0.1 Ver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3/50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제3부: 바스티유에서 베르사유까지 (1789 여름-가을)
(알랭 마르탱의 목소리)
역사는 종종 한순간의 극적인 사건으로 기억되지만, 그 이면에는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응축된 시간들이 존재한다. 1789년 5월 베르사유에서 삼부회가 열렸을 때, 프랑스는 이미 임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표결 방식을 둘러싼 지리한 논쟁은 단순한 절차 문제가 아니라, 낡은 질서의 기반 자체를 뒤흔드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누가 진정한 '국민'이며, 주권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베르사유의 회의장을 넘어 파리의 거리로, 그리고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갈 운명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바로 그 격동의 여름, 의회에서의 선언과 파리 민중의 함성이 어떻게 하나의 혁명적 물결로 합쳐졌는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제21장: 우리는 국민이다! 6월 17일의 선언
(1789년 5월 말 - 6월 17일)
베르사유의 ‘소소한 즐거움의 방’은 이름과 달리 더 이상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지독한 교착 상태의 현장이 되어 있었다. 5월 5일 개회 이후 한 달이 넘도록, 삼부회는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모든 논의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바로 표결 방식이었다. 제1신분(성직자)과 제2신분(귀족) 대표들은 여전히 신분별 표결을 고집했고, 이는 곧 두 특권 신분이 연합하여 제3신분의 모든 개혁 요구를 봉쇄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제3신분 대표들은 이에 맞서 세 신분이 함께 모여 머릿수 표결을 할 것을 요구하며 신분별 자격 심사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에티엔 드샹은 거의 매일 방청석에서 이 지루하고 소모적인 논쟁을 지켜보았다. 그의 초기 흥분과 기대는 점차 초조함과 답답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시간만 허비할 것인가? 파리에서는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그는 노트에 날카로운 비판을 휘갈겨 썼다.
“결국 그들의 속셈은 명백하네. 제3신분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것뿐이야.” 카페에서 만난 뤽 모로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는 에티엔과 달리 삼부회에 대한 기대를 일찌감치 접은 듯 보였다.
“하지만 뤽,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네. 우리가 바로 국민 아닌가! 우리가 프랑스 전체를 대표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네.” 에티엔은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국민이라… 과연 저 고집불통 귀족들과 완고한 주교들이 그 말을 인정할까? 차라리 벽에 대고 소리치는 게 낫겠네.” 뤽은 어깨를 으쓱했다.
회의장 안에서도 제3신분 대표들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미라보 백작, 그 웅변과 카리스마로 좌중을 압도하는 인물은 단상에 올라 특권층의 완고함을 질타했다. “신사 여러분! 언제까지 이 무익한 논쟁을 계속할 것입니까? 프랑스 전체가 우리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3신분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회의장에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시에예스 신부 역시 냉철하고 논리적인 언어로 제3신분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우리는 이미 국민의 96% 이상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망설여야 합니까? 우리 스스로 국민의 의지를 대변하는 합법적인 의회임을 선언해야 합니다.”
이러한 지도자들의 독려 속에서 제3신분 대표들은 점차 독자적인 행동 노선을 굳혀갔다. 그들은 자신들을 ‘코뮌(Communes)’, 즉 평민 대표단이라고 칭하며 다른 신분 대표들에게 합동 회의 참여를 거듭 촉구했다. 변화의 조짐은 성직자 대표단 내부에서 먼저 나타났다. 교구 사제 등 하급 성직자들은 대부분 제3신분 출신이었고, 민중의 고통에 더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 역시 주교 등 고위 성직자들의 권위주의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6월 중순에 이르자, 일부 하급 성직자들이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제3신분 회의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클레망 신부의 동료 중 몇몇도 용기를 내어 제3신분과 함께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에티엔은 이 소식을 듣고 다시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균열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 그는 방청석에서 제3신분 회의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하급 성직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비장했지만, 거기에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용기가 담겨 있었다.
6월 17일,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았다. 시에예스의 제안에 따라, 제3신분 대표들은 압도적인 표 차이로 스스로를 ‘국민 의회(Assemblée Nationale)’로 선언하는 역사적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더 이상 특정 신분의 대표가 아니라, 프랑스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유일하고 합법적인 의회임을 스스로 선언한 것이다. 이는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 주권의 원칙이 공식적으로 천명된 순간이었다.
회의장은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였다. 대표들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고, “국민 의회 만세!”를 외쳤다. 에티엔 역시 방청석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성을 질렀다. 비록 표결권은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역사의 가장 위대한 순간 중 하나를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그는 노트에 떨리는 손으로 적었다. ‘1789년 6월 17일. 제3신분, 국민 의회를 선언하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신분이 아닌 국민이다. 혁명의 루비콘 강을 건넜다!’
아버지 기욤 드샹 역시 회의장에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아들처럼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그는 국민 의회 선언의 역사적 의미와 불가피성은 인정했지만, 동시에 이것이 가져올 파장에 대해 깊이 우려했다. 왕과 특권층이 이 선언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제 정면충돌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너무 성급한 결정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는 회의가 끝난 후 에티엔에게 조용히 말했다. “물론 제3신분의 권리는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왕과 귀족들을 너무 자극할 수 있다. 결국 힘의 충돌로 이어질까 두렵구나.”
“하지만 아버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선언한 것뿐입니다.” 에티엔은 아버지의 우려를 이해하면서도, 혁명의 대의를 굽힐 수는 없었다.
