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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M으로 뽑은 잡지식

충주시 설화 소설 : 보련과 장미 - 보배로운 연꽃과 강을 품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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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소설

보련과 장미

보배로운 연꽃과 강을 품은 산


제 1 화

돌을 고르는 누이

물소리 밑에서 돌이 돌을 가는 소리를, 보련은 사람들의 비명보다 먼저 들었다. 사흘을 퍼붓던 비가 그친 한낮이었다. 남한강으로 내려가는 개울은 누런 흙물로 불어 아랫논의 돌담을 옆구리부터 밀고 있었다. 담은 아직 서 있었지만, 선 채로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담 안쪽은 모를 낸 지 얼마 안 된 논이었다. 가래와 삼태기를 든 사람들은 물부터 막으려고 담 머리에 돌을 더 올리고 있었다. 장미는 장정 넷이 겨우 굴릴 너럭돌을 혼자 가슴까지 안아 들고 담으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보련은 담의 허리를 보았다. 가운데가 논 쪽으로 배를 내밀고 있었고, 밑돌 하나가 젖은 진흙 위에서 손가락 한 마디만큼 밀려나 있었다. 위에 무게를 더 얹으면 담은 개울 쪽이 아니라 사람들이 선 논 쪽으로 쓰러질 것이었다.

보련돌 더 올리지 마세요. 장미야, 그거 내려놔.

고함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장미의 걸음이 먼저 멎었고, 담 위의 손들이 뒤따라 멎었다.

장미누이, 물이 넘어오잖아. 이거 하나만 얹으면 막혀.
보련안 돼. 밑돌이 밀렸어. 더 얹으면 논 쪽으로 넘어가.

들어 올린 돌을 쓰지 못하고 내려놓는 일을 아우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보련은 알았다. 보련도 그 돌이 아까웠다. 다만 지금은 놓일 자리가 없었다. 장미는 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담에서 세 걸음 떨어진 풀밭에 돌을 내려놓았다. 땅이 울렸다.

장미그럼 누이는 어쩔 건데.
보련길 내 줘야지. 물한테.

보련은 가래를 집어 들고 개울이 굽는 자리로 뛰었다. 굽이 바깥은 옛 물길이 지나던 자갈밭이었다. 그는 가래 끝으로 자갈밭 어귀에 금을 하나 그었다.

보련가래 드신 분들, 여기 좀 파 주세요. 두 뼘이면 돼요. 나머지는 담 밑에서 나오세요.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물 넘는 담을 두고 멀쩡한 둑을 파라는 말에 서로 얼굴만 보았다. 늙은 일꾼 하나가 먼저 가래를 메고 와 보련 옆에 섰다.

늙은 일꾼보련이 파라면 파는 거지. 뭣들 하고 섰나!

보련이 첫 삽을 떴다. 넓게 팔 필요는 없었다. 물은 제가 갈 길을 한 뼘만 보여 주면 나머지는 스스로 넓힌다. 일꾼 셋이 달라붙어 홈을 이었고, 흙물 한 줄기가 머뭇거리다 홈으로 혀를 들이밀더니 곧 자갈밭으로 쏟아졌다. 담을 치던 물살의 등이 눈에 띄게 낮아졌다.

그때 담이 울었다. 이번에는 모두가 들었다. 불룩하던 자리의 돌들이 한꺼번에 주저앉으며 논 쪽으로 기울었고, 그 밑에는 가마니를 나르던 마을 여인과 아이가 아직 남아 있었다.

장미누이!

부르는 소리와 뛰어드는 몸이 한순간이었다. 장미는 기우는 담에 오른쪽 어깨를 밀어 넣고 두 발을 논바닥에 박았다. 정강이까지 진흙에 잠겼고 어깨 위에서 돌들이 이를 갈았다. 담이 멈췄다. 여인이 아이를 안고 논둑 너머로 굴렀다.

보련밀지 마. 받치기만 해. 밀면 위가 개울로 넘어가.
장미얼마나.
보련돌 하나 찾을 동안.

보련은 담 밑 물웅덩이에 무릎을 꿇고 밑돌이 밀려난 틈에 손을 넣었다. 틈은 안쪽이 좁고 바닥이 왼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손바닥으로 그 생김새를 외운 뒤 그는 개울 가장자리로 들어가 바닥을 더듬었다. 흙물 속에서는 눈이 소용없었다.

첫 돌은 둥글었다. 둥근 돌은 무게를 받으면 구른다. 두 번째 돌은 모양이 맞았으나 결이 가로로 나 있어 눌리면 쪼개질 것이었다. 세 번째로 잡힌 돌은 한쪽이 도끼날처럼 얇고 밑면이 왼쪽으로 비스듬히 깎여 있었다. 보련이 그 돌을 안고 물에서 나왔을 때 장미의 숨은 부쩍 짧아져 있었다. 돌에 쓸린 어깨의 옷이 찢어지고 피가 배었지만 아우는 발을 옮기지 않았다.

장미누이, 아직이야?
보련숨 한 번 더 쉬어. 셋 세면 손톱만큼만 들어.

보련은 돌의 얇은 쪽을 틈에 물리고 셋을 세었다. 장미가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담을 들어 올렸고, 그 찰나에 보련은 손바닥으로 돌을 쳐 넣었다. 담이 내려앉으며 쐐기를 물었다. 돌 모서리에 끼인 손바닥이 길게 찢어졌지만 그는 손을 빼지 않고 돌이 자리를 잡는 떨림을 끝까지 느꼈다. 담 속이 낮고 둔하게 울렸다. 서로 갈던 돌들이 맞물리는 소리였다.

보련됐어. 이제 놔도 돼.

장미는 바로 놓지 못했다. 어깨를 떼면 다 쏟아질 것 같은 얼굴로 더 버티다가, 보련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서야 몸을 뺐다. 담은 불룩한 채였지만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개울물은 새 홈을 따라 자갈밭으로 빠졌고 논에는 발목을 적실 만큼만 물이 들어와 있었다. 벼는 서 있었다.

둑 위에서 함성이 터졌다. 사람들은 논으로 뛰어내려 장미를 에워싸고 등을 두드렸다.

마을 사람다들 봤나? 담 하나를 어깨로 받쳤어. 우리 마을에 장수가 났네!

보련은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새로 판 홈의 어귀에 굵은 자갈을 박고 있었다. 그 홈을 누가 파라고 했는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아우의 목소리는 한참 만에, 환호가 한 번 잦아든 틈을 타서 나왔다.

장미돌은 누이가 골랐습니다. 물길도 누이가 냈고요. 전 받치기만 했어요.

첫마디는 또렷했는데 말끝은 제 발치로 떨어졌다. 잠깐 조용해졌다. 몇 사람이 보련 쪽을 돌아보았다. 오래가지는 않았다.

마을 사람그야 보련이 눈썰미는 있지. 그래도 마지막에 버틴 건 사내 장수 아닌가.

사람들이 웃으며 장미의 성한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보련은 자갈을 마저 박으며 기다렸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고개를 들자 장미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 듯 숨을 들이켜는 것이 보였다. 막는 사람은 없었다. 장미는 그 숨을 그냥 내쉬고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겸손으로 알고 더 크게 웃었다.

보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개울 위쪽 맑은 물이 드는 자리로 가서 손을 담갔다. 갈라진 손바닥에서 진흙이 풀려 나가고 그 뒤로 붉은 실이 따라 흘렀다. 담이 섰고 아무도 깔리지 않았다. 이 손이 쓰일 데가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 익숙했다. 진흙이 다 빠진 뒤에도 손은 물속에 있었다.

등 뒤에서 장미의 걸음이 다가오는 소리가 났다. 걸음은 몇 발짝을 남기고 멈췄다. 보련은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해가 서쪽 하늘에 아직 두어 뼘 남았을 때 남매는 사립문을 들어섰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뛰어나왔다. 말보다 손이 먼저였다. 보련의 젖은 저고리를 벗겨 마른 옷을 입히고, 장미를 마루에 앉혀 어깨의 옷을 걷었다. 살갗이 벗겨진 자리에 시퍼런 멍이 번지고 있었다.

어머니뼈는. 팔 좀 들어 봐.
장미괜찮아요. 어머니, 누이 손 좀 보세요. 돌에 베였어요.

어머니는 찧던 쑥을 든 채 보련의 손을 끌어다 보았다. 손바닥을 가로지른 상처 앞에서 어머니의 눈썹이 잠깐 모였다. 그러고는 그 손등을 한 번 쓸어 주고 놓았다.

어머니너는 강하니까 이 정도는 견디지. 시렁에 깨끗한 베 있으니까 우선 감고 있어. 장미 것 붙이고 봐 줄게.
보련네. 제가 할게요.

보련은 시렁에서 베 조각을 내려 한쪽 끝을 이로 물고 손바닥을 감았다. 한 손으로 매듭을 짓는 일은 익숙했다. 어머니가 저를 덜 아끼는 것이 아니었다. 장미는 어려서 잔병이 많았고, 어머니의 손은 더 아파 보이는 쪽으로 먼저 가는 손이었다. 보련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장미의 눈이 보련의 입에 물린 베 끝에 머물렀다. 아우는 어머니의 손 밑에서 어깨를 조금 빼려 했다.

장미누이, 그거 내가 묶어 줄게.
보련가만있어라. 약 떨어진다. 나는 괜찮다.

장미는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는 쑥을 붙인 어깨에 베를 두르고 나서 이른 저녁상을 내왔다. 보리밥 두 그릇은 똑같이 고봉이었고, 어머니는 국이 짜지 않으냐고 두 아이에게 똑같이 물었다. 다만 장미가 수저를 왼손으로 바꿔 쥘 때마다 어머니의 눈은 그쪽으로 먼저 갔다. 보련의 손은 끝내 다시 들여다보지 않았다.

✧✧✧

상을 물리고 장미는 뒷산 능선으로 올랐다. 부르지 않았는데도 누이가 뒤따라왔다. 해는 서쪽 산마루에 걸려 있었고, 비에 불은 남한강이 저녁 빛을 받아 구리처럼 번들거렸다. 강을 굽어보는 낮은 산 하나와, 그 뒤로 어깨를 치켜든 높은 산 하나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었다. 어느 쪽에도 아직 돌 한 단 쌓인 것이 없었다.

장미는 욱신거리는 어깨를 바위에 기대고 앉았다. 낮에 들은 환호가 아직 귓속에 남아 있었다. 그 소리가 좋았다. 그 절반이 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알았다. 장미는 몇 번이나 몸을 고쳐 앉았다.

누이는 낮의 일을 묻지 않았다. 장미도 꺼내지 못했다. 그는 강가의 낮은 산을 턱으로 가리켰다.

장미나 언젠가 저기다 성 쌓을 거야. 강길 다 내려다보이는 데다.

누이는 고개만 돌려 그 산을 보았다. 대꾸가 없자 장미는 발치의 돌멩이를 툭 차고 말을 이었다.

장미누구 동생이 쌓은 성 말고. 내 이름 붙은 성.

누이의 대답은 조금 늦게 나왔다. 베를 감은 손을 무릎에 얹고, 그 산을 한참 더 본 뒤였다.

보련이름 남길 거면 오래가게 쌓아. 들 수 있는 돌부터 찾지 말고.

맞는 말이었다. 장미는 그 말이 고마웠다. 그런데도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풀을 뜯어 손끝으로 비비다가 바람에 놓아 버렸다. 그러고는 누이를 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장미누이를 이기고 싶어. 한 번은.

말해 놓고 장미는 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누이가 화를 낼지, 아니면 어린애 달래듯 져 주겠다고 할지, 어느 쪽이든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누이는 웃었다. 비웃는 웃음이 아니라 오래 기다리던 말을 들은 사람의 웃음이었다.

보련알아. 그날 오면 나도 있는 힘 다 쓸 거야. 봐주지 않는다. 너도 그렇게 와, 장미야.
장미정정당당히.

누이는 말로 받지 않고 성한 손으로 주먹을 내밀었다. 장미는 제 주먹을 거기에 세게 부딪쳤다. 누이의 주먹은 밀리지 않았다. 해가 넘어가자 두 산은 검은 윤곽만 남아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장미가 돌아보았을 때 누이의 눈은 높은 산의 골짜기를 따라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물길을 짚는 눈이었다.

✧✧✧

남매는 초저녁부터 건넌방에서 곯아떨어졌다. 어머니는 방문을 닫기 전에 보련의 가슴 위에 얹힌 손을 보았다. 아이가 제 손으로 감은 매듭이었다. 어머니는 그 매듭을 오래 보았다. 참 야무졌다. 저 아이는 무엇이든 혼자 해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어머니는 마루로 나와 관솔불 아래에서 장미의 찢어진 옷을 깁기 시작했다.

원로 셋이 사립문을 밀고 들어온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 어머니는 깁던 옷을 든 채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들을 마루에 올리지 않고, 아이들이 자는 방에서 가장 먼 마당 끝에 세워 두었다.

어머니이 밤중에 웬일이세요. 애들 자요.
큰 원로낮에 개울 일 봤소. 온 마을이 봤소.
마른 원로아들은 어깨로 담을 받치고, 딸은 물속에서 돌 자리를 짚어 내고.
어머니그래서 사람이 안 다쳤지요. 칭찬하러 오셨으면 날 밝고 오시지요.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저도 모르게 자랑이 묻어 있었다. 큰 원로는 지팡이 끝으로 마당 흙을 한 번 눌렀다.

큰 원로이 집안에 내려오는 오래된 말이 있소. 들어는 봤을 거요.

큰 원로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낮춘 목소리가 오히려 마당을 다 건너갔다.

큰 원로한 지붕 아래 두 장수가 서면, 한 별은 반드시 땅으로 떨어진다.

어머니의 손에서 바늘이 멎었다. 모르는 말은 아니었다. 오래전 누군가 흘리듯 하던 것을 아궁이 재처럼 쓸어 내고 잊은 채 살았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건넌방 쪽을 돌아보았다. 닫힌 방문 안에서는 뒤척이는 기척 하나 없었다. 다시 돌아섰을 때 어머니의 말끝은 굳어 있었다.

어머니낡은 말입니다. 그 말 하자고 이 밤에 오셨습니까. 돌아가십시오.
마른 원로그 낡은 말이 요새 맞아 들어가니 온 거요. 지난달 북쪽 골짜기 산이 무너져 길이 끊겼소. 강 건너에서는 창 든 무리가 움직인다는 소문이오.

