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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M으로 뽑은 잡지식

현진건 - 운수 좋은 날 (현대어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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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 - 운수 좋은 날

운수 좋은 날

현진건 (2025년 현대어 버전)

눈이라도 올 것처럼 잔뜩 찌푸린 날씨였지만, 눈 대신 얼다 만 진눈깨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이날은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를 끄는 김첨지에게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운수 좋은 날이었다. 사대문 안에 사는 앞집 사모님을 전차 정류장까지 모셔다드린 것을 시작으로, 혹시나 손님이 있을까 정류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애원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교사로 보이는 양복 입은 신사를 동광학교까지 태워주게 되었다.

첫 손님에게 30전, 두 번째 손님에게 50전. 아침 일찍부터 이 정도면 괜찮은 벌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지지리도 없어서 거의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 했던 김첨지였다. 10전짜리 동전 서너 개, 대여섯 개가 손바닥에 찰칵하고 떨어질 때 그는 거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더구나 오늘 번 이 80전이라는 돈이 그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될지 몰랐다. 칼칼한 목을 막걸리 한 잔으로 축일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앓고 있는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을 사다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내가 기침을 콜록거리기 시작한 지는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조밥조차 굶기 일쑤인 형편이니 약 한 번 써 본 적이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못 쓸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병에 약을 쓰면, 병이 버릇이 되어 자꾸 찾아온다’는 그만의 고집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니 의사에게 보인 적도 없어 무슨 병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똑바로 누워 일어나기는커녕 몸을 돌려 눕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 분명 심각한 병이었다. 병이 이토록 심해진 것은 열흘 전, 조밥을 먹고 체한 탓이었다. 그때도 김첨지가 오랜만에 돈을 벌어 좁쌀 한 되와 땔감 한 단을 사다 주었다. 그러자 김첨지의 말에 따르면, 그 ‘망할 여자’가 마음만 급해서 냄비에 허겁지겁 밥을 안쳤다고 했다. 불길은 약하고 마음은 조급해 채 익지도 않은 밥을, 그 ‘망할 여자’가 숟가락도 없이 손으로 우겨넣었다. 뺨이 터져라 허겁지겁 먹어대더니만, 그날 저녁부터 가슴이 답답하다, 배가 아프다며 눈을 희번덕이며 난리를 쳤다. 그때 김첨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에이, 이 망할 여자야! 가난한 살림엔 복도 없지. 못 먹어서 병, 먹고 나서 병!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왜 눈을 똑바로 못 떠!”

그는 앓는 아내의 뺨을 한 대 후려갈겼다. 희번덕이던 눈은 조금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눈물이 맺혔다. 그 모습을 보는 김첨지의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아내는 그러고도 먹는 것에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사흘 전부터는 설렁탕 국물이 마시고 싶다며 남편을 졸라댔다.

“이 망할 여자야! 조밥도 제대로 못 넘기는 주제에 설렁탕은 무슨. 그거 처먹고 또 난리 치려고.”

그렇게 야단을 쳤지만, 못 사주는 그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이제 설렁탕을 사줄 수 있다. 앓는 엄마 곁에서 배고프다고 보채는 세 살배기 아들 개똥이에게 죽이라도 사줄 수 있다. 80전을 손에 쥔 김첨지의 마음은 더없이 든든했다.

하지만 그의 행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땀과 빗물이 뒤섞여 흐르는 목덜미를 기름때 묻은 수건으로 닦으며 학교 문을 나설 때였다. 뒤에서 “인력거!”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부른 사람이 그 학교 학생이라는 것을 김첨지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학생은 다짜고짜 물었다.

“남대문역까지 얼마예요?”

아마 학교 기숙사에 살다가 겨울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가려는 모양이었다. 오늘 떠나기로 마음은 먹었는데 비는 오고 짐은 많아 어쩔 줄 모르다가, 마침 지나가는 김첨지를 보고 급히 뛰어온 것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왜 구두도 제대로 신지 못해 질질 끌고, 비록 낡은 학생복일지언정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그를 뒤쫓아 왔겠는가.

“남대문역까지 말입니까?”

김첨지는 순간 망설였다. 비를 맞으며 우산도 없이 그 먼 길을 질척거리며 가기 싫어서였을까? 아니면 아침에 번 돈으로 만족해서였을까? 결코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 행운이 오히려 조금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집을 나설 때 아내가 했던 부탁이 마음에 걸렸다. 앞집에서 손님을 부르러 왔을 때,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내는 유난히 크고 푹 꺼진 눈에 애원하는 빛을 담고 있었다.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제발, 내가 이렇게 아픈데 집에 좀 있어 줘요….”

