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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남행일록 — 1591년 음력 11월부터 1592년 음력 6월까지

임진남행일록 서문

1592년 1월

1592년 1월 11일 (신묘년 음력 11월 27일)

나는 지난해 신묘년 동짓달 스무이렛날 새벽에 서울을 떠났다. 용인에 있는 이경여의 서당으로 가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양산의 농촌으로 가서 여행에 필요한 양식을 마련했다.

또 다음 날 일찍 출발하여 직산에 있는 세상을 떠난 벗 변중진의 농장에 도착했다. 중진이 생전에 부리던 종 어질동이 나를 보자 매우 반가워하며 따뜻한 방에서 자게 해주었다. 마치 살아 있는 주인을 대하듯 정성을 다했다. 참으로 충실한 종이라 할 만했다. 그 모습을 보니 죽은 벗에 대한 슬픔이 저절로 마음속에서 솟구쳤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해 망일사에 들어갔다. 아침밥을 먹은 뒤 목천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비를 만나 어렵게 관아에 도착했다.

마침 김태숙과 조자옥이 와 있었다. 조자옥의 이름은 조우이다. 목천 수령 조영연은 내가 왔다는 말을 듣자 곧바로 관아의 대청으로 나왔다. 태숙, 자옥과 함께 오래 만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곳에서 사흘 동안 머물렀다. 조영연은 음악을 마련하고 술을 내어 함께 실컷 마셨으며, 자신도 관아를 나와 내가 묵는 곳에서 자면서 매우 후하게 대접했다. 영연은 나와 혼인으로 맺어진 친척이며 어려서부터 함께 지내 정이 매우 두터웠다. 자옥은 영연의 친동생이며 나와도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벗이다.

떠날 때에는 여행에 쓸 물품도 넉넉히 챙겨주었다.

그다음 날 일찍 길을 떠났다. 전날 큰눈이 내려 길을 가기가 무척 어려웠다. 해가 질 무렵 연기에 도착하여 임소설의 고을로 들어갔다. 임소설의 이름은 임태이며 그도 나와 혼인으로 맺어진 친척이다.

임면부가 이곳에 왔다는 말을 들었지만 마침 수령이 자리에 없었고 갈 길도 바빠 만나지 못했다. 몹시 아쉬웠다.

그다음 날에는 [원문 훼손] 금강가에서 아침을 먹고 [원문 훼손] 묵었다.

밤에는 비와 눈이 함께 내렸다. 늦게 길을 떠났는데 길이 온통 진창이어서 고생 끝에 은진 앞의 원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이었다.

처음에는 그곳에서 묵으려 했으나 민가가 매우 드물었고 도적도 두려웠다. 그래서 밤길을 무릅쓰고 여산군 앞의 원까지 달려갔다.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집마다 여행객이 가득하여 묵을 곳이 없었다. 마침 비어 있는 집이 하나 있었는데 주인이 우리를 받아주었다. 술자리가 거의 끝날 무렵 술 취한 우리 종 하나가 갑자기 들어와 술에 취한 집주인과 말다툼을 벌였다. 큰 싸움이 날 뻔했다.

나는 우리 종을 엄하게 말리고 술 취한 주인을 잘 달래 간신히 싸움을 막았다. 다른 집으로 옮기고 싶었지만 이미 밤이 너무 깊어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묵었다.

다음 날 송인수, 곧 송영구의 집으로 가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침을 먹은 뒤 완산부 남문 밖 장수 사람의 집에서 묵었다.

다음 날에는 진안에 사는 정병 김윤보의 집에서 묵었다. 그는 장수 사람으로, 흰 술을 내어 나를 대접했다.

1592년 1월 24일 (신묘년 음력 12월 10일)

섣달 초열흘에 중대사에 도착했다. 아침밥을 먹은 뒤 마침내 장천현에 이르렀다.

장천은 곧 장수현이다. 수령 이윤은 자가 자미이며 내 처남이다.

관아 사람들이 모두 나와 반갑게 맞았다. 며칠 동안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오랫동안 쌓였던 답답한 마음을 풀었다.

[원문에는 이 뒤 날짜를 ‘초여드레’라고 적었으나 앞뒤 순서와 맞지 않아 날짜가 분명하지 않다.]

종과 말을 서울로 보내면서 세밑을 지낼 비용을 마련해 주었다.

이듬해 정월 스무날이 지난 뒤 종과 말이 돌아왔다. 말의 다리를 쉬게 한 다음, 이월 초열흘이 지나 황간으로 먼저 길을 떠났다. 황간은 내 외가의 고향이다.

1592년 3월

1592년 3월 23일 무렵 (임진년 음력 2월 10일이 지난 뒤)

장천을 떠나 장계의 속현에서 묵었다. 종윤이 잠자리를 함께하는 사람과 같이 찾아왔다가 헤어졌다.

다음 날 무주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고을 안으로 들어갔으나 이 도의 부관이 군사를 점검하느라 무주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물러나 내가 부리던 종 인수의 집에서 묵었다.

다음 날 무주를 지나 영동에 있는 숙부 집에 도착했다. 숙부는 몸이 붓는 병에 걸려 상태가 몹시 위중했다. 사촌 형제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만나니 매우 반가웠지만 숙부의 병 때문에 마음껏 기뻐할 수 없었다.

하루를 머문 뒤 황계에 사는 남백원의 집으로 갔다. 백원은 내 외사촌 형이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 밑에서 함께 자라 정이 친형제와 같았다.

서로 헤어진 지 십오 년이 넘었는데 이제 다시 만나니 슬픔과 기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옛 고향에 돌아와 주변을 바라보니 옛일이 떠올랐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이미 다른 세상에 있으니 감회에 젖어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며칠을 머물며 외할아버지 무덤에 가서 제물을 올리고 절했다. 옛날 나를 애써 길러주신 은혜를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나는 이 고장에서 태어나 외할머니에게 길러졌다. 그 은혜가 끝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은 술로 두 숙부의 무덤에도 제사를 지냈다. 두 분 역시 내가 어렸을 때 많이 보살펴주셨는데, 특히 첨사를 지낸 숙부가 더욱 각별했다. 제물은 이 일을 위해 장천에서부터 준비해 온 것이었다.

당시 남자순 형은 금릉에 있었다.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말을 보내 나를 불렀다. 그 집에 가서 하루를 머물며 함께 잠자리에 누워 밤새도록 옛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순 형 역시 내 외사촌이다. 어린 시절 함께 놀았고 마음과 뜻이 잘 맞아 다른 사촌들보다 훨씬 가까웠다. 이번에 다시 만나니 기쁨이 더욱 컸다.

형수가 나와 인사했고, 딸들도 줄지어 앞으로 나와 절했다. 모두 단정하게 꾸몄고 용모와 행동이 얌전하고 고왔다. 정말 아름답고 품행이 단정한 처녀들이었다.

큰딸은 이미 혼인할 나이가 되었는데 [원문 훼손] 혼처를 고르고 있다고 했다.

자순 형과 함께 다시 황계로 돌아왔다.

1592년 5월 5일 (임진년 음력 3월 24일)

이날은 한식이었다. 나는 그대로 머물렀다. [원문 훼손]

내가 이곳에 도착한 다음 날 종을 성산으로 보내 받을 것을 받아오게 했는데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원문 훼손]

곧 출발해 영동의 숙부 집으로 다시 갔다. [원문 훼손]

그곳에서 하루를 머물며 외가 쪽에서 미처 나누지 못했던 노비들을 나누는 일을 했다.

숙부의 병세는 더욱 위중해졌다. 나이가 여든넷인데 이런 중병에 걸렸으니 과연 살아날 수 있을까 싶었다.

다음 날 다시 무주로 돌아와 한풍루에 올랐다. 누각 앞에는 장천이 띠처럼 흘렀다.

삼청각에서 묵었는데 누각이 매우 맑고 시원해 정신까지 날아갈 듯 상쾌했다. 신선이 사는 곳에 오른 것 같았다.

삼청각의 맑고 아름다운 경치는 예전부터 많이 들어왔다. 이제 와서 직접 보니 오랫동안 품어왔던 소원을 이룬 셈이었다. 다만 함께 경치를 즐길 벗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수령은 아침저녁으로 밥을 보내주었다. 자미 이윤의 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종 인수의 집으로 갔다. 그에게 노비를 나누게 된 까닭을 이야기했다.

인수와 그의 오촌 조카딸은 우리 집에 나누어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그곳의 노비들은 모두 분배에서 빠진 채 오랫동안 영동의 사촌에게 차지당하고 있었다. 이제 나누어 갖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인수가 매우 기뻐했다.

아침을 먹은 뒤 장계의 손인의 덕남 집에서 묵었다. 다음 날 아침 손공이 두부를 만들어 대접했다.

그날은 이월 스무아흐레로 외할머니의 제삿날이었다. 그날 장천현으로 돌아왔다.

1592년 4월

1592년 4월 13일 (임진년 음력 3월 2일)

남찰방 군실이 부안에서 어머니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급히 이곳으로 달려왔다.

밥 한 끼 먹을 시간도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뒤따라 도착했다. 그는 곧바로 상을 치르러 떠났다.

몹시 슬프고 애통했다.

1592년 4월 28일 (임진년 음력 3월 17일)

관아 사람들이 모두 망운정에 올라 군사들이 진법을 익히는 것을 보았다.

그 뒤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나는 크게 취해 돌아왔다.

이 정자는 예전에 소수라는 사람이 이 고을의 수령으로 있을 때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망운정’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름과 실제 모습이 너무 달라 우습기도 했다.

1592년 4월 29일 (임진년 음력 3월 18일)

아침에 비로소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용성부에 도착하여 동문 안의 민가에서 묵었다. 통판이 우리 일행 모두에게 아침저녁 식사를 보내주었다.

밤이 반도 지나기 전에 집의 대문에서 불이 나 행랑으로 번졌다. 불빛이 창문을 비추어 대낮처럼 밝았다.

놀라 허둥지둥 옷을 챙기고 간신히 이웃집 담을 넘어 몸을 피했다. 종과 말, 짐까지 거의 잿더미가 될 뻔했다.

다행히 바람이 없었고 사람들이 힘을 다해 불을 꺼 겨우 화를 면했다.

듣자 하니 집주인은 재상 집의 종인데 세력을 믿고 나쁜 짓을 많이 해 미워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한 것이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성 남쪽으로 나가 오작교를 건넜다. 광한루의 맑은 경치를 구경하고 싶었지만 수령이 그곳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들어가지 못했다.

곡성 땅에 도착해 선비 신대춘의 정자에서 묵었다.

정자 앞에는 큰 강이 흘렀는데 낙수의 한 갈래였다. 남쪽으로는 넓은 들을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바위산 기슭에 기대 있으며 물결 바로 위에 내려다보듯 서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능파정이라 했다.

신공은 문인 신대수의 아우다. 젊어서 과거 공부를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시골에서 살고 있었다.

자기 말로는 본래 순천 사람인데 을묘년의 난을 겪은 뒤 내륙으로 옮겨 와 옛 농장이 있던 곳에 집을 지었다고 했다.

나를 매우 후하게 대접하며 저녁밥도 내주었다.

다음 날은 비 때문에 멀리 갈 수 없었다.

낙수를 건너 조계산 송광사로 들어갔다. 송광사는 순천 땅에 있는 남쪽 지방의 이름난 절이다. 전부터 많이 들어왔고 오래전부터 한번 올라가 보고 싶었다.

침계루에서 묵었다. 아래로 경당이 내려다보였다.

가운데 법당은 새로 지은 것이어서 단청이 눈부셨다. 붉은 난간 아래로 맑은 물이 둘러 흐르고, 헤엄치는 물고기를 하나하나 셀 수 있을 만큼 물이 맑았다. 푸른 물결을 손으로 움켜쥘 수 있을 듯했다.

선방도 깨끗하고 시원하여 마음과 정신까지 맑아졌다. 정말 뼛속까지 서늘하고 정신이 맑아져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다음 날 아침밥을 먹고 보성군에 도착했다.

보성은 예전에 [원문 훼손] 내가 남자순 형과 함께 놀던 곳이다. 어느덧 삼십 년이 훨씬 넘었다. [원문 훼손]

옛 자취를 다시 보고 싶었지만 수령과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성문까지 굳게 닫혀 있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북문 밖 민가에서 묵었다.

공생 임희령을 찾아보았으나 서울에 올라가 있다고 했다. 그는 예전에 나와 함께 산사에서 지냈던 사람이다.

다음 날 일찍 출발해 장흥부에 도착했다. 성 동쪽 냇가의 정자에서 잠시 쉬었다가 이름을 적어 들여보내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남문 안 민가에 묵었다. 수령은 우리 일행 모두에게 음식을 넉넉하게 내주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나를 불러 함께 밥을 먹었다.

마침 해남 수령 변응정이 순찰사가 있는 곳에서 곤장 열다섯 대를 맞고 돌아온 참이었다. 군무 때문이었다.

변공은 젊어서 글 공부를 하여 초시에서 여러 번 좋은 성적을 냈으나 늦게 활쏘기를 배워 무과에 급제했다. 처음에는 금위군에 들어갔다가 남성의 수령으로 승진했다.

이번에 곤장을 맞는 수모를 당하자 글 공부를 버리고 무인의 길로 간 것을 꽤 후회하는 듯했다.

변공은 나와 혼인으로 맺어진 친척이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이름은 오래전부터 익히 들었다. 내가 이곳에 왔다는 말을 듣고 먼저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으며 매우 정성스럽게 대했다.

그가 성으로 돌아간 뒤에는 화살 만드는 대나무와 표고버섯 등을 구림의 임경흠 집으로 보내주었다. 경흠 역시 윤겸(큰아들)의 어린 시절 친구였다.

관아의 중방 송강도 윤겸과 친하게 지내던 아전이라 날마다 찾아왔다.

이 고을에 사는 우리 집 노비들을 사람을 보내 붙잡아 오게 하고 신공을 바치지 않은 것을 따졌다. 모두 가난하여 마련할 수 없다고 했다.

숨어 있는 여종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며 그 어미에게 매를 쳤지만 끝내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더 심하게 형벌을 주었다가는 죽을까 걱정되어 곧 놓아주었다. 내 우유부단함도 우습다.

숨어 있던 종 덕수는 스스로 나타났다. 이상하여 까닭을 물으니 지금 병영의 임시 나장으로 붙어 있는데 그 일이 너무 고되어 내 힘을 빌려 명단에서 빠지고 싶어서라고 했다.

박효공은 도 관찰사의 사적인 편지를 받아 나보다 하루 먼저 순천에서 이곳에 와 있었다. 말을 듣지 않는 노비들을 찾아내려고 온 것이다.

며칠 동안 함께 이야기하며 객지의 답답함을 꽤 풀 수 있었다. 그는 나보다 먼저 강진으로 떠났다. 박효공은 내 칠촌 조카다.

장흥부는 남쪽 지방의 큰 고을이다. 순찰사가 곧 순시하러 올 예정이라 성을 고치고 못을 파며 군사를 훈련하고 무기를 손질했다. 음식과 좋은 먹을거리도 쌓고 집과 그릇도 말끔히 꾸미며 순찰사의 노여움을 피하려고 온갖 일을 한꺼번에 벌였다.

백성들이 몹시 괴로워했다.

수령은 본래 나와 같은 동네에 살았고 얼굴만 아는 정도였을 뿐 특별히 친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매우 정성스럽게 대하고 길 떠날 비용까지 주었다.

나는 나흘을 머문 뒤 늦게 병영으로 향했다.

장수 사람의 집에서 묵었는데 집주인이 술과 고기를 가져와 매우 후하게 대접했다.

성 안에서 북 치는 소리가 들려 물으니 원수가 과녁에 활을 쏘는 중이라고 했다.

성곽을 다시 쌓으면서 여러 고을의 승군까지 모아 돌을 끌게 했다. 힘쓰는 고함소리가 산골짜기를 뒤흔들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바로 매질이 이어지니 사람들이 모두 원망하고 괴로워했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영암군에 도착했다.

영암 역시 예전에 숙부가 수령을 지낸 고을이다. 나도 자순 형과 숙부를 따라와 반년 동안 이곳에 살며 많이 놀았다.

이제 다시 온 것이 이십여 년 만이었다.

예전에 관기였던 춘화를 불러 옛일을 물으니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숙부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다. 옛일을 떠올리니 슬픈 마음이 많이 일었다.

돌아올 때 수령이 여행 비용을 주었다.

점심을 먹은 뒤 지림촌에 사는 임씨 집에 시집간 누이의 집으로 갔다.

누이는 내가 문 앞에 왔다는 말을 듣자 중문 밖까지 맨발로 뛰어나왔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곧 슬픔이 북받쳐 서로 마주 보며 크게 울었다.

그 집에서 아흐레를 머물렀다.

죽도에 가서 고기 잡는 것을 구경하기도 했고, 도갑사에 가서 두부를 만들어 먹으며 놀기도 했다.

박경인 형제와 박성이 형제 등과 집 앞 초가 정자에 모여 바둑을 두며 즐겁게 지냈다.

헤어지기 전날 밤에는 누이가 소를 잡아 음식을 마련하고 술과 음악을 곁들였다.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며 아주 즐겁게 놀다가 자리를 마쳤다.

함께한 마을 사람은 대여섯 명이었다. 직장을 지낸 어른이 윗자리에 앉았고, 광산에 사는 박천정도 함께했다. 그의 자는 응순이었다.

응순은 친척 응선 때문에 이 마을로 옮겨 왔으며 아내가 병을 앓고 있어 찾아와 있었다. 응선은 아내가 아파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다.

응선은 남쪽 지방에서 이름난 인물인데 여러 차례 과거에 떨어졌고 집안까지 가난하여 운수가 몹시 사나웠다. 안타까운 일이다.

응순은 내가 북쪽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자기 집이 광산으로 가는 길가에 있으니 꼭 들르라고 여러 번 당부했다. 그런데 내가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길로 가는 바람에 그 집 앞을 지나지 못했다.

약속을 크게 어겼다. 그는 틀림없이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부끄럽고 후회스럽지만 어쩌겠는가.

아흐레 동안 술에 취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육지와 바다의 진귀한 음식이 끊이지 않았다.

내 배만 실컷 채운 것이 아니라 종들까지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에 싫증이 날 정도였다.

누이가 아무리 나를 지극히 대접하고 싶었다 해도 임경흠의 정성이 없었다면 어떻게 혼자 이 모든 것을 마련했겠는가.

내 친형제자매는 모두 서울에 있는데 이 누이만 남쪽 끝에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 부모와 형제에게서 천 리나 떨어진 곳에서 이번에 만났으니 앞으로 또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헤어지는 날 누이도 울고 나도 울었다. 서로 마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람의 삶이 이런 지경에 이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누이는 손수 치마와 버선을 만들어 떠나는 나에게 주었다.

1592년 5월

1592년 5월 19일 (임진년 음력 4월 9일)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억지로 떼어 길을 떠났다.

남평의 시골집에서 묵었다.

지름길로 가다가 짐을 실은 말이 논에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이불과 잠자리가 모두 젖었다.

다음 날 능성을 지나 화순현 앞의 원 누각에서 잠시 쉬며 말에게 먹이를 먹였다.

광산의 경양역에 도착해 묵었다.

찰방 김여봉과는 같은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사이지만 마침 사신을 모시고 가느라 자리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창평에 도착했다.

창평 수령 심사화, 곧 심언은 내 재종형이다. 마침 병으로 휴가를 내어 관아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겨우 이름을 적어 들여보내자 나를 관아 안으로 불러 누운 채 만나주었다.

임직보의 아들 장숙 일가도 사화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와 있었다.

사화 형제는 내 인척이면서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서 지낸 벗이다. 천 리 밖에서 뜻밖에 다시 만나니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관아 방에서 함께 자면서 밤새도록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은 여행 비용도 넉넉히 주었다.

다음 날 일찍 출발하여 옥과를 지나 큰 고개를 넘고 밤길을 무릅써 다시 용성부에 도착했다.

전에 묵었던 집에서 잤다.

새벽에 길을 떠났다. 얼마 가지 않아 냇가에서 밥을 지어 먹고 풀이 무성한 곳에 말을 풀어놓았다.

흰 돌과 맑은 물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발과 손목을 씻어 먼지를 털어내니 가슴까지 시원하고 상쾌했다.

수분원에 도착했다. 그곳은 장수 경계 안이었다.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1592년 5월 23일 (임진년 음력 4월 13일)

장천에 달려 도착했는데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나는 본래 서울 사람인데 이곳에서 객지 생활을 한 지 이제 넉넉히 넉 달, 다섯 달이 되어간다.

이곳 사람들은 처음과 다름없이 나를 대해주었다.

남쪽으로 여행을 떠난 뒤 돌아오면서 이 고을을 바라보니 마치 내 고향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이제 다시 고을 경계 안으로 들어오니 마음이 기뻤다. 사람의 정이란 이런 것이다. 다른 고장에서 오래 살다 보면 그곳을 고향처럼 느낀다는 말이 정말 맞다.

이시윤이 이틀 전에 서울로 돌아갔다고 한다.

내가 서둘러 달려온 것도 그의 출발에 맞추려 했기 때문인데 끝내 만나지 못해 몹시 아쉬웠다.

1592년 5월 26일 (임진년 음력 4월 16일)

[원문 훼손] 부산 앞바다에 왜선 수백 척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저녁에는 부산과 동래가 모두 함락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너무나 놀랐다.

성을 지키는 사람들이 굳게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592년 5월 27일 (임진년 음력 4월 17일)

현의 아전 전천우가 서울로 올라갔다.

그에게 집으로 보내는 편지와 제사에 꼭 필요한 물품 몇 가지를 맡겼다.

내 종이 스무아흐렛날 제삿날에 맞추어 도착하지 못하여 늙으신 어머니께 걱정을 끼칠까 두려웠다.

1592년 5월 29일 (임진년 음력 4월 19일)

두 종에게 말을 주어 서울로 올려보냈다.

이때부터 영남에서 들어오는 급보가 아침저녁으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어졌다.

용맹하다는 장수와 사나운 군사들마저 적의 소문만 듣고 먼저 무너졌다.

큰 고을과 튼튼한 성들이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왜적은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곧바로 서울을 향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기를 마치 사람 없는 땅으로 들어오듯 했다.

신립과 이일은 조정에서 굳게 믿고 있던 장수들이었다. 지휘권을 받아 적을 막으러 갔으나 중도에서 패했다.

조령의 험한 길을 잃었고 왜적은 충주까지 들어왔다.

임금은 서쪽으로 피란하셨고 도성은 지키지 못했다.

아아, 우리 백성들은 모두 흉악한 칼날 아래 피를 흘리게 되었다.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은 떠돌며 흩어졌고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밤낮으로 울 뿐이다.

두 종을 서울로 보낸 뒤로 큰길의 군사들이 길 가는 사람들의 말을 빼앗는다고 한다.

이시윤이 관아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내려올 때 은진 마야에서 두 종과 마주쳤다고 하는데 그 뒤로 어디까지 갔는지 소식을 듣지 못했다.

걱정이 더욱 커졌다.

두 종이 서울까지 도착하기만 했다면 왜적이 강을 건너기 전에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듣자 하니 스무이렛날부터 도성 문을 굳게 닫아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1592년 6월 9일 (임진년 음력 4월 30일)

새벽에 임금께서 종묘와 사직을 떠나 서쪽으로 피란하셨다고 한다.

1592년 6월 12일 (임진년 음력 5월 3일)

왜적이 도성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 사이 이삼 일 동안 온 도성의 남녀가 서로 성문 밖으로 빠져나오려 했고, 서로 밟혀 죽은 사람도 있으며 앞뒤로 흩어져 가족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길에서 들은 이야기라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 상황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법하다.

통곡할 곳조차 없다.

임금께서 도성을 굳게 지키며 장수를 임명해 방어하게 하고 강의 위아래에 나무 울타리를 많이 세운 뒤 배를 먼저 가라앉혀 적이 건널 길을 끊었다면, 적이 아무리 강하고 날쌔도 어찌 날아서 강을 건넜겠는가.

그런 계책을 쓰지 않고 먼저 물러나 피하셨으니 너무나 애통하고 안타깝다.

더구나 우리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은 평생 집 앞길조차 제대로 다녀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하루아침에 피란길에 나섰으니 걸어가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어느 길 어디쯤에서 서로 모여 울고 있을까 생각하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죽고 싶은 심정이다.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두 아들이 반드시 미리 피할 곳을 마련해 두었으리라는 생각뿐이다.

또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은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니 틀림없이 내가 죽은 줄 알고 있을 것이다.

윤함(셋째 아들)도 해서의 처가에 있으니 부모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 못해 틀림없이 통곡하고 있을 것이다.

예전에 역사책을 읽다가 난리 속에서 사람들이 동서로 흩어져 제각기 살길을 찾아 도망가고 부모와 아내와 자식, 형제와 친척이 서로 지켜주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책을 덮고 가슴 아파한 적이 있었다.

오늘 내가 직접 이런 일을 겪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이 고을은 아직 급박한 전쟁 소식이 없어 아침저녁으로 예전처럼 음식을 내준다.

그러나 밥상을 마주할 때마다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지금 어느 땅, 어느 산에서 굶주리며 겨우 입에 풀칠하고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을까.

생각할 때마다 목이 메어 통곡하고 눈물이 마구 흐른다.

어찌 마음 편히 숟가락을 들어 밥을 삼킬 수 있겠는가.

하늘이여, 땅이여. 참으로 끝없는 고통이다.

영남 사람에게 들으니 왜적이 난을 일으키게 된 데에는 [원문 훼손] 민심이 흩어져 막을 수 없었던 사정도 있다고 한다.

경상 감사 김수는 지난해 초부터 농사짓는 백성을 많이 끌어다가 지켜내지도 못할 성을 쌓게 했다.

올봄까지도 공사가 끝나지 않아 농사철을 놓쳤고 백성의 원망과 고통이 길에 가득했다.

마침내 이런 노래까지 생겼다고 한다.

굽은 성 높이 쌓아
누가 적을 막을 것인가.
성이 성이 아니라
백성이 곧 성인데.

경상 좌도 병사 신길은 군대의 위엄을 세우겠다며 큰 몽둥이를 준비하고 솥에 물을 끓여두기까지 하면서 가는 곳마다 혹독한 형벌을 내렸다.

매를 맞아 죽은 사람이 많았다.

사람마다 원한을 품어 오히려 적이 오기를 기다릴 지경이었다.

그러다 하루아침에 난리가 나자 임금과 부모의 치욕을 씻겠다며 의롭게 일어나 적을 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숲속으로 도망쳐 잠깐이라도 목숨을 보전하려고 했다.

영남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도의 민심도 마찬가지다.

군사를 징발하라는 명령이 오기도 전에 먼저 흩어질 생각부터 한다.

헛소문이 끊임없이 퍼져 사람들의 마음이 정착하지 못한다.

집의 물건을 미리 묻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놓고 적이 오기만 하면 달아날 준비를 한다.

군적에 이름이 있는 사람도 집에서 먼저 도망가거나 가는 길 중간에 되돌아 달아난다.

완산 통판 이성임이 우주창에 군사를 주둔시켰다가 하루아침에 모두 흩어졌다고 한다.

전 첨사 백광언도 금구현 군사를 거느렸지만 그 군사들도 모두 달아났다고 한다.

아아, 사람의 마음이 이 지경이라면 제갈공명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어떻게 수습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애통하다.

얼마 전 순찰사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구원군을 이끌고 공산에 머물렀다가 임금께서 피란지를 옮기셨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흩어버리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때 곧바로 경기로 올라갔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깊은 참호를 파고 높은 보루를 쌓아 적과 함부로 싸우지 않더라도 요충지를 막아 적이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게 하고, 도성 안의 군사와 바깥 군사가 서로 돕는 형세를 만들었다면 서울도 믿고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사방의 군사도 계속 도착했을 터이다.

그러면 적이 아무리 기세가 대단해도 멀리 적진 깊숙이 들어온 상태에서 앞뒤로 곤란해져 열흘이나 한 달이 되기 전에 스스로 무너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군량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며 먼저 진영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이처럼 치욕을 당했으면 신하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

윗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니 아랫사람도 따라 한다. 그러면서 어떻게 군졸들이 달아난 것만 죄 줄 수 있겠는가.

역사의 엄정한 기준으로 논한다면 순찰사도 엄한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아무리 가슴 아파도 어찌하겠는가.

조금 마음을 놓게 하는 것은 여러 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뽑은 군사들은 눈치를 보다가 절반쯤 달아났다고 하니 어떻게 큰일을 이루겠는가.

평화로울 때 나라의 녹을 먹던 자들은 저마다 자신을 꾸미며 충성을 다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처럼 위태로운 때가 되니 임금과 나라의 치욕은 생각하지 않고 먼저 자기 목숨을 늘릴 곳부터 찾는다.

수백 년 이어온 종묘사직이 어디에 머무르게 될지조차 알 수 없다.

아무 쓸모 없는 늙은 선비인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길게 탄식하며 분하고 슬퍼 눈물만 흘릴 뿐이다.

난리가 난 뒤로 잠도 잊고 밥도 잊었다.

한밤중에도 잠들지 못한다.

흰 달빛이 창문을 비추면 뜰에 나가 갓을 벗고 머리를 드러낸 채 하늘에 기도한다.

“다시 한번 늙으신 어머니를 뵐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하늘과 땅이 정말 내려다보고 있으니 반드시 내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두 종을 서울로 보내기 전에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가벼운 차림으로 혼자 말을 타고 올라갔을 것이다.

그러면 가족이 떠나기 전에 도착하여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을 등에 업고, 짐을 이고,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함께 고생했을 것이다.

굶으면 함께 굶고 먹으면 함께 먹고, 죽으면 함께 죽고 살면 함께 살면서 온갖 쓰라림을 같이 겪었을 것이다.

아무리 고생이 심한들 무엇이 걱정이고 무엇이 후회였겠는가.

나는 편안한 곳에서 예전처럼 자고 먹는데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과 누이들만 이런 고통을 겪게 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함께 들판에서 자고 풀뿌리를 먹고 싶지만 그럴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면 오래 통곡하다 숨이 끊어질 듯하다.

왜적이 도성에 들어간 뒤 군사를 풀어 사방으로 약탈한다고 한다.

산을 뒤지고 숲을 샅샅이 수색한다면 산골짜기에 숨어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생각할수록 통곡할 뿐이다.

늙으신 어머니는 평소에도 마음이 편치 않은 일이 조금만 생기면 하루 종일 음식을 물리시곤 했다.

이 큰 난리를 겪고 있으니 마음이 얼마나 상하셨겠는가.

끝없는 은혜를 생각하면 어찌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내는 본래 다리가 아파 가까운 거리도 잘 걷지 못했다.

전쟁을 피해 이리저리 떠돌며 산과 강을 건너야 하니 얼마나 고생스럽겠는가.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의 정을 생각하면 어찌 가슴이 막히지 않겠는가.

큰딸과 둘째 딸은 여자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집이 가난하여 죽조차 제대로 이어 먹지 못했지만 배부른 것을 바라지도 않았고 따뜻하게 입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어른의 뜻을 잘 받들어 한 번도 거스른 일이 없었다.

나는 늘 두 딸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겼다.

막내딸 숙단은 얼굴이 곱고 성품도 매우 단정했다.

내가 특히 사랑하던 아이였다.

그 고운 모습이 눈에 선하여 자나 깨나 보이는 듯하다.

막내딸을 가엾게 여긴다는 옛 시구가 내 마음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 같다.

이 두어 줄을 쓰는 동안 슬픈 눈물이 저절로 종이를 적신다.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인아는 성품이 게으르고 부지런하지 못했다.

지난해 초봄에 내가 너무 심하게 매를 때렸다.

오늘에 와서 생각하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우 희철은 혼자 큰 난리를 맞아 어머니를 모시고 달아났을 것이다.

어떻게 무사히 빠져나왔을까.

제수는 몸이 약하고 원래 두통이 있으며 젖먹이까지 데리고 있다.

난리통에 어떻게 모두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남상문 누이는 아마 적성의 중온 집으로 달아갔을 것이다. 그곳이라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씨 집에 시집간 누이는 딱히 피할 곳이 없지만 자정 김정남이 있으니 몸을 피할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가족이 갈 만한 곳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동서로 어디를 가든 안전한 곳이 하나도 없다.

심설이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강릉으로 빠져나갔다면 그나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 없다.

내 아내와 자식들은 윤겸 형제가 서울에 있으니 틀림없이 함께 죽고 살려고 했을 것이다.

다만 윤겸은 광릉의 임금 초상화를 지키고 있었으니 한 집안의 사정 때문에 임무를 버리고 올 수도 없었다.

그의 처가에는 남자가 없으니 처가 식구도 내버려둘 수 없다.

윤해도 모시는 양어머니와 아내와 자식이 있다.

갑자기 난리가 터진 상황에서 서로를 다 돌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걸을 수 없는 젖먹이들이 여럿이다.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신주는 아우가 어떻게 했을까.

깨끗한 곳에 묻었다면 그나마 방법이 되었겠지만 가지고 다녔다면 온전히 보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종가에 모신 선조들의 신주는 믿고 맡길 사람이 없다.

그대로 두고 피했다면 불에 타버렸을 것이니 그것 역시 걱정이다.

우리 집안 안팎 식구가 줄잡아 백 명이나 된다.

난리를 피해 달아나는 동안 모두 제 목숨을 구하려 흩어졌으니 누가 살아 있고 누가 죽었는지 알 수 없다.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 아우와 누이들 외에는 미처 하나하나 걱정할 겨를도 없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들에 대한 걱정도 남아 있다.

1592년 6월 5일 (임진년 음력 4월 26일)

이 고을에서 서울의 일을 맡아보던 종이 서울을 떠났다가 그믐날에야 이곳에 도착했다.

어머니와 아내의 편지도 가져왔다. 모두 스무날에 쓴 것이었다.

그때는 아직 난리가 지금처럼 급박하지 않았는데도 편지에 걱정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가득했다.

끝까지 읽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렀다.

어머니의 편지에는 자신이 이미 이런 참혹한 일을 겪을 줄도 모르고 먼저 내 몸과 영암의 임씨 누이가 객지에 흩어져 있는 일을 걱정하고 계셨다.

더욱 통곡할 일이다.

그 편지를 서랍 속에 간직했다.

가끔 꺼내 읽으면 시름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고 슬픈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그 뒤로 우리 집 소식만 완전히 끊긴 것이 아니라 서울의 소식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난리 중에는 집에서 온 편지 한 장이 금덩이보다 귀하다는 말이 바로 이런 뜻일 것이다.

하늘이 이 재앙을 거두고 왜적의 운수가 끝나기를 바란다.

역대 임금의 신령이 몰래 도와주시고 여러 장수가 힘을 합쳐 더러운 적을 재빨리 쓸어버렸으면 한다.

궁궐을 깨끗이 되찾고 임금께서 서울로 돌아오셔서 종묘사직을 다시 안정시키고, 모든 백성이 집으로 돌아가 생업을 편안히 이어가게 되기를 바란다.

나도 다시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 아우와 누이, 친척들과 만나 술을 따라 마시며 피란 중 겪은 고생을 서로 이야기하고 싶다.

“오늘 다시 서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말할 날이 온다면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는가.

과연 그런 날을 살아서 볼 수 있을까.

나는 밤낮으로 천지신명께 빌고 또 빈다.

사람과 하늘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지극한 정성은 신명을 움직일 수 있다.

한 여인의 원한만으로도 삼 년 가뭄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물며 지금 조선 온 나라에서 칼과 화살에 맞아 죽어 시체가 들판에 널린 사람이 몇만인지 모르고, 숲속으로 달아나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노숙하는 사람이 몇만인지 모르는데 어찌 하늘이 움직이지 않겠는가.

홀아비와 과부의 원한, 굶주려 골짜기를 메우는 백성들의 억울함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하늘도 틀림없이 마음을 돌려 이 재앙을 거두실 것이다.

난리가 난 뒤로는 무엇을 보아도 슬픈 생각이 든다.

벌레와 풀과 나무 같은 미물까지도 모두 내 마음을 건드린다.

뜰 앞에서는 까치 어미와 새끼가 서로 따라다니며 재잘거리고 날갯짓을 하면서 먹이를 주고받으며 즐거워한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저렇게 즐거울 수 있는 것일까.

담 밑의 붉은 접시꽃도 활짝 피어 해를 향해 몸을 기울인다.

사람 가운데 어질지 못한 자들은 오히려 저 꽃만도 못하다.

무엇을 보든 마음이 움직여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시국을 슬퍼하니 꽃을 보아도 눈물이 난다는 옛 시인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었으리라.

옛날 당나라 임금이 서쪽으로 달아났을 때나 송나라가 남쪽으로 피란했을 때도 참혹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두 임금은 간사한 사람을 믿고 술과 여색에 빠져 백성의 원망을 쌓고 결국 오랑캐에게 화를 불러들였다.

나라가 무너지고 백성이 도탄에 빠진 것은 스스로 불러온 면이 있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 임금께서는 왕위에 오른 뒤 스무 해가 넘도록 밖으로 사냥을 즐기지 않았고 안으로 음악과 여색에 빠지지도 않았다.

밤낮으로 정사를 살피며 부지런히 쉬지 않으셨다.

명나라를 섬기는 데 지극한 정성을 다했고 이웃 나라와도 믿음으로 사귀었다.

그런데 어찌 오늘날 섬나라 왜적이 독기를 부려 성을 무너뜨리고 장수를 죽이며 곧장 서울까지 함락하게 되었는가.

수많은 집이 있던 서울은 이미 짐승 같은 적의 소굴이 되었고 예의와 문물이 찬란하던 땅은 온통 더러운 기운에 물들었다.

임금께서는 이미 신하들에게 나라를 구하라고 간절히 명하셨다.

그러나 조정에는 충성을 다해 죽으려는 신하가 없고, 관찰사가 군사를 모으려고 격문을 간절히 내렸지만 여러 고을에는 앞장서 응모하여 난리에 뛰어드는 사람이 없다.

의병을 일으켜 두 서울을 되찾은 옛 영웅과 같은 사람은 어디 있는가.

한 번 손을 휘둘러 강을 건너 적지를 쓸어버린 충용한 장수는 누구인가.

제 몸 하나 살리려고 구차하게 목숨만 보전하려는 사람이 세상에 가득하다. [원문 일부 훼손]

박진은 적진으로 갑자기 뛰어들어 왜적 열 명 남짓을 마구 베고 돌아왔다고 한다.

또 성산에서도 곧바로 적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적의 머리를 베어 매달고 나왔다고 한다.

통쾌하다. 참으로 용사라고 할 만하다.

또 들으니 경상 우수사 원균은 지난달 중순 왜선 열여 척을 불태워 부쉈다고 한다.

경상 좌수사 이순신은 이달 초 여러 배를 거느리고 우수사와 함께 왜선 마흔두 척을 불태워 없앴다.

포로로 잡혔던 우리 사람 두 명을 살아서 구했고 적의 머리 세 개를 베었다.

나머지 왜적은 앞다투어 물로 뛰어들어 헤엄쳐 육지에 오른 뒤 숲속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안타까운 점은 그 기세를 타고 곧바로 부산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배를 지키는 적은 많지 않았을 것이고, 붙잡혀 간 우리 남녀도 그곳에 많이 있었을 것이다.

적이 우리 배들이 오는 것을 알았다면 틀림없이 육지로 올라가 흩어졌을 것이니 빈 배를 모두 불태울 수 있었을 것이고 붙잡혀 있던 사람들도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임금께서 피란하셨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며 군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겁을 낸 것이다.

이때 임금께서 잠시 도성을 떠나신 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나라의 성패만 생각했다면 남은 치욕이라도 조금 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거의 이루어질 공을 마지막 한 번의 노력 때문에 놓쳤으니 더욱 애통하고 안타깝다.

또 경상 방어사 조경이 금산 싸움에서 적의 공격을 받자 곧장 적의 허리를 끌어안고 뒤엉켜 싸웠다고 한다.

그때 그의 군관이 달려가 적의 머리를 베었다.

조경은 손과 옆구리만 다쳤다고 한다.

1592년 6월 25일 (임진년 음력 5월 16일)

처남 이윤이 의병을 거느리고 진안에 도착했다.

군사 일고여덟 명이 달아나 돌아오자 그들의 부모와 아내를 가두고 이웃 친척들까지 붙잡으니 돌아와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 많았다.

이 고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여러 고을의 군사 가운데 달아나는 사람이 아주 많다.

남원 군사는 삼례에 진을 쳤다가 한꺼번에 흩어졌다.

순창 군졸들은 가는 도중 반란을 일으켜 따로 진을 만들고, 다른 고을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군사들을 자기 진으로 몰아넣은 뒤 무기와 군량을 빼앗았다.

장성 수령 백수종까지 그들에게 위협받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한다.

백성들이 군역을 싫어하는 마음을 이용해 불의한 일을 벌이려 한 것이다.

순창 수령이 우두머리인 숙질을 꾀어 진 밖으로 끌어낸 뒤 궁수들을 매복시켜 길에서 쏘아 죽였다.

나머지 무리는 모두 흩어졌다고 한다.

자세한 사실은 모르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애통하다.

그 뒤 흩어진 군사들이 조금씩 다시 모여 방어에 나섰다.

이들은 큰길을 따라 곧장 북쪽으로 올라갔다.

순찰사 이광은 용안에서 강을 건너 충청도 안쪽 길로 올라갔다.

모두 이달 스무날 본도를 떠났다고 한다.

왜적이 경상도에 들어온 뒤 적의 길잡이가 된 사람이 많다고 한다.

어떤 자들은 무리를 지어 왜적 행세를 하며 마을에 난입했다.

사람들이 달아나면 재물을 빼앗는 자도 많다고 한다.

의병이 떠난 뒤에는 장맛비가 그치지 않아 냇물이 불어났다.

큰 군대가 비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으니 원망과 고생이 많을 것이다.

화살의 깃이 풀어지고 활도 힘을 잃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 군사의 장점은 활과 화살인데 이것마저 이 지경이면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푸른 하늘조차 의로운 쪽을 돕지 않는 듯하다.

하늘의 뜻을 믿기 어렵다지만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탄식하고 손목을 쥐며 분통해할 뿐이다.

영동의 의로운 선비들이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모아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고 일어났다고 한다.

글을 만들어 널리 알리고 여러 의로운 사람과 함께 일을 일으키려 한다.

지난 열이렛날 그곳 활터에 모여 의논했다고 한다.

고부의 의로운 선비들도 글을 만들어 여러 고을에 돌리고 한 도의 의로운 선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려 한다.

이달 스무이렛날 완산 삼례 앞에 모일 것이라고 한다.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미리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의기를 들으니 늙고 쓸모없는 선비인 나는 객지를 떠돌며 도울 힘이 없어 그저 감탄하고 부러워할 뿐이다.

이 장천현은 산골 깊숙이 있는 작은 고을이라 사람이 적다.

열 집뿐인 마을에도 충성스럽고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두 곳에서 온 격문이 이곳까지 여러 번 왔어도 일어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참으로 한탄스럽다.

1592년 7월 4일 (임진년 음력 5월 25일)

오늘은 늙으신 어머니의 생신이다.

평소 같으면 우리 형제자매가 각자 술과 떡을 마련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밤새 이야기했을 것이다.

지금은 어디로 떠돌고 계시며 누구와 모여 울고 계실까.

옛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비처럼 쏟아진다.

지난 열아흐렛날 밤에는 꿈에서 아내를 보았다.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남쪽으로 내려온 뒤 한 번도 꿈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오늘은 무슨 까닭으로 꿈에 보였을까.

살아 있는가, 죽었는가.

슬프고 또 슬프다.

1592년 7월 1일 (임진년 음력 5월 22일)

이날은 장인의 제삿날이었다.

종윤 형제와 함께 제사를 지냈다.

처남 이윤은 군사를 거느리고 여산까지 갔기 때문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달 초에는 원중성이 경상 우수영에서 난리를 피해 이곳으로 왔다.

곧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길이 막혀 가지 못했다.

여러 날 밤낮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꽤 위로되었다.

그러나 관가에 오래 머물러 밥을 얻어먹는 것을 미안해해 이 고을에 사는 숙부 집으로 옮겨가 묵었다.

가끔 나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갔다.

양재역 아전 임언복도 초봄에 일 때문에 영남에 갔다가 난리를 피해 지난달 스무날이 지나 이곳으로 왔다.

서울로 돌아갈 수 없어 이곳에 머물고 있다.

언복의 집은 역관 동쪽에 있어 내가 오가며 자주 돈을 내고 묵던 곳이다.

처남 이윤이 진위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옛 집주인이기도 하다.

이윤은 그를 매우 후하게 대하며 관아 곡식도 넉넉히 주었다.

그러나 임언복은 오랫동안 관청 곡식을 먹는 것을 미안해해 지금은 환곡을 받아 그것으로 먹고 있다.

먼 곳으로 피란해 가족이 흩어진 처지가 나와 비슷하다. 다만 그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안 계실 뿐이다.

전부터 서로 알던 사이였고 토당산이 사는 곳에서 멀지 않아 만나자마자 옛 친구 같았다.

날마다 관아로 와 나와 이야기를 나누니 객지에서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또 성주 목사 이덕설의 후처는 김태초의 막내딸이다.

지난 사월 스무날이 지나 난리를 피해 산으로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된 뒤 적군이 사방으로 흩어져 사람을 잡으러 다니자 간신히 빠져나왔다.

걷기도 하고 말을 타기도 하면서 산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 이제야 이곳까지 왔다.

용성의 옛 농장으로 돌아가려 한다고 했다.

태숙의 둘째 아들이 함께 왔는데 왜적의 기세가 얼마나 사나운지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의 아우는 뒤처져 오지 않았는데 밥 한 끼 먹을 무렵 뒤이어 나타났다.

적에게 공격받다가 간신히 빠져나왔으며 목에는 칼자국이 나 있었다.

듣자 하니 사랑하는 기생과 떨어지기 싫어 산속 피란처에 함께 데리고 있다가 누이와 같이 오지 않아 이런 일을 당했다고 한다.

태숙은 나와 인척이고 같은 고향 사람이므로 그 아들들도 나이는 어리지만 서로 알고 지냈다.

이 소식을 들은 뒤로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동요했다.

관아 사람들도 멀리 피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먼저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관아 안에 묻고, 그 뒤 옷가지는 현사 마룻바닥 아래 묻었다.

한 달이 지난 뒤 며칠 전에 관아 안에 묻은 것을 다시 파보니 절반가량이 젖어 어떤 것은 썩어 쓸 수 없었다.

현사에 묻은 것은 흙이 예전처럼 말라 있었다.

관아 안쪽은 낮아 물기가 많기 때문이다.

내 옷 몇 벌도 현사 안에 들어 있다.

아내 쪽 집안의 서모는 이달 초 영진을 데리고 먼저 석천사로 들어갔다.

관아 식구들이 난리를 피하려고 정해둔 곳이다.

선윤 형제도 함께 절로 올라갔다.

현에서 반나절 거리에 큰 고개가 있고 고개를 넘을 때는 말로 갈 수 없어 걸어서 올라야 한다. 고개가 몹시 높고 가파르기 때문이다.

이 고을 안에서 난리를 피하기에는 이 절만한 곳이 없다.

다만 고개 위에 오르면 아래에서 훤히 보이는 것이 흠이다.

그래도 절 뒤에 깊은 골짜기가 있어 적이 이곳까지 침범하면 다시 깊숙이 피할 수 있다.

그래서 이응일과 종윤을 먼저 보내 숨을 만한 곳을 살펴보고 나무를 엮어 집의 뼈대를 만들어두게 했다.

급할 때 지붕만 덮어 피하려는 것이다.

성산의 안주인이 산으로 들어갔을 때 적이 산을 포위하고 샅샅이 수색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주와 군이 함락되었고 산으로 피한 사람들까지 찾아내 죽이고 약탈했다고 한다.

성산의 피해가 특히 참혹하다고 한다.

자식이 있는 관아 여종들도 미리 산마루로 보냈다.

형수는 적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피할 생각이다.

관아 식구들이 먼저 달아나면 온 고을이 겁에 질릴 것이므로 상황을 좀 더 지켜보려는 것이다.

또 왜적은 영남의 여자들 가운데 얼굴이 고운 사람들을 골라 배 다섯 척에 가득 싣고 먼저 일본으로 보냈다고 한다.

머리를 빗고 화장하라고 시키고 따르지 않으면 곧 화를 내니 모두 죽을까 두려워 억지로 따랐다고 한다.

그들은 먼저 성폭행을 당한 여자들이라고 했다.

왜적의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들은 여러 적이 차례로 성폭행한다고 한다.

너무나 참혹하다.

이 이야기는 이 고을의 복병장 김성업이 포로로 잡혔다가 빠져나온 사람에게 직접 들었다고 하니 거짓은 아닐 것이다.

앞서 금산 싸움 때 한 여자도 적에게 붙잡혀 창고 안에 갇혔다.

전투가 끝난 뒤 나와 살려달라고 빌었다.

사는 곳을 물으니 처음에는 숨기다가 뒤에 사실대로 말했다.

본래 성주에 사는 선비의 아내인데 왜적이 갑자기 마을에 들어와 시어머니와 함께 달아나다 붙잡혀 이곳까지 끌려왔다고 했다.

여러 왜적에게 차례로 성폭행을 당해 고통을 견딜 수 없었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했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치마도 없이 찢어진 옷자락만 허리에 묶고 있었는데 몸이 심하게 다쳐 제대로 걷지 못했다고 한다.

참으로 참혹하고 또 참혹하다.

우리 고을에서 군사로 나갔던 사람이 직접 보고 돌아와 이야기한 것이다.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지난 십 년 동안 남북에서 거듭 난리를 당했고 올해 그 극에 이르렀다.

계미년 겨울에는 북쪽 오랑캐가 경원을 침범하여 성을 지키지 못했다.

정해년 봄에는 남쪽 왜인이 말썽을 일으켜 손죽도에서 패했다.

기축년 늦가을에는 역적 정여립이 본래 임금 가까이에서 일하던 신하이면서 몰래 임금을 배반할 마음을 품고 해서의 어리석은 백성들과 반란을 꾀했다.

일이 드러나 처형되었고 그 일에 연루된 사대부들이 줄줄이 죽임을 당했다.

애통하고 또 애통하다.

1592년 7월 5일 (임진년 음력 5월 26일)

처남 이윤이 의병을 거느리고 금강까지 가서 군사를 넘겨주고 오늘에야 돌아왔다.

그에게 들으니 도성에 들어간 왜적들은 발이 붓고 기운이 빠져 밤이면 여기저기 흩어져 깊이 잠든다고 한다.

상금을 걸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 쉰 명을 뽑아 어둠을 틈타 들어가 마구 베도록 지난 초여드레에 보냈다고 한다.

[다음 한 면은 원문이 잘려 있다.]

왜군이 십만 명은 넘을 것이라고 한다.

지혜와 용기를 갖춘 장수 두세 명만 있어 강한 활과 쇠뇌를 잘 쏘는 군사를 골라 험한 곳을 막고 적이 쉽게 넘어오지 못하게 하며, 별동대를 사이사이에 보내 뒤를 끊는다면 적 역시 사람인 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다.

어찌 이토록 빠르게 밀고 내려올 수 있었겠는가.

장수다운 장수가 없다는 사실을 여기서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아아, 애통하다.

또 들으니 영남 선비 곽재우가 혼자 용기를 내어 용사 네 명을 거느리고 적선 세 척을 뒤쫓았고, 그 뒤 다시 열세 명을 거느리고 열한 척을 공격해 몰아냈다고 한다.

황간을 차지하고 있던 왜적 기병 서른여 명이 영동에 쳐들어와 먼저 마을을 불태우고 함성을 지르며 난입했다.

품관 두 사람과 관아 사람 몇 명이 쫓아가 마구 활을 쏘자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그 뒤 오륙십 명의 적이 다시 침범했다.

현감이 궁수 예닐곱 명만 거느리고 활을 마구 쏘아 맞아 죽은 적이 몇 명 있었다.

적이 물러나 북쪽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두 무리로 나뉘어 앞뒤에서 쳐들어왔다.

군사가 겨우 예닐곱 명이라 막을 수 없어 산 위로 물러났다.

왜적은 창고지기 한 사람을 죽이고 관아 창고와 객사를 모두 불태운 뒤 돌아갔다.

용사 서른 명만 한마음으로 힘껏 막았더라면 적이 그렇게 쉽게 들이닥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 성산 성에 들어가 있는 왜적도 백여 명밖에 되지 않는데 자기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을 목사로 삼고 우리나라 승려 한 사람을 판관으로 삼아 관곡을 나누어주며 민심을 사려 한다고 한다.

백성들은 앞다투어 곡식을 받고 엎드려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면서 어떤 자는 “새 상전이 나를 살려주었다”고까지 한다고 한다.

길에서 들은 말이라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듣기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아 밥 먹는 것조차 잊을 지경이다.

[다음 일부 원문 훼손]

합천, 초계, 고성, 진주 등에서는 육지의 도적들이 크게 일어나 대낮에도 관아 창고를 턴다고 한다.

이는 대부분 흩어진 군사들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무리를 지어 도적이 된 것이다.

환곡을 나누어주고 여러 방법으로 타일러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안정해 살게 하되, 끝까지 반란을 그치지 않는 군졸은 장수를 정해 토벌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달 스무닷샛날 운봉에서 전해온 글에 따르면 초유사 김성일이 진주에 있으면서 여러 고을에 비밀리에 알렸다고 한다.

창원에 있는 왜적들이 전라감사, 어사, 도사, 찰방이라 거짓으로 일컬으며 스무이틀이나 스무사흘쯤 길을 떠나 단성, 함안, 의령, 함양, 운봉, 남원, 임실을 거쳐 전주로 갈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몹시 놀랍지만 사실이 아닌 듯하다.

왜적이 미리 통문을 보내고 영남 여러 고을을 지나 호남으로 온다면 당연히 먼저 막을 준비를 하게 될 텐데 그럴 리가 없다.

그 뒤 나흘, 닷새가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으니 거짓이라는 것을 더욱 알 수 있다.

또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오 리쯤 떨어진 북천에서 적과 싸웠다고 한다.

총탄이 비처럼 쏟아지고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어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고 한다.

종사관 윤섬의 행방을 알 수 없다니 아마 죽은 듯하다.

신립 역시 순변 임무를 받고 충주에 왔다가 적을 가볍게 여기고 대비하지 않아 적에게 틈을 보였다.

크게 패해 군사들이 모두 죽고 신립은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김여물도 군중에 있다가 함께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통곡을 참을 수 없다.

신립은 본래 용맹한 장수로 북방에서 공을 세워 임금께서 크게 믿던 사람이었다.

출정할 때 서울의 무사들과 무기고의 좋은 무기를 거의 모두 가지고 나왔는데 하루아침에 패하고 자신도 강물에 죽었다.

임금께서 도성을 떠나신 일도 이 패배 때문이었다.

종묘사직이 받은 치욕이 너무나 크다.

더욱 애통하다.

지난달 스무아흐렛날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제삿날이었다.

내가 이 고을에 있었기 때문에 처남 이윤이 제물을 넉넉히 마련해 주어 내가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서울 집을 생각해 보면 왜적이 가까이 다가와 온 도성이 허둥대던 날이었으니 어느 겨를에 제사를 지냈겠는가.

나는 그나마 참으로 다행했다.

이달 스무날과 스무아흐렛날도 나를 길러준 두 숙부의 제삿날이었다.

서울의 아내와 자식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고 이 고을 역시 일이 많아 술 한 잔조차 올리지 못했다.

마음이 더욱 슬프고 아팠다.

지난밤 꿈에서는 내가 서울에 있는 것처럼 친척과 옛 벗들을 많이 보았고 아내도 보았다.

아내가 내가 죽은 줄 알고 나를 그리워해서 꿈에 나타난 것일까.

아니면 아내가 이미 죽어 그 혼이 내 꿈에 들어온 것일까.

열흘 사이에 어찌 두 번이나 꿈에 나타나는가.

평생 집이 가난해 온갖 고생을 겪었고 하루도 마음껏 웃은 날이 없었다.

그러다 하루아침에 이런 난리를 만나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죽는다면 평생 쌓인 한이 얼마나 크겠는가.

슬프고 또 슬프다.

이날은 이달 스무여드레였다.

1592년 7월 8일 (임진년 음력 5월 29일)

다음 날 전 만호 이충이 이 고을을 지나갔다.

그는 경상 우수영 진중에 있었는데, 우수사 원균이 다시 왜선 스물네 척을 불태우고 적의 머리 일곱을 베었다는 보고서를 가지고 몰래 길을 가고 있었다.

우연히 만나니 시름이 조금 풀렸다.

나는 곧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서 윤겸에게 전해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하지만 가족들이 피란해 다른 곳에 있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으니 편지가 제대로 전달될지 걱정된다.

이공은 곧바로 임금이 계신 곳까지 가 보고를 올린 다음 양주로 가서 늙은 어머니를 찾겠다고 했다.

만약 편지를 그의 아우 이청에게 주어 봉선전에 보내게 하면 윤겸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광릉과 양주는 멀지 않기 때문이다.

이공은 나와 같은 동네에서 살며 친하게 지냈고 그의 아우 이청은 윤겸과 어려서부터 친구였다.

1592년 7월 10일 (임진년 음력 6월 2일)

[이 뒤 원문 한 면이 잘려 있다.]

부속 문서

1592년 6월 4일 (임진년 음력 4월 25일) — 나라 안팎의 신하와 백성에게 내린 교서

나는 부족한 사람으로 큰 왕업을 이어받아 스무 해가 넘도록 근심하며 정사를 살펴왔다.

크고 작은 일을 직접 챙기느라 한낮이 되어서야 밥을 먹고 밤이 깊어서야 잠들었다.

사냥을 즐기거나 음악과 여색, 잔치와 놀이에 빠지는 일은 감히 하지 않았다. 이 점은 곁의 신하들도 어느 정도 나를 알아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리를 밝게 살피지 못해 정치의 핵심을 놓쳤고, 어진 마음이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지 못해 은혜가 백성에게까지 미치지 못했다.

여러 해 동안 천재지변이 경고를 보였고 세상의 도리와 사람의 마음이 날로 흩어졌는데도 나는 두려워 깨어나 정치를 새롭게 하지 못했다.

시행한 정책 가운데 백성을 괴롭힌 것이 많았다.

특히 백성의 원망이 컸던 일을 몇 가지만 말하겠다.

토목공사가 끊이지 않아 백성의 힘을 심하게 소모시켰다.

궁궐 안의 단속이 엄하지 못해 백성의 자잘한 이익까지 빼앗는 일이 있었다.

지방의 산과 물에까지 권세 있는 자들이 손을 뻗어 생업을 잃은 백성이 부역에 시달렸다.

사람들의 원망은 가득했지만 어리석은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깊은 궁궐 안에 있어 곧은 말이 막혔으니 나라 안에 큰 병이 든 것도 깨닫지 못했다.

나는 오직 변경의 위험만을 걱정하여 성을 쌓고 참호를 파며 군사를 훈련하고 무기를 손질했다.

백성을 적의 칼날에서 지키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백성의 원망을 더 쌓고 민심을 더욱 떠나게 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적군이 가까이 오자 군사들은 적의 모습도 보기 전에 무너졌다.

백성을 지키려고 마련한 장비가 도리어 적의 물자가 되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몸 둘 곳이 없을 만큼 부끄럽다.

지금 왜적의 수가 날마다 늘어난다고 한다.

어찌 왜적이 이 땅에 내린 뒤 스스로 사람을 낳아 수가 늘었겠는가.

겁에 질린 우리 백성 가운데 적에게 붙어 그들이 내미는 이익에 넘어가 칼끝을 돌린 자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백성을 자식처럼 돌보는 도리를 잃었으니 이런 결과가 생긴 것이 당연하다.

우리 조상들이 이백 년 동안 백성을 길러온 은혜가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졌으니 참으로 가슴 아프다.

영남은 본래 우리나라 인재의 보고다.

어른들은 충과 효를 가르치고 젊은이들은 시와 글을 배웠다.

옛날 김유신이 나라의 난리를 평정했고 김춘추가 몸을 내던져 나라의 위기를 구한 것도 모두 이 지역 사람이다.

예로부터 뛰어난 기풍을 품은 곳이었다.

예순이 넘는 고을 가운데 어찌 충성과 의리를 지닌 선비가 없어 팔을 걷어붙이고 나라의 위급함에 뛰어들지 않겠는가.

옛날 원충갑은 평범한 백성이면서 강한 적을 꺾었고 유차달은 부유한 백성이면서 군사를 크게 도왔다.

지금 기꺼이 일어나는 사람이 조상들이 남긴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관청의 재물과 벼슬을 나는 아끼지 않겠다.

살아서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고 그 은택이 자손에게까지 이어진다면 얼마나 훌륭한 일이겠는가.

지금 적은 배를 멀리 뒤에 두고 이익을 탐해 깊이 들어왔다.

요충지는 모두 적의 뒤쪽에 있다.

좌우에서 막고 앞뒤에서 협공하여 궁지에 몰린 적을 없앨 때가 바로 지금이다.

그런데 적을 보기도 전에 먼저 달아나 적이 거리낌 없이 멀리 쳐들어오게 만들었다.

군사들은 대대로 그 땅에 살아왔다.

늙은 부모와 어린 자식이 그곳에 있고 조상의 무덤도 그곳에 있다.

그런데 서로 힘을 합쳐 적을 막을 생각은 하지 않고 고향이 적에게 짓밟히고 불타는 것을 그대로 두니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프다.

서울 사람들 역시 놀라고 혼란스러워 모두 흩어질 생각만 하고 나라가 위급할 때 의리를 지킬 마음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종묘사직이 이곳에 있고 조상의 신령이 굽어보고 계신다.

충성을 떨쳐 몸을 잊고 임금을 구하며 적과 싸운다면 기세가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적이 무엇이 두렵겠는가.

내가 백성을 힘들게 하여 원망을 모으고 오늘의 형세에 이르게 했으니 이 재앙은 실로 내가 불러온 것이다.

얼굴을 들기가 부끄럽다.

너희 백성과 선비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부터 오랫동안 나라의 큰 은혜 속에서 살아왔다.

하루아침에 난리를 만나 나를 버리려 한다 해도 나는 너희를 탓하지 않겠다.

그러나 너희는 정말 나를 버릴 수 있겠는가.

이제 내 속마음을 온 나라에 널리 알린다.

부디 용기 있게 일어나 의병을 모으고 나라의 장수들의 지휘에 따라 적을 없애라.

조상의 치욕을 씻고 산하의 수치를 씻어라.

여러 도의 군사와 백성들은 모두 내 잘못을 용서하고 이 간절한 뜻을 헤아려 분발해 적을 토벌하고 예전처럼 삶의 터전을 지켜주기 바란다.

아아, 안에서는 원망이 쌓이고 밖에서는 침략을 당했으니 적을 불러들인 책임이 나에게 있다.

그러나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바친다는 도리가 있다.

너희에게 어찌 적과 싸울 충성이 없겠는가.

이에 이 뜻을 밝히니 모두 잘 알기 바란다.

1592년 6월 20일 (임진년 음력 5월 11일)

사인 심대가 임금의 교서를 받들고 전주부에 있던 이 도의 도순찰사에게 도착했다.

교서를 여러 고을에 돌려 알렸고 진안에서 이곳으로 가져왔다.

처남 이윤은 군복을 갖추어 입고 교서를 맞이하여 앞뒤로 네 차례 절했다.

현의 아전 이언홍이 교서를 읽었다.

듣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임금이 자기 잘못을 꾸짖는 교서를 한 번 들었을 뿐인데 사람의 마음이 이처럼 움직였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임금의 한마디에 달려 있지 않겠는가.

아아, 훌륭한 일이다.

1592년 6월 22일 (임진년 음력 5월 13일) — 영동 사람들이 돌린 통문

나라의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통곡하고 또 통곡할 일입니다.

저 왜적이 이미 서울로 향했습니다.

신하와 백성이 된 사람이 무슨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까.

통곡하고 또 통곡합니다.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모두 한결같습니다.

조금이라도 사람다운 마음이 있다면 어찌 편히 자고 먹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난리를 직접 겪은 지역에서는 부모가 모두 죽고 아내와 자식을 빼앗겼으며 집은 모조리 불탔고 대대로 이어온 살림도 남김없이 사라졌습니다.

천지 사이에 이보다 큰 원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통곡하고 또 통곡합니다.

미리 막지 않으면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힘을 합쳐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여러 어진 분들께서도 같은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귀천을 따지지 않고 담력이 있으며 활을 잘 쏘고 재주와 용기가 있는 사람은 이달 열이렛날 영동 활터 근처에 모여 큰일을 의논하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글을 모르는 백성은 이 글을 읽지 못할까 걱정되어 일부러 쉬운 말로 대강 뜻을 적습니다.

빨리 널리 알려 사람들을 감동시키면 충신과 의로운 선비가 틀림없이 손바닥에 침을 뱉으며 일어날 것입니다.

통곡하며 여기까지 씁니다.

전주 유생들이 좌도 여러 고을에 알린 글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섬나라 왜적이 침범했습니다.

수백 년 이어온 종묘사직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고 여러 임금이 길러온 백성의 절반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임금께서 서울을 떠나셨는데 소식마저 아득합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저절로 통곡하게 됩니다.

다행히 우리 호남은 아직 국경이 어느 정도 보전되어 있고 군사와 식량도 넉넉합니다.

나라가 다시 일어설 때 의지할 수 있는 땅이 바로 이곳입니다.

그런데 헛소문이 시끄럽게 퍼지면서 민심이 흩어져 적이 오기도 전에 먼저 달아날 생각부터 하고 있습니다.

적이 실제로 들어오면 무엇으로 막겠습니까.

이 도의 부모와 형들은 자식과 아우에게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목숨을 바치도록 타일러주십시오.

군사들은 윗사람을 따르고 장수를 위해 죽을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손바닥에 침을 뱉고 적을 향해 나아가 산하의 치욕을 씻고 의리를 내세워 적을 없애 조상들이 세운 나라를 되찾읍시다.

이것이 임금과 부모가 위급할 때 원수를 갚는 도리를 다하는 길입니다.

열 집뿐인 작은 마을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이 호남에 어찌 용기와 지혜를 갖추고 의롭게 일어날 사람이 없겠습니까.

훌륭한 사람을 천거하고 격려해 크게 쓰이게 할 수도 있고 곡식이나 말을 내어 군량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관과 민이 힘을 합쳐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음이 되는 것이 지금 가장 시급합니다.

국가가 위급한 때 신하와 백성이 나라를 구하려는 뜻은 모두 같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보잘것없는 생각이지만 먼저 널리 알리지 않을 수 없어 이렇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이 뜻을 마을마다 널리 알려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의로운 뜻을 북돋아주기 바랍니다.

임진년 음력 오월 십사일

전주 생원 이당 등 스무여 명

고부 유생들의 격문

천지가 지닌 가장 큰 덕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고 백성이 지켜야 할 바른 기운은 의리라고 들었습니다.

살육을 즐기는 자에게 하늘은 벌을 내리고 큰일을 일으키는 사람에게는 백성이 따르는 법입니다.

이에 작은 마음속의 슬픔을 털어놓아 사방 사람의 귀를 깨우려 합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백성을 은혜로 길렀고 역대 임금의 덕이 높았습니다.

그런데 백성이 불행하여 나라의 운수가 극도로 막힌 때를 만났습니다.

하찮은 섬나라 무리가 감히 우리 땅을 침범해 돼지가 날뛰듯 영남을 삼키고 벌떼처럼 독침을 쏘며 나라 안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백성을 죽여 시체가 진흙과 모래에 널렸고 마을을 불태워 산과 들이 연기로 가득합니다.

남녀를 붙잡고 재물을 빼앗으며 큰 나라를 제멋대로 차지하고 상국과의 관계도 끊으려 합니다.

예의와 염치를 버리고 짐승 같은 탐욕만 품었습니다.

사람을 죽여 공을 세웠다고 자랑하고 하는 짓은 오직 도둑질뿐입니다.

뱀과 전갈 같은 마음으로 사람의 도리를 버렸으니 모든 신하와 백성이 함께 미워해야 할 자들입니다.

악이 쌓이고 죄가 가득 찼으니 이제야말로 흉악한 무리가 망할 때입니다.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니 지금이 바로 신하들이 충성을 다할 때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원수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습니다.

완산과 금성을 비롯한 여러 고을의 기이한 인재들이여, 용성과 광산을 비롯한 여러 고을의 뛰어난 선비들이여.

큰 계책을 품고 병법의 지혜를 지닌 사람들이 의병의 깃발을 보고 구름처럼 모이고 전쟁의 북소리를 듣고 바람처럼 달려오기를 바랍니다.

한강 북쪽에 진을 펴고 호남의 군사들이 한 걸음으로 움직인다면 번개와 우레처럼 적을 쓸어 궁궐의 더러운 기운을 걷어낼 수 있습니다.

임금을 다시 모시고 나라를 일으켜 왜적의 우두머리를 목 베어 큰길에 내걸고 이름을 역사에 남깁시다.

임금을 잊지 말고 나라를 다시 세울 날을 기약하십시오.

이 의로운 글을 읽고도 뒤늦게 나서 평생 후회하지 마십시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하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문관이든 무관이든, 전직 관리든 현직 관리든, 귀하거나 천하거나, 늙은이거나 유생이거나, 한량이거나 승려이거나 속인이거나, 아전이나 역리나 노비나 그 밖의 어떤 신분이든 따지지 않습니다.

이달 스무이렛날 모두 삼례역 앞에 모이십시오.

고부 유생 김현, 김흔, 김섬 등

곽재우가 초유사 김성일에게 보낸 글

곽재우가 머리를 조아려 김 초유사께 삼가 글을 올립니다.

왜적이 한 번 들어오자 사람들이 바람에 쓸리듯 달아났습니다.

민심이 흩어진 탓이라고는 하지만 신하 된 사람으로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 계책이 비록 어리석고 둔하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한 가지 방도를 내었습니다.

이달 초나흘 용맹한 사람 네 명을 거느리고 낙동강 하류에서 왜선 세 척을 뒤쫓았습니다.

초엿새에는 왜선 열한 척이 다시 초나흘 싸웠던 곳에 왔기에 용사 열세 명을 거느리고 쫓았습니다.

왜적이 가진 것은 긴 칼과 총뿐입니다.

화약은 반드시 떨어진 듯합니다. 총소리를 내도 탄환이 날아오지 않는 때가 많으니 적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긴 칼은 몇 걸음 안까지 가까이 붙어야 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강한 활과 쇠뇌를 가진 우리가 어찌 몇 걸음까지 기다렸다 쏘아야 하겠습니까.

이 점으로 생각하면 우리 군사 한 명이 저들 백 명을 당할 수 있고 우리 군사 백 명이면 저들 천 명을 상대할 수도 있습니다.

선생의 충절은 이미 통신사를 다녀오실 때 드러났고 의로운 마음 또한 이 난리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제가 전부터 스스로 나서고 싶었으나 [원문 일부 불분명] 서울로 가셨다는 말을 듣고 오래도록 엎드려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어찌 제가 글을 보내기도 전에 선생께서 저를 부르실 줄 알았겠습니까.

곧 달려가고 싶지만 아직 여러 무리가 모이지 않았으므로 용맹한 군사를 모아 찾아가겠습니다.

의령은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뒤로는 험한 곳을 막고 정암을 끼고 있어 왜적이 백만이라 해도 쉽게 들어오지 못합니다.

바라건대 선생께서는 깊이 헤아려 이곳으로 오십시오.

성을 지킬 계책은 제가 선생을 위해 마련하겠습니다.

글로 뜻을 다하지 못합니다.

전 동래부사 고경명의 격문

임진년 음력 유월 초하루, 행부호군 고경명은 전라도 여러 고을의 선비와 백성에게 급히 알립니다.

이번에 우리 도의 임금을 구하러 가던 군사는 금강에서 되돌아온 날 한 번 무너졌고 여러 고을에서 다시 사람을 모을 때 또 무너졌습니다.

방어 방법이 잘못되고 군율이 무너졌으며 헛소문이 계속 퍼져 사람들의 마음이 놀라고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모으고 있지만 사기는 꺾였고 정예병의 기운도 쇠했습니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위급할 때 쓸 수 있으며 늦게나마 공을 세우기를 기대하겠습니까.

임금께서 피란하신 뒤 관리들이 달려가 문안하지 못한 지 오래고 종묘사직이 잿더미가 되었는데도 나라를 되찾는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생각할 때마다 가슴과 뼈가 아픕니다.

우리 전라도는 본래 군사와 말이 강한 곳으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옛날 황산 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이 있었고 영암 싸움에서도 적선 한 척도 돌아가지 못했다는 노래가 생길 만큼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때 앞장서 적장을 베고 깃발을 빼앗은 사람들이 어찌 이 도 사람이 아니었겠습니까.

더구나 요즘에는 유학이 크게 일어나 사람마다 학문에 힘썼습니다.

임금을 섬기는 큰 의리를 누가 배우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유독 오늘에 이르러 의로운 소리가 사라지고 겁에 질려 스스로 무너져 적과 한번 싸워보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모두 제 몸과 아내와 자식만 보전하려 쥐처럼 머리를 감싸고 달아나기에 바쁩니다.

이는 이 도 사람이 나라의 은혜를 크게 저버린 것일 뿐 아니라 조상까지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이제 적의 기세는 크게 꺾이고 나라의 위엄은 날마다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이 대장부가 공명을 세우고 임금과 부모의 원수를 갚을 때입니다.

나는 글이나 읽던 고루한 선비라 병법을 알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떠밀어 장수 자리에 올랐으니 군사를 다스리지 못해 뜻을 함께한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끼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신하의 의리는 나라가 어려울 때 죽는 데 있습니다.

또 의로운 군대는 수가 적어도 강합니다.

나는 오직 용기를 내어 북쪽으로 나아가 군사들보다 앞장설 생각입니다.

이달 열하루를 출정일로 정했습니다.

우리 도의 사람들은 아버지가 아들을 타이르고 형이 아우를 격려하여 의로운 군사를 모으고 함께 일어나십시오.

용감하게 좋은 길을 따르고 주저하다 스스로 그르치지 마십시오.

이에 진심으로 알립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생각했다.

이 격문이 순찰사가 군대를 돌린 직후, 사람들 마음에 아직 분발할 뜻이 남아 있을 때 나왔다면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나는 사람이 틀림없이 많았을 것이다.

순찰사도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며 군사를 모으는 날짜 역시 이렇게 늦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에 들어간 적도 몇 달씩 성을 차지하고 경기 고을을 약탈하여 백성이 이토록 도탄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깝다. 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다.

그래도 글의 의리는 엄정하고 말은 씩씩하고 힘차니 이를 읽고 분발하여 의로운 길로 나서는 사람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또 운봉에서 전해온 말에 따르면 왜적이 진주를 침범해 남강에서 싸우다가 크게 패해 깃발까지 버리고 달아났다고 한다.

곽재우는 의령 정진에 군사를 두어 적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했고 적은 다시 김해로 돌아갔다고 한다.

김면 등의 의병 이천여 명은 성주를 점령한 적을 공격하기 위해 초나흘 출발했다고 한다.

나는 유월 초이렛날에야 이 소식을 들었다.

세자를 책봉하는 교서

임금이 이르노라.

조상이 물려준 큰 왕업에 기대어 위태로움을 잊은 탓에 전쟁이 나라 안까지 닥쳤다.

이제 훌륭한 후계자를 골라 나라의 두 번째 중심으로 삼는 일은 모든 신하와 백성이 바라는 바다.

비록 지금은 경사를 말하기 어려운 형편이지만 난리 중이라 하여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일을 잊을 수는 없다.

이에 피란 중인 오늘 세자 책봉의 뜻을 온 나라에 알린다.

부족한 내가 나라에 큰 어려움을 만났다.

스물다섯 해 동안 두려운 마음으로 정사를 보며 나름대로 힘을 다하고자 했으나 수많은 백성이 흩어지고 원망이 몰려왔다.

다행히 왕실에 훌륭한 자손이 있으니 선대가 후손을 위해 남긴 은덕 덕분이다.

내가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은 비록 어긋났어도 나라의 후계자를 세우는 일은 일찍 했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책봉 의식을 신중히 하려다 보니 신하들이 여러 번 청했음에도 날짜가 오래 미뤄졌다.

그러던 중 왜적의 침략이 나라 안의 혼란을 틈타 일어났고 여러 성이 한꺼번에 무너져 종묘의 위패까지 옮겨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나라의 형편이 이처럼 급박하니 내가 어찌 사양만 고집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의 마음이 두려움에 빠진 지금 나라의 근본을 빨리 정해야 한다.

둘째 아들 광해군 혼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학문에 밝으며 어질고 효성스러운 성품이 일찍부터 드러났다.

오래전부터 온 백성이 마음을 두었고 사람들의 바람도 그에게 모였으니 선왕의 왕업을 이어갈 수 있다.

이에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군사를 위무하며 나라 일을 대신 살피게 한다.

비록 일이 갑작스러운 난리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이 결정은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것이다.

신하들은 내가 우연히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나라의 근본은 결코 갑자기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평양에 와서 비로소 나라 안팎에 이 글을 내리지만 서울에 있을 때 이미 신하와 백성의 축하를 받은 바 있다.

하늘이 우리 조상을 도우시니 종묘사직이 어찌 이 한쪽 땅에만 머물겠는가.

적의 기세는 이미 꺾이고 한강의 바람과 물결도 다시 맑아질 것이다.

관군은 분발하여 적의 진지를 곧 걷어낼 것이다.

세자는 다시 궁궐에서 어버이께 문안드리고 옛 도성에서 세자의 예를 행하게 될 것이다.

아아, 우리 신하와 백성은 내 지극한 뜻을 헤아리라.

세자를 위해 죽겠다는 마음을 품고 나 한 사람을 부끄럽게 하지 말라.

깊은 물을 건너는 것처럼 앞길을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어려움을 함께 건너고 세자를 지켜 나라의 근본을 보전하라.

이 뜻을 널리 알리니 모두 잘 알기 바란다.

정여립의 역모에 연좌된 사람들을 풀어주는 사면

임금이 이르노라.

하늘에 닿는 큰 죄는 용서할 수 없어 이미 역적을 토벌하였다.

그러나 은혜는 땅처럼 넓어 함께 살리는 데 뜻이 있으므로 죄인을 풀어주는 명을 내린다.

나는 큰 은혜를 베푸니 너희는 마땅히 새 사람이 되어라.

지난번 역적이 흉계를 꾸밀 때 그 씨앗과 가지라는 이유로 함께 죄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

법을 담당한 관청에서 그렇게 처리한 일이기는 하지만 내 마음에는 가엾게 여겨졌다.

역적의 법정 연좌 범위에 해당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풀어주라.

넓은 어진 뜻을 펴서 살리고 기르는 은혜를 이루고자 한다.

이에 알리니 모두 잘 알기 바란다.

임진년 음력 오월 초아흐레.

이 두 교서는 평양에서 출발한 지 한 달 만인 유월 초아흐레에야 이곳에 도착했다.

용담현령 서응기가 교서를 받들고 왔다.

처남 이윤은 오 리 밖까지 나가 맞이했고 뜰 아래에서 앞뒤로 모두 열두 번 절했다.

그날 저녁 나는 비로소 관군이 무너진 자세한 소식을 들었다.

현의 아전 이호연이 군량을 가지고 전쟁터에서 내려와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말했다.

1592년 7월 12일 (임진년 음력 6월 4일)

우리 군사가 수원부를 포위했으나 왜적은 이를 알고 이미 달아난 뒤였다.

1592년 7월 13일 (임진년 음력 6월 5일)

용인 행원 뒤쪽에서 왜적은 험한 지형을 차지하고 집을 지었다.

앞에는 뾰족한 나무 장애물을 늘어놓고 방패까지 세워둔 채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는 지형이 험해 전진하기 어려웠다.

방어사 곽영이 명령을 내려 앞으로 나아가라고 재촉했다.

여러 장수는 어쩔 수 없이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진했다.

그때 왜적 서너 명이 칼을 빼들고 갑자기 튀어나와 정신없이 마구 베었다.

죽은 사람이 서로 포개질 정도였다.

선봉장 백광언과 고부군수 이원인, 함열현감 정연, 조방장 이지시가 한꺼번에 칼에 맞아 죽었다.

군사들은 모두 흩어졌다.

이원인과 백광언은 재주와 용기가 뛰어나 사람들이 크게 믿고 있었는데 방어사의 강요 때문에 결국 패하여 죽었다.

모두가 분통을 터뜨렸다.

1592년 7월 14일 (임진년 음력 6월 6일)

다시 진격해 싸웠다.

서울 쪽 길에서 많은 왜적이 깃발을 세우고 내려와 방어사의 진을 에워쌌다.

먼저 왜적 네 명이 쇠로 된 괴상한 투구를 쓰고 이상한 차림을 한 채 금빛 부채를 휘두르며 말을 달려왔다.

그 뒤로 수십 명이 걷거나 말을 타고 칼을 빼든 채 따라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어지러워졌고 여러 장수가 한꺼번에 무너져 달아났다.

왜적이 뒤쫓아 마구 베었다.

우리 군사들은 군장비를 버리고 어떤 사람은 옷까지 벗어던지고 달아났다.

서로 짓밟혀 죽은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순찰사 이광 역시 큰 깃발을 버리고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

군량과 무기, 깃발과 북, 전마를 모조리 버리고 달아났으니 모두 적의 물자가 되었다.

놀랍고 가슴 아픈 일이다.

사람들이 믿고 있던 것이 이번 대군이었는데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모두 넋을 잃었다.

적이 가장 두려워하던 곳이 전라도였는데 전라도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였으니 적이 업신여기고 쳐들어올 것이다.

어떻게 막겠는가.

십만 대군이 겨우 수십 명의 적에게 쫓겨났고 뒤돌아 활 한 번 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니 더욱 분하고 또 분하다.

앞선 금산 싸움에서도 방어사는 우리 군사를 좁은 입구로 몰아넣어 많은 군사가 죽게 했는데 이번에도 이와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계책 없음과 고집스러움을 탓한다.

집을 짓고 자리 잡은 왜적은 겨우 서른에서 마흔 명가량이었고 험한 곳에 기대어 지키고 있었으니 함부로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런데 군사들을 억지로 걸어 올라가게 하여 선봉 네 장수가 한꺼번에 죽었다.

정읍현감 권진경만 홀로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

방어사는 적의 수가 적으니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얕보았다가 도리어 패했다.

그 때문에 군사들의 간담이 서늘해졌고 다음 날의 대붕괴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방어사가 먼저 달아나고 군사들이 뒤따라 흩어졌다고 한다.

순찰사 이광도 짐을 모두 버렸고 친위병과 군관도 모두 흩어졌다.

말 한 필을 겨우 구해 혼자 타고 달아났는데 한 영리가 마침 고삐를 잡아주어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아침도 먹지 못하고 멀리 달아났으나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다.

한 역졸이 깨진 그릇에 밥을 싸서 물에 말아 올리자 아들과 조금씩 나누어 먹었다.

충청도 안쪽 길을 지나 용안강을 건너 본도로 돌아왔다.

더욱 통탄할 일은 화약과 쇠탄환, 마름쇠 같은 물건을 모두 적에게 빼앗긴 것이다.

훗날 그것으로 우리 군사를 해칠 것이 분명하다.

흩어져 달아나는 와중에 인장과 병부까지 버렸다.

인장은 남원 아전, 혹은 그 자제가 간신히 주워왔지만 병부는 모두 잃었다고 한다.

임실현감의 인장도 잃었다고 한다.

나는 이응일과 약속한 적이 있었다.

“더러운 적을 깨끗이 쓸어버린다면 열흘이나 보름 안에는 반드시 승전 소식이 들릴 것이다. 그러면 그날로 걸어서라도 북쪽으로 올라가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을 찾겠다.”

그런데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과 아우와 누이들이 여러 달 산속을 헤매며 먹을 길도 없을 테니 틀림없이 굶어 죽고 말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다시 볼 수 없다면 차라리 내가 먼저 죽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편이 낫겠다.

날마다 마음속으로 묻는다.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 아우와 누이들은 오늘 밤 어디에서 자고 오늘은 무엇을 먹었을까.”

내 밥을 나누어 주고 싶어도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면 창자가 찢어지는 듯하다.

하늘은 끝없이 아득하기만 하다.

죄 없는 백성을 칼과 화살 아래 쓰러뜨려 피와 살이 땅을 덮게 하니 하늘의 뜻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하늘을 원망하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장수란 삼군의 목숨을 맡은 사람이다.

그런데 군사를 모르는 사람이 장수가 되어 백성을 적에게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명령을 내린다.

삼군의 목숨을 병법도 모르는 못난 장수에게 맡기고 어떻게 일을 그르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적이 도성을 차지한 지 이제 석 달이다.

마음껏 약탈한 물건을 말에 싣고 영남 길로 끊임없이 내려보낸다.

적 한 명이 말 네다섯 필씩을 몰고 가도 가로막아 빼앗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제 들으니 이달 초여드레 왜적 백여 명이 금산에서 황간 북쪽 마을을 지나 청산으로 가려 했다고 한다.

영동현감 한명윤이 궁수들을 거느리고 좁은 길에 숨어 있다가 공격해 적의 머리 열세 개를 베었다.

그 가운데 우두머리 한 명은 좋은 말을 타고 갑옷과 투구를 갖췄으며 앞에 붉은 깃발을 세워 군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 역시 화살을 맞아 죽었다.

짐을 실은 말 열여 필 분량의 물건도 모두 빼앗았다.

적보다 군사가 적어 전부 잡지는 못했다고 한다.

누가 글만 읽던 선비에게 담력이 없다고 하겠는가.

참으로 장하다.

이 도의 순찰사는 수만 명을 거느리고 하루아침에 패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적의 힘을 보태주었다.

애통하고 또 애통하다.

나라에서 큰 임무를 맡은 지 벌써 삼 년인데 조그마한 공 하나 세우지 못하고 오히려 늙은 선비 한 사람만도 못하니 부끄럽지 않은가.

도순찰사 이광의 격문

아아, 조그마한 왜적은 벌과 전갈처럼 독하고 뱀처럼 사나운 성품으로 몰래 우리나라를 삼킬 마음을 품고 날뛰기 시작했다.

수십 개 성을 함락시키고 수많은 백성을 죽였다.

겁먹은 수령들은 소리만 듣고 쥐처럼 도망가고 백성들은 바람만 불어도 물결처럼 흩어졌다.

영남의 산하는 모두 승냥이와 호랑이 같은 적의 소굴이 되었고 호서의 땅도 절반이 그 더러운 기운에 물들었다.

적은 곧바로 서울로 향하고 있으니 종묘사직의 치욕이 끝이 없다.

생각할 때마다 잠을 이룰 수 없다.

임금께서는 밤낮으로 슬픈 교서를 내리시고 산과 강의 신에게까지 기도하고 계신다.

이 땅에 피를 가진 생명이라면 누구나 마음을 썩이고 손목을 쥐며 창을 들고 일어나야 한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이다.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니 나라를 구하는 충성을 다해야 한다.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를 어찌 그대로 두겠는가.

용맹한 장수는 구름처럼 일어나고 용사는 숲처럼 모여야 한다.

호남은 본래 예의의 고장이며 인재의 보고다.

거센 바람에 드러나는 질긴 풀처럼 모두 난세의 충신이 되어라.

이백 년 동안 나라가 길러준 은혜를 생각하고 수많은 백성이 품은 의분을 모아 앞장서 싸우라.

장수를 베고 깃발을 빼앗아 적의 수레 한 대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라.

각자 충성과 의리로 스스로를 격려하여 장정들을 이끌고 밤낮으로 달려오라.

1592년 7월 21일 (임진년 음력 6월 13일)

전 수사 이계와 정기복이 조방장으로 정해져 이 고을 동쪽 육십현에 와서 지키기 시작했다.

육십현은 안음 땅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적이 이 고개를 넘어 침입할까 두려워서였다.

앞서 복병장 전 첨사 남응길이 와서 막고 있었는데 그가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품계가 높은 무신을 더 보낸 것이다.

군관 열여섯 명과 이 고을 군사, 임실과 진안 군사를 합쳐 천여 명을 세 곳으로 나누어 지키게 했다.

1592년 7월 24일 (임진년 음력 6월 16일)

아침에 순찰사 이광이 군사를 뽑으라는 공문을 보내왔다.

다시 정예병을 뽑아 군산 창고 앞에서 배를 타고 곧바로 임금이 계신 곳으로 가게 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가기를 꺼려 뜻대로 모일 수 있을지 걱정된다.

병사 최원은 순찰사의 군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미 수만 명을 동원해 장수들에게 나누어 맡겼다.

이달 스무날 완산을 출발해 여산까지 갔고, 군사가 다 모이면 곧바로 서울로 향할 것이라고 한다.

전 부사 고경명, 최경회, 김천일 등이 충성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냈다.

전직 관리와 유생 등이 각자 건장한 종들을 데리고 많이 응모했다.

이달 열하루와 열이틀 사이에 삼례역 앞에 모여 북쪽 길로 올라갈 예정이라고 한다.

병사 최원의 군대와 서로 돕는 형세가 될 것이다.

앞서 순찰사의 대군이 무너진 것은 군사는 많았지만 장수가 서툴러 사람들을 다스리지 못했고, 군사들이 장수를 믿지 않았으며 마음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뒤로 물러나자 온 군대가 함께 흩어졌다.

지금 고경명의 군사는 억지로 끌려온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의로운 일에 나선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이니 군사는 적더라도 적과 맞설 수 있을 것이다.

큰 공을 세우기를 발돋움하여 기다린다.

왕실의 먼 친척인 호성감도 스스로 충성을 떨쳐 원수의 지휘를 받아 이달 초 완산으로 내려왔다.

스스로 충의위를 모집하게 했더니 응모자가 많았다.

이 고을에서도 충의위에 가려는 사람이 예닐곱 명 있다.

백광언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는 성품이 급하고 의분이 강해 왜적이 밀려드는데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 싸우지 않는 것을 늘 분하게 여겼다.

초닷샛날 싸움에서 이지시가 그에게 말했다.

“적은 높고 험한 곳을 차지하고 있고 날도 저물려 합니다. 내일 밝은 뒤 다시 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백광언이 말했다.

“영공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는 방패를 끌어안고 곧장 전진했다.

그때 적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군사들이 한꺼번에 쓰러졌고 백광언도 베여 죽었다.

백광언은 평소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를 먼저 보내고 내가 뒤에 있으면 너희는 내가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제는 내가 너희보다 앞에 설 테니 너희가 나를 구하라.”

비록 경솔하게 나아가 죽었다고는 하지만 그 뜻만은 온 세상이 무너져 달아나는 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고 할 만하다.

참으로 아깝다.

그가 거느리던 군사들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 현의 아전이 완산에서 돌아오며 들은 말에 따르면 적이 이미 임진강을 건넜고 임금께서는 평양에서 함경도 함흥 쪽으로 피란하셨다고 한다.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송도와 해서의 백성 역시 틀림없이 흉악한 칼 아래 참혹하게 죽었을 것이다.

윤함도 산속으로 달아났을 텐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

더욱 통곡할 뿐이다.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이 서쪽으로 달아났다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윤겸은 평소 “난리를 피하려면 관동만 한 곳이 없다”고 말했었다.

또 올봄에는 친구와 함께 홍천으로 가서 살 만한 곳을 살펴보았다는 말도 들었다.

그렇다면 서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갔을 것이다.

또 왜적이 서울 사람들이 서산에 많이 숨어 있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포위해 많은 남녀를 붙잡아갔다고 한다.

분하고 또 분하다.

그날 저녁 처남 이윤과 관아 대청에 마주 앉아 난리로 떠돌게 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위로는 임금이 떠돌고 종묘사직이 무너지려 하는데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을 슬퍼했다.

아래로는 죄 없는 백성이 도탄에 빠진 것을 걱정했다.

우리 집 늙은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 아우와 누이의 생사를 알지 못해 서로 마주 보며 통곡했다.

마음을 달랠 방법이 없어 추로주 한 잔을 따르고 또 한 잔씩 마셨다.

네다섯 잔쯤 마시니 반쯤 취했다.

밖으로 나와 산정에 오르니 모든 소리가 고요하고 밝은 달이 대낮처럼 비쳤다.

따라온 아이들은 모두 깊이 잠들었다.

이런 달밤에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 아우와 누이는 어디에서 자고 있을까.

그들도 이 달을 보고 있을까.

슬픔을 견딜 수 없어 눈물이 비처럼 흘렀다.

뜰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절하며 빌었다.

“하늘이여,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 아우와 누이를 살려주십시오. 다시 만나기만 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기도를 마친 뒤 종응과 윤일을 데리고 동헌 아래를 거닐었다.

응벽정을 지나 향사당까지 갔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엄지발가락을 다쳤다.

숙소로 돌아오니 밤이 이미 한참 지나 있었다.

달구경을 하며 놀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가슴에 가득한 걱정을 조금이라도 풀고 싶었을 뿐이다.

1592년 7월 26일 (임진년 음력 6월 18일)

[안음 사람들의 통문과 관련된 기록]

경상도 안음 사람들이 보낸 통문을 읽어보니 형편과 이치는 그럴듯하다.

그러나 각 도와 고을에는 지켜야 할 경계가 있다.

주장의 명령도 없이 어찌 마음대로 다른 도로 넘어갈 수 있겠는가.

더구나 적이 무주 경계에 침범해 있는데 우리의 뒤를 걱정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 글을 순찰사에게 올렸으니 어떻게 처리할지는 모르겠다.

1592년 7월 24일부터 29일 무렵

의병장 김천일은 열엿새에 정예병 삼백 명을 거느리고 여산에서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병사도 열이렛날 만오천여 명을 거느리고 곧장 북쪽으로 향했다.

김천일은 이미 천안에 도착했고 병사는 공주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경명은 무기와 군량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아 뒤이어 출발한다고 한다.

어제 그의 군관인 진사 최상겸이 여러 고을에 도움을 청하는 일로 부사의 공문을 가지고 이곳에 왔다.

만나니 너무나 반가웠다가 또 슬픔이 밀려왔다.

서로 난리 중 겪은 일을 말하다 마주 보고 울었다.

그는 내가 묵는 곳에서 함께 잤다.

다음 날 아침 용담으로 향해 금산과 진산을 거쳐 고경명과 여산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그가 거느린 군사도 천여 명이라 했다.

다만 의병장들이 모두 유생이라 군사 일에 익숙하지 않고 장비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성공을 장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앞서 대군이 패한 것은 군사들의 마음이 하나가 아니어서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가 적을 보자마자 먼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번 의병은 모두 스스로 모집에 응해 억지로 나온 사람이 아니다.

마음이 하나이니 적은 수라도 적과 맞설 수 있을 것이다.

이 고을에서는 군량 두 바리와 긴 화살, 짧은 화살을 각각 다섯 묶음, 쇠탄환 백 개를 군영으로 보냈다.

최상겸은 나와 같은 동네 사람인데 지금 임실 처가에 살고 있다.

그의 부모와 형제자매가 모두 서울에 있어 생사를 알지 못한다.

의병에 응한 것도 부모를 찾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다.

그의 심정이 나와 같다.

1592년 7월 31일 무렵 (임진년 음력 6월 22일)

무주 율현으로 적 대여섯 명이 몰래 넘어와 형편을 살폈다.

다음 날 옥천 쪽에서 금산으로 들어온 왜적이 금산 수령과 싸웠다.

수적으로 맞설 수 없어 금산 수령은 세 번 싸워 세 번 패했고 끝내 말에서 떨어졌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다.

왜적은 이미 고을에 들어와 사방으로 흩어져 약탈하고 있다고 한다.

적은 먼저 무주 쪽을 건드려 우리 군사를 그곳에 묶어놓고 다른 곳을 치려 한 것이다.

우리 군사는 매번 그 꾀에 빠지면서 금산 경계는 막지 않고 무주만 지켰다.

참으로 한탄스럽다.

이들은 틀림없이 곧바로 완산까지 들어가려 할 것이다.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호남까지 도탄에 빠지게 되었으니 더욱 애통하다.

1592년 8월 3일 (임진년 음력 6월 26일)

새벽에 관아 식구들이 석천암으로 들어왔다.

가까운 곳과 먼 곳의 백성들도 남자는 짐을 지고 여자는 아이를 업은 채 산속으로 달아나 마을이 텅 비었다.

산과 숲은 오히려 피란민으로 붐볐다.

적이 산을 수색한다면 함께 화를 입을까 두렵다.

조방장 이유의와 남원판관 노종령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용성에서 이 고을로 온다고 한다.

그날 저녁 동풍이 크게 불어 밤새 그치지 않았다.

1592년 8월 4일 (임진년 음력 6월 27일)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며칠 동안은 개지 않을 것 같다.

오늘은 곡식을 사람이 찾아갈 수 없는 깊은 골짜기 여러 곳에 나누어 감추어두려 했다.

훗날 산으로 들어갔을 때 급하게 꺼내 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비 때문에 하지 못했다.

비가 갠 뒤 다시 하기로 했다.

아침에 우연히 편지 상자를 열었다가 지난 사월 스무날 어머니께서 쓰신 편지를 보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도 아직 알 수 없는데 다시 어머니의 글씨를 볼 수 있기를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어머니의 편지는 영암의 임씨 누이에게 보내 읽게 한 뒤 잘 간직하라고 했다.

처남 이윤의 편지도 보았다.

왜적이 금산에서 오 리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고 한다.

금산 수령은 싸움에서 패한 뒤 자기 고을로 급히 돌아왔다가 곧 피를 토하고 죽었다.

아내와 자식은 겨우 시신을 임시로 묻고 걸어서 진안 쪽으로 갔다고 한다.

슬프고 또 슬프다.

광주 목사가 그의 사촌이니 아마 그에게로 몸을 의탁하려 할 것이다.

같은 도의 주부군현에 알리는 광주목사 권율의 격문

1592년 8월 3일 (임진년 음력 6월 26일)

아아, 하늘이 어질지 못해 우리나라에 큰 재앙을 내렸습니다.

적의 난리가 일어난 지 겨우 석 달인데 영남 한 도와 호서, 경기 지방이 거의 모두 적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이백 년 동안 예의와 문물이 이어지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더러운 적에게 짓밟히고 백성이 풀 베이듯 죽임을 당했습니다.

온 나라 사람이 겁에 질려 감히 맞서지 못했고 마침내 임금께서 피란하시고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옛날에도 보기 어려운 큰 난리입니다.

통곡하고 또 통곡할 일입니다.

최근 조정이 믿고 왜적이 두려워한 곳은 오직 우리 전라도였습니다.

이곳을 나라를 다시 일으킬 근본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용인 싸움에서 수만의 온전한 군대가 겨우 오륙십 명의 적을 보고 달아났습니다.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고 병력이 약해졌으니 국토를 되찾을 날을 기약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우리의 죄가 이때부터 더욱 무거워졌습니다.

고려 말에도 우리나라를 괴롭힌 것은 몇몇 섬의 왜구에 불과했습니다.

관군에게 여러 번 패했는데도 계속 드나들며 사십여 년 동안 백성을 죽이고 땅을 짓밟았습니다.

하물며 지금 히데요시는 일본 여러 지역을 하나로 합친 사나운 자입니다.

오랫동안 큰 악을 품어왔습니다.

그들이 부산을 침범했을 때 용맹한 장수와 정예병이 위엄을 떨쳐 적을 없애고 배 한 척도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면 적은 본거지에서 두려움에 떨며 다시는 생각조차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고 우리가 오랫동안 편안함에 젖어 있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적이 천 리를 달려오면서도 한 사람의 제지도 받지 않았습니다.

후일의 걱정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알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형세는 작은 배 한 척이 큰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데 사나운 바람과 거센 파도에 휩쓸려 노가 부러지고 돛대가 꺾여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은 모습과 같습니다.

배 안의 사람이 모두 죽을힘을 다해 구해야 겨우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모두 함께 빠져 죽고 말 것입니다.

이 나라의 선비와 백성이라면 집집마다 싸우고 사람마다 분노하여 마치 자기 개인의 원수를 갚듯 해야 합니다.

그래야 위로는 임금과 부모를 구하고 아래로는 아내와 자식을 지킬 수 있습니다.

더구나 나라의 큰 은혜를 받고 한 고을을 맡아 군사와 백성을 다스리며 지역을 지킬 책임까지 받은 사람의 의무가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다행히 전라도는 아직 적의 칼날을 직접 겪지 않아 예전처럼 비교적 온전합니다.

우리는 한 번 패했다고 주저앉아 침상에서 쉬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전 관행을 따라 명령이 내릴 때만 우르르 나갔다가 우르르 물러나는 식으로 움직여서도 안 됩니다.

분발하여 나라의 위급함에 몸을 바치고 평범하지 않은 큰 공을 세워야 합니다.

바라건대 여러 수령은 다시 군사들을 모으고 무기를 정비하여 마음을 합치고 힘을 모아 한 몸처럼 움직이십시오.

나 권율이 비록 부족한 사람이지만 둔한 재주를 다해 여러 군사보다 앞에 서겠습니다.

한 도의 요충지를 지켜 적이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기회를 보아 진군하면서 차례로 적을 없애 대군과 의병의 힘이 되겠습니다.

한강 일대가 깨끗해지고 임금께서 돌아오시면 다시 승세를 타고 고개를 넘어 육지와 바다에서 함께 공격해 솥 안의 물고기와 개미굴 속 개미 같은 적을 남김없이 없애겠습니다.

그러면 삼군의 사기가 크게 오르고 종묘의 치욕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다음 바다를 가로질러 대마도까지 곧장 치는 일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사람은 천지 사이에 서서 짐승과 다른 까닭이 도덕과 인륜이 있기 때문입니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해와 별처럼 밝습니다.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하는 것이 군자가 바라는 길입니다.

지금 적 앞에서 겁을 먹고 깃발과 북을 버리고 먼저 달아나는 자는 임금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몸만 아끼며 요행히 목숨을 건지려는 사람일 뿐입니다.

적이 뜻을 이루고 나라의 일이 날로 위급해지면 풀숲으로 쥐처럼 숨어들어 잠시 목숨을 이어가려 해도 가능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짐승 같은 적에게 절하고 그들의 신하와 종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 없고 나라의 법 또한 엄합니다.

싸움에서 패하고 군대를 무너뜨린 죄에는 정해진 형벌이 있습니다.

본인은 죽임을 당하고 처자식은 관청의 노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고 몸과 이름을 함께 빛내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나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임금을 섬기는 의리를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군대가 패한 뒤부터 밥을 먹을 때도 목이 메고 잠자리에 누워도 가슴이 뛰었습니다.

밖에 나가면 나를 따르는 사람들을 보기가 부끄럽고 고개를 들고 숙일 때마다 신명에게 부끄러웠습니다.

살아서는 나라에 털끝만큼도 보탬이 되지 못했고 죽어서도 선조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내가 아직 죽지 않고 얼굴을 들어 사람을 대하는 것은 뜻을 함께하는 몇 사람과 힘을 모아 늦게라도 잘못을 만회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부디 여러 분은 내가 스스로를 꾸짖는 마음을 이해하고 이 지나치게 격한 말을 용서하십시오.

무기를 들고 함께 일어나 오직 앞으로 나아갈 뿐 물러서지 마십시오.

뜻을 다 말할 수 없어 여기서 줄입니다.

1592년 8월 5일 (임진년 음력 6월 28일)

저녁에 선조의 신주를 절 서쪽 산 중턱 메밀밭 가장자리의 마른 땅에 묻었다.

그 위에는 메밀 씨를 뿌려 사람들이 묻은 곳을 알지 못하게 했다.

신주를 옷으로 받치고 바구니에 넣었다.

먼저 기름 먹인 천으로 싸고 다시 멍석으로 감쌌다.

땅을 깊이 판 다음 나무를 가로세로 놓고 삼대 줄기로 틈을 보강했다.

사방에도 삼대를 세우고 마른 풀을 쌓은 뒤 신주를 담은 바구니를 넣었다.

그 위에도 같은 방식으로 덮고 흙을 더해 습기가 들어가지 않게 했다.

난리가 이처럼 심해 선조의 나무 신주조차 보전하지 못하고 먼저 땅속에 묻었다가 다시 더 깊은 골짜기로 옮기려 하니 그 슬픔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말안장과 옷 보따리는 절 동쪽 바위틈에 감추었다.

쌀도 골짜기 오른쪽 굴에 나누어 숨겨 훗날 산으로 깊이 들어갔을 때 꺼내 먹을 수 있게 했다.

쌀 열세 섬은 절 변소 사이 빈 곳에 감추었다.

형수의 옷 보따리 세 짐은 동쪽 깊은 골짜기 바위 사이에 숨겼다.

종 석지와 개손, 관아 사람 동이만 그곳을 알고 있다.

임진일록 — 1592년 음력 7월부터 12월까지

1592년 8월

1592년 8월 7일 (임진년 음력 7월 1일)

산속에 있다.

산에 들어온 뒤로 마음이 더욱 좋지 않다.

현 동쪽을 바라보며 영남 쪽에서 사람이 달려올 때마다 무슨 소식을 가지고 오는지 두렵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하여 마음을 가눌 수 없다.

무사하다는 소식이 오면 잠시 안심할 뿐이다.

병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올라간 뒤 승패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

왜적이 금산을 차지한 지도 오래되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막을지 알 수 없다.

그저 통곡할 뿐이다.

응일 이경백은 학질을 여러 차례 앓고 아직 낫지 못했다.

영진의 서조모도 오늘 같은 병에 걸렸다.

걱정스럽다.

오늘은 입추다.

난리가 초여름에 시작되어 석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진정되지 않았다.

흉악한 적의 침략은 여전히 끝나지 않는다.

언제 다시 태평한 세월을 볼 수 있을까.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은 어디로 떠돌고 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생각하면 슬픈 눈물이 저절로 흐른다.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오늘은 인종 임금의 제삿날이고 지난달 스무여드레는 명종 임금의 제삿날이었다.

임금께서 피란 중인 지금 이 두 날을 맞아 무슨 마음이셨을까.

북쪽 하늘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처남 이윤은 육십현을 지키는 일 때문에 어제 고을 경계로 돌아와 나를 불러 함께 이야기하자고 했다.

아침밥을 먹은 뒤 찾아가려 했다.

처음에는 신립이 충주에서 패해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들으니 전투에서 패할 때 좋은 말을 타고 적진을 뚫고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국필도 난리 초에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관직을 버리고 달아났다가 곧 죄를 받아 처형되었다고 들었는데, 다시 들으니 깊은 산속에 숨어 아직 살아 있으며 굶주림이 심해져 누군가 먹을 것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 길에서 들은 이야기라 사실인지 알 수 없다.

이날 처남 이윤이 현의 천잠리 한응기의 정자에 와서 묵는다는 말을 듣고 곧 달려가 만나려 했다.

도중에 용담 송현의 복병들이 왜적의 깃발을 보고 먼저 무너져 달아났다는 말을 들었다.

정자까지 달려가 겨우 얼굴만 보고 산속으로 돌아오니 이미 밤이 깊었다.

왜적이 용담에 앞서 보낸 글은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대강 자기들을 관찰사나 안무사라고 부르며 주민을 보살피러 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 꾀려는 말이었다.

적이 이미 용담과 무주를 함락했다고 한다.

오늘이나 내일이면 이 고을까지 올 것이다.

모든 일을 미리 준비했다.

관아 물건도 땅에 묻었다.

1592년 8월 8일 (임진년 음력 7월 2일)

아침을 먹은 뒤 관아 식구들이 절 뒤 더 깊은 골짜기로 다시 들어갔다.

나무를 이용해 집을 만들어 머물렀다.

오는 길은 골짜기가 몹시 험하고 비탈져 올라오기 어려웠다.

형수는 걸음을 잘 걸어 남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영진의 할머니만 길 절반쯤에서 학질이 도져 몹시 괴로워했다.

종 말질손과 개손이 번갈아 업고 부축하여 겨우 움막까지 왔다.

걱정스럽다.

응일은 병이 나았다. 다행이다.

현의 호장 이옥성이 호위병 다섯 명을 거느리고 관아 식구들을 지키려고 산속까지 찾아왔다.

나는 곧 그들을 복병이 있는 고개 너머로 돌려보냈다.

적의 동정을 보거나 들으면 즉시 달려와 알려 갑작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게 하라고 했다.

만약 적이 고을 안에 들어오면 다시 고개 하나를 넘어 숲속 깊이 숨을 생각이다.

이 움막은 절에서 십 리 남짓 떨어져 있다.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빽빽하여 햇빛이 보이지 않는다.

삼복더위인데도 모두 겹옷을 입고 더운 줄 모른다.

다만 아침저녁으로 모기와 날벌레가 떼 지어 달려드는 것은 견디기 어렵다.

천 리 타향에서 직접 난리를 만나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과 함께 고생하지도 못하고, 내 몸조차 편히 있지 못해 사람의 발길도 닿지 않는 깊은 산골로 도망쳐 들어왔다.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무에 기대어 깊이 생각한다.

“우리 어머니는, 내 아내와 자식은, 내 아우와 누이는 어느 땅, 어느 산, 어느 골짜기, 어느 물가에 있을까. 무엇을 먹고 어떤 죽을 마시고 있을까. 굶주려 배를 움켜쥐고 서로 울고 있지는 않을까.”

슬픈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울었다.

면산에서 무주와 용담을 지나 진안과 장수에 이르기까지 산길이 좁고 험하며 굽이진 요충지가 많다.

험한 곳에 궁수 수백 명을 숨겨두고 산등성이와 숲에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며놓기만 해도 적은 아무리 많아도 쉽게 전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장수들 가운데 적을 막을 계책 하나 내놓는 사람이 없다.

적의 소리만 들으면 먼저 물러나 달아난다.

분하고 또 분하다.

금산의 궁수 두 명이 군대가 패해 흩어질 때 길 아래 풀숲에 숨어 있다가 맨 뒤에 말을 타고 지나가는 적 두 명을 활로 쏴 죽였다.

그 말을 빼앗아 타고 순찰사에게 가져가자 순찰사가 후하게 상을 주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수많은 적 가운데서 한마음으로 적을 쏘아 죽이고 말을 빼앗아 돌아왔다.

용맹한 장수 두세 명이 각자 궁수 이삼십 명을 거느리고 요충지에 숨어 있다가 한꺼번에 활을 쏜다면 적은 반드시 자기 소굴로 달아나기 바쁠 것이다.

어느 겨를에 다른 고을까지 침범하겠는가.

곳곳에서 우리 군사가 먼저 무너지니 적이 사람 없는 땅처럼 깔보고 깊숙이 들어오는 것도 당연하다.

애통하다.

1592년 8월 9일 (임진년 음력 7월 3일)

산속에 있다.

오늘은 할머니의 제삿날이다.

서울이 함락된 뒤 사람들이 모두 제각기 달아났으니 제물을 올릴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 슬픔을 어찌 말하겠는가.

새벽에 꿈을 꾸었다.

아내가 관동 집에 평소 모습 그대로 있었고 막내딸 단아는 곱게 분을 바르고 단장하고 있었다.

나는 단아를 안아 무릎에 앉히고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는 아비를 생각했느냐?”

그러면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아내와 서로 피란 중 겪은 고생을 이야기하다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잠에서 깼다.

나는 나무 아래 누워 있었고 동쪽이 이미 밝아오고 있었다.

꿈속 일을 깊이 생각하니 눈앞에 보는 것처럼 생생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난리가 난 뒤 세 사람이 꿈에 자주 나타난다.

모두 살아 있는 것일까, 죽은 것일까.

왜 이렇게 자주 내 꿈에 들어오는가.

그런데 늙으신 어머니는 한 번도 꿈에 보이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꿈이란 허망한 것이지만 잠든 사이에라도 한번 어머니께 절하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내 효성이 모자라 그런 것인가.

슬픔이 더욱 심하다.

아침밥을 먹기 전 호장 이옥성이 급히 달려와 알렸다.

“어제 왜적이 곧바로 호천면까지 와서 민가를 불태웠습니다. 금산 안성창에도 불을 질렀습니다. 오늘은 틀림없이 고을 안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처남 어른과 조방장, 남평현감은 군사를 물려 고을 앞 원에 진을 쳤습니다.”

밥을 먹은 뒤 관아 식구들과 다시 짐을 꾸려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산은 갈수록 높고 험했으며 길조차 없었다.

열 걸음을 가면 아홉 번 넘어질 정도였다.

조금씩 올라가고 조금씩 쉬어 겨우 고개 위에 올랐다.

나무가 빽빽하여 양손으로 가지를 헤치며 가장 높은 곳까지 갔다.

사방이 끝없이 탁 트여 있었다.

고개 동쪽은 경상도 함양 경계로 한나절 남짓 걸리고, 동북쪽은 안음 땅으로 두 번 쉬어 갈 거리쯤 된다고 했다.

남쪽은 남원 땅으로 세 번 쉬어 갈 거리보다 멀고, 운봉은 그 사이에 있어 여기서 한나절 남짓 걸린다고 했다.

고개 남쪽 벼랑으로 내려가는 길은 벽 위에서 내려가는 것처럼 가팔랐다.

서로 부축하여 겨우 내려갔다.

산허리에도 못 미쳐 갑자기 우뚝 솟은 바위가 나타났는데 높이가 일곱여덟 길쯤 되었다.

그 아래에서는 차가운 샘물이 바위틈으로 흘러나왔다.

옛날 이곳에 작은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터가 아직 남아 있었고 앞에는 돌계단을 쌓아두었는데 한 길 정도 높이로 층층이 모양이 뚜렷했다.

폐허가 된 지 오래여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전에 응일과 종윤이 승려들을 데리고 여러 곳을 찾아다니다 이곳보다 나은 곳이 없어 나무를 베어 표시해 두었다.

그래서 이곳을 찾아왔다.

바위 아래 나무를 엮어 집을 만들고 기름 먹인 천과 종이옷, 도롱이 같은 것으로 덮었다.

오랫동안 지낼 생각이다.

현에서 석천암까지 십오 리가 넘고 그 사이에 매우 험한 큰 고개가 하나 있다.

그 암자에서 어제 묵었던 움막까지 다시 십 리가 넘는데 길은 더욱 험하다.

거기서 이곳까지도 다시 십 리가 넘는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이라 길도 끊겨 있다.

누군가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적이 고을에 들어와 숲속을 샅샅이 뒤져도 이곳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날마다 고개 위에 사람을 보내 동정을 살피기로 했다.

다만 처남 이윤이 지금 적의 위협을 받는 곳에 있는 것이 걱정이다.

이곳은 남원 관할이다.

면 이름은 추리이고 골짜기 이름은 서남이다.

예전에 서남사라는 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폐사되었다고 한다.

우리와 함께 온 사람은 다음과 같다.

  • 여종 네 명
  • 사내종 다섯 명
  • 관아 사람 정춘
  • 춘학
  • 동이
  • 승려 능인
  • 승려 능찬

오후에는 암자의 승려 유운과 현각이 숨어 있던 골짜기에서 숲을 헤치고 고개를 넘어 우리 숙소를 찾아왔다.

그 처지가 가엾었다.

관아 사람 동이는 아주 위급한 일이 생기면 나를 데리고 피하라고 처남 이윤이 미리 일러둔 사람이어서 내 일은 무엇이든 함께하고 있다.

1592년 8월 10일 (임진년 음력 7월 4일)

산속 바위 아래에서 잤다.

이른 아침 사람 네 명을 정해 현 동쪽 고개의 봉수대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적의 소식을 알아보고 적이 고을에 들어오는지 살펴오게 했다.

한낮에 관아 사람이 처남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알렸다.

왜적은 아직 고을에 들어오지 않았다.

진안을 곧바로 함락한 뒤 조방장과 남평현감이 그 소식을 듣고 완산을 구원하겠다며 임실로 달려갔다고 한다.

처남은 아직 고을 남쪽 민가에 있다고 한다.

걱정스럽다.

엊그제 관아에 쌓아둔 군량과 관청의 잡곡을 군사와 백성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

민가 가운데 곡식이 있는 집은 적이 그것을 보고 오래 머물까 두려워 불태웠다.

동쪽 마을 무당의 집에는 저장한 곡식이 특히 많아 역시 불을 질렀다.

창고 집의 불은 이틀 낮과 밤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원문 다섯 줄 훼손]

왜적이 서울에 들어간 뒤 길이 막혀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집안 소식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조정에서 무엇을 하는지도 알 수 없다.

한두 사람이 말을 전해도 모두 길에서 들은 소문이라 믿을 수 없다.

처음에는 임금께서 평양에서 고개를 넘어 함흥부로 가셨다고 들었는데 이제 다시 들으니 아직 평양에 계시고 북쪽으로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 한 가지만 보아도 다른 소문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지난밤 바위 아래에서 잤다.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 한밤이 되자 찬 기운이 살갗을 찌르듯 차가워 견디기 어려웠다.

솜옷은 모두 바위굴에 숨겨둔 채 왔으니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바위 앞 계단 위에 방 하나짜리 집을 엮고 풀과 나무로 지붕을 덮고 바닥에도 풀과 나무를 깔아 쉬는 곳으로 삼았다.

비가 오면 틀림없이 샐 텐데 어떻게 견딜지 걱정이 많다.

그러나 적만 오지 않는다면 내 몸 하나 고생하는 것은 계산할 것도 없다.

얼마 뒤 갑자기 산비가 쏟아졌다.

위에서 물이 새고 아래는 젖어 간신히 견뎠다.

큰비가 하루 종일 오면 정말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다.

저녁에 정찰하러 나갔던 사람이 돌아와 말했다.

적은 아직 고을에 들어오지 않았고 사방에도 별다른 소식이 없으니 아마 완산으로 간 듯하다고 했다.

1592년 8월 11일 (임진년 음력 7월 5일)

산속 바위 아래에 있다.

아침에 사람을 고을로 보내 적의 소식을 살피게 했다.

또 종 두 명을 보내 바위굴에 감춰둔 옷을 가져오게 했다.

추위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바위틈에는 석이가 온통 붙어 있었다.

그것을 따다가 나물로 만들었다.

산나물도 뜯어 푹 삶아 밥과 함께 먹었다.

철이 지나 질기기는 했지만 산속에서 먹을 만한 별미가 되었다.

저녁에 정찰하러 갔던 춘학 등이 돌아왔다.

적은 아직 고을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주의 왜적도 용담으로 모여 관사를 부수고 냇가에 줄지어 임시집을 지었다고 한다.

창 구멍을 내어 사방을 바라보게 했다고 한다.

틀림없이 진안과 장수로 나누어 침범하려는 듯하다.

이는 처남의 편지와 아전 이언홍이 적의 소식을 적어 보낸 내용이다.

[원문 여섯 줄 훼손]

1592년 8월 12일 (임진년 음력 7월 6일)

산속 바위 아래에 있다.

한낮에 현의 아전 백언곡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저녁에는 호위병 박명련과 한련 등이 처남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조방장과 남평현감이 군사를 거느리고 곧장 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고 한다.

처남도 관아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적이 진안에 들어온 뒤 다시 이 고을 호천까지 침범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다시 알아보니 아마 거짓 보고였다고 한다.

이곳의 소식조차 이처럼 어긋나니 다른 곳의 소식이 어떠할지 알 만하다.

밤중에 두견새 소리를 들으니 처량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꿈에 경여 부부를 보았다.

무슨 까닭일까.

1592년 8월 13일 (임진년 음력 7월 7일)

골짜기 안 냇가에서 묵었다.

오늘은 칠석이다.

서늘한 바람이 불고 초승달이 고개 위에 걸렸다.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오늘이 칠석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감회가 더욱 깊어 슬픈 눈물을 참기 어렵다.

또 왜적이 관북으로 향했다가 철령에서 패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관동도 적의 소굴이 된 셈이다.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이 동쪽으로 피했다면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두렵고 의심스러워 걱정이 끝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지금처럼 적의 기세가 날마다 가까워지는 때 바위굴에 숨어 하루가 한 해처럼 길게 느껴지니 차라리 한 번 죽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도 고생하며 달아나 목숨을 보전하려는 것은 하늘이 언젠가는 재앙을 거둘 것이고 흉악한 적도 오래 머물 운명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죽지 않고 버티면 나라가 다시 일어나는 날을 보고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 아우와 누이를 다시 만나고 싶다.

이른 아침 쌀을 져 나르게 하려고 남자들을 모두 석천사로 보냈다.

아침밥을 막 먹고 나자 고개 위에서 대포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위아래 사람들이 놀라 어쩔 줄 몰랐다.

응일이 먼저 형수를 모시고 있던 물건을 모두 버린 채 곧바로 서남동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내 생각에는 어제저녁까지 적이 고을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오늘 아침 갑자기 산 위에서 대포를 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모두 달아나 내려가니 나 혼자 남을 수도 없어 같이 내려갔다.

골짜기는 깊고 멀며 전보다 훨씬 험했다.

넘어지고 쓰러지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

거의 골짜기 입구까지 갔다가 멈췄다.

거리를 헤아려보니 십오 리가 넘었다.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아무 일도 없었다.

아마 바위에서 돌이 떨어지며 대포 같은 소리가 난 듯했다.

곧 다시 위로 올라왔다.

몇 리쯤 가다가 삼을 물에 담가두는 곳이 있어 냇가에 임시집을 지었다.

삼대를 엮어 지붕을 덮고 묵었다.

한밤중에 큰비가 갑자기 쏟아졌다.

기름 먹인 천 한 폭을 위에 덮었지만 비가 더욱 세게 내리며 사방으로 물이 샜다.

옷이 모두 젖었다.

갓을 쓰고 밤새 앉아 있었다.

그날 밤의 고생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팔을 베고 잠깐 졸았는데 꿈에 윤겸이 보였다.

나는 관동의 별채에 있었고 윤겸은 밖에서 들어와 기둥 앞에서 절했다.

나는 말했다.

“네 말을 네 상전 집으로 보내놓았는데 다시 타고 왔느냐?”

무슨 뜻의 꿈인지 모르겠다.

이런 고생 중에도 부모와 자식 사이의 본성이 서로 통하여 윤겸이 나를 몹시 생각하기 때문에 꿈에 나타난 것일까.

이 한 줄을 쓰는데 슬픈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눈물을 참을 수 없다.

1592년 8월 14일 (임진년 음력 7월 8일)

골짜기 냇가에서 묵었다.

오늘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신이다.

옛일을 생각하니 슬픈 마음을 견딜 수 없다.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 아우와 누이는 오늘 어디에 있으며 이 날을 생각하고 있을까.

슬프고 또 슬프다.

눈물을 거둘 수 없다.

저녁에 정찰하러 나갔던 사람들이 호장의 보고서를 가지고 왔다.

엊그제 왜적이 이미 진안에 들어와 가까운 고을의 산과 숲과 민가를 불태우고 관아 사람과 백성을 많이 붙잡아갔다고 한다.

어제는 말을 탄 적 네 명과 걸어온 적 열 명이 이 고을 경계를 엿보러 왔다.

우리 고을의 망보는 사람들이 적이 왔다고 소리치자 왜적은 총 세 발을 쏜 뒤 다시 진안 쪽으로 돌아갔다.

조방장과 보성, 남평 두 고을의 수령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 고을에 와서 묵었다.

오늘 아침 처남과 함께 고을에서 십여 리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고 한다.

그 뒤의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다.

다만 이 고을 군사는 모두 달아나 처남은 군사도 없이 홀로 나아갔다고 한다.

걱정스럽고 또 걱정스럽다.

1592년 8월 15일 (임진년 음력 7월 9일)

골짜기 냇가에서 묵었다.

이른 아침 종 주질동과 승려 능인을 봉수대가 있는 곳으로 보내 적의 소식을 알아오게 했다.

저녁에 돌아와 보고했다.

적은 침범하지 않았다.

다만 어제 현 경계에 있는 덕안원 원주의 집을 불태운 뒤 진안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날 소나기가 여러 차례 내렸다.

하루 종일 갓과 도롱이를 쓰고 돌 위에 쪼그리고 앉아 저녁까지 지냈다.

고생을 말로 다 할 수 없다.

며칠 전 바위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놀라 허둥댄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왜적은 산에 숨어 있는 사람을 찾을 때 흔히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총을 쏜다고 한다.

그러면 숲에 숨어 있던 어린아이와 개와 말이 놀란다.

아이 울음, 개 짖는 소리, 말 우는 소리가 나면 그 소리를 따라가 사람을 잡는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1592년 8월 16일 (임진년 음력 7월 10일)

골짜기 냇가에서 묵었다.

이른 아침 관아 사람 동이와 종 개손 등을 보내 적의 소식을 알아오게 했다.

하루 종일 냇가 돌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허리 아래가 쇠처럼 차가웠다.

저녁에 동이 등이 처남의 편지와 통문을 가지고 돌아왔다.

처남의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초여드레 왜적이 이미 웅현을 넘어 완산으로 향했다.

고개를 넘는 동안 우리 군사가 적장 한 명과 보통 왜적 한 명을 베고 다섯 명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완산에는 아래쪽 여러 고을의 군사가 와서 지키고 있으니 쉽게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이곳 천잠에 진을 친 보성, 남평과 조방장의 군사는 천여 명이다.

구례 수령도 군사를 거느리고 현 북쪽 추현에 매복해 있다.

적이 장계를 돌아 진의 뒤쪽으로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처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중대령 위에 매복했다.

적이 진안이나 완산에서 몰래 고개를 넘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또 영남에서 온 통문에는 안국사라는 왜승이 정승이라 자칭하며 이끄는 이천여 명이 현풍현에 들어와 묵은 뒤 초나흘 가야산과 금산군 쪽으로 향했다고 했다.

[원문 열여 줄 훼손]

현의 호장이 소의 앞다리와 뒷다리, 벌집을 보내 밥반찬에 보태게 했다.

1592년 8월 17일 (임진년 음력 7월 11일)

산속 바위 아래에서 묵었다.

어제저녁 적이 완산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침을 먹은 뒤 전에 머물던 바위 아래로 돌아왔다.

오래 머물 생각이다.

저녁에 적을 살피러 갔던 사람이 돌아왔는데 어제와 같고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1592년 8월 18일 (임진년 음력 7월 12일)

산속 바위 아래에 있다.

이른 아침 관아 쪽으로 사람을 보내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한낮에 현의 아전 백언곡이 찾아왔다.

처남의 편지에 따르면 초이렛날 적이 웅령을 넘을 때 나주판관과 김제군수, 의병장 황류 등이 맞서 싸워 백여 명을 활로 쏴 죽였다고 한다.

왜적은 전주 안두원에 세 곳으로 나누어 진을 쳤다고 한다.

저녁에는 정찰하러 간 사람이 처남의 편지와 통문을 가지고 돌아왔다.

운봉에서 전해온 글에는 영남의 적 가운데 안국사라고 불리는 왜승과 여러 곳에 머물던 적들이 모여 무주와 지례 등에 진을 치고 움직일 때를 엿보며 호남으로 침범하려 한다고 했다.

매우 걱정스럽다.

대체로 적의 기세가 매우 사납다.

전에 진안에 있던 적은 이미 웅현을 넘어 전주 땅에 진을 쳤고 영남의 적도 무주 경계까지 왔다.

틀림없이 힘을 합쳐 전주성을 삼키려는 것이다.

또 들으니 왜적이 산을 수색할 때 보통 두세 명을 높은 봉우리 위로 보내 깃발을 들고 소리를 지르게 한다고 한다.

그리고 열 명이나 열다섯여섯 명이 몽둥이를 들고 숲을 마구 두드리며 꿩을 몰아내는 사냥꾼처럼 움직인다.

사람 소리가 나지 않으면 지나가지만

 

이여송 도독에게 올린 시 — 유학 임전

삼가 명나라 원수 이공 각하께 올립니다.

지금 성스러운 천자의 명을 받들어 우리처럼 위태로운 나라를 구해 주시니 그 은혜가 한량없습니다. 기뻐 뛰며 감사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감히 변변치 못한 시 스무 운을 지어 제 마음을 조금이나마 드러냅니다. 어찌 감히 시라고 할 만하겠습니까.

두 대에 걸쳐 장수의 임무를 이어받으니
무장의 집안에서 물려받은 가업이 융성하네.

병법은 황석공의 가르침을 전해 받은 듯하고
검술은 흰 원숭이 노인에게 배운 듯하네.

백 번 싸워 그 위엄이 널리 드러났고
삼군을 다스리는 법도 또한 뛰어나네.

무너진 하늘을 떠받칠 큰 계책을 지녔고
바다를 막아내는 기이한 공을 세웠네.

서쪽 땅에서 이미 큰 명성을 얻었고
동쪽 나라에서도 승리를 이끌 영웅이 되었네.

조선 백성은 넓은 은혜를 입고
오랑캐들은 남은 위엄만 보고도 떨리라.

의주에 장수의 깃발을 세우고
패수 가에는 진영이 끝없이 이어졌네.

명령은 천둥처럼 엄하고
군대의 위엄은 서리와 눈처럼 매섭네.

전통에서 화살을 뽑으면 별빛이 번쩍이고
시위를 당긴 활은 둥근 달처럼 팽팽하네.

큰 적장은 이미 간담이 서늘해졌으니
남은 무리들이 어찌 감히 몸을 빼 달아나겠는가.

그물에 든 물고기처럼 적은 궁지에 몰리고
쫓기는 새처럼 달아날 곳을 잃었네.

흉악한 적을 풀 베듯 쓸어버리니
사악한 기운은 바람에 구르는 쑥대처럼 흩어지네.

위엄은 요동 북쪽까지 떨치고
군세는 동해 너머까지 미치네.

조선의 끊어질 듯한 국운을 다시 붙들고
일본의 흉악한 무리를 모조리 쓸어버리리.

변방의 오랑캐 별빛은 떨어지고
명나라의 해는 하늘 한가운데 더욱 밝네.

편안히 놀기만 했던 우리들이 부끄럽고
나라를 다시 넓혀 주는 여러 공들의 은혜가 크네.

신하와 백성은 새로워진 세상을 바라보고
임금께서는 다시 옛 궁궐로 돌아가시리.

이제야 알겠네. 훌륭한 장수의 계책은
실로 성스러운 황제의 뜻에서 나온 것임을.

어진 이는 본래 천하에 적이 없고
정의로운 왕의 군대는 예로부터 그러했네.

작은 나라 백성이 기뻐 춤추는 이 마음을
바라건대 황제께도 전해 주소서.

이여송에게 다시 올린 시

마침 대감이 베 두 필을 보내주었다. 흰 베옷에 관한 대목은 원문이 분명하지 않다.

내가 지은 시를 올리자 각하께서는 보잘것없다고 물리치지 않고 말을 멈춘 채 오래도록 거의 끝까지 읽어보셨다. 이어 좌익 도독에게 전해주고 곧 물으셨다.

“너는 무슨 벼슬을 맡고 있느냐?”

말씀도 매우 따뜻하고 자상하셨다.

남루 앞에서 행차를 멈추셨다가 다시 나를 부르셨으니, 바닷가의 보잘것없는 선비인 나로서는 너무나 큰 영광이었다.

지금 오랑캐 때문에 우리 원수께서 수고하시는 일이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이미 정해진 운수가 있는 듯하다.

정해년부터 아이들이 부르던 노래 가운데 이런 말이 있었다.

이리 달아나고 저리 달아나고, 모두 달아난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십팔자가 많은 도적을 쓸어버린다.

그때 사람들은 그 뜻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지난해 왜적과 맞설 때마다 싸우기만 하면 패했는데 평양의 승리는 이 대감께서 오신 뒤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러고 보니 노래에 나온 ‘십팔자’가 바로 ‘이’라는 성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많은 도적을 쓸어버린다’는 예언 또한 믿을 만한 징조가 있었다.

그래서 다시 스무 운의 시를 지어 감히 장군의 막부에 올린다. 옛 노래에 담긴 뜻을 잇고자 한 것이니, 외람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란다.

큰 고래 같은 왜적이 푸른 바다를 뒤흔들어
그 남은 물결이 우리 궁궐까지 밀려왔네.

명나라 황제께서는 작은 나라를 가엾게 여기시고
용맹한 장수를 동쪽으로 보내 근심을 없애게 하셨네.

삼군을 거느리는 장수여
한 시대의 빼어난 영웅이로다.

형제는 꽃받침처럼 늘 함께하고
기러기 떼처럼 서로 떨어지지 않네.

소라 나팔 소리에는 차가운 서리가 서리고
용을 그린 깃발은 햇빛 속에 눈부시네.

도성 백성은 앞다투어 춤추고
귀신 같은 적들은 스스로 거꾸러지네.

평양에서 먼저 적의 계책을 깨뜨리고
개성에서도 다시 승세를 떨쳤네.

군대의 함성은 바다까지 솟구치고
병사들의 기세는 구름처럼 길게 뻗었네.

나라를 평정하는 일이 어찌 어렵겠으며
그 위엄 앞에 누가 감히 맞서겠는가.

화산에는 푸른 산빛이 다시 떠오르고
한강에는 맑은 물결이 출렁이네.

예와 문물이 다시 제 운을 만나고
임금의 법도도 다시 일어나리.

천둥처럼 엄하게 적을 쓸어내리니
개미와 이 같은 무리가 저절로 사라지네.

명나라의 달은 이제 더욱 빛나고
요사스러운 별은 이미 빛을 잃었네.

남쪽 바다에서는 왜적을 섬멸하고
서쪽에 계신 우리 임금께서는 돌아오시리.

신의 도움이 막힌 운수를 다시 트이게 하고
하늘의 도움이 나라의 앞날을 다시 일으키네.

성스러운 임금을 늘 간절히 축원하고
어진 장수의 은혜 또한 잊을 수 없네.

호랑이처럼 바라보는 모습은 제갈량과 같고
매처럼 날아오르는 기세는 여망과 같네.

종묘와 사직의 복이 길이 이어지고
백성의 노래도 좋은 징조와 맞으리.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아 큰 공을 이룰 것이니
[원문 훼손]

한낱 선비의 재주가 비록 보잘것없지만
이 큰 덕을 어찌 노래하지 않을 수 있으랴.

명나라 사람 송여량이 답했다.

훌륭한 작품은 이미 대감께 올렸습니다.
동요의 예언이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니 기쁘고 웃음이 절로 납니다. 바쁜 가운데 삼가 받들어 올립니다.

원수의 참모 송여량.

명나라 사신 설번의 상주문

행인사의 행인 설번이 아룁니다.

왜적의 속셈은 교활하고 믿기 어려우므로 군사를 동원해 토벌하는 일을 서둘러야 합니다. 아울러 미리 방어해야 할 몇 가지 일을 말씀드리니 성상께서 살펴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앞서 병부에서는 일본이 조선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반란을 일으킨 형세가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문무 대신을 급히 보내 전쟁을 총괄하게 하고 군사를 일으켜 그들의 미친 계책을 꺾어야 한다고 아뢰었습니다.

이에 황제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조선이 왜적에게 함락되고 국왕이 매우 급하게 구원병을 청하고 있다. 이미 여러 관리가 가 있으니 병부에서도 다시 의논하고 상황을 자세히 알아본 뒤, 마땅히 시행할 일을 헤아려 신속하게 구원하라. 구원을 기다리게 하다가 때를 놓쳐 훗날 우리 변경까지 해를 입게 해서는 안 된다.”

이에 관리를 임명하고 장수를 보내는 일과 조선 국왕에게 황제의 뜻을 전하는 일이 정해졌습니다.

신은 명을 받들어 급히 조선으로 달려가 황제의 칙서를 펴서 국왕에게 전했습니다.

조선의 임금과 신하 가운데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 말하기를,

“황제께서 작은 나라를 불쌍히 여기고 돌보시는 은혜는 마치 하늘과 땅이 만물을 품어 기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명나라 군대를 기다리는 모습은 큰 가뭄에 구름과 무지개를 기다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신이 조선 군신들이 다급하게 호소하는 말을 직접 듣고, 백성들이 고통을 겪으며 떠도는 모습을 직접 보니 나라의 존망이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걱정하는 것은 조선의 존망만이 아닙니다. 우리 명나라 변경의 안전이 더 큰 문제입니다. 더 깊이 생각하면 변경만이 아니라 내지까지 놀랄 일이 생길까 걱정스럽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동원해 토벌하는 일을 한시도 늦출 수 없습니다.

신이 앞으로 반드시 닥칠 형세와 미리 방어를 강화해야 할 곳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요동은 수도의 왼팔과 같은 곳이며 조선은 바로 요동을 막아주는 울타리입니다. 영평은 수도 주변의 중요한 땅이고 천진은 수도로 들어오는 문과 같은 곳입니다.

지난 이백 년 동안 복건과 절강은 왜적의 침입을 당한 적이 있었지만 요양과 천진에 왜적이 출몰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조선이 앞을 막아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압록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러 길이 이어지는데 서쪽 가까운 곳은 물이 얕고 강폭도 좁아 말을 타고 단숨에 건널 수 있습니다. 어떤 곳은 동서 사이가 화살 한 번 쏠 거리보다도 짧습니다. 이런 곳을 어찌 믿고 방어할 수 있겠습니까.

왜적이 조선을 차지한다면 요양 백성은 단 하루 밤도 편히 잘 수 없을 것입니다.

순풍 한 번만 불어도 배를 띄워 서쪽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 영평과 천진이 먼저 화를 입을 것이고 수도 또한 어찌 놀라지 않겠습니까.

신은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염려되어 가는 곳마다 자세히 묻고 조사했습니다. 또 사람을 평양까지 보내 적의 형편을 살피게 했습니다.

돌아온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기를, 왜적은 조선의 집집마다 부녀자를 골라 자기들의 아내처럼 삼고 집을 고치며 식량과 꼴을 많이 쌓아 오래 머물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무기를 더 만들고 민가의 활과 화살까지 거두어 전쟁에 쓰고 있다 하니 그들의 뜻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신이 조선에 도착했을 때 왜적은 서쪽으로 진군하여 압록강까지 군세를 보이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었습니다. 조선 신민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다행히 유격장 심유경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혼자 말을 타고 적진에 들어가 말을 전했습니다. 그는 오십 일 동안 공격하지 않기로 약속하게 하여 우리 군대가 올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계책으로 저들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저들이 같은 계책으로 우리를 속이고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그들은 매우 교활합니다.

처음 평양을 함락했을 때에는 “명나라에 복수하러 가기 위해 조선의 길을 빌리고 싶다”고 하더니, 지금은 “길을 빌려 명나라에 조공하고 싶다”고 합니다.

조금 전까지는 명나라와 겨룰 수 없는 것이 천고의 한이라고 떠들다가 갑자기 심유경을 만나 조공할 길이 열렸다며 기뻐한다고 합니다.

어느 순간에는 거만하게 욕하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공손한 말을 합니다. 이 한 가지만 보아도 그들의 간사함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은 원래 십 년에 한 번 조공하는 것이 정해진 규례이고 조공길 또한 영파부를 거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선을 끼고 우리에게 맹약을 요구하며 여러 차례 통역관을 보내고 있으니 어찌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신이 생각하기에 그들의 계책은 매우 교활합니다. 귀순과 화친을 말해 우리 군대의 출동을 늦추려는 것뿐입니다.

혹 강이 얼기를 기다렸다가 요양을 침범할 수도 있고, 봄을 기다렸다가 천진을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인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즉시 대군을 보내지 않는다면 저들은 가는 곳마다 감히 막는 자가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순순히 배를 돌려 일본으로 돌아가겠습니까. 신은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지금 조선은 멸망 직전에 놓여 하루아침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명이 한 번 내려가 충의로운 마음을 북돋우고 적개심을 일으키자 조선 사람들은 모두 나라를 되찾을 생각뿐이며 왜적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있습니다.

이 민심을 이용하고 여기에 정예군을 보태 조선군과 협공한다면 왜적을 정해진 시일 안에 섬멸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시간을 끌면 적은 가난한 자들을 끌어모으고 흩어진 백성을 달래며 자리를 굳힐 것입니다. 조선 백성들이 오랜 전쟁을 싫어하여 새 주인을 편안하게 여기게 된 뒤에는 백만 대군을 보내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군사를 보내 토벌하면 오히려 왜적의 중국 침입을 재촉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토벌해도 올 것이고 토벌하지 않아도 올 것입니다.

우리가 토벌하면 평양 동쪽에서 적을 붙들어둘 수 있으므로 침입이 늦어지고 피해도 작아질 것입니다. 토벌하지 않으면 평양 밖으로 마음대로 밀고 들어와 침입은 빨라지고 피해도 커집니다.

빨리 토벌하면 조선의 힘을 빌려 왜적을 잡을 수 있지만, 늦게 토벌하면 오히려 왜적이 조선 사람들을 거느리고 우리를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군사를 동원해 토벌하는 일을 한시도 늦출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군을 한꺼번에 모으기 어렵더라도 차례차례 계속 보내 조선의 기세를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저 왜적의 기세라도 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군사를 일으킬 때 가장 큰 비용은 군량입니다.

신이 조사해 보니 지금까지 모은 곡식은 겨우 칠팔천 명이 한 달 동안 먹을 정도뿐입니다. 부족한 것은 우리 쪽에서 이어서 지원해야 합니다.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도 많은 사람과 말을 동원하여 압록강가에서 군량을 운반하겠다고 합니다.

평양을 되찾은 뒤에는 조선 백성들도 우리 군대가 자기 부모와 형제를 위해 원수를 갚아준 것을 기뻐하여 앞다투어 곡식을 낼 것입니다. 그러면 현지에서도 군량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왜적이 쌓아놓은 군량도 있습니다.

관전, 대전, 운양 같은 곳은 서북쪽으로 북방 오랑캐와 맞닿고 동남쪽으로 압록강을 끼고 있습니다. 그 경계가 오백 리가 넘는데 원래 배치된 군사 수부터 매우 적습니다.

지금 여러 진영으로 차출된 기병과 해마다 달아나거나 죽은 군사를 빼면 관전에는 실제 군사가 삼백삼십여 명밖에 없습니다.

왜적도 막고 북방 오랑캐도 막아야 하는데 성보를 지키려면 군사가 있어야 하고 길목을 막으려 해도 사람이 필요합니다. 정말 왜적이 온다면 무엇으로 막겠습니까.

그러므로 관전 등지의 병력을 빨리 보충해야 합니다.

북쪽 사람들은 북방 오랑캐를 막는 데 익숙하고 남쪽 사람들은 [원문 훼손]에 능합니다. 왜적과 싸우려면 남쪽 군사 이만 명은 있어야 그 예봉을 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남쪽 병력을 서둘러 불러야 합니다.

우리의 장기는 기마와 활쏘기이고 왜적의 장기는 조총입니다.

활과 화살은 갑옷으로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만 조총은 사람과 말을 가리지 않고 쓰러뜨립니다. 게다가 등나무 방패는 사람뿐 아니라 말까지 가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등나무 방패와 조총 또한 서둘러 마련해야 합니다.

신이 말씀드린 일들은 아마 여러 대신도 먼저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굳이 신의 말이 더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 일찍 움직이면 조선이 하루 더 멸망의 화를 피할 수 있고, 하루 늦으면 우리 변경에 하루 더 근심을 남깁니다.

바라건대 황제께서 밝게 결단하시어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고 해당 신하들에게 명하여 병마를 재촉해 보내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변경에도 큰 다행이고 종묘와 사직에도 큰 다행일 것입니다.

신은 공연히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하는 사람처럼 지나치게 근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침 풍한에 걸려 병이 나 길에서 빨리 달려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향한 충정만은 간절하여 일이 늦어질까 두려워 이 상소를 갖추었습니다.

먼저 집안사람 설지에게 지니게 하여 삼가 황제께 아룁니다.

도체찰사 정철이 의병에게 내린 글 — 종사관 신흠이 지음

아아, 임금께서 피란길에 오르고 종묘와 사직은 폐허가 되었으니 나라의 어려움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우리 조상 임금들이 백성에게 베푼 깊고 두터운 은혜가 사람들의 뼛속까지 스며 있어 백성은 아직 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하늘도 우리나라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초야의 여러분이 모두 의로움에 떨쳐 일어나 충성을 품고 절개를 지키며 목숨을 걸었다. 어떤 이는 벼슬하던 사람이고, 어떤 이는 선비이며, 어떤 이는 시골 마을이나 산속에서 일어났다.

구름처럼 모여들고 바람처럼 달려온 사람의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의로운 명성이 퍼지는 곳마다 왕실의 위엄이 다시 떨쳐지고 나라의 운명이 실오라기 하나처럼 간신히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어찌 여러분의 힘이 아니겠는가.

예전에 높은 벼슬과 큰 녹을 받아 나라의 은혜를 누리던 자들 가운데 나라가 하루아침에 위태로워지자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도리어 임금의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나라의 희망이 되었다.

어려운 때에도 변하지 않는 절개와 나라가 어지러울 때 드러나는 진심을 나는 여러분에게서 보았다.

하늘의 벌을 받들어 저 요사스러운 적을 쓸어내고 서울과 궁궐의 더러운 기운을 씻어내며 온 나라에 퍼진 독을 없앨 사람이 여러분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맡겨진 책임은 매우 무겁다.

뜻을 더욱 굳게 하고 힘을 넓혀가는 것이야말로 오늘 여러분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 역시 이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먼저 의병이라는 말의 뜻을 이야기하고 다음으로 그 뜻을 어떻게 더욱 키워나갈지를 말해보겠다.

아아, 세상의 도리가 무너지고 사람의 마음이 어두워져 진정한 의로움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드물어졌다.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기 자리만 생각하고, 관직을 맡은 사람은 자기 관청만 생각하며, 아래 사람은 자기 몸과 자기 처자만 생각한다. 이제 세상에서 의리라는 말은 거의 묻지 않게 되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사사로운 욕심까지 더해졌으니 의병이라는 말을 듣고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슨 놀라운 일이겠는가.

내가 이 지역에 들어온 뒤 각 고을의 관리들이 잇달아 찾아와 말하기를,

“어느 의병장이 관군을 빼앗아갔습니다.”

“어느 부대가 관군을 데려갔습니다.”

하였다.

이런 말이 너무 많아 처음에는 웃었고, 그다음에는 이상하게 여겼으며, 끝내는 크게 놀랐다.

나는 생각했다.

“모두 나라를 위한 사람들이며 함께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인데 어찌 서로 미워하기를 이토록 심하게 하는가.”

어떤 고발은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았고 어떤 것은 [원문 훼손]하였다.

얼마 뒤에는 의병에 속한 사람들도 잇달아 찾아와,

“어느 고을에서 우리 고을을 침범했습니다.”

“어느 진영에서 우리 군사를 빼앗았습니다.”

하며 죄를 물어달라고 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런데 그들이 조목조목 들이대는 말은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숟가락과 젓가락을 내던지며 말했다.

“[원문 훼손]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부모가 중병에 걸려 목숨이 오늘내일하는데 자식들이 여럿 있다고 하자.

그중 불행히도 한두 사람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고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면 효자라면 마땅히 눈물을 흘리며 타이르고 서로 화해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오직 약을 구하고 부모를 돌보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부모가 병들어 죽어가는데 서로 눈치를 보고 흠을 들추며 부모 곁에서 시끄럽게 다투고 치료하고 보호할 일은 잊어버린다면, 결국 부모가 죽도록 내버려두겠다는 말인가.

의로움이란 마땅함이다.

옛 학자는 의로움을 두고 “마음을 다스리고 일을 마땅하게 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렇다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의롭지 않은 것이고, 일이 마땅함에서 벗어나도 의롭지 않은 것이다.

지금 왜적을 토벌하는 일 하나만 놓고 보자.

나라를 위해 적을 막는 사람은 모두 의로운 사람이고, 나라를 위해 군사를 모으는 사람도 모두 의로운 사람이다.

어찌 관군의 의로움과 의병의 의로움이 서로 다르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처음에는 말다툼으로 시작하고 끝에는 문서로 서로 따지며, 그것으로도 부족해 서로 욕한 일을 나에게 잇달아 고하는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얼굴에 화를 드러내고, 길게 읍만 하고 절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똑바로 서서 노려보는 사람도 있다.

아아,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과연 마음이 제대로 다스려졌다고 할 수 있는가. 과연 일이 마땅하게 처리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의병의 기세가 한창 올라올 때 이를 북돋우고 세워주려고 하는 사람이다. 어찌 그 사이에 조그마한 거리낌이라도 두겠는가.

다만 나라는 위아래가 서로 이어지고 통솔되는 힘이 있어야 나라답게 유지될 수 있다.

위로는 공경대부에서 아래로는 아전까지, 크게는 한 도를 맡은 관리에서 작게는 말단 관리까지 법도와 질서가 피와 맥처럼 이어져 있어야 명령과 상벌이 막힘없이 시행된다.

그런데 지금 의병은 적어도 삼사십 부대에 이르는데 저마다 스스로 장수가 되어 전체를 거느리는 사람이 없다.

무리끼리 따로 모이고 서로 기세가 이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기기를 좋아해 좀처럼 남에게 자신을 낮추지 않으며 하나로 합치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한 현이 이렇고 한 군이 이러며 끝내 한 도 전체가 이 꼴이 된다면 큰 공을 어떻게 세우고 큰 뜻을 어떻게 이루겠는가.

그렇게 되면 ‘의병’이라는 이름만 있고 실질은 없어질까 두렵다.

나는 늘 이것을 걱정해 왔다.

그런데 홍양에 있는 심수경 정승이 원수가 되어 의병을 전체적으로 지휘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너무 기뻐 잠을 이루지 못하고 혼잣말로 말했다.

“이것은 참으로 나라의 복이며 백성의 다행이다. 이제 의병과 관군이 서로 화합하여 도울 수 있으니 일을 이루어낼 기회가 생겼다.”

심 정승은 충성심이 한결같고 두 임금을 섬긴 원로이며, 행실은 얼음과 옥처럼 맑고 옛 제도와 일에 밝으며 문무를 두루 갖춘 사람으로 오래전부터 명망이 있었다.

여러분을 위해 생각하건대 군사의 많고 적음이나 거리가 멀고 가까운 것을 따지지 말고 각자 자기 군사를 이끌어 모두 심 정승의 지휘 아래 모이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

북을 치면 나아가고 징을 치면 물러나며 오직 정승의 명령만 따른다면 의기만 더욱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군사들이 서로 이어지고 질서가 뚜렷해져 지휘권이 한곳에 모이므로 서로 모순되고 방해하는 폐단도 사라질 것이다.

무거운 쇠뇌와 큰 돌을 수많은 사람이 함께 들려 할 때 모두 한목소리로 힘을 합치면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한두 사람이라도 마음과 힘을 쓰지 않으면 수천수만 명이 모여 있어도 서로 방해를 받아 끝내 들어 옮길 수 없다.

하물며 이미 쓰러진 나라를 일으키고 이미 위태로운 나라를 붙들어 끊어지려는 나라의 맥을 다시 잇는 이때에 [원문 훼손] 서로 딴마음을 품는다면 일을 망치고 멸망을 재촉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 것이다.

[원문 훼손] 백성의 삶은 이미 막다른 곳에 몰렸고 나라의 형세도 다급하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믿을 곳 하나 없고 오직 여러분이 의로움을 지켜 일어난 것만이 희망이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잠깐의 작은 공에 만족하지 말고, 사소한 다툼도 마음에 두지 말라.

늘 마음속에 세워둘 것은 오직 왜적을 치고 원수를 갚는 일뿐이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어 여러분의 막부 아래 서기를 원할 것이니 수백 명의 수령이라도 감히 여러분과 맞서겠는가.

그렇지 않고 군사를 모았다는 이름만 내세운 채 적진 하나 공격하지 않고 적장 하나 베지 않으며 세월만 보내면서 성패를 구경하고는 “나는 의로운 일을 했다”고 말한다면 그 어디에 의로움이 있겠는가.

지금 영남에는 왜적이 가득하고 죽산의 적은 수시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운봉과 금산으로 통하는 길이 열리면 전라도 동쪽 지역은 우리 것이 아니게 되고, 직산과 평택의 요충지를 지키지 못하면 충청도 서쪽도 우리 것이 아니게 된다.

백 번 패한 뒤 겨우 남은 힘을 수습했는데 다시 한 번 패한다면 군사를 다시 모을 날조차 없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심장이 찢어지는 듯하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병력이 충분히 갖추어지고 부대의 질서가 정리되면 군사를 정비해 들판으로 나가라.

요충지를 살피고 일이 급한 곳과 늦은 곳을 가려 진영을 이어 설치하여 백 리 밖에서도 서로 바라볼 수 있게 하라.

앞뒤가 서로 호응해 한 도 전체를 지킬 수 있다면 날뛰는 잔당들은 멀리서도 겁을 먹어 감히 넘볼 마음조차 품지 못할 것이다.

옛날 허원은 수양을 지키면서 장순에게 지휘권을 양보했고, 분양왕 곽자의도 공적인 의리를 앞세워 군문에서 자신을 낮췄다.

이들은 모두 함께 나라를 위하면서 사사로움을 잊고 서로 도왔기 때문에 큰 공과 위대한 업적이 옛날과 오늘에 빛나며 지금까지 사람들의 눈과 귀에 남아 있다.

여러분도 [원문 훼손] 이를 본받아 스스로 힘쓴다면 다시 맑은 하늘이 열리고 밝은 길이 드러나며 임금께서 다시 제자리를 찾으시는 날을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의로운 이름 또한 영원히 빛날 것이다.

나 같은 못난 사람도 어찌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러분의 뒤를 따라 여러분의 명성을 이루는 데 힘을 보태겠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뜻을 지켜주기 바란다.

명나라 사신들이 의병에게 내린 글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아 바다를 방어하고 왜적을 막는 군무를 맡은 병부 무고청리사 원외랑 유황상과 직방청리사 주사 황원이 의병을 격려하여 함께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이 글을 보낸다.

살펴보건대 너희 나라는 본래 문물과 예의를 숭상하고 대대로 충성과 절개를 소중히 해왔다.

그런데 근래 왜적이 도리를 따르지 않고 멀리까지 밀고 들어와 임금과 신하들이 풀숲을 떠돌며 꼬리를 물고 피란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곤궁함이 얼마나 심하겠는가.

우리 명나라 황제께서는 너희 나라가 이백 년 동안 신하의 예를 지켜온 것을 생각하시어 막대한 비용도 아끼지 않고 장수를 보내 토벌하게 하셨다.

너희 나라에는 왕실의 친족으로 큰 책임을 맡아 충성과 분노가 마음에 가득한 사람이 어찌 없겠으며, 지방을 지키는 수령으로 비분강개하여 목숨을 바치려는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임금의 근심을 자기 근심으로 여기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도 욕을 당했다고 여기는 충신이 어찌 없겠으며, 몸을 버려 나라에 보답하려는 의사가 어찌 없겠는가.

마땅히 황제의 위엄을 받들어 서둘러 의병을 모으고 각자 한 부대씩 이끌어 함께 [원문 훼손]해야 한다.

지금 왜적이 강한 듯 보이지만 그 형세는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

먼저 하늘의 형세를 살펴보자.

[원문 훼손] 지난해 목성이 인방에 머물렀는데 일본은 하늘의 뜻을 거슬러 침략하였다. 하늘을 거슬러 움직이는 군대는 강해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약하다. 이것이 첫째이다.

또 [원문 훼손] 입춘이 지났는데도 [원문 훼손] 기운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니 하늘의 때를 이용할 수 있다. 이것이 둘째이다.

너희 임금과 신하들은 모두 [원문 훼손] 기운을 품고 있으며 왕성한 기운이 무성하게 솟아오르고 있으니 반드시 나라를 회복할 것이다. 이것이 셋째이다.

다음은 사람의 형세를 말하겠다.

우리 대국의 용맹한 군사는 호랑이와 곰 같고 적이 당해낼 수 없는 대포는 한 번 쏘면 천 보 밖까지 미친다. 왜적이 제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맞선다면 산산조각 날 것이다. 이것이 첫째이다.

송응창 경략은 계책이 깊고 치밀하여 귀신도 헤아리기 어렵고, 이여송 제독은 충의가 가득하며 백 번 싸워 살아남은 용맹을 지녀 옛 명장과 같은 풍모가 있다.

우리 두 사람 역시 충성과 절개를 지키며 한마음으로 도와 반드시 이 적을 없애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한다.

두 나라 군사가 힘을 합쳐 궁지에 몰린 적을 몰아내는 것은 나무에서 마른 잎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이것이 둘째이다.

관백은 사납고 포악하여 위로는 자기 임금을 겁박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학대한다. 하늘이 그를 멸망시키려 하여 우리 손을 빌리는 것이다. 이것이 셋째이다.

어제 조선 국왕을 만나보니 행동이 침착하고 모습이 준수하고 위엄이 있어 반드시 나라를 다시 일으킬 기상이 있었다.

앞서 너희 나라가 명나라에 보낸 사신들도 구원병을 청하는 뜻이 너무나 간절하여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 옛날 나라를 구하려고 다른 나라 조정에서 울며 군사를 청했던 사람과 같은 정성이었다.

임금과 신하가 이와 같으니 어찌 끝내 곤궁하게 되겠는가.

순리를 따르는 자가 거스르는 자를 치는데 무슨 공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이것이 넷째이다.

왜적이 믿는 무기는 조총뿐이다.

그러나 세 번쯤 쏘고 나면 계속 발사하기 어렵다.

군사의 수는 많지만 정말 강한 자는 많지 않다. 앞줄의 이삼백 명만 죽이면 나머지는 모두 기세만 보고 달아날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이길 수 있는 기회이며 뜻있는 사람이 공을 세울 때이다.

우리 조정에서는 명을 내렸다.

너희 나라 사람이든 우리 나라 사람이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승려 겐소를 사로잡거나 죽이는 사람에게는 각각 은 일만 냥을 상으로 주고 백작에 봉하여 그 작위를 대대로 잇게 한다.

또 히데시게,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원문 표기 불분명] 등 이름난 왜장들을 붙잡거나 죽이는 사람에게는 한 명마다 은 일천 냥을 주고 지휘사 벼슬을 세습하게 한다.

그 아래 적장을 잡은 사람에게도 각각 정해진 상이 있다.

너희 나라 백성들이 이때 사람을 모아 큰 공을 세운다면 자기 나라의 종묘와 사직을 되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명나라의 후한 상까지 받을 수 있다.

망해가는 나라에 남은 백성에서 한 집안을 일으킨 시조가 될 수도 있으니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 글을 보내니 서둘러 각 도에 널리 알리라.

