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950년, 낡은 서랍 속의 목소리들
제1장: 먼지 쌓인 서재, 역사의 속삭임
1950년 파리. 전쟁의 상흔은 여전히 도시 곳곳에 얼룩처럼 남아 있었지만, 센 강변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에는 희미하게나마 재건의 활기가 묻어났다. 사람들은 잿빛 폐허 속에서도 카페 테라스에 앉아 담배를 태우고, 무너진 건물 더미 옆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폐허와 희망이 뒤섞인 도시의 풍경처럼, 내 마음 역시 스물두 해를 살아오며 겪은 전쟁의 기억과 역사가로서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나는 알랭 마르탱, 소르본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이다. 그날은 늦봄의 햇살이 유난히 따스했지만, 나는 파리 6구, 생 제르맹 데 프레 근처의 오래된 아파트 다락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얼마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은 증조할아버지, 에티엔 마리 루이 드샹이 말년을 보낸 곳이자, 그의 서재가 있던 공간이었다.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의 기록들을 소중히 간직하셨고, 이제 그 책임은 내게 넘어왔다.
다락방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경사진 지붕 아래, 볕이 잘 들지 않는 공간에는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오래된 책들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빼곡하게 쌓여 있었고, 빛바랜 지도들과 알 수 없는 도표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낡은 마호가니 책상 위에는 잉크병과 깃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만, 잉크는 이미 오래전에 말라붙어 있었다. 공기 중에는 묵은 종이 냄새와 희미한 담배 향,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시간의 냄새가 뒤섞여 맴돌았다. 창밖으로 들려오는 자동차 소음과 사람들의 웅성거림만이 이곳이 1950년의 파리임을 상기시켜 줄 뿐이었다.
“증조할아버지… 당신은 대체 어떤 분이셨을까.”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먼지 쌓인 책장 앞을 서성였다. 에티엔 드샹. 법학도였으며, 혁명기에 활동했고, 나폴레옹 시대를 거쳐 왕정 복고기까지 살았던 인물. 가족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단편적이었다. 이상주의자였지만 혁명의 격랑 속에서 깊은 고뇌를 겪었고, 말년에는 세상과 거리를 둔 채 글쓰기에만 몰두했다고 했다. 그의 방대한 기록이 이 다락방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만이 분명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품 정리는 핑계였고, 나는 어쩌면 이 낡은 기록들 속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갓 겪어낸 끔찍한 전쟁, 나치 점령 하의 파리, 레지스탕스의 영웅담과 부역자들의 비겁함, 그리고 해방의 환희와 이어진 혼란. 이 모든 것을 겪으며 ‘역사’란 과연 무엇인지, 격동의 시대 속에서 개인의 삶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끊임없이 질문하게 되었다. 교과서 속의 건조한 연대기나 위인들의 영웅담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어쩌면 증조할아버지의 기록 속에서, 150년 전 또 다른 혁명과 전쟁의 시대를 살아낸 한 개인의 목소리를 통해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남기신 열쇠 꾸러미 중에서 가장 낡고 투박한 열쇠 하나가 책상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끼익, 하고 마찰음을 내며 열린 서랍 안에는 놀랍게도 가지런히 정리된 여러 묶음의 문서들이 있었다. 두꺼운 가죽 표지의 일기장 여러 권, 꼼꼼하게 밀랍으로 봉인된 편지 꾸러미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도표와 스케치들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가장 위에 놓인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표지는 닳아서 부드러웠고,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어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 같았다.
‘1788년 7월 14일. 파리는 여전히 굶주림의 공포에 떨고 있다. 어제 카페에서 만난 뤽은 루소의 사상이 너무 이상적이라고 비웃었지만, 지금 이 부조리한 현실이야말로 새로운 사회 계약이 필요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정의, 평등, 자유… 이 숭고한 이념들이 언제쯤 이 땅 위에 실현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여전히 나의 열정을 위험한 치기 정도로 여기시는 듯하다. 그분의 신중함은 존경하지만, 때로는 답답함을 느낀다…’
에티엔 드샹의 젊은 시절 필체는 또렷하고 열정적이었다. 계몽사상에 대한 깊은 믿음과 구체제에 대한 비판, 그리고 다가올 변화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행간마다 살아 숨 쉬는 듯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다음 장을 넘겼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필체는 점점 더 고뇌에 차고 때로는 격분하거나 절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1789년 7월 15일. 어제, 바스티유가 함락되었다. 압제의 상징이 무너지는 순간을 내 눈으로 목격했다. 민중의 거대한 힘 앞에 전율했다. 그러나… 드 로네 후작과 플레셀 시장의 끔찍한 죽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저 야만적인 폭력 앞에서 나는 혼란스럽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던 이성의 승리인가?’
‘1793년 1월 22일. 어제, 루이 카페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혁명 광장은 수십만 군중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공화국의 적이 사라졌다는 안도감과 함께, 천 년 왕정의 비극적인 종말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온다. 과연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법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 죽음 앞에서, 법학도로서의 내 양심은 깊은 질문을 던진다.’
‘1794년 4월 6일. 당통과 데물랭마저… 혁명은 이제 자신의 아들들을 삼키기 시작했다. 로베스피에르의 ‘덕의 공화국’은 피로 세워지는가. 그의 눈빛 속에는 더 이상 인간적인 온기 대신 냉혹한 원칙만이 번뜩인다. 어디까지 가려는 것인가. 이 공포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침묵만이 유일한 미덕인가?’
나는 에티엔의 고뇌와 환멸을 따라가며 함께 가슴 아파했다. 혁명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지식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런데 그의 기록 사이에는 다른 필체로 쓰인 편지들이 끼워져 있었다. 그중 하나는 투박하지만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여성의 필체였다.
‘에티엔 씨께. 오늘 시장에서 밀가루를 구하려다 또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피에르는 계속 기침을 하고, 마담 뒤부아는 이제 웃음마저 잃었습니다. 당신이 말하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은 언제쯤 오는 건가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혁명은 그저 더 배고프고 더 불안한 나날일 뿐입니다. 그래도 당신이 그때 건네준 동전 덕분에 피에르에게 작은 빵 한 조각을 사줄 수 있었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이제야 전합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길. – 소피 라비뉴’
소피 라비뉴. 에티엔의 일기에도 몇 번 등장했던 이름이었다. 파리 빈민가의 소녀. 에티엔과는 너무나 다른 세계를 살았던 그녀의 목소리가 150년의 시간을 넘어 내게 말을 거는 듯했다. 그녀의 편지에는 절박한 생존의 몸부림과 함께, 혁명의 거대한 구호 뒤에 가려진 평범한 민중의 고통이 담겨 있었다.
다른 편지 묶음은 뜻밖에도 영국에서 온 것이었다. 깔끔하고 지적인 필체로 쓰인 편지의 주인공은 엘리자베스 브라운이라는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새로운 기계를 발명하는 것에 대한 흥분과 자부심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그 기술이 사용되는 공장의 현실에 대한 깊은 고민을 토로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새로운 증기기관은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입니다. 석탄 소모는 절반으로 줄었고, 생산량은 두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밀러 씨는 크게 만족하며 추가 주문을 약속했습니다. 기술의 진보는 정말 경이롭습니다! 하지만 어제 밀러 씨의 공장을 방문했을 때, 저는 그곳에서 일하는 어린 아이들의 텅 빈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작은 손들이 쉴 새 없이 기계 부품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과연 우리의 발명이 가져온 이 ‘진보’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술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겠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책임은 무엇일까요? 아서 핀리 씨와의 서신 교환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이 배우고 싶습니다…’
엘리자베스 브라운. 그녀는 증기기관으로 상징되는 영국의 산업 혁명 한복판에서 기술 발전의 가능성과 윤리적 딜레마를 동시에 목격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의 편지는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격변과는 또 다른, 거대한 변화의 축이 존재했음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내 손에 들린 것은 거칠고 투박한 필체로 쓰인 짧은 편지였다. 발신자는 토마스 애쉬워스, 맨체스터의 공장 노동자였다. 그는 윌 존슨이라는 친구와 함께 겪는 고된 노동과 감독관의 횡포, 그리고 아주 작은 저항의 시도에 대해 담담하게, 그러나 깊은 분노를 담아 적고 있었다.
‘…그림쇼는 오늘도 아이들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윌과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계는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우리의 하루는 여전히 14시간이다. 어젯밤 술집에서 몇몇 동료들과 모여 우리의 처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밀러 사장의 귀에 들어가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래도 이대로 주저앉을 수만은 없다. 언젠가는…’
에티엔, 소피, 엘리자베스, 토마스… 프랑스 혁명의 이상과 피, 그리고 산업 혁명의 역동성과 그늘 속에서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 그들의 목소리가 낡은 종이 위에서 되살아나 내 심장을 두드렸다. 증조할아버지가 남긴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진짜 역사는 왕이나 장군들의 연대기가 아니라,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 숨 쉬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라. 그 안에 진실이 있다."
