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시스: 오늘, 우리의 하루』
[프롤로그: 왜 우리는 여전히 율리시스를 읽어야 하는가]
서점의 고전 코너에 가면 늘 그 책이 있습니다. 『율리시스』. 누구나 제목은 알지만, 끝까지 읽은 사람은 드문 책. 우리는 이 책을 ‘교양의 허세’처럼 꽂아두거나, 너무 어려워서 10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책장에 유배를 보내곤 합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대체 이 8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 왜 ‘20세기 최고의 소설’이라 불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죠. 하지만 어느 날, 저는 이 책이 ‘고전’이 아니라 ‘현대인의 일기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은 영웅의 대서사시가 아닙니다. 아침에 일어나 변기 앉아 고민하고, 점심에 샌드위치를 먹으며 딴생각을 하고, 직장 상사에게 치이고, 아내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우리와 똑같은 ‘보통 사람’ 블룸의 아주 평범한 하루에 관한 기록입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100년 전 더블린의 거리에서, 오늘 우리가 걷는 서울의 강남대로를 예견했습니다. 복잡한 정보 속에 파묻힌 피로감, 타인과 연결되고 싶으면서도 고립되고 싶은 모순적인 마음, 그리고 매일 밤 다시 집으로 돌아와 눕는 그 허무하면서도 안도감 있는 기분까지.
이 책은 당신에게 지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의 하루가 얼마나 치열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가치 있었는지를 말해줍니다.
자, 이제 어렵고 딱딱한 문법은 잊으세요. 100년 전의 더블린이 아닌, 당신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다시 씁니다. 책장을 넘겨보세요. 당신과 닮은 누군가가 거기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1장. 아침, 세상이 깨어나다
알람이 울렸다. 오전 7시.
나는 이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소리라고 생각한다. 어제의 나를 부정하고, 억지로 오늘의 나를 불러내는 소환장.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매연 섞인 서울의 아침 공기가 방 안을 서늘하게 채우고 있었다.
옆방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경쾌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민호다. 이 좁은 셰어하우스에서 그는 마치 자기 집 안방인 양 활개를 치고 다니는 인간이다. 그는 매일 아침 세상의 모든 에너지를 다 끌어다 쓰는 것처럼 굴었다.
"야, 김 작가! 아직도 자냐? 해가 중천이다. 얼른 일어나서 커피라도 내려. 오늘 마감이라며?"
민호의 목소리는 주방의 믹서기 소리보다 더 시끄럽게 고막을 찔렀다. 나는 거실로 나갔다. 민호는 벌써 인스타그램용 셀카를 찍으며 샌드위치를 굽고 있었다. 그는 늘 그렇다.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전시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
나는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앞에는 빈 머그잔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커피 다 떨어졌어."
내가 툭 내뱉자 민호가 웃으며 컵을 내밀었다.
"그럼 사 오면 되잖아. 왜 그렇게 매사에 비관적이야? 세상이 너한테 빚진 게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의 말은 예리했다.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세상이 나에게 무언가 설명해주길 바랐고, 세상은 아무런 답도 내놓지 않은 채 그저 내일의 출근과 마감을 내밀었다. 어쩌면 나라는 인간은 아침마다 자신을 죽이고 다시 태어나야 하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주 낡은 방식 그대로.
나는 창밖을 보았다. 옥탑방 난간 너머로 출근길 버스들이 줄을 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저 많은 사람도 지금 이 순간, 자기만의 고독을 이불 속에 숨겨두고 나왔을 것이다. 저마다의 율리시스가 되어 각자의 이타카(집)를 떠나 매일같이 거대한 도시의 미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심각해? 그냥 커피나 한 잔 마시고 나가자. 별일 있겠어?"
민호가 건넨 따뜻한 머그잔을 손에 쥐었다. 뜨거운 온기가 손끝에서부터 혈관을 타고 몸속으로 퍼졌다. 이게 위로일까. 아니면 그저 습관일까. 우리는 늘 무언가를 떠나보내고, 또다시 무언가를 시작한다.
오늘 아침, 내 안의 무엇인가가 죽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혀끝을 감돌았다.
그래, 시작하자. 오늘도 어쨌든, 살아내야 하니까.
제2장. 가르치는 사람, 배우는 사람 (네스토르)
학원 강사실의 공기는 늘 무거웠다. 창문을 닫아걸고 하루 종일 에어컨만 돌아가는 폐쇄된 공간. 칠판 가루와 오래된 참고서 냄새가 뒤섞인 이곳에서, 나는 오늘도 '역사'를 가르쳤다.
원장님은 낡은 가죽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있었다. 그는 내가 이 학원에서 가장 경계하는 인물이자, 동시에 가장 닮지 말아야 할 표본이었다. 그는 늘 '현실적인 조언'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꼰대 같은 세계관을 주입했다.
"김 선생, 역사를 왜 배우는지 알아?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외우는 게 아니야. '승리하는 법'을 배우는 거지. 결국 세상은 강한 놈들이 기록하는 거고, 그게 역사야."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돈의 흐름을 봐. 금리, 환율, 그리고 부동산. 이게 역사의 본질이야. 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주의니 평등이니 하는 건 다 지루한 이야기일 뿐이지. 살아남으려면 현실을 직시해야 해."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이곳에서 내 월급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원장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백 년 전의 낡은 신문지처럼 퀴퀴했다. 그는 과거의 영광과 자신의 성공담을 뒤섞어 '지혜'라고 포장했지만, 내 귀에는 그저 멈춰버린 시계의 태엽 소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스티븐 디덜러스가 생각났다. 그는 역사를 '깨어나고 싶은 악몽'이라고 했다지. 내 앞의 원장님에게 역사는 '절대 변하지 않는 법칙'이자 '자신의 권위를 증명하는 도구'였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좁은 학원 사무실 안에서, 우리는 각자 다른 역사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과거의 승리에 갇혀 있고, 나는 미래의 불확실함에 쫓기고 있다.
"네, 원장님. 명심하겠습니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텅 빈 메아리였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코웃음을 치며 다시 주식 창을 띄웠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의 간극은 도저히 메워질 수 없는 심연 같았다.
나는 수업 준비를 위해 교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의실로 향하는 복도, 학생들의 소란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아이들은 아직 모를 것이다. 이 복도를 지나 어른들의 세계로 들어오면, 역사는 더 이상 배움의 대상이 아니라, 각자 견뎌내야 할 '오늘의 숙제'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교실 문을 열었다. 칠판에는 지난 시간에 누군가 지우지 못한 '시험 범위'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그 글자들 위로 분필을 덧그렸다.
가르치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시간을 죽이는 것인가. 나의 오늘 수업은 또 어떤 기록으로 남게 될까.
강의실의 조명이 켜졌다. 나는 다시 억지 미소를 짓고 아이들을 마주했다. 오늘 우리가 함께할 '과거'라는 이름의 악몽 속으로, 다시 한번 걸어 들어가야 할 시간이었다.
제3장. 해변을 걷는 생각들 (프로테우스)
학원을 나와 한강 공원으로 향했다. 버스에 올라타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왠지 모를 답답함에 무작정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서울의 바다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한강이 있다. 쉴 새 없이 흐르지만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그래서 더 우리와 닮은 물길이.
