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부부고》에 부치는 서문 (서기 1613년 5월 12일, 양력)
출처: 성소부부고 · 권두 서문 (이정기 지음)
배경: 1613년(광해군 5년),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왔던 주지번의 부탁을 받아, 명나라의 원로 문인 이정기가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에 써 준 서문입니다. 주지번은 1606년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때 허균과 만나 깊이 교유했던 인물입니다.
호를 난우라 쓰는 명나라 학사 주지번이 《부부고》라는, 시와 부와 산문과 잡록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 책 한 질을 들고 나를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가 사신의 임무를 받아 조선에 갔을 때, 그 나라의 이름난 관리와 선비들을 두루 만나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허씨 집안이 단연 으뜸이었는데, 이 책이 바로 그 집안 막내로 문과에서 장원을 한 사람의 문집입니다. 그의 산문은 여유롭고 아름다워 만년의 왕세정이 쓴 글과 같고, 그의 시는 막힘없이 풍성하고 고와 변공의 맑은 운치가 있습니《성소부부고》에 부치는 서문 (서기 1613년 5월 12일, 양력)
출처: 성소부부고 · 권두 서문 (이정기 지음)
배경: 1613년(광해군 5년),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왔던 주지번의 부탁을 받아, 명나라의 원로 문인 이정기가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에 써 준 서문입니다. 주지번은 1606년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때 허균과 만나 깊이 교유했던 인물입니다.
호를 난우라 쓰는 명나라 학사 주지번이 《부부고》라는, 시와 부와 산문과 잡록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 책 한 질을 들고 나를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가 사신의 임무를 받아 조선에 갔을 때, 그 나라의 이름난 관리와 선비들을 두루 만나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허씨 집안이 단연 으뜸이었는데, 이 책이 바로 그 집안 막내로 문과에서 장원을 한 사람의 문집입니다. 그의 산문은 여유롭고 아름다워 만년의 왕세정이 쓴 글과 같고, 그의 시는 막힘없이 풍성하고 고와 변공의 맑은 운치가 있습니다. 저는 내심 기뻐하며 그의 전집을 구하려 했는데, 올해 마침내 한양에서 책 한 질을 보내와 지방 관아의 심부름꾼 편에 전해 받았습니다.
이 책과 함께 아주 정성스러운 편지도 왔는데, '온 세상에 이름난 큰 학자의 말 한마디를 얻어 책머리를 빛나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비록 벼슬에서 물러나 산속에 계시지만, 지금 이 나라 문단을 이끌 분이 선생님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좋은 말씀을 써 주시어 먼 나라 사람의 정성을 위로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온 세상의 문장을 책임진 이들은 모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옛 한나라 서울이나 당나라의 가장 융성했던 시절에 태어났더라도 문단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만한 인물들인데, 유독 자기 집 반찬은 마다하고 남의 들오리를 즐기듯 제 나라 것은 마다하며, 마땅히 물리쳐야 할 것은 물리치지 못하면서 오히려 탐내려 드니,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닐는지요." (※ 이 문장 가운데 일부 표현은 정확한 뜻이 분명하지 않다 — 원문 불확실)
주지번이 답했다.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황제의 다스림이 온 천하를 하나로 아우른 위대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밝은 가르침이 나라 안에 넘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그 바깥까지 미친 것이지요. 조선은 예로부터 기자가 봉해졌던 땅이라 그 가르침을 가장 먼저 입었고, 허씨 집안은 아득한 옛 성인의 후예이기에 그 나라 문단을 으뜸으로 차지하였으니, 그의 형과 누이의 글 역시 이와 함께 크고 반듯한 격조를 갖추었다 할 것입니다. 이 문집은 명나라를 대표하는 일곱 문장가들 사이에 놓아도, 그 가운데 손꼽히는 두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합니다. 이런 인연이야말로 아침저녁으로 우연히 만난 것과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주지번이 인재를 아끼는 마음을 아름답게 여기는 한편, 황제의 가르침이 멀리까지 미친 것을 우러르며 이 일을 맡기로 하였다.
아, 인재가 태어나는 것은 땅의 기운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어찌 시운에 호응하지 않고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 있겠는가. 삼한(조선)은 아득한 옛날 주나라 때부터 중국과 왕래하였으나, 남긴 글이 그리 드러난 것이 없었다. 수나라와 당나라 때에 이르러서야 을지문덕이 적장 우중문에게 보낸 훈계의 시나, 신라 왕이 비단에 수놓아 당나라 황실의 공덕을 기린 노래 같은 것이 기록에 전하지만, 대개는 소박하여 뛰어난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 이 사람(허균)의 글만은 크고 넓은 세계에서 노닐어 우아하고 아름다운 울림을 지녔으니, 중원의 큰 문장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그 전통을 이어받을 만하다. 다만 그를 명나라의 이름난 문장가 두 사람에게 견주는 것은 조금 지나친 칭찬인 듯하지만, 주지번의 밝은 안목을 어찌 다 가릴 수 있으랴.
수천 년 만에 비로소 이런 글쓴이 하나를 얻었는데, 때마침 밝은 세상을 만났으니, 시운에 호응해 일어나는 인재는 땅의 기운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이 한 가지 일로도 알 수 있다. 내가 이렇게 거듭 칭송해 마지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애초에 "부부"(장독 뚜껑을 덮는다는 뜻으로, 별 볼 일 없는 글이라는 겸손한 표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지나친 겸양에서 나온 듯하지만, 이 책이 끝내 그런 하찮은 대접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 책 자체가 증명해 줄 것이다. 그렇다면 예전에 양웅의 《법언》과 《태현경》이 세상에 빠르게 알려진 것이 환담이라는 사람이 미리 그 가치를 알아본 덕분이었듯, 이번에 이 책이 널리 알려지는 것은 주지번의 공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가 낮아져 내가 그 환담의 역할을 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이 책에 누가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는 변방의 것이 중국 문단에 나아간 것일 뿐이니, 그저 중국의 것으로 여겨질 따름이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좋다고 기뻐 춤을 추어도, 그것은 마치 옛날 초나라의 광대 우맹이 손뼉을 치며 죽은 재상 손숙오의 흉내를 낸 것과 같은 노릇이니, 주지번께서는 아마 이를 두고 웃음거리라 놀리지 않으시겠는가. 이런 마음으로 이 글을 서문으로 삼는다.
1613년(광해군 5년) 음력 3월, 그달의 세 번째로 돌아온 '사'날에, 진강 사람 이정기(자는 이장)가 쓰다.
인물·용어 설명
주지번(호는 난우): 명나라의 학사로, 1606년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때 허균과 만나 깊이 교유하였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왕세정(호는 감주): 명나라의 문인으로 시문에 뛰어나 당대 최고 문장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다.
변공(호는 화천): 명나라의 문인으로, 뛰어난 시인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다.
기자: 옛 중국 은나라의 인물로, 전설에 따르면 조선 땅에 봉해졌다고 전해진다.
명나라를 대표하는 일곱 문장가: 명나라 후기에 활동한 일곱 문장가를 가리키며, 그 가운데 특히 손꼽히는 두 사람에 허균이 견주어졌다.
을지문덕: 고구려의 장군으로, 수나라 대군과 싸울 때 적장 우중문에게 훈계하는 시를 보낸 일화로 유명하다.
신라 왕의 노래: 신라 진덕여왕이 손수 지어 비단에 수놓아 당나라에 보낸 노래로, 당나라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양웅과 환담: 양웅은 한나라의 학자로 《법언》과 《태현경》을 지었고, 환담(자는 군산)은 이 책들이 후세에 반드시 전해질 것이라 미리 알아보고 칭찬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한 인물이다.
우맹과 손숙오: 우맹은 옛 초나라의 광대로, 죽은 재상 손숙오를 흉내 내어 그의 공덕을 임금에게 일깨운 일화로 유명하다.
원문에서 이정기는 자신을 옛 관직 이름(오늘날의 예조판서에 해당)으로 낮추어 표현한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는 이해하기 쉽도록 '나'로 풀어 옮겼다.
성소부부고 제1권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정유조천록 —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정유조천록
배경: "정유조천록"은 허균이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 명나라에 사신 일행으로 다녀오면서 지은 연작시다. 임진왜란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요동, 산해관을 지나 명나라 수도까지 오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분량이 매우 많아 이번에는 앞부분 열 편만 먼저 옮긴다.
높은 누각에 올라 (서기 1597년 9월 14일, 양력 추정)
바람을 타고 선 누각이 아득히 트여 있어
한가로우면 부르지 않아도 절로 오르게 된다
전란을 여러 번 겪었어도 옛 풍경은 그대로 남아
이리저리 둘러보며 시를 읊는 것은 오늘 아침이 처음이다
밤비에 씻긴 푸른 산은 가까이 다가온 듯하고
연기에 잠긴 초록 들판은 아득히 멀어 보인다
먼 길 떠도는 나그네, 타향살이 시름도 어느새 잊었는데
서쪽으로 기우는 해는 긴 다리 너머로 저물어 간다
평양 가는 길에 (서기 1597년 9월 17일, 양력 추정)
쓸쓸하다, 소나무 심은 저 정원도
처량하다, 남포의 저 다리도
강산은 예전과 다름없지만
누각들은 절반이 불타 버렸다
부질없이 흥하고 망함을 슬퍼할 뿐
누구에게 기대어 이 적막을 깨뜨릴까
동풍은 나그네의 마음을 아는 듯
목련으로 만든 조각배에 불어온다
나그네로 지내는 밤에 있었던 일을 적다 (서기 1597년 9월 17일, 양력 추정)
시름 어린 등잔불이 바람에 흔들리는 휘장 사이로 가물거리고
꿈에서 깨어나니 조각달이 창틈으로 살짝 들여다본다
언덕 위에서 놀던 사람들은 아직 돌아갈 줄을 모르는지
밤이 깊도록 옥퉁소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백상루 (서기 1597년 9월 20일, 양력 추정)
높은 누각이 하늘 반쯤 걸려 있고
그 아래로는 긴 강이 흘러간다
틈을 내어 병든 몸을 이끌고 나와
붙잡고 올라 잠시 마음을 내려놓는다
고개 들어 향로봉을 바라보니
구름 밖에 붉고 푸른 빛이 두둥실 떠 있다
어찌하면 밀랍 바른 나막신을 신고
곧장 저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볼까
신선이 사는 곳은 너무도 아득하기만 하니
얽매인 이 세상살이가 시름겹기만 하다
홀로 서성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니
서산으로 지는 해가 발에 걸렸다
사람의 한평생은 백 년을 채우지 못하는데
세상일에 팔려 근심만 늘어난다
명예도 이익도 다 헛것일 뿐인데
왜 진작 그만두지 못했던가
이제라도 나랏일을 끝마치게 된다면
벼슬을 내려놓고 산골로 돌아가리라
학을 탄 신선에게 말을 건네 보나니
나도 즐거이 신선 세계에서 노닐게 해 주겠는가
공강정 (서기 1597년 9월 21일, 양력 추정)
강 안개는 아득아득하고 강물은 유유히 흐르는데
강가 붉은 정자에는 빗방울이 그칠 줄 모른다
돌아가는 저 기러기가 어찌 북쪽 땅을 잊을 수 있으랴
지는 꽃잎은 저 홀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을 따라간다
누각에 올라 고향을 그리던 왕찬의 한스러운 노래를 읊조려 보지만
나라를 떠나 사는 우번의 시름은 또 어찌하리
만 리 밖 사신의 여정, 하늘은 한없이 멀기만 한데
구름 저편 어드메가 바로 황제가 있는 서울인가
(용어) 왕찬은 후한 말 전란을 피해 형주로 몸을 의탁하고 성루에 올라 고향을 그리는 글을 남긴 문인이다. 우번은 삼국 시대에 바른말을 하다가 먼 곳으로 쫓겨나 살았던 인물이다. 두 사람 모두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지내야 했던 처지를 빌려 자신의 심정을 견준 것이다.
정주 가는 길에 (서기 1597년 9월 23일, 양력 추정)
사신의 여정으로 서쪽 관문을 서둘러 벗어나니
어젯밤 꿈은 벌써 고향 동산으로 돌아가 있었다
날은 덥고 말은 지쳐 걸음이 참으로 힘겨우니
하늘 끝 어디쯤이 정주의 산천인가
선천 (서기 1597년 9월 25일, 양력 추정)
선천 객사에 막 들어서니
난간 너머로 들판이 훤히 내다보인다
우거진 숲은 뜨거운 햇볕을 가려 주고
높다란 창문은 긴 바람을 받아들인다
상쾌한 기운에 시흥이 절로 솟아나고
게으름은 술기운 속에 던져 버렸다
뜰에 가득 작약꽃이 무르익어 피었으니
어느 것이 기생의 다홍치마보다 고울까
거련관 (서기 1597년 9월 26일, 양력 추정)
잠시 솔그늘을 빌려 누워 있노라니
뜨거운 여름 햇볕도 까맣게 잊었다
남은 꿈에서 문득 깨어나니
바람이 산들산들 얼굴에 불어온다
전문령에 오르다 (서기 1597년 9월 28일, 양력 추정)
(허균 자신이 남긴 설명): 나는 갑오년(1594년)에 나라의 공문을 가지고 가는 관원 자격으로 요동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허 급사를 맞이하고 배웅하는 접반사 윤국형 공의 종사관이 되어 무려 넉 달이나 그 일을 맡아보았다. 그때 의주에 머문 적이 있어 이 시에서 그 일을 언급하였다.
말을 달려 전문령에 오르고 보니
비껴 비치는 해가 앞세운 깃발을 비춘다
만 리 밖 타향 길을 가는 몸이니
삼 년 동안 오래도록 나그네로 지낸 심정이다
구름 저편에는 넓은 대륙이 펼쳐져 있고
파도 너머로는 관문의 성이 어렴풋이 보인다
백성이며 아전이며 서로 아는 이들이 많으니
길에 가득 몰려나와 정겹게 맞아 준다
의주 (서기 1597년 9월 28일, 양력 추정)
더운 기운은 대자리 위에서 맑게 식어 가고
강 안개는 먼 숲속까지 스며든다
창을 여니 오늘 밤엔 달이 휘영청 밝은데
베개에 기대니 옛 벗이 그리워진다
쓸쓸하여라, 데릴사위처럼 얹혀사는 이 신세가 서글프고
적적하여라, 절로 고향 노래가 흘러나온다
서늘한 밤, 나그네는 꿈조차 이루지 못하니
가을벌레 우는 소리 때문만은 아니다
(용어) 옛 중국 진나라에는 가난한 집 아들이 장성하면 남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여보내던 풍습이 있었다. 허균은 이 옛일을 빌려, 남의 나라에 몸을 의탁한 나그네 신세를 비유하였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정유조천록 (2) — 나머지 27편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정유조천록
배경: 앞서 옮긴 열 편에 이어, 정유조천록의 나머지 스물일곱 편이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 산해관을 지나 명나라 수도에 이르는 사행길이 이어지며, 도중에 정유재란 전황(원균·이억기·최호의 전사, 남원성 함락, 직산 전투 등)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고 읊은 시들도 여러 편 섞여 있다. 이로써 정유조천록 전체 서른일곱 편의 번역이 마무리된다.
압록강을 건너며 (서기 1597년 10월 1일, 양력 추정)
오늘은 날짜마저 길한 날이라
내 수레바퀴에 기름을 쳤네
수많은 벼슬아치들 줄지어 와서
강가에서 전별 잔치를 열어주네
긴 물결에는 배들이 빼곡히 들어차고
강 한복판엔 구슬픈 북소리 퉁소 소리
그대여 이 술잔일랑 다 비우게
정든 이들과 이제 여기서 헤어지는구나
앞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아득하기만 한데
연경과 계주 가는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하네
사내대장부는 큰 여행을 귀하게 여기지만
여인들은 그저 이별을 서러워할 뿐
사공이 일어나 노를 저으니
어느새 압록강을 건너버렸구나
고개 돌려 옛 장성을 바라보니
저녁 안개가 성가퀴에 잠겨 있네
해가 지니 변방의 관새는 어두워지고
밤이 깊으니 나그네는 배가 고프다
그래도 정겨운 내 고향의 저 달은
만 리 길을 마다 않고 나를 따라오는구나
(당대 평가): 손곡은 이 시를 두고 "위나라와 진나라 시대 시의 격조가 있어 참으로 진귀하다"고 평했다. (손곡은 허균에게 시를 가르친 스승 이달의 호이다.)
두관참 (서기 1597년 10월 9일, 양력 추정)
냇물은 넘실넘실 흐르고 들판은 아득히 넓은데
옛 수자리에서 들려오는 슬픈 피리 소리에 나그네 애가 끊어지네
변방이라 가을이 이토록 일찍 찾아오는 걸 이제야 깨닫는데
밤이 깊으니 벌레 소리가 벌써 침상까지 스며드는구나
회원관 (서기 1597년 10월 10일, 양력 추정)
드넓은 성벽으로 진영을 웅장하게 세우고
엄격한 절제로 오랑캐를 막아내네
이 땅의 풍속엔 아직 협객의 기풍이 남아 있고
백성들 사이엔 오랑캐 풍습도 섞여 있구나
여관에 묵어도 안부 물어줄 사람 없고
낯선 타향이라 계절은 벌써 서늘해지네
외로운 등불만 밝혀 놓고 잠 못 이루는데
철새 기러기는 어느새 남쪽으로 날아가는구나
주필산의 노래 (서기 1597년 10월 11일, 양력 추정)
잘려나간 산기슭이 용처럼 휘돌아
구불구불 우뚝 솟아 평지를 내려다보네
어느 해에 만승의 천자가 먼 원정에 지쳤던가
지금도 이따금 길 가던 사람이 화살촉을 줍는다지
공 세우기 좋아하고 일 벌이기 좋아한 수나라 황제는 말할 것도 없고
진시황과 한무제도 다 같이 교만한 임금이었네
작다고 얕볼쏘냐, 벌과 전갈에도 독이 있는 법
날아온 화살이 문득 검은 갑옷의 군대를 범했다네
안시성 꼭대기에선 북소리가 둥둥 울리고
이적의 검은 깃발 아래 모래먼지 자욱했지
비단 백 필을 내려 충성을 권해 본들 부질없어
차라리 연개소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편이 나았으리
화살이 눈을 맞혀 상처를 입고 돌아갔다지만
이 이야기도 전해지는 말일 뿐, 허황된 데 지나지 않네
이번 원정길에 설인귀 같은 명장 하나는 얻었다지만
훗날 무미랑을 비웃는 노래야 낸들 어이하리
태자궁 앞에서는 청동 말이 목메어 울고
방주성 안에는 해마저 핏빛처럼 붉었다네
저승에 간 수양제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니
당나라 왕실이 이어진 것도 겨우 머리카락 한 올 차이였구나
(용어) 무미랑은 당나라 태종이 재주 있는 여인으로 뽑아 궁에 들인 여인이었는데, 훗날 고종의 황후가 되어(측천무후라 불린다) 당나라 황실을 뒤흔든 인물이다. 이 시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안시성에서 크게 패퇴한 역사를 소재로 삼았다. 연개소문은 당시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였고, 이적은 당나라의 장수였으며, 설인귀는 이 원정에서 이름을 떨친 당나라의 장수다. 수양제, 진시황, 한무제는 모두 무리한 원정을 벌이다 나라를 위태롭게 한 중국 역대 황제들이다.
고평 (서기 1597년 10월 15일, 양력 추정)
너른 들판은 포류 땅으로 뚫려 있고
긴 담장은 변방의 언덕을 갈라놓았네
변방의 바람이 구슬프게 불자 말도 술렁이고
해가 지니 오랑캐 땅의 먼지가 자욱해지네
종군의 즐거움은 미처 노래하지 못한 채
고국을 떠난 마음만 상하는구나
슬픈 피리 소리 몇 가락 울려 퍼지자
저녁도 되기 전에 망루의 문을 닫아거네
광녕 (서기 1597년 10월 17일, 양력 추정)
일찍이 도호부가 이곳에 설치되었고
중승이 다시 제단을 쌓았다고 하네
깃발들은 해를 가릴 만큼 자욱하고
갑옷과 창은 서리에 비쳐 싸늘하구나
갈석산을 바라보니 하늘이 가까운 듯하고
개원 땅은 개척한 땅이 넓기도 하다
중국의 판도는 이곳을 믿고 튼튼하니
범 같은 군졸들이 더욱 씩씩하구나
장진보의 관왕묘 (서기 1597년 10월 18일, 양력 추정)
문 앞의 옛 비석은 이끼 속에 누워 있고
쓸쓸한 숲 한가운데 한 뙈기 사당이 서 있네
전각의 깃발은 저녁노을에 눈부시고
담장 위 삼나무와 회나무는 찬바람에 소리 내어 흔들리네
단청한 벽화에는 구름과 천둥이 굉장하게 그려져 있고
향불 타는 빈 사당엔 신상이 위엄 있게 서 있네
지전을 태워 원혼을 부르지는 말아다오
두견새 피 토하듯 울어 들꽃이 붉게 물들었으니
(허균이 남긴 설명): 사당 안에 핀 붉은 꽃이 우리나라의 진달래와 꼭 닮아 있어서, 시의 끝 구절에 그 이야기를 넣었다.
영원성에 들어와서 본 바를 적다 (서기 1597년 10월 21일, 양력 추정)
채찍을 비껴 잡고 말을 달려 긴 언덕을 내닫는데
서로 만난 젊은이들 의기가 드높구나
비단 저고리 벗어 던지고 좋은 술을 잔뜩 사서
청루에 머물러 앉아 여인의 노래를 듣는구나
행산 (서기 1597년 10월 22일, 양력 추정)
먼 길 나선 나그네 시름겨워 잠 못 이루는데
서늘한 새 기운이 살쩍으로 스며드네
하늘 저 멀리 기러기 소리 아스라하고
밤이 깊으니 풀벌레 소리 처량하구나
공을 세우기엔 때가 이미 늦었고
어부나 나무꾼으로 돌아갈 계획도 더디기만 하네
일어나 바라보니 은하수는 돌아가고
새벽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 성벽에 메아리치네
산해관 (서기 1597년 10월 25일, 양력 추정)
땅의 형세는 넓은 바다에 닿아 있고
긴 성벽은 견고한 벌판까지 이어졌네
관문의 방비는 사나운 자들이 발붙이지 못하게 하고
빗장은 겹겹의 문마다 튼튼하기만 하네
사방 들판엔 뽕나무와 삼을 심은 집들이요
이어진 병영엔 무기와 군량이 쌓여 있네
시절이 태평하여 전쟁이 없으니
이 모든 것이 다 임금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먼 변방에 웅장한 진영이 열려 있고
겹겹의 관문에는 큰 방비가 마련되었네
군사를 다스리는 이는 부도위요
빗장을 맡은 이는 직방랑일세
마을에서는 변방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나루터 다리에는 절강 상인들이 자리를 잡았네
먼 길 온 나그네가 어찌 즐겁지 않으랴
술을 사서 권하며 맛보라 하는구나
영평부 (서기 1597년 10월 28일, 양력 추정)
노룡성 안에 해가 저물기 시작하니
우북산 꼭대기에 먹구름이 뭉쳐드네
사람들은 저마다 오랑캐가 말을 먹이러 왔다고 떠드는데
한나라의 이 장군은 지금 대체 누구인가
(용어) 이 장군은 한나라 무제 때 북평 태수를 지낸 이광을 가리킨다. 팔이 길고 활을 잘 쏘아 흉노가 몹시 두려워한 나머지 "나는 장군"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제묘에서 사신 어른의 시에 화답하여 짓다 (서기 1597년 10월 28일, 양력 추정)
석상은 대체 어느 해에 세워졌을까
그 고결한 기풍은 백대가 지나도 오히려 맑기만 하네
말고삐를 잡고 극진히 간언하던 그 마음을
그 누가 알리, 임금 자리를 사양했던 그 심정에서 나온 것임을
전각에는 단청이 눈부시게 빛나고
봄가을 제사는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네
난하의 물은 맑고 맑아 바닥까지 보이니
위천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기도 부끄럽구나
(허균이 남긴 설명): 이 마지막 구절은 지을 당시에는 스스로 적절하다 여겼는데, 훗날 양송천의 시를 보니 "평생 서산의 높은 절개를 우러러보았는데, 난하가 위천보다 낫다는 것을 이제 또 깨닫는다"는 구절이 있어 내 뜻과 은연중에 들어맞았다. 다만 양송천의 시가 나보다 훨씬 낫다고 하겠다. 마땅히 이 구절을 지워야 하겠지만, 우연히 뜻이 일치했다는 점에서 그대로 남겨둔다.
(용어) 옛날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의 폭군 주왕을 정벌하러 갈 때, 백이와 숙제 형제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신하로서 임금을 치는 것은 옳지 않다"며 극구 말렸다. 또 이 형제의 아버지인 고죽군이 작은아들 숙제에게 나라를 물려주려 했으나, 아버지가 죽은 뒤 숙제는 형 백이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했고, 백이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한다며 몸을 피했으며, 숙제도 형을 따라 함께 나라를 떠나버렸다. 이들이 임금에게 바친 충성도 결국 아버지에 대한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뜻이다. 한편 위천은 강태공(여상)이 낚시하다가 주나라 문왕을 만났다는 강 이름으로, 여기서는 자신에게는 나라를 경영할 만한 재주가 없음을 부끄러워하는 뜻으로 썼다.
계주 (서기 1597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저물녘 성루의 피리 소리 구슬피 울려 퍼지자
정탐하던 기병이 훨훨 날듯 돌아오네
산이 낮아 하늘이 계주 땅에 바짝 붙은 듯하고
들이 트여 나무들이 연경 하늘에 떠 있는 듯하네
황성이 가까워졌음을 차츰 느끼게 되니
나그네의 잠자리도 한결 편안해지는구나
어양은 예로부터 협객들이 살던 땅이라
지금도 여전히 둥둥 북소리가 울려 퍼지네
통주 (서기 1597년 11월 2일, 양력 추정)
통주는 황성을 곁에 끼고 앉아
군량을 실어 나르는 목구멍과 같은 요충지일세
저잣거리엔 외국의 진귀한 물건이 널려 있고
강 다리에는 바다를 건너온 배들이 모여드네
만나는 사람마다 다 월 땅에서 온 상인들
술을 사 들고 나루터 누각에 오르는구나
떠도는 나그네는 그저 우두커니 서서 듣고만 있으니
양쪽 살쩍에는 쓸쓸한 가을만 스며드네
황제의 도성 (서기 1597년 12월 13일, 양력 추정)
제도는 어찌 이리도 웅장한지
누각과 궁전은 구름과 무지개처럼 솟아 있네
이백여 년 동안 불꽃처럼 번성하여
빛나는 업적이 이토록 장대하구나
정치와 교화는 온 세상에 두루 퍼지고
예악과 문물은 천하에 빛나는구나
천자는 매달 초하루마다 조회를 여시니
새벽녘 명광궁이 활짝 열리네
사방의 제후들이 모여들어 옥패 소리 울리고
뭇 공경대신들은 안개 속에서 부지런히 조회하네
의장을 이끄는 구진성이 돌아나오자
종소리 울리며 대궐문이 활짝 열리는구나
보좌를 오색구름이 둘러싸니
마치 해가 동쪽에서 솟아오르는 듯하네
먼 나라 사람들 여러 통역을 거쳐 찾아와
만 리 길 마다 않고 문물을 구경하는구나
뜰에는 조공으로 바친 폐백이 가득 늘어서고
사람들은 절하고 춤추며 임금을 우러르네
아, 우리 기자의 나라 백성들이야말로
그 은택을 유달리 크게 입었다 하리라
우임금이 물길을 다스리지 않았던들 우리는 모두 물고기 신세였으리니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구나
그런데 동쪽 바다에는 아직도 풍파가 일어
중승이 붉은 활을 하사받았다고 하네
바라건대 천자께서 아낌없이 토벌을 명하시어
끝내 흉악한 도적떼를 말끔히 없애 주소서
백성들이 밭 갈고 우물 파며 다시 편히 밥을 먹게 되면
길이길이 우리 황제의 공덕을 기리오리다
(용어) 구진은 하늘의 별자리 이름으로, 천제를 호위하는 별이라 한다. 여기서는 황제의 행차를 이끄는 의장 행렬을 비유한 말이다. 붉은 활은 천자가 공을 세운 제후에게 잔치와 함께 내려주던 활이다. 기자는 옛날 중국에서 조선으로 건너와 나라를 다스렸다고 전하는 인물로, 여기서는 조선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우임금은 중국 고대에 큰 홍수를 다스려 백성을 구했다고 전하는 임금이다.
8월 15일 밤, 사신 어른이 "한 해의 밝은 달은 오늘 밤이 제일이다"라는 구절로 운을 삼아 오언절구 일곱 수를 지어 보여주기에 화답하여 짓다 (서기 1597년 12월 23일, 양력 추정)
계절이 어느덧 한가을로 접어드니
올 한 해도 저무는 줄 모르고 지나갔네
달구경한 아름다운 시가 있다기에
그 재주와 정취가 으뜸이라 청하고 싶네
때마침 가을바람 부는 계절을 맞으니
하늘 가득 금빛 물결 넘실거리는구나
밤이 깊을수록 유난히 희고 맑아
올해 들어 가장 맑은 풍경일세
하얀 빛깔이 은하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차가운 빛이 옥경에 넘실거리네
항아가 마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둥글고 둥글어 저리도 환하구나
그림자를 이끌고 뜰을 거니노라니
싸늘한 빛이 뼛속까지 스며드네
귀양 온 신선이라 불리던 저 이백에게 말을 전하노니
술잔 들고 와서 저 달에게 물어보라고
맑은 빛이 아까워 술잔을 마주하니
서글픈 마음이 나그네 가슴에 사무치네
예로부터 사람마다 저 달을 바라보았지만
그 누가 지금까지 남아 있단 말인가
고향에도 저 달은 똑같이 밝을 테니
근심 어린 집안 식구들 얼마나 허전할까
만 리 밖 나그네 신세를 응당 가엾이 여기며
하늘가에서 이 밤을 지새우고 있으리라
북쪽 마을에서는 미인이 비파를 뜯고
동쪽 이웃에서는 나그네가 노래를 뽑네
시를 읊어 이 좋은 풍경에 화답하노니
저 달빛은 대체 누구를 위해 이리도 환한가
본국의 수군통제사 원균과 수사 이억기, 최호가 싸움에 져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기 1597년 12월 24일, 양력 추정)
나라 소식을 들어보니 동쪽의 왜적들이
바다 어귀를 지키고 있다가 우리 수군을 습격했다고 하네
전선이 순식간에 파도 속에 뒤집히니
통제사와 수사들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는구나
한나라 장수는 남월을 무찔렀다지만
주나라는 오랑캐를 피해 기산으로 도읍을 옮겼었지
한밤중에 홀로 앉아 눈물을 쏟으니
이 분함과 원통함을 그 누가 알아주리오
남원성이 함락되어 (명나라 장수) 양원이 도망쳐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서기 1597년 12월 25일, 양력 추정)
말을 들으니 남원성이 함락되어
장군은 어두운 밤을 틈타 포위를 뚫고 달아났다 하네
백제 땅을 남김없이 집어삼키고
날카로운 칼끝이 서울까지 육박했다지
가엾어라, 가까운 이들은 어디로 흩어졌을까
임금과 신하는 나라 잃은 서러움만 노래하는구나
옛 고향 동산은 승냥이와 범의 소굴이 되었으니
어디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용어) "식미"는 《시경》에 나오는 시의 편명이다. 옛날 여후라는 제후가 나라를 잃고 위나라에 몸을 의탁했을 때, 그를 따르던 신하들이 그 처지를 슬퍼하며 지은 노래라고 한다. 여기서는 나라를 잃고 떠도는 임금과 신하의 처지를 빗댄 말이다.
계주로 돌아와, 부총병 이씨가 오랑캐 추장을 사로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서기 1597년 12월 31일, 양력 추정)
계주진의 관문 방비는 웅장하기만 한데
가을을 맞아 오랑캐 군세가 강성해졌다고 하네
큰 사막에는 음산한 바람에 흙먼지 자욱하고
어양 땅은 해가 지자마자 어두워지는구나
싸움에 물든 깃발은 스산하게 나부끼고
군사들의 함성과 북소리 뿔피리 소리 드높구나
계주에 돌아오자마자 들려오는 소식은
"나는 장군" 이씨가 얼마 전 좌현왕을 사로잡았다는구나
(용어) "대로"는 옛날 진나라 장수 순오가 오랑캐를 크게 무찔렀던 땅의 이름이고, "어양"은 당나라 때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던 고을 이름이다. 둘 다 여기서는 전란이 벌어진 땅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나는 장군"은 앞서 나온 이광 장군의 별명을 빌려, 이번에 공을 세운 부총병 이씨를 비유한 것이다.
산해관에 이르러, 경리 양호가 곧장 한양에 이르고 왜적은 직산까지 왔다가 패하여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서기 1598년 1월 5일, 양력 추정)
말을 들으니 시서를 익힌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곧장 한양으로 들어왔다 하네
위례성 쪽에서 왜적의 기세가 크게 꺾이니
부여 땅을 뒤덮었던 요사한 기운도 활짝 걷혔구나
날랜 창끝에 왜적 일천 명이 쓰러지고
흙탕물 이는 강물 위로 만 마리 말이 내달렸다지
승전보가 유관까지 전해져 오니
이 먼 사행길이 다 헛수고였구나 싶어 우습기만 하네
산해관을 나서며 짓다 (서기 1598년 1월 5일, 양력 추정)
산해관을 막 벗어나자 날씨가 벌써 쌀쌀한데
북녘 바람이 우뚝한 갖옷 모자에 불어오네
상자 가득 책이 실려 행장은 풍성하지만
서리와 이슬이 옷에 스며 나그넷길이 힘겹구나
돌아갈 생각에 시흥은 오히려 더 왕성해지고
벼슬살이에 대한 마음도 나그네 마음처럼 시들해지네
감호의 옛집은 예전 그 모습 그대로일 텐데
낚싯대를 저버린 이 몸이 부끄럽기만 하구나
(용어) "혜문관"은 전국 시대 조나라 무령왕이 북방 오랑캐의 복장을 본떠 담비 꼬리로 장식해 쓰던 모자인데, 훗날 진나라가 조나라를 멸망시킨 뒤 이 모자를 가까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사신 행차에 쓴 관모를 가리킨다.
여양 (서기 1598년 1월 11일, 양력 추정)
변방이 가까워 가을 방비가 긴급한데
갈 길이 멀어 나그네 마음은 지쳐만 가네
말이 지치니 해가 벌써 기울어진 걸 알겠고
매가 빠르게 나니 바람이 매섭다는 걸 깨닫네
호각 소리 들려오는 저 황폐한 성보
술 깃발이 나부끼는 저 쓸쓸한 주막
시를 찾아 스스로 근심을 달래 보니
수염을 쓰다듬는 일도 나쁘지만은 않구나
삼분하에서 오랑캐의 경보를 듣고 (서기 1598년 1월 15일, 양력 추정)
창을 낀 채 만 마리 말이 내달리니
오랑캐 기병이 지나간다는 전갈이 왔네
가을 구름은 너른 사막에 뭉쳐 있고
차가운 해는 긴 강물 저편으로 떨어지네
조정의 계책이 저들을 깊숙이 끌어들이니
오만한 오랑캐들이 감히 화친을 청해 오는구나
평생토록 품어 온 청영의 뜻인데
칼을 매만지며 홀로 슬픈 노래만 부르는구나
(용어) "청영"은 군대에 나아가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뜻이다. 옛날 한나라의 종군이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긴 끈을 준다면 반드시 남월왕을 결박하여 대궐 아래로 끌고 오겠다고 자원했던 데서 나온 말이다.
해주위에서 본 것을 기록하다 (서기 1598년 1월 16일, 양력 추정)
해주는 큰 진영이라 불리는 곳
화려한 집들 붉은 처마가 눈부시게 빛나네
물건을 실어 온 오 땅 상인들이 모여들고
곱게 단장한 조나라 여인들이 마중을 나오네
항아리에는 천 일 묵은 술이 넘실대고
소반에는 오후의 진미가 가득 올랐네
비단 방석엔 미인들이 줄지어 앉아
맑은 노래에 북과 피리 소리 어우러지네
피워 놓은 향은 쪽 찐 머리를 감싸며 향기롭고
창에 걸린 달빛은 치맛자락을 환히 비추네
동으로 돌아가는 나그네를 그 누가 생각해 줄까
깊은 가을 홀로 서글픈 마음만 이는구나
(용어) "오후의 진미"란 한나라 성제 때 제후에 봉해진 왕씨 다섯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사람들이 저마다 진귀한 요리를 바쳤는데, 이 다섯 가지 요리를 한데 모아 끓인 것이 진짜 진미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는 매우 호화로운 요리상을 뜻한다.
요동에 이르러 집에서 온 편지를 보다 (서기 1598년 1월 18일, 양력 추정)
오랫동안 떠돌던 나그네가 집에서 온 편지를 보니
어찌나 반갑던지 마치 집에 다다른 것 같네
임금은 아직 서울에 계시고
여러 장수는 여전히 창을 비껴들고 있다 하네
두보가 편지 한 통을 천금처럼 여겼다더니 그 마음 이제 알겠고
이별할 땐 한마디 말도 오히려 많다더니 그 말도 이제 알겠네
다만 병든 아내가 가엾을 뿐이니
나는 지금 바다 서쪽 한구석을 떠도는 나그네 신세로구나
(용어) "하교"는 다리를 뜻하는데, 예로부터 이별을 다룬 시에 흔히 등장하는 곳으로, 헤어질 때는 한마디 말조차 많게 느껴진다는 뜻이 여기 담겨 있다. "내부"는 옛 초나라의 은사 노래자의 아내를 가리키는 말인데, 흔히 자기 아내를 낮추어 부르는 표현으로 쓰인다.
진강에서 통군정을 바라보면서 (서기 1598년 1월 24일, 양력 추정)
강 건너 아득히 통군정을 바라보니
정든 임을 본 것처럼 눈이 문득 반가워지네
나랏일을 다 마치고 만 리 길을 돌아오니
그저 양쪽 살쩍에 흰머리만 더 늘었을 뿐이구나
진산강 길 위에서 우연히 읊다 (서기 1598년 1월 25일, 양력 추정)
거친 물굽이 들판 물에는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데
강가의 나그네는 말 한 필로 홀로 돌아가네
전쟁터였던 산마다 옛 성가퀴는 다 허물어졌고
마을 집집마다 텅 빈 베틀만 덩그러니 놓여 있네
어느 해에나 이 몸을 빼내어 전원에서 늙어갈까
해마다 전쟁이 그치지 않아 포위망을 풀 길이 없구나
가을바람 앞에 홀로 서서 눈물을 펑펑 흘리는데
가을 하늘의 기러기는 남쪽을 향해 날아가는구나
(당대 평가): 석주는 이 시를 두고 "빈틈없이 매섭다"고 평했다. (석주는 허균과 가깝게 지낸 당대의 시인 권필의 호이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막부잡록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막부잡록
배경: "막부잡록"은 허균이 군영의 막료로 지내던 시절에 지은 시 열일곱 편을 모은 것이다. 벗과 주고받은 시, 세시풍속을 노래한 시, 장난삼아 지은 시 등 다양한 소재가 섞여 있다.
선성에서 묵다 (서기 1597년 11월 4일, 양력 추정)
밤이 깊어 선성관에 드니
사방이 고요하여 향을 피우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아쟁 줄 위로 기러기발이 굴러가고
가물거리는 등불 심지는 옥벌레처럼 파르르 떤다
이별을 이야기하니 갈 길이 아득하고
집 생각에 나그네의 한이 실타래처럼 얽힌다
밤이 이슥해도 잠은 오지 않는데
북두칠성만 서쪽 행랑 너머로 저물어 간다
거련에서 즉흥으로 쓰다 (서기 1597년 11월 5일, 양력 추정)
서풍이 나뭇잎을 날려 못가 누대에 가득 쌓이니
지친 나그네 고향 그리는 마음이 더욱 서글프다
막걸리로는 천 일을 취하게 한다는 신선의 술이 될 수 없지만
노란 국화는 때맞추어 늦가을에 피어 있으리라
높은 성엔 지는 노을 속으로 까마귀가 다 날아가고
먼 변방엔 첫서리를 기러기가 몰고 온다
찬 소나무를 홀로 마주하고 마음속으로 되뇌길
언제나 돌아가 북산의 나물을 벨 수 있으려나
(당대 평가): 석주는 이 시를 두고 "당나라 말기의 시인 이상은에 견줄 만하지만, 유우석과 유종원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라고 평했다.
(용어) 석주는 허균과 가까이 지낸 문인 권필의 호이다. 이상은, 유우석, 유종원은 모두 당나라 때의 이름난 시인들이다.
양책 (서기 1597년 11월 7일, 양력 추정)
빈 객관이라 밤은 유난히 길고
적막함을 견디지 못해 비단 휘장을 걷어 본다
초겨울 추위에 싸락눈이 살짝 내리고
북풍은 밤새도록 사납게 불어댄다
떠돌아다니는 신세라 마음은 늘 지치고
비방과 모함 속에 뼈마디가 다 녹아내린 듯하다
관문과 강을 넘어가기 참으로 어려우니
하늘 저편 은하수만 아득히 멀다
고진강에서 버들을 읊다 (서기 1597년 11월 8일, 양력 추정)
고진 나루 강가에 선 저 버드나무는
지난해 봄과는 어딘가 다르구나
먼 길 떠도는 나그네가 마치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
가지 하나 꺾어 누군가에게 건네주고 싶다
의주 (서기 1597년 11월 9일, 양력 추정)
사 년 동안 세 번이나 이곳에 왔는데
그때마다 슬픔과 기쁨이 달랐다
떠나도 머물러도 어차피 나그네 신세
얼굴이며 귀밑머리는 어느새 늙은이가 다 되었다
변방이 어두워지니 강 위 안개도 검게 짙어지고
밤이 길어지니 촛농은 눈물처럼 붉게 흘러내린다
남은 꿈마저 깨어지니 쓸쓸하고 외로운데
싸늘한 새벽바람이 주렴을 뚫고 들어온다
벗 여인과 함께 짓다 (서기 1597년 11월 18일, 양력 추정)
두 번이나 허망한 마음으로 임시 거처를 찾아가니
주렴 드리운 뒤채에서 옛 정취는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재주와 정취가 대단하다고 다들 칭찬하던 사람인데
무슨 일로 풍류가 예전만 못해졌는가
(용어) 여인은 이재영이라는 문인의 자(허물없이 부르던 이름)이다. 그는 부윤 벼슬을 지낸 이선의 서자로 태어나 과거에서 장원으로 뽑혔으나, 신분 문제로 급제가 나중에 취소된 인물이다.
장난삼아 윤이술의 운자를 빌려 짓다 (서기 1597년 11월 25일, 양력 추정)
1.
월궁의 제일가는 가지를 두 번째로 붙잡았으니
천상의 향기가 밤에 내려와 비단 도포에 스며드는구나
하늘 위엔 관청이 많다고 불평하지 마오
인간 세상엔 이별이 하도 잦아 오히려 한스러울 뿐이라오
봉래섬 오색구름 속으로 사람이 떠나 아득하고
옥하의 밝은 달 아래 꿈길도 더디게 돌아온다
이미 신선 같은 이와 약속을 정해 두었으니
유신과 완조처럼 우연히 나를 찾아내도록 놔둘 리 있으랴
2.
호주에서 나눈 은밀한 약속이 꽃가지에 걸려 있어
다닥다닥 필 때 내 진작 보아 두었다오
봄이 무르익어 젊은 마음이 솟구친들
지루한 병든 신세의 시인이 가엾을 뿐
은은한 향기가 가늘게 바람 따라 전해지고
비스듬히 고운 꽃송이 이슬에 젖어 오래도록 피어 있네
난간 바로 앞에 옮겨 심어 자리도 알맞으니
아리따운 그 자태에 나비가 행여 찾아올까
3.
검은 머리 무거운 쪽에 봉황 비녀를 눌러 꽂았어라
쌍가닥 끈을 접어 만들 때를 처음 본 기억이 나네
나비 무늬 고운 치마는 그 빛깔이 화려하고
난새 새긴 옥 노리개는 무늬도 찬란했지
옛꿈이 마음에 걸려 아침 기상이 늦어지고
새 시름이 뺨에 어려 새벽 단장이 더디다오
한가로운 소식이란 여섯 폭 봄 편지지에
그리운 이에게 전하여 그가 알아주기만 하면 그뿐
4.
성홍색 고운 빛깔이 해당화 가지에 갓 엉기니
해장술에 얼큰해진 미인의 낯빛과 마찬가지
예쁜 혀끝 잘도 굴려 귀염받기를 시새우고
새로 단장하기도 게을러진 건 이별에 마음 상해서라네
응당 사영운처럼 꽃을 서둘러 옮겨 심을 테지
버들가지 꺾기를 망설인 한랑 같은 짓은 나는 하지 않으리
이제부턴 비단 장막 두른 깊은 방 안에서
채색 구름 같은 소식을랑 아는 사람 없으리
(당대 평가): 손곡은 이 네 편을 두고 "비록 훌륭하기는 하나, 오히려 놀라 주저하는 듯한 데가 있다"라고 평했다.
(용어) 윤이술은 윤계선이라는 인물의 자이다. 손곡은 조선 중기의 시인 이달의 호로, 허균에게 시를 가르친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유신과 완조는 옛 중국 후한 때 사람들로, 산에 약초를 캐러 갔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 신선 같은 두 여인을 만나 한동안 함께 지냈다는 옛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호주의 은밀한 약속이라는 구절은 당나라 시인 두목이 호주에서 만난 소녀와 훗날을 기약했다는 옛이야기를 빌려 온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어떤 고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영운은 남조 송나라의 시인으로 산수와 화초를 몹시 사랑했다고 전하며, 한랑은 당나라 시인 한굉을 이르는 것으로, 사랑하는 이와 헤어졌다가 버들가지에 얽힌 사연으로 훗날 다시 인연을 맺었다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이 두 구절이 구체적으로 어떤 고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막부에 별다른 일이 없어 이우린의 각야시 운자를 빌려 스스로 마음을 달래며 짓다 (네 수) (서기 1597년 12월 22일, 양력 추정)
1.
채색 편지지엔 그저 한스러운 마음이나 적어 볼 뿐
돈으로 어찌 즐거움을 다 살 수 있으랴
세상 인정은 유달리 삭막해지고
우리가 가는 길은 날로 더욱 어렵기만 하다
긴긴 밤 은하수는 캄캄하기만 한데
온 산엔 눈비가 내려 쌀쌀하구나
짤막한 저 등잔대가 나의 벗이니
옛 책을 비추어 가며 읽게 해 주는구나
2.
궁핍한 신세라 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랏일을 감히 힘들다 말하리
이 몸은 늘 물 위를 떠도는 나무 인형 같은데
재주는 예전에 급제를 다투던 그 솜씨 그대로다
밤이 깊어 가니 등불 심지도 짧아지고
서리가 매서워지니 호각 소리 더욱 드높다
누가 서생이 병들었다 했던가
시 한 수 이루고 나니 기운이 절로 솟는구나
3.
고향은 이미 천 리 밖으로 멀어졌는데
집에 보낼 편지는 오히려 쓰기가 게을러진다
구름은 저 푸른 바다로 돌아가고
기러기는 긴 강을 건너온다
풍금 소리는 밤이면 더욱 운치가 있고
서릿바람 속 피리 소리는 새벽이면 더욱 구슬프다
낯선 타향이라 애가 타서 끊어질 듯한데
눈물이 고향을 바라보는 누대에서 다하고 만다
4.
빠른 가락으로 아쟁의 기둥을 재촉해 뜯는데
등불은 술 실은 배를 맑게 비춘다
빈 누각엔 바람 기세가 차갑게 일고
높은 성 위로는 북두성 자루가 비스듬히 걸렸다
위태로운 길을 다니며 세상 맛을 알게 되고
오랜 나그네 노릇에 인정을 보게 된다
그리운 이의 마음을 내 어찌 감히 저버리랴
담장 동쪽에는 송옥같이 사모하는 이가 있다고 하는데
(용어) 이우린은 명나라의 문인 이반룡을 말한다. 우린은 그의 자이며, 당나라 전성기의 시풍을 본받아 시를 지은 것으로 이름났다. 각야시는 그가 지은 시의 제목이다. 마지막 수의 "담장 동쪽에는 송옥같이 사모하는 이가 있다"는 구절은, 전국시대 문인 송옥의 이웃집 딸이 삼 년 동안 담장 너머로 그를 몰래 연모했지만 송옥이 끝내 마음을 주지 않았다는 옛이야기를 빌린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무제 (서기 1598년 1월 20일, 양력 추정)
한 그루 수양버들이 하얀 담장에 늘어져 있어
그 가지를 부여잡고 한밤중에 담을 넘어 서쪽 행랑으로 들어가니
난간 밖에서는 시녀가 등불을 옮겨 들고
낮은 목소리로 가만히 사랑하는 임을 부르는구나
떠나며 남기다 (서기 1598년 2월 1일, 양력 추정)
이제 여기를 떠나면 어느 날에나 다시 돌아오게 될지
비단 적삼에 눈물을 뿌리니 마음이 더욱 서글프다
길 가다 강남에 이르러 역참의 인편을 만나면
그윽한 매화 향기가 고갯마루 너머에서 먼저 전해오겠지
(용어) 옛날 중국 남북조 시대에 육개라는 사람이 매화 가지를 꺾어 역참의 인편에 실어 멀리 있는 벗에게 보내며 "강남에는 특별한 것이 없어, 그저 봄 한 가지를 부친다"는 시를 함께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그 옛이야기를 빌려, 멀리서도 전해지는 그리움과 봄소식을 표현한 것이다.
임반 마을집에서 묵다 (서기 1598년 2월 2일, 양력 추정)
황량한 초가 객점이라 눈빛마저 차갑게 느껴지는데
바람에 휘장이 들썩이고 새벽 등불은 가물가물 사그라든다
누가 알리, 베개 하나에 기대어 무르익은 봉래산의 꿈속에서
문득 채색 난새를 잡아타고 그리운 이를 만나러 갈 줄이야
(용어) 봉래산은 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의 산이다. 채색 난새를 타고 그리운 이를 만난다는 구절은, 옛이야기 속에서 신선의 새를 타고 인연을 맺었다는 사랑 이야기를 빌려 온 것으로, 여기서는 꿈속에서 그리운 사람을 만난 정경을 비유한 표현이다.
정주 (서기 1598년 2월 3일, 양력 추정)
여기 와서는 좋은 밤을 즐길 흥도 나지 않으니
관문과 산 너머 만 리 길이 아득하기만 하다
비단 아쟁도 옥 술잔도 도무지 흥이 나지 않고
촛농만 눈물처럼 흘러내려 병풍 속 파초를 등지고 있다
그믐밤을 지새우며 (서기 1598년 2월 5일, 양력)
묵은 해는 시각과 함께 다 지나가고
새해는 새벽을 따라 찾아온다
세월이란 참으로 아까운 것이라
나그네의 마음은 더욱더 서글퍼진다
보배로운 아쟁은 자주자주 기러기발을 옮겨 가고
향긋한 술은 잔마다 넘실댄다
날이 밝으면 어느새 나이 서른
노쇠함과 병이 나란히 나를 재촉하는구나
가평관에서 입춘을 맞이하다 (서기 1598년 2월 4일, 양력)
1.
상서로운 빛이 북두성을 따라 어느새 동으로 돌아드니
아름다운 기운이 온 나라를 감쌌구나
동해엔 파도가 잠잠해지고 전쟁도 이미 그쳤으니
임금을 위해 해마다 풍년을 노래하리
2.
옥잔에 술을 따라 황류주를 권하는데
새벽빛 스친 눈썹 위엔 어느새 봄빛이 떠올랐네
합환화 꺾어 꽂고 온갖 머리 장식을 벌여놓으니
봄의 뜻이 어느덧 비녀 끝까지 올라왔구나
(당대 평가): 홍옹이라는 이는 이 시를 두고 "강서 시파의 격조를 따르면서도 스스로 곱고 뛰어나, 당나라 말기 이상은의 시보다 오히려 낫다"라고 평가했다.
(용어) 강서 시파는 중국 북송 때 황정견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의 유파로, 형식과 격률을 중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은은 당나라 말기의 이름난 시인이다.
숙녕에서 인일을 맞다 (서기 1598년 2월 12일, 양력)
정월 초하루부터 인일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루도 맑고 화창하지 않은 날이 없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 하는 말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들 입을 모아 시절이 태평하다고 한다
내게도 두어 이랑 밭이 있어
강릉 땅 산골에 맡겨 두었으니
마침내 나랏일을 다 마치고 나면
돌아가 그 밭이나 갈며 살아야겠다
(용어) 인일은 음력 정월 초이렛날을 이르는 말이다. 옛 중국의 풍속을 적은 형초세시기라는 책에 따르면, 이날에는 일곱 가지 나물로 국을 끓이고 비단이나 금박을 사람 모양으로 오려 병풍에 붙이거나 머리에 꽂았다고 한다.
서경에서 곡일을 맞다 (서기 1598년 2월 13일, 양력)
인일에도 날이 맑더니 곡일에도 그러하니
집집마다 술을 걸러 풍년을 기뻐한다
늙은이는 낮은 땅에도 수레 가득 곡식이 실리기를 축원하며
돼지 발굽 하나 차려 놓고 토지신에게 절을 올린다
(용어) 곡일은 음력 정월 초여드렛날을 이르는 말이다. 늙은이의 축원은 옛 중국의 역사책 사기에 나오는 말을 빌린 것으로, 낮은 지대의 밭에서도 수레 가득 수확하고 높은 지대의 밭에서도 다래끼 가득 수확하게 해 달라고 비는 풍년 기원이다. 사공은 토지를 맡아 다스린다는 신을 이른다.
오봉의 운자를 빌려 황숙정의 도망첩에 쓰다 (서기 1598년 2월 15일, 양력 추정)
하늘의 향기가 흩날려도 떠난 이의 넋은 돌아오지 않으니
한밤중에 애끊는 듯한 퉁소 소리만 들려온다
그리운 방으로 건너가 차마 옷장을 열어 볼 수 있으랴
석류빛 치마에는 아직도 눈물 자국이 남아 있으리라
(용어) 오봉은 조선 중기의 문신 이호민의 호이다. 도망첩은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지은 글을 이른다. 이 시는 황숙정이라는 사람이 아내를 잃은 슬픔을 적은 글에, 허균이 이호민의 시에 쓰인 운자를 그대로 빌려 지어 준 것이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무술서행록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무술서행록
배경: "무술서행록"은 무술년(1598년) 서쪽 지방을 오가며 지은 시 열아홉 편을 모은 것이다. 평안도 일대의 나그넷길에서 느낀 감회와, 옛 인물(정몽주)의 자취를 찾은 감상 등을 담고 있다.
중화에서 홍수로 길이 막히다 (서기 1598년 8월 30일, 양력 추정)
장맛비가 가을 내내 날마다 쏟아지니
넓은 들판 흥건한 물이 하늘빛을 그대로 담았다
길 떠난 나그네는 물을 건널 일이 걱정이고
배편으로도 소식 한 자 전하기 어렵구나
외줄기 연기 저편으로 들녘 빛이 보이고
어지러이 우거진 숲속에서 강물 소리 들려온다
기둥에 기대어 서서 북쪽 하늘을 바라보니
아득한 하늘 끝으로 기러기 떼가 날아간다
평양의 나그네 밤 (서기 1598년 9월 1일, 양력 추정)
저녁 비 개고 나니 날씨가 차가워지고
한가로운 방 안으로 먼 데서 바람이 불어온다
오늘 밤 이런 만남을 누가 알았으랴
뜻밖에도 옛 벗과 자리를 함께하다니
달빛은 금빛 파초 잎에 비쳐 하얗고
촛불 앞의 꽃은 붉게 물들었다
고향 쪽을 바라봐도 끝이 보이지 않으니
소식은 그저 저 푸른 구름 속에 있을 뿐이다
백상루 (서기 1598년 9월 3일, 양력 추정)
저물녘 높은 누각에 기대어 서니
찬바람이 일어 저녁 물결을 흔든다
바위틈 가을꽃은 벌써 피어났고
물가에는 서리 기운이 유난히 짙다
고국을 떠나온 채 한 해가 저물어가니
어지러운 시절을 슬퍼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리
바닷가 산마루에 올라 슬피 읊조리나니
이 시구를 지어 먼 벗에게 전하고 싶구나
(용어)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양하"는 중국 남조 송나라의 시인 사영운과 가깝게 지내며 시를 주고받던 벗 양선지와 하장유 두 사람을 함께 부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마음을 나눌 만한 먼 벗을 가리키는 뜻으로 썼다.
대정강에서 짓다 (서기 1598년 9월 4일, 양력 추정)
말을 몰아 기나긴 강을 건너가노라니
일꾼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시름겹게 들려온다
여울물 소리는 가을이라 더욱 빠르게 흐르고
나뭇잎은 늦가을인데도 오히려 무성하구나
나무 저편으로는 돛단배가 나아가고
서리 내리기 전에 변방의 기러기가 지나간다
올 한 해 벌써 두 번째로 역마를 타는 몸이니
헛되이 흘려보낸 세월을 감히 원망할 수 있으랴
(당대 평가): 이손곡은 이 시를 두고 "가운데 두 연은 두보의 시와 같고, 또한 맹호연과 잠삼의 시와도 같다"고 평하였다.
(용어) 두보, 맹호연, 잠삼은 모두 중국 당나라 때의 이름난 시인들이다.
신안 (서기 1598년 9월 5일, 양력 추정)
저녁이 되니 풍류 소리도 흩어지고
향을 사르고서 객실 문을 닫아건다
관문과 강 저 멀리 외기러기 울음 아득하고
비바람 치는 밤 등불 하나만이 쓸쓸하다
눈발은 거문고 줄에 스며들어 차갑고
꽃잎은 붓끝에 날려 향기를 남긴다
사람 사는 일이란 본디 웃음과 즐거움을 귀히 여기는 법
그러나 어느 땅이 정녕 내 고향이란 말인가
곽산 동상 (서기 1598년 9월 6일, 양력 추정)
비단 자리에 애절한 거문고 소리 울려 퍼지니
아리따운 여인이 또다시 이 자리에 있구나
가을 구름은 저 바다 끝까지 펼쳐지고
저녁빛은 더디게 술잔 속으로 스며든다
자주 마주하다 보니 정도 어느새 익숙해지고
즐거움이 끝나갈 무렵엔 나그네 마음이 서글퍼진다
차가운 바위 틈엔 계수나무 꽃이 피어 있으니
숨어 사는 이를 부르는 새 시 한 수 지어봄 직하다
임반으로 가는 길에 짓다 (서기 1598년 9월 7일, 양력 추정)
시든 풀이 넓은 들판까지 이어져 있고
스산하게 서린 이슬 기운이 처량하구나
기러기는 북쪽 변방에서 날아오는데
나는 대동강 서쪽 땅에 있구나
말 한 필 몰아 외로운 성을 나서니
장정 위로 지는 해가 나직하게 걸렸다
황량한 역참이 점점 가까워지니
저녁 안개 낀 숲에서 갈까마귀가 운다
(용어) 장정은 옛길에서 나그네가 쉬어 가도록 세운 정자를 말한다. 5리마다 세운 것은 단정, 10리마다 세운 것은 장정이라 불렀다.
철산강을 건너다 (서기 1598년 9월 8일, 양력 추정)
지는 해가 오래된 나루에 걸렸는데
서풍을 맞으며 나 홀로 강을 건넌다
저녁 물결은 남쪽으로 빠르게 흘러가고
가을빛은 북쪽에서 짙게 밀려온다
흘러가는 한 해도 어느덧 다 저물어 가니
지금쯤 고향 동산은 어떤 모습일까
강 한가운데 이르자 문득 서글퍼지는데
강 위로 어부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고진강 (서기 1598년 9월 9일, 양력 추정)
옛 성곽에 가을 다듬이 소리 울리고
강가 들녘엔 나뭇잎이 흩날린다
어찌하여 나만 홀로 떠나가고
저 기러기처럼 함께 돌아가지 못하는가
햇살은 여위어 가고 연기가 막 피어오르는데
서리가 짙어도 풀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외로운 마음이 이토록 쓸쓸하고 서글픈데
겨울옷 한 벌 물어볼 사람조차 없구나
의주 (서기 1598년 9월 10일, 양력 추정)
한 해에 두 번씩이나 이곳에 다시 오니
마중 나온 아전을 보기가 부끄럽구나
높은 곳에 기대어 모처럼 한가로운 날을 얻어
먼 곳을 바라보니 시정이 절로 인다
물결 너머로는 드넓은 중원 땅이 펼쳐지고
술잔 앞으로는 잔잔한 발해 바다가 놓였다
자리를 뜨지 못하고 초승달 뜨기를 기다리니
옷소매에 맑은 이슬방울이 맺혀온다
대윤의 초대에 병으로 참여하지 못하다 (서기 1598년 9월 11일, 양력 추정)
새로 지은 정자에서 성대한 모임이 지난해와 같다는데
병든 몸이라 도리어 이 자리를 저버리고 마는구나
밤이 깊어지자 풍악 소리 멀리서도 귀를 시끄럽게 하니
사또께서는 아마 자지전에 흠뻑 빠져 계신 게 틀림없다
(허균이 남긴 설명): 여기서 대윤은 황진이라는 사람으로, 자는 경미이며 예조 판서를 지냈다. 대윤은 원래 고을을 다스리는 우두머리 벼슬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용어) 자지전은 옛 춤곡인 "자지"에 흠뻑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송나라의 구준이라는 사람이 이 춤을 매우 좋아하여, 그와 자리를 함께한 손님들도 으레 이 춤을 추었는데 한번 시작하면 하루가 다 지나서야 끝이 났다고 하여 이런 말이 생겼다.
옛일을 이야기하다 (서기 1598년 9월 12일, 양력 추정)
구름이 되었다가 비가 되었다가, 옛 초나라 누대의 꿈같은 이야기처럼
꿈속에서 서로 만나고 꿈속에서 헤어져 돌아온다
옷소매에 가득 밴 하늘의 향기를 그대는 아는가
나는 일찍이 봉래산 꼭대기까지 다녀온 적이 있다네
여섯 굽이 난간이 작은 연못을 굽어보고
연꽃과 연잎이 발 너머로 은은히 비친다
어젯밤 꾼 강남의 꿈은 이토록 또렷한데
그 꿈을 아는 이는 오직 저 여인의 비파 소리뿐이리
(용어) 첫째 수의 "구름이 되고 비가 되었다"는 표현은, 옛날 초나라 왕이 양대라는 곳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아침에는 구름이, 저녁에는 비가 된다는 여신을 만나 정을 나누었다는 옛이야기에서 온 말이다. 남녀 간의 애틋한 만남을 비유할 때 흔히 쓰였다.
나그네의 회포 (서기 1598년 9월 13일, 양력 추정)
옥 거문고 한 가락이 탁문군의 마음을 흔들었다더니
변방은 아득히 푸르고 해는 저물어간다
낙엽이 뜰 가득 쌓였는데 문은 벌써 닫혀 있고
기러기 울음소리만 유독 나그네의 귀에 파고든다
(용어) 탁문군은 한나라 때 사마상여가 거문고 가락으로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여인이다. 여기서는 거문고 소리에 마음이 흔들리는 정경을 빗대어 쓴 것이다.
가평에 돌아와 고을 원님에게 단술 대접을 받다 (서기 1598년 9월 15일, 양력 추정)
야자 잎은 차갑게 이슬을 머금은 듯하고
사탕수수즙은 옥병 속 얼음처럼 서늘하게 스며든다
이 시원한 맛이 목마름을 말끔히 씻어주니
사마상여가 병으로 앓아누웠다 한들 이제 무슨 걱정이랴
(허균이 남긴 설명): 여기서 고을 원님은 김공휘라는 사람으로, 김계휘의 아우이다.
(용어) 사마상여는 한나라 때의 이름난 문인으로, 효문원이라는 곳의 관리를 지내 후대 사람들이 그를 "문원"이라 불렀다. 그는 갈증을 심하게 앓는 병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시에서는 시원한 단술이 그런 갈증마저 씻어줄 만하다는 뜻으로 그의 이야기를 끌어왔다.
안주에서 장난삼아 쓰다 (서기 1598년 9월 17일, 양력 추정)
새로 한 단장이 얼굴에 곱게 어울려 아리땁고
집은 성 남쪽 두 번째 다리 곁에 있다 하네
밝은 달빛이 누각에 가득한데 그 사람은 보이지 않고
계수나무 꽃향기 속에서 홀로 퉁소 소리만 들려온다
서 황문을 따라 부벽루에 오르다 (서기 1598년 9월 19일, 양력 추정)
청쇄문의 신선 같은 낭관은 옥과 눈처럼 맑은 풍채를 지녔으니
붉은 누대에서 한가로이 흰 구름다리를 밟아 오른다
영롱한 채색 안개 속으로 은빛 궁궐이 열리니
혹시 항아가 자줏빛 퉁소를 부는 것은 아닐까
저녁놀도 무색하게 붉은 도포 빛이 곱더니
시흥이 훨훨 일어 소매 가득 바람이 인다
신선이 학을 타고 내려온 것은 아닌가 싶은데
맑은 옥피리 소리가 오색구름 속을 꿰뚫는구나
(용어) 황문은 궁궐을 드나들며 임금을 가까이 모시던 벼슬 이름이고, 악방은 잔치 자리에 마련한 장막 친 방을 말한다. 청쇄문은 궁궐의 문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이며, 항아는 달에 산다는 전설 속의 선녀이다. 여기서는 함께한 사람의 고운 풍모와 그 자리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신선 세계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송경에서 사내에게 고마움을 전하다 (서기 1598년 9월 27일, 양력 추정)
나그네길에 서로 만난 것은 해가 기울 무렵이었는데
옛 도읍의 풍경은 가을이 들어 더욱 서글프구나
수고롭게만 사는 내 인생을 그대는 도리어 비웃겠지
개성을 세 번이나 지나면서도 시 한 편 짓지 못했으니
(허균이 남긴 설명): 여기서 사내는 안경창이라는 사람이다.
포은의 옛집을 지나며 노래하다 (서기 1598년 9월 28일, 양력 추정)
포은 선생은 고려 말엽 그 어지러운 시절에도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늠름한 충절을 지키셨다
어찌 성리학을 전했는지 아닌지만으로 그분을 논하랴
선생이 조정에 계실 때는 나라가 그나마 목숨을 부지했거늘
송악산에 서린 왕기는 오백 년 만에 다하고
새 왕조의 상서로운 조짐은 하룻밤 새 수강궁으로 옮아갔네
선생은 관복 띠를 드리운 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깊은 숲에 웅크린 범처럼 의연히 앉아 계셨네
선죽교 다리 위에 뿌려진 한 줄기 피
그 이름은 서산의 봉우리처럼 우뚝하게 솟아났네
도읍이 남쪽으로 옮겨가 옛 저잣거리는 텅 비었지만
남아 있는 사당의 향불은 지금도 그윽이 피어오른다
나는 사내 형을 따라 선생의 옛집 터를 찾아가 보니
무너진 담장에는 들풀과 넝쿨만 어지러이 우거져 있었네
산바람은 쓸쓸히 불고 지는 해는 어둑해지는데
저녁 안개가 숲을 덮고 새들은 슬피 우는구나
옛일이 서글퍼 나도 모르게 눈물을 닦아내니
어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복을 내린다더니, 하늘도 그때는 취해 있었던가
사내대장부 한 번 죽는 일이야 본디 피할 수 없는 법
차라리 이 한 몸을 충의에 바치고 싶어라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삼군부 안에 칼날이 서릿발처럼 늘어서던 그날을
임금을 저버리고 적통을 바꾸어 하늘의 도리를 어겼던 그 일을
음모를 꾸며 놓기가 무섭게 사회는 목숨을 잃고 말았으니
중교에서의 그 갑작스런 죽음은 결코 사람이 내린 재앙이 아니었네
(당대 평가): 손곡은 이 시를 두고 "삼봉에게 만약 혼이 있다면 마땅히 혀를 내두르며 자기 죄를 스스로 인정할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용어) 포은은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를 가리키는 호이다. 그는 새 왕조를 세우려는 세력에 맞서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다가 선죽교라는 다리 위에서 죽임을 당했다. "송악산의 왕기"와 "새 왕조의 상서로운 조짐이 수강궁으로 옮아갔다"는 구절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일을 가리킨다. 삼봉은 조선 건국의 핵심 공신이었던 정도전의 호이다. 시의 끝부분에 나오는 사회는 중국 남조 송나라 사람으로, 어린 황제를 폐위시키는 음모에 가담했다가 훗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여기서는 이 사회의 옛일을 빌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음모에 가담했던 이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 하늘의 뜻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흔히 풀이된다.
길 위에서 (서기 1598년 9월 30일, 양력 추정)
구름 낀 산은 아득한데 나는 아직 돌아가지 못한 사람
검은 사모는 어느새 삼 년째 말먼지 속에 묻혀 있다
남으로 북으로 오가는 사이 어느덧 가을도 저물었으니
이 저무는 한 해에 또다시 임진강을 건널 일을 어찌 견디랴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좌막록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좌막록
배경: "좌막록"은 허균이 막료로 황해도 해주 일대에 머물던 시절에 지은 시 스물세 편을 모은 것이다. 해주와 인근 고을(신광사, 구월산, 풍천, 송화 등)을 오가며 겪은 일과 감회를 담고 있다.
해주 (서기 1599년 9월 20일, 양력 추정)
해서 지방에서도 손꼽히는 큰 고을
수양, 곧 해주는 그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번화한 곳이다
둘러친 해자는 겹겹이 참호를 두르고
딱따기 소리는 겹겹 성문을 엄중히 지킨다
그 안에는 수만 가구가 빼곡히 들어차 있고
늘어선 가게들은 구름처럼 모여 있다
밤낮으로 오가는 나그네와 손님이 몰려드니
수레와 말 소리 어찌나 요란한지
예로부터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라 했으니
이곳을 맡은 사람은 지금도 몹시 분주하다
근래에는 수령이 너무 자주 바뀌어
백성과 아전들이 새 수령 맞이하느라 여위어 간다
관아 건물은 풀더미처럼 황폐해지고
그릇들도 절반이나 사라져 버렸으니
손님이 찾아오면 싫은 기색이 역력하고
거친 밥과 나물 반찬으로 끼니를 때운다
하물며 나 같은 막료 신세는 어떻겠는가
그 고생이야 말로 다 하지 못한다
시큼한 술에 썩은 냄새 나는 안주를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답답하고 억울해진다
사신 행차는 대체 언제 떠나려나
나도 어서 내 수레를 재촉하고 싶다
서글피 고향 가는 길을 바라보니
해는 지고 가을 구름만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작은 잔치를 열어 주목 윤경에게 드리다 (서기 1599년 9월 23일, 양력 추정)
저물녘 부용당 문을 활짝 열어젖히니
맑은 향기가 침소 가득 엉겨 붙는다
한 동이 술을 열어 손님을 맞으니
천 마리 말이 동쪽에서 몰려드는 듯하다
산에서 내리는 비는 남은 더위를 씻어 내리고
숲을 스치는 바람은 저녁 서늘함을 재촉한다
평생 이렇게 실컷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으니
사군이 내주는 술잔을 기어이 다 비우고야 말리라
(용어) 후한 시대 북해 태수를 지낸 공융이라는 사람은 성격이 호방해서 그의 자리에는 늘 손님이 가득했고 술동이가 빈 적이 없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윤경이 베푼 이 자리를 그 옛 고사에 견주어 흥겹게 노래한 것이다.
신광사 (서기 1599년 9월 27일, 양력 추정)
산허리에 자리 잡은 화려한 궁전
상서로운 구름이 비단 창문을 떠받든다
이 절에 시주를 한 것은 공주로부터 비롯되었고
절을 지은 것은 고려 시대의 일이었다
땅에는 황금빛이 찬란하게 깔려 있고
누대는 은하수에 닿을 듯 아득히 솟았다
상서로운 빛은 삼계를 두루 비추고
천상의 음악은 하루 내내 울려 퍼진다
비스듬히 둘러선 회랑은 정교하고
삼엄하게 늘어선 불상들은 드높다
풍경 소리에 놀라 비둘기 날아오르고
여의주를 품은 용은 힘차게 뛰논다
꽃비는 옥으로 만든 일산을 적시고
등불 매단 틀은 붉은 하늘에 닿을 듯하다
그 장관에 참으로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윽한 구경에 잠시 가마를 멈춘다
부들자리 위의 공양은 맑고 정갈함을 베풀고
스님과 나눈 선문답은 적막함을 달래준다
불경들은 패엽 위에 또렷이 남아 있고
범종 소리는 산꼭대기까지 메아리친다
고통의 바다를 건너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니
자비의 배를 부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부처님 제자 사리자를 따라간다면
저 텅 빈 세계에서 서로 만날 수 있을는지
(용어) 등륜은 불교 행사 때 등불을 매다는 틀을 말한다. 당나라 예종 때는 성문 밖에 스무 길 높이의 등륜을 세우고 오만 개의 등불을 달아 마치 신비로운 꽃송이처럼 보였다고 한다. 패엽은 인도의 패다라수라는 나무의 잎으로, 옛 인도 사람들은 이 잎에 불경을 옮겨 적었다. 사리자는 석가모니의 십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스님의 시축에 적으며 서담의 운을 빌리다 (서기 1599년 9월 27일, 양력 추정)
송홧가루와 찻잎으로 지은 절밥을 먹고 나니
속세에 찌든 이 몰골로 푸른 산을 마주하기가 부끄럽다
숲의 달은 아직 둥글지 못해 넝쿨진 산길이 어둡고
산봉우리 구름이 막 걷히어 돌 누각이 차갑게 느껴진다
벼슬살이에 떠도는 신세 서글픈데 가을은 또 저물어가고
스님과 나누는 선문답에 붙들려 밤이 이토록 깊어졌다
도리어 한스러운 건 고달픈 이 삶이 늘 분주하기만 하다는 것
머리가 허옇게 세도록 아직도 말 위에서 일에 매여 있으니
금사사 (서기 1599년 10월 20일, 양력 추정)
이곳이 삼천대천세계에 가깝다면
노을빛 창은 사방으로 활짝 열려 있으리라
구름이 감싸안아 초승달은 숨어 버리고
밀물은 저녁 바람을 실은 채 밀려온다
지팡이를 짚은 스님은 언제나 이곳에 이를까
난새를 탄 신선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구나
옷깃을 헤치고 봉래섬 쪽을 바라보니
바다 위에 떠가는 이 흥취가 아득하기만 하다
(용어) 삼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삼천대천세계, 곧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백사정 (서기 1599년 10월 21일, 양력 추정)
눈이 쌓인 물굽이는 희고 깨끗하며
구슬을 깐 듯한 넓은 언덕이 굽이굽이 이어진다
은하수는 신선들의 세계로 통하는 듯하고
아름다운 바닷물은 얼음병처럼 맑기만 하다
발자국을 따라 걸으면 푹 빠질 것만 같고
솔가지는 눈에 덮여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긴 노래를 불러 밝은 달에게 화답하니
나야말로 술랑의 무리가 아니겠는가
(용어) 술랑은 신라시대 이름난 네 화랑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선의 문인 남곤이 지은 백사정에 관한 글에 따르면, 아랑포라는 곳은 옛날 화랑들이 노닐던 자리였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아랑포 (서기 1599년 10월 22일, 양력 추정)
외딴 수자리가 푸른 바다를 마주하고 서 있고
저무는 해는 파도치는 언덕으로 내려앉는다
연기가 피어오르자 외딴 섬은 자취를 감추고
바람 가득 안은 저녁 돛배가 돌아온다
구름 저편으로 옛 중국 땅이 가깝게 느껴지고
파도 속에서 해와 달이 함께 떠오르는 듯하다
층층이 솟은 저 누각은 신기루임을 알겠으니
사람들은 저것을 두고 봉래산이라 부른다
풍천으로 가는 길에 (서기 1599년 10월 26일, 양력)
단풍 숲은 비단결 같고 국화는 황금빛인데
걷다 보니 장정에 이르러 어느새 석양이 물든다
나그네 길 다니느라 계절 가는 줄도 몰랐는데
문득 놀란다, 내일이 벌써 중양절이라니
송화에서 중양절에 비를 만나다 (서기 1599년 10월 27일, 양력)
서리 맞은 배와 이슬 맞은 게를 안주 삼아 송순주를 올리는 날
집 떠난 나그네 마음은 중양절이라 더욱 답답하기만 하다
비바람이 온 성에 가득한데 나 홀로 앉아 있으니
국화꽃마저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한 나를 비웃는 듯하다
(용어) 옛날 중국 후한 때 환경이라는 사람이 신선술을 배우던 스승 비장방으로부터, 음력 구월 구일에 집안에 재앙이 닥칠 것이니 식구들에게 붉은 주머니에 산수유를 넣어 팔에 차고 높은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게 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대로 따랐더니 그날 집에 있던 닭과 개는 모두 죽었지만 식구들은 무사했다고 한다. 이 일에서 유래해 음력 구월 구일에 높은 곳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는 풍습이 생겼다.
길을 가다가 짓다 (서기 1599년 10월 28일, 양력 추정)
이어진 숲의 비단 같은 잎사귀들이 살짝 서리를 맞았는데
절 안으로 걸어 들어가니 나그네의 흥취가 더욱 길어진다
산 아래 핀 국화꽃은 술에 띄우기 딱 알맞으니
여기 머물러 중양절을 한 번 더 지낸다 해도 나쁘지 않으리
수증사 (서기 1599년 10월 29일, 양력 추정)
이 절의 불상은 고려 왕조 때 세운 것이고
요사채는 전란을 겪은 뒤에 새로 고친 것이다
시주를 한 것은 다름 아닌 내 선조의 힘이었고
건물을 지은 것은 이 절 스님들의 계획이었다
옛일에 마음이 아파 먼 후손인 내가 이곳에 절을 올리니
초상을 그린 족자가 고이 전해져 남아 있다
조용히 그 초상화를 우러러보니
서리와 이슬이 무덤가 소나무와 가래나무에 가득 내려 있다
(허균이 남긴 설명): 고려의 시중 양기라는 인물은 본래 원나라의 재상이었는데, 우리나라에 와서 공민왕이 그를 정승으로 삼았다. 이 절은 바로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원찰이어서 지금까지도 그의 초상이 보관되어 있고, 묘소는 이 산 아래에 있다. 나의 외조모가 바로 그의 칠대손이 되기 때문에 이 시에서 이 일을 이렇게 언급한 것이다.
잠시 돌로 지은 방을 빌려 앉으니
쓸쓸한 기운이 내 마음을 맑게 씻어 준다
비가 한바탕 지나가자 이끼 빛이 촉촉해지고
구름에 막혀 풍경 소리도 잦아든다
세상일이란 참으로 한바탕 꿈과 같은데
텅 빈 불문에 어찌 마음을 붙이겠는가
차라리 벼슬을 마다하고 은거했던 옛사람 허현도처럼
인끈을 벗어던지고 이곳을 오래도록 찾고 싶다
구월산 단군사 (서기 1599년 10월 30일, 양력 추정)
요임금 시절에 이 땅의 임금으로 서시어
신묘한 공덕으로 이 바닷가 땅을 평안케 하셨다
사당은 구월산에 자리를 잡아
그 향불이 몇천 년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우임금이 도산에서 제후들을 모았고
기자는 옥으로 만든 말을 타고 이 땅에 봉해져 왔다
동쪽 땅 백성들이 옛 임금께서 남기신 은혜에 보답하고자
산꼭대기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떠들썩하게 모인다
용연 (서기 1599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백 길이나 되는 깊은 웅덩이, 검은 물굽이가 둘러 있고
그 속에는 신령한 용이 만년 동안 서려 있다고 한다
땅 위 세상에는 해마다 가뭄이 심하게 드니
어서 우레와 비를 내려 이 뜨거운 세상을 씻어 주었으면
망해암 (서기 1599년 11월 1일, 양력 추정)
서쪽 봉우리에 자리한 이 절에 한번 올라보니
넓은 바다가 술잔처럼 작게 보여 마음이 후련해진다
만 리 밖으로 뻗은 돛대는 저 큰 나라와 통하고
하루 내내 울리는 범종 소리는 온 하늘을 울린다
제주도는 파도 저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고
봉래섬은 이 지팡이와 신발 바로 앞에 아득하게 있는 듯하다
비로소 깨닫는다, 이 장쾌한 유람이 온 우주를 다 둘러본 것임을
생황을 불며 학을 타고 오는 뭇 신선들을 불러 내리고 싶다
양산 (서기 1599년 11월 3일, 양력 추정)
온 집안이 고요히 가라앉고 밤기운은 맑고 스산한데
바람에 흔들리는 발 사이로 남은 촛불이 금빛 파초 잎에 반짝인다
노란 국화와 비단결 같은 돌이 그저 서로 짝하여 있으니
초록 소매에 붉은 치마 입은 여인을 굳이 부를 것도 없다
향기 스민 붉은 솜은 새벽 화장을 곱게 매만지고
구름 같은 쪽머리는 흐트러진 채 검푸른 눈썹이 길게 그려져 있다
원앙을 수놓은 휘장 속에서는 한밤중에 흘리는 눈물
비취빛 발 앞에는 하룻밤 사이 내린 서리 같은 슬픔이 어린다
남서에서 작은 술자리를 갖다 (서기 1599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막부의 일 중에 애오라지 짬을 내어
교외에 있는 별장에 잠시 들를 수 있었다
술자리를 열어 맑은 술을 따르고
손님을 붙잡아 노란 국화를 함께 구경한다
서리가 내려앉아 산의 모습은 야위어 보이고
하늘은 텅 비어 달빛만 가득하다
애처로운 쟁 소리는 줄이 끊어질 듯 이어지니
서글피 흘러가는 세월을 원망하게 된다
사면 조서를 맞이하고 차사원 홍난상 직장을 청하여 광원루에서 작은 술자리를 열다 (서기 1599년 11월 25일, 양력 추정)
(허균이 남긴 설명): 홍 직장의 이름은 난상으로, 홍이상의 아우다.
임금의 조서가 대궐로부터 나오니
임금의 글이 자줏빛 구름을 타고 이 땅에 내려온다
온 고을이 임금의 은택에 흠뻑 젖으니
수레와 일산이 그 귀한 글을 받들어 모신다
그물을 터 주었던 은나라 탕임금의 덕을 공경하며
만세를 부르며 요임금의 공덕을 기린다
성인의 기쁨은 온 세상 만물에까지 미치니
이 맑은 자리에서 그대를 만나니 참으로 기쁘다
화려한 누각에는 귀한 손님들이 모여들고
신선의 처소인 양 속세의 티끌은 사라졌다
옥으로 꾸민 자리에는 잔치의 기쁨이 펼쳐지고
노을빛 감도는 단술을 무르익은 흥 속에 나눈다
어스름 빛이 푸른 산에 잠겨 들고
초겨울 추위가 대자리 무늬 사이로 스며든다
노랫소리는 은근한 마음을 전하고
촛불 그림자는 살짝 취한 얼굴을 비춘다
별들은 처마 끝에 떨어질 듯 낮게 드리우고
파초 향기는 문 너머로 은은히 풍겨온다
흐르는 세월은 검푸른 귀밑머리를 재촉하고
웃음 섞인 농담은 기생들에게 맡겨 둔다
긴긴밤이라 정은 오히려 흡족하기만 한데
밝은 아침이 오면 차마 손을 놓고 헤어질 수 있을까
관서 땅 천 리 머나먼 길을 떠나며
고개 돌려 헤어진 벗을 그리며 눈물짓는다
(용어) 옛날 은나라 탕임금이 들에 나갔다가, 사냥꾼이 사방에 그물을 쳐 놓고 "온 세상 새와 짐승이 모두 내 그물에 걸리게 해 주소서" 하고 비는 것을 보았다. 탕임금은 이를 너무 심하다 여겨 그물 세 면을 터놓고 "피하고 싶은 짐승만 이 그물에 걸리게 해 주소서" 하고 다시 빌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제후들은 탕임금의 어진 덕을 크게 칭송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죄인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사면령을 이 옛 고사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황주의 사랑 노래 (서기 1599년 11월 28일, 양력 추정)
위에는 정방산이 있고
아래로는 족금계라는 시내가 흐른다
차라리 기생집 여인이 될지언정
장사꾼의 아내는 되지 말라
장사꾼 임은 강 위로 떠나가면서
팔월이면 돌아오마 약속했건만
중양절도 이미 다 지나가 버렸는데
빚어 놓은 술은 다 익었건만 어찌 이리 늦으시는가
화아라는 여인은 낮잠에 빠져 있고
학아라는 여인은 밤나들이에 빠져 있어
밤낮으로 저들끼리만 어울려 만나니
내 마음을 알아줄 이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나는 한 줄기에 두 송이 핀 연꽃처럼 변치 않는 사랑을 바라건만
임은 그저 멀리서 그리워만 하는 사랑을 좋아하시네
차라리 비단 빨래하러 시냇가에 나가는 편이 나으리니
그곳엔 오가는 길손들이 있지 않은가
밤에 태허루에 올라 (서기 1599년 11월 28일, 양력 추정)
몰래 좋은 임을 맞으려 했더니
뜻밖에도 상존 어른이 나타나서
누가 여기까지 오라 시켰냐고 묻는다
(용어) 태허루는 광원루라는 누각의 옛 이름인데, 허영양이라는 이가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때 이렇게 이름을 고쳐 불렀다. 상존은 호장이라는 지방 아전을 가리키는 호칭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성도 땅의 비단
꽃 사이로 나비가 날아다니는 듯 곱기도 한데
그대와 하룻밤을 함께한 값으로
춤출 때 입을 옷 한 벌을 지었다네
사신 행차는 해마다 돌아오니
임을 만날 생각에 그리움이 더욱 길어지는데
평양의 기생들만 없었더라면
흰 비단이 상자 가득 쌓였을 것을
한밤중에 창문을 넘어 들어가니
노란 명주 이불에서 짙은 향내가 풍겨온다
그대여, 부디 오리를 놀라게 하지 마오
오리가 놀라면 원앙까지 덩달아 놀란다오
옥류천 (서기 1599년 11월 29일, 양력 추정)
영롱한 물방울이 바위 꼭대기에서 떨어지니
그 빛깔과 향이 좋아 입에 넣으면 상큼하기 그지없다
이 물로 옥사발에 차를 달이면 조그만 둥근 달을 담아낸 듯하니
저 멀리 혜산의 샘물을 애써 길어 올 필요가 없구나
(용어) 혜산천은 중국의 이름난 샘으로, 예로부터 차를 달이기에 가장 좋은 물로 손꼽혔다. 이 시에서는 옥류천의 물이 그에 못지않게 좋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평산 산성 (서기 1599년 12월 1일, 양력 추정)
삼한이 먼저 이 땅에 나라를 세웠고
그 뒤 한사군이 국경을 나누었다
요충지에는 도호부가 자리를 잡았고
견고한 이 요새는 지도에도 기록되어 있다
천 년이 지나도록 험준한 요새로 남아
만 겹의 성가퀴가 아직도 산등성이를 두르고 있다
황폐해진 이곳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누구의 계획인가
바로 조정에서 세운 원대한 정책 덕분이다
회포를 적다 (서기 1599년 12월 12일, 양력 추정)
지방에 머물러 있는 이 나그네 신세는
재주는 있으나 불우했던 옛 문인 송옥과 다를 바 없다
헛된 영화란 참으로 한바탕 꿈일 뿐인데
세상일은 물밀듯이 자꾸만 나를 재촉한다
밤이 깊어가니 등잔불꽃이 활짝 피어나고
하늘은 아득한데 변방을 나는 기러기 울음소리 구슬프다
고향 관동 땅의 옛 가업은 이제 다 사라져 버렸으니
어디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용어) 송옥은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문인으로, 뛰어난 글재주를 지녔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불우하게 지낸 인물이다. 허균은 지방 관아의 막료로 떠도는 자신의 처지를 이 옛 문인에 견주었다.
운을 나누어 '산' 자를 얻다 (서기 1600년 1월 12일, 양력 추정)
(허균이 남긴 설명): 손곡과 오정이 내가 머무는 객사로 찾아와 모였는데 정시망도 뒤이어 왔다. 그래서 네 사람이 '눈이 온 산에 가득하다'는 구절로 운자를 나누어 시를 지었다.
병을 안고 누운 채 열흘을 보내니
쌓인 눈이 사립문마저 묻어 버렸다
어디에서 오셨는가, 시 짓는 저 노인네여
시름겨운 내 얼굴을 활짝 펴게 해 주는구나
등불을 돋우고 따뜻한 방에 둘러앉아
흰 두건을 높이 쓴 채 서로 마주 본다
정시망은 본래부터 얽매임 없이 시원스러운 사람이요
윤생 또한 맑고 한가로운 사람이라
격식을 잊고 실컷 웃고 이야기하니
좋은 이 밤도 어느덧 깊어만 간다
맛좋은 술로 서리 맞은 생선회를 씻어 내리고
고운 노랫가락으로 기녀에게 술잔을 권한다
타향에서 나그네로 지내는 신세임을 아주 잊었으니
아마도 여기가 서울 한복판이 아닌가 싶다
희부옇게 밝아 오는 새벽하늘엔 은하수가 돌고
아득한 하늘엔 초승달이 걸려 있다
흥이 다하면 이별이 오는 법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오
세상길은 원래 험하고 힘든 것을
사람이 살아 봤자 백 년일 뿐인데
빨리 달리는 수레 같은 세월을 오래 붙잡을 수야 있겠는가
몸이 이런 노역에 어찌 오래 얽매여 있으랴
끝내는 이 속세를 떠나야 할 것을
푸른 넝쿨 우거진 곳으로 돌아갈 계획이 있으니
머지않아 그 동산에서 마음껏 노닐 것이다
섣달그믐밤 (서기 1600년 2월 14일, 양력)
한밤중 문루에서 둥둥 울리는 저 북소리
사람 사는 이 세상의 기해년을 이렇게 떠나보낸다
폭죽 터뜨리고 산초꽃 노래 읊는 옛 풍속은 없을지언정
느린 노래와 잦은 비파 소리로 화려한 잔치를 벌인다
공명이란 술잔을 든 이 손에는 결코 들어오지 않으니
세월은 이불 덮고 한잠 자는 사이 덧없이 흘러가 버린다
내일 아침 서른두 살이 된다고 비웃지들 마오
그 옛날 반악도 서른두 살에 이미 흰머리가 가득했다니까
(허균이 남긴 설명): 올해 구월에 나도 비로소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렇게 적은 것이다.
(용어) 반악은 중국 서진 시대의 문인으로, 서른두 살의 나이에 이미 머리가 희끗희끗 세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남궁고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남궁고
배경: "남궁"은 예로부터 예조(禮曹)를 달리 이르던 이름이다. "남궁고"는 허균이 예조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지은 시 열네 편을 모은 것으로, 종묘 제사와 왕릉 행차 등 예조의 소임과 관련된 시들이 여럿 실려 있다.
마음에 품은 생각 (서기 1600년 4월 1일, 양력 추정)
공명이란 애초에 우리 같은 사람의 몫이 아니니
책이나 읽으며 그것과 정을 붙여 보자
깊은 산과 골짜기는 은자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루터에서 나를 건네줄 벗은 대체 누구인가
위태로운 벼슬길을 걷는 사이 검던 귀밑머리 세어버리고
가난한 옛 살림에는 흰 구름만 남았다
그래도 이제라도 돌아가자 노래 부른다면
산속의 아름다운 풀들은 날마다 봄빛이리라
지친 새는 언제쯤 둥지로 모여들까
외로운 구름은 유유히 떠갈 뿐 돌아올 줄 모른다
헛된 이름은 흰머리만 늘려 놓았는데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은 이미 청산을 저버리고 말았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나는 한자리에 눌러앉은 신세
천지는 좁아져 문지기 신세가 되었구나
음률에 얽매이지 않는 새 시를 쓰니
그나마 시름겨운 얼굴이 조금은 펴지는구나
(용어) 관영은 후한 때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요동 땅에 숨어 살던 선비로, 오십 년 넘게 나무 걸상 하나에 앉아 지내는 바람에 무릎이 닿는 자리가 움푹 팼다고 한다. "한자리에 눌러앉은 신세"는 이 옛이야기를 빌려 온 표현이다. "문지기 신세"는 어진 이가 밤마다 성문을 돌며 딱따기를 치고 그 삯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던 옛일을 빌려, 변변찮은 벼슬살이에 매인 자신의 처지를 빗댄 말이다.
대축이 되어 종묘에 제사를 올리다 (서기 1600년 8월 14일, 양력 추정)
큰 제사를 초가을에 올리게 되어
제관들이 한밤중부터 모여든다
사당 문이 열리자 향내가 감돌고
자리가 다 정해지니 옥패 소리 들려온다
북소리는 주로곡 가락을 전하고
섶 태우는 연기는 상서로운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정성을 다해 옥과 폐백을 올리니
밝으신 임금을 대신하는 정승의 모습이 보인다
(용어) 대축은 종묘나 사직 등에서 제사를 지낼 때 축문을 읽는 소임을 맡은 관원이다. 옛날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옥으로 만든 예물을 갖추고 단 위에서 섶나무를 태워 그 연기로 정성을 하늘에 알렸는데, 시 속의 "섶 태우는 연기"는 이를 가리킨다.
장생전에 나가 근무하다 (서기 1600년 8월 6일, 양력 추정)
후덕하신 그분을 사람마다 우러렀는데
신선놀음 가듯 갑자기 세상을 뜨셨다
동궁께서는 나물만 가려 드시고
성상께서는 소릉 쪽만 하염없이 바라보신다
황장목으로 짠 관에는 온갖 보물이 담기고
상여는 흰 장막으로 뒤덮였다
이 모든 일을 주선하는 것이 예조의 임무이니
일을 살피다 보면 절로 눈물이 가슴을 적신다
(용어) 장생전은 나라에 초상이 나면 관을 짜서 보관해 두던 관청이다. 당나라 태종은 아내 문덕황후를 소릉에 묻은 뒤에도 그리움을 못 이겨 궁 안에 높은 누각을 짓고 늘 그쪽을 바라보곤 했다. 하루는 신하 위징과 함께 누각에 올라 소릉 쪽을 가리키며 보라고 하니, 위징이 일부러 딴 곳을 보다가 "신은 폐하께서 선왕의 능을 보시는 줄 알았습니다. 소릉이라면 이미 보았습니다." 하고 아뢰자, 그날로 누각을 헐어 버렸다는 옛이야기가 전한다. 시에서는 이 이야기를 빌려 임금이 세상 뜬 이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황장목은 잣나무 가운데 속이 누런 부분으로 짠 관을 이르는 말이다.
중양절에 (서기 1600년 10월 15일, 양력)
중양절 좋은 시절에도 절로 긴 한숨이 나오니
모자가 벗겨져도 태연했던 맹가의 풍류가 부럽구나
찬비 내리는 성안, 사람 마음마저 쓸쓸한데
울타리 아래 노란 국화도 오늘은 볼 마음이 나지 않는다
(용어) 중양절은 음력 구월 구일을 이르는 명절이다. 옛날 진나라의 환온이 중양절에 여러 막료를 데리고 용산에 올라 잔치를 벌였는데, 바람이 불어 막료 맹가의 모자가 벗겨져 날아갔다. 그런데도 흥에 취한 맹가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태연히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능에 올라 짓다 (서기 1600년 12월 18일, 양력 추정)
이름난 지관들이 언덕에 모여 무덤 자리를 마련하니
휘장이 걷히자 정승이 나아가 예를 올린다
백발이 성성한 늙은 관원이 부장품을 옮기는데
두어 줄기 시든 눈물이 찬바람 속에 떨어진다
능이 있는 곳으로 가다 (서기 1601년 1월 24일, 양력 추정)
서글퍼라, 저 동쪽 능으로 가는 길을 바라보니
험한 길에 지친 여윈 말이 겨우 걸음을 이어간다
매서운 북풍은 너른 들판에 몰아치고
큰 눈은 이 산 저 산 가득 쌓여 있다
맡은 소임을 다하는 것이 나라의 정해진 예법이요
제사를 모시는 것도 시종하는 관원의 몫이라
추위를 무릅쓰고 영혼이 잠든 자리를 지키니
희끗희끗해진 이 귀밑머리를 어찌하리
장난삼아 봄맞이 글을 쓰다 (서기 1601년 2월 4일, 양력 추정)
반평생 낭관 노릇에 곤궁한 신세를 한탄하니
왕교처럼 신을 신고 섭현 땅으로 훌쩍 날아가고 싶구나
이제부터 나를 밖으로 보내줄 사람이 나타난다면
올해는 귀신의 야유만은 면할 수 있으리
(용어) 낭관은 여러 관청의 실무를 맡아보던 하급 관직으로, 한나라 때 풍당이라는 이가 나이 들도록 이 자리에 머물렀다는 옛이야기가 있어 기구한 벼슬살이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동한 시대 섭현의 현령이었던 왕교는 신묘한 술법을 부려 매달 초하루와 보름마다 조정에 나타났는데, 정작 타고 온 수레는 보이지 않았다. 임금이 이상히 여겨 지켜보게 하니 오리 한 쌍이 날아왔고, 그물로 잡아 보니 신발 두 짝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뒤로 "부석"이라는 말이 지방관을 다르게 이르는 표현으로 쓰이게 되었다. 진나라의 나우는 재주가 뛰어났지만 환온에게 크게 쓰이지 못했는데, 어느 날 동료의 승진을 축하하는 자리에 가장 늦게 나타나서는 "오는 길에 귀신이 나타나 '너는 남의 영전을 축하할 뿐 네 영전은 축하받지 못하리라' 야유하기에 부끄러워 늦었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시의 "귀신의 야유"는 이 고사를 빌려, 자신은 언제쯤 승진하겠느냐는 자조 섞인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마음에 품은 뜻을 부쳐 (서기 1601년 2월 20일, 양력 추정)
초야에 묻힌 미천한 몸을 밝으신 임금께서 알아주시어
예조에서 두 해 동안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오
이태백 같은 시가 있었던들 귀신인들 울리지 못했으랴만
사마상여 같은 부는 없으니 구름을 뚫을 재주가 없구나
세월은 물처럼 흘러가는데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가
시끄러운 세상의 시비는 귀에 담고 싶지 않다
초당에 봄이 와도 돌아가지 못하는 이 신세
산신령은 이미 어서 오라는 글을 내렸을 텐데
(용어) 이태백은 당나라의 시인 이백을, 사마상여는 한나라 때 부라는 화려한 문체의 글에 뛰어났던 문장가를 가리킨다. 허균은 자신에게 이 두 사람만 한 재주가 없음을 짐짓 겸손하게 한탄하고 있다.
작은 복사꽃 (서기 1601년 3월 19일, 양력 추정)
이월의 장안은 아직 봄을 느끼지 못했는데
담장 위 작은 복사나무에는 어느새 꽃눈이 텄다
시 짓는 이 늙은이를 향해 살포시 웃음을 지어 보이니
마치 하늘 끝에서 옛 벗을 만난 것만 같구나
명나라로 조회 가는 이자민을 전송하며 (서기 1601년 5월 29일, 양력)
이태백 같은 그대를 평소에 마주하면
한 시대에 몇 안 되는 인물임을 알겠네
그대와 세상을 함께한 것만도 다행이니
감히 어깨를 겨룬다고야 말할 수 있으랴
장부는 먼 이별을 가벼이 여기는 법
장한 광경은 바로 이제부터 펼쳐지리라
축하하는 행렬에 끼어 명나라 조정에 들어서면
천하의 선비들이 그대에게 마음을 기울이리
쓸쓸하여라, 훗날 화표주처럼 돌아오게 될까
맑고도 맑은 난하의 물이여
지난날 함께 노닐던 곳들이 아득히 떠올라
그대를 보내는 이 마음을 가눌 길이 없구나
(용어) 이자민은 이름이 안눌이며, 조선 중기 문신 이행(호는 용재)의 증손이다. 화표주는 무덤 앞에 세우는 돌기둥으로, 옛이야기에 요동 사람 정령위가 신선이 되어 학으로 변한 뒤 천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더니 성곽과 사람은 다 변하고 무덤의 화표주만 예전 그대로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여기서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돌아오게 될 쓸쓸한 처지를 빗댄 것으로 보인다. 난하는 중국 북방을 흐르는 강 이름이다.
성 동쪽 심씨의 별장에서 (서기 1601년 6월 1일, 양력 추정)
경치 좋기로 이름난 별장에
반갑게 불러 맞아 주는 벗이 있다
푸른 버들은 안개 너머로 겹겹이 늘어지고
꾀꼬리는 자리 옆까지 살갑게 다가온다
들에서 지은 밥은 줄풀 열매를 넣어 더욱 맛있고
산나물국은 순채를 넣어 향긋하다
입에 맞아 실컷 먹고 배를 두드리니
저절로 터지는 웃음에 꾸밈없는 참모습이 드러난다
(용어) 줄풀 열매와 순채는 옛사람들이 즐겨 먹던 물가의 곡식과 나물로, 여기서는 소박하면서도 맛깔스러운 시골 밥상을 나타낸다.
동료들과 동호에서 뱃놀이하고 느지막이 돌아오며 (서기 1601년 6월 3일, 양력 추정)
뙤약볕을 무릅쓰고 잠시 한강가로 나섰더니
어느새 청산이 내 시 속으로 들어와 있다
호수는 넘실넘실, 조각배는 마음대로 떠다니고
뱃놀이하는 이들은 모두 신선 같은 벗들일세
저녁놀 머금은 물안개는 나루터 숲에 낮게 엉기고
바람은 서늘한 그늘을 끌고 와 술잔 위를 스친다
흥에 겨워 돌아가기 싫어 말도 수레도 마다하는데
고개 돌려 성을 바라보니 초승달이 눈썹 같구나
(용어) 원문에서 함께 배를 탄 이들을 "신선 세계에 사는 이들"에 빗대어 표현했는데, 이는 실제로 신선을 만났다는 뜻이 아니라 뱃놀이에 함께한 벗들을 신선처럼 멋스럽게 추어올린 문학적 표현이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한 벗 박 아판에게 조운 벼슬자리를 구걸하며 보내다 (서기 1601년 6월 28일, 양력 추정)
동으로 만든 인장이 어찌 이 벼슬아치 집에까지 오겠냐마는
듣자니 조운을 맡은 관원의 임기가 다 찼다더군
지방을 감찰하는 관복을 얻어 입고 강과 바다 고을로 떠나가서
봉생대 아래에서 매화 구경이나 하고 싶네
(용어) 박 아판은 이름이 동량, 자는 자룡이다. "아판"은 판서를 보좌하는 버금 벼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벼슬 이름은 분명하지 않다). 조관은 조세로 거둔 곡식을 배로 실어 나르는 일을 맡아보던 관원이다. "지방을 감찰하는 관복"은 한나라 때 지방을 살피러 나가는 관원이 입던 수놓은 옷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여기서는 지방관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봉생대는 매화가 아름답기로 이름난 누대이다.
스스로 탄식하다 (서기 1601년 6월 29일, 양력 추정)
나는 본디 어리석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라
나이 서른둘인데 머리는 벌써 눈처럼 하얗다
수레바퀴 먼지에 굽실거리던 반악의 처지는 되기 싫고
오히려 수놓은 도끼를 지니고 자유로이 지낸 사상이 부럽구나
무거운 인끈과 긴 띠는 대체 누구의 몫인가
다가서기만 하면 정승의 꾸지람만 당하는걸
봉래산을 찾아가 생황 부는 학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복사꽃 핀 그 봄을 서왕모는 알려 주지 않는다
온 장안의 귀인들 얼굴이야 다 알지만
붉은 대문은 높디높아 만나보기 어렵구나
고을 하나 구걸하기가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려우니
삼천 리 약수마저 맑지도 얕지도 않다는군
(용어) 반악은 진나라 때의 미남 문인으로, 권세가 가밀의 수레가 지나갈 때마다 그 먼지를 바라보며 절을 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사상은 진나라 사람으로, 수놓은 도끼를 지니고 지방관으로 나가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지냈다고 전한다. 두 사람을 견주어, 권세에 아첨하는 처지보다는 자유로운 지방관의 삶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서왕모는 신선 세계에 산다는 여신으로, 삼천 년에 한 번 열린다는 전설 속 복사꽃(반도)을 가꾼다고 한다. 약수는 신선이 사는 곳을 둘러싸고 있어 배조차 뜨지 못한다는 전설 속의 강이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남정일록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남정일록
배경: "남정일록"은 허균이 과거 시험관으로 임명되어 호남(전라도) 지방으로 내려가던 여정과 그곳에서 지낸 일들을 담은 일기체 연작시 스물여섯 편이다. 전주·남평·담양·창평·장성·부안 등 전라도 각지를 오가며 시험을 감독하고 여러 인물과 교유한 기록이 담겨 있다.
과거 시험관이 되어 호남으로 떠나며 조정에 하직 인사를 올리고 짓다 (서기 1601년 3월 25일, 양력 추정)
이른 아침 궁궐에서 임금의 교서가 내려오니
총이말은 훨훨 내닫고 나는 어사의 관과 붉은 관복을 갖춰 입었네
감히 옛사람처럼 하늘과 사람의 이치에 통달했다 이를 수 있으랴
문장깨나 한다는 말도 그저 부끄러울 뿐
이 소임은 옛적 고을마다 반듯한 인재를 뽑던 그 권한을 이은 것이요
옛적 관리가 지방의 노래를 채집하던 그 직분과 같은 것이네
호남의 선비들에게 먼저 말을 전하노니
그 누구의 힘찬 붓끝이 무지개 같은 기운을 뿜어낼는지
(용어) 셋째 구절과 넷째 구절은 각각 하늘과 사람의 이치에 통달했다는 한나라 학자와, 뛰어난 문장으로 이름났던 한나라 문인에 자신을 견주면서도 겸손하게 부끄러움을 표한 대목이다. 다섯째 구절과 여섯째 구절은 옛 중국에서 지방마다 반듯하고 바른 인재를 천거하던 제도와, 조정 관리가 각 지방을 돌며 백성의 노래를 모아 민심을 살피던 옛 제도에 견주어, 자신이 맡은 시험관 소임의 뜻을 밝힌 것이다.
이른 새벽 판교원을 떠나며 (서기 1601년 3월 26일, 양력 추정)
새벽종이 울려 떠날 길을 재촉하니
다리 어귀를 벗어나자 짙은 안개가 자욱하다
언덕가 버드나무에는 봄빛이 살며시 돌아오고
말 앞의 봉우리에는 해가 막 둥실 떠오른다
한평생 글재주는 남보다 뒤떨어지는데
맑은 세상에서 공명을 구할 마음도 어느새 시들해졌다
조만간 이 몸 빼내어 속세 밖으로 떠날 터이니
남들이 나를 술집 심부름꾼이라 불러도 상관없다
스스로를 놀리며 (서기 1601년 3월 26일, 양력 추정)
승명전에서 밤새 숙직하니 촛불이 창가를 밝히고
일찍이 조서를 초 잡던 이 붓은 서까래처럼 굵었지
한 조정에 뛰어난 문장가가 둘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회음후야말로 나라에 둘도 없는 인재였네
요 몇 해 비방의 불길이 부질없이 뼛속까지 태우는데
늙어가도 내 시의 성채는 결코 항복하지 않으리
어찌하면 문장의 근원을 산골짜기 물처럼 기울여
천 리를 도도히 흘려보내 저 뛰어난 문장가의 강물에 마주 쏟을 수 있을까
(용어) 셋째 구절의 "둘"은 한나라의 역사가와 문장가로 나란히 이름을 떨쳤던 두 인물을 가리킨다. 회음후는 한나라 개국공신 한신을 말하며, 나라에 둘도 없는 인재라는 평을 받았던 인물이다. 마지막 구절의 강물은 진나라의 어느 문장가가 지녔던 뛰어난 글재주를 강물에 비유한 옛 표현을 빌려 온 것으로, 자신의 문장도 그에 못지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이른 아침 천안으로 향하면서 (서기 160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누런 진흙길이 미끄러워 말 걸음이 더디니
지친 나그네들이여 서로 탓하며 원망하지 마시게
나는 스스로 문장이 있어 이 적막함을 달래니
명예와 지위가 어긋난들 무엇을 한탄하랴
사람들 틈에서 옥을 품고 있으면 그것만으로 죄가 되고
어둠 속에서 구슬을 던지면 오히려 의심을 사는 법
이제 떠나간들 몸이 더 멀어진다고 근심할 것 없네
매화 소식은 벌써 남쪽 가지까지 이르렀을 테니
(용어) "옥을 품은 죄"는 옛 책에 나오는 말로, 평범한 사람이 값진 옥을 지니고 있으면 그 자체가 화를 부르는 죄가 된다는 뜻이다. 뛰어난 재능이나 값진 것을 지니고 있으면 오히려 남의 시기와 의심을 받기 쉽다는 것을 빗댄 말이다. "어둠 속에서 구슬을 던진다"는 표현은 당나라 어느 시인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상대가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밀면 오히려 의심만 산다는 뜻이다.
여산에서 윤지중을 만나다 (서기 1601년 3월 30일, 양력 추정)
붓을 귀에 꽂고 승명전에서 대궐을 지키며 숙직하던 그 시절
임금이 내리신 향내음이 시종하는 신하들 옷에 함께 배어들었지
천균성이 밤을 비추자 천 척의 배가 모여들고
수놓은 관복이 봄볕에 빛나며 네 필 말이 나란히 치달렸네
나그네 길에서 이불을 나란히 하고 자는 기쁨이 이보다 더할까
말고삐를 나란히 하며 아름다운 봄 경치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강남 만 리 밖에 꽃이 곧 피어날 터인데
대궐 문 마주 보며 별을 바라보던 그날을 능히 떠올릴 수 있을는지
총이말을 타고 잠시 지방 벼슬살이를 나서고 보니
고개 돌려 청운의 뜻을 돌아보매 그 자취가 점점 아득해지는구려
요즘 사람들이 아무리 가난을 좇는 내 신세를 비웃는다 해도
벗이라면 어찌 절교의 글을 쓰겠는가
봄이 오니 꽃과 새가 이별의 한을 더욱 보태고
늙어가니 숲과 샘이 있는 옛집이 그리워지네
우습구나, 밝은 조정에서 그대도 나도 다 함께 뜻을 펴지 못한 신세라니
언젠가 다시 나란히 벼슬아치 인끈을 차고 부름을 기다릴 수 있으려나
(용어) 지중은 윤의립의 자이다. 천균은 하늘의 창고를 맡았다는 별 이름이다. 둘째 수에 나오는 "가난을 좇는 글"은 한나라 문장가 양웅이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두고 지은 글이며, "절교의 글"은 진나라 혜강이 벗에게 절교를 선언하며 써 보낸 글이다. 허균은 이 두 고사를 빌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곤궁한 처지를 비웃더라도 참된 벗은 자신을 저버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나타냈다.
전주 (서기 1601년 3월 31일, 양력 추정)
전주는 태조 임금의 고향이자 나라의 두 번째 도읍
아름다운 기운이 용이 되어 서리니 왕업이 웅장하다
개와 닭조차 지금까지 이 고을을 알아보고
바람과 구름은 길이길이 이 고향 마을을 지켜주네
태평하던 시절엔 관아 건물들이 우뚝하고 빛났는데
난리를 겪은 뒤에도 산천만은 여전히 울창하구나
남쪽 지방의 큰 고을로는 첫손에 꼽히니
문신인 내가 어찌하면 이 고을 수령 자리를 얻어볼까
(용어) 셋째 구절의 "고향 마을"은 원래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의 고향 마을 이름에서 온 말로, 훗날 임금의 고향을 가리키는 말로 두루 쓰이게 되었다. 전주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본관이므로 이렇게 견주어 말한 것이다.
양진당 (서기 1601년 4월 1일, 양력 추정)
봄 그늘이 아득하게 드리워 처마 끝을 비추는데
동쪽 곁방에 베개 베고 누웠더니 어느새 한낮을 알리는 닭이 우네
바람은 하늘거리는 향 연기를 난간에 가늘게 휘감고
비는 산의 푸른빛을 머금은 채 발 위로 나직이 떨어지네
난간의 꽃은 무언가 아는 듯 사람을 맞아 웃음 짓고
골짜기 새는 정이 많아 나그네를 벗 삼아 지저귀네
이별의 회포 때문에 넋이 새삼 끊어지는 것만은 아니니
그리운 고향 옛 동산이 지금 저 서쪽 물가 다리 너머에 있어서라네
(용어) 양진당은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에 있던 정자이다. 마지막 구절의 "서쪽 물가 다리"는 중국 장안 근교에 있던 다리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예로부터 고향이나 그리운 곳을 가리키는 말로 즐겨 쓰였다. 여기서는 허균이 두고 온 자신의 고향 집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옛 장성으로 향하며 (서기 1601년 4월 2일, 양력 추정)
노령 고개를 막 넘어서니 경치가 문득 아름다워
무성한 향초들이 시냇가 언덕을 뒤덮었구나
목련꽃 꽃술이 흩날리며 봄기운을 재촉하는데
두견새 우는 소리는 한스러워 나그네 마음을 어지럽히네
이 몸 밖의 공명이야 얻든 잃든 무슨 상관이랴
세상의 영화와 쇠락도 그저 되어가는 대로 맡겨두리라
자연 속에 숨어 살자던 약속이 있으니 나는 언젠가 그리 숨으리라
어찌 늙기를 기다렸다가 그제야 벼슬을 그만두겠다 하겠는가
광주에서 즉흥으로 쓰다 (서기 1601년 4월 3일, 양력 추정)
봉생정 가에서 홀로 서성이니
옛 문장가가 스승을 그리며 화려한 글을 짓던 그 흥취조차 나지 않는구나
산새는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듯 지저귀고
들매화는 옛 벗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듯하네
시름이 스며들어 희끗한 귀밑머리가 온통 흰 눈발 같고
한이 맺혀 여린 마음은 한 줌 재가 되어버렸네
관사에 밤이 깊어 물시계 소리도 그치고 회랑에 달빛마저 어두운데
굽은 난간 깊숙한 문틈으로 그림자만 어른어른 비치네
(용어) 둘째 구절의 옛 문장가는 초나라의 송옥을 가리킨다. 그는 스승 굴원을 그리며 여러 편의 화려한 글을 지은 것으로 유명한데, 여기서는 그런 흥취조차 낼 수 없을 만큼 쓸쓸한 심경임을 견준 것이다.
능양의 시험장에서 영광 군수 경섬과 금산 현감 구의강을 만나 함께 시험장에 들어가다 (서기 1601년 4월 4일, 양력 추정)
연주관 안에 가벼운 수레를 멈추어 세우니
다행히도 풍류 넘치는 두 옥 같은 벗이 있었네
시험장에서 이들과 함께 시험을 치르게 되니 기쁘기 그지없고
낯선 고장에서 정겨운 벗들과 어울리게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사헌부에서 홀을 잡고 서 있던 예전 모습을 우러러보았고
홍문관에서 경서를 펴놓고 가르치던 그 뒷모습을 우러렀었지
잠시 조정의 반열을 떠나 수고로이 지방 수령으로 나왔으니
이는 임금께서 본디 영남 백성을 근심하셨기 때문이라네
(용어) 시험장은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가시나무 울타리를 둘러친 곳으로, 응시생과 시험관 모두 그 안에 갇혀 시험을 치렀다.
새벽녘 시험장에 앉아서 (서기 1601년 4월 5일, 양력 추정)
새벽 횃불이 휘황하게 가시울타리를 따라 늘어서고
뜰 아래에는 흰 도포 입은 선비들이 구름처럼 늘어섰네
안개는 곧 개려 하고 밤하늘엔 여전히 서린 기운이 있는데
어느 준마가 온 세상의 뭇 말들을 몰아내고 으뜸이 될는지
모두들 활을 당겨 과녁을 뚫겠노라 자랑하지만
몇 사람이나 성루를 무너뜨릴 실력을 갖추었을는지
예조에서 시험관 노릇 하며 먹물로 배를 채운 지 오래건만
오늘 아침 이 시험을 관장하게 된 것이 못내 부끄럽구나
(용어) 셋째 구절의 "서린 기운"은 옛날 진나라 사람이 밤하늘에 뻗친 검의 기운을 보고 땅을 파서 명검 두 자루를 찾아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뛰어난 인재가 세상에 묻혀 있음을 뜻한다.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는 날 술을 마시며 응시생들의 글을 풀이하다 (서기 1601년 4월 7일, 양력 추정)
급제자 명부를 처음 펼치니 흐린 먹빛이 뒤섞여 있고
바람과 우레 같은 세 관문을 거쳐 마침내 어렵다는 문을 뛰어올랐구나
옥돌을 품은 죄로 다시 발꿈치를 베이게 할 수야 있으랴
그렇다고 인재 하나 놓쳐 또 다른 억울함을 남길까도 두렵네
달나라로 가는 길은 열렸으나 계수나무 가지는 아직 하나 남았으니
잔치 노래를 부르며 벗들과 술잔을 나누어 보세
술잔을 마주하고 여러 응시생들을 위해 스스로 축원하노니
본디 품은 뜻은 배부르고 몸 따뜻한 데 있지 않았음을 잊지 마시게
(용어) 둘째 구절의 "어렵다는 문"은 황허강 상류의 협곡을 가리키는데, 잉어가 이 여울을 뛰어오르면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어 예로부터 사람의 입신출세를 빗대는 말로 쓰였다. 셋째 구절의 옥돌 이야기는 초나라의 어느 이가 귀한 옥돌을 얻고도 알아보는 이가 없어 두 차례나 발꿈치를 베이는 형벌을 당했다가 훗날에야 인정받았다는 옛이야기에서 온 것으로, 재능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외면당하는 것을 뜻한다. 여섯째 구절의 잔치 노래는 《시경》에 실린 노래로, 임금이 신하와 귀한 손님을 불러 잔치를 베풀 때 부르던 곡이다.
나그네 숙소에서 붓 가는 대로 쓰다 (서기 1601년 4월 8일, 양력 추정)
봄빛이 궁궐에서 바라보던 것과 견주면 어떠한가
엷은 그늘이 아득한데 살구꽃마저 차갑게 느껴지네
병든 몸으로 술잔을 마주하니 마음이 먼저 움츠러들고
늙어서 책을 읽으려니 흥마저 시들해지는구나
이 관을 벗어 궁궐 북쪽 문에 걸어두고 싶은 마음뿐
몸이 굳건하니 탄핵인들 어찌 두려워하랴
잠겼다 떴다 하며 그저 이 인간 세상을 구경할 뿐이니
밝은 시절에 벼슬을 벗어던지는 일조차 오히려 쉽지가 않구나
청명 절기의 풍물은 어느새 저물어 가고
동산의 붉은 꽃은 다 떨어져 땅 가득 얼룩졌네
하늘 밖에 머무는 저 구름은 어느 먼 극락의 그곳이런가
꿈속에서 본 향긋한 풀은 어느 신령한 산자락이런가
가벼운 추위 쓸쓸한데 봄기운은 장막 속으로 스며들고
보슬비 조용히 내려 대낮에도 문을 닫아걸었네
얼룩무늬 발을 스스로 걷어 올리고 짐짓 북녘을 바라보니
아득한 봉우리 안개 저편에 마치 쪽 찐 머리처럼 점이 찍혔구나
(용어) 첫 수의 "궁궐 북쪽 문"은 옛날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날 때 관을 벗어 걸어 두었다는 문으로, 벼슬에서 물러나고 싶은 마음을 나타낸다. "탄핵"은 사헌부 관원들이 잘못을 규찰하던 일을 가리킨다. 둘째 수의 "먼 극락"과 "신령한 산자락"은 불교 경전에 나오는 이상향으로, 여기서는 고향이나 그리운 곳을 빗댄 표현이다.
최 정언의 집에서 조촐한 술자리를 갖다 (서기 1601년 4월 9일, 양력 추정)
지난날엔 임금을 가까이 모시며 대궐 안뜰에 엎드리더니
이제는 임금의 은혜로 전원으로 돌아감을 허락받았네
솔과 국화 심긴 오솔길을 열어두었으니 여기서 여생을 마칠 만하고
집 안에 술상을 벌여놓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정겹구나
바람은 늦게 핀 꽃을 흔들며 새소리를 휘감고
비는 깊은 대숲에 머물러 차 달이는 연기를 촉촉이 적시네
한나절을 훌쩍 이 맑은 흥취에 마음껏 젖어 보았으니
이제야 알겠구나, 평지에도 신선이 있다는 것을
(용어) 최 정언은 이름이 홍재, 자는 덕여이며 화순 사람이다.
김영광의 집에서 장난삼아 쓰다 (서기 1601년 4월 10일, 양력 추정)
먼 서쪽 하늘로 상서로운 기운이 아득히 바라뵈고
남극 노인성이 고운 빛을 펼쳐 붉은 하늘이 환하게 밝았네
시가 완성되니 겹겹이 쌓인 옥구슬을 사람 앞에 던진 듯 찬란하고
경치 좋은 이 자리엔 온갖 꽃이 난간을 둘러싸 곱기도 하구나
진귀한 음식은 바다의 용왕이 뛰어난 맛을 실어 보낸 듯하고
옥술잔에는 어느 노파가 신선의 술을 올리는 듯하네
계수나무 향이 달빛에 실려 오니 달나라 궁전이 지척인 듯
혹시 옥퉁소 잘 부는 그 신선 같은 이가 어디선가 불고 있는 것은 아닐지
(용어) 첫째와 둘째 구절은 옛날 함곡관을 지키던 관원이 누각에 올라 사방을 살피다가 성인이 이곳을 지나가리라는 조짐으로 서쪽 하늘의 상서로운 기운을 보았는데, 과연 훌륭한 사상가를 만나 귀한 가르침을 전수받았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귀한 손님이 찾아올 상서로운 조짐을 뜻한다. 마지막 구절의 옥퉁소 부는 이는 옛이야기 속에서 퉁소를 잘 불어 봉황을 부르고 마침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적인 인물을 가리킨다. 영광 현감 김공희는 아버지가 김윤이다.
남평으로 가는 길에 (서기 1601년 4월 16일, 양력 추정)
한가로이 역마를 타고 너른 들판을 밟아가니
들 밖의 인가들은 어느새 새 이엉을 얹었구나
봄이 저물어 언덕의 꽃잎은 바람에 우수수 흩날리고
비가 개어 모래톱의 오리들은 꽥꽥 지저귀네
이제 가면 저 언덕과 동산에 이 몸을 맡겨 늙어가는 것이 마땅하리
그런데 근년 들어 산속의 벗들마저 나를 멀리하니 이를 어찌하리
졸렬한 벼슬살이에 겨우 말단 벼슬 노릇 하는 신세가 가엾은데
내 속뜻을 풀어줄 사람이 어찌 없으랴
(용어) 여섯째 구절의 "산속의 벗들"은 원숭이와 학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연 속에 숨어 사는 삶을 함께하던 벗을 뜻한다. 마지막 두 구절은 한나라 문장가 양웅이 너무 청렴만 지키다가는 녹봉과 벼슬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조롱을 받자 스스로 글을 지어 해명했던 옛일을 빌려, 자신의 곤궁한 벼슬살이를 그에 견준 것이다.
남평의 나그네 밤 (서기 1601년 4월 17일, 양력 추정)
온돌방에 배를 깔고 곤히 잠들었다가 문득 깨어보니
남쪽 처마 끝에는 어느새 둥근달이 높이 떠올랐네
궁중 악부에서 새로 지은 노래를 들을 복은 없을망정
예전 대궐에서 하사받은 도포 한 벌은 자랑스레 지녔다오
상서로운 안개가 장막을 감싸고 향로에서는 향 연기가 피어오르고
따뜻한 향기 머금은 이슬은 노란 복사꽃을 짓누르네
문득 화들짝 놀라 봉래산의 꿈에서 깨어나
열 폭 고운 종이에 채색 붓을 적셔 시를 써 내려가네
해양에서 품은 생각을 적다 (서기 1601년 4월 20일, 양력 추정)
거친 뜰은 적막하여 오가는 발길도 끊겼는데
온종일 나른하게 졸음으로 병든 몸을 달래네
향긋한 풀은 무성하여 신발이 파묻힐 지경이고
푸른 그늘은 어느새 난간 위까지 짙게 드리웠네
시름 속에 바라본 풍경은 봄이 다 가버렸음에 놀라게 하고
시를 읊고 나니 늙어가는 이 심정을 어찌할거나
오래 앉아 있다가 문득 꾀꼬리 소리를 들으니
그 영롱한 소리가 마치 나를 원망하는 노래 같구나
작은 뜰을 두른 회랑에 해가 어느덧 기울었으니
은사발에 갓 우려낸 새 차 맛이나 보아야겠다
못 위에 점점이 심긴 연꽃은 이제 막 잎을 띄우려 하고
비를 맞은 장미는 어느새 꽃을 활짝 피웠네
시름과 병이 늘 뒤엉켜 나는 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아름다운 봄빛이 다 저물어가니 나그네는 집 생각뿐이네
시를 지어 스스로 이별의 한스러움을 적어보지만
새벽놀을 노래하던 그 풍류와는 견줄 바가 못 되는구나
(용어) 해양은 지금의 광주 지역을 이르던 옛 이름이다. 첫 수의 "나를 원망하는 노래"라는 구절은, 허균이 이때 향시의 시험관으로 지방에 내려와 있던 처지를 스스로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둘째 수의 "이별의 한스러움"은 남북조 시대의 어느 문장가가 이별과 한스러움을 다룬 글을 잘 지은 것으로 유명했던 데서 따온 표현이다.
윤씨의 별장에서 베푼 잔치 (서기 1601년 4월 22일, 양력 추정)
술잔을 받든 곱게 단장한 여인들이 세 줄로 늘어서서
파초잎 술잔에 향기로운 술을 따라 손님에게 권하는구나
어느 이름난 집안은 예로부터 부엌 음식 맛 좋기로 자랑했다더니
또 다른 집안의 지극한 효심이 오늘도 이어지는 듯하네
화로 연기 자욱한 가운데 바람은 장막을 걷어 올리고
꽃안개 자욱한 회랑에는 달빛이 돌아드는구나
이제야 알겠구나, 벼슬 없는 부자라도 큰 제후에 견줄 만하다는 것을
세상에서 왕후장상이라는 게 대체 무슨 대단한 것이란 말인가
(용어) 이 잔치를 베푼 윤씨는 남쪽 지방의 부자이다. 셋째 구절의 이름난 집안은 한나라 때 부엌 음식이 맛좋기로 이름났던 집안을 가리킨다. 넷째 구절은 한나라의 한 인물이 닷새마다 돌아오는 휴가 때면 아버지의 속옷을 몰래 가져다 손수 빨아 드릴 만큼 지극한 효자였다는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일곱째 구절의 "큰 제후"는 벼슬은 없어도 넉넉한 살림을 가진 사람이 제후에 못지않은 부를 누린다는 뜻으로, 세속의 벼슬이나 신분보다 실질적인 삶의 풍요로움을 더 높이 산 표현이다.
담양의 비 오는 밤 (서기 1601년 4월 24일, 양력 추정)
문루의 종소리가 뎅그렁 울려 밤이 깊었음을 알리니
비단 이불 속 짙은 향기에 젖었던 꿈이 문득 깨어나네
귀한 술 한 잔 몰래 훔쳐 마시는 풍류쯤이야 해로울 것 없지만
갈증을 달래겠다고 신선의 이슬이나 바라는 헛된 욕심은 내키지 않네
등불 꽃은 또렷또렷 홀로 웃음 짓게 하고
처마의 대나무는 우수수 빗소리를 실어 보내네
비단 장막에 새벽 추위 스며들어 사람은 쓸쓸한데
굽은 난간 실버들 사이로 꾀꼬리 소리만 들려오는구나
(용어) 넷째 구절은 한나라의 어느 임금이 불로장생을 바라며 이슬을 받으려고 세운 구리 기둥 이야기를 빌린 것이다. 그 임금은 그 이슬을 마시면 갈증의 병을 고치고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헛된 욕심을 부리며 무언가를 갈구하는 태도를 빗댄 것이다.
창평에서 임자승을 만나다 (서기 1601년 4월 25일, 양력 추정)
낯선 고장에서 서로 만나니 반가운 눈빛이 서로 같고
남녘 하늘에 이렇게 벗들이 모일 줄 그 누가 헤아렸으랴
옛사람이 병을 얻은 것은 함부로 술을 마셔서가 아니라 아내를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었고
또 다른 옛사람을 위해 먼 길을 달려온 것도 형체를 잊은 깊은 사귐 때문이었지
지팡이 짚고 산골 서당을 노닐던 그 시절을 끝내 잊지 못하니
물가 정자에서 노래 듣던 잔치야 부디 그리워 말게나
얻고 잃음이란 그저 한바탕 봄꿈에 지나지 않음을 진작 알았으니
차라리 옛 현인을 따라 세상 밖에 노니는 도리나 배워보세
승화전 밤 당직 자리에서 궁중 이불을 걷고 물러나
고을을 맡겨 부모 봉양케 하신 임금의 은혜가 두터웠지
강 언덕에서 아쉽게 이별하며 일찍이 손을 맞잡았더니
이제 산골 객관에서 반갑게 다시 만나 등불 심지를 돋우네
트이고 막힘은 오직 하늘에 달렸음을 모름지기 알아야 하니
낮은 벼슬아치라 불린들 그것이 내 명성에 해가 될 것은 없지
흰머리 되어 조서나 짓는 것도 이제는 임금을 보필하는 자리가 아니니
봄이 오면 내 꿈은 늘 강릉으로 돌아가는구나
(용어) 임자승의 이름은 임만이다. 첫 수의 "벗들이 모일 줄"이라는 구절은 별 두 개 이상이 한데 모인 것, 또는 견우와 직녀 두 별을 가리키는 옛 표현을 빌려, 벗들이 서로 만난 것을 별에 빗댄 것이다. 셋째 구절의 옛사람은 삼국 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아내를 깊이 사랑하다가 아내가 죽자 자신도 슬픔에 겨워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넷째 구절의 두 옛사람은 진나라의 어느 명사와 그를 사모한 벗을 가리키는데, 그 벗은 그리울 때마다 천 리 길을 마다 않고 수레를 달려 찾아왔다고 한다. 이 두 고사는 모두 벗 사이의 깊은 정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동당에 들어가서 짓다 (서기 1601년 4월 26일, 양력 추정)
두루 통달한 인재는 예로부터 모든 방면에 다 뛰어나기 어려운 법인데
하물며 세 차례 시험마다 요구하는 문체가 저마다 다름에랴
송나라의 한 학자는 화려한 문체보다 실질적인 글을 중시했고
한나라의 한 학자는 오로지 역사서 한 가지 학문에만 매달렸지
한 분야에만 전념한다면 혹 옛 경전학자들을 따를 수 있을지언정
두루 배운다 한들 어찌 공자와 주공의 경지를 이을 수 있으랴
해가 뜰의 절반에 드리우도록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 답안을 써 내려가니
그 가운데 몇 사람이나 씩씩하고 날래어 으뜸 자리를 차지할는지
(용어) 동당은 과거 시험 가운데 문과의 정식 시험을 이르는 말이다. 셋째 구절의 학자는 송나라의 사마광을 가리킨다. 넷째 구절의 학자는 한나라의 동중서로, 역사서인 《춘추》 연구에 뛰어났다. 다섯째 구절의 "옛 경전학자들"은 한나라 시절 각각 시와 역사 경전에 정통했던 학자들을 가리킨다.
장성에서 조카 박씨와 헤어지다 (서기 1601년 5월 7일, 양력 추정)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십 년 묵은 속마음을 털어놓고
애써 꽃 앞으로 나아가 술잔을 마주하며 시를 읊조리네
풍진 세상에서 오만한 관리 노릇 하기도 이제는 싫증이 나니
산수 사이에서 맑은 거문고 소리를 이제 누구와 함께 즐기리
하늘 끝에서 살붙이와 헤어지는 이 마음이 못내 아프고
봄이 지난 동산 숲에는 어느새 여름 그늘이 짙어가네
만나고 헤어짐이 하도 분주하여 남은 날이 짧기만 한데
문득 흠칫 놀라 떨어지는 눈물이 옷깃을 흠뻑 적시는구나
(허균이 남긴 설명): 박생은 이름이 종현, 자는 정백이며, 거문고를 잘 탔으므로 이 시의 넷째 구절에서 그 일을 언급하였다.
부안에서 도위 민인길을 만나다 (서기 1601년 5월 9일, 양력 추정)
신성 도위의 내실은 그윽하고 깊기도 한데
잠시 말 멍에를 풀고 바람 부는 마루에 몸을 붙여 잠들었네
넓은 바다에 구름이 자욱이 깔리자 어느새 섬이 사라지고
변산에 해가 솟으니 잠깐 사이 안개가 걷히는구나
아리따운 이의 묘한 말솜씨로 시를 막 읊조리는데
도위와 나눈 정겨움에 술기운이 어느덧 거나해지네
짙은 그늘 속 꾀꼬리의 온갖 소리를 다 듣고 나니
수놓은 병풍 아래 높은 베개에 기대어 강남을 꿈꾸네
(용어) 도위는 조선 시대 임금의 사위나 왕실과 혼인으로 맺어진 이에게 내리던 벼슬이다. 민인길은 자가 숙정이며, 진사 민인백의 아우이다.
덕은관에 홀로 앉아서 (서기 1601년 5월 10일, 양력 추정)
먼 산이 창문을 향해 눈썹 끝처럼 둘러섰는데
남녘 하늘을 바라보니 그림 같은 처마가 훤히 트였네
계절은 거침없이 흘러 봄은 어느새 다 가버렸고
술상은 초라하여 도리어 마음이 씁쓸해지는구나
안개는 늘어진 조릿대를 감싸며 붉은 난간과 나란히 어우러지고
바람은 흩날리는 꽃잎을 걷어차 수놓은 발에 흩뿌리네
만 리 밖 이별의 회포는 아무리 애써도 삭일 수가 없으니
구름 밖으로 떠오를 밝은 달이나 기다려 볼 밖에
금강을 건너면서 (서기 1601년 5월 12일, 양력 추정)
곱게 꾸민 배 두 척이 가파른 바위에 나란히 매여 있는데
지친 몸을 뱃전에 기대니 빗줄기가 어지러이 흩날리네
맛좋은 단술을 사람에게 권하며 새 모양 술잔을 기울이고
고운 여인은 손님을 마주하려 매미 날개처럼 얇은 옷을 걸쳐보네
안개 잠긴 아랫섬에서는 어부의 노랫가락이 들려오고
바람 잔뜩 머금은 앞여울에는 바다로 향하는 돛이 떠오르네
돌아보니 나랏일로 가는 이 여정, 잠시도 머무를 수 없는 몸이라
부질없이 돛대에 앉은 제비만 재잘재잘 지저귀며 애쓰는구나
(용어) 일곱째 구절의 "나랏일로 가는 이 여정"은 임금의 명을 받든 공무로 분주히 오가는 여정을 뜻하는 말이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임인서행록 · 기성고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임인서행록 · 기성고
배경: "임인서행록"은 임인년(1602년)에 서쪽 지방을 오간 짧은 여정을 담은 여섯 편이다. 이어지는 "기성고"는 병조(兵曹)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지은 일곱 편으로, "기성"은 병조를 달리 이르던 이름이다. 두 소제목을 합쳐 모두 열세 편이다.
송경에 머물며 (서기 1602년 3월 31일, 양력 추정)
옛 나라의 자취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이 땅
허물어진 성 곁으로 나그네가 지나간다
오백 년이 흘러 왕조의 기운은 사라졌어도
험준한 산과 물은 그때 그대로 남아 있구나
해가 저무니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마저 쓸쓸하고
아직 남은 추위에 들판의 눈은 녹지 않았네
남쪽 누각에 올라 홀로 서글픔에 잠겨
옛일을 그리며 하염없이 노래를 읊는다
(용어) 송경은 고려의 옛 수도였던 개성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황주 가는 길에 (서기 1602년 4월 4일, 양력 추정)
들녘 주막에는 밥 짓는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르고
강 위 다리에 해가 저무니 시름이 밀려온다
천 리 길 떠도는 나그네를 그 누가 가여워해 줄까
오늘에야 겨우 황주에 이르렀구나
평양 가는 길에 (서기 1602년 4월 6일, 양력 추정)
한 필 말에 몸을 싣고 서경으로 가는 길
봄바람 맞으며 나그네 마음은 지쳐만 간다
맑은 물결 위로는 채색한 놀잇배가 떠 있고
비낀 햇살은 층층이 솟은 성벽에 반쯤 걸렸네
낙척한 신세라 지난 일들이 우습기만 하고
지루하게 이어지는 이 걸음이 슬프기만 하다
정자를 아무리 바라봐도 길은 끝이 없는데
나루터 숲에는 저녁 안개가 피어오른다
(허균이 남긴 설명): 지난 오 년 사이에 이곳을 네 번이나 지나왔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백상루 (서기 1602년 4월 8일, 양력 추정)
먼 길 떠도는 나그네의 시름은 끝이 없더니
누각에 오르니 잠시나마 얼굴이 펴진다
밀물 소리는 살수에 부딪쳐 울리고
푸른 이내는 향산을 온통 휘감아 도네
역참 길은 대체 언제나 끝이 날는지
고향 땅은 꿈속에서나 돌아갈 수 있구나
어여쁜 기생이 내 마음속 한을 알아채고는
잔을 멈추고 이별의 노래 양관곡을 불러 주네
(용어) 백상루는 평안도 안주에 있던 누각으로, 살수(지금의 청천강)와 향산(묘향산)이 내다보이는 자리에 있었다. 양관곡은 먼 길 떠나는 벗을 보낼 때 부르던 옛 이별의 노래다.
영훈루 (서기 1602년 4월 10일, 양력 추정)
낯선 땅이라 봄추위가 유난히 매섭고
높다란 누각에는 지는 해가 비껴 있다
어여쁜 기생이 자꾸만 술을 권하지만
나그네의 마음은 오로지 집 생각뿐
굽이진 언덕엔 녹다 만 눈이 남아 있는데
개나리는 벌써 일찌감치 꽃을 피웠구나
관문과 요새는 아득히 어두워져 가고
성 안 나무에는 벌써 까마귀가 깃든다
판문령 (서기 1602년 4월 12일, 양력 추정)
화살 오늬처럼 가파른 이 고개는 오르기도 힘겹고
자욱한 흙먼지는 나그네의 얼굴을 상하게 하네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낯설기만 하니
대체 어디가 내 고향이란 말인가
멀리 펼쳐진 물은 하늘 끝까지 이어지고
외로운 구름은 기러기를 데리고 돌아가네
아득히 안개 서린 저 너머로
한 점 솟아 있는 것이 바로 의주의 산이로구나
(용어) 판문령은 의주로 가는 길목에 있던 고개다.
면복과 고명을 내리는 의식이 끝난 뒤에 짓다 (서기 1602년 3월 1일, 양력)
상서로운 조서가 내려와 은총의 빛을 비추니
홀과 곤룡포, 면류관까지 의전이 두루 갖추어졌네
나라를 다시 일으켜 준 그 은혜에 어짊이 넘쳐흐르고
나라의 운이 다시 회복되는 때를 만나 왕업이 새로이 창성하네
궁궐 뜰에는 화려하게 풍악이 늘어서고
들쭉날쭉 늘어선 깃털 의장은 깃발이 되어 나부끼네
미천한 신하가 이 성대한 광경을 직접 보게 되니
이 벅찬 마음을 노래로 어찌 다 찬양할 수 있으랴
(용어) 면복은 관복을, 고명은 오품 이상 고관을 임명할 때 내리던 임명장을 뜻한다. 이 시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명나라 황제가 조선에 다시 관복과 임명장을 내려 준 일을 두고 지은 것이다. 재조의 은혜란 망해 가던 나라를 구해 준 은혜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 조선을 구해 준 일을 가리킨다.
무장 현감으로 부임하는 성칙생을 보내며 (이름은 계선이다) (서기 1602년 7월 19일, 양력 추정)
임금께서 장사 고을을 근심하시어
성씨 낭관에게 구리 도장을 내려 주셨네
쌍깃발을 앞세운 이 행차는 좌천이 아니라
어진 사람에게 백 리 고을을 맡기신 것이라네
채색 꿩은 거문고 소리를 듣고 모여들고
맑게 핀 꽃은 인끈을 스쳐 향기롭겠지
태수의 귀한 행차를 부질없이 바라보다가
서쪽으로 바삐 떠나야 할 내 신세가 우습구나
내 예전에 장사 고을에 이르렀을 때
시냇가 정자에 앉아 서늘한 저녁을 맞았었네
대숲 바람이 갓에 불어와 서늘하고
연잎의 이슬이 옷에 떨어져 향기로웠지
맛 좋은 안주로 붉은 잉어를 삶아 내오고
아리따운 여인이 옥잔을 올려 주었네
신선처럼 노닐던 그 시절이 이미 꿈만 같아
고개 돌려 떠올려 봐도 마음만 아득하구나
(용어) 백 리 땅이란 현 하나의 크기가 사방 백 리쯤 되었으므로, 그 고을을 다스리는 현령이나 현감을 뜻한다.
금오에서 자정을 찾아가다 (자정은 임곤이다) (서기 1602년 7월 28일, 양력 추정)
사내로 태어나 벼슬이 집금오에 그쳤어도
그 명성은 이미 온 장안을 뒤흔드는구려
낭관으로 있는 내 관아엔 근래 찾아오는 수레도 뜸하고
머리 허옇게 센 풍당처럼 나는 그저 궁한 길만 걷고 있다오
풍경 소리 뎅그렁 울리며 순라군이 외쳐 대고
검은 옷에 붉은 몽둥이 든 이들이 뜰 모퉁이를 둘러쌌구려
그대의 벼슬길이 이토록 빛나는 걸 보고 있자니
임금의 조서에 이름 올린 나 자신이 도리어 후회스럽소
젊은 시절엔 시로 이름나 무리 중 으뜸이라더니
늘그막에 금오 벼슬이 무슨 재주에 맞는 일이랴
흡사 한나라 때 중위 표가
백량대에서 칠언시로 임금께 화답하던 그 일과 같구려
지난날 권세가 중서성에 맞먹던 그 시절에는
밤새도록 노래와 피리 소리로 서지가 떠들썩했었지
태평했던 그 옛일을 그대로 좇을 수만 있다면
그저 오래된 이 병을 여의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소
(용어) 풍랑은 한나라 문제 때 중랑서장을 지낸 풍당이라는 인물을 가리킨다. 그는 무제 때에 이르러서야 어질고 현명하다 하여 뒤늦게 천거되었으니, 늘그막까지 뜻을 펴지 못한 인물의 대명사로 쓰인다. 한나라 무제가 백량대를 완공하고 신하들을 모아 칠언시로 화답하게 했을 때, 집금오 벼슬에 있던 중위 표도 그 자리에 끼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상대인 자정의 벼슬과 처지를 그 중위 표에 빗댄 것이다.
병조 관아에서 (서기 1602년 8월 5일, 양력 추정)
병조에서 숙직을 선 것도 이미 아홉 번째
죄인을 심리하는 일까지 겹치니 마음이 다시 고달프다
반랑처럼 벼슬은 서투르고 몸엔 병도 많으니
가을바람 기다릴 것도 없이 벌써 흰머리가 보이는구나
뜰의 횃불은 휘황하게 타오르고 옥졸들 떠들썩한데
밤새도록 매질 소리에 억울하다 울부짖는 소리 들려온다
이따금 문서 뒤편으로 살길을 터 주기도 하니
우습구나, 이 몸이 옥리들 가운데 으뜸이 되었다는 것이
(용어) 기조는 조선 시대 병조를 달리 이르던 말이다. 이모는 희끗희끗하게 세기 시작한 반백의 머리를 뜻한다. 독배는 문서의 뒷면을 이르는 말인데, 옛 중국 역사서 《사기》에 전하는 이야기에서 나왔다. 주발이라는 사람이 죄를 얻어 옥에 갇히자 천금을 옥리에게 주었더니, 옥리가 문서 뒷면에 "공주를 증인으로 삼는다"는 말을 써서 보여 주었고, 그 덕에 죄를 벗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유래하여, 문서 뒤편에 슬쩍 살길을 일러 준다는 것은 죄인을 너그러이 봐준다는 뜻으로 쓰인다.
병조에서 맞은 첫가을 (서기 1602년 8월 17일, 양력 추정)
병조에서 숙직한 지도 어느덧 오 년
낭관 벼슬은 대체 언제나 자리를 옮길는지
글공부는 저버린 지 오래니 변소의 뱃속에 부끄럽고
서리와 눈이 가득 내린 듯 풍당의 이마처럼 머리만 세었네
달빛은 은하수 저 너머 높이 떠 있고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섬돌가에서 그쳤구나
가을날의 회포는 참으로 쓸쓸하기만 한데
변방의 기러기마저 또다시 남쪽 하늘로 울며 떠나가네
(용어) 변소는 후한 시대의 학자로 학문이 매우 깊었는데, 하루는 낮잠을 자는 척 누워 있다가 제자에게 "뱃속에는 글은 안 읽고 낮잠만 자는군" 하고 놀림을 받자, "내 뱃속은 다섯 경전을 담은 책 상자다" 하고 되받아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여기서는 글공부를 게을리한 자신을 그와 견주어 부끄러워한 것이다. 풍당은 한나라 문제 때 사람으로 재주가 있었으나 늙도록 낮은 벼슬에 머물렀던 인물이다.
교외로 나가서 (서기 1602년 10월 5일, 양력 추정)
가을걷이 무르익어 들빛이 넉넉하니
여기저기서 기쁨에 겨운 소리가 들려온다
집집마다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곳곳마다 누렇게 익은 벼를 베어 들이네
밭 한 뙈기 없는 이 나그네가 우습기만 해서
부질없이 쌀을 꾸는 편지만 쓰고 있구나
성 동쪽에 세 이랑쯤 땅이나 빌려서
언제나 내 손으로 갈고 김을 매어 볼거나
(용어) 누렇게 익은 벼가 논밭에 가득 서 있는 모습을 구름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서신을 얻어 보고서 (서기 1602년 10월 8일, 양력 추정)
오성에서의 즐거운 모임을 꿈속에서 다시 만난 듯
편지를 막 펼쳐 드니 먹빛이 아직도 짙게 남아 있네
남쪽 거리 저편의 작은 누각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창문을 닫아걸고 달려와 함께 새벽 종소리를 듣던 그 밤이여
(용어) 옛사람들은 편지를 흔히 잉어에 빗대어 불렀다. 옛 악부시 〈음마장성굴행〉에 "먼 데서 온 손님이 나에게 잉어 두 마리를 주기에, 아이를 불러 삶으라 했더니 그 속에서 편지 한 통이 나왔다"는 구절이 있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태복고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태복고
배경: "태복"은 임금의 수레와 말, 목축을 관장하던 관청(사복시)을 달리 이르는 이름이다. "태복고"는 허균이 이 벼슬에 임명되어 궁궐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지은 시 열일곱 편을 모은 것이다.
태복 벼슬에 임명되어 짓다 (서기 1602년 11월 17일, 양력)
말 좋기로 이름난 그 고장에서 인재를 가려 뽑듯
조정은 나를 뽑아 남다른 은혜를 베풀었다
몸가짐 조심하며 신중하게 살피려 하지만
목장을 다스리고 말을 부리는 일에는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말이 날뛰어 수레가 뒤집힐 걱정은 늘 있기 마련이니
지나친 나들이를 경계하라던 그 옛 훈계를 어찌 헛소리라 하겠는가
언제라야 이 둔한 몸에 채찍질하여
천 리 먼 길을 마음껏 달려볼 수 있을까
(용어) 기북은 지금의 중국 화베이 지역 북쪽 땅으로, 좋은 말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예로부터 뛰어난 인재에 즐겨 비유되었다. 둘째 연의 "신중하게 살피려 한다"는 구절은, 한나라 때 석경이라는 사람이 태복 벼슬에 올라 여섯 마리 말을 부리면서 굳이 세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말의 수를 채찍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세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따온 것으로, 지나치리만치 신중한 태도를 뜻한다. 다섯째 연에서 말한 "수레가 뒤집힐 걱정"은 말이 성이 나서 재갈이 벗겨지고 굴대가 부러져 수레가 뒤집히는 사고를 이른다. "지나친 나들이를 경계하라던 옛 훈계"란 옛 시의 제목으로, 주나라 목왕이 천하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려 하자 신하 채공 모부가 이 시를 지어 임금의 마음을 가라앉혔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다.
겨울비 (서기 1602년 11월 21일, 양력 추정)
열흘이 넘도록 궂은 겨울비 이어지며
날은 어둑하고 부슬비는 걷힐 줄 모른다
튀는 흙탕물에 말은 흠뻑 젖고
구정물은 거리마다 넘실거린다
유향이 옛날 이상한 조짐들을 점쳐 기록해 두었듯
경방이 겨울 천둥을 두고 경계하라 일렀듯
하늘의 뜻은 여전히 살펴 알 수 있으니
정성으로 응하면 재앙도 마침내 스러지리라
(용어) 유향은 한나라 때 중루교위라는 벼슬을 지낸 학자로, 예로부터 전해 오는 상서로운 조짐과 재앙의 기록을 모아 그 결과를 살핀 책을 남겼다. 경방도 한나라 사람으로 역학에 밝아, 여름에 서리가 내리거나 겨울에 천둥이 치는 것과 같은 이상 현상을 두고 임금에게 경계할 것을 아뢰었다.
장난삼아 자정에게 답하다 (서기 1602년 12월 4일, 양력 추정)
몸에 병이 들고 보니 흥청거리던 나들이도 이제 싫증이 난다
옅은 정 붙들고 화려한 그 거리를 다시 어찌 찾아가겠나
글공부하던 붓과 벼루를 벗어났다니 그것 참 좋은 농담이로군
봉래산 꼭대기에는 밝은 달이 둥실 떠오르네
(용어) 둘째 줄의 "화려한 그 거리"는 옛 중국의 번화한 고을을 가리키는 표현을 우리말로 풀어 옮긴 것으로, 젊은 시절의 방탕한 놀음을 빗댄 말이다.
회포를 풀며 (서기 1602년 12월 14일, 양력 추정)
반평생을 근심 걱정으로 보내다 보니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졌다
시류에 영합하는 자들과 마주 앉아 웃는 낯을 짓기가 못내 싫다
세상과 매끄럽게 어우러지던 그 옛사람의 재주는 나는 끝내 배우지 못했다
가락 맞춰 시나 짓다 보면 가볍고 야한 노래에 가까워질까 두렵기도 하다
저무는 해를 좇듯 이제는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고 싶은데
말이나 세는 자잘한 소임으로 아직도 궁궐을 지키는 벼슬아치 반열에 머물러 있다
숨어 지낼 뜻이야 있지만 벼슬을 버리지 못해 남들의 비웃음을 사고 마는데
돌아가고픈 꿈은 언제나 저 산속 동산에 가 있건마는
(용어) "세상과 매끄럽게 어우러지던 옛사람"은 춘추 시대 노나라의 유하혜라는 인물로, 세속과 잘 융화하며 살았던 것으로 이름났다. "말이나 세는 자잘한 소임"이라는 표현은 앞서 나온 대로 한나라 관리 석경의 옛이야기에서 따온 말로, 여기서는 하찮은 직무에 매인 신세를 뜻한다. "숨어 지낼 뜻이 있으면서도 비웃음을 산다"는 구절은, 진나라의 사안이라는 선비가 원래 산속에 은거할 뜻을 품었다가 결국 다시 벼슬길에 나서자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따온 표현이다.
숙정헌에 여럿이 모여 (서기 1603년 2월 7일, 양력 추정)
섣달이 다 가도록 추위는 더욱 매섭고
밤은 길어 촛불은 차츰 가늘어진다
옥 술잔을 기울이니 노랫소리 맑고
비단옷을 풀어헤치자 향내가 풍겨온다
세상을 살아가려니 가난이 병이 되어 괴롭고
이름을 좇으려니 시비 다툼만 잦다
오늘 저녁만큼은 실컷 즐겨나 보세
세월이 어찌나 빠른지 날아가는 것만 같구나
이술이 보낸 시에 화답하다 (서기 1603년 2월 18일, 양력 추정)
벼슬살이 흔적이라야 아직 하찮은 녹봉뿐인데
시로 이름난 이가 그 누가 으뜸이던가
정에 지나치게 빠져 목숨을 잃은 순찬을 나는 경계로 삼겠지만
여색을 딱 끊어 버린 왕돈 같은 결단은 나는 갖지 못했다
마음만은 여전히 씩씩하여 태산에라도 오를 기세지만
실상은 말재주 하나로 이곳저곳 떠도는 신세일 뿐이다
같은 병을 앓는 나그네 신세를 가엾이 여겨
다시 한 번 이 사립문을 찾아와 주지 않겠는가
(용어) 순찬은 삼국 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여 아내가 열병을 앓자 자기 몸을 차갑게 식혀 열을 내려 주려다가, 결국 아내가 죽은 뒤 자신도 얼마 안 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왕돈은 진나라 사람으로, 여색에 빠져 몸이 쇠약해지자 주변의 간언을 듣고는 단번에 첩들을 모두 내보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여섯째 줄은 전국 시대의 유세가 장의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모진 곤욕을 당한 뒤에도 "혀만 남아 있으면 된다"며 자신했다는 옛이야기에서 따온 표현으로, 말재주 하나로 세상을 떠도는 처지를 빗댄 것이다.
심사눌의 집에서 피리 소리를 듣다 (서기 1603년 3월 23일, 양력 추정)
(허균이 남긴 설명): 사눌은 자이고, 본래 이름은 종민이다.
쌀쌀한 봄추위가 비단 휘장 속으로 스며들고
동풍이 불어와 어린 복사나무 가지를 흔든다
구름 낀 창, 안개 자욱한 방은 바다처럼 아득한데
그 옛날 듣던 옥피리 소리가 지금도 들려오는 듯하다
내사에서 숙직하며 (서기 1603년 4월 8일, 양력 추정)
손님 맞는 누대는 아득히 후궁 자리를 내리누르고
이부자리 안고 밤마다 대궐 가까이서 지낸다
한나라는 말과 목축을 살피는 태복 벼슬을 중히 여겼고
당나라는 임금의 말을 짓는 문신을 귀하게 여겼다지
욕실 딸린 전각에 바람 맑아 새벽 종소리 메아리치고
구름에 둘러싸인 궁궐엔 이른 아침 의장 행렬이 새롭다
해가 뜨자 마구간의 얼룩무늬 말들이 빛을 내니
말 기르는 이가 끌고 나와 뭇 준마들을 씻어 준다
(용어) 첫 줄의 "후궁 자리"는 궁궐 안 깊숙한 곳을 이르는 옛말이다. "임금의 말을 짓는 문신"이란 임금의 조서와 말씀을 대신 짓던 시종 신하를 가리킨다.
내사에서 이술이 보낸 시에 화답하다 (두 수) (서기 1603년 4월 17일, 양력 추정)
첫째 수
신령한 나무들이 궁궐을 에워싸고 있는데
궁궐 문에는 새벽빛이 밝아 온다
글재주를 사마상여에 견주어 본들 그저 문장가일 뿐이니
동방삭처럼 신선의 재주를 지녔다 한들 무엇하리
하늘의 음악이 공중에서 울려 내려오면
하늘의 향내가 소매 가득 스며드는 듯하다
왕족들은 말과 수레를 정돈하여
백량대에 모여 서로 시를 주고받는다
둘째 수
세상에 이바지하는 일이야 어찌 우리 몫이랴
반악처럼 나도 벌써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졌다
금을 대신 물어 주고도 의심을 다 풀지 못했다던 그 사람처럼
옥을 지녔다는 것만으로 죄가 된다니 어찌 피할 수 있으랴
내 행색은 벼슬길에 나설 기회조차 적어
어지러운 세상 속에 베개만 높이 하고 엎드려 있을 뿐이다
다만 그대의 다정한 마음이 고마워
나를 잊지 않고 보내 준 이 도포 한 벌이 사무친다
(용어) 사마상여는 한나라의 문장가로 뛰어난 부를 여럿 남겼고, 동방삭은 한 무제 때 익살과 신선술로 이름난 사람이다. 백량대는 한나라 무제가 세운 누대로, 신하들이 모여 함께 시를 짓던 곳이다. 반악은 진나라의 문장가로, 젊은 나이에 이미 머리가 세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금을 대신 물어 준 그 사람"은 한나라의 직불의로, 같은 방 사람의 금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도 변명 없이 그 값을 물어 주었는데 훗날 그의 결백이 밝혀졌다. 마지막 줄의 도포는 전국 시대 위나라의 수가가 곤궁한 옛 친구 범수를 안타까이 여겨 선물한 것으로, 여기서는 벗의 정을 잊지 않는 마음을 뜻한다.
