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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M으로 뽑은 잡지식

슬라보예 지젝의 시차적 관점: 당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뒤집는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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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옆자리 철학자의 수상한 초대장

 

혹시 이런 경험 없으신가요? 어제는 분명 옳다고 믿었던 일이 오늘은 어딘가 이상해 보이고, 저 사람이 보기엔 완벽한 천국이 내 눈에는 지옥처럼 느껴지는 순간 말입니다. 마치 같은 영화를 봤는데, 친구는 인생 최고의 로맨스라 하고 나는 최악의 스릴러라고 말하는 것처럼요.

우리는 보통 둘 중 하나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정답은 하나뿐이라고 배우니까요. 하지만 여기, "둘 다 맞다. 아니, 어쩌면 둘 다 틀렸다. 진짜 진실은 그 둘 사이의 '틈'에 있다"고 외치는 괴짜 철학자가 있습니다. 덥수룩한 수염에 쉴 새 없이 손을 흔들며 열변을 토하는 남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입니다.

그의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리신다고요? "현대 철학", "정신분석", "이데올로기" 같은 단어만 봐도 책을 덮고 싶으신가요? 당연합니다. 그의 생각은 복잡하고, 그의 글은 불친절하기로 악명 높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나섰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적 모험가인 지젝의 생각, 그중에서도 그의 사상의 정수가 담긴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이라는 비밀 지도를 여러분께 펼쳐 보이려고 합니다. 이 책은 지젝의 난해한 이론을 해설하는 학술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 겪는 현실, 즉 K-드라마의 막장 전개부터 SNS의 뜨거운 논쟁, 끝나지 않는 정치 싸움과 나를 괴롭히는 직장 상사의 문제까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보게 만드는 '생각의 안경'을 선물하는 책입니다.

'시차'라는 말,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오른쪽 눈으로 볼 때와 왼쪽 눈으로 볼 때 사물이 살짝 다르게 보이는 것, 바로 그겁니다. 지젝은 이 간단한 원리를 우주와 사회, 그리고 인간의 마음을 꿰뚫는 강력한 무기로 사용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가 '객관적인 현실'이라고 믿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오른쪽 눈으로 본 세상과 왼쪽 눈으로 본 세상, 그 두 가지 관점 사이의 아찔한 '틈'과 '모순'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뿐이라고 말이죠.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지젝과 함께 신나는 지적 롤러코스터를 타게 될 겁니다.

  • 1부에서는 우리가 당연하게 믿는 것들이 얼마나 허술한지,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 왜 끝나지 않는 '가짜 전쟁'인지, 자본주의가 어떻게 우리의 욕망을 훔쳐 가는지에 대한 지젝의 신랄한 폭로를 엿볼 겁니다.
  • 2부에서는 영화 <기생충>과 <조커>를 찢고 들어가 주인공들의 진짜 속마음을 훔쳐보고, 왜 우리는 나쁜 남녀에게 끌리는지, 다이어트는 왜 항상 실패하는지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비밀을 파헤칠 겁니다.
  • 마지막 3부에서는 이 모든 '틈'과 '모순'을 끌어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지에 대한 지젝의 도발적인 대답을 들어볼 겁니다. 정답 없는 세상에서 나만의 답을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되는 거죠.

이 책을 덮을 때쯤, 여러분은 더 이상 세상을 예전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없을 겁니다. 눈앞의 문제에 허덕이는 대신, 그 문제를 만든 '판' 자체를 꿰뚫어 보게 될 테니까요.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는 세상의 거짓말을 간파하고, 그 너머의 진짜 현실을 마주할 용기를 얻게 될 겁니다.

자, 준비되셨나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매력적인 철학자, 지젝이 보낸 초대장입니다. 지금부터 당신의 머릿속을 발칵 뒤집어 놓을 '시차적 관점'의 세계로 함께 떠나보시죠. 평범한 일상이 거대한 미스터리로, 골치 아픈 현실이 짜릿한 게임으로 바뀌는 마법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제1부 생각의 안경 바꾸기: 당신이 알던 세상은 끝났다


1장. 셀카는 왜 어색할까?: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시차’ 사용법

자, 지금 바로 스마트폰을 들어 카메라 앱을 켜보세요. 그리고 셀카 모드로 바꿔보시죠. 화면 속 당신의 모습, 매일 거울로 보던 바로 그 얼굴이라 익숙하죠?

이제, 망설이지 말고 ‘찰칵’ 버튼을 눌러 사진을 찍어보세요. 그리고 방금 찍은 사진을 갤러리에서 열어봅시다.

어떤가요?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이게 정말 내 얼굴이라고?’ 싶은 낯선 느낌이 들지 않나요? 분명 같은 얼굴인데, 좌우가 바뀌었다는 그 사소한 차이만으로도 ‘내 것 아닌 내 얼굴’ 같은 기묘한 위화감이 듭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세수하며 보는 거울 속 좌우 반전된 모습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남들이 보는 나의 ‘진짜’ 얼굴, 즉 좌우반전이 되지 않은 사진을 보면 깜짝 놀라곤 하죠.

그렇다면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어느 쪽이 진짜 ‘나’일까요? 내가 매일 보는 익숙한 거울 속의 나? 아니면 남들이 보는 낯선 사진 속의 나?

만약 이 질문을 슬라보예 지젝에게 던졌다면, 그는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할 겁니다. “바보 같은 질문이군! 둘 다 진짜가 아니야. 진짜는 ‘거울 속 나’와 ‘사진 속 나’ 사이의 그 어색하고 불편한 ‘틈(Gap)’ 속에 있다고!”

오른쪽 눈과 왼쪽 눈, 세상은 원래 짝짝이다

이해합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으시죠? 지금부터 이 지적 마술사가 어떻게 세상을 꿰뚫어 보는지, 그의 첫 번째 도구인 ‘시차(Parallax)’를 함께 사용해 봅시다.

‘시차’는 원래 천문학이나 물리학에서 쓰는 용어지만, 원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오른쪽 눈을 감고 왼쪽 눈으로만 사물을 보세요. 그리고 반대로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 눈으로만 같은 사물을 보세요. 사물의 위치가 살짝 이동해 보이죠? 두 눈이 다른 위치에서 보기 때문에 생기는 이 ‘어긋남’이 바로 시차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뇌가 이 두 개의 다른 이미지를 종합해서 입체적인 하나의 완성된 이미지로 만들어주지”라고 생각하며 넘어갑니다. 하지만 지젝은 바로 이 지점에서 멈춰 서서 소리칩니다. “아니! 그 ‘어긋남’과 ‘틈’을 지워버리지 마! 그게 바로 핵심이라고!”

지젝은 이 간단한 원리를 세상 만물을 분석하는 강력한 무기로 사용합니다. 그에게 세상은 결코 하나의 완성된 그림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두 관점이 영원히 만나지 못한 채 팽팽하게 맞서 있는 전쟁터와 같습니다.

대한민국을 한번 볼까요?

