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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성소부부고

성소부부고 제2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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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부부고 제20권 · 문부 17 · 척독 상(尺牘上)

출처: 성소부부고 제20권, 문부 17, 척독 상

배경: 제20권은 문부 열일곱 번째 갈래인 "척독(尺牘)" 가운데 첫 부분(상)이다. 척독은 짧은 편지, 곧 사사로운 안부와 부탁을 담은 개인적인 서신이다. 이 권에는 정승과 판서 등 당대 고관들, 그리고 벗과 문우들에게 보낸 여든두 통의 짧은 편지가 실려 있다. 벼슬을 청탁하거나 인사를 부탁하는 사연, 죽은 누님(허난설헌)과 둘째 형(허봉)의 문집 간행을 부탁하는 사연, 서적과 골동품을 주고받는 이야기, 벗과 나눈 문학 비평과 농담 섞인 안부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앞선 산문들보다 훨씬 짧고 격의 없어, 허균의 인간적인 면모와 당대 관료 사회의 풍경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서애 유성룡 정승께 올린 편지

1604년 8월

1591년에 세상을 떠난 누님의 시집에 서문을 지어 주셨는데, 제가 그것을 외워 두지 못한 채 전란을 만나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이 불민한 죄를 어찌 면하겠습니까.

요즘 어떤 사람이 그 서문이라며 보여 주기에 읽어 보니 마치 다른 시대의 일처럼 낯설어 진본인지 가려낼 수가 없었습니다. 삼가 이를 기록하여 집사께 바치오니, 노사께서 잘못된 곳을 바로잡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이는 문집 첫머리에 실어 간행하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남쪽을 바라보니 아득히 멀어 마음속 말을 다 하지 못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도를 위해 몸을 잘 보중하소서.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1605년 2월

형님의 시문은 대부분 흩어져 없어졌습니다. 겨우 몇 편을 모아 간행하고자 이제 깨끗이 베낀 책을 바치오니, 한번 읽어 보시고 서문을 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형님을 가장 깊이 아시는 분으로는 노사만 한 분이 없습니다. 세상에 그분의 글에 서문을 지을 사람으로 노사가 아니고서야 누가 있겠습니까. 천 리 먼 곳에서 간절히 부탁드리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서문을 지어 영광되게 해 주시면 어떨는지요. 돌아가신 형님이 이를 아신다면 마땅히 지하에서 감격하여 우실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헤아려 주소서.

1606년 1월

삼가 손수 써 주신 편지를 받으니 황홀하기가 마치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는 것과 같아 무척 기쁘고 위로가 됩니다. 돌아가신 형님의 시집 서문을 지어 주시겠다고 승낙하신 지 벌써 해가 넘었는데도 아직 지어 주지 않으시니, 바라는 마음이 갑절로 간절합니다.

김흥세(자 근언)의 맏형은 완력과 용기가 있고 지략까지 갖추어 임용할 만한 인재인데, 더구나 노사께서 이미 추천하셨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가 지금 청송 고을살이를 얻으려는 것은 대감을 뵙기 위해서입니다만, 하늘이 사람의 바람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습니다.

심부름꾼이 급히 돌아가는 바람에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살펴 주소서.

(용어) 유성룡(호 서애)은 선조 때의 정승이다. 작고한 누님은 허균의 누이인 여류 시인 허난설헌으로, 본명은 초희다.


한음 이덕형 정승께 올린 편지

1605년 3월

형님께서는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형님의 시문 또한 전란 통에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그 시문 몇 수를 겨우 모아 두 권으로 엮었습니다. 이제 제가 맡은 고을에 가서 봉급의 절반을 떼어 이를 간행하려 하는데, 이는 형님이 남긴 시문 전체에 비하면 정말 태산의 터럭 한 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한 부를 바치오니, 귀찮으시더라도 읽어 보시고 몇 마디 말씀으로 그 끝에 발문을 달아 주신다면, 돌아가신 형님도 큰 은혜를 입는 셈이 될 것입니다. 절하고 삼가 아룁니다.

1608년 3월

대감 곁을 떠나온 지 몇 달 사이에 나라에 여러 일이 많았습니다. 승하하신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이 소신도 이렇게 간절한데, 하물며 합하께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암자의 승려가 대감의 뜻을 전해 오기에, 종이에 인쇄한 《소학》 같은 책들을 주어 대감께 보내 드렸습니다.

작별하던 날 나중에 전별시를 지어 주시기로 약속하셨기에 훌륭한 시를 지어 주시기를 날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국상 중이라 감히 거듭 부탁드리지 못합니다. 황공하여 다 쓰지 못합니다.

(용어) 이덕형(호 한음)은 선조 때의 정승이다.


오성 이항복 정승께 올린 편지

1605년 3월

전에 《원각경》 토를 단 책을 대감께 올려 읽어 보시도록 했었는데, 제가 잘못 해석한 곳을 대감께서 이미 모두 지적하셨다고 하니, 저에게도 가르쳐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완위편》은 필사하는 사람을 시켜 베낀 뒤 곧 김충신 편에 부쳐 대감께 돌려보냈습니다.

돌아가신 형님의 시집은 이제야 간행하였습니다. 삼가 한 부를 대감께 바치오니 열람하시기 바랍니다.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1610년 5월

성우길은 저의 집안 조카입니다. 완력과 용기가 있고 지략까지 갖추어 이미 북방을 지키며 공을 세운 바 있습니다. 호남의 우수사 자리가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다니, 바라건대 합하께서 그를 그 자리에 추천해 주셨으면 합니다. 세상에서는 북방의 장수는 남쪽 변경을 지키는 데 맞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리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옛날 양복은 북쪽 사막 지역에서도 여러 차례 공을 세웠고, 바다에서 싸우는 누선 장군이 되어서도 그 정예 병력이 꺾인 적이 없었습니다. 마원(신식후)은 농서와 촉 지방을 평정하는 데도 좋은 계책을 다 썼고, 남쪽 오령 밖에 구리 기둥을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어디에서나 통하는 재주라면 어느 자리를 맡아도 뜻대로 해낼 수 있는 법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오늘날의 누선 장군이요 복파 장군이니, 합하께서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몸이 아파 직접 찾아뵙고 아뢰지 못해 죄송합니다.

(용어) 이항복(호 오성, 오성부원군)은 선조 때의 정승이다. 양복은 한 무제 때의 장수로 외적과 싸워 전공이 많았다. 마원(신식후)은 후한의 명장 복파장군으로, 교지 지방을 정벌하여 평정하고 그 경계에 구리 기둥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일송 심희수 정승께 올린 편지

1605년 2월

합하께서 정승이 되셨으니 어진 인재들이 뜻을 펼 수 있게 되어 태평한 세상을 기대할 만합니다. 저로서는 개인적으로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경사스럽습니다.

