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이상 (李箱)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나요? 나는 유쾌합니다. 이런 상황에선 연애마저 유쾌하게 느껴지죠.
몸이 흐느적거릴 정도로 피곤할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아집니다. 니코틴이 쓰린 속으로 스며들면, 머릿속은 으레 새하얀 백지가 되죠. 그 위에 나는 위트와 역설을 바둑돌 놓듯 늘어놓습니다. 지긋지긋한 상식이라는 병입니다.
나는 또 한 여자와의 생활을 설계합니다. 연애 기술마저 서먹해진 지성의 끝을 엿본 적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석가 같은 여자 말입니다. 그런 여자의 절반―그건 모든 것의 절반이기도 합니다―만을 받아들이는 생활을 설계하는 겁니다. 그런 생활에 한 발만 들여놓고, 마치 두 개의 태양처럼 서로를 마주 보며 낄낄거리는 거죠. 아무래도 나는 인생의 모든 것들이 시시해서 견딜 수 없게 된 모양입니다. 굿바이.
굿바이. 당신도 가끔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일부러 찾아 먹는 아이러니를 실천해 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위트와 역설과…….
당신 자신을 위조하는 것도 해볼 만한 일입니다. 당신의 작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성품처럼, 오히려 더 간편하고 고상할 테니까요.
19세기는 가능하다면 봉인해 버리세요. 도스토옙스키의 정신이란 자칫하면 낭비일 수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를 ‘프랑스의 빵 한 조각’이라고 한 사람은 누구인지, 참으로 적절한 표현입니다. 하지만 인생, 혹은 그 모형에 있어서 '디테일' 때문에 속아서야 되겠습니까?
화를 보지 마세요. 부디 당신께 드리는 말씀이니…….
"테이프가 끊어지면 피가 나오겠죠. 상처도 머지않아 나을 거라고 믿습니다. 굿바이." 감정이란 일종의 '포즈'입니다. (그 '포즈'의 본질만을 말하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포즈가 부동자세 수준으로 고도화될 때, 감정은 딱 멈춰버립니다.
나는 내가 비범하게 성장해온 과정을 돌아보며 세상을 보는 눈을 만들었습니다.
여왕벌과 미망인―세상의 수많은 여자 중에 본질적으로 미망인이 아닌 이가 있을까요? 아니, 모든 여자가 일상 속에서 저마다 '미망인'이라는 내 논리가 뜻밖에도 여성에 대한 도발이 될까요? 굿바이.
그 33번지라는 곳은 구조가 꼭 유곽(사창가)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한 번지에 열여덟 가구가 어깨를 맞대고 죽 늘어서 있는데, 창문과 아궁이 모양이 모두 똑같습니다. 게다가 각 집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꽃처럼 젊습니다.
해가 들지 않습니다. 그들이 해가 드는 것을 일부러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턱밑에 빨랫줄을 매고 얼룩진 이불을 널어 말린다는 핑계로 미닫이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막아 버립니다. 침침한 방 안에서 다들 낮잠을 잡니다. 그들은 밤에는 잠을 자지 않는 걸까요?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밤이나 낮이나 잠만 자기 때문에 그런 걸 알 길이 없습니다. 33번지 열여덟 가구의 낮은 참 조용합니다.
조용한 것은 낮뿐입니다. 어둑어둑해지면 그들은 이불을 걷습니다. 전등이 켜진 뒤의 열여덟 가구는 낮보다 훨씬 화려합니다. 해가 질 무렵부터 미닫이 여닫는 소리가 잦아집니다. 분주해집니다. 여러 가지 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생선 굽는 냄새, 향수 냄새, 쌀뜨물 냄새, 비누 냄새.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도 그들의 문패가 가장 고개를 끄덕이게 만듭니다.
이 열여덟 가구를 대표하는 대문이라는 것이 모퉁이에 외따로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있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한 번도 닫힌 적이 없는, 길이나 마찬가지인 대문입니다. 온갖 장사치들은 하루 중 어느 때라도 이 대문을 통해 드나들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문간에서 두부를 사는 게 아니라, 미닫이를 열고 방 안에서 두부를 삽니다. 이렇게 생긴 33번지 대문에 열여덟 가구의 문패를 전부 붙이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은 어느샌가 각자 미닫이 위, '백인당'이니 '길상당'이니 써 붙인 팻말 옆에 문패를 다는 풍습을 만들어냈습니다.
내 방 미닫이 위 한쪽에 성냥갑만 한 내—아니! 내 아내의 명함이 붙어 있는 것도 이 풍습을 따른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사도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아내 외에는 누구와도 인사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내 외의 다른 사람과 인사를 하거나 어울리는 것은 아내 보기에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아내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아내를 소중히 여긴 이유는, 이 33번지 열여덟 가구 중에서 내 아내가 아내의 명함처럼 가장 작고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열여덟 가구에 저마다 들어앉은 꽃송이들 가운데서도 내 아내는 유독 아름다운 한 떨기 꽃으로, 이 양철지붕 밑 해 안 드는 곳에서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따라서 그런 한 떨기 꽃을 지키고—아니, 그 꽃에 매달려 사는 나라는 존재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거북하고 불편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물론입니다.
나는 내 방이—집이 아닙니다. 집은 없습니다.—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방 안의 온도는 내 체온에 쾌적했고, 방 안의 침침한 정도 또한 내 시력에 쾌적했습니다. 나는 내 방보다 더 서늘한 방도, 더 따뜻한 방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보다 더 밝거나 더 아늑한 방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내 방은 오직 나 하나를 위해 이 정도의 상태를 꾸준히 지켜주는 것 같아 늘 고마웠고, 나는 또 이런 방을 위해 태어난 것만 같아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행복이나 불행을 따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고, 그렇다고 불행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냥 그날그날 아무 이유 없이 빈둥거리며 게으르게 지내면 그만이었던 겁니다.