나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찾아 헤매던 역사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교과서에서는 별개의 사건처럼 다루어지지만, 이 기록들은 두 혁명이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오히려 같은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 속에서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우리가 사는 ‘근대 세계’를 만들어낸 거대한 이중주였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법학도 에티엔의 이상과 환멸, 민중 소녀 소피의 끈질긴 생존 투쟁, 발명가의 딸 엘리자베스의 지적 탐구와 윤리적 고민, 공장 노동자 토마스의 고통과 저항 의식… 이 네 사람의 삶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는 이 ‘이중 혁명’의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태피스트리(Tapestry)처럼 느껴졌다.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 그들의 운명 속에는 자유를 향한 불타는 열망과 기계 시대의 차가운 논리가, 혁명의 숭고한 이상과 잔혹한 폭력이, 진보의 눈부신 빛과 그 뒤편의 짙은 그림자가 함께 아로새겨져 있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것은 단순히 증조할아버지의 유품 정리가 아니었다.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운명적인 과제였다. 이 잊혀진 목소리들을 세상에 다시 전하는 것. 이들의 삶을 통해 이중 혁명의 시대를 복원하고, 그 복합적인 유산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를 묻는 것. 그것이 역사가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아니,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일기장과 편지들을 집어 들었다. 창밖의 파리는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이미 150년 전, 혁명의 불꽃이 타오르고 기계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하던 그 격동의 시대로 향하고 있었다. 길고 긴 여정이 될 것이다. 1000만 자라는 방대한 분량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써야만 한다. 자유의 불꽃과 기계의 심장이 만들어낸 이 거대한 대서사시를. 역사에 길이 남을, 아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이야기를.
이제, 그들의 목소리를 따라, 1788년 혁명 전야의 프랑스와 영국으로 시간 여행을 시작할 시간이다.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제1부: 오래된 세계의 균열 (ca. 1770-1788)
(알랭 마르탱의 목소리)
나의 이야기는, 아니, 우리 모두의 이야기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그 시대의 이야기는 한 궤짝의 낡은 기록들에서 시작되었다. 1950년,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파리의 한 다락방. 그곳에서 나는 증조할아버지 에티엔 드샹의 목소리를, 그리고 그와 함께 격동의 시대를 살아냈던 이름 모를 사람들의 숨결을 만났다. 그들의 기록은 나를 18세기 후반, 혁명의 불꽃이 타오르기 직전의 위태로운 평화와 산업의 기계 심장이 막 고동치기 시작하던 변화의 시대로 이끌었다. 이 이야기는 그들의 삶을 통해, 두 개의 거대한 혁명이 어떻게 우리의 근대 세계를 빚어냈는지 추적하는 여정이다. 첫 장은 찬란한 빛과 가장 어두운 그림자가 공존했던 1788년 여름, 베르사유와 파리의 극명한 두 풍경에서 시작된다.
제1장: 베르사유의 거울, 굶주린 거리
(1788년 여름)
1788년 여름의 베르사유 궁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세계처럼 보였다. 루이 14세가 태양의 영광을 지상에 구현하고자 했던 그 의지는 여전히 궁전 곳곳에 살아 숨 쉬며, 그 후계자 루이 16세 시대에도 변함없는 화려함과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특히 ‘거울의 방(Galerie des Glaces)’에서 열리는 무도회는 그 정점이었다. 거대한 아치형 창문으로는 잘 가꾸어진 정원의 푸르름과 석양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 빛은 벽면을 가득 메운 거울들과 천장의 크리스털 샹들리에에 반사되어 눈부신 황홀경을 연출했다. 바닥에는 최고급 목재가 격자무늬로 깔려 반짝였고, 공기 중에는 값비싼 향수와 분가루, 그리고 은은한 밀랍초 타는 냄새가 뒤섞여 감돌았다.
오늘 밤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드러운 현악 4중주의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프랑스 최고위 귀족들이 형형색색의 실크 드레스와 정교하게 수놓인 연미복 차림으로 우아하게 춤을 추거나 삼삼오오 모여 소곤거리고 있었다. 여자들의 머리 위에는 깃털과 보석으로 장식된 가발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고, 남자들의 허리에는 금실로 장식된 칼이 번쩍였다. 웃음소리는 높고 가벼웠지만, 그들의 대화는 대부분 최신 유행, 궁정 내의 은밀한 소문, 혹은 서로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험담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들의 세계에서 프랑스의 텅 빈 국고나 파리 거리의 굶주림 따위는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잠시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가십거리에 불과했다.
갓 열여덟 살이 된 앙투아네트 드 발루아는 이 화려한 군중 속에서 약간의 지루함과 설렘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중 하나의 딸인 그녀에게 이런 무도회는 익숙한 일상이었지만, 동시에 사교계에 막 발을 들인 젊은 아가씨로서 느끼는 흥분감도 있었다. 그녀는 섬세한 레이스가 달린 연분홍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어머니가 물려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섬세하게 꾸민 머리 모양이 흐트러질까 조심하며, 그녀는 부채 뒤로 숨어 동갑내기 친구 마리안과 수다를 떨었다.
“저기 좀 봐, 마리안. 랑발 공작 부인의 새 드레스 말이야. 너무 과하지 않아? 꼭 이동식 정원을 꾸며놓은 것 같아.” 앙투아네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속삭였다.
마리안이 킥킥거리며 답했다. “쉿, 앙투아네트. 그래도 왕비 폐하께서 총애하시는 분이잖아. 하지만 네 말이 맞아. 내 생각엔 아르투아 백작 전하께 잘 보이려는 속셈이 분명해.”
“아르투아 백작이라… 그분은 너무 경박해 보여. 나는 좀 더 진중하고… 로마 영웅 같은 분이 좋은데.” 앙투아네트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멀리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대화하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근위대 장교를 훔쳐보았다.
그녀의 오빠, 스무 살의 필리프 드 발루아는 친구들과 어울려 카드놀이를 하거나 다음 사냥 약속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그는 가문의 명예와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실제로는 무료한 궁정 생활의 자극을 찾아다니는 젊은 귀족일 뿐이었다.
“다음 주 퐁텐블로 사냥은 정말 기대되는군. 지난번엔 내가 가장 큰 멧돼지를 잡았지!” 필리프가 거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어림없을걸, 필리프. 내 새로운 영국제 사냥총을 아직 못 봤나?” 그의 친구 샤를르가 맞받아쳤다.
그들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승마, 펜싱, 사냥, 여자, 그리고 가끔씩 자신들의 특권을 위협하는 ‘하층민들의 불만’에 대한 경멸 섞인 언급들. 그들에게 재정 위기는 자신들의 연금이 줄어들거나 왕실 하사금이 깎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정도였고, 농민들의 굶주림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충직한 하녀 마르그리트는 앙투아네트의 등 뒤에 조용히 서서, 혹시라도 아가씨가 부채나 손수건을 떨어뜨릴까 긴장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 화려한 세계의 일부였지만, 동시에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그녀의 고향 마을에서는 올여름 극심한 가뭄으로 먹을 것이 없다는 편지가 와 있었지만, 이곳 베르사유에서는 그런 걱정 따위는 감히 입 밖에 낼 수도 없었다.
바로 그 시각, 베르사유의 눈부신 빛이 가닿지 않는 파리 동부 생탄투안 구역의 어느 허름한 다락방에서는 열여섯 살 소녀 소피 라비뉴가 고된 하루 일을 마치고 막 돌아와 있었다. 퀴퀴한 곰팡내와 싸구려 비누 냄새가 뒤섞인 좁은 방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벽에는 성모 마리아 그림이 희미하게 걸려 있었고, 구석에는 낡은 짚단 침대 두 개와 텅 빈 찬장 하나가 전부였다. 창문 너머로는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둑했고, 방 안은 마지막 남은 작은 촛불 하나가 겨우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소피는 녹초가 된 몸을 간신히 일으켜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았다. 하루 종일 귀족 저택의 빨랫감과 씨름하고, 빵집에서 밀가루 포대를 나르고 바닥을 닦았다. 손가락 마디마디는 부르텄고 어깨는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그녀의 가장 큰 걱정은 따로 있었다. 침대에 누워 얕은 기침을 콜록거리는 열 살짜리 남동생 피에르였다.
“피에르, 좀 어때? 오늘은 기침이 좀 덜한 것 같니?” 소피가 동생의 이마를 짚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피에르는 핼쑥한 얼굴로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누나, 배고파… 오늘 저녁은 뭐 먹어?”
소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늘 벌어온 몇 푼 안 되는 동전으로는 딱딱하게 굳은 빵 한 덩어리밖에 살 수 없었다. 그나마도 오후에 빵집에 갔을 때는 이미 다 팔리고 없었다. 빵값이 또 올랐다는 소문이 돌았다.
“미안해, 피에르. 오늘은 빵을 못 구했어. 대신… 어제 남은 감자 수프라도 데워줄게.” 소피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지만, 목이 메었다.
“또 감자 수프야?” 피에르의 얼굴에 실망감이 어렸다.
“내일은 꼭 맛있는 빵 사다 줄게. 약속해.” 소피는 동생의 마른 등을 토닥이며 마음에도 없는 약속을 했다.
찬장을 열었지만, 어제 끓여둔 묽은 감자 수프 냄비는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것으로는 두 사람의 허기를 달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 아래층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피! 소피, 있니?” 아래층에 사는 세탁부 마담 뒤부아였다.
“네, 마담! 잠깐만요!” 소피는 얼른 문을 열었다.
계단참에는 푸근한 인상의 마담 뒤부아가 양초를 들고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깊은 수심이 어려 있었다.
“오늘도 힘들었지? 이거라도 먹으렴.” 마담 뒤부아가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딱딱하게 굳었지만 그래도 제법 큰 빵 조각과 치즈 한 뙈기였다.
