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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성소부부고

성소부부고 제2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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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부부고 제23권 · 설부 2 · 성옹지소록 (중)

출처: 성소부부고 제23권, 설부 2, 성옹지소록 중

배경: "성옹지소록"은 허균이 스스로를 가리키는 별호인 "성옹"을 앞세워 지은 견문록으로, 조선 초기부터 자신이 살던 당대까지 이름난 재상과 학자, 선비들에 얽힌 크고 작은 일화를 두서없이 적어 내려간 글이다. 이 권에는 황희와 김종서 같은 나라를 세운 초기의 명재상들부터,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겪은 선비들, 허균 자신의 아버지와 두 형이 가르침을 받은 스승들, 그리고 임진왜란을 이끈 선조 시대의 대신들에 이르기까지 쉰 편이 넘는 짧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각 이야기에는 원문에 없는 소제목을 옮긴이가 붙여 내용을 짐작하기 쉽게 하였다.

일러두기: 이 글에는 조선 시대의 관직과 제도를 가리키는 말이 자주 나온다. "문형"은 나라의 글을 총괄하는 대제학의 별칭이고, "지제교"는 임금의 문서를 짓는 벼슬이며, "홍문록"은 홍문관 관원이 될 후보로 오른 명단을 말한다. "향안"은 지방에서 대대로 이름난 사대부 집안 출신만을 골라 이름을 올리던 명부이고, "궤장"은 임금이 나이 많은 공신이나 대신에게 내리던 지팡이와 앉는 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가독서"는 젊고 유능한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오로지 책만 읽게 하던 제도이고, "독서당"(또는 "호당")은 그들이 머물며 공부하던 곳이다. "계유정난"은 1453년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이 반대파 대신들을 없애고 정권을 잡은 사건이며, "기묘사화"는 1519년, "을사사화"는 1545년에 각각 조정에서 뜻있는 선비들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대광보국숭록대부"는 신하가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품계이다. 이런 말들은 문맥에서 필요할 때마다 짧게 풀어 놓았다.


황희와 허조 — 나라를 세운 초기의 명재상

나라를 세운 초기의 이름난 재상으로는 황희와 허조를 꼽는다. 언젠가 《세종실록》을 살펴보니 이 두 사람이 특별히 무언가를 앞장서서 건의한 것은 없고, 다만 임금이 조금이라도 지나친 행동을 하면 반드시 굳게 고집하며 따르지 않았을 뿐이었다.

황희는 관리를 임명하는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고 제도를 함부로 바꾸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허조는 문학적 재능으로 조금 꾸미기는 했으나 조심스럽게 바른 법도를 지켰다.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다스리는 큰 그릇이나 시대를 구제할 만한 재주를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진 신하들이었다.


황희가 김종서를 엄히 대한 까닭

익성공 황희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 김종서는 호조판서로 있었다.

하루는 삼정승과 육조 판서들이 대궐에서 회의를 하는데 해가 저물자, 김종서가 간단한 밥상을 준비해 왔다. 황희는 그 밥상을 물리치고는 조정의 자리에 앉아 김종서를 불러 섬돌 위에 세워 놓고, 규정에도 없이 사사로이 음식을 대접한 일을 꾸짖었다. 말이 매우 엄하니 김종서는 진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였다. 한참을 그렇게 세워 두었다가 돌려보냈으니, 황희가 규범을 지키는 태도가 이와 같았다.

황희가 나랏일을 맡아보는 동안 김종서는 여러 차례 병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지냈는데, 한 가지 일이라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황희는 심하게 꾸짖고 때로는 그의 종을 매질하거나 몸종을 가두기까지 하였다. 동료들은 모두 너무 심하다고 여겼고, 김종서 자신도 몹시 곤욕스럽게 여겼다.

하루는 정승 맹사성이 물었다. "김종서는 당대의 이름난 재상인데 공은 어찌 그리도 심하게 대하십니까?"

황희가 대답했다. "이것은 내가 종서를 훌륭한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종서는 성품이 강직하고 기세가 날카로워 일을 과감하게 처리하니, 훗날 우리들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 때 스스로 신중하지 않으면 반드시 일을 그르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그 기세를 꺾어 경계하도록 하고 뜻을 단속하여 조심하게 함으로써, 일에 임하여 신중해지도록 하려는 것이 제 뜻이지, 그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맹사성이 이 말에 감복하였다. 훗날 황희가 사직을 청하면서 김종서를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하였다고 한다.

김종서가 함경도 북쪽 변경에 있을 때는 다스림이 매우 엄격하고 씀씀이는 매우 사치스러워 백성과 아전들이 그를 꺼렸다. 하루는 화살이 그의 책상에 날아와 꽂혔는데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의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여러 차례 독을 넣었으나 그를 죽이지는 못하였다.

무릇 잔치를 한 번 열면 부하 장교 백 명에게 저마다 쇠고기 다리 하나씩을 돌렸으므로, 어떤 사람이 낭비라고 간언하니 김종서가 이렇게 대답했다. "이 북쪽 변경은 우리 왕조가 일어난 곳으로, 선대 임금들이 개척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땅이다. 이제 다행히 이 땅을 개척하였으나, 장수와 병졸들이 이 먼 곳에서 십 년이나 수자리를 서고 있으니, 이렇게라도 잔치를 베풀지 않고서는 이들을 위로할 길이 없다. 더구나 이 일을 시작하는 마당에 쓸쓸하게 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비록 쇠고기 다리 하나씩을 쓰고 있지만, 십 년이 지난 뒤에는 닭다리 하나조차 넉넉지 못할 것이다. 장수와 병졸들이 노래를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게 되면, 대체 누구와 함께 이 변방을 지키겠는가?" 이 말을 듣고 간언하던 사람은 더는 말하지 못하였다.


김종서와 신숙주

김종서는 신숙주를 천거하여 자신의 막료로 삼고, 그의 재주와 그릇을 지극히 아꼈다. 무슨 일을 계획할 때면 신숙주가 뒤에서 돕는 일이 많았다.

여진 지역에 아홉 개의 성을 설치하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를 두고 조정의 논의가 자신의 생각과 달랐으므로, 김종서가 글을 올려 이를 다투었는데 그 내용이 수만 자에 달하였다. 김종서가 신숙주에게 붓을 잡게 하고 자신은 입으로 부르는데, 마치 미리 지어 둔 글을 외우듯 줄줄 이어져 그치지 않았다. 신숙주는 명을 받들어 부르는 대로 받아 적으며 붓을 멈추지 않았는데, 한 글자도 되묻는 일이 없었고 한 자도 잘못 쓰거나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김종서가 감탄하여 말했다. "나는 본디 내 재주를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대야말로 참으로 드물게 보는 큰 재주로세."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날, 신숙주는 마침 관청에 있었다. 그의 부인은 남편이 반드시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스스로 목을 매려고 치마끈으로 목에 걸어 놓고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저물녘에 벽제 소리가 들리기에 알아보니 신숙주가 돌아온 것이었다. 부인이 치마끈을 풀며 말했다. "저는 당신이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신숙주는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허종과 허침 형제, 그리고 백세 할머니

충정공 허종과 문정공 허침 두 형제는 모두 정승이 되었고 그 덕과 업적도 다 뚜렷하였으니, 우리나라에서 전에 없던 일이었다. 두 사람의 누님도 글과 행실,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고 백 살까지 사셨으므로, 집안에서는 지금까지도 그분을 "백세 할머니"라고 부른다. 두 형제는 이 누님을 매우 공손히 섬겼고, 조정에 중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찾아가 의견을 여쭈었다.

