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 구역의 ‘글쓰기 미친놈’은 바로 너!
자, 솔직하게 까놓고 말해보자.
당신, 지금 이 책을 왜 집어 들었나? 마음 한구석에 ‘작가’라는 놈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겠지. 블로그에 끄적인 몇 줄, 싸이월드 시절의 오글거리는 일기, 상사 욕으로 가득 채운 비밀 노트… 형태는 달라도 당신은 이미 무언가를 쓰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미치도록 불안해하고 있다.
‘내 글, 너무 구린 거 아냐?’
‘이딴 걸 누가 읽는다고.’
‘역시 난 재능이 없어.’
이놈의 ‘재능’이라는 두 글자는 얼마나 많은 키보드를 잠재우고, 얼마나 많은 펜을 부러뜨렸는가. 마치 선택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전설의 무기처럼, 우리를 시작도 하기 전에 쫄게 만든다.
바로 그런 당신에게, 내가 아주 기가 막힌 사람을 소개해 주려고 한다.
그의 이름은 스티븐 킹. 맞다, 당신이 아는 그 ‘공포 소설의 왕’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번 작가 중 한 명이자, 그의 이름만으로도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줄을 서는 괴물.
그런데 이 양반의 시작이 어땠는지 아는가? 허구한 날 술에 절어 살던 가난한 영어 교사였다. 트레일러 하우스에 살면서, 세탁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겨우 꾸렸다. 출판사에서 받은 거절 편지를 벽에 못으로 박아두었는데, 나중엔 못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그의 첫 장편 소설 『캐리』는 사실 쓰레기통에 처박혔던 원고다. 스스로 ‘이건 쓰레기야!’라며 포기했던 걸, 그의 아내 태비사가 쓰레기통에서 건져내 “이 이야기엔 힘이 있어요. 계속 써봐요.”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스티븐 킹은 없었을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천재 작가’ 스티븐 킹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는 소리다.
그에겐 오직 빚 독촉에 시달리면서도 매일 밤 타자기를 두들겼던 ‘성실한 노동자’ 스티븐 킹, 아내의 믿음 하나에 의지해 쓰레기통 속 원고를 다시 꺼내든 ‘지질한 남편’ 스티븐 킹, 그리고 끔찍한 교통사고로 몸이 박살 난 뒤에도 진통제를 삼키며 글을 썼던 ‘독한 환자’ 스티븐 킹만 있었을 뿐이다.
바로 그가 쓴 책이 『유혹하는 글쓰기』다. 이 책은 당신에게 “이렇게 쓰면 대박 난다!” 따위의 싸구려 비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스티븐 킹은 자신의 너덜너덜한 인생 전체를 탈탈 털어 보여주며, 우리 옆에 털썩 주저앉아 맥주 캔이라도 하나 까주듯 말한다.
“야, 나도 했어. 그러니까 너도 할 수 있어. 쫄지 마.”
이 책은 ‘방법’을 알려주기 전에, 당신의 ‘마음’부터 구원한다. 글쓰기는 재능 있는 천재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성실한 사람들을 위한 ‘기술’이자 ‘노동’이라는 위대한 진실을 깨닫게 한다.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이 책을 덮을 때쯤, 당신은 더 이상 ‘재능’이라는 핑계 뒤에 숨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할 것이고, 손가락은 저절로 키보드를 찾아 헤맬 것이다. 머릿속에 잠자고 있던 이야기들이 깨어나 “제발 나 좀 꺼내줘!”라고 소리치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홀린 작가다. 그리고 나를 홀린 단 한 권의 책이 바로 이것이다.
이제 당신 차례다.
이 책은 당신을 유혹하기 위해 쓰였다. 한번 감염되면, 빠져나올 수 없다.
환영한다, 이 구역의 새로운 ‘글쓰기 미친놈’!
PART 1. 일단, 당신의 키보드를 켜라
1장. 쫄지 마, 글쓰기는 자격증이 아니다
- 부제: ‘나는 재능 없어’라는 세상에서 가장 질긴 핑계를 박살 내는 법
“작가님은… 역시 타고나신 거죠?”
강연이 끝나고 나면, 늘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이다.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들에게 나는 항상 똑같이 대답한다.
“아니요? 저 글 진짜 못 썼는데요.”
그럼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웃는다. 겸손의 표현이겠거니 생각하는 거다. 천만에. 이건 팩트다. 내가 신인 시절에 썼던 첫 원고를 보여주면, 아마추어 웹소설 작가를 꿈꾸는 당신의 글이 훨씬 더 나을 거라고 장담한다. 정말이다.
우리는 ‘글쓰기’라는 행위 앞에 너무 쉽게 작아진다. 마치 국가대표 선발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레 겁을 먹는다. 왜? ‘재능’이라는 거대한 벽 때문이다. 피카소의 그림처럼, 모차르트의 음악처럼, 글쓰기도 번뜩이는 영감을 가진 소수의 천재들만 할 수 있는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긋지긋한 착각을 깨부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첫 번째 목표다.
그리고 여기, 당신의 가장 든든한 아군이 되어줄 스티븐 킹의 명언이 있다.
“형편없는 작가를 유능한 작가로 만들 수는 없다. 좋은 작가를 위대한 작가로 만들 수도 없다. 하지만 성실한 노력을 통해, 유능한 작가는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아주 화끈하게, 대한민국 버전으로 번역해주겠다.
“글쓰기 재능이 아예 없는 젬병(형편없는 작가)을 갑자기 천재 작가로 만들 순 없어. 하지만 어지간한 필력(유능한 작가)을 가진 사람이 엉덩이 붙이고 꾸준히 쓰면, 밥은 벌어먹고 살 수 있는 수준(좋은 작가)은 충분히 된다고!”
그렇다. 킹은 ‘재능’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오히려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라고 소리치고 있다. 글쓰기는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다. 재능이라는 타고난 스타트가 조금 뒤처져도, 성실함이라는 훈련을 통해 얼마든지 따라잡고 역전할 수 있는 ‘마라톤’이라는 거다.
생각해보자. 당신이 오늘 처음 헬스장에 등록했다고 치자. 트레이너가 당신 몸을 슥 보더니 “회원님은 골격근량이 부족해서 김종국처럼 될 수 없어요. 포기하세요.”라고 말하는가? 아니다. “지금부터 꾸준히 하면 3개월 뒤에는 훨씬 달라질 겁니다.”라고 말한다. 글쓰기도 똑같다. ‘글쓰기 근육’은 누구나 키울 수 있다.
사실 당신은 이미 ‘글쓰기’를 매일 하고 있다.