모기 소리처럼 속삭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김첨지는 대수롭지 않게 쏘아붙였다.

“아, 진짜 빌어먹을 소리 하고 있네. 우리가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있으면 누가 먹여 살려준대?”

그렇게 뿌리치고 나오려는데, 아내는 붙잡으려는 듯 팔을 뻗으며 말했다.

“그래도 나가지 말라니까. 정 가야겠으면… 일찍 들어와요.”

목이 멘 소리가 그의 등 뒤를 따랐다.

역까지 가자는 말을 듣는 순간, 경련하듯 떨던 손, 울 것 같던 아내의 커다란 눈이 김첨지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래서 남대문역까지 얼마냐고요?”

학생은 초조한 듯 그를 재촉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인천 가는 기차가 열한 시에 있고, 다음 차는 두 시던가….”

“1원 50전만 주십시오.”

자기도 모르게 엄청난 액수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뱉어놓고 보니 스스로도 놀랄 만큼 큰돈이었다. 이렇게 큰돈을 불러본 게 대체 얼마 만인가. 그 순간, 돈을 벌고 싶은 욕심이 아픈 아내에 대한 걱정을 집어삼켰다. ‘설마 오늘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있겠어.’ 그는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에 번 돈을 합친 것보다 두 배는 더 많은 이 행운을 놓칠 수는 없었다.

“1원 50전은 너무 비싼데요.”

학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닙니다, 손님. 여기서 거기까지 거리가 4킬로미터는 족히 넘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비 오는 궂은날에는 돈을 좀 더 쳐주셔야죠.”

김첨지는 빙그레 웃었다. 그의 얼굴에는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좋아요. 달라는 대로 드릴 테니 빨리 갑시다.”

마음이 너그러운 젊은 손님은 그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짐을 가지러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을 태우고 달리는 김첨지의 다리는 이상하게 가벼웠다. 달린다기보다 거의 나는 것 같았다. 인력거 바퀴도 어찌나 빨리 구르는지, 마치 스케이트를 타고 얼음 위를 미끄러져 나가는 듯했다. 얼어붙은 땅 위로 비가 내려 길이 미끄러웠던 탓도 있었다.

얼마 후, 인력거를 끄는 그의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자기 집 근처에 가까워진 탓이었다. 불현듯 걱정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아내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푹 꺼진 눈이 원망스럽게 자신을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엉엉 우는 아들 개똥이의 울음소리가, 딸꾹질하며 넘어가는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저씨, 왜 이래요! 기차 놓치겠네!”

손님의 다급한 외침이 겨우 그의 귀에 꽂혔다. 정신을 차려보니, 김첨지는 인력거를 쥔 채 길 한복판에 멈춰 서 있었다.

“예, 예!”

김첨지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집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그의 발걸음에는 다시 신이 붙었다. 쉴 새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근심과 걱정을 잊으려는 듯, 그는 미친 듯이 다리를 놀렸다.

역까지 손님을 내려주고, 꿈만 같던 1원 50전을 손에 쥐었을 때, 그는 4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비를 맞으며 달려온 고생은 까맣게 잊고 그저 공돈이라도 생긴 듯 고맙고 기뻤다. 졸부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자기 자식뻘밖에 안 되는 젊은 손님에게 몇 번이나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하지만 빈 인력거를 끌고 이 빗속을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일하느라 흘렸던 땀이 식자, 굶주린 배와 흠뻑 젖은 옷에서 스멀스멀 한기가 올라왔다. 그제야 1원 50전이라는 돈이 얼마나 값지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역을 떠나는 그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온몸이 오그라들며 당장 그 자리에 쓰러져 못 일어날 것만 같았다.

“젠장, 이 비를 맞으면서 빈 수레를 끌고 돌아가야 한다니. 빌어먹을 비는 왜 남의 얼굴만 골라 때리는 거야!”

그는 잔뜩 화를 내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거칠게 소리쳤다. 바로 그때, 그의 머릿속에 새로운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이러고 그냥 갈 게 아니라, 이 근처에서 기차가 오길 기다리면 또 다른 손님을 태울 수 있을지도 몰라.’ 오늘 이상하게 운수가 좋으니, 그런 행운이 또 없으리란 법도 없지 않은가. 그는 행운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내기를 해도 좋을 만큼 강한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역 앞에 터를 잡은 인력거꾼들의 텃세가 무서워 대놓고 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예전에도 몇 번 해봤던 것처럼, 역 앞 전차 정류장에서 조금 떨어진 길가에 인력거를 세워두고 주변을 맴돌며 상황을 살폈다. 얼마 후 기차가 도착했고, 수십 명의 승객이 정류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서 손님을 찾던 김첨지의 눈에 한 여자가 들어왔다. 파마머리에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망토까지 두른 것이, 은퇴한 기생 같기도 하고 노는 여학생 같기도 했다. 그는 슬그머니 그 여자 곁으로 다가갔다.

