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LM으로 뽑은 잡지식

0.1 Ver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2/50

반응형

 

제2부: 1789년, 혁명의 시작

(알랭 마르탱의 목소리)

1789년 봄, 프랑스는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폭풍전야와 같았다. 삼부회 소집 결정은 억눌렸던 민심에 숨통을 틔워주었지만, 동시에 오랜 모순과 갈등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전국 각지에서 작성된 진정서에는 개혁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지만, 그 목소리들은 계급과 지역에 따라 미묘하게 달랐다. 특히 표결 방식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한 절차 문제가 아니라, 프랑스의 미래를 결정할 주권의 소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시에예스의 날카로운 외침,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는 혁명의 방향을 예고하는 서곡과 같았다. 한편, 영국에서는 또 다른 혁명이 진행 중이었다. 맨체스터의 공장은 쉴 새 없이 돌아갔고, 그 안에서 어린 토마스는 기계의 리듬에 맞춰 고된 노동을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기술의 경이로움과 함께 그 이면의 어두운 현실을 목격하며 내적 갈등의 씨앗을 틔우고 있었다. 이제 곧, 프랑스와 영국에서 시작된 두 개의 거대한 물결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참이었다.


제11장: "왕에게 세금을?", 특권층의 반란

(1787-1788년)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함은 여전했지만, 그 안을 채우는 공기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우아한 미소와 가벼운 농담 뒤에는 불안과 불만,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감돌았다. 프랑스 왕국의 재정이 파탄 지경이라는 소문은 더 이상 쉬쉬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궁정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미국 독립 전쟁 지원이라는 ‘명예로운’ 투자의 결과는 국가 부도라는 치욕적인 결과로 돌아올 위기에 처해 있었다.

루이 16세는 선량했지만 결단력이 부족했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꼬리표와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해 끊임없이 민중의 비난 대상이 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정 총감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은 더 이상 임시방편으로는 위기를 넘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1787년 초, 루이 16세에게 파격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 핵심은 ‘토지 보조세’였다. 모든 토지 소유자에게, 신분에 관계없이 소득에 비례하여 세금을 부과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귀족과 성직자의 면세 특권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폭탄선언과 같았다. 칼론은 또한 국내 관세 철폐, 곡물 거래 자유화, 소금세 완화 등 중상주의적 규제를 풀고 경제를 활성화시키려는 조치들도 함께 제안했다.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루이 16세는 마지못해 칼론의 제안을 승인했지만, 문제는 이 개혁안을 어떻게 통과시키느냐였다. 전통적으로 왕의 칙령은 파리 고등법원(Parlement de Paris)을 포함한 전국 고등법원의 등록 절차를 거쳐야 효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특권층의 아성인 고등법원이 순순히 자신들의 면세 특권을 포기하는 법안을 등록해 줄 리 만무했다. 칼론은 고등법원을 우회하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바로 1626년 이후 열리지 않았던 '명사회(Assemblée des Notables)'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명사회는 왕이 직접 선정한 고위 귀족, 성직자, 관료들로 구성된 자문 기구였다. 칼론은 왕이 직접 뽑은 인사들이니만큼 자신의 개혁안을 지지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1787년 2월, 베르사유에서 명사회가 소집되었다. 144명의 명사들 앞에는 프랑스의 재정 상태를 보여주는 암울한 보고서와 함께 칼론의 개혁안이 놓였다. 그러나 칼론의 기대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명사들은 개혁의 필요성 자체는 인정하는 척했지만, 개혁안의 세부 내용, 특히 토지 보조세 도입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앙투아네트 드 발루아의 아버지, 발루아 공작 역시 명사회의 일원이었다. 그는 집에 돌아와 딸과 아들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괘씸한 칼론 같으니! 감히 우리 귀족들에게 평민처럼 세금을 내라니! 이것은 신성 모독이자 조상 대대로 내려온 우리의 권리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그는 왕국의 재정을 파탄 낸 책임을 우리에게 떠넘기려 하고 있어!”

앙투아네트는 아버지의 말에 동조하면서도, 칼론이 제시한 재정 보고서의 충격적인 내용(엄청난 적자 규모)을 떠올리며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하지만 아버지, 정말로 국고가 그렇게 비어 있다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치? 물론 취해야지! 하지만 그 방법이 왜 하필 우리 귀족들의 희생이어야 한단 말이냐! 왕실 경비를 줄이고, 낭비를 막고, 부르주아들에게 더 세금을 걷으면 될 일 아닌가? 칼론은 무능하고 부패한 자일 뿐이다!” 공작은 완강했다.

명사회는 칼론의 개혁안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정부의 재정 운영 전반에 대한 비판과 함께 국가 재정에 대한 통제권을 요구하고 나섰다. 심지어 일부 명사들은 고등법원과 마찬가지로 '삼부회' 소집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칼론은 결국 1787년 4월 해임되었다.

그의 후임으로 툴루즈 대주교이자 명사회 의장이었던 로메니 드 브리엔이 임명되었다. 브리엔 역시 개혁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명사회의 완고한 태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결국 명사회는 아무런 성과 없이 5월에 해산되었다. 브리엔은 이제 고등법원을 직접 상대해야 했다. 그는 칼론의 개혁안을 일부 수정하여 다시 추진하려 했지만, 예상대로 파리 고등법원은 칙령 등록을 거부했다. 고등법원은 자신들이야말로 '국민의 기본권'과 '왕국의 기본법(Lois fondamentales)'을 수호하는 기관이며, 새로운 세금 부과는 오직 삼부회만이 결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웃기는 소리!” 아버지 기욤 드샹은 신문을 내려놓으며 혀를 찼다. 그는 비록 고등법원 소속 변호사였지만, 동료 판사들의 위선적인 행태를 경멸했다. “저들이 언제부터 국민의 권리를 걱정했다고! 자신들의 면세 특권을 지키기 위해 ‘국민’과 ‘자유’를 팔아먹고 있는 것뿐이야. 왕권에 저항하는 모습이 용감해 보일지는 몰라도, 결국 자신들의 낡은 특권을 지키려는 이기적인 몸부림일 뿐이다.”

“하지만 아버지, 많은 시민들이 고등법원을 지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왕의 전횡에 맞서는 유일한 보루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에티엔이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그것이 바로 문제다, 에티엔. 민중은 선동에 취약하다. 고등법원은 교묘하게 자신들을 자유의 투사로 포장하고 있지만,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과거로의 회귀일 뿐이다. 그들이 요구하는 삼부회가 과거 방식대로 열린다면, 제3신분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특권층의 의도대로 끌려갈 뿐이다. 이것은 개혁이 아니라 반동이다.” 기욤은 답답하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1788년, 왕과 고등법원 사이의 갈등은 극으로 치달았다. 왕은 고등법원의 권한을 축소하는 사법 개혁을 강행하려 했고, 고등법원은 이에 맞서 총파업을 선언했다. 전국 각지에서 고등법원을 지지하는 시위와 소요가 잇따랐다. 그르노블에서는 시민들이 군대에게 기왓장을 던지며 저항하는 '기와일' 사건이 벌어져 왕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다. 재정 위기는 더욱 심화되어 국가 부도 사태가 임박했다.