대륙의 옛 시 운을 빌려 내 마음을 풀어보다 (서기 1603년 4월 28일, 양력 추정)
붉은 산에서 태어난 저 봉황새는
날개를 활짝 펴고 훨훨 날아올라
햇빛을 등에 지고 맑은 샘물을 마시며
깃을 접고 흰 물결에 몸을 씻는다
네 기둥이 떠받친 높은 누각의 둥지를 돌아보니
너무도 비좁아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숲 속에 숨어 사는 선비들은
산골짜기만을 마음 편히 쉴 곳으로 삼는다
아침이면 향긋한 숲을 서성이고
저녁이면 신선의 밭을 거니노라면
이렇게 자유로이 한평생을 마칠 수 있을 텐데
구태여 높은 관을 쓸 까닭이 있으랴
옥돌을 품고도 임금 앞에서 그저 울기만 하고
문 앞에 난 난초조차 뽑기를 꺼리는 세상이다
태평한 세상을 만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니
구름 수레를 채찍질하여 어서 떠나야겠다
이 마음을 다 털어 나를 알아주는 벗에게 맡기려니
품은 회포가 못내 한스럽기만 하다
(용어) 다섯째 줄의 "네 기둥이 떠받친 높은 누각"은 옛이야기 속에서 봉황이 둥지를 틀었다고 전해지는 화려한 누각을 말한다. "옥돌을 품고도 울기만 한다"는 구절은, 옛날 변화라는 사람이 진짜 옥돌을 임금에게 바쳤다가 거짓이라는 의심을 받아 두 발을 잘리고도 끝내 그 옥돌이 진짜임을 인정받지 못해 통곡했다는 이야기에서 따온 것으로, 참된 재능이나 진심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안타까움을 빗댄 표현이다.
어떤 이에게 주다 (서기 1603년 5월 5일, 양력 추정)
첫째 수
서울에는 봄이 이미 저물어 가는데
하늘 끝 떠도는 나그네는 돌아가지 못한다
아침에 높은 누각에 올라앉아 있노라니
뜰의 나무에서 꽃잎이 져 흩날린다
둘째 수
봄이 다 가도록 안부를 묻는 이 누구던가
외로이 지내다 보니 그대 생각이 갑절이나 더하다
병치레만 많이 겪고 나면
하늘을 찌를 듯한 명문장이 어찌 나오겠는가
(용어) 마지막 줄은 한나라의 문장가 사마상여가 병이 많았음에도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이 담긴 명문장을 지어 천자를 감탄시켰다는 옛이야기를 빌려, 병든 몸으로는 좋은 글을 쓰기 어렵다는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초여름 관아에서 짓다 (서기 1603년 5월 15일, 양력 추정)
첫째 수
묵어 버린 내 고향 동산, 언제나 돌아갈거나
귀밑머리 하얗게 세니 벼슬 생각도 시들해진다
적막한 궁궐 정원에 봄은 어느새 다 가 버렸는데
성긴 빗줄기가 또다시 장미꽃을 적신다
둘째 수
빗방울 보슬보슬 내리니 낮잠이 아쉬운데
베갯머리 훈훈한 바람이 전각 안에 감돈다
점심 어서 들라고 아전들은 재촉하지 마오
꿈속에서 한창 무창의 물고기를 먹고 있는 참인데
(용어) 무창의 물고기는 옛 중국 무창 지역에서 나던 물고기로, 삼국 시대 오나라 사람들이 도읍을 옮기면서도 무창의 물고기 맛을 잊지 못해 불렀다는 노래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여기서는 꿈속에서나마 누리는 소박한 즐거움을 가리킨다.
관아에서 비를 만나다 (서기 1603년 7월 15일, 양력 추정)
졸다가 일어나니 마루가 서늘하고
먼 하늘에서 우렛소리 은은히 들려온다
세찬 바람이 비를 몰고 밀려오는데
놀란 번갯불이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온다
바다처럼 내닫는 물줄기 넘실거리고
일렁이던 개울가 풀은 쓰러져 있다
석양 무렵 하늘이 문득 활짝 개니
갠 빛이 궁궐 가득 비쳐든다
숙정루에서 (서기 1603년 7월 30일, 양력 추정)
온 세상이 더위에 헐떡이는데
높은 누각만은 저물녘 홀로 서늘하다
한가로이 옥여의를 손에 쥐고서
높다랗게 대나무 평상에 누워 있노라
좋은 술은 맑은 이슬처럼 흘러내리고
찬 수박은 마치 눈서리를 씹는 듯하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젊은 여인이
석양 무렵 가로피리를 부는구나
(용어) 옥여의는 손에 쥐면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옥으로 만든 보배로운 지팡이를 가리킨다.
즉흥으로 짓다 (서기 1603년 8월 21일, 양력 추정)
첫째 수
저잣거리 누각의 등불은 꺼지고 물시계 소리만 재촉하는데
말을 타고 어둠 속을 거침없이 달려 돌아왔다
북두칠성 자루는 자리를 옮기고 은하수는 점점 잦아드는데
밝은 달을 다시 이끌고 궁궐 풍경을 구경한다
둘째 수
굽은 난간 저 서쪽엔 대나무꽃이 아스라한데
바람이 발을 흔들어 횃대 하나 나직이 드리웠다
달 밝은 한밤중에 쇠피리를 불고 있노라니
푸른 창가에서는 아마 채색 난새가 울고 있으리라
(용어) 채색 난새는 전설 속의 아름다운 새로, 여기서는 피리 소리에 화답하듯 어디선가 울고 있을 것만 같은 정취를 나타낸 것이다.
성 남쪽 이씨의 정자에서 (서기 1603년 8월 30일, 양력 추정)
성 밖에는 가을 기운이 일찍 서늘하고
들판 서쪽엔 오래 내리던 비가 활짝 걷혔다
연꽃의 서늘한 기운이 창문을 뚫고 들어오고
맑은 대바람이 옷섶에 스며든다
묘한 노랫가락은 들을수록 흥이 더하고
가득 채운 술잔은 아까워 다 기울이지 못한다
흥이 무르익자 저문 해는 어느덧 지고
황금 자물쇠가 겹겹 성문에 내려진다
춘추관에 임명되고 나서 (서기 1603년 9월 5일, 양력 추정)
한가로운 강호로 돌아가길 빌었건만
귀한 사서를 엮는 일에 또 능력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게 되었다
산골짜기의 맑은 풍류야 내 어찌 감히 바라랴만
한 해가 다 가도록 글을 교정하며 지내겠구나
드넓은 세상을 두루 다닌 것으로는 사마천을 따르지 못하니
어진 사관 중에 그 누가 동호의 곧은 붓을 이어받으랴
푸른 바다 삼만 이랑, 아득한 안개와 물결 속에서
어느 날에나 낚싯대가 산호나무를 스칠 수 있을까
(용어) 사마천은 한나라의 역사가로, 젊은 시절 천하를 두루 돌아다닌 뒤 방대한 역사서 《사기》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동호는 춘추 시대 진나라의 사관으로, 어떤 위세에도 굴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직필한 것으로 이름 높았다. 마지막 줄은 벼슬을 버리고 강호에 은거하고 싶은 마음을, 낚싯대가 산호나무를 스친다는 표현을 빌려 나타낸 것이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풍악기행 (1) — 앞부분 23편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풍악기행
배경: "풍악"은 가을철의 금강산을 부르는 이름이다. "풍악기행"은 허균이 금강산을 유람하며 지은 연작시로, 시부 1의 열두 소제목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은 마흔일곱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성을 나서 포천을 지나 금강산 안팎을 두루 돌아보는 여정을 담고 있으며, 분량이 많아 두 편으로 나누어 옮긴다. 이번 문서에는 앞부분 스물세 편을 실었다.
도성 문을 막 나서며 (서기 1603년 10월 7일, 양력 추정)
말 한 필에 몸을 싣고 도성 문을 나서니
맑게 갠 가을, 바다와 금강산으로 떠나는 길이다
서쪽 바람이 내 정갈한 옷자락에 불어오고
차가운 이슬은 허리에 찬 칼끝에 맺혀 반짝인다
뗏목 타고 바다로 떠나 세상을 등지려는 마음까지야 있으랴만
그래도 도성을 떠나는 서운함만은 어쩔 수가 없구나
고개 돌려 겹겹이 둘린 성벽을 돌아보니
대궐 위로 오색구름이 두둥실 떠 있다
(용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난다"는 구절은 공자가 세상에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차라리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버리겠다"고 한 《논어》의 말에서 따온 것으로,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등지고 싶은 마음을 가리킨다.
포천 가는 길에 (서기 1603년 10월 7일, 양력 추정)
벼를 다 벤 농부는 성 안으로 돌아가고
갈대를 문 기러기는 논밭에 내려앉는다
한 해가 이렇게 또 저물어가니
나그네 신세가 갈수록 쓸쓸하기만 하다
먼 산은 비스듬히 저녁 해를 삼키고
외딴 마을은 반쯤 저녁 연기에 잠겼다
평생을 떠돌아다니는 데 지친 이 마음이여
얼굴도 머리도 어느새 시들어가는 나이가 되었구나
김정경의 별장 수담에서 짓다 (서기 1603년 10월 7일, 양력 추정)
(허균이 남긴 설명): 김정경은 이름이 확이며, 내 전처의 오라버니다. 나와 같은 해에 생원진사시에 함께 합격한 사이이기도 하다.
겹겹 산이 띳집을 빙 둘러싸고
등나무 넝쿨에 서렸던 저녁 안개도 활짝 걷혔다
고요히 살아가는 이 사람의 뜻을 누가 알아주랴만
나는 벗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고 이렇게 찾아왔다
해가 지니 바위틈 샘물이 한결 더 곱게 빛나고
바람이 이니 대숲이 서글피 흔들려 운다
동쪽 봉우리에 초승달이 떠오르는 걸 보니
사조 같은 시인이라도 여기서라면 새 시 한 편 얻겠구나
(용어) 사조는 중국 남북조 시대 남제의 시인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로 이름이 높았다. 이런 좋은 풍경이라면 사조만큼 뛰어난 시인도 절로 좋은 시를 지어냈으리라는 뜻으로 빗댄 것이다.
풍전역에서 (서기 1603년 10월 8일, 양력 추정)
이른 서리 막 내리니 기러기들 서로 짝을 부르고
하늘 저 멀리 봉우리에는 저녁 구름이 피어오른다
해 저물녘 산기슭을 따라 옛 역참을 찾아드니
말 앞으로 붉은 단풍잎이 어지러이 흩날린다
늙은 나그네 아낙의 원한 (서기 1603년 10월 9일, 양력 추정)
철원 고을 성 서쪽으로 차가운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우뚝 솟은 보개산은 저녁 구름을 두르고 있다
백발이 성성한 늙은 할미가 다 해진 옷차림으로
손님을 맞으러 집을 나와 사립문을 열어준다
스스로 말하기를, 서울에서 온 늙은 나그네 아낙인데
떠돌다 가산을 다 잃고 이 타향에 몸을 의탁했다 한다
지난날 왜적이 서울을 함락시켰을 때
어린 자식 하나를 이끌고 시어머니와 남편을 따라
몇 백 리 길을 걸어 깊은 골짜기로 숨어들었단다
밤에는 나와 먹을 것을 구하고 낮에는 숨어 지냈는데
시어머니가 늙어 병이 나자 남편이 업고 걸었으니
험한 산길에 발바닥이 다 뚫려도 쉴 겨를조차 없었다고
그날은 마침 비가 내려 밤이 유난히 캄캄했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고 길이 미끄러워 뜻밖에 넘어지고 말았단다
그 순간 칼을 든 왜적 둘이 어디선가 나타나
어둠을 틈타 뒤를 밟았으니 마치 서로 짜기라도 한 듯했다고
성난 칼날이 목을 베어 목이 사방으로 찢어지고
시어머니와 남편이 함께 목숨을 잃어 원통한 피가 흘렀단다
자신은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수풀 속에 엎드렸는데
아이가 그만 울음을 터뜨려 왜적에게 들키고 끌려가고 말았다고
오직 이 한 몸만 겨우 범의 아가리를 벗어났으니
너무나 다급하여 큰 소리조차 내지 못했단다
이튿날 아침 와서 보니 두 구의 시신이 버려져 있었는데
어느 것이 시어머니고 어느 것이 남편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고
까마귀와 솔개는 창자를 쪼아 먹고 들개는 뼈를 물어뜯으니
삼태기와 흙수레라도 빌려 시신을 덮으려 한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리
갖은 고생 끝에 겨우 석 자 깊이 구덩이를 파서
남은 뼈를 손수 주워 담아 흙으로 덮었단다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이 몸, 끝내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싶었는데
이웃 아낙이 가엾이 여겨 함께 살자고 해서
마침내 이 주막에 몸을 의탁해 방아 찧고 물을 길으며 지냈다고
먹다 남은 밥을 얻어먹고 낡은 옷을 얻어 입으며
몸을 혹사하고 애를 태우며 어느덧 열두 해를 넘겼으니
얼굴은 검게 그을고 머리는 빠지고 허리와 다리는 이제 말을 듣지 않는다고
그런데 근래에 서울 소식이 어쩌다 전해져 왔는데
그때 잃어버린 그 아이가 왜적의 손에서 다행히 살아 돌아왔다고
어느 궁가에 들어가 종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옷장에는 비단이 남아돌고 곳간에는 곡식이 그득하다고
장가들어 집도 마련하고 살림도 넉넉해졌다는데
타향에서 떠도는 제 어미는 도무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낳아 기른 아들이 다 자라고도 그 덕을 보지 못하니
이 생각만 하면 한밤중에도 눈물이 가슴을 적신다고
내 몰골은 이미 다 시들었고 아이는 이미 다 자랐을 테니
설령 다시 만난다 한들 서로 알아볼 수나 있을지
이 늙은 몸이야 죽어 도랑에 뒹군들 말할 것도 없지만
어찌하면 그 아이가 따라준 술 한 잔을 아비 무덤에 부어볼 수 있을까
아, 슬프다, 어느 시대인들 난리가 없었으랴만
이 몸이 품은 원한만큼 깊은 것은 없으리라
(용어) "삼태기와 흙수레"는 흙을 담아 나르는 도구를 말하며, 여기서는 시신을 묻어줄 도구조차 없는 처지를 나타낸다. "궁가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궁궐에 딸린 집안의 하인이 되었다는 뜻으로, 원문에서는 이런 하인을 머리에 푸른 두건을 쓴 사람이라 하여 "창두"라 불렀다.
(당대 평가): 거침없이 도도하게 흘러가면서도 격조가 아름답고, 옛 시의 법도까지 두루 갖추었다는 평을 받았다.
금성에서 묵다 (서기 1603년 10월 10일, 양력 추정)
고을 성은 산기슭 나무 그늘에 기대어 있고
낡은 서재는 숲을 굽어보고 있다
원님이 후하게 대접해 주니
나그네의 마음이 절로 흐뭇해진다
떠돈 지 오래되어 가을도 거의 다 지나가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
바람에 발이 흔들려 등불 그림자 어른거리고
비 내리는 섬돌에는 벌레 소리가 서걱거린다
옥처럼 흰 생선회를 실같이 가늘게 썰어내고
향기로운 술을 조금씩 따라 마신다
궁색한 나그네 신세에 이렇게 한 번 배불리 먹으니
이 고마움을 잊기가 참으로 어렵구나
통구에서 (서기 1603년 10월 11일, 양력 추정)
시내를 건너 위태로운 벼랑길을 타고 오르니
산허리에는 낭떠러지에 매단 잔도가 갈라져 있다
외딴 마을엔 가랑비가 뿌옇게 내리고
먼 봉우리엔 찬 구름이 피어오른다
이따금 농사짓는 늙은이와 마주치고
멀리서 나무꾼의 노랫소리도 간간이 들려온다
개울가에 이르러 주막이 어디냐 물으니
안개 낀 숲엔 어느새 석양이 비껴 있다
환희령에서 (서기 1603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고개에 올라 봉래산을 바라보니
사방으로 옥 같은 봉우리들이 펼쳐진다
아득한 저 해와 달빛이
금대와 은대를 환하게 비춘다
높이 휘파람을 부니 일천 바위가 다 흔들리는 듯하고
만 리 밖에서 불어오는 긴 바람이다
신선 왕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늘 밖에서 학 한 마리 날아 돌아온다
(용어) 봉래산은 금강산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금대와 은대는 금강산의 아름다운 봉우리들을 신선 세계의 누대에 빗댄 표현이다. 왕교는 후한 시대 사람으로 신선술로 이름났던 인물이다.
(당대 평가): 이 시의 다섯째와 여섯째 구절이 기상이 높고 당당하다는 평을 받았다.
장안사에서 (서기 1603년 10월 13일, 양력 추정)
화성은 생대를 마주 바라보고
골짜기의 전각은 높은 봉우리에 기대어 서 있다
우뚝 솟은 처마는 봉황이 날아오르는 듯하고
들쭉날쭉한 전각들이 구름 속에 줄지어 있다
우물 모양 천장에는 연꽃이 거꾸로 매달려 있고
무지개처럼 휜 대들보는 처마의 물을 받아낸다
서린 용 조각이 금빛 불감을 뒤덮고
엎드린 사자상이 옥돌 섬돌에 웅크리고 있다
부처님 불상은 눈부시게 높고 장엄하며
조각된 귀신 형상들은 금방이라도 내달릴 듯 어지럽다
부처님 미간의 흰 터럭은 붉은 하늘에 눈부시게 빛나고
검푸른 놀은 맑게 갠 대낮에 하늘거린다
한낮이면 스님들이 불경을 뒤적이고
새벽이면 커다란 종을 쳐서 시각을 알린다
신묘한 향나무 향이 타오르고
하늘의 음악이 은은히 울려 퍼진다
사방에서 폐백과 보시가 모여들어
사람이고 하늘이고 다투어 몰려든다
젊었을 적엔 이런 먼 곳까지 구경 오지 못했더니
이번 유람에는 장관이 참으로 풍성하구나
기이한 경치를 찾아다니는 마음이 비로소 흡족해지고
그윽한 곳을 찾으려던 오랜 계획이 이제야 이루어졌다
움직이지 않는 저 부처님께 머리 숙여 절을 올리니
부처의 눈은 헛되이 보는 법이 없으리라
헛된 망상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다 떨쳐버리고
참된 진리는 본디 소리도 냄새도 없는 법이라 하니
마음을 씻고 불법에 귀의하기를 바라노라
등불이 등불로 이어지듯 진리도 대대로 전해지리라
(용어) 화성은 불교 경전 《법화경》에 나오는 비유로, 먼 길을 가다 지친 사람들을 위해 길잡이가 잠시 신통력으로 만들어낸 가짜 성을 말한다. 여기서는 절의 법당 이름으로 쓰였다. 생대는 절에서 스님들이 먹던 밥을 조금씩 덜어 새와 짐승에게 나누어 주던 대를 말한다. 옥호는 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다는 희고 빛나는 터럭으로, 그곳에서 끊임없이 빛이 뿜어져 나온다고 한다.
장안사 벽에 이정이 그린 그림을 보고 부른 노래 (서기 1603년 10월 13일, 양력 추정)
예로부터 부처를 잘 그린 이가 몇이나 되었던가
오도현은 신선이 되어 떠나갔고 이공린도 세상을 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장군(이사훈)을 첫손에 꼽는데
그 자손인 이정은 더더욱 기이하고 뛰어나다
장안사의 하얀 벽은 깊고도 그윽한데
이정이 이 그림을 그릴 때 나이가 겨우 열셋이었단다
생생한 기운이 흘러넘쳐 벽이 아직 젖어 있는 듯하고
해와 달이 환히 빛나며 안개와 구름을 머금었다
급고독원에는 금빛이 땅에 깔려 있고
기타 태자의 숲에는 첨복나무 향기가 감돈다
두둥실 채색 빛무리가 막 떠오른 해를 쏘아대니
그 공덕의 장엄함이란 이루 말로 다 못 하겠다
모든 하늘의 신들이 늘어서서 모시고 용신도 달려오는데
온갖 향내가 은은히 감돌고 하늘의 음악이 울려 퍼진다
오묘한 진리는 이미 사리불에게 전해졌는데
꽃을 들어 보이며 미소 지은 그 뜻을 아는 이 누구였던가
큰 종이 땅을 울리며 울고 철봉이 춤을 추듯 흔들리니
허공 저 너머로 하늘 꽃이 비 오듯 흩날린다
보배 자리가 잠깐 사이 자금산으로 옮겨가니
저 빛나는 구름은 누구를 위해 세워졌는가
그 가운데 정수리에 물을 받아 참된 불성을 얻은 이는 누구인가
흰 옷 입은 관음보살이 여의주를 손에 들고
물결치듯 수많은 게송과 법라 소리가 울려 퍼지니
육도의 중생이 모두 구제되고 뭇 마귀는 벌을 받는다
참으로 거룩하다, 그 구상의 자유분방함이여
자세히 보면 터럭 하나하나까지 곧 움직일 듯 생생하다
옷을 걷어붙이고 신들린 솜씨를 부릴 때에는
일천 부처와 팔부신중이 다 함께 둘러서서 손을 모은다
서쪽 행랑의 안개비 그림은 대낮에도 몽롱하고
그러고도 남는 힘으로 물가 은자의 풍경까지 그려냈다
곽희가 그린 봄산과 위언이 그린 나무들도
그 솜씨가 조물주와 다투어도 털끝만큼 뒤지지 않으니
내 듣기로 태연이라는 화가도 왕유도
개원 연간의 어느 재상도 모두 늘그막에야 붓의 경지에 이르렀다는데
이정은 어린 나이에 이미 그림 솜씨가 뭇사람을 뛰어넘어
가느다란 붓끝으로 부처의 황금빛 몸을 자유자재로 그려냈다
정이여, 정이여, 이렇게 큰 재주를 품었으니
큰 이름을 얻은 그 아래에는 궁한 운명이 뒤따르는 법
이 그림을 마주하니 내 기운이 절로 상쾌해지고
해 떨어진 넓은 법당에 긴 바람이 이는 듯하다
(용어) 오도현은 당나라의 화가로 불화와 산수화에 뛰어나 화성이라 불렸다. 이공린은 송나라의 화가로 시와 글씨와 그림에 두루 뛰어났다. 이장군은 당나라 종실 화가 이사훈을 가리키며, 북종화의 시조로 꼽힌다. 이정은 조선 선조 때의 화가로, 화가 집안에서 태어나 열 살 무렵부터 이름을 날렸고 열세 살에 장안사 벽화를 그려 크게 칭찬받았다. 급고독원은 인도 사위성에 있던 동산으로 부처가 설법하던 곳이며, 기타 태자가 원래 가지고 있던 땅을 급고독 장자가 사서 부처에게 바친 곳이다. 첨복은 향기가 멀리 퍼진다는 나무 이름이다. 사리불은 부처의 제자 가운데 지혜가 가장 뛰어났다는 인물이다. "꽃을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는 것은, 석가모니가 연꽃을 들어 보였을 때 오직 제자 가섭만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미소를 지어 진리를 전수받았다는 유명한 일화를 가리킨다. 관정은 부처가 물을 부어 깨달음을 인가해 주는 의식이며, 제호는 우유를 정제해 만든 최고급 음식으로 부처의 성품을 비유한 말이다. 백의대사는 흰 옷을 입고 흰 연꽃 위에 앉은 관음보살을 가리킨다. 곽희는 송나라의 산수화 대가이며, 위언은 당나라 때 소나무와 돌 그림에 뛰어났던 화가다. 왕유(자는 마힐)는 성당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화가다.
(당대 평가): 붓놀림이 자유자재로 살아 움직이는 듯하며, 소동파의 글맛이 얼마쯤 느껴진다는 평을 받았다.
시왕백천동 (서기 1603년 10월 14일, 양력 추정)
그늘진 골짜기를 들여다보니 고요하고 깊은데
굽이도는 시내는 넘실넘실 아득하다
실낱같은 길은 가파른 벼랑에 비껴 있고
깎아지른 절벽은 높이 솟은 봉우리를 둘러쌌다
기이한 경치를 찾느라 험한 길도 잊고
높은 곳에 오르느라 몸을 굽혔다 폈다 애쓴다
굽이치는 여울은 성난 듯 무너져 내리고
땅에서 솟구친 위태로운 봉우리가 우뚝 치솟았다
끊어진 벼랑에서는 몇 번이고 신을 고쳐 신고
기울어진 바위에서는 애써 지팡이를 옮겨 짚는다
폭포는 물을 흩뿌리다가 다시 잠잠해지고
삐죽삐죽한 바위 모서리들이 빽빽이 서로 마주 서 있다
파릇파릇한 단풍과 소나무가 어우러지고
아른아른한 산 안개가 자욱이 넘실댄다
신비한 이치를 멀리서 찾아 나서니
외딴 곳에 맑은 구경거리가 남아 있다
아름다운 경치는 그윽한 마음에 꼭 들어맞고
깊은 깨달음은 번뇌를 시원하게 씻어준다
신선이 사는 곳도 이 외진 골짜기와 통하는 듯
왕교의 퉁소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도 하다
귀양살이하는 이 몸도 신선의 반열에 통할 수 있으니
하늘 사다리를 타고 이따금 훨훨 날아오르는 듯하다
신선의 수레가 만약 이곳에 내려온다면
한바탕 웃으며 이 세상의 그물을 풀어버리리라
(용어) 왕교는 후한 때 사람으로 퉁소를 잘 불어 봉황 울음소리를 냈다는 신선이다.
(당대 평가): 깊고 힘 있는 시이지만, 표현이 다소 격해 운율을 해쳤다는 평도 있다.
영원사 (서기 1603년 10월 15일, 양력 추정)
깎아지른 푸른 봉우리에 절이 우뚝 서 있고
해가 돋으니 짙은 금빛이 창문을 쏜다
사리는 예로부터 다보탑에 간직되어 왔는데
어린 스님은 아직도 아래채의 종을 친다
연꽃 핀 곳에는 대낮에 새들이 모여들어 불경 읽는 소리를 듣고
가을 구름 기운은 골짜기로 드는 용처럼 서린다
외딴 이곳에서 우연히 속세 밖 경치를 구경하게 되어
옷자락을 떨쳐 입고 이내 망고봉에 올랐다
(당대 평가): 성당 시의 풍격을 닮았으나, 끝맺음이 너무 무르익어 오히려 못 미친다는 평을 받았다.
망고대에서 내려와 송라암에서 쉬다 (서기 1603년 10월 15일, 양력 추정)
험한 길을 올라 빈 벼랑을 지나
그윽한 곳에 이르러 못골에서 쉰다
어지러운 여울에서는 자꾸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위태로운 외나무다리에서는 겨우겨우 발꿈치를 옮긴다
등나무 넝쿨을 붙잡고 몇 번이나 발을 내디뎠던가
시내를 뛰어넘을 때는 먼저 마음을 다잡아 용기를 낸다
벼랑 끝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고
바위 배는 마치 옆으로 뉘어놓은 항아리 같다
위쪽은 미끄러운 이끼가 영롱하게 빛나고
아래쪽은 깊은 못물이 어둑어둑하다
끊어진 다리를 건너자니 몸을 웅크린 채 어질어질하고
쇠줄을 붙잡고도 여전히 두렵기만 하다
한 걸음 내디디면 넋이 날아갈 듯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정신이 놀라 오싹해진다
험한 곳을 다 넘어서니 마음이 비로소 놓이고
마루턱에 오르니 눈앞이 탁 트인다
첩첩 골짜기는 울퉁불퉁 내려다보이고
뭇 산봉우리들은 빙 둘러 솟아 있다
서늘한 바람이 난초숲을 흔들면
천지의 소리가 아름다운 음악을 끌어오는 듯하다
벼랑 곁에는 절집이 하나 있어
아름드리 기둥이 무지개처럼 공중에 솟아 있다
지친 몸에 짐을 내던지고 쉬면서
늘어놓은 소박한 공양으로 주린 배를 채운다
흥이 다하도록 목숨조차 잊었더니
놀란 넋이 아직도 두근두근 쓰리다
뒤에 올 사람들에게 이르노니
목숨이 소중함을 부디 잊지 마시게
(당대 평가): "나도 일찍이 이 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발바닥이 간지러워진다. 이 시는 그때의 경치를 남김없이 다 담아내어 더할 나위가 없다"는 평이 전한다. 다만 표현이 너무 매섭고 강해, 이 지역의 험하고도 아름다운 정취와는 잘 겨루지만 예스러운 멋은 다소 부족하다는 평도 함께 따른다.
명연 (서기 1603년 10월 16일, 양력 추정)
그늘진 굴을 들여다보니 아득하고 깊은데
어둑어둑한 물빛이 동그랗게 휘돌아 있다
그 아래에는 천 년 묵은 이무기 한 마리
힘차게 서린 채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다
이따금 하얀 기운을 뿜어내니
자욱하게 안개처럼 퍼져나간다
언제나 천둥과 비로 변하여
저 신선의 궁전 끝으로 날아오를 것인가
(용어) "명연"은 "우는 못"이라는 뜻으로, 물소리가 크게 울린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요대는 옥으로 지었다는 신선의 궁전을 가리킨다.
표훈사 (서기 1603년 10월 17일, 양력 추정)
영롱한 금빛 푸른빛이 숲 끝에 아롱져 걸려 있는데
넓은 법당엔 사람 없고 저녁 종소리만 잦아든다
아마 용신과 천신이 내려와 물 뿌리고 청소를 했나 보다
자욱한 향로 연기가 아득한 구름처럼 서린다
(당대 평가): 힘차면서도 운치가 있다는 평을 받았다.
폐허가 된 절이 다시 새로워진 것도 다 인연이 있어서니
늙은 스님의 신통한 힘이 하늘의 여러 신을 움직였다
구슬 같은 법당이 갑자기 연꽃 핀 땅에서 솟아났으니
생각건대 담무갈보살도 빙그레 웃고 있으리라
(용어) 담무갈보살은 금강산에 늘 머문다고 전해지는 보살로, 여기서는 절의 주지 스님을 빗대어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정양사 서쪽 누각에서 (서기 1603년 10월 18일, 양력 추정)
가을이 다 저문 일만 봉우리는 옥처럼 들쭉날쭉한데
해질 무렵 서쪽 누각에 기대어 절로 웃음이 난다
여산의 참모습을 시로 그려내고 싶지만
세상에 그럴 만한 이백 같은 시인이 어디 있으랴
(용어) 여산은 중국의 명산으로, 그 참모습을 시로 옮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빗댄 것이다. "적선"은 인간 세상에 귀양 온 신선이라는 뜻으로, 뛰어난 글재주를 지닌 사람을 가리키며 특히 이백을 일컫는 말이다.
(당대 평가): 정양사를 두고 시를 짓는다면 결국 이 정도에서 그칠 수밖에 없으리라는 평이 따랐다. "나 또한 이곳에 다섯 번이나 올랐지만, 지금까지 이곳을 노래한 시구를 한 줄도 제대로 짓지 못했다"는 술회도 함께 전한다.
팔각전에서 부처 그림을 보다 (서기 1603년 10월 19일, 양력 추정)
팔각전 네 벽의 그림이 삼엄하기도 한데
언제 그려졌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근엄한 자마금빛 부처님의 몸이요
채색 붓끝이 눈부시게 빛난다
용신과 천신이 앞다투어 달려와 모시고
일산과 깃발과 온갖 패물들이 뒤섞여 있다
좌우로 늘어선 호법신은
부릅뜬 눈으로 형형하게 서로 마주 노려본다
생동하는 기운이 훌쩍 정신을 사로잡고
흠뻑 배어난 정취가 그대로 드러난다
빛깔은 비록 바랬어도 뜻은 늘 새로우니
이 신묘한 솜씨가 참으로 사랑스럽다
모두들 말하기를 오도자가 와서
이 그림을 그려 천 년을 전했다 한다
하지만 오도자는 당나라의 귀한 신하였으니
무슨 연유로 바다 건너 이 나라까지 왔겠는가
근거 없는 전설을 어찌 다 믿을 수 있으리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자야말로 참으로 어리석다
비록 오도자의 그림이 아니라 할지라도
신라 시대의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리라
오래된 것에다 솜씨마저 뛰어나니
바라보면 마음이 절로 상쾌해진다
오도자의 것이냐 신라 것이냐 굳이 따지지 말고
소중히 간직하여 상하지 않게들 하시게
(용어) 자마금은 부처의 몸빛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인도의 전설에 나오는 자줏빛이 도는 순금을 말한다. 오도자는 당나라의 화가 오도현의 자로, 그림 솜씨가 뛰어나 화성이라 불렸다.
(당대 평가): 소동파의 참맛을 깊이 체득했고, 때로는 두보와 진사도(진무기)의 문체를 드나든다는 평을 받았다.
개심대 (서기 1603년 10월 20일, 양력 추정)
어제는 정양루에서
옥 같은 일만 봉우리를 우러러보았는데
오늘 아침 개심대에 다다르니
옥 같은 봉우리들이 문득 평지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지세가 그리 높은 것도 아닌데
무슨 까닭으로 뭇 산들을 다 눌러 보이는가
파릇파릇한 중향성이
아름다운 옥돌처럼 구름 밖에 늘어서 있다
서리에 흠뻑 취한 늦가을 단풍이
붉게붉게 온 벼랑을 물들였다
소리 높여 노래하며 붉은 하늘을 바라보니
마치 저 푸른 하늘도 잡아 오를 수 있을 것만 같다
신선이 공중에서 내려온다면
흰 난새 한 마리를 빌리고 싶구나
그 난새를 타고 팔방 끝까지 가로질러
옛 신선 선문과 함께 어울려 노닐고 싶다
백 년의 긴 세월도 번갯불처럼 스쳐 지나가니
어찌 굳이 이 속세에서 헤매야만 하는가
이제 여기서 옷자락을 떨쳐 털어버리고
봉래산으로 올라가리라
(용어) 중향성은 금강산에 있는 봉우리로, 이름 자체가 "온갖 향기의 성"이라는 뜻을 지녔다. 선문은 자고라는 이름을 가진 옛 신선이다.
(당대 평가): 개심대의 경치는 그려내기가 몹시 어렵다. 이 시는 글은 좋으나 힘이 조금 부족하다는 평도 있다.
계수를 노래하다 (서기 1603년 10월 20일, 양력 추정)
남해 저편에서 건너온 저 계수나무
어느 해에 이 산에 심어졌을까
바람이 부는 곳마다 하늘의 향기가 흩날리니
아마도 달 속에서 꺾어다 심은 것이 아닐까
(용어) 계수나무는 예로부터 달 속에 산다고 전해지는 나무로, 여기서는 실제로는 남쪽 바다에서 옮겨 심은 계수나무를 보고, 마치 달 속의 나무를 옮겨 온 것 같다고 상상한 것이다.
학을 기다리다 (서기 1603년 10월 20일, 양력 추정)
학을 기다려도 학은 오지 않으니
검은 치마 흰 저고리 차림의 학이 정말 있기는 한 것인지
서호는 아득히 어디쯤에 있을까
나야말로 그 옛날의 임포가 아니겠는가
(용어) "검은 치마 흰 저고리"는 학의 검은 꽁지깃과 흰 몸빛을 옷에 빗대어 부르는 학의 별칭이다. 임포는 송나라 때의 은자로, 서호의 외딴 산에 살며 이십 년 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고 매화와 학을 벗 삼아 지낸 인물이다.
정양사 동쪽 방에서 (서기 1603년 10월 20일, 양력 추정)
절집은 금빛 연꽃 봉우리에 어리어 비치는데
상좌 스님이 몸을 일으켜 이경 종을 친다
시험 삼아 창을 활짝 열어젖히니
서늘한 달이 누각 동쪽 봉우리 위로 솟아오른다
계수나무 그림자 하늘하늘한 저 하얀 달의 궁궐이여
일천 바위 일만 골짜기가 온통 옥으로 된 굴 같다
하늘 바람이 하늘하늘 내 옷자락에 불어오니
팔방 끝까지 훨훨 날아갈 듯 정신이 아득해진다
아마도 이 몸이 신선의 누대에 오른 것이 아닌가 싶은데
부구 신선님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
굳이 돌을 채찍질해 바다에 다리를 놓을 필요도 없겠구나
(용어) "이경"은 밤 열 시 무렵을 가리키는 옛 시간 단위다. 부구는 옛 신선의 이름으로, 여러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마지막 구절은 진시황이 돌다리를 놓아 바다를 건너려 했을 때 어느 신인이 돌을 채찍질해 바다로 몰아넣었다는 옛이야기를 빗댄 것으로, 이곳이 이미 신선 세계와 다름없으니 굳이 그런 기적까지 필요 없다는 뜻이다.
(당대 평가): 쉽게 나온 듯한 말이지만 그 안에 중당 시의 격조를 잃지 않았다는 평을 받았다.
만폭동 (서기 1603년 10월 21일, 양력 추정)
두 골짜기가 겹겹 벼랑을 갈라놓으니
온갖 시냇물이 그 안에서 세차게 쏟아진다
뿜어져 나오는 물살이 날마다 넘실거리고
흩날리는 물보라가 늘 자욱하다
처음엔 푸른 절벽이 갈라지는가 놀랐더니
두 마리 흰 용이 날아오르는 듯하다
자세히 보니 하늘에 틈이 벌어져
만 자나 되는 옥무지개가 거꾸로 걸린 듯하다
벽력 같은 소리가 대낮에도 울려대니
어지러운 바위들이 우레와 바람에 부딪는 듯하다
이 못 저 못이 굽이굽이 물을 모으는데
지척의 못끼리도 튀는 물결로 서로 통한다
이 장한 경관이 내 마음을 뒤흔드니
참으로 거룩하구나, 조물주의 솜씨여
사강락은 석문에서 노닐었다지만
이백은 향로봉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지
모르겠구나, 천 년 뒤에는
어느 곳이 이 경치와 우열을 겨룰 수 있을지
(용어) 사강락은 남조 송나라의 문장가 사영운을 가리키는데, 강락공에 봉해져 이렇게 불린다.
(당대 평가): 이 시는 여러 작품 가운데 가장 마음에 흡족한 작품으로 꼽힌다.
바위에 새겨진 양봉래의 여덟 글자 (서기 1603년 10월 21일, 양력 추정)
(허균이 남긴 설명): 바위에는 양봉래가 쓴 여덟 개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여덟 글자는 "봉래풍악원화동천"이다. 이는 "금강산은 신선이 사는 별천지"라는 뜻이다.
싸우는 용의 발톱이 서로 얽혀 아슬아슬한데
돌을 깎아 뛰어오르는 사자 모습이 만고에 새겨져 있다
공손대랑의 혼탈무를 굳이 기다리지 않고도
이 신들린 필력이 이미 장욱을 압도하는구나
(용어) 양봉래는 조선 중기의 서예가 양사언으로, 호가 봉래이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공손대랑은 당나라 때 궁중 기생으로 검무를 잘 추었는데, 그가 혼탈무라는 춤을 출 때 그 몸놀림을 보고 승려 회소와 서예가 장욱이 각각 초서의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고 전한다. 장전은 "미치광이 장씨"라는 뜻으로, 당나라의 서예가 장욱의 별명이다. 그는 술을 몹시 즐겨 크게 취하면 미친 듯이 소리치며 뛰어다니다가 붓을 잡으면 신기한 글씨가 나왔다고 한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풍악기행 (2) — 뒷부분 24편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풍악기행
배경: 앞서 옮긴 스물세 편에 이어, 풍악기행(금강산 기행시)의 나머지 스물네 편이다. 보덕굴에서 시작해 금강산 내산과 외산 곳곳의 암자·폭포·고개를 두루 거쳐, 동해안의 청간정·낙산사를 지나 이 여정을 마무리하는 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 시 "호정"에 붙은 손곡의 평으로 풍악기행 마흔일곱 편 전체에 대한 총평이 함께 전한다.
보덕굴 (서기 1603년 10월 21일, 양력 추정)
누가 만 길이나 되는 벼랑을 깎아
허공에 의지해 이토록 아슬아슬한 누각을 지어놓았을까
날아갈 듯한 서까래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은데
기둥 하나가 그 절반을 떠받치고 있구나
만년이 지나도록 버티어 조금도 기울지 않고
곧바로 천 길 벼랑을 내리누르고 있다
고개 들어 처마 끝을 올려다보니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날아오를 듯하다
돌길을 붙잡고 기어오르다 보니
훨훨 나는 듯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은 것만 같다
고승이 머무는 승방을 둘러보니
금빛과 푸른빛이 눈부시게 찬란하구나
나무를 파내어 그윽한 샘물을 끌어왔으니
한 모금 마시자 답답하던 병이 씻은 듯 사라진다
밤에 묵으려니 도무지 잠이 오지 않고
솔바람 소리만 귓가에 울려 퍼진다
(용어) 개사는 원래 보살을 달리 이르는 말인데, 바른 길을 열어 중생을 이끄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덕이 높은 승려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여기서는 이 굴에 머무는 고승을 가리킨다.
원통사 (서기 1603년 10월 22일, 양력 추정)
사자봉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골라
원통사에 이르렀다
등나무 가시가 옷자락을 마구 할퀴고
칡덩굴은 자꾸만 신발에 걸린다
가마꾼을 재촉해 시내를 건너니
단풍잎이 빈 웅덩이를 가득 메웠다
구름 사이 햇살이 큰 숲을 비추고
산 아지랑이는 산들바람에 활짝 걷힌다
문에 들어서니 늙은 스님이 마중 나와
나를 보고 반가운 낯빛을 짓는다
둘째 형님을 따라 노닐며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신비로운 곳을 두루 헤맸다면서
두루마리에 적힌 시를 꺼내 보이는데
읽어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이토록 슬플 수가 있을까, 아내를 잃은 그 마음이
아득히 구름을 바라보며 부모를 그리는 그 심정이
(당대 평가): 삶과 죽음, 이 두 가지를 나란히 놓아 시의 짜임이 참으로 절묘하다는 평을 얻었다.
(용어) "단현의 정"은 아내를 잃은 슬픔을 이르는 말로, 거문고와 비파의 줄이 끊어진 것에 빗댄 표현이다. "구름을 바라보는 생각"은 자식이 타향에서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하는데, 당나라 때 적인걸이 타향에 나가 있으면서 고향 쪽 구름을 바라보며 그 아래 계신 부모를 생각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화룡담 (서기 1603년 10월 22일, 양력 추정)
깊은 웅덩이 물빛은 검푸르러
굽어보니 어찌 이토록 으슥한지
양쪽 벼랑은 미끄럽고 또 기울어
몸이 오싹해 오래 서 있기 힘들다
이 아래에는 독한 용이 도사리고 있다니
단풍잎조차 함부로 던져서는 안 된다
구경하는 이들아, 부디 발걸음을 조심해
굶주린 용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하라
(당대 평가): 짧은 시구지만 이 또한 빼어나다는 평을 얻었다.
마하연 (서기 1603년 10월 22일, 양력 추정)
절집이 구름을 밀치고 우뚝 솟았으니
그 화려한 궁전이 햇빛마저 빼앗아 곱기만 하다
경전을 담은 상자는 패엽에 어리비쳐 빛나고
향로의 재에서는 전단향 내음이 그윽하다
스님은 홀로 참선에 잠겨 있는데
나는 그저 평상을 빌려 졸고 있구나
밤이 깊어지자 바람 소리 울려 퍼지니
생황 소리에 학을 탄 신선이 삼천세계에서 내려오는 듯하다
(용어) 생학은 하늘에 산다는 신선의 학을 가리키고, 삼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삼천대천세계, 곧 우주 전체를 뜻한다.
백전암 (서기 1603년 10월 23일, 양력 추정)
성문 골짜기마다 푸른 안개가 자욱하고
아득한 천지를 굽어보니 기운마저 흐릿하다
땅이 트여 높은 바위 위로 떠오르는 해가 나직하고
하늘에 걸린 깎아지른 벼랑엔 흘러가는 구름이 끊겨 있다
안팎으로 산이 트여 뭇 봉우리가 모여들고
동서로 갈라진 물줄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암자 안 늙은 스님은 편안히 앉아 있으니
귓속에 생황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가 보다
(당대 평가): 이 시는 웅숭깊고 뛰어나 참으로 당나라 전성기의 격조라 할 만하며, 왕세정과 이반룡 같은 이들도 이만큼은 해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을 얻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끝맺는 구절이 느슨하게 풀어져서 당나라 말기의 격조로 떨어지고 만 점이다.
(용어) 성문은 본래 군영의 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홍몽은 하늘과 땅이 아직 나뉘기 전의 광대한 원기, 또는 바다 위에 아득히 서린 기운을 이르는 말이다. 왕세정과 이반룡은 명나라 때 시로 이름 높았던 두 문인이다.
구정봉 (서기 1603년 10월 23일, 양력 추정)
내산은 빛깔이 희고 아기자기하며
외산은 검푸르고 웅장하다
아기자기함은 마치 사람의 손을 빌린 듯하고
웅장함은 참으로 하늘이 빚어낸 솜씨로다
새벽녘 구정봉에 오르자마자
굽어보니 마음과 눈이 활짝 트인다
두 산이 저마다의 자태를 지녔으니
어느 쪽이 낫고 못하다 누가 말할 수 있으랴
동녘 해는 어느새 솟아 골짜기를 벗어나고
바다 안개는 눅눅한 기운을 머금었다
아침노을이 흩날려 곱게 어리비치고
풀과 나무는 비취옥처럼 밝게 빛난다
뭇 골짜기는 다투어 오르내리니
마치 긴 바람이 파도를 부채질하는 듯하다
산꼭대기엔 구멍이 뚫려 아홉 웅덩이가 늘어섰는데
늙은 이무기가 그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더니
몇 해 전에 제 살던 곳을 옮겨 가서
못에 잠겨 용으로 변했다고들 한다
스님이 그 옛 자취를 이야기해 주며
꿈틀거리던 그 모습을 아직도 또렷이 짚어낸다
짙은 안개가 어느새 가랑비로 바뀌더니
대낮인데도 뭉게구름 속에 어둑해진다
지척에 비로봉 정상이 있건만
내 지팡이가 더는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구나
흥이 식어 절벽을 내려가려니
수풀 끝으로 절집이 언뜻 보인다
비스듬히 기대어 낮잠을 청하니
꿈은 요대로 들어가 아득히 사라진다
(당대 평가): 송나라풍도 아니요 당나라풍도 아니요 육조풍도 아니니, 스스로 하나의 격을 이루었다. 짙고 예스러운 맛이 있어 성문 골짜기의 풍경을 그려내는 데 조금의 아쉬움도 없다는 평을 얻었다.
(용어) 요대는 신선이 산다는 옥으로 된 누대를 가리킨다.
적멸암 (서기 1603년 10월 23일, 양력 추정)
금빛 은빛 누각이 향대에 비쳐 어리는데
부상을 굽어보니 동해가 술잔 하나만 하다
하얀 명주 드리운 듯 일천 폭포가 쏟아지고
옥 무지개 비끼듯 온갖 시내가 휘돌아든다
층진 벼랑은 갈라질 듯 천둥과 벼락이 맞부딪고
드넓은 골짜기엔 해와 달이 활짝 열려 있다
오래 앉아 있자니 어스름한 안개가 온 골짜기를 감싸는데
생황 소리에 학을 탄 신선은 봉래산에서 언제나 내려올까
(용어) 부상은 해가 뜨는 동쪽 바다 끝에 있다는 전설 속의 나무이며, 봉래산은 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의 산이다.
박달곶 (서기 1603년 10월 23일, 양력 추정)
비탈을 따라 슬슬 돌아 내려가니
그윽한 골짜기가 차츰 음산해진다
지나온 실낱같은 길을 돌아보니
아득하기가 마치 하늘길 같다
둥그런 하늘을 고개 들어 쳐다보니
햇빛이 양쪽 산자락에 걸려 있다
내달리는 물이 돌다리를 뛰어넘고
우렛소리처럼 성난 물굽이가 으르렁댄다
미끄러운 비탈길에 발을 자주 헛디디고
날카로운 돌부리에 다리를 다치기도 한다
냇물 한가운데 큰 바위가 마주 박혀 있어
사자가 엎드리고 범이 웅크린 듯하다
무시무시하게 사람을 덮칠 듯하니
잠깐 보아도 간담이 서늘해진다
원숭이처럼 얼마나 낭떠러지를 타고 넘었는지
기울어진 돌길에서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가까스로 남쪽 언덕을 건너고 나니
숨이 가쁘고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여기 이르니 마음에 흡족하여
아까 겪은 고생을 모두 잊어버렸다
(당대 평가): 이곳 경치에 이만한 작품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다 할 만하다. 쓰고 싶어도 미처 쓰지 못했던 것을 남김없이 다 드러냈다는 평을 얻었다.
(용어) 원문에서 "자꾸 뒤를 돌아본다"고 한 것은, 이리가 겁이 많아 늘 뒤를 돌아보는 습성에 빗대어 두려운 마음을 나타낸 표현이다.
은신대 (서기 1603년 10월 23일, 양력 추정)
한낮에야 겨우 자월암에 올라
목을 빼고 자꾸만 북쪽을 바라본다
이미 내산의 모습을 놓치고 나니
마치 어여쁜 사람을 놓친 것만 같다
이윽고 큰 구름이 퍼져 나가니
골짜기도 시내도 온통 보이지 않는다
다리 아래로는 소나기와 비바람이 몰아치고
섬돌 앞에는 천둥과 번개가 번쩍인다
천주봉에서의 이 놀이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듯
이슬 맺힌 잎사귀엔 아직도 햇빛이 비친다
우레의 신은 아직 노여움을 풀지 않았는데
비바람의 신은 어느새 활짝 걷어 가 버렸다
고개를 드니 일만 개의 옥 무지개가
철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폭포에 흩뿌려진다
폭포가 열둘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는데
우물 속에서 하늘을 보는 격이니 그 바깥을 어찌 알겠는가
이백에게 말을 전하노니
여산도 그리 부러워할 것 없다고
(용어) 아향은 우레를 몰고 다닌다는 전설 속의 여신이고, 병예는 비바람을 다스린다는 신이다. 청련은 당나라 시인 이백이 태어난 고향 마을의 이름으로, 이백은 스스로 청련거사라 불렀다. 여산은 지금의 중국 강서성에 있는 산으로, 옛날 고승 혜원이 이곳에 절을 세우고 도잠 같은 은사들과 어울려 지낸 곳으로 유명하다. 허균은 금강산이 여산에 못지않다는 뜻으로 이백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도솔암 (서기 1603년 10월 23일, 양력 추정)
(허균이 남긴 설명): 도솔암의 스님이 마침 한창 정진 수행을 하고 있었다.
도솔암은 이름난 절이라
아미타불은 본래 흔들림 없는 부처님
어떤 노스님이 이곳에 몸을 의탁하여
이 산문에서 이토록 편안히 지내는 것일까
해진 승복이 이끼 낀 벽에 걸려 있고
질그릇 동이에는 차가운 샘물이 담겨 있다
내 이제 와서 불법을 물으려 하는데
스님은 그저 합장만 할 뿐 아무 말이 없다
(용어) 아미타불을 줄여 미타라 부른다. 부동존은 온갖 악마를 항복시키기 위해 무서운 얼굴로 나타난 부처의 화신을 가리킨다.
성불암 (서기 1603년 10월 23일, 양력 추정)
깊은 숲속 승방은 자그마하고
층진 산자락에는 돌길이 갈라진다
한밤중에야 비로소 달을 보는데
넓은 바다는 구름 한 점 없이 활짝 트여 있다
향기는 하늘 저편에서 내려오는 듯하고
종소리는 인간 세상 아래로 울려 퍼진다
시원스럽기가 인간 세상 밖 같으니
무리를 떠나 오래 머무는 것도 그리 한스럽지 않다
불정대 (서기 1603년 10월 24일, 양력 추정)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성문이 크게 열려 있고
바위 첩첩한 불정봉은 한없이 높기만 하다
뭇 봉우리는 일관봉과 나란하고
폭포는 하늘 문에서 쏟아져 내린다
구름은 골짜기에 아득히 깔려 있더니
어느새 바다에서 해가 목욕하고 솟아오른다
앉은 자리에서 별들이 하나둘 스러지고
새벽빛이 닭이 우는 마을에 밝아 온다
유점사 (서기 1603년 10월 24일, 양력 추정)
금빛 종과 불상은 서역 월지국에서 들여왔고
우람한 전각들은 이 좋은 터에 늠름하게 열려 있다
여덟 부류의 용신은 부처님 옥좌 앞에 굽실거리고
하루 여섯 때마다 하늘의 음악이 향대에 울려 퍼진다
재를 올려 아직도 세조 임금의 명복을 빌고
민지가 지은 기문은 그 재주를 두고두고 칭송받는다
무슨 일로 나 허균은 근기가 이토록 얕아서
승려의 옷과 밥그릇을 세속의 먼지에 뒤섞고 마는가
(용어) 월지는 서역에 있던 나라 이름이다. 하루 여섯 때란 낮 세 번, 밤 세 번을 합한 것으로, 아침·낮·해질녘·초저녁·밤중·새벽을 이르며, 극락왕생을 바라는 이는 이 여섯 때마다 부처님께 예를 올린다고 한다. 조선 세조 임금은 불교를 깊이 믿어 1466년 유점사에 행차하여 승려 학열에게 명해 절을 새로 고쳐 짓게 하였고, 이로써 유점사는 큰 절이 되었다. 그 내력을 적은 기문은 고려 때 문신 민지가 지은 것이다. 마지막 구절의 "허순"은 중국 동진 때 사람으로, 한때 불교에 깊이 심취했다가 다시 세속으로 돌아간 인물이다. 허균은 같은 허씨 성을 빌려, 자신도 그처럼 수행에 전념하지 못하고 세속에 얽매여 있음을 자책하고 있다.
산영루 (서기 1603년 10월 24일, 양력 추정)
(허균이 남긴 설명): 도사 벼슬을 지내는 윤길과, 집경전 참봉 벼슬의 노승이 찾아와 함께 자리하였다.
가을이 이미 저물어 단풍잎도 늦었는데
국화가 가득 피어 마치 내 고향 동산 같다
잔칫상에는 고을에서 보내온 음식이 가득 차려지고
스님의 밥상에는 배추와 무 반찬이 올랐다
아사 벼슬의 그대는 이름을 안 지 이미 오래고
재랑 벼슬의 그대와도 오랜 정이 두텁다
우연히 이렇게 좋은 모임을 이루었으니
지는 해 아래 술동이엔 맑은 술이 넘실댄다
(용어) 도사는 각 도의 관찰사를 보좌하던 벼슬로, 흔히 아사라고도 불렸다. 참봉은 왕실의 사당이나 전각을 관리하던 말단 벼슬로, 여기서는 재랑이라고도 불렀다.
동단료에서 하룻밤 묵다 (서기 1603년 10월 24일, 양력 추정)
잎이 지고 나니 봉우리마다 말끔하고
가을 구름은 온 절을 음산하게 덮었다
나그네 마음은 이 해도 저무는가 놀라고
맑은 구경에 번거롭던 가슴이 후련해진다
등잔 그림자는 가물가물 밤은 깊어 가고
서리 짙은데 변방 기러기 소리 끼욱끼욱 울린다
잠이 오지 않아 창문을 열어젖히니
은하수는 새벽이 되어 벌써 희미해진다
경고에서 정생 두원과 이별하고 곧장 산을 내려오다 (서기 1603년 10월 25일, 양력 추정)
(허균이 남긴 설명): 정생은 도교의 수련법인 단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다.
산을 내려온 지 아직 하루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마치 한 해가 지난 듯 산이 그립다
다시 올라가 볼까 생각도 해 보지만
세속의 그물에 얽매인 몸을 어찌하랴
아득히 벗님마저 나를 떠나가니
가고 또 가는 저 낙양으로 흐르는 냇물처럼
나그네 신세에 또 다른 나그네를 떠나보내니
내 마음은 더욱더 처량하기만 하다
열 걸음에 아홉 번은 고개를 돌아보고
다섯 걸음에 세 번은 채찍을 멈춘다
멍하니 절집을 바라보며 눈길을 두는데
구름과 안개가 전각과 요사채를 감춰 버렸다
서글피 바라봐도 더는 보이지 않으니
서늘한 바람 앞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백천교 (서기 1603년 10월 25일, 양력 추정)
백 척 되는 다리가 수풀 끝에 걸터앉았는데
구월의 마른 우렛소리처럼 급한 여울물이 부딪는다
편리하게 물을 건너게 해 준 이 다리는 어느 해 누가 세웠는가
오늘 이곳에 와 노닐다 난간에 기대어 본다
서리 맑은 큰 골짜기엔 세찬 물결이 깨끗하고
바람 급한 층진 산에는 떨어지는 잎이 차갑기만 하다
서글프구나, 젊은 시절 다리 기둥에 써 놓았던 그 큰 뜻은
반평생이 다 가도록 얻은 것이라곤 희끗희끗한 귀밑머리뿐이니
(용어) 한나라 때 사마상여는 처음 벼슬길에 올라 서쪽으로 떠나던 날, 승선교라는 다리를 지나며 그 기둥에 "높은 수레와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지 않고서는 다시 이 다리를 지나지 않겠다"고 써 놓았다고 한다. 허균은 이 옛이야기를 빌려 자신의 젊은 시절 포부를 떠올리고 있다.
청간정에서 낮잠이 들다 (서기 1603년 10월 25일, 양력 추정)
풍악산이 그대 담무갈보살이라면
궁궐의 늙은 별, 세성은 바로 나일세
만남이 늦은 것이 비록 한스럽지만
사귄 정은 절로 격식을 잊게 한다
잠시 헤어짐은 세속의 얽매임 때문이니
그윽한 만남의 약속은 늘그막에나 맡길 수밖에
높은 정자에서 짧은 낮잠 한 자락 남기고 나니
하늘 밖으로 일만 봉우리가 새파랗게 펼쳐져 있다
(용어) 담무갈보살은 불교 경전에서 금강산에 머문다고 전하는 보살의 이름이다. 세성은 목성을 달리 이르는 말로, 옛사람들은 나이 든 이를 세성에 견주기도 하였다. 허균은 자신을 늙은 세성에, 금강산을 담무갈보살에 견주어 오래 별러 온 만남에 비긴 것이다.
쌍성호 (서기 1603년 10월 25일, 양력 추정)
바다를 아우르니 호수가 드넓은데
물길 따라 내려가는 나그네의 배는 가볍다
저무는 산은 붉은빛으로 안개에 엉기고
서리 내리니 저녁 물결이 유난히 맑다
뗏목 길이 은하수로 통한다면
신선의 거처가 옥경과 가까울 텐데
젓대 소리에 서왕모가 내려온다는데
동쌍성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용어) 서왕모는 곤륜산에 산다고 전하는 전설 속의 여자 신선이며, 동쌍성은 그 시녀로 알려진 옛 여선이다.
가는 길에 낙산을 바라보다 (서기 1603년 10월 26일, 양력 추정)
향로봉 자락이 흩어져 무리 진 구름 쟁반을 이루니
푸른빛 겹겹이 쌓인 사이로 고운 빛깔이 늘 환하게 빛난다
낙산사에서 하룻밤 묵어가려 물어보니
길 가던 이가 저 멀리 오봉산을 손으로 가리킨다
낙산사에 묵다 (서기 1603년 10월 26일, 양력 추정)
오봉산의 절을 두 번째로 찾아왔는데
풍경은 지난해와 다름이 없다
대숲 오솔길엔 오가는 발길이 이어지고
꽃 핀 누대에는 저녁 연기가 피어오른다
여러 스님이 줄지어 마중 나와 반겨 주니
이 멋진 유람이 마치 하늘나라를 밟는 듯하다
이미 나고 죽음이 없는 이치를 깨달았으니
속세의 인연은 아득히 멀어져 마음이 맑기만 하다
(용어) "나고 죽음이 없는 이치를 깨달았다"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는 참된 이치를 깨달아 흔들림 없이 그 자리에 편안히 머무는 경지를 뜻한다.
고을 원님이 술과 기생을 보내오다 (서기 1603년 10월 26일, 양력 추정)
(허균이 남긴 설명): 이 고을을 다스리는 원님은 홍여성이다.
원님은 사귀는 정이 참으로 두터워서
맑은 술동이에 곱게 꾸민 기생의 쪽 그림자가 어린다
바다로 나가 노닐 뜻을 품었더니
도리어 기생을 데리고 동산에서 노닐게 되었구나
(용어) 옛날 동진의 사안은 처음 동산에 은거하며 지냈는데, 산수의 흥취를 즐기면서도 나들이할 때마다 반드시 기생을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허균은 이 옛이야기를 빌려 자신의 처지를 빗대고 있다.
사촌에 이르다 (서기 1603년 10월 27일, 양력 추정)
사촌에 이르자 얼굴이 절로 환하게 풀리니
교산이 마치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듯하다
붉은 정자에 홀로 올라 보니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고
봉래산 아득한 그 사이에 내가 서 있구나
호정 (서기 1603년 10월 27일, 양력 추정)
안개와 아지랑이 푸르게 어리어 호수 빛이 넘실넘실
가을꽃을 사뿐사뿐 밟으며 대숲 속 방으로 들어선다
머리 허옇게 센 여덟 해 만에 이곳을 다시 찾았으니
그림배에 곱게 단장한 기생을 태우고 놀 마음이 이제는 없다
(당대 평가): 석간이 남긴 주석에는 "박공이 홍장이라는 기생을 이 정자 아래 숨겨 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손곡은 이렇게 평하였다. "이 마흔일곱 편이 모두 예스럽고 우아하며 맑고 아름다워, 높은 것은 한나라·위나라 시와 견줄 만하고 낮은 것도 당나라 전성기의 격조에 낄 만하니, 시가 쇠퇴하던 이 시대에 이런 바른 소리가 나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풍악산의 담무갈보살도 마땅히 기뻐서 춤을 출 것이다."
(용어) 개원과 대력은 각각 당나라 현종과 대종의 연호로, 현종의 개원 연간부터 대종의 대력 연간까지가 곧 당나라 시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 해당한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명주잡저 · 요산록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명주잡저 · 요산록
배경: "명주잡저"는 허균이 1603년(계묘년)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외가가 있는 강릉(옛 이름 명주)으로 돌아와 지낸 넉 달 동안 지은 시들을 모은 것이다. 마침 큰 풍년이 들고 여러 경사가 겹쳐 잦은 잔치에 시달리느라 많은 글을 남기지 못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어지는 "요산록"은 1604년(갑진년) 요산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한 뒤 지은 시들을 모은 것으로, 소송이 빗발쳐 글쓰기에 전념하지 못했다는 사정을 서문에서 직접 밝히고 있다. 이 두 편의 서문(허균이 직접 남긴 산문)과 그에 딸린 시들을 함께 옮긴다. 이로써 성소부부고 제1권(시부 1)에 실린 시 240편의 번역이 모두 마무리된다.
명주잡저 (서기 1604년 2월 27일, 양력 추정)
계묘년(1603년)에 나는 금강산에서 명주(지금의 강릉) 외갓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명주는 큰 풍년이 들었고, 원님으로 있던 유인길이라는 사람은 임기가 다 되어 떠나게 되었는데, 백성들이 그가 떠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집집마다 그를 위한 잔치를 열어 주었다.
거기다 김자징이 첩을 들이는 일로 이곳에 내려오게 되어, 우리 세 사람이 어울려 노닐게 되었는데, 그렇게 벌어진 큰 잔치만 무려 마흔두 차례나 되었다. 문과에 급제한 선비가 한 사람, 진사시에 오른 사람이 다섯이나 되어 그들이 집에 돌아올 때와 축하하는 자리마다 잔치가 벌어졌고, 진사시에 합격해 명부에 이름을 올린 사람도 여덟이나 되어 역시 잔치가 이어졌다. 그때마다 풍악 소리가 귀를 어지럽혀 마치 개구리 떼가 우는 것 같았고, 술과 음식이 넘쳐흘러 지옥이 따로 없어 보일 지경이었으며, 사람들을 응대하느라 정신을 차릴 틈조차 없었으니, 어느 겨를에 붓을 들고 시를 읊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넉 달을 머무는 동안 책 한 장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채 잔치 초대에 응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그래서 아프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해 다니기도 했다. 유 원님이 임기를 마치고 떠난 뒤에야 비로소 붓을 들기 시작해 겨우 마흔여섯 편을 얻었기에, 그 이름을 '명주잡저'라 하였다.
요산록 (서기 1605년 9월 15일, 양력 추정)
갑진년(1604년) 가을, 나는 지방관 자리를 자원하여 요산 고을을 얻었다. 이곳은 원래 외진 벽지로 알려져 있었기에, 나는 속으로 경전 공부에 전념하면서 틈틈이 글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부임하고 보니 소송 문서가 빗발치듯 밀려들어 귀가 시끄럽고 눈이 어지러워 밥 먹고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게다가 이 고을 백성들은 드세고 사나운 기질을 숭상하여 다스리고 억누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천 권이나 되는 책을 묶어 놓은 채 펼쳐 보지도 못했으니, 하물며 생각을 가다듬어 글을 짓는 일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2년 동안 지은 것이라고는 겨우 서른두 수뿐인데, 그나마 대부분 시끄럽고 번잡한 와중에 나온 것이라 딱히 남길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래도 다 낡은 빗자루라도 제 것이라고 아까워하는 마음처럼 선뜻 버리지 못하고, 우선 세 편만 남겨 '요산록'이라 이름 붙였다. 그 가운데 두 편은 화학루에서 최해성의 시에 운을 맞추어 지은 것인데, 최해성의 시에 "정공이 떠나간 지 삼천 년 뒤에, 태수가 찾아와 열두 난간에 기대었네"라는 구절이 자못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도 운을 맞추어 "사훈이 남긴 빼어난 글귀 늘 외우며, 높은 난간 현도관에 오래도록 기대리라"라고 지어 놓고 제법 잘 지었다고 여겼는데, 최해성의 맏아들이 이를 불쾌하게 여기기에, 나는 나중에 지은 것일 뿐이라고 둘러대고 그의 노여움을 풀어 주려 결국 그 시를 빼 버렸다. 또 다른 한 수도 운자가 같아서 함께 빼 버렸다.
고을에 부임하여 화학루에 오르다 (서기 1604년 10월 5일, 양력 추정)
아전들이 흩어지니 뜰이 고요해지고
누각에 오르니 나그네 마음도 활짝 열린다
사방의 산은 마치 팔짱을 끼고 인사를 하는 듯
한 줄기 강물은 저 홀로 굽이굽이 감돈다
저녁 새는 사람을 반기듯 지저귀고
가을꽃은 제멋대로 활짝 피었구나
몸이 이리도 홀가분해 들판의 흥취에 젖어드니
내가 원님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경무와 함께 학선당에서 묵다 (서기 1604년 10월 20일, 양력 추정)
벗이 먼 길도 마다 않고 나를 찾아와
함께 짝이 되어 관아 숙소에서 묵는다
오늘 겪는 총애와 수모에 새삼 놀라고
지난해 이야기를 나누며 슬픔과 기쁨을 함께한다
서리 맞은 기러기 울음 애처로운데 하늘은 아득하고
촛불 심지 다 타들어가고 물시계 소리도 멎었다
벼슬아치 체통을 지키려니 절로 거만해지지만
푸른 강에서 낚싯배를 띄우던 그 시절이 못내 그립다
(용어) 경무는 정상조라는 사람으로, 당대에 이름 높았던 시인 호음의 서자 계열 후손이다.
인백의 애첩이 부르는 노래를 듣다 (서기 1604년 10월 21일, 양력 추정)
변방의 노랫가락은 유달리 힘차고 웅장한데
그 노래 부르는 젊은 여인의 얼굴 또한 빼어나게 곱다
맑은 목소리는 마치 달을 흔드는 듯 애절하고
긴 여운은 느릿느릿 구름을 넘어간다
애끊는 그 노랫가락은 임을 그리는 곡조요
애달픈 그 노랫말은 술을 권하는 사연이라
벗을 붙잡아 두어 새벽까지 노래를 들으니
시름겨워 찡그린 고운 눈썹이야 아랑곳할까
(용어) 인백은 민희안이라는 사람이고, 노래를 부른 여인은 창성 출신으로 송강가사를 가장 잘 부르는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마음속 회포를 적다 (서기 1604년 11월 5일, 양력 추정)
도연명은 팽택 현령이 되었을 때 관아의 밭에 온통 수수를 심게 했고
반악은 하양 현령이 되었을 때 고을 전체에 복사꽃 오얏꽃을 가득 심었다지
그들은 벼슬을 벗고 돌아가 절로 편안했건만
나 같은 못난 벼슬아치는 정말이지 서글프기만 하다
술을 거르느라 두건이 삐딱하게 젖혀지고
먼지 속을 헤매고 다니느라 손에 쥔 수판마저 비뚤어졌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결국은 다 묻혀 사라지는 법
누런 인끈을 두른 벼슬살이가 무슨 자랑거리이겠는가
밭이랑은 거의 다 묵정밭이 되어 버렸고
백성은 절반이나 죽어 사라졌는데
부세는 여전히 예전처럼 거두어들이고
게다가 홍수와 가뭄, 벌레 피해까지 덮쳐 온다
이런 형편에 다스림이 어찌 좋은 평가를 받기 바라리
내 마음은 오히려 고향 생각뿐이다
지방 수령 자리에 있는 것이 부질없이 부끄러워라
한나라 때 어진 지방관들에게 어찌 미칠 수 있으랴
(용어) 도잠은 동진 시대의 문인으로 팽택 고을의 현령이 되었을 때 관아 소유의 밭에 모두 수수를 심게 하고 "늘 술에 취할 수 있으면 그만"이라 말했다고 한다. 반악은 진나라 때 하양 현령이 되어 고을에 복사꽃과 오얏꽃을 잔뜩 심어 놓아, 사람들이 "하양은 고을 전체가 꽃밭"이라 불렀다고 한다. "누런 인끈"과 "이천 석"은 모두 태수, 곧 지방장관을 가리키는 말로, 한나라 때 태수의 녹봉이 이천 석이었던 데서 나온 말이다. 순량은 법을 잘 지키며 백성을 잘 다스리는 관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과거 시험을 감독하고 돌아오는 길에 양산에 이르러 짓다 (서기 1605년 1월 10일, 양력 추정)
과거 시험장을 걷고 나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다가
양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잠시 긴장을 풀었다
좋은 술을 가득 따라 원님에게 권하니
곱게 쪽 찐 기녀들이 맑은 풍류를 울려낸다
촛불 심지를 돋우니 장막에 향내가 감돌고
주렴을 걷어 올리니 온 산에 눈이 가득 쌓였다
즐거움에 흠뻑 취해 그칠 줄을 모르는데
이 좋은 밤은 어느새 이토록 깊어 버렸구나
군무로 인해 새벽에 바다를 보며 황주에 이르러 그 일을 적다 (서기 1605년 1월 11일, 양력 추정)
칼 쓰는 병법 이야기는 내 재주가 아닌데
관아의 공문서 부름에 그저 시달릴 뿐이다
가득 찬 물살을 헤치며 별빛 아래 배를 저어 가고
살얼음판 위로 떨면서 말을 몰아간다
새벽달 아래 풍루에서 들려오는 젓대 소리
차가운 하늘 아래 눈 덮인 배에 켜진 등불
벼슬살이가 저절로 게을러지니
세상일이 귀먹은 승리마저 저버리는구나
(용어) 여기서 말하는 "귀먹은 승리"는 한나라 때 태수 황패 밑에서 일하던 허씨 성의 승리(태수를 보좌하는 관리)가 늙어 귀가 어두워지자, 그를 내쫓으려는 부하에게 황패가 "이 사람은 청렴한 관리이니 귀가 좀 어두운들 무슨 상관이냐"며 감싸 주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는 늙고 세상에서 밀려난 자신의 처지를 이 이야기에 빗댄 것으로 보인다.
황주에서 자다 (서기 1605년 1월 11일, 양력 추정)
병풍 속 파초 그림자가 등잔불을 가리는데
비파 줄을 막 고르니 옥구슬 부딪는 소리 쟁그랑쟁그랑
고량주 잔 그득 채우니 부귀한 잔치인 양 훈훈한 기운이 넘치는데
(※ 이 구절의 '금장'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눈바람이 창문을 두드려대든 말든 무슨 상관이랴
서흥의 인가에 묵다 (서기 1605년 1월 12일, 양력 추정)
가녀린 손으로 손수 찻잔을 받쳐 올리니
용단차가 다 우려지면 다시 더 넣어 준다
날이 차가워지니 바람이 장막을 걷어 올리고
밤이 깊어지니 달빛이 처마를 살며시 엿본다
산줄기는 탁문군의 비단 치마처럼 곱게 주름지고
방 안엔 가씨 집안 주렴처럼 그윽한 향이 감돈다
봉래산 신선 세계는 천 리 밖에 있건만
새벽마다 꿈속에서는 실컷 그곳을 넘나든다
(용어) 탁문군은 한나라 때의 이름난 여류 시인으로, 여기서는 산줄기의 결을 그녀의 곱게 짜인 비단 치맛자락에 견준 것이다. 가씨는 진나라 재상 가충의 딸을 가리키는데, 그녀가 아버지가 아끼던 귀한 향을 정인에게 몰래 나누어 주었다는 옛이야기에서, "가씨의 향"은 그윽하고 은밀한 향기를 뜻하는 표현으로 쓰이게 되었다. 봉래산은 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의 산으로, 여기서는 멀리 떨어진 그리운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고을에 있으면서 저녁에 짓다 (서기 1605년 1월 13일, 양력 추정)
한 줄기 파르스름한 연기가 관아 부엌에서 피어오르더니
사슴 새끼 고기며 곰 발바닥 요리를 안주로 차려 올린다
배불리 먹기만 하고 공무는 등한시하고 있으니
시인이라면 응당 하는 일 없이 녹만 축낸다고 비웃을 만하다
나옹이 오다 (서기 1605년 3월 24일, 양력 추정)
봄바람과 함께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니
묵은 병이 금세 씻은 듯 나을 것만 같다
그대는 사상처럼 흥에 겨워 춤도 잘 추니
본래부터 술 좋아하는 호탕한 무리가 아니던가
평생 이룬 일이라야 서까래만 한 큰 붓 하나 남았을 뿐
살아가는 방식은 그저 술병 하나에 맡겨 두었다
하찮은 벼슬자리 따위가 다 무엇이랴
돌아갈 길은 저 강호에 있을 뿐인 것을
(용어) 사상은 진나라 때 사람으로 총명하고 음악에 능했는데, 한 모임에서 재상 왕도가 춤을 청하자 흔쾌히 일어나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호탕한 무리"라는 말은, 한나라를 세운 유방을 찾아가 스스로 "나는 유생이 아니라 고양 땅의 술꾼이다"라고 당당히 말했다는 역이기의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술을 즐기는 호방한 사람을 가리킨다.
동헌에 막 나가 앉아서 (서기 1605년 3월 25일, 양력 추정)
타향에서 병을 앓은 지 벌써 석 달째
높다란 관 아래 어느새 흰머리가 비친다
이렇게 눌러앉아 있는 내 옹졸함이 가엾고
"돌아가리라" 외치고 미련 없이 떠난 이야말로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날씨는 남은 눈을 슬슬 녹여내는데
봄추위는 여전히 복사꽃 봉오리를 옥죄고 있다
동녘 바람이 불어와 돌아가고픈 흥을 돋우니
강호 어딘가에는 벌써 낚싯배가 떠 있겠지
안성관에서 조성 형제를 만나다 (서기 1605년 4월 6일, 양력 추정)
객지에서 한식을 지내고 보니
저물어가는 봄빛을 어찌할 수가 없구나
문을 나서면 어디나 고운 풀이 무성하고
지팡이에 기대서니 떨어지는 꽃잎이 많기도 하다
그대들은 말을 나란히 타고 나를 찾아왔고
고운 여인은 술을 권하는 노래를 불러 준다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새어 나오니
이 정도면 떠도는 서글픔을 달래기에 충분하다
(용어) 조성 형제는 허씨 집안의 친척이다.
고을에 돌아와서 (서기 1605년 4월 7일, 양력 추정)
멀리 떠도는 나그네는 저물어가는 봄에 놀라
누각에 올라 늦도록 자리를 뜨지 못한다
바람이 가벼운 빗줄기를 실어 저편으로 옮기고
푸른 산은 저녁노을을 두르고 다가온다
숲속 새는 발을 엿보며 지저귀고
복사꽃은 댓잎에 비쳐 활짝 피었다
그저 이 도주 고을의 선정을 본받아 기록으로 남기고자
(※ 이 구절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날마다 시를 읊조리며 이리저리 서성인다
새벽에 일어나서 (서기 1605년 4월 18일, 양력 추정)
게으르게 시를 읊으며 동쪽 난간에 기대어 서니
봄날은 어느새 벌써 절반이나 지나가 버렸다
보슬비가 발에 가득 맺혀 마음이 서글픈데
어젯밤 바람이 불더니 두어 가지에 꽃이 피었다
관아에 오가는 문서는 산더미처럼 계단에 쌓였는데
당직 서는 아전들은 오리처럼 뒤뚱뒤뚱 줄지어 걷는다
다행히 나도 왕휘지처럼 홀로 턱을 괴어 볼 수 있으니
서산에서 불어오는 저 시원한 기운이나 바라볼 수밖에
(용어) 왕휘지는 동진 때 사람으로, 자유라는 자를 썼다. 얽매임 없이 자유분방한 성품으로 유명했는데, 한번은 상관인 환충이 "내 밑에서 일한 지 오래되었으니 이제 좀 더 진지하게 임해 달라"고 하자, 그는 아무 대답 없이 손에 쥔 홀(관리들이 지니던 판)로 턱을 괸 채 "서산에 아침이 오니 시원한 기운이 감도는군"이라고만 답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말로, 세속의 일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한 태도를 뜻한다.
생각나는 대로 읊다 (서기 1605년 5월 8일, 양력 추정)
높다란 누각에서 낮잠을 깨어나
한가로이 시를 읊으니 마음도 느긋해진다
발을 걷어 올리니 꾀꼬리가 노래를 부르고
난간 가에는 푸른 그늘이 무르익었다
모든 물줄기는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데
외로운 저녁연기는 먼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다
마음 맞는 벗 두세 사람과 함께
경치를 바라보니 이 또한 한없이 조용하고 좋다
산으로 돌아가는 승려 무위를 배웅하며 (서기 1605년 5월 10일, 양력 추정)
더없이 아름다운 이 단하자여
일찌감치 불교의 오묘한 진리에 들어섰구나
나를 찾아와 관아 숙소에 묵으면서도
말 한마디 잊은 듯 고요히 지냈다
여러 달을 지내면서도 딱히 즐기는 것 하나 없이
곁에 둔 것이라곤 낡은 술항아리 하나뿐
취하면 문득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고
옷소매 펄럭이며 덩실덩실 춤도 추었지
안타깝구나, 사람 중의 영웅다운 그대가
평생을 산속에서 늙어가야 한다니
저 멀리 구월산을 찾아 들어가
구름 속에 절 하나를 새로 열었다지
작별을 고하며 문득 지팡이를 떨치고 일어서니
그 걸음걸이가 어찌 그리 홀가분한지
떠나가는 그대가 못내 아쉬워
저녁 내내 마음이 어수선했다
들판에 나가 거적자리 깔고 이별을 나누니
아득한 이별의 심정이 못내 서글프다
돌아가는 말 잔등에는 석양빛이 비껴들고
외로운 저녁연기는 먼 마을에서 피어오른다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지 없을지 그 누가 알랴
그저 이 숲 속 술이나 다 마셔 버리세
(용어) 감원은 절, 곧 사찰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인이 서경에서 오다 (서기 1605년 5월 14일, 양력 추정)
그대가 사뿐사뿐 걸음으로 찾아오니
(※ 원문의 '단부'라는 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문맥상 찾아온 벗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나그네의 맺힌 한도 스르르 풀리는구나
그대에게 시문을 다듬게 하고
못가 누각에서 함께 노닐게도 한다
낮잔치에는 향기로운 술이 오르고
밤이 되면 촛불을 밝히며 이야기를 나눈다
서경에서 꽃다운 소식이 전해오니
봄날 동교요 같은 미인이 그리움에 애태운다지
(용어) 동교요는 옛 소설 《전등여화》에 등장하는 미인의 이름이다.
황주 목사가 기생 두 명을 데려오다 (서기 1605년 5월 20일, 양력 추정)
해당화가 막 잠들 듯 나른한데 술기운도 얼근히 오르고
잎사귀마다 비단 치맛자락에 푸른 안개가 물든 듯하다
떠나려던 사람이 차마 발길을 떼지 못하니
그대여, '망강남' 노래를 다시 한번 불러다오
장미꽃이 부슬비와 어우러져 하늘하늘 떨어지고
한낮의 산들바람은 얇은 옷깃을 파고든다
비파 한 가락을 타니 졸던 제비가 놀라 깨어
주렴 높은 곳으로 날아올라 지저귄다
(용어) 이 자리에 있던 황주 목사는 박동량이라는 사람으로, 허균과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한 동기이자 그 시험의 장원이었다. 망강남은 노래 곡조의 이름으로, 수나라 양제가 서원이라는 정원을 만들고 연못에 화려한 배를 띄운 뒤 이 곡을 지어 부르게 했다고 전한다.
충천각에서 쓰다 (서기 1605년 6월 15일, 양력 추정)
느지막이 높은 누각에 올라앉으니
스쳐 가는 바람이 옷자락을 흔든다
꾀꼬리 소리가 노랫가락을 대신하고
작약꽃이 이 계절의 아름다움을 도맡았다
너른 들판에는 냇물 줄기가 가늘게 보이고
외딴 마을의 나무 빛깔은 희끄무레하다
산에서 기다리는 벗과의 약속을 저버렸으니
돌아가겠다는 말만 자꾸 어기다가 몸만 살쪄 가는 게 아닌가 싶다
석봉이 찾아오다 (서기 1605년 6월 16일, 양력 추정)
석봉은 온 세상이 알아주는 노대가로
그 드높은 기풍이 능히 나를 일으켜 세운다
새로 지은 시는 도연명의 글을 닮았고
붓놀림은 왕희지의 글씨를 방불케 한다
귀한 손님 맞으려 걸어둔 걸상을 내린 지 오래인데
바야흐로 큰 어른의 수레가 마침내 발길을 돌려 찾아왔다
높다란 누각에서 술 마시며 시를 읊는 이곳에
더운 바람이 연꽃 향기를 실어 오는구나
수수로 빚은 술 항아리를 막 기울여 따르니
기름진 소고기 안심에 족발까지 곁들여진다
누각 위에서 이렇게 잔치를 벌이니
화려한 난간 서쪽에 취한 채로 드러눕는다
이 뜬세상은 사람 살기에 참 좁기도 한데
높은 이야기를 나누니 세간의 평판도 절로 정리되는 듯하다
술기운이 얼근히 오르자 문득 붓을 놀리니
성난 사자가 바위를 할퀴어 찢는 듯 힘찬 글씨가 나온다
(용어) 도연명은 팽택 현령을 지낸 동진의 은자 도잠을 가리키고, 왕희지는 우군장군을 지낸 동진의 명필로 그의 글씨는 후대의 전범으로 꼽힌다. "걸상을 내리다"라는 말은 후한 말의 재상 진번이 평소 걸어 두었던 의자를 귀한 손님인 남주의 선비 서치가 찾아올 때만 내려 극진히 대접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것으로, 귀한 손님을 정성껏 맞이한다는 뜻이다.
석봉과 충천각에서 술을 나누다 (서기 1605년 6월 30일, 양력)
머리 숙여 훌륭한 글씨에 경의를 표하니
구양순이나 우세남인들 어찌 감히 잘난 체하리
술잔이 넘실거리자 붓끝을 적셔 글을 쓰고
이야기하고 노래하다 보니 어느새 격식조차 잊어버린다
은행은 주렁주렁 열려 난간에 닿을 듯하고
붉은 석류는 뚝뚝 떨어져 뜰에 가득하다
실컷 취한 끝에 산에 내리던 비마저 개니
구름 저편 먼 산이 유난히도 푸르다
(용어) 구양순과 우세남은 당나라의 이름난 서예가들로, 여기서는 석봉의 뛰어난 글씨를 이들에 견주어 극찬한 것이다.
사상이 오다 (서기 1605년 7월 4일, 양력 추정)
그대는 대체 어디서 이곳까지 찾아왔는가
그윽한 약속은 이미 봄을 놓쳐 버렸구려
서늘한 기운이 막 더위를 걷어 가는가 싶더니
줄곧 내리는 비가 사람의 발길을 붙들어 둔다
흥이 오르면 시를 천 수라도 읊어대고
시름이 밀려오면 술을 몇 순배나 마셨던가
평생토록 나를 알아주는 이는 오직 그대뿐
돌아가고픈 마음은 저 농어와 순채 나물에 있다네
(용어) 사상은 이원형이라는 사람이다. "농어와 순채 나물"은 진나라 때 장한이라는 사람이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의 농어회와 순챗국이 그리워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여기서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뜻한다.
석봉의 부음을 듣다 (서기 1605년 7월 10일, 양력 추정)
손을 맞잡고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사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될 줄이야
드높은 이름은 온 세상에 남을 것이요
큰 업적은 천 년을 두고 기억될 것이다
통곡하니 하늘과 땅이 아득해지고
슬픈 노래를 부르니 해와 달마저 시름겨워하는 듯하다
산양 땅에서 젓대 소리를 듣고 솟구치던 그 눈물처럼
나는 특별한 계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이미 눈물이 솟는다
(용어) 진나라 때 상수라는 사람은 죽은 벗의 옛집이 있던 산양 땅을 지나다가 이웃집 젓대 소리를 듣고 옛정을 못 이겨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 진나라 재상 사안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조카 양담은 슬픔에 겨워 삼촌과 자주 드나들던 서주문 근처를 차마 지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시에서는 이 두 옛이야기를 빌려, 특별한 장소나 계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벗을 잃은 슬픔이 곧바로 북받쳐 오른다는 뜻을 나타냈다.
가을 밤에 짓다 (서기 1605년 8월 20일, 양력 추정)
높은 누각에 밤이 깊어 사방이 어둑한데
나그네의 벗이라곤 가물거리는 등불 하나뿐
싸늘한 방에 쓸쓸히 홀로 앉아 있노라니
비바람이 서쪽 숲 가득 몰아친다
나그네의 밤 (서기 1605년 9월 15일, 양력 추정)
객지에서 밤이 되어도 잠은 오지 않는데
첫서리 내려 이불자락마저 싸늘하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신세이니
갓 떠오른 저 달을 누구와 함께 바라보리
북쪽 마을에서는 다듬이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오고
서쪽 이웃집에서는 젓대 소리가 여운을 남긴다
기둥에 몸을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노라니
울며 날아가는 저 기러기, 구름 끝자락에 걸려 있구나
성소부부고 제3권
9. 19:52
동정부 (서기 1603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부 / 1603년 허균이 금강산과 강릉 일대를 유람하고 지은 초사체 작품 / 병서(산문 서문)는 한문 원문 미확보로 이번 번역에서 제외)
일찍이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외람되이 '기초'라는 간언의 소임을 맡았었네(기초: 옛 중국에서 신하가 임금의 지나친 유람을 경계하며 지었다는 노래)
화려한 누각을 돌아보고 이어진 회랑을 거닐었고
궁궐 높은 계단에서 옛 성군 시절의 음악을 들었네
아, 분수에 넘치는 자리에 앉아 스스로 어리석었으니
끝내 맑은 조정에서 화를 자초하고 말았네
이미 세상과 서로 어긋났으니
차라리 바다와 산에서 자유로이 노닐리라
슬프다, 내 발걸음 이다지도 더디니
도성 문을 나서 동쪽으로 향하네
기쁘다, 내 옷차림이 처음으로 돌아갔으니
통쾌하다, 거꾸로 매달렸던 이 몸이 마침내 풀려났구나(벼슬살이의 속박을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 비유하고, 거기서 풀려남을 이르던 표현)
내 말을 몰아 고향 마을로 치달려
내 수레를 금연에 멈추었네(원문 확인 필요)
반갑구나, 조카가 신발을 거꾸로 신고 뛰어나오니
손님 맞는 정자를 열어 잔치 자리를 마련하네
굽이진 계곡물 따라 술잔을 띄우고
뱃사공에게 명하여 배를 띄우게 하네
가늘게 썬 회가 젓가락 끝에서 나풀거리니
나는 배불리 먹고 돌아갈 일마저 잊었네
남쪽 언덕에서 외삼촌의 무덤을 찾아뵈니
슬프구나, 무덤가 나무들 저리도 무성하게 우거졌네
먼 길을 따라가며 한데서 먹고 자니
바람과 이슬에 지쳐 내 몰골 초췌해라
어떤 비탈인들 넘지 못하며
어떤 깊은 냇물인들 건너지 못하리
어느덧 금성에 다다르니(강원도의 옛 고을 이름)
그 고을 원님이 서쪽 행랑에 숙소를 마련해주네
세상 떠난 형제가 남긴 시를 읊조리니
눈물이 흘러넘쳐 눈시울 가득하네
통구를 따라가며 말채찍 휘두르니
우뚝 솟은 단발령을 오르네
구름 끝에 걸린 일만 개 옥 같은 봉우리를 바라보니
노닐고 싶은 흥이 벌써 저만치 앞서 내달림을 깨닫네
불어난 냇물을 건너 구불구불 나아가
저물녘에 장안사에 이르렀네
대웅전은 우뚝하니 하늘을 찌를 듯하고
칠해진 단청은 금빛 붉은빛으로 찬란하네
자마금으로 빚은 불상의 모습 엄숙하니(자마금: 붉은빛을 띤 금)
흡사 열반에 든 부처님 모습인가 싶네
벽화는 애초 이정이 그린 것인데(조선의 화가)
혹시 개원 연간 오도자의 그림은 아닌가 의아하네(개원: 당나라 현종 때 연호, 오도자: 그 시절의 이름난 화가)
어지러이 용신과 천신이 내달리고
구름 끝에서 부처님 미간의 흰 털이 눈부시게 빛나네
산에서 시중드는 아이 불러 바구니를 들리고
백천 물줄기를 따라 동쪽으로 길을 꺾네
폭포는 요란한 소리로 골짜기에 물을 뿜어내고
봉우리는 우뚝하니 험준하게 솟았네
시왕동의 세찬 여울을 건너
영원사라는 절을 슬쩍 엿보았네
이른 새벽 송라암에서 나막신 끈을 고쳐 매고
망고대를 웅크린 채 기어오르네
벼랑은 깎아지른 듯 아득한데 밧줄을 늘어뜨리니
목숨이 위태로울까 두려웠네
높은 산꼭대기에서 옷자락을 떨치니
뭇 골짜기가 발아래 나직이 주름져 있네
명연이라는 못에서 싸우는 용을 엿보니
꿈틀꿈틀 몸을 웅크린 채 잠겨 있네
정양사에서 오도자의 그림을 찾아보고
마침내 동쪽 누각으로 눈길을 달리네
묶어놓은 옥처럼 빽빽이 하늘을 찌르고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일만 겹으로 늘어섰네
어떤 것은 흰 난새가 훨훨 나는 듯하고
어떤 것은 흰 이무기가 재빨리 솟구치는 듯하네
어떤 것은 보살이 두 손으로 구슬을 받든 듯하고
어떤 것은 얽매이지 않는 성인이 나막신 신고 거니는 듯하네
어떤 것은 위엄 있는 봉황이 목을 치켜든 듯하고
어떤 것은 천마가 갈기를 떨치는 듯하네
어떤 것은 서리 맞은 연꽃이 아직 피지 않은 듯하고
어떤 것은 대모 비녀들이 서로 모여드는 듯하네
어떤 것은 세차게 내달리며 뛰어오르는 듯하고
어떤 것은 높이 솟구치며 우르르 몰려드는 듯하네
어떤 것은 고개를 젖혔다가 다시 굽어보는 듯하고
어떤 것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듯하네
어떤 것은 옥구슬을 쌓고 보석을 흩어놓은 듯하고
어떤 것은 동이를 기울이거나 삿갓을 엎어놓은 듯하네
놀랍구나, 온갖 모습이 저마다 기이함을 다투니
참으로 낱낱이 눈길 줄 겨를조차 없네
어느덧 석양이 서쪽으로 기우니
골짜기 가득한 서리 맞은 단풍에 비쳐드네
자줏빛 끈을 짜놓은 듯 촘촘히 엮이니
울퉁불퉁한 산봉우리들이 붉디붉게 취한 듯 물들었네
오색이 눈부시게 언덕을 두르니
바람에 뒤집히는 비단 휘장을 떠올리게 하네
허공을 딛듯 걸음을 옮겨 차츰 올라가
개심대 축대에 걸터앉네
땅의 형세가 그리 높이 오른 것도 아닌데
어느새 뭇 봉우리들이 눈 아래 있구나
어두운 안개가 넝쿨 우거진 길에 피어오르고
풍경 소리가 숲 너머로 울려 퍼지네
아흔 곳에 이르는 옛 암자를 하나하나 짚어보니
참선하는 등불들이 서로를 비추고 있네
생대에 홀로 우뚝 서 있으니(생대: 절에서 승려들이 밥을 조금씩 떼어 새나 짐승에게 나눠주던 자리)
어느새 고운 달이 빛을 토해내네
계수나무 그림자 찬란히 영롱하고
달빛 비친 바위 사이로 은빛 대궐이 활짝 트였네
맑은 달빛을 손으로 붙잡고 일어나 춤을 추니
온 세상이 작아 보여 비좁게 느껴지네
청학의 옛 둥지를 굽어보고
만폭동의 겹겹 폭포를 건너네
은하수를 기울여 벼랑에 쏟아붓는 듯하니
다투어 뿜어내며 우렛소리처럼 요란하네
옥무지개가 고개 숙여 물을 마시는 듯하고
바다로 치닫는 뭇 용들이 꼬리를 흔드는 듯하네
못과 골짜기에 물보라와 거품이 세차게 튀니
대낮인데도 갑자기 어둑어둑해지네
어지러이 펼쳐진 빼어난 경관에 가슴이 탁 트이니
웅장하구나, 조물주의 신묘한 솜씨여
바위에 새겨진 용의 이마를 어루만지니
일만 봉우리와 더불어 웅장함을 다투려 하네
보덕굴의 외기둥을 바라보니
천 년이 지나도록 넘어지지 않았구나
실낱같은 오솔길을 따라 원통사로 들어서서
용이 숨어 산다는 화룡담을 내려다보네
마하연이라는 절에서 묵으니
밤공기 맑고 서늘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네
바람에 흔들리는 전나무 소리와 샘물 소리 어우러지니
황홀하여라, 마치 생황과 퉁소 소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이른 새벽 잠자리를 걷어 백전을 지나 길을 나서서
아슬아슬한 꼭대기 구정봉에서 입을 헹구네
비로봉에서 신선을 만나볼까 하였으나
비바람이 가로막아 오르지 못하게 하네
적멸암에서 내려와 물을 가로질러 건너고
성문이라는 바위 어귀를 넘어 남쪽으로 건너가네
어지러이 늘어선 바위들이 사람을 덮칠 듯하니
마치 괴상한 짐승이 입을 쩍 벌린 듯하네
은신대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니
물은 아득히 넓고 산은 울퉁불퉁하네
삐죽삐죽한 산줄기 첩첩이 솟았다 가라앉았다 하니
긴 바람이 부채질하듯 바다 물결을 일으키네
누가 구름을 깔아 산골짜기를 가두었는가
발밑에서 번갯불이 번쩍이네
우렛소리 우르릉거리며 비를 몰아오는데
그래도 해는 산봉우리 틈새에 걸려 있네
금강산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라는 말이 참으로 헛말이 아니니
정녕 이번 유람은 자랑할 만하네
어느새 바람의 신이 그늘을 거두어가니
겹겹 봉우리 사이로 일천 폭포가 쏟아지네
누가 이 산을 일만이천 봉우리라 이름 지었는가
우물 안에 앉아 어림짐작한 것이 우습구나
가슴이 트이기가 마치 드넓은 옛 못을 여덟아홉 개라도 삼킬 듯하니
마침내 유점사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네
쉰 명 남짓한 금빛 불상에 절을 올리고(문수보살이 순금으로 빚어 보냈다는 전설이 전하는 쉰세 분의 불상)
백천교를 건너 잠시 머무네
삼일포 남쪽 바위에 신선들이 새겼다는 붉은 글씨를 바라보며(신라 화랑 네 명이 놀러 왔다가 바위에 이름을 새기고 갔다는 사선 전설)
동쪽 바위에 남은 그 옛 자취를 떠올리네
밝은 물결을 등지고 바다를 따라 나아가
어느 고을에서 나이 든 신선 같은 벗을 만났네(원문 확인 필요)
상자 속의 뛰어난 글을 꺼내 보니
진나라와 한나라 때의 그윽한 향기가 풍겨나네
가을 물결과 상서로운 비단을 펼쳐보는 듯하니
쟁쟁하게 우아한 음악이 크게 울리는 듯하네
천 년을 뛰어넘는 빼어난 자취를 보노라니
가을이면 풍악이라 부르는 이 금강산의 우뚝함과 맞먹는구나
참으로 이번 걸음이 가장 풍성하니
글과 산을 함께 만끽했음이라
안개 너머로 보타산을 바라보며(관음보살이 산다는 전설 속 산)
낙산에 내 수레를 멈추었네
동쪽 창을 활짝 열어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고
온 세상을 어루만지듯 큰소리로 노래하네
오직 감호 가의 초라한 내 오두막이야말로(강릉에 있는 호수)
노년을 한가로이 보내기에 마땅하네
천 리에 걸친 아름다운 자취를 거두어 안고
한 골짜기의 안개와 노을 속에 몸을 눕히네
가슴을 활짝 열어 스스로 즐거워하니
세상에 대한 생각이 단번에 사라지네
저 벼슬살이야말로 근심할 만한 것이니
벼슬길의 성난 파도가 두렵기만 하네
생각만 해도 이내 몸서리쳐지고 꿈에서도 가위눌리니
내 어찌 다시 그 길을 걸어 헛디디랴
만약 이 맑은 복을 오래도록 누릴 수 있다면
내가 얻은 것이 가장 많음을 알겠네
하늘이 내린 운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랴
내 뜻에 맞게 편안히 지내며 화평함을 지키리라
원숭이와 학을 벗 삼아 이리저리 노닐며
이 다짐을 골짜기 속 은거하는 삶에 부쳐보리라(옛 시경에서 골짜기에 숨어 유유자적하는 현자를 노래한 표현에서 따옴)
하루하루를 느긋하게 보내리니
인생 백 년이 그 얼마나 되겠는가
서쪽 하늘의 서왕모를 바라보다가
문득 서글퍼져 길게 읊조리네
사구부 (서기 1607년 5월 3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부 / 1607년 삼척부사로 부임하는 길에 옛 고향 강릉을 지나며, 큰 홍수와 오랜 세월로 쇠락한 모습을 보고 지은 초사체 작품 / 병서(산문 서문)는 한문 원문 미확보로 이번 번역에서 제외)
내가 세상의 모진 액운을 만나
슬프게도 벼슬길에서 자주 걸려 넘어졌네
영예와 녹봉이 이미 나와는 인연이 없으니
차라리 강호에 몸을 놓아버릴까 생각했었지
그래도 깃발 하나 앞세워 지방관으로 나가는 것도
역시 임금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라네
수레와 말을 정돈하여 동쪽으로 떠나가니
실직(삼척의 옛 이름)의 옛 도읍을 향해 가는 길
아침에는 횡계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저녁에는 대관령을 넘어섰네
명주(강릉의 옛 이름), 그 옛 고향에 다다르니
반갑게도 다시 신선의 땅을 보는구나
마부는 숨을 헐떡이며 서둘러 말을 몰아
긴 수풀을 뚫고 내달려 왔네
가슴 아파라, 백성들에게 복이 없어
하늘이 자꾸만 재앙을 내리시니
물의 신이 크게 노하여 울부짖으며
온 들판을 큰 파도로 뒤덮어버렸구나
튼튼한 둑을 무너뜨리고 큰 방죽마저 헐어
높이 솟은 벼랑까지 깎아내렸네
늙은이와 어린것들이 급류에 휩쓸려가
깊은 굴속 상어와 악어의 밥이 되었다니
성곽 곁에 빼곡히 늘어섰던 그 많은 집들
지금은 물에 잠겨 강으로 변해버렸네
혹시 새로 전쟁이라도 겪은 것인가 의아해하다가
아니면 세상이 통째로 뒤바뀐 것인가 생각해보네
아, 어찌 이리도 혹독한 벌이 이곳에만 내렸는가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구나
마을은 이미 절반도 채 남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 옛 벗은 누가 살아있는지 물어보았네
술상을 차려놓고 반갑게 나를 맞이하는데
양반이며 종놈이며 뒤섞여 앉아 있구나
내 마음이 조금은 위로가 되어
억지로라도 웃음 지으며 이리저리 서성였네
발길을 돌려 담장 동쪽으로 향해
청헌(원문 확인 필요, '맑은 정자'라는 뜻으로 보이는 이름)의 매화나무 두 그루를 찾아가 보았네
주인은 어디로 갔느냐 물으니
봉래산의 신선 학처럼 아득히 사라졌다 하네
쓸쓸하여라, 적막한 정원이여
먼지 낀 계수나무 집을 훔쳐보았네
뜰을 따라 거닐며 마음이 아려오는데
섬돌 가에는 아직도 붉은 작약꽃이 흐드러져 있네
아, 옛적 이곳을 드나들던 이들의 자취는 이미 흩어져 사라지고
어느새 푸른 이끼만 누각에 돋아나 있구나
지난날의 그 흥겨운 놀이는 다시 좇기 어렵고
정다운 목소리와 얼굴은 또다시 아득하기만 하네
일어나 바람을 마주하며 내 신세를 홀로 슬퍼하니
흩어지는 내 눈물만 하염없이 떨어지네
서글피 서성이며 차마 떠나지 못하는데
밝던 해는 어느새 서산으로 저물어가네
깊은 샘물은 목이 메어 흐르지 못하고
날아가는 새는 북쪽 숲에서 울부짖는구나
답답한 마음을 풀어보려 길게 휘파람 불어보지만
소리만 처량하고 거칠어 곡조를 이루지 못하네
슬프구나,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인생이여
고개 한 번 숙였다 드는 사이에 오늘이 어느새 옛날이 되어버리는구나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음을 보고서
이 몸도 오래 지니지 못할 것임을 알았네
낮과 밤이 어지러이 서로 갈마드니
왕자교와 적송자처럼 오래 살 자 그 누구인가
내 몸을 어루만지며 스스로 서러워하니
참으로 이 몸은 내가 영영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무슨 까닭으로 험한 길 무릅쓰고 이익을 좇아
어리석은 탐욕꾼들과 함께 썩어가야 하는가
저 맑고 빼어난 바닷가 산속에서
느긋하게 노닐며 남은 생을 보내리라
독우(감독하러 오는 관리, 도연명이 벼슬을 버린 고사에 나오는 인물)가 찾아와 나를 괴롭히기를 기다리지 않고
차라리 귀거래사 같은 글이나 지어볼까 헤아려보네
타고난 목숨을 다 살고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면
어쩌면 권력을 탐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네
울적한 마음을 안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니
객사는 고요하기만 하고 잠은 오지 않네
달은 그윽하게 휘장을 엿보고
등불은 희미하게 벽을 비추네
온갖 상념이 가슴속에 사무쳐오니
문득 산양 땅에서 들려오던 피리 소리가 떠오르는구나(진나라 상수가 죽은 벗을 그리며 지었다는 고사, 이 작품 제목의 유래)
곁에 있던 이에게 거문고를 건네주며 타보라 하고는
처량한 나의 한을 그 소리에 실어 쏟아내네
거문고에 눈물 적시며 새벽에 이르니
서글프게도 동녘은 어느새 밝아왔구나
죽루부 (서기 1607년 5월 10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부 / 1607년 삼척부사 시절, 죽서루에서 지은 작품)
정미년(1607년), 나는 삼척부사로 부임했다. 공무를 마친 틈에 경치 좋은 곳을 찾다가 죽서루에 올랐다.
만 길 높이 솟은 두타산(삼척에 있는 산)을 우러르고
맑게 흐르는 오십천(삼척을 가로지르는 하천)을 굽어본다.
거센 바람을 마주하고 길게 휘파람을 불어
객지살이의 시름을 잠시 풀어본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데도
떠나기가 아쉬워 조금 더 머물고 싶어진다.
이맘때는 봄기운이 아직 남아 있고
여름 풍경이 막 곱게 물들기 시작한다.
갖가지 꽃이 난간을 비추고
짙은 그늘이 섬돌을 덮는다.
회랑은 고요해 인기척이 없고
새소리만 비 갠 뒤라 유난히 곱게 들려온다.
산의 푸른 기운은 이슬처럼 부슬부슬 맺혀 떨어지고
대숲의 안개는 하늘하늘 가늘게 피어오른다.
나는 새하얀 학창의를 걸치고
은자들이 쓴다는 화양건을 쓰고
옥자루 먼지떨이(옥주)를 손에 든 채
평상에 비스듬히 눕는다.
뜰 앞 우거진 숲을 내려다보니
화려하게 채색한 누각 창살 언저리에 맑은 향기가 서린다.
자리에 함께한 세 사람도 나와 흥취가 같아
서로 어울려 이리저리 노닌다.
그래서 요리사를 불러 성찬을 재촉하니
맛 좋은 감주가 올라오고 맛있는 방어가 차려진다.
표주박으로 만든 생황과 가래나무로 만든 슬(거문고 종류의 큰 현악기)이
여러 가락을 뒤섞어 연주하는데,
'자야곡'(옛 중국의 애틋한 노래 곡조)이라는 옛 노래를 새로운 가락으로 떨쳐 부르고
'결풍'이라는 옛 춤곡의 첫 가락을 이끌어 낸다.
흥이 다하도록 즐기며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니
타향에 나와 있는 이 몸조차 잊어버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빛은 아직 퍼지지 않았는데
계수나무 향 초를 높이 밝히니
밤빛은 맑고 서늘하며
물빛은 훤히 트여 아득하다.
은하수는 누각 지붕 위에서 반짝이고
북두칠성 자루 끝의 별은 맑은 하늘에 낮게 걸려 있다.
주렴을 걷어 올리고 느긋하게 흥에 겨우니
봉래섬(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 섬)을 가리켜도 멀지 않은 듯하다.
문득 솟구치는 흥취가 걷잡을 수 없이 날아오르니
전설 속 신선 부구공이라도 불러올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윽고 손님들은 이미 취해
즐거운 놀이가 한창 무르익었다.
어우러진 노랫소리는 그칠 줄 모르는데
내 마음속에는 문득 서글픔이 인다.
슬프구나, 흐르는 세월은 이토록 쉽게 사라지니
마치 흘러가는 냇물이 부서지는 물결과 같구나.
얽히고설킨 세상일이 사람을 재촉하니
아, 젊은 시절이 얼마나 되겠는가.
언젠가는 늙어 죽는 날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생각하니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겠다.
그러니 어찌 술잔을 마주하고도 마다하겠는가.
마음을 풀어헤치고 목청껏 노래 부르리라.
노래하기를,
자줏빛 퉁소 소리 목메어 울자 이슬 기운이 사방에 퍼지고
금빛 물시계에 물이 차오르니 향기로운 밤이 깊어간다.
덧없는 인생이란 잠시 세상에 몸을 얹어놓은 것 같으니
어찌 즐기지 않고 길게 탄식만 하겠는가.
노래를 마치고 한숨을 내쉬니
자리에 앉은 모두가 고요해진다.
난간에 기대어 쓸쓸히 바라보니
높은 하늘에 달이 떠 있다.
북귀부 (서기 1609년 1월 6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부 / 남쪽 임지·유배 생활을 마치고 한겨울에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의 고단함과, 세상이 옳고 그름을 뒤바꿔 놓은 데 대한 풍자를 담은 초사체 작품)
나는 관인을 풀어놓고 길을 나서며
정성껏 수레를 채비하여 몸을 편안히 실었네
고맙게도 남녘 고을의 따뜻한 기운이
헐벗은 나그네를 옷 없이도 견디게 해주었지
그런데 세상은 거만하게 흘겨볼 뿐 나를 돌아보지 않으니
나는 이제 멀리 떠나 훨훨 날아오르리라
붉은 봉황을 타고 붉은 준마를 곁마로 세워
신선 선문(전설 속 신선)과 함께 봉래산(동쪽 바다에 있다는 신선의 산)에서 노닐고
곤륜산 꼭대기 층성에 올라 서왕모(곤륜산에 산다는 전설 속 여신)를 뵙고
요대(서왕모가 산다는 궁궐)에서 편히 쉬어 보려 했건만
아, 세속의 굴레가 나를 옭아매어
다시 나를 붙잡아 북쪽으로 내닫게 하는구나
내 어찌 마음을 바꿔 부귀영화를 좇겠는가
사람들이 내 아름다움을 시샘할 뿐인 것을
속세 밖에서도 오래 머물 곳이 없으니
이 몸을 대체 어디에 두어야 하나
길은 자꾸 막히고 진창을 걸어야 하니
아, 타고난 운명조차 기약할 수 없구나
성문을 나서 말들을 가지런히 몰아
한겨울 매서운 바람을 헤치고 나아가네
마부는 콧물을 흘리며 춥다고 소리치고
냇물은 꽁꽁 얼어붙어 길마저 막혔네
아침에 용성을 떠나
저녁에는 금강을 건너니
아, 이 걸음이 어찌 이리도 더딘가
누가 좋아서 이런 길을 가겠는가
높은 봉우리를 넘으며 추위에 떨자니
산은 험준하게 솟아 하늘을 가리고
검은 구름이 해를 가려
쏟아지는 눈발에 대낮도 어둑하네
살갗은 얼어 터져 검게 그을린 듯하고
변방의 말은 몸을 웅크린 채 자꾸 쓰러지네
슬프다, 내 삶이 이토록 험난하니
마음이 어지러이 뒤엉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구나
공자도 광야에서 굶주림에 시달렸고(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양식이 떨어졌던 고사)
접여(미친 척하며 벼슬을 피한 초나라의 은자)는 미친 척 세상을 등졌으며
증자(공자의 제자로, 가난해도 절개를 지켰던 인물)는 헤진 신을 끌면서도 노래를 불렀고
그 노인(장자에 나오는, 힘들어도 기계를 마다하고 손으로 물을 길어 밭에 대던 인물)은 물동이를 안고 밭에 물을 주었으니
성인이라고 반드시 세상에 쓰이는 것은 아니고
현인이라고 반드시 등용되는 것도 아니라네
이는 예로부터 늘 그러하였으니
내 어찌 지금 사람들을 원망하리오
타고난 운명을 편히 받아들여 스스로 마음을 풀면
적어도 이 한 몸 욕되지는 않으리라
다시 노래하노라
천지에는 서슬 퍼런 살기가 감돌고
화창한 기운은 꽉 막혀버렸네
난새와 공작 같은 귀한 새들은 위세를 잃고
가시덤불 속으로 숨어드는데
올빼미와 부엉이 같은 것들은 뜻을 얻어
대궐 안에서 요란하게 설쳐대는구나
향기로운 난초는 내쳐져 향내를 못 내는데
누린내 나는 잡초를 도리어 향기롭다 하고
못생긴 얼굴을 곱다 하면서
모장(옛 전설 속의 미인) 같은 미인을 오히려 추하다 하네
어리석은 자들이 활개를 치며
헐뜯는 말을 무늬처럼 날마다 엮어
없는 죄를 부풀려 늘어놓는구나
답답하고 서글프구나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차라리 치욕을 견디며 낮은 벼슬자리에 머물렀던 그 사람(사마천이 궁형을 당하고도 역사서 저술을 완수한 고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나 확실하지 않음, 원문 확인 필요)처럼
세상과 더불어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리라
몽유연광정부 (서기 1597년 9월 17일, 양력 추정)
— 꿈에 연광정에서 노닐다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부 / 꿈속에서 신선 세계의 누각 연광정에 노닐며 선녀를 만나는 환상적인 초사체 작품)
붉은 용을 타고 아득히 멀리 떠나가다가
지성(봉래산에 있다는 신선의 궁전)에 이르러 붉은 깃대를 내려놓았네.
무지개 옷자락을 나부끼며 허공을 밟고
아찔하게 솟은 붉은 계단을 올랐어라.
붉은 하늘에 진주로 지은 궁궐이 걸려 있고
오색 난간은 텅 빈 하늘 속으로 훨훨 날아오르는 듯하네.
사자 모양 주춧돌 둘레엔 은빛 물결이 넘실거리고
붉은 기둥에는 상서로운 노을빛이 어리어 빛나네.
새우 수염으로 엮은 발을 걷어 올리고 느긋이 거닐며
맑고 차가운 밤이슬을 떠서 마셨어라.
이윽고 붉은 난새가 날개를 퍼덕이더니
노을 저편에서 옥패를 찬 선녀를 이끌고 왔네.
오색구름이 창문을 감싸고 은은히 비추는 가운데
붉은 깃발 든 시녀들이 어지러이 앞장서 길을 이끄네.
곱고 하늘거리는 옥돗자리를 펼쳐 놓고
향긋하고 시원한 옥 같은 술을 올리네.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고는 옷깃을 여미더니
나더러 요경(신선이 산다는 옥빛 궁궐)으로 함께 내려가자 하네.
봉래산에서 다시 만나자던 옛 약속을 가리키며
전생과 현생과 내생, 삼생에 걸쳐 이어진 묵은 인연이 아직 남았다 하네.
느긋이 거닐어 보자며 나를 부추기더니
견우와 직녀가 헤어질 때의 애틋한 사연을 하소연하네.
풍이(물의 신 하백)를 불러들여 북을 치게 하고
쌍성(서왕모를 모시던 전설 속 선녀)에게 생황을 불게 하네.
유하주(신선이 마신다는 술)를 기울여 뼛속까지 훈훈하게 하고
쟁그랑거리던 옥 귀걸이를 풀어 내려놓네.
은빛 병풍 뒤로 외로이 찌푸린 얼굴을 가리고
반짝이는 꽃무늬 베개 위로 스르르 쓰러지네.
즐거운 만남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느닷없이 성문 다락의 종소리가 뎅뎅 울려오네.
화들짝 놀라 깨어나 길게 탄식하니
기운 달만 서쪽 성벽에 반쯤 걸려 있구나.
동림성부 (서기 1597년 9월 26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부 / 제목 원주: 성은 선천(평안도 지역)의 서북쪽에 있다. 폐허가 된 옛 고구려 성터를 지나며 그 흥망을 늙은 마을 사람에게 전해 듣고 느낀 바를 적은 초사체 작품)
달리는 말을 서쪽으로 몰아
동림의 옛 성터를 찾아간다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는 허물어져 흔적도 없고
흙벽은 무너져 절반이나 주저앉았다
그 화려하던 문루는 다 어디로 갔는지
눈에 들어오는 건 무성한 쑥과 가시나무뿐
깨진 주춧돌이 묵은 풀숲에 뒹굴어도
저 자리가 예전엔 관아 건물 터였음을 알겠다
놀란 노루와 서로 다투는 날다람쥐가
어지러이 수풀 속에서 저희끼리 멋대로 논다
우거진 숲은 그늘져 대낮에도 어둑하고
산도깨비와 나무귀신이 우는 소리 들리는 듯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서성이며
물었다, 이곳은 어느 시대의 도읍이었느냐고
시골 노인이 옛말을 전해주었다
이 성은 고씨가 쌓은 것이라 한다
쳐들어오는 오랑캐 기병을 막으려고
평양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문을 겹겹이 세우고 딱따기를 치며 삼엄히 지킬 만큼
성은 튼튼하게 만들어져 낮지 않았는데
겨우 백 년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이곳은 서쪽 변방을 지키는 큰 진영이 되었다
완안(여진족, 훗날 금나라를 세운 부족)이 쳐들어왔을 때
장씨와 허씨(이 성을 지키다 함께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지는 이들로 보이나, 정확한 내력은 확인되지 않는다)가 함께 죽었다니 애석하다
산마루에 사당을 세워 향불을 올리니
백성들은 지금도 그 의로움에 감복한다
지금까지도 재앙과 복을 내린다 하니
그 굳센 넋은 아직 스러지지 않은 듯하다
고을 관아가 남쪽으로 옮겨가면서
이 성은 비로소 고려 말엽에 버려졌다
사람들은 그래도 이 땅을 못 잊어 눌러살아
마을에는 뽕나무와 삼밭이 무성했는데
중간에 전염병을 만나 다들 떠나버리고
나 같은 늙은이 한둘만 남았다고 했다
노인은 흥망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길게 탄식했는데
길 가던 나는 그보다 더 마음에 사무치는 바가 있었다
도읍을 옮긴 일과 오랑캐에 맞서 싸운 일은
마땅히 믿을 만한 역사책에 남아 있어야 할 텐데
둘 다 전해지지 않아 들을 길이 없으니
이 노인이 아니었다면 누가 알았겠는가
안타깝다, 훌륭한 자취가 이렇게 파묻히다니
세상에 드러나지 못한 일들이 다 이런 식이겠구나
기록이 사라지고 잊혀지면
훗날 누가 그 이름을 기억해 주겠는가
한때 제아무리 이름을 떨쳤다 해도
백 년만 지나면 믿을 곳이 없어짐을 이제 알겠다
이 몸과 이름이 함께 썩어 없어질 것을 알았으니
또 어찌 부질없는 영화와 이익을 탐내랴
내 마음이 서글퍼 서성이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으니
예나 지금이나 이치는 매한가지임을 깨닫는다
하늘은 아득히 넓고 구름은 검게 드리웠는데
사나운 회오리바람이 성난 듯 일어난다
산은 우뚝 솟아 하늘을 가리고
해는 벌써 저무는 물가(해가 지는 곳)에 다가섰다
서글피 서성이며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한 채
이 슬픔을 한 편의 조문 글에 담아 부쳐본다
별지부를 차운하여 적궤·석주 두 벗에게 주다 (서기 1592년 9월 20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부 / 벗이 드물고 세상과 어긋난 처지에서, 자신을 알아준 벗들과의 우정과 이별의 아쉬움을 노래한 초사체 작품. 석주는 허균의 절친한 벗인 시인 권필의 호)
아 나는 세상살이에 발이 묶여
십이 년 세월, 두 번의 목성 주기를 흘려보냈네
가려서 벗을 사귀었건만 마음 맞는 이는 드물었으니
누가 서로 부르며 짝을 찾을 수 있다 했던가
다들 뜨거운 불길처럼 어지러이 날뛰는데
나만 홀로 이 깨끗한 지조를 즐겨 지켰네
자하가 은거하던 서하 땅처럼 외지고 쓸쓸하게 지내며
그저 근심 속에서 글이나 지으며 살았지
털보 조씨와 술 벗 덕분에
세상 사람들 다 나를 버릴 때 그 둘만은 나를 거두어주었네
때때로 글과 예술을 논하며 손뼉을 치고
자주 궁벽한 골목까지 서로 찾아다녔지
애써 잘못을 씻어내며 서로 타이르고
넘어져 망신당할까 두려워했네
아득히 먼 대궐 쪽을 바라보며
근심 만난 처지에서 서로 하나로 뭉쳤었지
이 몸이 얽매여 있는 것이 슬퍼서
떨쳐 일어나 날아가고 싶어도 방법이 없네
지난날 이불 함께 덮고 지내던 그 시절 떠올리니
흐르는 눈물이 뒤섞여 뚝뚝 떨어지네
물길은 아득히 넓고도 험하니
누가 천 리 길 갈 수레를 대령해줄까
서산으로 지는 저 해를 가리키며
가슴속은 구불구불 답답하기만 하네
내닫는 구름은 시커멓게 사방에서 일어나고
검푸른 바다는 하늘까지 떠받쳐 든 듯하네
슬프다, 남쪽 고을에 오래 머물 수는 없는데
아득해라, 무슨 수로 얼굴을 다시 볼거나
아름다운 나뭇가지 꺾어 보내려다가
한탄하며 오래도록 서서 홀로 머뭇거리네
몽귀부 (서기 1611년 2월 27일, 양력 추정)
— 꿈속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다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부 / 유배지에 갇혀 밤마다 꿈속에서 혼백이 고향 집으로 날아가는 것을 그린 초사체 작품. 원문 중간에 글자가 유실된 부분은 "원문 결락"으로 표시)
머나먼 변방으로 쫓겨나 산속에 갇힌 몸,
아득하여라, 옛 도성으로는 돌아가지 못하네.
어찌 된 일인지 꿈속 넋은 갈피를 못 잡고
밤마다 (원문 결락)으로 날아가는가.
밤은 참담하도록 고요하여 하루가 일 년 같고
잠에서 깨면 두렵도록 온갖 생각만 꼬리를 무네.
억지로 베개를 베고 겨우 잠을 청하니
그제야 이 몸이 편안해지고 절로 느긋해지네.
정신이 가라앉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가느다란 숨결에 코 고는 소리 새어 나오는데,
문득 넋이 위로 떠올라
아득히 트인 하늘로 거침없이 날아가네.
우주의 기운을 곁눈질하며
망망한 창공을 가르고 불꽃처럼 솟구치네.
대체 무엇이 나를 몰아 이토록 멀리 가게 하는가,
회오리바람을 밟고 비스듬히 날아가네.
혜성을 붙잡고 세차게 내달리니
컴컴한 구름이 발아래 깔리고,
거꾸로 비친 풍경을 뚫고 높이 솟아
서북쪽을 바라보며 곧장 건너가네.
상서로운 기운이 자욱이 감돌고
희뿌연 안개가 느릿하게 떠도는데,
어지러운 속세를 굽어보니
아득하고 어수선하여 그저 짐작만 할 뿐이네.
번화한 도성조차 찾을 수 없거늘
하물며 궁궐과 큰길을 어찌 가려내랴.
홀로 우뚝 서서 서성이다가
서글피 아득함을 좇아 헤매네.
낡은 우리 집을 바라보며 정신을 모으니
넋이 아래로 내려가 빙빙 도는구나.
남산 기슭을 따라
내 발걸음을 옮겨 가네.
예조(조선의 중앙 관청)를 등지고 우리 집 쪽을 향하니
눈앞은 캄캄하고 길은 끝없이 이어지네.
울타리는 무너져 내렸고
쑥과 잡초만 무성하게 우거졌으며,
늘어진 버들가지는 꺾이고
버려진 연못은 메워져 있네.
산은 굽이굽이 창문을 감싸 안았고
도랑물은 흐느끼듯 샘으로 흘러드네.
맏형님을 마주하고 맺힌 울분을 토로하니
가슴에서 솟구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네.
보이는 것은 순식간에 스쳐 가고 들리는 것은 아득하니
머뭇거리는 넋은 의지할 곳이 없구나.
남쪽 변방으로 발길을 돌리려 하니
정신은 안절부절 쓸쓸하고 텅 비어버렸네.
문득 넋이 흔들리며 또렷해지더니
나는 소스라쳐 잠에서 깨어 가슴이 떨리네.
멀고 험한 길도 뛰어넘으면 지척이니
도성이 아득하다고는 말하지 마오.
이 꿈속 유람을 또다시 할 수 있으리니
정신이 참으로 향한다면 반드시 이르리라.
만약 밤마다 선뜻 돌아갈 수 있다면
어찌 갇힌 신세를 한탄하겠는가.
세상에 사는 인생이란 꿈과 같아
나는 이 몸을 그저 천지간에 잠시 두었을 뿐이네.
또한 땅, 물, 불, 바람 네 가지가 잠시 모여 이룬 것이니
어찌 고향 마을을 그리워하랴.
오직 도를 통달한 사람만이
천지를 여관집보다도 작게 여기고,
일찌감치 몸을 일으켜 멀리 떠나
아득히 넓고 외진 곳에서 노니는 법이라네.
모기떼 모인 웅덩이 같은 이 세상을 굽어보면
답답하여 오래 머물 수 없음을 알겠네.
저 지성(봉래산에 있다는 신선 궁전)과 현포(신선이 산다는 곳),
참으로 내 마음이 노닐고 싶은 곳이라네.
신선의 불사약을 구하여
마침내 단구(밤도 낮처럼 밝다는 신선의 나라)에서 수레를 멈추리라.
속정희부 (서기 1611년 2월 10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부 / 명나라 문인 왕세정(자 원미)이 지은 「정희부」를 본떠 지은 작품. 궁중에서 참소를 당해 쫓겨난 후궁의 처지에 자신을 빗대어 억울함과 충심을 노래한 초사체 작품. 병서(산문 서문)는 한문 원문 미확보로 이번 번역에서 제외)
승상(귀한 가문을 상징하는 자줏빛 갓끈)의 남은 복을 이어받아, 맑고 총명한 기질을 타고났네
몸가짐이 그윽하고 고요함을 스스로 살폈고, 부덕(옛 궁중 여성에게 요구되던 네 가지 덕목―말씨, 몸가짐, 일솜씨, 마음가짐)을 몸에 갖추었네
정숙하다는 소문이 귀한 마을에 퍼져나가, 마침내 높은 궁궐에서 임금을 뵙게 되었네
동쪽 하늘에 뜬 작은 별을 바라보며(시경에서, 후궁이 차례를 기다려 밤에 임금 침소에 드는 것을 별에 빗댄 표현), 낮은 후궁의 자리에 머물러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네
그런 처지에도 나는 본디 이런 고운 자태를 지녔고, 세상에 드문 진귀한 옷차림까지 갖추고 있었네
아름다운 옥 노리개를 허리에 차고, 옥 귀걸이에 상아 비녀를 꽂았네
봉황을 수놓은 신을 신고, 사각사각 소리 나는 비단옷을 걸쳤네
궁궐 전각에 올라 온화한 자태로, 새벽마다 삼가 일어나 손수 세숫물과 수건을 준비했네
거친 명주옷을 입었다는 옛 황후(검소함으로 이름났던 한나라 명덕황후)의 가르침을 받들고, 새벽에 임금을 깨워 정사를 살피게 했다는 어진 후비의 노래(시경 계명편)를 따랐네
유순한 가르침이 널리 펼쳐지기를 바랐고, 그 아름다움이 옛 성군의 어머니들(주나라를 일으킨 태임과 태사)과 나란하기를 기다렸네
그런데 어찌하여 온갖 헐뜯음과 참소가 한꺼번에 밀려오는가, 다들 내 고운 얼굴을 시샘하는 것이었네
뭇 여인들은 앞다투어 아첨하고 웃음으로 아양을 떨며, 예를 지켜 스스로를 다잡는 나를 미워했네
파리떼처럼 윙윙거리며 소매 뒤에서 헐뜯으니, 제멋대로 내 은총을 해치고 빼앗으려 들었네
수레를 사양한 것을 두고 거만하다 하고, 비녀를 빼고 근신한 것을 두고 트집 잡기 좋아한다 모함했네
어지러이 시끄럽게 떠들어 임금의 총명을 흐리니, 임금께서는 도리어 미혹되어 살피지 못하셨네
억울한 속마음을 밝혀 시비를 가려볼까도 했으나, 그저 내 분수를 지키며 홀로 마음 아파하기로 했네
장신궁(총애를 잃은 후비가 물러나 지내던 궁궐 이름)으로 물러나 조용히 지내기를 바랐고, 근심을 떨쳐내고 남은 생을 마치기를 바랐네
하늘은 내게 온전한 운명을 주지 않아, 슬프게도 억울한 허물을 만나게 했네
곧고 신실했건만 도리어 죄를 얻은 것이 마음 아파, 영항(죄를 지은 후궁을 가두던 궁중 처소)으로 내쳐져 영영 버려졌네
눈물을 훔치며 임금께 하직 인사를 올리니, 가슴속이 맺혀 지지듯 타들어갔네
높고 환한 합환전(부부가 함께 지내는 화목한 처소라는 뜻의 궁전 이름)을 등지고, 어둡고 외진 식실(후궁의 처소 이름)로 옮겨갔네
하늘은 캄캄하여 해조차 빛을 잃고, 흐린 무지개가 땅으로 드리웠네
회오리바람이 문득 어두운 안개를 흩날리니, 두려움에 숨죽이고 넋이 떨려왔네
떠도는 내 넋은 의지할 곳이 없어, 술 취한 듯 아득한 저 하늘이 그저 애통하기만 했네
아, 생명에는 정해진 운수가 있듯이, 사랑받음과 욕됨도 본디 서로 맞물려 도는 것이네
충심을 품고도 재앙을 만난 것은, 참소하는 입이 이간질하여 어진 마음을 해쳤기 때문이네
굴원(참소를 당해 강물에 몸을 던진 초나라의 충신)은 돌을 품고 초나라 도읍을 슬퍼했고, 비간(상나라 주왕에게 간언하다 죽은 충신)은 폭군에게 배를 갈렸네
먼 옛날 성현들도 이런 화를 면치 못했으니, 하물며 이 몸이야 무엇이 서럽겠는가
내 천한 목숨이야 아까울 것 없지만, 유순하신 그분마저 차츰 미혹당할까 두렵네
혹시라도 지존의 짝 되시는 분이 그 단아한 덕을 그르치신다면, 그것은 곧 임금의 법도가 무너지는 것과 다름없으리라
나라를 돌아보면 마음이 무너져, 차라리 잠들어 다시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네
이 또한 크나큰 운명에 달린 일이니, 나는 그저 하늘이 내게 준 본분에 편안히 머물겠네
다시 노래를 잇는다
깊고 높은 궁궐에 홀로 조용히 지내며, 옥으로 된 문을 걸어 잠그고 그윽한 방에 갇혔네
넓은 뜰은 황폐해지고 옥 섬돌엔 잡초가 우거졌는데, 찾아오는 이 없어 적막하고 이끼빛만 푸르네
수놓은 창문을 활짝 열고 비단 휘장을 걷어, 초풍전(후궁의 처소 이름)을 바라보고 미앙궁(황제가 정사를 보는 궁전)을 응시하네
뿔로 만든 베개엔 향내가 은은하고, 상아 침상 위엔 옷가지만 걷어놓았네
임금의 수레 소리 들릴까 귀 기울여도 아무 소리 없어, 푸른 깃발(임금의 행차를 상징하는 표현) 떠올리며 지금 어디쯤 계실까 생각하네
거문고를 뜯어보아도 임은 듣지 못하고, 술잔을 따라 올려도 임은 받지 않으시네
텅 빈 집은 고요하고 처량한데, 외로운 그림자만 벗 삼아 서성이네
가물가물한 등불 아래 벽을 등지고 앉았더니, 어느새 하늘이 어둑어둑 밝아오네
마음이 어지러워 옷깃마저 뒤바뀐 줄도 모르고, 콧물과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네
이 속마음 다 풀어 바른 말씀을 올려볼까, 주나라를 일으킨 태임과 태사의 덕을 아뢰어볼까
붉은 붓(동관―옛 여사관이 궁중의 일을 기록하던 붓)을 잡았다가 도로 내려놓으니, 다시 죄를 얻어 화를 입을까 두려워서네
임금 계신 문으로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데, 이 해도 이미 저물어가고 근심만 자꾸 쌓여가네
훼벽사 (서기 1589년 3월 20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사 / 일찍 죽은 손위 누이를 애도하며, 그 넋이 신선 세계로 훨훨 돌아가 편히 노닐기를 기원하는 초혼 형식의 작품. 병서(산문 서문)는 한문 원문 미확보로 이번 번역에서 제외)
구슬이 깨지고 옥이 떨어졌으니
누이의 삶은 참으로 기구했구나
하늘은 어찌 그리 풍성한 재능을 주고서는
어찌 그리 모질게 벌하여 주고 빼앗기를 이토록 서둘렀는가
거문고와 비파는 버려진 채 아무도 타지 않고
아침 밥상을 차려도 그대는 다시 맛볼 수 없네
고요한 침실은 적막하기 그지없는데
갓 돋아난 난초 싹은 서리를 맞아 꺾이고 말았네
돌아오라, 자유로이 노닐던 그곳으로
슬프다, 이 덧없는 세상은 눈 깜짝할 사이일 뿐
문득 왔다가 홀연히 떠나가니
단 한 해도 머물지 못했구나
구름은 뭉게뭉게 광릉의 무덤길 위로 피어오르고
밝은 해도 저승 궁전 앞에서 빛을 잃네
우거진 숲은 짙고 아득히 어두운데
넋은 훨훨 날아 어디로 가는가
머나먼 요압(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신선 세계의 먼 곳)을 찾아 아득히 떠나가는가
백옥루(하늘의 문인들이 죽으면 간다는 누각)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돌아오라, 자유로이 노닐던 그곳으로
줄지어 선 신선들을 따라 한가로이 노닐라
속세는 어지러이 소용돌이치고 온갖 잡귀들이 우글거리는 곳
훨훨 멀리 솟아올라 구름 속으로 가라
무지개를 깃발 삼고 난새를 수레 삼아
하늘에 계신 이를 뵈러 서늘한 긴 바람을 타고 가라
요지(서왕모가 산다는 곤륜산의 연못)에서 서왕모께 술을 따라 올리면
해와 달과 별이 그 아래 늘어서 있으리라
티끌 세상을 굽어보며 내 근심을 눌러 준다면
이 어두운 마음도 자연의 이치 속에 아득히 풀리리라
오직 살아남은 나만이 슬픔을 품은 채
아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애간장이 끊어지네
돌아오라, 자유로이 노닐던 그곳으로
옥황상제의 뜰이야말로 노닐기에 좋으리라
도원량의 귀거래사에 화답함 (서기 1611년 2월 25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사 /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운을 빌려, 벼슬살이보다 독서를 통한 정신적 자유를 예찬하며 유배지든 어디든 책만 있으면 그곳이 곧 자기 집이라는 배포를 노래한 작품. 병인(산문 서문)은 한문 원문 미확보로 이번 번역에서 제외)
돌아가자.
내가 책을 끼고 돌아갈 곳은 오직 이곳뿐이다.
총애를 받았을 때도 기쁘지 않았는데
치욕을 당한들 무엇이 슬프겠는가.
책 끈이 세 번 끊어지도록 읽어(공자가 주역을 즐겨 읽어 책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공자의 경지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고 싶다.
도리와 의리를 곱씹고 덕을 마주하니
쉰 살에 이르러 지난 마흔아홉 해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거백옥(위나라의 현자)과 같은 심정이다.
옛사람이 걸어간 길을 살펴 몸가짐을 바로잡으니
속에 보배를 품고 거친 베옷을 입고 살아도 그만이다.
아,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모가 나서
툭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작은 낌새에도 어두웠다.
벌을 받은 것도 은혜요
결국 남쪽으로 쫓겨났다.
이 액운이 사마천이 당한 궁형만큼 참혹한 것은 아니며
가는 길이 저승으로 가는 문도 아니다.
몸에 지니고 갈 것이 무엇인가
만 권의 책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 깊은 맛을 떠내는 일은
술동이에서 술을 퍼 마시는 것과 같다.
초가집 문을 활짝 열어 볕을 마주하고
책들을 죽 벌여 놓으니 얼굴이 절로 환해진다.
내 정신을 가라앉혀 깊이 파고들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성인과 어리석은 자가 갈리는 까닭을 헤아리고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생각한다.
제자백가가 어지러이 뒤섞여 저마다 내달리지만
그 온갖 주장을 한데 모아 하나로 꿰뚫어 본다.
기쁘고 즐거워 잠자는 것도 잊으니
오래 떠돌던 나그네가 마침내 고향에 돌아온 것 같다.
책 읽다가 양을 잃어버렸다는 종의 이야기(장자에 나오는 우화)처럼 여기에 빠져들고
수레바퀴 깎던 장인이 환공을 깨우친 일(장자에서, 참된 이치는 말로 전할 수 없다고 한 이야기)처럼 그 속에서 참뜻을 얻는다.
돌아가자.
이렇게 노닐다가 여기서 내 삶을 마치리라.
이것이 바로 백 년을 편안히 살 집이니
어찌 이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구하랴.
관동이든 호남이든
책을 이끌고 오가는 데 무슨 근심이 있으랴.
곁에 있던 사람이 내게 묻는다, 무엇을 본받아 사느냐고.
나는 기자가 전했다는 홍범구주(기자가 무왕에게 전한 정치 사상)를 따를 뿐이라고 답한다.
생각을 말로 삼고
지식을 배로 삼아
학문의 바다, 아득히 먼 뱃길을 떠가서
마침내 구구(중국 여러 고을의 지리와 산물을 기록한 옛 책)에 이르러 멍에를 풀고 쉬리라.
학문의 동산에 숨은 보배를 캐내고
아홉 학파에 마음을 맡겨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듯 흘러들리라.
내 집 문을 나서지 않고도
내가 만족할 것을 만족하며, 삶과 죽음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맡기리라.
그만두자. 나는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살아왔으니
본디 떠난 적도 없는데 하물며 다시 머무를 일이 있겠는가.
유유히 노닐 뿐, 이곳을 떠난들 어디로 가겠는가.
크고 좋은 집이 어찌 내가 좋아하는 것이며
대궐 문(청쇄, 벼슬살이를 뜻함)도 본디 내가 바라던 바가 아니다.
집 뒤뜰의 마음 밭을 가꾸어
밤낮으로 쉬지 않고 부지런히 김을 매리라.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고 한결같이 하여 그 중심을 잡으라"던 순임금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생각에 삿됨이 없다"는 시경의 노래(공자가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요약한 말)를 읊으리라.
대장부는 천하에서 가장 넓은 집에 사는 법이니
이는 자여(증자의 자)가 한 말이니 그대는 의심하지 말게.
성소부부고 제4권
9. 19:53
성소부부고 제4권 · 문부 1 · 서(序)
출처: 성소부부고 제4권, 문부 1, 서
배경: 제4권부터는 시가 아니라 산문이다. 그중 첫 갈래인 "서"는 남을 떠나보내며 써 준 글, 남의 책이나 자신이 엮은 책에 붙인 서문 등 열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교와 유교를 오간 자신의 젊은 시절 독서 편력, 벗 권필의 시를 향한 파격적인 찬사, 옛 명나라·송나라 시선집을 직접 편찬하며 세운 안목, 전쟁터에서 순국한 시인 양대박을 향한 애도 등 허균의 문학관과 인간관계가 두루 드러나는 글들이다.
기달산으로 돌아가는 이나옹을 전송하며 쓴 글 (서기 1606년 2월 26일, 양력 추정)
나는 젊었을 때 옛날의 글 잘 짓는 사람들을 무척이나 흠모해서, 손에 잡히는 책이란 책은 다 읽어치웠다. 그렇게 읽은 책 가운데는 찬란하고 진기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것들도 많았다.
그러다 소동파가 《능엄경》이라는 불경을 읽고 나서 문장이 더욱 높고 오묘해졌다는 이야기, 그리고 근래의 학자 왕양명과 당순지의 글도 모두 불경을 통해 깨우친 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속으로 그럴듯하다 싶어서 자주 승려들을 따라 이른바 불경이라는 것을 구해다 읽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툭 트인 안목은 마치 도랑이 뚫리고 강둑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뜻을 풀어내고 말을 부리는 솜씨는 마치 나는 용이 구름을 타고 오르는 듯 아득하여 도무지 형용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글로 치자면 귀신같은 것이었다.
시름겨울 때 읽으면 즐거워지고, 지루할 때 읽으면 정신이 번쩍 들어서,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번 생을 거의 헛되이 보낼 뻔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일 년도 안 되어 백여 상자에 이르는 불경을 다 읽었는데, 마음을 밝히고 본성을 다잡는 대목에서는 무언가 환하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는 듯했다. 마음속에 얽혀 있던 세속의 잡생각들이 훌훌 풀려나가는 느낌이었고, 글도 절로 술술 풀려나와 그 넘실거림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은근히 스스로 무언가를 얻었다고 자부하며 그 책을 아끼고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해 고을 수령이 되고 보니, 벽지라 다스릴 일도 적어 매일 한가한 날이 많았다. 그래서 젊어서 읽었던 사서와 성리학 책들을 다시 꺼내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이른바 불교에서 본성을 논하고 마음을 논하는 것들이, 언뜻 이치에 가까운 듯 보여도 사실은 우리 유학과는 번번이 어긋난다는 것을, 그리고 그 허황된 견해와 헛된 이야기들이 하늘의 이치에 온통 위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진주(眞珠)를 두고 말해 보자. 둘 다 조개에서 나는 것은 같지만, 유학에서는 진주가 조개의 태에서부터 생겨난다고 보는 반면, 불교에서는 진주가 밖에서 조개의 태 속으로 들어와 깃든다고 본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까닭은, 유학은 하늘을 근본으로 삼고 불교는 자기 자신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 같은 온갖 감정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온다고 보는 것이 우리 유학의 설명인 데 비해, 불교에서는 그것을 눈·귀·코·혀·몸·생각의 여섯 감각기관이니, 몸·느낌·생각·행동·의식의 다섯 가지 쌓임이니 하는 말로 설명한다. 이것만 봐도 어느 쪽이 참이고 어느 쪽이 거짓인지 가늠할 수 있다.
불경에 나오는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느니 "한 법도 놓지 않는다"느니 하는 말들은 도에 제법 가까운 듯하지만, 거기엔 그저 그럴듯한 뜻만 있을 뿐 정작 그것을 뒷받침할 이치는 없다. 말은 그럴싸하게 할 수 있어도 실제로는 아무 쓸모가 없으니, 이것을 두고 정말 도를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훌륭하도다, 주자의 다음과 같은 말이여. "이 세상 이치가 빈틈없이 꽉 차 있어서, 자기 한 몸이 이치가 미치지 않는 자리를 단 한 군데도 얻어 제멋대로 안주하지 못하는 것을 미워하고, 이 이치가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 돌아가서 자기가 단 한 순간도 이치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싫어한 나머지, 이른바 텅 비고 아무것도 없는 적멸의 경지로 도망쳐 숨는 것이다." 이 말이 한 번 나오자, 부처님도 저승에서 남몰래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한유와 구양수가 불교를 배척한 것은 모두 겉으로만 배척한 것이었기에 승려들의 기세를 조금도 꺾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불경을 직접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뼈대까지 꿰뚫어 보고 칼을 댔더라면, 불교가 어찌 그토록 오랜 세월 제멋대로 행세하며 공자와 주공의 가르침과 맞서 겨룰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내 생각은 여기서 그친다.
이나옹은 젊어서 풍악산(금강산)에 들어가 신여상인이라는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장차 머리를 깎으려 했으나, 난리 통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자라서는 여러 해 동안 서쪽 지방을 이리저리 떠돌았는데, 올봄에 다시 그 신선 같은 산으로 돌아가 옛 스승을 다시 찾아가겠다고 한다. 비록 승복을 입지는 않았지만 불경을 두루 읽어 마음을 닦고 본성을 지키기를, 옛날 속세에 있으면서도 보살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유마힐이나 방 거사처럼 하고 싶다면서, 나를 찾아와 떠나겠노라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대가 그리하는 것은, 배움에는 어둡고 이익만 쫓는 자들보다는 훨씬 낫다. 그러나 이 책을 볼 때는 마땅히 먼저 그 안의 참과 거짓을 가려내야 한다. 만약 그 말이 허황된 견해요 헛된 이야기여서 하늘의 이치와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환하게 알게 된다면, 그 말이 그대를 흘리지는 못할 것이며 오히려 그 글이 그대의 문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뜻을 조금이라도 마음속에 담아 둔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그 속으로 끌려 들어가 결국은 인과응보와 죄와 복 같은 것에 빠져들고 말 것이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나옹이여, 부디 힘쓸지어다. 아, 나 역시 일찍이 이 문제로 크게 데어 본 적이 있어 그 병통을 깊이 안다. 아무쪼록 주자의 이 한마디를 늘 마음에 새기고 살펴 나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헤어지는 자리에 이르러 이 글을 써 주었다.
(용어) 왕양명은 명나라 학자로, 사물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서 이치를 찾아야 한다는 학문을 세운 사람이다. 당순지는 옛 문체에 뛰어나 명나라 중엽 문단의 큰 어른으로 꼽혔던 학자이다. 사서는 《논어》·《대학》·《중용》·《맹자》 네 책을 가리키고, 성리학 책이란 송나라 학자 주돈이와 정호·정이 형제가 남긴 책들을 말한다. 눈·귀·코·혀·몸·생각의 여섯 감각기관과 몸·느낌·생각·행동·의식의 다섯 가지 쌓임은 모두 불교에서 사람의 몸과 마음이 이루어지는 원리를 설명하는 용어들이다. 유마힐은 인도의 한 부유한 사람으로 집에 있으면서도 보살의 수행을 닦았다는 인물이고, 방 거사는 당나라 사람 방온으로 재산을 강물에 버리고 수행하여 선종에 통달했다고 전한다.
석주소고에 부친 서문 (서기 1606년 6월 10일, 양력 추정)
나의 벗 권여장(자를 여장이라 하며, 본명은 권필이다)은 스무 살도 안 되어 이미 시를 잘 지어서 그 높은 경지가 옛사람을 능가할 만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는 늘 지금 세상에서 시를 가장 잘 짓는 사람을 꼽을 때마다 반드시 "여장이다, 여장이야" 하고 말하곤 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괴이하게 여겼고, 다음에는 비웃었으며, 나중에는 결국 믿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정확히 어느 경지까지 이르렀는지는 다들 알지 못했다.
하루는 홍녹문이 내게 물었다. "여장의 시는 우리 조선에서 누구와 견줄 만한가?" 내가 "점필재 김종직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답하자, 홍녹문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서 "허튼소리는 하지 말게" 하고 말렸다. 나는 슬며시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점필재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가라고 사람들이 일컫기에 우선 그렇게 견주어 본 것일 뿐이다. 만약 여장이 홀로 이르러 간 경지와 그 깊은 깨달음을 논한다면, 맑기로는 당나라 왕유와 같고, 맛깊기로는 당나라 유종원과 같으며, 부드럽고 능숙하기로는 송나라 진여의와 같으니, 어찌 점필재 정도와 나란히 놓고 논할 수 있겠는가?"
여장은 명망과 지위가 남을 움직일 만하지 못한데다, 세상 사람들은 그저 눈앞에서 직접 본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를 하찮게 여긴다. 하지만 그가 만약 옛날에 태어났더라면 사람들의 우러름이 어찌 점필재 정도에 그쳤겠는가.
어떤 이는 여장이 학문의 축적이 적고 원기가 모자라니 마땅히 점필재보다 한 수 아래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더더욱 시라는 것을 모르는 소리다. 시에는 별도의 독특한 흥취가 있어서 이치와는 상관이 없으며, 시에는 별도의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그저 많이 읽고 쓴 글과도 상관이 없다. 오직 하늘이 부린 재주를 자유자재로 놀리고 조물주의 오묘함을 빼앗아 오는 그 순간, 정신이 빼어나고 울림이 밝으며 격조가 뛰어나고 생각이 깊은 것이야말로 가장 으뜸가는 경지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학식의 축적이 풍부하다 해도, 비유하자면 그것은 마치 점진적인 수행을 강조하는 불교 종파에서 교리만 읊는 것과 같으니, 어찌 감히 단박에 깨우침을 얻는 임제종의 경지를 넘볼 수 있겠는가.
이실지는 평소 안목이 높아서 남을 인정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여장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이실지조차 여장의 경지를 다 알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여장은 원래 게을러서 자기가 지은 글을 모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심생이라는 사람이 세상에 전해지던 그의 시 수백 편을 모아 《석주소고》라는 제목을 붙이고 내게 보여 주었다. 읽어 보니 마음이 흐뭇해져서 이렇게 말했다. "내 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이 책을 보면 여장의 온전한 모습을 다 볼 수 있으니, 옛사람을 압도하고 지금 시대에 으뜸가는 이가 여장이 아니면 대체 누구겠는가? 세상이 그를 귀히 여기지 않는다 한들 여장에게 무슨 흠이 되겠는가? 하물며 훗날에는 그의 진가를 알아줄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그리고 마침내 이 글을 비평 삼아 적는다.
이따금 소리 내어 그의 시를 외워 보면, 이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절로 일어 나도 모르게 정신이 아득히 높은 하늘까지 날아오른다. 아, 참으로 지극하다.
여장은 안동 권씨로, 본명은 필이고 석주는 그의 호이다. 그의 인품이 높은 것은 시보다도 더욱 우뚝한데, 세상이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시에 대한 푸대접보다도 더 심하니, 아, 애석하기 그지없다.
(용어) 점필재는 조선 초기의 학자 김종직의 호로,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사림의 으뜸으로 꼽혔던 인물이다. 임제종은 단박에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시하는 불교의 한 종파 이름이다. 이실지는 이춘영이라는 사람으로, 시문에 능했던 학자 성혼의 제자다.
세설산보주해에 부친 서문 (서기 1606년 7월 15일, 양력 추정)
옛 중국 진나라 사람들은 세속을 벗어난 청담을 즐겼다. 표현은 짧아도 뜻하는 바는 멀리 나아갔고, 한마디 한마디에 깊은 깨달음이 담겨 있었으니, 이러한 풍류를 숭상하는 기풍은 동진 시대에 이르러 정점에 달했다.
그중 좋은 것만 가려 뽑아 책으로 엮은 이가 있었으니, 맨 처음이 유의경이었다. 세상에 전하는 《세설신어》가 바로 그 책이다.
그 뒤 육조 시대부터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이름난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남긴 한마디 말이나 짧은 논평 가운데 진나라의 여러 인물들과 견줄 만한 것들, 그리고 한나라·위나라·진나라 세 시대 명사들의 이야기 가운데 유의경이 빠뜨린 것들을 모아 책을 엮은 이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하씨어림》이다. 세상에서 하양준(자는 원랑이다)의 저술이라 일컫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두 책을 합쳐서 다시 엮되, 말이 어렵고 껄끄러운 유의경의 글은 열에 두셋을 덜어 내고, 잡다하고 지루한 하양준의 글은 열에 일고여덟을 쳐내어, 오롯이 자기 나름의 안목으로 새로운 관점을 세워 두 책에서 알맹이만 골라 하나의 독자적인 책을 만든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오군 지방의 왕세정(자는 원미)이다.
원미는 문장이 넓고 통달하기가 천고에 드문 사람이었는데, 이 책을 몹시 아껴서 늘 되풀이해 읊조리며 입에서 놓지 않았고, 심지어 자기 손으로 직접 덜어 내고 보태는 작업까지 했다. 그가 뭔가 보는 눈이 없었다면 어찌 그렇게까지 했겠는가?
대개 한마디 말이라도 은미한 뜻을 담은 것들, 짧은 한 구절이라도 절묘하게 짜인 것들에는 어떤 풍모와 정취가 은은히 흩어져 있어서, 겉으로 드러난 말 바깥에 무한한 뜻이 절로 서려 있고 지극히 깊은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으니, 원미가 이 책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그칠 줄을 몰랐던 것도 그 때문이다.
당나라와 송나라의 시인들은 이 책을 그저 시구에 쓸 소재로만 가져다 썼을 뿐이니, 이미 한 단계 낮은 쓰임에 그친 것이다.
유의경의 책과 하양준의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읽혀 왔지만, 이른바 왕세정이 손질했다는 그 판본만은 볼 수가 없었다. 예전에 왕세정의 문집에서 그가 직접 쓴 서문을 보고서 전체 책을 구해 보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병오년(1606년) 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조서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왔을 때, 나는 그를 맞이하는 접반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그에게 깊은 대접을 받았다. 그가 떠날 때가 되어 몇 종의 책을 꺼내 내게 선물로 주었는데, 이 책도 그중 하나였다. 사신의 특별한 은혜에 감격했고, 평생 보고 싶던 책을 마침내 얻었기에 마치 큰 보배를 받듯 절을 하고 받았다. 끝까지 다 읽고 나서야, 유의경과 하양준의 책은 두루뭉술한 데가 있지만 왕세정의 책은 독창적인 경지를 이루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 옛 전적을 두루 살펴 주석을 덧붙였는데, 비록 옛 주석가 유효표의 상세하고 견실한 주석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왕세정에게 부끄럽지 않은 충실한 해설자는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왕원미가 이 사실을 안다면 저승에서라도 반드시 손뼉을 치며 기뻐할 것이다.
(용어) 청담은 세속의 명예나 이익을 벗어나 철학적이고 초탈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말한다. 육조는 중국 남북조 시대에 강남 지역에 세워졌던 여섯 왕조를 가리킨다.
사한전방에 부친 서문 (서기 1607년 6월 9일, 양력 추정)
정미년(1607년) 여름, 나는 삼척에 있었다. 그런데 사헌부로부터 불교를 두둔하는 논의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쫓겨나 시골로 돌아가게 되었다. 가는 길에 지평 땅을 지나게 되어, 이웃 어른인 양사눌의 별장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때 이름은 잊었지만 이생이라는 사람이 책 한 권을 들고 와서 보여 주었는데, 표지에 《사한전방》이라 적혀 있었다. 펴 보니 세조 임금 때 총애를 받던 승려 신미의 시를 모은 시권이었다.
김수온(자는 문량)이 서문을 썼고, 서거정·강희안·강희맹·성임·이승소가 시를 지었는데 모두 손수 글씨를 썼다. 찬을 지은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글씨는 정사룡이 썼고, 안견(자는 가도)이 그린 석가여래와 아미타불 두 상으로 끝을 맺었는데 그 그림이 참으로 미묘했다. 맨 마지막에는 임금의 도장이 하나 찍혀 있었으니, 참으로 귀한 옛 물건이었다. 나는 종이 이백 장을 주고 이 책과 맞바꾸었다.
아, 조선 초기의 문장은 웅혼했고 그 시절 선배들은 하나같이 이름난 대가와 큰 인물이었으며, 글씨와 그림 또한 모두 이름을 떨친 이들의 솜씨이니, 참으로 귀중한 물건이라 감히 그 사이에 함부로 입을 놀릴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글은 불교의 이치에는 밝아서 손 가는 대로 뽑아 쓰긴 했지만 이따금 진부한 데로 흘렀고, 시는 웅혼하고 무게가 있어 기세는 있으나 아름다운 울림이 부족해 다소 속된 데로 떨어졌으며, 글씨는 짜임새는 정밀하지만 둔하고 막혀서 활달함이 없어 왕희지나 조맹부의 뛰어난 필법에는 미치지 못하고, 그림은 실물과 닮기는 했으나 불교 그림다운 격조가 부족한데다 채색도 풍부하지 못하다.
만약 요즘 시대의 문장가인 최립에게 서문을 쓰게 하고, 유근·이달·권필·이안눌에게 시를 짓게 하고, 한호·김현성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 이정(호는 나옹)에게 채색을 입혀 상을 그리게 했더라면, 이 옛 작품이 어찌 그들만 못하다 할 수 있겠는가?
훗날 안목을 갖춘 사람이 이 두 가지를 견주어 본다면 어느 쪽에 손을 들어 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무릇 문장과 서화는 마치 귀한 옥이나 보배로운 구슬처럼 저마다 정해진 값어치가 있는 법이지만, 세상에 안목 있는 감정가가 아닌 이상 어찌 그 우열을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요즘 안목이 어두운 자들은 하나같이 시문도 세태를 따라 오르내린다면서, 직접 눈으로 본 것은 낮잡아 보고 귀로 전해 들은 것만 귀하게 여겨 옛사람은 도무지 따를 수 없다고 말한다. 아, 큰 물이 밀려와 하늘까지 넘실거리면 산호가 어디에 잠겼는지도 알 수 없게 되는 법인데, 그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손가락질하며 찾는구나. 이것이 바로 귀로만 듣고 먹는 자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책은 오래된 물건이기에 소장하는 것이지, 그 글과 시와 그림 자체를 보배로 여겨서가 아니다. 훗날 이 책을 보는 사람이 자세히 살펴 기록해 준다면 다행이겠다.
(용어) 세조 임금은 왕위에 오르기 전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뒤 불교를 깊이 믿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고시선에 부친 서문 (서기 1610년 6월 21일, 양력 추정)
《고시선》은 나 허균이 손수 뽑은 시선집이다.
나는 머리가 채 마르기도 전인 어린 시절부터 옛 시를 읽는 것을 좋아해서, 뜻을 다 이해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책만 펴면 밥 먹는 것조차 잊었다. 그렇게 몇십 년을 쌓아 오면서 단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시의 아름다움이란 반드시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대개 뛰어난 작가란 한 시대에 몇 사람 되지 않고, 한 사람의 작품 중에서도 정말 뛰어난 것은 몇 편 되지 않으니, 후세 사람이 외우고 본받고자 할 때 굳이 많은 것을 취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먼 옛날 순임금·우임금 시대부터 시를 지은 사람이 적지 않았을 텐데도, 《서경》과 《예기》에 실린 것이나 공자가 골라 엮은 《시경》에 실린 시가 이토록 적은 것을 보면, 후세에 울림을 절실히 하고 아름다움만 취하려 애쓰는 것이 그리 취할 만한 방법이 아님이 분명하다.