기욤의 우려대로, 국민 의회 선언 소식은 베르사유 궁정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왕비와 아르투아 백작 등 강경 왕당파들은 루이 16세에게 즉각 국민 의회를 해산하고 주동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우유부단한 루이 16세는 또다시 결정을 망설였지만, 결국 보수파의 압력에 밀려 국민 의회의 회의를 방해하기로 결정했다. 며칠 뒤 예정된 왕의 특별 연설 준비를 핑계로, 6월 20일 아침 국민 의회 회의장인 ‘소소한 즐거움의 방’ 문을 걸어 잠근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이제 막 첫 번째 중대한 고비를 맞이하고 있었다.
제22장: 테니스 코트의 맹세, 꺾이지 않는 의지
(1789년 6월 20일)
1789년 6월 20일 아침, 베르사유에는 차가운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전날 밤 국민 의회 선언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에티엔 드샹은 다른 대표들과 함께 ‘소소한 즐거움의 방’으로 향했다. 그들은 헌법 제정의 구체적인 절차를 논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회의장 입구에는 왕의 근위병들이 늘어서 있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벽에는 ‘왕의 특별 연설 준비를 위해 임시 폐쇄함’이라는 짤막한 공고문만 붙어 있을 뿐이었다.
대표들은 당혹감과 분노에 휩싸였다. “이럴 수가! 왕께서 우리를 막으시는 건가?” “명백한 탄압이다!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짓밟는 행위다!” 곳곳에서 격앙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회의장을 잃은 대표들은 비를 맞으며 어쩔 줄 몰라 서성거렸다. 왕당파의 계략에 빠진 듯한 무력감과 굴욕감이 그들을 덮쳤다.
에티엔 역시 참담한 심정이었다. 불과 사흘 전에 선언했던 국민 의회의 위엄은 온데간데없고, 자신들은 비를 맞으며 길거리에 내쫓긴 신세가 된 것 같았다.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우리의 혁명은 이렇게 허무하게 꺾이는 것인가?’ 그는 절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바로 그때, 의사 출신의 대표 조제프 이냐스 기요탱(훗날 단두대의 이름을 남기게 되는 바로 그 인물)이 목소리를 높였다. “동지들이여! 낙담하지 마시오! 회의장이 없다면 다른 곳에서 모이면 됩니다! 저기, 근처에 실내 테니스 코트(Jeu de paume)가 있지 않소? 그곳으로 갑시다!”
기요탱의 제안은 절망에 빠져 있던 대표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지가 중요하다! 대표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기요탱의 뒤를 따라 근처의 실내 테니스 코트로 향했다. 테니스 코트는 귀족들이 실내에서 테니스와 유사한 경기를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넓고 텅 빈 공간이었다. 높은 벽과 천창, 그리고 한쪽 벽에 걸린 그물 네트 외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회의를 열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장소였다.
그러나 대표들의 눈빛에는 새로운 결의가 넘치고 있었다. 그들은 임시방편으로 주변에 있던 나무 테이블과 의자들을 가져와 단상을 만들었다. 국민 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장 실뱅 바이이, 천문학자이자 파리 시장이 될 인물이 침착하게 단상 위로 올라섰다. 500명이 넘는 대표들이 그를 주목했고, 실내는 숙연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바이이는 떨리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존경하는 국민 의회 동지들이여! 우리는 지금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왕국의 재건과 공공 질서의 유지를 위해 소집된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결코 물러설 수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졌다. “이에 본인은 국민 의회의 이름으로 엄숙히 제안합니다. 우리는 헌법이 제정되고 확고한 기초 위에 세워질 때까지 결코 해산하지 않으며, 필요하다면 프랑스 왕국의 어떤 장소에서든 다시 모일 것을 맹세합시다!”
바이이의 제안에 대표들은 일제히 오른손을 들고 외쳤다. “맹세합니다! (Nous le jurons!)” 그 함성은 테니스 코트의 높은 천장을 뒤흔들었고, 비 내리는 창밖까지 울려 퍼지는 듯했다. 바이이가 먼저 선서문에 서명했고, 뒤이어 모든 대표들이 차례로 나와 서명했다. 단 한 명, 루이 16세에 대한 충성심을 이유로 반대한 대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 역사적인 맹세에 동참했다.
에티엔은 흥분과 감동으로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방청석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며, 노트에 빠르게 스케치를 하고 기록을 남겼다. 텅 빈 공간, 비장한 표정의 대표들, 하늘을 향해 뻗은 수많은 손들… 이것은 단순한 맹세가 아니었다. 이것은 낡은 권위에 대한 불굴의 저항 의지였고,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집단적인 약속이었다. 왕이 회의장을 폐쇄함으로써 혁명을 좌절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대표들의 결의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고 혁명의 도덕적 정당성을 높여준 셈이었다.
테니스 코트 서약은 프랑스 혁명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가 되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소박한 공간에서 이루어진 이 맹세는, 화려한 궁정의 권위가 아닌 국민의 의지야말로 진정한 힘의 원천임을 보여주는 극적인 선언이었다. 1791년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국민 의회가 해산되지 않고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날의 맹세 덕분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대표들이 테니스 코트를 나설 때,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에티엔은 굳게 주먹을 쥐었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고 험난하겠지만, 오늘 그들은 결코 꺾이지 않을 혁명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새로운 희망과 함께, 앞으로 닥쳐올 더 큰 시련에 맞설 용기를 얻었다. 베르사유의 테니스 코트에서, 프랑스 혁명은 불굴의 생명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제23장: 파리의 불안, 군대의 그림자와 굶주림
(1789년 7월 초)
베르사유에서 국민 의회가 테니스 코트의 맹세를 통해 혁명적 결의를 다지고 있을 무렵, 파리의 공기는 여전히 불안과 굶주림, 그리고 임박한 폭력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치적 격변에 대한 소식은 파리 시민들에게 희망과 함께 더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국민 의회’가 과연 왕과 귀족들의 방해를 이겨내고 진정한 개혁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시도는 무력으로 진압되고 말 것인가?
