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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Ver.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13/50

베오81 2025. 4. 18.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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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부: 브뤼메르 쿠데타와 통령정부 수립 (1799)

제121장: 지중해 횡단, 영웅의 귀환인가 탈영인가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1799년 가을, 나폴레옹의 이집트 탈출과 프랑스 귀환 소식을 접했을 때의 복잡한 심경을 드러낸다. 한편으로는 총재정부의 무능과 계속되는 전쟁 패배 속에서 강력한 지도자의 등장을 갈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군대를 버리고 돌아온 나폴레옹의 행동에 대한 의구심과 그의 야심에 대한 깊은 경계심을 떨치지 못했다. 그의 귀환은 과연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한 영웅적 결단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한 계산된 탈영이었을까? 이 질문은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을 평가하는 데 있어 여전히 유효한 딜레마이다.

<1799년 8월 말 - 10월 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 지중해 / 프랑스 프레쥐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 1799년 8월 22일 밤, 알렉산드리아 항구에는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비밀스러운 움직임이 있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자신이 아끼던 장군 클레베르에게 이집트 주둔군 지휘권을 넘긴다는 짧은 편지 한 통만을 남긴 채, 베르티에(Berthier), 란(Lannes), 뮈라(Murat) 등 소수의 최측근 장군들과 몽주(Monge), 베르톨레(Berthollet) 같은 학자 몇 명만을 대동하고 작은 프리깃함 두 척, '뮈롱(Muiron)'호와 '카레르(Carrère)'호에 몸을 실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영국 함대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프랑스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지중해 항해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여전히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었고, 프랑스 프리깃함 두 척은 그들에게 발견되는 순간 격침될 운명이었다. 나폴레옹은 밤에는 불빛을 최소화하고, 낮에는 해안선 가까이 숨어 항해하며 영국 함대의 눈을 피했다. 때로는 역풍과 폭풍우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고, 병사들은 멀미와 불안감에 시달렸다.

"장군님, 이대로 가다가는 영국 놈들에게 발각될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중립 항구에 잠시 기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측근 장군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나폴레옹은 창백한 얼굴로 지도를 노려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멈출 수 없다. 프랑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니, 내가 프랑스를 구해야 한다. 운명이 나를 부르고 있다!" 그의 눈빛에는 초조함과 함께, 자신만이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는 갑판 위를 서성이며 프랑스 본국의 상황과 자신의 미래에 대한 복잡한 계산을 거듭했다. '총재정부는 이미 무너지고 있을 것이다. 국민들은 혼란에 지쳤고 새로운 구원자를 갈망하고 있겠지. 지금이야말로 내가 나설 때다.'

항해는 40일 이상 계속되었다. 마침내 10월 9일 새벽,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프랑스 남부 해안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프리깃함 두 척은 기적적으로 영국 함대의 눈을 피해 프랑스 영토인 프레쥐스(Fréjus) 항 근처에 닻을 내렸다.

해안가에서 조업 준비를 하던 어부들은 낯선 배에서 내리는 초라한 행색의 군인들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맙소사! 보나파르트 장군이다! 이탈리아의 영웅이 돌아오셨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프레쥐스 항구는 순식간에 나폴레옹을 환영하는 군중으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열광했다. 오랜 전쟁과 혼란에 지친 그들에게, 나폴레옹의 귀환은 마치 구세주의 재림처럼 느껴졌다.

"장군님! 프랑스를 구해주십시오!", "영웅 만세!"

나폴레옹은 군중의 환호에 둘러싸여 감격에 젖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마음속은 냉철한 계산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귀환이 군대를 버리고 온 '탈영'으로 비난받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열광적인 환영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파리로 향하는 길을 영웅의 개선 행렬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파리에서 이 소식을 들은 에티엔은 복잡한 심경을 일기장에 적었다. "보나파르트가 돌아왔다. 그것도 자신의 군대를 이집트에 버려둔 채. 이것은 명백한 탈영 행위 아닌가? 그러나 파리의 많은 사람들은 그를 구원자로 여기며 열광하고 있다. 혼란에 지친 나머지 이성을 잃어버린 것인가? 나는 그의 귀환이 프랑스에 복이 될지 화가 될지 두렵기만 하다."