한나라 시대의 시 가운데 자주 일컬어지는 것은 오직 〈고시십구수〉와, 소무와 이릉이 서로 이별하며 지은 증별시뿐이다. 이들은 옛 노래의 원형이 아직 흩어지지 않아서 《시경》 삼백 편에 가깝다고 할 만하다. 탁문군, 반첩여의 시나 옛 악부에 실린 채옹·송자후 이하 수십 편도 겨우 전아하고 화려하다 할 만하고, 나머지는 어떤 것은 투박하고 어떤 것은 지나치게 화려하며 어떤 것은 형식조차 갖추지 못했으니, 요컨대 모두 바른 소리는 아니다.
위나라·진나라 이후로는 전아함은 그런대로 갖추었지만 익살스러운 기교로 인해 그 기상을 손상시켰고, 육조 시대에는 화려함이 더해지면서 옛 시의 정신과는 더욱 멀어졌다.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아예 스스로 당나라만의 시를 이룬 것이지, 더 이상 옛 시라고 할 수는 없다.
지금 내가 가려 뽑은 것은 대체로 한나라와 위나라의 것은 자세히 다루고 진나라와 송나라의 것은 간략히 다루었으며, 양나라와 진나라에 이르러서는 뽑은 것이 더욱 적다.
간혹 옛 시라 하더라도 근래의 시풍에 가까운 것은 굳이 취하지 않았고, 근래의 시라 하더라도 옛 시에 견줄 만한 것은 감히 버리지 않았으니, 오직 옛 시의 정신에 맞는 것만을 구했을 따름이다.
전체 여섯 편으로 나누어 엮었는데, 뽑은 것은 모두 삼백 편뿐이다. 간혹 내 나름의 좁은 소견으로 몇몇 작품을 빼놓고 평을 달기도 했는데, 이는 세상에 널리 전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저 내 나름대로 얻은 바를 나타내어 때때로 외우고 본받고자 함일 뿐이다.
당나라 시인은 워낙 많기에 따로 엮은 《당시선》이 있으므로, 여기에는 섞어 싣지 않았다.
(용어) 〈고시십구수〉는 지은이를 알 수 없는 한나라 때의 옛 시 열아홉 편을 가리킨다. 탁문군은 한나라 때 학식과 문재로 이름났던 여인이고, 반첩여는 한나라 성제의 후궁으로 시가에 뛰어났으나 훗날 총애를 잃고 쓸쓸한 처지를 시로 노래한 인물이다.
당시선에 부친 서문 (서기 1610년 7월 20일, 양력 추정)
당나라 삼백 년 동안 시를 지은 사람이 천 명을 넘었으니, 시의 도가 이토록 융성했던 시절은 앞뒤로 다시없었다.
이를 모아 뽑아 놓은 책들도 수십 종에 이르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간략하게 알맹이만 골라낸 것은 양사홍이 처음 엮은 《당음》이고, 상세하고 방대하게 뽑아 놓은 것은 고병(초명은 고정례)의 《당시품휘》이며, 독자적인 안목으로 옛 틀을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기준을 세운 것은 이반룡의 《당시산》이다.
이 세 책이 나오자 그전까지 나왔던 온갖 당시 선집들은 모두 쓸모없어져 사라졌으니, 아,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나는 일찍이 이 세 사람이 뽑은 책들을 가져다 읽어 보았는데, 다소 다른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양사홍은 비록 정밀함을 힘써 추구했다지만 바른 소리와 그 나머지 여운을 가려내는 데 있어 갈피를 잡지 못한 데가 있고, 웅장하고 예스러운 소리를 채택하지 않은 곳도 있어서, 안목 있는 이로 하여금 구슬을 빠뜨렸다는 개탄을 자아내게 한다. 고병이 모은 것은 지극히 방대하기는 하나 시대별로 사람을 늘어놓고 작가별로 작품을 늘어놓아, 곱고 추한 것을 함께 나란히 두고 우아함과 속됨을 몽땅 뒤섞어 버렸으니, 안목 있는 이들이 "물고기 눈알을 진주와 섞어 놓았다"고 나무란 것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이반룡이 가려 뽑은 것에 이르러서는, 오직 굳세고 빼어난 것만을 택하여 자기 기준에 맞으면 싣고 맞지 않으면 아무리 값진 구슬이라도 미련 없이 내던져 버렸으니, 이는 마치 영웅이 사람을 속이는 듯한 데가 있어 전부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여러 작품들 사이에 묻혀 오랜 세월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뛰어난 시편들을 능히 찾아내어 윗자리에 올려놓은 것만큼은, 확실히 겉으로 드러난 말 너머의 독자적인 통찰이라 세속의 눈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있다.
나는 이 시들을 소리 내어 읽고 연구하기를 여러 해 동안 계속했는데, 어렴풋이 깨달아지는 바가 있는 듯하여 마침내 고병이 모은 것을 가져다 먼저 그 잡다하고 어지러운 것을 걸러 내어 열에 다섯을 남기고, 양사홍의 것을 참고하고 이반룡의 것을 이어받아, 전에 뽑아 두었던 것과 합쳐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시의 형식별로 나누고 시대순으로 작가를 배열하되, 진실로 오묘한 것이라면 비록 당나라 말기의 것이라도 자세히 다루었고, 흠이 있거나 속된 것이라면 비록 당나라 전성기의 것이라도 남겨 두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모두 육십 권, 이천육백여 수를 엮었으니, 당나라 시는 이 책에 거의 다 실린 셈이다.
송오가시초에 부친 서문 (서기 1610년 8월 19일, 양력 추정)
시는 송나라에 이르러 사라졌다고 할 만하다. 사라졌다는 것은 말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 원리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시의 근본 원리는 자세하고 완곡하게 다 풀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지고, 가리키는 바는 가까워도 그 취지는 아득히 멀며, 이치에 얽매이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자취에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으뜸가는 경지가 되는 것이니, 당나라 사람들의 시가 왕왕 이런 경지에 가까웠다.
송나라 시대에 작가가 적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나같이 뜻을 남김없이 다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옛 고사를 인용하는 데만 힘썼으며, 게다가 어려운 운자와 억지스러운 압운으로 스스로 격조를 손상시켰으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천 편 만 편의 시가 모두 다 낡은 상투어의 냄새를 풍기며 시의 참된 도에서 아득히 멀어졌으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는가?
저 소식(호는 동파) 같은 사람도 하늘이 내린 재주를 지녔지만 그저 폭넓게 세상을 교화하려 했다는 나무람을 면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나는 일찍이 송나라 여러 시인들의 작품을 얻어 읽어 보고, 그들이 공들여 노력한 것은 부지런했으나 참된 도에서 멀어진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도 감히 내 좁은 소견만으로 옛사람들이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짜낸 것을 완전히 내치지는 못하고, 낮잡아 보면서도 남겨 두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지은 시조차 점점 송나라 강서파의 시풍으로 흘러들어 옛 정신을 버리고 손쉬운 쪽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으니, 낮고 속된 것이 사람을 물들이는 것이 이토록 빠른 줄을 알 만하다.
그저 대응하기 편하다는 이유로 이런 시풍이 내 뜻에 맞다고 여겨 차마 버리지 못했으니, 이는 마치 아름다운 여자가 그 시절 유행하는 화장법을 배워 저잣거리 문 앞에 기대어 선 것과 다름없다. 어찌 부끄러움이 얼굴에 가득하지 않겠는가?
한가한 날 왕안석(시호는 문공)과 소식, 황정견, 진사도와 진여의의 시를 가져다 음미하다가, 그중 짧은 시와 근체시 가운데 다소 아름다운 것을 뽑아 이 책에 실었다. 그러자 어떤 이가 힐난하며 말했다. "그대가 이미 옛 시에 능통하니 옛 시만으로도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후세에 전할 만한데, 어째서 굳이 송나라 시까지 다루는가?" 나는 이렇게 답했다.
"아니, 그렇지 않소. 이건 말하기가 쉽지 않소. 옛 시는 마치 옥으로 만든 귀한 술잔과 같아서 저 종묘나 조정 같은 큰 자리에나 쓸 수 있을 뿐, 마을 잔치 같은 자리에서는 흙으로 빚은 그릇이나 도자기 술병만큼 편리하지 못하오. 내가 송나라 시를 버리지 않는 것도 이와 같소. 나는 그저 세상일에 대응하려는 것일 뿐이니 어찌 시의 참된 도를 해칠 수 있겠소. 하물며 왕안석(자는 개보)의 정밀하고 알찬 맛, 소식(자는 자첨)의 시원스럽고 힘찬 기세, 황정견(자는 노직)의 깊고 웅숭깊은 멋, 진사도(자는 무기)의 침착하고 간결한 맛, 진여의(자는 거비)의 부드럽고 환한 정취는, 당나라 시인들 사이에 놓아도 능히 명가로 꼽힐 만한데, 어찌 송나라 사람이라 하여 몽땅 내버릴 수 있겠소."
그러자 힐난하던 사람도 "그렇겠구려" 하고 수긍했다. 그래서 그 말을 이 책 첫머리에 적어 둔다.
명사가시선에 부친 서문 (서기 1610년 9월 17일, 양력 추정)
명나라 사람으로 시를 짓는 이들은 툭하면 "나는 당나라 전성기의 풍모다", "나는 이백과 두보의 계승자다", "나는 육조의 풍류다", "나는 한나라와 위나라의 정통이다" 하고 스스로 내세우며, 저마다 자기가 문단의 우두머리가 될 만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어떤 이는 남의 말을 그대로 베끼고 어떤 이는 남의 뜻만 흉내 내어, 하나같이 남의 집 아래 또 다른 집을 지은 격을 면치 못하면서도 과장되게 스스로 잘났다고 하니, 이는 마치 세상에서 자기 나라가 가장 크다고 우겼다는 저 오랑캐 나라 임금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명나라 효종·무종의 홍치·정덕 연간에는 하늘과 땅의 맑은 기운이 온전하여 뛰어난 인재들이 무성하게 일어났다. 이때 이몽양(호는 북지)이 첫 깃발을 세우고 하경명(호는 신양)이 그 뒤를 이었는데, 그 시가 쟁쟁하고 화려하여 자못 당나라 전성기와 우열을 다툴 만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시절 이런 풍조를 너도나도 좇는 바람에 온 세상이 바람에 쓸리듯 따라 하다가, 결국은 "몸에 성한 살갗이 없다"는 비웃음을 사게 되었으니, 이는 흉내만 낸 자들의 허물이지 어찌 원래의 작가들을 탓할 일이겠는가.
이반룡(호는 역하생)은 뛰어난 재주로 때를 만나 일어나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떨쳤고, 왕세정(호는 오군)이 마침내 그 뒤를 이어 중원 땅에 산처럼 우뚝 서서 천고를 굽어보며 곧바로 한나라의 사마상여, 사마천과 백대 뒤에 우열을 겨루었으니, 아, 또한 기이한 일이다.
이 네 위대한 인물은 참으로 하늘이 재주를 내려 명나라의 융성함을 세상에 울려 퍼지게 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지은 시는 모두 하늘의 조화에 동참하여 뒷사람들에게 빛을 주고 앞사람들을 능가할 만하니, 어찌 흉내나 내고 베끼기만 하는 자들과 나란히 놓고 꼽을 수 있겠는가?
하경명(자는 중묵)의 시는 화창하고 수려하여 옛것을 흉내 낸 흠은 있지만, 육조와 이백·두보의 경지를 자유로이 넘나들어 마치 꽃송이처럼 사랑스럽다. 이몽양(자는 헌길)은 시상을 조이고 늦추는 웅장한 힘이 오로지 두보에게서 나왔지만 도도하고 광대하여 기운이 절로 창대하니, 이 두 사람은 당나라로 치면 개원·천보 연간의 명가라 할 만하다.
이반룡은 우뚝하고 맑고 장엄하여, 논하는 이들이 저 우뚝한 민산과 아미산의 쌓인 눈에 비유하는데 거의 합당한 비유다. 옛 악부시는 그저 옛것을 모방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수천 년 동안 아무도 감히 흉내조차 내지 못하던 것을 이반룡만은 홀로 그 진수와 비슷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가 스스로 말한바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변화를 이루었다"는 말이 결코 헛말이 아니다. 오언시는 그 격률에 꼭 들어맞아 심전기와 송지문의 맑고 힘찬 기풍 그대로다.
왕세정(자는 원미)에 이르러서는 마치 큰 바다가 넘실거리듯 그 축적한 바가 지극히 방대하다. 비록 이따금 격조가 근래의 수준으로 떨어진 것도 있지만, 그래도 만대를 아우르고 백 명의 작가를 망라하며 앞선 세 대가를 자기 나름으로 취사선택하여 채찍질하듯 자유자재로 다루었으니, 무예에 비유하자면 마치 초나라 항우가 거록에서 벌인 큰 싸움과 같다고 하겠다.
이 네 사람에 이르러서는 명나라 시의 정수를 다했다고 할 만하다.
내가 가려 뽑은 이 네 사람의 시는 모두 천삼백여 편, 스물여섯 권이다. 서정경(호는 창곡)·변공(자는 정실)·오국륜(자는 명경)·서중행(자는 자여) 등 여러 사람의 작품도 마땅히 갖추어 두어야 할 것이나, 바빠서 미처 손대지 못했으니 훗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청계집에 부친 서문 (서기 1607년 6월 20일, 양력 추정)
지난 임오년(1582년), 나는 아직 젊었을 때였다. 돌아가신 형님 하곡(허봉의 호) 선생을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 마침 손곡 이달(자는 익지)이 《용성창수집》이라는 책 한 권을 소매에 넣고 찾아와 물었다. "제가 몇 해 전 남원에 갔을 때 백광훈(자는 창경)·임제(자는 자순)·양대박(자는 사진)과 함께 지냈는데, 이 책은 바로 그때 서로 주고받으며 지은 시들입니다. 이 네 사람의 작품 중 누가 뛰어나고 누가 못한지요?" 하곡 선생은 그 시들을 소리 내어 읊어 보시더니 한참 만에 말씀하셨다. "다른 이들의 시도 모두 맑고 산뜻하지만, 좋게 지으려는 데만 힘을 써서 말이 다소 겉도는 느낌이 있다. 아무래도 매끄럽고 원숙한 양대박의 시만은 못하구나." 손곡도 그 말에 깊이 동감했다.
나는 이때 비로소 남녘 땅에 양대박이라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 등계달의 《번경칠자시》를 읽어 보니 양대박도 그 가운데 이름을 올리고 있어서, 더욱더 그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한 번도 직접 만나 보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경인년(1590년) 가을, 화중의 처소에서 마침내 양대박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 그의 고운 용모는 마치 옥이 맑고 봄기운이 온화한 듯했고, 맑은 그의 몸가짐은 마치 노을이 피어오르고 구름이 퍼져 나가는 듯했다. 나아가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흥망성쇠와 뛰어난 인물들의 출처거취를 이야기할 때는 막힘없이 술술 이어져 마치 구슬을 꿴 듯, 강물을 쳐서 바다로 쏟아 붓는 듯했다. 아, 참으로 기이한 인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렇게 하여 그와 사귐을 맺고 자주 오가며, 날마다 듣지 못하던 이야기를 듣고 그가 지은 시를 보게 되었다. 그의 필치는 도도하여 나아갈 때는 냇물이 흐르는 듯했고 멈출 때는 산이 우뚝 선 듯했으며, 소재를 고르는 데는 당나라 시를 본받으면서도 송나라 강서파의 시풍까지 넘나들어 천고 시인들의 우아한 운치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를 몹시 존경하고 감복했다.
임진년(1592년)에 전란을 피해 바닷가에 있을 때, 남쪽에서 온 어떤 사람에게서 양대박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자기 재산을 다 털어 의병을 모집해서 고경명(호는 태헌공)에게 넘겨주고 함께 왜적에 맞서 싸우게 했는데, 그 충의가 강개하고 분발하여 남녘 땅의 사기를 크게 북돋우다가 결국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한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그 절개와 의로움이 참으로 나라를 위한 큰 인물다운 풍모가 있어 결코 한낱 구구한 선비가 아님을 더욱 절감했다.
그 뒤 유성룡(호는 서애) 정승이 지은 양대박의 전기를 읽고서야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또한 눈물을 흘리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까워했다.
정유년(1597년) 봄, 나는 굉사과라는 과거 시험에서 장원으로 급제했는데, 양대박의 아들 양경우(자는 자점)가 마침 과거 명부에 이름을 올리며 아버지와의 오랜 인연으로 나를 찾아왔다. 만나 보니 온화하고 우아하며 문장까지 풍부하여 능히 그 집안의 명성을 이어 갈 만한 사람이었다. 나는 다시금 양대박의 남은 복이 자손에게까지 이렇게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착한 사람을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주 고을의 수령 자리에서 물러나 돌아왔을 때, 양경우가 우리 집으로 찾아와 아버지의 유고를 내게 맡기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의 시는 넉넉히 후세에 전할 만하기에 이제 판각하여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는데, 지금 세상에 재주를 아끼고 선비를 사랑하는 이 가운데 그대만 한 사람이 없고, 우리 아버지를 알아주고 감탄하며 칭찬해 주신 이 가운데도 그대만 한 사람이 없으며, 시의 아름다운 전통을 널리 알려 후세 사람에게 믿음을 전할 만한 이로도 그대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부디 그대가 한마디 서문을 써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그대의 선친은 포부가 남달랐으나 나라의 법에 매여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고 마음에 품은 채 세상을 떠났으니, 이는 뜻있는 이라면 누구나 탄식할 일이다. 다만 등계달은 온 세상에 이름난 선비인데도 그대의 선친을 찬탄했고, 하곡 선생은 평생 안중에 두는 인물이 드물었는데도 그를 자주 칭찬하였으며, 서애 정승은 밝고 지혜로운 군자였는데도 그 행적을 전기로 남겼으니, 글재주도 없는 내가 어찌 그 본말을 새삼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대의 집안에서는 부자 이대에 걸쳐 모두에게 참된 벗이라는 소리를 들은 사람으로는 나보다 더한 사람이 없을 것이니, 어찌 감히 내 글이 거칠고 서투르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마침내 내가 보고 듣고 마음에 아끼고 정을 느꼈던 바를 위와 같이 적어 그 청에 보답하는 바이다. 그의 시문에 관해서는 마치 곡식이나 삼베처럼 일상에 꼭 필요한 것과 같으니, 보는 사람이 마땅히 스스로 알아보고 소중히 여길 것이므로 여기에 굳이 덧붙이지 않는다.
섭생월찬에 부친 서문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세상에서 신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걸핏하면 수련과 화후의 비법을 들먹이며 "나는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 "나는 신선의 몸을 이룰 수 있다", "나는 오래도록 살아 죽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득한 수백 년 동안 실제로 그런 사람을 본 적은 거의 없으니, 이는 다 거짓말이다.
일찍이 호남 땅에서 남궁두라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나이가 아흔인데도 용모가 조금도 늙지 않았기에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저 계절에 맞게 생활하고 음식을 조절할 뿐이라고 답했다. 생각해 보니, 연단술 같은 어려운 수련은 손대기가 쉽지 않지만, 먹고 마시고 움직이고 앉는 일상의 순간마다 몸을 돌보고 잘 기르는 것은 일상생활에 매우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빨리 효과를 거두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또한 확실히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나의 벗 천옹은 도교의 수련법에 조예가 깊어서 노자(자는 백양)가 남긴 뜻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으니, 그가 세속의 낡은 틀을 벗어던지고 한마음으로 참됨을 닦는다면, 신선이 되어 죽지 않는 경지에 이르는 일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다만 상자평(후한 시대의 신선으로 전하는 인물)처럼 세속의 인연에 매여 신선의 경지에 이르는 일이 자꾸 늦어지고 있으니, 아, 대체 누가 그렇게 만드는 것인가?
이 책을 지은 것은 도를 닦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다. 몸을 잘 다스릴 수 있다면 정신을 보존할 수 있고, 혼백을 단련할 수 있으며, 신선이 되어 오래도록 죽지 않을 수도 있다. 처음에는 얕고 가까운 이야기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모두 지극한 도에 이르는 길이니, 그 쓸모가 크지 않은가?
내가 몸을 돌보고 잘 기르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일상생활에 가장 절실하기 때문에 가장 반갑다. 그래서 이를 깨끗이 정리하여 상자 속에 보관해 두고, 늘 마음에 새겨 익히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움직일 때나 고요히 있을 때나 반드시 이를 법도로 삼으려 한다. 천옹이 말하기를 "진실로 이 일에 전념한다면 신선이 되어 죽지 않는 효험은 당장에라도 이룰 수 있다"고 하기에, 나는 머리를 조아려 공손히 그 말을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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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부부고 제5권
9. 22:11
서변비로고 서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5권, 문부 2 · 서 / 조선의 서북 국경(평안도 방면) 방비가 허술함을 통렬히 비판하고 대비책을 촉구한 글. 한문 원문이 전해지지 않아 한국고전번역원 기존 번역문을 내용 이해용으로만 삼아 전면 재작문함)
조선은 산과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좁은 땅이다. 동남쪽은 왜구와 마주하고, 북쪽은 말갈(옛 북방의 이민족)과 국경을 맞대며, 서쪽은 여진족의 세 부족(흔히 삼위 여진이라 불렀다)이 강 하나만 사이에 두고 바짝 다가와 있다. 그런데 정작 이런 나라를 지켜야 할 무기는 낡아 빠지고 병사는 지칠 대로 지쳤으며, 성곽마저 손질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다. 막상 적을 막아 내려 해도 힘이 턱없이 모자란 것이 지금 우리의 형편이다.
북쪽 지역은 조선 왕조가 일어난 뿌리와 같은 곳이다. 그래서 역대 임금들은 일찌감치 국경을 다지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성을 고치고 해자를 파고, 팔도의 재물을 끌어모아 그곳 군사를 먹였으며, 정예 병사와 말을 뽑아 지키게 했다. 그 덕에 급한 일이 터져도 어렵지 않게 막아 낼 수 있었다. 북방 오랑캐들 또한 국경 초소가 촘촘히 이어져 있지 않았기에 이따금 노략질을 벌이기는 했어도, 대군을 몰아 땅을 다투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백 년 동안 자잘한 침탈은 있었을지언정 나라가 크게 상하는 일은 없었다. 남쪽 왜구로 말하자면 넓은 바다가 가로막고 뱃길이 아득히 멀어, 일본 본토는 애초에 먼 곳까지 쳐들어올 마음이 없었다. 다만 그 사이에 자리 잡은 대마도(쓰시마섬, 일본과 조선 사이에 있는 섬)의 왜인들이 꾀와 위협을 앞세워 잇속을 챙기려 들었을 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끌어들여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며 침략의 명분을 만든 것도, 실은 평조신(당시 조선과 일본 사이를 오가며 강화를 주선하던 일본 측 인물)이 두 나라를 얽어 잇속을 보려던 술수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백만 대군이 함부로 밀고 들어와 이 강토를 짓밟은 그 사건은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재앙이지, 해마다 벌어질 일은 아니다. 대마도 왜인들은 그저 교역을 청해 쌀이나 얻어 가려는 정도이니, 남쪽 국경은 그다지 걱정할 것이 없다. 지금 나라의 걱정거리 가운데 가장 크고 심각한 것은 다름 아닌 서쪽 국경이다.
서쪽의 방어선이라고는 압록강 하나와 연평이라는 고개 하나를 믿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겨울이 되어 강이 얼어붙으면 평지나 다름없어져 누구든 마음대로 건널 수 있고, 고개 또한 막혀 있지 않아 말을 탄 채로 쉽게 넘을 수 있다. 그곳만 지나면 수레 두 대가 나란히 달릴 만큼 길이 넓게 트여 있고, 대정강(평안도의 강 이름)에서 사현(고개 이름)에 이르기까지는 막아 낼 만한 지형조차 없다. 적이 일단 강을 건너면 열흘도 못 되어 서쪽 성 아래까지 들이닥칠 것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태평한 세월이 이어지다 보니, 평안도와 황해도 고을들은 그저 연못과 누각을 꾸미고 손님 접대용 물품이나 화려하게 갖추어 중국 사신을 즐겁게 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을 뿐, 국경을 굳건히 해야 할 이유는 아예 안중에도 없다. 문관이든 무관이든 지방 수령들은 그저 세월이나 보내며 임기가 끝나 다른 자리로 옮겨 가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군적에는 이름이 반이나 비어 있고 군사 훈련도 흐지부지된 지 오래다. 성은 무너지고 해자는 메워졌으며, 병기는 녹슬고 군량은 바닥났다. 백성들은 가혹한 수탈에 시달려 강변 여섯 고을 사람들 가운데 열에 여덟아홉이 내륙으로 흘러들어 갔다. 이는 곧 일이 터지면 흙담 무너지듯 순식간에 무너질 조건이 이미 다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구차하게나마 의지할 곳이라고는 오직 명나라뿐인데, 오랑캐 우두머리의 사나움과 명나라의 쇠약함은 이미 중국 자신도 근심하는 바다. 저들의 세력은 날로 커지고 주변 부족들은 날로 꺾여 굴복하고 있으니, 몇 해 지나지 않아 요동 땅조차 알을 쌓아 놓은 듯 위태로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총알만큼이나 작은 우리 서쪽 땅이 짓밟히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으며, 명나라가 반드시 와서 구해 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우리 역사를 살펴본 적이 있다. 요나라가 세 차례, 거란이 한 차례, 몽고가 여섯 차례, 홍두적(원나라 말기의 홍건적)이 두 차례 쳐들어왔는데, 모두 서쪽 변경을 통해 들어왔다.
고려 때는 장수가 잘 단련되고 병사가 강해서 적이 오면 그때마다 물리쳤다. 이는 지략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들의 힘으로 외침을 막아 낸 것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이 미리 방비를 튼튼히 하여 "만만한 상대"로 보이지 않을 태세를 갖추어 놓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백 년 동안 끝내 외침 때문에 나라의 명운을 그르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과연 오늘날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이 고려가 미리 대비하던 그 자세로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좋은 장수를 가려 뽑지도 않고, 병사를 훈련시키지도 않으며, 성곽조차 미리 정비해 두지 않은 채, 조정에서는 팔짱을 끼고 헛된 말로 세월만 보내다가, 혹시라도 일이 터질까 걱정되면 곧바로 "명나라가 위에 버티고 있으니" 또는 "하늘이 반드시 송나라를 도왔듯 우리도 도울 것이니"라는 말로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해 버린다. 아, 우리 땅이 고려 때보다 줄어든 것도 아니요 백성 수가 줄어든 것도 아니다. 저 오랑캐들 또한 완안(여진족, 훗날 금나라를 세운 부족)이나 철목(테무친, 곧 몽고족)보다 강해졌다고 할 수도 없다. 망할 조짐이 이렇게 뻔히 보이는데도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지조차 모르고 있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법과 정치가 밝지 못하고 기강이 서 있지 않아, 고위 관리들이 늘 안일에 젖어 눈앞의 편안함에만 안주해 버린 탓이다.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서쪽 변경을 오간 지가 오늘로 벌써 십이 년이 넘었고, 그동안 산천의 지형을 직접 눈으로 보아 잘 알고 있다. 또한 나이 든 장교와 퇴역한 병사들을 만날 때마다 방비책의 실효성을 물어 그들의 생각을 두루 들어 보았는데,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조정에서 참으로 한 도의 불필요한 경비와 부역을 덜어 내어, 재능 있는 사람을 뽑아 군사 업무를 맡긴다면 좋을 것입니다. 양반이든 천민이든 가리지 말고 젊은이는 군에 편입시키고 늙은이와 아이들은 그들 먹을 것을 돕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략 있는 사람을 뽑아 강변 고을 수령으로 보내고 자금을 넉넉히 대주어 성곽 수리를 맡기고, 산 고개나 좁은 길목마다 관문을 세워 지키게 해야 합니다. 삭주, 구성, 안주 같은 고을에는 진영을 두어 정예 병력을 주둔시키고 보루를 쌓아 방비를 다져야 합니다. 군량과 병력을 넉넉히 갖추고 칼을 벼리고 갑옷을 걸친 채 늘 적이 쳐들어올 것처럼 대비하고 있다면, 저들의 기병이 아무리 수만이라 한들 어찌 함부로 쳐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런 대비는 하지 않고, 그저 '급하면 강화도로 피하면 된다'거나 '안동으로 도망가면 된다'는 말만 늘어놓습니다.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저들도 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런 말이 저 오랑캐들 귀에 들어가면 오히려 마음을 놓고 팔을 걷어붙이며 쳐들어오리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으니, 편히 지내는 고위 관리들의 이런 생각이 어찌 딱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보잘것없는 선비이니 어찌 내 권한 밖의 일을 감히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근심이 깊은 사람은 반드시 대책도 주도면밀하게 마련하는 법이다. 내 마음에 이런 근심이 있으니,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도 오래 생각하면 쓸 만한 생각 하나쯤은 얻는다고 했듯이 나 역시 얻은 바가 없지 않았다.
그래서 고려가 서쪽 국경을 방비했던 기록들을 찾아 앞머리에 싣고, 또한 여지(우리나라 지리서인 《여지승람》 등을 가리킴)에 실린 산천의 형세와 관문 지역의 험하고 평탄한 정도, 그리고 지금의 병력 수와 군량의 많고 적음을 모두 정리하여 두 권의 책으로 엮은 뒤, 제목을 《서변비로고》(서쪽 변경의 오랑캐 방비를 살핀 기록)라 붙였다.
이 책을 상자에 넣어 두고 이 뜻을 알아줄 사람을 기다린다. 세상의 뜻있는 이가 이 글을 보고 받아들여 내가 말한 바가 실제로 행해진다면, 내 근심도 비로소 놓일 것이다.
귀전록 서 (서기 1608년 10월 23일, 양력 추정)
내가 어릴 때 두 형님 밑에서 글쓰기를 배우다가, 그때 처음으로 호남 출신의 김공이라는 분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 자란 뒤에는, 김공이 사문박사(국자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벼슬)로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어서, 심우승(호는 청계) 댁에서 직접 뵐 기회가 있었다. 만나 보니 과연 인정 많고 온화한 어른이었고, 겉치레 없이 속이 꽉 찬 참된 선비였다. 다만 그때 나는 너무 젊어서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그저 마음속으로만 '저런 분이 계시구나' 하고 새겨 두었을 뿐이다.
1601년 봄, 나는 명을 받아 호남의 선비들을 능양에서 시험 쳐서 뽑는 일을 맡게 되었다. 가는 길에 화순현을 지나게 되어, 그 기회에 김공의 집에 들러 마루에 올라 인사를 드렸다. 그새 공은 노인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반가워하며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된 것을 아쉬워했고, 며칠 머무르며 술잔도 몇 번 주고받았다. 공은 그동안 지은 글 수십 편을 꺼내어 보여주었는데, 읽어 보니 문장은 마치 중국 장안과 낙양을 두루 돌아보고 온 사람의 글 같았고, 시는 위응물과 유종원(둘 다 당나라의 이름난 시인이다)의 중간쯤 되는 맛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공의 글이 옛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는 것을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다.
시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공의 집에 들렀다. 공은 식견 좁은 나를 마다하지 않고 책 한 질을 꺼내 보여주었는데, 《귀전록》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끝까지 읽었다. 책의 내용은, 옛날에 세상을 등지고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살았던 사람들을 골라, 그들이 산 시대 순서대로 사실을 정리해 싣고, 거기에 관련된 시와 글을 덧붙인 것으로, 모두 두 권이었다. 나는 감탄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그냥 심심풀이로 쓰신 게 아니고, 공 한 사람만 좋으라고 쓰신 것도 아닙니다. 아마 세상에서 벼슬길로만 정신없이 내달리는 사람들이 이 책을 보고 무언가 깨닫는 게 있어서, 이익과 녹봉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누구나 쉽게 물러날 마음을 먹게 하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이 책이 쓰이는 방식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저도 지금 벼슬살이를 하는 사람인지라, 구름 낀 산속에 들어가 살고 싶은 생각이 늘 마음에 맺혀 있습니다. 언젠가는 벼슬을 내놓고 동쪽으로 돌아가, 감호(중국의 이름난 호수로, 예로부터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는 선비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전해진다) 가에서 남은 생을 보낼 작정입니다. 그러니 이 책은 저에게도 그곳까지 건너가게 해 줄 나룻배 같은 책이 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을 빌려 베껴 두었다가, 나중에 은거하며 지낼 때 들여다볼 거리로 삼고 싶습니다."
그러자 공은 기뻐하며 말했다.
"바로 내가 바라던 뜻이오."
그래서 나는 그 책을 받아 깨끗한 종이에 옮겨 베끼고, 원본은 공에게 돌려드렸다.
그 뒤로 나는 계속해서 큰 고을의 수령을 맡았는데, 감독하러 오는 관리에게 자주 지적을 받으면서도 얼마 안 되는 녹봉에 연연해 스스로 결단을 내려 벼슬을 떠나지 못했으니, 그때 공에게 했던 말을 저버리고 있는 셈이다. 공이 계신 남쪽 하늘 — 예로부터 어진 사람이 있는 곳엔 상서로운 기운이 감돈다던 그 하늘 — 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얼굴이 붉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가끔 상자를 열어 이 책을 들여다보면, 마치 선생님이 직접 쓰신 그 뜻이 눈앞에 환히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 마음에 감탄한 끝에, 이 책을 얻게 된 사연을 이렇게 책머리에 적어, 내가 품고 있는 이 부끄러움과 아쉬움을 풀어 본다.
공의 이름은 공희이고, 문과에 올라 벼슬길에 나섰으며, 관직은 영광 군수까지 지냈다. 지금은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서 지내고 있다.
산으로 돌아가는 해안을 보내며 (서기 1608년 11월 22일, 양력 추정)
나는 고을 수령 자리를 내놓고 부령(지금의 전라북도 부안 지역에 있던 바닷가 고을)으로 옮겨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해안이라는 스님이 무안(전라남도의 한 고을)에서 찾아와 인사를 했는데, 첫눈에 보기에도 기품이 남달라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학식을 떠보니 불교 경전에는 이미 통달해 있었고, 거기에 더해 시와 글에도 능해서 지어낸 글이 상당히 훌륭했다. 어떤 집안 사람인지 물으니 본래 양반 집안 출신이라 했다. 나이를 물으니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났고, 태어난 달과 날, 심지어 태어난 시각까지도 나와 똑같았다. 나는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나는 평소에 사주로 운명을 점치는 사람들이 내놓는 풀이가 대개 맞지 않는다고 의심해왔다. 분명 점술가들이 근거 없이 이론을 만들어 책으로 엮어놓고는, 운 좋게 맞아떨어지는 경우를 내세워 세상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이 일을 보니 그 의심이 더욱 굳어진다.
그대는 나와 태어난 시가 완전히 같은데도 해진 승복 한 벌과 밥그릇 하나로 산속 바위굴에 숨어 살고 있다. 나 또한 세상과 잘 맞지 않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집안을 일으킨 지 열여섯 해 동안 세 번이나 고을 수령 자리에 올랐고, 젊은 시절에는 궁궐 서고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며 글을 짓는 벼슬까지 지냈다. 이렇게 잘되고 못되고, 막히고 풀리는 정도가 서로 이토록 차이가 나는 걸 보면, 태어난 시를 잘못 짚은 것인가, 아니면 점술가가 제대로 가려내지 못한 것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곁에 있던 민정걸이라는 사람이 음양오행을 잘 다루었으므로, 우리 두 사람의 태어난 시를 다시 짚어 추산해 보았다. 그 결과 일찍 죽을 수도 있고 오래 살 수도 있으며, 크게 될 수도 있고 막힐 수도 있지만, 둘 중 누구의 사주에도 집을 떠나 스님이 될 조짐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말했다.
"평소에도 점을 믿지 않았지만, 이번 일을 겪고 나니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더욱 굳게 믿게 되었다."
그렇긴 하지만, 해안은 불교를 믿는 사람이고 나 또한 불교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언젠가 그의 글을 읽어보니 환하게 마음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아 다 헛것으로 돌려버리니, 마치 완전한 깨달음을 바로 눈앞에서 증명해 보이고 부처의 경지로 곧장 넘어가려는 듯했다. 벼슬을 버리고 바닷가에 숨어 사는 것은 본래 한 생애의 인연을 마무리하려는 뜻일 터이니, 설령 엄격한 옛 법도를 지키는 승려들에게 비난과 공격을 받는다 해도 나는 거리낄 것이 없다. 나고 죽음이 없는 이치를 깨달아 번뇌와 몸까지 모두 사라지는 열반에 들어, 달마대사와 홍인대사가 고요히 세상을 떠난 것과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지 않았다 해도 해안과 나는 똑같은 불교도라 할 수 있다.
더구나 해안은 구름과 물 사이에서 스스로 즐기며 마음이 맑고 편안한데, 나는 비방과 모함, 질책과 벌에 시달려 마음 편할 날이 하루도 없다. 좋은 수레를 타고 비단옷을 입고 있어도 오히려 물병과 밥그릇만 들고 다니는 자유로움에는 미치지 못하니, 내가 누리는 영화와 그가 겪는 쓸쓸함은 서로 맞바꿀 만하다. 정말로 그렇다면, 운명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도 어느 정도는 그럴듯하다 하겠다.
열흘 남짓 머물다가 해안이 자기가 있던 산으로 돌아가겠다며 작별을 고하기에, 이 글을 써서 떠나는 그에게 선물로 준다.
황지천시권 서 (서기 1609년 4월 18일, 양력 추정)
나는 젊었을 때 지천 노인(황정욱의 호)을 뵌 적이 있다. 그분은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태도가 몹시 거만해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글에 대해 말할 때 좋다고 인정해 주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우리나라 시에 대해서는 한술 더 떠서, 아예 따져볼 가치도 없다는 듯 순위에 넣지도 않았다.
이를테면 용재 이행 같은 사람을 두고는 "지나치게 기름지다"고 깎아내렸고, 이달에 대해서는 "남의 것을 본뜬 것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 정도이니 그 아래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오직 눌재 박상만은 떠받들며 "아무도 따라갈 수 없다"고 했고, 호음 정사룡과 소재 노수신에 대해서는 "그나마 작가라고 불러 줄 만하다"는 정도로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마치 저 멀리 아득한 은하수를 올려다보는 것 같아서, 그 깊이와 끝을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을 그저 혼자 마음에 담아 두고만 있었다. 그분이 세상을 떠난 뒤로는 남긴 글을 제대로 볼 기회가 없어서 늘 아쉬워했고, 한편으로는 '정작 자신이 쓴 글도 그렇게 큰소리친 만큼 정말 대단할까' 하는 의심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내 벗 조지세가 그분이 근래에 지은 율시 백여 편을 모아 둔 것이 있어서, 나는 비로소 그 글을 직접 읽어 볼 수 있었다. 과연 그 기개와 굳건함, 속 깊고 드넓은 기상은 천 년을 사이에 두고도 홀로 울려 퍼질 만큼 남다른 것이었다.
그 시가 어떤 길을 거쳐 이렇게 되었는지 따라가며 살펴보니, 대체로 눌재에게서 뻗어 나와 노수신과 정사룡의 경지를 넘나들면서 거의 같은 흐름을 타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 두 사람보다 한 수 위였다. 이것을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그가 평소에 큰소리쳤던 말과 실제로 쓴 글이 정확히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아, 만약 이런 분들이 중국에서 태어났더라면 그 성취가 어찌 북지 이몽양이나 제남 이반룡, 태창 왕세정 같은 이들(명나라 때 이름을 떨친 문장가들)보다 못했겠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탓에 그 재능을 다 펼치지 못했고, 천하와 후세에 이름을 널리 알리지도 못한 채 이대로 사라져 전해지지 않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분의 이름은 정욱이고 자는 경문이다. 선조(무덤 이름을 따 '목릉'이라고도 부른다)를 섬겨 광국원훈(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에게 내리는 칭호)에 봉해지고 1품(조선시대 관직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의 지위까지 올랐으며, 한때는 문단을 이끄는 자리까지 맡았는데, 이는 소세양 정승이 그를 밀어준 덕분이었다.
왕자를 모시고 있다가 적의 손에 붙잡혔는데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책을 당해 관직을 빼앗기고 세상을 떠났다. '지천'은 그가 스스로 지어 부른 호이다.
적암유고 서 (서기 1609년 5월 18일, 양력 추정)
조신은 매계(조위의 호)의 배다른 동생이다.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달과 날로 따지면 조위보다 늦게 태어났다.
형과 동생이 나란히 글재주를 타고나서 둘 다 성종의 눈에 들어 아낌을 받았다. 조위는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품계를 훌쩍 뛰어넘어 소사도(호조와 관련된 벼슬 이름)까지 올랐지만, 조신은 신분이 낮아 정식으로 벼슬길에 나설 수 없었다. 처음에는 사알(궁궐에서 찾아오는 사람을 임금에게 알리는 낮은 벼슬)이 되어 궐문에서 임금을 모시는 일을 맡았다.
성종은 아무 때나 그를 불러들여 만났고, 가끔 까다로운 운자를 던져 시를 지어 보라고 시키면 그 자리에서 써서 바쳤는데, 말도 뜻도 다 아름다워서 옷과 비단을 상으로 받곤 했다.
그 뒤 일본에 다녀온 공으로 군직(군대 쪽 벼슬)을 얻었고, 이어서 내시교관(궁중 관원들을 가르치는 벼슬)이 되었다. 얼마 안 가 대군(정실 왕비가 낳은 왕자)의 스승이 되었고, 나라의 법전이 반포되자 그제야 내의원(궁궐의 의료를 맡은 관청)에서 정식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또 북경에 다녀온 공으로 사역원(외국어 통역을 담당하는 관청)의 관원이 되었고, 공을 쌓아 3품 벼슬까지 올랐다. 이쯤 보면 조신은 글재주만이 아니라 여러 방면에 두루 능했던 사람이다.
중종은 어렸을 때 조신에게 배운 적이 있어 두 사람 사이에는 스승과 제자로서 맺은 오랜 정이 있었다. 그래서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조신을 불러 내의원의 수장 자리에 앉히고 책을 편찬하는 관청에서 일하게 했으며, 특별히 당상관(정3품 이상의 고위 품계)까지 올려 주었다. 그런데 간언하는 신하들이 반대하자 그 명을 도로 거두고 말았다.
조신은 일흔다섯에 금산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내가 조신이 남긴 《백년록》이라는 글을 읽어 보니 그의 삶이 대략 이러했다.
성종과 중종, 두 임금이 다스리던 시절은 학문과 문화가 크게 꽃피어서 홍문관이니 예문관이니 하는 학술 기관에 거물로 불릴 만한 원로 학자들이 매우 많았다. 그런데도 다들 조신을 첫손에 꼽았다. 남곤(호는 지정), 박은(호는 읍취), 이문민, 김안로(자는 이숙), 김안국(호는 문경), 이호숙, 김문정 같은 이들이 모두 의문이 생기면 조신에게 물어서 결론을 냈으니, 그들이 조신을 얼마나 높이 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사룡(호는 호음)은 고집이 세고 남에게 잘 굽히지 않아서 누구든 함부로 인정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정진 나루터에 지은 별장에는 조신의 시와 더불어 용재·눌재라는 호를 쓴 두 사람(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원문에 밝혀져 있지 않다)의 작품까지 단 세 사람의 글만 마루에 걸어 두었다. 이것만 보아도 조신이 당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조여익이라는 사람에게서 조신의 시 두 권을 얻었다. 원래 세 권이었는데 한 권은 이미 사라지고 남은 것이 이 두 권뿐이었다.
읽어 보니 시어가 굳세고 절실하며 간결하면서도 무게가 있어서, 대체로 황정견과 진사도(둘 다 송나라의 이름난 시인이다) 쪽의 시풍에서 나왔지만 그보다 한결 부드럽게 무르익은 느낌이었다. 태허라는 호를 쓴 시인(원문 확인 필요)과 견주면, 두루 녹아든 원만함은 조신이 더 나았지만 격조와 울림과 화려한 문채는 그에 못 미쳤다. 그래도 조신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이름난 시인이라 할 만하다.
우리나라에서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세상에 이름을 떨친 사람으로는 어무적, 이효칙, 어숙권, 권응인, 이달, 양대박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조신은 그들보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실제로 나라에 쓰였다.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문서를 작성하는 일은 반드시 그가 맡아 처리했다.
한때 그 많은 대가들이 이렇게까지 그를 받들고 높였는데도, 남아 전하는 시는 이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세상에 묻힌 인재는 다시 얻기 어렵다는 뜻으로 보이는 옛말(원문 확인 필요)이 더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북경에 가는 김자중을 전송한 서 (서기 1610년 9월 22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5권, 문부 2 · 서 / 한문 원문이 없어 한국고전번역원 기존 번역문을 내용 이해용으로만 삼아 전면 재작문함)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기는 자세는 한결같았다. 제후국으로서 지켜야 할 예법, 이를테면 조회에 나가고 선물을 보내고 청원을 올리고 사은하는 일 같은 것들을 앞에 두고 언제나 정성과 예의를 다하고 공경과 삼가는 마음을 잃지 않았으니, 이렇게 해온 지 벌써 이백 년이 넘었는데도 마치 어제 시작한 일처럼 변함이 없다.
그래서 이 일을 맡는 사신도 반드시 학문과 글재주가 빼어나고 예법에 밝으며 옛 법도와 관례까지 잘 아는 선비 중에서 골라 뽑아야 한다. 그래야 임금의 뜻을 제대로 펼치고 사신의 임무를 다하여, 애써 사람을 고른 보람을 저버리지 않게 된다. 그런 까닭에 나라가 세워진 이래 이 인선만큼은 무엇보다 중히 여겨왔으니, 그 뜻을 짐작할 만하다.
사신 밑에는 서장관을 두어 감찰의 권한까지 함께 맡겼다. 일행 중에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가려내어 바로잡는 자리다. 그러니 나라의 법도를 어긴 자라면 비록 정사(사신단의 우두머리)라 해도 서장관의 탄핵을 피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서장관을 뽑는 일도 사신을 뽑는 일에 못지않게 중요했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꺼리는 정도는 오히려 사신 자리보다 한 수 위였다고 한다.
내가 들은 이야기가 있다. 성종 때 정승 윤사분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정희왕후의 동생이었다. 그가 중국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개인적으로 물건을 엄청나게 많이 챙겨 왔다. 그런데 서장관 권경우가 강가에서 이 짐을 뒤져 장물을 찾아냈다. 성종이 이를 알고 윤사분을 불러들여 가두고 법대로 죄를 물으려 하니, 윤사분은 두려움과 걱정에 시달리다 옥에서 죽고 말았다.
권경우는 윤사분이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고 대신이라 해서 봐주지 않았고, 성종도 그가 왕후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감싸주지 않았으며, 왕후 또한 자기 동생을 용서해 달라고 빌어볼 데가 없었다. 이만하면 선왕이 법을 지키는 자세가 얼마나 확고했는지 알 수 있고, 권경우가 권세 있는 친척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은 기개 또한 높이 살 만하다. 임금도 신하도 이렇게만 한다면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까 걱정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요즘 사대부들이 법을 지키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상 여론이 지나치게 각박해서 털끝만 한 실수도 그냥 넘기지 못하다 보니, 억울하게 법에 걸려드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슬쩍 빠져나가는 사람도 많다. 아, 위아래가 모두 법을 바르게 지키면서도 누구 눈치도 보지 않던 성종 시절 같은 그 기풍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을까.
내 벗 김자중은 천하에 드문 선비다. 보고 들은 것이 많고 기억력이 좋으며 글솜씨도 뛰어나, 스무 살 갓 넘어 과거에 올라 줄곧 이름난 벼슬자리를 거쳐 왔다. 몸가짐은 언제나 법도에 맞추었고 옛 어진 이들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공적인 일을 처리하고 법을 집행할 때는 한결같이 정직함에서 출발해 힘 있는 자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당당한 기세에 거칠고 못된 자들도 마음을 고쳤으니, 참으로 곁에 두고 그릇된 일을 바로잡고 잘못을 꾸짖게 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가 언젠가 간언하는 신하가 되거나 감찰을 맡는 관리가 되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서둘러 발탁되어 동지를 축하하러 가는 사신의 서장관으로 뽑혔다. 여론은 "아깝다"며 못마땅해했지만, 자중 본인은 오히려 반겼다. 만 리 밖까지 시원하게 다녀올 기회가 생겼으니 바라던 바에 꼭 맞는다며 아주 기뻐했다고 한다. 나는 이 일을 보고 자중의 그릇이 얼마나 넓은지 알았다. 등용되든 버려지든 그는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법이 없으니, 보통 사람과는 격이 다르다.
인사를 맡은 이들이 그를 추천하고 임금이 그를 뽑아 쓴 데에는 분명 뜻이 있었을 것이다. 위아래가 모두 법과 바른 도리를 지키며 사사로운 정에 끌리지 않던 성종 때의 기풍을 다시 세워보고 싶었던 게 아니겠는가. 자중은 본래 뜻이 무겁고 굳은 사람이니, 가만히 참고 조용히 얼버무리며 조정이 그에게 건 기대를 저버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런다면 저 권경우마저도 요즘 사람들이 너무 물러 터졌다고 웃을 것이다. 자중이여, 힘쓰시게.
이번 사행길에 정사는 덕이 두텁고 사리에 밝아 선비다운 기품으로 일행을 잘 다스릴 만한 분이고, 부사(정사를 보좌하는 사신) 또한 자기 재능을 믿고 당당히 나설 만한 사람이다. 여기에 자중의 강직한 기개와 의기가 더해져 서로 마음을 합쳐 돕는다면, 이 사행의 임무는 반드시 성공을 거둘 것이다. 옛날 오나라의 계찰(어진 덕으로 이름난 오나라 왕자)이 주나라를 찾아가고 정나라의 자산(뛰어난 외교로 이름난 정나라 대부)이 이웃 나라를 예방했던 일과, 시대는 다르지만 그 뜻과 결과는 꼭 닮을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자중이여, 힘쓰시게.
떠나는 자리에서 자중이 나에게 한마디 적어 전송해 달라 청하기에, 이렇게 써서 그를 격려하고 당부한다.
북경에 가는 조지세를 전송한 서 (서기 1610년 10월 1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5권, 문부 2 · 서 / 한문 원문이 없어 한국고전번역원 기존 번역문을 내용 이해용으로만 삼아 전면 재작문함)
내 벗 조지세는 마흔이 되도록 과거에 붙지 못해 여전히 시험공부에 매달려 있고, 나는 벼슬하지 않던 선비의 신세를 벗어난 지 열여섯 해가 되었는데도 낮은 자리에 머물러 아직 높은 벼슬아치의 붉은 옷을 입어보지 못했다. 바라는 뜻이 같을 뿐 아니라 세상에서 외면당한 처지까지 닮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되어 마음이 꽤 잘 맞았다. 아침저녁으로 서로 찾아다니며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고, 날마다 시와 문장을 품평하고 옛날과 지금의 일을 따져보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며,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고 이렇게 몇 해를 지냈다.
어느 날 내가 먼 나라로 사신 가는 일의 고생스러움을 이야기하자 지세가 말했다.
"우리가 중국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만으로도 이미 불행한 일인데, 거기다 길 위의 고생을 핑계로 그 웅장하고 멋진 구경까지 놓친다면 이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와 다를 게 뭐 있겠나."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과거에 붙고 그대가 붉은 옷을 입게 되면, 만 리 길 장한 구경을 어찌 같이 안 하겠는가."
나는 대답했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두 번이라도 마다하겠나. 다만 모르겠네, 하늘이 과연 사람 욕심대로 다 들어줄지, 아니면 운명을 가지고 장난치는 심술꾼이 또 훼방을 놓지나 않을지."
그러고는 서로 쳐다보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
1609년(기유년) 여름, 나는 성균관에서 치른 시험에서 세 번이나 장원을 하여 형조참의(형조의 고위 관직)로 승진했고, 그해 초겨울에는 전시(임금 앞에서 치르는 과거의 마지막 시험) 답안을 채점하는 대독관에 임명되었다. 지세도 이때 사책(정책 논술 시험)으로 갑과(과거 합격자 중 최상위 등급)에 급제하여 명성이 자못 높았다. 내가 축하하러 찾아가니 그가 말했다.
"예전에 우리끼리 한 약속, 중국에 함께 가자던 그 약속이 내년쯤엔 이루어지지 않겠나?"
내가 대답했다.
"그대는 이미 급제했고 나도 붉은 옷을 입었으니 원은 다 이룬 셈인데, 모르겠네, 하늘이 사람 바라는 대로 끝까지 다 들어줄지, 아니면 그 심술꾼이 끝내 샘이 나서 또 방해하지나 않을지."
그런데 올봄, 나는 정말로 천추사(중국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는 사신)로 임명되었다. 나는 급히 지세에게 말했다.
"서장관 후보 명단에는 분명 그대 이름이 올라갈 걸세."
그가 웃으며 말했다.
"하늘이 정말 사람 바라는 대로 해줄까?"
마침 인사 일을 맡은 사람에게서 들으니, 지세의 이름이 후보 명단 맨 앞에 올랐는데도 위에서 쓰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
"이것도 그 심술꾼이 훼방 놓은 건가?"
그 후 한 달 남짓 지나 나는 병을 얻어 위태로운 지경까지 갔고, 거듭 상소를 올려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청했다. 지세가 찾아와 나를 다독였다.
"힘써 약을 챙겨 먹으면 병마도 저절로 물러갈 걸세. 그대 재주로 나이와 벼슬이 어찌 이 정도에서 멈추겠나. 내년에는 전에 한 약속도 이룰 수 있을 걸세. 혹시 아나, 하늘이 이 병을 내린 것도 결국 우리 바람을 이루어주려는 뜻일지. 그렇다면 그 심술꾼이 그대를 괴롭힌 게 아니라는 얘기지."
그러면서 정성껏 나를 위로하고 돌아갔다.
결국 나는 이 병 때문에 문책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지세는 오히려 의제랑중(예법과 의식을 담당하는 관청의 관리)으로 승진하여 사은사(중국 황제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러 가는 사신)의 서장관으로 뽑혔다. 나는 한탄했다.
"결국 하늘이 사람 바라는 대로 다 들어주지는 않는 모양이군. 그 심술꾼이 샘이 나서 끝내 훼방을 놓은 게 아니겠나."
지세도 이 일을 못내 아쉬워했다.
떠나는 자리에서 그는 시 한 편을 청하며, 우리의 오랜 우정을 적어 작별의 선물로 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병을 앓은 지 오래라 글 짓는 일과는 멀어진 터인데, 못난 얼굴에 분칠을 하고 미인 행세를 하는 꼴을 어찌 보이겠는가.
그렇다 해도, 빼어난 산천과 아름다운 경관이라면 눈으로 대강 보고 마음에 새겨둔 것이 있다. 언젠가 기념비 기둥을 어루만지며, 학으로 변해 신선이 되어 고향에 돌아왔다는 정령위(옛 전설 속 인물)의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그 신선됨을 선망했고, 주필산(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러 가는 길에 머물렀던 곳)에 올라서는 당 태종이 무력을 과시하다 체면을 구긴 일을 두고 웃음을 지었으며, 의무려산(요동 지역의 이름난 산)을 바라보며 어진 이를 우러르는 마음이 일었고, 백이숙제(은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 산나물만 캐 먹고 살다 죽은 형제)의 사당을 보고는 그 지조 앞에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겹겹의 관문과 거대한 둑으로 중국과 바깥 땅을 갈라놓고, 겹겹의 해자와 층층의 건물로 황제가 사는 곳을 위엄 있게 꾸며놓았으며, 머리 장식과 옷과 패옥은 화려하게 빛나고, 저잣거리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려 그 모습을 노래로 짓거나 글로 그려낼 만한 것이 참 많았다. 하지만 그때는 우리나라가 전란을 겪던 시절이라, 나는 일을 맡은 관리들에게 매달려 사정을 호소하느라 하루도 여유가 없었다. 붓을 들어 뭔가 써보려다가도 걱정과 두려움에 그만두기를 거듭했으니, 꼭 재주가 모자라서만은 아니었다.
지금은 나라가 평안하고 중국도 태평하여 특별한 일이 없으니, 조회 가는 사신들은 그저 시를 짓고 경치를 기록하는 것으로 소임을 삼을 수 있다. 더구나 지세처럼 남다른 재주와 아름다운 문장을 지닌 이라면, 좋은 경치를 마주할 때마다 붓을 들어 글을 지을 것이고, 날마다 눈부신 글들이 그의 주머니에 가득 쌓일 것이다. 이 얼마나 문단을 위해 반가운 일인가.
다만 나는 안타깝게도 그 곁에서 시를 부르면 곧바로 화답하며 서로 주고받지 못하고, 전에 갚지 못한 빚마저 갚을 길이 없게 되어 몇몇 형제들에게나 의지해 지낼 처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나도 모르게 하늘을 원망하고 그 심술꾼에게 분풀이를 하게 된다.
그래서 전에 생각했던 것들을 이렇게 하나하나 풀어내어 작별의 선물로 삼는다. 아울러 사람의 계획이 하늘을 이기지 못하고, 그 심술꾼이 일을 훼방 놓기를 이토록 즐긴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세상 이치를 모르고 헛되이 행운만 바라는 이들을 일깨우고자 한다.
사체성당 서 (서기 1610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이 글을 다 쓰고 나니 어떤 손님이 찾아와 따지듯 물었다. 나는 이렇게 주고받았다.
"어째서 '네 갈래'라는 이름을 붙이셨습니까?"
"일곱 자로 쓰는 '가'와 '행'이라는 노래체 시 두 가지, 그리고 다섯 자와 일곱 자로 쓰는 율시(정해진 격식을 갖춘 정형시) 두 가지, 이렇게 네 가지 형식은 당나라 시가 가장 흐드러지게 피었던 전성기, 이른바 '성당'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틀을 완전히 갖추었다. 그래서 내가 이 책에 고른 시도 딱 그 네 가지, 그 범위까지만 다룬 것이다."
"그럼 왜 성당 시기 것만 고르셨습니까?"
"시를 짓는 재주가 이토록 크게 일어난 시대는 당나라 말고는 없다. 그중에서도 경룡(당나라 중종 황제 때 쓰던 연호)과 개원(현종 황제 때 연호) 무렵이 가장 화려했다. 그 뒤 대력(대종 황제 때 연호) 이후로 내려가면, 솔직히 더 따져볼 가치조차 없다."
"그렇다면 다섯 자로 된 옛 시체, 오언고시는 어째서 빼셨습니까?"
"비유하자면 참선을 논하는 것과 똑같다. 한나라와 위나라 시가 가장 높은 경지에 있다면, 반악과 육기는 이미 그보다 한 단계 떨어진 둘째 경지에 있고, 포조·사령운·조식·강엄(모두 중국 한시를 대표하는 옛 시인들) 같은 이들은 그보다 더 낮은 경지에 있다. 그런데 당나라에 와서는, 그야말로 남의 말을 얻어듣고서야 겨우 깨치는 가장 낮은 수준밖에 안 된다."
"당나라 삼백 년을 통틀어 절구(넉 줄로 끝나는 짧은 정형시)로 이름난 시인이 가장 많았는데, 그건 왜 빼셨습니까?"
"아니, 아니, 그런 말이 아니다. 내가 고른 것은 처음부터 성당 시기의 시뿐이다. 그런데 절구라는 형식은 당나라가 기울어가던 말기까지도 누구나 당연히 짓던 것이어서, 이게 성당 때 지은 것인지 말기에 지은 것인지 딱 잘라 가를 수가 없다. 그러니 내가 따로 가려 실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이백과 두보도 빼버릴 수 있습니까?"
"이 두 사람은 하늘에 맞닿은 거대한 강물을 보는 것과 같다. 됫박 같은 작은 잣대로 어떻게 그걸 재겠는가. 게다가 매씨라는 사람이 골라 엮은 책(정확히 누구인지는 원문 확인 필요)이 이미 두 사람의 시를 충분히 다 담아 놓았으니, 더 보탤 말도 없다."
손님은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갔다. 그래서 나는 이 주고받은 말을 적어 서문으로 삼는다.
당절선산 서 (서기 1610년 11월 29일, 양력 추정)
예로부터 사람들은 "시의 모든 이치는 시경(유교의 경전으로 꼽히는 옛 노래 모음집) 삼백 편 안에 이미 다 갖추어져 있다"고 말해 왔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인정이 넉넉해서 사람의 착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나쁜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국풍(시경 가운데 민간의 노래를 모은 부분)이 가장 뛰어나다. 아와 송(시경 가운데 궁중의 의례와 제사에 쓰인 노래를 모은 부분)은 이치와 논리를 따지는 데 치우쳐서 사람의 본디 감정과는 다소 거리가 생겼다.
한나라와 위나라 이후로도 시를 쓴 사람이 적지 않았고, 그 가운데 아름다운 작품도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지나치게 꼼꼼하고 세세한 데로 흘러 버렸다. 이는 다름 아니라 아와 송의 경향이 지나치게 번져 나간 탓이니, 이런 시를 사람의 본디 마음과 감정을 다루는 참된 시라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당나라에 이르러 시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 수천 명에 달했지만, 대부분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화려하고 곱기만 한 말, 바람과 꽃 같은 가벼운 소재에 치우쳐 시의 바른 기운을 해치는 경우도 있었으니, 결국 백성을 가르치고 이끌어야 할 책임자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것이야말로 시의 정신에 닥친 재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당나라 사람들이 지은 오언절구와 칠언절구로 지금까지 판에 새겨 전해지는 것만 해도 무려 만 수에 이른다. 이 시들은 말은 짧아도 뜻은 멀리까지 뻗어 있고, 표현은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다. 곧이곧대로 할 말을 오히려 뒤집어 말하는 듯하고,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은 도리어 거칠고 투박하게 들린다. 그러면서도 할 말의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말의 자취에만 머물지도 않는다. 풍자하고 간언하려는 뜻을 은근히 품어, 먼저 다른 사물을 노래하고 그에 기대어 속뜻을 펴는 시경의 표현법('흥'이라 부르는 기법)에 실어 전하며, 남을 비꼬아 놀리는 대목도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딱 알맞은 정도를 지킨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 사람을 거듭 감탄하게 만드니, 참으로 국풍이 남긴 울림을 이어받아 시경 삼백 편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다고 할 만하다.
그래서 당시 음악을 다루던 사람들이 이 시들을 가져다 노래 가락에 얹어 불렀다. 왕유나 이익 같은 시인의 작품은 천금을 주고 사들여 궁중 음악(악부)에 올릴 정도였고, 왕창령(자는 소백)과 고적(자는 달부)이 지은 노랫말은 궁중 음악을 맡은 관청인 운소부 소속 기생들까지 모두 외워 부를 줄 알았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당나라의 여러 시인들은 대체로 훌륭했지만, 중당과 만당(당나라의 중기와 후기)에 이르러서는 그 기세가 차츰 기울었다. 그런데 절구만은 성당(당나라의 전성기)이든 만당이든 가리지 않고 시인들의 빼어난 작품이 꾸준히 나와 하나하나가 읊고 외울 만했다. 심지어 저잣거리의 여인이나 세상 밖 신선과 기이한 존재가 지었다는 작품까지도 모두 뛰어났으니, 당나라의 시는 절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한가한 날이면 이반룡(호는 창명)의 《고금시산》, 서자충의 《백가선》, 양사홍(자는 백겸)의 《당음》, 고병의 《품휘》 같은 책들을 꺼내어 그 안에 실린 절구 가운데 빼어난 작품을 골라 몇 수씩 뽑아냈다. 이것을 간추려 열 권으로 묶고 《당절선산》이라는 이름을 붙여 책상 머리에 두고서, 아침저녁으로 틈날 때마다 읊고 외운다.
아, 당나라 절구의 정수는 이 책에 다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시경 삼백 편이 남긴 울림도 이 책을 통해 미루어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본디 마음과 감정을 다루는 시의 길에 이 책이 비록 작게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손곡집 서 (서기 1618년 4월 9일, 양력 추정)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문운이 밝고 아름다워서, 학사와 대부 가운데 시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 수십 수백 명에 이른다. 저마다 전설 속 신령한 뱀이 물고 있었다는 진주처럼 좀처럼 얻기 어려운 보배로운 글귀를 손에 쥐었다고 여기니, 참으로 많고도 성대하다.
대략 나누어 보면 세 갈래 흐름이 있었다.
첫째는 차분하고 점잖으며 원만하고 적절하여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두루 들어맞아, 하나의 독자적인 경지를 이룬 흐름이다. 이 방면에서는 용재 이행 정승(조선 중종 때 정승을 지낸 문신)을 첫자리에 놓을 만하고, 낙봉 신광한, 그리고 영가 부자(영가가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원문 확인 필요)가 그 화려함을 나누어 가졌다.
둘째는 기상이 드넓고 아득하며 정밀함과 깊이를 두루 갖추고 재료가 엄정하고 풍부하여, 한 시대를 대표하는 큰 문장가로 자리매김한 흐름이다. 사가 서거정, 점필재 김종직, 허백당 성현(모두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문신이자 학자) 같은 이들이 이 자리에서 웅대함을 마음껏 펼쳤다.
셋째는 뾰족하고 우뚝하여 생각이 치밀하고 기교가 섬세하며, 기이하고 웅장한 기상과 험준하고 빼어난 멋을 귀하게 여긴 흐름이다. 눌재 박상, 호음 정사룡, 소상 소세양, 지천 황정욱(모두 조선 중기의 이름난 시인들) 같은 거장들이 저마다의 걸출함을 한껏 뽐냈다. 참으로 대단하다.
그러나 부드럽고 너그러우며 도탑고 후하면서도 울림이 바르고 격조가 높아서, 당나라의 개원ㆍ천보ㆍ대력 연간(당나라 시가 가장 활짝 피어난 시절의 연호들)의 법도에 나란히 놓을 만한 이는 세상에 드물었다. 시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점을 못내 아쉬워했다.
예전 홍치ㆍ정덕 연간(명나라 연호로, 조선 성종 후반에서 중종 초반 무렵에 해당한다)에 망헌 이주라는 이가 처음으로 당나라 시를 배워 차분하고 아름다운 시를 썼고, 뒤이어 충암 김정(시호는 문간)이 일어나 위응물과 전기(둘 다 당나라의 이름난 시인)의 소리를 냈다. 이 두 사람은 당시의 참맛을 살짝 엿본 셈이라 할 만하지만, 아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 거기서 그치고 말았다.
그 뒤 융경ㆍ만력 연간(명나라 연호로, 조선 선조 무렵에 해당한다)에 사암 박순 정승이 성당(당나라 시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의 이백을 높이 받들어, 그가 읊은 시가 제법 맑고 높은 기상을 지녔다. 법도로 보면 다소 모자랐지만, 뒷사람을 북돋아 일으킨 공은 적지 않았다.
그러다 늦게 최경창과 백광훈을 얻어 마침내 그 터를 넓고 크게 일으켰으니, 이것이야말로 진나라 말에 진섭이 먼저 들고일어나 훗날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다투는 길을 터 준 것과 같은 격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 무렵, 손곡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는 호음 정사룡에게서 두보와 소동파를 배웠다. 그 읊는 솜씨가 이미 웅대하고 치밀했지만, 최경창ㆍ백광훈과 사귀게 되자 스스로 배운 것이 허술함을 깨닫고 진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배운 것을 모두 내던지고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그의 시는 이백에 뿌리를 두고, 왕유와 유장경(둘 다 당나라의 이름난 시인) 사이를 넘나들었다. 기운은 따스하고 정취는 빼어나며, 빛깔은 곱고 말은 담담했다.
그 고움은 남위와 서시(춘추시대의 이름난 미인들)가 화려하게 차려입고 환한 화장을 한 것과 같고, 그 온화함은 봄볕이 온갖 풀 위에 고르게 내리쬐는 것과 같으며, 그 맑음은 서릿발 같은 물줄기가 큰 골짜기를 씻어 내리는 것과 같다. 그 울림이 맑게 퍼지는 모양은 학을 탄 신선이 하늘 높은 곳에서 피리를 불며 오색구름 너머를 떠도는 듯하다. 끌어당기면 저녁노을 같은 비단과 잔바람에 이는 물결 같고, 펼쳐 놓으면 구슬이 내려앉고 옥이 구르는 듯하며, 두드리고 문지르면 비파 소리의 애절함과 구슬이 부딪는 울림 같고, 누르고 억눌러 놓으면 천리마가 발을 멈추고 용이 몸을 움츠린 것과 같다. 할 일 없이 느긋하게 거닐 때는 잔잔한 물결이 천 리를 굽이치며 흘러가는 듯하고, 태산에 낀 구름이 바위에 부딪혀 흰 옷이 되었다가 이내 푸른 개의 모습으로 바뀌는 것과도 같다(구름이 순식간에 모습을 바꾸는 것을 빗댄 옛 표현이다).
이런 시를 당나라 개원ㆍ천보ㆍ대력 연간에 가져다 놓아도 왕유와 잠삼(당나라의 또 다른 이름난 시인)의 반열에서 크게 기울지 않을 것이며, 우리나라의 여러 이름난 작가들과 나란히 놓고 보아도 그들이 눈이 휘둥그레져 구십 리는 뒤로 물러설 것이다.
옹은 신분이 미천하여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지은 글이 수천 편에 이르렀으나 모두 흩어져 없어지고 남은 것이 거의 없다.
나는 젊은 시절 둘째 형님(허봉을 가리킨다)의 명을 받아 옹에게 시를 배우러 다녔는데, 그 덕분에 시가 가야 할 방향을 알게 되었다.
옹이 세상을 떠난 뒤 남긴 글이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평소 외워 두었던 시 이백여 수를 모아 책으로 엮으려 했다. 그러다 성균관 유생 홍유형의 집에서 다시 백삼십여 수를 얻게 되어, 이재영에게 부탁해 이를 한데 모으고 갈래를 나누어 여섯 권으로 엮게 했다.
옹의 시는 우리나라의 여러 이름난 작가들을 뛰어넘는다. 그러니 내 글 따위를 빌려야 썩지 않고 전해질 까닭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흩어진 시를 애써 주워 모아 천 년 뒤까지 전하고자 하는 것이 내 마음이니, 부처님 머리에 진흙을 덧바른다는(이미 완벽한 것에 쓸데없이 손을 댄다는 뜻의 옛 비유) 꾸지람을 들을지언정 어찌 마다하겠는가.
위아래로 수백 년에 걸친 여러 노련한 대가들을 평하면서 그 사이에 옹을 끼워 넣는다는 것이 얼마나 분수에 넘치는 일인지, 그래서 한 시대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일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지나면 평가는 저절로 정해지는 법이니, 어찌 세상에 이 말을 알아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겠는가. 그래서 끝내 이 글을 써서 서문으로 삼는다.
옹의 성은 이, 이름은 달, 자는 익지이다. 쌍매당 이첨(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친 문신)의 후손이지만 서자 쪽 집안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이며, 손곡은 스스로 지어 쓴 호이다.
성소부부고 제6권
9. 22:12
출처: 성소부부고 제6권, 문부 3, 기
배경: 제6권은 문부 세 번째 갈래인 "기"로 이루어져 있다. "기"는 누각, 정자, 서원, 절, 무덤 같은 곳을 두고 그 내력과 감회를 적은 글이다. 허균이 강원도 강릉·원주 등지에서 지방관으로 지내며 보고 겪은 일들, 옛 인물과 유적을 돌아보며 떠오른 감회, 꿈속에서 겪었다는 신비로운 체험, 그리고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옛사람들과의 상상 속 우정으로 달랜 글까지 모두 열한 편이 실려 있다. 지방관으로서의 실무와 자부심, 신비한 일에 대한 열린 태도, 세상을 향한 거침없는 냉소가 두루 드러난다.
강릉 호숫가 서재, 장서각에 부친 글 (서기 1604년 7월 11일, 양력 추정)
강릉은 영동 동해안 지역에서 손꼽히는 큰 고을이다. 신라 때는 북빈경, 또는 동경이라고 불렀다. 김주원이 이 땅을 다스리는 왕족으로 봉해진 뒤로 집과 거리의 꾸밈새가 화려하고 뛰어나 서울과 견줄 만했고, 고을 풍속이 글공부를 귀하게 여겨서 의관을 갖춘 선비들이 과거 시험장으로 줄지어 몰려들 정도였다. 인심은 두텁고 너그러워 노인을 공경하고 검소함을 숭상했으며, 백성들은 꾸밈없고 성실해서 잔꾀를 부리지 않았다. 물고기와 쌀이 풍족하게 나서, 산과 물의 아름다움이 우리나라 동쪽 땅에서 으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래서 이 고을을 다스리다 떠나는 관리들은 대개 이곳을 못 잊어 눈물을 흘렸다고 하며, 그 때문에 생긴 고갯길 이름이 지금도 남아 있다 — 사람들은 이를 '원님이 울고 넘는 고개'라 불렀다 — 이만하면 강릉이 얼마나 좋은 고을인지 알 만하다.
유인길이라는 분이 이 고을 수령으로 부임해 왔는데, 맑고 엄정하면서도 어질고 너그러워 백성들이 그를 떠받들며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여겼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일으키는 일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선비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는 데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 덕분에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는 선비가 많아졌다.
임기를 마치고 떠나면서 그는 손질이 잘된 인삼 서른두 냥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이건 나라에 바치고 남은 것이오. 돌아가는 짐에 이런 걸 챙겨 가면 뒷말이 날 테니, 그대가 맡아 약으로나 쓰시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이걸 저 혼자 쓸 수는 없지요. 이 고을 학자들과 함께 쓰고 싶습니다." 그러고는 상자에 담아 서울로 가지고 돌아왔다.
마침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그 인삼 판 돈으로 유교의 여섯 경전과 사서, 《성리대전》, 《좌전》, 《국어》, 《사기》, 《문선》, 이백·두보·한유·구양수의 문집, 변려문 모음과 《통감》 같은 책들을 북경 저잣거리에서 사서 돌아왔다. 이 책들을 노새에 실어 강릉 향교로 보냈다. 그런데 향교의 선비들이 자신들은 이 일을 상의한 적이 없다며 받기를 사양했다. 그래서 나는 호숫가에 있던 내 별장의 누각 하나를 비워 책을 보관해 두고, 고을 선비 누구든 빌려 읽고 싶으면 와서 읽고 다시 갖다 두게 했다. 옛날 이공택이 자기 서재를 남에게 개방했던 일과 같은 방식이었다. 이렇게 하면 유인길이 학문을 일으키고 인재를 기르려 했던 뜻을 어느 정도 이룰 수 있을 것이고, 의관을 갖춘 선비들이 줄지어 몰려들던 옛 강릉의 흥성한 모습을 되살릴 수 있다면, 나 역시 그 공을 나눠 가질 수 있을 터이니 이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뜻밖의 화를 당해 벼슬길이 갈수록 쓸쓸해지니, 장차 관인을 내던지고 이 동쪽 땅으로 돌아와 수만 권 책 속의 좀벌레처럼 남은 생을 보내고 싶다. 이 책을 이곳에 갖춰 둔 것이 그런 나의 노년을 즐길 밑천이 될 것이니 그저 기쁠 따름이다. 학생들은 부디 책을 상자에 넣어 좀약을 치고 볕에 말려 잃어버리거나 못 쓰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해 주기 바란다. 그리한다면 하늘의 기운을 살펴 점치는 사람이 필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비슬라 옛 고을 터에 무지개가 하늘을 찌르고 달을 꿰뚫으니, 틀림없이 그 아래 진기한 책이 있구나." 삼가 이 글을 적는다.
(용어) 김주원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6대손으로, 강릉 지역을 다스리는 명주군왕에 봉해져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사서는 논어·대학·중용·맹자 네 책을 가리킨다. 이공택은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젊어서 여산에서 공부한 뒤 과거에 급제하자 자신이 모은 책 만 권을 공부하던 집에 기증하여 누구나 빌려 볼 수 있게 했다. 비슬라는 강릉의 옛 이름이다.
화학루를 고쳐 세우고 쓴 글 (서기 1605년 9월 2일, 양력 추정)
나는 젊었을 때 이것저것 벌이기를 좋아해서,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를 펴 놓고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산천의 아름다움과 누각·정자의 빼어남을 상상해 보곤 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셈이었지만, 몸이 약하고 게으른 탓에 직접 그 경치를 찾아가 보지는 못해 내심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러다 전란을 만나 동쪽으로 피난을 가게 되면서, 대관령 안팎의 진기하고 빼어난 곳들을 남김없이 둘러볼 수 있었다.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하게 된 뒤로는 사신 행렬에 끼어 평안도의 빼어난 경치도 두루 구경하고 북경까지 다녀왔으니, 이만하면 가 볼 만한 명승지의 열에 예닐곱은 본 셈이다. 그런데 유독 요산의 화학루만은 소문은 무성히 들었으면서도 직접 가 보지는 못했다.
1599년, 재해 상황을 살피라는 왕명을 받고 이 고을 경계에 이르렀을 때, 나는 속으로 다행이다 싶어 이번에야말로 이 누각에 올라 빼어난 경치를 보고 묵은 소원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9월 9일 중양절에 고을에 이르러 보니 왕비께서 아직 그곳을 떠나지 않으신 터라 감히 구경도 하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말 위에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누각에는 끝내 오르지 못하는구나. 하늘의 뜻인가. 언젠가 이 고을 수령이 되어 다시 와서 이 못다 한 빚을 갚으리라.'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604년 가을, 요산 수령의 임기가 끝나자 나는 마지막 순번으로 추천되어 운 좋게도 임금의 낙점을 받았다. 아마 하늘이 내 마음을 헤아려 소원을 이루어 준 모양이었다. 기뻐 날뛰며 길을 나선 지 나흘도 안 되어 고을 경계에 이르니 마을 노인들이 나와 맞아 주었다. 나는 대뜸 물었다. "이 누각은 언제 지어졌기에 《동국여지승람》에는 기록이 없습니까?" 노인들이 답했다. "아, 그건 최황이라는 분이 지으신 것인데, 그해가 무인년이라 《여지승람》 편찬 때는 미처 실리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저희 고을을 어질고 밝게 다스리셔서 관리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그리워했지요. 지금까지도 그분을 기리는 노래가 그치지 않고, 비석까지 세워 사모하고 있습니다."
다음 날 새벽 고을에 들어가 보니 과연 우뚝 선 비석이 있었는데, 최황 공의 이름이 길 왼편에 새겨져 있었다. 마침내 관아에 이르러 업무를 처리하자마자 곧장 화학루에 올랐다. 누각은 과연 훤하게 트여 있으면서도 짜임새가 치밀했다.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게 지세에 맞춰 반듯하게 자리 잡았고, 난간과 기둥도 규격에 딱 맞았다. 동쪽에는 충천각이, 북쪽에는 학선당이 있어 추울 때는 따뜻하고 더울 때는 서늘하니 머물며 지내기에도, 쉬기에도 좋았다. 서쪽은 무기고로 둘러싸여 있어, 평화로운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다는 뜻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석양 무렵부터 밤늦도록 둘러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마침내 지난 기록들을 가져오게 해서 살펴보았다. 백성들에게 편리했던 공사, 고을에 이로웠던 일들부터 부엌과 창고에 흙을 바르고 벽을 바른 자잘한 일, 나무 한 그루 돌 하나 배치한 것까지, 누가 처음 시작한 일이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최황 공입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감탄하며, 참으로 유능하고 훌륭한 관리였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현판에 걸린 글을 보니 최황 공이 지은 기문과 시가 있어 되풀이해 읊어 보고서야, 그분이 글솜씨도 이만큼 뛰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둘러보니 지은 지 이미 오래되어 서까래가 썩은 곳이 있고 기와도 삭고 금이 간 곳이 있었다. 단청이 바랜 곳이 열에 일고여덟이었고, 동쪽 누각 터도 반쯤 꺼져 있었다. 나는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이 누각이 세워진 지 벌써 27년이 지났고, 그동안 이 고을을 거쳐 간 수령이 몇 명인데 아무도 이 무너져 가는 것을 바로잡을 책임을 지지 않았으니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외람되이 이 고을에 부임했으니 이를 손봐 되살리는 일은 나의 직책이거늘, 번거롭고 성가시다고 게을리할 수야 있겠는가. 서둘러 내 녹봉의 절반을 털어 목수를 부르고 일손을 모아, 이듬해 7월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썩고 갈라진 목재는 새것으로 갈고, 깨지고 상한 기와는 단단한 것으로 바꿔 끼웠다. 바랜 단청은 다시 색을 입혔고, 꺼져서 기울어진 동쪽 누각 터는 흙으로 다져 나무를 새로 심었다. 처마 끝과 천장, 빈 다락과 붉은 사다리는 옛 모습 그대로 두고 손질만 했으며, 휘장과 방석, 놀이 도구도 새로 갖춰 놓았다.
20일 만에 공사가 끝나자 고을 노인들과 아전들, 그리고 예전 모습을 알던 이들을 불러 보여 주니 모두들 "이제야 누각이 옛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하고 말했다. 낙성하는 날 손님들을 모아 잔치를 벌였는데, 손님 하나가 일어나 말했다. "이 누각을 처음 지은 최공께서는 이미 기문을 남기셨는데, 오늘 이렇게 다시 고쳐 세운 마당에 성주께서는 어찌 글을 지어 이 일을 남기지 않으십니까?"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이곳의 빼어난 경치는 젊었을 때부터 이미 소상히 알고 있었지만, 반평생을 상상만 하다가 다행히 숙원을 이룬 것이오. 이곳의 깊은 산수와 넓고 아름다운 누각은 우리나라에서 견줄 데가 드물 것이오. 다만 하찮은 내 몸으로 외람되이 훌륭한 관리의 뒤를 이어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는 일을 맡았을 뿐이니, 이 빼어난 승경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부족하여 부끄러운 땀에 이미 말문이 막힐 지경이오. 어찌 감히 하찮은 글로 앞사람의 훌륭한 글에 이어 붙일 수 있겠소. 그렇지만 경치를 다시 잘 갖추어 앞사람의 미덕을 기리는 것도 고을을 다스리는 일의 하나이니, 어찌 이 일을 기록해 전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러고는 붓을 들어 위와 같이 적었다. 건물이 지어진 경위와 그 경치의 아름다움에 관해서는 앞사람이 남긴 기문에 이미 다 나와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쓰지 않는다.
(용어) 최황은 조선 선조 때 문신으로, 자는 언명, 호는 월담이다. 수안 군수를 지냈고 훗날 좌찬성 겸 세자이사에 이르렀다.
수헐원에서 신선의 목소리를 들은 일을 적은 글 (서기 1608년 7월 26일, 양력 추정)
내가 공주에 있을 때, 화공을 불러 여러 신선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거기에 찬을 지어 붙인 적이 있다. 그중 이백을 찬양한 글의 마지막 구절은 이러했다. "만 리에 펼쳐진 푸른 물결, 하늘 가득한 밝은 달." 처음에는 이 구절이 얼마나 신묘한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마침 향을 나라에 바치러 서울로 올라가게 되어, 화공을 재촉해 표구를 만들고는 상자에 넣어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서울에 도착한 지 열흘 남짓 만에 돌아오는 길에 직산의 수헐원에 이르렀는데, 마침 관찰사의 중군 민인길과 은진 교수 심우영을 함께 만나게 되었다. 때는 한창 무더운 여름이라 주막 아래로 가서 버선을 벗고 갓도 벗은 채 샘물을 길어 손발을 씻었고, 데리고 온 종 셋이 좌우에서 시중을 들었다. 그 동쪽에 집이 하나 있었는데 초라하고 담장도 낮았으며 인기척 없이 고요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집 안에서 누군가 내가 이백을 찬양하며 지은 그 마지막 구절을 읊는 소리가 들렸다. 그 가락이 맑고 흥이 넘치며 정겹고 시원해서 듣기에 좋았다.
심우영이 먼저 물었다. "방금 시 읊는 소리 들으셨소?" 민인길이 답했다. "나도 들었소." 나는 이상하게 여겼다. 이것은 내가 이백을 찬양하며 지은 구절인데, 지은 지도 얼마 안 됐고 아직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보여 준 적도 없는데 어떻게 남이 알고 있단 말인가.
문하생 정 아무개를 불러 급히 가 보라 했더니, 대문 자물쇠가 단단히 잠겨 있고 안을 들여다봐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우리 세 사람은 이상하게 여겨 직접 낮은 담장 너머로 자세히 들여다보았는데, 과연 텅 빈 집이었다. 먼지 쌓인 걸상과 깨진 항아리 몇 개, 그리고 낡은 벽만 있을 뿐이었다. "주인은 어디 있소?" 물으니, "이 집은 빈 지 벌써 서른 날이나 되었습니다" 하는 답이 돌아왔다.
아, 그렇다면 그것은 신선이었을까, 귀신이었을까. 귀신이라면 대낮에 시를 읊고 소리 낼 리가 없고, 신선이라면 이런 낮고 좁은 땅에 내려올 까닭이 없으니,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심우영이 말했다. "그대의 글이 이백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옛사람도 말하지 못한 경지까지 이르렀으니,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 이백의 넋이 기뻐서 찾아와 읊조리며 그 반가운 마음을 드러낸 것이 아니겠소.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을 것이오."
나는 말했다. "이태백은 하늘의 신선이니 지금쯤 옥황상제가 계신 궁궐에서 노닐고 있을 텐데, 어찌 세상 사람들의 칭찬이나 험담에 일희일비하여 몸을 굽혀 저잣거리까지 내려와 속된 귀에 스스로 영험을 드러내겠소. 결코 그럴 리 없을 것이오." 심우영이 말했다. "하늘과 사람의 이치는 본디 하나라서 저절로 서로 통하는 법이 있기 마련이오. 그대의 말 한마디가 위로 신선의 영혼을 감동시켜, 어느새 그가 숙연히 바람을 타고 내려와 그대 곁에서 노닌 것인지 누가 알겠소. 더구나 그대가 지은 백 편의 찬 가운데 하필 신이 이 구절만을 읊었으니, 나는 그것이 바로 이태백이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 나는 웃으며 "그럴지도 모르겠소" 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일을 글로 적어 두어, 훗날 이 이치를 알아볼 사람을 기다리는 바이다.
정사암을 고쳐 세우고 쓴 글 (서기 1608년 10월 18일, 양력 추정)
부안현 바닷가에 변산이 있고, 변산 남쪽에는 계곡이 하나 있어 우반동이라 부른다. 그 고을 출신인 부사 김청 공이 이 빼어난 곳을 골라 암자를 짓고 '정사암'이라 이름 붙여, 노년에 즐겨 쉬는 곳으로 삼았다. 나는 예전에 사명을 받들어 호남을 오가면서 이곳의 경치에 대한 소문은 여러 번 들었지만 직접 가 보지는 못했다.
나는 본디 명예와 이익을 좋아하지 않아 늘 상자평처럼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고 싶은 뜻을 품어 왔지만, 그 소원을 아직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올해 공주에서 벼슬을 잃자, 남쪽 지방으로 돌아가 이 우반동에 집을 짓고 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김청 공의 아들인 진사 김등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희 선친께서 지으신 낡은 집이 있는데 제가 지키고 있을 형편이 못 되니, 공께서 손보아 사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기뻐서, 마침내 고달부라는 벗과 이씨 성을 가진 벗 둘과 함께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가서 그곳을 둘러보았다.
바닷가를 따라 좁은 길이 나 있어 그 길을 따라 골짜기로 들어서니, 시냇물 소리가 옥이 부딪는 듯 맑게 울리며 숲 속을 졸졸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내를 따라 몇 리쯤 가자 산이 갈라지고 넓은 땅이 트였는데, 좌우로 솟은 가파른 봉우리들은 마치 봉황과 난새가 날아오르는 듯 높이를 가늠하기 어려웠고, 동쪽 산기슭에는 소나무 수만 그루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었다.
나는 세 사람과 함께 곧장 앞으로 살 곳을 향해 나아갔다. 동서로 세 개의 언덕이 있는데 그중 가운데 언덕이 가장 반듯하게 둘러 있고 대나무 수백 그루가 울창하게 푸르러, 여기가 예전에 사람이 살던 폐허였음을 알 수 있었다. 남쪽으로는 넓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데 금수도라는 섬이 그 가운데 떠 있었고, 서쪽에는 숲이 무성한 가운데 서림사라는 절이 있어 승려 몇이 살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 동쪽으로 거슬러 올라 오래된 마을 신목을 지나 정사암이라는 곳에 이르니, 암자는 겨우 방 네 칸짜리로 바위 언덕에 지어져 있었는데, 앞으로는 맑은 못이 내려다보이고 세 봉우리가 높이 마주 서 있었다.
폭포수가 푸른 절벽 위로 쏟아져 내려 마치 흰 무지개가 걸린 듯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시내로 내려가 물을 마시고, 우리 네 사람은 머리를 풀고 옷깃을 풀어헤친 채 못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가을꽃이 막 피어나고 단풍은 반쯤 붉게 물들었는데, 석양이 산봉우리를 비추고 그 그림자가 물속에 거꾸로 비쳤다. 위아래로 둘러보며 시를 읊조리니 어느새 티끌세상을 벗어난 듯한 기분이 들어, 마치 옛 신선 안기생·선문자와 함께 삼신산에서 노니는 듯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다행히 몸이 성할 때 벼슬을 버려 오랜 계획을 이루고 또한 이렇게 은거할 곳을 얻어 몸을 편히 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하늘이 내게 베푼 보답도 참으로 넉넉하구나. 이른바 벼슬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토록 얽매어 놓는단 말인가.
이 고을 원님인 심덕현이라는 분이 암자가 낡아 가는데도 돌보는 이가 없는 것을 보고, 승려 셋을 모아 쌀과 소금 몇 섬을 얹어 주고 목재를 베어 수리하게 한 뒤, 관아의 부역을 면제해 주는 대신 그곳에 머물며 암자를 지키도록 했다. 암자는 이렇게 해서 다시 복구되었다고 한다.
(용어) 상자평은 중국 후한 때의 은사로, 벼슬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간 인물이며 흔히 은거의 뜻으로 인용된다. 안기생과 선문자는 옛 중국 진나라 때 전해지는 신선들이다. 삼신산은 봉래·영주·방장, 신선이 산다고 전해지는 세 산을 가리킨다.
도산 박씨 집안 별장에 부친 글 (서기 1609년 10월 17일, 양력 추정)
서울 동대문에서 40리 떨어진 곳에 도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산 아래는 온통 기름진 땅으로, 평성공 박원종 정승의 현손인 박몽필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1609년, 나는 휴가를 얻어 동쪽으로 성묘를 갔다가 박씨 댁에서 묵게 되었는데, 주인은 나를 몹시 후하게 대접했다. 주인이 말했다. "저희 선조들은 평양공 이하로 모두 이곳에 묻히셨습니다. 칠팔 대에 걸쳐 뽕나무밭을 일구어 왔으니, 사방 십 리 밖까지 모두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지요. 태평한 시절에는 이 근방 인가 수백 채가 다 저희 집 노비였는데, 전쟁을 겪은 뒤로는 대부분 달아나 버려서 개간하지 못한 밭이 열에 아홉입니다. 저는 조상 제사를 받들기 위해 겨우 집 십수 채만 손봐서 남은 종 서넛을 모아 여기서 산 지가 벌써 십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나를 이끌고 집 뒤 언덕에 올랐는데, 예전의 연못과 누대는 다 무너져 흩어졌고, 가시덤불이 우거진 채 무너진 담과 깨진 주춧돌만이 스산한 안개와 야생 덩굴 사이에 남아 있었다. 주인은 손으로 가리키며 하나하나 설명했다. "저기가 사당 자리이고 저기가 안방 자리입니다. 저곳은 한가히 쉬시던 집이었고, 저 땅은 활터, 저기는 곡식 창고였지요. 저 터는 손님을 맞아 잔치를 벌이던 정자였고, 저곳은 풍악을 울리던 집이었습니다. 저 폐허는 격구를 하고 말을 타던 곳이고, 저곳은 아랫사람들이 찾아와 문안드리던 대청이었습니다." 나는 이리저리 둘러보며 그 옛날의 호화롭던 자취를 낱낱이 마음에 새겼다.
아, 사람의 일이란 늘 그대로 있기 어려워 흥하고 쇠함이 번갈아 오는 법이니, 이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다 마찬가지여서 아무리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평성공이 한창 잘나가던 때에는, 그 손으로 세상의 운행을 바로잡아 온 나라 백성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 그 크고 위대한 공적이 나라와 백성에게 두루 미쳤으니, 그가 누린 부귀영화는 바로 그런 노력에 대한 보답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누리며 살았다. 누대와 별채, 살림집으로 몸을 편안케 하고, 노랫가락과 비단옷, 화초와 대나무로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손님과 벗, 제자와 옛 부하들이 대문과 담장 안을 가득 메웠고, 사방 여러 고을에서 보내온 예물이 중국 한나라의 권신 곽광이나 장안세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름다운 여인을 곁에 끼고 흥겨운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고 춤을 구경하며 한창 세도를 부리던 그때, 백 년 뒤에는 논밭과 집이 황폐해지고 정자와 누각이 불타 없어지며, 외로운 후손들은 몰락하여 평민이 되고 손바닥만 한 땅도 지키지 못하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부귀란 이렇듯 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영화란 이렇듯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찌하여 이것을 경계로 삼지 않고, 권세를 탐하고 임금의 총애와 재물에 연연하는가. 스스로는 평성공만큼의 공적도 쌓지 못하면서 평성공만큼의 호사를 누리고 싶어 하고, 게다가 그것이 오래도록 이어지리라 믿고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주인이 이 이야기를 글로 남겨 오래도록 전해 달라 청하기에, 이렇게 별 도움 안 되는 글이나마 적어서 돌려보낸다.
(용어) 곽광과 장안세는 중국 한나라 때 큰 권세를 누렸던 신하들이다.
원주 향교를 다시 세우고 쓴 글 (서기 1609년 10월 28일, 양력)
우리나라는 건국 이래 역대 임금들께서 유학을 받드는 일을 가장 급한 과제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서울에는 성균관과 오부 학당을 두고, 지방에는 부·주·군·현마다 향교를 세워 학생들을 길러 냈다. 이백 년이 지나는 동안 학문과 교육의 찬란함이 중국보다도 나았으니, 참으로 거룩한 일이라 할 만하다.
관립 학교 외에도 서원을 세워 그 지방의 어진 인물을 제사 지내고, 뛰어난 선비를 가려 뽑아 그곳에서 학문을 익히게 했다. 나라에서는 전답과 노비를 내려 먹고살 수 있게 해 주었고, 서원의 우두머리로는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학문과 덕행을 갖춘 이를 뽑아 교육과 서원 운영을 함께 맡겼다. 개성에서 정몽주와 서경덕을 받들고, 영곡에서 조광조를 제사 지내는 것이 바로 이런 예이니, 그 뜻 또한 훌륭하다 하겠다.
그런데 학문을 숭상하는 기풍이 극에 달하자 도리어 겉치레로 흘러, 여러 고을의 선비들이 다투어 이를 흉내 내어 서원을 세우기 시작했다. 선배 중에 조금이라도 도리를 논한 이가 있으면 그 행적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무작정 받들어 모시면서 "누구는 이 고을 출신이고, 누구는 여기서 벼슬을 산 적이 있으니 제사를 지낼 만하다"고 했다. 그마저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지명을 갖다 붙여 강릉의 구산 서원에서 공자를 제사 지내는 것처럼 엉뚱한 경우도 자주 있었다.
서원의 선비들은 논밭을 늘리고 곡식을 불리는 데만 힘써 고을의 권세를 독점하고 제멋대로 위세를 부렸다. 수령조차 감히 건드리지 못했고, 조금이라도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곧바로 이웃 고을 선비들에게 통보해 무리 지어 비방하게 만들어 기어이 쫓아내고야 말았다. 이렇게 되니 서원의 권세가 군수보다 더 무거워져서, 선비로서 서원에 들지 못하면 다들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러는 사이 정작 나라에서 세운 향교는 버림받은 땅이 되어, 그저 군역을 면하려는 자들만 이름을 채워 넣었다. 그러니 사당은 무너지고 뜰은 거칠어져, 봄가을 제사 때가 지나고 나면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그에 반해 서원은 높다란 본당과 넓은 곁채를 갖추고 식구가 백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그런데 조정의 일에 관여하는 게 아니면 그저 관리들의 잘잘못이나 논평하는 데 그치고, 정작 이치를 탐구하고 본성을 궁구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케 하는 학문에는 대체로 어둡기 짝이 없었다. 조정과 지방 관리들이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쉽사리 고치지를 못하니, 무엇이든 극에 달하면 오히려 폐단이 생긴다는 이치가 여기서도 그대로 들어맞았다.
그런데 우리 원주만은 이와 달랐다. 지난 백 년 동안 이곳 사람들은 다들 향교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알아, 고을의 선비들이 모두 향교로 모여들어 정성을 다해 받들었다. 또한 공자·맹자와 정자·주자의 책을 부지런히 외고 익히며, 세상일이나 남의 잘잘못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이곳 선비들은 하나같이 인정이 두텁고 태도가 우아했다. 근년에는 과거에 장원 급제하는 이가 많이 나왔고, 그중에는 재상의 자리까지 오른 이도 있었으니, 가히 학문을 올바르게 익혀 일의 경중과 선후를 안다고 할 만하다.
이유인이라는 수령이 이 고을을 다스릴 때, 창고에 남은 곡식 수백 석을 내고 노비도 함께 내려서 서원을 세우게 했다. 그러자 고을 사대부들이 의논하기를, 그 재물로 향교 동쪽을 넓혀 재실을 하나 더 짓고, 노비를 시켜 남은 곡식으로 이자를 불려 장학금으로 삼자고 했다. 그리고 경서를 잘 외거나 부·논 시험에 합격한 학생은 그 재실에서 지내게 하며 나라에서 식사를 대 주고 '서원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렇게 해서 향교는 더욱 중시되었고 서원의 좋은 제도까지 그 안에 스며들었으니, 사람들은 모두 "핵심을 잘 짚었다"고 칭찬했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로 향교가 어느 정도 복구되기는 했지만 제대로 손보지는 못한 상태였다. 1608년 봄, 임취정이라는 수령이 부임해서 은혜롭게 고을을 다스리니 온 고을 사람들이 기뻐했다. 마침내 그가 고을의 사대부와 학생들을 모아 사당을 다시 지을 방도를 의논하자, 모인 이들이 모두 기꺼이 뜻을 모아 하루도 안 되어 일이 성사되었고, 수령도 자신의 녹봉 절반을 내어 도왔다.
이듬해인 1609년 여름에 공사가 마무리되자, 서원의 전답과 노비까지 함께 내어 동쪽에 집을 세우고 다시 서원생들을 그곳에 살게 했다. 이로써 원주 고을 학교의 옛 모습이 온전히 복구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며 칭찬했다. "수령의 재능과 고을 선비들의 정성이 참으로 훌륭하다. 향교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서원까지 함께 세운 아름다운 뜻은 다른 고을의 본보기가 될 만하구나. 만약 영남의 여러 고을이 다 우리 원주 같다면 나라에서 그 폐단을 걱정할 일이 뭐 있으며, 관리와 유생들 사이에 다툴 일이 뭐 있겠는가." 이렇게만 된다면 이 아름다운 교화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 사람마다 옛날 공자·맹자의 고향 사람들처럼 될 것을 단언하고 기다릴 수 있으리라.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는 기록해 둘 만한 일이다.
이해 시월 초하루에 쓰다.
원주 법천사에 부친 글 (서기 1609년 10월 25일, 양력)
원주에서 남쪽으로 50리쯤 되는 곳에 비봉산이라는 산이 있고, 그 산 아래 신라 때부터 있던 오래된 절인 법천사가 있다. 나는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태재 유방선 선생이 이 절 아래에 살자, 권남·한명회·서거정·이승소·성간 같은 이들이 모두 그를 찾아와 배우며 이 절에서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이들은 훗날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기도 하고 공을 세워 나라를 안정시키기도 했으니, 그 덕분에 이 절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이 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산소가 그 북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 나는 해마다 한 번씩 성묘를 갔지만, 정작 법천사라는 곳에는 아직 가 본 적이 없었다. 올가을 휴가를 얻어 와서 며칠 머무는데, 마침 지관이라는 승려가 산소 근처 암자로 나를 찾아왔다. 이야기를 나눠 보니 그는 기축년에 법천사에서 일 년간 지낸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문득 유람하고 싶은 흥이 일어, 지관을 데리고 새벽밥을 먹은 뒤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험한 두멧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이른바 명봉산에 이르니, 산은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봉우리 네 개가 서로 마주 보는 모양이 마치 새가 날아오르는 듯했다. 시내 두 줄기가 동쪽과 서쪽에서 흘러나와 골짜기 입구에서 하나로 합쳐지는데, 절은 바로 그 한가운데 남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전란에 불타 버려 이제는 터만 남았고, 무너진 주춧돌은 토끼나 사슴이 다니는 길목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며, 비석은 반 토막이 난 채 잡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살펴보니 고려의 승려 지광 스님의 탑비였다. 글도 깊이가 있고 글씨도 힘이 있었지만 누가 짓고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니, 참으로 오래되고 기이한 유물이었다. 나는 해 질 녘까지 그 비석을 어루만지며, 탁본을 뜨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지관 스님이 말했다. "이 절은 원래 대단히 커서 한창때는 상주하는 승려가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전에 지내던 이른바 선당이라는 곳은 지금 찾아보려 해도 어디였는지 가려낼 수가 없습니다." 그 말에 우리는 한참 동안 함께 탄식했다.
절의 동쪽에 돌로 만든 상과 자그마한 비석이 있어 살펴보니 무덤이 세 개 있었는데, 모두 표지석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조선의 정승 이원의 어머니 무덤이었고, 다른 하나는 태재 유방선의 무덤인데 그 아들인 승지 유윤겸이 그 뒤에 묻혀 있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원 정승의 어머니는 바로 우리 선조이신 야당 선생의 따님이시오. 내가 듣기로, 정승이 처음 어머니를 장사 지낼 때 풍수가가 '이 땅에는 왕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 했는데, 결국 이 때문에 죄를 얻어 자손들이 감히 그 곁에 뒤따라 묻히지 못했다고 하오. 태재 선생은 곧 이원 정승의 사위인데 이곳에 살았으니, 아마도 이 때문에 끝내 곤궁하게 살다 세상을 떠나 여기 묻히게 된 것이 아니겠소. 워낙 오래된 일이라 정확히는 알 수 없구려."
이리저리 거닐며 옛일에 마음 아파하다가 지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삶에 곤궁과 영달, 흥함과 쇠함이 있는 것은 참으로 운명이오. 그리고 영원히 남는 명성이란 이런 데 있는 것이 아니오. 이원 공은 좌명공신으로서 정승의 자리에 올라 한때 부귀와 권세가 자자했고 사람마다 우러러 따랐지만, 결국 그 때문에 미움을 사서 버림받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소. 유윤겸은 세종대왕을 모시는 시종신이 되어 궁궐을 드나들며 거듭 큰 은총을 입고 마침내 왕명을 전달하는 요직까지 맡았으니, 귀하게 되었다 할 만하오. 그런데 태재 선생은 학문과 덕행을 지니고도 집안에 우환이 있어 벼슬길이 막힌 채 곤궁하게 지냈소. 삼베옷 한 벌로 몸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날마다 끼니를 걸러 가며 도토리와 밤 따위를 주워 먹으며 산속에서 곤궁하게 살다가 남은 생을 마쳤소. 지금 그의 시를 보면 마치 곤궁했던 당나라 시인 맹교나 가도와 같으니, 얼마나 궁핍하고 고달팠는지 짐작이 가오. 앞의 두 분과 견주면 영달과 초췌함이 하늘과 땅 차이인데,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태재 선생의 글을 읊으며 그 인품을 그리워하고 있소. 심지어 이 보잘것없는 산과 촌스러운 절도 딱히 기이하거나 화려한 구경거리가 아닌데도 세상에 이름이 나고 《동국여지승람》에까지 실려 전하고 있소. 그런데 저 화려하게 드날리던 두 분은 지금 어디에 있소? 몸만 땅에 묻혀 사라진 게 아니라, 그 이름을 말해도 사람들은 어느 시대 사람인지조차 모르지 않소. 그렇다면 한때 누린 이득이 어찌 만대에 이름을 전하는 것과 같을 수 있겠소? 후세 사람들에게 둘 중 하나를 고르라 한다면 앞의 것을 고르겠소, 뒤의 것을 고르겠소?"
지관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다만 두보의 시에 '천추만세의 이름은 죽은 뒤의 적막한 일일 뿐'이라는 구절이 있지요. 옛사람 중에는 명성이 도리어 짐이 된다며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은 이들도 있었으니, 대체 그들은 홀로 무슨 마음이었을까요?" 나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말로 그대들 불가의 가르침이 아니오." 그러고는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돌아섰다.
1609년 9월 28일에 쓰다.
(용어) 유방선(호는 태재)은 조선 세종 때 학자로, 그 문하에서 권남·한명회·서거정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지광은 고려 문종 때의 국사로, 이 법천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원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고려와 조선을 함께 섬긴 인물인데, 세종 때 노비 문제로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야당선생은 고려의 문신 허금의 호로, 허균의 선조다. 맹교와 가도는 당나라 때 가난에 시달리며 시를 지은 것으로 유명한 시인들이다.
상원군의 옛 왕릉, 왕총에 부친 글 (서기 1610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상원군 북쪽으로 15리쯤 되는 곳에 왕산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 북쪽에 나무 하나 없이 민둥하게 우뚝 솟은 산이 있어 이를 '왕총'이라 부른다.
1607년 7월에 큰비가 내려 이 왕총이 무너졌다. 마을 사람 조벽이라는 이는 어려서 승려가 되어 글을 조금 아는 사람인데, 무덤이 무너졌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살펴보았다. 무덤 구덩이의 깊이는 두 길 남짓 되었는데, 벽돌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네 귀퉁이를 빙 둘러 통로는 없이 돌로 뚜껑을 덮어 놓았다. 뚜껑을 들춰 보니 푸른 옥돌로 덮여 있고 그 틈은 재로 막아 놓았으며, 그 안에는 기와로 만든 관을 안치하고 풀과 나무로 만든 인형들을 늘어놓았으며, 도자기·솥·술잔 등이 매우 많이 놓여 있었다. 북쪽에는 등이 하나 있었는데 기름이 반쯤 남아 있었고, 뼈 두 무더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무덤 남쪽에는 돌로 만든 종이 흙에 묻혀 있어서 깨끗이 씻어 보니 '신명대왕묘'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글씨체가 크고 투박했다. 조벽은 마을 노인들을 불러 모아 삼태기와 가래로 흙을 날라 다시 무덤을 덮었다.
그날 밤 조벽의 꿈에 붉은 옷을 입고 금띠를 두른 신인이 나타나, 조벽과 함께 일한 사람들에게 두루 감사 인사를 하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왕총의 신이오. 그대들이 내 유골을 다시 묻어 준 큰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히 풍년을 들게 하여 보답하겠소." 그 후로 삼 년 연달아 과연 큰 풍년이 들었고, 노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병에 걸리거나 일찍 죽는 이가 없었다니, 참으로 신령스럽지 않은가. 조벽이 내게 찾아와 들려준 이야기가 바로 이러했다.
내 생각에는, 우리나라에 지도와 문헌이 드물어 삼국 시대 이전의 일은 상고할 길이 없지만, '신명왕'이라는 칭호는 고구려 역사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니 주몽의 후손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이 무덤이 성천에서 가깝고, 성천은 옛날 송양국이 있던 곳이니, 아마도 이 무덤의 주인은 그 나라의 왕이 아닐까 싶지만 내가 감히 확신할 수는 없다.
옛날에 제후들은 무덤에 긴 통로를 만들지 않았고, 무덤을 '능'이라 높여 부르지도 않았으며, 옛 성인들은 지나치게 후하게 장사 지내는 것을 그릇된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이 왕총은 통로도 없이 그저 '묘'라 칭했으니 예의에 맞고, 금은보화를 넣지 않아 도둑맞을 일이 없게 했으니 지혜롭다 할 만하며, 게다가 죽어서도 백성들에게 복을 내려 그 은혜에 보답했으니 어질다 할 만하다. 지혜롭고 어질고 예의까지 갖췄다면, 살아서는 훌륭한 임금이었고 죽어서는 밝은 신령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사관들이 이를 빠뜨려 그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했으니, 이에 이 글을 지어 역사에서 빠진 부분을 조금이나마 채워 넣는 바이다.
(용어) 송양국은 고구려 초기에 있던 부족국가로 비류국이라고도 하며, 그 왕 송양이 고구려 동명왕 2년에 항복하여 병합되었다.
임창헌에 부친 글 (서기 1610년 11월 15일, 양력 추정)
심우민이라는 사람은 서울을 떠나 아선현 북쪽 지방으로 내려와 살았는데, 그곳 지명이 송령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직접 농사짓고 채소를 가꾸며, 밭 갈고 낚시하는 이웃들과 어울려 살면서 평생을 그렇게 지내려 했다.
그가 어느 날 나를 찾아와 말했다. "저는 바닷가에 살아 물고기와 소금에서 이득을 보고, 땅이 기름져서 해마다 반드시 풍년이 들며, 백성들은 순박하고 이곳은 외진 곳이지요. 저는 이곳이 몹시 마음에 들어 사는 곳 남쪽에 집을 짓고 임창헌이라 이름 붙였는데, 노년을 여기서 즐기며 살고자 합니다. 공께서 저를 위해 기문을 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무릇 정자나 집을 지을 때는 반드시 땅이 탁 트이고 넓은 곳을 골라야 하고, 경치가 아름답고 산수가 빼어난 곳이라야 자리 잡을 만하오. 그런데 아선은 외지고 초라한 고을인데, 어째서 하필 여기에 정자를 지었소?"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 집은 서쪽으로 큰 바다가 있고 넓은 들판이 우뚝 펼쳐져 있으며, 가야산·연암산·용성산 같은 여러 산이 좌우로 둘러싸고 있어 푸른 봉우리 빛이 창가에 은은히 비치지요. 남쪽으로는 큰 방죽이 가로질러 있는데 연꽃과 수초가 뒤덮여 있고, 일조사와 망월사 같은 절들이 눈앞에 서로 마주 보여, 새벽 종소리와 경쇠 소리가 늘 구름과 안개 자욱한 그 사이에서 울려 옵니다. 집 앞뒤로 소나무·대나무·온갖 꽃을 심어 놓았더니 봄이면 고운 새들이 지저귀지요. 저는 안석에 기대어 배를 문지르며 하루 종일 시를 읊고 휘파람을 부니, 이만하면 정자라 부를 만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물었다. "임창헌이라 이름 붙인 것은 무슨 뜻이오?" 그가 답했다. "이 정자에서 바라보는 것 중 가장 큰 것이 바다입니다. 멀리 보면 큰 파도가 만 리에 뻗쳐 곧장 중국 산둥 땅에 맞닿아 있는 듯하고, 바람과 물결이 용솟음칠 때면 신기루가 들락날락하며, 장삿배와 고깃배들이 돛을 달고 오가며 저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른바 '구름이 드리우니 큰 붕새가 날아오르고, 파도가 요동치니 큰 자라가 자취를 감춘다'는 옛 시구가 딱 들어맞는 풍경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저는 세속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입니다. 만약 하루라도 제 마음에 딱 맞는 삶을 살며 제 뜻을 기를 수 있다면, 그 즐거움이 벼슬살이보다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정자를 지어 그런 삶을 굳히려는 것이지요. 저 금띠를 두르고 옥패를 울리는 벼슬아치들은 몸은 화려할지 몰라도 정작 자기 마음에 딱 맞는 삶을 살지는 못합니다. 저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옳은 말씀이오. 서울에서 벼슬하는 높은 관리들은 벼슬자리를 제 집처럼 여기며 백 년이라도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으리라 여기지만, 하루아침에 쫓겨나면 돌아갈 곳조차 없어 낭패한 채 떠도는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오. 그런 처지가 되면 손바닥만 한 땅 한 조각을 얻고 싶어도 뜻대로 안 되지요. 그런데 그대는 지금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고 이렇게 빼어난 곳을 골라 정자까지 지어 스스로 즐기고 있으니, 그 지혜로움이 벼슬아치보다 만 배는 나은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어찌 이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래서 마침내 이 글을 지어, 세상 화를 미처 내다보지 못하고 이익만 탐내는 자들에게 경계로 삼는 바이다.
주흘옹의 꿈 이야기를 적은 글 (서기 1610년 11월 29일, 양력 추정)
주흘옹이라는 호를 쓰는 유연숙이라는 사람을 나는 20년 전 과거 시험장에서 처음 만나 사귀었는데, 서로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중년에는 함께 과거에 급제하기도 했다. 주흘옹은 이따금 높은 벼슬에 오르기도 했지만, 나는 벼슬길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신세를 면치 못한 채 서울에서 벼슬자리를 구하러 이리저리 다녔으므로 서로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도 가끔 친구 집에서 만나면 몹시 반가워하며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근년에 서쪽 변방에서 함께 벼슬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세상 여론에 동조하지 않고 가슴속에 쌓인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늘어놓은 적이 많았다. 때로는 유교·불교·도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는 이따금 이치를 따져 설명하기도 했지만 그다지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았다.
올해 토산으로 성묘를 갔다가 단주의 한 민가에서 묵게 되었다. 그날 밤 주흘옹의 꿈에 검은 옷을 입은 자가 나타나 그를 끌고 가는데 몹시 빨랐다. 놓아 달라고 애걸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큰 관청에 이르니 무장한 호위병들이 몹시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고, 문을 네 겹이나 지나는 동안 보니 집 모퉁이마다 갑옷과 방패로 진을 치고 있었다. 대전에는 주렴이 드리워지고 촛불이 밝혀져 있었으며, 좌우 행랑에는 푸른 옷을 입고 상아 홀을 쥔 관리들이 문서를 처리하고 있었다. 거의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뜰에 나뉘어 서서 소장을 심사하고 있었는데, 남녀가 뒤섞여 있으면서도 엄숙하여 떠드는 이가 없었다.
검은 옷 입은 자가 주흘옹을 계단 중간쯤에 무릎 꿇게 했다. 잠시 후 옅은 황색 가사를 걸친 젊은 승려 넷이 서쪽 계단에서 내려와 손가락질하며 "저 사내는 예전에 우리 불법을 배척한 자다" 하고는 빙 둘러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조금 있으니 대전 위에서 주렴이 걷히며, 멀리 원유관을 쓰고 자줏빛 옷에 옥으로 된 띠를 두른 이가 보였다. 그가 안석에 기대어 "아무개를 국문하라" 명하니, 붉은 옷을 입은 관리 하나가 뜰 가운데로 내려와 종이와 붓을 쥐여 주며 대답을 쓰라고 했다. 주흘옹은 영문을 몰라 붓을 쥐고도 쓰지 못했다.
그런데 그 관리는 예전부터 알던 사람 같았는데, 손톱으로 문서 뒤에 몰래 이렇게 적어 주었다. "평생토록 불교를 비방한 적이 없습니다. 동료인 허 아무개가 압니다." 주흘옹은 즉시 이 내용대로 대답을 적어 냈다. 그러자 전상에 앉은 이가 "그럼 허 아무개를 데려와야겠구나" 했다.
잠시 후 동쪽 회랑의 첫째 문이 열리며 희미하게 패옥 소리가 들리더니, 화양건을 쓰고 흰 도포에 검푸른 바지, 붉은 비단 속옷을 갖춰 입고 구슬 달린 신발에 자줏빛 혁대를 두른 이가 나타났다. 그는 동쪽 계단으로 올라와 왼쪽 기둥 곁에 서서 주흘옹을 슬쩍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주흘옹이 고개를 들어 흘깃 보니, 바로 나였다.
전상에서 물었다. "이 사람이 그대를 증인으로 내세워 자기가 불법을 비방한 적이 없다고 증명했는데, 정말 그러한가." 내가 답했다. "저 사람이 비록 선교의 깊은 이치에는 통달하지 못했지만 크게 배척하지도 않았습니다." 전상에서 웃으며 "그렇다면 어서 놓아주어라" 했다. 검은 옷 입은 자가 주흘옹을 데리고 대문을 나서는 순간, 그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깼는데 이미 닭이 울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주흘옹이 맨 먼저 나를 찾아와 그 꿈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며 말했다. "그대가 비록 인간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어 있는 모양이오." 나는 이렇게 답했다. "도교와 불교는 우리 유학에서 굳이 말하지 않는 것들이오. 나는 마땅히 스스로 정성과 밝음의 학문을 다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안케 하는 일에 힘쓸 뿐이지, 굳이 떠들며 시비를 가려 배척할 것까지야 없다고 여기오. 내가 예전에 불교에 아첨한다는 탄핵을 받은 적이 있긴 하지만, 내가 어찌 불교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겠소. 다만 딱히 비방하지 않았을 뿐인데 세상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이 꿈이야 우연일 테니 딱히 믿을 만한 것은 아니지만, 도를 알지도 못하면서 억지로 아는 척하는 세속 사람들에게는 경계가 될 만할 것이오." 그러고는 붓을 들어 이 일을 기록해 두었다.
주흘옹은 술을 좋아해서 취하면 혀가 꼬여 말을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흘'이라는 호를 스스로 지었다고 한다.
순군부 신당의 마루를 두고 쓴 글 (서기 1611년 2월 27일, 양력 추정)
1610년 겨울, 나는 과거 전시의 시험관 중 하나인 대독관을 맡았는데, 그때 마침 내 조카가 급제를 했다. 그러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내가 사사로운 정을 개입시켰다는 혐의를 걸어 번갈아 상소를 올려 국문할 것을 청했다. 임금께서는 이 주장을 옳다고 여겨 나를 의금부에 가두셨다.
처음 옥에 들어가던 날 저녁, 국경을 지키던 변방 장수 여럿이 함께 갇혀 있었는데, 그들이 나무를 깎아 남자 성기 모양을 만들고 있기에 무엇에 쓰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이 답했다. "순군부의 신령은 여자분이시라 이런 걸 아주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갇힌 죄수들이 이걸 바치며 복을 비는 것이지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죽은 이가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만이지만, 알고 있다면 어찌 감히 이런 걸로 희롱한단 말이오. 귀신을 업신여기고 예의를 모독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는데, 이런 것으로 복을 빈다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 아니겠소."
이윽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꿈에 신을 모신 사당에 가 보니 신은 열예닐곱쯤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소녀였는데 화장기 없는 얼굴에, 위로는 자줏빛 실로 짠 저고리를, 아래로는 옅은 황색 명주치마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비녀도 꽂지 않은 채 얼굴을 찡그리고 앉아 있다가, 나를 보자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예를 갖추며 말했다. "대부께서는 밝고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지난밤 하신 말씀이 제 생각과 꼭 맞았기에, 이렇게 모셔 온 것은 제 마음속 깊이 맺힌 원한을 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절을 올려 답례하려 하자 신은 몸을 일으켜 나를 붙들고 절을 못하게 막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량 땅의 명문가 출신입니다. 명나라 영락 연간에 제 아버지는 찬성사 벼슬을 지내셨고 집에는 시녀도 많았지요. 그때 저는 열일곱 살로 아직 시집가지 않은 처녀였습니다. 뜰에는 꽃이 한창 만발해서 저는 여러 시녀들과 함께 뒤뜰에서 달구경을 하고, 밤 삼경이 되자 혼자 앞채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웬 불량배가 담을 넘어와 제 머리채를 휘어잡고 겁탈하려 하기에 제가 소리치며 힘껏 반항했습니다. 그러자 그 불량배는 발각될까 겁이 나서 칼을 뽑아 제 배를 베고는 남쪽 담을 넘어 도망쳤는데, 그 담 너머는 마침 이웃에 사는 한 서생의 집이었습니다. 날이 밝아 집안사람들이 뒤쫓아 가 보니 그 담장에 핏자국이 있었고, 그래서 다들 그 서생이 저를 죽였다고 여겨 순군부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형조와 사헌부, 한성부 세 관청이 번갈아 가며 몹시 처참하게 고문을 하니 그 서생은 거짓으로 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옥사는 곧 마무리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전날 밤, 이 사건을 맡은 관리 유정현의 꿈에 나타나 '내일 낮에 커다란 검은 나비가 판부사의 모자 끝에 앉을 것이니, 즉시 관리를 풀어 그 나비를 쫓게 하면 진범이 저절로 잡힐 것이다'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이 꿈을 세 관청의 여러 관원들에게도 두루 보여 주었습니다. 날이 밝자 관원들이 모여 저마다 꾼 꿈을 맞춰 보니 모두 똑같았습니다. 다들 이상하게 여기며 지켜보았는데, 정말로 한낮이 되자 나비 한 마리가 판부사 유정현의 모자 끝에 날아와 앉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낭리에게 명해 그 나비를 뒤쫓게 했더니, 마시 거리에서 범인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나비가 바로 그자가 쓴 굽은 챙의 삿갓 위에 앉았던 것입니다. 그자를 꽁꽁 묶어 순군부로 끌고 오니 단 한 번의 심문 만에 죄를 자백하여 곧 처형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저는 제 원수를 갚고 그 서생의 억울함도 풀어 주었습니다. 그 뒤로 순군부 사람들이 저를 신령스럽게 여겨 제사를 지내고 향불을 올린 지가 벌써 이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제사야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지만, 날마다 음란한 모욕을 당해 왔으니 저는 이를 몹시 수치스럽게 여겨 낯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옥에 갇힌 이들이 제때 재판을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오래도록 지체되어 옥중에서 죽는 일까지 있었는데, 이는 모두 제가 이 일을 분하게 여겨 그렇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으로 물려받아 이 잘못된 관습을 고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슬퍼할 만한 일입니다. 이제 대부의 밝은 지혜를 빌려 세상에 이 사정을 알리고자 하니, 대부께서는 부디 이를 잘 말씀해 주십시오."
신은 이어서 말했다. "공은 지금 액운이 무거우니, 혹시 견책을 받는 은전이 내려지거든 남쪽 지방으로 가는 것이 가장 길할 것입니다." 나는 답했다. "어찌 감히 신령님의 밝은 말씀을 세상에 알리지 않겠습니까." 그러고는 일어나 읍을 하려는 순간 번쩍 잠에서 깼다. 아, 참으로 신령스러운 일이 아닌가. 나는 즉시 함께 갇힌 이들에게 이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다들 "그렇겠군요" 하며 나무로 깎은 성기 모양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그러자 과연 함께 갇혔던 장수들이 잇달아 풀려났고, 나 역시 남쪽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으니, 이 또한 꿈이 들어맞은 것이다.
'순군'이란 옛날 의금부를 부르던 이름이다. 조선 초에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순군부를 두고 도만호·상만호·부만호·만호 네 사람이 총괄해 다스리게 했는데, 나중에는 의용순금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세조 때 이르러 지금의 의금부라는 이름이 되었다. 그런데도 옥에 딸린 하인들은 옛 습관대로 지금까지도 '순군'이라 부르는 까닭에, 이 신에게도 그처럼 순군부군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용어) 유정현은 조선 초의 문신이다.
사우재 기 — 네 벗의 서재에 부친 글 (서기 1611년 3월 21일, 양력)
이 서재를 '사우재', 곧 '네 벗의 집'이라 이름 지은 까닭은 무엇인가. 나에게 벗이 셋 있는데 내가 그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보니 합쳐서 넷이 되는 셈이다. 나머지 세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세상 사람이 아니라 모두 옛사람이다. 나는 성격이 소탈하고 거침없어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하니, 당시 사람들이 무리 지어 나를 꾸짖고 떼 지어 배척했다. 그래서 문을 찾아오는 이도 없고, 밖에 나가도 마음 맞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탄식했다. "벗이란 오륜의 하나인데 나만 홀로 이것을 갖지 못했으니, 어찌 심히 부끄럽지 않겠는가."
물러나 생각해 보니, 온 세상이 나를 하찮게 여겨 사귀려 하지 않으니 내가 어디 가서 벗을 구하겠는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옛사람 가운데 사귈 만한 이를 골라 벗으로 삼기로 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는 진나라의 처사 도연명이다. 그는 한가하고 고요하며 매인 데 없이 활달하여 세상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고, 가난도 편안히 여기며 주어진 운명을 즐기다가 자연의 흐름을 따라 삶을 마쳤다. 그 맑은 풍모와 빼어난 절개는 아득하여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나는 그를 몹시 사모하지만 도저히 그 경지에는 미칠 수가 없다.
그다음은 당나라 한림학사 이태백이다. 그는 비범하고 호탕하여 온 세상을 좁다 여기고 귀인들을 개미 보듯 했으며, 스스로 산수 사이를 마음껏 떠돌았으니, 나는 그를 부러워하며 따라가려 애쓰는 처지다.
또 그다음은 송나라 학사 소동파이다. 그는 마음이 활짝 트여 남과 벽을 두지 않으니, 현명한 이든 어리석은 이든, 귀한 이든 천한 이든 누구나 그와 더불어 즐거워했다. 이는 옛 유하혜가 자신의 빛을 감추고 세속과 어울렸다는 것을 본받으려는 것인데, 나는 아직 그런 경지에도 이르지 못했다.
이 세 분 군자는 문장으로도 천고에 이름을 떨쳤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그들에게는 그저 부차적인 일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세 분에게서 취하는 것은 그들의 삶과 인품이지, 문장 그 자체가 아니다. 이렇게 세 분 군자를 벗으로 삼는 마당에, 어찌 속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소매를 맞대며 소곤소곤 귓속말이나 나누는 것을 벗 사귀는 도리로 삼겠는가.
나는 화가 이정에게 명하여 이 세 군자의 초상을 똑같이 그리게 하고, 거기에 찬을 지어 붙인 뒤 명필 석봉 한호에게 해서체로 쓰게 했다. 어디에 머물든 그 자리 한쪽에 반드시 이 초상을 걸어 두니, 세 군자가 엄연히 마주 앉아 서로 시비를 가리고 평가를 나누며 마치 함께 웃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심지어 그들의 말소리와 인기척까지 들리는 것만 같아, 홀로 지내는 쓸쓸함을 좀처럼 느끼지 못했다. 이렇게 하고 보니 비로소 나도 오륜을 온전히 갖추게 된 셈이었고, 이제는 더더욱 세속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즐겁지 않게 되었다.
아, 나는 사실 글재주도 변변찮아 세 분 군자가 부차적으로 남긴 문장에도 미치지 못하고, 성격도 솔직하고 어리숙해서 감히 그런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 바랄 처지도 못 된다. 다만 그분들을 존경하고 사모하여 벗으로 삼고자 하는 이 정성만큼은 신명을 감동시킬 만하다고 믿는다. 그래서인지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나의 행보는 어느새 은연중에 그분들과 꼭 맞아떨어졌다.
도연명은 팽택 현령이 된 지 팔십 일 만에 벼슬을 벗어던졌는데, 나는 세 번이나 고을 수령이 되었지만 그때마다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갑작스레 배척받아 쫓겨났다. 이태백은 심양과 야랑으로 유배 갔고, 소동파는 어사대 옥에 갇혔다가 황주로 유배 갔다. 이는 모두 어진 이들이 겪은 불행이지만, 나 역시 죄를 지어 형틀에 묶이고 매를 맞는 고문을 겪은 뒤 남쪽으로 유배되었다. 아마도 조물주가 장난삼아 그 어려움만은 나에게도 똑같이 맛보게 했지만, 타고난 재주와 성품까지는 갑자기 옮겨 줄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하늘의 복을 입어 혹시라도 시골로 돌아가도록 허락된다면, 관동 지방은 나의 옛 고향 땅이라 그 경치와 풍물이 중국의 시상산이나 채석산에 견줄 만하고, 백성은 부지런하고 땅은 기름져서 중국의 상숙현이나 양선현에도 뒤지지 않는다. 그곳에서 세 군자를 모시고 호숫가에서 벼슬하기 전의 소박한 옷차림으로 돌아간다면, 어찌 인간 세상의 한 가지 즐거움이 되지 않겠는가. 저 세 분 군자께서 이 마음을 아신다면 역시 장차 즐겁고 유쾌하게 여기실 것이다.
내가 사는 집은 한적하고 외져서 찾아오는 이가 아무도 없다. 오동나무가 뜰에 그늘을 드리우고, 대나무와 들매화가 집 뒤에 줄지어 심겨 있다. 나는 그 그윽하고 고요한 정취를 즐기며, 북쪽 창가에 세 군자의 초상을 펼쳐 놓고 향을 사르며 읍을 올린다. 그래서 마침내 이 서재의 편액을 '사우재'라 짓고, 그 사연을 이와 같이 기록해 둔다.
1611년 2월, 봄맞이 제사를 지내는 날에 쓰다.
(용어) 도연명(도원량)은 중국 진나라의 대표적인 은일 시인이다. 이태백은 당나라의 대표적 시인으로, 자유분방한 삶으로 유명하다. 소동파(소자첨)는 송나라의 대문호로, 여러 차례 유배를 겪으면서도 활달한 삶의 태도를 잃지 않았다. 유하혜는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현인으로, 남과 잘 어울리면서도 자신의 지조를 잃지 않았다는 '화광동진'의 고사로 유명하다. 이정은 조선 선조 때의 유명한 화가로 산수화와 인물화에 뛰어났고 글씨도 잘 썼다. 석봉은 명필 한호의 호다. 초복은 벼슬하기 전에 입던 옷, 곧 벼슬하기 전의 소박했던 시절을 뜻한다.
성소부부고 제7권
9. 22:12
출처: 성소부부고 제7권, 문부 4, 기
배경: 제7권부터는 "기"라는 갈래의 글들이 실려 있다. 기는 어떤 장소나 사물, 사람에 얽힌 사연을 적어 두는 글이다. 외조부의 옛집을 되찾아 손질한 이야기, 장인이 지은 서원 이야기, 강릉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신비로운 옛이야기, 조상의 초상화를 되찾아 표구한 이야기, 벗들이 지은 정자와 서실 이야기, 고을살이를 잘한 수령을 기린 글 등이 실려 있어, 허균의 집안 내력과 강원도·전라도 지방에서 맺은 인간관계, 그리고 세상을 보는 그 나름의 눈이 두루 드러난다.
애일당 이야기 (서기 1592년 9월 20일, 양력 추정)
강릉부에서 30리쯤 되는 곳에 사촌이라는 마을이 있다. 동쪽으로는 넓은 바다에 닿아 있고 북쪽으로는 오대산·청학산·보현산 같은 산들이 바라보인다. 백병산에서 흘러나온 큰 냇물 하나가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데, 이 냇물을 따라 위아래 수십 리에 걸쳐 거의 수백 가구가 살고 있으며, 모두 양쪽 언덕에 의지해 냇가 쪽으로 문을 내었다.
냇물 동쪽 산은 북대산에서 뻗어 내려와 구불구불 이어진 모습이 마치 용 같은데, 바닷가에 이르러 문득 솟구쳐 사화산의 봉수대가 되었다. 봉수대 아래에는 옛날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냇가가 무너질 때 늙은 교룡 한 마리가 그 밑바닥에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그 교룡이 신유년(1501년) 가을에 그 바위를 깨뜨리고 떠나면서 바위가 두 동강 나 구멍이 문처럼 뚫렸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이를 "교룡의 문바위"라 불렀다.
조금 남쪽으로는 언덕 하나가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름을 쌍한정이라 한다. 이 고을 사람인 박공달과 박수량이 노닐던 곳이라 그렇게 이름 붙였다. 이곳의 산수가 울창하고 깊숙하며 기운이 힘차게 솟구치는 까닭에, 예로부터 이 땅에서 유난히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났다.
나의 외조부이신 참판 어른께서는 바다에 가장 가까운 자리를 골라 이 집을 지으셨다. 새벽에 일어나 창을 열면 해돋이를 볼 수 있는 자리였는데, 마침 노모를 모시며 부모의 늙음을 안타까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에 계셨으므로,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에서 "애일당"이라 이름 붙이셨다. 명나라의 오희맹이라는 이가 큰 현판 글씨를 써 주었고, 공용경이라는 이가 시를 지어 읊었는데, 그러자 당대의 여러 이름난 이들이 잇달아 화답하는 시를 짓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집은 이 일로 강릉 땅에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임진년(1592년) 가을,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왜적을 피해 북쪽에서 배를 타고 교산에 이르러, 이 집을 청소하고 거기서 지냈다. 외조부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어느덧 서른세 해가 지난 뒤였다. 뜰에는 풀도 베지 않아 덩굴이 묵어 엉키고 잡목이 무성했으며, 담은 무너지고 집은 곧 내려앉을 듯했고, 지붕은 금이 가고 벽은 벗겨져 있었다. 시를 적어 걸어 둔 현판은 반도 남아 있지 않았고, 빗물이 새어 들보와 서까래를 더럽혀 어떤 곳은 이미 썩어 있었으며, 창문과 지게문도 삭아 문드러진 곳이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고 통곡하며 우셨다. 나는 서둘러 종들을 재촉하여 더러워진 것은 쓸어 내고 덩굴은 걷어 내어, 집을 깨끗이 치우고 그곳에서 지냈다.
아, 선조께서 이 터를 힘써 닦고 늙은 부모를 모실 곳을 마련하시느라 이토록 부지런히 애쓰셨는데, 후손 된 우리가 변변치 못하여 이 몇 칸 되지 않는 집조차 지켜 내지 못하고 무너지게 하였으니, 그 죄가 참으로 크다. 나는 비록 부족한 사람이나 마침 노모를 모시고 이 집을 이어받아 지키게 되었으니, 하루하루를 아끼는 그 마음이 어찌 선조 대에서 끊어지게 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마음을 다하고 힘을 쏟아 정성껏 이 집을 보전함으로써 어머니의 마음을 편안케 하고 선조의 터전을 손질하여, 한가로이 노닐며 편안히 지내다가 생을 마친다면, 저세상에서라도 외조부를 다시 모실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이렇게 기록하여 뒷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한다.
(용어) 박수량은 명종 임금 때의 학자이자 효자로, 사섬시 주부라는 벼슬을 지내다가 기묘사화 때 파직되어 강릉으로 돌아와 조카 박공달과 함께 시와 술을 즐기며 여생을 보낸 인물이다. "애일"이란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안타까워한다는 뜻으로, 자식이 부모를 오래도록 모시고 싶어 하는 마음을 비유한 말이다.
반곡서원 이야기 (서기 1593년 4월 16일, 양력 추정)
사촌 마을에서 서쪽으로 10리를 가면 두 산이 맞닿는 곳이 있는데, 흐르는 냇물이 그 사이를 돌아 나가고 그 위쪽으로 깊은 골짜기가 있다. 울창하고 심원하며, 맑은 여울과 고운 바위가 위아래로 서로 비친다. 골짜기에 들어서서 한 마장도 못 가면 비탈에 바위가 있는데, 냇물 동쪽에서 물이 들이쳐 폭포를 이루고 흩날리는 물거품이 자욱하며 그 소리가 은은히 우렛소리 같다. 단풍나무·삼나무·소나무·상수리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해를 가려, 그 빽빽하고 깊숙하며 맑고 상쾌한 정취가 참으로 세상을 등진 이가 노닐며 지내기에 알맞았다.
나의 장인이신 직장 어른께서 이곳에 집을 짓고 사셨는데, 이름을 반곡서원이라 하였다. 공은 우뚝하여 남다른 기상을 지니셨고, 학문에 힘써 문장에 능하셨으나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하셨기에, 늘 세상 밖에서 노닐고자 하는 뜻을 품고 계셨다. 그래서 벼슬을 버리고 떠돈 옛사람 상자평을 본받고 싶어 하셨지만, 노부모를 모시고 있어 그 뜻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셨다. 마침내 부모님을 여의시자 관직을 내려놓고 이름난 산들을 두루 유람하며, 선의 이치를 깊이 깨치고 본성의 근원을 꿰뚫어 보게 되셨다. 한 해의 반 이상을 금강산에서 지내셨고, 집에 계실 때도 시를 짓는 승려 한둘을 곁에 두고 이따금 거리낌 없는 행동을 하며 세상을 흘려 넘기셨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손가락질하며 웃음거리로 삼았으나, 공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홀로 기뻐하며 자부하셨다. 만년에는 이 서원을 짓고 책 천 권을 갖추어 그 안에서 노닐며 시를 지어 스스로 즐거워하셨다. 여든 살에 병 없이 돌아가시니, 어떤 이는 신선이 되어 떠나신 것이라고도 했다.
공의 맏아드님이 그 뒤를 이어 그곳에서 살고 계신데, 하루는 나를 이끌고 함께 놀러 가셨다. 시냇가를 따라 복숭아나무 백여 그루가 서 있어 꽃이 반쯤 떨어져 있었고, 비단결 같은 물결이 도도히 흘렀으며, 그윽한 꽃과 야생초가 우거져 사랑스러웠다. 새들은 숲 사이를 오르내리며 갖가지로 지저귀는데, 마치 노니는 사람을 놀리는 듯했다. 소나무 그늘이 땅에 드리우고 이끼가 방석처럼 깔린 자리에서, 형님께서는 나를 위해 술과 안주를 차리시고 시녀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여 흥을 돋우셨다. 술기운이 조금 오르자 돌을 딛고 발을 씻으며 양지쪽에서 머리를 말리고, 천지를 굽어보니 한없이 넓어 마치 허공에 기댄 듯한 생각이 들어 그 상상이 몹시 유쾌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나는 형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하늘이 무심하여 지금 한창 전쟁이 그치지 않으니, 서울의 이름난 집안들도 선대의 가업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갈 곳을 정하지 못하는 이가 태반인데, 우리 강릉 땅은 전쟁의 화가 그리 심하지 않아 고을과 마을 어디에도 불타 무너진 집이 없습니다. 형님께서는 선친께서 남기신 가업을 삼가 지켜 그 책과 기물 하나 썩거나 잃어버린 것이 없고, 또한 유유히 누워 쉬시며 즐거이 평생을 보내고 계십니다. 이는 물론 조상께서 덕을 쌓아 하늘이 은밀히 도와주신 바이기도 하지만, 아버님의 가업을 저버리지 않고 훌륭히 이어받은 것은 형님께서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셨기 때문이니, 어찌 대단하지 않다 하겠습니까." 형님께서는 기뻐하시며 "그렇겠구나. 나를 위해 이 말을 적어 벽에 걸어 두면 좋겠다" 하셨다. 나는 마침내 붓을 들어 이 일을 적는다.
별연사에 얽힌 옛이야기 (서기 1596년 4월 12일, 양력 추정)
강릉부 남쪽에 큰 냇물이 있고, 그 냇물 남쪽에 별연사라는 절이 있으며, 절 뒤쪽 언덕은 연화봉이라 부른다. 노인들이 전하기를, 주원공의 어머니이신 연화부인이 예전에 이곳에 사셨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봉우리 이름을 지었고, 절은 곧 그 옛집 자리라고 한다. 절 앞에는 돌로 된 못이 있는데 이름을 양어지, 즉 "물고기를 기르던 못"이라 한다.
노인들은 또 이렇게 전한다. 옛 명주 땅에 어떤 서생이 있었는데, 이곳으로 공부하러 왔다가 한 처녀와 혼약을 맺었다. 처녀의 부모는 이 사실을 모르고 딸을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려 하자, 처녀가 편지를 못에 던졌는데 한 자쯤 되는 잉어 한 마리가 그것을 물어다 서생에게 전해 주어 마침내 그 인연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을 엮은 이가 이 이야기를 믿어 옛 자취를 적는 항목에 실어 놓았다.
그 기록에는 "혹은 그 서생이 동원군 함부림이라고도 한다"고 되어 있는데, 나는 속으로 이를 의심했었다. 봉우리 이름이 이미 부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니, 절은 분명 그 부인이 살던 집 자리일 것이다. 그런데 이 절이 신라 시절에 세워졌다면 강릉부는 그때 아직 "동원경"이라 불리던 시절일 텐데 어찌 "명주"라 했을까? 또 절 안에 어찌 사람이 처녀를 데리고 살았을 수 있을까? 더구나 함부림 공은 조선 건국 때의 공신으로 원래 이 고을 사람이었는데, 어찌 그보다 훨씬 이전인 고려 초 명주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를 등장시키며 "이곳에 공부하러 왔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이야기가 거짓임을 보여 주는 단서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거짓이 거짓인 채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데도 옛 기록을 널리 살펴 그 잘못된 부분을 밝혀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병신년(1596년) 봄, 관찰사로 순행하던 정구 선생께서 평창군에 이르렀는데, 그 고을이 옛 동원경 시절에는 강릉부에 속해 있었으므로 고을 사람 중에는 지금까지도 그 시절 이야기를 전하는 이가 있었다. 선생께서 옛 문서들을 두루 물어 아전에게서 옛 기록을 얻으셨는데, 그것을 내게 가져와 보여 주셨다. 살펴보니 강릉부사를 지낸 이거인이 쓴 글이 여럿 있었고, 그중에 연화부인의 사연이 매우 자세히 실려 있었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신라 시절 명주는 동원경이라 불렸는데, 그곳을 다스리는 유후관은 반드시 왕자나 왕실 친척, 장수와 재상, 대신 가운데서 맡게 하였고, 웬만한 일은 그 아래 고을들에 알아서 처리하도록 맡겨 두었다. 왕의 아우 되는 무월랑이라는 이가 있어 어린 나이에 그 자리를 맡았는데, 업무는 보좌관의 말을 따라 대신 처리하게 하고 자신은 화랑도를 이끌고 산과 물 사이를 노닐었다.
하루는 홀로 이른바 연화봉에 올랐는데, 한 처녀가 있어 용모가 매우 빼어났고 돌로 된 못에서 옷을 빨고 있었다. 낭은 기뻐하며 그 여인을 유혹하였는데, 처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양반 집안 출신이라 예를 갖추지 않고서는 혼인할 수 없습니다. 낭께서 아직 혼인하지 않으셨다면 혼약을 맺을 수는 있으나, 정식으로 예를 갖추어 맞아 주셔야 늦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미 낭께 마음을 허락하였으니 다른 이에게 시집가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낭은 이를 허락하고, 이후로 안부를 묻고 선물을 보내기를 끊이지 않았다. 임기가 차서 낭이 서라벌로 돌아가 반년 동안 소식이 없자, 처녀의 아버지는 딸을 북평 마을의 한 청년에게 시집보내기로 하고 이미 날짜까지 정해 놓았다. 처녀는 감히 부모께 사정을 말씀드리지 못하고 속으로 몰래 애를 태우다가 마침내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
하루는 못에 가서 예전의 맹세를 떠올리며, 기르던 못 속의 황금 잉어에게 말했다. "옛날에 잉어 한 쌍이 편지를 전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너는 내게서 오래도록 보살핌을 받았으니 낭이 계신 곳까지 나의 마음을 전해 줄 수 없겠니?" 그러자 갑자기 한 자 반쯤 되는 황금 잉어가 못에서 튀어 올라 입을 딱 벌리는데, 마치 승낙하는 듯했다. 처녀는 이를 신기하게 여겨 옷소매를 찢어 글을 썼다. "저는 감히 혼약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나 부모님의 명을 앞으로는 거스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낭께서 만약 이 맹약을 버리지 않으셨다면 서둘러 아무 날까지 이르러 주시면 아직 가능하지만, 그렇지 못하시면 저는 마땅히 목숨을 끊어 낭을 따르겠습니다." 이것을 잉어의 입속에 넣어 큰 냇물에 던지니, 잉어는 유유히 사라졌다.
그다음 날 새벽, 무월랑은 아랫사람을 알천에 보내 물고기를 잡아 오게 했는데, 회를 뜰 생선을 찾던 중 금빛 나는 한 자짜리 잉어가 갈대 사이에 있는 것을 보았다. 아랫사람이 이것을 낭에게 가져다 보였더니, 잉어는 펄쩍 뛰며 빠르게 움직여 마치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했고, 잠시 뒤 거품을 한 되쯤 토했는데 그 속에 흰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이상히 여겨 읽어 보니 처녀가 손수 쓴 것이었다. 낭은 즉시 그 편지와 잉어를 가지고 왕께 아뢰었다.
왕은 크게 놀라며 잉어를 궁궐 안의 연못에 놓아주게 하고, 급히 대신 한 사람에게 명하여 비단을 갖추게 하고 낭과 함께 동원경으로 말을 달려가게 하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 겨우 약속한 날짜에 맞춰 도착했다. 도착해 보니 유후관을 비롯한 여러 관리와 고을 노인들이 모두 잔칫상 아래 모여 있어 자리가 무척 성대했다. 문을 지키던 관리가 낭이 오는 것을 이상히 여기며 "무월랑이 오십니다!"라고 소리쳐 알렸다. 유후관이 나가 맞이해 보니 대신이 함께 와 있었다. 마침내 그간의 사연을 낱낱이 알려 드렸다. 북평 마을의 신랑은 이미 도착해 있었으나, 대신이 사람을 보내 혼례를 잠시 멈추게 했다. 처녀는 하루 전부터 병을 핑계 대며 머리도 빗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어머니가 아무리 다그쳐도 듣지 않아 한창 꾸지람을 듣던 중이었는데, 낭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 벌떡 일어나 곱게 단장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아갔다. 이렇게 하여 양가의 혼인이 무사히 이루어지니, 온 고을 사람이 모두 놀라며 신기해하였다.
부인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곧 주원공이요 둘째는 훗날의 경신왕이다. 신라의 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뒤를 이을 자손이 없자 나라 사람들 모두가 주원공을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하필 그날 큰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갑자기 불어났다. 주원공이 알천 북쪽에서 사흘이나 물을 건너지 못하자, 나라의 재상이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하고는 마침내 경신을 왕위에 올렸다. 이 때문에 마땅히 왕위에 올랐어야 할 주원공은 즉위하지 못하고, 대신 강릉 땅에 봉해져 주변 여섯 고을을 받아 명원군의 왕이 되었다. 부인은 주원공에게 가서 봉양을 받았는데, 살던 집을 절로 만들었으며 왕은 해마다 한 번씩 찾아와 어머니를 뵈었다. 사대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지며 명주가 되었고, 신라도 뒤이어 망하였다.
나는 이 기록을 보고서야 비로소 이 못에 얽힌 사연을 남김없이 알게 되어, 마치 구름을 헤치고 해를 본 듯한 기분이었다. 더욱이 고을 노인들이 전하던 이야기가 얼마나 소략한지, 또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내용이 얼마나 엉성한지도 알게 되었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께서는 주원공의 후손이시니, 곧 이 부인은 나의 조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찌 언제까지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내가 태어난 근원을 흐리고 욕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이렇게 낱낱이 갖추어 기록하여 강릉부의 옛 기록으로 삼는다.
(용어) 주원공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6대손인 김주원을 가리키며, 명주군왕에 봉해졌고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함부림은 조선 개국공신으로, 처음에는 명성군에 봉해졌다가 뒷날 동원군으로 다시 봉해졌다. 이거인은 고려 때 경상우도 관찰사를 지냈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판개성부사를 지낸 뒤 청성백에 봉해진 인물이다.
돌아가신 형조참판 성공의 초상화 이야기 (서기 1599년 9월 18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는 초상화를 즐겨 그리지 않는다. 그래서 초상을 그려 후세에 전하는 이가 매우 드물고, 오직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들만 초상화가 있는데, 그마저도 관아에서 그려 준 것이지 그 집안에서 따로 그리게 한 것이 아니니 그 솜씨가 얼마나 엉성하고 볼품없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반면 중국 사람들은 이름난 이나 훌륭한 선비라면 으레 초상화가 있어 오랜 세월 전해지므로, 뒷사람들이 그 그림을 우러르며 마치 그 사람을 직접 뵙는 듯이 여긴다. 심지어 자손들도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초상을 그려 걸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섬기기를 마치 살아 계실 때 말씀을 받드는 듯이 한다. 이로써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온전히 품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뒷날의 자손들도 비록 직접 얼굴을 뵙지는 못했어도 그 그림 앞에 나아가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어 마치 살아 계신 날과 같이 여기게 되니, 이 어찌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가 초상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돌아가신 형조참판 성순조 공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길에 올라 세종·문종·세조 세 임금을 섬겼는데, 강직하다는 칭송이 자자하였고 여러 차례 큰 고을을 맡아 그 소임을 훌륭히 해내었으며,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벼슬에서 형조참판으로 발탁되었다. 일찍이 신숙주의 청혼을 물리친 일이 있어 이 때문에 공신의 반열에는 들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 처신을 훌륭하게 여겼다. 공의 증손 되는 희는 곧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의 외조부이시다.
공에게는 그려 둔 초상화가 있어 서손 되는 윤박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나도 어릴 적에 한 번 뵌 적이 있다. 전란이 일어났을 때 그 집에서는 두루마리를 잘라 옷으로 싸서 연안 땅에 모셔 두었는데, 내가 마침 부사로서 그 고을에 이르렀을 때 찾아가 삼가 살펴보았다.
공은 긴 수염에 붉은 얼굴, 넓은 이마에 우뚝한 콧대, 번개처럼 번뜩이는 두 눈을 지니셨고, 조복을 입고 관을 쓰신 채 의자 위에서 두 손을 마주 잡고 앉아 계셨는데, 늠름하여 위엄이 있었고 정신이 상쾌하여 금방이라도 움직이실 듯했다.
나는 그 앞에 삼가 서서 이렇게 아뢰었다. "공께서는 임금이 총애하는 재상에게도 굽히지 않으시어 비록 공신의 명부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하셨으나, 자손이 능히 그 초상을 그려 정성껏 모신 지가 지금까지 백오십 년이니, 후손들로 하여금 이 초상을 뵙고 우러러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함이 마치 살아 계신 것과 같고 그 말씀을 직접 듣는 듯합니다. 어찌 반드시 관아에서 그려 준 초상이라야 영광스럽다 하겠습니까? 또 듣자니 나라를 세운 이래 열다섯 차례의 공신 책봉이 있어 그 초상을 그린 이가 거의 수백 명에 이른다는데, 전란을 겪으며 그 그림이 온전히 보전된 집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니 초상이 보전되고 안 되고는 그 사람의 공적이 기록되었는지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이 정녕 존경받을 만한가에 달려 있음이 분명합니다."
나는 우러러 공의 안색을 살펴보니, 남달리 빼어나고 우뚝하여 참으로 열렬한 대장부이시라, 마땅히 지체 높은 이에게도 굽히지 않고 부귀와 공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을 것이다. 비록 옛날의 이름난 이들이라 한들 어찌 이보다 낫겠는가? 마땅히 이 초상을 그려 천 년 뒤까지 전해야 할 것이니, 후손 된 이가 어찌 감히 소홀히 하여 가문의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나는 급히 솜씨 좋은 장인을 구해 그 두루마리를 손질하고 다시 표구하여 성씨 집안에 돌려주니, 후손들은 대대로 이를 맡아 소중히 지키기를 게을리하지 말기 바란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기록해 둔다.
수증사에 있는 양 시중 부부의 초상화 이야기 (서기 1599년 10월 29일, 양력 추정)
송화현 북쪽 10리쯤에 묵산이라는 산이 있고, 그 산에 수증사라는 절이 있는데, 고려 시중을 지낸 양공이 세운 원찰이다. 공의 이름은 기이며, 집안은 홍농 땅의 큰 가문으로 한나라 때 대부를 지낸 양표의 후손이다. 공민왕 시절 노국공주가 우리나라에 시집올 때 공이 그를 모시고 왔으므로, 왕이 시중 벼슬을 내리고 청주를 본관으로 삼게 하였다. 부인 진씨가 집안의 재물을 내어 이 절을 지었는데, 크고 아름다우며 정교하여 지금까지도 이름난 절이 되었고 상주하는 승려가 백 명에 이른다. 법당 뒤쪽으로 가면 별채가 하나 서 있는데, 시중과 그 부인의 모습을 그려 그 안에 걸어 놓고 향불을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올리고 있다. 나의 외조모 되시는 양 부인은 바로 그분의 7대손이시다.
나는 예전부터 이 절에 초상화가 있다는 말을 들어 왔는데, 마침 보좌관이 되어 재해를 조사하는 일로 이 절에 이르러 술잔을 갖추어 절을 올렸다. 시중은 얼굴이 네모지고 콧수염이 적었으며, 눈에 흰자위가 많고 코가 우뚝하며 입술이 두툼하였고, 사모를 쓰고 옥대를 두른 채 붉은 도포에 참새 무늬 흉배를 달고 의자에 앉아 계셨다. 부인은 자줏빛 꽃을 수놓은 저고리를 입고 금테를 두른 푸른 큰 띠와 금빛 봉황 무늬 흉배를 걸쳤으며, 아래에는 노란 명주치마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려 은구슬 아홉 갈래와 난새 모양 비녀를 꽂고 계셨다.
술잔을 올리기를 마치고 곁에 서서 찬찬히 살펴보니, 부인의 모습이 나의 외조모와 참으로 닮아 있어 몹시 놀라웠다. 잠시 뒤 천연이라는 승려가 뒤에서 다가와 "부인의 모습이 부사 어른의 얼굴과 흡사합니다" 하였다. 곁에 있던 승려들도 모두 이미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여기고 있었지만 감히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다가, 이 말을 듣고는 일제히 "천연 스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고 맞장구쳤다. 우리 집안에서도 내가 외조모를 닮았다는 말을 종종 하였으므로, 나는 더욱 신기하게 여겼다. 옛날에 도적이 오예라는 이의 무덤에 들어갔다가 그 후손의 얼굴을 알아보았다는 이야기가 있고, 왕방경이라는 이는 먼 외조부인 사문정과 몹시 닮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무릇 사람은 부모의 정기를 받아 태어나는 법이다. 그러니 아버지는 나의 할아버지에게서 그것을 받으시고, 나는 다시 나의 아버지에게서 받았으며, 어머니와 할머니의 기운까지 함께 받아 이 몸이 이루어졌으니, 그 생김새가 서로 닮는 것은 이치상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서 나로, 나에서 다시 자손으로 대대로 이어질 때, 비록 수십 대가 지나더라도 서로 닮은 데가 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니, 어찌 이상하다 할 것이 있겠는가?
이에 이렇게 기록하여 이 절의 주지스님에게 맡겨 대대로 전하게 한다.
(용어) 여기서 "보좌관"으로 옮긴 자리는 감사·유수·병사·수사 등을 따라다니며 보좌하던 벼슬인 "비장"을 가리킨다.
탐원와 이야기 (서기 1599년 7월 6일, 양력 추정)
"탐원와"란 맹인으로서 점을 치는 이광의라는 사람의 거처를 이르는 이름이다. 어째서 "탐원", 즉 "근원을 찾는다"고 이름 붙였는가 하면, 이백이 옛 점술가 엄군평을 노래한 시에 "근원을 찾아 사람들을 깨우친다"는 구절이 있어 이를 따서 이름 지은 것이다. 이광의는 양반 집안 출신으로, 그 먼 조상 되는 이무는 조선 개국과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대대로 충의위라는 벼슬을 받아 녹을 먹으며 왕궁을 지켰다. 이광의 또한 일찍이 이 벼슬을 이어받아 계속 낮은 품계의 녹을 받았으나, 이윽고 눈에 병이 생겨 궁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운명을 점치는 술법을 배웠다. 그런데 그 솜씨가 남달리 신묘하여 점을 쳤다 하면 죄다 들어맞았다. 전란 중 이천 땅에서 병화를 피할 때에도, 그는 매번 왜적이 쳐들어올지 여부를 미리 알아내어 사람들을 이끌고 먼저 자리를 옮겼으므로, 그 덕에 목숨을 건진 사람이 많아 다들 그를 신이라 일컬었다. 계사년(1593년)에 중화부 북쪽에 살면서 집을 짓고 스스로 이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나는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점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동강 서쪽을 오간 것이 무릇 다섯 차례요, 이광의라는 이를 만난 것도 여러 번이었지만 그때마다 운명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양창서를 따라 중화 땅에 묵을 때 이광의와 한 침상에 눕게 되었는데, 그가 우연히 내 운명을 묻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수명은 마땅히 길어질 것이고 지위도 마땅히 높아질 것이다. 다만 내년 여름에는 황해도 지방의 보좌관이 될 것이니, 나는 마땅히 황강 땅으로 그대를 찾아갈 것이다." 그런데 이듬해 과연 그 말대로 보좌관이 되었다. 황강에 이른 지 며칠 만에 이광의가 정말로 찾아와 "내 말이 들어맞았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이를 신기하게 여기며 "아, 세상 사람들이 점술을 믿고 즐겨 점을 치는 것은 모두 이런 일 때문이겠구려" 하였다. 이광의는 또 아무 해는 길하고 아무 해는 흉하며, 아무 해에는 감사가 되고 병마절도사가 되며,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가 되었다가 좌찬성과 우찬성 같은 높은 벼슬에 오를 것이라고 낱낱이 짚어 말하였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앞날은 내가 이미 잘 알고 있소. 나는 하늘에 맡기고 운명에 맡기는 사람이오. 하늘과 운명이 내게 내려 주는 것이라면 그대가 예언하지 않아도 나는 마땅히 누릴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설령 위나라 무공처럼 오래 살고 주공처럼 부귀를 누릴 것이라 말해도 나는 믿지 않을 것이오."