  • (오른쪽 눈으로 본 대한민국): BTS와 <오징어 게임>으로 세계를 휩쓴 문화 강국. 반도체와 자동차를 팔아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을 이룬 눈부신 성공 신화.
  • (왼쪽 눈으로 본 대한민국): OECD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최저 수준의 출산율. ‘영끌’과 ‘N포 세대’로 상징되는 지옥 같은 경쟁 사회, 즉 ‘헬조선’.

자,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나요? 우리는 보통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받습니다. ‘국뽕’에 취하거나, ‘국까’가 되어 냉소하거나. 방송과 유튜브는 연일 이 두 가지 관점을 번갈아 보여주며 우리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객관적 사실’이라는 환상

지젝의 ‘시차적 관점’이라는 새로운 안경을 쓰면, 이 지긋지긋한 이분법에서 벗어날 전혀 다른 풍경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공 신화’와 ‘헬조선’이라는 두 관점 중 어느 것이 더 ‘객관적인 사실’에 가까운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젝에 따르면, 애초에 그런 신(神)의 시점에서 본 것 같은 완벽한 ‘객관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특정한 관점(오른쪽 눈 혹은 왼쪽 눈)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는 것뿐입니다.

진짜 핵심은 이것입니다. ‘성공 신화’라는 관점과 ‘헬조선’이라는 관점은 결코 하나로 합쳐질 수 없다는 사실. 이 둘 사이에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깊은 ‘틈’이 존재한다는 것. 바로 그 틈, 그 화해 불가능한 긴장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봉합하려는 진짜 모순이 응축된 자리입니다.

우리는 늘 이 불편한 틈을 어떻게든 메워버리려고 합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지”, “그래도 옛날보다 살기 좋아졌잖아”라며 어색하게 양쪽을 화해시키려 하죠. 하지만 이것은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는 가장 손쉬운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지젝은 우리에게 그 틈을 똑바로 보라고, 그 어색하고 불편한 긴장감을 견디라고 요구합니다.

진실은 정답이 아니라 ‘틈’ 속에 있다

결국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요? A(성공 신화) 혹은 B(헬조선)라는 깔끔한 정답 안에 있지 않습니다. 진실은 A와 B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거리, 그 둘 사이의 관계 자체에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왜 성공 신화인 동시에 헬조선일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 속에, ‘대한민국의 성공은 어떻게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지옥을 만들어내는가?’라는 그 모순적인 구조 속에 진실이 숨어있는 것이죠.

이것이 ‘시차적 관점’의 위력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세상을 다양하게 보자’는 교양 있는 태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믿었던 ‘하나의 현실’이라는 땅을 무너뜨리고, 서로 다른 관점들 사이의 위태로운 심연 위를 걷게 만드는 아찔한 곡예입니다.

이제 당신은 세상을 보는 새로운 무기를 하나 얻었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은 왜 저렇게 극단적으로 싸우는지 이해하지 못해 답답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서로 다른 관점이라는 ‘행성’에 살고 있으며, 진짜 봐야 할 것은 그 행성들이 아니라 행성들 사이의 텅 빈 우주 공간, 즉 ‘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생각의 도구 #1] 틈을 보는 용기

의견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상황을 마주할 때, 본능적으로 ‘누가 옳은가?’라고 묻지 마세요.

대신 이렇게 질문을 바꿔보세요. “왜 이 두 의견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가?”

그 화해 불가능성 속에, 양쪽 모두가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문제의 진짜 본질이 숨어있습니다.

2장. 회식은 왜 거절하기 힘들까?: 우리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규칙 ‘대타자’

“김 대리,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지? 다 같이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려고. 물론 강요는 아니야. 하하.”

부장님의 이 ‘친절한’ 한마디에 사무실의 공기가 순간 싸늘하게 얼어붙습니다. “강요는 아니다”라는 말의 뒷면에 숨겨진 “감히 빠질 생각은 마라”는 서슬 퍼런 진짜 메시지를 읽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퇴근 후의 달콤한 약속도, 지친 몸을 뉘고 싶은 간절한 바람도, 이 보이지 않는 압력 앞에서 힘없이 무너집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 불편한 술자리로 가게 만드는 걸까요? 부장님의 권력? 회사의 조직 문화? 아니면 ‘사회생활이란 다 그런 것’이라는 막연한 체념일까요?

지젝은 이 정체불명의 압력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를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우리는 모두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자신이 살아온 세상이 사실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거대한 가상현실이라는 충격적인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빨간 약을 먹고 진짜 현실로 깨어나죠.

지젝은 이 영화가 단지 SF 판타지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구조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시스템, 즉 ‘매트릭스’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 매트릭스를 구성하는 것은 컴퓨터 코드가 아니라, 바로 ‘상징적 질서(Symbolic Order)’입니다.

‘상징적 질서’라는 말이 어렵게 들리나요? 전혀요. 이것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배우는 모든 사회적 규칙, 법, 언어, 예절, 상식 등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질서 안에서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어른에게는 존댓말을 써야 하고, 빨간불에는 횡단보도를 건너지 말아야 하며, 회사에서는 직급에 맞춰 행동해야 한다는 것 등등.

회식 문화 역시 이 상징적 질서의 일부입니다. “회식은 업무의 연장이다”, “술자리에서 상사에게 잘 보여야 성공한다”는 식의 명문화되지 않은 규칙들이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죠. 우리는 마치 영화 속 인간들처럼, 이 시스템이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습니다.

눈치와 암묵적 룰의 정체

지젝은 이 보이지 않는 규칙과 사회적 압력의 총체를 라캉의 용어를 빌려 ‘대타자(the Big Other)’라고 부릅니다.

‘대타자’는 특정 인물이나 집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공기처럼 우리 사회 전체에 스며들어 있는 거대한 시선, 암묵적인 규칙, 사회적 통념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늘 이 대타자의 눈치를 보며 살아갑니다.

  •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기 전, ‘남들이 어떻게 볼까?’를 의식하며 수십 번 필터를 고치는 마음.
  • 명절에 친척들이 “결혼은 언제 하니?”, “취업은 했어?”라고 물을 때 느끼는 그 숨 막히는 압박감.
  • 모두가 주식과 부동산 투자 이야기를 할 때,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조급해지는 불안감.

이 모든 것이 바로 대타자의 속삭임입니다. 대타자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합니다. “남들처럼 살아라. 튀지 마라. 이 길이 정답이다.” 우리는 이 대타자의 인정을 받기 위해, 그가 정해놓은 ‘성공’과 ‘행복’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잊은 채 달려갑니다. 부장님의 ‘강요 아닌 강요’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압박감의 진짜 정체는 부장님 개인이 아니라, 그를 통해 말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대타자’인 셈입니다.

사실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젝은 바로 여기서, 그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가장 충격적이고 통쾌한 비밀을 폭로합니다.

