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Ver.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15/50
제15부: 제1제정의 수립과 유럽 정복 (1804-1807)
제141장: 종신 통령, 황제를 향한 마지막 단계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 드샹의 서재에서 발견된 1802년 무렵의 팸플릿들은 당시 프랑스 사회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한 개인에게 얼마나 열광하고 의존했는지를 보여준다. 아미앵 조약으로 찾아온 평화, 정교 협약을 통한 종교 갈등 봉합, 그리고 법전 편찬과 행정 개혁을 통한 질서 회복. 이 모든 성과는 나폴레옹을 단순한 군사 영웅을 넘어, 프랑스를 구원하고 재건한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 압도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공화국의 마지막 숨통을 끊고,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나 샤를마뉴 대제처럼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에티엔의 기록은 이 과정을 불안과 혐오 속에서 지켜보며, 공화주의의 이상이 어떻게 개인의 야망 앞에 무너져 내리는지를 통탄하고 있다.
<1802년, 파리 튈르리 궁 / 원로원>
1802년, 프랑스는 마침내 10년 만에 평화를 맞이했다. 아미앵 조약 체결 소식은 전국적인 환호를 불러일으켰고, 제1통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안팎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안정과 영광을 가져다준 구원자로 여겨졌다.
나폴레옹과 그의 측근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나폴레옹의 업적을 칭송하며 그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제2통령 캄바세레스(Cambacérès)는 원로원에 나폴레옹의 임기를 10년 더 연장하여 '국민적 감사'를 표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더 영구적이고 절대적인 권력을 원했다.
결국 그의 의도대로, 문제는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질문은 교묘하게 바뀌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종신 통령으로 임명되어야 하는가?"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1802년 8월 발표된 투표 결과는 찬성 360만 표, 반대 8천여 표라는 압도적인 지지였다. 물론 이번에도 투표 과정의 공정성과 결과 조작에 대한 의혹은 끊이지 않았지만, 나폴레옹은 다시 한번 '국민의 이름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제 임기 없는, 사실상의 종신 독재자가 된 것이다.
에티엔 드샹은 이 소식을 듣고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 "종신 통령이라니! 이것은 명백한 군주정으로의 회귀가 아닌가! 공화국이라는 이름은 이제 허울뿐인 장식품으로 전락했다. 프랑스 국민들은 자유를 위해 그토록 많은 피를 흘리고도, 결국 새로운 독재자를 스스로 선택했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무력함과 시대의 흐름에 대한 환멸 속에서 더욱 깊은 은둔의 길을 택하기로 결심했다.
튈르리 궁은 점차 옛 왕궁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화려한 궁정 의례를 부활시켰고, 그의 주변에는 새로운 엘리트들이 몰려들어 충성을 맹세했다. 캄바세레스, 탈레랑, 푸셰 같은 노회한 정치가들은 물론, 뮈라, 란, 베르티에 등 군부의 실력자들도 그의 곁을 지켰다. 그들 사이에서는 나폴레옹의 후계자 문제와 함께, 아예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새로운 왕조를 창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나오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자신도 이러한 분위기를 즐기는 듯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역사와 샤를마뉴 대제의 업적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자신을 그들의 계승자로 여기는 듯한 언행을 자주 보였다. 그는 더 이상 '제1시민'이 아니라, '프랑스의 운명을 짊어진 특별한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후계자 문제는 그의 고민거리였다. 아내 조제핀은 여전히 매력적이고 사교계에서 영향력이 있었지만, 나이가 많아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희박했다. 나폴레옹의 형제들(조제프, 뤼시앵, 루이, 제롬)은 야심은 많았지만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오히려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그가 세습적인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혈통을 이을 후계자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 문제는 훗날 조제핀과의 이혼과 오스트리아 황녀와의 재혼이라는 냉혹한 정치적 결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1803년, 영국과의 아미앵 조약이 파기되고 다시 전쟁이 시작되면서, 나폴레옹에게는 자신의 권력을 절대화하고 제정을 수립할 또 다른 명분이 주어졌다. '조국의 안보'와 '전쟁 수행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더욱 강력하고 안정적인 통치 체제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종신 통령 나폴레옹. 그의 시선은 이미 더 높은 곳, 바로 황제의 관을 향하고 있었다. 공화국 프랑스는 이제 제국으로 나아가는 마지막 문턱 앞에 서 있었다. 혁명의 불꽃은 꺼져가고, 제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제142장: 앙기앵 공작의 피, 공포와 결단
1950년 파리. 역사의 기록 속에는 때로 한 개인의 비극적인 죽음이 거대한 정치적 격변의 촉매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1804년 3월, 부르봉 왕족인 앙기앵 공작(Duc d'Enghien)의 납치와 처형 사건은 바로 그러한 사례였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이 사건을 나폴레옹의 냉혹한 정치적 계산과 국가 폭력의 정당화 시도, 그리고 유럽 전체에 미친 충격적인 파장을 상세히 담아내고 있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나폴레옹이 더 이상 혁명의 수호자가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법과 도덕마저 무시할 수 있는 냉혈한 독재자임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1804년 3월, 파리 / 독일 바덴 / 뱅센 성>
종신 통령이 된 나폴레옹의 권력은 공고해 보였지만, 여전히 왕당파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영국에 망명 중이던 조르주 카두달은 영국의 지원을 받아 나폴레옹 암살 및 부르봉 왕정 복고를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푸셰의 비밀경찰은 이 음모를 사전에 감지하고 관련자들을 체포했다.
나폴레옹은 이 사건을 단순히 음모를 분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절대화하고 제정 수립의 명분을 쌓는 기회로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부르봉 왕가 전체에 강력한 경고를 보내는 동시에, 과거 자코뱅 세력을 안심시키고 자신의 혁명적 정통성을 과시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의 목표는 바로 젊고 유능하며 프랑스 국경 근처 독일 바덴(Baden) 공국에 머물고 있던 앙기앵 공작, 루이 앙투안 드 부르봉-콩데(Louis Antoine de Bourbon-Condé)였다.