결국 루이 16세는 백기를 들었다. 1788년 8월, 그는 사법 개혁을 철회하고 브리엔을 해임했으며, 민중의 인기가 높았던 네케르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 해 5월 1일에 삼부회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했다. 귀족과 고등법원은 환호했다. 자신들의 저항이 승리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할 운명이었다. 특권층의 반란으로 시작된 정치적 위기는 이제 프랑스 사회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혁명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셈이었다. 텅 빈 국고의 신음은 이제 곧 터져 나올 민중의 함성으로 바뀔 참이었다.


제12장: "우리도 말하자!", 진정서에 담긴 염원

(1788년 겨울 - 1789년 봄)

 

1788년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었다. 프랑스 전역을 덮친 혹독한 추위와 연이은 흉작은 민중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뜨거운 정치적 열기가 얼어붙은 땅 밑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삼부회 소집 결정. 그것은 175년 만에 찾아온 변화의 기회였다. 왕과 특권층의 의도가 어떠했든, 이제 프랑스 전역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삼부회 대표 선출 방식과 진정서 작성 규정은 1789년 1월에 발표되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제3신분 대표 수를 귀족과 성직자 대표 수의 합과 같게 두 배로 늘린다는 결정이었다. 이는 시에예스를 비롯한 제3신분 대변자들의 강력한 요구가 일부 반영된 결과였다. 하지만 여전히 신분별 회의 및 표결 방식은 명확히 정해지지 않아 갈등의 불씨를 남겨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전역은 곧 삼부회 대표 선출과 진정서(Cahiers de doléances, ‘불만 사항 기록부’라는 뜻) 작성이라는 전례 없는 정치 참여의 열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정서 작성은 일종의 여론 수렴 과정이었다. 각 지역의 교구, 길드, 도시 등 다양한 단위에서 모임이 열렸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과 개혁에 대한 바람을 토론하고 기록했다. 물론 이 과정이 완전히 민주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식자층, 특히 부르주아 법률가나 지역 유지들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했다. 가난한 농민이나 도시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직접 반영되기보다는, 종종 이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 걸러지거나 편집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만 건에 달하는 진정서들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와 염원을 담고 있는 생생한 역사 기록이었다.

파리의 부르주아 계급 사이에서도 진정서 작성은 활발했다. 에티엔 드샹은 아버지 기욤이 참여하는 변호사 조합의 모임이나 자신이 속한 구역의 제3신분 예비 회의에 참석하여 열띤 토론을 지켜보았다. 법률가, 상인, 의사, 작가 등 다양한 배경의 부르주아들은 구체제의 모순과 불합리성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권리 신장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무엇보다 먼저, 법 앞의 평등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신분에 따른 차별은 이성의 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한 변호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조세 평등 역시 시급합니다. 왜 우리 제3신분만이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부담해야 합니까? 귀족과 성직자도 당연히 세금을 내야 합니다!” 상인이 주먹을 쥐고 외쳤다.

“자의적인 체포와 구금을 금지하고,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보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기초입니다!” 젊은 작가가 열정적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정기적인 의회 소집을 통해 국민이 국가 운영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국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발전된 입헌 군주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은퇴한 관료가 신중하게 덧붙였다.

에티엔은 이러한 논의들을 들으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계몽사상의 이상이 마침내 현실 정치의 언어로 구체화되고 있었다. 아버지 기욤 역시 대표로 선출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온건하지만 확고하게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편, 파리 빈민가 생탄투안 구역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소피 라비뉴는 진정서니 대표 선출이니 하는 소식에 처음에는 냉담했다. 그런 것들이 당장 자신과 동생의 굶주림을 해결해 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매일 오가는 거리와 시장, 빨래터에서 만나는 이웃들의 목소리는 이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들의 대화에는 체념 대신 분노와 희미한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우리도 진정서를 써야 한다고 하더군. 빌어먹을 빵값 좀 어떻게 해달라고 말이야!” 시장의 생선 장수가 소리쳤다.

“맞아! 지긋지긋한 세금도 좀 줄여달라고 해야 해. 귀족들은 세금 한 푼 안 내고 호의호식하는데!” 구두 수선공이 맞장구를 쳤다.

마담 뒤부아의 아들, 가구 장인 마티유 뒤부아는 얼마 전 동료 장인들과 함께 진정서 작성 모임에 다녀왔다. 그는 글을 제법 쓸 줄 알았기에 사람들의 요구 사항을 기록하는 역할을 했다.

“마티유,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 이야기도 제대로 적었니?” 마담 뒤부아가 아들에게 물었다.

“그럼요, 어머니. 빵값 안정, 과도한 세금 폐지, 길드 규제 완화… 다 적었어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거기 모인 변호사나 상인들은 우리 이야기보다는 무슨 선거권이니, 헌법이니 하는 어려운 이야기만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마티유는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높은 양반들이 우리 사정을 제대로 알 리가 없지.” 마담 뒤부아가 혀를 찼다.

소피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여전히 정치적인 구호들은 멀게만 느껴졌지만, 자신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절박한 목소리가 모여 무언가 변화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작은 희망의 불씨가 그녀의 마음속 어딘가에서 피어오르는 듯했다.

시골 마을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에티엔의 어머니 마리 드샹이 가끔 찾아가는 남편의 고향 마을(만약 있다면)이나, 클레망 신부가 사목하는 본당에서도 진정서 작성이 이루어졌다. 클레망 신부는 가난한 농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려 애썼다.

“우리는 더 이상 영주님께 부당한 공납과 부역을 바칠 수 없습니다. 사냥 독점권도 폐지되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밭을 망치는 비둘기와 토끼를 잡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처사입니다.” 한 농민 대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맞소! 십일조 부담도 너무 과합니다. 주교님들과 수도원은 저렇게 많은 땅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농민이 말을 보탰다.

클레망 신부는 그들의 말을 경청하며 진정서 초안을 다듬었다. 그는 교회의 부패와 특권에 비판적이었고, 가난한 신자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했다. 그는 농민들의 요구 사항과 함께, 지역 교회의 자율성 확보와 하급 성직자 처우 개선에 대한 내용도 조심스럽게 포함시켰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혁명의 바람이 가져올 혼란과 신앙에 대한 위협을 우려하기도 했다.