강변을 따라 걷는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속도로 자신만의 상념을 안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연인, 이어폰을 꽂고 뜀박질하는 남자, 유모차를 밀며 생각에 잠긴 엄마. 나는 그들 사이를 지나치며 신발 바닥에 닿는 보도블록의 감각에 집중했다.
철학자들은 세상을 실체라고 불렀지만,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은 그저 ‘흐름’일 뿐이었다.
스티븐 디덜러스는 눈을 감고 걸으면 시공간의 감각이 뒤틀린다고 했다. 나도 눈을 잠시 감아보았다. 강물 소리가 가까워졌다. 눈을 뜨면 세상은 다시 견고한 모습으로 돌아와 나를 압박한다. 출근 시간, 마감 기한, 대출 이자, 아내의 잔소리, 그리고 나라는 인간의 정의. 모든 것이 딱딱한 벽처럼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 벽들조차 사실은 물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 어제 나는 훌륭한 작가가 되기를 꿈꿨고, 오늘 나는 학원 강사로 살아가며 안도한다. 내일의 나는 또 어떤 이름으로 불릴까. 우리는 상황에 따라, 만나는 사람에 따라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는 프로테우스(바다의 신) 같은 존재들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그래서 잔인하다. 답을 내리는 순간, 그 답은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버리니까.
한강 물결이 햇빛을 받아 잘게 부서졌다. 그 빛의 조각들이 내 마음의 불안을 비추고 있었다. 나를 규정하려 애쓰지 말자. 형태가 없기에 우리는 어디든 흘러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지금 이 걷는 행위 자체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5시.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강물은 멈추지 않고, 나의 하루도 멈추지 않는다.
그저 흐르는 대로. 모든 것은 변한다. 그래서, 다행히도 우리의 고통도 언젠가는 흘러가 버릴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조금은 숨을 쉴 것 같았다. 나는 강물을 따라, 내일의 내가 기다리는 어딘가로 묵묵히 걸어갔다.
제4장. 아침 식사, 그리고 고양이 (칼립소)
냉장고 문을 열었다. 텅 빈 야채 칸, 유통기한이 어제까지인 우유, 그리고 뜯다 만 식빵 한 봉지. 이게 내 아침의 전부다.
나는 토스트기에 식빵 두 장을 넣었다. 레버를 내리자 ‘틱’ 소리와 함께 열선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짧은 기다림의 시간이 좋다. 빵이 구워지는 동안 나는 어제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이메일들을 휴대폰으로 훑었다. 수신함에는 광고 메일과 결제 알림이 쌓여 있었다. 세상은 내가 잠든 사이에도 쉼 없이 돌아가며 나에게 무언가를 팔려 한다.
창틀에 길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녀석은 창문을 사이에 두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란 눈동자 속에 도시의 새벽 풍경이 투명하게 비쳤다. 녀석은 아마 생각할 것이다. '저 인간은 왜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짓을 반복할까?'
고양이는 묻지 않는다. 녀석에게는 그저 지금 당장 배를 채우는 것과, 볕이 잘 드는 곳에서 몸을 웅크리는 것, 그것뿐이다. 그 단순함이 부러웠다. 나는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리고, 다시 출근 준비를 하는 이 지루한 의식을 수행해야만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데.
안방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내는 아직 자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같은 지붕 아래 살지만, 어쩌면 서로 다른 섬에 표류 중인 것인지도 모른다.
원작에서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자신의 섬에 7년 동안 붙잡아 두었다. 현대의 우리에게 칼립소는 누구일까. 아내일까? 아니면 이 좁은 아파트? 대출금? 아니, 어쩌면 '안정'이라는 이름의 감옥 그 자체가 아닐까. 우리는 모두 어딘가로부터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그곳을 떠나면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며 갇혀 있다.
‘띠링.’ 토스트기가 빵을 뱉어냈다.
나는 탄 냄새가 밴 식빵을 접시에 담았다. 딱딱하게 굳은 빵을 우유에 적셔 한 입 베어 물었다. 퍽퍽하고 밋밋한 맛. 하지만 이 맛이 오늘 하루를 버티게 할 에너지가 된다.
나는 고양이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었다. 녀석은 꼬리를 한 번 까딱하더니 이내 지붕 너머로 사라졌다.
나도 이제 나가야 한다. 다시 이 섬을 떠나 도시라는 바다로. 돌아올 곳이 있다는 사실이 안도감인지, 아니면 나를 묶어두는 닻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나는 컵을 싱크대에 던져 넣었다. 오늘의 아침은 이렇게, 또 무사히 끝났다.
제5장. 일상의 틈새, 커피 한 잔 (연꽃 먹는 사람들)
지하철 2호선은 언제나 거대한 파충류처럼 꿈틀거린다. 수많은 사람이 그 뱃속에 갇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실려 가고 있다. 모두의 눈은 스마트폰이라는 작은 발광체에 고정되어 있다. 그 파란 빛에 홀린 채, 우리는 스스로를 잊는다. 어쩌면 이게 현대판 '연꽃'인지도 모른다. 먹으면 고향을 잊고 현실의 고통을 망각하게 해준다는 그 전설의 꽃처럼, 우리는 디지털 화면과 카페인이라는 마취제를 들이키며 오늘을 버틴다.
회사 근처, 익숙한 카페에 들렀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쉭쉭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점원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샷 추가요"라고 말하는 건, 내겐 일종의 주문이다. *이 쓴 물을 마시고 나면, 적어도 두 시간 정도는 내 의지대로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게 해달라*는 무언의 기도.
창가 자리에 앉아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넥타이를 꽉 조여 매고 종종걸음으로 뛰는 남자, 무거운 가방을 멘 채 멍한 표정으로 걷는 여자. 저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다들 내 마음과 같을 것이다. '이대로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거나, '오늘이 금요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아주 작고 나약한 소망들.
연꽃을 먹은 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고 했다. 그 평온한 마취 상태가 너무 달콤해서. 나 역시 이 짧은 휴식의 순간을 사랑한다. 업무용 메신저의 알림도, 상사의 꾸중도, 대출 이자 독촉도 잠시 멈추는 이 짧은 틈새.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혀끝에서 퍼지는 씁쓸한 산미. 카페인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잠들어 있던 뇌세포를 억지로 깨운다. 감각이 날카로워지면서 동시에 현실이 흐릿해진다. 이 묘한 역설. 고통을 잊기 위해 감각을 더 날카롭게 만드는 이 행위가, 우리가 삶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옆 테이블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웃고 있다. 저들에게도 커피는 낭만일까, 아니면 생존을 위한 연료일까.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나에게 커피는 그저 쓴 음료였을 뿐, 내 영혼을 붙들어 매는 동아줄은 아니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이런 작은 위로들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내 번호가 불렸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카페라는 좁은 성소에서 나와, 다시 저 거대한 도시의 톱니바퀴 속으로 발을 들여야 한다.
나는 빈 컵을 들고 일어났다. 입안에는 아직 쓴맛이 남아 있다. 이 쓴맛이 사라지기 전에, 오늘의 할 일을 하나라도 더 해치워야 한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 하지만 조금은 다르게 버텨내야 하는 하루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연꽃의 마법은 짧다. 하지만 그 짧은 마법 덕분에, 우리는 또 하루를 살 수 있다. 나는 카페 문을 밀고, 다시 차가운 공기 속으로 걸어 나갔다.