그러자 곁에 있던 다리 없는 조씨 성을 가진 이가 말했다. "옛말에 임금과 재상은 운명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했는데, 이광의가 그대를 재상이 될 것이라 하였으니 운명을 말하지 않는 것이 옳겠소." 이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아니오, 그렇지 않소. 《서경》에 '우리 인생은 운명이 하늘에 달려 있지 않은가' 하는 말이 있는데, 만약 이 말이 요임금이나 순임금, 혹은 기나 고요 같은 어진 신하의 입에서 나왔다면 참으로 나라를 망칠 말이 될 것이오. 하지만 이 말이 완적이나 도잠 같은 이의 입에서 나왔다면, 사람들은 반드시 그를 두고 인생에 통달했다느니, 하늘의 뜻을 즐기고 운명을 안다느니 하고 일컬었을 것이오. 나는 시대와 맞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니 기나 고요와 같은 큰 사업을 감히 바라지는 못하지만, 완적의 거침없음과 도잠의 소탈함이라면 나와 거의 뜻이 통한다 할 것인즉, 비록 '운명이 하늘에 달려 있지 않다' 말해도 또한 괜찮지 않겠소?" 그러고는 농담 삼아 웃으며 이야기를 마쳤다. 이광의가 이 이야기로 제 거처를 꾸미고 싶다고 청하므로, 마침내 종이에 적어 그에게 주었다.
(용어) "우리 인생은 운명이 하늘에 달려 있지 않은가"라는 말은 《서경》 서백감려 편에 나오는 구절로, 원래는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주가 제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한 말이다.
통곡헌 이야기 (서기 1599년 11월 1일, 양력 추정)
내 조카 친이라는 이가 자신의 서재를 짓고 편액을 "통곡헌"이라 달았다.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즐거운 일이 이토록 많은데 어찌하여 통곡이라는 말로 집의 이름을 삼는단 말인가? 더구나 통곡하는 이란 아버지를 여읜 자식이거나 사랑하는 이를 잃은 부인네인데,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법이거늘, 그대만 홀로 사람들이 꺼리는 것을 굳이 골라 거처에 걸어 놓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친은 이렇게 답했다. "저는 세상의 취향과는 반대로 가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쁨을 즐기니 저는 슬픔을 좋아하고, 세상 사람들이 흔쾌해하니 저는 근심하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부귀와 영화조차 세상은 기뻐하는 바이지만, 저는 이를 몸을 더럽히는 것인 양 여겨 내던지고, 오직 가난하고 검소한 것을 본받아 그렇게 살아가며, 무슨 일에서든 세상과 어긋나고자 합니다. 그러니 세상이 가장 싫어하는 것을 굳이 고르자면 통곡만 한 것이 없으므로, 저는 그것으로 제 서재의 이름을 삼은 것입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비웃던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릇 곡을 하는 데에도 나름의 이치가 있소. 대체로 사람의 온갖 감정 가운데 쉽게 일어나 마음을 움직이는 것으로는 슬픔만 한 것이 없소. 슬픔이 일면 반드시 곡을 하게 되는데, 그 슬픔이 일어나는 까닭도 여러 가지지요. 그래서 시대의 일을 어찌할 수 없음을 슬퍼하여 통곡한 이는 가의였고, 흰 실이 본바탕을 잃는 것을 슬퍼하여 곡을 한 이는 묵적이었으며, 갈림길이 여럿으로 나뉜 것을 슬퍼해 운 이는 양주였고, 길이 막혀 곡을 한 이는 완적이었으며, 운명이 불우함을 한탄하여 스스로를 세상 밖으로 내치고 그 심정을 통곡에 담은 이는 당구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마음속에 품은 뜻이 있어 운 것이지, 이별을 서러워하거나 억울함을 품고서 하찮은 일로 부녀자처럼 통곡을 흉내 낸 이들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는 그들이 살던 시대보다 더욱 말세가 되었으니, 나랏일은 날로 그릇되어 가고 선비들의 행실은 날로 야박해져서, 벗들 사이에서 등을 돌리는 일이 갈림길이 갈라지는 것보다 심하고, 어진 선비가 고생을 겪는 것도 그저 길이 막힌 정도가 아니어서, 다들 인간 세상 밖으로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만약 앞서 말한 그 몇 분의 어진 이들이 이 시대를 직접 보게 된다면 과연 어떤 마음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통곡할 겨를조차 없이, 모두 굴원처럼 돌을 안고 강물에 몸을 던지려 할 것입니다. 조카 친이 서재의 이름을 '통곡'이라 한 것도 바로 이런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여러분은 그 통곡을 비웃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비웃던 이들이 이 말을 알아듣고 물러가기에, 이렇게 글로 남겨 여러 사람의 의심을 풀어 준다.
취학정 이야기 (서기 1599년 11월 3일, 양력 추정)
나의 당질 이장경 군이 양산 북쪽에 집을 짓고 사는데, 앞으로는 바닷물이 임하고 뒤로는 아름드리 소나무 백여 그루가 울타리를 이루어 그 광활하고 그윽한 정취를 즐기며, 탁 트이고 밝은 자리를 골라 집을 짓고 한가로이 지내는 곳으로 삼았는데, 이름을 "취학정"이라 하였다. 내가 그 이름의 뜻을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비록 벼슬길을 잃고 서쪽으로 왔으나, 바닷가 고을에서 밭 십여 이랑을 얻어 힘써 갈아 생활하니, 그럭저럭 죽이나마 먹고 지낼 만합니다. 그 나머지로 술을 빚어 마시곤 하지요. 제가 원래 술이 세지 못하여 몇 잔만 마셔도 얼근히 취해 마음이 화창해지고 종일토록 즐거워서, 답답한 시름이 가슴에 걸려 있다는 것도 잊고 흐뭇하게 그 기분을 즐깁니다.
집에서 학을 한 마리 기르는데 소나무 숲 사이에 풀어 놓으면 맑은 밤에 길게 우는데 그 소리가 하늘까지 들릴 듯합니다. 제가 대나무 지팡이를 두드리며 부르면 학은 반드시 훨훨 날개를 치며 다가오고, 제가 앞에서 박자를 맞춰 노래하고 손뼉을 치며 화답하면 학은 문득 날개를 퍼덕이며 껑충거리고 춤을 추면서 집 주위를 천천히 돌지요. 노래의 곡조에 맞춰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하다가 노래가 끝나면 그제야 멈춥니다. 학이 춤을 출 때면 제 마음이 몹시 즐거워서 술에 취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옛사람들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를 흠모하여 '백에 취한다'고 하였고, 대나무 그림을 사랑하여 '먹에 취한다'고 하였는데, 저는 술을 조금만 마셔도 곧 술을 많이 마신 사람 못지않게 취하고, 또 춤추는 학에도 이렇게 취하니, 정자를 학으로 이름 지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잘 알겠네. 하지만 술이란 시름을 잊게 해 주는 것이지만, 도가 지나쳐 술로 연못을 이루고 술지게미로 언덕을 쌓을 지경이 되면 하나라와 상나라가 그 때문에 망하였고, 학이란 깨끗함을 즐기고 한가함과 짝하는 것이지만, 학을 실은 수레가 삼백 대나 되었을 때 위나라는 그 때문에 어지러워졌다네. 무릇 어떤 것에 유독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그 아래에는 곧 화가 뒤따르는 법인데, 지금 그대가 술과 학을 지나치게 좋아하다가 도리어 그로 인한 허물을 불러들이는 것은 아닌가?"
그가 답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나라를 다스리는 소임을 맡은 이들이었는데,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돌보는 일은 뒷전으로 하고 오직 술과 학에만 빠져 있었으니 패망한 것이 마땅합니다. 완적과 유영은 아무리 술을 좋아하였어도 그저 거침없고 통달한 사람이 되었을 뿐이고, 임포가 아무리 학을 사랑하였어도 그 고고하고 활달한 성품을 드러냈을 뿐이니, 어찌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해가 되었겠습니까? 다만 그들의 빼어남을 더해 주었을 뿐입니다. 저는 백성과 나랏일에 얽매인 몸이 아니고 관직에도 매인 바가 없으니, 제가 술을 사랑하고 학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그러겠습니까?"
나는 부끄러워하며 그 말이 맞다고 사과하고 물러났고, 이렇게 글을 지어 그의 정자에 남긴다.
(용어) "학을 실은 수레가 삼백 대나 되었을 때 위나라가 어지러워졌다"는 것은, 춘추시대 위나라 임금 의공이 학을 지나치게 좋아하여 대부에 봉한 학이 삼백 마리에 이르렀다는 옛이야기를 가리킨다.
산월헌 이야기 (서기 1611년 2월 27일, 양력 추정)
나는 젊었을 때 전운판관이라는 벼슬로 전라도에서 조운을 감독하며 바다를 자주 오갔다. 부안 땅의 봉산을 몹시 좋아하여 그 산기슭에 오두막이나 짓고 살고 싶었다. 사람들 말이, 그 산속에 골짜기가 있어 우반이라 하는데 그곳이 가장 살 만하다 하였으나, 정작 가서 보지는 못하고 그저 마음만 그리로 향할 뿐이었다.
무신년(1608년) 가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온 가족을 데리고 부안으로 가서 이른바 우반이라는 곳으로 나아갔다. 경치 좋은 언덕을 골라 나무를 베어 몇 칸의 집을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칠 계획을 세웠는데, 일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당시 세상의 여론이 나를 조정에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시골에 묻혀 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려 하여, 여럿이 모여 함께 나를 헐뜯으며 "태평한 세상을 만났는데도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 뜻을 품으니 너무도 옳지 않다"고 하여, 마침내 나를 끌어다 북쪽으로 가게 하였다. 그 아름다운 곳을 돌아보면 마치 하늘 저편에 떨어져 있는 듯하니, 아, 운명이라 한들 어찌하겠는가.
예전에 듣기로, 구인기라는 이가 골짜기 너머에 집을 짓고 속세를 멀리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기에, 나는 참으로 속으로 그를 부러워하면서도 은근히 이렇게 생각했다. "구군은 부모님이 살아 계시고 벼슬도 비록 음직이라고는 하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도 아닌데, 어찌 까닭 없이 그것을 내던지고 옛사람 상자평처럼 떠돌려 하는가? 이것은 잠시 몇 해쯤 머무르며 흉년에 양식이나 얻으려는 것일 뿐,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신해년(1611년) 봄, 내가 함산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을 때 구군이 여관으로 나를 찾아왔다. 내가 "자네가 비록 봉산에 집을 지었다지만 어찌 오래도록 그곳에서 지낼 사람이겠는가?" 하였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부안은 서울과의 거리가 겨우 닷새 길이고 길도 평탄하여 왕래하며 부모님을 뵙기에 그리 어렵지 않으며, 땅도 바다에 가까워 물고기와 소금으로 생계를 꾸리기에 넉넉합니다. 그대가 보기에도 서울의 인심과 세태가 함께 살 만하던가요? 저는 이 때문에 결단코 떠나 멀리 숨어 그것을 피하려는 것입니다. 더구나 벼슬의 녹을 받는 것은 원래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함인데, 부모님께서 제가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니, 제가 감히 한 몸의 영화를 위해 이해득실을 좇아 부모님께 근심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이어 말했다. "그곳에 몇 칸의 집을 지었는데, 지형이 탁 트이고 밝으면서도 깊숙하며, 서쪽으로는 봉산이 바라보이는데 아침 구름과 저녁 안개가 삼켰다 뱉었다 밝았다 어두웠다 하며 책상머리에서 아양을 떠는 듯하고, 남쪽으로는 두승산과 소요산 같은 여러 산이 눈 아래로 빙 둘러 떠받치고 있으며, 큰 바다가 그 남쪽을 지나는데 파도가 거세게 일어 하늘에 닿을 듯하고, 밀물이 포구에 들면 마치 물의 신이 흰 수레에 백마를 몰고 오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서 종일토록 기대어 누웠다가 매번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숲속을 거닐며 그림자를 끌고 배회하는데, 서늘하기가 마치 얼음 항아리나 신선의 궁궐에 들어간 듯하여 몸과 마음이 모두 상쾌해집니다. 그리하여 이를 몹시 즐거워하여 집의 편액을 '산월'이라 달았으니, 그대가 어찌 저를 위해 기록을 남겨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봉산은 내가 살고 싶어 했던 곳인데 그대가 먼저 가서 살게 되었으니, 그곳을 그토록 즐거워하는 마음이 나와 다르지 않을 터, 어찌 글재주가 없다는 핑계로 사양하겠는가? 더구나 그 바라보이는 경치가 아름답고 안개와 노을이 곱다는 것은, 내가 비록 그대의 집에 올라 보지는 못했어도 이미 그 십중팔구는 대략 알고 있네. 사면이 내려진 뒤에는 마땅히 곧장 그 옛 골짜기로 향해 가서 그대와 더불어 그 아름다운 땅을 반씩 나누어 갖고 내 목숨을 그곳에서 마칠 것이니, 그대의 집이 곧 나의 집인데 어찌 감히 즐거이 글을 지어 그대의 집을 빛내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위와 같이 적는다.
(용어) 무신년의 파직은 1608년, 허균의 나이 마흔 살 때 공주 목사 자리에서 파면된 일을 가리킨다.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 뜻"이란 원래 "복숭아꽃 피는 마을을 그리는 뜻"이라는 표현을 옮긴 것으로, 세상을 피해 숨어 살고자 하는 마음을 뜻한다. 이상향을 뜻하는 "무릉도원"에서 나온 말이다.
능파서실 이야기 (서기 1611년 2월 20일, 양력 추정)
나의 이웃 벗 이할 군은 용안 고을의 수령으로 다섯 해를 지냈는데, 다스림의 공이 있어 쇠락한 고을을 변화시켜 번성하게 하니 그 소문과 칭송이 호남 땅에 자자하였으므로, 나는 실로 그 소식을 듣고 부러워하였다. 신해년(1611년), 내가 죄를 얻어 함산으로 옮겨 가게 되었는데 마침 그 고을을 지나게 되어 더욱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그가 하루는 나를 여관으로 찾아왔기에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우연히 벼슬아치들이 관직에서 물러나면 돌아갈 곳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그에게 관직이 끝나면 어디로 갈 것인지 물었다. 그가 이렇게 답했다. "제게는 부모님이 계신데 서울에 계시니 마땅히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려야겠지요. 하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저는 돌아갈 곳이 없을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저의 선대 가업이 양근군에 있는데, 그 고을 남쪽에 상교암이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그 바위는 큰 강에 우뚝 임하여 산을 등지고 있는데, 층층이 가파르게 겹쳐 있어 아래로 여울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저는 옛터를 이용해 그 위에 서실을 지었는데, 난간과 격자창이 모두 물결을 향해 탁 트여 있어, 누워 있으면 마치 바다 한가운데를 항해하는 듯하고, 내려다보면 물이 깊고 맑아 물속에서 노니는 물고기까지 셀 수 있을 정도이며, 햇빛이 부딪쳐 반사되면 맑은 빛이 들보와 기둥에서 일렁입니다. 그리하여 물결에서 얻는 경치가 으뜸이므로 이름을 '능파서실', 즉 물결을 타고 넘는 서실이라 하였습니다.
강의 북쪽은 용문산과 마주하고 있어 푸른 안개와 아지랑이가 책상에 비쳐 아침저녁으로 색다른 정취를 자아내고, 산봉우리가 물결 속에 거꾸로 비치면 또렷하여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입니다. 동쪽으로 추익산을 바라보면 해가 뜰 때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이 상서롭고 고와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을 정도이며, 앞으로 강가 십여 리를 바라보면 흰 모래와 푸른 풀이 눈 아래로 종횡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강의 상류는 오대산에서 시작되어 여러 고을에서 배로 오르내리는 이들이 반드시 이 난간 앞을 지나가야 하니, 바람 받은 돛과 부드러운 노질이 안개와 물결 아득한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여 마치 이 기이한 풍경을 거들어 주는 듯합니다. 저는 이를 매우 즐거워하여 지팡이 짚고 신 신은 채 한가로이 거닐며, 봄이면 산꽃을 감상하고 여름이면 서늘한 낮을 맞이하고, 가을이면 서리 맞은 단풍이 취한 듯 붉고 겨울이면 산봉우리의 눈이 옥을 쌓은 듯하니, 사계절의 경치를 두루 갖추었습니다. 아침이면 먹일 소가 나가고 저녁이면 기러기가 손님처럼 모여들며, 굽이진 여울에는 밤낮으로 고기잡이 등불이 어지럽고 모래톱에는 새벽달이 흐르니, 곧 황혼과 새벽, 아침과 저녁의 풍경을 두루 갖춘 셈입니다. 게다가 밭 다섯 이랑이 있어 부지런히 갈면 죽은 먹을 만하니, 저는 이곳에서 편안히 노년을 보내기에 족합니다. 벼슬의 녹봉이란 그저 뜬구름 같은 것에 지나지 않으니, 그 썩고 냄새나는 것이 무엇이관대 감히 사람을 오래도록 붙잡아 두겠습니까?"
나는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그대는 참으로 어질다 할 만하네. 세상 사람들은 명예와 이익에 취해 부지런히 뒤쫓기를 마다하지 않아, 비록 파직되면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앞의 편안함만을 좇아 물러날 곳을 미리 마련하려 하지 않으며, 설령 그런 곳이 있다 해도 권세의 길에 빠져 역시 돌아보지 않는 이가 대부분이고, 그 가운데 조금이나마 사리를 아는 이라 해도 비용이 부족하거나 계책이 서투른 탓에 실행하지 못하니, 요즘 사대부들 가운데 몰락하여 낭패를 겪는 이들은 대개 이 세 가지 경우를 벗어나지 못한다네. 이 또한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그대는 능히 선대의 가업을 일으키고 빼어난 경치를 독차지하였으니, 비록 벼슬아치의 인장을 몸에 지니고 있어도 늘 물러나 쉴 뜻을 품고 있으며, 훌쩍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면 그 맑은 복을 편안히 누릴 것이니, 요즘 사대부들보다 훨씬 현명하다 하겠네.
다만 그대가 훌륭한 관리라는 칭송을 받고 있으니, 임명 문서가 조만간 내려온다면 이 고을이나 다른 고을에서도 그대의 공을 인정하여 곧 조정의 벼슬로 승진해 들어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니, 이런 때를 당하여 비록 물러나고자 한들 어찌 물러날 수 있겠는가? 나 같은 사람은 사리는 조금 알지만 계책이 서투르고 형편도 넉넉지 못하여, 뜻은 있어도 물러나지 못하고 자주 곤경에 빠졌으니 그대에 견주어 부끄러운 점이 많네. 다행히 사면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 강가에 나의 선산이 있어 다시 벼슬 없는 평범한 선비의 차림으로 성묘를 갈 것이니, 길이 반드시 그대의 서실 아래를 지날 것이오. 그때는 마땅히 배를 그 바위에 대고 서성이며 그대를 위해 '주인은 드물게 오는데 손님은 자주 온다'는 옛 시구를 읊는다면, 이 또한 강산의 맑은 경치를 저버리지 않는 일이 될 것이오."
그는 이 말을 듣고 배를 잡고 웃었다. 마침내 이렇게 써서 기록해 둔다.
사계정사 이야기 (서기 1611년 6월 25일, 양력 추정)
남원은 옛 대방국이 있던 곳으로, 옛날에 이른바 방장산이 있던 삼한 땅이다. 진나라 시절부터 방사들은 삼신산이 동해 가운데 있으며 그곳에 신선과 불로장생약이 있다고 하였는데, 임금치고 이 말을 반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나는 일찍이 《오악진형도》와 《동명기》, 《십주기》 같은 책들을 구해 살펴보았는데, "삼신산이 동해에 있다"고 하나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이런 곳이 있을 수 없으며, 그중 이른바 "방장산에 있다"는 말은 이미 대방 땅에 있다는 것이니, 영주와 봉래 또한 금강산과 묘향산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만약 그렇다면 그곳은 신령스럽고 아득한 구역이어서 사람이 쉬이 올라갈 수 없는 곳이니, 반드시 그 위에는 참된 신선들이 있어 복된 땅을 다스리고 신선의 세계를 맡아 그 일을 관장하고 있을 텐데도 세상에는 이를 아는 이가 없다. 이 어찌 참된 신선의 무리가 세속의 혼탁함을 꺼려 손사래를 치며 만나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사람에게 스스로 인연이 없어 다다르지 못하는 것인가?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른바 방장산이란 곧 오늘날 지리산이라 부르는 곳이다. 그 산의 우람하고 우뚝한 모습은 영남과 호남에서 으뜸이고, 수행이 높은 승려들이 이곳에 모여들며, 크고 화려한 절과 암자가 거의 수백 곳에 이르고, 층층이 이어진 돌길과 우뚝 솟은 봉우리, 그 위의 풀과 나무, 안개와 구름의 기이하고 풍성함이 이 세 신산 가운데 으뜸이니, 유람하는 이들은 눈이 어지럽고 정신이 아찔하여 돌아갈 것도 잊는다. 만약 진나라나 한나라의 임금이 이 소문을 들었더라면 반드시 옷자락을 걷고 발 적실 겨를도 없이 달려왔을 것이니, 아, 참으로 기이한 산이 아닌가! 이 산자락 아래에서는 오직 남원부만이 가장 크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 우뚝하고 우람한 기운을 받고 태어나, 나아가서는 나라의 기둥이 되고 물러나서는 고을에서 우러름을 받는 선비가 되어, 이름이 역사에 기록되고 뒷사람의 본보기가 된 이가 대대로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니, 이 또한 성대하다 할 만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방씨 집안이 더욱 뛰어난 인재를 냈는데, 지금 생존해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이 가운데는 상사 방군을 가장 으뜸으로 꼽는다. 그는 문장과 행실을 두루 갖추어 여러 해 동안 자신을 수양하며 지내 왔다. 세상 사람들이 그의 재주가 쓰이기를 바란 지 이미 오래이지만 그는 아직 옥돌을 품은 채 세상에 내놓지 않고 있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안타까워하였지만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데 급급해하지 않고 산수 사이에서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하였고, 사계 땅에 있던 선대의 가업이 전란으로 무너지자 서둘러 정사를 지어 옛 모습을 되살리고 그곳에서 살았다. 이미 이정귀와 신흠 두 분에게 글을 청하여 그 일의 자초지종을 기록하였고, 또한 조식과 노수신 두 분의 시를 걸어 두어 당대의 명작으로 그 뒤를 잇게 하였으니, 숲과 산이 더욱 빛나고 못과 정자가 생기를 띠어 참으로 인간 세상 밖의 신선 세계와 같았다. 그가 또한 보잘것없는 나의 글까지 구해 그 뒤에 이으려 하니, 나는 이런 글에 서툰 사람이라 어찌 감히 여러분의 훌륭한 글에 부족한 글을 덧붙여 그대의 아름다운 옥돌에 흠집을 내겠는가? 그렇지만 지리산은 내가 노닐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곳이고, 대방 땅은 내가 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곳이므로, 평소의 꿈은 늘 반야봉과 교룡산 사이를 맴돌았다. 듣자니 그의 정사 또한 빼어난 경치를 독차지했다 하니, 마음이 끌리고 흥이 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라, 어찌 잠자코 있어 그 정성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아, 방장산은 이미 신선의 산이라 하여 여러 신선이 오가며 노닐던 곳이라 하는데, 나는 끝내 가 보지 못하였고, 삼화와 신비한 영지는 불로장생의 약이라 하나 역시 문득 얻을 수가 없었다. 방군은 정신이 인간 세상 밖에서 노닐고 마음이 도와 하나가 되어 그 아래 편안히 앉아 여러 해를 지냈으니, 혹시 신선과 불로장생약을 만나고도 이를 비밀로 하여 남에게 알리지 않는 것은 아닌가?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귀양살이하는 이 몸에게 만약 사면이 내려 자유로워진다면, 마땅히 신선의 산에 올라 신선과 불로장생약을 찾아볼 것이며, 하늘의 운이 좋아 그대의 집에 오를 수 있다면 골짜기와 산, 대나무와 나무들이 나를 빙 둘러 맞아 줄 것이고, 주인은 두건을 쓰고 학창의를 입은 채 안개와 노을 속을 거닐며 들나물과 산과일을 소반에 올릴 것이니, 이 또한 복된 땅이요 신비로운 곳이라 할 만하다. 신선과 불로장생약이 모두 이 안에 있을 터인데, 하필이면 저 멀리 신선의 정원에 올라 옛 신선인 안기생과 선문자를 만나 보고 신선의 과일을 먹은 뒤라야 유쾌하다 할 수 있겠는가?
그 집안의 맑게 닦아 온 가업과 아름다운 경치는 이미 앞서 두 분의 글이 다 말해 놓았으므로 다시 논하지 않고, 다만 이것만을 적어 돌려보낸다.
(용어) "상사"는 생원이나 진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옥돌을 품은 채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는 것은 훌륭한 학문과 재주를 지니고도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옛날 초나라의 변화라는 이가 산속에서 얻었다는 보배로운 옥돌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함열현 객사 대청을 다시 지은 이야기 (서기 1611년 10월 20일, 양력 추정)
함열은 외따로 떨어져 호남의 바닷가에 있는 고을이다. 땅은 사방이 모두 20리가 채 되지 않고, 백성은 가난하여 모아 둔 재물이 없으며, 큰 산도 없어 좋은 재목이 될 만한 나무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관아의 건물들은 낮고 비좁으며 민가는 대개 띠풀로 지붕을 이었다. 게다가 정유년(1597년)의 전란을 겪으며 왜적이 몹시 잔인하게 굴어, 노비는 죽거나 도망친 이가 절반이 넘고 논밭은 황폐한 채 버려진 것이 열에 일고여덟이었다. 이 고을에 부임한 수령들은 모두 눈앞의 편안함만을 좇아 제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으므로, 관아와 창고는 어느 하나 새로 지어진 것이 없었다. 이것이 비록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라고는 하나, 고을을 맡은 수령으로서 그 책임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근래에 홍우라는 수령이 겨우 관아의 동쪽 곁채를 지어 사신을 맞아 머물게 하였으나, 임금을 상징하는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마다 대궐을 향한 예를 올릴 곳을 짓는 데까지는 미처 손이 미치지 못했다.
경술년(1610년)에 한씨 성을 가진 수령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법도를 삼가 받들며 조금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고, 검소함으로 몸가짐을 삼고 은혜로 백성을 보살피니, 백성들이 이미 화목해져 도망갔던 이들이 모두 돌아왔고 물이 고이고 잡초가 무성하던 땅이 모두 개간되었으니, 참으로 잘 다스려졌다 할 만하였다. 씀씀이를 아껴 재정이 넉넉해지자 관아의 힘을 모아 황폐한 터에 다시 관사를 세워 옛 모습을 되찾고 대청을 짓고자 하였다. 예를 행하는 자리는 법도상 마땅히 먼저 지어야 하므로, 이웃 고을 수령들에게 공문을 보내 배로 변산에서 목재를 실어 오게 하고, 세금으로 거둔 것 가운데 남는 것을 덜어 일꾼들을 먹이니,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목수들이 일을 마쳤음을 아뢰었는데, 그 모습이 훤하니 옛 모습보다 나았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관아에 큰 공사가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였다. 온 고을의 남녀노소가 모두 그 덕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우리 원님은 어질고도 재주가 있으시니, 어디서 이런 분을 다시 얻겠는가."
나는 죄를 지어 이곳으로 귀양을 왔는데, 이 수령의 보살핌을 받아 그 다스림을 익히 알게 되었으므로, 그 고을 노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대체로 요즘 수령이 되는 이들 가운데 가장 낫다는 이도 겉치레만 일삼으며 어리석은 백성에게 아첨하는 데 힘쓰고, 감사나 병사가 보내는 공문을 막아 내는 데에만 힘써 관아의 사무가 흐트러지고 지체되는 것은 돌보지 않으며, 함부로 옛 법규를 뜯어고쳐 좋은 평판을 얻으려 하다가, 조금만 견디기 힘들면 곧바로 자리를 버리고 떠나 버리니, 이런 이들은 다스렸다는 이름은 얻을지언정 고을은 그 때문에 오히려 버려지고 마는 것이오. 그다음가는 이들은 수완을 닦는 데에만 힘써 제 능력을 뽐내고,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일을 서둘러 벌이면서 그로 인한 폐단이 불어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저 남의 이목을 즐겁게 하는 데에만 신경을 쓸 뿐이니, 지치고 쇠약한 백성으로 하여금 힘든 부역에 시달리며 근심하고 탄식하게 만들지요. 가장 못한 이들은 제 직분도 다하지 않고 백성도 위로하지 않으면서 그저 백성의 살과 뼈를 벗겨 먹을 뿐이니, 이는 노약자들을 날로 흩어지게 하고 제 주머니만 날로 불려, 그 이익이 자기 한 몸 살찌우는 데에만 돌아가게 하는 것인데, 대개는 다들 이러합니다.
그런데 이 수령은 그대 백성들을 어질게 사랑하고 그대 고을의 황폐함을 되살려, 그대들로 하여금 베개를 높이 베고 마을에서 배를 두드리며 편히 지내게 하고, 순식간에 이토록 크고 훤한 집을 지었으되, 그대들은 집에서 편안히 잠을 자며 나무 한 개비 나르지 않았고 힘든 부역의 신음 소리도 듣지 않았으며, 또한 능히 그 청렴한 가풍을 지켜 세금 외에는 따로 거두어 가는 일이 없어 그대들의 살림을 넉넉하게 하였으니, 이 수령의 치적을 앞서 말한 세 부류의 수령과 견주어 본다면 어떠하며, 그 덕은 마땅히 비석에 새겨 둘 만하니, 여러 어르신들께서 어찌 이를 잊을 수 있겠소?"
그러자 여러 노인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대부께서 이 사실을 글로 남겨 후세까지 사라지지 않게 해 주시겠습니까?" 그 청이 하도 간곡하여, 내가 비록 죄를 지어 벼슬에서 쫓겨난 몸이나 예나 지금이나 어진 사대부의 올바른 행실이 무엇인지는 자못 이야기할 줄 알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 해서 함부로 아첨할 줄은 모른다. 그러니 어찌 감히 이 수령의 다스림을 묻어 버려 노인들의 뜻을 저버리겠는가? 마침내 이 소임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대신 이렇게 적는다.
수령의 이름은 회일이며, 상당 지방의 큰 가문 출신이다. 그 부친 상서공은 당대에 크게 이름이 높았는데, 이 수령은 삼가 집안의 가르침을 받들어 젊은 나이에도 벼슬살이의 이치를 알고 익숙히 처리함이 이와 같으니, 그래서 군자들이 더욱 그를 어렵게(대단하게) 여겼다.
성소부부고 제8권
9. 22:13
성소부부고 제8권 · 문부 5 · 전(傳)
출처: 성소부부고 제8권, 문부 5, 전
배경: 제8권은 문부 다섯 번째 갈래인 "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은 실존 인물의 삶을 기록하여 그 인품과 행적을 후세에 전하는 글이다. 효행으로 이름난 은사 엄 처사, 신분의 굴레에 갇혔던 천재 시인 이달, 신비한 도술을 부린 장한웅, 나병을 앓고 신선의 길을 걸었던 남궁두, 그리고 기이한 재주를 지닌 걸인 장생까지, 신분과 처지는 저마다 달랐지만 모두 세상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살아간 인물들이다. 허균은 이들의 삶을 기록하며 신분 제도의 부조리와 재능이 묻혀 버리는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을 곳곳에 드러낸다.
엄 처사의 삶을 기록한 글 (서기 1606년 6월 5일, 양력 추정)
엄 처사는 이름이 충정이며, 강릉 사람이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그는 직접 땔감을 하고 먹을거리를 마련해야 했다. 어머니를 모시는 데 효성을 다하여 아침저녁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어머니가 조금만 편찮으셔도 마음 편히 잠들지 못하고 손수 음식을 만들어 올렸다.
어머니가 비둘기 고기를 좋아하시자, 그물을 짜고 낚싯대에 끈끈이를 발라서라도 반드시 잡아다가 대접했다.
어머니가 글을 배워 과거를 보라고 타이르자, 그는 더욱 열심히 글공부에 힘을 쏟았다. 시와 부를 짓는 솜씨가 우아하고 힘이 있어 여러 번 지방 과거 시험에 뽑혔고, 마침내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렸다.
그는 어느 책이든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주역》과 《중용》을 깊이 파고들어 이치를 높고 멀리까지 밀고 나갔다. 그가 지은 글들은 옛 하도와 낙서의 깊은 뜻과도 서로 맞아떨어질 정도였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해지자 그는 하늘에 빌었다. 자신을 데려가고 어머니를 살려 달라고. 그러나 어머니가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자, 그는 여러 날 동안 물조차 마시지 않아 지팡이를 짚어야 겨우 일어설 수 있을 정도였다. 삼 년 동안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도 죽만 마시며 지냈다.
상복을 벗을 때가 되자 벗들이 다시 과거를 보라고 권했다. 처사는 울면서 말했다. "나는 늙으신 어머니를 위해 과거를 보려 했던 것이오. 이제 와서 과거를 보아 내 몸만 영화롭게 한들, 어머니께서는 그걸 누리실 수 없지 않소.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소." 그러고는 목메어 울음을 그치지 않으니, 사람들도 감히 다시 권하지 못했다.
만년에는 강릉에 속한 우계현으로 옮겨 가서, 산수가 그윽하고 빼어난 곳을 골라 띠풀로 지붕을 이은 집을 짓고 그곳에서 생을 마치려 했다. 궁핍하여 몸 하나 제대로 의탁할 곳이 없었지만 마음만은 편안하게 지냈다.
사람됨이 온화하고 순수하며 평탄하고 활달해서 남들과 부딪히는 일이 없었다. 평소에는 공손하고 정성스러웠지만, 고을의 잘잘못을 논하거나 사양하고 받고 취하고 주는 일에 있어서는 확고부동하여 아무도 함부로 범할 수 없었다. 모든 일을 오로지 의로움으로 재단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사랑하고 공경했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반드시 충과 효를 첫째로 삼았고, 화려한 명예나 이익 따위는 아예 벗어난 사람처럼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역사책을 읽다가 성공과 실패, 잘 다스려진 시대와 어지러운 시대, 군자와 소인을 가려내는 대목에 이르면 언제나 강개하여 명확하게 판단을 내렸는데, 막힘이 없어 듣기에 참으로 좋았다. 송나라의 충신 악비나 문천상이 죽어 가는 대목에서는 별안간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의 글은 간결하고 절실하면서도 운치가 있었고, 시 또한 장엄하고 아름답게 지어 냈다. 그래서 세상에 전해지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시가 백여 편이나 되었는데, 모두 시 짓는 법도에 딱 맞았지만 처사 자신은 그것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조정에서도 이 소문을 듣고 가상히 여겨 두 번이나 참봉 자리를 내렸지만 그는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일흔여덟 살에 세상을 떠났다. 생을 마치려 할 즈음, 오랫동안 왕래하던 몇몇 지인과 학자 십여 명을 불러 모아 술상을 차려 대접했다. 그러고는 이어서 자기가 죽은 뒤의 일을 부탁했으니, 반드시 선산에 장사 지내 달라는 것과 어린 손자를 잘 돌봐 달라는 것이었다. 아끼던 책들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단정히 앉은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평소 알지 못하던 선비들까지도 모두 찾아와 조문했다.
남긴 글들은 흩어지고 없어져서 제대로 모아 두지 못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논평한다. 처사는 집안에서는 효를 다했고 고을에서는 절도 있는 행실을 보였으니, 마땅히 높은 자리에도 오를 수 있었을 사람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궁핍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나, 그 훌륭한 재능이 조금도 쓰이지 못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사는 선비들 가운데는 이분처럼 이름이 묻혀 전해지지 않는 이가 처사 한 사람만은 아닐 것이니, 그래서 더욱 슬퍼진다.
(용어) 하도와 낙서는 옛 중국의 전설에서 유래한 그림과 글로, 각각 《주역》의 팔괘와 《서경》 홍범 편의 근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악비(무목)와 문천상(문산)은 중국 송나라의 충신으로, 각각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거나 원나라에 끝까지 맞서다가 처형된 인물이다.
손곡산인 이달의 삶을 기록한 글 (서기 1606년 6월 20일, 양력 추정)
손곡산인 이달은 자가 익지이며, 쌍매당 이첨의 후손이다. 그는 어머니가 천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세상에 나가 쓰일 수가 없었다. 원주의 손곡이라는 곳에 살면서 그 지명을 자기 호로 삼았다.
이달은 젊었을 때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지은 글도 무척 많았다. 사역원 소속의 한리학관이라는 벼슬을 얻었지만, 부당한 일을 겪고는 벼슬을 버리고 떠나 버렸다.
그는 최경창, 백광훈과 어울려 노닐었는데 서로 마음이 잘 맞아 몹시 기뻐하며 시 짓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달은 한창 소동파의 시법을 본받아 그 요체를 터득해서, 한 번 붓을 잡으면 순식간에 수백 편을 써 냈는데, 모두 풍성하고 화려해서 읊기에 좋은 시들이었다.
하루는 사암 박순 정승이 이달에게 말했다. "시를 짓는 길은 마땅히 당나라 시를 따르는 것이 정도라네. 소동파의 시는 호방하긴 하지만 이미 당시의 격에는 미치지 못하지." 그러고는 서가에서 이태백의 악부와 노래시, 왕유와 맹호연의 근체시를 꺼내 보여 주었다. 이달은 깜짝 놀란 듯, 시를 짓는 참된 법도가 바로 여기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예전에 배운 기법을 완전히 버리고, 옛날 숨어 살던 손곡의 농장으로 돌아갔다.
그는 《문선》과 이태백의 시, 성당 시대의 뛰어난 시인 열두 사람, 유장경, 위응물의 시, 그리고 양사홍이 엮은 《당음》까지 꺼내 놓고 문을 닫아걸고 외웠다. 밤을 꼬박 새운 적도 있었고 온종일 무릎을 자리에서 떼지 않은 적도 있었다. 이렇게 오 년을 보내자 어렴풋이 깨닫는 바가 있었다. 시험 삼아 시를 지어 보니 어휘가 무척 맑고 절실해져서, 옛날의 수법은 완전히 씻겨 나가 있었다.
그리하여 당나라 여러 시인들의 시 형식을 본받아 장편과 단편, 율시와 절구를 지어냈다. 글자와 구절을 다듬고 소리와 운율을 골똘히 헤아리면서, 법도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몇 달이 지나고 몇 해가 지나도록 고치고 또 고쳤다.
그렇게 애를 써서 십여 편을 지은 뒤 비로소 세상에 내놓고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읊으니, 모두 감탄을 그치지 못하며 놀라워했다. 최경창, 백광훈 같은 이들도 모두 자기는 따라갈 수 없다고 했고, 고경명, 허봉 같이 당대에 시로 이름난 이들도 모두 그가 성당 시대 풍의 시를 짓는다고 치켜세웠다.
그의 시는 맑고 새로우며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잘 지어진 것은 왕유·맹호연·고적·잠삼에 버금갔고, 다소 못한 것이라도 유장경과 전기의 운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신라와 고려 이래로 당나라 풍의 시를 지었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그를 따를 수 없었다. 이는 참으로 사암 박순이 그를 일으켜 세워 준 힘이었으니, 마치 진승이 봉기하여 한 고조가 나라를 세울 길을 열어 준 것과 같다고나 할까.
이달은 이 일로 이름이 온 나라에 울렸고, 신분은 접어 두고서라도 그를 귀하게 여겨 칭찬을 아끼지 않는 시문의 거장이 세네 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세속의 사람들 중에는 그를 미워하는 자들도 끊이지 않아, 여러 번 더러운 누명을 씌워 형벌의 그물로 몰아넣기도 했지만, 끝내 그를 죽게 하거나 그의 명성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이달은 용모가 그리 단정하지 못했고 성품도 호탕해서 스스로를 단속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시대의 예법에도 서툴러서 이런 점들 때문에 세상의 흐름에 자꾸 거슬렸다.
그는 옛날과 지금의 이야기를 잘했고,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이르면 술을 즐겨 마셨다. 글씨도 옛 진나라 명필들에 가까울 만큼 잘 썼다. 마음이 툭 트여 한계가 없었고, 먹고사는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았는데, 사람들 중에는 오히려 그 때문에 그를 더 좋아하는 이도 있었다.
평생 몸 하나 붙일 곳이 없어 사방으로 떠돌며 걸식까지 했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천하게 여겼다. 그가 궁색한 신세로 늙어 간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오로지 시 짓는 일에만 몰두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몸은 비록 곤궁했어도 그는 영원히 남을 명시를 남겼으니, 한때의 부귀로 어찌 그런 명예와 바꿀 수 있겠는가.
그가 지은 글들이 거의 다 흩어져 사라질 지경이었는데, 내가 골라 모아 네 권으로 만들어 전해지게 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논평한다. 명나라 태사 주지번은 일찍이 이달의 시를 보았다. 그가 지은 「만랑무가」를 읽고서는 무릎을 치며 감탄해 마지않으며 말했다. "이 작품이 이태백의 시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석주 권필도 이달의 「반죽원」이라는 시를 보고 말했다. "이백의 시집 속에 끼워 넣어도, 안목을 갖춘 사람이라도 가려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이 어찌 함부로 헛말을 할 사람들이겠는가. 슬프다, 이달의 시야말로 참으로 기이하게 뛰어났던 것이다.
(용어) 이첨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문신이자 문장가로, 호는 쌍매당이다. 최경창(호 고죽)과 백광훈(호 옥봉)은 이달과 함께 당나라풍 시를 잘 지어 '삼당시인'이라 불렸다. 사암은 정승 박순의 호다. 성당의 십이가는 당나라 성당 시대에 이름을 떨친 열두 시인을 가리킨다. 유장경(유수주)과 위응물(위좌사)은 당나라 중당 때의 시인이며, 백겸은 원나라 사람 양사홍으로 《당음》이라는 시선집을 엮었다. 제봉은 시인이자 의병장인 고경명의 호이며, 하곡은 허균의 친형인 허봉의 호다. 전기는 당나라 중당의 대표적 시인이다. 진섭(진승)은 진나라 말에 처음 반란을 일으켜 한 고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 길을 열어 준 인물이다. 주지번은 명나라 사람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왔으며 글씨와 그림, 시로 이름이 높았다. 권필(호 석주)은 정철의 문인으로 시와 문장에 이름을 떨쳤으나 광해군의 정치를 비판하는 시를 지어 귀양 가는 길에 죽었다.
장산인 장한웅의 삶을 기록한 글 (서기 1608년 10월 20일, 양력 추정)
장산인은 이름이 한웅인데, 어떤 내력을 지닌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그의 할아버지 대부터 삼 대에 걸쳐 외과 의술을 업으로 삼았다. 그의 아버지는 예전에 자리공이라는 약재를 먹고서 귀신을 볼 수도 있고 부릴 수도 있었다고 한다. 나이 아흔여덟이 되었을 때도 마흔 살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집을 떠나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집을 떠날 때 아들에게 책 두 권을 주었으니, 바로 《옥추경》과 《운화현추》였다.
장한웅은 그 책을 받아 수만 번을 읽고 나자, 자신도 귀신을 부릴 수 있게 되었고 학질도 고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던 일을 그만두고 마흔 살에 집을 떠나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곧 기이한 사람을 만나 마귀를 다루는 법을 배웠고, 도교의 이치를 담은 책 열 권도 읽었다. 빈 암자에 앉아 거의 먹지도 않으면서 삼 년을 보냈다.
하루는 계곡을 지나는데 승려 두 사람이 그를 따라왔다. 우거진 숲 사이에 이르자 호랑이 두 마리가 나타나 엎드려 그를 맞이했다. 장산인이 꾸짖자 호랑이들은 귀를 내리고 꼬리를 흔들며 목숨을 애걸하는 태도를 보였다. 장산인이 그중 한 호랑이에 올라타고 두 승려를 다른 호랑이에 함께 태워 절 문 앞에 이르니, 호랑이들은 그들을 내려놓고 물러갔다.
산에서 지낸 지 18년 만에 서울로 돌아와 흥인문 밖에서 살았다. 나이가 예순이었지만 용모는 정정했다.
이웃에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있었는데, 흉측한 일이 자꾸 일어나 살 수가 없다 하여 집주인이 그에게 귀신을 물리쳐 달라고 청했다. 장산인이 밤에 그 집으로 가 보니, 귀신 둘이 와서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저희는 문을 지키는 귀신과 부엌을 지키는 귀신입니다. 요사스러운 뱀이 이 집을 차지하고 간사한 짓을 벌이고 있으니, 제발 저것을 없애 주십시오." 그러고는 뜰 가운데 있는 큰 회화나무 밑동을 가리켰다. 장산인이 주술이 담긴 물을 뿜자 잠시 뒤 사람 얼굴을 한 큰 뱀이 번쩍이는 눈빛으로 꿈틀거리며 나오다가, 절반도 채 빠져나오지 못한 채 죽어 버렸다. 그것을 태워 버리게 하니 집은 마침내 깨끗해졌다.
사람들과 어울려 놀다가 화살로 물고기를 잡으면, 장산인은 그중 죽은 것만 골라 물동이에 넣고 단약을 넣었는데, 그러면 물고기가 다시 살아나 유유히 헤엄쳤다. 사람들이 죽은 꿩으로도 시험해 보라 하니, 역시 단약을 입에 넣어 주자 훨훨 날개를 치며 살아났다.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죽은 사람도 다시 살려낼 수 있습니까?" 장산인이 답했다. "보통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정욕에 방자하여, 몸을 떠난 넋과 혼백이 삼 년이 지난 뒤에야 완전히 끊어지니, 약으로는 살려낼 수 없소."
장산인은 실제와는 다르게 자기는 글자를 모른다고 말했지만 글만은 잘 지어 냈고, 밤눈이 어둡다고 하면서 밤에는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지만 어두운 곳에서도 작은 글자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삼베로 만든 병에 술을 담거나 종이로 만든 그릇에 불을 피우는 것과 같이, 세상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는 잡기 재주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이 많았다.
점쟁이 이화라는 사람이 점을 잘 친다고 한창 이름을 날렸는데, 장산인은 그를 자기보다 한 수 아래로 여겼다. 이화가 점치는 것을 볼 때마다 잘 맞히지 못하면 장산인이 고쳐서 말해 주었는데, 그 말이 모두 딱딱 들어맞아서 이화가 한마디도 감히 덧붙이지 못했다. 이화가 말했다. "장산인의 곁에는 늘 삼백 명의 귀신이 호위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사람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장산인의 나이는 일흔넷이었다. 그는 집안 재산을 처리하여 조카들에게 나누어 주고, 승복 차림에 지팡이 하나만 짚고 5월에 소요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의 승려에게 "금년은 내 명이 다하는 해이니 반드시 화장해 달라"고 일러 두었다. 오래지 않아 왜군이 들어와 앉은 채로 칼에 찔렸는데, 그의 피는 하얀 기름 같았고 시체가 쓰러지지도 않았다. 잠시 뒤 큰 뇌성이 울리며 비가 쏟아지자 왜군은 겁이 나서 물러갔다.
산의 승려가 그를 화장하니, 상서로운 빛이 사흘 밤낮으로 하늘에 이어졌고, 사리 일흔두 개를 얻었다. 그중 큰 것은 가시연 열매만큼 컸고 검푸른 빛을 띠었다. 이를 모두 탑 속에 안치해 두었다.
그해 9월, 장산인이 강화도에 사는 정붕이라는 사람의 집을 찾아왔다. 정붕은 그의 죽음을 알지 못했고, 그는 사흘을 머물다가 떠나면서 금강산으로 간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듬해에야 비로소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 사람들은 그가 죽은 뒤에 신선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정붕이라는 사람 또한 기이한 사람을 만나 점과 관상을 잘 보게 된 술사였다. 그가 하는 말은 대부분 신통하게 맞아들었고, 조정에서 참봉 자리를 내렸지만 받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그가 귀신을 부릴 수 있었지만 젊어서 죽었다고 말했다.
(용어) 양의는 옛 중국 주나라 때 외과 진료를 맡았던 벼슬 이름으로, 지금의 외과의를 뜻한다. 자리공은 뿌리를 약재로 쓰는 풀이다. 《옥추경》은 도교의 경전이고, 《운화현추》는 도술을 익히는 책으로 전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남궁 선생의 삶을 기록한 글 (서기 1608년 10월 25일, 양력 추정)
선생의 이름은 두이며, 대대로 임피에서 살아온 집안 출신으로 뿌리도 깊고 재산도 넉넉해서 고을에서 손꼽히는 집안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두 세대는 과거에 나가 벼슬살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남궁두만은 스승을 따라 과거 공부를 하여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서른 살에 처음으로 1555년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해 시험장에 이름을 울렸다. 일찍이 "큰 믿음은 약속하지 않는다"는 뜻의 글을 지어 성균관 시험에서 수석으로 뽑히니, 사람들이 모두 그 글을 서로 베껴 외우고 다녔다.
남궁두는 거만하고 고집이 세며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성격이어서, 재주만 믿고 고을에서 호기롭게 멋대로 지냈다. 잘난 체하며 고을 수령에게도 예의를 갖추지 않으니, 고을의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그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보며 앙심을 품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선생은 처음에 서울로 옮겨 가 벼슬길에 나설 계획을 세우고, 첩 한 사람만 시골집에 남겨 두었다. 그리고 해마다 가을이면 곧장 내려가 그해 수확을 처리했다.
첩은 무인의 딸이었지만 몹시 예쁘고 영특해서, 글과 셈법을 가르쳐 주면 남보다 빨리 알아챘다. 그래서 남궁두는 그녀를 가장 사랑했다. 그러나 남궁두가 서울에 살게 되면서 여러 달 동안 홀로 지내야 했던 그녀는, 몰래 남궁두와 성이 다른 먼 친척 조카와 정을 통하고 있었다.
1558년 가을, 남궁두는 급한 일로 고향으로 내려가다가 30리를 남기고 날이 저물었다. 하인들은 그 자리에 머물게 하고 혼자 말 한 필을 몰아 시골집으로 달려가 보니, 이미 등불이 켜진 밤이었다. 종들도 모두 잠자리에 들었는데 중문이 활짝 열려 있고, 그 안에 첩이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은 채 섬돌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조카 녀석이 동쪽의 낮은 담을 넘느라 발이 땅에서 반 자쯘 떠 있었는데, 첩이 급히 달려가 그를 안아 맞아들이고 있었다.
남궁두는 분노를 억누르며 일이 끝까지 이르기를 짐짓 천천히 기다렸다. 말을 바깥문 기둥에 매어 두고 몸을 숨긴 채 틈으로 두 사람을 엿보았다. 둘이 희희덕거리며 온갖 추잡한 짓을 하다가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남궁두는 그 실체를 확실히 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었다. 걸려 있던 화살통에 화살 두 개와 활 하나가 있었다. 마침내 화살을 당겨 쏘아 먼저 계집의 가슴을 꿰뚫어 즉시 쓰러뜨렸다. 그 사내가 놀라 일어나 북쪽 창문으로 뛰어넘으려 하자, 다시 쏘아 늑골에 적중시켜 죽게 만들었다.
남궁두는 관아에 알리고도 싶었지만, 그러면 가문을 더럽히는 일이 되고 고을 수령의 마음도 믿을 수 없어, 곧바로 두 시체를 끌어다 논 도랑 속에 묻어 버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말을 몰아 서울로 돌아왔다.
다음 날 날이 훤히 밝은 뒤에야 집안 종들이 첩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와 그 조카가 함께 도망친 것으로 여기고 조카의 집에 가서 물어보니, 그쪽에서도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있었다.
농장에 있던 종 하나가 예전에 남궁두의 곡식 백여 섬을 훔친 적이 있어, 남궁두가 오면 반드시 자신을 죽일 것이라 늘 걱정하고 있었다. 그자는 남궁두가 이번에 그 두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며 자취를 뒤지고 다녔다. 논 도랑 물 위에 기름이 떠 있는 것을 보고 삽으로 파 보니 두 시체가 엎어지고 뒤집어진 채로 나왔다. 그자는 곧바로 첩의 집안에 알렸고, 그 집의 늙은 병졸이 현령에게 고발하면서 남궁두의 집안과 사내의 집안 사이에 오래된 원한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로 내세웠다. 현령과 아전들은 본래부터 남궁두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기에 모두 잘됐다며 기뻐하고, 사사로운 미움 때문에 조카를 모살했다는 죄목을 씌워 사건을 꾸몄다.
서울에서 남궁두는 형틀에 묶이고 온갖 형구가 갖춰진 죄인의 수레에 실려 이산까지 끌려갔다. 남궁두의 아내가 어린 딸을 업고 뒤늦게 그곳에 도착해, 간수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밤에 형틀을 풀어 남궁두를 빼내 주었다. 날이 밝아서야 간수가 그가 없어진 것을 알았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를 읍내까지 끌고 와 어린 딸과 함께 옥중에 가두어 굶겨 죽였다.
임피에 있던 남궁두의 논밭과 재산은 모조리 몰수되어 죽은 두 사람의 집안에 나누어졌다.
남궁두는 곧바로 금대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법명을 총지라 했다. 계율을 몹시 엄하게 지키며 일 년을 보냈다. 그런데 원수로 여기던 집안에서 그가 있는 곳을 알아내고 병졸을 거느려 붙잡으러 오고 있었다. 그날 새벽 꿈에 산신이 나타나 "원수진 사람들이 곧 올 것이니 급히 달아나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급히 산을 내려가니, 그를 잡으러 오던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무도 붙잡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남궁두는 두류산(지리산)으로 향하다가 쌍계사에서 한 달가량 머물렀다. 이름난 절이라 승려와 속인들이 몰려드는 것에 싫증이 나서, 그곳을 떠나 태백산으로 향했다. 의령에 있는 한 들판의 암자에 이르러 쉬고 있었는데, 뒤따라 승려 한 사람이 도착했다. 곱게 생겼고 나이도 어린데, 삿갓을 벗고 당에 올라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그대는 사족이시군요. 어째서 뒤늦게 머리를 깎으셨습니까?" 잠시 뒤에는 "참을성이 있는 분이시군요" 하더니, 조금 있다가 "유학을 업으로 하셨으면 큰 벼슬을 하셨을 텐데요" 했다. 얼마 지나서는 껄껄 웃으며 "두 사람의 목숨을 해치고 죄를 지어 도망 온 분이시군요" 하는데, 말한 네 가지가 모두 딱 들어맞았다.
남궁두는 깜짝 놀라 어찌할 줄 모르다가, 밤이 되자 그의 방으로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그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인정하고, 무척 간곡하게 스승이 되어 달라고 청했다. 그 젊은 승려가 말했다. "나는 겨우 관상 보는 법만 이해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스승께서는 온갖 방술을 다 아십니다. 사람의 관상을 보고 그에 맞는 방술을 전해 주시는데, 더러는 부적과 주문으로, 더러는 천문으로, 더러는 풍수지리로, 더러는 점술로, 그 사람의 그릇에 맞춰 친절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관상법만 전수받았을 뿐 아직 지극한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어찌 감히 남의 스승이 되겠습니까." 남궁두가 지금 스승이 어디 계시냐고 묻자 승려가 답했다. "무주의 치상산에 계십니다. 그대가 그곳으로 가면 만나 뵐 수 있을 것입니다." 남궁두는 절하고 물러났다. 다음 날 아침 그의 안부를 살피러 가 보니 이미 떠나 버린 뒤였다.
남궁두는 곧바로 방향을 돌려 지팡이를 짚고 치상산에 이르러 온 산을 두루 살폈다. 절이 거의 수십 곳이나 있었지만, 어느 절에도 유별난 승려는 없었다.
한 해 동안 머물며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돌이 구르는 험한 비탈과 산꼭대기, 나는 새조차 이른 적 없는 곳까지 찾아다녔다. 세 번 네 번을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젊은 승려가 자기를 속인 것이라 여기고 서운한 마음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우연히 한 골짜기에 이르러 숲속을 흐르는 시내를 보니, 물 위에 큰 복숭아씨가 떠내려 오고 있었다. 남궁두는 속으로 기뻐하며 '이 계곡 안쯐에 신선 스승이 계신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는, 걸음을 재촉해 물줄기를 따라 몇 리쯤 들어가 우뚝 솟은 봉우리를 바라보니, 소나무와 삼나무가 해를 가리고 있는 곳에 허름한 세 칸짜리 집이 있었다.
벼랑에 기대어 지은 집으로, 돌을 쌓아 만든 층계 위에 대를 두었고 맑고 깨끗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옷자락을 거머쥐고 길을 따라 올라가니 동자가 맞이하며 물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남궁두가 읍하며 "총지가 신선 스승님을 찾아뵈러 왔습니다" 하니, 동자가 동쪽의 왼편 쪽문을 열어 주었다.
그 안에는 늙은 승려가 있는데, 모습은 마른 나뭇가지 같았고 해진 가사를 입은 채 나오며 말했다. "화상의 기골이 우람하여 보통 사람 같지 않은데, 무슨 일로 오셨는가?" 남궁두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어리석고 우둔한 저는 아무런 재주도 없습니다. 노스승님께서 온갖 방술을 다 아신다는 말을 듣고, 세상에서 그중 한 가지라도 익혀 보고 싶어 천 리 먼 길을 마다 않고 스승을 찾아왔습니다. 한 해를 헤매고서야 겨우 이곳을 찾았습니다. 제자가 되어 배우고자 하니 가르쳐 주십시오."
장로가 말했다. "산속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늙은이일 뿐인데, 무슨 방술이 있겠는가." 남궁두는 계속 절하며 간절히 애걸했지만 장로는 굳게 거절하며 문밖으로도 나오지 않았다. 남궁두는 처마 밑에 엎드린 채 새벽이 되도록 애타게 빌었고 아침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지만, 장로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여기며 가부좌를 틀고 선정에 들어 돌아보지도 않은 채 사흘을 보냈다. 남궁두가 갈수록 더 정성을 다하니, 그제야 장로는 그 정성을 알아보고 문을 열어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방은 한 길밖에 되지 않을 만큼 작았고, 나무 베개 하나가 놓여 있었으며, 북쪽 벽을 파서 여섯 굽이의 벽감을 만들어 놓았다. 자물쇠로 잠가 두고 열쇠 하나는 벽감 기둥에 걸어 두었으며, 남쪽 창문 위의 선반에는 책 대여섯 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장로가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군. 투박한 성품이니 다른 방술은 가르쳐 줄 수 없지만, 오직 죽지 않는 방술만은 가르쳐 줄 수 있겠네." 남궁두가 일어나 절하며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장로가 말했다. "무릇 모든 방술은 먼저 정신을 하나로 모은 뒤에야 이룰 수 있는 법인데, 더구나 넋과 정신을 단련하여 신선으로 탈바꿈하려는 사람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네. 정신을 모으는 일은 잠을 자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니, 그대는 먼저 잠을 자지 않도록 해 보게."
남궁두가 그곳에 도착한 지 나흘이 되었는데도 장로는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어린아이 대하듯 하루에 검은 콩가루 한 홉만 먹으면서도 전혀 배고프거나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남궁두는 이를 마음속으로 특이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런 가르침을 받고서는 온 정성을 다해 큰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빌었다.
첫날 밤에는 앉아서 밤 깊은 시각까지 견디자 눈이 저절로 감겼지만 참고 새벽까지 버텼다. 이튿날에도 정신이 흐리고 몸이 고달파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각고의 뜻으로 굳게 참았다. 사흘, 나흘째 되는 밤에도 몸이 지치고 고달파 앉아 있기조차 힘들어 더러는 머리를 벽에 찧으며 겨우 견뎌 냈다. 일곱째 밤을 넘기자 마음이 툭 트이듯 밝게 깨어나 상쾌한 기운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장로가 기뻐하며 말했다. "그대에게는 참으로 큰 인내력이 있으니, 무슨 일을 이루지 못하겠는가." 그러고는 경전 두 권을 꺼내 주며 말했다. "이것은 위백양이 지은 《참동계》라는 책으로, 수련하는 데 가장 좋은 비결이며 도가에서 가장 높은 가르침이다. 《황정경》의 내옥경 편은 기를 이끌고 오장을 단련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역시 도가의 오묘한 진리다. 이 두 책을 만 번쯀 읽으면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이니, 매일 열 번씩 읽도록 하게."
그리고 이어 말했다. "무릇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르려는 사람은 마음속 생각을 끊어 없애고 편안히 앉아 기와 정신을 단련해야 하며, 눈과 입과 귀 이 세 가지를 굳게 닫아 몸속의 상반된 기운이 다투는 그 틈에서도 도가 이루어지니,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네. 스스로 뛰어난 지혜와 타고난 자질이 없다면 빨리 이룰 수는 없네. 그대의 성품은 투박하고 굳세며 잘 참아 내니, 높은 가르침으로 이끌기는 어렵겠네. 먼저 곡식으로 하는 식사를 끊어 보게. 그것이 가장 낮은 데서 가장 높은 곳까지 이르는 방법일세.
무릇 사람의 생명이란 오행에서 정기를 받은 것이기에, 오장은 각각 오행이 주관하는 것이라네. 위장은 흙의 기운을 받아서, 사람이 마시고 먹는 것은 모두 위장으로 들어가지. 곡식의 정기로 몸을 건강하게 하고 병 없이 지낼 수 있다 해도, 그 기운이 결국 흙에 끌려 찌꺼기가 되어 땅으로 돌아가고 마니, 옛날에 곡식을 먹지 않았던 사람들이 다 이런 까닭이었네. 그대는 먼저 곡식을 끊는 것을 시험해 보게."
그러고는 곧 남궁두에게 이레 동안 하루 두 끼만 먹게 했다. 다시 이레 동안은 한 끼는 밥, 한 끼는 죽을 먹게 했고, 또 이레 동안은 죽 한 끼를 없애고 밥만 한 끼 먹게 했다. 다시 이레 동안은 밥 대신 죽만 한 끼 먹게 하고는, 이렇게 스물여드레가 지나자 밥이든 죽이든 아예 먹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열쇠로 위쪽 벽감의 자물쇠를 열어 칠을 입힌 합 두 개를 꺼냈는데, 하나는 검은 콩가루가 든 것이고 하나는 황정 뿌리와 복숭아씨 가루가 든 것이었다. 각각 한 숟가락씩 물에 타서 하루에 두 차례 먹게 했다.
남궁두는 본래 식사량이 커서 허기를 견디기 힘들었고, 몸이 수척해지고 피곤해지며 눈이 흐려져 물건을 분별하기 어려웠지만 계속 참아 냈다. 검은 콩가루를 스물한 번째 먹던 날, 갑자기 배 속이 가득 찬 듯한 느낌이 들며 더는 먹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그 뒤로는 측백나무 잎과 참깨를 먹게 했더니, 온몸에 부스럼이 촘촘히 돋아 견디기 힘들었다. 다시 백 일이 지나자 부스럼 딱지가 떨어지고 새살이 나와 완전히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다. 장로가 기뻐하며 말했다. "그대는 참으로 훌륭한 성품과 체질을 타고났군. 다만 욕심만 없애면 되겠네."
삼 년 동안 그곳에 머물며 두 가지 비결서를 각각 만 번씩 읽었다. 가슴속이 씻은 듯 시원해져 정신이 하늘과 통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장로는 자주 호흡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기를 운행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어 기가 이윽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자시·오시·묘시·유시에 맞춰 정해진 호흡 비결을 행하여 호흡의 길을 완성하니, 얼굴에 점점 살이 오르고 기운은 갈수록 상쾌해지며 온갖 잡념이 모두 사라졌다.
육 년이 지나자 장로가 말했다. "그대에게는 도를 이룰 골격이 있어 법대로 하자면 마땅히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를 만하네. 이 수준에서 그치더라도 옛날의 왕자교나 전갱 정도는 될 것이네. 욕심이 비록 일어나더라도 오직 그것을 참아 내야 하네. 무릇 욕심이란 먹고 성욕을 탐하는 욕심이 아니더라도, 일체의 망상은 참됨에 해로우니 반드시 모든 것을 비워 내고 고요한 마음으로 단련해야 하네."
그런 뒤 비어 있는 두 번째 방에 남궁두를 앉히고, 기운을 오르내리고 굴리고 뒤집는 수련법을 가르쳐 주었다. 가르치는 말마다 자상하고 친절했다. 남궁두는 배운 대로 태연히 앉아 움직이지 않은 채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장로를 떠올렸다. 그러는 동안에는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배부름을 모두 견뎌 낼 수 있었다.
하루는 윗 잇몸에서 자두 씨만 한 것이 생겨 단물을 혀 위로 흘려보내는 것을 느끼고 장로에게 알리니, 장로는 그것을 천천히 빨아 뱃속으로 삼키게 하고는 기뻐하며 말했다. "수련의 기초가 세워졌으니 이제 불기운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네." 그러고는 곧바로 벽에 하늘·땅·사람을 비춘다는 거울을 걸고 좌우에 칠성검 두 개를 꽂은 뒤, 절뚝거리는 걸음을 걸으며 주문을 외워 마귀를 물리치고 도를 이루게 해 달라고 빌었다.
수련한 지 거의 여섯 달 만에 단전이 가득 채워지고 배꼽 아래에서 금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남궁두는 도가 이루어져 가는 것을 기뻐하다가, 어서 빨리 완성하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솟아 억누를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몸속의 신비로운 기운에 불이 붙어 머리끝까지 타올랐고, 그는 고함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장로가 지팡이로 그의 머리를 내리치며 "슬프다, 크게는 이루지 못하겠구나" 하고는, 급히 남궁두를 앉혀 안정시키고 기운을 아래로 내리게 했다.
기운은 비록 가라앉았지만 마음이 두근거려 온종일 안정되지 않았다. 장로가 탄식하며 말했다. "세상에 드문 사람을 만나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전생의 업장을 다 걷어 내지 못해 끝내 일을 그르치고 말았으니, 이는 그대의 운명이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그러고는 회복시키는 차를 마시게 했다. 이레가 지나서야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운에 열이 오르지 않게 되었다.
장로가 말했다. "그대는 비록 신선의 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지상의 신선은 될 수 있을 것이며, 조금만 더 수양하면 팔백 살의 수명을 누릴 수 있을 것이네. 그대의 운명에는 마땅히 아들을 두게 되어 있지만 정자가 나오는 길이 이미 막혔으니, 약을 먹어 그 길을 열어야 하네." 그러고는 오동나무 열매만 한 붉은 환약 두 알을 꺼내 주었고, 남궁두는 그것을 삼켰다.
남궁두가 청했다. "우둔한 이 사람이 가르침대로 이루지 못한 것은 제 운명이 기박한 탓이니 무엇을 한스러워하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스승님을 모신 지 이제 칠 년인데도 아직 스승님이 어디서 오신 분인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부디 자세히 알려 주셔서, 훗날에라도 사모하는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게 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장로가 웃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물었다면 결코 말해 주지 않았겠지만, 그대는 그토록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자세히 말해 주겠네.
나는 상주 땅 큰 성씨 집안의 후손으로, 태사 권행의 증손자였네. 송나라 희령 2년, 곧 1069년에 태어났지. 열네 살에 나병에 걸렸는데, 부모가 나를 거두지 않고 숲속에 내버렸네. 밤에 호랑이 한 마리가 나를 안아다 돌집에 놓아 주고는, 눈에 불을 켠 채 새끼 두 마리에게 젖을 먹이면서도 곁에 있는 나를 끝내 해치지 않더군. 통증이 극에 달했을 때는 오히려 호랑이 어금니에 물려 속히 죽지 못하는 것만이 한스러울 정도였네.
초라라는 풀이 벼랑의 구멍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잎이 넓고 뿌리가 크더군. 시험 삼아 씻어서 먹어 보니 뱃속이 조금 채워지더군. 그것을 먹으며 몇 달이 지나자 부스럼이 줄어들고 점점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네. 그래서 많이 캐다가 끼니마다 그것을 먹었네. 산 중턱에 있는 것을 거의 다 캐 먹으며 몇백 일을 지내자 부스럼이 모두 벗겨지고 온몸에 푸른 털이 돋아나기에, 기뻐하며 실컷 먹었더니 다시 백 일이 지나 몸이 저절로 움직여져 산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네. 나병은 이미 나았지만 예전에 살던 마을을 알아볼 수 없어, 길에 나와도 갈 곳을 몰라 서성이고 있었네.
그런데 뜻밖에 승려 한 사람이 산봉우리 아래로 지나가기에, 찾아가 길을 막으며 물었네. '이곳은 어떤 산입니까?' 승려가 답하기를 '여기는 태백산이고, 진주부에 속한 땅입니다' 하더군. 근방에 절이 있느냐고 물으니 승려가 '서쪽 봉우리에 절이 있지만 길이 끊겨 쉽게 오를 수 없습니다' 했네. 나는 곧 몸이 날듯이 가벼워져 그 암자에 이르렀는데, 선방은 낮에도 문이 닫혀 있고 사람이라곤 없더군.
손으로 곁채의 문을 열고 들어가 안채로 가 보았더니, 늙고 병든 승려 한 사람이 굵은 삼베옷을 두르고 탁자에 기댄 채 숨을 헐떡이며 거의 죽어 가는 모습이었네.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더니 '지난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 「우리 스승님의 비결서를 전할 사람이 지금 오고 있다」고 하더니, 그대의 얼굴을 보니 참으로 그 사람이구나' 하면서, 일어나 보자기를 풀어 책 한 뭉치를 꺼내 주었네.
그러고는 '이것을 만 번 읽으면 그 뜻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니, 애써 힘쓰고 게으름 피우지 말게' 하였네.
내가 이 책을 누가 전한 것이냐고 물으니, '신라의 의상대사께서 중국에 들어가 정양진인을 만나 이 책을 받으셨는데, 세상을 떠나실 때 나에게 이 책을 맡기며 이백 년 뒤에는 반드시 전할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 하셨네. 그대가 바로 그 예언에 맞는 사람이니 받아서 힘써 정진하게. 나는 이제 전할 사람을 만났으니 죽으려네' 하고는, 가부좌를 튼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네. 나는 곧바로 그분을 화장하여 검푸른 빛의 사리 백 개를 얻어 탑 속에 안치했네.
책 뭉치를 풀어 살펴보니 《황제음부경》, 《금벽용호경》, 《참동계》, 《황정내외경》, 《최공입약경》, 《태식심인》, 《통고정관》, 《대통청정》 같은 경전들이었네.
나는 그 암자에 들어가 홀로 살며 수련을 했네. 마귀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둘러쌌지만, 듣지도 보지도 않으니 저절로 사라져 갔네. 온갖 애를 쓴 지 열한 해 만에야 신선의 태를 이루었네. 법대로라면 마땅히 세상을 벗어나 떠났겠지만, 옥황상제께서 이곳에 머물며 우리나라 세 지방의 모든 신을 거느리라 명하셨네. 그래서 여기 머문 지가 벌써 오백여 년이 되었네.
기한이 차면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네. 그동안 수십 명을 만나 보았지만, 더러는 기운이 지나치게 예민하고 더러는 너무 둔하고 더러는 인내력이 부족하고 더러는 인연이 얕고 더러는 욕심이 많아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네. 만약 도를 이루는 사람이 있었다면 마땅히 내 임무를 맡기고 옥경으로 돌아갔을 텐데, 수백 년을 헛되이 보내고도 그런 사람 하나 만나지 못했으니, 이는 아마 내가 아직 이 티끌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지 못해서 그런 것일 게야."
남궁두는 장로와 오랫동안 같은 방에서 잠을 자면서도, 그가 늘 숨기는 것이 있어 이상하게 여겼다. 배꼽 아래 한 치쯤 되는 부분을 늘 가리고 남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 까닭을 묻고 한번 보고 싶다고 청하니, 장로가 웃으며 말했다. "그걸 어찌 쉽게 보여 주겠나. 보여 주면 그대는 깜짝 놀라 까무러칠 것인데." 남궁두가 "왜 놀라겠습니까, 한 번 보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하니, 장로가 싸맨 것을 풀어 놓았다. 그러자 눈부신 금빛 백여 줄기가 천장까지 뻗쳐 나왔다. 도저히 마주 볼 수가 없어 의자 밑으로 숨으니, 장로는 다시 그것을 감싸 원래대로 해 놓았다.
남궁두가 또 물었다. "스승님께서는 진작부터 모든 신들을 다스린다 하셨는데, 어째서 찾아와 뵙는 신이 하나도 없습니까?" 장로가 답했다. "나는 정신을 날려 보내 그들의 조화를 받아 왔을 뿐이네." 남궁두가 여러 신들을 직접 보고 싶다고 청하니, 장로가 말했다. "다음 해 정월 보름날을 기다려야 하네."
그날이 되자 장로는 벽감 속에서 옷 상자를 꺼내, 여덟 가지 색깔로 된 두건을 쓰고, 일곱 별과 해와 달의 무늬를 수놓은 도포를 입고, 둥근 청옥에 사자를 그린 띠를 두르고, 다섯 가지 꽃무늬를 놓은 신을 신었다. 손에는 여덟 모난 옥으로 만든 여의주를 쥐고 섬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남궁두는 서쪽을 향해 그를 모셨고, 동자는 한쪽 모퉁이에 서 있었다.
갑자기 대 위의 잣나무 두 그루에 각각 울긋불긋한 꽃등불이 걸리더니, 잠시 뒤 산골짜기를 가득 채운 수천수만 그루의 나무마다 모두 꽃등불이 걸려 붉은 불꽃이 온 공간을 가득 채워 대낮같이 밝아졌다. 기이하고 괴상한 짐승들이 나타났는데, 더러는 곰이나 호랑이 같기도 하고 더러는 사자나 코끼리 같기도 했다. 어떤 것은 표범인데 다리가 둘뿐이었고, 어떤 것은 뿔 없는 규룡의 모습에 날개가 달려 있었으며, 어떤 것은 뿔 없는 용의 모습이었다. 어떤 것은 용의 몸에 말의 머리가 달렸고, 어떤 것은 뿔이 셋인데 사람처럼 서서 빨리 달렸으며, 어떤 것은 사람 얼굴을 하고 눈동자가 세 개나 달렸는데, 이런 것들이 수백 마리나 되었다.
또 코끼리, 노루, 사슴, 돼지 모습을 한 것들로 노란 눈에 하얀 이빨, 붉은 털에 하얀 발굽을 지니고 뛰고 할퀴어 대는 것들이 천여 마리쯤 되어 모두 줄지어 좌우에 모시고 섰다. 그 밖에도 금빛 사내아이와 옥빛 계집아이 차림을 한 이들이 지휘 깃발을 들고 수백 명이나 서 있었고, 창검을 든 군사들도 천여 명이 빙 둘러서 있었다.
대 위에는 온갖 향기가 물씬 풍기고 옥 노리개가 부딧치는 소리가 쟁쟁거렸다. 곧이어 푸른 장삼을 입고 상아로 만든 홀을 들고 물빛 옥을 차고 고깔을 쓴 두 사람이 섬돌 아래서 몸을 굽히며 외쳤다. "동방의 극호림, 광하, 홍영산 세 대신군께서 뵙습니다." 이 세 대신은 모두 붉은 금관을 쓰고 붉은 도포에 옥띠를 두르고, 홀을 단정히 쥐고 구름 무늬가 그려진 신을 신고 칼과 노리개를 찬 채 키가 훤칠했다. 얼굴은 희고 길었으며 눈매가 밝고 수려했다. 장로가 일어서서 두 손을 맞잡아 예를 표하니, 세 대신은 함께 두 번 읍하고 물러갔다.
또 외쳤다. "봉호, 방장, 도교, 조주, 영해 다섯 신선 고을의 참된 관리들이 뵙습니다." 다섯 신은 각각 자기 지방의 색을 나타내는 도포를 입었는데, 관이나 노리개는 앞의 이들과 같았고 모두 헌걸차고 수려했다. 장로가 일어서니 다섯 신은 모두 두 번 절하고 물러갔다.
또 외쳤다. "동해, 남해, 서해에 있는 장리, 광야, 옥초, 현롱, 지폐, 총진, 여궤, 동화, 선원, 임소 등 열 개 섬의 여관들이 뵙습니다." 그러자 선녀 열 명이 모두 꽃을 수놓은 금빛 두건을 쓰고 붉은 구슬로 된 흔들이 노리개를 꽂았는데, 구슬과 비취옥이 얼굴에 영롱하게 반사되어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금빛 봉황 무늬를 놓은 하얀 저고리에 파란 비단으로 지은 무릎 아래까지 닿는 긴 치마를 드리우고, 태을영부라는 부적을 차서 번쩍번쩍 번갯불이 일었으며, 푸르고 붉은 모가 난 낮은 신을 신었다. 훤칠하고 허리가 긴 그들이 남자들처럼 절을 올리니, 장로는 일어나지 않고 앉은 채로 절을 받았고 여관들은 곧 물러갔다.
또 외쳤다. "천인, 자개, 금마, 단릉, 천량, 남루, 목주 일곱 지역을 다스리는 사명신장들이 뵙습니다." 그러자 붉은 머리띠에 깃을 꽂고 무인들이 입는 홑바지와 꽃수를 놓은 앞가림 옷을 입은 이들이 나타났는데, 팔에는 활집과 화살통을 비스듬히 걸고 손에는 붉은 창을 쥐고 있었다. 모두 사자와 호랑이를 섞은 듯한 모습으로 붉은 머리털을 곧추세우고 금빛 눈동자에 용의 수염이 달려 있었다. 이들은 읍만 하고 절은 하지 않은 채 물러갔다.
또 외쳤다. "단산, 현림, 창구, 소천, 자야 다섯 신을 따르는 산과 숲, 늪과 못, 고개와 물길, 성황당 등의 모든 귀신 우두머리들이 함께 뵙습니다."
이 다섯 신장의 모습은 앞의 일곱 지역 신장들과 비슷했고, 각각 백여 명씩의 영관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어떤 것은 키가 작고 못생겼으며 어떤 것은 키가 컸고, 어떤 것은 말쑥했으며 어떤 것은 팔이 여섯 개, 눈이 네 개나 달려 있었다. 여자들 중에는 늙고 못생긴 이도 있고 곱고 젊은 이도 있었는데, 옷은 모두 자기 지방의 색을 따라 입고 줄지어 서서 네 번 절한 뒤 물러나 다섯 줄로 늘어섰다.
장로가 어린 동자에게 명하여 붉은 깃발을 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갔다가 남쪽으로 돌아 서쪽에 이르러 중앙 부대 앞에 서게 하니, 동자가 아뢰었다. "모든 신령들이 다 모였지만, 오직 위주의 조 부인만 오지 않았습니다." 소천신이 나와 무릎을 꿇고 말했다. "그분은 귀양을 가서 이제 인간으로 강등되었고, 그를 대신할 이가 아직 오지 못했습니다."
장로는 광하를 비롯한 세 진인을 불러 앞에 세우고 물었다. "경들은 세 방면을 나누어 다스리며 상제의 어진 덕을 실천해서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입은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요즘 액운이 닥쳐와 만백성이 재앙에 걸려들고 있는데, 이를 구할 방책을 세워 놓았는가?" 세 사람은 모두 거듭 탄식하며 말했다. "참으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어제 봉래산의 치수대감이 자하원군이 계신 곳에서 와서 홍영산에 들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진인들이 구광전 위에서 상제를 모시고 있는데, 삼도제군께서 말씀하시길, 「이 속세에 사는 삼한의 백성들이 지나치게 교활하고 간사하여 속임수를 잘 쓰고 복을 아낄 줄 모르며,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효불충하며 귀신을 모독하였다. 그래서 어느 골짜기에 사는 여우 얼굴을 한 큰 마귀를 빌려다가 붉은 땅의 군대를 모두 모아 소탕하려 한다. 그리하여 이어질 전쟁 칠 년째에는 나라가 다행히 망하지는 않더라도 세 지방 백성의 열에 다섯이나 여섯을 죽여서 경계로 삼으려 한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신하인 저희도 그 말을 듣고 모두 두려워 마음이 떨렸습니다. 그러나 이는 큰 운수가 정한 바인데, 어찌 저희 힘으로 감히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장로도 역시 탄식을 그치지 못했다. 잠깐 사이에 중앙 부대에서 대포 한 발을 쏘는 소리가 울리자 네 개의 부대가 모두 호응하여 북과 쇠북을 울려 대었다. 그러자 나무 위에 걸려 있던 등불이 하나씩 땅으로 떨어지고, 아득히 깊은 골짜기에 짙은 구름이 내리깔렸다.
장로는 방으로 들어와 관과 옷을 벗고 등불을 밝히더니 방 한가운데 앉았다. 남궁두는 깜짝 놀라 한동안 정신을 놓고 있었다.
다음 날 남궁두를 불러 말했다. "그대는 이미 이곳과의 인연이 얕아 오래 머무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니, 산을 내려가 머리를 기르고 황정을 먹으며 북두칠성에 절하도록 하게. 음탕한 자나 도둑이라도 죽이지 말고, 매운 채소와 소고기·개고기 따위를 먹지 말며, 남을 몰래 해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땅 위의 신선일세. 이렇게 행하고 수양하기를 쉬지 않는다면 또한 하늘로 오르는 신선도 될 수 있을 것이네. 《황정경》과 《참동계》는 도가의 높은 가르침이니 외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게. 《도인경》은 노자의 도를 전하는 글이고, 《옥추경》은 우레를 맡은 여러 신들을 존숭하는 글이니, 늘 지니고 다니면 귀신들이 두려워하고 우러러볼 것이네. 이 밖에 마음을 닦는 요체로는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이 최상일세. 보통 사람이 선과 악 한 가지를 생각만 해도 귀신들이 곁에 벌려 서서 그것을 먼저 알아채고, 상제께서 굽어보심이 몹시 가까워서 무슨 일을 하나 하면 그것을 곧바로 하늘의 기록에 남기니, 억제하고 응답해 주는 효과가 그림자나 메아리보다도 빠른 것이네. 이치에 어두운 자들은 이것을 업신여기며 하늘은 꽉 막혀 있으니 두려울 게 없다고 하지만, 저 창창한 하늘 위에 참다운 주재자가 세상을 다스리는 손잡이를 쥐고 있음을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그대는 참아내는 마음이 강하긴 하지만 욕심을 아직 다 없애지 못했으니, 혹시라도 삼가지 않으면 한 번 그릇된 길에 떨어지는 것으로도 끝없이 오랜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네. 삼가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남궁두는 눈물을 흘리며 가르침을 받고, 곧 인사를 드리고 산을 내려왔다. 돌아보니 사람이 살던 그곳은 이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임피에 이르러 보니, 예전의 집은 터도 남아 있지 않았고 농장은 이미 두세 차례나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서울로 가 보아도 옛집은 터만 남아 주춧돌이 묵은 풀 속에 이리저리 널려 있을 뿐이었다. 눈물을 삼키며 그대로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예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착실한 늙은 종이 하나 있었는데, 해남에 살며 논밭과 집도 넉넉하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몸을 의지했다.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얼마 뒤 자기 주인임을 알아채고는 서로 붙잡고 통곡했다. 그 종은 자기가 살던 곳을 비워 남궁두가 지내게 해 주었다. 남궁두는 그곳에서 평민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아들과 딸을 하나씩 낳았다.
선생은 비록 다시 가업을 일으켰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끝까지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는 해남을 떠나 용담 지역에 은거했는데, 깊은 산골짜기를 골라 산 것은 치상산에서 가까운 곳이라 다시 그 신선 스승을 만나기를 바랐던 계획이었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 황정과 솔잎을 캐어 식사로 삼으니 몸이 날이 갈수록 더욱 건강해져, 수염도 희어지지 않고 걸음걸이도 날아갈 듯 가벼웠다.
1608년 가을, 나 허균이 공주에서 파직당하고 부안에 살고 있었다. 선생께서 고부에서부터 걸어서 내 여관방을 찾아오셨다. 그리하여 네 가지 경전의 오묘한 뜻을 나에게 전해 주시고, 또 그분이 신선 스승을 만났던 그 전말에 대해서도 위에서 말한 것처럼 상세히 들려주셨다.
선생의 나이는 그해로 여든셋이었으나 얼굴은 마치 마흔여섯이나 일곱쯤 된 사람 같았다. 시력이나 청력도 조금도 쇠약하지 않았고, 형형한 눈동자와 검은 머리털이 의연하여 여윈 학과 같은 풍모였다. 어떤 때는 며칠씩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참동계》나 《황정경》을 쉬지 않고 외우기도 했다.
이따금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몰래 해로운 일을 하지 말고, 귀신이 없다고 말하지 말게. 착한 일을 하고 덕을 쌓으며 욕심을 끊고 마음을 단련한다면 최고의 신선 경지에 이를 수 있으니, 난새와 학이 며칠 안에 내려와 그대를 맞이할 것이네."
나는 선생의 음식과 거처가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씀드리니, 선생이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하늘로 날아오르려 했는데, 너무 빨리 이루고 싶은 마음에 결국 이루지 못하고 말았네. 우리 스승께서는 이미 지상의 신선이 되었다면서, 부지런히 수련하면 팔백 살까지 기약할 수 있다고 허락해 주셨네. 그런데 요즘은 산속이 너무 한가하고 적막해서 속세로 내려왔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고, 가는 곳마다 젊은이들이 늙고 누추한 나를 멸시하니 인간 세상의 재미라곤 전혀 없네. 사람이 오래도록 곁에 두고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본래 즐거운 일인데, 이렇게 쓸쓸하고 즐거움이라곤 없으니 내가 왜 오래 살려 하겠는가. 그래서 속세의 음식을 가리지 않고, 아들을 안고 손자를 재롱부리게 하면서 남은 생을 보내다가, 자연의 흐름을 따라 깨끗이 세상을 떠나 하늘이 정해 준 바를 따르려 하네. 그대야말로 신선의 재주와 도를 이룰 골격을 지녔으니, 힘써 행하고 쉬지 않는다면 참된 신선이 되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네.
우리 스승께서 일찍이 나에게 인내력이 있다 하셨지만 나는 끝내 참아 내지 못하고 이 지경이 되었네. '참을 인' 이 한 글자야말로 도가의 오묘한 비결이니, 그대 또한 이를 삼가 지니고 놓치지 말게." 얼마간 머무시다가 붙잡는 손을 뿌리치고 떠나셨는데, 사람들은 그가 다시 용담으로 갔다고들 했다.
내가 논한다. 전해 오는 말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교는 숭상했지만 도교는 숭상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신라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몇천 년이 지났지만, 도를 얻어 신선이 되어 떠나간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 전해 오는 말이 과연 맞는 말인가. 그러나 내가 직접 만나 본 남궁 선생을 두고 말한다면,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선생이 스승으로 모셨던 분이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관상 보는 사람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그 일도 확실히 믿을 만한 것은 아니며, 이야기 속에 나온 여러 일들도 다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요컨대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실체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다만 선생의 나이와 용모로 본다면, 참으로 도를 얻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여든의 나이에도 그처럼 건강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이 또한 도교를 숭상하는 일이 실제로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궁벽한 바다 밖 먼 곳에 있어, 옛 선문자나 안기생 같은 뛰어난 은자가 드물었다. 그러나 바위틈에 그런 기이한 사람이 있어, 천백 년 만에 남궁 선생으로 하여금 그를 만날 수 있게 했으니, 그 누가 "이 좁은 땅에는 그런 인물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도에 통달하면 신선이 되고, 도에 어두우면 평범한 사람으로 남는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이 귀로 주워듣고 그대로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만약 선생이 빨리 이루려는 욕심을 없애고 끝내 수련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면, 저 선문자나 안기생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다만 그 한 가지를 다스려 내지 못해 거의 다 이루어진 공을 마지막에 놓치고 말았으니, 아,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용어) 오독은 참혹한 형벌을 가하는 다섯 가지 형구를 말한다. 위백양은 한나라 사람으로 도술을 익혀 산에 들어가 도를 이루었으며, 도가의 중심 경전인 《참동계》와 《오행상류》라는 책을 남겼다. 《황정경》은 도교의 경전으로, 내경·외경·둔갑연신경 세 종류가 있다. 삼보는 도가에서 말하는 귀·입·눈을 가리킨다. 염부제는 불교 경전에서 말하는 이 세상, 곧 사람이 사는 세계를 뜻하는 말이다. 뇌부는 도가에서 우레를 맡은 신들의 관청을 뜻한다.
걸인 장생의 삶을 기록한 글 (서기 1608년 11월 20일, 양력 추정)
장생이라는 사람은 어떤 내력을 지닌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1589년 무렵 서울을 오가며 구걸로 살아갔다. 그의 이름을 물으면 자기 자신도 모른다고 했고,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어디서 살았는지 물으면 이렇게 답했다. "아버지는 밀양의 좌수였는데, 제가 태어난 지 세 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가 종첩의 속임수에 빠져 저를 농장 종의 집으로 쫓아냈습니다. 열다섯 살에 그 종이 상민의 딸에게 장가들게 해 주어 몇 해를 살았는데, 아내가 죽자 이곳저곳을 떠돌며 호남과 호서 지방 수십 고을을 거쳐 이제 서울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용모는 매우 우아하고 수려했으며 눈매도 그린 듯이 고왔다. 이야기와 웃음이 막힘없이 술술 흘러나왔고, 더욱이 노래를 잘 불러서 그 소리가 애절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키곤 했다. 늘 자줏빛 비단으로 지은 겹옷을 입고 다녔는데, 춥거나 더울 때에도 갈아입는 법이 없었다.
기생집이라면 안 다녀 본 곳이 없어 서로 잘 알고 지냈고, 술만 있으면 곧바로 스스로 떠다가 잔뜩 마시고는 노래를 불러 흥겹게 해 주고는 훌쩍 떠나가 버렸다.
어느 때는 술이 한창 취하면 눈먼 점쟁이, 취한 무당, 게으른 선비, 소박맞은 여인, 걸인, 노파 들이 하는 짓을 흉내 냈는데, 하나하나가 아주 똑같아 보였다. 또 얼굴로 십팔나한의 표정을 흉내 내면 꼭 그대로 닮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입을 찡그려 피리, 거문고, 비파, 기러기, 고니, 두루미, 집오리, 갈매기, 학 등의 소리를 내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밤에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내면 이웃의 닭과 개들이 모두 따라 울고 짖어 댈 정도였다.
아침이면 밖으로 나와 거리와 저잣거리에서 구걸을 했는데, 하루에 얻는 것이 거의 서너 말이나 되었다. 그중 몇 되쯗만 끓여 먹고 나머지는 다른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밖에 나오기만 하면 거지 아이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다음 날도 또 그렇게 하니, 사람들은 그가 하는 짓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전에 악공 이한이라는 사람 집에 더부살이한 적이 있었다. 그 집에서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계집아이가 호금을 배우느라 아침저녁으로 마주쳐서 서로 친숙해졌다. 하루는 그 아이가 구슬로 이어진 자줏빛 봉미 노리개를 잃어버렸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했다. 사연을 들어 보니, 아침에 길거리를 지나오다 잘생긴 소년과 마주쳐 웃으며 장난을 걸다가 몸이 닿고 스쳤는데 그러고 나니 봉미가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애처롭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러자 장생이 말했다. "우습구나, 어린 것들이 감히 그런 짓을 하다니. 아가씨야 울지 마라. 저녁이면 반드시 내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오마." 그러고는 훌쩍 나가 버렸다.
저녁이 되자 그 아이를 불러 따라오게 하고는 서쪽 거리를 지나 경복궁 서쪽 담장을 따라 신무문 모퉁이에 이르렀다. 그는 아이의 허리를 큰 띠로 묶어 왼쪽 어깨에 들쳐 메고, 풀쩍 뛰어 몇 겹으로 겹쳐진 문을 날듯이 넘어 들어갔다. 한창 어두울 때라 길도 분간할 수 없었지만, 급히 경회루 위로 올라가니 소년 둘이 있었다. 그들은 촛불을 들고 마중 나와 서로 보며 껄껄 웃었다. 그러더니 대들보 위 뚫린 구멍에서 금구슬, 비단, 명주가 무척 많이 나왔는데, 그 아이가 잃어버린 봉미도 그 안에 있었다.
소년들이 그것을 돌려주자 장생이 말했다. "두 아우는 행동을 삼가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 종적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게." 그런 뒤 다시 아이를 끌고 날듯이 북쪽 성벽을 넘어 그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아이는 다음 날 아침이 밝기도 전에 이씨의 집으로 가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했는데, 장생은 술에 취해 누워 코를 쿨쿨 골고 있었고, 집안사람들 역시 그가 밤에 외출한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1592년 4월 초하루, 그는 값을 나중에 갚기로 하고 술 몇 말을 사 와 아주 취한 채 길을 가로막고 춤추고 노래하기를 그치지 않다가, 거의 밤이 되어서야 수표교 위에서 쓰러졌다. 다음 날 해가 뜬 뒤 늦게서야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는데,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뒤였다. 시체가 부패해서 벌레가 되더니 모두 날개가 돋아 하룻밤 사이에 다 날아가 버리고, 옷과 버선만이 남아 있었다.
무인 홍세희라는 사람은 연화방에 살았는데, 장생과 친하게 지냈다. 그해 4월 이일 장군을 따라 왜적을 막으러 나섰는데, 조령에 이르렀을 때 장생을 만났다. 장생은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끌며 그의 손을 붙잡고 무척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사실 죽지 않았소. 바다 동쪽으로 건너가 어느 나라를 찾아 떠났던 것이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지금 죽을 나이가 아니니, 병란을 만나면 높은 숲으로 몸을 피하고 물에는 들어가지 마시오. 정유년에는 몸을 삼가서 남쪽으로 가지 마시오. 혹 나라의 공무를 맡더라도 산성으로는 오르지 마시오." 말을 끝내고는 날듯이 사라져 버려, 순식간에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홍세희는 과연 탄금대 전투에서 그 말을 기억해 내고 산 위로 달아나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597년 7월, 궁궐을 지키는 금군으로 숙직하다가 오리 정승 이원익에게 임금의 교지를 전하는 임무를 맡게 되면서, 장생이 일러 준 경계를 그만 모두 잊고 말았다. 돌아오던 길에 성주에서 적군의 추격을 받게 되자, 황석성이 전쟁 준비가 잘 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는데, 성이 함락되면서 그도 함께 죽고 말았다.
나는 젊었을 때 의협심 있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장생과도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가깝게 지내며 그의 온갖 재주를 다 구경할 수 있었다.
슬프다, 그는 신이었을까, 아니면 옛날에 이른바 검선이라 부르던 부류의 사람이었을까!
(용어) 좌수는 조선시대 지방 고을의 향청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자리다. 호금은 깡깡이와 비슷한 현악기다. 이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순변사로 상주·충주 등지에서 왜적과 싸웠다.
성소부부고 제9권
9. 22:14
출처: 성소부부고 제9권, 문부 6, 서(편지)
배경: 제9권부터는 허균이 실제로 주고받은 편지글이 실려 있다. 조정의 요직에 있던 재상들에게 정치적 조언을 올리는 편지, 벗들에게 유배지의 생활이나 벼슬살이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편지, 형에게 억울한 사정을 해명하는 편지, 벼슬을 그만 내려놓고 싶다는 뜻을 밝히는 편지 등 열한 통이 실려 있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던 허균의 처지와, 직설적이면서도 할 말은 하는 그의 성격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완성 이 정승께 올리는 글 (서기 1600년 8월 7일, 양력 추정)
어제는 오랫동안 문하에 있었으나 경림군이 온종일 나가지 않고 저녁도 안 먹은 채 배고픔을 참고 돌아왔습니다. 아침에 심부름꾼이 편지를 가지고 왔으니 마땅히 달려가 뵙고 가르침을 들어야 하겠으나, 마침 임금의 관에 옻칠을 하는 일로 장생전에 와 있고 날도 저물어 가는 터라 편지로 아뢰옵니다.
요즘 사람들이 좌우 정승 자리에 계신 분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대감께서도 잘 아실 줄 압니다만, 이는 한두 젊은 사람이 일부러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퍼뜨린 것일 뿐입니다. 이제 만약 다시 사직을 청하신다면 바로 그들이 바라는 바를 들어주는 셈이 됩니다. 주상께서 노련하고 신중한 분을 구하여 이 자리를 맡기신 것은 참으로 올바른 공론을 듣고자 하심이니, 부디 쉽게 물러나실 계책을 세우지 마시고, 옳고 그름을 힘써 가려내고 바른 여론을 북돋우시어, 간사한 무리가 발붙일 문은 막고 충성스러운 신하가 나아올 길은 여시며, 붕당을 흩어 버리고 온 나라와 더불어 새롭게 일을 시작하심으로써 주상의 각별한 은혜에 보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들이 백관을 이끌려 하는 것을 결코 따르지 않으셔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대감의 말씀과 같으니, 부디 뜻을 바꾸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박씨 성을 가진 젊은이의 비석 일은 지난번에 이미 형님댁에 편지로 알려 드렸으니 마땅히 처리하여 아뢸 것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 찾아뵙고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삼가 아룁니다.
완성께 올리는 두 번째 편지 (서기 1600년 8월 12일, 양력 추정)
어제저녁 대감댁 하인이 쪽지를 제 처소에 던져 주고 갔는데, 그때 제사 준비하는 곳에 있었기에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받아 보니 타이르시는 말씀이 자상하시어, 저를 버리지 않으셨음을 깊이 느꼈습니다.
윤씨 성을 가진 선비 한 사람과 저는 글로써 서로 사귀게 된 사이입니다. 그가 자주 시를 보내와 화답을 구했고 또 자기가 지은 글을 가지고 와 좋고 나쁨을 묻곤 하여 이로 인해 정이 제법 익숙해졌습니다. 그는 또 거리낌 없이 제게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지만 저는 매번 그저 듣기만 했을 뿐입니다.
지난번에는 그가 임금을 뵙고 나서 곧바로 저희 집에 찾아와 임금 앞에서 여러 신하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자세히 전해 주었습니다. 또 그가 정승 앞에서 그 뜻을 정면으로 꺾어 버린 일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옳음과 그름이 있는 법인데 정승께서는 둘 다 그르다 여기시고, 홍씨와 이씨 두 분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안목이 퍽 부족하니, 이첨이 함께 죄를 얻은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 이첨은 곧 제가 어릴 적부터 한 책상에서 함께 공부한 벗으로 지금까지도 사귐이 변함없기에, 저는 그저 "홍씨와 이씨와 함께 견책을 받는다면 이첨으로서는 참으로 원통할 것입니다" 하고 대꾸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일어나 문득 자리를 떠나 버렸습니다.
지금 대감의 말씀을 받들어 보니,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은 중간에서 이 이야기를 전한 자가 누구이기에 감히 갖가지 말을 지어내어 대감의 귀를 어지럽혔는가 하는 점입니다. 참으로 괴이한 노릇입니다. 대감께서 저를 친혈육처럼 여겨 주시는 정이 너무도 지극한 터에, 제가 어찌 어린아이의 지껄임을 듣고 그 말에 부화뇌동하여 스스로 마음을 저버리는 죄에 빠지겠습니까. 결코 그럴 리가 없으니 부디 마음에 두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조판서 후보에 오른 일을 두고 사람들은 모두 대감께서 해원부원군의 말씀에 치우쳐 그리하신 것이라 하며, 대감 역시 후회를 면치 못하실 것이라고들 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서인 쪽 의견을 내는 이라 해서 반드시 나쁘다 할 수는 없고, 천거받은 세 분 판서 후보 또한 모두 여러 사람이 바라던 인물들이니, 이 천거는 참으로 여론에 부합하는 것이므로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서인들이 송강 정철을 옹호하는 것도 저마다 자기 소신을 지키는 것이니 다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만, 성혼과 이이의 문인들에 이르러서는 다른 인재의 등용 길을 너무도 많이 막고 있습니다. 벼슬자리는 나라의 공적인 그릇이며 하늘과 땅, 사계절에도 순환이 있는 법인데, 어찌 한쪽 사람들에게만 벼슬을 몰아주어 훌륭한 인재들이 낮은 자리에서 헛되이 늙어 가게 한단 말입니까. 이렇게 계속 나가다가는 하늘이 인재를 낳아 주는 그 어진 뜻을 저버리게 되고 나라가 나라 꼴을 갖추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정승께서 서인을 등용하시는 것은 사사로움 없는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일이니 저로서는 그 처사가 지당하다 여기는데, 대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제사가 끝나면 곧바로 달려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감의 헤아림을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김정경에게 준 글 (서기 1603년 10월 1일, 양력 추정)
손수 쓰신 편지를 받으니 얼굴을 뵙는 듯한데, 더구나 위로해 주시는 말씀까지 지극하니 기쁨과 감격이 한꺼번에 밀려오네. 벼슬자리란 내 몸 밖의 것이니, 한 번 물러났다 해서 어찌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
내 평생 유보로 인해 곤욕을 치른 일이 참으로 많았다네. 지난번 호남에서 전주에 이르렀을 때 유보가 마침 모친상을 당했는데, 상을 치르는 처사가 비록 크게 미진했다 하더라도 지방에서 온 나그네인 내가 그 일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유보를 헐뜯는 사람 가운데 어떤 이가 나를 끌어들여 증인으로 삼으려 하니, 사람들이 나를 보기만 하면 다투어 그 경위를 묻곤 했네. 그런데 유보는 예전에 내가 상중의 몸으로 행실이 근실치 못하다며 나를 욕한 적이 있었으니, 설령 그가 상중에 도장을 함부로 써서 관아의 재물을 빼돌리고 하인을 마구 때린 일을 내가 직접 보았다 한들 어찌 그것을 입에 담아 마치 보복하듯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까닭에 묻는 사람이 백 명이 넘었어도 나는 모두 잘 모른다고 답했었네. 그런데 이 때문에 도리어 의심이 내게 쏠려 마침내 사람들은 "이제는 오히려 서로 짜고 모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까지 말하니, 이보다 더 원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양오가 이 소문을 듣고 와서 말해 주기에, 나로서는 애초에 이런 일이 없었기에 이렇게 내 입으로 밝혀 두려는 것이네.
유보가 기씨와 송씨 두 집안을 다그쳐 캐물은 것도 어찌 내가 그들과 친해서 그리된 것이겠는가. 미움을 사게 된 실마리는 참으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네. 그 후에 형님댁에서 왕실과 혼인을 맺을 때, 천한 종 몇 사람이 유보의 지시를 받아 이조판서를 임금께 이간질하려고 언문 편지를 조작하여 귀한 분들을 얽어매려 하였고, 마침내 이 일로 소란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그로 인해 나에게까지 의심이 미친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네. 오늘날 사대부 집안의 혼인에서도 신부의 작은아버지가 감히 말을 전하여 그 시어머니에게 통할 수는 없는 법인데, 하물며 궁궐 속 깊고 엄한 곳에서 어찌 그럴 수 있었겠는가. 오래 두면 저절로 밝혀질 일이라 굳이 변명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었네.
나는 본디 벼슬의 영달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제 한 가지 구실을 얻어 절로 파직되었으니, 가을비가 잠시 그치면 마땅히 말 한 필을 타고 자네 집을 찾아본 뒤 그길로 동쪽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네. 이즈음 자네가 만약 별장에 있다면 지나는 길에 며칠 묵으면서 옛일과 오늘의 일을 마음껏 이야기해 보세. 항아리에 남은 단술로도 술 못하는 손님을 대접할 수 있을 것이고, 석순과 자라로도 술상 안주로 충분할 것이니, 부디 바람 드는 난간을 치워 놓고 기다리시게. 끝내 이 약속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네. 이만 줄이네.
석주에게 준 글 (서기 160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서울에 있을 때 형이 강화도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 보니, 내가 벼슬을 잃은 것을 위로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이미 수레를 단속하여 도성 문을 나서던 참이었는데, 찾아온 심부름꾼이 편지만 놓고 곧 떠나겠다 하기에 워낙 경황이 없어 답장을 쓰지 못했으니, 예의를 갖추지 못한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집을 떠난 지 이틀 만에 김정경의 영평 별장에 이르니 샘과 골짜기, 시내와 산의 아름다움은 지난해와 다름없었으나, 다만 아쉬운 것은 무너진 누각을 아직 다시 세우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방 안에 들어서니 단술이 항아리에 가득하여 술 위에 뜬 밥알이 한창 부풀어 오르고 있었는데, 형을 모셔다 큰 잔으로 권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었습니다. 형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틀림없이 군침을 흘릴 것입니다. 지금도 성벽에는 최경창과 허봉의 시가 남아 있어 맑고 깨끗하여 읊조릴 만했고, 이안눌의 시도 있었으나 바빠서 화답하는 시를 짓지는 못했습니다.
비를 만나 통구에서 자고 단발령을 넘어 멀리 일만이천봉을 바라보니, 빙 둘러선 봉우리들이 마치 서로 인사를 나누며 저의 나들이를 맞아 주는 듯했습니다. 유람의 흥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것을 스스로 억누를 수 없어 말을 재촉하여 장안사에 드니 날이 이미 저물어 있었습니다. 도관이라는 승려가 호남에서 왔는데 그가 글을 제법 알기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매우 총명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시왕백천동에 들어서니,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땅 위로 삐죽삐죽 솟아 있고 물은 솟구쳐 흘러내리며 단풍은 우거져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15리쯤 가서 영원암에 이르러 그곳에서 묵고, 새벽에 망고대를 향해 가는데 골짜기는 좁고 벼랑은 깎아지른 듯하여 쇠줄을 붙잡고 겨우 올랐습니다. 소나무 겨우살이 아래에서 잠시 쉬고 마침내 만폭동에 들어가 양사언이 써 놓은 여덟 글자를 감상하니, 그 필세가 나는 듯하여 이 산과 더불어 웅장함을 다툴 만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명연에 이르렀다가 저녁에는 표훈사에서 쉬니, 그 절의 주지 담유 스님이 자리와 상을 마련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날이 밝자 진헐대에 올랐다가 거기서 가마를 버리고 걸어서 개심사에 오르니, 일만 봉우리가 눈앞에 죽 늘어서 있어 그 모습을 무어라 이름 붙이기 어려웠습니다. 높이 솟아 치켜든 봉우리는 마치 형이 우뚝하게 홀로 빼어난 모습 같고, 헌걸차게 기울어진 봉우리는 마치 형이 취해서 옥이 무너지듯 쓰러지는 모습 같으니, 이런 풍경을 보며 제 마음을 넉넉히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17일 밤에는 정양루 동쪽에서 달구경을 하였습니다.
원통암에서 아침을 먹은 뒤, 지름길로 사자봉을 질러가 보덕굴에서 묵고 화룡담을 거쳐 마하연에 이르렀습니다. 바람과 물, 삼나무와 회나무가 밤새도록 서로 부딪치고 너울거리며 소리를 내니, 마치 생황 소리와 학의 울음이 서늘하게 구름 밖에서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곧장 운흥을 거쳐 구정봉에 오르다가 비가 내려 비로봉에는 오르지 못하고, 적멸암에 이르러 성문동을 내려다보니 뭇 골짜기가 층층이 겹쳐 있어 마치 긴 바람이 바다에 파도를 일으켜 놓은 듯했습니다. 두 승려가 말하기를 "이곳에서 박달곶으로 가면 은신대까지 다다를 수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저는 신발을 단단히 매고 새벽 기운을 헤치며 백전에서부터 구불구불한 길을 5리쯤 내려가니,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한데 모인 곳에 거센 물줄기가 그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데, 바위들은 모두 괴물처럼 생겨 마치 서로 다투어 치고받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맨발로 그곳을 건넜습니다.
한낮에는 자월암에서 쉬었는데, 이 암자는 내산과 외산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 그 빼어난 경치를 모두 모아 놓은 곳이었으나, 대개는 구경꾼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남쪽 비탈을 구불구불 내려와 불정대에 이르렀는데, 잠시 후 바람과 천둥이 골짜기 안에서 일어나며 큰 구름이 평평하게 깔리고 발아래로 번갯불이 번쩍이며 우렛소리가 쿵쾅거리니 놀라서 내려다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윽고 천둥이 그치자 천 개의 폭포가 푸른 절벽에 시원하게 쏟아져 내려, 마치 옥빛 무지개들이 다투어 자태를 뽐내는 듯했습니다.
날이 저물어 유점사에 이르니 정두원이 뒤미처 찾아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습니다. 하루를 쉬고 산을 내려오면서 백천교를 거쳐 가섭동 쪽으로 길을 잡아 명파에서 묵었습니다. 삼일포는 예전에 익히 지나던 곳이므로 이번에는 곧장 강릉 쪽으로 향했으니, 같은 곳을 두 번 구경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수성에서 최립을 만났는데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사흘이나 저를 붙잡아 두었습니다. 또 형이 요사이 어떻게 지내는지 물으시며, 자기가 지은 시문을 모두 꺼내 보여 주셨는데 편편이 주옥같았습니다.
이어 예전에 머물렀던 낙산 땅을 찾으니, 그 고을 노인들이 모두 술병과 땔감을 가지고 와 다리를 데워 주었고, 태수 또한 기생과 풍류를 더하여 성대히 대접해 주니, 옛 사안이 동산에서 노닐던 흥취가 절로 일었습니다.
말이 절뚝거려 닷새를 머물다가 강릉 외가로 돌아오니, 고향집을 떠난 지 벌써 여덟 해라 세월의 풍상을 겪은 서글픈 마음이 갑절이나 더했습니다. 읍 동쪽에 작은 서당이 있어 학생 대여섯 명이 문을 닫고 책을 읽고 있으니, 남은 생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으나 하늘이 사람의 욕심을 허락해 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바다와 산을 두루 구경한 이야기는 대략 이러합니다. 그러나 그때 만약 형과 함께 다녔더라면 그사이에 지은 훌륭한 시가 마땅히 많았을 터이니, 형이 이 말을 들으면 틀림없이 유쾌해하면서도 크게 아쉬워하실 것입니다.
벼슬할 뜻은 식은 재처럼 싸늘해지고 세상맛은 씀바귀처럼 쓰기만 하니, 조용히 지내는 즐거움이 벼슬살이보다 나은데 어찌 이 편안함을 버리고 남을 위해 애쓰겠습니까. 다만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슴에 맺히지만 거리가 멀어 만나기 어려우니 회포를 다 풀 길이 없습니다. 가을 기운이 점점 짙어 가니 부디 부모님을 잘 모시고 그 뜻을 잘 받들기 바랍니다. 편지로는 하고 싶은 말과 뜻을 다 적지 못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용어) "옥이 무너지듯 쓰러지는 모습"이라는 표현은 용모가 매우 아름다운 사람이 술에 취해 넘어지는 모습을 형용하는 옛말이다. 동진 시대 산도라는 이가 혜강을 두고 "그 사람됨이 마치 우뚝 선 외로운 소나무 같고, 술에 취했을 때는 마치 옥산이 무너지려는 것 같다"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사안이 동산에서 노닐던 흥취"란, 동진의 사안이 일찍이 동산에 은거하며 자손들과 함께 시 모임을 열 때마다 반드시 기생과 술상을 푸짐히 마련하여 노닐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표현이다.
이조판서 허욱께 올리는 글 (서기 1604년 12월 26일, 양력 추정)
아래로 내려온 통지를 받고 삼가 살펴보았습니다.
이조판서로 승진하시어 온 조정 관원을 두루 관장하는 소임을 맡으시니, 선비들의 여론이 한마음으로 화합하여 대감을 받드니, 참으로 종묘사직과 만백성이 의지할 바입니다. 감히 조정을 위하여 이런 인재를 얻은 것을 축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집안의 말석에 끼어 있는 사람이니,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축하하며 바라는 그 마음을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어르신께서는 맑고 충성스러우며 도탑고 소박하시어 충정공의 훌륭한 가풍을 넉넉히 이어받으셨으니, 벼슬길에 오르신 지 30여 년 만에 지위가 재상급에 이르셨음에도 털끝만큼도 권세에 기댄 흔적이 없으시며, 그 청렴한 이름과 맑은 행실은 세상 사람들이 다 듣고 본 바입니다. 주상께서 깊이 헤아리시어 이조판서로 등용하셨으니, 이 어찌 어르신의 신중하고 성실한 마음이 평소부터 여론에 부합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선비들의 여론이 둘로 갈라지고 참된 인재는 아득히 보이지 않는데, 윗자리에 있는 이들조차 더러 스스로 자만한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여, 뜻있는 선비들은 물러나 숨어 지내고 도리어 간사한 자들이 관을 털고 벼슬길에 나서니, "물고기 눈알을 옥구슬로 착각한다"는 옛 탄식이 오늘에 이르러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본디 어느 당파에도 치우치지 않으시고 밝게 살피시어 공평하고 명석한 판단에 어긋남이 없으시니, 부디 옛사람 진관이 남긴 "배는 한쪽으로 치우치면 갈 수 없다"는 가르침을 본받으시어, 그때그때의 여론에 휘둘리지 마시고 훌륭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가려 뽑아 인재들이 모두 어르신의 문하에 모이게 하신다면, 이는 나라가 복을 받고 어진 이들이 경사를 맞이할 뿐 아니라 우리 가문의 충직한 가풍이 오늘에 이르러 다시 떨쳐 일어나는 일이 될 것이니, 어찌 거룩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을 굽히고 남의 뜻에 영합하여 구차하게 벼슬자리나 지키려 하거나, 좋은 자리에 앉아 제 한 몸의 호사만 누리는 것은 속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니, 어르신께서는 결코 그런 마음을 품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만약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을 것 같으면 미련 없이 몸을 빼내어 물러나시고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는 것 또한 좋은 방책일 것입니다. 어르신께서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그 사람의 옳은 말까지 저버리지 않으신다면 온 집안에 참으로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훗날 마무리가 좋지 않아 한 번 그르치는 바람에 모든 일이 어그러진다면 아무리 후회한들 어찌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 부디 어르신께서는 스스로를 아끼시어 임금의 은총과 벼슬을 영광으로만 여기지 마시고, 위로는 선조의 유훈을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자신을 위해 헤아리시기를 천 번 만 번 정성을 다해 비옵니다.
어르신 문하에 드나드는 한두 젊은이는 본디 점잖은 선비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오가며 부추기고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낸다면 어르신께 끼치는 해가 반드시 클 것이니, 부디 그들과 깊이 이야기를 나누지 마시고 인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들이 권세에 빌붙는 것이 너무도 심하니, 훗날 그들이 어르신을 저버리는 날이 오면 반드시 오늘 제가 드린 말씀을 떠올리시게 될 것입니다.
어르신을 아끼는 간절한 마음에서 저도 모르게 함부로 마음에 거슬리는 말씀을 올리게 되었으니, 부디 잘못이라 꾸짖지 말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만 갖추어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용어) 진관은 송나라 때 사람으로 호가 요옹이다. 장돈이 재상이 되어 진관이 그를 찾아뵙자, 진관의 명망을 익히 들었던 장돈이 그에게 지금 가장 급한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진관은 이렇게 답했다. "배에 비유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무게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배가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왼쪽 물건을 오른쪽으로 옮겨 놓아도 이는 여전히 치우친 것입니다. …… 천자께서 공에게 정치를 맡기셨으니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장돈이 "사마광이 간사하니 그를 처단하는 것이 가장 급합니다" 하고 답하자, 진관이 말했다. "공의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배의 균형을 잡으려 하면서 왼쪽 물건을 오른쪽으로 옮기는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이렇게 하신다면 천하의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입니다."
형님께 답해 올리는 글 (서기 1605년 9월 2일, 양력 추정)
고을 아전이 이르러 손수 쓰신 편지를 받들어 보니 타이르시는 말씀이 사무치게 자상하시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이고 얼굴에 땀이 흘러 절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저는 본디 성품이 자유분방하여 세속을 따르기 좋아하지 않고 마음 또한 좁아서 참고 받아들이지를 못하니, 벼슬살이하며 일을 처리할 때에도 간혹 엉성하게 얼버무리는 실수를 면치 못하고, 일이 그르쳐진 뒤에야 마음속으로 자책한 적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러나 분한 마음에 사람을 함부로 죽여 그 욕이 감사에게까지 미쳤다는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제가 비록 경솔하고 못났다 해도 거기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니, 말을 전한 사람이 잘못 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고을에 이방헌이라는 힘깨나 쓰는 백성이 있어 고을에서 함부로 위세를 부리며 도망친 백성을 받아들이고 힘없는 백성들의 땅을 삼켜 한 지방에 해를 끼쳐 온 지 오래인데, 제가 부관으로 있을 때부터 그의 못된 행실을 귀에 익히 들어 왔습니다. 지난번 근거 없는 소문이 두 고을 수령을 잇달아 얽어매어 사람들 귀에 널리 퍼졌기에, 저는 틈을 보아 그에게 죄를 주어 변방으로 내쫓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침 같은 고향 사람인 병마절도사 이봉수와 술을 마시다가 시비가 붙어 봉수를 때리고 갓을 찢고 옷을 뜯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일로 고을 사람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관아에 잇달아 소장을 올려 하소연하므로, 저는 사정을 갖추어 감사에게 보고했더니 감사는 신문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두 집안이 모두 세력 있는 가문인 데다, 중전께서 이 지방에 머물러 계실 때 조정 사대부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었던 터라 청탁하는 편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미처 다 읽어 볼 겨를조차 없었으니, 저 역시 처벌을 결정하기가 어려워 짐짓 열흘 동안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보름날 밤 관아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니 계집종이 와서 아뢰기를, 흰 명주 예순 필이 담 안쪽에 떨어져 있고 정갈한 글씨로 쓴 익명의 편지 한 통이 그 보자기 속에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히 여겨 가져다 보니, 바로 이씨 집안에서 뇌물을 바치며 죄를 풀어 달라 청하는 편지였습니다. 저는 곧 고을 아전을 불러 편지를 전한 자를 대청 아래 꿇리고 곤장 서른 대를 치라 분부하였는데, 화가 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지나치게 엄히 치라 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재차 신문하라는 명이 내리자 그 집안에서는 뇌물로는 일을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닫고 감사에게 급히 애걸하는 한편, 전양이라는 자에게 뇌물을 먹여 안에서 압박을 가하게 하니, 감사가 과연 그 말에 흔들려 갑자기 고을로 달려와 이방헌을 다시 신문했는지를 물었습니다. 아직 하지 못했다고 답하니 감사는 "그의 죄가 죽을 죄에까지 이르지는 않고, 신문에 이미 승복하여 자백을 받았으니 법에 따라 변방으로 추방하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저는 그러겠다 답하고 물러났는데, 감사는 이윽고 고을의 호장을 불러 장부를 가져오게 하고 기록을 살피며 법률 담당자에게 "추방죄에 해당하는 사람이 나이 일흔이면 어떻게 하는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냥 풀어 준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고 답하니, 알고 보니 이방헌은 실제 나이가 예순이었으나 호적에는 일흔한 살로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미 그 속셈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재촉이 잇달았어도 꿈쩍하지 않고 사흘을 머물다가 비로소 그를 보냈습니다. 이튿날 제가 엄중히 신문해야 한다고 보고하자, 감사는 형벌을 멈추고 돌려보내라 하였습니다.
그자는 본디 곤장을 맞아 본 적이 없는 몸이라 이틀 뒤 자기 집에서 기력이 다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아들이 감사에게 소장을 올렸고, 감사는 형방과 곤장을 친 자를 가두라 명하였습니다. 제가 감사께 따져 물었습니다. "감영의 지시를 받아 형법을 시행한 것이니 설령 백 사람을 때려 죽였다 해도 이는 군수의 죄가 아닌데, 담당 아전을 가두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자 감사는 부끄러워하며 기가 꺾였습니다. 대개 이 대목에서 그들의 얽히고설킨 속셈이 모조리 드러난 셈입니다. 그 자초지종은 이러할 뿐입니다. 처음 담 안에 명주가 던져졌을 때 저의 마음은 참으로 분했으나, 형벌을 내리던 그날은 실은 감사가 저의 노기를 더욱 부추긴 셈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일 처리가 매우 온당함을 잃었으나, 아무리 후회한들 무엇을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
감사가 뇌물을 받은 일에 대해서는 온 도가 다 알고 있으나, 제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닌 이상 어찌 감히 반드시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다만 명주를 던져 놓은 그 일을 미루어 볼 때, 자식으로서 아비를 구하려는 마음에는 못할 짓이 없을 터이니, 관아의 담 안에 놓였던 그 명주가 감영 문 안에는 놓이지 않았으리라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법을 굽혀 슬그머니 풀어 주려 했던 여러 정황이 공문서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근래 이 일로 호되게 곤욕을 치러 바야흐로 사직하고 떠나기로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 집안에서 또 형조에 소장을 올려 형조가 이 도에 공문을 보내는 바람에 고을 아전 몇 사람이 바야흐로 서흥에서 대질 심문을 받고 있으니, 이 일이 마무리되면 저는 이 고을 수령 자리를 마치 헌신짝 벗어 던지듯 버리려 합니다. 어찌 하찮은 녹봉 때문에 오래도록 허리를 굽히려 하겠습니까. 성품이 거칠어 자세히 갖추어 말씀드리지 못하니, 헤아리시고 가르침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허 신창께 답하는 글 (서기 1605년 9월 4일, 양력 추정)
제가 이 고을로 부임하던 날 경계에 이르니, 한 늙은이가 산에서 딴 과일 한 광주리를 들고 길가에 꿇어앉아 있기에 누구냐고 물었더니 이 고을에 사는 유방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찾아온 까닭을 물으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허 신창님댁 종입니다. 태수께서 허씨 성을 쓰시니 저희 주인 어른과 한집안이 아니시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물건을 가지고 와 바치는 것입니다." 저는 웃으며 그것을 받았는데, 그 뒤로 그가 종종 관아에 찾아오기에 이따금 술을 대접하였고, 백성들의 고초를 물으면 숨김없이 모두 아뢰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그의 순박함이 좋고 정직함이 가상하여, 면제해 줄 만한 부역은 이따금 특별히 면제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존장께서 편지에 다시 외람되게도 그를 불쌍히 여겨 달라 이르시니, 굳이 가르쳐 주지 않으셔도 저 스스로 힘써 온 일인데 하물며 편지 가운데 거듭 당부해 주시기까지 하시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저는 다스림에 능하지 못하여 아침저녁으로 탄핵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인데, 힘깨나 쓰는 백성을 죽인 일로 저를 비방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한 가지 일만 더 생기면 곧바로 그만두고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동해 바닷가 고향집은 이미 다 황폐해졌으니, 가을에는 그곳에 가서 고쳐 지을 생각이 간절합니다. 어찌 이런 객지 생활에 미련을 두어 스스로 고향의 보금자리를 버려두겠습니까. 하찮은 벼슬자리 하나가 무엇이라고 장한처럼 결단을 미루고 머뭇거린다면 참으로 대장부가 아닐 것입니다.
지난해 양릉공께서 처음 이조판서가 되셨을 때, 저는 속으로 걱정이 되어 편지를 써서 넌지시 말씀을 올렸으나, 양릉공께서는 겉으로는 옳다 하시면서도 속으로는 사실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더니 요즈음 일이 되어 가는 모습이 모두 어그러져 가고, 또 그분과 몹시 가까운 한두 젊은이가 따라다니며 판단을 흐리게 하니, 몇 해가 지나지 않아 반드시 낭패를 보고 말 것입니다. 존장께서는 두터운 친분과 가까운 친척 관계로써 눈물을 흘리며 그분께 말씀을 드릴 수 없으시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물러나신다면 오히려 허물을 면할 수 있으시겠지만, 만약 다시 미련을 두어 허물을 더 쌓으신다면 위로는 선대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여 우리 집안의 수치가 될까 두렵습니다. 양릉공께서는 늘 저를 아우처럼 대해 주시니 정이 두텁고 정성이 지극합니다만, 알고도 말씀드리지 않는 것은 그 마음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존장께서는 이를 미친 소리나 어두운 생각이라 여기지 마시고 한번 말씀하시어 그만두시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만 갖추어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용어) "닭 갈비"는 먹을 것은 별로 없으나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 것을 이르는 말로, 여기서는 하찮은 벼슬자리를 빗댄 것이다. 장한은 진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계응이다. 그는 낙양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중 가을바람이 일자 고향의 순챗국과 농어회가 그리워져 "인생이란 자기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중요한데, 무엇하러 수천 리 타향에서 고생하며 벼슬을 구하겠는가" 하고는 그길로 수레를 몰아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금계정께 답하는 글 (서기 1605년 12월 29일, 양력 추정)
거듭 찾아 주셔서 한창 감격스럽고 다행스럽게 여기던 참인데, 또 외람되이 편지까지 주시어 타이르시는 말씀이 곡진하시니, 지극한 정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러실 수 있겠습니까.
저의 병은 거짓이 아닙니다. 지난 9월부터 감기가 제법 심하게 들어 폐에 열이 오르고 가래가 끼며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고, 심장은 마치 큰 걱정이라도 있는 듯 두근거립니다.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입맛은 뚝 떨어졌으니, 억지로 몸을 움직이다가는 반드시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몇 달을 조리하고 치료해야 예전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어찌 한낱 당상의 자리 하나 때문에 나랏일을 모두 폐하고 스스로 피할 계책을 꾸미겠습니까.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왕실 족보를 편찬하는 일은 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담당자가 만약 제멋대로 이름을 올리고 빼면서 왕실 핏줄이 아닌 이를 뒤섞어 싣고 마땅히 실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빠뜨린다면, 하늘에 계신 조상님들의 영령이 이를 어떻게 여기시겠습니까? 주상께서 저를 부족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편찬하는 대열에 끼워 주셨으니, 여러 갈래의 편집에서 잘못된 부분을 하나하나 다 바로잡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거짓임이 훤히 드러나 도무지 감추고 덮을 수 없는 일에 대해서까지 그저 그 무리의 간청에 못 이겨 접어 두고 감싸 주어 기어이 족보에 싣게 한다면, 이는 위로 조상님들을 욕되게 하는 일이니 신하 된 도리로 결코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회안군의 부인 김씨가 태조의 능 비문에 실려 있는데, 유배지에 안치된 뒤에 황씨에게 장가들고 또 금씨에게 장가들었다고 되어 있으나, 이럴 리는 없을 듯합니다. 설령 금령을 어기고 몰래 혼인한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조정이 알 바 아닌데, 또 어찌 감히 정실부인의 자손이라 자처할 수 있단 말입니까. 게다가 가지고 온 문서에는 "역대 임금께서 모두 뽑아 기록하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되어 있으니, 그 어긋나고 틀린 흔적이 한둘이 아닙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홍치 원년 3월에 도승지 신 허종이 담당하여 올린 계에 의거하여 윤허하셨다"고 한 대목인데, 허종은 그때 이미 숭정대부 이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사신 동월을 접대하는 일로 의주에 가 있었으니, 어찌 그보다 낮은 도승지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또 "가정 12년 4월에 우승지 신 김정국이 담당하여 올린 것에 의거하여 윤허하셨다"고 되어 있으나, 김정국은 이미 정덕 기묘년에 황해감사로서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금지령이 매우 엄하여 한 번 쫓겨난 어진 선비 가운데 다시 벼슬길에 풀려난 이가 하나도 없었는데, 김정국이 어찌 홀로 먼저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거기 등장하는 전주부윤 김광진이라는 이는 바로 저의 외할아버지의 아우입니다. 정미년에 부윤이 되어 그 일가와 종들이 지금도 그곳에 남아 있으나, 가정 12년에 그 고을에 부임한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이 문서를 위조한 자가 전주 사람이었기에 김정국이 승지가 되었던 일과 김광진이 부윤이 되었던 일을 익히 알고서 그 이름만 따다가 제멋대로 지어낸 것이니, 이는 굳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어도 그 간사함을 알아챌 수 있는 일입니다.
더구나 순녕군의 양자로 들어간 천례의 아들 문제는, 형께서 본디 그 실마리를 꺼내셨다고는 하나 이는 참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니, 금산군께서 힘써 다투시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만약 저에게 이 일을 맡기신다면 결코 핏줄을 끊어 하늘의 이치를 저버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니, 이런 일까지 차마 한다면 대체 무엇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종친 가운데 이품 벼슬을 지낸 이가 나이 마흔이 넘도록 오촌 과부 형수를 어머니라 부르고 그 형수 또한 그를 자식으로 대했으니, 남들의 비난이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또 이에 더하여 그 후사마저 빼앗아 왕실 족보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하게 한다면, 예나 지금이나 이보다 더 원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형의 소견은 일반 법도에 얽매인 것이고, 저희들이 다투는 바는 하늘의 이치에서 나온 것이니, 옛 임금들도 하늘의 이치를 바탕으로 법을 마련하였을 뿐, 하늘의 이치를 저버리고서 능히 나라를 다스린 이는 없었습니다. 금산군께서 나서지 않으신다면 저 역시 이 일을 맡아 처리할 형편이 못 되니, 형께서 헤아려 다시 회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대중께 보낸 첫 번째 글 (서기 1608년 1월 21일, 양력 추정)
형께서는 높은 재주와 무거운 명망으로 임금의 신망이 두터우니, 한 시대의 선비들이 모두 그 풍채를 우러르며 형의 문하에서 배출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더구나 저처럼 일찍부터 형의 아낌과 사랑을 받은 사람이야 감히 스스로 소외감을 갖지 않고 그 따뜻한 은덕이 미치기를 힘껏 바라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분수를 지키고 만족할 줄 아는 구구한 마음으로 조용히 형께 아뢰고 싶은 것이 있으니, 시험 삼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엄한 가르침을 받지 못했고, 어머니와 형은 저를 어여삐 여기기만 하고 가르치고 타이르지는 않으셨기에 저는 제멋대로 떠돌아다니며, 거리를 쏘다니고 찻집과 술집까지 드나들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이를 본 사람들은 분명 저를 가벼이 여겼을 것입니다. 점점 자라면서 익힌 것도 자잘한 재주뿐 취할 만한 것이 없었고, 남을 비웃고 잘잘못을 가려 남의 이목이나 즐겁게 하는 데에만 힘쓰다 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경박한 데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불행히도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공명을 손쉽게 얻으리라 여기고는, 소매를 떨치며 자신만만하게 당돌히 굴다가 죄와 허물을 쌓았으니, 곁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저를 노리고 있었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얼마 전 큰 조카가 이씨 집안과 혼인이 깨졌는데, 그 집안에서 노하여 기어이 앙갚음하려고 근거 없는 소문을 지어내어 저를 헤아릴 수 없는 곤경에 빠뜨리려 하자, 저를 미워하던 무리들이 서로 그 말을 주고받으며 마침내 구실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10여 년 동안 가는 곳마다 비방이 태산처럼 쌓여 여러 차례 일어났다 넘어지곤 하였으니, 이제는 영영 세상에서 버림받아야 할 몸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니 화려한 벼슬길을 지나가는 일은 마치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아득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집 안에 틀어박혀 오로지 글과 역사책에만 몰두하였으며, 벼슬에서 얻는 녹봉은 그저 가난을 면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 혹 권세 있는 요직에 오르면 저는 일부러 소식을 끊었으니, 이는 대개 선대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고 집안의 명성을 실추시키는 것이 부끄러워, 감히 스스로 어진 사대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형께서 인사를 보좌하시던 날에는 도리어 우경과 더불어 저의 재주를 아깝게 여기시고 애써 이끌어 주려 하셨으나, 뒤이어 실권을 쥔 이들의 미움을 사서 두 분 형님들마저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잇달아 지방으로 나가시게 되었고, 저 또한 벼슬에서 떨려나 고향으로 돌아갔으니, 이는 저의 운수가 기박한 탓이었을 뿐 달리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겠습니까.
지금 형께서는 또 승정원이나 예문관, 홍문관 같은 관청으로 저를 이끌어, 정사에 대한 의견을 올려 임금의 다스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게 하려 하시니, 그 뜻이 참으로 간곡하고 지극하여, 저를 후하게 대해 주시고 아껴 주시는 그 은혜를 이미 뼈와 간에 새겨 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제 평생을 익히 헤아려 보았으니, 비유하자면 강물의 물고기나 들판의 새와 같아서 연못에 가두고 새장에 길들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제 소원한 처지로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귀한 자리 언저리를 기웃거리게 된다면, 편협한 마음과 모난 행동이 남의 비위나 맞추고 아첨하는 데 익숙지 못하여 말 한마디라도 거슬리면 문득 천 길 낭떠러지로 밀려나고 불난 데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입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비록 형과 같은 이가 백 사람 있다 한들 두레박줄을 끌어당겨 저를 구해 주기는 어려울 것이며, 도리어 그 화가 가까운 벗들에게까지 번져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이 어찌 크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집안이 가난하고 형은 이미 늙으셔서 아주 떠날 수는 없으니, 다만 작은 고을 하나나 맡아 처자식의 입에 풀칠이나 하고, 겸하여 책이나 읽으며 늘그막에 소일거리로 삼고 싶을 따름입니다. 형께서 저를 아깝게 여기신다면 실권을 쥔 이에게 힘써 말씀하시어 고을 하나 얻어 나가게 해 주신다면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저의 진심에서 나온 것이지 공연히 꾸며 낸 말이 아닙니다. 이만 줄입니다.
(용어) 여기 나오는 "유여의 기름"이라는 옛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대중께 보낸 두 번째 글 (서기 1608년 1월 22일, 양력 추정)
답해 주신 편지를 받아 보니 그 내용이 은근하고 간절하였습니다. 제 재주를 어여삐 여기고 벗을 아끼는 정이 말 밖으로 넘쳐흘러, 서너 번을 되풀이해 읽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 제가 무엇이관대 이런 은혜를 받는단 말입니까. 참으로 마땅히 벼슬길에 나설 채비를 하고 저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이라도 바쳐야 할 터인데, 다른 일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불행히도 엄청난 비방에 걸려 있습니다. 비방하는 자 한 사람이 족히 저를 칭찬하는 사람 백 명의 입을 막아 버릴 수 있는 법인데, 하물며 저를 헐뜯는 이들은 온 나라에 가득하고 칭찬하는 이는 겨우 형들 몇 사람뿐이니, 설령 제 이름이 추천 명단에 올라 몸이 조정의 반열에 든다 한들 저를 탄핵하는 상소가 뒤미처 이르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당시의 여론이 제가 오랫동안 낙담해 있는 것을 가엾이 여겨 마지못해 벼슬 하나를 내려 체면을 세워 주고, 이리저리 손을 써서 낭패는 면하게 해 준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 나아가고 물러날 때마다 저와 사이가 좋지 않던 사람들이 뒤따라오며 손가락질하고 욕하기를 "이 사람은 예전부터 행실이 좋지 못하여 배척받던 자인데 대체 누구에게 빌붙어 벼슬을 얻었는가" 한다면, 그 욕됨은 탄핵 상소를 받는 것보다도 더욱 심할 것입니다.
더구나 저는 말이 가볍고 도량이 좁아 참고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임금을 모시는 강론 자리에 있거나 정사에 대해 말할 자리에 참여하게 된다면, 논의하고 탄핵하는 사이에 툭하면 반드시 임금이나 정승에게 죄를 얻어, 크게는 멀리 귀양 가거나 목숨을 잃고 작게는 벼슬에서 쫓겨나고 말 것이 너무도 뻔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누가 저를 이끌어 주신 형께도 미치게 될 것이고 이 맑은 시절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할 것이니, 제가 가장 걱정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동쪽 이웃에 한 아낙이 있었는데, 몸집은 작고 앳되었으나 길쌈 솜씨는 제법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일찌감치 시집을 갔다가 남편을 여의자 시댁에서 재혼을 권했지만 10년 동안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이 들어 남의 꼬임에 넘어가 개가를 하고 보니 본부인과 마음이 맞지 않고 시어머니의 뜻에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몇 달도 못 되어 쫓겨나 친정으로 돌아와서는 스스로 절개를 잃은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오늘날 저의 처지도 참으로 이 이웃 아낙과 같이 될까 두렵습니다.
제게 만약 성 밑에 밭 두 이랑만 있다 하더라도 어찌 즐겨 귀한 분들 앞에서 낯빛을 낮추어 가며 구차하게 하찮은 녹봉을 얻어 처자식을 보전할 계책을 세우겠습니까.
듣자니 홍양 고을에 자리가 비어 있다 하니, 가능하다면 이조참판께 말씀하시어 그 후보 명단에 들 수 있게 해 주시고, 부디 제 분수에 맞지 않는 일로는 서로 애쓰지 말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만 다 적지 못합니다.
이대중께 보낸 세 번째 글 (서기 1608년 1월 23일, 양력 추정)
두 번째로 보내 주신 답장은 그 내용이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형의 지극한 정성과 저를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은 보통 사람의 만 배는 될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부서진들 어떻게 이 은혜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어제 인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저를 홍양으로 보내는 명이 몹시 기다려졌다는 것은 덕보가 와서 전해 주었습니다. 제 이름이 검토관 후보에 올랐는데, 명단을 살피던 이가 서명 절차를 문제 삼아 우선 정지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몹시 불쾌하여 밤새도록 애를 태우며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제가 굳이 좋은 자리를 마다하는 그 사정은 이미 앞서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다 말씀드렸으니, 이제 다시 구구하게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일이 있어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으나, 이제는 이미 너무도 다급한 지경에 이르렀기에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으니, 형께서는 제 말을 헤아려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집안은 불행히도 궁궐과 혼인을 맺었는데, 인척 가운데 지위가 높고 또 가장 총애받던 이가 몇 해 전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모진 수법을 써서 위태로운 죄목으로 저를 얽어매려 하여 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깥 조정의 여러 신하들은 저에게 별다른 잘못이 없음을 알았고, 저와 사이가 좋지 않던 이들조차도 결코 그럴 리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궁궐 안은 깊고도 엄한 곳이라, 줄을 대어 참소를 들여보내는 자들이 너무도 심하니, 제 집안에서조차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마치 넘어지는 나무에 외로운 새가 깃드는 격이었으니, 감히 하루하루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는 처지에 어찌 영화롭고 좋은 자리를 넘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붉은 옷 입은 이들이 길을 인도하고 은패를 앞세우며, 아름다운 누대와 한가한 관사를 거닐고 궁궐의 여러 문을 드나드는 것이 어찌 나쁜 일이라서 굳이 재물이나 관리하는 하찮은 벼슬아치가 되고 싶어 하겠습니까. 이는 너무도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나랏일은 크게 걱정스러운 때인데, 형들께서는 그저 임금과 정승 자리만 믿고 다시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시며, 불붙은 나무 위에 편안히 누워 계신 것과 다름없으니 그 위태로움이 전보다 더한데도 오히려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미 그런 형세를 뚜렷이 보고 있는데, 저를 끌고 함께 깊은 웅덩이 속으로 들어가자 하시니, 아무리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인들 어찌 즐겨 손을 맞잡고 소매를 나란히 하여 재앙의 소굴로 함께 들어가겠습니까.
부디 형께서는 스스로를 아끼시고 저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다행히 한가한 고을에 결원이 생긴다면 후보 명단에 힘써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형께서도 기러기처럼 높이 날아 곡식 낟알에 미련을 두지 않으신다면 그물에 걸리거나 화살에 맞을 걱정은 영영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리하지 못하시겠다면, 수상 대감께 권하시어 세자 책봉의 일을 조정에 아뢰고 널리 선비들을 규합하며 조정 관원들에게 두루 알려, 참된 마음을 열고 공정한 도리를 펴서 온 세상을 위해 태평한 터전을 마련한다면, 신선처럼 긴 수명과 반석처럼 굳건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며 역사에도 빛나게 기록될 것입니다.
미친 사람처럼 함부로 말씀을 올렸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이만 갖추어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성소부부고 제10권
9. 22:20
출처: 성소부부고 제10권, 문부 7, 서
배경: 제10권은 문부 일곱 번째 갈래인 "서(書)"로 이루어져 있다. "서"는 편지, 곧 척독이다. 지방관으로 재직하며 겪은 파직과 탄핵, 정치적 풍파에 대한 솔직한 심경, 벗들과 나눈 은거의 꿈, 그리고 우리나라 한문학의 계보를 정리한 편지까지 열한 통이 실려 있다. 공적인 글보다 훨씬 격의 없고 직설적인 어조로, 허균 특유의 자부심과 세상에 대한 반발, 그리고 정치적 처세의 실상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성덕보에게 보내는 편지 (서기 1608년 1월 24일, 양력 추정)
어제 찾아와 주셔서 마음속에 쌓인 이야기를 형께 다 털어놓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그저 한담으로 흘러가 버렸습니다. 밤새도록 안타까워하다가 새벽에 뵈러 갔더니 이미 떠나신 뒤였습니다.
이대중이 온 힘을 다해 저를 북돋아 주는 것은 정이야 두텁지만, 저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편지를 보내 알아듣도록 했지만 갈수록 이해하지 못하니, 형의 도움을 빌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형은 그 사람과 이웃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서로 오가는 사이니,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 주신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지금은 크고 작은 일 가릴 것 없이 모두 수규 대신 한 사람에게서 나오는데, 그가 저를 대하는 뜻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큽니다. 그런데 몇몇 벗들이 그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저를 억지로 끌어들이려 하니, 이는 서로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일이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국 낭패에 이르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얼마 전 분음공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수규께서 그대의 재능을 기특하게 여겨 경연에서 학문을 논하는 자리에 두고 싶어 하시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형님께서 평소 수규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는데, 수규가 그 동생인 저를 홍문관이나 예문관 같은 자리에 발탁한다면, 사람들은 장차 제가 친형을 배반하고 권세에 아부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결코 그런 처지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자 분음공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는데, 이것이 바로 저의 본심이었습니다.
형은 진실하고 믿음직한 분이니 틀림없이 이 마음을 헤아려 주실 겁니다. 마침 들으니 진주 부사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그 고을은 제 외가가 있는 시골과 가까운 곳입니다. 산과 강이 아름답고 소송할 일도 적으며 백성들이 순박하고, 연못과 정자가 있어 노닐기에도 좋은 곳입니다. 그곳의 수령이 되어 벼슬살이하면서도 은거하듯 육 년을 지내고 싶습니다.
은사들 중에는 그곳 산 귀신이 요사스러운 짓을 부려 수령에게 불리한 곳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저는 본래 보화군을 섬겨 왔으니 우레를 다스리는 여러 신을 동원해서라도 산 귀신을 눌러 놓을 수 있습니다. 도깨비 따위가 무엇이라고 감히 사람을 농락하겠습니까.
이 일을 결정할 권한은 온전히 형의 입에 달려 있으니, 부디 뜻을 바꾸지 말아 주시면 어떨는지요. 하고 싶은 말을 다 적지는 못합니다.
(용어) 성준구(호 장곡)는 조선 선조 때 문신으로,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여러 공을 세웠다. 뇌부는 도가에서 우레를 맡은 신들의 관청을 뜻한다.
최분음에게 답하는 편지 (서기 1607년 6월 1일, 양력 추정)
교외까지 나오셔서 손을 붙잡고 배웅해 주신 것은 정이 두텁고 간곡한 일이었고, 깨우쳐 주신 말씀은 생각할수록 잠시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고을에 도착한 지 열사흘째 되던 날, 아전이 조정의 소식지와 손수 써 주신 편지를 가지고 왔기에 살펴보았더니, 5월 6일에 대관의 탄핵으로 파면되었다고 하더군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돌아가신 제 아버님도 이 고을을 맡으신 지 열사흘째에 교체되셨는데, 저도 또 이렇게 되었으니, 이건 거의 조물주의 장난이지 어찌 사람의 꾀로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세상과 잘 맞지 않아, 죽고 사는 일이나 얻고 잃는 일을 마음에 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차츰 노자와 불교 쪽으로 몸을 의탁해 스스로 세상을 피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저도 모르게 그 안에 젖어 들어 더욱 불경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불경의 뛰어난 견해를 보면 골짜기가 갈라지고 강물이 터지는 듯했고, 그 글이 황홀하고 아득하여 마치 나는 용이 구름을 타고 오르는 듯 꼬리와 갈기, 발톱과 비늘조차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읽을수록 더욱 아득해져서 정신이 온 세상 밖을 노니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늘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아마 일생을 헛되이 보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깊이 찾아 연구하며 그 속에 쌓인 온갖 이치를 꿰뚫어 보니, 마음과 본성이 저절로 또렷해져서 마치 깨달음이 있는 듯했습니다. 때때로 젊었을 때 배웠던 사서와 성리학 책들을 꺼내 놓고 불교에서 마음과 본성을 말한 부분과 견주어 보았습니다. 같고 다른 견해와 참되고 거짓됨의 경계를 따져 가며 논하다 보니 제법 스스로 얻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글로 지어 그 뜻을 밝혔는데, 이른바 "불교에 아첨한다"는 말이 필시 이것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세상에서 거슬리는 사람이 되어 여러 번 더러운 치욕으로 탄핵을 받았지만 털끝만큼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찌 이런 일로 제 정신을 손상시키겠습니까. 더구나 곽공과 함께 저를 간하는 글에 나란히 이름이 올랐으니, 이른바 이백과 두보처럼 명성을 나란히 하게 된 셈인데, 죽는다 해도 또 무엇을 한스러워하겠습니까.
형과 이대중, 성덕보가 처음에 저에게 좋은 벼슬길을 터 주려 하신 것은, 아마 일의 형세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탓이 아닐까요. 고을 수령 자리도 허락되지 않는데, 옥당의 높은 자리가 허락되겠습니까.
오래지 않아 서울에 도착하면 손을 붙잡고 다 말씀드리겠으니, 여기서는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용어) 사서(사자)는 논어·대학·중용·맹자를, 염락은 주돈이와 정자 형제를 가리키며, 둘 다 성리학의 근본이 되는 학문을 뜻한다. 영불은 불교에 지나치게 기대어 복을 비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임자정에게 보내는 편지 (서기 1608년 3월 7일, 양력 추정)
심부름꾼인 박씨와 김씨가 와서 이달 17일 자 조정 소식지를 전해 주었는데, 내암공이 수규를 죄주자는 상소를 올렸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이를 펴 보며 밥을 먹다가 저도 모르게 밥을 뱉으며 일어나 손뼉을 치고 감탄했습니다. 천하에 이런 선비가 있으니, 뜻있는 이들이 기세를 떨칠 만합니다.
지난해 겨울, 형께서 이 일을 하려 하셨을 때 제가 애써 말렸던 것은, 우리가 본디 무거운 명망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라 이런 일을 한 번 벌였다가는 나라에서 외로운 새 새끼나 썩은 쥐 새끼처럼 버림받을 것이고, 또 더 큰일에도 불리해질까 걱정되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분이 우리가 감히 하지 못한 일을 해냈으니, 그 강개한 충절이야말로 어찌 옛 열사에게 뒤진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수규 역시 무거운 명망을 지닌 이라 말을 꺼내면 한 시대를 진동시킬 만하니, 죽기로 마음먹고 그와 맞서 싸운다면 그 나름 후련한 점은 있을 것입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지금 임금께서 격노해 계시니, 이 일을 계기로 지나친 일이 벌어지면 그분 자신의 몸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고, 그 화가 사림에까지 미쳐 끝내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 미치니 춥지 않아도 몸이 떨립니다.
그렇지만 어진 임금께서는 공명하시니, 흉측한 무리들이 소란을 피운다 해도 어찌 소인의 말만 듣고 바른말을 하는 이를 해치겠습니까.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형께서는 평소 이분을 늘 불만스럽게 여겨 잘못을 너무 심하게 지적하셨습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선비를 논할 때는 큰 줄기를 취해야 하고, 자잘한 것들을 모아 어진 사람의 허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형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게 하지 않으시더군요.
오늘 일어난 이 사건은 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요? 비유하자면, 큰 강물이 도도하게 흘러가는데 백 리쯤 가서 한 번 굽이가 있다 한들 그 강물의 웅대함에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형께서는 스스로 남을 잘 안다고 여기지 마시고, 이 점만은 저에게 양보해 주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고을 사무가 무척 바쁘고 온종일 소송 사건이 비 오듯 밀려들지만, 그래도 제가 휘파람 불며 시를 읊는 것까지 방해하지는 못합니다. 때때로 서산의 상쾌한 기운을 마주하면 저 또한 홀을 턱에 괴고 감상에 잠기지요. 이만 다 갖추지 못합니다.
(용어) "서산의 아침 기운" 이야기는 진나라 왕희지가 상관에게서 일을 서두르라는 말을 듣고도 아무 대꾸 없이 홀을 턱에 괴고 "서산의 아침 기운이 상쾌하기 그지없다"고 답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청고한 관리의 태도를 뜻한다.
임자정에게 답하는 편지 (서기 1608년 8월 19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가 복이 없어 선왕께서 신하들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나셨으니, 그 승하의 쓰라림이야 안팎으로 어찌 다르겠습니까.
더구나 저는 선왕께서 두텁게 칭찬하고 이끌어 주셨고 어려울 때마다 건져 주셔서 오늘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저의 티끌만 한 것 하나까지도 어찌 모두 임금의 은덕이 아니겠습니까.
새 임금의 큰 밝음이 이어 비추고 온 나라가 새로워지니, 슬픔과 경사가 겹쳐 오는 것이 황홀하기 그지없습니다. 게다가 형께서 병조에서 물러나 언관의 자리로 나아가셨다니, 이야말로 참으로 군자가 뜻을 펴 볼 때입니다. 새로 등극하신 임금을 보좌하는 일은 참으로 임금의 눈과 귀가 되는 신하에게 달려 있으니, 형께서는 온 힘과 충성을 다하시어 평소 배우신 바를 저버리지 않으시면 어떨는지요.
그 사람이 백성들을 대할 때 스스로 패망을 자초해서 얼마 전 진도로 귀양을 갔다고 합니다. 이 고을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몰래 그가 했던 짓을 들어 보니 참으로 사람 같지 않더군요. 우리가 지난해 애태웠던 것은 지나친 근심이었던 셈입니다. 상복을 입은 사람이 어떻게 남을 대하며 술을 즐기고 기생과 마차 이야기나 하면서 껄껄 웃음을 그치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런 사람이 비상한 일을 해낼 리가 있겠습니까? 이는 그저 남을 해치기 좋아하고 복을 바라는 자들이 부추기고 아첨한 결과일 뿐이니, 한 번 웃고 넘길 만합니다.
내암공이 서울에 도착했다는데 형께서도 가서 그 사람됨을 보셨는지요. 그분의 논의와 풍채가 소문으로 듣던 것과 맞아떨어지던가요. 이분의 지조와 절개는 우뚝 솟은 바위처럼 뛰어나니, 세속 사람들로서는 바라거나 따라가지 못할 점이 있습니다. 다만 그분의 제자들이 반드시 모두 훌륭하지만은 않을 것이니, 형의 넓은 식견으로는 제 말을 듣지 않고도 이미 스스로 꿰뚫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주 만나면 친해지고, 친해지면 그 안에 빠져들고, 빠져들면 같아지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같아지고 마는 법입니다. 그러니 경계하는 마음과 경모하는 마음을, 마치 책 속에서 만난 사람을 대하듯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중국에 관한 일은 논의가 늘 타당하지 못하니, 먼 고을에 있는 관리로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어 쓸데없는 근심을 견디지 못합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흉측한 무리들이 간사한 계책을 부려 큰일을 그르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형들은 나라의 일을 맡은 처지이니 그런 일까지 염려하고 계시는지요.
향을 올리러 서울로 올라갈 날이 이달 20일 무렵입니다. 모시고 말씀드릴 날이 머지않으니 이만 다 갖추지 않습니다.
큰 조카에게 답하는 편지 (서기 1608년 9월 23일, 양력 추정)
헤어진 뒤로 마음이 몹시 언짢았는데, 곧이어 손수 쓴 편지를 받아 보니 가슴이 트이는 것 같구나.
나는 평생 동안 그 누구보다 심하게 비방만 받았다. 해가 가고 날이 갈수록 비방이 더욱 새롭고 기이해졌지만, 들을수록 털끝만큼도 마음에 두지 않았고 스스로 해명하려 들지도 않았다. 오래 두면 저절로 풀리기도 하는데, 지금까지 십오 년을 그렇게 지내 왔다. 요즘 들어서는 치아와 머리털이 쇠약해져서 세상일에 대한 흥미도 줄고 꺾여 버렸다. 그저 고요한 곳에서 책이나 보면서 그 즐거움으로 겨우 만족하고 있는데, 어찌 예를 범하고 법을 어기기를 즐겨서 상을 당한 여인을 거느리고 범법의 소굴을 다스리는 주인 노릇을 했겠느냐.
서울에서 이 일을 두고 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사헌부에서 문제를 제기하기에까지 이르렀는데, 다행히 임자정과 이득여가 온 힘을 다해 주선해 준 덕분에 겨우 무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벼슬을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니, 그렇게만 되면 내 행적이 곧 분명히 드러나 비방하던 자들도 저절로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설령 다른 일로 물러나도록 탄핵한다면 상관없겠지만, 역관이라는 신분이 나와 같은 처지도 아닌데 그저 아쟁과 노래를 듣기 위해 그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하니,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도 실로 그럴 만한 일이다. 오히려 누구를 탓하겠느냐.
들으니 기 정승이 탄핵을 당해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이 모두 들고 일어났고, 사관들도 계속해서 그 뒤를 이을 것이라 하는데, 너는 이 논의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옳겠다. 그분은 선왕의 만년에 원흉과 뜻이 갈려 세자를 도운 공이 실로 많았던 분이니, 저 무리들이 한창 떠들어 댄다고 해서 그 논조에 덩달아 따라서는 안 될 것이다. 뒷날 저절로 알게 될 일이니 번거롭게 더 말하지 않겠다.
아계 이산해의 손자 두 사람은 나이도 젊고 허물이 없으며 재주도 넉넉하다. 사관으로 추천될 무렵 너는 굳이 이를 막지 말아야 한다. 예부터 선비들이 화를 입은 일은 대부분 이런 병통에서 비롯되었다. 형님도 이미 연로하시고 나 또한 고달프게 지내고 있으니, 바른 의논이야 마음에 두는 것이 옳겠지만 어찌 몸과 집안을 지킬 계획도 세우지 않으려느냐.
너는 성정이 고집스럽고 또한 지나치게 진실하여, 이해를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위험한 길에 부딪치니, 그 패망은 이미 정해진 것과 같다. 온 세상이 다 흐린데 너 한 사람이 어떻게 맑게 할 수 있겠느냐. 세상과 더불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곳 토호 가운데 나를 미워하는 자가 어사에게 말을 꾸며 댄 모양인데, 어사도 그 말을 자못 믿는 눈치다. 나는 이 일로 벼슬을 그만두고 싶으니 그 또한 방해될 것은 없지만, 바라는 것은 좋은 말로 나를 내보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내가 이미 덕구에게도 말해 두었지만, 너도 이 점을 생각해 다오.
사회가 죄에 연루되어 물에 젖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형편이니, 거의 한시도 견딜 수 없는 모습이다. 더는 말하지 않겠다.
(용어) 삼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함께 이르는 말로, 임금에게 옳은 말을 아뢰는 일을 맡았다.
조지세에게 보내는 편지 (서기 1608년 9월 28일, 양력 추정)
심부름꾼이 돌아와 형의 가르침을 전해 주었는데, 이는 참으로 벗 사이의 도리를 다한 것이라, 읽고 나니 고마운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함께 밀려옵니다.
제가 지난번 보낸 편지는 그저 농담이었는데, 형께서 지나치게 믿으시고 걱정하시며 제가 실제로 그렇게 할 계획인 것으로 여기셨더군요. 제가 비록 몹시 어리석고 경솔하지만, 어찌 이렇게 남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끝내 그릇된 생각을 고집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평생 세 가지 일로 비방을 받아 왔는데, 그 모두가 의심받을 만한 자취가 있었습니다. 처음 현산에서 받은 비방으로 말하자면, 유보가 비록 큰 조카와의 혼사 문제로 저를 미워해서 이간질하는 말로 남의 귀를 어지럽혔다 하더라도, 만약 제가 영위 앞의 궤연을 지키며 서울을 지나가지 않았다면 유보가 백 마디를 한들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었겠습니까.
기 정승과의 일에 있어서도 저에게 잘못이 있었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저와 기 정승은 정이 아주 긴밀했으니, 그 당시 사소한 말들을 먼저 정승께 고해서 스스로 풀어지도록 했다면 반드시 막히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못된 사람들에게 누설하는 바람에 갈수록 속임과 의혹으로 변해서 끝내 그분의 분노를 자극하고 말았습니다. 저에게 애초부터 그런 일이 없었기에 저절로 풀린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 화란이 어찌 한 차례 쫓겨나는 것으로만 끝났겠습니까. 뒤늦게 생각하면 후회스러워 말문이 막힙니다.
오늘 일어난 말썽은 제가 당연히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늘 드나들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 집은 본래 저를 의심하던 처지였는데, 그 여인이 도망친 때에 마침 저는 향을 올리러 가야 할 날을 맞았습니다. 그러자 그 남편 집안에서 평소 서로 가까이 지내던 흔적을 잡아 이간질하여 말썽의 뿌리를 만들어 낸 것이니, 이 역시 제가 스스로 그 비방을 불러들인 셈입니다. 어찌 남을 원망하겠습니까.