소피 라비뉴에게 베르사유의 정치 드라마는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현실은 변함없이 혹독했다. 빵값은 좀처럼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투기꾼들이 사재기를 한다는 소문과 함께 더욱 오르는 추세였다. 동생 피에르의 기침은 더욱 심해졌고, 그녀는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어지럼증을 느낄 정도였다.
“마담, 이러다 정말 다 굶어 죽겠어요. 국민 의회인가 뭔가 하는 곳에서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요?” 소피는 빨래터에서 만난 마담 뒤부아에게 하소연했다.
“글쎄 말이다. 높은 양반들은 맨날 말싸움만 하고… 우리 같은 사람들 사정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마담 뒤부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요즘은 더 흉흉한 소문까지 돌더구나. 왕께서 파리 주변에 군대를 잔뜩 불러 모으고 있다는 거야. 그것도 우리 프랑스 군대가 아니라, 돈만 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스위스 용병이랑 독일 기병들이라지 뭐야.”
“군대요? 왜요?” 소피는 불안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뻔하지 않겠니. 국민 의회인지 뭔지를 쓸어버리고, 우리처럼 불만 많은 파리 시민들을 혼내주려는 거지. 어떤 사람들은 왕비가 오스트리아 군대까지 끌어들이려 한다고 하더구나.” 마담 뒤부아의 목소리는 공포로 잠겨 있었다.
마담 뒤부아의 말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 실제로 루이 16세는 국민 의회의 독자적인 행동에 불안감을 느끼고, 파리의 소요 사태를 진압한다는 명분 아래 베르사유와 파리 주변에 약 2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집결시키고 있었다. 특히 충성심을 의심받는 프랑스 군대 대신, 스위스와 독일 등 외국 용병 부대들이 동원된 것은 파리 시민들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외국 군대가 프랑스 국민을 학살하려 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여기에 귀족들이 군대와 짜고 파리 시민들을 굶겨 죽이려 한다는 ‘기근 음모설’까지 더해져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졌다.
이러한 불안감은 파리 시내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시장에서는 사소한 시비가 금세 큰 싸움으로 번졌고, 빵집 앞에서는 연일 소동이 벌어졌다. 팔레 루아얄 정원은 온갖 유언비어와 선동적인 연설이 난무하는 해방구이자 불안의 진원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최신 소식(이라고 믿는 것)을 교환하고, 정부와 귀족들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
인쇄공 장 발레는 이러한 분위기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낮에는 인쇄소에서 일했지만, 밤에는 코르들리에 클럽 회원들과 함께 비밀리에 모여 상황을 논의하고 행동을 준비했다. 그는 시에예스의 팸플릿뿐만 아니라, 마라가 막 발행하기 시작한(혹은 준비 중인) 신문이나 다른 급진적인 인쇄물들을 통해 혁명 사상을 더욱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동지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왕과 귀족들은 군대를 동원해 우리를 짓밟으려 하고 있다! 베르사유의 저 말 많은 의회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 스스로 무장해야 한다!” 장 발레는 비밀 회합 장소에서 주먹을 치켜들고 열변을 토했다. 그의 눈에는 광적인 열정과 함께, 다가올 투쟁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장, 무기는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우리에게는 쇠스랑과 몽둥이밖에 없는데.” 앙투안 루셀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찾아야 한다! 폐병원에 무기가 숨겨져 있다는 소문도 있고, 바스티유에도 화약이 있다고 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장 발레와 그의 동지들은 파리 시민들 사이에 퍼져 있는 불안과 분노를 혁명적 에너지로 조직화하려 했다. 그들은 무기를 확보할 방법을 모색하고, 각 구역의 상퀼로트들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7월 11일, 루이 16세가 마침내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재무 총감 네케르를 파면하고 보수파 인물로 내각을 교체했다는 소식이 파리에 전해졌다. 이것은 결정타였다. 파리 시민들은 이를 왕과 귀족들이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하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도시는 공포와 분노로 술렁였고, 이제 더 이상 누구도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굶주림의 고통과 군대의 그림자, 그리고 반혁명 음모에 대한 공포가 뒤섞여, 파리는 거대한 화약고처럼 폭발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베르사유의 정치적 선언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민중의 직접적인 행동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불길한 공기가 파리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제24장: 팔레 루아얄의 함성, 데물랭의 불꽃
(1789년 7월 12일 오후)
1789년 7월 12일 일요일 오후, 파리 시민들에게 네케르 파면 소식이 전해지자 도시 전체가 들끓기 시작했다. 특히 팔레 루아얄 정원은 분노와 불안감에 휩싸인 수천 명의 군중으로 가득 찼다. 한때 오를레앙 공작의 사적인 정원이었던 이곳은 혁명 전야, 검열을 피해 온갖 정치적 토론과 선동이 이루어지는 파리의 가장 뜨거운 해방구였다. 카페와 상점들이 즐비했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연설가들이 저마다 목청을 높여 군중을 사로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날 오후, 카페 드 푸아(Café de Foy) 앞의 작은 테이블 위로 한 젊은이가 뛰어올랐다. 그는 스물아홉 살의 변호사이자 저널리스트인 카미유 데물랭이었다. 평소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지만, 흥분과 격정에 휩싸인 그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힘차고 명료하게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장 발레와 앙투안 루셀도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군중 속에 끼어 있었다.