이미 의병을 일으킨 신민은 앞으로 나아가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서둘러 모이라.

힘을 합쳐 적의 위세를 꺾어도 좋고, 곳곳에서 번갈아 나와 적의 힘을 분산시켜도 좋다.

돌아가는 적을 길목에서 공격해도 좋고 군량이 오가는 길을 끊어도 좋다.

구체적인 방법은 각자 형편에 따라 판단하여 시행하라.

이 글을 조선 국왕에게 보낸다.

만력 이십일 년 음력 정월 초이레.

발문

이 쇄미록은 나의 십대조이신 의정공 오희문께서 남긴 기록이다.

임진년 봄 왜적이 날뛰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지고 백성이 사방으로 달아난 일은 우리나라가 생긴 뒤 처음 겪은 일이었다.

공께서는 마침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갑자기 전란을 만났다.

한 집안의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동서로 흩어져 서로 소식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공께서는 산속으로 피란해 다니면서 자신이 찾아간 곳과 직접 보고 들은 일을 모아 사실대로 기록했다.

그 기록은 무려 여덟 해 동안 이어졌으며 이름을 쇄미록이라 하였다.

모두 일곱 책으로 종손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종손의 집이 경기도에 있었기 때문에 외지에 흩어져 살던 후손들은 이 책을 보지 못한 것을 늘 한스럽게 여겼다.

올해 초여름 종손 화영에게 간절히 부탁해 일곱 권을 빌려왔다.

각 종가에 한 권씩 나누어두고 베껴 쓰기로 약속했다.

나도 첫째 권을 맡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읽어본 뒤 그 가운데 열에 하나나 둘 정도를 뽑아 한 책으로 베껴놓았다.

너무 간략하게 줄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늙고 쇠약한 나이가 이미 일흔여덟 살이라 눈은 흐리고 정신도 맑지 못해 잘못 쓰거나 빠뜨리는 일이 많다. 다른 사람이 두루 읽어볼 정도로 제대로 베껴낼 형편이 못 된다.

더구나 공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거의 삼백 년이 되어 당시 직접 쓰신 글씨가 곳곳에서 닳아 없어져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그 사이사이를 대강 보충하며 아침저녁으로 받들어 읽고 있으니 손때가 아직 남아 있는 듯하고 공의 모습도 바로 앞에서 뵙는 것 같았다.

공경하고 감격하며 기뻐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보배처럼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첫째 권 끝부분에서 위로 열 장을 떼어 따로 보관하여 길이 읽고 우러러볼 수 있게 하였다.

그 열 장에는 명나라 조정에서 보낸 문서와 여러 사신의 글, 그리고 우리나라 의병장들의 격문이 실려 있었다.

흐린 눈과 둔한 붓으로 간신히 다시 베껴 열 장을 채웠으며 예전 모양대로 책 끝에 붙였다.

혹 원본에 걸맞지 않은 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조선 개국 오백십팔 년 기유년 음력 칠월 열엿새.

해향 상림 삼간동에 사는 십대손 일선이 눈물을 닦으며 삼가 베껴 적는다.

 

 

 

계사일록 — 1593년 2월 1일 ~ 1594년 2월 19일

1593년 2월

1593년 2월 1일 (계사년 음력 1월 1일)

오늘은 설날이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떠돌아다닌 끝에 또 한 살을 먹었다. 그런데도 흉악한 왜적은 아직 없어지지 않았고 나라에는 제대로 된 장수와 재상이 없으니, 가슴 아프지만 어찌하겠는가.

그래도 어머니를 모시고 아우 희철과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한집에 모여 새해를 맞았으니, 이것만은 다행이다.

윤겸(큰아들)은 보령으로 돌아갔다.

1593년 2월 2일 (계사년 음력 1월 2일)

밥을 먹은 뒤 사포 숙부를 찾아뵈었다. 이어 김찬선 형이 묵고 있는 이익빈의 집에 들어갔다. 이광축도 따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이광축의 집에도 들러 잠시 이야기했다.

길에서 김지남(자 자정)이 왔다는 말을 듣고 급히 계당으로 달려갔다. 서로 만나 무척 기뻐하고 위로하며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밤 김지남은 내가 묵는 곳에서 함께 잤다.

그에게서 이런 소식을 들었다.

명나라 장수 심유경이 수십 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평양에서 십 리 떨어진 곳까지 달려갔다. 왜장도 수십 명의 병사를 데리고 나와 맞이해 말 위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성 밖에 이르자 왜군의 다른 장수가 다시 오십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걸어서 나왔고, 심유경도 말에서 내려 서로 인사했다.

심유경은 평양성 안으로 들어가 이틀 밤을 묵었다. 돌아올 때 은 여든 냥과 붉은 비단 두 동을 주었다. 왜장도 흰쌀 열다섯 석과 소 여덟 마리, 돼지 뒷다리 열다섯 개를 바쳤다고 한다. 그들이 그 사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고 했다.

우리나라 도원수 김명원도 심유경을 따라갔다가 십 리쯤 되는 곳에서 만나고 돌아왔다고 한다.

또 명나라 군사 십만 명이 이미 압록강을 건넜다는 말도 들었다. 사실이라면 벌써 평양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처음에는 명나라 장수가 왜적의 진영 안으로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 다시 들으니 사정이 이와 같았다. 앞서 들은 말은 잘못된 것이었다.

1593년 2월 3일 (계사년 음력 1월 3일)

이른 아침 김지남은 예산으로 돌아갔다.

막정(사내종)과 말질손에게 말을 딸려 대흥에 있는 윤함(셋째 아들)의 처가 농막으로 보냈다. 거기서 벼 서른 말을 싣고 왔다. 윤함의 장인이 써 준 패가 있었기 때문이다.

춘기는 최희선의 처가로 보내 말먹이 풀을 싣고 오게 했다.

오세량과 문응인, 최응룡 등이 어제 어머니를 뵈러 왔다고 한다. 내가 마침 밖에 나가 있어 만나지 못했으니 아쉽다.

김지남을 통해 조정에서 명령이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체찰사 휘하에서 무과로 만 이천 명을 뽑으려 했는데, 호남에서 오천 명, 호서에서 삼천 명, 영남에서 이천 명, 경기에서 이천 명을 뽑는다는 것이었다.

또 호남 유생 정언눌 등이 상소를 올려 체찰사 정철이 여러 고을에 임시 장수를 임명하면서 사사로운 정에 끌려 사람을 썼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청주와 목천의 유생들도 체찰사의 잘못을 논하는 상소를 올리려 했다. 심지어 정철이 왼손으로 기생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술잔을 들었다며 주색에 빠졌다고 했다고 한다.

남의 잘못을 말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지나치게 말해서는 안 된다.

정철이 술을 지나치게 마셨다면 평소 술을 좋아했던 사람이니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생의 손을 잡고 즐겼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나라가 이처럼 무너진 뒤에 큰 책임을 맡은 사람이 어느 겨를에 기생의 손을 잡고 마음껏 놀겠는가. 다른 사람이라도 해서는 안 될 일인데 하물며 송강 정철이 스스로 그런 짓을 했겠는가. 사람들이 쉽게 믿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가 일을 처리하면서 사리에 맞지 않게 한 일이 많았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그를 따라다니는 사람 가운데 바르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말도 있다. 아마 그런 데서 비난이 나온 듯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뒤에 다시 들으니 목천 유생들의 상소는 결국 올라가지 못했고, 무과 시험도 일이 많아 끝내 치르지 못했다고 한다.

또 호남 순찰사 권율과 체찰사 정철의 사이가 좋지 않아 일을 할 때마다 서로 부딪쳤고, 권율이 정철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조정에서도 호남 순찰사가 체찰사의 지휘를 듣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틀림없이 둘 사이를 몰래 이간질한 말도 있었을 것이다.

안팎의 비난이 한꺼번에 정철에게 몰리고 있다. 옛날 악무목처럼 충성스럽고 용맹한 사람도 밖에서 공을 이루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하물며 송강은 본래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던 사람이니 어떻게 성과를 낼 수 있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체하라는 명령이 올 것이 분명하다.

다시 들으니 목천 유생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제지당해 상소를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1593년 2월 4일 (계사년 음력 1월 4일)

밥을 먹은 뒤 사포 숙부가 묵는 곳을 찾아뵈었다.

김찬선 형과 장응명 주부, 윤민헌 진사, 김극, 한박, 이구령이 모두 모였다. 이익빈 생원도 뒤따라왔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허영말은 그저께 나를 보러 왔다가 오늘 아침 돌아갔다.

또 단성령 이청이 동궁에게 글을 올려 다섯 흉악한 신하의 죄를 물어 달라고 청했다는 말을 들었다. 동궁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는 어리고 변변치 못한 몸으로 무거운 책임을 맡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충성스럽고 의로운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고 적을 토벌하는 공도 아직 이루지 못했으니, 내게 잘못이 적지 않다.

그런데 단성령 이청은 왕실 사람으로 나라와 기쁨과 근심을 함께해야 할 처지이면서도 내 잘못을 바로잡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임금께 관계된 일이라 내가 들어서는 안 될 것을 함부로 말했으니 마땅히 무겁게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이 또한 내가 어질지 못하여 이런 일을 불러온 것이다.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여러 번 용서하기 어려울 것이다. 승정원은 이를 알라.

단성령이 어떤 사람인데 동궁에게 말해서는 안 될 일을 말한단 말인가. 이것 또한 틈을 벌리고 분란을 일으키는 짓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괴상한 자들이 일을 망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한탄스럽다.

그러나 동궁이 내린 말은 매우 합당하다. 백성들의 복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나라를 되찾을 날을 기다릴 수 있을 듯하다.

1593년 2월 5일 (계사년 음력 1월 5일)

아우 희철과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강화도에 있을 때 온몸에 옴이 났다. 이곳에 온 뒤에는 더욱 심해져 손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

붕이와 그 어머니는 가슴 통증이 몹시 심해 음식도 먹지 못한다. 남쪽으로 떠날 날은 다가오는데 병세가 이러니 걱정스럽고 또 걱정스럽다.

여종 동을비는 길을 오다가 몸이 붓는 병을 얻었는데, 이곳에 온 뒤 온몸이 크게 부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다. 틀림없이 죽을 듯하다. 대대로 내려온 늙은 여종이 여기까지 와서 죽는다면 얼마나 좋지 않은 일인가.

어제 윤겸의 편지가 왔다. 보령에서 꿩 한 마리를 보내왔는데 그곳 군관이 쏜 것이라고 한다. 곧바로 어머니께 올렸다. 기쁘다.

오늘은 아내의 생일이다. 윤해(둘째 아들)의 아내가 시루떡을 쪄서 올렸다. 윤겸의 아내와 자식들은 그 집안에 홍역 환자가 있어 오지 못했다.

오후에 사포 숙부의 집에 갔다. 이익빈 생원이 두부를 마련해 나와 동네 사람들을 불러 함께 먹었다.

함께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 김찬선
  • 장응명
  • 윤민헌
  • 김극
  • 한박
  • 이구령

모두 배불리 먹고 돌아왔다.

저녁에는 희철의 처남 김담명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누이를 보고 돌아갔다.

1593년 2월 6일 (계사년 음력 1월 6일)

나는 어제부터 감기에 걸렸다. 밤에 뜨거운 온돌방에 누워 땀을 내니 조금 나아진 듯하지만 기침이 계속된다. 걱정스럽다.

어머니도 감기에 걸려 머리가 조금 아프고 음식을 드시지 못한다. 몹시 걱정스럽다. 밤에 땀을 내고 조금 나아지셨지만 내일 당장 길을 떠나는 것은 무리다. 완전히 나으실 때까지 기다린 뒤 출발할 생각이다.

붕이의 배앓이도 오래도록 낫지 않아 어머니가 무당을 불러 빌게 했다. 병이 낫기를 바랄 뿐이다.

김덕장 진사가 뜻밖에 찾아왔다. 너무 반가웠다. 좋지 않은 막걸리였지만 석 잔을 대접하고 보냈다. 부여의 농촌에 피란해 와 있다고 한다.

저녁에는 허탄의 아내가 어머니를 뵙겠다며 아들 영말을 데리고 결성에서 소를 타고 왔다. 가엾다.

조도어사가 어제 홍주에 들어왔다. 내가 홍주 고을 안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고 만나자고 했지만, 남쪽으로 떠날 날이 가까워 사양했다.

1593년 2월 7일 (계사년 음력 1월 7일)

어머니가 아직 회복되지 않으셨다. 당분간 길을 떠날 수 없으니 답답하다.

늦은 아침 홍양으로 가서 조도어사 이철(자 강중)을 만나려고 했다. 가는 도중 눈발이 날렸고 바람이 몹시 차가워 견디기 어려웠다.

겨우 성문 밖에 이르러 말을 세우고 먼저 종을 보내 내 이름을 알리게 했다. 이철이 곧 관리를 보내 나를 불러들였다.

문 안으로 들어가 서로 만나니 슬픔과 기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서로 피란하면서 겪은 온갖 고생을 이야기했다. 오늘 다시 만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운(자 자미)이 죽은 이야기를 하자 슬픔을 견딜 수 없었다.

저녁에는 통판 황언이 술과 안주를 마련해 왔다. 이철과 대흥 수령 신괄, 그리고 내가 한자리에 앉았다. 밤이 깊어서야 술자리를 마쳤다.

신괄은 명나라 군량을 맡은 관리로서 이철의 명령을 받으러 온 것이었다.

우리는 자리를 잇대어 누워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쌓였던 근심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1593년 2월 8일 (계사년 음력 1월 8일)

아침에 이철과 함께 밥을 먹었다. 박원호 참봉도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뒤 홍주 목사 이총이 이철을 찾아왔다. 나도 함께 만났다. 이총은 주자동 사람이어서 젊었을 때 서로 알았지만 삼십여 년 동안 보지 못했다.

나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자세히 사정을 설명하고 나서야 알아보았다.

아침을 먹은 뒤 밖으로 나갔다.

판관 황씨는 나와 칠촌 친척이지만, 서울에 살 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얼굴조차 모르고 지냈다. 이번에 우연히 만났는데도 친척으로 대하지 않았다. 사람됨을 보니 교만하고 거드름을 피우며 남을 업신여겼다. 저런 사람이 오래 복을 누릴 사람은 아닐 듯하다. 자기 삼촌의 부고를 듣고도 관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늦게 이철과 헤어져 돌아왔다. 이철이 흰 닥나무 종이 한 묶음을 주었다.

계당에 도착하니 장원 안창이 문안하러 왔다가 내가 없어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아쉽다.

어머니는 감기로 고생하시다가 밤에 땀을 내고 다시 정신을 차리셨다. 기쁘다.

영말의 어머니인 허탄의 아내는 하루를 묵고 돌아갔다. 나는 길에서 마주쳤다.

1593년 2월 9일 (계사년 음력 1월 9일)

오늘부터 어머니가 음식을 조금 더 드셨다. 그러나 입맛에 맞는 것이 없으니 몹시 답답하다.

용인에 살던 이씨도 피란하여 이웃에 와 있었는데,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같은 마을 사람 조항복도 다른 사람과 함께 왔다가 갔다.

이득천 진사도 피란하여 연산 땅에 와 살고 있었다. 볼일이 있어 홍주 북쪽으로 가던 길에 들렀다. 뜻밖에 만나니 매우 반가웠다.

득천의 아버지는 내가 젊었을 때부터 친구였고 나와 나이가 같으며 같은 마을 사람이었다. 지금 연안에 있는데 무사하다고 한다. 기쁜 일이다.

득천에게 저녁밥을 대접했다. 이곳에는 재울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익빈 생원의 집으로 보냈다.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희철의 장인 김철이 태인에서 종과 말을 보냈다. 그래서 희철은 내일 아내와 자식을 먼저 데리고 돌아가기로 했다. 희철이 다시 돌아오면 그 뒤에 어머니의 길을 정할 예정이다.

1593년 2월 10일 (계사년 음력 1월 10일)

희철이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호남으로 떠났다.

붕이의 배앓이가 아직 멎지 않아 보내서는 안 되지만, 나중에 우리가 떠날 때 사람과 말이 부족할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먼저 보냈다. 차마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밤이 되자 머리가 조금 아프고 팔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듯했다. 그저께 홍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다시 찬바람을 맞았기 때문인 듯하다.

저녁에는 계당에서 잤다. 윤해와 인아는 자기 집에 가서 잤다.

1593년 2월 11일 (계사년 음력 1월 11일)

내 병은 어제와 같으면서 더 심해졌다. 음식과 물을 전혀 먹지 못한다. 감기가 심하게 든 것이 분명하다. 몹시 걱정스럽다.

어머니는 차츰 회복되시는 듯하지만 드시는 양이 다시 줄었고 기침이 멎지 않는다. 걱정스럽다.

1593년 2월 12일 (계사년 음력 1월 12일)

어젯밤부터 병이 매우 심해졌다. 밤새 뒤척이며 한숨도 자지 못했다.

새벽이 되자 머리를 들 수조차 없었고 허리까지 심하게 아팠다. 내 한 몸의 병도 걱정이지만 어머니께 또 걱정을 끼치니 더욱 답답하고 괴롭다.

오후에는 병세가 조금 가라앉는 듯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못했다.

1593년 2월 13일 (계사년 음력 1월 13일)

어젯밤부터 병세가 조금 나아져 잠도 평소처럼 잤다. 다만 머리가 때때로 조금 아팠다.

차가운 녹두죽을 시원하게 마셨더니 다시 머리가 아파졌다.

이 뒤로는 병 때문에 삼월까지 일기를 쓰지 못했다.

나는 음력 정월 초열흘에 병이 들었고, 음력 이월 이십사일이 되어서야 조금 정신을 차렸다. 이십칠일부터 흰죽을 먹기 시작했고, 삼월 초에는 마른밥을 먹기 시작했다. 삼월 초열흘이 지나면서 날마다 조금씩 좋아져 밥 먹는 양도 늘었다. 보름이 지나서는 지팡이를 짚고 방 안에서 걷는 연습을 했다.

병이 시작된 지 열흘 남짓 지나면서부터는 병세가 극도로 심해져 날마다 위태로워졌고 정신까지 잃었다.

윤해의 양어머니도 같은 병에 옮아 열이레 남짓 앓아누웠다. 윤해 역시 같은 병을 얻어 더욱 심하게 앓다가 스무 날이 지나서야 조금 나아졌다. 단이도 병에 걸려 스무 날 가까이 앓았고, 몽임과 충립도 모두 심하게 고생했다.

어머니는 용곡역의 절에 딸린 종 기매의 집으로 피하여 거처하셨다.

내 병세가 너무 위중했기 때문에 음력 이월 십칠일에 아우 희철이 어머니를 모시고 영암으로 갔다. 인아도 함께 내려갔다. 떠날 때 모두 통곡했고 나도 슬픔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이렇게 심하게 앓고 있었고 윤해도 누워 있었다. 윤겸은 온 집안의 환자를 돌봐야 했으므로 어머니를 모시고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인아가 모시고 가게 했다. 인아 역시 그 병에 옮은 듯했다.

어머니가 남쪽으로 떠난 그날 저녁 나도 어머니가 묵던 집으로 옮겼다. 큰딸과 윤겸 부부를 데리고 갔다. 윤겸의 아내가 내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함께 온 것이다.

아내는 단이의 병이 낫지 않아 그때 같이 오지 못했다. 단이의 병이 조금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같은 달 이십오일 둘째 딸과 함께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그날 아침밥을 먹은 뒤 윤함이 갑자기 들어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슬픔과 기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윤함은 황해도에 있을 때 체찰사 정철이 서쪽으로 돌아가 해주로 들어가자 정종명 좌랑을 찾아갔는데, 정종명이 내가 병으로 죽었다고 잘못 알려 주었다고 한다.

윤함은 다음 날 급히 달려와 큰 바다를 건너 강화도로 들어갔다가 다시 육로로 대흥의 처가 농막까지 왔다. 거기서야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

체찰사가 그 지방에 있을 때에도 누군가 내가 죽었다고 잘못 전하여 윤겸에게 조문하는 글까지 보냈다고 한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십오 년쯤 전 내가 양지의 농촌에 있을 때, 죽산에 사는 맹인 김자순을 불러 내 평생의 운수를 점쳐 보게 한 일이 있었다. 김자순은 이렇게 말했다.

“쉰넷이 되는 임진년에 큰 횡액을 당할 것입니다. 그것만 넘기면 일흔이 넘도록 살 것입니다.”

그때는 흔한 점쟁이의 말이라 여기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봄에 앓은 병을 생각해 보면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병세가 열 가운데 아홉은 죽을 만큼 위급했고 오직 한 가닥의 운으로 살아남은 셈이다.

게다가 비록 죽지는 않았으나 큰 난리를 만나 어머니와 아우,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떠돌며 고생했다. 나 역시 장수에 있을 때부터 산골짜기로 달아나 피해야 했다.

늙은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 형제자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각하며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 걱정과 울분이 조금이라도 풀리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 아우와 누이들이 모두 살아남아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 불행 가운데에서도 큰 다행이라고 여겼다.

이번 봄에는 같은 병이 온 집안에 번져 대여섯 명이 잇달아 드러누웠다. 거기에 홍역까지 들어 단이와 충이, 몽임, 사내종 명복과 안손, 여종 춘월과 신덕이 한꺼번에 앓았다.

그 사이의 고통과 걱정을 생각하면 차라리 한 번 죽는 편이 나았을 듯하다.

문득 김자순의 옛말이 떠올랐다. 허황된 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무려 마흔다섯 날을 앓은 뒤에야 조금 살아났다. 다른 사람보다 세 배는 더 오래 앓았다.

내가 윤해와 함께 한창 심하게 앓고 있을 때 일이다.

용곡으로 옮겨온 뒤 종 말질손을 병영으로 보냈다. 병사가 문서를 써 주며 흰쌀 한 석, 참깨 세 말, 감장 세 말, 조기 세 묶음을 주기로 했기 때문에 그것을 싣고 오도록 한 것이었다.

그런데 기한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아 몹시 이상하게 여겼다.

그런 와중에 음력 이월 이십일 새벽 안손과 명복이 함께 달아났다. 전에 말질손과 짜고 말을 끌고 식량을 실어 달아난 것이다. 분하고 또 분했다.

안손은 계당에 있던 놋화로 하나와 칼 하나, 낫 세 자루까지 훔쳐 갔다.

온 가족이 두 곳으로 나뉘어 피란해 있는데 식량과 반찬이 거의 떨어져 병영에서 받을 쌀만 믿고 기다리던 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것까지 훔쳐 달아났으니 너무나 분하고 미웠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주인에게는 말이 단 한 필뿐이라 피란길에 그것을 타고 다녔는데 그 말마저 훔쳐 달아났다. 뼈에 사무치는 분노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훗날 붙잡게 된다면 주인을 죽음의 구렁으로 몰아넣은 죄가 죽여도 모자라니 어찌 감히 용서하겠는가.

기매의 집은 방도 작고 마루도 비좁아 우리 가족이 함께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음력 삼월 초열흘에 다시 이웃의 빈집으로 옮겼다. 그 집주인은 기선군의 친족에게 시달리는 것을 견디지 못해 달아난 뒤라 집이 비어 있었다.

윤겸의 아내와 자식들도 다른 집에서 내가 있는 집으로 다시 옮겨왔다.

윤함 역시 잘 곳이 없어 윤겸이 묵는 집으로 들어왔는데, 밤에만 자고 아침이면 나왔다.

내가 이곳으로 옮긴 뒤 단이도 데려왔고 윤해도 찾아왔다. 충이와 몽녀도 잇따라 오갔다.

윤해 처가의 여종 말질복은 양주에 있다가 서울 본가로 돌아갔다. 그런데 음력 정월 이십사일 왜적이 서울 사람들을 불태우고 죽일 때 달아나 진위에 있는 주인집 농장으로 왔다.

삼월 보름 무렵 춘기가 마침 진위로 갔다가 그 여종을 데리고 왔다. 말질복의 어머니와 두 자녀는 모두 난리 중에 죽었다고 한다.

여종 강춘의 일도 기구하다.

우리 아내와 자식들이 관동에서 호서로 피란해 올 때 사흘 밤낮을 계속 길을 가다가 용인의 세호 집에서 묵었다. 그곳 종 대여섯 명을 데리고 한밤중에 왜적의 진을 뚫고 빠져나왔다.

그때 사람들이 너무 두려워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한 채 제각기 달려왔다.

그런데 강춘과 신 좌랑 집의 두 여종이 일행을 따라잡지 못하고 중간에 뒤처졌다. 머뭇거리는 사이 날이 밝아 그만 용인의 왜군 진영으로 잘못 들어갔다.

두 사람은 왜적에게 붙잡혀 일을 하게 되었다.

신씨 집 여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쳐 나왔지만, 강춘은 자기 아이 때문에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이가 죽은 뒤에야 탈출했다.

그 뒤 진위에서 살며 맹인에게 재가했으나 본처와 싸우고 쫓겨났다.

마침 길에서 최기남 생원의 서조모 일행을 만났는데, 우리 가족이 이곳에 피란 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따라 찾아왔다. 삼월 십팔일의 일이었다.

강춘의 어머니가 마침 이곳에 머물고 있어 모녀가 서로 만났으니 슬프면서도 기뻤다. 우리 가족도 강춘이 죽은 줄 알았는데 뜻밖에 살아 돌아왔으니 기뻤다.

그동안 향이라는 여종 하나가 모든 일을 혼자 맡아 하느라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생했는데, 강춘이 돌아오자 향이가 누구보다 기뻐했다.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막정과 송이 등은 어머니를 모시고 영암까지 내려갔다가 삼월 십사일 돌아왔다.

가는 길의 여러 고을과 역참에서 필요한 것을 빠짐없이 대 주었고 도중에 비바람도 만나지 않아 무사히 내려갔다고 한다. 다만 장성현에 들어갔을 때 비가 내려 하루 머물렀다고 한다.

암말을 팔아 베 여덟 필 값을 받아 왔다.

그러나 장흥의 노비들에게 공물을 거두려 했더니 모두 한 집안에 부과된 역 때문에 견디기 어렵다며 도망쳐 나타나지 않았다. 오직 여종 무숭만 집에 있었다.

그의 두 아들 가운데 하나는 의병에 들어갔고 하나는 수군절도사 휘하 군사가 되었다. 게다가 집에 불까지 나 모조리 타 버려 공물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결국 베 한 필도 거두지 못하고 불탄 집에서 남은 들깨 다섯 되만 받아 왔다.

도중에는 식량까지 떨어져 식량을 사 먹느라 베 한 필을 썼다고 한다.

그 사이의 사정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참으로 답답하고 괘씸하다.

이 밖에도 병으로 앓던 서너 달 동안 기록할 일이 있었겠지만 자세히 쓰지 못했다. 뒤늦게 들은 것 가운데 한두 가지를 적어 둘 뿐이다.

1593년 5월

1593년 5월 1일 (계사년 음력 4월 1일)

지난달 이십팔일 윤겸이 부사 김찬의 부름을 받고 갔다.

1593년 5월 2일 (계사년 음력 4월 2일)

비가 내렸다.

이월 이후 지금까지 한 달 안에 사흘씩 이어서 비가 온 적이 예닐곱 번이나 된다. 파종에는 걱정이 없겠지만 오뉴월에는 틀림없이 가뭄이 들 듯하다.

피란하며 떠돌다 구걸하는 사람들이 양반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아이를 데리고 노인을 부축하며 날마다 우리 집 문 앞에 선다. 적어도 열다섯이나 열여섯 명은 된다.

불쌍하고 안타까워 차마 외면하기 어렵지만 나 역시 떠돌며 남에게 얻어먹는 사람이다. 모두 돌볼 형편이 되지 않으니 그저 탄식할 뿐이다.

1593년 5월 3일 (계사년 음력 4월 3일)

아침밥을 먹은 뒤 찰방 김가기 공이 나와 아들들을 초대했다.

그의 아내도 피란하여 역에 와 있었으므로 내 아내와 윤겸의 아내도 불렀다. 아내는 사정이 있어 가지 못했고 윤겸의 아내만 갔다가 저녁에 돌아왔다.

나는 윤함과 함께 갔다. 김가기는 점심을 푸짐하게 차려 주었고 우리는 온종일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왔다.

김가기는 나를 매우 후하게 대했다. 내가 병으로 앓을 때도 계속 입에 맞는 음식을 보내 주었다. 윤겸과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해도 그 정성이 고맙기 그지없다.

김가기의 아들 김덕민의 아내는 신식의 딸로, 나에게는 팔촌 손녀가 된다.

1593년 5월 4일 (계사년 음력 4월 4일)

늦은 아침 뒤 김찬선 형이 역으로 와서 나를 불렀다.

내가 병든 뒤로 몇 달 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이제야 다시 만났으니 무척 반가웠다.

저녁밥까지 먹고 돌아왔다.

1593년 5월 5일 (계사년 음력 4월 5일)

언실의 종 윤석이 보령에 피란해 살다가 생숭어 두 마리를 사 가지고 왔다.

줄 것이 없어 막걸리 두 사발만 먹여 보냈다. 가난한 형편이 한탄스럽다.

막정은 전에 윤겸을 따라 공주로 갔다가 회덕으로 보냈다.

회덕 수령 남군실이 마침 군진에서 고을로 돌아와 있어 다음 물품을 마련해 주었다.

  • 둔전에서 난 벼 한 석
  • 흰쌀과 보통 쌀 각각 세 말
  • 보리쌀 네 말
  • 말장 다섯 말

윤겸에게도 거의 같은 것을 주었는데 말장만 빠졌다고 한다.

이처럼 피폐한 작은 고을에서 힘을 다해 도와주었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정이 깊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까지 해 주었겠는가.

또 홍주의 환곡을 받기 위해 두 종을 화성창으로 보냈다. 거친 쌀 한 석, 밭곡식 한 석, 팥 열 말을 받아왔다.

거친 쌀은 윤겸의 장모 집으로 보냈고, 밭곡식과 팥은 절반을 윤겸의 집에 나누어 주었다.

전에 식량이 거의 떨어졌을 때 윤겸이 직접 홍양으로 가서 목사 이총에게 청하여 문서를 받아왔기 때문에 오늘 비로소 받을 수 있었다.

지난 초사흘 윤해는 서천에 있는 처가 농막으로 갔다. 그곳 종의 집에서 우리가 살 만한지 살펴보고, 논밭에서 거두어 둔 곡식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남은 곡식은 겨우 한 석뿐이라고 한다. 전에 스물일곱 석이나 있다고 들었는데 모두 부역에 썼다고 했다.

집도 울타리가 모두 뜯겼고 사방 벽까지 허물어졌다. 방은 몹시 좁고 마루도 없다. 여름 더위에 살 수 있는 집이 아니라고 한다. 한탄스럽다.

윤겸이 돌아오면 상의하여 거처를 정할 생각이다.

윤해 처가의 여종 말질복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병이 들어 여드레나 아흐레가 지났는데 아직 낫지 않았다.

그 때문에 홍역을 막기 위한 굿도 아직 보내지 못했다. 집안일이 여러모로 막히니 답답하다.

윤해가 생선을 한 마리 구해 왔다. 다음 날 윤해를 불러 함께 끓여 먹었다.

남군실의 편지를 보고서야 남문중 형과 그의 아내와 첩, 조카 남응온과 그의 두 아들, 아우 남경덕, 첨정 형의 사위 이려와 누이의 남편 이응기 등이 모두 처음 왜적이 쳐들어왔을 때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집안의 화가 이토록 심할 수 있는가. 너무나 참혹하고 슬프다.

문중 형은 비록 먼 지방에 살았지만 벼슬 때문에 오래 서울에 머물러 나와 정이 매우 깊었다.

응온의 두 아들은 모두 열두세 살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시를 제법 잘 지었다. 몇 해 전 봄 내가 그 집에 갔을 때 시를 짓게 했더니 기이하고 좋은 구절이 많았다. 생김새도 단정하고 고와 내가 매우 아꼈고 사람들도 모두 신동이라고 했다.

그 아이들까지 모두 참혹하게 죽었다니 더욱 슬프다.

들으니 문중 형은 온 가족을 데리고 깊은 산속 바위굴로 피했다고 한다. 왜적이 굴을 찾아와 수많은 사람을 활로 쏴 죽이자 더 많은 군사를 불러 굴을 포위하고 노인과 어린아이까지 모두 죽였다고 한다.

또 이여인 찰방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형제와 집안의 노소를 모두 데리고 지난해 회덕으로 피란해 왔다. 그곳은 내 아내의 사촌 친척이 사는 농촌과 가까워 아침저녁으로 서로 만나며 매우 가깝게 지냈다.

그 가족은 모두 왜적의 화를 피했다고 하니 온 집안이 매우 기뻐했다.

막정이 돌아갈 때 아내가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그쪽에서도 우리 종을 보자 모두 반갑게 맞았다고 한다.

천안 형수는 슬픔을 견디지 못해 울며 답장을 써서 보냈다.

천안의 서모는 서울로 돌아갔다가 굶어 죽었다는 말도 있고 살해되었다는 말도 있다. 가엾다.

1593년 5월 6일 (계사년 음력 4월 6일)

아침을 먹고 사포 숙부를 찾아뵈려고 말을 타고 나섰다.

가는 길에 찰방 김가기를 찾아본 뒤 숙부에게 갔다.

김찬선 형은 오늘 새벽 호남 고부에 있는 자기 종의 집으로 떠났다. 가족을 데리고 그곳으로 들어가 살 수 있는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윤민헌 진사와 김극의 새 매부 김점을 불러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이익빈과 이광축을 찾아갔다. 또 이광복과 장응명을 찾았더니 이익빈의 행랑에 와서 젊은 사람들과 종정도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니 이미 한낮이 지나 있었다.

저녁 무렵 전에 보령 수령이 윤겸에게 보내기로 한 물품이 도착했다.

  • 중간 품질 쌀 한 석
  • 콩 열 말
  • 조개젓 한 항아리
  • 절인 숭어 세 마리

그런데 가져온 사람이 스스로 아홉 되들이 말을 가지고 와 그것으로 재어 내놓았는데도 서너 되가 모자랐다.

이곳의 말로 다시 재어 보니 쌀 한 석이 열세 말 세 되밖에 되지 않았고, 콩 열 말은 여덟 말 여덟 되밖에 되지 않았다.

약과는 꿀이 없어 아직 만들지 못했다고 했다.

쌀 한 말과 콩 한 말쯤은 틀림없이 오는 사람이 훔쳐먹은 것이다. 그래도 답장에는 받은 수량을 원래대로 적어 보냈다.

1593년 5월 7일 (계사년 음력 4월 7일)

종 금손이 결성에서 돌아왔다. 환곡을 받아 한효중 생원의 집에 맡겨 두고 마른 생선 세 마리만 가져왔다.

전에 윤겸이 들은 바로는 결성에 있는 한광세의 입안 받은 땅을 토정 이지함이 차지했는데, 뒤에 토정이 원래 주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즉시 돌려주었다고 한다.

한씨 집에서도 토정이 그 땅에 들인 힘이 있으니 빼앗을 수 없다고 하여 서로 양보하다가 결국 빈 땅이 되었다.

한씨 집에서는 윤겸에게 그 땅을 경작해 먹도록 했다.

윤겸은 결성 수령 김응건과 아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찰방 김가기를 통해 종자용 환곡을 청했다. 결성 수령이 문서를 내주며 벼 세 석, 감장 두 말, 마른 생선 세 마리를 주었다. 그래서 금손을 보내 받아오게 한 것이다.

오후에는 윤겸이 보령에서 돌아왔다.

윤함은 그저께 아내의 삼촌을 만나려고 보령으로 갔다가 오늘 비로소 돌아왔다.

윤함이 이운을 만나 조관 생원이 지난달 초여드레 강화도로 돌아가다가 길에서 왜적에게 살해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너무나 놀랍고 슬프다.

조관은 내 아내의 사촌이고, 어려서부터 나와 매우 가까웠다. 억울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 슬프다.

이운은 조관의 매부로서 보령에 피란해 와 있었다. 조관은 아내와 자식들이 강화도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고 만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화를 당한 것이다.

1593년 5월 8일 (계사년 음력 4월 8일)

아침을 먹은 뒤 찰방을 찾아갔다.

찰방은 청양으로 갔다고 한다. 청양 수령 임순이 부사 김찬에게 곤장을 맞았기 때문에 위로하러 갔다고 했다.

윤함과 함께 계정 아래 물가로 갔다. 윤해도 왔다.

그물을 물길을 가로질러 쳤지만 작은 물고기 열몇 마리밖에 잡지 못했다.

조금 뒤 김가기의 아들 김덕민이 나와 아이를 시켜 낚시하게 했는데 두 마리를 잡았다. 우습다.

정월에 내가 병으로 몹시 고생하던 가운데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평양에 들어가 있던 왜적을 공격해 거의 모두 죽였고, 남은 왜적이 서울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여송이 군사를 거느리고 뒤쫓자 개성의 왜군도 스스로 무너져 달아났다고 했다.

나는 병중에도 너무 기뻐 머지않아 서울을 되찾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평양과 개성을 되찾은 뒤 지금까지 서울의 왜적을 공격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왜적은 사방의 군사를 모두 서울로 모아 성을 굳게 지키며 물러가지 않고 있다.

또 두 왕자와 김귀영, 황정욱을 서울로 데려와 볼모로 삼고 스스로 화친을 청한다고 한다. 그 속임수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다.

명나라 수군이 정말 대마도를 공격한다면 왜적은 본국을 구하러 돌아가기에도 바쁠 텐데, 아직도 서울을 차지한 채 태연히 돌아가지 않고 있다. 그 사이의 진실과 거짓을 알 수 없다.

우리나라 장수들은 사방을 둘러싸고 지키기만 하며 명군만 믿고 왜적의 진영을 한 번도 공격하지 않는다.

이렇게 날짜만 보내는 사이 농사지을 때가 이미 지나가고 있다.

영남에서 경기까지 백성은 살 길을 잃어 저마다 달아나고 있다. 호남과 호서로 흘러와 구걸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길마다 굶어 죽은 시체가 이어져 그 수를 셀 수도 없다.

세 철의 농사 시기를 모두 놓친다면 내년 봄까지 갈 것도 없이 두 지방 백성이 남김없이 죽을 것이다.

그런데도 분발하여 백성을 구하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만일 명나라 군사가 없었다면 우리 장수들은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도 그대로 두었겠는가.

그나마 호남과 호서는 왜적의 소굴이 되지 않아 나라를 회복할 바탕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이곳 백성들도 부역에 시달린다.

누구는 창을 들고 적과 맞닿은 성을 지키고, 누구는 여러 군영으로 군량을 지고 나른다. 길에는 그런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조도어사는 두 해 치 공물을 서둘러 바치게 하고, 독운어사는 명군의 군량을 재촉해 운반하게 한다.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불같이 독촉하고 매질까지 하여 죽는 사람이 많다.

각 고을 관청의 저장 물자는 이미 바닥났는데 해마다 나누어 주던 환곡까지 내놓아야 한다.

백성들이 어찌 곤궁해지고 떠돌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곳곳에는 군사를 모집한다는 관리들이 스스로 어사라 부르며 여러 고을을 돌아다닌다. 고을에서는 그들을 대접하느라 견디지 못하고, 조금만 뜻에 맞지 않으면 수령을 욕하고 매질까지 한다.

관리와 아전들이 어찌 고통을 견디며 달아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호남과 호서 백성들도 더는 버틸 수 없는 지경이다. 한 마을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어 버린 곳도 많다.

만일 왜적 수천 명이 기세를 타고 두 지방으로 들이닥친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두 지방 역시 왜적의 땅이 되고 말 것이다.

아, 급하고도 위태롭다.

호남과 호서마저 잃는다면 우리는 오랑캐의 풍속을 따르는 백성이 되고 말 것이다.

1593년 5월 9일 (계사년 음력 4월 9일)

막정이 대흥에 가서 쌀 열 말과 콩 열 말을 싣고 왔다.

전에 의병장 김탁의 종사관 한교 봉사는 윤겸의 친구라서 우리 집에 윤겸을 만나러 왔다.

마침 윤겸에게 새 흑각궁이 하나 있어 팔려고 했는데, 한교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군중에 활이 부족하니 내가 사고 싶네.”

그래서 활을 가지고 갔다.

그저께 사람을 보내 우리 종과 말을 불렀고, 자기 군관 최륜이라는 사람을 시켜 대흥의 부자가 자원하여 낸 곡식을 보냈다. 다행이다.

오후에는 한성령이 우리 집에 들렀다.

한성령은 본래 서울 대정동에 살았고 관동과 이웃이었다. 지금은 남대문 밖 처가에 살지만 형들을 자주 찾아왔다.

그 두 형인 공성수와 의성도정 역시 나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 때문에 예전부터 알고 지냈는데 오늘 찾아와 주니 무척 반가웠다.

술을 사 세 사발 먹여 보냈다.

윤함의 아내 삼촌 강신윤도 보령의 처가에서 대흥 농막으로 가 윤함을 만나고 점심을 먹은 뒤 돌아갔다.

한성령도 피란하여 보령에 있는 인척 집에 와 살고 있다.

1593년 5월 10일 (계사년 음력 4월 10일)

종일 비가 내렸다.

저녁에 윤겸이 공주에서 돌아왔다.

공주 목사가 보내 준 것은 다음과 같다.

  • 흰쌀 두 말
  • 중간 품질 쌀 다섯 말
  • 찹쌀 한 말
  • 참깨 두 말
  • 들깨 두 말
  • 밀 세 말
  • 팥 두 말
  • 밀가루 두 말

통판 이간이 준 흰쌀 다섯 말, 중간 품질 쌀 다섯 말, 찹쌀 다섯 말, 생깨 다섯 말은 정산에 사는 종 가지 아버지의 집에 맡겨 두었다.

다음 물품은 직접 가져왔다.

  • 꿀 세 되
  • 조기 두 묶음
  • 쇠고기포 두 접
  • 소주 두 병
  • 마른 숭어 두 마리

부사는 홍주와 덕산 두 고을에도 공문을 보내 각각 흰쌀 한 석, 밀 한 석, 소금 열 말, 감장 세 말, 마른 생선 다섯 묶음씩 내주게 했다고 한다.

이대로라면 보리가 나올 때까지 굶주림은 면할 수 있을 듯하다.

공주 목사의 이름은 나급이다. 내가 젊을 때 도성사에서 글을 읽었는데 나급도 그곳에 와 있어 서로 알게 되었다. 윤겸과도 가까운 사이다.

또 부여에서 준 벼 두 석, 흰쌀 세 말, 콩 두 말, 백어젓 세 되도 가지의 집에 맡겨 두었다.

1593년 5월 11일 (계사년 음력 4월 11일)

찰방 김가기가 우리 부자를 불렀다.

아침을 먹고 윤겸과 윤해와 함께 걸어갔다.

찰방은 꿩을 잘 쏘는 사람을 불러 꿩을 잡게 했다. 그런데 마침 산허리 풀 속에 큰 노루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화살 한 발이 가슴을 꿰뚫어 그 자리에서 죽었다.

곧 잡아 간을 회로 먹고 고기를 구웠다. 이어 점심을 마련해 주었다.

윤함은 처삼촌과 함께 그저께 대흥으로 가서 묵었다. 피란해 와 있는 양응락 진사를 찾아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양응락은 윤함과 가까운 마을에서 자란 젊은 시절의 매우 친한 친구다. 이곳에 피란해 와 있다가 아내를 잃었다는 말을 듣고 꼭 찾아가 조문하고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1593년 5월 12일 (계사년 음력 4월 12일)

늦은 아침 윤겸은 찰방의 집으로 가 활을 쏘았다. 윤해도 구경하러 갔다.

윤함은 대흥에서 돌아오면서 벼 다섯 말과 보리 다섯 말을 싣고 왔다. 아내의 삼촌이 도와준 것이다.

나도 점심을 먹고 찰방 집에 갔다.

윤겸은 아내 쪽 서얼 조카 이박과 활을 쏘고 있었다. 윤겸과 동서 사이인 성민헌도 왔다.

찰방이 물말이밥을 내놓았지만 나는 이미 먹었다며 사양했다.

오후에는 우리 집에서도 철쭉꽃으로 화전을 부쳐 가지고 가 함께 먹었다.

1593년 5월 13일 (계사년 음력 4월 13일)

아침을 먹은 뒤 윤겸은 보령으로 갔다. 김포 수령 정엽과 이희참 진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윤해와 윤함은 냇가로 갔다. 나도 뒤따라갔다.

송이라는 종에게 그물을 치게 했더니 회로 먹을 만한 물고기를 수십 마리 잡았다.

윤해의 아내에게 회를 뜨게 하여 냇가에 앉아 두 아들과 함께 먹었다. 추로주 한 잔도 마시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찰방을 찾아갔다. 찰방은 내일 본도의 순찰사 군영으로 간다고 했다.

저녁에는 결성 수령이 윤겸에게 다음 물품을 보냈다.

  • 광어 한 마리
  • 쌍어 두 마리
  • 오징어 세 마리

결성 수령의 이름은 김응건이라고 한다.

1593년 5월 14일 (계사년 음력 4월 14일)

종일 비가 내렸고 오후에는 바람까지 불었다.

윤해의 아내가 어제부터 앓아누웠는데 온몸에 붉은 좁쌀 같은 것이 돋았다고 한다. 걱정스럽다.

저녁에 윤겸이 보령에서 비를 맞으며 돌아왔다. 종들에게 비옷이 없어 옷이 모두 젖었다.

1593년 5월 15일 (계사년 음력 4월 15일)

윤해의 아내 병이 오늘부터 아주 심해졌다.

저녁에 윤해의 양어머니와 몽임이 피하여 왔다. 이 집 앞에 사는 늙은이의 작은 움막을 빌려 며칠 묵은 뒤 이리로 오려고 한다.

병이 계속 이어지니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다.

윤해는 아내의 병을 돌보느라 밖에 나오지도 못한다. 몹시 걱정스럽다.

조도어사 이철이 청양까지 순행해 와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흰쌀 세 말, 팥 두 말, 감장 두 말도 보내 주었다. 매우 고맙다.

청양 수령 임순도 윤겸에게 다음을 보냈다.

  • 흰쌀 세 말
  • 밭곡식 다섯 말
  • 버들그릇 한 벌
  • 사발 열 개
  • 접시 스무 개
  • 간장 두 되

더욱 고맙다.

윤겸의 마부 김어토동이 전에 부사 김찬이 홍주와 덕산에서 내주라고 한 물품을 받으러 갔다가 오늘 돌아왔다.

덕산에서는 흰쌀 한 석, 밀 한 석, 감장 세 말을 보냈다. 소금과 마른 생선은 저장된 것이 없다며 보내지 않았다.

홍주에서는 아직 보내지 않았다. 어사가 와 있다는 말을 듣고 그가 떠난 뒤에 보내려고 한다고 했다.

1593년 5월 16일 (계사년 음력 4월 16일)

홍주에서 흰쌀 한 석, 밀 한 석, 소금 열 말, 감장 세 말을 보내왔다. 부사가 내주라고 명령한 물품이다.

마른 생선은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쌀과 밀은 각각 한 말 반씩 모자랐다. 틀림없이 누군가 훔쳐먹은 것이다.

1593년 5월 17일 (계사년 음력 4월 17일)

김지남이 심수경 정승의 종사관이 되어 홍양에 와 있었는데 오늘 한낮에 찾아왔다.

이곳에서 묵었다.

관에서 점심을 보내 주었고 김지남은 윤겸과 활쏘기를 했다.

저녁에는 윤겸 휘하의 중방 응연이 찾아와 절인 조기 세 묶음을 바쳤다.

응연은 봉선전에 딸린 종으로서 이곳까지 떠돌아온 사람이다.

윤해의 아내는 어제부터 차츰 좋아져 이제 물도 조금 마시고 특별히 아픈 데가 없다고 한다. 감기에 걸렸던 모양이다. 다행이다.

1593년 5월 18일 (계사년 음력 4월 18일)

이른 아침 김지남은 예산으로 돌아갔다.

윤겸도 결성의 한광세 생원이 묵는 곳으로 갔다. 영손이 논을 만들고 있다는 곳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1593년 5월 19일 (계사년 음력 4월 19일)

저녁에 찰방 김가기의 아들 김덕민이 찾아왔다. 소매 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보여 주었다.

찰방이 직산의 순찰사 군영에 있을 때 조정에서 보내온 글이었다.

그 내용은 좌의정 윤두수가 의주에서 명나라 경략 송응창을 만난 일을 보고한 것이었다.

신이 이달 초아흐레 의주에 도착했으나 날이 저물어 이름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초열흘 아침 일찍 명함을 올리고 경략에게 인사했습니다. 경략은 월대 계단에서 예를 행하게 한 뒤 곧 청 안 동쪽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신이 꿇어앉아 홍수언 등을 시켜 “국왕께서 특별히 신을 보내 문안하게 하셨습니다”라고 아뢰었습니다.

경략은 소매를 들어 보이며 “매우 고맙다. 국왕은 지금 어디 계시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지금 숙녕에 계시며 어르신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경략이 말했습니다.

“국왕께서는 돌아가 군무를 처리하시라고 하라. 일이 끝나 내가 돌아오는 날 평양에서 만나겠다. 지금은 만날 필요가 없다.”

이어 신에게 차를 내렸습니다.

신이 보고서를 올리자 경략은 다 읽고 홍수언과 표헌, 남호정을 앞으로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재촉하지 말라. 내게는 생각이 있다.

지난해 가을 원군을 보내려고 은 천여 냥을 헛되이 썼다. 당시에는 나도 오지 않았고 이여송 대장도 오지 않았다. 병마도 모이지 않았고 전쟁 도구도 갖추지 못했다.

계책으로 왜적을 붙들어 두지 않았다면 그들이 두 달 사이에 세 도읍을 연달아 함락시키고 함경도 깊숙이 들어간 기세로 보아 평양의 왜적이 어찌 의주까지 들어오지 못했겠는가.

나는 구월 이십일 북경을 떠나 시월에 요동에 도착했다. 그러나 곧바로 움직이지 않고 이여송의 병마와 무기가 갖추어지기를 기다렸다.

준비가 끝난 뒤 십이월 이십육일 군사를 보내 압록강을 건넜다. 정월 초여드레 평양을 공격해 한 번 북을 울린 뒤 평정했다.

군대는 신속해야 한다. 그 기세를 몰아 열흘 사이 황해도와 개성, 경기까지 연달아 나아갔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었는가.

그러나 무기와 전쟁 도구가 거의 소모되었고 장수와 병사들의 마음도 교만해질 수 있었다.

나는 즉시 이여송에게 편지를 보내 개성이나 임진강 부근에 잠시 머물며 군사를 쉬게 하고 무기를 다시 마련한 뒤 기회를 보아 진격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여송이 내 말을 듣지 않고 가볍게 벽제에서 싸움을 벌여 큰일을 망쳤다.

돌아온 뒤에는 군량이 부족하다, 길이 진창이라 싸우기 어렵다, 사람과 말이 지쳤다, 이미 평양과 개성을 되찾았고 속국을 구원하는 일도 충분히 했다는 말을 하면서 여러 차례 철군을 청했다.

그러나 나는 황제의 명을 받아 조선을 완전히 회복시키려고 왔으니 가볍게 돌아갈 수 없다며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 사정을 보고하며 군량과 병력을 더 청했더니 황제께서 병부와 호부에 명하여 돈과 군량을 빨리 마련하고 힘을 합쳐 적을 쳐서 큰 왜적을 하루빨리 평정하라고 하셨다.

이 문서를 베껴 국왕께 보내 보여 드려라.

이제 장수들은 철군 이야기를 꺼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군사가 오래되어 지쳤고 싸울 마음이 없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지친 병사를 골라 태안 등 여러 곳에 나누어 보내 군량을 쉽게 대게 했다.

유정의 군사도 머지않아 도착할 것이며 뒤의 군사도 계속 올 것이다. 모두 정예군 만 명이다.

여러 지방에서 군량 삼십여 만을 지금 운반하고 있고 요동에서 만든 화포와 화살 등도 이미 갖추었다.

병마와 군량, 무기가 모두 준비된다면 관백이 직접 온다 해도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런데 너희 나라는 이런 뜻을 알지 못하고 무조건 빨리 진격하기만 원한다.

만일 서둘러 싸우다 패하여 황제의 군사가 불리해지면 너희 나라만의 손해가 아니다. 중국의 위엄도 함께 손상된다.

우물 위에 있는 사람이라야 우물 속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법이다.

너희 나라 임금과 신하들은 중국이 원군을 보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가 중국만 지키려 했다면 압록강을 막으면 그만이었다. 어찌 천하의 군사를 움직이고 은 백만 냥을 써 가며 수천 리 밖까지 원정하겠는가.

황제께서 너희 나라가 이백 년 동안 충성해 온 것을 가상히 여겨 구원하시는 것이다.

결국 너희 나라 일을 완전히 끝내고서야 그만둘 것이다.

하늘에는 사계절이 있고 사람에게는 네 가지 덕이 있다. 봄에는 살리고 가을에는 죽이며 은혜와 위엄을 함께 쓰는 것이 하늘의 법이다. 때를 기다렸다 움직여야 모든 일이 온전하다.

너희 나라가 그렇게 급했다면 지난해 사월부터 십이월까지 여덟아홉 달 동안 어째서 한 치의 땅도 회복하지 못했고 함경도의 왜적도 몰아내지 못했느냐.

그런데 명나라의 위엄을 한 번 떨치자 몇 달 만에 평양과 개성을 되찾았고 북쪽의 왜적이 달아났다. 이것이 큰 증거가 아니겠느냐.

중국의 아홉 변경에는 모두 오랑캐가 있다. 오늘 침입하면 토벌하고 내일 와서 조공을 청하면 허락한다. 사람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이 천지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지금 왜적의 죄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모조리 죽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관백이 살아 있고 일본에는 예순여섯 주의 백성이 있다. 그들을 모두 죽일 수 있겠는가.

왜적이 물러간다고 해도 다시 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명군이 모두 철수한 뒤 다시 쳐들어오면 또다시 구원군을 보낼 것인가. 너희 나라가 이미 크게 상했는데 무슨 힘으로 막겠는가.

힘으로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보다 마음을 굴복시키는 것이 낫다.

왜적이 두려워 화친을 청했으니 일단 허락하여 옛 영파 길을 통해 조공하게 하고 은혜에 감복해 물러가게 하려 한다.

명군 만 명 또는 사오천 명 정도를 남겨 중요한 곳을 지키게 하고, 너희 나라 임금과 신하는 앞으로 십 년이나 이십 년 동안 원수를 잊지 말고 장수를 고르고 군사를 훈련하며 은을 만들어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병력을 강하게 하라.

스스로 지킬 힘을 갖춘 뒤에야 남겨 둔 명군을 철수시킨다면 싸우거나 지키는 일이 모두 온전해져 후환이 없을 것이다.

왜적에게 조공을 허락했는데도 물러가지 않는다면 그때는 싸우는 수밖에 없다. 그때는 반드시 토벌할 것이다.

너희 나라 임금과 신하는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고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라.

한 번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물리치고 곧바로 철군하는 일이야 나라고 못 하겠는가. 나는 빠르고 늦음에 얽매이지 않고 너희 나라의 먼 장래를 생각하고 있다.

군량도 애초에 사만 명이 두 달 먹을 양을 준비하라고 했을 뿐인데, 어찌 매번 너희 나라에만 요구하겠는가. 중국의 군량을 계속 가져올 수 있으니 헛되이 낭비하지 말라.

나는 낙상지에게 솜씨 좋은 광물 기술자 열 명을 구해 시험해 보게 했다. 그들을 국왕에게 보내 은과 납, 구리, 쇠를 제련하게 하여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바탕으로 삼도록 할 것이다.

기술자들이 도착하면 국왕께서는 극진히 대우하라. 그들의 기술을 이용하면 대대로 큰 이익을 얻고 의식이 넉넉해져 백성의 힘도 여유로워질 것이다. 그 뒤 옛 원수를 갚아도 늦지 않다.

옛날 오나라와 월나라가 십 년을 기다려 원수를 갚은 일이나 조충국이 둔전을 경영한 일도 모두 때와 형세를 기다렸다가 한 일이다.

너무 서두르지 말라.

나는 빈말이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흐지부지 일을 버리고 체면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잃은 옛 강토를 모두 되찾아 뒤처리까지 온전하게 하고 돌아갈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윤두수는 이 글을 보고 명나라가 결국 화친하려는 것 같다고 판단했다.

심유경은 지난 초아흐레 왜적의 진영으로 들어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까닭은 알 수 없다.

보름날에는 명나라의 사상공과 서 재상, 주 유격 등도 왜적 진영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모든 일을 극비로 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한다니 더욱 이상하다.

왜적은 팔도의 백성을 죽이고 선왕들의 능을 파헤쳤으며 종묘와 사직을 불태우고 서울의 수많은 집을 무너뜨린 채 한 해 가까이 소굴로 삼아 조금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명나라 장수들이 억지로 화친하려 한다면 명나라의 위엄도 크게 손상될 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를 언제 갚을 수 있겠는가.

분하고 한탄스럽지만, 끝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1593년 5월 20일 (계사년 음력 4월 20일)

임언복이 가족들이 피란해 있는 곳에서 나를 찾아왔다가 장수로 돌아갔다. 아침과 저녁을 먹여 보냈다.

저녁에 윤겸이 결성에서 돌아와 말했다.

“논을 만들 곳을 자세히 보니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이산겸의 형제들이 나누어 가진 땅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버려 두었어도 결국 되찾으려 할 테니 차라리 사고 싶습니다. 다만 주인이 팔 생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땅은 넓고 사람은 드물며 오래 버려져 있으니 주인도 아마 팔고 싶어 할 것이다. 다만 값은 틀림없이 요구할 것이다.

1593년 5월 21일 (계사년 음력 4월 21일)

임언복은 아침을 먹고 장천으로 돌아갔다.

지난해 왜란이 일어났을 때 나는 고을 관아에 있었다. 늙은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라 밤낮으로 근심하고 울었다.

그때 임언복은 산정에서 늘 나와 마주 앉아 내 끝없는 근심을 조금이나마 달래 주었다.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한 번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지난겨울 먼저 돌아왔지만 그는 그곳에 계속 남아 있었다.

올해 정월 장천에서 올라오며 계당의 내 거처를 찾았지만 내가 병으로 앓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다. 오늘 다시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그의 정이 얼마나 두터운지 알 만하다.

비록 아전 신분이지만 마음 씀씀이에는 본받을 만한 점이 많다. 나도 그를 매우 후하게 대했다.

막정에게 쌀 열 말을 싣고 대흥 장으로 보내 베를 사 오게 했는데, 내가 시킨 것과 다르게 샀고 물건도 부실했다.

자기가 직접 훔친 것은 아니더라도 남에게 속은 것은 분명하다. 괘씸하다.

한낮에 너무 무료하여 냇가로 나가 종에게 그물을 치게 했다. 조금 잡은 물고기는 윤해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냈다.

윤해의 양어머니는 담당으로 돌아갔다. 이십사일에 신을 보내는 굿을 하려는 까닭이다.

1593년 5월 22일 (계사년 음력 4월 22일)

아침을 먹고 세 아들과 함께 역 앞 언덕의 느티나무 아래까지 걸어갔다.

김덕민을 불러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뒤 박효제 생원과 이광복이 찾아와 함께 이야기했다. 오후가 되어 각자 돌아갔다.

저녁에는 이익빈 생원도 내 거처를 찾아왔다.

갓장이를 불러 내 갓과 윤겸의 갓에 칠을 했다.

1593년 5월 23일 (계사년 음력 4월 23일)

아침을 먹고 윤겸과 윤함이 부여로 갔다. 정 사과 집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윤겸은 그 길로 한산에 있는 처가 종의 집에도 가서 우리가 살 만한 곳인지 살펴볼 생각이었다. 온 가족이 머지않아 거처를 옮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저께 막정과 춘기 등이 말 두 필을 끌고 청양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말이 달아나 보리밭을 짓밟았다. 밭주인이 두 종의 낫을 빼앗았다.

그래서 어제 아침 마부 김어질동을 보내 되찾아오게 했다.

(원문에는 음력 삼월 이십삼일로 적혀 있으나 앞뒤 날짜에 따라 음력 사월 이십삼일로 보았다.)

1593년 5월 24일 (계사년 음력 4월 24일)

무당을 불러 계당에서 신을 보내는 굿을 했다.

저녁에 윤겸이 부여에서 돌아왔다.

명군 접대 문제 때문에 여러 고을 수령들이 모두 군영으로 가 있어 한산에는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윤함은 박원과 함께 옛 백제의 유적을 구경하느라 뒤처졌다.

또 이언실 첨정의 서자가 어제 저녁 순천에서 도착했다. 이언실은 편지와 함께 부채 두 자루를 보냈다.

찰방이 전해 준 경기 순찰사의 공문도 보았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조선이 일본과 깊은 원한을 맺고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명나라가 이미 두 나라의 원한을 풀고 싸움을 그치게 했으니 조선은 경략 송응창이 정한 법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너희가 사사로이 복수한다며 거리낌 없이 왜병을 죽인다면 일본은 명나라 명령에 따르는데 도리어 조선이 명을 거역하는 셈이 된다.

지난해 왜군이 쳐들어왔을 때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이 왜 성문을 닫고 죽음으로 싸우지 않고 바라보기만 해도 무너져 달아났는가.

그 때문에 종묘사직은 폐허가 되고 임금은 피란하였다.

명나라가 작은 나라를 불쌍히 여겨 불난 집을 구하듯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면 조선 땅은 모두 왜적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은덕을 모르고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서 복수를 핑계로 흩어진 왜병을 죽이려 하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만일 다시 분쟁을 일으킨다면 화가 작지 않을 것이다.

왜병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빨리 조사하여 군법으로 처리하라.

명나라 사신이 왜군을 호송해 가는 동안에는 절대로 공격하지 말라. 왜군이 다시 침입한다면 그때는 이전처럼 토벌하라.

명나라 장수들이 화친하려 하고, 명나라 사신이 왜적을 호위하여 돌려보낸다는 말이니 분하고 또 분하다.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다.

다만 명나라 사신이 왜적을 데리고 가는 동안 무지한 우리 군사들이 흩어진 왜병을 뒤쫓아 공격하여 분쟁을 일으킨다면 신하들이 죽고 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명나라에 죄를 얻게 될 수도 있으니 그것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적은 지난 십구일 서울에서 나갔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명나라 사신 두 사람이 호송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도리어 사신들이 왜적에게 붙들려 간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또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서울에 들어가 있고 그의 아우 이여매가 군사를 거느리고 이십일 강을 건너 뒤쫓아갔다는 말도 있다. 떠도는 말이라 믿기 어렵다.

우리나라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를 갚지 못한 채 왜적이 무사히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면 신민들의 분통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명나라의 위엄도 이 일로 크게 손상될 것이다. 왜적이 앞으로 명나라를 가볍게 여기지 않겠는가.

1593년 5월 25일 (계사년 음력 4월 25일)

아침을 먹고 종 셋을 데리고 계당으로 갔다.

더러운 것을 치우고 무너진 담 쪽에는 소나무를 베어 울타리를 만들었다.

저녁에는 사포 숙부와 이광복이 내 거처를 찾아왔다.

숙부는 아침에 광석에 있는 최인 부장의 정자로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른 것이다.

1593년 5월 26일 (계사년 음력 4월 26일)

날이 밝기 전에 윤해의 양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이 찾아왔다.

어제 저녁 이광복이 와서 말했다.

“안성 수령 강성의 병이 위독해 목숨이 오늘내일합니다. 만일 세상을 떠나면 계당으로 빈소를 옮길 생각이니 미리 알아 두십시오.”

그래서 역리 장천의의 집을 빌려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강성은 계당 주인 이광륜의 장인이다. 이광륜은 의병장 조헌이 패할 때 죽었다.

그 아들 대해가 지금 상중인데 제사를 지내는 집에 시신을 모실 수 없으므로 계당으로 옮기려 한다는 것이다.

막정과 춘기를 시켜 계당의 물건을 새 거처로 옮기고 집도 손보게 했다. 저녁부터 그곳에서 잘 생각이다.

저녁에 윤함이 부여에서 돌아왔다.

1593년 5월 27일 (계사년 음력 4월 27일)

아침을 먹고 세 아이와 함께 계당으로 가 왜철쭉을 구경했다.

이광복의 행랑으로 들어가니 사포 숙부가 먼저 와 있었다. 이광축도 왔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겸은 이광복과 활을 쏘았다.

이씨 집에서 물말이밥을 내놓았다.

해가 기울어서야 돌아왔고, 오는 길에 윤해가 새로 옮긴 집에도 들렀다.

1593년 5월 28일 (계사년 음력 4월 28일)

윤겸과 윤해가 서울로 떠났다.

왜적이 달아났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광주 토당리에 있는 선산을 살펴보고 서울에 들어가 안팎의 집들이 어떤 상태인지 보려는 것이다.

땅에 묻어 둔 신주도 파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단오가 가까우므로 선산에서 제사를 올릴 생각이다.

윤겸은 이어 봉선전도 찾아보고 서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먼 길을 갈 식량을 싣고 가지 못했으므로 중간에 굶주릴 수도 있어 정말 돌아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저녁에는 장수 고을 사람 이백과 범년 등이 왔다.

새 장수 수령 전협이 결성의 친척집에 문안하러 보낸 사람들이다. 이곳을 지나면서 전임 수령 이운의 아내와 자식들이 맡긴 편지를 전해 주고 하룻밤 묵었다가 갔다.

새 수령이 그들을 후하게 대하지 않아 가족이 꽤 곤궁하다고 한다. 안타깝다.

시윤도 오지 않는다고 하니 더욱 슬프다.

이웃에서 소를 잡아 고기를 팔기에 흰쌀 한 말 세 되를 주고 뒷다리 하나와 내장을 조금 샀다.

1593년 5월 29일 (계사년 음력 4월 29일)

송이라는 종을 병영으로 보냈다.

절도사가 문서로 내주기로 한 물건을 받아오게 하기 위해서다.

1593년 5월 30일 (계사년 음력 5월 1일)

종일 집에 있었는데 너무나 무료했다.

단이가 학질에 걸렸다.

처음에는 오후에 병이 났는데, 그저께부터는 밤 이경 무렵에 발작한다. 한동안 온몸을 떨다가 머리가 심하게 아파지고 다음 날 아침까지 낫지 않는다. 오후가 되어야 조금 풀린다.

오늘 밤에도 몹시 앓았다. 벌써 네 번째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니 걱정스럽다.

윤겸의 아내도 학질에 걸린 지 열 번이 넘었는데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금손이 결성에서 돌아와 살아 있는 갈어 두 마리를 가져왔다.

저녁에는 김덕민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장수 사람이 답장을 받아 돌아갔다.

충이가 몇 걸음씩 걷기 시작했다.

1593년 5월 31일 (계사년 음력 5월 2일)

오후에 윤겸이 돌아왔다.

타고 가던 말이 너무 야위어 제대로 걷지 못했다. 아산에 있는 이시설의 집까지 겨우 갔다가 어쩔 수 없이 돌아왔다고 한다.

윤해만 종 셋을 데리고 각자 식량과 짐을 지게 한 채 혼자 말을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저녁에는 송이라는 종이 병영에서 돌아왔다.

병사 이옥이 준 물품은 다음과 같다.

  • 중간 품질 쌀 세 말
  • 말장 세 말
  • 소금 다섯 말
  • 찹쌀 한 말

1593년 6월

1593년 6월 1일 (계사년 음력 5월 3일)

종일 집에 있었다.

오후에 윤겸이 묵는 집주인 가매가 냇물고기 한 소반을 잡아다 주었다.

곧 술을 사 대접했다.

조금 큰 것 오십여 마리는 골라 소금을 뿌려 말리고 나머지는 저녁에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끓여 먹었다. 맛이 아주 좋았다.

저녁밥을 먹은 뒤 김덕민이 와서 집 뒤 언덕으로 가자고 했다. 두 아이와 함께 나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찰방은 지금 충원에 있다고 한다.

오늘은 지난해 왜적이 서울에 들어간 바로 그날이다.

왜적은 우리나라에 꼬박 한 해를 머물며 무고한 백성을 셀 수 없이 죽였고, 여자와 아이를 불태우거나 잡아갔으며, 귀중한 재물을 모조리 자기 나라로 실어 갔다.

그런데 끝내 명나라 장수들은 왜적과 화친하여 무사히 돌아가게 했다.

온 나라 사람이 느끼는 분노를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왜적이 조령을 넘어 돌아간 뒤로는 가는 길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듣지 못했다.

명군 수백 명이 뒤따라 호송한다는 말도 있고, 우리나라 장수들도 뒤쫓고 있으나 명나라 장수의 명령 때문에 함부로 공격하지 못한 채 형세를 보고 있다고 한다.

한탄스럽지만 어찌하겠는가.

더욱 분통 터지는 것은 왜적이 돌아가는 길에 우리나라 악공을 데리고 앞뒤에서 음악까지 연주하게 했다는 말이다.

분하고 또 분하다.

1593년 6월 2일 (계사년 음력 5월 4일)

오후에 두 아이와 함께 역관 대문 앞 느티나무 아래로 갔다.

김덕민을 불러 푸른 그늘 아래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을 아이들이 하는 반선 놀이도 구경하고 돌아왔다.

1593년 6월 3일 (계사년 음력 5월 5일)

이른 아침 역리 억룡의 아내가 새 보리를 조금과 텃밭 채소 한 광주리를 가져왔다.

단술 한 사발을 먹이고 누룩 한 덩이를 주어 보냈다.

오늘은 단오다.

예전 서울이 한창 번성하던 때를 생각하면 곳곳에 그네를 매고 거리마다 씨름판이 벌어졌다. 화장하고 곱게 차려입은 여자들이 떼를 지어 손을 잡고 구경하러 다녔다.

그러나 흉악한 왜적에게 나라가 짓밟힌 뒤로는 옛 도읍에 보리만 우거진 것을 바라보듯 폐허를 탄식하게 되었다.

언제 다시 태평하던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아, 슬프다.

아침을 먹고 두 아이와 함께 이광복의 행랑으로 가 사포 숙부를 찾아뵈었다.

그곳에는 이광축 생원, 윤민헌 진사, 김극, 김형윤과 집주인이 함께 있었다.

오랫동안 이야기하다 해가 기울어서야 돌아왔다.

이광복의 자가 중진이고, 이광축의 자가 중순이다.

김찬선 형은 마침 광석으로 가 있어 만나지 못했다.

1593년 6월 4일 (계사년 음력 5월 6일)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리더니 늦은 아침에는 크게 쏟아졌다. 바람도 세게 불었다.

한낮이 되어서야 천둥이 쳤다.

지난달 십사일 비가 온 뒤 지금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날마다 짙은 안개만 끼었고 보리와 밀이 누렇게 말라 절반은 열매가 제대로 들지 않았다.

모두 비를 애타게 기다리던 때였는데 오늘 밭을 한 번 갈 만큼 비가 내려 그나마 곡식이 살아날 수 있겠다.

이미 누렇게 뜬 보리는 다시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오늘 비도 충분하지는 않았다. 높고 메마른 논은 뿌리만 젖었을 뿐 물이 고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룻밤 더 비가 온다면 백성들의 바람을 채워 줄 수 있을 것이다.

단이도 학질을 앓고 있다.

어제 오전부터 발작했다가 저녁밥 먹기 전에 조금 나았다. 이제 하루 걸러 앓는 학질로 바뀐 듯하다.

예전보다 아픈 정도가 삼분의 이나 줄었으니 이제 떨어질 듯하다.

강성 전 안성 수령이 어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오늘 처음 들었다.

지난해 여름 왜적이 쳐들어왔을 때 임지에서 피해 나와 사위 이광륜의 집에 머물렀다.

아내와 첩 등 가족들은 서울에 있다가 관서로 피란했다고 한다.

지난 삼월부터 숨이 차고 온몸이 부어오르는 병을 앓다가 지금 세상을 떠났다.

슬프고 슬프다.

1593년 6월 5일 (계사년 음력 5월 7일)

종일 집에 있었다.

윤함의 아내 삼촌 강신윤이 대흥에서 와 윤함을 보고 점심을 먹은 뒤 지나갔다.

식량과 반찬이 거의 다 떨어졌다.

어디에도 구걸하여 구할 곳이 없다.

보리를 거두기 전까지는 굶주릴 일이 생길 듯하다. 걱정스럽다.

1593년 6월 6일 (계사년 음력 5월 8일)

이성록 정자가 영암에서 돌아오며 우리 집에서 묵었다.

어머니와 아우 희철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모두 평안하고 인아는 절에 올라가 글을 읽고 있다고 한다.

어머니의 친필 편지를 펼쳐 보니 종이 가득 나를 그리워하고 잊지 못한다는 말뿐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생각나 차마 목으로 넘기지 못한다고 쓰셨다.

끝까지 읽기도 전에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셨다.

저녁에는 윤해가 서울에서 돌아왔다.

단오날 토당의 선산에 밥과 국, 맑은 물을 차려 제사를 올리고 무덤을 살펴보았다고 한다.

무덤들은 모두 그대로였다.

다만 선릉에서 난 불이 우리 산까지 번져 왔으나 봉분에는 미치지 않았다.

산 가득한 소나무는 모두 불에 그을려 누렇게 되었지만 새잎이 다시 나오고 있어 죽지는 않을 듯하다.

윗마을과 아랫마을의 민가들은 모두 불타 없어졌고 아직 옛집터로 돌아와 사는 사람은 없었다.

제삿날 마침 용궁 숙모 집 종 복룡이 그곳에 왔다가 윤해를 찾아왔다.

윤해의 양아버지 무덤 앞 망주석은 하나가 앞쪽 골짜기로 밀려 떨어졌고 하나는 허리가 부러져 버려져 있었다.

왜적의 무덤 근처에서는 명나라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왜적의 뒤를 추격하는 군사라고 했다.

병사는 천 명 가까이 되었고 대장은 좋은 말을 타고 남빛과 붉은빛 비단 도포를 입었다. 앞가슴과 등에 흉배를 달고 가죽 관을 썼는데 기상이 씩씩했다.

앞뒤로 호위병이 달리며 악기를 울리고 음악을 연주했다.

낙타 한 마리에는 커다란 쇠대포를 싣고 끌고 갔다.

그 뒤로 따라 내려가는 군사는 얼마나 되는지 셀 수 없었다고 한다.

서울로 들어가 보니 큰길 북쪽의 집들은 거의 모두 불탔다. 어떤 곳은 잿더미만 남았고 행랑이나 곁채 몇 칸만 홀로 서 있었다.

보는 광경이 너무나 참혹했다.

산골 깊숙한 곳에는 간혹 화를 피한 곳도 있었다.

큰길 남쪽 집들은 왜적이 절반쯤 진을 치고 있었던 까닭에 보존된 집이 비교적 많았다.

왜적이 진을 치지 않았던 집은 불에 타거나 헐려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왜군이 머물던 집은 온전했고, 놋그릇과 잡다한 물건, 다른 집에서 뜯어온 목재가 가득 쌓여 있었다.

왜적이 나간 직후 집주인이 곧바로 들어간 사람은 많은 물건을 건졌다고 한다.

죽전동의 처가는 왜적이 진을 쳤던 집이라 처음에는 남아 있었다.

그러나 왜적이 물러간 뒤 가까이 있던 장사꾼들이 먼저 들어가 훔쳐 갔다.

북쪽과 동쪽, 서쪽 누각 사이의 기둥과 곁채 마룻널, 창문과 문짝까지 모두 뜯어 갔다.

동쪽 누각 두 칸의 마루만 조금 남았고 안팎의 벽도 모조리 뜯겨 나갔다.

이것은 모두 먼저 들어간 우리나라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한다.

윤해의 양가가 있던 이현의 집은 건물 전체가 모조리 뜯겨 기왓장과 흙더미만 터에 가득했다.

건축용 나무 세 개와 대들보 두 개만 버려져 있었다.

관북에 있던 장수 이운의 집도 모두 타 버렸고 곁채 두 칸과 행랑만 홀로 남았다.

향나무와 버드나무는 모두 베어졌지만 줄기는 남아 있었다.

서쪽 담 밑 무성한 풀 사이에는 작약 두 송이만 홀로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매우 처연했다고 한다.

그곳은 내 아내의 종가다.

나는 장수 이운과 삼십여 년 동안 한집처럼 지냈고 내 여러 자녀도 그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러니 그리움과 안타까운 마음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문 앞에는 옛날 아이들이 손에 들고 쓰던 화로 집게와 부젓가락이 버려져 있었다.

윤해가 종에게 주워 오게 했다.

아이들이 그것을 보고 모두 반가워하면서도 옛날 생각에 다시 슬퍼했다.

이경여의 집도 모두 타고 곁행랑만 조금 남았다고 한다.

마을 전체를 살펴보면 비석이 서 있던 위쪽에서부터 관아 아래 관리들 집까지 거의 모두 타 버렸다.

간혹 행랑만 남은 집이 있었다.

목천 집과 천안 집은 완전히 불탔고 오직 돈손의 집만 남아 있었다.

성균관에 들어가 보니 대성전과 명륜당, 존경각, 식당, 정록청도 모두 타 버렸다.

성전의 협문과 전사청만 남았고 좌우의 재실도 절반은 불탔다.

전각 앞의 성인 비석은 세 조각으로 부러졌고 받침돌인 거북 모양 돌도 뽑혀 넘어져 있었다.

주자동의 종가로 가 보니 집은 모두 타고 사당만 홀로 남았다.

신주를 뒤뜰에 묻었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들어가 파내어 절하려 했다.

그런데 여종 천복의 남편 수이가 말했다.

“집 안에 시신이 너무 많이 쌓여 있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사당 앞 계단에는 천복의 어머니와 천복, 천복 아들의 아내가 살해된 채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그 밖에도 수이의 두 사위와 같은 동네 사람들이 살해된 시신 열두 구가 집 안에 놓여 있었다.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해 악취가 동네를 가득 메우고 있었으므로 윤해는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천복의 어머니는 처가의 종의 아내였고 우리 어머니와 동갑이었다.

성품이 본래 순하고 후덕했다.

남편이 일찍 죽은 뒤 수절하며 혼자 살면서 우리 어머니를 자기 주인처럼 극진히 섬겼다.

혼례나 장례, 제사가 있으면 반드시 와서 음식을 맡아 장만했고, 어머니의 뜻을 조금도 거스르지 않았다.

오십여 년 동안 드나들면서 한 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매우 아꼈고 안팎의 온 집안 사람이 모두 좋은 사람이라 칭찬했다.

그런 사람이 비명에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슬픔을 견딜 수 없다.

윤해의 처가는 왜적이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인 최형록이 바로 들어가 보았기 때문에 집이 예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깨진 그릇과 뜯어 온 나무도 많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아마 왜군이 진을 쳤던 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처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집에 들어가 지키는 사람이 없다.

종 광이를 불러와 살게 하려고 했지만 이웃에 명군이 머물고 있어 들어가 살 수 없다고 했다.

다른 곳에 있더라도 매일 와서 살펴 더 이상 사람들이 집을 뜯어 가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 밤에 몰래 들어와 남은 재목을 뜯어 가면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매우 걱정스럽다.

서쪽 이웃 유사덕의 집은 전에 왜군 진영이었는데 지금은 명군이 들어와 머물고 있다.

거리와 집집마다 시신이 쌓여 있어 차마 볼 수 없다고 했다.

아마 정월 이십사일 왜적이 서울을 불태울 때 살해된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처음 왜적이 들어왔을 때 성을 떠나지 않고 왜적이 주는 이익을 탐해 다른 사람 집에 묻어 둔 물건까지 파내 훔쳐 자기 집에 쌓아 놓고 술과 음식을 배불리 먹으며 잘되었다고 여긴 사람들이 많았다.

앞날의 화를 생각하지 않았다가 끝내 모두 살해되었다.

스스로 불러온 일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고성 남상문의 집은 모두 타고 연정만 남았고, 김지남의 집은 건물의 뼈대는 남았지만 사방이 모두 뜯겼다.

오직 이응화 참봉의 처가만 옛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또 윤해의 양아버지와 양조부모의 신주, 죽전동 삼촌 두 분의 신주를 왜적이 파내 마당에 내던졌다고 한다.

여종 옥춘이 그것을 받들어 관동 장수 집 동산에 묻었다.

그래서 윤해가 직접 찾아가 양아버지와 양조부모의 신주는 찾아 파냈다.

그러나 죽전동 삼촌의 신주는 어디 묻었는지 몰라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했다. 옥춘이 와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양조모의 신주 받침도 잃어버렸다.

윤해는 신주를 받들고 오는 길에 수원의 종 내은동 집에서 안전하게 모신 뒤 돌아왔다.

세 궁궐과 종묘, 문소전, 연은전도 모두 타 버려 남은 것이 없었다.

궁궐의 뜰과 계단에는 잡초가 무성하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이백 년 동안 선왕들이 이룬 문물과 제도가 모두 왜적의 손에 사라졌다.

나는 이 왜적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선릉과 정릉도 모두 파헤쳐 관을 깨뜨리고 임금의 시신을 밖으로 끌어냈다고 한다.

중종의 시신은 뒤쪽 골짜기에서 간신히 찾았으나 성종의 시신은 아직 찾지 못했다.

누군가는 불태웠다고 하고 누군가는 강물에 던졌다고 한다.

온 나라 신민의 분통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성종은 우리나라의 성스러운 임금으로 태평한 세상을 누렸는데 세상을 떠난 지 백 년도 되지 않아 무덤 한 줌조차 보전하지 못했다.

비록 하늘의 운수가 그렇게 된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일이 제대로 되지 못한 까닭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제 임금과 신하들은 원수를 갚기 위해 쓰디쓴 것을 먹고 쓸개를 맛보듯 이를 갈아야 한다.

그런데 나라의 만세에 남을 치욕을 씻기 위해 몸을 잊고 의롭게 일어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오직 명군의 토벌만 믿다가 끝내 명나라 장수들이 화친을 하여 흉악한 왜적을 무사히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더욱 분통이 터진다.

옛날 초나라 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했을 때 초나라 사람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복수를 다짐했다.

비록 그때 바로 원수를 갚지 못했으나 뒤에 항적이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진시황의 무덤까지 파헤쳤다.

후세의 복수도 결국 초나라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으니 통쾌한 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도 초나라 사람들처럼 이를 갈며 훗날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 통탄스럽다.

강릉과 태릉, 현릉도 파헤쳤으나 깊은 현실까지는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왕릉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 듣지 못했다.

봉선전에 모신 세조의 어진은 처음 왜적이 가까이 닥쳤을 때 윤겸이 어쩔 수 없이 어진을 받들어 뒷산에 묻었다.

제기는 절 앞 계단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왜적이 한 차례 절에 들어왔다가 물러간 뒤 윤겸이 다시 들어가 어진 묻은 곳을 살폈다.

비가 내려 땅이 젖어 어진이 썩을까 두려워 다시 파내고 장식물과 함께 불상 사이에 섞어 두었다.

왜적이 보고 불상인 줄 알고 거들떠보지 않았다.

제기는 왜적이 파내 가져간 듯하다.

그 뒤 윤겸은 여러 번 절에 들어갔다.

왜적이 오면 물러났다가 왜적이 돌아가면 다시 들어가는 일을 세 차례나 되풀이했다.

그러나 왜적의 기세가 갈수록 거세져 날마다 들이닥치자 더는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다.

윤겸은 경기 감사 권징을 찾아가 그동안의 사정을 자세히 보고했다.

감사도 이를 조정에 장계로 올렸으나 임금께 실제로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남쪽 호서로 내려온 뒤에는 왜적이 길을 막아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늘 걱정했는데 이제 왜적이 나갔다는 말을 듣고 윤겸이 아우와 함께 서울로 가면서 봉선전도 살펴보려 했다.

하지만 아산에서 말이 쓰러져 움직이지 않는 바람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대신 종 가지를 보내 봉선전을 살펴보게 했다.

그곳 승려들에게 물으니 봉선사는 모두 불탔고 승려들도 대부분 흩어졌으며 대여섯 명만 임시 움막을 지어 살고 있었다.

어진은 아무 탈 없이 보전되었다고 했다.

승려 세 사람이 목숨을 걸고 지킨 덕분이라고 한다.

지난 삼월 초사흘 광릉 참봉 이이첨이 그 승려들과 함께 어진을 모시고 임금이 머무는 행재소로 갔다.

임금께서 직접 어진을 지킨 승려들을 불러 사정을 물으셨다.

승려들이 처음부터 끝까지의 일을 아뢰자 임금께서는 벼슬을 내리라고 하셨다.

승려들이 사양하자 다시 명하여 평생 봉선사의 주지로 삼고 문서를 내려 보냈다고 한다.

어진을 모셔 간 뒤 나흘째인 초이렛날 왜적이 군사를 일으켜 산을 포위하고 절과 능산을 모두 불태웠다.

조금만 늦었어도 어진까지 보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또 처가 여종 복지는 처음에 어머니와 함께 성 밖으로 나왔다.

남편 산석은 아들 응일이 왜적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고 되찾아오겠다며 뒤를 따라갔다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틀림없이 살해되었을 것이다.

복지는 세 아이와 자기 어머니를 데리고 있었는데 먹을 것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서울로 들어가 옛집에서 살다가 왜적이 불을 지를 때 달아나 중흥사까지 갔다.

그러나 아이들과 함께 추위와 굶주림으로 모두 죽었다고 한다.

복지의 어머니가 왜적의 손에 죽지 않았다고 해도 굶어 죽었을 것이다.

참으로 참담한 일이다.

지난해 시월 아우가 서울에 들어가 신주를 모셔 나올 때 복지 모녀도 함께 나오고 싶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식량이 없어 데려오지 못했다.

그때 데리고 나왔더라면 어머니와 세 아이가 모두 죽는 일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더욱 가엾다.

여종 옥춘이 온 뒤 죽전동 숙부의 신주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다.

처음에는 관동 집 다락 위에 모셨는데 서울이 불탈 때 함께 불타 버렸다고 한다.

1593년 6월 7일 (계사년 음력 5월 9일)

이른 아침 이성록이 찾아왔다가 갔다.

아침을 먹고 이광복의 행랑으로 가 사포 숙부를 찾아뵈었다.

김찬선 형과 이광축 생원, 신정숙이 먼저 와 있었다.

신정숙은 김찬선과 같은 나이의 친구로, 이 고을에 피란해 왔다가 김찬선을 만나러 온 것이다.

조금 뒤 윤민헌 진사와 김형윤도 왔다.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정숙이 먼저 돌아가고 나도 해가 기울 무렵 돌아왔다.

또 송응창 경략이 여러 장수에게 왜적을 뒤쫓아 공격하라고 보낸 문서를 보았다.

그것을 보니 명나라 장수들이 화친한 것이 본뜻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왜적이 서울의 험한 지형과 튼튼한 성을 차지하고 굳게 버티고 있어 공격하기 어려우므로, 화친을 미끼로 성 밖으로 끌어낸 뒤 험한 곳을 잃게 하고 공격하려는 계책이었다.

지금 돌아가는 왜적의 길목을 막아 추격한다고 하니 그 뜻을 비로소 알겠다.

더구나 왜적이 조령을 넘고도 영남에 머물며 여러 고을을 불태우고 있으니 그 속셈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이여송이 대군을 거느리고 내려가 충주에 주둔한다고 한다.

송응창은 심유경이 왜적과 한편이 되었다면 죄를 용서하기 어렵다고 했다.

왕자들과 신하, 두 사신을 구출하지 못하더라도 나라의 큰일을 우선해야 하므로 어쩔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이것을 보면 경략의 본뜻을 알 수 있다.

다만 심유경이 당당한 명나라 신하로서 흉악한 왜적과 모의하여 스스로 그들의 신하처럼 행동했다면 참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뒤에 알고 보니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

1593년 6월 8일 (계사년 음력 5월 10일)

이른 아침 윤해가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진위의 처가 농막으로 돌아갔다.

송이라는 종이 말을 끌고 따라갔다.

윤해의 아내와 자식들은 우리와 함께 피란하여 이곳에서 거의 반년을 지냈다.

그동안 온갖 고생을 겪었고 병에 걸려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이제 갑자기 헤어져 돌아가니 온 가족이 쓸쓸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아이와 손주들이 눈앞에서 뛰노는 것을 보며 하루하루를 보냈기에 더욱 섭섭하고 그립다.

저녁에는 문응인이 찾아왔다. 저녁을 먹여 보냈다.

1593년 6월 9일 (계사년 음력 5월 11일)

함열 수령 신응구가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윤겸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형님 집 일을 생각할 때마다 걱정이 생깁니다. 굶든 배부르든 함께할 것이니 곧 이 근처로 와서 지내십시오.”

정말 정이 두텁다.

한낮에는 안세규 공이 광석에서 걸어서 찾아왔다.

전에 한 번 왔는데 내가 병으로 오래 앓아 답례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또 찾아왔으니 마음이 몹시 부끄럽다.

저녁에 윤겸이 결성에서 돌아왔다.

다음 물품을 가져왔다.

  • 소금에 절인 갈어 열세 마리
  • 생광어 한 마리
  • 오징어 네 마리
  • 생조기 한 마리

갈어는 전에 금손이 갈 때 쌀과 소금을 한효중 생원의 집에 미리 보내 사 두었던 것이다.

또 송응창 경략이 세 도에 내린 공문을 보았다.

왜적은 평양과 개성 등에서 여러 차례 패한 뒤 서울에 모여 명군의 위세와 토벌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거짓으로 조공을 청하며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 한 것이지 진심으로 항복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속임수를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기회를 보아 토벌하려고 일부러 서울에서 끌어내 험한 곳을 잃게 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약속을 어기고 왕자와 신하를 붙잡아 두었으니 왜적의 간사함이 더욱 분명해졌다.

이에 이십일과 이십이일에 왜적 토벌을 맡은 제독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경상도와 전라도로 추격하게 하고 앞길을 막아 여러 군대가 힘을 합쳐 뒤쫓도록 했다.

각 장수가 이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해 왜적이 이미 떠난 곳에서 느슨하게 행동하다 일을 그르칠까 두려워 다시 엄히 재촉한다.

조선의 장수들은 즉시 군사를 이끌고 화기와 무기, 식량을 갖추어 밤낮으로 적을 뒤쫓아 명군과 힘을 합쳐 토벌하라.

심유경이 왜적과 한편이 되었다면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으니 감싸 줄 필요가 없다.

왕자와 신하, 파견한 두 사신을 구출하지 못하더라도 국가 대사를 우선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내가 두 사신을 보낼 때에도 그들에게 때가 되면 형편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여 움직이고 심유경의 말만 듣지 말라고 이미 타일렀다.

조공과 호송이라는 작은 신의만 붙잡고 명나라와 조선의 큰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왜적에게도 이미 알렸고 호택과 심사현 등 여러 장수도 모두 들었다.

오늘 갑자기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다.

필요한 군량은 조선 사람과 가축을 동원해 군사들과 함께 운반하고 출발 날짜를 보고하라.

1593년 6월 10일 (계사년 음력 5월 12일)

종일 집에 있었다. 너무나 무료했다.

아침에 막정에게 말을 주어 정산의 가지 집으로 보냈다. 전에 윤겸이 얻은 쌀을 그 집에 맡겨 두었는데 이곳의 식량과 반찬이 다 떨어져 그것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한낮 전에는 김포 수령 정엽이 보령에서 서울로 올라가다가 들렀다. 윤겸을 만나고 떠났다.

윤겸의 친구로 지금 상중인데 보령의 농막에 피란해 살고 있다. 이산보 판서의 사위이기도 하다.

또 상투를 튼 어린아이 두 명이 피리를 들고 와 구걸했다.

어디 사느냐고 물으니 서울 신성동이라고 했다.

누구 집 종이냐고 물으니 박숭원 판윤의 종이라고 했다.

호서로 피란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려는데 식량이 없어 구걸한다고 했다.

한 곡조 불어 보라고 했더니 맑고 멀리 울리는 소리가 몹시 처량했다.

나 역시 타향을 떠도는 사람이라 그 소리를 듣고 더욱 슬펐다.

더구나 박숭원은 같은 동네에서 살며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인데 지난해 관서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종들을 보니 옛사람이 떠올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소금과 식량을 조금 주어 보냈다.

1593년 6월 11일 (계사년 음력 5월 13일)

종일 집에 있었다.

별다른 소식도 없고 몹시 무료했다.

아이들과 지팡이를 짚고 가까운 곳을 거닐었다.

때로는 푸른 나무 그늘 아래 앉거나 누워 끝없는 근심을 달랬다.

1593년 6월 12일 (계사년 음력 5월 14일)

늦은 아침 송이라는 종이 진위에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부터 머리가 아팠다는데 지금까지 낫지 않았다. 오늘 저녁에는 병이 아주 심해졌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걱정스럽다.

문 밖에 움막을 지어 따로 살게 했다.

내일까지 지켜보고 병세가 낫지 않으면 냇가로 더 멀리 옮길 생각이다.

윤겸과 함께 사포 숙부를 찾아뵈러 이광복의 행랑으로 갔다.

이광축과 이광복도 모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찬선 형은 계당에 와 있었다. 종에게 물고기를 잡게 한 뒤 나를 불렀다.

나와 윤겸도 계당으로 돌아가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 우리 집에 술 반 병이 있어 가져오게 해 각자 석 잔씩 마셨다.

날이 저물어 헤어졌고 다음에 이 집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1593년 6월 13일 (계사년 음력 5월 15일)

아침을 먹은 뒤 김덕민이 어제 보은 본가에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역관 앞 느티나무 그늘로 갔다.

김덕민과 두 아이가 함께 앉아 이야기했다.

윤겸은 김덕민과 철전으로 열 차례 남짓 활을 쏘았다.

영남의 왜적 소식을 물으니 왜적이 이미 상주를 떠났고 명군이 그곳에 들어갔다고 했다.

송이라는 종의 병은 낫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냇가에 움막을 짓고 저녁에 옮겨 살게 했다.

그러나 집안의 종들이 날마다 두세 차례씩 오가며 문병하고 음식을 가져다주어야 하니 그것도 걱정이다.

저녁에는 안창 장원이 비인의 농촌에서 서울로 올라가다가 이곳에서 묵었다.

역 앞 느티나무 아래서 만나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두 아이도 함께했다.

1593년 6월 14일 (계사년 음력 5월 16일)

이른 아침 사람을 보내 송이라는 종의 병을 물었다.

여전히 몹시 아프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고 한다.

병든 지 벌써 이레다. 걱정스럽다.

저녁에 금손이 왔다.

결성에서 도망한 역역 담당자의 논밭을 입안으로 내주는 문서를 가져왔다.

고을 좌수와 유위장이 상의해 내준 것이라고 한다.

논은 볍씨 세 석을 뿌릴 만큼이고 밭은 닷새갈이 정도라고 한다.

좌수에게는 내 새 갓 하나를 선물로 보냈다.

이 논밭을 얻고 이어 주변 땅까지 더 살 수 있다면 윤겸이 늙어 돌아가 살 곳이 될 것이다.

기쁘다.

1593년 6월 15일 (계사년 음력 5월 17일)

아침을 먹은 뒤 구성수가 찾아왔다.

함께 역 앞 느티나무 아래로 걸어가 김덕민과 두 아이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 김상관도 왔다.

조금 뒤 사포 숙부와 김찬선 형이 계당으로 와 나를 불렀다.

나와 윤겸, 김상관이 급히 갔다.

그곳에는 다음 사람들이 모였다.

  • 이광축
  • 이광복
  • 김형윤
  • 장응명
  • 윤민헌
  • 사포 숙부의 두 손자
  • 이광복의 두 아들

먼저 사람을 보내 아래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게 했다.

각자 점심에 먹을 쌀과 반찬을 가져왔고 이광복의 집에서 밥 짓는 도구를 마련했다.

김상관은 먼저 보령의 피란처로 돌아갔다.

해가 저물도록 고기 잡으러 간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아 모두 배가 고팠다. 결국 먼저 점심을 먹었다.

저녁 무렵에야 물고기를 잡아왔다.

회를 만들어 함께 먹고 종일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왔다.

1593년 6월 16일 (계사년 음력 5월 18일)

오전 나와 윤겸, 김덕민이 나란히 말을 타고 광석에 있는 안지도 사과의 괴정으로 갔다.

나는 가는 길에 단천정의 어머니가 피란해 있는 집에 들렀다가 뒤따라갔다.

안 사과와 안 별감, 최인 부장, 안 참봉, 안세규, 사과의 형 안씨 등이 모였다.

정자를 보니 큰 느티나무 열여 그루가 앞뒤로 늘어서 있었다.

푸른 그늘이 우거져 한여름 불볕더위에도 솜옷을 겹쳐 입어도 더위를 느끼지 않을 정도였다.

앞으로는 큰 들이 펼쳐졌고 냇물이 정자 아래를 휘감아 흘렀다. 정말 뛰어난 경치였다.

조금 뒤 주인이 우리를 별채로 데려갔다.

집은 매우 깨끗하고 단청이 빛났다.

서쪽으로 오서산을 바라보니 푸른 산빛이 문을 밀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앞뒤 뜰에는 매화나무가 심겨 있었다.

남쪽 담 밖에는 연못도 있었으나 가뭄으로 물이 말라 아쉬웠다.

주인이 토장을 내놓아 함께 먹었다.

오후에는 김찬선 형과 윤민헌 진사도 왔다.

집주인이 다시 점심을 내놓았는데 순채국이 있었다. 오랫동안 맛보지 못한 음식이라 그런지 아주 맛있었다.

얼마 뒤 조존성 한림이 임금이 머무는 곳에서 명을 받고 내려오다가 역관에 들러 윤겸을 불렀다.

윤겸이 먼저 돌아갔고 나와 김찬선, 윤민헌도 뒤따라갔다.

역 앞 느티나무 아래서 조존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심인제가 예산 수령에, 이귀가 장성 수령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해 질 무렵 조존성은 보령으로 가 늙은 어머니를 보고 이어 전주로 간다고 했다.

왜적이 파헤친 선릉과 정릉을 수리하는 데 필요한 옥책을 사고에서 꺼내 전해 오는 임무라고 한다.

1593년 6월 17일 (계사년 음력 5월 19일)

이른 아침 윤겸이 함열로 떠나려 했으나 출발하려는 순간 말이 아파 그만두었다.

김찬선 형은 내일 서쪽의 임금이 머무는 곳으로 간다고 한다.

늦은 아침 윤겸과 이광복의 행랑으로 가 사포 숙부를 찾아뵈었다.

김찬선 형과 이광축, 장응명, 윤민헌, 김극, 김형윤이 모두 모였다.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다 해가 기울어 돌아왔다.

장응명의 자는 회부다.

장응명도 오늘 어버이를 모시고 영해로 떠난다고 하여 먼저 작별하고 돌아갔다.

저녁에 윤함이 대흥에서 돌아왔다.

1593년 6월 18일 (계사년 음력 5월 20일)

이른 아침 윤겸이 함열로 떠났다.

막정의 짐말을 타고 윤함의 말을 끌고 갔으며 막정과 세만을 데리고 갔다.

어제 저녁 찰방 김가기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윤함과 걸어가 오래 헤어졌던 회포를 풀고 왔다.

그에게서 왜적이 밤에 몰래 달아나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말을 들었다.

명나라 장수들도 이미 조령을 넘어 상주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여송도 뒤따라갔지만 실제로는 왜적의 뒤를 바짝 추격하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잘못 공격했다가 낭패를 볼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명군은 겨우 삼만 명인데 전염병에 걸려 누워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오후에는 윤해가 진위에서 돌아오면서 안손을 붙잡아 데려왔다.

명복도 함께 데려오려 했지만 도중에 발이 아프다고 핑계 대며 뒤처져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이나 내일 돌아오지 않는다면 또다시 달아난 것이다. 괘씸하다.

윤해는 양지에도 가 보았다.

우리 집이 있던 마을에는 집이 하나도 남지 않았고 쑥대만 눈에 가득하며 돌아와 사는 사람도 한 명 없다고 했다.

다만 죽산 사람인 양반 문응신과 평민 김금이동 등 서너 명이 옛터에 돌아와 초막 몇 칸을 겨우 지어 살고 있다고 한다.

논밭도 군데군데 흙을 일으켜 농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목악리에는 절반가량 사람이 돌아와 살며 논밭을 일군 곳도 있다고 한다.

또 송예가 전염병에 걸린 데다 식량까지 떨어져 굶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너무나 애통하다.

송예는 나와 서얼 친족 관계가 있고 평소 매우 가까웠다.

곡식을 넉넉히 저장해 두었고 논밭도 많이 샀으며 새집까지 지었다.

늦게 아들도 얻어 앞으로 대대로 물려주며 넉넉하게 살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이번 큰 난리를 만나 끝내 굶어 죽고도 구제받지 못했다.

사람의 죽고 사는 것과 화복은 미리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1593년 6월 19일 (계사년 음력 5월 21일)

아침부터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조금 뒤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곧 큰비가 되어 저녁까지 멎지 않았다.

사월 보름 이후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너무 심했다.

물을 끌어들일 수 없는 논은 거북등처럼 갈라졌고 밭도 갈 수 없었다.

모두 비를 간절히 기다렸는데 오늘 큰비가 내렸으니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백성들이 매우 기뻐한다.

1593년 6월 20일 (계사년 음력 5월 22일)

어제부터 시작한 비가 저녁과 밤새도록 멎지 않았고 오늘 아침까지도 개지 않았다.

송이라는 종이 지내는 냇가 움막은 물이 차 거의 잠길 지경이었다.

아침에 춘기를 시켜 높은 언덕으로 옮겨 짓게 했다.

송이의 병은 며칠 사이 조금 나아져 죽과 물을 먹기 시작했고 오늘 아침에는 밥 생각도 난다고 했다.

늦은 아침 뒤 비가 그쳤지만 종일 흐렸다.

찰방 김가기가 순찰사의 급한 부름을 받고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아침을 먹은 뒤 찾아가 보니 이미 사람과 말을 거느리고 충주로 출발한 뒤였다.

명나라 장수가 뜻밖에도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조령을 넘어 충주에 들어왔다고 한다.

여러 고을에서 사람과 말을 대고 접대해야 하는데 갑작스러운 일이라 준비가 미처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반드시 소동이 일어날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되돌아오는지는 알 수 없다.

김덕민을 불러 냇가 언덕의 느티나무 아래에서 불어난 물을 구경했다.

윤함도 뒤따라왔다.

한 끼 정도 머물다가 각자 돌아왔다.

1593년 6월 21일 (계사년 음력 5월 23일)

아침부터 흐렸다.

비가 오기도 하고 개기도 하면서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춘기에게 말을 주어 대흥에 있는 윤함 처가 농막으로 보내 보리를 가져오게 했다.

요즘 식량과 반찬이 모두 떨어져 급한 일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걱정스럽다.

저녁에는 여자들이 먹을 쌀이 부족해 밀가루 음식 조금만 먹었다.

춘기가 대흥에서 돌아왔지만 보리 다섯 말밖에 가져오지 못했다.

처가 종 애운이 부역에 써야 한다고 핑계 대며 더 주지 않았다고 한다.

괘씸하다.

밤에 명복이 돌아왔다.

1593년 6월 22일 (계사년 음력 5월 24일)

종일 흐렸다.

오후에 역 앞 느티나무 그늘로 걸어가 김덕민을 불러 쭈그리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뒤 김포 수령 정엽이 서울에서 내려오다가 윤겸을 찾아 들렀으나 윤겸이 없어 그냥 갔다.

신대의 이씨 두 집에 보리를 빌리려 했지만 아직 거두어 타작하지 않았다며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역졸 집에서 세 말을 빌려왔다.

이달 초와 비교하면 구걸하러 다니는 사람이 조금 줄었다.

아마 떠돌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고 보리가 이미 익어 먹을 길이 조금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1593년 6월 23일 (계사년 음력 5월 25일)

춘기에게 베를 들려 홍주 장으로 보내 보리와 모시로 바꾸게 했으나 값이 맞지 않아 빈손으로 돌아왔다.

윤해는 한 식경쯤 떨어진 곳에 사는 동갑 친구 최여해를 만나러 갔지만 마침 그가 집에 없어 헛걸음하고 돌아왔다.

저녁에 진위에서 사람이 와 몽이가 이십이일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전했다.

걱정스럽다.

오늘은 어머니 생신이다.

처음에는 이 날 전에 돌아가 어머니를 뵈려 했다.

그러나 사람과 말이 부족할 뿐 아니라 일도 너무 많아 갈 겨를이 없었다.

또 큰 병을 앓은 뒤라 두 다리에 힘이 없어 걷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요즘 다시 남쪽으로 거처를 옮긴 뒤 어머니를 찾아뵐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무더위가 심하고 장맛비까지 이러하니 그것도 확실히 할 수 없다.

1593년 6월 24일 (계사년 음력 5월 26일)

새벽부터 비가 내려 종일 멎지 않았다.

춘기를 정산의 가지 집으로 보내 맡겨 둔 식량을 싣고 오게 했다.

요즘 먹을 것과 반찬이 완전히 떨어져 걱정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어제 이익빈 생원이 벼 네 말을 보내 주었다.

많은 돈을 얻은 것처럼 기뻤다.

며칠 굶는 일은 면할 수 있겠다.

1593년 6월 25일 (계사년 음력 5월 27일)

어제부터 저녁과 밤새 비가 조금도 멎지 않았다.

문 앞 냇물이 크게 불어 사람이 건널 수 없었다.

강춘이 송이의 밥을 들고 갔다가 냇가에서 건너지 못하고 돌아왔다.

진위에서 온 사람에게 다시 밥을 들려 보냈고 그가 물을 건너 송이에게 전해 주었다.

아침에 먹을 양식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찰방 집에서 쌀 세 되를 빌려 먹었다.

저녁밥은 춘기가 돌아와야 지을 수 있다.

물이 너무 불어 춘기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온 식구가 굶을 판이다.

저녁이 되어 춘기가 돌아왔다.

가져온 것은 다음과 같다.

  • 흰쌀 다섯 말
  • 보리쌀 두 말
  • 벼 한 석

이곳 말로 다시 재니 벼는 열세 말이었다.

그가 돌아온 뒤에야 저녁밥을 지어 먹었다.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씨로 쓸 콩 두 말과 다른 콩 두 말도 싣고 왔다.

윤겸이 결성에서 새로 입안 받은 땅에 심으려는 것이다.

1593년 6월 26일 (계사년 음력 5월 28일)

전에 장에서 베를 사 두었다가 이때 보리와 바꾸어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베 값이 크게 떨어져 좋은 베 한 필로 보리 열두세 말밖에 살 수 없다고 한다.

전에 세웠던 계획이 모두 허사가 되었다.

여름을 넘기기가 너무 어렵다.

온 집안의 걱정을 어찌 말하겠는가.

1593년 6월 27일 (계사년 음력 5월 29일)

새벽에 죽전동 삼촌의 기일 제사를 지냈다.

어제 저녁부터 큰비가 다시 내려 밤새 멎지 않았고 오늘도 조금도 갤 기색이 없다.

냇물과 못이 모두 넘쳐 사람이 건널 수 없다.

송이에게 아침밥을 보내려고 춘기에게 들려 보냈지만 그 역시 건너지 못했다.

냇가까지 가서 밥을 건너편으로 던지니 송이가 나와 주워 갔다.

춘기와 안손 등을 오늘 내보낼 생각이었으나 비가 이처럼 심해 아직 떠나지 못했다.

식량과 반찬은 모두 다 떨어졌다.

굶주릴 일이 눈앞에 닥쳤다.

온 식구의 답답함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윤겸이 떠난 지 열흘이 넘었는데 아무 소식이 없다.

장맛비 때문에 큰 강과 늪을 건너기 어려워 오래 돌아오지 못하는 듯하다.

걱정스럽다.

저녁에 비가 조금 개었다.

뒤 언덕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앞뒤 두 냇물이 합쳐져 큰 들을 뒤덮었다.

눈이 닿는 곳 끝까지 물바다였다.

냇가 곡식은 흙과 모래에 많이 묻혔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다.

윤겸의 목화밭도 물바다 가운데 잠겼다. 더욱 아깝다.

1593년 6월 28일 (계사년 음력 5월 30일)

어젯밤부터 남풍이 크게 불어 오늘 아침까지 멎지 않았다.

검은 구름이 북쪽으로 달리는 것을 보니 큰비가 올 징조 같다.

먹을 것을 얻을 길은 있어도 큰물이 길을 막아 사람과 말이 오갈 수 없다.

굶주림이 아침저녁으로 닥쳤으니 너무나 답답하다.

아침에는 온 식구가 콩죽을 끓여 먹었다.

나는 본래 죽을 좋아하지 않아 혼자 밥을 지어 먹었다.

한낮에 함열에서 윤겸의 편지가 왔다.

흰쌀 한 말과 조기 한 묶음을 함께 보냈다. 함열 수령 신응구가 준 것이다.

윤겸은 오늘이나 내일 돌아올 듯했지만 오지 않는 것을 보니 물길에 막힌 모양이다.

또 편지를 가져온 사람에게 들으니 함열 수령은 명군 접대 때문에 막 떠나려던 참에 윤겸과 만났고, 잠시 이야기한 뒤 윤겸에게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윤겸이 빨리 돌아오지는 못하겠다.

무료하여 역 앞까지 걸어가 김덕민을 불러 이야기했다.

찰방은 검찰사 이산보를 모시고 공주에 도착했다고 한다.

검찰사가 세 도를 살피는 임무를 맡았다고 하지만 자세한 것은 모른다.

명나라 장수들은 아직 충주에 있다고 한다. 아마 비와 큰물 때문에 오래 머무는 듯하다.

오늘 비가 올 징조가 있었지만 끝내 오지는 않았다.

1593년 6월 29일 (계사년 음력 6월 1일)

아침을 먹고 이광복의 행랑에서 사포 숙부를 뵈었다.

집주인과 이광축, 윤민헌, 이구령, 김극, 이익빈 등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젊은이들은 운자를 정해 시를 지으며 누가 더 잘하는지 겨루고 웃고 놀았다.

오후에는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큰 냇가에 있는 이 첨사 집 둔전 논을 보았다.

이미 세 번이나 김을 맨 논이었는데 그저께 큰비에 앞 언덕이 무너져 모래와 자갈에 완전히 묻혔다.

그 자리가 아예 큰 냇물이 되어 버렸으니 가을 수확은 기대할 수 없다. 안타깝다.

춘기를 청양 장에 보내 베 한 필을 보리 열 말과 바꾸어 오게 했다.

다시 재 보니 아홉 말밖에 되지 않았다.

또 좋은 베 한 필을 모시 서른다섯 자와 바꾸었는데 보리 한 말까지 더 주었다고 한다.

보리 값이 이처럼 비싸진 적이 없다.

먹을 것을 이을 다른 길이 없고 집주인은 또 집을 비워 달라고 재촉한다.

사람의 곤궁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살아갈 일이 한탄스럽다.

1593년 6월 30일 (계사년 음력 6월 2일)

안손을 진위로 보내 몽이의 안부를 묻게 했다.

아침을 먹은 뒤 윤해는 처남 최희선을 만나려고 홍주 적동리로 갔다.

오후에는 윤겸이 돌아왔다.

함열에서 비 때문에 사흘 머물렀고, 돌아오다 임천의 조희보 한림 집에 이르러 또 큰물에 막혀 이틀을 더 머물렀다고 한다.

전에 정산에서 얻은 집으로 옮길 생각이었지만 윤겸이 직접 보니 집이 낡고 허물어진 데다 이웃에 전염병 환자가 한창 앓고 있어 갈 수 없었다.

또 임천 조존성 한림의 이웃집을 하나 구했지만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손질하지 않았고 마루도 없다고 한다.

그래도 더 갈 데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들어갈 생각이다.

열흘이 되기 전에 떠나기로 했다.

함열 수령 신응구가 윤겸에게 보낸 물품은 다음과 같다.

  • 쌀 일곱 말
  • 벼 아홉 말
  • 감장 두 말
  • 조기 세 묶음
  • 갈어 네 마리
  • 웅어젓 두 동이
  • 새우젓 한 항아리
  • 남자 신 한 켤레
  • 여자 신 한 켤레

윤겸이 모두 가져왔다.

남자 신은 내가 신기로 하고 여자 신은 임씨 어머니에게 주었다.

마침 식량과 반찬이 끊겨 온 집안이 걱정하던 때라 이 물건으로 닷새나 엿새는 목숨을 이어갈 수 있겠다.

1593년 7월

1593년 7월 1일 (계사년 음력 6월 3일)

어제 오후부터 동남풍이 크게 불어 밤까지 멎지 않았다.

바람이 그치자 비가 오기 시작했고 오늘 아침에는 물을 퍼붓듯 쏟아졌다.

늦은 아침이 지나서야 조금 그쳤고 오후에 안개가 걷혔다.

윤해가 돌아왔다.

1593년 7월 2일 (계사년 음력 6월 4일)

밤부터 비가 내려 오늘까지 개지 않았다.

열흘 무렵 임천으로 거처를 옮기려 했는데 장맛비가 이러하다.

큰물이 불어나 사람이 다닐 수 없을 뿐 아니라 길도 매우 험하다고 한다.

지금 떠날 형편이 아니다.

가진 식량도 거의 다 떨어졌다.

이 사정을 말로 다하기 어렵다.

1593년 7월 3일 (계사년 음력 6월 5일)

새벽부터 비가 왔다.

종들을 여러 곳에 보내야 하는데 비 때문에 모두 집에 모여 있어 먹일 것이 더욱 어렵다.

임천으로 떠나는 일도 비 때문에 계속 늦어지니 답답하다.

어제 최진운이 거친 벼 열 말을 사람을 시켜 보내 주었다.

다시 재 보니 일곱 말 여덟 되밖에 되지 않았다.

짐을 지고 온 사람이 틀림없이 훔쳐먹은 것이다.

진운은 윤해의 처남 최희선이 이름을 고친 것이다.

1593년 7월 4일 (계사년 음력 6월 6일)

밤새 비와 큰바람이 몰아쳤다.

오늘도 갤 기색이 전혀 없다.

고생을 말로 다할 수 없다.

오후에는 조금 그쳤지만 때때로 가는 비가 내렸다.

1593년 7월 5일 (계사년 음력 6월 7일)

어제 저녁부터 다시 비가 내려 밤새 멎지 않았고 아침까지 안개도 걷히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송이를 직산의 아버지 집으로 돌려보냈다.

병이 나은 뒤 오랫동안 냇가 움막에서 지냈는데 이런 장맛비 속에서 견디기 어려우니 집에 가 몸을 추스른 뒤 다시 오겠다고 했다.

이십일 전에 돌아오라고 이르고 보냈다.

요즘 식량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들깻잎을 따 국을 끓이고 죽을 쑤어 온 식구가 나누어 먹으며 지낸다.

나는 본래 죽을 좋아하지 않아 혼자 밥을 지어 단이와 나누어 먹는다.

하지만 두 아들까지 죽을 먹고 있으니 한탄스럽다.

1593년 7월 6일 (계사년 음력 6월 8일)

밤새 바람과 비가 계속되었다.

여러 달째 장맛비가 이어져 개지 않는다.

온 가족이 한집에 모여 꼼짝 못 하고 있으니 먹을 것이 막혀 굶주림이 심하다.

걱정을 말할 수 없다.

춘기를 대흥으로 보내 전에 받아온 보리 환곡을 줄여 달라고 하려 했다.

하지만 문지기의 금지가 너무 엄해 청원서를 올리지 못하고 저녁에 빈손으로 돌아왔다.

조존성 한림이 역에 도착해 묵었다.

사람을 보내 나를 찾기에 곧 나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조존성이 말했다.

“국사를 정읍 내장산 절에 옮겨 두었습니다. 그 절에서 옥책을 베껴 가지고 오는 길인데 큰물에 막혀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적은 아직 영남 창원 아래 여러 고을의 들판을 가득 메운 채 진을 치고 있다고 한다.

이여송 제독도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영남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그 사정은 아직 자세히 알 수 없다.

왜적이 오래 머물며 여러 고을을 노략질해 그 속셈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뒤쫓아 공격하려는 것인가.

지난달 하순부터 동남풍이 계속 불어 지금까지 멎지 않는다.

왜적 역시 이 바람 때문에 바다를 건너지 못할 것이다.

또 전주에 있던 임금의 어진을 국사를 보관한 절로 옮겨 모셨다고 한다.

처음 왜적이 전주를 침범했을 때 너무 급하게 철수하느라 면류관 장식과 두루마리 축까지 말아 한데 묶고 기름 먹인 자리로 싸서 국사와 함께 옮겼다고 한다.

참으로 불길하고 참담하다.

신중한 유생 두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한다고 한다.

1593년 7월 7일 (계사년 음력 6월 9일)

어제부터 동남풍이 계속 불었고 밤에도 그치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는 더욱 거세게 불었다.

비도 때때로 조금 내렸다.

조존성 한림은 이른 아침 서울로 올라갔다.

춘기도 그의 일행과 함께 대흥으로 보냈다.

조존성이 대흥 수령 신괄에게 말을 전해 주어 보리 환곡을 줄여 주고 콩 세 말까지 더 주었다.

그래서 애운에게 맡겨 두었던 보리 열일곱 말을 모두 싣고 왔다.

전에 환곡을 갚으려고 윤함의 처가에서 보리를 미리 준비해 놓았는데 환곡을 줄여 주었다는 말을 듣고 도로 가져온 것이다.

식량이 떨어져 걱정하던 때 뜻밖의 곡식을 얻었으니 며칠 굶을 걱정은 면하겠다. 기쁘다.

저녁에는 찰방 김가기가 역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세 아이와 함께 찾아갔다.

오래 만나지 못하다 다시 만나 서로 무척 반가워했다.

오후부터 바람이 그치고 비가 개면서 마침내 푸른 하늘과 해를 보았다.

찰방에게 들으니 이여송이 서울로 올라간 뒤 이여백이 내려와 충주에 머물다가 지금 다시 북쪽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왜 오가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왜적이 창원 이남 여러 고을에 아직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동래와 부산, 웅천 등에 조금 남았을 뿐 나머지는 거의 모두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우리나라 장수들은 양산으로 나아가 진을 쳤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우리 장수들이 왜적이 어디에 남아 있는지 제대로 정찰하여 여러 고을에 알리지 않으니 조정조차 사정을 모른다고 한다.

한탄스럽다.

단이는 어제 학질이 떨어졌는데 오늘 또 앓았다.

하루 걸러 오는 학질로 바뀐 모양이다. 걱정스럽다.

1593년 7월 8일 (계사년 음력 6월 10일)

아침을 먹은 뒤 세 아이와 찰방을 찾아갔다.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고 찰방이 점심을 마련해 주었다.

반찬으로 찐 닭과 오이구이가 있었다.

평소라면 귀한 음식도 아니겠지만 피란 중에는 보리밥조차 잇기 어려운 형편이다.

반찬을 바라기나 하겠는가.

오랫동안 이런 음식을 먹지 못하다 보니 팔진미를 마주한 듯했다.

내 처지가 한탄스럽다.

병든 단이에게도 나누어 보냈다.

자리에 함께한 사람은 찰방과 아들 김덕민, 내 세 아들, 정계무였다.

정계무는 정지연 정승의 서자다.

윤겸은 김덕민과 활을 쐈다.

저녁 무렵 돌아왔다.

또 명나라 안에서도 세 곳에 변란이 일어나 이여송에게 급히 군사를 돌리라는 명령이 내려왔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만일 사실이라면 왜적은 아직 영남에 남아 바다를 건너지 않았고 여러 고을의 남은 백성을 불태우고 죽이고 있는데 명군이 갑자기 돌아가게 된다.

왜적이 그 소식을 듣고 다시 북쪽으로 길게 밀고 올라올까 걱정스럽다.

1593년 7월 9일 (계사년 음력 6월 11일)

찰방이 공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이른 아침 세 아이와 찾아가 작별했다.

찰방은 그 길로 검찰사 이산보를 모시고 여러 고을을 순행하느라 오래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우리도 보름이 지나면 임천으로 옮길 생각이므로 이제 다시 만나기 어려울 듯하다.

헤어지는 자리에서 서로 섭섭한 마음이 컸다.

나는 삼월부터 이곳에 오래 머물렀다.

찰방이 역에 있을 때는 거의 날마다 서로 찾아갔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서로 도왔다.

찰방은 성운곡의 양자로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며 집안의 좋은 기풍을 지녔다.

그 아들 김덕민도 범상한 사람이 아니어서 집안을 잘 이을 만하다. 좋은 아들과 좋은 손자를 둔 집안이라 할 수 있겠다.

찰방은 떠나면서 내게 우장을 주었다.

아침을 먹은 뒤 세 아이와 김덕민과 함께 계당으로 갔다.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잡게 하고 나는 혼자 사포 숙부를 찾아뵌 뒤 돌아왔다.

1593년 7월 10일 (계사년 음력 6월 12일)

찰방의 아내가 우리 집 여자들과 윤겸의 아내를 초대했다.

아침을 먹고 모두 갔다가 점심을 먹고 돌아왔다.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며 매우 정성스럽게 대했다고 한다. 떡까지 만들어 내놓았다고 한다.

저녁에는 세 가지 젓갈도 보내 주었다.

나는 혼자 계당으로 가 종 명복에게 그물을 쳐 물고기를 잡게 하고 말을 풀밭에 놓아먹였다.

종일 누워 쉬며 여름의 답답함을 조금 달랬다.

날씨가 너무 더워 찌는 듯 견디기 어려웠는데 높은 집에서 바람을 쐬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녁에 막정이 임천에서 돌아왔다.

1593년 7월 11일 (계사년 음력 6월 13일)

윤겸은 명복과 말을 데리고 결성으로 돌아가다가 오 리도 채 못 가 말이 달아나 짐이 뒤집혔다.

짐이 모두 젖어 어쩔 수 없이 돌아왔다.

세만만 먼저 보냈다.

아침을 먹고 세 아이와 계당으로 더위를 피하러 갔다.

전 언양 수령 박제선이 먼저 와 말을 먹이고 있었다.

서로 인사하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제선이 가지고 온 점심도 함께 나누어 먹었다.

얼마 뒤 윤민헌 진사와 김극, 김정생 생원이 뒤따라왔다.

박제선은 또 소주와 안주를 꺼냈다.

김찬선 형에게 술을 대접하려고 가져온 것이었는데 김찬선은 마침 서울로 올라가고 없었다.

그래서 자리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박제선과 김찬선은 젊었을 때부터 친구였다.

김정생은 윤겸과 동갑 친구이고 홍주에 사는 사람이다.

1593년 7월 12일 (계사년 음력 6월 14일)

아침을 먹은 뒤 김덕민의 말을 빌려 타고 사포 숙부를 찾아뵌 뒤 돌아왔다.

오후에 김덕민이 집에서 잡은 노루고기를 보내 주었다.

썩 좋은 고기는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고기를 먹지 못한 터라 맛있게 먹었다. 기쁘다.

해 질 무렵 김덕민이 찾아왔다가 갔다.

내일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므로 작별하러 온 것이다.

또 명나라 장수가 포수 육천 명을 거느리고 호남으로 갈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오늘이나 내일 공주에 도착하고 대군도 뒤따른다고 한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왜적이 호남으로 들어오려 하므로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 길을 따라 전주와 남원으로 가서 운봉 팔량치를 넘어 영남 진주로 들어가 왜적을 공격하려는 것인가.

왜적이 떠났는지 남아 있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이른 아침 윤해와 윤함은 먼저 부여로 보냈다.

뒤에 우리가 떠날 때 사람과 말이 모자라므로 부여에서 기다리게 하려는 것이다.

부여 수령 박동도는 가까운 친구라 먹을 것을 구하기가 편하다.

막정도 잡다한 물건 한 바리를 싣고 함께 갔다.

1593년 7월 13일 (계사년 음력 6월 15일)

어제 저녁 아내와 이현 형수가 사포 숙모를 찾아뵈러 갔다가 오늘 새벽 돌아왔다.

머지않아 우리가 임천으로 옮긴다고 하여 숙모께서 억지로라도 오라며 사람을 보내고 종과 말까지 보내 주셨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찰방의 아내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세만도 결성에서 돌아왔다.

좋은 베 한 필을 보리 열다섯 말과 바꾸어 왔다.

저녁에는 막정과 춘기가 부여에서 돌아왔다.

조도어사 이철이 마침 부여에 와 있었다.

윤해와 윤함이 찾아뵈었더니 매우 반갑게 맞으며 각각 쌀 일곱 말과 감장 한 말씩을 주었다.

여행 식량이 떨어져 죽조차 잇기 어려워 온 집안이 걱정하던 때 뜻밖의 물건을 얻었으니 기쁘기 그지없다.

쌀 네 말은 가지고 왔고 열 말은 부여에 맡겨 두었다고 한다.

다만 내일 떠나려 해도 말 두 필이 모자라 온 가족이 함께 갈 수 없다. 걱정스럽다.

1593년 7월 14일 (계사년 음력 6월 16일)

아침을 먹고 사포 숙부를 찾아뵌 뒤 작별하고 돌아왔다.

숙부도 몹시 섭섭해하셨다.

이광축과 이광복, 윤민헌도 와서 모였다.

이은신 좌수를 불러 만나니 물말이밥을 대접했다.

이익빈의 집에도 두 번 찾아갔는데 마침 집에 없어 만나 작별하지 못했다. 아쉽다.

돌아오니 광석에 사는 안지도 사과가 박효제 생원과 안세규를 보내 나를 찾아왔으나 내가 없어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아쉽고 또 아쉽다.

저녁에는 이익빈이 찾아왔다가 갔다.

짐을 꾸렸지만 말 두 필을 구하지 못해 걱정하던 중 사포 숙부 집의 소와 이익빈의 소를 빌릴 수 있었다.

이제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함께 갈 수 있으니 기쁘다.

1593년 7월 15일 (계사년 음력 6월 17일)

닭이 울 무렵 출발했다.

청양 대치 아래 길가 솔그늘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윤겸은 먼저 정산으로 갔고 우리는 뒤따라갔다.

간신히 고개를 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세 차례나 쏟아졌다.

온 식구의 옷이 다 젖었다.

딸아이의 새 치마도 진흙투성이가 되어 둘째 딸이 계속 울었다.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정산현에 들어갔다.

수령 김장생은 윤겸의 오랜 친구로 우리를 매우 후하게 대했다.

스무 명이 넘는 일행 모두에게 한 되씩 먹을 것을 내주었다.

젖은 옷은 숯불을 구해 다림질하고 말렸다.

저녁에는 김장생이 소주를 권했다.

나는 더위를 먹어 배가 아팠는데 잇달아 석 잔을 마시자 복통이 조금 나았다. 다행이다.

오늘은 초복이다.

더위가 평소보다 갑절이나 심하다.

1593년 7월 16일 (계사년 음력 6월 18일)

흐리고 빗방울이 조금 내렸다.

정산 수령 김장생이 다음을 주었다.

  • 흰쌀 두 말
  • 보리쌀 두 말
  • 팥 한 말
  • 조기 한 묶음
  • 감장 한 말

여행 식량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매우 고맙다.

늦은 아침 비가 개어 길을 떠났다.

왕진 북쪽 가지 아버지 유령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곽란에 걸려 토하고 설사했다.

조금 나아지기를 기다렸다가 왕진을 건넜다.

정 사과 집 피란처에 들렀는데 아내와 작은딸은 거기에 묵기로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말을 달려 부여현에 도착했다. 이미 날이 저물었다.

마침 수령 박동도가 오늘 낮 공주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일행 모두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1593년 7월 17일 (계사년 음력 6월 19일)

이른 아침 세만에게 소 두 마리를 끌고 홍주로 돌아가게 했다.

소 등에 상처가 생겨 안타깝다.

우리 일행은 모두 장마철 더위에 지쳐 더위를 먹고 배가 아픈 사람이 많았다.

어쩔 수 없이 하루 더 머물렀다.

새벽에 윤해는 자기 어머니를 모셔오기 위해 정 사과 집으로 갔다.

조금 뒤 정 사과의 아내와 함께 도착하여 삼가댁이 피란해 있는 옛집으로 곧장 갔다.

나는 아침을 먹고 수령을 관아에서 만났다.

배 한 척을 빌려 아내와 자식들이 내일 배를 타고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게 했다.

또 다음을 청해 받았다.

  • 쌀 두 말
  • 조기 두 묶음
  • 감장 한 되
  • 젓갈 한 되
  • 간장 한 되
  • 소금

나는 먼저 임천으로 갔다. 조도어사 이철을 만나려는 것이다.

임천에 도착하니 운량어사 강첨도 고을에 와 있다고 했다.

나는 빈 관문 밖 민가에 물러나 종을 먼저 보내 이름을 알리게 했다.

이철이 곧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조금 뒤 다시 나를 불러들였다.

이철과 강첨은 낙산루에 올라 활을 쏘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 인사하고 함께 앉았다.

자리에는 금성정과 파계수, 한산 수령 신경행, 이철의 사촌 형 양사원이 있었다.

금성정은 내 아내와 사촌 관계다.

피란해 와 한산에 있다가 여기서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파계수는 금성정의 맏형으로 양성정의 막내아들이다.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첨은 먼저 숙소로 돌아갔다.

우리는 누각에서 내려와 낙수헌에 다시 앉았다.

윤시남 진사도 왔다.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나는 양사원과 윤시남과 함께 이철이 머무는 윗방에서 잤다.

낙수헌은 동헌 북쪽 연못가에 세운 건물이었다.

물을 끌어 연못으로 흘려보내고 연꽃을 심었다.

늦여름이라 연꽃이 한창 피어 바람이 불 때마다 향기가 집 안에 가득했다.

동북쪽 담 아래에는 대나무가 한 묶음처럼 서 있었고 푸른 잎이 땅을 덮었다.

대숲 사이에는 매화나무 두 그루와 왜철쭉 다섯 그루도 있었다.

참으로 좋은 곳이다.

1593년 7월 18일 (계사년 음력 6월 20일)

이른 아침 이철과 우리 일행은 다시 낙수헌에 앉아 함께 밥을 먹었다.

관에서 연포를 마련해 주었다.

이철은 나와 금성정, 파계수, 양사원, 윤시남에게 각각 쌀 두 말씩 주었다.

우리 집은 식구가 많으므로 죽은 아우의 아내와 네 아이 이름도 함께 올려 두 말씩 더 받았다.

모두 여섯 사람 이름으로 열두 말을 받은 셈이다. 기쁘다.

또 부여현에서 보리 스무 말과 소금 다섯 말을 내주도록 공문을 써 주었다.

뒤에 사람을 보내 받아올 생각이다.

한산 수령 신경행은 서울에 있을 때 조경수의 집에서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다.

오늘 만났는데 서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숙소로 돌아간 뒤 금성정에게 물어보고서야 나인 줄 알았다고 한다.

곧 사람을 보내 문안했다.

나도 이철을 통해 빈 섬을 구해 달라고 했더니 한산에서 다음을 보내 주었다.

  • 빈 섬 이백 장
  • 좋은 벼 열 말
  • 조기 두 묶음
  • 장어 열 마리
  • 청어 다섯 마리

몹시 기쁘다.

신경행은 윤겸과도 매우 가까운 사이다.

아침을 먹은 뒤 운량어사 강첨이 찾아와 이철에게 다시 누각에 올라 활을 쏘자고 했다.

우리도 따라 올라가 구경했다.

관에서 노루고기를 내놓았다.

해 질 무렵 임금이 머무는 곳에서 사람이 비변사의 공문을 가지고 왔다.

읽어 보니 이철이 물자를 조달하는 일을 잘못했다는 이유로 교체되고 강첨이 대신 맡게 되었다.

이철은 큰 짐을 벗은 듯 홀가분해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아 뜻밖의 교체가 몹시 아쉬웠다.

곧 누각에서 내려와 다시 낙수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1593년 7월 19일 (계사년 음력 6월 21일)

이른 아침 아내와 자식들이 어제 오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다.

아침을 먹고 이철과 작별하여 고을 동쪽 십여 리쯤 떨어진 우리가 옮겨 살 집으로 달려갔다.

소직의 빈집이었다.

집은 제법 넓었지만 좁은 곳도 있어 종들이 살 곳이 없고 잡다한 물건을 쌓아 둘 공간도 없다.

이웃집도 모두 멀리 떨어져 있고 소씨 집만 가까이 있는 것이 아쉽다.

작은 지명은 소지동이고 큰 지명은 수다동이라고 한다.

막정과 명복에게 말 두 필을 끌고 가게 하고 이곳에서 마련한 소와 말 네 필도 함께 데려가 물가에서 아내와 자식들이 오기를 기다리게 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온 가족이 들어왔다.

집주인이 저녁을 차려 주었다. 미안한 일이다.

부여 수령 박동도는 쌀 여덟 말과 반찬을 보내 주었다. 매우 고맙다.

말이 부족해 짐을 한꺼번에 옮기지 못했으므로 윤해는 배 위에서 짐을 지키며 잤다.

또 영남에 남은 왜적이 곧장 전라도로 향해 지금 함양까지 왔다는 말을 들었다.

호남 사람들이 동요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소직이 종들을 데리고 물고기를 잡아 한 사발을 얻었다.

회를 만들어 먹고 추로주 한 사발도 마셨다.

1593년 7월 20일 (계사년 음력 6월 22일)

윤해가 들어왔다.

부여에서 받은 백어젓을 배 안에서 잃어버렸다고 한다. 아깝다.

종일 소씨 집에서 편히 쉬었다.

찜통 같은 더위 속에서 답답했던 마음을 조금 풀 수 있었다.

1593년 7월 21일 (계사년 음력 6월 23일)

날이 밝기 전에 막정을 한산으로 보냈다.

전에 내주기로 한 물품을 받아오게 하기 위해서다.

주인집의 종과 말도 함께 빌려 보냈다.

아침에는 명복을 풀 베러 보냈다.

그런데 곧바로 명령을 따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친 말까지 많이 하기에 발바닥을 때렸다.

소직은 종들과 물고기를 잡았다.

저녁에 소직과 밥을 지어 물고기를 함께 끓여 먹었다.

막정은 한산에서 돌아왔다.

약속한 물건은 받아왔으나 빈 섬은 저장된 것이 없어 가져오지 못했다.

또 조희보 한림이 쌀 한 말 다섯 되와 반찬을 보내 주었다. 고맙고 또 고맙다.

이웃에 사는 유선각 공도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윤겸은 활을 쏘다 화살이 시위를 스치며 벗어나 오른쪽 눈을 때렸다.

위태로운 일이었다.

1593년 7월 22일 (계사년 음력 6월 24일)

가지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조희보 한림이 여종을 보내 안부를 묻고 생선구이와 생선국도 보냈다.

윤겸과 매우 가까운 사이여서 이렇게 정성껏 대하는 것이다.

소나무 처마를 만들고 싶었지만 긴 나무를 구하지 못했다.

소직이 종과 말 세 바리를 데리고 유선각의 산에서 소나무를 베어 왔다.

1593년 7월 23일 (계사년 음력 6월 25일)

아침에 조희보 한림이 떡과 생선구이, 고깃국을 보내왔다.

큰 제사를 지내고 남은 음식이었다.

춘기를 부여로 보냈다.

이철이 주기로 한 물건을 받아오게 한 것이다.

저녁에 춘기가 보리 스무 말과 소금 두 말을 싣고 돌아왔다.

함열에서도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다음을 보냈다.

  • 흰쌀 두 말
  • 소금
  • 웅어 두 동이
  • 진어 네 마리
  • 백새우젓 세 되

매우 고맙다.

한겸 진사가 찾아왔다가 갔다.

1593년 7월 24일 (계사년 음력 6월 26일)

날이 밝기 전에 소직이 종들을 데리고 소나무 처마를 만들었다.

늦은 아침 윤해는 함열로 갔다.

함열 수령이 어제 편지로 불렀기 때문이다.

윤겸은 몸이 좋지 않아 함께 가지 못했고 소직이 따라갔다.

아침에 조희보 한림이 생선구이와 고깃국, 닭국을 보내왔다.

계속 좋은 음식을 보내 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이뢰 참군이 마침 이 고을 종의 집에 왔다가 우리가 여기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

뜻밖에 만나니 매우 반가웠다.

저녁밥을 먹여 보냈다.

오후부터 비가 내려 저녁을 지나 밤까지 계속되었다.

임시로 지은 집은 비가 새고 종들이 잘 곳도 없어 이리저리 허둥대며 편히 쉬지 못했다. 한탄스럽다.

여종 동을비는 이곳에 온 날부터 이질에 걸려 지금까지 조금도 낫지 않았다.

누운 채 설사를 하고 기력이 다 빠져 위태롭다. 아마 다시 일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걱정스럽다.

조정호 진사도 찾아왔다가 갔다.

조정호는 윤함과 젊을 때부터 아주 가까운 친구다.

고산에 피란해 와 있다고 한다.

점심을 먹여 돌려보냈다.

1593년 7월 25일 (계사년 음력 6월 27일)

흐리고 바람이 불었으며 때때로 빗방울이 내렸다.

윤겸은 눈을 다친 뒤 몸까지 몹시 좋지 않다.

눈동자가 붉고 찌르는 듯 아프다고 한다. 걱정스럽다.

저녁에 세만이 홍주에서 들어왔다.

윤겸의 아내와 자식들은 용곡에서 종 용복의 집으로 옮겼다고 한다.

춘기는 서천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중복이다.

1593년 7월 26일 (계사년 음력 6월 28일)

밤새 바람과 비가 몰아쳤고 아침에는 더욱 심했다.

한낮이 되어서야 개었다.

함열에서 사람을 시켜 숭어 한 마리와 조어 한 마리, 웅어 열 마리를 보내왔다.

아내는 이곳으로 오는 날부터 곽란을 앓아 지금까지 낫지 않아 음식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곧 생선회를 만들고 국도 끓여 함께 먹었다.

물에 담가 살아 있는 채로 가져와 맛이 막 잡은 것처럼 좋았다.

저녁에는 윤해가 함열에서 돌아왔다.

신응구 수령이 보내 준 물품은 다음과 같다.

  • 쌀 열 말
  • 보리 한 석
  • 밀가루 두 말
  • 참깨 한 말
  • 진어 세 마리
  • 여러 젓갈 한 말
  • 감장 두 말
  • 간장 세 되
  • 단 미역 두 동
  • 소금 한 말
  • 잠자리 한 장
  • 말편자 두 벌
  • 찹쌀 다섯 되

이런 때에 매우 두터운 정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처럼 크게 도와줄 수 있겠는가.

깊이 감사한다.

1593년 7월 27일 (계사년 음력 6월 29일)

윤겸이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홍주로 돌아가려 했다.

막정과 안손에게 말 두 필을 끌고 함열로 가 빈 섬을 싣고 오게 했다. 집을 덮는 데 쓰려는 것이다.

또 이런 소식을 들었다.

우리나라 여러 장수가 대군을 거느리고 함안군에 들어가 주둔했다.

그러나 지형이 좋지 않고 많은 군사를 수용하기 어려워 여러 장수는 의령으로 물러나 정진을 지키려고 했다.

전라 순찰사는 한 걸음도 물러나서는 안 된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거제 현령 김준민은 크게 소리쳤다.

“우리나라 일은 늘 글만 아는 사람들이 그르쳐 왔습니다. 형세를 살피지 못하고 융통성 없이 버틴다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고언백도 크게 말하며 반박했다.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왜적이 뜻밖에 갑자기 들이닥쳤다.

아군은 무너져 흩어졌고 왜적은 그 기세를 타고 추격했다.

우리 군사가 많이 죽었다.

왜적은 정진을 건너 의령까지 들어갔다.

의령은 호남과 멀지 않아 호남도 크게 동요했다.

순찰사는 남원으로 달아났고 함안에 있던 무기와 군량은 도리어 왜적의 물자가 되었다고 한다.

한탄스럽다.

또 왜적은 진주로 향하며 날마다 마을을 불태웠다.

진주성 오 리 밖에 셀 수 없이 진을 치고 먼저 조총수 칠십여 명을 성 가까이 보내 공격했다.

성 위에서 수많은 쇠뇌와 화살을 한꺼번에 쏘아 열다섯 명이 맞아 즉시 죽었다.

열 명의 목을 베었고 나머지는 달아났다고 한다.

진주성에는 경상 우병사 최경회, 충청 병사 황진, 창의사 김천일, 건의장 고종후와 여러 의병이 들어가 굳게 지키고 있다.

지형도 험하니 쉽게 함락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또 남평 현감이 대구에서 급히 보낸 보고에 따르면 심유경이 왜인 서른다섯 명과 우리나라 신하 한 명, 황정욱의 가족 다섯 명을 데리고 부산에서 안주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

길에서 필요한 사람과 말을 미리 준비하라는 공문까지 왔다.

그들이 왜 나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두 왕자가 아직 부산에 있다는 말도 있다. 사실인지 모르겠다.

윤겸은 말이 야위어 걷지 못하는 바람에 오 리쯤 가다가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왔다.

춘기도 돌아왔다.

1593년 7월 말 ~ 8월

1593년 7월 28일 (계사년 음력 7월 1일)

윤겸이 비로소 홍주로 돌아갔다.

춘기를 진위로 보냈다.

충이가 천연두를 앓는다고 들어 안부를 알아보게 한 것이다.

안손에게 오미자를 들려 함열로도 보냈다.

함열 수령이 더위를 먹어 오미자를 구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제 깜빡하고 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손이 문을 나서려 할 때 마침 함열에서 온 사람이 오미자를 가지러 와 가져갔다.

오후에는 조희보 한림이 사람을 보내 두 종류의 떡과 과일, 생선과 고기구이, 좋은 음식과 찹쌀술 한 사발을 보내왔다.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먹었다.

타향을 떠도는 형편에 사방을 둘러봐도 친척이나 벗이 없는데 조희보만 유독 이처럼 후하게 대한다.

감사하기 그지없다.

아마 초하루 제사를 지내고 남은 음식일 것이다.

조응록 정랑의 아들도 찾아왔다가 갔다.

이 사람도 피란하여 이곳에 와 살고 있다.

조응록은 지난달 중순 임금이 머무는 곳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저녁에는 종사관 김상용이 서산에 피란해 있는 어머니를 뵙고 호남으로 돌아가다가 이 고을에서 묵었다.

윤겸이 이 근처에 피란해 있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보내 서로 안부를 물었다.

내일 지나가며 들르겠다고 한다.

막정은 임천 장으로 가 쌀 두 말 다섯 되를 주고 아홉 새 모시 마흔 자를 샀다.

또 쌀 한 말을 주고 생모시 두 근 두 냥을 샀다.

곡식이 비싸 좋은 베 한 필 값이 보리 네댓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모시 값도 이렇게 싸졌다.

모시는 인아의 여름옷을 만들려고 산 것이다.

1593년 7월 29일 (계사년 음력 7월 2일)

아내가 어제부터 물설사를 앓아 하루 여덟아홉 차례씩 쏟았다.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고 기력이 몹시 쇠했다.

이질을 고치는 데 쓴다 하여 흰 오골계를 구하려고 안손을 함열로 보냈다.

오후에는 윤함이 직접 유선각의 집으로 가 오골계를 구했으나 없어 누런 닭 한 마리를 얻어왔다.

조방직도 한 마리를 보내 주었다.

조방직은 조경수의 아들이다.

저녁에는 명복이 정산에서 돌아왔다.

강을 건널 때 누군가 베적삼을 두고 간 것을 주워 왔다.

여름 내내 입을 만하니 다행이다.

1593년 7월 30일 (계사년 음력 7월 3일)

오늘은 할머니 기일이다.

난리 뒤 온 집안이 각처로 흩어져 먹고살기조차 어려우니 어느 겨를에 선조를 생각하며 술 한 잔 올리겠는가.

슬프고 한탄스럽다.

저녁에 경여가 익산에서 찾아왔다.

안손도 함열에서 돌아왔다.

함열 수령은 닭 한 마리와 쇠고기포 다섯 줄을 보내 주었다.

또 왜적이 진주를 포위한 지 이레가 되었지만 성안 장수들이 굳게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날마다 촉석루에 올라 음악까지 연주하며 태연한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한다.

순변사와 도원수도 성 밖에 진을 쳐 호응하고 있다.

성 안에는 군량도 많이 쌓여 있어 한 해를 버틸 수 있다고 한다.

명나라 송대빈 지휘와 낙상지 참장도 포수 천여 명을 거느리고 남원에서 곧 팔량치를 넘어올 것이라 한다.

이여송도 대군을 거느리고 내려온다고 한다.

진주는 쉽게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

진주가 굳게 버틴다면 왜적도 그곳을 두고 호남을 침범하지는 못할 것이다.

1593년 7월 31일 (계사년 음력 7월 4일)

경여와 소씨 집에서 종일 바둑을 두며 긴 여름날을 보냈다.

종들에게 그물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게 했다.

저녁에 함께 끓여 먹었다.

몇 달 동안 어머니의 소식을 듣지 못해 밤낮으로 걱정했다.

처음에는 이곳에 온 뒤 곧 찾아뵈려 했으나 일이 많아 가지 못했다.

열흘 뒤쯤 윤함과 함께 돌아가 뵙기로 마음먹었다.

1593년 8월

1593년 8월 1일 (계사년 음력 7월 5일)

아침에 막정에게 윤겸의 편지를 들려 석성으로 보냈다.

석성 수령이 편지를 받아주지 않아 빈손으로 돌아왔다.

종일 소씨 집에서 경여와 바둑을 두었다.

또 진주성이 장맛비로 무너져 왜적이 떼 지어 들이닥쳤다는 말을 들었다.

성벽을 타고 오르려 할 때 성 위에서 천자총통 일곱여덟 문을 한꺼번에 쏘고 돌을 던지고 화살을 퍼부어 왜적이 셀 수 없이 죽거나 다쳤다고 한다.

왜적은 남강에 대나무로 뗏목을 만들어 건너려 했으나 우리 군사가 비처럼 화살을 쏘아대자 놀라 허둥대다 물에 빠져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시체가 강을 가득 메우고 떠내려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왜적의 기세가 크게 꺾여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는 이야기다.

최경회 의병장의 아전이 보낸 보고를 익산에 있는 이탁이 전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1593년 8월 2일 (계사년 음력 7월 6일)

오후에 이탁이 익산에서 뜻밖에 걸어서 찾아왔다.

전라 순찰사가 보낸 통문과 좌의장 임계영의 긴급 보고를 보여 주었다.

그 내용은 진주성 안의 창의사 김천일과 충청 병사 황진을 비롯한 장수들이 유월 이십이일부터 밤낮으로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이십구일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놀랍다.

왜적이 전라도 경계로 들이닥칠 일이 이제 눈앞에 닥쳤다.

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에 호남 사람들이 크게 술렁이며 모두 호서로 옮길 생각을 한다.

우리 가족도 이곳으로 옮겨온 지 스무 날도 지나지 않았는데 또 이런 일을 당했다.

다시 경기 안쪽으로 올라가고 싶어도 식구가 수십 명이라 먹을 것을 구하기가 극히 어렵다.

왜적의 손에 죽지 않더라도 굶어 죽을 것이 분명하다.

걱정스럽고 또 걱정스럽다.

왜적이 팔량치를 넘어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내와 자식들은 다시 북쪽으로 돌려보낼 생각이다.

저녁에는 소직이 함열에서 돌아왔다.

소직은 함열의 술을 좋아해 오래 돌아오지 않았는데, 오늘 집에 오자 아내가 질투하며 큰 소리로 다투었다.

망건과 옷까지 찢어졌다. 우습다.

1593년 8월 3일 (계사년 음력 7월 7일)

이른 아침 윤해가 익산으로 갔다.

김상용을 만나 환곡을 얻어 여행 식량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이탁은 부여로 돌아갔다.

1593년 8월 4일 (계사년 음력 7월 8일)

윤해가 돌아왔다.

익산 수령이 다음을 주었다.

  • 쌀 두 말
  • 보리 두 말
  • 소금 한 말
  • 감장 한 말
  • 조기 두 묶음

후한 마음이 고맙다.

또 진주의 장수 가운데 황진과 김천일, 거제 수령 김준민이 직접 화살과 돌을 맞으며 죽도록 싸우다 총탄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성안 사람들은 모두 학살되었다.

놀랍고 비통하다.

왜적의 선봉은 산음 가까이까지 왔다고 한다.

머지않아 호남으로 들어올 것이다. 걱정스럽다.

또 영남의 왜적 사백여 명이 밀양성 밖에 진을 쳤을 때 독전사 박진과 성주 목사 곽재우 등 여러 장수가 공격 날짜까지 정하고 명나라 장수에게 알렸다고 한다.

그런데 명나라 총병 유정이 박진 등을 불러들여 하루 종일 뜰에 묶어 두고 왜적을 공격하지 못하게 했다.

자기들이 힘을 합쳐 왜적을 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우리 장수들이 공격하는 것까지 막고 모욕했다.

왜적을 돕기라도 하려는 것인지 그 속뜻을 모르겠다.

또 호남으로 내려간 명군이 길가 민가의 재물을 끝없이 빼앗아 왜적이 지나간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전주에 사는 송영구 지평의 집에도 갑자기 들이닥쳐 소를 잡아먹고 귀한 그릇을 모조리 빼앗아 갔다.

송영구의 아내만 간신히 몸을 피해 살아났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이여송 휘하의 요동과 계주 군사들이다.

군졸을 엄하게 단속하지 않아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다.

반면 송 장수와 낙상지 장수의 군사는 털끝 하나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고 명령이 엄하여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이 편안하다고 한다.

절강 군사들이라 한다.

훌륭하고 기특하다.

1593년 8월 5일 (계사년 음력 7월 9일)

춘기와 송이가 돌아왔다.

충이와 몽이가 모두 천연두를 잘 넘기고 있다고 한다.

기쁘다.

아침을 먹고 조희보 한림을 찾아갔다.

그의 두 형 희철과 희식도 있었다.

이웃에 사는 조희윤과 정응창 생원도 와서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인집에서 점심을 대접했다.

조희윤은 어릴 때 이름이 희무였으나 지금 이름을 바꾸었다.

나와 젊을 때 함께 공부했던 친구다.

삼십여 년 동안 만나지 못하다 뜻밖에 오늘 다시 만났는데 서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각자 이름을 말하고서야 비로소 알아보았다.

정응창 생원은 윤겸과 동갑 친구로 이곳에 피란해 와 있다.

막정이 함열에서 왔다.

왜적이 두 갈래로 나뉘어 한쪽은 산음에 들어갔고 한쪽은 지리산으로 향해 호남 가까이 다가온다고 한다.

명나라 장수들은 아직 남원 성 밖 독산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한다.

1593년 8월 6일 (계사년 음력 7월 10일)

홍준 정자가 영남에서 돌아가는 길에 우리가 여기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

홍준도 의병장이다.

영남에 있을 때 진주성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고 산음에 있다가 진주가 함락된 뒤 달아나 돌아왔다.

호서에서는 병사 황진을 비롯해 수령 아홉 명이 죽었다고 한다.

결성, 보령, 남포, 서산, 태안, 강진 등의 수령이 포함되었고 나머지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진주성이 어떻게 함락되었는지는 사람마다 말이 달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밤낮으로 여드레 동안 죽을 힘을 다해 싸웠는데 밖에서는 개미 한 마리만 한 지원조차 없었다.

왜적은 기세가 크게 올라 온 힘을 모아 공격했다.

하늘마저 돕지 않아 열흘 가까이 장맛비가 내렸고 성벽이 무너졌다.

황진과 김준민이 총탄을 맞아 죽자 군사들이 겁을 먹었다.

왜적은 온갖 계책을 써서 반드시 성을 함락시키려 했다.

마침내 풀단을 묶어 성벽만큼 높이 쌓고 총탄을 비처럼 퍼부으며 군사를 몰아 들어왔다.

충청 군사가 먼저 무너졌고 그 때문에 성을 잃었다고 한다.

전에 피란하러 진주성에 들어간 선비들도 모두 학살되었다고 하니 더욱 참혹하다.

최경선은 남원에 있었는데 순찰사가 성을 지키려고 양반들을 억지로 들여보내려 했다.

최경선이 들어가지 않고 머뭇거리자 순찰사가 붙잡아 하루 종일 군중에 돌려 보이며 여러 가지 모욕을 주었다고 한다.

놀랍고 한탄스럽다.

저녁에는 기성군이 뜻밖에 찾아왔다.

부여에 왔다가 우리가 이곳에 피란해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찾아온 것이다.

이 혹독한 더위에 정이 깊지 않다면 어찌 일부러 걸어왔겠는가.

그의 두 아들은 모두 왜적에게 죽었다.

영북에서 떠돌며 온갖 고생을 했다는 말을 들으니 너무나 슬프다.

안손이 돌아왔다.

윤겸은 내일 오려고 한다고 한다.

1593년 8월 7일 (계사년 음력 7월 11일)

기성군은 아침을 먹고 부여로 돌아갔다.

집주인 소씨는 오늘 아버지 기일이었다.

그 형 소은도 와서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아침밥을 아주 잘 차려 우리에게도 내놓았다.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어제 저녁에는 달빛 아래 앞마당에 함께 앉아 주인집의 좋은 술을 마시며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오늘도 이렇게 대접해 주니 미안하기 그지없다.

윤겸이 홍주에서 돌아왔다.

막내아이가 이질로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한 해 사이 딸 둘을 연달아 잃었으니 슬픔이 더욱 크다.

또 결성의 논밭은 값을 주고 사들였다고 한다.

내년부터 이곳에 옮겨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 굶주림은 조금 면할 수 있겠다.

다만 지금 가진 식량과 힘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농사를 지을 힘까지 마련하겠는가.

1593년 8월 8일 (계사년 음력 7월 12일)

조희철 문화현감이 찾아왔다.

신발도 대흥에서 지나가다가 들렀다.

소씨 집에 함께 앉아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신발은 그 길로 익산으로 돌아갔다.

내일 호남으로 떠나기로 하고 짐을 꾸렸다.

지난해에는 가족이 남북으로 흩어져 함께 고생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제 또 형편 때문에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 남쪽으로 간다.

흉악한 왜적이 가까이 오면 아내와 자식들은 북쪽으로 돌아가고, 나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배를 타고 섬으로 피할 것이다.

서로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내와 자식들이 슬픔을 견디지 못한다.

한탄스럽지만 어찌하겠는가.

1593년 8월 9일 (계사년 음력 7월 13일)

아침을 먹고 윤겸과 길을 떠났다.

무수포를 건너 용안을 지나 함열에 들어갔다.

함열 수령 신응구가 곧 동헌으로 불러 차를 내고 소주 석 잔을 권했다.

조금 뒤 물말이밥을 차려 함께 먹었다.

나와 윤겸은 먼저 객청으로 돌아와 쉬었다.

저녁에는 수령이 내려와 함께 저녁밥을 먹었다.

신응구는 여행 물자로 다음을 주었다.

  • 흰쌀 한 말
  • 중간 품질 쌀 한 말 다섯 되
  • 콩 한 말
  • 조기 한 묶음
  • 쇠고기 한 덩이
  • 쇠고기포 다섯 줄
  • 새우젓 한 되
  • 추로주 한 병
  • 감장과 간장

그중 쌀 한 말과 쇠고기포, 조기, 새우젓은 임천의 가족에게 돌려보냈다.

길에서 숙수 영환을 만났다.

떠돌며 굶어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가엾어 쌀 두 되를 주었다.

하루라도 목숨을 잇게 하려는 것이다.

1593년 8월 10일 (계사년 음력 7월 14일)

날이 밝기 전에 밥을 먹었다.

떠나려는 순간 큰비가 내리고 천둥과 번개가 쳤다.

아침 내내 비가 오다가 조금 개자 길을 떠났다.

임피를 지나 전주 땅 신창진가의 누각에 올라 말을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이어 나루를 건넜다.

김제의 동진에는 긴 다리가 있었지만 지난해 여름 큰물에 무너져 배로 사람을 건네고 있었다.

나루를 건너 부안에 있는 정병 박원준의 집에서 묵었다.

그곳에는 원래 수십 가구가 살았으나 대부분 비어 있었고 뜰에는 쑥대만 무성했다.

몇 집만 사람이 남아 있었다.

박원준에게 까닭을 묻자 말했다.

“지난해 난리가 난 뒤 부역이 예전보다 열 배나 많아져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고 모두 달아났습니다. 이곳뿐 아니라 가는 곳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지금은 살고 있지만 가을걷이가 끝나면 흩어질 생각입니다. 잠깐이라도 부역을 피하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너무나 참담했다.

오는 길에 유형 선전관을 만났다.

그가 영암에서 오는 길이라고 하기에 어머니가 평안하신지 물었다.

“지금은 모두 무사합니다. 왜적이 오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생각이라고 합니다.”

유형은 임경흠의 사촌동생이다.

어릴 때 본 적이 있어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는데 그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이름을 말해 주어 알았다.

어제 무수포 가에서는 전라 순찰사의 장계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났다.

왜적 소식을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구례를 불태운 자들은 왜적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군 옷으로 갈아입고 왜말 흉내를 냈습니다. 목책을 지키던 군사가 모두 달아났고 주민들도 놀라 도망가자 그 틈에 재물을 빼앗고 집을 불태웠습니다.

마침 곡성 수령이 도적 대여섯 명을 붙잡아 조사했는데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었습니다.

진주가 함락된 뒤 왜적은 다시 물러났고 명군이 진주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 장계는 호남을 침범한 무리가 왜적이 아니라는 내용을 보고한 것이라고 한다.

길에서 사람들에게 물어도 모두 같은 말을 했다.

정말 왜적이 왔다면 이곳 사람들이 이렇게 태연히 지낼 수 없을 것이다.

산음 가까이 왔다는 왜적도 우리나라 도적이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아직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나라 장수들은 왜적의 위세를 너무 무서워한다.

소문만 들어도 놀라 달아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정찰병을 보내도 그들 역시 겁이 나 적진까지 가 보지도 않고 중간에서 돌아와 거짓 보고를 한다.

그러니 관청의 공식 보고조차 허황된 것이 많다.

참으로 한탄스럽다.

1593년 8월 11일 (계사년 음력 7월 15일)

날이 밝자 길을 떠났다.

고부군 앞을 지나 십 리쯤 가다가 시냇가 다리 밑에서 말을 먹이고 아침을 먹었다.