“아씨, 인력거 타시지요.”

그 여자는 한껏 멋을 부린 채 입술을 꾹 다물고 김첨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김첨지는 마치 구걸하는 거지처럼 계속해서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씨, 역전 인력거꾼들보다 훨씬 싸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댁이 어디십니까?”

그는 능청스럽게 여자가 든 일본식 바구니에 손을 갖다 댔다.

“왜 이래요, 귀찮게!”

여자는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며 돌아섰다. 김첨지는 움찔하며 물러섰다.

전차가 도착했다. 김첨지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전차에 오르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전차가 승객을 가득 싣고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타지 못하고 남은 손님이 하나 있었다. 커다란 가방을 든 것을 보니, 붐비는 차 안에서 짐이 크다는 이유로 차장에게 밀려난 듯했다. 김첨지는 얼른 다가섰다.

“인력거 타시지요.”

한동안 요금을 두고 실랑이를 벌인 끝에, 60전을 받고 인사동까지 태워주기로 했다. 손님을 태워 인력거가 무거워지자 그의 몸은 이상하게 가벼워졌고, 손님을 내리고 인력거가 가벼워지자 몸은 다시 무거워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음까지 초조해졌다. 집안의 풍경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려 더 이상 행운을 바랄 여유도 없었다. 그는 나무토막처럼 무감각해진, 제 것 같지도 않은 다리를 재촉하며 정신없이 뛸 수밖에 없었다. “저 인력거꾼, 술에 취했나. 저런 질퍽한 길을 어떻게 가려고.” 길 가던 사람들이 걱정할 만큼 그의 걸음은 다급했다. 흐린 하늘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황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창경원 앞에 다다라서야 그는 턱까지 차오른 숨을 돌리며 걸음을 늦췄다. 한 걸음, 한 걸음 집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마음은 이상하게 차분해졌다. 하지만 이 차분함은 안도감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덮칠 끔찍한 불행을 확인하게 될 순간이 임박했음을 직감하는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는 불행과 마주하기 전까지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려보려고 발버둥 쳤다. 기적같이 큰돈을 벌었다는 기쁨을 가능한 한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그 모습은 마치 불행이 기다리는 집으로 달려가는 자신의 다리를 스스로 멈출 수 없으니, 제발 누구라도 나 좀 붙잡아 구해달라고 외치는 듯했다.

그때 마침 길가 선술집에서 친구 치삼이가 나왔다. 얼굴이 울긋불긋 살이 찐 치삼이는 턱과 뺨이 시커먼 구레나룻으로 뒤덮여 있었다. 반면 김첨지는 누렇게 뜬 얼굴이 바싹 말라 여기저기 주름이 깊게 패고, 턱 밑에만 솔잎 뭉치를 거꾸로 붙여놓은 듯한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어 둘의 모습은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어이, 김첨지! 자네 시내 나갔다 오는 모양이군. 돈 많이 벌었을 테니, 한잔 사게.”

뚱뚱보가 마른 친구를 보자마자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덩치와는 다르게 부드럽고 싹싹했다. 김첨지는 이 친구를 만난 것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랐다. 마치 자기를 구해준 은인처럼 고맙기까지 했다.

“자네는 벌써 한잔 걸친 모양이군. 오늘 자네도 운이 좋았나 보네.”

김첨지가 얼굴을 펴고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아, 운이 안 좋아야 술 못 마시나. 근데 자네 꼴이 왜 물에 빠진 생쥐 같아? 어서 이리 들어와서 몸 좀 녹여.”

선술집 안은 훈훈하고 따뜻했다. 추어탕 끓이는 솥뚜껑이 열릴 때마다 흰 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고, 석쇠에서는 너비아니, 제육볶음, 간, 콩팥, 북어, 빈대떡 등이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었다. 지저분하게 안주가 널린 탁자 앞에 앉자, 김첨지는 갑자기 속이 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기 있는 음식을 모조리 집어삼켜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우선 양 많은 빈대떡 두 개와 추어탕 한 그릇을 시켰다. 굶주린 위장은 음식이 들어가자 더욱 허기를 느끼며 계속해서 음식을 달라고 아우성쳤다. 순식간에 두부와 미꾸라지가 든 국 한 그릇을 물처럼 마셔버렸다. 세 번째 그릇을 받아들었을 때, 데운 막걸리 곱빼기 두 잔이 나왔다. 치삼이와 함께 잔을 비우자, 텅 비었던 속에 술기운이 찌르르 퍼지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연거푸 곱빼기 한 잔을 더 마셨다.