나폴레옹의 극적인 귀환. 그것은 과연 조국을 위한 영웅적 결단이었을까, 아니면 개인의 야망을 위한 치밀한 정치적 도박이었을까? 역사는 아직 그 답을 내리지 않은 채, 새로운 격동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제122장: 파리의 열광, 구원자를 기다리며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 속에는 나폴레옹의 귀환을 둘러싼 파리의 극단적인 분위기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한편에서는 '이탈리아의 영웅', '이집트의 정복자'(비록 실패했지만)가 돌아왔다며 열광하는 군중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야심과 불법적인 귀환을 우려하는 소수의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소피 라비뉴와 같은 대다수 민중들의 막연한 기대와 정치적 무관심이 존재했다. 나는 이 기록들을 통해, 위기의 시대에 대중들이 어떻게 영웅을 갈망하고, 그 영웅 숭배가 어떻게 위험한 정치적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1799년 10월, 프랑스 남부에서 파리로 향하는 길 / 파리 시내>

나폴레옹의 파리행 여정은 그야말로 개선 장군의 행렬과 같았다. 그가 거쳐가는 도시마다, 아비뇽, 리옹, 그리고 마침내 파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나와 그의 이름을 연호하고 꽃다발을 던지며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신문들은 연일 그의 귀환 소식을 대서특필했고, 이집트에서의 패배나 군대 포기 문제는 교묘하게 축소되거나 미화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총재정부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계속되는 전쟁의 고통에서 프랑스를 구해줄 유일한 영웅, 구원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보나파르트 장군 만세! 그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저분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다!"

파리 시내 역시 들뜬 분위기로 가득 찼다. 소피 라비뉴는 가게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흥분된 대화를 들었다.

"들었어? 보나파르트 장군이 곧 파리에 도착한대! 이제 빵값도 좀 내리고 살기 좋아지겠지?"

"글쎄, 군인이 정치를 뭘 알겠어. 그래도 저 총재들보다는 낫겠지."

소피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그녀 역시 총재정부의 혼란과 경제난에 지쳐 있었다. 어쩌면 저 유명한 장군이 정말 뭔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었다. 하지만 동시에 혁명 초기부터 겪어온 정치적 혼란과 폭력에 대한 기억은 그녀를 냉담하게 만들었다. '누가 권력을 잡든, 우리 같은 사람들의 삶이 쉽게 나아지지는 않을 거야.' 그녀는 다시 묵묵히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반면, 에티엔 드샹은 이러한 대중적 열광 속에서 깊은 우려를 느꼈다. 그는 나폴레옹의 군사적 능력은 인정했지만, 그의 권력욕과 공화주의 원칙에 대한 경시는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파리가 온통 보나파르트 열풍에 휩싸였네. 사람들은 그를 마치 신처럼 떠받들고 있네. 이집트에서의 탈영 행위조차 영웅적인 결단으로 미화되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일세. 대중은 언제나 강한 지도자를 갈망하지만, 그 갈망이 결국 독재자를 불러들이는 법이지. 나는 저 영웅 숭배 뒤에 숨겨진 위험한 미래가 두렵네."

파리의 정치권 역시 나폴레옹의 귀환으로 술렁였다. 총재정부의 관리들은 그의 엄청난 인기에 위협을 느끼며 불안해했다. 바라스 총재는 한때 나폴레옹의 후원자였지만, 이제는 그를 견제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한편, 또 다른 총재이자 혁명의 이론가였던 시에예스(Sieyès)는 나폴레옹의 귀환을 오히려 기회로 여겼다. 그는 오랫동안 총재정부의 무능함을 비판하며 강력한 행정부에 기반한 새로운 헌법 제정을 구상해왔다. 그에게 나폴레옹은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켜 줄 강력한 '검(칼)'이었다. 시에예스는 비밀리에 나폴레옹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파리의 복잡한 분위기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인물들과 접촉하며 정권 장악을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겸손하고 공화국에 충성하는 군인의 모습을 연기했지만, 그의 눈빛 속에는 이미 프랑스 전체를 자신의 발아래 두려는 뜨거운 야망이 불타고 있었다. 파리는 이제 영웅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지만, 그 영웅이 가져올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123장: 시에예스의 계산, '머리'와 '검'의 만남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브뤼메르 쿠데타의 막후를 흥미롭게 조명한다. 나폴레옹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혁명의 초기 단계부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노회한 정치가 시에예스와의 불안정한 동맹이 쿠데타 성공의 결정적인 열쇠였음을 보여준다. '머리'를 자처했던 시에예스와 '검'의 역할을 맡았던 나폴레옹.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 다른 야심과 계산이 충돌하는 한 편의 정치 드라마였다. 그러나 결국 '검'은 '머리'를 삼켜버렸고, 시에예스는 자신이 불러들인 영웅에게 이용당하는 비운의 조연으로 전락하고 만다.

<1799년 10월 하순, 파리 시에예스의 저택 또는 비밀 회합 장소>

파리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잠시 휴식을 취하며 정세를 살폈다. 그의 저택에는 연일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군 장성들, 정치인들, 은행가들, 심지어 왕당파 인사들까지, 모두가 이 새로운 실력자에게 줄을 대려 애썼다. 나폴레옹은 그들을 만나며 정보를 수집하고 자신의 편을 은밀하게 규합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만남은 바로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와의 만남이었다. 혁명 초기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팸플릿으로 혁명의 방향을 제시했던 이 노련한 성직자 출신 정치가는, 이제 총재정부의 총재 중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총재정부의 무능함과 불안정성에 깊은 환멸을 느끼고, 강력하고 안정적인 정부를 세우기 위한 헌법 개정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정교한 헌법 이론('머리')을 현실에서 구현해 줄 강력한 군사력('검')이었고, 이집트에서 막 돌아온 국민적 영웅 나폴레옹은 그에게 완벽한 파트너처럼 보였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겉으로는 정중했지만, 속으로는 서로의 의도를 탐색하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시에예스는 먼저 입을 열었다.