돌아가신 형님의 시문은 흩어져 거의 남지 않은 지경인데, 겨우 제 기억에 남은 몇 편과 남들 사이에 전해 오던 것들을 보태어 두 편으로 엮어 이미 간행하였습니다. 삼가 한 부를 대감께 올리려 합니다. 대감께서도 옛 벗을 그리워하는 감회가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대감께서 헤아려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용어) 심희수(호 일송)는 선조 중기의 정승이다. "산양의 감회"는 진나라 상수가 옛 벗의 고향인 산양을 지나다 피리 소리를 듣고 옛 생각에 잠겼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옛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황지천 황정욱에게 올린 편지

1604년 9월

요즘 세상에 깃발을 세우고 문단에 우뚝 설 사람이 합하가 아니고서야 누구이겠습니까. 어찌하여 이조의 논의가 공정하지 못하여 학덕 높으신 어른의 벼슬길을 오랫동안 막아 두고, 마땅히 그 아래에 있어야 할 사람이 도리어 높은 자리에 올라 있게 하는지요. 아, 이 또한 운명인가 봅니다.

저에게 보내 주신 훌륭한 편지에서는 칭찬이 너무 지나치고, 인재를 아끼시며 뜻을 펴지 못함을 애석해하시는 마음이 말씀 밖으로까지 간절하여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고을살이 나가는 일이 무척 급박하여 미처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봄에 성묘하러 서울에 가게 되면 마땅히 문하를 찾아뵙고 사례하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1606년 8월

주지번 태사의 그림에 합하의 시까지 곁들여 얻었으니 더욱 귀중합니다. 저는 갑작스레 두 가지 보물을 얻고 보니 이번 행차가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어찌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지 않겠습니까.

가을이 서늘해지는데 잘 보중하시기를 우러러 빕니다.

1607년 3월

멀리 영남 밖으로 고을살이를 나가게 되어 찾아뵙고 떠나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심생이 전별시를 가지고 왔더군요. 수십 번을 읽어 보니 막힘없고 호탕하여 차마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성품이 졸렬하고 게을러서 외지로 벼슬살이 나가면서도 여러 어르신들께 시를 지어 달라 청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귀한 시를 얻고 나서는 곧바로 이 시의 운을 따라 문장으로 자부하는 여러분에게 두루 시를 지어 달라 청했더니, 다들 과연 화답해 주시어 곧 커다란 시집이 되었습니다. 이는 군자의 말씀을 귀히 여긴 것이요, 저를 훌륭하게 꾸며 준 일이니, 감격스러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용어) 황정욱(호 지천)은 선조 때 예조 판서를 지내고 장계부원군에 봉해졌다. 주지번(주 태사)은 명나라 사람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인물이다.


윤월정 윤근수에게 올린 편지

1606년 8월

합하께서는 중국의 옛일에 무척 밝으시어 중국 사람 중에서도 어깨를 겨룰 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것을 저 같은 사람에게 물으시니, 이는 귀머거리에게 소리를 들어 달라 부탁하는 격입니다.

김주의 일은 전에 낭중 가유약에게서 《이문광독》이라는 책 속에 실린 고중현이 쓴 《병탑유언》 한 권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나라와 관련된 일이 세 조항 실려 있었는데, 하나는 종계에 관한 일이었고, 하나는 기순(기 천사)과 서거정이 주고받은 시에 얽힌 이야기였으며, 또 하나가 바로 김주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오래된 일이라 정확한 문구는 잊었지만, 삼가 그 대략을 기억하여 별지에 적어 올리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1607년 8월

왕경 상서의 일화 네 조목은 바로 하양준이 지은 《사우총설》에 실려 있습니다. 지금 이를 기록하여 바치니 읽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유청일찰》이라는 책은 전예형이 지은 것인데, 저는 전에 가 낭중에게서 빌려 한 번 읽고 돌려주었으니 지금은 가진 것이 없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장씨와 육씨는 장주와 육온을 가리키는 것이지, 강릉 장거정과 오대 육광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608년 5월

서울에 갔다가 장모상을 당하여 허둥지둥하느라 겨를이 없어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합하께서 먼저 저희 형님들의 집까지 찾아 주셨다는데, 저는 향을 올리러 가느라 미처 돌아오지 못해 맞이하지도 못했으니, 게으른 죄를 면하기 어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누님의 시집 한 질을 바치오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지번과 양유년, 두 분의 서문 중에 어느 쪽이 더 낫습니까? 양유년이 직금시를 인용한 것이 이치에 딱 맞아떨어지는 듯한데, 대감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용어) 윤근수(호 월정)는 선조 때 양관 대제학과 우찬성 등을 지냈다. 김주는 조선 문신으로 1563년 종계변무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그곳 객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오봉 이호민에게 올린 편지

1604년 9월

훌륭한 시를 받고 보니 마치 좋은 보옥을 얻은 것만 같습니다. 이번 행차는 정말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마땅히 아름다운 옥에 새겨 길이 전하겠습니다.

1606년 3월

윤청의 시권은 전부터 갖고 있었는데, 펴 보니 마치 벗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이것을 슬쩍 빼내어 어르신께 보내 드리고 싶었으나, 주인이 이를 지키는 태도가 마치 옛날 인상여가 구슬을 품에 안고 머리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내주지 않으려 기둥을 노려보고 서 있던 것과 같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용어) 이호민(호 오봉)은 선조 때 문신으로 좌찬성 등을 지냈다. 인상여는 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신으로, 진나라 소왕이 화씨벽 구슬을 속임수로 빼앗으려 하자 구슬을 품고 기둥에 기대어 목숨을 걸고 지켜 낸 고사로 유명하다.


유서경 유근에게 올린 편지

1605년 3월

공께서는 저희 형님 미숙(허봉)과 홍태고(홍적)와 더불어 문단의 중심 역할을 하셨는데, 저희 형님과 홍태고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공만이 남아 문형을 쥐고 예원의 우두머리로 군림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누구도 감히 그 글솜씨를 대적할 자가 없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듣자니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를 가려 뽑고 계신다 하기에, 돌아가신 저희 형님의 시도 그 안에 많이 실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감히 간행본 한 질을 올리오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1605년 9월

남창 김현성을 만났더니, 돌아가신 형님의 시는 시선에 들어간 것이 매우 적고 누님의 것은 다소 많더라고 하더군요. 옛날 용재 이행이 우리나라 글을 가려 뽑을 때 탁영 김일손의 문장과 읍취 박은의 시를 매우 많이 넣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문단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니, 혹 다른 사람들의 이견에 밀려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까? 돌아가신 형님의 칠언 가행은 가장 절묘한데 단 한 편도 들어가지 않았다니, 이 점이 더욱 이해되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다시 잘 헤아려 가려 뽑으시어, 넓은 바다에 빠뜨린 구슬처럼 묻히는 일이 없게 해 주십시오.

