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부부고 제26권 · 설부 5 · 도문대작
출처: 성소부부고 제26권, 설부 다섯 번째 갈래, 도문대작
배경: 제26권은 성소부부고의 마지막 권으로, 설부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갈래다. 여기에는 허균이 귀양지에서 지은 음식 수필 "도문대작"(뜻: 푸줏간 앞을 지나며 입맛을 다신다)과 그 서문, 그리고 부록으로 시화집 "학산초담", 광해군 때 올린 상소 두 편, 세 편의 서문이 함께 실려 있다. 이 파일은 그 가운데 도문대작 서문과 본문을 옮긴 것이다. 팔도 각지의 명물 음식을 떡·과일·고기·수산물·채소·기타로 나누어 적은 일종의 음식 백과로, 유배지에서 굶주리며 지난날 누렸던 진미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짙게 배어 있다.
도문대작을 지으며
우리 집은 가난한 편이었지만, 선친이 살아 계실 때는 사방에서 나는 별미를 예물로 바치는 사람이 많아 나는 어릴 때부터 온갖 귀한 음식을 고루 맛볼 수 있었다. 자라서는 부유한 집안에 장가들어 산과 바다에서 나는 진귀한 음식을 다 맛보았다.
임진왜란 때는 병화를 피해 북쪽으로 갔다가 강릉으로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진기한 해산물을 두루 맛보았다. 벼슬길에 나선 뒤로는 남으로 북으로 옮겨 다니며 우리나라에서 나는 별미를 죄다 먹어 볼 수 있었다.
먹는 것과 색을 밝히는 것은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다. 더구나 먹는 것은 목숨과 관계된 일이다. 옛 선현들이 음식 바치는 자를 천하게 여긴 것은, 그저 먹는 것만 탐내어 제 잇속을 차리는 자를 가리켜 한 말이지, 어찌 먹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뜻이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예기》에 여덟 가지 진미를 적어 놓았으며, 맹자는 어찌하여 생선과 곰 발바닥 중 하나를 고르는 이야기를 했겠는가.
내가 일찍이 진나라 하증이 지었다는 《식경》과 당나라 위거원이 지었다는 《식단》을 본 적이 있는데, 두 사람 모두 천하의 진미를 빠짐없이 적어 그 가짓수가 만에 이를 만큼 많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저 그럴듯한 이름만 늘어놓아 눈만 어지럽히는 데 지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외진 곳에 있지만 바다로 둘러싸이고 높은 산이 솟아 있어 물산이 풍부하다. 만일 하증과 위거원 두 사람의 예를 따라 이름을 바꾸어 가며 하나하나 구분해 본다면, 우리나라의 물산도 아마 만 가지는 될 것이다.
내가 죄를 지어 바닷가로 귀양 갔을 때는 쌀겨조차 넉넉지 못해 밥상에 오르는 것이라고는 상한 생선이나 감자, 들미나리 따위뿐이었고, 그마저도 끼니마다 먹지 못해 굶주린 배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럴 때면 언제나 지난날 산해진미도 물리도록 먹어 싫증 내던 시절을 떠올리며 침을 삼켰다. 다시 한번 먹어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하늘나라 서왕모의 복숭아처럼 아득히 먼 일이었으니, 천도복숭아를 훔쳐 먹었다는 동방삭이 아닌 바에야 내가 어떻게 그걸 훔쳐 먹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종류별로 나열하여 적어 놓고 이따금 들여다보며 한 점 고기라도 되는 듯 여기기로 했다. 다 쓰고 나서 이 글에 "도문대작", 곧 "푸줏간 앞을 지나며 입맛을 다신다"는 이름을 붙였다. 먹는 것에 지나치게 사치를 부리며 절제할 줄 모르는 세상의 잘나가는 자들에게, 부귀와 영화란 이처럼 덧없을 뿐임을 일깨우고자 함이다.
1611년(광해군 3년) 4월 21일, 성성거사는 쓴다.
(용어) 팔진미는 《예기》에 나오는 여덟 가지 귀한 음식으로, 늙은 부모를 봉양할 때 올리던 것이다. 맹자가 생선과 곰 발바닥 중 하나를 고른다는 말은,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을 때는 더 귀한 쪽을 택한다는 비유다. 하증은 중국 진나라 사람으로 사치스러운 생활로 유명했으며, 한 끼 식사에 어마어마한 돈을 쓰고도 늘 먹을 것이 마땅찮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위거원은 당나라 측천무후 때 재상을 지낸 인물이다. 서왕모는 하늘나라에 살며 삼천 년에 한 번 열리는 신비한 복숭아를 지녔다는 여신이고, 동방삭은 그 복숭아를 훔쳐 먹어 오래 살았다는 전설 속 인물이다. 성성거사는 허균이 스스로 붙인 호다.
도문대작
떡 종류
방풍죽 나의 외가는 강릉이다. 그곳에는 방풍이 많이 난다. 이월이 되면 강릉 사람들은 해가 뜨기 전에 이슬을 맞으며 갓 돋아난 싹을 딴다. 곱게 찧은 쌀로 죽을 끓이다가 반쯤 익었을 때 방풍 싹을 넣는다. 다 끓으면 차가운 사기그릇에 담아 따뜻할 때 먹는데, 달콤한 향이 입안에 가득해 사흘이 지나도 가시지 않는다. 세간에서는 참으로 으뜸가는 진미로 친다. 나는 훗날 수안(옛 이름 요산)에 있을 때 시험 삼아 한번 끓여 먹어 보았지만 강릉에서 먹던 맛에는 어림도 없었다.
석이떡 내가 금강산 구경을 갔을 때 표훈사에서 묵은 적이 있는데, 그 절 주지가 저녁상을 차려 왔다. 상에 오른 떡 한 그릇은 귀리를 빻아 여러 번 체로 쳐서 곱게 만든 다음 꿀물을 넣고 석이버섯과 반죽하여 놋쇠시루에 찐 것이었다. 맛이 매우 좋아 찹쌀떡이나 감떡보다도 훨씬 나았다.
백산자 속칭 박산이라 하는데, 전주 지방에서만 만든다.
다식 안동 사람들이 만든 것이 맛이 매우 좋다.
밤다식 밀양과 상주 사람들만 잘 만드는데, 다른 고을에서 만든 것은 매워서 먹을 수가 없다.
차수 여주 사람들이 아주 잘 만든다. 희고 부드러워 맛이 매우 달고 연하다.
엿 개성에서 만든 것이 으뜸이고 전주 것이 그다음이다. 근래에는 서울 송침교 부근에서도 잘 만든다.
큰 만두 의주 사람들이 중국 사람처럼 잘 만든다. 그 밖의 곳에서 만든 것은 모두 별로 좋지 않다.
두부 장의문 밖 사람들이 잘 만든다. 말할 수 없이 부드럽다.
곰기름 정과 회양 것이 가장 좋고 다른 곳 것은 모두 이만 못하다.
들쭉죽 갑산과 북청에서만 나는데 맛은 정과와 같다. 이 뒤에 나오는 포도 이하 과일들은 모두 이 들쭉죽만 못하다.
이상은 떡 종류다.
과일 종류
하늘배 성종 임금 때 강릉에 살던 진사 김영의 집에 갑자기 배나무 한 그루가 돋아났는데 열매가 사발만 했다. 지금은 여러 곳에 퍼졌는데 맛이 달고 연하다.
금색배 정선군에 많다.
검은배 평안도 산골 고을에 있다. 검푸른 빛인데 물이 많고 꿀맛이 난다.
붉은배 석왕사에서 난다. 붉고 큰데 맛이 산뜻하다.
대숙배 속칭 부리라고도 한다. 산중에 많은데 곡산과 이천 것이 매우 크고 맛도 으뜸이다.
금귤 제주에서 나는데 맛이 시다.
감귤 제주에서 나는데 금귤보다 조금 크고 달다.
청귤 제주에서 나는데 껍질이 푸르고 달다.
유감 제주에서 나는데 감자(귤의 일종)보다는 작지만 매우 달다.
감자 제주에서 난다.
유자 제주와 경상도·전라도 남쪽 해변에서 난다.
석류 영암과 함평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고 그 밖에는 이만 못하다.
일찍 붉어지는 감 온양에서 나는 것이 붉고 달고 물기가 많다. 그 밖에는 모두 이만 못하다.
각시감 남양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먹감 지리산에서 난다. 검푸른 빛에 둥글고 끝이 뾰족하다. 맛은 그런대로 좋으나 물기가 적다. 꼬챙이에 꿰어 말려 곶감으로 만들어 먹으면 더욱 좋다.
밤 상주에서 나는 밤은 작은데 껍질이 저절로 벗겨져 속칭 겉밤이라 한다. 그다음은 밀양에서 나는 밤이 크고 맛이 가장 좋으며, 지리산에서도 주먹만 한 큰 밤이 난다고 한다.
죽실(대나무 열매) 지리산에서 많이 난다. 내가 부안(옛 이름 낭주)에 있을 때 노스님 선수가 제자들을 시켜 보내온 적이 있는데, 감과 밤가루를 섞어 만든 것이었다. 몇 숟갈 먹었는데 온종일 든든했다. 참으로 신선이 먹는 음식이다.
대추 보은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크고 씨가 작으며 붉고 물기가 많아 달다. 그 밖에는 모두 이만 못하다.
앵두 저자도에서 나는 것이 작은 밤만큼 크고 맛이 달다. 흰 앵두는 영동 지방에서 많이 나는데 맛은 붉은 앵두만 못하다.
살구 서울 서쪽 교외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자두 삼척과 울진에서 많이 나는데 주먹만큼 크고 물기가 많다.
황도 춘천과 홍천에서 많이 난다.
오얏 서울에서 많이 나는데 서쪽 교외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자줏빛·누런빛 오얏은 모두 작아 지방에서 나는 것보다 못하다.
반도(납작복숭아) 금천과 과천 두 곳에서 많이 났었는데 지금은 없다. 내가 어렸을 때 친척이 안양에 살아서 냇가에 많이 심어 놓고 따서 보내 주곤 했다. 맛이 매우 좋았는데 지금은 얻을 수가 없어 안타깝다.
승도(털 없는 복숭아) 전주 부근에서는 어디서나 난다. 크고 달다.
포도 마유포도는 드물고, 신천에 사는 윤대련의 집에 한 그루가 있는데 맛이 매우 좋아 중국산에 뒤지지 않는다.
수박 고려 때 홍다구가 처음 개성에 심었다. 연대를 따져 보면 아마 홍호가 강남에서 들여온 것보다 먼저였을 것이다. 충주에서 나는 것이 으뜸인데 동아처럼 생긴 것이 좋다. 원주 것이 그다음이다.
참외 의주에서 나는 것이 좋다. 작으면서도 씨가 작은데 매우 달다.
모과 예천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맛이 배 같고 물기가 있다.
달복분자 갑산부에서만 나는데 맛이 앵두 같아 매우 달고 향기롭다.
이상은 과일 종류다.
(용어) 홍다구는 고려 후기 원나라 편에 서서 활동한 인물이고, 홍호는 남송에서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던 인물로 중국 강남 지방의 수박 재배와 관련해 거론된다.
새와 짐승 고기 종류
곰 발바닥 산골에는 어디에나 있다. 요리를 잘하지 않으면 제맛이 나지 않는다. 회양의 요리가 가장 좋고 의주·희천이 그다음이다.
표범 새끼 태 양양에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하나 있어 맛이 매우 좋다. 다른 곳에서 만든 것은 불결해서 먹을 수가 없다.
사슴 혀 회양 사람들이 요리한 것이 매우 맛있다.
사슴 꼬리 부안에서 그늘에 말린 것이 가장 좋고 제주도 것이 그다음이다.
기름진 꿩 황해도 산골에서 나는데 양덕과 맹산 것이 가장 좋다.
거위 의주 사람들이 잘 굽는다. 중국 요리 솜씨와 같다.
대체로 이 지방 어디서나 나는 돼지·노루·꿩·닭 등은 굳이 번거롭게 다 적을 필요가 없다. 다만 특산물이거나 요리 솜씨가 특별한 경우만 골라 적었다.
이상은 새와 짐승 고기 종류다.
물고기와 바다 음식 종류
숭어 서해 어디에나 있지만 한강 것이 가장 좋다. 나주에서 잡은 것은 매우 크고, 평양에서 잡아 얼린 것도 맛이 좋다.
붕어 어디에나 있지만 강릉 경포가 바닷물과 통해 흙냄새가 안 나서 가장 맛있다.
웅어(준치) 한강 것이 가장 좋다. 호남에서는 이월이면 잡히고 관서 지방에서는 오월에야 잡히는데 모두 맛이 좋다.
뱅어 얼음이 얼었을 때 한강에서 잡은 것이 가장 좋다. 임한·임피 지방에서는 정월과 이월에 잡는데 국수처럼 희고 가늘어 맛이 매우 좋다.
노란 조기 서해 어디에나 있는데 아산 것이 가장 좋아 삶으면 비린내가 안 난다.
오징어 서해 일부 지방에서만 잡히는데 흥덕과 부안에서 잡히는 것이 가장 좋다.
해양 인천과 남양 등지에서 잡힌다. 소 지라 맛과 비슷한데 두 지방 사람들이 요리를 잘한다.
죽합(대합조개) 경기와 해서 지방에서 많이 난다.
소라 서해에서 많이 나는데 옹진 것이 가장 좋다.
청어 네 종류가 있다. 북쪽 지방 것은 크고 배가 희며, 경상도 것은 등이 검고 배가 붉다. 호남 것은 조금 작고, 해주에서는 이월에 잡히는데 매우 맛이 좋다. 옛날에는 매우 흔했지만 고려 말에는 쌀 한 되에 마흔 마리밖에 주지 않았으므로, 목은 이색이 이를 한탄하는 시를 지었다. 난리가 나고 나라가 황폐해져 온갖 물건이 부족해진 탓에 청어마저 귀해진 것을 한탄한 것이다. 명종 임금 이전만 해도 쌀 한 말에 쉰 마리였는데 지금은 아예 잡히지 않으니 괴이한 일이다.
큰전복 제주에서 나는 것이 가장 크다. 맛은 작은 것만 못하지만 중국 사람들이 매우 귀히 여긴다.
꽃전복 경상북도 해안 사람들은 전복을 따서 꽃 모양으로 썰어 상을 장식하는데 이를 화복이라 한다. 또 큰 것은 얇게 썰어 만두를 빚는데 이 역시 좋다.
홍합 중국인들은 "동해부인"이라 부른다. 동해와 남해에 모두 있는데 남해 것이 조금 크다. 또 해삼도 있는데 옛날에는 "이"라 불렀다. 중국인들이 좋아한다.
은어(은구어) 영남에서 나는 것은 크고 강원도에서 나는 것은 작다. 해주에도 있다.
여항어 산골 어디에나 있는데 강릉 것이 가장 크고 맛도 좋다.
금린어(쏘가리) 산골 어디에나 있는데 양근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원래 이름은 "천자어"였는데 명나라 사신 동규봉이 먹고 맛이 좋다며 이름을 묻자 통역관이 얼떨결에 "금린어"라 하였고, 모두 좋다고 하여 그대로 금린어가 되었다.
누치 산골 어디에나 있는데 평안도 강변 것이 가장 크다.
궐어 서울 동쪽과 서쪽에서 많이 나는데 속칭 염만어라 한다.
복어 한강 것이 맛이 좋은데 독이 있어 사람이 많이 죽는다. 영동 지방 것은 맛이 조금 떨어지지만 독은 없다.
방어 동해에서 많이 나지만 독이 있어 임금께는 올리지 않는다.
연어 동해에서 나는데 알젓이 좋다.
송어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많이 나는데 바다에서 잡은 것은 좋지 않다. 알은 연어만 못하다.
황어 이월에 동해에서 난다.
가자미 동해에서 많이 난다. 옛날에 "비목어"라 부르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광어 동해에서 많이 나는데 가을에 말린 것이 끈적이지 않아 좋다.
대구 동해·남해·서해에서 모두 나는데 북쪽 것이 가장 크고 누런빛에 두껍다. 동해 것은 붉고 작은데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한다. 서해 것은 더욱 작다.
문어 동해에서 난다. 중국인들이 좋아한다.
정어 강문에서 나는데 곧 작은 숭어다.
은어(도로목) 동해에서 난다. 원래 이름은 "목어"였는데 고려 때 어떤 임금이 좋아하여 "은어"로 고쳤다가, 많이 먹어 싫증이 나자 다시 "목어"로 고쳤다 하여 "환목어(도로목)"라 부른다.
고등어 동해에서 나는데 내장으로 젓을 담근 것이 가장 좋다. 또 "미어"라는 작은 물고기가 있는데 가늘고 짧지만 기름져서 먹을 만하다.
제곡 자줏빛 껍질의 작은 조개다. 경포에 있는데 흉년에 이것을 먹으면 굶주림을 면할 수 있어 곡식과 같다는 뜻에서 "제곡"이라 한다.
살조개 북청과 홍원에서 많이 난다. 크고 살이 연해 맛이 좋다. 고려 때는 원나라의 요구로 모두 바쳐서 국내에서는 먹을 수 없었다.
자주조개 동해에서 난다. 크고 살이 희며 맛이 달다.
게 삼척에서 나는 것은 강아지만큼 커서 다리가 큰 대나무만 하다. 맛이 달고 포를 만들어 먹어도 좋다.
언 게 안악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굴 고원과 문천에서 나는 것이 크지만 맛은 서해에서 나는 작은 것만 못하다.
윤화(굴 종류) 동해에서 나는데 굴과 비슷한 것으로 큰 것이다. 맛이 달다.
왕새우 서해에서 난다. 평안도에서 나는 새우알로 젓을 담그면 매우 좋다.
곤쟁이새우 서해에서 난다. 옹강 것은 짜고 통인 것은 달고 호서 것은 맵고 크다. 의주 것은 가늘고 달다.
도하(복숭아새우) 부안과 옥구 등지에서 난다. 빛이 복숭아꽃 같은데 맛이 매우 좋다.
물고기 중 흔한 것으로는 민어·조기·밴댕이·낙지·준치 등이 있는데 서해 곳곳에서 나며 모두 맛이 좋아 다 적지 않았다. 병어와 그 밖의 변종 물고기는 맛이 좋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어 따로 적지 않았다.
이상은 수산물 종류다.
채소 종류
죽순젓 호남 노령 이남에서 잘 담그는데 맛이 매우 좋다.
원추리나물 의주 사람들이 중국인에게 배워 잘 요리하는데 매우 맛있다.
순채 호남 것이 가장 좋고 해서 것이 그다음이다.
돌김 영동 지방에서 많이 나는데 가장 좋다.
무 나주에서 나는 것이 매우 좋다. 맛이 배 같고 물기가 많다.
거여목 원주에서 나는 것이 줄기가 희고 매우 맛있다.
고사리·아욱·콩잎·부추·미나리·배추·송이·참버섯 등은 어디서 난 것이든 다 맛이 좋아 따로 구별하지 않았다.
표고버섯 제주에서 나는 것이 좋다. 오대산과 태백산에도 있다.
홍채 경기도 갯가에서 나는 것이 매우 좋다.
황각 해서에서 나는 것이 매우 좋다.
청각 서해 어디에나 나는데 해주와 옹진 것이 가장 좋다.
참가사리 서해 어디에나 나는데 해서 것이 가장 좋다. 또 우뭇가사리라는 것이 있는데 열을 가하면 녹는다.
산초젓 황주에서 만든 것이 매우 좋다.
인삼포 영평과 철원 사람들이 잘 만든다. 모양이 소고기포와 같다.
여뀌 이태원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동아 충주에서 나는 것도 좋다.
가지·오이·호박·무 등은 어디서나 나며 맛도 좋다.
산갓김치 함경남도와 회양·평강 등지에서 모두 나는데 맵고도 산뜻하다.
다시마 북쪽 바다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고 그다음은 미역이다.
올미역 삼척에서 정월에 딴 것이 좋다.
김 호남에서 나는데 함평·무안·나주 것이 엿처럼 달아 맛이 썩 좋다.
해의(김의 일종) 남해에서 나는데 동해 사람들이 주먹으로 짜서 말린 것이 가장 좋다.
토란 호남과 영남 것이 모두 좋아 매우 크다. 서울 지방 것은 맛은 좋은데 작다.
생강 전주에서 나는 것이 좋고 담양과 창평 것이 그다음이다.
겨자 해서에서 나는 것이 가장 맵다.
파 삭녕에서 나는 것이 매우 좋은데 부추·작은마늘·고수 등도 모두 좋다.
마늘 영월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먹어도 냄새가 안 난다.
이상은 채소 종류다.
그 밖의 음식
차 순천에서 나는 작설차가 가장 좋고 변산 것이 그다음이다.
술 개성부에서 빚는 태상주가 가장 좋은데 자주는 더욱 좋다. 그다음은 삭주 것도 좋다.
꿀 평창에서 나는 석청이 가장 좋고 곡산·수안 것도 좋다.
기름 중화부에서 짠 기름은 벌레에 물린 독을 바르면 해독이 되고, 인주로 쓰면 오래될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약밥 경주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까마귀에게 먹이는 풍습이 있다. 중국인들이 좋아해서 배워 만들어 먹는데 "고려반"이라 부른다.
서울에서 철따라 먹는 음식으로는, 봄에는 쑥떡·송편·느티떡·진달래전·배꽃전이 있고, 여름에는 장미전·수단·쌍화·만두가 있으며, 가을에는 경단·국화떡·감과 밤을 섞어 만든 찰떡이 있고, 겨울에는 탕떡이 있는데, 그 밖에 지지는 떡·찌는 떡·시절떡·달떡·인삼떡·송기유·꿀떡·혀떡 등은 사시사철 만들어 먹는다.
꿀떡 종류로는 약과·대계·중박계·홍산자·백산자·빙과·과과·봉접과·만두과 등이 있는데, 이는 모두 제사나 손님 접대에 쓰인다. 실국수는 오동이라는 사람이 잘 만들어 지금까지 전해 온다.
(용어) 목은 이색은 고려 말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학자다.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1 · 학산초담 (1부)
출처: 성소부부고 제26권, 부록 1, 학산초담
배경: 학산초담은 허균이 1593년(선조 26년) 스물다섯 살에 지은 시화집으로, 조선 초부터 당대까지 시인들의 작품과 일화를 모아 논평한 글이다. 임금과 세자의 시, 매월당 김시습부터 둘째 형 허봉과 누님 허난설헌, 벗 이달을 비롯한 당대 시인들의 작품과 인물평이 이어지며, 중국 사신들과의 교류, 신비로운 일화, 기녀들의 시까지 폭넓게 다룬다. 분량이 매우 많아 두 편으로 나누어 옮긴다. 이 편은 앞부분이다.
임금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
제왕의 문장은 반드시 평범한 사람을 뛰어넘게 마련이다. 우리 역대 임금들의 작품은 대개 《대동시림》에 실려 있을 뿐, 그 밖에는 전하는 것이 드물다. 지금 임금(선조)은 하늘이 낸 어진 임금으로, 무릇 신하들을 타이르는 말은 손수 지으셨는데 질박하고 엄숙하여 기백이 있었다. 그러나 시를 지으셨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1591년(선조 24년) 가을, 바깥에서 임금이 지었다고 전하는 절구 한 수가 돌았으니 다음과 같다.
한밤에 칼을 어루만지니 호기가 무지개를 토해 내는 듯 웅장한 마음은 일찍이 우리 동방을 안정시키고자 했건만 이제껏 이룬 일이라곤 남의 걸음걸이 흉내 내다 제 걸음마저 잃은 격 가을바람에 고개 돌리니 한스럽기 그지없구나
시의 격조가 노련하고 굳세어 웬만한 시인에 못지않았는데, 어찌 그 이듬해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줄 알았으랴.
동궁이 지은 삼청동시
동궁(광해군)도 즉위하기 전에 문학에 뜻을 두어 옛 책을 많이 모았다. 언젠가 삼청동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것이 진사 유희발의 상자 속에 있다기에 정중히 청하여 읽어 보았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푸른 이내 속 붉은 골짜기는 그늘지고 맑은 시냇가 기이한 풀들이 하늘 제단을 에워쌌네 노을 어린 옥솥에는 신선의 단약이 익어 가는데 다래 넝쿨에 달 비치고 솔바람 일어도 학은 아직 돌아오지 않네
시의 정취가 맑고 서늘하며 글자 쓰는 법도 기이하다. 임금이 지은 글은 저절로 속된 시인의 말투와는 다른 법이니, 아, 존경할 만하다.
(용어) 유희발은 문화 유씨로 광해군의 처남인데, 벼슬은 이조 참판에 이르렀으며 1623년 인조반정 때 죽임을 당했다.
우리나라 시학의 흐름과 매월당·망헌·충암
우리나라의 시학은 소식과 황정견을 위주로 삼아, 경렴당 같은 큰 학자조차도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나머지 세상에 이름난 사람들은 결국 그 찌꺼기나 빨아 먹으며 비위를 상하게 하는 촌스러운 말을 지어낼 뿐이니, 읽으면 진력이 날 지경이다. 성당 시대의 드높은 소리는 이제 다 사라져 들을 수가 없다.