볕이 너무 뜨거워 견디기 어려웠다.

나무를 베어 임시 그늘을 만들어 앉았다.

임피에서 고부까지 길 좌우의 농사를 살펴보니 들판 절반 이상이 묵어 있었다.

경작한 곳도 김을 매지 않은 곳이 많았다.

김을 맨 곳도 곡식 싹이 몇 치밖에 자라지 못했다.

천 리 기름진 들판에 잡초만 눈에 가득하다.

굶주리는 백성이 앞으로 어떻게 견디겠는가.

내년까지 갈 것도 없이 굶어 죽어 골짜기를 메울 것이다.

너무나 참담하다.

어제 오는 길에는 일곱여덟 살쯤 된 아이가 큰 소리로 울고 있었고 한 여자가 길가에 앉아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었다.

이상하여 물어보니 여자가 말했다.

“방금 남편이 우리 모자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왜 버리고 갔소?”

“셋이 떠돌며 구걸해 먹었는데 이제는 구걸해도 얻지 못합니다. 모두 굶어 죽을 것 같으니 남편이 저와 아이를 버리고 혼자 떠났습니다. 저는 이 아이와 함께 굶어 죽을 것이 뻔해 울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너무나 불쌍했다.

부자 관계는 하늘이 준 가장 가까운 정이고 부부는 사람 사이에서 가장 사랑하는 관계다.

짐승조차 제 새끼를 아낀다.

그런데 길에 아내와 아이를 버리고 돌아보지 않은 것이 어찌 본래 그러고 싶어서였겠는가.

먹고살 길이 없으니 이런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모두 죽어 한 사람도 남지 않을까 두렵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또 고부에서 십여 리쯤 떨어진 곳에서 이규실 생원을 만났다.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물으니 영광에 있다가 왜적이 호남으로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올라가는 중이라고 했다.

우선 한산에 있는 종의 집에서 살다가 왜적이 오지 않으면 다시 내려갈 생각이라고 했다.

이들뿐이 아니다.

양반과 떠돌이 백성이 걸어서 또는 말을 타고 노인과 아이를 부축하며 북쪽으로 올라가는 행렬이 길에 끊이지 않았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은 때투성이였다.

차마 볼 수 없었다.

아침을 먹은 뒤 노령 아래 군영까지 가 점심을 먹었다.

걸어서 고개를 넘은 뒤 장성까지 달려가니 이미 날이 저물었다.

마침 수령 이귀가 없고 형 이자가 관아에 있었다.

이름을 알리자 관청으로 불러 함께 묵게 했다.

이 고을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예전에 수령으로 계셨던 곳이다.

옛사람 가운데 아버지를 알던 사람은 서너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새로 난 젊은 사람들이라 얼굴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름을 묻고서야 누구의 자손인지 알았다.

아버지는 계해년 겨울 이 고을 수령으로 오셨다가 이듬해 갑자년 가을 떠나셨다.

한 해도 채 머물지 않았으니 아는 사람이 적은 것도 당연하다.

1593년 8월 12일 (계사년 음력 7월 16일)

며칠을 두 배 속도로 달려왔더니 사람과 말이 모두 지쳤다.

하늘까지 비를 내렸다.

나도 더위와 바람에 상해 토하고 설사했다.

어쩔 수 없이 하루 머물렀다.

종일 큰비가 내렸다.

내일도 떠나기 어려울 듯하다.

여행 식량으로 흰쌀 한 말 다섯 되와 콩 다섯 되, 반찬을 이자가 예리에게 말해 구해 주었다.

저녁에는 검찰사 이산보의 종사관 김상용이 나주 등을 순찰하러 가다가 이곳에 도착했다.

내가 와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사람을 보내 만나자고 했다.

나는 곧 행랑방 위 곡루로 나가 함께 이야기했다.

조금 뒤 관에서 차와 음식을 보내 함께 먹었다.

김상용이 또 다음을 주었다.

  • 흰쌀 여섯 말
  • 콩 네 말
  • 소금 한 말
  • 감장 한 말
  • 닭 두 마리
  • 마른 생선 두 묶음
  • 소주 한 병

뜻밖에 이런 물건을 얻었다.

종과 말이 돌아갈 때 가족들에게 실어 보내면 며칠 먹을 수 있겠다. 기쁘다.

김상용은 내 처가 친척이고 윤겸과 동갑 친구다.

내 아들들과도 매우 가까이 지냈다.

전에는 자주 보지 못했지만 피란 중에 뜻밖에 만나니 오래 알던 사람처럼 반가웠다.

1593년 8월 13일 (계사년 음력 7월 17일)

비는 맑게 개었지만 앞길의 큰 냇물이 불어 건너기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억지로 가면 사람이나 말이 빠질 위험이 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또 머물렀다.

주인 수령도 없는 고을에서 며칠씩 머무르니 마음이 몹시 미안했다.

그래도 이자가 관아에 있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으니 위안이 된다.

이른 아침 김상용 종사관을 만나고 함께 우정정까지 걸어갔다.

예전에는 없던 정자인데 전임 수령 이씨가 처음 세웠다고 한다.

흰쌀 한 말을 주고 모시 두 근을 샀다.

어머니께 드리려고 한다.

1593년 8월 14일 (계사년 음력 7월 18일)

닭이 울 때 일어나 밥을 먹고 이자와 작별했다.

반 식경쯤 가자 동쪽이 밝아왔다.

나주 땅 옛 양응정 목사의 집 앞 냇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는 길에 큰 냇물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그 물은 노령 아래서 시작해 나주의 영산포로 흘러간다.

같은 물줄기를 무려 열여덟 번이나 건넜다.

마지막으로 건넌 곳은 물이 배꼽 아래까지 차올라 말을 타고 건널 수 없었다.

나도 옷을 벗고 종을 붙잡고 간신히 건넜다.

전에 내린 비로 물이 크게 불었기 때문이다.

나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

북문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문지기가 문을 닫고 들여보내지 않았다.

종을 서문으로 들여보내 김상용에게 알리게 했더니 곧 관리를 보내 문을 열어 주었다.

임경흠이 이곳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그가 묵던 집으로 갔는데 오늘 아침 이미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잠자리와 요가 아직 치워지지 않은 것을 보니 만나지 못한 것이 더욱 아쉬웠다.

나도 그 집에서 묵었다.

나주 통판 이성남은 윤겸 아내 쪽 친척이다.

윤겸의 편지를 김상용을 통해 보내니 곧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우리 일행 모두에게 밥을 내주었다.

술과 과일도 보냈다.

또 자기 숙소인 금성관으로 나를 부르려 했지만 드나들기 불편해 사양했다.

저녁에는 다시 술과 안주를 보내고 여러 번 사람을 보내 정성스럽게 대했다.

여행 식량으로도 다음을 주었다.

  • 흰쌀 두 말
  • 콩 두 말
  • 기름과 꿀 각각 한 되
  • 마른 숭어 다섯 마리
  • 새우젓 다섯 되
  • 보릿가루 세 되

매우 고맙다.

1593년 8월 15일 (계사년 음력 7월 19일)

일찍 떠나려 했지만 어제 받은 물건을 오늘에야 받아 챙기는 바람에 늦어졌다.

통판 이성남이 내가 묵는 곳까지 찾아와 쇠고기 열 덩이를 따로 주었다.

일행 모두가 길에서 먹을 점심도 싸 주었다.

서문으로 나가 영암 부소원까지 달려가 말을 먹이고 밥을 지었다.

오는 길의 농사를 살펴보았다.

고부 이북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이남 장성, 광주, 나주에서 영암까지는 곡식이 아주 좋았다.

일찍 익는 벼와 기장, 조를 절반가량 베어 먹고 있었고 가을 수확도 기대할 만했다.

이곳 백성들은 굶어 죽는 일은 조금 면할 수 있을 듯하다.

점심을 먹은 뒤 구림까지 달려가니 이미 저녁이었다.

곧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얼굴빛이 예전과 같았다.

아우 희철과 임씨 누이, 인아와 조카 붕이도 모두 무사했다.

너무나 위안되고 기뻤다.

어제 나주에서 묵은 집의 주인은 관비 심이다.

전에 서울 관비로 십삼 년 동안 살았고 지금은 윤두수 좌의정의 공신 노비가 되어 해마다 좋은 베 스무 필을 공물로 낸다고 한다.

집은 나주 서문 안에 있다.

앞으로 오갈 때 묵을 곳으로 삼을 만하다.

1593년 8월 16일 (계사년 음력 7월 20일)

유성룡 체찰사의 종사관 김탁 판관이 군량을 모집하려고 여러 고을을 돌다가 영암에 왔다.

임경흠과 친한 사람이라 우리 집에도 들렀다.

집주인과 냇가 초정에 앉았다.

집에서 채소떡과 좋은 안주, 추로주를 내놓아 술을 돌렸다.

김탁은 술을 마시지 않아 조금만 마시고 그쳤다.

조금 뒤 물말이밥도 내놓았는데 반찬이 아주 좋았다.

자리에는 집주인과 나, 아우 희철, 임환 생원, 임현 진사가 있었다.

임현은 경흠의 조카이고 임환은 경흠의 인척이다.

해가 기울자 김탁은 도갑사로 가서 묵었다.

희철이 함께 가서 하룻밤을 보냈다.

경흠은 조카와 함께 내일 절에 가서 두부를 마련해 대접할 생각이라고 한다.

또 여종 복지는 처음에는 어머니와 자식들과 함께 굶어 죽었다고 들어 늘 불길하고 슬프게 생각했다.

오늘 남쪽으로 와 보니 복지는 막내아들과 함께 떠돌다가 어머니가 계신 곳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복지의 어머니와 둘째 아들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아마 죽었을 것이다.

슬프고 또 슬프다.

막내딸은 길에서 죽었다고 한다.

또 삼촌 집 여종 양이는 지난봄 떠돌다 이곳에 왔는데 자기 어머니와 할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와서야 처음 들었다.

가엾다.

1593년 8월 17일 (계사년 음력 7월 21일)

이른 아침 경흠과 조카가 도갑사로 갔다.

누이가 생숭어를 구해 회를 만들어 주었다.

큰 접시 하나를 배불리 먹었다.

오후에는 경흠과 희철이 절에서 내려왔다.

요월당에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뒤 마을의 박준, 박경인, 박주, 임환 진사, 피란해 온 김영휘 등 노소가 모두 모였다.

저녁이 되어 헤어졌다.

김영휘는 나와 칠촌 친척이다.

순천에 살며 전에 태인 수령을 지낸 조숙관의 외손이다.

조태인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촌이다.

김영휘의 어머니도 이곳에 와 있는데 여기는 그 처가다.

1593년 8월 18일 (계사년 음력 7월 22일)

종일 요월당에 있었다.

마을의 어른과 젊은이들이 모두 모였다.

바둑을 두기도 하고 종정도 놀이를 하기도 하며 장기와 쌍륙을 두면서 긴 하루를 보냈다.

1593년 8월 19일 (계사년 음력 7월 23일)

종일 요월당에서 젊은이들이 여러 놀이를 하는 것을 구경했다.

오후부터 머리가 조금 아프고 몸이 좋지 않았다.

저녁 무렵 관자놀이에 땀이 나면서 조금 풀렸다.

학질의 징조인 듯해 걱정스럽다.

며칠 더 지나 봐야 알겠다.

거친 베 세 필로 막정에게 미역 마흔다섯 동과 침고도어 여러 마리를 사 오게 했다.

1593년 8월 20일 (계사년 음력 7월 24일)

아침을 먹고 아우와 서호정으로 갔다.

임환 별감과 임현 진사가 뒤이어 왔다.

조금 뒤 이웃에 사는 김영휘와 그의 처남 고기후도 왔다.

소나무 그늘 아래 함께 앉았다.

김영휘 집에서 점심을 보내 주었다.

또 종들에게 앞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게 했는데 우연히 은순어 한 마리를 잡았다. 청어만큼 컸다.

곧 어머니 부엌으로 보내 구워 드리게 했다.

저녁밥 때 임환의 아들 중이 술과 안주를 가져왔다.

함께 마셔 술병을 비웠다.

다시 한 병을 가져와 다 마시고 또 가져왔다.

나는 몸이 좋지 않아 먼저 돌아왔다.

아우는 여러 사람과 저녁까지 술을 마시고 어두워진 뒤 크게 취해 돌아왔다.

내 병은 하루 걸러 앓는 학질인 듯하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조금 나았다.

임경흠은 배 만들 나무를 베러 배를 타고 서호를 건너갔기 때문에 함께하지 못했다.

인아는 임천으로 떠났다.

막정과 명복을 데리고 갔다.

1593년 8월 21일 (계사년 음력 7월 25일)

이른 아침 박 덩굴을 태운 재를 구해 술에 타 마셨다.

학질을 고친다고 하는 방법이다.

누이가 새 숭어를 구해 회를 한 접시 가득 만들어 주었다.

아우는 모두 먹었고 나는 절반도 먹지 못했다.

조카 붕이와도 나누어 먹었다.

요즘 늦더위가 매우 심한데 오늘은 더욱 뜨겁다.

인아가 이 더위를 뚫고 어떻게 올라갈지 걱정이 그치지 않는다.

임현의 암말을 빌려 타고 갔고 장성에 도착하면 돌려보내기로 했다.

장성에서 말을 구하지 못하면 거기 머물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나도 다음 달 초에는 돌아가기로 정했다.

어제 막정이 가져온 물건은 다음과 같다.

  • 미역 마흔다섯 동
  • 침고도어 스물세 마리 가운데 열 마리는 임 진사가 더해 준 것
  • 마른 숭어 한 마리
  • 붉은 조개 다섯 되
  • 젓갈 한 항아리
  • 작은 전복 다섯 꾸러미

이것들은 누이가 준 것으로 추석 제사에 쓰려고 한다.

미역은 한 동이 한 움큼밖에 되지 않아 수량은 많아도 실제로는 큰 한 동만 못하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누이가 교아상화떡을 쪄 먼저 신주에 올린 뒤 내게 큰 그릇 하나를 주었다.

하지만 학질을 앓고 있어 먹지 못했다.

오후부터 학질이 왔다.

저녁에는 조금 풀렸다.

전처럼 심하지 않고 머리만 조금 아팠다.

1593년 8월 22일 (계사년 음력 7월 26일)

오늘은 처서다.

아침에 또 박 덩굴 재를 술에 타 마셨다.

학질이 아주 심하지는 않지만 여러 날 계속되어 기력이 몹시 떨어졌다.

답답하다.

아침에는 경흠의 막냇누이 이 서방 댁에서 점심을 차려 우리를 대접했다.

반찬이 아주 좋았다.

종일 요월당에 있었다.

오후에 두 관자놀이가 조금 아팠지만 저녁에 땀이 나고 평소처럼 돌아왔다.

이제부터 완전히 떨어질 것인가.

김영휘와 박경행이 찾아와 이야기하고 저녁에 돌아갔다.

1593년 8월 23일 (계사년 음력 7월 27일)

오늘 아침에도 박 덩굴 재 탄 술을 마셨다.

아침을 먹고 아우와 걸어서 박종정 집을 찾아갔다.

안홍도 생원과 박근기도 뒤따라왔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씨와 박씨는 먼저 돌아갔다.

집주인이 점심을 내놓으려 했지만 굳이 사양하고 돌아왔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학질이 크게 발작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조금 가라앉았다.

오늘은 전보다 훨씬 심했다.

답답하다.

경흠은 조카와 함께 수령을 찾아뵈러 갔다가 밤이 깊어서 돌아왔다.

1593년 8월 24일 (계사년 음력 7월 28일)

아침부터 어머니가 더위 먹은 이질을 앓아 여러 차례 설사하셨다.

기력이 몹시 떨어지셨다. 걱정스럽다.

방에 아침 햇빛이 가득 들어 찜통 속 같은데, 아마 더위를 먹으신 듯하다.

어깨 위에는 밤톨만 한 작은 종기가 생긴 지 며칠 되었고 찌르는 듯 아프다.

지금은 조금 덜한 듯하다.

안에서 곪은 것 같아 불침을 놓으면 고름이 나와 쉽게 나을 것 같지만 어머니가 무서워하실 것이어서 하지 못했다.

걱정스럽다.

밤 이경 무렵 여향을 불러 내 학질을 잡는 민간요법을 하게 했다.

여향은 부사 한진의 종으로 이곳에 피란해 있다.

나도 오늘 다시 학질을 심하게 앓았다.

1593년 8월 25일 (계사년 음력 7월 29일)

닭이 처음 울 때 몰래 문을 나섰다.

여러 방법을 써 학질을 떼어 보려는 것이다.

춘희를 데리고 나귀를 타고 마을 어귀로 나갔다.

아직 밤이 이른지라 소나무 정자에서 나귀를 내려 소나무 뿌리에 기대 누웠다.

샛별이 뜬 뒤 도갑동으로 들어갔다.

풀이 길고 나귀는 작아 새벽이슬에 허리 아래 옷과 버선이 모두 젖었다.

절에 들어가니 날이 밝았다.

기운이 빠져 오랫동안 선방에 누워 있었다.

밥때가 되어 법당에 나가 승려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밥을 먹고 북쪽 연못가 나무 그늘에 숨어 누웠다.

조금 뒤 전 좌수 박정기가 아우와 아들을 데리고 왔다.

연못에는 물고기가 많았다.

작은 돌을 던지면 고기들이 떼로 몰려들어 삼켰다.

박정기가 승려에게 바늘을 얻어 낚시를 만들어 일곱여덟 마리를 잡았다가 다시 놓아주었다.

한낮부터 몸이 좋지 않은 조짐이 나타났다.

법당으로 들어가 힘없이 누워 있었는데 미시 무렵부터 병이 심해졌다.

어쩔 수 없이 내려왔다.

오는 길에는 햇볕이 뜨거웠고 병도 더욱 심해져 길가에 쓰러져 눕고 싶을 정도였다.

억지로 참고 집까지 왔다.

어머니를 뵈니 병세가 극도로 위중했다.

붉거나 흰 설사가 물고기 창자 같은 모양으로 셀 수 없이 쏟아졌다.

헌 옷을 밑에 깔아 두면 저절로 흘러나올 정도였다.

배도 찌르듯 아파 견디지 못했고 음식을 전혀 드시지 못했다.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나도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학질이 전날보다 갑절이나 심했다.

저녁에 조금 가라앉았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어머니 병은 이처럼 위급하고 내 학질도 떨어지지 않는다.

걱정을 이루 말할 수 없다.

1593년 8월 26일 (계사년 음력 8월 1일)

어머니 병세는 어제와 같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아침 전에 임현의 종과 말이 들어왔다.

인아가 말을 타고 장성에 간 뒤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매우 걱정했는데 이제야 말이 도착했다. 다행이다.

인아는 장성에서 말을 구하지 못해 그대로 머물고 있다고 한다.

수령이 출장을 나가 있어 구하지 못한 것이다.

임현의 종은 나주에 도착한 뒤 목사가 답장을 바로 주지 않아 머물렀다고 한다.

어머니의 이질 횟수는 어제보다 조금 줄었다.

하지만 배 아픈 것은 그대로다.

소변 보기가 어려운 증세가 며칠 동안 계속되어 아랫배가 당겼는데 오늘 새벽 연달아 세 번 소변을 보고 나니 당기는 증세가 곧 줄었다.

그러나 죽을 조금 드시면 곧 구역질해 넘기지 못한다.

이 때문에 더욱 걱정스럽다.

나는 오후부터 학질 기운이 조금 나타났다.

요월당으로 나가 최심원과 임환 등과 이야기를 나누며 잊어보려 했지만 곧 다시 심해졌다.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전날보다 갑절이나 심하게 앓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조금 풀렸다.

답답하다.

심원은 최집 생원의 자다.

경흠의 사촌이다.

난리 처음에는 관서로 떠돌았고 이제야 남쪽으로 내려와 어제 도착했다.

1593년 8월 27일 (계사년 음력 8월 2일)

어머니 병은 여전하고 배가 더 심하게 아프다.

몹시 걱정스럽다.

한낮에는 열기가 심하고 답답해 수박을 드시고 싶어 하셨다.

조금 잘라 얼음과 꿀을 섞어 드리니 기분이 매우 상쾌하다고 하셨다.

내 학질은 어제보다 조금 덜했다.

발작 시간도 조금 늦고 낫는 시간은 빨라졌다.

이제 떨어질 조짐인 듯하다.

1593년 8월 28일 (계사년 음력 8월 3일)

어머니 병세가 조금 줄었고 배 아픈 것은 그대로이지만 어제보다는 약간 나은 듯하다.

그런데 여러 날 죽도 제대로 드시지 못해 원기가 크게 쇠했다.

걱정이 끝이 없다.

내 학질은 계속 민간요법을 쓰며 박연운에게 잡게 했다.

저녁 무렵 조금 아프다가 빨리 풀렸다.

이제는 완전히 떨어질 듯하다.

발작하기 전에는 요월당으로 나가 임환과 최심원, 김영휘 등이 바둑 두는 것을 보며 병을 잊어보려 했다.

1593년 8월 29일 (계사년 음력 8월 4일)

어머니의 설사 횟수는 대체로 조금 줄었고 변 색깔도 정상에 가까워졌다.

다만 배 아픈 것은 그대로고 음식 생각도 전혀 없으시다.

너무나 걱정스럽다.

오늘은 두 번 얼음물에 밥을 말아 대여섯 숟갈 드셨다.

저녁에는 흰죽을 조금과 생꿩 고기 몇 점도 드셨다.

내 학질은 박연운에게 사흘 연속 잡는 법을 시켰다.

오늘 저녁에는 머리가 조금 아프다가 그쳤다.

아마 완전히 떨어진 듯하다. 기쁘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직 완전히 낫지 않으셨으니 여전히 걱정스럽다.

1593년 8월 30일 (계사년 음력 8월 5일)

어머니는 어젯밤 두 차례 변을 보셨는데 모두 자연스러워 설사는 아니었다.

흰죽도 두 차례 조금 드셨다.

하지만 배가 찌르는 듯 아픈 것은 그대로고 먹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으시다.

어깨의 작은 종기는 전에 병 때문에 속의 고름을 짜내지 못해 다시 곪고 찌르는 듯 아파졌다.

옆으로 진물이 번져 작은 종기가 여러 개 생겼다.

녹두알만 하고 끝은 희며 몸통은 붉다.

몹시 걱정스럽다.

처서가 지났는데도 더위가 찜통처럼 심하다.

젊고 건강한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데 병중인 어머니가 어떻게 버티시겠는가.

머무는 방도 탁 트이지 않았고 바람이 들어오는 곳이 없다.

아침 햇빛이 창 가득 들어와 저녁이 되어야 창을 열 수 있다.

병중에는 이것도 큰 고통이다.

걱정스럽다.

임환이 노루고기를 마련해 왔다.

마을 사람들과 요월당에 앉아 배불리 먹었다.

마침 술이 없어 경흠의 서모 집에서 추로주 한 병을 구해 각자 석 잔씩 마시고 헤어졌다.

참석한 사람은 임환, 최심원, 박종정, 나와 아우, 마을 젊은이 네댓 명이었다.

1593년 8월 31일 (계사년 음력 8월 6일)

어머니의 상태는 어제와 같다.

어젯밤 변을 한 번 보셨는데 굳고 정상적이었다.

다만 배 아픈 증세가 없어지지 않았고 음식을 드시지 못한다.

걱정스럽다.

어깨 종기는 두 손으로 눌러 고름을 터뜨려 구멍이 생겼다.

이제는 그것 때문에 나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종기 옆에 붉은 콩알만 한 작은 부스럼 일곱여덟 개가 생겼다.

더욱 걱정스럽다.

오후에는 기운이 조금 나아졌고 배 아픈 것도 줄어든 듯했다.

소변도 잘 보고 아침 이후 설사도 하지 않았다.

미역죽과 꿩고기를 조금 드셨다.

이제 차츰 완전히 나으실 듯해 온 가족이 매우 기뻐했다.

능성감이 어제 저녁 나주에서 와 묵었다.

바둑을 아주 잘 두었다.

임환과 김영휘, 임현 등이 요월당에서 종일 바둑을 두었지만 실력 차이가 너무 컸다.

임환 등이 여덟 점을 놓고도 번번이 졌다. 우습다.

저녁을 먹은 뒤 경흠과 최심원, 임환, 임현 등이 도갑사에 올라가 함께 묵었다.

내일 두부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청성감도 함께 갔다.

나와 아우는 어머니가 병중이어서 묵으러 가지 못했고 내일 아침 갈 생각이다.

1593년 9월

1593년 9월 1일 (계사년 음력 8월 7일)

이른 아침 아우와 절에 올라가 여러 사람과 함께 연포를 먹었다.

바둑도 두고 종정도 놀이도 하며 웃고 놀았다.

마침 소나기가 크게 내리다가 얼마 뒤 그쳤다.

오랜 가뭄 뒤에 밭을 한 번 갈 만큼 비가 내려 누렇게 마르던 곡식이 살아날 희망이 생겼다.

다만 흠뻑 내리지 않은 것이 아쉽다.

그래도 바람이 남쪽에서 불고 하늘이 흐리니 이것으로 끝나지는 않을 듯하다.

비가 그치자 각자 서둘러 돌아왔다.

능성감은 강진으로 향했다.

어머니의 기운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

어젯밤 흰죽 큰 접시 하나를 드셨고 오늘 아침에는 나물과 말린 박을 조금 드셨다.

늦은 아침에는 수제비 한 큰 접시를 드셨다.

차츰 식사를 하시니 너무나 기쁘다.

다만 배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아직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때때로 생긴다.

저녁에는 비가 조금 오다 그쳤다.

1593년 9월 2일 (계사년 음력 8월 8일)

어머니의 기운은 계속 나아지고 있다.

다만 변을 보려는 느낌이 들 때마다 배가 찌르듯 아팠다가 변을 본 뒤에야 풀린다.

식사는 평소보다 적다.

어깨의 종기 구멍에서는 흰 진물이 때때로 흘러나오고 상처가 오랫동안 아물지 않는다.

늘 누워 있고 싶어 하시며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신다.

걱정스럽다.

어제 고을 아전이 통문을 가져와 보니 두 왕자와 명나라 사신 두 사람이 모두 왜적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왜적은 부산, 동래, 김해, 밀양 일대에 가득 주둔하고 있다고 한다.

함안과 진주로 향해 호남을 노린다는 말도 있고 절반은 바다를 건넜다는 말도 있다.

사실은 알 수 없다.

아침에 경흠과 최심원이 나주 수령을 찾아갔다가 돌아왔다.

별다른 호남 침범 소식은 없고 왜적이 동래와 부산 근처에서 돌을 모아 성을 쌓는다고 한다.

오래 머물려는 계책이 분명해 걱정스럽다.

안서국 참봉과 이용제가 나주에서 경흠을 찾아왔다.

둑을 쌓을 곳을 살펴보려는 일이었다.

안서국은 나주 목사의 첩 장인이고 이용제의 서형이다.

안서국은 내가 젊을 때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친구다.

피란 중 뜻밖에 만나 서로 회포를 풀었다.

1593년 9월 3일 (계사년 음력 8월 9일)

어머니의 기운은 어제와 같다.

다만 배 아픈 것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걱정스럽다.

어젯밤에는 수제비 한 접시를 드셨고 새벽에는 녹두죽 반 그릇, 아침에는 흰죽 반 접시를 드셨다.

어제 한낮 무료하여 아우와 국사암 앞으로 걸어가 임환을 불렀다.

냇가 초정에서 함께 이야기하다 해가 기울어서야 돌아왔다.

마을 젊은이 몇 명과 금남, 갑생도 함께했다.

금남과 갑생은 경흠의 서숙이다.

오늘은 임환의 생일이다.

떡과 과일, 토장을 내놓고 추로주도 내왔다.

안서국, 이용제, 임환, 최심원, 민우중, 경흠, 나와 아우가 함께했다.

민우중은 민준 참판의 막내아들이고 임현의 처남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에 피란해 있다.

오후부터 어머니가 다시 흰 설사를 네 차례 하셨고 저녁 내내 배가 아팠다.

먹는 양도 다시 줄었다.

매우 걱정스럽다.

1593년 9월 4일 (계사년 음력 8월 10일)

아침에는 어머니 병이 조금 가라앉고 배 아픈 것도 줄었다.

한밤중에 밥 끓인 물 한 큰 접시를 드시고 아침에는 박죽 반 접시를 드셨다.

어젯밤 대변은 한 번 보셨는데 정상적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시 흰 설사가 조금씩 일곱여덟 차례나 나왔다.

걱정스럽다.

그래도 배 아픈 것은 어제보다 덜하다.

한낮에는 박죽 한 접시를, 저녁에는 파를 썰어 넣은 밥을 조금 드셨다.

안서국과 이용제는 나주로 돌아갔다.

임환도 나주 회진촌 본가로 갔다.

추석이 지나면 돌아오겠다고 했다.

내 목 뒤가 뻣뻣해 돌아보기가 불편하다.

찬 기운을 맞은 모양이다.

1593년 9월 5일 (계사년 음력 8월 11일)

어머니의 배 아픈 증세는 여전하고 음식도 맛있게 드시지 못한다.

죽도 싫어하시지만 억지로 권해야 조금 드신다.

어깨 종기도 거의 아물지 않았다.

그 옆의 작은 종기 여덟아홉 개는 콩알만 하고, 어떤 것은 끝이 희고 몸이 붉으며 어떤 것은 고름이 나온다.

몹시 걱정스럽다.

우리 종과 말이 곧 올 때가 되었는데 오지 않는 것을 보니 어머니가 완전히 회복되시기 전에 떠날 수도 없다.

그러면 이곳에 더 오래 머물러야 한다.

식구들을 먹이는 일이 어려워질 것이니 그것도 걱정이다.

새벽에 큰비가 한 차례 쏟아졌다.

늦은 아침까지 비가 오다 개기를 반복했다.

말라가던 곡식이 살아날 수 있겠다.

다만 아직 충분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늦은 아침 뒤 어머니 기운이 조금 좋아졌다.

김칫국물에 밥을 말아 두 번 드시고 저녁에는 수제비도 조금 드셨다.

대변은 세 차례 정도였다.

배는 변을 볼 때만 잠깐 아프고 곧 그치니 전날보다는 낫다고 하신다.

1593년 9월 6일 (계사년 음력 8월 12일)

어젯밤 어머니는 숙수에 밥을 말아 드셨다.

그러나 새벽부터 다시 배가 아팠다.

아침 전에 세 차례 변을 본 뒤 조금 풀렸지만 통증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먹는 맛도 돌아오지 않는다.

병이 몸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나 걱정스럽다.

늦은 아침 수제비에 밥을 섞어 반 큰 접시를 드셨다.

오후에는 쇠고기구이도 반 꼬치 드셨다.

아우가 거친 베 반 필로 쇠고기를 사 왔다.

한낮에 구워 둘이 함께 먹었다.

오후부터 비가 내려 저녁까지 개지 않았다.

1593년 9월 7일 (계사년 음력 8월 13일)

어머니의 배 아픈 것은 여전하다.

어젯밤에는 숙수에 밥을 말아 드셨다.

아침 전에 변을 두 번 보셨는데 색과 모양이 정상적이었다.

생새우국과 마른밥도 조금 드셨다.

아침 뒤 경흠이 최심원과 임현, 나와 아우를 안방으로 불러 추로주를 마셨다.

한 병을 다 비우고 헤어졌다.

1593년 9월 8일 (계사년 음력 8월 14일)

어머니의 병세는 어제 오후부터 차츰 회복되고 있다.

배 아픈 증세가 가끔 생기기는 하지만 전처럼 심하지 않다.

어젯밤 변을 몇 차례 보셨는데 모양도 정상적이었다.

아침에는 흰밥과 민어국을 거의 한 그릇 드셨다.

한낮에는 조밥도 조금 드셨다.

때때로 일어나 앉아 한동안 계셨다.

오늘부터 회복 쪽으로 돌아선 듯해 기쁘기 그지없다.

다만 어깨와 등의 종기가 아직 다 낫지 않았다.

눕고 일어날 때마다 건드려져 아프다.

파리가 떼 지어 달라붙어 부채질을 쉬지 못하니 괴롭다.

김지남 집의 종 고서비가 어머니를 만나려고 휴가를 받아 나주까지 왔다가 이곳에 들러 어머니를 뵈었다.

누이의 편지도 가져왔다.

저녁에 어머니는 흰밥과 붕어찜 한 마리, 생선국을 조금 드셨다.

아침밥 전에는 누이가 새 숭어를 구해 회를 큰 접시로 만들어 주어 나와 아우가 배불리 먹었다.

1593년 9월 9일 (계사년 음력 8월 15일)

돌아가신 아버지 신위 앞에 누이가 술과 과일, 떡, 국과 구이를 갖추어 차례를 올렸다.

오늘은 추석이다.

윤해에게 서울에 올라가 광주 선산에 제사를 지내라고 했는데 잘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의 병은 점점 낫고 식사량도 날마다 늘고 있다.

매우 기쁘다.

그러나 변을 보려 하면 배가 곧 아픈 증세는 아직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이른 아침 경흠이 청령동 선산에 제사를 지내러 가며 나를 불렀다.

재궁까지 갔다.

제사를 마친 뒤 연포를 만들어 대접했다.

제사 음식도 넉넉해 배불리 먹고 술도 마신 뒤 돌아왔다.

함께한 사람은 윤사우, 민우맹, 나, 경흠의 숙질과 서숙 등 모두 열네 명이었다.

최심원도 뒤늦게 왔으나 길에서 학질이 크게 발작해 음식을 먹지 못하고 승방에 누웠다.

함께 돌아오지도 못했다.

청령동은 구림에서 십여 리 떨어져 있다.

윤사우 진사는 서울 사람인데 피란하여 그곳 종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민우맹은 임현의 처남으로 그저께 어머니를 뵈러 이곳에 왔다.

1593년 9월 10일 (계사년 음력 8월 16일)

어머니의 상태는 어제와 같다.

죽이나 밥을 하루 서너 차례, 많으면 네댓 차례 드신다.

양은 그때그때 다르다.

반 그릇을 드실 때도 있고 그보다 적게 드실 때도 있다.

대변은 낮에 두세 번, 밤에 한두 번 보시는데 모양은 정상적이다.

다만 변을 볼 때 배가 아픈 것은 그대로다. 걱정스럽다.

숙수 영환이 절에서 내려왔다.

이질이 오래 낫지 않은 데다 굶어 얼굴이 검게 마르고 부기가 생겼다.

머지않아 죽을 듯해 몹시 불쌍하다.

이제 북쪽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길에서 먹을 식량도 없다.

나도 뭔가 주고 싶으나 구할 방법이 없다.

누이가 쌀 한 되와 장을 주었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남은 밥을 모아 먹여 보냈다.

어머니도 쌀 한 되와 반찬을 조금 주셨다.

본인은 더 많이 기대했겠지만 우리 형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

병세가 이 정도라면 북쪽까지 가지도 못하고 길에서 죽을까 걱정된다.

가엾다.

1593년 9월 11일 (계사년 음력 8월 17일)

어머니의 기운과 식사, 대변은 어제와 같다.

아침을 먹고 희철과 초정으로 걸어가 최심원을 불렀지만 학질을 앓느라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서호정으로 가 김영휘를 불러 소나무 그늘에 앉아 오래 이야기했다.

경흠과 민우중도 뒤이어 왔다.

함께 포구로 가 경흠이 지난해 피란하려고 만든 배를 구경했다.

다시 소나무 정자로 돌아와 앉아 쉬었다.

경흠은 먼저 돌아갔다.

나와 희철은 김영휘의 집으로 가 그의 어머니를 뵈려 했지만 병이 있다며 사양해 뵙지 못했다.

김영휘의 어머니는 내 육촌 누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박경인 집을 찾았다.

그의 아우 박경행도 왔다.

집에서 술과 과일을 내놓았다.

그 서얼 친족 두 사람도 와서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희철은 크게 취해 돌아와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토하며 밥도 먹지 않고 잤다.

나는 술을 마셨지만 몹시 취하지 않아 저녁도 평소처럼 먹고 밤에도 잘 잤다.

1593년 9월 12일 (계사년 음력 8월 18일)

어머니의 기운은 어제와 같다.

등의 종기는 거의 나았고 어깨 몇 군데만 아직 낫지 않아 때때로 찌르듯 아프다.

이제 곧 완전히 나을 듯하다.

아침밥 전에 누이가 생모치어를 구해 회를 만들어 주었다.

나와 아우가 큰 접시 하나씩 먹고 추로주 한 잔도 마셨다.

희철은 어제 크게 취한 뒤라 다 먹지 못했다.

1593년 9월 13일 (계사년 음력 8월 19일)

어머니 상태는 어제와 같다.

다만 큰 병 뒤라 식사량이 너무 줄었다.

다섯 홉쯤 되는 밥을 차려도 삼분의 일 정도밖에 못 드신다.

죽이나 밥을 하루 네댓 차례, 밤에도 한 차례 드시지만 한 번 먹는 양이 적어 금방 배고파하신다.

약과 같은 것이 있으면 허기를 달랠 수 있겠지만 구할 수 없다.

답답하다.

우리 종과 말이 올 때가 한참 지났는데 오지 않는다.

말이 아픈가 의심되기도 하고 아이들이 다른 곳에 데리고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가 싶기도 하다.

1593년 9월 14일 (계사년 음력 8월 20일)

어머니 상태는 여전하다.

아침을 먹은 뒤 요월당으로 나갔다.

최심원과 김영휘가 마침 와 있어 차분히 이야기하고 김영휘와 임현이 바둑 두는 것도 구경했다.

오후에 각자 흩어졌다.

임현의 자는 자승이다.

1593년 9월 15일 (계사년 음력 8월 21일)

어머니 상태는 여전하다.

다만 어깨의 종기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아 가끔 찌르는 듯하고 누울 때 불편하다고 하신다.

걱정스럽다.

숙수 영환이 절에서 내려왔다.

이질이 오래 낫지 않고 굶주리기까지 해 몸은 검고 야위었으며 얼굴은 부었다.

머지않아 죽을 듯해 너무나 가엾다.

북쪽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식량이 없다.

내가 도와주고 싶어도 가진 것이 없다.

누이가 쌀 한 되와 장을 주었다.

나는 아침저녁 남은 밥을 주어 보냈다.

길에서는 구걸해 먹고 갈 것이다.

그러나 병이 이렇게 심하니 아마 끝내 올라가지 못하고 길에서 죽을 듯하다.

불쌍하다.

1593년 9월 16일 (계사년 음력 8월 22일)

어머니 상태는 여전하다.

아침을 먹고 희철, 최심원, 김영휘, 김영휘의 동서 서완, 민우중, 박원중의 아들, 심원의 두 아들, 귀생과 금남 등과 배를 탔다.

죽도 앞에 배를 띄우고 물고기 잡는 것을 구경했다.

모치어 열여 마리를 잡아 회와 구이, 국을 만들어 배불리 먹었다.

해가 기울어 밀물에 맞추어 돌아왔다.

금남은 경흠의 서숙이고 귀생은 경흠 누이의 어린 아들이다.

오는 길에는 서호정에 함께 앉아 쉬었다가 돌아왔다.

1593년 9월 17일 (계사년 음력 8월 23일)

어머니 상태는 여전하다.

다만 식사량이 예전 같지 않고 어깨 종기도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다.

걱정스럽다.

희철이 거친 베 한 필을 쇠고기와 바꾸어 삶기도 하고 구워 먹었다.

1593년 9월 18일 (계사년 음력 8월 24일)

어머니 상태는 여전하다.

아침 전에 누이가 모치어를 구해 회를 큰 접시로 만들어 주었다.

또 추로주 한 잔도 마셨다.

오후에는 희철이 영암 군으로 갔다.

순찰사 이정암이 순행해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뵈려는 것이다.

날이 저물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1593년 9월 19일 (계사년 음력 8월 25일)

어머니 상태는 여전하다.

음식이 맛있지 않아 밥상을 보면 곧 싫어하신다.

기운도 몹시 쇠했다고 하신다.

걱정스럽다.

희철이 돌아왔다.

순찰사가 크게 꺼리는 일이 있어 사람을 만나지 않아 직접 뵙지 못하고 그의 자제들만 만나고 왔다고 한다.

순찰사의 집은 서울 이현에 있는데 희철이 전에 그에게 배운 일이 있어 찾아뵈려 한 것이다.

영남 왜적은 부산에서 웅천까지 잇달아 진을 치고 성을 쌓고 집을 많이 지으며 군량을 쌓아 오래 머물 준비를 한다고 한다.

고성 사람이 지난해 구월 왜적에게 잡혔다가 이달 초 도망쳐 돌아왔는데, 왜적 속에서 몰래 들은 말이라며 이렇게 전했다고 한다.

관백 평수길이 말했다.

“조선은 이미 내 것이 되었다. 호남을 서둘러 공격할 필요가 없다. 내년 삼월 바다를 건너 곧장 밀고 들어가면 한 번에 평정할 수 있다.”

분통을 참을 수 없다.

방답 첨사 이순신이 경흠에게 보낸 편지에도 왜적이 성을 쌓고 집을 지으며 오래 머물고 있고 요즘은 군사를 거두어 호남을 엿보지 않고 있으니 반드시 속셈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내년 봄의 일을 생각하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걱정스럽다.

늙은 어머니는 이곳에 계시고 우리 가족은 임천에 있어 서로 닷새나 엿새 거리다.

왜적이 뜻밖에 길을 끊으면 서로 소식조차 전하지 못해 죽고 사는 것도 모르게 될 것이다.

미리 걱정되는 일이 너무 많다.

어머니 곁에 머물고 싶지만 먹여 살릴 길이 없다.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살 집이 없고 봉양할 물자도 부족하다.

밤마다 생각해 보지만 좋은 방법이 하나도 없다.

그저 근심하고 답답해할 뿐이다.

저녁에 막정이 말을 끌고 들어왔다.

집안 형편을 물으니 아내와 자식, 종들까지 모두 학질에 걸려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날마다 고생한다고 한다.

그 가운데 아내와 윤겸이 가장 심해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아내는 숨이 끊어질 듯하다가 이제 조금 나아졌다고 한다.

윤겸은 결성에서 학질을 얻어 보령으로 와 여러 날 심하게 앓았고 담증까지 생겨 기운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아 병세가 매우 위급했다.

마침 검찰사 이산보가 홍양에 있다가 윤겸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약을 보내 치료하게 했다.

지금은 조금 회복했지만 다시 이질을 얻었다고 한다.

원기가 크게 손상된 뒤라 병이 빨리 낫지 않으면 어떻게 견디겠는가.

걱정스럽고 또 걱정스럽다.

내가 집을 떠난 몇 달 사이 병환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곳에서도 어머니가 이질로 거의 죽을 뻔하다 겨우 살아나셨고 나도 학질을 보름 동안 앓다가 겨우 떼었다.

윤해도 진위에서 학질을 앓던 중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달려왔는데 지금까지 병이 떨어지지 않았다.

윤해의 아내도 예닐곱 번 앓다가 겨우 나았고 윤겸의 아내는 지금도 고생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또 무슨 큰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난리를 만나 가난하고 궁한 데다 온 집안에 병환까지 겹쳤다.

고요한 한밤중에 앞날을 생각하면 차라리 지난봄 병들었을 때 죽어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나았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1593년 9월 20일 (계사년 음력 8월 26일)

어머니 상태는 여전하다.

종과 말이 왔으니 내일 반드시 길을 떠날 생각이다.

임극이 임천 수령이 되어 이미 부임했다는 말을 들었다.

위안이 된다.

또 종이 오는 길에 장성에서 내 편지를 전하려 했는데 편지를 받는 사람이 종에게 매질했다고 한다.

이귀가 어찌 그럴 리 있겠는가. 나는 믿지 않는다.

다만 사람 마음이란 변하기 쉬우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한 고을 수령이 되었으니 어찌 옛날의 가난한 친구를 돌아보겠는가.

훗날 높은 조정에 들어가면 미천할 때의 옛 친구를 돌아보지 않을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세상일이 우습다.

독운어사 임발영이 뜻밖에 경흠을 찾아왔다가 해남으로 돌아갔다.

임발영은 경흠의 육촌으로 해남에 사는 사람이다.

임발영이 돌아간 뒤 나도 요월당으로 나가 박종정과 박대기를 만나 차분히 이야기하다 헤어졌다.

1593년 9월 21일 (계사년 음력 8월 27일)

어머니 상태는 여전하다.

다만 어깨 종기가 아직 다 낫지 않았다. 걱정스럽다.

순찰사가 어젯밤 사람을 보내 어머니께 다음 물품을 주었다.

  • 쌀 다섯 말
  • 콩 여섯 말
  • 장 한 말
  • 소금 일곱 말
  • 김 열 줌
  • 고도어 다섯 마리
  • 미역 일곱 줌

뜻밖에 이런 물건을 얻었다.

술을 빚어 팔아 쓸 수 있으니 매우 기쁘다.

희철이 감사를 드리러 고을에 들어갔는데 순찰사가 막 출발하려는 때라 문 사이에서 잠깐 이야기만 했다고 한다.

1593년 9월 22일 (계사년 음력 8월 28일)

어머니 상태는 여전하다.

오늘 새벽 떠나려 했지만 막정이 어제 아침부터 머리가 아파 종일 신음하다 밤늦게 조금 나았다.

학질인 듯하다.

그래서 떠나지 못했다. 아쉽다.

오늘은 경흠의 할머니 기일이다.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아침에 나를 불러 함께 먹었다.

연포도 만들어 대접했다.

임현이 마른 숭어 한 마리를 주었다.

누이도 마른 숭어 두 마리, 침고도어 다섯 마리, 말린 모치어 다섯 묶음, 젓갈 한 항아리를 주었다.

어머니는 고도어 네 마리, 미역 세 줌, 김 다섯 줌을 주셨다.

누이는 여행 식량과 반찬도 마련해 주었다.

한편으로는 매우 미안하다.

경흠에게는 갓 하나를 얻어 주었다.

임환은 여행 쌀 한 말, 은절어 한 묶음, 작은 전복 한 꾸러미를 주었다.

1593년 9월 23일 (계사년 음력 8월 29일)

이른 아침 길을 떠났다.

어머니와 헤어질 때 어머니가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나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모자의 정이 이처럼 절절하다.

나는 정해진 거처도 없이 호서 지방을 떠돌고 있고 아침저녁 끼니조차 잇기 어렵다.

그래서 늙은 어머니를 천 리 밖, 머물러서는 안 될 곳에 그대로 계시게 하고 있다.

우리 모자가 한곳에 함께 살 수 없는 것도 하늘이 만든 일이겠지만 너무나 슬프다.

임현의 암말을 빌려 타고 부소원 아래 냇가까지 달려가 말을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나주 성 밖에 이르러 종과 말을 먼저 남문으로 들여보내고 나는 걸어서 서문으로 갔다.

문지기의 단속이 몹시 엄했고 순찰사도 성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안경호가 남문 안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안경호는 나를 보자 눈물을 흘렸다.

밥을 지어 저녁을 대접했다.

안경호는 나주 목사의 장인이고 남중소와 젊을 때부터 친구였다.

예전에 배천에서 만나 여러 날 함께 지낸 적이 있다.

지금은 가족을 데리고 피란하여 이곳에 기대어 살고 있다.

저녁에 아우 희철이 순찰사를 만나 유형의 억울한 일을 말하려고 급히 왔다.

날이 저물어 만나지 못하고 내일 만나기로 했다.

뜻밖에 객지에서 아우를 만나니 매우 기뻤다.

어머니가 요즘 평안하시다는 소식까지 들으니 더욱 기쁘고 위안이 되었다.

밤이 깊어 함께 주인집에서 잤다.

1593년 9월 24일 (계사년 음력 8월 30일)

새벽에 희철이 순찰사를 만나 유형의 억울한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조도어사가 들어오는 바람에 끝까지 설명하지 못하고 나왔다.

순찰사는 그 길로 진원으로 떠났다.

희철은 안서국을 찾아갔다.

안서국이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말을 보내 불렀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술도 구해 먹였다.

아침밥도 나누어 주었다.

희철은 나주 목사를 찾아갔다.

나는 먼저 떠나 십여 리나 갔다.

그런데 나주 목사가 내가 묵고 갔다는 말을 뒤늦게 듣고 관리를 급히 보내고 희철에게 말을 주어 나를 다시 불러들였다.

어쩔 수 없이 성으로 돌아왔다.

목사는 관아에 앉아 있었고 손님이 가득했다.

내가 들어가자 왜 자기를 만나지 않고 갔느냐며 나무라고 여러 차례 정성스러운 말을 했다.

그리고 다음을 주었다.

  • 흰쌀 세 말
  • 좋은 쌀 열 말
  • 콩 열 말
  • 목미 한 말
  • 감장 한 말
  • 간장 한 말
  • 참기름 한 되
  • 생꿩 한 마리
  • 마른 닭 두 마리
  • 쇠고기포 다섯 줄
  • 조기 한 묶음
  • 안 부채 다섯 자루
  • 흰 종이 한 묶음
  • 가을보리 열 말
  • 갓 하나
  • 세 종류 부채 세 자루

관의 창고가 텅 빈 가운데 힘껏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

뜻밖의 후의를 받으니 깊이 감사한다.

감장과 콩 한 말은 주인집에 주었고 간장은 춘의에게 주었다.

짐이 너무 무거워 모두 옮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희철에게도 쌀 열 말과 콩 한 석, 갓과 부채를 주었다.

임익신과 조탁도 와 있었다.

뜻밖에 옛 친구들을 만나 너무나 반가웠다.

조탁은 나와 칠촌 친척이고 임익신은 젊을 때부터 친구다.

그런데 홍백남 찰방, 자가 사진인 사람이 병으로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너무나 놀랍고 슬프다.

그는 조탁의 사촌이고 나와도 칠촌 친척이다.

지난봄 내가 큰 병을 앓을 때 홍주 계당으로 찾아와 내 병이 심한 것을 보고 매우 걱정해 주었다.

그런데 반년도 지나지 않아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사람의 죽고 사는 일이 병들었느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 아님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슬프고 또 슬프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과 작별하고 희철과 함께 걸어서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얻은 물건을 정리한 뒤 사십여 리를 달려 나주 옛 양응정 목사 집 앞까지 가 그 집 종의 집에서 묵었다.

비변사 관리 언충이 공문을 순찰사에게 전하고 돌아가는 길에 나를 따라와 한곳에서 잤다.

또 조보를 보니 진주성이 함락될 때 여러 장수들이 힘껏 싸운 일이 기록되어 있었다.

김천일은 직접 성을 돌며 병사들을 어루만지고 눈물로 격려했다.

성이 함락되자 좌우 사람들이 부축해 피하자고 했지만 일어나지 않고 말했다.

“나는 여기서 죽겠다. 너희들은 피하라.”

어떤 말에는 김천일이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최경회와 촉석루 위에서 통곡한 뒤 바위 아래로 몸을 던져 죽었다고도 한다.

충청 병사 황진은 몸소 병사들보다 앞장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서쪽 성벽이 무너지자 옷과 관을 벗고 직접 돌을 나르며 병사들을 이끌었다.

밤새 공사를 감독하면서 성안 남녀를 진심으로 설득했고 모두가 감격하여 힘껏 성을 쌓았다.

하룻밤 만에 다시 성벽을 세우자 다음 날 왜적이 조금 물러났다.

황진이 성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젯밤 싸움에서 죽은 왜적이 거의 천 명에 이른다.”

그때 성 아래 숨어 있던 왜적 하나가 총을 쏘아 황진의 목에 맞혔고 그는 죽었다.

거제 현령 김준민은 성이 함락되는 날 싸우다 총탄에 맞아 죽었다.

이종인은 성이 무너질 때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일이 급하다.”

하며 큰 화살을 연달아 쏘아 왜적 일곱 명을 꿰뚫었다.

왜적이 물러가지 않자 얼마 뒤 총탄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명나라 사람이 올린 보고에는 이종인의 용력이 삼군에서 으뜸이었다고 했다.

진주 사람들이 와서 도와달라고 청하자 그는 연달아 왜적 다섯 명을 쏘았고 모두 달아났다.

왜적이 큰 나무궤짝을 만들어 앞세워 성 굽은 곳으로 들어오자 이종인은 수십 발의 화살을 궤짝에 쏜 뒤 기름과 장작을 던져 불태웠다.

왜적이 불을 끄는 동안 다시 여덟 명을 쏘아 죽였다.

그날 초저녁 북문 싸움이 급해지자 또 이종인을 청했고 그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왜적을 쏘아 물리쳤다.

그날 밤 왜적이 성돌을 빼냈다.

날이 밝자 그 틈으로 왜적이 밀려 들어왔다.

이종인은 활과 화살을 버리고 창과 칼을 들고 직접 싸웠다.

그가 죽인 왜적이 산처럼 쌓이자 왜적이 잠시 물러났다.

그러나 새 북문 쪽 의병이 형세가 급해지자 촉석루 쪽으로 물러났고 왜적이 성을 넘어 들어왔다.

이종인은 결국 총탄에 맞아 죽었다.

장윤은 임시 진주 목사로 임명되어 싸웠다.

쇠탄환을 몸에 맞고도 흔들리지 않고 상처를 싸맨 채 계속 싸우다가 죽었다.

이 사람들은 평소에도 공이 많았고 한 성에 함께 들어가 끝까지 지키다가 성이 무너지는 날 이처럼 의롭게 죽었다.

조정에서는 특별히 포상하여 충혼을 위로하라고 했다.

  • 김천일에게 좌찬성을 추증
  • 황진에게 우찬성을 추증
  • 최경회에게 이조판서를 추증
  • 이종인에게 호조판서를 추증
  • 김준민에게 형조판서를 추증
  • 장윤에게 형조참판을 추증

아, 이런 장사들이 한 성에 함께 있다가 모두 죽었다.

나라의 운수라고는 하나 밖에서는 작은 도움 하나 없고, 홀로 기세 오른 왜적을 막다가 형세와 힘이 다해 나란히 죽음을 택했다.

그 충성과 의로운 정신은 만고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회덕 수령 남경성도 내 사촌인데 진주성에서 죽었다고 한다.

슬픔을 견딜 수 없다.

지난해 그의 두 형과 일가 아홉 명이 왜적에게 죽었고 이제 본인마저 피하지 못했다.

더욱 통곡할 일이다.

명나라 사신 사용재와 서일관, 두 왕자와 가족 네 명, 신하 두 명과 가족 여섯 명은 지난 칠월 이십칠일 왜적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전에 순화군이 왜적 진영에서 죽어 장례까지 치렀다는 말을 들었는데 살아 돌아왔다.

앞서 들은 말은 잘못이었다.

1593년 9월 25일 (계사년 음력 9월 1일)

일찍 길을 떠났다.

삼십여 리를 가 냇가에서 아침을 먹었다.

장성에서 오 리쯤 떨어진 곳까지 와 순찰사가 군사를 훈련한다는 말을 들었다.

말에서 내려 냇가에 앉아 있었다.

박응소 교리가 물자 조달 명령을 받고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길가에서 기다렸다.

지나갈 때 사람을 보내 불렀더니 곧 왔다.

서로 이야기했지만 해가 저물고 갈 길이 바빠 오래 대화하지 못한 채 다시 헤어졌다. 아쉽다.

장성 관아에 도착하니 이귀도 없었다.

홀로 빈 행랑에 앉아 있으니 너무 무료했다.

수령은 밤이 깊어서야 관아로 돌아왔다.

관아에서 함께 앉아 피란 중 겪은 고생을 이야기했다.

작은 술상을 차려 석 잔씩 마시고 헤어졌다.

밤이 반이 지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이귀의 친구 김연경도 와서 관아 방에서 함께 잤다.

그는 이곳에 온 지 한 달이 넘었다.

1593년 9월 26일 (계사년 음력 9월 2일)

이른 아침 순찰사가 길을 떠났다.

현 안의 산성을 살피러 가는 것이어서 이귀도 따라갔다.

내일 돌아온다고 한다.

송이라는 종이 아침 전에 말을 끌고 들어왔다.

집안 소식을 들으니 아내와 자식들이 아직 학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윤함의 병이 위중하고 둘째 딸과 이현 형수도 학질에 걸렸다고 한다.

걱정스럽다.

윤겸은 조금 회복했다고 한다.

춘희를 영암으로 돌려보냈다.

누룩 세 덩이, 녹두 다섯 되, 율무 다섯 되, 꿀 한 되를 어머니께 보내려 했는데 율무와 꿀은 밖에서 구하지 못해 보내지 못했다.

종일 홀로 관아에 앉아 말동무가 없어 무료했다.

마침 용인에 사는 정종선이 순찰사와 가까운 사이라 어제 찾아왔다가 머물고 있었다.

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옛이야기를 나누었다.

객지의 무료함을 달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춘기는 일이 있어 남아 내일 보내기로 했다.

1593년 9월 27일 (계사년 음력 9월 3일)

장성에 머물렀다.

정종선이 찾아와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에는 이여실이 광산에서 들어왔다.

타향을 떠돌다가 객지에서 우연히 만나니 매우 반가웠다.

저녁에는 수령 이귀가 돌아왔다.

밤에 이여실과 한 방에서 잤다.

1593년 9월 28일 (계사년 음력 9월 4일)

장성에 계속 머물렀다.

이른 아침 이귀가 나를 관아 안으로 불렀다.

그제야 큰형수와 이귀의 아내를 만나 뵈었다.

아침으로 흰죽을 대접받고 술도 마셨다.

차분히 이야기한 뒤 밖으로 나왔다.

이귀도 관아로 나와 공무를 처리했다.

오후에 다시 안으로 들어가 나와 이여실을 불러 술을 내놓았다.

이귀는 다시 현 앞 냇가에 과녁을 세워 이여실과 활 잘 쏘는 고을 사람들을 불러 활쏘기를 했다.

사람을 시켜 물고기도 잡아 회와 국, 구이를 만들어 먹었다.

이어 저녁까지 먹고 해 질 무렵 돌아왔다.

밤에는 관아 방에 다시 모여 이귀가 지난해 관동과 관서에서 병사와 군량을 모을 때 세운 여러 계책을 들었다.

말이 끊이지 않아 밤이 반이 넘어서야 잠들었다.

이귀의 서외사촌 권수성도 와서 한 방에서 함께 잤다.

1593년 9월 29일 (계사년 음력 9월 5일)

장성에 머물렀다.

이른 아침 이귀는 또 나와 이여실을 불러 흰죽을 먹였다.

좋은 술도 마셨다.

관아 밖으로 나와 정종선, 이여실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이귀는 다시 현 앞 냇가에서 군사를 모아 훈련했다.

절강병의 방식에 따라 죽창과 긴 칼을 써서 나아가고 물러나며 싸우는 훈련이었다.

초하루부터 시작해 온 고을 사람에게 모두 명나라 군대의 방식을 본받게 했다.

갓을 벗고 감투를 쓰며 옷과 버선을 모두 푸른색으로 맞췄다.

훈련할 때에는 온 군사가 같은 차림을 했다.

우리도 나가 구경했다.

윤진 봉사도 왔다.

조금 뒤 검찰사의 군관 임득인이 지나가다 들렀다.

술상을 차렸는데 임득인이 술을 잘 마셔 모두 크게 취했다.

해 질 무렵 돌아왔다.

임득인은 지난해 홍주 피란처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데 오늘 다시 만나 서로 반가워했다.

그는 진원으로 향했다.

윤진은 해운판관 윤기의 아우로 이 현의 농막에 피란해 있다.

순찰사가 산성 축조 감독을 맡겼다고 한다.

그날도 물고기를 잡아 회를 만들어 먹었다.

오전에는 윤수이와 아들 양이, 두 딸이 설암으로 가다가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

서울 소식을 들으니 김제 숙모의 관을 거둘 사람이 없어 아직 종가 뒤뜰에 임시로 묻어 두었다고 한다.

참담하다.

오세량이 병에 걸려 길에서 죽었다는 말도 들었다.

슬픔을 견딜 수 없지만 아직 확실히 믿기는 어렵다.

오늘 밤에도 이귀, 이여실, 권수성 등과 밤이 반이 넘도록 이야기하다 잤다.

1593년 9월 30일 (계사년 음력 9월 6일)

이른 아침 길을 떠났다.

천원역 앞 판교 아래에서 말을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고부에 들어가 희철의 아내가 산다는 마을을 찾아 물으니 지난달 이미 태인 옛 고을 안에 있는 처남 집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돌아와 같은 고을에 있는 옛 감사 김계의 정자 아래 빈집에서 묵었다.

마을 사람에게 물으니 김 감사가 정자를 짓다가 마무리하기 전에 죽어 사방 벽이 무너지고 정자만 홀로 남았다고 했다.

정자를 지을 때는 틀림없이 평생 머물며 놀고 쉬는 곳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죽은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황폐하다.

사람의 일이 우습다.

아래에 농장이 있다는데 자손이 없는 듯하다.

자손이 있었다면 이렇게 버려 두었겠는가.

이귀가 내게 준 물건은 다음과 같다.

  • 흰쌀 두 말
  • 중간 쌀 세 말
  • 콩 세 말
  • 목미 한 말
  • 감장 한 말
  • 간장 한 말
  • 참기름 한 되
  • 생꿩 한 마리
  • 마른 닭 두 마리
  • 쇠고기포 다섯 줄
  • 조기 한 묶음
  • 안 부채 다섯 자루
  • 흰 종이 한 묶음
  • 가을보리 열 말

관의 창고가 텅 빈 가운데 힘껏 마련했다고 한다.

1593년 10월

1593년 10월 1일 (계사년 음력 9월 7일)

날이 밝자 출발했다.

태인에서 아침을 먹고 신창진까지 갔다.

마침 길손이 매우 많았고 술 취한 사람 하나가 나루 사공과 다투다가 머리채를 잡고 싸웠다.

그 때문에 제때 건너지 못하고 해가 저물었다.

어쩔 수 없이 나루터 사공의 집에서 묵었다.

온돌방이 있어 편히 하룻밤 잤다.

밤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생하게 뵙는 꿈을 꾸었다.

그리움과 슬픔을 견딜 수 없다.

1593년 10월 2일 (계사년 음력 9월 8일)

날이 밝기 전에 나루를 건넜다.

임피 길가에서 아침을 먹었다.

오늘은 장모의 기일이다.

오는 길에 소찬을 따로 준비하지 못해 아침에는 그저 두부장과 함께 밥을 먹었다.

송이의 발목이 시큰거려 멀리 걷지 못하고 자꾸 뒤처졌다.

어쩔 수 없이 함열현 안의 전 이천 사람 남궁씨 집 종 산이의 집에서 묵었다.

마침 순찰사가 함열에 들어와 관아가 어수선해 수령에게 이름을 알리지 못했다.

순찰사가 떠난 뒤 알렸더니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서헌으로 불렀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작은 술상을 차려 석 잔을 마신 뒤 돌아왔다.

안극인 생원이 뒤이어 들어왔다.

윤겸과 같은 나이의 친구다.

함열 수령은 우리 일행 모두에게 아침과 저녁밥을 내주었다.

1593년 10월 3일 (계사년 음력 9월 9일)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무수포에서 유선각을 만나 한 배를 타고 건넜다.

임천의 집에 도착하니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딸이 학질을 앓았다.

한탄스럽다.

집안 사람들은 모두 학질을 앓고 있고 아내가 특히 심하다.

몸이 뼈만 남을 만큼 쇠했다.

다른 병까지 생기면 큰일이다.

윤겸은 전보다 조금 나았다고 하지만 식사량이 예전 같지 않고 아직 걷지도 못한다.

매우 걱정스럽다.

저녁부터 비가 내려 밤까지 멎지 않았다.

1593년 10월 4일 (계사년 음력 9월 10일)

아내가 학질을 몹시 심하게 앓다가 해가 기울 무렵 조금 풀렸다.

걱정스럽다.

오전에는 이웃에 사는 유원 공이 술과 과일을 들고 찾아왔다.

후한 정이 고맙다.

이곳은 방이 비좁아 모두 잘 수 없어 어제부터 나는 소직의 곁방에서 잔다.

소직의 맏형 소은도 와서 함께 잤다.

종일 가랑비가 내렸다.

1593년 10월 5일 (계사년 음력 9월 11일)

어젯밤 이운의 꿈을 꾸었다.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너무나 슬펐다.

두 딸이 학질을 앓았다.

윤함은 새벽부터 한참 몸을 떨었고 열도 나며 머리가 조금 아팠다.

학질인 듯하다.

큰 병을 오래 앓은 뒤 또 학질까지 얻는다면 큰일이다.

걱정스럽다.

여종 셋도 모두 앓아누웠다.

저녁밥을 지어 줄 사람 하나가 없다.

한탄스럽다.

시윤의 아내가 사람을 따로 보내 데리러 오게 하여 세 딸을 데리고 찾아왔다.

저녁에 피치 못할 일이 있어 돌아가고 경진만 남아 단이와 함께 잤다.

1593년 10월 6일 (계사년 음력 9월 12일)

이른 아침 임천 수령 임극을 찾아갔다.

부탁할 일이 있었지만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다.

집에는 병든 아내와 병든 아들이 있는데도 작은 물건 하나 보내지 않는다.

참으로 야박하다.

아내와 사촌 관계인데 임천 수령에 임명되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의 힘을 빌려 우리 가족 몇 사람의 목숨을 연명할 수 있겠다며 사람들까지 모두 기뻐했다.

그런데 지금 그 마음씀씀이를 보니 더 기대할 것이 없다.

한탄스럽다.

임면부 부부가 마침 관아에 와 있어 찾아가 서로 난리 중의 일을 이야기했다.

날이 기울어서야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조희보 한림 형제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가 저물어 집에 돌아오니 배가 너무 고팠다.

임기 자장은 수령과 같은 집안 육촌이며 이곳에 얹혀살고 있다.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란 내 동갑 친구이기도 하다.

객지에서 우연히 만나 매우 반가웠다.

아내도 학질을 앓았다.

1593년 10월 7일 (계사년 음력 9월 13일)

임면부 참봉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아내와 두 딸이 학질을 앓았다.

아내는 그저께부터 날마다 발작하고 있어 걱정스럽다.

임면부가 데리고 온 종이 돌아갈 때 수령이 쇠고기 한 덩이를 보내 주었다.

종일 소씨 집에서 소직과 바둑을 두었다.

1593년 10월 8일 (계사년 음력 9월 14일)

밤에 비가 조금 내렸다.

이른 아침 조희식이 벼 열 말과 두부 두 덩이를 보내왔다.

마침 식량이 완전히 떨어졌던 때라 매우 고맙다.

임천 수령 임극이 재해 입은 논밭을 살피러 고을을 돌다가 한낮 이 마을을 지나며 아내를 잠시 보고 갔다.

그러나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일어났다.

우습다.

아내의 학질은 전보다 더 심하다.

수령이 왔을 때 마침 발작하고 있어 얼굴만 잠깐 보았다.

희철의 처가 사람 김담명도 찾아왔다가 갔다.

유원도 수령을 만나고 돌아갔다.

저녁에는 비가 조금 내렸다.

1593년 10월 9일 (계사년 음력 9월 15일)

새벽에 송이를 홍주의 윤겸에게 보냈다.

오랫동안 윤겸의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안부를 묻게 한 것이다.

막정도 함열로 보내 식량과 반찬을 구해 오게 했다.

경여의 아내는 익산으로 돌아갔다.

십구일에 소 면천의 장례가 있어 가 보려는 것이다.

성덕린이 술과 과일을 가지고 찾아왔다.

유선각도 마침 왔고 소직도 술과 떡을 내놓았다.

차분히 마시며 이야기하다 헤어졌다.

저녁에는 바람과 비가 있었다.

1593년 10월 10일 (계사년 음력 9월 16일)

아내의 학질이 갑절이나 심하다.

윤해도 오늘부터 다시 앓기 시작했다.

집안 위아래가 모두 앓고 있다.

병을 피한 사람은 나와 인아, 단이뿐이고 종 가운데는 막정과 송이뿐이다.

밤에는 소직과 인아와 함께 뒷냇가로 게를 잡으러 갔다.

열세 마리를 잡아 돌아오니 밤 이경이었다.

1593년 10월 11일 (계사년 음력 9월 17일)

어제부터 식량과 반찬이 완전히 떨어졌다.

저녁에는 쌀 두 되에 미역을 넣어 죽을 끓여 열 명이 넘는 식구가 나누어 먹었다.

사람의 삶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한탄한들 무엇하겠는가.

병든 아내와 병든 자식에게 배불리 먹이지 못하니 더욱 가슴이 아프다.

오늘 아침에는 씨로 남겨 둔 보리 한 말을 찧어 먹으려 했다.

그런데 마침 유선각이 마른 벼 세 말을 사람을 시켜 보내 주었다.

오늘 굶는 것은 면하게 되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속담에 산 사람의 입에는 거미줄이 치지 않는다고 하더니 바로 이런 경우인가.

윤겸도 세만을 보내 안부를 묻고 돌아갔다.

윤겸의 편지를 보니 그도 전에 앓던 학질이 다시 도져 세 번이나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 나를 찾아오지 못한다.

걱정스럽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안부조차 자주 묻지 못한다.

살림은 날마다 더 곤궁해진다.

사방을 둘러봐도 의지할 곳이 없다.

내년 봄까지 갈 것도 없이 이번 겨울이 오기 전에 굶어 죽는 귀신이 될 것 같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녁에는 막정이 돌아왔다.

함열 수령 신응구가 다음을 보내 주었다.

  • 흰쌀 다섯 말
  • 좋은 벼 열 말
  • 콩 네 말
  • 소금 한 말
  • 찹쌀 한 말
  • 마른 민어 두 마리
  • 누룩 다섯 덩이
  • 씨보리 네 말
  • 쇠고기 두 덩이

며칠은 목숨을 이어갈 수 있겠다.

고맙기 그지없다.

함열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번 가을을 넘기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보답할 길이 없어 온 가족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아내와 두 딸, 윤해와 여종 넷이 모두 학질로 누워 있다.

저녁밥을 지을 사람도 없다.

발작이 멎은 뒤에야 밥을 지을 테니 틀림없이 밤이 깊을 것이다.

한탄스럽다.

저녁에는 시윤의 장인 이언우가 찾아왔다가 갔다.

이언우는 피란하여 이산 땅을 떠돌다가 딸을 보러 이곳에 왔다.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유선각도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1593년 10월 12일 (계사년 음력 9월 18일)

아침에 윤함도 학질을 앓았다.

큰 병이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는데 또 이 병을 얻었으니 걱정스럽다.

유선각 집에 종을 보내 달걀 세 개를 얻어왔다.

윤함이 삶아 먹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변응익이 찾아와 생밤 몇 되를 주었다.

그도 이 고을에 피란해 와 있는 사람이다.

성덕린이 찾아왔다.

가까운 시일 안에 그의 종 집으로 옮겨 살까 하여 함께 가 집의 크기와 방 상태를 살펴보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조희보 한림도 찾아갔다.

형수와 세 딸, 시룡의 어머니가 게를 잡으러 갔다.

인아가 데리고 갔지만 한 마리밖에 잡지 못했다. 우습다.

인아 혼자 있을 때는 일곱 마리나 잡았다.

사람이 많으면 소란스러워 게가 물을 따라 달아나 많이 잡지 못한 것이다.

1593년 10월 13일 (계사년 음력 9월 19일)

이른 아침 시윤의 장인 이언우를 만나려고 그가 묵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어제 낮 이미 이산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시윤의 아내만 만나 잠깐 서서 이야기했다.

하늘이 비가 오려는지 물 밑에서 소리가 나 서둘러 돌아왔다.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천둥과 큰비가 쏟아졌다.

두 방 모두 비가 새 앉아 있을 곳도 없었다.

윤함은 어제 학질을 앓은 뒤 식사량이 갑자기 줄었다.

오늘 아침까지도 몸이 좋지 않고 머리도 아프다고 한다.

걱정스럽다.

막정을 수령에게 보내 편지를 전하고 젓국물을 조금 얻으려 했지만 문지기가 막아 편지를 들이지 못했다.

빈손으로 돌아왔다. 한탄스럽다.

송이는 보령의 윤겸에게서 돌아와 윤겸의 편지를 가져왔다.

학질은 조금 나았다고 한다. 기쁘다.

하지만 오래 만나지 못해 그리움이 더욱 커진다.

송이는 대흥 윤함 처가 종 애운의 집에 들러 윤함 아내의 편지도 가져왔다.

가족 모두 지금까지 무사하다고 한다. 다행이다.

또 윤함의 장인 편지를 통해 임금께서 지난 팔월 하순 해주로 가셨고 왕위를 동궁에게 넘기려 하여 이품 이상의 대신들이 의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떻게 의논이 끝났는지는 모른다.

오늘은 아내가 잠깐 학질을 앓다가 빨리 나았고 둘째 딸도 마찬가지였다.

윤해와 큰딸만 학질을 앓았다.

나도 오후부터 온몸이 묶인 듯하고 마디마디가 풀리는 것 같으며 머리가 조금 아팠다.

한밤중까지도 개운하지 않다.

학질이 오려는 듯하다.

1593년 10월 14일 (계사년 음력 9월 20일)

아침을 먹고 유원 공을 찾아갔다.

뽕나무 줄기 조각을 잘라 왔다.

학질을 치료하는 데 쓰려는 것이다.

유원은 나를 행랑으로 불러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그의 아들 유선각은 몸이 좋지 않아 누워 땀을 내느라 나오지 못했고 찰떡만 보내 주었다.

아내는 이제 학질이 떨어져 앓지 않는다. 기쁘다.

윤함은 학질을 앓고 가벼운 이질까지 생겼다.

뽕나무 조각 달인 물을 마신 탓인 듯하다.

그러나 큰 병 뒤에 이질까지 얻으면 위험하다.

걱정스럽다.

윤해도 오늘 학질을 앓았지만 전보다는 조금 덜했다.

1593년 10월 15일 (계사년 음력 9월 21일)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 치마를 벗고 창밖으로 소변을 보다가 온몸이 갑자기 조금 떨렸다.

곧 이불 속으로 들어가 한참 있다가 진정되었다.

그저께부터 좋지 않던 기운이 아직 남아 있었는데 오늘 아침은 더 좋지 않다.

처음에는 학질인가 했지만 이틀째 이러는 것을 보니 감기에 걸린 듯하다.

걱정스럽다.

오늘 윤해와 큰딸이 학질을 앓았다.

둘째 딸은 앓지 않았다.

윤함은 이질 때문에 더욱 신경이 쓰이고 식사량도 크게 줄었다.

걱정스럽다.

나도 종일 몸이 좋지 않았다.

1593년 10월 16일 (계사년 음력 9월 22일)

어젯밤 온돌을 따뜻하게 하고 땀을 냈다.

아침에는 조금 나은 듯했지만 아직 완전히 개운하지는 않았다.

오후부터 땀이 많이 나고 저녁에는 완전히 나았다.

윤함은 학질을 앓았고 이질도 아직 낫지 않았다.

걱정스럽다.

윤해도 학질을 앓았다.

밤에는 소씨 집에 온 젊은 손님과 한 방에서 잤다.

이름은 한선일이며 원주 목사 한준겸의 조카라고 한다.

1593년 10월 17일 (계사년 음력 9월 23일)

늦은 낮 유원 부자가 찾아왔다가 갔다.

윤해와 큰딸이 학질을 앓았다.

윤해는 날마다 앓고 있어 떨어지지 않는다.

걱정스럽다.

1593년 10월 18일 (계사년 음력 9월 24일)

송이는 직산의 아버지 집으로 휴가를 받아 돌아갔다.

겨울옷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예산을 지나갈 때 김지남 집에 편지를 전하게 했다.

저녁에는 조희보 한림이 상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 상을 치른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다시 어머니를 잃었다.

참으로 불행하다.

그러나 우리처럼 떠돌며 의지할 데 없는 사람과는 형편이 다르다.

이곳에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재산이 넉넉하니 먹고사는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 점은 다행이다.

시윤이 종 수억과 덕손에게 말을 들려 보내 아내와 자식들을 데려가려 했다.

그 집안은 모두 무사하지만 먹을 것이 몹시 어렵다고 한다.

가엾다.

1593년 10월 19일 (계사년 음력 9월 25일)

이른 아침 시윤의 아내가 들러 인사하고 장수로 돌아갔다.

길이 바빠 그 집에 보내는 편지를 쓰지 못했다. 아쉽다.

경여도 자기 딸을 데려가려고 종과 말을 보냈으나 사정이 생겨 딸이 돌아가지 못하고 종만 빈손으로 갔다.

소직은 도사를 만나려고 고을로 들어갔다.

막정은 익산에서 돌아왔다.

경여가 벼 여덟 말을 보내 주었다.

저녁에는 조희보 집에 가 상복을 마련하는 사람들을 보고 돌아왔다.

오늘 윤함도 학질을 앓았다.

날마다 앓으니 너무나 걱정스럽다.

요즘 식량과 반찬이 부족하고 병환이 이러하지만 병든 아들이 먹고 싶어 하는 것을 구할 길이 없다.

더욱 답답하다.

여종 동을비는 요즘 누운 채 일어나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며 얼굴까지 부었다.

오랫동안 찬 곳에 있으면서 바람을 막지 못해 생긴 병일 것이다.

틀림없이 죽을 듯하다.

가엾다.

1593년 10월 20일 (계사년 음력 9월 26일)

윤해와 윤함 형제가 종일 학질을 앓았다.

소씨 집에 있었지만 몹시 무료했다.

1593년 10월 21일 (계사년 음력 9월 27일)

윤해와 함께 조희보 집의 성복을 보러 갔다.

그런데 관을 아직 다 만들지 못해 입관이 밤늦게나 가능하고 성복도 오늘은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왔다.

고을의 향리와 양반들도 많이 모였다가 모두 흩어졌다.

인아가 그물을 들고 물고기를 잡아 스무 마리 넘게 잡았다.

쪄서 윤함에게 주었다.

윤함은 오랫동안 병을 앓아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고 아무것도 먹으려 하지 않아 물고기라도 잡아 준 것이다.

윤함과 큰딸은 또 학질을 앓았다.

윤함은 전보다 조금 덜했고 이질도 줄었다.

저녁에는 명복이 돌아왔다.

부여 수령 박동도가 흰쌀 두 말과 목미 한 말을 보내 주었다.

식량이 끊긴 가운데 뜻밖에 얻은 물건이라 매우 고맙다.

1593년 10월 22일 (계사년 음력 9월 28일)

어젯밤 동을비가 세상을 떠났다.

대대로 내려온 늙은 여종 가운데 이 아이만 살아 있었는데 타향에서 죽었다.

너무나 가엾다.

곧 종들에게 묻게 했다.

종이 없어 조희보 집 성복에도 가지 못했다.

성덕린이 쌀과 콩을 각각 한 말씩 보내 주었다.

이른 아침 윤해는 집을 빌리는 일로 수령을 찾아갔다가 돌아왔다.

1593년 10월 23일 (계사년 음력 9월 29일)

종일 비가 내렸다.

때로는 조금 내리고 때로는 갰다.

아침을 먹고 비를 무릅쓰고 고을로 들어갔다.

수령은 이미 관아에 나와 있어 만나지 못했다.

임면부 참봉 집만 찾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빌려 살려고 하는 집을 살펴보니 살 만했다.

다만 우물이 멀고 땔나무 구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쉽다.

1593년 10월 24일 (계사년 음력 10월 1일)

윤해가 종 둘을 데리고 새로 빌린 집으로 가 청소하고 창을 바르고 땔나무를 마련해 온돌을 덥힌 뒤 돌아왔다.

나는 종일 소씨 집에 있었다.

저녁에는 유선각이 내일 우리가 이사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오랫동안 이야기하다 돌아갔다.

이미 밤이 깊었다.

1593년 10월 25일 (계사년 음력 10월 2일)

조희윤과 유선각, 이정시에게 말을 빌렸다.

아침을 먹고 임천에서 서쪽으로 오 리쯤 떨어진 검암리 백성 덕림의 집으로 옮겼다.

두 번 왕복하고 나니 날이 저물었다.

덕림은 죽은 지 오래다.

그 외손 김화동이 가까이에 살지만 꺼리는 일이 있어 여러 해 동안 들어가 살지 않아 집이 오래 비어 있었다.

다른 사람이 빌려 살고 있었는데 수령의 패를 받아 그 사람을 내보내고 우리가 들어왔다.

이 집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네 가지다.

첫째, 온돌이 너무 차가워 장작 한두 단으로는 따뜻해지지 않는다.

둘째, 땔나무할 곳이 너무 멀다.

셋째, 우물도 멀다.

넷째,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으면 연기가 집 안에 가득 차 눈을 뜰 수가 없다.

그러나 안팎 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기와집이며 깨끗하기 때문에 식구들은 좋아하며 다시 옮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더 큰 걱정은 요즘 식량과 반찬이 모두 떨어졌다는 것이다.

오늘 저녁도 겨우 조금 먹었다.

내일부터는 끼니를 마련하기가 매우 어렵다.

살림살이가 한탄스럽다.

오는 길에 조희보 집에도 들러 조문했다.

윤함은 길에서 학질이 발작해 겨우 집에 들어왔다.

오늘은 특히 심하다.

걱정스럽다.

윤해는 며칠째 학질을 앓지 않아 아마 떨어진 듯하다.

1593년 10월 26일 (계사년 음력 10월 3일)

어젯밤 온돌이 너무 차가워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침 전에 윤해와 성덕린의 종 집으로 달려가 안팎을 쓸고 온돌에 불을 때고 돌아왔다.

내일 그 집으로 옮겨갈까 하기 때문이다.

다만 오래된 초가라 비가 새고 집도 깨끗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아침밥은 임면부에게 쌀을 빌려 먹었다.

저녁에는 콩 세 되를 갈아 콩죽을 끓여 온 식구가 나누어 먹었다.

모두 배가 차지 않았다.

한탄스럽다.

1593년 10월 27일 (계사년 음력 10월 4일)

어젯밤 이운의 꿈을 꾸었다.

살아 있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꿈에서 깬 뒤 얼굴과 말소리가 눈앞에 선명했다.

너무나 슬프다.

이른 아침 윤해가 한겸 진사에게 편지를 보내 벼 두 말을 빌렸다.

솥을 데워 말린 뒤 찧어 밥을 지어 먹으니 이미 한낮이었다.

온 식구가 너무 배고팠지만 먹을 것도 적었다.

쌀 한 되를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한탄한들 무엇하겠는가.

이웃에 사는 늙은 아전이 장국 한 사발과 김치 한 그릇을 보내왔다.

또 병방 아전의 아내가 아내를 찾아와 큰 홍시 일곱 개를 주었다.

윤함이 병중에 이런 것을 먹을 수 있어 다행이다.

그 뒤 달걀 세 개, 녹두 세 되, 박 한 개도 보내왔다.

윤해의 양어머니는 먼저 대조동 성덕린의 종 집으로 보냈다.

이 집은 방이 작아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날씨가 더 추워지면 이 집에서는 살기 어려워 우리도 옮길 생각이 있다.

다른 사람이 먼저 차지할까 싶어 양어머니를 먼저 보낸 것이다.

이웃 교생 김대성과 아들 김정도 찾아왔다가 갔다.

이곳은 고을과 가까워 주변에는 관청 사람들 집이 많다.

마을 풍속이 나쁘지 않고 빌려 달라고 하면 인색하게 굴지 않는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작은 물건이라도 자주 보내 준다.

후한 사람들이다.

저녁에는 집주인 노파가 대추와 밤을 가지고 아내를 찾아왔다가 갔다.

오후부터 비가 내려 밤새 멎지 않았다.

1593년 10월 28일 (계사년 음력 10월 5일)

아침에도 비가 내렸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식량과 반찬마저 떨어졌다.

어디에 가서 빌릴 수도 없다.

녹두 몇 되로 죽을 끓여 나누어 먹을 뿐이다.

춘기는 환곡 문제로 비를 맞으며 나갔다.

막정도 아내를 데리고 이탁의 아내와 자식들을 고을에서 반 식경 떨어진 이탁의 종 집으로 옮겨 주었다.

그들도 식량이 없으므로 비가 온다고 머물 수 없었다.

이웃 김대성이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감장 한 사발과 여러 가지 김치를 한 상 가득 보내 주었다.

정말 고맙다.

또 이웃에서 사발 두 개, 접시 두 개, 종지 두 개, 팥 두 되, 생채와 김치를 조금씩 보내왔다.

집주인 노파도 손자며느리를 데리고 술과 대추, 밤을 가지고 아내를 찾아왔다.

세 딸도 나와 만났다.

이웃 병방의 아내는 접시 네 개, 큰 접시 네 개, 팥 세 되를 보냈다.

아침에 종을 임면부에게 보내 쇠간 한 덩이를 얻어왔다.

윤함이 병중에 반찬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편지로 청한 것이다.

저녁에는 먹을 곡식이 없었다.

방법이 없어 윤해가 직접 조윤공 좌수 집으로 가 굶고 있다는 사정을 말했다.

조윤공이 벼 세 말을 주어 먼저 종에게 지워 보냈다.

곧 솥에 데워 말리고 찧어 밥을 지으니 이미 밤이 깊었다.

그래도 모두 배가 차지 않았다.

한탄스럽다.

조씨 집에서는 윤해에게 저녁밥까지 먹여 보냈다고 한다.

이곳은 관아에서 가깝지만 수령 임극은 한 번도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지 않는다.

우리가 이렇게 곤궁해도 돌아보지 않고 물 한 숟갈 보태지 않는다.

사람의 정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남이라도 불쌍히 여겨 도와야 할 텐데 하물며 가까운 친척이 큰 고을의 수령이 되어 이렇게 모른 체하니 단순히 야박한 정도가 아니다.

참으로 모진 사람이다.

원망스럽고 한탄스럽다.

1593년 10월 29일 (계사년 음력 10월 6일)

집주인이 쌀 두 되와 팥 두 되를 보내 주어 온 식구가 밥을 지어 먹었다.

저녁에는 콩 두 되로 죽을 쑤어 나누어 먹었다.

한낮에는 안낙국자가 찾아왔다가 갔다.

진위에서 편지가 와 윤해의 아내와 자식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았다.

윤해의 아내가 밤을 보내왔다.

아이들이 함께 나누어 먹었다.

윤함이 병중에 먹고 싶어 하던 것이어서 더욱 기뻤다.

1593년 10월 30일 (계사년 음력 10월 7일)

어제 저녁 집주인에게 벼 두 말을 빌려 온돌을 데우며 말렸다.

이른 아침 찧어 밥을 지어 먹었다.

이 뒤로는 빌릴 곳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종과 말을 데리고 부여로 떠났다.

먹을 것을 구해 궁한 처지를 구제하려는 것이다.

오는 길에 임면부 집에 들렀는데 참봉은 관아에 들어가 없었다.

그 아내를 만나고 나왔다.

전에 임면부와 함께 부여에 가 옛 유적을 구경하기로 약속했는데 서로 때가 맞지 않아 아쉽다.

백마강을 건너는 길에 부여 수령 박동도가 관아에 없다는 말을 듣고 몹시 아쉬웠다.

사삿집에 들어가 아전 자제들을 불러 물으니 수령은 정광적 참의가 고을 경계에 왔다는 말을 듣고 만나러 갔고 저녁에는 돌아온다고 했다.

강위와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 수령이 크게 취해 돌아와 만나지 못했다.

객관 윗방에서 묵었다.

밤에는 강위가 찾아왔다.

추로주를 구해 함께 마시다 밤이 깊어 돌아갔다.

1593년 10월 31일 (계사년 음력 10월 8일)

수령이 나를 관아로 불러 함께 아침을 먹었다.

박적 인의도 함께했다.

오후에는 박적과 박원과 함께 배를 탔다.

백마강을 따라 올라가 먼저 조룡석과 낙화암을 보고 고란사에 올라 오래 앉아 구경하다 돌아왔다.

배를 타고 물을 따라 내려왔다.

수령이 술과 안주를 마련해 보내 주어 우리 셋이 마주 앉아 마셨다.

크게 취해 객관으로 돌아오니 이미 날이 저물었다.

오늘은 서쪽 윗방에서 잤다.

동쪽 윗방에는 죽산 출신 박동준이 와서 묵었기 때문이다.

박동준은 수령과 사촌이고 오늘 저녁 막 도착했다.

1593년 11월

1593년 11월 1일 (계사년 음력 10월 9일)

수령이 다시 관아로 불러 아침을 함께 먹었다.

박동준, 박적, 임소설의 둘째 아들 임경연도 함께했다.

늦은 아침 비가 조금 내리다가 한낮에는 개었다.

곧 현의 몽대리로 달려가 정 사과 집이 피란해 있는 곳을 찾았다.

점심을 대접받고 벼 다섯 말과 조개젓을 조금 받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이탁을 찾아갔다.

이탁의 어머니도 이웃 김덕장 찰방의 농막에 피란해 있었다.

저녁에는 큰비가 내려 밤까지 멎지 않았다.

아침에는 사포 숙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나 슬프고 또 슬프다.

이광복도 이달 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더욱 슬프다.

지난해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우리 가족이 그 계당을 빌려 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사포 숙부도 이광복의 이웃에 피란해 있었기에 나는 날마다 찾아가 뵈었다.

숙부는 병중에도 나를 위해 일곱 폭 그림을 그려 주었다.

우리가 임천으로 옮길 때에도 매우 섭섭해하셨다.

이제 부고를 들으니 더욱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김찬선 형이 인천 수령으로 임명되자 숙부도 그를 따라 인천으로 갔고 지난 구월 보름 무렵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홍주에서 세상을 떠났다면 장례를 치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인천은 선산에서 가까워 장례하기 편했으니 그것만은 불행 중 다행이다.

이좌수 우씨 집은 재산이 넉넉했고 아들 둘뿐이었다.

맏아들 이광륜은 지난해 여름 조헌 의병에 참여했다가 금산 전투에서 죽었다.

둘째 이광복도 이번 가을 병으로 죽었다.

두 해가 지나기도 전에 두 아들을 모두 잃었다.

본인도 늙어 중풍으로 방 밖에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사람의 일이 참으로 한탄스럽다.

1593년 11월 2일 (계사년 음력 10월 10일)

아침에 윗방으로 가 박동준과 이야기했다.

박원 형제와 박적, 임경연, 이양 등도 함께했다.

아침을 함께 먹었다.

수령 박동도가 나를 관아로 불러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령이 관청으로 나간 뒤 나는 객사로 돌아왔다.

젊은 사람들도 따라와 감고루에 올라 활을 한 차례 쏘고 그쳤다.

나는 임경연과 나란히 말을 타고 배로 백마강을 건너 임천으로 돌아왔다.

해가 지기 전 집에 도착했다.

돌아와 보니 어제 임천 수령 임극이 쌀 두 말을 보내왔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우리 집이 곤궁하다고 말해 주어 내준 것이라고 했다.

오늘 낮에는 함열 수령 신응구가 사람을 따로 보내 다음을 보냈다.

  • 쌀 두 말
  • 새우젓 스무 개
  • 백새우젓 네 되
  • 종이 세 묶음

편지에는 이렇게 썼다.

“요즘 왜 사람을 보내 필요한 것을 가져가지 않습니까?”

우리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늘 이렇게 마음을 써 주니 그 후한 정을 보답하기 어렵다.

온 가족이 고마워한다.

윤함 처가의 여종 옥지도 옷을 가지고 왔다.

그 집 사람들은 모두 무사하다고 한다.

기쁘다.

윤함은 학질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올해 안에는 서쪽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듯하다.

나는 이번에 부여까지 직접 갔지만 부여 수령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지난달에도 사람을 보냈고 이번에는 직접 갔으니 수령도 번거롭게 여겼을 것이다.

부끄럽다.

아내와 자식들은 내가 먹을 것을 가져오기를 몹시 기다렸는데 끝내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다.

타향을 떠돌며 사방에 친척 하나 없고 굶주림은 날마다 가까워지니 가는 곳마다 구걸하며 부끄러운 얼굴을 들 수밖에 없다.

어찌하겠는가.

함열의 도움마저 없었다면 우리 가족은 벌써 굶어 죽었을 것이다.

1593년 11월 3일 (계사년 음력 10월 11일)

이웃 김대성이 찾아왔다가 갔다.

윤해는 어쩔 수 없이 집주인 문제를 처리하려고 고을로 들어가 수령을 만나고 돌아왔다.

소직도 찾아왔다가 갔다.

저녁에는 임천 수령 집에서 삶은 고기 한 광주리를 보내왔다.

온 가족이 함께 먹었다.

아내는 오후부터 약간 오한이 들고 몸이 좋지 않았다.

따뜻한 방에 이불을 덮고 누웠다.

학질이 오려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1593년 11월 4일 (계사년 음력 10월 12일)

종일 집에 있었다.

너무나 무료했다.

안손에게 뒷간을 만들게 했다.

윤함 처가 여종 옥지는 편지를 받아 서쪽으로 돌아갔다.

또 오세검이 문의에 있다가 벼 서른 말을 받아 집에 두었는데 화적을 만나 겨우 몸만 살아났다는 말을 들었다.

그곳이 얼마나 굶주리고 궁핍한지 알 만하다.

저녁에는 경여의 종 성동이 익산에서 찰떡을 가져왔다.

경여의 아내가 보낸 것이다.

경여와 이언좌가 고을 안 임면부의 숙소에 와 있다고 한다.

내일 만나려 한다.

이언좌는 나와 동서 사이인데 첫 아내가 젊어서 죽고 지금은 재혼했다.

피란해 전주의 농막에 살고 있다.

1593년 11월 5일 (계사년 음력 10월 13일)

경여와 이언좌가 찾아왔다.

아내는 이언좌를 안으로 불러 만났다.

나는 아들들과 경여와 함께 앉아 오래 이야기했다.

이언좌는 참깨 한 말과 생강 세 되를 주었다.

병중에 마침 이런 물건이 부족했는데 뜻밖에 받으니 매우 고맙다.

이언좌는 종을 찾아오려고 한산으로 갔다.

그의 자는 계우다.

경여는 남아 있다가 저녁을 먹고 임면부의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 집에는 잘 방이 없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소직도 찾아왔다.

저녁을 먹여 보냈다.

윤해는 집주인이 죽은 뒤 재산을 입안 받는 일로 고을에 들어갔다.

수령 임극이 굴 두 되와 절인 웅어 열 마리를 보내 주었다.

나도 수령에게 편지를 보내 절인 게 스무 마리, 말먹이콩 다섯 되, 소금 세 되를 얻었다.

게는 내일 영암으로 안부를 물으러 가는 종에게 맡겨 어머니께 보내려 한다.

아내는 학질을 앓았다.

1593년 11월 6일 (계사년 음력 10월 14일)

막정은 오늘이 좋지 않은 날이라 떠나지 않았다.

내일 이탁의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익산까지 간 뒤 남쪽으로 갈 생각이다.

한낮에 경여가 찾아왔다.

마침 이웃 사람이 술과 안주를 가져와 두 사발 먹여 보냈다.

기쁘다.

윤겸의 종 세만이 들어왔다.

편지를 보니 윤겸의 학질이 떨어졌다고 한다.

매우 기쁘다.

윤겸은 찰떡 한 광주리, 꿩과 닭 각각 한 마리, 마른 생선과 젓갈 등을 보냈다.

떡은 아이들과 함께 먹었다.

꿩과 닭은 국을 끓여 병든 윤함에게 먹일 생각이다.

1593년 11월 7일 (계사년 음력 10월 15일)

새벽에 세만은 보령으로 돌아갔다.

어머니 문안을 위해 막정은 영암으로 내려갔다.

아침 전에 윤해는 아내의 조카 최지선을 만나려고 고을 박곡촌으로 갔다.

여기서 십여 리라고 한다.

최지선이 추수 때문에 이곳에 왔다.

한낮에 윤해가 돌아왔다.

최지선이 아직 오지 않아 만나지 못하고 헛걸음했다.

아침을 먹은 뒤 너무 무료하여 두 아들과 뒤 언덕에 올랐다.

사방이 훤히 트여 임천 관아가 내려다보이고 멀리 바닷물이 밀려들며 돛단배가 오가는 것이 보였다.

객지에서 답답한 마음을 조금 풀 수 있었다.

단이도 따라 올라왔다.

아내의 학질은 전보다 훨씬 심했고 윤함도 마찬가지였다.

걱정스럽다.

저녁에 먹을 곡식이 없어 아이들과 콩죽을 먹었다.

이웃 사람이 콩 세 되와 쌀 두 되를 보내 주어 끓인 것이다.

1593년 11월 8일 (계사년 음력 10월 16일)

향춘을 임면부 참봉의 숙소로 보냈다.

참봉의 아내가 장 한 그릇과 절인 진어 한 마리, 젓갈을 조금 보내 주었다.

수령 집 안에서도 국거리 고기와 산적, 젓갈과 채소 등을 한 광주리 보내왔다.

아내와 자식들이 함께 먹었다.

무료하여 지팡이를 짚고 집 앞 밭두렁을 거닐었다.

마음을 터놓고 말할 사람이 없으니 몹시 한탄스럽다.

밤에는 아내와 윤함이 학질을 앓았다.

날마다 발작한다.

집에는 쌀 한 되도 남지 않았다.

여종 둘도 날마다 앓는다.

걱정스럽다.

1593년 11월 9일 (계사년 음력 10월 17일)

이른 아침 김대성이 다음을 보내왔다.

  • 술 한 병
  • 전과 여러 색 떡 한 그릇
  • 세 종류 과일
  • 두부와 구이
  • 삶은 닭다리 하나
  • 김치 한 그릇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먹었다.

매우 고맙다.

저녁에는 밥 지을 것이 없었다.

나와 윤해, 윤함은 쌀 한 되 반을 지어 먹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콩 두 되만 쪄 나누어 먹었다.

배가 차지 않았다.

가엾다.

타향을 떠돌아 사방에 친척 하나 없는데 가난은 이 지경이고 병환까지 겹쳤다.

어찌할 수가 없다.

윤함 모자는 밤 초경에 학질을 앓았다.

윤함의 어머니는 그 때문에 저녁도 먹지 못했다.

더욱 안타깝다.

1593년 11월 10일 (계사년 음력 10월 18일)

아침 먹을 곡식을 구할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향춘을 관아 안으로 보내 수령 임극에게 편지를 전했다.

수령이 쌀 한 말을 보내 주어 아침과 저녁으로 나누어 먹기로 했다.

윤해 처가의 종이 겨울옷을 가지고 왔다.

가족들이 모두 무사하다고 한다. 기쁘다.

최지선이 이제야 박곡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윤해가 달려가 그를 만나 함께 묵었다.

내일 돌아온다고 한다.

임면부도 찾아왔다가 갔다.

이우춘 별감도 이 고을에 피란해 있었다.

길을 지나가다 우리 여종을 만나 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

임면부와 함께 말을 타고 고을로 들어가 순찰사가 내준 물건을 받으려 한다고 했다.

이우춘은 이운과 동갑 친구로 예전에 이운의 집에서 만난 적이 있다.

아내의 학질은 아주 심하지 않았다.

1593년 11월 11일 (계사년 음력 10월 19일)

아침에는 콩 두 되로 죽을 끓여 나누어 먹었다.

아침을 먹고 너무 무료하여 인아와 지팡이를 짚고 울타리 밖으로 나갔다.

김대성을 불러 함께 동쪽 봉우리에 올랐다.

아래 마을을 내려다보며 김대성이 집집마다 누구 집인지 가리켜 주었다.

이 봉우리는 화산이라고 했다.

봄철이면 진달래가 가득 피어 술을 들고 놀러 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위에는 소나무가 우산처럼 드리워 있고 땅도 넓고 평평해 열 사람 넘게 앉을 수 있었다.

멀고 가까운 곳이 사방으로 막힘없이 보였다.

좋은 곳이다.

오랫동안 앉아 구경했다.

김대성이 옛이야기도 들려주었지만 대부분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래도 적막한 마음을 풀고 근심을 잊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윤해는 아내의 조카 최지선을 만나고 돌아왔다.

내일 진위로 가고 싶어 하지만 여행 식량을 마련하기 어려워 실제로 떠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최지선에게서 심설이 금오랑에 임명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전에 윤함의 아내 편지에 심설이 도사에 임명되었다고 적혀 있어 믿기 어려웠는데 이제 최지선의 말을 들으니 사실인 듯하다.

매우 기쁘다.

심설의 어머니는 내 누이다.

나보다 열 살 아래인데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뒤 외할머니 집에서 자랐고 내게 공부했다.

우리 아들들과 함께 여러 해 지냈기 때문에 나는 심설을 내 자식처럼 여긴다.

이제 음직으로 벼슬을 얻었으니 온 집안이 기뻐한다.

다만 이런 난세에 조정이 어수선하고 동서로 뛰어다닐 일이 많으니 끝까지 무사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심설의 장인은 민준 참판이니 아마 그의 힘으로 벼슬을 얻었을 것이다.

집주인 노파가 추수 일로 다른 곳에 갔다가 오늘 돌아왔다.

팥 두 되와 찰떡 다섯 조각을 보내왔다.

팥으로 죽을 끓여 저녁을 대신했다.

어제 낮 단이에게 벼루를 가져오라 했는데 손에서 놓쳐 깨뜨렸다.

아깝다.

이 벼루는 삼십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장성 수령으로 계실 때 허탄에게 집을 짓게 하고 여행용 상자에 늘 넣어 두었던 것이다.

난리가 난 뒤 집안 물건을 모조리 잃었지만 이 벼루만은 내가 장천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남았다.

그런데 이제 깨지고 말았다.

물건의 흥망도 운수가 있는 모양이다.

집에 쓸 벼루도 없으니 깨진 부분을 붙여 계속 쓸 생각이다.

단이는 벼루를 깨고 내가 꾸짖을까 두려웠는지 계속 울었다.

가엾다.

1593년 11월 12일 (계사년 음력 10월 20일)

윤해는 진위로 가고 싶어 했지만 여행 식량을 마련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이른 아침 고을로 들어갔다.

마침 수령 임극이 출장 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오늘 떠나지 못했다.

종일 흐리고 바람이 불었으며 때때로 빗방울도 내렸다.

아침밥 지을 것이 없어 향을 임면부 집에 보내 쌀 세 되를 구해왔다.

아침과 저녁에 죽을 끓여 온 식구가 나누어 먹었다.

병든 아들까지 배를 채우지 못한다.

한탄한들 무엇하겠는가.

딸들은 행전 같은 물건을 만들어 향에게 이웃에 팔게 했다.

벼 두 말과 콩 세 되를 얻었다.

솥에 볶아 찧어 내일 윤해의 여행 식량으로 쓰려 한다.

며칠 사이 아내와 둘째 딸은 학질이 떨어졌다.

윤함만 아직 낫지 않아 밤마다 발작한다.

먹을 것도 마음껏 먹지 못하고 굶는 일이 많으니 슬픔을 참을 수 없다.

1593년 11월 13일 (계사년 음력 10월 21일)

어젯밤부터 바람이 불고 눈발이 날렸다.

아침까지 개지 않아 산과 들이 모두 희었다.

윤해는 어쩔 수 없이 바람과 눈을 무릅쓰고 떠났다.

집에 종이 없어 어린 종 안손 하나만 데리고 갔다.

여행 식량도 충분히 마련하지 못했다.

길에서 얻어먹으며 가겠다고 한다.

생각할수록 슬프고 눈물이 난다.

나는 본래 살림살이에 서툴러 평상시에도 아내와 자식을 제대로 먹여 살리지 못해 쌀독이 자주 비었다.

하물며 이런 난리 뒤 타향을 떠도는 지금은 기댈 친척도 없고 의지할 농장도 없다.

우연히 이곳에 몸을 붙였지만 굶주림과 추위가 날마다 심해진다.

앞으로 또 얼마나 고생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저 한탄할 뿐이다.

전에 쌀 네 되로 술을 빚어 두었는데 오늘 향에게 들려 장에 내다 팔고 쌀로 바꾸게 했다.

내일 먹을 것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이런 눈보라 속에서도 먹는 일이 급하니 술을 보고도 한 잔 마시지 못한다.

한탄스럽다.

저녁에는 동쪽 이웃의 병든 노모가 밥 한 그릇을 지어 울타리 틈으로 건네주었다.

나와 윤함이 절반씩 나누어 저녁을 때웠다.

아내와 아이들은 흰죽을 끓여 먹었다.

가엾다.

요즘 종이 없어 오랫동안 땔나무를 하지 못했다.

날은 이렇게 추운데 온돌에 불조차 때지 못한다.

아이들의 이부자리도 매우 얇은데 차가운 방에서 잔다.

걱정스럽다.

1593년 11월 14일 (계사년 음력 10월 22일)

어제 눈이 온 뒤 오늘은 맑았지만 바람이 매우 차갑다.

요즘 먹을 것이 없어 날마다 죽을 끓여 먹는데 그조차 그릇을 채우지 못한다.

아이들이 빈 배를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나 가엾다.

송이는 지난달 하순 휴가를 받아 집으로 간 뒤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굶주림이 이처럼 심한데 심부름할 사람까지 없어 아는 곳에 가서 빌려올 수도 없다.

몹시 괘씸하다.

저녁에는 양식이 완전히 떨어졌다.

쌀 일곱 홉으로 죽을 끓여 아이들이 나누어 먹었다.

아이들이 죽을 마시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밤에 집주인이 벼 두 말, 좁쌀 한 되, 콩 일곱 되를 가져왔다.

아마 우리가 굶는다는 말을 들은 모양이다.

곧 콩 두 되를 쪄 나누어 먹어 허기진 배를 조금 채웠다.

1593년 11월 15일 (계사년 음력 10월 23일)

이른 아침 윤해의 양어머니가 밥을 커다란 그릇 가득 지어 보내 주었다.

아이들이 나누어 먹었다.

형수도 남에게 얻어먹는 형편인데 우리 가족이 날마다 죽만 먹는다는 말을 듣고 밥을 지어 보내 주었다.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하다.

향을 보내 조희윤 좌수에게 편지를 전하고 도와달라고 청했다.

조희윤이 보통 쌀 한 말, 흰콩 세 되, 감장과 간장 각각 한 그릇을 주었다.

정말 고맙다.

아내와 아이들이 밥을 짓고 국까지 끓여 이제야 제대로 먹었다.

이웃 교생 전윤득이 찾아왔다가 갔다.

1593년 11월 16일 (계사년 음력 10월 24일)

어젯밤 눈이 조금 내려 기와가 모두 희어졌다.

아침에도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한겨울처럼 춥다.

종들은 모두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날씨가 이토록 추운데 땔나무와 숯도 떨어졌다.

강춘이 아침저녁 집 뒤의 낙엽을 쓸어 모아 겨우 밥을 짓는다.

온돌은 몹시 차갑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윤해가 진위로 간 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말 한 필에 어린 종 하나만 데리고 갔으니 어떻게 견디며 갈지 걱정이 크다.

아침에 향을 관아 안으로 보냈다.

수령 집 안에서 반찬 한 광주리와 여러 김치 한 항아리를 보내왔다.

반찬은 얻었지만 쌀이 없어 밥을 지을 수 없다.

안타깝다.

저녁에 최지선이 벼 열 말을 사람을 시켜 보내왔다.

윤해의 양어머니에게도 열 말을 보냈다.

며칠 급한 것은 넘길 수 있겠다.

매우 고맙다.

1593년 11월 17일 (계사년 음력 10월 25일)

성덕량이 추수 일로 이웃에 왔다가 말을 끌고 나를 찾아왔다.

직접 안장을 얹고 나를 태워 자기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남녀가 곡식을 거두는 모습을 구경하고 농가의 풍년 이야기를 들으니 무료한 마음을 조금 달랠 수 있었다.

집주인이 좋은 술을 먹이고 저녁밥도 대접했다.

그 집주인의 이름은 이등귀다.

화포장 역을 맡고 있다.

지난해 겨울 강화도 의병에 들어갔다가 발을 잘못 디뎌 배에서 떨어지면서 오른팔이 부러졌다.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나이가 몇이냐고 물으니 기해년생이라고 했다.

나와 동갑이다.

아직 귀밑머리가 희지 않았다.

다만 팔이 부러진 뒤 여러 달 고생해 늙은 모습이 이미 뚜렷했다.

이등귀가 말했다.

“저와 동갑인 사람 가운데 머리가 희어진 사람은 늙었다고 군역을 빼 줍니다. 저는 머리가 희지 않아 아직도 역을 져야 합니다. 팔이 부러져 쓸 수 없는데도 역은 예전과 똑같이 부과됩니다. 머리가 희지 않은 것이 한스럽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젊기를 바라고 흰머리를 싫어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흰머리가 빨리 나지 않는 것을 원망한다.

관청의 부역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여기서 알 수 있다.

슬프다.

성덕량은 성덕린의 친아우다.

저녁에는 임면부의 아내가 사람과 말을 보내 우리 집 여자들을 불러갔다.

그곳에서 묵고 돌아오지 않았다.

종 명복은 돌아왔다.

1593년 11월 18일 (계사년 음력 10월 26일)

아내는 아직 임씨 집에 머물고 있다.

이른 아침 단이가 어머니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향이 어제부터 앓아누워 데려갈 사람이 없었다.

걱정하고 있었는데 마침 임면부 집에서 종과 말을 보내 주어 타고 갔다.

한낮에는 이웃 김대성과 백몽진, 방수간이 찾아와 차분히 이야기하고 돌아갔다.

백몽진도 교생이고 방수간은 무자년에 생원시에 합격해 윤해와 동년이다.

이 동네에는 위아래로 양반 집이 하나도 없고 교생 몇 집과 백성, 관청 아전들이 살고 있다.

무료해도 속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다.

아쉽다.

1593년 11월 19일 (계사년 음력 10월 27일)

아침에 들으니 아내는 임천 수령 부인의 초대를 받아 관아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향은 밤새 심하게 앓았고 아침에도 낫지 않았다.

전염병에 옮은 듯하다.

임면부 집에서 술 한 병을 보내왔다.

곧 따뜻하게 한 잔 마시니 차갑던 속이 조금 편해지고 온몸에 혈색이 돌았다.

그야말로 한 잔이 천금 같은 술이었다.

향은 이웃집의 따뜻한 온돌방을 빌려 옮겼다.

땀을 내게 하려는 것이다.

1593년 11월 20일 (계사년 음력 10월 28일)

향은 밤새 몹시 앓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아침에도 일어나지 못하고 차가운 것만 찾는다.

걱정스럽다.

윤함의 학질은 아직 떨어지지 않아 밤마다 앓는다.

그러나 전보다는 조금 덜하다.

한낮에는 유원 충의가 찾아왔다.

조금 뒤 임면부와 조카 임경운도 왔다.

차분히 이야기하다 각자 돌아갔다.

명복을 익산으로 보냈다.

1593년 11월 21일 (계사년 음력 10월 29일)

아침에 향의 병을 물으니 어젯밤 따뜻한 방에서 이불을 두껍게 덮고 땀을 내자 기운이 회복되었다고 한다.

기쁘다.

아내는 아직 관아 안에 머물며 돌아오지 않았다.

어제 분개를 관아로 보냈더니 아내가 생선과 고기구이, 채소 등을 받아 보내왔다.

아이들과 함께 먹고 일부는 집주인과 동쪽 이웃 가운데 평소 가까운 두 집에도 나누어 주었다.

임면부가 안장 갖춘 말을 보내 나를 불렀다.

곧 관아로 가 임면부와 임경운, 구혜, 이효길과 이야기했다.

임면부와 바둑도 두었다.

구혜와 이효길은 수령 임극의 사위다.

저녁에 수령이 관아로 돌아왔다.

하릉군 부인이 북쪽으로 올라갈 때 호송하는 임무를 맡아 수원까지 갔다가 돌아온 것이다.

수령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관에서 차와 음식을 보내 함께 먹었다.

전 감찰 한집도 왔다.

수령과 먼 친척이며 이 고을에 피란해 와 있다고 한다.

저녁까지 얻어먹고 밤에 집으로 돌아왔다.

수령에게서 이 도의 감사가 군사를 뽑는 일을 제때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잡혀가고 윤승훈이 대신 임명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1593년 11월 22일 (계사년 음력 10월 30일)

향의 병이 나아 집으로 들어왔다.

오랫동안 찬 곳에서 지내다 심하게 찬바람을 맞은 것이 원인이었던 듯하다.

땀을 내자 곧 나았다.

늦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비가 내렸다.

아내는 수령에게 급한 사정을 말해 흰쌀 한 말, 밀가루 한 말, 소금 두 되, 게젓 한 되를 받아 보냈다.

하루의 곤궁은 면할 수 있겠다.

아내는 비 때문에 임씨 집에 계속 머물고 있다.

다만 어제 또 학질이 발작했다고 한다.

걱정스럽다.

명복이 돌아왔다.

경여의 아내가 찰떡을 쪄 보내 주어 아이들과 함께 먹었다.

베개 모서리에 쓰던 물건을 팔아 벼 여덟 말과 콩 세 말 다섯 되를 얻어왔다.

그런데 다시 재 보니 한 말이 모자랐다.

명복이 틀림없이 훔쳐먹은 것이다.

괘씸하다.

콩은 짐이 너무 무거워 전부 가져오지 못했다.

어제 성덕린이 찾아왔는데 내가 고을에 들어가 있어 만나지 못했다.

아쉽다.

성덕린은 벼 다섯 말을 주고 갔다고 한다.

며칠은 급한 일을 넘길 수 있겠다.

1593년 11월 23일 (계사년 음력 11월 1일)

아내는 아직 임씨 집에 머물고 있다.

오늘 학질이 발작해 돌아오지 못했다.

종일 집에 있었다.

최천인이 찾아왔다.

누군가에게 고발당해 관청에 붙잡힐 처지라 나에게 말을 좀 해 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이다.

최천인은 윤해 아내의 육촌으로 추수 일 때문에 이곳에 와 있다.

1593년 11월 24일 (계사년 음력 11월 2일)

어제 남정지가 영암 임경침 집에 의탁해 먹고살려고 내려가는 길에 고을 안 여종의 남편 집에서 묵는다는 말을 들었다.

이른 아침 말을 얻어 타고 그 숙소로 갔다.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를 써 맡기고 오래 못 본 회포를 풀었다.

한겸 진사도 불러 오래 이야기했다.

남정지가 아침밥을 지어 먹였다.

돌아오는 길에 임씨 집에 들러 잠시 이야기하고 관아로 갔다.

임면부와 임경운, 구혜, 이효길 등과 이야기했다.

오후에 최경선 전 목천 수령이 사창에서 수령 임극을 만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곧 걸어갔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뒤 서로 다시 만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피란하며 겪은 고생과 이운의 죽음을 이야기하자 슬픔을 견딜 수 없었다.

수령은 밥을 먹고 관아로 돌아갔다.

나와 최경선은 빈 객관 서쪽 윗방에서 함께 자려 했다.

하지만 밤 이경이 되자 온돌이 너무 차 잠을 잘 수 없어 사삿집으로 옮겼다.

밤새 발을 맞대고 누워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행이다.

다만 수령이 최경선을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최경선이 꽤 분개하며 돌아갔다.

아쉽다.

관아로 갈 때 마침 고을 사람들이 술과 고기를 바쳤다.

임경운이 관아에서 고기를 굽고 술을 데워 먹였다.

술은 향기롭고 독했으며 고기는 부드럽고 기름졌다.

정말 맛있었다.

아내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단이는 데려다 줄 사람이 없어 임씨 집에 남았다.

남정지는 경침의 동서이고 경침은 이미 죽은 지 오래다.

경침의 아내는 구림촌에서 혼자 사는데 살림이 조금 넉넉하다.

남정지는 보령에서 떠돌다가 먹고살 길이 없어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이제 그 집에 의탁해 겨울을 난 뒤 봄이 늦기 전에 다시 올라오겠다고 한다.

왜적이 내년 봄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 걱정하기 때문이다.

1593년 11월 25일 (계사년 음력 11월 3일)

이른 아침 최경선과 밥을 먹었다.

최경선은 먼저 떠났다.

나는 숙소에 홀로 남았다.

임면부의 말을 빌려 날이 늦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윤함은 며칠째 학질을 앓지 않는다.

완전히 떨어진 듯하다. 기쁘다.

아내도 돌아왔고 단이는 여종 둘이 업어 왔다.

1593년 11월 26일 (계사년 음력 11월 4일)

종일 집에 있었다.

너무나 무료하여 단이와 바둑판을 놓고 말 대신 대추씨를 두며 놀아 적적함을 달랬다.

윤해가 떠난 뒤 종과 말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아마 곧장 윤겸이 있는 곳으로 보냈는데 윤겸이 홍주 환곡 독촉을 받아 아직 다 갚지 못해 붙잡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앓던 학질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것인가.

걱정스럽다.

막정도 돌아오지 않는다.

길에서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면 말이 병든 것이 틀림없다.

요즘 궁핍이 극심한데도 종과 말이 없어 아는 곳에 빌러 갈 수도 없다.

더욱 답답하다.

1593년 11월 27일 (계사년 음력 11월 5일)

아침을 먹고 김대성을 불렀다.

조금 뒤 백몽진과 이광춘도 찾아왔다.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이광춘은 상 판관의 서손 사위로 가까운 곳에 피란해 와 있다.

저녁에는 최천인이 찾아왔다.

벼 다섯 말, 콩 한 말, 말먹이 풀 열세 단을 사람을 시켜 보내 주었다.

매우 고맙다.

오천린도 찾아왔다.

어머니와 두 아우를 모시고 한산의 종 집에 피란해 와 있다고 했다.

그저께 어머니를 모시고 이 고을에 있는 전 구례 현감 조사겸의 가족을 만나러 왔다가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뜻밖에 만나 몹시 반가웠다.

저녁을 먹여 보냈다.

조사겸은 오천린의 외가 친척인데 임지에서 병으로 죽어 이곳에 임시로 묻혔다.

그 아내와 자식들이 가까운 곳에 피란해 살고 있다.

밤에는 막정이 영암에서 돌아왔다.

어머니의 친필 편지를 받아 읽으니 눈물이 흘렀다.

여종 서대가 병이 들어 냇가 움막으로 따로 보내졌는데 돌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기어서 냇가로 가다가 물에 닿기도 전에 죽었다.

너무나 슬프다.

서대는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았다.

어머니가 데려와 눈앞에서 늘 심부름을 시키던 아이였다.

부지런히 집안일을 했고 물건을 사고파는 재주도 있어 어머니가 많이 의지했다.

난리 뒤 온갖 고생을 함께하면서도 잠시도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남쪽 끝에 피란해 와서도 계속 데리고 있었는데 뜻밖에 병들어 아무 구호도 받지 못하고 죽었다.

참으로 불행하다.

어머니는 이 때문에 몹시 상심하여 계속 우셨고 식사량까지 크게 줄어 몸이 좋지 않다고 한다.

걱정을 견딜 수 없다.

또 어머니는 누이 집에 오래 머무는 것을 미안해하시며 북쪽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신다.

그러나 서울과 고향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다.

나 역시 여기서 날마다 궁핍해져 죽조차 잇기 어렵다.

그래서 늙은 어머니를 오래 남쪽에 계시게 하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다.

모셔 오지 못하는 것도 형편 때문이라지만 불효가 너무 크다.

내년 봄 날이 따뜻해지면 이곳으로 모셔오려 한다.

죽조차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더라도 마음만은 편하게 해 드리고 싶다.

그러나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미리 장담할 수 없다.

그리움과 걱정만 날로 깊어진다.

어머니는 흰쌀 한 말과 버선을 만들 흰 무명 네 자, 반찬 한 광주리를 보내셨다.

희철도 흰쌀 한 말을 보냈다.

임씨 누이는 마른 숭어 두 마리, 고도어 다섯 마리, 미역 다섯 줌, 감장 한 사발, 목화 다섯 근을 보냈다.

전에 맡겨 둔 쌀 네 말로 작은 고도어 열 마리와 칼치 쉰다섯 마리를 사서 싣고 왔다.

나주 통판 이성남도 윤겸의 편지를 받고 다음을 보내 주었다.

  • 마른 숭어 세 마리
  • 작은 포 세 접
  • 기름과 꿀 각각 두 되
  • 밀가루 세 말
  • 참깨 두 말

장성의 이귀가 준 흰쌀 한 말, 거친 쌀 세 말, 콩 한 말, 조기 한 묶음, 돼지고기 한 덩이도 싣고 왔다.

1593년 11월 28일 (계사년 음력 11월 6일)

밤부터 비와 눈이 내렸다.

최천인이 종과 말을 보내 보광사로 나를 불렀다.

아침을 먹고 눈을 무릅쓰고 갔다.

최천인은 뒤늦게 왔다.

또 절의 승려에게 말을 주어 인아도 데려왔다.

저녁에 나와 인아, 최천인 세 사람이 마주 앉아 두부를 만들어 먹었다.

두부가 아주 부드럽고 맛있었다.

나는 서른 꼬치가 넘게 먹었고 인아와 최천인은 각각 마흔 꼬치씩 먹었다.

처음에는 돌아오려 했지만 종일 큰눈이 내렸고 날도 저물어 세 사람이 서쪽 승방에서 함께 잤다.

보광사는 고려 때부터 내려온 오래된 절로 근처 고을에서는 가장 큰 절이라고 한다.

난리 뒤 승려들이 전투에 동원되어 많이 죽고 관청의 부역도 심해져 뿌리내릴 곳 없는 승려들은 모두 흩어졌다.

빈방이 많다.

지금 남은 승려들도 버티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살고 있는 승려들을 보니 곡식을 많이 쌓아 두어 꽤 넉넉했다.

이런 난리에도 이 정도이니 평소에는 얼마나 풍족했을지 알 수 있다.

승려들은 환곡을 돌려 이익을 얻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다고 한다.

법당은 웅장하고 좌우 승당도 크지만 대부분 비어 있다.

동쪽에는 차군루라는 누각이 있고 이색의 기문이 벽에 붙어 있다.

누각 앞에 대숲이 있어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시인들이 대나무를 노래한 시도 많다.

법당 서쪽에는 큰 우물이 있다.

고운 돌로 쌓았고 깊이가 한 길쯤 된다.

한겨울에도 얼지 않고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절의 모든 사람이 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도 부족한 적이 없다고 한다.

위에는 비를 가리는 지붕도 있다.

우물 서쪽에는 큰 비석이 하나 있다.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쓴 글이라고 한다.

돌빛이 매우 푸르다.

큰눈이 길을 덮어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지는 못하고 손으로 만져보기만 했다.

새 주지 신변이 어제 막 왔다.

본래 안성 청룡사에 있던 승려라고 한다.

신변이 말했다.

“지금 명나라 장수의 말에 따라 팔도에 선종과 교종 사찰을 각각 정해 모두 열여섯 절을 두었습니다.

충청도에서는 남포 영흥사를 교종의 중심으로, 보은 속리사를 선종의 중심으로 정했습니다.

각각 판사를 두어 도장을 맡아 공무를 보고 도 안의 여러 절을 모두 다스립니다.

승려의 임면은 도총섭이 바로잡고 주지의 임면도 그 도의 판사가 맡습니다.”

아마 승려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해 군역과 부역을 맡기고 누락되는 사람이 없게 하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법을 세우면 폐단도 생긴다.

승려들이 이 제도를 믿고 세력을 부리며 방자해질까 걱정된다.

불교를 숭상하는 풍조도 이 때문에 다시 일어날 수 있다.

1593년 11월 29일 (계사년 음력 11월 7일)

아침을 먹고 최천인이 먼저 떠났고 나도 뒤따라 돌아왔다.

인아는 말이 없어 내가 집에 들어온 뒤 종과 말을 다시 보내 타고 오게 했다.

어제 큰눈이 내린 뒤 땔나무와 숯이 완전히 떨어졌다.

나무를 베어올 수도 없어 밥을 짓기도 어렵다.

하물며 온돌을 어떻게 덥히겠는가.

방바닥이 쇠처럼 차갑다.

옷도 얇은 아이들이 누웠다 일어날 때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다.

한탄스럽다.

전에 이수준 전 통진 수령이 이 고을 농장에 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어제 아침 종과 말을 보냈더니 벼 한 석을 보내 주었다.

그 후한 정이 너무나 고맙다.

지난해 늙은 어머니가 강화도에서 피란할 때에도 두 번이나 식량과 반찬을 보내 굶주림을 면하게 해 주었다.

그 은혜가 큰데 이제 또 이렇게 도와준다.

이수준은 윤겸의 친구다.

아내는 오늘 아침밥을 먹자마자 학질이 발작해 전보다 훨씬 심하게 앓았다.

머리도 몹시 아프다고 한다.

걱정스럽다.

정 사과의 아내가 부여에서 오늘 낮 임면부 집에 왔다고 한다.

부여의 장모인 삼가댁이 우리 집의 굶주림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 쌀 한 말과 닭 두 마리를 정 사과의 아내 편에 보내왔다.

윤함은 며칠 전에 학질이 다시 생겨 밤마다 앓는다.

겨우 닷새나 엿새 떨어졌다가 다시 생겼다.

더욱 걱정스럽다.

1593년 11월 30일 (계사년 음력 11월 8일)

윤해의 양어머니에게 종과 말을 보내 모셔왔다.

오랫동안 한집에서 살다가 지난달 초 이 집으로 옮긴 뒤 방이 없어 따로 살았다.

서로 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모셔온 것이다.

소직이 찾아와 바둑 두 판을 두고 돌아갔다.

저녁을 먹여 보내고 소금 다섯 되, 칼치 두 마리, 고도어 한 마리를 주었다.

1593년 12월

1593년 12월 1일 (계사년 음력 11월 9일)

아침 전에 수령 임극을 찾아갔다.

말구유를 하나 청했더니 관에 저장해 둔 소나무가 없다며 주지 않았다.

우습다.

돌아오는 길에는 임자순의 숙소에 들렀고 이어 임면부 집에도 갔다.

정 사과의 아내를 만났다.

임씨 형수가 아침밥을 지어 먹였고 막걸리 한 그릇도 주었다.

아침에 수령에게 누룩을 청했더니 관아에 나와 있을 때 사람을 보내 가져가라고 했다.

그래서 저녁에 일부러 종을 보냈더니 지금은 어수선하니 다음에 와서 가져가라고 했다.

늘 다음으로 미루다가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이 많다.

아내와 자식들이 굶고 있어 술을 빚어 팔아 조금이라도 남는 것으로 살림을 보태고 싶어 여러 번 누룩을 청했는데 속기만 했다.

부끄럽고 한탄스럽다.

말구유는 임자순이 구해 주었다.

저녁에 종을 보내 가져왔다.

수령에게 부탁하고도 얻지 못한 것을 임자순은 이곳에 객으로 와 있으면서도 자기 말 먹이던 것을 내 요구에 내주었다.

수령의 속 좁음이 어떤지 알 만하다.

1593년 12월 2일 (계사년 음력 11월 10일)

아침을 먹고 임자순이 찾아왔다.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막걸리 두 그릇을 먹여 보냈다.

저녁에는 윤겸이 들어왔다.

서로 병 때문에 만나지 못한 지 다섯 달이나 되었다.

온 가족이 날마다 보고 싶어 기다렸는데 뜻밖에 들어왔으니 한집안의 기쁨을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런데 윤해가 타고 간 말은 윤겸에게 곧바로 보내리라 생각했는데 윤겸이 올 때 가지고 오지 않았다.

오는 길에 명군에게 빼앗긴 것이 아니라면 송이가 훔쳐 달아난 것이 분명하다.

한탄스럽다.

1593년 12월 3일 (계사년 음력 11월 11일)

아내가 아침을 막 먹고 나자 학질이 전보다 훨씬 심하게 발작했다.

걱정스럽다.

임전이 윤겸을 찾아왔다.

쌀 한 말을 주고 날이 기울 무렵 고을로 돌아갔다.

임전은 전 참의 임윤신의 아들이다.

서울 상사동에 살며 윤겸 형제와 매우 가까운 사람이다.

마침 이 고을에 왔다가 윤겸이 왔다는 말을 듣고 먼저 사람을 보내 문안한 뒤 직접 찾아왔다.

임전은 수령과도 같은 집안이며 호남에 피란해 있다고 한다.

소직도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저녁을 먹여 보냈다.

1593년 12월 4일 (계사년 음력 11월 12일)

요즘 종이 없어 오랫동안 나무를 하지 못했다.

아침저녁 밥을 짓기도 어려운데 온돌을 덥히는 일은 말할 것도 없다.

아내가 학질을 앓는데 방까지 너무 차가워 병이 더 심해질까 걱정하던 참이었다.

소직이 마른 장작 한 바리를 일부러 보내 주었다.

감장 한 항아리도 보냈다.

매우 고맙다.

저녁에는 막정이 돌아왔다.

함열 수령 신응구가 다음을 보내 주었다.

  • 벼 두 석
  • 콩 한 석
  • 절인 웅어 스무 마리
  • 새우젓 세 되
  • 소금 두 말
  • 참기름 한 되
  • 누룩 열 덩이

감사하기 그지없다.

다만 벼는 오래 묵고 잡것이 섞여 좋지 않았다.

다시 재 보니 스물여섯 말이었다.

좋은 벼 한 석에도 못 미칠 듯하다.

콩은 짐이 무거워 열 말을 가져오지 못하고 소은의 집에 맡겨 두었다.

1593년 12월 5일 (계사년 음력 11월 13일)

소금을 굽는 일을 맡은 전 판관 이경록이 이 고을을 순행하다 내가 가까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한산으로 가는 길에 찾아왔다.

김대성도 찾아왔다.

백몽진과 이광춘도 왔다가 돌아갔다.

이웃 병방 아전 임춘기도 찾아왔다가 갔다.

1593년 12월 6일 (계사년 음력 11월 14일)

저녁에 백몽진이 술과 과일을 가지고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윤겸의 종 가지도 들어왔다.

그 아버지가 보낸 녹두 한 말과 팥 한 말을 가져왔다.

1593년 12월 7일 (계사년 음력 11월 15일)

장수 집 종 수억이 그저께 들어왔다가 오늘 돌아갔다.

수령이 준 물건을 싣고 갔다.

처음에는 이운의 소상 날에 맞추어 돌아가 보려 했으나 종과 말이 없어 가지 못했다.

아쉽다.

윤해가 타고 간 말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지를 말을 태워 부여로 보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다.

그저께 이경록 판관에게 윤응상 참봉이 지난해 수운판관에 임명되었다가 뜻밖에 병으로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정해년 무렵 내가 윤응상의 집을 빌려 삼 년이나 살았는데 나를 매우 후하게 대했고 정이 친형제처럼 깊었다.

이제 부고를 들으니 놀랍고 슬프다.

난리가 난 뒤 옛 친구와 친척들이 왜적에게 죽지 않으면 병으로 죽은 경우가 너무 많다.

관동 한 마을만 보아도 연장자 가운데 남궁지평 한 사람만 살아 있다.

그마저 함열에 피란해 있다가 중풍을 얻어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고 한다.

그 아래로는 조대정, 홍응추, 최경선, 민치운, 이여인과 나 등 대여섯 명만 목숨을 보전했다.

나머지는 왜적에게 죽거나 병으로 죽어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다.

평소 좋은 계절이면 앞뒤로 사람을 부르고 많은 노소가 모여 놀고 술 마시며 떠들던 일을 이제 다시 볼 수 없다.

생각할 때마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형세가 그러하니 하늘의 운수에 맡길 수밖에 없다.

1593년 12월 8일 (계사년 음력 11월 16일)

삼가댁이 정 사과의 종을 통해 닭 한 마리를 보내왔다.

조금 뒤 부여의 사위 강위가 술 한 병과 닭 두 마리를 가지고 윤함을 찾아왔다가 갔다.

동궁 광해군이 명나라 장수의 요청 때문에 황해도에서 출발해 호남과 호서를 돌아볼 것이며 전주나 공주에 머물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요즘 명군이 수없이 호남 길로 내려간다고 한다.

또 명나라 총병 유정이 경주 어느 곳에서 왜적과 싸워 양쪽 모두 많이 죽었다는 말도 들었다.

유정이 왜적에게 포위되자 고언백이 포위를 뚫고 나왔고, 그 때문에 낙상지 등도 포위망을 뚫으며 마구 공격해 왜장들을 많이 베었다고 한다.

명나라의 편장도 총탄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뒤에는 고성에서도 싸워 우리 두 남도 병사가 조총에 맞았으나 중상은 아니었고 양쪽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 군사는 군량이 없어 곳곳에서 달아난다.

왜적의 침략은 여전히 그치지 않는다.

내년 봄 다시 대대적으로 쳐들어오면 누가 막겠는가.

죄 없는 백성들이 굶주림과 칼날 속에서 모두 죽어 하나도 남지 않을까 두렵다.

하늘이 어찌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는가.

윤겸은 아침을 먹고 임면부를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함께 묵고 돌아오지 않았다.

1593년 12월 9일 (계사년 음력 11월 17일)

이른 아침 가지가 부여에서 돌아왔다.

부여 수령 박동도가 다음을 보내 주었다.

  • 벼 한 석
  • 중간 품질 쌀 네 말
  • 콩 두 말
  • 채두 한 말

며칠의 급한 어려움은 면하겠다.

매우 고맙다.

소직도 찾아와 저녁을 먹고 갔다.

1593년 12월 10일 (계사년 음력 11월 18일)

윤겸은 가지와 막정을 데리고 말과 짐을 갖추어 홍산으로 갔다.

정 사과의 아내가 지금 관아 안에 머물고 있다가 아침에 먹고 남은 반찬을 일부러 사람을 시켜 보내 주었다.

아내와 자식들이 곧 함께 먹었다.

요즘 무료하여 날마다 단이와 대추씨 놀이를 하며 객지의 적막함을 달랜다.

종 명복은 이달 초부터 발이 붓고 아파 밤낮으로 신음했다.

침을 두 번 맞았지만 아직 낫지 않아 이웃의 흙집으로 옮겨 있었다.

오늘 처음 집으로 들어왔다.

발의 부기는 전과 비슷하고 아직 걷지 못하지만 통증은 조금 줄어든 듯하다.

윤함은 며칠째 학질을 앓지 않는다.

기쁘다.

1593년 12월 11일 (계사년 음력 11월 19일)

막정이 돌아온 뒤로 어머니 소식을 오래 듣지 못했다.

걱정스럽고 또 걱정스럽다.

요즘 날씨가 봄처럼 따뜻하다.

어제 저녁 짙은 안개가 끼어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걷혔다.

이 또한 재앙의 징조가 아닌가 싶다.

아침에 집주인이 콩죽 두 사발을 가져왔다.

아내와 자식들이 나누어 먹었다.

이십구일이 동지인데 오늘이 동지인 줄 잘못 알고 있었다.

우습다.

백몽진이 찾아와 말먹이 풀 열두 단을 주었다.

유선각도 사람을 시켜 벼 열 말과 볏짚 한 바리를 보내 주었다.

감사하다.

저녁에 윤겸이 돌아왔다.

홍산에는 손님이 너무 많아 빈손으로 왔고 생꿩 두 마리만 얻어왔다.

또 홍응추의 종 천학이 이곳을 지나가다 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

그에게서 홍응추가 지난 구월 개천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너무나 슬프다.

전에 최경선이 사람들 말로 홍응추가 죽었다고 하지만 전해 들은 말이라 믿기 어렵다고 했었다.

이제 그 종에게 직접 들으니 사실이 분명하다.

같은 마을에서 가장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라 부고가 더욱 가슴 아프다.

아내는 요즘 학질이 떨어졌지만 여종 둘은 다시 앓고 있다.

1593년 12월 12일 (계사년 음력 11월 20일)

이른 아침 향을 수령 임극에게 보내 급한 사정을 말했다.

흰쌀 두 말과 젓국 한 항아리를 주었다.

가지를 한산으로 보냈다.

한산 수령 신경행이 벼 한 석, 절인 게 열 마리, 조기 한 묶음, 얼린 생선 세 동이를 보내 주었다.

벼는 거칠고 좋지 않았지만 다시 재 보니 열세 말이었다.

1593년 12월 13일 (계사년 음력 11월 21일)

윤겸이 함열로 갔다.

저녁에는 성산령과 운산령 형제가 홍산에 왔다가 임천으로 들러 나를 찾아왔다.

두 형제는 평릉수의 아들로 임천과 나에게 오촌 친척이다.

1593년 12월 14일 (계사년 음력 11월 22일)

어제 저녁 윤겸 처가의 여종 남편이 보령에서 왔다.

홍주 환곡을 다 거두지 못한 일로 세만 부부가 갇혔기 때문에 윤겸을 데리러 온 것이다.

윤겸이 마침 함열에 있어 이른 아침 그 사람을 함열로 보냈다.

한낮에는 검찰사의 공문을 가지고 온 말꾼이 도착했다.

공문을 보니 윤겸을 막중 종사관으로 삼아 여러 고을을 돌며 영남으로 보낼 군량을 독촉해 보내라고 했다.

윤겸이 전에 여러 번 병을 이유로 사양했는데 또 억지로 나가게 하니 걱정스럽다.

방수간과 백몽진이 바둑돌을 소매에 넣어 가지고 찾아왔다.

열 판 남짓 두고 돌아갔다.

어제 향이 장에서 술을 팔았다.

정 사과 집 여종 묵개와 함께 술 여덟 병을 이고 갔는데, 가는 길에 묵개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술독까지 함께 깨뜨렸다.

빈손으로 돌아왔다. 우습다.

독은 이웃 사람에게 빌린 것이어서 어쩔 수 없이 새것을 사 갚았다.

조금이라도 이익을 남겨 부족한 살림에 보태려 했는데 원금까지 모두 잃었다.

더욱 한탄스럽다.

1593년 12월 15일 (계사년 음력 11월 23일)

김대성이 찾아왔다가 갔다.

저녁에는 윤겸 처가의 여종 남편 옥지가 함열에서 돌아왔다.

함열 수령 신응구가 다음을 보냈다.

  • 좋은 술 한 병
  • 다섯 가지 과일 한 광주리
  • 다섯 가지 고기구이 한 광주리
  • 쇠고기 한 덩이
  • 찹쌀 한 말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먹었다.

고맙다.

임자순도 아이를 보내 편지로 안부를 묻고 쇠고기 두 덩이를 보내 주었다.

자신도 먹지 않고 옛 친구에게 나누어 주니 후한 사람이다.

오늘은 이운의 소상이다.

처음에는 이날 돌아가 보려 했지만 종과 말이 없어 가지 못했다.

한탄스럽다.

1593년 12월 16일 (계사년 음력 11월 24일)

윤해가 위로 간 뒤 한 달 가까이 소식을 듣지 못했다.

오늘 아침 편지를 써 연학 편에 보내 안부를 묻게 했다.

연학은 윤해 양가 여종 풍월의 남편이다.

아침을 먹은 뒤 비가 시작되어 저녁까지 개지 않았다.

1593년 12월 17일 (계사년 음력 11월 25일)

이른 아침 백몽진이 찾아왔다가 갔다.

오후에는 백몽진이 다시 방수간과 바둑돌을 가지고 왔다.

저녁까지 바둑을 두었다.

술 한 잔씩 먹여 보냈다.

명복은 이제야 움직이기 시작해 나무를 해 왔다.

하지만 부은 발이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

집에 땔나무가 없어 절뚝거리는데도 억지로 보낸 것이다.

밤에는 윤해가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먼저 양어머니가 묵는 곳으로 보냈다.

뜻밖에 돌아오니 온 집안이 너무나 반가웠다.

윤함의 말을 곧 돌려보내려 했지만 송이는 아버지가 군량을 지고 영남으로 종군한 뒤 돌아오지 않아 그를 도우러 갔고, 안손은 병으로 누워 있었다.

그래서 말을 제때 보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번에 돌아오며 말을 함께 데리고 왔다.

영영 잃은 줄 알았던 말이 뜻밖에 돌아왔으니 더욱 기쁘다.

하지만 송이는 휴가를 받고 돌아간 뒤 몇 달째 오지 않고 멀리 영남까지 갔다.

몹시 괘씸하다.

윤해는 오는 길에 예산의 친척 집에서 묵었다.

모두 무사하다고 한다.

다만 예산 수령 심인제의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 어머니는 나의 사촌 누이다.

부고를 들으니 너무나 슬프다.

조희보 한림도 사람을 따로 보내 벼 열 말과 말장 한 말을 보내왔다.

매우 고맙다.

조희보는 나와 친척도 아니고 전에 서로 알던 사이도 아니다.

그저 윤겸과 동갑 친구일 뿐인데 우리 가족을 친척보다 더 후하게 대한다.

고마움을 금할 수 없다.

1593년 12월 18일 (계사년 음력 11월 26일)

이른 아침 백몽진의 급한 일을 돕기 위해 수령을 만나 직접 사정을 말했다.

아침을 먹고 돌아왔다.

윤해의 아내와 아이들이 찾아왔다.

충이와 몽이를 보니 충이는 잘 걷고 뛰기까지 한다.

닭, 개, 소, 말 소리도 흉내 낸다.

너무나 귀엽다.

지난 오월 진위 친정으로 돌아간 뒤 일곱 달이 지나 이제야 다시 왔다.

김대성과 백몽진도 찾아왔다가 갔다.

저녁에는 송이가 들어왔다.

자기 아버지가 병이 들어 군량을 영남으로 운반하지 못하기에 자기가 대신 지고 거창까지 갔다가 돌아왔다고 했다.

구월에 휴가를 받아 간 뒤 여러 달 기한을 넘겼다.

집안일이 엉킨 것도 모두 이 종이 제때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크게 벌을 줄 생각이었다.

그의 말이 다 사실인지는 의심스럽지만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은 자식이라면 당연한 것이므로 이번에는 용서하고 따지지 않았다.

1593년 12월 19일 (계사년 음력 11월 27일)

윤해의 아내와 자식들은 아침을 먹고 자기 거처로 돌아갔다.

송이를 부여로 보냈다.

내일이 팥죽을 먹는 동짓날인데 집에 팥 한 되도 없고 구할 곳도 없다.

아이들이 팥죽을 먹고 싶어 하니 부여 수령 박동도에게 팥을 얻어다 끓여 먹으려는 것이다.

저녁에는 이웃의 늙은 아전 임승운의 후처가 술과 안주, 밥 한 그릇을 직접 가지고 와 아내를 찾아보고 돌아갔다.

밤에는 막정과 가지가 말 세 필에 쌀과 콩을 싣고 돌아왔다.

윤겸이 함열에 있으면서 여러 곳에서 구한 것이다.

  • 좋은 쌀 스물여섯 말
  • 흰쌀 열두 말
  • 거친 쌀 두 말
  • 콩 서른아홉 말
  • 벼 열 말
  • 절인 게 스무 마리
  • 숭어 두 마리
  • 얼린 생선 다섯 동이
  • 새우젓 다섯 되

이것이면 한 달은 잘 지낼 수 있겠다.

기쁘고 또 기쁘다.

마침 박응소 교리가 명을 받고 함열까지 순행해 와 쌀과 콩 여섯 말을 구해 주었다고 한다.

어젯밤에는 큰 쥐가 방에 들어와 숭어 반 마리와 얼린 생선 두 동이를 먹어 버렸다.

아깝다.

1593년 12월 20일 (계사년 음력 11월 28일)

백몽진과 방수간이 찾아왔다.

종일 바둑을 두다 돌아갔다.

송이가 부여에서 돌아왔다.

부여 수령은 팥 한 말, 싸라기 한 말, 조기 한 묶음을 보내 주었다.

저녁에는 백몽진이 팥 세 되, 방수간이 네 되를 보내왔다.

내일이 동지인데 우리 집에 팥이 없다는 말을 듣고 보낸 것이다.

몽이를 데려왔다가 저녁에 다시 자기 거처로 돌려보냈다.

1593년 12월 21일 (계사년 음력 11월 29일)

팥 일곱 되를 삶아 온 식구가 나누어 먹었다.

어젯밤 큰 쥐가 또 들어와 꿩 한 다리를 물고 달아났다.

너무나 괘씸하다.

명복에게 쥐구멍 아래 덫을 놓게 했지만 잡지 못했다.

덫을 제대로 놓지 못한 듯하다.

저녁에는 유원 공이 찾아왔다가 갔다.

연장자가 두 번이나 찾아와 안부를 묻는데 나는 종과 말이 없어 한 번도 답방하지 못했다.

부끄럽다.

밤에 종과 말을 관아 안으로 보내 정 사과의 아내를 모셔왔다.

1593년 12월 22일 (계사년 음력 11월 30일)

새벽에 비가 조금 내렸고 아침에도 흐렸다.

아침을 먹고 조희보 한림 형제를 찾아가 차분히 이야기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조희윤 좌수 집에도 들렀다.

조희윤이 저녁밥을 차려 주었다.

오는 길에는 윤해가 사는 곳에도 들러 충이 등을 보았다.

밤이 되어 돌아왔다.

세만 형제가 보령에서 들어왔다.

먹을 쌀 한 석을 마련해 바치자 일을 맡은 관리가 풀어주었지만 나머지 쌀은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고 한다.

1593년 12월 23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1일)

세만 형제를 함열로 보냈다.

가는 길에 윤겸이 돌아오는 것을 만나 저녁에 함께 들어왔다.

쌀과 콩을 각각 한 석씩 싣고 왔다.

홍주 환곡으로 바칠 것이다.

좋은 술 한 병과 삶은 돼지 다리 하나도 가져왔다.

곧 고기를 썰고 술을 데워 정 사과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먹었다.

1593년 12월 24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2일)

아침을 먹은 뒤 임자순이 찾아왔다.

바둑을 대여섯 판 두고 돌아갔다.

집에 술과 음식이 없어 해가 기울도록 아무것도 대접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보냈다.

부끄럽고 한탄스럽다.

세만에게 환곡으로 바칠 쌀 열두 말과 콩 아홉 말을 싣고 먼저 보령으로 돌아가게 했다.

1593년 12월 25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3일)

윤겸이 임경운에게 편지를 보내 수령에게 사정을 말하게 했다.

식량으로 쌀 세 말과 조기 한 묶음을 얻었다.

아침을 먹은 뒤 윤겸은 송이 등을 데리고 보령의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부여와 정산, 청양을 들러 갈 예정이라고 했다.

저녁에는 검찰사가 윤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윤겸이 부여로 떠난 뒤라 온 사람을 그쪽으로 보내 주었다.

1593년 12월 26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4일)

이른 아침 임자순이 종과 말을 보내 나를 불렀다.

곧 관아로 가 수령 임극과 임자순, 임면부, 임경운, 유석필 봉사 등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령이 파직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호남으로 내려가는 사람이 구혜의 종에게 한 말이라 사실이 아니라고도 했다.

백성의 원망이 매우 심하고 미움받는 곳도 많으니 오래 자리를 지키기 어렵기는 할 것이다.

유석필은 전 참의 유순선의 아들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결성에 피란해 살며 여기저기에서 먹을 것을 구하고 있다고 한다.

너무나 가엾다.

저녁에는 임자순이 타던 말을 빌려 타고 돌아왔다.

이시설이 이곳에 왔다.

아산 수령에게 괴롭힘을 받아 임천에 청원서를 내러 왔다고 한다.

임천 수령과 아산 수령 최유원은 매우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이다.

1593년 12월 27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5일)

종일 흐리고 때때로 비가 조금 내렸다.

아침에 수령의 파직이 사실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침을 먹고 찾아가니 사헌부에서 “정사를 아랫사람에게 맡긴다”는 이유로 탄핵했다고 한다.

수령은 돌아갈 곳이 없어 당분간 이 고을 근처에 머물 생각이라고 했다.

비록 우리를 직접 도와준 힘은 크지 않았어도 친척 수령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의지가 되었는데 뜻밖에 파직되었다.

그 집도 의지할 곳이 없어졌고 우리 집도 매우 섭섭하다.

한산 수령 신경행이 이 고을 창고를 봉하러 왔다.

사람을 보내 내게 안부를 물었다.

나도 만나려고 객사로 갔지만 이미 관청으로 가 버려 만나지 못했다.

임자순의 말을 빌려 타고 돌아왔다.

임자순도 내일 연산으로 돌아간다며 말했다.

“난리를 피해 떠돌다가 여기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수령이 오래 있었다면 자주 만날 수 있었겠지만 뜻밖에 다시 헤어지게 됐습니다. 앞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군요.”

서로 마주 보며 매우 섭섭했다.

수령은 파직 소식을 들은 뒤로 관청 물건은 쌀 한 되도 사사로이 쓰지 않았고 자기 식량과 반찬도 관에서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청렴하기는 청렴하다.

한산에서 쌀과 콩 각각 다섯 석, 벼 열다섯 석을 내주었다고 한다.

이시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1593년 12월 28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6일)

이른 아침 종을 보내 한산 수령에게 문안했다.

짙은 안개가 사방을 덮어 늦은 낮에야 걷혔다.

한낮에는 소직이 찾아왔다.

막걸리 한 잔을 먹여 보냈다.

이탁의 아들 시룡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슬픔을 견딜 수 없다.

이탁에게는 아들 넷과 딸 둘이 있었다.

맏아들 기룡은 왜적에게 죽었고 둘째 준룡은 왜적에게 끌려갔다.

두 딸은 피란 중 죽었다.

이제 셋째 시룡마저 죽어 막내 원룡 하나만 남았다.

지난해에는 아우와 조카도 모두 왜적에게 죽었다.

아버지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 겨우 장례를 치른 뒤인데 또 아들을 잃었다.

한 집안의 화가 어찌 이처럼 심한가.

더욱 애통하다.

1593년 12월 29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7일)

흐렸다.

요즘 날씨가 봄처럼 따뜻하다.

오후에는 비가 내려 종일 개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이웃 말을 빌려 임면부 부부를 찾아갔다.

관아에도 들어가 수령을 만나고 돌아왔다.

송이가 돌아왔다.

윤겸은 무사히 홍양에 도착했다고 한다.

오늘 아침 총병이 통역을 시켜 우리 신하들에게 전한 말도 들었다.

왜장 평행장이 보낸 글에 일곱 가지 요구가 모두 이루어진 뒤에야 바다를 건너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 일곱 가지는 하나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다.

남쪽 군사 십만을 다시 불러야 토벌할 수 있을 듯하다.

조선에 십만 군사가 반년이나 한 해 먹을 군량이 있는가.

우리 신하들이 답했다.

십만 명이 몇 달 먹을 군량이라면 이십만 포대가 필요합니다.

곡식이 있다 하더라도 백성의 힘이 이미 다해 운반하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군사 삼사만 명이 넉 달이나 다섯 달 먹을 군량 정도라면 어떻게든 준비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남쪽 군사를 새로 불러오면 오륙 개월은 지나야 도착할 것입니다.

이미 요양에 와 있는 남병 만여 명과 우리나라 정예군 이삼만 명을 합쳐 내년이 되기 전에 일을 시작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군사를 움직일 날짜를 알려 주시면 여러 도에 명령을 내려 군량을 모으겠습니다.

총병은 다시 물었다.

지금 있는 군량으로 십만 명을 몇 달이나 먹일 수 있는지 분명히 써서 보여라.

우리 신하들이 답했다.

현재 저장된 군량으로는 십만 명을 반년 동안 먹이기 어려울 듯합니다.

다만 별도의 방법으로 조달한다면 계속 댈 수도 있습니다.

여기 있는 신하들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으니 국왕께 보고하여 결정한 뒤 답하겠습니다.

총병은 이를 읽고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일곱 가지 요구는 국왕에게 굳이 전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왜적이 요구한 일곱 가지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 화친
  • 영토 할양
  • 혼인
  • 왜의 우두머리를 왕으로 봉할 것
  • 조공 허용
  • 황제의 예복 하사
  • 인장 하사

남쪽 군사 십만을 실제로 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삼사만 명이라 해도 군량을 계속 대기 어려우니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의견을 조정에서 의논하라고 했다.

1593년 12월 30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8일)

병사에게서 이런 통보가 왔다.

명나라 장수 한 명이 명군 서른여 명을 거느리고 이달 초이렛날 동래에서 왔다.

왜적과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시고 나흘 동안 머물렀다.

십일에는 왜군이 준 말 두 필을 타고 왜인들을 길잡이로 삼아 웅천과 거제로 돌아갔다.

왜적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명나라 장수와 이미 화친했으므로 성을 쌓고 무기를 만드는 일을 모두 그만두고 명나라에 조공하러 갈 준비를 하면서 왜군이 흩어져 닥나무를 베고 종이를 만드는 일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병사가 잘못 전한 소문이었다.

아침을 먹은 뒤 김대성, 방수간, 백몽진 세 사람이 각자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가지고 찾아왔다.

나와 두 아들이 배불리 먹고 취할 만큼 마셨다.

마침 허용 생원도 찾아와 함께 마셨다.

김대성, 백몽진, 방수간 세 사람은 자주 찾아오는데 오늘도 술과 안주까지 가지고 왔다.

후한 마음이 고맙다.

1593년 12월 31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9일)

이른 아침 김대성의 아들 김정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찾아왔다가 갔다.

어제 다른 곳에 나가 있어 아버지와 함께 오지 못했으므로 오늘 아침 따로 음식을 마련해 찾아온 것이다.

아침밥 전에는 암학 한 마리가 날개를 치며 길게 두 번 울었다.

무슨 징조일까.

1594년 1월

1594년 1월 1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10일)

임면부 부부가 아내를 찾아왔다.

윤해의 아내도 찾아뵈었다.

모두 함께 묵었다.

백몽진과 방수간이 찾아와 바둑을 두었다.

내가 다섯 판을 연달아 이기고 헤어졌다.

수령 임극은 이른 아침 연기로 떠났다.

임면부는 몸이 좋지 않아 함께 가지 않고 남았다.

밤에는 비가 내리고 천둥까지 쳤다.

1594년 1월 2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11일)

어젯밤 좋지 않은 꿈을 꾸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세속에서는 흉한 꿈은 도리어 좋은 징조라고 하니 그것만은 위안이 된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가 먼 남쪽 끝에 계시고 소식을 듣지 못한 지 몇 달이나 되어 걱정이 그치지 않는다.

막정을 홍산으로 보냈다.

윤겸의 편지를 들려 먹을 것을 구해 오게 했다.

임면부가 찾아왔다.

방수간과 바둑을 두었는데 여섯 판을 연달아 졌다.

우습다.

임면부의 아내는 자기 거처로 돌아갔다.

충이의 어머니도 돌아갔다.

1594년 1월 3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12일)

날이 매우 추웠고 때때로 눈발이 날렸다.

백몽진과 방수간이 와서 종일 바둑을 두고 돌아갔다.

어제 장에 술을 팔러 향과 정 사과 집 여종 묵개가 술 여덟 병을 이고 갔다.

가는 길에 묵개가 넘어지면서 술독도 함께 떨어져 깨져 빈손으로 돌아왔다.

우습다.

술독은 이웃 사람 물건이라 어쩔 수 없이 새것을 사서 갚았다.

저녁에는 막정이 홍산에서 돌아왔다.

홍산 수령이 다음을 보내 주었다.

  • 좋은 벼 한 석
  • 흰쌀 세 말
  • 콩 다섯 말
  • 누룩 세 덩이
  • 절인 게 열 마리

1594년 1월 4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13일)

어젯밤 큰눈이 내렸다.

날씨가 갑절이나 차가워졌다.

술도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무료하여 햇볕을 등지고 앉아 단이와 대추씨 놀이를 했다.

1594년 1월 5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14일)

백몽진과 방수간이 찾아와 종일 바둑을 두고 헤어졌다.

함열에서는 작은 생선 열 동이를 보내왔다.

저녁에는 부여 수령 박동도가 파직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놀랍고 섭섭하다.

내년 봄에는 그의 도움으로 목숨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제 파직되었다니 이것 역시 우리 집의 불행이다.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니 한탄한들 무엇하겠는가.

1594년 1월 6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15일)

이른 아침 정 사과의 아내가 부여 수령이 파직되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윤해가 모시고 갔다.

부여 수령이 떠나기 전에 만나기 위해서다.

한산 수령 신경행이 겸임 수령으로 이 고을에 왔다.

나는 사람을 보내 문안했고 그도 먼저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저녁에는 임면부의 말을 빌려 타고 고을로 들어가 신경행과 차분히 이야기했다.

작은 술상을 차려 여섯 잔을 마셨다.

홍사고 생원 삼형제도 와서 같은 자리에 앉았다.

그들도 이 고을에 피란해 살고 있다.

밤이 깊어 돌아올 때 나장 두 사람을 딸려 집까지 보내 주었다.

임면부의 말은 먹이기 위해 그대로 두고 내일 아침 돌려보내기로 했다.

1594년 1월 7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16일)

이른 아침 종에게 편지를 들려 한산 수령에게 문안했다.

신경행이 답장과 함께 새우젓 한 되, 젓국 한 항아리를 보내 주었다.

방수간이 찾아와 바둑을 두고 돌아갔다.

오천린이 한산에서 찾아왔다.

저녁을 먹여 보냈다.

저녁에는 윤해가 돌아왔다.

부여 수령이 독운어사 윤경립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고 한다.

오는 길에 지름길로 들어갔다가 여울과 진창을 건넜다.

송이가 먼저 들어가다 말이 넘어져 물에 빠지는 바람에 옷이 모두 젖었다고 한다.

안타깝다.

부여 관아는 이미 창고까지 봉해져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오늘 장에는 거친 쌀 한 말을 보내 쇠 두 근 두 냥으로 바꾸었다.

말 두 필의 편자를 만들 생각이다.

1594년 1월 8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17일)

조희윤 좌수가 편지를 보내 나를 불렀다.

내게 말이 없다는 말을 듣고 안장까지 갖춘 말을 다시 보내 주었다.

나는 곧 달려갔다.

가는 길에 조희철과 그 아우 조희보 한림을 찾아갔지만 마침 집에 없어 만나지 못했다.

유원 공도 와서 함께 말을 타고 조씨 집으로 갔다.

한극창 전부, 상시손 판관이 먼저 와 있었다.

이홍제 부장과 홍씨도 뒤따라왔다.

푸짐한 음식을 차려 배불리 먹고 취해 돌아오니 이미 어두웠다.

이홍제는 홍준 주서의 매부다.

조씨 집 아들이 홍준 집에 장가들었기 때문에 피란 중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려고 술과 안주를 마련한 것이다.

한씨와 상씨도 조희윤의 인척이고 모두 이 고을에 피란해 와 있다.

또 새 수령 고경조가 교체되고 송응서가 새로 임명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송응서는 천안 형수의 친정 조카다.