"보나파르트 장군, 프랑스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소. 총재정부는 더 이상 국가를 이끌 능력이 없소. 우리는 이 혼란을 끝내고 안정되고 강력한 공화국을 세워야 하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헌법이 필요하오. 나는 오랫동안 그 구상을 해왔소."

시에예스는 자신이 구상한 복잡하고 정교한 헌법 체계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는 보통 선거권을 형식적으로 유지하면서도, 실제 권력은 소수의 엘리트(자신을 포함한)가 행사하는, 매우 제한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공화정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이 쿠데타 계획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하며, 성공 후에는 그에게 명예로운 지위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나폴레옹은 시에예스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는 시에예스의 복잡한 이론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총재정부를 타도하고 자신이 권력을 장악할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는 시에예스의 '검' 역할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척했다.

"시에예스 시민, 당신의 통찰력에 깊이 감탄했소. 프랑스를 구하기 위한 당신의 계획에 기꺼이 동참하겠소. 나의 칼은 공화국을 위해 쓰일 준비가 되어 있소." 나폴레옹은 진심인 것처럼 말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시에예스를 이용하려는 차가운 계산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시에예스가 권력의 실질적인 측면, 특히 군대의 장악력에서는 자신에게 상대가 되지 않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쿠데타의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핵심은 양원 의회(원로원과 500인회)를 무력화시키고, 총재들을 사임시켜 합법적인 정부를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나폴레옹의 동생이자 당시 500인회 의장이었던 뤼시앵 보나파르트(Lucien Bonaparte)의 역할이 중요했다. 뤼시앵은 형의 야심을 지지하며 기꺼이 협력하기로 했다.

또한, 쿠데타의 성공을 위해서는 군대의 확실한 지지와 핵심적인 정치 인물들의 협조 또는 묵인이 필수적이었다. 나폴레옹은 시에예스와 함께 비밀리에 군 장성들과 접촉하여 그들의 충성을 확보하고, 탈레랑, 푸셰 등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끌어들이는 작업에 착수했다.

'머리'를 자처했던 시에예스와 '검'을 쥐려 했던 나폴레옹. 불안정한 동상이몽의 동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에예스는 자신이 나폴레옹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는 자신이 불러들인 영웅이 결국 자신을 삼켜버릴 괴물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혁명의 이론가는 혁명의 현실, 즉 권력의 냉혹한 논리 앞에서 무력하게 이용당할 운명이었다.

제124장: 안개 속의 음모, 쿠데타 공모자들

1950년 파리. 쿠데타는 결코 한두 사람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의 성공 뒤에는 나폴레옹과 시에예스 외에도, 각자의 이해관계와 계산 속에서 움직였던 다양한 공모자들의 복잡한 네트워크가 존재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당시 파리의 정치적 분위기를 '짙은 안개 속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배신의 연극'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특히 탈레랑과 푸셰 같은 인물들의 역할에 주목하며, 혁명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도덕성이 마비되고 기회주의가 판을 치게 되는지를 통탄하고 있다.

<1799년 11월 초, 파리 나폴레옹 저택 / 군 사령부 / 은행가 살롱 등>

브뤼메르 18일(11월 9일) 거사를 며칠 앞두고, 파리의 공기는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물밑에서는 치밀하고 은밀한 움직임들이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자신의 저택에서 밤늦도록 측근들과 만나며 쿠데타의 세부 계획을 점검하고 공모자들을 포섭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가장 먼저 합류 의사를 밝힌 인물 중 하나는 외무 장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Charles 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였다. 귀족 출신 주교였으나 혁명에 가담했던 그는, 특유의 뛰어난 정치 감각과 처세술로 격동의 시대를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그는 총재정부의 몰락을 예감하고 일찌감치 나폴레옹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외교적 경험과 인맥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쿠데타 당일 총재 바라스의 사임을 유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장군, 시대는 새로운 영웅을 요구하고 있소. 그리고 당신이야말로 그 영웅이 될 자격이 있소. 나는 기꺼이 당신의 길을 닦는 데 힘을 보태겠소." 탈레랑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다짐했지만, 그의 속내는 알 수 없었다.

경찰 책임자(경찰 장관 대리) 조제프 푸셰의 역할은 더욱 모호하고 음흉했다. 그는 과거 공포 정치 시절 리옹에서의 잔혹한 학살로 악명이 높았지만,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교묘하게 살아남아 경찰 조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나폴레옹과 시에예스의 쿠데타 음모를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었지만, 이를 막으려 하기보다는 양측 모두에게 정보를 흘리며 자신의 몸값을 높이고 있었다. 그는 쿠데타 당일 경찰력을 동원하여 반대 세력의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쿠데타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지만, 그 대가로 나폴레옹 정권 하에서도 경찰 총수 자리를 유지하게 된다.