“아니에요, 마담. 저 때문에… 마담도 힘드실 텐데.” 소피는 미안함에 손사래를 쳤다.
“에그, 이럴 때일수록 서로 돕고 살아야지. 우리 마티유도 오늘 일거리가 없어서 빈손으로 들어왔단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빵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귀족 나리들은 베르사유에서 매일 밤 파티만 연다지 뭐니.” 마담 뒤부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사람들은 왕이랑 왕비가 일부러 빵을 숨겨놓고 우리를 굶겨 죽이려고 한다고 수군거리기도 해.”
“설마요…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이신데요.” 소피는 불안한 마음에 중얼거렸다.
“글쎄다. 하지만 배고픈 사람들 눈엔 뵈는 게 없단다. 조심해야 해, 소피. 요즘 사람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마담 뒤부아는 소피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힘없이 돌아섰다.
소피는 마담 뒤부아가 준 빵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고마움과 함께 더 큰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 굶주림과 분노가 언제까지 계속될까? 베르사유의 화려한 거울은 거리의 굶주린 얼굴들을 비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깨지지 않을 것 같던 거울에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1788년 여름, 베르사유의 빛과 파리의 그림자는 그렇게 위태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제2장: 울타리 쳐진 들판, 요크셔의 눈물
(1780년대 후반)
토마스 애쉬워스의 어린 시절 기억 속 고향은 언제나 푸른빛이었다. 요크셔의 구릉진 들판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봄이면 들꽃이 만발했으며 여름이면 황금빛 밀 이삭이 바람에 넘실거렸다. 마을 사람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방식에 따라 너른 개방 경작지(Open Field)에서 함께 일하고, 공유지(Commons)에서는 자유롭게 양과 소를 방목했다. 토마스는 아버지 존 애쉬워스의 튼튼한 등 뒤에 매달려 종달새 소리를 듣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작은 시냇물에서 물장구를 치며 자랐다. 그의 아버지 존은 과묵했지만 강직한 농부였다. 비록 자신들의 땅은 아니었지만(대부분 귀족이나 젠트리 소유의 땅을 소작했다), 그는 땅을 경작하고 가축을 돌보는 일에 깊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햇볕에 검게 그을린 그의 얼굴에는 늘 땅에 대한 애정과 삶에 대한 건강한 활력이 넘쳤다.
“토마스, 이 땅을 잘 보아두어라. 이 땅이 우리를 먹여 살리고, 또 우리가 지켜야 할 곳이다.” 아버지는 종종 어린 토마스의 작은 손을 잡고 들판을 거닐며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이고, 이웃들과 함께 이 땅을 돌보는 것이 우리의 도리다.”
토마스는 아버지의 말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했다. 마을 사람들은 농사일뿐 아니라 길흉사에도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갔다. 추수 때는 온 마을 사람들이 품앗이를 했고, 겨울이면 모닥불 주위에 모여 앉아 오래된 이야기를 나누거나 민요를 불렀다. 토마스에게 고향 마을은 단순히 집이 있는 곳이 아니라, 그의 세계 전체였고, 삶의 뿌리였다.
하지만 그 평화롭고 익숙했던 세계는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낯선 변화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런던의 의회에서 통과되었다는 ‘인클로저 법령(Enclosure Act)’이라는 종이 한 장이 마을에 도착한 것이 시작이었다. 곧이어 말쑥하게 차려입은 도시 관리들과 측량사들이 나타나 공유지와 개방 경작지에 줄을 치고 말뚝을 박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이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합리적인 조치’라고 설명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삶의 방식을 빼앗는 폭력일 뿐이었다.
“이게 무슨 짓들이오! 여긴 대대로 우리 조상들이 함께 농사짓고 가축을 키우던 땅이오!” 존 애쉬워스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관리에게 항의했다. 그의 얼굴은 검붉게 상기되었고, 평소 과묵했던 그의 눈에는 불길이 일었다. 다른 농부들도 존의 뒤에 서서 거칠게 소리쳤다.
관리는 콧방귀를 뀌며 서류를 흔들어 보였다. “법이 그렇게 정했소, 존 애쉬워스 씨. 이 땅은 이제 영주님의 사유 재산이며, 보다 효율적인 경작을 위해 구획될 것이오. 당신들은 새로운 경작 방식에 적응하거나, 아니면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시오.”
“다른 일자리라니! 우리는 평생 땅만 알고 살아온 사람들이오! 이 땅을 떠나 어디로 가란 말이오!”
“그건 당신들 사정이지. 듣자 하니 맨체스터나 리즈 같은 도시에 가면 공장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고 하더군.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야지, 언제까지 낡은 방식에 매달려 살 거요?” 관리는 냉담하게 말하고는 측량사들에게 작업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존 애쉬워스와 마을 사람들의 저항은 허무하게 끝났다. 그들에게는 법이나 권력에 맞서 싸울 힘이 없었다. 며칠 후, 뾰족한 말뚝과 날카로운 철조망 대신 단단하고 높은 돌담과 생울타리가 들판을 가로지르며 세워지기 시작했다. 토마스는 아버지가 울타리 앞에 망연자실하게 서서, 한때 자신들의 것이었던, 그러나 이제는 들어갈 수 없게 된 푸른 들판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넓고 단단했던 어깨는 그날따라 유난히 작고 초라해 보였다. 아버지의 눈가에는 깊은 주름이 패었고, 한때 활력이 넘쳤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공유지가 사라지자 양 몇 마리로 생계를 유지하던 가난한 농부들은 가장 먼저 타격을 입었다. 개방 경작지가 사라지고 대규모 농장이 들어서면서 소작농들도 점차 설 자리를 잃었다. 존 애쉬워스 역시 소작 계약 연장을 거부당했다. 마을에는 일자리가 없었다. 어떤 이들은 농장의 농업 노동자로 고용되었지만, 대부분은 정든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떠나야 했다. 토마스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늦가을 저녁, 아버지는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 앞에서 무거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도 맨체스터로 가야 할 것 같다.”
어머니는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어린 여동생은 아버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눈만 껌뻑였다. 토마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맨체스터. 검은 연기를 뿜는 거대한 공장들이 즐비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낯선 얼굴로 북적거린다는, 듣기만 해도 무서운 도시였다.
“아버지, 꼭 가야 해요? 여기서 살면 안 돼요?” 토마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존 애쉬워스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힘없이 웃었다. “토마스, 여기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단다. 먹을 것도, 일할 곳도 없어. 맨체스터에 가면 공장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고 하더구나. 힘들겠지만, 우리 가족이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과 체념이 배어 있었다.
며칠 후, 애쉬워스 가족은 몇 안 되는 살림살이를 낡은 짐마차에 싣고 정든 고향 마을을 떠났다. 토마스는 마지막으로 마을 어귀의 오래된 참나무와 그 아래 흐르던 시냇물을 눈에 담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지만, 아버지 앞에서 울 수는 없었다. 덜컹거리는 짐마차 위에서, 토마스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자신이 알던 세계가 영원히 사라졌음을 직감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고향을 잃은 슬픔과 함께, 앞으로 닥쳐올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울타리 쳐진 들판 뒤로 해가 지고 있었고, 그 붉은 노을은 마치 요크셔 땅이 흘리는 피눈물처럼 보였다. 짐마차는 이제 막 산업 혁명의 심장부, 맨체스터를 향해 첫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제3장: 금서(禁書) 속의 진실, 에티엔의 꿈
(1788년)
1788년, 파리 마레 지구의 유서 깊은 석조 건물 3층에 위치한 드샹 가문의 저택은 겉보기에는 평온했다. 넓은 응접실에는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벽에는 풍경화와 가족 초상화들이 걸려 있었다. 저택의 중심부에는 아버지 기욤 드샹의 서재가 있었다. 그곳은 법률 서적과 역사책, 그리고 고전 문학 작품들이 가죽 장정의 위엄을 뽐내며 빼곡히 꽂힌, 지성과 질서의 공간이었다. 기욤 드샹은 파리 고등법원 근처에서 존경받는 변호사였다. 그는 제3신분 출신이었지만, 뛰어난 능력과 신중한 처신으로 상당한 부와 명성을 쌓았고, 온건 개혁 성향의 귀족 및 부르주아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살롱에도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몽테스키외의 사상을 신봉하며, 영국식 입헌 군주제와 법치주의를 프랑스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스무 살의 에티엔 드샹에게 아버지의 서재는 단순한 지식의 보고가 아니었다. 그곳은 때로는 답답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도피처였고, 때로는 금지된 사상의 불꽃을 발견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에티엔은 루이 르 그랑 중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소르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아버지처럼 명석한 두뇌를 물려받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신중함이나 현실주의보다는 불타는 이상주의와 정의감에 더 이끌렸다. 그의 영웅은 몽테스키외가 아니라, 제네바의 시민이자 사회 계약론의 예언자인 장자크 루소였다.
“뤽, 자네는 아직도 루소를 위험하다고 생각하나?” 에티엔은 카페 프로코프의 구석 자리에서 친구 뤽 모로에게 열정적으로 말했다. 커피 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 너머, 그의 눈빛은 젊은 지식인 특유의 총명함과 함께 이상에 대한 확신으로 반짝였다. “루소의 말이 틀렸나?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지 않은가! 이 낡은 구체제야말로 그 쇠사슬이 아닌가? 특권, 불평등, 전제 정치… 이것들을 깨부수지 않고서 어떻게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말할 수 있겠나?”