“시민들이여! 형제들이여!” 데물랭의 외침이 정원에 울려 퍼졌다. “방금 파리에서 네케르가 파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소! 이 애국적인 재무 총감의 파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오? 이것은 바로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의 전조요! 오늘 밤, 왕이 고용한 스위스와 독일 용병들이 파리로 쏟아져 들어와 우리 애국자들을 학살할 것이오!”
그의 말은 군중 속에 잠재되어 있던 공포심을 극대화시켰다. ‘학살’이라는 단어에 사람들은 술렁였고, 일부 여성들은 비명을 질렀다. 데물랭은 군중의 반응을 예리하게 포착하며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소! 지금 당장 무기를 들어야 하오!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하오! 적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행동해야 하오!” 그는 허리춤에서 권총 두 자루를 뽑아 치켜들었다. “형제들이여! 내가 여러분의 선두에 서겠소! 나를 따르시오!”
군중 속에서 누군가 외쳤다. “하지만 우리의 표식은 무엇인가? 서로를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
데물랭은 잠시 망설이더니, 테이블 옆 밤나무 가지를 꺾어 그 잎사귀를 자신의 모자에 꽂았다. “이 녹색 잎사귀! 희망의 색깔인 이 녹색 휘장을 답시다! 이것이 우리의 표식이 될 것이오! 자, 모두 무기를 들고 거리로 나섭시다! 바스티유로 갑시다!” (실제 데물랭의 연설에서 '바스티유'가 직접 언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소설적 극적 효과를 위해 삽입 가능).
“무기를!” “바스티유로!” “독재 타도!” 군중은 열광적으로 화답했다. 데물랭의 연설은 마치 마른 장작더미에 던져진 불꽃과 같았다. 순식간에 팔레 루아얄 전체가 혁명적 열기로 타올랐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밤나무 잎을 따서 모자나 옷에 달았고, 녹색 리본을 흔들었다. 데물랭은 군중의 선두에 서서 팔레 루아얄을 나섰고, 그의 뒤를 따라 수천 명의 군중이 함성을 지르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장 발레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드디어 때가 왔다!’ 그는 앙투안 루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가자, 앙투안! 역사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 두 사람은 벅찬 가슴을 안고 데물랭을 따르는 거대한 물결 속으로 합류했다. 그들의 손에는 아직 무기가 없었지만, 눈빛에는 이미 혁명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데물랭의 연설은 그 자체로 혁명의 도화선이었다. 비록 그의 예측(그날 밤의 학살)은 사실과 달랐지만, 그의 격정적인 호소는 파리 민중의 잠재된 공포와 분노를 행동으로 전환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우연히 선택한 녹색 휘장은 곧 파리 전역으로 퍼져나가 혁명의 첫 번째 상징이 되었다 (비록 이 녹색은 곧 아르투아 백작의 상징색이라는 이유로 파랑과 빨강, 그리고 왕가의 흰색을 결합한 삼색기로 대체되지만). 팔레 루아얄의 함성은 이제 곧 파리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봉기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제25장: 무기를 찾아서, 파리는 봉기한다
(1789년 7월 12일 밤 - 14일 아침)
카미유 데물랭의 연설 이후, 파리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열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7월 12일 밤, 성난 군중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극장 문을 닫게 하고, 네케르와 오를레앙 공작(민중에게 인기가 있었음)의 흉상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방돔 광장에서는 시위대와 왕의 독일 용병 기병대 사이에 첫 충돌이 발생했고, 몇몇 시민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이 소식은 파리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기였다.
밤새도록 파리 시내는 무기를 찾는 군중들의 함성과 횃불로 뒤덮였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무기 상점을 약탈했고, 총포 제작 장인들의 작업실을 습격했다. 장 발레와 앙투안 루셀도 이 혼란스러운 행렬에 동참했다. 그들은 낡은 검이나 사냥총, 권총 등을 닥치는 대로 손에 넣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이것만으로는 안 돼! 제대로 된 무기가 필요해! 소총과 대포가 있어야 해!” 장 발레는 외쳤다.
분노한 군중들은 또한 파리 시를 둘러싸고 있던 징세소(Octroi) 54개 중 40개를 불태우고 파괴했다. 징세소는 도시로 들어오는 물품에 세금을 매기는 곳으로, 민중에게는 착취와 억압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밤하늘은 불타는 징세소의 연기로 붉게 물들었고, 파리는 마치 전쟁터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한편, 파리 시청(Hôtel de Ville)에서는 삼부회 제3신분 대표 선출에 참여했던 선거인단 대표들이 모여 사태 수습과 질서 유지를 위한 방안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들은 혼란을 막고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각 구(District)를 단위로 하는 ‘파리 민병대(Milice parisienne)’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바로 훗날 국민 방위대의 모태가 된다. 그들은 또한 왕이 아닌 파리 시민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자치 정부, 즉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사태를 완전히 통제할 힘이 부족했다.
7월 13일, 파리 시내의 무기 탐색은 계속되었다. 수도원이나 공공건물에 무기가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군중들은 이곳저곳을 수색했다. 그러던 중, 폐병원(Hôtel des Invalides), 즉 상이군인 요양소의 지하 창고에 수만 자루의 소총과 대포가 보관되어 있다는 정보가 퍼져나갔다. 그곳은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훗날 유명해지지만, 당시에는 군사 시설이자 무기고 역할도 하고 있었다.