내 몸과 마음에 옷처럼 딱 맞는 방에서 뒹굴며 축 늘어져 있는 것은,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세속적인 계산을 떠난, 가장 편리하고 안일한, 말하자면 절대적인 상태입니다. 나는 이런 상태가 좋았습니다.
이 절대적인 내 방은 대문에서부터 세어 정확히 일곱 번째 칸입니다. 럭키 세븐의 의미가 없지 않습니다. 나는 이 '7'이라는 숫자를 훈장처럼 사랑했습니다. 이런 내 방이 가운데 미닫이문으로 두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이 내 운명의 상징이었음을 누가 알았을까요? 아래채는 그래도 해가 듭니다. 아침에는 책보만 한 해가 들었다가 오후에는 손수건만 하게 작아지며 사라집니다. 해가 전혀 들지 않는 위채가 바로 내 방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렇게 해 드는 방이 아내 방, 해 안 드는 방이 내 방이라고 아내와 나 둘 중 누가 정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불만이 없습니다.
아내가 외출만 하면 나는 얼른 아래채로 건너가 동쪽으로 난 작은 창문을 열어젖힙니다.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아내의 화장대를 비추면, 각양각색의 병들이 무지갯빛으로 찬란하게 빛납니다. 이렇게 빛나는 것을 보는 것은 나의 둘도 없는 오락입니다. 나는 조그만 돋보기를 꺼내 아내만 쓰는 화장지를 태우며 불장난을 합니다. 볼록렌즈로 햇빛을 모아 한 점을 뜨겁게 달구면, 마침내 종이가 그을리기 시작하며 가느다란 연기를 내뿜다 구멍이 뚫립니다. 그 짧은 순간의 초조한 맛이 죽고 싶을 만큼 재미있었습니다.
이 장난이 싫증 나면 나는 또 아내의 손거울을 가지고 놉니다. 거울이란 자기 얼굴을 비출 때만 실용품입니다. 그 외의 경우에는 그저 장난감일 뿐이죠. 이 장난도 금방 싫증이 납니다.
나의 놀이는 육체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넘어갑니다. 나는 거울을 내던지고 아내의 화장대로 다가가 나란히 놓인 각양각색의 화장품 병들을 들여다봅니다. 그것들은 세상 무엇보다도 매력적입니다. 나는 그중 하나를 골라 조심스럽게 마개를 열고 병 입구를 코에 댄 채 숨죽이듯 가볍게 숨을 들이마십니다. 이국적이고 관능적인 향기가 폐로 스며들면, 저절로 눈이 스르르 감기는 것을 느낍니다. 분명 아내 체취의 일부입니다.
나는 다시 병마개를 닫고 생각해 봅니다. 아내의 어느 부분에서 이 냄새가 났던가를……. 하지만 분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내의 체취는 여기 늘어선 각양각색 향기들의 총합일 테니까요.
아내의 방은 늘 화려했습니다. 내 방은 벽에 못 하나 박혀 있지 않은 소박한 모습인 반면, 아내 방에는 천장 아래로 빙 둘러 못이 박혀 있고 못마다 화려한 아내의 치마와 저고리가 걸려 있습니다. 여러 가지 무늬가 보기 좋습니다. 나는 그 옷 조각들을 보며 늘 아내의 몸과, 그 몸이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포즈를 상상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늘 점잖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나에게는 옷이 없었습니다. 아내는 내게 옷을 주지 않았습니다. 입고 있는 코듀로이 양복 한 벌이 잠옷이자 평상복, 그리고 외출복을 겸했습니다. 그리고 목까지 올라오는 스웨터 한 장이 사계절 내내 입는 내의입니다. 모두 색이 검습니다. 아마 빨래를 최대한 하지 않아도 보기 흉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짐작합니다. 나는 허리와 양쪽 다리, 세 군데 모두 고무줄이 들어간 부드러운 속바지를 입고 조용히 잘 놀았습니다.
어느덧 손수건만 해졌던 햇볕이 사라졌는데도 아내는 외출에서 돌아오지 않습니다. 나는 이만해도 좀 피곤했고, 아내가 돌아오기 전에 내 방으로 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내 방으로 건너갑니다. 내 방은 침침합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낮잠을 잡니다. 한 번도 갠 적 없는 내 이불은 내 몸의 일부처럼 무척 반갑습니다. 잠이 잘 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온몸이 쑤시면서 도무지 잠이 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아무 주제나 하나 골라 연구했습니다. 나는 축축한 이불 속에서 참 여러 가지 발명도 했고, 논문도 많이 썼습니다. 시도 많이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내가 잠드는 순간, 방 안에 가득 찬 축축한 공기 속으로 비누처럼 풀어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한숨 자고 깨어난 나는, 속이 무명천이나 메밀 껍질로 빵빵하게 찬 베개 같은, 한 덩어리 신경 뭉치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빈대가 무엇보다도 싫었습니다. 하지만 내 방에서는 겨울에도 빈대 몇 마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내게 근심이 있었다면 오직 이 빈대를 미워하는 근심뿐이었을 겁니다. 나는 빈대에게 물려 가려운 자리를 피가 나도록 긁었습니다. 쓰라립니다. 그것은 은밀한 쾌감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나는 몽롱하게 잠이 듭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불 속 사색 생활에서도 무언가 적극적인 것을 궁리하는 법이 없습니다. 내게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만약 내가 그런 적극적인 무언가를 생각해 냈을 경우, 나는 반드시 아내와 의논해야 할 것이고, 그러면 틀림없이 아내에게 꾸지람을 들을 것입니다. 나는 꾸지람이 무섭다기보다는 성가셨습니다. 내가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일을 해보는 것도,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는 것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동물처럼 그저 게으른 것이 좋았습니다. 될 수만 있다면 이 무의미한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지고 싶었습니다.
