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방의 한계를 뛰어넘은 시인, 이옥봉
이옥봉은 선비 조원의 소실(첩)이다. 그녀의 시는 몹시 맑고 강건하여, 도무지 아낙네들이 연지 찍고 분 바르며 짓는 연약한 시가 아니다. 남편을 따라 진주로 내려가는 길에 노산묘(단종의 무덤, 훗날의 장릉)를 지나며 지은 시는 이러하다.
닷새는 장간(이백의 시에 나오는 이별의 지명)을 지나고 사흘은 영월을 지나며 / 참담한 노릉의 구름 아래 애달픈 노래가 끊어지네.
이 내 몸 또한 왕손의 딸(옥봉은 전주 이씨로 왕족의 후손이다)이기에 / 이 땅에서 우는 두견새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구려.
서군수(서익)의 소실이 현판 글씨와 짧은 율시를 부쳐준 데 대해 감사하며 옥봉이 보낸 답시는 이러하다.
여위면서도 굳센 필치로 하늘 밖의 정취를 써 보내니 / 당나라 명필 유공권의 서체, 그 남은 자취를 보는 듯하네.
반듯한 글씨(진서)는 흩날리는 가운데 봉황처럼 날아오르고 / 큰 글씨는 뭉게구름이 응집된 듯 웅장하네.
시험 삼아 산속 누각에 걸어보니 호랑이가 뛰어오르는 듯하고 / 강가 정자에 걸어보니 문득 용이 솟아오르는 듯하네.
진나라 위부인(왕희지의 스승)의 필재가 바야흐로 건장한 줄은 알았건만 / 진나라 소야란(유명한 여성 시인)의 시재까지 어찌 이리 공교하게 독차지하셨소.
그대 몸은 가녀린 난초(혜초) 가지 같아도 생각은 이리 씩씩하며 / 옥 같은 가녀린 손 파뿌리 같건만 글씨는 어찌 이리 웅장한가.
우리의 정신적 사귐이 만 리 밖에서도 문묵(글과 글씨)으로 통하니 / 여의주를 보내주신 은혜에 보답하려 백옥동자(편지 전하는 신선)에게 소식을 알리노라.
옥봉의 남동생 또한 시를 아주 잘 지어, 언젠가 절구 한 수를 읊었는데 그 마지막 구절은 이러하다.
창문 열고 새벽 달빛 아래 거니노라니 / 맑은 이슬이 매화나무 가지를 함초롬히 적시누나.
안타깝게도 그의 문집 전체를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이옥봉의 본명은 이원이고 완산 사람으로, 충의위 이봉의 딸이다. 남편 조원의 자는 백옥, 호는 운강, 임천 사람으로 승지를 지냈다. 서군수의 이름은 서익, 호는 만죽, 부여 사람으로 부사를 지냈다.)
이옥봉이 규방의 애틋한 정을 노래한 시(규정시)는 또 이러하다.
오마 약속하신 서방님 어이 이리 더디신가 / 뜰가에 핀 매화꽃은 이미 다 시들어가는데.
문득 나뭇가지 위 까치 우는 소리(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징조) 듣고는 / 행여 오실까 헛되이 거울 보며 눈썹을 그리네.
명시는 지명을 탓하지 않는다
최경창(최고죽) 등이 언젠가 "우리나라 지명은 촌스러워 중국만 못하니, 시를 지을 때 지명을 멋들어지게 구사할 수가 없다"며 늘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소재 노수신의 시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길은 막다른 '평구역(平邱驛)'이요 / 강물은 '판사정(判事亭)' 앞이라 깊기도 하여라.
이 시를 보면 윗구절과 아랫구절 모두 조선의 속된 지명을 썼건만, 시를 구성하는 법이 무척이나 온당하고 적절하다. 이로써 대가의 솜씨란 자연히 여느 평범한 사람들의 불평과는 차원이 다름을 알겠다.
내 스승 이달과 양사언의 일화
이달(이익지, 손곡)은 젊어서 화류계에 드나드는 실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뛰어난 재주를 시새움하는 자들이 늘 그것을 꼬투리 삼아 비방했다. 심지어는 "어머니도 제대로 모시지 않고, 부인에 대한 예의도 닦지 않은 놈"이라며 헐뜯어 마지않았다.