(용어) 유근(호 서경)은 선조 때 대제학과 좌찬성 등을 지냈다.


이월사 이정귀에게 보낸 편지

1610년 9월

듣자니 공조에 자리가 하나 비었다는데, 그곳은 본디 한가하여 여유롭게 지낼 만한 자리입니다. 옛 시인 중에 공조 벼슬을 지낸 이로는 하손, 두보, 장적, 소식 등이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야 이 네 분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한 시대에 요행히 시로 이름을 얻어 공께서도 일찍이 칭찬하고 격려해 주신 바 있습니다. 지금 마침 공께서 인사를 맡고 계시니 이 일을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에게 이 자리를 맡겨 주셔서, 저 네 분이 저승에서나마 손뼉을 치도록 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11년 1월

감옥에서 살아 나오자마자 유배 명령이 촉박하여 미처 찾아뵙고 인사드릴 겨를도 없었습니다. 어느 한이 이만하겠습니까. 편지와 귀한 약제까지 길 떠나는 사람을 위해 보내 주시니, 그 두터운 정을 이루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신문을 받던 날 진술 중에 여러 차례 공의 이름을 끌어들였는데, 그것은 상황이 몹시 위태롭고 급박한 나머지 그리된 것이지 감히 공을 모함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말썽이 적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제가 어찌 남을 모함하는 사람이겠으며, 또 어찌 남의 사주를 받는 사람이겠습니까. 이는 온 세상이 저를 너무 하찮게 여긴 탓이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공께서는 같은 죄를 지은 사람이 아직도 높은 벼슬을 그대로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는데, 그 말씀은 너무 지나칩니다. 제 조카는 시험에 합격했고 공의 장인은 합격하지 못했으니, 그 죄가 서로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밝혀질 일이니 감히 여러 말 하지 않겠습니다.

(용어) 이정귀(호 월사)는 선조 때 대제학을 지내고 인조 때 좌의정에 이른 문장가다.


신현옹 신흠에게 보낸 편지

1608년 3월

「춘영」 백 편은 정직한 선비들이라면 입에 올리지 않을 내용이라 남에게 보여 드리기에 적합하지 않은데, 감히 보여 드리겠습니까. 이 졸렬한 사람이 입을 함부로 놀렸으니, 곧장 혓바닥을 뽑히는 지옥에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어 감히 보시라고 바치니, 보시면 반드시 더럽게 여기시며 상서롭지 못하다 하실 것입니다.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1608년 3월 (다른 편지)

훌륭한 서문을 지어 주셨는데, 칭찬이 너무 지나쳐서 제가 감당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 일이라 하여 감히 합하의 밝은 감식안을 가릴 수 없기에 그대로 서문으로 실었더니 명성이 훨씬 높아졌습니다. 저를 알아주신 은혜는 저를 낳아 주신 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죽어서도 그 은혜를 갚기로 기약하겠습니다.

1610년 10월

나주는 서남쪽 지역의 큰 고을입니다. 제가 전에 직접 그곳을 가 보고서, 벼슬이 이 고을 목사에 이르면 그것으로 그만두어도 좋겠다고 여겼습니다. 지금 마침 그 자리가 비었고 월사께서 이조를 맡고 계시니, 이는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합하께서 저를 그곳에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기회에 남쪽으로 아예 돌아가 버릴 계획입니다. 감히 진심을 말씀드립니다.

1611년 1월

감옥에서 여러 차례 보내 주신 소식을 받았습니다. 옛날 사마천이 궁형을 받던 날, 강도상을 지낸 동중서나 예 대부 같은 이들도 찾아와 안부를 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대야 천 년의 차이가 있지만, 옥에 갇힌 처지에서 이런 벗이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게다가 도교의 책까지 보내 주셔서 제가 그것을 읽으며 하늘로 오르는 상상이라도 하게 해 주셨으니, 지극한 정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리하셨겠습니까.

옛날 영웅들은 장수나 정승이 되지 못하면 신선이라도 되었는데, 저야 장수나 정승이 되기는 이미 틀렸으니, 마땅히 연문자·안기생 같은 옛 신선들과 더불어 노니는 것도 충분히 즐길 만한 일일 것입니다.

강남 천 리 길을 미처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떠나왔기에, 종이를 대하니 목이 메어 다 쓰지 못합니다.

(용어) 신흠(호 현옹)은 인조 때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이른 문장가다. "혓바닥을 뽑히는 지옥"은 불교에서 함부로 말을 지껄인 사람이 가게 된다는 지옥의 이름이다. 연문자와 안기생은 옛 전설 속의 신선들이다.


한유천 한준겸에게 보낸 편지

1601년 8월

해양의 모임에 어찌 감히 즐거이 달려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다만 부사가 계셔서 제가 함부로 참견할 처지가 아니니, 공께서 알아서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이번 제 행차를 두고 기이한 만남이라며 비웃는데, 이는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굳이 피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장부로 태어나 젊은 시절은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가는데, 한 차례의 즐거움이 충분히 만종의 녹봉만 한 가치가 있습니다. 참으로 그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면 욕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들 어찌 제 털구멍 하나라도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의리에 크게 해로운 일도 아닌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공께서 식사하시다가 이 편지를 보신다면 틀림없이 웃음이 터져 밥상 가득 입 속의 밥을 뿜고 마실 것입니다.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1601년 8월 (다른 편지)

공께서는 용성으로 가시어 큰 고을의 음식을 드신다는데, 그 맛이 해양의 작은 고을 음식에 견주어 어떻습니까?

저는 공을 배웅하고 성을 나와 봉생정 위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한 줄기 연기가 대숲을 덮고 차가운 바람이 휘장에 불어왔습니다. 고개를 들어 동쪽을 바라보니 푸른 큰 들판 저 멀리 공의 깃발과 수레 일산이 이미 보이지 않았습니다.

타향에서 벗을 이별하는 것은 옛사람들도 모두 탄식했던 일인데, 뜻밖에 오늘 그 일을 직접 겪었습니다. 생각건대 아마 공께서도 저와 같은 심정이실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식사를 많이 하셔서 몸을 잘 보중하소서. 이만 갖추지 않습니다.

1601년 9월

조운을 맡은 병졸과 일반 군졸 문제는 형님께서 이미 저와 함께 타당하게 조정하여 공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나랏일인데 어찌 감히 고집을 부리겠습니까. 외적이 오지 않는다면 편안히 밥을 먹겠지만, 만약 급박한 일이 생긴다면 그 많은 곡식을 어떻게 바닷길로 운반하여 서울을 구제하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공께 다시 여쭐 필요는 없겠습니다. 다만 수군을 통솔하는 사람이 일을 제대로 모를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곁에서 어떤 사람이 공께서 식사를 잘 하시는지 묻고 있으니, 이 정성을 알아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용어) 한준겸(호 유천)은 선조·광해군 때 호조 판서와 영돈령부사 등을 지냈다.