제6장. 이별과 작별의 시간 (하데스)
장례식장은 산 사람들의 파티장이다.
검은 정장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다. 낯익은 얼굴들도 보이고, 십 년 만에 보는 이름 모를 친척도 있다.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 척하며, 사실은 각자의 근황을 전시하고 확인한다. 국화 향과 짙은 육개장 냄새가 섞인 이 기묘한 공간에서, 죽음은 엄숙한 의식이라기보다 하나의 ‘업무’처럼 처리된다.
상주와 맞절을 한다. 고개 숙인 찰나의 순간, 나는 고인의 얼굴 대신 내 구두 앞코를 본다. 닦지 않아 묻은 먼지가 눈에 띈다. 그게 죄송해서 고개를 조금 더 깊이 숙인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입에 밴 듯한 위로의 말.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 산 자들은 분주히 말을 쏟아낸다. 부의금을 내는 봉투에 이름을 적는 손끝이 떨린다. 이 종이 한 장이 고인의 삶 전체에 대한 유일한 증명이라니. 사람들은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든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조차 일상의 소란함을 잠재우지 못한다.
원작에서 블룸은 장례식장을 향하며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임을, 그리고 결국 우리는 모두 지하로 내려갈 준비를 하며 윗세상에서 발버둥 치고 있음을 통찰한다.
나 역시 식당 구석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숟가락 끝에 걸린 찢어진 소고기 한 점을 보며 생각했다. 저 사람도 어제까지는 밥을 먹었고, 퇴근을 걱정하고, 내일 입을 옷을 고민했겠지. 그런데 오늘, 그는 식탁 위의 메뉴가 아니라 식탁에 놓인 액자 속의 사진이 되었다.
삶이란 얼마나 허망하고도 질긴 것인가. 누군가 떠나도 지하철은 멈추지 않고, 주식 시장은 장을 마감하며, 편의점 알바생은 여전히 2+1 행사 상품을 진열한다. 우리는 죽음을 보며 슬퍼하지만, 사실은 죽음이 내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깊은 안도를 느낀다. 그 잔인하고도 당연한 생존 본능.
장례식장을 빠져나오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덮쳤다. 정장 상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세상은 낮과 다름없이 소란스러웠고, 택시들은 줄을 지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은 자의 시간은 멈췄지만, 산 자들의 시간은 흐른다. 고인을 위한 작별 인사를 끝내고, 나는 다시 나의 시간을 살러 간다. 그것이 하데스의 왕국에서 돌아오는 유일한 방법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문득 고인의 이름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오늘 나는 삶과 죽음 사이의 얇은 경계를 보았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내일은 또 출근이다. 살아있다는 건, 참으로 피곤하고도 고마운 일이다.
제7장. 신문사, 소음과 침묵 (아이올로스)
사무실은 언제나 바람이 분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도, 공기는 쉼 없이 소용돌이친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날카로운 타건음, 쉴 새 없이 울려대는 메신저의 알림음, 트래픽 수치를 확인하며 내뱉는 탄식과 환호. 이것은 현대라는 도시가 뿜어내는 거대한 '바람'이다.
편집국의 분위기는 전쟁터와 다를 바 없었다. 아이올로스가 자루 속에 바람을 가두었다 풀었다 하듯, 여기서는 '트렌드'라는 바람을 다루었다.
"이거 조회수 안 나오잖아! 제목을 더 자극적으로 뽑아. 사람들이 클릭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편집장의 목소리는 고막을 뚫고 지나갔다. 그는 활기차고, 논리적이며, 동시에 공허했다. 그가 내뱉는 말들은 신문의 헤드라인처럼 화려했지만, 오후 6시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릴 바람 같은 것들이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세상의 중요한 이슈들을 생산하지만, 사실은 단 한 줄의 진실도 담지 못한 채 허공에 메아리만 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화면 속에 떠 있는 기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연예인의 사생활, 정치권의 싸움질. 우리는 이 바람을 타고 먹고산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 사람들이 클릭하고 싶은 것. 그곳에 진실은 없다. 오직 대중의 욕망이 만들어낸 공기 흐름만 있을 뿐이다.
나는 이 '소음의 공장'에서 잠시 벗어나 탕비실로 향했다. 커피 머신이 웅웅거리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기계적인 소음이 아닌, 무언가 생명력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점심시간을 맞은 직장인들이 개미 떼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저들 중 누구도 자신이 무슨 바람에 휩쓸려 다니는지 모른다. 그냥 걷는다. 바람이 부는 대로, 유행하는 대로,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원작에서 스티븐 디덜러스가 신문사 사람들의 웅변과 논쟁 속에서 느꼈던 것은 '말의 과잉'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정보가 넘쳐나지만, 정작 우리가 읽어야 할 문장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많이 떠들고, 너무 많이 쓰고, 너무 많이 소비하지만, 침묵 속에서 나를 대면할 시간은 박탈당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모니터 앞에 앉았다. '클릭률(CTR)'이라는 숫자가 붉게 깜빡였다. 이 숫자가 오늘 나의 존재 이유다.
나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무의미한 단어들을 조합해 사람들의 시선을 잠시 붙잡아둘 문장을 만든다. 바람이 불면 흩어질, 아주 가벼운 문장들.
"그래, 이게 내 일이지."
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삼키며 제목을 고쳤다. 세상은 끊임없이 소리를 지르고, 나는 그 소음의 일부가 되어 오늘도 하루를 채워 넣는다. 이 바람이 멈추는 날은 언제일까. 아니, 바람이 멈추면 나는 어디에 서 있게 될까.
오후 2시. 다시 한번 새로운 알람이 울렸다. 또 다른 바람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그 소용돌이 속으로 다시 몸을 던졌다.
지금 이 순간, 사무실에는 오직 소음만이 가득하다. 그리고 나라는 고독한 침묵만이 그 소음 뒤에 숨어 있다.
제8장. 점심시간의 허기 (라이스트리곤 사람들)
시계 바늘이 정확히 12를 가리키자마자, 사무실 건물마다 거대한 둑이 터진 듯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12시 5분. 도시의 가장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삼킬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생존의 시간.
거리로 밀려 나온 수천 명의 직장인들. 저마다 굶주린 짐승처럼 맛집 리스트를 뒤지거나,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허기를 달랠 궁리를 한다. 신화 속 라이스트리곤 사람들은 사람을 잡아먹었다지만, 현대의 우리는 시간을 잡아먹고, 에너지를 잡아먹고, 서로의 자리를 뺏으며 하루를 버틴다. 식당 안은 이미 만석이다. 찌개 끓는 냄새, 고기 굽는 기름 냄새, 시끄러운 대화 소리가 뒤섞여 후각과 청각을 공격한다.
나는 적당히 한산해 보이는 분식집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낡은 멜라민 그릇에 담긴 김치볶음밥.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 음식을 앞에 두고 잠시 숨을 골랐다.
사람들이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입을 벌려 음식을 넣고, 씹고, 삼킨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저 단순한 행위가, 왜 이렇게 처절해 보일까. 우리는 무엇을 채우려 하는 걸까. 텅 빈 위장인가, 아니면 텅 빈 일상인가.