앙기앵 공작은 카두달 음모에 직접 연루되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정치적 효과였다. 그는 앙기앵 공작이 망명 귀족들과 접촉하고 있으며 반혁명 음모의 중심인물이라는 구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1804년 3월 15일 밤, 프랑스 주권을 침해하면서까지 바덴 공국 영토로 기병대를 보내 앙기앵 공작을 강제로 납치하도록 명령했다. 납치 작전은 코랭쿠르(Caulaincourt) 장군(훗날 나폴레옹의 측근이 됨)의 지휘 아래 은밀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납치된 앙기앵 공작은 파리 근교 뱅센(Vincennes) 성으로 압송되었다. 그곳에서는 이미 형식적인 군사 재판이 준비되어 있었다. 재판은 한밤중에 열렸고, 변호인 선임이나 증거 제출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앙기앵 공작은 자신은 카두달 음모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단지 프랑스에 맞서 싸울 기회를 기다렸을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재판부는 이미 정해진 각본대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나는 프랑스를 위해 싸우고 싶었을 뿐, 조국을 배신하려 한 적은 없다! 이것은 암살이다!" 앙기앵 공작의 마지막 외침은 차가운 성벽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재판 직후, 1804년 3월 21일 새벽, 성벽 아래 해자에서 총살형으로 즉결 처형되었다. 그의 시신은 미리 파 놓은 구덩이에 서둘러 매장되었다.
앙기앵 공작 처형 소식은 유럽 전역에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격분하여 공식적으로 항의했고, 다른 군주국들도 나폴레옹의 야만적인 행동을 비난했다. 한때 프랑스 혁명에 동조했던 일부 지식인들마저 등을 돌렸다. 베토벤은 원래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 했던 교향곡 3번 '영웅(Eroica)'의 헌사를 찢어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외무장관 탈레랑은 이 사건에 대해 "그것은 범죄보다 더 나쁜 것, 바로 실수였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의 말처럼, 앙기앵 공작 처형은 외교적으로는 나폴레옹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었지만, 국내 정치적으로는 그가 의도했던 효과를 거두었다. 왕당파 세력은 공포에 휩싸여 움츠러들었고, 자코뱅 잔당들은 나폴레옹이 부르봉 왕가와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고 안심했다. 무엇보다도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자는 누구든 가차 없이 제거할 수 있다는 냉혹한 결단력을 프랑스 전체에 과시했다.
에티엔 드샹은 이 사건 소식을 듣고 분노와 혐오감으로 치를 떨었다. 그는 자신의 비밀 기록에 이렇게 적었다.
"앙기앵 공작의 피. 그것은 나폴레옹이 공화국의 관에 박은 마지막 못이다. 그는 이제 법과 정의를 완전히 무시하는 폭군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그는 프랑스의 영광을 외치지만, 그의 손에는 무고한 피가 묻어 있다. 나는 더 이상 그의 통치 하에서 숨 쉬는 것조차 부끄럽다. 역사는 반드시 그의 죄악을 심판할 것이다."
앙기앵 공작 처형이라는 피의 제물을 통해, 나폴레옹은 황제의 자리로 나아가는 마지막 장애물을 제거했다. 공포는 그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그는 그것을 사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이제 제정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143장: 원로원의 결정, 제국의 탄생
1950년 파리. 공화력 8년 헌법을 통해 이미 막강한 권한을 확보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제 공화국이라는 마지막 허울마저 벗어던질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앙기앵 공작 처형으로 반대 세력의 기세를 꺾은 그는, 이제 원로원(Sénat conservateur)을 압박하여 자신에게 황제의 칭호를 부여하도록 하는 마지막 단계를 밟아나갔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이 과정이 얼마나 형식적이고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공화주의의 이상이 어떻게 한 개인의 야심 아래 무너져 내렸는지를 보여준다.
<1804년 4-5월, 파리 원로원 회의장 / 튈르리 궁>
앙기앵 공작 처형 이후 파리의 정치적 분위기는 겉으로는 잠잠했지만, 물밑에서는 제정 수립을 위한 움직임이 분주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측근들은 언론과 각종 위원회를 통해 '프랑스의 안정과 영광을 위해서는 강력하고 세습적인 지도체제가 필요하다'는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공화정은 끊임없는 정파 싸움과 불안정을 야기했지만,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은 프랑스를 위대하게 만들 것이라는 논리였다.
원로원은 헌법상 새로운 제도 변경을 제안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나폴레옹은 이 기구를 이용하여 제정 수립을 합법화하려 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대부분 나폴레옹에 의해 임명되었거나 그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에, 그의 의도를 거스를 힘이 없었다.
1804년 4월 말, 원로원 내 나폴레옹 지지 세력은 "프랑스 공화국의 통치를 세습 황제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맡긴다"는 내용의 동의안을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형식적인 토론이 며칠간 이어졌지만, 반대 의견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과거 혁명에 참여했던 일부 공화주의 성향 의원들은 침묵하거나 불참하는 방식으로 소극적인 저항을 표시했을 뿐이다.
에티엔은 시골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원로원마저 저 야심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구나. 그들은 헌법의 수호자가 아니라 파괴자가 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프랑스 공화국은 이제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다."