어머니는 바늘을 옷감에 찔러 두었다. 손끝이 떨려 실이 엉켰다. 젊은 원로가 어머니의 눈을 피했다.

젊은 원로저희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녁부터 우물가에서 다들 그럽니다. 한 집에 장수가 둘이라고.

무서운 것은 원로의 말이 아니었다. 우물가였다. 낮에 장미를 에워싸고 환호하던 입들이 저녁에는 벌써 다른 말을 나르고 있었다. 그런 말이 불어난 물보다 빨리 담을 넘는다는 것을 어머니는 알았다.

어머니는 사립문을 열어젖히고 비켜섰다.

어머니나가 주십시오. 제 자식은 둘입니다. 둘 다 제 지붕 밑에서 컸고, 거기서 늙을 겁니다.

마른 원로와 젊은 원로가 먼저 나갔다. 큰 원로는 문턱을 넘다 말고, 돌아보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큰 원로같이 살리려 들면 둘 다 잃소. 하나를 고르셔야 하오.

발소리가 고샅 아래로 멀어졌다. 어머니는 빗장을 지르고, 지른 빗장을 한 번 더 흔들어 보았다. 그러고는 불을 끄고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남매는 어릴 적처럼 나란히 잠들어 있었다. 보련은 베를 감은 손을 가슴에 얹고 반듯하게, 장미는 다친 어깨를 위로 하고 모로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둘 사이에 앉았다. 오른손으로 보련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 장미의 손을 잡았다. 보련의 손은 굳은살이 박여 단단하고 따뜻했다. 장미의 손은 컸지만 잠결에 아이처럼 어머니의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어머니는 어느 쪽 손에도 힘을 더 주지 않으려고, 또 어느 쪽 손도 덜 쥐지 않으려고 숨을 죽였다. 닭이 울고 문살이 희어지도록 두 손은 그 자리에 있었다.

어느 손도 놓지 못한 채 날이 밝았다.

제 2 화

둘 중 하나는 죽는다

젖은 발이 고샅을 뛰어 올라오는 소리에 어머니는 빨래를 널던 손을 멈췄다. 해가 머리 위에 와 있었다. 허리까지 강물에 젖은 사내가 사립문 밖을 지나갔다. 나루 쪽에서 올라온 전령이었다. 어머니는 빨래를 함지에 도로 던져 넣고 그 뒤를 따랐다.

전령은 느티나무 아래에 닿아서야 무릎을 짚었다. 모이라는 외침이 집집이 건너갔다. 어제 판 물길 홈에 자갈을 박으러 나갔던 보련이 가래를 멘 채 장미와 나란히 개울 쪽에서 올라와, 베 감은 손의 흙을 털었다.

전령나루에, 강 건너 나루에 창 든 놈들이 내려왔습니다.

전령은 거기까지 뱉고 다시 허리를 꺾었다. 등이 크게 오르내렸고, 젖은 바짓가랑이에서 물이 흙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앞줄에 섰던 사내가 그 어깨를 붙들었다.

마을 사람나루까지 왔다고? 자네가 봤나?
전령봤습니다, 제 눈으로. 짐 인 사람들이 물가에 새까맣게 몰려 있어요. 물만 빠지면 이쪽으로 건너옵니다.

소문이던 말이 젖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자 무게가 달랐다. 큰 원로가 지팡이를 짚고 느티나무 밑동 앞에 서자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큰 원로건너오는 사람들을 들판에 세워 둘 수는 없소. 창이 건너오면 우리도 들어갈 데가 있어야 하고. 성을 쌓읍시다.
마른 원로하나로는 안 되오. 북쪽 길을 막으면 강으로 돌아 들어오오. 두 산에 하나씩은 있어야 하오.

옳은 말이었다. 높은 산은 북쪽 길목을 내려다보았고, 마주 선 강가의 낮은 산은 물길을 끼고 있었다. 어머니의 눈에 딸이 벌써 두 산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이 들어왔다. 딸의 눈은 높은 산의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다가 중턱 어디쯤에서 멎었다.

보련높은 산은 중턱 위로 샘이 없어요. 사람을 받으려면 물부터 가둬야 합니다.

마른 원로가 돌아보았다. 말은 없이 턱으로 강가의 낮은 산을 가리켰다.

보련낮은 산은 돌이 가깝고 나를 길도 짧습니다. 강길 막을 성은 그쪽이 맞고요.

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가슴이 잠깐 펴졌다가 곧바로 식었다. 끄덕이던 얼굴들이 보련과 장미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어제 장미의 등을 두드리던 손들이 오늘은 제 소매 속에 들어가 있었다. 어머니는 그 눈들이 무엇을 세고 있는지 알았다. 하나, 둘.

마을 사람성이 둘이면 장수도 둘이면 되겠네. 마침 그 집에 둘이 있지 않나.
마른 원로그게 걱정이오. 어제 일로 벌써 담 받친 쪽이니 물길 낸 쪽이니 하고 편이 갈렸소. 창이 오는데 말이 두 군데서 나와서야.

한 걸음 더 나서려던 보련의 발이 멎었다. 큰 원로가 지팡이 끝으로 흙을 한 번 눌렀다.

큰 원로이 집안에 내려오는 오래된 말이 있소. 한 지붕 아래 두 장수가 서면, 한 별은 반드시 땅으로 떨어진다.

그 말은 어머니에게 낯설지 않았다. 어젯밤 마당 끝에서 들은 말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다시 울렸을 뿐이었다. 처음 듣는 얼굴은 딸과 아들, 둘뿐이었다. 어머니는 큰 원로의 지팡이 끝만 보았다. 보련과 눈이 마주치면 무슨 낯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을 사람그럼 겨루게 하면 되지.

말을 꺼낸 사내는 제 말에 제가 놀란 듯 옆을 돌아보았다. 옆에 섰던 이가 그 말을 받아 마저 이었다.

마을 사람산을 하나씩 맡기세. 먼저 다 쌓는 쪽을 장수로 세우면 성은 둘이 서고 장수는 하나만 남잖나.

뒤쪽에서 누가 진 쪽은 어찌 되느냐고 물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큰 원로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큰 원로진 사람은 목숨을 내놓소. 그래야 별 하나로 끝나오.

성을 쌓자는 말과 사람 하나가 죽어야 한다는 말이 한 입에서 이어 나왔다. 앞말에 끄덕이던 고개들은 뒷말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장미의 숨이 거칠어졌고, 보련이 아우의 팔뚝을 잡았다. 잡은 손끝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어머니는 사람들 어깨 사이를 밀고 나갔다. 밤을 새운 다리가 제 것 같지 않았다.

어머니성은 둘을 쌓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장수는 하나만 남깁니까.

느티나무 아래가 조용해졌다. 마른 원로가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젊은 원로는 제 신코를 보았다. 그 말에 바로 답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어머니는 알았다.

마른 원로맞는 말이오.

마른 원로는 그렇게 한 번 물러섰다. 그러고는 어머니가 아니라 둘러선 사람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마른 원로그래도 이 집에 아들은 하나요. 대 이을 아이는 장미뿐이오.
젊은 원로누구를 죽이자는 게 아닙니다. 그 아이를 살릴 길을 찾자는 겁니다.

어머니의 귀밑이 달아올랐다. 어젯밤 마당에서는 나오던 말이 있었다. 제 자식은 둘이라고, 둘 다 제 지붕 밑에서 늙을 것이라고. 그 말이 혀끝까지 와서 나가지 않았다. 둘러선 고개들이 아들은 하나라는 말에 천천히 끄덕이고 있었고, 그 눈들은 모두 장미에게 가 있었다. 어머니의 눈도 어느새 거기 가 있었다.

어머니보련이도, 보련이도 제가 낳은.

말이 거기서 끊겼다. 누가 소매를 가만히 잡았다. 어제 담 밑에서 아이를 안고 굴렀다던 마을 여인이었다. 여인은 제 아이를 구해 준 집 사람을 달래듯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마을 여인보련이는 강하잖아요. 어디다 내놔도 살 애예요. 걱정은 장미를 하셔야지요.

되물어야 했다. 진 사람이 목숨을 내놓는다는 자리에서 어디서든 살아남는다는 소리가 말이 되느냐고. 어머니는 되묻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장미의 어깨에 두른 베가 보였다. 그 옆에 보련이 서 있었다. 발을 어깨만큼 벌리고, 베 감은 손을 등 뒤로 돌려 쥐고, 반듯하게. 저 아이는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마음이 놓였다. 밤새 뜬눈이던 몸이 여인의 말에 잠깐 기대는 것을 어머니는 막지 않았다.

✧✧✧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느티나무 그늘이 한 뼘쯤 옮겨 가 있었다. 사람들이 자리를 고쳐 서는 사이, 보련은 어머니의 말이 끊긴 자리로 걸어 나갔다. 방금 들은 말들 가운데 손에 잡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지붕이라는 말이었다.

보련지붕이 문제면 지붕을 나누면 되잖습니까. 하나가 딴 마을로 가든, 집을 따로 짓든요. 성은 성대로 쌓겠습니다.

아우가 곧바로 옆에 와 섰다. 어깨가 나란했다. 보련은 그것만으로 숨이 조금 쉬어졌다.

장미옛말에도 한 지붕이라고 했잖아요. 지붕이 둘이면 되는 거 아닙니까.

큰 원로는 고개를 저었다. 화를 내는 얼굴은 아니었다.

큰 원로늦었소. 어제 개울에서 누구는 보련이 가래를 따라갔고, 누구는 장미 어깨에 소리를 질렀소.
젊은 원로벌써 우물가에서는 누구 쪽이냐고들 묻습니다.

젊은 원로가 끼어든 말을 큰 원로는 나무라지 않았다. 그 말 위에 제 말을 얹었다.

큰 원로지붕을 나누면 사람도 따라 나뉘오. 창은 강 건너에 와 있는데 서로 제 장수 세우겠다고 다투다가, 성 쌓기도 전에 우리끼리 피를 보오.

보련은 뒤를 돌아보았다. 늙은 일꾼이 가래를 멘 채 제 등 뒤에 서 있었다. 그 곁으로 몇이 더 붙어 있었고, 장미 쪽으로도 그만큼이 몰려 있었다. 누가 세운 줄도 아닌데 두 무리 사이에는 한 걸음쯤 빈 땅이 나 있었다. 큰 원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장미그럼 제가 나갈게요. 따라오는 사람은 제가 돌려보내고요.
보련아니요, 제가 가요.

말은 생각보다 먼저 나왔다. 장미가 몸을 돌려 누이를 보았다.

장미누이가 왜 가. 성은 누이가 쌓아야지. 돌 자리 볼 줄 아는 사람이 남아야 할 거 아냐.
보련너는 어깨도 성치 않잖아. 낯선 데 가서 혼자 뭘 먹고 살아. 나는 어디 가서든 산다. 너는.

보련은 거기서 말을 멈췄다. 늦었다. 장미의 얼굴에서 핏기가 걷히고 턱에 힘줄이 섰다.

장미나는 못 산다고. 누이가 없으면.
보련그런 말 아니야.
장미그런 말이잖아. 어제 능선에서 뭐라고 했어. 봐주지 않는다며. 이게 봐주는 게 아니면 뭔데.

어제 제 입으로 한 약속이 아우의 입에서 돌이 되어 돌아왔다. 성은 누이가 쌓아야 한다던 아우의 말도 보련의 귀에는 똑같이 들렸다. 제가 비켜 줄 테니 그 자리에 서라는 소리였다. 보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보련너야말로 나를 봐주고 있다. 비켜 준 자리에 내가 설 줄 알았냐.
장미누이는 늘 그래. 내가 뭘 하겠다고 하면 가만있으라고 하지. 약 떨어진다고.

장미가 한 걸음 다가섰다. 보련은 물러서지 않았다. 두 사람의 발끝이 흙바닥에서 거의 맞닿았다. 아우의 어깨가 들썩일 때마다 쑥 냄새가 끼쳤다.

장미안 들어. 누이 뒤에 숨어 사는 놈이라는 소리, 나는 안 들어.
보련장미야.

보련은 아우의 팔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장미가 그 손을 쳐 냈다. 하필 베를 감은 손이었다. 덜 아문 자리가 벌어지는 아픔에 보련의 어깨가 움찔했고, 장미의 얼굴에서 남은 핏기가 마저 가셨다. 아우의 손이 누이의 손 쪽으로 반쯤 나왔다가 허공에서 주먹이 되어 제 허벅지로 내려갔다.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보련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어제까지는 늘 하던 말이었다.

베에 붉은 점 하나가 번졌다. 보련은 그 손을 등 뒤로 돌렸다. 느티나무 아래 얼굴들이 한 걸음씩 물러나 있었다.

마을 사람저것 보게. 벌써 저러잖나.

두 무리 사이에 나 있던 빈 땅은 어느새 없어져 있었다. 물러난 사람들이 제 편의 등 뒤로 바짝 붙어 선 탓이었다. 서로 제가 가겠다고 한 다툼이 저 눈들에는 옛말이 맞아 들어가는 모양으로 보였다. 말로는 더 갈 데가 없었다.

보련은 높은 산을 올려다보았다. 말은 듣는 사람이 뒤집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돌은 누가 쌓았는지를 가리지 않았고, 놓인 자리를 속이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흠잡을 데 없는 성을 먼저 세운 사람이 진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면, 그 성 안으로 피해 들어올 사람들이 그 말을 못 들은 척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보련은 그렇게 믿었다.

보련은 아우를 돌아보았다.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 장미의 턱에는 아직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지금 꺼내면 아우의 귀에는 방금과 똑같은 소리로 들어갈 것이었다. 보련은 삼켰다.

보련하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흙을 누르고 있던 큰 원로의 지팡이가 땅에서 떨어졌다.

큰 원로조건이라니, 무슨 조건이오.
보련일꾼하고 연장은 똑같이 나눕니다. 돌 다뤄 본 사람도 반씩이요.

마른 원로는 토를 달지 않았다. 보련은 원로들을 보지 않았다. 둘러선 얼굴들을 한 바퀴 돌아보며 마저 말했다.

보련그리고 누구도 상대 산 일에는 손대지 않습니다. 쌓는 사람도, 산 아래 있는 사람도요.
큰 원로그러겠소. 다들 들었소.
장미저도 하겠습니다. 조건은 누이 말대로요. 정정당당히.