뤽 모로 역시 에티엔처럼 법학도였고, 초기에는 계몽사상에 함께 열광했다. 하지만 노르망디 지방 몰락한 소귀족 가문 출신인 그는 에티엔보다 훨씬 현실적이었고, 때로는 냉소적이었다. 그는 잘생긴 얼굴에 살짝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에티엔, 자네의 열정은 존경하네. 하지만 루소의 '일반의지'라는 것이 과연 현실에서 존재할 수 있을까? 자네가 말하는 '인민'이란 누구인가? 어제 레베용 공장에서 폭동을 일으킨 무지한 군중들인가? 이상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혼란과 폭력으로 귀결될 수도 있네. 나는 좀 더 점진적이고 질서 있는 개혁을 원하네. 아버지의 말씀처럼, 우리는 영국처럼…”
“영국처럼? 뤽, 영국에도 여전히 귀족 특권과 제한된 선거권이 존재하지 않는가! 우리는 그보다 더 나아가야 하네. 프랑스는 미국처럼, 아니 미국을 넘어서는 진정한 공화국을 건설할 잠재력이 있단 말일세!” 에티엔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공화국이라… 자네 아버지께서 들으시면 기절하실 소리군.” 뤽은 씁쓸하게 웃으며 커피 잔을 들었다.
아버지 기욤은 실제로 아들의 급진적인 생각에 깊은 우려를 표했다. 그는 에티엔의 방에서 몰래 숨겨둔 루소나 디드로의 금서들을 발견할 때마다 아들을 불러 앉혀 타이르곤 했다.
“에티엔, 네가 새로운 사상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해한다. 나 역시 이 낡은 체제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루소의 이론은 너무 위험하다. 그것은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고 결국 무질서와 폭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그렇게 선하지 않다. 우리는 이성과 법률, 그리고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사회를 개선해야 한다.” 기욤은 서재의 육중한 책상에 앉아 아들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 하지만 지금 프랑스가 처한 현실을 보십시오! 재정은 파탄 났고, 국민 대다수는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특권층은 세금 한 푼 더 내지 않으려 저항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과연 이성적이고 합법적인 사회입니까? 이런 상황에서 점진적인 개혁만 기다리라는 것은 민중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입니다.” 에티엔은 아버지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네 마음은 알겠다만, 에티엔. 성급한 열정은 종종 더 큰 비극을 부른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삼부회가 소집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하지 마라. 오히려 더 큰 혼란이 올 수도 있다. 제발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거라.”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어머니 마리 드샹의 걱정은 또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녀는 아들이 계몽사상의 ‘불경한’ 사상에 빠져 영혼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다. 볼테르의 신랄한 교회 비판이나 루소의 자연 종교 사상은 그녀에게 신성 모독과 다름없었다.
“에티엔, 내 아들아. 공부도 좋지만, 네 영혼을 더럽히는 책들은 멀리하거라. 주님의 가르침과 교회의 품 안에서 평안을 찾아야 한다. 요즘 세상이 너무 흉흉하니, 제발 위험한 생각은 하지 말고 몸조심하거라.” 그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기도하듯 말했다.
에티엔은 부모님의 걱정을 이해했지만, 그의 마음속 혁명의 불꽃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서재 깊숙한 곳, 아버지 몰래 숨겨둔 금서들을 밤늦도록 읽고 또 읽었다. 낡고 거친 종이 위, 빛바랜 잉크로 새겨진 단어 하나하나가 그의 젊은 영혼을 뒤흔들었다. 자유, 평등, 인민 주권, 일반의지… 이 숭고한 개념들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을 깨부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힐 강력한 무기처럼 느껴졌다.
그는 친구 뤽 모로와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더욱 단련시켰고, 소르본 대학 근처의 카페와 서점을 드나들며 같은 생각을 가진 학생들과 교류했다. 때로는 정치 클럽의 초기 모임에도 참석하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우연히 길거리에서 급진적인 팸플릿을 인쇄하여 몰래 배포하는 인쇄공 장 발레와 마주치기도 했다. 그의 강렬하고 확신에 찬 눈빛에서 에티엔은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차원의 혁명적 열정을 감지했다.
에티엔 드샹은 꿈꾸고 있었다. 이성과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 모든 시민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자신의 권리를 누리는 공화국. 그는 법학도로서, 혁명이 불가피하다면 그것이 최대한 이성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감도 자리 잡고 있었다. 과연 책 속의 이상은 현실의 거친 파도를 이겨낼 수 있을까? 굶주린 민중의 분노는 이성의 통제 아래 머물 수 있을까? 그는 아직 그 답을 알지 못했다. 다만, 역사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자신 역시 그 흐름 속에 서 있다는 것만을 분명히 느낄 뿐이었다. 1788년, 에티엔 드샹의 혁명은 그렇게, 금서 속 진실과 젊은 이상주의자의 꿈 속에서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제4장: 실 잣는 소녀 소피, 팍팍한 파리의 삶
(1788년 겨울)
1788년 겨울, 파리 생탄투안 구역의 새벽은 잿빛 추위와 함께 찾아왔다. 얼기 직전의 차가운 공기가 좁은 골목길을 휘감았고, 다락방의 얇은 나무 벽은 그 냉기를 막아주지 못했다. 소피 라비뉴는 낡고 해진 담요 속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잠에서 깨어났다. 뼈마디까지 스며드는 한기와 배고픔은 그녀의 오랜 친구였다. 옆자리의 짚단 침대에서는 남동생 피에르가 얕은 기침 소리와 함께 뒤척이고 있었다. 아직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소피는 벌써 몇 년째 어린 동생을 책임지는 소녀 가장이었다.
“피에르, 일어나. 누나 일하러 가야 해.” 소피는 차가운 손으로 동생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다행히 열은 없는 듯했다. “오늘도 기침하면 안 돼. 약은… 약이 다 떨어졌구나.”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약을 살 돈은커녕 당장 오늘 저녁 먹을 빵을 살 돈도 부족했다.
소피는 꽁꽁 언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낡은 옷을 껴입었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지만, 그녀의 하루는 이미 시작되었다. 동생에게 어젯밤 남은 멀건 수프를 겨우 한 그릇 먹이고, 자신은 찬물로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첫 번째 일터는 부유한 상인이 사는 마레 지구의 저택이었다. 그 집의 하녀들은 소피에게 산더미 같은 빨랫감을 맡겼다. 소피는 차가운 센 강변 공동 빨래터에서 꽁꽁 언 손으로 두꺼운 시트와 속옷들을 비벼 빨았다. 얼음장 같은 강물은 손가락 감각을 앗아갔고, 비누 거품은 살갗을 따갑게 했다. 주변에는 소피와 비슷한 처지의 세탁부 여성들이 모여 앉아,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들었어? 어제 또 빵값이 올랐다지 뭐야.”
“말도 마. 이러다간 정말 굶어 죽겠어. 우리 애들은 빵 냄새만 맡아도 울음을 터뜨린다니까.”
“베르사유의 그 여자(마리 앙투아네트)는 매일 밤 파티를 열고 다이아몬드로 치장한다는데, 우리는 빵 한 조각 구경하기 힘드니… 이게 나라인가?”
“쉿! 그런 말 함부로 하다가 잡혀가.”
소피는 말없이 빨래에만 집중했다. 그녀 역시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지만, 그것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억울함보다는 당장 오늘 저녁거리를 걱정하는 것이 그녀의 현실이었다. 빨래 일을 마치고 나면, 그녀는 다시 생탄투안 구역으로 돌아와 뒤랑 씨의 빵집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밀가루 포대를 나르고, 오븐 주변을 청소하고, 손님들에게 빵을 팔았다. 갓 구워져 나온 빵 냄새는 달콤했지만, 소피에게는 고문과 같았다. 그녀는 침을 삼키며 빵을 포장하고 손님들에게 건넸지만, 정작 자신과 동생이 먹을 빵은 살 수 없었다.
“소피!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바닥이나 닦아!” 빵집 주인 뒤랑 씨의 잔소리가 날아왔다. 그는 인색했지만, 그래도 가끔 팔다 남은 딱딱한 빵 조각을 던져주기도 했기에 소피는 묵묵히 그의 말을 따랐다.
저녁이 되어 빵집 일을 마치면, 그녀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동생 피에르를 돌보고 저녁 식사(라고 해봤자 묽은 수프나 딱딱한 빵이 전부였다)를 챙겨 먹고 나면, 그녀는 아래층 마담 뒤부아의 집으로 향했다. 마담 뒤부아는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아들 마티유(가구 장인)를 키우며 세탁부 일을 하는 이웃이었다. 그녀는 소피를 친딸처럼 아꼈고, 가끔 일감을 나눠주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힘이 되어주었다.
“왔구나, 소피. 오늘 고생 많았지.” 마담 뒤부아가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며 소피를 맞았다. 그녀의 방 역시 소피의 다락방만큼이나 비좁고 허름했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온기가 느껴졌다.
“네, 마담. 이건… 오늘 받은 품삯이에요.” 소피가 작은 동전 몇 닢을 내밀었다.