성종이 윤비를 폐위하려 할 때 두 형제가 누님에게 자문을 구하니, 이렇게 말하였다. "아들이 지금 세자로 있는데, 그 어미에게 죄를 준다면 어찌 나라가 편안하고 탈이 없겠느냐?" 이에 허종은 병을 핑계로 논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허침은 다른 의견을 내다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뒤 연산군이 정치를 어지럽히면서 "윤비를 폐위한 것이 마땅하다"고 논의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허침만은 홀로 화를 면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누님의 뛰어난 안목에 감탄하였다.


반정공신의 서열 — 성희안의 겸양

연산군을 폐위하는 일을 논의할 때, 성희안(창산)이 실로 그 계획을 가장 먼저 세웠고, 박원종(평성)이 여기에 참여하였으며, 유순정(청천)은 뒤늦게 참여하였다. 그런데 서열이 박원종과 유순정이 앞서고 성희안이 끝에 놓인 것은 원래 지니고 있던 벼슬의 등급에 따른 것이었다. 이것은 실은 성희안이 스스로 겸손하여 셋째 자리로 물러난 것이었다. 모든 일은 겸양해야 잘 이루어지는 법인데, 하물며 반정처럼 큰일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렇게 양보하여 큰 공을 이루었으니, 성희안의 안목은 따라갈 수가 없다.


성희안의 결단 — 형조참판 시절 일화

성희안은 낮은 벼슬에 있을 때부터 이미 굳세고 과감하여 권력에 눌리지 않았다. 그가 형조참판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성균관 유생이 관아의 하인에게 모욕을 당하고는 동료들과 함께 이름을 나란히 올려 그 하인을 죽여 달라고 청하였다. 그런데 그 하인은 당시 영의정이던 신승선의 종이면서, 좌의정 이극배(광릉)의 여종의 남편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판서 한치형은 이 일의 죄를 판단하기 어려워 병을 핑계로 출근하지 않았다. 이 일로 이극배의 아우 이극돈이 성희안의 집을 두 차례나 찾아갔지만 병을 핑계로 만나 주지 않으니, 두 정승이 노하였다.

하루는 성희안이 조정에 나가자 두 정승이 그를 몰아세웠다. 성희안이 그 자리에서 여러 사람에게 대놓고 말했다. "여러 유생이 한낱 천한 종에게 얻어맞았으니, 그 종의 죄는 사형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나라의 법이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정승들을 위하여 이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임금께 아뢴 뒤에 저 스스로 물러나겠습니다." 두 정승은 부끄러워하며 사과하였다. 함께 있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성희안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물러나와 그 종에게 곤장을 쳐서 죽였으니, 그 결단력이 이와 같았다.


성희안의 안목 — 정광필을 천거하다

성희안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일찍이 정광필(문익공)을 두고 참으로 정승이 될 만한 인물이라며 감탄하였다. 정광필이 함길도 감사로 있다가 우의정이 되어 돌아온 것도 모두 성희안이 천거한 덕분이었다. 당시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으나, 정광필이 훗날 기묘사화 때 선비들을 위해 공을 세우고 정승으로서의 업적도 훌륭하여, 시대는 다르지만 황희·허조와 나란한 명망을 얻게 되니, 사람들은 그제야 성희안의 안목에 감탄하였다.


박원종의 사치와 정사룡·황여헌

박원종(평성)은 영의정으로서 병조판서를 겸임하여 총애와 권세가 매우 높았다. 물러나려는 뜻으로 병을 핑계 삼아 도산의 별장에 가 있었는데, 조정에 큰일이 있을 때면 임금이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그때 정사룡(호음)과 황여헌(유촌)이 함께 병조의 낭관으로 있으면서 도산에 가서 자문을 구하곤 하였다. 박원종은 평소 사치를 매우 좋아하여 정원과 연못, 누각, 집을 크게 짓는 등 집을 매우 화려하게 꾸몄으며, 시중드는 첩 수십 명이 비단 치마를 입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능하였다. 박원종은 정사룡과 황여헌을 재주 있는 선비라 하여 매우 극진히 대접하였다. 진수성찬을 차리고 풍악을 울리며 술을 권하고, 시중드는 여종들에게 각자 시 한 수씩을 짓게 하여 잔뜩 취하고 한껏 즐긴 뒤에야 흩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반드시 박원종의 생활 가운데 한 가지를 본받겠다"고 다짐하였다. 정사룡은 만년에 음식을 사치스럽게 들었고, 황여헌은 큰 집을 짓고 여종에게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게 하였는데, 이는 모두 박원종을 흉내 낸 것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선비가 하는 일이 어찌 나라에 공을 세운 귀족과 같을 수 있겠는가.


정광필의 안목 — 황헌의 관상

정광필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사람을 천거하거나 임용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용모를 살펴보았다. 그래서 그가 천거한 사람 가운데 높은 벼슬에 오른 이가 많았다.

정승 황헌이 막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서 정광필의 집을 찾아왔다. 정광필은 정성껏 음식을 대접하였다. 황헌이 하직 인사를 하자 일어나 전송하면서 그의 등을 한참 바라보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자제들이 이상히 여겨 까닭을 묻자 정광필이 말했다. "저 사람은 얼굴이 넉넉하면서도 수려하니 반드시 재상의 지위에 오를 것이다. 그런데 마시고 먹는 모습을 보니 반드시 빠르게 승진했다가 일찍 물러날 것이고, 등이 얼굴만 못하니 마땅히 자손이 없을 것이다." 황헌은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등용되었고, 막 정승이 되자마자 관직을 박탈당했으며 또 자식도 없었으니, 모두 정광필의 예언대로 되었다.


정광필의 식사법

정광필은 식사 때마다 자신이 먹고 남은 음식을 좌의정 정유길과 우의정 정지연에게만 먹게 하고 다른 자제들에게는 주지 않았다.

이헌국(완성)은 정광필의 먼 친척뻘 손자였는데, 어렸을 때 문안을 드리러 갔다. 마침 정광필이 식사 중이었고 정유길과 정지연 두 사람은 마침 집에 없었다. 식사를 마치자 정광필은 이헌국을 한참 바라보더니 여종을 불러 남은 음식을 걷어다 주게 하니, 이헌국이 그것을 먹고 물러나왔다. 여종들은 서로 눈짓을 하며 웃으면서 "저분도 정승이 될 상인가?" 하였다. 훗날 이헌국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고, 충직함으로 선조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여든 살에 세상을 떠났다. 정광필이 그의 관상을 보고 대개 짐작했던 것이다.


정사룡의 젊은 날과 만년

정사룡(호음)은 젊었을 때 행동을 조심하지 않아 정광필에게 칭찬받지 못하였고, 선비들도 이를 단점으로 여겨 지방으로 내쳐졌다. 기묘년(1519년)에 사화가 일어나자 그를 불러들여 사간으로 임명하니,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며 "저 사람이 오래 분한 마음을 품고 있었으니 반드시 분풀이를 하려 들 것이다" 하였다. 정광필이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내 조카가 비록 몸가짐은 조심스럽지 못했으나 결코 남을 해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정사룡이 사간이 되고 나서는 과연 스스로 사양하며 당시의 논의에 참여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이를 보고 정사룡을 훌륭하게 여겼고 정광필이 사람을 잘 알아본다고 칭찬하였다.

