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산초담 1권
📌 [원문]
제왕의 문장은 반드시 범인(凡人)을 초월하게 마련이다. 우리 역대 임금의 작품들이 대개는 《대동시림(大東詩林)》에 보이는데 그 밖에는 전하는 것이 없다. 현재 임금은 하늘이 낸 어진 임금으로 무릇 교유(敎諭)하는 말을 손수 지었는데, 질박하고 엄숙하여 기백(氣魄)이 있었다. 그러나 시는 있다는 소리를 못 들었다. 그러던 차에 신묘년(1591, 선조24) 가을에 외간(外間)에 임금의 작품이라고 전하는 절구(絶句)가 있었으니 다음과 같다.
한밤에 칼 어루만지니 호기가 무지개를 토해라 / 撫劍中宵氣吐虹
웅장한 마음은 우리 동방을 안정시키고자 했더니 / 壯心曾欲奠吾東
이제껏 그 사업은 한단의 걸음 / 如今事業邯鄲步
가을 바람에 고개 돌리니 한스럽기 그지없네 / 回首西風恨不窮
시격(詩格)이 노련하고 건장하여 시인에 못지 않았는데, 어찌 그 이듬해 변고가 있을 줄을 알았으리오.
동궁(東宮)이 또한 임금 되기 전에 시[詞藻]에 뜻을 두어 고서(古書)를 많이 모았다. 언젠가 삼청동시(三淸洞詩) 한 수를 지었는데, 그것이 진사(進士) 유희발(柳希發)의 궤 속에 있다기에 그에게 삼가 청하여 읽어보았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푸른 이내 속에 붉은 골짜기는 그늘졌는데 / 丹壑陰陰翠靄間
맑은 시냇가 기이한 풀들이 천단을 에웠도다 / 碧溪瑤草繞天壇
노을 어린 옥솥에 단약은 익어가나 / 煙霞玉鼎靈砂老
다래넝쿨에 달 비치고 솔바람 일어도 학은 아직 돌아오지 않네 / 蘿月松風鶴未還
시화(詩話)가 맑고 서늘하며 자법(字法)도 또한 기이하다. 임금의 제작은 저절로 세속 시인들의 구기(口氣)와는 다르다. 아, 존경할 만하다.
희발(希發)은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광해군의 처남인데, 벼슬은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계해년(1623)에 사형되었다.
우리나라의 시학(詩學)은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을 위주로 하여 비록 경렴(景濂) 같은 대유(大儒)로도 역시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나머지 세상에 이름 날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찌꺼기를 빨아 비위를 썩게 하는 촌스러운 말을 만들 따름이니, 읽으면 염증이 날 정도이다. 성당(盛唐)의 소리는 다 없어져 들을 수가 없다. 매월당(梅月堂)의 시는 맑고 호매(豪邁)하고 세속을 초탈하였다.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서 스스로 다듬고 꾸미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았다. 더러는 마음을 쓰지 않고 갑자기 지은 것이 많기 때문에 간혹 가다가 박잡한 것도 섞여 결국 정시(正始)의 詩體는 아니다.
망헌(忘軒) 이주지(李?之)의 시는 침착ㆍ노련하여 나의 중씨(仲氏)가 대력(大曆 당 대종(唐代宗)의 연호)ㆍ정원(貞元 당 덕종(唐德宗)의 연호) 연간의 작품과 가깝다고 여겼다. 그러나 소식ㆍ두보(杜甫)로부터 나왔는데도 대체가 순박치 못했다. 충암(?庵)은 맑고 굳세고 기이하고 아름다워 작가라고 할 만하되, 거친 말[生語]과 중첩되는 말[疊語]이 약간 많다. 그 후에는 퇴폐한 것을 일으킨 자가 없다.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ㆍ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연간에 최가운(崔嘉運)ㆍ백창경(白彰卿)ㆍ이익지(李益之) 등이 비로소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시대의 공부를 전공하여 정화(精華)를 이루기에 힘써서 고인에게 미치고자 하였으나, 골격(骨格)이 온전치 못하고 너무 아름답기만 하였다. 당(唐)의 허혼(許渾)ㆍ이교(李嶠)의 사이에 놓더라도 바로 촌뜨기의 꼴을 깨닫게 되는데, 도리어 이백(李白)ㆍ왕유(王維)의 위치를 앗으려고 한단 말인가? 비록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학자는 당풍(唐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세 사람의 공을 또한 덮어버릴 수는 없다 하겠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자는 열경(悅卿), 강릉인(江陵人)이다. 처사(處士)로서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이주지(李?之)의 이름은 주(?)이며 고성인(固城人)으로 벼슬은 정언(正言)이다. 중씨(仲氏)는 하곡(荷谷) 허봉(許?)이다. 자는 미숙(美叔), 양천인(陽川人)이며 벼슬은 전한(典翰)이다. 충암(?庵) 김정(金淨)의 자는 원충(元?), 경주인(慶州人)으로 벼슬은 형조 판서(刑曹判書)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가운(嘉運)의 이름은 경창(慶昌), 호는 고죽(孤竹)인데 해주인(海州人)으로 벼슬은 부사(府使)이다. 창경(彰卿)의 이름은 광훈(光勳), 호는 옥봉(玉峯)인데 해미인(海美人)으로 벼슬은 참봉(參奉)이다. 익지(益之)의 이름은 달(達), 호는 손곡(蓀谷)이며 홍주인(洪州人)으로 쌍매(雙梅) 첨(詹)의 서손(庶孫)이다.
가운(嘉運)은 제고봉군산정시(題高峯郡山亭詩)에
오래된 고을이라 성곽도 없는데 / 古郡無城郭
산재에는 다만 수풀뿐 / 山齋有樹林
백성도 아전도 흩어져 쓸쓸한데 / 蕭條人吏散
물건너 마을에 겨울 다듬이 소리 / 隔水搗寒砧
라 하였다. 창경(彰卿)은 제화시(題?詩)에,
문서 기록은 백발을 재촉하는데 / 簿領催年?
시내와 산이 그림 속에 들었구려 / 溪山入?圖
모래톱 평평하니 옛 언덕이 예로구나 / 沙平舊岸是
달빛은 하얀데 낚싯배 외로워라 / 月白釣船孤
하였고, 제승축시(題僧軸詩)에
지리산은 쌍계가 승경이오 / 智異雙溪勝
금강산은 만폭이 기이하다던데 / 金剛萬瀑奇
명산엔 몸소 가보도 못하고서 / 名山身未到
매양 스님을 보내는 시만 짓누나/ 每賦送僧詩
하였다. 익지(益之)는 산사시(山寺詩)에,
흰 구름 속에 절이 있으니 / 寺在白雲中
흰 구름이라 중은 쓸지를 않네 / 白雲僧不掃
손이 오자 그제사 문을 여니 / 客來門始開
골짜기엔 온통 송화만 흐드러졌구나 / 萬壑松花老
하였고, 회주시(回舟詩)에,
병든 가을 해오리 모래밭에 내려앉고 / 病鷺下秋沙
늦매미는 강가 나무에서 울어대네 / 晩蟬鳴江樹
흰 물마름에 바람 일자 배를 돌리니 / 回舟白?風
꿈속에 서담엔 비가 내리네 / 夢落西潭雨
하였다.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이달(李達) 3인의 시는 모두 정시(正始)의 법을 본받았는데, 최씨의 청경(淸勁)과 백씨의 고담(枯淡)은 귀히 여길 만하나, 기력(氣力)이 미치지 못하여 다소 후한 결점이 있었다. 이달의 부염(富艶)함은 그 두 사람에 비하면 범위가 약간 크긴 하나, 모두 맹교(孟郊)와 가도(賈島)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최경창ㆍ백광훈은 일찍 죽었고, 이달은 늙어서야 문장이 크게 진보하여 자기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어, 그 기려(綺麗)를 거두고 평실(平實)로 돌아갔다. 나의 중형이 자주 칭찬하기를,
“수주(隨州 당(唐)의 유장경(劉長卿)을 가리킴)와 어깨를 겨룬다고 하더라도 큰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므로 내가,
“문장이란 세상의 흥망을 따르는 것이니 송(宋)은 당(唐)만 못하고 원(元)은 송만 못한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는데, 어찌 이대(二代)를 뛰어넘어 당시의 작가와 우열을 다툴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중씨는,
“한퇴지(韓退之)는 당 나라 사람인데 유자후(柳子厚)가 ‘곧장 자장(子長 사마천(司馬遷)의 자)과 함께 달린다.’고 하였으니, 자후가 어찌 헛말을 할 사람인가? 이달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하였다. 그러나 나는 끝내 그렇게 여기지를 않았다.