“어휴, 이걸로는 턱도 없지. 걱정 마라. 내가 어제 상인한테서 실 잣는 일감을 좀 받아왔으니, 같이 밤새도록 돌리면 내일 빵 살 돈은 나올 게다.” 마담 뒤부아는 물레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피는 고마움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두 사람은 희미한 등잔불 아래 마주 앉아 물레를 돌리기 시작했다. 끼익거리는 단조로운 물레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소피의 머릿속은 온통 동생 피에르에 대한 걱정과 내일 빵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담, 요즘 삼부회인가 뭔가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술렁이는 것 같아요. 뭐 좋은 일이라도 생길까요?” 소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담 뒤부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다, 아가. 높은 양반들이 모여서 떠드는 게 우리 같은 사람들 살림살이에 무슨 도움이 되겠니. 진정서인지 뭔지를 쓴다고 하던데, 우리 마티유가 가서 보니까 죄다 똑똑한 양반들만 모여서 어려운 말만 하더란다. ‘봉건제 폐지’, ‘조세 평등’… 그런 게 당장 우리 배를 채워주지는 못하잖아.” 그녀는 물레를 돌리던 손을 잠시 멈추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바랄 걸 바라야지.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 살아남는 수밖에 없어.”
소피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마담 뒤부아의 말처럼, 혁명이나 정치 같은 거창한 이야기는 그녀의 삶과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어떻게든 이 지독한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동생과 함께 살아남는 것이었다. 물레는 밤새도록 멈추지 않고 돌아갔다. 파리의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실 잣는 소녀 소피의 고되고 팍팍한 삶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었다. 혁명의 불꽃은 아직 그녀의 다락방까지 비추지 못하고 있었다.
제5장: 쇠붙이의 마법, 엘리자베스의 호기심
(1780년대 후반)
영국 버밍엄. 18세기 후반 이 도시는 ‘천 개의 공장을 가진 도시’라 불릴 만큼 활발한 제조업과 기술 혁신의 중심지였다. 도시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공방과 공장들이 쉴 새 없이 망치 소리와 기계 소음을 쏟아냈고, 석탄 연기는 하늘을 뒤덮었다. 바로 이 역동적인 도시의 한가운데, 열다섯 살 남짓한 소녀 엘리자베스 브라운의 세계는 아버지 데이비드 브라운의 기계 작업실 안에 있었다.
데이비드 브라운은 세상의 찬사보다는 기계 자체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재능 있는 발명가이자 기술자였다. 그는 증기기관 부품 개량이나 정밀한 기계 장치 제작에 몰두하며 밤낮없이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엘리자베스에게 아버지의 작업실은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놀이터이자 배움터였다. 기름 냄새와 뜨거운 쇠 냄새가 뒤섞인 공기, 쇠를 깎고 다듬는 소리, 복잡하게 얽힌 기어와 톱니바퀴, 정교하게 그려진 설계 도면들… 이 모든 것이 어린 엘리자베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버지, 이 캠(Cam)은 어떻게 회전 운동을 왕복 운동으로 바꾸는 건가요? 정말 신기해요!” 엘리자베스는 아버지 어깨너머로 복잡한 기계 장치를 들여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당시 여자아이들에게는 인형 놀이나 자수 배우기가 당연한 일이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인형 대신 렌치와 드라이버를 손에 쥐는 것을 더 좋아했다.
데이비드는 딸의 비범한 재능과 열정을 일찍부터 알아보았다. 그는 당시 사회적 통념과 달리, 엘리자베스에게 수학과 물리학의 기초를 가르쳐주고, 기계의 원리를 설명해주며 그녀의 지적 성장을 격려했다. “잘 보렴, 리지(엘리자베스의 애칭). 캠의 이 곡선 모양이 바로 마법의 비밀이란다. 회전축이 돌아가면서 이 곡면이 밀대를 밀어 올렸다 내렸다 하는 거지. 마치… 그래,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말이다.” 데이비드는 딸에게 설명해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부녀 사이의 이러한 지적인 교감은 엘리자베스에게 큰 기쁨이자 위안이었다.
데이비드는 버밍엄의 유명한 지식인 모임인 ‘루나 소사이어티(Lunar Society)’의 정식 회원은 아니었지만, 제임스 와트나 매튜 볼턴과 같은 회원들과 기술적인 교류를 하거나 그들의 업적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종종 엘리자베스에게 루나 소사이어티 회원들의 놀라운 발견과 발명 이야기(와트의 증기기관 개량, 프리스틀리의 산소 발견, 웨지우드의 도자기 혁신 등)를 들려주었다.
“리지, 그들은 정말 세상을 바꾸고 있단다.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말이야. 그들은 보름달이 뜨는 밤에 모여 밤새도록 열띤 토론을 벌이지. 그들의 지식과 열정은 마치 달빛처럼 세상을 밝히고 있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엘리자베스의 마음속에는 과학과 기술 진보에 대한 경외심과 함께, 언젠가 자신도 그들처럼 세상을 바꾸는 일에 기여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자라났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 엘리너 브라운은 딸의 이런 모습이 영 마뜩잖았다. 엘리너는 남편의 재능은 인정했지만, 그의 불안정한 수입과 딸의 ‘별난’ 관심사에 대해 늘 불만이었다. 그녀는 엘리자베스가 숙녀답게 행동하고 좋은 가문에 시집가서 안정적인 삶을 살기를 바랐다.
“리지, 또 그 기름때 묻은 작업실에 있었니? 얘, 여자는 바느질이나 피아노를 배워야지, 언제까지 그렇게 쇠붙이만 만지작거릴 거니? 그러다 시집이나 제대로 가겠어?” 어머니의 잔소리는 엘리자베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녀의 반항심과 독립심을 더욱 자극했다.
“어머니, 왜 여자는 기계를 만지면 안 되나요? 저도 아버지처럼 새로운 것을 만들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결혼만이 여자의 유일한 길은 아니잖아요.” 엘리자베스는 당차게 대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깊은 좌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학회에 참석할 수도, 대학에서 정식으로 공부할 수도 없는 현실의 벽은 너무나 높고 단단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몰래 어려운 수학 문제나 과학 서적을 탐독하며 스스로 지식의 갈증을 채워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엘리자베스에게 새로운 과제를 주었다. “리지, 이 설계도를 좀 보렴. 와트 씨의 증기기관을 우리 공방의 작은 기계에도 적용할 수 있을지 연구해보고 싶구나. 네 생각은 어떠니?” 데이비드가 내민 것은 복잡한 증기기관 설계도 사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증기기관. 산업 혁명의 심장이라 불리는 바로 그 기계였다. 그녀는 며칠 밤낮으로 설계도를 파고들고 계산하며, 아버지와 열띤 토론을 벌였다.
“아버지, 가능할 것 같아요! 증기 압력을 조절하고 소형 피스톤을 사용하면… 가능해요! 상상해보세요, 이 작은 힘으로 물레 수십 개를 동시에 돌릴 수 있다면…!” 엘리자베스의 눈은 흥분으로 빛났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 아버지를 따라 방문했던 맨체스터 근처의 방적 공장 풍경이 떠올랐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 소음 속에서, 기름때 묻은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어린 아이들의 모습. 그 아이들의 고통과 아버지의 발명이 가져올 놀라운 생산성 향상 사이의 간극. 엘리자베스는 문득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기술의 진보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이 경이로운 쇠붙이의 마법은 세상을 더 좋게 만들까, 아니면 더 깊은 고통을 낳을까? 그녀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기술의 윤리적 문제에 대한 질문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었다. 버밍엄의 작업실에서 엘리자베스의 지적 호기심은 계속 타올랐지만, 그 불꽃 속에는 이제 막 새로운 고민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제6장: 땅을 잃은 소년 토마스, 낯선 도시의 문턱
(1780년대 후반)
요크셔의 푸른 언덕과 정든 마을을 뒤로하고 맨체스터로 향하는 길은 길고 고됐다. 덜컹거리는 낡은 짐마차 위에서 어린 토마스 애쉬워스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잠결에도 고향 집 앞 시냇물 소리와 종달새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낯선 길과 아버지 존 애쉬워스의 지치고 침울한 뒷모습뿐이었다. 아버지는 거의 말이 없었다. 한때 땅에 대한 자부심으로 빛나던 그의 눈빛은 이제 깊은 상실감과 불안감으로 흐려져 있었다. 토마스는 감히 아버지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저 꽉 잡은 어머니의 손에서 전해져 오는 미세한 떨림만이 이 가족에게 닥친 현실의 무게를 느끼게 해줄 뿐이었다.
며칠간의 고된 여정 끝에 마침내 맨체스터 외곽에 도착했을 때, 토마스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요크셔의 푸른 하늘과는 너무나 다른, 검은 연기로 뒤덮인 잿빛 하늘이었다. 하늘 높이 솟아 끊임없이 연기를 뿜어내는 수많은 공장 굴뚝들은 마치 거대한 괴물처럼 느껴졌다. 도시로 들어서자 귀를 찢을 듯한 기계 소음과 마차 바퀴 소리, 사람들의 외침이 뒤섞여 혼란스러움을 더했고, 코를 찌르는 매캐한 석탄 연기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악취가 진동했다. 거리에는 무표정하고 지친 얼굴의 사람들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고, 그들의 남루한 옷차림은 토마스 가족의 행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 여기가… 맨체스터예요?” 토마스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존 애쉬워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낯선 도시에 대한 경계심과 함께, 이런 곳으로 가족을 이끌고 와야 했던 가장으로서의 비참함이 어려 있었다.