이창해 이사홍에게 올린 편지

1609년 9월

간이 최립의 아들은 바로 공께서 잘 아시는 사람입니다. 서경에서 숙천 고을 자리를 약속하신 적이 있으셨지요. 합하를 괴롭히기만 하는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일을 간청드려 왔습니다. 방금 조보를 보고서 감히 연락을 드립니다. 합하께서 어찌 남의 마음을 저버리실 분이겠습니까. 감히 대략 말씀드립니다.

1609년 9월 (다른 편지)

저의 육촌형 되는 체씨는 그 굳센 절개가 관리들에게 알려져 있고 학문과 행실이 선비들에게 존경받고 있는데도, 아직까지 벼슬에 오르지 못한 채 서울에서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어진 사람이나 군자들이 마음을 써야 할 곳입니다. 합하께서 그에게 한 말의 물이라도 부어 주시어, 수레바퀴 자국의 마른 물웅덩이에서 죽어 가는 붕어를 살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609년 10월

여러 저잣거리의 물가가 치솟는 데 대한 대책은 법령의 첫째 조항에 실려 있습니다. 만약 법령대로 시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횡포를 어떻게 징계하겠습니까. 애초에 이 일은 본조가 책임질 일입니다.

이번 초하루에는 공을 위해서 아전들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몹시 질 나쁜 물건을 가지고 높은 값을 받는 자들은 합하께서 다스리셔도 무방하겠습니다.

(용어) 이사홍(호 창해)은 선조 때의 유생이다.


황사숙 황신에게 보낸 편지

1609년 1월

듣자니 공께서 중국에서 《이담》이라는 책을 구해 오셨다는데, 그중 한 조목에 저희 누님에 관한 일이 실려 있다고 하니 참으로 그러합니까?

얼마 전 행주 정승(기자헌) 댁에서 그 책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런 내용은 없었습니다. 혹 나중에 다시 엮으며 덧붙인 것은 아닙니까?

이 일 때문에 다시 문하에 찾아가는 것도 마땅치 않으니, 그 책을 빌려주시기 바랍니다. 다 쓰지 못합니다.

(용어) 황신(자 사숙)은 광해군 때 호조 판서를 지낸 문장가다.


최분음 최천건에게 보낸 편지

1605년 11월

옛 도읍에서의 하룻밤 대화로는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회포를 풀기에 부족했습니다.

월성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리운 마음이 차가운 구름과 함께 모두 아득해졌습니다. 성 위의 낮은 담장 너머로 만월대를 바라보니 안개 낀 나무들만 푸르러, "지는 해"니 "비껴 내리는 비"니 하는 시구를 읊을 수가 없어 스스로 재주가 다한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느지막이 임진강에 이르니 커다란 얼음이 강을 막고 차가운 눈이 온 산에 가득하여, 문득 눈 구경의 흥취가 일었습니다. 생각건대 옥황상제가 계신다는 하늘 위 높은 누각은 그 추위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혹 공께서는 저를 위해 부 한 편을 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1606년 11월

예나 지금이나 비방을 받는 일은 성현이라도 피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형수와 정을 통했다는 누명이나 장인을 매질했다는 소문이 옛 진평이나 제오륜에게 무슨 해가 되었겠습니까. 공께서는 스스로 삭이시고, 남의 헐뜯음을 귀신 같은 사람과 견주거나 소나 말과 힘을 겨루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난초와 창초 같은 향초는 불에 태우고 삶아도 저절로 향기를 내는 법이니, 구중궁궐에 계신 임금께서도 이미 환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일이 곧 밝혀질 것이니, 억지로라도 직무에 나아가시어 성상의 기대에 부응해 주시기를 애타게 바랍니다.

1607년 6월

사흘 동안 내린 비도 더위를 식히지 못했습니다. 북쪽 창가에 다리를 뻗고 도연명의 시 몇 편을 읊으니,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와 문득 하늘 위 신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공께서는 이 찌는 더위 속에서 부채로나마 땀을 식히실 수 있는지요. 아마 마음과 힘을 많이 허비하고 계실 것 같은데, 이런 때는 오히려 못난 사람이 더 편한 법입니다.

한낮에 갑자기 보내 주신 편지를 받고 보니, 시원한 바람이 상쾌하게 답답한 제 가슴을 씻어 주는 듯했습니다. 성균관 사성 자리에 저를 추천하신 것은 불교를 좋아했다는 비난을 씻어 주시려는 뜻이었습니까? 저는 지금 이대로가 좋으니 무슨 수고인들 꺼리겠습니까. 다 닳은 붓도 천금 주고 산 것처럼 이대로 만족하며 스스로 즐기렵니다. 서울에 가서 귀인들과 가까이 지내는 일은 내키지 않습니다. 공께서 들으시면 틀림없이 이 미친 종놈의 옛 버릇이 또 도졌다 하실 것입니다.

지금 막 서첩을 들고 《갈고보》를 읽다가 다 마치지 못한 채 대강 써서 올립니다.

1607년 8월

지난번에 올린 열 편의 율시는 운자에 얽매여 좋은 흥취를 손상시켰으니 남겨 둘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술 항아리 덮개로나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수령의 인끈을 매고 대방주(남원)를 육 년쯤 다스리다가 지리산의 신선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공의 이조 판서 자리를 준다 해도 저는 바꾸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되도록 도모해 주시기 바랍니다.

1607년 9월

약초 임수정이 백옥루에 글을 지으러 저세상으로 떠났으니, 천고에 남을 한이 많습니다. 공께서도 이런 아픔을 느끼시는지요. 만시 한 편에 제 나름대로는 그의 일생을 다 담았다고 여깁니다. 이 시에 화답하여 죽은 이를 위로해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별지에 적어 둔 것은 부디 제 뜻에 곡진히 부응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1607년 9월 (다른 편지)

저의 벼슬살이하는 심정은 마치 엷은 가을 구름 같아서, 가을바람이 한 차례 불어오자 옛날 장한이 고향의 농어회와 순챗국을 그리워하던 그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고을 하나를 얻어 입에 풀칠이라도 한다면 만호후에 봉해진 것과 다름없겠는데, 공께서는 어찌하여 그것을 아끼십니까? 공께서 인재를 아끼는 그 한마음이야 하늘에 물어도 부끄럽지 않겠지만, 때를 알지 못하니 그 사랑이 오히려 지혜를 어둡게 한 것이 아닙니까?