이처럼 프랑스 전역에서 작성된 진정서들은 구체제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과 개혁에 대한 열망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비록 신분과 계층, 지역에 따라 강조점과 요구 사항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절대 왕정의 전횡을 제한하고, 특권을 폐지하며, 보다 공정하고 합리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이제 더 이상 침묵하는 다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말하기 시작했고, 그 목소리들은 곧 다가올 혁명의 거대한 함성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789년 봄, 프랑스는 기대와 불안 속에서 역사의 새로운 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제13장: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시에예스의 외침

(1789년 1월 이후)

 

1789년 1월, 파리의 서점가에 얇지만 강력한 폭발력을 지닌 팸플릿 하나가 등장했다. 제목은 간결했지만 도발적이었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Qu'est-ce que le Tiers-État?)』. 저자는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신부. 그는 성직자라는 제1신분에 속했지만, 그의 펜 끝은 날카롭게 특권층을 겨누고 제3신분의 권리를 옹호했다. 이 팸플릿은 순식간에 파리 지식인 사회를 강타했고, 곧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혁명적 각성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에티엔 드샹은 카페 프로코프에서 친구가 건네준 이 팸플릿을 밤새워 읽고 또 읽었다. 그의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이 뛰었고, 머릿속은 혁명적인 사상으로 가득 찼다. 시에예스의 논리는 명쾌하고 직설적이었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 팸플릿은 이렇게 시작했다. 시에예스는 프랑스 국민을 구성하고 국가에 필요한 모든 생산적인 활동(농업, 공업, 상업, 전문직 등)을 담당하는 것은 바로 제3신분이며, 따라서 제3신분이야말로 온전한 ‘국민(Nation)’ 그 자체라고 주장했다. 반면, 아무런 생산 활동 없이 특권만을 누리는 제1신분(성직자)과 제2신분(귀족)은 국민 전체의 이익에 기생하는 '짐'일 뿐이며, 국민의 일부가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지금까지 정치 질서에서 무엇이었는가?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에예스는 제3신분이 국가의 실질적인 기반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완전히 무시당하고 억압받아 온 현실을 신랄하게 고발했다. 특권층은 모든 고위 관직과 명예를 독점하고, 제3신분은 온갖 부담만을 짊어진 채 아무런 발언권도 갖지 못했다.

“무엇을 요구하는가? 무언가가 되기를.” 이것이 팸플릿의 핵심 요구였다. 시에예스는 제3신분이 더 이상 무시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마땅히 가져야 할 정치적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가올 삼부회에서 제3신분 대표 수를 다른 두 신분 대표 수의 합과 같게 할 것(Doublement), 세 신분이 함께 모여 합동 회의를 열 것(Vote en commun), 그리고 개인별 투표(Vote par tête)를 실시할 것을 구체적인 요구 사항으로 제시했다. 그는 이것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제3신분 대표들만이라도 독자적으로 모여 스스로를 '국민 의회(Assemblée Nationale)'로 선언하고 헌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이는 사실상 프랑스 정치 체제의 완전한 전복을 예고하는 혁명적 행동 강령이었다.

에티엔은 팸플릿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전율했다. 루소의 추상적인 이론이 시에예스의 명쾌한 논리를 통해 현실 정치의 언어로 번역된 느낌이었다. '국민', '주권', '대표'. 이 단어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살아 움직였다. 그는 더 이상 막연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그림을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 시에예스 신부의 팸플릿을 읽어보셨습니까?” 에티엔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 기욤에게 물었다.

기욤은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읽어보았지. 뛰어난 논객임에는 틀림없다만, 너무 위험하고 선동적인 글이다. 제3신분만이 국민이고 특권층은 적으로 규정하다니… 이것은 화합이 아니라 분열과 내전을 부추기는 주장이다. 그리고 국민 의회를 독자적으로 선언하라는 것은 명백한 반역 행위다.”

“하지만 아버지, 지금 상황에서 타협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특권층은 결코 자신들의 기득권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3신분이 스스로의 힘을 보여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에티엔. 그리고 그 힘이 통제되지 못할 때 어떤 비극이 초래되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우지 않았느냐? 나는 여전히 대화와 타협을 통한 점진적인 개혁이 옳다고 믿는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부자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한편, 파리 뒷골목의 작은 인쇄소에서는 장 발레가 동료 인쇄공 앙투안 루셀과 함께 밤늦도록 시에예스의 팸플릿을 찍어내고 있었다. 잉크 냄새와 종이 넘기는 소리 속에서 장 발레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거야, 앙투안!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다려온 목소리다!” 장 발레는 갓 인쇄된 팸플릿을 흔들며 외쳤다. “시에예스 신부님 말씀대로, 우리 제3신분이 바로 이 나라의 전부다! 더 이상 귀족 놈들 밑에서 개처럼 살 수는 없어!”

“맞아요, 형님! 이 팸플릿을 빨리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해요. 모두가 읽고 깨어나야 합니다!” 앙투안 루셀도 흥분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그래, 서둘러야 한다. 삼부회가 열리기 전에, 우리의 힘을 보여줘야 해.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다. 행동해야 할 때다!” 장 발레는 굳게 주먹을 쥐었다. 그는 시에예스의 글에서 혁명의 이론적 무기뿐만 아니라, 행동의 정당성까지 발견한 것이다. 그는 팸플릿을 통해 혁명의 불씨를 더욱 널리 퍼뜨리고, 다가올 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시에예스의 팸플릿은 파리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것은 카페와 살롱에서 열띤 토론의 주제가 되었고, 삼부회 대표 선출 과정과 진정서 작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제3신분 대표들에게는 강력한 연대감과 투쟁 의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비록 시에예스 자신은 이후 혁명의 급진화 과정에서 로베스피에르 등과 거리를 두게 되지만, 그의 팸플릿은 1789년 혁명의 문을 여는 가장 중요한 열쇠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외침은 프랑스 사회 깊숙이 잠들어 있던 거인을 깨웠고, 이제 그 거인은 자신의 힘을 자각하고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제14장: 잉글랜드의 검은 심장, 탄광의 어둠

(1780년대 후반 - 1790년대 초반)

 

프랑스가 정치적 혁명의 열기로 들끓고 있을 때, 영국에서는 또 다른 종류의 혁명이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산업 혁명의 검은 심장, 바로 석탄이었다. 증기기관의 연료로, 철강 생산의 핵심 원료로 석탄의 중요성은 날로 커져갔고, 영국 북동부의 뉴캐슬, 남부 웨일스, 그리고 중부의 랭커셔 등지에 산재한 탄광들은 쉬지 않고 검은 황금을 파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풍요의 이면에는 광부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남부 웨일스의 어느 탄광촌. 서른 살의 오언 데이비스는 좁고 어두운 갱도 안에서 땀과 탄가루로 범벅이 된 채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고,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열 살 때부터 탄광에서 일해 온 베테랑 광부였다. 머리에는 희미한 불빛을 내는 안전등(초기 형태의 데이비 램프가 보급되기 전에는 더 위험한 촛불이나 기름 등잔을 사용했을 것이다)을 쓰고 있었지만, 주변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등 뒤에서는 어린 소년들이 힘겹게 석탄 수레를 끌고 지나갔고, 더 깊은 곳에서는 메탄가스 폭발을 알리는 불길한 소리가 언제 터져 나올지 모른다는 공포가 늘 도사리고 있었다.

“조심들 해! 얼마 전에 옆 갱도에서 가스가 터져서 세 명이나 죽었다고 하더군!” 함께 일하던 동료 다이(Dai)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알아. 하지만 어쩌겠나? 먹고 살려면 이 짓이라도 해야지.” 오언은 씁쓸하게 대답하며 다시 곡괭이를 휘둘렀다. 그의 폐는 이미 탄가루로 뒤덮여 숨쉬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지만, 가족들을 생각하면 일을 멈출 수 없었다.