그들이 어렵게 찾아낸 거처는 도시 외곽, 공장 지대 근처 슬럼가의 허름한 다세대 주택 꼭대기 층에 있는 작은 다락방이었다. 방 안은 어둡고 축축했으며, 벽에서는 곰팡내가 풍겼다. 창문 밖으로는 다른 건물 벽이 가로막고 있어 햇빛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토마스는 이곳이 앞으로 자신들이 살아가야 할 집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요크셔의 햇살 가득했던 집과 푸른 들판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아버지 존은 다음 날부터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는 건장한 체격과 성실함을 가졌지만, 농사일 외에는 별다른 기술이 없었다. 공장에서는 젊고 손 빠른 노동자들을 선호했고, 건설 현장의 막노동 일자리는 이미 넘쳐나는 이주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며칠 동안 허탕만 치고 돌아온 아버지의 어깨는 점점 더 움츠러들었고, 밤이면 싸구려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와 깊은 한숨을 쉬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날이 많아졌다. 어머니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고, 어린 동생들은 낯선 환경과 배고픔에 지쳐 보챘다.
토마스는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열두 살 남짓한 나이였지만, 그는 자신이 이제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날 저녁, 술에 취해 잠든 아버지 몰래 토마스는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머니, 제가… 공장에 가볼게요. 저도 이제 일할 수 있어요.”
어머니는 아들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토마스, 안 된다. 거긴 너무 위험한 곳이야. 너까지 잘못되면…”
“괜찮아요, 어머니. 제가 돈을 벌면 아버지도 힘을 내실 거고, 동생들도 굶지 않을 거예요. 제가 할 수 있어요.” 토마스는 애써 씩씩하게 말했지만, 두려움에 심장이 떨렸다.
다음 날 새벽, 토마스는 어머니가 싸준 딱딱한 빵 조각을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거리를 걸어,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거대한 공장 건물 앞에 섰다. 조셉 밀러 면방직 공장. 아버지에게 들었던 이름이었다. 공장 정문 앞에는 토마스와 비슷한 또래거나 더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 관리인의 지시에 따라 줄을 서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기대감보다는 불안감과 체념이 더 짙게 어려 있었다. 토마스 역시 떨리는 마음으로 그 줄 맨 뒤에 섰다.
잠시 후, 험상궂은 인상의 감독관 그림쇼가 나타나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토마스는 잔뜩 겁을 먹었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림쇼가 토마스 앞에 멈춰 서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름은?”
“토마스… 애쉬워스입니다.”
“나이는?”
“열… 열두 살입니다.”
“일해 본 적 있나?”
“아뇨… 하지만 뭐든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토마스는 용기를 내어 또렷하게 말했다.
그림쇼는 잠시 토마스의 야무진 눈빛을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좋다. 하지만 명심해라. 여기선 게으름 피우거나 실수하면 가차 없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토마스의 공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는 ‘피서(Piecer)’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거대한 뮬 방적기 사이를 정신없이 오갔다. 그의 임무는 기계가 돌아가다 끊어진 실을 재빨리 손으로 이어주는 것이었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계는 위협적이었고, 작은 실수라도 하면 빠르게 움직이는 부품에 손가락이 끼일 위험이 있었다. 공장 안은 면화 먼지로 자욱했고,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귀를 찢는 듯한 기계 소음 때문에 동료들과 대화하기도 어려웠다. 하루 14시간이 넘는 고된 노동이 끝나면, 그는 다른 아동 노동자들과 함께 공장 근처의 비좁고 더러운 기숙사에서 잠을 잤다. 식사는 형편없었고, 늘 배고픔과 피로에 시달렸다. 아버지와 가족들이 있는 다락방에 갈 수 있는 날은 일주일에 단 하루뿐이었다.
토마스는 매일 밤 눈물을 삼켰다. 푸른 들판과 따스한 햇살, 가족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꿈결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곳 맨체스터 공장은 그가 알던 세상과는 너무나 다른, 낯설고 차가운 기계의 왕국이었다. 그는 자신이 마치 거대한 기계의 작은 부속품이 되어버린 듯한 소외감과 절망감을 느꼈다. 땅을 잃은 소년 토마스는 이제, 낯선 도시의 문턱을 넘어 산업 혁명이라는 거대한 기계의 심장부로 던져진 것이다. 그의 길고 고된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제7장: 바다 건너 불어온 바람, 재정 위기의 그림자
(1788년)
1788년 파리. 삼부회 소집 결정으로 인한 정치적 술렁임과 함께, 에티엔 드샹의 젊은 마음은 대서양 건너에서 불어온 자유의 바람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미국 독립 혁명. 그것은 단순한 식민지 해방 전쟁이 아니라, 계몽사상의 이상이 현실 정치에서 승리한 위대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에티엔은 토머스 페인의 『상식(Common Sense)』이나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 선언문 같은 팸플릿들을 탐독하며 가슴 뛰는 흥분을 느꼈다.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권’. 인간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는 선언, 군주에 맞서 인민 스스로 정부를 세울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낡은 구체제의 모순 속에서 신음하던 프랑스 젊은 지식인들에게 강력한 영감을 주었다.
“보았나, 뤽? 필라델피아의 영웅들이 어떻게 왕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공화국을 세웠는지를! 이것이야말로 루소가 말한 인민 주권의 실현이 아닌가! 우리 프랑스라고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에티엔은 카페 프로코프에서 친구 뤽 모로에게 열변을 토했다. 당시 파리 지식인 사회에는 일종의 ‘미국 열광’ 분위기가 있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로 활동하며 특유의 소박함과 지혜로 큰 인기를 끌었고, 라파예트 후작처럼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했던 귀족들은 자유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뤽 모로는 에티엔의 열광에 찬물을 끼얹었다. “물론 미국 혁명은 위대한 사건이지. 하지만 에티엔, 잊지 말게. 그 혁명을 돕기 위해 우리 프랑스가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지 아나? 국고가 바닥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미국 독립 지원이었네. 자유의 이상은 아름답지만, 그 대가는 혹독한 법이야. 지금 프랑스는 이상을 논하기 전에 당장 파산을 걱정해야 할 처지 아닌가.”
뤽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에티엔 역시 아버지 기욤을 통해 프랑스 재정 위기의 심각성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호기심과 불안감이 뒤섞인 마음으로, 그는 그날 저녁 아버지의 서재를 찾았다. 아버지는 돋보기를 쓴 채 복잡한 수치가 적힌 문서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기욤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에티엔.”
“뤽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나라 재정 상태가 그렇게 심각한지 여쭙고 싶었습니다. 미국 독립 지원이 그렇게 큰 부담이었습니까?”
기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담 정도가 아니었지. 물론 자유를 위한 싸움을 도운 것은 명예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이미 휘청거리던 국고에 치명타를 가한 것은 사실이다. 루이 14세 시절부터 누적된 부채에, 7년 전쟁 패배, 그리고 미국 지원까지… 지금 프랑스는 파산 직전이다.”
“하지만 재정 총감들이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습니까? 칼론이나 브리엔 같은 분들이…”
“시도는 했지. 하지만 결과는 어땠느냐?” 기욤은 씁쓸하게 말했다. “칼론은 귀족과 성직자에게도 세금을 물리는 공평 과세를 제안했지만, 명사회에서 특권층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쫓겨났다. 그의 후임 브리엔 역시 비슷한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이번에는 고등법원이 왕의 칙령 등록을 거부하며 저항했다. 그들은 ‘전통적인 자유’와 ‘국민의 권리’를 들먹였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면세 특권을 지키려는 이기심일 뿐이었다.”
“고등법원이… 왕권에 맞서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씀이십니까?” 에티엔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고등법원의 저항을 계몽사상의 영향 아래 이루어진 진보적인 행동으로 여기고 있었다.
“겉모습에 속지 마라, 에티엔. 고등법원 판사직은 대부분 세습되거나 매매되는 특권직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은 민중의 고통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 상실이다. 그들이 ‘삼부회 소집’을 요구한 것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신분별 표결 방식을 통해 제3신분의 개혁 요구를 무력화시키려는 속셈이지.” 기욤은 아들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삼부회 소집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다. 억눌려왔던 모든 불만과 요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올 테지. 과연 우리가 그 혼란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솔직히 두렵다.”
아버지의 말은 에티엔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혁명의 이상과 당위성에 매료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현실적인 혼란과 위험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 혁명의 영광 뒤에는 프랑스의 재정 파탄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특권층의 반동이 역설적으로 혁명의 문을 열고 있었다. 혁명의 길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하고 명쾌하지 않다는 것을, 오히려 복잡하고 위험한 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자유와 평등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타올랐지만, 이제 그 불꽃 위로 냉혹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제8장: 커피 향 속의 논쟁, 이성의 힘
(1788년 겨울)
혁명 전야의 파리는 끓어오르는 용광로와 같았다. 낡은 질서에 대한 불만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이 뒤섞여 도시 전체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이러한 지적·정치적 발효의 중심에는 카페와 살롱, 그리고 인쇄술의 발달이 있었다. 특히 18세기 파리의 카페는 단순한 사교 공간을 넘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자유롭게 정보를 교환하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공론장(Public Sphere)'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중에서도 코메디 프랑세즈 극장 맞은편에 위치한 ‘카페 프로코프(Café Procope)’는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 기라성 같은 계몽사상가들이 드나들었던 역사적인 장소이자, 여전히 젊은 지식인들과 예술가, 혁명가 지망생들이 모여드는 토론의 메카였다.