“사실,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그 막강하고 전지전능해 보이는 존재는 실체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안데르센 동화 속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임금님이 멋진 옷을 입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리고 그 믿음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거대한 환상이자 집단적 사기극인 것이죠.

우리가 회식에 빠지면 정말로 내일 당장 해고될까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정말로 실패한 인생이 되는 걸까요? 우리가 ‘그럴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대타자는 힘을 얻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대타자의 가장 충실한 경찰관 노릇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지젝의 이 통찰은 우리에게 엄청난 해방감을 줍니다. 대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 거대한 시선에 주눅 들 필요가 없어집니다. 우리는 그의 기대를 배신할 용기를 얻게 됩니다.

부장님의 ‘강요 아닌 강요’ 앞에서 “죄송하지만, 오늘 저녁엔 정말 중요한 선약이 있습니다”라고 웃으며 말하는 작은 용기. 그 순간 당신은 ‘사회생활이란 이런 것’이라는 견고한 매트릭스에 작은 버그(Bug)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균열이 모일 때, 우리를 억압하던 거대한 시스템은 힘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할 겁니다.

[생각의 도구 #2] 대타자 의심하기

당신을 억누르는 막연한 불안감이나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느껴질 때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이걸 원하는 건 나인가, 아니면 ‘남들’의 시선인가?”

그리고 기억하세요.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믿는 그 거대한 ‘남들’의 실체는 생각보다 훨씬 허약하고, 어쩌면 아예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3장. 갑분싸, 그리고 지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진짜 현실 ‘실재계’

야심 차게 던진 농담에 아무도 웃지 않고 싸늘한 침묵만 흐르는 순간. 우리는 이 끔찍한 상황을 신조어 ‘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해짐)’라고 부릅니다. 친밀하고 유쾌하던 대화의 흐름이 나의 말실수 하나로 순식간에 찢어지고, 그 아래의 당혹스러운 공백이 드러나는 순간이죠. 그 짧은 몇 초가 영원처럼 느껴지는 극도의 어색함과 공포.

바로 이것이 지젝 철학의 가장 심오하고 어려운 개념인 ‘실재계(the Real)’를 일상에서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세상은 사실 단단한 기반 위에 서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어, 규칙, 상식, 사회적 약속이라는 촘촘한 그물망, 즉 앞서 말한 ‘상징계’로 짜인 위태로운 무대 장치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무대 위에서 각자의 역할을 연기하며 안정감을 느끼죠.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같은 인사말부터 법률과 제도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연극을 매끄럽게 이어주는 장치입니다.

‘실재계’는 바로 이 견고해 보이던 무대 바닥이 갑자기 ‘쩍’하고 갈라지면서 드러나는 텅 빈 심연, 즉 현실이라는 옷감의 ‘구멍’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와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충격적인 무엇입니다.

  •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어제까지 멀쩡했던 일상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나는 경험.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질서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그 상태가 바로 실재계의 침입입니다.
  • 감당할 수 없는 자연재해: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지진이나 쓰나미 앞에서 인간의 언어와 문명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상징계를 압도하는 실재계의 맨얼굴입니다.

‘갑분싸’는 물론 생사를 오가는 사건은 아니지만, 그 구조는 정확히 똑같습니다. 유쾌한 대화의 흐름이라는 매끄러운 현실의 표면이 내 말실수라는 작은 돌멩이 하나로 산산조각 나고, 그 아래의 끔찍한 ‘의미 없음’의 공백이 드러나는 순간이죠. 우리는 이 공백을 견딜 수가 없어서 서둘러 다른 말을 꺼내거나 헛기침을 하며 어떻게든 그 찢어진 구멍을 필사적으로 메우려고 합니다.

이데올로기가 필사적으로 숨기는 것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나 사회 시스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일까요? 지젝은 그것이 바로 이 끔찍한 ‘실재계’의 구멍을 가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현실이 사실은 매우 불안정하고 모순투성이며,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는 진실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핵심 기능입니다.

  •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자기계발 신화는 왜 존재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노력과 상관없이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다’는 끔찍한 실재계를 가리기 위한 거대한 스크린입니다. 이 스크린이 있기에, 우리는 실패의 원인을 시스템이 아닌 나 자신의 ‘노력 부족’ 탓으로 돌리며 시스템에 순응하게 됩니다.
  • “우리는 평화와 안정을 추구한다”는 국가의 공식 발표 뒤에는, 사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의 위협과 사회 내부의 폭력이라는 실재계가 숨겨져 있습니다. 국가는 이 실재계를 철저히 통제하고 은폐함으로써 질서를 유지합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은, 사실 이 끔찍한 실재계의 구멍들을 교묘하게 가리고 기워놓은 거대한 깁스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

실재계를 마주하는 것은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내가 굳게 믿고 있던 세상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경험이니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경험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지젝은 역설적으로 말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오직 이 실재계와의 충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시작될 수 있다고.

안정적이라고 믿었던 직장에서 갑자기 해고당하는 것, 영원할 것 같던 관계가 끝나는 것. 이런 사건들은 우리를 깊은 절망에 빠뜨립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를 옭아매고 있던 낡은 상징계(‘나는 이 회사 없이는 살 수 없어’, ‘나는 이 사람 없이는 불행해’)로부터 우리를 강제로 해방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내가 서 있던 무대가 무너져 내리는 그 고통스러운 순간이야말로, 비로소 내가 어떤 무대 위에 서 있었는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무대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실패와 좌절은 단순히 부정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를 진짜 삶으로 이끄는 실재계의 거친 손길일 수 있습니다.

[생가겡의 도구 #3] 현실의 버그(Bug) 마주하기

당신의 삶을 지탱하던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 당연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을 피하지 마세요.

그 불편함과 공포는 당신이 현실의 이면, 즉 ‘실재계’를 엿보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입니다.

그 균열 속에서, 낡은 당신을 버리고 새로운 당신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값진 기회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제2부 욕망의 지도 펼치기: 당신은 왜 그것을 원하는가?


4장. 매운 떡볶이와 막장 드라마: 고통스러운데 왜 멈출 수 없을까?

입안이 불타는 것처럼 얼얼하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데도, 우리는 멈추지 않고 새빨간 떡볶이를 입에 넣습니다. 재벌가의 암투와 출생의 비밀, 복수와 배신이 난무하는 스토리에 “에이, 말도 안 돼!”라고 욕을 하면서도 다음 회를 애타게 기다리며 막장 드라마를 봅니다. 오늘까지만 먹고 내일부터는 진짜 다이어트라고 다짐하며, 한밤중에 라면 봉지를 뜯습니다.

이 기묘하고 모순적인 행동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쾌락 원칙(Pleasure Principle)’에 따라 움직인다고 말했습니다. 고통은 피하고 즐거움을 좇는다는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죠. 하지만 우리가 매운 음식을 먹고, 슬픈 영화를 보며 눈물 흘리고, 위험한 스포츠에 열광하는 현상들은 이 쾌락 원칙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과 쾌락이 한데 뒤엉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젝은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의 비밀 무기, ‘향유(Jouissance)’라는 개념을 꺼내 듭니다.