장미는 그 말을 하고 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도로 거두었다.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아우가 무엇을 삼켰는지 보련은 알지 못했다.

어머니안 된다. 얘들아, 그건 안 된다.
큰 원로제 입으로 하겠다고 했소.

어머니의 입술이 몇 번 달싹였다. 말은 더 나오지 않았다. 보련은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

사람과 연장을 가르는 데 여러 날이 걸렸다. 장정은 두 줄로 세우고, 가래와 지렛대와 밧줄은 하나씩 마주 놓아 길이를 댔다. 어느 줄이 누구 몫이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채였다. 장미는 연장을 말없이 날랐다. 어깨가 욱신거릴수록 더 큰 것을 졌다.

나무 아래의 그날, 마른 원로가 아들은 하나라고 하던 때 장미는 숨이 쉬어졌다. 숨이 쉬어지는 제 가슴이 싫어서 그날 밤 그는 달도 없는 마당에서 장작을 팼다. 누이는 말리지 않았다. 제 손으로 베를 새로 감고 나와 마루 끝에 앉아서, 패 놓은 장작을 받아 쌓았다. 한 단도 비뚤지 않았다. 묶어 주겠다는 말을 장미는 이번에는 꺼내지도 못했다.

가르기가 끝난 저녁, 느티나무 아래에서 제비를 뽑았다. 젊은 원로가 주먹에 지푸라기 두 가닥을 쥐고 나왔다. 긴 것이 높은 산, 짧은 것이 강가의 낮은 산이었다. 누이가 먼저 뽑으라고 턱짓을 했다. 장미가 뽑은 것은 짧았다.

강길이 다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제 이름으로 불리는 성을 쌓겠다던 산이었다. 장미는 지푸라기를 쥔 손을 펴지 못했다. 누이가 그 손을 보고 있었다. 누이는 능선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장미는 지푸라기를 주먹 안에서 꺾었다.

큰 원로가 지팡이를 들어 서쪽 하늘을 가리켰다. 해 넘어간 자리에 손톱만 한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큰 원로저 달이 차기 전이오. 먼저 다 쌓는 쪽이 이기오.

사람들은 보름까지 남은 날을 손가락으로 꼽아 보며 흩어졌고, 벌써 보련의 산, 장미의 산이라고 불렀다. 장미는 집으로 가는 고샅에서 누이를 따라잡았다. 이기면 그만이었다. 성을 다 쌓은 그 자리에서, 이긴 입으로 누이는 안 죽는다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그 말을 하려고 따라잡았다. 누이가 돌아보았다. 이겨서 살려 주겠다는 말을 들으면 누이는 웃을 것 같았다. 웃지 않고 고맙다고 한다면 그쪽이 더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장미누이.
보련왜.
장미손은 좀 어때.
보련괜찮다. 네 어깨나 챙겨라.

장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까지 그는 누이의 반 걸음 뒤에서 걸었다.

✧✧✧

그날 밤 어머니는 시렁에서 베를 내렸다. 보련의 손바닥을 감은 것과 같은 베였다. 어머니는 관솔불 아래에서 베를 길게 찢어 두 가닥을 내고 가닥마다 똑같이 꼬았다.

어머니한 자락에서 난 거야. 길이도 같고, 꼰 수도 같고.

어머니는 두 가닥을 불빛에 나란히 대어 보였다. 남매는 대꾸가 없었다. 어머니는 끈 끝의 보풀을 손톱으로 뜯어내며 자식들이 아니라 끈에다 대고 말했다.

어머니밥도 똑같이 지어서 똑같이 올려 보낼 거다. 어느 산에 더 가고 덜 가는 거 없이. 그러니 둘 다, 돌아오기만 해라.

보련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베 감은 쪽이었다. 새로 감은 베에는 마른 얼룩이 엷게 배어 있었다. 어머니는 그 베 바로 아래 손목에 끈을 두르고 매듭을 지었다. 손이 빨랐다. 매듭은 단단했고 한 번에 끝났다.

어머니너는 걱정이 안 된다. 늘 그랬지.
보련예.

칭찬이었다. 보련은 그렇게 들었다.

장미는 성한 어깨 쪽 손목을 내밀었다. 어머니는 끈을 두르고 매듭을 짓다가 도로 풀었다.

어머니안 조이니.

장미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는 그러고도 손가락 하나를 끈 밑에 넣어 보고서야 다시 묶었다. 다 묶고 나서도 어머니의 엄지는 매듭 위에 얹혀 있었다. 아들의 손목을 쥔 채 어머니는 불빛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보련은 그 손을 보고 있었다. 제 손목에서보다 오래였다. 아우는 어깨가 성치 않으니 끈이 돌에 쓸려 풀리면 혼자 다시 묶기도 어려울 것이었다. 그러니 어머니는 단단히 봐 주는 것이라고, 보련은 늘 그랬듯이 생각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 손목의 매듭을 성한 손으로 한 번 돌려 보았다. 자리에 누워 눈을 감은 뒤에도 매듭 위의 엄지가 한동안 보였다.

닭이 울기 전에 남매는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사립문을 닫지 않고 따라 나왔다. 마을 끝 갈림길에 일꾼들이 두 줄로 서 있었고 연장도 두 무더기였다. 남매는 서로 말이 없었다. 장미가 먼저 제 줄 앞에 가 섰고 보련도 제 줄 앞에 섰다.

산길은 들머리부터 가팔랐다. 동쪽 능선이 희어질 무렵 길이 한 번 꺾이면서 골짜기 건너가 트였다. 보련은 돌아보았다. 건너편 낮은 산의 중턱에서 장미도 돌아서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우가 팔을 들었다. 주먹이었다.

보련도 성한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부딪칠 데가 없는 주먹이 골짜기 이쪽과 저쪽에 하나씩 떠 있었다. 장미가 먼저 팔을 내리고 돌아섰다. 보련은 아우의 등이 나무 사이로 들어갈 때까지 보았다. 그 아래, 두 길이 갈라지는 자리에 어머니가 서 있었다. 일꾼들은 다 올라가고 혼자였다. 어머니는 높은 산으로 드는 길에도, 강으로 내려가는 길에도 발을 올리지 않았다.

제 3 화

두 개의 산

초승달이 걸렸던 밤이 밝자 북소리가 두 산에서 동시에 울렸다. 보련은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발치에 쌓인 가장 큰 돌을 지나쳐 비탈을 올랐다. 그는 돌보다 먼저 산의 경사와 물이 고일 자리, 사람들이 오르내릴 길부터 눈으로 재었다. 두런거리던 일꾼들은 돌무더기와 그의 등을 번갈아 보았다.

늙은 일꾼장수님, 돌은 언제 올려요. 다들 손이 근질근질한데.
보련아직요. 말뚝부터 박으세요. 물 고일 데랑 사람 다닐 길에.
늙은 일꾼돌은요.
보련그건 나중에요.

보련은 벌써 다음 말뚝 자리를 발로 다져 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영문을 모른 채 말뚝과 노끈을 들고 비탈을 오르내렸다. 해가 중천에 이르도록 눈에 보이는 벽은 한 자도 서지 않았다. 보련은 그 사이 성벽의 뼈가 될 돌을 하나씩 골라 작은 돌로 밑을 받쳐 수평을 잡았다. 채근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몇몇의 얼굴에는 못 미더운 기색이 스쳤다.

해 질 무렵에야 물길 홈과 성문 자리를 잇는 선이 산허리를 한 바퀴 둘렀다. 늙은 일꾼이 그 선을 따라 산허리를 끝까지 걸어 보고 돌아왔다.

늙은 일꾼눈으로 볼 땐 몰랐는데, 걸어 보니 알겠구먼. 벽이 이리로 서는 거네요.

보련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지막 말뚝에 노끈을 한 번 더 감아 당겼다. 선은 어디서도 늘어지지 않았다.

보련벽은 내일부터 올립니다.

밤이 되어서야 그 선을 따라 뼈대가 될 돌 몇 개가 자리를 잡았다. 크기는 작았지만 어느 것도 흔들리지 않았다.

✧✧✧

강가의 낮은 산에서는 장미가 같은 북소리에 맞춰 눈에 보이는 가장 큰 돌부터 어깨에 걸었다. 돌이 자리에 놓일 때마다 사람들의 함성이 뒤따랐고, 해가 지기 전에 벽 한 자락이 벌써 사람 키를 넘었다.

부하어이구, 장수님 어깨 하나가 열 사람 몫이네. 열 사람 몫이야.

장미는 돌가루 묻은 손을 털며 웃었다.

장미내일은 스무 사람 몫 할게요.

웃음이 비탈을 타고 번졌다. 사람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늦도록 산을 내려가지 않았다.

밤이 깊어진 뒤 밑돌이 흙 속으로 조금씩 밀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홰를 들이대자 낮에 세운 벽 한 구간이 이미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다. 장미는 갈라진 틈에 손가락을 넣어 보았다. 두 마디가 다 들어갔다. 낮에 함성이 가장 크게 오르던 자리였다.

✧✧✧

차오르는 달이 뜨는 며칠 사이, 보련은 사람을 나누었다. 늙은 일꾼에게는 돌의 결을 보게 하고, 아이들에게는 작은 쐐기돌을 나르게 하고, 물 긷는 일꾼에게는 따로 길을 냈다. 처음에는 저마다 어리둥절했지만 사나흘이 지나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제자리를 찾아갔다.

늙은 일꾼이건 결이 삐딱해요. 눌러 놓으면 한 철을 못 가요.
보련그럼 저 아래 축대에 눕히죠.

늙은 일꾼이 돌을 옆으로 밀어 놓자 젊은 축 둘이 말없이 그것을 축대 쪽으로 굴려 갔다.

나흘째 되던 날, 한 일꾼이 옮기던 돌 밑에 발이 끼었다. 비명이 오르자 보련은 모두를 물리고 곧장 돌 밑으로 손을 넣었다.

보련손 떼요. 제가 듭니다.

발을 뺀 일꾼은 그 자리에 눕혀 물을 먹였고, 나머지는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보련의 손에는 아까 든 돌의 무게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날 뒤로 사람들은 돌을 옮기기 전에 먼저 보련 쪽을 보았다.

✧✧✧

낮은 산에서는 장미가 갈라진 구간을 혼자 다시 쌓으려 했다. 부하들을 물려 놓고 무너진 돌을 짊어지다가 어깨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부하장수님, 그러다 어깨 상해요.

장미는 대꾸하지 않고 어깨를 감싼 채 돌아섰다. 등 뒤에서 부하의 발소리가 한참 떠나지 않았다.

부하저기, 작은 돌로 밑부터 잡아 보면 어떨까요.

장미는 그 말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작은 돌부터 골라 밑을 채우는 부하의 곁에 말없이 앉았다. 부하가 놀라 손을 멈추었다. 장미는 한참 돌만 고르다가 입을 뗐다.

장미하던 대로 하세요. 위는 제가 받칠게요.

그날부터 장미는 무너진 자리마다 작은 돌로 먼저 수평을 잡았다. 대신 그는 제가 가장 잘 아는 일을 했다. 적이 오를 길과 물러날 길을 살펴 방어선과 출입로 자리를 잡았다. 부하들은 그 뒤로 오히려 더 바짝 그를 따랐다. 강가의 낮은 산도 조금씩 제 모습을 갖추어 갔다.

부하여기 서면 강에서 올라오는 놈들이 다 보이겠는데요.

장미는 저도 모르게 성치 않은 어깨를 한 번 짚었다가 손을 내렸다.

장미그럼 됐어요. 이제 물러날 길 보죠.
✧✧✧

어머니는 사람 편에 밥을 올려 보냈다. 높은 산에도, 강가의 낮은 산에도 꼭 같은 양이었다.

마을 사람어머님이 손 좀 쉬어 가며 하시랍니다.

보련은 밥그릇을 받아 들었다. 국은 아직 따뜻했고 나물에서는 막 데친 냄새가 났다. 그는 어머니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으려 애쓴다고 여겼다. 몇 술 뜨고 나서 그릇을 늙은 일꾼에게 밀어 주고 다시 일어섰다.

✧✧✧

강가의 낮은 산에도 같은 무렵 밥이 올라왔다. 그릇은 높은 산으로 간 것과 다르지 않았다.

마을 사람어머님이 다치지 말라고 하셨어요.

장미는 그릇을 받다가 산 아래에서 어머니가 높은 산 쪽 심부름꾼을 붙들고 오래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끊어져 들렸다. 성벽이 얼마나 자랐는지, 다친 사람이 또 있는지 하나하나 캐묻는 말투였다. 장미는 그 등을 잠시 보다가 돌아섰다. 가슴 한 자락이 서늘했다. 왜 그런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다치지 말라는 말을 입속으로 한 번 되뇌어 보고, 그는 국이 식기 전에 숟가락을 들었다.

✧✧✧

차오르는 달이 뜬 어느 밤, 보련은 물을 길으러 골짜기로 내려갔다. 두 산의 물줄기가 만나 웅덩이를 이루는 자리였다. 반달에 못 미친 달이 가늘게 걸려 있었다.

둘러보니 양쪽 산 모두 낮보다 조용했다. 높은 곳에는 드문드문 화톳불이 남아 있었고, 낮은 곳에는 아직 매듭짓지 못한 성벽의 그림자가 물 위에 비쳤다. 물소리 사이로 다른 발소리가 섞여 들었다.

장미였다. 진흙과 돌가루를 뒤집어쓴 몰골이 보련과 다르지 않았다. 둘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다가 아무 말 없이 물가에 나란히 앉았다. 보련의 눈은 앉으면서도 아우의 어깨에 먼저 가 있었다.

보련어깨는 좀 어때.

장미는 팔을 두어 번 돌려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아프다는 내색은 없었지만 팔은 끝까지 올라가지 않았다. 물속에 담근 손끝이 밤에도 흰 딱지투성이였다.

보련또 혼자 들었지.
장미이까짓 거.

장미도 손을 뻗어 보련의 손바닥을 뒤집어 보았다. 새로 감은 베 위로 마른 얼룩이 엷게 배어 있었다. 그는 헝겊이 헐거워진 자리를 손끝으로 눌러 보고는 말없이 다시 여며 주었다.

장미누이 손은.
보련다 나았다.

거짓말이었다. 갈라졌던 자리는 낮의 노동으로 다시 뻑뻑해져 있었다. 장미는 그 손을 한 번 더 내려다보았을 뿐 더 묻지 않았다.