친구에게 보내는 카카오톡 메시지. ‘ㅋㅋㅋ’ 하나를 더 붙일까 말까 고민하는 그 순간, 당신은 문장의 리듬을 고민하는 작가다.
인스타그램에 음식 사진을 올리며 쓰는 글. ‘존맛탱’ 대신 더 근사한 표현을 찾으려 애쓰는 그 순간, 당신은 더 나은 셔사를 고민하는 작가다.
회사에 제출하는 보고서. 어떻게 하면 팀장님이 한 번에 OK 사인을 내줄까 전전긍긍하며 문장을 다듬는 그 순간, 당신은 독자를 설득하려는 작가다.
우리는 이미 쓰고 있다. 다만, 그것을 ‘글쓰기’라고 부르지 않을 뿐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재능’이라는 자격증이 아니라, 내 글을 ‘작품’으로 만들겠다는 ‘태도’다.
이 책을 덮을 때, 당신에게 벌어질 단 한 가지 변화를 약속하겠다.
당신은 더 이상 ‘나는 재능이 없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될 것이다. 대신 이렇게 말하게 될 거다.
“아, 오늘 분량 채워야 하는데.”
그 순간, 당신은 이미 아마추어가 아니다. 당신의 심장에는 ‘프로 작가’의 엔진이 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쫄지 마라.
글쓰기는 자격증이 아니다.
그저, 오늘 시작하는 습관일 뿐이다.
2장. 일단, 카톡부터 꺼라
- 부제: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당신의 이야기를 지켜낼 ‘작업실’ 만들기
자, 이제 ‘재능’이라는 거대한 핑계 하나를 치웠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을 거다. “그래, 나도 한번 써볼까?” 하는 용기도 살짝 생겼을지 모른다. 당신은 비장한 각오로 노트북을 켜고 한글 파일을 연다. 커서가 외롭게 깜빡인다. 드디어 당신 인생 첫 소설의 첫 문장을 쓸 차례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우주를 본 순간, 나는…”
띠링-
화면 오른쪽 하단에 익숙한 노란색 알림창이 뜬다. 친구에게서 온 카톡이다.
‘야, 오늘 저녁에 치맥 ㄱ?’
순간, 당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주인공의 아련한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바삭한 튀김 옷을 입은 닭다리와 살얼음 낀 생맥주잔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당신은 나도 모르게 ‘ㅋ’를 입력하며 답장을 보낸다. ‘콜’.
끝났다. 당신의 소설은 시작도 하기 전에 ‘치킨’에 장렬히 전사했다.
스티븐 킹이 글쓰기에 대해 재능 다음으로, 아니 어쩌면 재능보다 더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너만의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라.”
이건 비유가 아니다. 정말 ‘물리적으로’ 문을 닫고, 세상과 당신을 분리하라는 강력한 명령이다. 킹은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두 가지를 ‘작업실’과 그곳의 ‘닫힌 문’이라고 못 박는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그깟 카톡 알림 하나, 인스타그램 ‘좋아요’ 하나가 뭐 그리 대수라고.
킹의 대답은 단호하다. 그것은 당신이 지금 창조하려는 ‘세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지금 쓰는 글은 단순한 활자의 나열이 아니다. 당신만이 만들 수 있는 유일무이한 세계다. 당신의 머릿-속에서는 지금 칼과 마법이 부딪치고, 애틋한 연인들이 이별하고 있으며, 미제 살인 사건의 범인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섬세하고 연약한 작업이다. 작은 소음 하나, 짧은 방해 한 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 있는 유리성(城)을 쌓는 것과 같다.
그런 신성한 의식의 한가운데에, 감히 ‘오늘 저녁 치맥’ 따위가 끼어들게 내버려 둘 텐가? 당신의 이야기에 대한 존중이 있다면, 그럴 수 없다. 문을 닫는 행위는 세상에 보내는 강력한 신호다.
“지금부터 나는 내 세계로 들어간다. 방해하지 마시오.”
물론 모두가 근사한 서재를 가질 수는 없다. 킹 역시 젊은 시절엔 보일러실 구석에 책상을 놓고 글을 썼다고 고백한다. 중요한 것은 물리적 공간의 크기나 모양이 아니다. 아이 둘이 떠드는 시끄러운 거실이라도, 온갖 잡동사니가 쌓인 창고 구석이라도 상관없다. ‘지금부터 이 한 평 남짓한 공간은 오직 나만의 우주다’라고 선포하는 정신적인 태도가 핵심이다.
당신의 원룸 구석, 닳아빠진 식탁 한쪽, 늘 시끄러운 동네 카페 창가… 그 어디든 당신의 작업실이 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노트북과 ‘방해금지 모드’로 돌려놓은 핸드폰, 그리고 ‘지금부터 한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글만 쓴다’는 당신의 단호한 결심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킹의 진짜 무서운 조언은 그다음에 나온다.
그는 문을 ‘닫을 때’와 ‘열 때’를 구분하라고 말한다. 즉, 초고를 쓸 때의 ‘나’와 원고를 고칠 때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문을 닫고 쓸 때: 당신은 이기적인 창조주가 되어라.
이때는 독자를 생각하지 마라. 이게 돈이 될까, 사람들이 좋아할까 따위의 계산은 집어치워라. 오직 당신만을 위해, 당신이 보고 싶은 장면을, 당신이 듣고 싶은 대사를 미친 듯이 쏟아내라. 이 단계에서 당신의 유일한 관객은 당신 자신이다. 스스로를 최대한 즐겁게 해주는 것이 유일한 목표다.
문을 열고 고칠 때: 당신은 냉정한 살인마가 되어라.
초고가 완성되고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면, 이제 문을 활짝 열 시간이다. 이때 당신은 더 이상 창조주가 아니다. 당신의 글을 돈 주고 사 읽는, 세상에서 가장 까다롭고 냉정한 첫 번째 독자가 되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지루한 문장, 없어도 될 것 같은 단어, 폼 잡는 미사여구는 모조리 죽여라. 가차 없이. 내 새끼 같은 문장이라고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독자는 당신의 ‘노력’이 아니라 당신의 ‘결과물’에만 관심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자, 오늘 당장 당신의 ‘작업실’을 정하고, 그곳의 문을 닫아라.
그리고 기억해라.
쓸 때는 이기적인 미치광이처럼, 고칠 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심판자처럼.