정사룡은 살림을 잘 꾸려 부자가 되자 자신의 생활은 왕족이나 다름없이 누렸으나, 성품이 인색하여 손님을 잘 대접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선비들 가운데 정사룡의 집 음식을 먹어 본 사람이 없었으나, 유독 어득강(관포)이 찾아오면 반드시 많은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정씨 집의 식객"이라 불렀다.

만년에는 서울 동쪽 교외로 물러나 살았는데, 임억령(석천), 신잠(원량)과 시와 술로 어울리며 맑은 복을 누린 것이 이십여 년이었다. 비록 세상을 구제한 공은 별로 없었으나 그 풍류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아, 마을 사람들 가운데는 그의 자를 따서 자신의 자로 삼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박상의 의리

박상(눌재)은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다. 기묘년(1519년)에 충주목사로 있었다. 조광조(정암)가 사화를 당하자 당시 선비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박상이 이들을 모두 돌보아 주었으므로 김세필(성동), 이자(음애), 이연경(탄수) 같은 사람들이 다 그에게 가서 의지하였다.

박상이 하루는 여주에 갔다가 김안국(모재)과 신광한(기재)이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는, 여주목사 이희보(안분당)를 찾아가 쌀 백 섬을 빌려 두 사람을 구제하였다. 충주로 돌아와서는 서둘러 쌀을 배에 실어 빌린 만큼을 이희보에게 갚았다. 옛 선배들은 벗들 사이에서 대개 이러하였다.


박수량과 김정

박수량은 강릉 사람으로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갑자년(1504년) 사마시(진사시)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응시하지 못하였고, 현량으로 뽑혔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훗날 용궁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두어 달 만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김정(충암)이 금강산을 유람하는 길에 그의 집에 들렀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일꾼들 사이에 끼어 손수 새끼를 꼬고 있었으므로, 김정은 처음에 그가 주인인 줄 몰랐다. 마침내 풀을 깔고 앉아 술을 마셨는데, 질그릇에 담은 술과 나물 안주뿐이었다. 이틀 밤을 묵으며 한껏 놀다가 떠나면서, 헤어질 때 진달래나무 지팡이를 선물로 주며 이런 시를 지어 주었다.

높디높은 벼랑에서 늦가을 서리와 눈을 겪은 가지라네 가져와 그대에게 주노니 오래도록 이 마음 변치 말게나


소학과 근사록의 수난 — 나식과 부친

기묘년에 선비들이 화를 당한 뒤로는 집집마다 《소학》과 《근사록》을 입에 담기를 꺼렸고 자제들에게 배우지 못하게 금하였다.

나의 선친께서는 젊었을 때 나식(장음)에게 배우셨다. 한번은 외가에 갔다가 낡은 함 속에서 좀먹고 다 떨어진 《소학》 네 권을 보았다. 펴서 읽어 보고는 학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그중 첫째 권을 소매 속에 넣고 나식에게 가서 보여 드리니, 나식이 깜짝 놀라며 "네가 어디서 이런 귀신 붙은 물건을 얻었느냐?" 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사화로 죽은 옛 어진 이들의 불운을 슬퍼하였다. 선친이 이 책을 배우기를 청하니 나식이 크게 칭찬하며 《소학》과 《근사록》을 가르쳐 주었으나, 이 일을 남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


나식의 인품

나식은 타고난 재주가 총명하고 큰 절개가 있었다. 그의 문장은 매우 고상하고 옛 풍취가 있었으며, 과거에 응시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두 아우 나숙과 나익을 가르쳐 모두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최수성(원정)은 뜻이 높아 남을 좀처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나식을 보고는 감동하여 이렇게 칭찬하였다. "압록강 동쪽에는 나생 한 사람뿐이다."


부친과 이여 교리

나의 선친은 젊었을 때 교리 이여에게서 《주역》을 배우셨다. 이여는 진천 사람으로 그의 형 이치와 함께 성리학에 밝았다. 이여는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오랫동안 곁에서 모시며 아침저녁으로 경계하고 강독하여 도움을 준 것이 매우 많았다.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인종이 친히 제문을 지어 궁의 신하를 보내 조문하였다.

이치도 높은 벼슬에는 이르지 못하고 박사로 세상을 떠났는데, 진천의 선비들이 두 형제를 위하여 서원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선친이 살아 계실 때는 매번 주선하여 제사가 끊이지 않도록 하셨다. 지금까지도 이 고장 선비들이 잇달아 과거에 급제하고 고을 풍속도 좋은 것은 모두 이여의 가르침 덕분이다.


조광조 이후의 성리학 — 김안국의 역할

조광조가 화를 당한 뒤로는 이치와 성품의 근본을 탐구하는 성리학에 대해 감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김안국(모재)만은 여주에 은거하며 선비를 만날 때마다 성현의 일을 인용하여 논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언적(회재)은 영남에서 여주를 오가며 반드시 그에게 질문하고 논쟁하였으며, 이황(퇴계)도 단양군수로 부임하는 길에 그의 집에 들렀을 때 비로소 성리학의 근원을 들었다. 김안국은 이처럼 두 분에게도 길을 열어 준 공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있다. 나의 선친은 젊어서부터 김안국에게 배웠으므로 이 일을 두루 알고 계셨다. 대체로 김안국은 평소 문장가로만 칭송받았고 성품도 위세를 부리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그저 문인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김안국의 사람됨

김안국은 성품이 경박하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사람을 사랑하였다. 처음에 김안로와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김안로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때마다 나무랐다. 김안로도 그의 솔직함을 알았으므로 화내지 않았다.

김안로가 정권을 잡자 김안국 형제를 가장 먼저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김안로가 이불을 가지고 그의 집에 가서 잤는데, 김안국이 베개를 맞대고 누워 자면서 경계하는 말을 너무도 간절하게 하니, 옆에 누워 있던 김정국(사재)이 그의 발을 밟으며 그만 말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안국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너도 안 자고 있었느냐. 내 다리에 기대지 말라" 하니, 김정국은 뜨끔하여 다시는 말리지 못하였다.

훗날 김안로가 권좌에서 물러나 죽임을 당했을 때, 김안국이 김정국에게 말했다. "안로가 간사하다는 것을 누군들 모르겠는가마는, 우리 형제가 이미 그와 깊이 사귀었으니 이제 와서 그의 단점을 말하지는 말자." 그러고는 매번 김안로의 가족들에게 음식을 보내 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김안국과 성세창의 호당 일화

김안국이 우의정 성세창과 함께 독서당에서 휴가를 받아 글을 읽을 때, 둘이 함께 숙직을 하게 되었다. 성세창은 본래 집이 넉넉하였으므로 이부자리를 모두 비단으로 만들어 매우 화려했고, 김안국은 본래 가난한 데다 성품도 사치를 좋아하지 않아 베 이불에 나무 베개를 베고 자니 가난한 선비처럼 쓸쓸하였다. 성세창은 몹시 부끄러워 밤새 잠을 설치고는, 날이 밝자 집으로 돌아가 부인에게 말했다. "국경(김안국의 자)이 차라리 내 사치를 비웃어 주기라도 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러고는 서둘러 검소한 것으로 바꾸게 한 뒤에야 한 방에서 함께 잤다고 한다.


서경덕과 부친의 일화

나의 선친은 서경덕(화담) 선생에게서 가장 오래 배우셨다. 한번은 7월에 선생의 집을 찾아갔더니, 화담 별장으로 떠난 지 이미 엿새가 되었다고 하므로 곧바로 그곳으로 갔는데, 가을 장마로 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날이 저물어서야 여울물이 조금 줄어 겨우 건너서 화담에 이르니, 선생은 거문고를 타며 큰 소리로 시를 읊조리고 계셨다.