"걱정 마시오, 장군. 파리의 질서는 내가 책임지겠소. 어떤 불미스러운 소요도 없을 것이오." 푸셰는 나폴레옹에게 확신을 주었지만, 그의 차가운 눈빛은 언제든 배신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군부의 지지 확보는 쿠데타 성공의 가장 중요한 열쇠였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휘하에서 활약했던 충성스러운 장군들을 핵심 요직에 배치하고 그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용맹한 기병대 지휘관 조아생 뮈라(Joachim Murat, 훗날 나폴레옹의 여동생과 결혼), 장 란(Jean Lannes), 그리고 이집트 원정에서 함께 돌아온 베르티에 등이 그의 핵심 군사 참모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은 그들에게 쿠데타 성공 후의 영광과 보상을 약속하며 충성을 다짐받았다.

그러나 모든 장군들이 나폴레옹에게 협조적인 것은 아니었다. 특히 공화주의 성향이 강했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Jean-Baptiste Bernadotte, 훗날 스웨덴 국왕)는 나폴레옹의 야심을 경계하며 쿠데타 참여를 거부했다. 나폴레옹은 그를 직접 만나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쿠데타 당일 그가 방해하지 않도록 견제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쿠데타에는 막대한 자금도 필요했다. 나폴레옹과 시에예스는 파리의 유력 은행가들과 접촉하여 쿠데타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총재정부의 혼란과 경제 불안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일부 은행가들은 나폴레옹이 가져올 '질서와 안정'에 기대를 걸고 기꺼이 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자본은 언제나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편에 서는 법이었다.

이 모든 준비 과정은 '자코뱅의 음모로부터 공화국을 구한다'는 명분 아래 극도의 비밀 속에서 진행되었다. 나폴레옹은 연일 파리 시민들 앞에서는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외치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지만, 밤에는 측근들과 함께 권력 장악을 위한 치밀한 시나리오를 짜고 있었다.

에티엔은 파리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물밑 움직임들을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그는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문들과 신문의 행간에 숨겨진 의미들을 통해 무언가 거대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파리는 안개 속에 휩싸인 듯하다. 모두가 변화를 갈망하지만, 그 변화가 어떤 모습일지 두려워하고 있다. 보나파르트는 영웅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의 눈빛 속에는 카이사르의 야심이 번뜩인다. 탈레랑과 푸셰 같은 배신의 달인들이 그와 손을 잡았다는 소문은 더욱 불길하다. 아, 공화국이여! 너는 또다시 기회주의자들과 독재자의 제물이 되는 것인가?"

브뤼메르 18일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프랑스의 운명을 결정지을 쿠데타의 막이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125장: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의 서막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1799년 11월 9일, 공화력 8년 브뤼메르 18일의 아침을 "짙은 안개와 함께 시작된 혼란과 기만의 날"로 묘사하고 있다. 합법을 가장한 쿠데타. 나폴레옹과 그의 공모자들은 치밀하게 짜인 각본에 따라 움직였고, 총재정부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에티엔은 그날 파리 시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직접 목격하거나 전해 들으며, 공화국의 운명이 군사력과 정치적 음모 앞에서 얼마나 허무하게 결정될 수 있는지 통감하고 있었다.

<1799년 11월 9일 (브뤼메르 18일) 아침, 파리>

파리의 아침은 유난히 짙은 안개에 싸여 있었다. 이 안개는 마치 쿠데타 세력의 비밀스러운 움직임을 가려주는 자연의 장막과도 같았다.

이른 아침부터 나폴레옹의 저택은 군 장성들로 붐볐다. 나폴레옹은 그들 앞에서 "공화국이 위험에 처했다! 자코뱅 반역자들이 의회를 장악하고 공포 정치를 부활시키려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에게 부여된 파리 군 사령관으로서의 임무(이 또한 쿠데타 세력이 원로원을 통해 조작한 것이었다)를 수행하여 공화국을 수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장군들은 그의 말에 동조하며 충성을 맹세했다.

동시에, 쿠데타에 동조하는 원로원 의원들이 긴급 소집되었다. 시에예스와 뤼시앵 보나파르트는 '자코뱅의 음모'로부터 의회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양원(원로원과 500인회) 회의 장소를 파리 시내가 아닌 외곽의 생클루(Saint-Cloud) 궁으로 옮기는 법령을 통과시키도록 유도했다. 이는 파리 민중의 개입을 차단하고 의회를 고립시키려는 계산된 조치였다. 또한, 이 법령은 나폴레옹에게 의회 이전 기간 동안 파리의 치안 유지 및 군대 지휘권을 공식적으로 부여했다.