그 두 개의 얼굴을 가질 수 있을 때, 당신의 이야기는 비로소 당신의 방을 벗어나 세상으로 걸어 나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3장. 당신의 연장통엔 쓰레기가 너무 많다
- 부제: 초등학생도 아는 단어로 대문호처럼 쓰는 법 (어휘와 문법)
글쓰기를 막 시작한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아주 치명적인 착각이 하나 있다. 바로 ‘어려운 단어를 쓰고, 문장을 복잡하게 꼬아야 유식해 보인다’는 착각이다.
아마 당신도 찔릴 거다. ‘사색에 잠기다’, ‘고뇌의 흔적이 역력했다’, ‘존재론적 딜레마에 빠졌다’… 이런 말들을 괜히 한 번씩 써보고 싶지 않았는가? 마치 이런 단어를 써야만 내 글이 싸구려 티를 벗고 ‘문학 작품’의 반열에 오를 것 같은 느낌.
만약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머리를 세게 한 대 쥐어박아라. 당신은 지금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 잘 쓰는 척’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스티븐 킹은 이런 ‘있어 보이는 척’에 대한 집착을 향해 핵폭탄급 돌직구를 날린다. 그는 작가의 도구를 ‘연장통(Toolbox)’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연장통 맨 위 칸에는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도구들만 들어 있어야 한다. 어휘와 문법. 그게 전부다. 그리고 제발, 그 연장통을 무겁게 만드는 쓰레기들은 좀 갖다 버려라!”
그가 말하는 ‘쓰레기’란 무엇일까? 바로 당신이 유식해 보이려고 인터넷 사전을 뒤져 찾아낸, 평생 한 번 쓸까 말까 한 현학적인 단어들이다. 킹은 이런 단어들을 “파티에 어울리지도 않는 애완동물을 억지로 데려온 것”과 같다고 조롱한다. 글의 흐름을 뚝 끊고, 독자를 짜증 나게 만드는 최악의 방해물이라는 뜻이다.
생각해보자. 당신이 친구에게 어제 본 영화 얘기를 해준다.
“와, 어제 본 영화 대박! 주인공이 완전 멋있게 악당들을 다 때려눕히는데, 진짜 통쾌하더라!”
이렇게 말하지, 누가 이렇게 말하는가?
“음, 어제 관람한 영상 서사는 실로 경이로웠네. 주인공의 카타르시스를 유발하는 권선징악적 액션 시퀀스는 관객에게 대리만족의 서사를 제공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
만약 후자처럼 말하는 친구가 있다면, 당신은 아마 그를 ‘손절’할 것이다. 글도 똑같다. 독자는 당신의 지식을 뽐내는 걸 보려고 책을 읽는 게 아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을 뿐이다. 쉽게 쓰는 것이 가장 잘 쓰는 것이다. ‘어머니’라는 단어를 놔두고 굳이 ‘모친’이라고 쓸 이유가 없고, ‘슬픔’을 ‘비애’라고 바꿔 쓴다고 해서 당신의 문장이 더 깊어지는 것도 아니다.
킹의 연장통에서 빛나는 또 하나의 단순한 도구는 바로 ‘능동태’다.
우리는 학교에서 글짓기를 배울 때부터 이상하게 수동태 문장을 쓰도록 교육받았다. “나는 밥을 먹었다” 대신 “밥이 나에 의해 먹혔다”라고 써야 왠지 더 객관적이고 고급스러워 보인다고 착각한다.
킹은 이런 수동태 문장을 극도로 혐오한다. 그는 말한다. “수동태는 소심하고 겁 많은 작가들이나 쓰는 것이다.”
왜일까? 수동태 문장은 힘이 없다. 문장의 주인이 누구인지, 누가 이 행동을 책임지는지를 모호하게 만든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여야 할 문장을 힘 빠진 좀비처럼 만든다.
- “창문이 그 남자에 의해 깨졌다.” (X)
- “그 남자가 창문을 깼다.” (O)
어떤 문장이 더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는가? 어떤 문장이 더 긴박하고 힘이 느껴지는가? 당연히 후자다. ‘그 남자’라는 범인이 명확하게 행동하고, 그 결과로 ‘창문’이 박살 나는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수동태를 남발하는 글은 책임지기 싫어하는 비겁한 변명처럼 들린다.
킹’s 연장통: 가장 빛나는 도구는 가장 단순한 것이다.
당신의 연장통을 열어보라. 그 안에는 이미 글을 쓰는 데 필요한 모든 도구가 들어있다. 당신이 초등학교 때 배운 기본적인 단어들, 주어와 동사를 갖춘 단순한 문장 구조.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무기다.
화려한 기교로 독자의 눈을 속이려 하지 마라. 군더더기를 모두 걷어내고, 이야기의 알맹이만으로 정면 승부하라.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가장 정직하고, 가장 간결하고, 가장 힘 있는 문장으로 전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스티븐 킹이 말하는 ‘진짜 글쓰기’의 시작이다.
오늘부터 당신의 글에서 ‘있어 보이는 척’하는 모든 쓰레기를 들어내라.
그러면 비로소, 당신만의 진짜 목소리가 빛나기 시작할 것이다.
4장. 제발, '아주' 좀 갖다 버려라
- 부제: 지옥행 특급열차, 당신의 문장을 망치는 ‘부사’ 때려잡기
자, 당신의 연장통에서 불필요한 쓰레기들을 꽤 많이 걷어냈다. 문장이 한결 가벼워지고 솔직해졌을 거다. 그런데 아직 당신의 글을 좀먹는 아주 교활하고 끈질긴 녀석이 남아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문장 곳곳에 숨어들어, 당신의 글을 서서히 죽여가는 암살자.
그놈의 이름은 바로 ‘부사(adverb)’다.
‘아주’, ‘매우’, ‘정말’, ‘몹시’, ‘슬프게’, ‘기쁘게’, ‘완벽하게’…
만약 당신이 이 단어들을 사랑한다면, 미안하지만 당신의 글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스티븐 킹은 이 ‘부사’라는 놈들을 향해 거의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퍼붓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부사로 포장되어 있다.”
이건 단순한 과장이 아니다. 킹은 부사를 ‘정원의 잡초’에 비유한다. 뽑아도 뽑아도 끝없이 자라나, 아름다운 꽃(동사와 명사)이 받아야 할 영양분을 모조리 빨아먹는 징글징글한 놈들이라는 거다.
도대체 왜? ‘아주 예뻤다’가 ‘예뻤다’보다 더 예쁜 거 아닌가? ‘정말 슬펐다’가 ‘슬펐다’보다 더 슬픈 느낌을 주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아니다. 완전히 틀렸다.