매월당 김시습의 시는 맑고 호탕하며 세속을 초탈했다.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 스스로 다듬고 꾸미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았다. 더러는 마음 쓰지 않고 즉흥적으로 지은 것이 많아 간혹 거친 것도 섞여 있으니, 결국 정시 시대의 격조는 아니다.
망헌 이주의 시는 침착하고 노련하여, 나의 둘째 형(허봉)은 이것이 당나라 대력·정원 연간의 작품과 가깝다고 여겼다. 그러나 소식과 두보에서 나왔으면서도 대체로 순박하지는 못했다.
충암 김정은 맑고 굳세고 기이하고 아름다워 한 사람의 작가라 할 만하되, 거친 말과 겹치는 말이 다소 많다. 그 뒤로는 그 흐름을 되살린 사람이 없었다. 융경·만력 연간에 이르러 최가운(최경창)·백창경(백광훈)·이익지(이달) 등이 비로소 당나라 개원 시대의 시풍을 전공하여 정화를 이루기에 힘썼고 옛사람의 경지에 닿고자 했으나, 골격이 온전치 못하고 너무 아름답기만 했다. 당나라의 허혼·이교 사이에 놓는다면 곧 촌티가 드러날 터인데, 도리어 이백·왕유의 자리를 넘보려 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이 세 사람 덕분에 배우는 이들이 당풍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그 공을 덮어 버릴 수는 없다.
가운(최경창)의 "고봉군 산속 정자에 부쳐"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오래된 고을이라 성곽도 없는데 산속 집에는 다만 수풀뿐 백성도 아전도 흩어져 쓸쓸한데 물 건너 마을엔 겨울 다듬이 소리
창경(백광훈)의 "그림에 부쳐"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문서와 기록에 매달리다 보니 흰머리만 늘어 가는데 시내와 산은 그림 속에 담겼구나 모래톱 잔잔하니 옛 언덕 그대로인데 달빛은 하얗고 낚싯배만 외로워라
또 "스님의 시축에 부쳐"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지리산은 쌍계사가 절경이고 금강산은 만폭동이 기이하다는데 명산에는 몸소 가 보지도 못하고 매양 스님을 배웅하는 시만 짓는구나
익지(이달)의 "산사"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흰 구름 속에 절이 있으니 흰 구름이라 스님이 쓸지를 않네 손님이 와서야 비로소 문을 여니 골짜기엔 온통 송화 가루만 흐드러졌네
또 "배를 돌리며"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병든 가을 해오라기 모래밭에 내려앉고 늦매미는 강가 나무에서 울어 대네 흰 마름에 바람 일자 배를 돌리니 꿈속엔 서쪽 못에 비가 내리네
(용어) 매월당 김시습(자 열경)은 강릉 사람이며 처사로 지냈고 시호는 청간이다. 이주(호 망헌)는 고성 사람으로 벼슬은 정언이었다. 충암 김정은 경주 사람으로 벼슬은 형조 판서, 시호는 문간이다. 최경창(자 가운, 호 고죽)은 해주 사람으로 벼슬은 부사였다. 백광훈(자 창경, 호 옥봉)은 해미 사람으로 벼슬은 참봉이었다. 이달(자 익지, 호 손곡)은 홍주 사람으로 쌍매당 이첨의 서출 손자다.
최경창·백광훈·이달의 시풍 논쟁
최경창·백광훈·이달 세 사람의 시는 모두 정시 시대의 법도를 본받았는데, 최씨의 맑고 굳센 맛과 백씨의 담백한 맛은 귀하게 여길 만하나 기력이 미치지 못해 다소 얇은 결점이 있었다. 이달의 풍성하고 화려한 맛은 두 사람에 비해 범위가 약간 넓지만, 셋 다 맹교와 가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최경창과 백광훈은 일찍 죽었고, 이달은 늙어서야 문장이 크게 나아져 자기 나름의 일가를 이루어 화려함을 거두고 평이하고 진실한 경지로 돌아갔다. 나의 둘째 형은 자주 이렇게 칭찬했다.
"당나라 수주 자사 유장경과 어깨를 겨룬다 해도 크게 손색이 없을 것이다."
내가 말했다. "문장이란 세상의 흥망을 따라가는 법이니, 송나라가 당나라만 못하고 원나라가 송나라만 못한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어찌 두 시대를 뛰어넘어 당나라 작가와 우열을 다툴 리가 있겠습니까."
둘째 형이 말했다. "한퇴지는 당나라 사람인데 유자후가 '곧장 사마천과 나란히 달린다'고 했으니, 자후가 어찌 헛말을 할 사람이겠느냐? 이달도 이와 같으니라."
그러나 나는 끝내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둘째 형 허봉의 시 세계
나의 둘째 형의 시는 처음에는 소동파를 배워 전아하고 순실하며 온건하고 노숙했는데, 호당에 뽑히고 나서는 《당시품휘》를 익히 읽어 시가 비로소 맑고 굳세졌다. 늘그막에 갑산으로 귀양 갈 때 이백의 시집 한 부를 가지고 갔는데, 귀양이 풀려 돌아온 뒤의 시는 하늘의 신선 이백의 말을 깊이 체득하여 장편이든 단편이든 휘몰아치는 기세가 있었다. 일찍이 이익지(이달)가 말하기를,
"미숙 학사(허봉)의 시를 읽으면 공중에 흩날리는 꽃을 보는 것 같다."
라고 했는데, 둘째 형이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나 원대한 포부를 제대로 펴 보지 못했고, 남긴 글마저 흩어져 미처 수습하지도 못한 채 임진왜란을 만나 손쓸 겨를도 없이 병화에 다 타 버렸으니, 죽어도 잊지 못할 이 슬픔이 어찌 끝이 있으랴. 내가 강릉(별칭 경호)에 살 때, 놀란 마음이 좀 가라앉자 일찍이 외워 두었던 것을 생각해 내어 보니 겨우 오백여 편뿐이었다. 이를 베껴 세상에 전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저 태산의 터럭 한 올일 뿐이다.
최경창의 생애와 시
최경창(자 가운)은 1568년(선조 1년)에 진사가 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종성 부사가 되었는데, 어떤 일로 강등되었다가 국자감 직강을 제수받고는 세상을 떠났다. 언젠가 북경에 가서 도교 사원인 조천궁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한밤이라 옥단에 흰 구름을 쓸고 향 피우고 멀리 하늘 임금께 절한다 달빛 아래 절하는 모습 보는 이 없고 아름다운 나무만 겹겹이 궁문을 가리웠네
또 이렇게 지었다.
삼청궁 이슬 기운 구슬 궁전을 적시고 봉황 피리 부는 신선 달밤에 서성였건만 궁궐 길에는 지금 향기로운 수레 끊기고 푸른 복사꽃 붉은 살구꽃만 봄바람에 흐드러졌네
어떤 도사가 있었는데 성은 진씨이고 이름은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그 또한 시를 잘 지었다. 이 시를 크게 칭찬하여 통주 하청관까지 쫓아와 그 시집에 제사를 써 주기를 청하였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
푸른 하늘은 참된 세계를 나타내고 검은 제단은 태청궁에 가깝구나 난새는 구슬 정원 나무에 깃들고 노을은 자미성을 감돌았네 삼원의 보배 문서는 비장되어 있고 금단은 아홉 번 달여 이루어졌네 지초 수레 탄 신선은 보이지 않고 하늘 저 밖에 피리 소리만 들려오네
이 시가 중국에 퍼져 왕봉주(왕세정) 선생이 대단히 칭찬하였다. 충장공 양조의 무덤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구름 속에 해 지자 불빛이 산을 비치니 오랑캐는 이미 녹두관에 다가왔네 장군이 홀로 천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서 한밤에 요하 건너 싸우다 돌아오지 않았구려
이 시는 당나라 사람의 수준에 못지않으니 중국에서 사랑받는 것이 당연하다.
백광훈의 생애와 시, 허난설헌의 감우시
백광훈(자 창경)은 글씨 쓰는 법이 왕희지·왕헌지에 가까웠고, 첫 벼슬은 예빈시 참봉이었다. 언젠가 홍경사를 지나다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풀 쓸쓸한 전 왕조의 절 낡은 비석엔 학사의 글 흐르는 물은 천 년토록 예와 같은데 해 질 무렵 떠가는 구름을 보네
1582년(선조 15년)에 병으로 서울 집에서 죽었다. 누님 난설헌이 그를 슬퍼하며 지은 감우시는 다음과 같다.
요즘 최씨 백씨 무리들이 성당을 본받아 시를 익혀 적막하던 대아의 음률이 이들을 만나 다시금 크게 떨쳤네 낮은 벼슬에 그저 녹만 받고 변방 고을살이에 서러운 처지 나이도 벼슬도 함께 시들어 가니 이제야 믿겠네,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함을
난설헌(이름 초희, 자 경번)은 초당 허엽의 딸이며 서당 김성립의 아내다. 난설헌의 "강남곡"은 다음과 같다.
남들은 강남땅 좋다 하지만 나 보기엔 강남땅 시름겹기만 해마다 모래톱 포구에 서서 애끊는 마음으로 가는 배만 바라보네
"가난한 여인의 노래"는 또 다음과 같다.
가위를 손에 잡으니 추운 밤 열 손가락 곱네 남 위해 시집갈 옷 지어 주건만 해마다 도리어 혼자 살다니
"연밥 따는 노래"는 다음과 같다.
가을이라 긴 호수엔 비취옥이 흐르는데 연꽃 깊숙한 곳에 목란배 매어 두고 물 건너 님을 만나 연밥을 던지다가 남의 눈에 그만 띄어 반나절이나 무안했네
(용어) 왕세정(호 봉주)은 명나라의 문장가다.
임제의 생애와 시
임제(자 자순)는 나주 사람이다. 1577년(선조 10년)에 진사가 되었다. 본성이 의협심이 있고 얽매이지 않아 세속과 맞지 않았으므로 불우한 채 일찍 죽었다. 벼슬은 예조 정랑에 그쳤다. 죽은 뒤 어떤 이가 "역적 정여립과 함께 시국을 논하면서 항우는 천하의 영웅인데 성공하지 못한 것이 애달프다고 말하고 마주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그를 무고했다. 그 말이 삼성에까지 전해지자 아들 임지가 국문을 받았는데, 임지가 선친이 지은 "오강에서 항우를 조상하는 부"를 올려 겨우 용서받고 변방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그의 "평사 이영을 보내며"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북방 눈 내리는 용황 가는 길 음산한 바람 부는 발해 바닷가 원수의 서기를 맡은 이는 한 시대의 미남아로다 칼집엔 별을 찌르는 칼이 있고 주머니엔 귀신도 울릴 시가 들었네 변방 모래바람 금갑옷에 자욱한데 관문 위의 달은 붉은 깃발을 비추누나 옥문관 어딘들 두루 다니지 않으리 공신각에 화상 걸릴 날 머지않으리 마주 보니 굳센 머리카락 곤두서고 먼 길 떠날 슬픈 기색 짓지 않네
시의 격조가 당나라 양영천(양형)과 매우 비슷하다.
임제의 호는 백호이며 벼슬은 북평사를 지냈다. 《잠영보》를 살펴보면 "임제의 맏아들은 임탄으로 호는 한정인데 벼슬을 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임기로 호는 월창, 벼슬은 좌랑이다"라고 하였다. 임탄은 혹 임지의 개명이 아닌지 모르겠다.
백호의 "규방의 원망"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열다섯 살 월계 아가씨 남 보기 부끄러워 말도 없이 헤어졌네 돌아와 겹문 닫고는 배꽃에 비친 달 보며 울었네
"산사"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한밤중 숲속에서 스님이 잠드는데 무거운 비구름이 풀옷을 적시누나 느지막이 사립문을 여니 깃든 새가 그제야 놀라서 나네
이영은 고성 사람으로 자는 언윤, 호는 남고이니 청파 이육의 손자로 벼슬은 목사를 지냈다.
(용어) 정여립의 옥사는 1589년(선조 22년) 일어난 사건으로, 이 일로 많은 사림이 화를 입었다.
둘째 형의 시와 최경창·허봉의 화답
둘째 형이 경흥 압호정에 제하여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국경에서 스산하게 바라다보니 인가의 연기는 오랑캐 땅과 접했구나 산은 외로운 장막 밖을 에웠고 물은 무너진 능 옆으로 흘러드는구나 초가집에서 해가 바뀌도록 병들었는데 푸른 모에 한밤중 서리 내렸네 이곳에 오르자 가장 서글퍼지니 까칠한 수염은 낙엽과 함께 누렇구나
임자순(임제)이 크게 칭찬하며 같은 운으로 화답하려 하였으나 종일 궁리해도 뜻대로 되지 않자 시를 보내기를,
백옥과 청묘는 열 글자의 역사로다
라 하였으니, 셋째와 넷째 구절이 역사적 사실을 담았음을 말한 것이다. 금성 객관에 옛사람이 "추" 자로 압운한 시를 판각해 걸어 놓았는데, 최고죽(최경창)이 차운하기를,
서글픈 대평소 소리 옛 고을에서 나는데 깊은 강물은 어둠 속 급히 흐르네 희미한 등불 아래 초나라 나그네의 꿈이요 한밤중 중선의 다락일레 찬비 비록 개었으나 고향 생각 또다시 가을을 만났네
라고 했다. 둘째 형이 이어 읊기를,
나그네 만리길 가매 말 멈추어 차가운 물을 먹이네 큰길엔 온통 꽃다운 풀들 저녁 연기 역루에서 피어오르네 나그네 회포는 어렴풋 꿈과 같아서 봄이라지만 거의 가을 같고나
라고 했다. 최고죽이 보고, "봄 시를 가을 추 자로 압운하기는 가장 어려운 일인데, 이 구절은 옛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하였다.
누대의 현판시에 대하여
내 생각에 누대 현판은 모조리 케케묵은 시들이라, 비록 청신한 구절이 있다 하더라도 가려내기 쉽지 않으니, 굳이 지을 필요가 없다. 임자순(임제)이 언젠가 가학루를 지나갔는데, 판시가 많아 만여 개나 되므로 그 되지 않은 잡소리를 싫어하여 관리를 불러 말하기를, "이 현판들은 관에서 명하여 만든 것이냐? 아니면 안 만들면 벌을 주느냐?" 하니, 관리가 "만들고 싶으면 만들고 싫으면 안 만들지요. 어찌 관명이나 처벌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자순이 "그렇다면 나는 짓지 않겠다" 하였다. 듣는 이들이 다 웃었다. 임진왜란에 적이 관사를 불태워 남은 것이 없었으며, 불태우지 않은 곳도 현판을 뜯어 불 속에 던져 버렸다. 아마 하늘도 시가 높은 벽에 걸려 있는 것을 싫어했나 보다.
임형수와 심언광의 시
누제에도 좋은 시구가 더러 있다. 임진년에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난리를 피해 북쪽 변경으로 들어가다가 곡구역에 이르니, 임형수가 지은 시의 셋째 넷째 구절에,
꽃이 고개 숙이니 술 취한 미녀의 얼굴 같고 산이 끊어지니 바닷물 마시는 푸른 용의 허리 같구나
하였다. 시어가 맑고 뛰어나니 어찌 누제라 하여 흠잡을 수 있겠는가. 임형수(자 사수, 호 금호)는 평택 사람으로 벼슬은 목사를 지냈는데, 1547년(명종 2년) 벽서 사건 때 원통하게 죽었다.
어촌(심언광)의 시는 혼후하고 부염하기가 호음(정사룡)에 못지않은데, 송계(권응인)가 중종 이래 대가를 평하면서 그 명단에 어촌이 들지 않았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내가 북쪽 변경의 누제를 보다가 어촌의 시를 읽고는 눈을 씻고 장단을 맞추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영동역"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총애와 굴욕 아득하다 둘 다 절로 놀라니 떠도는 남은 목숨 그 어디에 붙일까 하늘가 해 질 무렵 고향 그리는 눈물 변방 밖 늦가을 고국 떠나는 마음일세 구름송이 어지러이 날아 산은 온통 새까맣고 둥근 달 나직이 비치니 온 바다는 밝아라 나그네 신세 오늘 밤 유난히 시름겨워서 푸른 등불 마주하여 앉아 지새웠네
"수성역"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고향 떠나 가을 지나 국경 성에 머무니 낯선 땅 풍경은 모두가 고향을 그리게 하네 넓은 강 건너고 싶으나 뱃사공 없고 겨울나무 말라 가도 겨우살이는 매달렸네 일신을 도모함이 곧은 길 아님 우습고 세상 속여 헛된 이름에 붙들림 오히려 부끄럽네 새벽 문을 열고 푸른 바다 마주하니 아침 해 밝고 밝아 간담을 비치네
이와 같은 작품들이 어찌 호음(정사룡) 무리만 못하단 말인가? 아래 시의 넷째 구절은 권신 김안로가 죽었지만 그 잔당이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았음을 가리킨 것이다.
어촌 심언광(자 사형)은 삼척 사람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공이다. 호음 정사룡(자 운경)은 동래 사람이며 벼슬은 영중추부사이다. 송계 권응인은 안동 사람이니 벼슬은 학관이고 이조 참판 권응정의 서출 아우다. 김안로(자 이숙, 호 희락)는 연안 사람이고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다. 탐욕스럽고 간사하며 조정 일을 제멋대로 하였으므로 1537년(중종 32년)에 사약을 받았다.
어촌의 "사과꽃 지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붉고 흰 꽃 봄을 도와 늙은 가지에 피니 뉘 위해 단장하는고, 시골 사람 집에서 한밤중 비바람에 초췌할까 두렵더니 다닥다닥 핀 사과꽃 모조리 다 졌구나
송계(권응인)의 "촉석루"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구름 사이 새어 나는 희미한 달이 잔잔한 물결을 비추어 주니 잠자던 해오라기 나직이 날아 물언덕 모래톱에 내려앉는다 물가 정자에 발 거두고 기둥 기대어 앉아 있으니 나룻머리 노 젓는 소리 밤이라 크게 들리네
둘째 형이 근래 시인을 평하면서 소재 상공(노수신)을 대가로 여기고 제봉 고경명을 그다음으로 쳤다. 이익지(이달)는 둘째 형의 시와 문장이 모두 고경명보다 낫다고 여겨 논란이 오래되었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다. 내가 권응인을 만나 물어보니 이달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권응인이 갑산으로 귀양 가는 둘째 형을 보내는 시의 셋째 넷째 구절에,
정묘교 곁에 살던 당나라 시인이고 경인일에 태어나 쫓겨난 초나라 신하로다
라 하니, 고사 인용과 대구가 다 적절하다. 둘째 형이 서애 유성룡에게 부친 시에 또,
갑자년 참상을 말하지 마라 응당 경인년에 하강하는 때를 맞으리
하였다.
소재 노수신(자 과회)은 광산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간이다. 제봉 고경명(자 이순)은 장흥 사람이다. 벼슬은 목사이고 시호는 충렬이다. 서애 유성룡(자 이견)은 풍산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충이다.
둘째 형과 누님이 꿈속에서 지은 시
둘째 형이 귀양 가기 전 옥당에 있을 때 꿈속에서 시를 짓기를,
텃밭에 채마 부치노라니 솜씨야 늘었다만 하늘은 꿈결에도 어렴풋 오직 가의의 눈물만 남아 밤마다 차가운 옷을 적실 뿐
하더니, 가을이 되자 갑산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누님이 평시에 또한 꿈속에서 지은 시에,
푸른 바다는 신선 사는 요해에 젖어들고 파란 난새는 채색 봉황에 기대었구나 연꽃 스물일곱 송이 서리같이 싸늘한 달빛 아래 지는구나
하더니 이듬해 신선 되어 올라가니, 3에 9를 곱하면 27로서 누님 나이와 같으니, 사람 일에 있어 미리 정해진 운명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누님의 시문은 모두 타고난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선계에 노니는 시"를 즐겨 지었는데 시어가 모두 맑고 깨끗하여, 밥 짓고 반찬 익혀 먹는 속인으로서는 미칠 수가 없다. 산문도 우뚝하고 기이한데 사륙변려문이 가장 좋다. "백옥루상량문"이 세상에 전한다. 둘째 형이 일찍이, "경번(허난설헌의 자)의 재주는 배워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이태백과 이장길의 남은 울림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아, 살아서는 부부 금슬이 좋지 못했고 죽어서는 제사 받들 자식이 없으니 옥이 깨진 원통함이 한이 없다.
(용어) 가의는 한나라 초 문인으로 재주가 있었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젊어서 죽었다.
이옥봉의 시
이옥봉은 조원(자 백옥)의 소실이다. 그 시가 몹시 맑고 강건하여, 거의 아낙네들이 화장할 때 쓰는 말들이 아니다. 남편을 따라 진주부로 가는 길에 노산묘(단종의 무덤)를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닷새는 장간이요 사흘은 영월이라 참담한 노릉 구름 슬픈 노래 끊어지네 이 몸도 또한 왕손의 딸이라서 이 땅 두견새 소리 차마 들을 수 없구려
서익(자 군수)의 소실이 편액 글씨와 짧은 율시를 부쳐 준 데 사례하는 시는 다음과 같다.
여위고도 굳세게 하늘 밖의 정취 써서 이루니 유공권 서체의 남은 자취 보여 주네 해서체는 나부끼는 가운데 봉새처럼 날아오르고 큰 글씨는 뭉게구름이 응집되었네 시험 삼아 산속 집에 걸고 보니 호랑이가 뛰는 듯 문득 강가 누각에 거니 용이 오르는 양 위부인 필력이 바야흐로 굳건한 줄 알거니와 소야란의 재주라고 어찌 공교함을 독차지할 것인가 몸은 마치 혜초 가지 같아도 생각은 씩씩하며 가녀린 손 파처럼 곱건만 글씨를 쓰면 웅장하여라 정신적인 사귐이 만 리를 문묵으로 통하니 여의주를 갚기 위해 백옥 동자에게 알리노라
그 아우도 시를 잘 지었는데, 언젠가 절구 한 수를 읊었으니 그 뒷구절은 다음과 같다.
창 열고 새벽달 아래 거니노라니 이슬은 매화 가지에 함초롬하구나
그 전집을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옥봉(이름 원)은 완산 사람인데 충의위 이봉의 딸이다. 조원(자 백옥, 호 운강)은 임천 사람으로 벼슬은 승지다. 서익(호 만죽)은 부여 사람으로 벼슬은 부사다.
옥봉의 "규방의 정"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언약하신 서방님 어이 이리 더디신가 뜰가의 매화는 이울려 하는데 갑자기 가지 위에 까치 소리를 듣고 헛되이 거울 비쳐 눈썹 그리네
최고죽(최경창) 등이 언젠가 "우리나라 지명은 중국만 못하여 시 지을 때 지명을 구사할 수 없다"며 늘 한스럽게 여겼는데, 소재(노수신)의 시에,
길은 막다른 평구역이오 강물은 깊어라 판사정 앞에
라는 구절을 보니, 상하 구절이 모두 우리 지명을 썼건만 구법이 온당하고 적절했다. 그러니 대가의 솜씨는 절로 여느 사람과 다름을 알겠다.
이달의 불우함과 양사언의 우정
이익지(이달)는 젊어서 화류계에 드나든 실수 때문에, 그 재주를 시새우는 자들이 이를 가지고 비방하였고, 심지어는 "어머니도 잘 대우하지 않고 부인과의 예의도 닦지 않았다"며 비난해 마지않았다. 양봉래(양사언)가 강릉 부사로 부임했을 때 그를 스승의 예로 대우하자, 시샘하는 이들이 선친(허엽)에게 근거 없는 말을 해서 선친이 편지로 이달을 멀리하도록 권하였다. 양봉래가 답장을 보내기를, "오동꽃은 밤비에 지고, 바닷가 나무는 봄구름 속에 사라진다는 시를 짓는 이달을 만약 소홀히 대접한다면, 진왕 조식이 응탕과 유정을 잃을 때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였다. 그 뒤에 대우가 약간 소홀해지자 이달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작별을 고했다.
나그네의 떠나고 머무름은 주인의 눈썹 사이에 달렸나니 오늘 아침 반기는 빛 없으니 우리 집 고향산 그리워지네 노나라에선 원거를 잔치해 주고 남쪽 정벌엔 율무로 돌아갔다네 가을바람에 소진의 신세로 또다시 목릉관을 떠나노라
이에 양봉래가 놀라고 뉘우쳐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양사언(자 응빙, 호 봉래)은 청주 사람으로 벼슬은 부사다. 선친(자 태휘, 호 초당)의 이름은 엽이며 벼슬은 부제학이다.
양봉래의 "국도"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단청한 누대에 보랏빛 연기 떨치며 구름길에 용을 타고 여러 신선 내려오네 청산도 또한 인간 속세 싫어선지 푸른 바다 같은 만 리 장천으로 날아드누나
연산군 시절의 강혼
연산군이 집정하였을 때, 강혼은 도승지가 되어 가장 총애를 받았다. 언젠가 연산군이 출제하기를,
한식 동산에 삼월은 다가오고 비바람에 꽃 지는 새벽은 싸늘해라
하고, 승지·사관·경연관에게 칠언율시를 지어 바치게 하였는데, 강혼의 시는 다음과 같다.