저는 여러 차례 세상일에 걸려 넘어져 벼슬할 생각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미 변산 남쪽에 집터를 잡아서 백 년토록 은거할 곳으로 만들어 두었습니다. 아름다운 절벽의 계수나무 그늘에서 맑은 물에 발을 씻고, 산 위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채 신선주를 기울이며 스스로 즐기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노래 잘하는 사람 하나가 곽경순의 「유선시」를 읊어 권주가로 삼아 준다면 어찌 인간 세상의 더없이 유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고 보니, 그동안 기이한 재앙들을 겪어 온 것이 오히려 후회스럽습니다. 형께서 보신다면 틀림없이 크게 웃으실 것입니다. 이만 다 갖추지 않습니다.
(용어) 곽박(자 경순)은 중국 진나라 사람으로 재주가 뛰어났고, 사부와 점술에 능했으며, 신선을 노래한 「유선시」로 유명하다.
형님께 올리는 편지 (서기 1608년 10월 13일, 양력 추정)
가을 날씨가 점점 서늘해지는데, 삼가 여쭙건대 몸조리는 더욱 잘 하고 계신지요. 그리운 마음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는 마침내 탈 없이 파직되었으니 아주 원하던 대로 되었습니다. 당연히 곧 서울로 돌아가 형님과 함께 베개를 나란히 하는 즐거움을 누려야 마땅하겠지만, 구설의 곤욕을 너무 많이 겪었으니 멀리 떠나서 그 액운을 완전히 녹여 없애고자 합니다. 그래서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마음먹고 북쪽 하늘을 바라보니 마음이 더욱 슬퍼졌습니다.
부안에 도착하니 이곳 원님인 심군이 성안의 아전 집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게 해 주고, 날마다 고기와 곡식을 대 주며, 아침저녁으로 찾아와 무엇이든 요구하는 대로 바로바로 응해 줍니다. 마음도 안정되고 몸도 편안하여 오직 책과 역사서로 즐기며 지내고 있으니, 참으로 속세 안의 신선 고을입니다. 지난날 벼슬길에서 골몰하던 때를 돌이켜 보면, 그 차이가 어찌 하늘과 땅만 하겠습니까.
변산 남쪽 기슭에는 우반곡이라는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 안이 기름지고 평탄하여 물과 바위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씨 성을 가진 두 벗을 데리고 가서 집터를 정해 놓으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하고 시내와 계곡이 깊고 아름다워 참으로 은자가 살 만한 곳이었습니다. 그 지역이 또 바닷가라서 물고기와 조개가 풍부하게 나고, 소금을 굽고 곡식을 심으면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사람이 굶어 죽을 일이 없습니다.
심군이 목수들을 모아 나무를 베어 이미 시냇가에 몇 칸짜리 집을 지어 놓았으니, 이런 곳에서 이리저리 거닐며 남은 생을 보낼 수 있겠습니다. 더구나 서울까지 거리가 겨우 닷새 길인데 큰 언덕이나 높은 고개, 큰 강이 가로막는 것도 없으니, 형님이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면 저는 마땅히 말 한 필로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니, 이 아니 편리하겠습니까.
저는 불행히도 처음에는 형중에게 배척을 당했고, 중간에는 일송 정승 심희수의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자정이 인사를 돕게 된 날에 이르러서는 그만 사훈에게 파면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저들은 제가 이 고을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제 행적만 붙잡고서는 손뼉을 치며 기뻐하며 "저 사람은 남인이 아니면서도 본래부터 우리와 뜻을 같이했다"고 말할 것이니, 이 모욕이야말로 궁형보다 더 심한 것인데, 불행히 이를 당하고 보니 자못 분이 납니다.
지난달 임자정이 보낸 편지에서, "다시 등용하라는 명이 내리면 요즘 논의로는 옥당에 벼슬을 시키고 싶어 한다"고 했던 것도 참으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뜻을 펴지 못한 신세이니 좋은 벼슬을 바라는 마음은 이미 사라졌는데, 어찌 남에게 목을 끌려 굽히고 젊은 무리의 뒤를 따라다니며 벼슬 한 자리를 구해 스스로 영예와 은총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에 가고 싶던 생각도 이 소식을 듣고 더욱 절망스러워졌습니다.
심부름꾼이 바쁘다 하니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다만 계절에 맞추어 몸을 스스로 아끼시기를 빌며, 종이를 대하니 목이 메옵니다.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정 대사간에게 주는 편지 (서기 1611년 1월 3일, 양력 추정)
저는 불행하여 그동안 지위 높은 분들에게 미움을 산 일이 무척 많았습니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감히 변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는 참으로 제 운수가 나쁜 탓이니 하늘의 뜻에 맡길 뿐 달리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에는 백진의 성난 꾸짖음이 또 뜻밖에 터져 나왔으니, 집집마다 말 잘하는 사람을 세워 변명하게 한다 해도 그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째서 그토록 고집이 세어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요.
그 누각을 처음 지은 것이 해성이 한 일이라면, 그 뒤를 이어 중수한 사람이 그 시를 철거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기문과 차운시는 모두 제 문집 속에 남아 있는데, 백진은 이를 보고도 믿지 않으며 그저 제가 뒤늦게 지어서 그의 화를 누그러뜨리려 한 것이라고만 여기니, 이는 저를 얼마나 하찮게 대하는 것입니까.
제가 비록 어리석고 거칠지만, 세상 만물이 다 티끌 같은 것임을 알고 있는데, 벼슬아치의 행세를 탐내어 스스로를 속이는 지경에 빠지겠습니까.
요산군에 살던 어느 부유한 백성이 죽자 그 자손들이 저를 걸고 넘어지려는 계략이 천 가지 만 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각에 걸린 글 가운데 제 이름이 있는 것은 모두 철거하고, 해성과 참판 유영길, 황주 목사 박동열 등의 시도 모두 뜯어내 버린 뒤 이 세 집안에 하소연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백진은 먼저 들은 말만 믿고서 그 맺힌 감정을 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화담서원의 상량문에서도 제가 불교에 아첨했다는 이유로 제 이름을 지우도록 명하고 형님의 이름으로 대신 쓰게 했으니, 이 역시 그 원한을 갚으려 한 까닭입니다. 이것이 어찌 군자의 마음씨라 하겠습니까.
시판을 훼철한 일로 그 화가 사림 전체에 미쳤던 사례가 지난날에 명백히 있었습니다. 제가 비록 망령되고 어리석지만 조선 이래의 옛일을 조금은 알고 있는데, 어찌 다시 김종직의 경솔했던 잘못을 되풀이하여 참혹한 화란에 스스로 빠져들겠습니까.
승지와 참의 사이에 무슨 높고 낮음이 있겠습니까. 벼슬길이 열리고 막히는 것은 하늘의 명에 달린 것인데 백진이 어찌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마흔 나이에 이미 상대부가 되어 형조 참의 벼슬까지 지냈으니, 장자나 양웅에 비교한다면 이미 얻은 것이 많은 셈입니다. 이제 관을 벗어 걸고 기러기처럼 높이 날아 마땅히 세상 밖의 맑은 복을 누리려 합니다. 남의 눈치를 살피며 아양 떠는 말로 스스로를 변명하는 짓만은 차마 하지 않으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절대로 백진이 알게 하지는 마십시오. 그의 성내고 꾸짖음이 더 커질까 두렵습니다. 이만 다 갖추지 못합니다.
(용어) 김종직(자 계온)이 일찍이 유자광의 시판을 철거한 일이 있었는데, 유자광이 이를 원한으로 품고 결국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다시 벤 일이 있었다.
유 시어에게 주는 편지 (서기 1611년 1월 5일, 양력 추정)
어제 수레를 몰고 찾아 주셨는데, 형께서 한창 술에 취하신 터라 그 이야기를 끝맺지 못했습니다.
편지로 다 담아내려면 너무 번거로울 듯하지만, 이미 말이 나온 이상 끝내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야 있겠습니까. 형께서는 한번 들어 보아 주십시오.
1603년 벼슬에서 파직된 뒤 금강산을 유람하러 가는 길에 철원에 이르러, 풍전 북쪽 2리쯗 되는 곳의 민가에서 묵었습니다. 늙은 아낙 하나가 맞아 주어 주막으로 들어갔는데, 집이 몹시 조촐하고 깔아 놓은 자리도 깨끗한지라 이상히 여겨 물어보았더니 아낙이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대대로 향교동의 포전랑 뒤에서 살았는데, 남편 유세영이 제 외가에 드나들었던 사람이라 선대의 일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외가의 종들 이름까지 하나하나 불러 댔습니다. 어째서 이곳에서 살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아낙은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남편을 따라 시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왜적이 밤에 갑자기 들이닥치자 남편이 엉겁결에 시어머니를 업고 밖으로 나가 숲속에 엎드려 있었는데, 왜적을 만나 한 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 아이는 풀숲 사이에서 울고 있었는데 왜적이 데리고 가 버렸습니다. 날이 밝으니 피가 낭자했지만, 제 손으로 구덩이를 파서 그분들을 묻었습니다. 그 뒤로 이곳 토박이들에게 의지하며 살다가, 이듬해 왜적이 물러가자 사람을 모아 무덤을 다시 옮겨 갈무리했습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술을 팔아 생계를 잇고 있습니다. 서울에는 일가친척도 없어 결국 이곳에 눌러 살며 봄가을로 두 무덤에 제사를 지내다가 이 몸도 여기서 마치려 합니다."
제가 그 아이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아낙이 답했습니다. "1593년에 왕자를 따라 나갔는데, 지금은 어느 궁에 있다고 하는데도 아직까지 저를 찾아와 주지 않습니다."
저는 그 사연에 느낀 바가 있어 「늙은 나그네 아낙의 원한」이라는 시 한 편을 지었는데, 그 첫머리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동주성 동쪽에 차가운 날이 저무는데, 보개산은 높이 솟아 저녁 구름을 두르고 있네." 그런데 이 시를 본 사람들이 이를 송공을 가리켜 배척한 것이라 오해하고 그렇게 퍼뜨렸습니다. 송공이 밤낮으로 저에게 이를 갈며 반드시 앙갚음하려 하는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피란했던 사람을 통해 송공이 변을 당했던 사정을 매우 자상하게 들었는데, 그것은 적군을 만나 정신없이 뒤섞이는 바람에 그 아버지가 계신 곳을 놓쳤다가 돌아와 보니 이미 적군에게 해를 입은 뒤라 끝내 어찌할 수 없었던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만약 이 시를 직접 본다면 필시 전하는 사람의 망령됨을 알아챌 것입니다. 다만 이 시를 어떻게 그에게 보여 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도 진실로 그럴 방도가 없으니, 저 역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송공이 만약 그 아낙을 저버린 일이 없다면, 백 편의 놀리고 나무라는 시가 있다 한들 그 몸에 무슨 손상이 있겠습니까. 반대로 만약 조금이라도 부족한 점이 있다면, 집안에 말 잘하는 사람을 아무리 배치하고 저잣거리에 천금을 풀어놓아 스스로를 밝히고 씻으려 해도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이룰 수 없을 것이니, 제 시 한 편이 어찌 그 무게를 더하거나 덜하겠습니까.
군자는 그저 자신을 닦을 따름이니, 뭇사람의 입이란 흐르는 냇물과 같아서 한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법입니다. 만약 자기를 논하는 사람을 일일이 중상하려 든다면 너무도 수고롭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형께서 이 실정을 자세히 아시고 잘 말씀해 주셔서 이 분란을 풀어 주신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이만 다 갖추지 않습니다.
정생에게 답하는 편지 (서기 1611년 1월 7일, 양력 추정)
어제는 재계할 일이 있어 관아에서 묵었습니다. 하필 그때 형께서 찾아 주셨는데,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습니다. 보여 주신 내암공에 관한 이야기는 한바탕 웃어넘길 거리도 못 됩니다.
저는 내암과는 한 번 만나 사귄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그 사람을 오히려 불만스럽게 여겼는데, 다만 몇 년 전 유씨를 성토한 상소가 보통 사람보다는 좀 뛰어나다고 여겨서 임자정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점을 언급했던 것이지, 그의 주장에 동조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악부에 실려 있는 것도 그 나름의 억양이 있으니, 큰 새가 날개를 잃었다느니 뜬구름이 해를 가린다느니 한 것은 역시 그때 있었던 일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윤과 여상에 견준 것도 시인들이 즐겨 쓰는 반어법의 한 예일 뿐이니, 무엇이 이상하겠습니까.
저는 평생 제 처지를 스스로 익숙히 헤아려 왔습니다. 한 집안 사람들끼리도 의논이 다 같지는 않은 법입니다. 저는 좋은 벼슬 자리를 그저 부평초나 떠내려가는 장승처럼 여기는 사람인데, 만약 뚫고 나가고자 한다면 제 집안에서 스스로 구할 일이지 어찌 하필 멀리 새 친구를 맺어 남의 비웃음과 꾸짖음을 크게 받겠습니까. 임자정, 이대중과 서로 친하게 지낸 것은 오늘 시작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저를 이끌어 주고자 하는 것은 참으로 제 떠도는 신세를 가련히 여기기 때문이지, 어찌 의견이나 마음이 서로 같아서라고 하겠습니까.
임자정이 자순과 명익 등을 등용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가 없는데, 유독 저에 대해서만 의심을 품으니, 이보다 더 원통한 일이 있겠습니까.
아무개는 시판을 훼철한 일 때문에 품은 분노를 풀지 못해 온갖 흠집을 찾아내느라 못할 짓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아무리 말을 잘 꾸미는 사람이라 해도 누가 믿겠습니까.
내암은 비록 세간의 이런저런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본래 산속에 숨어 지낸 깨끗한 선비였으니, 그를 사귀는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 무턱대고 동조하지만 않는다면 무슨 손상이 있겠습니까. 정작 붙고 엉겨서 남의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은 과연 어느 집안입니까. 그런데도 감히 이러쿵저러쿵하며 남이 누구와 교제하고 누구와 친하다고 헐뜯습니다. 만약 제가 권세 있는 집안에 드나들었다면 저들은 장차 무엇으로 입방아를 찧었겠습니까.
요즘 몇 해 사이에 허리와 다리가 무척 아파서 직책 수행하는 일 외에는 형님을 자주 뵙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저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들의 분노를 풀어 주려고 염탐하며 아양 떠는 웃음 따위는 게을러서도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 설령 그 집에 찾아간다 해도 반드시 수치스러운 봉변을 당할 것이 틀림없기에, 이처럼 간곡한 가르침을 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만 그칩니다.
이생에게 답하는 편지 (서기 1611년 1월 18일, 양력 추정)
보내온 편지에서 영원히 남을 큰 사업에 대해 물으셨으니 참으로 훌륭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저의 얕고 거친 식견으로 어찌 만에 하나라도 제대로 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대의 질문이 선진 시대나 한나라·당나라의 이른바 대가들에게는 미치지 않고 유독 우리나라에 대해서만 자세히 물으셨으니, 이것이 어찌 낮춰 보는 논의이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외져서 바다 한구석에 있으니 당나라 이전의 문헌은 까마득히 멀고, 비록 을지문덕과 진덕여왕의 시가 역사책에 실려 있다고는 하나 정말 그분들이 직접 지은 것인지는 감히 믿기 어렵소.
신라 말엽에 이르러 최치원(호 고운) 학사가 처음 큰 이름을 얻었는데, 오늘날의 눈으로 본다면 그의 문장은 너무 곱기만 해서 힘이 시들었고 시는 거칠고 약해서, 허혼이나 정곡 같은 만당 시인들 사이에 넣어도 오히려 누추함이 드러날 지경이니, 성당의 작품들과 그 기법을 겨루려 해서야 되겠습니까.
고려 시대의 정지상은 표범 무늬의 얼룩 하나쯤은 보았다 할 만하지만, 그래도 만당 시 가운데 화려한 부류에 그쳤을 뿐입니다. 이인로와 이규보는 간혹 맑고 기이한 맛이 있었고, 진화와 홍간도 기름지고 곱기는 했지만 모두 소동파의 그늘을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익재 이제현에 이르러 새로운 문풍이 시작되었고,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이 그 뒤를 이었으며,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척약재 김구용이 고려 말엽의 명가가 되었습니다.
조선 초엽에 이르러서는 삼봉 정도전과 양촌 권근이 그 명성을 독점했으니, 문장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원숙해졌다고 할 만하여 아름답게 다듬어지고 크게 변모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흥의 공로는 문정공 이색이 가장 큽니다.
중간에 문간공 김종직이 포은과 양촌의 문맥을 이어받아 사람들이 그를 대가라 일컬었지만, 한스러운 것은 그 문장의 트임이 그리 높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 뒤로는 용재 이행 정승이 시에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고, 신광한과 정사룡도 그 뒤를 이어 뚜렷한 이름을 남겼습니다. 소재 노수신 정승도 애써 문명을 떨쳤으니, 이 몇 분이 중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어찌 모두 중국의 이름난 문장가들에게 뒤진다 하겠습니까.
지금 세상에서 글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문장으로는 동고 최립을 추대하고 시로는 이달(자 익지)을 추대하는데, 두 분 모두 천 년 이래 견줄 데 없는 절조입니다. 같은 연배 중에서는 여장 권필이 매우 부드럽고 맑으며, 자민 이안눌이 매우 깊고 굳세니, 이 밖에는 잘 알지 못합니다.
문장이란 비록 작은 재주라고들 하지만, 학문의 힘이 없고 안목이 없으며 꾸준한 노력이 없다면 그 극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루어 낸 바에 크고 작음, 높고 낮음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 오묘한 이치에 있어서는 다 한가지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글을 널리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학문의 힘이 없고, 스승을 찾아가 배우지 않기 때문에 안목이 없으며, 배운 것을 계속 익히지 않기 때문에 꾸준한 노력이 없습니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서 함부로 자기가 옛사람을 뛰어넘어 이름을 후세에 남기겠다고 큰소리치니, 저는 감히 그 말을 믿지 못합니다.
저는 열두 살에 아버지를 여의어, 어머니와 형님들이 저를 애처롭게 여기고 사랑만 해서 따로 엄한 다그침을 주지 않았습니다. 좀 더 자라서는 과거 공부를 익히는 사람들을 보고 따라 배웠는데, 그저 빨리 이루고 싶은 마음만 있어 육경과 여러 사서를 두루 읽고 대략의 뜻은 알았지만, 몸소 실천하고 침잠하는 공부는 즐기지 않았습니다.
호탕한 마음과 함부로 된 기세로 하루에 수만 자를 외워 입에서 글이 줄줄 흘러나오니, 사람들은 저를 총명하고 민첩하기가 무리에서 뛰어나다고 여겼고, 저 또한 그저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뿐, 학문과 문장이 애초에 많이 외고 널리 읽은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둘째 형님이 유배지에서 돌아오신 뒤 비로소 저에게 고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뒤 문장은 서애 유성룡 정승에게서 배우고, 시는 손곡 이달에게서 배우고서야 비로소 문장의 참된 길이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차츰 그 길로 들어서고자 했지만 세상의 흐름에 끌려 세상에 나가 과거에서 장원으로 뽑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격이 소탈하고 스스로를 단속하는 데 부족하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배척을 받아, 마침내 문을 닫고 학업에 몰두한 지가 이제 열여섯 해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무엇을 이루었는지는 제가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맑고 힘차며 깊고 굳세어 스스로 새로운 경지를 열어 가는 데는 저 앞선 분들에게 조금 못 미친다 하더라도, 여러 것을 품고 쌓아 두어 손 가는 대로 뽑아내면 마땅히 갈 데에 가고 마땅히 그칠 데에 그치며, 넘실넘실 흐르는 큰 강물이 하늘에 닿아 조개 궁전과 이무기 궁궐, 혹은 굴 산과 뱀장어 집이 끼어 있는 듯해서 그 웅대함을 잃지 않는 점만은, 저 여러 사람들과 견주어 제법 한 치쯤의 장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안목 있는 이들이 이를 인정해 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만약 스승과 벗들에게서 그 근원을 전해 받지 못했다면 또 어찌 이럴 수 있었겠습니까.
형님들과 누님의 글은 집안 내력에서 나온 것인데, 선친께서 젊었을 때 모재 김안국에게 배우셨고, 모재의 스승은 허백당 성현이며, 성현은 그 형 성간과 괴애 김수온에게서 배웠습니다. 이 두 분은 모두 태재 유방선의 제자였고, 유방선 공은 바로 문정공 이색이 아끼던 문인이었습니다.
문정공은 중국에 유학하여 한림원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오랫동안 우집과 구양현의 문하에 있으면서 그들의 칭찬을 받았는데, 심지어 그 학문의 도가 바다 밖 우리나라로 전해졌다는 구절까지 있었습니다.
구양현은 강서 지방 사람이라 몸소 여러 학자를 스승으로 모셨으니, 옛 문인들의 유훈을 익숙하게 들었고, 더구나 왕안석, 증공, 구양수, 황정견 등 옛 대가들의 업적이 여전히 찬란했던 터라, 이 학업을 전수하여 목은 이색에게까지 이어 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글 짓는 일의 내력을 조금이라도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목은이 중국에서 돌아온 덕분이니, 어찌 위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장 권필의 선친은 낙봉 신광한에게 배웠고, 낙봉은 용재 이행의 추천과 칭찬을 받은 사람이며, 자민 이안눌은 또 용재의 증손자이니, 이 역시 집안 대대로 이어진 학문으로 이름을 세운 사람들입니다.
낙봉과 용재 두 분은 모두 점필재 김종직이 남긴 학문을 이었고, 점필재의 아버지는 야은 길재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야은은 양촌 권근 형제에게 배웠고, 목은 이색 역시 그들의 스승이었으니, 결국 모두 목은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무릇 시와 글을 짓는 사람으로서 이 흐름을 떠나 따로 문파를 세운다면, 망령된 일이 아니라면 분수를 넘는 일일 것입니다.
보내 주신 편지에서 최경창과 백광훈을 말씀하셨는데, 두 분은 당나라에 있었더라도 역시 명가라 할 만하지만, 다만 그 세계가 좁았던 것이 한스럽습니다. 말씀하신 아계 이산해와 제봉 고경명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그들의 전집을 보지 못했으니, 어찌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침 형조의 회의에 참석해야 해서 문 앞에서 재촉하는 통에 대강 답장을 적을 뿐,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만나서 충분히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이만 갖추지 않습니다.
(용어) 최치원(호 고운)은 신라 말의 학자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이름을 떨쳤다. 이제현(호 익재), 이곡(호 가정), 이색(호 목은, 시호 문정)은 고려 말의 대표적 문인들이며, 정몽주(호 포은), 이숭인(호 도은), 김구용(호 척약재)도 고려 말의 이름난 문인이다. 정도전(호 삼봉)과 권근(호 양촌)은 조선 초의 문신이다. 김종직(호 점필재, 시호 문간)은 조선 초의 성리학자로 사림파의 뿌리가 된 인물이다. 이행(호 용재), 신광한(호 낙봉), 정사룡, 노수신(호 소재)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들이다. 최립(호 동고)과 이달(자 익지, 호 손곡)은 당대에 문장과 시로 이름난 인물이고, 권필(자 여장)과 이안눌(자 자민)도 같은 시기의 시인이다. 김안국(호 모재), 성현(호 허백당), 성간, 김수온(호 괴애), 유방선(호 태재)은 조선 초·중기에 이어진 학문 계보 속의 인물들이다. 우집과 구양현은 원나라의 학자로, 이색이 중국 유학 시절 가르침을 받은 스승들이다. 길재(호 야은)는 고려 말의 절개 높은 학자다.
성소부부고 제11권
9. 22:21
출처: 성소부부고 제11권, 문부 8, 논
배경: 제11권은 허균이 정치와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한 논설 열두 편을 모은 곳이다. 학문하는 태도, 정치와 인재 등용, 관직 제도, 군사, 신분에 따른 인재 차별, 관리의 녹봉, 붕당의 폐해, 그리고 힘없는 백성이 마침내 나라를 뒤엎는 "호민"이 될 수 있다는 경고까지 다룬다. 뒤이어 정도전과 권근, 김종직, 남효온, 이장곤 등 조선 초기 인물들의 처신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인물론이 이어진다. 허균 특유의 거침없는 비판 정신과 신분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글들로, 그중 〈호민론〉과 〈유재론〉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는 대표작이다.
학문을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5일, 양력 추정)
옛날에 학문을 하던 사람들은 저 혼자만 착한 사람이 되려고 공부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세상의 온갖 변화에 대응하고, 사람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밝혀 뒤에 올 학문의 길을 열어 주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훗날 세상 사람들이 "우리 학문은 존중할 만하고, 그 맥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 것은 바로 이 사람 덕분이다"라고 환히 알게 되기를 바랐다. 이것을 선비가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로 삼았으니, 그 마음씀이야말로 공정하다 할 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요즘 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우리 학문을 존중하려는 마음도 없을뿐더러, 저 혼자만 착한 사람이 되려는 마음조차 없다. 그저 입으로 몇 마디 주워섬기고 귀로 얻어들은 것을 긁어모아 겉으로 말과 행동을 그럴듯하게 꾸밀 뿐이면서도, 스스로는 "나는 도를 밝히는 사람이다, 나는 이치를 끝까지 파고드는 사람이다"라고 떠벌려 한 시대 사람들의 눈과 귀를 흐려 놓는다. 그러나 그 결과를 가만히 살펴보면, 턱없이 높은 명망을 거저 거머쥐려 했을 뿐이고, 정작 타고난 본성을 높이고 도를 후세에 전하는 참된 알맹이에 있어서는 멍하니 아무것도 엿본 바가 없는 듯하니, 그 마음씀은 결국 사사로움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공과 사를 가르는 기준이요, 참과 거짓을 가르는 기준이다.
어찌하여 수십 년 전부터 사람들은 입만 열면 "아무개는 학자다, 아무개는 참된 선비다" 하며 함부로 서로 치켜세우고 자랑하기에 바쁜가? 이 또한 미혹된 짓이다.
일찍이 보건대, 이른바 참된 선비란 세상에 쓰이면 요임금과 순임금 시절의 다스림, 우임금·탕임금·문왕·무왕의 공적이 실제 일로 드러난 것이 그와 같았고, 설령 쓰이지 못하더라도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 그리고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학설을 책에 남긴 것이 또한 그와 같아서, 비록 천만 년이 지나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그 마음씀이 공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거짓 선비들은 실속도 근거도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입만 열면 마치 옛적 재상 이윤·부열이나 주공·공자가 했던 큰일을 자기가 떠맡을 수 있다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써 보면 손발 하나 제대로 놀리지 못하고 일을 그르쳐 스스로도 수습하지 못하니, 당대의 비웃음과 후세의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조금 더 교활한 자들은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헤아리고는 명망이 무너질까 두려워, 아예 나서지도 않은 채 제 졸렬함을 감추어 버린다. 이 또한 다름이 아니라 그 마음씀이 사사로웠기 때문이다.
슬프다! 거짓이 참됨을 어지럽혀 마침내 이런 극단에까지 이르렀고, 그 바람에 임금마저 도학이라는 것을 싫어하여 쓸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는 거짓과 사사로움을 품은 자들의 죄이지, 어찌 참된 선비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겠는가.
우리나라에서도 이른바 도학을 한다는 선비들이 더러는 화를 입었고, 더러는 끝내 자신의 경륜을 펴 보지도 못했다. 잘 모르겠지만, 그 시절 임금들이 과연 그들의 도를 받아들여 실제로 펼쳤더라면, 그 공적을 옛사람에게 견줄 만했을까, 이 세상을 요순시대처럼 만들 수 있었을까?
조정의 논의가 두 갈래로 갈라진 뒤로는 사사로움에 치우친 논쟁이 몹시 치열해져서, 어떤 이는 제 편만 옳다며 남을 헐뜯고, 어떤 이는 갑만 떠받들고 을은 배척하여, 시끄럽게 갈라진 채 옳고 그름이 정해지지 못했다. 이는 모두 사사로운 마음으로 듣고 보아서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니, 대체 누구를 탓하겠는가!
얼마 전에는 이른바 오현(다섯 어진 이)을 공자를 모신 사당에 함께 모셨다. 그때 논의하던 사람들은 "이 다섯 분 말고는 더 모셔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 또한 몹시 우스운 일이다. 어진 이라는 것이 어찌 정해진 숫자가 있어서 반드시 다섯 명으로 한정된다는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 공자나 안자 같은 학자가 나오더라도 함께 모실 수 없다는 말인가? 공자나 안자 같은 인물이 언제 태어날지는 아무도 미리 정할 수 없는 법이다.
또한 충절로 이름난 길재가 우탁과 정몽주의 학맥을 직접 이어받은 일이나, 서경덕이 홀로 깨우친 초월한 경지, 이이의 밝은 식견과 넓은 도량 같은 것을, 어찌 "비중이 크지 않으니 취할 게 없다"며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는가? 심지어 더러는 헐뜯기까지 하니, 이 또한 사사로움과 거짓이 빚어낸 해악이다.
만약 김굉필과 정여창이 불행히도 백 년 뒤에 태어났더라면 그런 헐뜯음을 당하지 않았으리라고 어찌 장담하며, 이이가 다행히 백 년 앞서 태어났더라면 그가 존중받지 못했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이는 마음씀이 공정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 것이요, 스스로 살펴보기는 싫어하고 남의 말만 떠받드는 세태에서 나온 것이다.
임금이 참으로 공과 사를 밝게 가릴 수 있다면,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일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미 공과 사, 참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다면 반드시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고 도리를 밝히는 사람이 나와 배운 바를 실천할 것이다. 겉만 그럴듯하게 꾸미던 자들은 감히 제 잔꾀를 부리지 못하고 모두 깨끗이 거짓을 버릴 것이며, 나라의 큰 시비 또한 저절로 정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열쇠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임금 한 사람의 몸에 있으니, 결국 "그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한마디로 귀결될 뿐이다.
(용어) 오현은 조선의 학자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다섯 사람을 가리키며, 이들을 공자를 모신 사당(문묘)에 함께 모신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탁과 정몽주는 고려 말의 학자이고, 길재는 호가 야은으로 이들의 학맥을 이었다고 전해지는 학자다. 서경덕은 호가 화담으로 혼자 힘으로 학문의 경지를 깨우친 학자이며, 이이는 호가 율곡으로 조선 중기의 대학자다. 안자는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 안회를 가리킨다.
정치를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7일, 양력 추정)
예로부터 임금이 나라를 다스릴 때 혼자서 정치를 한 경우는 없었다. 반드시 그를 도와줄 신하가 곁에 있어야 했다. 그 돕는 자리에 적합한 사람만 얻으면 천하와 나라의 일을 알맞게 다스릴 수 있었다. 이 이치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예로는, 요임금·순임금·우임금·탕임금이 임금 자리에 있을 때 반드시 고요·후직·익·이윤 같은 신하의 보좌를 받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런 다음에야 태평한 다스림을 이룰 수 있었으니, 하물며 지금 세상에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훗날의 임금들은 비록 잘 다스리기를 바란 이들도 있었지만, 늘 마땅한 보좌를 얻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신하 된 사람도 옛사람과 같은 포부를 지녔더라도, 더러는 어진 임금을 만나지 못함을 걱정하고 더러는 끝내 제대로 쓰이지 못함을 걱정하였다. 그러니 정치가 옛날만 못하고 다스림이 날이 갈수록 저속해지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으니, 어찌 백성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가 비록 외진 곳의 작은 나라이지만, 임금과 신하가 있고 백성과 나라가 있다. 정치를 맡은 사람이 참으로 하나라·은나라·주나라 세 시대를 본받는다면, 그 시절의 태평한 다스림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세종대왕이 황희와 허조를 등용한 예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황희와 허조는 학자도 아니었고 뛰어난 재능을 지닌 신하도 아니었다. 다만 묵직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임금이 잘못하는 일이라도 무작정 따르지만은 않을 정도의 사람이었다. 세종 당시에는 나라의 틀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 개혁할 만한 국사가 많았는데도, 두 신하는 큰 도리로써 힘쓰기보다는 그저 너그럽게 진정시키는 것만을 최선으로 여겼다. 이래서야 어찌 임금의 정사를 도와 옛적 익·후직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겠는가?
그런데도 나라가 신망을 얻어 오늘날까지 유지된 것은 모두 세종의 힘이었고, 두 신하가 보좌의 역할을 했다고들 말한다. 만약 고요·익·후직 같은 인물이 보좌하여 정치를 했더라면 그 공적이 어찌 이 정도에 그쳤겠는가.
아, 선왕(선조)의 정치는 밝았다고 할 만하다. 그 시절 보좌하던 신하야 많았지만, 아끼고 서로 믿었던 이는 이이였고, 온전히 맡기고 책임을 지워 일하게 한 이는 유성룡이었다. 두 신하는 참으로 학자이자 재능 있는 신하였다고 할 만하다. 그들에게 일을 맡기고 성과를 채근하던 뜻이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나, 끝내 그 포부를 펴지 못한 것은 그들의 재능이 미치지 못해서가 아니라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어지럽기 짝이 없던 임진왜란을 맞아 온 힘과 지혜를 다했으나, 어떤 일은 건져 냈고 어떤 일은 막혔으니, 이는 당시 형편이 유리했느냐 불리했느냐에 달린 것이었다. 그가 이순신을 등용한 일 하나만으로도 나라를 다시 일으킨 큰 발판이 되었다. 그런데 유성룡을 공격하던 자들은 이순신까지 싸잡아 죄를 물었으니, 그 해악이 나라에 미친 것이 그보다 클 수 없었다.
이이가 곤욕을 치른 것은, 논의하던 자들이 "공물 장부를 고치는 것은 불편하다", "여러 고을에 정원 밖의 병사를 두는 것은 마땅치 않다", "곡식을 바치고 벼슬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서얼에게 벼슬길을 열어 주는 것도 옳지 않다", "성과 보루를 다시 쌓는 것도 합당치 않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란을 겪은 뒤 왜적을 막고 백성을 편안케 하려고 부지런히 강구한 방책이라는 것이 결국 이 다섯 가지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째서인가? 대체로 이이가 앞날을 내다본 것은 수십 년 전에 이미 명확하였다. 그는 이 몇 가지 시행책이 평상시라면 번거로운 일임을 알았지만, 환란에 대비하려면 고쳐 나가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뭇사람의 꺼림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속에 얽매인 선비들이 좁은 소견에 이끌려 소란스럽다느니 온당치 않다느니 하며 요란하게 어깃장을 놓았으니, 그의 지위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도, 나라가 제대로 되지 못한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지금 논의하는 자들은 온 힘을 다해 이이를 배척하면서도, 정작 앞서 말한 다섯 가지 방책을 시행하는 데는 오히려 힘을 다하려 하지 않으니, 이야말로 몹시 우스운 일이다.
선왕이 온 정성을 다해 다스림을 도모하던 시절에, 두 신하가 조용히 쌓아 둔 포부를 펼 수 있었더라면, 그리하여 위에서는 그 뜻을 따르고 아래에서는 받들어 다른 논의가 없었더라면, 비록 태평성대를 온전히 되찾지는 못했더라도 외적의 침략만큼은 막아 낼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떠들어 대는 자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 쪼아 대며 기어이 가로막고 배척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설령 황희나 허조가 그런 처지에 놓였더라도, 반드시 "두 왕조를 섬겼다"는 트집을 잡혀 하루도 조정에 편히 있지 못했을 것이니, 어찌 세종 때처럼 여유롭고 진중하게 일할 수 있었겠는가.
훗날 훌륭한 다스림이 없었던 것은 모두 이런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밝음으로써 아랫사람을 살피고, 믿음으로써 신하에게 일을 맡긴다"는 이 두 가지면 충분하다 하겠는데, 그 결실은 오로지 굳은 의지와 결단에서 나올 뿐이다.
(용어) 고요·후직·익은 순임금을 도운 신하들이고, 이윤은 은나라 탕왕을 도와 왕도 정치를 이룬 명재상이다. 황희와 허조는 세종 때의 정승으로 묵직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이름났다. 이이는 호가 율곡으로 선조 때의 학자이자 재상이며, 유성룡은 호가 서애로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내며 이순신을 천거한 인물이다. 황희와 허조는 원래 고려의 신하였다가 조선에서 벼슬했기에, 트집을 잡자면 "두 왕조를 섬겼다"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었다.
벼슬자리를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9일, 양력 추정)
하·은·주 세 시대 이후로 관직을 함부로 늘리고 관원이 넘쳐 났던 나라로는 당나라만 한 나라가 없었다.
관직을 함부로 늘리면 권한이 이리저리 흩어져 어느 자리도 무게를 갖지 못하고, 관원이 넘쳐 나면 녹봉만 허비될 뿐 일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하고서도 훌륭한 정치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당나라(이씨의 나라)가 번창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나라의 관제는 당나라를 본받았으나, 오히려 관직은 더 늘어났고 헛되이 드는 비용도 더 많다. 중국처럼 큰 천하로도 오히려 권한이 흩어지고 녹봉이 낭비되는 것을 걱정했는데, 하물며 외지고 작은 우리나라에서야 어떠하겠는가. 나는 감히 먼 옛일을 끌어다 쓰지는 못하고, 명나라의 제도를 예로 들어 말해 보겠다.
명나라는 두 서울(남경과 북경)에 군사를 다스리는 관청 다섯 곳을 두고, 각 업무를 나누어 맡는 부서 여섯 곳을 두었다. 그 밖에 종실을 관장하는 관청, 감찰을 맡은 관청, 재판을 맡은 관청, 소식을 전하는 관청, 제사를 맡은 관청, 말과 수레를 맡은 관청, 궁중의 음식을 맡은 관청, 외국 사신을 맞는 관청 같은 여러 중간급 관청과, 국립 교육기관, 태자를 모시는 관청, 학사들이 모이는 관청, 임금께 간언하는 여섯 부서, 옥새를 관리하는 관청, 문서를 작성하는 관청 등이 각기 일을 나누어 맡았다. 궁궐 호위를 맡은 관청은 임금을 지키고 길을 순찰하는 일을 맡았고, 천문을 살피는 관청, 임금의 병을 돌보는 관청, 궁중 정원을 관리하는 관청, 도성 다섯 구역의 치안을 맡은 병사들은 예를 담당하는 부서와 군사를 담당하는 부서에 딸려 있을 뿐이었다. 이렇듯 관청은 이 정도에 그쳤고 관원 또한 쓸데없이 많지 않았지만, 그것으로도 천하의 일을 다스리기에 충분했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의정부·육조·삼사와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관원을 제외하고도, 관청과 관원의 수가 넘쳐 나고 번잡한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종친과 외척을 관장하는 데는 관청 하나면 충분한데, 종친부·의빈부·종부시가 나란히 있다. 재물을 관장하는 데는 호조 하나면 넉넉한데, 제용감·상의원·사섬시를 따로 두었다. 궁중의 술과 음식을 관장하는 데도 관청 하나면 넉넉한데, 내자시·내섬시·예빈시·사도시·사재감·사온서가 나뉘어 이 일을 맡고 있다. 형조 하나만 있으면 될 것을 장례원으로 굳이 나눌 필요가 없고, 군자감 하나면 될 것을 풍저창·광흥창 두 창고로 나눌 필요가 없다. 종묘의 음악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것인데, 정작 그 일을 맡은 관청(태상)은 버려두고 따로 장악원을 세웠으며, 제사에 쓸 짐승 한 가지만 기르면 될 것을 전생서와 사축서 두 곳에서 나누어 기른다. 심지어 잔치와 자리를 준비하는 관청조차 둘로 나누었고, 의약을 맡은 관청도 셋(내의원·전의감·혜민서)으로 나누었다.
그 밖에도 뒤섞이고 중복된 것들이 하도 많아 낱낱이 들기도 어려운데, 관청 하나에 한 사람이면 충분한 자리도 모두 두 자리로 만들었으며, 많은 경우는 열서너 명, 적어도 예닐곱 명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게다가 여러 관청이 저마다 제 소견을 고집하여, 어떤 관청은 다른 관청보다 더 많은 업무를 차지하려 하고 다른 관청은 또 그 업무를 침범하려 하여, 서로 다투며 지혜를 겨루느라 번갈아 임금의 재가를 받아 내니, 정작 그 일을 총괄해야 할 부서에서는 어리둥절하여 제대로 받들어 처리하지 못한다. 그래서 일이 이 때문에 성사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관청의 책임자도 하나하나 가려 뽑지 못해 대부분 어리석고 재능 없는 사람으로 구차하게 채우니, 아전들이나 멍하니 쳐다보며 일이 되어 가는 대로 내버려 둔다. 갑작스레 그 책임을 물으면 아무것도 모른 채 대답조차 못하니, 이런 까닭으로 그 자리도 높임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나랏일이 날이 갈수록 어지러워지고 기강도 날로 땅에 떨어지고 있다. 권한이 이 때문에 흩어져 하나로 모이지 못하고, 녹봉이 이 때문에 낭비되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날이 갈수록 쇠퇴한 말세로 빠져드는 것은, 관직을 함부로 늘린 것을 빌미로 삼지 않은 것이 없다.
얼마 전에 논의하던 사람들이 쓸모없는 관원을 걸러 내려 했으나, 걸러 내면 걸러 낼수록 도로 복귀되어 끝내 그 정책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이는 그저 쓸모없는 관원이 있다는 것만 살폈을 뿐, 관청이 너무 많은 것이 정작 큰 병폐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청을 합치기만 하면 그런 쓸모없는 관원은 저절로 줄어들 것이다.
우리나라를 중국에 견주면 한 지방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중국의 호남이나 광동 같은 한 지방에는 녹을 받는 사람이 칠백여 명에 불과한데, 우리나라는 관원이 많아 수천 명에 이르고, 관청의 수도 중국의 다섯 배나 되니, 권한이 흩어지고 녹봉이 낭비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당나라를 경계로 삼고 명나라를 본받는다면, 그런대로 괜찮을 것이다.
(용어) 종친부·의빈부·종부시는 모두 왕실 친족을 관리하던 관청이고, 제용감·상의원·사섬시는 모두 재물과 옷감을 다루던 관청이다. 내자시·내섬시·예빈시·사도시·사재감·사온서는 모두 궁중의 음식·술·물자를 나누어 맡던 관청이며, 전생서·사축서는 모두 제사에 쓸 짐승을 기르던 관청, 내의원·전의감·혜민서는 모두 의약을 다루던 관청이다.
군사를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11일, 양력 추정)
천하에 군대 없는 나라가 있을까? 그런 나라는 없다. 나라에 군대가 없다면 무엇으로 포악한 무리를 막아 내겠는가? 포악한 것을 막을 장비가 없다면 나라가 어찌 자립하며, 임금이 어찌 스스로를 지키며, 백성이 어찌 하루라도 편히 잠자리를 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천하에 군대 없는 나라가 있다. 군대가 없고도 오히려 수십 년이나 오래도록 보존된 예는 고금에 없는데, 우리나라가 바로 그런 나라다. 그렇다면 포악한 것을 막을 장비도 없이 오히려 제후의 왕위를 유지하고 있으니, 여기에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런 비결은 없고, 그저 우연일 뿐이다. 왜 우연이라 하는가? 왜적이 물러간 뒤로 우연히 다시 쳐들어오지 않았고, 북쪽 오랑캐가 우연히 우리를 침범하지 않았으며, 서북의 다른 오랑캐 무리도 우연히 북쪽 변경을 어지럽히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걱정거리가 없는 채로 그저 세월만 보내고 있는 것이다.
군대가 없다는 것도 군대가 아예 없다는 말이 아니라, 군사 수가 적어 싸울 수 없다는 뜻이다. 군사 수가 적다는 것은 군정이 제대로 닦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싸울 수 없다는 것은 자격 있는 장수가 없다는 뜻이다. 참으로 군정을 엄히 하고 장수를 제대로 골라 윗사람이 그를 믿고 전권을 맡긴다면, 훈련받은 군사 십만 명이 남북에서 뛰쳐나와 치고 공격하는 위엄을 떨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해 볼 생각도 없이 계책은 세우지 않고, 난리만 나면 도망칠 궁리부터 하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앞선 왕조인 고려 때는 군정이 가장 엄했다. 조정 관원으로서 정오품 이상, 즉 붉은 비단옷을 입지 못한 사람은 모두 임금을 호위하는 친군에 예속되었고, 재상의 아들도 으레 무관직을 받았으며, 학관에서 공부하던 유생들도 군에 종사토록 했다. 안팎의 정규 군대는 공노비든 사노비든 가리지 않고 모두 군적에 매여 있었다.
장수는 최고 관부의 대신 이하 여러 사람이 통솔했으며, 안팎의 크고 작은 여러 장수에게는 모두 몸소 이끄는 병사가 있었다. 평상시에는 이들의 의식주를 넉넉히 해 주며 훈련시켰고, 사변이 일어나면 장수와 병졸이 서로 손발이 맞아 마치 팔이 손가락을 부리듯 하였으므로, 백만 대군도 하루아침에 채울 수 있었다.
거란 장수 소손녕이 쳐들어왔을 때는 순탄하게 물리쳤고, 거란 왕자 금산과 금시가 쳐들어왔을 때는 궁색한 지경까지 몰아붙였으며, 늑대같이 사나웠던 몽골 장수 살리타와의 싸움에서도, 병력이 많기로 이름났던 모거경·유사·관선생의 침입에서도, 옛 고려는 모두 맞서 싸워 물리칠 수 있었다.
지금 우리 강토는 고려에 비해 더 줄어들지도 않았고, 백성도 더 줄어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겁을 먹고 늘 "군대가 없다"고 두려워하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군대는 조정 관원과 재상의 아들, 학관의 선비들이 예속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종이나 천한 신분의 사람들까지도 모두 군적에서 빠지기를 꾀하고, 병사를 다루는 관리들이 군사에게서 재물을 빼앗아 쓰니 그 골수가 이미 다 빠져 버렸다.
평상시에 넉넉히 먹여 주어도, 난리를 당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게 하면 더러 물러나 달아나며 살길을 찾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하물며 모질게 부려 먹다가 죽을 자리로 몰아넣음에야 어떠하겠는가! 그들이 흩어져 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장수를 고르는 일도 반드시 백성을 잘 다스리는 사람 가운데서 임용해야 한다. 백성을 다스리는 것과 군사를 다스리는 것은 본래 방법이 같지 않다. 하물며 백성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그저 임금 곁의 사람들에게만 잘 보이려는 자들이겠는가. 그런 까닭에 어쩌다 이런 사람이 장수가 되면 아무것도 모르고 손발조차 놀릴 줄 모르며, 적군을 바라보기도 전에 먼저 무너지는 일이 왕왕 다 이래서 벌어졌다.
아, 이런 사람으로 장수를 삼아 이런 군대를 거느리게 했으니, 군대가 없다고 해도 옳은 말이다. 나라가 그런대로 나라 노릇을 하고 있는 것도 역시 우연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폐단을 어떻게 고쳐야 할까? 고려의 제도만 본받아도 군대는 씩씩해지고 장수도 제대로 고를 수 있어 나라가 나라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렇게 하더라도, 장수 된 신하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오래도록 변방에 있으면 남의 헐뜯음을 받아 임금의 의심을 사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군대를 강하게 하고 병졸을 훈련시키며, 부하들을 엄히 단속하고 명령이 분명하며, 위아래가 서로 친숙하여 적국이 두려워할 만한 장수라 할지라도, 한 번 임금의 의심을 살 꼬투리가 생기면 미처 발길을 돌리기도 전에 자신이 무너지고 나라도 따라서 위태로워진다. 이렇게 본다면, 군대를 다스리고 장수를 통솔하여 나라를 스스로 강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임금뿐이다.
(용어) 소손녕은 거란의 장수로 고려 성종 때 침입했다가 서희의 담판으로 물러난 인물이다. 금산·금시는 거란의 왕자로 고려 고종 때 침입했다가 김취려에게 격퇴되었다. 살리타는 몽골의 장수로 고려 고종 때 여러 차례 고려를 침입했다. 붉은 비단옷은 다섯째 품계 이상의 벼슬아치가 입던 관복을 가리킨다.
버려지는 인재를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13일, 양력 추정)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과 하늘이 맡긴 직분을 함께 다스릴 사람은 인재가 아니고서는 되지 않는다.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하는 것은 본래 한 시대에 쓰이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인재를 낼 때, 하늘은 귀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그 품성을 풍부하게 해 주지 않고,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그 품성을 인색하게 주지도 않는다. 그런 까닭에 옛날의 밝은 선철들은 이 이치를 분명히 알아서, 더러는 초야에서도 인재를 구했고, 더러는 병사들 사이에서 뽑아냈으며, 더러는 싸움에 져서 항복한 적장을 발탁하기도 했고, 더러는 도둑 무리 가운데서 고르며, 더러는 창고지기를 등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임용한 사람마다 모두 그 일을 맡기기에 적당했고, 임용된 사람들도 저마다 지닌 재능을 마음껏 펼쳤다. 나라가 복을 받고 다스림이 날로 융성했던 것은 바로 이런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하를 다스리는 큰 나라조차도 혹시 그런 인재를 놓칠까 오히려 걱정하여,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앉으나 누우나 생각하고 밥상머리에서도 탄식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산림과 들판에서 보배 같은 포부를 가슴에 품고도 벼슬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리도 흔하며, 영특하고 준수한 인재가 낮은 벼슬자리에 파묻혀 끝내 그 포부를 시험해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그리도 많은가! 참으로 인재를 다 찾아내기도 어렵고, 찾아 쓰더라도 그 재능을 다하도록 하는 일 역시 어렵다.
우리나라는 땅부터가 좁아서 인재가 드물게 나는 것이 예로부터 걱정거리였다. 그런데 조선에 들어와서는 인재를 등용하는 길이 더욱 좁아져서, 대대로 벼슬한 이름난 집안이 아니면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없었고, 바위굴이나 띠집 같은 데 사는 선비라면 아무리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억울하게 쓰이지 못했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서는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없어, 아무리 덕과 업적이 매우 훌륭한 사람이라도 끝내 판서나 정승 자리에는 오르지 못한다. 하늘이 재능을 부여함은 누구에게나 고른데, 대대로 벼슬한 집안과 과거 급제자로만 등용을 한정하고 있으니, 늘 인재가 모자람을 애태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예부터 지금까지 시대가 멀고 오래며 세상이 넓다고는 하지만, 서얼 출신이라 하여 어진 인재를 내버리고, 어머니가 재혼했다는 이유로 그 재능을 쓰지 않는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으니, 어머니가 신분이 미천하거나 재혼한 경우라면 그 자손은 모두 벼슬길의 차례에 끼지도 못한다. 보잘것없는 나라로서 두 오랑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니, 모든 인재가 나라에 쓰이지 못할까 오히려 걱정해도 나랏일이 제대로 구제될지 예측하기 어려운데, 그런데도 도리어 스스로 그 길을 막아 놓고는 탄식하기를 "인재가 없다, 인재가 없다" 하니, 이는 마치 월나라로 가면서 수레를 북쪽으로 돌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이웃 나라에도 알리지 못할 일이다.
한 사내와 한 아낙네가 원한을 품어도 하늘은 그들을 위해 마음 아파하는 법인데, 하물며 원망에 찬 남정네와 홀어미가 나라 안에 절반이나 되니, 화평한 기운을 이루기도 어려울 것이다.
옛날의 어진 인재는 대부분 미천한 데서 나왔다. 그 시절에 만약 우리나라의 법을 썼더라면, 송나라의 명재상 범중엄은 정승이 되어 이룬 공업이 없었을 것이고, 진관과 반양귀는 곧은 말을 하는 신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마양저와 위청 같은 장수, 왕부 같은 문장가도 끝내 세상에 쓰이지 못했을 것이다.
하늘이 낳아 준 것을 사람이 내버리니, 이는 하늘을 거스르는 짓이다. 하늘을 거스르고서 하늘에 빌어 나라의 명이 길기를 바란 사람은 예로부터 없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그대로 행한다면, 큰 복도 또한 저절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용어) 범중엄은 송나라의 어진 재상으로,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재혼하였으나 후에 송나라 제일의 재상으로 이름을 남겼다. 진관과 반양귀는 모두 송나라의 강직한 신하였다. 사마양저는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병법에 밝아 제나라의 대사마에 오른 인물이고, 위청은 어머니가 재혼하여 성이 바뀐 인물이었으나 한나라의 대장군에 올랐다. 왕부는 벼슬하지 않고 《잠부론》이라는 책을 지어 문장으로 이름을 남긴 후한의 학자다.
녹봉을 후하게 줌을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15일, 양력 추정)
《예기》에 이런 말이 있다. "충심과 믿음으로 대접하고 녹봉을 후하게 주는 것은 선비를 권장하기 위해서다." 이 말이야말로 의미심장하다. 남의 윗사람 된 자가 아랫사람에게 녹봉을 후하게 내려 주지 않는다면, 선비 된 사람들이 무엇으로 스스로를 가다듬어 청렴한 정신을 기르고, 이익 앞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겠는가.
이 때문에 옛날 군자로서 나라에 벼슬하던 사람은 녹봉이 넉넉하여 살림을 채우기에 충분했으니, 봉급만으로도 아내와 자식을 돌보기에 넉넉했다. 그래서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지 않고, 뇌물을 받는 일도 없이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기르는 물품이 저절로 넉넉했다. 여유롭게 한가하고 편안한 틈을 내어 쌓아 둔 포부를 펼 수 있었으니, "공 없이 녹만 먹는다"는 나무람을 면할 수 있었고, 염치가 뚜렷이 세워져 세상의 기풍이 도타워졌다. 옛날의 훌륭한 시대에는 대개 이런 제도를 시행하였다.
비록 그렇다 해도 군자라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고, 제 몸만 이롭게 하려는 자들이 너무도 많다. "임금이 나를 이토록 후하게 대접해 주시니, 내가 임금께 보답할 길은 무엇이 마땅한가"를 생각해야 할 텐데, 정작 검소함으로 스스로를 다잡으라는 옛 훈계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재물이나 쌓아 둔다는 나무람만 여러 차례 터져 나왔다. 제 말채찍 꾸미기는 그만두지 않으면서 정작 제사 그릇은 꾸밈이 없으니, 선비들이 스스로를 대접하는 수준이 이토록 낮고 얕다.
《주역》에 이런 말이 있다. "기른다는 것을 보는 것은 자신이 남을 기르는 모습을 살피는 것이요,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한다는 것은 자기가 길러지는 모습을 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그저 따뜻하고 배부르기만 생각하며 벌떡 일어나 곡식 창고와 재물 자루에만 매달리고, "너의 밝은 지혜는 던져 버리고 나의 탐욕스러운 모습만 살핀다"는 것은 군자에게 바랄 만한 일이 아니다.
옛 제도는 다 상고할 수 없으나, 공자의 제자 원헌이 노나라의 고을 수령이 되었을 때 공자는 그에게 곡식 구백을 주었고, 맹자가 제나라의 경이 되었을 때 그 녹봉은 십만이었다. 제나라와 노나라는 제후의 나라였을 뿐인데도 녹봉을 후하게 주어 염치를 기르게 함이 이와 같았으니, 하·은·주 세 시대의 녹봉이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할 만하다.
한나라의 녹봉도 후했고, 특히 하급 관리들을 가장 우대하였으니 이 또한 훌륭한 일이었다. 송나라도 어진 이를 기르는 데 더욱 마음을 써서, 봉급을 모두에게 충실히 주었고 별도의 지급금도 넉넉히 베풀었다. 하급 관리를 우대하니 청렴한 기풍이 세워졌고, 지방관을 우대하니 지방 벼슬을 하찮게 여기는 걱정이 사라졌으며, 퇴직한 노신을 우대하니 어진 이를 대접하고 원로를 높이는 뜻이 도타웠다.
역대의 제도가 저마다 같지는 않으나, 녹봉을 후하게 주어 선비를 권장했다는 점만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관리들의 녹봉을 깎으면서도 그들의 청렴만을 다그치고 있으니, 천하에 이런 이치는 없다. 신라 때는 일품 벼슬의 녹봉이 일 년에 삼백이었고, 고려는 그 절반이었는데, 이는 대체로 고려가 신라보다 관직을 많이 두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관직이 세 곱절로 늘어나 녹봉을 깎지 않을 수 없었다. 삼분의 이를 깎고 나니 봉급이 턱없이 부족해졌다. 대부나 선비마다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기르는 데 곤궁하여 청렴할 겨를조차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임진왜란 뒤에는 다달이 주던 요를 다시 녹으로 바꾸어 설계하면서 예전의 절반으로 또 줄었고, 됫박 수량마저 줄여 받는 사람이 열흘도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제사를 받드는 규모나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이를 장송하는 데 드는 물품은 평상시보다 줄인 것이 없고, 의복과 말 꾸미기와 먹고 마시는 것은 사치스러워 절제할 줄 모르니, 이는 예전 임금들 시절보다 열 배나 되는 씀씀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힘없는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게 되고, 마지못해 뇌물까지 받게 된다. 이 때문에 예의와 염치가 펴지지 못하고 세상의 기풍은 날로 야박해지는데도, 사대부들은 태평스레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백성들은 윗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뇌물을 바쳐 벼슬을 얻거나 죄를 가볍게 하려는 자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으니, 이는 모두 선비를 권장하는 제도를 시행할 수 없어서 생긴 일이다. 이 또한 가슴 아픈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를 구제할 수 있을까?
쓸데없이 들어가는 관청 비용을 줄이고, 윗사람이 공손하고 검소한 태도로 이끈다면 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용어) 원헌은 공자의 제자로 자가 자사이며, 지조가 높아 가난 속에서도 도를 즐긴 인물이다. "요"는 다달이 주던 봉급을, "녹"은 해마다 주던 봉급을 가리키는 옛 이름이다.
소인을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17일, 양력 추정)
요즈음 나라에는 소인도 없으니, 또한 군자도 없다.
소인이 없다면 나라의 다행이지만, 만약 군자마저 없다면 어찌 나라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는 않다. 군자가 없기 때문에 역시 소인도 없는 것이다. 만약 나라에 군자가 있다면 소인들이 감히 제 자취를 숨기지 못한다.
대저 군자와 소인은 음과 양, 낮과 밤과 같아서, 음이 있으면 반드시 양이 있고 낮이 있으면 반드시 밤이 있듯이, 군자가 있으면 반드시 소인도 있다. 요임금과 순임금 때도 역시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뒷세상에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대개 군자는 바르고 소인은 간사하며, 군자는 옳고 소인은 그르며, 군자는 공정하고 소인은 사사롭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사특함과 바름, 옳음과 그름, 공정함과 사사로움을 가려 살핀다면, 저 소인들이 어찌 감히 제 실정을 숨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요즘 이른바 군자와 소인이라는 것은 서로 큰 차이가 없다. 자기와 뜻을 같이하면 모두 군자로 여기고, 뜻을 달리하면 모두 소인으로 여긴다. 저편이 이쪽과 다르면 배척하여 사특하다 하고, 이쪽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면 치켜세워 바르다고 한다. 옳다는 것은 그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옳음이요, 그르다는 것은 그들이 그르다고 여기는 것이 그름이니, 이는 모두 공정함이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만약 참으로 학식과 행실과 재주와 식견이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대인군자로 하여금 나와서 높은 지위에 있게 하고, 모든 관료를 이끌고 권장하며, 지체 높은 대부들로 하여금 모두 바름을 지키고 공을 받들며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알게 한다면, 한 시대의 음흉한 붕당 무리들도 머지않아 그 낯빛을 고칠 것이다. 어찌 감히 요즘처럼 사분오열하여 함부로 날뛸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음흉한 붕당의 해로움이 소인이 국권을 함부로 휘두르는 것보다 심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라에서 소인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나라에 해를 끼치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은, 권세 잡은 간신이 국정을 홀로 쥔 것도 아닌데 이토록 극에 달했으니, 이는 모두 사사로운 뜻이 크게 행해져서 권한이 한곳에서 나오지 않고, 기강이 이미 무너져 다시는 떨쳐 세울 수 없게 된 까닭이다.
이른바 권세를 쥔 간신이라는 자들도 예전에 있었다. 김안로가 일찍이 농간을 부렸고, 윤원형도 일찍이 전권을 휘둘렀으며, 요즘에는 최영경 또한 전횡하려 하여 저 혼자만 이롭게 하고 뜻을 달리하는 사람을 배척했으니 그 수법은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나라의 기강만큼은 여전했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권한이 한곳에서 나왔기 때문에, 전횡하던 자가 물러가면 곧바로 예전대로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권한이 여러 군데서 나오고, 저 혼자만 이롭게 하며 뜻을 달리하는 사람을 배척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 그러하다. 이런 것을 물리치려 해도 이루 다 쫓아낼 수가 없고, 나라의 기강도 끝내 수습할 수 없게 된다.
아, 어찌해야 소인이 국권을 전횡하게 만들었다가, 그 기세가 다하기를 기다려 공격하여 제거할 수 있을까? 또 어찌해야 대인군자가 나와서 그 바람으로 저 음흉한 붕당 무리를 흩어 놓을 수 있을까? 이 때문에 "지금의 나라에는 소인도 없으니 또한 군자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또 하나 말해 둘 것이 있다. 옛날의 이른바 소인이라는 자들은 그 학문이 자기의 언변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했고, 그 행실이 세상 사람을 속이기에 충분했으며, 그 재주가 사태의 변화에 대응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므로 그가 자리에 있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그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고, 그는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행할 수 있었다. 그들이 군자와 다른 것은 오직 공과 사라는 아주 작은 차이일 뿐이지만, 그들이 끼치는 화란은 오히려 참혹했다. 하물며 재주도 행실도 학식도 없으면서 오직 좋은 벼슬만 탐내고 요직에만 기를 쓰며 구차한 태도로 조정에 가득 찬 자들이라면, 그 화가 마침내 어느 지경에 이를 것인가. 그러므로 "음흉한 붕당의 해로움이 소인이 조정을 전횡하는 것보다 심함이 분명하다"고 말한 것이다.
(용어) 김안로는 중종 때 권력을 남용하며 정적을 가리지 않고 축출하고 살해한 인물로, 뒤에 유배 가서 사약을 받았다. 윤원형은 명종 때 이십 년 동안 집권하며 온갖 횡포를 부린 인물로, 역시 유배지에서 죽었다. 최영경은 조식의 제자로, 정여립 모반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었으나 뒤에 누명을 벗었다.
호민을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19일, 양력 추정)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백성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나 표범보다도 훨씬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늘 백성을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인가?
대저 이루어진 것을 함께 즐거워하기만 하면서 늘 눈앞의 일에 얽매이고, 그저 법이나 지키며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을 항민(늘 그러한 백성)이라 한다. 항민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모질게 수탈당하여 살이 벗겨지고 뼈가 부서지도록 시달리며, 집안의 수입과 땅에서 나는 것을 죄다 바치면서도 끝없는 요구에 시달리느라 시름하고 탄식하며 그 윗사람을 원망하는 사람들을 원민(원망하는 백성)이라 한다. 원민도 결코 두려워할 것이 없다. 자취를 저잣거리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마음을 품은 채 천지간을 흘겨보다가, 혹시라도 시대에 변고가 생기면 자기 뜻을 이루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호민(호걸다운 백성)이라 한다. 대저 호민이야말로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
호민은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이 벌어질 형세를 노리다가, 팔을 휘두르며 밭두렁 위에서 한 번 소리쳐 외치면, 저 원민이라는 자들이 그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도 함께 외쳐 대기 마련이다. 저 항민이라는 자들도 역시 살길을 찾느라 호미와 고무래와 창자루를 들고 따라와서, 무도한 자들을 쳐 죽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진나라가 멸망한 것은 진승과 오광 때문이었고, 한나라가 어지러워진 것도 역시 황건적이 그 원인이었다. 당나라가 쇠퇴하자 왕선지와 황소가 그 틈을 타고 일어섰는데, 마침내 이 때문에 백성과 나라가 함께 멸망하고 말았다. 이는 모두 백성을 괴롭혀 제 배만 채우던 자들의 죄과이며, 호민들이 그 틈을 편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저 하늘이 백성을 다스릴 사람(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기르게 하기 위함이지, 한 사람이 위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 아무리 채워도 차지 않는 구렁 같은 욕심을 채우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저 진나라와 한나라 이래로 벌어진 화란은 당연한 결과이지, 불행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땅이 좁고 험준하여 사람도 적고, 백성은 또 나약하고 조심스러워 남달리 기개 있거나 의협심 강한 이가 드물다. 그런 까닭에 평상시에도 큰 인물이나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가 나와 세상에 쓰이는 일이 없었지만, 난리를 당해서도 호민이나 사나운 병졸이 앞장서서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었던 일 역시 없었으니, 그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비록 그렇다 해도, 지금 이 시대는 고려 때와는 같지 않다. 고려 시대에는 백성에게 거두는 세금에 정해진 한도가 있었고, 산림과 하천과 못에서 나는 이익도 백성들과 함께 나누어 가졌다. 장사는 자유로이 통하도록 했고, 장인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게 했다. 또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정할 수 있게 하였으므로 나라에는 여분의 저축이 있었다. 그래서 갑작스레 큰 전란이나 상사가 있어도 세금을 더 늘리지 않았다. 고려는 말기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나라의 세 가지 궁핍을 걱정할 정도였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변변찮은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귀신을 섬기고 윗사람을 받드는 격식만은 중국과 대등하게 갖추려 한다. 백성이 내는 세금이 다섯 몫이라면 나라에 돌아오는 이익은 겨우 한 몫이고, 나머지는 간사한 사인들에게 어지러이 흩어져 버린다. 게다가 고을 관청에는 남은 저축이 없어 일만 생기면 일 년에 두 번씩 세금을 부과하는 일도 있고, 수령들은 이를 핑계 삼아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것이 또한 극에 달하지 않은 바가 없다.
그런 까닭에 백성의 시름과 원망은 고려 말엽보다 훨씬 심하다.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태평스레 두려워할 줄을 모르니, 이는 우리나라에 호민이 없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견훤이나 궁예 같은 자가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시름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몰려가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으며, 저 중국 기주·양주 지방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큰 변란이 없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발돋움하고 서서 기다려도 좋을 만큼 가까운 일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두려워해야 할 형세를 명확히 알아서 지금까지의 잘못된 자취를 고친다면, 그런대로 나라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용어) 진승과 오광은 진나라 말기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켜 진나라 멸망의 발단이 된 인물들이다. 왕선지와 황소는 당나라 말기에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를 크게 뒤흔든 인물들이다. 세 가지 궁핍이란 흉년이 들어 제사를 거르고, 서당에 학생이 오지 않고, 뜰에 개마저 없는 가난을 이르는 옛말이다.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엽 각각 후백제와 후고구려(태봉)를 세운 인물들이다. 기주·양주의 변란은 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을 가리킨다.
정도전과 권근을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21일, 양력 추정)
무릇 높은 벼슬아치로 영화와 이권을 누리던 사람이 나라가 뒤바뀌는 혁명을 만났을 때, 의리를 위해 죽거나 절개를 지키지 않는다면 반드시 목숨을 도모하여 원수를 섬기게 된다.
그런데 목숨을 도모하여 원수를 섬기는 자들에게도 두 갈래 길이 있다. 형세가 돌아가는 것을 엿보아 제 임금과 나라를 팔아넘기며 그런 계책을 부추겨 부귀를 도모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겁이 많고 나약하여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오직 욕되게 살아남기만을 일삼으며, 부끄러움을 참고 원수를 잊은 채 구차하게 다른 성씨를 섬기는 자도 있다. 그 죄악에는 비록 무겁고 가벼움이 있으나, 절의를 잃었다는 점에서는 같다.
겁이 많아 욕된 목숨을 탐내고 수치를 참으며 남을 섬기는 자들은, 그 마음이 애초에 제 한 몸을 아끼는 데서 나온 것이지 제 임금을 팔아넘기는 짓까지는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하늘은 더러 그들이 여생을 마치도록 용서해 주었으니, 위나라의 정충과 하증 같은 이들이 그러하다. 이 두 사람은 결국 제집에서 늙어 죽었다.
형세를 엿보아 나라를 팔아넘기기까지 부추긴 자들은 그 마음이 애초부터 부귀에 있었으니, 오직 제 한 몸만을 이롭게 하려 했다. 그래서 하늘은 문득 혹독한 재앙을 내려 그 응보를 갚아 주었으니, 남조 송나라의 사회·부량·서선지 같은 이들이 그러하다. 이 세 사람은 마침내 죽임을 당하고 그 일족까지 목이 베였다. 이런 일은 예나 지금이나 이미 그러했던 자취요 필연의 이치이니,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정도전과 권근은 둘 다 고려 임금을 가까이 모시던 신하이자 높은 벼슬아치였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도 두 사람 모두 훌륭한 벼슬을 얻었는데, 권근은 제 명대로 살다가 죽었고 정도전은 죽임을 당하고 일족까지 멸망당했으니, 나는 여기서 더욱 확신을 얻게 된다.
정도전은 일찍부터 우리 태조대왕의 인정을 받아, 외적을 정벌하고 토벌하던 시절에 막부의 계책을 세우는 일에 참여하였다. 태조대왕은 임금 자리에 오르려는 마음이 없었지만, 정도전이 먼저 그를 추대하려는 꾀를 냈다. 비록 하늘의 명과 백성의 마음이 저절로 합해져서 온당한 형편으로 왕위를 이어받은 것이었으나, 고려의 입장에서 정도전은 충신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참으로 제 몸을 이롭게 하는 데 있었으니, 그 때문에 끝내 죽임을 면하지 못했다.
권근은 이색의 일에 연루되어 지방으로 유배되었는데, 강헌왕(태조)의 부름을 받고 임금이 임시로 머물던 곳으로 나아가 마침내 등용되어 벼슬이 계속 높아졌다. 권근의 입장에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계속 물러나기를 청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였으나, 겁을 먹고 제 목숨을 아낀 나머지 마지못해 몸을 굽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이름과 지위가 높아졌고 제 명대로 살다가 죽었다. 이는 남의 신하 된 사람이 마땅히 경계로 삼을 일이다.
고려가 망할 때를 당하여, 정도전이 만약 충절을 위해 죽었고 권근이 벼슬하지 않고 돌아가기를 애걸했더라면, 사람들이 정몽주와 길재를 우러르는 것과 무엇이 달랐겠는가. 그런 계책을 내지 못하고 나라를 팔아넘긴 죄에 빠지거나, 더러는 비겁하게 목숨을 부지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으니, 사대부가 죽고 살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처세에 있어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지를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정도전이 태종이 왕위에 오르던 날 자신이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더라면, 결코 몇 년의 목숨을 아끼려고 제 명성을 훼손하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부귀만을 생각하다가 그 지혜가 어두워져, 자신의 공로만 믿고 어린 왕자를 세자로 세우자는 계책까지 임금에게 권하여 제 세력을 굳히려 하였다. 그것은 자신을 편안하게 하려던 것이었으나 결국 자신을 위태롭게 만든 셈이었다.
나는 이 두 사람 가운데 정도전에게 더욱 죄가 있다고 여긴다.
(용어) 정충과 하증은 중국 위나라에서 진나라로 넘어갈 때 살아남아 제 명대로 죽은 신하들이다. 사회·부량·서선지는 남조 송나라의 건국공신이었으나 뒤에 반역죄로 죽임을 당한 인물들이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으로 새 왕조의 기틀을 세웠으나,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 무렵 죽임을 당했다. 권근은 정도전과 함께 고려 말 조선 초를 살았던 학자이자 문신으로, 이색의 문인이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가 조선에서 다시 등용되어 천수를 누렸다. 이색은 고려 말의 대표적인 학자로, 정몽주·길재와 더불어 흔히 고려 말 세 은사(삼은)로 꼽힌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던 날"은 이방원이 실권을 잡아 가던 과정, 곧 정도전 등이 제거된 왕자의 난 무렵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옮겼다.
김종직을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23일, 양력 추정)
천하에 이익과 봉록이나 취하고 제 명망을 훔치는 자가 있는데, 세상에서 그를 군자라 한다면 사람들이 그 말을 믿겠는가? 나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겠다.
어찌하여 믿지 못하는가? 무언가를 제 것으로 만들거나 훔치는 짓이라면, 비록 그것이 도덕과 인의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거짓됨을 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익과 명망임에랴. 이미 이익과 봉록을 취하고 명망을 훔쳐서 한 세상을 속이고 제 영화와 녹봉을 누린다면, 참으로 제 지혜를 다하고 온 마음을 기울여 제 직분에 마땅히 해야 할 일에 힘써야만 그 허물을 조금이라도 메울 수 있다. 그런데 도리어 "영화와 녹봉은 내 본뜻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능청스럽게 한갓 붉은 수레를 꾸미고 붉은 인끈을 매단 채 일생을 마친다면, 그 죄악은 죽어 마땅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김종직은 근세에 이른바 대학자로 꼽히는 사람이다. 젊은 시절에는 벼슬하려 하지 않다가, 세조가 과거를 보라고 다그치자 마지못해 과거에 올랐고,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자리를 거치며 벼슬이 높아졌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마지못해 벼슬한다고 둘러댔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천수를 다 누리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히려 벼슬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의 문인이 시정에 대한 건의를 올리지 않는다고 간언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벼슬하는 것은 내 본뜻이 아니다. 그러니 건의하고 싶지 않다."
김종직 같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익과 봉록을 취하고 명망을 훔치면서도 능청스럽게 한갓 수레를 붉게 하고 인끈을 붉게 했다고 말할 만한 사람이다.
정란이 일어난 날, 김종직은 박팽년이나 성삼문 무리처럼 녹을 먹던 신하도 아니었고, 김시습처럼 평소에 특별한 은택을 입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시골의 보잘것없는 한 선비였으니 옛 임금(단종)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도 없었다. 그가 벼슬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부터가 본래 위선이었다. 그러나 비록 위선이었더라도 이미 그런 뜻을 세웠다면, 임금이 아무리 다그치더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나아가지 않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화를 두려워하여 억지로 나온 것처럼 행세하였다. 이미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는 붓을 귀에 꽂고 임금의 말을 받아 적었으며, 사초를 끼고 고운 털자리 위에 엎드리기도 하였다. 또 고을을 맡아서는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니, 그가 이익과 봉록을 취한 것이 도를 넘었다. 게다가 명망까지 훔치고 싶어 남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에게는 어버이가 계신다. 그러나 끝내는 백이·숙제가 지킨 뜻을 지키리라." 그러나 이미 어머니의 상복을 벗고 나서도 응교라는 벼슬을 받았고, 십 년 사이에 형조판서 자리까지 뛰어올랐다. 그쯤이면 그만 물러날 만도 한데 오히려 더 탐내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자리만 지키고 녹만 축내며 마땅히 해야 할 직분조차 하지 않다가, 문인이 그 점을 지적하면 얼버무리는 말로 둘러댔다. 이것이 과연 군자라 할 만한가? 그 죄는 마땅히 죽임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지금까지 이 사람을 칭찬하고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내가 가만히 그 사람됨을 살펴보니, 집안에서 물려받은 학문을 주워 모으고 문장 공부를 하여 스스로 출세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교활하여 제 명망을 높이려고 한 시대 사람들을 들썩이게 하고, 임금의 귀를 흐려 이익과 봉록을 훔치는 밑천으로 삼았다. 이미 그런 꾀를 부렸지만 스스로 제 재능을 헤아려 보니 백성을 편안케 하고 구제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런 까닭에 넉넉히 할 수 있는 일조차 하기 싫은 것처럼 꾸며 제 졸렬함을 감추는 수단으로 삼았으니, 그 또한 교묘한 짓이었다.
그가 〈조의제문〉을 짓고 술 이야기를 노래한 시를 지은 것은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이미 벼슬을 했다면 그분(세조)이 바로 자신의 임금인데도, 온 힘을 다해 그를 넌지시 꾸짖었으니 그 죄는 더욱 무겁다. 죽은 뒤에 화를 입은 것은 불행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그 간사하고 교활함에 노하여 사람의 손을 빌려 분명하게 벌을 내린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세상 사람들이 그의 실제 자취는 살피지 않고 헛되이 그 명성만 떠받들어 지금까지도 그를 대학자로 치켜세우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그런 까닭에 특별히 이렇게 밝혀 기록해 둔다.
(용어) 정란은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이 김종서·황보인 등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할 발판을 마련한 사건을 가리킨다. 박팽년과 성삼문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임을 당한 사육신이고,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하여 평생 벼슬하지 않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백이·숙제가 지킨 뜻"이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절개를 뜻하는 말로, 주나라 무왕에게 항복하지 않고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은나라 유신 백이와 숙제의 고사에서 나왔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일을 옛 중국 초나라 회왕(의제)이 항우에게 죽임당한 고사에 빗대어 은근히 비판한 글로, 훗날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빌미가 되었다.
남효온을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25일, 양력 추정)
김종직이 보잘것없는 선비로서 벼슬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 그 속뜻은 거짓이었다면, 남효온이 벼슬하지 않은 것 또한 의롭지 못한 일일까? 아니다. 남효온이 벼슬하지 않은 것은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 것이었다.
성종 임금 때를 맞아 나라 안이 한창 태평하니, 위에 있는 임금이 아랫사람들과 함께 지극한 다스림을 이루려 하여, 남다른 포부를 지닌 사람이라면 까치가 뛰듯 일어서던 시절이었다. 남효온은 먼저 명분을 바로잡으려고 상소를 올려 논의를 폈다. 그의 뜻은 대체로 우리 임금이 밝고 뛰어나니 반드시 자기 말을 받아들이리라 믿는 데 있었다. 그런 까닭에 쌓아 온 포부를 다하여 말을 올렸다. 나라의 근본이 될 원칙을 정하여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를 바라며, 다스림을 바라던 임금의 뜻에 부응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상소가 올라갔으나 임금은 감히 시행하지 못했다. 남효온은 이미 자신이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선비가 임금에게 쓰이기를 구하는 것은 그 도를 행하려 함이다. 그러나 도를 행하지 못한 채 헛되이 이익만 좇는다면 선비가 아니다"라고 하며, 마침내 뜻을 굳혀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과거 공부를 하라고 말씀하시면 사마시(진사시)에는 합격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그러고는 평생토록 녹봉을 입에 담지 않아 처음에 했던 말을 그대로 지켰다. 이것은 뜻있는 선비나 지조 굳은 사람이 강개한 마음으로 부귀에 마음 두지 않을 때나 하는 일이다. 어찌 이익이나 취하고 명망이나 훔치던 자들과 나란히 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해도 나는 남효온의 뜻을 애석하게 여긴다. 그의 지혜가 밝지 못했고 그의 도량이 좁았기 때문이다. 그 상소를 올리던 해에 남효온은 겨우 스무 살이었다. 그가 닦아 온 바가 과연 다 무르익었는지도 알 수 없거니와, 그저 가슴속에 격앙된 것만으로 기어이 임금이 시행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때가 될 만한지 아닌지도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임금과 더불어 큰일을 이루겠다고만 알았지, 자기가 한 말이 그렇게 갑작스레는 다 시행되기 어려우리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교분이 얕은 사람 앞에서 지나치게 말한 데다, 말이 이미 날카로웠고 책망도 너무 길었다. 결국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세상에서 저절로 밀려나고 말았으니, 그 실언한 바가 심하였다. 나이가 젊고 도량이 좁은 사람은 예전에도 이미 이러했으니 탄식을 이길 수 없다.
그렇지 않고, 만약 남효온이 조용히 스스로를 닦으며 때를 기다려 도로써 벼슬하고, 신하와 임금이 이미 도가 같아 서로 친해지고 믿게 되기를 헤아리면서 세월을 보냈어야 했다. 그리 심각하지 않은 일이라면 시험 삼아 먼저 그것부터 없애 나가면서, 정희왕후(세조의 왕비)가 세상을 떠나고 세조 때의 옛 신하들이 모두 죽기를 기다려서야 비로소 그런 논의를 꺼냈더라면, 성종도 그 말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온 나라와 더불어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니, 어찌 신하와 임금이 함께 영광스러워 역사책에 빛나게 기록되지 않았겠는가.
계책이 이렇게 나오지 못하고, 그저 빨리 이루려고만 하다가 끝내 실언했다는 허물에 빠져서, 곤궁하게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이것이 한나라의 가의가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다가 스스로 죽어 간 것과 무엇이 다르랴. 슬프도다.
(용어) 성종은 세조의 손자로, 학문을 숭상하고 인재를 널리 등용한 조선의 임금이다. 정희왕후는 세조의 왕비이며, 남효온이 명분을 바로잡자고 올린 상소는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능묘를 복원하자는 내용이었다고 전해진다. 가의는 한나라의 학자이자 문장가로, 재능이 뛰어났으나 주변의 시기와 모함에 걸려 뜻을 펴지 못하고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이장곤을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27일, 양력 추정)
내가 기묘당적이라는 것을 보았는데, 거기에 넣어야 할 사람과 넣지 말아야 할 사람을 가려 놓은 데는 참으로 따져 볼 만한 점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것은 이장곤조차 그 명단에 들어 있다는 것이니, 자못 이해할 수가 없다.
조선의 사화는 처음 무오년(1498년)에 격렬하였고, 다음 기묘년(1519년)에 심했으며, 마지막 을사년(1545년)에 가장 극심하였다. 그런데 이 사화들은 모두 역모의 변고를 고발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고발하고 나서 도리어 후회한 사람들도 있었으니, 무오사화 때의 노사신, 을사사화 때의 허자, 기묘사화 때의 이장곤이 그들이다. 이 세 사람은 비록 소인배들에게 이용당했으나 자신들의 허물을 뉘우치고 깨달았다면, 군자들도 오히려 이들을 용서해 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들을 여러 어진 이들의 반열에 함께 넣는다면 너무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유자광이 노사신을 움직일 때는 세조의 은택을 내세우면서 〈조의제문〉을 거론했다고 하니, 노사신이 그를 따른 것은 혹 깊이 생각하지 못한 데서 나온 일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가 그토록 지나치게 되리라고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가혹한 형벌을 주지 말자고 힘써 청하기까지 했으니, 그가 한 일은 상황에 어두워 경솔하게 처신한 허물일 뿐이다.
윤임을 둘러싼 모략에 있어서도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명종이 어린 나이였던 때를 당하여 인심마저 흉흉하던 참이었으니, 세 사람(윤임·유숙·유관)을 잠시 죄주자고 말한 것은 참으로 노여움을 가라앉히고 화를 늦추려던 계책이었다. 허자가 이기와 정순붕에게 속임을 당한 것도 지나치게 걱정하다가 운수에 맡겨 버린 탓이었다. 이 두 사람의 잘못에는 과연 용서할 만한 구석이 없지 않을까?
기묘사화의 일로 말하자면, 소인들이 군자들을 미워하여 모략한 것이 너무도 참혹했으니,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있었다. 이장곤은 한 시대의 이름난 재상으로서, 처음에는 여러 어진 이들과 함께 일하다가 도리어 간사한 무리의 계획에 마음을 합쳐 함께 신무문(북문)으로 나아갔다. 군자들이 극형에 빠지리라는 것을 그가 헤아리지 못한 것도 아니었건만, 차마 그런 짓을 하였다. 그의 죄악은 남곤·심정과 다를 바 없는데도, 끝내는 거짓으로 피해자들을 구제한다고 하여 제 행적을 감추려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말할 수 없이 지나친 짓이었다. 그가 흉악한 무리에게 배척당했던 것도, 바로 남곤과 심정이 이장곤을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들이 이장곤을 의심하지 않고 배격하지 않았더라면, 그 역시 소인배들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부귀를 지키는 데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기묘당적을 만든 사람은 이장곤이 임금 앞에서 올린 말 한마디에 현혹되어, 그가 신무문으로 함께 들어갔던 죄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가 흉악한 무리에게 배척당했던 자취만 기록해 놓고서, 흉악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그를 의심했던 덕분에 이장곤이 지금까지 선비다운 명망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였다.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이장곤은 본래 학문과 덕행이 없었고, 그저 유능한 신하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의 한평생을 따져 보면 물러나고 나아가는 데 잔꾀나 부리던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부터 알아보기 어려운 사람이 아니었으나, 기묘 명현들이 지나치게 그를 추어올리다가 끝내 배신당하는 화를 입었으니, 오히려 누구를 탓하겠는가.
교동에 있던 임금(연산군)이 이장곤을 죽이려 했었다. 그가 비록 무도했으나 우리에게는 그래도 임금이었건만, 이장곤은 임금의 명을 피해 달아났으니 이는 임금을 거역한 짓이다. 저 이극균과 성준 같은 이들은 대신으로서 나란히 목이 잘려 죽었다. 그들이라고 어찌 몇 해쯤 구차하게 살아남아 임금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릴 줄 몰랐겠는가. 그런데도 서로 이끌고 죽음의 길로 나아가며, 감히 도망칠 꾀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참으로 임금과 신하 사이의 분수가 이미 정해졌으니, 의리상 도망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애써 운명인 듯 편안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저 두 분의 지혜가 어찌 이장곤만 못해서 그리했겠는가?
대개 그 당시 사람들은 홍수나 화재처럼 연산군을 싫어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장곤이 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는, 마침내 그가 임금을 거역한 것이 큰 죄였음을 깨닫지 못했다. 예전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기묘년의 여러 어진 이들이 그의 허물을 살피지 못한 것인가? 이렇게 되면 마땅히 그 화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의 참된 자취는 가리지 않고 그저 그 명망만을 취하는 일이 매우 많다. 그러므로 내가 부득이 이렇게 가려서 밝히는 것이다.
(용어) 기묘당적은 기묘사화에 억울하게 연루된 여러 어진 이들을 기록한 문서다. 노사신은 성종 때의 영의정으로 무오사화를 일으켰으나 뒤에 뉘우치고 많은 선비를 구제한 공이 있었다. 허자는 을사사화를 일으킨 소윤 일파에 가담했다가 뒤에 대윤 일파를 편들었다는 죄로 탄핵받아 유배지에서 죽었다. 유자광은 무오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윤임은 을사사화 때 화를 입은 대윤의 우두머리였다. 이기와 정순붕은 소윤 편에 서서 을사사화를 일으킨 인물들이다. 신무문(북문)은 궁성의 북쪽 문으로, 기묘사화 때 홍경주 등이 이 문을 통해 밤에 임금에게 변고를 고했다 하여 "북문의 화"라 불린다. 교동은 강화도에 딸린 섬으로,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되었던 곳이다. 이극균과 성준은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으려다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한 대신들이다.
성소부부고 제12권
9. 22:21
출처: 성소부부고 제12권, 문부 9, 설·변·해·잡문
배경: 제12권부터는 갈래가 다시 바뀌어 "설", "변", "해", "잡문"이라는 네 가지 글이 실려 있다. "설"은 어떤 이치나 세태를 논한 글이고, "변"은 세상에 떠도는 오해나 잘못된 소문을 조목조목 따져 바로잡는 글이며, "해"는 궁금증에 답하듯 이치를 풀어내는 글이고, "잡문"은 이 세 갈래에 딱 들어맞지 않는 여러 성격의 글을 함께 모아 놓은 것이다. 이 권에는 글쓰기와 시에 대한 허균 자신의 문학관, 백 살 넘도록 건강했던 노인에게서 얻은 깨달음, 전쟁을 피해 어디로 가야 할지를 둘러싼 논쟁, 의병장 곽재우의 처신을 둘러싼 세간의 오해, 꿈의 이치를 둘러싼 논쟁,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스스로 풀어낸 글, 벗들과의 사귐을 변호하는 글, 고을 서낭당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개의 몸을 빌려 참회하는 짐승의 이야기까지, 허균의 인생관과 문학관, 그리고 특유의 풍자와 자부심이 고루 드러나는 다채로운 글들이 실려 있다.
설 — 세상 이치를 논한 글 세 편
글쓰기에 대하여 (서기 1610년 11월 7일, 양력 추정)
손님이 허자에게 물었다.
"요즘 세상에서 옛 문장에 능하다는 사람들은 다들 그대를 첫손에 꼽는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대의 글은 넓고 커서 끝이 없어 보이기는 해도, 실은 그저 평소에 쓰는 말을 가져다 쓴 것이어서 문장이 매끄럽고 글자도 순탄하다. 그것을 읽으면 마치 입을 벌려 목구멍 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서,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걸리는 데가 전혀 없다. 옛 문장을 전문으로 공부한 사람의 글이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내가 대답했다.
"바로 이런 것이 옛 문장이다. 그대는 순임금과 우임금 시절의 기록과 은나라의 가르침, 주나라의 여러 글들을 보라. 모두 글로서는 더 이를 데 없는 것들이지만, 거기에 어디 문장에 갈고리를 걸고 가시를 붙이듯 어려운 말로 짐짓 꾸며 놓은 곳이 있던가? 공자께서도 '글이란 뜻을 전달하면 그만이다'라고 하셨다. 옛날에는 글로써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뜻을 통하고 글로써 도리를 실어 후세에 전하였기 때문에, 뜻이 명백하고 발라서 듣는 사람이 그 가리키는 바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글의 쓸모다.
하나라·은나라·주나라 삼대의 여섯 경전과 성인의 글, 그리고 황제와 노자에서 비롯된 도가의 책이며 여러 사상가들의 말도 모두 저마다의 도리를 논하였기 때문에 그 글이 알기 쉬웠고 저절로 예스럽고 우아하였다. 그런데 후세로 내려오면서 글과 도리가 서로 다른 길로 갈라져, 비로소 남의 문장에서 이 구절 저 구절을 따다 붙이고 어렵고 교묘한 말로 문장을 꾸미는 일이 생겨났다. 이것은 글의 재앙이지, 글의 극치가 아니다. 내가 비록 둔한 사람이지만 그런 식으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뜻을 전달하는 것을 첫째로 삼아 쉽게 글을 지을 뿐이다."
손님이 다시 말했다.
"그렇지 않다. 그대는 좌구명, 장자, 사마천, 반고, 그리고 근래의 한유, 유종원, 구양수, 소식 같은 이들의 글을 보지 않았는가? 그들의 글이 그저 일상의 말만 가져다 쓴 것이던가? 게다가 그대의 글은 옛것을 본받지도 않고 거침없이 흘러넘치는 것만 일삼으니, 스스로를 너무 대단하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내가 말했다.
"그분들의 글 또한 일상의 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내가 보기에는 간결한 듯도 하고 웅장한 듯도 하며, 깊은 듯도 하고 거침없는 듯도 하고 단단하고 특이한 듯도 하지만, 결국은 그 시대에 흔히 쓰던 말을 가져다가 솜씨 있게 다듬어 격을 높인 것이다. 정말이지 무쇠를 달구어 황금을 만들었다고 할 만하다. 뒷사람이 오늘날의 글을 볼 때, 오늘 우리가 그 옛 몇 분의 글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게다가 내 글이 거침없이 흘러넘치는 것은 참으로 웅장하게 짓고 싶어서 그런 것이고, 옛것을 본받지 않는 것 역시 나름대로 우뚝 서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 여기에 무슨 자만이 있겠는가? 그대는 그 몇 분을 자세히 살펴본 적이 있는가? 좌구명은 스스로 좌구명이고, 장자는 스스로 장자이며, 사마천과 반고는 스스로 사마천과 반고이고, 한유·유종원·구양수·소식 역시 저마다 한유·유종원·구양수·소식이어서, 서로 흉내 내지 않고 각자 하나의 일가를 이루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배우는 것이지, 지붕 밑에 또 지붕을 얹듯 남의 글을 그대로 따라 하여 표절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것은 부끄러워한다."
손님이 말했다.
"그대의 글이 이렇게 쉽고 유창한데, 그렇다면 이른바 '옛것을 본받는다'는 것은 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내가 대답했다.
"그것은 마땅히 한 편 전체를 짜는 법, 한 단락을 짜는 법, 그리고 글자를 고르는 법에서 찾아야 한다. 한 편의 글에는 하나의 뜻으로 곧장 밀고 내려가는 것도 있고, 서로 걸어 이어져 여닫히는 것도 있으며, 마디마디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냉정한 한마디로 끝맺는 것도 있고, 자세하고 번잡하면서도 나름의 법도가 있는 것도 있다. 한 단락에는 조리가 정연하여 흐트러지지 않는 것도 있고, 뒤섞여 있으면서도 잡스럽지 않은 것도 있으며, 끊어진 듯하면서도 앞뒤가 이어지는 것도 있고, 아주 지루하게 늘어지는 것도 있고, 아주 짧게 끝나는 것도 있고, 할 말을 다 하지 않고 여운을 남기는 것도 있다. 글자를 고르는 데에는 울림을 주는 자리, 방향을 돌리는 자리, 숨죽이는 자리, 거두어들이는 자리, 겹쳐 쓰되 어지럽지 않은 자리, 강하게 나가되 억지스럽지 않은 자리, 끌어당기되 힘을 남용하지 않는 자리, 열고 닫는 자리, 소리쳐 부르는 자리가 있다. 글자가 또렷하지 못하면 구절이 고상해질 수 없고, 단락이 안정되지 못하면 뜻이 통하지 않으니, 이 두 가지가 갖추어져야 비로소 한 편의 글이 이루어진다. 내 글은 다만 이 이치를 깨달아 쓴 것일 뿐이고, 옛 문장 또한 바로 이런 이치를 따라 지어진 것이다. 요즘 사람들 가운데 글을 안다고 하는 이들도 이 이치를 제대로 엿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손님이 말했다.
"훌륭하다. 내가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용어) 좌구명은 공자와 같은 시대 노나라의 학자로 역사서 《춘추좌씨전》을 지었다고 전해지며, 장자는 전국시대의 사상가, 사마천과 반고는 각각 《사기》와 《한서》라는 역사책을 지은 한나라 때의 역사가다. 한유·유종원은 당나라, 구양수·소식은 송나라의 이름난 문장가들이다. 순임금·우임금 시절의 기록과 은나라의 가르침, 주나라의 글이라 한 것은 모두 유교 경전인 《서경》에 실린 오래된 글들을 가리키는데, 요임금·순임금·우임금의 정치를 적은 글, 은나라 임금이 신하를 가르친 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며 병사들에게 고한 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임 노인의 장수 비결 (서기 1603년 11월 2일, 양력 추정)
강릉부 태화현에 임세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백열세 살이 되었는데도 얼굴이 쉰 살 남짓 되어 보였고 보고 듣는 것도 쇠하지 않았다. 계묘년(1603년)에 내가 그를 만났는데,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습이 젊은이와 다름없었다. 살아온 내력을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젊었을 때 갑사(궁궐과 도성을 지키던 군인)로 있다가, 명나라 가정 연간의 신해년(1551년)에 나이가 차서 군적에서 빠지고는 이곳에 살게 되었소."
내가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무슨 특별한 방술이라도 지니고 계신 겁니까? 어찌 이토록 건강하십니까?"
노인이 답했다. "시골에 묻혀 사는 사람이 무슨 수로 방술을 지녔겠는가."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럼 무슨 약이라도 드십니까?"
"먹은 적이 없소."
나는 이 대답이 이상해서 다시 물었다. "세상에 정말로 몸을 닦지 않고도 이렇게 오래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노인이 대답했다.
"내가 어릴 때는 병치레가 많아 일찍부터 몸이 허약해서, 어쩌다 배불리 먹기라도 하면 반드시 배 속이 더부룩했소. 그래서 날마다 묵은 쌀 다섯 홉 정도만 먹고, 기름진 고기나 날것, 찬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소. 그렇게 십여 년을 지내니 병이 차츰 나아졌지요. 마흔 살에 아내를 잃었는데, 그때는 두 아들이 이미 장성해서 나를 봉양하기에 충분했으므로 첩을 두지 않고, 논밭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어 번갈아 가며 나를 먹여 살리게 했소. 겨울에는 두꺼운 갖옷, 여름에는 시원한 홑옷을 형제가 돌아가며 마련해 주게 하고, 바람이 들지 않는 으슥한 방을 골라 지냈소. 두 아들이 나를 잘 봉양해서 화낼 일도 없고 살림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으니, 그저 조용히 앉아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면서 지낸 지가 어느덧 육십 년이 넘었소.
집이 산골짜기에 있어서 날마다 삽주뿌리와 황정이라는 약초 뿌리를 캐 먹었소. 이런 세월이 오래되니 눈이 점점 밝아지고 귀도 점점 잘 들리고, 빠졌던 이가 다시 나고 다리 힘도 점점 튼튼해졌소. 두 아들이 죽은 뒤로도 손자가 다섯이나 있어서 그 봉양이 끊이지 않았으니, 그 덕에 나는 내 몸의 기운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을 뿐이오. 내게 무슨 특별한 방술이 있겠소?"
내가 말했다. "제가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서야 몸을 다스리는 참된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선이 되는 사람은 반드시 정과 기와 신, 이 세 가지를 온전히 지키는 법입니다. 어르신께서 다시 장가들지 않으신 것은 정을 지킨 것이고, 음식을 가려 먹고 배부르게 먹지 않으신 것은 기를 지킨 것이며, 화를 내거나 살림 걱정을 하지 않으신 것은 신을 지킨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이미 다 갖추셨으니 이토록 오래 사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더구나 타고난 기운을 함부로 흔들지 않고 그저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 것이야말로 마음을 고요히 안정시키는 첫걸음이며, 삽주뿌리와 황정 역시 약 중에서도 으뜸가는 것들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이것을 몸소 실천하시고 또 그것을 드셨으니,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르실 날이 어찌 멀겠습니까?
세상에서 신비로운 영약을 다려 먹고 오래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하늘과 땅을 화로와 솥에 비유하고, 물과 불을 부부에 비유하고, 용과 호랑이며 갖가지 광물을 들먹이고, 불을 밀고 당기는 이치를 논하며, 입으로는 도교의 오래된 경전과 비결을 외우면서 스스로 참된 신선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조급하게 무언가를 얻으려 하고 이익을 탐내는 마음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쳐서 끝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르신을 본다면 어찌 이마에 진땀이 나지 않겠습니까? 스승이십니다, 참으로 저의 스승이십니다, 어르신은."
(용어) 삽주뿌리와 황정은 예로부터 몸을 보하는 데 쓰인 대표적인 약초 뿌리다. "정과 기와 신"은 도교에서 사람의 생명을 이루는 세 가지 근본 요소로 여기는 것으로, 정은 몸의 정수, 기는 생명의 기운, 신은 정신을 뜻한다.
관동으로는 난리를 피할 수 없다는 이야기 (서기 1610년 10월 15일, 양력 추정)
요즘 전쟁을 피해 다닐 곳을 찾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반드시 이렇게 말한다.
"영동의 아홉 고을은 멀리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그 땅에 곡식이 넉넉하고 물고기와 소금도 풍부하니, 그곳에 가면 굶주릴 걱정이 없다. 게다가 위치도 외져서 전쟁을 겪을 일이 거의 없을 테니 그곳이 제일이다. 그다음으로는 영서만 한 곳이 없으니, 산이 가파르고 물길이 험해서 적이 오더라도 오래 머물 수 없고 사람이 몸을 피해 숨기도 쉬울 것이다. 호남과 영남은 왜적과 가깝고, 함경도와 평안도는 북쪽 오랑캐와 가까워서 마치 배가 뒤집힐까 봐, 혹은 배 안이 온통 적일까 봐 걱정하는 것과 같으니 모두 믿을 수 없다."
나는 이런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모두 이치를 밝게 알지 못하고 형세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탓이다. 영동과 영서는 모두 내 고향이라 그곳 사정을 매우 잘 알고 있으니,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 형편을 내가 자세히 말해 주겠다.
영동은 땅이 좁고 사람이 적어서, 풍년이 든 해에는 쌀값이 헐한 것 같다가도 조금만 바람이나 가뭄 피해를 입으면 금세 굶주림에 시달린다. 왜란이 일어났던 계사년(1593년)에 충주와 원주 두 고을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강릉으로 피란 와서 먹고살려 했는데,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원래 살던 사람이나 피란 온 사람이나 모두 곤궁해져서, 나무껍질을 벗기고 조개를 주워 겨우 요기하다가 그마저 떨어지면 서로 시체를 베고 죽어 갔다. 지금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곳으로 몰려가 먹고살려는 사람이 충주와 원주 사람들만이 아니라 온 나라 사람들로 미어터질 것이니, 그렇게 되면 원래 살던 사람이나 피란 온 사람이나 모두 함께 죽어 가리라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남쪽의 왜적이야 혹 올라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북쪽 오랑캐는 본디 함경도 동북 지역을 노리고 있다. 만약 정주와 평산 이북 땅을 고려 시대처럼 저들이 차지한다면, 적의 배들이 관동의 아홉 고을을 고려 때처럼 드나들 것이 틀림없으니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지체 높은 집안과 온갖 문물이 만약 영남으로 몰려든다면, 적이 내려오는 길로는 바닷길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될 터이니 더더욱 좋은 곳이 아니다. 이런 이치는 매우 분명하고 이런 형세는 매우 간단하다.
영서는 비록 험준하다고는 해도 서울에서 겨우 며칠 걸리는 거리다. 임진왜란 때 서울의 사대부 집안으로 이리저리 떠돌던 사람들이 죄다 이곳으로 몰려들자, 적들은 나라의 백성과 재물이 모두 여기 모였다고 여겨 몹시 혹독하게 수색하고 약탈했으므로, 칼에 맞거나 능욕을 당한 사람이 열에 예닐곱이나 되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나면 짐을 꾸려 그곳으로 갈 사람이 서울 사람들만이 아니라 호남과 호서의 백성들까지 모두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몰려드는 사람이 많을수록 도적을 불러들이는 속도도 더 빨라지는 법이다. 게다가 회양 일대는 옛날 거란 같은 북쪽 오랑캐가 드나들던 관문이었고, 원주와 충주는 왜적이 드나들던 길목이었다. 고려 때 거란이 쳐들어온 일과 임진년의 전쟁은 앞선 시대의 거울이라 할 만한데도, 고집 세고 겁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니, 이 또한 이치에 밝지 못하고 형세를 알지 못하는 탓이다."
피란을 계획하던 사람이 물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로 피해야 하는가?"
내가 말했다. "그대는 신씨 집안 형제의 일을 들어 보지 못했는가? 그들은 수원 바닷가에 살았는데, 왜구가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서로 이끌고 북쪽으로 들어갔다가 회령에서 포위를 당해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이듬해에 겨우 돌아와 보니 예전에 살던 농장과 마을이 고스란히 잘 보전되어 있어서, 떠났던 일을 몹시 후회했다고 한다. 이것은 대개 수원이 서울과 가까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적이 서울로 들어가려면 먼저 반드시 서울 근방부터 침범할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살던 사람들은 옮겨 가고 피란민들도 오지 않았으므로, 적이 얻을 것이 없어 가지 않은 것이다. 얻을 것이 없으면 가지 않는 것이 도적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만약 얻을 것이 없는데도 고을마다 일일이 뒤진다면 적 또한 힘들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전쟁을 피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원래 살던 사람들은 떠나가고 피란민도 몰려들지 않는 곳을 골라서 가야만 비로소 안전하고 탈이 없을 것이다. 육로로 갈지 뱃길로 갈지는 그때그때 형편을 보고 판단할 일이니, 어찌 미리 정해 둘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이 또 말했다.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다. 북쪽 오랑캐에 대해서는 나도 그렇다고 여기겠으나, 남쪽 왜적을 피하기에는 관동이 반드시 좋은 곳이 아니겠는가."
내가 다시 말했다. "왜적이 영동으로 갑자기 밀고 내려왔을 때 사람들은 피할 곳이 없었다. 겨우 며칠 노략질을 당했을 뿐인데도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으니, 만약 열흘만 더 머물렀다면 사람들이 모두 죽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물며 사람이 많이 몰려들어 적이 반드시 그것을 이롭게 여길 곳이야 말할 것도 없다. 관동의 형세를 알고 그 이치를 헤아려 아는 사람으로는 나만 한 이가 없을 텐데도 내 말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미혹된 사람일 것이다."
그러자 묻던 사람이 옳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갔다.
(용어) "영동"과 "영서"는 강원도를 대관령을 경계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눈 옛 말이며, 영동의 아홉 고을이란 대관령 동쪽 동해안 지역의 고을들을 가리킨다. "양계"라 불리던 함경도와 평안도는 조선 시대 내내 북쪽 여진족(오랑캐)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던 변방 지역이었다.
변 — 세간의 오해를 바로잡은 글 두 편
벽곡을 변론하다 (서기 1609년 6월 20일, 양력 추정)
곽재우 공은 도가의 수련법에 깊이 빠져 세상일을 마다하고 산에 살면서, 화식을 하지 않고 날것과 생식만 먹는 벽곡을 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곽공처럼 명석하고 슬기로운 사람이 높은 벼슬을 버리고 스스로 세상 밖에서 유유히 노닐었으니, 만약 인성과 천명의 이치를 깨달은 바가 얕고 적었다면 결코 이런 일을 즐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정도라는 큰길을 놓아두고 부정한 옆길로 들어서서 죽을 때까지 애썼는데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니, 그가 도를 알았다는 증거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 말을 듣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어찌 세상 사람들이 알 만한 일이겠는가. 곽공은 명석하고 슬기로운 사람이었으니, 신선이 그렇게 쉽사리 될 수 없다는 것과 날개가 돋아 하늘로 날아오르는 일이 황당하여 믿기 어렵다는 것쯤은 진작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온종일 쓸쓸히 앉아 도교 경전을 천 번 읽는 일이, 차라리 미인을 곁에 끼고 한가로운 곳으로 물러나 놀며 비파를 타고 술을 따라 놓고 잉어회를 먹으면서 여생을 보내는 것만 못하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끝내 부귀영화를 벗어던지고 궁벽한 산속으로 들어가 곡식을 끊고 스스로 메마르게 지낸 데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있지 않고서야 그가 결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옛날 장자방(장량)이 한나라를 도와 공을 이룬 뒤 물러나 벽곡을 하였는데, 이 사람이 어찌 참으로 신선이 되고 싶어서 그랬겠는가. 짐짓 그것을 핑계 삼아 제 몸을 지키려 한 것이었으니, 이 또한 신묘한 계책이었다.
지금 곽공은 평민의 신분으로 칼을 들고 일어나 지방 장관들을 꾸짖고 그 권세를 손에 넣으니 그를 따르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렇게 하여 한창 날뛰던 왜적을 무찔러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우니, 적이 두려워 꺼리는 존재가 되었고 그 기세와 공로가 한 시대를 뒤흔들었다. 이것은 참으로 사람들에게 '혹시 딴마음을 품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만한 일이었다. 공은 대체로 '공적이 너무 높으면 그에 걸맞은 상을 내리기 어렵다'는 이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물러나고자 했는데, 물러날 명분을 세우기가 마땅치 않았으므로 벽곡을 핑계 삼아 자취를 감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장자방이 걸었던 옛길이며, 곽공이 그 길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런데 어찌 억지로도 이룰 수 없는 신선이 되고자 하여 도리어 그 황당한 이야기를 믿었겠는가.
또 한편 도교의 옛 경전을 지은 위백양의 뜻도 몸의 정수와 기운과 정신, 이 세 가지를 다스리는 데서 벗어나지 않았을 뿐인데, 이 세 가지 수련은 반드시 남의 이목을 놀라게 한 뒤에야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남의 이목을 놀라게 할 만한 행동을 굳이 골라 하려면 벽곡만 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곽공은 반드시 벽곡을 내세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었다. 그러니 세상에서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은 참으로 그의 계략에 말려든 것이다.
이진을 서인으로 폐위할 당시, 대신들은 그 죄를 너그럽게 봐주자고 주장했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도 이에 반대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곽공 또한 조정의 논의가 옳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자기 직책도 아닌 일에 나서서 두 차례나 임금께 간언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것은 역적으로 몰린 이진을 벌해야 한다고 힘써 주장함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놓이게 하는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시기와 의심을 풀어 버리려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오가는 처신이 일반적인 관례를 따르지 않고 대체로 제멋대로였으니, 이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의아하게 여기거나 비웃으며 올바른 행동이 아니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의아해하고 비웃으며 옳지 않다고 책망하는 것을, 곽공은 오히려 속으로 기쁘게 여겼을 텐데, 온 세상 사람들은 도리어 그의 계략에 빠져들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곽공의 속마음은 그저 제 몸을 보전하고 화를 멀리하려는 데 있었을 뿐인데, 세상 사람들은 그가 정말로 신선이 되려고 벽곡을 한다고 여겨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니, 내가 이를 밝혀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용어) "벽곡"이란 불을 써서 익힌 음식을 먹지 않고 날것이나 특정 약초만 먹는 도교의 수련법이다. 장자방은 한나라 건국공신 장량을 가리키고, 위백양은 한나라 때 사람으로 신선술을 설명한 도교의 오래된 경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진은 선조의 아들로, 광해군이 즉위한 뒤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죄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죽임을 당한 임해군을 가리킨다.
시를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9일, 양력 추정)
요즘 시를 짓는 사람들은, 가장 높은 수준에서는 한나라와 위나라, 육조 시대의 시를 배우고, 그다음으로는 당나라 현종 때의 개원·천보 연간이나 대종 때의 대력 연간의 시를 배우며, 가장 낮은 수준에서는 송나라의 소식과 진사도를 들먹이면서, 저마다 스스로 "내가 그들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망령된 소리일 뿐이다. 이것은 그저 그들의 말과 뜻을 주워 모아 그대로 따라 하고 베껴 써서 스스로를 뽐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런 사람들과 어찌 시의 참된 도리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시경》의 삼백 편은 스스로 삼백 편이고, 한나라는 스스로 한나라이며, 위진과 육조는 스스로 위진과 육조이고, 당나라는 스스로 당나라이며, 소식과 진사도 또한 스스로 소식과 진사도이니, 어찌 서로를 흉내 내어 하나로 똑같이 만들었겠는가. 대개 저마다 나름대로 하나의 일가를 이룬 뒤에야 비로소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간혹 옛사람의 글을 본떠 지어 보는 일도 있지만, 이 또한 시험 삼아 한번 지어 보아 하나의 격식을 나름대로 갖추어 보는 것일 뿐 늘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니, 남의 발밑에서만 맴도는 사람은 결코 뛰어난 시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시는 어떻게 해야 지극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흥취를 먼저 세우고 뜻을 정한 다음, 격조를 그다음으로 삼고 말을 엮어 나간다. 구절은 살아 움직이듯 하고 글자는 둥글둥글 원만하게 하며, 소리는 맑고 절주는 굳건한 것을 기본으로 삼고, 소재를 취해 엮되 마땅한 자리를 침범하지 말고 지나치게 화려한 빛깔을 입히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두드리면 쇳소리가 나듯 단단하게, 만지면 화려한 무늬가 만져지듯 풍성하게, 눌러 내리면 깊이가 느껴지도록, 끌어올리면 치닫듯 높게, 닫을 때는 맑고 힘차게, 열 때는 여유롭고 호탕하게 지어야 한다. 생각을 마음껏 부리며 흥취에 흠뻑 젖어 마치 북 치고 춤추듯 신명 나게 지어야 한다. 무쇠를 가져다 황금을 만들 듯, 썩은 것을 싱싱하게 되살리듯 하되, 평범하고 담담하게 짓더라도 천박하고 속되게 흐르지 말고, 기이하고 고고하게 짓더라도 괴상한 데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사물의 모습을 읊되 그 사물에 얽매이지 말고, 말을 펼쳐 늘어놓되 소리와 운율을 해치지 말며, 화려하게 꾸미되 이치를 손상시키지 말고, 논의를 펼치되 겉모습을 흐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 비유와 흥취를 깊이 있게 쓰는 사람은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 사람이고, 옛사람의 말을 잘 끌어다 쓰는 사람은 마치 제 입에서 저절로 나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쓰는 사람이다. 이렇게 하면 한 편 전체에 품격이 드러나 흠잡을 데 없이 온전해지고, 말 너머로 기운과 힘이 넘쳐흘러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게 된다. 이런 법칙을 모두 갖춘 뒤에야 세상에 내놓을 만한 시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와 위나라 이래의 여러 시인들은 모두 이 법칙을 깨닫고 힘써 지켜 낸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한나라의 걸음걸이를 따라가고 위나라의 발걸음을 흉내 내며, 육조의 옷을 걸치고 당나라의 말투로 행동하며, 소식과 진사도를 마부 삼아 뒤쫓아 치달린다 해도, 그저 제 스스로의 추한 꼴만 드러낼 뿐이니, 아, 참으로 틀린 생각이다.
(용어) 개원·천보는 당나라 현종의 연호, 대력은 당나라 대종의 연호로, 모두 당나라 시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를 가리킨다. 진사도는 송나라 때 소식과 나란히 이름을 떨친 시인이다.
해 — 궁금증을 풀어낸 글 한 편
꿈을 풀이하다 (서기 1611년 3월 10일, 양력 추정)
성성옹(허균의 별호)은 젊었을 때는 꿈을 적게 꾸었는데 꿈을 꾸면 잘 들어맞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꿈이 점점 많아지고, 꾸는 꿈은 점점 맞지 않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꿈이란 공연한 망상에서 생기는 법이다. 그대가 젊었을 때는 욕심이 적어 마음이 담담하고 흔들리지 않았으니 망상도 적었고, 그래서 꿈도 드물었으며, 드물었기 때문에 잘 들어맞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나이가 들고 나서는 총애와 수모, 얻음과 잃음에 대한 잡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히니, 생각의 불꽃이 활활 타올라 꿈도 잦아지고, 잦아졌기 때문에 점점 맞지 않게 된 것이다."
내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꿈이 많고 적은 것은 혹 망상 탓이라 할 수 있겠지만, 꿈이 들어맞는지 아닌지는 망상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장차 무언가를 얻을 것을 미리 알려 주는 꿈으로는 어진 신하를 얻거나 오래 살 것을 예고해 준 옛이야기들이 있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 주는 꿈으로는 낯선 사람이 훗날 큰일을 하리라는 것을 미리 보여 준 옛이야기나 나라가 망할 조짐을 미리 알려 준 옛이야기 같은 것이 있으며, 몸이 아프려 하면 꿈에 음식을 먹고 노래를 부르려 하면 꿈에 울며, 새가 머리카락을 물고 날아가는 것을 보면 하늘을 나는 꿈을 꾸게 되는 것과 같은 일들이 모두 과연 망상 때문이겠는가. 이것은 마음이 신령스럽게 밝으면 일이 딱 들어맞고 정신이 맑으면 조짐이 나타나는 것이니, 다만 캄캄한 가운데서 우연히 서로 맞아떨어져 하나의 징조가 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꿈은 꿈대로, 일은 일대로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는 해도, 생각이 맑으면 마음과 정신이 저절로 밝아지고, 맑고 밝아지면 저절로 자연의 이치와 맞아떨어진다. 자연의 이치와 맞아떨어지면 근원이 되는 기운이 맑고 비어 있고 오묘한 작용이 흘러 움직여서, 다가오는 길흉화복이 마치 형체가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능히 미루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꿈으로 점을 치는 일이 생겨난 까닭이다."
어떤 사람이 또 말했다.
"망상이라는 말이 아마도 맞는 것 같다. 그대는 오랫동안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먹고살기 곤란할 때면 지체 높은 사람의 문을 찾아가 고을 원 자리 하나를 애걸하곤 했다. 그때 자리가 비기를 엿보며 요행을 바랄 때는 꿈만 꾸면 그대로 이루어졌고, 나중에 얻기도 하고 못 얻기도 했던 것은 그만큼 잡생각에 흔들린 정도가 깊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변고를 겪은 뒤로는 명예와 이익을 딱 끊고 오로지 도를 닦는 데만 뜻을 두어, 도가의 경전과 비결을 많이 읽으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연구에 몰두하자, 꿈에 이름난 여러 도인들을 만나 그 오묘한 비결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신선이 되어 하늘의 궁궐로 날아가, 난새와 학을 타고 오색구름 속에서 신선의 퉁소 소리를 듣는 꿈까지 수없이 꾸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망상에 골몰한 것이 극에 달한 것이다."
이 사람의 말이 여기에 이르니 더욱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렇다면 온 천하 사람들의 꿈은 모두 망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일 뿐이리라. 다만 "꿈이 적으면 잘 들어맞는다"는 말에 있어서는, 마음이 맑고 정신이 밝으면 혼이 밖으로 치닫지 않는 법이며, 맑고 밝기 때문에 반드시 사람의 일에서 조짐이 나타나는 것이니, 참으로 이런 이치는 있는 것이다. 이 사람 정도라면 함께 도를 이야기할 만하다.
(용어) 여기서 든 옛이야기들은 모두 중국 고전에 전해지는 꿈에 관한 일화들이다. 은나라 임금이 꿈에서 본 사람을 그림으로 그려 찾아내 재상으로 삼았다는 이야기, 주나라 무왕이 꿈에 하늘로부터 긴 수명을 받았다는 이야기, 어떤 사람이 꿈에서 본 아이를 훗날 실제로 만나 거두었다는 이야기, 나라가 망할 조짐을 알리는 인물이 꿈에 나타났다는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잡문 — 여러 갈래의 글 네 편
운명을 풀이하는 글 (서기 1611년 4월 1일, 양력 추정)
나는 기사년(1569년), 병자월이라 부르는 달(음력 열한 달째에 해당한다), 임신일이라는 날, 계묘시라는 시각에 태어났다. 사주를 보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신금이라는 기운이 명목이라는 기운을 해치고 신수마저 비어 있으니, 액운이 많고 가난하며 병치레가 잦고 무슨 일을 꾀하든 이루어지지 않겠다. 그러나 자수라는 기운이 그 사이에 끼어 있어서 목숨이 짧지는 않을 것이며, 강물이 맑고 깨끗한 형국이라 재주가 대단할 것이고, 묘금이라는 기운이 또 울리고 있으니 이름이 후세 천하에까지 전해질 것이다."
나는 늘 이 말을 미덥지 않게 여겨 왔는데, 벼슬길에 나온 지 열일고여덟 해가 지나는 동안 넘어지고 자빠지는 일과 총애를 받고 수모를 당하는 일들이 은연중에 그 말과 딱딱 맞아떨어지니, 이상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보니 한유는 마갈궁이 그 몸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었고 소식 또한 마갈궁이 운명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었는데, 이 마갈궁이라는 별자리는 사주에서 태어난 시각인 "묘"라는 자리와 대응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아, 나 또한 묘시에 태어난 사람이니, 문장과 기개로 보면 참으로 이 두 분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모함과 시기를 당하여 시대에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억눌리고 버림받은 자취는 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마치 부절을 맞춘 듯 다름이 없으니, 아,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마침내 나는 나의 운명을 풀어내는 글을 지어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는
쇠와 나무의 기운이 서로 부딪쳤다
다행히 물의 기운이 중간에서 구해 주었지만
운수 자리는 또 텅 비어 있었네
태어난 시각마저 마갈궁을 건드렸으니
아, 하늘이 정해 준 것이라 바꾸기 어려워
참으로 내 운명은 곤궁하기만 하구나
쇠가 나무를 치려 드니
몸은 늘 허약하고
운수 자리가 텅 비었으니
무슨 일을 꾀하든 이루어지지 않네
말을 함부로 하여 남들과 부딪치니
이 또한 마갈궁이 빌미가 된 탓이라
아, 하늘도 나를 돌보지 않는구나
힘겨운 액운을 만나 죽을 지경이 되었네
깊은 밤 책상에 기대어
눈물지으며 생각에 잠겼는데
꿈속에서 도인 한 사람을 만났네
헌칠하고 풍채가 좋은 이였다
내 방으로 들어오더니
명아주 줄기로 엮은 평상에 걸터앉아 이렇게 말했네
"그대는 어찌 운명을 원망하는가
그대의 수명은 매우 길 것이네
내 일러 주노니 하늘을 원망하지 마오
하늘이 그대에게 문장을 내려 주지 않았는가
육기처럼 풍성하고 사영운처럼 화려하며
송옥처럼 곱고 반고처럼 향기로우니
비단결 무늬처럼 휘황찬란하고
생황과 종소리처럼 성대히 울려 퍼진다
이것만으로도 한 시대에 우뚝 서기에 충분한데
높은 벼슬이 어찌 이것을 당해 내겠는가
저 높은 갓을 쓰고 호령하는 자들은
그 속마음이 더럽기 그지없어서
비록 화려한 옷을 걸치고 있어도
흙으로 빚은 인형을 수레에 태우고 종들이 떠받드는 꼴과 다름없다
그렇게 부귀만 누리다가 흔적도 없이 스러져 버리니
그대도 이런 것은 원하지 않을 것이네
내가 이제 하늘의 참된 주재자께 아뢰어
그대가 태어난 해를 바꾸어 달라 청하고
그리하여 그대의 재주를 빼앗고
그대의 총명함을 흐리게 한 다음
그대에게 높은 벼슬을 내리고
두터운 총애와 권세를 안겨 준다면 어떻겠는가
하지만 풀과 나무처럼 한때 무성하다 이내 썩어 스러지는 삶을
그대는 결코 바라지 않을 것이네
아, 군자란 그저 하늘에 맡길 뿐인 것을
재주와 부귀영화를 굳이 함께 얻고자 한다면
저 좌구명과 사마천이 이미 그러다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창려 땅 출신의 큰 선비 한유와
미산 땅 출신의 문장가 소식도
모두 태어난 때가 마갈궁을 만나
다 함께 고상한 문장을 세상에 전했을 뿐이라네
두 사람 모두 늘 고단한 제 운명을 원망했지만
후세에 이름을 전하는 데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네
한유가 조양 땅으로 쫓겨나고
소식이 무창 땅으로 좌천된 것도
그저 태어난 시각이 좋지 않았던 탓일 뿐이지
운명 자체가 순탄치 못했던 것은 아니라오
이제 그대의 이름은
이 두 분과 나란히 설 것이니
원망하며 탓하지 말게나
물길이 평탄하면 흘러가고 웅덩이를 만나면 멈추듯이
그저 유유자적하게 인간 세상의 남은 세월을 보내다가
훗날에는 신선의 세계에서 나를 찾아오시게
푸른 난새를 타고
붉은 규룡을 몰아
오색구름이 찬란한 누각에서
나와 함께 올라 보세나"
이 말을 마치자 도인은 사라지고
나는 잠에서 깨어 일어났네
쓸쓸히 그 말을 되새겨 보니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울리는구나
그 도인은 결코 나를 속이지 않았을 터이니
내 마음이 더없이 상쾌하다
옥황상제의 뜻을 따라 나 스스로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리니
그저 하늘이 정한 명을 즐길 뿐,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용어) 앞부분에 나오는 "신금", "명목", "자수", "묘금" 같은 말은 태어난 해와 달, 날, 시각을 오행과 십이지로 나타내는 사주 풀이의 전통적인 용어들이다. "마갈궁"은 서양의 별자리로 치면 염소자리에 해당하는데, 예로부터 사주에서 "묘"라는 지지와 대응하는 별자리로 여겨져 왔다. 한유는 창려 땅 출신이고 소식은 미산 땅 출신이어서 각각 "창려"와 "미산"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한유는 황제에게 직간하다가 조양 땅으로 좌천되었고, 소식도 직간하다가 무창 땅으로 좌천된 일이 있다. 육기·사영운·송옥·반고는 모두 문장으로 이름난 옛사람들이다.
힐문하는 자에게 답하다 (서기 1610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풍채가 헌칠하고 갓을 단정히 쓴 사람이 나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대는 뛰어난 문장을 지녔고 벼슬은 상대부에 이르렀다. 높은 관을 쓰고 넓은 띠를 두른 채 임금을 가까이서 모실 때면 따르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그대를 둘러싸고 큰길에서는 앞서 소리쳐 길을 틔웠다. 마땅히 사귀는 사람들도 공경과 재상 같은 높은 이들이어야 할 터, 서로 어울려 따르며 나랏일을 함께 의논해야 마땅한데, 차례를 뛰어넘어 권력을 잡아 호화로운 삶을 누릴 수도 있었건만 어찌하여 조회를 마치고 나면 입을 다물고 바보처럼 지내는가.
출세한 사람들은 찾아오는 일이 없고 그 대신 기이하게 생긴 사람들만 그대 곁에 있으니, 얼굴이 검은 사람도 있고 수염이 붉은 사람도 있구나. 수염 붉은 사람은 실없는 농담이나 늘어놓고 얼굴 검은 사람은 허리에 술병을 차고 다니며, 키 작은 한 사내는 코가 여우처럼 생겼고 애꾸눈인 사람도 있고 눈썹이 붉은 사람도 있다. 날마다 마루에 모여 떠들썩하게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세상 만물을 이리저리 아로새기는 시나 지으면서 그것으로 스스로 즐거워하고 있으니, 그대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뭇 선비들도 그대에게서 등을 돌리는구나. 그대 몸이 진흙탕에서 허덕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니, 어찌하여 이런 자들과의 사귐을 끊고 권세 있는 요로의 사람들과 인연을 맺지 않는가."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대의 말은 세상 물정에 어둡구려. 내 천성이 비루하고 옹졸하여 엉성하고 거칠기만 하다오. 권모술수도 부릴 줄 모르고 아첨도 할 줄 모르며, 무엇이든 하나라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잠깐도 참아 내지 못한다오. 남을 칭찬하는 말을 하려 들면 벌써 입이 더듬거리고, 권세가의 문턱에 발을 디디면 발꿈치가 곧바로 쑤셔 온다오. 지체 높은 이와 인사를 나눌 때면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리니, 이런 건방진 태도로 재상을 찾아뵙는다면 그 재상은 나를 미워하여 당장 목이라도 베고 싶을 것이오.
어찌할 도리가 없어 차라리 강호로 떠나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가난한 살림에 먹고살아야 하니 물러나고 싶어도 망설여진다오. 다만 저 두세 사람만은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내 재주를 아껴 주고, 혹은 내 소탈한 성품을 좋아해 주어서 찾아와 함께 내 술에 취하고 서로 부르고 따르며 지낸다오. 이 사람이 시를 지어 부르면 저 사람이 화답하니, 지어 내는 편편이 마치 아름다운 옥돌과 산호와도 같다오. 내 스스로 이 보물을 귀하게 여길 뿐 남에게 팔리기를 바라지 않는다오. 《시경》의 노래들을 내 벗으로 삼고 이름난 옛 시가를 내 종처럼 부리면서, 이것을 큰 사업인 양 뿌듯해하며 온 세상이 오히려 좁다고 여긴다오.
벼슬살이를 할 때도 권모술수를 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왔으며, 타고난 성품 그대로 어느덧 늘그막에 이르렀다오. 권세와 이익으로 맺은 사귐은 언젠가 반드시 변하기 마련이지만 우리의 사귐은 변하지 않으니 돌이나 무쇠와 같다고 할 만하오. 마음이 흡족할 때면 기쁘고 즐거워서 내가 나인 것조차 잊고 잠자고 먹는 일마저 잊어버린다오. 이럴 때 높은 벼슬 따위가 어찌 눈에 들어오겠소.
저 부귀한 사람들은 자줏빛 푸른빛 인끈을 늘어뜨리고 긴 옷자락에 옥을 찬 채 그저 아녀자들이나 즐겁게 할 뿐이지만, 우리처럼 세상에서 물러나 조용히 지내는 사람은 우리 나름의 즐거움을 즐길 뿐 음악과 여색을 탐하지 않고 엄한 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오. 도잠과 사영운, 이백과 소식, 이들과 같아지기만을 바랄 뿐 번성하고 쇠락하는 것은 돌아보지 않는다오.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나는 싫어하고 사람들이 떠받드는 것을 나는 더럽게 여기니, 남들은 나더러 실성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웃고 노는 것이 좋을 뿐이오.
그러니 내 몸이 늘 큰 허물에 빠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 사귐을 끊느니 차라리 이 몸이 잘리는 편이 낫소. 세상 인심은 칼날처럼 날카롭고 세상길은 더할 나위 없이 험하여 터럭 끝까지 쪼개어 따지고 이해득실은 눈금 하나까지 헤아리려 드니, 이런 세상과 맞지 않는 내 마음을 참으로 남에게 믿게 하기가 어렵구려."
따지던 사람이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기는 하나 내 노둔함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었고, 내가 그대를 아끼는 마음은 있으나 덕으로 그리한 것은 아니었소. 알겠소. 내가 참으로 사리에 어두웠구려.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치 큰 무당을 본 듯한 기분이오. 그대의 사귐은 훌륭하고 그대의 말도 틀림이 없소. 내가 실없는 말을 하였으니, 참으로 좀스러운 사람이었던 셈이오."
말을 마치고 물러가는데, 그 걸음걸이가 한결 시원스러워 보였다.
(용어) 도잠(도연명)과 사영운은 남북조 시대, 이백은 당나라의 이름난 시인이며 소식은 앞서 나온 송나라의 문장가다. 이들은 모두 벼슬과 부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던 인물로 흔히 꼽힌다.
가림신을 꾸짖다 (서기 1611년 4월 10일, 양력 추정)
함산 꼭대기에 우뚝 솟은 사당이 하나 있어 성황당이라 부르며 백성들이 정성껏 제사를 올린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캄캄한 흙먼지가 하늘을 뒤덮더니 흙비가 쏟아지고 거센 회오리바람이 몰아쳐 수풀을 헤집고 지붕을 뒤흔들며 성황신의 이마를 후려쳤다. 이튿날 무당이 찾아와 신의 자리를 정돈하고 머리와 옷매무새를 단장했는데 바람이 또다시 불어닥쳤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되풀이되니 나는 몹시 이상하게 여겨 무당에게 그 까닭을 물었더니, 무당이 절을 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함산의 신은 남편이요 가림산의 신은 그 아내입니다. 함산의 신이 첩에게 빠져 아내를 못났다고 흉을 보았는데, 그 첩 때문에 화가 난 아내가 찾아와서 닥치는 대로 짓밟고 비바람을 몰고 와 비를 뿌리며 욕설을 퍼붓고 남편의 저고리를 찢고 첩의 머리털을 쥐어뜯었답니다. 갔다가도 금세 다시 돌아오기를 밤에도 문득, 낮에도 문득 되풀이하니 무당인 저로서도 달랠 도리가 없어 이 싸움을 말릴 길이 없습니다. 그저 신상의 갓과 옷이나 고쳐 드리고 흙으로 빚은 신의 상을 다시 단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 말했다. "허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구나. 신이 감히 남편에게 그토록 사납게 대들다니. 내가 이 신의 허물을 낱낱이 늘어놓아 북두성께 그 죄를 고하리라."
그러고는 향을 피우고 축문을 지어 불사르며, 뜰 아래에서 허리를 굽혀 이렇게 아뢰었다.
"삼가 아뢰옵니다. 하느님께서 땅을 나누고 고을을 갈라 저마다 맡은 신을 두시어 백성을 보살피게 하셨으니, 이는 볕이 잘 들고 비가 알맞게 내려 농사가 잘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직책을 저버린다면 하늘이 반드시 벌을 내리시어 사당을 부수어 신 스스로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이 두 신은 본디 금슬 좋은 한 쌍의 부부로서 시냇물 하나를 경계 삼아 땅을 나누어 각기 그 주인이 되어 천 년 동안 끊임없이 제사를 받아 왔으니, 마땅히 복을 내려 그 땅을 넉넉하게 하고 비바람을 순조롭게 하여 곡식이 잘 자라도록 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여인 하나를 두고 다투어 그 눈에 노기를 번뜩이는 것입니까. 뇌신을 잡아타고 번개 창을 손에 쥔 채 안개를 헤치고 바람을 밟으며 들어와 신의 휘장을 베어 버리고 그 허리를 자르고 깃발을 부수어 놓으니, 날뛰며 물어뜯고 내동댕이치는 그 위세가 대단합니다. 금슬 좋던 부부가 서로 으르렁거리며 사이좋던 남편을 원수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나쁜 기운이 뒤따라와 가축과 꼴을 해치고 우리 농사를 망쳐 놓으니 백성들에게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한 번만으로도 심한 일인데 서너 번, 대여섯 번을 그치지 않으니, 상제께서는 더없이 밝으신 분이시니 부디 그들의 죄를 낱낱이 살피시어 그 죄를 널리 알려 꾸짖으실 때 저의 혀를 빌려 쓰소서. 또한 우레의 신들에게 명을 내리시어 날아와 이 요사스러운 기운을 물리치게 하소서. 천둥소리와 번갯불로 구름을 타고 바람을 몰아, 팔괘의 여러 신들과 사나운 말을 앞세우고 요란한 방울 소리와 번쩍이는 도끼를 갖추어 내려와 그 소굴을 소탕하시고 후련하게 그 요사한 것들을 없애 주소서. 그 눈을 파내고 그 목을 잘라 버리시고 귀신의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워 다시는 날뛰지 못하도록 경계하소서. 그리하여 백성들이 재앙을 면해 얼굴 찌푸릴 일이 없게 하시고, 찰벼와 기장을 풍성히 거두어 저마다 편안히 살아가게 하소서."
이렇게 아뢰기를 마치고 두 번 절한 뒤 무릎을 꿇고 하늘의 명을 기다렸다.
이윽고 머리에 투구를 쓰고 붉은 도포에 붉은 신을 신은 이가 신령스러운 깃발을 앞세우고 내려오더니, 내 귀를 잡아끌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무당이 그대를 속인 것이지 신의 잘못이 아니다. 가림산의 신도 본디 여신이 아니라 남신이다. 신이 신을 공격한다는 것이 어디 이치에 맞는 말인가. 바람과 안개로 인한 이 재앙은 오로지 이 고을 백성들이 불러들인 것이다. 사납고 요사스러운 백성들이 무당을 믿고 삿된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공경할 줄 모르고 오만하여 더러운 짓만 일삼고 있다. 충성도 효도도 하지 않고 믿음도 의리도 없으며, 거간꾼들은 간사한 꾀를 부려 잔재주로 이익만 취하려 든다. 이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자들 또한 바르게 처신하는 관리가 드물어, 겉으로는 바른 체하면서 속으로 욕심을 채우고 헛된 명예를 훔치려 든다. 사람을 속이고 겁박하며 염치없이 그릇된 짓만 일삼으니, 가르침과 교화가 제대로 펴지지 않아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속고 속인다. 이런 태도로 신을 섬기고 있으니 신이 노여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요사스러운 기운과 재앙이 내리는 것은 모두 이 때문인데도, 사람들은 제 허물은 돌아보지 않고 도리어 신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며 질투 때문에 다투는 것이라 여겨 거리낌 없이 헛소문을 퍼뜨리니, 신은 더욱 노여움을 품게 되어 재앙이 더욱 심해진 것이다. 천둥과 같은 벌을 내린 것은 오직 그 거짓말하는 무당을 징계하려 함이었는데, 그대처럼 명석한 관리마저 여기에 미혹되었으니 하물며 세상의 어리석은 백성들이야 현혹되기가 얼마나 쉽겠는가."
나는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내가 슬기롭지 못했음을 사죄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신은 이미 훌쩍 하늘로 올라가 버렸고, 아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그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용어) "성황"은 마을과 고을을 지켜 준다고 믿어진 수호신으로, 흔히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리는 사당에 모셔졌다. "상제"는 하늘을 다스리는 하느님을 뜻하며, "팔괘의 신"은 하늘·땅·물·불 등 여덟 가지 자연의 기운을 맡은 신들을 가리킨다.
산속 개의 게송 (서기 1611년 5월 1일, 양력 추정)
바싹 여윈 저 개는
애초에 어디서 왔는가
또 어디로 가려 하며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개가 대답했다.
"진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나고 죽음이 없는 이치를 깨달아 증명하고자 합니다. 저는 전생에 사람이었는데, 이익과 권력과 총애를 좋아하여 사람들을 형벌과 재앙에 빠뜨리고, 욕심이 많아 재물을 끌어모았습니다. 그 때문에 천벌을 받아 저 아비지옥에 떨어져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고통을 받았고, 이제 겨우 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저는 전생의 잘못을 참회하며 큰 서원을 세웠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고 집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부처님과 보살님께 참배하고 아미타불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되뇝니다. 그리하여 성거산으로 들어갔다가 사방을 두루 떠돌았으니, 금강산의 낙가사며 오대산과 태백산, 지리산의 천왕봉이며 속리산과 묘향산까지, 가는 곳마다 참선을 하고 머무는 곳마다 반드시 염불을 하였습니다.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그 짧은 순간에라도 저의 천 겁에 걸친 죄를 씻어 주시고 저를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주시기를 발원하며 불법승 삼보께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그리하여 진실한 가르침에 귀의하여 여래의 경지로 뛰어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는 뜰에 꿇어앉아 귀를 축 늘어뜨리는데, 마치 제 잘못을 호소하는 듯했다.
내가 그 개의 목에 매달린 패를 보니 여러 산 이름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정말로 고기를 먹지 않느냐고 곁에 있던 승려에게 물으니, 참으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내가 듣기로 석가모니께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하셨다는데, 이 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사람으로 태어나서 개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용어) "무생인"이란 불교에서 모든 것이 본래 나고 사라짐이 없다는 이치를 깨달아 확고히 아는 경지를 뜻한다. "아비지옥"은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이며, "겁"은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의 단위를, "삼보"는 부처와 부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따르는 승려 공동체, 이 세 가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게송"은 불교에서 깨달음이나 가르침을 시의 형식으로 담아낸 글을 뜻한다.
성소부부고 제13권
9. 22:22
출처: 성소부부고 제13권, 문부 10, 제발 및 독
배경: 제13권은 두 갈래의 짧은 글로 이루어져 있다. 앞부분인 "제발"은 책이나 그림, 글씨 뒤에 붙이는 짧은 발문으로, 허균이 아끼던 명나라 문징명의 글씨, 화가 이정과 이징의 그림, 승려 휴정에게서 전해 받은 옛 초상화, 도교 경전 《참동계》, 스스로 엮은 시선집 《시산》, 중국 문인들의 편지글을 모은 《명척독》 등 그가 평생 소중히 여기던 책과 서화에 얽힌 사연이 담겨 있다. 뒷부분인 "독"은 허균이 부안에 머물던 시절 제자백가의 책을 두루 읽고 그 끝에 적어 둔 독후감으로, 노자에서 문중자에 이르기까지 열여섯 사상가의 책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자신만의 거침없는 평가를 남겼다.
제발
돌에 새긴 여러 경전 뒤에 쓰다 (서기 1606년 7월 15일, 양력 추정)
형산 문징명 선생은 서예 솜씨가 명나라를 통틀어 첫째가는 인물로, 왕희지·왕헌지·조맹부와 나란히 견줄 만하다고 하니, 왕세정이 이들을 일러 "고금의 사대가"라고 부른 것이 결코 빈말이 아니다. 문징명은 만년에 《음부경》, 《황정경》, 《정관경》, 《심인경》, 《청정경》, 《태식경》, 《통고경》 같은 여러 도교 경전을 붓으로 옮겨 썼는데, 작은 글씨의 해서체가 매우 힘차고 단단했다. 어떤 것은 옛 명필의 글씨로 전해지는 "방삭찬"이라는 글을 본떠 썼고, 어떤 것은 "낙신부"라는 옛 문장을 옮길 때 쓰던 서체를 따랐으며, 어떤 것은 왕희지가 쓴 《황정경》을 본받았고, 어떤 것은 승려 지영의 《천자문》 글씨를 흉내 냈는데, 획의 굵기가 한결같이 고르면서도 고운 맵시가 넘쳐흘러 참으로 진기한 보물이라 할 만하다. 나는 이 글씨를 궁유 벼슬을 지낸 주씨 성의 어떤 이에게서 얻었는데, 어찌나 아끼고 좋아하는지 차마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아, 이 여러 경전은 모두 신선이 되는 지름길을 알려 주는 글이다. 사람이 참으로 천 번 만 번 되풀이해 읽는다면 그 깊은 뜻을 저절로 환히 깨치게 될 것이다. 게다가 형산 선생의 붓끝으로 그 무게를 더하였으니, 읽는 이가 그 깊은 뜻을 통해 도를 터득하고 그 마음이 담긴 글씨를 통해 서예의 이치까지 얻는다면, 이야말로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는 셈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글씨를 삼가 보자기에 싸서 간직하며 아침저녁으로 본받고자 한다.
(용어) "궁유"는 중국에서 황태자를 가르치던 벼슬 이름이다. "방삭찬"과 "낙신부"는 모두 예로부터 전해 오는 이름난 글로, 여러 서예가들이 즐겨 베껴 쓴 본보기 글이었다.
《시산》 뒤에 쓰다 (서기 1607년 12월 20일, 양력 추정)
《시산》이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은, 내가 감히 시를 새로 뽑아낸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이미 뽑아 놓은 것을 추려 깎아 낸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깎아 내는 일을 맡았을 뿐 뽑는 일을 맡은 사람이 아니다. 시를 뽑는 사람의 공은 대단히 크면서도 정작 일 자체는 수월하지만, 깎아 내는 사람은 정신을 몹시 고달프게 써야 한다. 대체로 여러 사람의 글을 두루 모으되 길고 짧은 잣대를 따지지 않고 그저 화려한 것만 골라 엮는 것이 뽑는 사람의 간편함이라면, 여러 사람이 이미 뽑아 놓은 것을 한데 모아 그 잣대의 길고 짧음과 두텁고 얕음을 다시 가려내고, 화려함은 따지지 않은 채 오직 격식에 순수하게 들어맞는 것만을 가려 비로소 책에 올리는 것은 깎아 내는 사람의 수고로움이다.
우리나라 시를 뽑은 사람은 모두 여섯이니, 그들이 남긴 책이 바로 앞뒤로 이어진 《청구풍아》와 《속청구풍아》, 《동문선》과 《속동문선》, 그리고 《시부》와 《선시》이다. 이 여러 분은 모두 대단한 인물들이었지만, 그렇더라도 수많은 선비의 글을 두루 모으려면 처음부터 상당한 정신을 쏟아야 했을 것이다. 하물며 나처럼 얕은 식견과 좁은 배움으로 뭇사람의 논평을 모아 취하고 버리는 일을 하였으니, 그 깎아 내는 작업이 고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 해도 격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 바닷속에 던져 버리듯 빼 버린 시를 두고, 혹 아까운 구슬 하나를 빠뜨렸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격식에 맞지 않는 것을 함부로 올려놓은 적은 없으니, 물고기 눈알과 진주가 뒤섞였다는 비난만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깎아 낸 뒤에 남은 분량도 결코 적지 않아서, 모두 열 권에 천 편에 이르니 거의 빠짐없이 갖추었다고 할 만하다.
이정의 불화첩 뒤에 쓰다 (서기 1606년 6월 15일, 양력 추정)
호를 나옹이라 하는 화가 이정이 그린 불화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그 대강을 논한 적이 있고, 명나라 사신 주지번, 호를 난우라 하는 이 또한 뒤이어 그 그림을 논했으므로, 이제는 그 오묘한 이치는 다시 말하지 않고 다만 그림 자체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정의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 가운데는 지나치게 치켜세우는 이도 있고 지나치게 깎아내리는 이도 있다. 그를 당나라의 오도자나 송나라의 이공린과 나란히 견주는 것은 참으로 분수에 넘치는 일이며, 반대로 그의 할아버지와 숙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깎아내리는 것 또한 터무니없는 말이다. 그런데 굳이 따지자면, 깎아내리는 쪽이 그림을 더 모르는 사람이라 하겠다.
이정의 산수화는 그 기법이 안견에게서 나왔으나 더욱 노련하고, 인물화는 할아버지에게서 전수받았으나 광채가 더욱 생동하니, 이것이 그의 장점이다. 불화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신묘하고 기이하여 색을 다루는 솜씨가 모두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눈동자를 그리는 솜씨 같은 것은 번쩍번쩍 빛을 내며 사람을 쏘아보아 마치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하다. 지금 오도자나 이공린과 견주면 과연 그 차이가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으나, 훗날에는 반드시 이를 알아볼 사람이 있을 것이므로 나는 이 그림을 귀하게 간직해 둔다.
풍간 초상화첩 뒤에 쓰다 (서기 1605년 4월 1일, 양력 추정)
옛날 향산에 당나라 화가 오도자가 그렸다는 풍간의 초상이 있어 절집에서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끝내 구하지 못했다. 그런데 서산대사, 법명은 휴정이라는 스님이 세상을 뜨기 직전에 제자인 원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교산(허균의 호)이 늘 이 그림을 갖고 싶어 했지만 내가 여태 숨겨 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보물이니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다. 그대는 본디 선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니 이것을 가져다주도록 하라. 죽기 전에 틀림없이 우리에게 되돌려 줄 것이다."
이듬해 봄, 원준 스님이 다른 승려 한 사람을 시켜 그림을 보내왔다. 살펴보니 작은 폭의 그림으로, 늙은 스님이 호랑이를 타고 앉아 있고 산에서 시중드는 아이 하나가 보따리를 지팡이에 걸어 어깨에 메고 그 뒤를 따르는 모습이었다. 빛깔은 비록 어둡게 바래고 군데군데 벗겨지고 떨어져 나갔지만, 붓놀림만큼은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으니 참으로 오래된 보물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오도자는 당나라 현종 때보다 앞선 개원 연간 이전의 인물이고 풍간 역시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그러니 같은 시대의 화가가 같은 시대의 인물을 그렸다고 알려진 것은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무리가 있는 듯하다. 만약 이 그림이 정말 풍간의 초상이라면 오도자의 그림이 아닐 것이고, 만약 오도자의 그림이 맞다면 풍간의 초상이 아닐 것이니, 반드시 둘 중 하나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을 그린 이가 당나라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매우 분명하니, 보물로 여길 만하다.
화가 이정은 이 그림을 구경하고 사흘 밤낮을 손에서 놓지 못했고, 화가 이징은 이 그림을 보고서 옛 그림 십여 점을 내어 이것과 바꾸자고 애걸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당대에 손꼽히는 화가들이었으니 틀림없이 그 진가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나는 다만 이 그림을 배접해 소중히 간직해 두었다가, 내가 죽을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절로 돌려보낼 생각이다.
(용어) 풍간은 당나라 때 이름난 승려로, 아미타불의 화신이었다고 전해진다.
옛 글자체로 된 참동계 뒤에 쓰다 (서기 1608년 12월 5일, 양력 추정)
옛 글자체로 쓰인 《참동계》는 명나라 영락 연간에 세상에 나왔다. 어떤 농부가 서주 땅 산속에서 밭을 갈다가 돌상자 하나를 파냈는데, 그 속에 책 세 권이 들어 있었고 글씨는 비단 폭에 붉은 주사로 적혀 있었다고 한다. 자를 용수라 하는 학자 양신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진본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 책은 넉 자로 된 구절을 모아 위백양이 지은 경문이라 하고, 다섯 자로 된 구절을 모아 서경휴가 붙인 주석이라 하며, 또 《오행삼상류》라는 글을 순우숙통이 지은 것이라 하는 등, 체제가 짜임새 있고 매우 뚜렷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진본일까? 이 책이 세상에 돌아다닌 지가 어느덧 천 년 가까이 되었고 이 책에 주석을 단 사람만도 백여 명에 이르는데, 그동안 아무도 그 잘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는 혹 이 책이 도교 서적이라 그 뜻이 은미하고, 은어와 뒤섞인 문장이 많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 탓이 아닐까?
그렇다 하더라도, 진일이라 불리는 팽효, 포일이라 불리는 진두징, 상양이라 불리는 진관오, 이 세 사람은 세상에서 모두 도를 깨달았다고 일컬어지는 이들로, 저마다 이 책에 주석을 달면서도 그 그릇된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세 사람이 정말로 도를 깨달았다면 반드시 신선이 되어 하늘의 세계로 올라가 여러 진인들을 만났을 것이고, 위백양과 서경휴 또한 이미 하늘의 궁궐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 책의 뜻을 서로 의논하여 잘못된 곳을 바로잡았어야 할 텐데, 지금까지 그리되었다는 말이 없으니, 혹 팽효 등이 실은 도를 깨닫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미 도를 깨달았으면서도 굳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인간 세상에 남아 이 주석을 지은 뒤에야 신선이 되어 떠난 것일까? 이 점은 알 수가 없다.
이 옛 글자체 판본은 이미 장과 구절이 질서 있게 나뉘어 있어서, 뒤죽박죽 흐트러진 예전 판본과는 다르니, 나는 우선 이 판본이 옳다고 여겨 이것을 읽는다. 순우숙통과 서경휴는 위백양과 더불어 모두 신선의 도를 빙자한 사람들이니, 그 글이나 뜻은 본디 우열을 가릴 것 없이 한 사람의 솜씨에서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읽는 이가 이 책을 두루 읽고 자세히 음미해 본다면 틀림없이 스스로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천고최성》 뒤에 쓰다 (서기 1607년 7월 1일, 양력 추정)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오씨 성의 화가 망천의 솜씨를 빌려 그린 작은 풍경화 스무 폭이 있다. 모두 이름난 이들의 시문 가운데 그림으로 옮길 만한 구절을 골라 담았고, 또 손수 그 그림 아래에 문장과 부와 시를 써넣었으니 참으로 훌륭한 작업이었다. 이 화첩은 원래 궁궐 안에 있던 것인데 지금은 의창군, 곧 선조 임금의 여덟째 서자로 이름이 광이라는 분의 집에 전해지고 있다. 나의 형님 되시는 허성께서 화가 이징의 솜씨를 빌려 그 그림을 옮겨 그리게 하시고, 이징의 적형 되는 이축에게 글씨를 쓰게 하셨다. 글씨는 비록 주지번의 것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림만큼은 오히려 더 뛰어났다.
그 그림에는 도화원, 시상, 산양, 산음, 학림장, 토원, 업원, 죽루, 자릉대, 등왕각, 악양루, 기부성, 촉으로 가는 길, 풍락정, 취옹정, 적벽, 희우정, 여산 등 이름난 명승지가 두루 담겨 있어, 대체로 내가 한번 노닐어 보고 싶었던 곳들을 이 그림 하나로 한눈에 다 볼 수 있으니, 이 어찌 인간 세상의 큰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나는 몹시 기뻐서 이 그림을 감상하며 즐거움을 그칠 줄 몰랐다.
나는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평소에도 훌훌 벼슬을 벗어던지고 도연명처럼 〈귀거래사〉를 짓고 싶다는 생각을 품어 온 지 이미 오래다. 만약 내 몸이 정말 그렇게 떠날 수만 있다면, 이 그림 속에 담긴 아름다운 일들을 나 또한 세상 밖에서 몸소 누릴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옛사람을 부러워만 하겠는가. 결국 빼어난 경치와 절경이란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가에 달려 있을 뿐이니, 내가 노닐 감호가 어찌 엄자릉의 낚시터나 왕희지의 난정보다 못하겠는가. 다만 나라는 사람이 그 낚시터와 난정에서 노닐던 몇몇 인물들에 미치지 못할까 그것이 걱정될 뿐이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은 틀림없이 손뼉을 치며 배를 잡고 웃을 것이다.
이징의 화첩 뒤에 쓰다 (서기 1608년 1월 15일, 양력 추정)
이징은 봉호가 학림정인 이경윤의 서자이다. 그 아버지와 숙부가 모두 그림에 능했기에 이징이 그 솜씨를 이어받아 마침내 독자적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산수화와 인물화는 물론, 온갖 새와 대나무, 풀벌레, 꽃과 나무에 이르기까지 그리지 못하는 것이 없어 모두 법도를 얻었으니, 사람들은 이를 두고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며 칭찬한다. 호를 나옹이라 하는 화가 이정이 세상을 뜬 뒤로는 이징이 곧 우리나라에서 첫손에 꼽히는 화가가 되었다.
나는 이징에게 여러 가지 그림을 작은 화첩에 그리게 하고, 마지막은 아이를 씻기는 두 여인의 그림으로 장식하게 하였다. 이정의 솜씨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풍성한 살결과 아양 떠는 웃음이 그 요염함을 한껏 드러내어 아리따운 자태가 실물과 거의 다름없으니, 이 또한 신묘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 그림만은 오래 펼쳐 놓고 싶지 않으니, 오래 펼쳐 두면 밤잠을 설칠까 두려워서이다.
《당음》 뒤에 쓰다 (서기 1608년 11월 24일, 양력 추정)
원나라 사람으로 자를 백겸이라 하는 양사홍이 당나라 시를 뽑아 시·정·유 세 등급으로 나누고 이름을 《당음》이라 붙였는데, 시를 논하는 이들이 이 책을 으뜸으로 삼는다. 오군 땅의 고린, 호를 동교라 하는 이가 다시 이 책에 평과 점을 매기자, 온 나라의 선비들이 모두 이 책을 떠받들어 시를 배우는 첫걸음으로 삼았으니, 두 분의 공로가 참으로 대단하다 하겠다. 그러나 양사홍이 《정음》과 《유향》을 나누어 놓은 것부터가 이미 매우 질서가 없는 데다, 고린은 아예 《유향》은 손대지 않고 평과 점을 매기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이 《정음》 몇 편만으로 당나라 시인들의 시를 죄다 아우를 수 있단 말인가? 자를 운경이라 하는 심전기와 자를 소백이라 하는 왕창령, 자를 달부라 하는 고적 같은 시인들의 작품이 《유향》 여기저기에 흩어져 실려 있으니, 이분들의 시가 장구령이나 왕유, 허운, 이백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옛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식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내가 임오년(1582년)에 이 책을 처음 얻었는데, 그때는 나이가 어려 이 책이 잘되었는지 아닌지조차 가릴 줄 몰랐다. 그러고도 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거의 십 년 넘게 읽고 외웠는데, 전란 통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늘 그 책이 생각났지만 다시 구할 길이 없었는데, 지난해 어떤 사람이 중국 시장에서 구해 와 내게 주었다. 펼쳐서 읽어 보니 마치 어릴 적 친한 벗을 다시 만난 듯하여 몹시 기뻐서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였다. 다만 《유향》까지는 함께 얻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그 평하는 말들은 어떤 곳은 시원하게 막힌 데를 뚫어 주기도 하고 어떤 곳은 얽혀서 통하지 않기도 하며, 어떤 곳은 뜻을 분명하게 밝혀 주기도 하고 어떤 곳은 도리어 모호하기도 하지만, 버리고 취하는 데 있어서는 대체로 올바른 격식을 잃지 않았으니, 그 노력이 결코 게으르지 않았음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책은 마치 옛 벗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으므로 늘 곁에 두고 놓지 않는다.
《사가궁사》 뒤에 쓰다 (서기 1608년 11월 26일, 양력 추정)
《사가궁사》란 바로 당나라의 왕건과 촉나라의 비씨, 그리고 송나라 휘종 임금과 왕규 등 네 사람이 지은, 궁중을 노래한 절구시를 가리킨다. 이들의 노래는 모두 궁궐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담고 있는데 문장 또한 풍부하고 아름다워서, 이 글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직접 옛 궁전 안으로 들어가 대궐의 화려한 문물을 구경하는 듯한 기분이 드니, 이것이 바로 내가 이 글을 즐겨 읽는 까닭이다.
그렇지만 왕건은 궁중의 귀인들과 가까이 지내며 궁궐 안의 온갖 일을 속속들이 알았던 사람으로, 시는 훌륭했을지언정 그 인품은 본디 말할 것이 못 되었다. 비씨는 시 짓는 재주만 있었을 뿐 절개를 잃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 줄은 몰랐으니, 이는 그저 문장 재주 하나만 지녔던 셈이다. 휘종 황제는 결국 이런 취미로 나라를 망쳐 버렸고, 왕규는 간신에게 빌붙어 그 밑에서 쓰임을 받았으니, 이 네 사람은 모두 딱히 본받을 만한 인물은 못 되고, 오히려 후세 사람들이 경계로 삼아야 할 이들이다. 읽는 이가 이 노래들의 절묘한 솜씨에 취해 이들의 인품마저 잊어버리는 일만 없다면, 세속을 벗어난 뜻을 가다듬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명척독》 뒤에 쓰다 (서기 1608년 11월 28일, 양력 추정)
자를 용수라 하는 양신이 《적독청재》를 지었고, 자를 원미라 하는 왕세정이 이를 더욱 늘려 보탰다. 그러자 월 땅 사람으로 자를 여림이라 하는 장윤이 이 두 책을 합쳐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만 추려 《고척독》이라는 책을 엮었는데, 뽑은 것이 간결하면서도 곡진하여 그 위세가 천하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하니, 참으로 이미 집집마다 전해 외워질 만한 책이 되었다.