나폴레옹은 곧바로 군대를 동원하여 파리 시내 주요 거점을 장악하고 튈르리 궁 주변을 봉쇄했다. 시민들은 거리 곳곳에 배치된 군인들과 삼엄한 분위기에 어리둥절하면서도 불안감을 느꼈다. 소피 라비뉴는 가게 문을 열었지만 손님은 거의 없었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모르겠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쿠데타의 다음 단계는 총재정부 자체를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시에예스와 로제 뒤코는 이미 쿠데타 계획에 따라 총재직 사임을 발표했다. 탈레랑은 바라스 총재를 찾아가 그의 사임을 종용했고, 막대한 뇌물을 약속하며 회유했다. 고립되고 위협을 느낀 바라스를 포함한 나머지 총재들도 결국 사임하거나 연금되었다. 이로써 프랑스 공화국의 합법적인 행정부는 사실상 기능이 마비되었다.

나폴레옹은 원로원에 출석하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공화국 수호 의지를 강조했지만, 연설 내용은 다소 두서없고 불안정했으며, 일부 의원들에게는 오히려 의심을 사기도 했다.

"나는 전쟁터에서 평화를 일구었고, 이제 돌아와 분열된 조국을 구하려 합니다! 만약 누군가 나를 카이사르나 크롬웰이라고 부른다면…"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나는 차라리 조국을 위한 브루투스가 될 것입니다!"라고 외쳤지만, 그의 말은 설득력보다는 야심을 드러내는 것처럼 들렸다.

에티엔은 원로원 회의장 밖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자코뱅 음모설'은 명백한 거짓이었고, 모든 것이 치밀하게 계획된 쿠데타임을 그는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대가 파리를 장악하고 의회마저 무력화되는 상황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깊은 무력감과 함께, 혁명이 또다시 군인의 손에 넘어가는 현실을 통탄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혁명의 시작도 군대의 개입이었고, 그 끝도 군대의 힘으로 마무리되는 것인가. 자유와 평등은 어디 가고, 총칼과 음모만이 남았단 말인가."

브뤼메르 18일 하루 동안, 나폴레옹과 그의 공모자들은 군사력과 정치 공작을 통해 총재정부를 사실상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직 500인회라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자코뱅 성향의 의원들이 다수 포진한 500인회는 순순히 쿠데타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쿠데타의 성패는 다음 날, 생클루 궁에서 열릴 양원 합동 회의에서 결정될 터였다. 파리의 하늘을 뒤덮었던 짙은 안개는 마치 앞으로 다가올 더 큰 혼란과 불확실성을 예고하는 듯했다.

(제125장 끝)

 

 

 

 

 

 

 

 

 

 

 

 

 

 

 

 

 

 

 

 

 


제13부: 브뤼메르 쿠데타와 통령정부 수립 (1799)

제126장: 생클루 궁의 드라마, 500인회의 저항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브뤼메르 19일(1799년 11월 10일)의 생클루(Saint-Cloud) 궁을 마치 거대한 연극 무대처럼 묘사하고 있다. 전날 파리에서 총재정부를 사실상 마비시킨 쿠데타 세력은 이제 의회의 추인을 받아 합법성의 외피를 완성하려 했다. 그러나 '자코뱅의 음모'라는 명분은 이미 많은 의원들에게 의심받고 있었고, 특히 500인회(Conseil des Cinq-Cents)에서는 공화국을 수호하려는 마지막 저항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에티엔의 시선을 따라, 화려한 궁전 복도와 회의장을 오가며 펼쳐졌을 그날의 긴장감 넘치는 드라마 속으로 들어선다.

<1799년 11월 10일 (브뤼메르 19일) 오전-오후, 생클루 궁>

파리 서쪽 외곽, 센 강변에 위치한 생클루 궁은 그날 삼엄한 경비 속에 고립되어 있었다. 전날 밤부터 나폴레옹 휘하의 군대가 궁전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쌌고, 파리 시내와의 통신은 엄격히 통제되었다. 아침부터 양원 의원들이 속속 도착했지만, 궁전 안의 분위기는 전날 파리와는 사뭇 달랐다. 안개는 걷혔지만, 의원들의 얼굴에는 의심과 불안, 그리고 분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군대가 의회를 포위하다니, 명백한 불법 행위 아닌가!" 500인회 소속의 한 자코뱅 성향 의원이 격분하여 소리쳤다.

"진정하게, 동지. 아직 상황을 속단하기는 이르네. 원로원에서 현명한 결정을 내려주시겠지." 옆에 있던 동료 의원이 그를 달랬지만, 그의 목소리에도 불안감이 묻어났다.

오후 1시경, 마침내 원로원과 500인회의 회의가 각기 다른 홀에서 소집되었다. 원로원은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시에예스파의 주도로 총재정부의 공석 문제와 새로운 집행부 구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500인회 회의장인 오랑주리(Orangerie)는 처음부터 격앙된 분위기였다. 젊고 혈기 왕성한 의원들이 다수였던 500인회에서는 쿠데타 음모에 대한 의혹과 분노가 공공연하게 터져 나왔다.