청명이라 대궐 버들 찬 연기 서렸는데 쌀쌀한 봄바람 새벽 들어 한층 더 미친 듯하구나 붉은 꽃잎 땅을 덮도록 내버려두고 휘날리는 버들개지 온 하늘에 자욱하구나 물 건너 높은 누각에 구슬발 걷히니 꽃구경 가는 좋은 말 비단 안장 빛나네 금 동이 술 다 마시고 취하여 별원으로 돌아오노라니 단청한 난간가에 오색 드림 나부끼네
연산군이 크게 칭찬을 하며 금은보화를 많이 하사하였다.
강혼(자 사호, 호 목계)은 진주 사람이며 벼슬은 판중추부사이고 시호는 문간이다.
기준의 절명시
응교 기준이 온성으로 귀양 가 있는데, 서울로부터 사약이 내려왔다. 그는 조용히 시를 읊어 스스로 만사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해 지자 하늘은 먹빛 같고 산 깊어 골짜기는 구름 같구나 천년토록 지키자던 군신의 의는 슬프다, 하나의 외로운 무덤뿐
이 시를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심장과 간장이 다 찢어지게 한다.
기준(자 자경, 호 복재)은 행주 사람이며 벼슬은 응교에 그쳤다. 시호는 문민이다.
최수성의 죽음과 나식의 시
최원정(최수성)은 늘 화를 입을까 두려워 세상 밖을 떠돌아다녔건만, 마침내 숙부의 참소를 받아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되었는데, 그가 만의사에 제하여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옛 불전에 몇몇 스님이 있고 나뭇가지엔 저물녘 경쇠 소리 맑아라 산굽이는 천 리나 아스라한데 담장은 우뚝, 뭇산이 하마 낮아 뵈네 나무는 하 늙었으니 몇 살이나 되었누 새들의 지저귐도 곳에 따라 유달라라 어려운 세상 죄의 그물 근심했더니 오늘이야말로 부끄럽다, 나의 삶이여
시어가 맑고도 빼어났다. 끝 구절은 대체 그가 화 입을 것을 미리 헤아렸단 말인가?
최수성(자 가진, 호 원정)은 강릉 사람이며 처사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그의 숙부 최세절(자 개지)은 벼슬이 호조 참판이다. 원정의 "망천도"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달이 서녘산에 내리니 어두운 연기 먼 나무에 피어나네 끊어진 다리에 복건 쓴 두 사나이 그 누가 망천의 주인인지
나공(나식)은 웅장한 글과 곧은 절개가 오랜 세월 빛난다.
외로운 배는 일찍 매어야만 하니 풍랑은 으레 밤 깊으면 더하다네
라는 구절은 선배들이 이미 칭찬하였던 것이고, 원숭이 그림에 제한 절구 두 편을 손곡(이달)은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칭찬하였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산 원숭이 포도를 안고는 다리로 긴긴 가지를 밟는구나 떨어진 열매 주울 때 뉘 능히 암수를 구별하리오
또 이런 시도 있다.
늙은 원숭이 그 무리를 잃고 마른 나무 등걸 위에 해는 지네 동그마니 앉아 고개조차 까딱 않으니 아마도 일천 봉의 메아리 듣나 보네
아랫시가 더욱 기발하다.
나식(자 장원)은 안정 사람이며 정암 조광조의 문인이다. 을사사화에 형인 부제학 나숙과 함께 참화를 당했다. 그의 "여강"이라는 시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푸른 강가에 해는 저물고 하늘이 차니 물결은 절로 이네
다른 야사를 참고해 보면 최원정(최수성)의 시로 되어 있다. 그의 숙부 최세절이 이 시를 가지고 그를 참소했다고도 하나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이달의 시구와 세평
손곡 이익지(이달)의 "한식"이라는 시에,
배꽃에 비바람 치는 한식철인데 병든 나그네로 떠돈 지 삼십 년일세
라든지, 임귀성에게 보낸 시에,
해마다 떠돌이라 옷은 벌써 해어지고 몇 달을 집 떠나니 허리춤 줄었구나 범숙의 이 가난 뉘 가엾이 여길 건가 소진처럼 곤궁하여 못 돌아감을 스스로 비웃노라
라든지, "노산묘"라는 시에,
봄바람에 귀촉새 울음 애닯고 해 저물녘 노릉은 스산도 해라
등의 시구는 대구가 자연스럽고 침착하고 무게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더러 바람 앞의 꽃이라 하여 결점으로 여기나, 글쎄 미처 생각을 못 해서 하는 말이 아닌지?
김정의 시와 이행의 시
김충암(김정) 시집 속에 "청산금야월"이라는 시는 바로 용재 이행(시호 문민)의 작품으로 시법이 같지 않다. 편찬한 자가 잘못 엮은 것이다. 내가 스님의 시축을 보니 충암의 시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고개 너머 한산사에 스님 만나니 문득 반가워라 돌샘 가의 같은 병든 나그네 천지간에 하나의 부평초 성긴 빗속 가물거리는 등불은 싸늘한데 잔 들자 들려오는 먼 바닷소리 창 열고 거듭 두런거리다 헤어지니 구름 설핏 새벽별만 밝구나
이 시가 충암 본집에는 없으니, 당시 편찬자가 혹 미처 못 본 것인가?
용재 이행(자 택지)은 덕수 사람이며 벼슬은 좌의정이다. 시호는 문민이었는데 문정으로 고쳤다가 다시 문헌으로 고쳤다. 용재의 "그림에 부쳐"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후둑후둑 소상강에 비가 내리고 아스라이 보이네, 반죽의 숲 그러나 거기서 묘사키 어렵기는 아황·여영 두 왕비의 심정
"관사 벽에 쓰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늙마에 분주타 보니 병은 약속이나 한 듯 찾아오고 봄 흥취라야 많지 않으니 시까지 지을 건 없다 졸다 깜짝 놀라 깨니 꽃철이 늦었구나 한 차례 보슬비가 장미를 적시누나
"합천에서 자규 소리를 듣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강북 봄 경치 밤이라 더 서글퍼서 잠깨자 까닭 없이 나그네 맘 설레이네 세상만사 고향에 돌아감만 못하니라고 건너 숲에 울어 대는 자규 소리 잦아라
"주운을 읊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허리에 칼이 있으니 청할 게 무어 있소 땅밑에 사람 없어도 또한 노닐 만하네 가석하다, 한나라 조정의 괴리령은 일생에 영신 머리 베기만을 알았구려
이달과 홍적의 시구 비교
나의 둘째 형이 언젠가 이손곡(이달)의 "송경에서 노닐며"라는 시 가운데,
대궐 앞 거둥하던 길엔 가을풀 스산하고 누대 아래 격구하던 뜰엔 저녁 소를 먹이누나
라는 구절을 칭찬하였으나, 사인 홍적의,
누대는 비었어도 반월대요 각은 황폐하나 옛 첨성각이네
만큼 절실하지는 못하다.
홍적(자 태고, 호 하의)은 남양 사람이다.
홍경신과 이덕형의 시재
나의 둘째 형이 일찍이, "홍덕공(홍경신)·이명보(이덕형)의 시는 모두 일가라 이를 만한데, 홍덕공은 장편을, 이명보는 칠언율시를 특히 잘 짓는다"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또, "명보는 반드시 대제학이 될 것이다" 하더니, 후에 이덕형은 나이 겨우 서른이 넘자 대제학에 임명되고 벼슬로는 예조 판서의 반열에 오르게 되니, 대제학이 되리라던 말이 비로소 증명되었다. 홍경신은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불행히도 뜻을 얻지 못해 벼슬이 변변치 못했으니, 재주와 팔자는 이처럼 같지 않다.
홍경신(호 녹문)은 남양 사람이다. 만전당 홍가신의 아우로 벼슬은 부제학을 지냈다. 이덕형(호 한음)은 광주 사람이며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익이다.
홍경신의 "봉래풍악가"를 나의 둘째 형이 아침저녁으로 한 번씩 죽 읊으면서 장단을 맞추며 감탄하였다. 그 시는 이태백의 "천로음"에 영향을 받은 것인데, 종횡으로 오르내림에 한 글자도 세속에 찌든 티가 없다. "반통투수사"·"기택요" 등 작품은 모두 호방하며 기력이 있으나, 율시나 절구는 장편만은 조금 못하고, 산문 또한 간결하고 엄정하다. "운부"·"격구부" 같은 작품은 양봉래(양사언)가 몹시 부러워하며, "사마상여와 천 년 뒤에 우열을 다툴 만하다"고 하였다.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1 · 학산초담 (2부)
출처: 성소부부고 제26권, 부록 1, 학산초담
배경: 학산초담 번역의 두 번째 편이다. 첫 편에 이어 명나라 시인들에 대한 품평, 임진왜란 전후의 시인들, 규수 시인들의 작품, 신비로운 일화, 강릉 지역 인물들에 대한 자부심 등이 이어지며 글 전체를 마무리한다.
명나라 시인들에 대한 논란
명나라 사람의 시를 이손곡(이달)은 하중묵(하경명)으로 첫째를 꼽되, 나의 둘째 형은 이헌길(이몽양)을 최고로 여겼고, 윤월정(윤근수)은 이우린(이반룡)을 그 두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여겼으니 정론을 내릴 수 없다. 봉주(왕세정)의 말은, "비교하자면 헌길은 높고 중묵은 통창하며 우린은 크다" 하고 그 또한 누가 첫째요 누가 다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달이 하루는 율시 한 수를 내어 보이며, "이것은 세상에 전하지 않는 중묵의 시일세" 하기에, 처음에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몰라서, "이 시는 맑고 뛰어났으니 율시를 고르는 자가 빠뜨렸을 리 없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지은 것일 겁니다" 하니, 이달이 자기도 모르게 껄껄 웃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나그네 이불에 스미는 가을 기운에 밤은 깊어 가고 그윽한 집 성긴 반딧불만 고요 속을 나는구나 밝은 달은 뜰에 가득, 서늘한 이슬은 함초롬 푸른 하늘은 물 같은데 은하수는 아득해라 이별의 꿈 고개고개 넘다 깨니 대궐 누수 소리 십이교에 여운지네 지척에서 새삼 동각로 그립건만 고관의 말굽 소린 하늘처럼 아득해라
짜임새와 구법이 대복(하경명)과 꼭 같아서, 웬만한 감식안이 있는 사람이라도 구별하기 쉽지 않다. 이 시는 바로 이달이 월정(윤근수)에게 올린 작품이다.
윤근수(자 자고, 호 월정)는 해평 사람이며 벼슬은 예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신노와 홍성민의 시
임진왜란 때 신노(자 제이)와 함께 북쪽으로 가는데 명종 임금의 제삿날이 되었다. 그가 객창에서 다음과 같이 지었다.
선왕이 이날 세상 뜨실 때 유언은 정녕 새 임금 부탁이었네 스물여섯 해 종묘 제례도 못 모시게 되니 센머리로 울부짖는 건 오직 유민들
뜻이 몹시 서글퍼서 익성군 홍성민이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어떤 사람은 "끊길 절" 자를 고쳐 "차가울 냉" 자로 하기도 하는데, 뜻은 좋으나 격은 먼저 글자만 못하다.
신노는 고령 사람이며 생원이다. 선대의 허물로 과거에서 보류되어 급제를 못했다. 홍성민(자 시가, 호 졸옹)은 남양 사람이며 벼슬은 판중추부사에 그쳤다. 시호는 문정이다.
명나라 사람 등계달과 조선 문인들의 교류
명나라 사람 등계달(자 진생)은 오 지방 사람으로 글과 시를 잘하고 글씨를 잘 쓰며, 천하의 명산대천을 두루 돌아다녔고 스스로 북해라 호하였다. 소재 한세능이 1573년(선조 6년) 우리나라에 조서를 반포할 때 북해가 따라왔는데, 그때 습재 권벽·문봉 정유일·서애 유성룡이 종사관이 되고, 석봉 한호가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수행하였다. 북해가 이 네 분과 서로 몹시 좋아하여 여러 번 시문으로 주고받았다. 그때 나의 둘째 형은 사관으로 임금을 모시고 거침없이 일을 기록하자, 사신이 누구냐고 물으니 재상 김계휘가 한림학사라 대답하였다. 북해가 만나고자 하였으나 기회가 닿지 않았다. 1574년(선조 7년) 둘째 형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조천궁에서 서로 만나 보고 늦게 만난 것을 한스러워하였고, 둘째 형이 우리나라로 돌아온 뒤에도 북해는 여러 번 사신 편에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첨사 황홍헌·도헌 왕경민이 1582년(선조 15년) 조서를 반포하러 올 때, 북해가 둘째 형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 부탁하고 또 그들에게, "모의 벼슬이 선위사가 되지 않았으면 반드시 도감이 되었을 것이오. 당신들은 그를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되오" 하였다. 첨사가 의순관에 이르러 역관 곽지원에게 물어 둘째 형이 나와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자, 편지를 보이고 쥘부채를 선사하였다. 둘째 형도 율시를 지어 두 사신에게 인사하자 서로 돌아보며 감탄하기를, "우리나라 밖 작은 나라에도 인재가 있구려" 하였다. 귀국하자 첨사가 북해에게, "노형은 참으로 사람을 볼 줄 아십니다그려" 하였다. 이것은 당성군 홍순언에게 들은 말이다.
권벽(자 대수)은 안동 사람이며 벼슬은 감사다. 정유일(자 자중)은 동래 사람이며 벼슬은 대사간이다. 한호(자 경호)는 삼화 사람으로 진사이며 벼슬은 호군이다. 김계휘(자 중회, 호 황강)는 광주 사람이며 벼슬은 대사헌이다. 홍순언은 역관이며 남양 사람으로 광국공신에 녹훈되었다.
등계달이 지은 만사
사구 정유일이 세상을 뜨자 북해(등계달)가 듣고 다음과 같이 만사를 지었다.
그리워라 지난날 현도 땅에 노닐 때 청강 위에 일산을 기울이고 즐긴 일 싸늘한 달빛 감미로운 술잔에 일렁이고 눈송인 털방장에 엉기었었지 그해 다섯 사람은 다리에 올라 바람머리에 손잡고 일어나 세 번이나 노래 불렀지 헤어진 뒤 갑자기 신선이 되어 학 타고 놀 속 만릿길을 소요하다니 가을밤은 쓸쓸하고 화표주에 푸른 하늘 가없는데 그대 오기만을 바라누나
말쑥하고 속기가 없어 읽으면 마음이 시원해진다. 중국인이 인재를 아끼기가 대개 이와 같다.
최립의 시와 문장
황 조사(황홍헌)의 시를 사람마다 시원찮게 여겼으나 나의 둘째 형만은, "이런 재주는 예로부터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했지만 남들은 믿지 않았다. 《풍교운전》에 첨사(황홍헌)의 글이 실린 것을 보면 문법이 간결하고 엄숙하며 전아하고 미려하며 온후하고 순수하였으니, 둘째 형은 인재를 알아보는 분이라 할 만하다.
중추 최립은 문장이 간결하고도 예스러워 당대의 대가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더러 그의 시가 문만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정랑 하응림을 제사 지내는 시는 다음과 같다.
나무 찍는 소리 쩡쩡 울려라, 산새도 슬퍼하네 홀로 와 어느 가지에 칼을 건단 말가 재주와 명망이 당시의 비방을 이기지 못했는데 사귐 도는 응당 저승 가야 알리라 영해에서 작별한 뒤에 영 이별을 하다니 역정에서 시 지은 뒤 그대 시가 끊어졌네 평생 술만 보면 다 마시고야 마시던 님 궤연에 부어 놓은 한잔 술 살피실지
역시 근엄하고도 기발하며 건장하니 어찌 문만 못하다 할 것인가.
최립(자 입지, 호 간이)은 통천 사람이며 벼슬은 형조 참판이다. 하응림(자 대이, 호 청천)은 진주 사람이다. 경재 하연의 오대손이며 벼슬은 수찬이다.
둘째 형의 독서법과 문장 배우는 순서
나의 둘째 형은, "문장을 배우려면 반드시 한퇴지의 글을 익히 읽어 우선 문호를 세우고, 다음으로 《좌씨전》을 읽어 간결체를 배우고, 다음에는 《전국책》을 읽어 문장력이 종횡무진케 하고, 다음에는 《장자》를 읽어 신출귀몰하는 솜씨를 연구하고, 《한비자》·《여씨춘추》로 지류를 통창케 하고, 《고공기》·《단궁》을 읽어 뜻을 가다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마천의 《사기》를 익히 읽어 자유자재롭고 뛰어난 태를 키우는 것이다. 시를 배울 때는 먼저 《당음》을 읽고, 다음으로 이백의 시를 읽되, 소동파·두목은 그 솜씨만 따면 그만이다" 하였다.
나의 둘째 형은 언젠가, "내가 평생 두목(호 번천)을 익히 읽은 탓에 문장이 높지 못하다"고 한탄하였고, 이달 또한, "소동파·황산곡의 시가 내 폐부에 달라붙은 지 이미 오래인지라 시어를 만듦에 성당의 품격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시 짓기를 소동파·황산곡처럼 하면 그만이지, 하필 새삼스레 도연명·사영운 사이를 꾀할 것인가.
나의 둘째 형의 만년의 글은 유자후와 너무도 같아서, "주한정기"·"축려문" 같은 작품은 가히 대씨당·축필방 등의 글과 서로 어슷비슷하다. 최립이 "화기"에 대해 철로보지만 못지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명과 묘지는 무엇보다도 그의 장기인데도 세상 사람은 다 모르고, 보아도 아는 이가 드무니, 후세에 반드시 알아줄 이가 있을 것이다.
황정욱의 기개
임진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고 바로 철령을 넘었다. 장계 황정욱이 북청 진남루에 올라 한탄하기를, "정입부(정언신)가 살았더라면 왜놈이 어찌 능히 철령을 넘었으랴" 하더니, 7월에 회령에서 사로잡혔다. 장계의 문장은 우뚝하고 웅건하며 속기가 없다. 조선 초부터 문형을 잡은 자가 모두 사가독서한 자 가운데서 나왔지만 장계만은 그렇지 않아 세상에선 그를 영화롭게 여기지만, 지난해 난리에 화를 유달리 더 입었다.
황정욱(자 경문, 호 지천)은 장수 사람이며 벼슬은 병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정언신(호 나암)은 동래 사람이며 벼슬은 우의정인데,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의 옥사에 원통하게 죽었다. 뒤에 신원되었다.
노수신의 비문과 중국 사신의 평
1590년(선조 23년) 병부 주사 왕사기는 봉주(왕세정)의 아들로 우리나라 사신의 짐을 검열하러 왔다가 마침 한집에 있게 되었다. 통역을 통해 우리나라 문장을 보기 원하자 어떤 이가 소재(노수신)가 지은 정암(조광조) 비문을 보였다. 주사가 소매에 넣고 가며, "우리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하고, 또 "비명은 추역산송 같으면서도 광채는 더하고, 서문은 법언 같으면서도 넓고 크기는 그보다 나으니, 당신네 나라에도 이런 인물과 이런 문장이 있단 말입니까?" 하였다고 한다.
정암 조광조(자 효직)는 한양 사람이며 벼슬은 대사헌, 시호는 문정이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소재의 시,
바다 달에 벌레 소리는 끝지고 산 바람에 이슬 기운 걷혔네
라는 구절은 소릉(두보)의 시집 중에서 찾는다 해도 흔히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애초에 우의정 사임하고 문득 판중추 되었다네
라는 구절은 대구가 자연스러워 솜씨를 부리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 신도비를 지을 때는 밋밋하여 우뚝한 곳이 없으니, 아마도 기발하게 하려고 마음 쓰다가 도리어 옹졸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나의 둘째 형은 논평하기를, 국초 이래 문장은 경렴당을 제일로 치고 지정(남곤)을 다음으로 치며, 시는 충암(김정)의 높음과 용재(이행)의 난숙함을 모두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나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충암은 세련되지 않은 것 같고 용재는 너무 진부하니, 시 또한 경렴당을 으뜸으로 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지정 남곤(자 사화)은 의령 사람이며 벼슬은 영의정, 시호는 문경이다. 기묘사화 때 간악한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누님의 소령 짓기
가사를 지으려면 반드시 글자의 맑고 흐림과 소리의 높낮이를 분간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음률은 중국과 달라서 가사를 짓는 이가 없다. 공용경과 오희맹이 왔을 때 호음(정사룡)이 차운하지 않자 세상에서는 체면을 지켰다고들 하였다. 그 뒤에 소퇴휴(소세양)가 시강의 운에 차운한 시에,
마음이 서글픈 이, 발 걷고 다시 보니 꽃다운 풀빛 위에 눈길이 멈추네
라는 구절은 중국인이 여러 차례 칭찬하였으니, 모두 음률에 맞아서인지 아니면 다만 그 말씨의 아름다움을 취한 것인지?
소세양(자 언겸)은 진주 사람이며 벼슬은 찬성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나의 누님이 언젠가 "시를 지으면 운율에 맞는다"고 스스로 자랑하며 소령 짓기를 좋아하기에 나는 속으로 남을 속이는구나 하였는데, 《시여도보》를 보니 구절마다 옆에 동그라미와 점으로 어떤 자는 전청·전탁, 어떤 자는 반청·반탁이라 하여 글자마다 음을 달았기에 시험 삼아 누님이 지은 시를 가지고 맞추어 보니, 어떤 것은 다섯 자, 어떤 것은 세 자의 착오가 있을 뿐 크게 서로 어긋나거나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제야 걸출하고 고매한 천재적 소질을 타고나 힘써 겸손했기 때문에 많은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이처럼 성취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어가오" 한 편은 모조리 음률에 맞고 다만 한 자가 맞지 않았다. 그 사는 다음과 같다.
뜰에는 봄바람 스산하고 담머리엔 한그루 배꽃 희어라 옥난간에 기대어 고향 그리나 갈 수는 없고 하늘과 맞닿은 우거진 꽃다운 풀빛만이 비단 방장 비단 창도 쓸쓸히 닫겼는데 단장한 얼굴에 두 줄기 눈물 붉은 가슴 적시네 강북과 강남은 무성한 나무가 가리었는데 이 그리움 어이하리 산 높고 물은 아득, 님 소식은 없으니
"붉을 주" 자는 마땅히 반탁 글자를 써야 하는 자리인데 전탁이다. 하긴 소장공(소동파) 같은 재주로도 굳이 운율에 맞추지를 않았거든, 하물며 그만 못한 사람일까 보냐.
둘째 형의 시구, 거산역시
나의 둘째 형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쓸쓸한 들에 북두성 자루는 드리웠고 부서진 배 여울 모래에 놓였구나
이것을 소재(노수신) 상공이 몹시 칭찬하여 당나라 사람에 못지않다고 하였다.
나의 둘째 형의 "거산역"이라는 시는 이러하다.
새벽 별빛 아래 먼 길 떠나는 고각 소리 들리는데 터벅터벅 청주 옛 역정으로 향한다 나하동 그윽하고 산은 옹기종기 시중대를 감도는 바다는 아득아득 천 년 전 부러진 창 모래에 묻혀 짧고 십 리 황무지는 비 온 뒤에 비린내 나네 옛일은 아득해라 물을 데 없고 두어 가락 젓대 소리 차마 어이 들을 건가
이 시가 대궐에 들어가니 주상이 보고 몇 번이나 감탄하고는, 다섯째 여섯째 구절에 이르러서는 "작구법이 의당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율곡의 원접사 시절 일화
조사 황번충이 거련관의 소나무를 읊었는데, 그 맨 끝 구절에 "한" 자를 압운하니, 둘째 형이 한 선자가 각궁을 읊은 옛일을 인용하여 짓기를,
도리어 노나라의 좋은 나무처럼 북돋아 길러서 한 선자를 잊을쏜가
라 하였다. 이숙헌(이이) 선생이 당시 원접사였는데 이 시를 버리고 쓰지 않자 고제봉(고경명)이 크게 한탄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홍당릉이 몰래 황 조사에게 보이니 황 조사가 전편을 손수 베껴 가져오게 하고는 한동안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 사람은 시의 됨됨이를 아는 것이 이러하다.
이이(자 숙헌, 호 율곡)는 덕수 사람으로 벼슬은 정승에 이르고 시호는 문성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당릉은 당성의 잘못인 듯하다. 당성은 역관 홍순언의 호이다.
율곡의 "산중 절구"는 다음과 같다.
약 캐다 갑자기 길을 잃으니 산마다 온통 가을 낙엽뿐 산승이 물 길어 오더니 숲가에 피어나네, 차 달이는 연기
"성을 나서는 느낌"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아득히 사방에는 먹구름만 가득해도 중천엔 해 정히 밝구나 외론 신하의 한줌 눈물을 한양성 향하여 뿌리노라
지리산 신선 노인의 이야기
근세 어떤 선비가 지리산에 유람 갔는데, 한 외진 숲에 이르니 폭포는 이리저리 흐르고 푸른 대 우거진 가운데 한 띳집이 있었다.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섰다가 선비를 보고는 몹시 반기며 손을 맞아 솔 아래 앉혀 놓고 막걸리에 나물국으로 대접하고는 말하기를, "이 늙은 것이 평소 머리 빗기를 좋아하여 하루에 꼭 천 번은 빗어 내린다오" 하면서 쪽지를 내어 놓았는데, 그 속에 든 것이 바로 머리 빗는다는 소두시였다.