탄광 노동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고된 일 중 하나였다. 갱도 붕괴, 가스 폭발, 질식, 홍수 등 사고 위험은 끊이지 않았고, 안전 장비는 거의 전무했다. 좁고 비좁은 갱도 안에서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하루 12시간 이상을 일해야 했고, 점심은 딱딱한 빵 한 조각과 물이 전부였다. 햇빛을 거의 보지 못하고 탄가루 속에서 일하는 광부들은 대부분 진폐증이나 관절염 같은 직업병에 시달렸고, 평균 수명은 매우 짧았다.

더욱 비참한 것은 아동 노동의 현실이었다. 가난한 광부 가정의 아이들은 아주 어린 나이(심지어 5-6세)부터 탄광에서 일을 시작해야 했다. 가장 어린 아이들은 ‘트래퍼(Trapper)’라고 불리며, 하루 종일 캄캄한 갱도 문 옆에 웅크리고 앉아 석탄 수레가 지나갈 때마다 문을 열고 닫는 일을 했다.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공포와 외로움에 떨어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조금 더 자란 아이들은 ‘허리어(Hurrier)’가 되어, 무거운 석탄 수레를 쇠사슬로 허리에 묶고 네 발로 기어가며 운반해야 했다. 이 고된 노동은 아이들의 성장을 방해하고 척추를 휘게 만들었다.

여성들 역시 탄광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많은 여성들이 ‘핏 브로우 걸(Pit Brow Lass)’이라는 이름으로 갱도 입구에서 석탄을 분류하고 운반하는 일을 했다. 때로는 남성들과 함께 지하 갱도에서 수레를 끌거나 석탄을 나르기도 했다. 남루한 작업복(종종 바지 차림)을 입고 탄가루를 뒤집어쓴 채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당시 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그녀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랭커셔 탄광 근처에 사는 젊은 여성 메리 콜리어 역시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탄광 사고로 다리를 저는 바람에 어린 동생들과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갱도 입구에서 석탄 고르는 일을 했다.

“메리, 또 그 험한 일 하러 가니? 여자애가 얌전하게 집에서 바느질이나 할 것이지.” 이웃집 아주머니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어쩔 수 없어요, 아주머니. 우리 식구들 먹여 살리려면 이것밖에…” 메리는 씁쓸하게 대답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작업장에서는 거친 남성 광부들의 성희롱적인 농담이나 감독관의 횡포를 견뎌야 했고, 임금은 남성 노동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녀는 매일 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며, 이 지긋지긋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러한 탄광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처음으로 체계적인 문제 제기를 시작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맨체스터의 의사이자 사회 개혁가인 아서 핀리였다. 그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탄광 지역 주민들이 겪는 끔찍한 질병과 사고의 실태를 직접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단순히 개별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넘어, 문제의 근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탄광촌을 방문하여 노동 환경과 생활 실태를 조사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핀리 선생님, 여긴 사람이 살 곳이 못 됩니다. 제 아들은 열 살 때부터 저 어두컴컴한 굴속에서 일했는데, 결국 폐병으로… 제 남편은 작년에 갱도가 무너져서…” 한 광부의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핀리에게 호소했다.

핀리는 그녀의 말을 꼼꼼히 기록하며 분노와 연민을 느꼈다. 그는 아이들이 당나귀처럼 석탄 수레를 끌고, 여성들이 허리가 휘도록 석탄을 나르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그는 이 모든 비극이 단순히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탐욕스러운 자본주의 시스템과 사회적 무관심이 낳은 결과임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의회에 제출할 보고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들린 펜은 이제 단순한 기록 도구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사회 변화를 촉구하는 무기가 되어야 했다.

초기 증기기관(뉴커먼 엔진 등)이 탄광의 배수 펌프 동력으로 사용되면서 더 깊은 곳까지 채굴이 가능해졌지만, 이는 동시에 더 위험한 작업 환경을 의미하기도 했다. 기술의 발전은 생산성을 높였지만,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는 기여하지 못했다. 잉글랜드의 검은 심장, 탄광의 어둠 속에서는 산업 혁명의 동력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그 불꽃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희생을 연료 삼아 더욱 거세게 타오를 뿐이었다.


제15장: 발명가의 딸, 버밍엄의 지성

(1780년대 후반 - 1790년대 초반)

 

버밍엄에 위치한 데이비드 브라운의 작업실은 엘리자베스에게는 마법과 같은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둘러싸인 곳이기도 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복잡한 기계 장치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때로는 아버지도 미처 생각지 못한 날카로운 질문이나 아이디어를 던지며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버지, 이 증기기관의 실린더 효율을 더 높일 수는 없을까요? 응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 손실이 너무 큰 것 같아요. 만약 응축기를 분리해서…” 엘리자베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설계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데이비드는 딸의 말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흐뭇하게 웃었다.

“리지, 네 생각이 맞다! 와트 씨가 바로 그 방식으로 증기기관을 획기적으로 개선했지. 역시 내 딸이야.” 그는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만약 리지가 아들이었다면… 버밍엄 최고의 기술자가 되었을 텐데.’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의 격려 속에서 수학과 과학 공부에 더욱 매진했다. 그녀는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화학 이론이나 뉴턴의 역학 원리를 독학으로 익혔고, 라틴어와 프랑스어까지 공부하며 유럽 대륙의 최신 과학 기술 정보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아버지의 동료 기술자들이나 루나 소사이어티 회원들과의 대화에 참여하고 싶어 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기회를 얻지 못했다. 남성들만의 지적 사교 모임은 그녀에게 견고한 벽과 같았다.

어머니 엘리너의 잔소리는 더욱 심해졌다. “리지, 제발 그 기름때 묻은 책 좀 그만 보렴! 네 나이 때는 예쁘게 꾸미고 좋은 신랑감 찾을 생각을 해야지. 저 건너편 스미스 씨 댁 딸은 벌써 약혼했다더구나.”

“어머니, 저는 결혼보다 알고 싶은 게 더 많아요. 왜 여자는 남자처럼 배우고 생각하면 안 되나요?” 엘리자베스는 반항심 가득한 목소리로 대꾸했지만, 가슴에는 답답함과 좌절감이 쌓여갔다.