전에도 몇 차례 본 적이 있다.

비록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전혀 모르는 고경조보다는 낫다.

조금 위안이 된다.

다만 실제로 부임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1594년 1월 9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18일)

막정을 정산의 가지 집으로 보냈다.

가지에게 조씨 집안이 얼마나 부유한지, 딸의 사람됨은 어떤지 알아보게 했다.

인아의 혼인을 의논하려는 것이다.

조씨의 이름은 건이고 정산현에서 오 리쯤 떨어진 곳에 산다.

전에 강위에게서 우리 집과 혼인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다.

윤겸이 이 일 때문에 정산으로 간 적이 있지만 수령이 마침 없어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 종을 보내 알아보게 한 것이다.

1594년 1월 10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19일)

어젯밤 꿈에 아우 희철을 보았다.

어머니 소식을 모르니 걱정스럽다.

새벽에 단이가 발이 아프다며 계속 울었다.

오랫동안 어루만져 주니 조금 나아졌다.

단이는 늘 내 이불 속에서 잔다.

1594년 1월 11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20일)

백몽진과 김정이 찾아왔다.

백몽진과 바둑을 두다 해가 기울어 헤어졌다.

저녁에는 광주에 사는 여종 어둔이 아들 덕세를 데리고 여러 곳을 구걸하며 수원에서부터 우리가 여기 있다는 말을 듣고 조금씩 물어 찾아왔다.

어찌나 가엾은지 모르겠다.

그 어머니는 난리가 처음 일어났을 때 왜적에게 죽었다고 한다.

내가 서울에 살 때 해마다 양지 농장에 오가며 그 집에서 묵곤 했다.

비명에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슬프다.

요즘 우리 집 살림도 거의 바닥났다.

반찬이 끊긴 지 오래라 콩을 삶아 장에 섞어 반찬으로 먹고 있다.

삶이 참으로 한탄스럽다.

1594년 1월 12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21일)

종일 집에 있었다.

너무나 무료했다.

저녁에 명복이 부여에서 돌아왔다.

정 사과의 아내가 쌀 네 말과 벼 두 말을 보내왔다.

전에 빌려 쓴 것을 갚은 것이다.

1594년 1월 13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22일)

새벽에 막정을 함열로 보내 먹을 것을 구해오게 했다.

십 리도 가기 전에 함열의 사자가 마침 도착했다.

흰쌀 세 말을 보내고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그 후한 뜻이 고맙다.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겠는가.

곧 답장을 써 주고 온 사람에게 술을 먹여 보냈다.

변응익이 찾아와 바둑을 두었다.

내가 세 판 연달아 이기자 얼굴이 붉어져 달아나듯 돌아갔다.

우습다.

새 수령 송응서가 관아로 나왔고 고을의 크고 작은 품관들이 찾아가 인사했다고 한다.

1594년 1월 14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23일)

신몽겸과 백몽진이 찾아왔다.

바둑 세 판을 두었는데 실력 차이가 너무 컸다.

우습다.

여종 옥춘이 아들 덕년을 데리고 해주에서 우리를 찾아왔다.

윤함의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무사하다고 한다.

기쁘다.

우계 성혼 선생이 지금 해주 석담서원에 머물면서 윤겸에게 편지를 보냈고 나에게도 편지를 보내 주었다.

그 후한 마음이 고맙다.

옥춘은 서울에 들러 조카 심설 도사도 만났다.

심설도 내게 편지를 보냈다.

벼슬살이를 무사히 하고 있다니 매우 기쁘다.

다만 직접 만날 길이 없는 것이 아쉽다.

저녁에 막정이 함열에서 돌아왔다.

함열 수령 신응구가 다음을 보내 주었다.

  • 콩 열 말
  • 벼 한 석
  • 새우젓 네 되
  • 누룩 세 덩이
  • 소금 세 말
  • 보통 종이 세 묶음

후한 뜻에 깊이 감사한다.

다만 벼 한 석은 실하지 못하고 쭉정이와 겨가 많이 섞여 한 말을 찧어도 쌀이 몇 되 나오지 않는다.

한탄스럽다.

1594년 1월 15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24일)

새 수령의 아들 송이창 진사가 찾아왔다.

그가 말했다.

“아버지께서 어제 동궁이 뜻밖에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맞이하러 공주 소속 지역까지 급히 가셨습니다. 그러나 날짜가 너무 촉박해 아마 미처 도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동궁이 이처럼 급하게 내려오는 줄 몰랐다.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또 명나라 사신이 나와 지난 십이일 이미 서울에 도착했다고 한다.

황제의 칙서에는 임금이 왕위를 물려주려 한 일을 크게 꾸짖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사신 이름은 사헌이라고 했다.

탐욕이 심해 끝없이 물건을 요구하여 이처럼 나라가 망한 뒤 필요한 물건을 마련할 길이 없으니 한탄스럽다.

놋촛대 예순 쌍을 요구했고 다른 물건도 그에 맞먹는 양을 달라고 했다고 한다.

또 송응창 경략과 이여송 제독은 지금 요양에 있는데 평양과 개성, 서울 세 도읍을 회복하고 왜적을 모두 몰아냈다고 명나라 조정에 보고했다고 한다.

황제도 그것을 사실로 믿어 조선에 있던 명군을 철수시키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송응창과 이여송은 왜적이 아직 우리 국경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숨긴다.

우리나라 사신이 북경으로 가는 문서에 왜적이 남아 있다는 내용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모두 지워 버린다고 한다.

황제의 눈과 귀를 막는 일이 이렇다니 한탄스럽다.

다만 길에서 떠도는 말이라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또 명나라 사신이 임금께 드릴 예복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1594년 1월 16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25일)

여종 강춘은 팔다리가 부어 일을 하지 못한다.

침을 놓는 의원이 가까이에 있다는 말을 듣고 아침에 종과 말을 보내 불러왔다.

수십 군데 침을 맞힌 뒤 돌려보냈다.

의원의 이름은 이기종이고 부장이라 불린다고 한다.

종 덕년은 다시 황해도로 돌려보냈다.

돌아가는 길에 보령의 윤겸에게 들러 우계 성혼 선생의 답장을 받아오게 했다.

덕년이 보령의 위치를 몰라 송이도 함께 보냈다.

나도 우계 선생의 편지에 답장을 써 보냈다.

어젯밤에는 반 자나 되는 큰눈이 내렸다.

1594년 1월 17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26일)

눈발이 날리고 바람이 불었다.

김대성이 찾아왔다가 갔다.

요즘 추위가 매우 심하다.

땔나무와 숯이 완전히 떨어졌다.

옷이 얇은 아이들과 종들은 추워 나무를 하러 가지 못한다.

아침저녁 밥을 지을 정도만 겨우 마련할 뿐 온돌은 너무 차다.

걱정스럽다.

1594년 1월 18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27일)

임면부와 구혜 생원이 눈길을 걸어 찾아왔다.

임면부와 바둑을 두었는데 내가 다섯 판 연달아 졌다.

해가 기울어 돌아갔다.

아내는 이달 하순부터 또 학질에 걸려 하루 걸러 앓는다.

처음에는 심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조금 심해졌다.

걱정스럽다.

왜적 우두머리 평수길이 자기 부하에게 살해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사실인지 알 수 없다.

만일 사실이라면 기쁨이 얼마나 크겠는가.

다만 예전에도 이런 소문이 돌았다가 거짓으로 밝혀졌으니 이번에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죄악이 하늘에 가득 찼으니 그가 어찌 오래 천지 사이에 살아남겠는가.

1594년 1월 19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28일)

저녁에 송이가 보령에서 돌아왔다.

윤겸의 편지를 보니 가족 모두 무사하다고 한다.

다만 결성에서 윤겸이 머물던 주인집이 떼강도를 만나 재산을 모두 빼앗겼다.

윤겸의 곡식도 그 집에 맡겨 두었는데 절반가량 잃었다고 한다.

안타깝다.

1594년 1월 20일 (계사년 음력 윤11월 29일)

방수간과 백몽진이 찾아왔다.

바둑을 두다 해가 기울어 헤어졌다.

말 두 필을 윤해 처가 농촌으로 보내 풀을 싣고 오게 했다.

세어 보니 마흔다섯 단이었다.

1594년 1월 21일 (계사년 음력 12월 1일)

큰 추위가 닥쳤다.

백몽진과 방수간이 찾아와 종일 바둑을 두고 돌아갔다.

유선각도 찾아왔다.

1594년 1월 22일 (계사년 음력 12월 2일)

아침을 먹고 윤해와 새 수령 송응서를 찾아갔다.

수령은 관아 안에 있으면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우리를 관아로 불렀다.

작은 술상을 차려 다섯 순배를 마시고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는 임면부의 집에 들러 차분히 이야기했다.

임면부의 아내가 저녁을 차려 주었다.

종일 비가 조금씩 내려 길이 진창이 되었다.

사람과 말이 다니기 몹시 어렵다.

곧 먼 길을 떠나고 싶은데 말은 야위고 종들은 지쳐 중간에 쓰러지거나 굶을까 미리 걱정된다.

1594년 1월 23일 (계사년 음력 12월 3일)

바람이 불고 눈발이 날렸다.

종 둘에게 말을 주어 향덕산의 유선각 묘소로 보내 마른 소나무를 베어오게 했다.

등잔기름이 없어 관솔을 만들어 불을 밝히려는 것이다.

유선각이 써 준 패를 들려 보냈다.

1594년 1월 24일 (계사년 음력 12월 4일)

김대성과 백몽진이 찾아왔다.

임면부도 왔다.

임면부와 종일 바둑을 두었다.

저녁을 먹여 보냈다.

1594년 1월 25일 (계사년 음력 12월 5일)

방수간이 찾아왔다.

종일 바둑을 두고 돌아갔다.

오후부터 비와 눈이 내려 밤까지 멎지 않았다.

내일 길을 떠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종일 윤겸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다.

이제 먼 길을 떠나는데 만나지 못하니 매우 아쉽다.

1594년 1월 26일 (계사년 음력 12월 6일)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났다.

남당진에 도착하니 얼음 조각이 강을 가득 메워 건널 수 없었다.

얼음이 모두 흘러내리기를 기다렸다가 오후에야 간신히 건넜다.

날이 저물어서 함열현에 들어갔다.

수령 신응구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곧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관아로 불렀다.

조익 정자도 와 있었다.

오랫동안 이야기하다 밤이 깊어 돌아왔다.

남궁지평의 종 산이 집에서 묵었다.

온돌방이 따뜻해 편히 잤다.

강을 건널 때 나루 사공이 긴 화살을 달라고 간절히 청하기에 화살 두 대를 뽑아 주었다.

강을 건너게 해 준 수고에 보답한 것이다.

1594년 1월 27일 (계사년 음력 12월 7일)

이른 아침 수령이 나를 관아로 불러 함께 아침을 먹었다.

여행 물자로 다음을 주었다.

  • 흰쌀 한 말
  • 중간 쌀 세 말
  • 콩 두 말
  • 조기 한 묶음
  • 새우젓 두 되
  • 감장과 간장 각각 두 되
  • 소금 두 되
  • 미역 한 동
  • 맑은 술 한 병

매우 고맙다.

늦은 아침 떠났다.

마침 송인수의 서제 흘립이 와 있어 함께 길을 갔다.

익산 고을 안 이경여의 피란처에 도착했는데 경여는 장성에 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오는 길에는 황간에 살던 외사촌 남경효 집의 종 부부를 만났다.

누더기 옷을 여러 겹 기워 입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은 때투성이였다.

차마 볼 수 없었다.

까닭을 물으니 왜적에게 집이 불탄 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림이 날로 심해졌다고 했다.

주인도 먹을 것이 없어 종들을 모두 내보냈기 때문에 지난달부터 떠돌며 구걸하다 좌도 쪽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너무나 참담했다.

친척과 옛사람들의 생사를 물으니 백원의 아내는 초겨울에 세상을 떠났고 남환장 좌수 숙부도 난리 초기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슬픔을 견딜 수 없다.

남 숙부는 내가 어릴 때 오래 모시고 다녀 정이 매우 깊었다.

부고를 들으니 더욱 슬프다.

처가 여종 흔비도 굶어 죽었다고 한다.

흔비는 내가 포대기에 싸여 있던 아기였을 때 업어 주던 사람이다.

굶어 죽었다니 더욱 슬프고 그립다.

자순 형의 가족만은 영동의 사위 집에 피란해 아직 죽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또 처가 여종 옥금은 난리 초기에 흩어져 간 곳을 모른다고 한다.

처음에는 사람을 보내 찾아오려 했는데 이제 완전히 떠돌아 사라졌으니 굶어 죽지 않는다 해도 다시 찾을 길이 없다.

아깝고 안타깝다.

그날은 경여의 집에서 묵었다.

1594년 1월 28일 (계사년 음력 12월 8일)

새벽 일찍 명복을 임천으로 돌려보냈다.

중간 품질 쌀 두 말과 새우젓 두 되를 지워 보냈다.

경여의 아내도 찹쌀 다섯 되를 함께 보냈다.

나는 일찍 길을 떠나 전주 땅 송영구의 산소가 있는 곳까지 갔다.

송영구는 지난해 가을 성절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제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시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우리 일행에게 아침밥을 먹이고 흰쌀 한 말도 주었다.

전주 양정포에 피란해 있는 이언좌의 집까지 갔다.

이언좌는 나와 동서다.

일행 모두에게 저녁을 먹이고 종의 집에서 묵게 했다.

이언좌는 다시 술을 들고 찾아와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 돌아갔다.

윤시남 생원이 마침 이언좌 집에 와 있어 함께 만나 이야기했다.

1594년 1월 29일 (계사년 음력 12월 9일)

새벽에 출발하려 했지만 어젯밤 비가 내렸고 오늘도 흐렸다.

이언좌가 굳이 머물라고 하여 아침밥까지 먹었다.

식사 뒤 길을 떠났다.

웅치 아래 유동에 사는 정병 유천창손 집에 묵었다.

고개를 넘고 싶었지만 말이 야위어 나아가지 못했고 하늘에서는 또 빗방울이 떨어졌다.

도둑이 두려워 일찍 민가에 들어가 묵었다.

유동의 집들은 지난해 왜적에게 모두 불탔다.

유천창손의 집만 유일하게 불타지 않아 그 집에 묵었다.

나머지 여덟아홉 집은 새로 움막처럼 지어 살거나 절반은 아직 비어 있었다.

유천창손에게 물으니 말했다.

“전주 부윤은 집이 불탄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환곡을 독촉하고 각종 부역을 날마다 내라고 합니다.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거의 모두 달아났습니다. 남은 사람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한탄스럽고 또 한탄스럽다.

1594년 1월 30일 (계사년 음력 12월 10일)

새벽에 비가 내렸다.

묵은 곳에서 아침을 먹은 뒤 길을 떠났다.

웅치를 넘는데 말에서 내렸다 탔다 하며 힘겹게 고개를 넘었다.

진안현 앞에 이르러 관노 내은풍의 집에서 묵었다.

송영구의 편지를 수령 정식에게 보냈다.

수령은 우리 일행 모두에게 아침과 저녁밥을 내주었다.

하지만 편지를 전할 때 종이 관청 심부름꾼에게 모욕을 당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주인집에는 마침 중대사 승려 영운이 와 있어 함께 묵었다.

객지의 무료함을 조금 달랠 수 있었다.

웅치를 넘으며 지난해 우리 군사가 패한 곳을 떠올렸다.

진지 흔적이 아직 남아 있어 참담한 마음을 견디기 어려웠다.

1594년 1월 31일 (계사년 음력 12월 11일)

날이 밝기 전에 출발했다.

십여 리쯤 갔는데 진안 수령이 관리를 급히 뒤따라 보내 길에서 쌀과 콩을 한 말씩 주었다.

어쩔 수 없이 길가 민가에 들어가 감사 편지를 써 돌려보냈다.

그곳에서 아침밥도 지어 먹었다.

진안 수령의 이름은 정식이다.

전에는 서로 알지 못했지만 이운을 통해 이름은 오래전부터 들었다.

길에서 먹을 곡식을 보내 준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후한 마음이 고맙다.

날이 저물어 옛 관아에 들어가 이운의 아내와 자식들을 만났다.

서로 끌어안고 통곡하며 집안의 재앙을 이야기했다.

밤이 반이 지나서야 잠들었다.

지난날을 돌이켜 생각하니 모든 일이 슬픔으로 몰려왔다.

사람의 일이 한탄스럽다.

오는 길에 종을 먼저 보내 수령에게 문안했더니 말먹이와 쌀, 콩을 각각 한 말씩 내주었다.

1594년 2월

1594년 2월 1일 (계사년 음력 12월 12일)

이른 아침 호장 이옥성과 창고지기 학춘이 찾아왔다.

모두 예전에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다.

조금 뒤 관비 능개지와 동봉도 찾아왔다.

오후에는 수령 전협을 찾아갔다.

아전들도 모두 와서 나를 보며 반가워했다.

수령은 나를 서헌 방으로 불러 안부를 나누었다.

술 넉 잔과 꿩구이 다리 두 개를 먹였다.

날이 저물어 돌아왔다.

수령의 사람됨을 보니 말은 매우 정성스럽지만 실속은 없는 듯하다.

우습다.

그래도 종과 말이 며칠 먹을 사료를 내준 것은 다행이다.

1594년 2월 2일 (계사년 음력 12월 13일)

새벽에 종 둘을 무주의 종 인수에게 보냈다.

공물을 거두기 위해서다.

또 쌀 한 말을 주어 장계 장에서 곶감을 사 어머니께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아침부터 비가 내려 두 종이 목적지까지 가지 못했을 듯하다.

오후에야 비가 그쳤다.

수령이 제사에 쓰라고 흰쌀 한 말, 두부콩 한 말, 목미 두 되, 세 가지 과일, 맑은 술 한 병을 보내 주었다.

매우 고맙다.

저녁에는 종윤이 흥양에서 돌아왔다.

그곳 노비들이 모두 달아나 신공을 하나도 거두지 못했다.

가는 길에 먹을 식량조차 구하지 못해 죽을 끓여 먹으며 어렵게 돌아왔다고 한다.

1594년 2월 3일 (계사년 음력 12월 14일)

윤함이 타는 말은 전에 오는 길에 얼어붙은 땅에서 발을 헛디뎌 앞발을 절게 되었다.

마의사를 불러 침을 놓고 피를 냈다.

오래 낫지 않을까 걱정된다.

저녁에는 창고지기 학춘이 냇물고기와 젓갈을 구해 보내 주었다.

내일 제사에 쓰려는 것이다.

1594년 2월 4일 (계사년 음력 12월 15일)

이른 아침 이운의 영전에 직접 제사를 올렸다.

슬픔을 견딜 수 없었다.

술잔을 올리다가 왼쪽 소매가 잘못 촛불에 닿아 절반이 타 버렸다.

다시는 입을 수 없게 되었다.

안타깝다.

어젯밤 꿈에도 이운이 살아 있을 때 모습 그대로 나타났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세계가 갈렸지만 내가 이곳까지 왔으니 그의 혼령도 어둠 속에서 슬픔을 느껴 꿈에 나타난 것일 것이다.

더욱 애통하다.

저녁에 종 둘이 돌아왔다.

인수는 초겨울 집이 모두 불타 충청도로 옮겨 살고 있어 찾지 못했다고 한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곶감 두 접은 사 왔다.

1594년 2월 5일 (계사년 음력 12월 16일)

절던 말의 발이 조금 나아진 듯하지만 아직 정상적으로 걷지 못한다.

다시 마의사를 불러 침을 놓았다.

모레 길을 떠나기로 했다.

저녁에 수령 전협을 찾아가 여행 물자를 구했다.

다음 물품을 주었다.

  • 흰쌀 세 말
  • 좋은 쌀 세 말
  • 콩 세 말
  • 목미 두 말
  • 찹쌀 한 말
  • 미역 한 동

길에서 쓰기에는 충분하겠다.

매우 고맙다.

1594년 2월 6일 (계사년 음력 12월 17일)

어젯밤 가위에 눌려 소리를 지르다가 깼다.

우습다.

여행 식량을 받아 왔다.

그중 목미 한 말과 찹쌀 한 말, 좋은 쌀 한 말은 이운의 형수에게 드렸다.

좋은 쌀 한 말은 아내의 서모에게도 주었다.

1594년 2월 7일 (계사년 음력 12월 18일)

아침에 종을 보내 수령에게 돌아간다고 인사했다.

수령은 벼 한 석과 간장 두 되를 보내 주었다.

곧 벼를 좋은 베 두 필과 바꾸었다.

전에 가죽장이에게 맡겨 두었던 여자 신 두 켤레도 이번에야 받아왔다.

관노 어둔에게 맡긴 망건도 찾아왔다.

갓장이에게는 전에 벼 일곱 말을 주었는데 이제 물건을 받아보니 거친 베 반 필밖에 주지 않았다.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다.

값에 못 미쳐도 어쩔 수 없이 받아왔다.

늦은 아침 길을 떠났다.

서창 뒤 고개에는 단단한 얼음이 길을 가득 덮고 있었다.

힘겹게 걸어 넘어 서창에 이르렀다.

바람이 불고 눈발이 날려 더 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묵었다.

전에 제사를 지낼 때 흰 직령의 왼쪽 소매가 촛불에 타 버렸다.

이운의 형수가 곧 이운이 입던 옥색 단령을 꺼내 직령으로 고쳐 주었다.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하다.

1594년 2월 8일 (계사년 음력 12월 19일)

날이 밝기 전에 출발했다.

오수역 뒤 길가 민가에서 아침을 먹었다.

남원 둔덕리에 있는 최경선의 농장까지 갔다.

최경선은 내가 오는 것을 보자 문 밖까지 나와 반갑게 맞았다.

아직 날이 일러 그냥 지나가려 했지만 붙잡아 그곳에서 묵었다.

우리 일행에게 밥을 먹여 주었다.

1594년 2월 9일 (계사년 음력 12월 20일)

이른 아침 최경선과 작별했다.

남원 땅에서 서창까지 몇 리 남지 않은 냇가 민가에서 아침을 지었다.

좌우 집들이 모두 비어 있었다.

이웃 사람에게 물으니 군사로 뽑혀 달아난 사람의 친족들까지 부역을 견디지 못해 거의 모두 도망갔다고 한다.

백성들의 살림이 어떤지는 이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한탄스럽다.

막정과 능찬을 먼저 보내 순창 수령 김예국에게 편지를 전하게 했다.

뒤따라 홍문 밖 민가에 머물렀다.

먼저 간 종들이 문지기의 단속이 너무 엄해 편지를 올리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그 집에서 묵었다.

집주인은 역을 면제받은 늙은 아전 최걸이라고 한다.

수령을 만나지 못하면 여행 식량도 거의 떨어졌는데 다른 데서 구할 곳이 없다.

걱정스럽다.

1594년 2월 10일 (계사년 음력 12월 21일)

내가 장수에서 올 때 이운의 아내와 자식들은 갈수록 궁핍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내 종과 말을 순창까지 일부러 보냈다.

순창 수령은 지난해 군사를 거느리고 장계에 있을 때 이운과 여러 달 함께 일해 정이 매우 두터웠다고 했다.

아는 사람을 보내면 힘껏 도와주겠다고 늘 말했다.

이번에 온 것도 바로 그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번이나 큰 소리로 사람을 불렀는데도 들은 척하지 않고 끝내 만나 주지 않았다.

사람의 정과 세상 인심이 이런 것은 흔한 일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순창 수령은 무관 가운데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행동을 보니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세상일이 한탄스럽다.

나도 이 일을 위해 억지로 하루를 더 머물렀는데 식량은 더욱 줄었다.

어쩔 수 없이 곧장 장성으로 가 거기에서 여행 식량을 얻은 뒤 영암으로 갈 생각이다.

가난한 사람의 일은 늘 뜻대로 되지 않는다.

헛수고만 하고 식량만 축냈다.

더욱 한탄스럽다.

능찬도 광주로 돌아가지 못했다.

실제로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능찬이 이번에 올 때는 여기서 식량을 얻고 광산 목사에게 편지를 올려 도움을 받은 뒤 장흥의 노비들에게 가 신공을 거두어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모든 일이 어긋난다.

종일 주인집에 있으니 너무 무료했다.

능찬은 본래 승려였다가 환속하여 장수 집 여종의 남편이 된 사람이다.

1594년 2월 11일 (계사년 음력 12월 22일)

말질손과 능찬은 장수로 돌려보냈다.

나는 날이 밝기 전에 출발했다.

담양 연덕원 오른쪽 민가에서 아침을 먹었다.

십 리도 가지 않아 잘못 지름길로 들어갔다.

작은 다리가 있었는데 내가 탄 말이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막정은 뒤처져 아직 오지 않았고 송이는 앞에서 짐말을 몰고 있었다.

송이가 내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달려와 일으켜 주었다.

그 사이 짐말이 혼자 돌아가 붙잡는 사람이 없었다.

뒷발이 미끄러지면서 좁은 길에서 크게 넘어져 진흙 웅덩이 아래로 떨어졌다.

먼저 짐 끈을 끊은 뒤에야 말을 끌어낼 수 있었다.

이부자리가 모두 젖었다.

어쩔 수 없이 민가를 찾아 들어가 옷과 이불을 널어 말리느라 멀리 가지 못하고 그 집에서 묵었다.

집주인은 정병 박귀문이다.

지명은 담양 북면 산막곡이라고 했다.

저녁밥 때 집주인이 청김치와 미역 반찬을 내주었고 따뜻한 방에서 자게 했다.

후한 사람이다.

임 진사가 새로 합격해 보내온 붉은 옷을 딸들이 만들어 주었는데 물과 진흙에 젖어 못 입게 되었을까 걱정했다.

꺼내 보니 안쪽이 조금 젖고 몇 군데만 겉까지 배어 나왔을 뿐이었다.

매우 다행이다.

다른 물건은 젖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1594년 2월 12일 (계사년 음력 12월 23일)

날이 밝기 전에 출발했다.

말이 지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날이 저물 무렵에야 장성 백양사 입구 아래 민가에 도착해 아침 겸 늦은 밥을 먹었다.

집주인은 절의 종 손오세라고 한다.

장성 수령 이귀가 동궁을 맞으러 전주에 갔고 설이 지난 뒤에나 돌아온다는 말을 들었다.

먹을 것이 완전히 떨어져 이귀에게 구하려 왔는데 없다고 하니 매우 아쉽다.

며칠 머물며 기다려 볼 생각이다.

저녁에 장성 관아에 들어가니 이자와 이찬이 마침 와 있었다.

서로 만나 반가웠다.

이자가 아랫사람에게 명해 우리 일행의 밥을 마련해 주었다.

밤에는 전 고창 수령 강수곤이 현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이자와 함께 찾아가 오래 이야기했다.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자세히 보니 아우 희철이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만나니 너무나 기뻤다.

어째서 왔느냐고 물으니 태인의 처가에서 영암으로 가다가 이곳에서 묵게 되었는데 형이 관아에 왔다는 말을 듣고 들어왔다고 했다.

어머니가 요즘 평안하시다고 한다.

더욱 기쁘다.

천 리 밖에서 서로 그리워하던 중 객지에서 아우를 만나고 어머니 소식까지 들으니 기쁨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밤이 깊어 관아로 돌아와 한 방에서 함께 잤다.

이자는 이귀의 형이고 이찬은 이귀의 사촌동생이다.

강수곤 전 고창 수령은 이정랑의 사위다.

1594년 2월 13일 (계사년 음력 12월 24일)

이른 아침 강수곤을 찾아가 여행 식량을 청했다.

흰쌀 한 말과 콩 두 말을 내주었다.

곧 송이를 고창으로 보내 받아오게 했다.

이귀에게는 편지를 써 문안하러 가는 사람 편에 보내고 식량도 구해 달라고 했다.

답이 돌아온 뒤 떠난다면 설 전에 영암에 도착하지 못할까 걱정된다.

그러나 식량 없이는 갈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머문다.

답답하다.

이자와 이찬 등이 나를 불러 냇가에서 쑥국을 끓여 먹었다.

술도 마셔 배불리 취해 돌아왔다.

이귀의 장인 장민과 나, 술과 음식을 마련한 사람 대여섯 명이 함께했다.

그 사람들도 술과 안주를 가져와 서로 노래했다.

나와 장민은 해 지기 전에 먼저 돌아왔다.

난리 뒤 노랫소리를 처음 들었다.

그러니 오히려 슬픈 마음도 많이 생겼다.

저녁에는 조익 정자가 들어와 관아 방에서 함께 잤다.

이찬도 같이 누웠다.

조익은 이여인의 사위이고 윤겸이 사마시에 장원했을 때 함께했던 사람이다.

피란하여 고산에 살다가 이귀를 찾아왔다.

1594년 2월 14일 (계사년 음력 12월 25일)

종일 관아에 있으면서 조익과 이야기했다.

이자와 이찬은 객사에서 활을 쏘았다.

1594년 2월 15일 (계사년 음력 12월 26일)

종일 관아 방에서 조익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는 이삼등의 부고를 들었다.

매우 놀랍고 슬프다.

이씨 집안의 어른으로 이제 이삼등 한 사람만 남았는데 그마저 세상을 떠났다.

더욱 애통하다.

1594년 2월 16일 (계사년 음력 12월 27일)

이자는 어제 외삼촌의 부고를 듣고 이른 아침 나주로 갔다.

수령 이귀도 없고 오직 이자에게 의지하고 있었는데 그마저 떠나니 너무나 무료하다.

사흘 밤 연달아 아내와 자식들의 꿈을 꾸었다.

무슨 징조인가.

남쪽으로 떠난 뒤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하니 걱정스럽다.

여행 식량을 얻지 못해 오래 이곳에 머무는데 손님들까지 잇달아 몰려오니 더욱 미안하다.

저녁에는 이 도의 아사가 현에 들어왔다.

밤에 조익과 함께 찾아가 오래 이야기하다 돌아왔다.

이복흥도 자기 집에서 밤길을 걸어왔다.

1594년 2월 17일 (계사년 음력 12월 28일)

조익, 이찬, 이복흥과 종일 관아 방에서 이야기했다.

나주 목사가 어젯밤 늦게 전주에서 와 객관에 묵고 날이 밝기 전에 나주로 떠났다고 한다.

만나지 못한 것이 몹시 아쉽다.

그를 만났다면 이귀가 식량을 주지 않더라도 나주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1594년 2월 18일 (계사년 음력 12월 29일)

아침에 이귀가 다음을 보내왔다.

  • 흰쌀 한 말
  • 중간 쌀 네 말
  • 콩 네 말
  • 간장 두 되

내일은 반드시 떠나 돌아갈 생각이다.

다만 중간 쌀을 받아 다시 찧어 보니 세 말 두 되밖에 되지 않았다.

틀림없이 모자란 것이다.

답답하다.

1594년 2월 19일 (계사년 음력 12월 30일)

어젯밤 비가 내렸다.

아침에도 흐렸고 종일 눈이나 비가 오락가락했다.

관에서 아침밥과 낮의 간단한 음식을 내놓았는데 모두 떡과 국수를 차렸다.

처음에는 오늘 떠나려 했다.

하지만 내일이 설날이어서 조익과 이찬이 붙잡는 바람에 그대로 머물렀다.

어제 저녁 희철의 종 덕향이 영암에서 들어왔다.

그에게서 오세량이 노비 양이, 향옥, 천우 등을 팔러 영암의 임 진사 집에 갔다가 병이 들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슬픔을 견딜 수 없다.

오세량은 성품이 본래 패악하여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피를 나눈 가까운 친척이 피란하며 구걸하다 타향에서 길에 쓰러져 죽었다니 참으로 좋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나에게는 매우 후하게 대했던 사람이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저녁에는 이자가 술을 구해 우리 숙소로 왔다.

함께 마시고 밤이 반이 되어서야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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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 광해군이 왕위 양위를 사양하며 올린 글

신은 본래 어리석고 변변치 못하며 어려서부터 학문도 없습니다. 나이는 비록 장성했으나 덕과 학업은 보잘것없습니다.

분에 넘치게 세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줄 알고 밤낮으로 두려워 몸 둘 곳을 몰랐습니다.

더구나 난리를 만나 병까지 겹쳐 반년 동안 깊은 병을 앓아 정신과 기력이 크게 쇠했습니다.

평범한 일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인데 어찌 감히 감당할 수 없는 큰 명이 갑자기 이 못난 신에게 내려올 줄 생각했겠습니까.

바라건대 아버지 임금께서는 신의 속마음을 깊이 살피시어 속히 이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신이 분수에 맞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신다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신의 답답하고 절박한 마음은 천지와 신명도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간절히 빌고 또 빕니다.

신은 어제도 땅에 엎드려 간절히 호소했으나 아직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물러나 엎드려 생각할수록 두렵고 망극합니다.

신의 어리석고 못난 점은 일일이 다시 들어 임금의 귀를 번거롭게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지금 나라 형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늙은 왜적은 아직 국경에 웅거하고 있어 흉악한 속셈을 알 수 없고 명나라 장수들은 길에 끊이지 않아 접대하는 일도 매우 어렵습니다.

옛 국토를 되찾고 살아남은 백성을 구제하는 일은 아버지 임금처럼 큰 덕과 지극한 어진 마음을 지닌 분도 어렵게 여기실 일입니다.

하물며 저처럼 둔하고 못난 사람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아무리 되풀이해 생각해도 결코 해낼 수 없습니다.

신이 죄를 얻는 것은 생각할 것도 없지만 종묘사직은 어찌하며 백성은 어찌하겠습니까.

작은 정성을 밝히지 못하고 임금의 뜻을 돌리지도 못하니 두렵고 떨려 몸 둘 곳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다시 깊이 생각하시어 허락해 주십시오.

임금의 답은 이러했다.

“지금 천명이 세자에게 있다. 세자는 사양하지 말라. 나는 병이 깊어 나라의 수많은 일을 감당할 수 없다. 하루라도 물러나 쉴 수 있다면 소원을 다 이루는 것이다. 나와 세자는 서로 간과 쓸개를 비추듯 마음을 아는 사이인데 어찌 내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가. 오늘은 바람과 날씨가 좋지 않으니 빨리 돌아가 몸을 잘 조리하라. 부모는 오직 자식의 병을 걱정하는 법이다.”

신은 여러 날 정성을 다해 호소했습니다. 이는 진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의 뜻은 더욱 멀게만 느껴지고, “천명이 너에게 있다”, “서로 속마음을 아는 사이”라는 말씀까지 내리셨습니다.

명을 받들고 너무 놀라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듯했습니다.

아버지 임금께서는 작은 일까지 모두 밝게 살피시는 분이니 신이 이처럼 두렵고 답답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마음도 틀림없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허락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엄한 말씀을 내리시니 피눈물만 흘릴 뿐 기절할 지경입니다.

차라리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한 해 넘게 이어진 난리로 국사가 위태롭고, 아버지 임금께서는 밤낮으로 근심하고 애쓰다가 몸까지 편찮아지셨습니다.

신이 아무리 어리석어도 이것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왜적이 조금 물러났다고는 해도 여전히 국경 안에 웅거하고 있어 백성이 두려워하며 끝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앞으로 걱정할 일이 예전보다 더 많습니다.

난을 평정하고 적을 이겨 옛 국토를 되찾는 큰일은 결코 어리고 어두우며 배우지 못한 못난 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종묘사직의 큰 계획을 깊이 생각하시어 빨리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면 신이 잠시라도 분수에 맞게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나라와 백성에게도 더없는 다행일 것입니다.

만일 이 정성이 하늘 같은 임금의 마음을 돌리지 못해 끝내 허락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대궐 아래에서 목숨을 마칠지언정 다시 천지 사이에 살아 서지 않겠습니다.

신은 여러 날 땅에 엎드려 궁궐 문을 향해 슬피 호소했으나 허락은커녕 여러 차례 엄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물러나 생각할수록 두렵고 떨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의 못남과 나라의 위급함은 이미 앞선 글에서 아뢰었으니 다시 일일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신은 명을 들은 뒤 밤낮으로 근심하며 밥도 넘기지 못한 지 닷새가 넘었습니다.

정신이 빠지고 기력이 다해 오늘은 목에 가래가 막히고 여러 병까지 다시 심해져 찌르는 듯 아픕니다.

이때 신의 몸이 아픈 것은 돌아볼 일이 아닙니다.

억지로라도 대궐 아래까지 가려고 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니 더욱 답답하고 눈물이 납니다.

천지와 부모와 같은 지극한 어진 마음으로 한 번만 특별히 허락해 주신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임금께서는 이렇게 답했다.

“이 글을 보니 큰 의리를 알지 못하는 말이다. 옛날 순임금이 요임금에게 왕위를 물려받을 때 사양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나랏일은 중하니 집안사람끼리의 작은 정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종묘사직이 중요하다. 나는 병이 깊어 수많은 정무를 감당하지 못하니 세자는 깊이 생각해 사양하지 말라.”

신은 어제 임금의 말씀을 받들었습니다.

허락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거절이 날로 심해져 요임금과 순임금이 왕위를 주고받은 일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명을 받고 너무 놀라 몸 둘 곳이 없어 울다가 피눈물까지 흘립니다.

옛 삼대의 시대가 어떤 시대이며 오늘이 어떤 때입니까.

순임금은 어떤 분이며 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요순 시대는 천하가 편안하고 백성이 넉넉했습니다.

오늘처럼 국가가 위태로운 때와 어떻게 같겠습니까.

우리 아버지 임금께서는 하늘 같은 큰 덕을 지니셔서 요임금과 다르지 않으시고 아직 춘추도 한창이십니다.

요임금이 늙어 정사를 내려놓던 때와는 크게 다릅니다.

오늘의 험난한 형세도 요임금 때 천하가 평안하던 것과는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사람을 말해 보아도 요임금과 순임금은 슬기롭고 밝은 덕이 천하에 알려진 성인이었습니다.

신처럼 어둡고 변변치 못한 사람이 어찌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순임금도 성덕이 그토록 높았지만 서른 살에 처음 발탁되어 이십팔 년 동안 여러 일을 시험받은 뒤에야 왕위를 잇으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때에도 남하 지방으로 물러나 사양했습니다.

어찌 사양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 아버지 임금께서는 아직 젊으시고 지금 나라의 위태로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은 어린아이처럼 어둡고 약하며 배우지 못했고 순임금처럼 오랫동안 시험받은 일도 없습니다.

게다가 오래된 병은 날로 심해지고 목숨은 실처럼 가늘게 이어져 있습니다.

종묘사직과 백성의 목숨을 맡고 전쟁을 이겨 옛 국토를 회복하는 책임을 아무리 되풀이해 생각해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신이 죄를 얻고 위아래에 잘못을 저질러 신명에게 죄를 얻는 것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조상을 욕되게 하고 아버지 임금께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신의 못남 때문에 정성이 위로 닿지 않고 피눈물로 호소해도 임금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두렵고 떨려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

바라건대 깊이 생각하시어 불쌍히 여기고 가엾이 여기시며 특별히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면 죽어가는 목숨이 잠시라도 편안해지고 다시 아버지 임금께서 몸을 회복하여 나라를 다스리시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의 답답하고 절박한 마음을 살펴 주신다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여러 날 땅에 엎드려 피눈물로 호소했지만 임금의 뜻은 더욱 멀기만 합니다.

이는 모두 신이 못나 정성이 위에 닿지 못하고 힘으로 임금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렵고 떨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의 절박한 사정은 이미 다 말씀드렸으니 다시 늘어놓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임금께서 짐을 벗고 싶어 하시는 뜻은 알지만, 나라가 막 무너졌다 다시 일어서려는 이때 저처럼 어리고 무식하며 둔하고 약한 사람에게 갑자기 이 어렵고 큰 일을 맡기면 조상을 욕되게 할 뿐 아니라 틀림없이 일을 그르칠 것입니다.

종묘사직의 큰일을 어찌 이토록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종묘사직의 무거운 부탁을 깊이 생각하시고 신의 절박한 마음을 굽어살피시어 다시 은혜를 베풀어 허락해 주십시오.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한 글

남의 즐거움을 함께 누린 사람은 남의 근심도 함께해야 하고, 남의 밥을 먹은 사람은 그 사람의 일을 위해 죽어야 한다고 들었다.

지금 나라가 깨지고 집안이 망하는 때에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는 의리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보잘것없는 왜적이 우리 큰 나라를 원수로 삼았다.

처음에는 이웃 나라 사이의 우호를 핑계로 우리의 허실을 엿보았고, 이어 사신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며 우리 조정을 업신여겼다.

감히 하늘을 쏘려는 흉계를 품고 길을 빌려 달라는 말로 속였다.

우리는 의리에 따라 거절했지만 왜적은 국경을 넘어왔다.

벌과 전갈처럼 독을 부리고 개와 양 같은 무리를 이끌고 길게 쳐들어왔다.

부산과 동래가 갑자기 함락될 때 싸우다 죽은 신하는 겨우 한 사람뿐이었다.

낙동강과 조령을 넘어오자 대군은 잇달아 무너져 달아났다.

군사 책임을 맡은 장수들은 적을 보기만 해도 달아났고, 진과 고을을 맡은 관리들도 태반이 자리를 버렸다.

죽음 속에서 살 길을 찾는다면서 병사들보다 먼저 북채를 잡고 싸우려는 사람은 없고, 풀숲에서 제 목숨만 보전하며 아내와 자식을 지키려는 자만 많았다.

여러 군대가 바람만 보고도 흙처럼 무너지고 싸워 보지도 않은 채 기왓장처럼 흩어졌다.

튼튼한 성과 요새는 모두 적에게 넘어갔다.

임금의 수레는 먼 곳으로 피란하고 백성들은 물고기와 고기처럼 죽임을 당했으며 종묘는 폐허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화친을 주장하는 사람이 힘을 얻었다.

나라를 그르친 간신의 고기는 씹어 먹어도 시원하지 않고, 임금을 멀리 피란시키자고 먼저 주장한 자의 머리는 매달아도 모자랄 것이다.

이는 공경과 사대부 모두의 수치이며 충신과 열사가 함께 아파할 일이다.

조상들이 나라를 전한 지 열한 대가 지나고 나라가 선비를 길러 온 지 이백 년이다.

어찌 의병을 먼저 일으킬 사람이 한 명도 없겠는가.

지금 강원도와 함경도의 군대는 감사가 직접 지휘해 잇달아 움직이고 있고 황해도와 평안도의 군사도 도원수 아래 모여 임금을 구하려 한다.

적을 섬멸할 날을 기다릴 수 있다.

그런데 유독 영남의 큰 고을들에서는 한 사람의 의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구차하게 목숨만 부지한다면 부끄럽지 않은가.

나라를 어찌할 것인가.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대장부가 아니다.

그대들 가운데는 한 지방을 맡은 사람도 있고 한 성을 다스리는 사람도 있으며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거나 지금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도 있다.

나라가 큰 어려움에 빠진 오늘이야말로 신하가 절의를 드러낼 때다.

어찌 높은 곳에만 떠돌며 수렁에 빠진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떨쳐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가.

위급한 때 임금을 길 가는 사람처럼 바라본다면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적에게 임금과 아버지를 내버려두고도 마음이 편한가.

비록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생각이 없더라도 훗날 나라의 형벌은 두렵지 않은가.

어찌 빨리 강을 건너 서울 성 아래까지 진격하지 않는가.

군사는 앞으로 나아갈 뿐 물러나지 말고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충신은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자기 몸은 뒤로 해야 한다.

나 또한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은 몸으로 피란 중 명을 받아 흩어진 군사를 모으고 있다.

서울을 깨끗이 되찾아 백성을 다시 편안하게 하고 옛 도읍을 회복하여 종묘의 모습을 되찾으려 한다.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합치기만 한다면 난리를 평정하고 쇠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일이 어찌 어렵겠는가.

다만 옷자락을 떨치고 달려 나오는 사람이 적어 함께 불 속과 끓는 물이라도 뛰어들 사람이 필요하다.

쓸개를 맛보고 피눈물을 흘리는 분함을 더욱 굳게 하여 천지를 뒤집듯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한다.

옛사람도 옛 임금을 구하지 못한 것을 평생 한스러워했다.

적을 토벌하는 일은 하루가 급하다.

의병을 일으키는 데 남보다 늦지 말라.

이 격문을 받거든 뜻을 따르라.

황사숙이 쓰다.

정인홍과 김면 등에게 내린 임금의 글

임금이 말한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천지에 변하지 않는 도리이고 충성과 의리는 사람이 지켜야 할 큰 절개다.

본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 남이 억지로 권하지 않아도 된다.

더구나 영남은 옛 신라의 터전으로 어른들은 효도와 우애를 지키고 젊은이들은 시와 글을 배운 고장이다.

나라가 뒤집힌 뒤라 해도 어찌 떨쳐 일어날 사람이 조금도 없겠는가.

처음 왜적이 닥쳤을 때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 이상했다.

장수들이 적을 보고 도망간 탓도 있지만 백성들도 뜻밖의 난리를 만나 놀라 흩어져 다시 모으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여러 고을의 집들은 비었고 나라 전체가 뒤집혔다.

백성은 도살당해 살 생각조차 하기 어렵고 관청 창고는 잿더미가 되어 손댈 것이 없다.

내가 서쪽으로 피란한 뒤 남쪽 소식까지 끊겼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인홍과 김면이 몸을 일으켜 군사를 모으고 오로지 왜적을 토벌하는 데 마음을 두었다.

몇 달 사이 수천 명을 모았고 그 의기에 감동한 열사들이 메아리처럼 응했다.

군량 창고가 비어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무기 창고가 비어 대나무를 깎아 활을 만들면서도 싸웠다.

정진에서 적을 쓸어내자 달아나던 왜적이 넋을 잃었고 무계에서 칼을 맞대자 시체가 강을 가득 메웠다.

관군은 어찌 그리 쉽게 무너지고 의병은 어찌 그리 한마음으로 이기는가.

왜적을 움직이는 것은 형벌과 강제이고, 의병을 묶어 주는 것은 의로움이기 때문이다.

의는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제야 성과 못을 쌓는 데만 힘쓰지 않고 백성의 힘을 길러야 하며, 절도사와 진을 제대로 두어 백성의 마음을 굳게 모았다면 왜적의 혼백이 이미 동래 들판에서 흩어져 평양까지 들어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알겠다.

이는 내가 밝지 못했던 탓이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얼마 전 강만담이 돌아갈 때 나의 잘못을 적은 글 한 장을 보내 천 리 밖 백성에게 내 마음을 알렸다.

험한 산과 바다 사이에서 그 글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제 최원의 군중을 통해 다시 내 뜻을 알리고 적의 형세도 살피게 한다.

너희가 이 글을 보더라도 내 마음을 어찌 다 알겠는가.

가을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때 종묘사직이 떠도는 것을 불쌍히 여기고, 먼 국경의 강가에서 임시 궁궐은 쓸쓸하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귀천이 다르지 않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아침저녁으로 더해진다.

다행히 명나라 황제께서 우리를 돌아보시어 용맹한 장수에게 명을 내렸다.

병부 시랑 한 명을 보내 광녕과 요동 등지의 총병을 거느리고 많은 군사를 일으켜 군량을 조달하며 물과 육지로 함께 진격하게 했다.

서울까지 곧장 쓸어버릴 것이다.

장기공 유격이 먼저 압록강을 건넜고 절강 출신 심유경 유격도 포수 천육백 명과 함께 황제가 군사들에게 내릴 은을 가지고 강을 건넜다.

명군이 곧 닥칠 것이니 산악도 빛을 바꾸는 듯하다.

가을 하늘이 맑고 길이 말랐으니 적을 잡을 때이며 말은 살찌고 활은 강해졌으니 왜적을 죽일 때다.

대군과 전선이 육로와 바닷길에 이어지고 있다.

흉악한 적의 죄가 가득 찼으니 하늘의 벌이 내려질 것이다.

경기와 황해도, 충청도에서도 의병이 일어나 곳곳에서 왜적의 목을 베어 날마다 관에 바치고 있다.

이는 천지가 말없이 돕는 것이며 종묘사직을 다시 일으킬 기회다.

너희는 더욱 충성을 다하라.

김성일은 거창에 있고 한효순은 바닷가에 있으니 각각 좌우도의 관찰과 순찰을 맡겼다.

여러 의병장에게도 벼슬을 차등 있게 내렸다.

너희는 그들의 지휘를 따르고 함께 계책을 의논하라.

왜적이 돌아가는 길을 막아 뒤를 치고 적이 머무는 곳을 정찰하여 밤에 진영을 습격하라.

나아가고 물러남은 기회를 보아 너희가 판단하라.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은 높은 벼슬을 추증했고 그 자식에게도 벼슬을 내릴 것이다.

너희에게 무엇을 아끼겠는가.

먼저 영남의 왜적을 쓸어버리고 임금의 수레가 하루빨리 돌아가게 하라.

내 말을 다하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흐른다.

내가 어찌 너희를 잊겠는가.

나라의 강토에서 왜적의 더러운 기운을 깨끗이 쓸어버린다면 훗날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나라의 영광을 함께 나누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뜻을 알리니 잘 알아두라.

전란을 탄식한 여덟 구절

비밀스러운 예언이 전해 온 지 구백 년,
앞사람은 이미 가고 뒷사람도 떠돈다.

세 도읍은 대낮에도 여우와 토끼의 땅이 되었고,
서울 거리는 봄이면 피리와 거문고에 취하던 곳이었다.

나뭇잎 지는 신령한 산에는 차가운 비가 울고,
풀이 깊어진 궁궐 뜰에는 새벽 연기만 오른다.

임금의 은혜와 용서가 바다처럼 깊으니,
이제야 삼한의 나라가 다시 온전해질 것을 믿겠다.

여러 도의 군사와 백성에게 알리는 글

명나라 황제께서는 우리나라가 왜적에게 침략당한 것을 매우 불쌍히 여기셨다.

특별히 사신을 보내 황제의 뜻을 알리고 대군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게 하셨다.

반드시 우리 백성을 구하고 우리 강토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힘이 천 근을 든다고 하여 ‘낙천근’이라 불리는 낙상지 참장이 남쪽 군사의 정예 포수 오천 명을 이끌어 선봉이 된다.

그들은 한 사람이 백 명을 상대할 만큼 강한 군사다.

이어 북쪽 군사와 기병 삼만 명이 뒤따르고 송응창 병부상서가 여러 지방의 대군을 이끌고 계속 나아온다.

육군은 세 길로 나뉘어 평양을 넘어 곧장 왜적을 치고, 수군은 두 길로 나뉘어 진격한다.

물과 육지의 모든 군대가 서울에서 만나 남쪽으로 내려갈 것이다.

장수만 삼백 명이고 전체 군사는 수십만에 이른다.

이처럼 강대한 명군으로 보잘것없는 왜적을 치는 것은 큰 산으로 새알을 누르는 것과 같다.

크고 작은 모든 백성에게 알린다.

너희는 조상 때부터 이 나라 백성이었는데 지금 섬나라 왜적에게 붙잡혀 부림을 당하고 있으며 부모와 아내와 자식을 잃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으며 원수를 갚으려는 뜻이 없겠는가.

각자 힘을 다해 왜적의 목을 베고 공을 세우라.

나라를 되찾는 날 공신으로 기록하여 은혜가 자손에게까지 미치게 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 명군이 길게 진격할 때 그대로 적 속에 남아 있다면 옥과 돌이 함께 불타듯 같이 화를 입을 수 있다.

뒤에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

각자 힘써 공을 세우라.

첫째, 왜군의 큰 장수를 벤 사람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높은 품계로 올린다.

둘째, 왜적의 머리를 하나라도 벤 사람은 모두 공신으로 기록한다.

셋째, 지금 왜적에게 들어가 있는 사람이라도 왜적을 베고 나오면 죄를 면하게 할 뿐 아니라 공을 기록한다.

넷째, 왜적을 베지 못하더라도 먼저 성을 빠져나와 돌아오면 죄를 면하고 포상한다.

명나라 경략부에서도 다음과 같이 알렸다.

“우리는 남북의 수군과 육군을 동원해 왜적을 없애고 조선을 회복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미 장수들에게 군사를 엄하게 단속해 백성의 물건은 털끝 하나도 범하지 말라고 명했다.

조선의 군사와 백성은 명군이 지나가거나 머물 때 평소처럼 자기 집과 생업을 지키고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명군이 소란을 일으켜 피해를 주면 그 부대 장수에게 알려 조사하게 하라.

추운 계절 먼 곳까지 와 너희 나라를 구하는 군대이니 너희도 일부러 억지 요구를 하거나 괴롭히지 말라.”

명나라 경략부가 정한 군율

첫째, 조선의 부녀자를 희롱하는 군인은 목을 벤다.

둘째, 시장 백성의 재물이나 술과 음식을 강제로 빼앗는 자는 왼쪽 귀를 자른다.

셋째, 마음대로 대열을 떠나거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포박하여 곤장 쉰 대를 친다.

넷째, 장수가 숙영할 곳에 이르면 유능한 책임자 한 사람을 먼저 보내 여관이나 절의 크기를 살피고 문마다 “이곳에는 어느 부대의 사람과 말 몇을 수용한다”는 표지를 붙인다.

각 부대는 그 표지에 따라 묵을 곳을 정한다.

숙소가 정해진 뒤에는 한 사람도 함부로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이를 어긴 사람은 묶어 곤장 여든 대를 친다.

장수가 단속하지 않았다가 일이 드러나면 함께 책임을 묻는다.

또 다음 네 가지를 거듭 정했다.

첫째, 장수와 군사는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을 구원하러 온 것이므로 백성의 물건은 털끝 하나도 범하지 말라. 어기면 목을 벤다.

둘째, 조선의 남녀를 함부로 죽여 공을 세운 것처럼 꾸미지 말라. 어기면 목을 벤다.

셋째, 장수와 군사는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큰 공을 이루어야 한다. 서로 어긋나고 의심하며 시기하면 군법으로 엄하게 다스린다.

넷째, 싸움에 임하면 선봉은 오직 적을 베는 데 힘쓰고, 목을 베는 담당자는 목을 거두는 데 힘쓴다. 공을 확인한 뒤 정해진 몫에 따라 포상한다. 남의 공을 빼앗고 적의 머리를 다투는 자는 목을 벤다.

이 네 조항은 매우 중요하니 모든 장수와 군사는 반드시 지키라.

동궁이 여러 군대에 내린 명령

동궁이 말하였다.

“명나라의 대도독 이여송과 이여백, 양원, 장세작 세 대장이 먼저 천하의 정예군 십만을 거느리고 지난달 이십오일 압록강을 건넜다.

낙상지 참장은 복건 포수 칠천 명을 이끌고 먼저 강을 건넜고, 크고 작은 장수가 모두 일흔두 명이다.

참장은 순안까지 왔고 도독은 이미 안주에 이르렀다.

우리 군사 삼만과 날짜를 정해 함께 거사하려 한다.

전쟁은 미리 결과를 장담할 수 없으나 형세로 본다면 큰 산으로 새알을 누르는 것과 같아 흉악한 왜적을 쓸어 없애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평양의 왜적은 기껏해야 육칠천 명이다.

여러 곳에 흩어진 왜적도 틀림없이 서쪽으로 몰려와 구하려 할 것이다.

이처럼 다시 얻기 어려운 기회를 타고 황제의 위엄까지 의지하여 우리 군대도 각 진영에서 동시에 일어나 왜적을 공격하라.

큰 부대는 큰 적을 막고 작은 부대는 작은 적을 맡아 서로 구하지 못하게 하라.

그러면 우리 군대의 기세는 대나무를 쪼개듯 거침없을 것이다.

만일 병력 차이가 너무 커 쉽게 공격할 수 없다면 맞서 진을 치고 버티며 왜적을 붙들어 두어라.

뒤를 따라가 공격해 적의 힘을 흩어놓고 한데 모이지 못하게 하라.

나라의 치욕을 씻고 온 강토를 깨끗이 하는 일이 이번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다.

이 뜻을 각 도의 진과 고을, 크고 작은 의병에게 모두 알리라.

각자가 싸울 것이며 한 사람이라도 왜적을 바라보기만 하며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머물러 나아가지 않거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즉시 군중에서 목을 베어 사람들의 마음을 격려하라.”

평양성 회복 뒤 임금이 내린 글

임금이 말한다.

아,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천지와 함께 영원하고 충성스러운 마음은 사람의 타고난 본성에 뿌리박혀 없어지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이니 억지로 권할 필요가 없다.

처음에는 적과 우리 병력의 차이가 커 쉽게 쓸어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천자의 위엄이 크게 떨쳐졌으니 모두 다시 일어나라.

명나라 황제께서는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충성을 다한 것을 생각하시고 내가 피란하여 들판을 떠도는 것을 가엾게 여기셨다.

천하의 대도독 이여송에게 명하여 정예군 수십만과 남쪽 지방의 화기와 포수를 거느리게 하셨다.

이달 초여드레 평양을 공격해 성 전체를 되찾고 왜적 이만여 명을 죽였다.

왜장 평행장 이하 수많은 왜적이 베이거나 불타거나 물에 빠져 거의 빠져나가지 못했다.

본래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왜적에게 붙었다가 다시 귀순한 자들은 모두 죽이지 않고 본래 신분으로 돌아가게 했다.

황제의 은혜는 천지처럼 커서 풀과 나무까지 살려 내고 천자의 위엄은 천둥처럼 강해 그 앞을 막는 것은 모두 부서진다.

이제 군사를 여러 길로 나누어 남은 왜적을 쓸어버리며 장구하게 진격하고 있다.

기세가 대나무를 쪼개는 것 같다.

송응창 경략도 황제의 명을 받들어 토벌을 지휘하며 모든 지시가 군사의 이치에 맞는다.

여러 명나라 관리들이 마음을 합쳐 반드시 궁지에 몰린 왜적을 없애려 한다.

우리나라에 보낸 글에서도 사람들을 격려하는 뜻을 조목조목 분명하고 간절하게 말했다.

너희 각 도의 크고 작은 관청과 들판의 충의로운 사람들은 각자 충성을 떨쳐 힘을 다하라.

의병을 모아 관군을 돕고, 영웅과 호걸들에게 알려 명군을 맞으라.

도망가는 적의 길을 막고 군량을 잇는 길을 끊어라.

모든 작전은 형편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라.

나라가 먼지 속에 빠진 지금 충절을 다한다면 그 공은 후세까지 그림과 기록에 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뜻을 널리 알리니 잘 알아두라.

이여송 제독이 우리나라 신하와 백성에게 내린 경계문

황제께서는 작은 조선이 왜적에게 함락되어 임금과 신하가 피란하고 백성이 흩어진 것을 불쌍히 여겨 특별히 대장을 보내 여러 진의 군사를 이끌고 멀리 산과 바다를 넘어와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게 하셨다.

지난해 십이월 이십오일 강을 건넌 뒤부터 조선의 대신들은 와신상담하며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하기보다 편안한 집에서 술 마시고 즐기는 일이 있다고 한다.

이는 명나라를 업신여기는 일일 뿐 아니라 스스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짓이다.

명군은 들판에서 자고 목숨을 내놓고 싸워 평양을 되찾았다.

이것은 너희가 나라를 잃었다 다시 찾고 집을 잃었다 다시 얻은 것과 같다.

그런데도 작은 잘못을 따지고 군량과 말먹이가 부족하다고 책임을 미루며 군사를 구경만 한다면 군기까지 그르치게 된다.

그런 일이 계속된다면 조정에 보고해 군사를 요동으로 돌릴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다시 나라와 집을 잃게 될 것이다.

나는 충정을 다해 작은 잘못을 마음에 두지 않고 나라의 큰 원칙을 지키려 한다.

평양에 군사를 머물게 하며 백성을 위로하고 계책을 세워 때에 맞게 진격하여 너희 나라와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 한다.

일이 평정되고 백성이 편안해진 뒤에야 황제께 돌아가 명을 보고할 것이다.

조선의 크고 작은 신하들은 이 뜻을 알고 대신들을 속히 우리 군영으로 보내 토벌할 계책과 필요한 군량, 말먹이 등을 의논하게 하라.

다시 명을 어기고 늦춘다면 조정에 보고해 군법으로 엄하게 다스릴 것이며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심수경을 의병 도체찰사로 삼으며 내린 교서

임금이 말한다.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사나운 왜적이 성 안까지 가득하고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잊을 수 없다.

원로 대신이 피란지에서 다시 일어났으니 마땅히 무거운 일을 맡겨 큰 공을 끝까지 이루게 해야 한다.

내가 부족한 자질로 이 어렵고 큰 나라를 이어받아 이십오 년 동안 걱정하고 애썼다.

늘 위태로운 일을 생각했지만 이백 년 동안 태평에 익숙해져 앞으로 닥칠 화를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

뜻밖에 왜적이 국경의 허점을 틈타 동남쪽을 집어삼키고 곧장 경기까지 달려왔다.

장구하게 밀려오는 기세를 막지 못했고 성을 굳게 지키는 계책도 다했다.

나는 잠시 도성을 떠나 피란하여 북쪽에서 나라를 다시 일으킬 길을 도모했다.

서울의 성과 도읍을 하루아침에 잃고 의주에서 서리와 눈을 맞으며 떠돈 지 이미 여러 계절이다.

여러 도가 무너진 것을 슬퍼하고 언제 평정될지 몰라 걱정했다.

다행히 백성의 마음이 아직 나라를 생각하고 있어 하늘의 뜻도 다시 우리를 돕는 것을 알겠다.

여러 고을에서 의병이 일어나 임금을 돕겠다고 서로 앞다퉈 모였다.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합치면 왜적을 평정할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 잘못된 계책으로 군사들의 마음을 갈라놓았다.

많은 사람이 자기 군대만 끼고 스스로를 지키며 막상 싸울 때 서로 돕지 않는다.

군사가 질서 없이 움직이니 공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군율에 따라 군사를 움직인다면 흉악한 적을 없애는 일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대신 한 사람을 보내 여러 군사를 통일하여 지휘해야 한다.

원로 가운데 심수경만 한 사람이 없다.

그대는 두 임금을 섬긴 원로이며 한평생 청렴하고 충성했다.

젊어서 과거에 뛰어난 답안을 내 조정에서 으뜸이 되었고 높은 벼슬을 맡아 나라의 원로로 의지해 왔다.

정사를 맡겨 함께 나라를 다스리려 했는데 병을 이유로 물러났다.

난리가 난 뒤 노병이 깊어 임금에게 달려오지는 못했지만 임금과 신하의 큰 의리를 잊고 나라를 회복하려는 정성을 늦춘 적은 없었다.

이미 호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고 들었다.

이제 경기 안쪽까지 나아가라.

서울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 곳인데 흉악한 왜적의 더러운 땅이 되었다.

예의와 문물이 왜적의 손에 더럽혀졌다.

백성은 날마다 우리 깃발을 바라보고 있다.

하늘의 토벌이 백성의 마음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일에는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이 있으니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이에 그대를 도체찰사로 삼아 여러 곳의 의병을 모두 지휘하게 한다.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기회를 잃는 자는 모두 군법으로 처리하라.

내 뜻을 듣고 마음을 다하라.

여러 군사의 명령을 밝히고 강 한가운데 노를 두드리며 원수를 쓸어버리겠다고 맹세하던 옛사람처럼 이번 길에서 왜적을 깨끗이 없애라.

명령을 거듭하여 어기는 일이 없게 하고 형세를 보아 적을 없애되 먼저 만전의 계책을 세워라.

정예군을 다해 공격하여 한 번에 승리를 이루라.

왜적의 갑옷 한 조각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임금의 수레가 하루빨리 서울로 돌아갈 수 있게 하라.

내가 이제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오직 그대가 직분을 다하기 바란다.

종묘사직의 치욕은 아직 씻지 못했고 백성의 재앙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예의의 땅에서 왜적의 더러운 기운을 오늘 깨끗이 쓸어버린다면 그 큰 공을 훗날 산과 강이 없어질 때까지 기억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서를 내리니 잘 알아두라.

충청도 우도 유생들이 심수경에게 올린 글

충청도 우도의 유생 이애 등은 삼가 심수경 대감께 글을 올립니다.

여러 고을에서 앞다투어 의병을 일으켜 흉악한 왜적을 없애려 합니다.

그러나 군대에 한 사람의 주장이 없으면 어지러워진다고 모두 말하며 대감을 따르려 합니다.

대감께서 어찌 그들을 버리시겠습니까.

대감은 벼슬이 이미 지극히 높고 나이도 많습니다.

조정에서도 억지로 일어나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감 스스로는 그렇게 물러나 계셔서는 안 됩니다.

처음 변경의 신하들이 군율을 잃고 바다 건너 왜적이 날뛰면서 튼튼한 국경과 세 도읍을 모두 잃었습니다.

임금은 피란했고 군사는 여러 번 패했으며 종묘사직은 폐허가 되고 백성은 학살되었습니다.

온 사방을 바라보아도 몸 둘 곳이 없습니다.

그나마 호서 절반이 겨우 폐허를 면했으니 조상들의 혼령이 우리 한 지방을 도와 나라를 다시 일으킬 작은 바탕을 남겨 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군사를 거느린 장수들은 계책이 부족하고 힘쓸 사람들은 큰 의리를 잊었습니다.

군사와 백성은 모두 겁에 질려 왜적만 보면 싸우지도 않고 무너졌습니다.

임금께서는 서쪽에서 근심하시고 왜적은 우리 지방까지 날뛰고 있습니다.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저희는 벼슬 없는 선비들입니다.

재주는 모자라고 힘도 약해 큰 공을 세우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도려내는 듯한 분노로 죽음을 각오하고 고을 군사를 모아 겨우 수백 명을 얻었습니다.

호서 십여 고을의 뜻있는 남자들도 약속하지 않았는데 모이고 있으니 천이천 명은 더 얻을 수 있습니다.

비록 일이 서툴더라도 정성이 하늘에 닿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들을 지휘할 사람은 오직 대감뿐입니다.

대감의 뜻이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이 지방 사람들이 반드시 대감을 장수로 모시려는 까닭은 평생의 큰 절개로 보아 큰일을 할 수 있는 분이고 병법을 안다는 이름도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난리가 처음 일어났을 때도 조정에서는 대감을 체찰사로 추천했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임금께서 대감을 잊으신 적은 없습니다.

어지러운 가운데 대감은 임금의 피란길을 따라가지 못했고 그 때문에 밤낮 울며 잠과 밥을 잊으셨을 것입니다.

이제 남은 힘을 다해 지휘 깃발을 들고 군문에 서신다면 백발의 원수를 바라보며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볼 것입니다.

임금께서 들으셔도 원로의 충성과 절개가 늙을수록 굳어진 것을 생각해 남쪽을 돌아보는 걱정을 조금 덜 수 있을 것입니다.

잠시 노쇠한 몸을 움직여 늦은 절의를 더욱 빛내고 죽기 전에 힘껏 나라의 은혜를 갚는 것이 대감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대감께서 일어나지 않으신다면 종묘사직은 어찌하며 백성은 어찌합니까.

대감께서 이 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희는 이상하여 오래 생각해도 알 수 없습니다.

시대의 형세상 해서는 안 된다고 보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군사를 모으기가 어려워서입니까.

나라가 위급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할 때입니다.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어찌 다른 일을 돌아보겠습니까.

여러 고을 수령과 장수들이 군사를 거느린 채 자기 몸만 지키며 머뭇거리지만, 대감께서 충의로 떨쳐 일어나신다면 모두 마음을 고쳐먹고 게으른 자도 일어나 대감의 명령을 들을 것입니다.

마음과 힘을 합쳐 호서를 지키고 경기의 흉악한 왜적을 쓸어버려 임금의 수레를 옛 도읍으로 돌아오게 한다면 얼마나 위대한 일이겠습니까.

저희가 대감에게 사사로운 마음이 있어서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 형세가 대감께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대감은 기력이 비록 쇠했어도 정신은 남보다 열 배 뛰어나십니다.

앉아서도 군사를 지휘하고 병법을 운용할 수 있습니다.

백성의 기대를 막을 수 없습니다.

한 도 의병이 모이고 흩어지는 일이 오직 대감께서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찌 한 번 나서는 것을 아껴 큰 의리를 저버리시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은 난리를 싫어하고 하늘도 바른 편을 돕습니다.

명군이 이미 서쪽 국경에 들어왔고 왜적의 기세는 무너져 약해졌습니다.

맑은 가을은 적을 죽일 기운을 돕고 별자리도 적의 멸망을 보이는 듯합니다.

큰 공을 이룰 때가 바로 오늘입니다.

대감께서는 생각해 주십시오.

임금께서 “돌아오고 싶다”, “날마다 기다린다”고 하신 말씀을 어찌 듣고도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겠습니까.

저희가 밤중에 베개를 어루만지다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의병을 모으며 몸을 아끼지 않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라건대 대감께서는 위로 임금의 깊은 치욕을 생각하고 아래로 선비들의 간절한 기대를 살피시어 단호히 일어나 큰 어려움을 구제하십시오.

종묘사직의 다행이며 신하와 백성의 다행입니다.

심수경의 답

나는 여든에 가까운 늙고 병든 사람이라 정신과 기력이 일을 도모할 수 없다. 이것이 할 수 없는 첫째 이유다.

난리를 피해 떠도는 몸으로 조정의 명령도 없이 유생들의 청을 받아 갑자기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일의 체모에 맞지 않는다. 이것이 둘째 이유다.

조정에서 지금 대신을 보내 이 도의 군무를 감독하고 있는데 전에 대신을 지낸 사람이 초야에 숨어 있다가 사사로이 의병을 일으킨다면 조정의 명을 받은 대신이 일을 해낼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것이 셋째 이유다.

이 도에서 이미 일어난 의병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 군량과 무기도 모두 여러 고을에서 가져와 소란이 이미 심하다.

내가 또 별도의 군사를 일으키면 다시 각 고을에서 물자를 가져와야 하니 백성이 견디기 어렵다. 이것이 넷째 이유다.

왜적의 기세가 조금 꺾인 듯하고 지금 군사를 일으키기에도 늦었다.

왜적이 다시 이 도를 침략하지 않는다면 이 의병을 서울이나 다른 도까지 옮겨 갈 것인가.

그렇지 않고 시간만 보내며 여러 고을 물자를 소비하면 아무 이익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다섯째 이유다.

유생들이 다시 올린 글

어제 대감께서 말씀하신 다섯 가지 불가한 이유를 들었으나 저희의 의혹은 오히려 더 커졌습니다.

여든 살에 장수가 된 사람은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일을 잘하고 못하는 것은 나이와 관계없습니다.

적을 없애려는 뜻만 있다면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나가는 것을 무엇 때문에 꺼리십니까.

선비가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스스로의 뜻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의병장이 되기 위해 어찌 조정 명령을 기다립니까.

명령을 기다린다면 그것은 관군이지 의병이 아닙니다.

조정이 사신을 보내 관군을 감독하는 것과 대감께서 의병을 지휘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사사로이 군사를 일으킨다는 혐의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미 일어난 의병들도 선비들이 스스로 모은 것이며 군량과 무기도 스스로 마련했습니다.

어찌 고을을 소란스럽게 하는 폐단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왜적은 서울을 차지한 지 한 해가 되어 가고 날로 기세가 거세지고 있습니다.

승전 소식은 들리지 않고 다시 길게 쳐들어올 걱정이 눈앞에 있습니다.

왜적이 잠깐 물러났다고 기세가 꺾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는 눈앞의 적을 쓸어버린 뒤 경기로 나아가 싸우고 서북의 임금께 승전 소식을 전하여 서울로 돌아오시게 하는 것을 뜻으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어찌 늦었습니까.

군기 앞에 지낸 제문 — 계사년 음력 10월 20일

하늘이 큰 재앙을 내려 추악한 왜적이 틈을 엿보았습니다.

종묘사직은 폐허가 되고 임금은 피란하셨습니다.

선비와 백성은 모두 칼날과 화살에 죽었고 조상들이 물려준 강토는 왜적의 더러운 땅이 되었습니다.

천고에 없던 참혹한 변란이 한 해가 다하도록 이어집니다.

군사는 여러 번 무너지고 적과 싸워 분노를 풀 사람은 없습니다.

간장이 찢어지고 마음이 썩는 듯 신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사방에 적진이 가득한데 어찌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있겠습니까.

이제 군사를 모아 적의 횡포를 막고자 합니다.

군기를 세우자 의로운 무리가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임금을 위해 주먹을 불끈 쥐고 임금이 욕을 당한 데 분노합니다.

이제 토벌군을 일으켜 길을 떠나려 합니다.

칼을 잡고 맹세하니 죽을지언정 살아 돌아오려 하지 않겠습니다.

신령께서는 부디 어둠 속에서 도와주십시오.

우리의 무위를 크게 떨쳐 흉악한 무리를 깨끗이 쓸고 나라를 다시 편안하게 하게 하십시오.

백성이 다시 평안하고 나라의 치욕을 영원히 씻게 하십시오.

이에 정성껏 제사를 올려 이 뜻을 고합니다.

신령께서는 들으시고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 의병에게 보낸 격문 — 계사년 음력 10월 25일

만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겠다며 나라에 보답하려는 의로운 군사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뜻이 하나라면 마땅히 적을 치는 군사의 힘도 하나로 합쳐야 한다.

이에 급히 격문을 보내 피 끓는 정성을 알린다.

얼마 전 하늘이 큰 재앙을 내려 추악한 왜적이 틈을 노렸다.

팔도가 모두 끊어져 나라가 있는지조차 알기 어렵고 세 도읍이 모두 짓밟혀 튼튼한 성도 믿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임금은 피란하고 종묘사직은 폐허가 되었다.

선비들은 짐승 같은 왜적의 이빨에 죽고 풀과 나무까지 피비린내에 물들었다.

옛날에도 보기 어려운 큰 변란이다.

그래도 다행히 사람의 마음이 나라를 떠나지 않았고 임금의 은혜가 아직 백성에게 남아 있다.

의병들이 적을 향한 분노로 서로 일어났고 모든 사람이 죽음을 각오했다.

군사를 모은 지 두세 달 만에 메아리처럼 호응하여 의병에 들어온 무리가 매우 많다.

의병장들 가운데는 이름난 선비도 있고 용감한 무장도 있다.

눈물을 씻고 나라를 회복하려 하며 왜적과 한 하늘 아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군막 안에서 창을 베고 누우며 옛 명장의 충성과 용기를 품고, 장막 속에서 계책을 세우며 뛰어난 책략을 생각한다.

왜적도 이 소문을 듣고 스스로 두려워할 것이며 강토도 머지않아 되찾을 수 있다.

다만 서로의 형세를 돕지 못하고 군사의 힘도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각자 진을 치고 자기 한쪽만 지키며 여러 군대가 큰 계책 없이 흩어져 있다.

의병의 진영이 서로 바라보일 만큼 많은데도 성 하나를 되찾았다는 소식이 없다.

의병을 일으킨 지 여러 달이 지났는데 흩어진 왜적 몇을 잡는 데 그치고 있다.

이는 여러 장수의 처음 뜻도 아니며 조정이 기대한 바도 아닐 것이다.

나는 세 임금을 섬기며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나 털끝만큼도 보답하지 못했다.

대신의 반열에 있었으면서 기울어지는 나라를 붙들지 못하고 전쟁 속으로 달아나 목숨만 구차하게 보전한 것이 부끄럽다.

원수와 같은 하늘을 이고 무슨 얼굴로 살며 임금의 땅에서 밥을 먹고 무슨 낯으로 있겠는가.

몸의 힘은 이미 쇠했지만 충성에서 나온 분노 때문에 병든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선비들의 청에 답하여 이달 이십일 아산창에 진을 쳤다.

여러 진을 뒤따르며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려 한다.

의를 위해 일어난 군사 가운데 나라를 위한 사람이 아닌 자가 어디 있겠는가.

계책을 하나로 하고 형세를 합친다면 군사가 적고 힘이 약한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창을 갈고 같은 원수를 치라.

남이 싸우는 것을 둘러서 구경만 하지 말라.

전차를 정비하고 함께 일어나 모두 한마음으로 돌아오라.

힘을 합치고 마음을 같이하여 날짜를 정해 함께 떨쳐 일어나자.

큰 산으로 새알을 누르듯 흉악한 무리를 깨끗이 쓸어버리고 뜨거운 화로에 깃털을 태우듯 빠르게 평정하자.

왜적의 운명이 어찌 오래가겠는가.

나라를 회복하는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속일 수 없으니 멀고 가까운 곳 모두 힘을 합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여, 세상에 드문 큰 공을 끝까지 이루기 바란다.

의병 대장에게 내린 임금의 답

옛날 태공도 늙은 나이에 들판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이름난 대신들도 아주 늙어서까지 나라 일을 맡았다.

경은 나이 여든에 가까운데도 나라 일을 걱정해 의분을 품고 군사를 일으켰다.

보고 들으니 칭찬할 만한 일이 많다.

경은 명망과 지위가 이미 높으니 여러 곳의 의병은 마땅히 경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

때를 놓치지 말고 일을 도모하라.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곧 군법으로 처리하라.

지휘에 필요한 인장도 만들어 보내니 군의 명령과 체모를 세우는 데 쓰라.

덧붙인 기록

황해도 해주 월곡면 상림 정문동에 사는 십대손 순선이 베껴 쓴 뒤 책 뒤에 붙였다.

다시 덧붙인 기록

기유년 오월 하순, 삼가 다시 베껴 해주 상림동 향재 서사에 소중히 보관한다.

 

 

 

갑오일록 — 1594년 2월 20일~1595년 2월 8일

1594년 2월

1594년 2월 20일 (갑오년 음력 1월 1일)

옥여 이귀가 완산에서 처음 도착했고, 이진 여헌도 왔다. 서로 만나니 참으로 반갑고 위로가 되었다.

여헌은 오는 길에 임천을 지나며 사흘을 묵었다고 한다. 임천 수령이 그의 장인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내 아내와 자식들을 두 번이나 찾아보았다고 했다. 집에서 보낸 편지도 전해 주어 읽어 보니, 그때까지는 모두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었다.

다만 윤겸(큰아들)의 장인 이응화가 순천에 있다가 바다를 건너던 배가 뒤집혀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그의 서자 이생도 물에 빠져 죽었고, 언실은 가까스로 헤엄쳐 육지에 나왔으나 병을 얻어 이레 만에 죽었다고 한다. 놀랍고 슬픈 마음을 이길 수 없다. 늙은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더욱 걱정스럽다.

윤겸은 장인의 관을 모셔 오려고 순천으로 가는 길에 이곳을 들렀는데, 마침 옥여가 관아에 와 있어 서로 만났다고 한다. 옥여가 붙잡아 두는 바람에 한동안 머물다가, 뜰에서 치르는 시험을 본 뒤 떠났다고 한다. 그 시험에 뽑힌 사람은 아홉 명이었다고 한다.

또 광주에 사는 선비 김덕령은 용맹과 힘이 남보다 뛰어나 왜적을 치겠다고 스스로 나섰다. 의병을 모으고 광주·담양·장성 사람들과 약속했는데, 장성에서는 그 일을 전적으로 맡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이달 안에 군사를 거느리고 영남으로 갈 것이라고 한다. 성공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사람됨이 비범하고 특별한 재주도 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익호장군이라는 호칭을 내리고 전마와 군장도 주었으며, 여러 차례 불러 만나 후한 말씀을 내렸다고 한다.

저녁에 옥여가 나와 함께 방에 앉아 국수를 만들어 먹고 술 석 잔씩 마셨다. 자리를 파하니 한밤중이 훨씬 지났다. 함께한 사람은 조익, 이자 숙훈, 여헌, 이천 여경, 이 고을 수령의 장인 권대순, 이복흥, 생원 이정일, 그리고 나였다.

1594년 2월 21일 (갑오년 음력 1월 2일)

아침밥을 먹고 출발해 나주 땅 여황리에 이르렀다. 생원 정문겸의 종이 사는 집에서 묵었다.

저녁에 정공이 찾아와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서 돌아갔다. 정공은 전 목사 정척의 둘째 아들이라고 한다.

1594년 2월 22일 (갑오년 음력 1월 3일)

일찍 길을 나서 한참 가다가 아침을 먹고 나주 서문 밖에 도착했다.

먼저 송노를 보내 옥여의 편지를 목사에게 전하게 했다. 서문 밖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송노가 잘못하여 남문으로 나가 버렸다. 아무리 찾아도 만나지 못해 서로 엇갈리는 바람에 날이 저물었다.

성문 단속이 몹시 엄해 한번 밖으로 나간 사람은 다시 들어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저녁밥을 지어 먹으니 이미 어두워졌다.

그런데 전날 묵었던 집 주인이 서문 안에 살고 있었는데, 내가 문 밖에 와서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직접 나와 나를 데리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자기 방에서 재워 주고 좋은 술까지 대접했으니 참으로 후했다.

참군 이재가 목사에게 먼저 와 있다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밤이 깊어 만나지는 못하고 내일 만나기로 했다.

1594년 2월 23일 (갑오년 음력 1월 4일)

이른 아침 사람을 양필에게 보내 불렀다. 양필이 곧 찾아왔는데 뜻밖의 만남이라 매우 반가웠다. 술과 생고기 한 덩이를 가져와 함께 구워 먹으며 술 두 잔을 마셨다.

늦은 밥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두 번 말을 먹인 뒤 달려 노암 서문 밖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저물었다.

임 진사의 계집종 남편 임명수의 집에서 묵었다. 명수의 아내는 돌장이다. 어려서 임 진사가 서울 집으로 데려가 부리던 사람이어서 내가 오자 옛 주인을 대하듯 섬겼다. 곧 저녁밥을 짓고 이웃에서 술까지 구해 나에게 대접했다.

말 먹일 콩 네 되를 삶아 두었는데, 아직 건져 내기도 전에 마침 굶주린 사람이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틈을 보고 절반가량을 훔쳐 갔다. 지나친 짓이기는 하지만 굶주림과 추위에 몰린 사람이라 한편으로는 가엾었다. 종들이 때리려 하기에 내가 엄하게 말렸다.

1594년 2월 24일 (갑오년 음력 1월 5일)

새벽빛이 밝을 무렵 출발해 구림에 이르니 해가 월봉 위로 막 장대 하나 높이만큼 떠올랐다.

어머니를 찾아뵈니 기쁨과 위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어머니의 얼굴은 예전과 같았고 식사도 전보다 잘하시며 별다른 병환이 없으셨다. 더없이 기뻤다.

다만 적이 호남으로 향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고, 길을 가로막는 불안한 일도 많았다. 나는 이달 안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호우 지방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봉양할 방도가 마땅치 않아 걱정이다. 그래도 어머니 역시 돌아가고 싶어 하시니 막을 수가 없다.

식사 뒤 최심원, 권순 생원, 임현 진사, 나와 아우가 요월당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는 아우와 함께 주인집에서 잤다. 심원이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가 한밤중에 돌아갔다.

1594년 2월 25일 (갑오년 음력 1월 6일)

아침밥 뒤 요월당으로 나갔다. 심원, 권 생원, 임 진사 두 사람, 남백형과 나, 아우, 그리고 젊은이 대여섯 명이 모여 저녁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흠이 나에게 벼 한 섬을 주었다. 찧어 목화를 사 둘 생각이다.

어제 김창수가 이곳을 지나가며 자정 김지남이 한림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기쁜 일이다. 창수는 자정의 사촌인데 예산에서 왔기 때문에 자세히 알고 있었다. 전부터 한림원 천거가 있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확실히 몰랐는데 이제야 사실임을 알았다. 김공은 강진으로 갔다고 한다.

1594년 2월 26일 (갑오년 음력 1월 7일)

밥을 먹고 요월당으로 나갔다. 권순, 임현, 최심원, 이웃에 사는 박준 형제, 박경행, 나와 아우가 모여 이야기했다.

심원과 임자승은 정투놀이를 하며 승부를 겨루었고, 거의 온종일 그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비도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저녁에는 아우와 숙소로 돌아왔다. 남백형도 학질을 피해 와서 함께 잤다.

1594년 2월 27일 (갑오년 음력 1월 8일)

백형은 학질이 떨어진 듯해 아침 일찍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나와 아우도 뒤따라 돌아왔다.

지난밤 큰바람이 불어 집이 흔들리고 지붕의 이엉이 말려 올라가며 울타리까지 뽑혔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바람이 멎었다.

잠자리가 너무 더워 밤새 뒤척이다가 오히려 찬 기운을 맞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꽤 좋지 않았다.

오후에는 임자중이 우리를 자기 집으로 불러 술과 안주를 차렸다. 크게 취해 숙소로 돌아왔다. 최심원이 뒤따라왔지만 내가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으므로 언명 희철과 잠깐 이야기하다가 돌아갔다.

오늘 자리에 함께한 사람은 남백형, 권화보, 최심원, 유선, 민우중 형제, 젊은이 서너 명, 그리고 우리 형제였다.

유선은 전 선전관 유형의 사촌으로, 유형의 집에 얹혀 지내다가 마침 자리에 참석했다. 성품이 몹시 거칠고 까다로워 사람들이 꺼린다고 한다. 우연히 심원과 말다툼을 하더니 큰소리로 욕설까지 퍼부었다. 우스운 일이다. 백형이 먼저 일어났고 나도 뒤따라 나왔다.

1594년 2월 28일 (갑오년 음력 1월 9일)

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요월당으로 나가 백형, 화보, 자승과 온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승이 산돼지 삶은 고기와 술 한 사발을 내놓았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온 뒤 말을 보내 심원을 불렀다. 누이에게서 술과 안주를 얻어 와 각자 네 사발씩 마시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한밤중이 훨씬 지나서야 헤어졌다.

어제 경흠이 순천 방답 첨사 진영으로 갔는데 비가 이렇게 오니 틀림없이 길에서 발이 묶였을 것이다.

1594년 3월

1594년 3월 1일 (갑오년 음력 1월 10일)

지난밤 비와 눈이 함께 내렸다. 아침에 보니 월봉이 온통 하얗다. 날은 아직 개지 않아 때때로 눈비가 뿌리고 바람도 불었다. 길이 진흙탕이 되어 도저히 떠날 수 없으니 답답하고 걱정스럽다.

처음에는 내일 능성으로 가려고 했다. 장흥에 있는 노비들에게서 신공을 거두기 위해서였다.

아침을 먹고 요월당에 가서 심원, 백형, 화보, 자중, 자승, 인중, 우리 형제, 젊은이 네댓 명과 온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중의 조카 임탄이 술과 안주를 가져와 함께 마셨다. 날이 저물어 흩어졌다. 하루 종일 큰바람이 불고 하늘이 흐렸다.

1594년 3월 2일 (갑오년 음력 1월 11일)

밥을 먹고 요월당으로 갔다. 심원, 백형, 자중, 신중, 화보와 젊은이 대여섯 명, 우리 형제가 온종일 어울렸다.

자중과 심원 쪽 사람들이 편을 갈라 활쏘기를 하고 진 편이 술과 안주를 내기로 했다. 자승 쪽이 져 자승이 술 한 병을 내놓아 함께 마셨다.

저녁에는 심원이 내 숙소를 찾아왔다가 밤이 깊어 돌아갔다.

경흠이 준 벼를 찧으니 쌀 여섯 말 일곱 되가 나왔다. 곧 목화 서른일곱 근을 샀다. 누이가 준 목화 열 근, 전에 침우에서 가져다 팔아 얻은 일곱 근까지 합쳐 모두 쉰네 근이 되었다. 종들에게 씨를 빼게 했다.

또 쌀 닷 되를 주고 쇳조각 두 근 열두 냥을 사서 여러 가지 쇠붙이를 만들 생각이다.

어제 암행어사가 고을에 들어왔다고 한다. 틀림없이 들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직접 수령이 사들인 집에 가서 조사한 뒤, 수령을 나주로 옮겨 가두었다고 한다.

수령 김성헌은 오래전부터 민심을 잃었고 탐욕이 심했다고 한다. 고을 가까이에 큰집을 사 두고 관청 창고의 물건을 꺼내 배 두 척에 가득 실어 영광에 사는 친족 집으로 먼저 보냈다. 또 곡식을 빼내 성 안의 열 집 남짓한 민가에 나누어 숨겨 두었다고 한다. 파면될 것이라는 소문을 미리 듣고 손을 써 둔 것이다.

이처럼 나라의 비축이 바닥난 때에 조정이 왜적을 물리치려는 뜻은 헤아리지 않고 백성을 괴롭히며 끝없이 재물을 긁어모았으니,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죽여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노비도 많이 사들이고, 쌀을 내어 무명을 사 둔 것도 많다고 한다. 훔친 곡식만 천 섬에 가깝고 배에 실어 보낸 물건은 그 수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이 도에서 관물을 많이 훔친 수령으로는 영광 수령 신상절, 태인 수령 박문영, 영암 수령 김성헌이 특히 심하다고 한다.

1594년 3월 3일 (갑오년 음력 1월 12일)

요월당에 가서 백형, 심원, 자중, 화보와 온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활도 쏘고 정투놀이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생원 정문회도 왔다. 서울에 있을 때 임자승과 사귀던 사이여서 찾아온 것이다.

1594년 3월 4일 (갑오년 음력 1월 13일)

요월당에서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보와 자승, 정공이 편을 갈라 활쏘기로 술내기를 했다. 자승 쪽이 져 술을 내놓았다. 사람은 많은데 술이 적어 더 마시고 싶어 하기에 내가 누이에게 부탁해 좋은 술 한 병을 더 얻어 왔다. 몇 잔씩 마시고 헤어졌다.

1594년 3월 5일 (갑오년 음력 1월 14일)

하루 종일 큰바람이 불었다. 추위는 겨울보다 더 매서웠다.

밥을 먹고 요월당에 가 여러 사람과 하루 종일 이야기했다.

다만 갓에 칠을 한 지 나흘이 지났는데도 아직 마르지 않았다. 좋지 않은 칠임이 틀림없다. 결국 버릴 물건이 될 듯해 몹시 걱정스럽다.

1594년 3월 6일 (갑오년 음력 1월 15일)

생원 정문회가 밥을 먹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오늘 처음 알았는데 정공의 아내는 고 윤은경의 딸로 내 팔촌 누이에 해당한다.

지난밤 큰눈이 세네 치쯤 내렸고 아침에도 그치지 않았다가 늦게야 개었다.

오후에는 민 참판 부인이 서울로 떠났다. 딸과 헤어질 때 서로 떨어지기 어려워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 인정이 이 지경에 이르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자승이 나주까지 모셔다 드리고 돌아왔다.

내일은 남백형도 북쪽으로 돌아갈 예정이라 저녁에 심원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다. 백형, 자중, 이보 임달, 우리 형제가 내 숙소에 모여 밤늦도록 이야기하고 흩어졌다.

아침에는 종을 영암군으로 보내 조도어사에 관한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먼저 보낸 공문은 도착했지만 아직 확실한 소식이 없다고 한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모레 능성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1594년 3월 7일 (갑오년 음력 1월 16일)

남백형이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떠났다.

나와 아우, 자중, 심원, 화보가 요월당에 모여 중문 밖까지 나가 작별했다. 집에 보낼 편지를 써 임천의 가족들에게 전해 달라고 맡겼다.

다시 요월당에서 여러 사람과 저녁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씨를 뺀 목화를 다시 달아 보니 여덟 근 여덟 냥이었고, 아직 씨를 빼지 않은 것은 열일곱 근이었다. 내일 능성으로 갈 예정이라 일단 어머니 방 곁에 맡겨 두었다가 돌아온 뒤 씨를 뺄 생각이다.

저녁에는 민우안이 와서 심설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1594년 3월 8일 (갑오년 음력 1월 17일)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불며 눈까지 내렸다.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개었다.

종과 말을 이끌고 출발해 나주 땅 내상리의 진도 팔번 정병 승강수 집에 가서 묵었다. 주인이 매우 후하게 대접해 말먹이와 김치까지 마련해 주고 따뜻한 방도 내주었다.

1594년 3월 9일 (갑오년 음력 1월 18일)

새벽빛이 밝을 때 출발해 남평 철야리에 사는 무인 서극철의 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서공이 나왔고 이웃에 사는 선비 정현도 마침 왔다. 그는 임경흠의 친족이다. 함께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떠났다.

고개 두 개를 넘었는데 길이 진창이라 어렵게 능성현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이었다. 수령이 관아 안으로 들어가 버려 내 이름을 알리지 못했다.

관노 낙수의 집에 묵었다. 주인이 말먹이와 김치를 마련해 주었지만 손님방이 없어 차가운 마루에서 잤다. 새벽녘에는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들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답답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문지기 단속도 매우 엄하다고 한다. 내 이름을 알리지 못하면 내일은 먹을 것을 얻을 길조차 없으니 진퇴양난이다. 주인에게 어떻게든 이름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자, 이름을 적어 주면 형편을 보아 안으로 들여보내겠다고 했다. 이 주인은 관청 창고지기다.

1594년 3월 10일 (갑오년 음력 1월 19일)

밤중부터 비가 내리더니 큰눈으로 바뀌었다. 아침에 보니 네댓 치나 쌓였다. 녹지 않고 계속 쌓인다면 한 자나 될 듯했다. 사람들이 근래 이런 큰눈은 없었다고 했다.

하루 종일 바람이 불고 흐렸으며 때때로 눈까지 흩날렸다. 차가운 행랑에 혼자 앉아 있으니 추위를 견딜 수 없었다.

수령은 요즘 몸이 좋지 않아 오래도록 정무를 보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을 써서 여러 방면으로 만나 보려 했으나 문단속이 너무 심해 이름을 알릴 길이 없었다.

집안의 종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핑계를 대고 소장을 써서 이름이라도 알리고자 했는데, 관례대로 그 종을 잡아오라는 처분만 내리고 나를 부를 뜻은 없었다.

양식과 반찬도 다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주인집에서 먹을 것을 빌렸다. 내일 장이 서면 무명 한 필을 팔아 식량을 마련하고 돌아갈 생각이다.

오늘은 바람과 추위가 더욱 심해 차가운 마루에서는 도저히 잘 수 없었다. 이웃 노인의 방을 빌려 들어갔다. 사방 벽에 구멍이 뚫려 바람이 그대로 들어오고 찬 기운이 얼굴을 때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래도 차가운 마루보다는 훨씬 나았다. 이 방마저 없었다면 반드시 큰병이 났을 것이다. 이곳에서 겪는 고생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1594년 3월 11일 (갑오년 음력 1월 20일)

주인집에서 쌀 두 되를 빌려 아침밥을 지어 먹었다.

막정(사내종)을 관아로 보내 알아보게 했더니 돌아와 말하기를, 어제 객사에 양 좌랑의 행차가 들어와 묵었다고 했다. 바로 양사형이었다. 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였으므로 곧 객관으로 가서 이름을 알렸다. 양공이 사람을 보내 안으로 불러들여 윗방에서 만났다.

생원 유표도 와 있었다. 유공은 윤겸과 같은 또래의 벗이고 나와도 아는 사이여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양공에게 부탁해 수령에게 내 이름을 전하자 수령이 곧 관아 마루로 불러들였다. 금성정도 마침 와 있었고, 수령의 아우 이린·이봉·이란 등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금성정은 내 아내의 사촌이고, 박씨 사람들도 황간에 사는 같은 고향 사람들이다. 수령의 큰아들 사군은 남경제 형의 사위다. 그 형의 딸도 관아에 와 있다가 사람을 보내 내 안부를 물었다.

이 자리에서 백원 형이 아내를 잃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들었다. 슬픔을 이길 수 없었다.

저녁에는 양 좌랑을 찾아가 함께 윗방에서 자며 밤새 옛일을 이야기했다. 양공은 조정의 명을 받아 진주 싸움에서 전사한 전 병사 최경회의 영전에 제사를 올리려고 순천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1594년 3월 12일 (갑오년 음력 1월 21일)

관아 마루에서 유표와 여러 박씨 사람들과 바둑도 두고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에는 수령도 마루방으로 나와 함께 이야기했다. 수령이 그 방에서 자라고 하여 유공과 함께 잤다. 회덕에 사는 수령 아내의 사촌 송정준도 상중에 와 있었는데 함께 자리했다.

1594년 3월 13일 (갑오년 음력 1월 22일)

수령이 관아로 나와 하루 종일 방에서 함께 이야기했다.

저녁에 작별 인사를 하자 수령이 다음을 주었다.

  • 흰쌀 두 말
  • 정미 다섯 말
  • 콩 다섯 말
  • 벼 한 섬

관청 창고가 텅 비어 찾아오는 사람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고 길갈이도 넉넉히 주지 못하는 형편인데, 나에게 이만큼 준 것을 두고 사람들이 특별히 큰손을 썼다고 했다. 우스운 일이다.

유공과 다시 관아 방에서 함께 잤다.

박사군의 아내가 길에서 먹으라며 쇠고기포 여섯 줄을 주었다. 마침 반찬이 다 떨어진 참이라 참으로 기뻤다.

1594년 3월 14일 (갑오년 음력 1월 23일)

새벽빛이 밝을 때 출발했다.

몇 리도 가지 않아 울타리 아래에서 아이가 울며 어머니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웃 사람에게 물으니 어젯저녁 그 어머니가 아이를 버리고 갔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죽을 것이라고 했다.

가엾고 불쌍한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 새끼를 사랑하는 마음은 미련한 짐승에게도 사라지지 않는데, 가장 영리하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극한 상황이 아니라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길게 탄식할 뿐이다.

며칠 전 양사형에게 들으니 호서 지방에 토적이 크게 일어나 공문까지 돌리며 불손한 말을 많이 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세자가 서울로 돌아가지 못하고 완산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내 가족들은 임천에 있는데 요즘 무사한지 알 수 없다. 걱정이 말할 수 없이 크다.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이런 소식을 들으니 더욱 답답하다.

왜적은 아직 변방의 성을 차지하고 있고 나라 안에서는 토적까지 일어났다. 굶주림은 날로 심해지고 백성들은 하루하루 굶어 죽어 간다. 나 또한 머지않아 구렁에 쓰러져 죽을 것이다. 푸른 하늘이여, 어찌 차마 이럴 수 있는가.

남평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가는 길에 서극철의 집에 들러 말을 먹이고 서공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시 출발했으나 십 리도 못 가 말이 지쳐 더 나아가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남평 오림리의 서원 황대 집에 들어가 따뜻한 방을 빌려 잤다.

1594년 3월 15일 (갑오년 음력 1월 24일)

날이 밝기 전에 출발해 나주 원정리 길가의 민가에서 아침을 먹었다.

붉은 말이 너무 지쳐 십 리도 못 가 서 버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말에서 내려 걸었다. 오늘 안에 구림에 들어가기 어려울 듯해 걱정스럽다.

아침 뒤에는 붉은 말이 더욱 걷지 못해 영암군에서 한참 남은 곳까지 내가 걸어갔다. 먼저 막정을 영암 서문 밖으로 보내 묵을 곳을 알아보게 했다.

나는 막정의 말을 타고 종 두 명을 데리고 해 질 무렵 구림에 도착했다. 어머니를 뵈니 여전히 평안하셨다.

경흠이 자기 방으로 나를 불러 산돼지 삶은 고기를 대접하고 술 두 잔을 마시게 했다. 밤이 깊어 숙소로 돌아갈 수 없어 요월당으로 가 임현 진사와 함께 잤다.

1594년 3월 16일 (갑오년 음력 1월 25일)

하루 종일 요월당에 있으면서 젊은이들이 정투놀이로 승부를 겨루는 것을 보았다.

언명 희철의 종 춘희가 태인에서 돌아왔다. 빌려 간 말이 너무 지쳐 걷지 못해 나주 땅에 버려 두고 왔다고 한다. 언명이 길을 떠나야 하는데 탈 말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걸어서 가야 할 형편이다. 답답하고 안타깝다.

저녁에 막정이 들어왔다. 붉은 말을 집주인 임명수의 말과 바꾸고, 벼 열세 말과 콩 한 말, 정미 여섯 되, 무명 한 필을 더 주었다고 한다. 새 말을 보니 살은 제법 붙어 있었으나 걷는 모양이 힘들어 다리에 병이 있는 듯했다. 그래도 붉은 말보다는 훨씬 낫다. 이번 길에 별일 없이 북쪽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저녁에는 경흠이 우리 형제를 방으로 불러 이야기하며 술 석 잔씩 주었다. 밤이 깊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1594년 3월 17일 (갑오년 음력 1월 26일)

오늘 아침부터 누이 집에서 우리 종들의 밥을 먹여 주지 않기로 해, 우리가 얻어 둔 쌀로 스스로 밥을 지어 먹게 했다.

하지만 양식과 반찬이 부족해 길을 떠나기 전까지 버티지 못할 듯하다. 걱정스럽다.

처음에는 스무아흐렛날 어머니를 모시고 떠나려 했다. 그러나 할 일이 많아 미처 준비하지 못했고, 언명은 내일 태인 처가로 떠나 데리고 간 종을 돌려보낸 뒤에야 출발할 수 있다. 그때까지 기다리면 일정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초하루 뒤로 미루려 하지만 너무 오래 머무르게 되는 듯해 마음이 무겁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594년 3월 18일 (갑오년 음력 1월 27일)

언명이 태인으로 떠났다. 임자중도 나주로 돌아가면서 함께 갔다.

송노에게 씨를 뺀 목화 열두 근 석 냥과 채색한 상자, 참빗 열세 개를 한 자루에 넣어 지고 가게 했다. 언명의 아내가 머무는 집에 맡겨 두려는 것이다.

막정도 신공을 거두기 위해 장흥의 노비들에게 보냈다.

언명이 타고 간 말은 몹시 지쳐 짐을 견딜 수 없으니 길에서 틀림없이 걸어가야 할 것이다. 안타깝다.

자중이 작별 선물로 목화 여덟 근과 흰 닥나무 두 묶음을 주었다. 참으로 고맙다.

이규빈은 어제 들어와 심원 등과 요월당에서 만났다. 규빈은 경흠의 사촌 누이 남편으로, 난리를 피해 영광에 와 머물고 있으며 이곳에도 농장이 있다고 한다.

심원과 자승은 정투놀이로 술과 음식을 걸고 온종일 다투었지만 끝내 승부를 내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무료함을 달래는 놀이 가운데 이만한 것도 없다.

1594년 3월 19일 (갑오년 음력 1월 28일)

아침부터 흐리고 비가 올 기미가 있다. 비가 내리면 언명은 틀림없이 길에서 발이 묶일 것이다. 가진 길양식도 얼마 되지 않아 걱정이다.

우리 모자와 형제가 여러 곳에 흩어져 떠돌고 있는데 형편이 어려워 한곳에서 함께 움직이지도 못한다. 더욱 한탄스럽다.

요월당에 가 여러 사람과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저녁에는 삼촌 집 종 근이가 서울에서 내려왔다. 오는 길에 임천을 지나며 계집종 옥춘을 만났는데, 옥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생원 윤해의 숙소에 횃불을 든 도적들이 들이닥쳐 생원은 몸에 걸친 것 하나 없이 겨우 살아났습니다. 지금은 모두 우리 집에 모여 있습니다.”

놀랍고 한탄스러운 마음을 이길 수 없다. 떠돌며 굶주리는 가운데 또 이런 화를 당했으니 사람의 궁핍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는가.

하늘의 운수에는 좋고 나쁨이 번갈아 온다고 하지만 우리 집은 내가 중년이 된 뒤로 줄곧 운이 막혀 한 해도 편안한 때가 없었다. 이제 그 불행이 극에 달했다. 한탄해도 어쩌겠는가. 하늘의 운에 맡길 뿐이다.

토적들이 사방에서 날뛰며 피해를 주는 지금,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북쪽으로 돌아가도 갈 곳이 없으니 더욱 답답하다. 형편이 그러하니 어쩌겠는가.

근이는 수의 아들이고 양의 아우다. 아버지와 형을 보려고 내려온 것이다.

1594년 3월 20일 (갑오년 음력 1월 29일)

새벽부터 큰비가 내리고 큰바람까지 불어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앞 시내가 크게 불었다.

언명은 반드시 길 한가운데서 머물러 있을 것이다. 내일 비가 갠다 해도 여러 큰 내를 건너야 하므로 쉽게 건너지 못할까 걱정이다. 더구나 진흙길을 걸어 어떻게 돌아오겠는가. 걱정이 끝이 없다.

저녁에 경흠이 자기 방으로 불러 함께 이야기했다. 술 네댓 잔을 마시고 크게 취해 숙소로 돌아왔다.

이웃에 사는 선비 박근이도 내 숙소를 찾아왔다.

1594년 3월 21일 (갑오년 음력 1월 30일)

아침부터 하루 종일 흐렸다.

누이가 숭어를 구해 회를 만들어 나를 불러 대접했다. 추로주 한 잔도 마셨다.

요월당으로 나가 심원, 자승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걸어서 모정에 가 박준, 박근이, 임급과 잠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1594년 3월 22일 (갑오년 음력 2월 1일)

새벽부터 비가 내려 아침에도 개지 않았다. 언명의 일행도 틀림없이 떠나지 못했을 텐데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모르겠다. 양식과 반찬도 다 떨어졌을 것이니 걱정이 더욱 크다.

며칠째 비가 이어져 길은 진창이 되었을 것이다. 초나흗날 어머니를 모시고 출발하기로 마음먹었는데 하늘마저 도와주지 않으니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언명이 데리고 간 종들이 길에서 머물러 있다면 초사흘에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초나흗날 출발도 장담할 수 없다. 하루를 더 머무는 것이 일 년처럼 길게 느껴진다.

저녁에는 심원이 내 숙소를 찾아왔다. 박준 형제도 뒤따라왔다.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두 박씨는 먼저 돌아가고 심원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막정이 장흥에서 돌아왔다. 계집종 무숭에게서 거친 무명 두 필과 들깨 닷 되만 받아 왔다. 무숭의 두 아들은 노를 잘 젓는 군사로 뽑혀 수사의 배에 갔다고 한다. 종 한수는 지난해 병사의 진영에서 병들어 죽었고, 계집종 사금은 남편이 죽은 뒤 어머니를 모시고 도망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한다. 한탄스럽다. 다만 그 말이 반드시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지난밤에는 큰딸이 꿈에 보였고 오늘 밤에는 아내도 꿈에 보였다. 무슨 까닭일까. 돌아올 때가 지났는데도 만나지 못해 걱정이 깊어서일까.

1594년 3월 23일 (갑오년 음력 2월 2일)

날이 흐리고 비가 올 듯했으며 바람도 불었다. 답답하다.

완산에서 치른 무과 뜰시험은 쇠화살 다섯 발을 두 차례 쏘아 두 발 이상 맞히고, 말을 타고 활을 쏘아 한 차례에 두 발 이상 맞힌 사람을 뽑았다고 한다. 모두 천칠백팔십이 명이 합격했고, 이 고을에서도 서른일곱여덟 명이 들었다고 한다.

아직 상중인데 장사를 치르지 못한 사람까지 많이 뽑혔다니 한탄스럽다.

이 사람들은 이달 보름 안에 남원의 충용장에게 모여 점검을 받고 함께 영남의 적을 치러 들어간다고 한다. 충용장은 김덕령이다. 전에는 익호장군이라 했는데 임금이 충용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요즘 우리 종들에게 먹을 것이 없어 누이 집에서 먹여 주니 너무 미안하다. 그래서 더욱 빨리 떠나고 싶지만 비가 이처럼 오고, 언명이 데려간 종들도 제때 돌아올 형편이 아니어서 답답하기 그지없다.

아침을 먹고 나주 판관 이성남이 겸관 자격으로 이 고을에 왔다는 말을 들었다. 경흠·심원과 함께 말을 나란히 타고 들어가 만났다. 환곡을 받게 해 달라고 청하며 경흠 집 종의 이름으로 각자 소장을 올렸다.

심원과 나는 각각 콩 한 섬과 벼 두 섬씩 내어 주라는 처분을 받았다. 또 나에게 콩 두 말과 흰쌀 두 말도 주었다. 종과 말의 양식이 떨어져 걱정하던 참이었으므로 당분간 이어 갈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고맙다.

판관이 우리에게 점심을 대접했다. 해 질 무렵 세 사람이 돌아오니 이미 날이 어두웠다. 막정은 물건을 받는 일이 늦어져 날이 저물어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1594년 3월 24일 (갑오년 음력 2월 3일)

종을 장터에 보내 무명 한 필로 김 예순 첩과 콩 닷 말을 사고, 다시 감태 스물다섯 묶음으로 바꾸게 했다. 호우 지방에서 팔아 먹을 생각이다.

아침밥 뒤 숙소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이웃 박경인·박경행 형제와 박근이가 찾아와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다 흩어졌다.

저녁에는 심원이 찾아왔다가 밤이 깊어 돌아갔다.

오늘부터 종들은 우리가 얻은 양식으로 스스로 밥을 지어 먹게 했다.

1594년 3월 25일 (갑오년 음력 2월 4일)

밤에 이정로와 홍응추를 꿈에서 만났다. 살아 있을 때처럼 반가웠다. 정로는 술에 취해 떠들어 대는 모습까지 생전과 꼭 같았다.

두 사람은 모두 나와 친하게 지내던 이들인데 몇 해 전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평소 함께 어울리던 일을 떠올릴 때마다 늘 슬펐는데 오늘 밤 꿈을 꾸니 더욱 비통하다.

밥을 먹고 요월당으로 가 자중 임탁, 심원, 응문, 자승 임현 등과 이야기했다.

오후에는 이웃 박경인 형제와 선전관 유형, 새로 급제한 박형도 왔다. 유형은 경흠의 사촌으로 완산의 시험에도 합격했으며, 외가 산소에 성묘하러 온 것이다.

며칠 전 나주 판관에게 청해 받은 환곡에 대해 경흠은 내가 가을에 갚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벼 열 말과 콩 석 말만 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쓰겠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받은 콩과 벼의 절반으로 무명을 사서 이곳에 맡겨 두었다가 가을에 팔아 환곡을 갚고, 나머지 절반으로 목화를 사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답답하다.

요즘 이곳은 곡식이 비싸고 무명이 싸다. 거친 무명 한 필에 쌀 두 되, 콩은 석 되 정도다. 쌀 한 말이면 목화 열몇 근, 어떤 이는 열다섯여섯 근까지 살 수 있다고 한다. 일곱 새짜리 좋은 무명 한 필은 쌀 한 말 네댓 되를 받는다고 한다.

언명이 데려간 종들이 오늘도 오지 않았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니 걱정스럽다.

1594년 3월 26일 (갑오년 음력 2월 5일)

지난밤 여인 형제가 꿈에 생전 모습 그대로 보였다. 무슨 까닭일까.

동남풍이 하루 종일 세차게 불었다. 큰비가 올 징조가 분명하니 내일 떠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더구나 언명이 데려간 종들도 아직 들어오지 않아 걱정이 더욱 크다. 전날 자중에게 들으니 언명이 비 때문에 나주 양산룡 생원 집에서 하루 묵었다고 한다. 그 뒤에도 틀림없이 길에서 지체된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지금까지 오지 않겠는가.

밥을 먹고 요월당에 가 자중, 심원, 응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중은 먼저 나가 군내 검길의 둑 쌓는 곳으로 가 농사일을 감독했다.

저녁에는 심원이 찾아왔다가 밤이 깊어 돌아갔다.

1594년 3월 27일 (갑오년 음력 2월 6일)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많이 오지는 않았지만 아침에도 개지 않고 사방이 흐렸다. 며칠 안에는 개지 않을 듯해 몹시 걱정스럽다.

어제 저녁 누이가 나에게 다음을 주었다.

  • 감태 열 묶음
  • 은붕어 세 묶음
  • 표고 한 되
  • 찹쌀 한 되
  • 버선 한 켤레

임자승도 버선 한 켤레를 주었다.

또 쌀 여섯 되, 김 스물다섯 첩, 콩 네 되로 한 덩이를 만들고 김 한 말을 사 왔다. 응문도 내게 좋은 무명 한 필을 주었다. 그 역시 피란살이 중인데도 나를 생각해 주니 그 후한 뜻이 참으로 고맙다.

자중이 검길에서 편지를 보내며 낙제 열다섯 개도 보냈다. 역시 고맙다.

저녁에 춘희와 송노가 들어왔다. 언명의 편지를 보니 길에서 비 때문에 이틀을 머물렀고, 처남의 말 한 마리도 길에서 죽었다고 한다. 안타깝다.

짐을 꾸렸다. 내일 비가 오지 않으면 반드시 출발할 생각이다.

저녁에 심원이 찾아왔다. 누이에게 술을 부탁해 한 병을 얻어 오고, 자중이 보낸 낙제를 안주로 삼아 각자 세 잔씩 마셨다. 두 집 주인에게도 한 잔씩 주고 밤이 깊어 헤어졌다.

1594년 3월 28일 (갑오년 음력 2월 7일)

이른 아침 경흠이 먼저 나주로 돌아갔다.

나는 늦게 어머니를 모시고 길을 나섰다. 어머니와 누이가 헤어지며 서로 붙잡고 통곡했다. 인정이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영암군 앞에 이르렀을 때 내가 탄 말이 진흙 도랑에 발이 빠져 갑자기 논바닥에 넘어졌다. 내 왼발도 물에 빠졌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왔는데 버선이 온통 더러워졌다. 우스운 일이다.

그 뒤로는 걷기도 하고 말을 타기도 하며 어렵게 나주 모산촌의 선비 유숙 집에 도착했다.

유공은 따뜻한 방을 내주고 땔감과 말먹이를 넉넉히 주었다. 술과 안주, 콩죽까지 보내 주었다. 참으로 고맙다.

오늘은 북풍이 크게 불어 찬 기운이 살을 뚫었다. 어머니가 이 때문에 몸이 편치 않아 저녁밥을 드시지 못하고 콩죽만 조금 드셨다. 팔과 다리도 뻣뻣한 듯하다고 하시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경흠이 올 때 유공을 먼저 찾아가 우리가 올 뜻을 말해 두었기 때문에 이렇게 후하게 대접한 것이다. 경흠이 먼저 나주로 간 것은 성문 단속이 매우 엄하기 때문에 목사에게 미리 알리고 문을 열어 우리를 들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저녁에 집주인 유공을 찾아가 보았다.

1594년 3월 29일 (갑오년 음력 2월 8일)

어머니의 기운이 조금 나아진 듯했다. 묵은 곳에서 아침밥을 지어 먹고 출발했다.

오늘은 날이 좋고 바람도 잦아들어 다행이다. 늦게 다시 바람이 일기는 했지만 어제만큼 세지는 않았다.

신안관에 이르러 말을 먹이고 흰죽을 끓여 어머니께 드렸다.

조금 뒤 최심원이 나주에서 지나가다가 들어와 어머니를 뵙고 떠났다. 며칠 전 경흠과 함께 와 임회의 어머니 상에 조문하고 오늘 구림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해 질 무렵 나주에 도착했다. 성문 안 박 참판 집 계집종의 집에 들어가 묵었다. 경흠과 목사가 금성산 성 쌓는 곳에 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가지고 온 물건으로 저녁을 지어 먹었다.

날이 저물어서야 경흠이 들어왔다. 목사가 이미 우리 일행의 식사를 내주라고 명했는데 아랫사람들이 주지 않아 목사가 화를 내며 벌을 주었다고 한다.

경흠과 함께 만복의 집에서 밥을 지어 먹고 잤다.

어제 묵었던 집주인은 유영덕 몽익의 아들이라고 한다. 아침에 떠날 때도 찾아가 작별했다.

1594년 3월 30일 (갑오년 음력 2월 9일)

목사가 경흠의 부탁을 받아 우리에게 다음을 내주었다.

  • 흰쌀 석 말
  • 정미 닷 말
  • 콩 닷 말
  • 단장 한 말
  • 짠장 두 되
  • 청주 닷 홉
  • 기름 한 되

새해 뒤로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 성문을 엄하게 단속하고 씀씀이도 몹시 아끼는 형편이라 이 정도만 준 것이다. 길양식이 모자라 걱정스럽다.

정미 닷 말 닷 되를 다시 찧으니 넉 말 닷 되가 되었다. 이를 노비들에게 사흘치 양식으로 나누어 주어 각자 지고 가게 했다. 짐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판관은 마침 밖에 나가 있어 길에서 먹을 반찬을 얻지 못했다. 아쉽다.

늦게 출발했다. 말이 지쳐 자꾸 드러눕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주 땅 등정리 양 목사의 아들 생원 양산룡의 집에 들어가 묵었다.

양공은 경흠의 친구다. 어제 성 쌓는 곳에 목사를 찾아왔다가 경흠과 만나 우리 사정을 미리 들었으므로 말을 먹일 풀을 마련해 주고 우리 모자에게 저녁밥까지 차려 주었다. 참으로 고맙다.

오후부터 남풍이 불어 해 질 때까지 멎지 않았다. 하늘도 흐려 비가 올 듯하니 몹시 걱정스럽다.

저녁에 주인 양공을 찾아가 잠깐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1594년 3월 31일 (갑오년 음력 2월 10일)

밤부터 비가 내렸다. 크게 쏟아지지는 않았지만 하루 종일 이어져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머물렀다.

길양식이 부족해 종들은 아침에 일곱 홉씩 먹고 저녁에는 죽을 쑤어 나누어 먹었다. 내일까지 개지 않아 다시 머물게 된다면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곤란해질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앞길에는 큰 강을 건너야 하는 곳이 많다. 이렇게 몹시 둔한 말을 데리고 이토록 험한 길을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가야 하니 어찌 걱정되지 않겠는가.

저녁에 다시 집주인을 만나고 돌아왔다.

1594년 4월

1594년 4월 1일 (갑오년 음력 2월 11일)

날이 개었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출발해 광주 땅 선비 박경의 집 앞에서 아침을 먹었다. 경흠의 편지를 전하니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김치와 말먹이도 보내 주었다. 나도 그 집에 들러 박공을 만났다.

장성에 이르니 해가 이미 기울었다. 관인 손천종의 집에 들어가 묵었다.

수령 옥여 이귀는 지난달 군사를 거느리고 충용장 김덕령과 함께 이미 영남으로 떠났다고 한다. 관아에는 찰방 이여인과 그 아우 이여경이 있었다. 곧 들어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자 조익도 사가에 있어 불러 만나고 돌아오니 밤이 깊었다.

수령이 없으니 관청에서 양식을 얻지 못해 길양식이 바닥났다. 걱정스럽다.

관아의 명으로 윗방 몫 두 사람분과 종 두 명, 말 두 필의 양식을 문서로 내주게 했다.

오늘 사면문도 보았다. 역적 송유진 등 여덟 명을 죽인 뒤 나라 안에 은혜를 베푼다는 내용이었다. 유진은 통사 송대춘의 아들이라고 한다. 또 전국에 애통해하는 교서도 내렸다.

영암에서 데리고 온 사람 한 명은 내일 돌려보낼 예정이라 누이에게 보낼 편지를 밤에 등불을 밝히고 써 맡겼다.

1594년 4월 2일 (갑오년 음력 2월 12일)

날이 밝기 전에 흰죽을 끓여 어머니께 드리고 해가 뜨기 전에 출발했다.

노령 아래 군영에서 아침을 지어 먹고 걸어서 노령을 넘었다. 천원역을 지나 정읍 땅에 이르러 길가에서 말을 먹이고 다시 출발했다.

고부로 들어가는 길에서 언명 희철이 마중을 나왔다.

고부 소정리의 내금위 김광필 집에 묵었다. 광필은 언명의 아내와 사촌이다. 언명의 장인 김철도 와 있었다.

나는 언명과 함께 김공이 묵는 곳에서 잤다.

밤에는 자미 이윤이 생전 모습 그대로 꿈에 나타났다. 슬픔을 이기기 어려웠다.

1594년 4월 3일 (갑오년 음력 2월 13일)

집주인이 우리 모자 세 사람에게 아침밥을 대접했다.

늦게 출발해 태인 동촌면 칠전리, 언명의 처조카 김담수가 사는 마을로 갔다. 권 좌수 서의 집 뒤에 있는 몇 칸짜리 초가에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들었다. 비바람만 겨우 피할 수 있는 집이다.

고향에서 천 리나 떨어진 곳인데 둘러보아도 의지할 친척 하나 없다. 자식 된 마음이 어떻겠는가. 슬픔을 이길 수 없다.

가지고 온 양식은 쌀 예닐곱 말뿐이고 그 뒤를 이을 길이 없다. 더욱 걱정스럽다.

나는 내일 임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며칠 더 머물고 싶지만 양식이 없어 그럴 수도 없다. 더욱 한탄스럽다.

1594년 4월 4일 (갑오년 음력 2월 14일)

아침밥 뒤 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가 슬피 우시며 그치지 않으셨고 나도 눈물이 소매를 적시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타향을 떠돌면서도 모자가 한곳에서 살 수 없으니 형편이 그렇다 해도 어찌 서럽지 않겠는가.

금구에 이르러 말을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금구현 앞을 지나 김제 동면 어이촌의 동해 점장이 집에 들어가 묵었다. 말이 지쳐 더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길에서 굶어 죽은 시체 하나를 보았다. 거적을 덮어 놓았는데 곁에 두 아이가 앉아 울고 있었다.

물어보니 그 시체는 아이들의 어머니로, 어제 병들고 굶주려 죽었다고 했다. 묻어 주고 싶어도 힘이 없어 시체를 옮기지 못하고 땅을 팔 도구도 없다고 했다.

잠시 뒤 한 여자가 바구니를 들고 호미를 메고 지나갔다. 두 아이는 저 호미를 빌릴 수만 있다면 흙을 파 어머니를 묻을 수 있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가슴 아픈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이뿐이 아니다. 길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서로 이어져 하루에 몇 구를 보았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가엾은 우리나라 백성들은 전쟁의 칼날 아래 죽고 또 흉년까지 겪고 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은 때로 뒤덮인 채,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며,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끌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길에 끊이지 않는다. 이제 한 사람도 남지 않을 지경이다.

푸른 하늘이여,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게 했는가. 길게 탄식할 뿐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1594년 4월 5일 (갑오년 음력 2월 15일)

새벽빛이 밝을 때 출발해 석탄에 이르러 배를 타고 여울물을 건넜다.

이 물은 전주 위 여러 고을의 골짜기 물이 삼례역 앞에서 합쳐져 바다로 들어가는 물줄기다. 여울 남쪽은 김제, 북쪽은 전주 땅이다.

여울가 민가에서 말을 먹이고 아침을 먹었다. 옥야창을 지나 함열에 도착했는데 그제야 수령 신응구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몹시 허탈했다.

길양식과 반찬을 모두 이곳에 기대고 있었는데 쌀은 이제 석 되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으로 일행의 밥을 지어 먹었다.

1594년 4월 6일 (갑오년 음력 2월 16일)

날이 밝기 전에 출발해 현 안 남궁 지평의 농촌에 이르러 안사눌 민중을 만났다.

난리 뒤로 오래 만나지 못했는데 오늘 다시 보니 참으로 반가웠다.

남궁 지평도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곧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일행 모두의 아침밥을 차려 주었다. 또 나를 안방으로 불러 정성스럽게 인사했다. 병을 앓아 사람을 만나지 않은 지 오래였는데도 내가 오자 곧 안방으로 불러 주었다. 예전에 한마을에 살며 매우 가깝게 지냈기 때문이다. 안민중은 남궁 지평의 사위다.

다시 출발해 남당진에서 배를 타고 북쪽 언덕으로 건넜다. 잠깐 쉬며 말을 먹이고 곧장 숙소로 달려갔다.

아내와 자식들이 탄식하며 맞아 주었다.

다만 집안 사람들이 학질을 앓아 벌써 여러 차례 발작했다고 하니 걱정스럽다.

곧 사람을 보내 충아와 의녀를 데려와 보았다. 충아는 이제 잘 걷고 달리기도 해 위로가 되었다. 다만 나를 낯설어하며 가까이 오지 않았는데, 오래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1594년 4월 7일 (갑오년 음력 2월 17일)

밥을 먹고 나니 윤해의 양어머니와 충아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저녁때 돌아갔다.

요즘 양식이 없어 집안 식구들은 늘 콩죽으로 끼니를 이어 간다. 콩마저 거의 떨어졌다. 한탄해도 어쩔 수 없다.

늦게 송노에게 김과 감태를 들려 조 한림 희보 삼형제와 소즐에게 나누어 보내게 했다. 집주인과 가까운 이웃들에게도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김대성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조 한림에게 말먹이 열 묶음을 빌렸고, 김대성도 다섯 묶음을 보내 주었다.

1594년 4월 8일 (갑오년 음력 2월 18일)

아침 전에 종들에게 집 북서쪽 곁에 변소를 만들게 했다.

밥을 먹은 뒤에는 종 네 명에게 소나무 껍질을 벗겨 오라고 했다. 종들이 먹을 것을 조금이라도 보태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종들은 힘을 다하지 않고 각자 몇 움큼밖에 가져오지 않았다. 몹시 밉고 화가 난다.

1594년 4월 9일 (갑오년 음력 2월 19일)

수령 송응서를 만나려고 이른 아침 고을로 들어갔지만, 수령은 이미 사창에 나가 환곡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일이 어수선해 내 이름을 알리지 못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윤해의 숙소에 들렀다.

하루 종일 흐렸고 비가 흩뿌리며 바람도 불었다.

방수간이 찾아왔다.

1594년 4월 10일 (갑오년 음력 2월 20일)

한밤중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 처마에서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늦은 오후에야 개었다.

방수간, 백몽진, 문경인이 찾아와 하루 종일 함께 바둑을 두다가 흩어졌다.

문경인은 이웃에 사는 교생인데 전에는 오지 않다가 오늘 처음 찾아왔다.

1594년 4월 11일 (갑오년 음력 2월 21일)

방수간이 찾아와 함께 바둑을 두었다.

1594년 4월 12일 (갑오년 음력 2월 22일)

새벽에 비가 내렸고 아침에도 개지 않았다. 늦게야 해가 났다.

방수간이 찾아와 하루 종일 바둑을 두고 돌아갔다.

종을 유선각에게 보내 말먹이를 구하게 했더니, 이 집 근처에 있는 함께 농사짓는 사람이 쌓아 둔 풀 스무 묶음을 주게 했다. 이것으로 닷새나 엿새는 말을 먹일 수 있겠다.

요즘 윗집과 아랫집 모두 양식이 바닥났다. 죽이나 풀뿌리조차 제대로 이어 먹지 못한다. 어른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이들이 너무 굶주려 차마 볼 수가 없다. 슬프고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하늘의 뜻에 맡길 뿐이다.

1594년 4월 13일 (갑오년 음력 2월 23일)

이른 아침 종을 결성의 참봉 윤겸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또 양식을 구하려고 막정을 함열로 보냈다.

함열 수령 신응구는 윤겸과 매우 친한 벗이지만 나와는 본래 친척도 아니고 예전에 사귄 사이도 아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보다 우리 집을 훨씬 후하게 돌봐 준다. 한 달 사이에 두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 먹을 것을 구했는데도 조금도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집 열 식구의 목숨이 오로지 그에게 달려 있으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겠는가. 그저 마음속으로 고맙게 여길 뿐이다.

내가 남쪽에서 돌아와 처음 들은 이야기다.

기대수 부부가 직접 짐을 지고 이고 두 자녀를 데리고 이달 초 영동에서 떠나 여러 곳을 떠돌며 구걸하다가 우리 집이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하룻밤 묵고 갔다고 한다. 옷이 해지고 남루해 평민과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하니 참혹하고 가엾다.

기대수는 내 사촌형 남자순의 사위다. 경상도 개령에 살며 재산이 넉넉해 평소 호화롭게 산다고 소문난 집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난리를 만나 집안 재산이 모두 사라지고 노비들도 흩어져 스스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남쪽으로 떠돌아 내려와 한산 수령 신경행에게 의지하려 했다는데, 한산 수령이 그의 동접 벗이라고 한다.

그때 우리 집도 먹을 것이 없어 죽만 먹는 형편이어서 그들 역시 죽 한 그릇 먹고 돌아갔다고 한다. 참으로 한탄스럽다.

오늘 아침은 양식이 없어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 콩을 조금 섞어 쪄서 집안사람 모두 나누어 먹었다.

나만 쌀 일곱 홉으로 밥을 지어 손자 둘과 단녀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탄해도 어쩔 수 없다.

방수간이 찾아와 바둑을 두고 돌아갔다.

1594년 4월 14일 (갑오년 음력 2월 24일)

생원 윤해의 종 안손이 지난밤 어머니를 데리고 달아났다고 한다. 몹시 괘씸하다.

아침밥도 완전히 떨어져 이웃에게 쌀 두 되를 빌렸다. 그중 일곱 홉은 생원 집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죽을 쑤어 나누어 먹었다.

방수도가 찾아와 바둑을 두고 갔다.

저녁에 막정이 돌아왔다. 함열 수령이 보내 준 물건은 다음과 같다.

  • 벼 한 섬
  • 밀가루 한 말
  • 막장 두 말
  • 소금 닷 되

요즘은 늘 소나무 껍질을 섞어 흰죽을 쑤어 온 집안이 함께 먹고 있다. 소금조차 이어 쓰기 어려웠는데 이제 닷 되를 얻었다. 아침저녁으로 죽에 넣어 먹고 아랫집에도 나누어 주려 한다.

근래에는 소금 없이 먹는 탄식까지 하게 되었으니 우리 살림이 참으로 가엾다.

1594년 4월 15일 (갑오년 음력 2월 25일)

아침부터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저녁에는 큰바람까지 불었다.

말먹이도 떨어졌다. 걱정스럽다.

생원 집에서 말먹이 여덟 묶음을 가져왔다.

1594년 4월 16일 (갑오년 음력 2월 26일)

오후에 수령 송응서를 만나려고 고을로 들어갔다.

수령이 이미 관청에 나와 있어 곧 이름을 알렸다. 수령이 나를 불러 만나 주었다.

마침 수령의 아들 진사 송이창이 회덕에서 들어와 있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에게 화전을 대접하고 저녁밥도 주었다.

나는 환곡을 받고 싶다는 뜻과 둔답을 경작하고 싶다는 계획을 이야기했다. 수령은 모두 어느 정도 허락하는 듯했지만 분명하게 승낙하지는 않았다. 아쉽다.

1594년 4월 17일 (갑오년 음력 2월 27일)

오후부터 비가 내려 하루 종일 이어졌고 밤까지 그치지 않았다. 새벽녘에야 개었다.

1594년 4월 18일 (갑오년 음력 2월 28일)

함열에서 일부러 사람을 보내 흰 물고기 한 동이를 보냈다. 고마움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쌀이 없어 밥을 지어 함께 먹지도 못하니 한탄스럽다.

내일은 외할머니 제삿날인데 모르고 흰 물고기국을 먹어 버렸다. 우스운 일이다.

1594년 4월 19일 (갑오년 음력 2월 29일)

백몽진과 문경인이 찾아와 바둑을 두고 돌아갔다.

어제 송노를 정산으로 보냈지만 정산 수령이 마침 없어서 빈손으로 돌아왔다. 온 집안이 오직 양식을 얻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끝내 허탕을 치고 돌아오니 한탄스럽다.

1594년 4월 20일 (갑오년 음력 3월 1일)

이웃에 사는 이등귀가 찾아왔다. 나와 나이가 같은 사람이다.

막정을 석성으로 보내 윤겸에게 편지를 전하게 했다.

먹을 것이 거의 없어 소나무 껍질로 끼니를 이었다. 내 두 아들은 콩죽 반 사발씩 겨우 먹었고, 아내와 세 딸은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둘째 딸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쓰러졌다가 나물국을 조금 마시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저녁에 쌀 한 되를 겨우 구해 나물을 넣어 죽을 쑤어 먹였다. 아이들이 굶주리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다.

막정이 돌아와 말하기를, 석성에서 편지를 받아 주지 않아 윤겸에게 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1594년 4월 21일 (갑오년 음력 3월 2일)

정산 수령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송노를 다시 보냈다.

평택 사람 이경담 희서가 이곳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수락헌으로 찾아가 만났다. 피란과 굶주림에 얼굴빛이 너무 상해 처음에는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송이창도 와 있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에 말아 먹는 밥을 내주어 먹었다.

1594년 4월 22일 (갑오년 음력 3월 3일)

굶주림이 심해 화정을 함열로 보냈다.

김대성, 방수간, 백몽진, 문경인이 찾아왔다. 함께 바둑을 두었다.

오후에는 윤함이 학질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갔다.

저녁에는 먹을 것이 콩뿐이었다. 간직해 두었던 찰기장과 쌀 닷 홉을 바꾸어 죽을 쑤어 먹었다. 종들도 굶주리고 있다.

오늘은 봄놀이를 하는 명절인데, 전에 빚어 둔 흰술 한 병이 맛이 없어 먹을 수 없기에 엿기름과 바꾸었다. 그래도 술 한 잔을 마시니 답답한 마음이 조금 풀렸다.

송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1594년 4월 23일 (갑오년 음력 3월 4일)

소나무 껍질에 쌀가루 반 되를 섞어 쪄 주니 아이들이 달게 먹었다.

막정이 함열에서 돌아왔다. 함열 수령이 보내 준 것은 다음과 같다.

  • 흰쌀 두 말
  • 정미 석 말
  • 콩 닷 말
  • 소금 한 말
  • 흰 물고기 젓 다섯 묶음

굶주리던 가운데 양식과 반찬을 얻으니 참으로 기뻤다.

정산에 보냈던 송노도 돌아왔다. 김장생이 거친 쌀 넉 말, 쌀 한 말, 목미 한 말과 장 한 말을 보내 주었다. 다만 답장은 오는 길에 잃어버렸다고 한다.

함열 수령의 아내가 오늘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도 들었다.

1594년 4월 24일 (갑오년 음력 3월 5일)

진사 윤해가 찾아왔다가 차가운 마루에서 묵었다.

윤함은 새벽에 학질을 피해 나갔다.

방수간과 문경인 등이 찾아왔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는데 빗물에 흙빛이 섞여 붉게 보였다.

관아에서 구휼미 두 섬을 받았다. 기대했던 것보다 적었다. 아전들에게 뇌물을 써야 제대로 받을 수 있으니, 정식으로 청해서는 얼마 나오지 않는다.

윤해의 집에도 한 섬이 나왔다.

종들에게 소나무 가지를 베어 울타리를 만들게 했다.

윤함은 병세가 가볍다고 한다.

1594년 4월 25일 (갑오년 음력 3월 6일)

울타리를 계속 만들었다.

김대성이 단장 조금과 파와 마늘을 보내 주었다.

몇 이랑 되는 남의 텃밭을 빌려 세 가지 채소 씨를 뿌렸다.

송이창을 통해 이등귀 집의 말먹이 스무 묶음을 얻었다.

1594년 4월 26일 (갑오년 음력 3월 7일)

윤함이 다시 학질을 피해 나갔다.

덕노, 송노, 막정을 보내 둔답을 손보게 했다.

조윤공과 신경유를 찾아보고 윤해의 아내와 아이들도 만나 보았다.

윤함의 병세는 나아졌다.

조 좌수가 간단한 점심을 대접했다.

1594년 4월 27일 (갑오년 음력 3월 8일)

송노를 함열로 보내 수령 아내의 상에 조문하게 했다. 이어 전주에 있는 송영구에게 가서 관찰사에게 구휼곡을 청할 수 있는 편지를 받아 오라고 했다. 관찰사는 송영구 아내의 외삼촌이라고 한다.

1594년 4월 28일 (갑오년 음력 3월 9일)

윤함이 내일 서쪽으로 떠난다고 하여 길 떠날 준비를 했다.

우계 성혼에게 답장을 썼다. 또 고성 쪽 친척에게도 편지를 썼다. 남상문이 옹진에 있는데 윤함 처가와 가까우므로 소식을 전하려 한 것이다.

1594년 4월 29일 (갑오년 음력 3월 10일)

윤함이 덕노와 막정을 데리고 떠났다.

먼저 결성에 가 형을 만나고, 대흥에서 길양식을 마련한 뒤 수원과 안산, 강화와 교동을 거쳐 강을 건너 연안과 해주로 갈 계획이다.

윤함은 지난해 음력 2월 25일, 내가 죽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온 뒤 지금까지 열다섯 달이나 머물렀다. 오늘 헤어지니 눈물이 났다.

아이 둘과 함께 언덕에 올라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봄꽃은 한창인데 사람 사는 형편은 쓸쓸하고 굶주림뿐이다.

김대성, 백몽진, 문경인이 찾아왔다.

비가 조금씩 내려 윤함의 길이 걱정스럽다.

1594년 4월 30일 (갑오년 음력 3월 11일)

비가 내렸다.

윤함이 가진 길양식은 이틀치밖에 되지 않는다. 비에 막혀 길에서 머물면 어찌할지 걱정스럽다.

아내가 장에 내다 팔려고 쌀떡을 만들었으나 비 때문에 가지 못했다. 결국 집안사람들이 먹어 버렸다. 쌀 닷 되를 이렇게 써 버렸으니 아깝다.

1594년 5월

1594년 5월 1일 (갑오년 음력 3월 12일)

밤에 꿈을 꾸었다.

임금이 행차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귀가 평소 사람보다 크게 보였다. 꿈속에서 나는 ‘나라를 다시 일으킬 임금의 모습인가’ 하고 생각했다.

어쩌다 궁궐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임금이 나를 부르셨다. 나는 제대로 된 관복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행전을 빌려 차고 들어갔다.

궁궐은 생각보다 검소했고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는데 왕자들인 듯했다. 임금은 평상복 차림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고 덮고 있던 비단 이불도 해져 있었다.

임금이 내게 글을 배웠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젊을 때 조금 배웠으나 오래전에 그만두었다고 대답했다.

또 어디 사느냐고 물으셔서 성균관동 벽송정 근처이며 장인은 전 문천군수였다고 말씀드렸다. 임금은 그곳이 가까운 곳이라고 하셨다.

꿈이 너무 또렷해 이상한 징조가 아닐까 싶어 기록해 둔다.

아침밥 뒤 고을로 들어가 송응서를 만나려 했으나 일이 많아 만나지 못했다.

동송동으로 가 조희설과 조희철을 만났다. 술을 대접받았다.

조희윤의 집에서는 조희보와 정응창을 만나 식사까지 했다. 돌아오는 길에 소즐에게 들렀으나 집에 없었다.

1594년 5월 2일 (갑오년 음력 3월 13일)

성덕린이 찾아왔다.

저녁에는 윤해와 함께 김대성 집 울타리 곁 나무 아래에 가 앉아 이야기했다.

양식이 다 떨어져 저녁에는 흰죽 반 사발밖에 먹지 못했다.

송노를 다시 함열로 보내 먹을 것을 구하게 했다. 계속 손을 벌리는 일이 부끄럽지만 달리 방도가 없다.

둔답에 뿌릴 볍씨로 관아에서 받은 벼 다섯 말은 거칠고 좋지 않다. 수령에게 다시 청해야 하지만 탈 말조차 없다.

누에가 깨어나 한 장쯤 되었다.

1594년 5월 3일 (갑오년 음력 3월 14일)

송노가 함열에서 돌아왔다.

신응구가 다음을 보내 주었다.

  • 정미 한 섬
  • 밀 열 말
  • 메주장 두 말
  • 찹쌀 넉 되
  • 생선 한 묶음

굶주림 끝에 쌀과 생선을 얻으니 살 것 같다. 윤해 집에도 일부 나누어 보냈다.

비가 내렸다.

1594년 5월 4일 (갑오년 음력 3월 15일)

수령을 만나려고 했으나 일이 많아 들어가지 못했다.

린아와 단녀를 데리고 산에 올라 고사리를 꺾었다.

김대성이 찾아왔다.

춘희가 진위에서 돌아왔다. 윤해 아내의 아버지 최경수가 전염병을 앓았으나 회복했다고 한다.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의 명단을 들었다.

  • 박동열
  • 민유경
  • 허균
  • 최계옥
  • 조응문
  • 민여신
  • 성계선
  • 이순민
  • 성진선
  • 황민중
  • 박원
  • 정곡
  • 박동망

모두 열세 명이라고 한다.

아내는 이가 아파 왼쪽 뺨과 입술까지 부었다.

1594년 5월 5일 (갑오년 음력 3월 16일)

아내의 부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김대성과 이등귀에게 소를 빌려 밭을 갈았다. 비가 올 듯해 서둘렀다. 밭은 갈았지만 이랑을 제대로 만들지는 못했다.

관아에서 받은 볍씨는 쭉정이가 많아 까부르고 나니 두 말 석 되밖에 남지 않았다. 함열에서 얻은 벼 석 말을 더 보태려 한다.

씨를 뿌리고 나면 먹을 곡식이 거의 남지 않는다.

아내가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학질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1594년 5월 6일 (갑오년 음력 3월 17일)

사람들을 시켜 밭일을 계속했다.

윤해의 아내와 아이들을 찾아보았다.

함열에서 사람을 보내 소금에 절인 조기 두 묶음을 보내 주었다. 고맙다. 하지만 함께 먹을 쌀이 없다.

밭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찬바람까지 분다.

1594년 5월 7일 (갑오년 음력 3월 18일)

밭일을 마쳤다. 볍씨 다섯 말을 뿌렸지만 땅이 반 마지기쯤 남았다.

구휼용 볍씨를 더 받으려고 했으나 관청 문지기가 가로막아 들어가지 못했다. 전에 윤해가 아전들의 부정을 말한 뒤부터 아랫사람들이 우리를 막는 듯하다.

밤에는 정로를 꿈에서 보았다.

1594년 5월 8일 (갑오년 음력 3월 19일)

단녀와 둘이 정투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1594년 5월 9일 (갑오년 음력 3월 20일)

환곡 쌀을 우리 부자가 한 섬씩 받았다. 실제로 되어 보니 열세 말쯤이었다. 이것으로도 사나흘밖에 버티지 못한다.

아내가 학질을 앓기 시작했다.

1594년 5월 10일 (갑오년 음력 3월 21일)

김대성, 문경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옥여 이귀가 이곳으로 온다는 말을 들었지만 오늘은 도착하지 않았다.

1594년 5월 11일 (갑오년 음력 3월 22일)

옥여를 만났다. 임천 수령도 함께 왔다.

이중영, 홍사고, 전 양지 수령 남대현, 김존경도 있었다.

남대현은 전쟁에서 세운 공이 있어 지금 김덕령을 보좌하고 있다고 한다. 김존경은 격문을 짓는 일을 맡고 있다.

그들은 조정과 행재소에 올라가 급한 일을 아뢰려 한다고 했다.

옥여가 나에게 쌀 두 말과 콩 닷 되를 주었다. 그중 쌀 닷 되는 윤해에게 나누어 주었다.

김덕령은 지금 함안에 있다고 한다.

그의 별장 최강은 군사 마흔여 명을 데리고 고성에서 적 아흔 명가량을 죽이고 네 명의 머리를 베었다고 한다. 뒤에는 창원에서도 스무 명 남짓을 죽이고 한 명의 머리를 베었다.

김덕령이 성을 직접 치려 했으나 적의 수가 많고 밤이 깊어 참았다. 다만 칼을 휘두르며 위세를 보이자 적이 물러났다고 한다.

최강은 남원 사람으로 힘이 매우 세다고 한다.

1594년 5월 12일 (갑오년 음력 3월 23일)

송노를 청양으로 보냈다.

윤함과 윤겸에게서 소식이 없어 걱정이다.

새해부터 우리 집은 계속 죽으로만 연명하고 있다. 요즘은 소금과 장마저 떨어져 나물 넣은 묽은 죽 반 사발로 끼니를 때울 때가 많다. 아이들이 굶주려 견디지 못한다.

나는 따로 쌀 일곱 홉으로 밥을 지어 먹지만 막내딸에게 조금씩 나누어 준다.

1594년 5월 13일 (갑오년 음력 3월 24일)

백몽진이 말먹이 풀 아홉 묶음을 가져왔다. 전에 약속한 마흔 묶음 가운데 일부다.

어머니 소식도 오래 듣지 못했다. 길양식이 없어 사람을 보낼 수도 없다.

아내는 학질을 앓았다.

1594년 5월 14일 (갑오년 음력 3월 25일)

김대성과 함께 연못에 그물을 쳐 물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하나도 잡지 못했다.

조희보가 쌀 한 말, 단장 한 사발, 조기 한 묶음을 보내 주었다.

1594년 5월 15일 (갑오년 음력 3월 26일)

함열에서 흰 물고기 젓 석 되를 보내 주었다.

송영구가 사신으로 지나간다기에 수락헌으로 가서 만났다.

이웃 백광염의 집에 불이 나 모두 타 버렸다고 한다.

시장에서 쌀 넉 되를 주고 칼과 쇳조각, 떡 세 개를 샀다.

태인으로 돌아가는 한 생원에게 어머니께 드릴 편지를 맡겼다.

1594년 5월 16일 (갑오년 음력 3월 27일)

전라도의 군관 유대경이 왔다. 쌀 한 말, 콩 한 말, 말린 조기 세 마리를 주었다. 사실은 송영구가 부탁해 준 것이라고 한다.

송영구가 묵는 곳을 찾아가 함께 바둑을 두었다.

1594년 5월 17일 (갑오년 음력 3월 28일)

비가 내렸다.

송영구를 다시 찾아갔다.

윤해가 학질을 앓았다. 그의 아내는 병이 나아졌다.

1594년 5월 18일 (갑오년 음력 3월 29일)

송영구가 돌아갔다.

세 딸을 데리고 산에 올라 나물을 뜯었다.

먹을 것이 없어 춘희를 함열로 보냈다.

쌀이 없어 생선을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다.

1594년 5월 19일 (갑오년 음력 3월 30일)

정오 무렵 천둥이 치고 바람과 비가 크게 일었다.

먹을 것이 없어 회화나무 잎과 콩가루를 섞어 국을 끓였다. 하루 종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다. 아이들이 너무 굶주렸다.

춘희가 오기를 기다리다 못해 쌀 한 되를 빌려 죽을 쑤었다.

그 뒤 춘희가 돌아왔다. 함열에서 보내 준 것은 다음과 같다.

  • 가미 두 말
  • 콩 석 말
  • 밀 닷 말
  • 정미 여덟 말
  • 소금에 절인 생선 한 묶음
  • 소금 닷 되
  • 흰 물고기 젓 한 단지

1594년 5월 20일 (갑오년 음력 4월 1일)

벼 한 말을 주고 큰 조기 두 마리를 사서 먹었다.

방수간이 찾아와 함께 바둑을 두었다.

윤해가 학질을 앓았다. 그의 아내는 이제 완전히 나았다.

1594년 5월 21일 (갑오년 음력 4월 2일)

명복을 전주 송영구에게 보냈다.

임진년 피란 때 우리 집에서 보낸 군량이 한산에 묶여 전해지지 못했던 일이 있어 그 사실을 확인하는 글을 받아 오게 하려는 것이다.

이예실이 찾아왔다.

조유한에게서 윤겸이 아프다는 말을 들었다. 걱정스럽다.

환곡으로 거친 쌀 한 섬을 받았는데 실제로는 열두 말 일곱 되였다. 윤해도 같은 양을 받았다.

1594년 5월 22일 (갑오년 음력 4월 3일)

예전에는 길마다 구걸하는 사람이 가득했는데 요즘은 오히려 보기 드물다. 굶어 죽어 버린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길에는 시체가 널려 있고, 영남과 경기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소문까지 들린다. 심지어 육촌 사이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서울 근처에서는 길 가는 사람을 죽여 먹었다는 말까지 들린다.

전염병도 사방에 번지고 있다.

이경여의 편지를 받았다. 그의 아내가 병이 들었다고 한다.

1594년 5월 23일 (갑오년 음력 4월 4일)

함열에서 결성으로 가는 사람에게 어머니께 드릴 편지를 맡겼다.

비가 내렸다.

1594년 5월 24일 (갑오년 음력 4월 5일)

윤해가 청양으로 떠났다. 결성에 있는 형 윤겸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윤해의 아내와 아이들, 양어머니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1594년 5월 25일 (갑오년 음력 4월 6일)

서울에 있던 막내누이가 전염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에 앞서 누이의 딸 신완도 예산에서 죽었다고 한다.

놀랍고 슬퍼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누이는 평생 나를 따뜻하게 대했고 무엇이든 있으면 나누어 주던 사람이었다. 이제 다시 볼 수 없다니 어찌 견디겠는가.

늙은 어머니가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슬퍼하실까. 그곳에도 전염병이 가까이 번지고 있어 더욱 걱정이다.

영암에 있는 다른 누이는 곡식을 보내 어머니를 돕고 있다고 한다.

1594년 5월 26일 (갑오년 음력 4월 7일)

먹을 곡식이 없어 나뭇잎으로 끼니를 때웠다.

굶주림이 날로 심하다.

충아와 그 어머니를 데려와 딸들과 함께 자게 했다.

1594년 5월 27일 (갑오년 음력 4월 8일)

쑥에 쌀을 조금 넣어 먹었다.

1594년 5월 28일 (갑오년 음력 4월 9일)

막내누이가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이라 간단히 제사를 지냈다.

윤해가 없어서 린아와 함께 예를 올렸다.

비가 내렸다.

아내는 이가 다시 아파 얼굴이 부었다.

1594년 5월 29일 (갑오년 음력 4월 10일)

밤새 큰비가 내려 물이 넘쳤다.

먹을 것이 없어 말려 둔 회화나무 잎에 콩과 보리를 조금 섞어 쪄 먹었다.

아이들은 계속 먹을 것을 찾았다.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함열로 사람을 보내고 싶어도 물이 불어 보낼 수 없다.

누에에게 먹일 뽕잎도 구하기 어렵다.

밤에는 늙은 어머니와 죽은 누이를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1594년 5월 30일 (갑오년 음력 4월 11일)

비가 그쳤다.

메밀가루와 나뭇잎으로 국을 끓여 먹었다.

저녁에는 쌀 한 되 반을 빌려 쑥과 모시잎을 넣어 죽을 쑤었다. 장도 없고 소금도 거의 없다.

그저 죽지 않을 만큼만 먹으며 하루를 넘긴다.

1594년 5월 31일 (갑오년 음력 4월 12일)

향비를 수령에게 보내 먹을 것을 청하게 했다.

껍질을 벗긴 도토리 열 말, 콩잎 한 섬, 거친 쌀 닷 말을 얻었다.

1594년 6월

1594년 6월 1일 (갑오년 음력 4월 13일)

윤해가 돌아왔다. 물이 불어 길에서 지체되었다고 한다.

윤겸은 전염병을 두 번째 앓았으나 회복했다고 한다.

윤겸의 아내 임씨는 임신 여섯 달인데 세 번째로 병을 앓아 아직 완전히 낫지 못했고, 하인들도 앓고 있다고 한다.

효임은 아홉 살의 나이로 죽었다. 이제 임아 하나만 남았다고 한다.

향비를 조희보 형제에게 보냈더니 쌀 한 말 닷 되와 중미 한 말을 주었다.

1594년 6월 2일 (갑오년 음력 4월 14일)

계집종들을 보내 둔답의 김을 매게 했다.

모가 새와 짐승에게 많이 뜯겨 듬성듬성하다. 환곡 볍씨를 얻어 다시 심어야 할 듯하다.

큰딸이 학질을 앓기 시작했다.

함열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보냈다.

1594년 6월 3일 (갑오년 음력 4월 15일)

우리 부자가 각각 환곡 한 섬씩을 받았다.

춘희도 함열에서 돌아왔다. 가져온 것은 다음과 같다.

  • 쌀 석 말
  • 밀 석 말
  • 벼 열 말
  • 단장 한 말
  • 말린 생선 세 묶음
  • 새우젓 두 되

1594년 6월 4일 (갑오년 음력 4월 16일)

볍씨 두 말을 물에 담갔다가 까부르고 골랐다.

종 셋이 논의 김을 맸다.

큰딸은 학질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앓았다.

덕노가 제 어머니에게 욕하고 대들기에 묶어 놓고 큰 몽둥이로 때렸다. 너무 버릇이 없다.

윤해 집의 짐말이 풀을 뜯다가 사라졌다. 하나뿐인 말이라 몹시 걱정스럽다.

호미도 하나 샀다.

1594년 6월 5일 (갑오년 음력 4월 17일)

종들이 계속 김을 맸다.

사라진 말을 찾아다녔다.

송이창이 찾아왔다.

1594년 6월 6일 (갑오년 음력 4월 18일)

오늘은 계집종 한 명만 김을 맸다.

덕노는 며칠 전 매를 맞은 뒤 병들었다고 핑계를 대며 일을 하지 않는다.

1594년 6월 7일 (갑오년 음력 4월 19일)

비가 내렸다.

망종 무렵인데도 아직 심지 못한 논밭이 많다.

자경편을 읽다가 나이가 이렇게 들도록 한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니 한탄스럽다.

1594년 6월 8일 (갑오년 음력 4월 20일)

비 때문에 일을 하지 못하다가 늦게 개었다.

이웃 늙은이가 듬성듬성 난 곳에 모를 보충해 주었다.

조익의 편지가 고을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만났다. 송이창도 와 있었다. 술 석 잔을 마셨다.

아내와 단녀도 학질을 앓았다.

1594년 6월 9일 (갑오년 음력 4월 21일)

먹을 곡식이 없어 무명 한 필을 팔아 쌀 한 말 닷 홉을 얻었다.

찧고 나니 실제로 먹을 수 있는 쌀은 여덟 되뿐이었다.

1594년 6월 10일 (갑오년 음력 4월 22일)

계집종들이 김을 맸다.

이정시가 혼사 이야기를 하러 찾아왔다.

아내와 단녀의 학질이 심해졌다.

누에는 네 자리로 늘어났는데 뽕잎이 부족하다. 관노 상근에게 부탁해 세 짐을 빌렸다.

어머니를 찾아가고 싶지만 송노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 사람을 부릴 수 없다. 도망간 것인지 죽었는지 병든 것인지 알 수 없어 걱정스럽다.

화산에 올라가 보니 새들이 볍씨를 많이 먹어 버렸다.

1594년 6월 11일 (갑오년 음력 4월 23일)

명복을 함열로 보냈다.

소즐이 찾아왔다.

이경여가 어제 전염병을 얻어 나흘 만에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놀랍고 슬퍼 견딜 수 없다.

얼마 전 그가 아내가 병들었다며 아들이 없어 걱정이라는 편지를 보내 왔는데, 이제 그마저 세상을 떠났다.

자미와 면부, 누이, 경여까지 모두 죽었다. 오래 사귄 사람들이 잇달아 사라지니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전염병은 바로 이웃까지 닥쳐왔다.

유선각도 찾아왔고 김대성 집안사람도 왔다.

누에가 고치를 짓기 시작했다.

1594년 6월 12일 (갑오년 음력 4월 24일)

윤겸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다.

명복이 함열에서 돌아오며 쌀 석 말, 밀 두 말을 가져왔다.

길을 나서 무수포를 건너 용안과 함열을 지났다. 신응구 등을 만나고 그곳에서 잤다.

1594년 6월 13일 (갑오년 음력 4월 25일)

비가 하루 종일 내려 그대로 머물렀다.

1594년 6월 14일 (갑오년 음력 4월 26일)

아침을 먹고 떠났다.

함열에서 흰쌀 한 말, 정미 한 말, 콩 한 말, 조기 한 묶음, 새우젓 석 되, 김 한 묶음, 단장과 짠장을 얻었다.

신창진을 지나 김제의 조대붕 집에 들렀다. 그는 나이가 많은 서울 사람인데 피란 와 살고 있었다. 함께 이야기했다.

1594년 6월 15일 (갑오년 음력 4월 27일)

새벽에 출발해 길가에서 아침을 먹었다.

비를 맞으며 태인 칠전리에 있는 어머니께 도착했다. 어머니와 아우 식구들은 무사했지만 굶주림이 심했다.

내일이 아버지 제삿날인데 영암 누이에게 보낸 종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가져온 흰쌀 닷 되와 콩 닷 되 정도밖에 없다.

어머니를 뵈니 기뻤지만 죽은 김씨 누이를 생각하며 함께 슬퍼했다.

저녁에 덕경이 영암에서 돌아와 누이의 편지와 제수용 물건을 전했다. 쌀 넉 말, 벼 여섯 말, 찹쌀 한 말 넉 되, 목미 닷 말 등이었다.

오는 길에 보니 씨와 일손이 없고 세금 부담까지 심해 버려진 논밭이 끝도 없었다. 굶주림과 전염병이 온 나라를 덮고 있다.

1594년 6월 16일 (갑오년 음력 4월 28일)

아우가 비를 맞으며 고을에 들어가 관찰사를 만나고 돌아왔다.

관찰사가 쌀 한 말, 콩 두 말, 소금, 장, 종이, 붓, 먹, 부채, 갓 등을 주었다고 한다.

내일 제사에 쓸 것을 준비했다.

1594년 6월 17일 (갑오년 음력 4월 29일)

새벽에 아버지 제사를 지냈다.

남은 음식은 처남들과 가까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머니는 단오가 지나도록 더 머물다 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양식이 없어 그럴 수가 없다. 내일 돌아가기로 했다.

서울 집은 완전히 헐려 없어졌다고 한다. 지킬 사람도 없다.

1594년 6월 18일 (갑오년 음력 5월 1일)

몸이 좋지 않고 설사가 나며 배 속이 계속 끓었다.

아우와 함께 권 좌수의 사랑채에 갔다. 버찌를 얻어 먹었다.

1594년 6월 19일 (갑오년 음력 5월 2일)

어머니와 아우에게 하직하고 떠났다.

김제 근처에서 길을 잘못 들어 조대붕의 집에서 묵었다.

보리와 밀이 제대로 익지 않았는데도 굶주린 사람들이 몰래 베어 먹고, 밤이면 남의 밭에 들어가 훔쳐 간다고 한다. 농부들은 활을 들고 밭을 지키며 때로는 사람에게 화살을 쏘기도 한다.

1594년 6월 20일 (갑오년 음력 5월 3일)

나루의 밧줄이 거센 물살에 끊어져 사공들이 작은 배로 사람을 건넸다. 말은 헤엄쳐 건넜다.

함열에 도착해 윤해와 이귀를 만났다. 윤겸은 이미 돌아갔다고 한다.

신응구 등도 만났다.

이귀는 서울에서 스무 날 넘게 병을 앓았고 임금이 의원과 약을 보내 주셨다고 한다.

그는 임천에 있는 내 가족도 찾아보았고 쌀과 콩, 생선과 젓갈까지 주었다고 한다.

또 나에게 환곡 벼 한 섬을 주도록 마련해 주었다.

1594년 6월 21일 (갑오년 음력 5월 4일)

윤해와 함께 돌아왔다.