나에게는 인간 사회가 어색했습니다. 생활이 어색했습니다. 모두가 서먹서먹할 뿐이었습니다.
아내는 하루에 두 번 세수합니다.
나는 하루에 한 번도 세수하지 않습니다.
나는 새벽 세 시나 네 시쯤 화장실에 갔습니다.
달이 밝은 밤에는 한참 동안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들어오곤 합니다. 그러니 나는 이 열여덟 가구의 누구와도 얼굴을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열여덟 가구 젊은 여자들의 얼굴을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 아내만 못했습니다.
오전 열한 시쯤 하는 아내의 첫 세수는 간단한 편입니다. 하지만 저녁 일곱 시쯤 하는 두 번째 세수는 손이 많이 갑니다. 아내는 낮보다 밤에 더 좋고 깨끗한 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낮에도 외출하고 밤에도 외출했습니다.
아내에게 직업이 있었을까요? 나는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아내에게 직업이 없었다면, 똑같이 직업 없는 나처럼 외출할 필요가 없을 텐데… 아내는 외출합니다. 외출할 뿐만 아니라 손님도 많습니다. 아내에게 손님이 많은 날은, 나는 온종일 내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어야만 합니다.
불장난도 못 합니다. 화장품 냄새도 못 맡습니다. 그런 날은 나는 의식적으로 우울해했습니다. 그러면 아내는 내게 돈을 줍니다. 50전짜리 은화입니다. 나는 그것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걸 어디에 써야 할지 몰라 늘 머리맡에 던져 두었는데, 어느새 꽤 많이 모였습니다. 어느 날 이것을 본 아내는 금고처럼 생긴 저금통을 사다 주었습니다.
나는 한 푼씩 그 안에 넣었고, 열쇠는 아내가 가져갔습니다. 그 후에도 나는 가끔 은화를 그 저금통에 넣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나는 게을렀습니다. 얼마 후 아내의 머리에 못 보던 보석 박힌 비녀가 하나 여드름처럼 돋아난 것은, 바로 그 저금통의 무게가 가벼워졌다는 증거였을까요? 하지만 나는 끝내 머리맡에 두었던 그 저금통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내 게으름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기조차 싫어했습니다.
아내에게 손님이 있는 날은 이불 속으로 아무리 깊이 들어가도 비 오는 날만큼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나에게 왜 늘 돈이 있는지, 왜 이렇게 돈이 많은지 연구했습니다. 손님들은 미닫이문 저편에 내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아내와 나조차 하기 어려운 농담을 아주 서슴없이 던집니다. 하지만 아내를 찾은 서너 명의 손님들은 늘 비교적 점잖았다고 볼 수 있는데, 자정이 조금 지나면 으레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는 교양이 꽤 낮은 사람도 있는 듯했는데, 그런 사람은 보통 음식을 사 와서 먹고 놀았습니다.
그렇게 그럭저럭 별일 없이 지냈습니다. 나는 우선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지 연구하기 시작했지만, 좁은 시야와 부족한 지식으로는 알아내기가 힘들었습니다. 나는 끝내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지 모르고 말 것 같습니다.
아내는 늘 새 버선만 신었습니다. 아내는 밥도 지었습니다. 아내가 밥 짓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언제나 끼니때가 되면 내 방으로 아침저녁 식사를 날라다 주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나와 아내 외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밥은 분명 아내가 직접 지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한 번도 나를 자기 방으로 부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늘 위채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잠을 잤습니다.
밥은 너무 맛이 없었습니다. 반찬도 너무 부실했습니다. 나는 닭이나 강아지처럼 말없이 주는 먹이를 넙죽넙죽 받아먹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서운하게 생각한 적도 없지 않았습니다.
나는 얼굴이 핏기 없이 창백해지며 말라갔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기운이 줄어드는 게 눈에 보였습니다. 영양 부족으로 온몸의 뼈가 앙상하게 드러났습니다. 하룻밤 사이에도 수십 번을 뒤척이지 않으면 등이 배겨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불 속에서 아내가 늘 쓰는 그 돈의 출처를 파헤치는 한편, 미닫이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아래채의 목소리가 무엇인지 간단히 연구했습니다.
나는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깨달았습니다. 아내가 쓰는 그 돈은, 내게는 그저 실없는 사람들로밖에 보이지 않는 정체 모를 손님들이 놓고 가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하지만 왜 그 손님들은 돈을 놓고 갈까요? 왜 내 아내는 그 돈을 받아야 할까요? 이런 예의에 관한 관념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예의에 불과한 것일까요? 아니면 혹시 무슨 대가일까요? 보수일까요? 내 아내가 그들의 눈에는 동정을 받아야만 할 가련한 사람으로 보였던 걸까요?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으레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곤 했습니다. 잠들기 전 얻는 결론이라고는 오직 불쾌하다는 것뿐이었지만, 나는 그런 것을 아내에게 물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귀찮기도 하거니와, 한숨 자고 일어나면 나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이것저것 다 깨끗이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손님들이 돌아가거나, 외출에서 돌아오면 아내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 방으로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불을 들추고는 내게 아주 생기 있는 목소리로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려 합니다. 나는 조소도, 쓴웃음도, 박장대소도 아닌 묘한 웃음을 얼굴에 띠고 아내의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봅니다. 아내는 방그레 웃습니다. 하지만 그 얼굴에 떠도는 한 줄기 슬픔을 나는 놓치지 않습니다.