어릴 적, 어머니가 차려주던 밥상은 사랑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의 이 볶음밥은 그저 '연료'다. 오후 1시부터 시작될 회의를 견디기 위한, 그리고 퇴근 때까지 버틸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비상식량.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허기를 달래며 도시의 부품으로 조립된다.
옆 테이블의 남자 둘이 회사 욕을 하며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다. 그들의 턱 근육이 긴장으로 굳어 있다. 그들도 씹고 있지만, 사실은 분노를 삼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말소리가 볶음밥의 매운 향과 섞여 내 귓가에 엉겨 붙는다. 이 도시는 정말로 거대한 위장이다. 우리 모두를 집어삼키고, 소화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배설해버린다.
숟가락을 들어 밥을 한 입 떠 넣었다. 짜다. 그리고 달다. 자극적인 맛이 혀를 마비시킨다.
'이렇게 먹으면 금방 늙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허기는 정직하다. 정신이 아무리 고고한 척해도, 육체는 당장 에너지를 요구한다. 살아야 한다는 생물학적 본능. 그 솔직함이 때로는 무섭고, 때로는 안도감을 준다. 적어도 배가 고프다는 것은, 아직 내가 완전히 기계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밥을 다 먹고 물 한 잔을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물줄기가 비로소 나를 현실로 돌려보낸다.
나가는 길에 계산대 앞에서 무심코 거울을 보았다. 숟가락을 든 채 멍하니 있던 내 얼굴이 비쳤다. 볼품없고, 지쳐 있고, 그래도 어딘가 인간적인 얼굴.
라이스트리곤의 식인 거인들에게 쫓기듯, 우리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간다. 오후의 업무라는 또 다른 허기를 채우기 위해.
오늘의 점심은 8,000원짜리 볶음밥이었다. 내일은 또 무엇을 삼키며 하루를 버틸까.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이고, 서울의 오후는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제9장. 도서관에서 길을 잃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도서관의 공기는 서늘하고 건조하다. 수만 권의 책이 뿜어내는 묵직한 침묵. 나는 이곳에 오면 늘 기가 죽는다. 수많은 천재가 남긴 불멸의 문장들 사이를 걷다 보면, 내가 오늘 사무실에서 썼던 그 가벼운 기사들이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지는지.
이곳은 신화 속 괴물들이 사는 바다 같다.
한쪽에는 '스킬라'가 있다. 깎아지른 절벽처럼 단단하고 위압적인 현실의 요구들. 조회수를 뽑아내야 하는 압박, 트렌드라는 이름의 획일성, 팔리지 않는 글은 쓰레기 취급을 받는 자본의 논리. 나는 그 바위산에 매일같이 머리를 들이받으며 살아간다.
다른 한쪽에는 '카리브디스'가 있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소용돌이. 순수함, 이상, 아무도 읽지 않는 고고한 예술, 시간이 흘러 잊혀질 것이라는 허무함. 내가 진정으로 쓰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이 소용돌이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나는 서가 사이를 거닐며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이 두 괴물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는 돛단배 같은 존재들이 아닐까.
“작가님, 요즘 독자들은 이런 거 안 읽어요. 너무 어렵잖아요.”
얼마 전 출판사 편집자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 말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내 문장들을 도려냈다. 그들은 바위를 깎아 배를 안전하게 통과시키려 하지만, 내 생각엔 그 과정에서 배의 돛이 다 찢어지고 있다.
나는 셰익스피어 전집이 꽂힌 칸 앞에 멈춰 섰다. 셰익스피어는 당대 최고의 ‘대중 작가’였다. 그는 스킬라(돈과 인기)를 영리하게 이용하면서도, 그 깊은 밑바닥에 카리브디스(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를 숨겨놓았다. 그는 괴물 사이를 통과한 게 아니라, 괴물들과 친구가 되어 함께 춤을 추었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책을 꺼내어 먼지를 털었다. 책장은 빳빳했다.
나는 과연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팔리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아니면, 팔리기 위해 내 영혼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잘라내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도서관의 조명등이 깜빡였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괴물을 피해 이곳으로 숨어들었다. 누군가는 전공 서적이라는 방패를 들고, 누군가는 소설이라는 구명보트를 타고.
나는 다시 책을 꽂아 넣었다. 답은 없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를 지나는 길은 언제나 좁고 위태롭다. 하지만 그 긴장감이 있어야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도서관을 나오자 밖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소음이 쏟아져 나오는 도시의 거리. 나는 다시 그 치열한 바다로 뛰어든다. 이번에는 어떤 전략으로 파도를 넘을 것인가. 고민하는 것 자체가, 아직 내가 이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는 증거다.
나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괴물들은 내일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일도 그 사이를 무사히 통과할 것이다.
제10장. 도시의 불협화음 (방황하는 바위들)
서울이라는 도시의 오후 3시는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조율 시간 같다. 그러나 연주자는 없고, 악기들의 불협화음만이 공간을 채운다.
나는 강남대로 한복판,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신호등은 붉은색에서 녹색으로, 다시 붉은색으로 바뀐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백 명의 사람이 서로의 어깨를 스치며 지나간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궤도를 가진 행성들이다. 누군가는 서두르고, 누군가는 멈춰 서 있고, 누군가는 핸드폰을 보며 길을 잃었다. 마치 그리스 신화 속에서 바다 위를 정처 없이 떠다니던 ‘방황하는 바위들’처럼, 우리는 이 도시라는 바다 위를 위태롭게 유영하고 있다.
오토바이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차량 사이를 뱀처럼 파고든다. 배달원의 헬멧 위로 오후의 햇살이 반사된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을까? 아니, 그저 다음 목적지에 배달해야 할 음식이 식지 않길 바랄 뿐일 것이다.
그 옆으로는 고급 세단이 미끄러지듯 지나가고, 지친 표정의 직장인들이 꽉 찬 버스 안에서 창밖을 노려본다. 그들의 시선은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 지하철 안에서는 수천 개의 이어폰 줄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각자의 세계로 연결된 노이즈 캔슬링의 고요 속에서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다.
우리는 이토록 촘촘하게 연결되어 살고 있는데, 왜 이토록 단절된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원작의 ‘방황하는 바위들’ 에피소드는 더블린 곳곳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일들을 파편처럼 보여주며 도시의 복잡성을 그려냈다. 지금의 서울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사랑을 고백하고, 누군가는 이별을 통보하며, 누군가는 횡령을 모의하고, 누군가는 점심 메뉴를 고민한다. 이 모든 일이 1초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나는 길 건너편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본다. 그녀는 커피잔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하다. 하지만 그녀의 폰은 울리지 않는다. 버스 안의 노인은 창밖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저 멀리 들리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는 누구의 절박함일까?
우리는 서로의 궤적을 침범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때로는 그 궤적들이 부딪혀 파편을 튀긴다. 지하철에서의 말다툼, 길거리에서의 어깨 부딪힘, 메신저에서의 오해. 그 불협화음이 바로 도시의 진짜 소리다.
신호등이 바뀌었다. 나는 인파에 휩쓸려 걷기 시작했다. 내 앞의 남자가 갑자기 멈춰 섰고, 나는 그와 부딪히지 않으려 걸음을 꺾었다.
'죄송합니다.'