그녀는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녀는 아버지 몰래 남동생의 이름으로 왕립 학회 도서관에 출입하여 책을 빌려보기도 했고, 당시 막 발전하기 시작하던 과학 저널이나 기술 관련 출판물을 구독하여 탐독했다. 그리고 때로는 익명이나 남성의 이름으로 학회나 저널에 질문이나 의견을 담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맨체스터에서 활동하는 젊은 철도 기관차 기술자 아이작 도즈(가상 인물)와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아이작 역시 새로운 기술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인물이었고, 엘리자베스의 날카로운 질문과 깊이 있는 이해력에 감탄했다. 두 사람은 서신을 통해 증기기관의 효율 개선, 새로운 금속 재료의 가능성, 정밀 기계 설계 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엘리자베스에게 아이작과의 편지 교환은 성별의 제약을 넘어 자신의 지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아이작 씨의 말씀처럼, 고압 증기를 사용하는 것은 효율성 면에서는 매력적이지만, 보일러 폭발 위험을 어떻게 제어할지가 관건이겠지요. 저희 아버지께서는 새로운 합금 개발에 몰두하고 계십니다만, 아직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혹시 귀하께서 연구하고 계신 새로운 밸브 디자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엘리자베스가 아이작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

아이작과의 교류는 엘리자베스에게 기술적인 영감을 주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들기도 했다. 아이작은 편지에서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철도 건설 현장의 열악한 노동 조건이나 공장 지대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종종 언급했다. 그는 기술 발전이 가져오는 풍요와 그 이면의 고통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늘도 터널 공사 중에 사고가 있었습니다. 안전 장비만 제대로 갖춰졌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회사는 비용 절감만 생각할 뿐, 노동자들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엘리자베스 양, 우리가 만드는 이 경이로운 기계들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때로는 회의감이 듭니다…’ (아이작이 엘리자베스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

엘리자베스는 아이작의 편지를 읽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 역시 얼마 전 방문했던 면직 공장의 충격적인 모습과 아서 핀리라는 사회 개혁가의 글을 읽으며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기술은 그 자체로 가치 중립적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사용되는 방식과 그 결과에 대해서는 기술자 역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자신의 스케치북 한구석에 이런 질문들을 적어 내려갔다. 단순히 기계를 만들고 개선하는 것을 넘어, 그 기술이 인간의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진보'가 아닐까? 버밍엄의 발명가의 딸, 엘리자베스 브라운의 마음속에는 이제 기술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깊은 윤리적 성찰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다.


제16장: 흉년과 빵값, 들끓는 민심

(1788년 겨울 - 1789년 봄)

 

1788년의 여름 가뭄에 이어 찾아온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다. 센 강이 꽁꽁 얼어붙었고, 파리 시내는 물론 프랑스 전역이 살을 에는 추위에 떨었다. 봄이 되어 얼음이 녹자 이번에는 대홍수가 발생하여 농지를 휩쓸었다. 연이은 자연재해는 가뜩이나 위태롭던 프랑스 경제에 결정타를 날렸다. 곡물 수확량은 급감했고, 이는 곧바로 빵값 폭등으로 이어졌다. 파리 시민들의 주식인 빵 가격은 평년의 두 배 이상으로 치솟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세 배, 네 배까지 오르기도 했다. 굶주림은 더 이상 일부 빈민층만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 노동자와 소상인 등 광범위한 민중의 생계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현실적인 공포가 되었다.

소피 라비뉴의 삶은 그야말로 벼랑 끝에 내몰렸다. 그녀가 아무리 밤낮없이 일해도, 치솟는 빵값을 감당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동생 피에르의 기침은 잦아들지 않았고, 영양 부족으로 얼굴은 더욱 창백해져 갔다. 다락방에는 땔감조차 떨어져 냉기가 감돌았다. 소피는 매일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빵집 앞에 늘어선 긴 줄에 합류해야 했다. 하지만 운이 좋아야 딱딱하게 굳은 작은 빵 한두 조각을 겨우 구할 수 있었고, 허탕을 치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빵집 앞은 언제나 아수라장이었다.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의 절박한 외침과 아이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빵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몸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새치기하지 마시오! 나도 어젯밤부터 여기서 기다렸단 말이오!”

“이보시오, 주인장! 빵값을 이렇게 올려 받으면 우리더러 굶어 죽으라는 거요?”

“내 아이가 굶고 있소! 빵 한 조각만이라도 제발…”

빵집 주인 뒤랑 씨는 밀려드는 항의와 애원에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나라고 별수 있소? 밀가루 값이 금값인데! 나도 밑지고 파는 거요! 빵 없으면 돌아가시오!” 그는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분노한 군중을 향해 총을 겨누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소피는 이런 광경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지켜보며, 간신히 구한 작은 빵 조각을 품에 안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빵조차 동생 피에르에게 먼저 양보해야 했고, 자신은 멀건 수프로 허기를 달랬다. 굶주림은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인간적인 존엄성마저 앗아가는 듯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파리 민중들 사이에는 온갖 유언비어가 흉흉하게 퍼져나갔다. ‘기근 음모설(Pacte de Famine)’이 대표적이었다. 귀족과 투기꾼들이 일부러 곡물을 사재기하고 가격을 올려 민중을 굶겨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와 짜고 프랑스를 망하게 하려 한다고 수군거렸고, 또 어떤 이들은 성직자들이 십일조로 걷어간 곡식을 창고에 쌓아두고 있다고 분노했다. 이러한 소문들은 과학적인 근거는 없었지만, 굶주림과 절망에 빠진 민중들의 분노를 특정 대상에게 집중시키고 집단적인 적개심을 키우는 데 강력한 역할을 했다.

에티엔 드샹 역시 파리 거리에서 이러한 민중의 고통과 분노를 직접 목격했다. 그는 학교를 오가며 빵집 앞에 늘어선 긴 줄과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카페에서 나누던 혁명에 대한 열띤 토론과 이상적인 구상들이, 빵 한 조각 앞에서 절규하는 민중의 현실 앞에서는 공허하게 느껴졌다.

“아버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데, 정부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특권층은 여전히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려 합니다. 이것이 정의입니까?” 에티엔은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기욤 드샹은 착잡한 표정으로 아들의 말을 들었다. “나도 안다, 에티엔. 지금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지. 하지만 분노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야. 레베용 벽지 공장에서 일어난 폭동을 보지 않았느냐? 임금 인하 소문에 격분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파괴하고 약탈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군대의 무자비한 진압과 수백 명의 희생뿐이었다.” (레베용 폭동: 1789년 4월 말 발생)

“하지만 아버지, 굶주린 사람들에게 이성적인 행동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그들의 분노는 정당합니다!”

“분노는 정당할 수 있다. 하지만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리고 저 거리의 분노가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향할지 나는 의문이다. 유언비어와 선동에 휩쓸려 무고한 희생자를 낳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성과 법률에 근거한 질서 있는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에티엔은 아버지의 말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민중의 분노가 가진 파괴적인 힘과 그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혁명과 거리의 굶주린 민중 사이의 깊은 간극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는 민중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면서도, 그들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느꼈다.