아내는 내가 배고파하는 것을 능히 눈치챌 것입니다. 하지만 아래채에서 먹고 남은 음식을 내게 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를 존경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는 배가 고프면서도, 그런 대우에 내심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아내가 뭐라고 지껄이고 갔는지는 기억에 남을 리 없습니다. 다만 내 머리맡에 아내가 놓고 간 은화가 전등 불빛에 희미하게 빛나고 있을 뿐입니다.
그 금고 모양 저금통 속에 은화가 얼마나 모였을까요? 하지만 나는 그것을 들어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무런 의욕도 바람도 없이, 단춧구멍처럼 생긴 틈으로 은화를 떨어뜨릴 뿐이었습니다.
왜 아내의 손님들이 아내에게 돈을 놓고 가는지가 풀 수 없는 의문인 것처럼, 왜 아내가 내게 돈을 놓고 가는지도 나에게는 똑같이 풀 수 없는 의문이었습니다.
내가 비록 아내가 돈을 놓고 가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단지 그 은화가 내 손가락에 닿는 순간부터 저금통 입구로 사라지기까지의 하찮고 짧은 촉감이 좋았을 뿐, 그 이상의 기쁨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그 저금통을 화장실에 갖다 버렸습니다. 그때 저금통 속에는 얼마가 들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은화가 꽤 들어 있었습니다.
내가 지구 위에 살며, 내가 사는 이 지구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광활한 우주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참으로 허망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부지런한 지구 위에서는 현기증이 날 것 같아 한시라도 빨리 내려 버리고 싶었습니다.
이불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난 뒤에는, 은화를 저금통에 넣고 또 넣는 것조차 귀찮아졌습니다. 나는 아내가 직접 저금통을 사용했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금통도, 돈도, 사실은 아내에게만 필요한 것이지 내게는 애초에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으니까요. 될 수만 있다면 아내가 그 저금통을 자기 방으로 가져갔으면 하고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내 방으로 가져다줄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 무렵에는 아내의 손님이 워낙 많아서 내가 아내 방에 가 볼 기회가 도무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화장실에 던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나는 서글픈 마음으로 아내의 꾸지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말도 안 할뿐더러, 여전히 돈은 돈대로 머리맡에 놓고 가지 않겠어요! 내 머리맡에는 어느덧 은화가 꽤 많이 모였습니다.
손님이 아내에게 돈을 놓고 가는 것이나 아내가 내게 돈을 놓고 가는 것이나, 일종의 쾌감—그 외에 다른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을, 나는 또 이불 속에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쾌감이라면 어떤 종류의 쾌감일까, 계속해서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불 속 연구로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쾌감, 쾌감. 나는 뜻밖에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흥미를 느꼈습니다.
아내는 물론 나를 늘 감금하다시피 해왔습니다. 내게 불평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그 '쾌감'이라는 것의 유무를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아내가 밤에 외출한 틈을 타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는 거리에서 잊지 않고 챙겨 나온 은화를 지폐로 바꿨습니다. 5원이나 되었습니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나는 목적지를 잃어버리기 위해 한없이 거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거리는 거의 경이로울 만큼 내 신경을 흥분시켰습니다. 나는 금세 피곤해졌습니다.
하지만 나는 참았습니다. 그리고 밤이 깊어지도록 이유도 잊은 채 이 거리 저 거리를 목적 없이 헤맸습니다. 돈은 물론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돈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미 돈을 쓰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았습니다.
나는 더 이상 피로를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가까스로 집을 찾았습니다. 내 방에 가려면 아내 방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내에게 손님이 있을지 없을지 걱정하며 미닫이 앞에서 조심스럽게 기침을 한 번 했습니다. 그러자, 정말이지 너무나도 당혹스럽게 미닫이가 열리며 아내의 얼굴과 그 등 뒤에 낯선 남자의 얼굴이 이쪽을 내다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쏟아지는 불빛에 눈이 부셔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나는 아내의 눈초리를 못 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모른 체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나는 어쨌든 아내의 방을 통과해야만 하니까요…….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무엇보다도 다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불 속에서 가슴이 울렁거리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습니다. 걸을 때는 몰랐는데 숨이 찼습니다. 등에 식은땀이 쭉 흘렀습니다. 나는 외출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이런 피로를 잊고 어서 잠이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한숨 푹 자고 싶었습니다.
얼마 동안 비스듬히 엎드려 있었더니, 차츰 두근거리던 심장이 가라앉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우선 살 것 같았습니다. 나는 몸을 돌려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워 다리를 쭉 뻗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래채에서 아내와 그 남자가 내 귀에도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소리가 미닫이문 틈으로 전해져 왔던 것입니다. 청각을 더 예민하게 하려고 나는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숨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아내와 남자가 앉았던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서는 참이었습니다. 옷과 모자를 챙기는 소리가 나는 듯하더니, 이내 미닫이가 열리고 구두굽 소리가 났습니다. 마당으로 내려서는 소리가 '쿵' 하고 나자, 뒤따르는 아내의 고무신 소리가 두어 발짝 '찍찍' 하고, 이내 두 사람의 발소리가 대문 쪽으로 사라졌습니다.
나는 아내의 이런 태도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아내는 어떤 사람과도 결코 속삭이는 법이 없습니다. 나는 위채에서 이불을 쓰고 누워 있는 동안, 혹시 술에 취해 혀가 꼬인 손님들의 대화는 더러 놓칠 때가 있어도 아내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는 단 한마디도 놓쳐본 적이 없었습니다.