마침내 1804년 5월 18일, 원로원은 압도적인 표차로 나폴레옹을 '프랑스인의 황제(Empereur des Français)'로 추대하고, 황제 지위는 그의 남성 직계 후손에게 세습된다는 내용의 법령(Sénatus-consulte)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프랑스 제1제정(Premier Empire)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법령은 다시 한번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정부는 또다시 대대적인 선전 활동을 벌였고, 투표 과정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공개적이고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찬성 357만 표, 반대 2,579표. 다시 한번 압도적인 지지율(물론 조작 의혹은 여전했다)을 통해 나폴레옹은 자신이 프랑스 국민의 의지에 의해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할 수 있게 되었다.
에티엔은 이 국민투표 결과를 보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국민투표는 이제 독재자의 알리바이가 되었다. 저 압도적인 찬성표 뒤에 숨겨진 진정한 민심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정말 황제를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공포와 혼란에 지쳐 안정을 갈망하는 것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1789년 바스티유 함락으로 시작된 혁명의 여정은 불과 15년 만에 다시 한번 1인 통치 시대로 회귀하고 만 것이다. 물론 나폴레옹의 제정은 구체제의 절대 왕정과는 달랐다. 그것은 혁명의 일부 성과(법 앞의 평등, 봉건제 폐지, 부르주아적 재산권 등)를 계승하고, 국민 주권이라는 형식을(비록 왜곡되었지만) 유지하려 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권력의 본질은 명백히 권위주의적이었고,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상은 퇴색되었다.
프랑스는 이제 황제 나폴레옹 1세의 통치 아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대관식은 새로운 제국의 시작을 알리는 화려하고 장엄한 행사가 될 터였다. 그러나 에티엔과 같은 소수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그 화려함 뒤에 숨겨진 혁명 정신의 배반과 미래의 불확실성을 예감하며 침묵 속에서 역사의 기록을 이어갈 뿐이었다.
제144장: 스스로 쓴 왕관, 노트르담의 대관식
1950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장엄한 첨탑을 바라볼 때면, 나는 1804년 12월 2일, 바로 이곳에서 펼쳐졌던 나폴레옹 1세의 화려한 대관식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즉위식을 넘어, 치밀하게 계산되고 연출된 한 편의 정치 드라마였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에는 당시 현장의 분위기와 함께, 대관식의 상징적인 장면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담겨 있다. 특히 나폴레옹이 교황의 손에서 왕관을 받아 스스로 썼던 장면은, 그의 절대적인 권력 의지와 함께 종교적 권위 위에 군림하려는 세속 권력의 의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피 라비뉴와 소년 다니엘 르페브르 역시 그날 파리의 군중 속에서 이 역사적인 스펙터클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이 행사가 어떻게 비쳤을까?
<1804년 12월 2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파리는 다시 한번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해 거리에는 삼색기와 함께 황제의 상징인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깃발들이 나부꼈다.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는 이날을 위해 특별히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고대 로마 제국과 샤를마뉴 대제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듯, 붉은 벨벳과 황금 장식이 성당 내부를 가득 채웠고, 수많은 촛불이 장엄한 분위기를 더했다.
대관식에는 유럽 각국의 사절단, 프랑스의 새로운 제국 귀족들, 군 원수들, 고위 관료들, 그리고 나폴레옹 가문의 사람들이 총출동했다. 그들의 화려한 복장은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는 듯했다. 나폴레옹은 이 행사의 정통성과 권위를 높이기 위해 로마 교황 비오 7세를 직접 파리로 초청했다. 마지못해 파리까지 온 늙은 교황은 복잡한 표정으로 제단 앞에 앉아 있었다.
성당 밖 광장과 거리에는 수많은 파리 시민들이 몰려들어 황제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피 라비뉴는 어린 아들(혹은 여전히 동생 피에르)의 손을 잡고 군중 속에 섞여 있었다. 그녀는 이제 중년의 여인이 되어 있었고, 혁명의 혼란 속에서 작은 옷 가게를 운영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황제니 제국이니 하는 것은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였지만, 이 화려한 행사가 혹시나 더 나은 삶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어린 소년 다니엘 르페브르는 아버지의 어깨 위에 목말을 타고 눈을 크게 뜬 채 이 모든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아직 역사의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황제라는 존재와 그를 둘러싼 압도적인 화려함과 군중의 열기는 그의 어린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는 훗날 그가 역사가의 길을 걷게 되는 먼 씨앗이 될 수도 있다.)
마침내 황제 부부가 탄 황금 마차가 성당 앞에 도착했다. 나폴레옹은 고대 로마 황제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있었고, 황후 조제핀 역시 눈부신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했다. 그들이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장엄한 오르간 음악과 함께 미사가 시작되었다.
미사가 끝나고 대관식의 하이라이트 순간이 다가왔다. 교황 비오 7세가 축성된 황제의 관을 들고 나폴레옹에게 다가가 씌워주려 할 때였다. 바로 그 순간, 나폴레옹은 교황의 손에서 왕관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잠시의 정적 끝에, 그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자신의 머리에 스스로 왕관을 썼다. 이어서 그는 조제핀을 무릎 꿇게 하고 그녀의 머리에도 황후의 관을 씌워주었다.
이 장면은 모든 참석자들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나폴레옹의 권력이 신이나 교황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과 프랑스 국민의 의지에 의해 획득된 것임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교황은 당황하고 모욕감을 느꼈지만,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나폴레옹의 권력을 종교적으로 승인해주는 도구로 이용되었을 뿐이었다.
대관식의 모든 과정은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화가 다비드에 의해 세심하게 기록되고 있었다. 그는 훗날 이 장면을 거대한 그림으로 완성하여 제국의 영광을 영원히 남기게 된다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과 조제핀 황후의 대관>).
에티엔 드샹은 이 모든 소식을 시골에서 전해 들으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스스로 쓴 왕관이라… 오만함의 극치로군. 그는 이제 신마저 자신의 발아래 두려 하는구나. 저 화려한 대관식은 혁명의 장례식이자, 새로운 독재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에 불과하다."