선친이 저녁밥을 짓겠다고 청하니 선생이 말했다. "나도 아직 먹지 않았으니 내 몫까지 함께 지어라." 하인이 부엌에 들어가 보니 이끼가 솥 안에 가득 끼어 있었다. 선친이 이상히 여겨 까닭을 묻자 선생이 말했다. "물이 막혀 엿새 동안 집사람이 오지 못했으니 내가 오랫동안 밥을 짓지 못했다. 그러니 분명 솥에 이끼가 끼었을 것이다." 그 얼굴을 살펴보니 조금도 굶주린 기색이 없었다. 이는 옛날 증자가 이레를 굶고서도 신을 끌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마치 악기가 울리는 듯했다는 이야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유담년과 황형 — 삼포왜란 방어사

경오년(1510년) 삼포에서 왜적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담년이 병조판서로 있었다. 중종 임금이 여러 대신들을 불러 왜적을 정벌할 일을 의논하려 할 때, 삼정승이 먼저 유담년에게 물었다. "방어사로 삼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 유담년이 즉시 대답했다. "한쪽 길은 제가 가서 막겠고, 다른 한쪽 길은 따로 막을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삼정승이 누구냐고 묻자 유담년이 말했다. "말씀드리면 반드시 다투어 헐뜯을 것이니, 임금께 직접 아뢰겠습니다."

임금을 뵙는 자리에서 과연 임금이 "누구를 장수로 삼을 만한가?" 하고 물으니, 유담년이 대답했다. "왼쪽 길은 제가 맡겠습니다만, 오른쪽 길에 쓸 만한 사람이 있기는 해도 사람들이 반드시 안 된다고 할 것이니, 전하께서 뭇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등용해 주신다면 제가 응당 천거하겠지만, 그렇지 않으시다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임금이 뭇사람의 의견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허락하니, 유담년이 그제야 말했다. "전에 승지를 지낸 황형이 바로 그 적임자입니다."

그러자 주위에서 과연 반대하였다. "그 사람은 예전에 자기 장인을 매질하여 버림을 받은 사람이니 다시 등용해서는 안 됩니다." 유담년이 말했다. "지금은 설령 옛사람 효기나 미생처럼 훌륭한 행실을 지닌 자라도 전쟁의 승패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니 등용할 수 없습니다. 설령 황형에게 그런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 상황이 매우 급하니 다른 것을 따질 때가 아닌 데다가, 사실 그는 그런 나쁜 짓을 한 일이 없습니다. 사소한 흠 하나를 이유로 나라를 지킬 만한 인재를 버리는 것은 예로부터 옳지 않게 여겨졌습니다." 성희안(창산)도 유담년의 의견에 힘써 찬동하였으므로, 마침내 황형과 유담년이 각각 좌방어사와 우방어사로 임명되어 출정해 왜적을 무찔렀다. 결국 나라가 이 일로 무사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유담년의 공이었다.

(용어) 효기는 은나라 고종의 태자로,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계모의 참소로 쫓겨나 죽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미생은 춘추 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여인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물이 불어나는 다리 밑에서 끝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죽었다는 이야기로 전해진다.


황형과 강화 연미정의 소나무

황형(장무공)의 밭과 집은 강화 연미정에 있었다. 그가 일찍이 소나무 수천 그루를 심으니 사람들이 "공은 이미 늙었는데 소나무를 이렇게 많이 심어서 무엇하시렵니까?" 하고 물었다. 황형이 답했다. "훗날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그 뒤 임진년(1592년)에 창의사 김천일과 전라병사 최원이 강화도에 들어와 지키면서 배와 진영의 목책, 방패, 각종 기계를 만들 때 모두 이 소나무를 가져다 썼다. 이때 쓰고 남은 것은 정유년(1597년)에 명나라 경리 양호가 임금을 모시고 강화도로 가려 할 때, 관아에서 베어다가 임시 행궁을 짓고 성책을 세우는 데 썼다. 이때 와서야 사람들은 황형이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음을 알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김인후의 인품

김인후(하서)는 인품이 매우 높고 학문과 문장이 모두 뛰어나 스스로 터득한 바가 있었으나,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인종은 세자로 있을 때부터 그를 인재로 여겼으므로 왕위에 오르자 맨 먼저 불러들였는데, 그가 서울에 도착하자 인종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고향에서는 그의 덕에 감화되어 선량해진 사람이 매우 많았다.

양응정(송천)은 기개가 높기로 당대에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김인후를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눌려 그의 말을 공손히 받들 뿐 감히 한마디도 못 하였다. 김인후 앞에서 물러나와서는 반드시 여러 날 동안 감탄하며 말하였다. "후지(김인후의 자)는 지금 세상의 안자(공자의 제자 안회)로다."


송순의 기지 — 서소문과 남대문, 그리고 향안

이조참판 송순(삼재)은 재직할 때 찬성 허자와 뜻을 합쳐 어진 이들을 천거하다가 권세 있는 신하의 미움을 받아 지방으로 오 년이나 유배되었다. 이후로는 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였다.

송순에게는 가깝게 지내는 서얼 숙부가 있었는데, 그가 매번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지방 출신으로 재상이 된 사람 가운데, 나는 서소문으로 떠나는 사람은 보았어도 남대문으로 떠나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이는 대개 서울에 와서 벼슬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서울을 떠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송순은 이 말을 늘 듣기 싫어하였다.

그 뒤 송순이 개성유수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 숙부가 강가에 나와 그를 전송하였다. 송순이 술잔을 잡고 말했다. "저는 이제 남대문으로 나왔습니다."

요즘 지방에는 향안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친가와 외가 양쪽 모두 사대부 집안 출신인 사람만을 가려 이름을 올린다. 외가나 아내의 집안이 다른 고을 출신이거나 이름난 가문이 아니면, 아무리 높은 벼슬을 지냈어도 여기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 그래서 여기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홍문록이나 이조의 천거 명단에 오르는 것보다도 어렵다고들 한다.

송순은 담양 사람이었다. 외가가 남원에서 왔고 뚜렷하게 이름난 벼슬을 한 이가 없었으므로, 그 역시 향안에 오를 수 없었다. 송순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 휴가를 얻어 성묘를 갔다가 고을 사람들이 모두 향청에 모여 있다는 말을 들었다. 즉시 음식을 성대하게 장만하여 수십 명의 짐꾼을 시켜 향청으로 보내고, 먼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시켜 향청의 어른들에게 이렇게 전하게 하였다. "대사헌께서 큰 잔치 음식을 보내어 마을의 원로와 학자들을 대접하고자 하시니, 이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향청의 어른들이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곧 음식을 차려 대접받는데, 한 노인이 "주인을 불러 우리와 함께 자리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니 모두 그러자고 하였다. 사람을 보내 청하였으나 사양하며 오지 않다가, 거듭 청한 뒤에야 왔다. 와서 좌우를 둘러보다가, 일찍이 훈도를 지낸 늙은 선비 가운데 자신과 나이는 같으나 생일이 앞선 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얼른 그 다음 자리로 가서 앉았다. 술이 거나해지자 향청의 어른들이 말했다. "대사헌이 이미 이 모임에 참석하였으니 향안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는 곧 향안을 가져다 그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송순의 재빠르고 총명함이 이와 같았다.