우리 시대 명나라 여러 문인들의 글 가운데는 편지글이 가장 뛰어난데, 이를 모은 능씨, 황씨, 도씨, 서씨 같은 이들이 저마다 널리 찾아다니고 끝까지 뒤져서 한데 모아 방대한 책을 만들었다. 그 책을 펼쳐 보면 마치 병기고에 창과 투구, 갑옷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듯하고, 보물 시장에 진귀한 조개껍데기와 옥돌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듯하며, 거대한 파도가 하늘까지 치솟는 듯하니, 참으로 장관이라 할 만하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짧은 한마디 말로 이치의 뿌리를 곧바로 꿰뚫고 사람의 마음을 절로 수긍하게 만들어 말 밖에 뜻이 서리게 하는 데에서는 《고척독》에 견주어 다소 못한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가가 있을 때마다 여러 종류의 책들을 죄다 꺼내 놓고 그 가운데 짧은 한두 마디로도 충분히 옛사람의 글에 견줄 만한 것들을 가려 뽑아, 따로 한 권을 만들어 네 권으로 나누고 이름을 《명척독》이라 붙여 장윤의 《고척독》 뒤에 덧붙였으니, 그런대로 양신과 왕세정 두 분의 뜻을 저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소문략》 뒤에 쓰다 (서기 1608년 11월 30일, 양력 추정)
구양수와 소식의 글은 송나라를 대표하는 대가라 할 수 있다. 구양수는 그 문장의 기운이 힘차고도 아름다우며 정취가 사람을 감동시키면서도 온화하고 간절하니 옛사람 가운데도 그만한 이가 없었고, 소식은 마치 베를 짜듯 자유자재로 글을 지어내어 그 변화가 끝이 없어 사람들이 그 신묘함을 헤아리지 못할 정도이니, 그 역시 천 년에 다시없을 절창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 가운데는 진나라 이전과 전한 시절의 문장만을 으뜸으로 여겨 이 두 사람의 글을 가벼이 여기고 배우려 들지 않는 이들이 있으니, 이는 참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문장이란 저마다 나름의 맛이 있는 법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대궐 푸줏간의 쇠고기와 표범의 태, 곰 발바닥 같은 진귀한 음식을 맛보고는 스스로 천하의 좋은 음식을 다 먹어 보았다고 여겨, 마침내 기장밥이나 회, 구운 고기 같은 평범한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면 굶어 죽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이다. 이것이 어찌 진나라 이전과 융성했던 한나라의 문장만을 으뜸으로 여기고 구양수와 소식을 가벼이 보는 것과 다르겠는가.
왕세정은 만년에 소식의 글을 즐겨 읽었고, 호를 녹문이라 하는 모곤은 평생토록 구양수를 한유보다 뛰어나다고 추어올렸으니, 이 두 사람이 결코 남을 속일 이들이 아니다. 어느 한 사람의 문집만 오로지 파고들다 보면 혹 너무 배가 불러 소화하지 못하고 도리어 체할까 염려되므로, 나는 그 가운데 가장 간결하고 절실한 글만을 가려, 구양수의 문장 예순여덟 편과 소식의 문장 일흔두 편을 뽑아 《문략》이라 이름 붙였으니 모두 여덟 권이다. 앞으로 틈틈이 이 책을 읽어 글쓰기의 법을 배울 생각이다.
《명시산보》 뒤에 쓰다 (서기 1608년 12월 2일, 양력 추정)
자를 우린이라 하는 이반룡이 명나라 시 몇 수를 가려 뽑아 《고시산》 뒤에 덧붙였는데, 그 버리고 취한 기준이 종잡을 수 없는 데가 있었으니, 왕세정이 이른바 "영웅도 사람을 속이니 다 믿을 수는 없다"고 한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명나라 사람 가운데 "성당 시대의 격조를 이루었다"고 일컬어지는 이라 해서 반드시 모두가 정말로 성당의 격조를 이룬 것은 아니다. 만약 양사홍의 방식대로 명나라 시를 취하고 버린다면, 내 생각에는 아마 그 기준 안에 들지 못할 시가 많을 듯하다.
나는 이반룡이 깎아 낸 것을 바탕으로 그 가운데 열에 서넛을 다시 덜어 내고, 또 왕정상의 《풍아》와 고기원의 《국아》, 그리고 여러 사람의 문집을 살펴 음률에 들어맞는 것만을 가려 보태었으니, 모두 육백스물네 편이 되었다. 당나라 삼백 년 동안 나온 수백 명의 시인에 대해서도 양사홍은 천여 편으로 정리를 마쳤으니, 지금 내가 가려 뽑은 명나라 시의 분량은 마침 그 절반쯤에 해당하는 셈이라, 이 역시 명나라 시인들의 시를 충분히 망라했다고 할 만하다. 그러니 나를 두고 주제넘다고 나무라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우총설》 뒤에 쓰다 (서기 1607년 8월 1일, 양력 추정)
내가 젊었을 때 하량준의 《어림》을 읽고서 비로소 중국에 자를 원랑이라 하는 하량준이라는 학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전집을 보고 싶었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고씨의 《시여》에서 하량준이 쓴 서문을 보았는데, 그 자상하고 고아한 문체가 참으로 이름난 문장가다웠다. 또 여러 사람의 편지글 가운데서 그가 쓴 짧은 글 한두 편을 대강 보고서는 마음속으로 은근히 그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전 중국에 들어가는 역관에게 부탁하여 《동해집》이라는 책을 구해 달라고 하였더니, 그 책은 구하지 못하고 대신 《사우총설》이라는 책 여덟 권을 사 왔다.
내가 조심스레 이 책을 살펴보니, 옛 경전과 여러 학자·역사가의 글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명나라 조정의 옛일이며 야사와 소설에 기록된 것에 이르기까지 두루 언급하였고, 곁들여 불교와 노래·희곡을 다루는 이들의 학문에까지 통달하여, 참으로 광범위하게 종합해서 기록하였으며, 그의 견해와 논평은 모두 보통 사람의 생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으니, 참으로 남다른 책이라 할 만하다.
내가 비록 그의 전집은 보지 못하였으나, 이 책 하나만으로도 하량준의 학문의 깊이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으니, 마치 구름을 헤치고 하늘을 본 듯 통쾌하였다. 옛날 중랑 벼슬을 지낸 후한 때 사람 채옹이 오나라 땅에 들어가 왕충의 《논형》을 읽고서 그 뒤로 말솜씨가 갑자기 명쾌해지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남다른 인물을 만나지 못한다면 마땅히 남다른 책이라도 보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나 역시 이 책을 읽고서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 바이다.
《사동방록》 뒤에 쓰다 (서기 1607년 10월 1일, 양력 추정)
황문시랑 벼슬을 지낸 양유년이 병오년(1606년) 봄에 황손이 태어났다는 조서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와서 이를 반포하였는데, 사람됨이 온화하고 단정하였으며, 정사로 함께 온 태사 벼슬의 주지번과 더불어 문장과 풍류를 나란히 갖추어, 입만 열면 주옥같은 문장이 절로 이루어지니 참으로 한 쌍의 보배와 같은 인물들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마치 한집안 사람 대하듯 하여 속마음을 터놓고 정성을 다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대하고 공손하고 부지런한 태도에서는 두 분이 서로 같았으나, 스스로를 법도로 단속하고 강직하게 바른길을 지키는 데에서는 양유년이 더 나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두 분을 마치 하늘에서 노니는 상서로운 기린과 봉황을 우러르듯 떠받들었고, 두 분이 떠난 뒤에는 마치 아름다운 이를 이별한 것처럼 그리워하였다. 하물며 여러 달 동안 곁에서 모시고 따르며 칭찬과 사랑을 받았던 나로서는, 그리워하는 마음이 마땅히 다른 사람보다 몇 곱절은 더할 수밖에 없다.
양유년은 조정으로 돌아가 사신으로 왔을 때 지은 작품들을 책으로 엮으면서 조선 사람들이 화답한 글까지 함께 붙여 《사동방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보낸 사신 편에 이 책을 실어 보내와 나도 한 부를 얻어 볼 수 있었다. 나의 보잘것없고 속된 글을 이 책에 붙여 온 천하에 전하여 빛냄으로써, 글을 짓고 문예를 논하는 천하의 선비들로 하여금 바다 건너에 허균이라는 선비가 있음을 알게 하였으니, 이 어찌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책 이름을 "동방"이라 하고 굳이 "조선"이라 하지 않은 것은 대개 더없이 가깝게 여긴다는 뜻에서였고, 우리 쪽에서 화답한 글을 함께 실은 것은, 지난날 시호가 문희인 예겸이라든가, 좨주 벼슬을 지낸 공용경이라든가, 규양이라 불리는 황홍헌 같은 이들이 각기 《요해편》이니 《조선록》이니 《유헌록》이니 하는 책을 남긴 것과 비슷한 예이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독창적으로 우리 쪽 화답시까지 함께 붙였으니 이는 깊이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양유년은 시를 채집하려는 뜻을 잘 헤아렸고, 또 우리가 공손히 대하려는 뜻도 자세히 알았으니, 그 친애함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이것이 어찌 나 한 사람만의 영광이 되겠는가.
《온리염체》 뒤에 쓰다 (서기 1605년 6월 22일, 양력 추정)
이 《온리염체》 한 권은 당나라의 자를 비경이라 하는 온정균과 남당의 마지막 임금 이욱이 지은 사와 곡들을 모은 것이다. 사와 곡이라는 갈래는 애초 이백에게서 비롯되었는데, 온정균에 이르러 비로소 편수가 크게 늘어나며 성황을 이루어 그 말이 빠르면서도 화려했고, 이욱은 이를 변화시켜 다소 유창하게 다듬어 그 말이 교묘하고 곡진하였으니, 두 사람 모두 이 갈래의 절정에 이르렀다고 할 만하다.
송나라의 구양수, 안수, 진관, 황정견에 이르러서는 유려하고 화려하며 웅장한 면에서는 뛰어나지만, 날카로운 맛에 있어서는 마땅히 조금 뒤떨어진다. 내가 지방관으로 요산에 있을 때, 여름철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 한가한 틈을 타서 두 사람의 작품을 가려 뽑아 서른아홉 수를 모아 한 권으로 엮고, 호를 석봉이라 하는 명필 한호에게 부탁해 이를 옮겨 쓰게 한 뒤 상자 깊이 간직해 두었다. 훗날 벼슬을 벗고 전원으로 돌아가 술 마시는 벗들을 이끌고 높은 누각에 기대어 노래를 읊으려 할 때, 이 책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권근의 응제시 뒤에 쓰다 (서기 1608년 12월 6일, 양력 추정)
문충공 권근이 외국 사신의 신분으로 명나라 천자를 알현하고 그 재주를 칭찬받았는데, 천자가 그에게 시를 내리고는 이에 화답하여 올리라는 명까지 내렸으니, 그 은총과 영광이 지극하였다. 이는 천고에 보기 드문 일이었으니, 그 자손이 이 글들을 모아 따로 책을 엮고 주석을 붙여 세상에 펴낸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그 특별한 은총과 남다른 대우가 함께 사행을 갔던 여러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명나라에 동행했던 여러 인물들이 저마다 충분히 칭송을 다하였다고 본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권근 공의 이 사행이 명나라 홍무 25년, 곧 1392년 이전에 있었더라면 더욱 빛났을 터인데, 공교롭게도 그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뜻있는 사람이라면 이를 두고 애석하게 여길 것이니, 슬픈 일이다.
《서유록》 뒤에 쓰다 (서기 1608년 12월 8일, 양력 추정)
나는 예전에 여러 통속 소설 수십 종을 구해 읽어 보았는데, 《삼국지연의》와 《수당지전》을 빼놓고는 다른 것들이 모두 시원치 않았다. 《양한지》는 앞뒤가 맞지 않고, 《제위지》는 옹졸하며, 《잔당오대사연의》는 거칠고 엉성하고, 《송태조용호풍운회》는 내용이 소략하며, 《수호전》은 간사한 속임수에 잔재주를 부렸다. 이것들은 모두 독자를 제대로 가르치기에는 부족한 것들인데, 이 여러 책이 나관중 한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고 하니, 그 자손이 삼대에 걸쳐 벙어리로 살았다는 이야기도 무리는 아닌 듯하다.
한편 《서유기》라는 책이 있는데, 어느 왕실 종친의 집안에서 나왔다고 하며, 이는 곧 현장 스님이 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 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살을 붙인 것이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석보》와 《신승전》 같은 책에 대략 나타나 있기는 하나, 반쯤은 믿고 반쯤은 의심스러운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이 책을 보니, 독특하게도 불가에서 몸과 마음을 닦는 수련의 이치를 빗대어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다. 원숭이 왕이 좌선하는 대목은 곧 몸을 단련하는 것을 뜻하고, 노조궁에서 단약을 훔치는 대목은 곧 신선의 구슬을 삼키는 것을 뜻하며, 하늘 궁전을 크게 어지럽히는 대목은 곧 잡생각을 다스려 없애는 것을 뜻하고, 삼장법사를 모시고 서역으로 가는 대목은 곧 몸속의 기운을 돌리는 것을 뜻하며, 화염산과 홍해아 대목은 곧 수련할 때의 불기운 조절을 뜻하고, 검은 물이 하늘의 강과 통한다는 대목은 곧 기운을 거두어들이는 절차를 뜻하며, 서쪽에서 다시 동쪽으로 돌아온다는 대목은 곧 서쪽의 범과 동쪽의 용이 서로 만나는 것을 뜻하고, 하루 만에 서역 십만 리를 오간다는 대목은 곧 하늘의 무수한 별을 한꺼번에 헤아린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비록 장황하고 막연하며 그 말이 다 이치에 맞는 것은 아니지만, 곳곳에서 단약을 만드는 비결을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으니 정말 하찮게 여겨 내버릴 수는 없다. 나는 이 책을 각별히 간직해 두고서, 참된 이치를 닦는 틈틈이 피곤할 때면 이것으로 졸음을 쫓아낼 생각이다.
독
머리말
내가 부안에 머물 때 딱히 할 일이 없던 차에, 마침 여러 제자백가의 전집을 구해 꼼꼼히 읽게 되었다. 그리하여 읽으며 깨달은 바를 풀어서 각 책의 끝에 적어 두었다. 이는 감히 내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보잘것없는 소견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노자 (서기 1608년 10월 16일, 양력 추정)
《노자》를 여러 장으로 나눈 것이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본래 글의 뜻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데도 억지로 끊어 놓은 곳이 있어 매우 잘못되었다. 다만 마땅히 전체를 이어서 읽어야 비로소 뜻이 통할 수 있다.
세상에서는 흔히 "《노자》는 유교의 육경에 넣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큰 도를 논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 뜻이 현묘하고 은미하여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 이는 《주역》이나 《중용》에서도 말하지 못한 것을 여기서 끄집어내어 말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노자》가 유교의 경전들과 나란히 서기를 마다하고 홀로 우뚝 떨어져 나가고 싶어 하는 까닭이니, 아, 참으로 신기한 책이다.
후세에 노자를 따르는 무리들이 그 학문을 이리저리 굴려 신비롭게 꾸며 내었고, 그것이 더 흘러가서는 몸을 단련하는 법이니 약을 먹는 법이니 부적이니 굿이니 하는 것들을 만들어 내어 괴이하고 황당하며 바르지 못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로써 세상을 현혹하고 사람을 속이는 일이 많아졌다. 이런 무리들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그 여파로 노자까지 싸잡아 비방하게 된 것이니, 괴이하고 황당한 짓거리가 어찌 본디 노자가 말한 맑고 고요함의 참뜻이겠는가. 노자의 글은 곧 경전이요, 그 뜻은 곧 그것을 풀이한 전이며, 도를 논함에 이르러서는 곧바로 하늘의 핵심을 꿰뚫었으니, 나의 재주로는 도무지 그 윤곽조차 잡을 수가 없다. 참으로 용과 같다 하겠다.
열자 (서기 1608년 10월 19일, 양력 추정)
《열자》 가운데 천서편과 황제편, 이 두 편은 도를 논한 부분이 그윽하고 미묘한 이치를 남김없이 끝까지 파고들어 숨김이 없으니, 노자의 《도덕경》이나 장자의 《남화경》과 서로 안팎을 이루어 짝할 만하며 문장 또한 예스럽고 우아하며 깊이가 있다. 그런데 그 뒤로 갈수록 문장이 차츰 흐트러지고 느슨해지며, 도리를 논한 것도 어긋나고 그릇된 곳이 많아져서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지가 않다. 그러니 한나라의 유향이 이 책을 두고 의아하게 여긴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여덟 편은 아마도 진나라가 남쪽으로 옮겨 간 이후에 여러 사람의 저술이 뒤섞여 나온 것인 듯하며, 유향이 손수 교열한 그 책은 아닌 듯하다. 장자가 자주 이름이 어구인 열자를 인용한 것을 보면 그 인물됨이나 사상이 참으로 귀하게 여길 만한데, 지금 그 온전한 책을 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내 생각으로는, 첫머리 두 편은 《열자》의 옛 판본이고, 그 나머지는 한나라 사람이나 혹은 위·진 시대 사람이 나중에 보태 넣은 것이 아닌가 한다.
장자 (서기 1608년 10월 22일, 양력 추정)
내가 어릴 때는 《장자》를 읽으면서도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문체를 살피고 구절을 따다가 글쓰기에 써먹는 정도였다. 그러다 중년에 다시 읽어 보니, 뜻이 크고 재주가 뛰어나며 생각이 황홀하여 도무지 헤아릴 수 없을 듯했지만, 이미 그 우화들이 마음에 들었고, 삶과 죽음을 똑같이 보고 얻음과 잃음을 똑같이 여기는 그 태도만큼은 소중히 여길 만하였다. 지금 다시 이 책을 보니, 담박하고 고요하며 맑고 무위한 그 사상이 은연중에 부처의 가르침과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 다만 그 아득하고 황당한 말들이 이치에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니기에 깊이 파고들지 않았으니, 그 실마리를 다 알 수는 없다.
그 가운데 대종사편에서 "안회가 가만히 앉아 사물과 나를 다 잊었다"고 한 한 구절을 유가에서는 몹시 비방하지만, 《예기》에도 "앉을 때는 마치 재계하는 사람처럼 하고, 설 때는 마치 신주 노릇을 하는 아이처럼 하라"고 하였고, 《논어》에는 "안회는 하루 종일 마치 어리석은 사람 같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앉아서 사물과 나를 잊었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또한 그 뜻을 부연하여 표현한 것일 뿐 함부로 지어낸 망언은 아니다.
그리고 "주공과 공자를 비방했다"는 말도 사실은 잘못된 것이다. 노자는 장자의 스승인데, 진일이라는 이가 노자의 죽음을 조문한 이야기를 빌려 노자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한 것은, 이 늙은이 특유의 해학적이고 능청스러운 평소 태도에서 나온 것일 뿐 참으로 비방한 것은 아니다. 천하편에서 유가를 맨 앞자리에 놓고 언급한 것을 보아도, 그가 실은 주공과 공자를 높이 받들었음을 알 수 있다.
관자 (서기 1608년 10월 25일, 양력 추정)
《관자》의 글은 뒤섞이고 겹치는 부분이 많아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지 않다. 그 가운데 심술편과 내업편 같은 것은 모두 도가의 학설을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고, 주합편을 비롯한 여러 편은 하나같이 은어를 써서 까다롭고 괴상하니, 실질적인 일을 앞세워 세상을 이끌던 관중의 학문과 방식으로 어찌 이렇게 현실과 동떨어지고 아득한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이것이 정말로 관중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는 일부러 이런 알쏭달쏭한 말을 지어 자기의 참모습을 감추어 꾸민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관중의 참뜻이 담긴 부분은 오직 목민편, 대광편, 경중편 정도뿐이며, 그 가운데서도 목민편이 가장 간단명료하다.
병사를 부리는 진법이며 농사와 누에치기 같은 살림살이의 근본을 논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조리가 정연하여 그 핵심을 정확히 짚었으니, 이를 실제 정치에 적용하자 곧바로 실효가 나타났고, 마침내 안으로는 나라와 군대를 부강하게 하고 밖으로는 이웃 나라에 위세와 패권을 떨쳐, 그 임금을 춘추오패 가운데 으뜸으로 만드는 데까지 이르렀다.
아, 세상의 도리는 이미 쇠퇴할 대로 쇠퇴하였다. 왕도 정치를 끝내 행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관중 같은 인물을 얻어 정치를 맡기고 백성을 다스릴 수 있을까?
안자 (서기 1608년 10월 28일, 양력 추정)
안영은 옛날 이른바 법가에 속하는 인물로, 흔히 "관중과 안영"이라고 나란히 일컬어진다. 이제 그의 글을 보니 다만 제나라를 섬긴 사적만을 담고 있는데, 문장이 그저 예스럽고 우아할 뿐, 정치를 일으키고 백성을 다스리는 요체를 자세히 논한 관중의 글과는 다르다. 안영은 그저 제 몸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남의 뜻을 따라 세상에서 인정받은 사람일 뿐이니, 권신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할 만하다. 만약 그가 제나라 환공의 시대를 만났더라면 그 업적은 틀림없이 관중에 미치지 못했을 것인데, 이 두 사람을 나란히 일컫는 것은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상자 (서기 1608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상앙이 처음 진나라 효공을 만나 왕도와 패도로써 설득하였으나 효공은 시큰둥하게 여겼는데,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하는 방법으로 설득하자 그제야 자리를 앞으로 당겨 다가앉으며 싫증 내지 않고 들었다고 한다. 상앙의 학문은 본디 왕도나 패도와는 거리가 멀고, 오직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만 뛰어났을 뿐이었다. 처음에 왕도와 패도로 설득한 것은 그저 말을 그럴듯하게 꾸민 것에 지나지 않았고, 결국은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을 꺼내어 진왕의 마음을 정확히 찔렀던 것이다. 그의 글은 매우 강경하고 사나워서 이 또한 진나라 이전 시대다운 필치이기는 하나, 후대 사람이 억지로 끼워 넣은 글도 많을 것으로 의심된다. 그의 글 가운데 한 편에서 말한 "부정을 고발한 사람에게는 상을 내린다"는 것이 바로 그가 평생토록 즐겨 쓰던 방편이었는데, 결국 이 방편으로 자기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니, 돌고 도는 것을 좋아하는 하늘의 이치로 보면 당연한 일이다.
후세의 군자들은 걸핏하면 왕도만을 내세우며 관중과 상앙을 하찮게 여겨 깎아내리지만, 정작 그 실제 공적을 따져 보면 오히려 이들에게 미치지 못한다. 아, 어떻게 해야 상앙 같은 인물을 얻어 그의 계책을 써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아 낼 수 있을까?
한비자 (서기 1608년 11월 3일, 양력 추정)
진나라 이전 제자백가의 글 가운데 《노자》와 《장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어떤 것은 뒤섞여 어수선하고 어떤 것은 난해하며 어떤 것은 논리가 끊어져 있다. 그런데 유독 한비자의 글만은 바르고 아름다우며 분명하고 확실할 뿐 아니라, 비슷한 말들을 엮어 일을 서술하는 데 뛰어나며, 게다가 현실 사정에 몹시 절실하니, 문장만 놓고 논한다면 참으로 대가라 할 만하다.
그 가운데서도 세난편과 팔간편이 더욱 뛰어난데, 시험 삼아 열고 닫으며 억누르고 치켜올리고 내달리다가 멈추고 끊었다가 다시 이어 가는 대목들을 살펴보면, 은연중에 후세에 글을 짓는 이들에게 문장을 촘촘히 짜고 얽어매는 방법의 실마리를 열어 준 셈이다. 그리고 옛 글이 애초에는 꾸밈없이 순박하였던 것이 이 사람에 이르러 임기응변의 계략을 갖추게 되었다. 그가 논변하는 학문은 대체로 상앙과 신불해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엄격하고 각박한 면은 오히려 그들보다 한술 더 뜬다고 하겠다.
묵자 (서기 1608년 11월 6일, 양력 추정)
묵자의 학문은 그 도의 큰 틀이 우 임금과 비슷한 점이 있어서 자주 우 임금의 도라고 일컬어지는데, 이는 마치 허행이 농사짓는 법을 닦으면서 스스로 "신농씨의 가르침을 말한다"고 일컬었던 것과 같다. 애초에는 모두 옛 성인에게서 비롯되었으나, 그 말류의 폐단이 결국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이 때문에 맹자가 있는 힘을 다해 이를 배척하였던 것이다. 유가와 나란히 일컬어지는 까닭은, 특히 어짊과 의로움에 뿌리를 두고 어진 이를 높이며 덕을 숭상하는 점이 유가와 서로 가까운 데가 있기 때문인데, 이는 옳은 듯하면서도 실은 그른 것이어서 사람을 쉬이 홀리기 딱 좋다. 그런데 한유가 "공자께서 지금 계신다면 반드시 묵자의 뜻을 받아들이셨을 것이다"라고 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인가? 그의 글은 비록 예스럽고 우아하기는 하나 간혹 뒤섞여 조리가 없으니, 혹 후대 사람이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은 아닐까?
순자 (서기 1608년 11월 9일, 양력 추정)
순황이 노자를 배척하며 "굽힐 줄만 알았지 펼 줄은 몰랐다"고 하였고, 장자를 배척하며 "하늘의 도리에 가려 사람의 일은 알지 못했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자못 타당하다. 또한 왕도를 높이고 패도를 낮추어 볼 줄 알았으며, 공자를 높이고 이단을 배척할 줄 알았으니, 이 점에서는 맹자 이후 첫손에 꼽을 만하다. 다만 그 타고난 성품이 거만하고 어리석어서 함부로 도를 안다고 자처하며, 증자와 자사, 맹자를 제쳐 두고 곧장 공자의 학통을 직접 이으려 하였으므로, 이론을 세우고 가르침을 전하는 데 있어 다른 유학자들과는 다르게 하려고 애를 썼다. 맹자가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고 하자, 순황은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고 말하여 맹자를 이기려 하였으나 끝내 이기지 못했다.
만약 순황이 순순히 자사와 맹자의 학통을 지키고 남다른 학설과 특이한 논변을 애써 내세우지 않았더라면, "작은 흠이 있다"는 배척이나 "가린 것이 정밀하지 못하고 말이 자상하지 못하다"는 한유의 꾸짖음이 대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오로지 거만하고 어리석어서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며 제멋대로 행동하였기 때문에, 그의 학문이 한 번 전해지자 이사와 한비자의 사상으로 변질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양자 (서기 1608년 11월 12일, 양력 추정)
순황은 스스로 자기 학문을 크게 떠벌리고 스스로 자기 지혜를 남다르게 여겨 다른 제자백가들보다 뛰어나고자 하였고, 양웅은 스스로 자기 학문을 낮추고 스스로 자기 지혜를 겸손하게 여겨 성인의 뜻에 부합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두 사람 모두 지혜로운 이들에게 배척을 받았으니, 이들이 도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양웅이 《법언》을 지을 때는 《논어》를 본떴고, 《태현》을 지을 때는 《주역》을 본떴는데, 이는 그의 마음속에 자기 학문이 성인에 미치지 못하고 자기 지혜가 다른 제자백가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여겨, 따로 새로운 이론을 세워 경전을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 책을 지어 성인의 뜻에 부합하고자 하였으니, 그 뜻이 자못 고루하다. 그가 어렵고 심오한 말을 즐겨 쓴 까닭은 얕고 보잘것없는 자기 학설을 그럴듯하게 꾸미려 했기 때문이니,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오히려 더 얕아 보이고, 깊으면 깊을수록 오히려 더 얄팍해 보이며, 통하면 통할수록 오히려 더 막혀 보여서, 결국 그 옹졸함을 가리지 못했다.
만약 양웅이 이런 일을 벌이지 않고 그저 시와 부만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더라면, 사람들이 그의 잘잘못을 굳이 따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온 정신과 힘을 쏟아부어 유학의 학통에 부합하고자 애쓰다가, 결국 왕망의 신하라는 손가락질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양웅의 허물은 고루함에 있고 순황의 잘못은 스스로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데 있으니, 차라리 고루할지언정 그처럼 어리석어서는 안 될 일이다.
(용어) "왕망의 신하"라는 말은, 한나라 말에 왕망이 한나라 황실을 찬탈해 나라 이름을 신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라 칭했을 때 양웅이 절개를 잃고 왕망 밑에서 벼슬을 지냈다 하여, 훗날 송나라의 주희가 역사책 《자치통감강목》을 지으면서 그를 낮추어 부른 데서 나온 말이다.
자화자 (서기 1608년 11월 15일, 양력 추정)
세상에서 흔히 자화자라고 부르는, 춘추시대 진나라 사람 정본이라는 이 인물은, 공자가 길을 가다가 마주쳐 마치 오래 사귄 벗처럼 여기며 수레의 덮개를 서로 기울인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전해지는 사람이니, 이 사람은 틀림없이 도를 아는 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책을 살펴보니, 문장이 매우 조잡하게 끊어지고 잡다한 글이 많이 섞여 있는데, 《순자》, 《맹자》, 《국어》, 《노자》, 《장자》, 《소문》, 《한비자》, 《초사》 같은 여러 책의 문장을 죄다 그러모아 마치 백가의 옷을 얻어 입힌 것 같으니, 이는 틀림없이 한나라 시대 유학자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도를 아는 자화자 같은 이가 어찌 이러하겠는가.
다만 그 마지막 편에서 한 말은, 비록 도의 근원을 밝히지는 못했으나 그 뜻이 그런대로 좋고 문장도 뛰어나다. 그 가운데 "사람의 수명이 얼마나 된다고 자신을 알아줄 날이 오기를 기다린단 말인가"라고 한 말은, 아마도 당시 여러 나라가 구름처럼 어지러이 다투고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때를 만나지 못한 선비들을 슬퍼하여 한 말인 듯하다. 이것이 곧 자화자가 직접 지은 글인데, 진나라의 분서 통에 그의 전집이 사라져 버리자 후대 사람이 이 한 편을 빌미 삼아 나머지를 위조해 지어내어 전한 것이 아닐까 한다.
손자 (서기 1608년 11월 18일, 양력 추정)
춘추전국 시대 이래로 병법을 논한 사람으로는 손무 한 사람뿐이다. 후세에 용병을 잘한다는 이들도 그의 그릇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비록 왕도를 이룬 임금의 스승이라 할 수는 없어도 참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글도 풀었다 잠갔다 열었다 닫았다 하는 대목들이 있어 마디마디 정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진나라 이전 제자백가의 글 가운데 한비자와 손무가 최고의 문장가로서, 간절하고 분명하게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다른 이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오자 (서기 1608년 11월 21일, 양력 추정)
어떤 이가 이르기를 "손자는 오로지 임기응변의 권도에만 능했고, 오기는 정도에 가까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손무가 오기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는 다만 오기의 책이 예의를 숭상하고 가르침을 밝히면서 주나라 시절의 사마 병법을 인용한 것을 보고서 그의 병법이 정도에 가깝지 않은가 여긴 것일 뿐이니, 이는 오기가 겉으로 꾸민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기가 군사를 부리는 임기응변의 술수는 모두 손무의 병법을 근본으로 삼은 것인데, 다만 이따금 따로 잔재주를 부려 스스로 그 흔적을 감추었을 뿐이다. 손무와 마찬가지로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고 할 만하지만, 그 계략의 깊이는 손무가 더 낫다. 그 글이 간결하고 절실한 점도 손무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그에 못 미친다.
여자 (서기 1608년 11월 24일, 양력 추정)
《여씨춘추》는 곧 《여자》라고도 불린다. 옛날에는 이치를 논하고 사물을 논한 책을 모두 "춘추"라고 일컬었기 때문에 《안자》도 《춘추》라 불렀던 것이니, 이 책을 《여자》라 부르는 까닭도 이와 마찬가지다. 여불위가 이 책을 만들 때, 자신이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천하의 뛰어난 변론가들을 모아들여 그들의 말을 채집하고 기록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 글이 정연하거나 능숙하지 못하여 어떤 곳은 매우 바르고 어떤 곳은 매우 잡되고 거칠다. 그 까닭을 따져 보면, 여불위가 이를 제대로 가려내고 버리지 못하여 그대로 함께 보존한 채 후세에 전해진 것이다. 그 가운데 팔람은 문장이 가장 예스럽고 우아하므로, 후세에 글을 짓는 이들이 이를 따로 《여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회남자 (서기 1608년 11월 27일, 양력 추정)
유안은 손님을 좋아하여 손님이 머물 집을 비워 두고 뛰어난 인재들을 대접하였으니, 대산과 소산, 그리고 팔공이라 불리는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고 기이한 인물들로, 그 말솜씨는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일을 꿰뚫기에 충분하였고, 문장은 제자백가를 두루 아우르기에 충분하였다. 그리하여 이들과 함께 이 책을 지었는데, 대체로 유가, 도가, 명가, 법가 등 여러 학파와 천문, 지리, 역법, 양생술 같은 학설이 두루 뒤섞여 나와, 폭넓게 종합하고 갖추 관통하여 광대하고 해박하니 참으로 완비되었다고 이를 만하다. 다만 그 말들이 서로 어긋나고 뒤섞여 조리가 딱 들어맞지 않으니, 이 역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 《여씨춘추》의 경우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한서》에서는 "유안이 반역죄로 처형되었다"고 하였고, 《신선전》에서는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였으니, 이는 혹 팔공의 무리가 세상을 현혹하려고 지어낸 말이 아닐까? 위백양의 《참동계》에도 그가 신선이 되어 떠났다는 말이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 혹 그 진짜 사실을 꺼려 숨긴 것은 아닌지, 분명히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그의 문장이 웅장하고 걸출하며,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고 음양의 원리를 탐구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또한 크게 남보다 뛰어난 데가 있으니, 전한 시대 제자백가 가운데 그가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 할 만하다.
문중자 (서기 1608년 11월 30일, 양력 추정)
왕통의 글은 육조 시대 이후에 나왔기 때문에 그 문장에 힘이 없다. 그가 지은 《속고시》, 《원경》, 《중론》은 각각 《시경》, 《춘추》, 《논어》를 본떠 지은 것으로, 그 논설이 모두 왕도 정치에서 우러나온 것이므로, 옛사람 가운데는 이를 두고 유교 경전들의 종노릇을 한다고 견준 이도 있었다. 종이라는 신분은 참으로 천하지만, 정말로 성인의 종이 되었다면 그 또한 성인의 문 앞이나마 엿본 셈이니, 성인의 경전을 벗어나 도를 저버리고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하는 잘못에 빠진 자들과는 그 거리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 것이다.
성소부부고 제14권
9. 22:23
출처: 성소부부고 제14권
배경: 제14권에는 잠(스스로를 경계하는 짧은 글), 명(사물이나 거처에 새겨 두는 글), 송(공덕을 기리는 글), 찬(인물이나 그림을 기리는 글)이 두루 실려 있다. 자신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다잡는 개인적인 글에서부터, 돌아가신 선조 임금을 그리워하는 글, 강릉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김유신 산신 신앙을 기리는 글, 그림 속 부처와 신선들을 노래한 연작까지 폭넓게 담겨 있어, 허균의 내면과 신앙, 예술적 취향이 두루 드러난다.
문부 11 · 잠
졸음을 경계하는 글 (서기 1611년 1월 20일, 양력 추정)
세상 사람들은 잠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밤이면 으레 밤새 자고도 낮에 또 눈을 붙이는 이가 많다. 그러다 잠이 조금만 부족해도 다들 병이라도 난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 서로 안부를 물을 때도 으레 먹는 것과 함께 묶어 "잠은 잘 주무시고 진지는 잘 드십니까?" 하고 묻는다. 이것만 보아도 사람들이 잠을 얼마나 대단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젊었을 때는 잠이 적어도 별로 앓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서는 잠은 오히려 늘었는데도 몸은 갈수록 약해지기만 한다. 그런데도 나는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잠이라는 것이 바로 병으로 가는 길이었다.
사람의 몸은 혼과 백, 이 두 가지가 함께 움직여 나간다. 혼은 양이고 백은 음이다. 음의 기운이 강해지면 몸이 약해지고 병들며, 양의 기운이 강해지면 몸이 건강하고 병이 없다. 그런데 잠을 자면 혼은 몸 밖으로 나가고 백만 홀로 안에서 움직이게 되니, 음의 기운이 강해져서 몸이 약해지고 병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반대로 잠을 자지 않으면 혼이 제 역할을 하여 백을 잘 다스려서, 음이 양을 침범하지 못하게 막아 준다.
그러니 잠을 너무 많이 자서는 안 된다. 불경에 이르기를 "번뇌는 독사와 같으니, 잠이 그대 마음에 자리 잡으면 바로 그 독사가 된다. 이 독사를 몰아내야만 비로소 편안히 잠들 수 있다"라고 하였다. 세상의 잠꾸러기들은 다들 이 독사 같은 번뇌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잠을 짓고 스스로 경계로 삼는다.
아, 늘 깨어 있으려는 이 늙은이여
눈은 잠들어도 마음은 잠들지 말라
눈만 잠들면 마음으로 얼마든지 밝힐 수 있지만
마음까지 잠들면 음의 기운이 밀려와 덮쳐 온다
음의 기운이 밀려와 양의 기운이 깎이면 몸은 변하여 음이 되고 마니
그리되면 귀신과 하나가 되어 버릴 것이다
아, 두렵고 두렵구나, 늘 깨어 있으려는 이 늙은이여
(용어) "늘 깨어 있으려는 늙은이"란 허균이 스스로를 부르던 호를 풀어 옮긴 것이다.
순리에 몸을 맡기며 스스로 경계하는 글 (서기 1611년 1월 22일, 양력 추정)
몸을 고요함에 내맡기면 몸이 순리를 따르게 되어 하늘이 정한 운명에 몸을 맡기게 되므로 남과도 잘 어울릴 수 있고, 마음을 훤히 트인 데 내맡기면 마음이 순리를 따르게 되어 도에 몸을 맡기게 되므로 만물과도 잘 어울릴 수 있으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에 내맡기면 세상이 순리를 따르게 되어 때에 몸을 맡기게 되므로 온갖 변화에도 잘 대응할 수 있고, 일을 자연스러운 흐름에 내맡기면 일이 순리를 따르게 되어 이치에 몸을 맡기게 되므로 갖가지 일에도 잘 대응할 수 있다. 이렇게 내맡기고 순리를 따르고 잘 대응할 수 있으면, 쓸데없는 생각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아 마음을 갈고닦을 수 있게 된다.
내맡길 수 있으면 화를 내지 않게 되고, 순리를 따를 수 있으면 남과 다투지 않게 되며, 잘 대응할 수 있으면 그 쓰임이 끝없이 이어져서, 마침내 바르고 참되어 고요함에 이르면, 밝은 달과 맑은 물결처럼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어지러운 생각을 갈고닦을 수 있고 타고난 성품과 목숨의 이치를 바로 세울 수 있으니, 이것으로 세상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는 셈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잠을 짓는다.
어지러운 생각을 갈고닦는 글 (서기 1611년 1월 24일, 양력 추정)
마음의 본바탕은
맑고도 깨끗하여
움직이지 않을 때는
물처럼 맑고 거울처럼 밝다
더없이 비어 있으면서도 더없이 신령하고
더없이 신묘하면서도 더없이 순수하니
한 기운이 근원으로 통하여
냄새도 없고 소리도 없다
그런데 조금만 마음을 놓아두면
쓸데없는 생각이 문득 일어난다
이것저것 갈피를 잃고
미친 듯 놀란 듯 흔들리니
슬픔과 기쁨, 즐거움과 노여움
막힘과 트임, 시듦과 번영이
헛된 것이 또 다른 헛된 것을 낳아
백 가지 생각이 뒤엉켜 다툰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마음은 눈먼 사람처럼 어두워져서
업을 짓고 화를 불러들여
악한 길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저 도에 이른 사람은
화의 싹을 미리 알아차려서
쓸데없는 생각 보기를 원수 보듯 하고
쓸데없는 생각 두려워하기를 무기 대하듯 하며
쓸데없는 생각 감추기를 보물 감추듯 하고
쓸데없는 생각 지키기를 성을 지키듯 하여
부지런히 또 부지런히 마음을 다잡아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한다
그렇다면 그 갈고닦는 방법은 무엇인가
고요하게, 한결같이, 정성을 다해
갈고닦고 또 갈고닦아
억지로 하지 않음으로써 굳혀 나가는 것이다
갈고닦으면 성인이 되고
갈고닦지 않으면 평범한 사람으로 그친다
이 지극한 도를
누가 처음으로 애써 말로 남겼던가
황제 헌원씨가
광성자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갈고닦으면
하늘의 옥황상제 계신 곳에도 나아가 뵐 수 있으리라
(용어) 광성자는 아주 오랜 옛날의 신선으로, 공동산의 동굴에 숨어 살았다고 전해진다. 황제 헌원씨가 일찍이 그에게 도의 요체를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문부 11 · 명
각헌명 (서기 1611년 2월 1일, 양력 추정)
사람이란 오직 하나의 깨어 있는 성품, 곧 '깨달음'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깨달음' 이 한 글자만으로도 의심과 삿된 생각을 끊어 낼 수 있고, 그릇된 마음과 헛된 생각을 없앨 수 있으며, 뒤섞이고 어지러운 것을 하나로 가지런히 할 수 있고, 참되고 한결같은 본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
사람의 기운이 참으로 맑고, 몸과 마음이 참으로 훤히 트여 밝다면, 삿된 기운이 어디로 비집고 들어오겠는가. 다만 마음이 절로 어둡고 어지러워져서 보고 판단하는 것이 뒤집히기 때문에, 바깥의 삿된 기운과 낯선 기운이 그 틈을 타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바깥의 삿된 기운과 낯선 기운도 알고 보면 내 마음의 판단이 뒤집힌 데서 생겨나는 것이지, 정말로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내 안이 스스로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바깥의 삿된 기운'이라 부르는 것이고, 내 마음에 스스로 중심을 잡는 바가 없기 때문에 '낯선 기운'이라 부르는 것일 뿐이다. 사람의 깨어 있는 성품이란 이토록 쉽게 흐려진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깨어 있는 성품은 오직 정성으로 길러야만 밝아지고, 흔들림 없는 안정으로 지켜야만 맑아지니, 맑음과 밝음이 극에 이르러야 비로소 도를 이룰 수 있다. 온갖 정성을 다해 귀신을 섬기는 것도, 사실은 내가 본래 타고난 자연스러운 성품을 잘 섬기는 것만 못하다.
나는 이 말을 가슴에 깊이 새겨 두었기에 내 서재의 이름을 '각헌', 곧 '깨달음의 집'이라 짓고, 그 이름에 걸맞게 다음과 같이 새겨 둔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타고난 성품이 있어
깨달으면 어둡지 않으나
깨닫지 못한 자는
물욕에 뒤섞여 어두워진다
거울에 먼지가 낀 것과 같아서
그 먼지를 털어 내면 다시 맑아지듯
깨달은 뒤에는 성품이 온전히 둥글어져
크고 맑은 거울과 같아진다
밖으로는 헛되고 삿된 것을 막아 내고
안으로는 맑고 밝은 것을 지켜 나가니
그 맑음과 밝음은
공경과 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신선의 것도 아니요
부처의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성인만의 것도 아니니
오직 이 마음으로 하늘을 마주하는 일일 뿐이다
누추한 집에 새기는 글 (서기 1611년 2월 5일, 양력 추정)
내 방은 너비가 두어 평 남짓
남쪽으로 문 두 짝을 내었더니
한낮의 햇살이 그대로 들어와
이미 밝고도 따뜻하다
집이라야 그저 벽만 서 있을 뿐이지만
책만큼은 그런대로 갖출 것 다 갖추었다
쇠코잠방이 하나 걸친 이 몸이지만
탁문군의 짝이었던 사마상여와 다를 바 없다
차 반 사발을 기울이고
향 한 자루를 피우면서
세상을 등지고 조용히 지내며
하늘과 땅, 옛날과 오늘을 가늠해 본다
집이 누추한데 어떻게 사느냐고
남들은 말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곳이 바로 신선의 세계다
내 마음이 고요하고 이 몸이 편안한데
그 누가 이곳을 누추하다 하겠는가
내가 정작 누추하다고 여기는 것은
몸과 이름이 함께 스러져 가는 일이니
옛날 원헌은 쑥대로 엮은 지게문 아래서 살았고
도잠 또한 다 낡은 떼집에서 살았다
군자가 산다면
그곳이 누추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용어) 원헌은 공자의 제자로, 몹시 청빈하게 살아 지게문을 쑥대로 엮어 달고 지붕을 풀로 이은 집에서 지냈다고 한다. 도잠은 동진 시대의 시인으로, 역시 청빈하여 바람과 햇빛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다 낡은 집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쇠코잠방이 하나 걸친 이 몸이 탁문군의 짝"이라는 구절은, 한나라 때 사마상여가 부유한 집안의 딸 탁문군과 어렵게 혼인한 뒤 함께 술장사를 하며 살았는데, 탁문군은 술을 팔고 사마상여는 다 낡은 잠방이 차림으로 궂은일을 도맡았다는 옛이야기를 빌려 온 것이다.
꿈에 네 가지 물건을 받고 새기는 글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신해년(1611년, 광해군 3년) 2월 보름날, 꿈속에서 선정전으로 들어갔더니, 돌아가신 선조 임금께서 네모난 관을 쓰시고 하얀 홑저고리 차림에 띠도 두르지 않은 채 뒷간으로 가고 계셨는데, 궁녀 둘과 내시 하나가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내가 엎드려 절을 올리니 임금께서 "너는 어찌하여 띠도 없고 신도 없고 붓집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조금 뒤에 어린 궁녀가 누런 무소뿔 띠 하나와 꽃무늬를 놓은 금띠 하나, 중국식으로 만든 초록 비단신 한 켤레, 그리고 다홍빛 모시실로 엮은 주머니에 담긴 족제비털 큰 붓 두 자루를 직접 내게 가져다주었다.
내가 먼저 신을 신고 붓 주머니를 차고서 내 몸을 돌아보니 이미 은띠를 두르고 있었으므로, 그 위에 차마 겹쳐 두르지 못하고 물러나 엎드렸더니, 임금께서 "그 위에 덧대어 두르거라" 하셨다. 내가 무소뿔 띠부터 먼저 집으려 하자 임금께서 다시 "먼저 금띠를 두르고, 그다음에 무소뿔 띠를 둘러라" 하셨다. 내가 먼저 금띠를 둘러 보니 그 만듦새가 무척 좁고 가벼웠다. 이어 무소뿔 띠를 둘러 보니 아주 넉넉하고 묵직했다. 일어나서 막 절을 올리려는데 몸이 굽혀지지 않았다. 임금께서 "꿇어앉아라" 하시기에, 내가 그대로 꿇어앉아 인사를 올리려는 순간 그만 꿈에서 깨고 말았다. 아, 참으로 이상한 꿈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이 네 가지 물건에 대한 명을 짓는다.
무소뿔 띠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불그스름하고 푸르스름한 그 무늬여
결은 희디희구나
빛깔조차 한가운데를 상징하듯
안팎이 온통 노랗게 트여 있다
네가 차기에 꼭 알맞으니
넉넉하고도 치렁치렁하구나
금띠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금못을 다닥다닥 박은 아름다운 드림이여
백 번을 불려 낸 순금 띠로다
임금께서 내려 주신 것이니
이 띠를 두르고 조정에 나아가야지
붓주머니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고운 비단으로 지은 조붓한 띠에
붓 두 자루가 담겨 있구나
임금의 조서를 짓는 자리를 맡은 이라면
마땅히 이것을 차고 다녀야 하리
문장으로 이루는 큰 업적, 영원히 스러지지 않을 이름을
그대에게 내려 주노라
신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물결무늬가 아른아른하고
푸른빛이 짙게 감도는구나
군자가 신는 신이니
순하면서도 곧다
옛 순임금의 신하였던 고요의 걸음걸이와 설의 발걸음에도
오직 너의 곧은 소리만이 따라 울렸으리라
(용어) 고요와 설은 순임금을 보좌한 어진 신하들로 전해진다.
벼루에 새기는 글 (서기 1611년 3월 30일, 양력 추정)
철철 흘러넘치는 아홉 물줄기가
흐르고 흘러 큰 바다로 들어간다
그 바닷속에서 기이한 돌 하나가 났으니
겉은 붉고 속은 푸르구나
그 돌을 다듬어 용의 꼬리 모양으로 새기고
갈고 또 갈았더니
봉황의 부리처럼 빛이 나고
구관조 눈처럼 반짝반짝하는구나
갈고 또 적셔 가며
잠시도 손을 멈추지 못하겠다
임금의 역사를 누가 엮어 내며
깊은 경전의 주석을 누가 낼 것인가
내 글은 내가 짓는 것이지만
오직 너의 신령한 힘을 빌릴 뿐이니
서로 따르며 저버리지 말고
남은 삶을 함께 마치자꾸나
(용어) "구관조 눈"이란 좋은 벼루의 표면에 나타나는, 눈 모양의 무늬를 가리킨다. 예로부터 귀하게 여겨 온 벼루의 무늬다.
문부 11 · 송
임금의 편지를 기리는 글 (서기 1611년 3월 17일, 양력 추정)
돌아가신 선조 임금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벌써 세 해가 지났다. 그런데도 위로는 벼슬하는 이들부터 아래로는 평범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안팎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하루도 다름없이 임금의 훌륭한 덕을 그리워하며 차마 잊지 못하고, 흐느껴 울며 사모하기를 마치 이제 막 돌아가신 날인 양 하고 있다.
나의 큰형님께서 아우인 나 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선왕의 덕을 신하 된 자로서 고맙게 여기고 떠받들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나는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던 신하로서 벼슬이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을 뿐 아니라 왕실과 사돈까지 맺었으니, 수십 년 동안 유난히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병이라도 앓으면 임금께서 어의를 보내 병을 살피게 하시고 이어 약까지 보내 주셨으며, 궁중 부엌의 진귀한 음식을 잇달아 내려 주시기까지 하셨으니, 마음과 뼈에 새길 만한 그 은혜는 지금 흐느껴 울며 사모하는 안팎의 신하와 백성들에 견주어도 실로 갑절은 될 것이다.
내가 병조판서가 되던 날, 임금께서는 친히 편지를 내려 그 자리에 나아갈 것을 친절히 타이르시고, 한편으로는 미리 대비책을 세우라고 권면하셨는데, 그 말씀의 간절함이 마치 여염집 식구끼리, 혹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귀를 잡아당겨 들려주고 눈앞에서 타이르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그 말씀을 받들어 일을 처리함에 감히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나를 낳고 길러 주신 것과 다름없는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는 재주도 지혜도 부족하여 끝내 그 뜻의 만분의 일도 제대로 받들지 못하였다.
이 편지는 문장이 아름답고 필세가 힘차며, 타이르시는 말씀은 참으로 《서경》에 실린 요임금의 훈계, 우임금의 계책과 다를 바 없으므로, 받들어 읽고 손으로 어루만지며 음미할 때마다 황홀하기가 마치 임금의 깃발 끝에 이는 먼지를 바로 우러러보고, 임금을 모시고 따르는 수레바퀴 소리를 들으며 그 모습을 직접 뵙는 듯하다. 나는 돌아가신 임금님을 사모하는 마음에, 삼가 장인을 시켜 이 편지를 곱게 꾸미게 하여 아침저녁으로 펼쳐 보고 완상하고 있다.
너는 일찍이 글솜씨로 임금의 칭찬을 받았고, 또한 지난날 대궐에서 붓을 귀에 꽂고 글 쓰는 일을 맡았던 신하이니, 송을 지어 우리 자손들에게 전해서 먼 후손들까지도 이 일을 잊지 않게 하여라."
이 말씀을 듣고 신 균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아뢰고 송을 짓는다.
"선왕께서는 신하를 지극히 정성스럽고 돈독하게 대해 주셨고,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기리고 사모하는 저희 아랫사람들 또한 충성과 정성을 다하였으니, 이 두 가지는 모두 글로 엮어 둘 만합니다. 더구나 선왕의 은덕이 뭇 백성에게 따뜻하게 미친 지가 마흔두 해나 되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미천한 백성일지라도 그 은덕을 슬퍼하고 읊조릴 줄 아는데, 하물며 저처럼 어려서부터 대궐을 드나들며 친히 임금의 훌륭한 덕을 우러러보고 하나하나 이루어 주심을 입은 자로서, 어찌 임금을 기릴 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하옵건대 우리 선조 임금님
그 덕은 하늘이 내려 주신 것
몸소 온 벼슬아치를 거느리시고
하늘과 땅과 사람의 도리를 새롭게 하셨네
한결같으신 그 마음을 누가 알아 맞추었나
오직 우리 대대로 임금을 섬긴 신하들뿐이었네
오직 충성되고 곧았기에
대궐에서 칭찬과 권면을 받았네
내 그대의 벼슬을 가려
병조판서로 삼으니
내 군사를 보살피되
군율을 씩씩하게 세우라
그 누가 우리 땅을 넘보며
그 누가 그대의 말을 가벼이 여기리
그대의 계책을 그대 스스로 헤아려
나의 국경을 튼튼히 하라
이에 아름다운 종이 위에
임금의 붓끝을 적시니
해와 별처럼 빛나고
구름과 노을처럼 찬란하다
뜻은 바르고 말씀은 간절하니
《서경》의 요전과 우모 같아라
나라를 꾸려 갈 계책을
병조판서인 그대에게 내리노라
형님께서는 절하고 이 글을 받아
서두르지도 게으르지도 않게
한결같이 가르치고 정돈하시니
이로써 군대가 잘 다스려졌네
오직 이 편지만이
집안에 간직되어 남았을 뿐
임금 계시던 그 시절은 아득히 멀어졌으니
눈물 흘리며 탄식한들 무엇하리
옥처럼 보배로이 간직하는 것은
오직 임금께서 내려 주신 것이기 때문
맑으신 모습을 그리며
그 붓 자국을 어루만지네
펼쳐 보고 다시 펴 보니
무지개 빛이 난간에 비치는 듯하고
엎드려 소리 내어 읽어 보니
임금의 말씀이 또렷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선왕의 덕은
하늘과 같고 아버지와 같으니
백성 된 자로서 그 누가 그리워하지 않으리오
어찌 나 홀로 그리워하겠는가
아, 우리 형제와
자식들, 손자들까지
아, 몇천만 년이 흐르도록
우리 임금의 은혜를 기리고 또 기리리라
(용어) "대사마"는 병조판서, 곧 지금으로 치면 국방을 총괄하는 벼슬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다. "총재"는 이조판서, 곧 관리들의 인사를 총괄하는 벼슬을 이르는 옛말이다. 요전과 우모는 유교 경전인 《서경》에 실린 편명으로, 요임금과 우임금이 남긴 훈계와 계책을 적은 글이다. 여기서는 선조 임금의 편지가 그만큼 훌륭하다는 뜻으로 빗댄 것이다. "아름다운 종이"라 옮긴 것은 원래 촉 지방에서 나던 열 가지 채색 종이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채색 무늬가 놓인 고급 종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성옹을 스스로 기리는 글 (서기 1611년 1월 28일, 양력 추정)
성옹이 대체 누구이기에
감히 스스로 제 덕을 기리려 하는가
그의 덕이 어떠하냐 하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데다 무식하기까지 하다
무식한 정도가 아니라 고루하고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라 미련하다
그렇게 미련하고 고루한 것을
대체 무슨 자랑거리로 내세운단 말인가
고루하니 성급하게 굴지 않고
미련하니 화를 내지 않는다
화도 안 내고 성급하지도 않으니
겉으로 보기엔 그저 못나 보일 뿐이다
온 세상이 허겁지겁 달려가는 그 길을
성옹만은 따라가지 않고
남들은 다들 고생스럽다 여기는 것을
성옹만은 달갑게 여기니
마음은 편안하고 정신은 맑아서
못나고 고루해 보여도
그 속의 정기는 오히려 단단히 뭉쳐 있다
어리석고 무식하니
형벌을 받아도 두려워하지 않고
좌천을 당해도 슬퍼하지 않는다
헐뜯든 꾸짖든 내버려 두고
그저 기뻐하고 즐거워할 뿐이니
제 스스로 이렇게 송을 짓지 않는다면
그 누가 그대를 기려 주겠는가
성옹이 대체 누구인가
바로 단보, 허균 그 사람이다
(용어) 단보는 허균의 자이다. 성옹은 허균이 스스로에게 붙인 호로, "늘 깨어 있는 늙은이"라는 뜻이다.
문부 11 · 찬
대령산신을 기리는 글 (서기 1603년 6월 13일, 양력 추정)
계묘년(1603년, 선조 36년) 여름이었다. 나는 명주, 지금의 강릉 땅에 있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5월 초하루가 되면 대령신을 맞이하는 풍속이 있었다. 그 까닭을 아전의 우두머리에게 물었더니 그가 이렇게 답했다.
"대령신이란 바로 신라의 대장군 김유신 공입니다. 공이 젊었을 때 이곳 명주에서 공부하였는데, 산신이 검술을 가르쳐 주었고, 명주 남쪽에 있는 선지사라는 절에서 칼을 만들었는데, 아흔 날 만에 불 속에서 꺼내니 그 빛이 햇빛도 무색하게 할 만큼 번쩍였다고 합니다. 공이 이 칼을 차고 다녔는데, 화가 나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오곤 했다고 하며, 끝내 이 칼로 고구려를 쳐부수고 백제를 평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대령산의 산신이 되어 지금까지도 신령스러운 자취를 보이고 있으므로, 고을 사람들은 해마다 5월 초하루가 되면 깃발과 일산과 향과 꽃을 갖추어 대령에서 신을 맞이하여 명주부의 관아에 모십니다. 그렇게 닷새가 되는 날에는 온갖 놀이를 벌여 신을 기쁘게 해 드립니다. 신이 기뻐하면 하루 종일 일산이 쓰러지지 않아 그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노하면 일산이 쓰러져 그해는 반드시 바람의 재해나 가뭄이 든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상하게 여겨 그날 직접 가서 지켜보았다. 과연 일산이 쓰러지지 않으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환호성을 지르고, 경사스러운 일로 여겨 서로 손뼉을 치며 춤을 추었다.
내 생각에 이 공은 살아서는 왕실에 큰 공을 세워 삼국을 통일하는 큰 업적을 이루었고, 죽어서는 수천 년이 지나도록 오히려 이 백성에게 화와 복을 내려 그 신령스러움을 드러내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기록해 둘 만한 일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음과 같이 찬을 짓는다.
갸륵하여라, 귀한 가문의 후손이여
씩씩하고도 우람하도다
나라의 용맹한 장수가 되어
북채를 들고 장수의 단에 올랐다
무장을 갖추고 군문에 나서니
그 기상이 고구려와 백제를 삼킬 듯하고
용맹한 장수들을 채찍질하듯 이끌며
날쌘 정예부대를 몰고 나아갔다
날카로운 칼을 허리에 차고 가니
곤오산에서 나는 쇠붙이로 벼린 칼이다
시뻘겋고도 아름다워
당장이라도 붉은 불꽃을 뿜어낼 듯하다
웅진에서 적장의 목을 베고
당나라의 배 만 척이 와서 도왔다
백마강에서 약속한 때를 놓치자
백제의 삼군이 두려움에 떨었는데
공의 수염이 분노로 곤두서서
칼을 어루만지며 큰 소리로 꾸짖으니
붉은 용이 번득이는 듯하고
놀라운 번개가 칼집을 에워싸는 듯했다
마침내 임금의 군대가 힘을 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꿈틀대던 고구려 무리가
서쪽 변방에서 날뛰자
군사를 풀어 가서 치니
황제의 위엄이 우레처럼 떨쳐 울렸다
동쪽 군사 일만 명을 거느리고
북을 울리며 앞장서서
긴 창을 모아 세차게 무찌르니
멧부리가 쪼개지고 연못이 치솟아 오를 듯했다
갑옷을 쌓아 두고 창을 내던지니
소라바다에 썩은 시체가 겹겹이 쌓였다
당나라 장수 이적이 웃음을 지으니
칠부의 군졸들이 땅에 무릎을 꿇었다
이웃 나라의 발악을 없애고 나니
나라의 근심거리가 사라졌다
해와 달도 툭 트여 맑아지고
하늘과 땅도 다시 빛을 발했다
삼한의 강토를 에워
모조리 나라의 판도 안에 거두어들이니
그 큰 공훈을 종묘의 그릇과 깃발에 새기고
역사책에 실어 영원히 빛나게 하였다
동해의 동쪽 땅에서
그 공에 견줄 이가 없다
웅장한 풍모와 빼어난 기개가
어느덧 수천 년이 지났건만
대령산 꼭대기에서
지금까지도 제사를 받고 계시니
해마다 올리는 향불을
누가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공의 넋은 어둡지 않으시니
내려 주시는 복도 크고 크다
구름을 타고 바람결에
살포시 내려오시네
오곡은 무르익어 풍년이 들고
백성에게는 재앙이 없다
동해 바다는 넘실넘실
오대산은 굽이굽이 들쭉날쭉
천추만대에 이르도록
이 향불이 어찌 끊이겠는가
이 몸 또한 공과 같은 겨레요
같은 강릉 땅의 백성이기에
이제 이렇게 송을 지어
우리 신령을 찬양하노라
(용어) 오구는 갈고리 모양으로 생긴 명검의 이름이다. 이적은 당나라의 장수로 영국공에 봉해진 인물이다.
교리 이여를 기리는 글 (서기 1611년 3월 5일, 양력 추정)
이 선생 여는 진천 사람이다. 그 형인 박사 이치와 더불어 성리학에 밝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고 지조와 행실이 매우 독실하였다. 형인 박사 이치는 끝내 벼슬길에서 크게 뜻을 펴지 못하였으나, 선생은 영정왕, 곧 인종의 눈에 들어 10여 년 동안이나 각별한 은총을 받았는데, 아침저녁으로 강론하며 임금의 훌륭한 덕을 이루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왕은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 문학과 함께 있으면 마치 얼음처럼 맑은 옥항아리 속에 들어간 듯하여, 내 마음속 비루한 생각의 꼬투리마저 사라짐을 느낀다."
교리 벼슬에 있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니, 왕은 몹시 슬퍼하며 친히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 주었다. 내가 일찍이 사관이 되어 여러 서고에 간직된 귀중한 문서들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선생의 행적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고, 야사를 다룬 이들이나 옛일을 기록해 온 이들의 글까지 찾아보았지만 역시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께서 일찍이 이 선생께 《주역》을 여쭈어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적에 집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어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너무 오래 흐르면 이런 사실이 아예 전해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이를 위해 찬을 지어 기록해 두니, 그 찬사는 다음과 같다.
진실하도다, 선생이여
유학자 중의 유학자로다
《대학》에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법을 배우고
《중용》에서 정성을 다해 성품을 밝히는 법을 배웠는데
공은 이를 배우면서
증자와 자사를 본받았다
복희씨와 문왕과 공자가 이룩한 《주역》
그 속의 효와 상과 길흉의 이치를
공은 남김없이 밝히면서
정이와 소옹을 스승으로 삼았다
벼슬길에 나아가 임금을 섬기니
그 이름이 구중궁궐에까지 떨쳐졌고
종묘의 제사에 오르니
흰 옥이나 누런 옥처럼 귀하게 여겨졌다
홍문관에 오르니
금종이요 큰 쇠북 같은 존재였다
때는 마침
인종대왕께서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이었는데
옛날 상산에 숨어 살던 동원공과 기리계 같은 이가 어디 있었으랴
오직 선생만이 정성을 다해 공경하였다
큰 계책을 바르게 가르치고
법도 있는 몸가짐에 패옥 소리가 쟁그랑쟁그랑 울렸다
한가로운 때에도 왕을
아침저녁으로 모시니
정성스러운 그 말씀이요
다소곳한 그 모습이었다
왕은 이를 듣고 스스로를 닦아 나가니
마치 쇠가 용광로에서 불려지듯
얼음처럼 맑은 항아리 속에 들어간 듯
인색한 마음이 사라져 갔다
왕의 덕이 날로 빛나 간 것은
다른 산의 돌로 내 옥을 갈고닦는 것과 같은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을 보필할 적격자를 얻은 것이
마치 나라를 지키는 성과도 같았다
행여 그 신묘한 교화로
오래도록 왕을 지켜 주시기를 바랐더니
하늘은 어찌하여 이 훌륭한 본보기를 앗아가서
그 농사를 다 짓지도 못하게 하였는가
칠십 년이 지난 뒤에
미련한 이 사람이
선생의 훌륭한 덕을 추모하니
보잘것없는 정성이나마 갑절로 더하고 싶다
이렇게 찬사를 지어
그 한평생을 기리노라
(용어) 동원공과 기리계는 한나라 고조 때 상산에 숨어 살던 네 노인, 곧 '상산사호' 가운데 두 사람으로, 뒷날 고조의 초빙을 받아 태자를 보필하였다.
세 분 선생을 기리는 글 (서기 1605년 6월 20일, 양력 추정)
나는 일찍부터, 팽택 현령 도연명이 관직에 오른 지 여든 날 만에 그 자리를 내던지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일과,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 이백이 총애받는 권세가조차 우습게 여겨 다리를 뻗고 앉아 제 신을 벗기게 한 일과, 소동파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만물을 사랑하여 귀한 이든 천한 이든 가리지 않고 저마다 제멋대로 살아가게 한 일에 대하여,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생생한 기운이 살아 있음을 사모해 왔다.
아, 나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나는 하찮은 봉록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모욕을 당하면서도 떠날 줄을 모르고, 은총을 입은 권세가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려 내 뜻 한번 제대로 펴 보지도 못하며, 좁은 마음에 모난 성격 탓에 뜻이 맞지 않는 이들에게 미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 세 분 선생처럼 살고 싶지만 아득하기만 하여 도무지 붙잡고 따라갈 수가 없다. 아,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래서 나는 화가 이정에게 명하여 세 분 선생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거기에 찬을 지어 붙였다. 마침 명필 한호가 군청에 들렀기에, 자잘한 해서체로 세 분의 이름과 호, 벼슬, 고향을 그 위에 금색 글씨로 써 달라고 청하였다. 이제 때때로 이 그림을 꺼내 보면서 세 분을 사모하려 한다.
도연명
팽택 현령 자리를 달가워하지 않고
〈귀거래사〉를 읊으며 떠나갔다
칡베로 만든 두건은 본래 지니고 있었고
거문고에는 줄조차 매어 두지 않았다
아득한 옛 태평성대의 임금 복희씨에게 뜻을 두고
소나무와 국화에 마음을 붙였다
만고에 변함없는 북쪽 창가에는
그 맑은 바람이 어제 일인 양 아직도 불어온다
(용어) 도연명은 여름날 북쪽 창가에 누워 시원한 바람을 쐬며 스스로를 아득한 옛 태평성대인 복희씨 시절의 사람이라 여겼다고 한다.
이백
구름과 노을이 피어오르듯 헌칠하니
참으로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로다
술 한 말을 마시면 시 백 편을 짓는데
비바람같이, 귀신같이 거침이 없구나
임금이 내려 준 비단 도포도 그에게는 딱히 영화로울 것이 없었고
야랑 땅으로 귀양 간 일도 수치스러울 것이 없었다
물속에 어린 달인 양
그대는 만고에 변치 않는 빛이로다
(용어) 이백은 당나라 현종에게 문재를 인정받아 비단 도포를 하사받은 적이 있었으나, 뒷날 영왕 이린의 역모에 연루되어 야랑 땅으로 귀양 가는 처벌을 받았다. 곽자의의 도움으로 사형은 면하였다.
소식
높고 준엄한 언론은 하늘에 멍에를 씌운 듯하고
곧은 기상은 땅 위에 우뚝 서 있다
재주가 워낙 크다 보니 오히려 세상에 쓰이기 어려워
몇 번이고 일어섰다가 또 쓰러지곤 하였다
적벽강에서 노닐며 시를 지었고
궁중의 촛불 아래서 나랏일을 의논하기도 했다
영예와 치욕은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법
그 이름만은 천년만년 스러지지 않으리라
(용어) "궁중의 촛불"이라 옮긴 것은 연꽃 모양으로 만든 궁중용 촛대를 가리키는 말로, 신하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영예를 비유하는 표현이다. 소식이 궁중에서 숙직하던 중 임금의 부름을 받아 정사를 의논한 뒤, 임금이 이 촛대의 불빛으로 그를 배웅해 주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탄은이 그린 대나무 그림을 기리며 — 낙가선사 스님 극융의 두루마리에 쓰다 (서기 1606년 8월 10일, 양력 추정)
푸르고 푸른 저 대나무여
잎사귀마다 모두 참된 진리로구나
이 말을 나는 늙은 스님에게서 들었다. 그런데 이것은 대나무가 먹으로 모습을 바꾼 것인가, 아니면 먹이 대나무로 모습을 바꾼 것인가? 허깨비 같은 꽃은 이미 시들어 사라졌으니, 무엇을 굳이 다시 모습으로 바꾸겠는가. 하늘은 텅 비어 있고 바다는 아득히 넓은데, 달이 떠오르고 구름이 걷히니, 대나무 그림자는 길게 어른거리고 그 잎사귀 소리는 우수수 울린다. 전각 안에 그려진 이 두 그루 대나무를, 스님은 가서 찬찬히 감상해 보시오. 그러면 옛 화가 문동과 혜숭의 빼어난 솜씨가 마음속에 그대로 들어와, 이 그림을 조금도 가벼이 여길 수 없게 될 것이오. 스님은 이 두루마리를 부처님 다비에 올려도 좋을 만큼 귀하게 여겨도 좋을 것이오.
(용어) 탄은은 화가 이정의 호이다. 문동은 송나라의 화가로 대나무 그림에 가장 뛰어났던 인물이고, 혜숭은 송나라의 승려 화가로 작은 풍경화에 뛰어났다.
이나옹이 그린 부처님과 조사들을 기리는 글 (서기 1605년 6월 25일, 양력 추정)
내가 요산에 있을 때, 명필 한호에게 부탁하여 구양순의 서체를 본떠 《반야심경》을 금색 글씨로 다시 쓰게 하여 첩을 만들고, 이어 화가 이정에게 명하여 부처님 상 셋과 보살상 하나, 조사상 둘, 거사상 둘을 그리게 하여 그 뒤에 붙였다. 그리고 마침내 절구 두 수씩을 지어 찬사로 덧붙이고, 이를 '선문법보'라 이름하였다.
석가모니불
흐르는 샘물은 옥돌을 씻어 내고
그윽한 꽃은 붉게 피어나는데
저 법을 들으러 온 이들은
아낙네와 어린아이로구나
경전을 막 펼쳐 놓았는데
단향 향은 이미 다 사그라들었구나
마음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그 둘 모두가 부처가 되었네
아미타불
아마도 저 극락세계에서는
땅에서 푸른 연꽃이 절로 솟아나겠지
그 푸른 연꽃을 받쳐 든 옥동자 둘은
사람으로도 되고 하늘의 존재로도 되겠지
애당초 인연이 아니라면
타고난 본성도 아닐 것이다
아미타불께 여쭈어 보아도
부처님은 고요히 선정에 드신 채 말씀이 없으시네
미륵불
지나간 시절은 아득히 멀고
지금 이 세상은 온갖 더러움이 뒤섞인 세상이라
오직 다가올 미래에나
원만한 깨달음을 증험할 수 있으리라
불현듯 선재동자가
어찌하여 눈앞에 와 있는가
법을 잊고서 법을 물으니
바다에 비친 달만이 창공을 흐르는구나
(용어) 선재동자는 불교 경전 《화엄경》에 나오는 구도자로,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깨달음을 구한 인물이다.
관세음보살
구슬 목걸이에 화려한 머리 장식을 하고
바닷속에 둥실 떠 계시니
용궁이든 물의 나라든
어디인들 가지 못하시리
손에는 커다란 여의주를 들고
돌 사이 물결 위에서 노니시는구나
저 보물을 간직하신 분은
그 신통력 또한 자유자재로구나
초조 달마
우뚝한 사라쌍수 숲이여
부처님 이마의 흰 터럭에서 나오는 빛이 비치는구나
《능가경》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데
상아로 만든 축에 푸르고 누런 표지를 둘렀구나
법을 전하는 일은 마음에 달려 있고
마음을 전하는 일은 다시 물건에 담기는 법이니
그대가 스스로 남겨 둔 것은
가사 한 벌과 바리때 하나뿐이었지
(용어) 초조 달마는 중국 선종의 첫 조사인 달마 대사를 가리킨다.
육조 혜능
나부산은 땅에서 우뚝 솟아 있고
유령 고개는 하늘을 가리고 있는데
그 누가 나의 발자취를 밟아
스승께서 전하신 법을 엿볼 수 있으랴
수미산은 오히려 옮길 수 있을지언정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가사와 바리때는 옮기기 어려운 법
끝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바로 마음이니
겨자씨 한 알조차도 그 무게가 가볍지 않구나
(용어) 육조 노능은 중국 선종의 여섯 번째 조사인 혜능 대사를 가리킨다.
유마힐 거사
한 길 남짓한 조그만 방 안에
하늘의 여러 신들이 자리를 함께하니
거사의 병을 두고
찾아오는 사람마다 병을 살펴 사람마다 낫는구나
누가 찾아와 병문안을 하는가
바로 문수보살이로다
말씀은 따로 없어도
깨달음의 법문은 오직 하나로 통하는구나
(용어) 유마힐 거사는 부처님 당시 속세에 살면서도 높은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전해지는 재가 신도이다. 그가 병을 핑계로 방에 누워 있을 때 문수보살이 문병을 갔다는 이야기가 불교 경전에 전한다.
방 거사
수정 구슬마저 던져 버리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저 거사님은
말없이 곧 세상을 떠나려 하는가
대나무 조리며 사슴 가죽 자리며
가진 것 모두 내려놓은들 무슨 거리낄 것이 있으랴
시험 삼아 보라
저 밝은 대낮의 해가 바로 내 손가락 끝에 있음을
(용어) 방 거사는 당나라 때의 재가 불교 신도로, 세속의 재산을 모두 강물에 버리고 대나무 조리를 짜서 팔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여러 신선들을 기리는 글 (서기 1608년 12월 15일, 양력 추정)
감주 왕세정(원미는 그의 자이다)이 엮은 《열선전》을 나는 헌보 허갈을 통해 그 진본을 볼 수 있었는데, 그림을 옮겨 그리고 새긴 솜씨가 더할 나위 없이 정묘하여 참으로 세상에 보기 드문 보배였다. 내가 이를 다 보고 나서 장인에게 그중에서도 특히 빼어난 것들을 가려 흰 비단에 옮겨 그리고 채색으로 꾸미게 한 뒤, 찬사를 붙였다. 때때로 이것을 꺼내어 감상하면서 신선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래려 한다.
노자
하늘이 열리기 전 태초는 끝이 없고
큰 도는 억지로 하지 않는 데 있으니
그윽하고 고요하며 순수하고 정갈한 것이
온갖 법의 스승이로다
오천 자에 이르는 그 글을 읽어 보니
아, 밝게 빛나는구나, 지극한 그 덕이여
숨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며 변화가 끝이 없으니
마치 용과 같아 그 조화를 헤아릴 수가 없구나
(용어) "오천 자에 이르는 그 글"은 노자가 지었다는 《도덕경》을 가리킨다.
왕예
넋을 갈고닦아 정신을 날려 보내니
숨었다 드러났다 종잡을 수가 없구나
나는 이 도를
복희씨와 신농씨의 시절부터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태양의 신 울화에게 배운 것도 아니요
제자 설결에게 전수해 준 것도 아니다
끝없는 근원은 늘 그 자리에 있으니
온갖 법은 결국 하나로 돌아간다
(용어) 왕예는 아주 오랜 옛날의 신선으로, 요임금 시대의 현인 설결이 그에게서 도를 배웠다고 전해진다. 울화는 태양의 정기, 곧 태양신을 가리킨다.
광성자
아득하고 그윽함이야말로
지극한 도의 정기이니
정신을 감싸고 몸을 바로 세워
잠잠하고 고요하고 맑기 그지없구나
그대는 하늘과 같은 존재이니
오래 산다는 것조차 오히려 군더더기일 뿐이다
꿈속에서 이상향에 노닐고 있으니
인간 세상이야 대체 어떤 곳이란 말인가
서왕모
빛나는구나, 서왕모여
기운을 다스리고 하늘을 받드는구나
여인의 몸이면서도 도를 구하여
그 바탕으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랐다네
화림의 어여쁜 난초요
현대의 푸른 물이로다
주나라 목왕은 무엇을 얻었으며
한나라 무제는 헛된 짓만 하였구나
(용어) 주 목왕은 일찍이 곤륜산으로 순행하여 서왕모에게서 요지의 잔치를 대접받았다고 전해진다. 유철은 한 무제의 이름으로, 옛이야기에 따르면 서왕모가 내려와 무제에게 신선의 복숭아 네 개를 주었다고 한다. 두 이야기 모두 서왕모를 만나고도 끝내 신선이 되지는 못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상원부인
하얀 옷이 눈부시게 빛나는구나
기린을 타고 이리저리 노니는구나
그 누가 신선의 명부를 가지고
영대로 찾아오는가
세 하늘의 이치를 어찌 다 헤아리며
몸속의 다섯 가지 거친 기운을 어찌 다스릴 것인가
도의 요체를 가르쳐 주니
《영비경》에 담긴 열두 가지 수행법이로다
(용어) 상원부인은 도교의 여신으로, 한 무제에게 몸속의 다섯 가지 사납고 거친 기운을 다스려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영비경》은 도교의 경전으로, 그 안에 도를 닦는 열두 가지 방법이 실려 있다고 한다.
윤희
하늘에서는 붉은 노을이 드리우고
땅에서는 황금빛 연꽃이 솟아났다
눈을 들어 언뜻 바라보니
보랏빛 기운이 함곡관을 감싸고 있는데
흰 수레에 검푸른 소를 타고
노자께서 서쪽으로 천천히 나아가시는구나
오천 자에 이르는 《도덕경》을 일러 주시니
그 현묘한 이치를 비로소 깨달았다네
(용어) 윤희는 함곡관을 지키던 관리로, 노자가 서쪽으로 떠나려 할 때 그를 알아보고 붙잡아 《도덕경》을 받아 적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광속
아름답구나, 광씨 성을 지닌 임금이여
그 정기를 북두성에서 받았다네
기운을 먹고 정신을 갈고닦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구나
폭포를 병풍으로 삼고
향로봉을 궁궐로 삼았네
만고에 신선의 산으로 이름난 남장산에는
푸른 물과 가을 달빛만이 남아 있구나
(용어) 광속은 은나라 말엽 또는 주나라 초엽의 은자로, 여산에 숨어 살며 도를 닦았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여산의 다른 이름인 광산, 남장산 등은 모두 그의 성씨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장주
소요는 그저 노니는 것이 아니며
만물에 대한 온갖 이론도 하나로 가지런한 것이 아니다
인간 세상에 머물러 있어도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 도의 이치이니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할 뿐인데
태초의 혼돈에게 일곱 구멍을 뚫어 주자 이레 만에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있구나
좋은 뜻을 기록한 여러 편의 글은
그 자취가 더더욱 크고 뚜렷하구나
(용어) 장주, 곧 장자는 저서 《장자》에서 소요유, 제물론 등의 편을 지었다. "태초의 혼돈에게 일곱 구멍을 뚫어 주자 이레 만에 죽었다"는 것은 《장자》에 실린 우화로, 자연 그대로의 혼돈에게 억지로 사람처럼 이목구비를 뚫어 주었더니 오히려 혼돈이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갈유
나무를 깎아 양을 만들어
저잣거리에 내다 팔더니
그 나무 양을 타고 촉 땅으로 들어가
수산에서 살았다고 하네
아미산은 구름에 닿을 듯 높이 솟아 있고
옥루산에는 저녁노을이 물드는데
저 아름다운 여인들이 서로 뒤따르며
신선의 수레를 함께 탔다네
금고자
순임금이 타던 거문고를 잘도 타고
팽조에게 전해지는 신선의 술법도 지녔다네
기주 벌판과 탁주의 물가를
제집인 양 여기며 지냈다네
깃발을 앞세우고 수레를 몰아
용의 자식들을 이끌어 내오고
저 잉어 두 마리를 타고서
끝없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네
(용어) 금고자는 옛 신선으로, 잉어를 타고 물속을 자유로이 오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갱은 팽조의 다른 이름으로, 오래 살았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이팔백
하루에 팔백 리를 걷고
팔백 살을 살았다 하여
'팔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니
그 누가 그가 신선인 줄 알았으랴
저잣거리에서는 한가로운 듯 지내고
산림 속에서는 시끌벅적한 듯 지내니
숨었다 나타났다 자유자재로 하는구나
도의 본바탕이 절로 이토록 묘할 수밖에
섭정
석뇌를 먹고 금단을 먹고
기운을 다스리며 욕심을 끊었다
욕심과 기호가 마음과 다투기에
아예 내 눈을 꼭 감아 버렸다네
그 누가 눈을 뜨라고 권할 것이며
어찌 한순간 번갯불 같은 것을 겁내겠는가
오묘한 도를 이미 이루었으니
그윽이 아홉 방위의 임금들을 찬양하노라
(용어) 섭정은 도교의 은자로, 광물성 약재인 석뇌와 신선의 단약인 금단을 복용하며 수련했다고 전해진다.
안기생
소매 속에 든 오이가 대추만 한데
회오리바람을 타고 바닷속 봉래산으로 향한다
진나라의 어지러운 정치에 진저리가 나니
지극한 도를 어찌 그런 이들에게 말해 줄 수 있으랴
옥으로 만든 신과 금색 글씨로 쓴 글을
속세에 남겨 두었으니
신선의 복숭아가 열리거든
봉래산으로 나를 찾아오시게
(용어) 안기생은 진시황 시절의 신선으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진시황이 그에게 도를 물었으나 안기생은 진나라의 정치를 못마땅히 여겨 옥신과 편지만 남기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모군
훌륭하도다, 큰 모군이여
서왕모를 따르는 무리로다
태극의 그윽하고 참된 이치는
있는 듯 없는 듯하구나
금빛 깃발과 의장이
펄럭펄럭 노을 속으로 떠오르니
땅에 남은 저 두 아우, 땅의 신선들은
부질없이 고개를 빼고 기다리는구나
(용어) 모군은 한나라 때 삼형제가 모두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는 모씨 삼형제 가운데 맏이를 가리킨다. 맏이는 하늘로 올라가고 두 아우는 땅의 신선으로 남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동방삭
세 번이나 신선의 복숭아를 훔쳐 먹고
궁궐 문 안에 귀양 온 신세로 살았다
어느 누가 공경대부이며
어느 누가 임금이던가
천고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고
온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호탕하게 구름을 타고
홀로 떠나가니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용어) 동방삭은 한 무제 때의 신하로, 서왕모의 복숭아를 세 번 훔쳐 먹어 죽지 않고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황안
그 몸은 시원스럽고
등골뼈는 곧기도 하구나
목을 한 번 움츠렸다 펴는 데에
삼천 년 가까운 세월이 걸린다네
한 무제는 타고난 바탕이 흐리고 탁하여
그저 태산에 올라 봉선 의식이나 치를 뿐이었네
수레를 타고 다닌들 그것이 무슨 영화이리오
차라리 이 몸을 속세 밖으로 날려 보내리라
(용어) 황안은 신선으로, 삼천 년마다 한 번씩 목을 움츠렸다 편다는 검은 거북을 타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타고난 바탕"이라 옮긴 말은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타고나는 기질을 이르는 말이다.
장 진인
북두성이 하늘에서 내려와
비범한 사람으로 태어났도다
바른 법으로 마귀를 다스리고
지극한 도로 참됨을 이루었으니
그 공덕과 아름다운 업적은
만대에 이르도록 전해지리라
보랏빛 수레에 검은 용을 타고
신선의 나라로 높이 올라갔도다
마고
하늘이든 땅이든
마음 내키는 대로 노닐었다
괄창산이든 곤륜산이든
어디를 간들 거리낄 것이 있으랴
마고는 속세의 사람이 아니요
채경 또한 참된 신선은 아니었으나
다만 이렇게 기약하였으니
봉래산 바다가 다시 뭍으로 변하여 먼지가 날릴 때 돌아오겠노라고
(용어) 마고는 손톱이 새 발톱처럼 길다는 선녀로, 동해가 세 번이나 뽕나무밭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채경은 후한 때 사람으로, 신선 왕방평과 마고를 만난 이야기로 전해진다.
황초평
네가 내 양들을
금화산 꼭대기에서 기르고 있었건만
네 주인이 너를 보지 못한 지가
이제 십 년이나 되었구나
흰 돌들이 나란히 늘어서더니
염소들이 뿔을 맞대고 모여드는구나
속세의 꿈에서 한번 깨어나니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는구나
(용어) 황초평은 어릴 적 양을 치다가 신선을 만나 도를 배웠는데, 마흔 해가 지나 그의 형이 찾아가 흰 돌들을 향해 "양들아" 하고 외치자 흰 돌이 모두 양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호공
하늘과 땅이 용광로라면
해와 달은 그 안의 구슬이로다
그 누가 이것을 실컷 가지고 놀다가
옥항아리 속으로 몸을 숨기는가
옥항아리 안으로 들어가면 금빛 전각이요
항아리 밖으로 나오면 그저 저잣거리로다
저자의 아전조차도 신선이 되었으니
겨우 그 안을 엿보는 것만도 허락받은 셈이다
(용어) 호공은 옛 신선으로, 늘 저잣거리에서 약을 팔다가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면 옥항아리 속으로 몸을 숨겼다고 한다. 후한 때 저자의 아전이던 비장방이 이 호공을 스승으로 섬겨 신선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온
나를 옥치 선녀에게로 이끌고
나를 영방에게로 이끄는구나
뱃사공에게 손짓을 하니
오강에는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내 스스로 물결 따위는 우습게 여기니
그 누가 감히 노를 멈추게 할 수 있으랴
저 돌로 된 감실에서 살아가며
저 향기로운 산자락의 삶을 누리리라
(용어) 조선온은 여자 신선으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옥치는 서왕모의 셋째 딸로 알려진 선녀의 이름이다.
도홍경
푸른 용이 품속에서 나오니
그 누가 이 오묘한 자질을 알아보았으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푸른 하늘에 밝은 해가 떠 있는 듯하다
너울너울 노을 위로 올라
봉래산에서 물을 다스리는구나
호령산 고개에서 발을 씻고
단대에서 머리를 말리는구나
(용어) 도홍경은 남조 시대 양나라의 도사로, 산속에 은거하며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과 도를 닦은 인물이다.
이백
아미산과 민산에 구름이 비껴 있는데
태백성이 가을 하늘에 다다랐구나
그대는 본래 신선의 재주를 타고났으니
속세로 귀양 온 것이 아니라 그저 노닐고 있는 것일 뿐
푸른 용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듯
비단 도포를 입고 송골매를 탄 채 날아가는구나
만 리에 이르는 푸른 물결 위로
온 하늘에는 밝은 달빛만 가득하구나
여순양
그 도는 하늘과 땅에 견줄 만하고
그 이름은 해와 달처럼 밝게 빛난다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고 나서
비로소 신선의 세계로 올라갔다네
어디에서나 숨었다 드러났다 하니
그 조화가 끝이 없구나
가을 하늘은 해맑기만 한데
이슬이 금단을 적시는구나
(용어) 여순양은 도교에서 여덟 신선으로 꼽는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여동빈의 호이다.
유해섬
오직 해섬옹은
정양자를 스승으로 삼았다네
환단의 도를 가르쳐 주고
달걀을 층층이 쌓아 위태로움을 보여 주었다네
흰 학이 되어 하늘로 떠오르니
붉은 노을이 바야흐로 스러지는구나
하늘과 땅이 다 무너진다 해도
그는 자기만의 해와 달을 따로 지니고 있다네
(용어) 유해섬은 오대·송나라 초의 도사로, 정양자, 곧 종리권에게서 도를 배웠다고 전해진다.
장자양
타고난 성품과 목숨을 갈고닦으니
정기는 엉기고 형체는 흩어졌구나
내가 옥구슬 같은 꽃을 손에 들어 보인들
그 신령함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으랴
《사리진편》이라는 글에
그 신묘한 조화를 남겨 보였다네
아, 이 진인을 애달파하노니
만고에 걸쳐 긴 밤이 이어지는구나
(용어) 장자양은 송나라의 도사로, 도교 내단 수련서인 《오진편》을 지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진남
하늘 높은 곳의 옥으로 된 글이며
태을이 전한 금단의 비법이라
그 누가 이 비법을 가져다가
금단을 만드는 오묘한 법을 가르쳐 주었는가
손에는 쇠채찍을 들고
발밑에는 테를 두른 삿갓을 신은 채
용을 몰아 바닷속으로 들어가니
비바람조차 그의 부름에 따르는구나
(용어) 진남은 송나라의 도사로, 비를 부르고 마귀를 물리치는 도술로 이름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무지사
까막까치가 놓은 오작교도 아니요 은하수도 아니건만
비단을 던져서 다리를 만들고
그 다리를 뛰어넘어 구름 위로 올라
보랏빛 하늘에서 날개를 펼치는구나
아름다운 바다는 천 리요
봉래산은 만 리나 떨어져 있는데
둥근 달 하나가 밝게 떠올라
가을 물결을 환히 비추는구나
살수견
그 누가 벼락을 내려
우리 사당을 불살랐는가
옥황상제께서 옥도끼를 내려 주시어
삼 년 동안 그 뒤를 따르게 하였다네
돈으로 뱃삯을 치르니
어두운 곳에서도 속임이 없구나
법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데에
어찌 예전의 유감을 담아 두겠는가
(용어) 살수견은 송나라 때의 도사로, 신령스러운 도술로 이름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여도장
이마는 옥처럼 빛나고
옥으로 지은 누각은 노을 위에 떠 있는 듯하다
하늘 끝에 닿은 황하는
만고에 걸쳐 늘 동쪽으로 흘러간다
내가 할 일을 다 마치고 나서는
옷자락을 뗏목 삼아 올라타니
겨드랑이 밑에는 하늘의 바람이 일고
소매 속에는 밝은 달빛이 담겨 있구나
성소부부고 제15권
10. 00:05
출처: 성소부부고 제15권, 문부 12, 뇌
배경: 뇌사는 죽은 이의 생전 공적과 인품을 기리며 짓는 애도의 글로, 산문으로 된 전기와 운문으로 된 애도시가 함께 실리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는 두 편이 실려 있다. 하나는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다 순국한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을 위한 글이고, 다른 하나는 재주는 뛰어났으나 기축옥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불우하게 살다 쉰도 못 되어 세상을 뜬 문인 이실지(이춘영)를 위한 글이다.
이복남 장군을 위한 뇌사 (서기 1598년 2월 15일, 양력 추정)
1597년 8월 16일, 왜적이 남원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명나라 부총병 양원은 포위를 뚫고 겨우 본국으로 달아났으나,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은 성을 지키다 목숨을 버렸다. 조정에서는 그의 충절을 높이 사 병조판서를 추증하여 그 뜻을 기렸으니, 마땅한 일이다.
공은 우계를 본관으로 하는 이씨 집안 사람으로, 고려 시대의 이름난 장수 이의의 후손이다. 고조부 이지방, 증조부 이광식, 조부 이전은 모두 나라를 지키는 든든한 방패 같은 존재들이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세상일에 울분을 품는 큰 뜻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글공부를 했으나 마음이 내키지 않아 그만두고, 손자와 오자의 병법을 배워 그 큰 줄기를 통달했으며, 평생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장순, 악비, 문천상의 전기를 읽을 때마다 반드시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곤 했다.
(용어) 장순, 악비, 문천상은 모두 중국 역사에 이름을 남긴 충신들이다. 장순은 당나라 때 사람으로,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관의 항복 명령을 거부하고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수양성을 지키던 중 전사했다. 악비는 남송의 명장으로 금나라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했으나, 금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하다가 간신 진회의 모함을 받아 옥중에서 죽임을 당했다. 문천상은 남송 말기의 충신으로, 원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혔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다가 죽임을 당했다.
공은 글을 지으면 기상이 넘쳤지만 그런 일에 마음을 쏟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과 마주 앉아 옛날과 지금의 흥망성쇠를 논할 때면 그 말솜씨가 시원스러워 들을 만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특별하게 여겼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금성 통판이 되었는데, 관직에 있으면서 매우 꿋꿋하여 남에게 아첨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몹시 좋게 여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날마다 군마를 훈련시키며 죽을힘을 다해 여러 차례 적을 베고 적의 깃발을 빼앗아 바치니, 그 공으로 붉은 비단옷을 하사받았다. 이어 목사로 승진했는데, 다스림이 엄정하면서도 밝고 인자하면서도 너그러워 교화가 크게 이루어졌다.
전쟁이 그치지 않던 때라, 공은 완력 있고 용감한 사람들 — 돌 던지는 솜씨, 힘겨루기, 활쏘기에 능한 이들을 따로 모아 오백 명을 얻었다. 이들을 막하에 두어 번갈아 숙직하게 하고, 밤낮으로 함께 지내며 맛있는 음식은 손대지 않고 적은 것도 나누어 먹으면서 충의로 그들의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감격하고 분발하여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를 다졌다. 마침내 무기를 잡고 호남의 방패가 되어 적을 막으니, 나라에서는 그를 큰 성벽처럼 든든히 여겨 의지하게 되었다.
(용어) 돌 던지는 무예와 힘겨루기는 옛 무인들이 전장에서 익히던 무예의 한 종류다. 돌 던지는 무예는 돌을 멀리 던져 적을 맞히는 것이고, 힘겨루기는 여러 사람이 땅에 엎드려 버티고 있는 것을 완력으로 떼어내거나 장애물을 뛰어넘는 훈련으로, 완력을 겨루는 놀이 겸 무예였다.
양원이 남원에 머물고 있을 때, 왜적의 큰 장수 가토 기요마사가 수만 병력으로 호남과 영남을 집어삼키려 했으니, 그 기세가 마치 우레가 진동하고 바다가 뒤집히는 듯했다. 그런데 양원은 두려움에 떨며 외로운 성 하나에 의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명나라 장수 진우충과 장유성은 각기 군대를 거느리고도 감히 구원하러 나서지 못했다. 양원은 이복남에게 격문을 보내 구원을 청했다. 마침 공은 바닷가에서 섬진강 일대를 방어하며 왜장 행장과 석만의 군대를 막으려던 참이었다. 격문을 받자 곧바로 떠날 채비를 하며 군리를 불러 군사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적은 많고 원병은 끊겼으니 성이 함락될 것은 뻔한 일이다. 나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고 가지 않을 수는 없다. 지금 수천 군사로 저 많은 적을 당해내려는 것은 마치 큰 용광로에 기러기 깃털 하나를 던져 넣는 것과 같으니, 형편으로 보아 요행을 바랄 수 없음은 뻔한 일이다. 그러나 사내대장부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에 죽음을 사양할 수야 있겠는가. 오늘이 바로 내가 죽는 날이다. 다만 그대들까지 부질없이 함께 죽을 필요는 없다. 가고 싶은 자는 가고, 남고 싶은 자는 남아라."
그러자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공을 따라 죽고 싶습니다."
이에 정예 병사 오백 명을 뽑아 남원으로 달려가니, 적은 이미 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공은 영을 내려 "누구든 조금도 동요하지 말라. 물러서는 자는 반드시 벤다"고 하고는, 병사들을 물고기 꿰미처럼 한 줄로 세워 진을 짠 뒤, 징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북을 치고 진격했다. 적들은 이를 보고 놀라 "조선에도 인물이 있구나" 하며 서둘러 길을 터 주었다. 공은 말고삐를 늦추어 유유히 포위망 안으로 들어가니, 성안 사람들은 그 두려움 없는 늠름한 모습을 믿음직하게 여겨 우레 같은 환성을 질렀다.
양원은 공의 손을 잡고 절하며 말했다.
"지금 강한 군대를 거느린 장수들도 모두 둘러앉아 구경만 할 뿐 구원하러 오지 않는데, 절도사는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 달려왔으니, 어찌 옛날 위기의 성에 홀로 군량을 날라 준 그 이안민 장군과 다르겠소."
그러고는 공의 등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용어) 이안민은 중국 남북조 시대 남제의 장군이다. 반란이 일어나 아군 장수가 위태로운 성에 갇히고 군량마저 끊겨 위기에 몰렸을 때, 이안민이 배에 군량 수백 석을 싣고 적진을 뚫고 들어가 구원했으며 이어 적을 크게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양원은 이복남을 이 이안민에 견주어 칭송한 것이다.
공은 이에 군사들을 독려해 바윗돌과 통나무, 무기를 날라 남쪽 성벽을 지키며 온종일 피 튀기는 싸움을 벌였다. 적이 성벽에 붙어 오르려 할 때마다 그때그때 물리쳐 수없이 죽이니, 마침내 적은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이튿날 성의 동쪽이 무너지자, 공은 남원부 관아 대청으로 달려 들어가 의자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양원이 부하를 보내 함께 도망치자고 권하자, 공은 칼을 손에 쥔 채 꾸짖었다.
"나는 맹세코 이 성과 생사를 함께하겠다. 어찌 구차하게 목숨을 탐내겠는가."
곁에 있던 이들은 감히 더 권하지 못했다. 얼마 뒤 병사들이 섶을 가져다 둘러쌓고 불을 지르니, 바람을 타고 불길이 매섭게 번져 갔다. 공은 그 불길 속에서도 꼿꼿이 앉아 있었으니, 이를 본 적들마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공은 마침내 의로써 목숨을 버렸으니, 호남 사람들은 지금도 이 일을 이야기할 때면 눈물을 흘린다.
군자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흔들림 없이 지조를 지키는 것은 충이요, 죽을 것을 알면서도 과감히 나아가는 것은 지혜요, 태연히 의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용기다. 이 셋 가운데 하나만 이루기도 어려운 법인데, 하물며 세 가지를 모두 갖춘 사람에 있어서랴. 마땅히 이 사람을 위해 뇌사를 지어야 한다." 그 뇌사는 다음과 같다.
공은 남달리 걸출한 인물
장군 집안의 자손답게
남다른 자질을 타고나
우뚝한 이마에 긴 팔을 지녔네
일찍부터 바른 가르침 받으니
오직 효와 충뿐이었네
마침내 경전과 학문을 익혀
큰 뜻을 진작에 깨쳤네
문득 붓을 내던지고
몸을 던져 새처럼 날아오르려 했네
(※ 이 구절은 정확한 뜻이 분명하지 않다)
하늘이 내린 병법과
여러 병서들을
꿰뚫어 통달하니
황석공도 그의 스승 되기 부끄러우리
(용어) 황석공은 중국 진나라 말엽, 장량에게 병법서를 전해 주었다는 전설 속 인물이다.
기략은 깊고 식견은 통철하여
정공법으로 나아가 기이한 계책을 냈네
버들잎을 쏘아 맞히듯 묘한 활솜씨로
과거 급제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네
(용어) 버들잎을 쏘아 맞히는 활솜씨는 전국 시대 명궁 양유기가 백 걸음 밖에서 버들잎을 쏘아 백발백중시켰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활솜씨가 매우 뛰어남을 가리킨다.
임금 계신 대궐을
가까이서 지키니 임금이 그를 의지했네
공이 병권을 손에 쥐자
금위군도 함부로 떠들지 못했고
병조에 글을 올려
은밀히 전쟁을 그치도록 도왔네
오직 금성 고을은
서남쪽을 지키는 큰 울타리
식량을 쌓고 군사를 길러
미친개 같은 왜적을 막아야 했네
누가 이 고을을 맡아
군사를 조련하고 물자를 비축할까
공이 가야 한다고
원로들이 나서서 그를 추천했네
이에 곳간마다
활과 창이 가득 차고
짧은 저고리에 수수한 갓끈 맨
뛰어난 검객들이
우뚝 서서 남쪽을 지키니
마치 물을 막아선 제방과 같았네
(용어) 짧은 저고리와 수수한 갓끈은 옛 무인들이 즐겨 입던 옷차림으로, 뒷자락을 짧게 지어 움직이기 편하게 만든 저고리와 무늬 없이 소박하게 만든 갓끈을 가리킨다.
왜적이 호남으로 마구 밀려들 때
장졸들을 이끌고 홀로 막아섰네
은빛 투구에 흰 깃발
쇠갑옷 위에 비단 웃옷
적들은 바라보기만 해도 달아나니
그 눈에는 굳센 적수가 없었네
무리로 사로잡고 목을 베어 바치니
그 공을 견줄 자가 없었네
그대에게 옥관자를 내리고
붉은 관복에 가죽띠를 내리고
절도사의 병부까지 내리니
백성들은 노래하며 어찌 이제야 오셨느냐 반겼네
보리이삭도 두 갈래로 파릇파릇 자라니
백 리 고을이 태평한 세월을 이루었네
(용어) 보리이삭이 두 갈래로 자란다는 것은 지방관의 선정으로 풍년이 든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후한 때 어양태수 장감이 선정을 베풀자 백성들이 "뽕나무엔 곁가지가 없고 보리이삭은 두 갈래라, 장 태수가 다스리니 그 즐거움 헤아릴 수 없네"라고 노래한 옛일에서 나왔다.
군대를 크게 사열하니
우뚝 솟은 산악 같았고
갑옷도 뚫는 굳센 활솜씨는
화려한 옷차림 따위는 하찮게 여겼네
술을 나눠 줘도 고르게 나누니
그 은혜는 부하의 종기를 빨아 준 것보다 깊어
죽음도 제집 가듯 여긴 것은
오직 공의 군졸들뿐이었네
(용어) 부하의 종기를 빨아 준 일은 전국 시대 위나라 장수 오기가 병사의 몸에 난 종기를 직접 입으로 빨아 치료해 주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것으로, 장수가 병사를 자식처럼 아끼는 두터운 은혜를 뜻한다.
이에 장막을 열고
지휘의 자리에 나아갔네
남쪽 바닷가를 눌러 제압하니
군령이 빠르기가 바람과 우레 같았네
한 말들이 그릇만큼 작은 고을 용성은
호남과 영남이 만나는 요충지라
적은 진작부터 군침을 흘리며
이곳을 삼키려 벼르고 있었네
적의 기병 삼천이나 되니
누가 그 예봉을 막아 낼 것인가
형세는 알을 쌓아 올린 듯 위태로운데
누가 그 성벽을 굳게 지킬 것인가
하란진명 같은 원병은 오지 않고
단도제 같은 이는 달아나려 하는데
공은 격문을 받자마자
곧바로 달려갔네
번개처럼 회오리바람처럼
하루 만에 남원에 이르렀네
(용어) 하란진명은 당나라 숙종 때의 하남절도사다. 수양성이 포위되었을 때 장순이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하란진명은 장순의 명성을 시기하여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고, 결국 수양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여기서는 정작 위급할 때 구원병이 오지 않는 상황을 빗댄 것이다. 단도제는 남조 송나라의 장군으로 짐작되나 확실하지 않다.
즉묵 싸움처럼 맞붙어 싸우고
수양성처럼 굳게 지켰네
(용어) 즉묵 싸움은 전국 시대 제나라 장수 전단이 즉묵성을 지키다가, 소 떼의 꼬리에 불붙은 갈대를 매달아 밤중에 적진으로 몰아쳐 연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른 싸움이다. 수양성을 지킨 일은 당나라 충신 장순이 안녹산의 난 때 허원과 함께 수양성을 끝까지 지키다가 끝내 전사한 일을 가리킨다.
군졸들을 독려하고
적의 허점을 무너뜨리며
징을 치고 깃발을 날리며
북을 치며 나아갔네
적들은 바라보다 놀라
문득 한쪽 모퉁이가 무너졌네
위급함을 구하러 달려가니
양원은 눈물 흘리고 병사들은 함성을 질렀네
낮은 성가퀴를 둘러보고는
약한 곳을 철통같이 고쳐 놓았네
북과 징은 두드리다 못해 가운데가 갈라지고
사다리와 공성 기구는 바깥에서 꺾여 나갔네
힘은 다하고 형세는 기울어
마침내 성을 포기하게 되었네
누가 그 말고삐를 잡고서
함께 가자 외칠 것인가
오직 임금과 나라뿐
오직 죽음만이 나의 본분이라
성과 함께 죽을지언정
내 맹세는 어김이 없으리
불타는 집을 편안히 여기고
뜨거운 불꽃도 서늘하게 여겼네
사는 것은 구차한 일
죽음이야말로 내가 돌아갈 곳
누가 감히 태연할 수 있으랴
생사가 갈리는 이 순간에
동쪽 고을에서 강개한 마음 북받쳐
장순처럼 그 넋은 죽어서도 사나운 귀신이 되었네
해와 달도 빛을 잃고
하늘과 땅도 어두워졌네
대궐에도 슬픔이 서렸으나
그대 넋을 어찌 위로하리
병조판서 자리도
재상의 지위라 할지라도
그대의 삶을 호사스럽게 하진 못했으나
그대의 죽음만은 마땅히 영예롭게 하리라
자손에게 벼슬과 땅을 내려
슬픔과 영광을 함께 다하게 했네
아, 죽을 자리에서 죽었으니
공은 뜻을 이루었네
그 공훈은 종묘의 솥과 종에 새겨지고
그 이름은 역사책에 길이 빛나리
누구인들 한 번은 죽지 않으랴만
공의 죽음은 유독 깨끗하여라
남원의 백성들이 떼 지어 모여
공을 그리워하며 눈물 흘리고
공의 덕을 마음에 새기고
공의 공훈을 사모하니
백 대가 흐르도록
공을 향한 그리움은 변치 않으리
지리산 남쪽 자락에
마땅히 제사를 받아야 하리
사당 짓는 일 늦출 수 없건만
아직 조정의 명을 기다리네
나는 공의 얼굴을 아나니
참으로 열렬한 대장부였네
남원으로 달려가던 그날
그 뜻이 더욱 또렷해졌으니
마음이 변치 않음은 충이요
죽을 줄 알고도 나아감은 지혜요
의로움을 향해 나아감은 용기이니
이 세 가지를 누가 다 갖추었던가
죽었어도 썩지 않으리니
문천상의 굳센 절개와 같아
무엇이 유감이며 무엇이 후회되리
천 년이 지나도 그대로이리
내 이 뇌사를 지어
후대에 알리노라
이실지를 위한 뇌사 (서기 1606년 7월 1일, 양력 추정)
이실지는 이춘영의 자다. 그는 젊어서부터 기개로 스스로를 내세웠고, 제 재주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성혼과 정철 사이를 오가며 세상에 자신만 한 선비가 없다고 여겼다. 일찍부터 세상을 향해 팔뚝을 걷어붙이고 뽐냈으므로, 선비 신분이면서도 제 의견으로 조정의 논의를 좌우하려 들었다.
기축옥사 무렵에는 집정자들 사이에서 손뼉을 치며 활개 쳤는데, 집정자들도 그의 말을 따랐고 당대 선비들도 그를 기이하게 여겨 다들 그에게 붙좇았다. 그와 가깝지 않던 이들은 모두 벼르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해 사관이 되어 홍문관과 규장각에서 붓을 잡았으니, 이미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 그러다 집정자가 곤경에 몰리자 실지 역시 삼수군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그에게 붙좇던 자들이 도리어 그를 공격했고, 평소 벼르던 자들은 몹시 고소해했다. 이는 실지가 나이 어리고 세상 물정에 어두워 망령되고 거칠고 어리석었던 탓이겠으나, 집정자를 감싸던 이들마저 덩달아 실지에게 죄를 뒤집어씌웠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만약 당시 집정자들이 온화하고 바르며 진중하여 조급하고 난폭한 이들의 부추김에 휘둘리지 않았더라면, 실지 같은 사람이 백 명이 있은들 어찌 감히 함부로 입을 놀려 일을 벌였겠는가. 그렇게 하지 못하여 이런 분란이 일어난 것이니, 이는 실로 집정자들의 잘못이다. 그런데 어찌 실지 한 사람만을 벌한단 말인가.
친구에게 버림받고 뜻이 맞지 않는 이들에게 미움을 받아 뜻을 펴지 못하게 되자, 그는 마침내 세상에 스스로를 내던져 술꾼들과 어울리며 마을 사이를 떠들썩하게 오갔다. 그럴수록 그의 글은 더욱 크고 거침이 없어졌다. 그의 산문은 양한 시대 이후의 글을 좇았고, 시는 두보와 한유와 소식 세 사람을 본받아 호탕하고 뛰어나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다만 사람됨이 신중하지 못해 경솔함을 면치 못했으므로 남들에게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의 안목을 얕보았고, 명성과 지위도 당대에 떨치지 못했다. 끝내 그를 추천하는 이가 없어 세상에 쓰이지 못한 채 뜻만 품고 죽었으니, 참으로 가엾다.
나는 그와 글로 벗을 삼아 늘그막에 서로 자주 오가며 지냈으므로 그의 사람됨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의 글은 견줄 사람이 드물었으나, 끝내 세상을 떠돌며 뜻을 펴지 못하고 쉰 살도 채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를 각별히 안타깝게 여겨 뇌사를 짓는다. 그 뇌사는 다음과 같다.
아, 문운이
지금 크게 막혀 있구나
오직 두세 벗들만이
문단에서 이름을 떨쳤네
그대는 기개로 호기롭게
수염을 떨치며 일어섰네
쌓인 지식이 깊고 두터우니
글로 마땅히 쏟아 냈네
넘실대는 문학의 물결이
큰 강을 따라 동으로 흘렀으니
흙탕물에 썩은 고기가 떠다닌들
그 광대함에 무슨 해가 되리
시 또한 재기 넘쳐
풍성하고도 힘찼네
용과 지렁이가 뒤섞인 듯해도
그 방대함에는 거리낄 것 없었네
북 치고 소리치며 나서니
그 주장을 누가 다 받아들였으랴
정사룡과 노수신 이하로는
그의 입에 성한 사람이 없었건만
(용어) 정사룡과 노수신은 모두 조선 중기의 이름난 시인이자 문장가다. 정사룡은 호가 호음이고, 노수신은 호가 소재다.
오직 권필과 이안눌
그리고 허균만을 추어올렸네
(용어) 권필과 이안눌은 이춘영과 같은 시대에 활동한 시인들로, 허균과도 가까이 지낸 벗들이었다.
더러는 메마르고 더러는 막혔어도
더러는 물릴 만해도 그런대로 다 마땅했네
그가 입을 열면
온 좌중이 조용해졌으니
그 값이 낮아진 것도
실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네
세상은 그 재주를 아까워하지 않았어도
그대는 조금도 굽히지 않았네
더욱 고고한 언론을 펼치니
미워하는 자들은 곁에서 그대를 노려보았네
수부 벼슬도 안 된다 하고
종정 벼슬도 막아서서
마침내 쫓겨나 재야로 밀려났으니
아, 운명은 여기서 그치고 말았네
(용어) 수부와 종정은 모두 관직 이름이다. 수부는 공조 계통의 벼슬을, 종정은 왕실 종친과 관련된 벼슬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그가 이런저런 벼슬자리마다 가로막혀 결국 조정에 설 자리를 얻지 못했음을 말한 것이다.
아, 슬프도다.
지난날 진주 고을
응벽루에 묵을 적에
그대가 이정을 데리고
표연히 찾아왔었지
손뼉 치며 옛날과 지금을 논하고
여러 대가의 글을 이러니저러니 품평하며
죽는 것이 차라리 편하고
사는 것이 오히려 한숨겹다 하더니
어느 날 문득 훌쩍 세상을 뜨니
그 낭랑한 목소리 아직도 귀에 쟁쟁하네
싸늘한 바람 부는 장막 앞에서
그대를 위해 눈물 한 줄기 흘리네
아, 슬프다.
그대가 세상에 쓰일 때는
다들 참으로 기특하다더니
그대가 밀려나게 되자
모두가 등을 돌렸네
등만 돌린 게 아니라
돌까지 던졌었지
알랑대던 그 무리들은
도리어 붉은 신을 신고 높은 자리에 올랐네
남들은 그대에게 화를 내지만
나는 그대를 위해 원통해하네
그대 넋이 안다면
반드시 내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리
아, 슬프도다.
장주는 가라앉아 자취 없고
양웅은 적막하게 되었으니
부귀를 누리다 스러지는 것은
애초에 그대가 바라던 바 아니었네
(용어) 장주는 전국 시대의 사상가 장자를 가리킨다. 그가 한때 칠원이라는 고을의 관리를 지냈으므로 후대에 그를 칠원이라 부르기도 했다. 양웅은 전한 시대의 문장가로, 그의 집에 있던 정자 이름을 따 현정이라고도 불렸다.
그대의 가없는 지혜는
맺히어 오랜 생명이 되리니
천고에 길이 빛나
해와 달처럼 늘 밝으리
그가 굽힌 것을 슬퍼 말고
그가 일찍 죽은 것을 슬퍼 말라
아, 슬프도다.
대체 무엇을 탄식하리오.
성소부부고 제15권 · 문부 12 · 애사
출처: 성소부부고 제15권, 문부 12, 애사
배경: 애사는 특히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를 애도하며 짓는 글이다. 여기에는 3대에 걸쳐 그림으로 이름난 집안에서 태어나 명나라 사신마저 감탄시킨 재주를 지녔으나, 가난과 방랑 속에 술병으로 평양에서 요절한 승려 화가 이정을 위한 애사 한 편이 실려 있다.
이정을 위한 애사 (서기 1607년 3월 12일, 양력 추정)
이정의 자는 공간이고, 스스로 나옹이라 불렀다. 아버지 이숭효, 할아버지 이배련, 증조할아버지 이소불이 모두 그림으로 이름을 날린 집안이었다. 그가 태어나려 할 때, 어머니는 온몸이 금빛으로 빛나는 나한(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제자)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 나한이 이렇게 말했다.
"너희 집안은 3대에 걸쳐 네 사람이 모두 부처 그림을 잘 그려서, 그려낸 부처가 수천 구에 이른다. 그래서 내가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너에게 아들을 주어 그 보답으로 삼겠다."
꿈에서 깨어난 뒤 아이를 낳았는데, 상서로운 빛이 해를 꿰뚫었고 아이의 생김새는 꿈속의 나한과 꼭 닮아 있었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 작은아버지 이흥효 밑에서 자랐다. 다섯 살에 저절로 그림 그리는 법을 터득해 붓을 들어 승려를 그렸는데, 그 모습이 아주 그럴듯했다. 이흥효가 기특하게 여겨 집안에 전해오던 화법대로 가르쳤더니, 열 살에 이미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다. 산수화에도 정통했지만 인물화와 불화가 특히 옛 명작에 가까웠다. 그림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할아버지와 견주면서도, 그림에서 뿜어나오는 기운만큼은 오히려 그가 한 수 위라고 말했다. 열한 살에 금강산에 들어가더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589년(선조 22년) 장안사를 고쳐 지을 때, 그가 그린 벽화와 산수화, 그리고 여러 폭의 천왕상은 하나같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생생하고 서슬이 퍼랬다.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주지번(호는 난우, 명나라의 이름난 학자이자 사신)이 그 그림을 보고 크게 감탄하여 "천고에 으뜸이니 천하에 이만한 이가 없다"고 극찬하고는, 결국 산수화 여러 점을 그에게서 얻어 가지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정은 천성이 게을러 좀처럼 그림을 그리려 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 전하는 그의 작품은 드물다. 1607년(선조 40년) 2월, 술병으로 평양에서 죽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이정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어 아버지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으므로,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놓고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며 울곤 했다. 작은아버지 내외를 친부모처럼 섬겨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고, 작은아버지 내외 역시 그를 친자식처럼 여겼다. 술을 좋아했고 마음이 활달했다. 글씨도 잘 쓰고 시도 지을 줄 알았는데, 모두 속된 티를 벗어나 범상치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흐리멍덩해서 무슨 일이든 야무지게 해내지 못할 사람 같았지만, 속은 훤히 트여 있었고 조예도 깊었다. 불교에 대한 이해는 더욱 깊어서 남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비록 가난하여 남의 집에 얹혀 지냈지만 옳지 않은 것은 하나도 취하지 않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가 아무리 권세 있고 지위 높은 사람이라도 더럽게 여겨, 마치 자신까지 더럽혀질까 두려운 듯 매몰차게 내쳤다. 벗인 심우영, 이경준과는 형제처럼 도탑게 지냈는데, 이 두 사람은 여러 해를 그와 사귀면서도 털끝만한 불의조차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좋은 시절이나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술이 거나해져서 목청껏 노래를 불렀고, 길을 가다 멋진 산수를 만나면 흥에 겨워 바라보느라 집에 돌아갈 생각도 잊었다.
남에게 주기를 좋아해서 추위에 떠는 사람을 보면 자기 옷을 벗어 입혀주곤 했는데, 속된 사람들은 그런 그를 어리석다고 헐뜯기만 할 뿐 아무도 거두어 주지 않았다.
한번은 세도 있는 정승이 그를 불러다 그림을 그리게 하면서, 흰 비단을 준비해주고 술을 넉넉히 대접했다. 그러자 이정은 일부러 취한 척 드러누웠다가 한참 만에 일어나더니, 솟을대문으로 소 두 마리에 짐을 가득 싣고 두 사람이 몰고 들어오는 그림 한 폭을 그려놓고는 붓을 내던지고 가버렸다(대문으로 짐이 쏟아져 들어오는 모습을 그려 정승의 탐욕을 은근히 풍자한 것으로 보인다). 정승이 노하여 죽이려 들자 그는 쫓겨 평양으로 달아났는데, 그곳의 아름다움을 못내 사랑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다가 끝내 그곳에서 죽고 말았다. 시신은 우선 선연동(평양 대동강 가에 있던, 옛 기생들의 무덤이 많이 모여 있던 골짜기)에 묻었다.
나는 소탈하고 영특하면서도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점이 서로 통해서, 나이도 벼슬도 따지지 않고 누구보다 깊이 그를 아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문득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 슬프다.
그가 참선(불교 수행의 한 방법으로, 고요히 앉아 진리를 궁구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면 현묘한 이치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내 마음을 맑게 틔워주곤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신선과 부처의 진리에서 터득한 것이었으리라. 그 이야기에 빠지면 밥 먹는 것조차 잊곤 했으니, 아, 금빛 나한이 꿈에 나타난 일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런 사람이 태어났겠는가. 그 또한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에 글을 지어 그를 애도한다.
아, 나옹이여
그대의 목숨은 어찌 이리도 짧았던가
그러나 썩지 않고 남을 것이 있으니
내 어찌 그저 슬퍼만 하겠는가
완적 같은 호방함과
왕헌지 같은 거침없음
정단 같은 맑고 꼿꼿함과
고개지 같은 우직함까지
이 모든 아름다운 덕을 한 몸에 지니고서
그대는 이 모두를 버려두고 어디로 가는가
나는 속세와 어울리지 못해
세상에서 쓸모없는 쭉정이 취급을 받았을 때
그대만은 나와 뜻이 맞아
일찌감치 벗을 맺어 둘도 없는 짝이 되었지
사람들은 저마다 시끄럽게 헐뜯고 손가락질했으니
이 몸은 슬프게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네
그대 손만 이끌고 함께 돌아가
산속에 숨어 살아볼까 생각했었지
먼지가 날아와 흰 옷을 더럽히듯이
난초와 지초(향기로운 풀, 곧고 맑은 사람을 빗댄 표현)는 가을바람에 여위어 갔네
세월은 자꾸 저물어 가니
어서 수레에 멍에를 메워 동쪽으로 떠나자 약속했건만
누가 알았으랴, 하늘의 옥루(옥황상제가 산다는 하늘 위 누각으로, 죽음을 뜻한다)가 그대를 이리 서둘러 불러갈 줄을
그대는 애초에 이 인간 세상에 미련이 없었나 보다
아득히 회오리바람을 타고 떠나가니 붙잡을 길이 없고
봉래산(신선이 산다고 전해지는 전설 속의 산) 위로 오색구름만 아스라이 떠 있네
어디선가 아득히 옥퉁소 소리 들려오는 듯
내 눈물은 줄줄 흘러내리네
서러워라, 이제 이 몸은 누구를 의지해야 하나
원통하여라, 나를 알아주던 벗은 이미 신선의 세계로 떠나버렸네
계수나무는 차가운 바위산에 서 있고
가을꽃은 그윽한 골짜기에 피어 있네
누구와 함께 갈까 서성이다가
외로운 내 그림자를 조문하듯 돌아보니 서럽기만 하여라
요담(옥처럼 맑다는 뜻을 지닌, 전설 속의 못)은 맑고도 깨끗한데
달빛은 환하게 온 세상을 비추네
어렴풋이 그대 모습을 보는 듯하니
오장을 소리 높여 읊는 그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구나
아, 천년만년이 지난들 어찌 다할까
그대를 그리워하는 이 마음, 나는 결코 잊지 못하리라
(용어)
완적(원문에서는 그의 자인 '사종'으로 표현했다):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문인으로, 세속을 등지고 대나무 숲에 모여 지냈다는 일곱 선비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노장 사상을 좋아하고 얽매임 없이 살았으며, 술을 몹시 즐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왕헌지(원문에서는 그의 자인 '자경'으로 표현했다): 중국 진나라 때의 이름난 서예가로, 성품이 거침없고 고매하여 세상의 예법에 얽매이지 않았다. 특히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고 그림에도 능했다.
정단: 중국 후한 때의 은사(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숨어 산 선비)로, 유교 경전에 정통했으며 성품이 청렴하고 꼿꼿하여 아무리 지위 높은 사람 앞에서도 굽히지 않았다.
고개지(원문에서는 그의 자인 '장강'으로 표현했다): 중국 진나라 때의 화가로, 학식이 넓고 재주가 뛰어나 사람들이 그를 재주와 그림과 천진한 우직함 세 가지 모두에서 으뜸이라 하여 이르던 이름이 있었다.
오장: 옛 역사서 《사기》의 음악을 다룬 편에 나오는 노래의 이름으로 짐작되나,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 이 구절은 정확한 뜻이 분명하지 않다)
성소부부고 제15권 · 문부 12 · 제문
출처: 성소부부고 제15권, 문부 12, 제문
배경: 제문은 죽은 이의 영전에 술과 음식을 올리며 읽는 제사글이다. 여기에는 사촌 형, 벗, 정승, 지방관, 서예가 한석봉, 승려 장군 사명당 유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을 애도하는 열 편의 글이 실려 있으며, 그 가운데는 허균 자신의 첫 부인을 애도하는 짧고 애틋한 글도 포함되어 있다. 이 부인에 관한 이야기는 뒤에 실린 행장에서 더 자세히 이어진다.
사촌 형 허기를 위한 제문 (서기 1601년 4월 20일, 양력 추정)
아, 형님은 타고난 인품이 듬직하고
성품은 굳세면서도 곧았습니다.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고
바른 도리로 자식들을 가르쳤습니다.
우리 종가의 제사를
정성껏 받들어 모셨고
그 이름이 고을에 널리 알려져
여러 차례 추천장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끝내 벼슬 한 번 얻지 못하고
남들 앞줄에 서보지도 못한 채 지내셨습니다.
그래도 하늘의 보답은 어긋나지 않아
아들들이 저마다 훌륭하게 자랐으니
늘그막엔 그 효도를 받으며
술과 안주 가득한 상을 받으실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오래오래 사시어
끝없는 복을 누리시리라 여겼는데,
하늘은 어찌 이리도 무심하여
느닷없이 이런 재앙을 내린단 말입니까.
대들보가 부러지고 서까래가 무너지듯
집안은 이제 더욱 쓸쓸해졌습니다.
저는 마침 과거 시험관이 되어
남쪽 지방에 가 있었던 탓에
형님 계신 서쪽 고을을 돌아보면서도
초상에는 끝내 달려가지 못했습니다.
돈독하셨던 가르침을 떠올리면
눈물만 하염없이 흐를 뿐입니다.
상여는 어디로 향하는 것입니까,
바로 선대 어른들이 묻히신 그 언덕입니다.
묘 쓸 날은 이미 정해졌지만
저는 장례에도 가지 못합니다.
형님의 한평생을 그려보노라니
애간장이 끊어지는 듯합니다.
조카에게 부탁하여
대신 제물을 올리게 하니
오, 형님이시여
아우가 올리는 이 잔을 받으소서.
임자승을 위한 제문 (서기 1601년 8월 29일, 양력)
아, 자승이여.
하늘은 어찌하여 그대를 태어나게 하고
또 어찌하여 이렇게 앗아간단 말인가.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 법이니
그대인들 무엇을 슬퍼하겠는가마는,
그대의 그 뛰어난 재주는
당대에 쓰이고 밝은 세상에 떨칠 만한 것이었는데,
너무 일찍 앗아가 크게 펼쳐보지도 못하게 했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 벗들 모두가 애석해하는 까닭일세.
아, 자승이여.
늙은 어머니는 살아 계시는데 슬하엔 아들 하나 없고
젊은 아내는 어린 딸을 품에 안고
아이고 아이고 울고 있네.
그토록 덕이 높던 사람에게 대 이을 자식조차 주지 않다니
아, 하늘의 도리란 참으로 알기 어렵구나.
남쪽 하늘은 아득하고
그 길은 굽이굽이 멀기만 한데
나는 흰 말을 타고
흰 장막을 부여잡네.
그대를 위해 우는 이 눈물은 저승까지 뚫고 갈 것이요
그대를 슬퍼하는 이 마음은 말로 다 할 수 없네.
그대에게 만약 영혼이 있다면
분명 나를 위해서도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리라.
지난봄 해양 땅에서
한 이불 덮고 정답게 지내던 때,
그대가 자신의 병은 고칠 수 없다고 말하기에
내가 잘 타이르며 이렇게 일러주었지.
"군평은 너무 옹졸했고
봉천은 너무 어리석었다"고.
그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 생각을 조금은 누그러뜨렸었지.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한 해도 채 못 되어
그대가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영영 등질 줄을.
산은 험하고 구름은 어둡고
해는 뉘엿뉘엿 서쪽으로 저무는데
굽어보니 묘 구덩이는 캄캄하고 아득하여
이제 그대와는 여기서 영영 헤어질 수밖에 없구나.
아, 슬프다.
가슴을 친들 통곡한들 어찌 그대를 따라잡으리.
지난날 허물없이 어울려 놀던 때를 생각하니
다시 만날 기약 없음이 서럽기만 하네.
정갈한 제물을 차려 올리고
피눈물로 이 글을 지어 바치니
영령이시여, 나를 굽어살피시고
이 잔을 다 받아주소서.
(용어) 군평 — 중국 진나라 때 사람 공탄의 자. 강직하기로 이름났으나 재상 왕도의 뜻을 거스른 뒤 지방관으로 좌천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봉천 —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사람 순찬의 자.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는데 아내가 일찍 죽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허균은 벗 임자승에게 이 두 사람처럼 지나치게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지 말라고 타일렀던 일을 떠올리고 있다.
이헌국을 위한 제문 (서기 1602년 7월 1일, 양력 추정)
공은 곧고 바르고 도량이 넓어
문중에서도 손꼽히는 큰 인물이었습니다.
일찍이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면서
비로소 그 명성이 세상에 크게 알려졌고
조정의 요직을 맡아서도
선비로서의 이름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여러 고을을 옮겨 다니며 애쓴 끝에
마침내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가까이서 모셨고
거듭 큰 은총을 입었습니다.
의리를 앞세워 토벌을 자청했고
임금을 호종하는 일에도 성실했습니다.
공을 세우는 데 힘써
다시 공신의 반열에 올랐고
이조판서 자리를 거듭 사양하니
임금께서도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셨습니다.
끝내 정승의 자리에까지 오르신
우리의 원로이셨습니다.
공정한 여론에 따라 일을 처리하니
그 공평함은 본보기가 될 만했습니다.
그 인자함은 어진 옛 재상들에 못지않았고
그 근엄함은 강직했던 옛 선비들에 못지않았습니다.
임금께서 겸허히 받아들이시니
온갖 법도가 바로 섰고
음탕하고 사사로운 무리는 절로 흩어져
서로 다투는 이가 없었습니다.
옛날 이름 높던 어진 재상들인들
그 명예가 공보다 컸겠습니까.
물러나야겠다는 공의 말씀은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뿐이었으나
여러 차례 사직 상소를 올리시니
벼슬에 연연하던 이들이 오히려 부끄러워했습니다.
장수를 상징하는 별이 저리 밝게 빛나니
이는 나라의 상서로운 징조라 여겼는데,
하늘은 어찌하여 더 머무르게 하지 않고
기둥과 서까래를 이리도 갑자기 기울게 하십니까.
이제 임금을 위해 몸 바쳐 대신 죽어드릴 이 누가 있으며
임금과 더불어 서로 경계하며 화답할 이 누가 있겠습니까.
슬픔에 잠기신 임금께서는
후한 부의를 내리셨습니다.
아, 하늘의 뜻은 참으로 믿기 어렵습니다.
그 보답이 어찌 이리도 야박할 수 있습니까.
끝내 뒤를 이을 자손도 주지 않으시니
살아서도 죽어서도 누구에게 의탁하란 말입니까.
남은 이들은 눈물을 흘리고
아낙들은 시름에 잠겨 있습니다.
나라의 예법에 따라
무덤 자리도 이미 마련되었습니다.
선대부터 이어온 정의로
저의 형님이 공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척 간의 정으로 늘 저희를 돌보아 주시고
벼슬자리에도 이끌어 주셨으며
재주를 아껴 앞길을 밀어주시어
막힌 운을 트이게 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이제 그 의지할 곳을 잃었으니
눈물만 하염없이 흐릅니다.
성 밖 하늘은 어둑어둑하고
붉은 명정이 바람에 나부낍니다.
곡하며 이 잔을 올리오니
이 낮은 정성을 굽어살피소서.
(용어) 천관 — 옛 중국에서 이조(관리의 인사를 맡아보던 관청)를 달리 부르던 이름. 이헌국이 이조판서 자리를 두 번이나 사양하였으므로 이렇게 표현했다. 한거와 우가 — 한거는 중국 한나라 고조의 장수 기신이 항우에게 포위되었을 때 고조를 대신하여 그 수레를 타고 대신 죽은 옛일을 가리키며, 우가는 순임금과 신하들이 서로 경계하며 주고받았다는 노래를 가리킨다. 둘 다 나라를 위해 몸 바치고 임금을 진심으로 보필한 충신을 그리워하는 뜻으로 쓰였다.
심우승을 위한 제문 (서기 1602년 11월 1일, 양력 추정)
공의 인품은 옥처럼 맑고 곧아
나라의 큰일을 맡을 만한 그릇이었습니다.
일찍이 조정에 나아갔으나
순탄치만은 않은 길이었습니다.
임금께서 의주로 몽진하실 때에는
그 뒤를 따라 모셨고
상소를 자주 올려
정성을 다해 잘못된 일을 바로잡았습니다.
지위와 명망이 걸맞아지니
앞으로 더 큰 은택을 베풀어 주시리라 기대했습니다.
중국으로 달려가
원병을 청하여
왜적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우니
그 공적은 솥과 술잔에 새겨질 만했습니다.
승지의 자리에 있으면서는
왕명을 받들어 전하는 일을 맡았고
늘그막에 고을을 다스릴 때는
백성들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조서가 막 도착하던 즈음
갑자기 건강이 크게 나빠졌습니다.
정성을 다해 병간호를 했으나
어찌할 수 없는 병이었기에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아, 목숨이 여기서 그치고 마니
나라는 보배로운 신하를 잃었고
임금께서는 슬픔에 잠기셨습니다.
어진 아내는 두었으나 대를 이을 자식은 없었으니
복을 내리는 데 이리도 인색하다니
하늘의 뜻은 참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세월은 자꾸만 흘러
장삿날이 다가오고
상여가 이제 막 떠나려 하니
거리마다 눈물바다입니다.
저는 공과 인척의 정을 맺어
누구보다 공과 가까이 지냈던 사이였기에
공의 행적을 정리하여
정성껏 이 글을 지었습니다.
잔을 마련하여 길 떠나시는 제사를 올리오니
저의 이 슬픔을 알아주소서.
(용어) 금루와 백도 — 금루는 중국 남제 때 사람 유금루를 가리킨다. 그가 죽었을 때 집이 가난하여 이불 하나로 염을 했는데, 얼굴을 덮으면 발이 드러나고 발을 덮으면 얼굴이 드러날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의 아내는 이불을 반듯하게 그대로 두어야 한다며, 남편이 평생 올바르게 살아온 뜻을 지켰다고 한다. 백도는 중국 진나라 때 사람 등유의 자이다. 전란 중에 자기 아들과 조카를 둘 다 살릴 수 없게 되자 아들을 버리고 조카를 살렸는데, 끝내 자기 아들은 얻지 못했다. 여기서는 심우승에게 어진 아내는 있으나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음을 이 두 옛사람의 이야기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권협을 위한 제문 (서기 1618년 5월 21일, 양력 추정)
공은 강릉 땅에서 존경받던 어른으로,
성실하고 단정하며 어질고 진실한 데다
청렴하고 결백하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그 명성은 고을의 인물평에서 으뜸이었고
자리는 향촌의 예우에서도 으뜸이었습니다.
재주와 식견이 뛰어나
벼슬 없이도 부유한 이 못지않은 삶을 누렸고
만년에는 마침내 벼슬길에 올라
많은 녹봉을 받았습니다.
꽃나무와 대숲, 연못과 누대를 두루 갖추고
집안 뜰에서는 풍악을 울리게 하며
손님을 맞아 잔치를 베풀고
술잔을 주고받았습니다.
이렇게 마음껏 즐기며
만년을 보내셨는데,
하늘이 돕지 않아
갑자기 수족에 병이 들어
그 화려한 자리를 미처 다 옮기지도 못한 채
어느새 상 치를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상여꾼의 요령 소리는 바람결에 울리고
붉은 명정은 달빛 아래 나부낍니다.
숲이 우거진 저 무덤 자리는
안국 땅 언덕이온데
상여 행렬은 더디게 나아가
서문 밖에서 노제를 지냈습니다.
제가 이토록 슬퍼하며 잊지 못하는 까닭은
누구보다 저를 아껴 주셨기 때문입니다.
손수 염을 하고 관에 모셨으니
이제 그 옛 교분을 다시 나눌 길이 없습니다.
공의 풍류를 오래도록 떠올리노라니
눈물만 하염없이 흐릅니다.
정성껏 안주와 단술을 올리오니
이 낮은 정성을 헤아려 주소서.
(용어) 월단평 — 인물을 평가하는 것을 이르는 말. 중국 후한 때 허소와 허정이 함께 명망이 높았는데, 이들이 매달 초하루마다 고향 사람들의 인물됨을 평가하고 그 등급을 새로 매겼던 데서 나온 말이다. 소봉 — 벼슬을 하지 않고도 농사나 장사로 얻은 재산이 넉넉하여, 마치 벼슬과 봉토를 받은 사람처럼 부유하게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혜장 — 가늘고 성긴 베로 만든 휘장으로, 상을 당한 집에서 영정이나 신주 앞에 치는 휘장을 이른다.
한석봉을 위한 제문 (서기 1605년 7월 10일, 양력 추정)
숭산의 정기를 타고나
남다른 재주를 이루었으니
공이 태어나면서부터
여러 사람 중에 단연 으뜸이었네
서까래만 한 큰 붓을 들고
연못이 온통 먹물이 되도록 글씨를 익히더니
마침내 사마시에 합격하여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떨쳤네
작은 글씨는 사자가 발톱으로 돌을 할퀸 듯하고
큰 글자는 용이 서린 듯하여
왕희지와 조맹부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천 년 만에 나온 솜씨였네
왕원미가 무릎을 치며
달리는 준마 같다고 감탄하며 칭찬했네
임금께서 그 재능을 아끼시어
벼슬을 내리시고
여러 차례 궁중의 술을 내리시고
귤과 유자와 좋은 물고기까지 내리셨네
곱고 가벼운 비단에
종이와 붓까지 함께 내리시니
베푸신 은혜가 두터워
한 세상에 둘도 없었네
벼슬은 공조의 낭관에 올랐고
두 고을의 원도 지냈네
만년에는 시에도 통달하여
도연명과 유종원의 경지를 밟았고
그 시가 평탄하고 넓고 맑고 순수하여
읊으면 맑은 기운이 감돌았기에
우리 둘째 형님과는
서로 막역한 벗이었네
그 인연으로 나도 공과 사귀게 되어
곧 종자기와 백아 같은 사이가 되었네
우리 집은 서울에 있었고
공도 서울에 머물러 지내셨으니
제법 자주 어울렸지만
세상일에 얽매인 것이 늘 한스러웠네
내가 요산 고을살이를 나가게 되니
마침내 예전의 약속을 지키게 되었네
공을 맞아 충천각에 묵게 하니
달빛 비치는 난간과 바람 부는 창가에서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네
나를 위해 금가루로
반야심경을 써 주었는데
필법이 굳세고 기세가 힘차
저수량과 구양순도 무색할 정도였네
어울려 읊는 흥이 흠뻑 무르익어
인간 세상의 즐거움이 극에 달했네
두 달이 지나
공은 너무 오래 머물렀다며 떠나려 하기에
교외까지 나가 절하며 배웅하고
가을에 다시 만나자 약속했었네
그런데 가을이 되기도 전에
갑자기 부고를 받았네
처음엔 놀라 믿기지 않아
말보다 눈물이 먼저 쏟아졌네
하늘이 무심하게도
나의 어진 벗을 앗아갔으니
어진 사람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을
누가 있어 하늘에 따지겠는가
높은 자리에 먼지가 앉기도 전에
아득히 저세상으로 떠나셨네
신선처럼 떠나신 것을 생각하면
애통하여 간과 골수가 토막토막 도려지는 듯하네
빼어난 넋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어찌 한 줌 재와 티끌로 돌아가리오
천지의 정기와 하나가 되어
달과 별처럼 하늘에 빛나리라
적막한 정자와
쓸쓸하고 텅 빈 집에서는
그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
그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리라
이름이 썩지 않을 것이니
죽음이 그리 슬플 것도 없으련만
살아남은 우리들만
부질없이 슬퍼하고 있네
맡은 직분에 매여
호리로 가는 길을 배웅하지도 못하고
멀리서 변변찮은 제수를 올리니
이 조문의 글을 들어주시기 바라네
아, 슬프다
(용어) 왕원미 — 명나라의 이름난 문인 왕세정을 가리킨다. 원문에는 "태창 왕원미"라고 나오는데, "태창"은 그의 호이고 "원미"는 그의 자이다. / 왕희지, 조맹부, 저수량, 구양순 — 모두 중국 역대의 이름난 서예가들이다. / 도연명, 유종원 — 중국 동진과 당나라 때의 이름난 시인들이다. / 종자기와 백아 —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탔고 종자기는 그 소리를 누구보다 잘 알아들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서로를 가장 잘 알아주는 벗 사이를 이르는 표현이다. / 사마시 — 조선시대에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 시험을 말한다. / 공조의 낭관 — 공조는 토목과 건축 등을 맡아보던 관청이고, 낭관은 그곳의 실무를 맡은 관리이다. / 충천각 — 허균이 요산 고을살이를 할 때 지내던 누각의 이름으로 보인다. / 호리 — 원래는 태산 남쪽에 있다는, 죽은 사람들이 산다고 전해지는 산 이름인데, 흔히 무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임약초를 애도하는 글 (서기 1606년 9월 16일, 양력 추정)
아, 내가 열아홉 살 되던 해,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상곡이라는 곳으로 이사하셨는데, 그때 그대를 처음 만났다. 그대는 나보다 한 살 어렸고, 아직 댕기머리를 드리운 소년이었지만 벌써 어른처럼 의젓했다. 우리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 마음이 통해 더없이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파피리를 불고 죽마를 타고 놀던 어린 시절부터 책을 끼고 스승을 찾아다니며 글방에서 재주를 겨루던 시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늘 함께 다녔고 한시도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낮에는 마주 앉아 글을 읽고 밤에는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잠들어, 잠시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살면서 어려운 일을 겪든 뜻대로 되든, 슬프든 기쁘든, 살든 죽든 우리는 언제나 같은 길을 가자고, 이 마음을 간직하여 아무리 힘든 때가 와도 변치 말자고 다짐하곤 했다.
전쟁(임진왜란)이 일어난 뒤로는 서로 다니는 곳이 달라졌지만, 그리워하고 아끼는 마음은 둘 다 변함없었다. 내가 벼슬길에 나가 사관이 되었을 무렵, 그대도 과거에 급제하여 함께 조정에 서게 되었으니, 예전에 다짐했던 뜻을 이제야 함께 실천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벼슬살이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한 달을 서울에서 함께 지낸 적도 없었고, 헤어질 때마다 늘 한숨을 쉬며 서로를 떠나보내야 했다. 그대는 정말 재주가 있어 요직에 있었지만, 나는 거칠고 세상 물정에 어두워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헛되이 나이만 먹고 있었다. 나는 그대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을 늘 안타깝게 여겨 힘써 추천했지만 끝내 그대의 뜻을 이루어 주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잘되고 못되는 것은 운명이로구나. 그대 같은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렇게 어렵게 지내는 것은 내 책임이다." 하고 탄식하곤 했다.
그대가 견책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내가 광릉으로 그대를 찾아갔다. 그날 밤 그대가 나에게 말했다.
"그대는 본래 몸이 약하고 나는 병이 많으니, 지루하게 이어지는 인생이라 해봐야 몇십 년이면 이 몸도 다 사라질 것이다. 잘되고 못되고, 기쁘고 슬픈 것이 마음에 걸릴 게 무엇인가? 그대 벼슬도 오르내림이 있을 텐데, 차라리 다 떨쳐 버리고 함께 시골로 내려가 같이 늙어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내가 대답했다.
"나아가고 물러나는 계책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니, 어찌 그대의 말을 기다릴 것까지야 있겠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섬강에서 함께 살자고 약속했다.
요산 고을의 원 노릇을 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대를 소려에서 만났는데, 안색은 초췌하고 정신도 상해 있어 남몰래 걱정했다. 그러나 하늘이 그대 같은 사람을 낳았는데 어찌 이런 정도에서 그치겠는가, 그대처럼 도량이 넓고 덕이 두터운 사람이라면 반드시 오래 살고 잘될 것이니, 슬픔이 다하면 다시 좋은 날이 오리라 여겼다.
얼마 전, 그대가 상소를 올리면서 흰 병풍 종이를 구한다는 말을 들었고, 가슴앓이가 갑자기 생겨 걱정이라는 소식도 들었지만, 나는 그저 한때의 우연한 병이려니 여겼다. 그런데 닷새도 지나지 않아 갑자기 부고가 날아들었으니, 이것이 정말인가, 꿈인가? 어찌 이런 소식이 내 귀에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그대가 죽은 것이 누군가의 헐뜯음 때문인가, 아니면 가슴앓이 때문인가?
그 아픔이 정녕 헐뜯음에서 비롯된 것인가? 눈물을 거두고 소리 내어 우니 창자가 찢기고 간이 무너지는 듯하다. 높은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해마저 빛을 잃은 것만 같다.
그대처럼 넓은 도량과 두터운 덕을 하늘이 무슨 뜻이 있어 이 세상에 내었다면, 어째서 이제 와 문득 앗아간단 말인가? 하늘의 뜻이란 참으로 믿기 어렵구나. 나는 본래 친구가 적어 오직 그대만을 믿고 지냈는데, 이제 그대를 잃었으니 나는 또 누구와 짝하겠는가? 생각한 바가 있어도 누구와 상의하며, 의심나는 바가 있어도 누구에게 물어보겠는가? 넘어지면 누가 나를 붙잡아 주고, 물에 빠지면 누가 나를 건져 주겠는가? 인생살이는 험하고 벗을 사귀는 일은 구름처럼 이랬다저랬다 하지만, 그대와 나는 오직 처음 먹은 마음 하나만을 간직해 왔는데 이제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옛날 초나라의 장석이라는 목수는 함께 재주를 겨루던 영땅 사람이 죽고 나자 다시는 도끼를 쓰지 않았고, 백아는 자기 음악을 가장 잘 알아주던 벗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어 버렸다고 한다. 이제 온 세상을 둘러보아도 나는 그저 외로운 그림자 하나로 남았을 뿐이다.
아, 슬프다. 섬강에서 함께 살자던 약속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채 몇십 년도 지나지 않아 그대가 먼저 죽어 저승 사람이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이제 살아 있는 나 또한 이 세상을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내 비록 아직 목숨은 붙어 있다 해도 비방과 헐뜯음이 뒤엉켜 있으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차라리 죽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칭찬도 헐뜯음도, 옳고 그름도, 근심도 즐거움도, 영예도 욕됨도 모른 채 제 마음 가는 대로 텅 빈 산에 홀로 누워 하늘을 이웃 삼고 해와 달을 벗 삼아 자기만의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다. 나 또한 오래지 않아 저승으로 그대를 따라가 이 즐거움을 함께 누리며 젊은 시절의 우정을 이어 가리니, 이렇게 슬퍼하며 그대를 그리워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도 한 잔 술을 그대에게 올리며 이렇게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넋이여, 아는가 모르는가? 물어도 대답이 없으니 내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으랴. 아, 슬프다.
죽은 아내를 위한 제문 (서기 1609년 10월 3일, 양력 추정)
그대는 성품이 공손하고 정성스러웠고
그 덕은 그윽하고 고요했네
일찍이 시어머니를 섬겨
시어머니의 마음이 몹시도 흡족했었네
죽어서도 시어머니를 따라
이 산에 와 묻혔구려
황량한 들판엔 안개가 자욱하고
달빛은 처량하고 서리는 차갑네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넋
그 홀로 있는 그림자 얼마나 서러울까
십팔 년이 지나
남편이 귀하게 되어 높은 벼슬에 올랐네
은혜로이 추증하라는
조서가 내려왔네
가난하던 시절 함께 고생하며
내가 높은 벼슬에 오르기를 빌었건만
정작 벼슬에 오르니 그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라
추증의 은혜만 부질없이 내려졌네
어찌하면 이 영화를 함께 누릴 수 있을까
내 마음 아득하기만 하네
그대의 넋이 아는 바 있다면
그대 또한 눈물 줄줄 흘리리라
나라에서 내린 술 한 잔 받아 드시게
서러움에 나도 눈물이 줄줄 흐르네
심장원을 위한 제문 (서기 1607년 11월 2일, 양력 추정)
아, 형은
일찍부터 학문을 갈고닦아
문장이 가멸찼네
하손과 유준처럼 화려한 글을 지었고
온정균과 이상은처럼
시단을 독차지했네
상자 속에 쌓인 백 편의 글이
마치 구슬처럼 찬란했지만
끝내 과거에 한 번도 급제하지 못하니
사람마다 안타까워하며 탄식했네
선비의 푸른 도포는 해지고 낡았으며
드넓은 조정에는 발붙일 곳 하나 없었네
운명이려니 하고 편안히 여겨
오직 붓과 벼루, 종이와 먹만을 벗 삼았네
강과 산을 벗 삼아 호탕하게 노닐고
글과 역사에 마음껏 빠져 지냈네
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아
등잔 밑에서 잔글씨를 쓰며
그렇게 즐기다가 세상을 떠났으니
무엇을 원망하고 무엇을 슬퍼하리
공경히 조상의 뜻을 이어받아
물려받은 가업을 욕되게 하지 않았네
초라한 무덤은
감천 물가에 있구려
맹동야처럼 재주 있어도 자식이 없으니
하늘의 이치도 믿을 수가 없구나
산이 멀리 가로막혀
궤연 앞에 가서 울지도 못하고
글을 보내 제사를 올리니
눈물만 하염없이 쏟아지네
(용어) 하손과 유준 — 중국 남북조 시대의 문인들로, 시문을 잘 짓기로 이름났다. / 온정균과 이상은 — 중국 당나라 말기의 시인들로, 두 사람 모두 시를 잘 짓기로 이름났다. / 맹동야 — 중국 당나라 시인 맹교의 호이다. 맹교에게 자식이 없었다는 데서, 시에 뛰어났으나 마찬가지로 자식이 없던 심장원의 처지를 빗대어 말한 것이다. / 감천 — 심장원의 무덤이 있는 강가의 이름으로 보인다.
사명당 유정 스님을 위한 제문 (서기 1610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부처께서 말씀하시길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 하셨는데
지금 그대가 죽었다 하니
이것이 참인가 거짓인가
죽음이 없다면 누가 죽으며
태어남이 없다면 누가 태어나는가
사대마저 헛것이라면
어디가 저승이고 어디가 이승인가
한결같은 마니구슬은
만고에 닳거나 이지러지지 않듯이
한 점 밝은 넋은
물에 비친 가을 달과 같으리
큰 화두를 다 마치고
큰 인연을 다 끊고서
한순간에
서방정토로 뛰어넘어 가셨네
말 없는 글로써
죽음이 없는 이를 조문하니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허공을 깨뜨려 버리네
바라건대 흠향하소서
(용어) 사대 — 불교에서 세상 모든 것을 이루는 네 가지 요소, 곧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이 네 가지로 이루어진 사람의 몸을 가리킨다.
성소부부고 제15권 · 문부 12 · 행장
출처: 성소부부고 제15권, 문부 12, 행장
배경: 행장은 죽은 이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는 전기문이다. 여기에는 허균이 자신의 첫 부인 김씨의 생애를 직접 기록한 글 한 편이 실려 있으며, 임진왜란 피난길에서 그녀가 겪은 고초와 스물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사연이 상세히 담겨 있다. 앞서 제문에 실린 "죽은 아내를 위한 제문"과 함께 읽으면 좋다.
먼저 세상을 뜬 아내 김씨의 생애를 적다 (서기 1609년 10월 3일, 양력 추정)
부인의 성은 김씨로, 서울에서 손꼽히던 명문가 출신이다. 고려 때 정승을 지낸 김방경의 현손인 척약재 김구용은 고려 말에 이름을 떨쳐 벼슬이 삼사 좌사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사대를 내려온 김윤종은 무과에 급제하여 절도사를 지냈고, 그 아들 김진기는 경자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별제로 첫 벼슬을 얻었다. 김진기가 낳은 아들 김대섭 역시 계유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도사로 첫 벼슬을 시작했다. 김대섭은 관찰사를 지낸 심전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인은 바로 그 둘째 딸이다.
부인은 1571년(선조 4년)에 태어나, 열다섯 살에 우리 집안으로 시집왔다. 성격이 조심스럽고 성실하며 꾸밈이 없었고, 길쌈하는 일에 부지런하여 조금도 게으른 법이 없었으며, 말수가 적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시어머니를 섬기는 태도가 매우 공손하여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몸소 문안을 드렸고, 음식을 올릴 때는 꼭 먼저 맛을 본 뒤에 드렸다. 철이 바뀔 때마다 제철 음식을 풍성하게 마련해 드렸다.
종들을 다스릴 때는 엄격했지만 잘못을 저질러도 너그럽게 용서했고, 욕설로 꾸짖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시어머니께서는 늘 "우리 집 어진 며느리로다" 하며 칭찬하셨다.
내가 한창 젊었을 때 아내에게 짓궂게 굴며 장난치기를 좋아했는데도, 아내는 싫은 내색을 얼굴에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다. 다만 내가 어쩌다 조금이라도 방자하게 굴면 반드시 이렇게 말하곤 했다.
"군자의 처신은 마땅히 엄중해야지요. 옛사람은 술집이나 찻집에도 드나들지 않았다는데, 하물며 그보다 더한 짓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부끄러워, 이따금 스스로를 다잡곤 했다. 아내는 또 늘 나에게 공부에 힘쓰라고 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 부모를 영화롭게 하고 제 몸에도 이롭게 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은 가난하고 시어머님은 이미 연로하시니, 재주만 믿고 허송세월해서는 안 됩니다. 세월은 빨리 흐르니, 나중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592년(선조 25년) 왜적을 피해 다닐 때, 마침 아내는 임신 중이었는데도 지친 몸을 이끌고 단천까지 가서 7월 7일에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이틀 뒤 왜적이 갑자기 들이닥쳐, 순변사 이영이 물러나 마천령을 지키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를 이끌고 밤을 새워 고개를 넘어 임명역에 이르렀는데, 그때 아내는 기력이 다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마침 성이 같은 집안사람 허행이 우리를 맞아 함께 바닷가 섬으로 피란했지만,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억지로 몸을 이끌고 산성원에 사는 백성 박논억의 집에 이르렀는데, 열흘째 되던 날 저녁 아내는 그만 숨을 거두었다. 소를 팔아 관을 마련하고 옷을 찢어 염을 했으나, 몸에서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아 차마 묻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왜적이 성진창을 친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장인어른이 서둘러 명하여 뒷산에 임시로 묻게 하였다. 그때 아내의 나이 스물둘이었고, 나와 함께 산 지 여덟 해째였다.
아, 슬프다. 그렇게 낳은 아들은 젖을 먹지 못해 일찍 세상을 떠났고, 맏딸은 자라서 진사 이사성에게 시집가 아들딸을 하나씩 낳았다.
1609년(광해군 1년) 내가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형조 참의에 임명되니, 관례에 따라 아내에게도 숙부인이라는 칭호가 추증되었다. 아, 그토록 맑은 덕을 지니고도 오래 살지 못한 데다 뒤를 이을 아들마저 없으니, 하늘의 뜻도 믿기 어렵구나.
우리가 한창 가난하던 시절, 나는 아내와 마주 앉아 짧은 등잔 심지를 돋우며 가물거리는 불빛 아래 밤새 책을 펼쳐 놓고 글을 읽곤 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싫증을 내는 기색을 보이면 아내는 꼭 농담 삼아 이렇게 말했다.
"게으름 부리지 마세요. 안 그러면 제 부인첩이 늦어집니다."
그로부터 열여덟 해가 지난 지금, 나는 그저 빈 칭호 문서 한 장을 아내의 영전에 바칠 뿐이니, 그 영예를 누릴 사람이 나와 함께 젊은 시절을 보낸 바로 그 사람이 아닐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대가 만약 저세상에서도 이 사실을 안다면, 반드시 슬퍼하리라.
아, 슬프다. 1595년(선조 28년) 가을, 길주에서 돌아와 강릉 바깥채 근처에 임시로 묻어 두었다가, 1600년(선조 33년) 3월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뒤따라 원주 서면 노수 땅에 영원히 묻었다. 그 무덤은 선산 왼쪽에 있으며, 동북동쪽을 등지고 서남서쪽을 바라보는 자리다. 삼가 이 글로 아내가 살아온 자취를 적는다.
(용어)
척약재 김구용: 고려 말의 학자로, 척약재는 그의 호이다.
삼사 좌사: 고려시대에 나라의 재정을 맡아보던 관청인 삼사의 높은 벼슬.
사마시: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 시험.
도사: 관찰사를 보좌하며 지방 행정과 감찰을 맡던 벼슬.
관찰사: 조선시대 한 도를 다스리던 최고 지방 장관.
순변사: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왕명을 받아 파견되던 군사 지휘관.
마천령·임명역·산성원·성진창: 각각 함경도 일대의 고개, 역참, 지명, 그리고 곡식을 쌓아 두던 관아 창고를 가리킨다.
당상관: 정삼품 이상의 높은 벼슬아치를 이르던 말.
형조 참의: 형조(오늘날의 법무부에 해당하는 관청)의 정삼품 벼슬.
숙부인: 정삼품·종삼품 벼슬아치의 아내에게 나라에서 내리던 칭호.
진사: 과거 시험 가운데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을 이르는 말.
부인첩: 나라에서 벼슬아치 아내의 정식 칭호를 인정하며 내려 주던 문서.
인좌 신향: 무덤이 앉은 방향을 가리키는 전통 풍수 용어로, 동북동쪽을 등지고 서남서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뜻한다.
성소부부고 제16권
10. 00:07
성소부부고 제16권 · 문부 13 · 비(碑) · 신도비(神道碑) · 갈(碣)
출처: 성소부부고 제16권, 문부 13, 비·신도비·갈
배경: 제16권은 문부 열세 번째 갈래로, "비(碑)", "신도비(神道碑)", "갈(碣)" 세 하위 갈래를 함께 묶고 있다. "비"는 사찰이나 사당을 세우거나 고쳐 세운 내력을 새긴 비석의 글이고, "신도비"와 "갈"은 세상을 떠난 인물의 행적을 기려 무덤 근처에 세우는 비석의 글이다. 이 권에는 임진왜란 때 나타났다는 관왕(관우) 신령을 기려 세운 사당비, 동해 용왕을 모신 사당을 고쳐 세운 내력을 새긴 비, 금강산 도솔원 미타전을 중수한 내력을 새긴 비 세 편의 비문과, 문신 최연의 신도비명, 그리고 홍문관 교리 임수정과 화가 이흥효 두 사람의 묘갈명이 실려 있다. 각 비문 끝에는 그 내용을 요약하여 찬양하는 운문인 "송(頌)" 또는 "명(銘)"이 함께 붙어 있다.
임금의 명으로 세운 현령관왕묘비 (서기 1602년 11월 14일, 양력)
이 비문을 지어 올린 뒤, 대제학 심희수가 비문을 지은 사람의 벼슬이 낮다는 이유로 자신이 다시 짓겠다고 나섰는데, 마침 비석을 굳이 세울 필요는 없다는 임금의 하교가 있었다. 아마도 명나라에서 파견한 관리를 의식해서 비석 세우는 일 자체를 그대로 덮어 둔 것이 아닐까 싶다.
1602년 10월 초하루, 임금께서 태복시 관리인 신 허균을 부르시기에 궁궐 문 앞으로 나아가니,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리셨다.