작은 사과 한마디가 바람에 흩어졌다. 남자는 대답 없이 다시 제 갈 길을 간다. 우리 모두는 방황하는 바위들이다. 서로 부딪히며 조금씩 깎여나가고, 결국에는 둥글고 매끄러운 조약돌이 되어가는 과정.
도시의 소음은 시끄럽지만, 동시에 거대한 자장가 같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를 전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서로의 삶을 곁눈질하고 있다.
그 무관심한 연대가, 때로는 우리를 이 거대한 미궁 속에서 길 잃지 않게 해주는 유일한 이정표일지도 모르겠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나는 생각했다. 오늘 이 도시에서 나는 누구와 부딪히고, 누구와 스쳐 지나가게 될까. 그 부딪힘이 비록 상처를 낼지라도, 그것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라면 기꺼이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도시의 불협화음은 계속된다. 우리는 그 안에서 각자의 리듬으로, 오늘도 계속해서 방황하고 있다.
제11장. 음악이 흐르는 바 (세이렌)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구리색 문이 닫혔다.
밖은 눅눅하고 시끄러운 서울의 밤이었지만, 이 안은 달랐다. 낮은 조도, 짙은 위스키 향, 그리고 끈적하게 달라붙는 재즈 선율. 이곳은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잠시 도망쳐 온 이들의 항구이자, 정신을 잃고 난파되기 딱 좋은 덫이다.
바텐더가 얼음을 담은 셰이커를 흔들었다. *짤랑, 찰랑.* 그 리드미컬한 소리는 마치 음악의 일부처럼 공간에 섞여 들었다. 바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조금씩 취해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고독을 술잔에 녹여내고,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잠시 자신이 누구인지, 내일이 월요일인지 따위는 잊으려 애쓴다.
저 무대 위에서 색소폰을 부는 연주자가 바로 '세이렌'이다. 그의 악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칠고 애절한 선율은 듣는 이의 마음 깊은 곳, 가장 곪아 터진 상처를 건드린다. 사람들은 그 유혹에 홀려 기꺼이 자신의 지갑을 열고, 시간을 쏟아붓고, 흐릿한 의식을 바닥에 쏟아낸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위스키 한 잔을 주문했다. 호박색 액체 속에 조명이 번졌다.
원작에서 블룸은 음악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숨겨진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음악은 위로인가, 아니면 도피인가? 이 공간의 사람들은 노래가 끝나면 각자의 현실로 돌아가야 할 '사형수'들처럼 보인다. 우리는 음악이라는 마취제를 맞으며, 잠시나마 현실의 고통을 잊는 기쁨을 누린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칵테일을 홀짝이며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녀의 눈빛은 어딘가 먼 곳을 향해 있다. 아마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노래가 주는 이 짧은 환상 속에서, 오늘 하루 내가 겪은 굴욕과 피로를 씻어내고 싶은 것.
*피아노가 낮게 깔리고, 색소폰이 비명을 지르듯 고음을 뱉어냈다.*
나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혀끝에서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뜨거운 열기가 오늘 하루 내내 뭉쳐있던 근육을 풀어주는 듯했다.
‘그래, 이 정도면 됐어. 잠시만 여기서 쉬자.’
음악은 사람을 유혹해 현실을 잊게 하지만, 동시에 그 고통을 견딜 힘을 주기도 한다.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며 바다에 빠져 죽는 이도 있지만, 그 노래 덕분에 거친 항해를 버티는 이도 있는 법이다. 나에게 이 바는 배를 침몰시키는 함정이 아니라, 잠시 닻을 내리는 정박지였다.
노래가 클라이맥스로 치닫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마지막 여운이 공기 중에 파르르 떨리며 흩어졌다. 잠시 동안의 정적.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얼음이 녹아 술은 조금 옅어졌다.
이제 나가야 할 시간이다. 저 문 밖으로 나가면 다시 차가운 서울의 밤공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 귀에는 방금 들은 그 선율이 아직 맴돌고 있으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텐더가 가벼운 목례를 건넸다. 다시, 항해를 시작할 시간이다.
오늘 밤, 나는 음악이라는 바다에서 길을 잃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내일의 내가 버틸 수 있는 작은 힘을, 이곳에서 얻어간다.
제12장. 우리 시대의 편견들 (키클롭스)
삼겹살집의 공기는 맵고 뜨거웠다. 불판 위에서 지글거리는 기름 소리는 전쟁터의 총소리만큼이나 요란했고, 테이블마다 소주잔을 부딪치며 쏟아내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 소음을 뚫고 밖으로 번져나갔다.
내 맞은편에 앉은 김 부장은 이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술기운을 빌려 세상의 모든 모순을 해결할 기세로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다 똑같아! 그놈들이나 저놈들이나! 우리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뻔히 보이는데, 다들 눈 감고 있는 거 아니야?"
그는 '그들'과 '우리'를 나누는 명확한 선을 긋고 있었다. 그 선 안에는 정의가 있었고, 선 밖에는 악이 있었다. 그는 세상을 오직 한쪽 눈으로만 보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듣지 않고, 오직 자신의 분노가 투사된 과녁만을 노려보는 눈. 그것은 신화 속 키클롭스의 눈과 닮아 있었다. 거대하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오직 하나만 보는 눈.
주변 테이블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한쪽에서는 정치를, 한쪽에서는 세대 갈등을, 또 한쪽에서는 젠더 이슈를 두고 각자의 '키클롭스'들이 서로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다. 그들은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말이 상대의 가슴에 제대로 박혔는지, 그 결과 상대가 얼마나 아파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할 뿐이었다.
나는 쌈을 싸서 입에 넣었다. 상추의 쓴맛과 고기의 기름진 맛이 입안에서 섞였다. 저들의 소음이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워질 때쯤, 나는 숟가락으로 탁자를 살짝 쳤다.
"부장님, 그래도 사정이라는 게 있지 않을까요? 다들 각자의 입장이 있는 거니까요."
내 말은 불판 위로 떨어진 빗방울처럼 금방 증발해 버렸다. 김 부장은 나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입장? 그게 바로 네가 문제라는 거야. 세상엔 옳고 그름이 있는 거지, 입장이 무슨 소용이야? 너는 너무 물러. 그러니까 세상이 널 만만하게 보는 거야."
그는 나를 공격했지만, 사실 그가 공격하고 싶었던 것은 내 인격이 아니라 내 '모호함'이었다. 흑백이 분명한 세상에서 회색빛으로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 시대의 키클롭스들에게 가장 먼저 돌을 맞는 법이다.
우리는 왜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두려워할까. 왜 자꾸만 자신의 시야를 좁혀, 세상의 풍경을 한쪽으로만 왜곡해서 보는 걸까.
잠시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났을 때, 식당 벽에 걸린 텔레비전 뉴스 소리가 들렸다. 화면 속에서는 여야 정치인들이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식당 안의 사람들과 화면 속의 사람들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거대한 외눈박이 괴물들이 되어,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하며, 동시에 같은 불판을 공유하고 있었다.
계산대 앞에서 주인아주머니는 무표정한 얼굴로 카드를 받았다. 그녀에게 이 소란은 그저 장사가 잘되는 날의 배경음악일 뿐일 것이다.