나의 중형의 시가 처음에는 동파(東坡)를 배워서 전아(典雅) 순실(純實)하고 온건(穩健) 노숙(老熟)하더니, 호당(湖堂)에 뽑히자 《당시품휘(唐詩品彙)》를 익히 읽어 시가 비로소 청건(淸健)해졌다. 늙마에 갑산(甲山)으로 귀양 갈 때, 이백시(李白詩) 한 부를 가지고 갔었기 때문에, 귀양이 풀려 돌아온 뒤의 시는 천선(天仙) 이백(李白)의 말을 깊이 체득하여 장편이고 단편이고 휘몰아치는 기세여서 일찍이 이익지가 말하기를,
“미숙 학사(美叔學士 미숙은 허봉의 자)의 시를 읽으면 공중에 흩날리는 꽃을 보는 것 같다.”
하더니, 중씨가 불행히 일찍 죽어 원대한 포부를 제대로 펴보지 못했고, 남긴 글마저 흩어져 미처 수습하지도 못했는데, 임진왜란에 찾아낼 겨를도 없이 다 병화(兵火)에 타버렸으니 죽어도 잊지 못할 슬픔이 어찌 끝이 있겠느냐. 내가 경호(鏡湖 강릉(江陵)의 별칭)에 살 때, 놀라움이 우선 가라앉자, 일찍이 외던 것을 생각해 내어 보니 겨우 5백여 편이라, 베껴서 세상에 전하여 사라지지 않도록 기대하고자 한다. 그러나 다만 태산(泰山)의 일호(一毫)일 뿐이다.
최경창(崔慶昌)의 자는 가운(嘉運)이니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무진년(1568, 선조1)에 진사(進士)를 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종성 부사(鍾城府使)가 되었는데, 어떤 일로 강등(降等)되었다가 국자 직강(國子直講)을 제수받고는 세상을 떠났다. 언젠가 북경(北京)에 가 조천궁(朝天宮)에서 시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한밤이라 구슬단에 백운을 쓸고 / 午夜瑤壇?白雲
향 피우고 멀리 옥신군에게 절한다 / 焚香遙禮玉宸君
달 아래 절하는 모습 보는 이 없고 / 月中拜影無人見
아름다운 나무만 겹겹이 궁문 가리웠네 / 琪樹千重鎖殿門
또
삼청의 이슬기운 주궁을 적시고 / 三淸露氣濕珠宮
봉피리 부는 신선 달밤에 배회했건만 / 鳳管裵廻月在空
동산길에 지금은 향기로운 수레 끊기고 / 苑路至今香輦絶
푸른 복사 붉은 살구 봄바람 한창일세 / 碧桃紅杏自春風
하였다. 어떤 도사(道士)가 있었는데 성은 진씨(秦氏)이고 이름은 지금 기억에 없다. 그 또한 시를 잘 지었다. 이 시를 크게 칭찬하여 통주(通州) 하청관(河淸觀)까지 쫓아와 그 책에 제(題)해주기를 청하였는데 시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벽우는 진계를 상징하고 / 碧宇標眞界
현단은 태청과 가깝네 / 玄壇近太淸
난새는 주포수에 깃들고 / 鸞棲珠圃樹
노을은 자미성을 감돌았네 / 霞繞紫微城
삼원의 보록은 비장되어 있고 / 寶?三元秘
금단은 구전으로 이루어졌네 / 金丹九轉成
지거를 탄 사람 보이지 않고 / 芝車人不見
공중 저 밖에 피리 소리만 / 空外有簫聲
이 시가 중국에 전파되어 왕봉주(王鳳洲 명(明) 왕세정(王世貞)의 호) 선생이 대단히 칭찬하였다. 충장공(忠壯公) 양조(楊照)의 무덤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운중에 해 지자 불빛이 산을 비치니 / 日沒雲中火照山
선우는 이미 녹두관에 다가왔네 / 單于已近鹿頭關
장군이 홀로 천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서 / 將軍獨領千人去
한밤에 요하 건너 싸우다 돌아오지 않았구려 / 夜渡遼河戰未還
이 시는 당인(唐人)의 수준에 못지 않으니 중원(中原)에서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백광훈(白光勳)의 자는 창경(彰卿)이고, 글씨 쓰는 법은 왕희지ㆍ왕헌지에 가까우며, 첫 벼슬은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다. 언젠가 홍경사(弘慶寺)를 지나다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풀 쓸쓸한 전조의 절 / 秋草前朝寺
낡은 비석엔 학사의 글 / 殘碑學士文
유수는 천년토록 의구한데 / 千年有流水
해질 무렵 떠가는 구름을 보네 / 落日見歸雲
임오년(1582, 선조15)에 병으로 서울집에서 죽었다. 난설(蘭雪) 누님의 감우시(感遇詩)는 다음과 같다.
요즘 최씨 백씨 무리들이 / 近者崔白輩
성당을 법삼아 시를 익혀 / 攻詩軌盛唐
적막하던 대아의 음률이 / 寥寥大雅音
이들 만나 다시금 크게 떨쳤네 / 得此復??
하료는 마냥 광록이고 / 下僚因光祿
변방의 고을살이 적신이 슬프네 / 邊郡悲積薪
나이나 벼슬이 모두 쇠락하니 / 年位共零落
이제야 믿겠네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함을 / 始信詩窮人
난설헌(蘭雪軒)의 이름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니, 초당(草堂) 엽(曄)의 딸이며 서당(西堂) 김성립(金誠立)의 아내이다. 난설헌의 강남곡(江南曲)은 다음과 같다.
남들은 강남땅 좋다 하지만 / 人言江南樂
나보기엔 강남땅 시름겹기만 / 我見江南愁
해마다 모래톱 포구에 서서 / 年年沙浦口
애끊는 마음으로 가는 배만 바라보네/ 腸斷望歸舟
빈녀음(貧女吟)은 또 다음과 같다.
가위를 손에 잡으니 / 手把金剪刀
추운 밤 열손가락 곱네 / 寒夜十指直
남 위해 시집갈 옷 지어주건만 / 爲人作嫁衣
해마다 도리어 혼자 살다니 / 年年還獨宿
채련곡(采蓮曲)은 다음과 같다.