가끔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도, 그것이 태연한 목소리로 들렸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랬던 아내의 이런 태도는, 분명 그 속에 보통이 아닌 사정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좀 서운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나는 너무 피곤해서 오늘만은 이불 속에서 아무것도 연구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고 잠을 청했습니다. 잠은 좀처럼 오지 않았습니다. 대문간에 나간 아내도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는 흐지부지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꿈속에서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거리의 풍경을 여전히 헤매고 있었습니다.
나는 몹시 흔들렸습니다. 손님을 보내고 들어온 아내가 잠든 나를 잡아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아내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습니다. 나는 눈을 비비고 아내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분노가 서린 눈초리, 파르르 떨리는 얇은 입술. 좀처럼 이 노여움은 풀릴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습니다. 벼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나 거친 숨소리와 함께 부스스 아내의 치맛자락 소리가 나더니, 미닫이가 여닫히고 아내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려 이불을 뒤집어쓰고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렸습니다. 배가 고픈 와중에도 오늘 밤의 외출을 또 한 번 후회했습니다.
나는 이불 속에서 아내에게 사과했습니다. 그건 당신 오해야… 나는 정말로 밤이 아주 깊은 줄로만 알았어. 당신 말대로 자정 전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나는 너무 피곤했어. 오랜만에 너무 많이 걸은 게 잘못이야.
내 잘못이라면 그게 전부야. 외출은 왜 했냐고? 나는 머리맡에 저절로 모인 그 5원을 아무에게라도 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뿐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내 잘못이라면 그렇게 알겠어. 나도 후회하고 있잖아. 내가 만약 그 5원을 써버릴 수 있었다면, 자정 안에 집에 돌아오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거리는 너무 복잡했고 사람은 너무 많았어. 나는 누구를 붙잡고 그 5원을 줘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고. 그러는 동안 나는 완전히 지쳐버리고 말았던 거야.
나는 무엇보다도 쉬고 싶었어. 눕고 싶었다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온 거야. 내 짐작으로는 밤이 꽤 늦은 줄 알았는데, 불행히도 그게 자정 전이었다니 참 안된 일이야. 미안해. 나는 얼마든지 사과할 수 있어. 하지만 끝내 아내의 오해를 풀지 못한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사과하는 보람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한심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 나는 이렇게 초조해하며 안절부절못해야 했습니다. 나는 이불을 홱 걷어차고 일어나 미닫이를 열고 아내 방으로 비틀비틀 달려갔습니다. 내게는 거의 의식이 없었습니다.
나는 아내의 이불 위로 엎어지면서, 바지 주머니에서 그 5원을 꺼내 아내 손에 쥐여 준 것을 간신히 기억할 뿐입니다.
이튿날 잠이 깨었을 때, 나는 아내의 방, 아내의 이불 속에 있었습니다. 이곳 33번지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 내가 아내 방에서 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해가 창문에 훨씬 높이 떴는데, 아내는 이미 외출하고 곁에 없었습니다. 아니, 어젯밤 내가 의식을 잃은 동안에 외출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따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만 온몸이 찌뿌둥한 것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습니다. 책보보다 조금 작은 면적의 햇살이 눈부셨습니다. 그 속에서 수많은 먼지가 마치 미생물처럼 춤을 추었습니다. 코가 꽉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이불을 푹 뒤집어쓴 채 낮잠을 자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코를 스치는 아내의 체취는 꽤 도발적이었습니다. 나는 몇 번이고 몸을 뒤척이며, 아내의 화장대에 늘어선 각양각색 화장품 병들의 마개를 열었을 때 풍기던 냄새를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견디다 못해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 내 방으로 갔습니다. 내 방에는 차갑게 식어버린 내 밥상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아내는 내 먹이를 여기에 두고 나간 것입니다. 나는 우선 배가 고팠습니다. 숟가락으로 밥을 한 술 떠 입에 넣었을 때, 그 차가운 감촉은 마치 재처럼 서늘했습니다. 나는 숟가락을 놓고 내 이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룻밤 비었던 내 이불은 여전히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번에는 정말 늘어지게 한숨 잤습니다. 아주 잘.
내가 잠에서 깬 것은 전등이 켜진 뒤였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니, 돌아왔다가 다시 나갔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걸 생각해서 뭐하겠습니까? 정신이 한결 맑아졌습니다. 나는 지난밤의 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5원을 아내 손에 쥐여주고 쓰러졌을 때 느꼈던 쾌감을, 나는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손님들이 아내에게 돈을 놓고 가는 심리와, 아내가 내게 돈을 놓고 가는 심리의 비밀을 알아챈 것 같아 무척 즐거웠습니다.
나는 속으로 빙그레 웃어 보았습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오늘까지 지내온 내 자신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밤에도 외출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나는 또 어젯밤 그 5원을 한꺼번에 아내에게 줘버린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 저금통을 화장실에 던져 버린 것도 후회했습니다. 나는 맥없이 실망하며, 습관처럼 그 5원이 들어 있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휘저어 보았습니다. 뜻밖에도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습니다. 2원이었습니다. 돈이 많아야만 좋은 것은 아닙니다. 얼마라도 있으면 됩니다. 나는 그만한 돈이 무척이나 고마웠습니다.