1789년 봄, 파리는 말 그대로 끓는 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흉년과 빵값 폭등으로 인한 민중의 고통은 극에 달했고, 귀족 음모설과 같은 유언비어는 분노를 증폭시켰다. 삼부회 소집에 대한 기대감은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 대한 절박한 요구와 뒤섞여 있었다. 사람들의 눈빛은 변해갔고, 거리의 공기는 폭발 직전의 화약 냄새처럼 느껴졌다. 들끓는 민심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프랑스 혁명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제17장: 엇갈리는 시선, 생 미셸 다리에서의 만남

(1789년 4월)

 

1789년 4월의 어느 맑은 봄날 오후, 에티엔 드샹은 센 강변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마음은 다가올 삼부회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그는 방금 전 카페에서 친구들과 헤어진 참이었다. 토론은 여느 때처럼 뜨거웠고, 시에예스의 팸플릿은 여전히 주요 화제였다. '제3신분이야말로 모든 것이다!' 에티엔은 그 말을 속으로 되뇌며 미소 지었다. 마침내 이성과 정의가 승리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확신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가 생 미셸 다리 근처에 이르렀을 때, 한 빵집 앞에서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건장한 빵집 주인과 조수 몇몇이 남루한 옷차림의 사내를 붙잡고 거칠게 몰아세우고 있었다. 사내의 손에는 작은 빵 덩어리가 쥐어져 있었다. 주변에는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 도둑놈! 감히 내 빵을 훔쳐?” 빵집 주인이 사내의 멱살을 잡고 고함쳤다.

“제발… 며칠을 굶었습니다. 아이들이 집에서 울고 있어요…” 사내는 겁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닥쳐라! 변명은 경찰서 가서 해!” 조수 중 하나가 사내를 발로 차려 했다.

바로 그때, 군중 속에서 작지만 당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때리지 마세요! 그만하세요!”

에티엔은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낡고 해진 옷을 입었지만, 야무진 표정의 어린 소녀가 성난 어른들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바로 소피 라비뉴였다. 그녀는 며칠 전,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마레 지구의 한 법률 사무소에 서류를 전달하러 갔다가 길에서 우연히 에티엔과 부딪힐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에티엔은 그녀의 당돌하고 경계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기억하고 있었다.

“네까짓 게 뭘 안다고 나서? 저놈은 도둑이야!” 빵집 주인이 소피를 거칠게 밀치려 했다.

소피는 물러서지 않고 쏘아붙였다. “도둑이라고요? 저 사람은 며칠을 굶었다잖아요! 빵 한 조각 훔친 게 그렇게 죽을죄인가요? 당신들은 매일 배불리 먹으면서, 굶주린 사람의 심정을 알기나 해요?”

그녀의 용감한 항변에 주변 사람들은 잠시 술렁였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에티엔은 순간 강한 연민과 함께 부끄러움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카페에서 자유와 평등을 논하던 자신이, 눈앞의 불의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잠깐만요, 주인장!” 에티엔이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그의 단정하고 귀족적인 풍모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이 분이 훔친 빵 값은 얼마입니까? 제가 대신 내겠습니다.” 그는 지갑을 꺼내 빵 값보다 훨씬 많은 액수의 동전을 빵집 주인에게 건넸다.

빵집 주인은 갑작스러운 귀공자의 등장과 돈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돈을 받아 챙겼다. “허허, 역시 배우신 분은 다르군요. 하지만 저런 놈들은 버릇을 고쳐야…”

“됐습니다. 이제 그만 이 분을 놓아주십시오.” 에티엔은 단호하게 말했다. 빵집 주인은 마지못해 사내를 놓아주었고, 사내는 에티엔에게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고는 황급히 사라졌다.

군중이 흩어지고, 에티엔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소피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함께 여전히 짙은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에티엔은 그녀의 용기에 감탄하며 먼저 말을 건넸다.

“용감한 아가씨로군요. 당신 덕분에 저 사람이 큰 봉변을 면했습니다.”

소피는 에티엔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당신 같은 부자 도련님이 왜 이런 일에 나섰는지 모르겠네요.”

“부자라서가 아닙니다.” 에티엔은 소피의 적대감에 살짝 당황했지만, 자신의 신념을 설명하고 싶었다. “저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누구도 굶주림 때문에 모욕당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곧 삼부회가 열리고 새로운 시대가 오면, 당신과 같은 사람들도 더 이상 고통받지 않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이 될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이상주의적 열정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소피의 표정은 싸늘했다. 그녀는 에티엔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자유? 평등? 그런 건 굶주림이 뭔지 모르는 당신 같은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겠죠. 당장 내일 먹을 빵 한 조각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게 무슨 소용인데요? 당신, 혹시 며칠이라도 굶어본 적 있어요?”

소피의 날카로운 질문은 에티엔의 가슴을 비수처럼 찔렀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이상주의는 그녀의 절박한 현실 앞에서 너무나 공허하고 무력하게 느껴졌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미안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에티엔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는 지갑에서 다시 동전 몇 닢을 꺼내 소피에게 건네려 했다. “이걸로 빵이라도 사세요.”

하지만 소피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됐어요. 당신의 동정은 필요 없어요.” 그녀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에티엔을 한번 더 쏘아보고는, 뒤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에티엔은 잠시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소피 라비뉴라는 소녀는 그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녀의 당돌함, 강인함, 그리고 세상을 향한 불신과 분노. 그것은 그가 책 속에서 배웠던 혁명의 이상과는 너무나 다른, 날것 그대로의 현실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속한 부르주아 계급과 굶주린 민중 사이의 깊은 간극을 절감했다. 과연 혁명은 이 간극을 메우고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오해와 갈등을 낳게 될까? 생 미셸 다리 위에서, 에티엔은 자신의 이상주의가 현실이라는 거대한 시험대 위에 놓였음을 깨달으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와 함께, 혁명의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깊은 고민이 시작되고 있었다.


제18장: 기계 소음 속 첫걸음, 토마스의 눈물

(1780년대 후반 또는 1790년대 초반)

 

맨체스터의 조셉 밀러 면방직 공장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어린 토마스 애쉬워스는 전혀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듯한 느낌에 압도당했다. 그의 고향 요크셔의 고요함과는 정반대로, 공장 내부는 거대한 기계들이 뿜어내는 оглушающий(귀청이 터질 듯한) 소음과 진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공기 중에는 면화 먼지가 자욱하게 떠다녔고, 기름 냄새와 뜨거운 증기가 뒤섞여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넓은 공장 바닥에는 수십 대의 거대한 뮬 방적기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실을 뽑아내고 있었고, 그 사이를 토마스와 비슷한 또래거나 더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 위태롭게 오가며 일하고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움직여! 꾸물거리면 혼날 줄 알아!” 험상궂은 얼굴의 감독관 그림쇼가 소리치며 아이들의 등을 거칠게 떠밀었다. 토마스는 잔뜩 겁을 먹은 채, 다른 아이들을 따라 방적기 옆에 섰다. 그의 역할은 ‘피서(Piecer)’, 즉 빠르게 돌아가는 방적기에서 실이 끊어지면 재빨리 다가가 손으로 이어주는 일이었다.

작업은 생각보다 훨씬 위험하고 고됐다. 수백 개의 방추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 아래를 기어 다니며 끊어진 실을 찾아야 했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빠르게 움직이는 기계 부품에 손가락이나 옷자락이 끼일 위험이 있었다. 실제로 토마스는 첫날부터 손가락을 다쳐 피를 흘리는 아이를 보았고, 그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지만 그림쇼는 아랑곳하지 않고 빨리 일하라고 소리칠 뿐이었다. 공장 안은 안전 장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부상을 당해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벌금을 물거나 해고당하기 십상이었다.