가을이라 긴 호수엔 비취옥이 흐르는데 / 秋淨長湖碧玉流
연꽃 깊숙한데 난주 매어두고 / 荷花深處係蘭舟
물건너 님을 만나 연밥을 던지다가 / 逢郞隔水投蓮子
남의 눈에 그만 띄니 반나절이나 무안해라/ 剛被人知半日羞
임제(林悌)의 자는 자순(子顺)이니 나주인(羅州人)이다. 만력(萬曆 송신종(宋神宗)의 연호) 정축년(1577, 선조10)에 진사가 되었다. 본성이 의협심이 있고 얽매이질 않아서 세속과 맞질 않았으므로 불우했고 일찍 죽었다. 벼슬은 의제 낭중(儀制郎中 예조정랑 겸 지제교(禮曹正郞兼知製敎)의 별칭)에 그쳤다. 죽은 뒤에 어떤 이가 ‘역괴(逆魁 정여립(鄭汝立)을 말함)와 더불어 시사를 논하면서 항우(項羽)는 천하의 영웅인데 성공치 못한 것이 애달프다 말하고 나서 마주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무함했는데 그 말이 삼성(三省)에 전해지자 그 아들 지(地)를 국문하니 지(地)가 그의 선친이 지은 오강(烏江)에서 항우를 조상한다는 부(賦)를 올리므로 인하여 용서받아 변방에 귀양 가게 되었다. 그의 평사 이영을 보내는 시[送李評事瑩詩]는 다음과 같다.
북방 눈 내리는 용황의 길 / 朔雪龍荒道
음산한 바람 부는 발해 바닷가 / 陰風渤?涯
원융의 서기를 맡은 이는 / 元戎掌書記
일대의 미남아로다 / 一代美男兒
칼집엔 별을 찌르는 칼 있고 / 匣有干星劍
주머니엔 귀신도 울릴 시가 들었네 / 囊留泣鬼詩
변방 모래 바람 금갑옷에 자욱한데 / 邊沙暗金甲
쪽문 위의 달 홍기를 비치누나 / 閨月照紅旗
옥문관 걸음 어딘들 안 가리오 / 玉塞行應遍
공신각에 화상 걸기 머지 않으리/ 雲臺?未遲
바라보니 머리카락 곤두세우고 / 相看?壯髮
먼 길 떠날 슬픈 빛 짓지 않네 / 不作遠遊悲
시격(詩格)이 양영천(楊盈川 당(唐)의 양형(楊炯))과 매우 비슷하다.
제(悌)의 호는 백호(白湖), 벼슬은 북평사(北評事)를 지냈다. 《잠영보(簪纓譜)》를 상고해 보면 ‘제(悌)의 맏아들은 탄(坦)이고 호는 한정(閒亭)인데 벼슬을 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기(?)인데 호는 월창(月?), 벼슬은 좌랑(佐郞)이다.’ 하였다.
탄(坦)은 혹 지(地)의 개명(改名)이 아닌지?
백호(白湖)의 규원시(閨怨詩)는 다음과 같다.
열다섯 살 월계 아가씨 / 十五越溪女
남보기 부끄러워 말도 없이 헤어졌네 / 羞人無語別
돌아와 겹문 닫고는 / 歸來掩重門
배꽃에 비친 달 보며 울었네 / 泣向梨花月
산사시(山寺詩)는 다음과 같다.
한밤중 숲 속에 중이 자는데 / 半夜林僧宿
무거운 비구름이 초의를 적시누나 / 重雲濕草衣
느지막에 사립을 여니 / 巖扉開晩日
깃든 새 그제서야 놀라서 나네/ 棲鳥始驚飛
영(瑩)은 고성인(固城人)으로 자는 언윤(彦潤), 호는 남고(南皐)이니 청파(靑坡) 육(陸)의 손자로 벼슬은 목사(牧使)를 지냈다.
중형의 경흥압호정(慶興狎胡亭)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국경에서 스산하게 바라다 보니 / 塞國悲寒望
인가의 연기는 귀방과 접했구나 / 人煙接鬼方
산은 외로운 장막 밖을 에웠고 / 山圍孤障外
물은 무너진 능 옆으로 흘러드는구나 / 水入毁陵傍
초가집에 해 바뀌도록 병들었는데 / 白屋經年病
푸른 모에 한밤중 서리 내렸네 / 靑苗半夜霜
이곳에 오르자 가장 서글퍼지니 / 登臨最蕭瑟
까칠한 수염은 낙엽과 함께 누렇구나 / 衰?葉俱黃
임자순(林子順)이 크게 칭찬하며 그 운자로 화답하려 하였으나 종일 궁리해도 뜻대로 되질 않자 시를 보내기를,
백옥과 청묘는 열자의 사기로다 / 白屋靑苗十字史
하였으니, 셋째와 넷째 구절이 사실(史實) 기록임을 말한 것이다. 금성 객관(金城客館)에 옛사람이 추(秋) 자로 압운하여 판각해서 못을 박아 걸어 놓았는데, 최고죽(崔孤竹)이 차운하기를
서글픈 대평소 소리 옛고을에서 나는데 / 殘角生古縣
깊은 강물은 어둠속 급히 흐르네 / 沈河急暝流
으스레한 등불 아래 초객의 꿈이요 / 疏燈楚客夢
한밤중 중선의 다락일레 / 半夜仲宣樓
찬 비 비록 개었으나 / 寒雨雖逢霽
고향 생각 또다시 가을을 만났네 / 歸心更値秋
라고 했다. 중씨가 이어 읊기를
나그네 만리길 가매 / 行人萬里去
말 멈추어 차가운 물을 먹이네 / 駐馬飮寒流
큰 길엔 온통 꽃다운 풀들 / 芳草遍官道
저녁 연기 역루에서 피어오르네 / 晩煙生驛樓
나그네 회포는 어렴풋 꿈과 같아서 / 旅懷渾似夢
봄이라지만 거의 가을 같고나 / 春事半如秋
라고 했다. 고죽이 보고,
“봄시를 가을 추(秋) 자로 압운하기는 가장 어려운 것인데 이 글귀는 옛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
하였다.
내 생각에 누대 현판은 모조리 케케묵은 시들이라, 비록 청신한 구절이 있다 하더라도 가려내기 쉽지 않으니, 지을 필요가 없다. 임자순(林子順)이 언젠가 가학루(駕鶴樓)를 지나갔는데, 판시(板詩)가 많아 만여 개나 되므로, 그 되지 않은 잡소리를 싫어하여 관리(館吏)를 불러 말하기를,
“이 현판들은 관명(官命)으로 만든 것이냐? 아니면 안 만들면 벌을 주었느냐?”
하니, 그의 말이,
“만들고 싶으면 만들고 말고 싶으면 안 만들지요. 어찌 관명이나 처벌이 있겠습니까.”
하자, 자순이,
“그렇다면 난 짓지 않겠다.”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다 웃었다. 임진왜란에 적이 관사를 불살라 남은 게 없었으며, 불사르지 않은 곳은 현판을 철거하여 불 속에 던져버렸다. 아마 하늘도 시가 높은 벽에 걸려 있는 것을 싫어했으리라.
누제(樓題)에도 좋은 시구가 또한 더러 있다. 임진년에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난리를 피하여 북변으로 들어가다가 곡구역(谷口驛)에 이르니, 임형수(林亨秀)가 지은 시의 항련(項聯)에
꽃이 고개 숙이니 술 취한 미녀의 얼굴 같고 / 花低玉女?觴面
산이 끊어지니 바닷물 마시는 푸른 용의 허리 같구나 / 山斷蒼?飮海腰
하였다. 시어(詩語)가 청절(淸絶)하니 어찌 누제라 하여 흠잡을 수 있겠는가.
형수의 자는 사수(士遂)이고, 호는 금호(錦湖)이다. 평택인(平澤人)으로 벼슬은 목사를 지냈는데,정미년 벽서(벽書)사건 때 원통하게 죽었다.