킹의 논리는 명쾌하다. 부사는 작가가 게으르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며, 독자를 믿지 못한다는 최악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녀는 아주 예뻤다”라고 쓰는 순간, 당신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이봐, 독자. 너는 내가 그냥 ‘예뻤다’라고만 쓰면 얼마나 예쁜지 상상할 능력이 없는 멍청이지? 그래서 내가 친절하게 ‘아주’라는 단어를 붙여줄게. 이제 좀 감이 와?”
이건 독자에 대한 모욕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정답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다. 독자 스스로 정답을 찾아낼 수 있도록, 생생한 단서들을 던져주는 사람이다.
‘그는 슬프게 말했다’ 대신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라고 써야 하는 이유
여기에 모든 해답이 있다.
‘슬프게’라는 부사는 작가가 독자의 감정을 강요하는 행위다. “자, 지금부터 슬퍼해!”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 독자는 아무런 감흥 없이 그저 ‘아, 슬픈가 보네’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뿐이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라고 쓰는 순간, 마법이 일어난다.
독자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장면이 그려진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 떨리는 목소리,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남자의 얼굴, 어깨의 미세한 떨림… 독자는 이 장면들을 스스로 조합하며, 가슴 저릿한 슬픔을 ‘스스로’ 느낀다. 작가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훨씬 더 깊고 강력한 감정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여주기(Showing)’와 ‘말해주기(Telling)’의 차이다. 부사는 게으른 ‘말해주기’의 전형이다. 실력 있는 작가는 부사를 쓸 시간에, 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구체적인 행동과 장면을 ‘보여준다’.
그녀는 정말 화가 났다. (X)
-> 그녀는 주먹을 꽉 쥔 나머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O)그는 몹시 배가 고팠다. (X)
-> 그는 텅 빈 위장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O)그 방은 아주 더러웠다. (X)
-> 방구석에는 먼지 낀 피자 박스가 쌓여 있었고, 셔츠에는 정체불명의 소스가 묻어 있었다. (O)
어떤가? 부사가 사라진 자리에, 생생한 이미지와 감각이 살아나지 않는가?
오늘부터 ‘부사 박멸 캠페인’을 시작하라. 당신이 어제 쓴 글을 펴고, 형광펜을 들어라. 그리고 ‘-게’로 끝나는 모든 부사, ‘아주’, ‘매우’, ‘정말’과 같은 모든 강조 부사를 모조리 색칠해라. 아마 당신의 글은 형광펜으로 뒤덮여 누더기가 될 것이다.
괜찮다. 이제 그 잡초들을 모조리 뽑아버릴 시간이다. 부사를 지우고, 그 자리에 당신의 오감을 동원한 구체적인 묘사를 채워 넣어라.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고 나면, 당신의 밋밋했던 흑백 스케치는 총천연색의 영화처럼 변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사 없이, 오직 동사와 명사만으로 장면을 창조하는 글쓰기의 마법이다.
5장. 영감님은 당신을 찾아오지 않는다
- 부-제: 작가는 엉덩이로 쓴다, 매일 쓰는 ‘글쓰기 근육’ 단련법
자, 이제 당신은 글쓰기에 대한 웬만한 ‘기술적’ 오해들은 다 풀었다. 쉽게 써야 한다는 것도 알았고, 부사를 쓰면 안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런데 아직 당신의 글쓰기를 가로막는 가장 거대하고, 가장 우아하며, 가장 허상에 가까운 ‘핑계’가 남아있다.
바로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를 신내림 같은 것으로 착각한다. 어느 날 갑자기 창밖으로 비치는 달빛에 취해, 혹은 쌉쌀한 커피 향에 이끌려 뮤즈(Muse)라는 여신이 내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는 순간. 바로 그때, 문장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올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 ‘영감님’이 오시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하루, 이틀, 한 달, 일 년…
만약 당신도 그 ‘영감님’을 기다리고 있다면, 정말 미안하지만 그분은 당신 집 주소를 모른다. 앞으로도 영원히 찾아올 일이 없다.
스티븐 킹은 이런 낭만적인 환상을 가진 작가 지망생들의 뒤통수를 아주 시원하게 후려갈긴다. 그는 예술가연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를 세상에서 가장 싫어한다. 그에게 글쓰기는 ‘영감’의 영역이 아니라, ‘노동’의 영역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감의 원천인 뮤즈가 정말 존재한다면, 그 여자는 당신 서재의 다락방에 사는 게 아니라, 축축하고 컴컴한 지하실에 살고 있다. 당신이 직접 끙끙거리며 내려가서 그 여자의 잠을 깨우지 않는 한, 그녀는 절대 먼저 올라오지 않는다.”
그렇다. 뮤즈는 당신을 찾아오는 손님이 아니다. 당신이 먼저 찾아가야 하는 까칠한 주인이다. 그리고 그 지하실로 내려가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닥치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이다.
킹은 작가를 ‘육체노동자’에 비유한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출근 도장을 찍는 직장인처럼, 작가도 글쓰기로 출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감이 오든 안 오든, 날씨가 좋든 구리든, 기분이 째지든 바닥을 치든 상관없다. 그냥 쓰는 거다.
이것이 바로 ‘글쓰기 근육’을 단련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당신이 헬스장에 가서 딱 하루 10시간 동안 미친 듯이 운동한다고 해서 갑자기 근육질이 되는가? 아니다. 매일 30분이라도 꾸준히, 지겹도록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근육이 붙는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한 번, 필(feel) 받을 때 밤새워 쓰는 글보다, 매일 단 한 페이지라도 꾸역꾸역 써나가는 습관이 훨씬 더 강력한 ‘글 근육’을 만든다.
그럼 하루 목표량은 어떻게 정할까?
스티븐 킹의 기준은 명확하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하루 2,000단어(원고지 약 10매)”라는 엄격한 룰을 적용한다. 이 목표를 채우기 전에는 절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크리스마스에도, 자기 생일에도 이 원칙을 지킨다고 한다. 이쯤 되면 거의 광기 수준이다.
물론 이제 막 글쓰기를 시작한 당신에게 하루 2,000단어는 무리일 수 있다. 괜찮다. 목표는 당신이 정하면 된다. 하루 500단어도 좋고, 딱 세 문단도 좋다. 핵심은 ‘분량’이 아니라 ‘매일 한다는 것’이다.
오늘부터 당신만의 ‘글쓰기 출근 시간’을 정해라. 퇴근 후 밤 10시, 모두가 잠든 새벽 2시, 혹은 출근길 지하철 안 30분. 그 시간이 되면, 알람을 맞추고 무조건 노트북을 켜거나 노트를 펼쳐라.