1804년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의 대관식은 나폴레옹 제국의 공식적인 출범을 알리는 화려한 서막이었다. 프랑스는 다시 한번 황제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황제는 과거 부르봉 왕가의 신성한 군주와는 다른, 혁명의 격동기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권력을 쟁취하고 국민적 지지(비록 조작되었을지라도)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군주였다. 그의 시대는 프랑스에게 영광과 함께 더 큰 시련을 안겨줄 운명이었다.
제145장: 제국의 귀족, 충성과 보상
1950년 파리. 센 강변을 따라 늘어선 화려한 저택들을 보며, 나는 나폴레옹 시대에 탄생했던 새로운 귀족들의 역사를 떠올린다. 프랑스 혁명은 귀족 특권을 타파했지만, 역설적이게도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자신의 제국을 떠받칠 새로운 엘리트 집단으로서 '제국 귀족(Noblesse d'Empire)'을 창설했다. 이는 단순한 명예직이 아니라, 군사적 공로나 국가에 대한 충성에 대한 보상이자, 제국의 통치 기반을 강화하려는 치밀한 정치적 계산의 산물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이 새로운 귀족 제도의 탄생을 혁명 원칙의 명백한 배반으로 규정하며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편, 앙투아네트 드 발루아와 같은 구 귀족들이나 뤽 모로 같은 기회주의자들은 이 새로운 질서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찾아야 했다.
<1804년 이후, 파리 튈르리 궁 / 제국 원수 및 고위 관리 저택>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제국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사회 질서를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핵심 중 하나가 바로 1808년 공식적으로 법제화된 제국 귀족 제도의 창설이었다.
"혁명은 평등을 외쳤지만, 인간 사회에는 언제나 뛰어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기 마련이다.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자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명예와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측근들에게 새로운 귀족 제도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그의 진짜 속내는 물론, 충성스러운 군 장성들과 고위 관료들을 자신의 주변에 묶어두고, 새로운 세습 엘리트 계층을 만들어 자신의 왕조를 뒷받침하려는 데 있었다.
제국 귀족의 작위(공작, 백작, 남작 등)는 주로 군사적인 공훈을 세운 제국의 원수(Maréchal d'Empire)들과 고위 행정 관료, 외교관, 그리고 과학자나 예술가 등 국가에 기여한 인물들에게 수여되었다. 뮈라, 네(Ney), 란, 다부(Davout), 베르티에 등 나폴레옹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원수들은 대부분 공작이나 그에 준하는 높은 작위를 받았다. 탈레랑, 캄바세레스, 푸셰와 같은 핵심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는 작위와 함께 막대한 토지와 연금, 그리고 화려한 문장(紋章)이 하사되었다.
뤽 모로는 이러한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뛰어난 처세술과 인맥을 활용하여 나폴레옹의 측근들에게 접근했고, 마침내 남작 작위를 받아 제국 귀족의 대열에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파리에 호화로운 저택을 마련하고 사교계 활동을 즐기며 과거 몰락했던 가문의 영광을 되찾은 듯 보였다. 그는 더 이상 혁명의 이상을 논하던 젊은 법학도가 아니었다. 완전히 제국의 질서에 편입된 기회주의적 출세주의자일 뿐이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힘과 현실일세, 에티엔." 뤽은 오랜만에 시골로 찾아와 에티엔을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투에는 은근한 조롱과 자기 합리화가 섞여 있었다. "자네는 아직도 낡은 공화국의 꿈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군. 세상은 변했네. 황제 폐하만이 프랑스에 질서와 영광을 가져다주실 수 있네."
에티엔은 그의 말을 씁쓸하게 들었다. "자네가 말하는 영광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 위에 세워진 것이고, 그 질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대가로 얻어진 것일세. 나는 그런 영광과 질서를 원하지 않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더 이상 좁혀질 수 없었다.
한편, 혁명의 격동기를 살아남은 구 귀족들은 이 새로운 제국 귀족의 등장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앙투아네트 드 발루아는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프랑스로 돌아와 어렵게 가문의 일부 재산을 되찾았지만, 과거와 같은 특권과 명예는 누릴 수 없었다. 그녀는 파리 사교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코르시카 촌뜨기' 출신의 졸부들이나 전쟁터에서 벼락출세한 장군들이 새로운 귀족 행세를 하는 것을 보며 속으로 경멸과 냉소를 감추지 못했다.
"저들을 보라지, 마르그리트." 그녀가 충실한 하녀에게 씁쓸하게 말했다. "가문의 역사도, 품위도 없는 것들이 번쩍이는 작위를 달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혁명이 귀족을 없앴다더니, 결국 더 천박한 귀족들을 만들어냈을 뿐이로구나." 그러나 그녀 역시 변화된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때로는 새로운 권력자들과 교류하고 타협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제국 귀족 제도는 구체제의 그것과는 달랐다. 면세 특권과 같은 법적인 특권은 거의 없었고, 능력과 공로에 따른 선발 원칙이 어느 정도 강조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것은 세습적인 신분 질서를 다시 부활시키고, 황제에 대한 충성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위계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선언했던 프랑스 혁명의 근본 원칙과는 명백히 배치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충성과 보상이라는 당근과 채찍을 통해 제국을 떠받칠 엘리트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동원했다. 제국의 귀족들은 나폴레옹 정권의 중요한 지지 기반이 되었고, 그의 전쟁과 팽창 정책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프랑스 사회 내부에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과 위화감을 조성하고, 혁명의 평등주의적 이상을 갈망하는 이들에게는 또 다른 비판과 저항의 대상이 되었다. 제국의 화려함 뒤에는 혁명의 유산과의 끊임없는 긴장과 모순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145장 끝)
제15부: 제1제정의 수립과 유럽 정복 (1804-1807)
제146장: 바다의 장벽, 트라팔가르를 향하여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서재에는 영국 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프랑스 대육군(Grande Armée)과 영국 함대의 모습을 묘사한 당시의 풍자화가 여러 점 있었다. 육지의 황제 나폴레옹, 그러나 그의 발목을 잡는 것은 넘을 수 없는 바다의 장벽, 즉 영국의 압도적인 해군력이었다. 에티엔의 기록은 나폴레옹의 영국 본토 침공 계획이 얼마나 야심 차고 동시에 무모했는지, 그리고 그 계획의 성패가 결국 바다 위의 함대 결전에 달려 있었음을 보여준다. 트라팔가르 해전은 단순히 해전의 승패를 넘어, 나폴레옹의 세계 전략 전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분수령이었다.