"의장! 나는 헌법 수호 서약을 다시 제안합니다! 우리 모두 공화국 헌법에 대한 충성을 다시 한번 맹세합시다!" 한 의원의 외침에 많은 의원들이 동조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헌법 만세! 타도 독재!"

의장석에 앉아 있던 뤼시앵 보나파르트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애쓰며 회의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의원들의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형 나폴레옹과 약속된 시나리오대로 회의를 진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초조해졌다.

한편, 나폴레옹은 궁전 내 다른 방에서 초조하게 상황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500인회의 저항이 예상보다 거세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의 카리스마와 군대의 위용으로 직접 의원들을 설득(혹은 압박)하기로 결심했다.

오후 4시경, 나폴레옹은 소수의 척탄병 호위를 받으며 먼저 원로원 회의장으로 향했다. 그는 연단에 올라 전날과 마찬가지로 공화국 수호 의지를 강조하며 자신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의 연설은 여전히 두서없고 설득력이 부족했으며, 일부 의원들은 그의 발언에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장군, 헌법에 대해 말씀해 보시오! 당신은 헌법을 존중하는 거요?" 한 의원이 날카롭게 질문했다.

나폴레옹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목소리를 높였다. "공화력 3년 헌법 말이오? 당신들 스스로 그것을 이미 파괴하지 않았소! 프뤽티도르, 플로레알… 그 모든 쿠데타로 헌법은 이미 누더기가 되었소! 나는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왔소!" 그의 격앙된 반응은 오히려 의원들의 의심만 증폭시켰다. 그는 별다른 성과 없이 원로원 회의장을 나와야 했다.

이제 남은 것은 500인회였다. 그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더욱 단호한 표정으로 오랑주리 회의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는 이미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쿠데타의 성패는 이제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에티엔은 당시 파리에서 들려오는 소문들을 종합하며, 생클루 궁에서 벌어지고 있는 드라마가 과연 공화국의 구원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또 다른 독재의 서막이 될지 불안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제127장: "독재자를 타도하라!", 절체절명의 위기

1950년 파리. 브뤼메르 19일 오후의 생클루 궁 오랑주리. 그곳은 마치 잘 짜인 연극 무대가 예기치 못한 배우들의 난입으로 아수라장이 된 듯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에는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이들의 증언(아마도 나중에 수집한)이 인용되어 있다. 이탈리아와 이집트 전장을 누비며 불패의 신화를 쌓았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무장하지 않은 의원들의 거센 항의와 물리적인 위협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는 모습. 이는 영웅 신화 이면에 감춰진 그의 인간적인 나약함과 함께, 쿠데타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순간에 놓여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1799년 11월 10일 오후 늦게, 생클루 궁 500인회 회의장(오랑주리)>

나폴레옹은 호위 척탄병 네 명만을 대동하고 소란스러운 오랑주리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등장은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회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의장석에 앉아 있던 동생 뤼시앵은 형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했지만, 의원들의 분노는 이미 통제 불가능한 상태였다.

"저 자가 누구냐!", "군인이 여기에 왜 들어왔나!", "독재자를 타도하라!", "법 밖에 있는 자다(Hors la loi)!"

사방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특히 자코뱅 성향 의원들은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했던 테르미도르 9일의 기억을 떠올리며 나폴레옹을 향해 달려들 기세였다. 그들은 나폴레옹을 둘러싸고 멱살을 잡고 밀치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일부 흥분한 의원은 단검을 꺼내 위협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나폴레옹은 이처럼 직접적이고 격렬한 저항에 직면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전장에서는 늘 부하들의 환호와 복종에 익숙했던 그였다. 그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분노와 적의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말은 횡설수설했으며, 몸은 휘청거렸다. 한때 전 유럽을 떨게 했던 영웅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공포에 질린 한 명의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나가라! 당장 여기서 나가라!" 의원들의 외침은 더욱 거세졌다.

나폴레옹은 거의 실신 직전 상태에 빠졌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호위 척탄병들이 재빨리 그를 둘러싸고 회의장 밖으로 거의 끌어내다시피 했다. 만약 척탄병들이 없었다면, 그는 정말 의원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회의장 밖으로 나온 나폴레옹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의 옷은 찢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긁힌 상처(혹은 연출된 상처라는 설도 있다)에서 피가 흘렀다. 쿠데타는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500인회의 저항을 무력화시키지 못한다면,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가고 나폴레옹 자신은 반역자로 처형될 수도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제128장: 뤼시앵의 기지, 군대의 개입

1950년 파리. 역사는 때로 한 인물의 순간적인 기지와 결단력에 의해 그 흐름이 바뀌기도 한다. 브뤼메르 19일 저녁, 형 나폴레옹이 500인회 의원들의 격렬한 저항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을 때, 쿠데타의 실패는 거의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동생 뤼시앵 보나파르트의 대담하고도 교활한 연기가 상황을 극적으로 반전시켰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뤼시앵의 역할을 "냉철한 배우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펼친 최고의 연기"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나폴레옹의 시대는 시작되기도 전에 막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1799년 11월 10일 저녁, 생클루 궁 500인회 회의장 밖 뜰>