보련은 아우의 소맷자락을 걷어 멍든 자리를 살폈다. 붉게 부어오른 살갗 아래로 뼈는 성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놓였다.

보련얼굴이 반쪽이네.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장미누이도 잠은 자고 다니는 거야.

두 사람은 잠시 같이 웃었다. 산에 오른 뒤로 보련은 이렇게 웃어 본 적이 없었다.

낮에는 서로 다른 산을 지고 선 사이였지만, 물가에 나란히 앉으니 어릴 적 그대로였다. 능선에서 처음 서로에게 이기고 싶다고 말하던 밤도, 개울에서 나란히 돌을 골라내던 낮도 이 물소리 안에 함께 있는 것 같았다. 달빛 아래 두 사람의 손목에는 어머니가 묶어 준 끈이 여전히 매여 있었다. 장미의 끈은 돌에 여러 번 쓸린 자리가 닳아 곧 풀릴 것처럼 헐거워져 있었다.

보련은 말없이 그 매듭을 다시 죄었다. 손끝이 야무졌다. 장미는 누이의 손이 제 손목 위에서 움직이는 것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장미이런 건 이제 나도 혼자 묶을 줄 알아.
보련알아도 손이 하나뿐이면 못 묶는다.

매듭을 다 묶은 뒤에도 보련의 손가락은 잠시 그 자리에 머물렀다. 장미는 그 손을 밀어내지 않았다.

장미는 잠시 물소리만 들었다. 그러다 자기 쪽 사람이든 돌이든 누이의 산에는 손대지 않겠다고, 이미 지켜 온 약속을 다시 다짐하듯 말했다. 보련도 같은 말을 아우에게 돌려주었다.

장미내가 정정당당히 이겨도 말이야. 누이를 그 자리에는 안 세워.

어떻게 하겠다는 말은 뒤따르지 않았다. 장미는 물에 담근 손을 쥐었다 폈다.

장미그렇게는 안 둬, 내가.

보련은 그 말에 웃음이 먼저 나왔다. 아우의 진심을 의심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진다는 그림이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보련내가 왜 져.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마.

같은 생각을 품고 있다는 말이 혀끝에 걸렸다. 이기면 아우를 살리겠다는 말을, 보련은 삼켰다. 지금 그 말을 꺼내면 자신이 질 수도 있다고 제 입으로 인정하는 셈이 될 것 같았다. 그는 아우의 젖은 머리카락을 한 번 흩트리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장미는 물끄러미 제 손목의 매듭을 내려다보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련은 그 숨을 못 들은 척, 아우의 어깨를 한 번 가만히 감쌌다가 놓았다. 말보다 그 손이 먼저 답이 되기를 바랐다.

골짜기에서 올려다본 두 산은 어둠 속에서 거의 같은 높이로 보였다. 낮 동안 벌어진 차이는 이 자리에서만은 보이지 않았다.

먼저 일어난 것은 장미였다. 그는 젖은 손을 털며 자기 산 쪽으로 돌아섰다. 몇 걸음 가다 발소리가 멎었다. 돌아보는 기척이었다. 보련은 고개를 들지 않고 물가에 앉은 채 손목의 매듭만 매만졌다. 발소리는 한참 만에야 다시 멀어졌다.

보련은 물가에 오래 더 앉아 있었다. 아우의 한숨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가 물을 길어 제 산으로 돌아선 뒤에는 물소리만 그 자리에 남았다.

웅덩이에 비친 가는 달이 두 산 쪽으로 갈라지는 물살을 따라 함께 흔들렸다.

✧✧✧

이레째 되던 날, 반달이 떴다. 원로 셋이 양쪽 산을 오르내리며 얼마나 쌓였는지 짚어 보았다.

원로들은 높은 산의 성벽을 손으로 짚어 가며 한 바퀴 돌았다. 물이 빠지는 홈은 이미 굽이마다 자리를 잡았고, 성문 위에는 돌 몇 개를 얹을 자리만 비어 있었다. 늙은 일꾼이 곁에서 원로들의 걸음을 따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벽은 벌써 산허리를 돌아 고리를 이루고 있었다.

보련은 한 발짝 물러서서 그들의 판정을 들었다. 마른 원로가 성문 기둥돌을 손바닥으로 두어 번 두드렸다.

마른 원로이쪽은 문 자리고 물길이고 다 잡혔소.

원로들은 강가로 내려가 낮은 산의 벽도 두드려 보고 돌아왔다. 겉보기에는 굵고 튼튼한데 이음매 몇 곳은 아직 손을 대지 않은 채라고 했다.

젊은 원로저쪽은 힘은 좋은데, 손볼 데가 아직 많습니다.

큰 원로는 더 듣지 않고 지팡이 끝으로 땅을 한 번 짚었다.

큰 원로하루하고도 반나절은 이쪽이 앞섰소.

보련 쪽 사람들 몇이 소리 없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누구도 크게 기뻐하지는 않았다.

판정이 끝나자 사람들 사이에서 낮은 말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등 뒤로 숨던 말이었다.

마을 사람그럼 보련이 이기면 장미는 어찌 되나.
마을 사람옛말대로면 목숨을 내놓아야지.
마을 사람그래도 둘 다 개울에서 우리를 구해 준 아이들인데.

처음으로 그 말이 숨지 않고 나왔다. 둘러선 사람들 몇은 낯빛을 굳히고도 말을 물리지 않았고, 다른 몇은 고개를 돌려 딴 곳을 보았다. 보련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이 강가의 낮은 산으로 갔다. 성문 하나 차이였다. 그 차이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 그는 그제야 남의 입으로 들었다.

✧✧✧

그 말은 어느새 마당 담을 넘어와 있었다. 어머니는 높은 산의 성벽을 올려다보며 한동안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담 너머의 말이 귀에 다시 닿자 얼굴에서 핏기가 스르르 빠져나갔다.

어머니는 마당에 오래 서 있지 못하고 부엌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손에 쥔 행주를 물기가 다 빠지고도 한참 더 짜고 있었다는 것을 어머니는 나중에야 알아차렸다.

그날 밤 어머니는 손끝으로 높은 산의 진척을 세어 보았다. 성문 위에 올릴 큰 돌 몇 개, 남은 것은 그뿐이었다. 어머니는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며 두 번, 세 번 다시 세었다.

어머니의 눈이 어두운 부엌 안쪽, 쌀독과 떡판 쪽으로 조용히 옮겨 갔다.

제 4 화

누이의 성벽

여드레째 되던 날, 빗줄기가 옆으로 눕기 시작하자마자 흙탕물이 운반로를 통째로 삼켰다. 돌무더기 무너지는 소리에 사람의 비명이 섞여 들리자, 보련은 반쯤 끌려 오르던 돌의 밧줄을 말뚝에 두 바퀴 감아 붙들어 매고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성문 위에 올릴 큰 돌은 이제 몇 개만 남아 비탈 아래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보련돌은 두세요. 사람부터요.

몇몇이 성문 쪽을 흘깃거리며 머뭇거렸다. 해가 능선을 넘기 전에 남은 돌을 마저 올리면 하루를 벌 수 있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늙은 일꾼장수님, 이러다간 오늘 저 돌 다 못 올리는데요.
보련알아요. 삽 드세요.

보련은 대꾸를 기다리지 않고 흙더미 앞에 무릎을 꿇어 맨손으로 흙을 파헤쳤다. 늙은 일꾼이 두말 않고 삽자루를 고쳐 잡자 다른 이들도 하나둘 흙더미로 달려들었다. 빗물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려도 누구 하나 손을 놓지 않았다.

한참 만에 흙더미 저편에서 삽 하나가 멈추었다.

일꾼여기요, 여기. 발목이 잡혀요.

짧은 함성이 터지고 손들이 그쪽으로 몰렸다. 갇혔던 이들을 모두 끌어내기까지 해가 두 뼘은 더 기울었다. 다친 이들을 싸매 내려보내자 부축하는 사람들까지 함께 산을 내려갔고, 성문 위에 올릴 돌은 운반로를 다시 내기 전에는 한 자도 옮길 수 없게 되었다.

보련의 손끝은 굳어 가던 자리 위로 다시 벗겨지고 긁혔다. 손목끈에는 흙물이 배어 무겁게 젖었지만, 그는 손을 내려다볼 겨를도 없이 다음 밧줄을 잡았다.

비가 잦아들자 그는 물길을 따라 성벽을 한 바퀴 돌았다. 처음부터 옆으로 돌려 둔 홈이 빗물을 고스란히 받아 흘려보낸 덕에 성벽은 어느 자리도 밀리지 않았다. 보련은 젖은 돌벽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성을 지킨 것은 힘이 아니라 미리 잡아 둔 물길이었다.

해가 떨어지고 사람들이 흩어진 뒤에도 보련은 성문 자리를 서성였다. 올리지 못한 돌들이 비탈 아래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오늘 잃은 것을 꼽아 보면 반나절과 다친 일꾼 몇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같은 손을 뻗을 것 같았다.

그 밤, 보련은 남쪽으로 이어지는 산길에 홀로 섰다.

달은 반달을 지나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다. 보련은 비에 길이 패지 않았는지 두어 굽이를 걸어 본 뒤, 보퉁이에서 짚신 두 켤레와 마른 식량을 꺼내 바위틈에 밀어 넣었다. 흙을 덮어 표 나지 않게 다독이는 손끝이 이상하게 조심스러웠다.

흠 없이 이기기만 하면 사람들도 자신의 말을 함부로 흘려듣지 못하리라 믿었다. 승자의 말로 그 낡은 약속을 물리고, 장미와 함께 이 길로 마을을 떠나면 그만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그 장면을 그려 보았다. 마지막 돌까지 올린 성벽을 등지고 서서, 죽음의 약속 대신 아우의 손을 잡고 걸어 내려가는 모습이었다. 그림 속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고개를 끄덕였고, 끄덕이지 않는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돌은 놓인 자리를 속이지 않는다고, 그는 늘 믿어 왔다. 사람의 마음도 그러기를 바랐다.

이 계획은 아직 아무에게도, 장미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던 보련은 골짜기 너머 강가의 낮은 산 쪽을 돌아보았다. 횃불이 여느 밤보다 늦도록 꺼지지 않고 있었다. 그 산의 일에는 손대지 않기로 한 약속이었다. 보련은 서늘해지는 마음을 그대로 둔 채 돌아섰다.

✧✧✧

아흐레째 새벽까지 장미는 횃불 아래에서 성벽 한 구간을 다시 쌓고 있었다. 어제의 비바람이 송두리째 쓸어 간 자리였다. 큰 돌부터 올리려던 손을 거두고 작은 돌을 골라 밑동부터 채워 넣었다. 누이가 하던 그대로였다.

돌의 무게가 다친 어깨를 타고 목덜미까지 올라와도 그는 신음 대신 숨을 짧게 끊어 쉬며 다음 돌을 끌어당겼다. 물보라에 젖은 손목끈이 살갗에 척척 감겼지만, 누이가 다시 죈 매듭은 풀리지 않았다. 누이에게 배운 방식으로 누이를 따라붙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벽이 다시 반듯하게 서는 것을 보면 부끄러움과는 다른 것이 함께 차올랐다. 살아서 이 벽 앞에 서 있고 싶었다.

동이 트며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물가에 붙은 낮은 산은 돌 나르는 길이 짧아, 하루 넘게 벌어졌던 격차가 밤사이 돌 한 개 차이로 줄어 있었다. 높은 산에서는 밤새 운반로를 새로 내고 돌을 올렸다고 했다. 저쪽은 이제 큰 돌 하나만 남았고 이쪽에는 아직 둘이 남았다는 말이 새참을 나르던 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말을 전한 이가 돌아서기도 전에, 장미는 어머니가 부하 하나를 붙들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남은 돌이 몇 개인지, 높은 산 쪽은 얼마나 남았는지를 캐묻는 낮고 또박또박한 말이 바람에 실려 왔다.

장미어머니, 여기서 뭐 하세요.

어머니는 흠칫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손에 쥔 것도 없이 그저 서 있었을 뿐인데, 몸을 돌리는 모습이 도망치는 사람 같았다.

어머니아니, 밥이나 좀 더 올려 보낼까 하고.
장미제 밥은 제가 알아서 챙겨요.

어머니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부하가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둘만 남자 장미의 말끝이 굳어졌다.

장미누이 쪽 일에도 손을 대지 말아 주십시오. 정정당당히 이기고 싶습니다.
어머니내가 언제 남의 일에 손을 댔다고 그러니. 밥그릇 하나 더 올리는 것도 이제 못 하겠네.

어머니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장미는 그 떨림이 화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살리려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낯이 뜨거워졌고, 그러면서도 숨이 놓였다. 장미는 더 캐묻지 않고 몸을 돌려 다시 돌을 짊어졌다.

✧✧✧

해가 중천을 넘어설 무렵, 큰 원로가 사립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섰다. 장독 뚜껑을 닦던 어머니는 손을 멈추었다. 원로는 마루에 걸터앉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큰 원로내일이면 높은 산 쪽 성이 닫히겠소.

어머니는 행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큰 원로채비는 어느 쪽으로 하시겠소. 딸이 이긴 걸 기뻐할 거요, 아들 상을 치를 거요.
어머니보련도 제 자식입니다. 둘 다 잃을 수는.
큰 원로원로들도 마을도 마음은 이미 정했소.

끊긴 말을 어머니는 다시 잇지 못했다. 대답 대신 마당의 흙바닥만 내려다보았다.

큰 원로지난번에 한 말에서 달라진 게 없소. 다들 밤잠을 못 자오.

원로의 목소리에는 다그침보다 지친 두려움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이 셈법을 다행스러워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원로는 그 말만 남기고 사립문을 나섰고, 마당에는 어머니 혼자 남았다.

마당 밖 고샅에서 낮은 말소리가 넘어왔다. 내일이면 끝난다는 말과, 그럼 장미는 어찌 되느냐는 말이 번갈아 오갔다. 그 말들 사이로, 어머니에게는 오래된 기억이 먼저 떠올랐다.

강보에 싸여 열병을 앓던 장미의 밤들이 스쳐 갔다. 이마에 젖은 수건을 얹고 뜬눈으로 새운 겨울밤이면, 넘어져도 좀처럼 울지 않던 보련은 옆방에서 기척 하나 없이 혼자 잠들어 있었다. 강한 아이는 어디서든 살아남고, 약한 아이는 자신이 없으면 죽는다는 생각이 다시 어머니를 붙들었다. 오래전부터 옳다고 믿어 온 셈법이었고, 어머니는 그것을 굳이 되짚지 않았다.