봉래 양사언이 강릉 부사로 부임했을 때 이달을 스승이자 빈객의 예로 융숭하게 대우하자, 이를 시샘한 무리들이 나의 아버님(선대부 초당 허엽, 당시 부제학)께 근거 없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아버님께서 양사언에게 편지를 보내 이달과 절교하라고 권하셨다. 그러자 양사언이 이런 답장을 보냈다.
"「오동꽃은 밤비에 지고, 바닷가 나무는 봄구름 속에 사라진다」라는 기가 막힌 시를 짓는 이달을 만약 소홀히 대접한다면, 삼국시대 조식(진왕)이 뛰어난 문인인 응탕과 유정을 잃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나 그 후 주변의 시선 때문인지 양사언의 대우가 약간 소홀해지자, 이달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훌쩍 떠나버렸다.
나그네가 머물고 떠나는 것은 / 오직 주인의 눈썹 사이(안색)에 달린 법.
오늘 아침 반기시는 기색이 사라졌으니 / 우리 집 고향의 푸른 산이나 그리워하련다.
노나라에선 바닷새 원거에게 화려한 잔치를 베풀어 환대하더니 / 남쪽으로 쫓겨날 땐 마원의 율무(억울한 모함의 상징)를 안고 돌아가는 꼴이네.
가을바람에 가난했던 소진(소계자)의 신세가 되어 / 또다시 쓸쓸히 목릉관을 떠나가노라.
이 시를 보고 양사언이 크게 놀라고 뉘우치며, 그를 쫓아가 전과 같이 극진히 대접하였다.
(양사언의 본명은 사언, 자는 응빙, 호는 봉래이며 청주 사람으로 부사를 지냈다. 내 아버님의 성함은 허엽, 자는 태휘, 호는 초당이며 부제학을 지냈다.)
양사언이 '국도(國島)'라는 섬에 대해 지은 시는 이러하다.
단청 칠한 화려한 누대에 보랏빛 신선 연기 떨치며 / 구름길 뚫고 용을 탄 여러 신선 내려오네.
저 푸른 산도 또한 인간의 더러운 속세가 싫었는지 / 푸른 바다 같은 만 리 아득한 하늘로 훨훨 날아드누나.
연산군과 강혼의 시
연산군이 집정하던 시절, 강혼은 도승지가 되어 임금의 가장 큰 총애를 받았다. 언젠가 연산군이 시제를 내리기를,
한식 동산에 삼월은 다가오고 / 비바람에 꽃 지는 새벽은 싸늘해라.
라며 승지와 사관, 경연관들에게 이 구절을 이어서 칠언율시를 지어 바치게 하였다. 그때 강혼이 지은 시는 이러하다.
청명절이라 대궐 버드나무엔 차가운 연기 서렸는데 / 쌀쌀한 봄바람 불어오니 새벽들어 한층 더 미친 듯 몰아치네.
붉은 꽃잎들이 온통 땅을 덮도록 내버려 두고 / 휘날리는 하얀 버들개지 온 하늘에 자욱하구나.
물 건너 높은 누각에 구슬 발이 걷히니 / 꽃구경 가는 좋은 말엔 비단 안장 빛나네.
금동이 술 다 마시고 취하여 별원으로 돌아오노라니 / 단청 칠한 난간 가에 오색 그네줄 나부끼네.
연산군은 이 시를 대단히 칭찬하며 그에게 금은보화를 듬뿍 하사하였다.
(강혼의 자는 사호, 호는 목계, 진주 사람이며 벼슬은 판중추부사를 지냈고 시호는 문간이다.)
기묘사화와 억울한 죽음들
응교를 지낸 기준이 기묘사화로 온성에 귀양 가 있을 때, 마침내 서울로부터 사약이 내려왔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조용히 시를 읊으며 스스로 자신의 만장(죽은 이를 애도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러하다.
해 지니 하늘은 먹빛 같고 / 산은 깊어 골짜기는 겹겹이 구름 같구나.
천 년토록 지키자 맹세했던 군신의 굳은 의리는 / 아, 슬프게도 오직 하나의 외로운 무덤뿐이로구나.
이 시를 읽노라면 사람으로 하여금 심장과 간장이 다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게 한다.