물론, 죽어도 글이 안 써지는 날이 있을 것이다. 첫 문장만 썼다 지웠다를 수십 번 반복하고, 결국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내는 끔찍한 날.
바로 그런 날, 당신은 좌절감에 빠져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역시 난 안 되나 봐…’
천만에. 오히려 그런 날을 만났다면, 축하 파티라도 열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제 진짜 ‘프로 작가’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글이 술술 잘 써지는 날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글이 미치도록 안 써지는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든 책상 앞에 앉아 있으려고 버티는 것. 그 지루하고 괴로운 시간을 견뎌내는 것. 그것이 바로 아마추어와 프로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다.
영감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당신의 성실한 엉덩이가, 잠들어 있는 뮤즈를 깨우는 유일한 열쇠다.
PART 2.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발굴하라
6장. 읽지 않는 자, 쓸 자격도 없다
- 부제: 최고의 작가들은 모두 ‘프로 독서가’였다
당신이 만약 “저는 책 읽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글 쓰는 건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미안하지만 당신은 작가가 될 수 없다. 이건 저주나 예언이 아니라, 물리학 법칙처럼 명백한 사실이다.
입력(Input)이 없는데, 어떻게 출력(Output)이 나올 수 있겠는가?
컴퓨터도 데이터를 입력해야 결과를 내놓는다. 자동차도 기름을 넣어야 달릴 수 있다. 작가에게 ‘독서’는 컴퓨터의 데이터 입력이고, 자동차의 기름이다. 읽지 않고 쓰겠다는 것은, 텅 빈 하드디스크에서 파일을 찾아내겠다는 헛소리고, 기름 없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겠다는 만용일 뿐이다.
스티븐 킹은 이 진리를 누구보다 간결하고, 누구보다 무섭게 말한다.
“많이 읽고, 많이 써라. 이 두 가지 말고 다른 방법은 없다.”
“만약 당신이 책 읽을 시간이 없다면, 글 쓸 시간(혹은 도구)도 없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작가’이기 이전에 ‘프로 독서가’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그는 1년에 70~80권의 책을 읽는다고 한다. TV 보는 시간, 잠자는 시간을 쪼개서, 심지어 운동을 하면서도 오디오북을 듣는다. 그에게 독서는 ‘교양’이나 ‘취미’가 아니라, 작가라는 직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생존 활동’이다.
왜 그렇게까지 읽어야 할까? 단순히 다른 작가의 기술을 훔치거나 지식을 쌓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킹이 말하는 독서의 진짜 이유는 훨씬 더 근본적이다.
닥치는 대로 읽어라, 당신의 뇌는 최고의 스토리 저장소다.
당신이 읽는 모든 책은, 당신의 뇌라는 거대한 도서관에 차곡차곡 쌓인다. 당신은 그 책들의 내용을 전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의 무의식은 그 모든 문장, 모든 인물, 모든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쌓인 이야기들은 당신의 뇌 속에서 서로 뒤섞이고, 발효되고, 숙성된다. 그러다 어느 날, 당신이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 그 이야기의 파편들이 마법처럼 당신의 손끝에서 새로운 조합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당신이 읽었던 싸구려 로맨스 소설의 대사와, 고전 철학책의 문장이 만나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식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의 비밀이다.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창조는 기존에 있던 것들의 ‘새로운 연결’일 뿐이다. 그리고 그 ‘연결할 재료’를 당신의 뇌 속에 가장 많이 집어넣는 방법이 바로 독서다.
좋은 글과 나쁜 글을 가리지 않고 먹어치워야 하는 이유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할 때 ‘좋은 책’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전 명작, 문학상을 받은 소설, 평론가들이 극찬하는 책들만 골라 읽으려 한다. 물론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쁜 책’도 열심히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배우기 위해서다.
형편없는 소설을 읽다 보면 당신은 자연스럽게 비평가가 된다. ‘아, 여기서 주인공이 이렇게 행동하니까 갑자기 멍청해 보이네.’, ‘이 문장은 너무 길고 지루해서 못 읽겠다.’, ‘결말이 왜 이따위야?’… 이런 생각들을 하는 과정 자체가 엄청난 공부다. 잘 쓴 글을 보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배우는 것만큼이나, 못 쓴 글을 보고 ‘어떻게 쓰면 안 되는지’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편식하지 마라. 당신의 독서 식단은 ‘잡식’이어야 한다. 베스트셀러, 순수문학, 웹소설, 자기계발서, 만화책, 심지어 마트 전단지까지. 닥치는 대로 읽어라. 당신이 먹어치운 모든 텍스트는, 당신의 글쓰기 근육을 만드는 단백질이 될 것이다.
독서는 어떻게 당신만의 ‘문체’를 만드는가?
결국 모든 작가 지망생의 꿈은 ‘나만의 문체’를 갖는 것이다. 다른 누구와도 다른, 나만의 독특한 목소리를 갖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그 문체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골방에 틀어박혀 혼자 고민한다고 생겨날까? 천만에. 당신만의 목소리는, 수많은 다른 작가들의 목소리를 ‘듣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난다.
많이 읽다 보면,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게 된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위대한 화가들이 처음에는 거장의 그림을 따라 그리며 실력을 키웠듯, 작가도 모방을 통해 성장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다양한 작가들의 글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그들의 목소리가 당신 안에서 뒤섞이며 완전히 새로운, 당신만의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지점이 온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문체’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 책을 잠시 덮고 당신의 책장을 둘러보라. 혹은 서점으로 달려가라.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끄는 책을 아무거나 한 권 집어 들어라.
그것이 당신을 작가로 만들어 줄 가장 확실하고, 가장 정직한 첫걸음이다.
읽지 않는 자, 쓸 자격도 없다.
아니, 읽지 않는 자는 애초에 ‘쓸 이야기’가 없다.
7장. 이야기는 발명하는 게 아니라, 발굴하는 것이다
- 부제: 당신 주변에 널려 있는 베스트셀러의 ‘화석’을 캐내는 법
자, 이제 당신은 매일 글을 쓰는 ‘엉덩이 근육’도 장착했고, 뇌를 이야기로 가득 채우는 ‘독서 습관’도 들였다. 그런데… 막상 흰 화면 앞에만 앉으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도대체 뭘 써야 하지?”