김인후와 유희춘

김인후(하서)가 급제하기 전, 성균관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전염병에 걸려 위독하니 사람들이 감히 그를 돌보지 못하였다. 유희춘(미암)이 당시 성균관의 관원으로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아깝게 여겨 자기 집으로 옮겨 밤낮으로 돌보아 끝내 다시 일어나게 하였고, 김인후는 이를 늘 감사하게 여겼다. 훗날 유희춘이 종성으로 유배되었을 때,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매우 어리석었다. 김인후가 그를 사위로 맞으려 하니 집안사람들이 모두 반대하였으나 듣지 않고 끝내 혼인을 이루었으니, 사람들은 김인후와 유희춘 두 사람을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유희춘의 내력과 학문

유희춘(미암)은 최부(금남)의 외손자이다. 최부는 성종과 연산군 때에 큰 명망이 있었고 문장에도 매우 능하였는데, 무오년(1498년)의 사화 때 죽임을 당하였다.

유희춘은 형 유성춘과 더불어 당대에 명망이 높았다. 유성춘은 벼슬이 헌납에 이르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유희춘은 정언으로 있을 때 을사년(1545년)의 변고를 만나 처음에는 제주로 유배되었으나, 고향과 가깝다 하여 다시 종성으로 옮겨졌다. 총명함이 남달라 읽은 책이라면 외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유배지에 있을 때 《속몽구》 네 권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모두 그가 암송하고 있던 것을 바탕으로 지은 것이다.

선조 임금 때 발탁되어 경연에 들어갔는데, 임금에게 도움을 준 공이 매우 많았다. 임금이 장차 그를 중히 쓰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임금이 몹시 슬퍼하며 그를 찬성에 추증하고 그 아들을 등용하였다.


유희춘의 학문과 성품

나의 두 형은 젊은 시절 유희춘에게서 배웠다. 그는 학문이 매우 정밀하고 행실이 지극히 독실하였으며, 배우는 사람을 대할 때마다 반드시 진실하고 밝은 학문을 자세히 가르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품이 매우 세상 물정에 어두워 집안일을 다스릴 줄 몰랐고, 옷과 버선이 때 묻고 해어져도 부인이 새것으로 바꿔 주지 않으면 스스로 갖춰 입을 줄을 몰랐다. 거처하는 방은 책을 펴 놓은 책상 외에는 먼지와 때가 끼어 더러워도 쓸고 닦지 않았다. 남을 만나 세상일을 이야기할 때는 전혀 아는 것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이야기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고 앎을 지극히 하는 공부,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이르면 뛰어난 견해와 해박한 지식이 다른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어 세밀히 분석하니 통쾌하고 명백하여, 듣는 사람이 정신을 쏟느라 피곤한 줄도 몰랐다.

대체로 이러하였으므로 경연에서 하는 말이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배운 바를 실천하게 함으로써 임금의 덕을 도왔던 것이다. 선조 초년의 정사 가운데 맑고 밝다고 일컬을 만한 것은 모두 유희춘이 잘 이끈 힘이었다고 한다.


유희춘의 회고 — 백인걸, 송인수와 세 차비

유희춘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젊어서 남평현감으로 있을 때 좌참찬 백인걸은 무장현감이었다. 마침 참판 송인수가 관찰사로 부임하니 세 사람이 서로 뜻이 맞아 매우 즐겁게 지냈다.

송인수는 부안의 기생을 사랑하였는데, 정을 통하지는 않고 다만 마음으로 아껴 수레에 태워 데리고 다니게 하였다. 늘 편지를 보내 무장현감과 남평현감을 불렀고, 놀러 다닐 때마다 늘 함께 다니니, 고을 사람들이 이 세 사람을 "세 차비"라 불렀다고 한다.

송인수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여량역에서 그를 전별하는데 두 사람과 그 기생이 따라왔다. 송인수가 기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이 사람의 뛰어난 지혜를 아껴 일 년 동안이나 자리를 같이하면서도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은 것은, 내가 그것 때문에 몸을 상할까 염려해서였네." 그러자 기생이 즉시 앞산에 있는 여러 무덤을 가리키며 말했다. "과연 그러하십니다. 저기 보이는 저 많은 무덤들이 모두 저의 낭군이었습니다." 이는 그를 원망하며 한 말이었으므로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크게 웃었다. 그 기생은 훗날에도 늘 송인수의 일을 떠올리며 감탄하고 눈물까지 흘리곤 하였다.


권벽의 침묵

권벽(습재)은 나의 선친과 가장 가깝게 지낸 벗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안명세, 윤결과 함께 공부하였는데 서로 뜻이 맞아 매우 즐겁게 지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거리낌 없이 말하다가 화를 입어 죽은 뒤로, 권벽은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집에서도 남과 담소를 나누지 않았고 하루 종일 책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최렴과 최락 형제는 이웃에 사는 젊은이들로서 권벽에게 배운 지 거의 일 년이 되도록 그들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고, 그들이 진사시에 합격한 뒤에야 비로소 이름을 알 정도였다. 이 때문에 별로 높은 벼슬은 하지 못하였으나 일흔넷까지 살았다.

내가 어릴 때 권벽이 나의 선친을 뵈러 온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주인이 묻는 말에나 대답할 뿐,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그가 자신의 뜻을 철저히 지킨 것이 이와 같았다.

(용어) 안명세는 사관으로 있으면서 을사사화의 진상을 사초에 그대로 적어 넣었다가 이 일이 새어 나가 사형을 당한 인물이다. 윤결은 벗의 자리에서 안명세의 죽음이 억울하다고 말했다가 이를 고발당해 죽임을 당하였다.


윤결의 옥사와 부친의 위기

윤결(자는 장원)의 옥사에서, 그의 진술 가운데 나의 선친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선친은 당시 병조의 낭관으로 관청에서 숙직하고 계셨다. 죄를 다스리는 관리가 선친을 문초하기를 청하자, 대사간으로 자리에 있던 진복창이 일어나 엎드리며 아뢰었다. "허모(허균의 아버지 허엽)는 경솔한 사람이 아니니 그럴 리가 없음을 제가 보증합니다. 지금 그를 잡아다 문초한다면 일이 더욱 커질까 염려되니 문제 삼지 마소서." 이렇게 두세 번이나 강경하게 주장하니, 문정왕후도 옳게 여겨 문초하지 않았다.

선친께서는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정원에 들어가니 승지들이 모두 축하하였으나, 그래도 영문을 모르다가 물러나 병조로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다. 승지들이 감탄하며 말했다. "화를 겨우 면했는데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으니 참으로 강직한 사람이다." 선친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까닭 없이 받는 칭찬이다"라고 하셨다.

진복창은 나의 선친과 평소 전혀 가깝게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는데도 선뜻 나서서 구해 주었으니, 이 또한 운명이라 할 만하다. 이런 일이 있었기에 나의 두 형은 진복창의 아들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후하게 대하곤 하였다.


임억령의 절개

임억령(석천)은 기개가 뛰어나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뒤로도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아 여러 차례 이름난 청요직(학식과 인망을 갖춘 사람만 맡을 수 있다고 여겨지던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지방 벼슬에 나가 있을 때가 많았다.

그의 아우 임백령이 을사년(1545년)의 공신에 들면서 그 권세가 한 시대를 뒤흔들게 되자, 당시 승지로 있던 임억령은 서둘러 벼슬을 버리고 서울을 떠났다. 임백령이 굳이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한강을 건너면서 이런 시를 지어 주었다.

"잘 있거라, 한강물아 고요히 흐르며 물결을 일으키지 마라"

그 뒤로 다시는 서울에 오지 않으니, 선비들의 여론이 그를 옳게 여겼다.