(기준의 자는 자경, 호는 복재, 행주 사람이며 벼슬은 응교에 그쳤고 시호는 문민이다.)
최수성(호는 원정)은 기묘사화 이후 늘 화를 입을까 두려워 세상을 등지고 방랑했건만, 마침내 그의 숙부인 최세절의 참소를 받아 억울한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가 죽기 전 만의사에 남긴 시는 이러하다.
옛 부처 모신 전각엔 늙은 스님 몇 남아있고 / 나뭇가지 끝엔 저물녘 경쇠 소리 맑게 울리네.
굽이진 산길은 천 리 밖으로 아스라이 사라지고 / 담장은 우뚝 솟아 뭇 산들이 하마 낮아 보이네.
저 나무는 하도 늙었으니 대체 몇 살이나 되었을꼬 / 새들의 지저귐도 곳에 따라 소리가 유달라라.
어렵고 험한 세상, 죄의 그물에 걸릴까 그토록 근심했더니 / 오늘 새삼 이 내 목숨 부지함이 부끄럽기 짝이 없구나!
시의 언어가 참으로 맑고 빼어나다. 마지막 구절을 보면, 그는 대체 자신이 그토록 억울하게 화를 입을 것을 미리 헤아리고 있었단 말인가?
(최수성의 자는 가진, 강릉 사람으로 벼슬을 하지 않은 처사이며 시호는 문정이다. 그를 고발한 숙부 최세절의 자는 개지이며 벼슬은 호조 참판이다.)
최수성의 '망천도(왕유의 별장을 그린 그림)'에 제하여 지은 시는 이러하다.
가을 달이 서쪽 산봉우리에 내려앉으니 / 어둑한 연기는 먼 나무에서 피어나네.
끊어진 다리 위에 복건 쓴 두 사나이 서 있는데 / 대체 그 누가 이 망천의 주인인가.
장음정 나식 공은 웅장한 글솜씨와 곧은 절개로 천년에 빛나는 인물이다. 그가 지은 "외로운 배는 일찍 매어두어야 하니 / 풍랑은 으레 밤 깊으면 더 거세어진다네"라는 구절은 옛 선배들이 이미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바 있다. 그가 원숭이 그림에 제하여 지은 절구 두 편을 보고, 이달(손곡)은 "그림 속에 시가 살아 숨 쉰다"며 극찬했다. 그 시는 이러하다.
산원숭이 산포도를 웅켜 안고는 / 다리로는 길고 긴 나뭇가지를 밟고 있네.
우수수 떨어진 열매를 주울 때 / 그 누가 원숭이의 암수를 구별하리오.
또 다른 시는 이러하다.
늙은 원숭이 제 무리를 잃고 / 마른 나무 등걸 위에서 해 지는 걸 바라보네.
동그마니 앉아 고개조차 까딱 않으니 / 아마도 일천 봉우리에 울리는 메아리 소리 듣나 보네.
이 두 번째 시가 더욱 기발하다. (나식의 자는 장원, 안정 사람이다. 조광조의 문인으로 을사사화 때 형인 부제학 나숙과 함께 참화를 당했다.)
그가 지은 <여강시>의 첫 구절 "푸른 강가에 해는 저물고 / 하늘이 차니 물결은 절로 이네"라는 시는, 다른 야사를 참고해 보면 최수성(원정)의 시로 되어 있기도 하다. 숙부인 최세절이 이 시를 꼬투리 삼아 그를 참소했다고도 하는데, 어느 기록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또한 <원숭이 그림에 제하여 지은 시>의 두 번째 시를 시집 《기아》에서는 최수성의 시라고 기록했는데, 이 역시 편집 과정의 오류가 아닌가 싶다.
이달의 시와 김정의 시
이달(손곡)의 <한식 시>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배꽃에 비바람 몰아치는 한식 철인데 / 병든 나그네로 강호를 떠돈 지 벌써 삼십 년일세.
또 임귀성에게 보낸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해마다 떠돌이 나그네라 옷은 벌써 다 해어졌고 / 몇 달이나 집을 떠나 있으니 허리 품만 훌쩍 줄었구나.
범숙(위나라 충신)의 이 지독한 가난, 그 뉘 가엾게 여겨줄 건가 / 소진(합종책을 주장한 책사)처럼 곤궁하여 집에 못 감을 스스로 비웃노라.