아마추어 작가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이 ‘소재 고갈’ 문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아주 기발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발명’해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다. 평범한 내 인생에는 소설로 쓸 만한 특별한 경험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티븐 킹은 또 한 번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을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좋은 이야기는 발명품처럼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화석과 같다. 작가의 임무는 땅속에 묻힌 그 화석을 조심스럽게 파내고, 붓으로 흙을 털어내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화석 발굴론’이야말로 뜬구름 잡는 것처럼 보였던 ‘스토리텔링’의 비밀을 푸는 가장 강력한 열쇠다. 이 관점을 장착하는 순간, 당신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이야기는 당신의 머릿속에서 0에서 1을 만들어내는 고통스러운 창조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미 당신 주변에, 당신의 일상 속에, 당신의 경험 속에 ‘이야기의 뼈대(화석)’는 존재하고 있다. 당신이 할 일은 그저 그것을 ‘발견’하고, 살을 붙여 ‘복원’하는 작업일 뿐이다.
스티븐 킹의 모든 소설이 시작된 단 하나의 질문: “만약 ~라면?”
그렇다면 킹은 그 ‘화석’을 어떻게 발견할까? 그의 비밀 무기는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다.
“만약 ~라면 어떨까? (What if?)”
이 마법의 질문은 가장 평범한 일상을 순식간에 비범한 이야기의 씨앗으로 바꿔버린다.
- 킹은 어느 날 비행기에서 아내가 읽던 잡지를 보게 된다. 거기엔 “미국에서 가장 외로운 직업”에 대한 기사가 있었고, 1위는 ‘등대지기’였다. 그는 생각한다. “만약 등대지기가 미쳐버린다면?” -> 이 아이디어는 그의 첫 소설 『캐리』의 초기 설정에 영향을 주었다.
- 그의 차가 시골길에서 고장 난다. 정비소에 차를 맡기고 기다리던 그는, 거대한 세인트버나드 개 한 마리가 정비소 주인을 빤히 쳐다보는 것을 본다. 그는 생각한다. “만약 저 개가 광견병에 걸린다면?” -> 소설 『쿠조』가 탄생했다.
- 그는 아내와 함께 외딴 호텔에 묵게 된다. 비수기라 손님은 그들 부부뿐이었다. 텅 빈 복도를 걷던 그는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겨울 내내 이 호텔에 갇히게 된다면?” -> 영화사상 가장 무서운 호텔을 만들어낸 『샤이닝』이 탄생했다.
보이는가? 그의 아이디어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에 ‘만약 ~라면?’이라는 작은 렌즈 하나를 들이댔을 뿐이다.
길을 잃은 고양이, 이상한 소문, 뉴스 헤드라인에서 이야기를 찾는 기술
이제 당신 차례다. 당신의 ‘화석 발굴 도구’인 “만약 ~라면?”을 들고, 당신의 일상을 탐사하기 시작하라.
- 어젯밤 당신 아파트 단지를 헤매던 길 잃은 고양이를 봤는가?
-> 만약 저 고양이가 사실은 외계에서 온 스파이라면? -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이 밤마다 이상한 소리를 낸다는 소문을 들었는가?
-> 만약 그 사람이 지하실에서 비밀스러운 실험을 하고 있다면? - 오늘 아침 뉴스에서 ‘30년 만에 최악의 폭설’이라는 헤드라인을 봤는가?
-> 만약 이 눈이 절대 그치지 않고, 온 세상이 얼어붙는다면?
모든 것이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당신이 무심코 지나쳤던 모든 순간, 모든 사람, 모든 사물 속에는 베스트셀러가 될지도 모르는 ‘화석’이 잠들어 있다. 작가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남들이 그냥 지나치는 것을 멈춰 서서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당신의 경험이라는 땅속에는 어떤 공룡 화석이 잠들어 있을까?
가장 거대하고, 가장 완벽한 화석은 사실 가장 가까운 곳에 묻혀 있다. 바로 ‘당신의 경험’이라는 땅속이다.
당신이 겪었던 첫사랑의 찌질함, 친구에게 당했던 배신의 아픔, 직장에서 겪은 부당함, 잊을 수 없는 여행의 기억… 이 모든 것이 당신만이 발굴할 수 있는 T-Rex급 화석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 속 인물들이 왜 그렇게 생생하게 살아 숨 쉴까? 그 인물들은 모두 킹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했던 자신의 경험은 『샤이닝』의 잭 토랜스에게, 작가로서 겪었던 고뇌는 『미저리』의 폴 셸던에게 녹아들어 갔다.
당신의 이야기를 써라. 당신의 분노, 당신의 슬픔, 당신의 기쁨을 써라.
당신이 발굴해낸 당신의 화석이야말로, 세상 그 어떤 작가도 흉내 낼 수 없는 가장 강력하고, 가장 진실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8장. 플롯은 사기다, 상황을 던져라
- 부제: 캐릭터가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이야기 엔진의 비밀
자, 당신은 이제 당신 주변에 널려 있는 이야기의 ‘화석’을 발견하는 법을 배웠다. “만약 ~라면?”이라는 질문을 통해, 평범한 일상을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씨앗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여기서 대부분의 작가 지망생들은 또 다른 거대한 벽에 부딪힌다. 바로 ‘플롯(Plot)’이라는 이름의 벽이다.
‘이제 이 캐릭터를 어디로 보내야 하지? 어떤 사건을 겪게 해야 독자들이 좋아할까? 기승전결은 어떻게 맞춰야 하고, 클라이맥스는 어디에 배치해야 하지? 결말은 또 어떻게 내야 욕을 안 먹을까?’
이런 고민들을 하다 보면, 당신의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거미줄처럼 얽힌 계획표 안에서 질식해버리고 만다. 당신이 애써 발굴한 생생한 화석은, 당신이 만든 어설픈 설계도에 갇혀 박제된 공룡 모형처럼 변해버린다.
이 ‘플롯 강박증’에 시달리는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스티븐 킹은 또 한 번 문학계의 상식을 뒤엎는 폭탄선언을 한다.
“플롯 같은 건 믿지 않는다. 플롯은 작위적이고, 인공적이다. 그것은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생명력을 죽이는 족쇄일 뿐이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플롯 없이 어떻게 소설을 쓰나? 그건 설계도 없이 빌딩을 짓겠다는 말처럼 무모하게 들린다. 하지만 킹은 단호하다. 그는 미리 짜인 플롯을 따라가는 글쓰기를 ‘가장 지루하고 재미없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왜 스티븐 킹은 플롯을 ‘이야기의 자연스러움을 죽이는 족쇄’라고 말했나?
킹의 논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우리네 인생에 플롯 같은 게 있었던가?”