어머니는 부엌으로 몸을 돌리며 앞치마 끈을 다시 질끈 동여맸다. 손을 움직이면 생각이 잠시라도 멈출 것 같았다.

밤이 깊어지자 어머니는 부엌에 홀로 앉아 불려 둔 쌀을 절구에 찧었다. 곱게 빻은 가루에 물을 조금씩 부어 가며 반죽을 치대는 손놀림은 오랜 세월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었지만, 눈은 자꾸 문밖 어둠을 향했다. 반죽에 든 것은 쌀가루와 물, 조청 한 숟갈이 전부였다. 독도 약도 그 손에는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것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부엌에는 절구질 소리와 반죽 치대는 소리만 오래도록 이어졌다. 집 안 어디에도 다른 기척이 없었다. 바람이 바뀔 때마다 강가의 낮은 산에서 돌 부딪는 소리가 실려 왔고, 높은 산은 이미 이겨 놓은 사람의 밤처럼 조용했다. 화덕 불씨가 잦아들면 어머니는 삭정이를 더 얹었다. 창호지 틈으로 스미는 달빛이 반죽 그릇 위에 얇게 내려앉았다.

보련이 어릴 때 유난히 좋아하던 모양으로 반죽을 빚었다. 손끝으로 가장자리를 여러 번 눌러 접어 작은 연꽃 모양을 만들고, 다시 펴서 둥근 보름 모양으로 고쳤다. 접었던 꽃잎의 자국이 둥근 떡 위에 희미한 결로 남았다. 어린 보련은 이 떡을 받으면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콕 찍어 보며 웃고서야 입에 넣곤 했다. 그 버릇이 아직 남아 있을지 궁금해져서, 어머니는 반죽을 쥔 채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보련이 마지막으로 무엇을 달라고 한 것이 언제였는지는 떠올릴 수 없었다. 그 아이는 자라는 내내 손을 벌리는 법이 없었고, 어머니는 그것을 대견하게만 여겨 왔다.

손 닿는 자리에는 보련의 갈라진 손바닥에 감아 줄 새 무명천을 미리 개켜 두었다. 손을 쉬게 하고, 갈라진 자리를 싸매 주고, 조금이라도 오래 곁에 앉혀 둘 생각뿐이었다.

어머니는 이 밤의 일을 죽이는 일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잠시 늦추는 일이라고 불렀다. 조금만 늦추면 된다는 말을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늦춘 시간의 끝에 무엇이 오는지는 끝내 셈하지 않았다.

문득 두 아이의 손목에 처음 끈을 묶어 주던 밤이 떠올랐다. 그날은 어느 쪽도 편들지 않으려 했으면서, 지금은 스스로 한쪽을 정해 놓고 있었다.

둘을 데리고 이 마을을 뜨는 길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보련은 세우던 성을 두고 떠날 아이가 아니었고, 장미는 그 어깨로 산길을 넘을 수 없었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고, 어머니는 거기에 이유를 하나씩 덧붙이고 있을 뿐이었다.

손을 멈추고 반죽 그릇을 밀어 둔 채 문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두 산의 불빛이 작게 떠 있었다. 이대로 그릇을 엎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자리에 누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밀어 둔 그릇을 다시 당겨 왔다. 이미 여기까지 온 걸음을 되돌릴 자신은 없었다.

소리 나는 산과 조용한 산에 각각 서 있을 두 아이를 차례로 떠올렸다. 어느 쪽도 미워한 적은 없었다. 그 사실이 이 밤의 일을 조금은 가볍게 해 주기를 바랐지만, 손 아래 반죽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시루에서 김이 오르자 쌀 냄새가 부엌 안에 가득 찼다. 김이 얼굴을 스치고 삭정이 연기가 매워 눈이 시렸다. 어머니는 소매로 눈가를 훔치고 다시 남은 반죽 앞으로 몸을 숙였다.

쪄 낸 떡을 채반에 옮겨 놓고도 어머니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릇 위에 내려앉았던 달빛은 어느새 문턱 쪽으로 옮겨 가 있었다. 몇 개인지 세다가 손을 놓고, 놓았다가 다시 세었다. 등이 뻐근하고 발끝이 시려 왔다.

식은 떡 한 조각을 떼어 입에 넣어 보았다. 달지도 짜지도 않은 쌀맛뿐이었다. 그 아무렇지도 않은 맛이 오히려 목에 걸려, 어머니는 삼키지 못하고 한참을 씹었다.

날이 밝으면 보련에게 무슨 말로 이것을 내밀지 입속으로 몇 번 굴려 보았다. 손을 좀 쉬라고, 앉아서 한술 뜨고 가라고. 어느 말도 거짓은 아니었다. 보련은 아마 한 번은 사양할 것이었다. 그러면 그 손을 잡아 곁에 앉히면 되었다.

어디선가 첫닭이 울었다. 벌써라는 생각과 이제야라는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와 어머니는 어깨를 움찔했다. 열흘째 새벽빛이 창호지 밖으로 희미하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식은 떡을 다시 시루에 올려 김을 쐬고, 김이 오른 떡을 시렁에서 가장 큰 광주리에 하나씩 옮겨 담았다. 평소 나르던 것보다 갑절은 큰 광주리였다. 개켜 둔 무명천을 펴 그 위를 덮자 천 밑으로 얇은 김이 새어 나왔다. 식기 전에 닿아야 했다.

광주리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어머니는 그 무게를 두 손으로 고쳐 들고 사립문을 나섰다. 손등에는 밤새 묻은 쌀가루가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강가로 이어지는 길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고, 발은 높은 산으로 오르는 길만 밟았다.

✧✧✧

장미는 새벽 첫 물을 길으러 산 중턱까지 내려왔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저만치 산길에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런 시간에, 이렇게 큰 광주리를 들고 나설 사람이 아니었다.

광주리를 덮은 무명천 자락이 걸음마다 흔들렸다. 길이 두 갈래로 갈리는 곳에서, 어머니의 발은 망설임 없이 높은 산 쪽으로만 향했다. 이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어제 아침 어머니가 부하를 붙들고 캐묻던 모습이 떠올랐다. 정확히 무엇이 이상한지는 짚이지 않았다. 다만 이 이른 걸음과 저 광주리의 크기가, 지금까지 본 어느 심부름과도 달랐다.

장미의 발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어머니를 따라잡아 광주리 속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돌아서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다리를 붙들었다.

장미는 입을 열었다.

어머니, 라는 소리가 목 안에서만 맴돌았다.

입술은 분명 그 모양을 만들었지만, 소리는 끝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혀끝에 남은 그 말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왜 부르지 못했는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머니의 등이 나무 그늘 사이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장미는 굳어 있던 발을 뗐다. 그는 몸을 돌려 자기 산의 마지막 구간을 향해 달렸다. 등 뒤로 멀어지는 산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제 5 화

떡이 식기 전에

보련은 성문 발치에 늘어놓은 밧줄을 한 가닥씩 손바닥으로 훑어 내려갔다. 새로 낸 운반로를 타고 큰 돌들이 차례로 올라가 앉았고, 이제 성문 위에는 가장 큰 돌 하나의 자리만 비어 있었다. 그 돌은 발치에 누워 막 산마루를 넘어 오른 해의 첫 볕을 받고 있었다.

보련닳은 건 빼세요. 성한 걸로 두 겹 겁니다.
늙은 일꾼예, 다시 보지요.

늙은 일꾼이 보풀이 인 가닥 하나를 골라 옆으로 던져 놓았다. 보련은 남은 가닥의 매듭을 엄지로 눌러 보고 손을 뗐다.

보련매듭은 한 번씩 더 당겨 보세요.

비탈 아래에서는 보련 쪽 사람들이 이미 이긴 얼굴로 서 있었다. 북을 안은 일꾼이 채를 치켜들었고, 그 곁에서 누군가 환호를 터뜨리려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보련아직입니다. 채 내려놓으세요.

술렁임이 가라앉았다. 일꾼은 머쓱하게 채를 내렸다.

보련은 돌 곁에 무릎을 꺾고 밑으로 두 손을 밀어 넣었다. 돌 모서리가 낡은 베를 뚫고 살에 박히더니 손바닥이 터져 붉은 것이 배어 나왔다. 무릎 뒤가 가늘게 떨렸으나 그는 숨을 한 번 끊어 내쉬고 돌을 가슴께까지 끌어안아 일으켰다. 이 돌이 앉을 자리는 손으로 재어 둔 자리라 마지막 몇 걸음은 제 팔이 가야 했다.

해는 산마루에서 아직 한 뼘도 오르지 않았다. 폭우에 반나절을 내주고도 이쪽이 앞선다는 셈은 흔들리지 않았다. 비가 그친 뒤 강가의 낮은 산에서 횃불이 늦도록 꺼지지 않던 밤이 마음에 걸렸으나, 하루 안팎 벌어진 거리를 밤샘으로 다 메울 수는 없었다. 남은 것은 이 돌 하나였고, 돌 하나 올리는 일이라면 해가 서쪽 능선을 넘기 전까지 몇 번을 하고도 남았다. 이기고 나서 남쪽 길로 아우의 손을 잡고 내려가는 그림이 잠깐 스쳤으나, 그는 그것을 돌 무게 아래로 눌러 두었다.

그때 비탈 아래에서 일꾼 하나가 낮게 말했다.

일꾼장수님, 저기. 어머님 아니십니까.

보련은 돌을 안은 채 고개를 돌렸다. 길이 굽어 오르는 아래쪽에서 어머니가 올라오고 있었다. 무명천으로 덮은 커다란 광주리를 두 손으로 배 앞에 받쳐 들고, 걸음을 뗄 때마다 어깨가 크게 흔들렸다. 이 산에서 어머니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성문 아래 마지막 굽이에 서서 숨을 골랐다.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고 이마의 땀이 귀밑에서 마르고 있었다. 일꾼들이 말없이 길을 터 주었다.

보련은 안고 있던 돌을 성문 발치의 손 닿는 자리에 내려놓았다. 손은 그대로 돌 위에 얹어 둔 채였다.

보련어머니? 여길 어떻게. 장미한테는요.

걱정이 먼저 올라왔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온 데다 밤을 꼬박 새운 얼굴이었다. 그 걱정 밑에서 다른 것이 더디게 올라왔다. 어머니가 이 산에 올랐다. 이 성문 앞까지, 제 발로. 보련은 그것을 다시 새겨 보듯 어머니의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짚신 코가 흙투성이였다.

어머니장미에게는 이미 사람을 보냈다. 밥은 지금쯤 올라가고 있을 거야.

어머니의 눈은 보련의 얼굴에 닿기 전에 한 번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광주리를 내려놓는 손이 바닥에 무겁게 닿았다. 한 사람 몫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큰 광주리였으나, 보련은 일꾼들 몫까지 챙겨 오신 것이려니 했다. 아우도 굶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어머니네 손이 찢어졌다며. 비 오던 날 맨손으로 흙을 팠다고, 마을에서 다들 그러더라. 어디 보자.

가슴 한복판이 뜨끈해졌다. 마을 사람들 입에 오른 자기 손 이야기를 어머니가 들었다. 듣고서, 새벽길을 걸어 올라왔다. 그 순서를 하나씩 짚어 보는 동안 입술 안쪽을 물고 있지 않으면 얼굴에 드러날 것 같았다. 그 뜨끈한 것의 가장자리에 무언가 가늘게 걸렸으나, 뜨거움이 다시 밀려와 그것을 덮었다.

보련괜찮아요, 이 정도는.

보련은 돌 위에 얹은 손을 뒤집어 보이지 않았다. 몸이 먼저 돌 쪽으로 반쯤 틀어졌다.

보련이거 하나만 올리면 끝나요. 금방 올리고 올게요.

어머니는 대답 대신 보련의 손목을 쥐었다. 차가운 손이었다. 손등에는 밤새 묻은 것인지 하얀 가루가 말라붙어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뿌리칠 수 있는 손이었으나 보련은 그러지 않았다.

어머니식는다. 김 있을 때 하나만 먹어.

곁에서 밧줄을 쥐고 섰던 늙은 일꾼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늙은 일꾼장수님, 돌은 저희가 올릴까요.
보련아니에요, 제가 해요. 자리는 제가 아니까요.

어머니는 그 말을 막지 않았다. 손목을 놓지도 않았다. 보련은 성문 위 빈자리를 한 번 올려다보고, 제 손목을 쥔 어머니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머니가 이 산을 올라, 다른 누구도 아닌 제게 왔다. 그것이 돌보다 무거웠다. 그는 돌 위에 얹어 둔 손을 그제야 떼었다.

어머니물 좀 나눠 주세요. 얘 손부터 씻겨야겠어요.

늙은 일꾼이 표주박에 물을 떠 왔다. 어머니가 성문 발치의 넓적한 돌을 눈으로 가리키자 보련은 그 자리에 앉았고, 어머니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낡은 베를 풀어내자 말라붙은 피가 베에 엉겨 함께 딸려 나왔고, 어머니가 붓는 찬물이 터진 자리마다 스몄다. 쓰렸으나 보련은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광주리 덮개를 걷었다. 남은 김이 얇게 올랐다가 볕 속으로 흩어졌다. 그 밑에 작은 꽃잎 자국이 결로 남은 둥근 떡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릴 때 좋아하던 모양이라는 것을 보련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벗겨 낸 덮개는 새 무명천이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펴서 보련의 손바닥을 두 바퀴 감고 끝을 안으로 접어 넣었다. 개울 일이 있던 날 저녁 마루에서 어머니의 손은 아우의 어깨부터 갔다. 오늘은 보련의 손부터 갔다. 자기 손바닥을 누가 감아 준 것이 언제였는지 보련은 헤아려 보려다 그만두었다.

어머니하나만 먹어 봐. 어릴 때처럼.

어머니가 건넨 떡이 감은 천 위 손바닥에 놓였다. 온기가 천을 뚫고 스며들었다. 보련은 다른 손 검지로 떡 한가운데를 콕 눌러 보았다. 어릴 적부터의 버릇이었다. 어머니의 손이 광주리 가장자리에서 잠깐 멈추었고, 보련은 그것을 곁눈으로 보다가 먼저 웃고 말았다.