공명은 손에 들어오지 않은 채 젊은 시절의 뜻은 이미 시들었습니다. 마치 힘없는 망아지가 우리 안에서 서성이는 격이니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곤궁함과 영달은 분수에 이미 정해져 있어 하늘도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대장부의 일이란 관 뚜껑을 덮고 나서야 끝나는 법인데, 제 혀는 아직 건재하지 않습니까. 용을 고삐와 쇠사슬로 얽어매려 하지 마십시오. 용의 성질이란 본디 길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1607년 10월

은주는 저희 선친께서 고을살이하셨던 곳인데, 제가 어찌 감히 기꺼이 부임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저는 선친의 일을 그대로 따를 수 없으니, 혹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다면 이는 선친의 가르침을 크게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가림(지금의 부여)은 바닷가에 있어 외지긴 하지만 생선과 게가 풍부하니 그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듣자니 공주와 같은 시기에 임명하신다는데, 그곳은 번잡한 데다 게도 없고 게다가 고을을 감독하는 관청까지 있으니, 제 이름은 그쪽에는 올리지 말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지역이 서로 가까워 혹 가림을 다투는 다른 사람에게 밀려날까 염려되어 번거롭게 말씀드립니다.

1607년 2월

가림은 얻지 못하고 도리어 공주를 맡게 되었으니, 이 역시 운명인데 어찌 공을 탓하겠습니까. 제가 벼슬을 하는 것은 가난 때문이니, 처자식을 지켜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게 하면 그것으로 족하지 달리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함부로 놀기만 하고 일을 게을리하여 공께서 천거해 주신 뜻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헌부의 서경이 끝나면 마땅히 찾아뵙고 사례하겠습니다.

적막한 겨울밤, 눈 녹인 물을 부어 새로 만든 차를 끓이는데, 불은 활활 타오르고 물맛은 좋으니 이 차 맛은 제호와 다를 바 없습니다. 공께서 어찌 이런 맛을 아시겠습니까.

1608년 1월

처음 부임할 때 간관 하나가 제가 그 자리에 걸맞지 않다며 심하게 헐뜯고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려다가 올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을에 부임해서는 새벽부터 많은 송사를 처리하고, 밤이면 등불 삼아 《좌씨전》 한 질을 읽고 있습니다. 이는 제 스스로 옛 한나라 관리의 방식을 따르면서 또한 천고의 성대한 일을 그만두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헐뜯는 자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세상에 쓸모없는 자라 하니, 이 또한 실없는 소리라 하겠습니다. 공께서는 틀림없이 크게 웃으실 것입니다.

(용어) 최천건(호 분음)은 선조 때 이조 판서를 지냈다. 진평(진 유자)은 한 고조의 공신으로 일찍이 형수와 정을 통했다는 모함을 받았다. 제오륜(자 백어)은 후한 광무제의 신하로, 장인을 매질했다는 놀림을 받자 자신은 장가를 세 번 갔지만 그때마다 장인이 안 계셨다고 답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장한(자 계응)은 진나라 사람으로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의 농어회와 순챗국이 그리워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최간이 최립에게 보낸 편지

1607년 3월

지천 황정욱의 시에 화답해 주신 시는 기걸차면서도 진중했습니다. 또 잘 맞지 않는 몇 글자를 고쳐 달라고 청하셨는데, 저는 마치 페르시아의 화려한 시장에서 진귀한 보석들에 눈이 부셔 어느 것이 더 값진 것인지 가늠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심정입니다.

그대로 둘 다 남겨 두어, 공께서 글을 지으실 때 얼마나 신중을 기하시는지 보여 드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1607년 3월 (다른 편지)

세상에서 글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공의 시를 잘못 낮추어 보는데, 이는 그저 무지한 탓입니다. 공의 문장은 아무리 억세고 기걸하다 해도 역시 반고와 한유(창려)에게서 그 뿌리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 시는 본디 딱히 스승에게서 배운 바 없이 스스로 하나의 격을 창조해 낸 것인데, 그 뜻이 깊고 시어가 탁월하여 성률이나 익히고 꽃과 풀이나 읊는 자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저는 공의 시가 문장보다 더 훌륭하다고 여기는데, 공께서는 그렇게 인정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용어) 최립(호 간이)은 선조 때 문장가로 형조 참판을 지냈다.


정한강 정구에게 보낸 편지

1596년 9월

읍지를 만들면서 고을의 나이 든 노인들에게 물으니, 아전방·동문창·우계상방 등이 모두 신라 때 김흔 공이 지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아득한 옛사람을 떠올리니 마음이 감개무량합니다.

1596년 9월 (다른 편지)

읍지의 범례를 명나라 전여성이 지은 《서호지》를 본받고자 했는데, 합하께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시다니 어째서입니까? 지리, 관청 건물, 토산물 등에 대해서는 말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읍지의 나머지 부분에는 그 사적을 싣되, 제 나름의 방법을 써서 신중히 하여 허물이 없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1601년 3월

오랫동안 어르신을 모시지 못하니 뵙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강릉지》에는 마땅히 빼야 할 것과 혹 보충해야 할 것이 있을 터이니, 전씨가 돌아올 때 편에 보내 보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릇 사실을 기록할 때는 핵심만 적되 너무 소략해서는 안 되고, 자세히 적더라도 거짓이 없어야만 후세까지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비루한 속어에서 비롯되었고, 저 또한 역사를 기록하는 재능이 부족한 데다 젊은 날의 경솔한 견해로 만든 것이니, 어찌 남의 안목에 흡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혹 이전 것보다 나은 점도 있을 것이기에 이렇게 세세히 늘어놓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1603년 8월

옛사람의 말에 "빌려 간 책은 늘 돌려주는 것이 더디다"고 했는데, 그 "더디다"는 말은 한두 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강》을 빌려드린 지가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벼슬할 뜻을 끊고 강릉으로 돌아가 그 책이나 읽으며 소일하려 하기에 감히 말씀드립니다.

(용어) 정구(호 한강)는 선조 때 공조 참판을 지낸 학자다.


김남창 김현성에게 보낸 편지

1605년 12월

《세가문헌》을 만든 일은 참으로 주제넘고 경솔한 짓이었습니다. 어르신께서 꾸짖지 않으시고 도리어 박식하고 우아하다며 격려해 주시니 부끄러우면서도 감격스럽습니다. 쪽지를 붙여 두신 곳은 하나하나 말씀하신 대로 고쳐서, 충고해 주신 말씀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한번 찾아뵙고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1606년 7월

돈녕부에 추천하는 일은 저희 형님께서 이미 승낙하셨습니다.

종이 열 첩을 책상 아래 바치니, 저를 위해 《황정경》, 임소경에게 보낸 편지, 「낙신부」, 「무조격」, 「추흥시」 여덟 수, 「양양가」, 「풍락정기」, 「전적벽부」, 「후적벽부」를 베껴 주신다면 마치 귀중한 구슬이 손안에 들어와 밤낮으로 빛나며 반짝이는 듯할 것입니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1606년 10월

저희 형님께서는 공을 여주 목사에 제수하는 것이 돈녕부에 제수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슨 힘을 썼겠습니까.