밖으로 나오자 늦은 밤의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김 부장의 고함 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남아 있었다.
우리는 세상을 입체적으로 보기 위해 두 개의 눈을 가졌다고 배웠다. 하지만 어른이 될수록 사람들은 한쪽 눈을 감아버린다. 그래야만 더 빠르고, 더 강하게, 남을 찌를 수 있으니까.
나는 길 건너편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거리의 불빛들이 이중으로 겹쳐 보였다. 키클롭스는 외눈으로 세상을 보기에 거리를 가늠할 수 없어 늘 바위를 던질 뿐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우리가 던지는 그 돌들이 결국은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오늘 밤도 서울 곳곳에서는 외눈박이들의 전쟁이 치열하겠지. 나는 두 눈을 모두 뜨고, 나를 스쳐 지나가는 이름 모를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려 애썼다. 그들의 모습이, 적어도 저 식당 안의 사람들보다는 훨씬 입체적으로 보였다.
제13장. 불꽃놀이, 찰나의 설렘 (나우시카)
여의도 한강 공원은 눅눅한 여름밤의 열기와 사람들의 들뜬 숨소리로 가득 찼다. 하늘 위로 쏘아 올릴 불꽃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마치 거대한 축제의 주인공이 된 듯한 표정들이었다.
내 옆자리에는 갓 스무 살이 되었을까 싶은 한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며, 머리카락을 만지고, 가장 예뻐 보이는 각도를 찾느라 분주했다. 옆에 있는 남자친구는 그녀의 사진을 찍어주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삶이 곧 영화의 한 장면이 될 것이라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이 참 예쁘고도, 서글펐다.
원작에서 블룸은 해변가에 앉아 있는 젊은 여성을 바라보며 묘한 설렘과 고독을 느낀다. 그건 단순한 관음이라기보다, 이미 지나가 버린 청춘의 찬란함에 대한 경외이자,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거리감에 대한 쓸쓸한 인정이다.
나 역시 저들이 뿜어내는 '설렘'이라는 에너지의 외곽에 서 있었다. 저들은 사랑이 영원할 거라 믿고, 오늘 밤의 불꽃이 자신들의 미래를 축복하는 폭죽이라 믿겠지. 하지만 나는 안다. 십 년쯤 지나면 저들은 오늘 밤을 기억조차 못 하거나, 혹은 사진첩 구석에 박힌 낡은 이미지로만 간직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팡!'
드디어 불꽃이 터졌다. 밤하늘이 순식간에 원색의 빛으로 물들었다. 사람들의 환호성. 주변의 소음이 일시에 불꽃 터지는 굉음에 묻혔다.
옆의 여학생은 입을 크게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불꽃의 잔상이 맺혔다. 그 찰나의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진 듯한 순수한 경이로움이 번졌다.
나도 하늘을 보았다. 화려하게 터졌다가 허무하게 흩어지는 빛의 파편들. 그것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너무나 짧다. 마치 우리가 인생에서 느끼는 거창한 희망들, 뜨거운 사랑, 찬란한 야망이 그렇다. 우리는 그것을 붙잡으려 애쓰지만, 불꽃이 남긴 건 오직 매캐한 연기와 곧 찾아올 더 짙은 어둠뿐이다.
하지만 그 짧은 빛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 어두운 밤을 어떻게 견뎠을까.
나는 문득 내 인생의 불꽃놀이를 떠올렸다. 나에게도 저렇게 눈이 멀 것 같은 설렘이 있었던가.
불꽃놀이가 끝나자 사람들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흩어지는 인파 사이로 여학생과 남자친구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밤하늘은 다시 무미건조한 검은색으로 돌아갔다.
나는 벤치에 조금 더 오래 앉아 있었다. 공중에 남은 불꽃의 잔상조차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설렘은 영원할 수 없다. 그렇기에 찰나인 것이다. 나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다시 현실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오늘 밤, 나도 잠시 빛을 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일 아침이 오면 다시 지루한 일상이 시작되겠지만, 내 눈 안에는 아주 잠깐 머물다 간 빛의 기억이 남아 있을 테니까.
나는 인파를 헤치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밤공기가 시원했다.
제14장. 병원, 생명의 시작 (태양의 소들)
병원 특유의 냄새가 있다. 소독약 냄새와 갓 피어난 꽃 향기, 그리고 정체 모를 긴장감이 뒤섞인 공기. 그 공기를 들이마시면 누구나 잠시 시간을 멈추게 된다. 이곳은 삶과 죽음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의 숨소리를 듣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갓 아빠가 된 후배의 병문안을 위해 산부인과 병동 복도를 걷고 있었다. 복도는 깨끗했다. 너무 깨끗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벽에 걸린 디지털 시계의 숫자가 무심하게 변하고 있었다. 우리가 밖에서 치열하게 싸우며 지켜내려 했던 그 '시간'이, 이곳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신생아실 유리창 너머로 아이들이 보였다. 조명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생명체들. 그들은 아직 세상의 언어를 배우지 않았고, 우리가 그토록 고민하는 출근 걱정이나 대출 이자 따위는 알 턱이 없다. 그저 숨을 쉬고, 배고파하고, 잠드는 것. 그것이 그들의 온전한 우주였다.
원작에서 '태양의 소들'은 생명과 비옥함을 상징한다. 신화 속에서 태양신의 소를 건드린 자들은 저주를 받았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는 매일같이 이 생명의 신성함을 건드리고 있다. 기술로 잉태를 조절하고, 제왕절개로 날짜를 정하고, 병원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생명을 공산품처럼 다루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유리창 안의 아이들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압도적인 '생의 의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후배는 피곤에 찌든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며칠 밤을 새운 듯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그의 표정만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선배님, 막상 애를 보니까요. 세상이 다르게 보여요. 이게 진짜 '일'이구나 싶더라고요."
그가 가리킨 유리창 너머의 아이. 저 작은 생명 하나를 지켜내기 위해, 세상은 오늘도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과, 출퇴근길의 번잡함과, 우리가 나누는 무의미한 대화들조차 사실은 저 작은 생명을 위한 부차적인 몸짓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우리는 너무 자주 잊는다. 우리가 왜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왜 그렇게 억울함을 참고 회사로 향하는지. 사실은,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낡은 시간을 뚫고 나온 위대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병원을 나설 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퇴근하는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을 메우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저 정체가 지루하고 짜증 났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 불빛들이 하나하나 소중하게 보였다.
저 수많은 불빛 속에서 누군가는 또 다른 생명을 키우고, 누군가는 그 생명을 지키기 위해 길 위에서 시간을 버리고 있겠지.
생명은 그렇게 끈질기게, 신화 속 태양의 소들처럼, 우리 삶의 가장 어두운 곳까지 비추며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차창을 열었다. 밤공기가 달았다.
오늘 병원에서 본 것은 단순한 아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래였고, 희망이었으며, 무엇보다 '어떻게든 계속되는 삶' 그 자체였다. 이 정도면, 내일도 또 한 번 살아볼 만하지 않을까.
나는 차의 시동을 걸고, 다시 세상의 소음 속으로 합류했다.