비가 크게 내렸다.

집에 오니 아내와 둘째 딸이 학질을 앓고 있었고 단녀도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다.

1594년 6월 22일 (갑오년 음력 5월 5일)

비가 내렸다.

내 몸도 좋지 않아 제사를 린아에게 맡겨 지내게 했다.

이웃 임승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염병이 사방에 퍼져 있다.

서울에서도 박동현, 이경함, 이산보, 정언지 등이 죽었다고 한다.

명나라 사신이 온다고 한다.

고양겸과 유정이 권율이 싸우려는 것을 막고 화의를 추진한다는 소문도 들었다.

광해군은 사신을 맞으려고 완산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아내는 여전히 학질을 앓았다.

누에고치는 스물세 말 정도 나왔다.

1594년 6월 23일 (갑오년 음력 5월 6일)

둔답을 둘러보았다.

윤해도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윤해의 아내와 딸 의아가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둘째 딸의 학질은 더 심해졌고 아내도 계속 앓는다. 단아는 조금 나아졌다.

송노는 아직 소식이 없다.

1594년 6월 24일 (갑오년 음력 5월 7일)

아내가 밤에 몹시 사나운 꿈을 꾸었다고 한다.

윤겸 집에도 전염병이 이어지는 듯해 걱정이다. 임아가 무사한지도 걱정스럽다.

춘희를 서천과 비인 쪽으로 보내 정미 한 말 석 되와 무명을 가지고 가 소금을 바꾸어 오게 했다. 윤해도 콩 두 말 닷 되를 보탰다.

함열에서도 장에 가서 필요한 것을 사라고 했다.

1594년 6월 25일 (갑오년 음력 5월 8일)

충아의 어머니가 병들었다.

의아는 조금 나아졌다.

방수간과 이광춘이 찾아왔다.

백몽진이 이달 초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김대성의 큰며느리도 죽었다고 한다.

나와 아이들도 몸이 좋지 않다.

문경인은 김덕령 진영으로 떠났다.

명복이 함열에서 물건을 받아 왔는데 오는 길에 일부 양식과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해 몹시 화가 났다.

1594년 6월 26일 (갑오년 음력 5월 9일)

비가 내렸다.

린아는 조금 좋아졌고 충아의 어머니도 나아졌다.

아내의 학질은 떨어졌다.

윤해가 학질을 앓았다.

1594년 6월 27일 (갑오년 음력 5월 10일)

큰비가 계속 내렸다.

길을 다니거나 물건을 사고파는 일 모두 걱정스럽다.

린아와 둘째 딸이 심하게 앓고 있다.

1594년 6월 28일 (갑오년 음력 5월 11일)

비가 내렸다.

윤해가 학질을 피하려 우리 집에 왔지만 결국 발작했다.

양식이 부족해 보리죽으로 끼니를 이었다.

종들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물건을 빼앗기는 일도 있었다.

1594년 6월 29일 (갑오년 음력 5월 12일)

비가 내렸다.

옥춘과 명복을 함열 장터로 보냈다.

아이들은 계속 학질을 앓았다.

1594년 6월 30일 (갑오년 음력 5월 13일)

윤해의 병이 심하다.

내일은 양아버지 제삿날이다.

함열에서 쌀과 찹쌀 등 여러 제수 물품을 보내 주었다.

쥐가 좋은 누에고치 석 되를 먹어 치웠다.

1594년 7월

1594년 7월 1일 (갑오년 음력 5월 14일)

꿈에서 한림 자정 김지남을 보았다.

죽은 누이 생각이 나 더욱 슬펐다.

아이들은 여전히 학질을 앓고 있다.

1594년 7월 2일 (갑오년 음력 5월 15일)

함열에서 곡식과 장, 소금 등 여러 물건을 보내 주었다.

춘희가 소금을 바꾸어 돌아왔다. 장에 내다 팔아 다른 먹을 것으로 바꿀 생각이다.

1594년 7월 3일 (갑오년 음력 5월 16일)

종을 함열로 보냈다.

윤해의 병이 매우 위중해 신 부제학 집에서 꿀을 얻어 먹였다.

먹을 것과 생활물자가 너무 부족하다.

장터 물가도 크게 올랐다.

1594년 7월 4일 (갑오년 음력 5월 17일)

비가 내렸다.

윤해는 조금 나아지는 듯하다가 다시 심해졌다.

충아도 병들어 걱정이다.

1594년 7월 5일 (갑오년 음력 5월 18일)

일꾼 다섯 명을 써서 김을 맸다.

윤해와 충아의 병은 조금 나아졌다.

이정시가 찾아왔다.

이작이 지난 음력 5월 8일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러 달 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한 집안에 재앙이 끊이지 않으니 참담하다.

1594년 7월 6일 (갑오년 음력 5월 19일)

네 사람이 김을 매다가 비가 와 일을 그만두었다.

조대득이 찾아왔다.

춘희가 장사를 다녀와 보리와 콩 열세 말 정도를 가져왔다. 계산이 분명하지 않아 중간에서 속인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병든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1594년 7월 7일 (갑오년 음력 5월 20일)

새벽에 제사를 지냈다. 쌀이 없어 아주 간소하게 차렸다.

비가 내렸다.

조경수에게 가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왜적이 화의를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요구한다는 말이 있다.

  • 조선의 여러 도 가운데 네 도를 떼어 줄 것
  • 명나라 황제의 공주를 일본에 보낼 것
  • 일본이 명나라에 왕래하고 조공하는 길을 허락할 것
  •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할 것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군사를 여러 길로 나누어 명나라까지 쳐들어가겠다고 한다.

승려 유정이 가토 기요마사를 만나 교섭했다는 말도 들었다. 적 내부에도 의견 차이가 있다는 소문이 있다.

심설이 승진했다는 소식 등도 들었다.

1594년 7월 8일 (갑오년 음력 5월 21일)

비가 그쳤다.

윤해의 병은 조금 나아졌다.

말먹이도 떨어졌다.

서쪽에 간 윤함의 소식이 없고 막정도 돌아오지 않아 걱정이다.

죽산에서 떠돌아온 열한두 살쯤 된 여자아이 하나가 버려져 있기에 거두어 집에서 부리기로 했다.

1594년 7월 9일 (갑오년 음력 5월 22일)

비가 내렸다.

함열에서 소금에 절인 생선을 보내 주었다.

앓고 있는 아이들과 윤해에게 나누어 주었다.

1594년 7월 10일 (갑오년 음력 5월 23일)

큰비가 내렸다.

아이들의 병이 계속되어 마음이 몹시 답답하다.

1594년 7월 11일 (갑오년 음력 5월 24일)

여러 곳에 양식을 부탁했다.

조희보가 쌀과 몇 가지 먹을 것을 보내 주었다.

사람들을 써서 농사일도 했다.

1594년 7월 12일 (갑오년 음력 5월 25일)

비가 내렸다.

땔감과 말먹이가 다 떨어졌다.

윤겸에게서 소식이 없다.

아내는 임신 여섯 달 된 사내아이를 유산했다. 몹시 안타깝다.

오늘은 어머니 생신인데 아무것도 보내 드리지 못했다.

1594년 7월 13일 (갑오년 음력 5월 26일)

비가 계속 내렸다.

곡식도 땔감도 없다.

쌀 닷 홉으로 나물죽을 쑤어 나누어 먹었다.

춘희가 함열에서 곡식과 김, 여러 반찬거리를 가져왔다. 윤해 집에도 나누어 주었다.

1594년 7월 14일 (갑오년 음력 5월 27일)

고을에 들어갔다.

백유함과 여러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놀이도 했다.

몇 가지 물건을 선물로 받았다.

홍범 등도 만났다.

1594년 7월 15일 (갑오년 음력 5월 28일)

두 번째 김매기를 마쳤다. 모두 열다섯 품의 일손이 들었다.

하지만 모가 너무 듬성듬성해 수확이 걱정스럽다.

내일은 삼촌 제삿날이다.

1594년 7월 16일 (갑오년 음력 5월 29일)

제사를 지냈으나 먹을 것이 없어 매우 간소했다.

아이들과 양어머니까지 모두 학질을 앓고 있다.

묽은 죽밖에 먹지 못해 모두 지쳐 있다.

전에 거두었던 떠돌이 여자아이는 달아났다.

1594년 7월 17일 (갑오년 음력 5월 30일)

양어머니가 의아를 데리고 학질을 피하려 다른 곳으로 갔지만 결국 또 앓았다.

아이들이 병과 굶주림에 지쳐 몰골이 말이 아니다.

1594년 7월 18일 (갑오년 음력 6월 1일)

비가 조금 내렸다.

아이들은 여전히 학질을 앓고 있고 충아는 특히 심하다.

양식이 전혀 없어 콩죽 반 사발씩 나누어 먹었다. 낮에는 아이들에게 남은 보릿가루를 조금씩 먹였다. 너무 가엾다.

막정이 해주에서 돌아왔다. 간 지 열여드레 만이다.

윤함 가족은 모두 무사하며 길도 다닐 만하다고 한다.

덕노는 성혼에게 보내려던 무명 두 필을 훔쳐 팔아먹었다고 한다. 그의 아내는 죽었고 덕노 자신도 병들고 굶주리며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한다.

윤겸 집에도 전염병이 번졌다. 세만의 아내는 죽었고 세만도 매우 위중하다고 한다.

윤겸 아내의 외할머니도 지난해 겨울 아들을 잃은 뒤 이번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윤함이 조기 다섯 묶음을 보내 왔는데 그중 하나는 나루삯으로 썼다.

남상문 가족은 지난 3월 옹진에서 영유로 옮겨 갔다고 한다. 내 편지는 전하지 못했다. 그곳에서도 먹고살 길을 찾아 옮긴 듯하다.

1594년 7월 19일 (갑오년 음력 6월 2일)

윤함이 당감토 하나를 보내 왔다. 크기가 조금 작아 물에 적셔 늘려 써야 할 듯하다.

오정일의 어머니가 지난 3월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종가 쪽 오유일은 어릴 때부터 지병이 있었고 난리 때 늙은 할머니와 어머니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한다. 집안에서 죽은 사람도 많다.

선조들의 신주는 정일이 서쪽 지방으로 모셔 갔다고 한다. 앞으로 제사를 누가 제대로 지낼지 걱정스럽다.

막정의 어머니는 여든이 넘었는데도 살아 있고, 친족 가운데 마흔 명 넘게 죽었다고 한다.

김지남은 어머니상을 당했고 자신도 병들었다는 소식이 있다.

아이들은 계속 학질을 앓고 있다.

니산 수령 김가기를 찾아가 볼 생각이다.

1594년 7월 20일 (갑오년 음력 6월 3일)

오늘은 초복이다.

새벽부터 큰비와 천둥이 이어졌다.

땅이 세 차례나 크게 흔들렸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다시 지진이 있었다. 평생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니산으로 가 김가기 수령을 만났다.

성문덕, 전 비인 수령 김기명도 있었다.

저녁에도 땅이 다시 흔들렸다.

김기명은 옥에 갇혀 있다가 공을 세워 죄를 씻게 하려고 풀어 주어 장수의 진영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1594년 7월 21일 (갑오년 음력 6월 4일)

수령이 나에게 밥을 먹이고 좋은 벼 한 섬과 흰쌀 넉 말도 주었다. 내일 집으로 보낼 생각이다.

명나라 군사들이 소금 장수들의 물건을 빼앗고 사람들을 때리며 함부로 요구한다고 한다. 나라 안이 몹시 어지럽다.

비와 천둥이 이어졌다.

유전 생원을 만났다. 젊을 때 함께 공부한 뒤 거의 마흔 해 만에 만난 사람이다.

1594년 7월 22일 (갑오년 음력 6월 5일)

홍요좌가 왔다.

친척이자 옛 벗인데 전염병을 앓고 겨우 회복했다고 한다.

막정에게 곡식을 들려 집으로 먼저 보냈다.

감찰관을 대접하려고 노루를 잡았고 소머리도 음식으로 썼다.

나는 더위에 상해 설사가 계속되었다.

충아가 걱정스럽다.

1594년 7월 23일 (갑오년 음력 6월 6일)

설사가 계속되었다.

수령은 감찰관을 맞으러 갔다.

명나라 군사들이 객사를 차지해 감찰관은 민가에 머문다고 한다.

날씨가 덥고 습해 파리가 들끓었다.

연산에 가고 싶다. 그곳 수령 심언은 친척이다. 이언우에게 보낼 편지도 썼다.

집에서 편지가 왔다. 아이들은 조금 나아졌다고 한다.

이곳에서 잰 곡식은 실제 양이 적게 나온다.

저녁에는 상주에서 떠돌아온 남매를 보았다. 누이는 열세 살쯤, 아우는 열 살쯤 되었다. 아버지가 회덕에서 죽은 뒤 어머니가 달아났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났다.

1594년 7월 24일 (갑오년 음력 6월 7일)

관아 창고에서 성문덕과 수령을 만났다.

연산으로 가려면 문단속이 엄해 수령에게 비밀 통행증을 받아야 했다.

비와 천둥 속에 연산으로 갔다.

심언을 만나고 심인정, 심대유 등 친척들도 만났다.

생선회와 소주 석 잔을 먹었다.

1594년 7월 25일 (갑오년 음력 6월 8일)

아침을 심언과 함께 먹었다.

은진 호동으로 가 판결사 이영공을 만나고 양필 이재도 만났다.

그곳에서 이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울었다.

밤에는 양필과 함께 잤다.

1594년 7월 26일 (갑오년 음력 6월 9일)

양필과 헤어지며 서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마음이 몹시 서글펐다.

홍세찬 집에 들러 바둑을 대여섯 판 두었다.

물에 말은 밥과 새로 만든 떡을 먹고 밀 두 말을 얻었다.

연산으로 돌아와 여러 손님과 술을 마셨다.

저녁에 다시 지진이 있었다.

1594년 7월 27일 (갑오년 음력 6월 10일)

심언이 다음을 주었다.

  • 벼 한 섬
  • 흰쌀 두 말
  • 중미 두 말
  • 목화씨 석 말
  • 밀 두 말
  • 단장 닷 되

주인집에 맡겨 둔 곡식 가운데 한 말 닷 되가 없어졌다.

니산으로 돌아왔다.

수령이 닭 두 마리를 잡아 나를 대접했다.

관아 창고에서 홍요좌와 좌수 홍이서와 함께 잤다.

1594년 7월 28일 (갑오년 음력 6월 11일)

임천으로 돌아왔다.

더위에 지쳐 몹시 힘들었다.

집에 와 보니 아내와 린아가 학질을 앓고 있었다.

1594년 7월 29일 (갑오년 음력 6월 12일)

충아를 데려와 보았다.

수령 송응서의 집을 찾아갔다. 이덕후, 이홍제, 이분, 이진 등도 있었다.

린아와 윤해가 학질을 앓았다.

막정은 아프다고 하며 일을 하지 않는다.

송노는 전의까지 갔다가 직산 쪽으로 돌아갔거나 도망친 듯하다는 말을 들었다.

논의 세 번째 김매기를 시작했다.

1594년 7월 30일 (갑오년 음력 6월 13일)

오늘은 중복이다.

일꾼들이 논의 김을 맸다.

아내가 갑자기 토하고 설사하며 이질 증세까지 보였다. 일곱여덟 번이나 설사를 해 몹시 위중해 보였다.

1594년 7월 31일 (갑오년 음력 6월 14일)

아내는 오늘도 일곱아홉 번 설사했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몹시 위태롭다.

린아도 이질과 학질을 함께 앓고, 윤해도 병이 심하다.

막정을 함열로 보내 얼음을 구하게 했다. 이 고을 수령은 이미 파직되어 관청에서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1594년 8월

1594년 8월 1일 (갑오년 음력 6월 15일)

아내의 병세가 조금 나아졌다.

막정이 함열에서 돌아왔다. 가져온 것은 다음과 같다.

  • 밀 열 말
  • 닭 한 마리
  • 새우젓 두 되
  • 참기름 한 되
  • 꿀 조금
  • 찹쌀 닷 되
  • 목미 석 말
  • 콩 두 말

전 수령 송응서가 돌아왔다고 하지만 아직 찾아가 보지는 못했다.

밀 여덟 말을 주고 소머리와 쇠고기, 내장을 샀다. 아랫집에도 나누어 주었다.

윤겸이 여덟 달 만에 찾아왔다. 가족들에게 아직 전염병이 이어지고 있고, 아내는 병 뒤로 몸이 약해져 매일 학질을 앓는다고 한다.

린아의 학질도 심하다.

1594년 8월 2일 (갑오년 음력 6월 16일)

소머리를 삶아 윤해의 양어머니와도 나누어 먹었다.

논의 김매기를 마쳤다.

윤해의 학질은 떨어졌다.

1594년 8월 3일 (갑오년 음력 6월 17일)

아내의 병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린아는 아직 기운이 없고 입맛도 없다.

피란민 조대충이 찾아왔지만 점심 한 끼 대접할 양식조차 없었다.

1594년 8월 4일 (갑오년 음력 6월 18일)

아내에게 이질 증세가 다시 나타났지만 전만큼 심하지는 않다. 더위를 먹은 탓인 듯하다.

린아는 학질은 그쳤지만 기운이 없다.

1594년 8월 5일 (갑오년 음력 6월 19일)

린아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윤겸이 함열로 갔다. 그곳에서 도움을 받아 어머니가 계신 태인에도 가 보려 한다.

날이 너무 더워 몸이 상할까 걱정이다.

윤함에게 보낼 편지를 명복에게 맡겨 대흥의 종 애운을 통해 전하게 했다.

1594년 8월 6일 (갑오년 음력 6월 20일)

윤해의 집에 양식이 없어 날마다 우리 집에 와 먹을 것을 구한다.

우리 집도 넉넉하지 않아 답답하다.

충아가 와서 밥을 먹고 돌아갔다.

1594년 8월 7일 (갑오년 음력 6월 21일)

오늘은 입추다.

저녁에 양식이 없어 아이들에게 밀가루로 떡을 만들어 주었다.

막정이 함열에서 돌아오며 밀 열 말, 벼 열 말, 밀가루 한 말, 흰 물고기 젓 닷 되를 가져왔다.

아랫집에도 밀 한 말과 벼 한 말을 나누어 주었다.

막정은 말먹일 풀은 가져오지 않았다.

1594년 8월 8일 (갑오년 음력 6월 22일)

밀가루를 들깨물에 풀어 먹었다. 이것도 넉넉하지 않다.

윤겸은 병든 아내에게 먹이려고 들깨가루를 구해 갔다.

1594년 8월 9일 (갑오년 음력 6월 23일)

오늘은 말복이다.

막정이 다시 함열로 갔다.

춘희는 장성으로 보냈다. 태인을 거쳐 어머니께 편지와 흰쌀 한 말 일곱 되를 전하게 했다.

윤겸도 어머니를 찾아가려 했지만 더위로 몸이 좋지 않고 종들도 병들어 가지 못했다.

1594년 8월 10일 (갑오년 음력 6월 24일)

태인에서 한 진사가 아우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어머니는 무사하지만 굶주림으로 몹시 야위어 누워 지내신다고 한다.

가슴이 미어진다.

날이 선선해지면 어머니를 모셔 오려 한다. 그 전에라도 다시 찾아가 뵈어야겠다.

아랫집도 굶주리고 있어 쌀 일곱 홉을 보내 주었다.

1594년 8월 11일 (갑오년 음력 6월 25일)

임 참봉 집 계집종 복금이 고기를 가지고 찾아왔다.

남궁 지평이 죽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세월과 사람 일이 허망하다.

저녁에는 양식이 전혀 없어 열 명 남짓한 식구가 보리죽 반 사발씩과 나물로 끼니를 때웠다. 아이들이 너무 야위었다.

1594년 8월 12일 (갑오년 음력 6월 26일)

배고픔을 잊으려고 단녀와 놀이를 했다.

충아가 대나무를 말처럼 타고 잠자리를 쫓아다니며 노는 모습을 보았다. 아직 말이 늦다.

집주인에게 밀 닷 되를 빌려 죽을 쑤었다.

아이들은 굶어 너무 야위었다.

윤겸은 밖에 나가 있고, 막정은 발이 붓고 한노는 무릎이 아파 일을 할 종이 없다.

1594년 8월 13일 (갑오년 음력 6월 27일)

한산 수령이 왔다는 잘못된 말을 듣고 수락헌으로 갔다.

이홍제, 한겸, 심응유 등을 만났다.

오후에 윤겸이 돌아왔다. 함열에서 보리 두 섬, 쌀 두 말, 보리쌀 두 말, 생선젓 등을 얻어 왔다.

함열 수령 신응구는 아내를 잃은 뒤 다시 혼인할 생각인데, 그 어머니가 온양에 있으면서 혼사를 허락했다고 한다. 늦가을이나 겨울에 일을 치를 계획이라고 한다.

호남의 도적들이 태인의 옥을 깨뜨리고 죄수들을 빼냈으며 니산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전주 남문에서는 군관을 죽이고 집에 불까지 질렀다고 한다. 나라가 어찌 될지 걱정스럽다.

1594년 8월 14일 (갑오년 음력 6월 28일)

홍성민, 윤우신, 남언경이 전염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홍성민 같은 훌륭한 신하가 죽었다니 나라에도 큰 손실이다.

새 수령으로 이구순이 임명되었다는 말이 있다.

1594년 8월 15일 (갑오년 음력 6월 29일)

한겸이 윤겸을 찾아왔다.

정산의 김장생이 파직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 그곳에서 도움을 얻기 더 어려워졌다.

아랫집 식구들이 모두 함께 살고 있어 먹을 것이 더욱 부족하다. 곡식값도 크게 올랐다.

막정을 함열로 보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1594년 8월 16일 (갑오년 음력 7월 1일)

아침 전에 막정이 돌아왔다.

함열 수령이 다음을 보내 주었다.

  • 흰쌀 두 말
  • 중미 한 말
  • 보리쌀 한 말
  • 찹쌀 닷 되
  • 목미 석 되
  • 웅어젓 두 묶음
  • 진어 식해 세 마리
  • 조기 두 묶음

초사흘은 할머니 제삿날인데 제사를 지낼 사람이 따로 없다. 이 물건으로 밥을 지어 제사를 올릴 생각이다. 참으로 고맙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집안에 큰일이 없다면 비록 모든 조상의 제사를 다 받들 수는 없더라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기일에는 밥이라도 지어 올려 그리움을 잊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세상 형편이 너무 어렵고 변수가 많으니 미리 장담할 수는 없다.

윤해를 이복령의 집으로 보내 혼인에 좋은 날을 골라 달라고 했다. 음력 팔월 십삼일이나 구월 사일이 좋고, 납채는 십팔일이 좋다고 했다. 그중 팔월이 가장 좋다고 하나 일이 너무 촉박해 준비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구월에 치를 생각이지만 상대 집안의 뜻이 어떨지 모르겠다.

이복령은 관상감에서 날짜와 운수를 맡아 보던 사람으로 이곳에 피란 와 있다.

1594년 8월 17일 (갑오년 음력 7월 2일)

이른 아침 참봉 윤겸이 결성으로 돌아갔다. 팔월 초에 다시 오기로 했다. 막정도 말을 끌고 따라갔다.

이웃 김대성이 지난밤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너무 놀랍고 슬프다.

평소 늘 나를 찾아왔고, 텃밭의 채소 같은 작은 것까지 여러 번 따서 보내 주며 나를 매우 후하게 대했다.

얼마 전 그 집안이 편치 않고 아내와 자식, 종들까지 모두 앓으며 큰며느리도 먼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다른 곳으로 피하라고 했는데 끝내 듣지 않더니 결국 이 지경이 되었다. 더욱 가엾다.

지난겨울 거의 날마다 찾아오던 사람은 김대성, 백몽진, 방수간이었다. 봄이 끝날 무렵 백몽진이 먼저 죽고, 초여름에는 방수간이 병들어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지만 그의 아내가 죽었다. 이제 김대성마저 죽었다. 반년도 되지 않아 사람이 이렇게 사라지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함열 수령 신응구가 사람을 보내 윤겸에게 편지를 전하며 혼삿날을 골랐는지 물었다. 또 그의 어머니가 편치 않은 기색이 있다고 하니 걱정스럽다. 윤해에게 답장을 써 보내게 했다.

1594년 8월 18일 (갑오년 음력 7월 3일)

새벽에 제사를 지냈다.

제수 음식을 마련할 길이 없어 밥과 국만 올렸다.

종가의 맏며느리가 죽었으니 종손 정일이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 하지만 떠돌며 가난하게 사는 중이라 그 역시 잔 하나 올리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는 방계 후손이지만 이날을 그냥 넘길 수 없어 간단히 상을 차려 술잔을 올렸다. 옛일이 떠올라 슬픔을 이기기 어려웠다.

이른 아침 윤해에게 택일한 날짜와 온양 신씨 집에 보낼 내 편지를 들려 보냈다.

고른 날은 음력 팔월 십삼일과 구월 사일이고, 납채는 십팔일이었다. 팔월은 준비가 너무 촉박해 구월에 예식을 치를 생각이다.

다만 함열 수령의 어머니가 계속 몸이 좋지 않다. 병이 오래 낫지 않으면 상대 집에서 서두를 수도 있으니, 그렇게 되면 팔월로 앞당기더라도 거절하기 어렵다. 그쪽 뜻을 더 살펴봐야겠다.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연못에서 그물로 붕어를 잡았는데 손바닥만큼 크고 지느러미가 힘차게 움직였다. 깨어 가족에게 말했더니 모두 맛있는 것을 얻게 될 좋은 꿈이라고 했다.

저녁에는 함열에서 특별히 사람을 보내 편지와 함께 푹 삶은 소머리고기와 얼음을 보내 주었다. 마침 오늘이 할머니 제삿날이어서 내일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먹으려 한다. 참으로 고맙다.

1594년 8월 19일 (갑오년 음력 7월 4일)

아침 전에 큰딸에게 어제 온 고기를 썰게 해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먹었다. 사람은 많은데 고기가 적어 실컷 먹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한산 수령 신경행이 고을에 왔다는 말을 듣고 말을 빌려 달려갔다. 수락헌에서 만났다.

이 고을에 피란 와 사는 사람들이 모두 모였는데, 공문이 잇달아 들어오고 뜰이 떠들썩해 차분히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서헌으로 나갔고 나만 남았다.

환곡 벼 다섯 섬을 청해 받았다.

전에 있던 수령 때 벼 닷 말과 보리 일곱 말을 윤해 이름으로 내주라는 처분을 받았으나 아직 실제로 받지 못했다. 이번에 한산 수령에게 다시 청하니 매우 난처해하면서도 보리 넉 말을 따로 내주었다.

또 웅어젓 한 묶음과 젓국 두 되를 주었다. 참으로 고맙다.

환곡 벼 두 섬은 아랫집 윤해에게 주었다. 윤해 처가의 집종 즉동 이름으로 받은 것이었다.

환곡을 받아 내는 동안 명노가 자루에서 곡식을 몰래 빼내다가 마침 한산 수령에게 들켜 잡혀 매를 맞았다. 참으로 속이 시원했다.

하지만 날이 저물어 말을 구하지 못해 오늘 곡식을 실어 오지 못했다. 다시 창고에 넣어 두었는데 내일 찾을 때 수량이 줄어 있을까 걱정스럽다.

지난달 초부터 한 달 넘게 비가 오지 않아 밭작물은 누렇게 말라가고 물이 없는 논은 거북등처럼 갈라졌다. 벼도 타들어 갔다.

사람들이 애타게 비를 기다리던 중 한낮에 소나기가 크게 내렸다가 잠시 뒤 그쳤다. 벼에 흠뻑 젖을 만큼은 아니지만 밭작물은 조금 살아나겠다.

내 둔답도 처음에는 모가 드문드문했는데 세 번 김을 매고 나니 제법 무성해졌다. 다른 사람 논처럼 좋지는 않아도 아주 버릴 정도는 아니다. 다만 벼가 이삭을 배는 때에 오래 가물어 비가 없었던 것이 걱정스럽다.

1594년 8월 20일 (갑오년 음력 7월 5일)

어제 받은 환곡을 말이 없어 가져오지 못했으므로 오늘 계집종 세 명에게 머리에 이고 오게 했다.

다시 되어 보니 한 섬은 열세 말, 한 섬은 열두 말, 한 섬은 열한 말 닷 되밖에 되지 않았다. 모두 합쳐 여덟 말 넘게 모자란다. 밤사이에 창고지기들이 훔친 것이 틀림없다.

무슨 일이든 어그러지는 것이 이 지경이니 한탄스럽다.

충아 어머니는 저녁에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열사흘을 머물다 오늘 돌아간 것이다. 처음에는 곧 보내려 했으나 아랫집에 양식이 없어 그동안 이곳에서 먹게 했다.

1594년 8월 21일 (갑오년 음력 7월 6일)

지난밤 비가 내렸다. 아침에도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이것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려 농부들의 바람을 조금은 풀어 주었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다. 늦게 비가 더 세졌고 오후가 되어서야 개었다. 그래도 높고 마른 곳은 흠뻑 젖지 않았다.

린아가 어제부터 다시 학질을 앓는다. 오늘도 앓으니 날마다 발작하는 병인 듯하다. 겨우 열흘 남짓 떨어졌는데 다시 시작되었으니 걱정스럽다.

막정이 결성에서 돌아왔다.

참봉 윤겸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편지와 새 기장쌀 두 되를 한 자루에 넣어 오다가 청양에서 묵은 집에 두고 잃어버렸다고 한다.

말먹일 풀도 베어 오지 않고 해 질 무렵에 돌아와 병들었다며 누워 일어나지 않는다. 말도 밤새 굶어 서 있었다. 몹시 밉다.

청양 수령 임순이 준 보리 석 말 닷 되를 가져왔다.

1594년 8월 22일 (갑오년 음력 7월 7일)

지난밤 큰비가 새벽까지 내렸고 아침에는 물을 퍼붓듯 쏟아졌다. 집 여기저기서 물이 새어 몹시 괴로웠다.

늦게야 비가 조금 그쳤지만 하루 종일 흐리고 비가 왔다 그쳤다 했다.

밭작물과 늦곡식에는 충분한 비였지만 오히려 지나친 듯하다.

주인집은 비가 새어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전부터 나더러 이 집을 비워 달라고 했는데 내가 옮길 집을 구하지 못해 그대로 머물렀다. 오늘 같은 비에 주인 가족이 자는 방 안까지 물이 가득 찼다니 더욱 미안하다.

밥솥도 깨져 새기 때문에 밥을 지을 수 없었다. 어제 장에서 벼 두 말 닷 되를 주고 한 말쯤 밥을 지을 수 있는 솥을 샀다고 한다.

명노는 본래 게으르고 고집이 세다. 평소 집에서도 작은 심부름조차 잘 듣지 않고 억지로 시켜야 겨우 움직이며, 그래도 힘을 다하지 않는다.

윤해가 늘 괘씸하게 여겨 벌을 주고 싶어 했지만, 피란 중이라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고 늘 죽만 먹게 하는 형편이라 가엾기도 해 그저 꾸짖기만 했다.

그런데 지난달 자기 장사를 하겠다며 휴가를 얻어 나갔다가 이달 초 빈손으로 돌아와 의심스러웠다. 며칠 전 환곡을 훔치다 들킨 뒤 마음이 불안했던지, 그저께 함열로 보냈더니 편지만 전해 놓고 돌아오지 않았다.

어제 장터에서 말질복이 그를 보았는데 자신을 보자 달아났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아주 도망친 것이 틀림없는 듯하다. 몹시 분하고 안타깝다.

한산 수령 신경행은 정승의 행차를 접대하려고 이 고을에 왔다가 이곳을 지나갔다.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내일 아침 찾아가 볼 생각이다.

한산 수령과는 평소 얼굴만 알 뿐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이곳에 와 여러 차례 만나면서 외가 쪽으로 먼 친척임을 알았다. 내게 팔촌쯤 되는 친족이다. 이름은 신경행이고 청안현에 산다.

1594년 8월 23일 (갑오년 음력 7월 8일)

아침 전에 한산 수령을 찾아갔다.

부장 이홍제도 와 있었다. 수락헌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추로주 석 잔을 마셨다. 아침밥도 대접받았다.

나는 먼저 돌아오는 길에 옮겨 살 집을 살펴보았다.

비가 새고 낡기는 했지만 방이 세 칸이고 곁채도 있어 식구들을 들일 수 있다. 비가 그치면 먼저 잡초와 쓰레기를 치운 뒤 보름이 지나면 옮겨 살 생각이다.

의아가 며칠 전 오른발을 뜨거운 물에 데었다. 약을 바르려 해도 참기름이 없어 한산 수령에게 청했더니 두 홉을 주었다.

고향 사과 집 종 귀일이 호남에서 노비들의 신공을 거두고 서울로 돌아가다가 들렀다. 사과 집 식구들이 지금 인천에 있으며 모두 무사하다고 한다. 기쁜 일이다.

아내가 편지를 써 귀일에게 맡겼다.

전에 귀일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오늘 갑자기 나타나니 그 소문은 거짓이었다. 다만 아산에 있을 때 전염병에 걸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1594년 8월 24일 (갑오년 음력 7월 9일)

어제 저녁부터 밤새 비가 내렸고 아침에도 그치지 않았다. 장마가 될 듯하다.

지난달 초부터 오래 가물고 더위가 극심해 해가 지면 모기 떼가 구름처럼 몰려들어 사람을 물었다. 집안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웠다.

비가 온 뒤에는 밤기운이 서늘해지고 찬바람이 이어져 모기가 거의 사라졌다. 벼룩과 이도 전보다 덜하다. 찌는 기운이 가시니 몸이 조금 살아나는 듯하다.

윤해는 어제 함열에서 돌아오다가 강가에 이르렀는데 물이 크게 불어 겨우 건넜다고 한다. 날이 저물어 집까지 오지 못하고 조 좌수 집에서 자고 오늘 아침에 들어왔다.

온양에서 온 답장을 보니 혼삿날은 우리가 고른 날을 따르겠다고 한다.

윤해가 돌아올 때 함열에서 다음을 보내 주었다.

  • 보리 열 말
  • 정미 닷 말
  • 흰쌀 한 말
  • 밀가루 한 말
  • 콩 넉 되
  • 쇠고기 한 덩이

윤해가 송영구를 찾아가자 새 조 한 말도 보내 주었다.

곧 콩과 조를 섞어 밥을 지어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먹었다. 콩과 조밥을 먹어 본 지 오래여서 모두 먹고 싶어 했다.

춘희도 들어왔다. 어머니가 직접 쓴 편지와 아우의 편지를 받아 보니 모두 평안하다고 한다. 다만 먹을 것이 너무 없어 죽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고 굶는 날이 더 많다고 한다.

늙은 어머니를 이런 지경에 놓아 둔 것은 모두 불효한 내 죄다. 그저 울 뿐이다. 다음 달에는 반드시 모셔 올 생각이다.

1594년 8월 25일 (갑오년 음력 7월 10일)

어제 한낮부터 가을 하늘처럼 맑게 개었다. 참으로 다행이다.

1594년 8월 26일 (갑오년 음력 7월 11일)

아침 전에 고을로 들어가 한산 수령을 만났다. 수락헌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좌 이우춘, 도사 홍사효, 그의 아우 생원 홍사고, 부장 이홍제, 진사 한겸이 함께 있었다.

정승이 오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한산 수령은 오늘 돌아간다고 한다.

수령이 아침밥을 대접했다. 나는 먼저 자리에서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윤해 집에 들러 충아를 보고 왔다.

늦게 큰비가 쏟아졌다.

춘희가 함열에서 돌아왔다. 함열 수령이 다음을 보내 주었다.

  • 장 한 말
  • 소금 닷 되
  • 물고기 세 묶음
  • 참기름 석 홉

비는 하루 종일 그치지 않고 때때로 세차게 내렸다. 물가의 곡식은 많이 상할 듯해 한탄스럽다.

평릉 수령 집의 종이 서울에서 내려와 홍산에 있다가 수령 형수의 편지를 전하러 왔다. 비 때문에 오늘 돌아가지 못했다.

1594년 8월 27일 (갑오년 음력 7월 12일)

수령 형수의 종이 오늘 돌아가므로 답장을 써 보냈다. 서울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한 진사 겸이 편지를 보내며 무씨 두 홉도 보냈다. 곧 감사 편지를 써 보냈다.

한낮에는 조 좌수 희윤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저녁에는 소즐이 찾아왔다. 술 두 잔을 대접하고 저녁밥도 먹였다.

1594년 8월 28일 (갑오년 음력 7월 13일)

아침부터 비가 내려 저녁까지 그치지 않았고 밤새 이어졌다.

올해는 비와 가뭄이 고르지 못하다.

사월부터 오월까지는 한 달 내내 큰비가 이어졌고, 유월에는 전혀 비가 오지 않았으며, 칠월 초 다시 비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개지 않는다.

낮은 논의 곡식은 여러 날 물에 잠겨 썩거나 모래에 덮인 곳이 많다. 밭작물도 여물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처럼 떠돌며 사는 사람은 먹을 것을 구하기도 어려운데 흉년까지 들까 더욱 걱정이다.

윤해와 충아가 오늘 심하게 학질을 앓았다. 걱정스럽다.

요즘 한세는 발을 앓아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막정도 배가 부어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 땔감과 말먹이를 벨 수 없어 말 두 필이 하루 종일 굶어 서 있다. 더욱 걱정스럽다.

1594년 8월 29일 (갑오년 음력 7월 14일)

하루 종일 흐리고 비가 내렸다.

윤해가 오늘도 학질을 앓았다. 날마다 발작하는 듯하다. 걱정스럽다.

주인집에서는 날마다 집을 비워 달라고 재촉하는데 아직 옮겨 살 만한 집을 구하지 못했다. 더욱 걱정이다.

1594년 8월 30일 (갑오년 음력 7월 15일)

밥을 먹고 부장 이홍제의 집을 찾아갔으나 밖에 나가 있어 만나지 못했다.

윤해의 아내와 자식들을 보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전경색의 집에 들렀다. 얼마 전 내가 옮겨 살려고 했던 집인데, 주인이 부엌을 헐어 버려 들어가 살 수 없게 만들었다. 양반이 들어와 사는 것을 싫어해서 그런 것이 분명하다. 몹시 밉다.

1594년 8월 31일 (갑오년 음력 7월 16일)

새 수령 이구순이 부임했다고 한다.

저녁에 온양 신발이 고을에 도착해 사람을 보내 나를 불렀다.

달려가 보니 새 수령과 동헌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식사가 끝난 뒤 이름을 알리고 처음 만났다.

수령이 추로주 석 잔을 주며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했다.

밤이 깊어 나와 온양은 먼저 서헌으로 돌아왔다. 수령도 뒤에 관아로 들어와 온양과 한동안 이야기하다 돌아갔다.

온양은 지금 동궁의 위솔로 있으면서 명나라 서울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묵는 것이다.

1594년 9월

1594년 9월 1일 (갑오년 음력 7월 17일)

아침에 종을 보내 조민에게 집을 빌리고 싶다고 했더니 들어와 살아도 좋다고 허락했다.

밥을 먹고 내가 직접 가서 보았다.

지금 집에서 멀지 않고 안팎채가 갖춰져 있으며 따뜻한 방이 세 칸이나 된다. 집 안에 우물과 다듬잇돌이 있고 이웃집도 있어 살기에 아주 알맞다.

다만 오래 비어 있어 낡고 허물어진 곳이 많고 땅이 낮고 습하다. 지붕도 여러 곳이 새어 수리한 뒤에야 들어갈 수 있겠다.

보름이 지나면 옮겨 살 생각이다.

막정을 함열로 보내 생활비가 될 물건을 구하게 했다.

1594년 9월 2일 (갑오년 음력 7월 18일)

아침밥 뒤 고을에 들어가 수령을 만났다.

명나라 군사들이 많이 들어와 있고 어사도 곧 올 예정이라 찾아온 사람이 많아 차분히 이야기할 수 없었다. 얼굴만 보고 돌아왔다.

그래도 수령은 점심을 대접했다.

저녁에 막정이 돌아왔다.

함열 수령이 다음을 보내 주었다.

  • 보리쌀 열 말
  • 벼 한 섬
  • 웅어젓 두 묶음
  • 좋은 밀 두 말
  • 참기름 한 되

막정에게 무명 석 필을 주어 장에서 명주로 바꾸게 했는데 시세가 맞지 않았다. 함열에서 무명 두 필과 보리 석 말을 더 보태 주어 겉명주 두 필을 바꾸어 왔다.

그런데 보리쌀 아홉 되와 벼 한 말 일곱 되가 모자란다. 몹시 괘씸하다.

1594년 9월 3일 (갑오년 음력 7월 19일)

함열에서 종을 결성의 별좌 윤겸에게 보내기에 내 편지도 맡겼다.

아침밥 뒤 종 두 명을 데리고 한산으로 달려갔다.

문지기가 막아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자 먼저 양성정이 묵는 곳으로 가 그에게 이름을 전해 달라고 했다.

뒤에 한산 수령 신경행이 읍취정으로 불러 만나 저녁밥까지 함께 먹었다.

또 관청 사람을 보내 내일 새벽 박반송을 잡아오게 했다.

박반송은 이 고을에 사는 배 주인이다. 임진년 봄 우리 집 쌀과 장 등을 배에 싣고도 전하지 않았던 사람이라 이제 그것을 받아 내려는 것이다.

양성정은 내 아내의 사촌으로 고을 동문 밖에 피란 와 있다. 그의 아우 금성정은 서울에 가고 없다.

그의 어머니는 지난해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 이곳에 임시로 묻었다고 한다. 먹을 것이 없어 아침저녁 끼니조차 잇기 어렵다. 왕실의 자손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참혹하다.

수령은 먼저 관아로 돌아갔다. 나도 뒤따라 성 북문 안 관인 집에 가서 차가운 마루에서 잤다. 추워 견디기 어려웠다.

1594년 9월 4일 (갑오년 음력 7월 20일)

새벽부터 비가 내려 오후에야 개었다.

아침밥 뒤 객사로 갔다. 수령도 나와 함께 앉아 이야기했다.

내 말을 보내 양성정을 불러오게 하니 그도 와서 하루 종일 함께 이야기하고 저녁밥을 먹었다.

수령이 관아로 들어간 뒤 나와 양성정은 낭청방에 가 순찰사 군관 김삼섭을 만났다.

김공은 자미 이윤의 사촌 김소의 아들로 어의동에 산다. 그는 젊고 전에는 서로 알지 못했지만 한 동네 사람이고 또 먼 친척이다. 만나니 반가웠다.

함께 그 방에서 잤다.

박반송도 잡혀 왔다. 물어보니 여러 핑계를 대며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일 장에서 다른 물건을 팔아 마련해 바치겠다고 했다.

1594년 9월 5일 (갑오년 음력 7월 21일)

수령은 도독을 맞이하라는 어사의 부름을 받고 새벽에 임천으로 갔다가 오후에 돌아왔다.

나는 하루 종일 김삼섭과 낭청 누마루에 앉아 장날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사고파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박반송은 다음 물건을 내놓았다.

  • 껍질 보리 열다섯 말
  • 콩 일곱 말
  • 모시 한 필 넉 새
  • 무명 한 필 반

나머지는 가을에 콩 닷 말을 더 내는 것으로 약속했다. 절반가량 모자라지만 한 푼도 받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기에 일단 받아들였다.

또 목박 여섯 개 가운데 다섯 개를 받아냈다.

그 보리 가운데 넉 말 닷 되로 모시 한 필을 바꾸고, 또 넉 말로 푸른 모시 다섯 근을 샀으며, 콩 한 말로 미역 다섯 동을 샀다.

수령은 나에게 벼 닷 말, 소금 한 말, 단장 석 되, 젓 석 되, 조기 두 묶음을 주었다.

저녁에 수령이 동헌으로 나와 내가 찾아갔다. 별좌 이우춘과 진사 홍영필도 왔다.

홍공은 서울에서 같은 동네에 살던 사람이다. 객지에서 우연히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홍공은 수령을 만나려 했으나 이름을 알리지 못했고 날까지 저물어 굶은 채 잘 형편이었다. 그래서 내 저녁밥을 나누어 주었다.

내가 먼저 들어가 수령에게 말한 뒤에야 수령이 사람을 보내 홍공을 불러들였다. 만나기 위해 눈치를 보고 머뭇거리는 모습이 참으로 구차했다. 떠돌며 얻어먹는 사람은 누구나 이런 일을 겪는다. 가엾고 한탄스럽다.

김삼섭과 다시 낭청방에서 함께 잤다.

1594년 9월 6일 (갑오년 음력 7월 22일)

수령이 동헌에 나와 있어 찾아갔다. 아침밥도 함께 먹었다.

정랑 유덕종, 별좌 이우춘, 순찰사 군관 김삼섭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먼저 작별하고 나와 양성정이 묵는 집을 찾았다.

금성정이 어제저녁 서울에서 내려와 있어 함께 이야기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별좌 이덕후를 우연히 만나 말 위에서 잠시 이야기했다.

덕후는 이 고을의 품관이고 집이 넉넉한 사람이다. 곡식을 바쳐 관직을 얻었으며 지사 변경의 매부로 내 아내 쪽 칠촌 친척이다.

집에 돌아오니 함열 물가에 사는 사람이 부탁할 일이 있다며 큰 생민어 한 마리를 가지고 왔다가 내가 없어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무슨 부탁인지는 모르겠다. 아내와 자식들이 곧 구워 먹었다고 한다.

윤해의 세 아이는 날마다 학질을 앓고 전보다 더 심하다.

린아도 하루 걸러 앓는다.

1594년 9월 7일 (갑오년 음력 7월 23일)

변응익과 이경익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이경익은 이전윤의 전 장인인 고 정자 이영익의 아우로, 이 고을에 피란 와 있다.

린아의 학질이 더욱 심해졌다. 걱정스럽다.

윤해는 오늘 조금만 앓았다고 한다. 이제 병이 떨어지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요즘 영남에서 적의 기세가 다시 세지고, 명나라 총병 유정이 다음 달 초 군사를 거두어 북쪽으로 올라가려 한다고 한다.

좌의정 윤두수가 그를 붙잡으려고 남원으로 갔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광해군이 직접 가서 강하게 만류하겠다고 장계를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행차 길에 필요한 것을 여러 고을이 미리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왜군 가운데 항복하는 자도 계속 이어져 여러 진영에 흩어져 있고 서울로 올라가는 자도 많다.

이들은 길목의 관아에서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령에게 화를 내고 모욕하며, 칼을 휘둘러 우리나라 사람을 다치게 하기도 한다고 한다.

전날 항복한 왜군 일곱 명이 서울로 올라가며 이 고을에 들어왔는데 음식이 나쁘다며 수령 앞에서 상을 들어 던져 깨뜨리고 불손한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이들은 거짓으로 항복한 것이니 훗날 끝없는 화근이 될 것이다. 우리 장수들이 그들의 속임수에 빠질까 걱정스럽다.

오는 팔월과 구월 사이 다시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울로 곧장 간다는 소문도 있다. 그렇게 되면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마저 모두 구렁에 쓰러질 것이다. 나 역시 묻힐 땅조차 없겠다.

명나라 군사들도 항복한 왜군을 두려워해 피하고 맞서지 않는다고 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한탄스럽다.

내일 이사한 뒤 남쪽으로 가 어머니를 모셔 올 생각이다.

1594년 9월 8일 (갑오년 음력 7월 24일)

옮겨 갈 집을 수리하고 물건들을 옮겼다. 저녁에 온 식구가 이사할 생각이다.

저녁에 함열 수령 신응구가 종을 보내 새 흰쌀 두 말, 소주 여섯 잔 분량, 어린 소의 뒷다리 하나를 보냈다.

내일이 내 생일이라는 말을 듣고 보낸 것이다. 참으로 고맙다.

세만도 왔다. 참봉 윤겸 집안이 모두 무사하다고 하니 참으로 기쁘다.

세만은 새쌀 닷 되, 좁쌀 한 말, 찰좁쌀 두 되를 보내 주었다.

저녁에 식구 모두 서쪽 제단 아래 조대영의 집으로 옮겨 살았다. 두 차례 짐을 나르니 밤이 깊었다.

1594년 9월 9일 (갑오년 음력 7월 25일)

함열에서 온 종과 세만이 함께 결성으로 갔다.

아침밥 뒤 집주인 조민을 불러 추로주 석 잔을 대접했다. 이웃 전문도 불러 한 잔을 주어 보냈다.

윤해의 양어머니와 아내, 아이들이 찾아왔다.

윤해의 아내가 술과 떡을 마련해 왔다. 아마 내 생일이라 그런 것이다.

자기 집도 끼니가 부족한데 내 생일을 잊지 않고 음식을 마련해 오니 정성은 고맙지만 한편으로 몹시 미안하다.

늦게 부장 이홍제가 찾아왔다. 새 술 석 잔을 주었다. 이 사람도 내일 자기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인사하러 온 것이다.

관노 상근도 쇠고기 한 덩이를 가져왔다.

저녁에 윤해의 양어머니와 아내, 아이들이 돌아갔다.

막정을 함열로 보냈다.

1594년 9월 10일 (갑오년 음력 7월 26일)

막정이 돌아왔다.

함열 수령은 마침 임피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 전에 얻어 둔 빈 가마니 마흔 장만 가져왔다.

함열 수령이 좋은 무명 열 필을 마련해 군 안의 양산에게 맡겨 우리 집으로 전하라고 했는데, 혼례 때 쓰라고 준 것이다.

이정시가 마침 함열에 가 있어 편지를 보내왔다.

유정 총병이 최근 군사를 철수해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어 흉적이 머지않아 다시 들이닥칠 염려가 있으니 혼사를 더 늦추지 말고 빨리 치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 말이 옳다.

다만 준비할 것이 하나도 마련되지 않아 어쩔 도리가 없다. 적의 형편을 좀 더 살펴보다가 다음 달 십삼일로 앞당겨 치를 생각도 있다.

오후에는 수령 이구순을 찾아갔다.

수령이 껍질 보리 두 말, 웅어젓 한 묶음, 흰 새우젓 한 되를 주었다.

전 인제 수령 박문필도 마침 와 있었다. 전부터 아는 사이인데 객지에서 뜻밖에 만나 무척 반가웠다. 그 역시 난리를 피해 이 고을에 와 살고 있다.

별좌 이위와 부장 이홍제도 와 있다가 먼저 돌아갔다.

1594년 9월 11일 (갑오년 음력 7월 27일)

충의 유원씨가 이달 초나흗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놀라움과 슬픔을 이길 수 없다.

평소 나를 매우 후하게 대하던 사람인데 뜻밖에 부고를 들으니 더욱 비통하다.

내일 남쪽으로 떠나야 하고 종과 말도 여유가 없어 조문을 가지 못한다. 미안하고 안타깝다.

린아는 오늘도 학질이 심하다.

아내도 어제부터 학질을 얻어 오늘 또 앓았다. 더욱 걱정스럽다.

종 둘에게 울타리에 쓸 땔나무 두 짐을 베어 오게 했다.

1594년 9월 12일 (갑오년 음력 7월 28일)

아침에 울타리와 변소를 만들었다.

아침밥 뒤 길을 나서 남당진을 배로 건넜다.

저녁에 함열에 도착했다.

수령 신응구가 곧 사람을 보내 나를 불렀다. 상동헌으로 들어가니 봉사 김경, 봉사 이신성과 그 형제, 이정시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녁밥도 같이 먹었다.

밤이 되자 모두 흩어지고 나는 이정시와 윗방에서 함께 잤다.

이정시가 내게 말했다.

“수령의 어머니는 혼삿날이 너무 멀다고 생각하십니다. 그 전에 적의 기세가 다시 커지면 혼례를 치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혼례 준비를 억지로 갖출 필요 없이 초례만이라도 먼저 치르도록 날짜를 앞당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 생각도 같았다.

다음 달 십삼일로 정해 곧 편지를 써 임천으로 보냈다. 침구만 준비하게 했다.

나는 태인에 도착해 형편을 살펴본 뒤 곧 돌아와 혼례를 치르고, 그 뒤 다시 어머니를 모시러 갈 생각이다. 어머니가 곧 오고 싶어 하시면 그때 함께 모셔 오려 한다.

1594년 9월 13일 (갑오년 음력 7월 29일)

밤새 이정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침에 그가 내 뜻을 수령에게 전했다. 수령과 이정시가 함께 나왔고 김봉사도 왔다. 함께 이야기하며 아침밥을 먹었다.

수령이 길에서 쓰라며 다음을 주었다.

  • 흰쌀 석 말
  • 중미 두 말
  • 보리쌀 두 말
  • 콩 석 말
  • 흰 새우젓 석 되
  • 조기 석 묶음
  • 미역 네 동
  • 단장 한 말
  • 짠장 한 되

늦게 출발해 석탄을 건너 김제 돌소리에 이르렀다.

마침 이 감찰 집의 농막이 있었고, 감찰 집 처남 남용희도 와 있었다.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곧 불러들였다.

뜻밖의 만남이라 무척 반가웠다. 저녁밥도 대접받았다.

그 집 사위 이현경과 감찰의 맏아들 이한도 있었다.

이현경은 의성도정의 아들로 서울에서 나와 한 동네에 살던 사람이다.

이한도 나와 육촌쯤 되는 친척이고, 그의 아버지 감찰은 서울에 있을 때 나와 매우 가까웠다. 난리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영전에 한번 울어 보지도 못한 것이 늘 한이었다.

오늘 그 아들을 만나니 슬픔과 반가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이한의 아우는 난리 초 왜적에게 죽었다고 한다. 참혹한 일이다.

1594년 9월 14일 (갑오년 음력 8월 1일)

새벽부터 비가 내려 아침에도 개지 않았다.

아침밥은 감찰 집에서 지어 주었다.

남용희가 비가 이렇게 오니 갠 뒤에 떠나라고 했다. 하지만 혼삿날이 얼마 남지 않아 머물 수 없었다.

늦게 길을 나섰는데 도중에 비가 물을 퍼붓듯 쏟아지고 짙은 안개가 사방을 덮었다.

길을 잘못 들어 동쪽과 서쪽으로 헤매며 바른 길을 찾지 못했다.

도롱이에서도 빗물이 새 옷이 모두 젖었다. 그 고생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금구 땅에 이르러 또 샛길로 잘못 들었다. 말이 넘어져 짐도 뒤집히고 물건이 모두 젖었다. 가까스로 물속에서 건져 냈다.

낙양리에 이르니 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시냇가 백성 모리금의 집에서 묵었다.

젖은 물건을 모두 말렸다.

남용희의 말을 듣지 않고 무리하게 떠난 것을 후회했다.

다만 임경흠의 옷은 젖지 않았다. 그것만은 다행이다. 그 옷은 지난봄 딸들이 지어 준 것으로 이번에 영암으로 보내려고 가져온 것이다.

1594년 9월 15일 (갑오년 음력 8월 2일)

새벽에 출발해 금구 종정원에서 아침을 먹었다.

태인으로 가는 길에 지름길로 들어섰다가 또 길을 잘못 안내받아 논밭 사이에서 헤맸다.

말이 다시 넘어져 짐이 또 뒤집혔지만 이번에는 모두 젖지는 않았다. 이른바 지름길로 가다가 오히려 더 곤란해진 셈이다.

어머니가 계신 곳에 도착해 뵈었다.

어머니는 지난달 보름 무렵부터 날마다 학질을 앓다가 열이틀 만에야 병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 사이 이질까지 심하게 앓아 온 집안이 망연해했는데 가까스로 회복하셨다.

이제 병이 나은 지 겨우 열흘 남짓이고 어제부터야 식사를 예전처럼 드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기가 크게 떨어지고 얼굴도 몹시 여위어 먼 길을 갈 형편이 아니다.

이번에는 모시고 갈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언명 희철의 종과 말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고, 비 때문에 길이 패여 진흙 구덩이가 된 곳이 많다.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이런 길을 걷게 할 수 없다.

나는 모레 먼저 돌아가 혼례를 치른 뒤 곧 다시 와 어머니를 모시고 가기로 했다.

언명도 감기에 걸린 지 닷새가 되었는데 낫지 않는다. 지금은 머리가 심하게 아프고 땀이 비 오듯 난다. 몹시 걱정스럽다.

내일 어머니를 다른 집으로 피하게 할지도 생각해 보아야겠다.

저녁에는 권 좌수의 사랑채에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잤다.

1594년 9월 16일 (갑오년 음력 8월 3일)

언명은 새벽부터 병세가 가라앉더니 아침에는 평소처럼 되었다. 참으로 기뻤다. 다만 입맛은 없다고 한다.

저녁에는 완전히 나아 더욱 다행이었다.

그런데 막정이 어제부터 머리가 아프고 밥을 먹지 못한 채 하루 종일 누워 있다.

내일 길을 떠나야 하는데 큰 종이 이러니 걱정스럽다. 밤에도 낫지 않으면 출발하기 어렵다.

혼삿날은 점점 가까워 오니 더 답답하다.

아마 어제 하루 종일 비를 맞고 여러 큰물을 건너 온몸이 젖어 감기에 심하게 걸린 탓일 것이다.

내일 돌아갈 생각이라 오늘도 이곳에서 잤다.

1594년 9월 17일 (갑오년 음력 8월 4일)

밤새 비가 내리다가 새벽에야 그쳤다.

아침밥 뒤 어머니께 하직하고 출발했다.

금구현에서 십 리 남짓 간 곳, 전에 묵었던 모리금 집 앞 시냇가에서 말을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해 질 무렵 김제의 남용희 농막에 도착해 묵었다.

남용희가 아침과 저녁을 대접했다.

이웃 임생원 전도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 밤늦도록 함께 이야기했다. 나는 남용희와 함께 잤다.

명나라 총병 유정이 군사를 철수해 남원에서 떠나 이미 완산에 도착했다고 한다.

남쪽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던 것이 이 군대였는데 이제 돌아간다니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린다. 모두 짐을 꾸려 도망갈 준비를 한다. 적이 다시 들이닥치면 막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도 구렁에 쓰러질 운명인가. 한탄해도 어쩔 수 없다.

오늘도 오는 길에 말이 진흙에 빠져 넘어지고 짐이 뒤집혀 침구가 모두 젖었다.

이번 길에는 오가는 동안 계속 이런 일을 당했다. 말은 지쳤고 종은 병들었으며 비까지 많이 와 길이 진창이 되었다.

만약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면 틀림없이 길에서 큰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임생원도 피란 와 이 농막 근처에 살고 있다.

1594년 9월 18일 (갑오년 음력 8월 5일)

아침은 남용희가 대접했고 점심은 감찰 집에서 보내왔다.

감찰 집에서 나를 불러 만나 편지를 써 우리 집에 보내 주었다.

전주 옥야창 길가 솔정자 아래에서 말을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어제 젖은 물건들을 널어 말렸다.

해가 기울 무렵 함열에 도착했다.

상동헌에서 수령 신응구를 만났다.

김봉사와 이봉사 형제, 이정시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녁밥을 같이 먹고 밤이 되자 모두 흩어졌다.

나는 윗방에서 혼자 잤다.

윤겸 참봉은 요즘 날마다 학질을 앓아 빨리 올 수 없다고 한다. 혼삿날은 코앞인데 할 일은 많고 준비한 것이 없다. 윤겸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또 병이라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춘희가 말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으니, 혼삿날을 앞당겼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주 심하게 앓는 것이 아니라면 올 것이다.

1594년 9월 19일 (갑오년 음력 8월 6일)

수령이 일찍 나왔다. 이른밥과 아침밥을 함께 먹었다. 김봉사도 들어왔다.

수령은 혼례에 쓰라며 다음을 내주었다.

  • 흰쌀 한 섬
  • 중미 한 섬
  • 누룩 한 동
  • 단장 넉 말
  • 짠장 넉 되
  • 소금 한 말
  • 흰 물고기 젓 한 말
  • 조기젓 세 묶음
  • 웅어젓 세 묶음
  • 조기 열 묶음

흰쌀과 중미는 각각 넉 말씩, 누룩은 한 동을 먼저 가져왔다. 나머지는 그곳에 맡겨 두었다가 내일 종과 말을 보내 싣고 올 생각이다.

남당진에 이르니 배가 반대편에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배가 돌아온 뒤 건너니 해가 이미 기울었다.

집에 와 보니 신부 옷과 장식품을 아직 빌리지 못했고 입을 옷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다. 답답하다.

종과 말이 없어 윤해가 바깥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윤해와 충아, 린아와 둘째 딸은 모두 아직 학질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내도 앓고 있었다. 집에 들어오니 모두 누워 신음하고 있다.

큰일이 눈앞인데 병까지 이러하니 어쩌겠는가.

광해군이 유정 총병을 만나려고 공산으로 간다고 한다. 여러 고을 수령들은 이미 모두 나가 행차를 준비하고 있다.

이 고을 수령 이구순도 길의 큰 접대 책임을 맡아 나갔다. 직산까지 가서 행차를 지나보낸 뒤 돌아오면 보름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혼례에 쓸 병풍과 침구 같은 물건을 모두 이 고을 관아에 기대고 있는데 일이 자꾸 어긋나 걱정스럽다.

1594년 9월 20일 (갑오년 음력 8월 7일)

새벽부터 큰비가 퍼부었다.

집 안이 모두 젖고 부엌에도 물이 차 밥을 지을 수 없었다.

서쪽 방도 아직 마르지 않았고 비 새는 곳이 많아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늘 우리 부자가 아는 사람들에게 혼례 물건을 빌리러 다니려 했는데 비가 이렇게 오니 밖에 나갈 수 없다.

하늘마저 돕지 않는구나.

혼례까지 닷새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추기는 틀린 듯하다. 형편이 그러니 어쩌겠는가.

오후에 비가 조금 약해지더니 저녁에는 갰다.

1594년 9월 21일 (갑오년 음력 8월 8일)

날이 아주 맑았다.

종과 말을 함열로 보내 전에 받은 물건들을 싣고 오게 했다.

밥을 먹고 정랑 조경수 집에 가 그의 두 아들을 만나 신부가 입을 옷 세 벌을 빌렸다.

돌아오는 길에 유선각의 상에 조문하고 소즐 집에도 들렀지만 소즐은 익산에 갔다고 했다.

혼례 준비를 살피는 일과 빌릴 물건을 거의 그에게 기대고 있었는데 그가 없어 걱정스럽다.

조 한림 희보도 찾아보았다. 조 좌수 희윤도 와 있어 함께 이야기했다. 조 한림은 콩죽을 대접했다.

조문화의 집에도 들렀으나 밖에 나갔다고 하여 만나지 못했다.

해가 이미 저물었다.

조경수 집에서 빌린 신부 옷은 몸에 잘 맞는다고 한다. 다행이다.

윤겸은 오늘도 들어오지 않았다. 물에 막힌 것일까. 혼삿날은 다가오는데 무엇 하나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 답답하다.

1594년 9월 22일 (갑오년 음력 8월 9일)

한노 하나만 있는데 병들었다며 일어나지 않는다.

심부름할 일은 많은데 집에 부릴 종이 하나도 없어 꼼짝할 수 없다. 답답하다.

저녁에 춘희와 세만이 들어왔다.

윤겸은 날마다 학질을 앓아 너무 괴로워 오지 못한다고 한다. 몹시 걱정스럽다.

이불감으로 석 새짜리 베 두 단을 보내와 좋은 무명 네 필을 주고 바꾸었다.

춘희가 오는 길에 홍양의 박부여 집에 들러 신부 옷 두 벌도 빌려 왔다. 이것도 입기에 알맞다고 한다. 조경수 집에서 빌린 붉은 저고리는 돌려보내려 한다.

막정과 함열 관원이 앞서 받은 물건들을 싣고 왔다.

함열에서는 다시 다음을 보내 주었다.

  • 콩 닷 되
  • 찹쌀 한 말
  • 목미 닷 되
  • 밀가루 닷 되
  • 민어 두 마리
  • 문어 세 마리
  • 전복 두 꼬치
  • 미역 일곱 동

다만 목미는 오지 않았다.

윤해 처가에서도 종 둘과 말을 보내 윤해의 아내와 아이들을 데려가려 했지만 혼사가 코앞이라 바로 떠나지 못한다. 혼례 뒤인 열엿새나 열이렛날 모두 진위로 돌아갈 계획이라 두 종은 잠시 남아 일을 돕게 했다.

최경수가 예빈시 참봉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축하할 일이다.

1594년 9월 23일 (갑오년 음력 8월 10일)

세만은 결성으로 돌아갔다.

윤해는 함열로 갔다.

이탁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놀랍고 슬프다.

네 달 사이 한 집안에서 상이 세 번이나 겹쳤으니 참혹한 변고를 어찌 말하겠는가.

혼례 준비로 조 한림 집과 여러 곳을 오가며 필요한 물건을 구했다.

1594년 9월 24일 (갑오년 음력 8월 11일)

혼례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필요한 물건을 빌리고 음식을 마련하느라 하루 종일 분주했다.

아픈 식구들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1594년 9월 25일 (갑오년 음력 8월 12일)

혼례에 쓸 병풍과 자리 등은 어사가 고을에 들어와 있어 빌려 오지 못했다.

촛불 한 쌍도 만들어 보냈다.

혼례 준비가 끝까지 빠듯하다.

1594년 9월 26일 (갑오년 음력 8월 13일)

날씨가 맑아 다행이다.

남당진 뱃사공 돌손이 말린 생선 한 마리와 가지, 생밤을 가져왔다. 무슨 부탁이 있는 듯하다.

조도어사 강첨이 윤겸이 왔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보내며 술 한 병, 닭 한 마리, 말린 민어 두 마리를 보냈다.

어사가 고을을 떠난 뒤에야 관아의 병풍과 자리를 빌려 왔다.

오후에 함열 수령 신응구가 혼례를 위해 임시 장막에 도착했다. 윤겸이 나가 맞았다.

신부는 예식을 연습하고 머리 장식도 갖추었다.

명종의 후궁 순빈이 난리 초 이 고을에 왔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궁인들이 아직 여막에 머물고 있었다. 계집종을 보내 신부 머리를 꾸미는 일을 부탁해 장식을 갖추게 했다.

소즐은 신부 치장 물건을 익산에서 구해 왔다. 쓸 만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돌려보냈다.

초례 때 쓸 횃불은 관청에서 장인을 보내 준비했다.

저녁에는 모든 물건을 갖추고 사람을 보내 신랑을 맞아오게 했다.

신랑과 신부 양쪽에서 따로 수행하는 새 종들은 쓰지 않기로 미리 약속해 두었다.

신랑 신응구가 들어왔다.

내가 직접 나가 맞아들여야 했지만 검은 단령이 없어 나가지 못했다. 소즐에게 기러기를 받들어 들이게 하고 나는 잠시 피했다.

신랑과 신부가 서로 절하고 함께 잔을 나누는 예식은 모두 법도에 맞게 치러졌다.

아침에는 서재동에서 소를 잡는다는 말을 듣고 무명 한 필을 보내 고기를 사 오게 했는데 천엽과 소머리만 얻었다.

새벽에 납채를 했고 상대 쪽에서 온 사람이 다섯 명이었지만 대접할 것이 없어 찐 닭과 국수, 술 한 동이를 마련해 먹였다.

저녁에는 신랑을 따라온 관원들에게 술 세 동이와 과일상 세 벌, 국수, 돼지머리를 대접했다.

피란살이 중이라 무엇 하나 마련할 길이 없어 아주 간소하고 볼품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함열 수령이 보내 준 물건으로 치른 것이다. 그 도움마저 없었다면 혼례의 모양조차 갖출 수 없었을 것이다.

1594년 9월 27일 (갑오년 음력 8월 14일)

아침밥 뒤 진사 한겸, 이복령, 이광춘이 찾아왔다. 술 석 잔씩 대접하고 헤어졌다.

오후에는 함열 수령이 자기 고을에서 술과 과일을 잔뜩 마련해 와 우리 집 식구들을 크게 대접했다.

함열에서 맡은 사람이 고기 한 벌, 닭 한 마리, 민어 한 마리, 잔칫상에 남은 음식과 쇠고기, 생게 등을 가져왔다.

1594년 9월 28일 (갑오년 음력 8월 15일)

아침밥 뒤 함열 수령이 돌아갔다.

그의 표정을 살펴보니 새 며느리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다. 참으로 다행이다.

오는 십구일에 사람과 말을 보내 딸을 데려가겠다고 했다.

오늘은 추석이다.

술과 밥만 간단히 차려 멀리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죽전 삼촌에게 제사를 올렸다. 그보다 먼 조상에게까지는 형편상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 슬프고 안타깝다.

부랑 이하부가 찾아왔다. 윤겸이 찹쌀술 석 잔을 대접했다.

마침 한 진사도 왔다.

이웃 전문의 아내가 술과 떡, 과일을 차려 보냈고 문순도 밤떡과 과일을 보내왔다.

종들에게 빌려 온 혼례 물건을 모두 본래 주인에게 돌려보내게 했다.

1594년 9월 29일 (갑오년 음력 8월 16일)

이웃 전문과 이기종을 불러 술을 대접하고 보냈다.

함열에서 특별히 사람을 보내 편지를 전하고 자하젓 석 되, 흰쌀 두 말, 쇠고기 한 덩이를 보냈다.

함열 수령의 어머니도 제사 뒤 남은 고기꼬치 스물세 개를 보내며 내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새 며느리가 훌륭하다며 크게 기뻐한다고 했다.

윤해 일가는 내일 북쪽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길 떠날 준비와 양식을 함열에 부탁해 마련했다.

함열에서 온 자하젓은 윤해 아내가 돌아가 부모에게 드리도록 주었다.

1594년 9월 30일 (갑오년 음력 8월 17일)

새벽에 윤해가 온 가족을 데리고 진위로 돌아갔다.

난리 초부터 지금까지 세 해 동안 함께 살며 온갖 고생을 같이했다.

그의 장인이 굶주리는 사정을 듣고 종과 말을 보내 데려가게 한 것이다.

충손이 늘 내 앞에서 놀아 무료함을 달래 주었는데 하루아침에 떠나니 몹시 서운하고 슬프다.

윤해의 양어머니는 성품이 고분고분하지 않아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를 냈다. 머무르든 떠나든 내 뜻대로 할 수도 없었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오후에는 함열에서 일부러 편지를 보내고 송이버섯 서른 개를 보내 주었다.

마침 윤겸이 조 한림 집에 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 바로 감사 편지를 쓰지 못했다.

별좌 이덕후 집에서 빌린 침장을 쓰고 곧 돌려보내려 했는데 막정이 병들어 미루다가 오늘 그 집에서 종을 보내 가져갔다. 부끄럽다.

계집종 강춘은 한쪽 발이 허리만큼 크게 부어 걷지 못한다.

밥 지을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어둔에게 맡겼는데, 이 계집종은 훔쳐 먹을 뿐 아니라 몹시 불결하다. 여러 번 타일러도 고치지 않으니 괘씸하다.

1594년 10월

1594년 10월 1일 (갑오년 음력 8월 18일)

아침에 말질산을 보내 송이버섯 큰 것 여섯 개를 조 한림에게 보냈다.

조 한림의 아내가 찹쌀 한 말을 보내 주었다. 고맙다.

밥을 먹기 전에 수령을 만나려고 고을에 들어갔으나 수령이 관아 안에서 나오지 않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1594년 10월 2일 (갑오년 음력 8월 19일)

새벽부터 흐리고 비가 흩뿌렸다.

윤해의 아내와 아이들이 지금 어디쯤 머물고 있는지 모르겠다. 가지고 간 양식도 많지 않아 길에서 곤란을 겪지 않을까 계속 마음에 걸린다.

어제 정산과 홍산 두 고을로 사람과 말을 보냈는데, 두 수령이 광해군의 행차를 접대하느라 관아에 없어 편지를 전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지금 양식이 떨어져 그들이 무엇이라도 얻어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는데 결국 허탕을 치니 한탄스럽다.

이웃 전문이 술과 과일을 마련해 직접 찾아와 대접했다. 그 정성이 고맙다.

저녁에는 함열에서 지붕 달린 가마를 빌려 보내왔다. 관아 종 세 명, 가마꾼 열여 명, 장리와 길잡이까지 모두 스무 명이 넘게 들어왔다.

1594년 10월 3일 (갑오년 음력 8월 20일)

날이 밝기 전에 술 두 동이를 내어 아랫사람들에게 먹였다.

밝아진 뒤에는 아침 죽만 먹이고 출발시켰다.

딸이 떠날 때 어머니와 아우를 붙잡고 통곡했다. 가엾고 슬픈 마음을 견딜 수 없다.

여러 해 부모 무릎 아래 살던 딸이 하루아침에 시집으로 완전히 돌아가니 어찌 그리움이 없겠는가.

다만 거리가 멀지 않아 날마다 소식은 들을 수 있으니 그것이 위로가 된다.

나도 딸을 따라 남당진까지 갔다.

배 위에서 잠시 쉬다가 배가 떠나자 윤겸만 함께 배를 타고 가고 나는 높은 언덕에 올라 배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뒤돌아보다가 남쪽 물끝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니 눈물이 소매를 적셨다.

관에서는 배 세 척을 마련했다.

  • 한 척은 크고 차일과 자리를 갖추어 딸이 타게 했다.
  • 한 척은 음식과 살림도구를 실었다.
  • 한 척은 사람과 말을 건너게 했다.

세 배가 함께 물길을 따라 내려갔다. 아침밥도 배에서 마련한다고 한다.

나는 종 하나만 데리고 말 한 필을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해가 이미 높았다.

집에 들어와 앉으니 슬픔이 더욱 몰려왔다. 딸의 어머니와 두 딸도 둘러앉아 울었다.

불과 며칠 전 윤해 가족이 진위로 돌아갔고 이제 또 이 딸이 시집으로 떠났다. 마음이 허전해 견디기 어렵다.

윤해 일가는 일정대로라면 오늘 진위 집에 도착할 텐데, 어제 비가 와 길에서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저녁에는 양식이 없어 국물을 많이 탄 죽을 쑤어 나누어 먹었다.

사람을 보내 이기종을 불러 강춘의 부은 발에 침을 놓게 했다. 술 한 그릇을 대접했다.

기종과 함께 이진사 중영이 묵는 곳을 찾아가 한가롭게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중영은 고 지사 이린의 아들이다. 평소 부유하기로 이름났지만 지금 난리를 만나 이곳에 떠돌아 살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지난여름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직 장사를 지내지 못했다.

우리 숙소와 가까워 찾아갔다. 전에도 한 번 얼굴을 알고 있었고 아이들과도 서로 아는 사이다.

이기종은 술을 못 마셔 한 그릇만 마시고도 몹시 취해 먼저 갔다. 우스운 일이다.

1594년 10월 4일 (갑오년 음력 8월 21일)

한노를 함열로 보냈다. 딸의 행차가 무사히 도착했는지 묻기 위해서다.

새벽에 아침도 먹이지 않고 보내 오늘 안으로 돌아오게 했다.

저녁에 막정이 분개와 함열에서 온 문안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함열 수령의 어머니가 새 며느리를 매우 기뻐하고 온 집안사람이 좋은 며느리를 얻었다고 칭찬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끝까지 잘 지낼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막정 편에 함열에서 다음을 보내왔다.

  • 흰쌀 석 말
  • 중미 석 말
  • 쇠고기 한 덩이
  • 조개젓 석 되

딸도 어제 받은 떡과 과일, 반찬 가운데 조금을 보내왔다. 곧 아이들과 함께 먹었다.

함열에서 온 사람에게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1594년 10월 5일 (갑오년 음력 8월 22일)

막정에게 관청에서 빌려 온 사기그릇과 작은 상, 족상 등을 실어 돌려보내게 했다.

전에는 종과 말이 바빠 이제야 보낸다.

사기그릇 네 개를 깨뜨려 잃었다. 아쉽다.

린아는 학질이 떨어진 지 사나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제부터 다시 날마다 앓는다. 걱정스럽다.

1594년 10월 6일 (갑오년 음력 8월 23일)

이른 아침 막정을 함열로 보냈다. 이어 익산 이충의 집에도 들르게 하고 장에서 물건도 사 오게 했다.

어제 한노가 오지 않았으니 오늘 윤겸이 함께 데리고 오는 것일까.

저녁에는 한노만 혼자 돌아왔다. 윤겸은 내일 오겠다고 한다.

딸이 홍시 열다섯 개와 송이버섯 서른 개를 보냈다. 홍시는 곧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먹었다.

린아는 학질을 앓던 중인데 매우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아내도 학질을 얻어 앓고 있으나 한기가 왔다 열이 났다 할 뿐 아주 심하지는 않다.

1594년 10월 7일 (갑오년 음력 8월 24일)

저녁에 윤겸이 함열에서 들어왔다.

사위 신응구가 아내를 매우 소중히 여긴다고 하니 참으로 기쁘다. 다만 끝까지 어떨지는 두고 볼 일이다.

밤에 아이들과 둘러앉아 이야기하고 있는데 서쪽 이웃 전문 집 종의 쌀 됫박이 없어졌다는 소동이 났다.

자국을 따라오니 쌀알이 우리 집으로 오는 길에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횃불을 밝히고 어둔의 방을 뒤졌지만 물건은 없었다.

다른 사람이 훔치고 일부러 이곳에 쌀을 흘렸는지, 아니면 어둔이 훔쳐 숲에 숨겨 두었는지 알 수 없다.

전문 집에서는 어둔을 몹시 의심했다.

나도 엄하게 다스리고 싶지만 아직 범인이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아 일단 두고 보기로 했다. 뒤에 사실이 밝혀지면 크게 벌할 생각이다.

이 계집종은 평소 하는 짓도 수상해 사람들이 모두 의심한다. 몹시 괘씸하다.

함열에서는 절인 게 쉰 마리를 보내고, 딸도 반찬과 두 가지 떡을 조금 보냈다.

1594년 10월 8일 (갑오년 음력 8월 25일)

윤겸은 결성으로 돌아가려 했다.

김봉사와 이봉사가 함께 가기로 했는데 그들이 오지 않아 출발하지 못했다.

오후에는 계집종 옥춘이 함열에서 들어왔다.

딸이 흰쌀 두 말, 절인 게 스무 마리, 조개젓 두 되를 보냈다.

저녁에는 김봉사와 이봉사가 들어왔다. 저녁밥을 먹이고 윤겸과 함께 재웠다.

기대수가 아들과 함께 짐을 지고 또 찾아왔다.

처음에는 거지인 줄 알았다. 이름을 물은 뒤에야 그인 줄 알았다.

옷은 누더기가 되어 양반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 처참하고 슬펐다.

아침과 저녁을 대접하고 재웠다.

그의 아내와 딸은 지금 공주 땅에 있다고 한다.

1594년 10월 9일 (갑오년 음력 8월 26일)

날이 밝기 전에 김봉사와 이봉사가 떠나려 하기에 묽은 국죽과 흰술 두 잔씩을 대접했다.

윤겸도 함께 홍산현으로 떠났다. 아침을 먹고 각자 길을 갈 것이라고 한다.

윤겸은 내 말을 타고 한노를 데리고 갔다.

기대수도 아침밥을 먹고 다시 한산으로 갔다. 한산 수령에게 먹을 것을 구하려는 것이다. 돌아올 때 다시 들르라고 했다.

아침에는 전라도 조도어사 박홍로가 이 도에 온 인연으로 내 숙소에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잊지 않고 생각해 주니 고맙다. 다만 어디에서 내 일을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저녁에는 천린과 덕린 형제가 수원에서 한산으로 가는 길에 들렀다.

윤해 일가는 무사히 진위 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기뻤다.

저녁밥을 먹이고 재웠다.

막정도 함열에서 돌아왔다.

함열에서 막장 열 말, 소금 석 말, 생게 서른 마리, 송이버섯 열일곱 개, 참기름 한 되, 좋은 술 여섯 병을 보내왔다.

막장을 다시 되어 보니 여덟 말밖에 되지 않았다.

1594년 10월 10일 (갑오년 음력 8월 27일)

막정에게 윤겸이 얻은 보리 씨와 밀 씨를 실어 결성으로 보내게 했다.

윤겸은 어제 돌아갈 때 종과 말이 없어 가져가지 못했으므로 오늘 보내는 것이다.

저녁에 함열에서 사람을 보내 편지와 생붕어 쉰 마리, 비늘 없는 물고기 열 마리를 보내왔다.

붕어는 곧 쪄 아내와 자식들과 먹었다.

비늘 없는 물고기는 배를 갈라 소금에 절여 말려 반찬으로 두려고 한다.

저녁에는 양식이 떨어져 콩죽을 쑤어 먹었다.

1594년 10월 11일 (갑오년 음력 8월 28일)

지난밤 비가 내렸고 처마에서 빗물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침에도 흐리고 바람이 불며 때때로 비가 뿌렸다.

새벽에 배가 아파 두 차례 심하게 설사했다. 토할 것 같았지만 토하지는 못했다. 머리도 조금 아팠다.

곽란인 듯하여 우물물을 마셨다.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조금 가라앉았지만 머리와 관자놀이 통증은 아직 남아 있었다.

저녁에 함열에서 사람이 왔다.

딸이 흰쌀 두 말, 생선 한 마리, 붕어 여덟 마리를 쪄서 국물과 함께 그릇에 담아 봉해 보냈다.

곧 밥을 지어 나누어 먹었다.

다만 나는 몸이 좋지 않고 속이 메스꺼워 먹지 못했다.

1594년 10월 12일 (갑오년 음력 8월 29일)

지난밤 바람이 불고 추웠다.

아침에 보니 된서리가 내려 지붕이 모두 하얗다. 날씨가 겨울 같다.

방도 몹시 차고 식구들의 옷은 너무 얇다.

계집종 옥춘을 함열에서 온 사람과 함께 돌려보냈다.

혼서함과 딸의 긴옷도 보냈다.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저녁에는 딸이 관노를 보내 편지로 안부를 묻고 잔치 뒤 남은 떡과 과일, 구운 고기와 반찬을 보내왔다. 아이들과 함께 먹었다.

답장을 써 그 사람에게 돌려보냈다.

소즐의 아내가 절인 게 열 마리를 보내와 쌀 한 말을 답례로 주었다.

1594년 10월 13일 (갑오년 음력 8월 30일)

오늘은 함열에서 아무도 오지 않았다.

막정도 돌아오지 않는다. 윤겸이 길에서 머물고 있는 모양이다.

관찰사가 어제 고을에 들어와 사흘 동안 머문다고 한다.

저녁에는 김정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그는 김대성의 아들이다. 김대성은 지난여름 병으로 죽어 지금 상중이다.

1594년 10월 14일 (갑오년 음력 9월 1일)

밥을 먹고 심심해 린아와 단녀를 데리고 제단 위에 올라갔다.

마침 이웃 노인이 그곳에서 풀을 베고 있어 함께 앉아 반나절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이경익이 찾아왔다가 갔다.

함열에서 오늘도 사람이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듯하다.

어제부터 양식이 떨어져 죽만 먹고 있다.

오늘 양식을 보내 준다는 말을 들어 저녁까지 기다렸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날까지 저물어 다른 곳에서 빌릴 데도 없어 무를 캐 국을 끓여 아이들과 마셨다.

밤이 깊었고 그대로 굶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 잠도 오지 않는다.

린아는 날마다 학질을 앓는데 먹지도 못하니 더욱 불쌍하다.

막정 일행도 오지 않는다. 무슨 일인가.

종과 말이 나가 버려 사람을 보내지도 못해 오늘처럼 완전히 굶게 되었다.

전에도 먹을 것이 없는 때가 있었지만 오늘처럼 아무것도 못 먹은 적은 없었다.

1594년 10월 15일 (갑오년 음력 9월 2일)

쌀 두 되 반을 빌려 아침밥을 지어 나누어 먹었다.

아침밥 뒤 함열에서 사람이 왔다. 흰쌀 두 말, 중미 두 말, 생게 스무 마리를 가져왔다. 딸도 반찬과 떡, 과일을 조금 보냈다.

이 사람은 어제 나루에 도착했으나 물을 건너지 못하고 오늘 아침에야 건너왔다고 한다.

함열 수령은 어제 차사로 나갔다고 한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다가 오후에야 갰지만 하루 종일 흐렸다.

밤늦게 막정 일행도 들어왔다.

어젯밤 공양 광석리에서 묵었는데 비 때문에 길이 나빠 일찍 떠나지 못해 날이 저물었다고 한다.

윤겸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홍양 이생원 익빈 집에서 이틀을 묵었기 때문에 종과 말이 이제야 돌아온 것이다.

언해 소학 네 권을 구해 보내왔다. 딸들이 몹시 읽고 싶어 해 윤겸에게 구해 달라고 했더니 이생원에게서 얻었다고 한다.

들깨 한 말, 찹쌀 넉 되, 찰조 닷 되, 살아 있는 닭 한 마리도 보내왔다.

닭은 전날 전문에게 빌려 쓴 닭 값을 갚으려는 것이다.

다만 막정 일행은 밤에 돌아오면서 풀을 베지 않아 말 두 필을 또 굶겼다. 몹시 괘씸하다.

단녀도 오늘 학질을 앓았다. 이틀에 한 번씩 앓는 병인 듯하다.

1594년 10월 16일 (갑오년 음력 9월 3일)

새벽부터 비가 내려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밤에는 경여를 꿈에서 보았다. 생전 모습 그대로였다.

깨어나니 슬픔을 이길 수 없었다.

저녁에 비가 개어 곧 고을로 들어갔다.

관찰사는 어제 이미 떠났고 수령 이구순은 관청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지기가 막아 이름을 전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몹시 아쉽다.

1594년 10월 17일 (갑오년 음력 9월 4일)

진사 이중영을 찾아가 한가롭게 이야기하다가 해가 기울어 돌아왔다.

저녁에는 옥춘이 함열에서 관원과 함께 들어왔다.

함열에서 흰쌀 두 말, 벼 한 섬, 절인 게 스무 마리를 보내왔다.

방이 너무 차가워 다른 집으로 옮기려 하지만 빌릴 집을 얻지 못해 걱정스럽다.

1594년 10월 18일 (갑오년 음력 9월 5일)

함열에서 사람이 왔다.

함열 수령은 어제 관아로 돌아왔다고 한다.

편지에는 전주에 갔다가 흉년의 피해를 조사하는 일이 갑자기 생겨 서둘러 돌아오는 바람에 태인에는 가지 못하고 안부를 묻는 사람만 보냈다고 했다.

함께 절인 게 스무 마리, 술 한 병, 닭 두 마리를 보냈다. 참으로 고맙다.

또 이곳으로 큰 붕어 다섯 마리, 새우젓 닷 되, 추로주 두 병, 생강 열세 덩이와 생강장아찌 작은 항아리 하나도 보내왔다.

붕어를 쪄 먹으니 맛이 매우 좋았다.

이렇게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늙은 어머니가 멀리 계셔 드리지 못하니 한참이나 상 앞에 앉아 젓가락을 들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더욱 빨리 어머니를 모셔 오고 싶지만 일이 계속 어그러져 답답하다.

단녀는 학질을 앓았다.

보리 씨를 환곡으로 달라고 수령에게 청했지만 관청에 남은 것이 없다며 주지 않았다. 아쉽다.

1594년 10월 19일 (갑오년 음력 9월 6일)

이른 아침 집을 빌리려고 최인복을 찾아갔는데 밖에 나갔다고 하며 만나 주지 않았다. 무시당한 듯해 불쾌했다.

밥을 먹고 나니 최인복이 직접 찾아와 아침에는 일이 있어 나가 있었기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추로주 큰 잔 두 잔을 주었다.

그의 집은 빌려 주기로 했다. 기쁘다.

어제 함열에서 자리 넉 장을 먼저 묶어 보내고 나머지 넉 장은 아직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저녁에는 시증이 익산에서 찾아왔다. 뜻밖이라 무척 반가웠다.

장수에 있는 집안사람들도 모두 무사하다고 하니 더욱 기쁘다.

경여의 아내는 딸이 일찍 죽어 외손자 원룡 하나만 남았는데, 시증을 양자로 삼아 경여의 장례와 묘 쓰는 일을 맡기려고 데리고 왔다고 한다.

1594년 10월 20일 (갑오년 음력 9월 7일)

시증이 익산으로 돌아갔다.

막정과 옥춘도 함열로 돌아갔다.

어제 어머니의 친필 편지와 아우의 편지를 받았다. 모두 별 탈 없다고 하니 참으로 기쁘다.

어머니는 함열에서 보낸 물건도 잘 받으셨고 고마워하신다고 한다. 마음이 놓인다.

저녁에는 신 별감 몽겸이 찾아왔다가 갔다.

그가 수령 이구순의 말을 전했다.

며칠 전 내가 두 번 고을에 들어갔다가 문지기에게 막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말을 수령이 듣고 몹시 미안해하며 다시 들어오라고 했다고 한다.

1594년 10월 21일 (갑오년 음력 9월 8일)

함열에서 사람이 왔다.

딸이 흰쌀 두 말, 중미 두 말, 단장 두 말, 미역 다섯 동을 보내 주었다.

아침밥 뒤 고을로 들어갔다.

수령이 관청에 나와 있어 나를 불러들였다.

전 대흥 수령 신괄과 전 판관 상기손이 함께 앉아 있어 같이 이야기했다.

수령은 물에 만 밥을 대접했다.

해가 기울어서야 돌아왔다.

오는 길에 최인복 집에 들러 실제로 살 만한지 살펴보았다.

저녁에는 천린이 한산에서 찾아와 묵었다.

기대수 부자도 뒤이어 들어와 저녁밥을 먹이고 재웠다.

1594년 10월 22일 (갑오년 음력 9월 9일)

천린은 아침 일찍 한산으로 돌아갔다. 어제 죽을 먹여 보냈다.

기대수에게도 아침밥을 먹였다. 줄 만한 것이 없어 벼 한 말과 단장, 미역 조금을 주어 보냈다.

부자가 짐을 지고 길을 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다.

천린이 곧 수원으로 돌아간다기에 윤해에게 보낼 편지를 맡겼다.

막정도 함열에서 온 사람과 함께 들어왔다.

함열 수령은 중양절이라고 다음을 보내 주었다.

  • 술 세 병
  • 떡 한 상자
  • 여러 가지 과일 한 상자
  • 여러 가지 썬 고기 한 상자
  • 여러 가지 구운 고기 한 상자
  • 천엽 반 벌
  • 생선 한 마리
  • 쇠고기 두 덩이
  • 중미 두 말
  • 콩 석 말

딸도 흰쌀 한 말을 보냈다.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먹었다. 그 후한 뜻이 참으로 고맙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마주하니 멀리 계신 어머니께 드리지 못하고, 윤해도 없어 함께 먹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충손 생각도 유난히 났다.

1594년 10월 23일 (갑오년 음력 9월 10일)

최인복과 전문을 불러 술을 대접했다.

누룩 한 덩이를 구하려고 한 것이다.

최인복은 큰 잔 여섯 잔, 전문은 큰 잔 두 잔을 마시고 돌아갔다.

1594년 10월 24일 (갑오년 음력 9월 11일)

린아와 단녀의 학질이 더욱 심해졌다. 걱정스럽다.

저녁에 함열에서 사람이 와 중미 두 말, 흰쌀 한 말, 절인 게 스무 마리를 전했다.

1594년 10월 25일 (갑오년 음력 9월 12일)

이른 아침 종 네 명에게 둔답의 벼를 베게 하고 널어 말리게 했다.

아침에는 체찰사 종사관 조존성이 이 고을에 와 쌀 두 말과 웅어젓 넉 되를 보내 주었다.

윤해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곧 답장을 써 보냈다.

저녁에는 함열의 종이 서울로 올라가며 우리 집에 묵었다. 윤해에게 보낼 편지를 써 진위 집에 전해 달라고 맡겼다.

향비가 볼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1594년 10월 26일 (갑오년 음력 9월 13일)

밥을 먹고 고을로 들어가 수령을 만났다.

수령은 마침 성 쌓는 일을 감독하는 군관들과 동헌에 앉아 있었다.

잠깐 이야기한 뒤 수령은 군관들과 함께 한 진사 겸의 집으로 활쏘기를 하러 갔다. 전에 약속한 일이었다.

수령이 나도 함께 가자 했지만 일이 있어 가지 않고 돌아왔다.

오는 길에 신몽겸을 만나 두 아이의 학질을 떼는 방법을 부탁했다. 전에 그의 방법이 매우 잘 듣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1594년 10월 27일 (갑오년 음력 9월 14일)

둔답의 벼를 모두 들여오니 백아흔여섯 단이었다.

함열에서 흰쌀 한 말, 중미 두 말, 절인 게 스무 마리, 술 한 병 반, 살아 있는 닭 한 마리를 보내왔다.

신몽겸이 준 부적과 방법을 두 아이에게 써 보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심하게 앓는다. 안타깝다.

1594년 10월 28일 (갑오년 음력 9월 15일)

한복이라는 떠돌이 사람을 불러 방구들을 손보게 했다. 그는 피란 와 우리 집 근처에 사는 사람이다.

1594년 10월 29일 (갑오년 음력 9월 16일)

어제 구들을 제대로 파내지 않고 겉만 고쳤더니 아궁이의 불길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침에 막정에게 다시 헐어 막힌 곳을 파내고 고치게 했다.

어제 한 일이 모두 허사가 되었으니 우습다.

하루 종일 불을 때도 방이 잘 따뜻해지지 않고, 새로 고친 곳도 아직 마르지 않았다.

이 방에 어머니를 모실 생각이었는데 이러하니 걱정스럽다.

1594년 10월 30일 (갑오년 음력 9월 17일)

아침밥 뒤 종 둘과 말을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남당진을 배로 건너는데 마침 이정시를 나루에서 만나 같은 배를 탔다.

함열에 도착하니 이미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다.

수령이 관아 안에 있다가 나를 불러들였다.

딸을 보고 차와 간식, 저녁밥을 함께 먹었다.

밤에는 상동헌에서 잤다. 이유위 이정시와 한방에서 잤고 임성도 함께 묵었다. 임성은 수령 집안사람이다.

1594년 10월 31일 (갑오년 음력 9월 18일)

이른 아침 전 대흥 수령 신괄이 찾아왔다. 함열 수령도 뒤따라 나왔다.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늦은 아침에는 김봉사도 들어와 하루 종일 함께 이야기했다.

나는 관아 안으로 들어가 딸을 보았다.

김봉사는 어제 태안에서 돌아오는 길에 결성에 들러 윤겸을 만났고, 그의 편지도 가져왔다.

윤겸은 지금 무사하다고 한다.

다만 임아가 밖에서 놀다가 뱀에 물렸는데 가까스로 낫는 중이라고 한다. 놀랍고 걱정스럽다.

린아의 혼사도 보령에 사는 윤겸 아내 쪽 친척집으로 정해졌고 청혼서도 보냈다고 한다. 아직 일을 완전히 마치지는 못했으므로 돌아온 뒤 글을 보내기로 했다.

1594년 11월

1594년 11월 1일 (갑오년 음력 9월 19일)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바람까지 불어 하루 종일 개지 않았다.

저녁에 관아로 들어가 딸을 보고 수령과 함께 저녁밥을 먹었다.

밤에는 동헌에서 임성과 이정시와 함께 잤다.

수령과 여러 사람은 웅포에 가서 고기잡이를 보려 했지만 비 때문에 가지 못했다.

1594년 11월 2일 (갑오년 음력 9월 20일)

비가 갰다.

함열 수령이 나왔고 신괄도 왔다. 여러 사람과 두부를 만들어 함께 먹었다.

늦게 고을 서쪽 웅포로 가 고기잡이를 구경했다. 마침 바람이 심해 물고기를 잡지는 못했다.

그래도 여러 사람과 배를 타고 강 한가운데에 닻을 내린 뒤 함께 술을 마셨다.

함께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 신괄
  • 김봉사
  • 이정시
  • 이천황
  • 신응관
  • 홍찰방 요좌
  • 함열 수령

고을의 세 향소 사람들도 참석해 각자 술과 안주를 아주 넉넉히 차려 왔다.

저녁에는 물결을 따라 배를 띄워 올라가 구창 나루에 댔다.

안사눌과 남궁이도 불러 술을 마시게 하고 저녁밥도 먹었다.

날이 저물어 각자 횃불을 들고 돌아왔다.

고을에 들어오니 밤이 깊었다.

이유위는 뒤에 처져 나루에서 묵고 내일 한산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1594년 11월 3일 (갑오년 음력 9월 21일)

처음에는 오늘 태인으로 떠나려 했으나 때가 늦어 가지 못했다.

함열 수령이 길에서 쓰라고 다음을 주었다.

  • 흰쌀 한 말
  • 중미 두 말
  • 콩 두 말
  • 조기 한 묶음
  • 육포 다섯 줄
  • 절인 게 열다섯 마리
  • 생게 열 마리
  • 짠장 한 되

또 보리 씨 일곱 말을 얻었고, 무명 한 필 반과 바꾸었다.

하루 종일 관아에서 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1594년 11월 4일 (갑오년 음력 9월 22일)

날이 밝기 전에 밥을 먹고 관아로 들어가 수령과 딸을 만났다.

마침 수령 선조의 제삿날이라 관아에서 제사를 지냈고, 그 음식과 술을 나에게도 주었다.

관인 한 명을 데리고 출발했다.

신창진에 이르러 배를 타고 건넜다.

건너편 주민의 집들은 모두 헐려 하나도 남지 않았다.

물어보니 지난달 임피에 갇혀 있던 도적이 주민들을 끌어들였다는 자백을 해 군사들이 수색하자 사람들이 모두 도망해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헐리지 않은 집 하나를 찾아 말을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잠시 뒤 바람과 비가 크게 일어 바로 떠나지 못했다. 조금 잦아들기를 기다려 비옷을 입고 길을 나섰다.

김제군에 도착해 홍문 밖 민가에 들어갔는데 이미 선비 한 사람이 먼저 묵고 있어 들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비가 하루 종일 그치지 않고 달리 머물 곳도 없어 억지로 빈 행랑에 들어가 앉았다.

그 선비가 나와 이름을 물으니 조형원이었다. 고 지례 수령 조추의 손자이고 조존경의 아들이니 내게 팔촌 손자뻘이었다. 뜻밖의 인연이라 다행이었다.

조도어사 박홍로가 군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막정에게 이름을 알리게 했다. 또 관인에게 함열 수령의 편지를 수령에게 전하게 했다.

수령이 곧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어사도 시동을 보내 나를 불렀다.

상동헌으로 가니 응소 박홍로가 수령과 친족 몇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뜻밖에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수령이 나간 뒤 응소와 밤늦도록 이야기하고 함께 잤다.

수령은 일행의 식사를 내주게 했다.

1594년 11월 5일 (갑오년 음력 9월 23일)

날이 맑았다.

수령이 어사를 찾아와 함께 이른밥을 먹었다.

생원 유표도 왔다. 그는 이 고을에 피란 와 살고 있으며 어사와 같은 또래의 친구다.

또 함께 아침밥을 먹고 큰 잔으로 술 두 잔을 마셨다. 날이 춥고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응소 박홍로와 여러 사람에게 작별하고 출발했다.

넓은 들을 지나는데 어제 비로 물이 길에 가득 차 진흙을 헤치며 어렵게 걸었다.

마른 길에 올라 태인 전리에 도착하니 해가 이미 기울었다.

어머니께 들어가 뵈었다.

집안사람들은 모두 예전대로였지만 덕경이 말을 끌고 영암으로 간 뒤 날짜가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도망친 것이 아니라면 도적을 만났을까 걱정된다.

며칠 더 기다려도 오지 않으면 어머니를 모시고 갈 때 종과 말이 부족해 곤란할 것이다.

밤늦도록 어머니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권 별감의 행랑방으로 가 권씨 아들과 함께 잤다.

김제와 익산 두 고을을 지날 때 묵으려고 어사가 써 준 사적인 통문도 가지고 왔다.

1594년 11월 6일 (갑오년 음력 9월 24일)

언명 희철이 농사지은 논의 벼를 종이 없어 오래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내 종 두 명과 관인을 보내 베게 하고 말 두 필로 실어 오게 했다.

그런데 찬바람이 크게 불어 날씨가 몹시 매서웠다. 사람들이 이를 딱딱 부딪칠 정도였다.

끝까지 다 베지 못하고 모두 일을 거두고 돌아왔다.

양식만 허비했다. 가난한 집 일은 하는 것마다 이렇다. 한탄스럽다.

권 별감 서가 집에 왔다는 말을 듣고 누마루로 찾아가 만났다.

전에 여러 번 이곳에 왔어도 번번이 서로 엇갈려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는데 오늘 드디어 만났다.

그가 우리 늙은 어머니를 후하게 보살펴 준 일에 먼저 감사했다.

어머니가 몸이 편치 않으시면 맛있는 것을 구해 잇달아 보내 주고, 양식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온갖 방법으로 마련해 굶지 않게 해 주었다.

아우에게도 후하게 대했다.

이런 때에는 친척과 옛 친구조차 돌아보지 않는데 전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해 주니 그 마음을 잊을 수 없다.

아우의 장인·장모와 처남은 바로 울타리 너머에 살면서 평범한 작은 물건조차 빌려 주지 않는다. 하물며 굶주림을 구해 주기를 바라겠는가.

사람의 타고난 마음이 어찌 이토록 다른가.

저녁에는 권씨 행랑에서 그의 둘째 아들 극정과 함께 잤다.

권씨의 두 아들은 나이가 어려도 모두 순박하고 신중한 사람들이다.

1594년 11월 7일 (갑오년 음력 9월 25일)

어제 다 베지 못한 벼를 종 둘에게 다시 베어 오게 했다.

실어 온 것은 겨우 세 짐뿐이었다.

아침밥 뒤 권씨 누마루에서 온종일 권공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는 다시 권씨 행랑에서 그 아들과 함께 잤다.

처음에는 내일 어머니를 모시고 떠나려 했지만 일이 끝나지 않아 모레로 미뤘다.

1594년 11월 8일 (갑오년 음력 9월 26일)

아침밥은 권씨 집에서 우리 형제와 어머니께 차려 드렸다.

권공의 아내도 내일 떠나는 어머니께 인사하러 왔다.

하루 종일 권씨 누마루에서 마을 사람 네댓 명과 이야기했다.

주인은 일이 있어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왔다.

다시 권씨 행랑에서 그 아들과 함께 잤다.

덕경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종과 말이 부족한 채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가야 하니 길에서 큰 곤란을 겪을까 걱정이 끝이 없다.

언명도 함께 갈 수 없다. 그 역시 종과 말이 없기 때문이다.

1594년 11월 9일 (갑오년 음력 9월 27일)

아침밥을 먹고 어머니를 모시고 출발했다.

언명은 걸어서 마을 어귀까지 따라 나왔다가 돌아갔다.

함께 가지 못하니 어머니도 서운해 눈물을 흘리셨다. 마음이 몹시 착잡했다.

종정원 앞에 이르러 말을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해가 기울어 금구현에 도착했다.

어사가 준 통문과 함열 수령의 편지를 전하니 일행의 식사를 내주었다.

밥을 먹은 뒤 수령 김복억을 만나러 들어갔다.

전에는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지만 이름은 오래전부터 들었다.

매우 후하게 대하며 다음을 길양식으로 주었다.

  • 흰쌀 한 말
  • 중미 한 말
  • 콩 한 말
  • 조기 한 묶음
  • 절인 게 열 마리
  • 단장 석 되
  • 짠장 반 되
  • 소금 한 되

참으로 고맙다.

저녁에는 이 도의 새 도사 황극중이 서울에서 막 내려와 있었다. 전부터 아는 사람이어서 곧 이름을 알리니 나를 불러들였다.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밤이 깊었다.

1594년 11월 10일 (갑오년 음력 9월 28일)

아침밥 뒤 수령 김복억이 사람을 보내 나를 불렀다.

서헌에서 만나 수령이 술 석 잔을 주었다.

잠시 뒤 도사 황극중도 사람을 보내 불러 방에서 만났다. 도사도 술 석 잔을 주었다.

영암 누이에게 보낼 편지를 써 맡기고 아우에게도 안부를 전해 달라고 했다.

밖으로 나와 어머니를 모시고 출발했다.

삼례역관에서 말을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계집종 열금이 뒤에 처져 기다려도 오지 않아 계집종 복지만 남겨 기다리게 하고 먼저 갔다.

익산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어두웠다.

어사의 통문과 함열 수령의 편지를 전하니 수령 고성후가 사창에 나와 있다가 사람을 보내 나를 불렀다.

찾아가 옛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대접받았다.

돌아와 객관에서 잤다. 일행의 식사도 관에서 내주었다.

1594년 11월 11일 (갑오년 음력 9월 29일)

이른 아침 수령에게 술과 안주를 얻어 고 경여의 아내가 사는 군내 탄곡으로 찾아갔다.

경여를 임시로 묻은 곳에 술 한 잔을 올리고 한바탕 울었다.

지난 일을 떠올리니 슬픔을 견딜 수 없었다.

경여의 아내도 나를 보고 통곡했다.

사람 없는 골짜기에서 아이들과 홀로 사는 모습이 너무 가엾다.

마침 한욱이 찾아와 잠시 이야기했다.

돌아오니 해가 높았다.

사창에 있는 수령을 다시 찾아갔다.

수령은 중미 두 말, 정미 두 말, 벼 닷 말, 단장 닷 되, 조기 두 묶음, 누룩 세 덩이, 콩 두 말을 주었다.

수령의 이름은 고성후이고 예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다.

도사 황극중도 먹을 것을 마련해 주라고 사적인 통문을 써 주었다.

한낮에 어머니를 모시고 출발해 함열에 도착하니 해가 아직 지지 않았다.

마침 함열 수령이 숙부 신괄의 서울 길을 전송하려고 상동방에 송별 자리를 마련했다. 나도 참석했다.

함께한 사람은 신괄, 김봉사, 전 신계 수령 조희안, 이경춘, 신괄의 아들 신응규였다.

서로 술을 주고받다가 밤이 깊어 흩어졌다.

오늘 아침 익산에서 받은 것 가운데 벼 닷 말, 단장 닷 되, 조기 다섯 마리, 절인 게 여섯 마리, 누룩 한 덩이, 쇠고기 한 덩이, 콩 한 말을 경여 아내에게 나누어 주었다.

전 신계 수령 조공은 옥구에 피란 와 살다가 이제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이곳에서 묵었다. 서울에서 같은 동네에 살며 알던 어른인데 객지에서 우연히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그의 두 아들은 모두 죽었고 의지할 곳이 없어 옥구에 있는 첩의 농막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가엾다.

이경춘도 난리를 피해 이 고을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저녁에는 함열 수령이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쇄미록 3책 현대어 번역

오희문 · 갑오일록

갑오일록 — 1594년 2월 20일~1595년 2월 8일

1594년 2월

1594년 2월 20일 (갑오년 음력 1월 1일)

옥여 이귀가 완산에서 처음 도착했고, 이진 여헌도 왔다. 서로 만나니 참으로 반갑고 위로가 되었다.

여헌은 오는 길에 임천을 지나며 사흘을 묵었다고 한다. 임천 수령이 그의 장인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내 아내와 자식들을 두 번이나 찾아보았다고 했다. 집에서 보낸 편지도 전해 주어 읽어 보니, 그때까지는 모두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었다.

다만 윤겸(큰아들)의 장인 이응화가 순천에 있다가 바다를 건너던 배가 뒤집혀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그의 서자 이생도 물에 빠져 죽었고, 언실은 가까스로 헤엄쳐 육지에 나왔으나 병을 얻어 이레 만에 죽었다고 한다. 놀랍고 슬픈 마음을 이길 수 없다. 늙은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더욱 걱정스럽다.

윤겸은 장인의 관을 모셔 오려고 순천으로 가는 길에 이곳을 들렀는데, 마침 옥여가 관아에 와 있어 서로 만났다고 한다. 옥여가 붙잡아 두는 바람에 한동안 머물다가, 뜰에서 치르는 시험을 본 뒤 떠났다고 한다. 그 시험에 뽑힌 사람은 아홉 명이었다고 한다.

또 광주에 사는 선비 김덕령은 용맹과 힘이 남보다 뛰어나 왜적을 치겠다고 스스로 나섰다. 의병을 모으고 광주·담양·장성 사람들과 약속했는데, 장성에서는 그 일을 전적으로 맡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이달 안에 군사를 거느리고 영남으로 갈 것이라고 한다. 성공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사람됨이 비범하고 특별한 재주도 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익호장군이라는 호칭을 내리고 전마와 군장도 주었으며, 여러 차례 불러 만나 후한 말씀을 내렸다고 한다.

저녁에 옥여가 나와 함께 방에 앉아 국수를 만들어 먹고 술 석 잔씩 마셨다. 자리를 파하니 한밤중이 훨씬 지났다. 함께한 사람은 조익, 이자 숙훈, 여헌, 이천 여경, 이 고을 수령의 장인 권대순, 이복흥, 생원 이정일, 그리고 나였다.

1594년 2월 21일 (갑오년 음력 1월 2일)

아침밥을 먹고 출발해 나주 땅 여황리에 이르렀다. 생원 정문겸의 종이 사는 집에서 묵었다.

저녁에 정공이 찾아와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서 돌아갔다. 정공은 전 목사 정척의 둘째 아들이라고 한다.

1594년 2월 22일 (갑오년 음력 1월 3일)

일찍 길을 나서 한참 가다가 아침을 먹고 나주 서문 밖에 도착했다.

먼저 송노를 보내 옥여의 편지를 목사에게 전하게 했다. 서문 밖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송노가 잘못하여 남문으로 나가 버렸다. 아무리 찾아도 만나지 못해 서로 엇갈리는 바람에 날이 저물었다.

성문 단속이 몹시 엄해 한번 밖으로 나간 사람은 다시 들어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저녁밥을 지어 먹으니 이미 어두워졌다.

그런데 전날 묵었던 집 주인이 서문 안에 살고 있었는데, 내가 문 밖에 와서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직접 나와 나를 데리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자기 방에서 재워 주고 좋은 술까지 대접했으니 참으로 후했다.

참군 이재가 목사에게 먼저 와 있다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밤이 깊어 만나지는 못하고 내일 만나기로 했다.

1594년 2월 23일 (갑오년 음력 1월 4일)

이른 아침 사람을 양필에게 보내 불렀다. 양필이 곧 찾아왔는데 뜻밖의 만남이라 매우 반가웠다. 술과 생고기 한 덩이를 가져와 함께 구워 먹으며 술 두 잔을 마셨다.

늦은 밥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두 번 말을 먹인 뒤 달려 노암 서문 밖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저물었다.

임 진사의 계집종 남편 임명수의 집에서 묵었다. 명수의 아내는 돌장이다. 어려서 임 진사가 서울 집으로 데려가 부리던 사람이어서 내가 오자 옛 주인을 대하듯 섬겼다. 곧 저녁밥을 짓고 이웃에서 술까지 구해 나에게 대접했다.

말 먹일 콩 네 되를 삶아 두었는데, 아직 건져 내기도 전에 마침 굶주린 사람이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틈을 보고 절반가량을 훔쳐 갔다. 지나친 짓이기는 하지만 굶주림과 추위에 몰린 사람이라 한편으로는 가엾었다. 종들이 때리려 하기에 내가 엄하게 말렸다.

1594년 2월 24일 (갑오년 음력 1월 5일)

새벽빛이 밝을 무렵 출발해 구림에 이르니 해가 월봉 위로 막 장대 하나 높이만큼 떠올랐다.

어머니를 찾아뵈니 기쁨과 위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어머니의 얼굴은 예전과 같았고 식사도 전보다 잘하시며 별다른 병환이 없으셨다. 더없이 기뻤다.

다만 적이 호남으로 향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고, 길을 가로막는 불안한 일도 많았다. 나는 이달 안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호우 지방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봉양할 방도가 마땅치 않아 걱정이다. 그래도 어머니 역시 돌아가고 싶어 하시니 막을 수가 없다.

식사 뒤 최심원, 권순 생원, 임현 진사, 나와 아우가 요월당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는 아우와 함께 주인집에서 잤다. 심원이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가 한밤중에 돌아갔다.

1594년 2월 25일 (갑오년 음력 1월 6일)

아침밥 뒤 요월당으로 나갔다. 심원, 권 생원, 임 진사 두 사람, 남백형과 나, 아우, 그리고 젊은이 대여섯 명이 모여 저녁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흠이 나에게 벼 한 섬을 주었다. 찧어 목화를 사 둘 생각이다.

어제 김창수가 이곳을 지나가며 자정 김지남이 한림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기쁜 일이다. 창수는 자정의 사촌인데 예산에서 왔기 때문에 자세히 알고 있었다. 전부터 한림원 천거가 있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확실히 몰랐는데 이제야 사실임을 알았다. 김공은 강진으로 갔다고 한다.

1594년 2월 26일 (갑오년 음력 1월 7일)

밥을 먹고 요월당으로 나갔다. 권순, 임현, 최심원, 이웃에 사는 박준 형제, 박경행, 나와 아우가 모여 이야기했다.

심원과 임자승은 정투놀이를 하며 승부를 겨루었고, 거의 온종일 그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비도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저녁에는 아우와 숙소로 돌아왔다. 남백형도 학질을 피해 와서 함께 잤다.

1594년 2월 27일 (갑오년 음력 1월 8일)

백형은 학질이 떨어진 듯해 아침 일찍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나와 아우도 뒤따라 돌아왔다.

지난밤 큰바람이 불어 집이 흔들리고 지붕의 이엉이 말려 올라가며 울타리까지 뽑혔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바람이 멎었다.

잠자리가 너무 더워 밤새 뒤척이다가 오히려 찬 기운을 맞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꽤 좋지 않았다.

오후에는 임자중이 우리를 자기 집으로 불러 술과 안주를 차렸다. 크게 취해 숙소로 돌아왔다. 최심원이 뒤따라왔지만 내가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으므로 언명 희철과 잠깐 이야기하다가 돌아갔다.

오늘 자리에 함께한 사람은 남백형, 권화보, 최심원, 유선, 민우중 형제, 젊은이 서너 명, 그리고 우리 형제였다.

유선은 전 선전관 유형의 사촌으로, 유형의 집에 얹혀 지내다가 마침 자리에 참석했다. 성품이 몹시 거칠고 까다로워 사람들이 꺼린다고 한다. 우연히 심원과 말다툼을 하더니 큰소리로 욕설까지 퍼부었다. 우스운 일이다. 백형이 먼저 일어났고 나도 뒤따라 나왔다.

1594년 2월 28일 (갑오년 음력 1월 9일)

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요월당으로 나가 백형, 화보, 자승과 온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승이 산돼지 삶은 고기와 술 한 사발을 내놓았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온 뒤 말을 보내 심원을 불렀다. 누이에게서 술과 안주를 얻어 와 각자 네 사발씩 마시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한밤중이 훨씬 지나서야 헤어졌다.

어제 경흠이 순천 방답 첨사 진영으로 갔는데 비가 이렇게 오니 틀림없이 길에서 발이 묶였을 것이다.

1594년 3월

1594년 3월 1일 (갑오년 음력 1월 10일)

지난밤 비와 눈이 함께 내렸다. 아침에 보니 월봉이 온통 하얗다. 날은 아직 개지 않아 때때로 눈비가 뿌리고 바람도 불었다. 길이 진흙탕이 되어 도저히 떠날 수 없으니 답답하고 걱정스럽다.

처음에는 내일 능성으로 가려고 했다. 장흥에 있는 노비들에게서 신공을 거두기 위해서였다.

아침을 먹고 요월당에 가서 심원, 백형, 화보, 자중, 자승, 인중, 우리 형제, 젊은이 네댓 명과 온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중의 조카 임탄이 술과 안주를 가져와 함께 마셨다. 날이 저물어 흩어졌다. 하루 종일 큰바람이 불고 하늘이 흐렸다.

1594년 3월 2일 (갑오년 음력 1월 11일)

밥을 먹고 요월당으로 갔다. 심원, 백형, 자중, 신중, 화보와 젊은이 대여섯 명, 우리 형제가 온종일 어울렸다.

자중과 심원 쪽 사람들이 편을 갈라 활쏘기를 하고 진 편이 술과 안주를 내기로 했다. 자승 쪽이 져 자승이 술 한 병을 내놓아 함께 마셨다.

저녁에는 심원이 내 숙소를 찾아왔다가 밤이 깊어 돌아갔다.

경흠이 준 벼를 찧으니 쌀 여섯 말 일곱 되가 나왔다. 곧 목화 서른일곱 근을 샀다. 누이가 준 목화 열 근, 전에 침우에서 가져다 팔아 얻은 일곱 근까지 합쳐 모두 쉰네 근이 되었다. 종들에게 씨를 빼게 했다.

또 쌀 닷 되를 주고 쇳조각 두 근 열두 냥을 사서 여러 가지 쇠붙이를 만들 생각이다.

어제 암행어사가 고을에 들어왔다고 한다. 틀림없이 들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직접 수령이 사들인 집에 가서 조사한 뒤, 수령을 나주로 옮겨 가두었다고 한다.

수령 김성헌은 오래전부터 민심을 잃었고 탐욕이 심했다고 한다. 고을 가까이에 큰집을 사 두고 관청 창고의 물건을 꺼내 배 두 척에 가득 실어 영광에 사는 친족 집으로 먼저 보냈다. 또 곡식을 빼내 성 안의 열 집 남짓한 민가에 나누어 숨겨 두었다고 한다. 파면될 것이라는 소문을 미리 듣고 손을 써 둔 것이다.

이처럼 나라의 비축이 바닥난 때에 조정이 왜적을 물리치려는 뜻은 헤아리지 않고 백성을 괴롭히며 끝없이 재물을 긁어모았으니,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죽여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노비도 많이 사들이고, 쌀을 내어 무명을 사 둔 것도 많다고 한다. 훔친 곡식만 천 섬에 가깝고 배에 실어 보낸 물건은 그 수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이 도에서 관물을 많이 훔친 수령으로는 영광 수령 신상절, 태인 수령 박문영, 영암 수령 김성헌이 특히 심하다고 한다.

1594년 3월 3일 (갑오년 음력 1월 12일)

요월당에 가서 백형, 심원, 자중, 화보와 온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활도 쏘고 정투놀이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생원 정문회도 왔다. 서울에 있을 때 임자승과 사귀던 사이여서 찾아온 것이다.

1594년 3월 4일 (갑오년 음력 1월 13일)

요월당에서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보와 자승, 정공이 편을 갈라 활쏘기로 술내기를 했다. 자승 쪽이 져 술을 내놓았다. 사람은 많은데 술이 적어 더 마시고 싶어 하기에 내가 누이에게 부탁해 좋은 술 한 병을 더 얻어 왔다. 몇 잔씩 마시고 헤어졌다.

1594년 3월 5일 (갑오년 음력 1월 14일)

하루 종일 큰바람이 불었다. 추위는 겨울보다 더 매서웠다.

밥을 먹고 요월당에 가 여러 사람과 하루 종일 이야기했다.

다만 갓에 칠을 한 지 나흘이 지났는데도 아직 마르지 않았다. 좋지 않은 칠임이 틀림없다. 결국 버릴 물건이 될 듯해 몹시 걱정스럽다.

1594년 3월 6일 (갑오년 음력 1월 15일)

생원 정문회가 밥을 먹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오늘 처음 알았는데 정공의 아내는 고 윤은경의 딸로 내 팔촌 누이에 해당한다.

지난밤 큰눈이 세네 치쯤 내렸고 아침에도 그치지 않았다가 늦게야 개었다.

오후에는 민 참판 부인이 서울로 떠났다. 딸과 헤어질 때 서로 떨어지기 어려워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 인정이 이 지경에 이르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자승이 나주까지 모셔다 드리고 돌아왔다.

내일은 남백형도 북쪽으로 돌아갈 예정이라 저녁에 심원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다. 백형, 자중, 이보 임달, 우리 형제가 내 숙소에 모여 밤늦도록 이야기하고 흩어졌다.

아침에는 종을 영암군으로 보내 조도어사에 관한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먼저 보낸 공문은 도착했지만 아직 확실한 소식이 없다고 한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모레 능성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1594년 3월 7일 (갑오년 음력 1월 16일)

남백형이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떠났다.

나와 아우, 자중, 심원, 화보가 요월당에 모여 중문 밖까지 나가 작별했다. 집에 보낼 편지를 써 임천의 가족들에게 전해 달라고 맡겼다.

다시 요월당에서 여러 사람과 저녁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씨를 뺀 목화를 다시 달아 보니 여덟 근 여덟 냥이었고, 아직 씨를 빼지 않은 것은 열일곱 근이었다. 내일 능성으로 갈 예정이라 일단 어머니 방 곁에 맡겨 두었다가 돌아온 뒤 씨를 뺄 생각이다.

저녁에는 민우안이 와서 심설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1594년 3월 8일 (갑오년 음력 1월 17일)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불며 눈까지 내렸다.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개었다.

종과 말을 이끌고 출발해 나주 땅 내상리의 진도 팔번 정병 승강수 집에 가서 묵었다. 주인이 매우 후하게 대접해 말먹이와 김치까지 마련해 주고 따뜻한 방도 내주었다.

1594년 3월 9일 (갑오년 음력 1월 18일)

새벽빛이 밝을 때 출발해 남평 철야리에 사는 무인 서극철의 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서공이 나왔고 이웃에 사는 선비 정현도 마침 왔다. 그는 임경흠의 친족이다. 함께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떠났다.

고개 두 개를 넘었는데 길이 진창이라 어렵게 능성현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이었다. 수령이 관아 안으로 들어가 버려 내 이름을 알리지 못했다.

관노 낙수의 집에 묵었다. 주인이 말먹이와 김치를 마련해 주었지만 손님방이 없어 차가운 마루에서 잤다. 새벽녘에는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들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답답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문지기 단속도 매우 엄하다고 한다. 내 이름을 알리지 못하면 내일은 먹을 것을 얻을 길조차 없으니 진퇴양난이다. 주인에게 어떻게든 이름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자, 이름을 적어 주면 형편을 보아 안으로 들여보내겠다고 했다. 이 주인은 관청 창고지기다.

1594년 3월 10일 (갑오년 음력 1월 19일)

밤중부터 비가 내리더니 큰눈으로 바뀌었다. 아침에 보니 네댓 치나 쌓였다. 녹지 않고 계속 쌓인다면 한 자나 될 듯했다. 사람들이 근래 이런 큰눈은 없었다고 했다.

하루 종일 바람이 불고 흐렸으며 때때로 눈까지 흩날렸다. 차가운 행랑에 혼자 앉아 있으니 추위를 견딜 수 없었다.

수령은 요즘 몸이 좋지 않아 오래도록 정무를 보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을 써서 여러 방면으로 만나 보려 했으나 문단속이 너무 심해 이름을 알릴 길이 없었다.

집안의 종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핑계를 대고 소장을 써서 이름이라도 알리고자 했는데, 관례대로 그 종을 잡아오라는 처분만 내리고 나를 부를 뜻은 없었다.

양식과 반찬도 다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주인집에서 먹을 것을 빌렸다. 내일 장이 서면 무명 한 필을 팔아 식량을 마련하고 돌아갈 생각이다.

오늘은 바람과 추위가 더욱 심해 차가운 마루에서는 도저히 잘 수 없었다. 이웃 노인의 방을 빌려 들어갔다. 사방 벽에 구멍이 뚫려 바람이 그대로 들어오고 찬 기운이 얼굴을 때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래도 차가운 마루보다는 훨씬 나았다. 이 방마저 없었다면 반드시 큰병이 났을 것이다. 이곳에서 겪는 고생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1594년 3월 11일 (갑오년 음력 1월 20일)

주인집에서 쌀 두 되를 빌려 아침밥을 지어 먹었다.

막정(사내종)을 관아로 보내 알아보게 했더니 돌아와 말하기를, 어제 객사에 양 좌랑의 행차가 들어와 묵었다고 했다. 바로 양사형이었다. 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였으므로 곧 객관으로 가서 이름을 알렸다. 양공이 사람을 보내 안으로 불러들여 윗방에서 만났다.

생원 유표도 와 있었다. 유공은 윤겸과 같은 또래의 벗이고 나와도 아는 사이여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양공에게 부탁해 수령에게 내 이름을 전하자 수령이 곧 관아 마루로 불러들였다. 금성정도 마침 와 있었고, 수령의 아우 이린·이봉·이란 등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금성정은 내 아내의 사촌이고, 박씨 사람들도 황간에 사는 같은 고향 사람들이다. 수령의 큰아들 사군은 남경제 형의 사위다. 그 형의 딸도 관아에 와 있다가 사람을 보내 내 안부를 물었다.

이 자리에서 백원 형이 아내를 잃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들었다. 슬픔을 이길 수 없었다.

저녁에는 양 좌랑을 찾아가 함께 윗방에서 자며 밤새 옛일을 이야기했다. 양공은 조정의 명을 받아 진주 싸움에서 전사한 전 병사 최경회의 영전에 제사를 올리려고 순천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1594년 3월 12일 (갑오년 음력 1월 21일)

관아 마루에서 유표와 여러 박씨 사람들과 바둑도 두고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에는 수령도 마루방으로 나와 함께 이야기했다. 수령이 그 방에서 자라고 하여 유공과 함께 잤다. 회덕에 사는 수령 아내의 사촌 송정준도 상중에 와 있었는데 함께 자리했다.

1594년 3월 13일 (갑오년 음력 1월 22일)

수령이 관아로 나와 하루 종일 방에서 함께 이야기했다.

저녁에 작별 인사를 하자 수령이 다음을 주었다.

흰쌀 두 말

정미 다섯 말

콩 다섯 말

벼 한 섬

관청 창고가 텅 비어 찾아오는 사람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고 길갈이도 넉넉히 주지 못하는 형편인데, 나에게 이만큼 준 것을 두고 사람들이 특별히 큰손을 썼다고 했다. 우스운 일이다.

유공과 다시 관아 방에서 함께 잤다.

박사군의 아내가 길에서 먹으라며 쇠고기포 여섯 줄을 주었다. 마침 반찬이 다 떨어진 참이라 참으로 기뻤다.

1594년 3월 14일 (갑오년 음력 1월 23일)

새벽빛이 밝을 때 출발했다.

몇 리도 가지 않아 울타리 아래에서 아이가 울며 어머니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웃 사람에게 물으니 어젯저녁 그 어머니가 아이를 버리고 갔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죽을 것이라고 했다.

가엾고 불쌍한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 새끼를 사랑하는 마음은 미련한 짐승에게도 사라지지 않는데, 가장 영리하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극한 상황이 아니라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길게 탄식할 뿐이다.

며칠 전 양사형에게 들으니 호서 지방에 토적이 크게 일어나 공문까지 돌리며 불손한 말을 많이 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세자가 서울로 돌아가지 못하고 완산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내 가족들은 임천에 있는데 요즘 무사한지 알 수 없다. 걱정이 말할 수 없이 크다.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이런 소식을 들으니 더욱 답답하다.

왜적은 아직 변방의 성을 차지하고 있고 나라 안에서는 토적까지 일어났다. 굶주림은 날로 심해지고 백성들은 하루하루 굶어 죽어 간다. 나 또한 머지않아 구렁에 쓰러져 죽을 것이다. 푸른 하늘이여, 어찌 차마 이럴 수 있는가.

남평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가는 길에 서극철의 집에 들러 말을 먹이고 서공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시 출발했으나 십 리도 못 가 말이 지쳐 더 나아가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남평 오림리의 서원 황대 집에 들어가 따뜻한 방을 빌려 잤다.

1594년 3월 15일 (갑오년 음력 1월 24일)

날이 밝기 전에 출발해 나주 원정리 길가의 민가에서 아침을 먹었다.

붉은 말이 너무 지쳐 십 리도 못 가 서 버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말에서 내려 걸었다. 오늘 안에 구림에 들어가기 어려울 듯해 걱정스럽다.

아침 뒤에는 붉은 말이 더욱 걷지 못해 영암군에서 한참 남은 곳까지 내가 걸어갔다. 먼저 막정을 영암 서문 밖으로 보내 묵을 곳을 알아보게 했다.

나는 막정의 말을 타고 종 두 명을 데리고 해 질 무렵 구림에 도착했다. 어머니를 뵈니 여전히 평안하셨다.

경흠이 자기 방으로 나를 불러 산돼지 삶은 고기를 대접하고 술 두 잔을 마시게 했다. 밤이 깊어 숙소로 돌아갈 수 없어 요월당으로 가 임현 진사와 함께 잤다.

1594년 3월 16일 (갑오년 음력 1월 25일)

하루 종일 요월당에 있으면서 젊은이들이 정투놀이로 승부를 겨루는 것을 보았다.

언명 희철의 종 춘희가 태인에서 돌아왔다. 빌려 간 말이 너무 지쳐 걷지 못해 나주 땅에 버려 두고 왔다고 한다. 언명이 길을 떠나야 하는데 탈 말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걸어서 가야 할 형편이다. 답답하고 안타깝다.

저녁에 막정이 들어왔다. 붉은 말을 집주인 임명수의 말과 바꾸고, 벼 열세 말과 콩 한 말, 정미 여섯 되, 무명 한 필을 더 주었다고 한다. 새 말을 보니 살은 제법 붙어 있었으나 걷는 모양이 힘들어 다리에 병이 있는 듯했다. 그래도 붉은 말보다는 훨씬 낫다. 이번 길에 별일 없이 북쪽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저녁에는 경흠이 우리 형제를 방으로 불러 이야기하며 술 석 잔씩 주었다. 밤이 깊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1594년 3월 17일 (갑오년 음력 1월 26일)

오늘 아침부터 누이 집에서 우리 종들의 밥을 먹여 주지 않기로 해, 우리가 얻어 둔 쌀로 스스로 밥을 지어 먹게 했다.

하지만 양식과 반찬이 부족해 길을 떠나기 전까지 버티지 못할 듯하다. 걱정스럽다.

처음에는 스무아흐렛날 어머니를 모시고 떠나려 했다. 그러나 할 일이 많아 미처 준비하지 못했고, 언명은 내일 태인 처가로 떠나 데리고 간 종을 돌려보낸 뒤에야 출발할 수 있다. 그때까지 기다리면 일정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초하루 뒤로 미루려 하지만 너무 오래 머무르게 되는 듯해 마음이 무겁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594년 3월 18일 (갑오년 음력 1월 27일)

언명이 태인으로 떠났다. 임자중도 나주로 돌아가면서 함께 갔다.

송노에게 씨를 뺀 목화 열두 근 석 냥과 채색한 상자, 참빗 열세 개를 한 자루에 넣어 지고 가게 했다. 언명의 아내가 머무는 집에 맡겨 두려는 것이다.

막정도 신공을 거두기 위해 장흥의 노비들에게 보냈다.

언명이 타고 간 말은 몹시 지쳐 짐을 견딜 수 없으니 길에서 틀림없이 걸어가야 할 것이다. 안타깝다.

자중이 작별 선물로 목화 여덟 근과 흰 닥나무 두 묶음을 주었다. 참으로 고맙다.

이규빈은 어제 들어와 심원 등과 요월당에서 만났다. 규빈은 경흠의 사촌 누이 남편으로, 난리를 피해 영광에 와 머물고 있으며 이곳에도 농장이 있다고 한다.

심원과 자승은 정투놀이로 술과 음식을 걸고 온종일 다투었지만 끝내 승부를 내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무료함을 달래는 놀이 가운데 이만한 것도 없다.

1594년 3월 19일 (갑오년 음력 1월 28일)

아침부터 흐리고 비가 올 기미가 있다. 비가 내리면 언명은 틀림없이 길에서 발이 묶일 것이다. 가진 길양식도 얼마 되지 않아 걱정이다.

우리 모자와 형제가 여러 곳에 흩어져 떠돌고 있는데 형편이 어려워 한곳에서 함께 움직이지도 못한다. 더욱 한탄스럽다.

요월당에 가 여러 사람과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저녁에는 삼촌 집 종 근이가 서울에서 내려왔다. 오는 길에 임천을 지나며 계집종 옥춘을 만났는데, 옥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생원 윤해의 숙소에 횃불을 든 도적들이 들이닥쳐 생원은 몸에 걸친 것 하나 없이 겨우 살아났습니다. 지금은 모두 우리 집에 모여 있습니다.”

놀랍고 한탄스러운 마음을 이길 수 없다. 떠돌며 굶주리는 가운데 또 이런 화를 당했으니 사람의 궁핍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는가.

하늘의 운수에는 좋고 나쁨이 번갈아 온다고 하지만 우리 집은 내가 중년이 된 뒤로 줄곧 운이 막혀 한 해도 편안한 때가 없었다. 이제 그 불행이 극에 달했다. 한탄해도 어쩌겠는가. 하늘의 운에 맡길 뿐이다.

토적들이 사방에서 날뛰며 피해를 주는 지금,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북쪽으로 돌아가도 갈 곳이 없으니 더욱 답답하다. 형편이 그러하니 어쩌겠는가.

근이는 수의 아들이고 양의 아우다. 아버지와 형을 보려고 내려온 것이다.

1594년 3월 20일 (갑오년 음력 1월 29일)

새벽부터 큰비가 내리고 큰바람까지 불어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앞 시내가 크게 불었다.

언명은 반드시 길 한가운데서 머물러 있을 것이다. 내일 비가 갠다 해도 여러 큰 내를 건너야 하므로 쉽게 건너지 못할까 걱정이다. 더구나 진흙길을 걸어 어떻게 돌아오겠는가. 걱정이 끝이 없다.

저녁에 경흠이 자기 방으로 불러 함께 이야기했다. 술 네댓 잔을 마시고 크게 취해 숙소로 돌아왔다.

이웃에 사는 선비 박근이도 내 숙소를 찾아왔다.

1594년 3월 21일 (갑오년 음력 1월 30일)

아침부터 하루 종일 흐렸다.

누이가 숭어를 구해 회를 만들어 나를 불러 대접했다. 추로주 한 잔도 마셨다.

요월당으로 나가 심원, 자승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걸어서 모정에 가 박준, 박근이, 임급과 잠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1594년 3월 22일 (갑오년 음력 2월 1일)

새벽부터 비가 내려 아침에도 개지 않았다. 언명의 일행도 틀림없이 떠나지 못했을 텐데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모르겠다. 양식과 반찬도 다 떨어졌을 것이니 걱정이 더욱 크다.

며칠째 비가 이어져 길은 진창이 되었을 것이다. 초나흗날 어머니를 모시고 출발하기로 마음먹었는데 하늘마저 도와주지 않으니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언명이 데리고 간 종들이 길에서 머물러 있다면 초사흘에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초나흗날 출발도 장담할 수 없다. 하루를 더 머무는 것이 일 년처럼 길게 느껴진다.

저녁에는 심원이 내 숙소를 찾아왔다. 박준 형제도 뒤따라왔다.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두 박씨는 먼저 돌아가고 심원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막정이 장흥에서 돌아왔다. 계집종 무숭에게서 거친 무명 두 필과 들깨 닷 되만 받아 왔다. 무숭의 두 아들은 노를 잘 젓는 군사로 뽑혀 수사의 배에 갔다고 한다. 종 한수는 지난해 병사의 진영에서 병들어 죽었고, 계집종 사금은 남편이 죽은 뒤 어머니를 모시고 도망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한다. 한탄스럽다. 다만 그 말이 반드시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지난밤에는 큰딸이 꿈에 보였고 오늘 밤에는 아내도 꿈에 보였다. 무슨 까닭일까. 돌아올 때가 지났는데도 만나지 못해 걱정이 깊어서일까.

1594년 3월 23일 (갑오년 음력 2월 2일)

날이 흐리고 비가 올 듯했으며 바람도 불었다. 답답하다.

완산에서 치른 무과 뜰시험은 쇠화살 다섯 발을 두 차례 쏘아 두 발 이상 맞히고, 말을 타고 활을 쏘아 한 차례에 두 발 이상 맞힌 사람을 뽑았다고 한다. 모두 천칠백팔십이 명이 합격했고, 이 고을에서도 서른일곱여덟 명이 들었다고 한다.

아직 상중인데 장사를 치르지 못한 사람까지 많이 뽑혔다니 한탄스럽다.

이 사람들은 이달 보름 안에 남원의 충용장에게 모여 점검을 받고 함께 영남의 적을 치러 들어간다고 한다. 충용장은 김덕령이다. 전에는 익호장군이라 했는데 임금이 충용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요즘 우리 종들에게 먹을 것이 없어 누이 집에서 먹여 주니 너무 미안하다. 그래서 더욱 빨리 떠나고 싶지만 비가 이처럼 오고, 언명이 데려간 종들도 제때 돌아올 형편이 아니어서 답답하기 그지없다.

아침을 먹고 나주 판관 이성남이 겸관 자격으로 이 고을에 왔다는 말을 들었다. 경흠·심원과 함께 말을 나란히 타고 들어가 만났다. 환곡을 받게 해 달라고 청하며 경흠 집 종의 이름으로 각자 소장을 올렸다.

심원과 나는 각각 콩 한 섬과 벼 두 섬씩 내어 주라는 처분을 받았다. 또 나에게 콩 두 말과 흰쌀 두 말도 주었다. 종과 말의 양식이 떨어져 걱정하던 참이었으므로 당분간 이어 갈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고맙다.

판관이 우리에게 점심을 대접했다. 해 질 무렵 세 사람이 돌아오니 이미 날이 어두웠다. 막정은 물건을 받는 일이 늦어져 날이 저물어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1594년 3월 24일 (갑오년 음력 2월 3일)

종을 장터에 보내 무명 한 필로 김 예순 첩과 콩 닷 말을 사고, 다시 감태 스물다섯 묶음으로 바꾸게 했다. 호우 지방에서 팔아 먹을 생각이다.

아침밥 뒤 숙소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이웃 박경인·박경행 형제와 박근이가 찾아와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다 흩어졌다.

저녁에는 심원이 찾아왔다가 밤이 깊어 돌아갔다.

오늘부터 종들은 우리가 얻은 양식으로 스스로 밥을 지어 먹게 했다.

1594년 3월 25일 (갑오년 음력 2월 4일)

밤에 이정로와 홍응추를 꿈에서 만났다. 살아 있을 때처럼 반가웠다. 정로는 술에 취해 떠들어 대는 모습까지 생전과 꼭 같았다.

두 사람은 모두 나와 친하게 지내던 이들인데 몇 해 전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평소 함께 어울리던 일을 떠올릴 때마다 늘 슬펐는데 오늘 밤 꿈을 꾸니 더욱 비통하다.

밥을 먹고 요월당으로 가 자중 임탁, 심원, 응문, 자승 임현 등과 이야기했다.

오후에는 이웃 박경인 형제와 선전관 유형, 새로 급제한 박형도 왔다. 유형은 경흠의 사촌으로 완산의 시험에도 합격했으며, 외가 산소에 성묘하러 온 것이다.

며칠 전 나주 판관에게 청해 받은 환곡에 대해 경흠은 내가 가을에 갚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벼 열 말과 콩 석 말만 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쓰겠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받은 콩과 벼의 절반으로 무명을 사서 이곳에 맡겨 두었다가 가을에 팔아 환곡을 갚고, 나머지 절반으로 목화를 사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답답하다.

요즘 이곳은 곡식이 비싸고 무명이 싸다. 거친 무명 한 필에 쌀 두 되, 콩은 석 되 정도다. 쌀 한 말이면 목화 열몇 근, 어떤 이는 열다섯여섯 근까지 살 수 있다고 한다. 일곱 새짜리 좋은 무명 한 필은 쌀 한 말 네댓 되를 받는다고 한다.

언명이 데려간 종들이 오늘도 오지 않았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니 걱정스럽다.

1594년 3월 26일 (갑오년 음력 2월 5일)

지난밤 여인 형제가 꿈에 생전 모습 그대로 보였다. 무슨 까닭일까.

동남풍이 하루 종일 세차게 불었다. 큰비가 올 징조가 분명하니 내일 떠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더구나 언명이 데려간 종들도 아직 들어오지 않아 걱정이 더욱 크다. 전날 자중에게 들으니 언명이 비 때문에 나주 양산룡 생원 집에서 하루 묵었다고 한다. 그 뒤에도 틀림없이 길에서 지체된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지금까지 오지 않겠는가.

밥을 먹고 요월당에 가 자중, 심원, 응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중은 먼저 나가 군내 검길의 둑 쌓는 곳으로 가 농사일을 감독했다.

저녁에는 심원이 찾아왔다가 밤이 깊어 돌아갔다.

1594년 3월 27일 (갑오년 음력 2월 6일)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많이 오지는 않았지만 아침에도 개지 않고 사방이 흐렸다. 며칠 안에는 개지 않을 듯해 몹시 걱정스럽다.

어제 저녁 누이가 나에게 다음을 주었다.

감태 열 묶음

은붕어 세 묶음

표고 한 되

찹쌀 한 되

버선 한 켤레

임자승도 버선 한 켤레를 주었다.

또 쌀 여섯 되, 김 스물다섯 첩, 콩 네 되로 한 덩이를 만들고 김 한 말을 사 왔다. 응문도 내게 좋은 무명 한 필을 주었다. 그 역시 피란살이 중인데도 나를 생각해 주니 그 후한 뜻이 참으로 고맙다.

자중이 검길에서 편지를 보내며 낙제 열다섯 개도 보냈다. 역시 고맙다.

저녁에 춘희와 송노가 들어왔다. 언명의 편지를 보니 길에서 비 때문에 이틀을 머물렀고, 처남의 말 한 마리도 길에서 죽었다고 한다. 안타깝다.

짐을 꾸렸다. 내일 비가 오지 않으면 반드시 출발할 생각이다.

저녁에 심원이 찾아왔다. 누이에게 술을 부탁해 한 병을 얻어 오고, 자중이 보낸 낙제를 안주로 삼아 각자 세 잔씩 마셨다. 두 집 주인에게도 한 잔씩 주고 밤이 깊어 헤어졌다.

1594년 3월 28일 (갑오년 음력 2월 7일)

이른 아침 경흠이 먼저 나주로 돌아갔다.

나는 늦게 어머니를 모시고 길을 나섰다. 어머니와 누이가 헤어지며 서로 붙잡고 통곡했다. 인정이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영암군 앞에 이르렀을 때 내가 탄 말이 진흙 도랑에 발이 빠져 갑자기 논바닥에 넘어졌다. 내 왼발도 물에 빠졌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왔는데 버선이 온통 더러워졌다. 우스운 일이다.

그 뒤로는 걷기도 하고 말을 타기도 하며 어렵게 나주 모산촌의 선비 유숙 집에 도착했다.

유공은 따뜻한 방을 내주고 땔감과 말먹이를 넉넉히 주었다. 술과 안주, 콩죽까지 보내 주었다. 참으로 고맙다.

오늘은 북풍이 크게 불어 찬 기운이 살을 뚫었다. 어머니가 이 때문에 몸이 편치 않아 저녁밥을 드시지 못하고 콩죽만 조금 드셨다. 팔과 다리도 뻣뻣한 듯하다고 하시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경흠이 올 때 유공을 먼저 찾아가 우리가 올 뜻을 말해 두었기 때문에 이렇게 후하게 대접한 것이다. 경흠이 먼저 나주로 간 것은 성문 단속이 매우 엄하기 때문에 목사에게 미리 알리고 문을 열어 우리를 들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저녁에 집주인 유공을 찾아가 보았다.

1594년 3월 29일 (갑오년 음력 2월 8일)

어머니의 기운이 조금 나아진 듯했다. 묵은 곳에서 아침밥을 지어 먹고 출발했다.

오늘은 날이 좋고 바람도 잦아들어 다행이다. 늦게 다시 바람이 일기는 했지만 어제만큼 세지는 않았다.

신안관에 이르러 말을 먹이고 흰죽을 끓여 어머니께 드렸다.

조금 뒤 최심원이 나주에서 지나가다가 들어와 어머니를 뵙고 떠났다. 며칠 전 경흠과 함께 와 임회의 어머니 상에 조문하고 오늘 구림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해 질 무렵 나주에 도착했다. 성문 안 박 참판 집 계집종의 집에 들어가 묵었다. 경흠과 목사가 금성산 성 쌓는 곳에 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가지고 온 물건으로 저녁을 지어 먹었다.

날이 저물어서야 경흠이 들어왔다. 목사가 이미 우리 일행의 식사를 내주라고 명했는데 아랫사람들이 주지 않아 목사가 화를 내며 벌을 주었다고 한다.

경흠과 함께 만복의 집에서 밥을 지어 먹고 잤다.

어제 묵었던 집주인은 유영덕 몽익의 아들이라고 한다. 아침에 떠날 때도 찾아가 작별했다.

1594년 3월 30일 (갑오년 음력 2월 9일)

목사가 경흠의 부탁을 받아 우리에게 다음을 내주었다.

흰쌀 석 말

정미 닷 말

콩 닷 말

단장 한 말

짠장 두 되

청주 닷 홉

기름 한 되

새해 뒤로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 성문을 엄하게 단속하고 씀씀이도 몹시 아끼는 형편이라 이 정도만 준 것이다. 길양식이 모자라 걱정스럽다.

정미 닷 말 닷 되를 다시 찧으니 넉 말 닷 되가 되었다. 이를 노비들에게 사흘치 양식으로 나누어 주어 각자 지고 가게 했다. 짐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판관은 마침 밖에 나가 있어 길에서 먹을 반찬을 얻지 못했다. 아쉽다.

늦게 출발했다. 말이 지쳐 자꾸 드러눕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주 땅 등정리 양 목사의 아들 생원 양산룡의 집에 들어가 묵었다.

양공은 경흠의 친구다. 어제 성 쌓는 곳에 목사를 찾아왔다가 경흠과 만나 우리 사정을 미리 들었으므로 말을 먹일 풀을 마련해 주고 우리 모자에게 저녁밥까지 차려 주었다. 참으로 고맙다.

오후부터 남풍이 불어 해 질 때까지 멎지 않았다. 하늘도 흐려 비가 올 듯하니 몹시 걱정스럽다.

저녁에 주인 양공을 찾아가 잠깐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1594년 3월 31일 (갑오년 음력 2월 10일)

밤부터 비가 내렸다. 크게 쏟아지지는 않았지만 하루 종일 이어져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머물렀다.

길양식이 부족해 종들은 아침에 일곱 홉씩 먹고 저녁에는 죽을 쑤어 나누어 먹었다. 내일까지 개지 않아 다시 머물게 된다면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곤란해질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앞길에는 큰 강을 건너야 하는 곳이 많다. 이렇게 몹시 둔한 말을 데리고 이토록 험한 길을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가야 하니 어찌 걱정되지 않겠는가.

저녁에 다시 집주인을 만나고 돌아왔다.

1594년 4월

1594년 4월 1일 (갑오년 음력 2월 11일)

날이 개었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출발해 광주 땅 선비 박경의 집 앞에서 아침을 먹었다. 경흠의 편지를 전하니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김치와 말먹이도 보내 주었다. 나도 그 집에 들러 박공을 만났다.

장성에 이르니 해가 이미 기울었다. 관인 손천종의 집에 들어가 묵었다.

수령 옥여 이귀는 지난달 군사를 거느리고 충용장 김덕령과 함께 이미 영남으로 떠났다고 한다. 관아에는 찰방 이여인과 그 아우 이여경이 있었다. 곧 들어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자 조익도 사가에 있어 불러 만나고 돌아오니 밤이 깊었다.

수령이 없으니 관청에서 양식을 얻지 못해 길양식이 바닥났다. 걱정스럽다.

관아의 명으로 윗방 몫 두 사람분과 종 두 명, 말 두 필의 양식을 문서로 내주게 했다.

오늘 사면문도 보았다. 역적 송유진 등 여덟 명을 죽인 뒤 나라 안에 은혜를 베푼다는 내용이었다. 유진은 통사 송대춘의 아들이라고 한다. 또 전국에 애통해하는 교서도 내렸다.

영암에서 데리고 온 사람 한 명은 내일 돌려보낼 예정이라 누이에게 보낼 편지를 밤에 등불을 밝히고 써 맡겼다.

1594년 4월 2일 (갑오년 음력 2월 12일)

날이 밝기 전에 흰죽을 끓여 어머니께 드리고 해가 뜨기 전에 출발했다.

노령 아래 군영에서 아침을 지어 먹고 걸어서 노령을 넘었다. 천원역을 지나 정읍 땅에 이르러 길가에서 말을 먹이고 다시 출발했다.

고부로 들어가는 길에서 언명 희철이 마중을 나왔다.

고부 소정리의 내금위 김광필 집에 묵었다. 광필은 언명의 아내와 사촌이다. 언명의 장인 김철도 와 있었다.

나는 언명과 함께 김공이 묵는 곳에서 잤다.

밤에는 자미 이윤이 생전 모습 그대로 꿈에 나타났다. 슬픔을 이기기 어려웠다.

1594년 4월 3일 (갑오년 음력 2월 13일)

집주인이 우리 모자 세 사람에게 아침밥을 대접했다.

늦게 출발해 태인 동촌면 칠전리, 언명의 처조카 김담수가 사는 마을로 갔다. 권 좌수 서의 집 뒤에 있는 몇 칸짜리 초가에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들었다. 비바람만 겨우 피할 수 있는 집이다.

고향에서 천 리나 떨어진 곳인데 둘러보아도 의지할 친척 하나 없다. 자식 된 마음이 어떻겠는가. 슬픔을 이길 수 없다.

가지고 온 양식은 쌀 예닐곱 말뿐이고 그 뒤를 이을 길이 없다. 더욱 걱정스럽다.

나는 내일 임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며칠 더 머물고 싶지만 양식이 없어 그럴 수도 없다. 더욱 한탄스럽다.

1594년 4월 4일 (갑오년 음력 2월 14일)

아침밥 뒤 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가 슬피 우시며 그치지 않으셨고 나도 눈물이 소매를 적시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타향을 떠돌면서도 모자가 한곳에서 살 수 없으니 형편이 그렇다 해도 어찌 서럽지 않겠는가.

금구에 이르러 말을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금구현 앞을 지나 김제 동면 어이촌의 동해 점장이 집에 들어가 묵었다. 말이 지쳐 더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길에서 굶어 죽은 시체 하나를 보았다. 거적을 덮어 놓았는데 곁에 두 아이가 앉아 울고 있었다.

물어보니 그 시체는 아이들의 어머니로, 어제 병들고 굶주려 죽었다고 했다. 묻어 주고 싶어도 힘이 없어 시체를 옮기지 못하고 땅을 팔 도구도 없다고 했다.

잠시 뒤 한 여자가 바구니를 들고 호미를 메고 지나갔다. 두 아이는 저 호미를 빌릴 수만 있다면 흙을 파 어머니를 묻을 수 있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가슴 아픈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이뿐이 아니다. 길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서로 이어져 하루에 몇 구를 보았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가엾은 우리나라 백성들은 전쟁의 칼날 아래 죽고 또 흉년까지 겪고 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은 때로 뒤덮인 채,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며,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끌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길에 끊이지 않는다. 이제 한 사람도 남지 않을 지경이다.

푸른 하늘이여,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게 했는가. 길게 탄식할 뿐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1594년 4월 5일 (갑오년 음력 2월 15일)

새벽빛이 밝을 때 출발해 석탄에 이르러 배를 타고 여울물을 건넜다.

이 물은 전주 위 여러 고을의 골짜기 물이 삼례역 앞에서 합쳐져 바다로 들어가는 물줄기다. 여울 남쪽은 김제, 북쪽은 전주 땅이다.

여울가 민가에서 말을 먹이고 아침을 먹었다. 옥야창을 지나 함열에 도착했는데 그제야 수령 신응구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몹시 허탈했다.

길양식과 반찬을 모두 이곳에 기대고 있었는데 쌀은 이제 석 되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으로 일행의 밥을 지어 먹었다.

1594년 4월 6일 (갑오년 음력 2월 16일)

날이 밝기 전에 출발해 현 안 남궁 지평의 농촌에 이르러 안사눌 민중을 만났다.

난리 뒤로 오래 만나지 못했는데 오늘 다시 보니 참으로 반가웠다.

남궁 지평도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곧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일행 모두의 아침밥을 차려 주었다. 또 나를 안방으로 불러 정성스럽게 인사했다. 병을 앓아 사람을 만나지 않은 지 오래였는데도 내가 오자 곧 안방으로 불러 주었다. 예전에 한마을에 살며 매우 가깝게 지냈기 때문이다. 안민중은 남궁 지평의 사위다.

다시 출발해 남당진에서 배를 타고 북쪽 언덕으로 건넜다. 잠깐 쉬며 말을 먹이고 곧장 숙소로 달려갔다.

아내와 자식들이 탄식하며 맞아 주었다.

다만 집안 사람들이 학질을 앓아 벌써 여러 차례 발작했다고 하니 걱정스럽다.

곧 사람을 보내 충아와 의녀를 데려와 보았다. 충아는 이제 잘 걷고 달리기도 해 위로가 되었다. 다만 나를 낯설어하며 가까이 오지 않았는데, 오래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1594년 4월 7일 (갑오년 음력 2월 17일)

밥을 먹고 나니 윤해의 양어머니와 충아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저녁때 돌아갔다.

요즘 양식이 없어 집안 식구들은 늘 콩죽으로 끼니를 이어 간다. 콩마저 거의 떨어졌다. 한탄해도 어쩔 수 없다.

늦게 송노에게 김과 감태를 들려 조 한림 희보 삼형제와 소즐에게 나누어 보내게 했다. 집주인과 가까운 이웃들에게도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김대성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조 한림에게 말먹이 열 묶음을 빌렸고, 김대성도 다섯 묶음을 보내 주었다.

1594년 4월 8일 (갑오년 음력 2월 18일)

아침 전에 종들에게 집 북서쪽 곁에 변소를 만들게 했다.

밥을 먹은 뒤에는 종 네 명에게 소나무 껍질을 벗겨 오라고 했다. 종들이 먹을 것을 조금이라도 보태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종들은 힘을 다하지 않고 각자 몇 움큼밖에 가져오지 않았다. 몹시 밉고 화가 난다.

1594년 4월 9일 (갑오년 음력 2월 19일)

수령 송응서를 만나려고 이른 아침 고을로 들어갔지만, 수령은 이미 사창에 나가 환곡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일이 어수선해 내 이름을 알리지 못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윤해의 숙소에 들렀다.

하루 종일 흐렸고 비가 흩뿌리며 바람도 불었다.

방수간이 찾아왔다.

1594년 4월 10일 (갑오년 음력 2월 20일)

한밤중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 처마에서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늦은 오후에야 개었다.

방수간, 백몽진, 문경인이 찾아와 하루 종일 함께 바둑을 두다가 흩어졌다.

문경인은 이웃에 사는 교생인데 전에는 오지 않다가 오늘 처음 찾아왔다.

1594년 4월 11일 (갑오년 음력 2월 21일)

방수간이 찾아와 함께 바둑을 두었다.

1594년 4월 12일 (갑오년 음력 2월 22일)

새벽에 비가 내렸고 아침에도 개지 않았다. 늦게야 해가 났다.

방수간이 찾아와 하루 종일 바둑을 두고 돌아갔다.

종을 유선각에게 보내 말먹이를 구하게 했더니, 이 집 근처에 있는 함께 농사짓는 사람이 쌓아 둔 풀 스무 묶음을 주게 했다. 이것으로 닷새나 엿새는 말을 먹일 수 있겠다.

요즘 윗집과 아랫집 모두 양식이 바닥났다. 죽이나 풀뿌리조차 제대로 이어 먹지 못한다. 어른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이들이 너무 굶주려 차마 볼 수가 없다. 슬프고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하늘의 뜻에 맡길 뿐이다.

1594년 4월 13일 (갑오년 음력 2월 23일)

이른 아침 종을 결성의 참봉 윤겸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또 양식을 구하려고 막정을 함열로 보냈다.

함열 수령 신응구는 윤겸과 매우 친한 벗이지만 나와는 본래 친척도 아니고 예전에 사귄 사이도 아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보다 우리 집을 훨씬 후하게 돌봐 준다. 한 달 사이에 두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 먹을 것을 구했는데도 조금도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집 열 식구의 목숨이 오로지 그에게 달려 있으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겠는가. 그저 마음속으로 고맙게 여길 뿐이다.

내가 남쪽에서 돌아와 처음 들은 이야기다.

기대수 부부가 직접 짐을 지고 이고 두 자녀를 데리고 이달 초 영동에서 떠나 여러 곳을 떠돌며 구걸하다가 우리 집이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하룻밤 묵고 갔다고 한다. 옷이 해지고 남루해 평민과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하니 참혹하고 가엾다.

기대수는 내 사촌형 남자순의 사위다. 경상도 개령에 살며 재산이 넉넉해 평소 호화롭게 산다고 소문난 집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난리를 만나 집안 재산이 모두 사라지고 노비들도 흩어져 스스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남쪽으로 떠돌아 내려와 한산 수령 신경행에게 의지하려 했다는데, 한산 수령이 그의 동접 벗이라고 한다.

그때 우리 집도 먹을 것이 없어 죽만 먹는 형편이어서 그들 역시 죽 한 그릇 먹고 돌아갔다고 한다. 참으로 한탄스럽다.

오늘 아침은 양식이 없어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 콩을 조금 섞어 쪄서 집안사람 모두 나누어 먹었다.

나만 쌀 일곱 홉으로 밥을 지어 손자 둘과 단녀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탄해도 어쩔 수 없다.

방수간이 찾아와 바둑을 두고 돌아갔다.

1594년 4월 14일 (갑오년 음력 2월 24일)

생원 윤해의 종 안손이 지난밤 어머니를 데리고 달아났다고 한다. 몹시 괘씸하다.

아침밥도 완전히 떨어져 이웃에게 쌀 두 되를 빌렸다. 그중 일곱 홉은 생원 집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죽을 쑤어 나누어 먹었다.

방수도가 찾아와 바둑을 두고 갔다.

저녁에 막정이 돌아왔다. 함열 수령이 보내 준 물건은 다음과 같다.

벼 한 섬

밀가루 한 말

막장 두 말

소금 닷 되

요즘은 늘 소나무 껍질을 섞어 흰죽을 쑤어 온 집안이 함께 먹고 있다. 소금조차 이어 쓰기 어려웠는데 이제 닷 되를 얻었다. 아침저녁으로 죽에 넣어 먹고 아랫집에도 나누어 주려 한다.

근래에는 소금 없이 먹는 탄식까지 하게 되었으니 우리 살림이 참으로 가엾다.

1594년 4월 15일 (갑오년 음력 2월 25일)

아침부터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저녁에는 큰바람까지 불었다.