어촌(漁村)의 시는 혼후하고 부염하기가 호음(湖陰)에 못지 않은데, 송계(松溪)가 중종 이래 대가를 평하되 그 선(選) 중에 어촌이 들지 않았으니,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내가 북변의 누제(樓題)를 보다가, 공의 시를 읽고는, 눈을 씻고 장단을 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영동역시(嶺東驛詩)는 다음과 같다.
총과 욕이 유유하다 두 가지 다 놀래니 / 寵辱悠悠兩自驚
표령한 남은 목숨 그 어디에 붙일까 / 飄零何處着殘生
하늘가 해질 무렵 고향 그리는 눈물 / 天邊落日懷鄕淚
국경밖 늦가을 고국 떠나는 마음일세 / 寒外窮秋去國情
구름송인 어지러이 날아 산은 온통 새까맣고 / 雲葉亂飛山盡黑
둥근 달 나직이 비치니 온바다는 밝아라 / 月輪低照海全明
나그네신세 오늘밤 유난히 시름겨워서 / 羈愁此夜偏多緖
푸른 등불 마주하여 앉아 지샜네 / 坐對靑燈到五更
수성역(輸城驛)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고향 떠나 가을 지나 국경 성에 머무니 / 去國經秋滯塞城
낯선 땅 풍경은 모두가 고향을 그리게 하네 / 異方雲物摠關情
넓은 강 건너고 싶으나 사공 없고 / 洪河欲濟無舟子
겨울나문 말라가도 겨우살인 매달렸네 / 寒木將枯有寄生
일신을 도모함이 곧은 길 아님 우습고 / 自笑謀身非直道
세상 속여 헛된 이름에 붙들림 오히려 부끄럽네 / 還慙欺世坐虛名
새벽 문을 열고 푸른 바다 마주하니 / 曉來拓戶臨靑海
아침해 밝고 밝아 간담을 비치네 / 旭日昭昭照膽明
이와 같은 작품들이 어찌 호음(湖陰)무리만 못하단 말인가? 아래 시의 제4구는 안로(安老)가 죽었지만 그의 잔당은 아직 다 죽지 않았음을 가리킨 것이다.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의 자는 사형(士炯)이니 삼척인(三陟人)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공(文恭)이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자는 운경(雲卿), 동래인(東萊人)이며 벼슬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이다.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은 안동인(安東人)이니 벼슬은 학관(學官)이고 이조 참판 응정(應?)의 서제(庶弟)이다. 안로(安老)의 성은 김씨(金氏), 자는 이숙(?叔), 호는 희락(希樂), 연안인(延安人)이고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다. 탐욕스럽고 간사하며 조정의 일을 제멋대로 하였으므로 중종 정유년(1537)에 사사되었다.
어촌의 사과꽃 지다[來禽花落]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오련붉은 꽃 봄을 도와 늙은 가지에 피니 / 朱白扶春上老柯
눌 위해 단장하는고 야인의 집에 / 爲誰粧點野人家
한밤중 비바람에 초췌할까 두렵더니 / 三更風雨驚??
다닥다닥 핀 사과꽃 모조리 다 졌구나 / 落盡來禽滿樹花
송계(松溪)의 촉석루시(矗石樓詩)는 다음과 같다.
구름 사이 새어나는 희미한 달이 잔잔한 물결을 비추어 주니 / 漏雲微月照平波
잠자던 해오리 나직이 날아 물언덕 모래톱에 내려 앉는다 / 宿鷺低飛下岸沙
물가 정자에 발 거두고 기둥 기대어 앉아 있으니 / 江閣捲簾人依柱
나룻머리 노 젓는 소리 밤이라 크게 들리네 / 渡頭鳴櫓夜聞多
중씨가 근래 시인을 평하되, 소재 상공(蘇齋相公)을 대가로 여기고,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을 그 다음으로 쳤다. 이익지(李益之 익지는 이달(李達)의 자)는 중씨의 시ㆍ문이 모두 고공(高公)보다 낫다고 치는데 논란은 오래되었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다. 내가 권응인(權應仁)을 만나게 되어 물어보니, 이익지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권응인이 갑산(甲山)으로 귀양 가는 중씨를 보내는 시의 항련(項聯)에
정묘교 곁에 살던 당나라 시인이고 /家居丁卯唐詩士
경인일에 태어나 내쫓긴 초나라 신하로다/降在庚寅楚逐臣
라 하니, 고사 인용이라든가 대우(對偶)가 다 적절하다. 중형이 서애(西厓)에게 부친 시에 또
갑자년 참상을 말하지 마라 / 莫言甲子泥塗日
응당 경인년에 하강하는 때를 맞으리 / 應値庚寅下降年
하였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자는 과회(寡悔)니 광산인(光山人)이다.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자는 이순(而順)이니 장흥인(長興人)이다. 벼슬은 목사이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자는 이견(而見)이니 풍산인(?山人)이다.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중형이 귀양 가기 전 옥당(玉堂)에 있을 때 꿈속에서 시를 짓기를
텃밭에 채마 부치노라니 솜씨야 늘었다만 / 稼圃功夫進
천상은 꿈결에도 어렴풋 / 煙?夢寐稀
오직 가의의 눈물만 남아 / 唯殘賈生淚
밤마다 차가운 옷을 적실 뿐 / 夜夜濕寒衣
하더니, 가을이 되자 갑산(甲山)에 귀양 가게 되었다. 누님이 평시에 또한 꿈속에서 지은 시에
푸른 바단 신선 사는 요해에 젖어들고 / 碧海浸瑤海
청난은 채봉을 기대었구나 / 靑鸞倚彩鳳
연꽃 스물일곱 송이 / 芙蓉三九?
서리같이 싸늘한 달빛 아래 지는구나 / 紅墮月霜寒
하더니 이듬해 신선되어 올라가니, 3에 9를 곱하면 27로서 누님 나이와 같으니, 인사에 있어 미리 정해진 운명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누님의 시문은 모두 천성에서 나온 것들이다. 유선시(遊仙詩)를 즐겨 지었는데 시어(詩語)가 모두 맑고 깨끗하여, 음식을 익혀 먹는 속인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문(文)도 우뚝하고 기이한데 사륙문(四六文)이 가장 좋다.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이 세상에 전한다. 중형이 일찍이,
“경번(景樊)의 재주는 배워서 그렇게 될 수가 없다. 모두가 이태백(李太白)과 이장길(李長吉)의 유음(遺音)이다.”
라고 한 적이 있다. 아, 살아서는 부부금슬이 좋지 못했고, 죽어서는 제사받들 자식이 없으니 옥이 깨진 원통함이 한이 없다.
📖 [현대어 완역]
임금님이 지으신 문장은 반드시 평범한 사람들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역대 임금들의 작품들은 대개 조선의 시 모음집인 《대동시림》에서나 일부 찾아볼 수 있을 뿐, 그 밖에는 따로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다. 지금의 임금(선조)께서는 하늘이 내신 어진 군주로서,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손수 내리신 교문(敎文)들을 보면 하나같이 그 질박하고 엄숙한 기백이 대단하시다. 하지만 시를 지으신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었다.
그러던 차에 1591년(신묘년, 선조 24년,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가을, 항간에 임금께서 지으셨다고 전해지는 절구(4줄짜리 한시) 한 수가 떠돌았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한밤중 칼 어루만지니, 붉은 호기가 무지개처럼 뿜어져 나오고
장엄한 이 마음, 일찍이 우리 동방(조선)을 반석 위에 올리려 했건만
지금껏 해온 일들은 남의 걸음걸이나 흉내 낸 꼴(한단의 걸음)이로구나.