나는 기운을 얻었습니다. 나는 그 다 떨어진 코듀로이 양복 한 벌을 걸치고, 배고픈 것도 초라한 꼴도 다 잊어버리고, 팔을 흔들며 또 거리로 나섰습니다. 나서면서 나는 제발 시간이 화살처럼 흘러 자정이 휙 지나가 버렸으면 하고 조바심을 냈습니다. 아내에게 돈을 주고 아내 방에서 자는 것은 정말 좋았지만, 만약 실수로 자정 전에 집에 들어갔다가 아내의 눈총을 맞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나는 해가 지도록 길거리 시계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면서, 목적 없이 거리를 방황했습니다. 하지만 이날은 좀처럼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시간이 너무 더디게 가는 것만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경성역 시계가 확실히 자정을 넘긴 것을 본 뒤에야 나는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날은 대문 앞에서 아내와 어떤 남자가 서서 이야기하는 것을 마주쳤습니다. 나는 모르는 척 두 사람 곁을 지나 내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뒤이어 아내도 들어왔습니다. 들어와서는 한밤중에 평생 안 하던 청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아내가 눕는 기척을 엿보자마자, 나는 또 미닫이를 열고 아내 방으로 가서 그 2원을 아내 손에 덥석 쥐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오늘 밤에도 그 2원을 쓰지 않고 도로 가져온 것이 참 이상하다는 듯 내 얼굴을 몇 번이고 쳐다보더니, 마침내 아무 말 없이,
나를 자기 방에서 재워주었습니다. 나는 이 기쁨을 세상의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편안히 잘 잤습니다.
이튿날도 내가 잠에서 깼을 때 아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또 내 방으로 가서 피곤한 몸을 뉘고 낮잠을 잤습니다. 아내가 나를 흔들어 깨웠을 때는 역시 불이 켜진 뒤였습니다. 아내는 자기 방으로 나를 오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또 처음이었습니다. 아내는 얼굴에 계속 미소를 띤 채 내 팔을 이끌었습니다. 나는 이런 아내의 태도 뒤에 심상치 않은 음모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적잖이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아내가 하자는 대로 아내 방으로 끌려갔습니다. 아내 방에는 조촐한 저녁 밥상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나는 이틀을 굶었습니다. 나는 지금 배가 고픈지조차 가물가물 잊어버리고 어리둥절해하던 참이었습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 최후의 만찬을 먹고 나서 바로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는 인간 세상이 너무나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던 참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성가시고 귀찮았지만, 예상치 못한 재난이라는 것은 즐겁습니다.
나는 마음을 푹 놓고 조용히 아내와 마주 앉아 이 기묘한 저녁밥을 먹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대화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밥을 먹은 뒤에도 나는 말없이 스르르 일어나 내 방으로 건너가 버렸습니다. 아내는 나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벽에 기대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벼락이 떨어지려거든 어서 떨어져라 하고 기다렸습니다.
오 분! 십 분!
그러나 벼락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긴장이 차츰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어느덧 오늘 밤에도 외출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돈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돈은 확실히 없었습니다. 오늘은 외출해도 나중에 돌아올 기쁨이 있을까? 눈앞이 그저 캄캄했습니다. 나는 화가 나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리저리 뒹굴었습니다. 방금 먹은 밥이 자꾸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랐습니다. 메스꺼웠습니다.
하늘에서 얼마라도 좋으니 왜 지폐가 소나기처럼 쏟아지지 않는 걸까? 그것이 한없이 야속하고 슬펐습니다.
나는 이렇게밖에 돈을 구할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불 속에서 좀 울었나 봅니다.
왜 돈이 없냐면서…….
그랬더니 아내가 또 내 방으로 왔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아마 이제야 벼락이 떨어지려나 보다' 하고 숨을 죽인 채 두꺼비처럼 납작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내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말소리는 참으로 부드럽고 다정했습니다. 아내는 내가 왜 우는지 안다고 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지 않느냐고.
나는 어이없이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사람 속을 이리도 훤히 들여다볼까 싶어 한편으로 슬그머니 겁이 나기도 했지만,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아마 내게 돈을 줄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좋은 일일까. 나는 이불 속에 똘똘 말린 채 고개도 들지 않고 아내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자, 여기요" 하고 내 머리맡에 내려놓는 것은, 그 가벼운 소리로 보아 지폐가 틀림없었습니다. 그리고 내 귓가에 대고 "오늘은 어제보다 더 늦게 돌아와도 좋아요" 하고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우선 그 돈이 무엇보다도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어쨌든 밖으로 나섰습니다. 나는 야맹증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밝은 거리로 돌아다니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경성역 1, 2등석 대합실 한쪽에 있는 찻집에 들렀습니다. 그것은 내게 큰 발견이었습니다. 그곳은 우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설령 왔다가도 금방 가버리니 좋았습니다. 나는 매일 여기 와서 시간을 보내리라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무엇보다 이곳 시계가 다른 어떤 시계보다도 정확하리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섣불리 엉터리 시계를 보고 시간을 착각해서 자정 전에 집에 돌아갔다가 큰코다쳐서는 안 됩니다.
나는 빈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잘 끓인 커피를 마셨습니다. 바삐 오가는 승객들도 잠시 앉아 마시는 한 잔의 커피가 즐거운 모양입니다. 얼른 마시고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벽을 잠시 쳐다보다가 곧 나가 버립니다. 서글픈 풍경입니다. 하지만 내게는 이 서글픈 분위기가 번화가 찻집들의 거추장스러운 분위기보다 훨씬 절실하게 와닿았고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따금 들려오는 날카롭거나 우렁찬 기적 소리가 모차르트보다도 더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메뉴에 적힌 몇 가지 안 되는 음식 이름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것들은 어딘가 아른거리는 것이, 내 어릴 적 친구들 이름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중에 손님이 슬슬 줄어들고 이 구석 저 구석 정리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아마 문 닫을 시간이 된 모양입니다. 열한 시가 좀 지났구나. 여기도 결코 내가 머무를 곳은 아니구나. 어디 가서 자정을 넘길까?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밖으로 나섰습니다. 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빗발이 제법 굵은 것이, 비옷도 우산도 없는 나를 고생시킬 작정인 듯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기괴한 차림으로 찻집 안에서 꾸물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에라, 비를 맞으면 맞았지’ 하고 그냥 나서 버렸습니다.