회의장 밖으로 간신히 빠져나온 나폴레옹은 여전히 충격과 공포 속에서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측근 장군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쿠데타는 명백히 실패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바로 그때, 500인회 의장인 뤼시앵 보나파르트가 회의장을 빠져나와 뜰에 모여 있던 군인들 앞으로 나섰다. 그는 아직 스물네 살의 젊은 나이였지만, 형 못지않은 담대함과 정치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의장으로서의 권위를 이용하여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말을 타고 군인들 앞에 서서, 격앙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피 흘리는 형 나폴레옹(일부러 상처를 더 과장했을 수도 있다)을 가리키며 외쳤다.

"병사들이여! 그대들의 장군이, 프랑스의 영웅이 지금 저 회의장 안에서 단검을 든 폭도들에게 살해당할 뻔했소! 그들은 공화국을 배신하고 테러를 자행하려는 자들이오! 나는 그대들의 의장으로서 명령하노니, 저 회의장을 점령하고 인민의 대표들을 저 폭도들로부터 구출하시오!"

그의 말은 완전한 거짓이었지만, 극적인 상황과 그의 연기력은 군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특히 '나폴레옹 장군이 암살 위협을 당했다'는 말은 병사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회의장 안에서의 소란과 나폴레옹의 상처 입은 모습은 뤼시앵의 주장에 설득력을 더해주었다.

나폴레옹 역시 정신을 차리고 뤼시앵의 연극에 가담했다. 그는 자신의 칼을 뽑아 들고 외쳤다. "나에게 충성하는 자는 나를 따르라! 우리는 공화국을 구해야 한다!"

이때, 나폴레옹의 충실한 부하이자 용맹한 기병대 지휘관 뮈라 장군이 결정적인 행동에 나섰다. 그는 칼을 뽑아 들고 북소리를 울리라고 명령하며 외쳤다.

"저 쓰레기들을 모두 쓸어버려라!(Foutez-moi tout ce monde-là dehors!)"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총검을 번뜩이는 척탄병들이 뮈라의 지휘 아래 오랑주리 회의장 안으로 난입하기 시작했다.

제129장: 흩어진 의회, 새로운 권력의 탄생

1950년 파리. 총검 앞에서는 어떤 웅변도, 어떤 헌법 조항도 무력했다. 브뤼메르 19일 저녁, 생클루 궁 오랑주리 회의장에 난입한 군대는 프랑스 혁명이 세운 마지막 의회 기관마저 폭력으로 해산시켰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 사건을 "법의 죽음이자 군사 독재의 시작"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쿠데타 세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흩어진 의원들 일부를 모아 심야 회의를 열고, 자신들의 쿠데타에 합법성의 외피를 씌우는 마지막 작업을 진행했다. 형식은 민주주의였지만, 내용은 군사 쿠데타의 완성 그 자체였다.

<1799년 11월 10일 밤, 생클루 궁 회의장>

"나가라! 모두 나가라!"

총검을 앞세운 척탄병들이 오랑주리 회의장 안으로 들이닥치자, 저항하던 500인회 의원들은 공포에 질려 흩어지기 시작했다. 일부는 뒷문으로 도망쳤고, 일부는 창문을 깨고 뛰어내렸다. 한때 혁명의 중심이었던 의회는 군홧발 아래 무참히 짓밟혔다. 공화국의 심장이 멎는 순간이었다.

바깥 뜰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나폴레옹의 얼굴에는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이제 모든 것은 그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뤼시앵과 시에예스, 그리고 다른 공모자들과 함께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그날 밤늦게, 쿠데타 세력은 흩어진 의원들 중 자신들에게 협조적인 소수의 의원들(대부분 원로원 의원과 500인회 온건파)을 다시 생클루 궁 회의장으로 불러 모았다. 어둠과 혼란 속에서 열린 이 심야 회의는 쿠데타를 사후 승인하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뤼시앵 보나파르트는 다시 의장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했다. 그는 태연하게 '폭도들로부터 의회를 구출했다'고 선언하고, 새로운 정부 구성을 제안했다. 겁에 질렸거나 혹은 쿠데타에 동조한 의원들은 별다른 반대 없이 뤼시앵의 제안을 따랐다.

마침내 새벽녘, 이 '잔여 의회(Rump Parliament)'는 총재정부의 폐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피에르 로제 뒤코 등 3명의 통령(Consul)으로 구성된 임시 정부 수립을 승인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또한,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위원회 구성도 결의했다.