가을바람에 고개 돌려 탄식하니, 그 한스러움 끝이 없네.
시의 뼈대와 품격이 이토록 노련하고 굳세어 웬만한 시인 못지않았는데, 아! 어찌 바로 그 이듬해에 참혹한 변고(임진왜란)가 일어날 줄 알았겠는가.
동궁(훗날의 광해군) 역시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문학에 뜻을 두어 옛 책을 많이 모았다. 언젠가 그가 〈삼청동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것이 진사 유희발(문화 유씨로 광해군의 처남이다. 벼슬은 이조 참판을 지냈으나 훗날 1623년 인조반정 때 사형당했다)의 궤짝 속에 보관되어 있다기에, 삼가 청하여 읽어보았다. 그 시는 이러하다.
푸른 아지랑이 피어나는 붉은 골짜기엔 그늘이 짙고
맑은 시냇가 기이한 옥초(신선 풀)는 하늘의 제단을 에워쌌네.
노을빛 어린 옥솥에는 신선이 될 단약이 익어가는데
다래 넝쿨에 달빛 비치고 솔바람 일건만, 학(을 탄 신선)은 아직 돌아오지 않네.
시의 분위기가 맑고 서늘하며, 글자를 다루는 법 또한 대단히 기발하다. 역시 제왕이 지은 작품은 세속 시인들의 뻔한 입버릇과는 차원이 다르니, 아 참으로 존경스럽다.
우리나라의 시학(詩學)은 고려 시대부터 송나라의 소식(소동파)과 황정견만을 지나치게 위주로 삼아왔다. 이 때문에 비록 이색(경렴, 고려 말의 대유학자) 같은 위대한 학자라 할지라도 역시 그들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나머지 세상에 이름 좀 날린다는 자들은 마침내 그들의 찌꺼기나 빨아먹으며 비위를 상하게 하는 촌스러운 문장만 만들어내니, 읽다 보면 역겨울 정도다. 맑고 울림이 컸던 당나라 전성기(성당 盛唐)의 진짜 시는 그 소리가 싹 없어져 들을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나마 매월당 김시습(자는 열경, 강릉 사람이다. 벼슬을 하지 않은 처사로 시호는 청간이다)의 시가 맑고 호방하여 속세를 초월했다 할 수 있다. 그는 타고난 천재성이 뛰어나 억지로 다듬고 꾸미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았다. 다만 머리를 쥐어짜지 않고 붓 가는 대로 툭 던지듯 지은 것이 많다 보니 간혹 거친 표현이 섞여 있어, 시의 정통(정시 正始)을 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망헌 이주(이름은 주, 자는 주지, 고성 사람으로 벼슬은 정언을 지냈다)의 시는 침착하고 노련하여, 나의 둘째 형님 허봉(자는 미숙, 호는 하곡, 양천 사람으로 벼슬은 전한을 지냈다)은 그의 시를 당나라 중기인 대력·정원 연간의 작품에 가깝다고 평가하셨다. 하지만 그 역시 소동파와 두보의 영향에서 나온 터라 전체적으로 순박하지는 못했다. 충암 김정(자는 원충, 경주 사람으로 형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간이다)의 시는 맑고 굳세면서도 기이하고 아름다워 진짜 작가라 부를 만하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말이나 중복되는 단어가 다소 많다.
그 후로는 이 썩어빠진 시단을 일으켜 세운 자가 없었다. 그러다 명나라 융경·만력 연간(선조 시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최경창(가운은 자이고 본명은 경창, 호는 고죽, 해주 사람으로 부사를 지냈다), 백광훈(창경은 자이고 본명은 광훈, 호는 옥봉, 해미 사람으로 참봉을 지냈다), 이달(익지는 자이고 본명은 달, 호는 손곡, 홍주 사람으로 쌍매당 이첨의 서얼 손자이다) 등 세 사람이 당나라 현종 때인 개원 시대의 시풍을 전공하며 정수를 이루려 애썼고, 옛 대가들을 따라잡고자 했다.
하지만 솔직히 내 눈에는 그들의 시 역시 뼈대가 온전치 못하고 겉모습만 너무 번지르르하게 예쁠 뿐이다. 당나라의 평범한 시인들인 허혼이나 이교 사이에 끼워 놓아도 금세 '촌뜨기' 꼴이라는 것을 들킬 텐데, 도리어 감히 이백이나 왕유 같은 대시인들의 자리를 뺏으려 든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사람 덕분에 비로소 조선의 학자들이 '당나라풍의 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니, 그 세 사람의 공로를 결코 덮어버릴 수는 없다 하겠다.
최경창이 고봉군의 산정에 제하여 지은 시(제고봉군산정시)는 이러하다.
오래된 고을이라 성곽조차 없는데 / 산속 서재엔 그저 숲이 우거졌네.
백성도 아전도 흩어져 쓸쓸한데 / 물 건너 마을에선 차가운 겨울 다듬이 소리만 들려오네.
백광훈이 그림에 제하여 지은 시(제화시)는 이러하다.
관청의 문서 기록은 백발을 재촉하는데 / 아름다운 시내와 산이 그림 속에 들어왔구려.
모래톱 평평하니 옛 언덕은 그대로인데 / 달빛은 하얗고 낚싯배는 외로워라.
또 그가 스님의 두루마리에 제하여 지은 시(제승축시)는 이러하다.
지리산은 쌍계사가 절경이요 / 금강산은 만폭동이 기이하다던데.
내 몸은 그 이름난 명산들에 가보지도 못하고서 / 매양 떠나는 스님을 위해 시만 지어 보내누나.
이달이 지은 산사 시(산사시)는 이러하다.
흰 구름 속에 절이 있으니 / 뜰에 흰 구름 가득해도 스님은 쓸지를 않네.
손님이 찾아와 그제야 문을 여니 / 온 골짜기에 소나무 꽃만 흐드러지게 피었구나.
또 그가 배를 돌리며 지은 시(회주시)는 이러하다.
병든 가을 해오라기 모래밭에 내려앉고 / 늦매미는 강가 나무에서 울어대네.
물마름에 바람 일어 배를 돌려 돌아가니 / 꿈속에서는 서쪽 연못에 비가 내리네.
최경창, 백광훈, 이달 세 사람의 시는 모두 바른 시법(정시)을 본받았다. 최경창의 맑고 굳센 맛과 백광훈의 메마른 듯 담백한 맛은 귀하게 여길 만하나, 뒷심과 기력이 달려서 약간 얇은 흠이 있었다. 이달의 풍부하고 화려함은 저 두 사람에 비하면 그 스케일이 약간 크긴 하지만, 결국 세 사람 모두 당나라의 가난하고 쓸쓸한 시인인 맹교와 가도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최경창과 백광훈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이달은 늙어서야 문장이 크게 진보하여 마침내 자신만의 일가를 이루었다. 그 화려함을 거두고 평범하면서도 진실한 경지로 돌아간 것이다. 나의 둘째 형님이 자주 칭찬하시기를 "이달의 시는 당나라 유장경(수주)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해도 큰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셨다.
그래서 내가 대꾸했다. "문장이란 세상의 흥망성쇠를 따라가는 법이라, 송나라가 당나라만 못하고 원나라가 송나라만 못한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조선의 시인이 중간의 두 왕조를 훌쩍 뛰어넘어 당대의 진짜 작가들과 우열을 다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형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유(한퇴지)는 당나라 사람인데도 유종원(유자후)이 그를 두고 '사마천과 나란히 달린다'고 평하지 않았더냐? 유종원이 어찌 헛말을 할 사람이겠느냐. 이달 또한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끝내 형님의 그 말씀을 곧이듣지 않았다.