날씨가 몹시 쌀쌀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코듀로이 옷이 젖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속까지 축축하게 스며들었습니다. 비를 맞으면서라도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거리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려 했지만, 이제는 쌀쌀해서 더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자꾸 오한이 들면서 이가 딱딱 부딪혔습니다. 나는 걸음을 늦추며 생각했습니다. '오늘 같은 궂은날에도 아내에게 손님이 있을까? 없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으로 가야겠다. 만약 불행히도 아내에게 손님이 있다면 내 사정을 이야기하리라. 사정을 이야기하면, 이렇게 비가 오는 것을 보고 알아주겠지.
부리나케 와 보니, 그러나 아내에게는 손님이 있었습니다. 나는 너무 춥고 몸이 젖어 얼떨결에 문을 두드리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내가 보면 좋아하지 않을 장면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나는 젖은 발자국을 내며 덤벙덤벙 아내 방을 지나 내 방으로 가서, 흠뻑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몸이 덜덜 떨렸습니다. 오한이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땅이 꺼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튿날 내가 눈을 떴을 때, 아내는 내 머리맡에 앉아 제법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감기에 걸렸습니다. 여전히 으슬으슬 춥고 머리가 아팠습니다. 입안은 씁쓸하고 침이 고였으며, 팔다리가 축 늘어져 기운이 없었습니다. 아내는 내 이마를 짚어 보더니 약을 먹어야겠다고 했습니다. 아내의 손이 이마에 차갑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열이 꽤 높은 모양이었습니다. 약을 먹는다면 해열제를 먹어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는데, 아내는 따뜻한 물과 함께 하얀 알약 네 개를 주었습니다. 이것을 먹고 한숨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넙죽 받아먹었습니다. 쌉쌀한 맛이, 짐작건대 아스피린인 듯했습니다.
나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대로 죽은 듯이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나는 콧물을 훌쩍이며 여러 날을 앓았습니다. 앓는 동안 끊임없이 그 알약을 먹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감기도 나았습니다. 하지만 입맛은 여전히 소태처럼 썼습니다.
나는 차츰 또 외출하고 싶은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내게 외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약을 매일 먹고 가만히 누워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괜히 외출했다가 이렇게 감기에 걸려서 자기를 고생시키는 게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 말도 맞았습니다. 그럼 외출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그 약을 계속 먹으며 몸보신을 좀 해야겠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매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낮으로 잤습니다. 유난히 밤낮으로 졸려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잠이 자꾸 오는 것이, 내 몸이 훨씬 튼튼해졌다는 증거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나는 아마 한 달쯤 이렇게 지냈나 봅니다. 머리와 수염이 너무 자라 덥수룩해서 견딜 수가 없어 거울을 좀 보려고, 아내가 외출한 틈을 타 아내 방으로 가서 화장대 앞에 앉아보았습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수염과 머리가 참으로 덥수룩했습니다.
오늘은 이발을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겸사겸사 그 화장품 병들의 마개를 뽑아 이것저것 냄새를 맡아보았습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향기 속에서 몸이 배배 꼬일 듯한 아내의 체취가 풍겨 나왔습니다. 나는 아내의 이름을 속으로만 한 번 불러보았습니다. "연심아—" 하고……. 오랜만에 돋보기 장난도 하고, 거울 장난도 했습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무척 따뜻했습니다. 생각해보니 5월이 아니던가.
나는 커다랗게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아내의 베개를 베고 벌러덩 드러누웠습니다. 이렇게 편안하고 즐거운 세월을 하느님께 실컷 자랑해주고 싶었습니다. 나는 세상의 그 무엇과도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하느님도 아마 나를 칭찬할 수도, 벌할 수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실로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것은 수면제, 아달린 약통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아내의 화장대 밑에서 발견하고, 그것이 아스피린과 흡사하게 생겼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약통을 열어보았습니다. 정확히 네 알이 비어 있었습니다.
나는 오늘 아침에 '아스피린' 네 알을 먹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잤습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도……. 나는 졸려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감기는 다 나았는데도……. 아내는 내게 아스피린이라고 하며 약을 주었습니다. 내가 잠든 동안 이웃에 불이 난 적도 있습니다. 그때도 나는 자느라 몰랐습니다. 그렇게 나는 계속 잤습니다. 나는 아스피린인 줄 알고, 한 달 동안 아달린을 먹어 온 것입니다. 이것은 좀 너무 심합니다.
갑자기 눈앞이 아찔해지더니,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습니다. 나는 그 아달린 약통을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산을 찾아 올라갔습니다.
인간 세상의 그 무엇도 보기가 싫었습니다. 걸으면서 나는 어떻게든 아내와 관련된 일은 일절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길에서 쓰러지기 쉬우니까요. 나는 어디든 양지바른 곳을 골라 자리를 잡고, 차분히 아내에 관해 연구할 작정이었습니다. 나는 길가의 돌, 본 적도 없는 개나리꽃, 종달새, 돌멩이도 새끼를 낳는다는 이야기, 이런 것들만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길에서 졸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벤치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곳에 똑바로 앉아, 그 아스피린과 아달린에 관하여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워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귀찮다는 생각과 함께 심술이 났습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가져온 아달린을 꺼내 남은 여섯 알을 한꺼번에 질겅질겅 씹어 먹어 버렸습니다. 맛이 묘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 벤치 위에 길게 가로누웠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내가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그러고 싶었습니다. 나는 거기서 그대로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잠결에도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졸졸, 언제까지나 귓가에 어렴풋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잠을 깼을 때는 날이 환히 밝은 뒤였습니다. 나는 거기서 꼬박 하루 하고도 하룻밤을 잔 것입니다. 풍경이 온통 노랗게 보였습니다. 그 속에서도 나는 번개처럼 아스피린과 아달린이 생각났습니다.