떡은 말랑하게 들어갔다가 천천히 올라왔다. 입에 넣자 달지도 짜지도 않은 쌀맛이 났고 끝에 조청이 아주 조금 스쳤다. 보련은 씹는 동안 성문 발치에서 볕을 받고 있는 돌을 흘끗 보았다. 이 한 점이 끝나면 일어날 생각이었다.

✧✧✧

해가 산마루에서 한 뼘 남짓 올라온 아침, 장미는 큰 돌 하나를 벽 위로 밀어 올려 이음을 맞추고 손바닥으로 두드려 보았다. 밑을 채운 작은 돌들이 누이에게 배운 대로 서로 물려 있어 돌은 꿈쩍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하나였다. 밤새 돌에 쓸린 어깨의 살갗이 터져 피가 옷 안쪽으로 번지고 있었으나 소매를 걷어 볼 겨를은 없었다.

부하장수님, 높은 산은 아직 조용하네요.

장미는 대꾸하지 않고 다음 돌 쪽으로 돌아섰으나 눈은 저도 모르게 건너편으로 갔다. 높은 산의 성벽과 그리로 오르는 산길이 맑은 볕 속에 또렷했다. 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새벽 산중턱의 광주리가 돌 무게보다 먼저 어깨에 얹혔다. 갑절로 큰 광주리와 걸음마다 흔들리던 덮개 천, 갈림길에서 한 번도 이쪽으로 향하지 않던 발.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산길을 뛰어 올라가 덮개를 걷어 보면 될 일이었다. 다만 그사이 이 벽은 비어 버리고, 누이의 북이 먼저 울린다면 살 길이 없었다. 누이가 먼저 끝낸 뒤에 서는 이 벽은 또 한 번 누이 뒤에서 쌓은 벽이 될 터였다. 샘가에서 누이의 성에는 손대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그때 누이가 죄어 준 끈이 손목에 아직 묶여 있었다. 장미는 그 셈을 끝까지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마지막 돌 곁으로 걸어갔다.

그가 돌에 손을 대려는데 산길 아래에서 마을 사람이 보자기에 싼 밥그릇을 받쳐 들고 올라왔다.

마을 사람장수님, 어머님이 보내셨어요. 다치지 말고 챙겨 드시래요.

평소와 다름없는 밥과 국 한 그릇이었다. 장미는 고개만 끄덕이고 그릇을 받아 돌 옆 평평한 자리에 내려놓았다. 산길이 굽어 내려가는 데까지 눈이 한 번 갔다. 올라온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오지 않은 어머니와 새벽의 광주리가 한 줄로 이어지려 했다. 장미는 그 줄이 이어지기 전에 그릇에서 눈을 떼고 돌 밑으로 어깨를 넣었다.

밥은 그 자리에서 조금씩 김을 잃어 갔다. 장미는 부하들을 다그치지 않았다. 다그칠 것도 없이 두 사람이 들 몫을 혼자 어깨에 걸었다. 그는 터진 살갗에 파고드는 돌 모서리를 이를 물고 견디며 마지막 돌을 어깨에 진 채 벽 위로 걸어 올라갔다.

✧✧✧

해가 산마루에서 한 뼘 반쯤 오른 사이 성문 발치의 그늘은 한 걸음쯤 물러나 있었다. 보련의 감긴 손에는 또 한 점의 떡이 쥐여 있었다. 처음 덮개를 걷었을 때보다 눈에 띄게 식어서 손끝에 닿는 결이 조금 뻣뻣했다. 아래에서는 일꾼들이 밧줄을 손질하며 이쪽을 흘끔거렸고, 재촉하는 사람은 없었다.

보련은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보련어머니, 저 이제 일어날게요. 다들 기다려요.
어머니물 한 모금만 마시고. 입 마르면 다리부터 풀려.

어머니가 표주박을 들어 보련의 입가로 가져갔다. 물이 턱을 타고 흘러 옷깃을 적셨다. 표주박이 어머니의 손끝에서 한 번 흔들린 탓이었다. 밤을 새운 사람의 손이려니 하고 보련은 물을 삼켰다. 표주박 너머로 어머니의 눈이 보련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일어나던 무릎이 그 눈길 앞에서 도로 굽었다.

어머니끈이 뻣뻣하네. 좀 죄어 놓자.
보련안 풀렸어요.
어머니그래도.

끈은 흙물에 젖었다 말라 빳빳했으나 매듭은 그대로였다. 어머니는 이미 묶인 그 매듭에 손을 올려 한 번 더 죄었다. 손이 느렸다. 죄고 나서도 어머니의 엄지는 그 위에서 떠나지 않았다. 매듭 위에 오래 머물던 엄지를 보련은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아우의 손목이었다. 지금은 제 손목 위에 있었다. 그것을 알아보자 목 안쪽이 뜨거워져 숨을 크게 쉴 수 없었다.

어머니눈 밑이 시커메. 어제도 못 잤지.
보련성문 닫히면 잘게요.

어머니가 소맷자락으로 보련의 볼에 말라붙은 흙을 닦아 냈다. 거친 베가 살갗에 닿았고 보련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을 뻔했다. 고맙다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가 도로 내려갔다. 말하고 나면 이 자리가 끝나 버릴 것 같았다. 어머니는 손을 거두고도 보련을 보고 있었다. 눈가가 붉었다. 보련은 그 눈을 오래 걱정한 눈으로 읽었다.

뒤편 성벽에 등을 기대자 지친 등 위로 아침 볕이 얹혔고 무릎 뒤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어머니 곁에 이렇게 오래 앉아 본 적이 드물었다. 보련은 몸이 풀리는 대로 두었다.

성문의 그늘이 발끝에서 조금 더 물러났다. 광주리에서 오르던 김은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 보련은 다시 무릎을 짚었다.

보련저거 하나만 올리고요. 그러고 나서 오래 앉아 있을게요.
어머니이거 하나만 더.

어머니는 더 말하지 않고 광주리 쪽으로 손부터 뻗었다. 짚었던 무릎에서 보련의 손이 저절로 풀렸다. 보련은 고개를 들어 해를 보았다. 서쪽 능선까지는 아직 한참이었다. 맞은편 강가의 낮은 산에서는 바람이 바뀔 때마다 돌 부딪는 소리가 실려 왔다. 아직 쌓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았으나 몇 개가 남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북은 조용했다. 돌 하나를 올릴 시간은 넉넉했다.

보련밧줄 먼저 걸어 두세요. 금방 일어납니다.

늙은 일꾼이 사람들을 밧줄 쪽으로 돌려세웠다. 어머니의 입에서는 끼니와 잠과 손 이야기만 나왔고 성벽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보련은 그것이 오히려 편했다.

보련이 손을 내밀자 미지근한 떡이 손바닥에 놓였다. 어머니의 손가락이 손끝에 닿았다. 떨리고 있었다. 물을 따를 때도 끈을 죌 때도 그랬을 것이다. 이제야 그것을 본 것이 보련은 이상했다.

보련어머니, 손이.

말이 거기서 걸렸다. 보련은 떡을 쥔 채 제 손끝에서 물러나는 그 손가락을 눈으로 따라갔다.

보련왜 이렇게 떠세요. 어디 편찮으세요.

어머니의 입술이 열렸다. 대답이 나오기 전에 강가의 낮은 산에서 북이 울렸다.

떡이 보련의 손에서 굴러 떨어졌다. 흙 위를 한 바퀴 구르다 멈춘 떡에서는 김 한 줄 오르지 않았다. 북이 다시 울렸고 뿔피리가 길게 뒤따랐다. 비탈 아래 사람들이 일제히 강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만은 그쪽을 보지 않고 보련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보련은 발치의 돌을 끌어안고 일어섰다. 올리려는 것인지 보려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걸음이었다. 성문 위 빈자리 곁을 지나면서도 돌은 그 자리에 놓이지 않았고, 보련은 곧장 성벽 위쪽 능선으로 올랐다. 등 뒤에서 어머니가 숨을 몰아쉬며 따라 올라오는 소리가 났다. 바람에 실려 오던 돌 소리가 언제부터 끊겼는지 그는 떠올리지 못했다.

능선에서는 강가의 낮은 산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 산의 성벽 위로 깃발이 오르고 함성이 강바람에 실려 늦게 건너왔다. 벽의 고리에는 더 이상 빈자리가 없었고, 마지막에 앉은 듯한 큰 돌 둘레로 흙먼지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북과 깃발만이 아니었다. 돌의 자리를 아는 눈에는 벽이 닫힌 것이 그대로 보였다.

깃발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뛰며 서로를 얼싸안았다. 한 사람만 뛰지 않고 이쪽 산을 향해 서 있었다. 팔을 내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멀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누구인지는 서 있는 모양만으로 알 수 있었다.

보련은 자기 성의 성문 위를 내려다보았다. 손으로 재어 둔 빈자리가 말갛게 비어 있었다. 눈을 더 내려 성문 발치의 광주리를 보았다. 덮개가 걷힌 광주리에는 떡이 빼곡했고 보련이 집어 먹은 자리만 작게 비어 있었다. 성문 위의 빈자리와 광주리의 빈자리를 번갈아 보는 동안 셈이 저절로 끝났다. 이 돌 하나를 올리는 데는 떡 몇 점을 집어 먹는 사이면 되었다. 저쪽은 바로 그 사이에 이쪽을 앞질렀다. 손끝에 묻은 떡가루는 어느새 차가웠다.

무릎 뒤의 떨림은 멎어 있었다. 앉아서 쉰 다리였다. 이 다리라면 그 돌을 성문 위까지 올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는 소리 지르지 않았다. 안고 있던 돌을 능선의 땅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감긴 손바닥에서 붉은 것이 번져 나와 있었고 손목의 끈은 그대로였다. 아래에서는 일꾼들이 고개를 젖혀 올려다보았다.

어머니가 곁에 와 서 있었다. 숨이 가빴고 광주리는 없었다. 보련은 어머니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에 말라붙은 하얀 떡가루가 아침 볕에 도드라졌다. 그 손은 아직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보련제 몫의 떡이었습니까.

한 박자가 지나도록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아래에서 함성이 한 번 더 일었다가 잦아들었고, 다시 입을 연 보련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더 낮았다.

보련아니면 제 몫의 목숨이었습니까.
제 6 화

마지막 돌의 주인

늙은 일꾼이 능선까지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 올라와 세 걸음 앞에서 멈추었다. 어머니의 입술이 막 열리려던 참이었다. 일꾼의 눈이 보련의 발치에 놓인 돌에 닿았다가 얼른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그는 무릎을 짚고 숨부터 골랐다.

늙은 일꾼장수님, 골짜기에 다들 모였습니다. 원로들이 두 분을 찾으세요.

보련은 어머니가 하려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숙여 돌을 안았다. 감아 준 천 안에서 손바닥이 다시 벌어지는 것이 느껴졌으나 손을 고쳐 쥐지 않았다. 어머니는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비탈을 내려서는 동안 보련은 돌을 두 번 바꿔 안았다. 성문 발치에서 일꾼들이 길을 열고 더러 손을 내밀었지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고, 보련은 그 손들을 지나쳤다. 어머니는 덮개가 걷힌 채 놓여 있던 광주리를 집어 들어 팔에 걸고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두 산의 물이 만나는 골짜기 자갈밭은 높이 오른 해에 하얗게 달아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그 위에 둥글게 서 있었다. 강가의 낮은 산에서 내려온 장미 쪽 일꾼들은 함성을 터뜨리려다 가운데 선 사람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삼켰다. 장미는 어깨에서 흘러 마른 피가 옷에 검게 붙은 채 서 있었고, 눈은 보련이 안고 온 돌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보련은 장미와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 돌을 내려놓았다. 성문 위에 오르지 못한 돌이 그의 발치에 앉았고, 사람들이 갈라 서 준 그 자리가 저절로 진 사람의 자리가 되었다. 장미와 눈이 마주쳤으나 두 사람 다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큰 원로장미의 성이 먼저 닫혔소. 약속은 마을 앞에서 한 것이니, 이제 지켜 주시오.
보련압니다. 그 전에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그는 원로가 아니라 어머니 쪽으로 돌아섰다. 어머니는 광주리를 발치에 내려놓았다. 덮개가 없는 광주리 안에는 식은 떡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고, 둥근 떡마다 접었다 편 꽃잎의 결이 희미하게 얹혀 사람들 눈에 그대로 드러났다.

보련오늘 아침에, 왜 저한테 오셨습니까.
어머니하늘의 뜻이다. 하늘이 이 집에 두 장수를 같이 두지 않으셨어.

보련은 어머니의 손을 보았다. 광주리 손잡이를 쥐었던 마디가 아직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보련광주리는 어머니 손으로 드셨습니다.
어머니대는 이어야지. 둘을 다 세울 집이 아니야.
보련그 둘 가운데 하나를 누가 골랐습니까.

어머니의 눈이 보련의 얼굴에서 비켜났다. 골짜기에는 두 산의 물이 자갈에 부딪는 소리만 크게 남았다.

어머니예언이 있잖니. 한 지붕 아래 두 장수가 서면, 한 별은 반드시 땅으로 떨어진다.

마을 사람 누구나 아는 말이었다. 어머니가 외는 그 말은 끝으로 갈수록 물소리에 묻혀 흐려졌다.

보련별이 광주리를 들고 높은 산을 올라왔습니까.

어머니는 그 물음을 받지 못했다. 내세운 말이 하나씩 자갈밭에 떨어지는 동안 사람들의 눈은 광주리와 그것을 쥐었던 손 사이를 오갔다.

보련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낮게 깔린 말이 골짜기의 웅성거림을 눌렀다.

보련떡이 없었으면, 누구 성이 먼저였습니까.

어머니는 한참 뒤에야 광주리에서 손을 뗐다. 손등에 말라붙은 쌀가루가 땀에 젖어 얼룩져 있었다.

어머니네 성이 먼저였다. 내가 널 앉히지만 않았어도.

보련이 오래 기다려 온 말과 닮아 있었다. 다만 그 말은 돌이 성문 위에 오르지 못한 뒤에야 왔다.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큰 원로는 눈을 내렸고 젊은 원로만 어머니를 오래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어머니방금 한 말은 다 핑계야. 하늘이 너를 놓은 것이 아니다. 내가 너를 놓았다.
보련장미한테 사람은 보내셨습니까.
어머니보냈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야. 그래 놓고 나는 너한테만 왔지.