얼레빗으로 솰솰 가려 낸 다음 참빗으로 훑되 천 번이나 훑어내니 이는 벌써 없어졌네 어떻게 하면 만 길 되는 큰 빗 구하여 백성의 이 모조리 훑어 없앨꼬
선비가 자신도 모르게 뜰 아래 내려가 절하고 그 이름을 물으니 숨기고 알려 주지 않았다. 이튿날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두세 사람이 같이 다시 찾아가 보니, 집은 그대로 있었으나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성혼의 만시
성혼(자 호원) 선생이 청양군(심의겸)을 애도한 시에,
속세에 벼슬살이 진정 뉘가 참인고 여관에서 만나니 바로 친구일레 오늘의 이별 자리 한 가락 노래로 고향 봄동산에 가서 누울 그대 전송하네
하였으니, 이른바 길게 읊는 가락의 서글픔이 통곡보다 더하다는 게 바로 이것이 아닌가?
성혼(호 우계)은 창녕 사람이다. 벼슬은 참찬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간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심의겸(자 방숙, 호 손암)은 청송 사람으로 벼슬은 대사헌에 이르렀다.
차천로의 웅장한 글
차천로(자 복원)의 글은 당시 사람들이 웅장한 문장이라 일컬었다. 글이란 기운으로 주를 삼아야 하건만 차천로는 하찮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았고, 사륙변려문은 전아해야 하는데도 그의 사륙문은 순정치 못하고 거칠다. 시는 그보다 더 못하다. 그의 일본 기행 원고가 매우 많아 천여 수나 되지만 읊을 만한 구절은 하나도 없다. 다만 명천으로 귀양 갈 때 지은,
하늘가에 성난 소린 발해의 파도 눈 속에 시름겹긴 음산의 빛이로다
라는 구절은 정말 웅혼하다. 그러나 전편이 다 그렇지는 못하다. 만약 복원이 조금만 사리를 추구하여 많이 짓거나 빨리 짓는 데 치우치지만 않았다면 고인의 경지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차천로(호 오산)는 연안 사람으로 벼슬은 봉정이다.
차천로가 "이필이 형산으로 돌아가기를 비는 표"를 지었는데,
객성이 임금 자릴 여러 번 침범하고 늘 경월이 궁궐 문을 두드렸네
라는 구절이 있어 세상에서 적절하다고 일컬었다. 나의 둘째 형이 상주 목사로 가는 윤칠계(윤탁연)를 보내는 시의 셋째 넷째 구절에 역시,
경월이 잠시 대궐을 하직하자 복성이 먼저 낙동강을 비추누나
라는 구절이 있으니, 차천로의 표에 비하면 나은 것 같다.
윤탁연(자 상중, 호 중호)은 칠원 사람으로 벼슬은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헌민이다.
한준겸의 재치 있는 대구
한익지(한준겸)가 어떤 일로 파직되어 농사를 짓기로 하고 온 식구가 원주로 내려갔다. 배가 종실 순치수의 별장에 닿았는데, 순치수가 마침 활을 쏘고 약초를 캐던 터라 사람을 보내 누구냐고 물어왔다. 한준겸은 대답하지 않고 절구 한 수로 대신했다.
공자의 풍류가 무리에 뛰어나니 봄이 오자 살구꽃 마을에 낚시질하네 쪽배 탄 나그네가 정겹게 문안드리니 이 사람은 금천의 옛 원이라오
순치수가 배를 타고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그때 한준겸은 금천 군수로 있다가 파면되어 가는 중이었고 순치수는 금천에 은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한준겸(호 유천)은 청주 사람으로 벼슬은 영돈녕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익이며 인조의 장인이다.
이달의 기녀와의 일화
이익지(이달)가 최가운(최경창)을 따라 영광에 노닐 적에, 사랑하는 기생이 있어 자줏빛 비단을 사 주려는데 그 비단 살 돈을 마련할 수 없어 이달이 시로써 다음과 같이 빌었다.
장사아치 강남 저자에서 비단을 파니 아침 해가 비치자 자줏빛 안개가 피어나는구나 미인은 그걸 사서 치마며 허리띠를 만들려는데 주머니 더듬어야 돈은 없구려
최경창이 말하기를, "손곡(이달)의 시는 한 자가 천금이니 감히 비용을 아끼랴" 하고는 한 자에 각각 세 필씩 쳐서 그 요구에 응해 주었으니, 그 재주를 아낌이 이와 같았다.
동파(소동파)의 시에,
슬프다, 사하 물가 십 리의 봄 한 차례 꽃 이울자 다음 꽃 새로워라 비낀 저녁놀에 작은 누각 예 같건만 그 당시 춤추던 이 어디 갔는지
라는 것이 있는데, 손곡(이달)이 죽은 아내를 슬퍼한 시에도 또한 동파의 말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깁 방장엔 향내 가시고 거울엔 먼지 닫힌 문엔 복사꽃만 쓸쓸한 봄날 작은 누각엔 옛날처럼 달은 밝은데 발 걷고 달 즐길 이 그 누구런가
이 시는 무르녹게 곱고 정겨워 옛사람의 말을 그대로 쓴 줄도 모를 정도다. 이달이 기생을 너무 좋아한다고 남에게 비방을 받으면서도 정에 끌린 것이 이러하단 말인가.
기녀에게 준 시가 명성을 좌우한 이야기
당나라 장우와 최애가 기생집에 시를 지어 주었는데, 만약 칭찬을 하면 네 필 말이 끄는 수레가 그 문을 메웠고, 그 시가 기생을 헐뜯으면 손님도 끊겼다. 신차소 선생이 상림춘이라는 기생에게 준 시에,
제오교 머리에 내 낀 버들 비꼈고 밤들자 바람 자고 날씨도 해맑아라 노르스름한 열두 난간에 아가씨 옥과 같으니 대궐 안 시인들도 말 가는 대로 찾아드네
라 하니 기생의 명성이 이로 인해 열 배나 올랐다. 이달이 옥하선이란 기생을 비웃기를,
빗자루 같은 머리털 그나마 센데다가 암말 않고 앉은 꼴 귀신 같구나 몸에 걸친 비단옷도 얻어 입은 듯 고작해야 곽충륜에게나 시집가겠군
이라 하였다. 곽충륜은 장님인데 돈은 있었다. 이 기생은 유명했었으나 이달의 시가 나오자 문득 그 집이 쓸쓸해졌다. 똑같이 이름난 기생이로되 한 편의 시로 그 값을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있었으니, 어찌 다만 기생뿐이겠는가? 대개 선비도 이와 같았다.
신종호(자 차소, 호 삼괴)는 고령 사람이다. 벼슬은 예조 참판에 이르렀는데 연경에 사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송도에서 죽었다.
삼괴의 "봄을 슬퍼하며"라는 절구에,
한 사발 차 마시자 졸음 막 깨니 이웃에서 들려오는 붉은 옥피리 소리 제비도 오잖고 꾀꼬리도 날아갔는데 뜰에 가득 붉은 꽃잎만 지네, 소리도 없이
라는 시가 있다.
임제의 익살, 이달의 애민시
임자순(임제)은 스스로 소치(웃음거리 바보)라 호하였다. 둘째 형이 언젠가 기생들의 고사를 모아 글을 지었는데, 화치의 고사를 따서 이십사령을 지었다. 임제가 칠언시로 제하기를,
추리고 가린 명기 스물넷인데 소치의 차지는 하나도 없네 인간 만사 다 거짓이라고 곳곳마다 풍류랑은 소치라 말들 하네
라 하였는데 그의 글은 흔히 볼 수가 없다. 이른바 "수성지"라는 것은 문자가 생긴 이래로 특별한 글이니, 천지간에 절로 이런 문자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이달의 시를 세상 사람들은 기생에 대한 실수 때문에 트집을 잡지만, 그의 "동산역"이라는 시에,
이웃집 어린 며느린 저녁거리도 없어 비 맞으며 보리 베어 풀섶길로 돌아오네 축축한 생솔가지 불도 안 붙는데 문 들어서자 어린 것들 옷 잡고 칭얼대네
라 하였으니, 시골 살림의 식량 딸리는 보릿고개 실정을 직접 보는 듯하다. 그의 "이삭줍기 노래"에는,
논에서 이삭 줍는 어린이 하는 말 온종일 이리저리 주워도 소쿠리도 안 차요 올해는 벼 베는 이 솜씨 하 좋아 한 톨이라도 흘릴세라 관아 창고에 다 바쳤대요
라 하였으니 흉년에 시골 사람의 말을 마치 친히 듣는 듯하다. "영남 가는 길에"라는 시에서는,
영감은 솥 지고 숲길로 가 버렸는데 할멈은 어린 것을 데리고 따라가질 못하네 사람 만나 떠돌아다니는 괴로움 넋두리하되 종군하기 육 년이라 부자도 이별이라오
라 하였으니, 부역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살 수 없어 떠돌아다니는 모습이 한 편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이 시를 보고 가슴 아파하며 놀라 깨달아, 고달프고 병든 자를 어진 정치로 잘 살게 한다면 그 교화에 도움됨이 어찌 적다 할 것인가. 문장을 지음이 세상 교화와 관계가 없다면 한갓 짓는 데 그칠 뿐일 것이니, 이러한 작품이 어찌 그저 아름다운 말재간보다 낫지 않겠는가.
이주와 이원의 이별시
이망헌(이주)이 진도로 귀양 갈 때 이낭옹(이원)을 작별하는 시에,
바닷가 정자에 가을밤도 짧은데 이번 작별에 새삼 무슨 말 할꼬 궂은비는 깊은 바닷속까지 연하였고 험상궂은 구름은 변방에까지 이었네 흰 구레나룻에 파리한 안색 두려운 눈물 자국 적삼에 그득 이소경의 말을 가지고 그대와 꼼꼼히 따질 날 그 언제런가
라 하였다. 그가 제주도로 옮겨 갈 때 배가 막 뜨려는데 친동생이 뒤쫓아 왔다. 떠나면서 시 한 수를 읊어 작별하기를,
찌걱거리는 노 굳이 멈추고 한평생을 서러워하니 밝은 해는 밝게밝게 우리 형제를 비추네 정위새 와서 바다를 메우기만 한다면 한 덩이 탐라도를 걸어서도 가련만
하였으니 천 년 뒤에도 읽는 이의 애를 끊어지게 하리라. 김경림(김명원)이 나의 형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원(호 재사당)은 경주 사람이다. 벼슬은 예조 정랑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장류되었고 갑자년에 원통하게 죽었다. 이주(호 망헌)의 아우 이려(자 홍재)는 벼슬이 수찬에 이르렀다. 김명원(자 응순, 호 주은)은 경주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익이다. 나의 큰형 허성(자 공언, 호 악록)은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망헌의 "우연히 짓다"라는 시에,
나이 드니 풍상은 두렵기만 하고 짓궂은 병은 더욱 떠날 줄 모르는데 외로운 처마 아침 해에 포단에 앉았네 이웃 중이 가 버린 뒤 사립 다시 닫았는데 산구름만 돌난간을 스쳐 지날 뿐
이라는 것이 있다. "스님에게 부친다"는 시는 또 다음과 같다.
종소리는 달을 두드려 가을 구름에 지고 산비는 주룩주룩 그대는 안 보이네 염정은 닫히고 불길만 보이는데 개울 너머 인기척 밤깊도록 두런두런
한호와 시마에 걸린 이현욱
한호(자 경홍)는 글씨를 잘 쓸뿐더러 시도 잘 지었다. 그러므로 한경당(한세능)·등북해(등계달)·황규양(황홍헌)이 모두 그를 시인으로 대접했다. "임궁아집시"를 한호에게도 운을 화답하게 하였으니 중국인이 그를 중히 여기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언젠가 《봉주집》을 보니 한 태사의 "동행록"에 발문을 지은 것이 있는데, 거기서 한석봉(한호)의 글씨를 칭찬하되 편액 글씨는 양속보다 나아서 성난 사자가 돌을 후벼 대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였고, 해서는 왕헌지와 비슷하고 초서는 바로 회소와 같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를 잘 알아주었다고 하겠다.
근세에 이현욱이라는 이가 있어 시마(시귀신)에 걸렸는데 아계 이산해 상공은 그런 줄도 모르고 굉장히 칭찬을 했다. 이달이 어느 날 상공을 뵈러 가니 상공은 이현욱의 시를 보여 주며 고하를 품평하게 했다. 그러자 이달은,
봄이 오는 걸음걸인 느릴 것도 없고 서두는 것도 아닌데 봄빛은 동서남북으로 고루 비치네
라는 구절을 들어, "이것은 정말 문장가의 말투입니다. 우리나라 서씨·이씨 같은 분도 일찍이 이런 말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나이도 어리니 필경 시마가 붙은 것입니다" 하였지만, 상공은 그렇게 여기질 않았으나 얼마 있다가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그가 허영주에게 차운한 시에,
봄 산길 외져 돌아가는 나무꾼에게 물으니 손가락으로 앞산 돌길을 가리키네 중도 흰 구름도 어두운 골짜기로 돌아간 뒤 달은 푸른 바다 찬 밀물을 따라 오르네 세상살이 늙을수록 도무지 믿을 수 없는데 유흥만은 요즘에도 삭을 줄 모르누나 둘러보니 외로운 배 벌써 자취 아득한데 물 건너 드문 종소리만 한밤에 은은해라
라 하였고, 이달에게 차운한 시는 다음과 같다.
바람에 휘몰려 놀란 기러긴 편편한 모래밭에 내려앉고 물맵시 산빛엔 어스름 빛 자욱해라 화가시켜 이 경치 그림폭에 옮기려 하는데 고깃배의 젓대 소린 이를 어쩐다지
말들이 모두 속기가 없고 격이 또한 노숙하다. 시마가 떠난 뒤로는 일자무식이 되어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이산해(자 여수, 호 아계)는 한산 사람인데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다.
정백련에게 붙은 시귀신 요개
정용의 아들 정백련이 일찍이 중풍에 걸렸는데 하루는 스스로 말하기를, "어떤 젊은 서생을 만났는데 연꽃 관을 쓰고 용모는 옥설 같았다. 그는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당나라의 선비 요개로 이장길(이하)과 친한 친구 사이인데 안탕산에 산 지 이백 년이 되었다. 조선의 산천이 가장 아름답다기에 한라산으로 옮겨 산 지도 천 년 가까이 되었다. 다시 금강산으로 가려고 하다가 자네와 인연이 있으므로 삼각산에 와 살게 되었다. 그런 지도 벌써 삼십 년이 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여기에 왔다'고 했다" 하였다. 그의 시는 다음과 같다.
만리라 큰 바다에 날은 저문데 벽도꽃 그림자 하늘문에 비치네 신선 수레 한 번 쉬면 천 년이 훌쩍 지난다던데 구령의 신선 피리 소리 한밤에 들리누나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삼각산에 깃든 지 삼십 년인데 남녘 구름 바라보며 늘 울었네 솔바람 소리는 용의 울음만 못한데 기러기 소리는 또 삼릉의 학만 못하도다 삼릉의 학은 오지를 않고 촉도봉 앞엔 가을 달만 어둡구나
어떤 이가 "기러기"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난초가 시들 무렵이면 철새인 기러기가 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렇게 한 해 남짓 지나더니 시마가 떠나자 병도 나았다. 이현욱의 시마는 장편 대작도 다 지을 수 있었고 산문도 다 원숙했는데, 정백련에게 걸린 시마는 격은 이현욱보다 나았지만 율시는 절구에 못 미쳤으니, 하물며 그 문장이야 말할 게 있겠는가. 요개의 이름은 전기나 소설에도 보이지 않으니, 혹 당나라 말기에 절구로 이름난 이가 아닌가 한다. 나의 둘째 형은 그의 오언 절구를 사랑하여 성당에 못지않다고 여겼다. 그가 노산군(단종)의 옛집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사람은 복사꽃 핀 강 언덕을 지나가고 말은 버들에 스치는 바람 소리에 운다 노을진 산 그림자 속에 노산군댁은 쓸쓸도 하여라
"청명날 남에게 주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이월이라 제비가 바다를 뜨니 고을마다 꽃이 가득할 때로다 청명이면 으레 취한 지도 올 들어 하마 삼십 년일세
"늦봄"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봄잠 자고 나서 술잔 따르니 걷은 발 앞에 꽃이 흩날리네 덧없는 인생 얼마나 살리 비 내리는 하늘을 창연히 바라보네
"가을날"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국화는 빗속에 꽃 드리우고 뜨락의 오동잎은 가을에 놀래누나 오늘 아침 갑절이나 서글퍼짐은 어젯밤 시골 꿈을 꾸어서일세
"거문고 소리를 듣다"라는 시는 이러하다.
아름다운 여인 붉은 비파를 끼고 삐비 같은 섬수를 희롱하누나 갑자기 유수곡 타니 집이 고릉 서녘에 있네
이달이 또,
밝은 달은 큰 바다 저문 줄도 모르고 구의산 기슭엔 흰 구름만 자욱
이란 구절을 전해 주었는데, 이런 구절은 이미 꿈의 경지에 든 것이다. 정백련의 아우 정감은 나와 절친하므로 상세한 얘기를 갖추 들었다.
정용(호 오정)은 해주 사람이다. 시로 세상에 알려졌으나 일찍 죽었다. 정감(호 삼옥)은 벼슬이 정랑에 이르렀다.
강릉 지역 인물들에 대한 자부심
강릉부는 옛 명주 땅인데 산수의 아름답기가 우리나라에서 제일이다. 산천이 정기를 모아가지고 있어 뛰어난 인물이 가끔 나온다. 국초의 함동원(함부림)의 사업이 역사에 실려 있고, 참판 최치운 부자의 문장과 절개가 또한 함동원만 못지않다. 매월당(김시습)은 천고에 동떨어지게 뛰어났으니 온 천하에 찾아보더라도 참으로 찾아볼 수 없으며, 원정 최수성 또한 뛰어난 행실로 일컬어지고, 중종 때 어촌 심언광과 최간재(최연)의 문장이 세상에 유명하다. 요즘 이율곡(이이) 또한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 나의 둘째 형과 누님 또한 강릉의 정기를 받았다 할 수 있다. 현재는 최운보 이후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없어 뛰어난 인물이나 문인을 만나기 쉽지 않다. 그런데도 과거한 선비를 전혀 볼 수 없으니, 또한 극히 성했다가는 쇠해지는 것이 만물의 이치인가 보다.
함부림(호 난계)은 강릉 사람인데 벼슬은 대사헌이고 시호는 정평이다. 최치운(자 백경, 호 경호조은)은 강릉 사람인데 벼슬은 이조 참판이다. 그의 아들 최응현(자 보신, 호 수재)은 벼슬이 대사헌이다. 최연(호 간재)은 강릉 사람인데 벼슬은 참찬이고 시호는 문양이다. 최운보(자 대중)는 최연의 당질이다. 아버지 최해는 벼슬이 한림이다.
강릉부에서 구경할 만한 곳으로는 경포대가 으뜸이요 한송정이 다음간다. 이곳을 구경하는 사신이 하도 많은데도 사람 입에 전파된 아름다운 구절이 하나도 없으니, 이 어찌 묘사할 절경이 너무나 무궁해서가 아니겠는가. 두보나 맹양양(맹호연)이 이 경치를 본다면,
오와 초는 동남으로 트였고 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들뜬 듯하구나
라든지, 또,
운몽택엔 기운이 찌는 듯 파도는 악양성을 뒤흔든다
등의 구절이 반드시 현판에 걸렸을 터인데, 우리나라 인재는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또한 알 만하다.
명나라 시인 여민표의 시
명나라 사람 산동 참의 여민표(자 유경)는 시를 잘하였다. "장 시랑의 훌륭한 맏아들 초보에게 부치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온 냇벌엔 백 번 이상 싸운 자취 나그네 시름과 이운 풀은 한결같이 스산하다 쓸쓸한 산 오래된 역에선 말 탄 가을 손을 만나고 먼 숲과 가물대는 불빛은 밤낚시로다 땅이 소상강에 가깝고 보니 저녁 비는 늘 내리고 분포에 기러기는 온다만 고향 소식 드물구나 벗은 정녕 아득한 하늘가에 있거니 안개 낀 물가에 서글퍼 정처 없어라
이 시가 우리나라에 퍼져서 《송계만록》에는 나 장원(나만화)의 시로 실려 있는데 글자가 잘못된 것이 많으니, 송계(권응인)는 전하는 사람의 말을 들었을 뿐이기에 착오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명·중국 문장가들과 우리나라 문형의 비교
명나라 사람 중 글로 이름을 날린 십대가는 공동 이헌길(이몽양)·양명 왕백안(왕수인)·형천 당응덕(당순지)·좨주 왕윤령·안찰 왕신중·심양 동분·녹문 모곤·창명 이반룡·봉주 왕세정·남명 왕도곤인데, 이몽양은 오로지 서한 시대의 문장만 본받고, 왕세정·이반룡은 난삽한 글귀로 선진 시대를 앞지르고자 하고, 왕도곤은 화려하고 건실하며 동분·모곤은 평이하고 원숙하며 왕신중은 풍부하다. 그러나 명나라 사람은 모두 이를 역겹게 여기며 진부하고 속되다고 한다. 나의 의견도 거의 같다.
왕수인은 문장을 전공하지 않고 학문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박잡함을 면치 못하고, 당순지는 전아하고 순실하여 모두 대가가 될 만하다. 왕세정의 무리가 명나라 사람의 문장을 서한에 비기고, 이몽양을 태사공(사마천)에게 비기고, 이반룡은 양자운에게 비기고, 자기는 사마상여에게 비겼으니 그 자기 자랑이 너무도 심하다.
우리나라의 김종직·남곤(호 지정)·김정(호 충암)·노수신(호 소재)의 글은 명나라 십대가 속에 넣어 동분이나 모곤에게 비긴다면 그다지 못할 것 없으나, 중국에서 팔을 휘두르고 뽐낼 수 없음이 안타깝다.
김종직(자 계온, 호 점필재)은 선산 사람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충이다. 점필재가 제천정 운에 차운한 시에,
꽃을 흩날리고 버들을 꺾는 반강 바람에 돛그림잔 석양 기러기를 진 채 건드렁거린다 한 조각 고향 생각에 부질없이 기둥에 기대니 흰 구름만 날아서 술 실은 배를 스치는구나
라 하였고, "보천탄 즉흥"이란 시에는,
복사꽃 필 때 이는 파도 그 몇 자런가 은빛 바윈 이마까지 묻혀 보이도 않는구나 쌍쌍이 나는 가마우지 옛 놀던 자갈밭 잃고는 물고기 입에 문 채 줄과 부들 속으로 날아드네
라 하였으니 참 좋다.
조선과 명나라의 시 잘하는 이들
명나라 사람으로서 시로 이름난 이로는 대복 하경명·공동 이몽양이 있어 사람들이 이백·두보에 비긴다. 한 시대에 잘한다고 칭도된 자는 화천 변공과 박사 서정경·태백 손일원·검토 왕구사인데, 하경명·이몽양의 장편칠률은 근체·고체를 다 잘 쓴다. 이반룡·왕세정 역시 이대가라 일컬어지며, 오국륜·서중행·장가윤·왕세무·이세방·사진·여민표·장구일 등이 모두 나란히 달려 앞을 다투었다.
우리나라의 김종직·김시습·박은·이행·김정·정사룡·노수신 등의 작품이 비록 하경명·이몽양·왕세정·이반룡에게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어찌 오국륜·서중행 이하 사람에게야 뒤지겠는가. 그러나 칠자로 더불어 중국에서 서로 겨루지 못함이 한스럽다.
박은(호 읍취헌)은 고령 사람이다. 벼슬은 수찬이다. 열여덟 살에 문과에 급제하고 1504년(연산군 10년)에 사형되었다. 그때 나이는 스물여섯이었다.
요즘 중국인의 문학은 서경(전한)의 시조인 두보를 숭상하기 때문에, 두보의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고니를 새기다가 집오리를 만드는 셈은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문은 삼소(소순·소식·소철)를, 시는 황정견·진사도를 배우므로 저속하여 취할 게 없다. 시 잘한 최경창·백광훈·임제·허봉은 모두 일찍 죽고, 다만 이달 한 사람이 있을 뿐인데 이달은 비방이 산더미 같으니 세상이 너무도 재주를 아끼지 않는다.
명나라 명사들과 조선 문형의 쇠퇴
중국 근래 명사로 글 잘하는 이 중에 요천 신시행·영양 허국·동록 여유정·상서 육광조·사업 원응기·강주 나만화·시랑 심일관·규양 황홍헌·백담 손계고·태사 심무학·곤명 위윤중·태사 이정기가 더욱 두드러지고, 글을 잘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길 만한 이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옥당 벼슬을 하는 사람도 눈으로 흔한 글자를 구별 못하며, 임금의 글을 짓는 벼슬을 띠고 있는 사람도 사륙변려문에 익숙지 못하여 심지어는 잘하는 이에게 대신 짓게 해서 자기 직책을 메워 가기까지 하니, 남의 의론이나 추종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다. 고평을 하는 이도 또한 그 이름만 따라 등수의 고하를 매기니, 조선에는 신시행·허국의 무리를 바라볼 만한 사람도 없거든, 하물며 중국의 칠자와 재주를 겨룰 수 있겠는가.