<1803년 - 1805년 여름, 프랑스 불로뉴 해안 / 영국 해협 / 대서양>
아미앵 조약의 짧은 평화는 1803년 5월, 영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깨졌다. 나폴레옹은 격분했고, 숙적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영국 본토를 직접 침공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즉시 프랑스 북부 불로뉴(Boulogne) 해안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영국 침공을 위한 '위대한 군대(Grande Armée)'였다. 십만 명이 넘는 정예 병력이 해안가에 캠프를 치고 상륙 훈련을 거듭했고, 수천 척의 상륙용 평저선이 건조되었다.
"영국 해협은 도랑에 불과하다! 의지만 있다면 건너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폴레옹은 장군들에게 호언장담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도버 해협의 폭은 좁았지만, 그곳을 지키는 것은 세계 최강의 영국 왕립 해군(Royal Navy)이었다.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단 하루, 아니 단 몇 시간이라도 장악하지 못한다면, 상륙 작전은 시작도 하기 전에 재앙으로 끝날 것이 뻔했다.
나폴레옹의 계획은 복잡하고 대담했다. 그는 빌뇌브(Villeneuve) 제독이 지휘하는 툴롱 함대와 스페인 함대에게 영국 함대를 카리브해까지 멀리 유인한 뒤, 비밀리에 급히 되돌아와 브레스트 함대와 합류하여 일시적으로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장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위대한 군대'를 영국 땅에 상륙시키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프랑스 함대는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의 끈질긴 감시와 봉쇄에 시달렸고, 빌뇌브 제독은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며 나폴레옹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그는 카리브해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과정에서 영국 함대와의 소규모 교전(피니스테레 곶 해전)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나폴레옹의 명령을 어기고 브레스트가 아닌 스페인 남부 카디스(Cádiz) 항으로 함대를 이끌고 피신해 버렸다(1805년 8월).
<불로뉴, 나폴레옹 사령부>
빌뇌브 함대가 영국 해협으로 오지 않고 카디스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격노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영국 침공을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지만, 이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였다.
"빌뇌브, 이 겁쟁이 같은 놈!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리다니! 당장 그를 해임하고 로실리(Rosily) 제독으로 교체하라! 그리고 카디스의 함대는 지중해로 이동하여 나폴리 작전을 지원하도록 명령하라!" 나폴레옹은 참모장 베르티에에게 불같이 명령을 쏟아냈다.
그는 영국 침공 계획을 사실상 포기해야 했다. 때마침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영국과 손잡고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를 위협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폴레옹은 놀라운 속도로 결정을 바꾸었다. 그는 불로뉴에 집결했던 '위대한 군대'를 즉시 동쪽으로 이동시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먼저 격파하기로 결심했다. 육지에서의 승리를 통해 바다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겠다는 계산이었다.
<스페인 카디스 항>
한편, 카디스 항에 갇힌 빌뇌브 제독은 나폴레옹의 질책과 해임 소식에 깊은 굴욕감과 절망감에 빠졌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나폴레옹의 분노를 풀기 위해,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함대를 이끌고 출항하여 지중해로 향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의 함대는 이미 오랜 항해와 봉쇄로 지쳐 있었고, 스페인 동맹 함대와의 협조도 원활하지 않았다.
1805년 10월 중순, 빌뇌브의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는 마침내 카디스 항을 나섰다. 그러나 그들의 앞에는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운명의 트라팔가르 해전을 향한 마지막 항해가 시작된 것이다. 바다의 장벽은 여전히 높고 견고했다. 나폴레옹의 야망은 이제 육지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제147장: 넬슨의 죽음, 영국의 바다
1950년 파리. 트라팔가르(Trafalgar). 그 이름은 영국 해군 역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의 상징이자, 동시에 위대한 영웅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의 죽음을 기리는 비극적인 장소이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에는 이 해전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없지만, 당시 파리에서 이 소식을 접했을 때 느꼈을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다. 프랑스에게는 뼈아픈 패배였지만, 동시에 나폴레옹의 야망이 바다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음을 확인시켜 준 사건이기도 했다. 나는 당시 해전에 참전했던 영국 해군 장교 찰스 킹슬리(가상 인물)의 시점을 빌려, 포연 자욱했던 그날 트라팔가르 곶 앞바다의 격전과 영웅의 마지막 순간을 그려보고자 한다.
<1805년 10월 21일, 스페인 남서부 트라팔가르 곶 앞바다, 영국 함선 갑판>
찰스 킹슬리 중령은 자신의 함선 '벨레로폰(Bellerophon)'호 갑판 위에서 망원경으로 적 함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빌뇌브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가 마침내 카디스 항을 빠져나와 지중해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전열은 길고 다소 흐트러져 있었지만, 33척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는 여전히 위압적이었다.