제15장.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밤 (키르케)
새벽 2시의 서울은 낮과는 완전히 다른 질감을 가진다. 네온사인들은 액체처럼 흘러내려 아스팔트 위로 번지고, 텅 빈 거리는 거대한 무대 세트처럼 비현실적이다. 취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도시가 내뿜는 최면 때문일까. 나는 걷고 있지만, 내 발걸음은 마치 다른 누군가의 것 같다.
신화 속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동료들을 돼지로 만들어버렸다. 오늘 밤, 이 화려하고도 잔인한 도시의 밤거리가 바로 키르케의 섬이다.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저마다의 욕망과 두려움에 먹혀, 본래의 모습을 잃고 기이한 괴물로 변한다.
골목 어귀를 돌 때마다 환영이 보였다. 저만치 걸어가는 남자는 10년 전, 처음 서울에 올라와 ‘세상을 바꾸겠다’며 호기롭게 술잔을 기울이던 스물셋의 나였다. 그의 눈은 지금보다 훨씬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싶었지만, 발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나를 스쳐 지나갔다.
옆 건물 유리창에는 넥타이를 머리에 묶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혐오스러운 중년의 내 모습이 비쳤다. 그것은 내 안의 가장 추한 부분, 타협하고, 굽히고, 비굴하게 웃으며 살아남은 현실의 나였다.
거리의 소음이 왜곡되어 들려왔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비명처럼, 자동차 경적 소리는 거대한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들렸다. 나의 죄책감, 억눌렀던 욕망,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이 환청이 되어 귓가를 맴돌았다.
"넌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내 안의 내가,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그래, 나는 알고 있었다. 키르케의 마법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가장 연약하고 어두운 부분을 건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 밤은 내 밑바닥을 긁어내는 시간이다. 성공하지 못한 초조함,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미련, 나를 옥죄는 사회적 가면들. 그 모든 괴물들이 이 새벽의 희미한 가로등 아래서 실체를 드러내고 나를 조롱한다. 나는 돼지가 되어 꿀꿀거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 환각을 뚫고 지나가려는 영웅인 걸까.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머리가 무거웠다. 나는 가로등 기둥을 붙잡고 잠시 숨을 골랐다.
'이건 꿈이야. 깨어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상이 시작될 거야.'
하지만 눈앞의 풍경은 도무지 정지되지 않았다. 거대한 빌딩 숲은 나를 삼킬 듯이 솟아올랐고, 바람은 차가운 칼날처럼 뺨을 스쳤다. 새벽의 공기는 너무나 선명해서, 오히려 이 모든 상황이 가짜라는 사실을 더 확연히 깨닫게 했다.
도시는 잠들지 않고, 그 속에서 우리는 매일 밤 각자의 키르케를 만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마법, 불안이라는 이름의 저주. 그 마법에서 풀려나는 유일한 방법은, 다시 해가 뜨는 것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동이 트려면 아직 몇 시간이 더 남았다.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바로잡고, 다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돼지가 되어도 좋고, 패배자가 되어도 좋다. 다만 이 밤이 끝나기 전에, 나라는 존재의 파편들을 다시 이어 붙여야 했다.
내일 아침, 나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출근 지하철에 몸을 실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아주 태연하게.
밤은 깊고, 골목은 멀다. 키르케의 마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16장. 낯선 이와의 대화 (에우마이오스)
새벽 4시의 편의점은 도시의 가장자리, 세상의 끝에 매달린 작은 섬 같다. 형광등 불빛은 창백했고, 냉장고의 모터 돌아가는 소리는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이고 단조로웠다. 나는 술기운을 깨려고 억지로 마신 캔커피의 쓴맛을 입안에서 굴리고 있었다.
그때 그가 들어왔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어딘가 잔뜩 망가진 모습의 청년이었다. 헝클어진 머리, 구겨진 셔츠, 그리고 초점 없는 눈동자. 그는 마치 폭풍우가 치는 바다를 건너온 난민처럼 편의점 문을 밀고 들어와 컵라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우리는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피할 곳이 없었다. 그는 뜨거운 국물을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혼잣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나를 향해, 아니 정확히는 허공을 향해 자신의 삶을 쏟아내고 있었다. 취업 준비의 피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공포, 어제 헤어진 연인에 대한 원망, 그리고 이 도시가 자신을 버린 것만 같다는 피해망상까지.
나는 그저 조용히 들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스티븐 디덜러스가 블룸에게 그랬듯, 그는 나에게 자신의 고통을 전염시키려 했다. 아니, 그저 누구라도 좋으니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는 거. 세상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거.”
그는 나를 향해 삐딱한 질문을 던졌다. 나는 캔커피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노력해도 안 되는 건 맞지. 그런데 노력하지 않으면 굴러떨어지는 건 훨씬 빠르더라. 그게 나도 참 억울하고 비겁하다고 생각해.”
우리의 대화는 엉성하고 파편화되어 있었다. 어제 먹은 술 때문인지, 아니면 잠을 자지 못한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건지, 문장은 앞뒤가 맞지 않았고 주제는 자꾸 겉돌았다. 마치 원작의 ‘에우마이오스’ 에피소드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완전히 닿지 못하면서도 그 거리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서 ‘꼰대’의 냄새를 맡으려 했고, 나는 그에게서 ‘철없는 청춘’의 불안을 보았다.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동질감을 느꼈다. 4시의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캔커피를 앞에 두고 앉아 있는, 도시의 낙오자들.
“형님이라고 불러도 돼요?”
그가 물었다.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밀려왔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 아무에게나 기대고 싶고, 누군가에게는 위로받고 싶던, 세상의 중심이 나여야만 했던 시절.
“그래, 마음대로 해라.”
우리는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라면 국물이 식어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밖은 조금씩 푸르스름한 빛이 돌고 있었다. 밤의 마법이 풀리고, 잔인한 아침이 오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컵라면 용기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용기가 바닥으로 굴렀다. 그는 그것을 줍지 않고 나갔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워 버렸다.
그는 멀어졌다.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나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4시의 편의점에서 나눈 대화는 아무런 무게가 없었다. 우리는 곧 서로의 얼굴도 이름도 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짧은 만남이, 텅 빈 새벽을 버티게 하는 아주 작은 온기였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편의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새벽 공기가 차갑게 폐부로 스며들었다. 오늘 하루도, 어떻게든 시작되고 있었다.
제17장.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타카)
도어락의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에 힘이 빠져 있었다. '삐빅, 삐비빅.' 익숙한 전자음이 복도의 정적을 깨뜨렸다. 문을 열자, 낮 동안 집 안에 갇혀 있던 서늘한 공기가 나를 맞이했다. 밖은 소음과 열기로 가득했지만, 이곳은 내가 떠난 시간 그대로 멈춰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불을 켜지 않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거실을 훑었다. 소파 위의 담요, 식탁 위에 올려둔 청구서, 설거지통의 빈 그릇. 오늘 하루 내가 밖에서 겪은 그 모든 소동—출근 지하철의 압박, 신문사의 마감 전쟁, 왁자지껄한 고깃집에서의 키클롭스들, 새벽 편의점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이 좁은 아파트 안에서는 그저 사소한 흔적에 불과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마셨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감각이 선명했다. 원작 속 블룸이 이타카(집)로 돌아와 차를 끓이며 자신의 하루를 과학자처럼 분석했듯, 나도 내 하루를 되짚어보았다.