김첨지의 눈은 벌써 풀리기 시작했다. 석쇠에 있던 떡 두 개를 숭덩숭덩 썰어 입안 가득 볼이 미어지게 씹으며 곱빼기 두 잔을 더 시켰다.

치삼이가 의아한 듯 그를 보며 말했다.

“여보게, 또 시킨다고? 벌써 우리 넉 잔씩 마셨어. 술값만 40전이야.”

“이 자식아, 40전이 그렇게 대수냐? 나 오늘 돈벼락 맞았어. 진짜 운수 좋은 날이었다고!”

“그래서 얼마를 벌었는데?”

“30원! 30원이나 벌었어! 이런 젠장, 술 더 안 가져오고 뭐 해! 괜찮아, 막 마셔도 돼. 오늘 돈을 산더미처럼 벌었다니까.”

“어허, 이 사람 단단히 취했네. 그만 마시세.”

“이 자식아, 이까짓 거 마시고 취할 내가 아니야. 어서 더 마셔!”

취한 김첨지는 치삼의 귀를 잡아끌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술을 따르는, 머리를 빡빡 깎은 열다섯 살쯤 돼 보이는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이놈, 망할 놈아! 왜 술을 안 따라!”

소년은 희희 웃으며 치삼이에게 어떡할 거냐는 듯 눈짓을 보냈다. 주정꾼은 그 눈치를 알아채고 버럭 화를 냈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내가 돈이 없는 줄 알고!”

그는 허리춤을 뒤지더니 1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소년 앞에 내던졌다. 그 바람에 동전 몇 푼이 잘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여보게, 돈 떨어졌네. 왜 돈을 함부로 뿌리나.”

치삼이가 말하며 돈을 주웠다. 김첨지는 취한 와중에도 돈이 어디로 갔는지 살피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문득 자기 행동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는지 소스라치게 고개를 들며 더욱 화를 냈다.

“봐라, 이 더러운 놈들아! 내가 돈이 없냐!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버릴 놈들 같으니!”

그는 치삼이가 주워준 돈을 받아 들고 소리쳤다.

“이 원수 같은 돈! 이 찢어 죽일 돈!”

그는 돈을 벽에 내동댕이쳤다. 벽에 맞고 떨어진 돈은 마침 술 끓이는 양은 냄비 안으로 떨어지며, ‘쨍’ 하고 울었다.

곱빼기 두 잔은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김첨지는 입술과 수염에 묻은 술을 빨아들이고는 아주 만족스러운 듯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외쳤다.

“더 따라! 더 따르라고!”

또 한 잔을 마시고 나서, 김첨지는 치삼의 어깨를 치며 갑자기 껄껄 웃었다. 웃음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술집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어이, 치삼이. 내가 웃긴 얘기 하나 해줄까? 오늘 손님 태우고 역에 갔지 않겠나.”

“그래서?”

“갔다가 그냥 오기가 아깝잖아. 그래서 전차 정류장 앞에서 어슬렁거리면서 손님 하나 더 태우려고 했지. 근데 마침 사모님인지 여학생인지 모를 여자(요즘 세상에 어디 노는 여자랑 아가씨를 구별할 수 있나)가 망토를 두르고 비를 맞고 서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슬쩍 다가가서 ‘인력거 타시죠’ 하면서 가방을 받으려고 하니까, 내 손을 탁 뿌리치면서 홱 돌아서는데, ‘왜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 굴어요!’ 와, 그 목소리가 꼭 꾀꼬리 소리 같더라고! 허허!”

김첨지는 정말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흉내 냈다. 술집의 모든 사람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빌어먹을 깍쟁이 같은 여자. 누가 자길 어쩐다고! ‘왜 사람을 귀찮게 굴어요!’ 어이구, 그 목소리하고는. 참나, 허허.”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김첨지는 갑자기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치삼은 어이없다는 듯 주정꾼을 바라보며 말했다.

“금방 웃고 난리 치더니, 우는 건 또 뭐야.”

김첨지는 연신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우리 마누라가 죽었어.”

“뭐? 마누라가 죽다니, 언제?”

“이 자식아, 언제긴! 오늘이지.”

“에이, 미친놈.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니야. 진짜로 죽었어, 진짜로… 마누라 시체를 집에 놔두고 내가 지금 술을 마시고 있다니. 내가 죽일 놈이야, 내가 죽일 놈….”