노산묘(단종 무덤)에서 지은 시는 이러하다.
봄바람에 슬피 우는 귀촉도 새소리 애달프고 / 해 저물녘 노릉의 풍경은 스산하기만 해라.
이러한 시구들은 대구(두 구절을 짝맞추는 법)가 대단히 자연스럽고 침착하며, 감정을 툭 던지듯 꺾어내는(돈좌) 맛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더러 그의 시가 가벼운 '바람 앞의 꽃' 같다며 결점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글쎄, 그건 시의 깊은 맛을 미처 깨닫지 못해서 하는 헛소리가 아닌지?
충암 김정의 시집 속에 '청산금야월(靑山今夜月)'이라는 시가 들어있는데, 사실 이 시는 용재 이행(시호는 문민공)의 작품이다. 두 사람의 시 짓는 법(시법)이 전혀 다른데도 편찬한 자가 엉터리로 엮은 것이다. 내가 우연히 스님의 두루마리를 보다가 김정의 진짜 시를 발견했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고개 너머 한산사에서 / 스님을 만나니 문득 눈앞이 밝아질 듯 반가워라.
돌샘 가에 마주앉은 우리 둘은 같은 병든 나그네 / 천지간에 떠도는 한낱 부평초일 뿐이네.
성긴 빗속 가물거리는 등불은 싸늘한데 / 술잔 들자 아스라이 들려오는 먼 바다 파도 소리.
창문 열고 거듭 두런거리다 아쉽게 헤어지니 / 구름 설핏 개고 샛별만 밝구나.
이 아름다운 시가 그의 문집 본집에는 빠져 있으니, 당시 편찬자가 혹 미처 보지 못한 것인가?
(이행의 본명은 행, 자는 택지, 덕수 사람이며 좌의정을 지냈다. 시호는 처음 문민이었다가 문정으로 고쳤고, 다시 문헌으로 고쳐졌다.)
이행 공이 그림에 제하여 지은 시는 이러하다.
후둑후둑 소상강에 비가 내리고 / 아스라이 보이네, 눈물 자국 얼룩진 반죽의 숲이여.
그러나 이 그림에 차마 묘사하기 어려운 것은 / 바로 그 옛날 순임금을 잃은 아황과 여영, 두 왕비의 애끓는 심정이리라.
관청 숙직실 벽에 쓴 시는 이러하다.
늙은막에 이리저리 분주하다 보니 병은 약속이나 한 듯 찾아오고 / 봄날의 흥취라야 많지 않으니 굳이 시까지 지을 건 없지.
꾸벅 졸다 깜짝 놀라 깨니 꽃피는 철 이미 늦었구나 / 한 차례 보슬비가 뜰의 장미를 촉촉이 적시누나.
합천에서 자규(두견새) 소리를 듣고 지은 시는 이러하다.
강북의 봄 경치, 고요한 밤이라 한층 더 서글퍼서 / 잠 깨자 까닭 없이 나그네 마음 어지러이 설레이네.
세상 만사 고향으로 돌아감만 못하리니 / 건너 숲에서 울어대는 자규 새소리만 처절하게 잦아라.
주운(한나라 충신)을 읊은 시는 이러하다.
내 허리에 늠름한 보검이 있으니 구차하게 청할 게 무어 있소 / 지하 세계에 날 알아줄 사람 없어도 또한 홀로 노닐 만하네.
가석하도다, 한나라 조정의 괴리령(주운)은 / 일생에 오직 간신의 머리 베는 것밖에 알지 못했구려.
문장의 천재들을 논하다
나의 둘째 형님(허봉)이 언젠가 이달(손곡)의 <유송경시(송도-개성을 유람하며 지은 시)> 가운데 이런 구절을 칭찬하셨다.
대궐 앞 임금 거둥하시던 길엔 가을 풀만 스산하고 / 누대 아래 격구하던 뜰엔 저녁 소를 먹이누나.
하지만 내 생각엔 그 구절이 사인 홍적의 시 구절인 "누대는 텅 비었어도 여전히 반달 모양(반월대)이요 / 전각은 황폐해졌으나 옛 첨성각이네"라는 구절만큼 가슴에 절실하게 와닿지는 못한다. (홍적의 자는 태고, 호는 하의이며 남양 사람이다.)