노동 시간은 상상 이상으로 길었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기숙사에서 딱딱한 빵과 묽은 수프로 아침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공장으로 향하면, 해가 지고 별이 뜰 때까지, 점심시간 40분을 제외하고는 꼬박 14시간 이상을 서서 일해야 했다. 중간에 잠시라도 허리를 펴거나 잡담을 나누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림쇼는 매서운 눈으로 작업장을 감시했고,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실수를 하는 아이에게는 가차 없이 채찍을 휘두르거나 벌금을 매겼다. 임금은 터무니없이 낮아서, 토마스는 자신이 이렇게 힘들게 일해도 과연 가족들에게 제대로 된 빵 한 덩이라도 사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함께 일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지치고 핼쑥했으며,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처럼, 아무런 감정 없이 묵묵히 자신의 작업을 반복할 뿐이었다. 토마스는 그 아이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더욱 절망감을 느꼈다. 이곳에서는 인간적인 온기나 연민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 소음과 감독관의 고함 소리, 그리고 노동자들의 깊은 한숨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하루의 고된 노동이 끝나면, 토마스는 다른 아동 노동자들과 함께 공장 근처의 비좁고 더러운 기숙사로 돌아갔다. 수십 명의 아이들이 낡고 삐걱거리는 2층 침대에서 잠을 자야 했고, 이불이라고는 얇고 더러운 담요 한 장이 전부였다. 밤에는 동료 아이들의 뒤척이는 소리, 기침 소리, 그리고 흐느끼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토마스는 딱딱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요크셔의 푸른 들판과 따뜻했던 집, 그리고 아버지의 미소가 떠올라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이 낯설고 차가운 도시, 비정한 기계의 소음 속에서 자신이 완전히 길을 잃었다고 느꼈다.

며칠이 지났을까, 여느 때처럼 끊어진 실을 잇기 위해 방적기 아래를 기어 다니던 토마스는 옆에서 일하던 조금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그 소년은 토마스와 달리 눈빛에 반항기가 어려 있었고, 입가에는 냉소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힘들지, 꼬마야?” 소년이 기계 소음 속에서도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물었다.

토마스는 깜짝 놀라 주위를 살폈지만, 그림쇼는 보이지 않았다. “네… 네.”

“나는 윌 존슨이라고 해. 너는?”

“토마스… 애쉬워스예요.”

“애쉬워스… 새로 왔구나? 여긴 지옥이야. 하루 종일 기계에 매달려 살아야 하고, 쥐꼬리만 한 돈 받아서는 빵 사 먹기도 힘들어. 그림쇼 저 자식은 악마고, 밀러 사장은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지.” 윌은 거침없이 불만을 쏟아냈다.

토마스는 윌의 대담함에 놀라면서도,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으로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요.” 토마스가 힘없이 말했다.

“그래, 우리 모두 사정은 마찬가지지.” 윌은 잠시 침묵하더니, 토마스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래도 너무 기죽지는 마, 토마스. 혼자서는 힘들지만, 우리가 뭉치면 뭔가 달라질 수도 있잖아? 언젠가는 말이야.” 윌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토마스는 윌의 마지막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작은 위안과 함께 희미한 희망 같은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이 지옥 같은 곳에서도 살아남을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윌 존슨과의 짧은 만남은 토마스의 얼어붙었던 마음속에 아주 작은 불씨를 지폈다. 그 불씨는 당장 현실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그의 내면에서 저항의 불길로 타오를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기계 소음 속에서 흘렸던 토마스의 눈물은 더 이상 단순한 슬픔과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애도이자, 다가올 투쟁을 예고하는 뜨거운 눈물이었다.


제19장: 다가오는 운명, 혁명 전야 파리의 공기

(1789년 4월 말)

 

1789년 4월 말, 삼부회 개회를 불과 며칠 앞둔 파리는 뜨거운 열기와 살얼음 같은 긴장감이 교차하는 도시였다. 봄기운이 완연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지난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삼부회 소집에 대한 기대감은 높았지만, 동시에 과연 무엇이 바뀔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과 불신도 깊었다. 정치 팸플릿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고, 카페와 거리 곳곳에서는 삼부회의 대표 수와 표결 방식, 그리고 프랑스의 미래에 대한 열띤 토론과 논쟁이 밤낮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에티엔 드샹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혁명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리고 있었다. 그는 시에예스의 팸플릿을 거의 외울 정도로 읽었고, 자코뱅 클럽의 전신이 될 브르통 클럽(Club Breton) 등의 모임에 참석하며 다른 혁명 지지자들과 교류했다. “마침내 프랑스에도 이성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네! 삼부회는 단순한 회의가 아니라, 국민 주권 시대를 여는 제헌 의회가 될 것이네!” 그는 친구 뤽 모로에게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파리 거리의 불안한 공기도 감지하고 있었다. 며칠 전 발생한 레베용 벽지 공장 폭동 소식은 그에게 깊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레베용 폭동은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성공한 벽지 제조업자 레베용이 선거인단 모임에서 노동자 임금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왜곡되어, 그가 임금 삭감을 주장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빵값 폭등과 경제난에 시달리던 생탄투안 구역 노동자들은 격분했고, 4월 27일과 28일, 수천 명의 군중이 레베용의 저택과 공장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약탈했다. 정부는 군대를 투입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에티엔은 이 사건을 통해 민중의 분노가 얼마나 쉽게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 그리고 정부의 탄압이 얼마나 가혹할 수 있는지를 목격하며 불안감을 느꼈다.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혁명의 모습인가? 민중의 분노를 어떻게 이성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까?’ 그는 밤늦도록 일기장에 자신의 고민을 적어 내려갔다.

소피 라비뉴에게 레베용 폭동은 더욱 직접적인 공포였다. 폭동이 일어난 곳은 바로 그녀가 사는 생탄투안 구역이었고, 그녀는 창문 너머로 성난 군중의 함성과 총소리를 들으며 동생 피에르를 끌어안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녀의 이웃 중 몇몇은 폭동에 가담했다가 다치거나 체포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정치니 혁명이니 하는 건 다 소용없어. 결국 죽어나는 건 우리 같은 가난한 사람들뿐이야.” 마담 뒤부아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피는 마담 뒤부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삼부회에 대한 희미한 기대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살아남는 것, 그리고 이 혼란 속에서 동생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반면, 인쇄공 장 발레에게 레베용 폭동은 혁명의 불가피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였다. 그는 폭동 자체를 옹호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억눌린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정당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보았나, 앙투안? 저것이 바로 굶주린 민중의 힘이다! 이제 더 이상 말로만 떠들 때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조직과 무기다!” 장 발레는 동료 앙투안 루셀과 함께 코르들리에 클럽의 비밀 모임에 참석하여, 삼부회가 민중의 요구를 외면할 경우를 대비한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는 무기를 숨겨둘 장소를 물색하고, 신뢰할 수 있는 동료들을 규합하며 다가올 투쟁을 준비했다.