당신은 아침에 일어나면서 ‘오늘은 기(起) 단계로 회사에 출근해서, 승(承) 단계로 부장님한테 깨지고, 전(轉) 단계로 퇴근길에 로또를 샀다가, 결(結) 단계로 꽝이 되는 하루를 보내야지’라고 계획하는가? 아니다. 인생은 예측 불가능한 우연과 선택의 연속이다. 바로 그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내일이 궁금하고, 다음 순간이 기대되는 것이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미리 정해놓은 길로 캐릭터를 억지로 끌고 가는 순간, 이야기는 생명력을 잃는다. 캐릭터는 작가의 꼭두각시 인형이 되고, 독자들은 작가가 파놓은 함정을 따라가는 수동적인 구경꾼이 되어버린다. 킹은 그런 글쓰기를 참을 수 없어 한다.
작가는 신이 아니다, 그저 첫 번째 관객일 뿐이다.
그렇다면 킹은 플롯 대신 무엇을 믿는가?
그는 ‘플롯’이 아니라 ‘상황(Situation)’을 믿는다.
그의 작업 방식은 이렇다.
- 흥미로운 상황을 설정한다: (예: 작은 마을이 갑자기 투명 돔에 갇혔다 - 『언더 더 돔』)
- 살아있는 캐릭터를 그 안에 던져 넣는다: (예: 야심 넘치는 정치인, 용감한 전직 군인, 비겁한 목사, 비밀을 가진 기자 등등…)
- 그리고… 그냥 지켜본다.
이것이 전부다. 그는 캐릭터들이 이 극한의 상황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서로 갈등하며,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지 그저 관찰하고 기록할 뿐이다. 그는 이야기의 전지전능한 ‘신’이 되기를 거부한다. 대신, 자기가 만든 세상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를 가장 앞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첫 번째 관객’이 되기를 선택한다.
그는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결말을 모른다. 그 역시 독자들처럼 이 캐릭터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 미치겠다. 바로 그 ‘궁금증’이 그가 매일 글을 쓰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다.
내향적인 회사원과 외계인이 한 엘리베이터에 갇혔다. 그다음은?
이제 당신의 차례다. 당신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플롯을 짤 시간에, 그냥 이 게임을 시작해보자.
- 캐릭터 만들기: 당신이 가장 잘 아는, 가장 흥미로운 인물 딱 두 명만 만들어라. (예: 마감에 쫓기는 소심한 웹소설 작가 + 지구를 정복하러 온 허당 외계인)
- 상황 던지기: 그 둘을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좁은 공간에 가둬라. (예: 고장 난 엘리베이터 안)
자, 이제 당신이 할 일은 끝났다. 그다음은? 모른다. 그게 정답이다.
웹소설 작가는 마감을 지킬 수 있을까? 외계인은 정체를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둘은 서로를 죽이려 할까, 아니면 협력해서 탈출하려 할까? 혹시 둘이 사랑에 빠지지는 않을까?
모른다. 나도 모르고, 당신도 모른다. 오직 그 엘리베이터 안에 갇힌 두 캐릭터만이 답을 알고 있다.
당신의 임무는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그들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뿐이다.
플롯을 버려라. 당신의 캐릭터를 믿어라.
그들을 족쇄에서 풀어주는 순간, 당신의 이야기는 스스로 살아 숨 쉬며, 당신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캐릭터가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진짜 ‘이야기 엔진’의 비밀이다.
9장. 첫 번째 독자는 오직 당신이어야 한다
- 부제: 이기적으로 쓰고, 냉정하게 고쳐라 (초고와 퇴고의 법칙)
자, 당신은 이제 이야기의 화석을 발굴했고, 캐릭터들을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정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엔딩에 도달했다. ‘끝.’이라는 마지막 단어를 치는 순간, 엄청난 희열이 온몸을 감싼다. 축하한다. 당신은 드디어 한 편의 ‘초고(First Draft)’를 완성했다.
이제 이 뜨끈뜨끈한 원고를 들고 뭘 하고 싶은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빨리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내 글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하고 싶어!’
‘친구한테 보내서 반응 좀 볼까? 혹시 출판사에 바로 투고해볼까?’
만약 당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아주 위험한 함정에 빠지기 직전이다.
스티븐 킹은 이 순간, 작가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실수가 바로 ‘너무 빨리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는 초고를 갓 태어난 연약한 아기에 비유한다. 세상의 온갖 세균과 바이러스에 무방비로 노출된 아기. 그런 아기를 성급하게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은, 아기를 죽이는 것과 같은 행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킹의 해답은 2장에서 언급했던 ‘문’의 법칙과 연결된다. 바로 초고를 쓸 때와 퇴고를 할 때의 ‘나’를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다.
남 눈치 보지 말고, 오직 당신만을 위해 미친 듯이 쏟아내는 시간
기억하는가? 킹은 초고를 쓸 때, 반드시 ‘문을 닫고’ 써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의 진짜 의미는, 초고를 쓰는 동안 당신의 첫 번째 독자는 오직 ‘당신 자신’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단계에서는 다른 사람의 평가나 시선을 완전히 차단해야 한다. ‘이런 내용을 쓰면 사람들이 욕하지 않을까?’, ‘이 문장은 너무 유치해 보이지 않을까?’ 따위의 자기검열은 독이다.
초고를 쓰는 시간은 철저히 이기적이어야 한다. 당신이 보고 싶은 장면을 쓰고, 당신이 듣고 싶은 대사를 쓰고, 당신을 가장 흥분시키는 이야기를 써라.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바 아니다. 당신이 재미없으면, 세상 그 누구도 당신의 글을 재미있어하지 않는다.
당신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 그것이 초고 단계의 유일한 목표다.
이 과정을 통해 당신의 이야기는 외부의 간섭 없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날것 그대로의 형태로 태어난다.
6주 동안 묵혀라, 당신의 원고가 낯설어질 때까지
자, 이제 당신만을 위한 뜨거운 초고가 완성되었다. 그럼 이제 문을 열고 퇴고를 시작하면 될까? 아직 아니다. 킹은 여기서 아주 중요한 중간 단계를 제안한다. 바로 ‘잊어버리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는 완성된 초고를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최소 6주 동안은 거들떠보지도 말라고 조언한다. 6주라는 시간 동안 당신은 그 원고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려야 한다. 다른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가고, 전혀 다른 단편을 쓰면서 당신의 머리를 ‘포맷’해야 한다.
왜 이런 ‘숙성’ 과정이 필요할까?
당신의 원고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다.
방금 막 완성한 원고는 당신의 자식과도 같다. 콩깍지가 단단히 씌어, 모든 문장이 사랑스러워 보이고 모든 단점이 예뻐 보인다. 이런 상태에서는 절대 제대로 된 퇴고를 할 수 없다.