나의 둘째 형님이 일찍이 "홍경신(홍덕공)과 이덕형(이명보)의 시는 모두 일가를 이루었다 일컬을 만한데, 홍경신은 장편 시를 특히 잘 짓고, 이덕형은 칠언율시를 몹시 잘 짓는다"고 칭찬하셨다. 덧붙여 "이덕형은 훗날 반드시 문장의 최고봉인 대제학에 오를 것이다"라고 예언하셨는데, 훗날 이덕형은 겨우 서른이 넘은 나이에 대제학에 임명되고 벼슬도 예조 판서의 반열에 올랐으니 형님의 안목이 마침내 증명된 셈이다. 반면 홍경신은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건만 불행히도 뜻을 얻지 못해 벼슬이 변변치 못했으니, 사람의 재주와 팔자는 참으로 이처럼 일치하지가 않는다.
(홍경신의 이름은 경신, 호는 녹문이며 남양 사람이다. 만전당 홍가신의 동생으로 부제학을 지냈다. 이덕형의 이름은 덕형, 호는 한음, 광주 사람이며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익이다.)
홍경신이 금강산 풍경을 노래한 <봉래풍악가>를 나의 둘째 형님은 아침저녁으로 쭉 읊으시며 장단을 맞추고 깊이 감탄하셨다. 그 시는 당나라 이태백의 <천로음>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인데, 시상을 얽고 풀어가는 과정에 단 한 글자도 세속에 찌든 태가 없었다. 그 밖의 다른 작품들도 모두 호방하고 기력이 넘친다. 다만 율시나 절구 같은 짧은 시는 장편만큼 뛰어나진 못했다. 산문 또한 간결하고 엄정하다. 그의 산문을 본 양사언이 몹시 부러워하며 "한나라의 대문장가 사마장경과 천년 뒤에 우열을 다툴 만하다"고 극찬했을 정도다.
명나라 사람의 시를 평가할 때, 이달(손곡)은 하경명(중묵)을 으뜸으로 꼽았으나, 나의 둘째 형님은 이몽양(헌길)을 최고로 여겼고, 윤근수(월정)는 이반룡(우린)이 그 두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여겼으니, 이에 대해서는 딱 부러진 정론을 내리기 어렵다. 명나라 대문장가 왕세정조차 "비교하자면 이몽양은 격이 높고, 하경명은 뜻이 통창하며, 이반룡은 스케일이 크다"고 할 뿐 누가 첫째라고 콕 짚어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이달이 나에게 율시 한 수를 내어 보이며 말했다.
"이것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명나라 하경명의 미발표 시일세."
처음엔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리둥절하다가 내가 웃으며 답했다.
"이 시가 이토록 맑고 뛰어난데, 명나라의 율시 선집 편찬자가 빠뜨렸을 리 만무합니다. 이보시오, 이건 필시 당신이 지어낸 가짜(의작) 아닙니까!"
내 말에 이달도 제 꾀에 넘어가 자기도 모르게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 시는 이러하다.
나그네 이불에 스미는 가을 기운에 밤은 아득히 깊어가고 / 그윽한 집 성긴 반딧불만 고요 속을 날아다니네.
밝은 달은 뜰에 가득 서늘한 이슬은 함초롬한데 / 푸른 하늘은 물 같은데 은하수는 아득해라.
이별의 꿈, 고개 고개 넘다 아쉽게 깨어나니 / 대궐의 누수 소리 십이교 다리에 아스라이 여운 지네.
지척에서 새삼 동각의 늙은 님이 그립건만 / 고관대작의 말굽 소린 저 구름 낀 하늘처럼 아득하기만 하네.
이 시의 짜임새와 시어들이 진짜 하경명의 것과 너무나 똑같아서, 어지간한 감식안을 가진 사람이라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 이 시는 이달이 윤근수에게 써서 올린 본인의 작품이었다!
(윤근수의 본명은 근수, 자는 자고, 해평 사람이며 예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정이다.)
임진왜란의 피난길과 명나라 사신들과의 교류
임진왜란 때 신노(자는 제이)와 함께 북쪽 피난길에 올랐는데, 마침 명종 임금의 제삿날을 맞게 되었다. 그가 쓸쓸한 객주 창가에서 지은 시는 이러하다.