열 첩의 글씨는 정밀하고 단정하여 절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삼가 절하고 받았습니다. 다만 옛날 왕희지에게 글씨 값으로 바칠 흰 거위가 저에게는 없으니 몹시 한스럽습니다.

삼가 상자에 보관하여 대대로 전할 가보로 삼겠습니다.

1608년 8월

어르신께서 옥관자와 금띠를 두르고 높은 벼슬에 오르신 것은 모두 문필이 뛰어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조정이 인재를 아끼지 않는다고 말하겠습니까. 먼 고을에서 나랏녹이나 축내고 있는 저는 조보를 보고서, 한창 밥을 먹다가 저도 모르게 수저를 놓고 일어나 감히 이렇게 축하드립니다.

(용어) 김현성(호 남창)은 시·서·화에 두루 뛰어났고 벼슬은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왕희지(왕 우군)는 진나라의 명필로, 거위를 좋아하여 산음의 한 도사에게 《도덕경》을 써 주고 그 대가로 흰 거위를 받았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심학이 심열에게 보낸 편지

1608년 3월

황강의 꿈에서 이미 은화대를 얻는 조짐을 보았는데, 그 은화대는 어찌하여 아직 제 손에 들어오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길에서 마땅히 형수님을 만났어야 했는데, 아랫사람들이 저를 이끌어 홍경비를 피하라고 하는 바람에 결국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무척 안타깝습니다.

고을에 도착해서는 애써 일하여 겨우 열 달 치 봉급을 떼어 연나라산 소뿔을 사서 무기고를 채웠습니다. 그런 공로는 정말 형수님 덕분이지 제가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삼가 면첩을 봉하여 올립니다. 형께서 보시면 필시 "성인만이 성인을 안다"고 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우습습니다.

(용어) 심열(자 학이)은 인조 때 영의정에 이른 문신으로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연우각은 춘추시대 연나라에서 나던 소뿔로, 활을 만드는 데 가장 좋은 재료였다고 하며, 여기서는 좋은 무기를 가리키는 듯하다.


정화백 정협에게 보낸 편지

1610년 10월

모든 재앙은 언제나 소홀히 여기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번 일은 저 역시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바이니, 공인들 어찌 예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평생 너무 많은 비방을 받아 왔으니 한 차례 관직에서 쫓겨난 것이야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한스러운 것은 큰 고을을 잃은 일입니다.

그자가 전에 활을 당겨 자안(남이공)까지 쏘았다니, 하물며 사촌 동서 사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허물할 필요도, 탄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스스로 이해하고 넘어갈 뿐입니다.

(용어) 정협(자 화백)은 광해군 때 예조 참판을 지냈다.


이지봉 이수광에게 보낸 편지

1609년 12월

홍양시권은 몇 차례나 읽었는데 차마 손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소리와 운율이 잘 어울리는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책머리에 한마디 적고 싶었으나 훌륭한 책을 더럽히게 될까 염려되어 그만두었습니다. 더구나 차씨의 발문에서 이미 할 말을 다 해 놓았기에, 제가 하고 싶었던 말도 저절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삼가 원본 그대로 돌려보냅니다.

1610년 4월

제 병은 박지지 군이 말하기를, 몸속의 음기가 허해져 화기가 동해서 생긴 것 같다고 합니다. 몸이 있고 나서야 벼슬도 있는 법입니다. 이번에 사신 행차에 오르지 못한 벌이라야 고작 평민이 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제 다시 상소를 올렸으니 제대로 전달되도록 막지 말아 주십시오. 서강의 물을 터서 수레바퀴 자국에서 허덕이는 붕어를 살려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용어) 이수광(호 지봉)은 여러 관직을 거쳐 인조 때 이조 판서에 이른 학자다.


김여수 김상준에게 답한 편지

1610년 12월

제가 아주 부득이한 일이 아니고서야 어찌 부모님이 남겨 주신 이 귀중한 몸으로 모진 고문의 욕을 당하겠습니까. 이번 일은 제 스스로 결단한 것이지 남이 시켜서 한 일이 아닙니다.

형께서는 저를 자세히는 모르셨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형께서 저를 무척 아껴 주셨기에 있는 일이니, 비록 제 속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하셨더라도 저를 아껴 주신 은혜는 분명 있는 것입니다. 어찌 감히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말이 막혀 다 갖추지 못합니다.

(용어) 김상준(자 여수)은 광해군 때 형조 참판을 지냈다.


홍녹문 홍경신에게 보낸 편지

1607년 12월

옥과 현감의 관은 어느 날 마읍을 떠난다고 합니까? 만약 제가 임지로 내려가는 날까지 그 행렬이 이곳에 있다면 길모퉁이에서라도 제사를 올릴 수 있겠습니다. 기억하건대 예전 절에서 함께 노닐 때 그 형님이 지은 시에 "물이 어우러지니 산비가 잦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그 말이 이치에 참으로 딱 들어맞았습니다. 재주가 있으면서도 그 재주를 펼치지 못했으니 참으로 원통한 일입니다.

1608년 1월

그 형님의 관이 지나가던 날이 하필 제가 관아에 나가야 하는 날이라, 그저 아전 한 사람을 보내 상여꾼들을 감독하여 이 고을 경내를 지나가게 했을 뿐입니다. 살아 계실 때의 정분을 돌아가신 뒤에 저버린 것만 같아 부끄러워 눈물만 흘렸습니다. 만시에 이런 마음을 자세히 담았으니 그 형님도 응당 보실 것입니다. 이만 다 갖추지 못합니다.

(용어) 홍경신(호 녹문)은 선조 때 부제학과 병조 참의를 지냈다.


윤지중 윤의립에게 보낸 편지

1606년 8월

듣자니 형께서는 양유년(양 황문)을 몹시 허물하신다는데, 이는 섭씨 성을 가진 자가 명령을 거짓으로 꾸며 낸 일입니다. 주지번은 요구하는 것이 좀 있었던 듯하지만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고, 양유년 쪽은 아예 아무런 요구도 없었습니다.

그 두 분 모두 저를 잘 대우해 주셨던 분들인데, 제가 무엇 때문에 우열을 가려 양유년만 편들겠습니까. 다만 그가 억울하게 비난받는 것으로 여겨져 부득불 변명해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용어) 윤의립(자 지중)은 인조 때 예조 판서를 지냈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양유년(양 황문)은 1606년 주지번과 함께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 관리다.