시에예스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깊은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그는 자신이 '머리'로서 계획을 주도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폴레옹이라는 '검'에게 모든 실권을 빼앗기고 이용당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제 명목상의 통령일 뿐, 실제 권력은 나폴레옹의 손아귀에 들어갔음을 직감했다. 그의 복잡하고 정교했던 헌법 구상은 나폴레옹에 의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변형될 운명이었다.

탈레랑과 푸셰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그들은 이번에도 승리하는 편에 줄을 섰고, 새로운 정권 하에서도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브뤼메르 18-19일의 쿠데타는 그렇게 성공했다. 군사력과 정치 공작, 그리고 일부 핵심 인물들의 배신과 기회주의가 결합되어, 프랑스 혁명이 10년간 쌓아 올린 공화정 체제는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형식적으로는 공화정이 유지되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이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한 사람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대, 즉 통령정부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제130장: 혁명의 종언인가, 계승인가?

1950년 파리. 브뤼메르 쿠데타 소식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 어떤 의미였을까?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마지막 기록들은 이 질문에 대한 복합적인 답변을 제시한다. 그에게 쿠데타는 혁명 이상의 명백한 배신이자 군사 독재의 시작이었지만, 동시에 오랜 혼란과 불안정에 지친 많은 프랑스인들에게는 질서 회복과 안정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한 사건이기도 했다. 혁명의 종언인가, 아니면 왜곡된 계승인가? 이 질문은 나폴레옹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혁명 유산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1799년 11월 하순, 프랑스 파리 근교 에티엔의 영지 / 파리 소피의 가게>

쿠데타 소식은 며칠 뒤 에티엔이 은둔하고 있던 파리 근교 시골 마을까지 전해졌다. 그는 파리에서 온 친구의 편지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편지를 읽는 그의 손은 분노와 허탈감으로 떨렸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구나. 10년의 혁명, 그 수많은 피와 눈물 끝에 얻은 것이 고작 코르시카 출신 군인의 독재란 말인가! 자유, 평등, 박애… 그 숭고한 이상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브뤼메르 18일은 공화국의 사망 선고일이다."

그는 서재 창밖으로 펼쳐진 황량한 겨울 풍경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혁명은 왜 실패했을까?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그는 혁명 초기 자신의 순진했던 이상주의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자조했다. 혁명의 과정에서 목격했던 민중의 광기, 정치 지도자들의 분열과 야심, 그리고 끊임없는 전쟁. 이 모든 것이 결국 혁명을 파멸로 이끌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아버지 기욤이 생전에 했던 충고들을 떠올렸다. '혁명은 이상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에티엔. 현실을 보아야 한다.' 어쩌면 아버지가 옳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만약 기욤이 공포 정치에서 살아남았다면)

"아버지, 결국 아버지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다시 한번 강력한 지도자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이제 혁명의 이름으로 무엇을 더 기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보나파르트가 혁명이 이룬 최소한의 성과, 즉 법 앞의 평등과 봉건제 폐지만이라도 지켜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는 이제 이곳에서 조용히 역사를 기록하며, 이 혼란스러운 시대의 의미를 성찰하는 데 남은 생을 바치려 합니다."

한편, 파리의 소피 라비뉴는 쿠데타 소식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혹은 공장에서 일하며) 고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총재정부 시기의 극심한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에 지칠 대로 지친 그녀에게, 나폴레옹의 등장은 오히려 일말의 안정에 대한 기대를 품게 했다.

"글쎄요, 마담 뒤부아. 누가 왕 노릇을 하든 장군 노릇을 하든, 우리 먹고사는 게 좀 나아지면 좋겠어요." 소피가 가게를 찾아온 마담 뒤부아(만약 생존했다면)에게 말했다. "저 보나파르트 장군이 이탈리아에서 돈을 많이 벌어왔다던데, 빵값이라도 좀 잡아주려나 모르겠네요."

마담 뒤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 전쟁보다는 낫겠지. 지긋지긋한 혁명도 이제 끝났으면 좋겠구나."

그녀들의 대화 속에는 거창한 정치 이념이나 혁명적 이상은 없었다. 오직 안정된 삶과 평화에 대한 소박한 갈망만이 담겨 있었다. 오랜 혼란에 지친 많은 프랑스 민중들에게, 나폴레옹은 강력한 질서 회복자이자 구원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그것은 프랑스 혁명의 종언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적어도 1789년 이래 지속되어 온 격렬한 혁명적 실험과 정치적 불안정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혁명이 뿌린 씨앗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자유와 평등의 이념, 국민 주권의 원칙, 그리고 혁명이 이룬 사회경제적 변화들은 나폴레옹이라는 새로운 권력자의 통치 아래 왜곡되고 변형될지언정, 완전히 지워질 수는 없었다. 나폴레옹 시대는 혁명의 종결인 동시에, 혁명의 유산을 선별적으로 계승하고 제도화하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기도 했다. 프랑스와 유럽은 이제 '자유의 불꽃'이 잠시 사그라든 자리에서, '영웅' 나폴레옹이 이끄는 또 다른 격동의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13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