나의 둘째 형님의 시는 처음에는 소동파를 배워 대단히 전아하고 순실하며 온건하고 노숙한 맛이 있었다. 그러다 독서당(호당)에 뽑히시더니, 그곳에서 《당시품휘》를 익히 읽으신 뒤로 시가 비로소 맑고 굳세어졌다. 훗날 늙은막에 갑산으로 귀양을 가실 때, 이태백의 시집 한 권을 품고 가셨다. 그 덕에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오신 뒤에 쓰신 시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 같은 이태백의 경지를 깊이 체득하여, 장편이든 단편이든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기세가 대단했다. 일찍이 이달(이익지)이 말하기를 "허봉(미숙 학사)의 시를 읽고 있으면, 마치 허공에 흩날리는 꽃을 보는 것만 같다"고 감탄했을 정도다.
하지만 형님이 불행히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 그 원대한 포부를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셨고, 남긴 글마저 흩어져 미처 수습하지조차 못했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미처 찾아낼 겨를도 없이 모든 것이 병화(兵火)에 타버리고 말았으니, 이 죽어도 잊지 못할 뼈저린 슬픔이 어찌 끝이 있겠느냐. 내가 강릉(경호)에 머물 때 난리의 놀라움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옛날 형님이 읊으셨던 것들을 필사적으로 떠올려 적어보았으나 겨우 5백여 편에 불과했다. 이것이라도 베껴 세상에 전하여 형님의 흔적이 영영 사라지지 않기를 기대할 뿐이다. 하지만 이는 태산의 털끝 하나에 불과할 따름이다.
최경창은 1568년(무진년, 선조 1년)에 진사가 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종성 부사가 되었다. 하지만 어떤 일로 벼슬이 강등되었다가 나중에 성균관 국자 직강으로 임명된 뒤 세상을 떠났다. 그가 언젠가 사신으로 북경에 갔을 때 조천궁(도교 사원)에서 지은 시는 이러하다.
한밤중 구슬 제단에 흰 구름을 쓸어내고 / 향 피우고 멀리 옥신군(도교의 신)에게 절 올린다.
달빛 아래 절하는 내 그림자, 보는 이 아무도 없고 / 아름다운 신선 나무만 겹겹이 궁궐 문을 가리웠네.
또 지은 시는 이러하다.
삼청동의 맑은 이슬 기운 구슬 궁전에 촉촉하고 / 봉황 피리 부는 신선은 달밤 허공을 배회하네.
정원 길엔 이제 향기로운 수레의 자취 끊어졌건만 / 푸른 복숭아 붉은 살구꽃엔 홀로 봄바람이 한창이네.
그때 진씨 성을 가진 어떤 도사가 있었는데(이름은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그 역시 시를 아주 잘 지었다. 그는 최경창의 이 시를 대단히 칭찬하며 통주의 하청관까지 쫓아와 자신의 책에 시를 지어달라고 청했고, 최경창은 다음과 같이 답시를 지었다.
푸른 우주는 신선 세계를 알리고 / 검은 제단은 태청(하늘)에 맞닿았네.
난새는 구슬 밭 나무에 깃들고 / 붉은 노을은 자미성(임금이 계신 곳)을 감돌았네.
하늘의 보물 기록은 깊이 감춰져 있고 / 신선의 금단은 아홉 번을 구워 완성되었네.
신선 수레 탄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 아득한 허공 저 밖으로 피리 소리만 들려오네.
이 시가 중국 전역에 전파되자 명나라의 대문장가 왕세정(왕봉주) 선생조차 대단히 칭찬하였다.
최경창이 충장공 양조의 무덤을 지나며 지은 시는 이러하다.
구름 속에 해가 지자 붉은 노을이 산을 비추고 / 오랑캐 우두머리는 이미 녹두관 앞까지 다가왔네.
장군이 홀로 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 한밤중 요하를 건너 싸우다 끝내 돌아오지 못했구려.
이 시는 진짜 당나라 시인들의 수준에 결코 뒤지지 않으니, 그가 중원(중국) 땅에서 그렇게 큰 사랑을 받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백광훈은 글씨를 쓰는 필법이 왕희지와 왕헌지의 경지에 가까웠다. 첫 벼슬로 예빈시 참봉에 임명되었는데, 언젠가 홍경사를 지나가다 지은 시는 이러하다.
가을 풀만 쓸쓸하게 우거진 고려 왕조의 옛 절 / 다 깨진 낡은 비석엔 학사의 글이 새겨져 있네.
흐르는 물이야 천 년토록 한결같은데 / 해 질 무렵 떠나가는 구름을 물끄러미 바라보네.
그는 1582년(임오년, 선조 15년)에 병을 얻어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리 난설헌 누님이 지은 감우시(마음에 느낀 바를 읊은 시)는 이러하다.
요즘 최경창과 백광훈 같은 무리들이 / 성당(당나라 전성기)을 법 삼아 시를 갈고닦으니
적막하게 죽어 있던 대아(정통적이고 우아한 시)의 음률이 / 이들을 만나 비로소 크게 떨쳤네.
하급 관리는 중국의 광록훈 벼슬에 비할 바 없고 / 변방 고을 벼슬아치는 땔감 지듯 고달파 슬프네.
나이와 벼슬이 모두 초라하게 쇠락해버렸으니 / 이제야 믿겠네, 시라는 것이 사람을 이토록 궁하게 만든다는 것을!
난설헌의 본명은 초희이고 자는 경번이다. 초당 허엽(나의 아버지)의 딸이자, 서당 김성립의 아내이다. 누님이 지은 <강남곡(강남의 노래)>은 이러하다.
사람들은 다들 강남 땅이 살기 좋다고들 하지만 / 내 눈엔 강남 땅이 온통 시름겹기만 하네.
해마다 모래톱 포구에 홀로 서서 / 애가 끊어지는 마음으로 임이 타고 올 배만 바라보네.
<빈녀음(가난한 여인의 노래)>은 또 이러하다.
황금 가위 손에 쥐고 마름질하려니 / 추운 밤 열 손가락이 꽁꽁 얼어붙네.
평생토록 남을 위해 시집갈 예쁜 옷만 지어주건만 / 정작 해마다 나는 홀로 텅 빈 방을 지키네.
<채련곡(연꽃 따는 노래)>은 이러하다.
가을빛 맑은 긴 호수엔 비취옥 같은 물결 흐르고 / 연꽃 깊숙한 곳에 목란 배를 매어두었네.
물 건너 임을 만나 반가운 맘에 연밥을 툭 던지다가 / 그만 남들 눈에 띄는 바람에 반나절이나 얼굴 붉혔네.
백호 임제(자는 자순, 나주 사람이다)는 1577년(만력 정축년, 선조 10년)에 진사가 되었다. 본래 타고난 성품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넘쳐 세상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았다. 속물적인 세상과 타협하지 못했으니 삶이 불우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일찍 세상을 떠났다. 벼슬은 의제 낭중(예조정랑 겸 지제교의 별칭)에 그쳤다.
그가 죽은 뒤에 어떤 이가 "임제가 역모의 괴수(정여립을 가리킴)와 더불어 시국을 논하면서, '항우는 천하의 영웅인데 성공하지 못한 것이 애달프다'고 말하며 마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무함(거짓으로 헐뜯음)을 했다. 이 고발이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삼성)에 전해지자 조정에서 임제의 아들 임지를 국문(심문)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아들 지가 선친(임제)이 예전에 오강(항우가 자결한 곳)에서 항우를 조상하며 지었던 부(賦, 운문)를 증거로 올린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변방으로 귀양 가는 것으로 끝났다.