임백령이 죽은 뒤 만년에야 서울에 왔고, 스스로 청하여 강원도관찰사로 나가서는 바다와 산을 두루 구경하며 많은 글을 지었으므로 지금까지도 그곳 산수를 빛내고 있다. 그의 정치와 교화도 맑고 평온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기대승과 호남 인재의 성쇠

기대승(고봉)은 호남 선비들 가운데 걸출한 인물이었다. 학문이 높고 깊어 이황(문순공)이 매우 칭찬하였다.

선조 임금의 신임을 받았으나 제대로 쓰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죽은 뒤로는 호남 사람으로 조정에 등용된 이가 한 명도 없었다. 기대승이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호남 선비들의 기풍이 점차 해이해지고 있으니, 수십 년이 지나면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도 많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와서 보니 그 말이 과연 맞아떨어졌다. 그는 아마도 그 조짐을 미리 내다보았던 것 같다.

중종 임금 시절에는 호남 출신의 뛰어난 인재가 매우 많았다. 박상(눌재) 형제, 사인 최산두, 유희춘(미암) 형제, 교리 양팽손, 제학 나세찬, 목사 임형수, 김인후(하서), 임억령(석천), 송순(삼재), 찬성 오겸 같은 이들이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졌다.

그 뒤로도 박순(사암), 이항(일재), 양응정(송천), 기대승(고봉), 고경명(제봉) 같은 이들이 학문이나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재능과 행실로 당대에 이름을 떨치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도 점점 줄어드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나는 여러 해 동안 호남을 오가며 그곳의 풍습을 살펴보았는데, 대체로 후학을 이끌어 줄 큰 스승이 없는 데다, 사람들의 성품 또한 대체로 경박하고 자만하여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한다. 게다가 먹고사는 형편이 넉넉한 까닭에 모두들 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릴 뿐 앞일을 도모하는 사람이 없다. 이 세 가지가 학문을 게을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으니, 탄식할 일이다.


대신과 부모 — 성희안과 홍섬

나라를 세운 이래로 대신 가운데 부모가 살아 계신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성희안(창산)의 경우는 모친이 살아 계셨으나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그 밖에는 기억할 만한 예가 아득하여 떠오르지 않는다. 선조 초년에 영의정 홍섬이 모친상을 당하자, 임금이 명하여 대신이 상을 당했을 때 상을 돌보고 부의를 보내는 예를 조사하게 하였으나 전례를 찾을 수 없어, 다만 관에서 대신의 예에 준하여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부의하게 하였다. 그 후 노수신(소재) 정승이 상을 당했을 때도 이 예를 따랐다.


이덕형의 이른 출세

지금의 영의정 이덕형(한음)은 서른여덟 살에 정승이 되었으니, 이는 나라를 세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의 부친도 아직 건강하게 살아 계셨다. 이덕형이 정승으로 있을 때 그의 부친은 수안군수로 있었는데, 번거로운 일들을 잘 다스리며 게으르지 않았다.

이덕형이 지금 임금 초년에 임금의 세자 책봉을 명나라에 주청하는 일로 명나라에 다녀와 윤허를 받아 오자, 임금이 그의 부친을 특별히 당상관 품계로 올려 판결사(장례원의 우두머리 벼슬)에 제수하니, 당시 사람들이 아름다운 일이라 하였다.


홍섬의 삼종 정승과 궤장

홍섬(인재)의 모친은 정승 송질의 딸이자 영의정 김언필의 아내였다. 이처럼 친정아버지, 남편, 아들이 모두 정승인 경우는 예전에 없던 일인 데다 나이도 아흔이었다. 그 부인이 노년을 보내던 무렵 홍섬은 일흔 살로 궤장을 하사받았으니, 이는 더욱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그리하여 노수신(소재)이 그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이런 시를 지었다.

"친정아버지와 남편과 아들, 셋 모두 정승 집안 문을 벗어나지 않은 것을 지금에야 처음으로 보게 되었네 관아에서 다시 지팡이를 짚으시고 집안에서는 다시 색동옷을 입으시네"

이는 사실을 잘 담아낸 시였다.

근래에 한집안에서 정승이 나온 경우로는, 이산해(아계)와 그의 매부인 좌의정 김응남, 그리고 사위인 이덕형(한음)뿐이다.

(용어) 마지막 시구의 "색동옷"은 춘추 시대 초나라의 효자 노래자가 일흔 살에도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부려 늙은 부모를 즐겁게 해 드렸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나이 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 집안의 정승들

정광필(문익공) 집안에서 세 정승이 나온 것도 세상에 드문 일이다. 이행(문정공)과 그의 형 이기, 심연원(충혜공)과 그의 아우 심통원도 한집안 형제가 정승이 된 경우다. 심수경(청천)과 그의 조부 심정은 할아버지와 손자가 정승이 된 경우다. 그러나 앞서 든 이행 이하의 경우는 모두 그 이름과 행적에 좋고 나쁨의 구분이 뚜렷하니 이상한 일이다. 무과와 정승 집안에 있었던 훌륭한 일 가운데 이미 성현의 《용재총화》에 실린 것은 다시 싣지 않는다.


부자·형제 정승의 여러 경우

한집안에서 부자와 형제가 정승이 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중에서도 허종·허침 형제만은 흠잡을 데가 없다. 정창손과 그의 아들 정괄은 그리 내세울 만한 것이 없고, 그의 사위 김질도 정승이었으나 이는 성삼문의 거사를 고발한 공으로 발탁된 것이다.

심온과 그의 아들 심회, 윤사흔·윤사분 형제와 그들의 매부 성봉조, 신승선과 그의 아들 신수근 등은 모두 왕실과 혼인한 덕으로 정승이 된 것이니 특별히 칠 것이 못 된다. 부자가 이어서 대제학을 지낸 것은 오직 성현(문대공)과 그의 아들 성세창뿐이다.


유성룡과 유영경

유성룡(서애)과 유영경은 첩의 동서 간으로서 모두 영의정이 되었다. 유성룡은 배척받아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가 세상을 떠났고, 유영경은 죄를 지어 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도 같은 유씨이고 벼슬도 같은 영의정이었지만, 그 이름과 행적에는 이토록 좋고 나쁨의 구분이 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채수 집안의 장원들

채수(인천군)는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그의 사위인 김안로(이숙)와 이자(차야)도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하루는 장원 급제자들만의 모임인 용두회를 여는데, 채수의 또 다른 사위인 김감(연창부원군)이 여기에 참여하려 하자 장원 급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김감이 부인을 보내 이렇게 청하였다. "제 사위는 서른다섯 살에 대제학이 되었으니, 이 사실로 모임에 참석시켜 주시기를 청합니다." 채수가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은 반드시 참석시켜야겠구나." 그러고는 곧 불러서 함께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문형을 지낸 나이와 가문

이덕형(한음)은 서른한 살에 대제학의 소임(문형)을 맡았으니 가장 젊은 나이에 문형을 지낸 경우이고, 김감(연창)은 서른다섯 살이었으니 그다음이다. 이 밖에는 이행(용재)이 마흔 살에 문형을 맡았다.

가장 많은 문형을 배출한 집안으로는 권근(길창)의 집안이 으뜸이다. 나라를 세운 초기에 권근도 문형의 일을 맡았으며, 그의 아들 권제(지재)는 대제학이 되었고, 외손 서거정과 손자사위 최항도 나란히 오랫동안 문형을 맡았다. 그 밖에 신숙주(문충공)와 그의 손자 신용개, 신광한이 모두 문형을 맡았으니, 이 역시 세상에 특히 드문 일이다.