나는 무엇을 얻었나? 돈? 명예? 아니, 그저 약간의 피로와 약간의 지혜, 그리고 내일 아침 다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의무감뿐이다.
거대한 항해는 끝났다. 밖은 위험하고, 시끄럽고, 끊임없이 나를 시험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안전하다. 비록 권태롭고 뻔할지라도, 이곳은 내 삶의 좌표가 찍힌 유일한 종착지다. 우리는 모두 이 평온한 정박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밖을 떠도는 것이 아닐까.
안방 문을 아주 조금 열었다. 아내는 이미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저 작은 소리가, 밖에서 내가 휘둘렀던 모든 긴장감을 무장 해제시켰다.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우리는 같은 지붕 아래 살지만, 어쩌면 서로 다른 시간대를 여행하는 외로운 여행자들이다. 나는 그녀의 하루를 모르고, 그녀 또한 나의 하루를 전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밤, 이 침대라는 공간에서 다시 만난다.
옷을 벗어 대충 의자에 걸쳤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은 지쳐 있었다. 눈밑은 퀭했고, 입가에는 어색한 미소가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나다. 밖에서는 '나'라는 가면을 쓰고 버텼지만, 여기서는 가면을 벗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 집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나는 이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차가운 시트가 몸에 닿자 몸이 움츠러들었다. 곧 체온이 시트를 데우기 시작했다.
이제 곧 잠이 올 것이다. 꿈속에서 나는 또 어떤 항해를 하게 될까? 내일 아침 알람이 울리면, 다시 현실이라는 바다로 뛰어들어야 하겠지. 그 사실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사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이 묵직한 안도감으로 가슴을 채웠다.
창밖으로 새벽빛이 희미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서울의 아침이 다시 준비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더 이상의 질문은 필요 없었다. 도착했다. 이것으로 되었다. 오늘의 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제18장. 그녀의 밤, 그녀의 고백 (페넬로페)
그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깊은 잠에 든 모양이다. 나는 어둠 속에 눈을 뜨고 가만히 천장을 보았다. 밖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얼마나 치열하게 시달리다 돌아왔는지 그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젖은 구두 냄새, 미세하게 찌든 담배와 술 냄새, 그리고 어깨에 묻어온 도시의 먼지. 그 모든 것이 그가 하루라는 전장에서 돌아온 훈장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그를 영웅이라 생각할까, 아니면 패배자라 생각할까.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가 돌아올 곳이 여기라는 것,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
나는 이불을 조금 더 끌어올려 그를 덮어주었다. 우리 사이엔 지난 세월만큼의 침묵이 쌓여 있다. 처음엔 열정이었고, 그다음엔 습관이었으며, 지금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 침묵. 우리는 서로에게 많은 것을 약속했지만, 정작 지킨 것은 함께 늙어가는 일뿐이다.
그는 밖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가면을 쓰고, 수많은 거짓말을 했겠지. 하지만 나는 안다. 저 가면 아래 숨겨진 그의 겁먹은 소년 같은 얼굴을. 나만 볼 수 있는 그 얼굴.
나 역시 나의 하루가 있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나의 전쟁. 아이의 학원비를 고민하고, 고장 난 세탁기를 보며 한숨 쉬고, 내 이름이 지워진 채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로 불리는 시간들. 내 안에도 꿈틀대는 욕망이 있었고, 때로는 낯선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는 충동도 있었다. 다른 삶을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은, 밤마다 찾아오는 불청객처럼 나를 괴롭히곤 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을 선택했다. 그리고 내일도 이 선택을 반복할 것이다.
어쩌면 사랑이란 건 거창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서로의 밑바닥을 보고도 떠나지 않는 것. 서로의 가장 초라한 모습을 보고도 그 옆에 누워 잠드는 것.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방식이 아닐까.
그래. 좋았던 날도 있었지. 처음 만났던 날의 그 서툴던 눈빛, 함께 웃고 울었던 기억들. 비록 지금은 빛이 바랬지만, 그 빛은 여전히 우리 관계의 뿌리에 남아 있다. 아니, 빛보다 더 진한 어둠이 우릴 지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어둠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찾으니까.
창밖으로 새벽빛이 희미하게 번져온다. 곧 세상이 다시 깨어날 것이다. 그는 다시 밖으로 나가 또 다른 하루의 전쟁을 치르겠지. 나는 그가 나간 뒤의 빈자리를 메우며 나의 전쟁을 치를 것이다.
누군가는 이 반복되는 일상을 지옥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래, 나는 대답한다. 이 지루하고, 버겁고, 때로는 숨 막히는 이 삶을 나는 다시 선택할 것이다. 아니, 이미 선택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 그렇게 살면 된다. 그래. 이것이면 충분하다. 그래. 그래도, 네가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어서.
그래.
어느덧 창가에 아침 햇살이 내려앉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가올 내일이 조금은 덜 두렵게 느껴졌다. 이 밤은 이제 끝났다. 우리는 또다시, 서로의 곁에서 아침을 맞이한다.
그것으로 되었다. 그래, 정말, 그래.
Epilogue: 모든 게 괜찮아질 것이다
어느덧 창밖으로 서울의 아침이 다시 밝아옵니다. 어제와 똑같은 아침입니다. 지하철은 다시 붐비기 시작할 것이고, 사무실의 기계들은 웅웅거리며 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커피 머신에서는 다시 쓴 원두 향이 배어 나오고, 거리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다시 채워질 것입니다.
이 책을 덮으며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영웅적인 모험을 기대했나요? 아니면 인생을 바꿀 거대한 통찰을 기다렸나요?
어쩌면 조금 허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따라간 블룸의 하루는 너무나 평범했고, 끝은 너무나 조용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바로 제임스 조이스가, 그리고 제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삶은 원래, 거대한 클라이맥스가 있는 드라마가 아닙니다.
삶은 아침에 일어나 변기 위에 앉는 고민부터 시작해서, 점심을 무엇을 먹을까 망설이고, 출퇴근길의 피로를 견디고, 누군가와의 오해에 상처받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이 되면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이 사소하고 반복적인 움직임들의 총합입니다. 우리는 매일 그 미궁을 헤매고, 매일 키르케의 유혹을 견디며, 매일 이타카(집)를 향해 길을 잃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인생이라는 서사시를 쓰는 작가이자 주인공입니다. 때로는 방황하는 바위처럼 흔들리고, 때로는 키클롭스처럼 타인을 오해하며, 때로는 페넬로페처럼 묵묵히 기다리며 자신의 하루를 지켜내고 있으니까요. 당신의 하루가 비록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당신에게는 그 무엇보다 치열하고 위대한 항해였습니다.
이제 이 책을 책장에 꽂아두세요. 그리고 당신의 하루를 시작하세요. 내일 아침 알람이 울리면, 다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가세요.
혹시 또다시 길을 잃거나, 세상이 너무 춥고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때 다시 이 책을 펼쳐보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기억하세요. 당신과 똑같이 고민하고, 똑같이 휘청거리며, 똑같이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수많은 '블룸'들이 이 도시의 곳곳에서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도, 환희도, 지루함조차도 말입니다.
자, 이제 문을 열고 나가세요. 오늘도 당신의 하루는,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고 훌륭합니다.
모든 게 괜찮아질 것입니다. 네, 그래요.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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