그러나 킹슬리의 마음속에는 두려움보다 결연한 의지가 더 강했다. 그들 곁에는 호레이쇼 넬슨 제독과 27척의 영국 전함이 있었다. 넬슨 제독은 이미 몇 주 전부터 휘하 함장들을 자신의 기함 '빅토리(Victory)'호에 불러 모아 대담하고 혁신적인 전투 계획을 설명하고 숙지시킨 상태였다. 전통적인 방식처럼 적 함대와 평행하게 전열을 이루어 포격전을 벌이는 대신, 영국 함대를 두 개의 종대(縱隊)로 나누어 적 함대의 중앙을 수직으로 돌파하여 혼란에 빠뜨리고 각개 격파한다는 전술이었다. 매우 위험하지만 성공한다면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계획이었다.
오전 11시경, 넬슨 제독은 '빅토리'호 마스트에 그 유명한 기치 신호(flag signal)를 올리도록 명령했다. "영국은 모든 이가 자신의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이 메시지는 모든 함선에 전달되었고, 영국 수병들의 가슴에 뜨거운 애국심과 결의를 불어넣었다. 킹슬리 중령 역시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정오 무렵, 넬슨과 콜링우드(Collingwood) 제독이 각각 이끄는 두 개의 영국 함대 종대가 적 함대의 중앙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적 함선들의 맹렬한 포격이 시작되었지만, 영국 함대는 굴하지 않고 전열을 유지하며 적진 깊숙이 파고들었다. '빅토리'호와 '로열 소버린(Royal Sovereign)'호가 가장 먼저 적 전열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순식간에 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양측 함선들이 뒤엉켜 근접 포격전을 벌였고, 포탄 파편과 부러진 돛대가 비 오듯 쏟아졌다. 킹슬리의 '벨레로폰'호 역시 프랑스 전함 '레글(L'Aigle)'호와 격렬한 교전을 벌였다. 갑판 위는 포연과 화약 냄새, 그리고 병사들의 함성과 비명 소리로 가득 찼다. 백병전(Boarding)을 위해 적함에 뛰어드는 수병들의 모습도 보였다. 킹슬리는 침착하게 전투를 지휘하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영국 해군의 우수한 함포 사격술과 수병들의 높은 사기는 점차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는 지휘 체계가 무너지고 혼란에 빠져 각개 격파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승리의 순간,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넬슨 제독이 '빅토리'호 갑판 위에서 프랑스 저격병의 총탄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킹슬리는 충격과 슬픔에 잠시 말을 잃었다. 넬슨은 모든 영국 해군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슬픔을 누르고 전투 지휘에 집중했다. 넬슨 제독의 마지막 소원은 완전한 승리였을 것이다.
오후 4시 30분경, 넬슨 제독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나의 의무를 다했다"였다고 전해진다. 그가 숨을 거둘 무렵, 해전은 이미 영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가고 있었다.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는 22척이 나포되거나 침몰하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빌뇌브 제독 역시 포로로 잡혔다. 영국 측은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지만, 넬슨 제독을 포함한 약 1,700명의 사상자를 냈다.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리는 영국에게는 결정적이었다. 이 전투로 프랑스 해군은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고, 나폴레옹의 영국 본토 침공 계획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이후 영국은 제해권을 확고히 장악하고 나폴레옹 제국을 해상에서 봉쇄하며 결국 그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전투가 끝난 후, 킹슬리 중령은 석양에 붉게 물든 바다 위에 떠 있는 부서진 함선들의 잔해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승리의 기쁨과 함께 영웅을 잃은 슬픔, 그리고 전쟁의 참혹함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바다는 영국의 것이 되었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컸다. 그는 넬슨 제독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나도 나의 의무를 다했는가?' 그는 조용히 거수경례를 올렸다.
제148장: 아우스터리츠의 태양, 육지의 영광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 드샹의 서재에는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전투를 묘사한 그림이 여러 점 걸려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안개 속에서 떠오르는 태양 아래 진격하는 프랑스 군대의 모습이었다. '아우스터리츠의 태양(Soleil d'Austerlitz)'은 나폴레옹 군사 경력의 정점, 그의 군사 예술이 가장 빛났던 순간을 상징한다. 에티엔은 당시 나폴레옹 군대에 행정 장교(혹은 유사 직책)로 징발되어 이 역사적인 전투를 직접 경험했던 것 같다. 그의 기록에는 전투의 경이로운 전술과 압도적인 승리에 대한 감탄과 함께, 전쟁의 참혹함과 황제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고 있다.
<1805년 11월 - 12월 2일, 오스트리아 울름 / 빈 / 모라비아 아우스터리츠 평원>
트라팔가르에서의 해전 패배 소식은 나폴레옹에게 뼈아팠지만, 그는 실망할 틈도 없이 동쪽에서 다가오는 새로운 위협에 맞서야 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영국의 자금 지원을 받아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불로뉴에 집결했던 '위대한 군대'를 놀라운 속도로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오스트리아 군대였다. 그는 오스트리아 군 주력이 바이에른의 울름(Ulm) 요새에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기만 작전을 통해 그들의 퇴로를 차단한 뒤 신속하게 포위했다. 오스트리아 사령관 마크(Mack) 장군은 속수무책으로 항복했고, 나폴레옹은 전투 없이 6만 명에 달하는 오스트리아 군대를 포로로 잡는 대성공을 거두었다(울름 전투, 1805년 10월).
에티엔 드샹은 이때 행정 장교 신분으로 군대에 합류하여 울름에서의 승리를 목격했다. 그는 나폴레옹의 뛰어난 전략과 군대의 신속한 기동력에 감탄했지만, 동시에 전쟁 포로들의 비참한 모습 앞에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울름에서의 승리 이후 나폴레옹은 거침없이 오스트리아 수도 빈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아직 러시아 군대와 오스트리아 군 잔존 병력이 남아 있었다. 두 동맹국의 황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와 러시아의 젊고 야심 찬 알렉산드르 1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폴레옹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라비아 지방의 아우스터리츠 근처 프라첸(Pratzen) 고지에 유리한 진지를 잡고 나폴레옹을 기다렸다.