아스피린, 아달린, 아스피린, 아달린, 마르크스, 맬서스, 마도로스, 아스피린, 아달린…….
아내는 한 달 동안 아달린을 아스피린이라고 속여 내게 먹였습니다.
그것은 아내 방에서 이 아달린 약통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증거가 너무나 명백합니다.
무슨 목적으로 아내는 나를 밤낮으로 재워야 했을까? 나를 밤낮으로 재워놓고, 내가 자는 동안 아내는 무슨 짓을 했을까? 나를 조금씩 죽이려던 것일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한 달 동안 먹은 것이 정말 아스피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내가 무슨 근심이 있어서 밤에 잠을 못 자, 정작 자기가 아달린을 썼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정말 미안한 일입니다. 내가 아내를 이렇게까지 의심했다는 것이 참으로 안됐습니다.
나는 그래서 서둘러 거기서 내려왔습니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어질어질했지만, 나는 겨우 집을 향해 걸었습니다. 여덟 시 가까이였습니다.
나는 내 잘못된 생각을 전부 털어놓고 아내에게 사죄하려 했습니다. 나는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또다시 노크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랬더니, 이건 정말 큰일이었습니다. 나는 내 눈으로 절대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딱 보고야 만 것입니다.
나는 얼떨결에 냉큼 미닫이를 닫았습니다. 그리고 현기증을 진정시키려고 잠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기둥을 짚고 서 있는데, 1초의 여유도 없이 홱 미닫이가 다시 열리더니,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아내가 불쑥 튀어나와 내 멱살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지러워서 그 자리에 나뒹그러졌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넘어진 내 위에 덮치면서 살을 마구 물어뜯는 것이었습니다. 아파 죽겠습니다. 나는 사실 반항할 의사도 힘도 없어서 그냥 납작 엎드려 어떻게 되나 보고 있는데, 뒤이어 남자가 나오는 듯하더니 아내를 한 아름에 덥석 안아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아무 말 없이 다소곳이 그렇게 안겨 들어가는 모습이 내 눈에는 몹시도 미웠습니다. 밉다.
아내는 “너 밤새도록 도둑질하러 다니냐, 계집질하러 다니냐!”라며 발악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너무 억울했습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너야말로 나를 살해하려던 것 아니냐!”라고 소리라도 한번 지르고 싶었지만, 그런 애매한 소리를 섣불리 입 밖에 냈다가는 무슨 화를 당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억울하지만 잠자코 있는 것이 우선 상책인 듯싶어, 나는—이것도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툭툭 털고 일어나 바지 주머니에 남은 몇 원 몇십 전을 가만히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몰래 미닫이를 열고 살며시 문지방 밑에 돈을 놓고, 그대로 줄행랑을 쳐서 나와 버렸습니다.
여러 번 자동차에 치일 뻔하면서도 나는 경성역으로 찾아갔습니다. 빈자리에 마주 앉아 이 쓰디쓴 입맛을 가시기 위해 무엇으로든 입가심을 하고 싶었습니다.
커피! 좋습니다. 그러나 경성역 홀에 한 걸음 들어섰을 때, 나는 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을, 그것을 깜빡 잊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다시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나는 어디선가 그저 맥없이 머뭇거리며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넋 나간 사람처럼 그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어디로 어떻게 미친 듯이 쏘다녔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몇 시간 뒤, 내가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습니다.
나는 거기 아무 데나 주저앉아 내가 살아온 스물여섯 해를 돌아보았습니다. 몽롱한 기억 속에서는 이렇다 할 만한 장면 하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또 내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 하지만 있다고도, 없다고도 대답하기가 싫었습니다. 나는 거의 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 어려웠습니다.
허리를 굽혀 나는 그저 금붕어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금붕어들은 참 예쁘게도 생겼습니다. 작은 놈은 작은 놈대로, 큰 놈은 큰 놈대로 모두 싱싱하니 보기 좋았습니다. 쏟아져 내리는 오월의 햇살에 금붕어들은 어항 바닥에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지느러미는 하늘하늘, 손수건을 흔드는 시늉을 합니다. 나는 이 지느러미 수를 세어보기도 하면서 굽힌 허리를 좀처럼 펴지 않았습니다. 등이 따뜻했습니다.
나는 또 혼탁한 거리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곳에서는 피곤한 삶이 꼭 금붕어 지느러미처럼 흐느적거리며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에 엉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피로와 굶주림으로 무너져 내리는 몸을 이끌고 그 혼탁한 거리 속으로 섞여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길을 나서며 나는 또 문득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발길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가……. 그때 내 눈앞에 아내의 목이 벼락처럼 떠올랐습니다. 아스피린과 아달린.
우리들은 서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설마 아내가 아스피린 대신에 아달린을 정해진 양만큼 나에게 먹여 왔을까?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다. 아내가 그럴 까닭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면 나는 밤을 새우며 도둑질을, 계집질을 했는가? 정말이지 아니다.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걸음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나나 아내나 자기 행동에 논리를 붙일 필요는 없다. 변명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며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이 발길이 아내에게로 돌아가야 옳은지, 이것만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가야 하나? 그럼 어디로 가나?
그때, 뚜-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팔다리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았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으며 소란을 떠는 듯한 찰나! 그야말로 현란함이 극에 달한 정오였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지워진 페이지가 사전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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