보련의 혀 밑에는 아직 쌀맛이 남아 있었다. 달지도 짜지도 않은, 어릴 적부터 아는 맛이었다. 그것이 이제는 삼켜지지 않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어머니가 제 손등의 쌀가루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새벽에 떡을 다시 찌면서도, 그만둘 수 있었어. 안 그만뒀다.
어머니너를 미워한 적은 없다. 한 번도. 둘 다 잃을까 봐, 그게 무서웠어.

보련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고 기다렸다. 어머니는 그 눈을 마주 보지 못한 채 능선에서 받아 둔 물음을 제 입으로 꺼냈다.

어머니네가 물었지. 제 몫의 떡이었느냐고, 제 몫의 목숨이었느냐고.
어머니둘 다 네 몫이었다. 진 사람이 뭘 내놓는지 알면서, 네 손에 떡을 쥐여 줬어. 네가 강한 걸 알아서, 자꾸 네 몫을 더 얹었구나.

어머니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용서를 구하는 말은 끝내 그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보련은 어머니 쪽으로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의 손바닥에는 떡을 덮었던 무명천이 감겨 있었고, 어머니가 접어 넣은 천 끝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이 손으로 그는 아침에 돌을 내려놓았다. 기꺼이 내려놓았다.

보련저는 기뻤습니다. 장미가 아니라 저한테 오신 줄 알고.

그는 손목끈을 쥐었다. 손가락이 매듭 위에서 한 번 조여졌지만 풀지는 않았다. 끊어 낼 수도 있는 끈이었다.

보련미워하셨으면 이 끈 끊고 돌아서면 그만입니다. 아끼면서 놓으셨다니, 그게 더 모진 겁니다.

손을 놓자 손가락 마디에 붉은 줄이 남았고 끈은 그대로 손목에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접어 넣어 준 천 끝을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누가 손을 잡아 주어도 그 손부터 보게 될 것 같았다.

어머니의 무릎이 자갈 위로 꺾였다. 밀린 광주리가 기울어 떡 하나가 굴러 나왔고, 흙과 가루가 묻은 채 보련의 발치에서 멈추었다. 보련은 줍지 않았다. 밟지 않으려 발을 한 뼘 옮겼을 뿐이었다. 꿇은 어머니를 일으키지도, 눈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때 장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손목끈이 감긴 주먹이 옆구리에 단단히 붙어 있었다.

장미누이. 봤어. 새벽에, 산중턱에서. 어머니가 큰 광주리 들고 높은 산 쪽으로만 가셨어.

어머니의 고개가 천천히 장미 쪽으로 돌았다. 자갈을 짚은 손이 돌 틈의 흙을 움켜쥐었다. 장미는 그쪽을 보지 않고 보련만 보았다.

장미그냥 심부름이 아닌 것 같았어. 부를 수 있었어. 부를 수 있었는데, 안 불렀어. 가 보지도 않았어.

말은 토막토막 끊겼으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고 눈물도 없었다. 고개를 숙이지도 눈을 피하지도 않은 채, 장미는 다음 말을 밀어냈다.

장미몰랐던 게 아니야. 알고 싶지 않았어.

보련은 그 산중턱 갈림길을 알았다. 어머니의 등이 나무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볼 수 있는 자리였고, 소리를 지르면 닿는 거리였다. 죽이려 했느냐고 물을 수도 있었다. 그는 묻지 않고 아우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마른 피가 팔꿈치까지 흘러내린 어깨는 밤새 성을 등에 진 사람의 것이었고, 그 수고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보련네가 얻은 것은 승리가 아니다. 네가 외면한 내 시간이다.

장미는 그 말을 선 채로 받았다. 턱 밑으로 땀이 흘러 어깨의 피 위로 떨어졌다. 손이 손목의 끈 쪽으로 올라가다 닿기 전에 내려갔다. 그 곁에서 어머니는 자갈을 움켜쥔 채 고개를 떨구었다.

큰 원로들을 말은 다 들었소. 해가 기우오.
보련잠깐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보련은 무리 끝에 선 늙은 일꾼에게 몸을 돌렸다. 일꾼은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보련어르신. 남쪽 산길 바위틈에 흙 덮어 둔 게 있습니다. 좀 가져다주세요.
늙은 일꾼다녀오겠습니다, 장수님.
마른 원로해가 산에 닿기 전까지만 기다리겠소.

늙은 일꾼이 비탈로 사라진 뒤 골짜기는 기다림으로 가라앉았다. 해는 서쪽 능선으로 한참 기울어 그림자가 자갈밭 위로 길어졌지만 사람들은 앉지도 흩어지지도 않았다. 장미 쪽 일꾼 하나가 물그릇을 떠다 장미 곁에 놓았으나 장미는 손을 대지 않았다. 어머니는 꿇은 자리에서 자갈만 보았고, 장미는 서 있던 자리에서 발을 옮기지 않았다.

보련은 돌 위에 감긴 손을 얹은 채 기다렸다. 돌은 한낮의 열을 아직 품고 있었고, 무명천 밑에서는 맥이 뛰었다. 그는 비가 지나간 밤에 흙을 덮던 손을 떠올렸다. 이기고 돌아와 그 흙을 파낼 날만 셈했고, 이런 날에 파내게 될 줄은 셈하지 못했다.

늙은 일꾼이 흙 묻은 것들을 품에 안고 돌아온 것은 해가 능선에 닿을 무렵이었다. 정강이가 풀물과 흙으로 얼룩졌고 숨은 가라앉지 않았다.

늙은 일꾼흙 새로 덮은 데는 한 군데뿐이던데요, 장수님.

보련은 그것을 받아 사람들 앞 자갈밭 위에 내려놓았다. 흙이 굳어 붙은 짚신 두 켤레와 마른 식량이 나란히 놓이자 사람들 사이에서 낮은 술렁임이 일었다. 한 켤레는 보련의 발에 맞았고 다른 한 켤레는 그보다 작아 장미의 발에 맞게 골라 둔 것이었다. 그는 어머니도 원로도 돌아보지 않고 장미만 보았다.

보련이건 네 거, 이건 내 거야.
장미누이, 이게 뭐야.
보련내가 이기면 그 약속 없던 걸로 하자고 할 참이었어. 그러고 너 데리고 남쪽 길로 마을을 뜨려고.

어머니가 광주리 손잡이를 다시 쥐었다. 눈은 짚신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손잡이를 쥔 손마디가 하얗게 굳었다.

장미남쪽 길.
보련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너한테도.

장미의 눈이 짚신에서 보련에게로, 다시 짚신으로 옮겨 갔다. 주먹이 풀렸다가 다시 쥐어졌고, 입이 열렸으나 한참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장미샘가에서, 누이 그때 웃기만 했잖아. 이걸 다 해 놓고.

뒷말은 나오지 않았다. 장미는 짚신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작은 켤레의 코에 붙은 마른 흙이 부스러져 떨어졌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가는 붉었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장미내가 죽을게. 누이, 내가 죽을게.

보련은 고개를 저었다. 한 걸음 다가서자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고 말 하나하나가 끊겨 나왔다.

보련네 죽음으로 내 억울함을 덮지 마라. 살아서 네 승리가 아니었다고 말해.

장미의 주먹이 반쯤 올라오다 멈추었다. 남매가 약속을 닫을 때 맞대던 그 주먹이었다. 보련은 그 주먹에 제 주먹을 맞대지 않았다. 주먹은 잠시 허공에 머물다 장미의 옆구리로 내려갔고, 골짜기의 술렁임도 그 말 뒤에서 잦아들었다.

해가 산마루에 걸려 골짜기가 붉게 물들 무렵, 큰 원로가 지친 걸음으로 앞에 나섰다. 짚신 두 켤레를 내려다본 그의 눈은 오래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큰 원로사연은 알겠소. 그런 길을 봐 두었다는 것도.

큰 원로가 다음 말을 고르는 사이, 마른 원로가 곁에서 말을 가로챘다.

마른 원로약속은 마을 앞에서 했소. 절차는 정해져 있소. 진 사람이 나서야 하오.

젊은 원로가 입술을 적시며 뒤에서 나섰다. 그러나 그의 발은 큰 원로의 어깨보다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젊은 원로그래도, 두 분이 다 사는 길이 있는지 좀 더 찾아보면 안 되겠습니까.
큰 원로그런 길이 있었으면 열흘 전에 찾았소.

젊은 원로는 입을 다물고 물러섰다. 사람들 사이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번졌고, 눈들이 보련에게 모였다.

마을 사람열흘을 못 잤습니다. 이제 끝을 내 주십시오.
사람들약속을 지켜 주십시오.

보련은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었다. 열흘 동안 돌을 나르던 얼굴도, 밥을 이고 산길을 오르내리던 얼굴도 그 안에 있었다. 자기가 먼저였다는 것을 이 사람들이 알아보게 하려던 마음이 언제 가라앉았는지 그도 알지 못했다. 이 얼굴들에게는 이제 바랄 것이 없었다. 먼저였다고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발치의 마지막 돌 하나뿐이었다.

보련제 돌은 못 올라갔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다들 들으셨지요.

그는 더 보태지 않았다. 알아 달라는 말은 거기서 끝이었다.

보련은 꿇어앉은 어머니 앞으로 다가섰다. 어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는 붉었으나 어머니는 눈을 피하지 않았고, 그는 그 눈을 받았다. 손목끈 위의 손은 조이지도 풀지도 않았다.

보련어머니께는 드릴 게 없습니다. 용서도, 저주도.

어머니의 손에서 광주리 손잡이가 떨어졌다. 보련은 그 손을 다시 보지 않고 장미를 돌아보았다.

보련따라오지 마.

장미가 입을 열려는 것을 보련은 고개를 저어 막았다. 그는 몸을 굽혀 마지막 돌을 안아 올렸다. 손바닥의 무명천에서 피가 배어 나왔고 돌 밑의 자갈이 낮게 갈렸다. 늙은 일꾼이 사람들 사이에서 한 걸음 나섰다.

늙은 일꾼장수님, 그 돌은 제가 들겠습니다.
보련제가 듭니다. 어르신은 여기 계세요.

짚신과 마른 식량은 땅에 그대로 두었다. 돌만으로 팔이 찼다. 원로들이 길을 텄다. 붙잡는 손도 막아서는 목소리도 없었다.

큰 원로어디로 가시오.

보련은 대답하지 않았다. 광주리 곁을 지날 때에도 떡은 내려다보지 않았다. 사람들이 갈라 선 사이로 그의 그림자가 발보다 먼저 길게 누웠다.

✧✧✧

장미는 땅에 남은 짚신 두 켤레를 움켜쥐었다. 누이의 뒷모습이 어스름 속으로 지워진 뒤에도 따라오지 말라던 말이 한참 발목을 붙들었고, 그사이 사람들은 하나둘 흩어져 달빛이 어스름을 밀어낼 무렵 골짜기에는 어머니와 장미만 남아 있었다. 어머니의 눈은 남쪽 산길 쪽에 붙박여 있었다. 장미는 그 눈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누이가 그 길로 가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짚신을 쥔 손끝에서 올라왔다. 남쪽 길은 이긴 누이가 두 사람 몫의 짚신으로 걷는 길이었지, 진 채로 혼자 지고 가는 길이 아니었다. 그러자 어릴 적 누이가 슬픈 날이면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가 앉아 있다 돌아오던 산중 연못이 떠올랐다. 넘어져도 울지 않던 아이가 울음 대신 찾던 물가였고, 어디 다녀왔느냐고 물으면 물을 길어 왔다고만 하던 곳이었다.

장미는 짚신을 가슴에 붙여 쥐고 달렸다. 두 켤레가 품 안에서 서로 스쳐 마른 소리를 냈다. 어깨의 상처가 다시 터져 옷깃이 젖었으나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달은 보름을 앞두고 차올라 산길의 돌부리마다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하나에 발이 걸려 무릎이 꺾였을 때에도 장미는 손을 짚지 않고 짚신부터 감싸 쥔 채 일어섰다.

숲이 트이자 물빛이 먼저 보였다. 연못은 차오르는 달을 한쪽에 담은 채 잠잠했고, 그 가장자리에 돌을 안은 누이가 서 있었다. 장미는 숨이 끓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나무 사이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누이는 안고 있던 마지막 돌을 물가의 젖은 흙 위에 내려놓았다. 손목끈이 달빛에 희게 드러났다. 누이는 허리를 굽혀 신을 벗었다.

보련늦었구나, 장미야.
제 7 화

별이 떨어진 자리

보련은 물가의 돌에서 손을 떼고 감긴 무명천을 옷자락에 눌러 닦았다. 천은 밤이슬과 배어 나온 피로 눅눅했고 그 아래에서 손바닥이 욱신거렸다. 어깨와 등은 아직 그 돌의 무게를 기억했다. 평소 신던 신은 돌 곁에 나란히 벗어 두었다. 맨발 밑의 진흙에는 낮의 온기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무 사이에서 끓는 숨소리가 먼저 들렸고, 곧 장미가 풀밭으로 걸어 나왔다. 터진 어깨에서 스민 피가 옷 한쪽을 어둡게 적시고 있었다. 장미는 흙 묻은 짚신 두 켤레를 가슴에 붙여 쥔 채 물가에서 몇 걸음 떨어져 섰고, 그 팔을 내리지 못했다.

장미내가 죽을게, 누이. 내가. 내가 죽으면 되잖아.

보련은 대답하기 전에 물을 한참 보았다. 연못은 탁해서 달빛을 흐린 얼룩으로만 받았고 가장자리에서는 썩은 수초 냄새가 올라왔다. 어릴 때 슬퍼지면 숨어 오던 물이었다. 그때는 해가 지면 무릎을 털고 내려갈 곳이 있었다. 사람들이 흩어진 골짜기 쪽으로는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보련그 얘긴 아까 끝났다. 너까지 그러지 마.

화가 날수록 낮아지는 목소리가 이번에는 물소리보다도 낮았다. 돌아서서 본 아우의 얼굴에는 마른 흙이 튀어 있었고, 눈은 어릴 때 잘못을 하고 누이의 낯부터 살피던 때와 같은 모양으로 열려 있었다.

보련네가 죽길 바란 적 없다. 하루도.
장미그럼 누이는. 누이는 어쩌려고.

보련은 대답하지 못했다. 내놓을 답이 없었다.