한편, 파리 귀족 사회는 불안과 동요 속에서 분열하는 모습을 보였다. 앙투아네트 드 발루아의 아버지와 같은 강경파 귀족들은 여전히 특권 유지를 외치며 제3신분의 요구를 묵살하려 했지만, 일부 자유주의 귀족들은 삼부회에서의 타협과 개혁의 필요성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앙투아네트의 오빠 필리프는 친구들과 함께 왕을 호위하고 '폭도'들을 진압할 준비를 해야 한다며 허세를 부렸지만, 그의 눈빛에도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삼부회가 정말로 열린다는군. 파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필리프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말했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왕께서 결단만 내리시면 저 하층민들의 소요쯤은 금방 잠재울 수 있다.” 발루아 공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앙투아네트는 불안한 마음에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조용히 성호를 그을 뿐이었다. 앙투아네트는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 뒤에 숨겨진 귀족 사회의 불안감을 느꼈다. 과연 그들의 세계는 안전할 수 있을까?

파리 주변에는 왕의 명령에 따라 스위스 용병과 독일 기병 연대 등 외국 군대가 속속 집결하고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정부는 질서 유지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파리 시민들은 이것이 국민 의회를 탄압하고 파리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라고 의심했다. 신문과 팸플릿들은 연일 삼부회 대표 수와 표결 방식에 대한 논쟁, 재정 위기 해법, 그리고 군대 이동 소식을 다루며 파리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제20장: 1789년 5월 5일, 역사의 문이 열리다

(1789년 5월 5일)

 

1789년 5월 5일,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았다. 프랑스 전역의 이목은 베르사유 궁전으로 쏠렸다. 1614년 이후 무려 175년 만에 소집되는 전국 삼부회 개회식. 이날은 프랑스 역사, 아니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꿀 거대한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었다. 베르사유 궁전 주변은 이른 아침부터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화려한 마차들이 끊임없이 도착했고, 삼엄한 경비 속에서 각 신분의 대표들이 회의장으로 향했다.

개회식 장소는 베르사유 궁전 부속 건물 중 하나인 '소소한 즐거움의 방(Salle des Menus Plaisirs)'이었다. 이름과는 달리, 이곳은 삼부회를 위해 특별히 개조되어 수백 명의 대표들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하고 화려한 공간이었다. 높은 천장 아래로는 화려한 태피스트리와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고, 단상 위에는 국왕 루이 16세와 왕족들, 그리고 고위 관리들이 앉을 옥좌와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에티엔 드샹은 아버지 기욤과 함께 일찌감치 회의장에 도착했다. 기욤은 파리 제3신분 대표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고, 에티엔은 방청석 한구석에서 이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펜과 노트를 준비했다. 그의 가슴은 기대와 긴장감으로 세차게 뛰고 있었다. '드디어 시작이다! 프랑스의 새로운 역사가 쓰이는 순간이다!'

그러나 회의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에티엔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구체제의 신분 차별은 개회식 절차에서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입장한 것은 제1신분, 즉 성직자 대표들이었다. 화려한 비단 제의를 입은 고위 성직자들(주교, 대주교)과 검소한 검은색 수단을 입은 하급 성직자들이 나뉘어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다음으로 입장한 것은 제2신분, 귀족 대표들이었다. 번쩍이는 검과 깃털 달린 모자, 정교한 자수가 놓인 연미복으로 치장한 그들의 얼굴에는 오만함과 자신감이 넘쳤다. 그들은 왕의 오른편, 성직자 대표들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입장한 것은 제3신분 대표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두 신분과 달리, 검소하고 통일된 검은색 복장을 착용하도록 강요받았다. 이는 명백한 차별이었다. 약 600명에 달하는 제3신분 대표들(변호사, 상인, 의사, 지식인 등 부르주아가 대부분)은 왕의 왼편, 다른 두 신분 대표들보다 약간 낮은 자리에 배치되었다. 에티엔은 아버지 기욤과 다른 제3신분 대표들의 얼굴에서 굳은 표정과 함께 억눌린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시작부터 분위기는 삐걱거리고 있었다.

팡파르 소리와 함께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왕족들이 입장하자 모든 대표들이 기립했다. 왕은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다소 불안하고 피곤해 보였다. 왕비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미소 뒤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왕이 옥좌에 앉자, 장내가 조용해졌다.

루이 16세가 개회 연설을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다소 약하고 떨리는 듯했다. “짐의 신민들이여, 짐은 오늘 왕국의 오랜 전통에 따라 삼부회를 소집하였노라. 짐의 충실한 신민들이 국왕과 함께 국가 재정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왕국의 번영을 위해 지혜를 모아주기를 기대하노라…” 연설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왕은 오직 재정 문제 해결에만 초점을 맞추었을 뿐, 제3신분이 갈망하는 정치 개혁이나 헌법 제정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대표 수 증원이나 표결 방식 문제에 대해서도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왕의 연설이 끝나자, 국새 상서 바랑탱이 왕의 권위를 강조하는 형식적인 연설을 했고, 이어서 재무 총감 네케르가 연단에 올랐다. 모두가 그의 연설에 주목했다. 그가 재정 위기의 구체적인 상황과 해결 방안, 그리고 가장 중요한 표결 방식에 대해 어떤 입장을 밝힐 것인가? 그러나 네케르의 연설은 무려 세 시간에 걸쳐 이어졌지만, 모호한 수사와 지루한 숫자 나열로 가득 차 있었고 핵심 쟁점은 교묘하게 비껴갔다. 그는 재정 적자 규모를 축소 발표하여 문제의 심각성을 은폐하려 했고, 표결 방식에 대해서는 어떤 제안도 하지 않은 채 각 신분의 '희생'과 '화합'만을 강조했다.

제3신분 대표들의 실망감은 극에 달했다. 그들은 단순한 세금 문제 해결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프랑스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왕과 정부는 여전히 과거의 틀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었다.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군!” 한 제3신분 대표가 옆 사람에게 속삭였다.

“표결 방식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어. 이건 우리를 기만하는 거야!”

“가만히 있어서는 안 돼.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해!”

회의장 곳곳에서 불만 섞인 속삭임과 술렁임이 터져 나왔다. 미라보 백작(귀족 출신이지만 제3신분 대표로 선출됨)은 굳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고, 시에예스 신부는 냉담한 표정으로 연설을 듣고 있었다. 에티엔은 방청석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착잡함을 느꼈다. 역사적인 날이라고 기대했지만, 개회식은 오히려 구체제의 완고함과 개혁의 어려움만을 확인시켜 준 셈이었다.

삼부회는 첫날부터 표결 방식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을 예고하며 불안하게 출발했다. 역사의 문은 열렸지만, 그 문턱을 넘어서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었다. 에티엔은 노트에 빠르게 기록을 남겼다. '1789년 5월 5일. 삼부회 개회. 화려함 속의 공허함. 왕과 정부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제3신분의 실망과 분노. 갈등은 불가피해 보인다. 프랑스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의 펜 끝에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함께 깊은 불안감이 묻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