여러 번 장원한 사람들

한 집안에서 정승이 나온 것과 과거에 여러 번 장원한 것에 대해서는 성현(용재)이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근래에 여러 차례 장원 급제한 사람으로는, 대사헌 권홍이 문과와 중시에서 장원하였고, 양응정(송천)은 생원시와 중시에서 장원하였으며, 진사시와 문과에서 연달아 장원한 사람으로는 김홍도와 강신이 있다.

율곡 선생은 한 해에 생원시와 문과에서 잇달아 장원하였다. 초시에서는 세 번의 시험을 내리 장원하였고, 회시에서도 장원하여 한 해에 여섯 번이나 장원하였으니 예전에 없던 일이다.

문형을 맡은 사람 가운데는 과거에 장원한 이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정인지(하동부원군)가 초시의 세 시험 모두에서 장원한 것이 가장 특별하고, 그다음이 율곡의 두 차례 장원이다.

변계량(춘정), 정사룡(호음)은 중시에서 장원하였고, 최영성, 김안로(이숙), 정유길(임당), 박순(사암), 노수신(소재), 유근(서경)은 문과에서 장원하였다. 판서 박충구, 홍성민(익성군), 이호민(연릉부원군)은 생원시에서 장원한 반면, 홍섬(인재)은 생원시에서 꼴찌를 하였으니 이 또한 전에 없던 일이다.

(용어) 조선의 과거 시험은 크게 지방에서 치르는 "초시", 서울에서 다시 치르는 "회시(복시)", 임금 앞에서 순위를 정하는 "전시"의 단계를 거쳤다. "중시"는 이미 벼슬하고 있는 문신들을 대상으로 다시 치르던 시험이다.


선조 말년의 정승과 대제학

선조 임금 말년까지 대광보국숭록대부의 품계로 살아 있던 사람은 이산해, 유성룡, 심수경, 최흥원, 윤두수, 김응남, 정탁,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이렇게 모두 열 사람이었다. 정탁과 심수경(청천)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이헌국과 김명원이 정승이 되었고, 최흥원이 세상을 떠나자 윤승훈이 정승이 되었다.

그 뒤 윤두수가 세상을 떠나자 유영경이 그 자리를 채웠고, 정탁이 세상을 떠나자 허욱이 있었으며, 유성룡이 세상을 떠나자 한응인, 기자헌, 심희수가 차례로 정승이 되어 그때마다 열 명의 수를 채웠으니, 이 역시 근래에 없던 일이다.

선조 말년에 대제학도 열 사람이었으니, 곧 이산해, 유성룡, 황정욱, 이덕형, 윤근수, 이항복, 심희수, 이정귀, 이호민, 유근이다. 이 가운데 다섯 명이 정승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하고도 대단한 일이었으며, 일곱 사람이 부원군에 봉해진 것도 기이한 일이다.


선조 말년의 지제교와 홍문록

선조 말년에는 지제교가 일흔두 명, 홍문록에 오른 사람이 여든네 명이나 되었으니, 나라를 세운 이래 없던 일이다. 그런데도 나라의 중요한 글을 지어야 할 때면 언제나 인재가 없다고 걱정하였다. 그래서 이조에서 홍문관 관원을 추천할 때도 매번 적격자가 없다고 하여, 지방관으로 나가 있는 사람이나 친인척 관계로 피해야 할 사람, 심지어 조사를 받던 사람까지 후보로 올려 임금께 아뢰곤 하였으니,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이헌국의 안목과 사양

이헌국(완성)은 성품이 충직하여 임금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피하거나 숨기지 않았으나, 선조 임금은 늘 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임진왜란 때 임금이 개성에 이르러 두 정승을 해임하였는데, 이헌국은 당시 대사간으로서 그 자리에 있었다. 임금이 막 새 정승을 뽑으려고 몸소 재상들의 명단을 펼쳐 놓고 이름을 짚어 가며 이헌국에게 물었다. "정탁은 어떠한가?" 이헌국이 답했다. "정탁은 비록 청렴하고 신중하나 세상을 구제할 만한 재주는 없습니다. 그는 옛사람이 말한 대로 '높은 다락에 묶어 놓고 태평한 시절을 기다리게 할' 사람입니다." 다시 물었다. "최황은 어떠한가?" 이헌국이 답했다. "강직한 면은 있지만 성품이 편협하니 큰일을 맡길 수 없습니다." 이어 유홍과 황정욱을 물었으나 모두 적당하지 않다고 답하다가, 임금이 최흥원과 윤두수 두 사람의 이름을 대니 이헌국이 합당하다고 하여 마침내 두 사람이 등용되었다. 사람들은 이 일을 듣고 모두 하기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하였다.

이헌국은 무술년과 기해년 사이에 잇달아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그 뒤 정승을 임명할 때 특별히 그를 발탁하며 임금이 말했다. "나는 이조판서를 사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이 사람은 두 번이나 물러났으니 정승으로 삼을 만하다." 이 말은 내시 이봉정이 직접 임금의 말을 듣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전한 것이라고 한다.

(용어) "높은 다락에 묶어 놓고 태평한 시절을 기다리게 한다"는 말은 전혀 쓸모가 없는 사람을 비유하는 옛말로, 중국 진나라 때 유익이라는 사람이 이름만 높고 실속 없는 이들을 두고 "천하가 태평해진 다음에야 이런 무리에게 일을 맡길지 의논할 수 있다"고 말한 데서 나왔다.


윤두수의 결단 — 의주행

평양에서 한창 왜적과 싸우고 있을 때, 임금이 윤두수(오음)에게 성을 지킬 것인지 버리고 떠날 것인지를 물었다. 윤두수는 그때마다 떠나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였는데, 수십 번을 물어도 대답은 늘 같았다. 그 뒤 영변에 이르자 조정의 의논이 갈라져 한쪽은 북쪽으로 가자 하고 한쪽은 강계로 가자고 하였으나, 윤두수 홀로 의주로 가자는 계책을 고집하였다. 끝내 이 결정으로 나라의 운명을 되돌릴 수 있었으니, 이는 모두 그의 힘이었다.

영변에 있을 때 우의정 유홍이 임금을 뵙는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종묘와 사직이 여기 있는데, 전하께서 떠나신다면 대체 어디로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면서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이 잘못임을 힘써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유홍은 곧바로 하직하고 세자가 있는 곳으로 가 버렸다.


신잡의 헛소동

정유년(1597년) 봄 왜적이 다시 국경을 침범하자, 임금이 대신들과 의논하며 물었다. "적이 만일 계속 밀고 들어온다면 어가는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한쪽에서 말했다. "영변은 지세가 매우 튼튼하고 명나라와도 가까우니 가서 지킬 만합니다."

신잡(평천)이 예전에 그곳의 절도사를 지냈던 터라 그곳으로 가는 것의 편리한 점과 불편한 점을 모두 아뢰고 군량 저축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끝으로 백관의 수가 많으니 미리 장을 담가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

한준겸(유천)과 남이공(자안)이 홍문관에 숙직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남이공이 말했다. "신공을 '장 담그는 일을 맡은 관리'로 삼아 먼저 영변으로 보내 준비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한준겸이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공만은 결코 보낼 수 없네." 남이공이 까닭을 묻자 한준겸이 답했다. "책력에 신일에는 장을 담그면 안 좋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말에 듣는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날짜를 가리키는 "신일"의 "신"과 신잡의 성씨인 "신"이 소리가 같은 것을 두고 놀린 말이었다.