‘행복’ 너머의 위험한 쾌락, ‘향유’

‘향유’라는 단어는 프랑스어로, 영어의 ‘Enjoyment’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강렬하고 복잡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즐거움(pleasure)이나 행복(happiness)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 즐거움(Pleasure): 배고플 때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피곤할 때 푹 자는 것처럼 긴장을 해소하고 안정 상태를 유지하려는 욕구입니다. ‘쾌락 원칙’이 지배하는 영역이죠.
  • 향유(Jouissance): 이 안정된 상태를 깨뜨리고 넘어서려는 충동입니다. 그것은 고통에 가까울 정도로 강렬한, 혹은 고통 그 자체를 동반하는 극단적인 쾌락입니다. 금지된 것을 위반할 때의 짜릿함, 나를 파괴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선을 넘는 쾌감, 바로 그것이 향유입니다.

매운 떡볶이를 먹는 행위는 완벽한 향유의 예입니다. 혀의 고통이라는 금지선을 넘나들면서 우리는 고통스러운 동시에 강렬한 쾌감을 느낍니다.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식과 도덕이라는 선을 훌쩍 넘어버리는 파격적인 스토리는 우리에게 불쾌감을 주지만, 동시에 일상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자극적인 향유를 제공합니다.

다이어트는 왜 항상 내일부터인가

우리를 움직이는 진짜 에너지는 사실 ‘건강하고 행복해지고 싶다’는 이성적이고 건전한 욕망이 아니라, 이 어둡고 비합리적이며 위험하기까지 한 ‘향유’일 때가 많습니다.

안정적이고 착한 사람 대신 예측 불가능한 나쁜 남자(여자)에게 자꾸만 끌리는 이유, 시험이나 마감을 앞두고 꼭 방 청소나 딴짓을 하며 모든 것을 망치고 싶은 자기 파괴적 충동,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바로 이 거부할 수 없는 향유의 유혹이 있습니다.

다이어트의 영원한 실패 역시 ‘향유’의 관점에서 보면 명쾌하게 이해됩니다. 우리의 이성은 ‘건강을 위해 살을 빼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한밤중에 몰래 먹는 라면이 주는 ‘금지를 위반하는 짜릿한 쾌감’, 즉 향유를 갈망합니다. 이 싸움에서 이성이 번번이 패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향유는 ‘쾌락 원칙’을 넘어서는, 죽음 충동과도 맞닿아 있는 훨씬 더 근원적인 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진짜 에너지의 비밀

현대 자본주의는 이 향유의 비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을 기가 막히게 이용합니다. 광고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Enjoy!” (코카콜라)
“Just do it!” (나이키)

마치 우리가 이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규칙과 한계를 넘어선 궁극의 쾌락, 즉 향유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를 유혹합니다. 하지만 지젝은 이것이 자본주의의 가장 교묘한 사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콜라를 마시고 새 운동화를 신어도 결코 궁극의 향유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파는 것은 향유 그 자체가 아니라, ‘향유에 대한 약속’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은 결코 지켜지지 않습니다. 향유는 언제나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저 너머에 있으며, ‘조금만 더’를 외치게 만들며 우리를 영원한 결핍과 갈증 속으로 몰아넣을 뿐입니다.

[생각의 도구 #4] 나의 진짜 ‘향유’는 무엇인가?

당신이 끊임없이 반복하는, 이성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나 나쁜 습관이 있나요?

그것을 억지로 끊으려고 하기 전에, 그 행동이 당신에게 어떤 종류의 ‘고통스러운 쾌락(향유)’을 주는지 솔직하게 들여다보세요.

당신을 움직이는 진짜 에너지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무의미한 반복의 셔틀에서 내릴 수 있는 첫걸음입니다.

5장. 부먹 vs 찍먹, 보수 vs 진보: 끝나지 않는 전쟁의 승자는 누구인가?

“탕수육 소스는 부어 먹어야 제맛이지! 튀김옷에 소스가 촉촉하게 배어든 그 맛을 모르다니.”
“말도 안 돼! 눅눅한 튀김은 죄악이야. 바삭한 튀김을 소스에 살짝 찍어 먹는 게 진리라고!”

대한민국 인터넷을 주기적으로 전쟁터로 만드는 ‘부먹 vs 찍먹’ 논쟁. 민트초코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를 두고 ‘민초단’과 ‘반민초단’으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하는 현상. 파인애플 피자를 둘러싼 끝나지 않는 논란까지.

우리는 왜 이토록 사소한 문제에 진심으로 분노하고, 편을 갈라 격렬하게 싸우는 것을 즐기는 걸까요?

지젝은 이것이 단순히 개인의 취향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Identity)’이 만들어지는 방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꿰뚫어 봅니다.

적(敵)이 있어야 내가 존재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라는 존재는 사실 ‘나’ 혼자만으로는 온전히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언제나 ‘내가 아닌 것’, 즉 타자(Other)이자 적(Enemy)을 설정함으로써 비로소 그 윤곽이 뚜렷해집니다.

나는 ‘부먹파’라는 야만적인(?) 집단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찍먹파’라는 문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나는 ‘치약 맛 나는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이상한 입맛의 소유자들’과 다르기 때문에 ‘정상적인 미각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죠. 즉, 상대방에 대한 부정과 혐오가 역설적으로 나의 존재 이유를 만들어주는 셈입니다.

이 원리는 정치 영역에서 훨씬 더 강력하고 위험하게 작동합니다.

보수와 진보의 싸움은 종종 합리적인 정책 대결이 아니라, ‘누가 더 나쁜 놈인가’를 가리는 감정적인 정체성 전쟁으로 흘러갑니다. 상대방을 ‘나라를 팔아먹을 친북좌파’ 혹은 ‘서민의 피를 빠는 부패한 기득권’과 같이 절대악으로 규정해야만, ‘애국 시민’ 혹은 ‘정의로운 약자의 편’이라는 우리 편의 정체성이 선명해지고 결속력이 강화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하지만 사실은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공생 관계인 셈입니다. 적이 없다면 ‘우리’도 없으니까요.

선택을 강요하는 ‘가짜 싸움’의 함정

이런 ‘가짜 싸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진짜 중요한 질문을 교묘하게 가려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먹’이냐 ‘찍먹’이냐를 두고 키보드 배틀을 벌이는 동안, 탕수육 가격은 왜 이렇게 올랐는지, 배달비는 왜 이렇게 비싼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진지하게 묻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보수와 진보가 서로를 악마화하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동안,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은 사회적 논의의 장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 “왜 우리는 이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는가?”
  • “어쩌면 이 정치 시스템 자체가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 “보수와 진보가 공유하고 있는 더 큰 문제점(예: 저성장, 기후 위기, 불평등 심화)은 없는가?”