장미가 가슴에 붙였던 짚신을 앞으로 내밀었다. 신이 손 사이에서 덜렁거렸다. 남쪽 산길 바위틈에 흙을 덮어 숨겨 두었던 신이었다. 한 켤레는 제 발에, 한 켤레는 아우 발에 맞추어 고른 것이었다.

장미가자, 누이. 지금 가면 날 새기 전에 넘어. 같이 가.

보련은 신을 보기만 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저것은 이기고 난 뒤에 둘이 걸을 길이었다. 지금 손을 내밀면 그 길은 또 한 번 참으라는 말이 되었다. 강하니까 참고, 참았으니 넘기라는 말이었다. 손이 옆구리에서 반쯤 올라오다가 손목의 끈에 걸린 듯 멈추었다. 감긴 손가락이 천 속에서 오므라들었고 손은 그대로 내려갔다.

장미누이.

장미가 부르는 소리에도 보련은 눈을 들지 않았다. 아우의 팔이 떨리는 것이 시야 가장자리로 보였다. 짚신 한 짝이 먼저 손에서 빠졌고 나머지가 뒤따라 물가 풀 위로 흩어졌다. 마른 풀에 묻혀 소리는 나지 않았고 아무도 줍지 않았다.

보련은 신이 떨어진 자리에서 눈을 떼어 발치의 돌을 내려다보았다. 모서리가 젖어 번들거리는 돌은 성문 위에 한 번도 오르지 못했다. 그 자리를 손으로 재어 둔 사람이 자기였고, 자기가 먼저였다는 말을 대신해 줄 것은 이제 이 돌뿐이었다.

보련장미야. 살아서 말해라. 누가 먼저였는지. 누가 누구를 늦췄는지.

장미의 입술이 달싹였으나 말이 되지 못했다. 대답 대신 주먹이 올라왔다. 골짜기에서 맞대지 않은 주먹이었다. 보련의 감긴 손은 주먹이 되지 못했고, 손등이 그 주먹에 스치듯 닿았다가 떨어졌다. 장미의 주먹은 얼음물에 담갔다 뺀 것처럼 차가웠다. 발을 적신 물이 그제야 시렸다.

✧✧✧

마른 풀을 헤치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장미는 내밀었던 주먹을 거두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고,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어머니가 나타났다. 머리는 풀려 어깨에 걸렸고 치맛단은 흙투성이였으며, 손등의 쌀가루만 허옇게 남아 있었다.

어머니보련아.

보련이 돌아보았다. 입은 다물려 있었고 그 얼굴에서는 용서도 저주도 읽을 수 없었다. 눈은 어머니의 얼굴에서 손등으로 내려가 잠깐 머물렀다.

어머니가 한 걸음 다가왔다. 보련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려 물로 들어갔다.

발목이 잠기고 무릎이 잠겼다. 진흙이 발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났고, 물이 가슴께에 닿는 자리에서 걸음이 한 번 끊겼다가 이어졌다. 그다음에는 머리만 보였다가 보이지 않았다.

장미누이!

장미는 풀 위의 짚신을 밟은 줄도 모르고 물가로 달렸다. 물은 무릎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가슴으로 한꺼번에 차올랐다. 숨이 갈비뼈 안에서 얼어붙었고, 터진 어깨에 물이 닿자 살갗이 불에 덴 듯 쓰라렸다.

발밑은 바닥이 아니라 진흙이었다. 한 발을 빼면 다른 발이 빠졌고 수초가 정강이를 감아 당겼다. 보련이 사라진 자리로 팔을 뻗어 휘저었으나 손에 걸리는 것은 뿌리와 썩은 잎뿐이었다.

뒤에서 어머니가 물로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물을 먹은 치마가 무거워 두 걸음 만에 넘어졌다가 일어나는 소리였다.

어머니보련아! 보련아!

장미가 한 번 어머니의 팔을 잡아 얕은 쪽으로 끌었다. 어머니는 그 손을 뿌리치고 다시 검은 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저마다 다른 자리를 더듬기 시작했다.

잠기고, 올라와 숨을 쉬고, 다시 잠겼다. 손에 걸린 것이 옷자락인 줄 알고 끌어당겼다가 뿌리 엉킨 물풀만 건져 올리는 일이 열 번을 넘고 스무 번을 넘었다. 살아서 말하라던 말이 물 밑을 더듬는 손마다 따라붙었고, 그 말을 한 사람을 찾는 일이 먼저였다.

달이 서쪽 나무 뒤로 넘어가자 물이 더 검어졌다. 이제 눈은 쓸모가 없어 손으로만 찾았다. 손가락 끝이 감각을 잃어도 물 밑을 긁었고, 귀에는 어머니가 부르는 이름과 자기 이가 부딪는 소리만 남았다. 이름이 갈라져 소리로만 나올 때까지 어머니는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동쪽 하늘이 잿빛으로 풀릴 무렵에야 장미는 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어머니는 얕은 물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손이 물속에서 쥐었다 펴졌다를 되풀이했다.

물가에는 돌이 있었다. 그 곁에는 보련의 신이 나란히 놓여 있었고 풀 위에는 젖은 끈 하나가 있었다. 이슬에 젖었는지 연못물에 젖었는지 알 수 없었다. 같은 베로 꼰 끈이었다. 장미는 제 손목의 끈을 내려다보았다.

짚신은 한 켤레뿐이었다. 장미는 밟히고 눌린 풀밭과 물가 진흙을 눈으로 훑었으나 나머지 한 켤레는 어디에도 없었다.

건너편 물가 바위 아래에서는 풀이 한 줄로 누워 있었다. 사람이 지나간 자국인지 산짐승이 물 마시러 내려온 자국인지 가려지지 않았다. 장미는 물가를 돌아 그리로 갔다. 풀은 젖은 바위 앞에서 끊겼고 바위 너머는 잡목이 우거진 능선이었다.

장미는 바위에 손을 얹어 보았다. 젖어 있었으나 밤새 물이 튄 자리이기도 했다. 오래 서 있다가 왔던 길로 돌아 나오니, 나란히 놓인 신 안쪽에 이슬이 고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해가 산마루를 넘어 몇 뼘 올랐을 때 연못가로 발소리가 올라왔다. 밤새 어머니가 부르던 이름이 골짜기까지 내려간 모양이었다. 큰 원로와 마른 원로가 앞서고 젊은 원로가 승자의 표식과 지휘봉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뒤따랐다. 그 뒤로 마을 사람들과 늙은 일꾼이 서다 걷다 하며 올라왔고, 젖은 채 물가에 앉은 어머니와 돌 곁에 선 장미를 보자 모두 걸음을 늦추었다.

마른 원로는 물가의 신부터 보았고, 그다음에 물을 보았다. 어머니 쪽은 보지 않았다.

마른 원로신은 있고 몸은 안 나왔소. 물에 든 걸로 치겠소.
큰 원로그럼 약속은 지켜진 거요. 이긴 건 장미니, 받으시오.

젊은 원로가 표식과 지휘봉을 내밀었다. 받쳐 든 두 손이 둘 곳을 몰라 흔들렸다. 장미는 물에서 눈을 떼어 그것을 보았으나 손을 내밀지 않았다.

장미안 받습니다.

원로들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장미가 사람들 쪽으로 돌아섰다. 밤새 물을 먹은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또렷했다.

장미누이가 말하라고 했습니다. 누이가 먼저였습니다. 제 북 울릴 때 누이 돌은 벌써 성문 밑에 와 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발 옮기는 소리가 났다가 그쳤다. 골짜기에서 이미 들은 말이었으나 대꾸하는 입은 없었다.

장미누이를 늦춘 건 어머니 떡입니다. 누이가 그 떡을 들고 있는 동안 제 성문이 닫혔습니다.

뒤쪽에서 누군가 신발 끝으로 흙을 눌렀다. 마을 사람들의 눈이 장미에게서 어머니에게로 옮겨 갔다가 도로 땅으로 내려앉았다. 어머니는 젖은 무릎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들었다. 장미는 그쪽을 보지 못하고 제 발치의 돌에 눈을 두었다.

장미저는 봤습니다. 광주리 들고 올라가시는 걸.

말이 거기서 한 번 끊겼다. 장미는 젖은 소매 끝을 쥐었다가 놓았다.

장미보고도 안 불렀습니다.
어머니떡은 제가 가져갔습니다. 먹으라고 한 것도 저고요. 장미 말이 맞습니다.

큰 원로의 입술이 움직였다.

큰 원로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오. 사람들이 이미……

뒤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마른 원로는 무슨 말을 하려다 소매 속으로 손을 넣었다. 젊은 원로가 든 지휘봉의 끝이 땅으로 내려갔다.

장미제 성은 누이 시간을 훔쳐서 닫은 겁니다.
젊은 원로그럼 이건, 이건 어떻게 합니까.

장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 큰 원로가 몸을 돌렸고 나머지가 그를 따라 산길로 내려갔다. 젊은 원로는 표식과 지휘봉을 든 채 맨 나중에 내려갔다.

물가에는 돌과 보련의 신과 젖은 끈이 남았다. 어머니는 일어나지 않았다. 해가 더 올라 신 안쪽의 이슬은 말랐으나 끈은 그대로 젖어 있었다.

낮이 저물도록 연못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장미는 해가 기울어서야 골짜기로 내려왔다. 잠들지 못한 마을이 두 산의 물이 만나는 골짜기에 모여 불을 피워 놓고 있었다.

달이 거의 찬 밤이었다. 장미가 고개를 든 것과 불가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켠 것은 같은 때였다. 높은 산 쪽 하늘로 큰 별 하나가 기울어 능선 뒤로 떨어졌다. 꼬리는 짧았고 소리는 없었다. 장미는 그것이 하늘에 있었는지 제 눈 안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불가의 사람들이 둘로 갈렸다. 본 사람은 산 쪽을 가리켰고, 못 본 사람은 그 손가락 끝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해 서로를 돌아보았다.

아이어디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큰 원로한 별이 떨어졌소. 다들 봤잖소.

불이 탁 튀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원로가 아니라 제 발끝을 보고 있었다.

마른 원로왜들 말이 없소. 별이 졌으니 예언대로 된 것 아니오.
마을 사람그래서 누가 떨어진 겁니까.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장미는 별이 진 자리 아래 검게 서 있는 높은 산을 올려다보았다. 성문 위의 빈자리는 달빛 속에서도 어두웠다.

장미누이.

대답하는 것은 불이 튀는 소리뿐이었다.

다음 날 해가 기울자 장미는 물가의 돌에 밧줄을 걸어 등에 졌다. 보련이 들고 온 돌이었다. 돌이 얹히는 순간 터진 어깨의 살갗이 다시 찢어져 밧줄 아래로 뜨거운 것이 흘렀다. 신과 끈은 그 자리에 두고 높은 산으로 오르는 길에 들어섰다.

낮은 산에서 따라온 제 쪽 일꾼 하나가 깃발과 북채를 내밀었으나 장미는 고개를 저었다. 동쪽 능선 위로 보름달이 오를 무렵 장미는 성문 아래에 닿았다. 성벽 위에서 일꾼들이 내려다보고 있었고, 늙은 일꾼이 밧줄 끝을 쥔 채 아래로 몸을 숙였다.

늙은 일꾼그 돌입니까.
장미누이가 들고 간 돌입니다.
늙은 일꾼위에서 당길 테니 밑에서 받치기만 하세요.

장미는 성문 아래 발판에 올라 돌 밑에 어깨를 밀어 넣었다. 밧줄이 팽팽해져 돌이 떠오르는 동안 흔들리는 무게를 아래에서 눌러 잡았다. 위에서는 일꾼들이 망설이지 않고 돌을 당겨 빈자리 쪽으로 돌렸다.

늙은 일꾼오른쪽으로 한 뼘만.

돌이 자리에 앉았다. 낮고 짧은 소리였고 북도 뿔피리도 뒤따르지 않았다. 돌의 옆면에는 마른 갈색 얼룩이 남아 있었다. 아무도 그것을 닦지 않았다.

늙은 일꾼장수님이 재 두신 그대로네요. 깎을 데가 없습니다.

장미는 돌 밑에서 어깨를 빼고 물러섰다. 달빛이 든 골짜기 건너에는 강가 낮은 산의 성벽이 닫힌 채 서 있었다. 두 성이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성문 곁에는 아무도 서지 않은 자리가 하나 있었고, 일꾼들은 그 자리를 비워 둔 채 늘어섰다.

늙은 일꾼이 돌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가 뗐다.

늙은 일꾼장수님, 다 올렸습니다.

대답할 사람은 성벽 어디에도 없었다. 장미는 성문 아래에서 팔을 내리고 그 돌을 올려다보았다. 돌에는 아무 이름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

세월이 흘러 성벽의 돌 틈마다 이끼가 앉았고, 그때 태어난 아이들이 늙어 갔다. 이야기는 우물가와 나루터와 겨울 화롯가에서 저마다 다르게 이어졌다.

마을 여인보련은 그 연못에서 죽었다지요. 그래서 그 물은 한여름에도 손이 시린 거라고요.

나루터에서는 다른 말이 오갔다.

마을 사람죽긴 누가 죽어. 그날 밤에 산 넘어 갔다는 말 못 들었나.

배를 기다리던 아이가 소매를 당기며 물었다.

아이어디로 갔는데요?
마을 사람그건 아무도 몰라.

겨울 화롯가에서는 노인들이 또 달리 말했다.

사람들처음부터 이긴 건 보련이었지. 어머니가 장미 쪽에는 더 오래 걸리는 음식을 들려 보냈다잖아.

이야기마다 끝은 달랐으나 떡과 마지막 돌과 마주 보는 두 산만은 어느 이야기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이야기는 듣는 사람이 잠들 수 있는 자리에서 끝났다.

늙은 장미는 누가 물어도 누이가 먼저였다고 했고, 어머니는 떡을 가져간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끝내 숨기지 않았다. 그 말을 하고도 어머니는 누구에게도 용서를 청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말은 보련을 돌려놓지 못했으나, 보련이 힘이 모자라서 졌다는 이야기만은 마을에 자리 잡지 못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람들은 높은 산을 보련산이라, 강가의 낮은 산을 장미산이라 불렀다. 길을 묻는 나그네에게는 그 이름과 함께 이야기도 따라붙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장미가 이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길을 잃은 이들이 먼저 올려다본 것은 언제나 더 높은 보련산이었다. 그 산의 성문 위에는 주인이 사라진 뒤에야 제자리를 찾은 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