말먹이도 떨어졌다. 걱정스럽다.

생원 집에서 말먹이 여덟 묶음을 가져왔다.

1594년 4월 16일 (갑오년 음력 2월 26일)

오후에 수령 송응서를 만나려고 고을로 들어갔다.

수령이 이미 관청에 나와 있어 곧 이름을 알렸다. 수령이 나를 불러 만나 주었다.

마침 수령의 아들 진사 송이창이 회덕에서 들어와 있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에게 화전을 대접하고 저녁밥도 주었다.

나는 환곡을 받고 싶다는 뜻과 둔답을 경작하고 싶다는 계획을 이야기했다. 수령은 모두 어느 정도 허락하는 듯했지만 분명하게 승낙하지는 않았다. 아쉽다.

1594년 4월 17일 (갑오년 음력 2월 27일)

오후부터 비가 내려 하루 종일 이어졌고 밤까지 그치지 않았다. 새벽녘에야 개었다.

1594년 4월 18일 (갑오년 음력 2월 28일)

함열에서 일부러 사람을 보내 흰 물고기 한 동이를 보냈다. 고마움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쌀이 없어 밥을 지어 함께 먹지도 못하니 한탄스럽다.

내일은 외할머니 제삿날인데 모르고 흰 물고기국을 먹어 버렸다. 우스운 일이다.

1594년 4월 19일 (갑오년 음력 2월 29일)

백몽진과 문경인이 찾아와 바둑을 두고 돌아갔다.

어제 송노를 정산으로 보냈지만 정산 수령이 마침 없어서 빈손으로 돌아왔다. 온 집안이 오직 양식을 얻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끝내 허탕을 치고 돌아오니 한탄스럽다.

1594년 4월 20일 (갑오년 음력 3월 1일)

이웃에 사는 이등귀가 찾아왔다. 나와 나이가 같은 사람이다.

막정을 석성으로 보내 윤겸에게 편지를 전하게 했다.

먹을 것이 거의 없어 소나무 껍질로 끼니를 이었다. 내 두 아들은 콩죽 반 사발씩 겨우 먹었고, 아내와 세 딸은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둘째 딸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쓰러졌다가 나물국을 조금 마시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저녁에 쌀 한 되를 겨우 구해 나물을 넣어 죽을 쑤어 먹였다. 아이들이 굶주리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다.

막정이 돌아와 말하기를, 석성에서 편지를 받아 주지 않아 윤겸에게 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1594년 4월 21일 (갑오년 음력 3월 2일)

정산 수령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송노를 다시 보냈다.

평택 사람 이경담 희서가 이곳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수락헌으로 찾아가 만났다. 피란과 굶주림에 얼굴빛이 너무 상해 처음에는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송이창도 와 있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에 말아 먹는 밥을 내주어 먹었다.

1594년 4월 22일 (갑오년 음력 3월 3일)

굶주림이 심해 화정을 함열로 보냈다.

김대성, 방수간, 백몽진, 문경인이 찾아왔다. 함께 바둑을 두었다.

오후에는 윤함이 학질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갔다.

저녁에는 먹을 것이 콩뿐이었다. 간직해 두었던 찰기장과 쌀 닷 홉을 바꾸어 죽을 쑤어 먹었다. 종들도 굶주리고 있다.

오늘은 봄놀이를 하는 명절인데, 전에 빚어 둔 흰술 한 병이 맛이 없어 먹을 수 없기에 엿기름과 바꾸었다. 그래도 술 한 잔을 마시니 답답한 마음이 조금 풀렸다.

송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1594년 4월 23일 (갑오년 음력 3월 4일)

소나무 껍질에 쌀가루 반 되를 섞어 쪄 주니 아이들이 달게 먹었다.

막정이 함열에서 돌아왔다. 함열 수령이 보내 준 것은 다음과 같다.

흰쌀 두 말

정미 석 말

콩 닷 말

소금 한 말

흰 물고기 젓 다섯 묶음

굶주리던 가운데 양식과 반찬을 얻으니 참으로 기뻤다.

정산에 보냈던 송노도 돌아왔다. 김장생이 거친 쌀 넉 말, 쌀 한 말, 목미 한 말과 장 한 말을 보내 주었다. 다만 답장은 오는 길에 잃어버렸다고 한다.

함열 수령의 아내가 오늘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도 들었다.

1594년 4월 24일 (갑오년 음력 3월 5일)

진사 윤해가 찾아왔다가 차가운 마루에서 묵었다.

윤함은 새벽에 학질을 피해 나갔다.

방수간과 문경인 등이 찾아왔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는데 빗물에 흙빛이 섞여 붉게 보였다.

관아에서 구휼미 두 섬을 받았다. 기대했던 것보다 적었다. 아전들에게 뇌물을 써야 제대로 받을 수 있으니, 정식으로 청해서는 얼마 나오지 않는다.

윤해의 집에도 한 섬이 나왔다.

종들에게 소나무 가지를 베어 울타리를 만들게 했다.

윤함은 병세가 가볍다고 한다.

1594년 4월 25일 (갑오년 음력 3월 6일)

울타리를 계속 만들었다.

김대성이 단장 조금과 파와 마늘을 보내 주었다.

몇 이랑 되는 남의 텃밭을 빌려 세 가지 채소 씨를 뿌렸다.

송이창을 통해 이등귀 집의 말먹이 스무 묶음을 얻었다.

1594년 4월 26일 (갑오년 음력 3월 7일)

윤함이 다시 학질을 피해 나갔다.

덕노, 송노, 막정을 보내 둔답을 손보게 했다.

조윤공과 신경유를 찾아보고 윤해의 아내와 아이들도 만나 보았다.

윤함의 병세는 나아졌다.

조 좌수가 간단한 점심을 대접했다.

1594년 4월 27일 (갑오년 음력 3월 8일)

송노를 함열로 보내 수령 아내의 상에 조문하게 했다. 이어 전주에 있는 송영구에게 가서 관찰사에게 구휼곡을 청할 수 있는 편지를 받아 오라고 했다. 관찰사는 송영구 아내의 외삼촌이라고 한다.

1594년 4월 28일 (갑오년 음력 3월 9일)

윤함이 내일 서쪽으로 떠난다고 하여 길 떠날 준비를 했다.

우계 성혼에게 답장을 썼다. 또 고성 쪽 친척에게도 편지를 썼다. 남상문이 옹진에 있는데 윤함 처가와 가까우므로 소식을 전하려 한 것이다.

1594년 4월 29일 (갑오년 음력 3월 10일)

윤함이 덕노와 막정을 데리고 떠났다.

먼저 결성에 가 형을 만나고, 대흥에서 길양식을 마련한 뒤 수원과 안산, 강화와 교동을 거쳐 강을 건너 연안과 해주로 갈 계획이다.

윤함은 지난해 음력 2월 25일, 내가 죽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온 뒤 지금까지 열다섯 달이나 머물렀다. 오늘 헤어지니 눈물이 났다.

아이 둘과 함께 언덕에 올라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봄꽃은 한창인데 사람 사는 형편은 쓸쓸하고 굶주림뿐이다.

김대성, 백몽진, 문경인이 찾아왔다.

비가 조금씩 내려 윤함의 길이 걱정스럽다.

1594년 4월 30일 (갑오년 음력 3월 11일)

비가 내렸다.

윤함이 가진 길양식은 이틀치밖에 되지 않는다. 비에 막혀 길에서 머물면 어찌할지 걱정스럽다.

아내가 장에 내다 팔려고 쌀떡을 만들었으나 비 때문에 가지 못했다. 결국 집안사람들이 먹어 버렸다. 쌀 닷 되를 이렇게 써 버렸으니 아깝다.

1594년 5월

1594년 5월 1일 (갑오년 음력 3월 12일)

밤에 꿈을 꾸었다.

임금이 행차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귀가 평소 사람보다 크게 보였다. 꿈속에서 나는 ‘나라를 다시 일으킬 임금의 모습인가’ 하고 생각했다.

어쩌다 궁궐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임금이 나를 부르셨다. 나는 제대로 된 관복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행전을 빌려 차고 들어갔다.

궁궐은 생각보다 검소했고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는데 왕자들인 듯했다. 임금은 평상복 차림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고 덮고 있던 비단 이불도 해져 있었다.

임금이 내게 글을 배웠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젊을 때 조금 배웠으나 오래전에 그만두었다고 대답했다.

또 어디 사느냐고 물으셔서 성균관동 벽송정 근처이며 장인은 전 문천군수였다고 말씀드렸다. 임금은 그곳이 가까운 곳이라고 하셨다.

꿈이 너무 또렷해 이상한 징조가 아닐까 싶어 기록해 둔다.

아침밥 뒤 고을로 들어가 송응서를 만나려 했으나 일이 많아 만나지 못했다.

동송동으로 가 조희설과 조희철을 만났다. 술을 대접받았다.

조희윤의 집에서는 조희보와 정응창을 만나 식사까지 했다. 돌아오는 길에 소즐에게 들렀으나 집에 없었다.

1594년 5월 2일 (갑오년 음력 3월 13일)

성덕린이 찾아왔다.

저녁에는 윤해와 함께 김대성 집 울타리 곁 나무 아래에 가 앉아 이야기했다.

양식이 다 떨어져 저녁에는 흰죽 반 사발밖에 먹지 못했다.

송노를 다시 함열로 보내 먹을 것을 구하게 했다. 계속 손을 벌리는 일이 부끄럽지만 달리 방도가 없다.

둔답에 뿌릴 볍씨로 관아에서 받은 벼 다섯 말은 거칠고 좋지 않다. 수령에게 다시 청해야 하지만 탈 말조차 없다.

누에가 깨어나 한 장쯤 되었다.

1594년 5월 3일 (갑오년 음력 3월 14일)

송노가 함열에서 돌아왔다.

신응구가 다음을 보내 주었다.

정미 한 섬

밀 열 말

메주장 두 말

찹쌀 넉 되

생선 한 묶음

굶주림 끝에 쌀과 생선을 얻으니 살 것 같다. 윤해 집에도 일부 나누어 보냈다.

비가 내렸다.

1594년 5월 4일 (갑오년 음력 3월 15일)

수령을 만나려고 했으나 일이 많아 들어가지 못했다.

린아와 단녀를 데리고 산에 올라 고사리를 꺾었다.

김대성이 찾아왔다.

춘희가 진위에서 돌아왔다. 윤해 아내의 아버지 최경수가 전염병을 앓았으나 회복했다고 한다.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의 명단을 들었다.

박동열

민유경

허균

최계옥

조응문

민여신

성계선

이순민

성진선

황민중

박원

정곡

박동망

모두 열세 명이라고 한다.

아내는 이가 아파 왼쪽 뺨과 입술까지 부었다.

1594년 5월 5일 (갑오년 음력 3월 16일)

아내의 부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김대성과 이등귀에게 소를 빌려 밭을 갈았다. 비가 올 듯해 서둘렀다. 밭은 갈았지만 이랑을 제대로 만들지는 못했다.

관아에서 받은 볍씨는 쭉정이가 많아 까부르고 나니 두 말 석 되밖에 남지 않았다. 함열에서 얻은 벼 석 말을 더 보태려 한다.

씨를 뿌리고 나면 먹을 곡식이 거의 남지 않는다.

아내가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학질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1594년 5월 6일 (갑오년 음력 3월 17일)

사람들을 시켜 밭일을 계속했다.

윤해의 아내와 아이들을 찾아보았다.

함열에서 사람을 보내 소금에 절인 조기 두 묶음을 보내 주었다. 고맙다. 하지만 함께 먹을 쌀이 없다.

밭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찬바람까지 분다.

1594년 5월 7일 (갑오년 음력 3월 18일)

밭일을 마쳤다. 볍씨 다섯 말을 뿌렸지만 땅이 반 마지기쯤 남았다.

구휼용 볍씨를 더 받으려고 했으나 관청 문지기가 가로막아 들어가지 못했다. 전에 윤해가 아전들의 부정을 말한 뒤부터 아랫사람들이 우리를 막는 듯하다.

밤에는 정로를 꿈에서 보았다.

1594년 5월 8일 (갑오년 음력 3월 19일)

단녀와 둘이 정투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1594년 5월 9일 (갑오년 음력 3월 20일)

환곡 쌀을 우리 부자가 한 섬씩 받았다. 실제로 되어 보니 열세 말쯤이었다. 이것으로도 사나흘밖에 버티지 못한다.

아내가 학질을 앓기 시작했다.

1594년 5월 10일 (갑오년 음력 3월 21일)

김대성, 문경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옥여 이귀가 이곳으로 온다는 말을 들었지만 오늘은 도착하지 않았다.

1594년 5월 11일 (갑오년 음력 3월 22일)

옥여를 만났다. 임천 수령도 함께 왔다.

이중영, 홍사고, 전 양지 수령 남대현, 김존경도 있었다.

남대현은 전쟁에서 세운 공이 있어 지금 김덕령을 보좌하고 있다고 한다. 김존경은 격문을 짓는 일을 맡고 있다.

그들은 조정과 행재소에 올라가 급한 일을 아뢰려 한다고 했다.

옥여가 나에게 쌀 두 말과 콩 닷 되를 주었다. 그중 쌀 닷 되는 윤해에게 나누어 주었다.

김덕령은 지금 함안에 있다고 한다.

그의 별장 최강은 군사 마흔여 명을 데리고 고성에서 적 아흔 명가량을 죽이고 네 명의 머리를 베었다고 한다. 뒤에는 창원에서도 스무 명 남짓을 죽이고 한 명의 머리를 베었다.

김덕령이 성을 직접 치려 했으나 적의 수가 많고 밤이 깊어 참았다. 다만 칼을 휘두르며 위세를 보이자 적이 물러났다고 한다.

최강은 남원 사람으로 힘이 매우 세다고 한다.

1594년 5월 12일 (갑오년 음력 3월 23일)

송노를 청양으로 보냈다.

윤함과 윤겸에게서 소식이 없어 걱정이다.

새해부터 우리 집은 계속 죽으로만 연명하고 있다. 요즘은 소금과 장마저 떨어져 나물 넣은 묽은 죽 반 사발로 끼니를 때울 때가 많다. 아이들이 굶주려 견디지 못한다.

나는 따로 쌀 일곱 홉으로 밥을 지어 먹지만 막내딸에게 조금씩 나누어 준다.

1594년 5월 13일 (갑오년 음력 3월 24일)

백몽진이 말먹이 풀 아홉 묶음을 가져왔다. 전에 약속한 마흔 묶음 가운데 일부다.

어머니 소식도 오래 듣지 못했다. 길양식이 없어 사람을 보낼 수도 없다.

아내는 학질을 앓았다.

1594년 5월 14일 (갑오년 음력 3월 25일)

김대성과 함께 연못에 그물을 쳐 물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하나도 잡지 못했다.

조희보가 쌀 한 말, 단장 한 사발, 조기 한 묶음을 보내 주었다.

1594년 5월 15일 (갑오년 음력 3월 26일)

함열에서 흰 물고기 젓 석 되를 보내 주었다.

송영구가 사신으로 지나간다기에 수락헌으로 가서 만났다.

이웃 백광염의 집에 불이 나 모두 타 버렸다고 한다.

시장에서 쌀 넉 되를 주고 칼과 쇳조각, 떡 세 개를 샀다.

태인으로 돌아가는 한 생원에게 어머니께 드릴 편지를 맡겼다.

1594년 5월 16일 (갑오년 음력 3월 27일)

전라도의 군관 유대경이 왔다. 쌀 한 말, 콩 한 말, 말린 조기 세 마리를 주었다. 사실은 송영구가 부탁해 준 것이라고 한다.

송영구가 묵는 곳을 찾아가 함께 바둑을 두었다.

1594년 5월 17일 (갑오년 음력 3월 28일)

비가 내렸다.

송영구를 다시 찾아갔다.

윤해가 학질을 앓았다. 그의 아내는 병이 나아졌다.

1594년 5월 18일 (갑오년 음력 3월 29일)

송영구가 돌아갔다.

세 딸을 데리고 산에 올라 나물을 뜯었다.

먹을 것이 없어 춘희를 함열로 보냈다.

쌀이 없어 생선을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다.

1594년 5월 19일 (갑오년 음력 3월 30일)

정오 무렵 천둥이 치고 바람과 비가 크게 일었다.

먹을 것이 없어 회화나무 잎과 콩가루를 섞어 국을 끓였다. 하루 종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다. 아이들이 너무 굶주렸다.

춘희가 오기를 기다리다 못해 쌀 한 되를 빌려 죽을 쑤었다.

그 뒤 춘희가 돌아왔다. 함열에서 보내 준 것은 다음과 같다.

가미 두 말

콩 석 말

밀 닷 말

정미 여덟 말

소금에 절인 생선 한 묶음

소금 닷 되

흰 물고기 젓 한 단지

1594년 5월 20일 (갑오년 음력 4월 1일)

벼 한 말을 주고 큰 조기 두 마리를 사서 먹었다.

방수간이 찾아와 함께 바둑을 두었다.

윤해가 학질을 앓았다. 그의 아내는 이제 완전히 나았다.

1594년 5월 21일 (갑오년 음력 4월 2일)

명복을 전주 송영구에게 보냈다.

임진년 피란 때 우리 집에서 보낸 군량이 한산에 묶여 전해지지 못했던 일이 있어 그 사실을 확인하는 글을 받아 오게 하려는 것이다.

이예실이 찾아왔다.

조유한에게서 윤겸이 아프다는 말을 들었다. 걱정스럽다.

환곡으로 거친 쌀 한 섬을 받았는데 실제로는 열두 말 일곱 되였다. 윤해도 같은 양을 받았다.

1594년 5월 22일 (갑오년 음력 4월 3일)

예전에는 길마다 구걸하는 사람이 가득했는데 요즘은 오히려 보기 드물다. 굶어 죽어 버린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길에는 시체가 널려 있고, 영남과 경기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소문까지 들린다. 심지어 육촌 사이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서울 근처에서는 길 가는 사람을 죽여 먹었다는 말까지 들린다.

전염병도 사방에 번지고 있다.

이경여의 편지를 받았다. 그의 아내가 병이 들었다고 한다.

1594년 5월 23일 (갑오년 음력 4월 4일)

함열에서 결성으로 가는 사람에게 어머니께 드릴 편지를 맡겼다.

비가 내렸다.

1594년 5월 24일 (갑오년 음력 4월 5일)

윤해가 청양으로 떠났다. 결성에 있는 형 윤겸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윤해의 아내와 아이들, 양어머니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1594년 5월 25일 (갑오년 음력 4월 6일)

서울에 있던 막내누이가 전염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에 앞서 누이의 딸 신완도 예산에서 죽었다고 한다.

놀랍고 슬퍼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누이는 평생 나를 따뜻하게 대했고 무엇이든 있으면 나누어 주던 사람이었다. 이제 다시 볼 수 없다니 어찌 견디겠는가.

늙은 어머니가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슬퍼하실까. 그곳에도 전염병이 가까이 번지고 있어 더욱 걱정이다.

영암에 있는 다른 누이는 곡식을 보내 어머니를 돕고 있다고 한다.

1594년 5월 26일 (갑오년 음력 4월 7일)

먹을 곡식이 없어 나뭇잎으로 끼니를 때웠다.

굶주림이 날로 심하다.

충아와 그 어머니를 데려와 딸들과 함께 자게 했다.

1594년 5월 27일 (갑오년 음력 4월 8일)

쑥에 쌀을 조금 넣어 먹었다.

1594년 5월 28일 (갑오년 음력 4월 9일)

막내누이가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이라 간단히 제사를 지냈다.

윤해가 없어서 린아와 함께 예를 올렸다.

비가 내렸다.

아내는 이가 다시 아파 얼굴이 부었다.

1594년 5월 29일 (갑오년 음력 4월 10일)

밤새 큰비가 내려 물이 넘쳤다.

먹을 것이 없어 말려 둔 회화나무 잎에 콩과 보리를 조금 섞어 쪄 먹었다.

아이들은 계속 먹을 것을 찾았다.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함열로 사람을 보내고 싶어도 물이 불어 보낼 수 없다.

누에에게 먹일 뽕잎도 구하기 어렵다.

밤에는 늙은 어머니와 죽은 누이를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1594년 5월 30일 (갑오년 음력 4월 11일)

비가 그쳤다.

메밀가루와 나뭇잎으로 국을 끓여 먹었다.

저녁에는 쌀 한 되 반을 빌려 쑥과 모시잎을 넣어 죽을 쑤었다. 장도 없고 소금도 거의 없다.

그저 죽지 않을 만큼만 먹으며 하루를 넘긴다.

1594년 5월 31일 (갑오년 음력 4월 12일)

향비를 수령에게 보내 먹을 것을 청하게 했다.

껍질을 벗긴 도토리 열 말, 콩잎 한 섬, 거친 쌀 닷 말을 얻었다.

1594년 6월

1594년 6월 1일 (갑오년 음력 4월 13일)

윤해가 돌아왔다. 물이 불어 길에서 지체되었다고 한다.

윤겸은 전염병을 두 번째 앓았으나 회복했다고 한다.

윤겸의 아내 임씨는 임신 여섯 달인데 세 번째로 병을 앓아 아직 완전히 낫지 못했고, 하인들도 앓고 있다고 한다.

효임은 아홉 살의 나이로 죽었다. 이제 임아 하나만 남았다고 한다.

향비를 조희보 형제에게 보냈더니 쌀 한 말 닷 되와 중미 한 말을 주었다.

1594년 6월 2일 (갑오년 음력 4월 14일)

계집종들을 보내 둔답의 김을 매게 했다.

모가 새와 짐승에게 많이 뜯겨 듬성듬성하다. 환곡 볍씨를 얻어 다시 심어야 할 듯하다.

큰딸이 학질을 앓기 시작했다.

함열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보냈다.

1594년 6월 3일 (갑오년 음력 4월 15일)

우리 부자가 각각 환곡 한 섬씩을 받았다.

춘희도 함열에서 돌아왔다. 가져온 것은 다음과 같다.

쌀 석 말

밀 석 말

벼 열 말

단장 한 말

말린 생선 세 묶음

새우젓 두 되

1594년 6월 4일 (갑오년 음력 4월 16일)

볍씨 두 말을 물에 담갔다가 까부르고 골랐다.

종 셋이 논의 김을 맸다.

큰딸은 학질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앓았다.

덕노가 제 어머니에게 욕하고 대들기에 묶어 놓고 큰 몽둥이로 때렸다. 너무 버릇이 없다.

윤해 집의 짐말이 풀을 뜯다가 사라졌다. 하나뿐인 말이라 몹시 걱정스럽다.

호미도 하나 샀다.

1594년 6월 5일 (갑오년 음력 4월 17일)

종들이 계속 김을 맸다.

사라진 말을 찾아다녔다.

송이창이 찾아왔다.

1594년 6월 6일 (갑오년 음력 4월 18일)

오늘은 계집종 한 명만 김을 맸다.

덕노는 며칠 전 매를 맞은 뒤 병들었다고 핑계를 대며 일을 하지 않는다.

1594년 6월 7일 (갑오년 음력 4월 19일)

비가 내렸다.

망종 무렵인데도 아직 심지 못한 논밭이 많다.

자경편을 읽다가 나이가 이렇게 들도록 한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니 한탄스럽다.

1594년 6월 8일 (갑오년 음력 4월 20일)

비 때문에 일을 하지 못하다가 늦게 개었다.

이웃 늙은이가 듬성듬성 난 곳에 모를 보충해 주었다.

조익의 편지가 고을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만났다. 송이창도 와 있었다. 술 석 잔을 마셨다.

아내와 단녀도 학질을 앓았다.

1594년 6월 9일 (갑오년 음력 4월 21일)

먹을 곡식이 없어 무명 한 필을 팔아 쌀 한 말 닷 홉을 얻었다.

찧고 나니 실제로 먹을 수 있는 쌀은 여덟 되뿐이었다.

1594년 6월 10일 (갑오년 음력 4월 22일)

계집종들이 김을 맸다.

이정시가 혼사 이야기를 하러 찾아왔다.

아내와 단녀의 학질이 심해졌다.

누에는 네 자리로 늘어났는데 뽕잎이 부족하다. 관노 상근에게 부탁해 세 짐을 빌렸다.

어머니를 찾아가고 싶지만 송노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 사람을 부릴 수 없다. 도망간 것인지 죽었는지 병든 것인지 알 수 없어 걱정스럽다.

화산에 올라가 보니 새들이 볍씨를 많이 먹어 버렸다.

1594년 6월 11일 (갑오년 음력 4월 23일)

명복을 함열로 보냈다.

소즐이 찾아왔다.

이경여가 어제 전염병을 얻어 나흘 만에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놀랍고 슬퍼 견딜 수 없다.

얼마 전 그가 아내가 병들었다며 아들이 없어 걱정이라는 편지를 보내 왔는데, 이제 그마저 세상을 떠났다.

자미와 면부, 누이, 경여까지 모두 죽었다. 오래 사귄 사람들이 잇달아 사라지니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전염병은 바로 이웃까지 닥쳐왔다.

유선각도 찾아왔고 김대성 집안사람도 왔다.

누에가 고치를 짓기 시작했다.

1594년 6월 12일 (갑오년 음력 4월 24일)

윤겸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다.

명복이 함열에서 돌아오며 쌀 석 말, 밀 두 말을 가져왔다.

길을 나서 무수포를 건너 용안과 함열을 지났다. 신응구 등을 만나고 그곳에서 잤다.

1594년 6월 13일 (갑오년 음력 4월 25일)

비가 하루 종일 내려 그대로 머물렀다.

1594년 6월 14일 (갑오년 음력 4월 26일)

아침을 먹고 떠났다.

함열에서 흰쌀 한 말, 정미 한 말, 콩 한 말, 조기 한 묶음, 새우젓 석 되, 김 한 묶음, 단장과 짠장을 얻었다.

신창진을 지나 김제의 조대붕 집에 들렀다. 그는 나이가 많은 서울 사람인데 피란 와 살고 있었다. 함께 이야기했다.

1594년 6월 15일 (갑오년 음력 4월 27일)

새벽에 출발해 길가에서 아침을 먹었다.

비를 맞으며 태인 칠전리에 있는 어머니께 도착했다. 어머니와 아우 식구들은 무사했지만 굶주림이 심했다.

내일이 아버지 제삿날인데 영암 누이에게 보낸 종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가져온 흰쌀 닷 되와 콩 닷 되 정도밖에 없다.

어머니를 뵈니 기뻤지만 죽은 김씨 누이를 생각하며 함께 슬퍼했다.

저녁에 덕경이 영암에서 돌아와 누이의 편지와 제수용 물건을 전했다. 쌀 넉 말, 벼 여섯 말, 찹쌀 한 말 넉 되, 목미 닷 말 등이었다.

오는 길에 보니 씨와 일손이 없고 세금 부담까지 심해 버려진 논밭이 끝도 없었다. 굶주림과 전염병이 온 나라를 덮고 있다.

1594년 6월 16일 (갑오년 음력 4월 28일)

아우가 비를 맞으며 고을에 들어가 관찰사를 만나고 돌아왔다.

관찰사가 쌀 한 말, 콩 두 말, 소금, 장, 종이, 붓, 먹, 부채, 갓 등을 주었다고 한다.

내일 제사에 쓸 것을 준비했다.

1594년 6월 17일 (갑오년 음력 4월 29일)

새벽에 아버지 제사를 지냈다.

남은 음식은 처남들과 가까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머니는 단오가 지나도록 더 머물다 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양식이 없어 그럴 수가 없다. 내일 돌아가기로 했다.

서울 집은 완전히 헐려 없어졌다고 한다. 지킬 사람도 없다.

1594년 6월 18일 (갑오년 음력 5월 1일)

몸이 좋지 않고 설사가 나며 배 속이 계속 끓었다.

아우와 함께 권 좌수의 사랑채에 갔다. 버찌를 얻어 먹었다.

1594년 6월 19일 (갑오년 음력 5월 2일)

어머니와 아우에게 하직하고 떠났다.

김제 근처에서 길을 잘못 들어 조대붕의 집에서 묵었다.

보리와 밀이 제대로 익지 않았는데도 굶주린 사람들이 몰래 베어 먹고, 밤이면 남의 밭에 들어가 훔쳐 간다고 한다. 농부들은 활을 들고 밭을 지키며 때로는 사람에게 화살을 쏘기도 한다.

1594년 6월 20일 (갑오년 음력 5월 3일)

나루의 밧줄이 거센 물살에 끊어져 사공들이 작은 배로 사람을 건넸다. 말은 헤엄쳐 건넜다.

함열에 도착해 윤해와 이귀를 만났다. 윤겸은 이미 돌아갔다고 한다.

신응구 등도 만났다.

이귀는 서울에서 스무 날 넘게 병을 앓았고 임금이 의원과 약을 보내 주셨다고 한다.

그는 임천에 있는 내 가족도 찾아보았고 쌀과 콩, 생선과 젓갈까지 주었다고 한다.

또 나에게 환곡 벼 한 섬을 주도록 마련해 주었다.

1594년 6월 21일 (갑오년 음력 5월 4일)

윤해와 함께 돌아왔다.

비가 크게 내렸다.

집에 오니 아내와 둘째 딸이 학질을 앓고 있었고 단녀도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다.

1594년 6월 22일 (갑오년 음력 5월 5일)

비가 내렸다.

내 몸도 좋지 않아 제사를 린아에게 맡겨 지내게 했다.

이웃 임승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염병이 사방에 퍼져 있다.

서울에서도 박동현, 이경함, 이산보, 정언지 등이 죽었다고 한다.

명나라 사신이 온다고 한다.

고양겸과 유정이 권율이 싸우려는 것을 막고 화의를 추진한다는 소문도 들었다.

광해군은 사신을 맞으려고 완산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아내는 여전히 학질을 앓았다.

누에고치는 스물세 말 정도 나왔다.

1594년 6월 23일 (갑오년 음력 5월 6일)

둔답을 둘러보았다.

윤해도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윤해의 아내와 딸 의아가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둘째 딸의 학질은 더 심해졌고 아내도 계속 앓는다. 단아는 조금 나아졌다.

송노는 아직 소식이 없다.

1594년 6월 24일 (갑오년 음력 5월 7일)

아내가 밤에 몹시 사나운 꿈을 꾸었다고 한다.

윤겸 집에도 전염병이 이어지는 듯해 걱정이다. 임아가 무사한지도 걱정스럽다.

춘희를 서천과 비인 쪽으로 보내 정미 한 말 석 되와 무명을 가지고 가 소금을 바꾸어 오게 했다. 윤해도 콩 두 말 닷 되를 보탰다.

함열에서도 장에 가서 필요한 것을 사라고 했다.

1594년 6월 25일 (갑오년 음력 5월 8일)

충아의 어머니가 병들었다.

의아는 조금 나아졌다.

방수간과 이광춘이 찾아왔다.

백몽진이 이달 초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김대성의 큰며느리도 죽었다고 한다.

나와 아이들도 몸이 좋지 않다.

문경인은 김덕령 진영으로 떠났다.

명복이 함열에서 물건을 받아 왔는데 오는 길에 일부 양식과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해 몹시 화가 났다.

1594년 6월 26일 (갑오년 음력 5월 9일)

비가 내렸다.

린아는 조금 좋아졌고 충아의 어머니도 나아졌다.

아내의 학질은 떨어졌다.

윤해가 학질을 앓았다.

1594년 6월 27일 (갑오년 음력 5월 10일)

큰비가 계속 내렸다.

길을 다니거나 물건을 사고파는 일 모두 걱정스럽다.

린아와 둘째 딸이 심하게 앓고 있다.

1594년 6월 28일 (갑오년 음력 5월 11일)

비가 내렸다.

윤해가 학질을 피하려 우리 집에 왔지만 결국 발작했다.

양식이 부족해 보리죽으로 끼니를 이었다.

종들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물건을 빼앗기는 일도 있었다.

1594년 6월 29일 (갑오년 음력 5월 12일)

비가 내렸다.

옥춘과 명복을 함열 장터로 보냈다.

아이들은 계속 학질을 앓았다.

1594년 6월 30일 (갑오년 음력 5월 13일)

윤해의 병이 심하다.

내일은 양아버지 제삿날이다.

함열에서 쌀과 찹쌀 등 여러 제수 물품을 보내 주었다.

쥐가 좋은 누에고치 석 되를 먹어 치웠다.

1594년 7월

1594년 7월 1일 (갑오년 음력 5월 14일)

꿈에서 한림 자정 김지남을 보았다.

죽은 누이 생각이 나 더욱 슬펐다.

아이들은 여전히 학질을 앓고 있다.

1594년 7월 2일 (갑오년 음력 5월 15일)

함열에서 곡식과 장, 소금 등 여러 물건을 보내 주었다.

춘희가 소금을 바꾸어 돌아왔다. 장에 내다 팔아 다른 먹을 것으로 바꿀 생각이다.

1594년 7월 3일 (갑오년 음력 5월 16일)

종을 함열로 보냈다.

윤해의 병이 매우 위중해 신 부제학 집에서 꿀을 얻어 먹였다.

먹을 것과 생활물자가 너무 부족하다.

장터 물가도 크게 올랐다.

1594년 7월 4일 (갑오년 음력 5월 17일)

비가 내렸다.

윤해는 조금 나아지는 듯하다가 다시 심해졌다.

충아도 병들어 걱정이다.

1594년 7월 5일 (갑오년 음력 5월 18일)

일꾼 다섯 명을 써서 김을 맸다.

윤해와 충아의 병은 조금 나아졌다.

이정시가 찾아왔다.

이작이 지난 음력 5월 8일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러 달 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한 집안에 재앙이 끊이지 않으니 참담하다.

1594년 7월 6일 (갑오년 음력 5월 19일)

네 사람이 김을 매다가 비가 와 일을 그만두었다.

조대득이 찾아왔다.

춘희가 장사를 다녀와 보리와 콩 열세 말 정도를 가져왔다. 계산이 분명하지 않아 중간에서 속인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병든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1594년 7월 7일 (갑오년 음력 5월 20일)

새벽에 제사를 지냈다. 쌀이 없어 아주 간소하게 차렸다.

비가 내렸다.

조경수에게 가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왜적이 화의를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요구한다는 말이 있다.

조선의 여러 도 가운데 네 도를 떼어 줄 것

명나라 황제의 공주를 일본에 보낼 것

일본이 명나라에 왕래하고 조공하는 길을 허락할 것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할 것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군사를 여러 길로 나누어 명나라까지 쳐들어가겠다고 한다.

승려 유정이 가토 기요마사를 만나 교섭했다는 말도 들었다. 적 내부에도 의견 차이가 있다는 소문이 있다.

심설이 승진했다는 소식 등도 들었다.

1594년 7월 8일 (갑오년 음력 5월 21일)

비가 그쳤다.

윤해의 병은 조금 나아졌다.

말먹이도 떨어졌다.

서쪽에 간 윤함의 소식이 없고 막정도 돌아오지 않아 걱정이다.

죽산에서 떠돌아온 열한두 살쯤 된 여자아이 하나가 버려져 있기에 거두어 집에서 부리기로 했다.

1594년 7월 9일 (갑오년 음력 5월 22일)

비가 내렸다.

함열에서 소금에 절인 생선을 보내 주었다.

앓고 있는 아이들과 윤해에게 나누어 주었다.

1594년 7월 10일 (갑오년 음력 5월 23일)

큰비가 내렸다.

아이들의 병이 계속되어 마음이 몹시 답답하다.

1594년 7월 11일 (갑오년 음력 5월 24일)

여러 곳에 양식을 부탁했다.

조희보가 쌀과 몇 가지 먹을 것을 보내 주었다.

사람들을 써서 농사일도 했다.

1594년 7월 12일 (갑오년 음력 5월 25일)

비가 내렸다.

땔감과 말먹이가 다 떨어졌다.

윤겸에게서 소식이 없다.

아내는 임신 여섯 달 된 사내아이를 유산했다. 몹시 안타깝다.

오늘은 어머니 생신인데 아무것도 보내 드리지 못했다.

1594년 7월 13일 (갑오년 음력 5월 26일)

비가 계속 내렸다.

곡식도 땔감도 없다.

쌀 닷 홉으로 나물죽을 쑤어 나누어 먹었다.

춘희가 함열에서 곡식과 김, 여러 반찬거리를 가져왔다. 윤해 집에도 나누어 주었다.

1594년 7월 14일 (갑오년 음력 5월 27일)

고을에 들어갔다.

백유함과 여러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놀이도 했다.

몇 가지 물건을 선물로 받았다.

홍범 등도 만났다.

1594년 7월 15일 (갑오년 음력 5월 28일)

두 번째 김매기를 마쳤다. 모두 열다섯 품의 일손이 들었다.

하지만 모가 너무 듬성듬성해 수확이 걱정스럽다.

내일은 삼촌 제삿날이다.

1594년 7월 16일 (갑오년 음력 5월 29일)

제사를 지냈으나 먹을 것이 없어 매우 간소했다.

아이들과 양어머니까지 모두 학질을 앓고 있다.

묽은 죽밖에 먹지 못해 모두 지쳐 있다.

전에 거두었던 떠돌이 여자아이는 달아났다.

1594년 7월 17일 (갑오년 음력 5월 30일)

양어머니가 의아를 데리고 학질을 피하려 다른 곳으로 갔지만 결국 또 앓았다.

아이들이 병과 굶주림에 지쳐 몰골이 말이 아니다.

1594년 7월 18일 (갑오년 음력 6월 1일)

비가 조금 내렸다.

아이들은 여전히 학질을 앓고 있고 충아는 특히 심하다.

양식이 전혀 없어 콩죽 반 사발씩 나누어 먹었다. 낮에는 아이들에게 남은 보릿가루를 조금씩 먹였다. 너무 가엾다.

막정이 해주에서 돌아왔다. 간 지 열여드레 만이다.

윤함 가족은 모두 무사하며 길도 다닐 만하다고 한다.

덕노는 성혼에게 보내려던 무명 두 필을 훔쳐 팔아먹었다고 한다. 그의 아내는 죽었고 덕노 자신도 병들고 굶주리며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한다.

윤겸 집에도 전염병이 번졌다. 세만의 아내는 죽었고 세만도 매우 위중하다고 한다.

윤겸 아내의 외할머니도 지난해 겨울 아들을 잃은 뒤 이번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윤함이 조기 다섯 묶음을 보내 왔는데 그중 하나는 나루삯으로 썼다.

남상문 가족은 지난 3월 옹진에서 영유로 옮겨 갔다고 한다. 내 편지는 전하지 못했다. 그곳에서도 먹고살 길을 찾아 옮긴 듯하다.

1594년 7월 19일 (갑오년 음력 6월 2일)

윤함이 당감토 하나를 보내 왔다. 크기가 조금 작아 물에 적셔 늘려 써야 할 듯하다.

오정일의 어머니가 지난 3월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종가 쪽 오유일은 어릴 때부터 지병이 있었고 난리 때 늙은 할머니와 어머니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한다. 집안에서 죽은 사람도 많다.

선조들의 신주는 정일이 서쪽 지방으로 모셔 갔다고 한다. 앞으로 제사를 누가 제대로 지낼지 걱정스럽다.

막정의 어머니는 여든이 넘었는데도 살아 있고, 친족 가운데 마흔 명 넘게 죽었다고 한다.

김지남은 어머니상을 당했고 자신도 병들었다는 소식이 있다.

아이들은 계속 학질을 앓고 있다.

니산 수령 김가기를 찾아가 볼 생각이다.

1594년 7월 20일 (갑오년 음력 6월 3일)

오늘은 초복이다.

새벽부터 큰비와 천둥이 이어졌다.

땅이 세 차례나 크게 흔들렸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다시 지진이 있었다. 평생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니산으로 가 김가기 수령을 만났다.

성문덕, 전 비인 수령 김기명도 있었다.

저녁에도 땅이 다시 흔들렸다.

김기명은 옥에 갇혀 있다가 공을 세워 죄를 씻게 하려고 풀어 주어 장수의 진영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1594년 7월 21일 (갑오년 음력 6월 4일)

수령이 나에게 밥을 먹이고 좋은 벼 한 섬과 흰쌀 넉 말도 주었다. 내일 집으로 보낼 생각이다.

명나라 군사들이 소금 장수들의 물건을 빼앗고 사람들을 때리며 함부로 요구한다고 한다. 나라 안이 몹시 어지럽다.

비와 천둥이 이어졌다.

유전 생원을 만났다. 젊을 때 함께 공부한 뒤 거의 마흔 해 만에 만난 사람이다.

1594년 7월 22일 (갑오년 음력 6월 5일)

홍요좌가 왔다.

친척이자 옛 벗인데 전염병을 앓고 겨우 회복했다고 한다.

막정에게 곡식을 들려 집으로 먼저 보냈다.

감찰관을 대접하려고 노루를 잡았고 소머리도 음식으로 썼다.

나는 더위에 상해 설사가 계속되었다.

충아가 걱정스럽다.

1594년 7월 23일 (갑오년 음력 6월 6일)

설사가 계속되었다.

수령은 감찰관을 맞으러 갔다.

명나라 군사들이 객사를 차지해 감찰관은 민가에 머문다고 한다.

날씨가 덥고 습해 파리가 들끓었다.

연산에 가고 싶다. 그곳 수령 심언은 친척이다. 이언우에게 보낼 편지도 썼다.

집에서 편지가 왔다. 아이들은 조금 나아졌다고 한다.

이곳에서 잰 곡식은 실제 양이 적게 나온다.

저녁에는 상주에서 떠돌아온 남매를 보았다. 누이는 열세 살쯤, 아우는 열 살쯤 되었다. 아버지가 회덕에서 죽은 뒤 어머니가 달아났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났다.

1594년 7월 24일 (갑오년 음력 6월 7일)

관아 창고에서 성문덕과 수령을 만났다.

연산으로 가려면 문단속이 엄해 수령에게 비밀 통행증을 받아야 했다.

비와 천둥 속에 연산으로 갔다.

심언을 만나고 심인정, 심대유 등 친척들도 만났다.

생선회와 소주 석 잔을 먹었다.

1594년 7월 25일 (갑오년 음력 6월 8일)

아침을 심언과 함께 먹었다.

은진 호동으로 가 판결사 이영공을 만나고 양필 이재도 만났다.

그곳에서 이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울었다.

밤에는 양필과 함께 잤다.

1594년 7월 26일 (갑오년 음력 6월 9일)

양필과 헤어지며 서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마음이 몹시 서글펐다.

홍세찬 집에 들러 바둑을 대여섯 판 두었다.

물에 말은 밥과 새로 만든 떡을 먹고 밀 두 말을 얻었다.

연산으로 돌아와 여러 손님과 술을 마셨다.

저녁에 다시 지진이 있었다.

1594년 7월 27일 (갑오년 음력 6월 10일)

심언이 다음을 주었다.

벼 한 섬

흰쌀 두 말

중미 두 말

목화씨 석 말

밀 두 말

단장 닷 되

주인집에 맡겨 둔 곡식 가운데 한 말 닷 되가 없어졌다.

니산으로 돌아왔다.

수령이 닭 두 마리를 잡아 나를 대접했다.

관아 창고에서 홍요좌와 좌수 홍이서와 함께 잤다.

1594년 7월 28일 (갑오년 음력 6월 11일)

임천으로 돌아왔다.

더위에 지쳐 몹시 힘들었다.

집에 와 보니 아내와 린아가 학질을 앓고 있었다.

1594년 7월 29일 (갑오년 음력 6월 12일)

충아를 데려와 보았다.

수령 송응서의 집을 찾아갔다. 이덕후, 이홍제, 이분, 이진 등도 있었다.

린아와 윤해가 학질을 앓았다.

막정은 아프다고 하며 일을 하지 않는다.

송노는 전의까지 갔다가 직산 쪽으로 돌아갔거나 도망친 듯하다는 말을 들었다.

논의 세 번째 김매기를 시작했다.

1594년 7월 30일 (갑오년 음력 6월 13일)

오늘은 중복이다.

일꾼들이 논의 김을 맸다.

아내가 갑자기 토하고 설사하며 이질 증세까지 보였다. 일곱여덟 번이나 설사를 해 몹시 위중해 보였다.

1594년 7월 31일 (갑오년 음력 6월 14일)

아내는 오늘도 일곱아홉 번 설사했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몹시 위태롭다.

린아도 이질과 학질을 함께 앓고, 윤해도 병이 심하다.

막정을 함열로 보내 얼음을 구하게 했다. 이 고을 수령은 이미 파직되어 관청에서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1594년 8월

1594년 8월 1일 (갑오년 음력 6월 15일)

아내의 병세가 조금 나아졌다.

막정이 함열에서 돌아왔다. 가져온 것은 다음과 같다.

밀 열 말

닭 한 마리

새우젓 두 되

참기름 한 되

꿀 조금

찹쌀 닷 되

목미 석 말

콩 두 말

전 수령 송응서가 돌아왔다고 하지만 아직 찾아가 보지는 못했다.

밀 여덟 말을 주고 소머리와 쇠고기, 내장을 샀다. 아랫집에도 나누어 주었다.

윤겸이 여덟 달 만에 찾아왔다. 가족들에게 아직 전염병이 이어지고 있고, 아내는 병 뒤로 몸이 약해져 매일 학질을 앓는다고 한다.

린아의 학질도 심하다.

1594년 8월 2일 (갑오년 음력 6월 16일)

소머리를 삶아 윤해의 양어머니와도 나누어 먹었다.

논의 김매기를 마쳤다.

윤해의 학질은 떨어졌다.

1594년 8월 3일 (갑오년 음력 6월 17일)

아내의 병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린아는 아직 기운이 없고 입맛도 없다.

피란민 조대충이 찾아왔지만 점심 한 끼 대접할 양식조차 없었다.

1594년 8월 4일 (갑오년 음력 6월 18일)

아내에게 이질 증세가 다시 나타났지만 전만큼 심하지는 않다. 더위를 먹은 탓인 듯하다.

린아는 학질은 그쳤지만 기운이 없다.

1594년 8월 5일 (갑오년 음력 6월 19일)

린아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윤겸이 함열로 갔다. 그곳에서 도움을 받아 어머니가 계신 태인에도 가 보려 한다.

날이 너무 더워 몸이 상할까 걱정이다.

윤함에게 보낼 편지를 명복에게 맡겨 대흥의 종 애운을 통해 전하게 했다.

1594년 8월 6일 (갑오년 음력 6월 20일)

윤해의 집에 양식이 없어 날마다 우리 집에 와 먹을 것을 구한다.

우리 집도 넉넉하지 않아 답답하다.

충아가 와서 밥을 먹고 돌아갔다.

1594년 8월 7일 (갑오년 음력 6월 21일)

오늘은 입추다.

저녁에 양식이 없어 아이들에게 밀가루로 떡을 만들어 주었다.

막정이 함열에서 돌아오며 밀 열 말, 벼 열 말, 밀가루 한 말, 흰 물고기 젓 닷 되를 가져왔다.

아랫집에도 밀 한 말과 벼 한 말을 나누어 주었다.

막정은 말먹일 풀은 가져오지 않았다.

1594년 8월 8일 (갑오년 음력 6월 22일)

밀가루를 들깨물에 풀어 먹었다. 이것도 넉넉하지 않다.

윤겸은 병든 아내에게 먹이려고 들깨가루를 구해 갔다.

1594년 8월 9일 (갑오년 음력 6월 23일)

오늘은 말복이다.

막정이 다시 함열로 갔다.

춘희는 장성으로 보냈다. 태인을 거쳐 어머니께 편지와 흰쌀 한 말 일곱 되를 전하게 했다.

윤겸도 어머니를 찾아가려 했지만 더위로 몸이 좋지 않고 종들도 병들어 가지 못했다.

1594년 8월 10일 (갑오년 음력 6월 24일)

태인에서 한 진사가 아우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어머니는 무사하지만 굶주림으로 몹시 야위어 누워 지내신다고 한다.

가슴이 미어진다.

날이 선선해지면 어머니를 모셔 오려 한다. 그 전에라도 다시 찾아가 뵈어야겠다.

아랫집도 굶주리고 있어 쌀 일곱 홉을 보내 주었다.

1594년 8월 11일 (갑오년 음력 6월 25일)

임 참봉 집 계집종 복금이 고기를 가지고 찾아왔다.

남궁 지평이 죽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세월과 사람 일이 허망하다.

저녁에는 양식이 전혀 없어 열 명 남짓한 식구가 보리죽 반 사발씩과 나물로 끼니를 때웠다. 아이들이 너무 야위었다.

1594년 8월 12일 (갑오년 음력 6월 26일)

배고픔을 잊으려고 단녀와 놀이를 했다.

충아가 대나무를 말처럼 타고 잠자리를 쫓아다니며 노는 모습을 보았다. 아직 말이 늦다.

집주인에게 밀 닷 되를 빌려 죽을 쑤었다.

아이들은 굶어 너무 야위었다.

윤겸은 밖에 나가 있고, 막정은 발이 붓고 한노는 무릎이 아파 일을 할 종이 없다.

1594년 8월 13일 (갑오년 음력 6월 27일)

한산 수령이 왔다는 잘못된 말을 듣고 수락헌으로 갔다.

이홍제, 한겸, 심응유 등을 만났다.

오후에 윤겸이 돌아왔다. 함열에서 보리 두 섬, 쌀 두 말, 보리쌀 두 말, 생선젓 등을 얻어 왔다.

함열 수령 신응구는 아내를 잃은 뒤 다시 혼인할 생각인데, 그 어머니가 온양에 있으면서 혼사를 허락했다고 한다. 늦가을이나 겨울에 일을 치를 계획이라고 한다.

호남의 도적들이 태인의 옥을 깨뜨리고 죄수들을 빼냈으며 니산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전주 남문에서는 군관을 죽이고 집에 불까지 질렀다고 한다. 나라가 어찌 될지 걱정스럽다.

1594년 8월 14일 (갑오년 음력 6월 28일)

홍성민, 윤우신, 남언경이 전염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홍성민 같은 훌륭한 신하가 죽었다니 나라에도 큰 손실이다.

새 수령으로 이구순이 임명되었다는 말이 있다.

1594년 8월 15일 (갑오년 음력 6월 29일)

한겸이 윤겸을 찾아왔다.

정산의 김장생이 파직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 그곳에서 도움을 얻기 더 어려워졌다.

아랫집 식구들이 모두 함께 살고 있어 먹을 것이 더욱 부족하다. 곡식값도 크게 올랐다.

막정을 함열로 보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1594년 8월 16일 (갑오년 음력 7월 1일)

아침 전에 막정이 돌아왔다.

함열 수령이 다음을 보내 주었다.

흰쌀 두 말

중미 한 말

보리쌀 한 말

찹쌀 닷 되

목미 석 되

웅어젓 두 묶음

진어 식해 세 마리

조기 두 묶음

초사흘은 할머니 제삿날인데 제사를 지낼 사람이 따로 없다. 이 물건으로 밥을 지어 제사를 올릴 생각이다. 참으로 고맙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집안에 큰일이 없다면 비록 모든 조상의 제사를 다 받들 수는 없더라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기일에는 밥이라도 지어 올려 그리움을 잊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세상 형편이 너무 어렵고 변수가 많으니 미리 장담할 수는 없다.

윤해를 이복령의 집으로 보내 혼인에 좋은 날을 골라 달라고 했다. 음력 팔월 십삼일이나 구월 사일이 좋고, 납채는 십팔일이 좋다고 했다. 그중 팔월이 가장 좋다고 하나 일이 너무 촉박해 준비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구월에 치를 생각이지만 상대 집안의 뜻이 어떨지 모르겠다.

이복령은 관상감에서 날짜와 운수를 맡아 보던 사람으로 이곳에 피란 와 있다.

1594년 8월 17일 (갑오년 음력 7월 2일)

이른 아침 참봉 윤겸이 결성으로 돌아갔다. 팔월 초에 다시 오기로 했다. 막정도 말을 끌고 따라갔다.

이웃 김대성이 지난밤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너무 놀랍고 슬프다.

평소 늘 나를 찾아왔고, 텃밭의 채소 같은 작은 것까지 여러 번 따서 보내 주며 나를 매우 후하게 대했다.

얼마 전 그 집안이 편치 않고 아내와 자식, 종들까지 모두 앓으며 큰며느리도 먼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다른 곳으로 피하라고 했는데 끝내 듣지 않더니 결국 이 지경이 되었다. 더욱 가엾다.

지난겨울 거의 날마다 찾아오던 사람은 김대성, 백몽진, 방수간이었다. 봄이 끝날 무렵 백몽진이 먼저 죽고, 초여름에는 방수간이 병들어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지만 그의 아내가 죽었다. 이제 김대성마저 죽었다. 반년도 되지 않아 사람이 이렇게 사라지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함열 수령 신응구가 사람을 보내 윤겸에게 편지를 전하며 혼삿날을 골랐는지 물었다. 또 그의 어머니가 편치 않은 기색이 있다고 하니 걱정스럽다. 윤해에게 답장을 써 보내게 했다.

1594년 8월 18일 (갑오년 음력 7월 3일)

새벽에 제사를 지냈다.

제수 음식을 마련할 길이 없어 밥과 국만 올렸다.

종가의 맏며느리가 죽었으니 종손 정일이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 하지만 떠돌며 가난하게 사는 중이라 그 역시 잔 하나 올리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는 방계 후손이지만 이날을 그냥 넘길 수 없어 간단히 상을 차려 술잔을 올렸다. 옛일이 떠올라 슬픔을 이기기 어려웠다.

이른 아침 윤해에게 택일한 날짜와 온양 신씨 집에 보낼 내 편지를 들려 보냈다.

고른 날은 음력 팔월 십삼일과 구월 사일이고, 납채는 십팔일이었다. 팔월은 준비가 너무 촉박해 구월에 예식을 치를 생각이다.

다만 함열 수령의 어머니가 계속 몸이 좋지 않다. 병이 오래 낫지 않으면 상대 집에서 서두를 수도 있으니, 그렇게 되면 팔월로 앞당기더라도 거절하기 어렵다. 그쪽 뜻을 더 살펴봐야겠다.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연못에서 그물로 붕어를 잡았는데 손바닥만큼 크고 지느러미가 힘차게 움직였다. 깨어 가족에게 말했더니 모두 맛있는 것을 얻게 될 좋은 꿈이라고 했다.

저녁에는 함열에서 특별히 사람을 보내 편지와 함께 푹 삶은 소머리고기와 얼음을 보내 주었다. 마침 오늘이 할머니 제삿날이어서 내일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먹으려 한다. 참으로 고맙다.

1594년 8월 19일 (갑오년 음력 7월 4일)

아침 전에 큰딸에게 어제 온 고기를 썰게 해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먹었다. 사람은 많은데 고기가 적어 실컷 먹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한산 수령 신경행이 고을에 왔다는 말을 듣고 말을 빌려 달려갔다. 수락헌에서 만났다.

이 고을에 피란 와 사는 사람들이 모두 모였는데, 공문이 잇달아 들어오고 뜰이 떠들썩해 차분히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서헌으로 나갔고 나만 남았다.

환곡 벼 다섯 섬을 청해 받았다.

전에 있던 수령 때 벼 닷 말과 보리 일곱 말을 윤해 이름으로 내주라는 처분을 받았으나 아직 실제로 받지 못했다. 이번에 한산 수령에게 다시 청하니 매우 난처해하면서도 보리 넉 말을 따로 내주었다.

또 웅어젓 한 묶음과 젓국 두 되를 주었다. 참으로 고맙다.

환곡 벼 두 섬은 아랫집 윤해에게 주었다. 윤해 처가의 집종 즉동 이름으로 받은 것이었다.

환곡을 받아 내는 동안 명노가 자루에서 곡식을 몰래 빼내다가 마침 한산 수령에게 들켜 잡혀 매를 맞았다. 참으로 속이 시원했다.

하지만 날이 저물어 말을 구하지 못해 오늘 곡식을 실어 오지 못했다. 다시 창고에 넣어 두었는데 내일 찾을 때 수량이 줄어 있을까 걱정스럽다.

지난달 초부터 한 달 넘게 비가 오지 않아 밭작물은 누렇게 말라가고 물이 없는 논은 거북등처럼 갈라졌다. 벼도 타들어 갔다.

사람들이 애타게 비를 기다리던 중 한낮에 소나기가 크게 내렸다가 잠시 뒤 그쳤다. 벼에 흠뻑 젖을 만큼은 아니지만 밭작물은 조금 살아나겠다.

내 둔답도 처음에는 모가 드문드문했는데 세 번 김을 매고 나니 제법 무성해졌다. 다른 사람 논처럼 좋지는 않아도 아주 버릴 정도는 아니다. 다만 벼가 이삭을 배는 때에 오래 가물어 비가 없었던 것이 걱정스럽다.

1594년 8월 20일 (갑오년 음력 7월 5일)

어제 받은 환곡을 말이 없어 가져오지 못했으므로 오늘 계집종 세 명에게 머리에 이고 오게 했다.

다시 되어 보니 한 섬은 열세 말, 한 섬은 열두 말, 한 섬은 열한 말 닷 되밖에 되지 않았다. 모두 합쳐 여덟 말 넘게 모자란다. 밤사이에 창고지기들이 훔친 것이 틀림없다.

무슨 일이든 어그러지는 것이 이 지경이니 한탄스럽다.

충아 어머니는 저녁에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열사흘을 머물다 오늘 돌아간 것이다. 처음에는 곧 보내려 했으나 아랫집에 양식이 없어 그동안 이곳에서 먹게 했다.

1594년 8월 21일 (갑오년 음력 7월 6일)

지난밤 비가 내렸다. 아침에도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이것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려 농부들의 바람을 조금은 풀어 주었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다. 늦게 비가 더 세졌고 오후가 되어서야 개었다. 그래도 높고 마른 곳은 흠뻑 젖지 않았다.

린아가 어제부터 다시 학질을 앓는다. 오늘도 앓으니 날마다 발작하는 병인 듯하다. 겨우 열흘 남짓 떨어졌는데 다시 시작되었으니 걱정스럽다.

막정이 결성에서 돌아왔다.

참봉 윤겸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편지와 새 기장쌀 두 되를 한 자루에 넣어 오다가 청양에서 묵은 집에 두고 잃어버렸다고 한다.

말먹일 풀도 베어 오지 않고 해 질 무렵에 돌아와 병들었다며 누워 일어나지 않는다. 말도 밤새 굶어 서 있었다. 몹시 밉다.

청양 수령 임순이 준 보리 석 말 닷 되를 가져왔다.

1594년 8월 22일 (갑오년 음력 7월 7일)

지난밤 큰비가 새벽까지 내렸고 아침에는 물을 퍼붓듯 쏟아졌다. 집 여기저기서 물이 새어 몹시 괴로웠다.

늦게야 비가 조금 그쳤지만 하루 종일 흐리고 비가 왔다 그쳤다 했다.

밭작물과 늦곡식에는 충분한 비였지만 오히려 지나친 듯하다.

주인집은 비가 새어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전부터 나더러 이 집을 비워 달라고 했는데 내가 옮길 집을 구하지 못해 그대로 머물렀다. 오늘 같은 비에 주인 가족이 자는 방 안까지 물이 가득 찼다니 더욱 미안하다.

밥솥도 깨져 새기 때문에 밥을 지을 수 없었다. 어제 장에서 벼 두 말 닷 되를 주고 한 말쯤 밥을 지을 수 있는 솥을 샀다고 한다.

명노는 본래 게으르고 고집이 세다. 평소 집에서도 작은 심부름조차 잘 듣지 않고 억지로 시켜야 겨우 움직이며, 그래도 힘을 다하지 않는다.

윤해가 늘 괘씸하게 여겨 벌을 주고 싶어 했지만, 피란 중이라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고 늘 죽만 먹게 하는 형편이라 가엾기도 해 그저 꾸짖기만 했다.

그런데 지난달 자기 장사를 하겠다며 휴가를 얻어 나갔다가 이달 초 빈손으로 돌아와 의심스러웠다. 며칠 전 환곡을 훔치다 들킨 뒤 마음이 불안했던지, 그저께 함열로 보냈더니 편지만 전해 놓고 돌아오지 않았다.

어제 장터에서 말질복이 그를 보았는데 자신을 보자 달아났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아주 도망친 것이 틀림없는 듯하다. 몹시 분하고 안타깝다.

한산 수령 신경행은 정승의 행차를 접대하려고 이 고을에 왔다가 이곳을 지나갔다.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내일 아침 찾아가 볼 생각이다.

한산 수령과는 평소 얼굴만 알 뿐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이곳에 와 여러 차례 만나면서 외가 쪽으로 먼 친척임을 알았다. 내게 팔촌쯤 되는 친족이다. 이름은 신경행이고 청안현에 산다.

1594년 8월 23일 (갑오년 음력 7월 8일)

아침 전에 한산 수령을 찾아갔다.

부장 이홍제도 와 있었다. 수락헌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추로주 석 잔을 마셨다. 아침밥도 대접받았다.

나는 먼저 돌아오는 길에 옮겨 살 집을 살펴보았다.

비가 새고 낡기는 했지만 방이 세 칸이고 곁채도 있어 식구들을 들일 수 있다. 비가 그치면 먼저 잡초와 쓰레기를 치운 뒤 보름이 지나면 옮겨 살 생각이다.

의아가 며칠 전 오른발을 뜨거운 물에 데었다. 약을 바르려 해도 참기름이 없어 한산 수령에게 청했더니 두 홉을 주었다.

고향 사과 집 종 귀일이 호남에서 노비들의 신공을 거두고 서울로 돌아가다가 들렀다. 사과 집 식구들이 지금 인천에 있으며 모두 무사하다고 한다. 기쁜 일이다.

아내가 편지를 써 귀일에게 맡겼다.

전에 귀일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오늘 갑자기 나타나니 그 소문은 거짓이었다. 다만 아산에 있을 때 전염병에 걸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1594년 8월 24일 (갑오년 음력 7월 9일)

어제 저녁부터 밤새 비가 내렸고 아침에도 그치지 않았다. 장마가 될 듯하다.

지난달 초부터 오래 가물고 더위가 극심해 해가 지면 모기 떼가 구름처럼 몰려들어 사람을 물었다. 집안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웠다.

비가 온 뒤에는 밤기운이 서늘해지고 찬바람이 이어져 모기가 거의 사라졌다. 벼룩과 이도 전보다 덜하다. 찌는 기운이 가시니 몸이 조금 살아나는 듯하다.

윤해는 어제 함열에서 돌아오다가 강가에 이르렀는데 물이 크게 불어 겨우 건넜다고 한다. 날이 저물어 집까지 오지 못하고 조 좌수 집에서 자고 오늘 아침에 들어왔다.

온양에서 온 답장을 보니 혼삿날은 우리가 고른 날을 따르겠다고 한다.

윤해가 돌아올 때 함열에서 다음을 보내 주었다.

보리 열 말

정미 닷 말

흰쌀 한 말

밀가루 한 말

콩 넉 되

쇠고기 한 덩이

윤해가 송영구를 찾아가자 새 조 한 말도 보내 주었다.

곧 콩과 조를 섞어 밥을 지어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먹었다. 콩과 조밥을 먹어 본 지 오래여서 모두 먹고 싶어 했다.

춘희도 들어왔다. 어머니가 직접 쓴 편지와 아우의 편지를 받아 보니 모두 평안하다고 한다. 다만 먹을 것이 너무 없어 죽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고 굶는 날이 더 많다고 한다.

늙은 어머니를 이런 지경에 놓아 둔 것은 모두 불효한 내 죄다. 그저 울 뿐이다. 다음 달에는 반드시 모셔 올 생각이다.

1594년 8월 25일 (갑오년 음력 7월 10일)

어제 한낮부터 가을 하늘처럼 맑게 개었다. 참으로 다행이다.

1594년 8월 26일 (갑오년 음력 7월 11일)

아침 전에 고을로 들어가 한산 수령을 만났다. 수락헌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좌 이우춘, 도사 홍사효, 그의 아우 생원 홍사고, 부장 이홍제, 진사 한겸이 함께 있었다.

정승이 오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한산 수령은 오늘 돌아간다고 한다.

수령이 아침밥을 대접했다. 나는 먼저 자리에서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윤해 집에 들러 충아를 보고 왔다.

늦게 큰비가 쏟아졌다.

춘희가 함열에서 돌아왔다. 함열 수령이 다음을 보내 주었다.

장 한 말

소금 닷 되

물고기 세 묶음

참기름 석 홉

비는 하루 종일 그치지 않고 때때로 세차게 내렸다. 물가의 곡식은 많이 상할 듯해 한탄스럽다.

평릉 수령 집의 종이 서울에서 내려와 홍산에 있다가 수령 형수의 편지를 전하러 왔다. 비 때문에 오늘 돌아가지 못했다.

1594년 8월 27일 (갑오년 음력 7월 12일)

수령 형수의 종이 오늘 돌아가므로 답장을 써 보냈다. 서울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한 진사 겸이 편지를 보내며 무씨 두 홉도 보냈다. 곧 감사 편지를 써 보냈다.

한낮에는 조 좌수 희윤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저녁에는 소즐이 찾아왔다. 술 두 잔을 대접하고 저녁밥도 먹였다.

1594년 8월 28일 (갑오년 음력 7월 13일)

아침부터 비가 내려 저녁까지 그치지 않았고 밤새 이어졌다.

올해는 비와 가뭄이 고르지 못하다.

사월부터 오월까지는 한 달 내내 큰비가 이어졌고, 유월에는 전혀 비가 오지 않았으며, 칠월 초 다시 비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개지 않는다.

낮은 논의 곡식은 여러 날 물에 잠겨 썩거나 모래에 덮인 곳이 많다. 밭작물도 여물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처럼 떠돌며 사는 사람은 먹을 것을 구하기도 어려운데 흉년까지 들까 더욱 걱정이다.

윤해와 충아가 오늘 심하게 학질을 앓았다. 걱정스럽다.

요즘 한세는 발을 앓아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막정도 배가 부어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 땔감과 말먹이를 벨 수 없어 말 두 필이 하루 종일 굶어 서 있다. 더욱 걱정스럽다.

1594년 8월 29일 (갑오년 음력 7월 14일)

하루 종일 흐리고 비가 내렸다.

윤해가 오늘도 학질을 앓았다. 날마다 발작하는 듯하다. 걱정스럽다.

주인집에서는 날마다 집을 비워 달라고 재촉하는데 아직 옮겨 살 만한 집을 구하지 못했다. 더욱 걱정이다.

1594년 8월 30일 (갑오년 음력 7월 15일)

밥을 먹고 부장 이홍제의 집을 찾아갔으나 밖에 나가 있어 만나지 못했다.

윤해의 아내와 자식들을 보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전경색의 집에 들렀다. 얼마 전 내가 옮겨 살려고 했던 집인데, 주인이 부엌을 헐어 버려 들어가 살 수 없게 만들었다. 양반이 들어와 사는 것을 싫어해서 그런 것이 분명하다. 몹시 밉다.

1594년 8월 31일 (갑오년 음력 7월 16일)

새 수령 이구순이 부임했다고 한다.

저녁에 온양 신발이 고을에 도착해 사람을 보내 나를 불렀다.

달려가 보니 새 수령과 동헌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식사가 끝난 뒤 이름을 알리고 처음 만났다.

수령이 추로주 석 잔을 주며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했다.

밤이 깊어 나와 온양은 먼저 서헌으로 돌아왔다. 수령도 뒤에 관아로 들어와 온양과 한동안 이야기하다 돌아갔다.

온양은 지금 동궁의 위솔로 있으면서 명나라 서울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묵는 것이다.

1594년 9월

1594년 9월 1일 (갑오년 음력 7월 17일)

아침에 종을 보내 조민에게 집을 빌리고 싶다고 했더니 들어와 살아도 좋다고 허락했다.

밥을 먹고 내가 직접 가서 보았다.

지금 집에서 멀지 않고 안팎채가 갖춰져 있으며 따뜻한 방이 세 칸이나 된다. 집 안에 우물과 다듬잇돌이 있고 이웃집도 있어 살기에 아주 알맞다.

다만 오래 비어 있어 낡고 허물어진 곳이 많고 땅이 낮고 습하다. 지붕도 여러 곳이 새어 수리한 뒤에야 들어갈 수 있겠다.

보름이 지나면 옮겨 살 생각이다.

막정을 함열로 보내 생활비가 될 물건을 구하게 했다.

1594년 9월 2일 (갑오년 음력 7월 18일)

아침밥 뒤 고을에 들어가 수령을 만났다.

명나라 군사들이 많이 들어와 있고 어사도 곧 올 예정이라 찾아온 사람이 많아 차분히 이야기할 수 없었다. 얼굴만 보고 돌아왔다.

그래도 수령은 점심을 대접했다.

저녁에 막정이 돌아왔다.

함열 수령이 다음을 보내 주었다.

보리쌀 열 말

벼 한 섬

웅어젓 두 묶음

좋은 밀 두 말

참기름 한 되

막정에게 무명 석 필을 주어 장에서 명주로 바꾸게 했는데 시세가 맞지 않았다. 함열에서 무명 두 필과 보리 석 말을 더 보태 주어 겉명주 두 필을 바꾸어 왔다.

그런데 보리쌀 아홉 되와 벼 한 말 일곱 되가 모자란다. 몹시 괘씸하다.

1594년 9월 3일 (갑오년 음력 7월 19일)

함열에서 종을 결성의 별좌 윤겸에게 보내기에 내 편지도 맡겼다.

아침밥 뒤 종 두 명을 데리고 한산으로 달려갔다.

문지기가 막아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자 먼저 양성정이 묵는 곳으로 가 그에게 이름을 전해 달라고 했다.

뒤에 한산 수령 신경행이 읍취정으로 불러 만나 저녁밥까지 함께 먹었다.

또 관청 사람을 보내 내일 새벽 박반송을 잡아오게 했다.

박반송은 이 고을에 사는 배 주인이다. 임진년 봄 우리 집 쌀과 장 등을 배에 싣고도 전하지 않았던 사람이라 이제 그것을 받아 내려는 것이다.

양성정은 내 아내의 사촌으로 고을 동문 밖에 피란 와 있다. 그의 아우 금성정은 서울에 가고 없다.

그의 어머니는 지난해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 이곳에 임시로 묻었다고 한다. 먹을 것이 없어 아침저녁 끼니조차 잇기 어렵다. 왕실의 자손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참혹하다.

수령은 먼저 관아로 돌아갔다. 나도 뒤따라 성 북문 안 관인 집에 가서 차가운 마루에서 잤다. 추워 견디기 어려웠다.

1594년 9월 4일 (갑오년 음력 7월 20일)

새벽부터 비가 내려 오후에야 개었다.

아침밥 뒤 객사로 갔다. 수령도 나와 함께 앉아 이야기했다.

내 말을 보내 양성정을 불러오게 하니 그도 와서 하루 종일 함께 이야기하고 저녁밥을 먹었다.

수령이 관아로 들어간 뒤 나와 양성정은 낭청방에 가 순찰사 군관 김삼섭을 만났다.

김공은 자미 이윤의 사촌 김소의 아들로 어의동에 산다. 그는 젊고 전에는 서로 알지 못했지만 한 동네 사람이고 또 먼 친척이다. 만나니 반가웠다.

함께 그 방에서 잤다.

박반송도 잡혀 왔다. 물어보니 여러 핑계를 대며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일 장에서 다른 물건을 팔아 마련해 바치겠다고 했다.

1594년 9월 5일 (갑오년 음력 7월 21일)

수령은 도독을 맞이하라는 어사의 부름을 받고 새벽에 임천으로 갔다가 오후에 돌아왔다.

나는 하루 종일 김삼섭과 낭청 누마루에 앉아 장날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사고파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박반송은 다음 물건을 내놓았다.

껍질 보리 열다섯 말

콩 일곱 말

모시 한 필 넉 새

무명 한 필 반

나머지는 가을에 콩 닷 말을 더 내는 것으로 약속했다. 절반가량 모자라지만 한 푼도 받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기에 일단 받아들였다.

또 목박 여섯 개 가운데 다섯 개를 받아냈다.

그 보리 가운데 넉 말 닷 되로 모시 한 필을 바꾸고, 또 넉 말로 푸른 모시 다섯 근을 샀으며, 콩 한 말로 미역 다섯 동을 샀다.

수령은 나에게 벼 닷 말, 소금 한 말, 단장 석 되, 젓 석 되, 조기 두 묶음을 주었다.

저녁에 수령이 동헌으로 나와 내가 찾아갔다. 별좌 이우춘과 진사 홍영필도 왔다.

홍공은 서울에서 같은 동네에 살던 사람이다. 객지에서 우연히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홍공은 수령을 만나려 했으나 이름을 알리지 못했고 날까지 저물어 굶은 채 잘 형편이었다. 그래서 내 저녁밥을 나누어 주었다.

내가 먼저 들어가 수령에게 말한 뒤에야 수령이 사람을 보내 홍공을 불러들였다. 만나기 위해 눈치를 보고 머뭇거리는 모습이 참으로 구차했다. 떠돌며 얻어먹는 사람은 누구나 이런 일을 겪는다. 가엾고 한탄스럽다.

김삼섭과 다시 낭청방에서 함께 잤다.

1594년 9월 6일 (갑오년 음력 7월 22일)

수령이 동헌에 나와 있어 찾아갔다. 아침밥도 함께 먹었다.

정랑 유덕종, 별좌 이우춘, 순찰사 군관 김삼섭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먼저 작별하고 나와 양성정이 묵는 집을 찾았다.

금성정이 어제저녁 서울에서 내려와 있어 함께 이야기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별좌 이덕후를 우연히 만나 말 위에서 잠시 이야기했다.

덕후는 이 고을의 품관이고 집이 넉넉한 사람이다. 곡식을 바쳐 관직을 얻었으며 지사 변경의 매부로 내 아내 쪽 칠촌 친척이다.

집에 돌아오니 함열 물가에 사는 사람이 부탁할 일이 있다며 큰 생민어 한 마리를 가지고 왔다가 내가 없어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무슨 부탁인지는 모르겠다. 아내와 자식들이 곧 구워 먹었다고 한다.

윤해의 세 아이는 날마다 학질을 앓고 전보다 더 심하다.

린아도 하루 걸러 앓는다.

1594년 9월 7일 (갑오년 음력 7월 23일)

변응익과 이경익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이경익은 이전윤의 전 장인인 고 정자 이영익의 아우로, 이 고을에 피란 와 있다.

린아의 학질이 더욱 심해졌다. 걱정스럽다.

윤해는 오늘 조금만 앓았다고 한다. 이제 병이 떨어지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요즘 영남에서 적의 기세가 다시 세지고, 명나라 총병 유정이 다음 달 초 군사를 거두어 북쪽으로 올라가려 한다고 한다.

좌의정 윤두수가 그를 붙잡으려고 남원으로 갔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광해군이 직접 가서 강하게 만류하겠다고 장계를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행차 길에 필요한 것을 여러 고을이 미리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왜군 가운데 항복하는 자도 계속 이어져 여러 진영에 흩어져 있고 서울로 올라가는 자도 많다.

이들은 길목의 관아에서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령에게 화를 내고 모욕하며, 칼을 휘둘러 우리나라 사람을 다치게 하기도 한다고 한다.

전날 항복한 왜군 일곱 명이 서울로 올라가며 이 고을에 들어왔는데 음식이 나쁘다며 수령 앞에서 상을 들어 던져 깨뜨리고 불손한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이들은 거짓으로 항복한 것이니 훗날 끝없는 화근이 될 것이다. 우리 장수들이 그들의 속임수에 빠질까 걱정스럽다.

오는 팔월과 구월 사이 다시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울로 곧장 간다는 소문도 있다. 그렇게 되면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마저 모두 구렁에 쓰러질 것이다. 나 역시 묻힐 땅조차 없겠다.

명나라 군사들도 항복한 왜군을 두려워해 피하고 맞서지 않는다고 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한탄스럽다.

내일 이사한 뒤 남쪽으로 가 어머니를 모셔 올 생각이다.

1594년 9월 8일 (갑오년 음력 7월 24일)

옮겨 갈 집을 수리하고 물건들을 옮겼다. 저녁에 온 식구가 이사할 생각이다.

저녁에 함열 수령 신응구가 종을 보내 새 흰쌀 두 말, 소주 여섯 잔 분량, 어린 소의 뒷다리 하나를 보냈다.

내일이 내 생일이라는 말을 듣고 보낸 것이다. 참으로 고맙다.

세만도 왔다. 참봉 윤겸 집안이 모두 무사하다고 하니 참으로 기쁘다.

세만은 새쌀 닷 되, 좁쌀 한 말, 찰좁쌀 두 되를 보내 주었다.

저녁에 식구 모두 서쪽 제단 아래 조대영의 집으로 옮겨 살았다. 두 차례 짐을 나르니 밤이 깊었다.

1594년 9월 9일 (갑오년 음력 7월 25일)

함열에서 온 종과 세만이 함께 결성으로 갔다.

아침밥 뒤 집주인 조민을 불러 추로주 석 잔을 대접했다. 이웃 전문도 불러 한 잔을 주어 보냈다.

윤해의 양어머니와 아내, 아이들이 찾아왔다.

윤해의 아내가 술과 떡을 마련해 왔다. 아마 내 생일이라 그런 것이다.

자기 집도 끼니가 부족한데 내 생일을 잊지 않고 음식을 마련해 오니 정성은 고맙지만 한편으로 몹시 미안하다.

늦게 부장 이홍제가 찾아왔다. 새 술 석 잔을 주었다. 이 사람도 내일 자기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인사하러 온 것이다.

관노 상근도 쇠고기 한 덩이를 가져왔다.

저녁에 윤해의 양어머니와 아내, 아이들이 돌아갔다.

막정을 함열로 보냈다.

1594년 9월 10일 (갑오년 음력 7월 26일)

막정이 돌아왔다.

함열 수령은 마침 임피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 전에 얻어 둔 빈 가마니 마흔 장만 가져왔다.

함열 수령이 좋은 무명 열 필을 마련해 군 안의 양산에게 맡겨 우리 집으로 전하라고 했는데, 혼례 때 쓰라고 준 것이다.

이정시가 마침 함열에 가 있어 편지를 보내왔다.

유정 총병이 최근 군사를 철수해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어 흉적이 머지않아 다시 들이닥칠 염려가 있으니 혼사를 더 늦추지 말고 빨리 치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 말이 옳다.

다만 준비할 것이 하나도 마련되지 않아 어쩔 도리가 없다. 적의 형편을 좀 더 살펴보다가 다음 달 십삼일로 앞당겨 치를 생각도 있다.

오후에는 수령 이구순을 찾아갔다.

수령이 껍질 보리 두 말, 웅어젓 한 묶음, 흰 새우젓 한 되를 주었다.

전 인제 수령 박문필도 마침 와 있었다. 전부터 아는 사이인데 객지에서 뜻밖에 만나 무척 반가웠다. 그 역시 난리를 피해 이 고을에 와 살고 있다.

별좌 이위와 부장 이홍제도 와 있다가 먼저 돌아갔다.

1594년 9월 11일 (갑오년 음력 7월 27일)

충의 유원씨가 이달 초나흗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놀라움과 슬픔을 이길 수 없다.

평소 나를 매우 후하게 대하던 사람인데 뜻밖에 부고를 들으니 더욱 비통하다.

내일 남쪽으로 떠나야 하고 종과 말도 여유가 없어 조문을 가지 못한다. 미안하고 안타깝다.

린아는 오늘도 학질이 심하다.

아내도 어제부터 학질을 얻어 오늘 또 앓았다. 더욱 걱정스럽다.

종 둘에게 울타리에 쓸 땔나무 두 짐을 베어 오게 했다.

1594년 9월 12일 (갑오년 음력 7월 28일)

아침에 울타리와 변소를 만들었다.

아침밥 뒤 길을 나서 남당진을 배로 건넜다.

저녁에 함열에 도착했다.

수령 신응구가 곧 사람을 보내 나를 불렀다. 상동헌으로 들어가니 봉사 김경, 봉사 이신성과 그 형제, 이정시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녁밥도 같이 먹었다.

밤이 되자 모두 흩어지고 나는 이정시와 윗방에서 함께 잤다.

이정시가 내게 말했다.

“수령의 어머니는 혼삿날이 너무 멀다고 생각하십니다. 그 전에 적의 기세가 다시 커지면 혼례를 치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혼례 준비를 억지로 갖출 필요 없이 초례만이라도 먼저 치르도록 날짜를 앞당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 생각도 같았다.

다음 달 십삼일로 정해 곧 편지를 써 임천으로 보냈다. 침구만 준비하게 했다.

나는 태인에 도착해 형편을 살펴본 뒤 곧 돌아와 혼례를 치르고, 그 뒤 다시 어머니를 모시러 갈 생각이다. 어머니가 곧 오고 싶어 하시면 그때 함께 모셔 오려 한다.

1594년 9월 13일 (갑오년 음력 7월 29일)

밤새 이정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침에 그가 내 뜻을 수령에게 전했다. 수령과 이정시가 함께 나왔고 김봉사도 왔다. 함께 이야기하며 아침밥을 먹었다.

수령이 길에서 쓰라며 다음을 주었다.

흰쌀 석 말

중미 두 말

보리쌀 두 말

콩 석 말

흰 새우젓 석 되

조기 석 묶음

미역 네 동

단장 한 말

짠장 한 되

늦게 출발해 석탄을 건너 김제 돌소리에 이르렀다.

마침 이 감찰 집의 농막이 있었고, 감찰 집 처남 남용희도 와 있었다.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곧 불러들였다.

뜻밖의 만남이라 무척 반가웠다. 저녁밥도 대접받았다.

그 집 사위 이현경과 감찰의 맏아들 이한도 있었다.

이현경은 의성도정의 아들로 서울에서 나와 한 동네에 살던 사람이다.

이한도 나와 육촌쯤 되는 친척이고, 그의 아버지 감찰은 서울에 있을 때 나와 매우 가까웠다. 난리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영전에 한번 울어 보지도 못한 것이 늘 한이었다.

오늘 그 아들을 만나니 슬픔과 반가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이한의 아우는 난리 초 왜적에게 죽었다고 한다. 참혹한 일이다.

1594년 9월 14일 (갑오년 음력 8월 1일)

새벽부터 비가 내려 아침에도 개지 않았다.

아침밥은 감찰 집에서 지어 주었다.

남용희가 비가 이렇게 오니 갠 뒤에 떠나라고 했다. 하지만 혼삿날이 얼마 남지 않아 머물 수 없었다.

늦게 길을 나섰는데 도중에 비가 물을 퍼붓듯 쏟아지고 짙은 안개가 사방을 덮었다.

길을 잘못 들어 동쪽과 서쪽으로 헤매며 바른 길을 찾지 못했다.

도롱이에서도 빗물이 새 옷이 모두 젖었다. 그 고생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금구 땅에 이르러 또 샛길로 잘못 들었다. 말이 넘어져 짐도 뒤집히고 물건이 모두 젖었다. 가까스로 물속에서 건져 냈다.

낙양리에 이르니 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시냇가 백성 모리금의 집에서 묵었다.

젖은 물건을 모두 말렸다.

남용희의 말을 듣지 않고 무리하게 떠난 것을 후회했다.

다만 임경흠의 옷은 젖지 않았다. 그것만은 다행이다. 그 옷은 지난봄 딸들이 지어 준 것으로 이번에 영암으로 보내려고 가져온 것이다.

1594년 9월 15일 (갑오년 음력 8월 2일)

새벽에 출발해 금구 종정원에서 아침을 먹었다.

태인으로 가는 길에 지름길로 들어섰다가 또 길을 잘못 안내받아 논밭 사이에서 헤맸다.

말이 다시 넘어져 짐이 또 뒤집혔지만 이번에는 모두 젖지는 않았다. 이른바 지름길로 가다가 오히려 더 곤란해진 셈이다.

어머니가 계신 곳에 도착해 뵈었다.

어머니는 지난달 보름 무렵부터 날마다 학질을 앓다가 열이틀 만에야 병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 사이 이질까지 심하게 앓아 온 집안이 망연해했는데 가까스로 회복하셨다.

이제 병이 나은 지 겨우 열흘 남짓이고 어제부터야 식사를 예전처럼 드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기가 크게 떨어지고 얼굴도 몹시 여위어 먼 길을 갈 형편이 아니다.

이번에는 모시고 갈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언명 희철의 종과 말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고, 비 때문에 길이 패여 진흙 구덩이가 된 곳이 많다.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이런 길을 걷게 할 수 없다.

나는 모레 먼저 돌아가 혼례를 치른 뒤 곧 다시 와 어머니를 모시고 가기로 했다.

언명도 감기에 걸린 지 닷새가 되었는데 낫지 않는다. 지금은 머리가 심하게 아프고 땀이 비 오듯 난다. 몹시 걱정스럽다.

내일 어머니를 다른 집으로 피하게 할지도 생각해 보아야겠다.

저녁에는 권 좌수의 사랑채에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잤다.

1594년 9월 16일 (갑오년 음력 8월 3일)

언명은 새벽부터 병세가 가라앉더니 아침에는 평소처럼 되었다. 참으로 기뻤다. 다만 입맛은 없다고 한다.

저녁에는 완전히 나아 더욱 다행이었다.

그런데 막정이 어제부터 머리가 아프고 밥을 먹지 못한 채 하루 종일 누워 있다.

내일 길을 떠나야 하는데 큰 종이 이러니 걱정스럽다. 밤에도 낫지 않으면 출발하기 어렵다.

혼삿날은 점점 가까워 오니 더 답답하다.

아마 어제 하루 종일 비를 맞고 여러 큰물을 건너 온몸이 젖어 감기에 심하게 걸린 탓일 것이다.

내일 돌아갈 생각이라 오늘도 이곳에서 잤다.

1594년 9월 17일 (갑오년 음력 8월 4일)

밤새 비가 내리다가 새벽에야 그쳤다.

아침밥 뒤 어머니께 하직하고 출발했다.

금구현에서 십 리 남짓 간 곳, 전에 묵었던 모리금 집 앞 시냇가에서 말을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해 질 무렵 김제의 남용희 농막에 도착해 묵었다.

남용희가 아침과 저녁을 대접했다.

이웃 임생원 전도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 밤늦도록 함께 이야기했다. 나는 남용희와 함께 잤다.

명나라 총병 유정이 군사를 철수해 남원에서 떠나 이미 완산에 도착했다고 한다.

남쪽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던 것이 이 군대였는데 이제 돌아간다니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린다. 모두 짐을 꾸려 도망갈 준비를 한다. 적이 다시 들이닥치면 막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도 구렁에 쓰러질 운명인가. 한탄해도 어쩔 수 없다.

오늘도 오는 길에 말이 진흙에 빠져 넘어지고 짐이 뒤집혀 침구가 모두 젖었다.

이번 길에는 오가는 동안 계속 이런 일을 당했다. 말은 지쳤고 종은 병들었으며 비까지 많이 와 길이 진창이 되었다.

만약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면 틀림없이 길에서 큰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임생원도 피란 와 이 농막 근처에 살고 있다.

1594년 9월 18일 (갑오년 음력 8월 5일)

아침은 남용희가 대접했고 점심은 감찰 집에서 보내왔다.

감찰 집에서 나를 불러 만나 편지를 써 우리 집에 보내 주었다.

전주 옥야창 길가 솔정자 아래에서 말을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어제 젖은 물건들을 널어 말렸다.

해가 기울 무렵 함열에 도착했다.

상동헌에서 수령 신응구를 만났다.

김봉사와 이봉사 형제, 이정시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녁밥을 같이 먹고 밤이 되자 모두 흩어졌다.

나는 윗방에서 혼자 잤다.

윤겸 참봉은 요즘 날마다 학질을 앓아 빨리 올 수 없다고 한다. 혼삿날은 코앞인데 할 일은 많고 준비한 것이 없다. 윤겸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또 병이라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춘희가 말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으니, 혼삿날을 앞당겼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주 심하게 앓는 것이 아니라면 올 것이다.

1594년 9월 19일 (갑오년 음력 8월 6일)

수령이 일찍 나왔다. 이른밥과 아침밥을 함께 먹었다. 김봉사도 들어왔다.

수령은 혼례에 쓰라며 다음을 내주었다.

흰쌀 한 섬

중미 한 섬

누룩 한 동

단장 넉 말

짠장 넉 되

소금 한 말

흰 물고기 젓 한 말

조기젓 세 묶음

웅어젓 세 묶음

조기 열 묶음

흰쌀과 중미는 각각 넉 말씩, 누룩은 한 동을 먼저 가져왔다. 나머지는 그곳에 맡겨 두었다가 내일 종과 말을 보내 싣고 올 생각이다.

남당진에 이르니 배가 반대편에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배가 돌아온 뒤 건너니 해가 이미 기울었다.

집에 와 보니 신부 옷과 장식품을 아직 빌리지 못했고 입을 옷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다. 답답하다.

종과 말이 없어 윤해가 바깥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윤해와 충아, 린아와 둘째 딸은 모두 아직 학질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내도 앓고 있었다. 집에 들어오니 모두 누워 신음하고 있다.

큰일이 눈앞인데 병까지 이러하니 어쩌겠는가.

광해군이 유정 총병을 만나려고 공산으로 간다고 한다. 여러 고을 수령들은 이미 모두 나가 행차를 준비하고 있다.

이 고을 수령 이구순도 길의 큰 접대 책임을 맡아 나갔다. 직산까지 가서 행차를 지나보낸 뒤 돌아오면 보름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혼례에 쓸 병풍과 침구 같은 물건을 모두 이 고을 관아에 기대고 있는데 일이 자꾸 어긋나 걱정스럽다.

1594년 9월 20일 (갑오년 음력 8월 7일)

새벽부터 큰비가 퍼부었다.

집 안이 모두 젖고 부엌에도 물이 차 밥을 지을 수 없었다.

서쪽 방도 아직 마르지 않았고 비 새는 곳이 많아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늘 우리 부자가 아는 사람들에게 혼례 물건을 빌리러 다니려 했는데 비가 이렇게 오니 밖에 나갈 수 없다.

하늘마저 돕지 않는구나.

혼례까지 닷새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추기는 틀린 듯하다. 형편이 그러니 어쩌겠는가.

오후에 비가 조금 약해지더니 저녁에는 갰다.

1594년 9월 21일 (갑오년 음력 8월 8일)

날이 아주 맑았다.

종과 말을 함열로 보내 전에 받은 물건들을 싣고 오게 했다.

밥을 먹고 정랑 조경수 집에 가 그의 두 아들을 만나 신부가 입을 옷 세 벌을 빌렸다.

돌아오는 길에 유선각의 상에 조문하고 소즐 집에도 들렀지만 소즐은 익산에 갔다고 했다.

혼례 준비를 살피는 일과 빌릴 물건을 거의 그에게 기대고 있었는데 그가 없어 걱정스럽다.

조 한림 희보도 찾아보았다. 조 좌수 희윤도 와 있어 함께 이야기했다. 조 한림은 콩죽을 대접했다.

조문화의 집에도 들렀으나 밖에 나갔다고 하여 만나지 못했다.

해가 이미 저물었다.

조경수 집에서 빌린 신부 옷은 몸에 잘 맞는다고 한다. 다행이다.

윤겸은 오늘도 들어오지 않았다. 물에 막힌 것일까. 혼삿날은 다가오는데 무엇 하나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 답답하다.

1594년 9월 22일 (갑오년 음력 8월 9일)

한노 하나만 있는데 병들었다며 일어나지 않는다.

심부름할 일은 많은데 집에 부릴 종이 하나도 없어 꼼짝할 수 없다. 답답하다.

저녁에 춘희와 세만이 들어왔다.

윤겸은 날마다 학질을 앓아 너무 괴로워 오지 못한다고 한다. 몹시 걱정스럽다.

이불감으로 석 새짜리 베 두 단을 보내와 좋은 무명 네 필을 주고 바꾸었다.

춘희가 오는 길에 홍양의 박부여 집에 들러 신부 옷 두 벌도 빌려 왔다. 이것도 입기에 알맞다고 한다. 조경수 집에서 빌린 붉은 저고리는 돌려보내려 한다.

막정과 함열 관원이 앞서 받은 물건들을 싣고 왔다.

함열에서는 다시 다음을 보내 주었다.

콩 닷 되

찹쌀 한 말

목미 닷 되

밀가루 닷 되

민어 두 마리

문어 세 마리

전복 두 꼬치

미역 일곱 동

다만 목미는 오지 않았다.

윤해 처가에서도 종 둘과 말을 보내 윤해의 아내와 아이들을 데려가려 했지만 혼사가 코앞이라 바로 떠나지 못한다. 혼례 뒤인 열엿새나 열이렛날 모두 진위로 돌아갈 계획이라 두 종은 잠시 남아 일을 돕게 했다.

최경수가 예빈시 참봉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축하할 일이다.

1594년 9월 23일 (갑오년 음력 8월 10일)

세만은 결성으로 돌아갔다.

윤해는 함열로 갔다.

이탁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놀랍고 슬프다.

네 달 사이 한 집안에서 상이 세 번이나 겹쳤으니 참혹한 변고를 어찌 말하겠는가.

혼례 준비로 조 한림 집과 여러 곳을 오가며 필요한 물건을 구했다.

1594년 9월 24일 (갑오년 음력 8월 11일)

혼례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필요한 물건을 빌리고 음식을 마련하느라 하루 종일 분주했다.

아픈 식구들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1594년 9월 25일 (갑오년 음력 8월 12일)

혼례에 쓸 병풍과 자리 등은 어사가 고을에 들어와 있어 빌려 오지 못했다.

촛불 한 쌍도 만들어 보냈다.

혼례 준비가 끝까지 빠듯하다.

1594년 9월 26일 (갑오년 음력 8월 13일)

날씨가 맑아 다행이다.

남당진 뱃사공 돌손이 말린 생선 한 마리와 가지, 생밤을 가져왔다. 무슨 부탁이 있는 듯하다.

조도어사 강첨이 윤겸이 왔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보내며 술 한 병, 닭 한 마리, 말린 민어 두 마리를 보냈다.

어사가 고을을 떠난 뒤에야 관아의 병풍과 자리를 빌려 왔다.

오후에 함열 수령 신응구가 혼례를 위해 임시 장막에 도착했다. 윤겸이 나가 맞았다.

신부는 예식을 연습하고 머리 장식도 갖추었다.

명종의 후궁 순빈이 난리 초 이 고을에 왔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궁인들이 아직 여막에 머물고 있었다. 계집종을 보내 신부 머리를 꾸미는 일을 부탁해 장식을 갖추게 했다.

소즐은 신부 치장 물건을 익산에서 구해 왔다. 쓸 만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돌려보냈다.

초례 때 쓸 횃불은 관청에서 장인을 보내 준비했다.

저녁에는 모든 물건을 갖추고 사람을 보내 신랑을 맞아오게 했다.

신랑과 신부 양쪽에서 따로 수행하는 새 종들은 쓰지 않기로 미리 약속해 두었다.

신랑 신응구가 들어왔다.

내가 직접 나가 맞아들여야 했지만 검은 단령이 없어 나가지 못했다. 소즐에게 기러기를 받들어 들이게 하고 나는 잠시 피했다.

신랑과 신부가 서로 절하고 함께 잔을 나누는 예식은 모두 법도에 맞게 치러졌다.

아침에는 서재동에서 소를 잡는다는 말을 듣고 무명 한 필을 보내 고기를 사 오게 했는데 천엽과 소머리만 얻었다.

새벽에 납채를 했고 상대 쪽에서 온 사람이 다섯 명이었지만 대접할 것이 없어 찐 닭과 국수, 술 한 동이를 마련해 먹였다.

저녁에는 신랑을 따라온 관원들에게 술 세 동이와 과일상 세 벌, 국수, 돼지머리를 대접했다.

피란살이 중이라 무엇 하나 마련할 길이 없어 아주 간소하고 볼품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함열 수령이 보내 준 물건으로 치른 것이다. 그 도움마저 없었다면 혼례의 모양조차 갖출 수 없었을 것이다.

1594년 9월 27일 (갑오년 음력 8월 14일)

아침밥 뒤 진사 한겸, 이복령, 이광춘이 찾아왔다. 술 석 잔씩 대접하고 헤어졌다.

오후에는 함열 수령이 자기 고을에서 술과 과일을 잔뜩 마련해 와 우리 집 식구들을 크게 대접했다.

함열에서 맡은 사람이 고기 한 벌, 닭 한 마리, 민어 한 마리, 잔칫상에 남은 음식과 쇠고기, 생게 등을 가져왔다.

1594년 9월 28일 (갑오년 음력 8월 15일)

아침밥 뒤 함열 수령이 돌아갔다.

그의 표정을 살펴보니 새 며느리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다. 참으로 다행이다.

오는 십구일에 사람과 말을 보내 딸을 데려가겠다고 했다.

오늘은 추석이다.

술과 밥만 간단히 차려 멀리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죽전 삼촌에게 제사를 올렸다. 그보다 먼 조상에게까지는 형편상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 슬프고 안타깝다.

부랑 이하부가 찾아왔다. 윤겸이 찹쌀술 석 잔을 대접했다.

마침 한 진사도 왔다.

이웃 전문의 아내가 술과 떡, 과일을 차려 보냈고 문순도 밤떡과 과일을 보내왔다.

종들에게 빌려 온 혼례 물건을 모두 본래 주인에게 돌려보내게 했다.

1594년 9월 29일 (갑오년 음력 8월 16일)

이웃 전문과 이기종을 불러 술을 대접하고 보냈다.

함열에서 특별히 사람을 보내 편지를 전하고 자하젓 석 되, 흰쌀 두 말, 쇠고기 한 덩이를 보냈다.

함열 수령의 어머니도 제사 뒤 남은 고기꼬치 스물세 개를 보내며 내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새 며느리가 훌륭하다며 크게 기뻐한다고 했다.

윤해 일가는 내일 북쪽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길 떠날 준비와 양식을 함열에 부탁해 마련했다.

함열에서 온 자하젓은 윤해 아내가 돌아가 부모에게 드리도록 주었다.

1594년 9월 30일 (갑오년 음력 8월 17일)

새벽에 윤해가 온 가족을 데리고 진위로 돌아갔다.

난리 초부터 지금까지 세 해 동안 함께 살며 온갖 고생을 같이했다.

그의 장인이 굶주리는 사정을 듣고 종과 말을 보내 데려가게 한 것이다.

충손이 늘 내 앞에서 놀아 무료함을 달래 주었는데 하루아침에 떠나니 몹시 서운하고 슬프다.

윤해의 양어머니는 성품이 고분고분하지 않아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를 냈다. 머무르든 떠나든 내 뜻대로 할 수도 없었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오후에는 함열에서 일부러 편지를 보내고 송이버섯 서른 개를 보내 주었다.

마침 윤겸이 조 한림 집에 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 바로 감사 편지를 쓰지 못했다.

별좌 이덕후 집에서 빌린 침장을 쓰고 곧 돌려보내려 했는데 막정이 병들어 미루다가 오늘 그 집에서 종을 보내 가져갔다. 부끄럽다.

계집종 강춘은 한쪽 발이 허리만큼 크게 부어 걷지 못한다.

밥 지을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어둔에게 맡겼는데, 이 계집종은 훔쳐 먹을 뿐 아니라 몹시 불결하다. 여러 번 타일러도 고치지 않으니 괘씸하다.

1594년 10월

1594년 10월 1일 (갑오년 음력 8월 18일)

아침에 말질산을 보내 송이버섯 큰 것 여섯 개를 조 한림에게 보냈다.

조 한림의 아내가 찹쌀 한 말을 보내 주었다. 고맙다.

밥을 먹기 전에 수령을 만나려고 고을에 들어갔으나 수령이 관아 안에서 나오지 않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1594년 10월 2일 (갑오년 음력 8월 19일)

새벽부터 흐리고 비가 흩뿌렸다.

윤해의 아내와 아이들이 지금 어디쯤 머물고 있는지 모르겠다. 가지고 간 양식도 많지 않아 길에서 곤란을 겪지 않을까 계속 마음에 걸린다.

어제 정산과 홍산 두 고을로 사람과 말을 보냈는데, 두 수령이 광해군의 행차를 접대하느라 관아에 없어 편지를 전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지금 양식이 떨어져 그들이 무엇이라도 얻어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는데 결국 허탕을 치니 한탄스럽다.

이웃 전문이 술과 과일을 마련해 직접 찾아와 대접했다. 그 정성이 고맙다.

저녁에는 함열에서 지붕 달린 가마를 빌려 보내왔다. 관아 종 세 명, 가마꾼 열여 명, 장리와 길잡이까지 모두 스무 명이 넘게 들어왔다.

1594년 10월 3일 (갑오년 음력 8월 20일)

날이 밝기 전에 술 두 동이를 내어 아랫사람들에게 먹였다.

밝아진 뒤에는 아침 죽만 먹이고 출발시켰다.

딸이 떠날 때 어머니와 아우를 붙잡고 통곡했다. 가엾고 슬픈 마음을 견딜 수 없다.

여러 해 부모 무릎 아래 살던 딸이 하루아침에 시집으로 완전히 돌아가니 어찌 그리움이 없겠는가.

다만 거리가 멀지 않아 날마다 소식은 들을 수 있으니 그것이 위로가 된다.

나도 딸을 따라 남당진까지 갔다.

배 위에서 잠시 쉬다가 배가 떠나자 윤겸만 함께 배를 타고 가고 나는 높은 언덕에 올라 배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뒤돌아보다가 남쪽 물끝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니 눈물이 소매를 적셨다.

관에서는 배 세 척을 마련했다.

한 척은 크고 차일과 자리를 갖추어 딸이 타게 했다.

한 척은 음식과 살림도구를 실었다.

한 척은 사람과 말을 건너게 했다.

세 배가 함께 물길을 따라 내려갔다. 아침밥도 배에서 마련한다고 한다.

나는 종 하나만 데리고 말 한 필을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해가 이미 높았다.

집에 들어와 앉으니 슬픔이 더욱 몰려왔다. 딸의 어머니와 두 딸도 둘러앉아 울었다.

불과 며칠 전 윤해 가족이 진위로 돌아갔고 이제 또 이 딸이 시집으로 떠났다. 마음이 허전해 견디기 어렵다.

윤해 일가는 일정대로라면 오늘 진위 집에 도착할 텐데, 어제 비가 와 길에서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저녁에는 양식이 없어 국물을 많이 탄 죽을 쑤어 나누어 먹었다.

사람을 보내 이기종을 불러 강춘의 부은 발에 침을 놓게 했다. 술 한 그릇을 대접했다.

기종과 함께 이진사 중영이 묵는 곳을 찾아가 한가롭게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중영은 고 지사 이린의 아들이다. 평소 부유하기로 이름났지만 지금 난리를 만나 이곳에 떠돌아 살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지난여름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직 장사를 지내지 못했다.

우리 숙소와 가까워 찾아갔다. 전에도 한 번 얼굴을 알고 있었고 아이들과도 서로 아는 사이다.

이기종은 술을 못 마셔 한 그릇만 마시고도 몹시 취해 먼저 갔다. 우스운 일이다.

1594년 10월 4일 (갑오년 음력 8월 21일)

한노를 함열로 보냈다. 딸의 행차가 무사히 도착했는지 묻기 위해서다.

새벽에 아침도 먹이지 않고 보내 오늘 안으로 돌아오게 했다.

저녁에 막정이 분개와 함열에서 온 문안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함열 수령의 어머니가 새 며느리를 매우 기뻐하고 온 집안사람이 좋은 며느리를 얻었다고 칭찬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끝까지 잘 지낼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막정 편에 함열에서 다음을 보내왔다.

흰쌀 석 말

중미 석 말

쇠고기 한 덩이

조개젓 석 되

딸도 어제 받은 떡과 과일, 반찬 가운데 조금을 보내왔다. 곧 아이들과 함께 먹었다.

함열에서 온 사람에게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1594년 10월 5일 (갑오년 음력 8월 22일)

막정에게 관청에서 빌려 온 사기그릇과 작은 상, 족상 등을 실어 돌려보내게 했다.

전에는 종과 말이 바빠 이제야 보낸다.

사기그릇 네 개를 깨뜨려 잃었다. 아쉽다.

린아는 학질이 떨어진 지 사나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제부터 다시 날마다 앓는다. 걱정스럽다.

1594년 10월 6일 (갑오년 음력 8월 23일)

이른 아침 막정을 함열로 보냈다. 이어 익산 이충의 집에도 들르게 하고 장에서 물건도 사 오게 했다.

어제 한노가 오지 않았으니 오늘 윤겸이 함께 데리고 오는 것일까.

저녁에는 한노만 혼자 돌아왔다. 윤겸은 내일 오겠다고 한다.

딸이 홍시 열다섯 개와 송이버섯 서른 개를 보냈다. 홍시는 곧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먹었다.

린아는 학질을 앓던 중인데 매우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아내도 학질을 얻어 앓고 있으나 한기가 왔다 열이 났다 할 뿐 아주 심하지는 않다.

1594년 10월 7일 (갑오년 음력 8월 24일)

저녁에 윤겸이 함열에서 들어왔다.

사위 신응구가 아내를 매우 소중히 여긴다고 하니 참으로 기쁘다. 다만 끝까지 어떨지는 두고 볼 일이다.

밤에 아이들과 둘러앉아 이야기하고 있는데 서쪽 이웃 전문 집 종의 쌀 됫박이 없어졌다는 소동이 났다.

자국을 따라오니 쌀알이 우리 집으로 오는 길에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횃불을 밝히고 어둔의 방을 뒤졌지만 물건은 없었다.

다른 사람이 훔치고 일부러 이곳에 쌀을 흘렸는지, 아니면 어둔이 훔쳐 숲에 숨겨 두었는지 알 수 없다.

전문 집에서는 어둔을 몹시 의심했다.

나도 엄하게 다스리고 싶지만 아직 범인이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아 일단 두고 보기로 했다. 뒤에 사실이 밝혀지면 크게 벌할 생각이다.

이 계집종은 평소 하는 짓도 수상해 사람들이 모두 의심한다. 몹시 괘씸하다.

함열에서는 절인 게 쉰 마리를 보내고, 딸도 반찬과 두 가지 떡을 조금 보냈다.

1594년 10월 8일 (갑오년 음력 8월 25일)

윤겸은 결성으로 돌아가려 했다.

김봉사와 이봉사가 함께 가기로 했는데 그들이 오지 않아 출발하지 못했다.

오후에는 계집종 옥춘이 함열에서 들어왔다.

딸이 흰쌀 두 말, 절인 게 스무 마리, 조개젓 두 되를 보냈다.

저녁에는 김봉사와 이봉사가 들어왔다. 저녁밥을 먹이고 윤겸과 함께 재웠다.

기대수가 아들과 함께 짐을 지고 또 찾아왔다.

처음에는 거지인 줄 알았다. 이름을 물은 뒤에야 그인 줄 알았다.

옷은 누더기가 되어 양반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 처참하고 슬펐다.

아침과 저녁을 대접하고 재웠다.

그의 아내와 딸은 지금 공주 땅에 있다고 한다.

1594년 10월 9일 (갑오년 음력 8월 26일)

날이 밝기 전에 김봉사와 이봉사가 떠나려 하기에 묽은 국죽과 흰술 두 잔씩을 대접했다.

윤겸도 함께 홍산현으로 떠났다. 아침을 먹고 각자 길을 갈 것이라고 한다.

윤겸은 내 말을 타고 한노를 데리고 갔다.

기대수도 아침밥을 먹고 다시 한산으로 갔다. 한산 수령에게 먹을 것을 구하려는 것이다. 돌아올 때 다시 들르라고 했다.

아침에는 전라도 조도어사 박홍로가 이 도에 온 인연으로 내 숙소에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잊지 않고 생각해 주니 고맙다. 다만 어디에서 내 일을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저녁에는 천린과 덕린 형제가 수원에서 한산으로 가는 길에 들렀다.

윤해 일가는 무사히 진위 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기뻤다.

저녁밥을 먹이고 재웠다.

막정도 함열에서 돌아왔다.

함열에서 막장 열 말, 소금 석 말, 생게 서른 마리, 송이버섯 열일곱 개, 참기름 한 되, 좋은 술 여섯 병을 보내왔다.

막장을 다시 되어 보니 여덟 말밖에 되지 않았다.

1594년 10월 10일 (갑오년 음력 8월 27일)

막정에게 윤겸이 얻은 보리 씨와 밀 씨를 실어 결성으로 보내게 했다.

윤겸은 어제 돌아갈 때 종과 말이 없어 가져가지 못했으므로 오늘 보내는 것이다.

저녁에 함열에서 사람을 보내 편지와 생붕어 쉰 마리, 비늘 없는 물고기 열 마리를 보내왔다.

붕어는 곧 쪄 아내와 자식들과 먹었다.

비늘 없는 물고기는 배를 갈라 소금에 절여 말려 반찬으로 두려고 한다.

저녁에는 양식이 떨어져 콩죽을 쑤어 먹었다.

1594년 10월 11일 (갑오년 음력 8월 28일)

지난밤 비가 내렸고 처마에서 빗물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침에도 흐리고 바람이 불며 때때로 비가 뿌렸다.

새벽에 배가 아파 두 차례 심하게 설사했다. 토할 것 같았지만 토하지는 못했다. 머리도 조금 아팠다.

곽란인 듯하여 우물물을 마셨다.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조금 가라앉았지만 머리와 관자놀이 통증은 아직 남아 있었다.

저녁에 함열에서 사람이 왔다.

딸이 흰쌀 두 말, 생선 한 마리, 붕어 여덟 마리를 쪄서 국물과 함께 그릇에 담아 봉해 보냈다.

곧 밥을 지어 나누어 먹었다.

다만 나는 몸이 좋지 않고 속이 메스꺼워 먹지 못했다.

1594년 10월 12일 (갑오년 음력 8월 29일)

지난밤 바람이 불고 추웠다.

아침에 보니 된서리가 내려 지붕이 모두 하얗다. 날씨가 겨울 같다.

방도 몹시 차고 식구들의 옷은 너무 얇다.

계집종 옥춘을 함열에서 온 사람과 함께 돌려보냈다.

혼서함과 딸의 긴옷도 보냈다.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저녁에는 딸이 관노를 보내 편지로 안부를 묻고 잔치 뒤 남은 떡과 과일, 구운 고기와 반찬을 보내왔다. 아이들과 함께 먹었다.

답장을 써 그 사람에게 돌려보냈다.

소즐의 아내가 절인 게 열 마리를 보내와 쌀 한 말을 답례로 주었다.

1594년 10월 13일 (갑오년 음력 8월 30일)

오늘은 함열에서 아무도 오지 않았다.

막정도 돌아오지 않는다. 윤겸이 길에서 머물고 있는 모양이다.

관찰사가 어제 고을에 들어와 사흘 동안 머문다고 한다.

저녁에는 김정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그는 김대성의 아들이다. 김대성은 지난여름 병으로 죽어 지금 상중이다.

1594년 10월 14일 (갑오년 음력 9월 1일)

밥을 먹고 심심해 린아와 단녀를 데리고 제단 위에 올라갔다.

마침 이웃 노인이 그곳에서 풀을 베고 있어 함께 앉아 반나절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이경익이 찾아왔다가 갔다.

함열에서 오늘도 사람이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듯하다.

어제부터 양식이 떨어져 죽만 먹고 있다.

오늘 양식을 보내 준다는 말을 들어 저녁까지 기다렸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날까지 저물어 다른 곳에서 빌릴 데도 없어 무를 캐 국을 끓여 아이들과 마셨다.

밤이 깊었고 그대로 굶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 잠도 오지 않는다.

린아는 날마다 학질을 앓는데 먹지도 못하니 더욱 불쌍하다.

막정 일행도 오지 않는다. 무슨 일인가.

종과 말이 나가 버려 사람을 보내지도 못해 오늘처럼 완전히 굶게 되었다.

전에도 먹을 것이 없는 때가 있었지만 오늘처럼 아무것도 못 먹은 적은 없었다.

1594년 10월 15일 (갑오년 음력 9월 2일)

쌀 두 되 반을 빌려 아침밥을 지어 나누어 먹었다.

아침밥 뒤 함열에서 사람이 왔다. 흰쌀 두 말, 중미 두 말, 생게 스무 마리를 가져왔다. 딸도 반찬과 떡, 과일을 조금 보냈다.

이 사람은 어제 나루에 도착했으나 물을 건너지 못하고 오늘 아침에야 건너왔다고 한다.

함열 수령은 어제 차사로 나갔다고 한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다가 오후에야 갰지만 하루 종일 흐렸다.

밤늦게 막정 일행도 들어왔다.

어젯밤 공양 광석리에서 묵었는데 비 때문에 길이 나빠 일찍 떠나지 못해 날이 저물었다고 한다.

윤겸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홍양 이생원 익빈 집에서 이틀을 묵었기 때문에 종과 말이 이제야 돌아온 것이다.

언해 소학 네 권을 구해 보내왔다. 딸들이 몹시 읽고 싶어 해 윤겸에게 구해 달라고 했더니 이생원에게서 얻었다고 한다.

들깨 한 말, 찹쌀 넉 되, 찰조 닷 되, 살아 있는 닭 한 마리도 보내왔다.

닭은 전날 전문에게 빌려 쓴 닭 값을 갚으려는 것이다.

다만 막정 일행은 밤에 돌아오면서 풀을 베지 않아 말 두 필을 또 굶겼다. 몹시 괘씸하다.

단녀도 오늘 학질을 앓았다. 이틀에 한 번씩 앓는 병인 듯하다.

1594년 10월 16일 (갑오년 음력 9월 3일)

새벽부터 비가 내려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밤에는 경여를 꿈에서 보았다. 생전 모습 그대로였다.

깨어나니 슬픔을 이길 수 없었다.

저녁에 비가 개어 곧 고을로 들어갔다.

관찰사는 어제 이미 떠났고 수령 이구순은 관청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지기가 막아 이름을 전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몹시 아쉽다.

1594년 10월 17일 (갑오년 음력 9월 4일)

진사 이중영을 찾아가 한가롭게 이야기하다가 해가 기울어 돌아왔다.

저녁에는 옥춘이 함열에서 관원과 함께 들어왔다.

함열에서 흰쌀 두 말, 벼 한 섬, 절인 게 스무 마리를 보내왔다.

방이 너무 차가워 다른 집으로 옮기려 하지만 빌릴 집을 얻지 못해 걱정스럽다.

1594년 10월 18일 (갑오년 음력 9월 5일)

함열에서 사람이 왔다.

함열 수령은 어제 관아로 돌아왔다고 한다.

편지에는 전주에 갔다가 흉년의 피해를 조사하는 일이 갑자기 생겨 서둘러 돌아오는 바람에 태인에는 가지 못하고 안부를 묻는 사람만 보냈다고 했다.

함께 절인 게 스무 마리, 술 한 병, 닭 두 마리를 보냈다. 참으로 고맙다.

또 이곳으로 큰 붕어 다섯 마리, 새우젓 닷 되, 추로주 두 병, 생강 열세 덩이와 생강장아찌 작은 항아리 하나도 보내왔다.

붕어를 쪄 먹으니 맛이 매우 좋았다.

이렇게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늙은 어머니가 멀리 계셔 드리지 못하니 한참이나 상 앞에 앉아 젓가락을 들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더욱 빨리 어머니를 모셔 오고 싶지만 일이 계속 어그러져 답답하다.

단녀는 학질을 앓았다.

보리 씨를 환곡으로 달라고 수령에게 청했지만 관청에 남은 것이 없다며 주지 않았다. 아쉽다.

1594년 10월 19일 (갑오년 음력 9월 6일)

이른 아침 집을 빌리려고 최인복을 찾아갔는데 밖에 나갔다고 하며 만나 주지 않았다. 무시당한 듯해 불쾌했다.

밥을 먹고 나니 최인복이 직접 찾아와 아침에는 일이 있어 나가 있었기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추로주 큰 잔 두 잔을 주었다.

그의 집은 빌려 주기로 했다. 기쁘다.

어제 함열에서 자리 넉 장을 먼저 묶어 보내고 나머지 넉 장은 아직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저녁에는 시증이 익산에서 찾아왔다. 뜻밖이라 무척 반가웠다.

장수에 있는 집안사람들도 모두 무사하다고 하니 더욱 기쁘다.

경여의 아내는 딸이 일찍 죽어 외손자 원룡 하나만 남았는데, 시증을 양자로 삼아 경여의 장례와 묘 쓰는 일을 맡기려고 데리고 왔다고 한다.

1594년 10월 20일 (갑오년 음력 9월 7일)

시증이 익산으로 돌아갔다.

막정과 옥춘도 함열로 돌아갔다.

어제 어머니의 친필 편지와 아우의 편지를 받았다. 모두 별 탈 없다고 하니 참으로 기쁘다.

어머니는 함열에서 보낸 물건도 잘 받으셨고 고마워하신다고 한다. 마음이 놓인다.

저녁에는 신 별감 몽겸이 찾아왔다가 갔다.

그가 수령 이구순의 말을 전했다.

며칠 전 내가 두 번 고을에 들어갔다가 문지기에게 막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말을 수령이 듣고 몹시 미안해하며 다시 들어오라고 했다고 한다.

1594년 10월 21일 (갑오년 음력 9월 8일)

함열에서 사람이 왔다.

딸이 흰쌀 두 말, 중미 두 말, 단장 두 말, 미역 다섯 동을 보내 주었다.

아침밥 뒤 고을로 들어갔다.

수령이 관청에 나와 있어 나를 불러들였다.

전 대흥 수령 신괄과 전 판관 상기손이 함께 앉아 있어 같이 이야기했다.

수령은 물에 만 밥을 대접했다.

해가 기울어서야 돌아왔다.

오는 길에 최인복 집에 들러 실제로 살 만한지 살펴보았다.

저녁에는 천린이 한산에서 찾아와 묵었다.

기대수 부자도 뒤이어 들어와 저녁밥을 먹이고 재웠다.

1594년 10월 22일 (갑오년 음력 9월 9일)

천린은 아침 일찍 한산으로 돌아갔다. 어제 죽을 먹여 보냈다.

기대수에게도 아침밥을 먹였다. 줄 만한 것이 없어 벼 한 말과 단장, 미역 조금을 주어 보냈다.

부자가 짐을 지고 길을 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다.

천린이 곧 수원으로 돌아간다기에 윤해에게 보낼 편지를 맡겼다.

막정도 함열에서 온 사람과 함께 들어왔다.

함열 수령은 중양절이라고 다음을 보내 주었다.

술 세 병

떡 한 상자

여러 가지 과일 한 상자

여러 가지 썬 고기 한 상자

여러 가지 구운 고기 한 상자

천엽 반 벌

생선 한 마리

쇠고기 두 덩이

중미 두 말

콩 석 말

딸도 흰쌀 한 말을 보냈다.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먹었다. 그 후한 뜻이 참으로 고맙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마주하니 멀리 계신 어머니께 드리지 못하고, 윤해도 없어 함께 먹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충손 생각도 유난히 났다.

1594년 10월 23일 (갑오년 음력 9월 10일)

최인복과 전문을 불러 술을 대접했다.

누룩 한 덩이를 구하려고 한 것이다.

최인복은 큰 잔 여섯 잔, 전문은 큰 잔 두 잔을 마시고 돌아갔다.

1594년 10월 24일 (갑오년 음력 9월 11일)

린아와 단녀의 학질이 더욱 심해졌다. 걱정스럽다.

저녁에 함열에서 사람이 와 중미 두 말, 흰쌀 한 말, 절인 게 스무 마리를 전했다.

1594년 10월 25일 (갑오년 음력 9월 12일)

이른 아침 종 네 명에게 둔답의 벼를 베게 하고 널어 말리게 했다.

아침에는 체찰사 종사관 조존성이 이 고을에 와 쌀 두 말과 웅어젓 넉 되를 보내 주었다.

윤해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곧 답장을 써 보냈다.

저녁에는 함열의 종이 서울로 올라가며 우리 집에 묵었다. 윤해에게 보낼 편지를 써 진위 집에 전해 달라고 맡겼다.

향비가 볼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1594년 10월 26일 (갑오년 음력 9월 13일)

밥을 먹고 고을로 들어가 수령을 만났다.

수령은 마침 성 쌓는 일을 감독하는 군관들과 동헌에 앉아 있었다.

잠깐 이야기한 뒤 수령은 군관들과 함께 한 진사 겸의 집으로 활쏘기를 하러 갔다. 전에 약속한 일이었다.

수령이 나도 함께 가자 했지만 일이 있어 가지 않고 돌아왔다.

오는 길에 신몽겸을 만나 두 아이의 학질을 떼는 방법을 부탁했다. 전에 그의 방법이 매우 잘 듣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1594년 10월 27일 (갑오년 음력 9월 14일)

둔답의 벼를 모두 들여오니 백아흔여섯 단이었다.

함열에서 흰쌀 한 말, 중미 두 말, 절인 게 스무 마리, 술 한 병 반, 살아 있는 닭 한 마리를 보내왔다.

신몽겸이 준 부적과 방법을 두 아이에게 써 보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심하게 앓는다. 안타깝다.

1594년 10월 28일 (갑오년 음력 9월 15일)

한복이라는 떠돌이 사람을 불러 방구들을 손보게 했다. 그는 피란 와 우리 집 근처에 사는 사람이다.

1594년 10월 29일 (갑오년 음력 9월 16일)

어제 구들을 제대로 파내지 않고 겉만 고쳤더니 아궁이의 불길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침에 막정에게 다시 헐어 막힌 곳을 파내고 고치게 했다.

어제 한 일이 모두 허사가 되었으니 우습다.

하루 종일 불을 때도 방이 잘 따뜻해지지 않고, 새로 고친 곳도 아직 마르지 않았다.

이 방에 어머니를 모실 생각이었는데 이러하니 걱정스럽다.

1594년 10월 30일 (갑오년 음력 9월 17일)

아침밥 뒤 종 둘과 말을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남당진을 배로 건너는데 마침 이정시를 나루에서 만나 같은 배를 탔다.

함열에 도착하니 이미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다.

수령이 관아 안에 있다가 나를 불러들였다.

딸을 보고 차와 간식, 저녁밥을 함께 먹었다.

밤에는 상동헌에서 잤다. 이유위 이정시와 한방에서 잤고 임성도 함께 묵었다. 임성은 수령 집안사람이다.

1594년 10월 31일 (갑오년 음력 9월 18일)

이른 아침 전 대흥 수령 신괄이 찾아왔다. 함열 수령도 뒤따라 나왔다.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늦은 아침에는 김봉사도 들어와 하루 종일 함께 이야기했다.

나는 관아 안으로 들어가 딸을 보았다.

김봉사는 어제 태안에서 돌아오는 길에 결성에 들러 윤겸을 만났고, 그의 편지도 가져왔다.

윤겸은 지금 무사하다고 한다.

다만 임아가 밖에서 놀다가 뱀에 물렸는데 가까스로 낫는 중이라고 한다. 놀랍고 걱정스럽다.

린아의 혼사도 보령에 사는 윤겸 아내 쪽 친척집으로 정해졌고 청혼서도 보냈다고 한다. 아직 일을 완전히 마치지는 못했으므로 돌아온 뒤 글을 보내기로 했다.

1594년 11월

1594년 11월 1일 (갑오년 음력 9월 19일)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바람까지 불어 하루 종일 개지 않았다.

저녁에 관아로 들어가 딸을 보고 수령과 함께 저녁밥을 먹었다.

밤에는 동헌에서 임성과 이정시와 함께 잤다.

수령과 여러 사람은 웅포에 가서 고기잡이를 보려 했지만 비 때문에 가지 못했다.

1594년 11월 2일 (갑오년 음력 9월 20일)

비가 갰다.

함열 수령이 나왔고 신괄도 왔다. 여러 사람과 두부를 만들어 함께 먹었다.

늦게 고을 서쪽 웅포로 가 고기잡이를 구경했다. 마침 바람이 심해 물고기를 잡지는 못했다.

그래도 여러 사람과 배를 타고 강 한가운데에 닻을 내린 뒤 함께 술을 마셨다.

함께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신괄

김봉사

이정시

이천황

신응관

홍찰방 요좌

함열 수령

고을의 세 향소 사람들도 참석해 각자 술과 안주를 아주 넉넉히 차려 왔다.

저녁에는 물결을 따라 배를 띄워 올라가 구창 나루에 댔다.

안사눌과 남궁이도 불러 술을 마시게 하고 저녁밥도 먹었다.

날이 저물어 각자 횃불을 들고 돌아왔다.

고을에 들어오니 밤이 깊었다.

이유위는 뒤에 처져 나루에서 묵고 내일 한산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1594년 11월 3일 (갑오년 음력 9월 21일)

처음에는 오늘 태인으로 떠나려 했으나 때가 늦어 가지 못했다.

함열 수령이 길에서 쓰라고 다음을 주었다.

흰쌀 한 말

중미 두 말

콩 두 말

조기 한 묶음

육포 다섯 줄

절인 게 열다섯 마리

생게 열 마리

짠장 한 되

또 보리 씨 일곱 말을 얻었고, 무명 한 필 반과 바꾸었다.

하루 종일 관아에서 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1594년 11월 4일 (갑오년 음력 9월 22일)

날이 밝기 전에 밥을 먹고 관아로 들어가 수령과 딸을 만났다.

마침 수령 선조의 제삿날이라 관아에서 제사를 지냈고, 그 음식과 술을 나에게도 주었다.

관인 한 명을 데리고 출발했다.

신창진에 이르러 배를 타고 건넜다.

건너편 주민의 집들은 모두 헐려 하나도 남지 않았다.

물어보니 지난달 임피에 갇혀 있던 도적이 주민들을 끌어들였다는 자백을 해 군사들이 수색하자 사람들이 모두 도망해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헐리지 않은 집 하나를 찾아 말을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잠시 뒤 바람과 비가 크게 일어 바로 떠나지 못했다. 조금 잦아들기를 기다려 비옷을 입고 길을 나섰다.

김제군에 도착해 홍문 밖 민가에 들어갔는데 이미 선비 한 사람이 먼저 묵고 있어 들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비가 하루 종일 그치지 않고 달리 머물 곳도 없어 억지로 빈 행랑에 들어가 앉았다.

그 선비가 나와 이름을 물으니 조형원이었다. 고 지례 수령 조추의 손자이고 조존경의 아들이니 내게 팔촌 손자뻘이었다. 뜻밖의 인연이라 다행이었다.

조도어사 박홍로가 군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막정에게 이름을 알리게 했다. 또 관인에게 함열 수령의 편지를 수령에게 전하게 했다.

수령이 곧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어사도 시동을 보내 나를 불렀다.

상동헌으로 가니 응소 박홍로가 수령과 친족 몇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뜻밖에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수령이 나간 뒤 응소와 밤늦도록 이야기하고 함께 잤다.

수령은 일행의 식사를 내주게 했다.

1594년 11월 5일 (갑오년 음력 9월 23일)

날이 맑았다.

수령이 어사를 찾아와 함께 이른밥을 먹었다.

생원 유표도 왔다. 그는 이 고을에 피란 와 살고 있으며 어사와 같은 또래의 친구다.

또 함께 아침밥을 먹고 큰 잔으로 술 두 잔을 마셨다. 날이 춥고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응소 박홍로와 여러 사람에게 작별하고 출발했다.

넓은 들을 지나는데 어제 비로 물이 길에 가득 차 진흙을 헤치며 어렵게 걸었다.

마른 길에 올라 태인 전리에 도착하니 해가 이미 기울었다.

어머니께 들어가 뵈었다.

집안사람들은 모두 예전대로였지만 덕경이 말을 끌고 영암으로 간 뒤 날짜가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도망친 것이 아니라면 도적을 만났을까 걱정된다.

며칠 더 기다려도 오지 않으면 어머니를 모시고 갈 때 종과 말이 부족해 곤란할 것이다.

밤늦도록 어머니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권 별감의 행랑방으로 가 권씨 아들과 함께 잤다.

김제와 익산 두 고을을 지날 때 묵으려고 어사가 써 준 사적인 통문도 가지고 왔다.

1594년 11월 6일 (갑오년 음력 9월 24일)

언명 희철이 농사지은 논의 벼를 종이 없어 오래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내 종 두 명과 관인을 보내 베게 하고 말 두 필로 실어 오게 했다.

그런데 찬바람이 크게 불어 날씨가 몹시 매서웠다. 사람들이 이를 딱딱 부딪칠 정도였다.

끝까지 다 베지 못하고 모두 일을 거두고 돌아왔다.

양식만 허비했다. 가난한 집 일은 하는 것마다 이렇다. 한탄스럽다.

권 별감 서가 집에 왔다는 말을 듣고 누마루로 찾아가 만났다.

전에 여러 번 이곳에 왔어도 번번이 서로 엇갈려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는데 오늘 드디어 만났다.

그가 우리 늙은 어머니를 후하게 보살펴 준 일에 먼저 감사했다.

어머니가 몸이 편치 않으시면 맛있는 것을 구해 잇달아 보내 주고, 양식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온갖 방법으로 마련해 굶지 않게 해 주었다.

아우에게도 후하게 대했다.

이런 때에는 친척과 옛 친구조차 돌아보지 않는데 전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해 주니 그 마음을 잊을 수 없다.

아우의 장인·장모와 처남은 바로 울타리 너머에 살면서 평범한 작은 물건조차 빌려 주지 않는다. 하물며 굶주림을 구해 주기를 바라겠는가.

사람의 타고난 마음이 어찌 이토록 다른가.

저녁에는 권씨 행랑에서 그의 둘째 아들 극정과 함께 잤다.

권씨의 두 아들은 나이가 어려도 모두 순박하고 신중한 사람들이다.

1594년 11월 7일 (갑오년 음력 9월 25일)

어제 다 베지 못한 벼를 종 둘에게 다시 베어 오게 했다.

실어 온 것은 겨우 세 짐뿐이었다.

아침밥 뒤 권씨 누마루에서 온종일 권공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는 다시 권씨 행랑에서 그 아들과 함께 잤다.

처음에는 내일 어머니를 모시고 떠나려 했지만 일이 끝나지 않아 모레로 미뤘다.

1594년 11월 8일 (갑오년 음력 9월 26일)

아침밥은 권씨 집에서 우리 형제와 어머니께 차려 드렸다.

권공의 아내도 내일 떠나는 어머니께 인사하러 왔다.

하루 종일 권씨 누마루에서 마을 사람 네댓 명과 이야기했다.

주인은 일이 있어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왔다.

다시 권씨 행랑에서 그 아들과 함께 잤다.

덕경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종과 말이 부족한 채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가야 하니 길에서 큰 곤란을 겪을까 걱정이 끝이 없다.

언명도 함께 갈 수 없다. 그 역시 종과 말이 없기 때문이다.

1594년 11월 9일 (갑오년 음력 9월 27일)

아침밥을 먹고 어머니를 모시고 출발했다.

언명은 걸어서 마을 어귀까지 따라 나왔다가 돌아갔다.

함께 가지 못하니 어머니도 서운해 눈물을 흘리셨다. 마음이 몹시 착잡했다.

종정원 앞에 이르러 말을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해가 기울어 금구현에 도착했다.

어사가 준 통문과 함열 수령의 편지를 전하니 일행의 식사를 내주었다.

밥을 먹은 뒤 수령 김복억을 만나러 들어갔다.

전에는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지만 이름은 오래전부터 들었다.

매우 후하게 대하며 다음을 길양식으로 주었다.

흰쌀 한 말

중미 한 말

콩 한 말

조기 한 묶음

절인 게 열 마리

단장 석 되

짠장 반 되

소금 한 되

참으로 고맙다.

저녁에는 이 도의 새 도사 황극중이 서울에서 막 내려와 있었다. 전부터 아는 사람이어서 곧 이름을 알리니 나를 불러들였다.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밤이 깊었다.

1594년 11월 10일 (갑오년 음력 9월 28일)

아침밥 뒤 수령 김복억이 사람을 보내 나를 불렀다.

서헌에서 만나 수령이 술 석 잔을 주었다.

잠시 뒤 도사 황극중도 사람을 보내 불러 방에서 만났다. 도사도 술 석 잔을 주었다.

영암 누이에게 보낼 편지를 써 맡기고 아우에게도 안부를 전해 달라고 했다.

밖으로 나와 어머니를 모시고 출발했다.

삼례역관에서 말을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계집종 열금이 뒤에 처져 기다려도 오지 않아 계집종 복지만 남겨 기다리게 하고 먼저 갔다.

익산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어두웠다.

어사의 통문과 함열 수령의 편지를 전하니 수령 고성후가 사창에 나와 있다가 사람을 보내 나를 불렀다.

찾아가 옛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대접받았다.

돌아와 객관에서 잤다. 일행의 식사도 관에서 내주었다.

1594년 11월 11일 (갑오년 음력 9월 29일)

이른 아침 수령에게 술과 안주를 얻어 고 경여의 아내가 사는 군내 탄곡으로 찾아갔다.

경여를 임시로 묻은 곳에 술 한 잔을 올리고 한바탕 울었다.

지난 일을 떠올리니 슬픔을 견딜 수 없었다.

경여의 아내도 나를 보고 통곡했다.

사람 없는 골짜기에서 아이들과 홀로 사는 모습이 너무 가엾다.

마침 한욱이 찾아와 잠시 이야기했다.

돌아오니 해가 높았다.

사창에 있는 수령을 다시 찾아갔다.

수령은 중미 두 말, 정미 두 말, 벼 닷 말, 단장 닷 되, 조기 두 묶음, 누룩 세 덩이, 콩 두 말을 주었다.

수령의 이름은 고성후이고 예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다.

도사 황극중도 먹을 것을 마련해 주라고 사적인 통문을 써 주었다.

한낮에 어머니를 모시고 출발해 함열에 도착하니 해가 아직 지지 않았다.

마침 함열 수령이 숙부 신괄의 서울 길을 전송하려고 상동방에 송별 자리를 마련했다. 나도 참석했다.

함께한 사람은 신괄, 김봉사, 전 신계 수령 조희안, 이경춘, 신괄의 아들 신응규였다.

서로 술을 주고받다가 밤이 깊어 흩어졌다.

오늘 아침 익산에서 받은 것 가운데 벼 닷 말, 단장 닷 되, 조기 다섯 마리, 절인 게 여섯 마리, 누룩 한 덩이, 쇠고기 한 덩이, 콩 한 말을 경여 아내에게 나누어 주었다.

전 신계 수령 조공은 옥구에 피란 와 살다가 이제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이곳에서 묵었다. 서울에서 같은 동네에 살며 알던 어른인데 객지에서 우연히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그의 두 아들은 모두 죽었고 의지할 곳이 없어 옥구에 있는 첩의 농막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가엾다.

이경춘도 난리를 피해 이 고을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저녁에는 함열 수령이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1594년 11월~12월

1594년 11월 12일 (갑오년 음력 10월 1일)

이른 아침 관아 안으로 들어가 딸을 보고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늦은 오후 함열 수령은 차사로 우도 여러 고을을 돌아볼 예정이어서 떠나려 했다. 출발하기 전에 신괄, 봉사 김경, 봉사 이신성, 민 주부, 신응규와 나까지 관청에 함께 앉아 조촐하게 술자리를 열고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덧 한낮이 기울어 수령은 그 때문에 출발을 미뤘다.

신괄과 김봉사는 술이 모자랐는지 더 마실 궁리를 하다가, 이 고을에 사는 생원 안극인 집에 술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 말을 달려 찾아갔다. 크게 취해 돌아왔다.

저녁에는 딸이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수령이 순행을 마치고 관아로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 머물다가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며칠은 이곳에 있게 되었다.

1594년 11월 13일 (갑오년 음력 10월 2일)

이른 아침 딸을 보러 들어갔다. 수령도 있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뒤 김봉사가 밖에 왔다는 말을 듣고 수령과 함께 관아 문밖으로 나가 평상에 앉아 한참 이야기했다. 그 뒤 각자 돌아갔다.

수령은 밥을 먹은 뒤 익산으로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는 어머니를 찾아뵙고 갔다.

수령이 태인에서도 묵을 것이라고 하므로 아우 희철에게 편지를 써 맡겼고, 어머니 뜻에 따라 조기 한 묶음과 반찬 한 바구니도 함께 보냈다.

한낮에는 수령이 명하여 길에서 먹을 과일과 찰떡을 마련해 어머니께 올렸다.

1594년 11월 14일 (갑오년 음력 10월 3일)

오늘은 장날이다.

딸이 막정에게 비단을 바꾸어 오게 하면서 좋은 무명 한 필과 흰쌀 닷 말을 주었다.

나도 좋은 무명 두 필 반과 중미 두 말을 내어 겉옷감으로 쓸 비단을 바꾸었다. 린아가 장가들 때 쓰려는 것이다.

그 일 때문에 늦게 출발해 남당진에 도착했다.

배가 마침 북쪽 언덕에 정박해 있었고 물살이 거세며 건너려는 사람도 없어 쉽게 배가 오지 않았다. 해가 기울어서야 가까스로 나루를 건넜는데 이미 저녁이었다.

마침 진사 이중영의 아들과 함께 길을 왔다. 밤이 깊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1594년 11월 15일 (갑오년 음력 10월 4일)

돌아와 들으니 윤겸의 종 세만이 그저께 들어왔다고 한다.

린아 윤성의 혼사를 이달 안으로 치르려고 하는데 상대 집에서 혼례 날짜를 재촉해 보내왔다고 한다. 윤겸이 사람을 보내 답장을 했는데, 이달로 정하면 옷을 마련할 시간이 부족해 걱정스럽다.

또 윤함의 처가 종 옥지가 해서에서 윤함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편지를 보니 윤함은 무사히 지낸다고 한다. 매우 기뻤다.

하지만 오정일은 지난 음력 팔월 도적을 만나 죽었고, 유일도 병들어 죽었다고 한다. 형제가 모두 죽었다니 참으로 불길하고 슬프다.

정일은 종가의 맏손자인데 뒤를 이을 아들도 없이 도적의 손에 죽었다니 더욱 애통하다.

다만 그는 본래 성품이 순하지 못하고 고향에서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많아 가는 곳마다 원망을 샀으며 승려와 백성 모두 그를 미워했다고 한다. 화를 입은 데에도 그런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종가의 선조 신주들은 난리 뒤 정일이 해주의 자기 집으로 모셔 갔다고 하는데, 정일이 죽은 뒤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의지할 사람도 없으니 걱정스럽다.

살아 있었다 해도 마음 놓고 맡길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은 막내아우 미질남만 살아 있다고 한다.

옥지는 어제 이미 돌아갔다. 답장을 써 보내지 못한 것이 몹시 아쉽다.

1594년 11월 16일 (갑오년 음력 10월 5일)

오늘은 할아버지 제삿날이다.

떡과 밥, 과일, 포와 젓갈을 마련해 술잔을 올렸다.

종손들이 모두 죽어 제사를 지낼 사람이 없고 차례로 제사를 맡을 곳도 없다. 나는 아주 먼 방계 후손이지만 차마 이날을 그냥 넘길 수 없어 마련할 수 있는 만큼만 차려 정성을 올렸다. 슬픈 마음을 이길 수 없다.

최인복이 찾아왔다. 큰 잔으로 술 다섯 잔을 대접해 보냈다.

오후에는 진사 이중영과 소즐이 찾아왔다. 이들에게도 술을 대접했고, 소즐에게는 저녁밥까지 먹였다. 한가롭게 이야기하다가 흩어졌다.

함열에서 사람이 와 흰쌀 두 말을 가져왔다.

1594년 11월 17일 (갑오년 음력 10월 6일)

어제부터 둔답에서 거둔 벼를 털어 정리하고 있다.

오늘은 노비 다섯 명을 붙여 내일까지 모두 끝내게 했다. 내일 동쪽 집으로 이사하려 하기 때문이다.

어제 벼 마흔 단을 털어 보니 깨끗한 벼가 서른 말 나왔다. 이것은 관아에 바칠 생각이다.

오후에는 신괄이 함열에서 서울로 올라가다가 들렀다.

그에게서 함열 수령이 어제 이미 관아로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다.

신괄에게 큰 잔으로 술 두 잔을 대접했다.

신괄과 함께 고을로 들어갔으나 수령은 병이 나서 나오지 않았고 이름도 알리지 못했다.

신괄과 낭청방에 앉아 이야기하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왔다. 해가 이미 저물었다.

신괄은 가까스로 이름을 알리고 그곳에서 묵었다.

1594년 11월 18일 (갑오년 음력 10월 7일)

아침에 집주인 최인복이 와서 말했다.

“홍 주서가 먼저 이 집에 들어와 살려고 계집종을 보내 집을 지키게 하고, 주인에게 묻지도 않은 채 짐부터 옮겼습니다. 오늘 들어와 산다고 하니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집이 비어 있는 줄 알고 내가 이미 빌린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들어오려는 것일 겁니다.”

술 큰 잔 두 잔을 대접해 보내고, 밥을 먹은 뒤 막정을 홍 주서에게 보내 내가 이미 집주인에게 빌려 내일 이사하기로 했다는 사정을 전하게 했다.

홍 주서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도 사정을 몰랐습니다. 이 부장의 말을 듣고 들어가려 했는데, 이제 어른께서 이미 빌렸다는 말을 들었으니 다툴 일이 아닙니다. 나는 다른 집을 구하겠습니다.”

내일 먼저 침구와 여러 물건을 옮기고 저녁 무렵 온 가족이 이사할 생각이다.

홍 주서의 이름은 홍준이다. 서울에 있을 때 한 동네에 살며 서로 알던 사람이고 윤겸의 젊은 시절 벗이기도 하다.

지금 어머니 상중이다. 지난달 장인인 전 판관 상시손의 집에 와 머물고 있었는데, 도적이 두려워 관아 가까운 곳으로 옮겨 살려고 한 것이다.

나도 최씨 집으로 찾아가 이광춘을 불러 사정을 이야기했다. 다만 최씨 집을 지키는 계집종이 불손한 말을 많이 해 몹시 괘씸했다.

함열에서 사람이 와 흰쌀 두 말을 전했다.

1594년 11월 19일 (갑오년 음력 10월 8일)

동쪽의 최인복 집으로 물건을 옮겼다.

저녁 무렵 온 가족이 그 집으로 이사했다.

전문의 아내가 술과 과일을 갖추어 와 아내에게 인사했다.

소즐도 찾아왔다. 큰 사발로 술 한 그릇을 대접했다.

그의 말을 빌려 타고 왔다.

윤겸은 오지 않았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1594년 11월 20일 (갑오년 음력 10월 9일)

윤겸이 별시를 보러 왔다면 어제는 반드시 나를 찾아본 뒤 부여의 시험장으로 갔을 텐데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오지 않은 모양이다.

함열의 종이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에 생원 윤해를 만났다고 한다.

윤해는 별시를 보려고 서울에 올라가던 중인데 길에서 편지를 쓸 겨를이 없었고,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수원의 종 집에 와 있다고 했다고 한다.

아침밥 뒤 조대영 집으로 가 어제 미처 옮기지 못한 물건을 다시 옮기게 했다.

그 길로 진사 이중영을 찾아보고 돌아왔다.

전문도 찾아왔다.

1594년 11월 21일 (갑오년 음력 10월 10일)

종 두 명에게 변소를 만들게 했다.

천린이 한산에서 찾아왔다.

지난달 이미 수원으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도망간 종의 논밭을 되찾는 일 때문에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고 있다가 나를 찾아왔다고 한다.

어머니가 머무실 방을 깨끗이 쓸고 찢어진 창과 벽을 발랐다.

1594년 11월 22일 (갑오년 음력 10월 11일)

처음에는 오늘 함열로 가 어머니를 모셔 오려 했다.

하지만 집에 땔나무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종 두 명과 말을 보내 나무를 베어 실어 오게 했다.

어머니가 함열 관아에 오래 머무르는 바람에 함열 수령은 다른 방으로 옮겨 자고 있다고 한다. 몹시 미안하다.

오늘 아침 집주인 계집종이 누마루 사이의 자물쇠를 열어 주어 그 안에 신주를 모셨다.

윤겸이 부여에서 별시를 보고 들어왔다.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잤다.

윤겸의 종도 결성에서 뒤따라왔다. 찰떡 한 바구니와 엿 한 바구니를 가져왔다.

개질지도 석성에서 쌀 두 말과 콩 두 말을 얻어 왔다.

함열의 사람도 와 흰쌀 두 말을 전했다.

1594년 11월 23일 (갑오년 음력 10월 12일)

아침에 소즐이 먼저 술과 과일을 보내고 자신도 뒤따라왔다. 오늘이 윤겸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밥을 먹고 윤겸과 함께 함열로 갔다.

찐 떡 한 바구니를 가지고 들어가 함열 수령의 어머니께 드렸다.

어머니께도 나아가 뵈니 평안하셨다.

수령 신응구가 관아로 들어와 윤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깊어서야 나왔다.

나는 윤겸, 임성과 함께 관청의 새 방에서 잤다.

아침에 이무가 떠나기 전에 찾아왔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술 석 잔을 대접해 보냈다. 소즐도 함께 있었다.

이무는 조자옥의 사위다. 지난여름 아내와 아들을 잃었다고 한다.

자옥은 해서 송화에서 해미로 옮겨 피란 와 있고, 이무도 그를 모시고 왔다.

함열 수령과 가까운 친척이라 찾아왔다가 내가 이 고을에 떠돌아 산다는 말을 듣고 나를 찾아본 것이다.

1594년 11월 24일 (갑오년 음력 10월 13일)

수령이 관아로 나온 뒤 윤겸과 함께 딸의 방으로 가 어머니를 모시고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만 계집종 열금은 이곳에 온 뒤 허리 아래가 심하게 부어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한다. 가엾다. 죽을 듯하다.

내일 어머니를 모시고 임천 숙소로 돌아가려 한다.

열금은 민가에 따로 머물게 하고 뒤에 종과 말을 보내 실어 올 생각이다.

저녁에는 수령이 떡과 국수를 만들고 과일상을 차려 어머니께 올렸다. 우리도 함께 먹었다.

1594년 11월 25일 (갑오년 음력 10월 14일)

함열 수령이 다음을 주었다.

중미 넉 말

콩 석 말

벼 한 섬

누룩 다섯 덩이

절인 게 열다섯 마리

조기 두 묶음

기름 한 되

소금 넉 되

밥을 먹고 어머니를 모시고 남당진에 도착했다.

마침 송노가 말을 끌고 마중을 나와 있었으므로 빌려 온 말과 관인은 돌려보냈다.

또 이번 도의 별시 합격자 명단을 보았다.

윤겸만 떨어지고 함께 시험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합격했다. 운명이 그러하니 어쩌겠는가.

장원은 권수기였다.

시험 문제 가운데 글 제목은 오왕이 무예를 폐하지 않은 일을 논하고 활과 화살에 빗대어 정치의 도를 깨우치는 내용이었다.

합격자 명단을 윤겸에게 보냈다.

윤겸은 아직 함열에 있다.

오는 십칠일에는 경여의 영구를 정식으로 장사하므로 내일 익산으로 가서 보려고 한다. 그 뒤 우리를 따라올 것이다.

강을 건너 숙소에 도착하니 해가 아직 높았다.

송노는 지난 음력 삼월 휴가를 얻어 떠난 뒤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아 병들어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나타났다.

괘씸하기는 하지만 집에 부릴 종이 없던 참이라 한편으로는 반가웠다.

왜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아버지가 병들어 죽었고 자신도 전염병을 앓아 곧 돌아오지 못했다고 했다. 가을에 아버지를 장사 지낸 뒤 이제야 돌아왔다고 한다.

틀림없이 꾸며 낸 말 같지만 달리 따질 수도 없어 그런 줄로 받아들였다.

처음부터 달아난 것은 아니므로 늦게 돌아온 죄를 따로 벌하지 않고 잘 대해 주었다.

1594년 11월 26일 (갑오년 음력 10월 15일)

종 세 명과 말을 보내 흙집을 지을 나무를 베어 오게 했다.

오후에는 비가 흩뿌렸다.

한노를 익산으로 보냈다.

경여의 무덤에 올릴 술과 과일을 준비해 보내기 위해서다.

1594년 11월 27일 (갑오년 음력 10월 16일)

흙집 두 곳을 묻어 만들었다. 한 곳은 계집종들이 살 곳이다.

기대수와 전계남이 영동에서 한산으로 가는 길에 들렀다.

남자순 형의 편지를 가져왔기에 여러 번 읽었다. 얼굴을 마주한 듯했다.

백원 형도 영동의 자순 형 집으로 왔다고 한다. 황간에는 의지할 곳이 없고 굶주림이 날로 심해 자순 형이 모셔 왔다고 한다.

황간의 친척과 벗들은 모두 병들거나 굶어 죽었고 외가의 옛 집터는 쑥과 잡초만 가득하다고 한다.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했다. 한탄스럽다.

전계남은 자순의 외손자다.

함열에 사는 막정의 주인이 아들과 함께 찾아와 찐 떡 한 바구니, 좋은 술 두 병, 과일과 안주 세 바구니를 바쳤다.

전에 권농 직책을 바꾸어 달라는 부탁을 들어 주었기 때문에 감사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마음이 불편했다. 저녁밥을 먹여 보냈다.

영암의 임경흠 집 종이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내가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

누이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종이 해서로 돌아가 박 참판이 머무는 곳에 간다고 하므로 윤함에게 보낼 편지를 써 맡겼다.

이무가 내일 해서로 돌아간다고 하기에 저녁에 찾아가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밤이 깊었다.

1594년 11월 28일 (갑오년 음력 10월 17일)

꿈에서 심설을 보았다. 생전처럼 또렷했다.

딸들도 여러 차례 그를 꿈에서 보았다고 한다. 아마 어머니께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을 징조인가 싶다.

윤함에게 보낼 편지를 다시 써 이무의 길에 맡겼다.

어제 경흠 집 종에게도 편지를 보냈지만 잃어버려 전하지 못할까 걱정되어 다시 써 보내는 것이다.

집주인 최인복 부자가 찾아왔다.

마침 술이 없어 찰떡만 대접해 보냈다.

송노와 계집종 향비를 함열로 보냈다.

윤겸의 종 개질지가 어제 말을 끌고 들어왔다가 오늘 아침 다시 결성 집으로 돌려보냈다.

전 구례현감 조사겸의 첩이 계집종 두 명을 팔겠다고 하여 내가 열세 필 값으로 사기로 했다.

먼저 큰 짐말 한 필을 주고 그 값을 무명 열한 필로 쳤다. 부족한 두 필 값은 벼 한 섬을 주었다.

중간에서 말을 전한 그 집 종 김동과 숙부 말질산에게도 벼 열세 말을 주어 두 사람이 나누어 먹게 했다.

이광춘을 불러 매매 문서를 쓰게 했다.

증인은 김동의 외숙인 사노 말질산과 소즐이 섰다.

1594년 11월 29일 (갑오년 음력 10월 18일)

사들인 계집종 삼작개가 찾아와 이제부터 일을 시키게 되었다.

생원 허용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저녁에는 윤겸이 함열에서 들어왔다.

계집종 열금은 몸을 움직이지 못해 말에 싣고 두 사람이 양쪽에서 붙들어 간신히 데려왔다.

함열 수령이 쌀 여섯 말과 절인 조기 스무 마리를 보내 주었다.

윤겸은 어제 경여의 정식 장사를 본 뒤 함열에서 묵고 오늘 돌아왔다고 한다.

1594년 11월 30일 (갑오년 음력 10월 19일)

아침밥 뒤 사창에 있는 수령 이구순을 찾아갔다.

둔답에서 거둔 좋은 벼 두 섬을 관아에 바쳤다.

또 계집종을 산 문서를 품에 넣고 가 수령에게 말한 뒤 원래 문서에 관의 확인을 받아 김동에게 돌려보냈다.

수령이 술 한 사발을 주었으나 너무 시어 마시기 어려웠다.

수령이 더 머물며 이야기하게 하고 저녁밥도 대접했다.

또 흰 새우젓 석 되, 누룩 두 덩이, 젓국 한 사발을 주었다.

오는 길에는 상중인 홍 주서 준을 찾아보고 돌아왔다. 홍준은 군내에 피란 와 머물고 있다.

저녁에는 선비 이유립이 윤겸에게 이름을 알렸기에 나도 나가 만났다. 난리를 피해 이 고을에 와 사는 사람이다.

밤에는 진사 한겸과 생원 홍사고가 윤겸을 찾아왔다. 나도 나가 함께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지난밤 눈이 내렸지만 땅에 닿자 녹았다.

오후에는 비가 흩뿌렸다.

열금의 병세는 조금 나아졌고 붓기도 줄어드는 듯하다.

1594년 12월

1594년 12월 1일 (갑오년 음력 10월 20일)

밤에 비가 내렸고 아침에도 흐렸다.

윤겸은 송노를 데리고 송노의 말을 타고 결성으로 떠났다.

정산에서 묵고 내일 송노와 말을 돌려보낸 뒤 개질지와 그 말을 데리고 집으로 갈 생각이라고 한다.

오후에는 조대득이 찾아왔다.

윤겸이 시험에서 떨어진 답안지를 가지고 왔다. 도사 김익복이 편지와 함께 그 답안지를 니산 수령 김가기에게 보냈고, 니산 수령이 조공에게 부탁해 전해 온 것이다.

이청도 마침 고을에 왔다가 내가 이곳에 산다는 말을 듣고 시동을 보내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곧 답장을 써 내일 찾아가기로 했다.

이공은 본래 죽산에 살며 나와 같은 고향 사람이다. 전부터 서로 잘 알고 있다.

수령과 칠촌 친척이어서 찾아온 것이고, 그의 가족은 지금 진위에 있다고 한다.

1594년 12월 2일 (갑오년 음력 10월 21일)

아침밥 뒤 군내 민가에 머무는 이청을 찾아갔다.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상중인 한의가 뒤따라왔다. 그는 고 첨지 한성원의 아들이다.

가을걷이 때문에 농막에 왔다가 이공과 아는 사이여서 찾아온 것이다.

한공에게서 한림 김지남의 막내아들 가응이가 지난 음력 팔월 병으로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슬픔을 이길 수 없다.

김한림은 어머니 상중이고 아직 장사도 마치지 못했는데 또 아들을 잃었다. 가난까지 심해 생계를 잇기 어렵다고 하니 더욱 가엾다.

전에는 맏아들과 딸 하나도 모두 죽었고 내 누이도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 해 동안 겹친 재앙이 너무 참혹해 말로 다 할 수 없다.

저녁에는 함열에서 사람이 와 쌀 두 말, 미역 네 동, 생선 한 사발을 가져왔다.

딸도 좋은 술 한 병을 보냈다. 곧 한 잔을 마시니 마음이 조금 풀렸다.

1594년 12월 3일 (갑오년 음력 10월 22일)

어제저녁 한노에게 콩 일곱 되를 들려 대조사에 보내 두부를 만들게 했다.

오늘 아침 가져왔다.

오늘은 외할아버지 제삿날이라 어머니를 위해 반찬을 마련하려 한 것이다.

소즐이 찾아왔다.

소즐이 가져온 환곡 이자 벼 일곱 말 닷 되와 그가 가져온 벼를 합쳐 한 섬을 만들어 관아에 바쳤다.

저녁에는 송노가 들어왔다.

윤겸은 정산에 도착해 말을 빌려 타고 갔고 송노와 말은 돌려보낸 것이다.

정산에서 거친 벼 열 말, 쌀 한 말, 콩 한 말, 단장 닷 되, 짠장 한 되, 홍시 서른 개, 두 가지 소금 조금을 보내왔다.

서울 별시 합격자 명단도 보았는데 윤해 역시 떨어졌다. 한탄스럽다.

조정도 다시 조용하지 못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배척하는 풍파가 일어난다고 한다. 몹시 한심하다.

흉적은 아직 국경 안에 버티고 앉아 으르렁거리며 우리나라를 노리고 있다.

신하와 백성은 마땅히 와신상담하며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억울함을 푼다는 구실로 몰래 복수하고 서로 공격할 궁리만 한다.

나라가 망한 뒤에야 그만둘 것인가. 이 또한 하늘의 뜻인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1594년 12월 4일 (갑오년 음력 10월 23일)

새로 산 계집종 삼작개를 함열로 보냈다.

한노가 말을 끌고 데리고 갔다.

부여 수령 박동도의 사위 이양이 도망 노비를 찾는 일로 이 고을에 왔다.

문단속 때문에 이름을 알리지 못하고 내 숙소로 찾아왔다.

저녁밥을 먹이고 수령에게 편지도 써 주어 만나게 했다. 이양은 그 편지를 가지고 고을로 들어갔다.

삼작개의 이름은 덕개로 바꾸고, 아작개는 눌은개로 바꾸었다.

1594년 12월 5일 (갑오년 음력 10월 24일)

덕린이 한산에서 찾아와 묵었다.

한노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1594년 12월 6일 (갑오년 음력 10월 25일)

덕린이 한산으로 돌아갔다.

한노와 관원이 함께 도착했다.

함열에서 벼 석 섬과 쌀 두 말을 보내 주었다.

벼는 이 고을에 바칠 환곡을 마련하기 위해 구해 온 것이다.

그런데 한노는 두 섬만 싣고 오고 한 섬은 양산 집에 맡겨 두었다고 한다.

장수에서 온 편지와 익산의 경여 아내 편지도 가져왔다.

경여 아내는 분개의 매매 문서를 써 보냈고 모레 수원으로 떠난다고 한다.

그래서 한노에게 곧 답장을 써 익산으로 보내 그 일행을 따라가게 했다. 아버지도 찾아보고 오게 하려는 뜻이다.

처음에는 경여 아내가 올라갈 때 막정이 말을 끌고 모셔다 드리기로 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지키지 못했다.

막정의 정강이에 종기가 생겨 걷지 못하고, 말도 계집종과 바꾸어 버려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한노만 보낼 뿐이니 형편상 어쩔 수 없다.

수령 이구순이 사람을 보내 저녁에 만나자고 했다.

마침 환곡 다섯 섬을 마련해 사창에 직접 가서 바쳤다.

이청도 와 있어 함께 이야기했다.

수령이 저녁밥을 대접하고 관청 일이 끝난 뒤 더 이야기하자며 머물게 했다.

그런데 마침 지평 윤유기와 형 윤유심이 고을에 들어와 일이 많아졌다.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해 질 무렵 숙소로 돌아왔다.

어제부터 찬바람을 맞아 코가 계속 흐른다. 이제는 머리도 조금 아프고 밤새 뒤척였지만 땀이 시원하게 나지 않는다. 걱정스럽다.