임제가 평사 이영을 떠나보내며 지은 시는 이러하다.
북방에 눈 내리는 척박한 오랑캐의 길 / 음산한 바람 불어오는 발해의 바닷가.
주장(원융)을 모시고 서기를 맡은 이는 / 당대 최고의 미남자로다.
칼집에는 별조차 찌를 듯한 보검이 들어 있고 / 주머니엔 귀신도 울릴 만한 기가 막힌 시가 들었네.
변방의 모래바람 금갑옷에 자욱하게 쌓이는데 / 규문(쪽문) 위로 떠오른 달은 붉은 깃발을 비추누나.
머지않아 옥문관(변방 관문) 곳곳을 다 누빌 테니 / 공신을 모신 운대각에 초상화 걸릴 날 머지않으리.
바라보건대 사내답게 머리카락 곤두세우고 뜻을 펼치시라 / 먼 길 떠난다고 결코 슬픈 기색일랑 짓지 마시게나.
이 시의 격조는 당나라 시인 양형(양영천)과 매우 비슷하다.
임제의 호는 백호이며 북평사를 지냈다. 양반의 족보를 기록한 《잠영보》를 상고해 보면 "임제의 맏아들은 임탄이고 호는 한정으로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둘째 아들은 임기이고 호는 월창으로 벼슬은 좌랑을 지냈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국문을 당한 '지'라는 이름은 혹시 장남 탄이 이름을 바꾼 것은 아닐까?
백호 임제의 <규원시(여인의 한을 읊은 시)>는 이러하다.
열다섯 살 어여쁜 월계 마을 아가씨 / 남보기 부끄러워 말 한마디 못하고 임과 헤어졌네.
돌아와 겹겹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 배꽃에 비친 달을 보며 홀로 숨죽여 울었네.
<산사시(산사 시)>는 또 이러하다.
한밤중 깊은 숲 속 절간에 스님이 잠들었는데 / 무거운 비구름이 스님의 풀옷을 축축이 적시누나.
느지막이 바위 틈 사립문을 여니 / 둥지에 깃들어 있던 새들이 그제야 놀라 푸드덕 날아오르네.
이영은 고성 사람으로 자는 언윤, 호는 남고이다. 청파 이육의 손자이며 벼슬은 목사를 지냈다. 그가 우리 둘째 형님(허봉)이 계시던 함경도 경흥의 압호정이라는 정자에 지어 올린 시는 이러하다.
국경에서 스산한 풍경을 서글프게 바라보니 / 인가의 밥 짓는 연기는 귀신 사는 오랑캐 땅과 맞닿았구나.
산은 외로운 진영의 장막 밖을 에워싸고 / 물결은 무너진 무덤 옆으로 스며 흘러드는구나.
누추한 초가집에서 해가 바뀌도록 병들어 누웠는데 / 푸른 싹에는 한밤중 차가운 서리가 내렸네.
이곳에 오르자 마음이 가장 서글퍼지니 / 까칠하게 센 수염은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누렇게 시들어가는구나.
임제(임자순)가 이 시를 대단히 칭찬하며 그 운자를 따서 화답시를 지으려 했다. 하지만 종일 머리를 쥐어짜도 뜻대로 되지가 않자, 포기하고 이영에게 짧은 시 구절 하나를 보냈다.
"백옥(초가집)과 청묘(푸른 싹) 열 글자는 완벽한 역사 기록이로다!"
이는 이영의 시 셋째 연과 넷째 연(백옥, 청묘)이 현실의 참담함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생생한 역사적 묘사임을 감탄한 것이다.
강원도 금성 객관 누각에 옛사람이 가을 '추(秋)' 자로 운을 맞춰 판각해 못을 박아 걸어놓은 현판이 있었다. 최경창(최고죽)이 거기에 차운(운자를 빌려 지음)한 시는 이러하다.
서글픈 태평소 소리 옛 고을에서 들려오는데 / 깊은 강물은 어둠 속을 다급히 흘러가네.
으스름한 등불 아래 쓸쓸한 나그네의 꿈결이요 / 한밤중 옛 시인 왕찬이 올랐던 고향 그리는 누각이로다.
차가운 비 쏟아지다 비록 개었다지만 / 고향 그리는 마음에 또다시 가을을 맞았구나.
여기에 나의 둘째 형님(허봉)이 이어서 읊으셨다.
나그네 몸으로 만 리 먼 길을 떠나가며 / 말 멈추어 차가운 강물을 먹이네.
넓은 큰길엔 향기로운 봄풀이 지천인데 / 저녁 밥 짓는 연기는 역참 누각에서 피어오르네.
나그네의 슬픈 회포는 온통 어렴풋한 꿈만 같아 / 분명 봄날이건만 마음은 절반이나 가을 같구나.
최경창이 이 시를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봄을 노래하는 시에 가을 '추(秋)' 자를 운자로 쓰기가 가장 어려운 법인데, 이 구절은 참으로 옛사람보다 훨씬 뛰어나구려!"
내 생각에 누각에 걸려 있는 현판의 시들은 모조리 케케묵은 것들뿐이다. 비록 그중에 맑고 신선한 구절이 있다 한들, 쓰레기 더미 속에서 가려내기란 여간 쉽지 않으니 굳이 지어 걸 필요가 없다.
임제가 언젠가 가학루라는 누각을 지나갈 때였다. 누각 안에는 사람들이 써 붙여놓은 현판 시가 무려 만여 개나 빽빽하게 걸려 있으므로, 임제는 그 수준 이하의 잡소리들이 너무나 꼴 보기 싫어 누각 관리인을 불러 물었다.
"이 현판들은 관청의 명령으로 억지로 만든 것이냐? 아니면 여기다 시를 안 지어 걸면 벌이라도 주었더냐?"
관리인이 황당해하며 답했다.
"짓고 싶으면 짓고, 말고 싶으면 마는 거지요. 어찌 관청의 명령이나 처벌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임제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 그래? 그렇다면 난 안 짓겠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적들이 관사들을 다 불태워버려 남은 것이 없었고, 불타지 않은 곳은 사람들이 현판을 철거해 땔감으로 불 속에 던져버렸다. 아마 하늘조차도 쓰레기 같은 시들이 높은 벽에 잘난 듯이 걸려 있는 꼴을 몹시도 싫어하셨던 게 분명하다!
물론 누각에 걸린 시 중에도 좋은 시구가 더러 있기는 하다. 임진년에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난리를 피해 북쪽 변방으로 들어가다가 곡구역에 다다랐을 때, 임형수가 지은 시의 한 구절(항련)을 보았다.
꽃이 나직이 고개 숙이니 술 취한 미녀의 붉은 얼굴 같고
산맥이 뚝 끊어지니 바닷물을 들이마시는 푸른 용의 허리 같구나.
이처럼 시어(시의 언어)가 맑고 절묘하니, 어찌 누각에 걸린 시라고 깎아내려 흠잡을 수 있겠는가. 임형수의 자는 사수이고 호는 금호이다. 평택 사람으로 벼슬은 목사를 지냈는데, 명종 때 정미년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원통하게 죽었다.
어촌 심언광의 시는 그 두터움과 화려함이 호음 정사룡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송계 권응인이 중종 이래의 문학 대가들을 평가하면서 그 명단에 심언광을 빼버렸으니,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내가 북방 변방에서 누각의 현판 시들을 보다가 심언광 공의 시를 읽고 나서는, 눈을 씻고 감탄하며 장단을 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의 <영동역 시(영동역시)>는 이러하다.