지배 시스템은 우리가 이런 가짜 싸움에 몰두하기를 은근히 바랍니다. 우리의 분노와 에너지를 덜 위협적인 대상에게 쏟아붓게 만들어, 정작 게임의 규칙 자체에는 의심을 품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죠.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최악이냐, 차악이냐’의 프레임은 바로 이런 함정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게임의 규칙을 의심하라

‘시차적 관점’은 우리에게 이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새로운 시야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부먹’과 ‘찍먹’ 중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 그 논쟁의 판 자체를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젝이라면 이렇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질 겁니다. “왜 우리는 탕수육을 먹을 때 소스를 부을지 찍을지를 고민해야만 하는가? 소스를 아예 따로 볶아서 나오는 ‘볶먹’이라는 제3의 길은 없는가? 아니, 오늘 꼭 탕수육을 먹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단순히 말장난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어진 선택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선택지가 만들어진 ‘판’ 자체를 문제 삼는 혁명적인 사유 방식입니다.

보수냐 진보냐는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대신, “왜 우리 사회의 상상력은 이 두 가지 길밖에 제시하지 못하는가?”라고 질문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이 끝나지 않는 소모적인 전쟁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열게 됩니다.

[생각의 도구 #5] 싸움의 판을 읽어라

어떤 문제에 대해 격렬한 찬반 논쟁이 벌어질 때, 본능적으로 어느 한 편에 서려고 하기 전에 잠시 멈춰 서서 이렇게 질문해보세요.

“이 싸움을 통해 진짜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이 시끄러운 싸움이 교묘하게 가리고 있는,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때로는 싸움에서 이기는 것보다 싸움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더 현명한 전략일 수 있습니다.

6장. “이걸 사면 인싸가 될 수 있어!”: 자본주의가 당신의 욕망을 훔치는 법

인스타그램 피드를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내려봅니다. 친구 A는 지중해가 보이는 멋진 곳으로 휴가를 갔고, 동기 B는 방금 뽑은 외제차 핸들 사진을 올렸으며, 선배 C는 구하기 힘들다는 한정판 명품백을 ‘득템’했습니다. 그 반짝이는 이미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우리는 나지막이 한숨을 쉽니다.

‘아,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저걸 가지면 나도 저들처럼 행복해질 텐데.’

과연 그럴까요? 정말 그 명품백이, 그 외제차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까요?

지젝은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교묘하고 강력한 비밀을 폭로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가 우리의 ‘욕망’ 그 자체를 생산하고 조종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물건이 아니라 환상을 소비한다

우리는 정말로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10분씩 줄을 서서 6천 원짜리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걸까요? 지젝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스타벅스에서 사는 것은 커피라는 액체가 아니라, ‘뉴욕의 커리어우먼처럼 노트북을 펴고 앉아 일하는 세련되고 지적인 나’라는 환상(Fantasy)입니다.

애플은 어떤가요? 우리는 단지 성능 좋은 스마트폰이 필요해서 아이폰을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스티브 잡스처럼 ‘세상을 바꾸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소수’에 속한다는 감각, 그 세련된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입니다. 우리는 물건의 사용가치를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에 교묘하게 들러붙어 있는 ‘환상’을 삽니다. 그리고 그 환상은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작동합니다.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쳇바퀴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지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그 물건이나 환상 자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짜로 욕망하는 것은 그것을 욕망하는 ‘타인의 욕망’ 그 자체입니다.

이게 무슨 선문답 같은 소리냐고요? 쉽게 말해봅시다. 우리는 사회와 미디어가 “이것이 바로 네가 원해야만 하는 멋진 삶이야!”라고 끊임없이 보여주는 것을 내 진짜 욕망이라고 착각하도록 사회적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욕망하도록 길들여진 것입니다. 내 욕망의 내비게이션은 내가 아니라 ‘대타자’가 설정해 놓은 셈이죠.

문제는 이 욕망이 구조적으로 결코 채워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어렵게 돈을 모아 작년에 유행하던 명품백을 사도, 올해는 새로운 ‘잇템’이 등장해 내 가방을 초라하게 만듭니다. ‘영끌’해서 겨우 내 집 마련에 성공해도, 더 좋은 입지의 ‘상급지’ 아파트 가격이 폭등하는 것을 보며 박탈감을 느낍니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만족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결핍’을 먹고 자랍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유행과 신제품을 만들어내어 어제의 만족을 오늘의 결핍으로 바꿔버립니다. 이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행복이라는 당근을 향해 달려가는, 셔틀에서 결코 내려올 수 없는 햄스터와 같은 신세가 됩니다.

내 욕망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이 끔찍한 욕망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 걸까요?

지젝은 그 첫 번째 단계가 바로 ‘내 욕망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지금 간절히 원하고 있는 이것이, 정말로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아니면 사회와 타인의 시선이 교묘하게 주입한 ‘가짜 욕망’은 아닌지를 냉정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타인의 욕망’은 너무나 교묘하게 우리의 무의식 속에 스며들어 있어, 마치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됩니다. 내가 ‘나의 욕망’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 사실은 사회가 만들어낸 거대한 환상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 욕망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수많은 불필요한 소비와 경쟁,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고통스러운 감정들(질투, 박탈감, 불안)로부터 자유로워질 첫 번째 단서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의 도구 #6] 욕망의 주인 찾아주기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구매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잠시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보세요.

“이것을 원하는 건 정말 ‘나’인가, 아니면 ‘남들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은 나’인가?”
“이것이 없으면, 나는 정말로 불행한가?”

내 욕망의 출처를 묻는 이 작은 습관이, 당신을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욕망의 매트릭스에서 구원해 줄 가장 강력한 ‘빨간 약’이 될 수 있습니다.

제3부 틈새에서 살아남기: 정답 없는 세상을 항해하는 법


7장. <기생충>과 <조커> 다시 보기: 영화는 어떻게 사회의 민낯을 폭로하는가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켭니다. 2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우리는 현실의 시름을 잊고 스크린 속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합니다. 영화는 단지 현실 도피를 위한 값싼 오락일까요?

지젝에게 영화는 결코 ‘단지’ 오락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진실을 담고 있는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꿈의 스크린’입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는 외면하고 싶어 하는 사회의 불편한 진실, 억압된 욕망들이 영화라는 스크린 위에서 꿈처럼 펼쳐진다는 것이죠. 우리는 영화를 보며 웃고 울면서, 무의식적으로 우리 사회의 가장 깊은 상처와 민낯을 마주하게 됩니다.