선왕(명종)께서 이 땅을 버리시고 세상을 뜨실 때 / 유언으로 정녕 새 임금(선조)을 저희에게 부탁하셨네.
하지만 선조 26년(임진왜란 발발 이듬해), 종묘의 제례마저 다 끊어지게 되었으니 / 흰머리로 하늘 향해 울부짖는 건 오직 남겨진 유민들뿐이라네.
그 뜻이 너무도 뼈저리고 서글퍼서, 곁에 있던 홍성민(익성군) 공이 이 시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어떤 사람은 셋째 구절의 '끊어졌다(절 絶)' 자를 '싸늘하다(냉 冷)' 자로 고치는 게 낫다고도 하는데, 뜻은 좋으나 시의 품격은 본래 글자만 못하다.
(신노는 고령 사람으로 생원이다. 선대의 죄 연좌제로 인해 과거 급제가 보류된 불운한 인물이다. 홍성민의 자는 시가, 호는 졸옹, 남양 사람이며 판중추부사를 지냈고 시호는 문정이다.)
명나라 사람 등계달은 자가 진생이고 오나라 사람으로 글과 시를 몹시 잘했다. 글씨도 명필이었으며, 천하의 명산을 두루 유람하며 스스로 호를 '북해'라 하였다. 1573년(계유년, 선조 6년) 명나라 사신 한세능이 조선에 조서를 반포하러 올 때 북해도 수행원으로 따라왔다. 그때 조선 측 종사관으로 권벽, 정유일, 류성룡이 나섰고, 명필 한호(한석봉)가 수행하였다. 북해는 이 네 사람과 몹시 친해져 여러 번 시문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때 나의 둘째 형님(허봉)은 사관으로서 임금을 모시며 거침없이 일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북해가 저 자가 누구냐고 묻자 재상인 김계휘가 대답해주었다. 북해는 형님을 꼭 만나보고 싶어 했으나 기회가 닿지 않았다.
이듬해 1574년에 형님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북경 조천궁에서 마침내 두 사람이 조우했고, 북해는 너무 늦게 만난 것을 크게 한스러워했다. 형님이 귀국한 뒤에도 북해는 사신 편에 여러 번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1582년(임오년), 명나라 사신 황홍헌과 왕경민이 조선에 올 때, 북해는 형님께 전할 편지를 부탁하며 사신들에게 신신당부했다.
"허봉 그 사람이 아직 선위사(높은 벼슬)가 되지 못했다면 반드시 도감 자리에 있을 것이오. 당신들은 조선에 가서 절대 그를 소홀히 대접해서는 안 되오!"
황홍헌 일행이 의순관에 도착해 역관 곽지원에게 물어보니 정말로 형님이 도감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반갑게 편지를 전하며 부채도 선물했다. 형님도 즉석에서 율시를 지어 두 사신에게 인사하자, 그들은 시의 수준에 깜짝 놀라며 감탄했다.
"작은 번국(조선)에도 이처럼 대단한 인재가 있었구려!"
훗날 황홍헌이 명나라로 돌아가 북해에게 말했다. "노형은 참으로 사람 볼 줄 아는 눈을 가졌소이다." (이 일화는 역관 홍순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권벽: 안동 사람, 감사. 정유일: 동래 사람, 대사간. 한호: 한석봉. 삼화 사람, 진사 출신으로 호군. 김계휘: 호는 황강, 광주 사람, 대사헌. 홍순언: 남양 사람, 역관으로 훗날 광국공신에 녹훈됨.)
훗날 정유일 공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북해가 지어 보낸 만장(애도시)은 이러하다.
그리워라, 지난날 현도(조선) 땅 노닐 적에 / 맑은 강가에 일산 기울이고 마주 앉아 즐기던 일.
싸늘한 달빛은 감미로운 술잔에 일렁이고 / 흰 눈송인 우리 털장막 위로 하얗게 엉기었지.
그해 다섯 벗이 강가 다리 위에 올라 / 거센 바람 맞으며 손 맞잡고 일어나 세 번이나 흥겹게 노래 불렀지.