에티엔 드샹 역시 카페 프로코프의 단골손님이었다. 그는 짙은 커피 향과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친구 뤽 모로를 비롯한 동료 학생들, 때로는 신문 기자나 변호사, 심지어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이름 모를 시민들과 어울려 밤늦도록 토론을 벌였다. 테이블 위에는 최신 팸플릿이나 금지된 서적들이 조심스럽게 오갔고, 목소리들은 열기에 차 웅성거렸다.
“정부의 검열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네. 디드로의 『백과전서』마저 다시 판매 금지 목록에 올랐다지.” 누군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검열이 진리의 빛을 가릴 수는 없네! 오히려 금지될수록 사람들은 더 알고 싶어 하지. 보게나, 오늘도 루소의 『사회 계약론』 초판본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서점에 줄을 섰다네.” 다른 이가 열정적으로 반박했다.
“루소는 너무 이상적이야. 현실 정치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몽테스키외 선생의 말씀처럼, 권력은 분립되고 견제되어야 진정한 자유가 보장될 수 있네.” 뤽 모로가 에티엔을 힐끗 보며 말했다.
에티엔이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 “권력 분립도 중요하지만, 그 권력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뤽? 주권은 분할될 수 없는 인민 전체에게 있네! 루소는 바로 그 근본 원리를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네.”
“하지만 그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을 보게. 팔레 루아얄에서는 매일같이 선동가들이 군중을 부추기고 있네. 이성이 아닌 감정과 분노가 앞서는 곳에 진정한 공화국이 설 수 있을까?”
토론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신분제 철폐, 조세 평등, 법 앞의 평등, 종교적 관용, 언론의 자유, 그리고 가장 뜨거운 감자인 삼부회 소집과 제3신분의 역할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충돌하고 정제되면서, 에티엔은 자신의 생각을 더욱 날카롭게 다듬어 나갔다. 그는 단순한 이상주의를 넘어, 현실 정치의 복잡함과 다양한 개혁 방안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카페와 함께 파리의 지적 담론을 형성하는 또 다른 중요한 공간은 살롱(Salon)이었다. 마담 조프랭, 마담 네케르, 마담 드 스탈 등 명망 있는 여성들이 자신의 저택 응접실에서 주최하는 살롱에는 당대의 최고 지식인, 예술가, 정치인들이 모여 교류했다. 에티엔은 아버지 기욤을 따라 몇 번 살롱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그곳의 세련된 분위기와 수준 높은 대화에 감탄했지만, 동시에 여성들이 안주인 역할에 머물 뿐 남성들과 동등하게 토론에 참여하지 못하는 현실(마담 드 스탈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과 귀족 중심의 폐쇄적인 분위기에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카페가 보다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토론의 장이었다면, 살롱은 여전히 구체제의 위계질서가 남아 있는 좀 더 세련되고 통제된 공간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담론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인쇄술의 발달이었다. 책, 팸플릿, 정기 간행물, 신문 등 다양한 형태의 인쇄물들이 계몽사상과 혁명적 이념을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전파시켰다. 정부의 검열이 존재했지만, 금서들은 비밀리에 인쇄되고 유통되었으며, 오히려 금지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에티엔은 서점에서 구하기 힘든 책들을 구하기 위해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뒷골목의 작은 인쇄소를 찾아가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 에티엔은 그런 인쇄소 중 한 곳에서 급진적인 팸플릿을 받아 나오다가 우연히 장 발레와 마주쳤다. 장 발레는 잉크 자국이 묻은 작업복 차림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강렬하고, 무언가에 대한 깊은 확신과 분노가 함께 담겨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학생 양반도 이런 걸 찾으시오?” 장 발레가 에티엔이 숨기려던 팸플릿을 힐끗 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 네. 시대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에티엔은 당황하며 얼버무렸다.
“시대? 시대는 책상머리에 앉아서 아는 게 아니오. 거리에서, 굶주린 배를 움켜쥔 사람들의 눈빛 속에서 알아야지.” 장 발레는 짧게 쏘아붙이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에티엔은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장 발레의 말은 그의 가슴을 날카롭게 찔렀다. 자신은 안전한 서재와 카페에서 이성과 정의를 논하고 있지만, 저 인쇄공은 위험을 무릅쓰고 혁명의 불씨를 퍼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소피 라비뉴와 같은 수많은 민중들은 여전히 굶주림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과연 자신의 이상주의는 현실의 고통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가? ‘이성의 힘’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장 발레와의 짧은 만남은 에티엔에게 또 다른 고민을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티엔은 파리 전체에 퍼져나가는 변화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커피 향 속의 열띤 논쟁, 살롱에서의 세련된 담론, 그리고 인쇄물을 통해 퍼져나가는 새로운 사상들은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 구체제의 낡은 벽을 허물고 있었다. 검열의 칼날도, 특권층의 저항도 이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어 보였다. 아버지 기욤의 우려는 점점 커져갔지만, 에티엔의 마음속에서는 ‘이성의 힘’이 마침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가 더욱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제9장: 빛바랜 영광, 텅 빈 국고의 신음
(1787-1788년)
베르사유 궁전의 눈부신 화려함은 프랑스 왕국의 재정 상태를 가리는 얇은 베일에 불과했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남긴 ‘짐은 곧 국가다’라는 선언은 이제 텅 빈 국고의 신음 소리 앞에서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왕정은 심각한 재정 파탄 위기에 직면해 있었고, 이는 구체제 모순의 가장 첨예하고 직접적인 발현이었다.
위기의 근원은 깊고 복합적이었다. 루이 14세 시대부터 이어진 빈번한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등)은 막대한 비용을 소모했고, 특히 미국 독립 전쟁 참전은 결정타였다. 자유의 이상을 지원한다는 명분 뒤에는 영국의 패권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지만, 그 대가로 프랑스는 천문학적인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 화려한 궁정 생활 유지 비용과 왕족 및 귀족들에게 지급되는 막대한 연금 또한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조세 제도에 있었다. 프랑스의 조세 시스템은 중세 시대의 봉건적 잔재와 지역별 특권이 복잡하게 얽혀 극도로 비효율적이고 불평등했다. 가장 중요한 직접세인 타유(Taille)는 주로 농민들에게 부과되었고, 제1신분(성직자)과 제2신분(귀족)은 대부분 면세 특권을 누렸다. 성직자들은 자발적인 '헌납금(Don gratuit)'을 내는 형식으로 세금을 대신했고, 귀족들은 혈통이나 관직 구매를 통해 다양한 세금 면제 혜택을 받았다. 간접세(소금세(Gabelle), 소비세(Aides), 통행세 등) 역시 징수 방식이 복잡하고 지역마다 세율이 달라 조세 저항과 탈세를 부추겼다. 특히 소금세는 징세 청부업자들이 과도한 이익을 챙기면서 민중의 큰 원성을 샀다. 국가 수입의 대부분이 제3신분, 특히 가난한 농민과 도시 서민에게 의존하는 구조였고, 이는 사회적 불만을 극도로 심화시키는 동시에 국가 재정 기반 자체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루이 16세 정부는 여러 차례 재정 개혁을 시도했다. 튀르고(Turgot), 네케르(Necker)와 같은 개혁 성향의 재정 총감들은 국가 지출 삭감, 행정 효율화, 그리고 특권층에 대한 과세 확대를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번번이 특권층의 강력한 저항과 궁정 내 보수파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1787년, 재정 총감 칼론(Calonne)은 파산 직전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보다 근본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의 계획에는 토지 소유에 따라 모든 신분에게 부과하는 새로운 '토지 보조세(Subvention territoriale)', 인지세 인상, 소금세 완화, 국내 관세 철폐, 곡물 거래 자유화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이었지만, 특권층의 핵심 이익인 면세 특권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것이었다.
칼론은 자신의 개혁안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고등법원의 저항을 우회하여, 왕이 직접 선정한 귀족, 성직자, 고위 관리들로 구성된 '명사회(Assembly of Notables)'를 소집했다. 그는 명사회가 자신의 개혁안을 추인해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명사회는 오히려 개혁안의 세부 내용을 문제 삼고 정부의 재정 운영을 비판하며, 특히 특권층 과세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국가 재정에 대한 통제권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주장하며 칼론을 실각시켰다.
앙투아네트 드 발루아의 아버지는 바로 이 명사회의 일원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 분개하며 말했다. “왕이 우리에게 세금을 물리려 하다니, 가당치도 않다! 발루아 가문이 언제부터 평민들처럼 세금을 냈단 말인가? 이것은 우리의 신성한 권리에 대한 모독이다. 칼론은 당연히 물러나야 했다.” 그의 말에는 귀족으로서의 오만함과 함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묻어났다. 앙투아네트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궁정에서는 연일 파티가 열렸지만, 그녀가 가끔 마차를 타고 지나치는 파리 거리의 풍경은 분명 예전 같지 않았다.
칼론의 뒤를 이은 툴루즈 대주교 브리엔(Brienne) 역시 유사한 개혁안을 추진했지만, 이번에는 파리 고등법원을 비롯한 전국 고등법원들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했다. 고등법원은 왕의 개혁 칙령 등록을 거부하며, 이는 자신들의 전통적인 권한(왕령 심사권)을 행사하는 것이자 국민의 자유를 수호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특히 그들은 새로운 세금 부과는 오직 '삼부회'만이 결정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고등법원이 진정으로 국민의 자유를 걱정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에티엔 드샹은 아버지 기욤에게 물었다. 기욤은 파리 고등법원 소속 변호사였지만, 고등법원의 행태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지.” 기욤이 안경 너머로 아들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속내는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습적인 특권과 영향력을 지키기 위해 '국민'과 '자유'라는 말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삼부회를 요구하는 것도 결국 신분별 표결을 통해 자신들의 면세 특권을 지키려는 얄팍한 술수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불장난을 하고 있는 거다. 한번 터져 나온 민중의 요구는 그들이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설지도 모른다.”