남자안 남이공에게 보낸 편지

1610년 1월

형은 지금 어머님을 모시고 계시니 섣달에 내리는 약제도 다른 벗들보다 넉넉히 받으실 것입니다. 돌아가신 저희 어머님은 원주에 묻혀 계신데, 제사도 제가 직접 받들지 못하고 나무꾼이나 목동들이 묘소를 범하지 못하도록 막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어버이에 대한 슬픔이 늘 가슴에 맺혀 있는데, 언제쯤이나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성묘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식 된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는 대목입니다. 이만 다 갖추지 못합니다.

(용어) 남이공(자 자안)은 인조 때 공조 판서를 지냈다.


이중집에게 답한 편지

1609년 1월

이별한 지 십 년 만에 어제 처음으로 편지 한 장을 받으니 위로되고 다행스럽습니다. 제가 이 사신 행차에 끼인 것이 지금 벌써 세 번째인데, 형께서는 아직 한 번도 행차에 오르지 못하셨다니, 세상일이란 대체로 이런 것인가 봅니다.

용천과는 저 역시 대대로 이어 온 교분이 있으니, 어찌 감히 특별히 대우하지 않겠습니까.

한번 문하를 찾아뵙고 옛정과 이별의 회포를 풀고자 하니, 문지기가 저를 막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윤차야 윤훤에게 보낸 편지

1609년 10월

『시산』은 이미 익히 읽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권생 편에 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옥잠이 자주 꿈에 보이니 이상한 일입니다. 두 가지 모두 온전히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1610년 1월

《두시》는 기대했으나 손에 들어오지 않고 《초사》만 뜻밖에 도착했습니다. 하늘이 참으로 뜻있는 일을 방해하는군요. 이제부터는 감히 함부로 요행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용어) 윤훤(자 차야)은 인조 때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홍휘세 홍서봉에게 보낸 편지

1610년 4월

동쪽 교외에서 손을 맞잡고 이별할 때 저에게 노자를 아주 넉넉히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아 이상히 여기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금강산 만 이천 봉이 형을 만나 한층 빛을 발했을 것입니다. 비단 주머니에 담아 오신 시들을 아픈 눈을 씻고서라도 보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610년 7월

저는 병으로 북경 가는 길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파직되었다가 금세 다시 살길이 열렸으니 이 모두가 임금의 은혜라 그저 감격할 따름입니다.

듣자니 형께서는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가려 하시어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라 하는데, 제가 다시 등용되기를 기다렸다가 그 인끈을 저에게 대신 차게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우습습니다.

(용어) 홍서봉(자 휘세)은 인조 때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제강공자에게 보낸 편지

1601년 3월

몇 달을 이웃하여 지내다가 갑자기 이별하게 되니 섭섭한 마음을 스스로 가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소랑을 마주하고서는 늘 장흥동에서의 옛일을 이야기하며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팥 섞은 밥에 배추김치를 먹으면 그 맛이 엿처럼 달았는데, 지금 다시 그런 맛을 볼 수 있을까요. 비록 그 맛을 다시 보고 싶어도 저 같은 늙은이가 어찌하겠습니까. 이 처절한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1602년 2월

족하는 재주가 높은 사람인데도 나라의 법률에 얽매여 포부를 펴지 못하고 그저 하찮은 봉급이나 받는 자리를 맴돌고 계셨습니다. 만약 옛날 유향 같은 사람이 오늘날에 태어났다면, 천록각에서 신령스러운 지팡이 불빛을 마땅히 누구에게 비춰 주었겠습니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슬픕니다.

1609년 8월

공의 병환이 더욱 위중해지셨다고 들었습니다. 화평한 군자는 신령이 돕는 법이니 마땅히 약을 쓰지 않아도 나아지실 것입니다. 혼자서 애태우고 노심초사하여 정신을 상하게 하지 마십시오.

당류 약제 두 가지를 아드님 편에 보냅니다. 이것을 드시면 곧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장강이라는 자는 사리를 모르고 그저 쓴 약만 먹게 하니 우습습니다.


이관송 이이첨에게 보낸 편지

1608년 8월

형께서 예전에 가깝게 지내던 정을 생각하시어 온갖 비방 속에서 저를 구해 주셨으니, 재주를 아끼시는 마음이 지극하십니다. 이는 옛사람도 어렵게 여기던 일인데 그것을 실천하셨으니, 이제부터 온 세상의 어진 선비들이 모두 공의 문하로 모여들 것입니다.

1609년 9월

도성 문을 나가 배웅하며 작별하려 했는데, 어제저녁 갑자기 형조에 제수되었습니다. 여론을 기다리느라 오늘 은혜에 감사드리지 못하여 두터운 정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서쪽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할 뿐입니다. 서른 편의 율시는 석주 권필이 보고서 타당치 못하다고 하기에 다시 고쳐 뒤따라 보내 드리려 합니다. 늦어진다고 허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611년 1월

편지가 도착하여 매우 기뻤으나 병 때문에 다시 나가 뵙지 못했습니다. 병이 아니었다 해도 어떻게 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이 마음만 지닌 채 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겠습니다. 남들은 제가 형과 비방을 나누어 지려고 형의 사위를 맞아들였다고 하는데, 형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시면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런 일이야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풀릴 것인데, 온 세상이 의혹스럽게 여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요.

한스러운 것은 저를 배신한 자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 가운데서 나왔다는 것인데, 이 역시 하늘이 시킨 일이겠지요. 제가 어찌 감히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겠습니까. 식사 잘 하시고 몸을 보중하소서.

(용어) 이이첨(호 관송)은 광해군 때의 권신이다.


이자민 이안눌에게 보낸 편지

1610년 3월

떠나는 일이 하도 급히 재촉당해 강가에서 손을 맞잡고 작별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삼 년을 떨어져 지내는 것도 짧은 기간이 아닌데, 더구나 저는 만 리 먼 길을 떠나야 하지 않습니까.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슬픔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오봉 이호민의 시는 저도 흉내 내 보려 애썼으니, 형도 이 운을 따라 시를 지어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형은 전에 제 시를 다소 약하다고 여기셨으니, 시험 삼아 무거운 가마솥도 들 수 있는 그 힘을 가벼운 손대야 하나 받쳐 드는 일에도 써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10년 3월 (다른 편지)

요동 지방 관리의 요구는 부채 삼백 개면 해결될 수 있다는데, 저는 요직이나 관찰사도 아니니 누가 제 말을 들어 주겠습니까. 형의 고을에는 대나무가 많고 또 죽세공 장인이 있으니, 설령 삼백 개를 다 채우지 못하더라도 그 절반이면 좋겠습니다.

저는 마땅히 공의 어진 덕을 널리 칭송하여 요동 땅까지 빛나게 하겠습니다. 어찌 상자 속에 그대로 묵혀 두겠습니까.