김첨지는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치삼은 흥이 깨진 얼굴로 말했다.

“원, 이 사람이.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일단 집으로 가세, 가.”

그는 우는 친구의 팔을 잡아끌었다.

김첨지는 치삼의 손을 뿌리치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씩 웃었다.

“죽기는 누가 죽어.”

그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죽긴 왜 죽어, 멀쩡히 살아있다니까. 그 망할 여자가 밥을 축내서 문제지. 자, 이제 나한테 속았지?”

그는 어린애처럼 손뼉을 치며 웃었다.

“이 사람이 정말 미쳤나. 자네 부인이 앓는다는 말은 나도 들었는데….”

치삼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다시 한번 김첨지에게 집에 돌아가자고 권했다.

“안 죽었어! 안 죽었다니까!”

김첨지는 화를 내며 소리쳤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아내가 죽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억지로 믿게 하려는 처절함이 묻어 있었다. 결국 1원어치를 다 채워 곱빼기 한 잔씩을 더 마시고 나서야 둘은 선술집을 나왔다. 궂은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김첨지는 취한 와중에도 설렁탕을 사 들고 집에 도착했다. 집이라고 해봐야 물론 셋방이었고, 그마저도 안채와 뚝 떨어진 행랑채 한 칸을 빌려 쓰는 신세였다. 물을 길어다 주는 조건으로 한 달에 1원씩 내는 방이었다. 만약 김첨지가 술에 취하지 않았더라면, 대문에 들어서는 순간 그곳을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정적, 마치 폭풍우가 휩쓸고 간 바다 같은 정적에 다리가 후들거렸을 것이다.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밭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 무덤 같은 침묵을 깨는 것은, 아니, 오히려 침묵을 더욱 깊고 불길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어린아이가 젖을 빠는 ‘빡빡’ 하는 희미한 소리뿐이었다. 만약 귀가 밝은 사람이었다면, 그 소리가 빠는 소리일 뿐, 젖이 넘어가는 ‘꿀꺽’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니, 빈 젖을 빨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김첨지도 이 불길한 침묵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평소와 달리 이렇게 고함을 쳤을 리가 없다.

“이 빌어먹을 여자야! 남편이 들어오는데 나와 보지도 않고 뭐 해, 이 망할 년아!”

이 고함이야말로, 온몸을 덮쳐오는 끔찍한 예감을 떨쳐내려는 허세에 불과했다.

김첨지는 방문을 왈칵 열어젖혔다. 순간 구역질이 날 듯한 역한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낡은 돗자리 밑에서 올라오는 먼지 냄새, 빨지 않은 기저귀의 똥오줌 냄새, 온갖 때가 켜켜이 쌓인 옷 냄새, 그리고 아내의 땀이 썩는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선 주정꾼은 설렁탕을 내려놓을 새도 없이 목청껏 소리쳤다.

“이 망할 여자야! 하루 종일 누워만 있으면 다야? 남편이 왔는데 일어나지도 못해?”

그는 소리와 함께 누워있는 아내의 다리를 힘껏 걷어찼다. 그러나 발끝에 채이는 것은 사람의 살이 아니라 딱딱한 나무토막 같은 느낌이었다. 그 순간, ‘빡빡’ 하던 소리가 ‘응애’ 하는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엄마 젖을 빨던 개똥이가 젖을 놓고 울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온 얼굴을 찡그려 우는 표정만 지을 뿐, ‘응애’ 소리마저 입이 아니라 배 속에서 겨우 짜내는 듯했다. 하도 울어 목이 잠겼고, 이제는 울 기운조차 없는 듯했다.

발로 차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김첨지는 아내의 머리맡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까치집처럼 헝클어진 아내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 흔들었다.

“이 여자야, 말 좀 해봐, 말을! 입이 붙었어, 이 망할 여자야!”

“……”

“어? 이것 봐, 아무 말이 없네.”

“……”

“이 여자야! 죽었어? 왜 말이 없어!”

“……”

“어? 또 대답이 없네. 정말 죽었나 봐.”

그러다 그는 아내의 얼굴 위로 허옇게 막이 덮인 채, 천장을 향해 치켜뜬 눈을 발견했다.

“이 눈! 이 눈! 왜 나를 보지 못하고 천장만 보고 있어, 어?”

말끝에 그의 목이 메었다. 그리고 산 사람의 눈에서 떨어진 닭똥 같은 눈물이, 죽은 사람의 뻣뻣한 얼굴을 얼룩지게 적셨다. 문득 김첨지는 미친 사람처럼 자기 얼굴을 아내의 차가운 얼굴에 비비며 중얼거렸다.

“설렁탕을 사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이상하게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