기욤의 예측대로, 고등법원의 저항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절대 왕권에 대한 반감이 높았던 상황에서, 고등법원은 ‘폭정에 맞서는 용감한 수호자’로 미화되었다. 1788년, 왕이 고등법원의 권한을 축소하려 하자 그르노블 등 여러 도시에서 고등법원을 지지하는 소요 사태가 벌어졌다. 군대가 투입되었지만, 시민들은 기왓장을 던지며 저항했고('기와일'), 군대는 결국 철수해야 했다.
궁지에 몰린 루이 16세와 브리엔 정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1788년 8월, 마침내 왕은 브리엔을 해임하고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네케르를 다시 재무 총감으로 임명했으며, 다음 해 5월 1일에 삼부회를 소집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특권층은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했지만,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결정이었다. 텅 빈 국고의 신음 소리는 마침내 프랑스 전체를 뒤흔들 혁명의 거대한 함성으로 이어질 운명이었다. 베르사유의 빛바랜 영광 아래, 낡은 세계의 균열은 돌이킬 수 없이 깊어지고 있었다.
제10장: 멈추지 않는 물레, 더 빨리 더 많이!
(1760년대 - 1780년대)
프랑스에서 구체제의 모순이 곪아 터져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어 갈 무렵, 영국 해협 건너 섬나라 영국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거대한 혁명이 조용하지만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피와 함성이 아닌, 기계 소음과 공장 굴뚝 연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변화, 바로 산업 혁명이었다. 그리고 그 혁명의 초기 동력은 다름 아닌 면직물 산업의 눈부신 기술 혁신에서 나왔다.
18세기 중반 영국, 면직물은 떠오르는 인기 상품이었다. 인도산 캘리코의 매력에 빠진 소비자들은 가볍고 실용적인 면직물을 찾았고, 국내 생산을 자극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수공업 방식으로는 늘어나는 수요를 따라잡기 역부족이었다. 특히 실을 만드는 방적 공정은 옷감을 짜는 방직 공정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했다. 방직공 한 명이 필요로 하는 실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여러 명의 방적공이 물레를 돌려야 했다. 이 '방적 병목 현상'은 어떻게든 더 빠르고 더 많이 실을 생산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갈망을 낳았다.
"데이비드 씨, 올해도 실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요. 가격은 또 어찌나 올랐는지… 이러다가는 우리 공장 문 닫게 생겼소." 맨체스터의 어느 면직물 공장주가 데이비드 브라운의 작업실을 찾아와 하소연했다. 데이비드는 숙련된 기술자였지만, 이런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는 획기적인 해결책을 당장 내놓기는 어려웠다.
기술 혁신의 첫 신호탄은 아이러니하게도 방직 분야에서 먼저 터졌다. 1733년 존 케이가 발명한 '플라잉 셔틀'은 방직 속도를 두 배 가까이 끌어올려 실 부족 현상을 더욱 심화시켰다. 마치 목마른 사람에게 소금물을 준 격이었다. 이제 방적 기술 혁신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1760년대, 마침내 돌파구가 열렸다. 랭커셔의 직조공 출신 제임스 하그리브스는 아내의 물레가 넘어져 방추가 계속 돌아가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한 번에 여러 가닥의 실을 뽑을 수 있는 '제니 방적기'를 발명했다. 그의 딸 제니의 이름을 땄다고 전해지는 이 기계는 비교적 작고 간단하며 사람의 힘으로 돌릴 수 있어, 특별한 동력 장치 없이도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아버지 데이비드가 구해온 제니 방적기 설계도를 보며 감탄했다. “아버지, 정말 기발한 생각이에요! 방추를 여러 개 연결해서 동시에 돌리다니! 이렇게 하면 훨씬 빨리 실을 만들 수 있겠어요.”
“그렇지, 리지. 하지만 제니 방적기로 만든 실은 좀 약하다는 단점이 있단다. 옷감을 튼튼하게 만들려면 더 강한 실이 필요한데 말이야.” 데이비드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버지의 말처럼, 제니 방적기의 한계를 극복하는 또 다른 발명이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 이발사 겸 가발 제조업자였던 리처드 아크라이트는 놀라운 사업 수완과 함께 기계적 재능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769년, 물레 대신 여러 쌍의 롤러를 이용하여 실을 꼬고 늘이는 방식의 '수력 방적기' 특허를 획득했다. 이 기계는 훨씬 굵고 튼튼한 면사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지만, 그 이름처럼 강력한 수력을 동력으로 필요로 했다. 아크라이트는 단순한 발명에 그치지 않고, 더비셔의 크롬퍼드 계곡에 대규모 수력 방적 공장을 세웠다. 그곳에는 수백 명의 노동자(주로 여성과 아동)들이 기계를 돌리고 있었고, 아크라이트는 이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엄격한 규율과 감독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적인 공장제 시스템의 시작이었다.
데이비드 브라운은 아크라이트의 성공 소식을 들으며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아크라이트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시대를 읽는 사업가이지. 그는 기술뿐만 아니라 노동력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냈어. 앞으로 공장은 저런 모습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크롬퍼드 공장의 모습을 상상했다. 수백 개의 방적기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고, 어린 아이들이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풍경. 경이로움과 함께 막연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1779년, 또 다른 중요한 발명이 이루어졌다. 새뮤얼 크럼프턴은 제니 방적기의 장점(가는 실)과 수력 방적기의 장점(튼튼한 실)을 결합하여 '뮬 방적기'를 만들었다. 뮬(Mule, 노새)이라는 이름처럼, 이 기계는 두 기계의 장점을 모두 가진 잡종이었다. 뮬 방적기는 매우 가늘면서도 질긴 최고급 면사를 생산할 수 있게 하여 영국 면직물의 품질 경쟁력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데이비드 브라운과 엘리자베스는 뮬 방적기의 정교한 메커니즘을 분석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버지, 이 기계는 정말 놀라워요! 롤러와 캐리지의 움직임을 이렇게 정교하게 결합하다니!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는 스케치북에 뮬 방적기의 구조를 열심히 그려 넣었다.
“그래, 크럼프턴은 진정한 천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아크라이트처럼 사업 수완이 부족해서 큰돈을 벌지는 못했다고 하더구나. 발명가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보여주는 예이지.” 데이비드는 씁쓸하게 덧붙였다.
방적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엄청난 양의 실을 쏟아냈고, 이제는 옷감을 짜는 방직 공정이 다시 한번 생산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병목 지점이 되었다. 플라잉 셔틀이 속도를 높였지만, 여전히 사람의 손길이 많이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가 바로 에드먼드 카트라이트 목사의 '역직기' 발명(1785)이었다. 그는 직물 공정을 본 적도 없었지만, 방적 공정의 기계화 소식을 듣고 방직 공정도 기계화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가 만든 초기 역직기는 매우 투박하고 비효율적이었으며 잦은 고장을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발명을 비웃었다.
“목사님이 옷감 짜는 기계를 만들었다고? 하하, 차라리 기도를 해서 옷감을 만드는 게 더 빠르겠군!”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수군거렸다.
하지만 카트라이트의 발명은 방직 공정 자동화의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이후 수많은 기술자들의 개량을 거쳐 19세기 초반에는 마침내 실용적인 역직기가 등장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브라운 역시 역직기의 초기 모델 설계도를 보며 아버지와 토론했다.
“아버지, 카트라이트 목사님의 아이디어는 훌륭하지만, 이 캠과 태핏(Tappet)의 움직임이 너무 거칠어요. 실이 끊어지기 쉽고 속도도 일정하지 않을 것 같아요. 좀 더 부드럽고 정밀한 동력 전달 장치가 필요해요.”
“네 말이 맞다, 리지. 아직 해결해야 할 기술적 과제가 많아. 하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이 역직기가 수많은 베틀을 대신하게 될 거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또 한 번 크게 바뀌겠지.”
데이비드와 엘리자베스는 버밍엄의 작은 작업실에서 멈추지 않는 기술 혁신의 흐름을 감지하고 있었다. 수요는 새로운 발명을 낳고, 그 발명은 또 다른 병목 현상과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며 연쇄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물레는 더 빨리 돌아야 했고, 기계는 더 많은 실을 뽑아내야 했다. 더 빨리, 더 많이! 이것이 바로 산업 혁명의 초기 시대를 관통하는 강력한 구호이자,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명령처럼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이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 변화가 가져올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깊은 생각에 잠겼다.
'LLM으로 뽑은 잡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0.1 Ver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3/50 (0) | 2025.04.16 |
---|---|
0.1 Ver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2/50 (0) | 2025.04.16 |
프랑스 혁명 + 산업 혁명: 세상을 바꾼 두근두근 200년 대모험 (1) | 2025.04.15 |
프랑스 혁명 + 산업 혁명: 세상의 코드를 바꾼 200년 (1) | 2025.04.15 |
세기의 스타일: 옷장 문을 열면 역사가 보인다 (0) | 2025.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