나폴레옹은 연합군이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이를 역이용할 계략을 꾸몄다. 그는 일부러 자신의 군대가 약하고 후퇴하려는 듯한 인상을 풍기며 연합군을 유인했다. 그는 프라첸 고지를 일부러 비워두고, 자신의 우익 부대를 약하게 배치하여 연합군이 그곳을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그의 진짜 목표는 연합군 주력이 우익 공격에 쏠린 틈을 타, 안개 속에 숨겨둔 주력 부대(술트(Soult) 원수 군단)로 하여금 텅 빈 중앙의 프라첸 고지를 단숨에 점령하여 연합군을 양단하고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다.
1805년 12월 2일 새벽, 바로 나폴레옹 황제 즉위 1주년 기념일이었다. 짙은 안개가 아우스터리츠 평원을 뒤덮고 있었다. 연합군은 나폴레옹의 계략에 말려들어 프랑스군 우익을 향해 총공세를 시작했다.
"바로 지금이다! 술트, 프라첸 고지를 점령하라!" 안개가 걷히고 '아우스터리츠의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 나폴레옹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안개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프랑스 주력 부대는 맹렬한 기세로 프라첸 고지를 향해 돌격했다. 고지를 지키던 연합군 중앙 부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고지를 점령한 프랑스 군은 이제 아래쪽에서 교전 중인 연합군 좌익(주로 러시아군)의 배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부(Davout)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 우익 부대 역시 필사적인 방어로 연합군의 발을 묶는 데 성공했다.
연합군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중앙이 돌파당하고 좌익이 포위되자 지휘 체계는 마비되었고,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많은 병사들이 얼어붙은 호수 위로 도망치다가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얼음이 깨지면서 차가운 물속에 빠져 죽었다. 전투는 프랑스군의 일방적인 학살극으로 변했다.
에티엔은 전투 지휘소 근처에서 이 모든 과정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그는 나폴레옹의 치밀한 계획과 대담한 실행력, 그리고 병사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카리스마에 전율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전쟁의 천재인가…' 그는 나폴레옹의 군사적 능력에 경탄했지만, 동시에 그 결과로 벌어지는 끔찍한 살육 앞에서 인간적인 연민과 함께 공포감을 느꼈다.
전투가 끝난 후, 나폴레옹은 말을 타고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병사들 사이를 지나갔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감과 함께 제국의 영광을 확인한 듯한 오만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병사들이여! 나는 그대들이 자랑스럽다! 그대들은 오늘 제국의 독수리를 더욱 빛나게 했다! 오늘 밤, 그대들은 영웅으로 잠들 것이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의 군사적 경력에서 가장 완벽하고 빛나는 승리였다. 그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뛰어난 전술과 기만 작전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로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오스트리아는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어야 했으며, 러시아 군대는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나폴레옹의 유럽 대륙 패권은 이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우스터리츠의 태양'은 그의 제국의 영광을 온 유럽에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부신 빛 뒤에는 수만 명의 죽음과 슬픔, 그리고 더 큰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제149장: 신성 로마 제국의 종말, 라인 동맹
1950년 파리. 천 년의 역사.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Holy Roman Empire)이라는 이름은 유럽 중세와 근세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상징이었다. 비록 그 실체는 오래전에 유명무실해졌지만, 제국이라는 이름 자체는 여전히 독일 지역의 복잡한 정치 구조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권위를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그러나 아우스터리츠에서의 참패는 이 천년 제국의 마지막 숨통마저 끊어놓았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나폴레옹이 어떻게 군사적 승리를 발판 삼아 독일 지역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프랑스의 패권을 강화하기 위해 '라인 동맹(Confédération du Rhin)'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했는지 분석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영토 조정을 넘어, 유럽 역사의 오랜 장(章) 하나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1805년 12월 - 1806년 8월, 프레스부르크 / 파리 / 독일 남서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승리 이후, 나폴레옹은 패배한 오스트리아에게 가혹한 강화 조건을 제시했다. 1805년 12월 26일 체결된 프레스부르크 조약(Treaty of Pressburg)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 이스트리아, 달마티아를 나폴레옹이 세운 이탈리아 왕국에 할양해야 했고, 티롤과 포어아를베르크 등 독일 지역 영토를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등 나폴레옹의 동맹국들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막대한 배상금 지불은 물론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큰 타격을 입었고, 독일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거의 상실했다.
나폴레옹은 이제 독일 지역의 정치 질서를 자신의 의도대로 재편할 기회를 잡았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견제하고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라인 강 유역과 남부 독일의 중간 규모 국가들을 프랑스의 보호 아래 묶는 새로운 연방체를 구상했다. 이것이 바로 '라인 동맹'이었다.
나폴레옹은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등 남부 독일의 주요 제후들에게 왕 또는 대공의 칭호를 부여하고 영토를 확장시켜 주는 대가로, 프랑스와의 군사 동맹 및 신성 로마 제국 탈퇴를 요구했다. 프랑스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서 이들 제후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1806년 7월 12일,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을 포함한 16개의 독일 남서부 국가들은 파리에서 조약을 맺고 라인 동맹(Confédération du Rhin) 결성을 선언했다. 이들은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탈퇴하고, 나폴레옹을 '보호자(Protecteur)'로 하는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 동맹 국가들은 프랑스에 군대 파견 의무를 져야 했다.
이러한 라인 동맹의 결성은 신성 로마 제국에게는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제국의 핵심적인 구성 국가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제국은 더 이상 존립할 명분도, 실질적인 힘도 잃어버렸다. 나폴레옹은 최후통첩을 보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2세(Franz II, 오스트리아 황제로서는 프란츠 1세)에게 제위 포기를 압박했다.