7월 14일 아침, 동이 트자마자 수만 명의 군중이 폐병원 앞으로 몰려들었다. 장 발레와 앙투안 루셀도 그 선두에 있었다. 군중 대표는 요양소 소장에게 무기 인도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격분한 군중은 성문을 부수고 안으로 난입했다. 소수의 수비 병력은 저항을 포기하거나 시민 편에 가담했다. 군중은 지하 무기고로 쇄도하여 약 3만 자루의 소총과 대포 여러 문을 탈취했다.
바로 그때, 더욱 고무적인 일이 벌어졌다. 왕에게 충성하던 프랑스 근위대(Gardes Françaises) 연대 일부 병사들이 연대기를 들고 시민들 편에 합류한 것이다! 그들 역시 대부분 평민 출신이었고, 파리 시민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있었다. 또한 외국 용병 부대에 대한 반감도 컸다. 그들은 탈취한 소총과 대포 사용법을 시민들에게 가르쳐주고, 함께 싸울 것을 맹세했다. 이는 혁명 과정에서 군대가 분열되고 일부가 민중 편으로 돌아섰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제 파리 민중과 이탈한 군인들은 소총과 대포로 무장했다. 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것이 부족했다. 바로 화약과 탄약이었다. 그리고 그 화약이 보관된 곳은 단 한 곳, 파리 동쪽의 거대한 요새 감옥, 바로 바스티유였다. 모든 시선이 이제 바스티유로 향하고 있었다. 폐병원에서의 무기 탈취는 혁명의 예고편이었고, 바스티유는 그 본 무대가 될 운명이었다. 무장한 군중들은 함성을 지르며 바스티유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리는 이제 거대한 혁명의 용광로가 되어 들끓고 있었다.
제26장: 바스티유 앞으로! 함락 전야의 대치
(1789년 7월 14일 오전 ~ 오후 1시 30분)
1789년 7월 14일 오전, 파리 동부의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전날 밤부터 이어진 소요와 무기 탈취 소식으로 도시 전체가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인 가운데, 폐병원에서 무장한 수만 명의 군중이 함성을 지르며 바스티유 요새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에는 소총, 칼, 창, 심지어 쇠스랑과 몽둥이까지 온갖 종류의 무기가 들려 있었고, 얼굴에는 전날 밤의 흥분과 함께 불안과 결의가 뒤섞인 표정이 역력했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바스티유에 보관된 것으로 알려진 막대한 양의 화약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바스티유. 여덟 개의 거대한 원형 탑과 높은 성벽, 그리고 해자로 둘러싸인 이 중세 요새는 파리 시민들에게 오랜 세월 동안 왕권의 압제와 자의적인 체포, 비밀스러운 투옥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볼테르를 비롯한 많은 계몽사상가들이 이곳에 수감되었던 역사는 바스티유에 대한 공포와 증오심을 더욱 키웠다. 비록 1789년 당시에는 수감자가 단 7명(위조범 4명, 정신이상자 2명, 근친상간 혐의 귀족 1명)에 불과했고 요새 자체의 군사적 중요성도 크지 않았지만, 바스티유는 여전히 무너뜨려야 할 구체제의 강력한 상징물이었다.
요새 앞 광장은 순식간에 성난 군중으로 가득 찼다. 그들은 요새를 향해 “문을 열어라!”, “화약을 내놓아라!”, “바스티유를 무너뜨려라!” 라고 외치며 함성을 질렀다. 요새 성벽 위에는 긴장한 표정의 수비대 병사들이 총을 겨눈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비대는 약 80명의 상이군인(앵발리드) 출신 노병들과 30여 명의 정예 스위스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수는 압도적인 군중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지만, 높은 성벽과 대포로 무장한 요새는 여전히 난공불락처럼 보였다.
요새 사령관은 베르나르-르네 드 로네 후작이었다. 그는 비교적 온건한 성품의 귀족이었지만,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대처할 경험이나 결단력이 부족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왕의 명령에 따라 요새를 사수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다른 한편으로는 압도적인 군중과의 충돌이 가져올 끔찍한 결과를 두려워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는 성벽 위의 대포를 뒤로 물리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이면서도, 군중의 핵심 요구인 화약 인도와 요새 개방은 거부했다.
파리 시청의 선거인단 대표들이 여러 차례 바스티유로 와서 드 로네와 협상을 시도했다. 대표 중 한 명인 튀리오 드 라 로지에르는 요새 내부를 시찰하고 군중에게 돌아와 드 로네가 공격 의사가 없음을 알리려 했지만, 성난 군중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동안 요새 밖 군중의 초조함과 분노는 점점 더 커져갔다.
소피 라비뉴는 자신도 모르게 이 거대한 군중의 물결에 휩쓸려 바스티유 앞 광장까지 오게 되었다. 그녀는 원래 아침 일찍 생필품을 구하러 시장에 나왔다가, 폐병원에서 무기를 탈취한 군중들이 바스티유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과 불안감 속에 그 뒤를 따랐던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녀를 압도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거대한 요새의 위압감, 성벽 위에서 총구를 겨누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 그리고 함성을 지르며 흥분한 수만 명의 군중. 그녀는 혁명의 열기보다는 코앞에 닥친 폭력의 공포를 더 크게 느꼈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닐까? 빨리 피해야 하는데…’ 하지만 그녀는 이미 거대한 인파에 갇혀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한편, 에티엔 드샹은 광장 한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역사적인 대치 상황을 착잡한 심경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혁명의 이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민중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눈앞의 광경은 그에게 깊은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무장한 군중의 모습은 통제 불가능한 폭력의 전조처럼 보였고, 바스티유라는 상징을 파괴하려는 열기 속에는 이성보다는 감정과 분노가 앞서는 듯했다. 그는 노트에 빠르게 기록했다. ‘민중의 분노는 정당하다. 그러나 그 분노가 이끄는 곳은 어디인가? 바스티유 함락이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줄 것인가, 아니면 더 큰 혼란과 피를 부를 것인가?’