"나는 덕이 부족하여 선왕이 이루신 업적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하고 있는 터에, 근래 왜구의 침입을 받아 서울 밖으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 나라의 운명을 스스로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께서는 대대로 이어 온 충성을 헤아리시고, 또 우리가 의리를 지켜 외적에 맞서 싸운 정성을 살피시어 이 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다 하시고, 조정의 반대 의견을 힘써 물리치시며 외적을 치기로 결단을 내리셨다. 그리하여 앞뒤로 병사 수십만을 보내시고 황제의 사사로운 재물 수백만 냥을 내놓으시어 중국 안이 떠들썩해져도 개의치 않으셨다. 그 덕분에 마침내 서울을 되찾아 나로 하여금 종묘를 다시 지킬 수 있게 해 주셨다. 이로써 수천 리 이 땅에 사는 새와 짐승까지도 평안히 살 수 있게 되었고, 바다는 잔잔해졌으며 중국의 울타리인 우리나라는 더욱 견고해졌으니, 이는 바로 성스러운 황제께서 먼 지방을 어루만지고 작은 나라를 보살피시는 자애로운 마음이 역대 그 어느 임금보다 뛰어나신 까닭이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 조상들께서 대대로 황제께 독실히 공순해 온 보람일 뿐이니, 내가 무슨 힘이 되었겠는가.
지난번 우리나라에 왔던 명나라 장수와 병사들이 하나같이 말하기를, '전투가 있는 날이면 번번이 관왕(관우를 이르는 말)의 신령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덕분에 평양에서의 승리, 한산도 전투, 그리고 충청·전라·경상 세 길에서 왜구를 쫓던 싸움에서 모두 그 신묘한 자취를 드러내시어 황제의 위엄을 널리 펴고 왜구를 크게 겁먹게 하시고 사악한 기운을 쓸어버려, 마침내 삼한의 옛 땅을 속국에게 돌려줄 수 있게 되었으니, 제사를 지내어 그 은혜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황제께서는 '그렇구나' 하시며 즉시 사천 금을 신하 만세덕에게 내려 조선의 서울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게 하셨다. 만세덕은 황제의 명을 받아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관공의 혼령은 본디 중국에서 나타나셨지만 왜구를 평정하는 싸움에도 함께하시어 조선을 위해 애써 주셨으니 마땅히 제사를 지내어 숭배해야 한다. 황제께서 먼저 그 비용을 보내셨으니, 왕은 이 명을 받들어 잘 주선해서 황제의 뜻을 실행하여 그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나는 이 명을 듣고 공손히 '관왕의 덕과 황제의 명을 이 소자가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하고는, 곧바로 공조 판서에게 명하여 산에서 재목을 베어 오고 쇠를 다루는 도구와 기와를 굽는 도구, 그리고 여러 기술자들을 모아 공사에 착수하게 했다. 그리고 흥인문 동쪽에 터를 잡고 대신에게 명하여 이 일을 감독하게 했다.
1600년 겨울에 공사를 시작하여 2년 뒤 봄에 완공하였다. 소상과 그림, 큰 전당과 곁채, 문과 창고, 북과 종을 두는 누각 등 백여 칸을 모두 중국의 격식에 따라 짓고, 크게 제사를 올려 낙성식을 거행했다. 봄가을과 여름겨울 사철의 제사와 초하루 보름의 분향은 예조의 관리가 엄격히 수행하고 교위 한 사람을 파견하여 이를 지켜보게 했다.
그리고 명나라에 현판 글씨를 청하였는데, 올해 황제의 뜻을 받들어 '현령소덕왕 관공지묘'라는 현판을 문에 걸게 하시고 제물 한 벌을 내려 주셨다. 내가 생각건대, 이 왕이란 바로 한나라 수정후 관공, 곧 관우 운장(운장은 관우의 자)이다.
공은 충렬과 의로운 용맹으로 소열왕 유비를 섬기며 한나라 황실의 부흥을 도모하여, 한수 일대를 범 같은 눈초리로 감시하니 그 위세가 온 중국에 떨쳤다. 그리하여 조조 같은 간웅도 두려워 도읍을 옮겨 피하려 했고, 손권 같은 애송이도 겁에 질려 감히 맞서지 못했는데,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곧 하늘이 한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지 어찌 공의 잘못이겠는가.
이런 까닭에 공의 충성스럽고 강개한 뜻은 죽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아,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히려 여러 신령들을 불러 모으고 바람과 우레를 몰아 그 위엄 있는 영험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옛날 명 태조 주원장이 파양호에서 싸울 때 황제가 탄 배가 얕은 물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게 되자 모든 병사들이 새파랗게 질렸는데, 이때 관왕이 구름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며 바람의 방향을 돌려 주어 적의 함선을 불태우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는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그래서 온 천하가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고 호구마다 예를 올리는 것은 바로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나라의 난리까지 구해 주시어 황제께서 동방에 대해 갖고 계셨던 근심을 덜어 드렸고, 우리나라 백만 백성이 그 복을 입어 평안하게 되었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당을 지어 후세까지 길이길이 제사 지내려 하는 것도 마땅한 일이라 하겠다.
나는 우러러 생각건대, 황제의 은혜와 관왕의 덕을 감히 잊을 수가 없다. 이 마음을 글로 지어 후대에 전하고자 한다. 너는 글을 짓는 신하이니 나의 뜻을 돌에 새겨 길이 보존하게 하라."
신 허균은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하고 물러 나와, 이 교지를 글머리에 싣고 이어서 칭송하는 노래를 짓는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한나라의 불꽃이 사그라지고 도적떼가 날뛰니
옥황상제께서 이를 물리치고자
밝으신 분을 이 땅에 내리셨네
유비·장비와 의로 형제를 맺고
칼을 들고 말에 올라 내달리니
그 기운이 움직여 온 누리를 밝게 비추었네
문추의 목을 베고 안량을 무찌르니
그 날카로운 창끝 당할 자 없어
뭇 영웅들이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었네
면수와 양수를 범처럼 넘나들며
우금을 항복시키고 방덕을 죽이니
온 중국이 그 위세에 쏠렸다네
촉을 지키니 촉이 강성해지고
오를 위협하니 오가 두려워 떨었고
조조를 노려보니 조조가 근심에 잠겼는데
상서로운 조짐은 사라지고 불길한 구름만 일어
무운이 다하고 마니
그 몸을 바쳐 충절을 지켰네
그 영검한 신령이 크게 드날려
나타나는 감응이 더욱 빛나서
마침내 하늘과 통하는 감응을 드러냈다네
파양호 싸움을 도와 순조롭게 이끌어
거센 바람 몰아쳐 적선을 불태우니
황제의 대업이 이로써 융성해졌다네
성이 다른 이에게도 왕의 칭호를 내리시고
사람마다 제물 올리고 집집마다 향 피워
그 덕에 보답하고 그 공에 보답하네
사나운 기운이 동방에 모여들어
왜적의 침략이 한창 기세를 떨쳐
지친 우리 병사를 몰아 적과 싸울 때
관왕의 신령이 앞장서서
선봉에서 천둥처럼 부숴 대니
뒤에서는 우레의 신처럼 굳세어져
수많은 적을 무찔러 크게 상처 입히고
마침내 저 왜국을 평정하여
우리나라를 다시금 안정시켜 주셨기에
이 변방 나라가 이제 평안해졌으니
그 높은 공훈을 어찌 감히 잊으리오
위로 황제의 마음을 감동시키니
황제께서 곳간의 재물을 내려주시고
훌륭한 예장나무를 베어다가
터를 잡아 공사를 시작하였네
높고 높은 전당에
날개처럼 뻗은 곁채와 둘러친 회랑
곱게 단청을 입혔다네
겹겹이 늘어선 기둥과 둘러친 담장
쟁쟁 울리는 종소리와 북소리
고요히 자리한 사당일세
폐백을 올리고 술잔을 부어
온갖 제물을 정성껏 바치니
관왕께서 크게 기뻐하시리
바람처럼 빠른 수레에 배자를 걸치고
구름 깃발 펄럭이며
강림하시어 이 제사를 흠향하시네
이 정성에 흡족하시어 상서로움을 내려 주시고
불길처럼 일어나고 번창하게 하시며
온갖 무기를 거두게 하시어
황제의 나라를 길이 지켜 주시고
포악한 무리를 영영 꺾어 주시어
천자의 큰 법도가 바로 서게 하소서
우뚝 솟은 사당의 담장
반듯한 이 터가 오래오래 이어져
제삿술과 음식이 언제나 풍성하리라
신은 보잘것없는 재주나마 다하여
이 칭송하는 글을 지어서
길이 후대에 전하옵니다
(용어) 문추와 안량은 후한 말 원소의 장수로, 안량은 관우에게 죽임을 당했다. 면수는 중국 섬서성의 강으로 동남으로 흘러 한수가 되며, 양수는 한수의 지류다. 우금과 방덕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수로, 조조를 섬기다 관우와 싸웠는데 우금은 항복했고 방덕은 홍수에 휩쓸려 죽었다. 양당은 소매 없는 저고리, 곧 배자를 뜻한다.
다시 고쳐 세운 동해용왕묘비 (서기 1607년 5월 10일, 양력 추정)
1604년 7월, 양양부 동산에 사는 어부 지익복이 배를 타고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바람이 그 배를 몰아가는데 몹시 빠른 속도였다. 이렇게 하루 밤낮을 달려 동쪽으로 한 섬에 닿았는데,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그를 이끌어 왕궁으로 데려갔다.
왕궁에 나아가니 뜰에는 창을 든 병사들의 경계가 몹시 삼엄했다. 왕이라 불리는 이가 보랏빛 옷을 입고 궁전에 앉아 말했다. "내가 강릉에서 제사를 받아 온 지 수천 년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강릉부 사람들에게 쫓겨 이곳으로 옮겨 와 보니 좋은 곳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상제께 호소한 끝에 이제 비로소 허락을 받았으니, 너의 힘을 빌려 관원에게 이 뜻을 전하고 옛 터인 내 집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너는 이 고을을 다스리는 관리에게 이를 알리라.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몰아 재앙을 내릴 것이니, 백성들이 나로 인한 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러고는 바람을 일으켜 그를 돌려보냈는데, 하루도 채 못 되어 동해 바닷가로 돌아왔다.
어부는 몹시 이상히 여겼지만 감히 관아에 직접 나아가 스스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향임 이석림에게 말하여 대신 관에 보고하게 했다.
부사 홍여성은 이 말을 듣고 몹시 이상하게 여겨 옛 기록을 뒤져 상고해 보니, 1536년에 사당이 강릉부 정동촌에서 이곳 양양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감히 귀신의 말을 그대로 근거로 삼을 수는 없었기에, 폐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당을 옛 자리로 되돌려 달라고 관찰사에게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듬해인 1605년 7월, 관동 지방에 큰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져 안변과 통천에서부터 남쪽으로 안동에 이르기까지 수십 고을이 혹독한 수해를 입었다. 죽은 백성과 가축의 수가 수만에 이르렀는데, 그중에서도 강릉이 특히 심했다.
부사 홍공은 더욱 이상하게 여겨 지방 관리와 백성들을 불러 의논하며 말했다. "귀신이 사당을 옮기지 않으면 해를 내리겠다고 경고한 지 일 년 만에 이런 수해가 났으니, 이야말로 그 징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 힘으로는 사당을 옮길 수 없지만, 살펴보니 그 사당이 퇴락하고 무너진 채 보수되지 않고 있다. 우리가 힘을 모아 이를 새롭게 단장하여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우리가 할 도리를 다하고 정성으로 받든다면, 신께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시겠는가." 모두가 "그렇습니다" 하니, 마침내 녹봉을 떼어 목수와 인부를 모으고 향임에게 감독을 맡겨, 기와를 갈고 벽을 바르고 담장을 둘러 쌓고 신문을 만들고 마당을 고르는 일을 두어 달 만에 마쳤다.
그런 다음 홍공이 몸소 제사를 지내니, 이때부터 양양에는 큰바람이 없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강릉부 사람들이 이를 신기하게 여겨 비석을 세워 후대에 전하고자 내게 글을 청하기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사해의 용왕을 위해 사당을 세우되 지리적으로 그 중심이 되는 곳을 가려 설치했는데, 강릉은 동해의 한가운데이자 정동쪽에 해당하고, 더욱이 고을 한가운데가 앞이 탁 트여 밝은 땅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정동'이라 이름 짓고 신라 때부터 이곳에서 용왕께 제사를 지내 왔다. 그런데 공희왕(중종) 때, 강릉부 출신으로 장원 급제한 심언경·심언광 형제가 용왕의 사당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관찰사에게 말하여 임금께 글을 올리고, 아무 까닭도 없이 사당을 옮겨 버렸다. 요즘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동해 용왕의 사당은 양양에 있는데 지금까지도 복구되지 않고 있다. 현재의 사당 자리는 낮고 더러워 귀신의 영을 편안케 하기에는 적당치 않다'고 적혀 있으니, 귀신이 노여워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심언광 형제가 몰락한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며, 을사년의 그 바람과 비의 재변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신이 사람에게 분명히 고한 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은 다들 미혹한 탓이다. 부사가 사당을 고쳐 지은 것은 예에 맞는 처사이니, 어찌 이를 그냥 덮어 둘 수 있겠는가."
이렇게 갖추어 기록하고, 이에 칭송하는 노래를 짓는다.
바다는 천지 사이에서
가장 큰 존재인데
그 누가 그 가운데서 왕이 되어
바람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하는가
굳세고 굳센 용왕신이시라
하늘의 용이라도 이만 못하리
복을 내리고 재앙을 내리시매
그 신령스러운 응보 참으로 미덥도다
누가 그 낮은 곳으로
내 집을 옮기게 했던가
적은 비용을 아끼려다
신의 노여움을 산 것도 마땅하네
귀신이 머무는 곳은
조개 대궐과 구슬 궁전인데
속세의 초라한 거처를
무엇하러 그리워하고 서운해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정성과 공경은
신께서 흠향하시는 바이니
공경하지 않는 자는 방자한 것이고
정성이 없으면 곧 게으른 것이라
땅을 쓸고 물 한 그릇 떠 놓아도
정성과 공경이 있으면 신이 강림하시지만
좋은 자리에 좋은 음식을 차려 놓아도
방자하면 흠향하지 않으시네
옮겨 놓고 더럽힌 것은
곧 게으르고 방자한 일이니
어찌 제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기뻐하거나 탄식하시겠는가
알려 주어도 따르지 않으니
홍수의 재앙도 마땅하도다
온화한 이 고을 원님이
공경으로 신을 받들어
사당을 새로 단장하고
제수를 넉넉히 차려 제사를 올리니
신께서 돌아보시고 기뻐하시어
바람처럼 오시어 흠향하시네
공경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받든다면
어찌 강릉이니 양양이니 가리시겠는가
원컨대 이곳에 길이 진정하시어
해마다 풍년이 들도록 도와주시고
백성들이 다치거나 요절하지 않게 하시고
전란이 미치지 못하게 하시어
길이길이 만년이 다하도록
우리 고을을 도와주소서
(용어) 심언광은 조선 중종 때 사람으로 자는 사형, 호는 어촌이며, 문과에 급제하고 형과 함께 임금께 청하여 예조 판서에 이르렀다. 문장에 뛰어나 《어촌집》을 남겼다.
도솔원 미타전을 다시 고쳐 세운 비 (서기 1602년 9월 30일, 양력 추정)
도헌 벼슬의 송언진이 이 글을 보자마자 곧바로 삼척과 관련한 탄핵 상소가 올라왔다.
금강산 동쪽에 내수라는 고개가 있다. 그 고개 아래로 6~7리쯤 가서 북쪽으로 꺾어 조금 더 가면 도솔원이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고려 중엽에 창건되었다.
이곳에는 아미타불상 한 구가 모셔져 있는데, 일찍부터 신령하고 기이한 일을 자주 보여 사람들이 다투어 향을 올리고 복을 빌었다. 이 절은 조선에 들어와서는 전각이 무너져도 고치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1549년, 덕흥대원군(선조의 아버지) 부인 정씨가 사재를 내어 승려 법우에게 이를 고치게 하니, 짜임새가 몹시 아름다웠다. 불전이 완성되자 지금의 임금께서 태어나셨고, 그 밖에도 상서로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부인은 이 모든 것을 절을 수리한 공덕으로 돌렸다.
또 화원 이배련과 그의 아들 이흥효에게 명하여 붉은 비단에 금물로 용선을 맞이하는 그림을 그리게 하여 큰 족자로 만들어 서쪽 벽에 걸고, 전하를 위해 복을 빌었다. 그 붓놀림이 뛰는 듯 나는 듯 엄숙하여 불전과 더불어 그 장엄함을 겨룰 만했다.
그 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시어 천고에 짝할 데 없는 태평의 기틀과 중흥의 대업을 여셨으니, 아, 이것이 어찌 부처의 힘이 아니며, 대원군 부인의 정성이 천지를 감동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옛날 중악산에 빌어 하나라 계왕을 낳고 니구산에 빌어 공자를 낳았다는 일과 견줄 만한, 참으로 세상에 드문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이 절을 관리하던 이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마침내 절이 황폐해지고 수리되지 않아, 그 족자는 표훈사로 옮겨지게 되었다.
1599년 의인왕후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는 내수사에 명하여 일을 맡을 승려를 보내 이를 수리하게 하시고, 왕실의 사사로운 재물을 후하게 내려 이 일에 쓰게 하셨다. 승려 도관이 그 일을 주관했는데, 일이 완성되기 전에 왕후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내수사에서 공사를 끝내지 못한 것을 아뢰니, 임금께서 이르셨다. "어머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고 돌아가신 왕후가 그 뒤를 이은 일인데, 중도에 그만두어 그 정성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 대군에게 지급하는 공물과 폐백 약간을 보내어 완성하도록 하라."
도관은 이 재물을 받아 공사를 독촉하여 마침내 완성하고, 그 남은 돈으로 이정을 시켜 백의관음상을 그려 동쪽 벽에 걸고, 용선 족자를 옮겨다 서쪽 벽에 걸어 놓으니, 동쪽과 서쪽이 서로 마주 보게 되었다. 그림이 훌륭하여 법당에 들어서면 환하게 사람을 비추니, 금빛 푸른빛 단청이 도리어 그 빛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어 미타회를 열어 낙성식을 거행하니 채색 구름과 흰 학, 하늘의 꽃 같은 신이한 일이 나타나, 시주한 사람들이 모두 큰절을 올렸다.
1602년 가을, 도관은 사람을 내게 보내 이 일을 글로 지어 돌에 새겨 달라고 청하였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라에서 이단을 배척하고 불교를 숭상하지 않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사람이 부처와 신령에게 복을 비는 것도 하나의 길이다. 위로는 바른 학문을 높여 깨끗한 선비들이 이를 익히고, 아래로는 부처의 인연과 인과응보로 백성들의 마음을 경계한다면, 그 정치는 균형 잡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절의 중수는 처음에 대원군 부인께서 시작하시고 의인왕후께서 이를 이어 마치셨으니, 두 분이 전하를 위해 쏟으신 정성은 모두 지극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편견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마땅히 그 공사를 끝마치시어 선대 부인의 뜻을 이루고 왕비의 소원을 완성하셨으니, 이를 어찌 지난 시대의 왕들이 이단의 가르침을 숭상하여 국력을 낭비하고 탑과 사당을 높이 세워 나라의 운수가 오래가기를 빌다가 마침내 혼란과 멸망을 초래한 일과 한데 묶어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글을 지어 기록하고 이어서 칭송하는 노래를 짓는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아아, 아미타 부처님은
헤아릴 수 없는 빛의 부처이시니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찾아와 기뻐하며
전각을 지어 높이 받드네
이 도솔천을
신묘하게 아름다운 구조로 지으니
땅에서는 금빛 연꽃이 솟아나네
오래도록 황폐했던 것을 고치신 분은
아, 우리의 성모이시고
그 뒤를 이어받아 그치지 않으신 분은
바로 우리 의인왕후시라
왕후와 왕의 어머니께서
왕을 위한 정성이 지극하시니
왕께서는 그 정성을 빼앗지 말라 하시고
공사를 재촉하여 완성하게 하셨네
층진 처마 고운 지붕에
금빛과 푸른빛을 곱게 칠했다네
이씨 성을 가진 세 화가가 그림을 그리니
고운 채색이 서로 어우러져 빛나네
용선 그림은 넓고 환하며
보배로운 그림은 빛을 뿜어내고
부처님 모습은 가장 아름다우니
사람들이 귀의함도 마땅하다네
이에 상서로움을 내리시어
큰 복과 작은 복을 두루 내려 주시니
온 세상 바다의 파도도 잠잠해지고
임금의 수명은 천억 년토록 길어
그 복록은 길이길이 이어지고
그 백성을 길이 도우시리
이 노래를 지어 돌에 새겨
천년토록 그 빛을 드리우리라
(용어) 이정은 조선 선조 때의 화가로 자는 공간, 호는 나옹·나재·나와·설악이며, 3대에 걸친 화가 집안 출신으로 열 살 때 이미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다. 산수화와 인물화에 뛰어났으며 서른 살에 요절했다.
신도비 — 한성부 판윤을 지낸 최연 공의 신도비명 (서기 1607년 5월 10일, 양력 추정)
공의 이름은 연이고 자는 연지이며, 강릉 사람이다. 아버지는 아무 벼슬을 지내고 훗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는 진사로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증조할아버지는 사간원 정언으로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니, 삼대 조상이 모두 공 덕분에 높은 벼슬을 받게 되었다. 어머니 김씨는 생원 아무개의 딸로 역시 정부인에 봉해졌다. 공은 1500년에 태어나 1519년에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1522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에서 문서 작성을 담당하다가 홍문관에 들어가 저작랑으로 승진했고, 호당에서 휴가를 받아 독서에 전념했으며, 이어 세자시강원 설서로 옮겼다가 곧 사서로 승진하고, 수찬·정언·지제교·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두루 지냈다.
밖으로 나가서는 충청 감영의 막료가 되었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가 다시 홍문관으로 돌아가 교리가 되었으며, 이조 정랑으로 옮겼다. 그 자리에 오래 있다가 검상으로 옮기고 사인으로 승진해서는 소세양을 따라 명나라 사신 시독을 맞이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돌아와서는 태복시 벼슬로 승진했다.
다시 홍문관으로 돌아가 응교가 되고, 전한·직제학·부제학으로 차례로 승진했으며, 대사간으로 옮겼다가 다시 승지로 승진했다. 1545년에는 도승지로서 공신 명단에 들어 품계가 오르고 동원군에 봉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성부윤으로 발탁되고 홍문관 제학을 겸하였다. 1546년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평양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는데, 조정에서는 그 죽음을 애도하여 관청에서 장례를 주관하고 좌찬성 겸 대제학으로 추증했다. 1577년에 다시 공신 작위를 받고 관계를 추증받았으며, 나머지 사항은 예전과 같다.
공은 천성이 호탕하고 한 번 들으면 곧 외우는 재주가 남보다 뛰어나, 하루에 만 자씩 외우고는 평생토록 잊지 않았다. 그래서 글을 쓸 때는 붓만 잡으면 바로 이루어졌고, 그 글은 찬란하여 볼만했다.
집안에서는 효성으로 부모님을 섬겼고 세 아우와의 우애가 극진했으며, 청렴결백하여 집에는 사사로운 재물이라고는 없었다. 직분을 수행할 때는 공손함으로 임하고 신중함으로 자신을 지켰으며, 조심스러워 남과 권세를 다투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심정, 김안로,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에도 몸을 온전히 보전하여 끝내 화를 입지 않았다.
소세양이 공을 천거하여 시독의 임무를 맡게 하였는데, 시를 짓는 재주가 넓고 컸다. 명나라 사신 설황문이 날마다 수십 편의 어려운 운자를 내놓았지만, 긴 작품을 짓는 일이나 온갖 문체를 공이 모두 감당하여 말 위에서 즉석으로 지어 올렸다. 그 시의 말과 뜻이 모두 아름다워 퇴휴 소세양이 몹시 감탄하며 칭찬했고, 명나라의 두 사신도 공의 재주를 알아보고 매우 우대했다.
중종대왕 말년에 오래도록 왕명을 짓는 일을 맡았으므로 조정에서 내리는 중대한 문서는 모두 공의 손에서 나왔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가 마땅히 대제학의 자리를 맡아야 한다고 여겼다.
당시에는 중종과 인종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시어 나라에 일이 많았다. 신광한은 글 지을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을 추천했으므로, 애사와 시호를 청하는 글, 사면령 같은 글은 모두 공이 대신 지었다. 중종의 애책문은 글이 매우 아름답고 유려하여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칭송하고 있다. 기재 신광한은 여러 차례 대제학의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고 공에게 넘겨주려 했다.
공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던 중 그의 동생이 도중에 세상을 떠나자, 공은 양친이 마음 아파하실 것을 염려하며 근심하다가 그것이 병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하늘이 그에게 맡긴 소임을 다 마치지 못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공은 아무 벼슬을 지낸 김씨 집안의 딸과 혼인하여, 사직 벼슬에 있는 아들 아무개를 낳았다. 손자는 둘인데 모두 무과에 급제했고, 증손은 넷인데 그중 최용은 진사였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예순 해가 되는 1607년 4월, 최용이 자기 아버지의 관을 갈아 다시 장사 지내고 공의 행장을 간행하고자 하여, 진주 고을 원으로 있던 나 허균에게 명문을 지어 줄 것을 청했다. 그는 나와 같은 고향 사람이다. 어찌 감히 글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산과 바다의 빼어난 기운이 모여
글재주가 풍성하니
중종을 섬겨 벼슬하며
옥당에서 이름을 드날렸네
왕명 짓는 솜씨가 전아하여
옛 중국의 명문장가들에 견줄 만하네
임금의 예복이 휘황하게 빛나고
생황과 종소리 쟁그랑 울리네
나라의 덕을 널리 펴고
임금의 다스림을 도왔네
이제 막 문형의 자리가 비었는데
공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니
임금께서 탄식하시고
글하는 선비들도 마음 아파하네
그 재주는 시들지 않고 남아
길이 그 향기를 남기리라
울창한 저 좋은 무덤은
신림의 언덕에 있으니
묘도비에 이 노래를 새겨
길이길이 후세에 알리노라
(용어) 소세양(호 양곡·퇴휴당)은 중종 때 문신으로 명나라 사신을 문장으로 응대하여 이름을 떨쳤고 좌찬성으로 은퇴했다. 심정은 중종반정 공신이었으나 훗날 기묘사화를 일으키고 스스로도 사사되었다. 김안로는 여러 차례 파직과 재등용을 거듭하며 권세를 휘두르다 사사되었다. 이기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으나 훗날 관직이 모두 삭탈되었다. 신광한(호 기재)은 영의정 신숙주의 손자로 문장과 필력이 뛰어났던 문신이다.
갈 — 홍문관 교리 임수정 공의 묘갈명 (서기 1607년 11월 4일, 양력 추정)
홍문관 교리 임공의 장례를 치른 이듬해 9월, 그의 부인인 의인(정·종 6품 문무관 아내에게 내리는 봉작) 김씨가 나 허균에게 부탁하며 말했다.
"제 남편이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 묘비를 세우려 했으나, 그의 관직이 복권되지 않아 세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임금의 은혜를 입어 그의 관작이 되돌아왔으니, 그 이름을 끝내 묻힌 채로 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제 남편의 행적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당신 말고는 없으며, 남편의 집안 내력과 벼슬살이에 대해서도 당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행장이나 가계 같은 것을 따로 보내지 않고 이렇게 부탁드리니, 저를 위해 이를 기록하여 후대에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나는 울면서 말했다. "아아, 슬프다. 내가 차마 내 친구의 묘비명을 써야 한단 말인가. 내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그와 알고 지낸 지 오래되었고 또한 교분이 두터웠으니,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상고해 보건대, 임씨는 풍천 출신이며 대대로 명문 거족이다. 아버지는 아무개로 이조 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는 승지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증조할아버지는 참봉으로 찬성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청주 한씨는 목사를 지낸 아무개의 딸이다.
그의 이름은 수정이요, 자는 약초다. 1570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뜻을 지녀 매우 어른스러웠고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라면서는 딱히 정해진 스승 밑에서 배우지 않았어도 학문이 날로 발전했고, 너그럽고 속이 깊어 의연하게 큰 도량을 지녔다. 기쁨과 노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남의 허물을 입에 올리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늘 겸손했다. 그래서 부모가 특히 그를 아꼈다.
1588년에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했는데, 그 명성이 높았다. 주관이 뚜렷하고 행동이 법도에 맞아 동료들이 그를 어렵게 여겼고, 모두 그가 훗날 재상이 될 것이라 말했다. 문장을 지을 때는 조리가 매우 분명했지만, 오래도록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다가 1597년 봄에야 비로소 을과에 급제하니 사람들이 모두 축하해 주었다.
사관으로 임명되니 그가 쓰는 기록과 논평이 매우 공평하여 동료들이 모두 탄복했다. 관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고 이어 세자시강원 사서로 임명되었는데, 세자에게 학문을 권하는 방식에 법도가 있었다.
사간원 정언이 되어서는 탄핵하고 규찰하는 일에 사사로운 정을 두지 않았고,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자 글을 올려 임금께서 자주 경연에 나오시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하게 여겼다.
1600년에 사헌부와 사간원이 서로 논쟁을 벌였는데, 그 처리는 온당했지만 동료 신하들의 의견은 매우 치우쳐 있었다. 그러자 그는 분연히 말했다. "사간원에서 김씨와 남씨를 공격한 것도 이미 잘못인데, 사헌부에서 또 다른 중신을 끌어들여 보복하려 하니, 양사가 똑같이 의롭지 못하다. 양사 모두 교체할 것을 청해야 한다." 동료들은 결코 안 된다고 했지만, 그는 끝내 서명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조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이는 그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가 끌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분한 기색도 없이 말했다. "남씨와 홍씨는 모두 나와 가까운 사이인데, 옥당이 남씨를 공격한다면 내가 어찌 그대로 따르겠는가. 이번 논쟁은 큰 시비거리가 될 만한 것도 아닌데, 내가 그저 우정을 지키려다 불행히 비난을 받게 되었으니, 잘못은 저쪽에 있다."
그 뒤 사헌부 지평(정오품)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을 때 시국의 여론이 또다시 홍씨를 공격했다. 그가 그때 홍씨 편에 서 있었으므로, 홍씨를 공격하는 자들은 바로 그가 그 일에 가담했다고 의심하여 심하게 꾸짖었지만, 그는 잠자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 일로 그는 면직되고 말았다.
광릉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지내는 동안 아침저녁으로 늘 즐거운 마음으로 지냈고, 정호·정이 형제의 책을 열심히 읽어 이치를 밝히면서 세상일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1605년 할머니의 상을 당해 슬픔으로 몸이 상해 지팡이를 짚고서도 상주 노릇을 하기가 벅찼으므로, 어머니께서 예법을 다소 완화하라고 권했지만 따르지 않았다. 그러다 이듬해 8월에 끝내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했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공을 잘 아는 선비들 가운데 눈물 흘리며 조문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해 10월 조상의 무덤 곁에 묻혔다.
병마절도사를 지낸 아무개의 딸 김씨는 현숙하고 행실이 반듯했다.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는데, 맏딸은 선비 이상문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아직 어리니, 그가 남긴 복은 마땅히 이 아이들에게 있을 것이다.
그와 나, 그리고 지금 재상으로 있는 최여이, 예조에 있는 임자승은 상곡에서 함께 자라 그 정이 형제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자승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그마저 떠나 버리니,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두 사람뿐이다.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 곤궁하고 형통한 것이 이토록 고르지 않으니, 앞으로 남은 일인들 어찌 온전하기를 기약할 수 있겠는가.
그와 나는 예전에 장난삼아 서로의 묘비문을 지어 준 일이 있었다. 그때 그가 말하기를 "내가 나이가 더 적으니, 내가 자네의 비문을 지어야겠지" 하기에, 나는 "앞일이란 알 수 없는 법일세. 세상에 어린아이의 무덤이 왜 있겠는가" 하며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었다. 아아, 슬프다. 나이 많고 몸 약한 이 사람이 먼저 그의 묘에 명문을 짓게 되다니, 하늘의 이치는 믿기 어렵고 사람의 일 또한 늘 그대로가 아니로구나. 명은 다음과 같다.
그릇은 넓고 크며 행동은 굳세고 강직하니
그대 나이 들면 마땅히 조정에 오를 줄 알았거늘
하늘은 어찌 이리 무정하여 내 좋은 벗을 앗아 갔는가
벗들은 슬퍼하고 선비들은 낙담하네
잘 자란 자식들이 의젓하게 줄지어 서 있으니
쌓인 경사가 마땅히 오래 이어지리라
광릉의 무덤 길은 어찌 그리 울창한가
단단하고 고운 돌에 새겨 그 향기를 기록하니
아아, 천추토록 잊지 말지어다
증 공조판서 행 대호군 이흥효 공의 묘갈명 (서기 1610년 3월 9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화가 집안으로는 이씨 가문을 꼽는다. 이씨 집안은 4대에 걸쳐 그 명성을 독차지해 왔는데, 그중에서도 중순공(이흥효)이 가장 뛰어났다. 채색이 특히 훌륭했고, 산수화에 능했다.
돌아가신 내 아버님께서는 중순공을 그저 그림쟁이로 대접하지 않으셨으므로, 그는 거리낌 없이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나는 둘째 형님께 여쭈었다. "중순이 어떤 사람이기에 아버님께서 저토록 후하게 대접하십니까?" 형님이 답했다. "그 사람은 아름다운 선비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옛 현인을 사모하며 시를 좋아하고 거문고와 바둑에도 밝으며, 마음이 탁 트여 세속에 얽매이지 않으니 특별히 대접하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이미 그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의 조카 이정과 나는 나이 차이도 잊고 매우 친하게 지냈다. 이정의 그림 또한 매우 훌륭했고, 그 성품은 깨끗하고 고매하여 먹고사는 일에는 통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숙모께서는 그의 먹고 입는 일을 친자식보다도 더 잘 챙겨 주셨다. 나는 이것이 몹시 신기하게 여겨졌는데, 이정이 말했다.
"숙부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제 숙부께서는 성품이 소박하여 화려한 것을 즐기지 않으셨고, 집안 살림이 넉넉한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말은 가려서 하고 행동은 신중히 하셨으며, 부모님 상을 당해서는 정성껏 시묘살이를 하며 예를 다하셨습니다. 명종 때는 문정왕후께서 숙부의 그림을 칭찬하시며 자주 물건을 내려 주셨는데, 숙부께서는 이에 감격하여 삼 년 상복을 입으신 듯한 마음으로 지내시고, 왕후의 기일이 되면 술과 마늘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고 친척들과는 화목하게 지내셨으며, 사람을 가려 공경으로 사귀셨습니다. 부부로 삼십 년을 함께 사시면서 단 한 번도 실없이 히히덕거린 일이 없었고, 어떤 일을 당해도 당황하여 낭패를 겪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옛 책을 많이 모으셨고, 유학자를 만나면 학문을 토론하는 데 게으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림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찮은 기색 없이 그려 주셨습니다. 제가 일찍 부모를 여의자 숙부께서는 저를 당신 자식처럼 길러 주셨습니다. 1593년 6월 숙부께서 병환이 심해지시자 저를 숙모께 부탁하셨는데, 숙모께서는 그 유언을 저버리지 않고 지키셨습니다. 숙모님 또한 신중하고 예의가 발라, 십여 년 동안이나 채식만 하고 흰옷을 입으며 돌아가신 남편을 그리워하셨습니다. 그 절개와 행실이 하늘에 닿을 만하니, 저를 잘 대우해 주신 것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 역시 이 이야기를 통해 그의 집안에서의 행실이 바로 그런 가정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정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 이듬해인 1608년 7월에는 그의 숙모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의 이름은 흥효요 자는 중순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그림에 뛰어났다. 그는 1537년에 태어나 여덟 살에 이미 집안의 화업을 이어받았다. 명종 때 중종의 초상화를 그린 공으로 대비께서 그를 내수사의 서제로 발탁하시고 농토를 내려 대대로 지어 먹게 하셨다. 선조 5년에는 수문장에 특별히 제수되어 품계가 어모장군까지 올랐고, 호군으로서 원종 광국공신에 녹훈되었다. 향년 쉰일곱이었다.
아들 이장이 선무 원종공신에 책봉되었으므로 그는 공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부인 김씨는 정부인에 봉해졌다. 부인 김씨는 병오년에 태어나 예순셋에 세상을 떠나 양주 아차산의 어느 자리에 합장되었다.
그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이추요 둘째는 이장으로, 둘 다 역관을 직업으로 삼았다. 이장은 공을 쌓아 2품 벼슬까지 올랐다. 막내 이주는 대대로 내려오는 화업을 이어받았다. 딸 넷은 각각 아무개에게 시집갔다.
경술년 봄, 그의 아들들이 찾아와 묘에 새길 글을 청했다. 나는 말했다. "이는 마땅히 써야 할 일이다. 나는 둘째 형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고인에 대해 잘 알게 되었고, 이정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반듯한 품행을 자세히 알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글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재주도 있고 품행도 있으며
벼슬도 있고 대를 이을 아들도 두었으니
온전한 삶을 다 살고 돌아갔으니
그 누가 그를 죽었다 하겠는가
무덤 길에 표석을 세워
천 년토록 이를 알리노라
성소부부고 제17권
10. 00:08
성소부부고 제17권 · 문부 14 · 묘표·묘지
출처: 성소부부고 제17권, 문부 14, 묘표·묘지
배경: 제17권에는 "묘표"와 "묘지"라는 두 갈래의 글이 실려 있다. 묘표는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에 새기는 글이고, 묘지(묘지명)는 죽은 이의 행적을 적어 관과 함께 땅에 묻는 글로, 대개 마지막에 후손에게 남기는 짧은 운문(이를 "명"이라 한다)을 덧붙인다. 이 권에는 허균이 고향 강릉에서 만난 인물들, 과거를 함께 보고 벼슬살이를 함께한 벗들, 그리고 임진왜란 중에 목숨을 잃거나 의병을 일으킨 이들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어, 조선 중기 사대부 사회의 인간관계와 전란의 상흔이 함께 드러난다.
일러두기 하나: 원문에는 죽은 이의 증조부·조부·아버지의 이름이나 벼슬이 확실하지 않을 때 "아무개"라는 뜻의 표시를 임시로 넣어 둔 곳이 많다. 이런 곳은 모두 "이름(또는 벼슬)이 전하지 않는다"거나 "아무개"로 옮겼다. 일러두기 둘: 이 권에는 조선 시대의 과거 제도와 관직 이름이 많이 나온다. "생원시·진사시(또는 사마시)"는 성균관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예비 시험이고, "문과(대과)"는 관리가 되는 본시험이며, "향시"는 지방에서 치르는 예비 시험, "발해"는 그 예비 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뜻한다. "좌랑·정랑"은 육조(호조·예조·형조 등 여섯 중앙 관청)의 실무 벼슬이고, "지평·헌납"은 관리를 감찰하고 임금께 간언하는 사헌부·사간원의 벼슬이며, "검열·대교·봉교"는 예문관에서 임금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던 벼슬이다. 이런 용어들은 매번 풀어쓰지 않고, 문맥상 필요할 때만 따로 설명을 붙였다.
묘표 —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 글 두 편
승정원 우승지 박시형의 묘표 (서기 1597년 5월 7일, 양력)
우리 강릉에는 본디 조선에서 이름난 학자와 큰선비가 많이 나왔다. 나라에 공이 많아 어진 신하가 된 사람으로는 최치운 부자가 있고, 학문과 몸가짐으로 선비 사회에서 칭송받은 이는 박공달과 박수량이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이는 심언광과 최연 등이니, 모두 역사를 기록하는 이들의 글에 실려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런데 승지를 지낸 박공만은 성종 임금 시절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가 되어 오랫동안 성종의 총애를 받았고, 주역에 밝아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로 발탁되는 아주 특별한 대우를 받았는데도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라의 오래된 전례와 옛일을 제대로 고증할 줄 모르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들을 따로 기록해 두는 이도 없었으므로, 비록 벼슬과 공적이 빛났던 사람일지라도 그 행적이 묻혀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 애석한 일이다.
공의 아들은 박공달이요 손자는 박수량인데, 고향 사람들이 그의 아들과 손자는 일컬을 줄 알면서 정작 공을 일컫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그의 사람됨이 오직 소박하고 겉을 꾸밀 줄 몰랐기 때문이다.
만력 정유년(1597년)에 박공달의 손자 박인각이 찾아와 말하였다.
"저의 증조부의 행장은 저의 당숙이 이미 기록하여 무덤 속에 함께 묻었습니다만, 묘비에는 이름만 새겨져 있을 뿐 비문은 없습니다. 그대가 저를 위해 비문을 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박공에 관한 일이라면 내가 잘 알고 있어 예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소. 그러나 그의 행적과 업적, 집안 내력, 과거에 급제한 과목, 관직의 이력은 모두 지문에 실려 있을 터이니 다시 쓸 필요가 없소. 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들을 내가 본 대로 적어 보리다."
내가 젊었을 때 승정원 일기를 보니 이런 기록이 있었다.
"공이 국자박사로 있으면서 상소를 올려 유학을 숭상할 것을 청하니, 성종께서 가상히 여겨 특별히 홍문관에 배치하였다."
또 내가 사관이 되어 은밀히 전해지는 기록들을 살펴보다가 우연히 공에 관한 기사를 보았는데 이렇게 되어 있었다.
"공이 사헌부 지평으로 임금을 뵈었을 때, 내수사의 여종들이 음악을 익히는 것을 금지해 달라고 청하니 왕께서 이를 허락하셨다."
또한 홍귀달의 문집에는 "공이 경전의 뜻에 밝고 품행이 방정하다"고 되어 있고, 성현의 문집에는 "공이 안동을 다스릴 때 청렴결백하여 교화가 크게 행해졌다"고 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공이 성균관을 수리하고 그 기문을 썼는데 매우 법도가 있었다"고 되어 있는가 하면, 김종직의 문집에서도 공의 일을 여러 차례 칭찬하고 있다.
이상으로 본다면 공의 학문과 행실, 벼슬살이, 문장이 모두 남보다 뛰어났으며, 임금 앞에서 곧은 말을 하는 강직한 신하의 풍모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송하였으나, 다만 나이가 짧고 벼슬이 높이 오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컬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아들 박공달은 기묘년(1519년)에 어질고 청렴하다 하여 천거된 인재, 곧 "현량"으로 뽑혀 뜻있는 선비들의 추대를 받았으니, 이것만 보아도 그가 자식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알 수 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마땅히 이 일을 드러내어 앞서 든 여러 인물들과 함께 후세에 전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손자 인각이 마침내 그 일을 해냈으니, 이는 그가 능히 효를 다하고 조상의 뜻을 이어받았다고 할 만하다.
공의 이름은 시형이요, 자는 조겸이며, 벼슬은 우승선에 이르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지금 그의 자손 서른 명 남짓이 북촌에 살고 있으며, 그의 무덤도 그 안에 있다고 한다.
정유년(1597년) 3월 22일, 고향 사람인 통선랑 행 예문관 검열 겸 춘추기사관 세자시강원설서 허균은 삼가 이 글을 쓴다.
(용어) 최치운은 강릉 출신의 조선 초기 문신으로 이조판서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박수량은 연산군 때 모친상을 삼 년 동안 정성껏 치른 효행으로 이름났던 학자다. "우승선"은 승지를 옛말로 이르는 이름이다. "국자박사"는 성균관에서 유학을 가르치던 벼슬이며, "지문"은 죽은 이의 행적을 적어 무덤 속에 함께 묻는 글을 뜻한다. "현량"은 중종 때 학문과 인품을 갖춘 인재를 시험 없이 천거하여 뽑던 현량과 급제자를 가리키는데, 이 제도로 뽑힌 이들은 대개 개혁적인 젊은 선비들이었으나 훗날 기묘사화 때 대부분 화를 입었다.
진사 심장원의 묘표 (서기 1608년 5월 28일, 양력 추정)
진사 심형의 이름은 장원이요, 자는 경혼이다. 삼척 사람으로 고려 때 학사를 지낸 심동로의 후손이다. 증조부 심준은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시랑을 지냈고 뒤에 좌찬성으로 추증되었다. 할아버지 심언광은 중종대왕을 섬겨 이조판서까지 올라 매우 귀하고 현달하였으나 만년에는 관직을 삭탈당한 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심운은 어질고 글을 잘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강릉 김씨로 예조참판 김광철의 딸이다. 공은 가정 신묘년(1531년)에 태어나 만력 정미년(1607년) 7월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일흔일곱이었다.
공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으나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여 학문이 매우 해박하였다. 성격이 고고하고 결백하여 세속에 잘 맞지 않았으며 의롭지 않은 것은 털끝만큼도 취하지 않았다. 남과 사귀는 일도 별로 없이 대문을 걸어 잠그고 날마다 글만을 전공하였다. 제사를 모실 때에는 매우 정갈하게 하였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이 되면 하루 종일 무릎을 꿇고 몸가짐을 바로 한 채 울었다. 시와 부로 여러 차례 향시와 서울에서 치르는 복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무진년(1568년)에야 비로소 진사가 되었으나 끝내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강릉으로 가서 살았는데, 감호 가에 선대의 묘가 있었으므로 그 비어 있는 땅 중에 호수를 마주한 자리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낚시를 벗 삼았으며 꽃과 대나무를 심어 놓고 그 사이를 거닐면서 날마다 시를 읊조렸다. 또한 옛 서화를 많이 수집하였는데, 어디서든 특이한 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찾아가 그것을 구하여 손수 베껴 쓰면서도 지루한 줄을 몰랐다. 누구든 장기 두는 사람을 보면 공부는 하지 않고 쓸데없는 짓만 한다고 꾸짖었다. 관청에는 한 번도 드나든 일이 없었으며, 선비를 만나면 번번이 유학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지은 시문이 수십 권에 달하였다. 그의 시는 당나라 이상은의 시풍을 본받아 내용이 매우 풍부하고 부드러웠으며 힘이 있으면서도 아름다웠다. 이율곡이 함께 시를 지어 화답해 보고는 도저히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한다.
처음에는 이씨와 결혼하고 두 번째로 김씨와 결혼하였으나 모두 자식이 없었고, 서출로 심각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좌랑을 지낸 조카 심열에게 조상의 제사를 맡기고 자기가 지니고 있던 책을 모두 그에게 물려주었다. 호숫가 선산의 남쪽을 바라보는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그해 9월 13일이었다. 이종사촌 동생 공주목사 허균은 삼가 이 글을 쓴다.
(용어) 이상은은 당나라의 시인으로, 그의 시풍을 본받아 옛이야기와 고사를 즐겨 인용하고 수사에 공을 들인 화려한 시풍을 훗날 사람들이 따로 이름 붙여 불렀다. "경향해"란 지방에서 뽑힌 인재를 다시 서울에서 시험 보게 하던 일을 가리킨다.
묘지 — 죽은 이와 함께 묻은 행장과 명 아홉 편
예조좌랑 임현의 묘지명 (서기 1602년 10월 30일, 양력 추정)
군은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났으나 달과 날은 나보다 앞섰고, 함께 남상곡에서 자랐으니 대구를 짓는 법을 배울 때부터 함께 공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을유년(1585년) 봄에 함께 한성부에서 향시를 치를 때 군은 갑자기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남쪽으로 떠났고, 이어 조부모의 상까지 당하여 경인년(1590년) 여름이 되어서야 서울로 올라와 승지 민준의 집안에 장가들었다. 나는 그를 찾아가 그의 학문을 살펴보니 넓고 깊었으며, 글을 짓는 솜씨는 마치 봇물이 터지듯 말이 치닫듯 하여 도무지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신묘년(1591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정유년(1597년) 여름 임금이 친히 주관한 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기해년(1599년) 봄에 승정원 주서로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세자시강원 설서로 옮기고, 가을에는 예문관 검열로 천거되어 이어 대교와 봉교로 승진하였다.
이때 한 재상이 군을 인재로 인정하여, 군은 가만히 앉아서도 좋은 벼슬자리를 얻은 셈이었다. 그러나 군은 한 번도 그를 찾아가 감사 인사를 한 일이 없었다. 오직 강가에 살던 나와 아침저녁으로 만나 시를 짓고 가야금과 노랫소리를 듣는 것으로 일을 삼았을 뿐이다. 그가 지조를 지키고 권세와 이권을 좋아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경자년(1600년) 여름에 예조좌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군은 본디 몸이 허약한 데다 잇달아 상을 당하며 얻은 병으로 몹시 고생하고 있었으므로, 지방관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강진 현감이 되었으니, 이는 어른을 모시고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었다. 이듬해 내가 왕명을 받들어 호남에서 선비들을 시험할 때 군도 함께 시험관이 되었는데, 이미 병이 깊었으므로 나가서 그 자리를 그만두고 돌아가 병을 치료하라고 권하였다. 그리하여 4월에 과연 사직하고 돌아갔으나, 끝내 이 병으로 6월 어느 날 영암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서른셋이었고, 아들은 없고 딸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군의 성품은 소박하고 벼슬에 나아가는 데 담담하였으며 남의 허물을 입에 담지 않았다. 집안이 본디 넉넉하였으므로 재산에는 별로 마음 쓰지 않아, 궁한 사람을 보면 번번이 베풀어 주었다. 지극한 정성으로 홀어머니를 모셨고, 그의 숙부에게 아들이 없자 마치 자기 아버지 제사를 지내듯 그 제사를 받드니 친척들이 모두 그를 칭송하였다.
군의 이름은 현이요, 자는 자승이며, 숭선 사람이다. 증조부와 조부는 이름과 벼슬이 전하지 않으며, 아버지는 진사였으나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외조부 이씨도 벼슬이 전하지 않는다. 장사 지낸 이듬해 부인 민씨가 나에게 명문을 지어 달라 청하니, 이에 울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그대가 묻힐 때
나는 조운을 맡은 관리였다네
무덤 구덩이를 들여다보며
울면서 관을 내렸네
내 정성을 다했건만
그대는 어찌 기뻐함도 서운함도 없는가
그대의 행적을 기록하여
이제 이 땅에 묻노라
(용어) "권지 승문원부정자"는 외교 문서를 담당하던 관청인 승문원의 임시직 벼슬이다.
사헌부지평 윤계선의 묘지명 (서기 1604년 8월 1일, 양력 추정)
정유년(1597년), 임금이 성균관에 나아가 인재를 뽑는 시험을 치를 때 오성부원군(이항복)이 시험관이 되어 군의 글을 보고는 혀를 내두르며 "기이하고도 아름답다. 필시 대가의 솜씨다" 하고는 마침내 장원으로 뽑았으니, 그때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명성이 자자하여 안팎에서 인재를 얻었다고 기뻐하였다. 예조를 거쳐 병조좌랑, 세자시강원사서, 사간원헌납으로 임명되고, 홍문관에 들어가 검토관이 되었다. 경자년(1600년)에 사헌부지평으로서 임금을 뵙고 자문에 응하였다. 당시 임금은 두 이씨가 홍여순을 탄핵하는 일로 노여워하고 있었는데, 완성부원군 이헌국이 양쪽 모두에게 죄를 물을 것을 청하였다. 군은 임금 앞에서 대놓고 그가 양쪽 모두의 편을 드는 것을 배척하였다. 임금이 크게 노하셨으나 군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더욱 간절하게 말씀을 올렸다. 임금이 군을 옹진현령으로 내보내니, 당시 여론이 그를 아까워하였다.
그러나 군은 개의치 않고 임지로 가서 부지런히 직무를 수행하였는데, 청렴하고 엄격하며 분명하고도 너그러워 아전과 백성들이 감히 그를 젊다고 가벼이 여기지 못하였다. 또한 관청 일을 처리하는 데 능하여 무슨 일이 생기면 성가시게 여기지 않고 시원하게 판정을 내렸다. 지방 장관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임금께 아뢰어 상으로 옷감을 내리게 하였다. 옹진현에 있을 때 중풍을 얻어 집으로 돌아갔다가, 얼마 뒤 평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이 다시 도져 들것에 실려 돌아온 뒤 갑신년(1604년)에 세상을 떠나니 스물여덟 살이었다.
군의 이름은 계선, 자는 이술이며 파평 사람이니, 고려의 태사 신달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이조참판을 지냈고 조부는 예조판서를 지냈다. 아버지 희굉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이씨는 벼슬한 이의 딸이다. 큰숙부 윤희정에게 아들이 없어 군이 그 뒤를 이었다. 군수를 지낸 윤씨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아들은 없고 어린 딸이 하나 있다. 어느 달 어느 날 선산에 묻었다.
군은 성품이 높고 뛰어나 범상치 않았으며 큰 뜻과 굳센 결단력이 있었으므로 남에게 영합하지 않고 일을 만나면 과감하게 행동하였다. 사람을 대할 때는 생각한 바를 그대로 털어놓았고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그와 사귀는 사람들이 모두 이 점을 칭찬하였다. 그의 문장은 넓고 풍부하여 붓만 잡으면 그 자리에서 만여 자를 써 내려갔다. 특히 넉 자와 여섯 자로 짝을 맞추어 짓는 화려한 문체에 뛰어났는데, 산뜻하고 풍부하며 매우 시원스러웠다. 그의 시는 당나라의 두 시인 유우석과 두목 사이를 넘나들어 그 웅장하고 화려한 품격이 사람들의 눈을 놀라게 하였으니,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 성취가 어찌 이 정도에 그쳤겠는가. 참으로 안타깝다. 나는 그와 문장으로 절친하게 지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하늘이 재주 있는 사람을 내는 것이
만약 쓰일 데가 있어서라면
어찌하여 이토록 빨리 앗아 갔는지
그 이치를 도무지 알기 어렵네
썩지 않을 덕이 남아 있으니
내 또한 어찌 슬퍼만 하리오
그대의 옛일을 자세히 알고자 하는 이는
내가 지은 이 글을 보아 주기를
(용어) 오성부원군은 임진왜란 때 다섯 차례나 병조판서를 지내며 나라를 이끌었던 명신 이항복을 가리킨다. 홍여순을 둘러싼 탄핵 다툼은 선조 말년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벌어진 정치 다툼이다. 유우석과 두목은 모두 당나라의 이름난 시인이다.
성균생원 신노의 묘지명 (서기 1594년 3월 6일, 양력 추정)
우리 큰형은 벗을 사귀는 데 매우 신중하여 그 수가 적었는데, 유독 신공하고만은 서로 마음을 열고 사귀었다. 그 무렵 공이 과거를 보러 가지 않아 비난이 자자하였고,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그와 사귀는 사람까지 함께 비방하였는데도 형은 조금도 태도를 바꾸지 않고 오히려 더욱 다정하게 대하였다.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공이 주먹을 불끈 쥐고 세상일에 분통해하며 이발의 억울함을 힘주어 말하면서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보고는, 형은 그가 강개한 뜻을 지닌 선비임을 알아보고 그때부터 그의 견해를 따르게 되었다.
공의 사람됨은 절개가 굳고 고집스러워 남을 쉽게 용납하지 못하였고, 성품이 깨끗함을 좋아하여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사귀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문을 걸어 잠그고 날마다 옛 책을 읽었으며 세속의 일에 어울리기를 싫어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두고 세상의 병폐를 아는 사람이라 일컬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임진년(1592년)에 함께 북쪽으로 피난하면서는 나라가 흔들리는 것을 슬퍼하여 목메어 울며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벼슬길에 나가지는 못하였으나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어찌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보다 못하겠는가?"
곡구역에 이르러 명종의 기일을 맞았을 때는 울면서 역관 벽에 시를 적었는데, 그 말과 뜻이 처절하여 홍시가와 김숙부 등 여러 사람이 보고는 감동하여 칭찬하였다. 단천에 이르러서는 군수 강찬에게 권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격문을 지었는데, 듣는 사람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 왜적이 회령에서 두 왕자를 사로잡았을 때, 공은 포위된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빠져나와 석막에 숨어 지내면서 집안사람 석린과 함께 정견룡 등을 설득하여 병사를 일으키게 하고, 평사 정문부를 추대하여 장수로 삼아 마침내 왜적을 무찌르고 육진을 되찾았으니, 이 모든 일을 실은 공이 주도한 것이었다. 나라를 위하는 그의 정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내가 큰형에게 "신공이야말로 참된 열사인데, 세상의 비방이 형에게까지 미치는 것이 참으로 한스럽습니다" 하니, 형은 웃으면서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기란 본디 쉽지 않은 법이니, 사람들이 그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뿐이다" 하였다.
계사년(1593년) 겨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마흔여덟 살이었다. 공의 이름은 노요, 자는 제이인데, 고령군 문충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이름과 벼슬이 전하지 않고, 할아버지는 공주에게 장가들어 고원위에 봉해졌다. 증조부는 예조참판을 지냈고 어머니는 아무개 씨였다. 아무개 씨와 결혼하여 어린 아들 하나와 시집간 딸 하나가 있다.
공은 문장이 풍부하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옛 문장에 능했는데 대범하고 엄격하여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시는 송나라 시인 진사도와 진여의의 시풍에서 나와 뜻이 깊고 경계하는 바가 뚜렷했다. 특히 넉 자와 여섯 자로 짝을 맞춘 문체에 뛰어나 사람들이 그를 옛 중국의 이름난 문장가들에 견주었다. 전해지는 글이 수백 편이나 되어 후배들이 모두 외우고 본받았다. 정묘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끝내 곧고 강직한 성품 탓에 세상의 미움을 받아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북쪽으로 피난하였을 때 세운 공으로 오품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유언에 따라 명정에는 진사라고만 기록하였다. 공의 아우 신부가, 나의 형제가 공을 잘 안다 하여 묘지에 넣을 글을 청하니, 이에 울면서 다음과 같이 명한다.
군자가 겪는 어려움은
그 몸을 깎아 내어
뒷사람에게 남겨 주는 것이라네
(용어) 기축옥사는 선조 22년(1589년)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큰 옥사로, 이 일로 여러 인물이 화를 입었다. 이발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된 문신이다. "명정"은 죽은 이의 관직과 이름을 적어 상여 앞에 세우는 깃발을 말한다.
순천부사 성계선의 묘지명 (서기 1610년 9월 1일, 양력 추정)
갑오년(1594년) 봄, 내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신참 관원 모임에 나갔을 때 민유경·정곡·박동망·성진선과 성계선 형제·민여신·박원, 이렇게 일곱 사람이 함께 나갔다. 열흘 남짓 만에 마치 오래된 동료처럼 서로 허물없이 지냈다. 나와 성계선은 나이가 가장 어렸으므로 유독 가깝게 자주 오가며 서로 일찍 알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하였다. 그 뒤 나는 왕명을 받들어 동쪽 지방으로 돌아가고 세상에서 따돌림을 받아 여러 차례 변방에 머무느라 소식을 전하지 못하다가, 임인년(1602년) 봄에 병조에 자리를 얻었을 때 군도 마침 같은 관청에 있어 서로 만나 몇 달을 즐겁게 지냈다. 그러다가 군이 무장현감으로 나가게 되어 서울 남쪽 교외에서 손을 맞잡고 헤어졌는데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군은 어려운 고을을 잘 다스려 여러 차례 포상을 받았고, 이어 서천군수와 남원부사로 자리를 옮기며 유능하다는 소문이 안팎에 자자하였다.
병오년(1606년) 봄, 내가 용만으로 부임하러 가려 할 때, 군이 벼슬을 그만두고 남산 집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더니, 군의 얼굴은 초췌하고 수염에는 흰 터럭이 섞였으며 이도 서너 개나 빠져 있었다. 이상히 여겨 물었더니 군은 "나는 일찍 늙고 게다가 병까지 들었으니 어찌 오래 살겠는가?" 하였다. 내가 "세상에는 튼튼하고 병 없이도 일찍 죽는 사람이 있고, 쇠약하고 지쳐 보여도 오래 사는 사람이 있으니, 그대가 몸을 아끼고 잘 다스리면 저절로 오래 살 수 있을 것이오" 하였더니, 군은 "그렇겠지" 하였다. 얼마 뒤 군은 순천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병 때문에 돌아왔다. 나는 그때 공주로 부임하던 길이라 작별 인사를 하러 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이듬해 정월 어느 날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향년 마흔셋이었다.
아, 슬프다. 그대는 재능이 있어 지방관의 일을 잘 해내었다. 가는 곳마다 백성에게 이로운 일을 일으키고 해로운 것을 없애는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 천성이 낙천적이어서 남과 시비를 다투는 일이 없었다. 그대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으며 벗에게는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웠으니 마땅히 크게 현달했어야 할 터인데, 나이와 지위가 여기서 그치고 자손도 없으니 하늘의 이치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춘추관에서 여덟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함께 노닐 때 세상에서는 모두 우리가 밝은 하늘에 우뚝 솟아오를 것이라 기대하였는데, 지금까지 열예닐곱 해 사이에 곤궁함과 형통함, 영화로움과 초췌함이 저마다 다른 가운데, 그대와 민여신, 박원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나머지 다섯 사람도 혹은 늙고 혹은 병들고 혹은 운수가 어그러졌으니, 예닐곱 해가 지나면 이 다섯 사람인들 어찌 모두 살아 있으리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새것과 헌것이 서로 바뀌는 이치가 이와 같으니, 나 또한 무엇을 탓하겠는가.
그대는 하산의 이름난 집안 출신으로, 증조부와 조부는 이름과 벼슬이 전하지 않으며, 아버지는 예조참판을 지냈고 어머니는 아무개 씨로 정부인에 봉해졌다. 대사성 이충작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대의 이력이 이처럼 빛나고 또 빛나며, 일찍이 호조·예조·형조 세 부서의 좌랑을 지냈고 성균관 전적도 지냈다. 어느 달 어느 날 어느 산에 장사 지내니, 그 아버지 묘가 있는 곳이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 창녕군은
아들이 셋이라 들었네
막내로 그대가 태어났는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났네
험한 고을을 네 차례나 맡아 다스려
백성들의 간사한 마음을 가라앉혔건만
쉰도 못 채우고 일찍 세상을 떠나니
하늘은 어찌 그리 인색하신가
파주산 동쪽
울창한 숲 속 그대의 무덤
내가 이 글을 지어
영원토록 전하노라
(용어) "정부인"은 조선 시대 종이품 이상 문무관의 아내에게 내리던 봉작이다.
목천현감 이군정의 묘지명 (서기 1609년 4월 18일, 양력 추정)
만력 기유년(1609년)에 벗 목천현감 이군정은 당대의 훌륭한 사람이었는데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고를 듣고는 곡할 자리를 마련하여 곡을 하였다. 3월에 임천의 선산에 장사 지냈다.
그의 아들 이제운이 급히 사람을 보내 묘지에 넣을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슬프다, 내가 차마 내 벗의 명문을 지어야 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대는 한산의 이름난 집안 출신으로 목은 이색의 9대손이다. 증조부와 조부는 이름과 벼슬이 전하지 않으며, 아버지는 사헌부 집의를 지냈고 어머니는 아무개 씨였는데, 이 두 분 사이에서 그대가 태어났다. 그대는 일찍부터 남다른 뜻을 품어 스스로 뜻을 세우는 바가 있었다. 아버지가 해남으로 유배를 가고 어머니는 서울에 계실 때는 두 곳을 오가며 부지런히 봉양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두 분의 상을 극진히 예를 갖추어 치렀다. 남과 사귀기를 잘하여 그가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대의 이름난 이들이었다. 평생토록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하였고 남의 환난을 자기 일처럼 여겼다. 큰집에 화가 미쳐 아무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을 때, 그대는 의연히 나서서 네 분의 상을 치러 주고 그 집 살림까지 도와주었다. 임진년에 홍흥진이 집안은 내버려 둔 채 임금을 호종하여 떠나고 그 아들 홍여율은 남쪽에 남아 있었으니, 그 집안은 슬프고 두려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대는 홍여율과 교분이 있었으므로 그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피난하여 마침내 전란의 화를 면하고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 그가 이처럼 의리에 두터운 사람이었다.
그대는 어려서 글을 배워 여러 차례 향시에 올랐으나 쉰이 되어서야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별좌와 도사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천성이 온화하여 남과 나누는 농담도 들을 만하였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손님 맞기를 즐겼다. 전란을 겪은 뒤로 집안 살림이 바닥나 먹고 입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만나면 번번이 도와주었다. 벗들이 찾아오는 일이 많았는데 이들을 잘 대접하고도 오히려 부족하다 여겼으며, 자신은 여러 차례 양식이 떨어져도 마음이 편안하였다. 천문과 관상, 점, 그리고 집터와 묏자리를 살피는 풍수의 이치에도 두루 통하였다. 또한 시를 좋아하여 이달에게 배워 늦은 당나라 시풍의 기품이 있었다.
만년에 서울로 올라오니, 나의 형이 그의 재간을 알아보고 의금부의 낭관으로 뽑아 처음으로 육품에 올라 장례원 사평이 되었다. 무신년(1608년)에 목천현감으로 나가 어진 정사를 베풀었다. 나이 쉰넷에 갑자기 중풍으로 세상을 떠나니 고을 사람 백여 명이 곡하며 그를 전송하였다.
완산 이씨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니 바로 이제운이다. 그는 성실하고 재간이 있어 집안을 잘 꾸려 나갔다. 지혜와 용기가 있어 그대는 그에게 무과 공부를 시켰는데 아직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덕을 지니고도 수명과 벼슬이 따르지 않았으니, 남은 복은 아마 이 아들 제운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인끈을 차고 백성을 다스렸으니
어찌 공의 영광이 아니겠는가
하늘은 대과 급제도 내려 주지 않고
또한 수명마저 아끼셨으니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는가
그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그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여
그대의 행적을 새겨
이 무덤에 길이 남기노라
(용어) 이달은 최경창·백광훈과 함께 당나라 시풍을 따른 시인으로 이름난 세 사람, 이른바 "삼당시인"의 한 사람이며 허균의 스승이기도 했다.
변흡의 묘지명 (서기 1594년 8월 1일, 양력 추정)
변흡의 자는 사화요, 원주 사람이다. 증조부와 조부는 이름과 벼슬이 전하지 않으며, 아버지는 나의 성이 다른 재종형이다. 어머니는 아무개 씨의 딸이다.
군은 정묘년(1567년)에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의젓하여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열 살에 《소학》과 《논어》에 통달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장래를 기대하였다. 장성해서는 용모가 옥처럼 맑고 온화하며 사랑스러웠다.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는데, 어머니가 병환이 들자 수십 일 동안이나 허리띠도 풀지 않고 몸소 음식을 맛보아 올렸다. 신의로 벗을 사귀어 단 한 번도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은 일이 없었다. 나와는 나이가 비슷하여 늘 함께 어울려 다녔는데, 십여 년 동안 한 번도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떠드는 자리에서도 흔들림 없이 엄숙하였고, 마음속에 굳게 지키는 바가 있어 예에 어긋나는 태도로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시와 부를 공부하여 향시에는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끝내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갑오년(1594년)에 스물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니 슬프다. 아무개 씨와 결혼하여 딸 하나가 있을 뿐이다.
군은 금각과 함께 백운사에 머물며 우리 둘째 형에게서 글을 배웠다. 둘째 형은 두 사람을 남다르게 여겨 시를 지어 주었다.
"나는 변군의 성품을 사랑하노니
온화함이야말로 덕의 바탕이라네
금군은 참으로 영특한 사람이니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보태고 채워 주게나"
이 시는 아마 두 사람을 격려하기 위해 지은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불행히도 두 사람이 모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는 것이 어찌 이토록 어긋난단 말인가. 이에 울면서 그의 행적을 적어 무덤 속에 넣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
의젓하고 온화하며
단정하고 결백한
이 네 가지 덕을 모두 갖추었는데
어찌하여 그 명이 길지 못하였는가
하늘이 베풂에 이토록 인색하시니
어찌 이러시는가, 하늘이시여
이광림의 묘지 (서기 1606년 10월 1일, 양력 추정)
산음현감 이보명 형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어질고 반듯하여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다. 셋째 아들 이광림은 더욱 남달리 총명하여 글도 가장 잘 지었는데,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나니 형은 매우 마음 아파하였다. 장례를 치른 뒤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나를 바로잡아 줄 아들을 잃고 말았네. 그 아이의 행적을 무덤 속에 넣어 후대에 전하고 싶으니." 나는 "착한 아드님은 저도 아끼던 사람인데 어찌 말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씨는 전의 지방의 큰 성씨로, 태사 이도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병조판서를 지냈고 조부는 은산현감을 지냈다. 어머니는 의령 남씨이다.
을해년(1575년)에 태어났다. 일고여덟 살에 이미 성숙하기가 어른 같아서 말수도 적고 웃는 일도 별로 없었으며 장난치며 노는 일도 없었다. 스스로를 올바르게 단속하고 옛 현인을 본받아 행동하였다. 힘써 배우고 싫증 내지 않았으며, 지은 글은 깊고 넓어 생각이 미치는 바가 있었다. 특히 시를 잘 지었는데 당나라 전성기의 시를 본받아 왕유·맹호연·고적·잠삼의 시풍을 넘나들었으므로 산뜻하고 씩씩하여 그 사람됨과 같았다. 그리하여 스무 살 무렵부터 이미 훌륭한 소문이 나서 모두들 그를 나라의 큰 그릇으로 지목하였다. 어머니 남씨의 상을 당해서는 수십 일 동안 미음도 먹지 않아 곁에서 부축해야 겨우 일어날 지경이었고, 마침 임진왜란을 만나 떠돌아다니며 몹시 고생스럽고 궁핍할 때에도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상식을 거른 적이 없었으며 틈이 나면 반드시 《예기》를 읽었다. 아버지를 섬김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고, 작은 잘못이 있으면 부드러운 낯빛과 온화한 목소리로 해명하였다. 형제간의 우애가 도타워 잠잘 때도 꼭 이불을 함께 덮었다. 그의 벗 허실, 한신과 함께 지낼 때도 오랫동안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농담을 건네는 일도 없었고, 더구나 세상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언급하지 않았다. 재주가 있었으나 과거에는 여러 번 낙방하였다. 어떤 이가 과목을 바꾸어 보라고 권하니, 그는 거만한 듯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이렇게 말하였다. "곤궁함과 영달함은 하늘이 정한 것인데, 내 어찌 좋아하는 것을 굽혀 가며 남을 따르겠는가?"
임인년(1602년) 가을 감기 기운을 느끼더니 마침내 그것으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아, 안타깝다. 광릉 이씨로 세상을 떠난 재상 충정공의 손자이자 정랑을 지낸 이의 딸과 결혼하니, 부인은 아내로서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덕을 고루 갖추었다. 아들딸을 하나씩 낳았으니 남은 복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씨 부인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병오년(1606년)에 끝내 정절을 지킨 채 세상을 떠나니, 형의 분부로 파주 어머니 묘 뒤편 언덕에 함께 묻었다.
(용어) 왕유·맹호연·고적·잠삼은 모두 당나라의 이름난 시인들이다. "사덕"은 부녀자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덕목인 말씨·행실·솜씨·용모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제목의 "회경"은 이광림의 자로 전해진다.
신평 이씨 삼 형제의 묘지 (서기 1610년 7월 1일, 양력 추정)
돌아가신 형조참판 이모의 부인 이씨는 자신의 외사촌 동생 허균을 불러 울면서 말하였다.
"내가 이씨 집안 며느리가 된 지 이제 쉰일곱 해가 되었다. 조상의 복을 입어 아들 여덟을 낳았는데 모두 잘 자랐으나, 지금 남은 아이는 다섯이다. 이들은 모두 관복을 입고 임금을 섬기고 있으니 이 어찌 행복이 아니겠는가. 다만 나의 맏아들 이문시와 그 아우 이문지, 이문봉은 이천에서 왜적을 만난 날 효를 다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죽은 아이들이야 여한이 없겠으나, 어미 된 정으로는 늘 살점을 도려내는 것 같아 잊을 수가 없구나. 막내 봉은 더욱 잊지 못한다. 태어날 때부터 아름다운 자질이 있어 성실하고 언행을 삼가며 남과 실없이 웃고 떠드는 일이 없었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열여덟 살에 목사 나급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나씨는 행실이 어질고 부부가 서로 공경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임진년(1592년) 여름에 그의 아버지는 나의 시어머님을 모시고 산골짜기로 피난하였는데, 왜적 수십 명이 갑자기 나타났다. 넷째 아들이 나와 제 누이동생을 데리고 높은 숲을 넘어 몸을 숨겼고, 죽은 세 아들은 할머니와 아버지를 부축하고 있었다. 왜적이 할머니를 베려 하자 아버지가 몸으로 막아섰는데 그 칼날에 귀를 다쳤다. 맏아들 문시가 먼저 싸우다 목숨을 잃고, 문지가 뒤이어 칼 아래 쓰러졌다. 문봉은 산골 물가에 있다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옷을 벗어 던지고 뛰쳐나와 몸으로 아버지를 덮고 손으로 왜적에 맞서 싸우니, 열 손가락이 모두 잘려 나갔는데도 소리는 조금도 잦아들지 않았다. 열여섯 군데나 칼을 맞고서야 끝내 숨이 끊어졌다. 마침 날이 저물어 왜적이 물러갔으므로 할머니와 아버지는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고을 관아에서 이 사정을 적어 임금께 보고하니, 특명으로 그 집안을 포상하였다. 이듬해 파주 선산에 아이들을 묻었다. 나씨는 자식이 없고 서출만 있을 뿐이니 나는 이것이 늘 마음 아프다. 이제 우리 집안이 묘를 교하로 옮기게 되어 아이들의 무덤도 함께 옮기게 되었으니, 그 행적이 그대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구나. 아우가 글을 지어 이 아이들의 저승길을 밝혀 길이 전해지도록 잘 써 주게."
균은 절하고 그 말씀을 받들어 이렇게 적는다.
금각의 묘지명 (서기 1610년 3월 9일, 양력 추정)
을유년(1585년) 둘째 형이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백운산에서 글을 읽고 계실 때, 금생이라는 사람이 그곳에 가서 함께 공부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나는 혼인하는 일 때문에 함께 가지 못하였다. 며칠 뒤 편지가 왔기에 열어 보니 단정한 해서체로 정갈하게 쓴 편지였다. 글은 매우 간결하고 조리가 분명했으며, 그 표현에는 은근한 뜻이 많이 담겨 있어 마치 옛사람의 글을 읽는 듯하였다. 그 내용은 대개 만나고 싶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과 함께 형을 찾아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급히 그가 사는 집을 찾아가 매우 가깝게 지냈다.
이듬해 봄 김확을 데리고 백운산에 가니, 군과 심액은 이미 먼저 와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함께 노닐고 서로 학문을 다듬어 주어, 그 정이 친형제나 다름없었으니 늙을 때까지 함께 지내기를 바랐는데, 불행히도 군이 병들어 8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아아, 애통하다.
공은 영남에서 태어났으니 고려 때 학사를 지낸 금의의 후손이다. 사람됨이 재기가 뛰어나고 호탕하였으며 생김새는 마치 옥을 세워 놓은 듯하여, 바라보면 신선 가운데 한 사람 같았다. 아버지인 봉화공은 그를 각별히 사랑하였다. 다섯 살 때 무덤 옆 초막에서 글을 배우다가 벽에 붙여 놓은 《주역》의 괘상을 보고 그 자리에서 외웠는데 순서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때 산소에서 제기를 보관할 창고를 짓느라 일꾼이 많았는데, 그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였다. 글 읽기에 몰두한 나머지 어머니를 뵈러 갔다가도 반드시 정해진 기한에 돌아왔다. 아홉 살 때는 아버지를 따라 신의왕후의 능에 가서 옛 도읍의 산과 물을 보았고, 아버지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또한 경주의 옛 자취를 두루 찾아보았다. 어려서부터 이렇듯 남다른 뜻을 지니고 있었다.
계미년(1583년)에 아버지가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자 군은 아버지를 따라와 송미로에게 소식의 시를 배웠고, 열다섯 살에 비로소 나의 둘째 형에게서 옛 문장과 시를 배웠다. 그의 글은 날로 나아졌고, 무엇을 읽든 바로 그 요체를 터득하였으며, 논하는 바는 세속의 티를 벗어나 깔끔하여 보통 사람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데서 나왔다. 둘째 형은 그를 아끼고 감탄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댁의 아드님이 멀리서 찾아와 그의 말을 들어 보고 그 깨끗한 마음가짐을 살펴보니, 맑고 빼어나기가 또래들보다 이만저만 뛰어난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제가 그 아이의 스승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아이가 저의 스승이 되어야 할 정도입니다."
그가 지은 《주류천하기》, 《풍창낭화》, 《일동록》, 《전의독서문》 같은 글들은 당시 문예를 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여 서로 베껴 외웠으므로 서울의 종이 값이 갑자기 오를 정도였다. 둘째 형은 크게 칭찬하며, 옛사람의 글이라도 이 글에 함부로 평을 매길 수 없다고 하였다.
군은 마음이 편안하고 욕심이 없었으며 행동에 법도가 있었다. 비록 글짓기를 좋아하였으나, 유학자가 할 일이 말을 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 늘 정성을 다해 사리를 철저히 밝히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책을 두루 연구하며 늘 성현과 같아지기를 스스로 기약하였다. 옛날과 지금의 여러 책을 두루 읽어, 나라가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며 흥하고 망하는 원인과 어진 이와 간사한 이를 가르는 기준을 논함에 있어 그 옳고 그름과 잘잘못을 명백하고 시원스럽게 짚어 내니, 듣는 사람이 지루해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오랜 전례와 옛일에도 밝아 마치 직접 겪은 사람 같았으니, 그의 학문이 높고 깊으며 뜻이 원대함이 이와 같았다.
병술년(1586년) 가을에 폐병에 걸려 날로 쇠약해졌으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부지런히 읽었다. 어른들이 병이 더할까 걱정하여 이를 말리자 그는 따르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침에 도리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조금도 힘들지 않은데 어찌 몸이 상하겠습니까." 그러고는 마침내 사마광의 《자치통감》과 《통감강목》, 그리고 여러 의학 서적을 읽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몇 해만 더 빌려주어 아직 보지 못한 책들을 모조리 읽게 해 준다면, 내 소원은 다 이룬 셈이다."
병이 몹시 위중해졌는데도 정신은 또렷하여 부질없는 기도를 못 하게 막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데 기도한다고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저는 어린 나이에 죽는 것이니 신주를 세우지 않아도 됩니다. 하물며 몸과 넋이 땅으로 돌아가면 혼은 어디에나 있을 터이니, 저를 이곳에 장사 지내도 괜찮습니다. 어찌 굳이 고향 선산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까? 고향 길이 험하고 머니 부모님께 근심만 더할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병중에 스스로 자기 묘지를 지어 이렇게 썼다. "봉화 사람 금각은 자가 언공이다. 일곱 살에 공부를 시작하여 열여덟 살에 세상을 떠났다. 뜻은 원대했으나 명이 짧았으니, 아마도 하늘이 정한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는 스스로 제문을 지어 이렇게 썼다. "아버지, 어머니, 저를 위해 울지 마십시오. 아아, 가슴이 아픕니다."
그해 9월, 예안 땅 백운동 남향 언덕에 장사 지냈다.
그가 지은 시문 두 권을 묶어 《조대집》이라 하였다. 경술년(1610년) 봄에 그의 형인 의부랑 금개가 그의 행장을 가지고 찾아와 이렇게 말하였다. "죽은 아우의 행실은 형이 자세히 아는 바입니다. 그의 묘지를 기록하려 하는데, 글을 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는 울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백운사에 함께 있었을 때 우리 세 사람은 군을 우러러보기를 마치 쑥대가 큰 소나무를 우러러보듯 하였소. 그가 살아 있었다면 반드시 문장의 우두머리가 되어 나라의 보배가 되었을 것이오. 내가 어찌 감히 글로써 세상에 이름을 날렸겠소. 불행히도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 이름을 뒷사람에게 전할 책임은 참으로 나에게 있소. 어찌 부족하다는 핑계로 세상을 떠난 그와의 두터운 우정을 저버리겠소." 그러고는 피눈물을 닦으며 다음과 같이 명한다.
공의 글은 옛글보다 뛰어나고
공의 학문은 미세한 이치까지 이르렀네
문단에 우뚝한 깃발을 꽂을 사람은
공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저세상에
우리의 슬픔을 적어 두려고
마침내 서투른 솜씨를 놀리려니
때로 손끝에서 피가 흐르는 듯하네
공의 행적을 더듬는 데
어찌 감히 많은 말이 필요하리오
다만 나의 정을 적을 뿐이니
공도 아마 그 마음을 알아주시리라
(용어) 사마광은 송나라의 학자로 역사서 《자치통감》을 지었고, 《통감강목》은 주희가 이 책을 다시 정리한 역사서다.
성소부부고 제18권
10. 00:08
성소부부고 제18권 · 문부 15 · 기행 상
출처: 성소부부고 제18권, 문부 15, 기행 상
배경: 제18권은 허균이 직접 다닌 여정을 날짜별로 기록한 세 편의 기행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조관기행〉은 1601년, 전운판관에 임명되어 충청도와 전라도 해안의 세곡 운반을 감독하러 다닌 반년 남짓의 기록이며, 그 사이 어머니의 상을 당하는 일도 겪는다. 두 번째 〈서행기〉는 1602년,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의주까지 다녀온 기록이다. 세 번째 〈병오기행〉은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과 양유년을 맞이하러 의주까지 갔다 오면서 주지번과 나눈 문학 이야기를 자세히 담고 있어, 세 편 가운데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조관기행 (서기 1602년 1월 27일, 양력 추정)
신축년(1601년, 선조 34년) 6월, 사복시의 낭관으로 있던 나는 전운판관(세곡을 배로 실어 나르는 일을 감독하는 벼슬)에 임명되어 삼창(세곡을 모아 두던 세 곳의 창고)으로 가서 조운을 감독하게 되었다.
7월 8일(정유) 조정에 하직 인사를 드리고 동작나루를 건넜다. 장마로 강물이 한창 불어나 배를 저어 물살을 헤치며 모래섬을 따라 겨우 강 남쪽 기슭에 이르렀다. 정오 무렵 과천에 도착하니 원인초는 마침 자리에 없고 그의 첩 설아가 작은 마루로 나와 맞으며 술을 대접했다. 볕이 뜨거워 그의 파란 양산을 빌려 쓰고 길을 떠났다. 저물녘 수원에 이르니, 부사 박이장(자는 숙빈)은 딸이 천연두를 앓는다며 나오지 않았고, 변경지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묵었다. 나는 예전 을유년(1585년)에도 이곳에 들른 적이 있는데, 그때 보았던 연못가 정자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잡초만 우거져 있었다. 옛날에 알던 이들의 안부를 물으려 해도 이제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으니, 지난 일을 생각하매 서글퍼졌다.
9일(무술) 시골집에 머물던 제로를 찾아갔다. 잉어를 잡고 눈처럼 흰 연뿌리와 멥쌀밥을 배불리 먹은 뒤 잠시 머물다가, 저물녘에 나루에 이르니 삼창의 아전이 거룻배를 가지고 마중을 나왔다. 어두워져서야 숙소에 드니 방은 비좁고 눅눅한 데다 파리와 벼룩이 들끓었다. 상에 오른 안주는 이미 상해서 냄새가 지독해 가까이 갈 수도 없었으니,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10일(기해) 각 고을의 강리들을 모아 세곡 걷은 실적을 검사했다. 배가 다 모이지 않아 백호 세 사람에게 각각 곤장 마흔 대씩을 쳤다. 정오에는 유선원과, 창고 감독을 위해 파견된 신창 현감 정사억이 찾아와 술자리를 마련했다. 아내의 사촌동생인 용궁 현감 김지회와 육촌 형뻘 되는 윤지복도 함께 왔다가 어두워져서야 헤어졌다.
11일(경자) 배가 비로소 모두 모여, 두 번째로 운반할 세곡 사천이백 석을 배 열두 척에 나누어 실었다. 저녁에 당진 현감 윤성지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12일(신축) 배를 출발시키고 조정에 보고서를 올렸다.
13일(임인) 동지 벼슬을 지낸 홍가신 어른을 그의 농막으로 찾아뵈었다. 서로 만나니 더없이 반가워 하루 종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가슴이 다 시원해지고 비루한 생각이 절로 씻겨 나가는 듯했다. 저녁에는 용궁 현감의 집에서 묵었다. 유선원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14일(계묘) 온양에 가서 관찰사 이용순 공을 만나 조운선의 사공들을 수군으로 편입할 수 있는지 의논하였다. 공은 해안 열여섯 고을의 세곡을 서울 창고에 곧바로 납입하게 하면 일이 훨씬 수월할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에 따라 예전대로 곧바로 납입하게 하고, 파발을 보내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15일(갑진) 온양에서 돌아와 용궁 현감의 집에서 묵었는데, 득초 형이 찾아와 한방에서 잤다.
16일(을사) 아산을 떠나 정오에 신창에서 쉬고 저녁에는 예산에서 묵었다. 관아 동헌 뒤에 석가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대나무가 푸르러 그윽하고 맑은 운치가 있었다. 그 사이를 거닐고 있으니 현감 이지화가 간단히 술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하였으나, 술을 잘 못한다는 핑계로 사양하였다.
17일(병오) 홍주에 이르러 동쪽 곁채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벌목을 감독하는 박경현이 관아의 안채에 와 있으면서 아전을 보내 내가 어느 방에 묵을 것인지 물어왔다. 나는 그가 동쪽 곁채로 들어오려는 속셈임을 알아채고는 따지지 않고 곧장 지름길로 안채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박경현과 목사 우복룡이 이미 잔치를 벌이고 있었고 노래하는 기녀들이 앞에 가득했다. 나는 취한 김에 "목사께서는 제 형님이나 다름없으시니, 안채에서 며칠 묵고 싶습니다. 이쪽으로 옮겨 와도 되겠습니까?" 하고 청했더니 목사가 흔쾌히 허락했다. 저녁에 박경현은 동쪽 곁채로 옮겨 갔다. 밤에 박경현의 방으로 들어가야 할 기녀가 잘못하여 내가 있는 곳으로 들어왔으므로 돌려보내고, 기녀들의 우두머리에게 곤장 수십 대를 때렸다.
18일(정미) 박경현이 떠났다. 저녁에 목사가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19일(무신) 보령에서 점심을 먹고 남포에서 묵었다.
20일(기유) 비를 맞으며 서천으로 향했다. 진흙탕이 미끄러운 데다 옷에까지 튀어 종들이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어서는 몹시 투덜거렸다. 정오 무렵 고을에 이르니 태수 김희태가 잔치 자리를 사치스럽게 꾸미고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서는 마치 큰 나라의 제후를 섬기듯 대접하였다. 대낮부터 밤이 깊도록 묵은 회포를 풀고서야 자리를 마쳤다. 밀물이 곧 들 것이라고 하였다.
21일(경술) 새벽에 말을 달려 포구에 이르니 태수가 뒤쫓아 나와 배웅해 주었다. 조수가 고르지 않고 매우 사나웠다. 가마를 타고 배에 오르니 서풍이 매섭게 불고 파도가 산더미처럼 솟구쳤다. 돛을 반쯤 올린 채 곧장 창고 마을에 이르니, 마을 어른인 별좌 이원두가 먼저 나와 맞으며 술자리를 마련해 위로해 주었다. 배와 세곡에 대해 알아보니 모두 정리가 되어 있다고 하였다.
22일(신해) 세곡을 배에 싣는 일을 감독하고 장계를 올렸다. 현감 김기가 세곡 싣는 일의 감독을 마치고 내게 인사를 왔다. 오후 늦게 길을 떠나 어두워져서야 만경에 도착했다. 이곳 현감 민형은 나와 같은 해 무과에 급제한 사람이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삼경(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이 되었다.
23일(임자) 부안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그대로 머물기로 했다. 고홍달이 인사를 왔다. 이곳 기녀 계생은 이귀(자는 옥여)의 정인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그리 곱지 않으나 재주와 정취가 있어 함께 이야기 나눌 만하였으므로, 종일 술잔을 앞에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했다.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잠자리에 들게 했으니, 남의 정인을 건드린다는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24일(계축) 비 때문에 떠날 수 없었다. 정오 무렵 비가 개어 고부에 도착해서는 이우 어른을 만났다. 율곡 이이 선생의 아우 되시는 분으로, 내게는 고향의 어른이신데 시와 그림과 글씨에 모두 능하여 내가 존경하는 분이다. 민인길(자는 숙정)이 죄를 지어 부안 현감 자리에서 파직되어 고을에 붙잡혀 있었으므로, 불러서 함께 묵었다.
25일(갑인) 흥덕에서 잠시 머물고 저녁에 무장에 도착했다.
26일(을묘) 법성창에 이르니 태수 경섬(자는 퇴부)이 세곡 싣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나를 고을 관아로 맞아들였다. 어릴 적 친구인 정홍연이 임희윤과 함께 찾아왔다. 서울 기녀 낙빈, 선래, 산월이 그곳에 함께 살고 있어 모두 찾아와 위로해 주었다. 술이 잔에 넘치도록 오가고 거문고와 노래가 번갈아 이어지며 우스갯소리로 흥을 돋우다가 새벽닭이 울고서야 자리를 파했다.
27일(병진) 좌랑 강항이 인사를 왔다. 부체찰사 한준겸과 관찰사 이홍로가 광주에서 군사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열고 있었고, 태사 벼슬의 소광진도 왕명을 받들고 그곳에 와 있어서 모두에게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한준겸은 조졸을 사공을 돕는 인력으로 배치하는 문제는 직접 만나 의논해야 한다며 나를 부르는 편지를 보내왔다.
28일(정사) 지름길로 사기원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친척인 정성일과 그의 아들 경득, 희득이 찾아왔다. 해질 무렵에야 광주에 도착했는데, 마침 광주에서는 사신을 대접하는 잔치가 한창이었다.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잔치에 참석하라고 여러 차례 청했으나 가지 않았다. 광주에는 젊은 시절 서울에서 정을 주고받던 기녀 광산월이 있었는데, 그를 보내 굳이 재촉하기에 어쩔 수 없이 참석했다. 이웃 고을의 소리 잘하는 기녀들을 죄다 불러 모았는데, 술은 동이마다 넘치고 고기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오히려 품위가 없어 보였다. 저녁에는 한준겸과 함께 묵었다. 광산월이 찾아와 위로해 주었는데, 평생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며 밤을 지새웠다.
29일(무오) 소광진이 장성으로 떠난다며 인사를 왔다. 그가 데리고 있던 나주 기녀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노래로 부를 줄 알았다. 술을 조금 마시고 떠났다. 저녁에는 옛 관아에서 묵었다. 광산월이 반찬을 보내왔으니, 그 두터운 정이 느껴졌다.
30일(기미) 한준겸과 관찰사는 모두 떠났고, 나는 만류를 받아 그대로 머물렀다.
8월 1일(경신) 목사 이상길 공과 초닷새에 광산월을 오성(법성)으로 보내기로 약속하고 말 두 필과 역리 하나를 남겨 두었다. 정오에 나주 관아에 이르러 목사 권협 공을 뵙고는, 곧바로 임현(자는 자승)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영암 땅 구림으로 향했다. 길이 몹시 멀어 산소 곁 재실에 도착하니 밤은 이미 칠흑같이 어두웠다. 고을에서 마련해 주기로 한 음식이 오지 않아, 상가에서 나물 반찬으로 소찬을 대접받았다.
2일(신유) 영구 앞에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고 글을 지어 곡했다.
3일(임술) 묘시(새벽 5시에서 7시 사이)에 관을 내려 묘혈에 안치하니, 아, 아득한 이 이별로 평생의 일이 이제 다 끝났구나. 돌아와 금성(나주)에서 묵었다. 같은 해 급제한 진사 진경문이 찾아와 율시 한 수를 지어 주었는데, 시가 매우 맑아 깨우쳐 주는 바가 있었다.
4일(계해) 권협 공과 작별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기원에 이르니, 정씨 집안 다섯 사람과 외가 쪽 첨지 유대린이 술과 음식을 마련해 위로해 주었다. 저녁에 법성으로 돌아와 경섬, 덕원, 그리고 기녀 내기와 먼저 만나 즐겁게 마시고 놀았다. 잠자리에 들자 내기가 "해양(광주)에서 옛 정인을 만났습니까?" 하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그가 여기 올 생각은 없던가요?" 하기에 나는 "목사가 보내주려 했지만 내가 사양했다"고 거짓으로 둘러댔다.
5일(갑자) 새벽녘에 내기가 먼저 일어나기에 이상하다 여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경섬과 짜고 나를 속일 계책을 꾸민 것이었다. 먼저 역졸을 속여 "광산월이 사기원에서 묵고 아침 일찍 고을로 들어올 것이다"라고 말해 두었는데, 역졸은 광산월에게 말을 맡겨 둔 것을 보았던 터라 그 말을 곧이듣고 내게 와서 고했다. 나는 속으로 '광주는 여기서 하루 거리인데 그가 왜 중간에 묵겠는가' 하고 짐작하였다. 세 사람은 늙고 못생긴 기생을 곱게 꾸며서는 내가 관아 정청에 나간 틈을 타 방에 숨겨 두었다. 얼마 뒤 강태초와 고을 사람 이곤, 강극문이 찾아왔다. 이윽고 시중드는 이를 시켜 내 귀에 대고 "광산월이 벌써 와서 방에 들었습니다" 하고 속삭이게 하고는, 방 안에서 거짓으로 애틋한 말을 늘어놓게 했다. 나는 경섬의 얼굴에 웃음을 참는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이미 눈치를 챘다. 경섬이 "방에 들어가면 즐거운 일이 있을 테니 다녀오라"고 하는데, 아마 내가 방에 들어가면 늙은 기생이 나를 끌어안고 곤란하게 만들어 웃음거리로 삼으려는 속셈인 듯했다. 나는 굳이 사양하고 일어나지 않았다. 경섬도 방에 들어가 문안 인사를 극진히 늘어놓았다. 얼마 뒤 점심때가 되자 상까지 차려 대접하였다. 역졸은 광주에 남겨 두었던 역리가 도착하지 않은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속은 줄을 알아차렸다. 나는 시중꾼을 불러 귓속말로 광산월이 오는 길목에 가서 걸음을 재촉하게 하라고 일렀다. 해가 저물 무렵 과연 광산월이 당도했는데, 곱게 화장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들어서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멍하니 쳐다보았다. 경섬은 자기 계책이 성공하지 못한 것을 몹시 분해하고 내기도 못마땅한 기색이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어 술과 풍악으로 실컷 즐기다가 사경(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두 기녀도 모두 그곳에 머물렀다.
6일(을축) 법성창에 나가 먼저 관선에 올라 태수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닷물이 빠지기 시작하기에 어쩔 수 없이 먼저 내려갔다. 태수는 덕원과 여러 기녀를 데리고 뒤쫓아 와서는 작은 배를 타고, 내가 먼저 내려간 것을 안타까워하며 강 가운데로 노를 저어 따라오면서도 관선에는 오르지 않았다. 배 안에서는 퉁소와 북소리, 노랫소리가 뒤섞여 시끌벅적한 채 관선 주위를 예닐곱 바퀴나 맴돌았다. 내가 율시 한 수를 지어 보내고서야 경섬이 관선에 올랐다. 노를 저어 바다 어귀를 나서니 바람이 세차고 물결이 용솟음쳤다. 해질 무렵에야 창고 마을로 돌아왔다.
7일(병인) 첫 번째로 거둔 세곡 삼천칠십 석과 세금으로 받은 콩 천 석을 배 열세 척에 나누어 실었다. 익산 태수 정언충이 석란창의 쌀을 옮겨 오지 않았으므로 이를 함께 보고하고, 해운으로 실어 나르는 곡식을 훔친 혐의로 영암의 아전 서른 명을 신문했다.
8일(정묘) 경섬, 덕원과 작별하고 무장에 이르니, 그곳 현감 이충(자는 거용)이 매우 정성스럽게 대접해 주었다. 광산월은 완산(전주)으로 간다며 따라왔다.
9일(무진) 고창에 도착하니, 관찰사가 13일이 자기 어머니의 생신이라 근신하느라 잔치를 열지 않고 대신 15일에 잔치를 마련할 테니 참석해 달라고 하여 답장을 보냈다.
10일(기사) 떠나려 했으나 비가 와서 머물렀는데, 현감 황입중이 조촐한 술상을 차려 주었다. 저녁에 비가 개어 정읍에 도착했다. 광주 기녀 둘이 관찰사의 잔치 때문에 뒤따라와 있기에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게 하다가 이경(밤 9시에서 11시 사이)이 되어서야 자리를 파했다.
11일(경오) 태인에 도착하니 현감 김자가 굳이 만류하여 양진당에서 묵었다.
12일(신미) 점심때 금구현에서 쉬고 저물녘 전주에 들어가니 관찰사가 찾아와 인사했다.
13일(임신) 진남헌에 나가 관찰사와 함께 장대타기, 줄타기, 뜀뛰기 등 온갖 재주놀이를 구경했다. 저녁 무렵 어머님께서 설익은 감을 드신 것이 체하여 부축을 받고 들어가시더니, 초저녁에는 병세가 매우 위태로워지셨다. 나는 부사 채형, 중군 이홍사, 판관 신지제와 함께 밤새도록 동헌에 앉아 소식을 기다렸다.
14일(계유) 진시(오전 7시에서 9시 사이)에 병세를 돌이키지 못하고 어머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그대로 머물러 상을 치르기로 했다.
15일(갑술) 전라우도의 재해를 조사하는 관원 강홍립이 도착했다. 강홍립은 어릴 적 친구이자 같은 해 급제한 사이라 정이 매우 두터웠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니 기뻤다. 그의 숙소에서 함께 묵었다.
16일(을해) 대렴을 마치고 빈소를 마련하였다. 전라좌도의 재해 조사관 김정목이 도착하여 강홍립의 숙소에서 만났다.
17일(병자) 성복(상복을 갖춰 입는 예)을 하였다. 나는 김정목, 강홍립 두 행대와 작별하고 저물녘 익산에 도착했다.
18일(정축) 비가 와서 머물렀다. 고산 현감 신순일이 찾아왔다. 저녁에 이유위가 임천에서 찾아왔다.
19일(무인) 진안 현감 심인조가 인사하러 왔다.
20일(기묘) 고을의 무과 급제자 소문진의 첩과 그 집에서 함께 지내는 계집종이 일솜씨가 매우 야무졌다. 이들이 술상을 차려 와서 위로하니 광산월도 함께 거들었다. 종일토록 피리 불고 노래하며 즐거워했는데, 이유위는 일어나 춤까지 추었다.
21일(경진) 소문진 첩의 집을 방문했다. 술상이 매우 푸짐했다. 동네 사람들이 구경하러 꽉 들어차게 모여들었다. 저녁에 임피에 도착하니, 현감 김료가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22일(신사) 이유위와 함께 소안역으로 윤강길을 찾아가니 노래와 피리로 즐겁게 해 주었다.
23일(임오) 광산월과 작별하고 이유위와 함께 나시포를 건너 한산에 도착해서는 태수 한회를 만났다. 저녁에 임천에서 묵었는데, 조보를 보니 큰형님이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있었다.
24일(계미) 이유위와 헤어져 고원에서 점심을 먹고 정산에서 묵었다. 현감 이사손과 그의 아들 필수가 찾아왔다.
25일(갑신) 유구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 온양에 도착했다.
26일(을유) 홍가신 공(호는 간옹)의 댁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저녁에 용궁 현감의 집에서 묵었다.
27일(병술) 창고 마을에 도착했다.
28일(정해) 거두어들인 쌀 이천삼백 석을 배 여섯 척에 싣고 보고서를 올렸다.
29일(무자) 직산에서 형님을 맞이했다. 현감 임자중과 진천 현감 임희지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물녘에 형님이 도착하셨다. 헤어진 지 삼 년 만에 만나니 몹시 기뻤다. 한 이불을 덮고 잤다.
9월 1일(기축) 변산에서 조운선 여섯 척을 만들어 보고서를 올렸다. 남쪽으로 돌아가 형수님을 기다렸다.
2일(경인) 형수님이 조카 셋을 데리고 도착하셨다.
3일(신묘) 형수님을 모시고 전주로 향했다. 천안에서 점심을 먹고 덕평원에서 묵었다.
4일(임진) 궁원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 공주에 도착했다. 목사 김상준이 극진히 대접해 주어 하인들까지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5일(계사) 목사가 안채로 와서 형수님께 인사드렸다. 정오에는 니산에서 쉬고 저녁에는 은진에서 묵었다.
6일(갑오) 여산에서 묵었다. 이곳 태수는 장원급제한 이성길인데, 그의 관아로 가서 인사했다.
7일(을미) 삼례에서 점심을 먹고 전주로 들어가는데, 판관이 풍악과 놀이패를 이끌고 반 마장이나 마중을 나왔다. 북소리 피리소리가 천지를 뒤흔들고, 바다 귀신춤과 학춤, 장대 위에서 공 놀리는 놀이, 탈춤 등 온갖 재주가 길을 가득 메워 구경하는 사람들이 성곽까지 넘쳐났다. 나는 큰조카에게 "이 길이 네가 과거에 급제하여 돌아오는 길이 아닌 것이 한스럽구나" 하고 농담을 던졌더니 그도 배를 잡고 웃었다. 마침내 동헌에서 형님을 뵈었다. 형님은 중동헌을 비워 나의 숙소로 내주셨다.
8일(병신) 그대로 머물렀다.
9일(정유) 전주를 떠나 점심때 금구에서 쉬고 태인에 이르러 양진당에 도착했다. 주위에 노란 국화와 아름다운 돌들이 어우러졌는데, 뉘엿뉘엿 지는 석양에 푸른 산빛이 피어올라 유난히 맑은 정취가 있었다. 오늘이 마침 중양절(음력 9월 9일)이라 주인이 높은 곳에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내가 이곳을 지나간 지 겨우 스무이렛날밖에 안 되었는데 풍경이 완전히 딴판이고, 함께 감상할 사람도 없으니 도리어 옛일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니, 이토록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나도 참 도량이 좁구나.
10일(무술) 천원에서 잠깐 쉬고 어두워져서야 장성에 도착했다. 조카 박정백은, 그의 큰형이 벼슬이 갈려 떠나면서 이곳에 남아 후임자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11일(기해) 광산월이 도착했다. 청암도 찰방 김효남이 찾아왔다.
12일(경자) 그대로 머물렀다.
13일(신축) 사기원 정씨 집에 이르러 그 누각에서 묵었다.
14일(임인) 경섬, 덕원, 그리고 현감 이정경이 강태초와 함께 와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밤중이 되어서야 자리를 파했다.
15일(계묘) 모두 떠났다.
16일(갑진) 그대로 머물렀다.
17일(을사) 배 여섯 척의 사공 조수들이 모두 도착하여 점검을 마치고 장부를 작성해 장계를 올렸다.
18일(병오) 나주에 도착했다. 도사와 목사가 찾아왔다.
19일(정미) 맏형님이 순시차 도착하니 목사가 큰 잔치를 마련해 대접했다.
20일(무신) 우수사 유형이 찾아와 인사했다. 저녁에는 노인과 함께 묵었다. 노인은 나주 사람이다. 정유년(1597년)에 왜적에게 붙잡혀 황해도까지 끌려갔을 때 몰래 중국 배에 올라타 복주(중국 복건성의 지명)에 이르러 무원 벼슬의 김학증에게 사정을 호소하니, 김학증이 돈을 후하게 주어 무이서원에 머물게 해 주었다. 서원의 여러 학생들도 모두 그를 잘 돌보아 주었다. 학문을 감독하는 벼슬아치 서즉등이 노인에게 우리나라에서 가장 받드는 학문이 무엇인지 글로 자세히 답하게 하였는데, 노인은 주자를 가장 받든다고 답하였다. 서즉등은 육구연과 왕수인의 학설을 비판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매우 기뻐하여 자기 책을 죄다 내어 주고 귀한 손님처럼 극진히 대접하였다. 기해년(1599년)에 사신 편에 딸려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무원 김학증에게 청하였더니, 김학증이 이를 허락하고 사여림이라는 이를 딸려 만세덕에게 보내는 공문서를 주었다. 마침내 태주를 거쳐 천태산, 안탕산, 진망산의 빼어난 경치를 구경하고, 소흥에 이르러 섬계, 운문, 약야, 난정 같은 유적지를 둘러본 뒤, 여항에서 열흘을 머물며 서호와 서산의 경치를 샅샅이 찾아보고, 가흥, 호주, 소주를 거쳐 오월 땅의 산천을 두루 돌아보고, 남경에 들어가 육조 시대의 유적을 찾아보고, 진회를 지나 양주의 스물네 다리에서 노닐었는데, 번화한 거리의 모습이 마치 당나라 전성기와 같았다고 한다. 서주를 지나 산동에 이르러서는 곡부에 가서 공자의 사당에 절하고 태산을 바라본 뒤 명나라 수도를 거쳐 본국으로 돌아왔다. 노인이 먼 곳을 노닐고 경치 좋은 곳을 두루 돌아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마치 눈앞에 보는 듯 생생하여 들을 만했다. 나는 부질없이 이곳저곳에 얽매여 마치 항아리 속에 갇힌 듯한 내 신세가 한스러워, 노인 앞에 부끄러운 점이 많았다.
21일(기유) 관찰사, 수사, 도사, 목사 등이 임탁의 강가 정자에서 노닐 때 나도 함께 하였다. 정자는 매우 산뜻하고 멀리까지 시야가 트여 물과 바위의 경치가 아름다웠다. 주인은 본디 세상을 피해 조용히 살기를 좋아하고 선의 이치를 깨쳐 함께 담론할 만한 사람이었는데, 성대한 음식과 시끄러운 풍악 소리에 귀와 눈이 피곤해져 오히려 흥이 나지 않았다. 시중드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하룻밤 조용히 담소를 나누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바쁜 여행길에 이런 기회를 어찌 다시 쉬이 얻을 수 있을까 안타까운 일이다.
22일(경술) 형님과 헤어져 장성에 도착했다.
23일(신해) 노령을 넘어 고부에서 묵었다.
24일(임자) 부안에 가서 배 만드는 목수 예순일곱 명을 점검하여 일을 시작하게 했다. 이 고을에 공문을 보내 나무를 운반할 인부 삼백 명을 징발하니, 부안 현감 임정이 찾아와 그로 인한 여러 폐단을 말하며 몹시 난색을 표했으나 그의 말을 따를 수는 없었다.
25일(계축) 그대로 머물렀다.
26일(갑인) 김제에서 묵었다.
27일(을묘) 돌아와 전주에 머물렀다. 이번 여정에서 지은 시가 쉰여섯 편이었다.
10월 13일(신미) 형님이 순시를 마치고 돌아오셨다.
16일(갑술) 열두 고을의 삼수병(포수, 사수, 살수)이 연병장에 모여 전체 사열을 하였는데, 나는 형님을 모시고 이를 지켜보았다. 군사들이 하나같이 주먹이 날래고 용맹스러웠다. 좌우로 군을 펼쳐 어려진과 아관진 같은 진법을 이루었는데, 병기는 예리하고 깃발은 선명하며 북과 피리로 신호하는 소리가 우렁찼다. 나아가고 물러서고 앉고 서는 동작이 모두 절도에 딱딱 들어맞았으니, 이 정도면 능히 적을 물리칠 만한데도 다들 벌벌 떨며 남쪽을 걱정하고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저녁이 되어서야 사열을 마치고 온갖 놀이를 벌여 군사들을 잔치로 먹였다. 밤이 되자 성안에 불을 밝혀 대낮처럼 환했다.
22일(병진) 배 만드는 일이 끝났다.
11월 1일(무자) 큰눈이 내렸다.
3일(병인) 오늘은 내 생일이다. 형님께서 큰 잔치를 베풀어 축하해 주셨다.
23일(병술) 조보를 보니 명나라 황제가 맏아들을 태자로 책봉하였으므로 조서를 받든 사신이 올 것이라 하였다.
12월 2일(무오) 우리 집 종이 서울에서 와서 전하기를, 한림시강 고천준과 행인 최정건이 사신으로 나오는데 나는 원접사 이정귀의 건의로 교체되고 사직 권운경이 나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형님과 헤어진 지 삼 년 만에 처음으로 한데 모여 여러 조카들까지 곁에 두고 몇 달을 함께 즐겨도 흡족하지 않을 판인데, 갑자기 멀리 떨어져야 할 일이 생겼으니 몹시 서운하다.
9일(을축) 형님이 송별연을 마련해 주셨다.
12일(무진) 하직 인사를 드렸다. 북풍이 스산하게 불고 찬 눈이 길에 가득하니 떠나는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눈물을 닦으며 길을 떠나 저녁에 여산에 이르러 장원급제자 이성길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13일(기사) 은진에서 묵었다.
14일(경오) 광산월과 헤어졌다.
15일(신미) 공주에 도착하여 삼창의 아전들을 모아 인수인계 서류를 작성했다. 목사는 서울로 올라갔고, 이유위가 찾아와 인사했다.
16일(임신) 그대로 머물렀다.
17일(계유) 연기에서 묵었다.
18일(갑술) 큰누님과 매형인 사어 박순원을 사탄으로 찾아뵈었다.
19일(을해) 그대로 머물렀다.
20일(병자) 청주에 들어갔다. 목사 서인원 공이 찾아왔다.
21일(정축) 낮에 청안현에서 쉬고 저녁에 음성에 이르렀다.
22일(무인) 충주에 도착하여 목사 김정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좌 손을남이 찾아와 인사했다.
23일(기묘) 엄정에 도착하여 지사 김신원 어른을 뵈었다.
24일(경진) 노수의 재실에 이르러 성묘하였다.
25일(신사) 고을에 들어가니 목사 강대호가 찾아와 인사했다. 저녁에 처가에 도착했다.
30일(병술) 재실로 돌아와 연말을 보냈다.
임인년(1602년, 선조 35년) 1월 1일(정해) 산소에 제사를 올리고 저물녘에 여주에 이르니 목사 송진보가 찾아왔다.
2일(무자) 양근에서 묵었다. 고을에 군수가 없어 아랫사람들이 나오지 않는 바람에 저녁도 굶은 채 묵었다.
3일(기축) 광주에서 묵었다. 목사 최중망이 찾아와 인사했다.
4일(경인) 서울에 들어갔다.
5일(신묘)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예를 올렸다. 권운경이 찾아왔으므로 문서와 도장을 모두 그에게 넘겨주었다.
서행기 (서기 1602년 6월 17일, 양력 추정)
이해(1602년, 선조 35년) 2월 6일, 원접사 이정귀는 종사관 박동열이 병으로 뒤처져 따라가지 못하게 되자, 나를 그 대신 종사관으로 삼아 보내 달라고 재촉하는 급한 보고서를 올렸다. 주상께서는 도감에 명하여 날짜를 정해 놓고 나를 뒤따라가게 재촉하셨다.
13일 조정에 하직 인사를 드리고 벽제에서 점심을 먹은 뒤 파주에서 묵었다.
14일 오목원을 지나 개성에 도착하니 유수 유희서가 찾아와 인사하고는, 박동열(자는 열지)이 의주에서 이미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하기에 곧바로 파발을 띄워 평산에 사실을 확인했다. 박청의 집에서 묵었다.
16일 아침에 평산에서 온 보고에 박동열이 떠난 지 엿새가 되었다고 하여, 관반 심일송에게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문의하고 그대로 머물며 명을 기다렸다.
19일 평산에서 소식이 왔다. 박동열이 중화에 도착하자마자 급히 출발한다는 보고를 올렸다니, 곧 돌아올 것이라 한다. 나는 이 소식을 다시 심일송 정승에게 보고했다.
20일 처음 올린 보고에 대한 회답이 비로소 왔다. 또 관반 심일송의 편지를 받았는데, 내 일을 주상께 아뢰니 그대로 가라고 명하셨다고 한다.
21일 마침내 길을 떠나 평산에 도착하니 자진과 자룡이 모두 찾아와 문안했다.
22일 안성을 지나 용천에서 묵었다.
23일 검수를 지나 길 위에서 박동열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동선에서 묵었다.
24일 황주에 도착했다.
25일 중화를 지나 평양에 들어가 관찰사 허욱(호는 양릉)에게 인사했다.
26일 순안을 지나 숙천에서 묵었다.
27일 파발을 만났는데, 이정귀(호는 월사)가 병이 났다는 보고였다.
28일 안주에서 묵었다.
29일 가산에서 묵었다. 파발을 만났는데, 두 사신이 이미 산해관을 통과했다고 한다.
30일 정주에 도착하니 목사 임직초의 병이 위중하여 그 동생 임약초가 와서 돌보고 있었으므로, 함께 지난 일을 이야기했다.
윤2월 1일 비 때문에 머물렀다. 임약초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2일 곽산에서 묵었다. 선전관이 표신을 가지고 왔는데, 이호민 공이 이정귀를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3일 감기가 들어 약을 먹고 땀을 냈다. 그대로 머물렀다.
4일 선천에 도착했다.
5일 그대로 머물렀다. 이호민(호는 오봉)이 떠난 지 사흘째였다.
6일 차연에서 묵었다.
7일 양책에서 묵었다.
8일 고진강에 이르니 이정귀가 배에 타고 있었고 양만세가 뒤따르고 있어, 함께 머물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곶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의주에 도착하여 이호민을 뵈었다. 동료 이자민, 홍휘세, 권여장 등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사 최염 공과 판관 홍유의가 찾아왔는데, 홍유의는 나와 같은 해 생원진사시에 급제한 사람이다. 통역관 표헌, 박인검, 박인상, 정득, 임준, 박대근과 이문학관 박희현, 사자관 이해룡, 승문원 서원 이자관 등이 함께 와서 인사했다. 제술관 김남창, 차천로(호는 오산), 한호(호는 석봉)도 함께 와서 문안했다.
9일 요동의 백패와 탐청통사가 와서, 두 사신이 초이렛날 이미 해주위에 도착했으므로 초열흘에는 요동에 당도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10일 원접사는 표헌과 박인검을 요동으로 보내기로 의논했다. 두 사신이 데려오는 수행원이 매우 많다는 말을 듣고, 예전에 다녀간 황씨·왕씨 두 사신 이전의 규정대로 고치려 한 것이었다. 도사선위사 정시회, 문례관 오여익이 의주에 도착하여 서로 만났다.
11일 연위사 황진이 의주에 도착하여 찾아가 뵈었다.
12일 의주부에서 관문에 하마연(도착을 환영하는 연회)을 베풀었다.
18일 표헌 등이 돌아와 전하기를, 두 사신이 데려오는 인원은 모두 동정대아문(왜란 때의 원정군 지휘부)의 전례에 따라 중군기고관 이하 각기 서른 명 남짓이라 한다. 또 동충이라는 자가 실권을 쥐고 사람을 부리는 솜씨가 몹시 능란하여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라고 한다. 그날 저녁 두 사신이 진강에 도착했다.
19일 동충이 먼저 왔다. 미리 결정해야 할 일이 너무 번거롭고 많아, 원접사는 이를 모두 주상께 보고했다.
21일 두 사신이 강을 건넜다. 원접사 일행과 관찰사 이하 관원들이 성문 밖에 나가 맞이하고, 관사에 들어가 환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상사는 연회에 딸린 예물이 없다며 잔치를 받지 않으려 하여, 간신히 청한 끝에야 잔치를 열 수 있었다.
22일 소관에서 점심을 먹고 양책에서 묵었다. 쉬고 묵는 곳마다 비용을 지불했다.
23일 차연에서 점심을 먹고 임반에서 묵었다.
24일 운흥에서 점심을 먹고 정주에서 묵었다. 이번에는 연회를 받지 않았다.
25일 납청정에서 점심을 먹었다. 처음으로 상사 석일오(호는 반송)가 시를 내놓아 원접사가 이에 차운하였고, 부사의 시에는 내가 차운했다. 상사는 원접사의 시를 손수 고쳐서 보여 주었다. 저녁에 가평에 도착하여 정주에서 마련한 연회를 받았다.
26일 안주에서 묵었다. 처음으로 연회를 받았다.
27일 숙녕에서 묵었다.
28일 순안에서 점심을 먹고 평양에서 묵었다. 그믐날 연회를 받았다.
3월 1일 뱃놀이를 했다.
2일 생양에서 점심을 먹고 황주에 이르러 연회를 받았다.
3일 동선에서 묵었다.
4일 검수에서 점심을 먹고 용천에서 묵었다.
5일 안성에서 점심을 먹고 평산에서 묵었다.
6일 금교에서 점심을 먹고 개성에 도착했다.
7일 연회를 받았다.
8일 오목에서 점심을 먹고 마산에서 묵었다.
9일 벽제에 도착했다.
10일 새벽에 서울 서쪽 교외에 이르렀다. 주상께서 황제의 조서를 맞이하여 태평관에 드셨다. 조서를 선포하는 의식을 마치고 두 사신은 남별궁(지금의 송현동에 있던 별궁으로, 한때 종묘를 임시로 모셨다가 이후로는 외국 사신의 숙소로 쓰였다)에 자리를 잡았다.
21일 두 사신이 돌아가게 되었다. 홍휘세는 탄핵을 받고 김남창은 병이 들어 둘 다 따르지 못했으며 박희현도 사양하고 가지 않았으므로, 원접사는 송효남을 추가로 데리고 벽제에서 묵었다.
22일 마산과 오목을 거쳐 송경에서 묵었다.
23일 금교와 오조천을 지나 평산에서 묵었다.
24일 안성에서 점심을 먹고 용천에서 묵었다.
25일 검수와 동선을 지나 황주에서 묵었다.
26일 생양에서 점심을 먹고 평양에서 묵었다.
27일 안정과 숙녕을 거쳐 안주에서 묵었다.
28일 자산을 거쳐 정주에서 묵었다.
29일 운흥과 임반을 거쳐 차연에서 묵었다.
30일 양책과 소관을 지나 의주에 도착했다.
4월 1일 비를 무릅쓰고 강을 건넌 뒤 일행은 중강에서 작별하고 돌아왔다.
2일 그대로 머물렀다.
3일 의주부에서 관문에 상마연(출발할 때 베푸는 이별연)을 열었다.
4일 두 사신은 진강을 출발했다.
5일 일행이 의주를 출발하여 용천에서 묵었다.
6일 차연에서 묵었다.
7일 선천에 도착했다.
8일 태수 강인이 일행을 머물게 하고 연등 잔치를 베풀었다.
9일 곽산에 먼저 가서 묵었다.
10일 먼저 정주에 도착했다. 저물녘에 원접사 일행이 막 오산에 도착했는데, 나는 먼저 떠났다.
11일 그대로 머물렀다.
12일 가산에서 묵었다.
13일 안주에서 묵었다.
14일 숙천에서 묵었다. 권여장은 먼저 성천으로 갔다.
15일 순안에서 묵었다.
17일 평양에 도착했다.
18일 그대로 머물렀다. 관찰사가 잔치를 마련해 위로해 주었다.
19일 사은사 정사호, 조정지와 서장관 윤안국이 평양부에 들어와, 낮부터 밤까지 함께 뱃놀이를 했다. 이정이 정사호 공을 따라 연경으로 가게 되어 그와 만나니 매우 즐거웠다.
20일 원접사는 먼저 상원으로 떠났다. 상원은 원접사의 조카가 현감으로 있는 고을이라, 그곳에서 첩과 작별하려는 것이었다.
21일 그대로 머물렀다. 관찰사를 추향당으로 찾아뵙고 종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22일 중화에서 묵었다.
23일 원접사와 만나 황주에서 묵었다.
24일 용천에서 묵었다.
25일 송경에서 묵었다.
26일 파주에서 묵었다.
27일 서울 서쪽 성 밖에서 묵었다.
28일 복명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병오기행 (서기 1606년 7월 6일, 양력 추정)
을사년(1605년, 선조 38년) 겨울, 명나라 황제의 맏손자가 태어났다. 황제는 한림수찬 주지번과 형과도급사 양유년을 파견하여 조서를 받들고 오게 하였다. 나는 그때 요산의 벼슬을 그만두고 서울 집에 있었는데, 원접사 유근 공이 나를 데려가겠다고 주상께 청하였다.
병오년(1606년, 선조 39년) 정월 초엿샛날, 의흥위 대호군 직을 제수받았다. 이달 21일 조정에 하직 인사를 드렸다. 동료인 필선 이지완은 어머니를 뵈러 성천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나와 전적 조희일만이 함께 따랐다. 김남창이 제술관으로, 진사 백진남이 서사관으로 함께 따르고, 통역관 표헌, 이해룡, 박인상, 진예남, 이운상, 신계도와 이문학관 이재영, 양만세, 사자관 이해룡, 송효남, 화원 이정, 서원 이자관이 뒤따랐다. 이날은 뒤따라와 베풀어 준 송별연이 번거로워 겨우 연서까지 가서 묵었다. 나는 여인과 함께 묵었다.
22일 벽제에서 점심을 먹었다. 고양 군수 김흡이 찾아와 인사했다. 저물녘에 파주에 도착하여 이지완, 송효남 두 사람과 함께 묵었다.
23일 오목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에 개성부에 도착했다. 개성 유수 홍가신(호는 간옹)이 찾아왔다.
24일 금교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평산에 이르니 관찰사 심열이 찾아왔다.
25일 안성에서 점심을 먹었다. 수안 군수 이경천이 찾아와 인사했다. 용천에서 묵었는데, 재령 군수 유희발과 소강 첨사 민인길, 강령 현감 조호룡 등이 만호 심눌의 소개로 함께 찾아와 인사했다.
26일 검수에서 점심을 먹고 동선에서 묵었다.
27일 소선령을 거쳐 황주에 도착했다. 저녁에 관찰사 심열과 목사 박동열(자는 열지), 조희일(자는 이숙), 여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상조가 인사하러 찾아와 송효남, 이지완 등과 함께 묵었다. 밤중에 기녀 학랑이 휘장을 걷으며 들어오기에 나는 곧 알아채고는, 정상조에게 "지금 임고의 밑을 지나 내게 인사하면서 적벽에서의 놀음이 즐거웠느냐고 묻더라"고 짐짓 둘러대었더니 세 사람이 껄껄 웃어대는 통에 학랑이 달아나 버렸다.
28일 원접사는 조카와 고을에서 만나기로 하여 중화에 머물렀다. 조희일은 나와 함께 먼저 평양에 도착했다. 서윤 박엽(자는 숙야)이 구름무늬로 꾸민 놀잇배에 춤추는 기녀들을 싣고 와 잔치를 베풀었다. 내가 관서 지방을 아홉 차례나 오갔지만 이번 잔치가 가장 성대했다. 기녀 향란은 예전에 내 형님께서 돌봐주던 이였는데, 노래와 우스갯소리에 능하므로 백가관서곡을 부르게 했다. 관찰사 박자룡이 중화에서 돌아와 함께 뱃놀이를 했다. 성 위에 횃불을 밝혀 놓으니 성가퀴가 대낮처럼 밝았다. 이경(밤 9시에서 11시 사이)에 가마를 타고 들어오니 박엽이 나를 자기 처소로 불러들였다. 내가 예전에 돌봐주던 기녀 춘랑이 기적에서 빠진 지 오래되었는데 서울에서 온 지 두어 달이 되었다고 한다. 박엽이 굳이 그를 데려다 밀어 넣었다. 그런데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매무새도 어지러워 몹시 앓고 있는 듯하기에 내가 만류했다.
그믐날 조희일이 먼저 왔다.
2월 4일 원접사가 비로소 도착했다.
5일 동지사 이상신, 정협과 서장관 유시행이 평양부에 당도했다. 저녁에 이지완(자는 양오)이 성천에서 왔다.
6일 평양부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7일 평양을 출발하여 순안에 도착했다. 박엽도 도차사원으로 따라왔다. 밤에 박엽, 여인과 함께 서쪽 곁채에서 묵었다. 성천 부사 이충(자는 거용)이 술자리를 성대하게 차려 놓고 노래를 청하기에 허락했더니, 기녀 넷이 들어와 인사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생김새가 몹시 곱지 않았다. 내가 "저 아이는 분명 노래를 잘할 것이다" 하니, 여인이 "어떻게 아는가?" 하고 물었다. 내가 "재주가 없으면 어떻게 이 자리에 낄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방 안 사람들이 한바탕 웃었다. 그런데 그 기녀는 과연 노래를 잘하였다. 발성이 맑고도 웅장하여 평안도에서 으뜸이라 할 만했으나 곡조에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이 흠이었다. 이날 밤 백패가 와서, 대 감생과 등황을 가지고 오는 관원이 온다고 보고했다 한다.
8일 숙녕에서 묵었다.
9일 안주에서 묵었다. 영변 기녀 생랑이 찾아와 인사하고 옛정을 나누었다.
10일 가산에서 묵었다. 영유 현령 홍영이 찾아와 인사했다.
11일 정주에 도착했다. 기녀 문아가 찾아와 인사하고 옛정을 나누었다.
12일 운흥에서 점심을 먹고 임반에서 묵었다.
13일 차연에서 묵었다. 병사 성윤문이 찾아와 인사했다.
14일 양책에서 묵었다.
15일 소곶에서 점심을 먹었다. 부윤 구의강, 판관 최간이 마중을 나왔다. 저녁에 성에 들어갔다. 나는 관아 노비 송풍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이지완과 조희일 두 사람, 양만세, 송효남 등도 모두 근처에 숙소를 정해 아침저녁으로 함께 어울렸다. 수세관 원외 이오는 나의 재종형인데, 찾아와 주니 매우 반가웠다.
16일 원접사가 매일 정해진 일과로 시를 짓게 하기로 하였다. 나는 이때부터 비로소 한유, 왕유, 이백의 시집을 읽었다.
22일 부윤이 관문에서 하마연을 베풀었다.
3월 2일 대 감생의 접반사 민인백이 들어왔다.
3일 원접사를 모시고 구룡연에서 노닐었다.
4일 연위사로 신흠(호는 현옹)이 왔다고 들었는데, 저물녘에 성에 들어가 보니 실은 대 감생의 연위사 송기였다. 백패통사가 두 사신이 초이튿날 산해관을 지났고 대 감생은 요동에 도착하자마자 되돌아갔다고 보고하니, 민인백과 송기 두 분은 서울로 되돌아갔다.
6일 도사연위사 유몽인이 왔다. 저녁에 박엽이 왔다.
7일 백패가 지나갔다.
8일 원접사는 표헌과 이해룡 두 통역관을 요동으로 보내 두 사신을 만나게 했다.
9일 관찰사가 도착했다.
10일 문례관 전한 유희분이 도착했다.
11일 도차사원 정주 목사 최기가 도착했다.
12일 진하사 민몽룡, 유사원과 서장관 이척이 도착했다.
13일 백패통사가 두 사신이 14일에 요동에 도착한다고 알려 왔다.
15일 관사에서 예행 의식을 행하였다.
16일 진하사 일행이 강을 건넜다.
18일 표헌과 이해룡이 돌아와 전하기를, "두 사신은 매우 너그럽게 대해 주었으나, 데려온 관속이 예전 고천준과 최정건이 왔을 때보다 적어서 따라온 요동 사람들이 모두 화를 내며 욕하고 손찌검까지 하려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20일 두 사신이 진강에 도착하니 원접사는 박인상과 진예남 두 통역관을 보내 인사하게 했다. 두 사신은 접대를 위해 차출된 이들의 성과 자, 호를 자세히 물었다고 한다. 하인들 말로는 오는 길에 지은 시가 매우 많다고 한다.
21일 다시 표헌과 이해룡을 보내 수행원의 수를 상세히 정하려 하였으나 결말을 짓지 못하고 돌아왔다.
22일 다시 예행 의식을 행하였다.
23일 두 사신이 강을 건넜다. 원접사 이하와 관찰사 등 모든 관원이 성 밖에 나가 맞이하고 환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조금 뒤 관원들이 인사드리는 예를 행하고 저녁에는 연위연을 베풀었는데, 하인들이 으스대며 위협하고 소란을 피우는 것이 고천준과 최정건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같은 날, 소관에서 점심을 먹고 양책에서 묵었다. 상사는 강가에서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시를 아홉 수나 지었고 부사가 지은 시도 그 절반이나 되어, 화답하기가 매우 군색하여 원접사와 나, 그리고 여인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24일 차연에서 점심을 먹고 임반에서 묵었다. 이날도 대여섯 편의 시를 지었는데, 부사가 으레 그 절반을 짓는 것이 아예 상례가 되어 버렸다.
25일 운흥에서 점심을 먹고 정주에서 묵었다. 상사는 원접사에게 《천고최성》이라는 책자를 내놓고 발문을 짓게 했다.
26일 가산에서 묵었다.
27일 상사가 먼저 공강정에 이르렀기에 나도 뒤따라갔다. 상사는 나를 불러들여 내 누님의 시에 관해 물으므로 누님의 시집을 드렸더니, 상사는 이를 읽으며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의 시는 책으로 펴내지 않았는가?" 하고 묻기에 나는 감히 펴내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어서 우리나라의 산천과 지리를 매우 자세히 물으므로 모두 글로 써서 답했더니, 상사는 부채를 꺼내어 자신이 지은 〈제산정시〉를 적어 주고는 화답하라 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즉시 입으로 불러 화답하였더니 상사가 감탄하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저물녘에 안주에 도착하여 녹주의 집에서 묵었다. 연주의 옛 정인이 찾아와 인사하고는 창아와 상의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했다.
28일 숙녕에 이르렀다. 상사가 나를 불러들여 "귀국에서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지어진 시가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낱낱이 적어 가지고 오시오" 한 다음, 내 과거 시험 성적을 물었다. 중시에서 일등한 것을 듣고는 "이것은 당나라·송나라 때의 과거 시험 방식이오" 하고는 이어서 "지금 무슨 관직에 있소?" 하고 물었다. 나는 "예빈시 부정이니 바로 중국의 광록소경에 해당합니다. 손님 접대를 관장하는 직책이기에, 국왕께서 저를 보내 음식과 역마를 마련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였다. 상사가 다시 내 경력을 물으므로, 나는 "처음에는 사관에 제수되었다가 병조의 직방과 예조의 주객 두 원외를 거쳐, 급사중으로 옮겼다가 무선랑중으로 승진하고, 해운판관이 되었으며, 사복시정에 승진하였다가 서쪽 고을(수안)의 수령으로 나갔고, 그다음에 지금의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사는 "이런 사람이 만약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마땅히 승정원이나 홍문관 같은 요직에 오래 머물렀을 텐데, 죄를 짓지 않고서야 어찌 낮은 벼슬과 지방 고을 사이만 오갈 수 있단 말이오?" 하고는 《세설산보》, 《시준》, 《고척독》 같은 책들을 꺼내 주었다. 또 이지완과 조희일을 불러 위로하며 그들의 과거 급제와 이력을 물었다. 부사도 이들을 불러 노고를 위로하고 〈형산석각첩〉을 주었다.
29일 평양에 도착하여 이아(관아의 별채)에서 묵었다. 춘랑은 화려하게 단장하고 상냥한 모습이 지난번 앓아 보이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여인이 시를 지어 나더러 화답하게 하기에 나는 그 자리에서 응했다.
30일 그대로 머물렀다. 두 사신과 뱃놀이를 했다. 목은 이색의 "종일토록 읊조려도 짓지 못했네"라는 시구를 보고는 사신들이 웃으며 내게 "매일 이런 부류의 시를 찾아 올려 주면 우리 마음이 한결 편할 것이오" 하였다. 부벽루에 이르자 두 사신이 나를 불러 "연주하는 음악이 중국 음악과 아주 비슷한데, 가사가 있소?" 하고 물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보당〉과 〈자야심사〉를 적어 드렸더니, 두 사신은 그 가사가 《화간집》(중국 오대 시절의 사를 모은 책)에 실린 것보다 못하지 않다고 칭찬했다.
4월 1일 생양에서 점심을 먹고 황주에서 묵었다. 민인길(자는 숙정)이 문 가운데 서 있기에, 나는 상사를 모시는 왕 장반에게 귀띔하여 그의 뺨을 후려치게 했더니 숙정이 아슬아슬하게 피했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저녁에 상사가 나를 불러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북경에서 옛 판본의 《황화집》을 보았는데, 이행, 정사룡, 이이 같은 이들은 모두 문집이 있소?" 하고 물었다. 나는 왜란 통에 판본이 모두 불타 버렸다고 답하니, 상사는 안타까워하며 "요즘 유영경의 작품을 보니 원만하고 유려한 것이 옛사람들보다도 훌륭합디다. 귀국 사람들의 시를 어서 베껴서 보여 주시오" 하였다. 나는 "길 위라 경황이 없고 글씨 쓸 사람도 없으니, 며칠만 기다려 주시면 모두 베껴 드리겠습니다" 하였다. 상사가 "길가 역관의 벽판에는 왜 귀국 사람들의 시문이 붙어 있지 않소?" 하고 묻기에, 나는 "황제의 조서를 받든 사신께서 지나는 곳에 변변찮은 시를 걸어 둘 수 없어 예로부터 붙이지 않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사가 웃으며 "나라로 치면 중국과 오랑캐의 구별이 있다지만 시에 무슨 안팎이 있겠소? 더구나 지금은 천하가 한집안 같고 사방이 모두 형제가 되어, 나와 그대가 모두 천자의 백성으로 태어났는데 어찌 중국에서 태어났다고 뽐낼 수 있겠소. 요즘 귀국의 사대부들을 보니 예절이 한아하고 문장이 빼어나서, 이들을 중국에 데려다 벼슬을 시킨다 해도 어찌 우리보다 못하겠소" 하였다.
2일 동선에서 묵었다. 상사가 원접사와 우리 세 사람(허균, 이지완, 조희일)을 초대하여 차를 마시는데, 갑자기 부사가 나타나서 우리 세 사람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처마 밑에서 절을 하였다. 부사는 매우 공손하게 답례하고는, 다시 함께 차를 마시며 서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갔다.
3일 검수에서 점심을 먹고 용천에서 묵었다.
4일 상사가 먼저 총수산에 도착하여 나를 불러 함께 동월과 공용경의 비석 두 개를 구경했다. 옥류천의 물을 떠 마시고는 서호(중국 항주의 호수)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야기해 주었다. 한참 뒤 부사가 와서 원접사와 우리 세 사람을 불러 즐겁게 술잔을 주고받았다. 저물녘에 평산에 이르렀다.
5일 회란석 위에서 잠시 쉬고 금교에서 점심을 먹은 뒤 송경에 들어갔다. 저녁에는 우리나라 사람의 시, 최치원(호는 고운) 이하 백스물네 명의 시 팔백서른 편을 골라 네 권으로 엮고 노란 표지를 씌워 두 벌을 만들어 두 사신에게 올렸다. 상사는 답례로 녹화단(꽃무늬를 놓은 푸른 비단) 한 필과 안식향 천 매를 주었고, 부사는 남화사 한 필과 《태평광기》 한 질을 주었다.
6일 개성에 머물렀다. 잔치가 끝난 뒤 상사가 나를 불러 우리나라 사람의 시를 평하였다. "최치원의 시는 거칠고 힘이 약한 듯하고, 이인로와 홍간의 시가 매우 좋습니다. 이숭인의 〈오호도〉, 김종직의 〈금강일출〉, 어무적의 〈유민탄〉이 아주 좋고, 이달의 시는 여러 형태가 하경명(호는 대복)과 매우 비슷하나 그릇이 크지는 않습니다. 노수신은 힘차고 깊이가 있어 왕세정(호는 감주)에 비해 다소 고집스러운 데가 있으나 오언율시는 두보의 시법을 깊이 터득하고 있습니다. 이색의 시들은 모두 부벽루에서 지은 시만은 못합니다. 내가 밤새 불을 밝히고 읽어 보았는데, 귀국의 시는 대체로 음률이 밝고 맑아 매우 좋습니다" 하고는, 이달의 〈만랑가〉를 소리 높여 읊으며 무릎을 치고 칭찬했다.
7일 오목에서 점심을 먹고 마산에서 묵었다.
8일 벽제에 당도했다.
9일 그대로 머물며 연회를 받았다. 상사가 나를 불러들여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왕세정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상사가 답했다. "계사년(1593년) 봄에 태창에 가서 왕세정 공에게 한 번 가르침을 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공은 남경 형부상서 자리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인물은 그리 잘생기지 않았으나 눈빛이 형형했습니다. 화원에 고고당, 박고당 같은 집을 짓고 시 짓는 벗들과 문하생들을 모아 온종일 시를 짓고 술을 마셨는데, 하루에 대여섯 말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시문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시녀에게 피리 불고 거문고 뜯으며 노래하게 하고는, 그 자리에서 종이를 펴 곧바로 완성하였습니다." 학문과 문장을 어떻게 공부했는지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젊었을 적에는 왕수인과 육구연의 새로운 학설을 공연히 좋아했는데, 늙어서 보니 주자가 주석을 단 사서가 으뜸이었습니다. 학문의 뜻은 여기서 찾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문장은 누구나 이반룡(자는 우린)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진나라 이전과 전한 시절의 문장, 한나라·위나라의 고시, 성당의 근체시 등도 반드시 읽어야 하지만, 소식의 시문이 가장 가깝고 배우기 쉽습니다. 나도 백거이와 소식의 시를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또 내가 지금 한림원에서 시를 잘 짓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남사중, 구대상, 고기원 등이 잘합니다. 병부랑 사조제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시는 하경명과 아주 비슷한 경지입니다."
10일 나는 먼저 서울에 와서 복명했다. 주상께서 교외까지 나오시어 일행을 맞이하셨다. 두 사신은 서울에 열흘 동안 머물렀다.
20일 두 사신이 돌아갔다. 일행이 모두 따랐는데 김남창과 백진남은 뒤처져 가지 않았고 역관 남윤함, 전대이가 새로 추가되었다. 벽제에서 묵었다. 저녁에 상사는 우리 세 사람을 불러 만난 자리에서 《양천세고》의 서문과 돌아가신 누님의 시집에 붙일 서문을 지어 주었다. 이정이 그린 불화첩을 보고는 좋아하며 이런 그림은 중국에서도 보기 드물다고 하고서 끝에 몇 마디 글을 적어 주었다.
21일 마산과 오목을 지나 송경에서 묵었다.
22일 금교에서 묵었다. 저녁에 상사가 나를 불러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옛 시집을 찾았다. 마침 보따리 속에 외할아버지께서 주신 〈후산시〉 여섯 권이 있어 드렸더니 상사가 두 손을 모아 사례했다.
23일 오조천에서 점심을 먹고 어두워져서야 평산에 이르렀다.
24일 옥류천에서 조촐한 술자리를 벌였는데 분위기가 매우 자연스럽고 부드러웠다. 저물녘 어두워져서야 용천에 도착하여 원인초와 함께 묵었는데, 못생긴 계집종을 잠자리에 들여보내려 하니 우스운 일이었다.
25일 검수와 동선을 지나 황주에 이르렀다.
26일 생양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평양에 닿아 배 안에서 연회를 받았다. 박엽은 어사가 장계를 올린 일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내가 찾아가 억지로 끌어내어 비로소 배 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원접사가 내게 회문시에 화답하라 하기에 숙소에 돌아와 고생고생하며 겨우 운을 맞추어 명에 응했다. 저물녘 두 사신은 쾌재정에 올라 나를 불러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부사에게 《세고》의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부사가 허락했다. 상사가 "우리나라 시는 유영경(호는 춘호)을 제일로 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부사가 "의기는 높고 말은 강직하지만 시가 무엇인지는 모르는 사람이오" 하였다. 그러자 상사는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듯하나 그 문장이 매우 신중하니, 이야말로 최고의 작가요" 하였다. 이는 영의정 유영경의 작품이 오로지 최립(호는 동고)의 작품을 본떴기 때문에 두 사신이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저녁에 이아에서 묵었다. 박엽이 새벽이 되도록 번거롭게 굴어 견디기 힘들었다.
27일 안정에서 점심을 먹고 숙녕에 이르렀다. 저녁에 부사가 나를 불러 직접 〈세고서〉를 내어 주므로 두 번 절하여 사례하고 물러났다.
28일 안주에 이르렀다. 저녁에 두 사신이 원접사와 우리 세 사람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해 위로해 주었다. 원접사와 나는 술을 잘 못하여 단술을 대접받았는데 맛은 술과 같았으나 취하지는 않았다.
29일 가산을 지나 정주에 이르렀다. 저녁에 두 사신이 한호(호는 석봉)의 글씨를 구하기에, 마침 내게 〈옥루문〉 두 벌이 있어 나누어 주었다. 상사는 "해서의 법이 아주 묘하다. 안진경보다는 위요, 왕헌지(자는 자경)보다는 아래이니, 조맹부(호는 송설)와 문징명(호는 형산)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할 듯하다" 하였다. 또 진본을 얻고자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장문부〉를 내주었다.
30일 운흥과 임반을 지나 거련에 이르렀다. 저녁에 상사는 황홍헌(호는 규양)의 〈증망형시〉의 운을 써서 장률 두 수를 짓고 큰 족자로 만들어 우리에게 주었다.
5월 1일 양책을 지나 의주에 이르렀다. 상사가 이별시를 재촉하기에 소매 속에서 스무 운으로 된 칠언율시를 꺼내 드리고 부사의 시와 나란히 펼쳐 놓으니, 상사는 "아름답고 섬세하며 바르고 전아하니, 참으로 관각체(조정의 문서에 쓰는 격식 있는 문체)를 터득했다"고 하였다.
2일 두 사신이 강을 건넜다. 상사는 아침부터 복통이 일어나 연회장에는 들어가지 않고 강 위에서 곧바로 헤어졌으며, 부사는 연회장에 들어가 나를 불러서는 〈감호영〉을 직접 내어 주고 정중하게 작별했다. 저녁에 동쪽 곁채로 돌아와 묵었다.
3일 표헌과 이해룡을 보내 문안하게 하였더니, 상사는 병이 심하여 만날 수 없었다.
4일 관문에서 상마연을 행하였는데, 원접사는 중건의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이라 참석하지 못했다.
5일 박인상, 진예남이 가서 문안하니 상사가 좀 나아졌다고는 하나 만나 보지는 못했다.
6일 조희일이 병이 심해 고생했다.
7일 표헌과 이해룡이 다시 두 사신을 문안하니, 상사는 아직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고 했다.
8일 조희일의 열이 좀 내렸다.
9일 박인상, 진예남이 다시 문안하니 상사가 불러서 만나 보았는데 매우 초췌한 모습이었으며, 13일에는 길을 떠나려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10일 부윤이 세관의 숙소에서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노랫소리와 피릿소리가 뒤섞였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11일 이지완이 먼저 떠났다.
12일 영과 조희일이 먼저 떠났다. 부윤이 남산에서 전별연을 베풀었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자 영이 내가 예전에 돌보았던 기녀들을 늙고 젊음을 가리지 않고 죄다 끌어내 앉히니 서른 명이 넘었는데, 그 가운데 진짜가 아닌 사람이 여섯이나 섞여 있어 더욱 우스웠다. 조희일의 정인 연아는 이별이 서러워 흐느끼며 고개도 들지 못했다. 나는 "내 정인은 이렇게 많아도 슬퍼 우는 이가 없는데, 이숙은 단 하나뿐이면서 이렇게 연연해하니, 많아 봤자 소용없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구려" 하니 모두 크게 웃었다. 저녁에 양책에서 묵었다. 연아가 나의 정인 봉랑을 데리고 조희일을 뒤따라왔다. 나는 "서른 명 가운데 너만 왜 왔느냐. 그대로 남아 있다가 용리와 이별하는 편이 나을 것을" 하였더니 조희일이 "형은 어찌 그리 박정한 말씀을 하십니까" 하였다.
13일 아침에 연아는 조희일을 붙들고 슬피 울며 데굴데굴 굴렀다. 봉랑도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울음을 아껴 두었다가 용리와 이별할 때 울어라" 하였다. 봉랑은 옥당의 관리 용우린과 좋아하는 사이였으나 나 때문에 뜻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14일 선천에 도착하여 천추사 홍경신(호는 녹문) 공과 함께 묵었다.
15일 점심때 곽산에서 쉬며 성절사 이각, 서장관 유경종과 만났다. 저녁에 정주에 이르렀다.
16일 가산을 지나 대정강에 이르렀다. 연주의 기녀가 원접사의 방기와 함께 있는 것을 배 위에서 만나자 서로 정을 품고 바라보았다. 조희일은 그를 데리고 안주로 갈 계획을 세웠으나, 원접사의 기녀가 혼자서는 갈 수 없다며 굳이 말리는 바람에 그는 슬퍼하며 가 버렸다. 저녁에 안주에 이르니 이지완과 점마 조여익이 배에서 맞이해 주었다.
17일 나는 먼저 영유로 가서 자인의 아내를 만났다.
18일 그대로 머물렀다.
19일 순안을 지나 평양에 도착했다. 사은사 한술, 황정철과 서장관 송인급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 이아에서 묵었다. 서장관이 방기 옥일을 빼앗아 가 버렸다.
20일 원접사 일행이 떠났다.
21일 원접사가 비로소 도착했다.
23일 나는 먼저 중화로 돌아갔고, 우리 세 사람은 박엽, 대동도찰방 송영구(자는 인수)와 함께 매우 즐겁게 뱃놀이를 했다.
25일 중화를 지나 원접사를 모시고 황주에서 묵었다.
26일 동선에서 묵었다. 《황화집》이 비로소 완성되니 모두 여섯 권이었다.
27일 평산에서 묵었다.
28일 개성부에서 묵었다. 조보를 보니 형님이 총재(이조 판서)로 제수되어 있었다. 원접사가 나를 불러 몹시 근심하였으니, 때가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29일 오목에서 점심을 먹고 송도로 부임하는 경력 심집을 만났다. 성균관 벽에 방을 붙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서로 탄식했다. 저녁에 마산에서 묵었다.
6월 2일 서울에 들어가 복명하고 형님을 뵈니, 형님은 이조 판서 자리를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다시 말미를 주었으므로 마침 사직 상소를 써 놓고 앉아 계셨다.
(용어) 《황화집》은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올 때 접대관과 주고받은 시를 모아 엮은 시집으로, 1450년(세종 32년) 세종의 명으로 처음 편찬된 뒤 사신이 오갈 때마다 새로 엮어 펴냈다. "성균관 벽에 방을 붙인 사건"은 1606년 5월, 성균관 문묘의 담벼락에 조정 대신과 내시의 이름을 나열해 비방하고 좌의정 기자헌의 비행을 규탄하는 글이 나붙자 선조가 노하여 관련자들을 하옥시키고, 그 가운데 학유 고경오와 관노 등이 매를 맞아 죽은 사건을 가리킨다.
성소부부고 제19권
10. 00:09
성소부부고 제19권 · 문부 16 · 잡기
출처: 성소부부고 제19권, 문부 16, 잡기, 몽기
배경: "몽기"는 허균이 1609년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임무로 강가에 머물던 중 꾸었다는 신비로운 꿈을 적은 짧은 글이다. 꿈속에서 하늘의 궁전으로 인도되어, 자신이 전생에 신선 세계의 관리였다가 실수로 인간 세상에 귀양 온 것이라는 사연을 듣는 도교적 환상담으로, 허균의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자신의 파란만장한 처지를 신선의 운명에 빗대어 풀어내는 태도가 잘 드러난다.
몽기 (서기 1609년 5월 18일, 양력 추정)
1609년, 광해군 즉위 원년의 일이다. 명나라 황제가 우리 임금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는 조서를 내리기로 하고, 황실 내시 관청인 사례감 소속의 유 태감에게 그 조서를 받들고 오게 했다. 나는 분에 넘치게도 사신을 맞이하는 임시 관청의 관리인 도감관을 맡아 강가에 나가 열흘 넘게 머물러 있었다.
4월 어느 날 밤, 잠자리에 누워 미처 잠들기도 전이었다. 금박을 입힌 자주색 사각 관을 쓰고 꽃무늬를 수놓은 비단 도포를 입고 둥근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를 두르고 푸른 인끈을 늘어뜨리고 비단실로 짠 신을 신은, 점잖고 풍채가 훌륭한 사람 둘이 손에 금빛 깃발을 들고 나타나 나를 이끌며 말했다.
"옥황상제께서 그대에게 봉래산의 식양을 내리셨으니, 하늘 문에 나아가 조서를 받으시오."
그러고는 나를 긴 끌채가 달린 수레에 태우고 눈을 감으라 했다. 귓가에 바람 스치는 소리가 무섭도록 빠르게 지나갔다. 얼마쯤 지나 "이제 눈을 떠도 좋습니다" 하는 말에 눈을 뜨니, 대낮처럼 환하게 빛나는 은빛 궁궐이 홀연히 눈앞에 펼쳐졌다. 그 안에는 커다란 전각 하나가 자개와 온갖 보석으로 장식되어 눈이 부셔 똑바로 볼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영소보전'이라는 네 글자가 크게 적힌 현판이 걸려 있었다. 흰옷 입은 선녀 수천 명이 구름 같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줄지어 서 있었고, 비단 두건을 쓰고 학 깃털로 지은 옷을 입은 이들도 계단 양쪽으로 수백 명씩 늘어서 있었다. 흰 난새와 자줏빛 봉황이 아름다운 꽃나무 사이를 날아다녔다.
조금 있으니 전각 위에서 말을 전하는 사람이 하나 나타났다. 흰 명주옷을 입고 수염을 길렀으며 키는 작지만 눈빛이 번갯불처럼 형형했다. 그는 나를 알아보는 듯 웃으며 말했다.
"자부선조께서는 굶주림에 시달리다 보니 예전에 노닐던 하늘 세계도 못 알아보십니까."
그러고는 옥으로 만든 함에서 책 세 권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책마다 금빛 글씨로 제목이 적혀 있었는데, 첫째는 《옥청금사비록》, 둘째는 《구천뢰부영부》, 셋째는 《오암진형도》라 했고, 모두 보라색 꽃무늬 비단으로 표지를 입혔다. 나는 네 번 절하고 그것을 받아, 송아지 같은 얼굴에 수염이 무성하고 흰옷을 입은 자에게 건네 양손으로 받들게 했다. 잠시 뒤 섬돌 위에서 생황과 퉁소 소리가 울려 퍼지고, 난새와 학들이 오색구름 사이에서 날개를 펼치며 시원스레 춤을 추었다.
조금 있다가 흰 명주옷을 입은 그 사람이 상제의 명이라며 나를 이끌고 동쪽 문을 지나, 옆으로 난 하얀 홀 모양의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어둑한 회랑을 한참 걸어가니 별채 하나가 나왔는데, 고요하고 시원스레 트인 곳이었다. 맑은 물이 주위를 감돌아 흐르고 세 가지 꽃을 심어 놓은 작은 정자에는 '봉래도산'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흰 명주옷의 그 사람은 작은 방문을 열고 나에게 들여다보라 했다. 들여다보니 상아로 만든 침상 위에 산호 베개가 놓이고 용수초로 엮은 자리가 깔려 있었으며, 물소 뿔로 눌러 놓은 금빛 휘장이 드리워 있었다. 향은 가물가물 타오르고, 옥으로 만든 책상 위에는 《황정경》 한 권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는데 사람 기척 하나 없이 고요했다. 그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대가 예전에 살던 곳입니다. 떠난 지 마흔 날 만에 돌아오셨군요. 이곳의 하루가 인간 세상의 한 해와 같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십니까."
나는 놀랍고 당황스러워 한참을 넋 놓고 서 있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그대는 본디 벽하원군을 모시는 관리로서 봉래산의 물을 다스리는 총책임을 맡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북쪽 마을의 마귀 우두머리들과 어울려 지내고, 특히 상원의 시녀인 위성군을 지나치게 아끼신 나머지 맡은 일을 게을리하셨지요. 그 일로 상제께서 노하시어 그대를 남쪽 마을 한산주로 귀양 보내시고, 그대를 따르던 여러 귀신들을 내쫓고 누리던 복도 거두어들이셨습니다. 위성군은 원교라는 곳으로 쫓겨났고, 그를 모시던 시녀 백 명은 창기 신세로 떨어져 정해진 기한이 차야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대가 속세에 있으면서도 풍류와 멋스러움만큼은 당대에 이름을 날렸지만, 운명만큼은 일부러 곤궁하고 군색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제가 여러 귀신들을 불러 하나하나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옥으로 만든 지휘봉으로 오른쪽 작은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풍도산 자금원 팔환 무상마두신 행태보는 나오라."
잠시 후, 검은 두건을 쓰고 붉은 비단 저고리를 입은, 눈이 툭 튀어나오고 얼굴은 뾰족하며 키가 크고 수염이 없는 데다 걸음이 몹시 빠른 자가 나타나 꿇어앉아 공손히 대답했다. 이번에는 왼쪽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광상동주 초신원 육압대도통 팔비나타는 나오라."
그러자 갑자기, 구슬 아홉 개를 꿴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검은 담비 가죽옷을 입은, 쥐 눈처럼 생긴 눈으로 돼지처럼 힐끔거리며 성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코가 크고 배가 불룩한 자가 나와 꿇어앉아 공손히 대답했다. 이번에는 남쪽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연화동 교태산 좌도관 육원 대마두 적발귀는 나오라."
그러자 곧바로, 물고기 나는 무늬를 놓은 푸른 도포를 입고 손에 쇠스랑 모양의 칼을 쥔, 모자도 신도 걸치지 않은 네모진 얼굴에 뺨에는 시뻘건 수염이 난 자가 나와 꿇어앉았다. 다시 북쪽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무당진군좌하 귀관사명 금랑백일서는 나오라."
그러자 곧, 네모난 옥띠를 두르고 자줏빛 짧은 도포를 입고 양쪽으로 뿔 모양이 솟은 두건을 쓴, 얼굴이 시퍼렇고 키가 작으며 귀가 상투처럼 위로 뾰족한 조그만 사람이 나와 꿇어앉았다.
이번에는 방 북쪽에 세워진 운모 병풍을 지휘봉으로 깨부수니, 병풍 뒤에서 사람 하나가 튀어나왔다. 화양건을 쓰고 명주 창의를 입었는데 허리띠도 신도 걸치지 않았지만 풍채만큼은 맑고 빼어났으며, 얼굴은 검고 눈은 희고 윗입술이 드러나 보이는 자였다. 그는 앞의 넷과 달리 꿇어앉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 곁에는 두 존재가 따르고 있었다. 하나는 뺨이 누렇고 눈이 움푹 들어가고 이빨 두 개가 길게 튀어나와 마치 늙은이 같은 모습으로, 검은 어깨에 금패를 두르고 오랑캐 말로 뭐라 뭐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얼굴이 붉고 수염이 적으며 살집이 좋고 술에 취한 듯한 모습으로, 꽃무늬 속옷을 입고 붓주머니를 차고 벼루를 받든 채 몸을 기울여 소매를 털고 있었다. 흰 명주옷의 그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조주권진군이 치수를 맡았던 그대의 방탕한 나들이를 바로잡지 못해 함께 귀양을 오게 된 것인데, 어찌하여 새태세운리금강까지 데리고 왔는가."
이어서 그가 다시 외쳤다.
"성군을 모시는 시녀, 광한궁 봉록여사 모대충은 어디 있는가."
그러자 북쪽 방의 두 짝 문이 갑자기 활짝 열리며 부인 하나가 나와 섰다. 자줏빛 노을빛 어깨걸이를 걸치고 위에는 수를 놓은 초록빛 저고리를, 아래에는 비취빛 노을 무늬 치마를 입었으며 구슬로 아홉 가지 무늬를 놓은 신을 신었는데, 호리호리하고 키가 크며 얼굴은 뾰족하고 몸에는 공작 무늬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나는 놀랍고 의아하기만 했다. 한동안 여섯 존재는 서로 곁눈질만 할 뿐 감히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얼마 뒤 흰 명주옷의 그가 붉은 깃발 하나를 들고 나를 불러 남쪽 문을 지나, 처음 왔던 길을 되짚어 궁전 아래에 이르렀다. 그가 말했다.
"그대는 인간 세상의 재미를 실컷 맛보셨습니까. 상제의 명령은 이렇습니다. 그대에게는 원래 백 일의 액운이 정해져 있으니, 타고난 정기를 잘 지켜 몸을 보전하고, 남몰래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세상의 유행을 좇지 말고 지내십시오. 그렇게 예순 날의 기한이 차기를 기다리면, 가벼운 구름 수레가 저절로 그대를 맞으러 내려올 것입니다. 세상을 피해 숨어서 수련할 곳은 식양이니, 그리로 가서 공을 원만히 이룬다면 어찌 굳이 백 일을 다 채운 뒤에야 오르겠습니까. 부디 힘써 노력하십시오."
그러고는 나를 궁전 동쪽 문 밖으로 떠밀고, 문 왼쪽에 걸린 큰 종을 한 번 쳤다. 요란한 종소리에 놀라 깨어 보니, 그것은 한낱 꿈이었다.
아, 이것이 정말 있었던 일일까, 아니면 헛된 것일까. 나는 급히 촛불을 켜고 이 일을 적어, 훗날 그 진위를 확인할 날을 기다린다.