총애와 치욕이 유유히 교차하니 두 가지 일에 모두 놀라고 / 낙엽처럼 떠도는 이 남은 목숨을 그 어디에 의탁할까.
하늘가 해 질 무렵 고향 그리는 눈물만 흐르고 / 국경 밖 늦가을 고국을 떠나온 서글픈 마음일세.
구름은 잎사귀처럼 어지러이 날아 온 산이 새까맣고 / 둥근 달은 나직이 비추어 온 바다가 훤히 밝아라.
나그네의 신세 오늘 밤 유난히 시름겨워서 / 푸른 등불 마주하고 앉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네.
<수성역>에서 지은 시는 또 이러하다.
고향 떠나 가을을 지나 국경 변방 성에 머무니 / 낯선 땅 풍경은 그저 고향을 그립게만 하네.
넓은 강 건너고 싶으나 배 저어줄 사공은 없고 / 겨울나무 말라 죽어가도 겨우살이 풀은 찰거머리처럼 매달렸네.
내 한 몸 도모함이 곧은 길이 아니었음이 스스로 우습고 / 세상을 속여 헛된 이름에 얽매였음이 오히려 부끄럽네.
새벽에 문을 활짝 열고 푸른 바다 마주하니 / 아침 해가 찬란히 떠올라 내 간담을 환히 비추네.
이와 같은 뛰어난 작품들이 어찌 정사룡 무리만 못하단 말인가? 특히 위 시의 넷째 구절("겨울나무 말라 죽어가도 겨우살이 풀은 매달렸네")은, 간신 김안로는 죽었지만 그 잔당들이 아직 다 죽지 않고 조정에 달라붙어 있음을 풍자한 것이다.
어촌 심언광은 자가 사형이며 삼척 사람이다. 이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공이다. 호음 정사룡은 자가 운경이며 동래 사람으로 영중추부사를 지냈다. 송계 권응인은 안동 사람으로 학관을 지냈으며 이조 참판 권응정의 서자 동생이다. 안로(김안로)는 성이 김씨, 자는 이숙, 호는 희락당이며 연안 사람으로 좌의정을 지냈다. 탐욕스럽고 간사하여 조정을 제멋대로 휘둘렀기 때문에 중종 32년(1537년, 정유년)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심언광의 <사과꽃이 지다(내금화락)>라는 시는 이러하다.
오련히 붉은 꽃이 봄기운 받아 늙은 가지에 피어나니 / 누굴 위해 단장했는가, 이 촌야 사람의 집에서.
한밤중 몰아치는 비바람에 초췌해질까 두렵더니 / 다닥다닥 피었던 사과꽃, 모조리 다 져버렸구나.
송계 권응인이 <촉석루>에서 지은 시는 이러하다.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달빛이 잔잔한 물결 비추니 / 잠자던 해오라기 나직이 날아올라 물가 모래톱에 내려앉는다.
강가 정자에 발을 걷어 올리고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있으니 / 나루터 노 젓는 소리, 고요한 밤이라 유독 크게 들려오네.
나의 둘째 형님(허봉)이 근래의 시인들을 평가하면서, 소재 상공(노수신)을 최고의 대가로 꼽고 제봉 고경명을 그다음으로 치셨다. 이익지(이달)는 늘 "둘째 형님의 시와 문장이 고경명 공보다 훨씬 낫다"고 주장했는데, 이 논란은 꽤 오래되었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다. 내가 우연히 권응인을 만나게 되어 이에 대해 물어보니, 그 역시 "이달의 말이 맞다"고 인정하였다.
권응인이, 갑산으로 귀양을 떠나는 둘째 형님을 전송하며 지은 시의 한 구절에 이런 내용이 있다.
정묘교 곁에 살던 당나라 시인이고 / 경인일에 태어나 쫓겨난 초나라의 충신이로다.
이 구절을 보면 고사의 인용이나 대구법(두 구절을 짝맞추는 법)이 대단히 절묘하고 적절하다. 형님이 서애 류성룡에게 부친 시에도 이런 구절이 있다.
갑자년에 진흙탕 구르던 참상을 말하지 말라 / 응당 경인년에 하늘에서 하강할 때를 맞이하리니.
소재 노수신은 자가 과회이며 광산 사람이다.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간이다. 제봉 고경명은 자가 이순이며 장흥 사람이다. 목사를 지냈고 시호는 충렬이다. 서애 류성룡은 자가 이견이며 풍산 사람이다.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충이다.
형님이 귀양 가기 전, 홍문관(옥당)에 계실 때 꿈속에서 이런 시를 지으셨다.
텃밭에 채소 가꾸는 솜씨야 날로 늘어간다만 / 천상 신선의 세계는 꿈결에도 어렴풋하기만 하네.
오직 한나라 가의(젊어 귀양 간 충신)가 흘렸던 눈물만 남아 / 밤마다 차가운 옷깃을 흠뻑 적실 뿐이네.
이렇게 읊으시더니, 정말로 그해 가을에 갑산으로 귀양을 가게 되셨다. 난설헌 누님이 평상시에 또한 꿈속에서 지은 시가 있다.
푸른 바닷물은 신선 사는 요해(아름다운 바다)로 젖어 들고 / 푸른 난새는 오색 봉황에 기대었구나.
스물일곱 송이 붉은 연꽃이 / 서리 내린 차가운 달빛 아래 툭 떨어져 지는구나.
누님은 이렇게 읊으시더니 정말로 이듬해에 신선이 되어 하늘로 떠나가셨다. 3에 9를 곱하면 27이니(三九, 27) 딱 누님이 돌아가신 나이와 똑같다. 사람의 일에 있어 이토록 미리 정해진 운명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우리 누님의 시와 문장은 모두 하늘이 내린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들이다. 특히 유선시(신선 세계를 유람하는 시)를 즐겨 지었는데, 시어 하나하나가 너무도 맑고 깨끗하여 밥이나 지어 먹고 사는 속세의 평범한 사람들은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경지다. 산문 역시 우뚝하고 기이한데 사륙문(넉 자, 여섯 자로 짝을 맞춘 문체)이 가장 압권이다. 누님이 지은 <백옥루상량문>이 지금도 세상에 널리 전해지고 있다.
둘째 형님이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경번(누님의 자)의 재주는 억지로 배워서 다다를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이는 모두 이태백과 이장길(이하, 당나라 천재 시인)이 남긴 신선 같은 울림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아아! 살아서는 남편과 금슬이 좋지 못해 마음고생만 하더니, 죽어서는 제사 지내줄 자식조차 하나 없구나. 아름다운 옥이 바스러진 듯한 이 끔찍한 원통함을 생각하면 내 가슴에 한이 끝이 없다.
💡 [핵심 해설]
허균은 이 글에서 당대 조선 시단의 뻔한 복제 관행을 통렬히 조롱하며,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이태백풍의 자유로움(허봉, 임제)과 하늘이 내린 순수한 감성(허난설헌)을 최고로 치켜세웁니다. 특히 임진왜란과 인물들의 비극적 죽음을 예언한 듯한 시들을 교차시키며, 문학 비평을 넘어선 시인의 얄궂은 숙명과 애끓는 가족사를 한 편의 아름다운 에세이처럼 풀어냈습니다.
'LLM으로 뽑은 잡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허균 - 학산초담 3 (0) | 2026.05.14 |
|---|---|
| 허균 - 학산초담 2 (1) | 2026.05.14 |
|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 제26권 「도문대작(屠門大嚼)」 (0) | 2026.05.14 |
|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 제26권 「도문대작(屠門大嚼)」 (0) | 2026.05.14 |
| 연역vs 귀납 (0) | 2026.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