오후 1시가 넘어서자, 군중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일부 성급한 사람들이 요새의 첫 번째 도개교 사슬을 끊고 바깥 뜰(Cour de l'Avancée)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두 번째 도개교 앞까지 다가갔지만, 안쪽 뜰(Cour du Gouverneur)로 통하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고, 이제 작은 불씨 하나만으로도 걷잡을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날 것 같은 위태로운 대치가 이어졌다. 베르사유의 정치적 혁명은 이제 파리 거리의 물리적인 충돌로 이어질 운명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제27장: 운명의 포성, 바스티유 전투
(1789년 7월 14일 오후 1시 30분 ~ 5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1789년 7월 14일 오후 1시 30분경, 마침내 운명의 포성이 울려 퍼졌다. 누가 먼저 발포했는지는 불분명했지만 (수비대 측의 우발적인 발포였을 가능성이 높다), 바스티유 요새 성벽 위에서 총알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방심하고 있던 바깥 뜰의 시민들 몇몇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들이 쐈다!”
“배신이다! 우리를 죽이려 한다!”
군중의 함성은 순식간에 경악과 분노의 외침으로 바뀌었다. 이제 더 이상의 협상은 없었다. 격분한 군중은 요새를 향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소피 라비뉴는 바로 눈앞에서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 비명을 질렀다.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흩어지거나, 혹은 분노에 차 요새를 향해 돌격했다.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소피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고 근처 건물 벽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살아야 해. 피에르에게 돌아가야 해.’ 그 생각뿐이었다.
초기의 전투 양상은 시민들에게 매우 불리했다. 그들은 수적으로는 압도적이었지만, 제대로 된 군사 훈련을 받지 못했고 지휘 체계도 없었다. 대부분의 소총은 폐병원에서 탈취한 것이었지만, 그에 맞는 화약과 탄약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들은 성벽을 향해 무모하게 돌격하거나 엄폐물 없이 총을 쏘아댔고, 요새 위에서 쏟아지는 수비대의 정확하고 효과적인 사격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나갔다. 사상자는 속출했고, 바스티유 앞 광장은 피와 신음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장 발레는 이 혼란 속에서 가장 앞장서 싸우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동료 인쇄공 앙투안 루셀과 몇몇 상퀼로트들과 함께 급조된 바리케이드 뒤에 몸을 숨기고, 낡은 소총으로 성벽 위를 향해 끊임없이 사격했다. 그의 얼굴은 화약 연기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고, 눈빛에는 혁명적 열정과 함께 살기가 번뜩였다.
“쏴라! 저 압제의 성벽을 무너뜨려야 한다!” 그는 옆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앙투안에게 소리쳤다. “두려워 마라, 앙투안! 이것은 자유를 위한 성전이다! 여기서 죽는 것은 영광이다!”
하지만 그들의 용감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좀처럼 기울지 않았다. 바스티유의 두꺼운 성벽은 소총 사격으로는 흠집조차 내기 어려웠고, 수비대의 화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시민들의 공격은 점차 소강상태에 빠지는 듯했고, 절망감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프랑스 근위대의 일부 병사들이 자신들의 지휘관이었던 엘리(Hélie)와 윌랭(Hulin) 등의 지휘 아래, 폐병원에서 탈취한 대포 여러 문을 끌고 바스티유 앞 광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왕의 군대가 아니라, 혁명하는 파리 시민들의 편에 서기로 결심했다. 숙련된 포병이었던 그들은 재빨리 대포를 설치하고 요새를 향해 조준했다.
“발사!” 윌랭의 우렁찬 명령과 함께 대포가 불을 뿜었다. 육중한 포탄이 요새 성벽과 두 번째 도개교에 명중하며 거대한 굉음과 함께 파편을 쏟아냈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파괴력에 요새 안의 수비대 병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다시 환호성을 지르며 공격에 가담했고, 장 발레는 이 순간이야말로 승리의 기회임을 직감했다.
“모두 돌격하라! 근위대 동지들이 우리와 함께 한다! 바스티유를 함락시키자!”
프랑스 근위대의 합류와 대포 공격은 전투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제 바스티유 함락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요새 안의 드 로네 사령관과 수비대 병사들은 점점 더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다. 바스티유 전투는 혁명과 반혁명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가장 격렬하고 상징적인 순간으로 치닫고 있었다.
제28장: 함락! 무너진 압제의 상징
(1789년 7월 14일 오후 5시 이후)
바스티유 요새 안, 드 로네 사령관은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했다. 프랑스 근위대의 합류와 대포 공격으로 요새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수비대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부상자는 늘어났고, 탄약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수만 명의 성난 군중이 함성을 지르며 금방이라도 요새 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기세였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한 희생만 초래할 뿐이라고 판단한 드 로네는 마침내 항복을 결심했다. 그는 요새 지하 화약고를 폭파시켜 모두 함께 자폭하겠다는 위협을 잠시 했지만, 부하들의 만류로 포기했다.