1594년 12월 7일 (갑오년 음력 10월 26일)

몸이 몹시 좋지 않아 옷과 이불을 두껍게 덮고 하루 종일 방에 누워 있었다.

음식도 달지 않고 양쪽 관자놀이가 조금씩 아픈데 아직 땀이 시원하게 나지 않는다. 걱정스럽다.

오후에는 비가 내렸다.

1594년 12월 8일 (갑오년 음력 10월 27일)

밤새 비가 그치지 않았고 아침에도 흐렸다.

소즐이 꼭 부탁할 일이 있다며 찾아왔다.

니산 수령 김가기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하기에 곧 써 주었다.

아침밥도 먹이고 술 두 사발을 주었다.

지난밤 땀이 조금 나기는 했지만 아침에는 어제처럼 심하게 아프지는 않아도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다.

1594년 12월 9일 (갑오년 음력 10월 28일)

밤새 땀이 났지만 흠뻑 젖을 만큼은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조금 아프고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다. 걱정스럽다.

기대수와 전계남이 한산에서 지나가다 들렀다.

내 몸이 좋지 않아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방으로 불러 만났다.

저녁밥을 먹이고 재웠다.

자순 형에게 보낼 편지도 맡겼다.

저녁에는 한노가 돌아왔다.

익산의 경여 아내는 닷새 전에 이미 수원으로 떠나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오는 길에 함열에서 묵었고, 함열에서는 새우젓 석 되와 쌀 두 말, 수탉 한 마리를 보내 주었다.

수탉은 울음을 잘 우는 것을 구해 오라고 했는데 어린 닭이라 울지 못한다. 아쉽다.

한 감찰 집이 찾아왔지만 몸이 좋지 않아 나가 만나지 못했다.

1594년 12월 10일 (갑오년 음력 10월 29일)

막정을 홍산으로 보냈다.

윤겸의 편지를 들려 보내 관청 빚으로 쓸 곡식을 구하게 했다.

송노도 함열로 보냈다.

기대수와 전계남은 새벽에 떠나갔다. 죽을 끓여 먹여 보냈다.

나는 지난밤 땀이 흠뻑 나 아침에는 많이 나아졌다.

다만 양쪽 관자놀이의 통증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진사 남일원이 찾아왔다.

몸이 좋지 않아 나가 만나지 못하고 방으로 불러 오랜만의 회포를 풀었다.

그가 함열의 말을 듣지 않는 계집종을 다스리는 일을 위해 내 편지를 받아 가고 싶다고 하여 곧 써 주었다.

저녁밥을 먹여 보냈다.

남일원은 고 죽산 수령 남대임의 둘째 아들이다. 본래 한 동네에 살았고 윤겸과는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였다.

오륙 년 동안 만나지 못하다 객지에서 뜻밖에 만나니 반가움을 이길 수 없다. 그 역시 난리를 피해 이 고을에 와 살고 있다고 한다.

저녁에 막정이 돌아왔다.

홍산에서 거친 벼 한 섬과 누룩 세 덩이를 보내 주었다.

딸은 내가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곧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1594년 12월 11일 (갑오년 음력 10월 30일)

딸이 보낸 문안 관원이 이른 아침 도착했다. 곧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한노는 아버지를 찾아보려고 휴가를 받아 진위로 올라갔다.

윤해에게 보낼 편지도 맡겼다.

다만 길이 험한데 어린 사람이 무사히 잘 갈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내 몸은 조금 나아졌지만 평소 같지는 않다. 머리도 때때로 조금 아프다.

단녀는 요즘 앓지 않는다. 병이 떨어진 것인지 모르겠다.

린아는 전처럼 계속 앓아 걱정스럽다.

아내도 오한이 나고 머리가 아파 한밤중이 되어서야 가라앉았다. 학질인 듯하다. 걱정스럽다.

저녁에 송노가 돌아왔다.

함열에서 쌀 석 말, 콩 석 되, 기름 한 되, 청주 닷 홉, 정어 한 사발을 보내 주었다.

1594년 12월 12일 (갑오년 음력 11월 1일)

몸은 점차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1594년 12월 13일 (갑오년 음력 11월 2일)

아침에 일어나니 평소처럼 거의 나았다. 기쁘다.

함열에서 사람이 와 흰쌀 두 말, 목미 석 되, 짠장 두 되를 가져왔다. 곧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종 둘에게 말을 끌고 동송동으로 가 울타리에 쓸 땔나무를 베어 오게 했는데, 조 금포의 종들이 낫 두 자루를 빼앗아 갔다고 한다.

이사과 사온과 허용이 찾아왔다.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다 흩어졌다.

이사과는 서울에서 알던 사람으로 지금은 전주 양정포에 와 살고 있다고 한다.

저녁에는 방수간이 찾아왔다.

지난봄 큰 병을 앓은 뒤 오래 만나지 못했는데, 지금은 한산으로 옮겨 살고 있고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었다고 한다.

1594년 12월 14일 (갑오년 음력 11월 3일)

종 둘에게 다시 땔나무를 베게 했다.

어제 빼앗긴 낫도 되찾아 오게 하고 울타리를 만들게 했지만 다 끝내지는 못했다.

양지에 사는 선비 김익형이 가을걷이 일로 앞집 종의 집에 왔다가 내가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

그에게 들으니 양지 농촌에는 돌아와 사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옛 집터에는 쑥과 잡초만 가득하다고 한다.

오효기 등도 모두 굶어 죽었다고 한다. 참혹하고 가엾다.

정자 이지강 형제만 옛 집에 들어가 살고 있지만 그들도 오래 머물 형편이 못 된다고 한다.

저녁에는 수령 이구순을 만나려고 고을로 들어갔다.

길에서 좌수 조윤공과 조광철을 만났는데 수령은 정자 정사신의 초대를 받아 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냥 돌아왔다.

계집종 옥춘이 함열에서 들어왔다.

함열 수령은 편지에서 요즘 올빼미가 관아 안으로 들어와 어지럽게 울어 대니 길흉을 이복령에게 점쳐 알려 달라고 했다.

1594년 12월 15일 (갑오년 음력 11월 4일)

이른 아침 고을로 들어갔다.

수령이 관아 안에 있었지만 아직 나오지 않아 이름을 알리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침밥 뒤 이복령 집으로 갔다.

마침 길에서 복령을 만나 함께 수레를 타고 고을에 들어갔다.

사창에서 수령을 만나 소즐의 담당자를 풀어 달라고 청하고 돌아왔다.

수령은 나를 불러 진사 한겸의 생일잔치에 함께 가자고 했다.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라 다른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돌아왔다.

저녁에 함열에서 사람이 와 쌀 두 말, 두 가지 젓갈 한 항아리, 미역 두 동을 보냈다.

밤에는 김익형을 불러 이야기했다.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1594년 12월 16일 (갑오년 음력 11월 5일)

한산으로 가려 했으나 비가 내려 가지 못했다.

하루 종일 개지 않았고 밤새 비가 이어졌다.

이 집에는 비 새는 곳이 너무 많다. 걱정스럽다.

1594년 12월 17일 (갑오년 음력 11월 6일)

아침에 김익형이 찾아왔다. 자는 광후다.

내가 한산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말을 듣지 않는 종 문제를 부탁했다.

아침밥 뒤 출발해 한산 문밖에 이르렀다.

성문 단속이 너무 엄해 들어갈 수 없었다.

물러나 금성정이 머무는 곳을 찾아갔으나 마침 밖에 나가 없었다.

빈 행랑에 혼자 앉아 있는데 금성정의 아내가 저녁밥을 보내 주었다.

저녁에 금성정이 돌아왔다.

한가롭게 옛이야기를 나누고 그곳에서 묵었다.

다만 종과 말은 모두 굶은 채 밤을 보냈다. 안타깝다.

1594년 12월 18일 (갑오년 음력 11월 7일)

아침밥도 금성정이 보내 주었다.

막정을 박반송에게 보내 지난해 가을 내기로 하고 아직 내지 않은 콩을 받아 오게 했다.

송노는 남은 밥만 먹었고 따로 먹을 것은 얻지 못했다. 안타깝다.

금성정이 나를 위해 먼저 수령 신경행을 만나 내 뜻을 전했다.

수령이 곧 나를 불러들였다.

관아 마루에서 만나 큰 잔으로 술 두 잔을 주고 일행의 식사도 내주었다.

천린도 마침 들어와 주인집에서 만났고 그와 함께 잤다.

저녁에는 수령이 관아 방으로 나를 불러 함께 밥을 먹었다.

수령이 다음을 주었다.

벼 한 섬

기름 닷 홉

찹쌀 석 되

조기 한 묶음

흰 물고기 젓 두 되

생선 두 마리

단장 석 되

미역 한 동

젓갈은 천린에게 주었다.

박반송에게서는 콩 넉 말을 받아 왔다. 한 말은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괘씸하다.

1594년 12월 19일 (갑오년 음력 11월 8일)

이른 아침 출발해 금성정 집에 갔다.

먼저 양식과 반찬을 보내 아침밥을 지었다.

천린의 종과 말을 빌려 짐을 실었다.

밥을 먹고 길을 떠나 절반쯤 왔을 때 천린의 종과 말은 돌려보냈다.

그 뒤 짐은 종 둘이 등에 지고 왔다.

오는 길에 말이 넘어져 싣고 있던 물건이 모두 젖었다. 한탄스럽다.

1594년 12월 20일 (갑오년 음력 11월 9일)

막정을 함열로 보냈다. 제수 물품을 구하려는 것이다.

오는 십일일이 동지라 신주 앞에 제사를 올리려 하는데 마련할 길이 없어 종과 말을 보낸 것이다.

저녁에 함열에서 사람이 와 다음을 보냈다.

쌀 두 말

작은 숭어 다섯 마리

홍어 반 마리

정어 다섯 묶음

제사 때 쓸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곧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1594년 12월 21일 (갑오년 음력 11월 10일)

이른 아침 김익형이 찾아왔다.

아침부터 흐리고 바람이 불었으며 눈도 흩뿌렸다.

저녁에 막정이 돌아왔다.

함열에서 다음을 얻어 왔다.

흰쌀 한 말

찹쌀 닷 되

콩 한 말

조기 두 묶음

정어 다섯 묶음

전에 맡겨 두었던 벼 한 섬도 실어 왔다.

내일 제사를 지내려 하는데 제수 물품이 넉넉하지 못하다. 아쉽고 안타깝다.

1594년 12월 22일 (갑오년 음력 11월 11일)

새벽빛이 밝을 무렵 린아와 함께 제사를 지냈다.

죽전 삼촌 두 분의 신위에도 함께 잔을 올렸다.

다만 쇠고기가 없었다. 시골에서는 구할 길이 없으니 한탄스럽다.

아침밥 뒤 조 좌수 희윤과 한림 조희보 형제를 찾아갔다.

말먹이를 부탁하니 조희윤이 술 석 잔을 주었다.

1594년 12월 23일 (갑오년 음력 11월 12일)

아침에 종과 말을 조 좌수 희윤의 집으로 보내 말먹이 스물한 묶음을 실어 왔다.

막정은 수다해로 보냈다. 거기 있는 말먹이를 한곳에 옮겨 쌓게 하기 위해서다.

조문화 희철과 이사과가 각각 말먹이 서른 묶음씩을 주었는데 모두 수다해에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는 김익형이 찾아왔다. 큰 잔 두 잔의 술을 대접해 보냈다.

저녁에는 함열에서 사람이 와 콩 석 말과 쌀 두 말을 가져왔다.

딸이 제사 뒤 남은 떡과 과일, 고기구이도 함께 보냈다.

곧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오후에는 영암의 진사 임현이 전시에 응시하러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며 내가 가까이에 산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

뜻밖의 만남이라 몹시 반가웠다.

누이도 평안하다고 하니 더욱 기뻤다.

저녁밥을 먹였다.

임현은 말린 생선 두 묶음을 주었다.

저녁에는 윤해가 들어왔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참이라 이루 말할 수 없이 반가웠다.

아내와 자식들도 모두 무사하다고 한다.

종과 말이 없어 제때 찾아오지 못하다가 처조카 집의 종과 말을 빌려 타고 왔다고 한다.

1594년 12월 24일 (갑오년 음력 11월 13일)

연기 수령 임태 소설이 호남에서 지나가다 찾아왔다.

뜻밖에 만나니 반가움을 이길 수 없었다.

그의 형이 이 고을 수령으로 와 몇 달이나 있었는데도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고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지도 않았다.

파직되어 돌아갈 때조차 안부를 묻지 않았다.

형제의 마음이 어찌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는가.

또 정종경이 지난여름 아산에서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가엾다.

1594년 12월 25일 (갑오년 음력 11월 14일)

이른 아침 소즐이 찾아왔다. 아침밥을 먹이고 하루 종일 머물렀다.

그의 부탁 때문에 함께 고을에 들어갔다.

수령 이구순이 삼촌 상을 당해 관아 안에만 있고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사창에 가서 감관 임붕을 만나 아직 갚지 않은 환곡 수량을 확인했다.

그 뒤 관아 문 앞으로 가 이름을 알렸지만 수령은 성복하기 전이라 나오지 않겠다고 했다.

수령의 아들에게 대신 나와 만나게 했다.

삼촌이 세상을 떠난 사연을 묻고 숙소로 돌아왔다.

수령의 삼촌은 개천군수 이경전으로 나와는 사촌 동서 사이이며 아주 가까이 지냈던 사람이다.

그 부고를 들으니 슬픔을 이길 수 없다.

소즐에게 저녁밥을 먹여 보냈다.

소즐은 무료함을 달랜다며 붉은 팽이 세 개와 큰 팽이 하나를 만들어 주고 돌아갔다.

1594년 12월 26일 (갑오년 음력 11월 15일)

김익형이 찾아왔다.

종 둘에게 울타리 서북쪽을 만들게 했다.

저녁에는 유선각이 종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가까운 농가에 쌓아 둔 쑥대를 우리 집에 가져다주라는 패지를 써 보냈다.

내일 소즐과 함께 니산으로 가기로 했다.

1594년 12월 27일 (갑오년 음력 11월 16일)

이른 아침 출발했다.

길에서 소즐을 만나 말을 나란히 하고 고성진으로 갔다.

석성 땅에서 말을 먹였다.

소즐은 먼저 니산 천동의 매부 집으로 들어갔다.

해가 기울어 나 혼자 니산현에 도착했다.

수령 김가기가 사창에 앉아 있다는 말을 듣고 종을 보내 이름을 알리니 곧 사람을 보내 불러들였다.

잠시 인사를 나누었으나 수령은 선전관을 접대할 일이 있어 먼저 나갔다.

객사에는 생원 홍사고가 먼저 와 있어 잠깐 이야기했다.

각자 민가 숙소로 돌아가 잤다.

현의 좌수 홍이서는 내가 머무는 집과 가까운 집에 묵고 있었다.

저녁에 찾아와 한가롭게 이야기하다 밤이 깊어 돌아갔다.

전날 내가 이곳에 왔을 때 서로 알게 되었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다.

1594년 12월 28일 (갑오년 음력 11월 17일)

아침에 수령이 나를 관아 마루로 불렀다.

생원 홍사고와 손님 서너 명도 왔다.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수령의 매부 성이현도 뒤따라 들어와 함께 이야기했다.

수령은 환곡을 거두는 일 때문에 사창으로 옮겨 갔다.

성이현이 술 한 병을 구해 나에게 주었다.

늦은 오후 출발해 연산으로 갔다.

곧장 관아 마루로 들어가니 마침 수령 안원직의 삼촌 안회와 그 사위 변흡이 앉아 있었다.

안공은 내가 온 것을 보고 몹시 반가워했다.

곧 수령에게 내 이름을 알리게 했다.

수령이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고 밤이 깊은 뒤 관아로 들어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좋은 술도 두 잔씩 마시고 헤어졌다.

민가 숙소로 돌아가 잤다.

1594년 12월 29일 (갑오년 음력 11월 18일)

아침 일찍 관아 마루로 들어갔다.

수령이 관아 안으로 불러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다음 물건을 얻었다.

벼 한 섬

찹쌀 한 말

참기름 한 되

청주 닷 홉

밤 석 되

콩 닷 되

흰 닥나무 한 묶음

송노에게 먼저 실어 니산의 소즐이 있는 곳으로 보내 내일 우리 집으로 운반하게 했다.

처음에는 오늘 돌아가려 했으나 수령이 붙잡아 그대로 머물렀다.

송노가 돌아오면 모레 돌아갈 생각이다.

오늘은 수령의 삼촌 안공의 생일이라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해 잔을 돌리고 끝냈다.

수령은 사창으로 가 환곡을 거두었다.

나는 안공과 젊은이 여러 명과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는 수령의 매부 좌랑 김원록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전부터 알던 사람이라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잠시 뒤 수령도 들어왔다.

수령이 관아 안으로 나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깊어 각자 숙소로 돌아가 잤다.

수령 이름은 안원직이고 자는 중성이다.

나와 사촌 동서 사이여서 정이 매우 두텁다.

난리 초 장천에서 함께 피란하며 온갖 고생을 같이 겪은 사람이다.

1594년 12월 30일 (갑오년 음력 11월 19일)

이른 아침 관아로 들어갔다.

수령이 우리를 관아 안으로 불러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수령은 환곡을 거두러 사창으로 나갔다.

나는 안충의, 김원록, 수령의 육촌 안효인, 사위 변흡과 하루 종일 관아 방에서 이야기했다.

저녁에 수령도 들어와 함께 이야기했다.

밤이 깊어 각자 흩어졌다.

송노가 저녁에 돌아왔다.

내일 돌아가기로 했다.

1594년 12월 31일 (갑오년 음력 11월 20일)

이른 아침 관아로 들어가 다음을 얻었다.

길양식 쌀 두 말

콩 한 말

단장 닷 되

피목 석 말

짚신 두 켤레

미투리 두 켤레

종 둘에게 나누어 지게 했다.

늦은 오후 길을 떠났다.

도중에 바람과 눈을 만나 어렵게 니산에 도착했다.

수령 김가기는 마침 감기에 걸려 안부만 사람을 통해 전하고 관아 안에서 만나지 못했다.

민가에 묵었다.

공주 유성현에 사는 품관 윤효명이 뒤따라 들어와 한방에서 잤다.

좌수 홍이서는 한밤중에 찾아와 닭이 울고 난 뒤에야 돌아갔다.

긴 밤을 잠들지 못했지만 그와 이야기한 덕분에 객지의 쓸쓸함은 조금 덜했다.

1595년 1월

1595년 1월 1일 (갑오년 음력 11월 21일)

수령이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관아 마루로 불렀다.

곧 찾아가니 좋은 술 큰 잔 한 잔을 주었다.

늦은 오후 수령이 사창에 나와 다시 나를 불렀다.

쌀과 콩을 각각 두 말씩 주고 점심도 대접했다. 아침을 일찍 먹었기 때문이다.

오후에 출발해 현 안 천동의 소즐 매부 양사유 집에서 묵었다.

양사유는 따뜻한 방을 내주고 나와 함께 잤다.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에는 알지 못했지만 말을 나누어 보니 괜찮은 사람이었다.

1595년 1월 2일 (갑오년 음력 11월 22일)

새벽에 밥을 먹었다.

전에 맡겨 두었던 벼도 사람들에게 지워 가져오게 했다.

고성진에 이르러 배를 타고 건넌 뒤 말을 먹였다.

숙소에 도착하니 해가 아직 높았다.

어머니께 들어가 뵈었다.

마침 아우 언명 희철이 어제저녁 찾아와 있었다.

뜻밖에 만나니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함열에서 온 사람도 뒤따라왔다.

함열에서 다음을 보내 주었다.

쌀 넉 말

벼 한 섬

정어 열 묶음

작은 소금물고기 다섯 묶음

새우젓 넉 되

그런데 아내가 어제저녁부터 머리가 아프고 오한과 열이 번갈아 오면서 밤새도록 뒤척여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오늘 밤에는 더욱 심해졌다.

걱정스럽다.

소즐도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윤겸의 서얼 처남 경복도 볼일이 있어 지나가다 묵었다. 저녁밥을 먹였다.

윤겸은 무사히 지낸다고 한다.

연산에서 얻은 벼를 송노가 양씨 집에 맡길 때 되어 보니 열세 말이었다.

오늘 가져와 다시 되어 보니 열 말 닷 되뿐이었다.

그 집 종들이 훔쳐 먹은 것이 틀림없다. 괘씸하다.

요즘은 관청이나 민가나 모두 가진 것이 바닥났다.

연산처럼 친하게 지내는 곳에서도 저장한 것이 없다며 주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았고, 니산에서는 아예 입도 열지 못하고 돌아왔다.

앞으로는 더 이상 얻을 곳도 없다.

우리 집뿐 아니라 늙은 어머니를 봉양할 것도 마련할 길이 없으니 말로 다 할 수 없이 걱정스럽다.

이 고을에서도 환곡을 절반 이상 갚지 못해 새로 받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걱정이 크다.

1595년 1월 3일 (갑오년 음력 11월 23일)

아내의 병세가 아침에는 조금 가라앉는 듯했지만 늦게 다시 심해졌다.

가슴이 답답하고 팔다리가 쑤시며 조금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입은 쓰고 속은 뜨거우며 증세가 오락가락한다.

밤새 뒤척였다. 몹시 걱정스럽다.

오후에는 생원 빙 집 종이 함열에서 들어왔다.

딸이 편육 한 조각과 찰떡 한 꾸러미를 보냈다.

또 이 고을에 사는 품관 조광필이 찾아와 배와 밤 한 바구니를 주었다.

별다른 까닭 없이 가져와 이상하게 여겨 자세히 물으니 함열에 있는 자기 도망 노비를 찾아 달라는 부탁을 하려는 것이었다.

전에 관직 임명 기록을 보니 박여룡이 청양 수령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윤함이 그 소식 때문에 반드시 찾아올 듯해 매우 기쁘다.

박공은 윤함 아내의 외할아버지와 같은 어머니를 둔 아우다.

집이 해주에 있고 윤함 처가와 같은 동네이므로 사람의 왕래가 있을 것이다.

1595년 1월 4일 (갑오년 음력 11월 24일)

아내의 병세는 전과 같고 오한이 왔다 갔다 한다.

온몸의 통증은 전보다 두 배나 심하다. 걱정스럽다.

오후에는 생원 윤해가 어머니가 편찮다는 말을 듣고 함열에서 급히 돌아왔다.

저녁에는 이시열이 자기 집에서 들어와 묵었다.

아침과 저녁밥을 먹였다.

다만 양식이 모자라 그가 데리고 온 종에게는 밥을 먹이지 못했다. 아쉽다.

1595년 1월 5일 (갑오년 음력 11월 25일)

이른 아침 이시열은 노비들의 신공을 거두러 함열로 돌아갔다.

윤해에게 함열 수령 앞으로 편지를 써 주어 말을 듣지 않는 종을 다스리게 하고 돌아갈 양식도 얻도록 했다.

나도 쌀 두 되와 장 한 그릇을 주었다.

중간에 먹을 것이 떨어질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아내의 병세는 여전하고 조금도 나아지는 기색이 없다. 몹시 걱정스럽다.

오늘 밤을 더 지켜본 뒤 결성의 윤겸에게 종과 말을 보내려 한다.

함열에서 문안 사람이 왔다.

곧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생꿩 반 마리, 방어 한 토막, 짠장 한 그릇을 가져왔다.

1595년 1월 6일 (갑오년 음력 11월 26일)

아내의 병세는 그대로다.

지난밤 새벽까지 계속 뒤척였고 열이 있는 듯하다.

우물물로 입을 헹구는 일을 멈추지 않고 때때로 얼음 조각을 씹었다가 뱉는다.

죽도 전혀 먹지 못한다. 몹시 걱정스럽다.

이른 아침 송노를 결성 윤겸에게 보내 빨리 오게 했다.

막정은 함열로 보내 약을 구해 오게 했다.

타향을 떠돌며 굶주림은 날로 심한데 병까지 이 지경이다.

때가 그런 것인가, 운명인가. 길게 탄식해도 어쩌겠는가.

하늘의 운에 맡길 뿐이다.

저녁에는 함열에서 문안 사람이 왔다.

흰쌀 두 말, 거친 쌀 두 말, 녹두 두 되를 가져왔다.

저녁에 막정도 돌아왔다. 약을 구해 왔고 녹두 두 되도 얻어 왔다.

1595년 1월 7일 (갑오년 음력 11월 27일)

아내의 병세는 여전하다.

열은 조금 줄어든 듯하다.

차가운 약을 두 차례 녹두죽에 섞어 먹였다.

아침 전에 양덕 수령 심설이 보낸 문안 사람이 처음 도착했다.

천 리 길을 어렵게 두 사람이나 보내 멀리 찾아왔다.

어머니께는 다음을 보냈다.

흰 명주 저고리 한 벌

비단 한 필

생꿩 세 마리

돼지고기포 두 묶음

약과 한 바구니

나에게는 다음을 보냈다.

낡은 짙은 청색 겉옷 한 벌

비단 한 필

생꿩

돼지고기포

약과

절망하던 때에 뜻밖에 이런 물건이 도착하니 온 집안이 매우 기뻐했다.

꿩 한 마리를 곧 구워 나누어 먹었다.

다만 아내는 병이 심해 한 점도 맛보지 못했다. 안타깝다.

오후에는 선전관 유형이 찾아왔다.

그는 이 고을 수령 이구순의 사위다.

마침 이곳에 왔다가 내가 군 안에 산다는 말을 듣고 찾아본 것이다.

저녁에는 소즐도 찾아왔다. 저녁밥을 먹여 보냈다.

1595년 1월 8일 (갑오년 음력 11월 28일)

아내의 병세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신음이 끊이지 않는다. 걱정이 더욱 크다.

다만 밤에 녹두죽에 월경수를 섞어 세 번 먹였다.

아침에는 땀이 날 듯해 옷과 이불을 두껍게 덮고 따뜻한 물을 항아리에 담아 품게 했지만 흠뻑 땀이 나지는 않았다. 아쉽다.

이른 아침 양덕에서 온 사람에게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쌀과 콩을 각각 두 되씩만 주었다.

집안 저장이 완전히 떨어져 넉넉히 주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아침밥 뒤 관청에 가 수령을 만나 가지와 오이, 김치를 얻어 왔다.

길에서 우연히 진사 김종남을 만나 말 위에서 잠시 오랜 회포를 풀었다.

그에게서 자정 김지남이 이미 옥구의 종 집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의 아들 무적이 병이 위중하다고 하니 놀랍고 걱정스럽다.

돌아오는 길에는 늙은 어머니를 찾아보고 갈 것이라고 한다.

종남은 자정의 막냇동생이다.

저녁에는 함열에서 문안 사람이 왔다.

곧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딸은 내일 어머니의 병을 보러 오겠다고 한다.

녹두와 죽력도 가져왔다.

저녁에는 이시설이 함열에서 들어왔다.

노비들이 죽거나 도망해 신공을 거두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함열 수령이 돌아갈 양식으로 쌀 두 말과 콩 한 말을 주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았으면 굶주릴 뻔했다. 다행이다.

어머니는 이웃집으로 피하여 머무셨다.

1595년 1월 9일 (갑오년 음력 11월 29일)

이시설은 아침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아침과 저녁밥을 먹여 보냈다.

아내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한밤중 향소산을 달여 먹였지만 땀이 나지는 않았다.

토하는 증세가 더 심하고 곡식 냄새를 더욱 싫어한다.

원기가 날로 쇠해 간다. 몹시 걱정스럽다.

어머니가 머무는 집으로 찾아가 뵈었다.

언명 윤철을 보내 길에서 딸을 맞게 했다.

오늘 출발해 온다고 들었는데 가까이에서 모셔 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오후에 딸이 들어왔다.

먼저 어머니가 머무는 곳으로 가 쉬게 한 뒤 내일 병든 어머니를 보게 하려 했다.

데리고 온 사람들은 곧 돌려보냈다.

집에 먹을 것이 없어 밥을 먹이지 못하고 술 두 병만 내어 먹여 보냈다. 안타깝다.

저녁에 어머니를 찾아뵙고 딸과 이야기한 뒤 돌아왔다.

잠자리에 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가 정신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급히 들어갔다.

윤해의 주머니에서 오래된 청심환 반 알, 용소 두 알, 월경수와 죽력을 꺼내 함께 갈아 서너 숟갈 먹였다.

기운이 조금 돌아왔다.

딸을 불러 함께 보게 했다.

닭이 울 무렵까지 뒤척인 뒤 정신이 돌아와 전날처럼 말을 했다.

여종들은 양덕에서 온 물건을 뜰에 내놓고 기도를 했다.

허망한 일인 줄 알지만 절박한 마음이라 막지 못했다. 걱정이 너무 큰 탓이다.

윤겸은 오늘 들어오기로 했는데 오지 않았다.

말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병든 사람이 윤겸을 보지 못할까 걱정하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1595년 1월

1595년 1월 10일 (갑오년 음력 12월 1일)

아침이 되자 아내의 병세가 크게 줄었다.

때때로 눈을 뜨고 말을 하며 웃기도 했다.

아내가 말했다.

“지난밤 제때 손을 쓰지 않았더라면 거의 죽었을 거예요.”

다만 원기가 몹시 쇠약해져 음식은 여전히 거의 먹지 못했다.

아침에 쌀미음도 두 번 조금씩 삼켰을 뿐이다.

곡식 냄새를 더 싫어하니 과연 살아날 수 있을지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그저 하늘만 바라볼 뿐이다.

열은 그저께부터 큰 기세가 조금 누그러진 듯하다.

때때로 입이 말라 물로 입을 헹굴 뿐이다.

함열에서 문안 사람이 왔다.

딸이 일행의 양식으로 쌀 두 말과 새우젓 조금을 보내고, 병자에게 필요한 서과 한 개, 껍질째 살아 있는 전복 열 개, 모주와 죽력도 보냈다.

아내는 곧 생전복 세 개를 회로 먹고 서과도 몇 숟갈 먹었다.

가장 먹고 싶어 하던 것들이었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상할까 싶어 그만 먹게 했다.

요즘 병 때문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쓰는 것이 몹시 많다.

이제 양식도 떨어져 오직 함열에서 오는 것만 기다리고 있는데 보내온 양이 너무 적어 걱정스럽다.

하지만 늘 보내는 물건이 따로 있으니 오늘이나 내일은 반드시 더 올 것이다.

서과는 임피에서 있는 곳을 수소문해 쌀 두 말을 주고 사서 보냈다고 한다.

오후부터는 병세가 조금 편안해졌다.

저녁 내내 딸과 이야기를 나누며 평소처럼 웃기도 했다.

때때로 죽도 조금 마셨다.

밤이 깊은 뒤 딸은 어머니가 머무는 곳으로 가서 잤고 새벽에 다시 돌아왔다.

1595년 1월 11일 (갑오년 음력 12월 2일)

한밤중 아내가 가위에 눌린 듯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깨어났다.

원기가 몹시 약해진 데다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침에는 기운이 제법 평소 같았지만 몹시 지쳐 있었고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억지로 권해 모주에 밥을 조금 말아 먹이고 꿩고기도 구워 먹였다.

아침밥 뒤 윤겸이 들어왔다.

도적이 두려워 온 가족을 데리고 보령으로 옮겨 피란했기 때문에 송노가 곧장 결성으로 갔다가 다시 보령까지 찾아갔다고 한다.

그곳에서도 남에게 종과 말을 빌려 어제 새벽 출발해 도천사에서 묵고 오늘에야 달려왔다.

저녁에는 함열에서 사람이 왔다.

다음 물건을 가져왔다.

흰쌀 두 말

거친 쌀 석 말

두 가지 젓갈 작은 항아리 하나

조기 두 묶음

단장 한 말

짠장 두 되

미역 작은 것 네 동

생숭어 작은 것 한 마리

생전복 다섯 개

유자 다섯 개

요즘 아내의 병 때문에 쓸 것이 몹시 많아 그저께부터 양식까지 완전히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윤해가 관청에 갚으려고 마련해 둔 벼 한 섬을 빌려 쓰고 있었는데 마침 이때 물건이 도착해 조금 위로가 되었다.

또 함열 집 종이 신공을 거두려고 지난달 영암에 갔다가 이제 돌아오면서 누이의 편지를 받아 왔다.

모두 무사하다고 하니 기쁘다.

누이는 어머니께 말린 숭어 두 마리를 보내고 우리 집에는 감태 열 묶음을 보냈다.

김한림 지남의 종 감희도 호남 노비들에게 신공을 거두러 다니다가 이곳에 묵었다.

김한림이 어머니와 나에게 각각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읽으니 슬픈 눈물이 옷소매를 적셨다.

저녁밥을 먹여 보냈다.

1595년 1월 12일 (갑오년 음력 12월 3일)

아내는 밤에 혼미하고 지치는 증세가 더 심했지만 아침에는 크게 회복했다.

때때로 순하게 국물과 밥을 섞어 반 사발쯤 먹었고 말하고 웃는 것도 평소 같았다.

이제부터는 완전히 낫지 않을까 싶어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 막정을 함열로 보냈다.

1595년 1월 13일 (갑오년 음력 12월 4일)

아내의 병세는 어제보다 더 나아졌다.

다만 심기가 허약해 정신이 흐리고 피곤해하는 때가 많다.

음식은 여전히 더 먹지 못한다. 걱정스럽다.

저녁에 막정이 돌아왔다.

함열 수령 신응구가 벼 한 섬, 콩 두 말, 보리 닷 말을 보내 주었다.

윤겸에게는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형편이 불편해 앞으로는 계속 도와주기 어려울 듯합니다.”

우리 집안의 살림이 앞으로 어찌 될지 말로 다 할 수 없다.

1595년 1월 14일 (갑오년 음력 12월 5일)

아내의 병세는 더욱 나아지는 듯하지만 정신이 흐리고 지치는 것은 전과 같다.

윤해가 환곡 석 섬을 마련해 오늘 갚으려 했다.

나도 밥을 먹은 뒤 고을로 들어갔으나 수령 이구순은 이미 사창에 앉아 있었다.

관청 일이 매우 바쁘고 함께 앉은 손님도 많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길로 선전관 유형을 찾아보았다.

또 생원 권학의 집에도 들러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유형은 수령의 사위이고 권학은 군내에 피란 와 살고 있는 윤해 양어머니의 사촌 조카다.

집에 돌아오니 생원 허용이 윤겸 형제를 찾아와 있었다.

나도 나가 만나 이야기하고 보냈다.

소즐의 아내도 찾아왔다.

딸이 두 가지 떡과 두부국, 고사리나물을 마련해 보내왔다.

정성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집도 본래 가난하니 준비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집안 여자들과 함께 아내가 앓아누운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밥을 먹여 보냈다.

1595년 1월 15일 (갑오년 음력 12월 6일)

아내의 병세는 크게 보아 나아지는 듯하지만 온몸이 나른하고 가슴과 목이 답답하며 숨이 짧고 가쁘다.

이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더 먹는 양도 늘지 않는다.

곤히 잠드는 때가 많아 걱정스럽다.

함열에서 사람이 와 다음을 가져왔다.

흰쌀 두 말

거친 쌀 두 말

두 가지 젓갈 각각 두 되

작은 숭어 한 마리

정어 네 묶음

곧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환곡 석 섬은 막정에게 실어 바치게 했다.

같은 호에 사는 생원 윤해 이름으로 납부한 것이다.

함열 수령이 내일 병자를 보러 오겠다고 한다.

1595년 1월 16일 (갑오년 음력 12월 7일)

아내의 병세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아침에 함열 수령 신응구가 말을 달려 왔다.

아우와 세 아들까지 한방에 모여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 무렵 수령은 돌아갔다.

함열에 사는 양윤근이라는 사람이 조기 한 묶음, 흰 새우젓 한 항아리, 병어 한 마리를 가져왔다.

아무 까닭 없이 바칠 리 없으니 무슨 부탁이 있는 듯하다.

저녁에는 소즐이 찾아왔으나 함열 수령이 있을 때에는 미처 오지 못했다.

1595년 1월 17일 (갑오년 음력 12월 8일)

아내의 병세는 여전하다.

함열에서 문안 사람이 와 모과 달인 물과 모주를 가져왔다.

곧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1595년 1월 18일 (갑오년 음력 12월 9일)

이른 아침 황간에 사는 남수일과 전계남이 한산으로 가는 길에 들렀다.

그들에게서 남경효 형이 지난 음력 시월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슬픔을 이길 수 없다.

남 형은 내 외가 쪽 사촌으로 어려서 외할아버지 집에서 함께 자라 정이 매우 깊었다.

그 부고를 들으니 더욱 통곡할 뿐이다.

경제 형이 편지를 보내면서 생배 서른여 개도 보내 주었다.

수일은 경효 형의 막내아들이다.

아침밥을 먹여 보냈다.

아우 언명 희철은 막정을 데리고 내 말을 타고 태인으로 떠났다.

지난달 스무하룻날 이곳에 와 열아흐레 머물다가 오늘에서야 돌아간다.

떠돌며 궁핍하게 살고 굶주림은 날로 심한데 하나뿐인 아우와도 함께 살지 못하고 타향에서 먹고살게 해야 하니 참으로 슬프다.

눈물만 흘릴 뿐이다.

그래도 아주 먼 곳은 아니니 새해가 지난 뒤 다시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종과 말이 없어 반드시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집주인 최인복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아우는 출발해 이미 문밖으로 나간 뒤였기에 최인복과 잠깐 서서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저녁에는 함열의 사람과 말이 들어왔다.

내일 새벽 딸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또 소즐이 갇혔다는 말을 듣고 계집종을 보내 수령 이구순에게 편지를 전하려 했으나 문지기가 막아 받아 주지 않고 돌려보냈다. 아쉽다.

오후부터 비와 눈이 내려 하루 종일 개지 않았다.

눈이 녹지 않았다면 반 자 가까이 쌓였을 것이다.

이런 험한 날씨에 언명이 길을 떠났고 비옷도 두 벌이 아니니, 길에서 지친 말과 함께 눈을 헤치며 가느라 고생이 많을 것이다. 몹시 걱정스럽다.

오늘부터 언명이 돌아간 뒤에는 내가 어머니가 머무는 집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곁에서 모실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윤해의 종 춘희가 진위에서 들어왔다.

그 집안이 모두 평안하다고 한다.

1595년 1월 19일 (갑오년 음력 12월 10일)

아침밥 뒤 딸이 함열로 돌아갔다.

윤겸이 데리고 갔다.

이곳에 열흘 남짓 머물렀지만 마침 어머니가 병으로 누워 있어 마음껏 이야기하지 못했다.

헤어질 때 모녀가 서로 슬피 울며 그치지 않았다.

가엾다.

늘 보고 싶어 하다가도 막상 만나면 속에 있는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다시 보내야 하니 더욱 한탄스럽다.

저녁에는 소즐이 찾아왔다.

어제 갇혔다가 오늘 가까스로 매를 맞지 않고 풀려났다고 한다.

1595년 1월 20일 (갑오년 음력 12월 11일)

아내의 병세는 어제보다 기운이 좋지 않고 피곤함도 전과 같다고 한다.

아마 밤에 찬바람을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달 초부터 병의 큰 기세는 줄고 음식도 조금씩 먹기 시작했지만 원기가 약해 말하는 것도 몹시 힘들어했다.

앉으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뜨지 못했다.

어제는 기운이 제법 돌아 눈을 뜨고 평소처럼 이야기했는데 오늘 다시 이렇다. 걱정스럽다.

병든 지 이제 스무 날이 넘었는데도 완전히 낫지 않고 이렇게 오래 끄니 더욱 걱정이다.

저녁에는 함열에서 사람이 와 중미 두 말, 조기 두 묶음, 절인 게 열 마리를 가져왔다.

1595년 1월 21일 (갑오년 음력 12월 12일)

아내의 병세는 어제보다 조금 나아졌다.

일어나 앉아 눈을 뜨고 평소처럼 이야기했다.

아침 뒤에는 생원 권학이 찾아왔다.

권학은 윤해 양어머니의 사촌 조카이며 군내에 피란 와 사는 사람이다.

저녁에는 윤겸이 함열에서 들어왔다.

밤에는 계집종 열금의 일을 보았다.

열금은 태인에서 올 때부터 몸이 붓더니 이곳에 온 뒤 병이 매우 심해져 온몸이 퉁퉁 부었다.

흙집에 들어가 살면서 음식은 오히려 평소처럼 먹고, 언제나 술과 고기를 달라고 한다.

조금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곧 화를 내고 욕설을 한다.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침저녁 죽도 잇기 어려운데 어찌 죽어 가는 늙은 계집종에게 술과 고기를 마련해 주겠는가.

병이 아무리 위중해도 빨리 죽지 않으면 우리 집을 괴롭히는 일이 많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밉기도 하다.

저녁에는 윤겸의 종 금손이 결성에서 말을 끌고 들어왔다.

윤겸은 내일 돌아갈 생각이다.

송영구가 쌀 한 말을 보내왔다.

1595년 1월 22일 (갑오년 음력 12월 13일)

아내의 병세는 어제와 같다.

다른 새로운 병은 없다.

윤겸은 밥을 먹고 돌아갔다.

도천사에서 묵을 생각이라고 한다.

길양식을 마련하기가 몹시 어려워 이른 아침 종을 보내 조 한림 희보에게 부탁했더니 곧 쌀 한 말 닷 되를 보내 주었다.

길양식뿐 아니라 우리 집 먹을 것도 바닥나 걱정하던 참이었다.

조공의 도움이 때맞춰 와 윤겸의 양식을 싸 주고도 며칠 먹을 것이 남게 되었다. 위로가 된다.

요즘 큰눈이 계속 내려 오랫동안 땔나무를 베지 못했다.

윗집과 아랫집 모두 아침저녁 밥을 짓기도 어렵고 방구들도 차갑다.

늙은 어머니와 병든 아내가 편히 잘 수 없다.

굶주림까지 날로 더 심해지니 걱정스럽다.

함열 수령은 보름 뒤 부모를 뵈러 서울로 올라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연말을 넘길 방도가 더 없어져 걱정스럽다.

송노에게 윤겸의 편지를 들려 석성과 니산 두 고을로 보내 구휼할 곡식을 구하게 했다.

단녀는 아직도 학질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틀을 건너 한 번씩 심하게 앓고 음식도 줄었다. 걱정스럽다.

1595년 1월 23일 (갑오년 음력 12월 14일)

아내의 병세는 전과 같다.

다만 요즘 양식과 반찬이 모두 떨어져 늙은 어머니와 병든 아내에게 맛있는 것을 드리지 못하니 걱정스럽다.

이른 아침 어머니가 머무는 집주인이 떡과 밥, 반찬, 술 한 사발을 보내왔다.

오늘이 그 집의 돌아가신 아버지 제삿날이라고 한다.

곧 어머니와 함께 먹었다.

저녁에는 막정이 태인에서 들어왔다.

아우는 무사히 집에 돌아갔지만 길에서 눈을 만나 옷이 모두 젖었다고 한다. 안타깝다.

길양식은 함열에서 넉넉히 주었다고 하니 그나마 기쁘다.

막정은 오는 길에 함열에서 묵었다.

함열에서 평소처럼 쌀 두 말과 정어 세 묶음을 보내왔다.

양식이 끊겨 걱정하던 때 이 쌀을 얻어 며칠은 목숨을 이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며칠 뒤에는 무엇으로 이어 갈지 답답하다.

저녁에는 송노가 석성에서 돌아왔다.

석성 수령이 중미 석 말과 조기젓 다섯 개를 보내 주었다.

이것으로도 며칠은 이어 갈 수 있어 다행이다.

1595년 1월 24일 (갑오년 음력 12월 15일)

아내의 병세는 전과 같고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

정신이 흐리고 지치는 것이 여전해 걱정스럽다.

지난밤 늙은 계집종 열금이 죽었다.

병세가 매우 심해 살릴 수 없는 형편이기는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차가운 곳에 지내며 음식도 배불리 먹지 못했다.

먹고 싶어 하는 것이 있어도 구할 길이 없어 한 번도 먹여 주지 못한 채 죽었다. 가엾다.

본래 성질이 사납고 거칠어 조금만 뜻대로 되지 않아도 화를 내고 욕설을 했다.

주인 앞에서도 불손한 말을 자주 해 모두가 싫어했다.

그런 점만 보면 죽은 것이 아깝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릴 때 붙잡혀 와 우리 집에서 일을 했고, 일흔이 넘도록 한 번도 도망치지 않았다.

길쌈도 잘하고 집안일에 부지런하고 검소했으며 작은 물건 하나라도 속이거나 훔치는 일이 없었다.

이런 점은 인정할 만하다.

그런데 타향을 떠돌다가 관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으니 더욱 슬프다.

저녁에는 수령이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1595년 1월 25일 (갑오년 음력 12월 16일)

종 둘과 이웃에 피란 와 사는 한복을 시켜 새벽에 열금의 시신을 메고 나가게 했다.

이곳에서 오 리쯤 떨어진 한산 가는 길가의 볕 잘 드는 곳에 묻었다.

가엾다.

지난해 가을에는 막내 계집종 동을비가 소즐 집에서 죽었고, 이제 열금도 이곳에서 죽었다.

둘 다 이 땅에 묻혔다.

서울에서 살 때 어찌 임천 땅에 죽어 묻힐 줄 알았겠는가.

사람의 일이 참으로 한탄스럽다.

아내의 병세는 전과 같다.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고 입맛에 맞는 음식도 없어 먹는 양이 늘지 않는다. 걱정스럽다.

단녀는 오늘도 앓았다. 가엾다.

저녁에는 춘희가 함열에서 들어왔다.

윤해에게는 양식을 따로 보내지 않고 편지만 보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고 한다.

“오는 구일에 서울로 올라갈 생각이다. 마침 빈말이 있어 함께 타고 갈 수 있다. 길양식과 반찬은 이곳에서 마련해 갈 테니 각자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다.”

전에 정월 제사에 쓸 제수용 말린 생선 등을 구해 둔 것이 있어 춘희 편에 조기 한 묶음, 흰 물고기 젓 두 되, 중미 한 말을 보냈다.

윤해가 서울로 올라가면 광주의 선산에 직접 가 밥과 국을 차려 묘를 쓸고 제사를 올리게 하려는 것이다.

난리 뒤 세 해 동안 한 번도 직접 제사를 올리지 못했다.

늘 슬프고 죄스러운 마음이 있었지만 종과 말도 없고 양식을 마련하기도 너무 어려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형편이 그러하니 어쩌겠는가.

윤겸의 계집종 황목도 마침 함열에서 왔기에 무명 반 필을 윤해에게 보내 고기를 사고 제수 음식을 마련하게 했다.

다만 준비가 너무 초라해 안타깝다.

모레 함열 수령이 서울로 올라갈 때 우리 집에서 묵는다고 한다.

1595년 1월 26일 (갑오년 음력 12월 17일)

아내는 조금씩 더 회복되고 있다.

하지만 요즘 양식과 반찬이 모자라 아침저녁 묽은 죽만 마신다.

이렇게 해서 어찌 빨리 평소처럼 회복할 수 있겠는가. 걱정스럽다.

저녁에는 태인에 피란 와 사는 선비 한용이 지나가다 묵었다.

마침 양식이 없어 밥을 먹이지 못했다. 아쉽다.

어머니가 지난봄 아우 희철 집에 머무를 때 이웃에 살았으므로 나도 어머니를 찾아갔다가 알게 된 사람이다.

그에게서 언명이 지난 십오일 권 좌수 서와 함께 금성으로 갔다가 영암의 누이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었다.

1595년 1월 27일 (갑오년 음력 12월 18일)

아침에 막정을 함열로 보냈다.

말 먹일 콩을 구하려는 것이다.

아내의 병세는 전과 같다.

저녁에는 조 좌수 윤공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1595년 1월 28일 (갑오년 음력 12월 19일)

밤에 홍응추 영공을 꿈에서 만났다.

생전 모습 그대로였다.

깨어나니 슬픔을 이기기 어려웠다.

오후에는 권학 성민복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오충일도 와서 묵었다.

막정이 돌아왔다.

함열에서 다음을 보내 주었다.

흰쌀 두 말

중미 두 말

흰 물고기 젓 석 되

콩 석 말

정어 네 묶음

저녁에는 함열 수령 신응구가 부모를 뵈러 서울로 가는 길에 이곳에 들러 묵었다.

1595년 1월 29일 (갑오년 음력 12월 20일)

함열 수령은 김백온이 오기를 기다리느라 그대로 머물렀다.

내일 윤해와 함께 말을 나란히 하고 떠나려는 것이다.

윤해는 말이 없어 함열 수령의 말을 빌려 타고 진위 집으로 갈 예정이다.

백온도 함께 서울로 간다.

이복령을 불러 이번 길의 길흉을 점쳐 보게 했다.

함열 수령이 왕복길이 어떨지 알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소즐이 함열 수령에게 인사하러 왔다가 돌아갔다.

밤에는 함열 수령을 내 방으로 불러 집안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했다.

밤이 깊어서야 자리를 파했다.

함열 수령이 길에서 먹으려고 가져온 것 가운데 엿 한 되, 약과 열다섯 개, 집돼지 삶은 고기 세 그릇, 술 한 상을 내놓아 함께 나누어 먹었다.

함열 수령이 조총을 쏘게 해 두 차례 총성이 울렸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우스운 일이다.

1595년 1월 30일 (갑오년 음력 12월 21일)

아침밥 뒤 함열 수령이 떠났다.

윤해도 함께 갔다.

그에게 정월 초하루에 광주 선산을 찾아가 성묘하도록 했다.

하지만 윤해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올라가 버리니 집에 장성한 아들이 없다.

혹시 병이 나거나 급한 일이 생기면 의지할 사람이 없어 한탄스럽다.

송노도 휴가를 받아 함께 올라갔다.

오는 정월 초열흘 전에는 돌아오라고 엄하게 말했다.

전에도 두 번 휴가를 주었지만 모두 기한을 넘겨 돌아와 늘 괘씸하게 여겼다.

이번에는 보내지 않으려 했으나 아버지 무덤에 제사를 지내겠다고 간절히 청했다.

사람의 자식 된 마음은 위아래가 다를 수 없으니 일단 보내면서 다시 빨리 돌아오라고 일렀다.

계집종 둔이도 올라갔다.

그 아들 한노가 지난달 아버지를 찾으려고 진위와 안성 등지를 돌아다닌 뒤 오래 돌아오지 않아 그를 찾으러 가는 것이다.

옛 광주 집터에 들어가 살려는 생각도 있다고 한다.

소즐도 함열 수령에게 인사하러 왔다가 돌아갔다.

계집종 둔이는 지난해 음력 십일월 찾아와 이제야 돌아간다.

본래 염치가 없어 집안 물건을 조금이라도 감추어 두면 곧 몰래 훔쳤고, 이웃에서도 손버릇을 썼다.

잡혀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과 늘 다투고 욕했다.

여러 차례 엄하게 가르쳐도 조금도 고치지 않았다.

성품이 그러하니 어쩌겠는가.

늘 벌을 주고 싶었지만 본래 오래 부리던 종도 아니고 멀리 찾아와 준 정이 가여워 참고 두었다.

1595년 1월 31일 (갑오년 음력 12월 22일)

어제부터 추위가 더욱 매섭고 바람까지 거세다.

윤해는 옷도 얇고 이불도 없이 돌아갔으니 어떻게 견딜지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저 탄식할 뿐이다.

어제저녁부터 양식과 반찬이 모두 떨어졌다.

몇 되밖에 안 되는 쌀로 온 집안이 죽을 쑤어 나누어 먹었다.

함열 수령도 연말을 날 양식을 따로 주지 않은 채 서울로 올라갔다.

설날이 코앞인데 죽조차 이어 먹지 못할 듯하다.

우리 집뿐 아니라 늙은 어머니께 드릴 것도 마련할 길이 없다. 답답하기 그지없다.

아내는 큰 병을 앓은 뒤 죽조차 배불리 먹지 못해 아직 굶주린 기색이 있다. 더욱 걱정스럽다.

1595년 2월

1595년 2월 1일 (갑오년 음력 12월 23일)

아침에 수령 이구순이 파직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종과 말이 없어 바로 찾아가 보지 못했다.

마침 소즐이 찾아와 그의 말을 타고 관아로 가 수령에게 위로 인사를 했다.

이 부장과 고을 품관들도 모두 모여 함께 이야기했다.

수령에게 부탁해 윤해가 먹은 환곡 한 섬을 덜어 주고, 집주인 호에 부과된 땔감과 곡초도 각각 일부 줄여 주게 했다.

누룩 한 덩이도 얻었다.

돌아오려는데 한산 수령 신경행이 창고를 봉인하는 일로 말을 달려왔다.

그를 만나 오랜만의 회포를 풀고 술 석 잔을 마신 뒤 돌아왔다.

내가 전년 음력 칠월 이곳에 와 산 뒤 겨우 한 해 남짓한 사이에 수령 네 사람이 잇달아 갈렸다.

관청 창고가 바닥난 것도 당연하다.

수령과는 서로 아는 사이여서 평소 나를 후하게 대했다.

이제 파직되어 떠나게 되니 몹시 섭섭하다.

조보를 보니 심설이 관직에서 물러났다고 하는데 이유는 모르겠다.

내년 봄 음력 이월 이십구일에는 준시를 열어 통정대부 이하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한다.

명나라 사신도 내년에 다시 온다고 하는데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좌의정 유홍은 탐욕스럽고 부정하다는 이유로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있으나 아직 임금의 윤허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1595년 2월 2일 (갑오년 음력 12월 24일)

지난밤 매우 흉한 꿈을 꾸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요즘 추위가 몹시 심하다.

윤해가 돌아가는 길을 어떻게 견디는지 걱정이 조금도 가시지 않는다.

일정을 헤아리면 내일쯤 집에 도착할 것이다.

어제 아침 함열에서 사람이 와 흰쌀 한 말과 벼쌀 한 말을 가져왔다.

딸은 절편 한 바구니를 만들어 보냈다.

지난 스무이틀이 딸의 생일이어서 마련해 보낸 것이라고 한다.

가엾다.

곧 장국에 넣어 끓여 먹었다.

마침 소즐도 들어와 함께 먹었다.

또 수령 이구순이 모레쯤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었다.

저녁밥 뒤 찾아가 잠깐 이야기하고 작별했다.

내일 종과 말을 함열로 보낼 예정이라 다시 얼굴을 보고 인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수령의 말과 행동, 얼굴빛을 살펴보니 넋을 잃은 사람처럼 정신이 흐려 보였다.

오래 살지 못할 듯해 걱정스럽다.

지난해 임맹길 극이 이 고을 수령으로 왔을 때도 행동이 이와 같아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부임한 지 다섯 달 만에 파직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번 이구순도 지난 음력 칠월 부임해 겨우 여섯 달 만에 관찰사의 장계로 파직되었다.

하는 일이 임맹길 때와 꼭 같아 걱정스럽다.

하지만 세력 없는 음관이 큰길가의 고을 수령이 되면 사람들이 업신여기기 쉽다.

지나가는 관원들뿐 아니라 피란 온 사대부들까지 끊임없이 물건을 요구해 접대에 지친다.

관청 창고는 완전히 바닥나 방법이 없다.

데리고 온 가족도 많다.

관청에는 장 한 항아리, 쌀이나 콩 한 되도 없어 날마다 곡식을 찧어도 이어 쓰지 못한다.

빌려 쓰기까지 한다.

수령 집에서 하루 먹는 양식만 다섯 말이나 든다고 한다.

이런 형편에 오래 버틸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 고을은 잇달아 적임자가 아닌 사람이 수령이 되어 이제 버려진 고을이 되어 간다.

뒤에 오는 사람이 사헌부나 사간원 같은 강한 배경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서도 몸가짐을 검소하게 하고, 권세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손님 접대를 줄이고, 백성을 사랑하고 비용을 아끼며, 오래 재임하지 않는다면 다시 추스를 수 없을 것이다.

1595년 2월 3일 (갑오년 음력 12월 25일)

밤에 큰눈이 내렸다.

아침에도 개지 않았고 눈이 거의 반 자나 쌓였다.

눈을 무릅쓰고 종과 말을 함열로 보냈다.

함열 수령이 서울로 올라가면서 연말을 지낼 양식을 문서로 내주었다고 들었기 때문에 받으러 보내는 것이다.

다만 나루가 반쯤 얼어 건너지 못할까 걱정스럽다.

내일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온 집안이 굶을 것이다. 걱정스럽다.

저녁에는 계집종 향춘이 함열에서 들어왔다.

정월 초하루 아버지 무덤에 제사하려고 휴가를 받아 온 것이다.

1595년 2월 4일 (갑오년 음력 12월 26일)

요즘 추위가 너무 심하다.

양식과 반찬이 모두 떨어졌을 뿐 아니라 땔나무도 베어 오지 못했다.

아침저녁 밥을 지을 때 말고는 방구들을 데울 수도 없다.

아이들이 편히 자지 못하니 걱정스럽다.

저녁에는 막정이 함열에서 들어왔다.

평소 보내는 몫으로 흰쌀 석 말과 거친 쌀 석 말을 가져왔다.

또 따로 문서로 내준 흰쌀 두 말과 거친 쌀 두 말까지 합쳐 모두 열 말이었다.

찹쌀 한 말, 누룩 두 덩이, 기름 한 되, 검은콩 닷 되도 실어 왔다.

따로 내준 물건은 함열 수령이 서울로 올라가며 연말을 지낼 양식으로 주라고 해 둔 것이다.

딸이 보낸 반찬으로는 조기 두 묶음과 흰 물고기 젓 작은 항아리 하나가 있었다.

저녁에는 바람이 불고 비가 흩뿌리더니 밤에는 눈으로 바뀌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크게 내려 산천이 온통 하얘졌다.

1595년 2월 5일 (갑오년 음력 12월 27일)

아침에 이웃 숙석의 집에 저장해 둔 호목 마흔 묶음을 가져왔다.

눈발이 날리고 바람이 거세 날씨가 몹시 추웠다.

이 나무를 얻어 며칠은 밥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내일 새벽 어머니를 다시 모시고 이 집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오늘은 입춘이다.

저녁에는 전주 송영구가 일부러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찹쌀 한 말, 검은콩 닷 되, 생꿩 한 마리도 보냈다.

뜻밖의 일이어서 매우 고마웠다.

다음 날 아침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1595년 2월 6일 (갑오년 음력 12월 28일)

지난밤 큰눈이 반 자나 내렸다.

아침 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예전에 살던 숙소로 다시 옮겼다.

지난달 스무여드렛날 피하여 나갔다가 오늘 돌아온 것이다.

1595년 2월 7일 (갑오년 음력 12월 29일)

큰눈이 내린 뒤 날씨가 몹시 추워졌다.

땔나무도 양식도 없어 한 해를 넘길 길이 없다.

더구나 방구들까지 차가워 견디기 어려우며 어머니도 편히 주무시지 못한다.

몹시 걱정스럽다.

쌀 한 말만 찧어 가루를 내 떡을 만들어 아버지 신주 앞에 올릴 제물로 마련했다.

한탄스러울 뿐이다.

며칠 전 무명 반 필로 쇠고기 몇 덩이를 샀고, 송영구가 보낸 꿩 한 마리도 제사에 쓰려고 남겨 두었다.

쌀 닷 되로 술도 빚어 차례 때 쓰려고 했다.

하지만 그 밖에는 곁들일 반찬이 없다. 아쉽다.

이처럼 추운 날씨에 윤해가 서울로 올라가 선산에서 제사를 제대로 올릴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윤겸이 떠난 뒤에도 아무 소식이 없다.

밤낮으로 마음을 졸인다.

저녁에는 다시 큰눈이 내리기 시작해 밤이 되어서야 갰다.

1595년 2월 8일 (갑오년 음력 12월 30일)

아침밥 뒤 고을로 들어가 순찰사 군관 김순종을 만났다.

이웃 전상좌의 담당자를 풀어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 두 향소에서 술과 과일을 가지고 군관에게 인사하러 왔기에 나도 함께 술 넉 잔을 마시고 돌아왔다.

김순종은 서울 관동 아래 사섬시 어귀에 사는 사람이다.

전에는 서로 알지 못했지만 같은 동네에 살았다는 말을 듣고 오래 알던 사람처럼 대해 주었다.

전상좌의 간절한 부탁 때문에 찾아가 본 것이다.

새 수령으로 누가 임명되었는지는 아직 듣지 못했다.

또 김순종에게 들으니 청양 수령 박여룡이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체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가 청양 수령이 되었으니 해서에 있는 윤함의 소식을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뜻밖에 교체되었다.

이제 다시 소식을 들을 길이 없어 몹시 섭섭하다.

저녁에는 전상좌와 복남 두 집에서 술과 떡, 안주와 과일을 마련해 보내왔다.

곧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먹었다.

삼책 부속 문서

영남에 보내는 격문 — 생원 김존경

아, 하늘에는 재앙을 거두는 때가 있고 나라의 운세도 언제까지나 막혀 있지는 않는다. 바른길을 지키면 비록 위태로워도 반드시 도움을 받고, 순리를 거스르면 처음에는 강해 보여도 끝내 멸망한다. 이것은 이치가 본래 그러하고 형세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수의 싸움에서는 적은 군사로 부견의 대군을 꺾었고, 장강의 수군으로는 역적 제갈량의 기세를 꺾었다. 이런 일은 옛 기록에 실려 있으며 시대가 달라져도 이치는 다르지 않다.

 

저 미련한 왜적은 남의 나라에서 전쟁을 일으킨 지 두 해가 지나도록 흉악한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 재앙이 들불처럼 번져 당당하던 나라의 형세는 쌓아 놓은 달걀처럼 위태롭고, 백성들은 오랑캐의 풍속을 따르게 될까 두려워 떨고 있다.

 

사람들의 분노는 이미 극에 달했고 귀신의 벌도 장차 내려질 것이다.

 

나 덕령은 한낱 어리석은 사람으로 궁벽한 고을에서 태어나 글 읽는 데 뜻을 두었을 뿐 활쏘기와 말 타는 일을 업으로 삼지 않았다.

 

전에 우연히 헛된 이름이 알려져 장수의 막하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이미 연로했고 형마저 전쟁에서 죽었으므로 어머니를 모실 사람이 없었다. 차마 오랫동안 전쟁터에 나가 있을 수 없어 잠깐 군대에 몸을 두었다가 곧 돌아왔다.

 

그러나 위로는 나라의 치욕을 생각하며 한밤중에도 칼자루를 어루만졌고, 아래로는 형의 원수를 생각할 때마다 밥을 먹다가도 눈물을 흘렸다.

 

집안의 상을 다 마치기도 전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제 집안일은 대강 끝났고 내 한 몸은 죽음에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나라에 몸을 바치고 싶었으나 아직 뜻을 아뢰지도 못하고 있던 때, 마침 담양 부사가 나의 헛된 이름을 잘못 듣고 전라도 관찰사에게 나를 추천했다.

 

그는 나라를 위한 큰 뜻으로 나를 일으켜 세워 상중의 예법보다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게 하고, 여러 차례 싸우고 남은 군사를 모아 비록 무딘 칼이라도 한 번은 쓸 수 있기를 기대했다.

 

돌아보면 내게는 닭 한 마리 묶을 힘도 없고, 말을 뛰어넘는 용맹도 없다. 사람은 미약한데 책임은 무거우니 기둥이 휘어질까 걱정하는 마음과 같다.

 

어찌 이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갑자기 시골의 미천한 사람에게 맡긴단 말인가.

 

아직 털끝만큼의 공도 세우지 못했는데 임금의 은혜로운 명령이 먼저 내려왔다.

 

아, 임금과 아버지가 이미 어려운 일을 맡겼다면 신하와 자식이 어찌 몸을 버리는 일을 마다하겠는가.

 

나는 의리를 등지고 살기만 탐하면 사나운 장사도 겁쟁이가 되고, 충성을 위해 제 몸을 잊으면 겁 많은 사람도 용사가 된다고 들었다.

 

윗사람을 가까이하고 장수를 위해 죽는 의리가 있으면 그것으로 용기가 되고, 죄 있는 자를 치고 역적을 토벌하는 정의가 있으면 그것으로 기세가 된다.

 

어찌 반드시 타고난 혈기와 용맹만으로 이 적을 제압하겠는가.

 

이에 둔한 몸을 스스로 독려하여 군마를 몰고 나갈 것을 허락했다.

 

멀고 가까운 곳에 격문을 보내 날쌔고 강한 사람들을 불러 모으니, 용처럼 뛰고 범처럼 걷는 자와 적장을 베고 깃발을 빼앗을 만한 이들이 모두 양식을 지고 따르기를 원하며 끓는 물과 불속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모두 분노를 품고 팔을 걷어붙여 전날 세 번이나 패한 치욕을 부끄러워하고, 손바닥에 침을 뱉으며 기세를 높여 앞으로 여러 차례 적을 칠 일을 준비하고 있다.

 

저 거짓 기세만 남은 패잔병들은 머지않아 쓸어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이달 어느 날을 길일로 정해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

 

깃발을 동쪽으로 돌리면 군사들은 좌우에서 호응하고 앞뒤의 부대가 서로 맞물릴 것이다. 철기병은 바람처럼 달리고 긴 창은 번개처럼 나아갈 것이다.

 

군사는 정예롭고 무기는 날카로우며, 명분은 바르고 기세는 장하다. 이런 군사로 적을 치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막겠는가.

 

병법에 이르기를,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고 했다.

 

적은 천 리를 돌아다닌 지 여러 해가 되어 비바람에 노출되었고, 우리와 기후와 풍토가 달라 병도 생긴다. 날카롭던 기세는 이미 평양에서 꺾였고 담력도 행주에서 무너졌다.

 

옛날에는 정예병이라 불렸지만 이제는 지친 군대가 되었다.

 

그 아래에는 사로잡혀 억지로 끌려간 우리 백성도 많다. 그들에게 어찌 부모와 아내와 자식 생각이 없겠는가.

 

원한과 고통이 이미 극에 달했으니 내부의 변란도 머지않아 일어날 것이다.

 

솥 안의 물고기와 같은 저들을 어찌 오래 살려 두겠는가.

 

지금이 바로 썩어 무너뜨릴 때이며, 뿌리째 없애는 일을 늦출 수 없다.

 

아, 적이 온 뒤 참혹한 재앙을 호남만 홀로 피했을 뿐 다른 일곱 도는 모두 같은 고통을 겪었다.

 

그 가운데 영남의 피해는 다른 도보다 더 심하다.

 

문관과 무관, 사대부, 늙은이와 아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아무 죄 없이 죽은 사람이 어찌 셀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죽어 아들이 외톨이가 되고, 남편은 죽어 아내가 과부가 되었다. 집은 불타고 고향을 떠났으며 흰 갈대와 누런 풀 사이로 재만 가득하다.

 

낙동강 동쪽과 진양 남쪽에는 다시 연기 나는 집조차 없다.

 

굶주림과 추위가 극에 달해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고,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겹겹이 누워 있으며 억울한 울음이 하늘에까지 닿는다.

 

수백 수천 사람의 원통함은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다.

 

이런 형편을 본다면 여윈 아이와 병든 부녀자조차 막대기를 들고 적을 때리게 할 수 있다.

 

하물며 장정과 씩씩한 사내가 어찌 칼을 거두고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이 바로 충의로운 자가 목숨을 바칠 날이며, 호걸들이 치욕을 씻을 때다.

 

각자 나라와 집안의 원수를 생각하고 함께 저 흉악한 적을 죽여야 한다.

 

더구나 명나라 군사도 돌아가려 하고 늙은 왜적이 언제 다시 튀어나올지 모른다.

 

지금 이때를 놓쳐 빨리 쓸어 버리지 못하면 전날의 재앙이 다시 아침저녁 사이에 닥칠 것이다.

 

그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때를 놓쳐서는 안 되고 군사를 다시 일으키기도 쉽지 않다.

 

선비와 백성들은 힘써 일어나라.

전라도 여러 고을에 돌린 통문 — 김존경

천오백구십삼년 음력 십일월 이십구일, 광주에 사는 상중의 김덕령은 전라도 여러 고을의 여러 군자에게 삼가 알린다.

 

요즘 흉적은 바다를 건너와 영남 변경에 벌 떼처럼 모여 국경의 성들을 멧돼지처럼 들이받고 있다. 몰래 우리 땅을 엿보며 날마다 사납게 날뛰는데, 관군은 물러나고 의병도 위축되어 군사를 지니고도 서로 바라볼 뿐 토벌할 뜻이 없다.

 

군대의 위엄을 꺾어 오히려 적의 기세를 키워 주는 일이 이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궁궐을 지켜야 할 자들 가운데 게으르지 않은 사람이 없고, 나라를 위해 몸을 잊을 충의로운 사람도 밖에서 얼마나 되겠는가.

 

오늘의 형편을 가만히 생각하면 참으로 답답하다.

 

나 덕령은 어려서부터 얽매이기를 싫어했고 뜻은 적의 머리를 씻어 내는 데 있었다.

 

난리가 처음 일어났을 때 군대에 들어가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는 뜻이 없지 않았다.

 

다만 늙은 어머니가 병들어 해가 서산에 지듯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마지막까지 봉양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차마 군대에 나가 버릴 수 없었다.

 

두 해 동안 숨어 지내며 칼을 어루만지고 동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제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나는 의지할 곳이 없다.

 

나라에 일이 많은 지금 신하가 충절을 다해야 할 때다.

 

마침 담양 부사 이경린은 왕실의 후손으로 늘 적을 향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

 

내 헛된 이름을 듣고 군장과 무기를 마련해 주며 국난에 나서라고 권했다.

 

두 번이나 사양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복을 입은 사사로운 슬픔을 끊고 나라의 위급함에 따라 갑옷과 병기를 잡게 되었다.

 

전쟁을 지휘하는 계책은 옛 명장에 미치지 못하지만, 의로운 기개만큼은 옛 충신들을 따르고 싶다.

 

손에는 큰 칼을 들고 몸에는 두꺼운 갑옷을 두른 채 위세를 기르고 정예를 쌓아 곧장 적의 소굴을 치려 한다.

 

조금이나마 백성의 분노를 풀고 왕실의 치욕을 씻고자 한다.

 

바라건대 멀고 가까운 곳에서 뜻을 같이해 나라를 구할 큰 계획을 함께 세워 주기 바란다.

 

이제 내 속마음을 밝혀 여러 고을에 알리니 선비들 가운데 나를 따를 사람이 있는가.

 

아, 이백 년 동안 나라가 길러 낸 선비 가운데 어찌 나라를 위해 분연히 죽을 사람이 하나도 없겠는가.

 

몸을 버려 국난을 구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옷소매를 떨치고 군단에 오르는 일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나 덕령은 힘으로 솥을 들 사람도 아니고 만 명을 상대할 용맹도 없다.

 

다만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는 뜻을 생각해 시골 사람의 얕은 지혜를 헤아리지 않고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불러 모았다.

 

한마음으로 공을 이루려 한다.

 

기회를 보고 변화에 대응하여 반드시 적을 꺾을 계책을 내지는 못하더라도, 칼날과 창끝에 뛰어드는 일만큼은 반드시 군사들보다 먼저 하겠다고 맹세한다.

 

지금 일곱 도가 모두 전쟁을 겪었고 오직 우리 호남만 아직 도륙을 면했다.

 

나라를 다시 일으킬 마지막 희망이 바로 이곳에 달려 있다.

 

그런데 요즘 군사를 징발하고 군량을 나르느라 물력이 시들고 백성들이 지쳐 이미 난리를 겪은 고을과 다를 바 없다.

 

이런 때 적이 들이닥치면 누가 다시 막겠는가.

 

누구에게나 부모와 아내와 자식이 있고, 누구 집에나 선조의 무덤과 고향이 있다.

 

하루아침에 가족이 죽거나 끌려가고 집이 불타는 일을 누가 바라겠는가.

 

사람들이 모두 사사로운 원수를 갚듯 분노한다면 이 적을 없애지 못할 이치가 없다.

 

눈앞의 편안함만 지키려 죽음을 각오한 의로운 군대에 나서지 않는다면 부모를 적에게 내맡기고 스스로 선조의 무덤을 베어 버리는 것과 같다.

 

어찌 그런 이치가 있겠는가.

 

여러 고을의 선비들이여, 물러설 핑계를 대지 말고 더욱 분발하라.

 

서릿발 같은 창과 철기병이 우레처럼 몰아치고 바람처럼 달려가면 거짓 기세만 남은 적의 잔당은 반드시 흙무더기와 기왓장처럼 무너질 것이다.

 

칼날에 피를 묻히기도 전에 몸을 굽혀 죽음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비수의 승리를 오늘 다시 이루고 전승의 소식을 머지않아 아뢸 수 있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아, 명나라 군사도 기습을 당해 욕을 보았고 국경은 오랫동안 왜적의 더러운 기운에 물들어 있다.

 

칼에 엎드려 죽고 수레 앞에서 목숨을 바칠 사람이 어디 있는가.

 

적이 국경에 이르자 스스로 목을 베어 죽은 옛 충신 같은 이가 누가 다시 있겠는가.

 

일을 일으키는 조목은 아래와 같으니 이 글을 받는 즉시 자세히 생각하고 힘써 주기 바란다.

승병 팔도 도대장에게 보내는 글 — 김존경

세상에서 불교의 무리를 성인의 죄인이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사람이 지켜야 할 큰 관계를 버리고 인과 의에서 달아났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람이 지켜야 할 큰 관계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다.

 

인과 의의 길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나라의 어려움에 달려가는 것이다.

 

성인의 도를 배웠으면서도 이 관계와 인의를 다하지 못한다면 이름은 유학자이면서 행동은 다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다.

 

불교의 무리이면서도 사람의 관계와 인의를 다한다면 이름은 불교도이지만 행동은 유학자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다.

 

이름은 유학자이면서 행동이 그렇지 못하다면 성인의 죄인일 뿐 아니라 오히려 불교도의 죄인이기도 하다.

 

반대로 이름은 불교도이면서 행동이 유학자의 도리에 맞는다면 성인이 어찌 그를 죄인이라 하겠는가.

 

오히려 문 안으로 받아들이고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나아가 가르치고 함께 어울리기를 즐거워할 것이다.

 

아, 이름은 불교도이지만 행동은 유학자의 도리에 맞는 사람을 나는 오늘 도대장 한 사람에게서 보았다.

 

왜적이 날뛰어 여러 고을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겹겹의 산성과 관문이 기왓장과 흙더미처럼 무너졌다.

 

날랜 장수와 정예병들은 새나 쥐처럼 달아났다.

 

끝내 세 수도가 적에게 넘어가고 임금이 멀리 피란해 나라의 명맥이 실 한 가닥에 매달린 듯했다.

 

전국의 관리들은 임금이 주는 곡식을 먹고 임금이 주는 옷을 입으면서 평소에는 인의와 윤리를 다한다고 스스로 말했지만, 임금 앞에서 길을 열고 의리를 위해 몸을 내놓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오직 대장만이 깊은 산속에서 승복을 걷어붙이고 도총섭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하루아침에 승려의 삶을 뒤로하고 전쟁에 나섰다.

 

이것이 어찌 조정의 명령 때문에 일어난 일이겠으며, 또 조금이라도 개인의 이익을 바라고 한 일이겠는가.

 

실제로 대장이 이미 도리를 보는 눈이 높아 임금이 치욕을 당하는 일을 의리상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모두 감동했다.

 

사방의 의로운 승려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그림자처럼 따랐다.

 

관동에서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평양의 적과 맞섰고, 험한 곳에 매복하여 적의 돌진을 막기도 했으며, 정탐을 보내 적의 계획을 샅샅이 살폈다.

 

그 때문에 적은 국경을 넘지 못하고 한 해 동안 군사를 움츠렸다.

 

또 외로운 군대로 수락산에서 적 수천 명을 맞아 싸워 추격하며 큰 전과를 거두었다.

 

적이 세 수도에서 물러난 날에도 무장을 풀지 않고 군사를 거느려 남쪽으로 내려와 영남 밖에서 계속 싸웠다.

 

대장의 충성은 어찌 이토록 굳센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인과 위난에 달려가는 의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의 큰 도리를 무겁게 여기고 인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대장이다.

 

성인의 도를 배우는 사람 중에도 이렇게 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

 

대장은 불교의 무리인데도 나라가 베푼 은혜가 털끝만큼도 없던 사람으로서 국난을 만나 적을 향해 분노한 것이 녹봉을 먹던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했다.

 

대장은 성인에게 배척받지 않을 뿐 아니라 성인이라면 틀림없이 함께할 사람으로 삼았을 것이다.

 

나 덕령은 남쪽 고을의 한낱 고루한 선비다.

 

대장의 명성을 여러 번 들었고 일찍부터 직접 군문 가까이에 가 훌륭한 계책을 보고 싶었다.

 

이제 장성 수령 이귀에게서 전에 듣지 못한 일까지 더 자세히 들었다.

 

대장이 그와 생사를 맡기고 함께 국난을 건지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나 역시 그와 약속해 끝까지 함께하려 하니 대장도 보잘것없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뜻과 기운이 같아 서로 찾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다행이다.

 

나도 난리가 시작된 뒤부터 나라에 목숨을 바치려는 뜻이 있었고 작은 공이라도 세우고 싶었다.

 

다만 늙은 어머니가 살아 계시고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아 차마 떠나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없었다.

 

이제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 나 역시 의지할 곳이 없다.

 

내가 충성을 다할 곳은 오직 임금뿐이다.

 

마침 담양 부사 이경린이 내 헛된 명성을 듣고 내가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

 

전쟁 장비를 마련해 주고 국난에 나서라고 권했다.

 

관찰사에게도 보고했고 관찰사 역시 상복을 벗고 나라의 위급함에 나서라는 글을 보냈다.

 

그 글의 몇 줄마다 임금을 향한 충성과 나라를 걱정하는 지극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마음이 북받쳐 오늘의 국난에 스스로 시험해 보고 싶지 않겠는가.

 

담양 부사와 관찰사의 권고가 없었더라도 나는 본래 나라가 위태로운 때 목숨을 바쳐야 했다.

 

하물며 그들이 큰 의리로 깨우쳐 주었으니 어찌 작은 집안 예법에만 매여 임금과 나라의 깊은 원수를 잊겠는가.

 

그래서 어머니 빈소를 떠나 병기를 잡았다.

 

둔한 말도 열 번 가면 한 번은 쓸모가 있고, 무딘 납칼도 한 번은 벨 수 있다는 마음으로 나섰다.

 

내가 의지하는 것은 대장이 이미 오래전부터 군사를 일으켜 지형과 군사의 형세를 두루 겪었다는 점이다.

 

군사를 움직이는 법과 계책이 모두 빈틈이 없을 것이니,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국토를 깨끗이 쓸어 버릴 사람으로 대장 말고 누가 있겠는가.

 

아,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는 누구나 갚을 수 있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일에는 유학자와 불교도가 따로 있을 수 없다.

 

흉적의 칼날이 미친 참혹한 재앙은 절과 불상에도 닥쳐 이백 년 동안 전해 오던 불상들이 모두 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대장의 원수 갚는 일은 나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서로 힘과 명성을 합쳐 나라를 회복할 기회가 바로 지금이다.

 

바라건대 대장은 힘쓰고 또 힘쓰기 바란다.

 

내가 청하고 싶은 몇 가지 일은 따로 적었으니 살펴 시행해 주기 바란다.

도원수에게 올리는 글 — 김존경

전라도 광주에 사는 상중의 김덕령은 머리를 조아려 도원수 대감께 삼가 글을 올린다.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고 했다.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을 썩이고 팔을 걷어붙이며 이 적을 모두 없애고 싶어 할 것이다.

 

나 덕령은 상중에 엎드려 지내면서도 적의 목을 매어 바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오래전부터 분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근래 평소 가깝게 지내던 도 안의 장사들이 찾아와 말했다.

 

“적은 날마다 더욱 날뛰고 쓸어 없앨 기약은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충신과 의사들이 떨쳐 일어나 공을 세울 때입니다.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다만 상복을 입은 사람으로 군대를 따르기가 어려워 마음속에 큰 뜻만 품은 채 조정에 글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담양 부사 이경린이 내 헛된 이름을 듣고 내가 일어나려 한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는 곧 전쟁 장비를 마련해 주며 나라의 위급함에 달려가라고 온 정성을 다해 권했고 관찰사에게도 보고했다.

 

관찰사 역시 상중이라도 나라의 위급함에는 나서야 한다는 뜻으로 일으켰다.

 

끝내 사양할 수 없어 나라를 위해 죽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보잘것없는 사람이나 전에 원수의 막하에서 군사 생활을 한 적이 있어 군대의 대열에 몸을 두고 전쟁터를 오간 지 오래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한 부대라도 맡아 칼끝만한 공도 세우지 못한 까닭은 여든 된 어머니가 살아 계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네 형은 이미 전쟁터에서 죽어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의지할 사람은 오직 너뿐이다. 너마저 계속 전쟁터에 있으면 내가 살아서는 누가 봉양하고 죽어서는 누가 장사하겠느냐. 네가 군역에 나가더라도 부디 몸을 아껴 살아 돌아오너라.”

 

까마귀가 어미를 먹여 살리는 작은 정처럼 어머니 뜻을 차마 상하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용인 전투와 이치 방어 때에도 대열을 따라다녔을 뿐 감히 스스로 나서지 못했고 늘 마음에 부끄러움이 있었다.

 

이제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장례까지 마쳤다.

 

나 한 몸만 돌아보면 비록 상중이라 해도 나라가 위급할 때 갑옷과 병기를 잡는 일은 옛사람도 피하지 못했다.

 

작은 예법에만 매여 나라의 어려움을 외면해서야 되겠는가.

 

더구나 겨울이 거의 다 되어 적이 따뜻한 곳을 찾아 움직일 때다.

 

흉적이 이 도에 함부로 들어오면 부모가 살던 집과 부모의 무덤까지 오랑캐의 땅이 되어 베어지고 불탈 것이다.

 

그런 참혹한 화를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위로는 나라를 위해 의리상 나서지 않을 수 없고, 아래로는 사사로운 정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한마음을 모아 나라의 치욕을 씻고 귀신과 백성의 분함을 조금이나마 풀려고 일어났다.

 

일을 시작한 뒤 밤낮으로 걱정하며 창을 베고 아침을 기다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밥조차 잊는다.

 

속으로 늘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 도원수 대감은 나라 밖 군사의 큰 책임을 맡아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려 한다. 조정도 나라의 자물쇠가 될 만한 용감한 사람 하나를 얻어 적의 칼끝에서 공을 거두기를 바란다. 이것이 대감이 아직 뜻대로 얻지 못한 일일 것이다.”

 

나는 비록 보잘것없으나 예전에 대감의 막하에서 일한 사람이다.

 

은혜도 깊고 의리도 무겁다.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어려운 나라를 구할 사람으로 대감 말고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만일 사납고 용감한 사람 수백 명을 거느리고 곧장 적의 소굴을 쳐 흉적 한 무리라도 없앨 수 있다면 모두 대감의 은혜가 될 것이다.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아, 상중의 남은 목숨으로 빈소를 떠나 하루아침에 목숨을 걸고 국난에 뛰어드는 일이 세상 예법에는 죄가 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때를 당해 뜻을 세우는 사람이라면 도리를 알아줄 것이고, 뜻을 아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함께할 것이다.

 

내 재주와 힘이 적을 치기에 부족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억지로 일어난 것이라면 오히려 대감께 부끄러움을 더할 것이다.

 

성공과 실패, 이로움과 불리함은 미리 헤아릴 일이 아니다.

 

죽은 뒤에야 그만두겠다는 마음으로 본래 뜻을 저버리지 않으려 할 뿐이다.

 

대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직접 찾아가 아뢰는 것이 정성과 예에 맞지만 지금 군사를 조련하는 중이라 자리를 떠날 수 없다.

 

그래서 친족 김극제를 보내 내 뜻을 전하고 몇 가지 여쭐 일을 적은 별지도 함께 올린다.

 

바라건대 대감께서는 번거로운 말이라 여기지 마시고 헤아려 선택해 주기 바란다.

 

엄한 위엄을 무릅쓰고 글을 올리니 두려운 마음으로 명을 기다린다.

폐비 윤씨에 관한 기록

성종 때 정비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숙의 윤씨를 왕비로 삼았다.

 

윤씨는 성화 병신년에 연산군을 낳았다.

 

총애를 믿고 교만해져 다른 후궁들을 질투했고 임금에게도 불손했다.

 

어느 날 임금의 얼굴에 손톱자국이 나자 인수대비가 크게 노했다.

 

임금의 노여움도 격해져 이 일을 조정에 알렸다.

 

대신 윤필상 등은 임금 뜻에 맞추어 윤씨를 폐해 사가로 내보내자는 의견을 냈다.

 

윤씨는 밤낮으로 울다가 피눈물까지 흘렸다.

 

하지만 궁 안에서는 그를 헐뜯는 말이 더욱 많아졌다.

 

임금이 내시를 보내 윤씨의 모습을 몰래 살피게 했는데, 인수대비는 그 내시에게 윤씨가 머리를 빗고 단장하며 전혀 뉘우치는 기색이 없다고 보고하게 했다.

 

이 보고로 윤씨의 죄가 더욱 무거워졌다.

 

윤씨는 눈물을 닦아 피가 묻은 수건을 어머니 신씨에게 주며 말했다.

 

“내 아들이 무사히 살아남는다면 이 수건을 보여 내 억울함을 알리십시오. 또 나를 임금의 수레가 다니는 길가에 묻어 임금의 행차라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것이 내 소원입니다.”

 

결국 건원릉 길 왼쪽에 묻혔다.

 

뒤에 인수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신씨는 궁인들과 몰래 연락해 연산군에게 생모 윤씨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호소하며 그 수건을 올렸다.

 

연산군은 그때까지 정현왕후를 친어머니로 알고 있었다.

 

사정을 듣고 크게 놀라고 슬퍼했다.

 

그는 당시의 기록을 보고 윤씨 폐비에 찬성했던 대신들과 명을 받들었던 사람들에게 분노했다.

 

이미 죽은 사람까지 관을 파헤쳐 시신을 베고 뼈를 부수어 바람에 흩어 버리게 했다.

 

그 가족들도 연좌해 죽였고 먼저 죽은 사람 역시 시신을 베게 했다.

 

정씨와 두 아들 안양군, 봉안군도 모두 비참하게 죽었다.

 

연산군은 효사묘를 세우고 종묘와 같은 예로 제사하게 했으며, 윤씨의 무덤을 회릉이라 높여 불렀다.

 

뒤에 이 묘는 헐리고 돌난간만 남았다.

 

홍문관의 한 관리가 말한 적이 있다.

 

“윤씨에게는 총애를 믿고 예를 잃은 잘못이 있었을 뿐인데 대비의 미움을 사고 주변의 모함까지 겹쳤습니다. 임금의 노여움이 커지자 대신들이 아첨하며 임금 뜻에 따를 뿐 바로잡아 구하려 하지 않아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경상도 관찰사 손순효는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상소해 강하게 간했으나 이미 일을 되돌릴 수 없었다.

 

연산군의 잔혹한 형벌은 모두 임사홍이 사사로운 원한을 품고 몰래 부추긴 것이라고 한다.

 

성종이 폐비 윤씨에게 죽음을 내리며 내린 전교의 내용은 이러했다.

 

“폐비 윤씨는 본래 성품이 흉악하고 사나우며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많이 했다. 궁중에 있을 때 악행이 날로 심해져 세 대비에게 순종하지 않았고 나에게도 흉악한 행동을 했다.

 

나를 업신여겨 종처럼 대하며 발자국까지 함께 지워 버리고 싶다고 말한 것은 작은 일이라 논할 것도 못 된다.

 

역대 왕조에서 어린 임금을 끼고 권력을 휘두른 태후의 일을 볼 때마다 기뻐했고, 늘 독약을 몸에 지니거나 상자에 감추어 두었다.

 

미워하는 사람을 없애려는 것만이 아니라 나에게까지 해를 끼치려 한 것이다.

 

또 스스로 오래 살 것이며 장차 큰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나라와 종묘사직에 관계되는 반역에 가까운 죄다.

 

그래도 차마 대의로 단죄하지 못하고 서인으로만 폐해 사가에 두었다.

 

이제 원자가 점점 자라자 밖의 사람들이 전후 사정을 두고 계속 말한다.

 

지금 당장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훗날의 재앙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저 흉악한 성품의 사람이 권세를 쥐게 된다면 원자가 아무리 어질고 밝아도 뜻대로 하지 못할 것이며, 발호하려는 마음은 날로 커질 것이다.

 

한나라 여후와 당나라 무후 같은 화가 머지않아 닥칠 수 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몹시 두렵다.

 

지금 우물쭈물하며 큰 계책을 정하지 않아 나라를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후회해도 늦을 것이며, 나야말로 종묘사직에 죄를 지은 사람이 될 것이다.

 

옛날 한무제는 죄 없는 구익부인조차 후세를 위해 죽였다.

 

하물며 이처럼 흉악하고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는 사람을 어찌 그대로 두겠는가.

 

이에 이달 십육일 사가에서 죽음을 내린다.

 

종묘사직을 위한 큰 계책이므로 어쩔 수 없다.”

대원수 김명원과 오리 이원익 등 여러 사람이 숙소를 찾아와 술을 마신 일을 읊은 시 — 풍중영

나그네는 나라 걱정에 날마다 초가 문을 닫고 있었는데,

 

원수가 수레를 몰고 찾아와 외로운 삶을 위로했네.

 

하늘을 가른 구름빛 사이 깃발이 움직이고,

 

햇빛에 번뜩이는 서릿빛 창과 칼이 펼쳐졌네.

 

한 지방을 맡은 명성은 주나라 강태공처럼 높고,

 

적을 사로잡은 공은 한나라 사마상여처럼 귀하네.

 

여러 공과 이 자리에 만난 것은 삼생의 행운이니,

 

부디 훗날 한 자의 편지라도 잊지 마시라.

한가위에 매월정에 올라

하늘의 얼음 수레바퀴 같은 달은 가득 찼고,

 

바람 앞 옥 같은 나뭇가지는 여위었네.

 

옛 유량의 누대에서 누렸던 천년의 승경을 떠올리고,

 

백 년 전 사람의 향기로운 자취도 생각하네.

 

피리 소리로 변방 군사의 시름을 더하지 말고,

 

다듬이 소리로 멀리 떠난 사람의 슬픔도 재촉하지 마라.

 

봉화가 오른 뒤라 경치를 즐기기도 차마 어렵고,

 

술잔을 들어도 걱정과 즐거움을 함께 잊을 수 없네.

전라도 여러 고을을 왜적이 침범하지 않았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판촌 홍 선생에게 드린 시

동쪽에서 온 봉화가 서울까지 가득했는데,

 

오직 이곳만 옛 평화를 지키고 있네.

 

가장 훌륭한 수령이 온힘을 다해 보장하니,

 

승냥이와 호랑이 같은 적도 함부로 날뛰지 못했네.

 

온 산의 초목 사이에 깃발빛이 살아 있고,

 

온 도에는 노래와 글 읽는 소리가 남아 있네.

 

부끄럽구나, 나는 군사를 거느리고 바닷가 절반을 돌았으나,

 

분주히 달렸을 뿐 무엇을 보탰는가.

명나라 장수 이 제독과 유정 총병에게 드린 시

한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니 만 기병이 따르고,

 

푸른 군막 깃발에 붉은 비단 도포가 빛나네.

 

진평의 여섯 기묘한 계책은 아직 나오지 않았어도,

 

위강처럼 오랑캐와 화친을 다룰 힘은 있네.

 

민머리 흉적은 바닷가에서 사납게 버티지만,

 

장군은 천하의 영웅을 헤아리는 사람.

 

예부터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이에 제후가 되기 쉬웠으니,

 

타고난 기골이 기이하면 공을 따질 것도 없네.

우연히 읊은 시 — 유정

늙은 조개가 햇볕 가까이 가는 것은 추위가 두려워서인데,

 

들새는 무슨 일로 그토록 서로 괴롭히는가.

 

몸이 굴을 떠나니 품은 구슬이 상하고,

 

힘을 다해 모래밭에 이르니 푸른 깃마저 상했네.

 

입을 닫기는 쉬워도 연 뒤에 닫기는 어렵고,

 

머리를 들이밀기는 쉬워도 빼내기는 어렵구나.

 

일찍이 둘 다 어부의 손에 잡힐 줄 알았다면,

 

물과 구름 속에서 각자 편안히 살았으리라.

꿈속에서 우연히 읊은 시 — 임전

오랑캐 왕의 머리를 바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세상에 드문 영웅이었네.

 

이름이 산악을 흔들고,

 

위엄은 바다 물결을 잠재웠네.

 

관문 밖 오랑캐 별이 떨어지고,

 

하늘 한가운데 한나라 해가 밝아졌네.

 

신하와 백성이 춤추며 기뻐하고,

 

천 리에 감탄 소리가 가득하네.

적벽 그림에 써 명나라 장수에게 드린 시 — 이덕형

승패는 한 판 바둑처럼 분명한데,

 

병가에서 가장 꺼리는 것은 망설임이라네.

 

그해 적벽에서 전례 없는 공을 세운 것은,

 

오직 장군이 책상을 내리찍던 그 결단에 있었네.

한가롭게 살며 — 송익필

걷다 보면 앉는 일을 잊고 앉으면 걷는 일을 잊네.

 

소나무 그늘에 말을 매고 물소리를 듣는다.

 

나보다 뒤에 태어난 몇 사람이 나보다 먼저 갔는가.

 

저마다 머물 곳을 찾는데 다시 무엇을 다투랴.

 

가벼운 도롱이 짧은 삿갓 쓴 태평한 사람,

 

손수 거친 뜰을 가꾼 지 마흔 해.

 

헤어질 때 흘리는 슬픈 눈물 몇 줄을 보니,

 

소부와 허유 같은 은자도 결국 요임금의 백성이었음을 알겠네.

규방의 원망 — 최경창

동풍이 막수의 집으로 불어오고,

 

발을 천천히 걷으니 제비 그림자 비껴드네.

 

낮잠에서 깨어 거문고를 고르는데 향기로운 안개 젖고,

 

뜰에는 푸른 복사꽃이 흩어져 떨어지네.

 

다섯째 다리 머리에는 안개 낀 버들이 비스듬하고,

 

늦은 바람과 햇살은 더욱 맑고 따뜻하네.

 

열두 겹 비단 발 안 사람은 옥 같은데,

 

푸른 옷 입은 문신은 말 가는 대로 지나가네.

산사에서 노닐다

낙엽이 산골짜기로 떨어지고,

 

가을 소리가 말발굽 아래에서 일어난다.

 

안개 너머 종소리를 듣고,

 

달과 함께 절에서 묵는다.

 

학 울음은 삼경의 이슬을 깨우고,

 

벼랑에는 만 길 무지개가 걸렸네.

 

정신이 맑아 꿈 하나 없이,

 

생각은 물과 구름 속에 빠져든다.

 

옛집은 강가에 있는데,

 

서로 떠난 지 벌써 여섯 해.

 

대나무는 제멋대로 자라고,

 

덩굴은 이리저리 얽혔네.

 

이웃집 채소로 밥을 짓고,

 

옷에는 쥐구멍 연기가 배었네.

 

아이들은 흰 머리를 보고 놀라,

 

밤 등불 아래 자세히 바라본다.

규방의 원망 — 허씨

비단 띠와 치마에는 눈물 자국이 겹겹이고,

 

한 해 푸른 풀을 보며 떠난 이를 원망하네.

 

옥 거문고로 강남 곡조를 다 연주하고 나니,

 

낮에도 문 닫힌 뜰에 비가 배꽃을 때리네.

 

제비 두 마리가 비낀 처마를 스치며 날고,

 

어지러운 낙화가 비단옷에 달라붙네.

 

깊은 방에 봄을 슬퍼하는 마음 끝이 없는데,

 

강남의 풀은 푸르고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네.

둘째 형이 위로해 보낸 시에 차운하여

가을 마음은 병을 한층 더 깊게 만들고,

 

하늘 끝까지 이어진 풀처럼 이별의 한도 길구나.

 

푸른 옷 노래를 읊고 나서 다시 스스로 가여워하니,

 

어찌 걱정과 즐거움으로 하늘의 조화를 어지럽히랴.

등불 아래에서

금빛 가위로 베틀에서 내린 흰 베를 자르고,

 

추운 옷을 꿰매며 손을 몇 번이고 불어 녹인다.

 

등불 곁에서 옥비녀를 비스듬히 뽑아,

 

붉은 심지를 돋우며 날아든 나방을 살려 주네.

둘째 형이 회산 수령으로 좌천되었다는 말을 듣고

병중에 임명장이 구중궁궐에서 내려왔는데,

 

먼 고을은 장기 낀 구름 끝에 있네.

 

한문제는 초회왕 같은 임금이 아닌데,

 

무슨 일로 젊은 이를 상강으로 귀양 보내는가.

 

한 고을 맡은 벼슬이라도 늙은 어버이를 모실 수 있으니,

 

서울을 떠나는 새벽에 이별의 눈물을 흘리지 마시오.

 

이제 옥당에는 바른말할 약석 같은 신하가 없으니,

 

밤중 임금이 자리를 앞으로 당겨 누구에게 묻겠는가.

단보가 산방에서 글 읽는 데 부치다

높은 봉우리에 구름이 생겨 연꽃 같은 산봉우리를 적시고,

 

옥나무와 붉은 벼랑에는 이슬 기운이 짙다.

 

절 누각의 저녁 예불이 끝나 승려는 선정에 들고,

 

강당의 재가 끝나 학은 소나무로 돌아온다.

 

담쟁이는 옛 벽을 감고 산귀신은 울며,

 

안개 낀 가을 못에는 촛불 같은 용이 누웠네.

 

밤이 깊어 향등이 돌침상을 밝히고,

 

동쪽 숲 달빛은 어두운데 성긴 종소리 들려오네.

둘째 형이 함경도에서 보내온 시에 차운하여

층층 누대 한 기둥이 높은 산을 누르고,

 

서북쪽 뜬구름은 변방에 이어졌네.

 

철령의 패업을 꿈꾸던 용은 이미 떠났고,

 

목릉의 가을빛 속 매가 처음 지나간다.

 

산은 대륙에 이어져 세 고을을 감싸고,

 

물은 평원을 갈라 아홉 강을 받아들이네.

 

만 리를 올라 바라보니 해가 저물고,

 

술에 취해 긴 칼에 기대 홀로 슬픈 노래를 부른다.

 

높고 험한 잔도는 구름과 맞닿고,

 

산봉우리는 하늘을 찌르며 은하에 꽂힌 듯하다.

 

산줄기는 북쪽 세 물이 끊기는 곳에 닿고,

 

지세는 서쪽 아홉 강 멀리까지 누른다.

 

저녁 안개가 걷히자 외로운 성이 드러나고,

 

가을 자주개자리에 만 마리 말이 살쪘네.

 

동쪽 수루를 바라보니 북소리가 급한데,

 

변방의 오랑캐 기운은 어느 날 사라질까.

단보가 산사에서 공부하며 보내온 시

초승달이 동쪽 숲 위로 떠오르고,

 

산사의 종소리는 어둠 속에 들린다.

 

높은 바람에 잎이 처음 지고,

 

비가 많아 돌아갈 마음 아직 이루지 못했네.

 

산과 바다의 그윽한 약속은 멀고,

 

강호의 술병은 깊어만 간다.

 

함경도에서 돌아오는 기러기도 드문데,

 

어디에서 답장을 얻을 수 있을까.

둘째 형이 갑산으로 유배되었다는 말을 듣고

멀리 갑산으로 귀양 가는 사람,

 

함관 길 떠날 채비가 바쁘구나.

 

신하는 가의와 같지만,

 

임금이 어찌 초회왕과 같으랴.

 

강물은 가을 언덕과 나란하고,

 

관문에는 저녁 해가 지려 한다.

 

서릿바람 속 기러기 날아가다가,

 

무리가 끊겨 줄을 이루지 못하네.

명나라 황제의 칙서

황제는 행인사 행인 설번을 보내 조선 국왕에게 칙서를 내린다.

 

그대의 나라는 대대로 동쪽 번방을 지키며 공손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의관과 문물이 갖추어져 예의 있는 나라로 불려 왔다.

 

그런데 근래 왜적이 날뛰며 함부로 침략하여 왕성을 함락하고 평양까지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먼 곳과 가까운 곳이 모두 어지러워졌다.

 

국왕은 서쪽 바닷가로 피하고 들판과 풀숲을 떠돌게 되었다.

 

이 나라가 이처럼 무너진 것을 생각하면 내 마음도 아프다.

 

앞서 급한 사정을 보고받고 이미 변경의 신하들에게 명해 군사를 보내 구원하게 했다.

 

이제 특별히 행인사의 관원을 보내 칙서를 가지고 가 그대 조선 국왕에게 알린다.

 

그대는 조상이 대대로 전해 준 나라의 터전을 생각해야 한다.

 

어찌 하루아침에 가볍게 버릴 수 있겠는가.

 

서둘러 치욕을 씻고 흉적을 없애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데 온힘을 다하라.

 

또한 나라 안 문무 신하들에게 알려 모두 임금을 갚으려는 마음을 굳게 하고 원수를 갚겠다는 의리를 크게 떨치게 하라.

 

나는 이제 문무 대신 두 사람을 보내 요양 여러 진의 정예병 십만 명을 거느리고 가 적을 토벌하게 한다.

 

조선 군사와 앞뒤에서 협공하여 반드시 흉적을 모조리 없애고 남은 무리가 없게 할 것이다.

 

나는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중국과 여러 이민족을 다스리고 있다.

 

지금 만국이 평안하고 사방 바다가 조용한데 저 작은 무리가 감히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

 

그래서 동남쪽 바닷가 여러 진에도 다시 명령해 유구와 섬라 등 여러 나라에 알리고 수십만의 병선과 군사를 모아 일본으로 직접 쳐들어가 적의 소굴을 부수게 할 것이다.

 

큰 적의 우두머리를 잡아 바다를 다시 평안하게 만들겠다.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벼슬과 상을 주는 일을 내가 어찌 아끼겠는가.

 

선대의 영토를 되찾는 것이 큰 효도이고, 임금과 부모가 위난에 처했을 때 급히 구하는 것이 지극한 충성이다.

 

그대 나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본래 예의를 아는 사람들이니 반드시 내 뜻을 받들어 옛 나라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국왕은 개선하여 도성으로 돌아가고, 종묘와 사직은 오래도록 번방을 지키게 하라.

 

이것으로 멀리 있는 작은 나라를 돌보는 내 뜻을 위로해 주기 바란다.

 

삼가 힘쓰라.

명나라 장수와 왜군이 주고받은 문답

명나라 장수가 왜군에게 물었다.

 

“조선에 무슨 죄가 있기에 일본이 감히 군사를 일으켜 땅과 백성을 침략했는가.”

 

왜군이 대답했다.

 

“조선은 전에 대마도를 공격했습니다. 또 신하를 일본에 보내 조공한다 해 놓고 반 년이나 머문 뒤에도 조공을 계속하지 않았고 사람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군사를 일으켜 공격했습니다.”

 

명나라 장수가 말했다.

 

“대동강 동쪽은 모두 조선 땅이다. 그런데 너희가 대동강 서쪽을 넘어 의주까지 오면 그곳은 본래 명나라의 영역과 맞닿은 곳이다. 명나라가 조선 국왕에게 대신 다스리게 한 것이다.

 

명나라 사신이 오면 국왕은 반드시 평양까지 나와 맞이한다. 그 길의 관사에는 명나라 사신들이 남긴 시문이 판에 적혀 있는데 너희는 보지 못했는가.

 

또 양 총관이 전에 군사 천 명을 보내 정탐하게 했을 때 너희는 어찌 감히 공격했는가.”

 

왜군이 대답했다.

 

“그때는 비가 오는 중에 요동 군사가 성문을 들이치고 들어와 문지기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맞서 싸웠을 뿐입니다. 정탐군인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명나라 장수가 물었다.

 

“성 안에 너희가 몇 명이나 있는가.”

 

왜군이 대답했다.

 

“다섯 장수가 있습니다.”

 

명나라 장수가 말했다.

 

“그들의 이름을 적어라.”

 

왜군이 대답했다.

 

“이름은 잘 모르고 직책만 압니다. 고산, 대촌, 오도, 평사송포, 그리고 대장 소서덕사랑입니다.”

 

명나라 장수가 다시 물었다.

 

“왕성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왜군이 대답했다.

 

“관백의 손자 전팔랑입니다. 신분은 높지만 실제 일은 거의 모두 행장이 맡고 있습니다.

 

요즘 여러 곳에 흩어진 군사를 모아 성을 지키려 하고, 성 안 군사는 의주 쪽으로 내려갈 생각입니다.”

 

명나라 장수가 말했다.

 

“내가 이제 황제께 아뢰어 두 나라의 군사를 멈추게 하겠다.

 

너희도 전에 풀을 베던 곳까지만 다니고 그보다 십 리 밖으로 나오지 마라.

 

우리도 명나라 군사와 조선 군사를 합쳐 풀을 베러 나오는 왜군을 죽이지 않고 황제의 명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겠다.”

 

이 말은 역관 진효남이 전한 것이다.

허의준이 올린 진술

기밀한 일을 아뢰는 허의준은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려는 뜻으로 말씀드린다.

 

나는 신미년에 광동을 지나다 배가 연이어 붙잡혔다.

 

다행히 작은 재주가 있어 일본 사쓰마의 군주에게 총애를 받아 가까스로 목숨을 보전했다.

 

그러나 명나라 상선과 어선을 약탈해 사람을 잡아가고 팔아넘기며 갖은 고통을 주는 자들을 늘 원망했다.

 

을유년에 나는 동료들과 의논해 사쓰마의 군주에게 호소했다.

 

그 결과 진화오, 전소봉 등 우두머리 열여 명을 죽이고 처자식을 몰수하게 했다.

 

남은 도적들은 동포채와 섬라, 여송 등으로 달아났다.

 

그 뒤로 바다의 도적선이 줄었다.

 

정해년에 관백이 사쓰마와 히젠을 쳤다.

 

나는 또 몰래 도적선을 빠져나왔고 사쓰마 군주를 따라 관백을 알현했다.

 

목숨을 걸고 울며 호소하자 관백은 해경상과 달아난 두 도적 우두머리를 베라고 명했지만 끝내 잡지는 못했다.

 

그 뒤 지금까지 바다가 대체로 평안했다.

 

그런데 관백이 다시 명나라를 침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밤낮으로 편히 있지 못했다.

 

마침 탐문하러 온 배를 만났다.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이라면 나라를 위한 계책을 세워야 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알려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일본에 오래 사는 명나라 사람은 대부분 옛 도적의 잔당이어서 진실을 말할 사람이 거의 없다.

 

또 장사꾼이나 마을 상인들이라 나라의 큰일을 잘 모르고 진실을 설명할 능력도 없다.

 

그래서 나는 죄를 무릅쓰고 지난 음력 구월 초사흘 일본의 실정을 하나씩 적어 히라도의 옛 배 주인에게 맡겨 조정에 전달하게 했다.

 

길이 멀고 바다가 넓어 도착했는지는 모르겠다.

 

음력 구월 초이렛날에는 내년에 조선을 건너 요동을 치고 북경성을 빼앗겠다는 확실한 소식을 다시 들었다.

 

그래서 내용을 다시 조목별로 적어 구월 초아흐렛날 새 배 주인에게 맡겨 조정에 보내게 했다.

 

이것도 제대로 도착했는지는 모르겠다.

 

날마다 걱정하며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할 뿐이었다.

 

마침 주균왕이 충성심과 의분이 매우 강해 몸소 나라에 보답하겠다고 나서 이 진술을 품고 직접 알리겠다고 했다.

 

나는 크게 기뻐하여 지금까지 다 말하지 못한 일을 자세히 적어 올린다.

 

구월 이십오일에는 여러 나라가 관백의 명을 따르려 하지 않자 사쓰마의 군신들이 몰래 동해도의 여러 나라와 연락해 함께 반란을 꾀했다.

 

일이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다.

 

만일 한 나라라도 반기를 들면 관백의 침략군은 출발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은 확실히 헤아릴 수 없으니 먼저 방비해야 한다.

 

황제께 아뢰어 임금이 그 폐단을 알고 미리 걱정하지 않도록 하고, 신하들이 그 약점을 알아 먼저 방비하게 해 주시기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나라와 백성 모두 큰 다행일 것이다.

 

두려운 마음으로 아래에 자세히 말씀드린다.

일본의 형편을 자세히 아룀

일본에는 예순여섯 나라가 있다.

 

명나라의 예순여섯 부와 비슷한 셈이다.

 

하지만 호구와 돈, 곡식을 모두 합쳐도 명나라 열 개 부에도 미치지 못한다.

 

본래 황제가 있어 대대로 자리를 전하지만 실제 정사에는 거의 관여하지 못한다.

 

한나라 말기의 여러 세력처럼 각 나라가 지형을 차지하고 서로 공격하며 빼앗는다.

 

아이가 열 살쯤 되면 칼과 활을 배우고 명나라 글도 배운다.

 

사서, 주역, 옛 글, 병법, 당시와 역사책 등을 배우지만 글의 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은 병으로 죽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전쟁에서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평소 자식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열 살에 죽든 백 살에 죽든 죽기는 마찬가지다. 차라리 적을 죽이다 죽을지언정 물러나 살아서는 안 된다.”

 

짧은 옷과 짧은 소매를 입고 맨발로 다니며 머리를 깎고, 긴 칼과 짧은 칼을 늘 몸에 지닌다.

 

총과 활을 겨루어 돈을 따는 일을 도박이라 하고, 활을 쏘고 무거운 것을 지고 신에게 비는 일을 서원 갚기라 한다.

 

나라를 지킬 때에는 높은 산에 성을 쌓고 도랑을 파 해자를 만든다.

 

적이 오면 양식이 있는 사람은 성에 올라 지키고, 양식 없는 사람은 살려 두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다른 나라를 칠 때에는 자기 병사와 자기 양식을 준비한다.

 

장수는 뒤에 있고 병사는 앞에 선다.

 

매복을 잘 쓰지만 거짓으로 패하는 계책은 잘 알지 못한다.

 

깃발을 많이 세워 적의 기세를 누른다.

 

병사 한 명에 깃발 열 개를 세울 때도 있다.

 

기괴한 복장과 눈에 띄는 색으로 적을 놀라게 하고, 소머리나 귀신 얼굴 같은 모양을 쓰기도 한다.

 

이기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길게 추격하고, 지면 기가 꺾여 어지럽게 달아난다.

 

이길 때에는 패배를 생각하지 않고, 패하면 다시 싸울 생각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육전에는 강하지만 수전에는 약하고 불을 이용한 공격도 잘 알지 못한다.

 

장수는 일정한 수의 군사를 거느리지 않고 병사도 한 달 넘길 양식을 지니지 않는다.

 

나라를 비우고 군사를 내면서 뒤를 공격당할 위험을 생각하지 않고,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 나가면서 지친 적을 기다렸다 치는 병법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뇌물을 써 이간시키는 계책을 잘 쓰고, 이기면 빼앗는다.

 

함께 살고 함께 죽자는 맹세를 잘 맺지만 목적을 이루면 잊어버린다.

 

거짓 화친과 거짓 맹세로 적국을 무너뜨리는 일을 잘한다.

 

성을 쌓아 적의 성을 포위하고 함락시키는 것도 잘한다.

 

겉으로 인자하고 의로운 척하지만 욕심이 끝이 없다.

 

법은 죄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털끝만 한 잘못에도 목을 벨 정도로 엄하다.

 

금은 많지만 백성을 심하게 착취한다.

 

빠른 공격을 가장 두려워하고 느린 싸움을 가장 좋아한다.

 

전투가 급하면 손을 쓸 틈이 없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여유 있게 힘을 기른다.

 

사쓰마와 관동 사람들은 강직하고 싸움을 잘하고, 교토와 기나이 사람들은 부드럽고 간사하며 계략을 잘 쓴다.

 

적이 적으면 기세가 배가되고 적이 많으면 스스로 두려워한다.

 

전투에는 나가지만 정교한 진법은 없고, 죽이기는 잘하지만 절제가 없다.

 

허세를 크게 부려 사람을 놀라게 한다.

 

전쟁에 나설 수 있는 병사가 만 명이라고 해도 실제 제대로 싸울 사람은 오천 명에 못 미칠 때가 많다.

 

배도 매우 불편하다.

 

배 바닥이 뾰족하고 폭이 넓어 흔들림이 심하다.

 

조금만 무게가 한쪽으로 쏠려도 뒤집힐 듯하며 움직이기 어렵고 세워 두기도 어렵다.

 

공격하기는 매우 쉽다.

 

그들은 명나라를 대당이라 부르고 명나라 사람을 당인이라 부른다.

 

일본에 오래 사는 명나라 사람은 구당인이라 부른다.

 

당나라의 위엄이 오래전부터 오랑캐에게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요임금과 순임금, 문왕과 무왕, 진시황과 한고조, 항우와 여러 중국 인물의 이야기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옷차림과 말은 허세가 많고 실속이 적다.

 

싸우기 전에는 모두 큰소리를 치지만 막상 전투가 닥치면 제각기 두려워한다.

 

싸우기 전에는 목숨을 버릴 듯 말하지만 전장에서는 각자 살 길을 찾기도 한다.

 

명나라는 이러한 실정을 여러 장수와 군사에게 알려 모두가 적의 약점을 알고 막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일본이 침략하게 된 까닭

관백은 일본 여러 나라를 거의 모두 병합했으나 관동만 아직 굴복시키지 못했다.

 

지난해 음력 유월 초여드렛날 여러 제후를 궁전 앞에 모아 장수에게 군사 십만을 거느리고 관동을 정벌하게 하면서 이렇게 명했다.

 

“성을 사방에서 겹겹이 포위하고 작은 성들을 둘러 지어 지켜라. 나는 이제 바다를 건너 대당을 침략하려 한다.”

 

이어 히젠 수령에게 배를 만들도록 명했다.

 

열흘 뒤 유구에서 승려를 보내 조공하자 금 백 냥을 내리고 이렇게 당부했다.

 

“내가 멀리 대당을 정벌하려 하니 너희 유구가 길잡이를 맡아라.”

 

그 뒤 예전에 왕오봉의 무리에 속했던 사람들을 불러 물었다.

 

그들이 대답했다.

 

“대당에서 오봉을 붙잡았을 때 우리 무리 삼백여 명이 남경 지방에서 약탈하며 마구 돌아다니다 복건까지 내려갔고, 일 년 뒤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대당 사람들은 일본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합니다. 대당을 깨뜨리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습니다.”

 

관백이 말했다.

 

“내 지혜로 내 군사를 움직이면 큰물이 모래둑을 무너뜨리고 날카로운 칼이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을 것이다. 어느 성인들 깨뜨리지 못하고 어느 나라인들 망하게 하지 못하겠는가. 나는 대당의 황제가 될 것이다. 다만 수군의 방비가 치밀해 대당 땅에 발을 딛지 못할까 걱정될 뿐이다.”

 

오월에는 고려국의 조공선이 교토에 들어왔다. 관백은 유구에 했던 것과 같은 말을 그들에게도 당부하고 금 사백 냥을 주었다.

 

고려가 일본에 조공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오월부터라고 한다.

 

칠월에는 광동 호경오에 사는 불랑기 사람들이 명나라의 그림 한 폭과 지도 한 폭, 개 만 마리, 큰 말 한 필, 채색 비단과 향료, 보물 등을 바쳤다. 그 값이 은 오만 냥이 넘었다고 한다.

 

뒤에 그들이 사쓰마로 내려갈 때 길에서 만났는데 관백이 무슨 부탁을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우리들은 관백이 대당을 건너가겠다는 큰소리를 내는 까닭을 의심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의 뜻을 북돋고 명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놀라게 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여러 나라 군사를 멀리 내보낸 뒤 그 뒤를 습격해 나라를 없애고 자기 고을로 만들려는 속셈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팔월에 관동을 평정한 뒤에는 이런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들어 보니 침략하려는 계획은 사실이었다.

 

이번 가을 칠월 초하루에는 고려국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인질을 바치며 관백에게 빨리 출병하라고 재촉했다고 한다.

 

지난달 초이렛날에는 명령서가 사쓰마에 도착했다.

 

사쓰마에 군사 삼만과 대장 두 명을 준비해 고려로 가게 하고, 그곳에서 당나라의 예순여섯 나라를 취할 군사 오십여만을 모으게 했다고 한다.

 

관백은 직접 군사 오십만을 거느려 모두 백만 명을 만들고, 대장 백오십 명을 둔다고 했다.

 

준비하라고 한 물품은 다음과 같다.

 

- 전마 오만 필

- 큰 괭이 오만 자루

- 베는 칼 십만 자루

- 긴 창 십만 자루

- 도끼칼 십만 자루

- 쇠도끼 십만 자루

- 긴 칼 오십만 자루

- 조총 삼십만 자루

- 석 자 길이의 칼은 모든 사람이 한 자루씩 몸에 지닐 것

 

다음 임진년 봄에 일을 일으키기로 하고, 관백은 삼월 초하루에 배를 점검한다고 했다.

 

사쓰마의 군주는 본래 명나라를 받드는 사람이다.

 

관백도 그 뜻을 조금 알고 있어 사쓰마 군주의 아우 무고에게 군사를 거느리게 했다.

 

사쓰마의 재상 행간도 본래 명나라를 공경하고 두려워해 군사를 빼내 몰래 여송이나 담수 같은 곳으로 달아나 전쟁의 성패를 지켜보려 했다.

 

뜻밖에 계획이 드러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금은 모두 무고와 함께 출병하게 되었다.

 

무고는 본래 가난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다.

 

사쓰마 군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잘 싸우지만 계략이 없으며, 군사는 있어도 군량이 없다.

 

이런 약점을 하나하나 기억해 두었다가 막는다면 매우 다행일 것이다.

왜적을 막을 계책

고려는 작은 나라다.

 

일본의 대마도와는 삼백 리쯤 떨어져 있고 가운데 큰 바다가 있다.

 

배로 이틀 거리이며 순풍이면 하루면 갈 수 있다.

 

대국의 부모와 같은 조정을 위해 계책을 말씀드리자면, 충성스럽고 의롭고 지혜와 계략이 있는 사람에게 잘 훈련되고 용감한 군사 이백만이나 삼백만을 거느리게 해 모두 고려에 주둔시키는 것이 좋다.

 

고려의 관장 가운데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토벌해야 한다.

 

대군을 고려의 사방에 매복시키고 고려 사람 가운데 우리나라와 한마음인 자에게 고려의 관직을 임시로 주어 왜군을 겹겹의 포위망 속으로 유인해야 한다.

 

사방에서 화포를 신호로 삼아 공격해 죽이고, 산동과 요동에서도 각각 군사 오십만을 내어 연기와 불을 신호로 왜군의 뒤를 쳐야 한다.

 

물과 육지에서 서로 공격하고 밤낮으로 함께 죽이면 된다.

 

그때 왜군은 배불리 먹을 겨를이 없고 고려 또한 왜군에게 호응할 수 없다.

 

적은 멀리 온 손님이고 우리는 주인이며, 왜군 뒤에는 구원군이 없다.

 

왜군은 수전에 익숙하지 않고 화공을 당해내지도 못한다.

 

긴 칼이 있어도 쓰지 못하고 활과 조총도 제대로 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대장들을 모두 죽이고 관백도 산 채로 사로잡을 수 있다.

 

왜군 백만 명 가운데 갑옷 한 조각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편안히 쉬고 있는 군사로 지친 적을 기다리고, 주인의 처지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형세다.

 

“적의 기세가 지금 날카로우니 갑자기 공격해서는 안 된다”라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것은 날카로운 기세가 아니다.

 

멀리에서 지쳐 온 군사가 어찌 정예로울 수 있겠는가.

 

만일 진영을 세우고 영채에 머물며 무기를 가다듬을 시간을 주면 그때는 상대하기 어려워진다.

 

또 따로 훌륭한 장수를 뽑아 군사 오십만을 이끌고 요동으로 들어가 훈련시켜 지원군으로 삼아야 한다.

 

황실의 금을 군중에 내걸어 상으로 보이고 사람들이 이익을 보고 목숨을 바치게 해야 한다.

 

맹자의 인의에 관한 말에만 얽매여서도 안 된다.

 

지금은 맹자의 시대가 아니며, 변하지 않는 원칙과 때에 따른 방편은 서로 다르다.

 

광서의 낭가 군사는 가장 용감하니 이들도 불러 쓸 만하다.

 

다만 왜군의 마음은 일정하지 않아 여러 길로 나누어 진격할지도 모른다.

 

서경에서 산동, 절강, 복건, 광동으로 이어지는 해안에서는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하고 전선을 많이 내어 막아야 완전한 대비가 된다.

 

또 적에게 몰래 물자를 대주는 화근도 엄하게 막아야 한다.

 

바닷가 주민이 적에게 물자를 대는 것은 도적에게 군량을 가져다주는 것이며, 바닷가 백성이 적에게 붙는 것은 적의 군사를 늘려 주는 것이다.

 

만일 왜군이 우리 대국 땅을 밟는다면 한순간도 멈추지 말고 즉시 맹렬하게 공격해 밤낮없이 죽여야 완전히 이길 수 있다.

 

앉아서 계책만 의논하다 죽음을 기다리며 이리 같은 적의 위세를 키워서는 안 된다.

 

왜군이 성 아래까지 오면 구원군이 성 밖에 흙성을 쌓아 적을 에워싸야 한다.

 

여러 겹으로 성을 쌓고 못을 파고 조총으로 공격하면 안팎에서 협공하게 되므로 이기지 못할 까닭이 없다.

 

성 안에서 가만히 지키기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날이 오래 지나면 위험해진다.

 

배의 운항을 막고 곡식을 봉쇄하자는 주장도 크게 잘못이다.

 

배와 곡식을 막으면 백성이 굶어 죽어 우리 쪽에서 먼저 어지러워진다.

 

그런 형편에 어찌 적을 막겠는가.

 

또한 왜군이 성 밑을 파는 수법을 각별히 막아야 한다.

 

관백은 진을 칠 때마다 먼저 금을 보내 화친을 산다.

 

군사를 십 리 밖에 주둔시키고 밤에 흙으로 영채를 쌓는다.

 

군사들이 편히 쉬어 힘을 기른 뒤에는 다시 밤을 틈타 성 가까이에 흙성을 둘러쌓는다.

 

오늘 조금 가까이 쌓고 내일 또 가까이 쌓아 마침내 높은 보루를 만든다.

 

그 위에서 성 안 병력의 허실을 살피며 조총을 높이 들고 성 아래를 공격한다.

 

땅굴을 파 성벽 밑을 파헤쳐 성이 스스로 무너지게 하기도 한다.

 

많은 황금을 풀어 성 안에서 호응할 사람을 사기도 하고, 갖가지 간사한 계책을 내어 성을 빼앗는다.

 

성을 차지하고 나면 주었던 금을 다시 빼앗고 사람도 죽인다.

 

조정에서는 이런 폐단을 반드시 알아 두고 그들의 계책에 잘못 빠져서는 안 된다.

 

일본에서 장수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부유하고 귀한 집안의 자제라 고생을 견디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책 읽는 선비와 같은 사람들이다.

 

참된 재주와 능력을 갖춘 사람은 백 명 가운데 하나도 드물다.

 

그저 마구 죽일 줄 알고 두려움을 모를 뿐이다.

 

또 군사를 움직일 때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장수를 두고 말한다면 옳지만 병사에게까지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일본 군사는 술을 담력으로 삼는다.

 

전투를 앞두고 한바탕 취하면 기세가 배가되고 죽음을 잊는다고 한다.

 

이 방법은 우리도 쓸 만하다.

 

우리 허의준 등은 직접 달려가 이 일을 아뢰고 싶지만 곁을 떠날 수 없고 처자도 딸려 있다.

 

조정에서 우리의 나라를 위한 마음을 살피지 않고 갑자기 큰 죄를 내릴까 두렵다.

 

그렇게 되면 한 조각 충의만 품은 채 미친 사람처럼 죽고 이름도 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감히 직접 가지 못한다.

 

바라건대 조정에서는 깊이 유념해 주기 바란다.

관백의 내력

관백이라는 이름은 한나라 대장군과 같은 직위다.

 

천자를 끼고 제후를 억누르며 교토를 제멋대로 차지한다.

 

지금의 관백은 처음에는 민가의 종이었다.

 

땔나무를 하다가 길에서 당시 관백을 만났는데 좌우 사람들이 죽이려 하자 관백이 살려 두고 부렸다.

 

앞 부대의 칼잡이로 삼아 이웃 나라를 정벌하게 했더니 적의 목을 베어 공을 세웠다.

 

관백이 기뻐해 기노시타라는 성과 도키치로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는 늘 아첨으로 관백을 섬기며 여러 차례 싸움에 나가 승리를 거두었다.

 

관백은 그를 대장과 재상 일을 겸하는 사람으로 삼고 다시 하시바라는 성과 지쿠젠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이듬해 그는 마침내 관백을 죽이고 그의 아들을 쫓아낸 뒤 스스로 자리에 올라 관백을 참칭했다.

 

처음 도키치로라 불렸던 자가 바로 지금의 관백이다.

 

그는 동쪽을 치고 서쪽을 정벌하여 일본 여러 나라를 합쳤다.

 

하지만 실제로 한 진을 싸워 한 진을 이긴 적은 거의 없고, 대부분 달콤한 말과 큰소리, 황금과 속임수로 얻었다.

 

지난해 십일월에는 아우가 죽었고 올해 칠월에는 아들도 죽어 안팎으로 가까운 친족이 없이 자기 한 몸뿐이다.

 

우리나라가 왜군을 모두 죽인 뒤 승리한 군사 오십만을 곧장 일본 땅으로 들여보낸다면 왜군은 넋이 나가고 담력이 꺾여 손을 묶고 사로잡히기를 기다릴 것이다.

 

앞에서는 공격하고 뒤에서는 회유하며, 앞을 회유할 때 뒤를 취하는 식으로 하면 몇 달 안에 일본 여러 나라를 모두 평정할 수 있다.

 

바라건대 우리 조정은 깊이 유념해 주기 바란다.

일본 예순여섯 나라와 여러 섬

여러 작은 섬은 이 숫자에 넣지 않았다.

 

각 섬에는 작은 왕이 지키고 있지만 모두 관백에게 속해 있다.

 

이키와 대마도는 고려와 가까워 늘 서로 오간다.

 

나가사키, 히라도, 고토, 치고시마, 나나시마는 유구와 가깝다.

 

대체로 그 사람들의 용맹과 나약함은 우리나라 사람과 비슷한 정도다.

 

지혜와 생각은 우리나라 사람의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들의 창과 칼도 본래 우리나라 창과 칼과 다를 것이 없고, 쓰는 법은 오히려 우리나라에 훨씬 못 미친다.

 

다만 정교하게 만들어 늘 갈고 닦을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겁내지 않고 맞서 막기만 한다면 늘 이길 수 있고 실수할 일이 만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바라건대 깊이 유념해 주기 바란다.

 

만력 십구년 구월, 진술인 허의준·곽국수와 보국인 주균왕이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일을 감히 더 아뢰어 백성으로서 나라에 보답하려는 정성을 다한다.

 

우리는 산골과 초야에 사는 선비이며 바닷가에서 물고기와 소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어 글의 차례에도 익숙하지 못하고 공부를 멀리한 지 오래라 문장도 이루지 못한다.

 

글솜씨로 황제의 눈에 올릴 만하지는 못하나 한 치의 마음만큼은 천지와 귀신에게 고할 수 있다.

 

관백은 포악함이 걸왕과 주왕보다 심하고 속임수와 계략을 끝없이 내므로 그 속뜻을 헤아릴 수 없다.

 

얼마 전 여러 나라에 명해 히젠·이키·대마 세 곳에 성을 쌓아 바다를 건너는 관사와 역참으로 삼게 했다.

 

대마도 수령에게는 상인으로 꾸민 사람들을 나누어 고려에 건너보내 지형을 살피게 했다.

 

십월 이십일에 돌아와 이렇게 보고했다고 한다.

 

“고려 왕은 관백을 기다리겠다며 군사를 이끌고 스무 날 길을 나왔습니다. 나라 안에는 왕에게 따르지 않는 자가 많고 대마도와 가까운 한 고을 사람들만 나왔습니다. 공격하려 한다면 손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십일월 십팔일에는 여러 나라에 문서를 돌려 각자 삼 년치 군량을 마련하게 했다.

 

먼저 고려를 정벌하고 일본 백성을 모두 고려 땅으로 옮겨 농사짓게 하여 대당을 공격할 근거지로 삼겠다고 했다.

 

“대당의 한 고을만 얻어도 그것은 우리 일본의 소유가 된다. 대당의 천하는 내 소매 안에 있다.”

 

왜군은 아는 것이 없어 우물 안에서 하늘을 재듯 생각하니 참으로 우습다.

 

또 여러 나라 군사에게 고려 해안에 닿으면 배를 불사르고 솥을 깨뜨려 돌아갈 마음을 끊게 했다.

 

낮에는 고려 땅을 빼앗고 밤에는 성을 쌓게 하며, 사람을 약탈하거나 재물을 취하지 못하게 했다.

 

성을 쌓거나 정벌하는 사람은 한순간도 쉬지 못하고 작은 풀 하나도 줍지 못하게 했다.

 

황금이 있어도 쳐다보지 못하게 했다.

 

전투에서는 단 한 사람도 뒤를 돌아보지 못하게 했다.

 

산을 만나면 산으로 나아가고 물을 만나면 물로 들어가며 함정을 만나면 그대로 함정에 빠지더라도 입을 열거나 발을 멈추지 못하게 했다.

 

앞으로 나가다 죽은 사람은 그대로 두되, 살아서 뒤로 물러나는 자는 왕후장상이라도 목을 베어 사람들에게 보이고 그 집안까지 모조리 죽인다고 했다.

 

법령이 이처럼 엄하다.

 

십이월에는 분고를 강제로 차지하고 그 나라 왕의 아내를 첩으로 삼았다.

 

서해도 아홉 나라를 선봉으로 삼고 남해도 여섯 나라와 산양도 여덟 나라가 뒤따르게 했다.

 

나라의 힘을 다해 출정하게 하면서 부자나 형제 가운데 한 사람도 집에 남지 못하게 했다.

 

이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며 말했다.

 

“이번 출병은 대당을 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군사를 멀리 내보낸 뒤 뒤를 습격해 우리 종족을 없애려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 몰래 반란을 꾀했으나 아직 이루지는 못했다.

 

만약 그들의 반란 모의가 이루어지면 침략 계획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우리 대국이 충성스럽고 용감한 사람에게 많은 정예병을 거느리게 해 먼저 고려에 가서 맞아 싸우면 된다.

 

스스로 담력을 잃고 두려워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왜군에게는 별다른 재주가 없고 한 장수만 사납고 용맹할 뿐인데, 그것도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고 걸어서 큰물을 건너겠다는 무모한 용기와 같다.

 

우리 대국이 그 약점을 알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밤낮으로 협공해야 한다.

 

오늘 장수와 군사를 더 보내고 내일 또 장수와 군사를 보태어 계속 잇고, 금을 내걸어 상을 보이며 지원군이 벌 떼처럼 모이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 군사의 기세는 강해지고 적군의 기세는 약해질 것이다.

 

처음 한 진을 깨뜨리면 왜군의 백 진도 모두 무너질 것이다.

 

왜군을 모두 죽여 갑옷 한 조각도 돌아가지 못하게 할 수 있으며 관백도 산 채로 잡을 수 있다.

 

바라건대 보잘것없는 사람의 말을 굽어 받아 깊이 생각해 주시기를 간절히 빈다.

 

일본 여러 지역 이름은 다음과 같다.

 

- 기나이, 곧 교토 부근: 소성·대화·하내·화평·섭진

- 동해도, 곧 관동: 이하·이세·지마·미장·삼하·원강·준하·이두·갑비·상모·무장·안방·상총·하총·상육

- 산동도: 근강·의농·비역·신농·상야·하야·육오·출우

- 북육도: 약부·월전·가하·능등·월중·월후·좌도

- 산음도: 주파·주후·단마·인번·백기·출운·견석·은기

- 산양도: 파마·미작·비전·비중·비후·안세·주방·장문

- 남해도: 기이·담하·아파·잠기·이예·토좌

- 서해도: 축전·축후·풍전·풍후·비전·비후·일향·대우·살마

조선기 — 여응종

동방에 아직 임금과 우두머리가 없던 때, 신인이 태백산의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자 무리가 그를 임금으로 받들고 단군이라 불렀다.

 

요임금과 같은 시대에 나라를 세워 천여 년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주나라에서는 기자를 이 땅에 봉했다.

 

한 차례 바뀌어 고려가 되었고, 다시 바뀌어 조선이 되었다.

 

조선은 우리 명나라에 신하로 속해 있으며 제도와 문물은 오직 중국을 본받는다.

 

그래서 작은 중국이라고 불리고, 제도에는 옛것을 숭상하는 것이 많다.

 

백성의 성품은 부드럽고 약하며, 예와 의라는 두 글자로 나라를 세웠다.

 

도읍은 세 곳이 있다.

 

평양에서는 옛 정전의 터를 지나 기자의 무덤에 조문할 수 있고, 개성에서는 만월대에 올라 장춘전을 찾아볼 수 있으며, 한양에서는 금빛 궁전과 아름다운 궁궐, 노래하는 누대와 춤추는 정자를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다.

 

도는 여덟이다.

 

경기는 풍속이 화려하고, 평안도는 들이 기름지고 평평하며, 황해도는 풍속이 부지런하고 검소하다.

 

충청도는 강산이 맑고 빼어나며, 경상도는 산천이 굳세고 웅장하다.

 

강원도는 바위 골짜기와 시내가 팔도 가운데 특히 기이하다.

 

함경도는 북두성이 가까워 보일 만큼 북쪽 끝에 있고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다.

 

전라도는 남쪽 끝에 닿아 있으며 인물이 가장 많이 난다.

 

나라에는 이름난 산과 물이 많다.

 

백악, 목멱, 송악, 구월산, 백두산, 철령, 천구, 두류산, 향산 같은 곳은 이름난 산 가운데 으뜸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용진, 백마강, 후서강, 한강, 금강, 호수, 낙수, 서해, 동해 같은 곳은 빼어난 물 가운데 으뜸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인재를 들어 말하면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계원필경을 남긴 최치원, 백운서원의 안향, 문곡 강감찬, 하늘을 나는 듯한 김유신, 입학도를 지은 권근, 역동서원의 우탁, 타고난 바탕이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설총, 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취한 정몽주가 있다.

 

또 김굉필, 이언적, 정여창, 조광조, 이황, 조식은 모두 몸소 학문을 실천하여 동방의 도통이 끊어지지 않게 한 사람들이다.

 

근래 사람으로는 충성과 강개가 있는 유성룡, 젊고 뛰어난 이덕형, 고아하고 비범한 유근, 풍도가 볼 만한 한응인이 있다.

 

유홍과 정철은 두 마음을 품지 않았고, 박진은 나라만 알고 자기 몸은 몰랐으며, 임흘은 무예도 남보다 뛰어나고 글도 남보다 뛰어났다.

 

위덕의는 험한 곳을 달려다녔고, 김영남은 군량 마련을 두루 맡았다.

 

공인상, 신경진, 이항복, 이산보, 윤근수, 신식도 이름난 사람들로 모두 현명한 인물이다.

 

이상은 내가 아는 몇 사람만 든 것이다.

 

뒤에 더 알게 되는 사람이 있으면 따로 기록할 것이다.

 

그 임금 선조는 문장이 밝고 훌륭하며 마음을 비우고 선비를 예로 대하는 임금이라 할 만하다.

 

조선의 지형은 함곡관이나 장강, 검각보다 못하지 않게 험하고 임금과 신하도 어질다.

 

그런데 적이 한 번 쳐들어오자 곧 나라가 무너진 것은 어찌 설명해야 하겠는가.

 

이백 년 동안 태평을 누리며 문을 높이고 무를 버려 사람들이 군사를 몰랐기 때문이다.

 

큰 도적이 갑자기 날뛰자 위아래가 놀라 흩어졌다.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지 임금과 신하만의 죄는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조선은 예전에 당나라 군사 십만, 수나라 군사 이십만, 몽골 군사 백만과도 맞섰던 나라다.

 

그때는 어찌 그토록 용감했는데 지금은 겁을 내는가.

 

저 관백이라는 자도 군사를 쓰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서는 한 시대의 영웅이라 할 만하다.

 

세 도읍을 차지하고 팔도의 요해처를 장악했다.

 

산을 보루로 만들고 골짜기를 방어선으로 삼아 죽기로 지켰으며, 대창·풍저창·용산창·광여창 등을 나누어 차지해 근거지로 삼았다.

 

따르지 않는 백성에게는 귀를 자르고 눈을 찌르고 살을 도려내고 가죽을 벗겼다.

 

심장을 베고 손발을 자르고 몸과 머리를 갈라놓았다.

 

머리를 장대에 매달고 시체를 걸었으며, 어린아이를 창끝에 꿰어 울음을 보며 웃었다.

 

절개를 지킨 부녀자를 나무에 매달고 활을 쏘아 죽이며 욕보였다.

 

뼈가 쌓여 산을 이루고 피가 흘러 바다에 넘칠 지경이었다.

 

반대로 자신들을 따르는 백성에게는 사람마다 베 한 필과 쌀 한 말을 주어 기쁘게 했다.

 

장정은 군사로 삼고 늙고 약한 사람은 부역을 시켰으며, 어린 여자는 계집종으로 삼고 어린 사내아이는 사내종으로 삼았다.

 

무조건 죽이지는 않고 머리만 깎게 했으며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방문까지 붙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여러 군현의 성문은 닫히지 않았고 병사들은 싸우지도 않았다.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졌다.

 

임금은 마침내 의주로 달아나 명나라에 구원을 청하면서 몸을 의탁할 땅까지 빌려 달라고 했다.

 

의주까지 전쟁 소식이 다급해지면 임금은 곧 압록강을 건널 형편이었다.

 

그렇다면 요동 땅에 조선 임금의 자취가 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사람들은 나라를 버린 물건처럼 여겼다.

 

높은 벼슬과 많은 녹을 받은 사람들도 저마다 살려고 달아나 피란했다.

 

임금을 따라 떠돌며 고생하려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었겠는가.

 

백성들은 적과 물건을 사고팔며 적에게 군량을 대주고, 적을 도와 싸우고 난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심지어 두 왕자를 묶어 적에게 바친 자들까지 있었다.

 

온 나라 사람들이 한 번의 북소리에 모두 오랑캐 풍속을 따를 듯했다.

 

나라의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적의 소유가 되고 백성이 적의 백성이 되어 그들을 위해 농사를 짓게 된다면 나라가 어찌 다시 회복될 수 있겠는가.

 

다행히 산과 숲 아래에는 평소 임금의 은혜를 받은 적도 없는 가난하고 천한 선비들이 있었다.

 

그들이 하루아침에 분개해 하늘을 부르며 땅을 두드리고 서로 약속해 의병을 일으켰다.

 

곽재우는 가난한 선비였는데 가장 먼저 의병 삼백 명을 거느리고 일어났다.

 

우배선은 열아홉 살의 젊은 서생이었는데 가장 먼저 의병 백 명을 이끌고 일어나 몸을 던져 수많은 싸움을 치렀으며 적을 가장 많이 죽였다.

 

고경명, 정인홍, 김면은 벼슬에서 물러나 있던 부사급 관리들이었는데 각각 의병 천여 명을 거느리고 일어나 적과 피 흘리며 싸웠다.

 

고경명은 나라를 위해 죽었고 그의 아들 인후는 아버지를 따라 죽었다.

 

막하의 유팽로도 주인을 따라 죽었다.

 

한 싸움에서 충신과 효자와 의사가 함께 나왔다.

 

정인홍과 김면은 양호 지방을 보전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임금이 있음을 알고 적이 적임을 깨달았다.

 

이미 흩어졌던 민심도 이들 때문에 안정되었다.

 

전에 높은 벼슬과 많은 녹을 받고도 달아났던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들으면 땀이 날 일이다.

 

아, 나라가 벼슬과 녹으로 사람을 기르는 까닭은 백성이 급할 때 그 어려움을 구하게 하고 나라의 위급함에 의지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벼슬이 높을수록 자기 몸과 집안을 지키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 일이 생기면 먼저 달아나 백성에게 그런 모습을 보였다.

 

나라가 백성을 사랑하고 길러 온 것은 백성이 나라의 뿌리가 되어 나라와 함께 죽기로 지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성 또한 어리석어 분수와 의리를 모르고 제각기 다른 마음을 품었다.

 

이익으로 꾀면 움직이고 위세로 겁주면 두려워하다 끝내 적에게 군사까지 빌려 주었다.

 

거센 바람이 불 때 굳센 풀을 알고 큰 강 한가운데서 버티는 숫돌 같은 사람을 안다고 했다.

 

이백 년 동안 이어 온 윤리와 질서를 자기 몸으로 맡은 사람은 몇몇 호걸 선비뿐이었다.

 

그렇다면 선비는 참으로 나라를 저버리지 않았다.

 

나라를 가진 자도 선비를 지나치게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조선은 예와 의라는 두 글자로 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예와 의의 길은 황폐해지고 선비들이 그 멸망을 붙잡았다.

 

끝내 예와 의라는 두 글자의 힘이 어디에서 드러나는지 똑똑히 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명나라 황제가 한 번 노하자 중원의 영웅들은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수만 정예병은 죽음을 즐겁게 받아들이며 나섰다.

 

그렇다면 어찌 나라 없이 나라를 지킬 수 있겠는가.

 

나라를 되찾는 데에는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릴 수 있어도 지키는 일은 자기에게 달려 있다.

 

내가 시 한 수를 지어 조선 임금과 신하에게 답한다.

 

예와 의를 말하던 임금과 신하들이여, 통곡만 하지 마시오.

 

이제부터는 자세히 용맹한 병법을 읽으시오.

 

이미 상한 무딘 창도 부지런히 갈아 날카롭게 만들고,

 

낮은 성 하나를 깨뜨렸다면 더욱 높은 기세를 보태시오.

 

큰 관모는 무인의 투구로 바꾸는 것이 마땅하고,

 

넓은 소매 옷도 다시 전투복으로 고쳐야 하오.

 

예부터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일은 많은 어려움에서 나왔으니,

 

힘써 나라를 경영하고 수고롭다고 탄식하지 마시오.

 

(원문에는 “명산을 말하며 금강산을 빠뜨렸고, 의사를 말하며 조헌을 빠뜨렸다. 그가 몰랐던 것인가. 안타깝다. 그 밖에도 잘못된 곳이 많으니 가리켜 준 사람이 없었던 것인가”라는 주가 붙어 있다.)

의병장 김천일을 제사하는 글 — 오종도

만력 이십일년 계사년 음력 구월 초열흘, 남북 여러 군사를 감독하고 조선의 기병까지 총괄하던 명나라의 군사 책임자 오종도는 삼가 제물을 마련해 조선 의병장 김 장군의 영구 앞에 제사하며 말한다.

 

사람이 천지 사이에 살면서 죽었으되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이 있고, 살아 있으되 오히려 죽은 사람도 있다.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것과 같은 사람은 세상에 넘쳐난다.

 

그러나 죽었으면서도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의병장 김 장군을 생각할 때마다 깊이 느끼는 바가 있다.

 

장군은 바다 건너 왜적이 미쳐 날뛰고 임금이 거친 들로 피란해 한 나라 팔도에 굳건히 지킬 성이 거의 없던 때를 만났다.

 

오직 장군만이 장대를 들고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으며 팔을 걷어붙이고 한 번 외쳤다.

 

그러자 호걸들이 메아리처럼 호응해 의로움을 지키려는 사람 천여 명을 얻었다.

 

그들과 함께 한강 가를 지키며 적과는 함께 살 수 없다고 맹세했다.

 

장군의 이름은 나라 안팎에 밝게 떨쳤다.

 

나도 나라 일을 보는 틈에 장군을 한 번 만나 인사한 적이 있다.

 

처음 만났는데도 마치 오래 알던 사람처럼 마음이 끌렸다.

 

당시 왜적은 조공과 화친을 청하고 있었다.

 

장군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팔을 걷어붙이며 분개했고, 늘 “이 적을 다 없앤 뒤에야 아침밥을 먹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그 뜻과 공이 비록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이 때문에 장군의 이름은 더욱 떨쳤다.

 

왜적도 속으로 계산했을 것이다.

 

송나라 때 악무목이 죽지 않으면 화의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 김 장군이 죽지 않으면 조공과 화친도 결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왜적은 밤낮으로 계책을 세우면서 반드시 장군을 죽이는 일을 큰일로 삼았을 것이다.

 

장군이 흩어지고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을 지킬 때 마침 최경회도 그곳에 있었다.

 

최공 역시 왜적이 전부터 몹시 두려워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왜적은 대군을 몰아 성을 짓눌렀고 몇 겹이나 에워싸 새와 참새조차 넘나들지 못할 정도로 만들었다.

 

두 분을 함께 잡기 전에는 끝내 물러가지 않으려 했다.

 

그때 나는 명을 받아 전라도를 지키러 오는 중이었다.

 

길에서 장맛비를 만나 죽산에 묵고 있는데 갑자기 큰바람과 천둥과 번개가 일고 모래가 날며 나무가 뽑혔다.

 

마치 나에게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나는 비를 무릅쓰고 길을 재촉해 이틀 만에 남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진주에서 급보가 왔다.

 

화살과 식량이 다 떨어져 성이 함락된 지 이미 며칠이 되었다고 했다.

 

장군 부자와 최공은 모두 적을 꾸짖으며 죽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죽산에 내리던 장맛비는 장군 부자가 흘린 눈물이었는가.

 

그 큰바람과 천둥과 번개는 장군 부자의 억울하고 분한 기운이었는가.

 

아,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장군의 이름은 천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것이다.

 

장군은 죽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나라를 위한 계책에 정성을 다하지 않아 임금과 아버지를 피란하게 만들고, 군사를 거느리고도 구하지 않아 성과 고을이 재가 되게 한 자들이 있다.

 

그러고도 뻔뻔한 얼굴로 관복을 입고 조정에 서 있는 사람들은 비록 살아 있다 한들 어찌 장군의 죽음만 하겠는가.

 

아, 하늘은 어찌 돕지 않아 부자가 함께 죽게 했는가.

 

절개와 의리를 두 사람이 함께 이루어 우리 윤리의 기둥을 세웠구나.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은 이제 서로 다른 세상에 있어 꿈에서나 그리게 되었네.

 

좋은 벗과 영원히 헤어지며 내가 술 한 잔을 올리노라.

1594년 11월

1594년 11월 12일 (갑오년 음력 10월 1일)

이른 아침 관아 안으로 들어가 딸을 만나 함께 아침을 먹었다.

늦게 함열 수령 신응구가 차원으로 우도 여러 고을을 돌 예정이었는데, 떠나기 전에 신괄, 김경 봉사, 이신성 봉사, 민 주부, 신응규와 나까지 관청에 함께 앉았다. 수령이 조촐하게 술자리를 마련해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미 한낮이 지나 그날 출발을 미루었다.

신괄과 김경은 술이 모자라다며 함께 더 마실 곳을 찾았다. 고을에 사는 생원 안극인 집에 술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 말을 달려 찾아가 크게 취해 돌아왔다.

저녁에는 딸이 어머니를 뵈러 왔다. 함열 수령이 순행을 마치고 관아로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 머물다가 돌아가겠다고 한다. 그래서 며칠 동안 우리와 함께 있게 되었다.

1594년 11월 13일 (갑오년 음력 10월 2일)

이른 아침 딸을 보러 들어갔는데 함열 수령도 함께 있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뒤 김경 봉사가 밖에 왔다는 말을 듣고 수령과 함께 관아 문 밖으로 나가 평상에 앉아 한동안 이야기했다.

수령은 밥을 먹은 뒤 익산으로 떠났다. 떠나기 전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갔다.

태인에서 묵을 예정이라고 하여 아우에게 편지를 써 맡기고 조기 한 묶음과 반찬 한 상자도 함께 보냈다. 어머니의 뜻이었다.

한낮에는 길에서 드실 과일과 찰떡을 마련해 어머니께 올렸다. 모두 함열 수령이 마련해 보낸 것이다.

1594년 11월 14일 (갑오년 음력 10월 3일)

오늘은 장날이었다.

딸이 막정을 시켜 안명주를 바꾸게 하면서 좋은 무명 한 필과 흰쌀 다섯 말을 주었다. 나도 좋은 무명 두 필 반과 중미 두 말을 내어 겉명주로 바꾸었다. 린아가 장가갈 때 쓰려는 것이다.

이 일 때문에 늦게 출발했다.

남당진에 이르니 배가 북쪽 언덕에 대어 있었고 물살도 거셌다. 건너려는 사람도 없어 쉽게 건널 수 없었다.

해가 기울어서야 겨우 강을 건넜고, 이미 저녁이 되었다.

마침 진사 이중영의 아들과 함께 오게 되어 밤이 깊어서야 숙소에 돌아왔다.

1594년 11월 15일 (갑오년 음력 10월 4일)

돌아와 들으니 별좌 윤겸의 종 세만이 그저께 들어왔다고 한다.

린아 윤성의 혼사를 이달 안에 치르기로 했는데 상대 집에서 날짜를 서두르자고 했다고 한다. 별좌가 사람을 보내 편지를 전했는데, 만약 이달 안으로 정하면 옷을 미처 마련하기 어렵다. 걱정스럽다.

윤함의 처가 종 옥지도 해서에서 윤함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편지를 보니 윤함은 지금 무사하다고 한다. 참으로 기쁘다.

하지만 오정일이 지난 음력 팔월에 도적을 만나 죽었고 오유일도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형제가 모두 죽었다니 참혹하다.

정일은 종가의 맏손자였는데 후사를 이을 아들도 없이 도적의 손에 죽었다. 더욱 슬프다.

정일은 본래 성품이 순하지 않아 고향에서 거스르는 일이 많았고 가는 곳마다 원망을 샀으며 승려와 속인 모두 그를 미워했다고 한다. 화가 그 때문에 미친 것인지도 모르겠다.

종가의 선조 신주들은 난리 뒤 해서의 정일 집으로 옮겨 모셨다고 한다. 정일이 죽은 뒤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없다. 맡아 돌볼 사람도 없어 걱정스럽다.

그가 살아 있었어도 마음 놓고 맡길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막내아우 미질남만 살아 있다고 한다.

옥지는 어제 이미 돌아갔다. 답장을 써 보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

1594년 11월 16일 (갑오년 음력 10월 5일)

오늘은 할아버지 제삿날이다.

떡과 밥, 과일, 포, 젓갈 등을 마련해 술잔을 올렸다.

종손들이 모두 죽어 제사를 지낼 사람이 없고 차례로 제사를 맡을 곳도 없다. 나 같은 먼 방계 후손이지만 차마 이날을 그냥 넘길 수 없어 마련할 수 있는 만큼 정성을 올렸을 뿐이다.

슬프고 감회가 깊다.

최인복이 찾아왔다. 큰 잔으로 술 다섯 잔을 먹여 보냈다.

오후에는 진사 이중영과 소즐이 찾아왔다. 역시 술을 대접했다.

소즐에게는 저녁밥도 먹였다. 한가롭게 이야기하다가 흩어졌다.

함열에서 사람이 와 흰쌀 두 말을 전했다.

1594년 11월 17일 (갑오년 음력 10월 6일)

어제부터 둔답에서 거둔 벼를 탈곡하고 있다.

오늘은 노비 다섯 명을 붙여 내일까지 모두 거두어들이게 했다. 내일 동쪽 집으로 이사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어제 벼 마흔 단을 털어 정미한 벼가 서른 말 나왔다. 이것은 관청에 바칠 생각이다.

오후에는 신괄이 함열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들렀다.

그에게서 함열 수령이 어제 이미 관아로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다.

신괄에게 큰 잔 두 잔을 대접했다.

그와 함께 고을로 들어갔으나 수령이 병으로 나오지 않았고 내 이름도 전하지 못했다.

신괄과 낭청방에 앉아 이야기하다 저녁에 돌아오니 이미 날이 어두웠다.

신괄은 겨우 이름을 전하고 그곳에서 묵었다.

1594년 11월 18일 (갑오년 음력 10월 7일)

아침에 집주인 최인복이 와서 말했다.

“홍 주서가 먼저 들어와 살겠다고 하여 이미 계집종을 보내 집을 지키게 하고, 집주인에게 묻지도 않은 채 짐을 옮겨 놓았습니다. 오늘부터 들어와 살겠다고 합니다.”

나는 말했다.

“빈집인 줄 알고 내가 이미 빌린 사실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최인복에게 큰 잔 두 잔을 대접해 보냈다.

밥을 먹고 막정을 홍 주서에게 보내 내가 집주인에게 이미 빌렸고 내일 이사하기로 정했다는 사실을 전하게 했다.

홍 주서가 말했다.

“나도 그 사정을 몰랐습니다. 이 부장의 말을 듣고 들어가려 했는데 이제 어른께서 이미 빌려 들어가신다는 말을 들었으니 다툴 수 없습니다. 나는 다른 집을 다시 구하겠습니다.”

내일 침구와 여러 물건을 먼저 옮기고 저녁에 온 가족이 이사할 생각이다.

홍 주서의 이름은 홍준이다. 서울에서 같은 동네 사람이라 예전부터 알고 지냈으며 윤겸과도 젊을 때부터 친구였다.

지금 어머니상을 당해 상중인데 지난달부터 장인인 상 판관 시손의 집에 와 살았다. 도적이 무서워 관아 가까운 곳으로 옮기려 했던 것이다.

나도 최인복의 집을 찾아가 이광춘을 불러 이 사정을 설명했다.

그런데 최인복의 집 계집종이 못마땅한 말을 많이 해 몹시 괘씸했다.

함열에서 사람이 와 흰쌀 두 말을 전했다.

1594년 11월 19일 (갑오년 음력 10월 8일)

여러 물건을 동쪽 최인복의 집으로 옮겼다.

저녁 무렵 온 집안이 모두 그 집으로 이사했다.

전문의 아내가 술과 과일을 갖추어 와 아내에게 인사했다.

소즐도 찾아와 큰 사발로 술 한 사발을 대접했다.

그의 말을 빌려 타고 이사했다.

별좌 윤겸은 오지 않았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1594년 11월 20일 (갑오년 음력 10월 9일)

별좌 윤겸이 별시를 보러 왔다면 어제 반드시 찾아온 뒤 부여의 시험장으로 갔을 텐데 지금까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오지 않은 듯하다.

함열 수령의 종이 서울에서 내려오다가 생원 윤해를 길에서 만났는데, 윤해가 별시를 보려고 서울로 올라가면서 길에서는 편지를 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도 수원에 있는 종의 집으로 왔다고 한다.

아침밥을 먹고 조대영 집으로 가 어제 다 옮기지 못한 물건을 다시 옮겨 오게 했다.

이어서 진사 이중영을 찾아갔다가 돌아왔다.

전문도 찾아왔다.

1594년 11월 21일 (갑오년 음력 10월 10일)

종 둘에게 변소를 만들게 했다.

천린이 한산에서 찾아왔다.

지난달 이미 수원으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도망간 종의 논밭을 찾아 되찾는 일 때문에 오래 이곳에 머물고 있어 찾아왔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머무실 방을 청소하고 찢어진 창호와 벽을 발랐다.

1594년 11월 22일 (갑오년 음력 10월 11일)

처음에는 오늘 함열로 가 어머니를 모셔 오려고 했다.

그러나 집에 땔나무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종 둘과 말을 보내 나무를 베어 싣고 오게 했다.

어머니께서 오랫동안 함열 관아 안에 머물고 계셔 함열 수령이 다른 방으로 피해 잔다고 들었다. 몹시 미안하다.

오늘 아침 집주인 계집종이 다락방 자물쇠를 열어 주었기에 그곳에 신주를 모셨다.

별좌 윤겸이 부여에서 별시를 보고 들어왔다.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보니 반가움을 이길 수 없었다.

밤늦도록 함께 이야기하고 잠들었다.

별좌의 종도 결성에서 뒤따라 왔다.

찰떡 한 상자와 감당 한 상자를 가져왔고, 개질지도 석성에서 쌀 두 말과 콩 두 말을 얻어 왔다.

함열에서 온 사람도 흰쌀 두 말을 전했다.

1594년 11월 23일 (갑오년 음력 10월 12일)

아침에 소즐이 먼저 술과 과일을 보내고 자신도 뒤따라 왔다.

오늘은 별좌 윤겸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밥을 먹고 별좌와 함께 함열로 갔다.

찐떡 한 상자를 들고 함열 수령의 어머니께 드렸다.

그 뒤 어머니를 찾아뵈니 평안하셨다.

함열 수령이 관아로 들어왔고 윤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깊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윤겸과 임성과 함께 관청 새 방에서 잤다.

오늘 아침 떠날 때 이유가 찾아왔다.

이유는 조우 자옥의 사위다. 지난여름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자옥이 해서 송화에서 해미로 옮겨 왔고 이유도 함께 왔다.

함열 수령과 가까운 친족이라 찾아왔다가 내가 이 고을에 피란 와 있다는 말을 듣고 들른 것이다.

잠깐 이야기하고 술 석 잔을 대접해 보냈다.

소즐도 자리에 함께했다.

1594년 11월 24일 (갑오년 음력 10월 13일)

함열 수령이 관아로 나온 뒤 윤겸과 함께 딸의 방으로 가 어머니를 모시고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만 계집종 열금이 이곳에 온 뒤 허리 아래가 심하게 부어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니 가엾다. 죽을 병인지도 모르겠다.

내일 어머니를 모시고 임천 숙소로 돌아가려 하므로 열금은 민가에 따로 머물게 했다. 뒤에 종과 말을 보내 실어 올 생각이다.

저녁에는 함열 수령이 떡과 국수, 과일상을 마련해 어머니께 올렸다. 우리도 함께 먹었다.

1594년 11월 25일 (갑오년 음력 10월 14일)

함열 수령이 다음을 주었다.

중미 넉 말

콩 석 말

벼 한 섬

누룩 다섯 덩이

절인 게 열다섯 마리

조기 두 묶음

기름 한 되

소금 넉 되

밥을 먹고 어머니를 모시고 남당진 가에 도착했다.