사관 시절의 회고 — 동정록

정유년에 내가 외람되이 사관을 맡아,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들을 모두 조사해 보니, 명나라 장수들이 군사를 부린 일이나 우리나라 장수와 병사들이 세운 공, 그리고 왜적이 침입해 온 일들이 어느 하나도 제대로 밝혀져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기록만 보면 마치 태평하여 전쟁이 없었던 나라처럼 보이니, 이것이 어찌 사관이 제대로 기록한 것이라 하겠는가.

그 뒤 임금이 명하여 명나라가 군사를 보내 우리를 도운 사정을 모아 《동정록》을 편찬해 올리게 하였다. 이에 윤근수(월정)와 신흠(현옹)이 이 일을 총괄하는 당상관을 맡고, 나는 실무를 맡아 책을 엮어 올렸다. 지금 실록청에서도 이 《동정록》을 가져다 실록에 싣고 있으나, 정작 우리나라 자체의 사적에 대해서는 아득하여 한 가지도 기록에 남은 것이 없으니 탄식할 일이다.


선조의 검소함

선조 임금의 검소한 덕은 여러 임금 가운데서도 뛰어났다. 말년에 병이 들어 궁중 의원이 진찰하러 들어갔는데, 임금은 푸른 베로 만든 요를 깔고 자줏빛 명주 이불을 덮고 계셨으며, 입고 있는 옷도 푸른 명주로 지은 것인데 올이 매우 거칠었다. 약을 올릴 때 쓰는 그릇도 무늬 없는 흰 자기였고, 검소한 안석과 글씨를 쓴 병풍만 있을 뿐 화려한 휘장도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최천건(분음)이 직접 보고 나에게 들려준 것이다.


지제교 시절의 급박했던 일들

나는 오랫동안 지제교를 맡았는데, 그동안 가장 다급했던 일이 두 번 있었다.

경자년(1600년) 의인왕후의 장례 때, 나는 장생전의 낭관으로서 관을 모시고 능에 가 있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혼령을 모신 장막에 불이 나서, 겨우 관만을 불길에서 구해 내었다. 이 일로 아침 제사 때 위안제를 지내야 했는데, 세자궁에서 나에게 제문을 지어 오라는 명이 내렸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승정원에서 나를 불러 당장 지어 바치라 하였다. 다급하고 당황하여 글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급하게 지은 것이라고 하여 사람들이 오히려 칭찬을 많이 하였으나 나로서는 매우 부끄러웠다.

계묘년(1603년) 봄에는 이덕형(한음)이 묘를 옮기는 일로 사직을 청하였는데, 이준(숙평)이 임금이 이를 처음으로 물리치는 비답을 지었다. 그런데 임금이 이를 마땅치 않게 여겨, 특별히 나를 불러 대궐로 오게 하고는 급히 다시 지어 바치라 하였다. 이준이 이미 매우 잘 지어 놓은 글이 있었는데도 이를 버려두고 따로 지으라는 것인 데다, 묘를 옮기는 일에는 여러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말을 만들어 내기가 몹시 어려웠다. 땀이 흘러 붓을 제대로 댈 수 없을 정도였는데, 겨우 격식을 갖추어 직접 써서 바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임금의 말이란 마땅히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서투른 글로 임금의 칭찬까지 받은 것은 나로서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유영경을 둘러싼 갈등

유영경(전양)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가 어떤 사건으로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리자, 내가 이를 물리치는 비답을 짓게 되었다. 그 비답에서 그의 인품을 칭찬하며 "재주는 온갖 일에 능통하고 기개는 공경들을 압도한다"고 썼더니, 유영경이 이를 보고 나를 미워하였다. 그 뒤로는 사관들과 짜고서 다른 지제교에게 맡겨 글을 짓게 하였는데, 지나치게 칭찬하는 말이 많았다.

훗날 유영경이 몰락하자, 신요와 민경기는 그에게 아첨한 일로 지제교의 벼슬을 박탈당하고 죄를 받아 파직되었다고 한다.


이항복과의 약속 — 공신 녹권

이항복(오성상공)은 나의 글을 좋아하였다. 공신 명부에 이름을 올리기 전에 그가 이렇게 다짐하였다. "내 공신 녹권은 반드시 자네의 글로 받고 싶네." 나도 그러겠다고 승낙하였다. 그 뒤 공신들이 회맹하는 자리가 열렸을 때 나는 마침 지방에 나가 있었으므로, 이미 홍경신(녹문)에게 대신 짓도록 부탁해 놓은 뒤였다. 내가 서울에 도착하자 이항복이 자신의 장인인 도원수 권율의 녹권을 지어 달라 부탁하면서, 예전의 약속을 이것으로 대신 갚으라고 하였다. 내가 지어 보낸 초고의 끝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어 선친이 지내신 정승 자리를 이었고, 길창군에 봉해져 문충공 권근의 복된 터전을 이어받았네." 이항복이 이를 보고 매우 칭찬하였다. 이는 권율이 영의정으로 추증되어 그의 선친 권철과 벼슬이 같아졌고, 권근(양촌)의 후손으로서 봉해진 고을 이름도 서로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이었다.


정원군 녹권의 오류

무릇 공신 녹권 안에는 "부모도 함께 벼슬을 추증받았다"는 등의 말을 으레 형식적으로 적어 넣는다. 승지 조정지가 정원군의 녹권을 지으면서 무심코 이 구절을 그대로 써넣어 "부모도 아울러 벼슬을 받았다"는 문구를 넣고 말았다. 임금이 이를 보고 물었다. "정원군의 부모가 언제 벼슬을 받은 일이 있었느냐?" 승정원에서 그를 문책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은 허락하지 않고, 나에게 다시 짓도록 명하였다. 나도 겨우 지어 바쳤으나 임금이 보고는 칭찬하는 말이 지나치다 하여 고쳐서 녹권에 쓰도록 하였다. 이를 보면 선조 임금이 말을 신중히 하려 했던 지극한 뜻을 알 수 있다.


월과 장원과 당상관 승진

정미년(1607년)에 나는 여름, 가을, 겨울 세 계절에 걸친 다달이 치르는 시험(월과)에서 연달아 장원을 하였는데, 임금이 법전을 살펴 상을 내리도록 하였다. 예조에서 《경국대전》을 살펴보니 "홍문관 월과에서 세 차례에 걸쳐 일등으로 수석을 차지한 사람은 품계를 올려 준다"는 규정이 있었다. 당시 대제학은 유근(서경)이었고 제학은 신흠(현옹)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이 법전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였다. 누군가가 "'세 차례'는 '연이은 세 등수'라는 뜻이고 '일등'은 곧 '수석'이라는 뜻이다"라고 하기에, 이 말대로 갖추어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특별히 품계를 올려 주도록 하였다. 나는 이렇게 하여 당상관이 되었다.

대개 법전에서 말한 "세 차례"란 석 달에 걸쳐 치른 아홉 번의 시험에서 모두 장원한 것을 말하고, "일등"이란 점수의 합계가 서른 점이 되어 수석을 차지한 것을 뜻한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세 계절에 걸쳐 아홉 달 동안 스물일곱 번의 시험에서 모두 장원하여 점수의 합계가 백두 점이나 되었으니, 법전에서 말한 내용과는 다소 다른 것이었다.

평소에는 글에 능한 사람이 많아서 누구도 혼자 장원을 독차지하는 경우가 없었으므로, 이 규정은 법전에만 있을 뿐 실제로 시행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를 직접 본 일이 없어 저마다의 추측으로 법을 헤아리다 보니 이런 착오가 생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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