오후 5시경, 바스티유의 높은 탑 위로 마침내 항복을 의미하는 백기가 올라갔다. 요새 밖 군중들은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술렁였지만, 이내 엄청난 환호성을 터뜨렸다. 잠시 후,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 번째 도개교가 천천히 내려오고,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렸다.
“이겼다! 우리가 바스티유를 함락시켰다!”
“자유 만세! 국민 만세!”
승리의 함성과 함께, 흥분한 군중들은 봇물처럼 요새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장 발레와 앙투안 루셀도 그 선두에 있었다. 장 발레는 감격에 차 주먹을 휘두르며 외쳤다. “보아라, 앙투안! 압제의 상징이 무너졌다! 이제 진정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건물 벽 뒤에 숨어 있던 소피 라비뉴도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전투는 끝난 듯했지만, 요새 안으로 밀려 들어가는 군중의 모습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호기심과 함께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군중 속에 섞여 요새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바스티유 내부는 혼란 그 자체였다. 승리감에 도취된 시민들은 요새 곳곳을 뒤지며 무기를 찾거나, 감방 문을 부수며 “수감자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소피는 어둡고 축축한 지하 감옥 통로를 따라 걸으며 오싹함을 느꼈다. 이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갇혀 고통받았을까?
그러나 막상 발견된 수감자는 놀랍게도 단 7명뿐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듯 초췌하고 멍한 표정이었지만, 대부분은 정치범이 아닌 위조범, 정신이상자, 혹은 귀족 가문의 추문과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군중들은 정치범들의 극적인 해방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다소 허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명의 수감자는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어깨에 들쳐 메여 영웅처럼 풀려났다.
“우리가 해방시켰다! 독재자의 감옥에서 형제들을 구출했다!” 사람들은 외쳤고, 7명의 수감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군중의 환대에 휩쓸렸다.
소피는 이 광경을 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분명 압제의 상징이 무너진 것은 통쾌한 일이었고, 오랫동안 갇혀 있던 사람들이 풀려난 것은 다행이었다. 그녀 역시 군중과 함께 해방감과 승리감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전투 과정에서 목격했던 끔찍한 폭력과 죽음의 모습,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혼란스러운 약탈과 파괴 행위는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자유일까? 이 승리가 자신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정말로 바꾸어 줄 수 있을까? 그녀는 요새의 높은 성벽 위에서 깃발을 흔들며 환호하는 장 발레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스티유 함락은 프랑스 혁명의 가장 극적이고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비록 군사적인 중요성은 크지 않았고, 구출된 수감자 수도 미미했지만, 이 사건은 파리 민중의 힘으로 왕권의 상징적인 요새를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엄청난 정치적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프랑스 전역과 유럽 전체에 충격과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승리의 환호 속에는 이미 폭력과 혼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혁명의 앞날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소피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은 채, 혼란스러운 바스티유를 빠져나와 어두워지는 파리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29장: 광기와 복수, 승리의 대가
(1789년 7월 14일 저녁)
바스티유 함락의 열광적인 환희는 오래가지 못했다. 승리의 기쁨은 곧이어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복수의 광기로 변질되었다. 항복한 바스티유 사령관 드 로네 후작은 성난 군중에게 붙들려 파리 시청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로 약속받았지만, 그 약속은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에티엔 드샹은 바스티유 근처에서 친구 뤽 모로와 함께 이 끔찍한 행렬을 목격하게 되었다. 군중은 드 로네를 둘러싸고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주먹과 발길질을 해댔다. 그의 군복은 찢겨나갔고, 얼굴은 피와 먼지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는 공포에 질려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저 자가 우리 형제들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했다!”
“압제자의 개다! 죽여라!”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군중의 외침은 점점 더 과격해졌고, 그들의 눈빛에는 이성이 아닌 광기가 번뜩였다. 에티엔은 참혹한 광경 앞에서 몸서리를 쳤다. 이것은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통제되지 않는 집단적 폭력이었다. “안 돼! 멈춰야 해! 이것은 혁명이 아니야!” 그는 소리치고 싶었지만, 차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그의 옆에서 뤽 모로는 역겨움과 공포가 뒤섞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보게나, 에티엔. 저것이 자네가 말하던 ‘인민의 의지’인가?”
드 로네는 간신히 시청 앞 그레브 광장까지 끌려왔지만, 그는 이미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광장에 이르자마자 군중은 그에게 달려들어 칼과 몽둥이로 무참히 살해했다. 누군가 그의 목을 베어 창끝에 높이 꽂아 흔들었고, 군중은 야수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에티엔은 차마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고 구토를 참아야 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혁명의 숭고한 이상은 산산조각 나는 듯했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파리 시장(정확히는 상인 조합장(Prévôt des marchands))이었던 자크 드 플레셀 역시 군중의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시민들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끌고 군대와 내통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그가 시청 계단을 내려오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쏜 총에 맞아 쓰러졌고, 성난 군중은 그의 시신마저 훼손했다.
그레브 광장은 피와 광기로 물들었다. 승리의 축제는 잔혹한 복수의 제전으로 변질되었다. 에티엔은 무력감과 환멸감 속에서 광장을 빠져나왔다. 그는 장 발레와 같은 급진파들이 이러한 폭력을 ‘인민의 정당한 분노 표출’ 혹은 ‘반혁명 세력에 대한 응징’이라고 정당화할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장 발레 자신이 저 군중 속에 섞여 복수의 칼날을 휘둘렀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이것은 야만이다. 혁명이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우리는 괴물을 타도하기 위해 또 다른 괴물이 되는 것일 뿐이다.’ 에티엔은 굳게 다짐했다. 혁명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폭력과 광기를 경계하고 이성과 법치주의의 원칙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이 거대한 분노의 함성 속에서 얼마나 힘을 가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한편, 생탄투안 구역의 다락방에서는 소피가 마담 뒤부아로부터 끔찍한 소식을 전해 듣고 공포에 떨고 있었다.