하지만 6주가 지나고 당신이 서랍 속 원고를 다시 꺼내는 순간,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 원고는 더 이상 당신의 자식이 아니다. 마치 남이 쓴 글처럼, 아주 낯설게 느껴진다. 당신은 비로소 ‘작가의 눈’이 아닌, 냉정한 ‘독자의 눈’으로 당신의 글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어색한 문장, 지루한 묘사, 구멍 뚫린 설정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킹’s 퇴고 공식: 2차 원고 = 1차 원고 - 10%
이제 문을 활짝 열고, 피도 눈물도 없는 퇴고를 시작할 시간이다. 킹은 퇴고의 목표를 아주 명확한 공식으로 제시한다.
“2차 원고는 1차 원고보다 10% 짧아져야 한다.”
그렇다. 퇴고는 무언가를 ‘더하는(Add)’ 과정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빼는(Subtract)’ 과정이다. 당신이 초고를 쓰면서 흥에 겨워 덧붙였던 온갖 군더더기, 없어도 될 것 같은 수식어, 반복되는 설명, 지루한 대화를 가차 없이 잘라내야 한다.
소설은 ‘무엇을 쓸 것인가’보다 ‘무엇을 쓰지 않을 것인가’로 완성된다. 10%를 덜어낸다는 목표를 세우면, 당신은 문장 하나하나를 훨씬 더 엄격한 기준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 문장이 없으면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되나?” 이 질문에 “아니오”라는 답이 나온다면, 그 문장은 삭제 대상 1순위다.
이기적으로 쓰고, 냉정하게 고쳐라.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헤어져라.
이 두 개의 얼굴을 가질 수 있을 때, 당신의 이야기는 비로소 ‘당신만의 낙서’에서 ‘독자를 위한 작품’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10장. 그래서, 우리는 왜 쓰는가?
- 부제: 글쓰기는 마법이다, 삶을 구원하는 가장 위대한 기술
자,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정말 고생 많았다.
당신은 이제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버렸고, 당신만의 작업실을 만들었으며, 연장통을 깨끗이 정리했다. 매일 쓰는 습관을 들였고, 닥치는 대로 읽었으며, 당신 주변에 널린 이야기를 발굴했다. 플롯의 족쇄에서 벗어나 캐릭터를 해방시켰고, 이기적으로 쓰고 냉정하게 고치는 법까지 배웠다.
이제 당신은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기술’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나는 당신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겠다.
“그래서, 우리는 도대체 왜 쓰는가?”
돈을 벌기 위해서? 유명해지기 위해서? 물론 그것도 좋은 동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스티븐 킹은, 그리고 나 역시, 글쓰기의 목적이 훨씬 더 위대한 곳에 있다고 믿는다. 돈과 명예는 그저 글쓰기라는 위대한 여정에 따라오는 작은 ‘보너스’일 뿐이다.
그렇다면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킹은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그 답을 보여준다.
교통사고로 박살 난 몸, 스티븐 킹을 다시 일으켜 세운 힘
1999년, 스티븐 킹은 산책을 하다가 미니밴에 치여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오른쪽 다리는 아홉 군데나 부러졌고, 골반은 산산조각 났으며, 척추뼈 여덟 군데에 금이 갔다. 의사는 다리를 절단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평생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육체적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고, 정신은 진통제와 절망의 늪에 빠져들었다.
모두가 그의 작가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고 후 5주가 지났을 때, 휠체어에 앉은 그는 아내에게 컴퓨터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다. 단 15분이라도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뼈가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 그는 딱 한 문단을 썼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는 매일 조금씩 써나갔다.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한다.
“글쓰기는 내 삶의 중심이었다. 나는 생존하기 위해 글을 썼다. 글쓰기는… 생명수와도 같았다.”
그렇다. 글쓰기는 그에게 단순한 직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의미 그 자체였고,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속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행위만이 그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내 머릿-속의 생각을 다른 사람의 머릿속으로 옮기는 ‘텔레파시’
글쓰기는 삶을 구원한다. 그런데 어떻게? 킹은 글쓰기를 거의 ‘마법’에 가까운 행위로 설명한다. 바로 ‘텔레파시’다.
생각해보라. 지금 당신은 이 글을 읽고 있다. 나는 2025년의 대한민국 어느 방구석에서 이 문장들을 썼다. 당신은 몇 시간 뒤, 혹은 몇 년 뒤에, 지구 반대편에서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이 글을 읽는 바로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있던 생각과 감정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당신의 머릿속으로 고스란히 옮겨가고 있다.
이것이 텔레파시가 아니면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섬에 갇혀 사는 외로운 존재다. 하지만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섬으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를 놓을 수 있다. 내 아픔을 이야기함으로써, 똑같은 아픔을 가진 누군가에게 “당신 혼자가 아니에요”라고 말해줄 수 있다. 내 기쁨을 나눔으로써, 누군가의 우울한 하루에 작은 미소를 선물할 수 있다.
글쓰기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의 소통이자, 가장 위대한 위로다.
당신의 이야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당연하다.
이제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시간이다. “우리는 왜 쓰는가?”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쓴다. 그리고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쓴다.
당신이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겠냐고? 당연하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창한 정치적 구호나 위대한 발명이 아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은 순간들이 모여, 세상을 바꾼다.
당신의 찌질했던 첫사랑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잊고 있던 설렘을 되찾아줄 수 있다.
당신이 겪었던 실패와 좌절의 기록이, 누군가에게는 다시 일어설 용기를 줄 수 있다.
당신이 상상해낸 허구의 세계가, 누군가에게는 팍팍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가장 행복한 도피처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더 이상 망설이지 마라.
당신의 서랍 속에 잠자고 있는 이야기를 꺼내라.
그 이야기는 오직 당신만이 들려줄 수 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마법이다.
쫄지 마, 너도 쓸 수 있다.
아니, 당신은 써야만 한다.
당신의 이야기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으므로.
이제 이 책을 셔랍.
그리고, 당신의 첫 문장을 시작하라.
'LLM으로 뽑은 잡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피터 린치의 전설로 떠나는 월가의 영웅: 나는 동네 마트에서 10루타 주식을 찾았다 (4) | 2025.09.15 |
|---|---|
| 피터 린치의 이기는 투자: 내 월급으로 텐배거 찾기 (8) | 2025.09.15 |
| 어슐러 K 르귄의 글쓰기의 항해술: 단어의 바다를 항해하는 법 (0) | 2025.09.15 |
| 총, 균, 쇠: 모든 역사는 지리에서 결정됐다 (4) | 2025.09.15 |
| 촘스키의 생성문법: 내 머릿속 문법 사용 설명서 (2) | 2025.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