헤어진 뒤 그대 어찌 그리 갑자기 신선이 되어버렸는가 / 학 타고 만 리 구름 속을 소요하고 있다니.
쓸쓸한 가을밤, 화표주(신선이 내려오는 기둥)에 섰노라니 / 가없는 푸른 하늘, 그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바라누나.
시가 군더더기 없이 말쑥하고 속기가 전혀 없어, 읽노라면 마음이 탁 트이듯 시원해진다. 중국인들이 타국의 인재를 아끼는 마음이 이토록 지극하다.
명나라 사신 황홍헌의 시에 대해 조선의 다른 문인들은 다들 시원찮게 여겼으나, 오직 나의 둘째 형님만은 "이런 재주는 예로부터 찾아보기 쉽지 않다"며 극찬했다. 남들은 형님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훗날 중국의 책 《풍교운전》에 실린 황홍헌의 글을 보니 문법이 간결하면서도 엄숙하고, 우아하면서도 미려하며 온후하고 순수했다. 이로써 우리 형님이 참으로 인재를 알아보는 감식안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최립(간이) 공은 문장이 대단히 간결하고도 예스러워 당대의 최고 대가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더러 "최립의 시는 그의 훌륭한 산문 솜씨만 못하다"고 평가절하하곤 했다. 하지만 그가 하응림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을 보라.
산에서 나무 찍는 소리 쩡쩡 울리니 산새도 덩달아 슬피 우네 / 나 홀로 찾아와 어느 나뭇가지에 이 칼을 걸어두고 애도할까.
그대의 뛰어난 재주와 명망도 당시 쏟아지던 비방을 끝내 이기지 못했으니 / 우리 사귐의 깊은 도리는 응당 저승에 가야만 알아주려나.
영해 땅에서 작별한 것이 끔찍한 영영 이별이 될 줄이야 / 역참 정자에서 읊어준 시를 끝으로 그대 시가 영영 끊어지고 말았네.
평생토록 술만 보면 다 마시고야 말던 호탕한 님이여 / 궤연에 부어놓은 이 한잔 술, 부디 흠향하시려는지.
이 시 역시 몹시 근엄하고 기발하며 건장하니 어찌 시가 산문만 못하다고 함부로 깎아내릴 수 있겠는가.
(최립의 자는 입지, 호는 간이, 통천 사람으로 형조 참판을 지냈다. 하응림의 자는 대이, 호는 청천, 진주 사람으로 수찬을 지냈다.)
허봉의 독서론과 문장론
나의 둘째 형님(허봉)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문장을 제대로 배우려면 반드시 당나라 한유(한퇴지)의 글을 익히 읽어 문장의 뼈대를 세워야 한다. 그다음엔 《좌씨전》을 읽어 간결한 문체를 배우고, 《전국책》을 읽어 문장력을 종횡무진 뻗어나가게 하며, 《장자》를 읽어 신출귀몰하는 상상력의 솜씨를 연구해야 한다. 이어서 《한비자》와 《여씨춘추》로 지식의 줄기를 틔우고, 《고공기》와 《단궁》을 읽어 뜻을 가다듬어라.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마천의 《사기》를 익히 읽어 얽매임 없이 자유자재로운 태를 기르는 것이다.
시를 배울 때는 먼저 《당음》을 읽어 틀을 잡고, 이백의 시를 읽어라. 소동파나 두목 같은 이들의 시는 그 솜씨만 살짝 빌려오면 그만이다."
형님은 언젠가 "내가 평생토록 두목(당나라 후기 시인)의 시를 너무 깊이 파고든 탓에 내 문장의 격이 더 높아지지 못했다"고 한탄하신 적이 있다. 이달 스승님 또한 "내가 소동파와 황정견의 시에 푹 빠져 산 지 이미 오래라, 내 시어에는 성당(전성기 당나라) 시대의 그 높은 품격이 부족하다"며 아쉬워하셨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시를 지음에 소동파나 황정견처럼만 잘 지어도 충분히 대단한 것이지, 하필 새삼스럽게 그보다 훨씬 옛날 사람인 도연명이나 사령운의 흉내까지 억지로 낼 필요가 있겠는가?