<빈, 호프부르크 궁>
프란츠 2세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라는 칭호는 천 년 가까이 이어져 온 신성하고 역사적인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제국은 이미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고, 나폴레옹의 군사적 위협 앞에서 저항은 불가능했다. 그는 결국 굴욕적인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1806년 8월 6일, 프란츠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제위 포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로써 962년 오토 1세의 대관식 이래 약 840년 이상 지속되었던 신성 로마 제국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유럽 중세 질서의 마지막 잔재가 마침내 청산된 것이다.
에티엔 드샹은 이 소식을 접하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구체제의 상징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를 역사의 진보로 보면서도, 그것이 프랑스 황제의 군사적 압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천 년 제국이 마침내 무너졌다. 봉건 시대의 낡은 유물이 사라진 것은 분명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프랑스 제국의 패권이라면, 이것을 진정한 진보라고 할 수 있을까? 독일 민족은 이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지만, 프랑스라는 새로운 지배자를 맞이하게 된 것은 아닌가? 나폴레옹은 역사의 흐름을 이용하고 있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질서는 과연 유럽에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인가?"
라인 동맹의 결성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는 독일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는 독일 지역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고 프로이센의 부상을 위한 길을 열었으며, 동시에 독일 민족주의를 더욱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패권을 강화했지만, 동시에 미래의 강력한 적을 스스로 키우는 씨앗을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150장: 예나의 굴욕, 베를린 칙령
1950년 파리. 1806년 가을, 예나-아우어슈테트(Jena-Auerstedt) 전투에서의 프로이센군 참패는 단순한 군사적 패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 유럽 최강 육군이라는 프로이센의 신화를 산산조각 낸 사건이자, 독일 민족 전체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감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에는 당시 베를린 대학 학생이었던 카를 폰 슈타인(가상 인물)과의 서신 교환 내용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카를의 편지에는 패배의 충격과 분노, 그리고 나폴레옹 군대가 베를린에 입성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굴욕 속에서 싹트는 강렬한 민족적 각성이 담겨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베를린에서, 나폴레옹은 영국을 향한 경제 전쟁, 즉 대륙 봉쇄령을 선포하며 자신의 패권을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1806년 10월 14일, 독일 작센 예나 / 아우어슈테트 전장>
프로이센은 라인 동맹 결성과 신성 로마 제국 해체를 지켜보며 더 이상 나폴레옹의 팽창을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러시아, 영국 등과 동맹을 맺고 마침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프로이센 군대는 여전히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의 명성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신들의 군사력을 과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1806년 10월 14일,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두 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대는 나폴레옹과 다부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구식 전술에 얽매여 있던 프로이센 군대는 프랑스 군의 신속한 기동과 유연한 전술, 그리고 우월한 지휘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불과 하루 만에 프로이센 주력 군대는 궤멸되었고, 수많은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사적 신화는 산산조각 났다.
<베를린 대학 근처>
패전 소식은 베를린에 엄청난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젊은 대학생 카를 폰 슈타인은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친구들과 함께 프로이센 군대의 승리를 확신하며 애국가를 불렀었는데, 이제 조국은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수도 베를린마저 프랑스 군대의 말발굽 아래 놓일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슬픔과 함께 프랑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위대한 프로이센 군대가 저 코르시카 촌뜨기에게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이것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다. 독일 민족 전체의 치욕이다!" 카를은 친구들과 모여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피히테 교수의 강연을 다시 떠올리며, 독일 민족이 정신적으로 각성하고 단결하여 이 굴욕을 씻어내야 한다고 다짐했다.
<1806년 10월 27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마침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베를린에 입성했다. 그는 백마를 타고 위풍당당하게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했고, 프랑스 군대는 시가 행진을 벌였다. 베를린 시민들은 침묵 속에서 정복자의 행렬을 지켜봐야 했다. 일부는 두려움에 떨었고, 일부는 굴욕감에 눈물을 흘렸다. 카를 폰 슈타인은 거리 한구석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복수'라는 두 글자가 깊이 새겨지고 있었다.
<베를린, 나폴레옹 집무실>
베를린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이제 자신의 유럽 대륙 지배를 완성하기 위한 다음 단계를 실행에 옮겼다. 그의 마지막 남은 강적은 바다 건너 영국이었다. 직접적인 군사적 침공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그는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켜 굴복시키기로 결심했다.
1806년 11월 21일, 나폴레옹은 베를린에서 역사적인 칙령, 즉 '대륙 봉쇄령(Décret de Berlin)'을 선포했다.
"대영 제도는 봉쇄 상태에 있음을 선포한다. 영국 및 그 식민지와의 모든 교역 및 통신을 금지한다. 유럽 대륙의 모든 항구는 영국 선박에 대해 폐쇄된다. 영국 상품은 발견 즉시 몰수한다. 이 명령을 위반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
이 칙령은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 전체의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운명이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군사적 패권을 이용하여 유럽 경제 전체를 통제하고 영국을 고사시키려 한 것이다. 이는 그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제국이 필연적으로 더 많은 저항과 갈등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에티엔은 시골에서 베를린 칙령 소식을 듣고 그 무모함과 위험성을 지적했다. "영국 없이 유럽 경제가 어떻게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영국뿐 아니라 유럽 대륙 전체를 질식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황제의 오만함은 끝이 없구나. 그는 결국 자신의 제국을 스스로 무너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예나에서의 군사적 승리와 베를린에서의 경제 전쟁 선포. 1806년 가을, 나폴레옹의 권력은 정점에 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유럽 대륙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지배자가 된 듯했다. 그러나 그 영광의 이면에는 프로이센의 굴욕과 독일 민족의 분노, 그리고 대륙 봉쇄령이라는 무리한 정책으로 인한 잠재적인 위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제국의 절정은 동시에 몰락의 시작을 예고하고 있었다.
(제15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