대개 명나라 사람은 학문을 애써 쌓아서 문과에 오른 사람도 등잔불을 켜 놓고 새벽까지 글을 읽어 늙어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 시문이 모두 혼후하고 기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의 경우는 문구나 잘 꾸며서 과거를 보는데, 과거에 붙게 되면 곧바로 책 버리기를 원수같이 한다. 우리나라가 예전에는 문헌으로 일컬어졌는데 이제 와서는 어찌 이다지도 미약하단 말인가. 이 어찌 윗사람이 장려하고 이끌어 성취시키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아니면 혹 세상이 말세가 되고 풍속이 저속해져서 인재가 옛날에 미치지 못해서인가?
그러나 사람마다 다 요순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인데, 하찮은 하나의 기예를 어찌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포기하여 진력하지 않을 것인가. 애써 공부를 계속하면 옛사람에게 미치기도 어렵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중국의 칠자라든지 신시행·허국 따위일까 보냐. 우선 이것을 써서 스스로를 경계한다.
선친의 가르침과 정임당 상공의 일화
선친께서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 사람은 중국의 옛 역사만 전공하여 우리나라 사적은 알지 못하니 근본을 힘쓰는 도리가 결코 아니다" 하셨다. 그러므로 두 형과 나는 모두 《동국통감》을 읽었다. 그러나 젊었을 때는 읽을 만한 책이 하도 많은데 하필 이것을 읽을 것이 무엇인가 생각했었다. 그러다 황 조사(황홍헌)가 태평관에 이르러 관반인 정임당(정유길) 상공에게 고려와 신우(우왕) 부자의 내력을 묻자 정 상공이 입만 벌리고 대답을 못하니, 나의 둘째 형이 들어가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선친의 높은 견식이 여느 사람보다 매우 뛰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아, 재주가 임당 같은 분으로서도 중국 사신과 문답할 때 곤욕을 당했으니, 사신의 접반관이 되어 본국의 일을 몰라서 되겠는가.
정유길(자 길원, 호 임당)은 동래 사람이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정유길의 "사제극성"이란 시에,
성조에선 죽은 이에게도 은혜 베푸사 해마다 쓸쓸한 담장에 제사를 내려주시네 제사 마친 단 위엔 비바람도 잦아지고 흰 구름만 바다인 양 앞 마을에 자옥해라
라 하였고, "영유 이화정"이란 시에는,
꽃샘 비바람은 옛 시에도 있거니와 올봄 꽃은 공교롭게도 늦장부리네 꽃 필 때 되면 응당 달이 있겠고 그중의 봄빛 자규야 알고말고
라 하였으며, "몽뢰정 봄맞이 첩자"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선대의 백발 판서 한가컨 분망컨 깜냥대로 편안했네 고기잡이 영감 봄강이 따사롭다면서 꽃도 피기 전이건만 쏘가릴 진상하네
최부의 표류기
최부(자 연연, 호 금남)는 나주 사람이다. 문장에 능하여 문과와 문과중시에 거듭 급제하여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제주도에 추쇄경차관으로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바다를 건너오다 풍랑을 만나 표류한 지 사십 일 만에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 우두 바깥바다에 배가 닿게 되었다. 당두채 천호가 왜구라 무고하였으나 최부가 질문에 척척 응답하였으므로 화를 모면하였다. 항주에 이르자 삼사관이 본국의 역대 흥망과 군현의 설치, 산천·예악·인물에 대해 매우 꼼꼼히 물었으나 최부의 대답이 마치 대를 쪼개듯 정확하므로 삼사관이 모두 감탄하였다.
돌아오자 성종이 일기를 쓰도록 명하므로 이를 써서 바치니 모두 세 권이다. 최부의 시는 흔히 볼 수 없는데, "송사를 읽다"라는 시에,
등잔불 돋우고 다 읽고 나선 문득 긴 한숨 짓노니 중국 천지엔 대장부랄 사람 하나 없구나 삼백 년 내려온 중국 전토를 어쩌자고 늙은 선우에게 내어 주었나
하였다. 시가 침착하고 노련하니 그 사람됨을 짐작할 만하다.
최부는 벼슬이 사간인데 1504년(연산군 10년)에 처형되었다.
성종 때 정의 현감에 이섬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최부보다 앞서 역시 풍랑으로 표류하여 양주부 굴항채에 닿으니, 채관이 가두고 상부에 아뢰어 문초하게 하였다. 이섬이 옥중에서 지은 시에,
열 폭짜리 돛폭은 바람도 못 가리고
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책임자가 보고 그가 해적이 아님을 알아 잘 대우하여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섬은 무인이라 전할 만한 여행 기록이나 기사가 없어 애석하다.
표류자들에 얽힌 여러 일화
1572년(명종 17년) 간에 호음(정사룡) 상공의 이웃 사람으로 해상 무역을 업으로 하는 자가 풍랑으로 표류하여 절강성 영파부에 닿자, 지부에서는 호패를 근거로 신원을 확인하고 북경으로 보냈다. 북경 가는 길이 공 천사(공용경)의 집을 지나게 되었다. 공씨는 그때 국자감 좨주로 벼슬을 사직하고 집에 있었다. 조선 사람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역관에게 청하여 길을 늦추어 상인과 이야기를 나눈 결과, 상인이 호음의 가계와 벼슬 지낸 경위를 말하자 공씨가 크게 놀라 데리고 집으로 가서 처자를 나오라 하여 인사시키고, 호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또 후히 대접하여 보냈으니, 공씨가 호음에게 심복함이 이와 같았다.
장흥 사람 이언세가 왜인에게 사로잡혀 남쪽 오랑캐 땅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배를 타고 밤낮 사십 일을 가서야 중국의 광서 향산현 땅에 닿았다. 그는 한 배에 탄 중국 상인에게 물어서 그곳이 명나라 지방인 것을 알았다. 그는 동행자와 함께 밤을 타 도망쳐 그 지방 지현에게 호소하니 지현이 처음에는 오랑캐가 올린 소장이라고 팽개쳐 버리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며칠을 울부짖으니 그제야 조사 심문하였다. 이언세는 글을 좀 알았는데 "조선국 장흥 사는 사람으로 해전을 하다가 왜적에게 사로잡혀 오랑캐 배에 넘겨졌다"고만 썼다. 그것을 본 지현이 남웅부에 압송하니 삼사관이 그 문초에 의거 북경으로 이송했다. 그때 마침 동지사가 북경에 도착하였으므로 그 사행과 같이 돌아오게 되었다. 이언세는 남창과 항주·소주의 풍경이며 북경·남경의 훌륭한 경치를 말하기는 하나 자세하지는 못하다.
승지 이정립이 지은 "표류된 사람들을 돌려보내 준 데 감사하는 표"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만 이랑 파도 헤치고 빛나는 요임금 땅에 나아갔다가 천 리라 고향 땅에 돌아오게 되었으니 우임금 같은 임금 아니었던들 고기밥 되었으리
이 글은 대구가 적절하고 뜻이 좋다. 전편을 볼 수 없음이 섭섭하다.
이정립(자 자정, 호 계은)은 광주 사람으로 벼슬은 이조 참의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희이다.
1591년(선조 24년) 겨울에 중국 상인 스무 명 남짓이 사탕을 팔다가 우리나라 제주도에 표류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왔었다. 내가 친구와 같이 가서 보고 소주와 항주의 풍속을 물으니, 그중 한 사람이, "당신은 외국 사람으로서 어떻게 중국 풍토를 역력히 아십니까?" 하였다. 그중에 장덕오란 사람이 있어 자기 말로 복건 장포 사람이라 하기에, 내가 시랑 장국정과 시랑 주천구가 당신의 이웃인가고 묻자 장덕오가 놀라며, "장 시랑은 저의 당숙이고 주 시랑은 한 동네 사람입니다" 하였다. 내가 또 "그러면 태사 장이풍과 어사 장이명은 당신 사촌 형제이겠구려" 하자 장덕오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희끼리 이야기하며 껄껄대고 웃었다. 역관이 말하기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기를 "수재가 나이 젊어도 중국의 일을 잘 안다고 하더라"고 했다. 왕신민이라는 자가 나에게, "무슨 벼슬이요?" 하고 묻기에 무자년에 과거하여 국자감생이 되었다 하니, 왕씨가 "언제 추천되지요?" 하고 물었다. 대개 중국에서는 국자감 학생이 으레 이부에 추천되기 때문에 그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이다.
임진왜란 의병장들과 승려들의 시
학관 양대박은 시를 잘하며 순평하고 전아하였다. 일찍이 자기의 한 연구를 자랑하였는데,
산귀신은 밤마다 금정불을 엿보고 물새는 가을이라 석당 연기에 잠들었네
하였으니 시구가 절로 좋다.
양대박(자 사진, 호 청계)은 남평 사람으로 벼슬은 학관이었다. 임진년 왜란 때 고제봉(고경명)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고 무기며 군량을 모두 자기 집에서 대었다. 군중에서 병으로 죽자 병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를 충장으로 내렸다.
상사 정지승이 시를 잘했는데 임자순(임제)의 무리가 몹시 추앙하였다. 세상에 전하는 한 편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돋아나는 풀잎 속에 왕손의 한 스며들고 피어나는 꽃잎따라 두견이 시름을 더하누나 물가엔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바람에 목란배만 일렁이누나
"스님을 전송하다"란 시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서에서 돌아오고 나는 또 서로 가니 봄바람 한 지팡이 가는 길은 높고 낮네 그 언제 달 밝은 밤 소요사에서 동녘 숲 두견이 울음 함께 들을꼬
또 한 연은 다음과 같다.
손이 돌아가자 문을 닫으니 남은 건 달빛뿐 꿈 깨자 빈 산엔 흩어지느니 솔바람 소리
그 전집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정지승(자 자신, 호 총계)은 온양 사람으로 정렴의 조카이다. 벼슬은 하지 않았다.
송익필이란 자도 시를 잘하니 그의 "산속의 눈"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밤새도록 내린 찬 눈 층대에 수북 쌓였는데 다른 산에 묵은 주지승 돌아오질 않았네 등잔불 깜박이는 작은 절집 신령한 바람 고요한데 소나무 스쳐오는 밝은 달 홀로 보네
구법이 맑고 뛰어나니 사람의 신분이 미천하다 하여 어찌 그 좋은 말까지 무시할 것인가.
송익필(자 운장, 호 귀봉)은 흉인 송사련의 아들이다. 본디 천민의 자식이나 문학의 조예가 뛰어나서 우계 성혼, 율곡 이이와 서로 친했다. 아우 송한필(자 사로, 호 운곡)도 시를 잘했다. 송익필의 "저물녘 남계에 배를 띄우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꽃에 홀려 돌아오기 하마 늦었고 달 뜨기 기다리다 여울 내려오기 머뭇거렸네 거나한 가운데도 낚싯대 드리우니 배는 흘러가도 꿈은 그대로
송한필의 "우연히 읊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어제 비엔 꽃이 피더니 오늘 아침 바람에 그 꽃 지는구나 애닯다 한 철 봄이 비바람 속에 오고 가누나
최전의 신동 시절
최전(자 언침)이 신동이란 이름이 있었다. 어려서 금강산에 노닌 적이 있었는데 그 길로 영동 산천을 구경하고 경포대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봉래산 한번 들어 삼천 년을 은바다 아득아득 물은 맑고 얕아라 난새 타고 피리 불며 오늘 홀로 날아왔건만 벽도화 꽃 그늘에 님은 아니 보이네
둘째 형이 그 시를 매우 칭찬하고 그 운자에 이어 읊기까지 하였는데, 그는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최전(호 양포)은 해주 사람으로 진사였다. 양포의 "늙은 말"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늙은 말 솔뿌리 베고 누워 꿈결에 천 리 길 가네 가을바람 나뭇잎 지는 소리에 놀라 깨니 지는 해가 뉘엿뉘엿
"물고기 뱃속 등불에 제하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멱라수는 흘러 흘러 끝이 없는데 굴원은 불평을 원망했네 지금 물고기 뱃속에서도 속마음 밝은 것은 간직했겠지
금각과 이성윤의 재주
금각(자 언공)은 봉성 사람이다. 둘째 형에게 열두 살 때 글을 배워 육경을 통하고 제자백가서와 역사서를 두루 읽지 않은 게 없었다. 글 짓기를 전중하고도 온화하고 아름답게 하여 이미 작가가 되었는데, 그의 "조대기"·"주류천하기"·"한발문" 등의 글이 세상에 전한다. 열여섯 살에 해외에 유학하였다. 뱃속에 벌레가 생기는 병을 얻어 집에 있으면서 《풍창랑화》를 지으며 심심풀이로 세월을 보내다가 1588년(선조 21년) 가을에 죽었다. 죽는 날 스스로 명을 짓기를, "봉성 사람 금각, 자 언공은 아홉 살에 글을 배우고 열여덟 살에 죽는다. 뜻은 원대하나 목숨은 짧으니 운명이로다" 하였고, 또 다음과 같이 만사를 지었다.
아버님 어머님 나 때문에 울지 마세요
《조대집》 4권이 있다.
종실인 이성윤(자 경실)은 우리 둘째 형에게 글을 배웠다. 그의 시는 온정균과 이상은을 숭상하여 그들의 시풍을 터득하였다. 그의 "향렴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부용성 밖 예주궁에 난새 수레로 허 시중을 맞네 앵무부는 달 밝은 밤에 읊조리고 숙상 갖옷은 비단 병풍에 걸려 있네 추운 비단 방장엔 향로까지 곁들였고 꿈 깬 은등잔엔 등화가 맺혔네 앵무새에 말 전하노니 자주 손을 물리쳐서 운우의 정 총총히 흩어지게 말아다오
"달을 읊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운모병풍 썰렁하고 아름다운 방장 비었는데 옥같은 달에 이슬만 함초롬 맺혔구나 항아가 장생약이야 얻었다 한들 해마다 홀로 사는 애달픔 어쩌지
자못 부귀롭고 아름다운 운치가 있다. 임진왜란에 어버이를 하직하고 임금을 호종하기에 갖은 고생을 다하였으니 배운 바 정신을 저버리지 않았다 할 만하다.
이성윤(호 매창)은 성종의 4세손이요 왕자 익양군 회의 증손이다. 그 아버지는 청원도정 이간이다. 시호는 충정이다.
양정집과 박엽의 시
양정집은 호남 사람으로 나이 열 살에 글을 잘 써 고향에서 신동으로 소문났었다. 스님에게 보내는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노닥노닥 기워 입은 한 늙은 영감 지팡이 의지하여 바위 아래 서 있어 머리 돌려 뭔지 기다리는 듯하니 필경 동해바다 달일 테지
어린 나이에 임금의 잔치에도 초대받았었으나 불행히 세상을 떴다.
근세 선비들은 예를 병으로 여기고 다만 허무를 말하고 욀 뿐만 아니라 술에 취한 채 수레를 타고 태연히 거리를 나돌아다니며 조금도 꺼리낌이 없는 이가 있는데, 엄숙한 선비나 단아한 선비조차 이에 물들었다. 요즘 박엽(자 숙야)이라는 사람이 있어 시문을 잘하나 불행하였다. 기생집에서 나의 글씨 솜씨와 시법을 보고 본떠 가는 곳마다 벽에다 써 대었는데, 뒷사람이 와 보고는 으레 이를 아무개 글씨다 하였다. 그의 "봄을 슬퍼하는 노래"는 다음과 같다.
연분홍 꽃 오련한 푸른 잎은 아침햇살 머금고 꾀꼬리 읊조리고 제비는 지지배배 남의 시름 자아내네 이끼 자욱 이슬에 함초롬 비취빛으로 젖었는데 흩날리는 눈같은 살구꽃은 연지빛으로 향기롭다 봉황 무늬 저고리는 흐르르 얇아 봄추위 스며드는데 은병풍 기대어서 이별을 슬퍼하네 서방님 한 번 떠나 돌아오질 않아 손꼽아 기다리던 그 봄도 또 삼월이라니
박엽의 호는 국창이며 반남 사람이고 벼슬은 평안 감사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사형되었다.
풍자시와 익살, 애처가 이야기
두남 김일숙(김두남)은 글은 보통이었으나 남을 풍자하는 작품으로는 그 당시에 으뜸이었다. 이웃에 어른이 있었는데 앞니가 길어 홀 모양 같았으므로 다음과 같이 찬을 지었다.
나이 일흔에 긴 것이라곤 이[치아]니 이는 홀을 만들만 허구려
또 이웃 사람이 눈이 가늘어 겨우 볼 수 있을 정도였는데 다음과 같이 찬을 지었다.
모든 것 보고 싶지 않아 한세상을 하찮게 보는 자인가 보이는 것이 작으니 우물에서 하늘을 보는 자 아닌가 그 눈동자를 보면 그 사람 무슨 수로 속마음 숨길쏜가
나의 둘째 형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잘하였다.
김두남은 원주 사람이며 김응남의 사촌 동생이다. 음관으로 부윤을 지냈다.
내가 다리를 앓아 핑계삼아 장인댁에 가니, 둘째 형은 내가 나들이 않음을 빈정대어 시를 지어 보냈는데 첫 수는 다음과 같다.
하늘이 태왕을 사모하는 자네 마음 알아 짐짓 두 다리에 온통 부스럼이 나게 했구나 이웃이 지척이나 오히려 멀다 혐의하니 하물며 물마름 우거진 십 리 길이랴
또 다른 수는 다음과 같다.
짧은 수레도 안 타는 자네 덩그런 황문이 한길가에 서겠네 세상이 온통 공사에만 종사한다면 이 세상 어디메서 잠부를 찾을꼬
대개 태왕이 그 비를 사랑하기에 세상에서 애처가를 태왕이라 부르는 것이다. 황문은 옛날 어떤 사람이 그 아내를 너무 사랑하여 그 친구가 빈정대기를, "열녀는 홍살문을 세워 정문을 삼으니 정남은 마땅히 황문을 세워야겠지" 하였다 해서 쓴 것이니, 그 풍류와 익살이 모두 이와 같았다.
이달의 낙화시와 불우함
이달이 일찍이 "낙화"를 읊기를,
슬프다 진분홍에 또 연분홍 한꺼번에 풀풀 날아 작은 뜰에 지는구나 푸른 이끼에 붙어 남는 것만은 못하나 바람 따라 동서로 흩날리는 것보단 낫구나
하니 말뜻이 함축되어 있다. 또 감회를 읊은 절구 두 수는 다음과 같다.
성궐은 들쑥날쑥 솟을대문 늘어섰는데 오후의 집 풍악소리 하늘 높이 울리는구나 패릉교 위 나귀 탄 나그네 양양땅 맹호연 만은 아니라오
둘째 수는 다음과 같다.
벼슬 높은 고관들 가는 곳마다 만나게 되고 수레는 물 흐르듯 말은 용 같네 장안 밭두렁에 부질없이 고개 돌리니 지척인 대궐문 아홉 겹이 가렸구나
"용나루를 건너며"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이라 강물은 용나루에 급히 내리니 나루의 아전은 배 멈추고 웃었다 성냈다 서울 나들이 그 무슨 소용 십 년을 오가도 포의인 것을
그 뜻이 몹시 서글프니 참으로 불우한 사람의 시다.
양사언의 신선 같은 풍모
양봉래(양사언) 선생의 아량과 풍도는 세상의 숭상받는 바가 되거니와,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와 사마시·문과를 모두 같이 합격하였으므로 그 사귐이 가장 친밀한데, 문장이 높고 빼어나 구름을 앞지를 듯한 기상이 있고 행서·초서를 잘 쓰는데 그 쓰는 법이 마치 용이나 뱀처럼 분방하며, 본성이 벼슬살이를 우습게 알고 산수에 정을 붙여 짚신과 밀랍으로 결은 나막신 차림으로 어느 때고 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바위 골짜기에 사는 이들이 사강락(사영운)에 비겼다. 언젠가 강릉 부사가 되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비석을 세운 일도 있었다. 언젠가 금강산에서 시를 읊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봉래섬의 백옥루를 소문으로만 들었더니 이제야 구경하네 운모병 둘러치고 호박구슬 베개삼고 산호 발걸이로 수정발 거두었네 벽도화 피고 지니 일천 년인데 서왕모 머물기는 팔만 년이라네 요대 맨 위에 호올로 서니 흰 구름 누른 학은 한가롭게 가는구나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훨훨 노을처럼 공중에 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한다.
양사언의 "금수정"시는 다음과 같다.
비단물 은모래는 마냥 고운데 골구름 강비 속에 갈매기 산뜻 진인 찾아 그릇 봉랫길에 들었거니 고기잡이 배를 동구 밖으로 내몰진 마오
신선의 조짐이 된 꿈속의 시
하서 김인후가 죽은 뒤, 오세억이란 자가 갑자기 죽더니 반나절 만에 깨어나서는 스스로 하는 말이, 어떤 관부에 이르니 "자미지궁"이란 방이 붙었는데 누각이 우뚝하여 난새와 학이 훨훨 나는 가운데 어떤 학사 한 분이 하얀 비단옷을 입었는데, 흘긋 보니 바로 하서였다. 오씨는 평소에 그 얼굴을 알고 있는데, 하서가 손으로 붉은 명부를 뒤적이더니, "자네는 이번에 잘못 왔네. 나가야겠네그려" 하더니,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주었다고 했다.
세억은 그 이름 자는 대년 문 밀치고 와서 자미선 뵈었구려 일흔에 또 일곱 된 뒤에 다시 만나리니 인간 세상 돌아가선 함부로 말하지 마오
깨어나자 소재 상공(노수신)께 말씀드렸다. 그 뒤에 오씨가 일흔일곱 살에 죽었다.
김인후(자 후지)는 울주 사람이며 벼슬은 교리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문묘에 배향되었다.
하서가 충암(김정)의 시권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오기를 어디로부터 왔으며 가기를 또한 어디를 향해 가는고 가기도 오기도 정한 자취 없이 유유한 세월 백 년 남짓이로구나
양사언 시풍의 계승과 누님의 유선사
양봉래의 "풍악에서"란 시는 다음과 같다.
백옥경 봉래도에 허허 넓은 연파는 태고적이고 맑고 따사로운 날씨도 좋구나 벽도화 그늘에 한가로이 오가니 학 탄 신선 피리소리에 세월은 간다
신선 같은 풍채와 도인 같은 느낌이 짙다. 자동 차식이 흉내내기를 다음과 같이 했다.
아침엔 현포에 저물녘엔 봉래산에 산달 걸린 박연폭포요 향풍어린 계수대라 동해를 굽어보며 마고에게 절하고 삼십육동천에 돌아가노라
원숙하기는 하나 격이 미치지 못한다. 나의 둘째 형도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학은 훤칠하게 제비는 높게 낮게 삼신산에 돌아와 오색 구름에 나는구나 이 천지간 석 자짜리 지팡이에 포의로 한 세상 보내누나 바윗머리 나무에 긴 칼 척 걸어 두고 맑은 시내에 손 담그고 영지풀잎 씹네
비록 좋기는 해도 마침내 양봉래의 신선 같은 운치에는 미치질 못한다. 양사언의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산 위에 또 산 있으니 산이 땅에서 나오고 물가에 또 물 흐르니 물 속에 하늘 어리었네 아득해라 이 몸 공허 속에 있거니 연하도 아닌 것이 선경도 아니로세
불경의 게송과도 비슷하다. 또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금옥루대에 보랏빛 안개 떨치고 용이 나는 구름길에 신선 내려오네 청산도 인간 세상에 역겨웠던지 푸른 바다에 어린 구만리 장천 속에 날아들었네
삼천 년 만에 익는다는 신선 복숭아 한밤중 하얀 난새 쌍으로 왔네 중천에 신선 서왕모 내려오니 아롱진 바다기운 구름창에 이었네
역시 그를 따라 배울 만하다.
차식(자 경숙, 호 이재)은 연안 사람이며 벼슬은 군수이다.
내 누님(허난설헌)의 "보허사"는 다음과 같다.
난새 타고 한밤 중 봉래도에 내려서 기린수레 한가로이 몰고 아름다운 풀 밟기도 하네 바닷바람은 벽도화를 불어 꺾어오고 옥소반엔 가득찬 외만한 대추
또 다음과 같이도 읊었다.
구화의 치마폭에 육수의 웃옷 입고 학의 등 싸늘바람 자부로 돌아왔네 비취 바다 달도 지고 은하수 기우는데 옥피리 소리 속에 상서구름 날리네
유몽득(유우석)을 본받았으나 맑고 뛰어나긴 그보다 더하다. "선계에 노니는 시" 백 편은 모두 곽경순(곽박)의 남긴 뜻인데 조요빈 따위로는 미치지 못한다. 나의 둘째 형과 이달이 모두 모방하여 지었으되 마침내 그 울타리를 넘지 못했으니, 우리 누님은 하늘이 내린 신선의 재주라 할 만하다.