1610년 4월

이 고을 기생 진랑은 제가 조운을 감독하던 시절에 가깝게 지냈던 여인인데, 지금은 혜민국에서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서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이를테면 저의 사람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그리도 심하게 다그치십니까? 꽃다운 나이도 지나고 자식까지 있어 굳이 찾아갈 흥은 나지 않지만, 그가 힘들어하는 말을 들으면 역시 동정심이 생깁니다. 바라건대 저를 봐서라도 그를 관대히 대해 주십시오. 하찮은 물오리를 잡으려다가 귀한 원앙새를 놀라게 하는 격입니다.

(같은 무렵)

제 병은 참으로 깊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헤아리지 않고 겨우 감옥살이만 면해 주고 오히려 관직은 해면했습니다. 집 안에서 몸을 조섭하며 살아갈 길을 찾으니, 썩은 냄새 나는 세상일 따위야 어찌 마음에 두겠습니까.

부채 백 개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이 떠난 뒤에 도착하여 어쩔 수 없이 그냥 두었습니다. 더구나 부채 윗부분에 형의 시가 적혀 있어 읽어 보니, 맑은 바람이 상쾌하게 일어나 마치 갈증이 풀리는 듯했습니다.

종이는 진랑에게 돌려주었으니 우습습니다. 형은 과연 송광평 같은 철석간장을 지니셨나 봅니다.

(용어) 이안눌(자 자민)은 인조 때 예조 판서에 이른 시인으로, 시와 글씨에 모두 뛰어났다.


한석봉 한호에게 보낸 편지

1604년 10월

서울 집에서 만났을 때는 아이들 때문에 흥겨운 정취를 마음껏 누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요산(수안)의 수령으로 나가는데, 공께서도 마침 수령 자리를 그만두셨다고 들었습니다. 옛 도읍과 그리 멀지 않으니, 혹 공께서 이 고을 관아에 오신다면 연못가 누각에서 노닐며 인간 세상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명주 비단을 펼쳐 놓고 먹을 두어 말쯤 갈아 두어, 흥이 나는 대로 붓을 휘두르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노닌다면 어찌 왕희지만이 천고에 그 영예를 독차지하겠습니까. 애타게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1604년 3월

"하늘 바람과 바다 물결"이라는 네 글자 큰 글씨를 잘 받았습니다. 필세가 용이 뛰어오르고 호랑이가 덮치는 듯하여, 마치 동명산과 오대산이 웅장함을 겨루는 것 같았습니다. 옛 소실산의 은자가 이것을 본다면 틀림없이 집 네 채를 팔아서라도 사려 할 것입니다.

저는 그 글씨를 벽에 걸어 두고 사흘 동안이나 그 아래에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도 싫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화씨벽 같은 보배를 주셨으니 어찌 감히 고개 숙여 감사드리지 않겠습니까.

(용어) 한호(호 석봉)는 선조 때의 명필로 가평 군수 등을 지냈다.


송천옹에게 보낸 편지

1611년 2월

젊은 시절 《포박자》를 잘못 읽고서 금석으로 만든 약을 먹으면 신선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훗날 자양·해경·치허 같은 여러 진인들의 글을 읽고 나서는 스스로 실망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무릇 단약이란 서로 같은 성질끼리 합쳐져야 참된 경지에 들 수 있는 것이니, 정·기·신 이 세 가지 보배를 어찌 몸 밖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반드시 밝은 스승과 착한 벗을 만나 서로 경계하고 갈고닦아야만 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저의 스승이자 벗이 되어 줄 사람은 그대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다만 저는 죄를 지은 신하라 그대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바라건대 전해 오는 비결을 편지에 적어 보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11년 2월 (다른 편지)

《옥청금사보록》과 《규중지남》, 《중화집》에는 모두 전해 오는 비결이 담겨 있는데, 이 세 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까? 숨기지 마시고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자격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전하는 것도 죄가 된다지만 그 죄는 가벼운 편이고, 아끼기만 하고 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무거운 죄입니다.

옛날 장평숙이 촉 땅으로 귀양 갔던 일은 경계로 삼을 만합니다. 공께서는 입을 다물고 침묵만 지키지 말아 주십시오.

(용어) 《포박자》는 중국 진나라 갈홍이 지은 도교 서적이다.


경홍(한호)을 초대한 편지

1605년 4월

봄은 이미 지나가, 그윽한 꽃들이 그대를 기다리다가 다 이울고 말았습니다.

녹음이 저리 무성하고 꾀꼬리 소리도 참으로 고우니, 봄빛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어찌 시냇가에 가득 핀 복숭아꽃뿐이겠습니까. 섬돌 곁에서 하늘거리는 붉은 작약도 볼만하니, 보내는 수레를 얼른 타고 와 주시기 바랍니다.

수수로 빚은 술이 한창 익었으니, 그물을 들고 냇가로 나가 그대와 함께 잉어를 잡아 회를 치려 합니다. 죽순 나물과 자라탕도 안주로 마련해 두겠습니다. 저는 평생 먹고 마시는 일만 밝혀 온 사람이라 이렇게 맛난 술과 음식으로 청하니, 먹는 것만 탐한다고 비웃지 마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용어) 경홍은 한호(한석봉)의 자다.


이실지 이춘영에게 보낸 편지

1607년 6월

족하께서는 온 세상을 만만하게 보시어 족하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저희 세 사람을 칭찬하시니, 부디 저희를 낮추어 보시고 너무 높이 평가하지는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나치게 넘치고, 석주 권필은 힘이 시들었고, 자민 이안눌은 막혀 있다고 하셨는데, 이 세 사람의 흠을 어떻게 해야 고칠 수 있겠습니까? 족하께서는 오늘날 문단의 대가이시니, 반드시 좋은 방법으로 다스려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05년 7월

이 통제사(이순신)의 공신록권은 족하께서 지으신 것이 참으로 뛰어난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물리쳐 두고 저 같은 사람에게 대신 지으라 하시니, 온종일 손만 아프도록 붓을 놀리면서도 한마디 말도 이루지 못하여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본래 변려문을 잘 짓지 못하는데, 사람들은 도리어 저를 변려문에 능하다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세상일이란 이런 것이니 우스운 노릇입니다. 부디 가르쳐 주시어 크게 나아지도록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607년 7월

족하께서 이미 저의 병을 고쳐 주셨는데 참으로 증세에 딱 맞는 좋은 약이었습니다. 즐겁고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족하께도 병이 있는지라 제가 침을 놓아 드리고자 하는데, 혹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남들은 재주가 적어서 걱정인데 족하는 오히려 재주가 너무 많은 것이 걱정입니다. 아무리 아깝더라도 조금 덜어 내어 거칠고 불필요한 것을 제거한다면 순수한 대가가 되실 것입니다. 이 말은 형을 몹시 아끼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이니, 자신의 병을 감추고 의원을 꺼려하다가 고질이 되도록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용어) 이춘영(자 실지)은 선조 때 문장가로 봉상시 첨정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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