마침 송노가 말을 끌고 마중을 나와 있어 빌려 타고 왔던 말과 관청 사람은 돌려보냈다.

오늘 이 도의 별시 합격자 명단도 보았다.

윤겸만 떨어지고 함께 시험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합격했다. 운명이니 어쩌겠는가.

장원은 권수기였다.

글 제목은 활과 화살을 논해 다스림의 도를 깨우치는 내용이었다.

합격자 명단을 윤겸에게 보냈다.

윤겸은 아직 함열에 있다.

오는 십칠일에 경여의 영구를 정식으로 장사 지내므로 내일 익산으로 가 보려 하고, 그 뒤 우리에게 오겠다고 한다.

강을 건너 숙소에 도착하니 해가 아직 높았다.

송노는 지난 삼월 휴가를 얻어 간 뒤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아 병들어 죽었나 의심하고 있었다. 뜻밖에 돌아오니 몹시 괘씸하면서도 집에 부릴 종이 하나도 없는 처지라 한편으로는 반가웠다.

왜 이제야 왔느냐고 물으니 아버지가 병으로 죽고 자신도 전염병을 앓아 곧 돌아오지 못했다고 했다. 가을에 아버지를 묻고 나서 이제 나타났다고 한다.

거짓말일 가능성이 크지만 굳이 따지지 않고 그런 줄로 받아들였다.

처음부터 완전히 달아났던 것은 아니니 늦게 온 죄도 벌하지 않고 좋게 대해 주었다.

1594년 11월 26일 (갑오년 음력 10월 15일)

종 셋과 말을 보내 흙집에 쓸 나무를 베어 오게 했다.

오후에는 비가 조금 내렸다.

한노를 익산으로 보냈다. 경여의 제사에 쓸 술과 안주를 마련해 제사 지내게 하려는 것이다.

1594년 11월 27일 (갑오년 음력 10월 16일)

흙집 두 곳을 만들었다. 하나는 계집종이 살 곳이다.

기대수와 전계남이 영동에서 한산으로 가는 길에 들렀다.

남자순 형의 편지도 가져왔다.

몇 번이나 읽으니 얼굴을 직접 보는 듯했다.

백원 형도 영동의 자순 형에게 왔다고 한다.

황간에는 의지할 데가 없고 굶주림이 날로 심해 자순 형이 데려왔다고 한다.

황간의 친척과 옛 친구들은 모두 병들고 굶주려 죽어 외가 옛터에는 잡초만 가득하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니 차마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한탄스럽다.

전계남은 자순의 외손자다.

또 함열에 사는 막정의 주인이 아들과 함께 찐떡 한 상자, 좋은 술 두 병, 과일과 안주 세 상자를 가지고 왔다.

전에 권농 일을 바꾸어 달라고 청했던 일이 있어 감사하러 온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오히려 불편했다. 저녁밥을 먹여 돌려보냈다.

영암 임경흠 집 종이 서울로 올라가다가 내가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

누이가 무사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 종은 해서 박 참판 숙소로 간다고 하기에 윤함에게 보낼 편지를 써 맡겼다.

이유가 내일 해서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저녁에 찾아가 이야기한 뒤 돌아왔다. 이미 밤이 깊었다.

1594년 11월 28일 (갑오년 음력 10월 17일)

꿈에 심설이 생전 모습 그대로 보였다.

딸들도 여러 번 꿈에서 그를 보았다고 한다.

아마 어머니께 안부를 묻는 사람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 임경흠 집 종에게 편지를 맡겼지만 잃어버려 전하지 못할까 걱정되어 오늘 다시 이유에게 윤함의 편지를 맡겼다.

집주인 최인복 부자가 찾아왔다.

마침 술이 없어 찰떡만 대접해 보냈다.

송노와 향비는 함열로 갔다.

별좌 윤겸의 종 개질지가 어제 말을 가지고 왔다가 오늘 아침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고 구례현감 조사겸의 첩이 가지고 있던 계집종 두 명을 사서 풀어 주기로 했다.

값은 무명 열세 필로 약속했다.

큰 짐말 한 필을 내주어 값으로 무명 열한 필을 치고, 모자라는 두 필은 벼 한 섬으로 대신했다.

그 집 종 김동과 그의 숙부 말질산이 중간에서 말을 전해 주었으므로 벼 열세 말도 더 주어 두 사람이 나누어 먹게 했다.

이광춘을 불러 문서를 쓰게 했고, 증인은 말질산과 소즐이 되었다.

1594년 11월 29일 (갑오년 음력 10월 18일)

사들인 계집종 삼작개가 와서 인사했다. 곧 집안일을 시켰다.

생원 허용도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저녁에는 별좌 윤겸이 함열에서 들어왔다.

계집종 열금은 몸을 움직일 수 없어 가까스로 말에 태우고 두 사람이 부축해 겨우 데려왔다.

함열에서 쌀 여섯 말과 절인 조기 스무 마리를 보내 주었다.

별좌는 어제 경여의 장사를 보고 함열에서 묵은 뒤 오늘 돌아왔다고 한다.

1594년 11월 30일 (갑오년 음력 10월 19일)

아침을 먹고 사창에 있는 수령 이구순을 찾아갔다.

둔답에서 거둔 벼 두 섬을 관청에 바쳤다.

사들인 계집종의 문서를 품에 가지고 가 수령에게 알렸다.

수령이 원문서를 대조해 확인한 뒤 김동에게 돌려주어 보내게 했다.

수령이 술 한 사발을 주었는데 너무 시어 마시기 어려웠다.

나를 남겨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밥도 대접했다.

또 흰 새우젓 석 되, 누룩 두 덩이, 젓국 한 사발을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홍 주서 준을 찾아갔다.

홍준은 고을 안으로 옮겨 와 상중에 머물고 있다.

저녁에는 선비 이유립이 찾아왔다.

별좌가 내게 이름을 알려 주어 나도 나가 만났다. 이 고을에 피란 와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밤에는 진사 한겸과 생원 홍사고가 별좌를 찾아왔다. 나도 나가 잠깐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지난밤 눈이 내렸지만 쌓이지 않고 녹았다.

오후에는 비가 조금 내렸다.

계집종 열금의 병세는 조금 가라앉고 붓기도 줄어드는 듯하다.

1594년 12월

1594년 12월 1일 (갑오년 음력 10월 20일)

밤에 비가 내렸고 아침에도 흐렸다.

별좌 윤겸이 송노와 송노의 말을 데리고 결성으로 떠났다.

정산에서 묵고 내일 종과 말을 돌려보낸 뒤 개질지와 그 말을 데리고 돌아가겠다고 한다.

오후에는 조대득이 찾아왔다.

별좌가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쓴 답안지를 가지고 왔다.

도사 김익복이 니산 수령 김가기에게 보내는 편지와 그 답안지를 조공 편에 보내왔던 것이다.

이청도 마침 고을에 왔다가 내가 이곳에 머무는 것을 듣고 시동을 보내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곧 답장을 써 내일 찾아가겠다고 했다.

이공은 본래 죽산 사람으로 내 고향 사람이다. 예전부터 알고 지냈고 수령과는 칠촌 친척이다.

가족은 지금 진위에 있다고 한다.

1594년 12월 2일 (갑오년 음력 10월 21일)

아침밥 뒤 고을 안 민가에 머무는 이청을 찾아갔다.

한가롭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상중인 한의가 뒤따라 왔다.

그는 고 첨지 한성원의 아들이다.

가을걷이를 살피러 농막에 왔다가 이공과 아는 사이여서 찾아온 것이다.

한공에게서 한림 김지남의 막내아들 가응이가 지난 음력 팔월 병으로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슬픔을 이길 수 없다.

김 한림은 어머니상을 당해 아직 장사도 끝내지 못했는데 다시 아들을 잃었고, 가난해 살아갈 길도 없다고 한다. 더욱 가엾다.

전에 큰아들과 딸 하나를 모두 잃었고 내 누이도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한 해 동안 겪은 화가 참혹해 말할 수 없다.

저녁에 함열에서 사람이 와 쌀 두 말, 미역 네 동, 생선 한 사발을 전했다.

딸도 좋은 술 한 병을 보냈다.

곧 한 잔을 마시니 마음이 조금 풀렸다.

1594년 12월 3일 (갑오년 음력 10월 22일)

어젯저녁 한노에게 콩 일곱 되를 들려 대조사에 보내 두부를 만들게 했다. 오늘 아침 가져왔다.

오늘은 외할아버지 제삿날이므로 어머니를 위해 반찬을 마련한 것이다.

소즐이 찾아왔다.

환곡 이자로 낼 벼 일곱 말 닷 되와 소즐이 가져온 벼를 합쳐 한 섬을 만들어 관청에 바쳤다.

저녁에 송노가 돌아왔다.

별좌 윤겸은 정산에 도착한 뒤 말을 빌려 타고 떠났고 송노만 돌려보냈다고 한다.

또 정산에서 거친 벼 열 말, 쌀 한 말, 콩 한 말, 단장 닷 되, 짠장 한 되, 홍시 서른 개와 두 가지 소금을 조금씩 보내왔다.

서울의 별시 합격자 명단도 보았는데 윤해 역시 떨어졌다. 한탄스럽다.

조정이 평온하지 못하고 다시 다툼이 일어나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을 배척한다는 소문도 들었다.

흉적은 아직 변방을 차지하고 으르렁거리며 나라를 노리고 있다.

이때야말로 신하와 백성이 원수를 갚겠다는 마음으로 이를 갈며 견뎌야 할 때인데, 오히려 억울함을 푼다는 명분을 빌려 남몰래 보복하려는 자들이 있다.

나라가 망해야 그만둘 것인가. 이것도 하늘의 뜻인가. 어찌해야 하는가.

1594년 12월 4일 (갑오년 음력 10월 23일)

사들인 계집종 삼작개를 함열로 보냈다. 한노가 말을 끌고 데리고 갔다.

부여 박동도의 사위 이양이 도망간 노비를 찾는 일로 이 고을에 왔다가 문단속 때문에 수령에게 이름을 알리지 못하고 내 숙소를 찾아왔다.

저녁밥을 먹였다.

또 수령에게 편지를 써 주어 만나게 했다. 이양은 그 편지를 가지고 고을로 들어갔다.

삼작개는 이름을 덕개로 바꾸고 아작개는 눌은개로 바꾸었다.

1594년 12월 5일 (갑오년 음력 10월 24일)

덕린이 한산에서 찾아와 묵었다.

한노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1594년 12월 6일 (갑오년 음력 10월 25일)

덕린은 한산으로 돌아갔다.

한노와 관원이 함께 도착했다.

함열에서 벼 석 섬과 쌀 두 말을 보내왔다.

벼는 이 고을의 환곡을 갚는 데 쓰려고 구한 것이다.

한노는 그중 두 섬만 실어 왔고 한 섬은 양산 집에 맡겨 두었다고 한다.

장수에서 온 편지와 익산 경여 아내의 편지도 가져왔다.

경여 아내가 분개의 문서를 써 보내며 모레 수원으로 떠난다고 했다.

한노에게 곧 답장을 들려 익산으로 보내고 길을 함께 모시게 했다. 한노도 가는 길에 자기 아버지를 찾아보려 한다.

처음에는 경여 아내가 올라갈 때 막정에게 말을 끌고 모시게 하려 했으나 집안 사정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또 막정은 정강이에 종기가 나 걷지 못하고, 말도 계집종을 사는 데 써 버렸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한노만 보내게 되었으니 형편이 그런 것을 어쩌겠는가.

저녁에는 수령 이구순이 사람을 보내 나를 불렀다. 어두워질 때 관아 마루에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마침 환곡 다섯 섬을 마련해 사창에 직접 가서 바쳤다.

이청도 와 있어 함께 이야기했다.

수령이 저녁밥을 먹이고 공무가 끝난 뒤 더 이야기하자며 나를 붙잡았다.

그런데 지평 윤유기와 그의 형 윤유심이 고을에 들어와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 다음을 기약하고 해 질 무렵 숙소로 돌아왔다.

어제부터 감기에 걸려 콧물이 계속 흐르고 오늘은 머리와 관자놀이까지 조금 아프다.

밤새 뒤척였지만 땀이 나지 않았다. 걱정스럽다.

1594년 12월 7일 (갑오년 음력 10월 26일)

몸이 매우 좋지 않았다.

두꺼운 옷과 이불을 덮고 하루 종일 방에 누워 있었다.

입맛도 없고 양쪽 관자놀이가 조금 아픈데 아직 시원하게 땀이 나지 않는다. 걱정스럽다.

오후에는 비가 내렸다.

1594년 12월 8일 (갑오년 음력 10월 27일)

밤새 비가 그치지 않았고 아침에도 흐렸다.

소즐이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며 찾아왔다.

니산 수령 김가기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해 곧 써 주었다.

아침밥도 먹이고 술 두 사발을 주었다.

지난밤 잠깐 땀이 났다.

아침에는 어제만큼 아프지는 않았지만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

1594년 12월 9일 (갑오년 음력 10월 28일)

밤새 땀이 났지만 흠뻑 젖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 깊은 곳이 조금 아프고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다. 걱정스럽다.

기대수와 전계남이 한산에서 오는 길에 들렀다.

내가 몸이 좋지 않아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방 안으로 불러 만났다.

저녁밥을 먹이고 재웠다.

자순 형에게 보낼 편지를 써 맡겼다.

저녁에는 한노가 돌아왔다.

익산 경여의 집은 지난 닷새에 이미 수원으로 떠나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오는 길에 함열에서 묵었는데 함열 수령이 편지와 함께 새우젓 석 되, 쌀 두 말, 수탉 한 마리를 보내왔다.

하지만 수탉이 울지 않는 어린 닭이라 아쉽다.

감찰 한즙도 찾아왔지만 몸이 좋지 않아 밖에 나가 만나지 못했다.

1594년 12월 10일 (갑오년 음력 10월 29일)

막정을 홍산으로 보냈다.

별좌 윤겸의 편지를 들려 보내 공채를 얻어 오게 하기 위해서다.

송노는 함열로 보냈다.

기대수와 전계남은 새벽에 떠났다. 죽을 쑤어 먹여 보냈다.

나는 지난밤 땀이 흠뻑 나 아침에는 몸이 조금 나아졌다.

다만 양쪽 관자놀이 통증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남일원 진사가 찾아왔다.

몸이 아파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방 안으로 불러 옛이야기를 나누었다.

함열의 완고한 계집종을 잡아 다스릴 일로 내 편지가 필요하다고 하여 써 주었다.

저녁밥도 먹여 보냈다.

남일원은 고 남대임의 둘째 아들로 본래 같은 마을에 살았고 윤겸과 젊을 때 아주 가까운 친구였다.

대여섯 해 만나지 못하다 뜻밖에 다시 보니 무척 반가웠다.

그 역시 이 고을에 피란 와 산다고 한다.

저녁에 막정이 돌아왔다.

홍산에서 거친 벼 한 섬과 누룩 세 덩이를 보내왔다.

함열의 딸이 내가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곧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1594년 12월 11일 (갑오년 음력 10월 30일)

함열 딸이 보낸 문안 관원이 이른 아침 도착했다.

곧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한노는 자기 아버지를 찾아보려 휴가를 얻어 진위로 올라갔다.

생원 윤해에게 보낼 편지도 써 맡겼다.

하지만 길이 험한 데다 어리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내 몸은 조금 나아졌지만 아직 평소 같지는 않고 머리 깊은 곳도 때때로 약간 아프다.

단녀는 요즘 학질을 앓지 않는다. 이제 완전히 떨어진 것인지 모르겠다.

린아는 전처럼 계속 앓는다. 걱정스럽다.

아내도 오한이 나고 머리가 아팠는데 밤중이 되어서야 가라앉았다. 틀림없이 학질인 듯하다. 걱정스럽다.

저녁에 송노가 돌아왔다.

함열에서 다음을 보내왔다.

쌀 석 말

콩 석 되

기름 한 되

청주 닷 홉

정어리 한 사발

1594년 12월

1594년 12월 12일 (갑오년 음력 11월 1일)

몸이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1594년 12월 13일 (갑오년 음력 11월 2일)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거의 평소처럼 회복되었다. 참으로 기쁘다.

함열에서 사람이 와 흰쌀 두 말, 목미 석 되, 짠장 두 되를 가져왔다. 곧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종 둘과 말을 보내 동송동에서 울타리용 땔나무를 베어 오게 했는데, 조금포의 종이 낫 두 자루를 빼앗아 갔다고 한다.

이사과 사온과 허용이 찾아와 한가롭게 이야기하고 돌아갔다.

이사과는 서울에서 알던 사람으로 지금 전주 양정포에 와 산다고 한다.

저녁에는 방수간이 찾아왔다.

지난봄 크게 앓은 뒤 오래 만나지 못했는데, 지금은 한산으로 옮겨 살며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었다고 한다.

1594년 12월 14일 (갑오년 음력 11월 3일)

종 둘에게 다시 땔나무를 베게 했다.

어제 빼앗긴 낫도 되찾아 오게 했다.

이어 울타리를 만들게 했으나 끝내 다 만들지는 못했다.

양지에 사는 선비 김익형이 가을걷이 일로 전에 이웃하던 종의 집에 왔다가 내가 이곳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

그에게서 양지의 농촌에는 돌아와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옛집 터에는 잡초만 가득하며 오효기 등도 모두 굶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참혹하고 슬프다.

이정자 지강 형제만 옛집에 들어가 살고 있으나 오래 버티기 어려운 형편이라고 한다.

저녁에 수령 이구순을 만나려고 고을에 들어갔다.

길에서 좌수 조윤공과 조광철을 만나 수령이 정정자 사신의 초대를 받고 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냥 돌아왔다.

계집종 옥춘이 함열에서 돌아왔다.

함열 수령의 편지에는 요즘 올빼미가 관아 안에 들어와 어지럽게 우는 일이 있어 이복령에게 길흉을 점쳐 알려 달라고 했다고 적혀 있었다.

1594년 12월 15일 (갑오년 음력 11월 4일)

이른 아침 고을로 들어갔다.

수령은 관아 안에 있고 아직 나오지 않아 이름을 전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침밥 뒤 이복령 집으로 갔다.

마침 길에서 이복령을 만나 함께 가마를 타고 고을로 들어가 사창에 있는 수령을 만났다.

소즐이 맡은 사람을 풀어 달라고 청하고 돌아왔다.

수령이 나를 한겸 진사의 생일잔치에 함께 가자고 했으나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어서 다른 일을 핑계로 돌아왔다.

저녁에는 함열에서 사람이 와 쌀 두 말, 두 종류의 젓갈 한 항아리, 미역 두 동을 전했다.

밤에는 김익형을 불러 이야기했다.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1594년 12월 16일 (갑오년 음력 11월 5일)

한산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비가 내려 가지 못했다.

하루 종일 비가 그치지 않았고 밤새 이어졌다.

이 집은 비 새는 곳이 너무 많아 걱정스럽다.

1594년 12월 17일 (갑오년 음력 11월 6일)

아침에 김익형이 찾아왔다. 그의 자는 광후다.

내가 한산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자기 집의 완고한 종 문제를 부탁했다.

아침밥 뒤 출발해 한산 성문 밖에 도착했다.

문단속이 매우 엄해 들어가지 못하고 물러나 금성정이 묵는 곳을 찾아갔다.

마침 금성정은 밖에 나가 없었다.

빈 행랑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 금성정의 아내가 저녁밥을 보내 주었다.

저녁에 금성정이 돌아와 옛일을 한가롭게 이야기하고 그곳에서 잤다.

다만 종과 말은 모두 굶은 채 밤을 지냈다. 안타깝다.

1594년 12월 18일 (갑오년 음력 11월 7일)

아침밥은 금성정 쪽에서 다시 보내 주었다.

막정을 박반송에게 보내 지난가을 아직 내지 않은 콩을 받아 오게 했다.

송노는 남은 밥만 조금 먹었을 뿐 제대로 먹지 못했다. 한탄스럽다.

금성정이 나를 위해 먼저 수령 신경행을 만나 내가 온 뜻을 전했다.

곧 수령이 나를 불러 관아 마루에서 만났다.

좋은 술 큰 잔 두 잔을 주고 우리 일행의 식사도 내주게 했다.

천린도 마침 들어와 집주인 집에서 만났다. 함께 그곳에서 잤다.

저녁에는 수령이 나를 관아 방으로 불러 함께 저녁밥을 먹었다.

수령이 다음을 주었다.

벼 한 섬

기름 닷 홉

찹쌀 석 되

조기 한 묶음

흰 물고기 젓 두 되

생선 두 마리

단장 석 되

미역 한 동

젓갈은 천린에게 주었다.

박반송에게서는 콩 넉 말을 받아 왔다. 한 말은 주지 않았다고 한다. 몹시 괘씸하다.

1594년 12월 19일 (갑오년 음력 11월 8일)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금성정 집에 이르러 먼저 식량과 반찬을 보내 아침밥을 짓게 했다.

천린의 종과 말을 빌려 짐을 실었다.

밥을 먹고 길을 가다가 절반쯤 왔을 때 천린의 종과 말을 돌려보냈다.

그 뒤에는 종 둘이 짐을 지고 왔다.

오는 길에 말이 넘어져 짐이 뒤집히는 바람에 물건이 모두 젖었다. 한탄스럽다.

1594년 12월 20일 (갑오년 음력 11월 9일)

막정을 함열로 보냈다. 제사에 쓸 물건을 구하기 위해서다.

오는 십일일이 동지라 신주 앞에 제사를 올리려 하지만 마련할 길이 없기 때문에 종과 말을 보낸 것이다.

저녁에는 함열에서 사람이 왔다.

쌀 두 말, 작은 숭어 다섯 마리, 홍어 반 마리, 정어리 다섯 묶음을 보내왔다.

제사 때 쓸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기쁘다.

곧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1594년 12월 21일 (갑오년 음력 11월 10일)

이른 아침 김익형이 찾아왔다.

아침부터 흐리고 바람이 불며 눈까지 조금 날렸다.

저녁에 막정이 돌아왔다.

가져온 것은 다음과 같다.

흰쌀 한 말

찹쌀 닷 되

콩 한 말

조기 두 묶음

정어리 다섯 묶음

전에 맡겨 두었던 벼 한 섬도 함께 실어 왔다.

내일 제사를 지내려 하지만 반찬거리가 마침 모자라 더 구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1594년 12월 22일 (갑오년 음력 11월 11일)

새벽빛이 밝을 무렵 린아와 함께 제사를 지냈다.

죽전 삼촌 두 분에게도 함께 술잔을 올렸다.

쇠고기만 마련하지 못했다.

시골에서 제물을 갖추기 어렵다는 것이 한탄스럽다.

아침밥 뒤 좌수 조희윤과 한림 조희보 형제를 찾아갔다.

말먹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조희윤이 술 석 잔을 대접했다.

1594년 12월 23일 (갑오년 음력 11월 12일)

아침에 종과 말을 좌수 조희윤 집으로 보내 말먹이 스물한 묶음을 실어 왔다.

또 막정을 수다해로 보내 그곳에 있는 말먹이를 한곳으로 모아 쌓게 했다.

조희철과 이사과가 각각 서른 묶음씩 주었는데 모두 수다해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는 김익형이 찾아왔다.

큰 잔으로 술 두 잔을 먹여 보냈다.

저녁에는 함열에서 사람이 왔다.

콩 석 말, 쌀 두 말과 딸이 제사 뒤 남은 떡과 과일, 구운 고기를 보내왔다.

곧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오후에는 영암의 임현 진사가 전시를 보러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며 내가 가까이에 산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

뜻밖의 만남이라 무척 반가웠다.

누이가 평안하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기뻤다.

저녁밥을 먹여 보냈다.

임현은 말린 생선 두 묶음을 주었다.

저녁에는 윤해가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던 끝에 만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모두 무사하다고 한다.

종과 말이 없어 빨리 와 보지 못하다가 아내의 생질 집에서 종과 말을 빌려 왔다고 한다.

1594년 12월 24일 (갑오년 음력 11월 13일)

연기현의 임태 소설이 호남에서 오는 길에 찾아왔다가 떠났다.

뜻밖에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그의 형이 이 고을 수령으로 몇 달이나 있었는데도 한 번도 나를 찾아보지 않았고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지도 않았다.

파직되어 돌아갈 때조차 묻지 않았다.

형제의 마음이 어찌 이토록 끊어졌는가.

정종경은 지난여름 아산에서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들었다. 가엾다.

1594년 12월 25일 (갑오년 음력 11월 14일)

이른 아침 소즐이 찾아왔다. 아침밥을 먹이고 하루 종일 머물게 했다.

그의 부탁으로 고을에 들어갔다.

수령 이구순이 삼촌상을 당해 관아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사창으로 가 감관 임붕을 만나 아직 갚지 않은 환곡 수를 확인했다.

이어서 관아 문으로 가 수령에게 이름을 알렸다.

수령은 상복을 갖추기 전이라 나와 만나지 않고 자기 아들을 내보냈다.

삼촌이 세상을 떠난 까닭을 듣고 조문한 뒤 돌아왔다.

수령의 삼촌은 개천군수 이경전으로 나와도 사촌 동서 사이여서 매우 가까웠다.

이제 부고를 들으니 슬픔을 견딜 수 없다.

저녁밥도 소즐에게 먹여 보냈다.

소즐은 심심하다며 붉은 윷말 셋과 붉은 도지 하나를 만들어 주고 돌아갔다.

1594년 12월 26일 (갑오년 음력 11월 15일)

김익형이 찾아왔다.

종 둘에게 서북쪽 울타리를 만들게 했다.

저녁에는 유선각이 종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가까운 곳에서 함께 농사짓는 사람이 가진 짚을 내주라고 문서를 써 보냈다.

내일 소즐과 함께 니산으로 가기로 했다.

1594년 12월 27일 (갑오년 음력 11월 16일)

이른 아침 출발했다.

중간에서 소즐을 만나 말을 나란히 타고 고성진을 건넜다.

석성에서 말을 먹였다.

소즐은 먼저 니산 천동에 있는 매부 집으로 들어갔다.

해가 기울 무렵 나 혼자 니산현에 도착했다.

수령 김가기가 사창에 앉아 있다는 말을 듣고 종에게 이름을 알리게 하니 곧 사람을 보내 나를 불렀다.

잠깐 안부를 나누었다.

수령은 선전관을 접대해야 해 먼저 나갔다.

객사에는 생원 홍사고가 먼저 와 있었다. 잠깐 이야기하고 각자 민가 주인집으로 돌아가 잤다.

현의 좌수 홍이서가 머무는 집이 내 숙소와 마침 이웃이었다.

저녁에 찾아와 한가롭게 이야기하고 밤늦게 돌아갔다.

홍공은 전에 이곳에 왔을 때 알게 된 사이여서 찾아온 것이다.

1594년 12월 28일 (갑오년 음력 11월 17일)

아침에 수령이 관아 마루로 나를 불렀다.

생원 홍사고와 손님 두세 명도 왔다.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수령의 매부 성이현도 뒤늦게 들어와 함께 이야기했다.

수령은 환곡을 거두는 일 때문에 사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현이 술 한 병을 구해 나에게 대접했다.

늦은 오후에 길을 나섰다.

연산에 이르러 곧장 관아 마루로 들어갔다.

마침 수령 안원식의 삼촌 안회와 그 사위 변흡이 앉아 있었다.

안공은 내가 온 것을 매우 반가워하며 곧 수령에게 이름을 전하게 했다.

수령이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밤이 깊은 뒤 관아로 들어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좋은 술 두 잔씩 마시고 자리를 파했다.

민가로 돌아가 잤다.

1594년 12월 29일 (갑오년 음력 11월 18일)

아침 일찍 관아 마루로 들어갔다.

수령이 관아 안으로 불러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수령에게서 다음을 얻었다.

벼 한 섬

찹쌀 한 말

참기름 한 되

청주 닷 홉

말린 밤 석 되

콩 닷 되

흰 닥나무 한 묶음

송노를 먼저 보내 니산 소즐의 처가 쪽에 실어 두게 하고, 내일 우리 집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오늘 돌아가려 했으나 수령이 붙잡아 그대로 머물렀다.

송노가 돌아오면 모레 돌아갈 생각이다.

오늘은 수령의 삼촌 안공 회의 생일이었다.

작은 술자리를 마련해 몇 순배씩 돌리고 끝냈다.

수령은 사창으로 자리를 옮겼고, 나는 안 충의, 좌랑 김원록, 수령의 육촌 안효인, 사위 변흡과 하루 종일 관아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는 수령의 매부 좌랑 김원록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전부터 아는 사이여서 서로 안부를 나누었다.

잠시 뒤 수령도 들어와 나를 관아 안으로 불러 밤늦도록 이야기했다.

각자 주인집으로 돌아가 잤다.

수령의 이름은 안원식이고 자는 중성이다.

나와 사촌 동서 사이로 정이 매우 두텁다.

난리 초기 장천에서 함께 피란하며 온갖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1594년 12월 30일 (갑오년 음력 11월 19일)

이른 아침 관아로 들어갔다.

수령이 우리를 관아 안으로 불러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수령은 환곡을 거두러 창고로 나갔다.

나는 안 충의, 좌랑 김원록, 수령의 육촌 안효인, 사위 변흡과 하루 종일 관아 방에서 이야기했다.

저녁에는 수령도 들어와 함께 이야기했다.

밤이 깊어 각자 흩어졌다.

저녁에 송노가 돌아왔다.

내일은 돌아가기로 했다.

1595년 1월

1595년 1월 1일 (갑오년 음력 11월 20일)

이른 아침 관아로 들어갔다.

길양식으로 다음을 얻었다.

쌀 두 말

콩 한 말

단장 닷 되

피목 석 말

짚신 두 켤레

미투리 두 켤레

종 둘에게 나누어 지게 했다.

늦게 길을 나섰다.

도중에 바람과 눈을 만나 어렵게 니산에 도착했다.

수령 김가기는 마침 감기에 걸려 사람만 보내 안부를 물었고 관아 안에서 나오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

민가에서 잤다.

공주 유성현에 사는 품관 윤효명이 뒤이어 들어와 같은 방에서 함께 잤다.

좌수 홍이서는 한밤중에 찾아와 이야기하다 닭이 운 뒤 돌아갔다.

긴 밤을 잠들지 못했지만 오히려 마음을 달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1595년 1월 2일 (갑오년 음력 11월 21일)

수령이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관아 마루로 불렀다.

곧 찾아가 만나니 좋은 술 큰 잔 한 잔을 대접했다.

늦은 오후 수령이 사창으로 나가 다시 나를 불러 그곳에서 만났다.

쌀과 콩을 각각 두 말씩 주고 점심도 대접했다. 아침을 일찍 먹었기 때문이다.

오후에 출발해 현 안 천동, 소즐의 매부 양사유 집에서 묵었다.

양사유는 따뜻한 방을 내주고 함께 자며 밤새 이야기했다.

전에 서로 알지 못했지만 말하는 모습을 보니 괜찮은 사람이었다.

1595년 1월 3일 (갑오년 음력 11월 22일)

새벽빛이 밝을 때 밥을 먹었다.

전에 맡겨 둔 벼도 나누어 지게 했다.

고성진에 이르러 배를 타고 건넌 뒤 말을 먹였다.

곧장 숙소로 달려가니 해가 아직 높았다.

어머니께 들어가 뵈었다.

마침 아우 언명 희철이 어제저녁 찾아왔다. 뜻밖에 만나니 참으로 기뻤다.

함열에서 온 사람도 뒤따라 왔다.

가져온 것은 다음과 같다.

쌀 넉 말

벼 한 섬

정어리 열 묶음

소금에 절인 작은 생선 다섯 묶음

새우젓 넉 되

하지만 아내는 어제저녁부터 머리가 아프고 춥다가 덥다가 하며 밤새 뒤척이고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오늘 밤에는 특히 더 아파하니 걱정스럽다.

소즐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별좌 윤겸의 서얼 처남 경복이 볼일로 지나가다가 우리 집에서 묵었다. 저녁밥을 먹였다.

윤겸은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연산에서 받은 벼를 송노가 양씨 집에 맡길 때 되어 보니 열세 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가져와 다시 되어 보니 열 말 닷 되밖에 되지 않았다.

그 집 종들이 훔쳐 먹은 것이 분명하다. 몹시 괘씸하다.

요즘 관청과 민간이 모두 바닥났다.

연산처럼 아주 가까운 사이도 저장한 것이 없다며 조금밖에 주지 않았다.

니산에서는 감히 먹을 것을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앞으로 도움을 받을 곳이 거의 없다.

우리 집뿐 아니라 늙은 어머니를 봉양할 길도 막막하다. 걱정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고을의 환곡도 절반 이상 갚지 못했다. 마련하기가 더욱 어렵다.

1595년 1월 4일 (갑오년 음력 11월 23일)

아내의 병세는 아침에는 조금 가라앉는 듯했으나 늦게 다시 심해졌다.

가슴이 답답하고 팔다리가 쑤시며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입은 쓰고 속은 달아올라 병세가 오락가락한다.

밤새 뒤척이니 몹시 걱정스럽다.

오후에는 생원 빙의 집 종이 함열에서 들어왔다.

딸이 간 한 조각과 찰떡 한 꾸러미를 보내 주었다.

이 고을 품관 조광필도 찾아왔다.

배와 밤 한 상자를 선물해 이상하게 여겼다.

천천히 까닭을 물으니 함열로 달아난 종을 찾아 달라고 부탁하려는 것이었다.

전에 본 인사 명단에서 박여룡이 청양 수령에 임명되었다는 것을 보았다.

윤함이 이 때문에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기쁘다.

박공은 윤함 아내의 외할아버지와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아우다.

집이 해주에 있어 윤함 처가와 같은 동네이니 사람들이 오갈 것이다.

1595년 1월 5일 (갑오년 음력 11월 24일)

아내의 병세는 전과 같다.

추웠다 더웠다 하는 증상이 오가고 온몸의 통증은 전보다 더 심하다. 걱정스럽다.

오후에 생원 윤해가 어머니가 편치 않다는 말을 듣고 함열에서 급히 돌아왔다.

저녁에는 이시열이 자기 집에서 들어와 우리 집에 묵었다.

아침과 저녁을 대접했다.

다만 양식이 부족해 그가 데리고 온 종에게는 밥을 먹이지 못했다. 아쉽다.

1595년 1월 6일 (갑오년 음력 11월 25일)

이른 아침 이시열은 신공을 거두는 일로 함열로 돌아갔다.

생원 윤해에게 함열 수령에게 보낼 편지를 쓰게 했다.

도망간 종을 붙잡아 다스리고 돌아갈 양식도 마련해 달라고 부탁하게 했다.

나도 쌀 두 되와 장 한 그릇을 주었다.

길에서 곤란을 겪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병세는 여전히 전과 같고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없다. 몹시 걱정스럽다.

오늘 밤까지 더 지켜본 뒤 결성의 별좌 윤겸에게 종과 말을 보내려 한다.

함열에서 문안하는 사람이 왔다.

곧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생꿩 반 마리, 방어 한 마리, 짠장 한 그릇을 가져왔다.

1595년 1월 7일 (갑오년 음력 11월 26일)

아내의 병세는 전과 같다.

지난밤 새벽까지 뒤척였고 열이 있는 듯했다.

우물물을 계속 마시며 입을 헹구었고, 때때로 얼음 조각을 씹었다가 뱉었다.

죽도 전혀 먹지 못한다. 몹시 걱정스럽다.

이른 아침 송노를 결성 별좌에게 보내 빨리 오라고 했다.

막정은 함열로 보내 약을 구해 오게 했다.

타향을 떠돌며 굶주림은 날로 심해지는데 병까지 이 지경이다.

때가 나쁜 것인가, 운명인가.

길게 탄식할 뿐이다. 하늘의 운에 맡길 수밖에 없다.

저녁에는 함열에서 문안하는 사람이 왔다.

흰쌀 두 말, 거친 쌀 두 말, 녹두 두 되를 지고 왔다.

밤에 막정도 돌아왔다. 약을 구해 왔고 녹두 두 되도 얻어 왔다.

1595년 1월 8일 (갑오년 음력 11월 27일)

아내의 병세는 전과 같다.

열은 조금 줄어든 듯하다.

찬 성질의 약을 두 번 먹이고 녹두죽도 함께 먹였다.

아침 전에 양덕 수령 심설이 보낸 문안 사람이 비로소 도착했다.

천 리 길을 어렵게 넘어 두 사람을 보내 멀리 찾아온 것이다.

어머니께는 다음을 보냈다.

흰 명주 저고리 한 벌

안명주 한 필

생꿩 세 마리

돼지고기포 두 첩

약과 한 상자

나에게도 까마귀빛 겉옷 한 벌, 안명주 한 필, 생꿩과 돼지고기포, 약과 등을 같은 정도로 보내왔다.

기대할 곳이 다 끊어진 가운데 이런 물건이 오니 온 집안이 크게 기뻐했다.

꿩 한 마리를 곧 구워 나누어 먹었다.

하지만 아내는 병으로 고생해 한 점도 맛보지 못했다. 안타깝다.

오후에는 선전관 유형이 찾아왔다.

그는 이 고을 수령 이구순의 사위다.

마침 이곳에 왔다가 내가 이 고을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저녁에는 소즐이 찾아왔다. 저녁밥을 먹여 보냈다.

1595년 1월 9일 (갑오년 음력 11월 28일)

아내의 병세는 조금도 나아지거나 심해진 것이 없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끊이지 않아 걱정이 더욱 크다.

밤에는 녹두죽에 월경을 섞어 세 번 먹였다.

아침에는 땀이 날 듯해 옷과 이불을 두껍게 덮고 뜨거운 물을 항아리에 담아 품게 했지만 흠뻑 땀이 나지는 않았다. 아쉽다.

이른 아침 양덕에서 온 사람에게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쌀과 콩을 각각 두 되씩만 주었다.

집에 저장한 것이 다 떨어져 넉넉히 주지 못하니 한탄스럽다.

아침밥 뒤 관청으로 가 수령을 만나 가지와 김치를 구해 왔다.

길에서 우연히 진사 김종남을 만나 말 위에서 잠깐 그동안의 안부를 나누었다.

그에게서 자정 김지남이 이미 옥구의 종 집으로 갔고 그 아들 무적은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들었다.

놀랍고 걱정스럽다.

김지남은 돌아오는 길에 아마 늙은 어머니를 찾아뵙고 갈 것이다.

종남은 자정의 막내아우다.

저녁에 함열에서 문안하는 사람이 왔다.

곧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딸은 내일 어머니의 병을 보러 오고 싶다고 한다.

녹두와 죽력도 가져왔다.

밤에는 이시열이 함열에서 들어왔다.

노비들이 죽거나 도망가거나 옮겨 다녀 신공을 걷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함열 수령이 돌아갈 양식으로 쌀 두 말과 콩 한 말을 주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굶주렸을 것이다. 다행이다.

어머니는 이웃집으로 잠시 옮겨 머무셨다.

1595년 1월 10일 (갑오년 음력 11월 29일)

이시열은 아침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아침과 저녁을 먹여 보냈다.

아내의 병세는 나아진 것이 없다.

한밤중에 향소산을 달여 먹였지만 별다른 땀이 나지 않았고 구토는 오히려 더 심해졌다.

곡식 냄새를 더욱 싫어하고 기운은 날로 쇠해 간다.

몹시 걱정스럽다.

어머니께서 머무는 집으로 가 뵈었다.

언명 윤철을 보내 길 가운데서 딸을 맞아오게 했다.

오늘 딸이 온다는 말을 들었는데 가까운 사람이 모시고 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후에 딸이 들어왔다.

먼저 어머니께서 머무는 곳으로 가 쉬게 했다가 내일 병든 어머니를 보게 하려고 했다.

함께 온 사람들은 곧 돌려보냈다.

집에 저장한 것이 마침 떨어져 밥을 먹이지 못하고 술 두 병만 내어 먹여 보냈다. 안타깝다.

저녁에 어머니를 찾아뵙고 딸과 이야기한 뒤 돌아왔다.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가 정신을 잃었다는 말을 들었다.

놀라 달려가 살펴보았다.

곧 생원 윤해가 가지고 있던 오래된 청심환 반 알과 용소환 두 알, 월경, 죽력을 함께 갈아 서너 숟갈 먹였다.

기운이 조금 돌아왔다.

딸도 불러 보게 했다.

새벽닭이 울 때까지 뒤척이다가 정신이 돌아와 말도 전날처럼 했다.

여종들은 양덕에서 보내온 물건을 꺼내 뜰에서 빌었다.

헛된 일임을 알지만 절박한 가운데 그러는 것을 보고도 막지 못했다. 근심이 그만큼 깊은 것이다.

별좌 윤겸은 오늘 들어오기로 했는데 오지 않았다.

말을 구하지 못한 것인가.

병든 사람이 그를 보지 못할까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참으로 불길하고 걱정스럽다.

1595년 1월

1595년 1월 11일 (갑오년 음력 12월 1일)

아침에는 아내의 병세가 크게 줄었다.

때때로 눈을 뜨고 웃으며 말했다.

“밤에 제때 구하지 않았으면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하지만 원기가 너무 약하고 쇠해 음식은 완전히 끊겼다.

아침부터 미음만 두 차례 조금 삼켰다.

반드시 살아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저 하늘만 바라볼 뿐이다.

열은 그저께부터 크게 줄어든 듯하고 때때로 입이 마르면 물로 입을 적실 뿐이다.

함열에서 문안 사람이 왔다.

딸과 일행의 양식으로 쌀 두 말, 새우젓 조금과 병자에게 필요한 사과 한 개, 살아 있는 전복 열 개, 모주, 죽력 등을 가져왔다.

아내는 곧 생전복 세 개를 회로 먹고 사과도 몇 숟갈 먹었다.

가장 먹고 싶어 하던 음식이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상할까 걱정되어 더 먹지 못하게 했다.

요즘 병 때문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씀씀이가 몹시 커졌다.

이제 양식이 완전히 떨어져 함열에서 오는 것만 기다리고 있는데 보내온 것이 너무 적어 걱정스럽다.

그래도 늘 보내는 물건이 있으니 오늘이나 내일 더 올 것이다.

사과는 여기저기 널리 구해 임피에서 얻었고 쌀 두 말과 바꾸어 보내왔다고 한다.

오후부터는 병세가 더 나빠지지 않았다.

저녁까지 딸과 이야기하고 평소처럼 웃기도 했다.

때때로 죽도 조금 마셨다.

밤이 깊어 딸은 어머니께서 머무는 곳으로 가서 잤다가 새벽에 다시 돌아왔다.

1595년 1월 12일 (갑오년 음력 12월 2일)

한밤중에 아내가 가위에 눌린 듯 오랫동안 정신을 못 차리다가 겨우 깨어났다.

원기가 극도로 약한 데다 오래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침에는 기운이 꽤 평소 같았지만 매우 지쳐 있고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억지로 모주에 밥을 조금 말아 먹이고 구운 꿩고기도 조금 먹였다.

아침밥 뒤 별좌 윤겸이 들어왔다.

도적이 무서워 온 가족이 보령으로 옮겨 살고 있어 송노가 곧장 결성으로 갔다가 다시 보령으로 갔고, 다른 곳에서 종과 말을 빌려 어제 새벽 떠나 도천사에서 묵고 오늘에야 급히 왔다고 한다.

저녁에는 함열에서 사람이 왔다.

다음을 가져왔다.

흰쌀 두 말

거친 쌀 석 말

두 가지 젓갈 작은 항아리 하나

조기 두 묶음

단장 한 말

짠장 두 되

미역 작은 네 동

생숭어 작은 것 한 마리

생전복 다섯 개

유자 다섯 개

요즘 아내 병 때문에 씀씀이가 매우 커져 그저께부터 양식이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생원 윤해가 공채로 마련한 벼 한 섬을 빌려 쓰고 있었는데 마침 이 물건들이 와 위로가 된다.

함열 집 종이 신공을 거두려고 지난달 영암에 갔다가 이제 돌아왔다.

임 누이의 편지를 받아 왔다.

모두 무사하다고 하니 기쁘다.

누이는 어머니께 말린 숭어 두 마리를, 우리 집에는 감태 열 묶음을 보내왔다.

한림 김지남의 종 감희도 호남의 노비들에게서 신공을 거두러 가는 길에 우리 집에서 묵었다.

김 한림이 어머니와 나에게 각각 편지를 보냈다.

읽으니 슬픈 눈물이 소매를 적셨다.

저녁밥을 먹여 보냈다.

1595년 1월 13일 (갑오년 음력 12월 3일)

아내의 병세는 밤사이에 피곤하고 졸린 증상이 전보다 심했다.

아침에는 아주 또렷해졌다.

때때로 순탕과 국물 반 사발을 먹고 말하고 웃는 것이 평소와 같았다.

이제부터는 완전히 나을 듯해 참으로 기쁘다.

이른 아침 막정을 함열로 보냈다.

1595년 1월 14일 (갑오년 음력 12월 4일)

아내의 병세는 어제보다 더 가라앉았다.

다만 심기가 허약하고 졸리고 피곤할 때가 많다.

먹는 양이 늘지 않아 걱정스럽다.

저녁에 막정이 돌아왔다.

함열 수령 신응구가 벼 한 섬, 콩 두 말, 보리 닷 말을 보내고 별좌 윤겸에게 편지도 보냈다.

편지에는 형편이 불편해 앞으로는 계속 도와주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우리 집 살림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말로 할 수 없다.

1595년 1월 15일 (갑오년 음력 12월 5일)

아내의 병세는 더욱 가라앉는 듯하지만 피곤하고 졸린 것은 여전하다.

생원 윤해가 환곡 석 섬을 마련해 오늘 바치려 하므로 나도 밥을 먹고 고을에 들어갔다.

수령 이구순은 이미 사창에 앉아 있었고 공무가 매우 번잡했으며 손님도 많았다.

그래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선전관 유형을 찾아갔고, 다시 생원 권학도 들러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유형은 수령의 사위이고 권학은 고을 안에 피란 와 사는 사람으로 윤해 양어머니의 사촌 남동생이다.

집에 돌아오니 생원 허용이 별좌 형제를 찾아와 있었다.

나도 나가 만나 이야기하고 보냈다.

소즐의 아내가 찾아왔다.

함열의 딸이 두 가지 떡과 두부국, 고사리나물을 마련해 보내왔다.

정성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집도 본래 가난하니 마련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몹시 미안하다.

온 집안의 딸들이 병든 아내 곁에 모여 이야기했다.

저녁밥을 먹여 보냈다.

1595년 1월 16일 (갑오년 음력 12월 6일)

아내의 병세는 크게 나빠지는 것은 없지만 온몸이 피곤하고 가슴과 목이 답답하며 숨이 짧고 급하다.

그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하고 식사량이 조금도 늘지 않는다.

졸려 누워 있는 때가 많아 걱정스럽다.

함열에서 사람이 와 다음을 가져왔다.

흰쌀 두 말

거친 쌀 두 말

두 종류의 젓갈 각각 두 되

작은 숭어 한 마리

정어리 네 묶음

곧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환곡 석 섬은 막정에게 실어 관청에 바치게 했다.

이것은 같은 호적에 묶인 생원 윤해 이름으로 바친 것이다.

함열 수령이 내일 병자를 보러 오겠다고 한다.

1595년 1월 17일 (갑오년 음력 12월 7일)

아내의 병세는 특별히 나아지거나 나빠진 것이 없다.

아침에 함열 수령 신응구가 말을 달려 왔다.

아우와 세 아들이 모두 한방에 모여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 질 무렵 함열 수령은 돌아갔다.

함열에 사는 양윤근이 조기 한 묶음, 흰 새우젓 한 항아리, 병어 한 마리를 가져왔다.

아무 까닭 없이 보낸 것은 아닐 것이다.

저녁에는 소즐이 찾아왔지만 함열 수령이 와 있을 때는 만나지 못했다.

1595년 1월 18일 (갑오년 음력 12월 8일)

아내의 병세는 전과 같다.

함열에서 문안 사람이 와 모과 달인 물과 모주를 가져왔다.

곧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1595년 1월 19일 (갑오년 음력 12월 9일)

이른 아침 황간에 사는 남수일과 전계남이 한산으로 가는 길에 들렀다.

남경효 형이 지난 음력 시월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슬픔을 이길 수 없다.

남 형은 내 외사촌으로 어려서 외가에서 함께 자라 정이 매우 두터웠다.

이제 부고를 들으니 더욱 통곡하게 된다.

경제 형이 편지를 보내고 생배 서른여 개도 보냈다.

수일은 경효 형의 막내아들이다.

아침밥을 먹여 보냈다.

아우 언명 희철은 막정을 데리고 내 말을 타고 태인으로 떠났다.

지난달 스무하룻날 이곳에 와 열아흐레를 머물다가 이제야 돌아가는 것이다.

떠돌며 궁핍하게 사는 가운데 굶주림은 날마다 심해지고, 하나뿐인 아우와도 함께 살지 못한 채 다른 고장에서 끼니를 이어가게 하니 슬프고 괴롭다.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다.

거리가 아주 먼 것은 아니니 새해 뒤 다시 찾아올 수는 있겠지만 종과 말이 없어 장담할 수 없다.

집주인 최인복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아우가 떠날 때 이미 문 밖에 나가 있었으므로 잠깐 서서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저녁에는 함열의 사람과 말이 들어왔다.

내일 새벽 딸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또 소즐이 감옥에 갇혔다는 말을 들었다.

곧 수령 이구순에게 편지를 써 계집종을 시켜 보냈지만 문지기가 막아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아쉽다.

오후부터 비와 눈이 섞여 하루 종일 개지 않았다.

눈이 녹지 않으면 반 자 가까이 쌓일 듯했다.

이런 험한 날 아우가 길을 나섰고 우비도 제대로 없으니 길에서 지친 말을 끌고 눈을 헤치며 가는 고생이 클 것이다. 매우 걱정스럽다.

오늘부터 아우가 돌아간 뒤에는 내가 어머니께서 머무는 곳에서 함께 자려고 한다.

모실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생원 윤해의 종 춘희가 진현에서 들어왔다.

그 집 식구들은 모두 평안하다고 한다.

1595년 1월 20일 (갑오년 음력 12월 10일)

아침밥 뒤 딸이 함열로 돌아갔다.

별좌 윤겸이 데리고 갔다.

열흘 넘게 이곳에 머물렀지만 마침 어머니가 병들어 누워 있어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다.

헤어질 때 모녀가 서로 붙들고 슬피 울며 그치지 않았다.

인정이 참 가엾다.

늘 보고 싶어 하다가 막상 만나면 마음속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보내야 하니 더욱 안타깝다.

저녁에는 소즐이 찾아왔다.

어제 갇혔다가 오늘 겨우 매를 맞지 않고 풀려났다고 한다.

1595년 1월 21일 (갑오년 음력 12월 11일)

아내의 병세는 어제보다 기운이 조금 좋지 않고 피곤한 모습이 예전과 같다고 한다.

밤에 바람을 맞은 탓인 듯하다.

이달 초부터 큰 병세는 줄고 음식도 조금씩 늘었지만 원기가 허약해 말하기를 싫어한다.

앉으면 머리를 떨구고 눈을 감은 채 뜨지 않았다.

어제는 기운이 꽤 돌아와 눈을 뜨고 말하는 것이 평소와 다르지 않았는데 오늘 다시 이러하니 걱정스럽다.

병을 얻은 지 스무 날이 넘었는데 아직 완전히 낫지 않고 이렇게 오래 끌어 더욱 걱정이다.

저녁에 함열에서 사람이 와 중미 두 말, 조기 두 묶음, 절인 게 열 마리를 가져왔다.

1595년 1월 22일 (갑오년 음력 12월 12일)

아내의 병세는 어제보다 나아졌다.

일어나 앉아 눈을 뜨고 말하는 것도 평소와 같았다.

아침 뒤 생원 권학이 찾아왔다.

권학은 윤해 양어머니의 사촌 남동생으로 고을 안에 피란 와 살고 있다.

저녁에는 별좌 윤겸이 함열에서 돌아왔다.

밤에는 계집종 열금이 태인에서 올 때부터 부종을 앓아 이곳에 온 뒤 병세가 매우 심해졌다.

온몸이 모두 붓고 흙집에 누워 있으면서도 먹는 양은 평소와 다르지 않다.

늘 술과 고기를 달라고 하며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를 내고 험한 말을 한다.

상하 식구가 죽과 미음도 제대로 잇기 어려운데 어찌 죽어가는 늙은 계집종에게 술과 고기를 마련해 줄 수 있겠는가.

병이 위중하더라도 빨리 죽지 않으면 우리 집을 괴롭히는 일이 많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밉다.

밤에는 별좌의 종 금손이 결성에서 말을 가지고 왔다.

별좌는 내일 돌아갈 예정이다.

송영구가 쌀 한 말을 보내 주었다.

1595년 1월 23일 (갑오년 음력 12월 13일)

아내의 병세는 어제와 같다.

다시 크게 나빠지는 일은 없다.

별좌 윤겸은 밥을 먹고 돌아갔다.

도천사에서 묵으려 한다.

길양식을 마련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른 아침 종을 보내 한림 조희보에게 구했더니 조공이 곧 쌀 한 말 닷 되를 보내 주었다.

별좌의 길양식도 마련하지 못했고 이곳도 양식이 떨어져 걱정하던 참이었다.

조공의 도움이 마침 때에 닿아 길양식을 싸고도 며칠 먹을 것이 남아 위로가 된다.

요즘 큰눈이 계속 내려 오래도록 땔나무를 베지 못했다.

아침저녁으로 윗집과 아랫집 모두 밥을 짓기도 매우 어렵고 구들도 차갑다.

늙은 어머니와 병든 아내가 편히 잘 수가 없다.

더구나 굶주림은 날로 심해진다. 걱정스럽다.

함열 수령은 보름 뒤 부모를 뵈러 서울로 올라간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연말을 넘길 방도가 없다. 더욱 걱정이다.

송노에게 별좌 편지를 들려 석성과 니산 두 고을로 보냈다. 도움을 받을 물자를 구하기 위해서다.

단아는 아직 학질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틀 걸러 한 번씩 앓는데 발작이 더욱 심하고 먹는 양도 줄었다. 걱정스럽다.

1595년 1월 24일 (갑오년 음력 12월 14일)

아내의 병세는 전과 같다.

다만 요즘 양식과 반찬이 모두 떨어져 늙은 어머니와 병든 아내에게 맛있는 것을 드릴 수 없다. 걱정스럽다.

이른 아침 어머니가 머무는 집주인이 제사 뒤 남은 떡과 밥, 반찬, 술 한 사발을 보내왔다.

오늘이 그의 돌아가신 아버지 제삿날이라고 한다.

곧 함께 나누어 먹었다.

저녁에 막정이 태인에서 들어왔다.

아우는 무사히 돌아갔으나 길에서 눈을 만나 옷이 모두 젖었다고 한다. 안타깝다.

함열에서 길양식과 콩은 넉넉히 주었다고 하니 그것은 다행이다.

막정은 오는 길에 함열에서 묵었고, 함열에서 늘 보내는 쌀 두 말과 정어리 세 묶음을 가지고 왔다.

양식이 떨어져 걱정하던 가운데 이 쌀을 얻어 며칠은 목숨을 이어갈 수 있겠다.

그 뒤에는 무엇으로 이어갈지 걱정스럽다.

저녁에는 송노가 석성에서 돌아왔다.

석성 수령이 중미 석 말과 조기젓 다섯 마리를 보내왔다.

당분간 이것으로 이어갈 수 있어 다행이다.

1595년 1월 25일 (갑오년 음력 12월 15일)

아내의 병세는 전과 같고 완전히 낫지 않았다.

이렇게 피곤해하니 걱정스럽다.

지난밤 늙은 계집종 열금이 죽었다.

병세가 매우 심해 살기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차가운 곳에 누워 있었고 먹을 것도 배불리 먹지 못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구할 길이 없어 한 번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죽었으니 가엾다.

성품은 본래 사납고 악해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 화를 내고 욕했다.

주인 앞에서도 공손하지 않은 말을 많이 해 사람들이 모두 싫어했다.

그런 점만 보면 죽어도 아깝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젊을 때 붙잡혀 우리 집에 온 뒤 일흔이 넘도록 한 번도 도망가지 않았고 길쌈을 잘했으며 집안일에 부지런하고 검소했다.

조금도 속이거나 훔치는 일이 없었다.

그 점은 취할 만하다.

타향을 떠돌다 관도 없이 죽었으니 더욱 슬프다.

저녁에 수령이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1595년 1월 26일 (갑오년 음력 12월 16일)

종 둘과 이웃에 피란 온 한복을 시켜 새벽에 열금의 시신을 메고 이곳에서 오 리쯤 떨어진 한산 길가 양지바른 곳에 묻게 했다.

가엾다.

지난해 가을에는 막내 계집종 동을비가 소즐 집에서 죽었고 이번에는 열금이 또 이곳에서 죽었다.

둘 다 이 지방에 묻혔다.

서울에 살던 때 어찌 임천 땅에 묻혀 죽으리라 생각했겠는가.

사람 일이 참으로 한탄스럽다.

아내의 병세는 전과 같다.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고 입맛도 없어 먹는 양이 늘지 않는다. 걱정스럽다.

단아도 오늘 또 학질을 앓았다. 가엾다.

저녁에는 춘희가 함열에서 들어왔다.

생원 윤해에게는 따로 양식이나 물건을 보내지 않고 편지만 보냈다.

편지에는 오는 초아흐렛날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는데 마침 빈 말이 올라가므로 함께 타고 갈 수 있으며, 길양식과 반찬은 함열에서 마련해 갈 것이니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전에 정월 초하루 제사에 쓸 마른 생선도 구해 둔 터라 춘희 편에 조기 한 묶음, 흰 물고기 젓 두 되, 중미 한 말을 보내왔다.

윤해가 돌아가는 길에 직접 광주 선영으로 가 밥과 국을 지어 성묘하게 하려는 것이다.

난리가 난 뒤 세 해 동안 한 번도 직접 제사드리지 못해 늘 슬픈 마음을 품고 있었다.

종과 말이 없을 뿐 아니라 양식을 마련하기 어려워 한 번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형편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겠는가.

별좌의 계집종 황목이 마침 함열에서 왔기에 무명 반 필도 윤해에게 주었다.

고기를 사 제수를 마련하게 한 것이다.

다만 모든 것이 너무 간소해 아쉽다.

모레 함열 수령이 서울로 올라갈 때 우리 집에 들러 묵는다고 한다.

1595년 1월 27일 (갑오년 음력 12월 17일)

아내의 병세는 점점 나아지고 있다.

다만 요즘 양식과 반찬이 모자라 아침저녁으로 죽만 마신다.

이렇게 해서 어찌 평소처럼 회복할 수 있겠는가. 걱정스럽다.

저녁에는 태인으로 피란 와 사는 선비 한용이 이곳을 지나며 묵었다.

마침 양식이 부족해 밥을 대접하지 못했다. 아쉽다.

어머니가 지난봄 아우 희철 집에 머물 때 이웃에 살았기 때문에 내가 어머니를 찾아갈 때 알게 된 사람이다.

그에게 들으니 언명은 지난 십오일 권 좌수 서와 함께 금성으로 갔다가 영암 누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1595년 1월 28일 (갑오년 음력 12월 18일)

아침에 막정을 함열로 보냈다. 말먹일 콩을 구하기 위해서다.

아내의 병세는 전과 같다.

저녁에는 좌수 조윤공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1595년 1월 29일 (갑오년 음력 12월 19일)

밤에 홍응추 영공을 꿈에서 보았다. 생전 모습 그대로였다.

깨고 나니 슬픔을 이길 수 없었다.

오후에는 권학 성민복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오충일도 찾아와 묵었다.

막정이 돌아왔다.

함열에서 다음을 보내 주었다.

흰쌀 두 말

중미 두 말

흰 물고기 젓 석 되

콩 석 말

정어리 네 묶음

저녁에는 함열 수령이 부모를 뵈러 서울로 올라가면서 우리 집에 들러 묵었다.

1595년 1월 30일 (갑오년 음력 12월 20일)

함열 수령 신응구는 김백온이 오기를 기다리느라 그대로 머물렀다.

내일 윤해와 함께 말을 나란히 타고 떠나려 한다.

윤해는 말이 없어 함열 수령의 말을 빌려 타고 진위 집까지 들어가기로 했다.

백온도 함께 서울로 간다.

이복령을 불러 길흉을 점쳐 보게 했다. 함열 수령이 오가는 길이 어떨지 알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소즐이 함열 수령을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밤에는 함열 수령을 침실로 불러 온 가족이 함께 이야기했다.

밤이 깊어서야 자리를 파했다.

함열 수령이 길에 가지고 가던 감당 한 되, 약과 열다섯 개, 삶은 돼지고기 세 그릇, 술 한 상을 내놓아 함께 나누어 먹었다.

함열 수령이 조총을 두 번 쏘게 하자 총소리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우스운 일이다.

1595년 1월 31일 (갑오년 음력 12월 21일)

아침밥 뒤 함열 수령이 떠났다.

윤해도 함께 갔다.

정월 초하루에 광주 선영에 성묘하도록 부탁했다.

하지만 윤해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서울로 올라가게 되어 집에 장남이 없다.

만약 집안에 급한 병이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의지할 사람이 없어 한탄스럽다.

송노도 휴가를 얻어 함께 올라갔다.

오는 정월 초열흘 전에는 돌아오라고 엄하게 일렀다.

전에 두 번 휴가를 주었을 때도 기한을 넘겨 돌아오지 않아 늘 몹시 괘씸했다.

처음에는 보내지 않으려 했지만 아버지 무덤에 제사드리고 싶다고 간절히 청했다.

사람의 자식 된 마음은 위아래가 모두 같은 것이므로 일단 보내고 반드시 빨리 돌아오라고 다시 일렀다.

계집종 어둔도 서울 쪽으로 올라갔다.

그 아들 한노가 지난달 아버지를 찾으러 진위와 안성 등지로 간 뒤 오래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찾아가려는 것이다.

그 기회에 광주의 옛집 터로 들어가 살려고 한다.

어둔은 지난해 섣달에 찾아와 지금까지 머물다가 이제 돌아간다.

본래 염치가 없는 사람이라 집 안 물건이 조금이라도 눈에 띄면 몰래 훔치고 이웃에서도 손버릇이 나빴다.

붙잡혀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양반집 사람들과도 늘 싸우고 욕했다.

여러 번 엄하게 타일러도 고치지 않았다.

늘 벌을 주고 싶었지만 본래 오래 부리던 종도 아니고 멀리서 찾아온 사정도 가엾어 참고 두었다.

1595년 2월 1일 (갑오년 음력 12월 22일)

어제부터 추위가 갑절이나 매서워졌고 바람도 몹시 불었다.

윤해가 돌아가는 길에 옷도 얇고 이불도 없으니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도 가라앉지 않는다.

그저 한탄할 뿐이다.

어제저녁부터 양식과 반찬이 모두 떨어졌다.

몇 되 남은 쌀로 온 식구가 죽을 끓여 나누어 먹었다.

함열 수령은 연말을 넘길 양식도 주지 않고 이미 서울로 올라갔다.

명절은 코앞인데 죽조차 이어가기 어려울 듯하다.

우리 집뿐 아니라 늙은 어머니를 봉양할 물건도 구할 길이 없다.

말할 수 없이 걱정스럽다.

아내도 큰 병 뒤인데 죽조차 배불리 먹지 못해 아직 굶주린 기색이 있다. 더욱 걱정이다.

1595년 2월 2일 (갑오년 음력 12월 23일)

아침에 수령 이구순이 파직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종과 말이 없어 곧바로 찾아가지 못했다.

마침 소즐이 찾아와 그의 말을 타고 관아 방으로 가 위로했다.

이 부장과 고을 품관들이 모두 모여 함께 이야기했다.

수령에게 청해 생원 윤해가 먹은 환곡 한 섬과 집주인 호에서 바쳐야 할 땔나무·곡식·풀 각각 한 짐씩을 면제받았다.

누룩 한 덩이도 얻었다.

돌아오려 할 때 한산 수령 신경행이 창고를 봉하기 위해 말을 달려왔다.

그를 만나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고 술 석 잔을 마신 뒤 돌아왔다.

내가 지난해 칠월 이 고을에 와 산 뒤 이제 겨우 한 해가 지났는데 수령이 잇달아 네 명이나 바뀌었다.

관청 창고가 텅 빈 것도 당연하다.

이구순과는 아는 사이여서 평소 나를 후하게 대했다.

이제 파직되어 떠난다니 몹시 아쉽다.

조보를 보니 심설이 관직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내년 봄 이월 이십구일에 등준시를 열어 통정 이하 사람을 뽑는다고 한다.

명나라 사신도 내년에 나온다고 한다. 무슨 일로 오는지는 모르겠다.

좌의정 유홍은 탐욕스럽고 부정하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있으나 아직 윤허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1595년 2월 3일 (갑오년 음력 12월 24일)

지난밤 매우 흉한 꿈을 꾸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요즘 추위가 극심하다.

윤해가 돌아가는 길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지 걱정이 끝이 없다.

일정을 헤아리면 내일쯤 집에 도착할 것이다.

어제 아침 함열에서 사람이 와 흰쌀 한 말과 벼쌀 한 말을 가져왔다.

딸은 오늘이 자기 생일이라며 썬 떡 한 상자를 만들어 보냈다.

가엾다.

곧 장국에 끓여 먹었다.

마침 소즐이 들어와 그와도 함께 먹었다.

수령 이구순이 모레쯤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저녁밥 뒤 찾아가 잠시 이야기하고 작별했다.

내일 종과 말을 함열로 보낼 예정이라 다시 얼굴을 보고 작별하기 어려울 것 같아 미리 찾아간 것이다.

그런데 수령의 말과 행동, 얼굴빛을 보니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해 보였다.

아마 오래 살지 못할 듯하다.

지난해 임맹길이 이 고을 수령으로 왔을 때도 행동이 이와 같아 이상하게 여겼는데, 다섯 달 만에 파직되어 돌아간 뒤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번 이구순도 지난 칠월 부임해 겨우 여섯 달 만에 관찰사의 장계로 파직되었다.

모든 모습이 임맹길과 꼭 같아 걱정스럽다.

하지만 세력 없는 음관이 큰길가 고을의 수령이 되면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기 쉽다.

공무로 오가는 사람들뿐 아니라 떠돌아다니는 사대부들의 요구도 너무 많아 접대에 시달린다.

관청 비축은 바닥나 살림할 방도가 없고 데리고 온 가족도 많았다.

관청에는 장 한 항아리, 쌀과 콩 한 되조차 남지 않아 날마다 곡식을 찧어도 모자라고 빌려 써야 했다.

수령 가족의 하루 양식만 닷 말이나 들었다고 한다.

오래 버티기 어려웠던 것도 당연하다.

이 고을은 여러 차례 적절하지 못한 수령을 거쳐 거의 버려진 고을이 되었다.

앞으로 오는 사람이 만약 대간을 지낸 강직한 사람으로 검소하게 몸을 지키고 권세 있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손님 접대를 줄이고 백성을 아끼고 비용을 절약하며 오래 재임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수습하기 어려울 것이다.

1595년 2월 4일 (갑오년 음력 12월 25일)

지난밤 큰눈이 내렸다.

아침에도 개지 않았고 눈이 반 자 가까이 쌓였다.

눈을 무릅쓰고 종과 말을 함열로 보냈다.

함열 수령이 서울로 올라갈 때 연말을 지낼 물자를 따로 내주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나루가 반쯤 얼어 건너지 못할까 걱정이다.

내일까지 돌아오지 못하면 온 집안이 반드시 굶을 것이다. 걱정스럽다.

저녁에는 계집종 향춘이 함열에서 들어왔다.

정월 초하루에 자기 아버지 제사를 지내려고 휴가를 얻어 온 것이다.

1595년 2월 5일 (갑오년 음력 12월 26일)

요즘 추위가 극심하다.

양식과 반찬이 모두 떨어졌을 뿐 아니라 땔나무도 베어 오지 못했다.

아침저녁 밥 지을 때 말고는 구들을 데우지 못해 아이들이 편히 잘 수 없다. 걱정스럽다.

저녁에는 막정이 함열에서 돌아왔다.

함열에서 늘 보내는 흰쌀 석 말, 거친 쌀 석 말과 따로 적어 준 흰쌀 두 말, 거친 쌀 두 말을 가져왔다.

모두 합쳐 열 말이다.

찰쌀 한 말, 누룩 두 덩이, 기름 한 되, 검은콩 닷 되도 함께 실어 왔다.

따로 적어 준 것은 함열 수령이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연말을 지낼 물자로 내주게 한 것이었다.

딸도 조기 두 묶음과 흰 물고기 젓 작은 항아리 하나를 보내왔다.

저녁에는 바람이 불고 비가 조금 내리더니 밤에 눈으로 바뀌었다.

이튿날 아침에는 눈이 크게 내려 산과 들이 온통 하얗게 되었다.

1595년 2월 6일 (갑오년 음력 12월 27일)

아침에 이웃 숙석이 간직하고 있던 호의 땔나무 마흔 묶음을 실어 왔다.

눈발이 날리고 바람도 어지러워 날씨가 몹시 추웠다.

이 나무로 며칠은 불을 땔 수 있겠다.

내일 새벽에는 어머니를 다시 원래 숙소로 모셔 오기로 했다.

오늘은 입춘이다.

저녁에는 전주 지평 송영구가 일부러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찹쌀 한 말, 검은콩 닷 되, 생꿩 한 마리도 보내 주었다.

뜻밖의 후의라 참으로 고맙다.

이튿날 아침 답장을 써 돌려보냈다.

1595년 2월 7일 (갑오년 음력 12월 28일)

지난밤 큰눈이 반 자나 내렸다.

아침 전에 어머니를 다시 옛 숙소로 모셔 왔다.

지난달 이십팔일 다른 집으로 피했다가 오늘 돌아오신 것이다.

1595년 2월 8일 (갑오년 음력 12월 29일)

큰눈 뒤로 날씨가 몹시 춥다.

땔나무도 없고 양식도 없어 설을 넘길 방도가 없다.

더구나 구들이 차가워 잠을 견디기 어렵고 어머니도 편히 주무시지 못한다.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쌀 한 말만 가지고 가루를 내 떡을 만들어 돌아가신 아버지 신주 앞에 올릴 제물로 준비했다.

한탄스럽다.

전에 무명 반 필로 쇠고기 몇 덩이를 바꾸어 두었고 송영구가 보낸 꿩 한 마리도 제사에 쓰려 한다.

쌀 닷 되로 술도 빚어 차례 때 쓰려고 한다.

그 밖에는 반찬을 보탤 것이 없다. 안타깝다.

이처럼 추위가 심한데 윤해가 어떻게 서울까지 올라가 선영에 제사를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제대로 가지 못했을 것이다.

별좌 윤겸도 떠난 뒤 소식이 없다.

밤낮으로 마음을 태우며 걱정한다.

저녁에 큰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해 밤이 되어서야 그쳤다.

1595년 2월 9일 (갑오년 음력 12월 30일)

아침밥 뒤 고을로 들어가 순찰사 군관 김순종을 만났다.

이웃 전문이 맡은 사람을 풀어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 두 향소 사람이 술과 과일을 들고 군관을 찾아와 나도 함께 술 넉 잔을 마시고 돌아왔다.

김순종은 관동 아래 사섬시 어귀에 살던 사람으로 예전부터 알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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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에 보내는 격문 — 김존경

아아, 하늘도 재앙을 거두는 때가 있고 나라의 운수도 언제까지나 막혀 있지는 않는다. 바른길을 붙들면 위태로워도 반드시 다시 일어나고, 순리를 거스르면 처음에는 강해도 끝내 망한다. 이치가 본래 그러하고 형세도 그렇다.

 

옛날 비수에서는 적은 군사가 부견의 큰 군대를 꺾었고, 수군은 반역자의 기세를 꺾었다. 이런 일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시대가 달라도 이치는 같다.

 

저 섬나라 오랑캐들이 남의 나라에서 끝없이 군사를 일으킨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는데 흉악한 기세는 갈수록 거세지고 재앙은 들불처럼 번졌다. 당당하던 나라의 형세는 쌓아 놓은 달걀처럼 위태롭고, 백성은 오랑캐의 풍속에 굴복할 지경까지 몰렸다.

 

사람들의 분노는 이미 극에 달했고 귀신의 벌도 곧 내릴 것이다.

 

나 김덕령은 한낱 어리석은 사람으로 외진 고을에서 자랐다. 글 읽는 데 뜻을 두었을 뿐 활과 말을 다루는 일을 업으로 삼지 않았다.

 

전에 헛된 이름이 알려지는 바람에 장수의 막하에서 종군하기도 했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가 계셨고 형까지 싸움터에서 죽었으니 어머니를 돌볼 사람이 없었다. 차마 오래 전쟁터에 있을 수 없어 잠시 군중에 있다가 곧 돌아왔다.

 

그러나 위로는 나라의 치욕을 생각해 한밤중마다 칼을 어루만졌고, 아래로는 형의 원수를 생각해 밥을 먹다가도 눈물을 흘렸다.

 

집안의 화가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 자식 된 도리는 어느 정도 마쳤으니 이 몸을 죽음에 맡길 수 있다.

 

마침 담양 수령이 나를 잘못 높이 평가해 전라도 관찰사에게 추천했다. 관찰사는 나라의 큰 의리를 들어 상중이라는 내 사정을 거두어 두게 하고, 백전 뒤 남은 군사를 모아 작은 힘이라도 보태기를 바랐다.

 

돌아보면 나는 닭 한 마리 묶을 힘도 없고 용맹도 뛰어나지 않다. 사람은 미천한데 책임은 무거우니 몹시 두렵다.

 

그런데 아무 공도 세우기 전에 임금의 은혜로운 명령이 먼저 내려왔다.

 

임금과 나라가 이미 어려움을 구하라는 책임을 맡겼는데 신하 된 자가 어찌 몸을 아끼겠는가.

 

의를 저버리고 목숨을 탐하면 용사도 겁쟁이가 되고, 충성을 다해 몸을 잊으면 겁쟁이도 용사가 된다고 들었다.

 

임금을 가까이하고 윗사람을 위해 죽겠다는 뜻만으로도 충분히 용기가 되고, 죄 있는 자를 벌하고 반역을 치는 정당함만으로도 충분히 기세가 된다. 반드시 혈기만 믿는 용맹이라야 이 적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둔하고 모자란 나 자신을 채찍질해 전쟁터에 나서기로 했다. 멀고 가까운 곳에 격문을 보내 날래고 강한 이들을 모으니, 용처럼 뛰고 범처럼 걷는 사람, 적장을 베고 깃발을 뽑을 사람 모두가 양식을 싸 들고 따르기를 원하며 끓는 물과 불 속도 마다하지 않는다.

 

모두 이를 악물고 원통함을 품어 지난날의 패배를 부끄러워하고, 앞으로 적을 치겠다는 기세를 더하고 있다.

 

저 적은 이제 남의 힘에 기대 겨우 숨만 붙은 잔당에 지나지 않으니 머지않아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달 어느 날을 좋은 날로 정해 군사를 출발시키려 한다. 깃발은 동쪽을 향하고, 쇠로 무장한 기병은 바람처럼 달리고 긴 창은 번개처럼 나아갈 것이다.

 

군사는 정예롭고 무기는 날카로우며, 우리의 명분은 바르고 기세는 굳세다. 이런 군대로 적을 치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막겠는가.

 

병법에 자신과 적을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고 했다.

 

적은 천 리 먼 길을 건너와 여러 해를 노숙했고, 우리와 추위와 더위가 다르며 물과 땅도 맞지 않아 병이 생긴다. 날카롭던 기세는 평양에서 꺾였고, 행주에서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전에는 정예병이라 불렸지만 이제는 기운이 다한 군사가 되었다.

 

그 아래에는 사로잡혀 억지로 끌려온 우리 백성도 많다. 어찌 부모와 처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원망은 이미 극에 달했고 탄식은 깊다.

 

솥 안의 물고기 같은 적을 오래 놓아둘 이유가 없다. 지금이 바로 없애 버릴 때다.

 

아아, 적이 들어온 뒤 참혹한 재앙을 호남만 피했을 뿐 다른 일곱 도는 모두 겪었다. 그중 영남이 입은 피해는 다른 도보다 더욱 심하다.

 

문무 관원과 선비, 늙은이와 어린이, 남자와 여자가 죄 없이 당한 일을 어찌 다 셀 수 있겠는가.

 

아버지가 죽어 자식이 고아가 되고 남편이 죽어 아내가 홀로 되었다. 집은 불타고 고향은 폐허가 되었다. 흰 갈대와 누런 띠풀 사이로 재만 가득하다.

 

낙동강 동쪽과 진주 남쪽에는 다시 연기가 오르는 집조차 드물다.

 

얼어 죽고 굶어 죽는 일이 극에 달해 사람이 서로 사람을 잡아먹고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겹겹이 누웠다. 원통한 울음이 하늘 끝까지 닿았으니 수많은 원망을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다.

 

이런 형편이라면 여윈 아이와 쇠약한 여자라도 몽둥이를 들고 적을 때리게 할 수 있다. 하물며 장정과 젊은이가 어찌 칼을 거두고 편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이 바로 충의로운 사람이 목숨을 바칠 날이며 호걸이 치욕을 씻을 기회다.

 

각자 집안의 원수와 나라의 원수를 생각하고 함께 저 큰 도적을 죽이자.

 

더구나 명나라 군대는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고 늙은 왜적이 언제 다시 움직일지 모른다. 이때 빨리 쓸어버리지 못하면 지난날의 재앙이 다시 눈앞에 닥칠 것이다.

 

그때 후회한들 소용없다.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고 군사를 다시 일으킬 기회도 얻기 어렵다.

 

선비와 백성들이여, 힘써 나서라.

도 안 여러 고을에 돌리는 글 — 김존경이 지음, 김덕령 이름으로 보냄

만력 이십일년 십일월 스무아흐렛날, 광주에서 어머니상을 당한 김덕령이 도 안 여러 고을의 여러 선비에게 삼가 알린다.

 

요즘 흉적이 다시 나와 영남 변방에 떼 지어 머물고 성과 진을 들이받으며 틈을 엿보고 날마다 흉악한 기세를 부리고 있다.

 

관군은 물러나고 의병도 움츠러들었다. 군사를 거느린 사람들은 둘러보기만 할 뿐 적을 쓸어버릴 뜻이 없다. 나라의 위엄을 떨어뜨리고 적의 기세를 키우는 일이 이보다 심한 적이 없다.

 

안에서 임금을 지키며 게으르지 않을 사람도 드물고, 밖에서 충의를 위해 몸을 잊을 사람이 또 몇이나 되는가.

 

오늘의 형편을 생각하면 참으로 답답하다.

 

나는 젊어서부터 적을 사로잡아 나라의 치욕을 씻고 싶었다.

 

난리가 일어난 처음에는 군대에 들어가 작은 힘이라도 보태려 했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가 병들어 끝까지 봉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차마 어머니를 버리고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두 해 동안 칩거하며 칼을 어루만지고 동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내 몸을 붙잡을 것이 없다. 나라에는 일이 많으니 신하 된 자로서 충성을 다할 때다.

 

다행히 담양 수령 이경린이 왕실 후손으로 늘 적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가 내 헛된 이름을 듣고 전투 장비를 마련해 주며 나라의 어려움에 나서라고 권했다.

 

두 번이나 사양했으나 끝내 피할 수 없었다. 상복을 입은 사사로운 슬픔을 끊고 전쟁에 나서게 되었다.

 

긴 칼을 손에 쥐고 무거운 갑옷을 몸에 두르며 위엄을 기르고 날을 세워 곧장 호랑이 굴을 치고자 한다.

 

백성의 원통함을 조금이나마 풀고 종묘의 치욕을 시원하게 씻고 싶다.

 

여러 고을의 선비 가운데 나를 따를 사람이 없겠는가.

 

아아, 이백 년 동안 나라의 은혜로 길러진 선비 가운데 나라를 위해 분개해 죽을 사람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몸을 버려 어려움을 구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내 힘은 솥을 들 만큼 세지 않고 용맹도 만 명을 상대할 정도가 아니다.

 

다만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는 뜻을 생각해,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을 불러 모아 붉은 마음을 함께 짊어지고 공을 이루려 한다.

 

비록 반드시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으나 칼날과 창끝이 맞부딪치는 곳에서는 반드시 군사보다 앞장서겠다.

 

지금 일곱 도가 모두 전쟁 피해를 입었고 호남만 유독 학살을 피했다.

 

나라를 되살릴 한 가닥 희망이 바로 이곳에 있다.

 

그러나 요즘 군사를 뽑고 군량을 옮기느라 재물과 힘이 다 떨어져 백성의 삶은 이미 난리를 겪은 곳과 다르지 않다.

 

이때 적이 쳐들어오면 누가 다시 막겠는가.

 

부모와 처자는 누구에게나 있고, 고향과 조상 무덤은 집집마다 소중하다.

 

하루아침에 적이 쳐들어와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고 집을 불태우는 일을 누가 바라겠는가.

 

모든 사람이 사사로운 원수를 갚듯 분노한다면 이 적이 멸망하지 않을 리 없다.

 

눈앞의 편안함만 지키려고 죽음을 각오한 싸움에 나서지 않는다면 이는 부모를 적에게 내주는 것이며 스스로 조상의 무덤을 버리는 것이나 같다.

 

여러 고을의 선비들은 물러서려는 생각을 버리고 더욱 분발하기 바란다.

 

서릿발 같은 창과 쇠기병이 천둥과 바람처럼 몰아치면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적의 잔당은 반드시 흙과 기와처럼 무너질 것이다.

 

명나라 군대까지 적의 기습에 욕을 당했고 국경은 오랫동안 적의 더러운 기운에 물들었다.

 

아래에 군사를 일으킬 때의 규정을 따로 적어 보낸다.

 

이 글을 받은 사람들은 자세히 생각하고 힘써 주기 바란다.

승병 팔도 도대장에게 보내는 글 — 김존경

세상에서 불교 사람을 성인의 죄인이라고 하는 까닭은 사람 사이의 큰 도리를 버리고 어짐과 의로움을 피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의 큰 도리는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이고, 어짐과 의로움의 실천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나라의 위급함에 달려가는 것이다.

 

성인의 도를 배웠다고 하면서도 이런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면 이름만 유학자이고 행동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반대로 불교의 무리라 해도 사람 사이의 도리와 어짐과 의로움을 다한다면 이름은 승려이지만 행동은 유학자라 할 수 있다.

 

오늘 나는 그런 대장 한 사람을 보았다.

 

왜적이 들이닥치자 여러 고을이 무너지고 험한 산과 관문까지 무너졌다. 날랜 장수와 정예병도 달아나 세 수도를 잃고 임금은 멀리 피란했으며 나라의 명맥은 실 한 올에 매달린 듯했다.

 

평소 충과 의를 말하던 사람 가운데 임금의 앞길을 열며 죽음을 각오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직 대장은 깊은 산중에서 의병을 일으켜 도총섭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조정의 명령 때문도 아니고 이익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임금을 저버리는 것이 의롭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감동했고 사방의 의승들이 구름처럼 따랐다.

 

관동에서 군사를 일으켜 평양 서쪽에서 적을 견제하고 요충지에 숨어 적의 돌격을 막으며 첩자를 보내 적의 움직임을 살폈다.

 

수락산에서는 외로운 군대로 수천 명의 적을 맞아 크게 이겼다.

 

적이 세 수도에서 물러난 뒤에도 군사를 풀지 않고 남쪽으로 내려와 계속 싸웠다.

 

대장의 충성과 의로움이 어찌 이토록 굳센가.

 

나는 남쪽 지방의 보잘것없는 선비 김덕령으로 오래전부터 대장의 이름을 들었다.

 

이제 장성 수령 이귀를 통해 대장이 그와 생사를 함께하겠다고 약속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같이 구했다는 사실을 더 자세히 들었다.

 

나도 그와 약속해 끝까지 함께하려 하니 대장도 나 같은 미천한 사람을 버리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나 역시 난리가 시작된 뒤 나라에 힘을 바치려 했지만 늙은 어머니가 살아 계셔 떠날 수 없었다.

 

이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니 충성을 다할 대상은 오직 임금뿐이다.

 

담양 수령 이경린과 관찰사가 큰 의리를 깨우쳐 상중이라도 나라의 어려움을 위해 나서라고 했다.

 

나는 빈소를 떠나 전쟁에 나섰다.

 

내가 의지하는 것은 대장이 이미 오래전부터 군사를 일으켜 온갖 형세를 겪었고 군대를 움직이는 법과 계책을 쓰는 절도가 알맞다는 점이다.

 

빠뜨리는 계책이 없고 하는 일마다 때를 잃지 않는 대장과 마음을 합해 나라를 되찾지 않는다면 누구와 함께하겠는가.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는 누구나 갚아야 한다.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는 데 유학자와 승려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적이 지나간 곳에서는 절과 불상도 재앙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니 대장의 복수는 나라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힘과 기세를 합해 나라를 되찾을 기회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라건대 대장은 힘쓰고 또 힘써 주기 바란다.

 

따로 부탁할 몇 가지 일은 별지에 적었으니 살펴 시행해 주기 바란다.

도원수에게 올리는 글 — 김존경이 지음, 김덕령 명의

전라도 광주에서 어머니상을 당한 김덕령이 머리를 조아려 백 번 절하고 도원수 상국께 글을 올립니다.

 

임금과 부모의 원수와는 한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습니다.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적을 모두 없앤 뒤에야 그만두고 싶을 것입니다.

 

저는 상중에 몸을 묻고 있으면서도 적의 목을 매달아 바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오래전부터 분개해 왔습니다.

 

얼마 전 도 안의 장사들이 찾아와 “적이 날마다 날뛰는데 쓸어버릴 때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충신과 의사가 소매를 떨치고 공을 세울 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도 옳다고 생각했지만 상중이라 나서기 어렵다고 여겼습니다.

 

그때 담양 수령 이경린이 전투 장비를 마련하고 힘써 권했고 관찰사도 나라의 어려움을 구하라는 뜻으로 다시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끝내 피할 수 없어 나라를 위해 죽기로 스스로 정했습니다.

 

제가 왜 진작 작은 부대라도 맡아 작은 공을 세우지 않고 이제야 나섰는가 하면, 여든 된 늙은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늘 “네 형은 전쟁터에서 죽어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내가 의지할 사람은 너뿐이다. 네가 또 전쟁터에 있으면 내가 살아서는 누가 나를 먹여 살리고, 죽어서는 누가 장사 지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식 된 사사로운 정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이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장사까지 마쳤으니 이 몸 하나만 남았습니다.

 

비록 상중이라 해도 나라에 전쟁이 나면 상복을 벗고 나서는 일은 옛사람도 피하지 못했습니다.

 

어찌 사사로운 예에만 얽매여 나라의 어려움을 외면하겠습니까.

 

더구나 적이 이 도까지 밀려오면 부모가 살던 집과 부모의 무덤이 모두 오랑캐에게 더럽혀질 것입니다.

 

위로 나라를 위해서도 나서지 않을 수 없고, 아래로 사사로운 마음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나라가 당한 모욕을 씻고 신과 사람의 분함을 풀고자 했습니다.

 

군사를 일으킨 뒤 아침저녁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창을 베고 새벽을 기다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밥도 잊었습니다.

 

지금 도원수 상국께서는 바깥의 군사를 맡아 책임이 무겁고 백성의 생명을 맡아 도탄에서 구하려 하십니다.

 

저는 비록 보잘것없지만 전에 상국의 막하에서 일했습니다.

 

은혜가 이미 무겁고 의리도 깊습니다.

 

마음을 합해 나라의 어려움을 구하려면 상국을 의지하지 않고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사나운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적의 굴을 쳐 흉적을 조금이라도 없앨 수 있다면 모두 상국의 은혜입니다.

 

성공과 실패는 미리 헤아리지 않겠습니다.

 

죽은 뒤에야 그만두어 평소 뜻을 저버리지 않으려 합니다.

 

직접 나아가 아뢰는 것이 예에 맞으나 지금 군사를 정비하는 중이라 자리를 떠날 수 없어 친족 김극제를 보내 속마음을 전합니다.

 

아울러 여쭙는 몇 가지 조목을 올리니 부디 살펴 선택해 주십시오.

폐비 윤씨에 관한 기록과 성종의 전지

성종 때 정비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숙의 윤씨를 왕비로 올렸다. 윤씨는 연산군을 낳았다.

 

윤씨는 총애가 커지자 교만해지고 다른 후궁들을 심하게 시기했으며 임금에게도 불손했다.

 

어느 날 임금의 얼굴에 손톱자국이 생기자 인수대비가 크게 노했고 임금의 분노도 격해졌다.

 

대신 윤필상 등은 임금의 뜻에 맞추어 윤씨를 폐해 사가로 내보내자고 했다.

 

윤씨는 밤낮으로 울어 피눈물까지 흘렸다.

 

그러나 궁중에서는 윤씨를 헐뜯는 말이 더욱 많아졌다.

 

임금이 내시를 보내 윤씨의 모습을 살피게 하자 인수대비는 “윤씨는 머리를 빗고 화장하며 후회하는 기색도 없다”고 대답하게 했다.

 

그 말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져 죄가 더해졌다.

 

윤씨는 눈물을 닦아 피가 밴 수건을 어머니 신씨에게 주며 말했다.

 

“내 아들이 다행히 살아남거든 이것을 보여 내 억울함을 알려 주십시오. 또 나를 임금의 행차 길 곁에 묻어 수레가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바라보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건원릉으로 가는 길 왼쪽에 묻었다.

 

인수대비가 세상을 떠난 뒤 신씨는 궁인들과 몰래 연락해 연산군에게 생모 윤씨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호소하며 그 수건도 올렸다.

 

연산군은 그전까지 정현왕후를 친어머니로 알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슬퍼했다.

 

당시 기록을 본 뒤 폐비를 주장한 대신과 명을 수행한 사람들에게 분노해 죽은 사람까지 무덤을 파 시신을 베고 뼈를 부수어 바람에 날리게 했다.

 

연좌된 사람도 죽였고 이미 죽은 사람도 시신을 다시 베게 했다.

 

연산군은 효사묘를 세워 제사를 지내고 생모의 무덤을 회릉이라 높여 불렀다.

 

뒤에 어떤 홍문관 관원은 윤씨의 죄가 총애를 믿고 예를 잃은 정도였는데 대비의 미움과 궁중의 이간질로 임금의 분노가 격해졌고 대신들이 아첨해 바로잡지 않아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고 했다.

 

경상도 관찰사 손순효는 이 말을 듣고 비처럼 눈물을 흘리며 극력 간했지만 뒤의 화는 이미 막을 수 없었다.

 

성종이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며 내린 뜻은 대략 이러했다.

 

“폐비 윤씨는 성품이 본래 사납고 위험하며 거스르는 일을 많이 했다. 궁중에 있을 때 악행이 날로 심해 세 대비에게 순종하지 않았고 나에게도 흉악한 짓을 했다.

 

나를 업신여기고 종처럼 대했으며, 역대 왕실에서 어린 임금을 끼고 대비가 정권을 마음대로 한 일을 보고 기뻐했다.

 

늘 독약을 몸에 지니고 미워하는 사람을 없애려 했을 뿐 아니라 나에게도 해를 끼치려 했다.

 

이는 종묘와 사직에 관계된 큰 죄다.

 

그래도 차마 큰 의리로 단죄하지 못하고 서인으로 폐해 사가에 두었다.

 

그러나 원자가 자란 뒤의 화를 생각하면 그대로 둘 수 없다.

 

지금 결단하지 않고 머뭇거리다 나라의 일을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후회해도 늦고 내가 종묘와 사직의 죄인이 될 것이다.

 

이에 이달 십육일 사가에서 죽음을 내린다.

 

종묘와 사직을 위한 큰 계책이라 어쩔 수 없다.”

여러 장수와 술자리를 한 뒤 지은 시 — 풍중영

나그네가 시국을 걱정하며 문을 닫고 지내는데

원수가 몸소 찾아와 떠도는 나를 위로했네.

허공을 가르는 깃발은 구름빛을 흔들고

햇빛에 번뜩이는 칼과 창에는 서리가 어렸네.

군문을 맡은 명성은 옛 명장에 견줄 만하고

글로 적을 굴복시킨 값은 한나라 상여와 같네.

여러 공과 오늘 만난 것은 삼생의 큰 행운이니

부디 잊지 말고 짧은 편지라도 보내 주시게.

한가위에 매월정에 올라

하늘의 둥근 달은 얼음처럼 가득 차고

바람 앞 옥 같은 나뭇가지는 여위고 푸르다.

옛날 누각의 천 년 풍류를 떠올리고

오래 전 남은 향기를 마음에 품는다.

피리 소리로 변방 군사의 설움을 더하지 말라.

다듬이 소리는 고향 떠난 이의 슬픔을 재촉한다.

봉화가 오른 뒤의 세상이라 경치를 즐길 수 없으니

잔을 들고도 근심과 즐거움을 함께 잊지 못한다.

전라도 여러 고을을 왜적이 침범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판촌 홍 선생에게 올린 시

동쪽에서 온 봉화가 서울까지 어지럽혔건만

오직 이곳만은 옛 평온함을 지켜 보는구나.

어진 수령이 오로지 보장에 힘쓴 덕분에

승냥이와 범 같은 적도 함부로 다니지 못한다.

산마다 깃발빛이 초목을 물들이고

한 도에 노랫소리와 송사 소리가 다시 들린다.

부끄럽다, 나는 군사를 이끌고 바닷가를 두루 달렸지만

그 수고로 무슨 보탬이 되었던가.

이 제독에게 올림 — 유정

한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니 만 기병이 따르고

푸른 군막 깃발에는 붉은 비단옷이 비친다.

진평의 여섯 기책도 아직 다 쓰지 않았고

위강의 화친책으로 오랑캐를 달랠 수도 있다.

바닷가 오랑캐는 사나움을 믿고 날뛰지만

그대는 천하가 알아주는 영웅을 헤아리는 사람이다.

예부터 웃고 이야기하는 사이 봉후되는 일은 쉬웠으니

타고난 기골을 가진 사람에게 공을 다시 물을 것이랴.

우연히 읊다 — 유정

늙은 조개가 해를 가까이하는 것은 추위가 두려워서인데

들새는 무슨 일로 그토록 괴롭히는가.

굴을 떠난 몸은 진주를 품은 배가 상하고

모래톱에서 힘이 다해 푸른 깃마저 해졌다.

입을 닫기는 쉬워도 다시 열기는 어려운 줄 누가 알며

들어가기는 쉬워도 빠져나오기는 어려운 줄 누가 알았으랴.

일찍이 어부의 손에 함께 잡힐 줄 알았더라면

물과 구름 속에서 각자 편히 살았으리라.

꿈속에서 우연히 읊다 — 임전

오랑캐 왕의 머리를 베어 바친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은 세상에 드문 영웅이로다.

이름이 퍼지니 산악도 흔들리고

위엄이 떨치니 바다 물결도 잔잔해진다.

관문 밖에는 오랑캐 별이 떨어지고

하늘 가운데 한나라 해가 밝아진다.

신하와 백성이 뛰고 춤추며

천 리에 탄성 소리가 넘친다.

적벽 그림에 써서 명나라 장수에게 올림 — 이덕형

승패는 바둑 한 판처럼 분명하니

병법에서 가장 꺼리는 것은 망설임이다.

그해 적벽의 전대미문 공적도

장군이 책상을 칼로 내리친 그 순간에서 시작되었다.

한가롭게 살며 — 송익필

한가로이 걷다 앉는 것을 잊고, 앉으면 또 걷는 것을 잊네.

소나무 그늘에 말을 매고 물소리를 듣는다.

나보다 뒤에 온 몇 사람은 나보다 먼저 갔으니

저마다 머물 곳을 찾을 뿐 무엇을 다투랴.

 

가벼운 도롱이와 짧은 삿갓을 쓴 태평한 사람,

손수 거친 밭을 가꾼 지 사십 년.

이별 앞에 몇 줄 눈물을 흘리고 나니

소부와 허유 같은 은자도 결국 요임금의 백성이었음을 알겠네.

규방의 원망 — 최경창

봄바람이 막수의 집에 불어 들어오고

발이 천천히 걷히자 제비 그림자가 비스듬하다.

잠에서 깨어 거문고를 타니 향기로운 안개가 젖고

뜰 가득 푸른 복숭아꽃이 떨어진다.

 

다섯째 다리 머리에 안개 낀 버들이 비스듬하고

저녁 바람과 햇살은 더욱 맑고 따뜻하다.

열두 겹 비단발 안 사람은 옥 같은데

푸른 도포 입은 문신은 말에 몸을 맡긴 채 지나간다.

산사를 유람하며

낙엽이 산골짜기로 떨어지고

가을 소리가 말발굽에서 난다.

안개 너머 종소리를 듣고

달과 함께 절에서 묵는다.

한밤중 이슬 속 학이 울고

벼랑에는 만 길 무지개가 걸렸다.

마음이 맑아 한 꿈도 없이

물과 구름 속으로 생각이 잠긴다.

 

강가 옛집을 떠난 지 벌써 여섯 해,

대나무는 질서 없이 자라고 덩굴은 이리저리 얽혔다.

이웃집 채소로 밥을 짓고

쥐구멍 연기 밴 옷을 입는다.

아이들은 흰머리를 보고 놀라

밤 등불 아래 한참 들여다본다.

규방의 원망 — 허씨

비단 띠와 치마에는 눈물 자국이 쌓이고

한 해 내내 푸른 풀을 보며 떠난 님을 원망한다.

옥쟁으로 강남의 곡을 다 타고 나니

비가 배꽃을 때리고 낮에도 문을 닫는다.

 

제비가 비스듬한 처마를 스치며 짝지어 날고

떨어지는 꽃잎이 어지럽게 비단옷에 날린다.

깊은 방에 봄을 아파하는 마음 끝이 없는데

강남의 풀은 푸르고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둘째 형의 위로 시에 차운하다

가을 시름이 한층 더 깊어 병이 되었고

풀빛이 하늘에 닿도록 이별 한이 많다.

녹의를 읊고 나니 다시 나 자신이 가엾어

어찌 근심과 즐거움으로 하늘의 조화를 어지럽히랴.

등불 아래

베틀에서 짠 흰 천을 칼로 자르고

추위를 막을 옷을 꿰매며 손을 자꾸 호호 분다.

등불 곁에서 옥비녀를 비스듬히 뽑아

붉은 불꽃을 돋우며 날아든 나방을 살려 준다.

둘째 형이 회산 수령으로 좌천되었다는 말을 듣고

병중에 임명장이 하늘에서 내려왔으나

한 고을은 멀리 장기 낀 구름 끝이로구나.

한 문제는 초 회왕과 같은 임금이 아닌데

어찌해 상수 가로 젊은이를 귀양 보내는가.

 

한 고을 수령 자리라면 늙은 어머니를 모실 수 있으니

서울을 떠나는 새벽 이별 눈물은 거두시게.

이제 옥당에는 바른말할 사람이 없으니

밤중에 임금 앞자리로 다시 불려갈 사람이 누구인가.

단보가 산방에서 글 읽는 데 부치다

구름은 높은 봉우리에서 연꽃처럼 피어오르고

옥나무 선 붉은 벼랑에는 이슬 기운이 짙다.

판각에서 범패가 그치자 승려는 선정에 들고

강당의 재가 끝나자 학은 소나무로 돌아간다.

덩굴은 옛 벽을 감고 산귀신이 울며

안개 낀 가을 못에는 촛불 같은 용이 누웠다.

밤이 되면 돌평상에 향등이 밝고

동쪽 숲 달 없는 어둠 속 성긴 종소리가 들린다.

둘째 형이 함경도에서 보내온 시에 차운하다

높은 누대 한 기둥이 험한 산을 누르고

서북쪽 뜬구름은 변방에 잇닿는다.

철령의 옛 패업 자리에서는 용이 이미 떠났고

왕릉의 가을빛 위로 매가 처음 지나간다.

산줄기는 큰 들판으로 이어져 세 고을을 감싸고

물은 평원을 갈라 아홉 강을 받아들인다.

만 리 먼 곳에 올라 바라보니 해가 저물어

긴 칼에 기대 취한 채 홀로 슬픈 노래 부른다.

 

높고 험한 잔도는 구름 끝에 닿고

봉우리는 하늘을 찔러 은하에 솟은 듯하다.

산맥은 북쪽에서 세 물줄기에 막히고

땅의 형세는 서쪽으로 아홉 강을 누른다.

저녁 연진이 걷히니 외로운 성이 드러나고

가을 자운영 살찐 들에는 말들이 기세 좋다.

동쪽 수루를 바라보니 북소리 급한데

변방의 오랑캐 기운은 어느 날 사라질까.

단보가 산사에서 공부하며 보내다

초승달이 동쪽 숲 위로 솟고

절 종소리는 산전의 그늘에 번진다.

높은 바람에 잎이 처음 떨어지고

비가 잦아 돌아갈 마음도 이루지 못한다.

산과 바다에서 맺은 약속은 멀고

강호의 술병은 깊어만 간다.

함경도에서 돌아오는 기러기도 드문데

어디에서 답장을 얻을 수 있을까.

둘째 형이 갑산으로 귀양 갔다는 말을 듣고

멀리 갑산으로 귀양 가는 나그네여

함경도 길 떠나는 행색이 바쁘구나.

신하는 가의와 같지만

임금은 어찌 초 회왕과 같겠는가.

강물은 가을 언덕과 나란히 평평하고

관문에는 저녁 해가 지려 한다.

서리 바람에 기러기 날아가다

가운데서 끊겨 줄을 이루지 못한다.

명나라 황제의 칙서

황제가 행인사 행인 설번을 보내 조선 국왕에게 칙유한다.

 

너희 나라는 대대로 동쪽의 번국을 지키며 늘 공손함을 다했고, 의관과 문물이 갖추어져 즐거운 나라라 불려 왔다.

 

그런데 요즘 왜적이 날뛰어 크게 침략하고 왕성을 함락시키며 평양을 점령해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먼 곳과 가까운 곳이 모두 소란하다고 들었다.

 

국왕은 서쪽 바닷가로 피하고 들판을 떠돌게 되었다.

 

이처럼 나라가 무너진 일을 생각하니 짐의 마음도 측은하다.

 

전에 급한 소식을 전해 듣고 이미 변경의 신하에게 명해 군사를 보내 구원하게 했다.

 

이제 특별히 행인사의 관원에게 칙서를 들려 보내 국왕에게 알린다.

 

국왕은 조상이 대대로 전한 나라를 생각해야 한다. 어찌 하루아침에 가볍게 버릴 수 있겠는가.

 

빨리 치욕을 씻고 흉적을 없애 힘써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

 

또 나라의 문무 신하와 종친에게도 알려 각자 임금에게 보답하는 마음을 굳게 하고 복수의 큰 의리를 떨치게 하라.

 

짐은 이제 문무 대신 두 사람에게 요양 여러 진의 정예병 십만을 거느려 가서 적을 치게 했다.

 

조선군과 앞뒤에서 협공하여 흉적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한 명도 남기지 않게 하라.

 

짐은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중국과 오랑캐를 함께 다스린다.

 

지금 만국은 모두 평안하고 사방 바다는 조용한데 저 작은 무리가 감히 날뛴다.

 

또 동남 바닷가 여러 진에 명해 유구와 섬라 등에도 알려 수십만의 병선이 일본으로 곧장 가서 소굴을 치도록 했다.

 

큰 적을 죽여 바다를 평안하게 만들 수 있다면 벼슬과 상을 어찌 아끼겠는가.

 

조상이 전한 강토를 되찾는 것이 큰 효이고, 임금과 부모의 환난을 급히 구하는 것이 지극한 충성이다.

 

조선의 군신은 본래 예와 의를 아는 사람들이니 반드시 짐의 뜻을 받들어 옛 땅을 되찾을 것이다.

 

국왕이 승리를 아뢰며 서울로 돌아가고, 종묘와 사직을 길이 지켜 동쪽 울타리가 되게 하라.

 

먼 나라를 불쌍히 여기고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짐의 뜻을 위로하기 바란다.

 

삼가 힘쓰라.

명나라 장수와 왜군이 주고받은 문답

명나라 장수가 찾아온 왜군에게 물었다.

 

“조선에 무슨 죄가 있기에 일본이 감히 군사를 일으켜 그 땅과 선량한 백성을 침범했는가?”

 

왜군이 대답했다.

 

“조선이 예전에 대마도를 토벌했고, 또 신하를 일본에 보내 조공하게 했는데 반년이나 머문 뒤에도 다시 조공하지 않고 사람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 것입니다.”

 

명나라 장수가 말했다.

 

“대동강 동쪽은 모두 조선 땅이다. 그러나 네가 대동강 서쪽을 침범해 의주까지 온 곳은 본래 명나라의 땅으로, 명나라가 조선 국왕에게 대신 다스리게 한 곳이다.

 

그래서 명나라 사신이 오면 국왕이 반드시 평양까지 나와 맞이했고, 길가 객사에는 명나라 사신들이 남긴 시와 글이 판에 새겨져 있다. 너희는 보지 못했느냐?

 

또 양 총관이 전에 군사 천 명을 보내 정탐하게 했을 때 너희는 어찌 감히 공격했느냐?”

 

왜군이 대답했다.

 

“그때 비가 내리는 가운데 요동 군사가 성문으로 들이닥치며 문을 지키던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맞서 싸웠을 뿐, 정탐하러 온 군사인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명나라 장수가 물었다.

 

“성 안에 너희는 몇 명이나 있느냐?”

 

왜군이 대답했다.

 

“다섯 명입니다.”

 

명나라 장수가 말했다.

 

“그들의 이름을 써라.”

 

왜군이 대답했다.

 

“이름은 모르고 직책만 압니다. 고산, 대촌, 오도, 평사송포, 소서덕사랑 대장입니다.”

 

명나라 장수가 다시 물었다.

 

“왕성에는 누가 있느냐?”

 

왜군이 대답했다.

 

“관백의 손자 전팔랑이 있습니다. 신분은 높지만 실제 일을 전적으로 처리하는 사람은 소서행장입니다. 요즘 여러 곳에 흩어진 군사를 모아 성을 지키려 하고, 성 안 군사들은 의주까지 내려가려 합니다.”

 

명나라 장수가 말했다.

 

“내가 이제 황제께 보고해 두 나라의 군사를 멈추게 하겠다. 너희가 전에 풀을 베던 곳까지는 괜찮지만 십 리 밖으로는 나오지 말라. 나도 명나라 군사와 조선 군사에게 풀을 베는 왜군을 죽이지 말라고 하겠다. 황제의 명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라.”

 

이 말은 역관 진효남이 전해 주었다.

허의준이 올린 보고

기밀한 일을 아뢰는 허의준 등이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고자 말씀드립니다.

 

저희는 신미년에 광동을 지나다가 탄 배가 잇달아 왜적에게 붙잡혔습니다. 다행히 작은 재주 때문에 일본 사쓰마의 군주에게 사랑을 받아 겨우 목숨을 보전했습니다.

 

저희는 늘 불량한 자들이 왜적을 끌어들여 명나라의 상선과 어선을 약탈하고 사람과 물건을 빼앗아 사고팔며 온갖 고통을 주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습니다.

 

을유년에 함께 의논해 사쓰마 군주에게 호소했고 진화오, 전소봉 등 우두머리 열여 명을 죽이고 그들의 처자도 몰수하게 했습니다. 남은 도적들은 동포채, 섬라, 여송 등으로 달아났습니다.

 

정해년에는 관백이 사쓰마와 히젠을 공격했습니다. 저희도 몰래 적의 배를 내보냈고 사쓰마 군주를 따라 관백을 알현했습니다.

 

목숨을 무릅쓰고 울며 호소하자 관백은 달아난 적 우두머리 둘을 잡아 죽이라고 명했지만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 뒤 바다는 비교적 평온해졌습니다.

 

그런데 관백이 다시 침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저희는 앉으나 누우나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마침 정탐선이 찾아왔습니다. 이는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일입니다.

 

일본에 오래 산 중국인들은 대부분 옛 해적 무리라 진실을 말해 줄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또 시장과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은 나라의 큰일을 잘 알지 못하므로 정확한 말을 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무릅쓰고 구월 초사흘 일본의 사정을 조목조목 적어 히라도로 가는 배 주인에게 맡겨 관청에 전달하게 했습니다.

 

길이 멀고 바다가 넓어 제대로 도착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구월 초이레 다시 확실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내년에 조선을 건너 요동을 치고 북경성을 빼앗으려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조목별로 적어 구월 초아흐렛날 새로 떠나는 배 주인에게 맡겨 관청으로 보내게 했습니다. 이 또한 제대로 도착했는지 알 수 없어 밤낮으로 걱정하며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했습니다.

 

다행히 주균왕이 충성심이 매우 깊고 의로운 마음이 강해 스스로 몸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겠다며 이 보고서를 직접 가지고 올라가 알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세한 내용을 다시 갖추어 아룁니다.

 

구월 스무닷샛날에는 여러 나라가 출병하기를 원하지 않아 사쓰마의 군주와 신하들이 몰래 도카이도 사람들과 손잡고 함께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의논한다고 들었습니다.

 

일이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한 나라라도 관백에게 반기를 들면 침략군은 출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일은 확실히 헤아리기 어려우니 미리 마음을 써서 막아야 합니다.

 

부디 황제께 아뢰어 임금은 그들의 약점을 알고 걱정을 덜며, 신하는 그 약점을 미리 알고 대비하게 하신다면 나라에 큰 다행이고 백성에게도 큰 다행일 것입니다.

 

삼가 두려운 마음으로 아래에 자세히 적습니다.

일본의 자세한 사정

일본은 예순여섯 나라로 나뉘어 있는데 명나라의 예순여섯 부와 비슷합니다.

 

호구와 재정 전체를 따져도 명나라 열 개 부의 규모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본래 천황이 있어 대대로 이어지지만 정사에는 거의 관여하지 못합니다.

 

한나라 말기처럼 여러 나라가 각자 형세 좋은 땅을 차지하고 서로 치고 빼앗습니다.

 

아이가 열 살쯤 되면 칼과 활을 배우고 명나라 글도 배웁니다.

 

사서, 주역, 고문, 병법, 당시, 자치통감, 잡기 같은 책을 배우지만 배워도 글의 이치를 제대로 통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병으로 죽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전쟁터에서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깁니다.

 

평소 자제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열 살에 죽으나 백 살에 죽으나 한 번 죽는 것은 같다. 차라리 적을 죽이다 죽을지언정 물러나 살아서는 안 된다.”

 

짧은 옷과 짧은 소매를 입고 맨발로 다니며 머리를 깎고, 긴 칼과 짧은 칼을 늘 몸에 지닙니다.

 

조총과 활쏘기로 돈을 걸어 겨루는 일을 도박이라 하고, 활을 쏘거나 무거운 짐을 지는 일을 신에게 소원을 비는 경기로 삼기도 합니다.

 

나라를 지킬 때에는 높은 산에 성을 쌓고 못을 파 해자로 만듭니다.

 

적이 오면 양식이 있는 사람은 성으로 올라가 지키고, 양식이 없는 사람은 버려 두어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를 칠 때에는 각자 자기 군사와 양식을 마련합니다.

 

장수는 뒤에 있고 군사는 앞에 세웁니다.

 

복병을 쓰는 데는 능하지만 일부러 패하는 척하는 계책은 잘 모릅니다.

 

깃발을 많이 세워 적의 기세를 누르려 하며 한 병사가 깃발 열 개를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괴한 모습으로 치장해 적을 놀라게 하고 소머리나 귀신 얼굴 같은 것을 쓰기도 합니다.

 

이기면 뒤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추격하며, 지면 겁을 먹고 어지럽게 달아납니다.

 

이겼을 때 뒤의 패배를 생각하지 않고, 패했을 때 다시 싸울 생각도 잘하지 않습니다.

 

육지 싸움에는 강하지만 수전에는 약하고 화공도 잘 모릅니다.

 

장수에게 정해진 군사 수가 없고 군사에게도 한 달 넘게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나라를 비우다시피 군사를 내보내면서 뒤에서 공격받을 화를 생각하지 않고,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 원정하면서 지친 적을 기다려 치는 계책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돈을 뿌려 이간질하는 계책을 잘 쓰며, 승리하면 전에 준 것까지 빼앗습니다.

 

함께 살고 함께 죽겠다고 맹세하는 일도 잘하지만 이익을 얻으면 그 약속을 잊습니다.

 

거짓 화친과 거짓 맹세로 적국을 무너뜨리는 데 능하고, 성을 둘러싸고 토성을 쌓아 적성을 함락시키는 데도 익숙합니다.

 

겉으로 어질고 의로운 척하지만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법은 크고 작은 죄를 가리지 않고 아주 작은 죄에도 목을 베는 일이 있습니다.

 

금이 많아 나라는 부유하지만 백성을 가혹하게 쥐어짭니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빠른 공격이고 가장 좋아하는 것은 싸움을 오래 끄는 것입니다.

 

싸움이 급하면 손쓸 겨를이 없지만 싸움이 느려지면 여유를 얻어 위세를 기릅니다.

 

사쓰마와 관동 사람들은 강직하고 싸움을 잘하며, 교토와 기나이 사람들은 부드럽고 간사하며 계책에 능합니다.

 

적이 적으면 기세가 배로 오르고 적이 많으면 스스로 위축됩니다.

 

싸우기는 해도 제대로 된 진법이 없고 죽이기는 잘해도 절제가 없습니다.

 

허세를 크게 부려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

 

만 명이 싸울 수 있다고 큰소리쳐도 실제로 싸울 수 있는 군사는 오천도 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배는 더욱 불편합니다.

 

면은 넓고 밑은 뾰족해 흔들리기 쉽고, 무게가 조금만 한쪽으로 치우쳐도 기울어 뒤집히려 합니다.

 

빨리 달리기도 어렵고 안정되게 서 있기도 어려워 공격하기 쉽습니다.

 

그들은 명나라를 대당이라 부르고 명나라 사람을 당인이라 부릅니다.

 

일본에 오래 산 중국인은 구당인이라 부릅니다.

 

이는 당나라의 위엄과 명령이 오랫동안 오랑캐 땅에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요순과 문왕·무왕, 진시황, 한고조, 항우, 한신과 장량 등의 옛일을 말합니다.

 

옷과 말은 화려하고 거창하지만 실속은 적습니다.

 

싸우기 전에는 모두 큰소리를 잘 치지만 실제 전투에 들어가면 저마다 마음속으로 겁을 냅니다.

 

싸우기 전에는 죽음을 가볍게 말하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저마다 살길을 찾습니다.

 

명나라는 이런 사정을 장수와 군사들에게 널리 알려 모두가 그 약점을 알고 대비하게 해야 합니다.

일본이 침략하려 한 까닭

관백은 여러 나라를 병합했지만 관동만 아직 완전히 복종시키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유월 초여드렛날 여러 제후를 궁전 앞에 모으고 장수에게 군사 십만을 주어 관동을 치게 했습니다.

 

성을 사방으로 겹겹이 포위하고 작은 성을 둘러 쌓아 지키게 했습니다.

 

관백은 곧 바다를 건너 명나라를 침략하겠다며 히젠 수령에게 배를 만들라고 명했습니다.

 

열흘 뒤 유구에서 승려를 보내 조공하자 금 백 냥을 주며 말했습니다.

 

“내가 멀리 명나라를 정벌하려 하니 유구는 길잡이가 되라.”

 

이어 예전 해적 무리에게 명나라 사정을 물었습니다.

 

그들은 “명나라 사람들은 일본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합니다. 명나라를 깨뜨리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쉽습니다”라고 과장했습니다.

 

관백은 말했습니다.

 

“내 지혜로 내 군사를 움직이면 큰물이 모래를 무너뜨리고 날카로운 칼이 대나무를 쪼개듯 할 것이다. 무너뜨리지 못할 성이 어디 있고 멸망시키지 못할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내가 명나라 황제가 될 수도 있다. 다만 수군의 방비가 엄해 명나라 땅에 발을 들이지 못할까 그것만 걱정된다.”

 

오월에는 조선의 조공선이 교토에 들어왔는데 유구에 했던 말과 비슷한 부탁을 하고 금 사백 냥을 주었다고 합니다.

 

조선이 일본에 조공한 것은 지난해 오월부터였다고 합니다.

 

칠월에는 광동 쪽의 서양 사람이 명나라 지도 한 폭과 지리도 한 폭, 개 만 마리, 큰 말 한 필, 비단과 향, 보물 등 은 오만 냥이 넘는 물건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뒤에 사쓰마로 내려갈 때 길에서 그를 만났다고 하는데 무슨 부탁을 주고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희는 관백이 명나라를 치겠다는 큰소리를 하는 것이 여러 나라 장정의 사기를 높이고 주변을 겁주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여러 나라 군사를 멀리 내보낸 뒤 뒤를 습격해 나라를 없애고 자기 군현으로 만들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팔월에 관동을 평정한 뒤 실제 침략을 준비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번 가을 칠월 초하루에는 조선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볼모로 삼게 했다고 합니다.

 

지난달 초이레에는 명령서가 사쓰마에 도착해 사쓰마에 군사 삼만과 대장 두 명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조선에 도착하면 여러 나라에서 모두 오십여 만을 모으고 관백 자신도 오십만을 거느려 모두 백만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대장 백쉰 명, 전마 오만 필, 큰 괭이 오만 자루, 베는 칼 십만, 긴 창 십만, 큰 칼 십만, 쇠도끼 십만, 긴 칼 오십만, 조총 삼십만을 준비하고 사람마다 세 자 길이의 긴 칼을 차게 했다고 합니다.

 

다음 해 임진년 봄까지 군사를 일으키고 관백은 삼월 초하루 배를 점검한다고 합니다.

 

사쓰마 군주는 본래 명나라를 존중해 관백도 그의 뜻을 조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쓰마 군주의 아우 무고에게 군사를 거느리게 했습니다.

 

사쓰마의 재상 행간도 본래 명나라를 공경하고 두려워해 군사를 빼 몰래 여송이나 담수 등으로 달아나 전쟁 결과를 지켜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드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이제는 모두 무고와 함께 출병하게 되었습니다.

 

무고는 본래 가난하고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사쓰마 군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데는 익숙하지만 계책이 부족하고, 군사는 있어도 식량은 넉넉하지 않습니다.

 

이런 약점을 낱낱이 기록해 대비한다면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왜적을 막는 방책

조선은 작은 나라이고 일본 대마도와는 약 삼백 리 떨어져 있으며 사이에 큰 바다가 있습니다.

 

바닷길로 이틀이고 순풍이면 하루 만에도 건널 수 있습니다.

 

명나라를 위해 생각한다면 충성스럽고 지혜와 계책이 있는 사람에게 훈련된 정예병 이백만이나 삼백만을 거느리게 해 조선에 주둔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조선 땅에 들어온 적의 우두머리를 모조리 없애고 따르지 않는 자도 토벌하며, 큰 군사를 조선의 좌우와 사방에 매복시켜야 합니다.

 

조선 사람 가운데 명나라와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을 조선 관리처럼 꾸며 적을 깊은 포위망 안으로 유인한 뒤 사방에서 포성을 신호로 삼아 공격해 죽이는 것입니다.

 

산동과 요동에서도 각각 오십만 군사를 내어 연기와 포성을 신호로 적의 뒤를 치고, 수군과 육군이 함께 밤낮으로 공격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왜군은 배불리 먹을 겨를도 없고 조선 안에서 호응해 줄 세력도 얻지 못하며, 멀리 들어와 뒤에 지원군도 없고 수전과 화공에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긴 칼과 조총도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이니 대장을 모두 죽이고 관백까지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왜군 백만도 갑옷 한 조각 남기지 못하고 돌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편안한 군대로 지친 군사를 기다리고, 주인이 손님을 기다리는 형세입니다.

 

“적의 기세가 한창 날카로워 지금 치기 어렵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멀리 원정해 지친 군사가 어찌 참으로 날카롭겠습니까.

 

오히려 그들이 진영을 세우고 주둔하며 무기를 정비하도록 시간을 주면 치기 어려워집니다.

 

또 좋은 장수를 따로 보내 군사 오십만을 거느리고 요동에서 훈련하게 해 지원군으로 삼아야 합니다.

 

황제의 금을 군중에 내걸고 상으로 보여 사람들에게 이익을 보게 해 죽기를 각오하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전쟁이 급한 때에는 평상시의 원칙만 고집해서는 안 되고 상황에 맞게 권도도 써야 합니다.

 

광서의 낭가병은 매우 용맹하니 불러 쓸 수 있습니다.

 

왜군의 마음은 일정하지 않아 여러 길로 나누어 진격할 수도 있습니다.

 

서경에서 산동·절강·복건·광동에 이르는 바닷가에서는 모두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하고 전선을 많이 마련해 막아야 완전할 것입니다.

 

적에게 식량과 물자를 대주는 일도 엄하게 막아야 합니다.

 

바닷가 백성을 옮겨 적이 사람과 물자를 이용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왜군이 명나라 땅에 발을 들이면 한순간도 멈추지 말고 곧바로 빠르게 공격해 밤낮없이 함께 쳐야 완전히 이길 수 있습니다.

 

앉아서 계책만 의논하며 적의 위세가 커질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만일 왜군이 성 아래에 이르면 구원군은 성 밖에 다시 토성을 쌓아 적을 에워싸고 겹겹이 성과 못을 만들며 조총과 화포로 공격해야 합니다.

 

안팎에서 협공하면 이기지 못할 리 없습니다.

 

성 안에서 앉아 지키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래 끌면 위험해집니다.

 

배를 막고 곡식의 유통을 모두 끊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배와 곡식을 모두 막으면 백성이 먼저 굶어 죽고 나라 안이 스스로 어지러워집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적을 막겠습니까.

 

또 성벽 밑을 파는 적의 술책도 조심해야 합니다.

 

관백은 싸울 때마다 먼저 금을 보내 화친을 사려는 척하고 군사를 십 리 밖에 두며 밤마다 흙으로 작은 보루를 쌓습니다.

 

군사가 안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밤마다 조금씩 성을 더 가까이 쌓아 오늘보다 내일 더 다가옵니다.

 

높은 보루를 만들어 성 안의 허실을 살피고 높은 곳에서 조총을 쏘며 땅굴을 파 성벽 밑을 무너뜨립니다.

 

또 많은 황금을 주어 성 안에서 호응할 사람을 사거나 온갖 간사한 계책을 씁니다.

 

성을 얻고 나면 전에 준 금을 다시 빼앗고 사람도 죽입니다.

 

이런 약점을 미리 알고 그 계책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일본에서 장수가 되는 사람은 대부분 부유하고 귀한 집 자제로 고생을 견디지 못합니다. 명나라로 치면 글만 읽던 선비와 같습니다.

 

참된 재주와 능력을 가진 사람은 백 명 가운데 하나도 드뭅니다.

 

다만 함부로 죽이고 겁내지 않는 데 익숙할 뿐입니다.

 

또 군사가 전쟁할 때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만 고집해서도 안 됩니다.

 

장수에게는 절제가 필요하지만 일본 병사들은 술을 담력으로 삼습니다.

 

싸움에 앞서 한 번 취하면 기세가 배로 오르고 목숨을 잊습니다.

 

이 점도 그들을 상대할 때 알아야 합니다.

 

저희는 직접 달려가 보고하고 싶지만 곁을 떠날 수 없고 아내와 자식의 짐도 무겁습니다.

 

명나라 조정에서 저희의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살피지 않고 갑자기 큰 죄를 내릴까 두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 조각 충성심도 알려지지 않은 채 헛되이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가지 못하고 이 글을 올리니 깊이 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관백이 권력을 잡은 경위

관백은 명나라로 치면 대장군과 같은 높은 칭호로, 천황을 끼고 여러 제후 위에 서서 교토를 제멋대로 장악한 사람입니다.

 

지금의 관백은 처음에는 평민 집의 종으로 땔나무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길에서 당시 관백을 만났을 때 좌우 사람들이 죽이려 했으나 관백이 살려 주고 써 주었습니다.

 

앞 부대의 칼 쓰는 군사가 되어 이웃 나라 전쟁에 나가 적의 목을 베어 공을 세웠습니다.

 

관백이 기뻐해 기노시타라는 성을 주고 도키치로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는 늘 아첨으로 관백을 섬겼고 여러 번 출전해 공을 세웠습니다.

 

관백은 그를 대장과 재상 일을 겸하는 자리에 올리고 다시 하시바라는 성을 주었습니다.

 

이듬해에는 마침내 전 관백을 죽이고 그 아들을 내쫓은 뒤 스스로 관백을 칭했습니다.

 

처음의 도키치로가 지금의 관백입니다.

 

동쪽과 서쪽을 정벌해 일본 여러 나라를 합쳤지만 모든 싸움에서 정면으로 이긴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달콤한 말과 큰소리, 황금과 속임수로 얻은 것입니다.

 

지난해 십일월에는 아우가 죽고 올해 칠월에는 아들도 죽어 안팎에 가까운 친족이 거의 없고 자신 하나만 남았다고 합니다.

 

명나라가 왜군을 모두 죽인 뒤 승리한 군사 오십만을 바로 일본으로 보내면 일본군은 간담이 서늘해져 손을 묶고 사로잡히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앞에서는 치고 뒤에서는 항복을 받아들이며 나아간다면 몇 달 안에 일본 여러 나라를 모두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일본 예순여섯 나라의 이름

일본은 기나이와 여러 길로 나뉩니다.

 

기나이에는 야마시로, 야마토, 가와치, 이즈미, 셋쓰가 있습니다.

 

도카이도에는 이가, 이세, 시마, 오와리, 미카와, 도토미, 스루가, 이즈, 가이, 사가미, 무사시, 아와, 가즈사, 시모사, 히타치가 있습니다.

 

도산도에는 오미, 미노, 히다, 시나노, 고즈케, 시모쓰케, 무쓰, 데와가 있습니다.

 

호쿠리쿠도에는 와카사, 에치젠, 가가, 노토, 엣추, 에치고, 사도가 있습니다.

 

산인도에는 단바, 단고, 다지마, 이나바, 호키, 이즈모, 이와미, 오키가 있습니다.

 

산요도에는 하리마, 미마사카, 비젠, 빗추, 빈고, 아키, 스오, 나가토가 있습니다.

 

난카이도에는 기이, 아와지, 아와, 사누키, 이요, 도사가 있습니다.

 

사이카이도에는 지쿠젠, 지쿠고, 부젠, 분고, 히젠, 히고, 휴가, 오스미, 사쓰마가 있습니다.

 

그 밖의 여러 섬은 이 수에 넣지 않았습니다.

 

대마도와 이키는 조선과 가까워 늘 왕래하고, 나가사키·히라도·고토·다네가시마·나나시마 등은 유구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대체로 일본 사람의 용맹은 명나라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고 지혜와 생각은 명나라 사람에게 훨씬 미치지 못하며, 창과 칼도 명나라 것과 같은데 쓰는 법은 오히려 훨씬 못하다고 했습니다.

 

다만 무기를 정교하게 만들고 늘 갈아 두는 데 힘쓸 뿐이므로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면 늘 이길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만력 십구년 구월, 사정을 아뢰는 허의준과 곽국수, 나라에 보답하려는 주균왕이 아직 다 말하지 못한 일을 더 적어 나라에 보답하려는 정성을 다한다고 했습니다.

 

산속 초야의 선비와 바닷가에서 소금과 물고기를 다루는 사람이라 글의 차례와 문장은 서툴지만, 그 마음만은 천지와 귀신에게 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관백의 포악함이 걸과 주보다 심하고 계책이 끝없이 변해 속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관백은 여러 나라에 히젠·이키·대마도 세 곳에 성을 쌓게 해 바다를 건너는 역참으로 삼았습니다.

 

대마도 수령에게는 상인으로 꾸민 사람들을 조선에 보내 지형을 살피게 했습니다.

 

십월 스무날 돌아온 보고에는 조선 국왕이 군사를 진격해 스무 날 거리에서 관백을 기다리고 있으나 나라 안에서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많고 대마도 가까운 한 고을 사람만 왔으므로 공격하면 쉽게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십일월 십팔일에는 문서를 여러 나라에 돌려 각자 삼 년치 양식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먼저 조선을 정벌하고 일본 백성을 조선 땅으로 옮겨 농사짓게 해 명나라를 공격할 근거지로 삼으려 했습니다.

 

관백은 “명나라 한 고을만 얻어도 일본이 얻는 것이다. 그러면 명나라 천하는 내 소매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우물 안에서 하늘을 헤아리는 무지한 말이라 우스운 일입니다.

 

또 여러 나라 군사가 조선 해안에 도착하면 배를 불태우고 솥을 깨뜨려 돌아갈 생각을 끊게 했습니다.

 

낮에는 조선을 공격하고 밤에는 성을 쌓으며 사람을 약탈하거나 재물을 빼앗지 못하게 했습니다.

 

성을 쌓거나 싸우는 사람은 잠깐도 멈추지 말고 지푸라기 하나도 줍지 못하게 했으며 황금이 있어도 돌아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전투에서는 한 사람도 뒤를 돌아보거나 입을 열고 발을 멈추지 못하게 했습니다.

 

산을 만나면 산으로, 물을 만나면 물로, 함정을 만나면 함정으로 그대로 전진하게 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다 죽은 사람의 집안은 남겨 두지만 뒤로 물러나 살아남은 사람은 왕후장상이라도 목을 베어 사람들에게 보이고 그 집안까지 없애겠다고 했습니다.

 

법령이 이처럼 엄했습니다.

 

십이월에는 억지로 분고의 왕비를 빼앗아 첩으로 삼았고, 사이카이도 아홉 나라를 선봉으로 세우고 난카이도 여섯 나라와 산요도 여덟 나라가 뒤따르게 했습니다.

 

나라의 힘을 모두 내어 출병하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 형제 가운데 한 사람도 집에 남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나라가 “이 원정은 명나라를 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군사를 멀리 보낸 뒤 우리 뒤를 습격해 집안을 없애려는 것”이라 의심하고 몰래 반란을 의논했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반란이 성공하면 침략도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명나라가 충성스럽고 용맹한 사람에게 많은 정예병을 거느리게 해 먼저 조선에 도착해 맞아 싸우면 됩니다.

 

스스로 겁을 먹고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왜군에게 특별한 능력은 거의 없고 관백 한 사람만 사납고 용맹할 뿐인데 그것도 맨손으로 범을 잡고 걸어서 강을 건너려는 무모한 용기에 가깝습니다.

 

명나라가 그 약점을 알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밤낮으로 앞뒤에서 공격하고, 오늘 장수와 군사를 더하고 내일 또 더하며, 상금을 내걸어 지원군이 벌떼처럼 몰려오게 하면 우리 군사의 기세는 강해지고 적의 기세는 약해질 것입니다.

 

첫 진영 하나만 깨뜨리면 왜군 백 진영이 모두 무너질 수 있고 왜군을 모두 없애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관백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부디 보잘것없는 사람의 말이라도 굽어 살펴 깊이 생각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조선기 — 여응종

동방에는 처음에 임금이 없었다.

 

신인이 태백산 박달나무에 내려오자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삼아 단군이라 불렀다. 요임금과 같은 시대라고 한다.

 

천여 년을 지나 주나라가 기자를 이 땅에 봉했다.

 

그 뒤 한 번 변해 고려가 되고 다시 변해 조선이 되어 명나라에 신하로 섬겼다.

 

제도와 문물은 중국을 본받아 작은 중국이라 불렸고 옛 제도를 많이 숭상했다.

 

백성은 부드럽고 약하며 예와 의 두 글자로 나라를 세웠다.

 

도읍은 세 곳을 꼽을 수 있다.

 

평양에서는 기자의 정전 터와 무덤을 볼 수 있고, 개성에서는 만월대와 장춘전을 찾을 수 있으며, 한양에서는 금빛 궁전과 누대와 정자를 볼 수 있다.

 

팔도 가운데 경기는 풍속이 화려하고, 평안도는 들이 넓고 기름지며, 황해도는 백성이 부지런하고 검소하다.

 

충청도는 강산이 맑고 아름다우며, 경상도는 산천이 웅장하고, 강원도는 바위와 골짜기와 시내가 특히 뛰어나다.

 

함경도는 북쪽 끝에 가까워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 곳이 있고, 전라도는 남쪽 끝과 맞닿아 인물이 가장 많다.

 

백악, 목멱, 송악, 구월산, 백두산, 철령, 두류산, 향산 같은 명산이 있고 여러 큰 강과 바다가 있다.

 

인재로는 최치원, 안향, 강감찬, 김유신, 권근, 우탁, 설총, 정몽주와 김굉필, 이언적, 정여창, 조광조, 이황, 조식 등이 학문으로 동방의 도맥을 이어 왔다.

 

요즘 인물로는 유성룡의 충성스럽고 강개한 기상, 이덕형의 젊고 날카로운 재주, 유근의 고아한 품격, 한응인의 풍도, 유홍과 정철의 한결같은 마음, 박진의 나라만 알고 자신을 잊는 태도, 임흘의 뛰어난 문무, 위덕의의 험한 곳을 달리는 능력, 김영남의 군량을 주선하는 재주를 들었다.

 

공린상, 신경진, 이항복, 이산보, 윤근수, 신식 등도 이름난 사람이라고 했다.

 

이는 글쓴이가 아는 사람만 든 것이며 뒤에 더 알게 되면 따로 적겠다고 했다.

 

임금 선조는 문장이 빛나고 마음을 비워 선비를 예로 대하는 군주라고 평했다.

 

조선의 지형은 험해 함곡관, 장강, 검각보다 못하지 않고 임금과 신하도 어질다.

 

그런데 왜적이 한 번 들어오자 나라가 무너진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백 년 동안 태평해 문을 숭상하고 무를 버려 사람들이 전쟁을 몰랐기 때문이다.

 

큰 도적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위아래가 놀라 흩어진 것은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지 반드시 임금과 신하의 죄만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 않다면 옛 조선 땅이 당나라 십만 군사, 수나라 이십만 군사, 몽골 백만 군사까지 맞아 싸웠는데 어찌 옛날에는 용감하고 지금은 겁을 먹겠느냐고 했다.

 

관백은 군사를 쓰고 배치하는 데 한 시대의 영웅이라 할 만하다고 했다.

 

세 수도를 차지하고 팔도의 요충지를 붙들며 산을 보루로 삼고 계곡을 방어선으로 삼았다.

 

여러 큰 창고를 근거지로 삼아 죽기로 지켰다.

 

따르지 않는 백성에게는 귀를 자르고 눈을 찌르며 살을 도려내고 가죽을 벗기고 심장을 꺼내고 손발을 자르고 몸과 머리를 나누는 온갖 잔혹한 형벌을 썼다.

 

머리를 장대에 매달고 시신을 걸었으며 어린아이를 창끝에 꿰어 울음을 보고 웃고 절개를 지킨 여인을 나무에 묶어 활로 쏘아 죽이며 욕보였다.

 

뼈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처럼 넘쳤다.

 

반대로 따르는 백성에게는 사람마다 베 한 필과 쌀 한 말을 주어 달랬다.

 

장정은 군사로 삼고 늙고 약한 사람은 부역시키며 어린 여자는 계집종으로, 소년은 사내종으로 삼았다.

 

모두 죽이지 않고 머리만 잘라 복종의 표시를 하게 했다.

 

항복하라는 방문까지 내걸었기 때문에 여러 고을의 성문은 닫히지 않았고 군사도 싸우지 않아 공격하지 않고도 무너진 곳이 많았다.

 

임금은 의주로 피란해 명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의주까지 군사 소식이 급해지자 임금이 압록강을 건넌다면 요동 땅에 조선 임금의 발자국까지 남게 될 형편이었다.

 

이때 나라를 거의 버린 듯한 상황이었다.

 

높은 벼슬과 많은 녹을 받던 사람들도 각자 살길을 찾아 달아났고 임금을 따라 피란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백성 가운데는 적과 장사하며 군량을 대고 적을 도와 싸운 사람도 있었다.

 

두 왕자를 묶어 적에게 바친 일까지 있었다.

 

나라의 땅과 그 땅의 재물이 모두 적에게 들어가고 백성까지 적의 농사꾼이 된다면 나라를 다시 세우기 어렵다.

 

다행히 산림 아래의 가난한 선비들 가운데 평소 큰 은혜를 받은 것도 아닌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분발해 하늘을 부르며 서로 의병을 일으켰다.

 

곽재우는 가난한 선비였지만 의병 삼백 명을 이끌고 가장 먼저 일어났고, 우배선은 열아홉 살의 젊은 서생으로 의병 백 명을 모아 여러 차례 싸워 적을 많이 죽였다.

 

고경명, 정인홍, 김면 등도 각기 천여 명의 의병을 일으켰다.

 

고경명은 나라를 위해 죽었고 그 아들 고인후는 아버지를 따라 죽었으며 막하의 유팽로도 주인을 따라 죽었다.

 

한 싸움에서 충신과 효자와 의사가 함께 나왔다.

 

이런 의병 때문에 백성은 다시 임금이 있고 적이 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무너진 민심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평소 높은 벼슬과 녹을 받다가 먼저 달아난 사람이라면 이 일을 듣고 부끄러워해야 한다.

 

나라는 벼슬과 녹을 주어 위급할 때 나라의 어려움을 구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벼슬이 높을수록 자기 몸과 집안을 지키려는 마음이 강해져 일이 생기면 먼저 달아난 사람도 있었다.

 

백성도 나라의 근본이라 사랑하고 길렀지만 의리를 모르는 사람은 이익에 움직이고 위세에 겁먹어 적에게 힘을 보태기도 했다.

 

거센 바람 속의 억센 풀과 큰 강물 가운데 기둥처럼 이백 년의 윤리와 의리를 떠받든 사람은 결국 몇몇 호걸과 선비였다.

 

선비가 나라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나라를 가진 사람도 선비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조선은 예와 의로 나라를 세웠지만 위태로워지자 예와 의의 길이 황폐해졌다.

 

선비가 그 망함을 붙들었지만 아직 그 효과를 다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명나라 황제가 분노해 정예병을 보내 도왔으니 남의 힘을 빌려 나라를 되찾을 수는 있어도 지켜 내는 것은 결국 자기에게 달렸다.

 

이에 조선의 임금과 신하에게 시 한 수를 준다고 했다.

 

예와 의만 외치며 임금과 신하가 울기만 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병법을 자세히 읽으라.

무뎌진 창은 부지런히 갈아 날카롭게 만들고

이미 무너진 낮은 성은 더 높이 쌓으라.

큰 관은 군모로 바꾸고

넓은 소매는 전투복으로 고치라.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일은 예부터 큰 어려움 속에서 나왔으니

힘써 경륜하고 수고를 한탄하지 말라.

 

덧붙여 글쓴이가 명산 가운데 금강산을 빠뜨리고 의병 가운데 조헌을 빼놓았으며 여러 곳에 잘못 적은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창의사 김천일에게 올린 제문 — 오종도

만력 이십일년 계사년 구월 초열흘, 남북의 여러 군을 감독하고 조선 마병까지 거느리는 명나라 군무 관원 오종도가 삼가 제물을 갖추어 조선 창의사 김 장군의 영전에 제사드립니다.

 

사람 가운데는 죽어도 살아 있는 것 같은 사람이 있고,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 있어도 죽은 것 같은 사람은 세상에 넘치지만, 죽어서도 살아 있는 사람으로 나는 김 장군을 보았습니다.

 

왜적이 미쳐 날뛰고 임금이 떠돌며 팔도가 거의 지킬 성을 잃었을 때 장군은 홀로 의병 깃발을 들고 한 번 팔을 떨쳐 외치자 호걸들이 메아리처럼 호응했습니다.

 

의로운 선비 천여 명을 얻어 한강가를 지키며 적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장군의 이름은 나라 안팎에 크게 알려졌습니다.

 

나도 공무 틈에 장군을 한번 만나 인사했는데 마치 오래된 벗처럼 정이 깊었습니다.

 

당시 왜적은 화친과 조공을 말했지만 장군은 늘 분개해 이 적을 멸한 뒤에야 아침밥을 먹겠다는 뜻을 품었습니다.

 

그 뜻과 공은 끝내 다 이루지 못했어도 장군의 이름은 그 때문에 더욱 떨쳤습니다.

 

왜적도 송나라 때 악비의 일을 오늘에 견주어 “악비가 죽지 않으면 화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듯 김 장군이 죽지 않으면 조공 약속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장군을 죽일 궁리만 했습니다.

 

장군이 흩어진 남은 군사로 진주성을 지킬 때 최경회도 함께 있었습니다.

 

최경회 역시 왜적이 오래전부터 두려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왜적은 대군으로 몇 겹이나 성을 포위해 새와 참새 한 마리도 지나갈 수 없게 만들고 두 사람을 함께 잡으려 했습니다.

 

그때 나는 명을 받아 전라도로 오던 중 죽산에서 큰비를 만났습니다.

 

갑자기 큰바람과 천둥이 일고 모래가 날고 나무가 뽑혀 마치 내 걸음을 재촉하는 듯했습니다.

 

비를 무릅쓰고 남원에 도착했을 때 진주에서 급보가 날아왔습니다.

 

화살과 식량이 모두 떨어져 성이 이미 며칠 전에 함락되었고 김 장군 부자와 최경회가 모두 적을 꾸짖다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제야 나는 죽산에서 내린 비가 장군 부자의 눈물이었고 큰바람과 천둥은 그들의 원통한 기운이었는가 생각했습니다.

 

아아, 어찌 눈물만 흘리겠습니까.

 

장군의 이름은 천 년 뒤에도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장군은 죽지 않은 것입니다.

 

나라를 위한 계책에는 성의가 없어 임금이 피란하게 만들고, 군사를 가지고도 구하지 않아 성읍이 잿더미가 되었는데도 뻔뻔하게 살아 벼슬아치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그들의 삶이 어찌 장군의 죽음만 하겠습니까.

 

아아, 하늘이 돕지 않아 부자가 함께 죽었으나

절개와 의리는 함께 이루어 나라의 기강을 세웠습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갈라져 꿈에서만 그리게 되었고

좋은 벗과 영원히 이별하며 이 한 잔을 올립니다.

정언 황신이 세자에게 올린 상소

삼가 생각하건대 지금 의논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평양의 적은 맞설 수 없고, 명나라 장수와 한 약속은 어길 수 없으며, 세자께서는 몸소 화살과 돌을 무릅써서는 안 되고, 행차도 관서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이런 말은 모두 이해득실만 따질 뿐 큰 의리를 알지 못하는 주장입니다.

 

이익과 해로움만 놓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이익을 좇고 해를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의로움과 이익을 함께 놓고 보면 의로움을 먼저 하고 이익을 뒤로 해야 한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더구나 이익만 구한다고 반드시 이익을 얻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해가 따라옵니다.

 

의로움을 따르면 이익을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불리하지 않습니다.

 

먼저 큰 의리가 어디에 있는지 말씀드리고 뒤에 이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하늘과 땅 사이에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시대가 달라도 다르지 않고 중국과 오랑캐 사이에도 차이가 없습니다.

 

임금이 있는 곳에서는 임금을 위해, 부모가 있는 곳에서는 부모를 위해 죽음을 다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누구나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알지만 사사로운 마음에 가려 이해가 걸리면 곧 나와 남을 가르게 되고, 결국 임금을 뒤로하고 부모를 뒤로하면서도 스스로 불의에 빠진 줄 모르게 됩니다.

 

오늘 나라가 당한 모욕은 극에 이르렀고 적이 가한 수치는 너무 깊습니다.

 

종묘는 무너지고 사직은 폐허가 되었으며 임금의 수레는 피란했고 능침까지 적에게 짓밟혔습니다.

 

신하와 자식이라면 차마 입에 올리기도 어려운 원통함입니다.

 

마땅히 장작더미 위에서 자고 창을 베고 누우며 나라의 치욕을 씻을 날을 기약하고 이 적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합니다.

 

한순간이라도 편안함을 훔치며 큰 원수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사람들은 적이 강하고 우리 병력이 약하며 여러 번 패한 뒤라 장수와 군사가 겁을 먹었으니 쉽게 맞설 수 없고 반드시 명나라 군대를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찌 신하와 자식이 원수를 갚는 큰 계책이겠습니까.

 

자기 집안의 원수도 남에게만 맡겨 두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면 설령 다른 사람이 원수를 모두 갚아 주어도 자기 의리에는 부족함이 남습니다.

 

하물며 명나라 군대만을 전적으로 믿을 수도 없습니다.

 

명나라 군대는 성원으로 삼을 수는 있어도 그 힘만 믿어서는 안 됩니다.

 

심유경이 와 오십 일을 기한으로 정한 것은 군사를 쉬게 하는 계책이라고 하지만 왜적도 거짓 화친과 거짓 항복을 잘합니다.

 

저들이 이 기한을 이용해 오히려 우리를 늦추는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지금 약속만 굳게 믿고 군사를 거두어 물러나 있으니 적을 나라 한복판에서 그대로 키우는 꼴입니다.

 

오십 일 동안 곡식이 얼마나 없어지고 백성이 얼마나 더 죽을지 생각하면 숨이 막힙니다.

 

더 걱정되는 것은 명나라 장수와 왜적이 만났을 때 적의 말이 몹시 오만했는데도 따지지 못하고 오히려 낮추어 응대한 일입니다.

 

화친을 말하는 태도도 끝까지 분명했습니다.

 

병법에서 속임수를 쓴다고 하지만 끝내 거짓이 진짜가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만약 명나라 조정에서 화친을 허락하고 두 나라가 서로 공격하지 말라는 황제의 명을 내리면, 황제의 명도 어길 수 없고 임금과 나라의 원수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는 아무리 정예병 백만과 책사 천 명이 있어도 세자를 위해 계책을 세울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오늘의 명나라 군대는 전적으로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훗날의 걱정을 열 수도 있습니다.

 

어찌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기회를 앉아서 잃으며 임금과 부모에게 오십 일의 근심을 더 안기고도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을 일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관서가 적과 너무 가깝고 병력이 없으니 호남과 호서 가까운 곳으로 가서 회복을 꾀하자고 합니다.

 

하지만 평양은 의주와 멀지 않고 의주에는 임금이 계십니다.

 

평양의 적은 바로 임금의 문 앞에 있는 도적입니다.

 

이 적을 버리고 다른 도로 멀리 간다면 평양의 적은 뒤를 걱정할 필요 없이 마음껏 북쪽을 칠 수 있습니다.

 

만약 순안이 무너지고 서쪽 길이 막히면 임금의 행차는 더 물러갈 곳이 없습니다.

 

그때 세자께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찌 급히 달려와 구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과 적을 가까이 두고 세자가 멀리 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늘 조정 신하들은 평양 적을 범처럼 두려워해 적을 치자는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멀리 달아날 궁리만 하니 적이 들으면 서른여섯 계책 가운데 달아나는 것이 으뜸이라는 조롱을 받을 것입니다.

 

옛사람이 “조정의 사람이 모두 부녀자 같다”고 한 말이 오늘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자라고 모두 약한 것도 아닙니다.

 

옛날 세씨 같은 여인은 임금을 위해 적을 칠 줄 알았습니다.

 

오늘 세자께서는 감무의 명을 받고 나라 회복의 책임을 맡은 지 여러 달이 지났지만 아직 한 치의 땅도 되찾지 못했습니다.

 

이제 겨우 적이 온다는 말만 들으면 더 멀리 피하려 한다면 훗날 임금 앞에서 무슨 얼굴로 말씀드리겠습니까.

 

또 그렇게 하면서 어떻게 적을 두려워해 달아난 장수들을 벌할 수 있겠습니까.

 

조종의 영령이 과연 “우리에게 후손이 있다”고 하겠으며 온 나라 백성이 “우리 임금의 아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고 하겠습니까.

 

하늘의 신령이 노하고 백성이 원망하면 세자께서는 스스로 변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예에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와는 한 하늘을 함께 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적과 같은 하늘 아래 지낸 지가 이미 얼마입니까.

 

적을 치는 일을 하루 늦추면 하루의 책임이 쌓이고 한 달 늦추면 한 달의 책임이 쌓입니다.

 

두렵지 않겠습니까.

 

제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의 일에는 전진해 적을 치는 것 말고 다른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옛날 천자의 나라 임금도 직접 정벌에 나섰습니다.

 

하물며 세자께서는 위에 임금이 계시고 자신은 신하이자 아들입니다.

 

눈으로 아버지의 위태로움을 보면서 어찌 앉아서 구하지 않고 편안함만 구하겠습니까.

 

오늘 세자를 위한 계책은 직접 삼군을 거느리고 화살과 돌을 무릅쓰며 애통한 교서를 내려 민심을 격려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원수 이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장수는 목을 베어 군사의 기세를 세우고, 기한을 정해 적을 쳐 성을 등지고 한 번 죽기로 싸우는 계책을 써야 합니다.

 

그러면 저처럼 피곤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도 간과 뇌가 땅에 쏟아지도록 먼저 싸우기를 원할 것입니다.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눈물을 흘리고 분발해 뒤돌아보지 않고 죽으려 할 것입니다.

 

지금은 싸워도 위태롭고 싸우지 않아도 위태롭습니다.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느니 한번 죽기로 싸워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설령 불행한 일이 생기더라도 임금과 신하가 함께 사직을 위해 죽는 것이 풀숲에서 목숨을 구걸하며 겨우 숨만 붙이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제가 듣기로 평양의 적은 만 명도 되지 않고 관군과 의병은 그보다 배나 많습니다.

 

적은 적고 우리는 많으며, 적은 사악하고 우리는 바르며, 적은 교만한 군사이고 우리는 의로운 군사입니다.

 

적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우리는 활과 화살이 지금 가장 강합니다.

 

난리에 지친 민심과 하늘이 재앙을 거두려는 뜻을 생각하면 이기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명나라 군대의 성원을 이용해 동서에서 협공하며 전진한다면 군사의 사기는 싸우기 전부터 배가될 것입니다.

 

평양의 적은 머지않아 없앨 수 있습니다.

 

그 뒤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 남은 적을 치고, 세자께서 대군을 이끌고 큰길로 계속 나아가면 서울 북쪽 지역은 다시 큰 싸움 없이 되찾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통쾌한 일입니까.

 

부디 세자께서는 크게 분발해 뜻을 굳게 정하시고 떠도는 의논에 흔들리지 말며 이해득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큰 의리를 밝히고 큰 치욕을 씻어 위로 임금의 근심을 풀고 아래로 백성의 기대를 위로해 주십시오.

 

또 한 가지 감히 말씀드립니다.

 

세자께서는 어질고 밝으신 점은 충분하지만 굳세고 결단력 있는 기질은 조금 부족한 듯합니다.

 

그래서 일을 처리할 때 과감히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뜻과 기운이 약해지는 일이 있습니다.

 

명령을 내려도 백성을 크게 위로하지 못하고 상벌이 분명하지 않을 때가 있으며 정령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초야에서 글을 올리는 사람에게는 말로만 칭찬하고 실제 시행은 없으며, 전쟁에 나간 군사에게도 글로만 위로할 뿐 실제 은혜가 미치지 못합니다.

 

가까이 두는 사람은 내시 몇 명뿐이고 신하들을 자주 만나 시국을 묻지 않으며, 서연에서는 소학 몇 장만 읽을 뿐 노성한 신하를 가까이해 큰 의리를 밝히는 일이 부족합니다.

 

적을 치려는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일이 번번이 무너지고, 난을 평정하려는 정성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 성과가 보이지 않습니다.

 

머뭇거리며 그때그때 넘기다 보니 은혜는 아래까지 미치지 못하고 사정은 위로 통하지 않아 백성은 실망하고 군사는 마음이 풀립니다.

 

이는 모두 나라를 회복하는 데 크게 꺼릴 일이며 세자께서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큰일을 하려면 먼저 뜻을 세워야 합니다.

 

하물며 적을 치고 원수를 갚는 이 일이 얼마나 큰일입니까.

 

이제 전날의 잘못을 크게 고치고 더욱 분발하며 굳세게 결단해 힘써 나아가신다면 중흥의 일은 절반 이상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부디 깊이 살펴 주십시오.

공주 고을의 노인과 군민에게 내리는 글 — 황사숙

왕세자가 이른다.

 

나는 온갖 어려움을 만난 시대에 태어나 이미 나라의 많은 환난을 감당하고 있다.

 

백성의 고생도 이제는 조금 쉬어야 하니 함께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일을 이루자.

 

내 속마음을 노인과 선비와 백성에게 모두 밝히겠다.

 

지난해 임금께서 피란하셨을 때의 위급함을 차마 다시 말하기 어렵다.

 

한강 이남을 오래 떠돌며 백성은 임금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다행히 하늘의 도움을 받아 임금이 옛 서울로 돌아오셨으니 막힌 운수가 끝나고 태평함이 올 줄 알았다.

 

그러나 전쟁은 이어지고 화는 끊이지 않았다.

 

백성은 지금 위태로운데 하늘은 어두운 듯하고, 나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갈 곳이 막막하다.

 

난리를 겪으며 백성의 삶은 이미 무너졌다.

 

군량을 나르느라 사람의 어깨가 붉게 부어오르고 말의 등에는 땀이 흐른다.

 

세금 독촉은 급해 집집마다 베를 걷고 논밭마다 곡식을 거둔다.

 

여기에 명나라 군사의 왕래와 사신의 연이은 통행까지 겹쳤다.

 

이미 상처 입은 백성을 다시 몰아세우고 얼고 굶주린 사람에게 채찍을 드는 형편이다.

 

곡식을 모집하고 거두는 방법이 알맞지 않아 임금의 뜻을 편안하게 하는 관리도 많지 않다.

 

이웃과 친족에게까지 세금을 떠넘겨 고통을 호소하는 일이 끝이 없다.

 

큰길가 백성의 수고는 적에게 직접 피해를 입은 것보다 오히려 심할 정도다.

 

더구나 지금 여러 길에서 마련하는 물자는 대부분 호남과 호서에 기대고 있다.

 

피와 살, 힘줄과 뼈 같은 백성의 힘을 하나도 남김없이 가져가고 부역에 몰아 잠시 쉴 틈조차 없다.

 

부유한 사람은 그래도 견딜 수 있지만 호소할 곳 없는 가난한 백성이 가엾다.

 

나는 부족한 사람으로 명을 받아 이곳에 왔다.

 

나라와 개인의 비축은 모두 바닥났고 접대 비용까지 겹쳐 서남 지방의 힘은 이미 다했다.

 

그런데 다시 사람과 물자를 동원해야 하니 너희가 억지로 힘써 일한다 해도 내가 어찌 차마 편할 수 있겠는가.

 

이 생각을 할 때마다 병이 내 몸에 있는 듯 괴로워 잠과 밥을 잊는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싶을 만큼 마음이 아프다.

 

특히 공주는 호서의 큰 요충지다.

 

나라가 흙과 기와처럼 무너질 때도 끝까지 굳게 지켰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때에 나라의 급함에 나서야 할 곳이다.

 

바라건대 너희는 힘을 다하고 내 괴로운 마음을 헤아려 주기 바란다.

 

내가 무슨 덕이 있어 너희의 고생을 갚겠는가.

 

다만 나라를 저버리지 않고 함께 원수를 갚기를 바란다.

 

임금과 신하는 부모와 자식처럼 가까우며 마음은 높고 낮음 때문에 막혀서는 안 된다.

 

너희가 겪는 고통은 일이 크든 작든 모두 말해도 좋다.

 

백성의 원망이라면 말이 지나쳐도 죄를 주지 않겠다.

 

작은 폐단이라도 하나하나 아끼지 말고 말하라.

 

고칠 수 있는 일은 내가 어찌 고치지 않겠는가.

 

이미 지난번 군사들에게서 걷은 값과 쌀, 이웃과 친족에게 떠넘긴 세금의 폐단은 조정의 뜻에 따라 모두 덜어 주게 했다.

 

곡식을 모집하고 거두는 일도 억지로 정해 빼앗지 못하게 했다.

 

그 밖에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일도 담당 관원에게 의논해 없애게 하겠다.

 

그러나 없앨 수 없는 일이 있으니 군량을 나르고 군사를 훈련해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일이다.

 

아직 힘쓸 수 있을 때 게으르지 말고, 부득이한 부역이라고 원망만 하지 말라.

 

윗사람을 가까이하고 장수를 위해 죽을 각오로 스스로 나라의 어려움에 힘쓰면 공에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에는 반드시 벌을 주겠다.

 

내가 어찌 사사로운 마음을 두겠는가.

 

아아, 내가 너희에게 실제로 덜어 줄 수 있는 것은 작지만 너희에게 바라는 것은 매우 크다.

 

전쟁이 두 해나 이어진 것은 옛날에도 드문 큰 화다.

 

원수와 한 하늘 아래 함께 사는 치욕 속에서 나 역시 임금과 부모에게 큰 죄를 지고 있다.

 

너희가 힘을 모아 충성을 다해 준다면 난을 평정하는 공을 이루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글을 내려 알리니 모두 자세히 알아두라.

발문

어릴 때부터 영의정 공이 직접 적은 쇄미록 일곱 권이 종손 집에 보관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늘 직접 읽어 보지 못한 것을 큰 한으로 여겼다.

 

마침 지난해 용인에 사는 집안 형 시영이 친족 모임에 찾아왔다.

 

선조를 추모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이 책을 간행하자는 의견이 크게 일어났다.

 

원본을 가져오는 일을 집안 형 시영에게 부탁했다.

 

시영 형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제사를 맡은 종손 화영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화영이 특별히 책을 내주었다.

 

원본을 짐 속에 넣어 곧 가지고 돌아왔다.

 

집안 형이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이 참으로 간절하고 깊었다.

 

그러나 당시 나라가 어지럽고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시대 형편도 좋지 않아 책을 간행하는 데 큰 장애가 있었다.

 

그래서 일단 간행을 멈추었다.

 

하지만 선조의 친필이 사라질까 걱정되어 집안 형과 하루 동안 책을 손질하고 여러 집안에 나누어 주었다.

 

각 집에서 원본을 잘 배접하고 또 베껴 써 오래도록 선조를 추모할 수 있게 하려는 뜻이었다.

 

오늘 시작된 집안의 의논이 훗날 끝까지 이루어진다면 참으로 다행일 것이다.

 

조선 개국 오백십팔년 기유년 팔월 초길일, 십일대손 봉영이 삼가 적는다.

 

오월 사이에 베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