정승들의 기개와 청허당 천연 스님의 무용담
양봉래의 "선종암"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거울속 부용은 서른 여섯인데 하늘가에 바라뵈는 일만 이천 봉 그 가운데 한조각 창주석에는 한 백년 동안에 시라고 말할 수가 있다오
박 상공(박순)이 끝구절을 고쳐, "동녘에 온 해객이 졸기에 합당하네"라 하자, 양봉래가 온당하다고 하여 드디어 고치고 나중에 지천 황정욱 상공에게 말하니 상공이, "이는 공의 시어가 아니니 바른 대로 말하시오" 하므로 양봉래가 지천의 식견에 크게 탄복했다. 지천은 양봉래를 잘 알아보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박순(자 화숙, 호 사암)은 충주 사람이며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혜이다. 사암의 "퇴계 선생이 남으로 돌아감을 전송하며"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고향생각 끊임없어 고리인 양 이어지니 한필 말로 오늘아침 한관 떠나네 추위에 고갯매화 봄인데도 못 피니 늦은꽃 응당 늙은 신선 돌아오길 기다리리
총병 양조의 사당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철갑옷 금빛칼도 이미 흙이 되었고 문 닫힌 사당 소나무 전나무엔 저녁 까마귀 우네 슬프다 중국 날센 장수 죽었으니 갈대 피리 소리만 백낭하 자주 넘네
청풍 한벽루 시는 다음과 같다.
나그네 그리움 외로이 절로 시름 생기니 앉은 채 강물소리 듣노라 다락에서 내려올 줄 모르네 내일 또 벼슬길로 가버린다면 흰 구름에 단풍은 누구 위한 가을일꼬
견 상인에게 보내는 시는 다음과 같다.
오랫동안 입은 은혜이기에 이 마음 궁리 많아 새벽 닭소리에 조회 나갈 비녀를 꽂네 강남 땅 들집은 하마 황폐했겠지 산승을 고용하여 대밭을 돌보게 했네
무위자 천연 스님은 집안이 본래 좋았으나 잘못 중이 되었는데 씩씩하여 기개가 있었다. 언젠가 지리산 성모 음사가 대중을 미혹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겨 이를 쳐부수었다. 남명 선생(조식)이 "용사천연전"을 지었으며 양송천(양응정)이 그 책머리에 다음과 같이 제하였다.
주먹 한번 휘둘러 산꼭대기 돌 깨부수니 갈 곳 없는 잡귀가 대낮에 울더라
양봉래·박사암(박순)과 나의 둘째 형이 모두 천연의 친구가 되었다. 천연이 약간 시를 알아 둘째 형에게 준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잘못 고기 배에 걸린 용 곤핍함을 슬퍼하고 닭우리에 그릇 떨어진 봉황새 쇠해만 가네
임진란에 정화상(휴정)을 따라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조식(자 건중, 호 남명)은 창녕 사람이며 벼슬은 전첨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양응정(자 공섭, 호 송천)은 남원 사람이며 벼슬은 부윤이다. 휴정(호 청허)은 정화상이니 임진란 때 승병 대장으로 팔도도총섭이 되었다. 시를 잘하였다. 양응정의 "어양교를 지나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나무빛이며 풍경은 태평세월 그렸는데 강다리는 아직도 옛이름을 띠었구나 이주곡 양주곡이 순임금의 음악 같았더라면 어찌 오랑캐놈들이 두 서울을 침범하였으리
휴정의 "한성 가는 길에"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바닷가 나무엔 가을 서리 내리고 초관엔 이른 기러기 떠나네 종산 외론 새 나는 하늘가에 나그넨 배 안에 늙어만 가네
둘째 형이 무위자에게 준 시는 다음과 같다.
천왕봉 위로 나는 듯 달려가 천 년 묵은 돌덩이 주먹으로 부수고 돌아왔네 애닯다 영웅은 속절없이 늙어가고 산속에 밝은 달이 닫힌 사립문 비추네
또,
두만강가 나뭇잎은 시들고 여기저기 외론 산엔 깃발만 펄럭이네 산속에 하늘을 떠받칠 솜씨 버려졌으니 슬프다 월지국 선우 머리 벨 이 그 누구런가
그에 대한 칭찬이 이와 같았다. 또 장편시의 머리 두 구절은 다음과 같다.
무위자는 사람중에 용이니 전생엔 바다를 가르던 금시조였는데 벼락이 한밤에 천왕봉에 떨어졌네
말이 매우 기발하였는데 전편을 못 외우겠다. 필경 무위자의 책 속에 있을 것이다.
엄흔의 몰이해
호음(정사룡)이 이우정에 제한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물가에 가로 세로 밀물은 지고 나무숲 우수수 기러기 손이 오네
조어가 기이 건장한데 전한 엄흔은 하찮게 보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엄흔(자 계소, 호 십성)은 영월 사람으로 벼슬은 전한을 지냈다.
남효온의 시와 안응세
남추강(남효온)의 "한식"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흐린 날 울 밖에 저녁 해 나고 한식날 봄바람에 들 물은 맑다 배에 가득찬 장사아치 끝없이 지껄이는 말 버들꽃 필 무렵이라 고향의 정일레라
"안자정(안응세)을 꿈에 보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부귀 영화 덧없는 꿈 저문 산 앞에서 꾸니 넋과 넋 만남이란 정말 우연이라 가는 비 뜰에 내리고 봄은 쓸쓸한데 살구꽃 수없이 지네 붉은 돈처럼
"삼짇날 성남에서"란 시는 다음과 같다.
성남이고 성북이고 살구꽃 붉은데 해는 꽃 서녘에 있으니 꽃 그림잔 동에 있네 외로이 말 탄 병든 늙은이 철 바뀜에 놀라니 비낀 바람이 성가퀴에 눈물을 흩뿌려주네
이상 몇몇 시는 당나라 사람에 못지않다. "귀신론" 일편은 학문이 극히 높다. 훌륭한 재주를 지녔어도 펴 보지 못했으니 아깝다.
남효온(자 백공, 호 추강)은 의령 사람인데 진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이다. 안응세(호 월창)는 죽산 사람이다. 진사를 지냈다.
남효온의 "성거산"에 제한 절구는 다음과 같다.
동녘에 해 높이 돋으니 신령스러운 비에 나뭇잎 지네 창 열자 온갖 시름 스러지니 병든 몸이 날개가 돋는 듯
황형의 무공과 시
무절공 황형은 무장 출신으로 또한 글과 글씨에 능했다. 1510년(중종 5년)에 왜구를 진압하고 몰운대에 올라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높은 대에 깃발 세우니 큰 바람 이는구나 바다 구름 갓 걷히고 해는 둥실 붉어라 하늘에 비겨 칼 어루만지며 자주 고개 돌리니 탄환만한 대마도가 가까이 보이는구나
조어가 기이하고 장엄하여 마치 그 사람을 보는 듯하다. 어찌 인재가 옛사람에게 못 미치랴.
황형은 창원 사람이다. 무과급제로 공조 판서를 지냈다. 시호를 살펴보면 그의 시호는 장무이지, 무절이 아니었다.
명나라 재상들에 대한 논평
《승암시화》에 명나라 초 이래 재상의 업적을 논함에 있어 유성의(유기)를 제일로 치켜세웠다. 유기가 실로 어질긴 하지만 재상의 업적에 대해서는 소문난 게 없다. 영락 연간에는 하원길을 제일로 삼고 삼양(양사기·양영·양보)은 그 축에 들지 않았으니 그 의논 또한 온당치 못하다. 이문달공(이현)이 그를 헐뜯어 심지어는 나륜을 내쳤으니, 비록 흠이 됨을 면할 수는 없으나 그 공정한 것만은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정덕 연간에 이르러는 거드름스럽게 자기 아버지를 제일로 쳤다. 젊어서는 비록 괜찮은 사람이었으나 입각하여서는 임금의 외척을 연줄로 삼았으니 이미 올바른 선비는 아닌데, 공평하여 사심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가정 연간 이래로 명정승은 문정공 사천과 충의공 양부가 더욱 드러나게 유명했는데, 소인도 제일 많았다. 계악·방헌부·장총·엄숭·이본이 모두 소인들인데, 그중 엄숭은 은총을 이십여 년이나 독차지했다. 그 뒤에는 소사 서계·소부 이춘방이 다 명정승인데, 서계는 남들이 사마공(사마광)에 비겼으니 오랫동안 국정을 담당했었다. 융경 연간 이래로 고공·장거정은 모두 약골이었으며 신시행은 기롱을 면할 수 없었고, 승상 마자강·소부 허국·소보 왕석작이 모두 괜찮은 사람이었으나 그들의 업적은 삼양에게 비기면 누가 나은지는 모르겠다. 인재가 날로 저하되니 개탄스러운 노릇이다.
우리나라 명상은 황희·허조를 제일로 삼는다. 세상에서는 더러 전조(고려)의 과거 제도를 병폐로 여기기도 하는데, 과연 그 뒤에는 별로 이름난 사람이 없었다. 중종 때 문익공 정광필은 전인에 부끄럽지 않다.
황희(자 구부, 호 방촌)는 장수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익성으로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허조(자 중통, 호 경암)는 하양 사람이다.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으로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정광필(자 사협, 호 수부)은 동래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고 중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여진 정벌의 세 장수
단간공 정효의 《오학편》에 우리나라가 여진 이만주를 정벌한 일의 본말이 아주 자상히 실려 있는데, 강순·어유소·남이의 이름을 대서특필하였다. 이 세 사람은 진실로 장군감으로 중국 역사서에 그 이름이 드러났으니 이보다 큰 영광이 무엇이겠는가?
강순(자 태초)은 신천 사람이다. 음관으로 좌의정을 지냈고 남이의 옥사에 죽었다.
어유소는 충주 사람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정장이다.
남이는 의령 사람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조 판서를 지냈다. 의산위 남휘의 손자이고 익평공 권람의 사위로 유자광의 무고에 의해 살해되었다. 남이의 "정남"이란 절구는 다음과 같다.
백두산 돌은 칼 갈아 닳아지고 두만강 물은 말 먹여 마르리라 사나이 스물에 북을 정벌치 못하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이언공, 승려 시인들, 노비 시인 백대붕
척 총병(척계광)은 위명과 사업이 남의 이목에 번쩍거릴뿐더러 또한 시문에 능하여 이창명(이반룡)의 무리가 치켜세웠다. 임회후 이언공(자 유인)은 또한 시문에 능하여 다음과 같은 시가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바람은 밀물소리 휘몰아 섬들 떠들썩하고 해에 비낀 돛 그림자 누대에 오르네
요즘 스님으로 시 잘 쓰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유정 산인(사명당)은 당나라 구승의 유를 배워 시가 몹시 맑고 고고하였다. 행사도 자못 좋은 시구가 있어 "상서로운 오색구름 아롱지니 나물 먹는 중이 아니다"라는 구가 있다. 요즘 홍정이란 분이 또한 시를 잘하여 "스님을 칭송하다"란 시가 있었는데 나의 둘째 형이 몹시 칭찬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 해 헤어질 땐 가을 강물에 단풍 지더니 올해 작별에는 봄 산언덕에 매화가 지네 물결은 아득하고 산언덕은 가렸는데 단풍잎 지는 매화 이 시름 어이하리
유정(호 송운)은 행사와 같이 일본에 사신 갔었다. 이 두 분의 시가 같이 《기아》에 들어 있다.
백대붕은 천한 종으로 중의 대열에 끼었다. 시를 잘 하였으므로 나의 둘째 형과 승지 심희수가 다 대등한 벗으로 사귀었는데,
가을 하늘에 엷은 그늘 어리어 화악의 그림자 침침해라
라는 시는 둘째 형이 칭찬해 마지않았다. 우리 큰형을 따라 일본에 오간 일이 있으며 아름다운 시가 매우 많다.
백대붕은 전함사의 종이다. 심희수(자 백구, 호 일송)는 청송 사람이며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이다.
이 책을 마치며
내가 어려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형님들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겨 차마 다그치거나 나무라지 않았기 때문에 게을러 빠져서 독서에 힘쓰지 않았다. 차츰 자라서는 남들이 과거하는 것을 보고 좋게 여겨 덩달아 해 보았으나, 글치레나 하는 것이 장부의 할 짓은 아니었다. 이제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으니 세상에 나갈 뜻은 이미 사그라졌다. 십 년 글읽기로 작정했으나, 아, 그 또한 늦었도다. 《학산초담》 한 권을 짓는다.
1593년(선조 26년) 시월 연등한 뒤 사흘 만에 교산자는 쓴다.
(용어) 한단학보는 연나라 소년이 한단 사람의 우아한 걸음걸이를 배우려다 제 걸음까지 잊어버렸다는 고사로, 자기 본분을 잊고 남의 흉내만 냄을 이른다. 정시는 위나라 제왕의 연호로, 그 시대 지식인들이 청담을 숭상했던 풍조에서 비롯된 맑고 초탈한 시풍을 가리킨다. 삼성은 강상죄인을 추국하는 세 관청, 곧 의정부·사헌부·의금부를 이른다. 칠자는 명나라 때 문학으로 이름 높았던 일곱 사람씩 두 그룹(전칠자·후칠자)을 가리킨다. 교산자는 허균이 스스로 붙인 호다.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2 · 소(상소)
출처: 성소부부고 제26권, 부록 2, 소
배경: 1618년(광해군 10년) 정월과 5월, 허균이 기준격의 밀소에 대응하여 올린 두 편의 상소다. 기준격은 영의정을 지낸 기자헌의 아들로, 허균과 그 아버지 기자헌 사이의 오랜 개인적 갈등을 배경으로 허균을 인목대비 폐위 논의의 배후이자 광해군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다는 혐의로 몰아붙이는 밀소를 올렸다. 허균은 두 차례에 걸쳐 이를 조목조목 반박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 상소들은 허균 생애 마지막 해의 정치적 위기를 생생히 보여 주는 자료로, 같은 해 8월 허균은 결국 역모 혐의로 처형되었다. 원문은 《광해군일기》에 실려 전한다.
기준격의 상소에 대한 첫 번째 해명 상소
삼가 아뢰옵니다. 신이 이달 초나흗날 밤 이경이 지난 시각 집으로 돌아오는데, 깜깜한 어둠 속 울타리 밑에 숨어 있던 장정 두 명이 손을 쓰려 할 때 말 뒤에 있던 종이 발견하고 "도적이 있다"고 외치니, 도적이 도망하여 인가에 숨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 색출하여 결박시키고 추궁하니, 처음에는 문창(유희분)의 집 종이라고 했다가 다음에는 정승댁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정승댁이냐고 강력히 추궁하였으나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제 포도청으로 송치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일선위의 여종이 방면해 주기를 청하면서 또 문창의 집에 드나드는 모피장이라고 했습니다. 신은 '내가 혼자서 대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원수진 사람이 미워한 나머지 당나라 이사도가 배도를 암살하려 했던 일을 행하려 했던 것인데, 남의 부탁을 받아 풀어 줄 수 있겠는가' 여겼습니다. 그런데 대장 등이 미루면서 지금까지 국문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권세 있는 자와 굳게 결탁하여 모의하는 바가 있는 정황을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신은 기반이 미약한 사람으로서 화근을 제거하자는 의논을 강력히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견을 내는 자들이 신을 살해하려 한 지 오랩니다. 지금 기가에서 원한 때문에 사람을 사주하여 흉악한 상소를 올리게 했습니다. 이영은 평소부터 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자인데, 지난번 아뢴 글에서 "임금과 세자를 위해하려 모의한다"는 넉 자를 저 스스로 지어 신에게 덮어씌웠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기준격의 상소가 임금께 내려지지도 않았는데 이영이 어떻게 그 내용을 미리 알고서 갑자기 이런 불측한 오명을 씌울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이 스스로 국문하는 자리에 나아가 기필코 이영과 대변하여, 이영에게 어떻게 신이 임금을 위해하려 모의한 곡절을 알았는지 따지려 했는데, 서서히 처결하겠다고 전교하셨으므로 신은 거적자리를 깔고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자헌의 귀양살이에 대해 다시 혈서로 쓴 상소를 전달하여 함께 대변하려 하였습니다만, 곧이어 대간의 아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조처하지 않고 서서히 정배하겠다고 전교하셨으므로 신은 입대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객이 횡행하면서 신을 먼저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신이 한번 죽고 나면 신의 지극한 원통함을 씻을 길이 없기 때문에, 감히 대론이 한창 일어날 때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고 우러러 간절한 충정을 아뢰었으니 그 죄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대체로 기자헌이 기필코 신을 죽이려는 이유는 바로 신의 입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1613년 변고가 일어났을 처음, 서궁(인목대비)의 흉역스러운 정상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신이 기자헌에게 말하기를 "이는 신하로서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어떻게 지극히 높은 대비의 자리에 두어 인륜을 무너뜨리게 할 수가 있겠는가?" 하니, 기자헌이 "그대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김제남은 사리에 어둡고 유약한 사람인데 어떻게 비상한 모의를 할 수가 있었겠는가. 궁중에서 저주했다는 일도 궁인들이 하고서 그 화를 대비전으로 전가하는 것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더구나 심우영의 공초에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서양갑이 박응서의 계책에 자신이 횡사하게 된 데 분노하여 나라에 난을 끼치려 이런 흉역스러운 말을 낸 것이다. 저들이 흉역스러운 짓을 하려 한들 누가 따르려 하겠는가. 또 《위료자》에도 가혹한 형벌을 가하면 지사도 무복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지금 주상에게 다른 아들이 없고 동궁에게도 아직 후사가 없으니, 만세 뒤에 정론이 일어난다면 오늘날 이 일을 한 자의 자손들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나의 외조부가 바로 임백령인데, 지금 사람들이 을사년의 일을 말하면 내 얼굴이 붉어지니, 그대는 이런 의논을 주장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김제남을 임유에게 견준 것이고 서양갑 등도 억지로 자백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신은 한심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그의 자질들이 역모 사건의 초사에 거론되었으므로 뒷날을 위하여 이런 의논을 주장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뒤 기자헌이 이 말을 누설할까 매우 두려워하였고, 신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습니다. 이 밖에 신이 들은, 위를 원망하고 난이 일어나기를 바란 말은 감히 아울러 아뢰지 못하겠습니다. 기준격의 상소에 대해서는 신이 알 수가 없습니다. 준격은 신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훈회 이외에는 나이 어린 사람과 시사에 대해 말하는 것도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거든, 하물며 흉악한 상소에 거론된 불측한 말이겠습니까. 저가 그런 말을 들었다면 어째서 일찍 고변하지 않고 저의 아비가 죄를 입은 때에야 발론한단 말입니까? 고변하지 않은 죄 그 또한 심한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무고하여 사람을 죄에 빠뜨리기 위해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을 감히 글에다 쓸 수가 있겠습니까? 진실로 천륜을 모독하고 문란시키는 것을 상습적으로 행하는 자가 아니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하여 임금께 아뢸 수가 있겠습니까? 위를 무시하는 패역스러운 말을 스스로 지어냈다면 그 죄는 역신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신은 삼가 통탄하였습니다.
1606년(선조 39년) 겨울, 신의 형 허성이 이조 판서로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허성에게 "이홍로가 이영을 광주 경주인의 집에 우거시키고 밤낮으로 모여 교활한 음모를 획책, 못 하는 짓이 없다고 한다. 모름지기 동궁을 위하여 외방에 보임시켜야 한다" 하였으므로, 허성이 즉시 잇따라 외방 고을에 의망하여 제수했는데, 그 뒤 정주에 있다가 마침내 파출되었습니다. 1608년 이홍로의 심복이라는 것으로 탄핵을 받고 오 년간 관직을 삭탈당했으므로, 온 나라 사람이 그가 이홍로의 당여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권세 있는 자의 연줄을 타고 요행히 면하여 청반(대사헌)에 올랐습니다. 겉으로는 대론을 가탁하고 나섰으나 속으로는 실상 사세를 관망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의 초나흗날 계사에는 폐출이라는 두 글자를 거론하지도 않은 채 바로 폄삭절목을 들고 나와서 끝에는 "내택에 옮겨 안치시켜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의 본마음이 여기에 다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이영이 감히 사주를 받아 원한을 앙갚음하기 위해 도리어 오명을 신에게 뒤집어씌우니, 신은 더없이 원통합니다. 신하로서 이런 대역의 죄명을 지고는 하루도 천지 사이에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급급히 기자헌과 이영 등을 하옥시켜 대변하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난모를 어째서 일찍 고변하지 않았고 화근을 어째서 제거하려고 하지 않았는지를 기자헌에게 끝까지 캐어묻고, 이어 이영에게 신이 임금을 위해하려는 모의를 한 줄을 어떻게 알았는지를 따지게 하여 주심으로써, 한편으로는 간사한 정상을 적발해 내고 한편으로는 미천한 신이 무고당한 정상을 씻게 하여 주신다면 천만 다행하기 그지없겠습니다.
신은 임금을 위하여 만 번 죽을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종묘사직을 부둥켜 세웠는데도 끝내는 망극한 참소를 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횡행하는 자객이 신을 미워하는 자의 소행이 아니라고 기필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통쾌히 변별하여 씻어 줌으로써 간인들의 음모를 저지시키지 않으신다면, 충정한 신하가 남은 생을 보전하기 어렵게 됩니다. 마음이 막히고 말이 움츠러들어 조처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곡진히 살펴 주소서.
(용어) 대론은 1617년(광해군 9년) 발론된 인목대비 삭호·폐출 논의를 가리키며, 이에 반대한 기자헌은 귀양을 갔다. 계축년의 변은 1613년(광해군 5년) 조령에서 은상을 약탈하다 잡힌 이들이 김제남이 역모를 꾀했다고 허위 진술하여 일어난 사화로, 이 일로 김제남은 사약을 받고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폐해졌다. 을사년의 일은 1545년(명종 즉위년) 소윤 윤원형이 대윤 윤임 일파를 몰아낸 사화로, 이 일의 주동 인물이 임백령이었다.
기준격의 상소에 대한 두 번째 해명 상소
지난해 대론이 일어나자 신의 원수인 기자헌이 제일 먼저 흉악한 차자를 올렸다가 귀양 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서는 신이 은밀히 중상한 것으로 의심하여 신에 대한 원망이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기자헌이 이런 차자를 올리지 않았다면 그의 원수가 백 명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모해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지만, 차자를 올렸다면 평소 원수진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벌을 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데도 기가에서는 신을 원망하여 그 아들(기준격)이 외람되이 변고를 아뢰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소의 내용이 매우 비밀스러워 사람들이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양사에서 추문하기를 청한 것과 2품 이상이 추국하기를 청한 것을 전하께서는 고집하면서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신은 사실에서 거적을 깔고 엎디어 다시 해명하는 글을 올립니다.
당초에는 상소의 내용이 이토록 참혹하고 악독한 줄 몰랐었습니다. 지난번 곽영의 옥사 때문에 국청에서 그 상소를 내려 달라고 청하였는데, 그 내용 가운데 위에 저촉되는 모독스러운 말들은 모두 차마 볼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허위의 사실을 날조하여 신을 무함하려는 온갖 계책이 비로소 전파되었습니다. 대신 이하가 그 글을 보고는 간담이 떨렸으니, 국청을 맡은 신하는 일각도 지체 없이 실정을 캐내어 나라의 법전을 바루는 것이 바로 신하의 대의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뜰 아래에서 대면하여 판별할 수 있게 되기를 가슴을 두드리며 바라노라니 하루가 일 년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판부사가 아직 임명되지 않았고 위에서도 병을 조리하는 중이므로 친히 물으실 기회가 막연하기만 합니다.
신이 기가와 원수를 맺게 된 전후 곡절을 먼저 말씀드리고, 이어 없는 사실을 날조한 상소의 내용에 대해 하나하나 해명하겠습니다.
신의 형이 이홍로와 혼인을 끊자 이홍로가 복제를 삼가 지키지 않았다는 것으로 신을 무함했기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되었다는 정상은, 신의 처음 상소에서 이미 상세히 아뢰었습니다. 이홍로가 스스로 변명한 상소에 "허균도 참여하여 알고 있다"고 한 말은 기가의 밀서에서 거짓임이 이미 드러났으니 신이 감히 다시 아뢰지 않겠습니다.
1601년(선조 34년)에 신이 해운판관으로 순찰차 전주에 갔었는데, 이홍로가 감사로서 어미 상을 당하여 성복도 하기 전에 좋지 못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사람들이 신이 이 사실을 상세히 알고 있다고 하자 기자헌이 신에게 증언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이홍로가 나를 복제를 삼가지 않았다는 것으로 무함했는데, 내가 또 이것으로 무함한다면 같은 내용으로 보복하는 것 같다. 누가 믿어 주겠는가? 결단코 따를 수 없다' 하였더니, 기자헌이 비로소 유감을 품었습니다.
이홍로가 서울로 올라와서는 신이 눈으로 본 일들을 전파했는가 의심하여 원망하는 말을 마구 하였습니다. 신이 조카의 상을 조문하기 위해 그의 이웃에 갔다가 들러서 스스로 해명하려 하였는데, 마침 신현과 이성경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홍로가 급급히 저지시키면서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그대는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는데, 그때 기가의 문안하는 종이 이를 보고 가서 기자헌에게 고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이홍로의 상소에 참견했다는 말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스스로 해명한 서찰은 본디 긴요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기자헌이 이것을 위협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밀서를 모방, 그 내용에 흉한 말이 있는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옥사를 일으켜 스스로 해명하려 한다는 말을 신에게 뒤집어씌워 몰아붙였습니다.