형님의 늦은막 산문은 당나라 유종원의 문체와 너무나 흡사했다. 형님이 지으신 <주한정기>나 <축려문> 같은 훌륭한 산문은 유종원의 <대씨당기>나 한유의 <축필방문> 같은 중국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다. 최립 공조차 형님의 글을 보고 "유종원의 명작 <철로보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감탄했을 정도다. 특히 비명(비석의 글)과 묘지명은 형님이 지닌 최고의 장기인데, 세상 사람들은 다들 눈먼 장님이라 이를 알아주는 이가 드물다. 하지만 훗날 반드시 한나라 양웅처럼 천재를 알아보는 이가 나타나 형님의 글을 알아줄 날이 올 것이다.
임진왜란과 인물에 대한 탄식
임진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고 순식간에 철령까지 넘어버렸다. 그때 장계 황정욱이 북청의 진남루에 올라 발을 구르며 한탄했다.
"아아! 나암 정언신 공이 살아만 있었더라면 어찌 왜놈들이 감히 철령을 이토록 쉽게 넘을 수 있었으리오!"
하지만 그렇게 한탄하던 황정욱마저 그해 7월 회령에서 왜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황정욱의 문장은 우뚝하고 웅건하며 속된 기운이 없다. 조선 초 이래로 문단을 호령했던 대가들이 모두 사가독서(임금이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 출신들이었지만, 오직 황정욱만은 예외로 그 자리에 올랐기에 세상이 그를 부러워하고 영화롭게 여겼다. 하지만 지난 임진년 난리에 그가 입은 화는 유달리 참혹했다.
(황정욱의 자는 경문, 호는 지천, 장수 사람으로 병조 판서를 지냈다. 정언신의 호는 나암, 동래 사람으로 우의정을 지냈으나 정여립 옥사 때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고 훗날 신원되었다.)
1590년(경인년, 선조 23년), 명나라 병부 주사 왕사기(대문장가 왕세정의 아들)가 조선 사신의 공물을 검열하러 왔다가 마침 나와 한곳에 머물게 되었다. 통역을 통해 그가 '조선의 수준 높은 문장'을 보고 싶어 하기에, 어떤 이가 소재 노수신 공이 지은 <조광조(정암) 비문>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러자 왕사기가 그 글을 소매에 소중히 챙겨 넣으며 감탄했다.
"이 글을 중국에 가져가 꼭 우리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덧붙였다.
"명(銘) 부분은 한나라 맹자가 지은 <추역산송>을 닮았으면서도 광채가 그보다 빛나고, 서(序) 부분은 양웅의 <법언>을 닮았으면서도 그 스케일이 훨씬 넓고 큽니다. 귀국(조선)에 이런 엄청난 인물과 대단한 문장이 있었단 말입니까?"
(조광조의 자는 효직, 한양 사람이며 대사헌을 지냈다. 훗날 시호 문정공을 받고 문묘에 배향된 대학자다.)
소재 노수신 공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바다 위로 달빛 비치자 풀벌레 우는 소리 자지러들고 / 산바람 불어오니 차가운 이슬 기운 걷혀가네.
이 구절은 시성 두보의 시집을 다 뒤져보아도 흔히 찾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절창이다. 또 다른 시구에는,
애초에 우의정 벼슬 사양했더니 / 엉뚱하게 판중추부사 자리에 앉혀 버렸네.
이 구절은 억지로 솜씨를 부리거나 머리를 쥐어짜지 않았음에도 대구가 물 흐르듯 아주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렇게 글 잘 짓는 노수신 공조차 정작 돌아가신 자기 친아버지의 신도비(무덤 앞의 큰 비석)를 지을 때는 어찌 된 일인지 문장이 밋밋하고 번뜩이는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아마도 아버지를 위해 너무 잘 쓰려고 억지로 기발하게 꾸미려 마음을 쓰다 보니, 도리어 문장이 옹졸하고 부자연스러워진 것이 아닌가 싶다.
💡 [핵심 해설]
허균은 이 글에서 여성(이옥봉), 서얼(이달), 불운한 천재들의 문학성을 적극 발굴하고 옹호하며 신분과 성별을 뛰어넘는 진보적인 문학관을 보여줍니다. 특히 당대 명나라 문인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자랑스럽게 서술하면서도, 무조건적인 중국 추종을 경계하고 개성적인 문체를 찾아야 한다는 날카로운 비평적 안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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