스크린은 현실의 엑스레이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떠올려 봅시다. 우리는 비좁은 반지하에 사는 기택 가족의 사기 행각에 손에 땀을 쥐면서도, 어느새인가 그들을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왜일까요? 부잣집 박 사장 가족을 속이는 명백한 범죄인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기생충>이 우리 사회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 즉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고 계층 이동이 가능하다”는 신화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노력’이라는 단어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선(線)’이 존재한다는 것, 아무리 애를 써도 냄새처럼 배어버린 가난의 흔적은 지울 수 없다는 계급 사회의 끔찍한 ‘실재계’를 우리의 눈앞에 들이밉니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아들 기우가 돈을 벌어 그 저택을 사겠다는 상상은 그 어떤 비극보다 더 처절하고 슬프게 다가옵니다. 그것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완벽한 ‘환상’임을 우리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우리 사회의 뼈를 찍는 한 장의 엑스레이 사진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악당에게서 우리를 보는 이유

영화 <조커>는 어떤가요? 우리는 사회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조롱당하던 코미디언 지망생 아서 플렉이 희대의 악당으로 변해가는 과정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기묘한 해방감을 느낍니다. 왜 우리는 그의 끔찍한 범죄에 공감하게 되는 걸까요?

지젝은 조커가 우리 사회가 애써 감추고 억압해온 ‘쓰레기’ 같은 진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우리 사회는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라”는 위선적인 명령(대타자)을 내립니다. 아서는 바로 이 시스템에서 탈락하고 버려진 ‘버그(Bug)’ 같은 존재입니다. 그는 더 이상 시스템의 규칙에 맞춰 웃는 것을 거부하고,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X같은 코미디였어!”라고 외치며 시스템 자체를 비웃고 파괴합니다.

우리가 조커에게서 느끼는 불편한 매력은, 사실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진 ‘이 거지 같은 세상을 한번 뒤엎어버리고 싶다’는 파괴적 충동, 즉 금지된 ‘향유(Jouissance)’와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조커의 광기 어린 춤과 폭력은 사회라는 갑갑한 옷을 찢어버리고 싶은 우리의 억압된 욕망을 대신 스크린 위에서 실현시켜 줍니다.

농담과 영화 속에 숨겨진 진실

지젝은 특히 ‘농담’과 유머에 주목합니다. 농담은 평소에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진실(성, 정치, 죽음, 차별 등)을 잠시 동안 안전하게 터뜨릴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 안전밸브와 같습니다. 우리가 블랙코미디 영화를 보며 폭소하는 것은, 그 웃음 뒤에 가려진 끔찍한 현실의 진실을 어렴풋이 감지하기 때문입니다. 웃음은 그 진실을 마주하는 고통을 잠시나마 견디게 해주는 마취제인 셈이죠.

결국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무의식을 읽어낼 수 있는 가장 정교한 지도입니다.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생각의 도구 #7] 스크린 너머의 진실 읽기

당신이 최근에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나 드라마는 무엇인가요?

그 이야기가 당신 마음속 어떤 부분을 가장 강하게 건드렸는지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열광하거나, 혹은 유독 불편하게 느꼈던 캐릭터나 장면은 어쩌면 당신이, 그리고 우리 사회가 평소에는 억압하고 있는 진실의 조각일지 모릅니다.

영화 평론가처럼 분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왜 이 이야기가 나를 사로잡았을까?’라고 묻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창을 얻게 될 것입니다.

8장. 선택 장애의 시대: ‘아무거나’는 왜 최악의 선택일까?

“점심 뭐 먹을래?”
“음… 아무거나.”

“주말에 뭐 할까?”
“글쎄… 딱히 생각 없어.”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대화입니다.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선택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수십 가지의 커피 메뉴, 수백 개의 넷플릭스 콘텐츠, 셀 수 없이 많은 맛집과 여행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우리는 오히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마비되는 ‘선택 장애(결정 장애)’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아무거나”라는 대답은 이런 상황에서 책임을 회피하고 갈등을 줄이는 가장 손쉬운 방법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젝은 바로 이 “아무거나”라는 말속에 현대 사회가 우리에게 선사한 ‘자유’의 가장 교묘한 함정이 숨어있다고 경고합니다.

선택할 자유, 선택하지 않을 자유

카페 키오스크 앞에 섰다고 상상해 봅시다. 화면에는 수십 가지의 메뉴가 떠 있습니다.

‘아메리카노, 라떼, 카푸치노… 원두는 산미 있는 걸로 할까, 고소한 걸로 할까? 샷은 추가하고, 시럽은 바닐라 시럽으로… 우유는 일반 우유, 저지방, 두유, 오트밀 중에 뭘로 하지?’

우리는 이 무수한 선택지 앞에서 자유롭게 나의 취향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젝은 이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시스템이 교묘하게 설계한 ‘가짜 자유’라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원두의 종류나 우유의 지방 함량을 선택할 자유는 있지만, 정작 “나는 오늘 커피를 마시지 않겠다”고 말할 자유는 쉽게 떠올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반드시 이 카페에서 무언가를 주문해야 한다’는 더 큰 게임의 규칙 안에 갇혀 있는 셈입니다. 시스템은 우리에게 사소하고 비본질적인 것들을 마음껏 ‘선택할 자유’를 줌으로써, 정작 시스템 자체를 거부하거나 그 바깥을 상상하는 ‘선택하지 않을 자유’를 잊게 만듭니다.

이것이 현대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어떤 정당을 찍을지 선택할 자유는 있지만, 이 정치 시스템 자체가 과연 옳은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못하도록 길들여집니다. 어떤 회사를 갈지 선택할 자유는 있지만, ‘꼭 회사에 들어가서 월급쟁이로 살아야만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던지지 못합니다.

짜장면과 짬뽕, 그 이상의 것을 상상하기

“아무거나”라는 대답은 이런 상황에 대한 무기력한 항복 선언과 같습니다. 그것은 나의 주체적인 선택을 포기하고, 나를 시스템과 타인의 결정에 완전히 맡겨버리는 행위입니다. 이는 결국 나를 ‘선택하는 주체’가 아닌 ‘선택당하는 객체’로 전락시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젝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 자체를 의심하고, 그 판을 깨는 상상력을 발휘하라고 주문합니다.

모두가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는 이분법에 갇혀 있을 때, “오늘은 왠지 밥이 먹고 싶은데요. 볶음밥은 어때요?”라고 제3의 선택지를 제시하는 능력. 더 나아가 “이 중국집 말고, 길 건너 새로 생긴 파스타집에 가보는 건 어때요?”라고 아예 게임의 판 자체를 바꾸는 상상력.

이것이 바로 시스템이 정해놓은 틀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자유의 시작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거절’에서 시작된다

결론적으로 지젝이 말하는 진정한 자유는 무한한 선택지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어진 선택지 자체를 ‘거절(Refusal)’할 수 있는 힘에서 나옵니다.

미국의 소설가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 나오는 주인공 바틀비는 상사가 업무를 지시할 때마다 나지막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그는 격렬하게 저항하거나 반항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히, 하지만 단호하게 시스템이 요구하는 참여를 거부합니다. 이 작은 거절의 말 한마디가 사무실 전체의 질서를 마비시키는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모두가 ‘YES’를 외치며 달려가는 길에서 잠시 멈춰 서서 “나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게임의 규칙에 “왜 그래야만 하죠?”라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선택 장애’와 ‘가짜 자유’의 늪에서 구원해 줄 가장 강력한 힘이자, 진정한 자유의 첫걸음입니다.