1603년(선조 36년) 신의 형 허성의 집에서 국혼을 할 적에 형수의 병이 침중하여 기일을 앞당겨 혼인을 치렀습니다. 궁인들도 병자를 보고 갔고, 그런지 닷새 만에 죽었습니다. 마침 상을 발설하지 않고 비밀에 부쳤다는 설이 궁중에 전파되었는데, 이 말은 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기자헌이 날조한 것이라고 지목당했습니다. 봄 꿩이 절로 울듯이 형의 집에 가서 해명하면서 "이는 균이 나를 잡아넣으려고 만든 말이니, 공이 대비전에 해명하라" 하였습니다.
기자헌은 더욱 노하여 헌납 신률을 충동질하여 신을 탄핵케 하였으므로 신은 즉시 강릉으로 내려갔습니다. 기자헌은 그래도 분풀이를 그치지 않았으므로 신의 형이 걱정하던 끝에 신에게 사과하는 서찰을 보내어 그의 노여움을 풀게 하라고 했습니다. 신은 즉시 서찰을 보내어 사과했고 그 내용에도 별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기자헌이 "내가 이 서찰을 내놓으면 균은 틀림없이 죽는다" 하였습니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이 망발한 말이 있는 것인가 의심하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그 실제는 이뿐이었습니다. 따라서 기자헌이 전후 차자를 올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을 두루 비방할 적에도 신의 이름이 그 가운데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606년(선조 39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벽제에 왔을 때, 신이 역관 박인상을 시켜 본국의 세자 책봉에 관한 일을 극력 아뢰게 하였더니, 사신이 즉시 정문할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신이 돌아와 대신들에게 말하였더니 적신 유영경은 즐거워하지 않았으나 기자헌과 심희수는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의 민정을 사신에게 아뢰어 중국 조정의 벼슬아치들에게 알릴 수 있었습니다.
유영경이 분노와 시기를 품게 되었으므로 기자헌 등도 잇따라 벼슬자리에서 밀려났고, 신도 곧이어 부처를 좋아한다는 비평을 당했습니다. 신과 기자헌이 함께 유영경의 배척을 받았기 때문에 이로부터 기자헌이 거짓 마음을 열고 대하는 체했습니다만, 신은 기자헌이 음험한 마음을 품고 있어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수시로 만나기는 해도 사사로운 정은 감히 토로하지 못하였으므로 늘 시기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1613년(광해군 5년) 초겨울 화근을 제거하자는 의논이 발론되기 시작했습니다. 11월 초나흗날 신이 마침 기자헌을 만나 조용히 물으면서 그의 마음을 염탐해 보았더니, 기자헌이 머리를 흔들면서 동의하지 않고서 송순의 일을 핑계 대면서 결연히 가 버렸습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신의 두 번째 상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다시 아뢰지 않겠습니다. 그의 자질들이 모두 서양갑과 절친한 사이로 역적의 초사에 거론되었으나 요행히 나문을 면하였습니다. 때문에 뒷날 화를 면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기 위해 미리 이런 의논을 세움으로써 판국을 번복시키려 도모한 것입니다. 신은 이것으로 기자헌이 끝내 임금을 등지고 대론을 저지시키려 할 줄 알았습니다.
1614년(광해군 6년) 봄 기자헌이 들어와 영의정이 되자 삼사가 일제히 탄핵하였습니다. 이때 그 자제들이 신에게 시배들의 의논을 중지하게 해 달라 하였으므로, 신이 널리 친우들에게 요청하여 그 탄핵을 그치게 했습니다. 그 뒤 그의 아우 기윤헌이 외설에 대한 일 때문에 신을 의심하여 유감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틈을 이용하여 그의 형에게 거짓말로 "삼사가 탄핵할 적에 허균이 힘써 저지시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덩달아서 배척하였다" 하니, 기자헌이 그대로 믿고 매우 노하였습니다. 신이 요동에 있으면서 징병에 관한 일은 조처하기 어렵다는 곡절로 기자헌에게 글을 보냈더니, 기자헌은 곧 자기를 헐뜯는 것인가 의심하여 공공연히 신을 욕하였습니다. 북경에 도착하여 조종의 무고를 밝히는 글을 올리자, 극도로 추잡한 비난을 가하고 사형에 처하려 했었습니다. 그때 신이 기자헌의 탄핵을 저지시키기 위해 진력했음을 아는 사람이 기자헌에게 가서 상세히 해명하고 그의 구원을 요청했던 서찰 세 통을 보이자 기자헌이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시기하고 방해하는 마음은 더욱 더하였습니다. 《대명회전》의 무고를 바로잡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그는 늘 "뒷날 이것이 반드시 나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 매우 증오스럽다" 하면서 밤낮으로 획책하여 기필코 신을 살해하려 하였습니다.
해주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는 기자헌이 스스로 차자를 지어 신을 무함했는데 그 내용을 들으니 모두가 허위로 날조한 것이었습니다. 신도 상소를 올려 대면하여 변정하려 하였으나 기자헌이 밖에서 위협을 가하여 왔으므로 중지하고 말았습니다. 흉격 사건이 있을 적에는 임금을 버리고 도주했고, 은연중 그 흉격을 신이 지은 것처럼 말했으며, 자기와 친한 사람들과 짜고 신을 무함하려 했습니다. 강릉의 차자에서는 신의 이름을 거론하여 드러나게 지적하지 못하였으며, 그가 조정으로 돌아와서도 감히 명백하게 드러내어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성명하신 전하께서 그의 흉측함을 통촉하지 않으셨다면 신의 목숨이 어떻게 지금까지 붙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뒤 김진의 옥사 때에는 기자헌이 신을 욕하면서 진회에다 비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신도 상소문을 올려 전일 원망을 맺게 된 상황과 저가 역적을 비호하고 임금을 저버린 정상을 아뢰어 면대해서 변정하기를 청하려 했더니, 기자헌이 기겁하여 이복장을 보내어 화해할 것을 애걸하였습니다. 신은 대례가 이미 임박하였고 또 기자헌이 이 때문에 도망하여 갈까 저어하여 일이 완전히 끝난 다음 아뢰어 변정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대론이 일어났고 저가 제일 먼저 죄를 받았습니다. 기회를 이용하여 남을 곤경에 몰아넣는 것은 의리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도록 덮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때 영남 사람이 사산에 몰래 장사 지낸 일을 가지고 상소를 올려 죄줄 것을 청하려 하였습니다. 사산은 신라 이래 장사지내는 것을 금지해 오던 곳으로 사람들이 모두 만세에 군왕이 날 곳으로 일컬어 왔는데, 기자헌이 그의 첩을 장사지냈습니다. 따라서 기자헌이 패몰하기 전에도 모두들 위태하게 여겼었습니다. 이 상소를 올리려 하자 기가에서는 신이 사주한 것으로 의심하여 원망이 더욱 극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허균이 평소 우리 집안에서 대론을 따르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고의로 이런 꼬투리를 들추어내어 우리 집안을 무함하려는 것이다. 배소를 여러 번 옮긴 것도 모두 그의 지휘에 의한 것이다" 하면서 부인으로 하여금 바로 상언하게 하려다가 하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에도 기준격과 기수발이 서양갑과 교분을 맺고 있는 정상을 거론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기윤헌이 이사호와 심복이기 때문에 신이 흉악한 정상을 자세히 염탐하여 알고 있다는 것으로 계속 신에게 공갈을 가하였습니다. 힘을 다하여 신을 제거하면 대론은 절로 와해되고 저의 화도 가벼워질 것으로 여겨 기준격을 꾀어 저격할 계획을 세우게 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경망하다 해도 원수진 사람들의 자제들을 대할 때면 반드시 말을 가려서 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고 귀로 차마 들을 수 없는 이런 흉역스러운 난언이겠습니까. 이는 풍병을 앓아 본심을 상실한 사람이라도 감히 할 수 없는 말인데, 신이 이런 말을 했으리라고 여기십니까?
흉악한 상소의 말은 전해 들은 데서 나온 것이므로 하나하나 해명할 수 없습니다만, 사람들에게 전파된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밝히겠습니다. 기준격이 나이 어릴 적에 그 아비의 명에 의해 신에게 와서 배웠고, 신도 부득이하여 억지로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평상적인 이야기도 역시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1609년과 1611년의 이야기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데 증거할 수 없는 말을 글에다 썼으니 신은 매우 통분스럽습니다. 의창군은 신의 형의 사위이기 때문에, 신의 집안을 죽이기 위해 문득 옹립하려 한다는 말을 만들어 내고 그 공을 자기 아비에게 돌리려는 것이 틀림없으니 그 계책이 매우 참혹합니다.
형의 집에서 혼인이 이루어진 지 얼마 안 되어 신은 곧 파직되어 시골로 내려갔었다가 1604년 8월에 올라왔습니다. 올라와서는 수안 군수에 제수되어 부임했었고, 1605년 11월에 파직되어 돌아왔습니다. 12월에는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어 내려갔었습니다. 1606년 3월에 의주에서 조보를 보고서 비로소 왕자(영창대군)가 탄생하여 진하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이 동료들에게 "대신들이 어떻게 감히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는데, 이는 성상께서 세자의 자리에 계시고 억조창생이 마음으로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은 바로 공빈 김씨의 친척에 드는 사람이므로 광해군을 추대하고픈 사정이 다른 신하들의 배나 되는데, 감히 흉측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겠으며 마침내 원수진 집 사람에게 토로할 수 있겠습니까?
1611년(광해군 3년) 겨울 유배지에서 사면하는 은혜를 받았고, 11월 12일에 서울에 와서 형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24일에 다시 부안의 농막으로 향하였고, 1612년 2월 초에 바야흐로 돌아왔습니다. 그간 기준격이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신의 형제는 김제남과 평소 좋지 않게 지냈으므로 한 번도 그의 집에 간 적이 없는데, 혼인을 권하기 위해서 김제남과 함께 윤수겸의 집에 갈 리가 있겠습니까? 그해 겨울 서울에 머문 것이 십여 일뿐이었기 때문에 윤수겸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윤수겸이 지금 있으니 물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김제남이 신과 접촉할 길이 없다는 것은 온 나라가 다 아는 일인데, 궁중의 이런저런 일을 신이 어떻게 김제남에게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두 시신은 적자가 아니다"라는 말은 모두 저가 스스로 만든 말입니다. 어떻게 차마 그런 말에 주석을 달아 감히 임금의 눈을 더럽히는 짓을 이토록 거리낌 없이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 마음에 이런 생각을 품은 자가 아니면 어떻게 이런 문자를 베낄 수 있단 말입니까? 저가 신을 무함하기 위해 망측한 욕을 도리어 임금께 가하였으니, 고금 천하에 임금을 무시하는 도리에 어긋난 말이 이렇게 극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습니다.
저가 만약 이런 흉측한 말을 실제로 들었다면, 신하 된 도리에 있어 어떻게 온 조정의 신하들이 그 집을 미워한다는 것으로 그의 의논을 정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일이 만약 정확한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미워하더라도 어떻게 겁박하여 도리어 죄를 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실제로 흉역스러운 말을 토로했다면 신하로서 하루도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책을 가지고 와서 십 년이 되도록 신에게 가르침을 받았겠으며, 저의 아비의 두 차례 공적을 기록한 문서를 기필코 신에게 지어 달라 해서 후세에 전하려 했겠습니까? 이는 변명하지 않아도 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1608년(선조 41년) 공주에서 파관되고 나서 전답을 물색하기 위해 부안에 갔다가 바닷가에 있는 산속의 거처할 만한 땅을 얻어 경영하고 있었는데 오래지 않아 도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 뒤 죄를 져서 유배될 적에 기필코 함열을 요구한 것은 이곳이 부안과 가까워서 사면받으면 즉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613년 봄에 또 부안에 내려갔던 것은 노복과 전토가 모두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지, 어찌 심광세와 모의하기 위해 부안에 내려갔을 리가 있겠습니까.
1611년 신의 집이 비어 있게 되자 윤수겸이 몇 달간 빌려 들었었으므로 그 아들의 훌륭함과 그렇지 못함은 집을 지키는 종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심광세가 "윤씨 집에 혼인을 청하려 하는데 아들 둘 가운데 누가 더 훌륭한가?"고 묻기에 신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사람들이 모두 대군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데 사대부가 어떻게 혼인을 맺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송구와 그 혼인의 부당함을 말하고, 윤수겸의 절친한 벗인 이문란을 불러서 "심광세가 자기의 질녀를 윤수겸의 아들과 결혼시키려 하니 그대는 모름지기 이 혼인을 극력 저지시키라" 하니, 이문란이 놀라 하면서 "이 말이 옳다" 하였습니다. 즉시 윤수겸에게 말하니 윤수겸이 "그가 아무리 요구해도 내가 어찌 허락하겠는가. 나는 하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다음날 기준격이 송구에게 찾아가서 이 일에 대해 묻자, 송구가 "어디에서 그런 말을 들었는가?" 하니 기준격이 "숙부에게 들었다" 하므로, 송구도 허균이 저지시켰다고 말하여 보냈다고 했습니다. 지금 송구를 끌어대어 증거를 삼았는데 송구가 아직 서울에 있으니 하문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이문란의 지난해 상소를 가져다 고증해도 알 수가 있습니다. 저의 상소 내용이 모두가 증거 없는 말이지만 이것만이 유독 증거가 있는 것인데, 윤수겸 등 세 사람이 모두 있습니다. 이것이 부실하다면 혼자서 말하고 혼자서 들은 근거 없는 말임을 유추해서 그의 거짓을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대명률》에 "참언을 담은 책을 집에 보관해 두는 것은 사형죄에 해당된다"고 했기 때문에 신은 비록 우연히 보았다 해도 집에다 보관해 두지도 않습니다. 이를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감히 하지 않고 있는데 하물며 원수진 집의 자제에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참설은 이십여 년 전 선왕 때부터 있던 것으로 전해 내려온 지가 이미 오랩니다. 그리고 천도설은 1612년에 나왔으니 그 거짓됨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이른바 심우영은 신의 죽은 아내의 서얼 외숙입니다. 약간 문재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대부들도 인정하였고, 신은 가족적인 친분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매우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품이 교만하고 사납고 적자를 멸시했기 때문에 온 집안이 그르게 여겼습니다. 1607년(선조 40년) 겨울 이원형이 와서 "부디 우영을 친절히 대하지 말라. 우영이 이야기 끝에 나를 시켜 임해군에게 가서 살펴보라기에 내가 큰 소리로 준절히 나무랐더니 그가 얼굴빛을 변하면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늙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싶다'고 하였다. 그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어 나도 이로부터 절교하겠다" 하므로 매우 이상스럽게 여겼습니다. 그 뒤 유념하여 살펴보니 말하는 즈음에 국가를 원망하는 것이 특별히 심했습니다. 그리고 드러나게 대군을 애호하는 말이 있어서 더욱 괴이하게 여겼었습니다.
그 뒤에 이의숭이 심우영에게 재물을 빌리려고 하므로 신이 중지시키면서 "이들의 지향이 수상하니 부디 서로 가까이 지내지 말라" 하였습니다. 이른바 박응서란 자는 그 아비가 박순으로 신의 아비 허엽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임백령의 시호에 대한 일 때문에 박순이 죄를 받게 되자, 신의 아비가 당국자에게 해명하여 사형을 면하였으므로 박순이 항상 고맙게 여겼습니다. 1583년(선조 16년)에 박순이 입대할 적에 신의 형 허봉의 잘못을 극언하였는데, 이 때문에 신의 형이 멀리 귀양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의 어미가 박순을 원망하게 되었고 이어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화담서원에는 신의 아비를 배향하게 되어 있는데 박순도 배향하려 함으로 신이 온당치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박응서가 이 말을 듣고 원망을 품었으므로 심우영이 박응서를 위하여 갑자기 신의 집 및 이의숭의 집과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노략질하던 날 밤 박응서와 김비가 분명히 도둑이었으므로 신이 이의숭에게 "내가 전에 한 말이 어떠한가. 이들이 끝내 국가의 큰 도적이 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대장 이문전을 만나서 말했는데, 체포하려 할 즈음에 이문전이 파직되었기 때문에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해에 박응서가 은을 노략질한 것 때문에 체포되었는데 즉시 결단하지 않자, 이의숭이 신의 말을 깨닫고 즉시 이이첨에게 가서 "필시 역적질을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이첨이 즉시 한희길을 불러 아뢰기를 극력 권했기 때문에 죄인의 괴수를 끝내 잡게 된 것이고 종묘사직이 다시 편안하게 된 것입니다.
신이 아무리 아둔하다 해도 보잘것없는 서얼 친족을 뜻을 같이하는 벗이라고 일컬었다는 것이 어찌 사리에 가까운 말이겠습니까?
신이 1607년(선조 40년) 겨울 혼자서 보기 위해 본조의 시를 뽑아 적을 적에, 정도전과 권근은 모두 국초 사람이므로 이들의 것을 조사하여 쓰다가 보니 자연 이 두 사람의 것을 제일 앞에 쓰게 된 것이지, 어찌 감히 그 사람들을 사모하여 뽑아서 앞에다 실었겠습니까? 지금 《동문선》과 《청구풍아》 등의 책에 실린 국초의 시문은 정도전의 저작이 반드시 제일 앞에 있습니다. 신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버리고 기필코 이 사람을 으뜸으로 삼았겠습니까. 더구나 신이 1598년(선조 31년)에 개성에 갔다가 정몽주의 옛집에 들러 시편을 지을 적에 말단에 정도전을 극력 배척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었습니다.
그대는 못 보았는가 삼군부 앞에 무기 벌여 놓고 임금 잊고 적자 바꾸어 천륜을 어긴 일을 계획을 끝내자 정도전이 죽었으니 다리 위에서 갑자기 죽은 것 사람의 재앙이 아니라네
이 시를 차운로가 늘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또 "정도전 권근론"을 지어 배척했는데 이는 본 사람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말은 마치 아이들의 장난과 같은 것입니다. 생존자들의 경우는 최립과 이달 외에는 뽑지 않은 것이 많은데, 서얼 친족을 위하여 그의 졸렬한 시를 뽑아 적으려 했겠습니까? 이 책이 지금 박엽의 집에 있으니 가져다가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이 남쪽으로 옮겨갈 때 옥에서 나와 몹시 총총한 형편이었고, 그때 심우영의 자취는 이미 신의 집과 소원해져 있었으므로 찾아온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찾아가서 시를 주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가 심우영의 집에 신이 증정한 시편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말을 날조하여 신을 무함하려 했으니, 또한 어리석지 않습니까?
서양갑의 자가 석선인 것은 지금 비로소 들었습니다. 천한 서얼들의 자는 지극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알 수가 없는 것인데, 기준격이 홀로 그의 자를 알고 있고 신에게 죄를 씌우기 위해 신이 지어 준 것이라고 합니다. 기준격이 은밀히 서양갑과 교결하여 굳은 교분을 맺은 정상이 이에 이르러 다 드러나 버렸습니다. 이는 바로 자기 자신이 서양갑과 절친하여 스스로 영웅이라고 일컫고서는 도리어 그 화를 신에게 돌리려는 짓이니 그 또한 참혹합니다.
이경준이 지은 흉격에 대한 일은 그때의 추안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는데도, 기준격이 지금 이런 말을 만들어 내면서 다른 증거는 세우지 않고 단지 신이 스스로 말했다고만 합니다. 흉격을 짓는 것은 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흉역인데 그것을 자신이 지었다고 끌어대어 원수진 집에다 말한다는 것이 사리에 맞는 말이겠습니까? 더구나 한집안의 조카들은 정이 부자와 같지만 사소한 일일지라도 감히 말하지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남에게 이렇게 전혀 사리에 맞지 않은 흉언을 했겠습니까. 그 말은 이번에 소명국이 은밀히 이대엽을 추대하려 했다는 것과 동일한 어리석은 계교입니다. 따라서 더욱 치가 떨립니다.
그의 "법궁으로 이어하는 데 대한 천시와 인사에 관한 말"은 신으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있는 얘기이겠습니까? 처음 법궁을 지었을 때 비길 데 없이 성대하고 화려하여 신민들이 밤낮으로 이어하시기를 바라고 있었고, 인심도 모두 우리 임금을 추대하고 있는데다가 시변과 천재도 별로 걱정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기준격이 사람을 무함하기 위하여 스스로 흉언을 지어내고 천시와 인사에 대한 말을 끌어대어 인심을 선동, 현혹시켰는가 하면 필설로 나타냈으니, 그가 영창대군에게 귀부한 마음이 있는 것이 이미 여기에서 드러났습니다. 아, 역시 참혹합니다.
이이첨 집의 큰 뱀에 대한 이야기는 역시 무엇을 인연하여 신에게 미루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1589년(선조 22년)부터 성균관에서 이이첨과 교제를 맺었습니다. 나이가 같지 않아서 형으로 섬겼고 삼십 년을 하루같이 지내왔으며, 1608년 이래 모든 역적 토벌에 관한 일에 함께 힘을 합하여 온 것은 사람들이 다같이 아는 일인데, 어떻게 1613년 이후에 바야흐로 투탁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1612년 겨울 신이 충주로 갈 때 이이첨에게 가서 작별을 고했는데 한찬남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인하여 "영창대군은 화의 근원이고 뜻을 잃은 자들이 침을 흘리고 있다. 훈련도감의 관원은 모두 서인들이니 불가불 우리들이 대신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좌중이 모두 옳게 여겼습니다. 신의 말이 불행하게도 1613년에 적중되었습니다. 신이 임금을 위해 시종 충성을 다한 실정은 동료들이 모두 아는데, 도리어 원수진 집안과 함께 흉언을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그의 "영창대군을 세우고 수렴청정한다", "화살이 떨어지는 곳에 과녁을 세우라"고 했다는 말은 이 얼마나 엄청난 흉역입니까? 가령 신이 저에게 분명히 그런 말을 했다면 어째서 들은 즉시 고변하지 않고 전혀 마음을 움직이지 않은 채 등한한 이야기로 서로 문답하듯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인데도 무고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임금을 우롱하는 정상이 빠짐없이 다 드러났습니다. 기준격이 아비의 원망을 앙갚음하기 위해 이런 소장을 올려 무함했으니 마음은 교사스럽고 계교는 어리석습니다.
저의 아비가 늘 신을 살해하려 하였으니, 만분의 일이라도 그런 기미가 있었다면 어찌 고변하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대론 때문에 패한 뒤로 그 원망을 신에게 돌려 사생 결단으로 만에 하나 요행을 바랐습니다. 그리고 의논을 달리하는 자들이 신을 미워하는 기회를 이용, 함께 힘을 합하여 함정에 밀어넣음으로써 신이 상해되기를 바랐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라도 원수가 원수를 공격하면 사실로 믿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이런 폐단은 앞으로 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원망을 보복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교묘하게 날조하는 짓을 끝내 그치게 할 수 없게 만들 것입니다. 따라서 신하로서 원망을 떠맡으면서 역적을 토벌한 사람들이 마침내 무함을 받아 죄에 빠진다면,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조종 선왕의 무고를 밝히는 일에 이르러서도 신이 언단을 발하자 기자헌이 극력 저지시켰습니다. 그러다가 《대명회전》을 완전히 고치고 돌아오는 경사가 있자, 기자헌은 이 때문에 죄를 얻어 공이 취소될까 깊이 우려했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이에 대한 말을 낼까 의심하여 기필코 신을 죽이려 했습니다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국가에서 공을 기록한 대전에 대해 기준격이 어떻게 감히 참여하여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기필코 남곤과 같다고 일컬으면서 신의 원훈을 저지시키려 하는 것은 역시 뒷날 저의 아비가 이 때문에 죄를 받을까 두려워해서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저가 소장에 부질없이 언급했으니 역시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더구나 대사를 연기하여 지체시킨 것이 어찌 신 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이는 성상께서 차마 사은을 갑자기 끊지 못했으며 묘당과 삼사가 때를 기다려 일제히 발론한 소치로 그렇게 된 허다한 곡절은 상께서도 환히 아시는 바입니다. 그런데도 기준격이 공적인 것을 빙자하여 사적인 보복을 한 것이고 자기 아비를 잡아넣기 위해서 대사를 연기시켰다고 한 것은 또한 너무도 무망한 말입니다.
1609년(광해군 1년) 겨울 신이 형조 참의로 있었는데, 그때 정협이 전옥 주부였습니다. 범죄인의 등급을 낮추는 것을 신이 실지로 주관했으므로 정협이 늘 신을 원망했습니다. 때문에 그가 자백하던 때 사람들이, 원망하기 때문에 무고하여 끌어들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도 있었습니다만, 신은 태연하였습니다. 그때 이원형은 바야흐로 광주에 있었으니 손을 잡으려 한들 될 수 있었겠습니까? 교묘하게 주워 모아 얽어낸 정상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끝에 심이기에 대한 말은 간담이 떨리는 말입니다. 기필코 이 역적과 상의 앞에서 같이 죽음으로써 스스로 변별하고자 합니다. 난신적자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겠습니까만 이렇게 극악한 말을 한 자는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신이 이미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저가 스스로 만들어 낸 말입니다. 금수 같은 행실을 익히 보고 인륜을 모독하는 것을 달게 여기는 집안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그의 집과 원수를 맺은 탓으로 선왕에게까지 욕이 미치게 하였으니, 차라리 가슴을 가르고 밝은 해 아래서 통쾌하게 설욕하고 싶습니다.