“세상에, 소피! 방금 들었는데, 바스티유 사령관이랑 시장 나리가 군중에게 맞아 죽었단다! 머리를 창에 꽂고 거리를 돌아다닌다지 뭐야!” 마담 뒤부아는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소피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낮에 바스티유 앞에서 보았던 그 광경, 그리고 지금 들려오는 소식은 그녀에게 혁명이 가져온 것이 해방만이 아니라 끔찍한 공포와 죽음이기도 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그녀는 문을 걸어 잠그고 피에르를 꼭 끌어안았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군중의 함성과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소피에게 그것은 더 이상 승리의 노래가 아닌, 광기의 울부짖음처럼 들렸다. 바스티유 함락이라는 위대한 승리는 그렇게, 피와 복수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혁명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었다. 승리의 대가는 너무나 잔혹하고 무거웠다.
제30장: 삼색기 휘날리며, 혁명은 전국으로
(1789년 7월 중하순)
바스티유 함락과 드 로네, 플레셀의 죽음 소식은 베르사유 궁정에도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처음 소식을 들은 루이 16세는 측근 리앙쿠르 공작에게 "이것은 반란인가?"라고 물었다고 전해진다. 그러자 공작은 유명한 대답을 남겼다. "아닙니다, 폐하. 이것은 반란이 아니라, 혁명입니다."
루이 16세는 마침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더 이상의 강경 대응은 걷잡을 수 없는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파리 주변에 집결했던 군대를 철수시키고, 파면했던 네케르를 다시 재무 총감으로 복직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결정은, 파리를 직접 방문하여 혁명 세력을 인정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었다.
1789년 7월 17일, 루이 16세는 소수의 수행원만 대동한 채 베르사유를 떠나 파리로 향했다. 파리 시청 앞 광장에는 새로 임명된 파리 시장 장 실뱅 바이이와 국민 방위대 총사령관으로 추대된 라파예트 후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파리 시민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왕의 행차를 지켜보았다. 그들의 표정에는 환호보다는 의심과 경계심이 더 많이 서려 있었다.
바이이는 루이 16세에게 파리 시의 열쇠를 건네며 말했다. "폐하, 이 열쇠는 앙리 4세께서 파리를 정복하셨을 때 그분께 바쳐졌던 것입니다. 오늘, 인민이 그들의 왕을 다시 정복하였기에 이 열쇠를 폐하께 바칩니다." 그의 말에는 정중함 속에 날카로운 경고가 담겨 있었다.
이어 라파예트가 다가와 모자에 달 삼색(Tricolore) 휘장을 건넸다. 파랑(파리 시의 색)과 빨강(파리 시의 색) 사이에 왕가의 흰색을 결합하여 만든 이 새로운 상징물은, 혁명 세력과 왕권의 화해를 상징하는 동시에, 왕권이 이제 국민의 통제 아래 놓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루이 16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군중의 압력 속에서 삼색 휘장을 받아 자신의 모자에 달았다. 그 순간, 광장을 메운 군중 속에서 마침내 “국왕 만세!(Vive le Roi!)”라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이전 시대의 절대 군주에 대한 맹목적인 환호가 아니라, 혁명을 인정한 ‘시민 왕’에 대한 조건부적인 환영에 가까웠다.
이날의 사건은 왕권이 파리 시민들과 새로 조직된 파리 코뮌, 그리고 국민 방위대의 힘 앞에 굴복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루이 16세는 더 이상 프랑스의 절대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혁명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힘 잃은 입헌 군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스티유 함락과 왕의 파리 방문 소식은 삽시간에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각 지방 도시와 농촌에서도 혁명의 열기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리옹, 마르세유, 보르도, 스트라스부르 등 주요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봉기하여 기존의 왕실 관리들을 축출하고 파리를 모방하여 혁명적인 코뮌(자치 정부)과 국민 방위대를 조직했다. 낡은 구체제의 행정 시스템은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했고, 프랑스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향한 격변 속으로 빠져들었다.
파리로 돌아온 에티엔 드샹은 거리 곳곳에서 휘날리는 삼색기와 활기차게 활동하는 국민 방위대의 모습을 보며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그는 혁명의 진전에 감격하면서도, 여전히 7월 14일의 폭력을 잊을 수 없었다. ‘이제 진정한 개혁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이 거대한 변화를 과연 평화롭고 질서 있게 이끌어갈 수 있을까?’
소피 라비뉴 역시 변화의 기운을 느꼈다. 빵값은 여전히 비쌌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귀족들의 마차가 거리를 활보하며 흙탕물을 튀기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거리에는 활기가 넘쳤고,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자유롭게 정치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여전히 혁명의 거창한 구호보다는 당장의 생계를 걱정했지만, 아주 희미하게나마 무언가 더 나아질 수도 있다는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1789년 7월 하순, 프랑스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바스티유의 무너진 성벽 위로 삼색기가 휘날렸고, 혁명의 불길은 파리를 넘어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왕권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새로운 권력 기구들이 속속 등장했다. 혁명은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혁명의 길이 어디로 향할지, 그 과정에서 어떤 희생과 고통이 따를지는 아직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