[생각의 도구 #8] 선택지 자체를 거부할 자유

당신 앞에 놓인 선택지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억지로 그중에서 ‘차악’을 고르려고 애쓰지 마세요.

때로는 가장 강력하고 창의적인 선택은 “나는 이 게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질문에 답하는 대신, 판 자체를 흔드는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세요. 그곳에 당신의 진짜 자유가 있습니다.

9장. 체스판 뒤엎기: 내 인생의 판을 바꾸는 진정한 ‘행위’란 무엇인가

매일 아침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정해진 업무를 처리하고, 퇴근 후에는 유튜브를 보거나 친구를 만납니다. 주말에는 밀린 잠을 자거나 쇼핑을 하죠. 우리는 이처럼 매일 무언가를 하며 바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지젝은 이 모든 바쁨과 분주함이 진짜 ‘삶’이 아닐 수 있다고 도발적으로 속삭입니다. 그는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일이 진정한 ‘행위(Act)’가 아니라, 단지 기존의 시스템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활동(activity)’일 뿐이라고 날카롭게 구분합니다.

‘활동’과 ‘행위’는 어떻게 다른가

‘활동’과 ‘행위’는 언뜻 보기에 비슷해 보이지만, 그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흐릅니다.

  • 활동(activity): 기존의 게임 규칙(상징계, 대타자)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입니다. 회사에서 보고서를 쓰는 것, 정해진 법규에 따라 운전하는 것, 유행하는 옷을 사는 것 모두가 활동입니다. 활동은 현상 유지를 목표로 하며, 예측 가능하고 안전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99%는 이 ‘활동’에 해당합니다.
  • 행위(Act): 이 기존의 게임 규칙 자체를 깨뜨리고, 완전히 새로운 판을 짜는 폭발적인 사건입니다. 마치 불리한 체스 게임을 하다가 체스판 자체를 뒤엎어버리는 것처럼, 내가 서 있던 좌표와 나를 규정하던 모든 규칙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행위’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며, 엄청난 위험을 동반합니다.

역사적으로는 3.1 운동이나 동학농민혁명 같은 사건들이 바로 이 ‘행위’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기존 식민지 체제나 봉건 질서 안에서 무언가를 개선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 질서 자체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새로운 판을 열었습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행위’의 순간은 찾아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안정적인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아무도 가지 않는 미지의 길을 떠나는 것, 사회적 편견과 비난을 무릅쓰고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 커밍아웃, 폭력적인 관계를 끝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결단. 이것들이 바로 그 사람의 인생을 이전과 이후로 완전히 갈라놓는 진정한 ‘행위’입니다.

모든 것을 잃을 각오, 그리고 새로운 시작

‘행위’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끔찍한 위험과 불안을 동반합니다.

체스판을 뒤엎는 순간, 당신은 게임에서 이길 가능성은 물론이고 ‘체스 선수’라는 정체성 자체를 잃게 됩니다. 회사를 그만두는 순간, 당신은 안정적인 월급과 사회적 지위를 잃습니다. 낡은 관계를 끊어내는 순간, 당신은 익숙한 안정감과 소속감을 잃고 혼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나를 지탱해주던 모든 상징적 좌표가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백, 즉 ‘실재계’의 심연과 맨몸으로 마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죽음과도 같은 경험입니다.

하지만 지젝은 바로 이 ‘상징적 죽음’이야말로, 낡은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합니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던 ‘활동’의 감옥에서 벗어나, 진짜 ‘나의 삶’을 시작하는 창조의 순간인 것이죠.

당신의 삶을 바꿀 ‘사건’을 만드는 법

그렇다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삶에서 이런 ‘행위’를 할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가 혁명가가 되거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만 하는 걸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젝이 말하는 ‘행위’는 그 규모와 상관없이, 당신의 삶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규칙(대타자)을 배신하는 모든 순간에 존재합니다.

  • “우리 집안은 대대로 의사 집안이야. 너도 당연히 의사가 되어야 해”라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당신의 진짜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
  • “여자는 조신해야지”, “남자는 울면 안 돼”와 같은 낡은 성 역할의 각본을 찢어버리고 ‘나다운 나’로 살아가는 것.
  • 모두가 부동산과 주식 투자에 열광할 때, “나는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추구하겠다”고 선언하고 다른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것.

이런 작은 반란들이야말로 당신의 삶을 의미 없는 ‘활동’의 연속에서 의미 있는 ‘행위’의 드라마로 바꾸는 결정적인 ‘사건(Event)’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닙니다. 그 ‘행위’가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남이 정해준 규칙에 따라 말을 움직이는 ‘플레이어’의 삶을 거부하고, 내 게임의 규칙을 내가 직접 만들겠다고 결단하는 주체적인 태도 그 자체입니다.

[생각의 도구 #9] 당신의 ‘체스판’은 무엇인가?

당신의 삶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문제, 벗어나고 싶은데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고 느끼는 상황이 있나요?

어쩌면 해결책은 체스판 위에서 말(piece)을 더 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가두고 있는 체스판 자체를 뒤엎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규칙은 무엇이며, 그 규칙을 깨뜨리는 당신만의 ‘행위’는 무엇일 수 있을까요? 그 행위가 아무리 작고 사소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바로 당신의 진짜 인생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10장. 그래서, 어떻게 살라고?: 지젝의 가장 위험하고 통쾌한 답변

자, 이제 우리는 지젝과 함께 꽤 길고 험난한 지적 여정을 달려왔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었던 현실이 사실은 수많은 관점의 충돌(시차)이며, 보이지 않는 규칙(대타자)에 의해 조종당하고, 언제든 찢어질 수 있는 불안정한 무대(실재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욕망마저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했죠.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았습니다. 어쩌면 이 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부터 당신이 가장 묻고 싶었을 바로 그 질문.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살라고?”

이토록 세상이 모순투성이고, 믿을 만한 진실도, 확실한 정답도 하나 없다면, 우리는 이 불안한 세상의 한복판에서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만약 당신이 이 질문을 지젝에게 직접 던진다면, 그는 아마 특유의 과장된 제스처로 땀을 뻘뻘 흘리며 이렇게 외칠 겁니다. “바로 그거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모든 철학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지젝은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나 친절한 인생 매뉴얼을 건네는 사상가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우리의 발밑을 끊임없이 무너뜨리고 우리가 기댈 곳을 빼앗아버리는 위험한 철학자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우리가 ‘정답’이라고 믿고 기대는 모든 것(종교, 국가, 이데올로기, 심지어 ‘자아’까지)이 사실은 우리를 기만하는 환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정답을 주는 ‘구루(Guru)’가 되기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아무런 답도 없는 걸까요? 아닙니다. 지젝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는 구체적인 답을 주는 대신, 이 정답 없는 세상을 항해하는 세 가지 태도, 즉 ‘삶의 기술’을 제시합니다.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

첫 번째 기술은 ‘정답이 없다’는 사실 그 자체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허무주의나 냉소주의에 빠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것은 내가 현재 굳게 믿고 있는 신념이나 가치관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것, 언제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지적인 겸손함에 대한 요구입니다.