저 기자헌이 지극히 미세한 일로 의심을 내어 실정이 없는 말로 원수를 맺고 형적이 없는 일로 살해하려 하니, 그 마음의 흉악함과 참혹스러움이 이보다 더 극심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천지의 귀신이 위에 임하고 곁에 있는데, 어떻게 감히 거짓을 말하여 스스로 죄를 자초할 수 있겠습니까.
기준격이 무함한 내용은 비록 승지·사관이라 할지라도 기록할 수가 없는 것인데, 소명국이 그 말을 사용하여 잇따라 사람을 무함하였습니다. 그 흉격의 근거가 맹랑한 것이 이와 같아 형적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이는 소명국과 기준격이 앞뒤로 같이 모의하여 사림을 해친 것으로, 소명국과 기준격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입니다. 소명국은 이미 형을 받았지만 기준격은 터럭 하나도 다치지 않고 있으니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기자헌은 바로 왕실에 가까운 친족으로서 수상의 자리에 있는 몸입니다. 그런데 이런 흉언을 듣고도 위에 고하지 않았다면 그에게도 역적을 비호한 죄가 있는 것입니다. 기준격이 흉언을 듣고서 남의 혼인을 금하기까지 하였으면서도 그 사람에게 공부를 배우러 계속 왕래하였다면 저도 역시 역당인 것입니다.
온 나라가 두 집안이 원수진 집안이라는 것을 다 아는데, 패몰당한 뒤에는 그 허물을 신에게 돌려 감히 증거도 없고 형적도 없는 말로 선왕과 두 분 성상을 모독했고 신을 살해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대역부도한 죄에 빠지는 것을 몰랐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대간의 말은 공공의 의논에서 나온 것이므로 죄를 진 사람으로서는 혀를 놀려 스스로 변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양사가 함께 신을 배척하는 것은 억울한 데 관계된 점이 있기에 신은 이에 대해 아뢰어 해명하고 끝맺겠습니다.
신은 선왕 때부터 오직 전하만을 추대하여 여러 번 뜨거운 정성을 바쳐 왔습니다. 1613년 전에는 자주 동료와 함께 국가의 일에 대해 우려했었고 자못 선견지명이 있었기 때문에 이이첨도 신의 충심에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신이 대략 경사에 통달하고 널리 전고를 안다는 것으로, 화근을 제거하는 일이 있을 적에도 신하고만 의논하여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재야의 선비들 가운데 신과 두텁게 지내던 자들이 다투어 혈서로 쓴 글을 올려 정론을 부식했습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신도 참여해 안다고 여겼기 때문에, 패몰당하여 뜻을 잃고 이의를 제기하던 무리들이 신을 이이첨보다 더 미워하였으므로 초야에서 사림을 공격하기 위해 떼 지어 일어난 상소도 모두가 "균이 사주했다" 하니, 이보다 더한 불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뒤에 최심과 윤해수 등의 소장은 신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님이 분명한데도 그때 논의가 의심하였었습니다. 심지어 곽영의 상소에서도 "덕부도 균을 지척하면서 그의 술수에 빠졌다"고 하였습니다만, 소명국의 일이 드러나게 되자 덕부도 비로소 말이 없었습니다.
신이 대론을 주장한 때문에 저들에게 미움을 당했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늦추기를 주장하는 약간의 시배들에게도 미움을 샀기 때문에 사지에 이르게 되었으니, 어찌 애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거적자리를 깔고 명을 기다리고 있으므로 다른 일은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지난날 같이 일하던 유생들은 징병 때문에 인심이 술렁거려 내홍이 일어날까 걱정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초야와 성균관·사학이 함께 소장을 올려 대국을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혹 와서 상의하면, 역적을 토벌하는 정론은 의에 있어 저지시킬 수 없으니 그들이 다시 청하는 대로 맡겨 둘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이에 무슨 딴 뜻이 있었겠습니까? 덕부 한 사람에게 배척받은 것 때문에 끝내 평핵을 받는 것이 원수인 기준격에게서보다 더 심하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민인길의 상소에는 당초부터 신이 격서를 지었다는 말이 없었고 이홍로와 원수 맺은 자취는 나라 사람이 다 아는 일이며, 서찰 다섯을 밀서로 만든 것은 모두 허위 날조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양사에서 원수가 무함하는 말을 주워 모아 탄핵하는 소장에 기록한 것에 대해서는 신 또한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은 기준격의 무함을 받은 뒤부터는 조심스럽게 사명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친우의 집에도 일체 왕래하지 않았습니다. 혹 밤을 이용하여 다른 집으로 옮겨 갈 적에도 파리한 말과 시원찮은 동복을 데리고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높은 벼슬아치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초헌을 타고 구종을 데리고서 큰 소리로 길을 물리며 다녔다"는 것은 너무도 억울합니다.
신이 바야흐로 병고에 시달려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병을 무릅쓰고 요동으로 달려가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기에 기필코 유겸을 사주하여 이런 망령된 의논을 했겠습니까? 윤리를 모독하고 문란시켰다는 것은 반드시 근거가 있는 것으로, 신은 이제 오십 년토록 살아오면서 이런 비방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런 오명을 받았습니다. 윤상이라는 것이 지목하는 바가 있어서 한 말이 아닙니까?
신은 한 사람의 몸으로서 한 시대의 어진 재상이 극히 친밀하게 대우했고 국가의 대론에 참여하게 했는데, 하루아침에 언관이 배척하여 흉역이라 하고 윤상을 모독했다고 합니다. 금방 훌륭하다고 했다가 금방 간사하다 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습니까? 민인길의 상소가 올라간 지 이미 열일곱 달이 되었고 기준격의 무고하는 상소에 대해서도 반 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조용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여러 유생들의 곧은 논의가 일제히 발한 뒤에야 신을 지적하여 역적이라 하면서 세 사람을 국문하기를 청하였는데, 역적을 토벌하는 것을 이토록 완만하게 한다면 국가의 일을 알 만합니다.
대사가 처음 거론될 때 신이 과연 권면한 일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에 와서는 공의가 일제히 분노하고 있습니다. 유생들은 모두가 전일 제일 먼저 같이 일한 사람들로서 모의하지 않았어도 말이 같았으며 각자 스스로 정성을 다했습니다. 성균관·사학의 유생이 팔방에서 와 모여 공의를 인하여 충심을 바치고 있는데 이것도 신의 술수에 빠져서 그렇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신은 요직에 있지도 않은데 무슨 이익을 가지고 유생들을 꾈 수가 있겠습니까? 유생들이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것도 이 때문에 신을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전하를 부호한 것은 선왕 때부터였고, 역적을 걱정한 것은 1612년이었고, 대론을 세운 것은 1613년이었고, 유생들의 상소는 지난해 11월에 있었고, 기준격의 무고는 12월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을 가리켜 공을 세워 스스로 죄를 면하려는 여지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니, 또한 거짓이 아닙니까? 신은 삼가 비통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신의 죄악이 이러한데도 병을 조리하고 계신 중에 이렇게 번거롭히는 것은 부당한 줄 압니다. 그러나 양사에서 이미 "자신에게 죄가 없다면 언관이 국문할 것을 청하기도 전에 스스로 옥에 나와서 기필코 변명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고, 이런 양사의 의논이 매우 의리에 합당했기 때문에 부득이 무릅쓰고 아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유념하시어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여 주소서.
(용어) 서양갑은 서얼 출신으로 박응서·심우영 등과 함께 조령에서 은상을 살해하고 금품을 강탈하다 체포되자, 이이첨 등의 사주를 받아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고 허위 진술함으로써 계축옥사를 일으킨 인물이다. 이 상소가 올라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618년 8월, 허균은 결국 역모 혐의로 처형되었다.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2 · 서(서문)
출처: 성소부부고 제26권, 부록 2, 서
배경: 성소부부고 마지막에 실린 세 편의 서문이다. "태각지 서"는 1601년 예조 정랑 시절 허균이 조선 개국 이래 의정부(정승·재상)의 연혁과 역대 재상 명단을 정리하며 쓴 글이다. "청허당집 서"와 "사명집 서"는 각각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서산대사 휴정과 그 제자 사명당 유정의 문집에 부친 서문으로, 허균이 두 고승과 맺은 개인적 인연과 존경심이 잘 드러난다.
태각지 서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 강헌대왕께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여셨는데, 그때 문하 우시중 배극렴은 전 왕조(고려)의 재상으로서 태조가 나라를 여는 데 실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문하성의 제도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았다.
그 후 2년 만에 한성에 도읍을 정하고서 비로소 두 개의 관부를 창설, 고려 말엽의 제도를 본떠 도평의사를 설치해서 국정을 맡게 하고 삼군부를 설치해서 군무를 다스리도록 하니, 그 조와 진의 제도가 한결같고 맡은 일도 예전과 똑같았다. 그리고는 배극렴을 판도평의사로, 정도전을 영삼군부사로 삼았다. 그리하여 조인옥·정희계·이옥·이서·설장수·조림 등이 모두 공신이자 왕실의 외척인 중신으로서 서로 전후하여 동판사사가 되었는데, 나라의 큰일은 혹 서로 참여하여 결정하곤 하였다.
2년 후 배극렴이 물러나자 조준·김사형이 그 직임을 대신하였고, 또 삼군부의 직무에 지장이 없도록 정도전에게 도평의사의 직무를 겸하게 하였다. 조준·정도전이 그 자리를 떠나고 나서는 심덕부·이서가 서로 이어 그 일을 맡았다. 안종원·이이·이승원·장사정·박위·이거이도 차례로 동판사사가 되었고, 이지란·이온·조박·남은·전백영·이지·조온·황거정이 상의평리가 되었는데, 모두가 다른 관직에 있으면서 그 직무를 겸하였다. 그러나 모든 군국 기무에 관계된 일은 두 재상이 주장하며 결단하였고, 동판사사 이하는 감히 가부를 말하지 못한 채 자리만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공정대왕(정종) 때에 도평의사를 고쳐서 의정부로 만들었다. 그런데 태종이 즉위하여서는 의정부와 삼군부를 혁파하고 좌정승·우정승을 모두 정1품으로, 시랑찬성사를 종1품으로, 참찬을 정2품으로 하여 하륜·성석린을 좌정승·우정승에, 이첨·정탁을 찬성에, 이내·권근을 참찬에 임명하였다.
그 14년 후에는 영부사 1인, 판부사 2인을 모두 정1품으로, 동판부사 2인을 종1품으로 설치하고 참찬지부사를 혁파하였다. 얼마 후에 제도를 다시 개정, 영의정·좌의정·우의정 각 1원을 모두 정1품으로 하여 이서·이직·조영무에게 그 직을 임명하였고, 좌찬성·우찬성 각 1원을 모두 종1품으로 하여 박은·한상경에게 그 직을 임명하였고, 좌참찬·우참찬 각 1원을 모두 정2품으로 하여 박석명·유관에게 그 직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의정부의 소속으로 사인·검상·사록 등의 관직은 모두 한때의 대단한 청요직이었고, 녹사·도리는 모두 처음 벼슬한 문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렇게 하자 군국의 큰 정사와 육조의 온갖 업무가 모두 의정부에 귀속되고 전장과 제도가 비로소 정해져서 그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삼정승이 조정에 앉아 있으면 육조의 관속들이 각기 맡은 일을 가지고 조방에 모여서 처리하였고, 무릇 임금의 재가를 받은 공문서를 만나면 사인 이하의 관원들이 각기 소임을 분담, 평의하여 재상의 결재를 받은 다음에야 해당 관원이 그 일을 과감하게 시행하였으니, 그 직무를 맡겨서 완수하기를 책임 지우는 일의 중대함을 대강 상상할 수 있겠다.
세조가 즉위하여서는 육조가 의정부에 가서 사건 결정하는 일을 혁파하고 큰 정사만 의정부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사록을 성균관·사관 등 사관의 겸직으로 삼고 녹사 이하는 옛 관례에 비추어 제수하니, 정부의 권한이 이로부터 약간 가벼워졌다.
나는 오랫동안 계속된 태평성대의 말엽에 태어나, 젊었을 적에 그윽이 조종조 때 어진 사대부들의 행적을 사모하고 좋아한 나머지 의정부 서고에서 삼정승의 전임 명부를 가져다가 한번 눈여겨본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에 내가 방종하여 그것을 베껴 두지 못하고 다만 마음속에 기억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로 전적이 모두 없어져서 이에 관한 것을 찬술하려 해도 참고할 만한 것이 없었다.
지난번 오성 이항복 정승을 모시고 있을 때에 이 일에 대해 언급하게 되었으므로, 지금 기억하고 있는 대신들의 성씨를 기록하여 바치고, 즉시 각 연도의 과거 급제자 명부를 가져다가 그 집정자를 뽑아 적되, 무관이나 음관으로 시작하여 대신이 된 사람들로서 가끔 기억할 만한 사람 또한 차례에 따라 적어 넣었다. 또 옛 정승 해원부원군 윤두수에게서 이른바 "국조대신고"라는 것을 얻어 옛일을 널리 상고하고, 거기에 나의 듣고 본 바를 가지고 바로잡은 다음 연도 순서로 편성하여 옛 명부의 잘못된 점을 보완하였다.
나라를 세운 초기에는 판평의사가 국정을 도맡았고 동판 이하는 정사의 권한을 행사하는 데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므로 판사만을 기록하였고, 또 문하성과 의정부에도 역시 정승과 영사만을 기록하였으며, 그 부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종실 가운데 재상이 된 사람은 준(전주 이씨 종친) 한 사람뿐이고, 음관으로 재상이 된 사람은 신수근 한 사람뿐이며, 무신으로 재상이 된 사람은 박원종 한 사람뿐이다. 그 후로는 모두 문관으로 재상을 삼았는 바, 통틀어 재상 백오십육 인을 가지고 나라 세운 초기 이후 대신 연표를 만들었다.
1601년(선조 34년) 1월 일에 예조 정랑 허균은 서한다.
(용어) 이항복(호 오성, 오성부원군)은 선조 때의 정승이다. 윤두수(호 해원부원군)는 선조 때 정승을 지낸 인물이다.
청허당집 서
불법이 동쪽으로 삼한에 들어오기는 신라 중엽부터였다고 한다. 그사이 불문에서 일컬어진 이가 수없이 많았으나, 거의가 가르침을 담은 경전이나 계율 두 가지에 벗어나지 못하여 탑과 절을 높이고 인과응보를 내세워 한 세대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을 뿐이었다.
그 염화미소의 은밀한 뜻과 달마가 면벽 수행한 은미한 뜻은 조금도 간파하지 못한 채, 아무 스승은 아무의 전수를 받았고 아무 조사는 아무에게 법을 전했다고 하는데, 그 문도가 또 덩달아 이를 기념하는 데 끊임이 없어, 높다란 비를 세우고 커다란 종을 만들어 공적을 과시하는가 하면, 보배로운 전각과 연꽃 궁전이 사찰을 빛나게 장식하되 수천 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으니, 어찌 너무 참람된 관습이 아니겠는가.
오직 도봉산의 영소국사가 중국에 들어가 법안종 영명 연수의 전수를 받고, 송나라 건륭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와 불법의 기풍을 크게 떨쳐 말법의 세상을 구제함으로써, 조사(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비로소 드러나고, 이 땅에서 가사를 두른 이가 드디어 임제종·조동종의 종풍을 계승하게 되었으니, 선종에 끼친 공로가 어찌 적다 하겠는가.
영소국사의 깨달음은 도장 신범에게 전수되어 청량산의 도국, 용문산의 천은, 평산의 회해·현감·각조, 두류산의 신수 등 여섯 세대를 거쳐 보제 나옹에게 이르렀고, 나옹은 오랫동안 중국에 있으면서 모든 선지식을 널리 찾아 두루 통하고 즉시 체득하여 무성하게 선종의 사표가 되었다. 또 그의 법을 전수받은 이는 남봉 수능이 적통을 이었고, 정심 등계가 이를 바로 계승하였는데, 정심은 벽송 지엄의 스승이다. 벽송은 다시 부용 영관에게 전수하였는데, 그 도를 체득한 이는 오직 청허 노사를 으뜸으로 일컫고 있다.
청허 노사의 법명은 휴정, 고향은 안서(해주의 옛 이름)로, 어려서 유가의 글을 익혀 이미 큰 뜻을 통하였고 문장에도 능하여 과거 볼 만한 정도의 공부는 매우 하찮게 여겼다. 뒤에 두류산(지리산)에 노닐다가 갑자기 큰 서원을 발하여 부용 영관의 문하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법을 받아 여덟 가지 가르침을 통하고 세 가지 관법을 통하였으며, 도는 조짐 이전에 비추고 생각은 번뇌 밖으로 벗어났다.
그 영원한 밝음과 간결한 조예는 곧장 달마·혜능의 맥락을 접하고, 마음과 본성을 설하는 오묘함은 남양 혜충·영가 원각·백장·남천과 어깨를 나란히 함으로써, 지혜의 태양이 거듭 밝고 지혜의 등불이 더욱 빛났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그림자를 보거나 말을 듣고 그대로 집착하거나 믿는 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멀찌감치 물러설 것이며, 참되고 바른 것을 훼방하고 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려다가는 스스로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업보를 지을 것이니, 이른바 하등 사람은 도를 듣고 도리어 크게 웃는다는 말이 어찌 허위이겠는가.
노사는 큰 법을 간직하고 명산에 두루 머무른 법랍이 이미 칠십 년이나 된다. 은고를 보배로운 도량에서 울리고 금륜을 향기로운 땅에서 굴려 온갖 미혹을 다 깨뜨리고 검은 불자를 혼자 세워, 도봉산·보제의 가르침이 이에 이르러 더욱 크게 밝아졌다. 저 가르침과 계율에 구구하여 인과응보나 믿는 이와 비교하면 그 거리가 어찌 백만 유순뿐이겠는가.
아, 그런데 부처의 말씀이 장차 밝혀지려는데 옥으로 된 천이 갑자기 재로 변하여, 부처가 설법한 기원정사에 그늘이 없어지고 자비의 배에서 노를 잃었으니, 사람과 하늘의 비통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종봉 유정공은 노사의 가르침을 듣고 흥기한 이이다. 지혜의 깃발이 이미 꺾이고 계율의 보배가 오랫동안 묻혀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그 남긴 글을 주워 모아 영원히 사모하는 뜻을 붙이려 하였으나, 그 글을 간행하기도 전에 유정공 또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열반에 들던 날 저녁에 문인들을 불러 부탁하기를, "나의 스승 노사의 유문을 내가 간행하지 못하고 갑자기 감으로써 처음의 마음을 저버리게 되었으니, 너희가 나의 정성을 잊지 않고 그 일을 마쳐 준다면 내가 지하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겠다" 하고, 이어 "거사(허균)는 우리 불교와 은미한 인연이 있다" 하고는, 이 서문을 부탁하였다.
그의 문인 혜구가 나를 찾아와서 그 죽은 스승의 말을 전하고 서문을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 그런 연유가 있었다. 청허는 나의 선친께서 뜻을 같이한 벗으로 보았고, 나도 젊었을 때 서찰 사이에서 보아 왔다. 지난해 서쪽 지방에 나가 노닐 때 객사에서 노사를 만나 직접 묘한 진리를 듣고 어지러운 마음이 금세 없어졌으며, 노사 또한 사후의 비문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나는 유가의 선비이다. 불교와는 전혀 서로 맞지 않는데 어찌 그 행적을 모사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스승이 이를 알고 부탁하였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에 선대의 오랜 우의를 감념하여 감히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그 스승과 제자로 서로 전수한 자취를 서술하고 노사에 관한 줄거리를 대충 기록해 보낸다. 그러나 석가의 머리 위에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일인데, 혹 나의 혀를 뽑는 업보가 돌아올까 염려된다. 그 유문의 현묘하고 탈속함은 보는 이가 스스로 짐작할 것이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명나라 만력 40년 임자년(1612, 광해군 4년) 정월에 양천 비야거사 허단보는 쓴다.
(용어) 염화미소는 석가가 연꽃을 따서 제자에게 보였는데 오직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미소 지었다는 고사로, 말이나 글 없이 마음으로 마음에 전하는 불교의 깊은 진리를 이른다. 청허당 휴정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킨 서산대사이며, 허단보는 허균이 스스로 붙인 자다.
사명집 서
지난 1586년(선조 19년) 여름에 내가 둘째 형을 모시고 봉은사 아래 배를 댄 적이 있었다. 마침 한 스님이 갑자기 나타나 뱃머리에 서서 읍을 하는데, 헌걸찬 체구에 용모가 단정하였고, 함께 앉아 담화를 나누는데 말이 간단하였으나 그 뜻이 깊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물어보았더니 바로 종봉 유정 스님이었다. 나는 그만 진심으로 흠모하고 말았다.
밤이 되어 매당에 들어 유숙하다가 그가 지은 시를 내어 보이는데, 그 격조가 마치 거문고 소리와 같이 청아하고 높았다. 둘째 형이 몇 번이고 칭찬하면서, 당나라 아홉 고승의 시와 나란히 놓아도 될 만하다고 하였다. 그때 나는 아직 어려서 그 오묘한 경지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를 마음속에 간직하여 쉬이 잊지 못하였다.
3년을 지나 둘째 형이 별세하자, 스님이 오대산에서 와서 조문하며 슬피 곡하고 또 만시를 지었는데, 그 시구가 너무 처절하여 아직도 생사의 경계에서 해탈하지 못한 듯하기에 내심 의아해하기를 '스님의 수도가 아직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일까. 어찌 구구히 속인들의 슬픔과 기쁨을 그대로 본받는단 말인가' 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겨울, 임진왜란을 피하여 강릉에 있다가 스님이 의병을 규합하여 국난을 막을 때, 그 스승을 대신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여러 차례 왜적을 꺾었단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 뒤에 스님이 임금의 명을 받들고 적진을 찾아가 왜인을 타일러 큰 공적을 세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다시 만날 수 없으니 스스로 마음만 피로하다.
1596년(선조 29년) 겨울, 내가 승문원에 있을 때 공무로 인하여 영의정 서애 유성룡을 찾아뵈었는데, 스님이 높은 고깔에 긴 수염으로 함께 앉아 있다가 반가이 손목을 잡고 옛날을 이야기하였다. 이에 함께 객사로 돌아와 당시의 국사를 담론하였는데, 강개한 기개로 손뼉을 치면서 이해를 타진하는 것은 옛날 의협의 풍도가 있고, 안장에 기대어 좌우를 돌아보면서 요사한 기운을 쓸어버리려는 의지는 또 노장군의 굳세고 정정한 모습과도 같기에, 내가 더욱 공경하고 소중히 여기면서 '그의 시문은 여사에 불과하다. 그의 재주가 국난을 구제할 만한데 아깝게도 잘못 불문에 투신했다'고 여기었다.
1603년(선조 36년) 가을, 스님이 조정에 사퇴를 빌고 상원사 옛 처소로 돌아와 있다가, 강릉의 내 별장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 무렵 내가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잠시 불교 경전을 가져 큰 뜻을 달래던 터라 불가의 명심견성설에 약간의 소견을 가지고 한두 가지를 시험 삼아 논해 보았더니, 스님이 모두 통달하고 환히 깨달아 진정 조계·황매의 가법을 체득하였다. 참된 종지의 적통과 은밀히 전해지는 뜻을 통투한 때문에, 세상을 제도하고 어려움을 구제한 것도 그 일단에서 나왔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며칠 오묘한 진리를 담론하는 사이에 일찍이 듣지 못했던 것을 많이 들었다. 이후부터는 스님이 도성에 오면 문득 서로 오가면서 서로 늦게 알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었다.
1610년(광해군 2년) 9월에 스님이 입적하였단 말을 듣고 글을 지어 조상하고 또 시로써 영결하였다. 나는 그 높은 풍도가 영영 멀어졌음을 섭섭해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스님이 둘째 형을 애도하던 마음이 오늘날 내가 스님을 애도하는 생각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정이란 대체 무엇이기에 사람을 그처럼 속박시켰단 말인가.
이번에 그 문도 혜구가 스님의 문집을 가지고 와서 청하기를, "우리 스승께서 지은 수천 수의 시는 일찍이 공의 둘째 형님께 보관되어 있다가 전란에 유실되었고, 이는 근자에 와서 주워 모은 것으로 태산에 비해 터럭 한 올과 같은 격차입니다. 우리가 스승의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기에 이 시 몇 권을 편성, 간행에 붙여 우리 스승의 문장의 높낮이와 도의 깊이를 알리려 하는데,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 하여 헛되이 추앙만 하지 않을 이는 공밖에 없으니, 부디 한 말씀을 주어 영원히 전하도록 한다면 이는 공의 은혜입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아, 내가 어찌 차마 스승의 글에 서문을 쓰겠는가. 스님의 시가 이미 문단에 널리 추앙되었고, 스님의 공적이 이미 국토 수복에 있었으며, 스님의 도가 이미 부처의 경지에 들었으니, 어찌 나의 서술이 있어야만 그 추중이 더 증가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의 형제는 진정 스님과 인연이 있었던 터라 어찌 글재주가 없다 하여 사양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그 시종을 서술하여 그의 청에 응하는 한편, 마음속 회포를 붙인다.
명나라 만력 임자년(1612, 광해군 4년) 정월에 교산 허단보는 서한다.
(용어) 사명집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왜국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던 사명당 유정의 문집이다. 교산은 허균이 스스로 붙인 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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