‘나는 무조건 옳고 너는 틀렸다’는 식의 독단적인 태도는 우리를 편 가르기와 혐오의 전쟁으로 이끌 뿐입니다. 하지만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타인의 다른 관점을 더 쉽게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맹목적인 믿음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어려운 지적 태도입니다.

불안과 모순 끌어안기

두 번째 기술은 내 안의 불안과 모순을 피하거나 제거하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모순적인 존재입니다. ‘성공 신화’를 꿈꾸면서도 ‘헬조선’을 욕하고, ‘안정적인 사랑’을 원하면서도 ‘위험한 끌림’에 흔들립니다. 다이어트를 결심하면서 동시에 야식을 주문하죠. 현대 사회는 이런 모순을 ‘결점’이나 ‘병’으로 취급하며 끊임없이 우리에게 ‘일관적인 자아’를 가지라고 강요합니다.

하지만 지젝은 이 모순과 흔들림이야말로 우리가 좀비처럼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주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말합니다. 완벽하게 일관적인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불안한 진동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방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입니다. 이 방황을 멈추고 어딘가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이겨내고, 그 불편한 ‘틈’ 위에서 위태롭게 춤을 추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이라는 가장 완벽한 농담을 즐기는 법

마지막 기술은 어쩌면 가장 지젝다운 답변일 겁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농담’으로 바라보고, 그 부조리함을 유쾌하게 즐기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진지하게 인생의 의미를 찾고, 성공을 향해 달려가며 고통받습니다. 하지만 한 걸음 물러나서 보면, 이 모든 것이 사실은 한바탕 잘 짜인 부조리 코미디일 수 있다는 것. 우리가 그토록 심각하게 목숨 거는 문제들이 사실은 ‘부먹 vs 찍먹’ 논쟁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이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냉소와는 다릅니다. 오히려 이 세상이라는 게임의 규칙에 과도하게 몰입해 상처받는 대신, 그 게임의 허술함과 모순을 간파하고 때로는 그 규칙을 역이용하며 웃어넘기는 현명한 ‘삐딱함’에 가깝습니다. 진지함의 감옥에서 벗어나 유머와 위트라는 무기를 장착하는 것이죠.

결국 지젝이 우리에게 주는 최종적인 답변은 ‘정답’이 아니라 ‘좋은 질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막막한 질문 앞에서 좌절하는 대신, 당신의 삶을 흔드는 더 구체적이고 날카로운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라는 것.

“나는 지금 무엇을 진정으로 욕망하는가?”
“나를 억압하는 보이지 않는 규칙은 무엇인가?”
“내 인생의 판을 바꾸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행위’는 무엇인가?”

정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좋은 질문은 우리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들고, 방황하게 만들고, 결국 우리를 계속해서 살아가게 합니다.

[생각의 도구 #10] 정답 대신 좋은 질문을 찾아라

이 책을 덮고 난 후, 당신의 머릿속에 더 많은 질문이 생겨났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지젝과 함께하는 철학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당신은 정답을 찾아 헤매는 순례자가 아니라,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탐험가가 되었습니다.

정답 없는 세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당신의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에필로그: 세상이라는 이름의 가장 완벽한 농담

슬라보예 지젝은 농담을 사랑하는 철학자입니다. 그의 책과 강연은 종종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더러운 농-담(dirty joke)’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청중은 그의 농담에 폭소를 터뜨리면서도 동시에 ‘내가 지금 웃어도 되는 건가?’라며 당황하곤 하죠.

그에게 농담은 단순한 유머나 아이스브레이킹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가 애써 점잖은 척 감추고 있는 억압된 진실(성, 정치, 권력, 죽음)을 가장 날카롭고 기습적으로 폭로하는 최고의 무기입니다. 잘 짜인 농담의 ‘펀치라인’이 터지는 순간, 우리가 당연하게 믿었던 상식의 질서는 잠시 멈춰 서고 그 이면에 숨겨진 부조리한 맨얼굴이 섬광처럼 드러납니다.

어쩌면 세상 자체가 지젝이 우리에게 던지는 하나의 거대하고 완벽한 농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이 농담 속의 등장인물입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고,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 사랑과 정의 같은 숭고한 가치를 위해 싸웁니다. 하지만 이 모든 처절한 몸부림이, 사실은 거대한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한바탕 잘 짜인 부조리 코미디일 수 있다는 것. 우리가 그토록 심각하게 목숨을 거는 문제들이, 사실은 농담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복선에 불과할 수 있다는 가능성.

‘시차적 관점’은 바로 이 세상이라는 농담의 구조를, 그 웃기면서도 슬픈 ‘펀치라인’을 이해하는 법을 알려주는 비밀 해설서와 같습니다. 더 이상 농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해하는 관객석에 앉아 있는 대신, 무대 위로 올라가 이 농담에 직접 참여하고 때로는 농담의 방향을 비트는 영리한 플레이어가 되게 만드는 것이죠.

이 책을 덮은 당신, 이제 세상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나요?

어제까지만 해도 당신을 짓누르던 고민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고 우습게 느껴지나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타인의 완고한 주장이, 사실은 그가 속한 농담의 세계에서는 나름의 논리를 가진 것이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지젝이 보낸 이 수상한 초대장에 성공적으로 응답한 것입니다.

[그리고 작가로서의 마지막 한 걸음]

지젝의 생각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 낡은 질서라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술 날카로운 도끼를 쥐여주었지만, 그 차가운 얼음물 위에서 무엇을 할지는 온전히 우리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작가로서, 감히 이 도끼를 들고 우리가 만들어갈 세상에 대해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실패할 용기’와 그 실패를 비웃지 않고 보듬어주는 ‘따뜻한 연대’에 대한 희망입니다. ‘행위’에는 언제나 실패의 위험이 따릅니다. 체스판을 뒤엎는 자는 모두의 비난과 조롱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하지 않고 낙오자를 가차 없이 절벽으로 내몬다면, 누가 감히 자신의 체스판을 뒤엎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요?

모두가 실패를 두려워해 낡은 게임의 규칙에 순응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이 지긋지긋한 농담 속에서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의 ‘틈’과 ‘모순’을 비난의 근거로 삼는 대신, 그것을 지극히 인간적인 것으로 끌어안고 서로의 어설픈 ‘행위’와 명예로운 ‘실패’를 격려해주는 세상. 그것이 지젝의 차가운 분석 너머, 우리가 이 땅에서 함께 만들어가야 할 우리만의 새로운 농담이 아닐까요.

정답 없는 세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의 진짜 게임이 시작됩니다.

부디, 세상이라는 가장 완-벽한 농담을 마음껏 즐기시길. 그리고 때로는, 유쾌하게 반란을 꿈꾸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