(용어) 상제: 하늘을 다스린다는 옥황상제. / 식양: 강릉의 옛 이름. / 도감관: 외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도감)에 속한 관리. / 사례감·태감: 사례감은 명나라 황실에서 환관을 관리하던 관청이고, 태감은 그 소속 환관에게 주어진 벼슬 이름이다. / 영소보전: 옥황상제가 머무는 궁전의 이름. / 자부선조: 하늘 세계에 속한 신선 관리를 이르는 말로, 꿈속에서 허균을 부르는 호칭이다. / 봉래도산: 허균이 전생에 신선으로 살았다는 처소의 이름. / 황정경: 도교에서 몸과 마음을 닦을 때 읽는 경전. / 벽하원군: 도교에서 섬기는 여신의 이름. 이 글에서 허균은 전생에 이 여신을 모시는 관리였다고 나온다. / 한산주: 이 글에서 허균이 살고 있는 인간 세상, 곧 강릉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였다. / 상원·북원: 하늘 세계 안에 있는 구역의 이름으로 보이나, 원문에 자세한 설명은 없다. / 원교: 위성군이 쫓겨나 갔다는 곳의 이름. / 창기 신세: 노래와 춤으로 사람을 접대하던 천한 신분으로 떨어졌다는 뜻. / 행태보, 팔비나타, 적발귀, 백일서, 조주권진군, 새태세운리금강, 봉록여사 모대충, 그리고 병풍 뒤에서 나온 이름 없는 이: 모두 저승 또는 신선 세계에 속한 귀신과 관리들의 이름이다. 원문에도 이 이름들의 뜻에 대한 설명이 따로 없어, 발음 나는 대로만 옮겼다. / 성군: 앞서 나온 벽하원군을 높여 부르는 말로 보인다. / 광한궁: 전설 속에서 달에 있다고 하는 궁전.
성소부부고 제20권
10. 14:38
성소부부고 제20권 · 문부 17 · 척독 상(尺牘上)
출처: 성소부부고 제20권, 문부 17, 척독 상
배경: 제20권은 문부 열일곱 번째 갈래인 "척독(尺牘)" 가운데 첫 부분(상)이다. 척독은 짧은 편지, 곧 사사로운 안부와 부탁을 담은 개인적인 서신이다. 이 권에는 정승과 판서 등 당대 고관들, 그리고 벗과 문우들에게 보낸 여든두 통의 짧은 편지가 실려 있다. 벼슬을 청탁하거나 인사를 부탁하는 사연, 죽은 누님(허난설헌)과 둘째 형(허봉)의 문집 간행을 부탁하는 사연, 서적과 골동품을 주고받는 이야기, 벗과 나눈 문학 비평과 농담 섞인 안부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앞선 산문들보다 훨씬 짧고 격의 없어, 허균의 인간적인 면모와 당대 관료 사회의 풍경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서애 유성룡 정승께 올린 편지
1604년 8월 (서기 1604년 9월 8일, 양력 추정)
1591년에 세상을 떠난 누님의 시집에 서문을 지어 주셨는데, 제가 그것을 외워 두지 못한 채 전란을 만나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이 불민한 죄를 어찌 면하겠습니까.
요즘 어떤 사람이 그 서문이라며 보여 주기에 읽어 보니 마치 다른 시대의 일처럼 낯설어 진본인지 가려낼 수가 없었습니다. 삼가 이를 기록하여 집사께 바치오니, 노사께서 잘못된 곳을 바로잡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이는 문집 첫머리에 실어 간행하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남쪽을 바라보니 아득히 멀어 마음속 말을 다 하지 못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도를 위해 몸을 잘 보중하소서.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1605년 2월 (서기 1605년 4월 2일, 양력 추정)
형님의 시문은 대부분 흩어져 없어졌습니다. 겨우 몇 편을 모아 간행하고자 이제 깨끗이 베낀 책을 바치오니, 한번 읽어 보시고 서문을 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형님을 가장 깊이 아시는 분으로는 노사만 한 분이 없습니다. 세상에 그분의 글에 서문을 지을 사람으로 노사가 아니고서야 누가 있겠습니까. 천 리 먼 곳에서 간절히 부탁드리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서문을 지어 영광되게 해 주시면 어떨는지요. 돌아가신 형님이 이를 아신다면 마땅히 지하에서 감격하여 우실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헤아려 주소서.
1606년 1월 (서기 1606년 2월 21일, 양력 추정)
삼가 손수 써 주신 편지를 받으니 황홀하기가 마치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는 것과 같아 무척 기쁘고 위로가 됩니다. 돌아가신 형님의 시집 서문을 지어 주시겠다고 승낙하신 지 벌써 해가 넘었는데도 아직 지어 주지 않으시니, 바라는 마음이 갑절로 간절합니다.
김흥세(자 근언)의 맏형은 완력과 용기가 있고 지략까지 갖추어 임용할 만한 인재인데, 더구나 노사께서 이미 추천하셨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가 지금 청송 고을살이를 얻으려는 것은 대감을 뵙기 위해서입니다만, 하늘이 사람의 바람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습니다.
심부름꾼이 급히 돌아가는 바람에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살펴 주소서.
(용어) 유성룡(호 서애)은 선조 때의 정승이다. 작고한 누님은 허균의 누이인 여류 시인 허난설헌으로, 본명은 초희다.
한음 이덕형 정승께 올린 편지
1605년 3월 (서기 1605년 5월 2일, 양력 추정)
형님께서는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형님의 시문 또한 전란 통에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그 시문 몇 수를 겨우 모아 두 권으로 엮었습니다. 이제 제가 맡은 고을에 가서 봉급의 절반을 떼어 이를 간행하려 하는데, 이는 형님이 남긴 시문 전체에 비하면 정말 태산의 터럭 한 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한 부를 바치오니, 귀찮으시더라도 읽어 보시고 몇 마디 말씀으로 그 끝에 발문을 달아 주신다면, 돌아가신 형님도 큰 은혜를 입는 셈이 될 것입니다. 절하고 삼가 아룁니다.
1608년 3월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대감 곁을 떠나온 지 몇 달 사이에 나라에 여러 일이 많았습니다. 승하하신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이 소신도 이렇게 간절한데, 하물며 합하께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암자의 승려가 대감의 뜻을 전해 오기에, 종이에 인쇄한 《소학》 같은 책들을 주어 대감께 보내 드렸습니다.
작별하던 날 나중에 전별시를 지어 주시기로 약속하셨기에 훌륭한 시를 지어 주시기를 날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국상 중이라 감히 거듭 부탁드리지 못합니다. 황공하여 다 쓰지 못합니다.
(용어) 이덕형(호 한음)은 선조 때의 정승이다.
오성 이항복 정승께 올린 편지
1605년 3월 (서기 1605년 5월 2일, 양력 추정)
전에 《원각경》 토를 단 책을 대감께 올려 읽어 보시도록 했었는데, 제가 잘못 해석한 곳을 대감께서 이미 모두 지적하셨다고 하니, 저에게도 가르쳐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완위편》은 필사하는 사람을 시켜 베낀 뒤 곧 김충신 편에 부쳐 대감께 돌려보냈습니다.
돌아가신 형님의 시집은 이제야 간행하였습니다. 삼가 한 부를 대감께 바치오니 열람하시기 바랍니다.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1610년 5월 (서기 1610년 7월 5일, 양력 추정)
성우길은 저의 집안 조카입니다. 완력과 용기가 있고 지략까지 갖추어 이미 북방을 지키며 공을 세운 바 있습니다. 호남의 우수사 자리가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다니, 바라건대 합하께서 그를 그 자리에 추천해 주셨으면 합니다. 세상에서는 북방의 장수는 남쪽 변경을 지키는 데 맞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리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옛날 양복은 북쪽 사막 지역에서도 여러 차례 공을 세웠고, 바다에서 싸우는 누선 장군이 되어서도 그 정예 병력이 꺾인 적이 없었습니다. 마원(신식후)은 농서와 촉 지방을 평정하는 데도 좋은 계책을 다 썼고, 남쪽 오령 밖에 구리 기둥을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어디에서나 통하는 재주라면 어느 자리를 맡아도 뜻대로 해낼 수 있는 법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오늘날의 누선 장군이요 복파 장군이니, 합하께서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몸이 아파 직접 찾아뵙고 아뢰지 못해 죄송합니다.
(용어) 이항복(호 오성, 오성부원군)은 선조 때의 정승이다. 양복은 한 무제 때의 장수로 외적과 싸워 전공이 많았다. 마원(신식후)은 후한의 명장 복파장군으로, 교지 지방을 정벌하여 평정하고 그 경계에 구리 기둥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일송 심희수 정승께 올린 편지
1605년 2월 (서기 1605년 4월 2일, 양력 추정)
합하께서 정승이 되셨으니 어진 인재들이 뜻을 펼 수 있게 되어 태평한 세상을 기대할 만합니다. 저로서는 개인적으로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경사스럽습니다.
돌아가신 형님의 시문은 흩어져 거의 남지 않은 지경인데, 겨우 제 기억에 남은 몇 편과 남들 사이에 전해 오던 것들을 보태어 두 편으로 엮어 이미 간행하였습니다. 삼가 한 부를 대감께 올리려 합니다. 대감께서도 옛 벗을 그리워하는 감회가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대감께서 헤아려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용어) 심희수(호 일송)는 선조 중기의 정승이다. "산양의 감회"는 진나라 상수가 옛 벗의 고향인 산양을 지나다 피리 소리를 듣고 옛 생각에 잠겼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옛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황지천 황정욱에게 올린 편지
1604년 9월 (서기 1604년 9월 29일, 양력 추정)
요즘 세상에 깃발을 세우고 문단에 우뚝 설 사람이 합하가 아니고서야 누구이겠습니까. 어찌하여 이조의 논의가 공정하지 못하여 학덕 높으신 어른의 벼슬길을 오랫동안 막아 두고, 마땅히 그 아래에 있어야 할 사람이 도리어 높은 자리에 올라 있게 하는지요. 아, 이 또한 운명인가 봅니다.
저에게 보내 주신 훌륭한 편지에서는 칭찬이 너무 지나치고, 인재를 아끼시며 뜻을 펴지 못함을 애석해하시는 마음이 말씀 밖으로까지 간절하여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고을살이 나가는 일이 무척 급박하여 미처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봄에 성묘하러 서울에 가게 되면 마땅히 문하를 찾아뵙고 사례하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1606년 8월 (서기 1606년 9월 16일, 양력 추정)
주지번 태사의 그림에 합하의 시까지 곁들여 얻었으니 더욱 귀중합니다. 저는 갑작스레 두 가지 보물을 얻고 보니 이번 행차가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어찌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지 않겠습니까.
가을이 서늘해지는데 잘 보중하시기를 우러러 빕니다.
1607년 3월 (서기 1607년 4월 20일, 양력 추정)
멀리 영남 밖으로 고을살이를 나가게 되어 찾아뵙고 떠나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심생이 전별시를 가지고 왔더군요. 수십 번을 읽어 보니 막힘없고 호탕하여 차마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성품이 졸렬하고 게을러서 외지로 벼슬살이 나가면서도 여러 어르신들께 시를 지어 달라 청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귀한 시를 얻고 나서는 곧바로 이 시의 운을 따라 문장으로 자부하는 여러분에게 두루 시를 지어 달라 청했더니, 다들 과연 화답해 주시어 곧 커다란 시집이 되었습니다. 이는 군자의 말씀을 귀히 여긴 것이요, 저를 훌륭하게 꾸며 준 일이니, 감격스러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용어) 황정욱(호 지천)은 선조 때 예조 판서를 지내고 장계부원군에 봉해졌다. 주지번(주 태사)은 명나라 사람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인물이다.
윤월정 윤근수에게 올린 편지
1606년 8월 (서기 1606년 9월 16일, 양력 추정)
합하께서는 중국의 옛일에 무척 밝으시어 중국 사람 중에서도 어깨를 겨룰 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것을 저 같은 사람에게 물으시니, 이는 귀머거리에게 소리를 들어 달라 부탁하는 격입니다.
김주의 일은 전에 낭중 가유약에게서 《이문광독》이라는 책 속에 실린 고중현이 쓴 《병탑유언》 한 권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나라와 관련된 일이 세 조항 실려 있었는데, 하나는 종계에 관한 일이었고, 하나는 기순(기 천사)과 서거정이 주고받은 시에 얽힌 이야기였으며, 또 하나가 바로 김주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오래된 일이라 정확한 문구는 잊었지만, 삼가 그 대략을 기억하여 별지에 적어 올리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1607년 8월 (서기 1607년 10월 5일, 양력 추정)
왕경 상서의 일화 네 조목은 바로 하양준이 지은 《사우총설》에 실려 있습니다. 지금 이를 기록하여 바치니 읽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유청일찰》이라는 책은 전예형이 지은 것인데, 저는 전에 가 낭중에게서 빌려 한 번 읽고 돌려주었으니 지금은 가진 것이 없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장씨와 육씨는 장주와 육온을 가리키는 것이지, 강릉 장거정과 오대 육광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608년 5월 (서기 1608년 6월 26일, 양력 추정)
서울에 갔다가 장모상을 당하여 허둥지둥하느라 겨를이 없어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합하께서 먼저 저희 형님들의 집까지 찾아 주셨다는데, 저는 향을 올리러 가느라 미처 돌아오지 못해 맞이하지도 못했으니, 게으른 죄를 면하기 어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누님의 시집 한 질을 바치오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지번과 양유년, 두 분의 서문 중에 어느 쪽이 더 낫습니까? 양유년이 직금시를 인용한 것이 이치에 딱 맞아떨어지는 듯한데, 대감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용어) 윤근수(호 월정)는 선조 때 양관 대제학과 우찬성 등을 지냈다. 김주는 조선 문신으로 1563년 종계변무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그곳 객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오봉 이호민에게 올린 편지
1604년 9월 (서기 1604년 9월 29일, 양력 추정)
훌륭한 시를 받고 보니 마치 좋은 보옥을 얻은 것만 같습니다. 이번 행차는 정말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마땅히 아름다운 옥에 새겨 길이 전하겠습니다.
1606년 3월 (서기 1606년 4월 21일, 양력 추정)
윤청의 시권은 전부터 갖고 있었는데, 펴 보니 마치 벗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이것을 슬쩍 빼내어 어르신께 보내 드리고 싶었으나, 주인이 이를 지키는 태도가 마치 옛날 인상여가 구슬을 품에 안고 머리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내주지 않으려 기둥을 노려보고 서 있던 것과 같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용어) 이호민(호 오봉)은 선조 때 문신으로 좌찬성 등을 지냈다. 인상여는 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신으로, 진나라 소왕이 화씨벽 구슬을 속임수로 빼앗으려 하자 구슬을 품고 기둥에 기대어 목숨을 걸고 지켜 낸 고사로 유명하다.
유서경 유근에게 올린 편지
1605년 3월 (서기 1605년 5월 2일, 양력 추정)
공께서는 저희 형님 미숙(허봉)과 홍태고(홍적)와 더불어 문단의 중심 역할을 하셨는데, 저희 형님과 홍태고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공만이 남아 문형을 쥐고 예원의 우두머리로 군림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누구도 감히 그 글솜씨를 대적할 자가 없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듣자니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를 가려 뽑고 계신다 하기에, 돌아가신 저희 형님의 시도 그 안에 많이 실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감히 간행본 한 질을 올리오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1605년 9월 (서기 1605년 10월 26일, 양력 추정)
남창 김현성을 만났더니, 돌아가신 형님의 시는 시선에 들어간 것이 매우 적고 누님의 것은 다소 많더라고 하더군요. 옛날 용재 이행이 우리나라 글을 가려 뽑을 때 탁영 김일손의 문장과 읍취 박은의 시를 매우 많이 넣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문단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니, 혹 다른 사람들의 이견에 밀려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까? 돌아가신 형님의 칠언 가행은 가장 절묘한데 단 한 편도 들어가지 않았다니, 이 점이 더욱 이해되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다시 잘 헤아려 가려 뽑으시어, 넓은 바다에 빠뜨린 구슬처럼 묻히는 일이 없게 해 주십시오.
(용어) 유근(호 서경)은 선조 때 대제학과 좌찬성 등을 지냈다.
이월사 이정귀에게 보낸 편지
1610년 9월 (서기 1610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듣자니 공조에 자리가 하나 비었다는데, 그곳은 본디 한가하여 여유롭게 지낼 만한 자리입니다. 옛 시인 중에 공조 벼슬을 지낸 이로는 하손, 두보, 장적, 소식 등이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야 이 네 분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한 시대에 요행히 시로 이름을 얻어 공께서도 일찍이 칭찬하고 격려해 주신 바 있습니다. 지금 마침 공께서 인사를 맡고 계시니 이 일을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에게 이 자리를 맡겨 주셔서, 저 네 분이 저승에서나마 손뼉을 치도록 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19일, 양력 추정)
감옥에서 살아 나오자마자 유배 명령이 촉박하여 미처 찾아뵙고 인사드릴 겨를도 없었습니다. 어느 한이 이만하겠습니까. 편지와 귀한 약제까지 길 떠나는 사람을 위해 보내 주시니, 그 두터운 정을 이루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신문을 받던 날 진술 중에 여러 차례 공의 이름을 끌어들였는데, 그것은 상황이 몹시 위태롭고 급박한 나머지 그리된 것이지 감히 공을 모함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말썽이 적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제가 어찌 남을 모함하는 사람이겠으며, 또 어찌 남의 사주를 받는 사람이겠습니까. 이는 온 세상이 저를 너무 하찮게 여긴 탓이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공께서는 같은 죄를 지은 사람이 아직도 높은 벼슬을 그대로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는데, 그 말씀은 너무 지나칩니다. 제 조카는 시험에 합격했고 공의 장인은 합격하지 못했으니, 그 죄가 서로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밝혀질 일이니 감히 여러 말 하지 않겠습니다.
(용어) 이정귀(호 월사)는 선조 때 대제학을 지내고 인조 때 좌의정에 이른 문장가다.
신현옹 신흠에게 보낸 편지
1608년 3월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춘영」 백 편은 정직한 선비들이라면 입에 올리지 않을 내용이라 남에게 보여 드리기에 적합하지 않은데, 감히 보여 드리겠습니까. 이 졸렬한 사람이 입을 함부로 놀렸으니, 곧장 혓바닥을 뽑히는 지옥에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어 감히 보시라고 바치니, 보시면 반드시 더럽게 여기시며 상서롭지 못하다 하실 것입니다.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1608년 3월 (다른 편지)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훌륭한 서문을 지어 주셨는데, 칭찬이 너무 지나쳐서 제가 감당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 일이라 하여 감히 합하의 밝은 감식안을 가릴 수 없기에 그대로 서문으로 실었더니 명성이 훨씬 높아졌습니다. 저를 알아주신 은혜는 저를 낳아 주신 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죽어서도 그 은혜를 갚기로 기약하겠습니다.
1610년 10월 (서기 1610년 12월 4일, 양력 추정)
나주는 서남쪽 지역의 큰 고을입니다. 제가 전에 직접 그곳을 가 보고서, 벼슬이 이 고을 목사에 이르면 그것으로 그만두어도 좋겠다고 여겼습니다. 지금 마침 그 자리가 비었고 월사께서 이조를 맡고 계시니, 이는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합하께서 저를 그곳에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기회에 남쪽으로 아예 돌아가 버릴 계획입니다. 감히 진심을 말씀드립니다.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19일, 양력 추정)
감옥에서 여러 차례 보내 주신 소식을 받았습니다. 옛날 사마천이 궁형을 받던 날, 강도상을 지낸 동중서나 예 대부 같은 이들도 찾아와 안부를 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대야 천 년의 차이가 있지만, 옥에 갇힌 처지에서 이런 벗이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게다가 도교의 책까지 보내 주셔서 제가 그것을 읽으며 하늘로 오르는 상상이라도 하게 해 주셨으니, 지극한 정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리하셨겠습니까.
옛날 영웅들은 장수나 정승이 되지 못하면 신선이라도 되었는데, 저야 장수나 정승이 되기는 이미 틀렸으니, 마땅히 연문자·안기생 같은 옛 신선들과 더불어 노니는 것도 충분히 즐길 만한 일일 것입니다.
강남 천 리 길을 미처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떠나왔기에, 종이를 대하니 목이 메어 다 쓰지 못합니다.
(용어) 신흠(호 현옹)은 인조 때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이른 문장가다. "혓바닥을 뽑히는 지옥"은 불교에서 함부로 말을 지껄인 사람이 가게 된다는 지옥의 이름이다. 연문자와 안기생은 옛 전설 속의 신선들이다.
한유천 한준겸에게 보낸 편지
1601년 8월 (서기 1601년 9월 11일, 양력 추정)
해양의 모임에 어찌 감히 즐거이 달려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다만 부사가 계셔서 제가 함부로 참견할 처지가 아니니, 공께서 알아서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이번 제 행차를 두고 기이한 만남이라며 비웃는데, 이는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굳이 피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장부로 태어나 젊은 시절은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가는데, 한 차례의 즐거움이 충분히 만종의 녹봉만 한 가치가 있습니다. 참으로 그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면 욕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들 어찌 제 털구멍 하나라도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의리에 크게 해로운 일도 아닌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공께서 식사하시다가 이 편지를 보신다면 틀림없이 웃음이 터져 밥상 가득 입 속의 밥을 뿜고 마실 것입니다.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1601년 8월 (다른 편지) (서기 1601년 9월 11일, 양력 추정)
공께서는 용성으로 가시어 큰 고을의 음식을 드신다는데, 그 맛이 해양의 작은 고을 음식에 견주어 어떻습니까?
저는 공을 배웅하고 성을 나와 봉생정 위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한 줄기 연기가 대숲을 덮고 차가운 바람이 휘장에 불어왔습니다. 고개를 들어 동쪽을 바라보니 푸른 큰 들판 저 멀리 공의 깃발과 수레 일산이 이미 보이지 않았습니다.
타향에서 벗을 이별하는 것은 옛사람들도 모두 탄식했던 일인데, 뜻밖에 오늘 그 일을 직접 겪었습니다. 생각건대 아마 공께서도 저와 같은 심정이실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식사를 많이 하셔서 몸을 잘 보중하소서. 이만 갖추지 않습니다.
1601년 9월 (서기 1601년 10월 10일, 양력 추정)
조운을 맡은 병졸과 일반 군졸 문제는 형님께서 이미 저와 함께 타당하게 조정하여 공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나랏일인데 어찌 감히 고집을 부리겠습니까. 외적이 오지 않는다면 편안히 밥을 먹겠지만, 만약 급박한 일이 생긴다면 그 많은 곡식을 어떻게 바닷길로 운반하여 서울을 구제하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공께 다시 여쭐 필요는 없겠습니다. 다만 수군을 통솔하는 사람이 일을 제대로 모를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곁에서 어떤 사람이 공께서 식사를 잘 하시는지 묻고 있으니, 이 정성을 알아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용어) 한준겸(호 유천)은 선조·광해군 때 호조 판서와 영돈령부사 등을 지냈다.
이창해 이사홍에게 올린 편지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간이 최립의 아들은 바로 공께서 잘 아시는 사람입니다. 서경에서 숙천 고을 자리를 약속하신 적이 있으셨지요. 합하를 괴롭히기만 하는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일을 간청드려 왔습니다. 방금 조보를 보고서 감히 연락을 드립니다. 합하께서 어찌 남의 마음을 저버리실 분이겠습니까. 감히 대략 말씀드립니다.
1609년 9월 (다른 편지)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저의 육촌형 되는 체씨는 그 굳센 절개가 관리들에게 알려져 있고 학문과 행실이 선비들에게 존경받고 있는데도, 아직까지 벼슬에 오르지 못한 채 서울에서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어진 사람이나 군자들이 마음을 써야 할 곳입니다. 합하께서 그에게 한 말의 물이라도 부어 주시어, 수레바퀴 자국의 마른 물웅덩이에서 죽어 가는 붕어를 살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609년 10월 (서기 1609년 11월 11일, 양력 추정)
여러 저잣거리의 물가가 치솟는 데 대한 대책은 법령의 첫째 조항에 실려 있습니다. 만약 법령대로 시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횡포를 어떻게 징계하겠습니까. 애초에 이 일은 본조가 책임질 일입니다.
이번 초하루에는 공을 위해서 아전들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몹시 질 나쁜 물건을 가지고 높은 값을 받는 자들은 합하께서 다스리셔도 무방하겠습니다.
(용어) 이사홍(호 창해)은 선조 때의 유생이다.
황사숙 황신에게 보낸 편지
1609년 1월 (서기 1609년 2월 19일, 양력 추정)
듣자니 공께서 중국에서 《이담》이라는 책을 구해 오셨다는데, 그중 한 조목에 저희 누님에 관한 일이 실려 있다고 하니 참으로 그러합니까?
얼마 전 행주 정승(기자헌) 댁에서 그 책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런 내용은 없었습니다. 혹 나중에 다시 엮으며 덧붙인 것은 아닙니까?
이 일 때문에 다시 문하에 찾아가는 것도 마땅치 않으니, 그 책을 빌려주시기 바랍니다. 다 쓰지 못합니다.
(용어) 황신(자 사숙)은 광해군 때 호조 판서를 지낸 문장가다.
최분음 최천건에게 보낸 편지
1605년 11월 (서기 1605년 12월 24일, 양력 추정)
옛 도읍에서의 하룻밤 대화로는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회포를 풀기에 부족했습니다.
월성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리운 마음이 차가운 구름과 함께 모두 아득해졌습니다. 성 위의 낮은 담장 너머로 만월대를 바라보니 안개 낀 나무들만 푸르러, "지는 해"니 "비껴 내리는 비"니 하는 시구를 읊을 수가 없어 스스로 재주가 다한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느지막이 임진강에 이르니 커다란 얼음이 강을 막고 차가운 눈이 온 산에 가득하여, 문득 눈 구경의 흥취가 일었습니다. 생각건대 옥황상제가 계신다는 하늘 위 높은 누각은 그 추위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혹 공께서는 저를 위해 부 한 편을 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1606년 11월 (서기 1606년 12월 14일, 양력 추정)
예나 지금이나 비방을 받는 일은 성현이라도 피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형수와 정을 통했다는 누명이나 장인을 매질했다는 소문이 옛 진평이나 제오륜에게 무슨 해가 되었겠습니까. 공께서는 스스로 삭이시고, 남의 헐뜯음을 귀신 같은 사람과 견주거나 소나 말과 힘을 겨루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난초와 창초 같은 향초는 불에 태우고 삶아도 저절로 향기를 내는 법이니, 구중궁궐에 계신 임금께서도 이미 환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일이 곧 밝혀질 것이니, 억지로라도 직무에 나아가시어 성상의 기대에 부응해 주시기를 애타게 바랍니다.
1607년 6월 (서기 1607년 7월 8일, 양력 추정)
사흘 동안 내린 비도 더위를 식히지 못했습니다. 북쪽 창가에 다리를 뻗고 도연명의 시 몇 편을 읊으니,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와 문득 하늘 위 신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공께서는 이 찌는 더위 속에서 부채로나마 땀을 식히실 수 있는지요. 아마 마음과 힘을 많이 허비하고 계실 것 같은데, 이런 때는 오히려 못난 사람이 더 편한 법입니다.
한낮에 갑자기 보내 주신 편지를 받고 보니, 시원한 바람이 상쾌하게 답답한 제 가슴을 씻어 주는 듯했습니다. 성균관 사성 자리에 저를 추천하신 것은 불교를 좋아했다는 비난을 씻어 주시려는 뜻이었습니까? 저는 지금 이대로가 좋으니 무슨 수고인들 꺼리겠습니까. 다 닳은 붓도 천금 주고 산 것처럼 이대로 만족하며 스스로 즐기렵니다. 서울에 가서 귀인들과 가까이 지내는 일은 내키지 않습니다. 공께서 들으시면 틀림없이 이 미친 종놈의 옛 버릇이 또 도졌다 하실 것입니다.
지금 막 서첩을 들고 《갈고보》를 읽다가 다 마치지 못한 채 대강 써서 올립니다.
1607년 8월 (서기 1607년 10월 5일, 양력 추정)
지난번에 올린 열 편의 율시는 운자에 얽매여 좋은 흥취를 손상시켰으니 남겨 둘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술 항아리 덮개로나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수령의 인끈을 매고 대방주(남원)를 육 년쯤 다스리다가 지리산의 신선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공의 이조 판서 자리를 준다 해도 저는 바꾸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되도록 도모해 주시기 바랍니다.
1607년 9월 (서기 1607년 11월 4일, 양력 추정)
약초 임수정이 백옥루에 글을 지으러 저세상으로 떠났으니, 천고에 남을 한이 많습니다. 공께서도 이런 아픔을 느끼시는지요. 만시 한 편에 제 나름대로는 그의 일생을 다 담았다고 여깁니다. 이 시에 화답하여 죽은 이를 위로해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별지에 적어 둔 것은 부디 제 뜻에 곡진히 부응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1607년 9월 (다른 편지) (서기 1607년 11월 4일, 양력 추정)
저의 벼슬살이하는 심정은 마치 엷은 가을 구름 같아서, 가을바람이 한 차례 불어오자 옛날 장한이 고향의 농어회와 순챗국을 그리워하던 그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고을 하나를 얻어 입에 풀칠이라도 한다면 만호후에 봉해진 것과 다름없겠는데, 공께서는 어찌하여 그것을 아끼십니까? 공께서 인재를 아끼는 그 한마음이야 하늘에 물어도 부끄럽지 않겠지만, 때를 알지 못하니 그 사랑이 오히려 지혜를 어둡게 한 것이 아닙니까?
공명은 손에 들어오지 않은 채 젊은 시절의 뜻은 이미 시들었습니다. 마치 힘없는 망아지가 우리 안에서 서성이는 격이니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곤궁함과 영달은 분수에 이미 정해져 있어 하늘도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대장부의 일이란 관 뚜껑을 덮고 나서야 끝나는 법인데, 제 혀는 아직 건재하지 않습니까. 용을 고삐와 쇠사슬로 얽어매려 하지 마십시오. 용의 성질이란 본디 길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은주는 저희 선친께서 고을살이하셨던 곳인데, 제가 어찌 감히 기꺼이 부임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저는 선친의 일을 그대로 따를 수 없으니, 혹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다면 이는 선친의 가르침을 크게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가림(지금의 부여)은 바닷가에 있어 외지긴 하지만 생선과 게가 풍부하니 그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듣자니 공주와 같은 시기에 임명하신다는데, 그곳은 번잡한 데다 게도 없고 게다가 고을을 감독하는 관청까지 있으니, 제 이름은 그쪽에는 올리지 말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지역이 서로 가까워 혹 가림을 다투는 다른 사람에게 밀려날까 염려되어 번거롭게 말씀드립니다.
1607년 2월 (서기 1608년 1월 26일, 양력 추정)
가림은 얻지 못하고 도리어 공주를 맡게 되었으니, 이 역시 운명인데 어찌 공을 탓하겠습니까. 제가 벼슬을 하는 것은 가난 때문이니, 처자식을 지켜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게 하면 그것으로 족하지 달리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함부로 놀기만 하고 일을 게을리하여 공께서 천거해 주신 뜻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헌부의 서경이 끝나면 마땅히 찾아뵙고 사례하겠습니다.
적막한 겨울밤, 눈 녹인 물을 부어 새로 만든 차를 끓이는데, 불은 활활 타오르고 물맛은 좋으니 이 차 맛은 제호와 다를 바 없습니다. 공께서 어찌 이런 맛을 아시겠습니까.
1608년 1월 (서기 1608년 3월 1일, 양력 추정)
처음 부임할 때 간관 하나가 제가 그 자리에 걸맞지 않다며 심하게 헐뜯고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려다가 올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을에 부임해서는 새벽부터 많은 송사를 처리하고, 밤이면 등불 삼아 《좌씨전》 한 질을 읽고 있습니다. 이는 제 스스로 옛 한나라 관리의 방식을 따르면서 또한 천고의 성대한 일을 그만두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헐뜯는 자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세상에 쓸모없는 자라 하니, 이 또한 실없는 소리라 하겠습니다. 공께서는 틀림없이 크게 웃으실 것입니다.
(용어) 최천건(호 분음)은 선조 때 이조 판서를 지냈다. 진평(진 유자)은 한 고조의 공신으로 일찍이 형수와 정을 통했다는 모함을 받았다. 제오륜(자 백어)은 후한 광무제의 신하로, 장인을 매질했다는 놀림을 받자 자신은 장가를 세 번 갔지만 그때마다 장인이 안 계셨다고 답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장한(자 계응)은 진나라 사람으로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의 농어회와 순챗국이 그리워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최간이 최립에게 보낸 편지
1607년 3월 (서기 1607년 4월 11일, 양력 추정)
지천 황정욱의 시에 화답해 주신 시는 기걸차면서도 진중했습니다. 또 잘 맞지 않는 몇 글자를 고쳐 달라고 청하셨는데, 저는 마치 페르시아의 화려한 시장에서 진귀한 보석들에 눈이 부셔 어느 것이 더 값진 것인지 가늠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심정입니다.
그대로 둘 다 남겨 두어, 공께서 글을 지으실 때 얼마나 신중을 기하시는지 보여 드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1607년 3월 (다른 편지) (서기 1607년 4월 11일, 양력 추정)
세상에서 글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공의 시를 잘못 낮추어 보는데, 이는 그저 무지한 탓입니다. 공의 문장은 아무리 억세고 기걸하다 해도 역시 반고와 한유(창려)에게서 그 뿌리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 시는 본디 딱히 스승에게서 배운 바 없이 스스로 하나의 격을 창조해 낸 것인데, 그 뜻이 깊고 시어가 탁월하여 성률이나 익히고 꽃과 풀이나 읊는 자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저는 공의 시가 문장보다 더 훌륭하다고 여기는데, 공께서는 그렇게 인정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용어) 최립(호 간이)은 선조 때 문장가로 형조 참판을 지냈다.
정한강 정구에게 보낸 편지
1596년 9월 (서기 1596년 11월 4일, 양력 추정)
읍지를 만들면서 고을의 나이 든 노인들에게 물으니, 아전방·동문창·우계상방 등이 모두 신라 때 김흔 공이 지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아득한 옛사람을 떠올리니 마음이 감개무량합니다.
1596년 9월 (다른 편지) (서기 1596년 11월 4일, 양력 추정)
읍지의 범례를 명나라 전여성이 지은 《서호지》를 본받고자 했는데, 합하께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시다니 어째서입니까? 지리, 관청 건물, 토산물 등에 대해서는 말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읍지의 나머지 부분에는 그 사적을 싣되, 제 나름의 방법을 써서 신중히 하여 허물이 없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1601년 3월 (서기 1601년 4월 17일, 양력 추정)
오랫동안 어르신을 모시지 못하니 뵙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강릉지》에는 마땅히 빼야 할 것과 혹 보충해야 할 것이 있을 터이니, 전씨가 돌아올 때 편에 보내 보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릇 사실을 기록할 때는 핵심만 적되 너무 소략해서는 안 되고, 자세히 적더라도 거짓이 없어야만 후세까지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비루한 속어에서 비롯되었고, 저 또한 역사를 기록하는 재능이 부족한 데다 젊은 날의 경솔한 견해로 만든 것이니, 어찌 남의 안목에 흡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혹 이전 것보다 나은 점도 있을 것이기에 이렇게 세세히 늘어놓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1603년 8월 (서기 1603년 9월 19일, 양력 추정)
옛사람의 말에 "빌려 간 책은 늘 돌려주는 것이 더디다"고 했는데, 그 "더디다"는 말은 한두 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강》을 빌려드린 지가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벼슬할 뜻을 끊고 강릉으로 돌아가 그 책이나 읽으며 소일하려 하기에 감히 말씀드립니다.
(용어) 정구(호 한강)는 선조 때 공조 참판을 지낸 학자다.
김남창 김현성에게 보낸 편지
1605년 12월 (서기 1606년 1월 23일, 양력 추정)
《세가문헌》을 만든 일은 참으로 주제넘고 경솔한 짓이었습니다. 어르신께서 꾸짖지 않으시고 도리어 박식하고 우아하다며 격려해 주시니 부끄러우면서도 감격스럽습니다. 쪽지를 붙여 두신 곳은 하나하나 말씀하신 대로 고쳐서, 충고해 주신 말씀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한번 찾아뵙고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1606년 7월 (서기 1606년 8월 18일, 양력 추정)
돈녕부에 추천하는 일은 저희 형님께서 이미 승낙하셨습니다.
종이 열 첩을 책상 아래 바치니, 저를 위해 《황정경》, 임소경에게 보낸 편지, 「낙신부」, 「무조격」, 「추흥시」 여덟 수, 「양양가」, 「풍락정기」, 「전적벽부」, 「후적벽부」를 베껴 주신다면 마치 귀중한 구슬이 손안에 들어와 밤낮으로 빛나며 반짝이는 듯할 것입니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1606년 10월 (서기 1606년 11월 14일, 양력 추정)
저희 형님께서는 공을 여주 목사에 제수하는 것이 돈녕부에 제수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슨 힘을 썼겠습니까.
열 첩의 글씨는 정밀하고 단정하여 절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삼가 절하고 받았습니다. 다만 옛날 왕희지에게 글씨 값으로 바칠 흰 거위가 저에게는 없으니 몹시 한스럽습니다.
삼가 상자에 보관하여 대대로 전할 가보로 삼겠습니다.
1608년 8월 (서기 1608년 9월 15일, 양력 추정)
어르신께서 옥관자와 금띠를 두르고 높은 벼슬에 오르신 것은 모두 문필이 뛰어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조정이 인재를 아끼지 않는다고 말하겠습니까. 먼 고을에서 나랏녹이나 축내고 있는 저는 조보를 보고서, 한창 밥을 먹다가 저도 모르게 수저를 놓고 일어나 감히 이렇게 축하드립니다.
(용어) 김현성(호 남창)은 시·서·화에 두루 뛰어났고 벼슬은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왕희지(왕 우군)는 진나라의 명필로, 거위를 좋아하여 산음의 한 도사에게 《도덕경》을 써 주고 그 대가로 흰 거위를 받았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심학이 심열에게 보낸 편지
1608년 3월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황강의 꿈에서 이미 은화대를 얻는 조짐을 보았는데, 그 은화대는 어찌하여 아직 제 손에 들어오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길에서 마땅히 형수님을 만났어야 했는데, 아랫사람들이 저를 이끌어 홍경비를 피하라고 하는 바람에 결국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무척 안타깝습니다.
고을에 도착해서는 애써 일하여 겨우 열 달 치 봉급을 떼어 연나라산 소뿔을 사서 무기고를 채웠습니다. 그런 공로는 정말 형수님 덕분이지 제가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삼가 면첩을 봉하여 올립니다. 형께서 보시면 필시 "성인만이 성인을 안다"고 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우습습니다.
(용어) 심열(자 학이)은 인조 때 영의정에 이른 문신으로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연우각은 춘추시대 연나라에서 나던 소뿔로, 활을 만드는 데 가장 좋은 재료였다고 하며, 여기서는 좋은 무기를 가리키는 듯하다.
정화백 정협에게 보낸 편지
1610년 10월 (서기 1610년 12월 9일, 양력 추정)
모든 재앙은 언제나 소홀히 여기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번 일은 저 역시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바이니, 공인들 어찌 예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평생 너무 많은 비방을 받아 왔으니 한 차례 관직에서 쫓겨난 것이야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한스러운 것은 큰 고을을 잃은 일입니다.
그자가 전에 활을 당겨 자안(남이공)까지 쏘았다니, 하물며 사촌 동서 사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허물할 필요도, 탄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스스로 이해하고 넘어갈 뿐입니다.
(용어) 정협(자 화백)은 광해군 때 예조 참판을 지냈다.
이지봉 이수광에게 보낸 편지
1609년 12월 (서기 1610년 1월 9일, 양력 추정)
홍양시권은 몇 차례나 읽었는데 차마 손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소리와 운율이 잘 어울리는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책머리에 한마디 적고 싶었으나 훌륭한 책을 더럽히게 될까 염려되어 그만두었습니다. 더구나 차씨의 발문에서 이미 할 말을 다 해 놓았기에, 제가 하고 싶었던 말도 저절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삼가 원본 그대로 돌려보냅니다.
1610년 4월 (서기 1610년 6월 17일, 양력 추정)
제 병은 박지지 군이 말하기를, 몸속의 음기가 허해져 화기가 동해서 생긴 것 같다고 합니다. 몸이 있고 나서야 벼슬도 있는 법입니다. 이번에 사신 행차에 오르지 못한 벌이라야 고작 평민이 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제 다시 상소를 올렸으니 제대로 전달되도록 막지 말아 주십시오. 서강의 물을 터서 수레바퀴 자국에서 허덕이는 붕어를 살려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용어) 이수광(호 지봉)은 여러 관직을 거쳐 인조 때 이조 판서에 이른 학자다.
김여수 김상준에게 답한 편지
1610년 12월 (서기 1611년 1월 22일, 양력 추정)
제가 아주 부득이한 일이 아니고서야 어찌 부모님이 남겨 주신 이 귀중한 몸으로 모진 고문의 욕을 당하겠습니까. 이번 일은 제 스스로 결단한 것이지 남이 시켜서 한 일이 아닙니다.
형께서는 저를 자세히는 모르셨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형께서 저를 무척 아껴 주셨기에 있는 일이니, 비록 제 속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하셨더라도 저를 아껴 주신 은혜는 분명 있는 것입니다. 어찌 감히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말이 막혀 다 갖추지 못합니다.
(용어) 김상준(자 여수)은 광해군 때 형조 참판을 지냈다.
홍녹문 홍경신에게 보낸 편지
1607년 12월 (서기 1608년 1월 26일, 양력 추정)
옥과 현감의 관은 어느 날 마읍을 떠난다고 합니까? 만약 제가 임지로 내려가는 날까지 그 행렬이 이곳에 있다면 길모퉁이에서라도 제사를 올릴 수 있겠습니다. 기억하건대 예전 절에서 함께 노닐 때 그 형님이 지은 시에 "물이 어우러지니 산비가 잦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그 말이 이치에 참으로 딱 들어맞았습니다. 재주가 있으면서도 그 재주를 펼치지 못했으니 참으로 원통한 일입니다.
1608년 1월 (서기 1608년 3월 1일, 양력 추정)
그 형님의 관이 지나가던 날이 하필 제가 관아에 나가야 하는 날이라, 그저 아전 한 사람을 보내 상여꾼들을 감독하여 이 고을 경내를 지나가게 했을 뿐입니다. 살아 계실 때의 정분을 돌아가신 뒤에 저버린 것만 같아 부끄러워 눈물만 흘렸습니다. 만시에 이런 마음을 자세히 담았으니 그 형님도 응당 보실 것입니다. 이만 다 갖추지 못합니다.
(용어) 홍경신(호 녹문)은 선조 때 부제학과 병조 참의를 지냈다.
윤지중 윤의립에게 보낸 편지
1606년 8월 (서기 1606년 9월 16일, 양력 추정)
듣자니 형께서는 양유년(양 황문)을 몹시 허물하신다는데, 이는 섭씨 성을 가진 자가 명령을 거짓으로 꾸며 낸 일입니다. 주지번은 요구하는 것이 좀 있었던 듯하지만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고, 양유년 쪽은 아예 아무런 요구도 없었습니다.
그 두 분 모두 저를 잘 대우해 주셨던 분들인데, 제가 무엇 때문에 우열을 가려 양유년만 편들겠습니까. 다만 그가 억울하게 비난받는 것으로 여겨져 부득불 변명해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용어) 윤의립(자 지중)은 인조 때 예조 판서를 지냈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양유년(양 황문)은 1606년 주지번과 함께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 관리다.
남자안 남이공에게 보낸 편지
1610년 1월 (서기 1610년 2월 8일, 양력 추정)
형은 지금 어머님을 모시고 계시니 섣달에 내리는 약제도 다른 벗들보다 넉넉히 받으실 것입니다. 돌아가신 저희 어머님은 원주에 묻혀 계신데, 제사도 제가 직접 받들지 못하고 나무꾼이나 목동들이 묘소를 범하지 못하도록 막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어버이에 대한 슬픔이 늘 가슴에 맺혀 있는데, 언제쯤이나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성묘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식 된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는 대목입니다. 이만 다 갖추지 못합니다.
(용어) 남이공(자 자안)은 인조 때 공조 판서를 지냈다.
이중집에게 답한 편지
1609년 1월 (서기 1609년 2월 19일, 양력 추정)
이별한 지 십 년 만에 어제 처음으로 편지 한 장을 받으니 위로되고 다행스럽습니다. 제가 이 사신 행차에 끼인 것이 지금 벌써 세 번째인데, 형께서는 아직 한 번도 행차에 오르지 못하셨다니, 세상일이란 대체로 이런 것인가 봅니다.
용천과는 저 역시 대대로 이어 온 교분이 있으니, 어찌 감히 특별히 대우하지 않겠습니까.
한번 문하를 찾아뵙고 옛정과 이별의 회포를 풀고자 하니, 문지기가 저를 막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윤차야 윤훤에게 보낸 편지
1609년 10월 (서기 1609년 11월 11일, 양력 추정)
『시산』은 이미 익히 읽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권생 편에 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옥잠이 자주 꿈에 보이니 이상한 일입니다. 두 가지 모두 온전히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1610년 1월 (서기 1610년 2월 8일, 양력 추정)
《두시》는 기대했으나 손에 들어오지 않고 《초사》만 뜻밖에 도착했습니다. 하늘이 참으로 뜻있는 일을 방해하는군요. 이제부터는 감히 함부로 요행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용어) 윤훤(자 차야)은 인조 때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홍휘세 홍서봉에게 보낸 편지
1610년 4월 (서기 1610년 6월 6일, 양력 추정)
동쪽 교외에서 손을 맞잡고 이별할 때 저에게 노자를 아주 넉넉히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아 이상히 여기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금강산 만 이천 봉이 형을 만나 한층 빛을 발했을 것입니다. 비단 주머니에 담아 오신 시들을 아픈 눈을 씻고서라도 보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610년 7월 (서기 1610년 9월 2일, 양력 추정)
저는 병으로 북경 가는 길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파직되었다가 금세 다시 살길이 열렸으니 이 모두가 임금의 은혜라 그저 감격할 따름입니다.
듣자니 형께서는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가려 하시어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라 하는데, 제가 다시 등용되기를 기다렸다가 그 인끈을 저에게 대신 차게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우습습니다.
(용어) 홍서봉(자 휘세)은 인조 때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제강공자에게 보낸 편지
1601년 3월 (서기 1601년 4월 17일, 양력 추정)
몇 달을 이웃하여 지내다가 갑자기 이별하게 되니 섭섭한 마음을 스스로 가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소랑을 마주하고서는 늘 장흥동에서의 옛일을 이야기하며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팥 섞은 밥에 배추김치를 먹으면 그 맛이 엿처럼 달았는데, 지금 다시 그런 맛을 볼 수 있을까요. 비록 그 맛을 다시 보고 싶어도 저 같은 늙은이가 어찌하겠습니까. 이 처절한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1602년 2월 (서기 1602년 3월 8일, 양력 추정)
족하는 재주가 높은 사람인데도 나라의 법률에 얽매여 포부를 펴지 못하고 그저 하찮은 봉급이나 받는 자리를 맴돌고 계셨습니다. 만약 옛날 유향 같은 사람이 오늘날에 태어났다면, 천록각에서 신령스러운 지팡이 불빛을 마땅히 누구에게 비춰 주었겠습니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슬픕니다.
1609년 8월 (서기 1609년 9월 12일, 양력 추정)
공의 병환이 더욱 위중해지셨다고 들었습니다. 화평한 군자는 신령이 돕는 법이니 마땅히 약을 쓰지 않아도 나아지실 것입니다. 혼자서 애태우고 노심초사하여 정신을 상하게 하지 마십시오.
당류 약제 두 가지를 아드님 편에 보냅니다. 이것을 드시면 곧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장강이라는 자는 사리를 모르고 그저 쓴 약만 먹게 하니 우습습니다.
이관송 이이첨에게 보낸 편지
1608년 8월 (서기 1608년 9월 23일, 양력 추정)
형께서 예전에 가깝게 지내던 정을 생각하시어 온갖 비방 속에서 저를 구해 주셨으니, 재주를 아끼시는 마음이 지극하십니다. 이는 옛사람도 어렵게 여기던 일인데 그것을 실천하셨으니, 이제부터 온 세상의 어진 선비들이 모두 공의 문하로 모여들 것입니다.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4일, 양력 추정)
도성 문을 나가 배웅하며 작별하려 했는데, 어제저녁 갑자기 형조에 제수되었습니다. 여론을 기다리느라 오늘 은혜에 감사드리지 못하여 두터운 정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서쪽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할 뿐입니다. 서른 편의 율시는 석주 권필이 보고서 타당치 못하다고 하기에 다시 고쳐 뒤따라 보내 드리려 합니다. 늦어진다고 허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19일, 양력 추정)
편지가 도착하여 매우 기뻤으나 병 때문에 다시 나가 뵙지 못했습니다. 병이 아니었다 해도 어떻게 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이 마음만 지닌 채 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겠습니다. 남들은 제가 형과 비방을 나누어 지려고 형의 사위를 맞아들였다고 하는데, 형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시면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런 일이야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풀릴 것인데, 온 세상이 의혹스럽게 여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요.
한스러운 것은 저를 배신한 자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 가운데서 나왔다는 것인데, 이 역시 하늘이 시킨 일이겠지요. 제가 어찌 감히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겠습니까. 식사 잘 하시고 몸을 보중하소서.
(용어) 이이첨(호 관송)은 광해군 때의 권신이다.
이자민 이안눌에게 보낸 편지
1610년 3월 (서기 1610년 4월 8일, 양력 추정)
떠나는 일이 하도 급히 재촉당해 강가에서 손을 맞잡고 작별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삼 년을 떨어져 지내는 것도 짧은 기간이 아닌데, 더구나 저는 만 리 먼 길을 떠나야 하지 않습니까.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슬픔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오봉 이호민의 시는 저도 흉내 내 보려 애썼으니, 형도 이 운을 따라 시를 지어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형은 전에 제 시를 다소 약하다고 여기셨으니, 시험 삼아 무거운 가마솥도 들 수 있는 그 힘을 가벼운 손대야 하나 받쳐 드는 일에도 써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10년 3월 (다른 편지) (서기 1610년 4월 8일, 양력 추정)
요동 지방 관리의 요구는 부채 삼백 개면 해결될 수 있다는데, 저는 요직이나 관찰사도 아니니 누가 제 말을 들어 주겠습니까. 형의 고을에는 대나무가 많고 또 죽세공 장인이 있으니, 설령 삼백 개를 다 채우지 못하더라도 그 절반이면 좋겠습니다.
저는 마땅히 공의 어진 덕을 널리 칭송하여 요동 땅까지 빛나게 하겠습니다. 어찌 상자 속에 그대로 묵혀 두겠습니까.
1610년 4월 (서기 1610년 6월 6일, 양력 추정)
이 고을 기생 진랑은 제가 조운을 감독하던 시절에 가깝게 지냈던 여인인데, 지금은 혜민국에서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서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이를테면 저의 사람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그리도 심하게 다그치십니까? 꽃다운 나이도 지나고 자식까지 있어 굳이 찾아갈 흥은 나지 않지만, 그가 힘들어하는 말을 들으면 역시 동정심이 생깁니다. 바라건대 저를 봐서라도 그를 관대히 대해 주십시오. 하찮은 물오리를 잡으려다가 귀한 원앙새를 놀라게 하는 격입니다.
(같은 무렵) (서기 1610년 6월 19일, 양력 추정)
제 병은 참으로 깊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헤아리지 않고 겨우 감옥살이만 면해 주고 오히려 관직은 해면했습니다. 집 안에서 몸을 조섭하며 살아갈 길을 찾으니, 썩은 냄새 나는 세상일 따위야 어찌 마음에 두겠습니까.
부채 백 개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이 떠난 뒤에 도착하여 어쩔 수 없이 그냥 두었습니다. 더구나 부채 윗부분에 형의 시가 적혀 있어 읽어 보니, 맑은 바람이 상쾌하게 일어나 마치 갈증이 풀리는 듯했습니다.
종이는 진랑에게 돌려주었으니 우습습니다. 형은 과연 송광평 같은 철석간장을 지니셨나 봅니다.
(용어) 이안눌(자 자민)은 인조 때 예조 판서에 이른 시인으로, 시와 글씨에 모두 뛰어났다.
한석봉 한호에게 보낸 편지
1604년 10월 (서기 1604년 12월 5일, 양력 추정)
서울 집에서 만났을 때는 아이들 때문에 흥겨운 정취를 마음껏 누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요산(수안)의 수령으로 나가는데, 공께서도 마침 수령 자리를 그만두셨다고 들었습니다. 옛 도읍과 그리 멀지 않으니, 혹 공께서 이 고을 관아에 오신다면 연못가 누각에서 노닐며 인간 세상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명주 비단을 펼쳐 놓고 먹을 두어 말쯤 갈아 두어, 흥이 나는 대로 붓을 휘두르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노닌다면 어찌 왕희지만이 천고에 그 영예를 독차지하겠습니까. 애타게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1604년 3월 (서기 1604년 4월 13일, 양력 추정)
"하늘 바람과 바다 물결"이라는 네 글자 큰 글씨를 잘 받았습니다. 필세가 용이 뛰어오르고 호랑이가 덮치는 듯하여, 마치 동명산과 오대산이 웅장함을 겨루는 것 같았습니다. 옛 소실산의 은자가 이것을 본다면 틀림없이 집 네 채를 팔아서라도 사려 할 것입니다.
저는 그 글씨를 벽에 걸어 두고 사흘 동안이나 그 아래에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도 싫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화씨벽 같은 보배를 주셨으니 어찌 감히 고개 숙여 감사드리지 않겠습니까.
(용어) 한호(호 석봉)는 선조 때의 명필로 가평 군수 등을 지냈다.
송천옹에게 보낸 편지
1611년 2월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젊은 시절 《포박자》를 잘못 읽고서 금석으로 만든 약을 먹으면 신선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훗날 자양·해경·치허 같은 여러 진인들의 글을 읽고 나서는 스스로 실망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무릇 단약이란 서로 같은 성질끼리 합쳐져야 참된 경지에 들 수 있는 것이니, 정·기·신 이 세 가지 보배를 어찌 몸 밖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반드시 밝은 스승과 착한 벗을 만나 서로 경계하고 갈고닦아야만 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저의 스승이자 벗이 되어 줄 사람은 그대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다만 저는 죄를 지은 신하라 그대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바라건대 전해 오는 비결을 편지에 적어 보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11년 2월 (다른 편지)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옥청금사보록》과 《규중지남》, 《중화집》에는 모두 전해 오는 비결이 담겨 있는데, 이 세 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까? 숨기지 마시고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자격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전하는 것도 죄가 된다지만 그 죄는 가벼운 편이고, 아끼기만 하고 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무거운 죄입니다.
옛날 장평숙이 촉 땅으로 귀양 갔던 일은 경계로 삼을 만합니다. 공께서는 입을 다물고 침묵만 지키지 말아 주십시오.
(용어) 《포박자》는 중국 진나라 갈홍이 지은 도교 서적이다.
경홍(한호)을 초대한 편지
1605년 4월 (서기 1605년 6월 1일, 양력 추정)
봄은 이미 지나가, 그윽한 꽃들이 그대를 기다리다가 다 이울고 말았습니다.
녹음이 저리 무성하고 꾀꼬리 소리도 참으로 고우니, 봄빛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어찌 시냇가에 가득 핀 복숭아꽃뿐이겠습니까. 섬돌 곁에서 하늘거리는 붉은 작약도 볼만하니, 보내는 수레를 얼른 타고 와 주시기 바랍니다.
수수로 빚은 술이 한창 익었으니, 그물을 들고 냇가로 나가 그대와 함께 잉어를 잡아 회를 치려 합니다. 죽순 나물과 자라탕도 안주로 마련해 두겠습니다. 저는 평생 먹고 마시는 일만 밝혀 온 사람이라 이렇게 맛난 술과 음식으로 청하니, 먹는 것만 탐한다고 비웃지 마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용어) 경홍은 한호(한석봉)의 자다.
이실지 이춘영에게 보낸 편지
1607년 6월 (서기 1607년 7월 8일, 양력 추정)
족하께서는 온 세상을 만만하게 보시어 족하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저희 세 사람을 칭찬하시니, 부디 저희를 낮추어 보시고 너무 높이 평가하지는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나치게 넘치고, 석주 권필은 힘이 시들었고, 자민 이안눌은 막혀 있다고 하셨는데, 이 세 사람의 흠을 어떻게 해야 고칠 수 있겠습니까? 족하께서는 오늘날 문단의 대가이시니, 반드시 좋은 방법으로 다스려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05년 7월 (서기 1605년 8월 28일, 양력 추정)
이 통제사(이순신)의 공신록권은 족하께서 지으신 것이 참으로 뛰어난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물리쳐 두고 저 같은 사람에게 대신 지으라 하시니, 온종일 손만 아프도록 붓을 놀리면서도 한마디 말도 이루지 못하여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본래 변려문을 잘 짓지 못하는데, 사람들은 도리어 저를 변려문에 능하다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세상일이란 이런 것이니 우스운 노릇입니다. 부디 가르쳐 주시어 크게 나아지도록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607년 7월 (서기 1607년 9월 5일, 양력 추정)
족하께서 이미 저의 병을 고쳐 주셨는데 참으로 증세에 딱 맞는 좋은 약이었습니다. 즐겁고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족하께도 병이 있는지라 제가 침을 놓아 드리고자 하는데, 혹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남들은 재주가 적어서 걱정인데 족하는 오히려 재주가 너무 많은 것이 걱정입니다. 아무리 아깝더라도 조금 덜어 내어 거칠고 불필요한 것을 제거한다면 순수한 대가가 되실 것입니다. 이 말은 형을 몹시 아끼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이니, 자신의 병을 감추고 의원을 꺼려하다가 고질이 되도록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용어) 이춘영(자 실지)은 선조 때 문장가로 봉상시 첨정을 지냈다.
성소부부고 제21권
10. 14:39
성소부부고 제21권 · 문부 18 · 척독 하
출처: 성소부부고 제21권, 문부 18, 척독 하(짧은 개인 편지 모음, 둘째 권)
배경: 척독은 격식을 갖춘 정식 편지가 아니라, 벗이나 친척에게 안부를 전하거나 짧은 용건을 담아 보내는 사사로운 편지를 말한다. 이 권에는 허균이 여러 사람에게 보낸 짧은 편지 아흔네 통이 실려 있다. 사촌 형 허자하, 죽마고우 임자정과 임약초, 벗 조지세·권여장·임자승·이손곡(이달)·이여인(이재영)·양자점 등에게 보낸 편지가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그 밖에 조카들, 고을 원님들, 화가 이정(나옹), 승려 휴정대사(서산노사)와 유정대사(송운대사), 그리고 부안의 기생 계랑에게 보낸 편지도 실려 있다. 시를 논하고 벗의 죽음을 슬퍼하며, 벼슬살이의 답답함을 토로하고 그림을 주문하며, 참선을 이야기하고 정을 나누는 등 편지의 내용은 짧지만 허균의 다채로운 인간관계와 거침없는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계묘년, 1603년) (서기 1603년 9월 19일, 양력 추정)
허자하는 허균의 재종형인 허적의 자이며, 호는 상고재이다. 1597년 유효립 등이 인성군(선조의 일곱째 아들)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던 역모를 고발한 공으로 영사공신 1등에 책록되고 양릉군에 봉해졌다.
권세를 쥔 자들이 저를 궁지로 몰아넣어 결국 쫓아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관동 땅으로 가서 감호대에 올라 바라보니, 아득히 펼쳐진 푸른 물결이 삼신산에 닿아 있어 문득 옷자락을 걷고 발을 담그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이 말은 형만 알고 계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갑진년, 1604년 10월) (서기 1604년 12월 5일, 양력 추정)
고을 하나를 맡아 다스리면서도 이렇다 할 성과 하나 없이 그저 날짜만 보내며 관청의 곡식만 축내고 있습니다.
그나마 밀린 업무가 없어 좌수가 찾아와 재촉하는 일만은 겨우 면했습니다만, 형께서는 틀림없이 저를 몹시 꾸짖으실 것입니다.
(용어) 좌수는 조선 시대 각 고을의 향청(지방 자치를 맡아보던 기구)을 이끌던 우두머리를 말한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노형의 시는 성당 시절의 시풍에 매우 가깝습니다. 다만 기세가 지나치게 거세니, 조금만 평탄한 길로 들어선다면 심전기나 송지문 같은 시인이 되기가 뭐가 어렵겠습니까.
칠언고시는 도가의 경전인 황정경과 흡사한데,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노조린과 낙빈왕쯤은 응당 내려다보게 될 것입니다. 제 말이 지나치다고 의아해하지는 마십시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보내주신 부 두 편을 읽어보니 그 빼어남이 진나라의 손작(자는 흥공)과 좌사(자는 태충)에 견주어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요즘 세상에 정시 시대와 같은 시풍이 다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요즘 옛 문체로 글을 짓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인데, 뜻밖에도 우리 집안에 이런 대단한 보물이 있었으니, 하곡께서 살아 계셨다면 응당 깜짝 놀라며 이를 으뜸가는 작품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용어) 정시는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연호이다. 이 무렵 혜강, 완적을 비롯한 이른바 죽림칠현이 노장사상에 심취하여 자유분방하고 맑고 그윽한 시풍을 이루었는데, 이를 정시체라 한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율시 네 수가 매우 맑고 굳세어 우리 집안을 빛냈습니다.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고 싶었으나 공무에 매여 붓을 잡고도 도무지 생각을 짜낼 겨를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못생긴 모모가 서시의 찡그린 얼굴을 흉내 내다가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달아날까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3월) (서기 1610년 4월 8일, 양력 추정)
권필(자는 여장)의 말로는 이안눌(자는 자민)의 시가 점점 못해지고 있다는데,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무릇 시란 공력을 오래 기울이면 붓을 대는 대로 저절로 정신이 깃드는 법입니다. 비유하자면 열 편을 지으면 그중 몇 편은 볼 만하고, 나머지는 더러 평범하고 더러 졸렬하고 더러 비루하기도 합니다.
볼 만한 것은 남겨두고 평범한 것은 더 다듬고 비루하거나 졸렬한 것은 아예 버린다면 저절로 높고 오묘한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편마다 애써 교묘하게 지으려고만 하면 힘만 허비하고 말이 어긋나서 도리어 난삽하고 옹색한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이는 큰 시인들이 가장 꺼리는 일입니다.
자민은 너무 기교만 부리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힘을 허비하며 억지로 시상을 짜내는 데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품격은 모자라고 재능은 줄어들어 갈수록 무디어지고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노형께서도 부디 그 점을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6월) (서기 1610년 8월 3일, 양력 추정)
선녀 쌍성이 제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조강지처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형께서 멀리 떠난 채 돌아오지 않으신다면 형수께서 아이를 안고 우실 터이니, 너무 매정한 처사인 듯합니다. 기생들에 둘러싸여 비단에다 글을 쓰는 짓은 그야말로 중국의 철없는 젊은이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형은 나이 쉰이 가까우니 흰머리가 날 만도 합니다. 부디 조금씩이라도 몸가짐을 단속하시어 교송의 장수를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용어) 교송은 옛이야기 속 신선인 왕자교와 적송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둘 다 오래도록 살았다고 전해진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11년 1월 22일, 양력 추정)
문한을 담당하는 신하가 과거 시험관으로 참여했다가 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는 일은, 수나라가 과거 제도를 시작한 이래 없었던 일인데 아우가 몸소 그 일을 당했습니다. 게다가 하필이면 우리 집안에서 이런 일이 나왔으니 선대의 가르침을 욕되게 함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저 죽고 싶은 심정뿐입니다. 명나라의 정민정(호는 황돈)도 고문까지 당하지는 않았고, 당인(자는 백호)도 벼슬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일까지는 당하지 않았습니다.
법을 엄하게 적용하는 것이 요즘은 어찌하여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 또한 운명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임자정에게 답한 편지 (정미년, 1607년 8월) (서기 1607년 10월 5일, 양력 추정)
임자정은 허균과 어려서부터 함께 글을 배운 벗 임곤의 자이며, 훗날 풍안군에 봉해졌다.
자네는 내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말을 조심하여 요즘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의 태도를 본받게 하려는 모양인데, 세상에 일부러 이런 옹색한 처신을 하면서 그것으로 만족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총채를 손에 들고 고상한 이야기를 나누며, 거친 베옷을 입고 지팡이를 끌며 다니는 것이야말로 고상한 뜻대로 사는 삶이라네. 큰길가의 누각에 올라 주렴을 걷어 올린 채 앉아서, 쌍갈래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누런 적삼 소매를 걷어붙인 채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신유안이 지은 '천고강상' 한 편을 읊는다면, 그 순간만큼은 온 세상에 안하무인이 됨을 절로 깨닫게 될 것이니, 붉은 관복을 입고 요란하게 길을 트며 지나가는 고관 따위를 마음에나 두겠는가. 왕평지가 이 말을 듣는다면 응당 배를 잡고 웃을 것이네.
임자정에게 답한 편지 (정미년,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임수정(자는 약초)이 세상을 떠났으니, 후배들이 다시는 그의 풍류를 볼 수 없게 되었네. 주옥 같은 사람을 땅에 묻었으니 사무치는 정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구려.
세상일은 갈수록 변하고 세태는 나날이 야박해지기만 하는데, 그대 같은 부류는 멀쩡히 살아남고 이 사람은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대는 내 말을 탓하지 말게. 약초마저 죽었으니 이제 누가 다시 나를 받아주겠는가. 그 사람을 떠올려 보니 마치 방금 세상을 떠난 듯하네.
임자정에게 답한 편지 (무신년, 1608년 11월) (서기 1608년 12월 21일, 양력 추정)
병을 얻어 여관에 머물고 있는데, 닷새가 지나도록 땀 한 방울 나지 않아 이대로 죽는가 싶었네. 형께서 자주 안부를 물어주셨으니 그 두터운 정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구려. 내 병이야 곧 나아지겠지만, 정말로 걱정되는 것은 자네의 병일세. 마음만 편히 풀리면 저절로 나아질 터이니, 부디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시게.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조지세는 호가 현곡, 소옹이며, 벼슬이 공조 참판에 이르렀던 조위한의 자이다.
공의 할아버지뻘 되는 어른의 시는 호탕하여 시선집에 오를 만했으나, 애석하게도 옥에 티와 같은 흠이 있었습니다. 이반룡(자는 우린)이 남의 시를 깎아 다듬어 간행했던 일을 본받고 싶으나 감히 손대지 못하여 이렇게 감히 여쭙습니다.
(용어) 본문에서 "할아버지뻘 되는 어른"이라 옮긴 표현은 할아버지와 같은 항렬이면서도 가까운 친족은 아닌 남자 어른을 가리키는 옛말인데, 여기서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2월) (서기 1608년 1월 31일, 양력 추정)
제가 워낙 일 벌이기를 좋아하고 줏대도 없어서, 제 시를 평한 글을 형님께 보여드리고 말았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형님은 부디 입을 다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비방이 더 늘어날까 두렵습니다.
그동안 두세 형제들에게 이야기했던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결과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3월)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큰 고을을 맡아 이런 복을 누리면서도, 가난한 벗을 구제하지 못했던 원헌(공자의 제자)처럼 저 역시 가난한 친구를 돕지 못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고을 창고는 봄을 맞아 곡식 한 알이 구슬처럼 귀합니다.
보내드리는 것은 겨우 말 한 필에 실을 정도이지만, 제 월급의 절반입니다. 범순인이 친구 석만경에게 배 한 척 가득 보리를 실어 보냈다던 일에 비하면 부끄러워 땀이 날 지경입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9월) (서기 1608년 10월 9일, 양력 추정)
저는 세상의 입방아에 시달려 액운을 당했으니, 이참에 쉬고 싶은 것이 본디 제 뜻이었습니다. 다행히 이제 파직되어 곧장 부령(전라북도 부안의 옛 이름)으로 향합니다. 이제부터 저는 권세가의 문턱을 넘지 않으렵니다. 어떻게 해야 형과 은거지를 절반씩 나누어 살 수 있을까요? 종이를 마주하니 그저 서글플 뿐입니다.
(용어) 여기서 "권세가의 문"이란 지위 높은 벼슬아치들의 집 문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은거지를 나누어 산다"는 말은, 옛날 중국 화산에 숨어 살던 은사 진단을 많은 이들이 찾아와 함께 노닐었다는 데서 나온 표현으로, 존경하는 은사를 찾아가 함께 지내고 싶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2월) (서기 1609년 1월 20일, 양력 추정)
세상 사람들은 제가 산에서 사는 것을 그냥 두지 않고, 자꾸 북쪽으로 올라오라 재촉합니다. 어제 형이 계신 곳까지 갔었지만 날이 추워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궁궐 일이 아무리 바쁘다 한들 어찌 한가한 틈이 전혀 없겠습니까. 저를 찾아와 주실 수만 있다면, 마땅히 시 한 묶음을 드려 형의 평을 받고 싶습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2월) (서기 1609년 1월 20일, 양력 추정)
형이 겨우 문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저는 형이 맨 앞자리를 차지하기를,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간절히 바랐는데, 이번에도 결국 높은 자리에는 오르지 못하셨군요. 제가 낙방한 것과 다름없으니 그 한스러움을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그러나 한 번 넘어졌다고 마음 아파하지 마시고, 다시 천 리 먼 길을 나아갈 뜻을 세우셔야 합니다. 도성을 넘어서는 일쯤은 작은 흙덩이 하나 지나치듯 해내는 날랜 재주를 공은 본디 지니고 계십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군옥은 저와 가까이 지내는 사이인데, 어찌 형의 말씀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카가 아무리 고집이 세다 해도, 어찌 폐인들이 걸었던 전철을 밟아 부모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손가락질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겠습니까. 저더러 잘 타일러 달라 하신 말씀은 감히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화백(정협의 자)과 의논해 보십시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0월) (서기 1609년 11월 11일, 양력 추정)
제가 시험관이 되어 형의 책문을 2등으로 뽑았으니, 이른바 눈이 흐려 다섯 빛깔 햇살도 가려내지 못한 셈입니다. 그러나 형의 업적이 한기(송나라 재상, 자는 치규)와 같고 문장이 소식(자는 자첨)과 같기를 바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왕요신(송나라 사람, 시호는 문안)과 장형(송나라 사람, 관직명은 대제)은 그저 장원 급제를 했을 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시험 삼아 물어보십시오. 왕요신과 장형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있던가요. 세월이 흘러도 썩지 않는 큰 업적은 장원 급제 여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2월) (서기 1610년 3월 9일, 양력 추정)
이조 판서를 만났더니 여장을 동몽교관(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벼슬)으로 임용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가 응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형께서 한번 그에게 물어봐 주십시오. 벼슬이란 때로 가난 때문에 하기도 하는 법이니까요.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2월) (서기 1610년 3월 9일, 양력 추정)
사신으로 추천한 것은 남이공(자는 자안)에게서 나온 일이라고 합니다. 하늘이 사람의 욕심을 다 들어주지는 않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병마에 시달리기만 하니 그저 크게 탄식할 따름입니다.
권여장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5월) (서기 1610년 7월 5일, 양력 추정)
형이 강도(강화도의 옛 이름)에 계실 때는 한 해에 두어 번 서울에 오시면 언제나 우리 집에 눌러앉아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으니, 세상에 그보다 즐거운 일이 없었네. 그런데 온 가족을 이끌고 아예 서울로 올라오신 뒤로는 열흘이 넘도록 한가로이 어울린 적이 없으니, 강도에 계실 때보다 오히려 못하니 대체 무슨 까닭인가?
연못에는 물결이 출렁이고 버들빛은 한창 푸르며, 연꽃은 붉은 꽃잎을 반쯤 열었고 짙은 녹음은 푸른 일산처럼 은은히 비치는데, 마침 이럴 때 동동주를 빚어 두어 젖빛처럼 뽀얀 술이 동이에 넘실거리니 어서 오셔서 맛보시게. 바람 잘 드는 마루는 벌써 깨끗이 쓸어놓고 기다리고 있네.
권여장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5월) (서기 1610년 7월 5일, 양력 추정)
그대 어머님의 병환이 너무 오래 끄니 걱정스러운 마음이 마치 내가 우리 어머니 병환을 곁에서 돌보던 때와 같네. 마침 엿 한 덩이를 구했기에 이생 편에 부쳐 보내니 식사 후에 드시게 하게. 나는 이것을 우리 부모님께 드리고 싶어도 이제는 그럴 수가 없으니,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겠네.
권여장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3월) (서기 1610년 4월 8일, 양력 추정)
내가 떠날 날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네. 만 리 길 여행 봇짐에 자네의 글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오언율시(다섯 자씩 여덟 구로 짓는 한시 형식) 여덟 수를 노잣돈 삼아 반드시 지어 주게. 한 수라도 줄인다면 무정하다 할 것이네.
형의 오언율시는 잘 지은 것은 맹호연(중국 양양 출신의 시인)의 작품에 견줄 만하고, 못한 것이라 해도 진거비의 고상한 운율에 못지않으니, 저 먼 연경의 저잣거리에 내놓고 읽더라도 연나라와 조나라 땅에서 부르던 우국지사들의 슬픈 노래에 맞설 만할 걸세. 부디 게으르다는 핑계로 짓기를 미루지 말아 주게.
(용어) "연조의 비가"는 옛날 중국 연나라와 조나라 지역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들이 시국을 근심하며 부르던 슬픈 노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권여장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2월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여행길 노자 삼아 보내 주신 율시 두 편에는, 그 무렵 병드신 형님과 이별하느라 마음이 몹시 어지러워 답을 하지 못했었네. 남궁생이 서울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자네를 만날 테니, 그때 화답하는 글을 보낼 것이니 내가 실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걸세.
초췌한 몰골로 연못가나 밭두둑에서 읊조린 시가 고운 가락에 맞을 리 없으니, 형님이 보시면 틀림없이 탄식하며 슬퍼하실 걸세.
박숙야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2월 (서기 1610년 1월 9일, 양력 추정)
형조에서 벌금을 없애지 못한 것은, 공도 태수가 문을 닫아걸고 조정의 명을 거절한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문을 닫아걸고 명을 거절해 놓고서는, 제가 벌금을 없애지 못했다고 책망하시니, 이는 법으로는 자신을 단속하면서 예로는 남을 대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벗들이 서로 권면하는 의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저 저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입니다.
(용어) 박숙야는 박엽의 자로, 호는 국창이며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이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기해년, 1599년) 5월 (서기 1599년 7월 6일, 양력 추정)
조정에서 몸가짐을 단정히 하는 일이라면 내가 자네를 따르지 못하겠지만, 경치 좋고 숨어 살기 좋은 곳을 아는 데는 내가 더 낫다고 생각했었네. 그런데 몇 년 사이 고을살이에 얽매여 떠나지 못하다가 은거하려던 뜻마저 저버렸으니, 북산이문이 곧 나에게 들이닥쳐 내 얼굴을 부끄럽게 만들 것만 같네.
사람이 요임금 시대의 신선이었다는 방회처럼 되지 못한다면 결국 남에게 부림받는 종이 될 뿐이니, 나는 자신만만하기로 이름났던 한나라의 문장가 사마상여의 기개를 배우고 싶네. 형은 나를 나무라 주게.
(용어) 임약초는 임수정의 자로, 159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와 한림을 지냈으며 허균과는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낸 벗이었다. 3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북산이문은 남조 제나라 때, 북산에 숨어 살던 주옹이 벼슬길에 나섰다가 다시 산으로 돌아오려 하자 그의 벗 공치규가 산신의 뜻을 빌려 그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나무란 글이다. 여기서는 허균이 예전에 임약초와 벼슬을 버리고 함께 강가에 숨어 살자고 약속해 놓고 지키지 못한 일을 두고 한 말이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기해년, 1599년) 5월 (서기 1599년 7월 6일, 양력 추정)
천지와 사계절도 다 변화하는 이치가 있는데, 나는 늘 움츠러들기만 하고 펴지를 못하니, 자네 같은 사람이 백 명 있다 해도 나를 어쩌지 못할 듯하네.
떠돌아다니는 벼슬살이에 먹고사는 것마저 자주 곤궁하니, 차라리 한 고을의 수령 자리 하나 내려주는 것만 못하네. 궁지에 몰린 원숭이가 숲으로 달아나면서 나무를 가려잡겠는가. 그저 벼슬하기 전 평민 시절의 정을 믿고 늘 이렇게 하소연하는 것이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기해년, 1599년) 1월 (서기 1599년 2월 10일, 양력 추정)
형의 그늘 아래 있을 때는 추위도 더위도 잊고 지냈는데, 이제 또 천 리 먼 곳으로 헤어지게 되니 남몰래 가슴이 아픕니다.
평소 그대를 만날 때면 있는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강물처럼 많은 술을 빚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었는데, 이제 멀리 떠나는 이별길에 올라서는 술 백 동이를 차려 놓아도 형이 한 잔조차 마시지 않으니, 신선과 범인의 길이 서로 막혀 버린 것인가. 고개를 들어 층성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서 그리워한다네.
(용어) 층성은 신선 서왕모가 산다는 곤륜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신선의 세계, 곧 다다를 수 없는 아득한 경지를 뜻한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2월 (서기 1600년 3월 29일, 양력 추정)
지독한 추위에 목이 다 잠겼으니, 하늘이 이런저런 대꾸를 하는 번거로움을 줄여 주려는 것이 아닌가 싶네. 그런데 혀부터 먼저 내게서 떨어져 나갔으니, 팔다리마저 저마다 떨어져 나갈 날이 그리 멀지 않은 듯하네.
어제 윤계선을 만났더니, 모든 일이 딱히 잘된 것도 잘못된 것도 없으니 함께 힘쓰면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하였지만, 내 입은 굳게 다물어져 벌어지지가 않았네.
성현도 보통 사람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법인데, 하물며 한 시대를 함께 논하는 사람들 사이야 얼마나 차이가 나겠는가. 형이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이 말을 들으셨더라면, 생각이 서로 그리 동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3월 (서기 1600년 4월 27일, 양력 추정)
나는 아직 마흔도 안 되었는데 머리가 벌써 이 모양이니, 나이가 더 들면 어떤 꼴이 될지 모르겠네. 떠도는 인생이 몇 해나 산다고 억지로 남을 따라다니며 줏대 없이 살겠는가.
옛날 이름난 선비들은 으레 술을 실컷 마시면서도 굴원의 이소쯤은 훤히 외우는 사람들이었는데, 나는 그 두 가지를 다 하지 못하니 뭇 관료들 밑자리에 있는 것을 참으로 달게 여기고 있네. 그런데 자네는 나를 천 길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려 하니, 옛날 힘장사였던 오확만 한 힘이라도 있는 겐가? 아마 애만 쓰고 소용은 없을 것이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6월 (서기 1600년 7월 24일, 양력 추정)
맑은 이슬이 새벽마다 내리는 요즘, 새로 만든 거문고를 타고 있다네. 이런 것들을 대하다 보니 그대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이 마치 봄 버들가지에 물이 오르듯 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들으니 자네가 홍문관에서 비방을 받았다고 하던데,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면 개의치 말게. 때가 지나면 저절로 잠잠해질 것이네.
암행어사로 나가는 일은 언제쯤 떠나는가? 이가 아파 문밖에 나가지 못해 이렇게 글로나마 위로를 전하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2월 (서기 1600년 3월 29일, 양력 추정)
어떤 사람에게 들으니 자네가 서애 유성룡을 헐뜯어서 설서 벼슬을 얻었다고 하기에, 나는 그 말을 듣고 몹시 화가 났었네. 서애는 어진 정승이니 헐뜯어서는 안 되네. 소인배를 헐뜯고 벼슬을 얻는다 해도 좋은 일이 아닌데, 하물며 서애 정승을 헐뜯어서야 되겠는가.
바라건대 형은 차분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조급하게 행동하지 말게. 앞길이 아무리 멀다 해도 다 타고난 운명이 있는 법이고, 공명이란 괴상한 짓을 해서 요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네. 속담에 "급히 먹으면 목이 멘다."고 했으니, 비록 속된 말이지만 큰 깨우침을 주는 말일세.
(용어) 임자승은 임현의 자로, 허균과 같은 해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가까이 지낸 벗이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3월 (서기 1600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옛 책 만 권을 쌓아 놓고 한쪽에는 탁문군 같은 여인을 끼고서 그 속에서 거리낌 없이 지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한평생을 마치기에 충분할 것이네. 그런 풍류는 형 혼자 누리고, 나에게까지 너무 자랑하지는 말게. 나야 세상에서 버려진 몸이니 그대 일에 무슨 간섭을 하겠는가. 형은 나를 탓하지 말게.
비루하고 잡스러운 것을 가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도량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니, 비유하자면 만 리를 흐르는 긴 강이 어찌 천 리에 한 굽이도 없을 수 있겠는가. 이런 나의 미친 짓을 형이 용서해 주신다면 참으로 고맙겠네.
(용어) 탁문군은 한나라 때 큰 부자였던 탁왕손의 딸로, 사마상여가 타는 거문고 소리에 반해 한밤중에 몰래 집을 뛰쳐나가 그의 아내가 된 여인이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3월 (서기 1600년 4월 27일, 양력 추정)
형이 내가 잡스러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경계하여 편지를 두 번이나 보내 주시니 참으로 고마운 마음이네. 그러나 이것은 내 참마음을 해치는 일이 아니라네.
옛날 송나라의 곽충서는 시장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술을 마시며 "나와 어울리는 사람은 모두 이런 부류들이다."라고 말했다는데, 모르긴 해도 형이 사귀는 사람들이 시장 사람들보다 나은가?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3월 (서기 1600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어젯밤에는 자네가 아끼는 여인이 찾아와 강남곡을 부르는데, 가락마다 마치 구슬을 꿰어 놓은 듯하였네. 그 노래를 듣느라 지루한 줄도 모르고 무릎을 치며 화답하다가 나중엔 발까지 구르며 춤을 추었으니, 천지가 넓은 줄도 전혀 몰랐다네. 이때는 내가 옛사람을 만나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지 않고, 오히려 옛사람이 나를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형이 함께 있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는데, 신선이 산다는 금화궁의 하늘 위에서도 이백이 술 마시던 누각을 그리워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5월 (서기 1600년 6월 25일, 양력 추정)
자네는 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손님을 물리쳐서, 요직에 있는 사람이 만나지도 못한 채 돌아가 화를 내게 만들었다고 나를 나무라는데, 이건 나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네. 불행히도 내가 사는 곳이 임약초라는 사람과 대문을 마주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높은 벼슬아치들이 예전에 도사 벼슬이나 지낸 사람의 집을 뭐 하러 찾아오겠나. 옛날 장찬이라는 사람은 "나는 하경용을 찾아온 손님은 만나줄 수 없다"고 말했다는데,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이네.
(용어) 장찬은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 사람으로, 하경용을 찾아온 손님이 오는 길에 자신에게도 들르면 "나는 하경용의 손님은 만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허균은 이 이야기를 빌려, 자기 집이 우연히 높은 벼슬아치 임약초의 집과 마주해 있어 그를 찾아온 손님들이 착각하고 몰려드는 것을 이렇게 에둘러 말한 것이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5월 (서기 1600년 6월 25일, 양력 추정)
나는 불교를 믿는 게 아니네. 다만 그 글이 좋아서 읽으며 한가한 시간을 메울 뿐이지. 몇 천 호쯤 되는 고을 하나 얻으려 해도 못 얻는 처지에, 부처가 되겠다고 도모한다는 말인가. 그런 건 전혀 아니네. 다만 권력에 아부하며 떠들어대기만 하는 무식한 자들에 비한다면,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걸세.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7월 (서기 1600년 8월 23일, 양력 추정)
내가 남궁 — 예조의 별칭 — 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을 때 형이 뒤이어 들어왔으니, 한비자가 노자와 나란히 한 열전에 실리게 될 줄은 미처 몰랐네. 나는 우연히 비국랑(비변사의 낭청 벼슬)에 올라, 하루 종일 정승 앞에 엎드려 붓을 잡고 글씨를 쓰다 보니 흐르는 땀이 비 오듯 하여 거의 미칠 지경이었네. 그래서 왜 손작이 수초부에서 말한 것처럼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찾지 않고, 억지로 나랏일에나 참견하려 드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네. 벼슬을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가난 때문에 몇 말 안 되는 녹봉에 매달려 실행에 옮기지 못할 뿐이네.
(용어) 남궁은 예조의 별칭이다. 1597년 허균이 예조 좌랑으로 있을 때 임현도 뒤이어 예조 좌랑으로 들어왔는데, 허균은 이를 사상이 상반된 한비자와 노자가 사기의 같은 열전에 함께 실린 일에 빗대었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신축년, 1601년) 2월 (서기 1601년 3월 19일, 양력 추정)
남쪽으로 내려온 것은 원래 자네가 보고 싶어서였는데, 관찰사가 옛 규칙을 없애지 못하는 바람에 능양까지 함께 가지는 못했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수행하게 되었으니 서로 만날 날이 있을 걸세.
듣자니 형은 요즘 아내를 잃고 지나치게 상심한다는데, 대장부란 마땅히 이치를 따라야 하는 법이네. 세상에 예쁜 여인이 얼마나 많은가, 하필 그 사람 하나뿐이겠는가. 인생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네. 형은 예전에 순봉천이 아내를 잃고 슬퍼하다 따라 죽은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더니, 이제 와서는 그 전철을 밟으려는가. 자네 어머니가 살아 계시고 자네는 외아들로 아들마저 없는 처지이니, 부질없이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게.
자세한 이야기는 창평의 과거 시험장에서 하세. 말 위에서 대충 몇 자 적고 이만 줄이네.
(용어) 순봉천은 삼국시대 위나라 사람 순찬의 자이다. 아내를 몹시 사랑했는데 아내가 일찍 병들어 죽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심중경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9월 (서기 1610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어제 처음으로 자네의 애첩이 '여인행'을 읊는 것을 들었는데,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정확하고 곡조를 붙이는 솜씨도 제격에 딱 들어맞아 마치 전문 소리꾼 같았네. 그 소리가 쇠나 옥이 부딪는 소리처럼 쟁쟁하면서도 간드러졌네. 영이니 석이니 하는 두 기생에게도 이런 재주가 있었는지 모르겠군.
그 옛날 도엽이라는 기생도 이 앞에서는 아름다움을 뽐내지 못하게 되었으니, 형은 왕자경이 되기에 충분하네. 그러니 굳이 만 호를 다스리는 제후에 봉해지기를 바랄 게 무엇 있겠나.
(용어) 심중경은 훗날 인조 때 문신을 지낸 심액이며, 중경은 그의 자이다. 도엽은 진나라 왕헌지의 애첩 이름이고 자경은 왕헌지의 자로, 왕헌지가 애첩을 그리워하며 지은 '도엽가'가 유명하다. 허균은 이를 빌려 심중경을 왕헌지에 비유한 것이다.
윤명익에게 답한 편지 (경술년, 1610년) 12월 (서기 1611년 1월 22일, 양력 추정)
제가 당한 불행은 사대부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무신년(1608년) 사월에 형께서 당하신 액운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지옥에 견주어 이 세상이 평온하게 느껴지는 것과 같습니다. 둘 사이의 차이가 어찌 천 유순 정도밖에 안 되겠습니까. 그런데 고맙게도 무명 세 필을 재빨리 곤장 치는 사람에게 쥐여 주셨다니, 이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다만 옥리들이 함부로 침범해 오니 임금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남은 인생은 그저 고향에 돌아가 살 수만 있어도 다행이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남해 바닷가 어딘가 신선이 산다는 곳으로라도 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긴 말은 줄이고 이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용어) 유순은 옛 인도에서 쓰던 거리 단위로, 1유순을 대략 40리로 보는 설이 있다. 여기서는 아득히 먼 차이를 비유한 말이다.
조이숙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오랫동안 덕이 높으신 그대를 뵙지 못하니 마음속에 더러운 티끌만 쌓여갑니다.
누대에 기대어 지으신 시는 어째서 정묘교의 주인에게 보여주어, 한창 졸음에 빠져 있는 그를 깨우지 않으십니까.
《세설》은 빌려 간 지 오래되었는데 돌려주지 않으시니, 아직 다 읽지 못하신 겁니까?
저는 천 년 뒤에 태어나 진나라 사람들이 나누던 청담을 직접 들어보지 못했으니, 한 번 읽고서 그 자세한 내용을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찾아가는 종 편에 부쳐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심부안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7월 (서기 1608년 8월 24일, 양력 추정)
저는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처지가 되었으니 마땅히 스스로 탄핵하여 물러나야 할 것이나, 다시 말썽이 일어날까 두려워 지금까지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이미 어사에게 사정하여 애걸하였으니 다음 달에는 마땅히 판결이 날 것입니다.
남도에서 믿을 사람은 오직 형뿐이니, 산속으로 들어가 살 때 종 두어 명의 부역만 덜어 주신다면 저는 마땅히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가을바람이 솔솔 불고 귀뚜라미가 한창 울어댑니다. 남쪽 하늘을 바라보니 기러기와 함께 날아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조선술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9월 (서기 1610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저는 마침 남의 잔치에 다녀왔고 말은 돌아와 여물을 먹고 있던 참인데, 그대가 마침 우리 집을 찾아오셨더군요. 그래서 제가 집에 있는 줄로 오해하셨고, 게다가 취랑이라는 자가 그대의 의심을 부추겨 정시망(시망은 정응운의 자)에게까지 그 일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무슨 나랏일의 주도권이라도 쥔 사람이라고, 세상 사람이 싫어서 찾아오는 이를 거절했겠습니까.
십 년을 사귄 사이에도 이렇게 의심을 받게 되니, 남을 알기도 쉽지 않지만 남이 나를 알아주는 것도 쉽지 않다는 말이 과연 사실인가 봅니다.
어금니가 아파 만나서 말씀드리지 못하고, 우선 편지로 사정을 아룁니다. 이만 줄입니다.
(용어) 조선술은 문장이 뛰어나고 특히 시와 부에 능했던 조찬한의 자이며, 호는 현주이다.
기헌보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28일, 양력 추정)
이달 십오일에 유배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 새우는 부안의 것만 못하고, 게도 벽제의 것만 못합니다. 먹는 것만 밝히는 사람으로서는 이러다 굶어 죽겠습니다.
(용어) 기헌보는 기자헌의 동생인 기윤헌의 자이다.
정시망에게 답한 편지 (경술년, 1610년) 12월 (서기 1611년 2월 11일, 양력 추정)
저의 옥사는 거의 끝나 갑니다. 억울함을 품은 채 심문을 받으니 하늘이 어두컴컴해지고 해마저 캄캄해지는 듯했습니다. 그 때문에 울다가 지쳐서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이태백도 야랑으로 귀양을 갔고 소동파도 해남으로 귀양을 갔듯이, 옛사람들도 피하지 못했던 일인데 제가 어찌 귀양길 한 번 가는 것으로 마음 아파하겠습니까.
남쪽으로 가는 것이 결정되었으니, 형은 술 한 말과 닭 한 마리를 들고 길가로 나와 시 한 수 읊어 주고 가지 않으시렵니까?
수많은 사연을 다 적지 못합니다.
임무숙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7월) (서기 1610년 9월 2일, 양력 추정)
제가 사람들에게 무숙의 변려문이 최치원의 글보다 낫다고 말했을 때는 다들 이상하게 여기며 못마땅해했습니다. 그런데 또 무숙의 글이 왕세정의 글과 같다고 했을 때는 사람들이 별로 의아해하지 않더군요. 이는 다름이 아니라 옛사람은 귀하게 여기고 요즘 사람은 천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왕세정의 문장은 멀리 한나라의 사마천과 사마상여의 뒤를 이었다고 할 만하니, 최치원을 내려다보는 정도가 어찌 봉황과 참새의 차이뿐이겠습니까.
그대는 스스로를 믿고 남의 말에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용어) 무숙은 임숙영의 자로, 문장이 뛰어나고 경서와 역사에 밝았던 인물이다. 변려문은 넉 자와 여섯 자를 짝지어 쓰는 화려한 한문 문체다. 왕세정은 명나라의 문장가로 호가 감주다. 최치원은 신라 말의 대문장가이며, 사마천과 사마상여는 한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다.
장지국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1월) (서기 1611년 3월 4일, 양력 추정)
죄를 짓고 귀양 가는 사람을 찾아 위로해 주는 이가 드문데, 그대는 뭇사람에게 버림받은 저에게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어 주셨으니 그 후한 뜻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는 정말 저를 나라의 인재로 대우해 주신 것이니, 어찌 감히 그 은혜에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런 태평한 시절에 죄를 지었으니 백 번 귀양을 가더라도 속죄할 길이 없습니다. 귀문관 밖으로 쫓겨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니, 감히 먼 곳으로 귀양 가는 것을 한스러워하겠습니까.
세자를 돕고 지키는 일은 오로지 강학을 맡은 신하에게 달려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대가 배운 바를 실행할 때입니다. 힘써 바르게 보필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눈을 씻고 귀를 기울여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용어) 지국은 장유의 자로, 문장이 뛰어났던 인물이다. 귀문관은 장백산맥의 한 줄기로, 아주 멀고 험한 변방을 뜻하는 말이다.
조카 실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1월) (서기 1611년 3월 4일, 양력 추정)
너는 내가 양식이 떨어질까 걱정하지만, 나도 네가 위험을 무릅쓰고 무턱대고 행동하는 것이 걱정스럽구나. 내가 너를 걱정하는 마음이 네가 나를 걱정하는 마음보다 훨씬 클 터이니, 행동을 삼가서 다시는 어버이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도록 하여라.
(용어) 실은 허균의 맏형인 허성의 맏아들로, 허균의 조카다.
조카 실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조씨 집안에서 노래하는 기녀를 데려간 일은 나에게는 딱히 아쉬울 것이 없는데, 너는 왜 그렇게까지 서운해하느냐? 얼마 전에 기를 쓰고 막으려 하던 마음과는 사뭇 다르구나. 더없이 아끼던 보물이었으니 아깝기는 하겠지만, 이제 와서 나를 탓해서야 되겠느냐.
조양오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6월) (서기 1608년 7월 26일, 양력 추정)
북관에 계시면서 학계를 만나 보셨는지요? 그의 병세는 어떠하던가요?
저는 평생 절도를 지키지 못하여 온갖 곤경을 겪었습니다. 그래도 이런 화는 면했는데 그는 단번에 걸려들었으니, 운명이란 것이 정말 있는 것일까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도 가슴이 뛰는데, 저는 변변찮은 사람이라 또 입을 잘못 놀려 걸려들었습니다. 이는 모두 평소 그렇게 처신해온 데서 비롯된 일이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그저 파면되어 돌아가기를 앉아서 기다릴 뿐입니다.
(용어) 북관은 함경남도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학계는 심액의 호다.
민숙정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2월) (서기 1609년 1월 20일, 양력 추정)
수헐원에서 신령이 이백을 찬양하는 시를 읊었다는 일을, 제 맏형님조차 믿지 않으시니 결판은 그대의 입에 달려 있습니다. 저를 위해 속히 와서 증명해 주셔서, 한편으로는 제가 허튼소리를 한다는 누명을 벗겨 주시고, 한편으로는 형제간에 서로 믿지 못하는 마음을 없애 주십시오. 이 두 가지 문제가 모두 그대의 한 번 걸음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 조카들에게 곤욕을 치르고도 빠져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종을 보내어 모십니다.
(용어) 민숙정은 민인길의 자다. 수헐원 일화는 허균이 지은 "열선찬" 가운데 이백을 기린 구절("만리에 푸른 물결, 하늘 가득 밝은 달")이 있었는데, 허균이 직산 수헐원에서 민인길, 심우영과 함께 있을 때 외딴 폐가에서 신령이 그 시구를 읊는 소리를 들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다.
용산 고을 원님 이할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아침에 일어나니 집게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더니, 문득 좋은 물고기 선물을 받았습니다. 어찌 바다의 용왕만 이런 좋은 맛을 낼 수 있다 하겠습니까. 양강의 축항이라는 물고기나 서주의 독미라는 물고기라 한들, 그 맛이 이것을 당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실처럼 가늘게 썰어 회를 쳤더니 절로 군침이 돌더군요.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으니, 그동안 국수나 먹던 창자가 깜짝 놀라 천둥소리를 낼 정도였습니다. 감사한 마음에 아홉 번이라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용어) "집게손가락이 움직인다"는 말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조짐이라는 뜻의 옛 표현이다. 옛날 중국 정나라의 공자 송이 자기 집게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조짐이다"라고 말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함산 고을 원님 한회일에게 감사드리는 편지 (신해년,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28일, 양력 추정)
연어알젓 한 그릇을 받아 먹어보니, 그 맛이 사슴 태보다도 뛰어나고 구장보다도 더 좋았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용어) 구장은 구약나물 뿌리를 가루 내어 끓여 만든 음식이다.
함산 고을 원님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사람들이 이곳에 작은 방어와 준치가 많이 난다고 하여, 저는 일부러 이곳을 유배지로 원했습니다. 그런데 올봄에는 통 나지 않으니, 이 또한 운이 없는 모양입니다. 늙은 몸이 입맛 하나 보고 왔는데, 거친 거여목으로도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하니 우스운 일입니다.
남궁생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2월)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벌통 하나를 오동나무 그늘에 두고, 벌 떼가 아침저녁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질서를 살펴보니, 저희들끼리의 법도가 무척이나 엄격하더군요. 그런데 나라의 법도가 벌만도 못하니, 사람으로서 크게 실망스러울 따름입니다.
조카 채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네가 서울로 올라간 뒤로, 서울의 여러 친지들이 모두 형보(함열 현감 한회일의 자)가 나를 잘 대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더구나. 설령 네 말대로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 말이 우리 집에서 나왔다면 매우 의롭지 못한 일인데, 더구나 그런 일도 없지 않았느냐.
이 고을은 본디 쇠잔한 곳인 데다 형보의 살림 규모도 넉넉지 않으니, 어찌 고을마다 임피 같고 사람마다 경기 감사 같을 수 있겠느냐. 너무 심하게 남을 책망하는 것은 군자가 할 일이 아니다. 부디 이런 말을 하지 말아라. 괜스레 네가 박정하다는 말만 더 듣게 될 것이다.
(용어) 채는 허균의 둘째 형 허봉의 아들로, 허균의 조카다. 임피는 전라도의 고을 이름이고, 경기 감사는 경기도를 다스리던 지방관을 이르는 말이다.
이손곡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4월) (서기 1609년 5월 18일, 양력 추정)
어르신께서는 제 근체시가 지나치게 다듬어지고 빈틈없이 짜여서 성당 시대의 시풍과는 거리가 멀다 하여 물리치고 돌아보지 않으시면서, 오직 고시만 좋다 하시며 남조의 문장가 안연지와 사영운의 풍격이 있다고 하시니, 이는 어르신께서 고집만 부리시고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고시가 비록 예스럽다고는 하나 이는 그대로 옛것을 본떠 베낀 것이어서 옛사람의 시와 비슷할 뿐이니, 그렇게 겹쳐 놓은 것을 어찌 귀하다 하겠습니까. 근체시는 비록 당나라 시와 꼭 닮지는 않았어도 나름대로 저만의 새로운 경지가 있습니다. 저는 제 시가 당시나 송시와 비슷해질까 오히려 두렵고, 사람들이 "이것은 허균의 시로구나" 하고 말해 주는 것을 듣고 싶으니, 너무 건방진 생각은 아닐는지요.
(용어) 이손곡은 선조 임금 때의 문장가 이달로, 손곡은 그의 호다.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당나라 시풍에 뛰어나 세 사람을 일러 '삼당'이라 불렀다. 허균은 그에게서 시를 배웠다. 근체시는 정해진 형식과 운율을 지켜 짓는 한시이고, 고시는 그런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짓는 한시다. 안연지와 사영운은 중국 남북조 시대 남조의 문장가다.
이손곡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4월 (서기 1609년 5월 18일, 양력 추정)
어르신께서는 제가 쓴 풍악기행시를 가장 예스럽고 격조 높다 하시며, 이 시집에서 으뜸가는 작품이 될 만하다고 말씀하셨다더군요. 하지만 제가 스스로 헤아려 보면 그 시는 그저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적어 놓은 것일 뿐입니다. 어찌 감히 천하의 문장가로 이름난 진나라의 손작이나 포조 같은 이들과 더불어 천 년 뒤까지 솜씨를 겨룰 수 있겠습니까. 저를 지나치게 추어올리시며 짐짓 놀리시는 말씀이라 여겨져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시왕동, 망고대, 박달곶을 읊은 세 편의 옛 시는 참으로 어르신 말씀대로 지나치게 강한 느낌이 있습니다. 제 글은 부드러운 것이 흠이지 강한 것은 흠이 되지 않습니다. 이따금 강한 느낌이 있다 해도 거리낄 것은 없습니다. 만약 명나라의 큰 문장가인 이반룡이 이 글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자신이 엮은 『명시산』이라는 시선집에 넣었을 것이니, 왕씨 집안 자제들이 다소 자부심을 가진다 한들 그것이 강남의 풍류를 가로막을 것이 또한 무엇이겠습니까.
이손곡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10월 (서기 1610년 11월 29일, 양력 추정)
어르신께서는 본디 제 초사와 부 작품들이 부드럽고 아름답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히 스스로 그렇다고 믿지 못하겠습니다. 제 글은 근래에 한층 나아졌는데 어르신께서는 오히려 이를 알아보지 못하시니, 삼가 『한정록』 서문과 『박씨산장』, 『왕총이기』, 『십이론』, 『이절도뢰』, 『관묘비』, 『남궁생전』, 『대힐자』, 그리고 『북귀부』, 『훼벽사』를 한데 묶어 변씨 성을 가진 이 편에 부쳐 보냅니다. 가르침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윤오정에게 답한 편지 (기유년, 1609년) 7월 (서기 1609년 8월 14일, 양력 추정)
보내주신 포도를 받아 먹고 나니, 갈증병을 앓던 사마상여의 목마름이 풀리는 듯합니다. 다만 그것을 한 말쯤 얻어서 세도가를 찾아가 변방 고을의 벼슬자리 하나를 청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용어) 사마상여는 한나라 때의 이름난 문장가로, 소갈증(요즘으로 치면 심한 갈증을 동반하는 병)을 앓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옛날 중국에서 어떤 사람이 진귀한 포도주를 뇌물로 바치고 변방 고을살이 자리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허균은 이를 빌려 농담 삼아 한 말이다.
윤오정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4월 (서기 1611년 5월 26일, 양력 추정)
초췌한 몰골로 시골에 묻혀 시를 읊조리며 그대의 훌륭한 시를 음미하다 보니, 북쪽을 향해 그리운 마음만 하염없이 펼쳐집니다. 저는 요즘 입을 다물고 지내다 보니 시상마저 막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변변찮은 시로나마 화답하지 못하니 부끄러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홍중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그대는 시 짓기에 오십 년을 힘쓴 끝에 마침내 진사시에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경솔하게도 그대 혼자 기뻐하며
'하루 만에 장안의 꽃을 다 보았노라'
라고 읊었다지요. 부디 신중하게 처신하여 이런 일로 우쭐대지 마십시오. 선비 된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결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홍중인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12월 (서기 1611년 1월 28일, 양력 추정)
보내주신 편지를 옥중에서 받고 보니 그대 볼 낯이 없습니다. 진작 그대의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오늘 같은 일을 당했겠습니까. 옛날 마원 장군이 아우 소유의 말을 떠올렸던 것도 그것이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의 은혜가 두터우니 결코 저를 죽을 곳으로 내몰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영동 지방으로 귀양 가고 싶지만, 그곳이 제 고향이라서 안 된다고들 합니다. 우리에 갇힌 원숭이나 새장에 갇힌 새나 그 운명은 남의 손에 달렸으니, 풀어 주는 것도 운명이요 다그치는 것도 운명인데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용어) 마원은 후한 때의 장수로, 신식후라는 봉호를 받았다. 그의 아우 소유는 일찍이 형에게 "선비로 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저 먹고 입는 것이 모자라지 않고, 작은 수레와 느린 말을 타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착한 선비라는 말을 들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훗날 마원이 먼 남쪽 땅으로 정벌을 나가 고생하던 중 아우의 그 말을 문득 떠올렸다는 옛이야기이다. 허균은 이 고사를 빌려, 진작 홍중인의 충고를 들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뜻을 전하고 있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정유년, 1597년) 8월 (서기 1597년 9월 25일, 양력 추정)
강을 건너던 날, 한 미녀가 동쪽 언덕을 서성이고 있었네. 그런데 배는 어느새 강 한복판에 이르러, 돌아보니 마치 은하수 너머 직녀를 바라보는 듯 아득하기만 했네. 진강 나루에 이르러서는 마중 나왔던 벼슬아치도 인사를 하고 돌아갔지. 십 리쯤 가다가 다시 돌아보니 그 벼슬아치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하물며 그 미녀가 보이겠으며 그대인들 보였겠는가.
장자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대를 배웅하던 사람이 언덕에서 돌아가 버리니, 그대는 이제 그만큼 멀어져 버렸구나.'
나도 지금 꼭 그 말을 하고 싶다네.
(용어) 이여인은 이재영을 가리킨다. '여인'은 이재영의 자, 즉 흔히 부르던 또 다른 이름이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병오년, 1606년) 2월 (서기 1606년 3월 23일, 양력 추정)
어젯밤 소랑이라는 여인을 불러 왔는데, 박엽이 하도 조르는 바람에 마지못해 만나 보았네. 찬찬히 뜯어보다가 문득 서러움이 북받쳐 고개를 돌려 벽을 향했는데, 촛불 그림자 속에 비친 헝클어진 머리와 지워진 화장, 구겨진 옷차림, 부드러운 얼굴이 곱게 단장하고 고운 옷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웠네. 그제야 서시가 얼굴을 찡그리자 못생긴 모모가 그 흉내를 냈다는 이야기를 비로소 믿게 되었다네.
잠자리에 들어서는 우는 듯 하소연하는 듯하더니, 십 년 전 옛일을 이야기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사뭇 다정하게 이야기하면서도 한마디도 틀리는 법이 없어 또 한 번 넋을 잃었다네. 그대는 한번 정겨운 사연의 글을 지어 이 일을 기록해 주게.
(용어) 서시는 중국 월나라의 이름난 미인이고, 모모는 그와 반대로 못생긴 여인을 가리키던 이름이다. 서시가 속병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자 그 모습마저 아름답다고 여긴 못생긴 여인 모모가 덩달아 얼굴을 찡그렸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표현으로, 못난 사람이 함부로 남을 흉내 낸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병오년, 1606년) 5월 (서기 1606년 6월 19일, 양력 추정)
연주에서 온 나그네가 대정강에 이르러 배 위에서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말도 못 하고 눈물만 그렁그렁하기에, 나는 차마 마주 보지 못했네. 배가 떠나려 하자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헤어지는데, 그 순간 강산이 온통 빛을 잃은 듯했으니, 만약 자네가 곁에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병오년, 1606년) 5월 (서기 1606년 6월 23일, 양력 추정)
18일에 대동강을 건너려 하자 박엽이 굳이 붙들었네. 다시 붙잡힐까 겁이 나서 몰래 강가의 작은 거룻배를 찾아가 강을 건넜는데, 그날 밤에는 이별한 마음이 사무쳐 잠을 이루지 못했네. 뱃전을 베고 누워 있자니 꿈속에서 배가 움직이기에 채염이 배를 미는 것이라 착각했다네. 놀라 깨어 보니 돛이 바람을 받아 배가 나아가고 있더군.
정오 무렵 생양 땅에 이르니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려 섬돌 옆 약초를 적셨는데, 주룩주룩 떨어지는 그 빗물이 마치 상강가에서 아황이 흘리던 눈물 자국과도 같았으니, 이런 때에 마음이 괴롭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심이 아닌 꾸며낸 말일 것이네.
(용어) 채염은 후한 때 학자 채옹의 딸로, 전란 중에 북방으로 끌려가 오랑캐 땅에서 살다가 훗날 고향으로 돌아온 기구한 사연으로 유명한 여인이다. 아황은 순임금의 아내로, 순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상강가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진다. 허균은 이 두 여인의 이야기를 빌려 이별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월 (서기 1608년 3월 1일, 양력 추정)
나는 큰 고을의 수령이 되었는데, 마침 자네가 사는 곳과 가까우니 어머니를 모시고 이리로 오게. 내가 마땅히 내 녹봉의 절반을 나누어 대접할 터이니, 결코 양식이 떨어지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네.
자네와 나는 처지는 다르지만 취향은 같고, 자네의 재주는 나보다 열 배나 뛰어난데도 세상에서 버림받기는 나보다 훨씬 심하니, 이 점이 나는 늘 기가 막힐 따름이네. 나는 비록 운이 기박해도 몇 차례나마 고을 수령을 지내며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지만, 자네는 입에 풀칠하기조차 힘들지 않은가. 세상에 불우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우리 같은 이들의 책임일세. 밥상을 마주할 때마다 몹시 부끄러워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으니, 어서 오시게. 자네만 온다면 이 일로 비방을 듣는다 해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겠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4월) (서기 1608년 5월 28일, 양력 추정)
자네 애첩은 몹시 깜찍하고 지혜로우니, 젊음이 잠깐이라는 것쯤은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네. 그런데 그 사람이 비구니가 되어 끝까지 절개를 지킬 수 있겠는가? 속담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했으니, 한번 힘써 보게나.
그가 비록 화려한 휘장과 맛 좋은 고아주 맛에 익숙해 있다지만, 눈 녹은 물로 끓인 차도 나름대로 특별한 운치가 있는 법이네. 혹시 그가 나를 찾아온다면 틀림없이 "하마터면 인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다"고 말할 걸세. 자네가 그에게 "날아가는 자 위에 올라타는 자가 있다"고 말해 준다면, 반드시 그 말에 마음이 움직일 걸세.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7월) (서기 1608년 8월 24일, 양력 추정)
처마에서 빗물이 쓸쓸히 떨어지고 향로에서는 향내가 은은히 풍기는데, 지금 벗 두어 사람과 함께 소매를 걷고 맨발로 방석에 기대어 하얀 연꽃 곁에서 참외를 쪼개 먹으며 번뇌를 씻어 볼까 하네. 이런 자리에 우리 여인이 빠져서야 되겠는가.
자네의 늙은 아내가 틀림없이 으르렁대며 자네 얼굴을 고양이 상판처럼 만들어 놓을 테지만, 늙었다고 겁먹고 움츠러들지 말게. 문 앞에서 기다리는 종이 종이우산을 들고 있으니 가랑비쯤은 넉넉히 피할 수 있을 걸세. 어서 오시게. 모이고 흩어지는 일이 늘 있는 것은 아니니, 이런 모임인들 어찌 자주 있겠는가. 흩어진 뒤에는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2월) (서기 1609년 1월 20일, 양력 추정)
이번 부임은 사람들의 비방을 잠재우려는 것일 뿐, 오래 있을 생각은 없네. 그런데 승문원 판교에 임명된 것은 승진할 기회이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친구들도 나를 말리며 "벼슬살이는 붉은 옷을 입는 정도면 충분하다"(당상관이 되었다는 뜻이다)고 했는데, 나 역시 그 말대로 그대로 있기로 했네. 다만 우스운 것은 원숭이가 자루 속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꼴이라는 것이네.
계륵이 대체 무엇이기에 감히 사람을 이렇게까지 뒤흔든단 말인가. 이런 때는 도연명이 마치 하늘 위 신선처럼 우러러 보이네.
(용어) 계륵은 닭갈비를 뜻하는 말로, 먹을 것은 별로 없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하찮지만 버리기 아까운 벼슬자리를 빗댄 표현이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월) (서기 1609년 2월 19일, 양력 추정)
내가 이번에 또 사신 행차를 따라가게 되어, 십 년 사이에 세 번이나 그 밑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어찌 지겹지 않겠는가. 사신 대감이 꼭 자네를 데려가고 싶어 하시네. 자네가 나오고 싶지 않다면 그만이지만, 세상에 뜻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부디 나와 주게. 우리 두 사람이 함께 기록을 맡아 가는 것도 즐거운 일이고, 서쪽으로 천 리 길을 가며 예전에 노닐던 곳을 다시 밟는 것도 유쾌한 일이네. 비록 임금이 돌아가신 때라 풍류와 여색을 즐기지는 못하더라도, 여관의 푸른 등불 아래 마주 앉아 향을 피우고 옛일과 오늘 일을 이야기하며 시를 지으면서 봄 석 달을 보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네.
우리 두 사람 다 이제 늙어 가는 처지라 함께 모일 날이 많지 않고, 남은 날도 얼마 되지 않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자네도 틀림없이 갓을 털고 일어설 걸세. 간절히 기다리겠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3월) (서기 1609년 4월 18일, 양력 추정)
신흠(호는 현옹)이 내 '채호영'이라는 시를 구해 보고는 몹시 칭찬하며,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도 따라오지 못한다고 했다더군. 이건 지나친 칭찬일세. 자네는 평소에 말이 많으니 부디 조심해서 함부로 주석 같은 것은 달지 말게. 한나라의 모형과 정현이 시경의 위풍과 정풍에 주석을 달았다가 본래 뜻에서 크게 벗어나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말깨나 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데, 자네도 그런 잘못을 본받으려는 것인가.
훗날 늙어서 절간에서 차 달이는 연기가 봄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보게 될 때, 남이 귀찮게 재촉하기를 기다릴 것 없이 스스로 재미있고 달콤한 이야기를 지어, 마치 노공의 북리지에 화답하듯 한다면, 이 세상에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책이 보태지는 셈이 될 것이네.
(용어) 노공의 북리지는 당나라의 손계가 지은 책으로, 그 시대 황제와 사대부, 평민들이 기생과 어울려 놀던 일을 적은 것이다. 노공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손계인 듯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3월) (서기 1609년 4월 18일, 양력 추정)
어젯밤 달빛이 대낮처럼 밝기에 문 밖으로 산보를 나갔더니, 안개 낀 버드나무가 무성히 우거지고 흩날리는 꽃잎이 옷깃에 스쳐, 그윽한 봄기운이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더군.
늙은 중이 아니고서야 어찌 외로이 홀로 앉아 그냥 지낼 수 있겠는가. 자네 집을 내려다보니 고요하여 사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더군. 향기 그윽한 방 안 원앙 이불 속에서 달콤한 꿈을 꾸고 있으리라 상상하니, 그 즐거움 또한 더할 나위 없었겠네.
나는 붉은 종이 두 장을 자네의 한리 자리와 바꾸고 싶네. 한리 자리 정도면 내 소원으로는 충분하다고 보네. 누가 자네더러 운수가 기구하다 하겠는가. 자네가 이 말을 들으면 우스워서 배를 움켜쥐고 웃을 걸세.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5월) (서기 1610년 6월 21일, 양력 추정)
병 때문에 연경(중국 베이징)으로 가는 사신 행차에 오르지 못한 죄로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네. 살아 있어야 벼슬도 있는 법이지. 이제부터는 호남 땅의 벼슬 없는 선비 한 사람일 뿐이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내가 이곳으로 옮겨 오고서 자네를 자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뻐하였는데, 몇 달이 지나도록 만나지 못했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서글퍼지는데, 자네가 찾아와 이 서글픈 마음을 풀어 줄 날은 더디기만 하니, 하루가 천 년처럼 지루하네.
물줄기 하나만 건너면 닿을 거리이니, 서둘러 얼른 오도록 하게.
양자점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돌아가신 자네 아버님은 문장이 매우 뛰어나 참으로 큰 문장가였네. 나는 글재주가 부족한데 어떻게 그분의 이름을 더 빛나게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바쁘게 짓느라 하고 싶은 말을 다 담지도 못했으니, 부처님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버리든 취하든, 그것은 오직 자네에게 달려 있네.
(용어) 양자점은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양경우를 가리킨다. 자점은 그의 자다.
양자점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들으니 그대는 먹을 것조차 넉넉지 못하다던데, 목화솜은 대체 어디서 났는가. 거절하자니 공손치 못한 것 같고, 받자니 차마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그대의 후한 뜻이 고마워 그것으로 속옷을 지어 입었네. 앉으나 누우나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겠네.
가을 산의 단풍과 국화 사이에서 두건을 비스듬히 쓰고 길게 시를 읊조리기에 딱 좋은 계절이니, 방장산(지리산을 달리 부르는 이름)의 바람과 안개가 모두 그대의 시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리라 생각되네. 간절히 그리는 마음, 이루 다 말할 수 없네.
이사상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0월) (서기 1609년 11월 11일, 양력 추정)
그대가 지은 윤씨의 비문 시는 참으로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명작이지만, 나에게 끼친 해가 매우 크네. 그대가 직접 지었다고 말한들 '여장'이라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걸세. 앞으로 어떻게 해명할 셈인가? 나는 이 일 때문에 무려 세 번이나 조정 관리들의 탄핵 논의에 올라야 했는데, 여러 사람의 변호 덕분에 겨우 빠져나왔네. 이번 일로 그 시가 나를 비방받게 한 것이 적지 않으니, 앞으로는 부디 조심하여 이런 일을 벌이지 말게나.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어무적(자는 어잠부)이 '매화나무를 베다'라는 시를 읊었던 일 말일세. 아,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네.
(용어) 이사상은 이원형의 자다. 이문학관이라는 벼슬을 지냈다.
모씨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2월) (서기 1607년 3월 12일, 양력 추정)
서쪽에서 온 사람이 전하기를, 나옹(화가 이정의 호)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통곡하며 피눈물을 흘리노니, 하늘이여 원통하도다. 나는 이제 누구와 함께 세상 바깥에서 노닐 것인가.
세상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소중히 여기지만, 나는 그의 사람됨을 소중히 여긴다네. (※ 원문에 두 글자가 빠져 있다) 알아줄는지 모르겠네. 풍류가 하루아침에 다한 듯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용어) 이 편지를 받은 사람의 이름은 원문에도 밝혀져 있지 않아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나옹은 조선 중기의 화가 이정의 호다.
모씨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8월) (서기 1607년 10월 5일, 양력 추정)
어젯밤 꿈에 나옹을 만났는데, 그가 죽음이 참으로 즐겁다고 말하더군. 이거야말로 삶을 훤히 꿰뚫어 본 사람의 말일세. 꿈에서 깨어 생각해 보니, 이 몸조차 본디 내 것이 아닌데 덧없는 인생살이의 온갖 일을 뭐하러 마음에 담아 두겠는가.
결국에는 벼슬을 던져 버리고 바다 위 갈매기와 벗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네. 이 마음은 맑은 물을 두고 맹세하듯 변함이 없네.
이나옹에게 보낸 편지 (을사년, 1605년 7월) (서기 1605년 8월 28일, 양력 추정)
석봉과 작별한 지 겨우 몇십 일밖에 안 되었는데, 느닷없이 부고를 들으니 가슴이 미어지고 살을 꼬집어도 놀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세상 사람들이 자네의 그림을 굳이 배대유(자는 자장)라는 이의 그림과 우열을 다투는 맞수로 여기고 있다는 점일세. 자네도 필시 이를 욕되다 여길 텐데, 정말 어떠한가?
(용어) 이나옹은 선조 시대의 화가 이정을 가리킨다. 삼대에 걸쳐 화가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열 살에 이미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다. 나옹은 그의 호이고, 자는 공간이다.
이나옹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월) (서기 1607년 2월 11일, 양력 추정)
큰 비단 한 필과 갖가지 무늬의 노랗고 푸른 비단을 우리 집 종아이 편에 함께 부쳐, 서경(평양을 달리 이르는 말)에 있는 자네에게 보냈네. 산을 뒤로 하고 시냇물을 마주한 집을 그려 주되, 다음과 같이 배치해 주게.
온갖 꽃과 곧게 뻗은 대나무를 천여 그루 심고, 가운데는 남쪽으로 향한 마루를 틔워 그 앞 토방을 넓게 하고, 거기에 패랭이꽃과 금선초를 심고, 괴석과 오래된 화분을 늘어놓아 주게. 동쪽 안방은 휘장을 걷어 두고 책 천 권을 진열하며, 구리 병에는 공작 꼬리깃을 꽂고, 산 모양으로 빚은 술동이는 비자나무 탁자 위에 놓아 주게. 서쪽 창문을 열어 두면, 사랑하는 첩이 나물국을 끓이고 손수 동동주를 걸러 화로에 데우는 동안, 나는 방 한가운데 방석에 몸을 기대고 누워 책을 읽고 있고, 자네는 (※ 원문에 두 글자가 빠져 있다)와 함께 곁에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즐기는 모습을 그려 주게. 다들 두건을 쓰고 비단신을 신되 도복에는 띠를 두르지 않은 차림이고, 한 줄기 향 연기는 발 너머로 피어오르며, 학 두 마리는 돌이끼를 쪼고, 산에서 자란 아이 종은 빗자루를 들고 와 꽃잎을 쓸고 있는 모습이면 좋겠네. 이렇게만 된다면 사람으로 태어나 할 일은 다 한 셈이라고 생각하네.
그림이 다 되거든, 마침 돌아오는 태징공(이수준의 자가 태징이다) 편에 부쳐 주시길 간절히 바라네.
서산노사에게 보낸 편지 (임인년, 1602년 2월) (서기 1602년 3월 8일, 양력 추정)
노스님께서 금강산으로 떠나셨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묘향산에 계셨습니까? 저는 벼슬살이에 매여 바쁜 탓에 신선이 산다는 산을 눈앞에 두고도 오르지 못하니, 이 고단한 삶이 언제나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는 노스님을 벗처럼 여기셨으니, 저 역시 대대로 이어 온 정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저희 부형의 친필 글씨가 모두 그곳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랏일이 마무리되면 반드시 절을 찾아 뵙겠으니, 노스님께서는 문을 열어 두고 기다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용어) 서산노사는 선조 때의 이름난 승려이자 승병장이던 휴정대사를 가리킨다. 속세의 성은 최씨이고, 서산은 그의 호이다.
서산노사에게 보낸 편지 (임인년, 1602년 3월) (서기 1602년 5월 6일, 양력 추정)
저는 번뇌의 씨앗에서 태어난 몸이라,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이 육신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제 몸속에서는 눈·귀·코·혀·몸·마음이라는 여섯 감각의 구멍이 서로 부딪치며 끝없이 다투니, 어떻게 다툼 없는 고요한 경지로 이를 다스리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남이나 저나 세상 만물은 모두 텅 빈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중생의 몸은 아득히 텅 빈 하늘과 같으니, 번뇌인들 어디에 발붙일 곳이 있겠는가." 라고 했는데, 이 말이야말로 제 처지를 그대로 말해 주는 듯합니다. 노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디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용어) 육착은 눈·귀·코·혀·몸·마음, 이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통해 온갖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이르는 불교 용어다. 무쟁삼매는 다툼 없는 이치에 온전히 머물러 다른 것과 다투지 않으며, 흐트러진 마음을 한곳에 모아 헛된 생각에서 벗어난 고요한 경지를 뜻한다.
서산노사에게 보낸 편지 (임인년, 1602년 4월) (서기 1602년 6월 4일, 양력 추정)
큰 깨우침을 내려주시고 또 어록까지 보내주셔서 며칠을 두고 읽었더니, 속세의 잡념이 말끔히 사라져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꽃을 들어 보이자 미소로 화답했다는 그 유명한 이심전심의 경지가 과연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이제야 알 듯합니다. 이제는 노스님 문 앞에 세워 둔 깃대를 제가 넘어뜨려야 할 성싶습니다.
(용어) 염화미소는 석가모니가 연꽃을 들어 보이자 다른 제자들은 그 뜻을 알지 못했으나 가섭만이 미소지었고, 이에 석가모니가 그에게 불법의 진리를 전했다는 옛이야기로, 말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으로 뜻이 통하는 것을 이른다. 찰간은 절 앞에 세우는 깃대인데, 예로부터 선승들 사이에서는 법력을 다투는 상대의 깃대를 쓰러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가렸다고 하며, 여기서는 노스님을 상대로 한바탕 겨뤄 볼 만하다는 자신감 넘치는 농담이다.
서산노사에게 보낸 편지 (임인년, 1602년 5월) (서기 1602년 7월 4일, 양력 추정)
도의 핵심을 가르쳐 주셨지만, 솔직히 말씀만 헛되이 쓰신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저 있는 것은 죄다 텅 비우고, 없는 것은 굳이 채우려 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타고난 성품대로 유유히 노닐고 인연 따라 거리낌 없이 지내다가 속된 마음마저 사라진다면, 성인의 경지가 뭐 그리 멀겠습니까.
다만 걱정되는 것은, 형체도 자취도 없는 그 마음이 대체 어떤 계기로 우러나오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오나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마땅히 노스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 노스님께서는 너무 심하게 다그치지 말아 주십시오.
송운대사에게 보낸 편지 (갑진년, 1604년 2월) (서기 1604년 3월 15일, 양력 추정)
대사께서는 아직 선의 오묘한 이치에 통달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아 움직이지 않게 하는 일이 반드시 온갖 인연을 말끔히 끊어 낸 뒤에야 되는 것이겠습니까? 조정에서든 저잣거리에서든 마을 골목에서든,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제가 듣기로 한 생각이 밝으면 그 한 생각이 곧 깨달음이고, 한 생각이 편안하면 그 한 생각이 곧 열반이라 하였습니다. 저는 다만 이 마음이 오래도록 고요히 가라앉아 맑아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용어) 송운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승려로, 법명은 유정이고 속세의 성은 임씨다. 승병을 총괄하는 자리에서 활약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일본에 건너가 강화를 맺고 돌아왔다. 사명대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송운대사에게 보낸 편지 (병오년, 1606년 1월) (서기 1606년 2월 21일, 양력 추정)
능가경 네 권은 바로 첫 조사인 달마 선사가 마음으로 전한 가르침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도 유독 구절을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조차 알기 어렵고, 나와 있는 주석도 깊이 있는 풀이가 없습니다. 토도 없는 원문만으로 그 뜻을 어찌 깨칠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만 번을 읽으면 저절로 통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에 이 경전의 판본이 없어서, 뒤에 공부하는 이들에게 그 혜택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제가 가지고 있던 중국본을 꺼내어 보내 드리니, 주지 스님으로 하여금 자금을 모아 간행하게 하십시오. 이 또한 좋은 인연이 될 것입니다.
해안 경석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0월) (서기 1608년 11월 22일, 양력 추정)
너는 무엇에도 집착하지 말되, 그렇다고 아무 감각 없는 완고한 텅 빔에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만약 자기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스승들이 은밀히 전한 가르침조차 다 남의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만약 본성을 본다면 마귀나 여우의 허튼소리조차 모두 오묘한 진리가 된다. 집착하는 순간 나와 남의 구별이 생기고 만다. 부디 조심하여라.
작은 선행 하나라도 게으르고 나태한 데서는 결코 나오지 않는 법이니, 힘써 정진하여라.
(용어) 해안 경석은 조선의 승려로, 호는 중관이고 속세의 성은 오씨이며 경석은 그의 승명이다. 휴정대사(서산노사)의 문하에서 배워 깨달음의 요체를 얻었고, 임제종의 정통 법맥을 이어받았다고 전해진다.
계랑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월) (서기 1609년 2월 20일, 양력 추정)
그대가 보름날 저녁에 비파를 뜯으며 '산자고'라는 노래를 읊었다고 들었소. 어째서 조용하고 으슥한 곳에서 하지 않고, 하필 윤씨 선정비 앞에서 그리하여 남의 흠을 잡기 좋아하는 자들 눈에 띄고, 떠난 사또를 기리는 비석을 시로 더럽히게 만들었소? 그것은 그대의 잘못인데 비방은 애꿎게 나에게 돌아오니 억울하기 짝이 없구려.
요즘도 참선은 하고 있소? 그리운 마음이 사무치오.
(용어) 계랑은 전라도 부안 지방의 기생으로, 시와 글에 능하고 노래와 거문고 솜씨도 빼어났다고 전해진다.
계랑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봉래산에는 가을빛이 한창 무르익었을 테니, 돌아가고 싶은 흥이 도도하게 이는구려. 그대는 필경 이 성성옹(허균 자신을 가리키는 별호)이 시골로 돌아가겠다던 약속을 어겼다고 비웃을 것이오. 그때 만약 한순간이라도 마음이 잘못 흔들렸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십 년이나 이토록 다정할 수 있었겠소.
이제야 알겠소. 풍류를 안다던 진회해(송나라 시인 진관)조차 참된 사내는 아니었으며, 헛된 생각을 끊어 버리는 것이야말로 몸과 마음에 이로운 일이라는 것을. 언제나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을는지, 종이를 마주하니 마음이 서글퍼지오.
성소부부고 제22권
10. 14:40
성소부부고 제22권 · 설부 1 · 성옹지소록 (인 및 상)
출처: 성소부부고 제22권, 설부 1, 성옹지소록 인(서문) 및 상권
배경: 1610년, 허균은 죄를 얻어 의금부 옥에 마흔두 날 갇혀 있다가 함경도 홍원(함산)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잠 못 이루는 옥중의 밤마다 평소 듣고 겪은 조정의 이야기와 기이한 일들을 두서없이 적어 두었는데, 귀양지에 도착한 뒤 이를 정리하여 엮은 것이 이 "성옹지소록"이다. 남의 흠을 들추는 내용과 인과응보·귀신·꿈·점술·음란한 이야기는 모두 지우고 194편만 남겼다고 밝히고 있다. 상권은 명나라와 조선의 외교 의전, 조정 관청들의 연혁과 권한 변화, 과거 시험과 벼슬살이에 얽힌 온갖 일화, 그리고 허균 자신의 두 형과 집안에 얽힌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어, 조선 관료 사회의 실제 돌아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이다.
성옹지소록을 쓰게 된 사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경술년(1610년), 나는 죄를 지어 순군옥(의금부의 옥)에 갇힌 지 마흔두 날 만에 함산(함경도 홍원)으로 귀양지가 정해졌다. 옥에 있는 동안 여러 날 사람도 만날 수 없는 데다 밤 또한 길어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등불을 켜고 화로에 불을 피운 채 이불을 두르고 홀로 앉아 있노라니, 문득 평소에 들었던, 조선 역대 임금 때부터 내려온 어진 사대부들의 행적이나 사건 가운데 후일 전례와 고사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들, 그리고 보고 들은 여러 기이한 일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에 종이를 가져다 붓을 녹여 가며 생각나는 대로 적어 상자 속에 넣어 두었다. 그러나 이는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글을 다시 다듬지는 않았다.
귀양지인 함산에 도착한 뒤로는 한가하여 하는 일이 없었다. 하루는 상자를 열어 보니 예전에 적어 둔 것이 있었다. 다 읽어 보니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생각이 들어, 순서만 조금 정리하여 그대로 옮겨 적었다. 그 내용이 대개 자잘한 일들을 적은 것이므로 "성옹지소록", 즉 "성옹(허균)이 자잘한 것들을 적은 기록"이라 이름 붙였다.
정리하는 사이에 남의 단점을 드러내는 내용은 지워 버렸고, 인과응보를 말한 것과 귀신 이야기, 꿈과 점술에 관한 것, 남녀 간의 음란한 내용들도 모두 지우고 나니, 남은 것이 백아흔네 개의 이야기였다. 웃고 이야기하는 자리에 보탬이 되고 정사에 빠진 것을 보충하는 데는 조금이나마 취할 것이 있으리라.
명나라 만력 39년(1611년) 신해년 4월 19일, 교산(허균의 호)은 쓴다.
명나라가 우리나라를 특별히 대우한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명나라가 우리나라를 대우하는 것은 다른 외국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임금이 세상을 떠나거나 즉위할 때 알리는 조서를 내리고, 조문하며 제사 지낼 때 예물을 내려 주고 사신을 보내 위문하는 것이, 마치 명나라 안의 제후국이나 황실의 친왕에게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대개 성종 문황제(명나라 영락제)가 우리 공정대왕(태종의 시호)과 매우 친밀하여, 그를 특별히 대우하고 격려한 것이 다른 왕들에게 하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에 우리도 지극한 정성으로 공경하고 예를 다하였다. 이 때문에 그 뒤로도 대대로 이 관계가 변치 않아 백 년이 지나도록 계속 은총을 받았고, 임진왜란 때에는 명나라가 온 힘을 다해 우리를 구제해 주어 마침내 우리 국토를 되찾고 나라를 다시 일으키게 하였으니, 아,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명나라 사신을 보내는 절차와 환관 사신의 폐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명나라 황제가 즉위하거나 맏아들이 태어나거나 태자를 책봉할 때마다, 그때그때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서를 내렸다. 사신은 한림원이나 감찰·간쟁을 맡은 관원 중에서 보냈고, 자잘한 일이 있으면 육부의 실무 관원을 보냈으며, 조문하고 제사 지낼 때도 이런 실무 관원을 보냈다.
우리나라 임금을 책봉하거나 세자를 책봉할 때는 환관을 사신으로 보냈는데, 환관을 시켜 조서를 보내는 것은 큰 은전이었다.
중국에서는 황실의 친왕이나 제후를 책봉할 때도 환관을 보내지 않는데 우리나라에만 보냈으니 그 영예로움이 이보다 더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중국에 들어가 환관이 된 자가 처음에 사신으로 오기를 황제에게 청하여 파견된 데서 비롯되었는데, 이것이 그대로 관례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이것이 말할 수 없이 큰 폐단이 되고 있다.
황장손 탄생을 알린 특별한 조서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중국 영락 연간(명나라 성조 때)에 황제의 맏손자가 태어났을 때는 조서를 보내 알리지 않았는데, 지금 황제는 을사년에 맏손자가 태어나자 특별히 한림원 수찬 주지번과 형과 도급사 양유년을 보내 조서를 반포하였으니, 이 또한 남다른 예우였다.
조선 임금들이 중국에서 받은 시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가 역대 임금 때부터 중국에서 받은 시호는 모두 아름다웠다. 그중 강헌(태조의 시호)과 강정(성종의 시호)이 가장 훌륭한 시호이고, 장헌(세종의 시호)과 소경(선조의 시호)이 그다음이며, 공헌(명종의 시호)이 또 그다음이다. 다만 인종은 그 훌륭한 덕에도 불구하고 "영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시호를 정하는 법에 "총애와 녹봉이 빛나고 큰 것을 영이라 하고, 너그럽고 편안하게 천수를 다한 것을 정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처럼 평범한 시호는 인종의 높고 빛나는 업적과는 걸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이를 서운하게 여긴다.
시호를 정하는 절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는 처음에 시호 제도를 중하게 여겨서, 정2품 이상의 실제 벼슬을 지낸 사람과 공신으로 추증된 사람이 아니면, 아무리 선량한 행실과 큰 공로가 있어도 시호를 내리지 않았다.
시호를 의논할 때는 먼저 봉상시(제사와 시호를 맡은 관청)에서 해당자의 행적을 적은 글을 받아 어울릴 만한 여러 시호 후보를 적어 이조로 보내고, 이조에서는 홍문관에 모여 이를 정하여 임금의 재가를 받았으니 매우 신중하게 처리하였다.
시호를 받을 만한 사람이 죽으면 그 집안에서는 곧바로 행적을 적은 글을 갖추어 담당 관청으로 보낸다. 죽은 이가 평소 내세울 만한 공덕이나 행실이 없더라도 그 집안에서는 시호를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쁜 뜻을 담은 시호가 내려도 사양할 수 없었다. 근래에는 이러한 풍조가 없어졌다.
처음에는 시호를 논의할 만한 집안이 있어도 나쁜 시호를 받을까 두려워 청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는데, 끝내는 이름난 신하와 큰 공로가 있는 사람까지도 따라서 시호를 청하지 않게 되었다. 이리하여 임금이 만대에 걸쳐 시행해야 할 상벌의 도구를 시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개탄할 일이다.
선조 때 낮은 벼슬로도 시호를 받은 학자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왕(선조) 때에는 벼슬을 추증받고 시호를 받은 사람이 많았다. 그중 생전에 낮은 관직을 지냈으면서도 시호를 받은 이로는 김굉필(시호 문경)과 정여창(시호 문헌), 서경덕(시호 문강)이 있는데, 이는 실로 특별한 은전이었다. 정암(조광조의 호) 선생도 벼슬을 추증받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나의 둘째 형(허봉)이 경연에 참석했을 때 미암(유희춘의 호) 선생의 시호를 청했으나, 임금은 다만 좌찬성으로 벼슬을 추증하도록 하고 시호를 내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의정부의 권한이 약해진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 의정부의 권한은 문종 이전에는 매우 높고 무거웠다. 아침마다 삼정승(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출근하면 육조 이하 해당 관청에서 각기 맡은 업무를 가지고 와서 뵙고 아뢰었다.
승정원에서 임금의 재가를 받은 모든 공무는 어느 것이나 다 의정부로 보내어, 대신과 동벽·서벽(품계에 따라 나뉜 자리)의 관원들이 함께 모여 알맞게 처리함으로써 나라의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참여해 결정하였기 때문에, 재상의 권한은 높고 나라의 체통도 엄중하였다. 그 뒤 세조가 왕위를 이어받은 이래로 이런 절차를 없앴기 때문에 의정부의 권한은 줄어들었고, 나라의 기강도 차츰 해이해졌다.
의정부 관원들의 잔치 풍습과 그 폐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의정부에서 공무를 처결하던 시절에는, 좌사인·우사인과 검상(모두 의정부의 실무 관원)은 모두 이조의 낭관 중에서 뽑았고, 사록 두 명은 으레 홍문관의 낮은 관원으로서 예문관 벼슬을 겸임하고 있는 자를 임명하였으며, 새로 급제한 사람 한 명을 녹사로 삼았다. 이들이 각기 여섯 부서를 나누어 맡아 종일 응대하느라 몹시 바빠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기생과 음악을 베풀어 즐기게 하였는데, 의정부에서 공무를 처결하는 일이 없어진 뒤에도 이런 풍습은 그대로 남아, 대신은 대청에 모여 앉았는데 사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노랫소리와 풍악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였다.
심지어는 돈과 곡식을 관장하는 낭관을 불러다 벌주를 먹인 다음 그 술값을 받아 내거나, 저잣거리의 부자를 잡아들여 공공연히 비용을 뜯어내는 등의 방법으로 재물을 거두어 창고에 쌓아 두고 광대와 기생에게 주는 화대로 쓰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것이 선조 때에 장령(사헌부 관원) 유몽학이 경연에서 이 폐단을 강력히 아뢴 뒤로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사인을 대하는 정승들의 서로 다른 태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둘째 형이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인으로 오래 재직하다 보면 그동안 많은 정승을 겪어 보게 되는데, 그중 정승 권철은 성품이 매우 엄숙한 분이었지만 자신도 사인 벼슬을 거쳤기 때문에 사인들의 술잔치를 매우 기쁘게 여겼고, 노랫소리와 풍악 소리가 온 천지를 진동해도 모르는 척하였다. 반면에 정승 노수신은 매사에 지극히 너그러운 분이었지만, 사인들이 술자리를 벌일 때면 언제나 '노래와 풍악이 너무 소란스럽다'며 여러 차례 이를 금지시켰다. 이는 그분이 사인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검상이라는 벼슬 이름의 유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검상(의정부의 실무 관원)은 형조 상복사(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신중히 재심하던 부서)의 정랑을 관례상 겸임하였다. 그래서 예전에는 형조 낭관청 서편에 북루가 있었고,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곳을 검상청이라 부른다.
전례와 옛 기록을 관리하는 관청이 없는 아쉬움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는 전례와 고사를 전담하는 관청이 없다. 각 관청마다 마땅히 지난 기록을 모아 둔 등록이 있어야 할 텐데도 모두 없다. 역대 임금들의 길례와 흉례에 대해서도 모아 기록해 놓은 것이 없다. 그래서 한 시대의 제도와 그 변천을 살펴볼 길이 없다.
예전에는 의정부에 가각고라는 것이 있어 녹사가 맡아 관리하였다. 이곳에는 임금의 모든 지시와 대신들이 올린 의견, 군사와 나라의 중요한 문서들을 모두 보관해 두고 필요할 때 참고하도록 하였는데, 성종 이후로는 없어져서 더 이상 시행되지 않는다.
가각이라는 이름은 송나라 때의 관제에서 왔다. 송나라에서는 학문에 능한 신하를 뽑아 이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중서성과 추밀원 두 곳에 모두 두었다. 이는 대개 옛 전례와 고사 자료를 모으고 조사하기 위해 둔 제도였다. 우리나라도 초기에는 이를 본떠서 설치했던 듯하다.
사간원의 권한이 줄어든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사간원은 예전에 승정원에 딸려 있었다. 좌사간·우사간·좌사의·우사의를 두었는데, 이들은 당상관으로서 이름에 "대부"라는 두 글자를 붙여 불렀고, 이 밖에 헌납과 정언을 두 명씩 두었다. 이들이 각기 여섯 부서를 나누어 맡았고, 날마다 교대로 당직을 섰다.
무릇 여러 관청과 각 도로 내려지는 공문은 반드시 사간원을 거치게 되어 있었는데, 그중에 온당치 못한 것이 있으면 논박하여 되돌려 보냈다. 이는 중국의 육과(황제의 명을 살피고 되돌리는 여섯 부서)의 규정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간관과 사헌부를 따로 두어 서로 맞서는 두 관청으로 만든 다음, 사의대부는 없애고 대사간·사간·헌납·정언 두 명만을 두었다. 이때부터 임금의 명을 되돌려 보내던 일은 맡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여러 관청과 각 도에서 위에 청하여 이전의 지시를 고치는 것에 온당치 못한 점이 많아도, 사헌부와 사간원이 이를 규찰하여 바로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의금부의 유래와 그 권한 변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의금부는 옛날 중국의 집금오(궁궐과 도성을 지키던 벼슬)에 해당한다. 고려에서는 순군부라 하였는데, 상만호·부만호를 두어 궁궐을 지키는 친위군을 관장하였다.
처음에는 옥을 설치하여 친위군 가운데 군령을 어긴 자를 가두던 곳이었다. 중기에 와서는 국왕이 직접 죄수를 판결하였고, 조정의 신하로서 임금의 뜻을 거스른 자도 바로 이곳에 가두었다. 대개 당시 사대부는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죄를 지으면 모두 사헌부의 옥에서 다루었고, 임금이 직접 다루는 옥이나 특명으로 다스리는 옥은 따로 없었다. 말엽에 와서는 이곳이 벼슬아치만을 다루는 옥이 되어, 관직에 있는 자의 범죄는 모두 이곳에서 다루었다.
우리나라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따르다가 얼마 안 가서 곧 의용순금사로 이름을 고치고 판사·지사·동지사 네 명을 두었다. 낭관은 문관과 무관을 섞어 임용하였으며, 궁궐을 지키는 친위군을 거느리는 것은 고려 때와 같았다.
그 뒤 의금부로 이름을 고치면서 군사를 거느리는 권한은 없어지고 임금이 직접 관여하는 옥으로서 죄수를 판결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삼았으며, 임금의 행차가 있을 때와 안팎의 출입 금지 구역에 낭관이 하인들을 거느리고 가서 비상시에 대비하여 경계할 뿐이니, 이 또한 처음 관직을 설치한 본래의 뜻을 잃은 것이다.
부원군이라는 칭호의 유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지금은 공신으로서 정1품에 오른 사람을 으레 부원군이라 부르는데, 이 또한 본래의 뜻을 잃은 것이다.
고려에서는 대신을 으레 군에 봉하였고, 추밀원을 거쳐 문하부의 관직을 지낸 자는 두 관부의 벼슬을 두루 거쳤다 하여 그 관함을 부원군이라 하였다.
이 말은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으니, 성균관의 하례가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축하할 때 낮은 관직에서부터 삼정승 자리까지 좋은 관직을 죽 부르다가 끝에 가서 "부원군"이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영돈녕부사 두 명을 둔 일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1품이라 해서 정승이 아닌데도 부원군이라 부르는 것도 잘못된 일이다. 영돈녕부사는 《경국대전》에 한 사람만 두도록 되어 있는데, 지금은 특별히 두 사람을 두고 있으니 이는 지금 임금의 뜻이다.
무신년(1608년) 2월에 성영이 정권을 잡자, 연흥부원군 김제남을 영돈녕부사에서 물러나게 하고 문양부원군 유자신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기를 청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성영이 아첨한다고 하였으나, 조선 초기에도 이런 전례가 있었다고 한다.
동인과 서인이 갈라진 발단, 이조 낭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관직은 이조의 낭청이다. 직제학 이하 청요직(명망 있는 요직)에 사람을 올리고 내리는 일은 모두 낭청이 전담하고, 당상관은 이들의 의견을 그대로 따를 뿐이다. 그래서 이조 낭청으로 뽑히기가 매우 어려우며, 사화의 대부분이 바로 이 자리를 둘러싼 다툼에서 비롯되었다.
근래에 동인과 서인이 갈라진 것도, 나의 장인인 김인백(자가 인백, 본명 김효원)이 판서 심충겸이 전랑(이조의 인사 담당 낭관) 자리에 뽑히는 길을 막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서, 선비들의 논의가 지금까지도 갈라져 있다.
김응남이 당쟁을 돌아보며 한 말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승 김응남이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임금의 외척을 전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처음의 논의는 참으로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심충겸이 나랏일에 애쓰는 것을 보니 참으로 충신이다. 그때 선비들의 논의를 지나치게 따랐던 탓에 결국 붕당으로 갈라지고 말았으니, 이 점이 후회스럽다."
계미년(1583년)에 선왕(선조)께서 명하여 이조 낭관이 인사를 추천하는 관행을 폐지하였는데, 병조는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이조 낭관의 빠른 승진과 외직을 꺼리던 풍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옛 규례에 따르면 이조의 낭관은 좌랑(정6품)으로 서른 달을 재직하면 정랑(정5품)이 되고, 정랑에서 다시 서른 달을 재직하면 곧바로 의정부 사인(정4품)으로 승진하였으며, 한 달을 넘기기 전에 당하관 정3품에 올랐다. 여기서 다시 두어 해도 안 되어 당상관이 되었다. 미움을 받거나 선비들의 비판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난 경우에도, 차례를 건너뛰어 승진시키는 일에 급급해서 일 년 안에 반드시 다음 자리로 옮겨 갔다.
찰방(종6품)·판관(종5품)·도사(종5품) 같은 지방 관직은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고 싫어하여 피하고 가지 않으려던 자리였는데, 근래에는 이런 풍조가 사라졌다. 송인수와 김숙도는 모두 찰방으로 나갔고, 오여익은 늙은 아버지를 집에 두고 경성 판관으로 나갔는가 하면, 송홍보는 4품 벼슬을 지냈는데도 전라도사로 나갔으니 매우 이상한 일이다. 이러한 일은 모두 벼슬을 신중히 내리지 않아 요행으로 자리를 얻는 자가 많아진 데서 비롯된 것으로, 결국 사람들이 벼슬살이를 가볍게 여기게 되어 그리된 것이다.
병조의 권한이 비변사로 넘어간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시하는 곳은 병조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 병조 판서가 된 사람은 대부분 변방의 사정을 아는 사람을 뽑아 오래도록 맡겼다. 김종서 같은 이는 십 년 동안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이계동과 유담년은 무신이었으나 역시 십수 년 동안 나라의 군무를 도맡아, 작은 일은 모두 스스로 결단하고 큰일만 대신에게 아뢰었으며, 대신도 그의 조치를 따르고 조금만 손질할 뿐이었다.
비변사가 설치되면서부터는 크고 작은 군사 업무의 처리를 모두 비변사에서 맡게 되었는데, 실무를 맡은 당상관 몇 사람이 전적으로 관장하고 정승의 지시를 받아 시행하였으므로 병조는 멍하니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근래에는 지방의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까지도 비변사에서 뽑게 되어 병조의 권한이 더욱 줄어들었다.
대동법의 뿌리, 공물 제도의 폐단과 개혁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 공물 제도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연산군 때 처음 만들어졌다는 사람도 있지만 틀린 말이다. 성현(호 용재)의 말에 "성종 때 비로소 예산 명세서(횡간)를 만들었다" 하였으니, 연산군 때 시작된 것이 아니다.
찬성 이이가 이 제도를 고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갑오년(1594년)에 서애 선생(유성룡)이 나랏일을 맡았을 때 비로소 줄여서 다시 정하였으나 백성들의 고통은 오히려 심하였다.
근래에 오리 정승(이원익)이 선혜청을 설치하고 먼저 경기 지방에 시행하였는데, 경기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긴다. 그래서 능묘를 조성하는 일과 두 차례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치렀는데도 백성들이 큰 부역인 줄을 모르니, 그 효과가 이미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 어떻게 하면 팔도를 다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오례의를 정한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 쓰는 《오례의》(다섯 가지 국가 의례를 정리한 책)는 세조 때 신문충공(시호 문충, 신숙주)이 정승으로 있으면서 총괄하여 정한 것이다. 이는 당나라의 《개원례》를 본뜨면서 옛 예법도 참고한 것이다. 모든 것이 사리에 맞고 편리하여 시행한 지 백여 년이 되도록 폐단이 없었다.
선왕(선조) 때에 와서 유학자들이 오로지 옛 예법만을 따르면서 고친 부분이 많았는데, 간혹 서로 어긋나서 시행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이로써 옛사람들도 시험해 보지 않은 바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세 판서 자리를 비교한 큰형의 말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맏형(허성)이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조·예조·병조 세 판서 중에서 병조 판서는 몸은 힘들어도 계획을 세우는 것은 힘들지 않고, 이조 판서는 계획을 세우기는 힘들어도 마음까지 피곤하지는 않은데, 예조 판서는 마음과 몸이 다 피곤하다." 이는 대개 조정의 큰 의례는 반드시 예조 판서가 총괄하는데, 갑작스레 변통해야 할 예법이라도 생기면 늘 근거가 없음을 걱정하며 이를 정하는 동안 많은 신경을 쓰게 되기 때문에 한 말인 듯하다.
형조의 권한이 줄어든 사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형조는 나라를 세운 초기에는 업무상 권한이 사헌부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형벌과 옥사에 관련된 사건은 "형조에서 아뢰기를……" 하면서 직접 탄핵하였는데, 이런 관행이 언제부터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법을 어기는 것을 금하는 점에서는 사헌부와 같고, 도둑을 처벌하는 기능에서 보면 의금부의 권한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공조 창고를 유독 엄히 감독하는 까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공조는 다른 관청들과 마찬가지로 육조의 하나인데도, 창고의 물품을 출납할 때면 반드시 사헌부 감찰을 불러 놓고 출납한다. 그뿐 아니라 호조의 낭관이 수시로 그 창고를 순회하는데, 마치 호조 자신의 창고를 도는 것과 다름없이 하니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노비 소송을 형조가 아닌 장례원에서 맡는 까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형조가 관장하는 업무는 옥사를 다스리는 것만이 아니라, 숨은 인구를 찾아내는 일도 전담한다. 그러므로 중국 조정에서는 해마다 호구책을 반드시 형조에 해당하는 관청에 보내고, 그 관청이 이를 접수하여 위에 아뢰어 재가를 받은 뒤에 호적을 다루는 관청에서 보관하는 것이 관례다.
우리나라에서는 호적 장부를 모두 호조에서 다루고 형조는 관여하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노비에 관한 소송도 모두 장례원의 판결에 따르고 있는데,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노비를 관장하는 업무도 예전에는 형조에 속해 있어서 도관사가 노비 관련 소송을 전적으로 다루었는데, 지금은 별도로 관청(장례원)을 두어 관제만 번거로울 뿐이다.
승지 자리의 무게와 박원종의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승정원은 임금의 말을 전달하는 곳으로서 그 임무가 매우 중요하므로 조정에서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당상관 중에서도 이조나 사간원의 대사간을 지낸 사람이라야 겨우 맡을 수 있었다.
평성군(봉호가 평성) 박원종 같은 사람을 승지로 임명하였다가,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자리를 바꾸어 병조 참의를 내린 것이 이런 경우다.
근래에는 승지에 대한 물망이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보다 아래에 있다. 또 조선 초기부터 반드시 무신 한 사람씩을 승지로 참여시켰는데, 이는 대개 그 사람의 명망을 키워 훗날 크게 쓸 밑거름을 만들고자 해서였다. 그래서 서북 지방(서쪽은 황해·평안도, 북쪽은 함경도)의 장수는 모두 승정원을 거친 사람 가운데서 임명하였다. 그런데 근래에는 선왕(선조) 때의 남언경과 양사형 이후로는 한 사람도 없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승지가 된 이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근래에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서 승지가 된 사람은 내암(정인홍의 호)과 한강(정구의 호) 두 사람이다. 한강은 예방 승지로서 전시(임금이 참석하는 마지막 과거 시험)의 시험관이 되었으니 이 또한 특이한 일이다.
얼마 전에 강명지(자가 명지, 강복성)가 승지에 임명된 것은 임금이 세자 시절부터 그를 가르친 스승이었던 수고 때문이었다. 간옹(홍가신의 호)은 비록 승지는 되지 못했지만 형조 판서가 되었고, 서인원은 강원도 감사가 되었으며, 이 밖에 참의가 된 사람은 겨우 두세 명뿐이다.
선왕(선조) 때에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얻은 벼슬(남행)로 사헌부 벼슬을 한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과감하게 직언하여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이도 있었다. 간옹이 장령(사헌부의 정4품 벼슬)으로 있을 때 "안여경을 부윤으로 임명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아뢰었는데, 임금이 이에 노하여 안여경을 부윤 자리에서 물러나게 함과 동시에, 이후로는 과거를 거치지 않은 사람을 사헌부 관원으로 삼지 못하게 하였다.
4조 낭관에 남행 출신이 늘어난 사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왕(선조) 초년에는 형조·공조·호조·병조 네 관청의 낭관을 과거를 거치지 않은 사람(남행)과 무과 출신을 섞어 임용하였는데, 모두 명망 있는 사람 중에서 골랐다.
중년에 들어서는 이를 뽑는 일을 매우 신중히 하여 남행과 무과 출신은 일절 임명하지 않다가, 대신들이 경연에서 예전처럼 남행과 무과에서도 뽑는 제도를 되살리자고 청하여 겨우 이경욱이 호조 낭관, 이경준이 형조 낭관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모두 승진하였다. 전란 뒤에는 인재가 부족하여 되는대로 구차하게 자리만 채웠다.
근래에는 네 관청 낭관의 절반 이상이 남행 출신인 데 반해, 문관으로서 등용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백여 명이나 되므로 이를 논의하는 사람들이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문관으로서 형조와 호조의 낭관이 된 사람들도 대부분이 시험을 거쳐 뽑힌 사람이 아닌 데다 무능한 자들이 많다. 이 때문에 당상관으로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남행 출신 낭관을 찾게 된다. 이는 현재의 상황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감찰의 위세가 예전만 못한 사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감찰(사헌부의 실무 관원)의 임무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고려와 우리나라 초기에는 이를 뽑아 임명하는 데 매우 신중을 기하였다. 관청에 참알할 때마다 대관(사헌부 관원)의 잘못을 종이에 적어 품에 간직했다가 달려 들어가 뜰에 떨어뜨렸다. 재상 중에 탐욕스럽고 부패한 자가 있으면 밤에 그 집 문간에 모여서 대문에 먹을 칠했다. 그러면 그 재상은 감히 조정에 나오지 못했고 조정에서도 다시 등용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사헌부에 나올 때면, 비록 왕자나 대신이라도 이들을 만나면 말에서 내렸다.
지금도 뜰에 달려 들어가는 예법과 먹을 묻힌 자를 지니는 것은 예전과 같으나, 잘못을 적은 글을 품에 간직하는 것과 대문에 먹칠하는 것은 시행되지 않은 지 오래다. 사헌부에 나올 때 왕자나 대신이 말에서 내리는 것은 예전과 같다고 한다.
감찰을 청하는 값과 재종형 "강홉랑" 이야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각 관청에서 연말에 감찰의 검사를 청할 때는(청대) 그 관청의 아전이 사헌부에 값을 치르는데, 이 일은 수석 아전이 파견된 감찰과 의논한다. 이때 어물어물 너그럽게 처리해 주는 감찰인 경우에는 값이 비싸고, 강직하고 꼼꼼해서 속일 수 없는 경우에는 값이 싸게 마련이니 그 유래가 오래된 일이다.
나의 재종형인 허체는 감찰로 있었는데, 성품이 매우 총명하고 꼼꼼하여 아전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았으며, 또 모질고 박정해서 숨긴 것을 찾아내기를 좋아하였다.
하루는 혜민서(의약을 맡은 관청)의 약재 담당 아전이 형의 집에 와서 약을 짓고 있기에, 내가 장난삼아 "요즘 감찰에게 주는 값이 가장 싼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물었더니, "허 감찰은 피 쭉정이 다섯 홉입니다" 하였다. 이에 온 집안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전해 가며 웃었고, 재종형을 "강홉랑"(쭉정이 다섯 홉 도령)이라고 불렀다.
집현전에서 홍문관으로 이어진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선에서는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학에 능한 선비를 가려 뽑아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게 하였다. 인원은 스무 명을 두었는데, 그중 열 사람은 경연관을 겸임하고 열 사람은 세자를 가르치는 서연관을 겸임하였다. 교대로 숙직하였고 임금의 은혜와 예우가 특별하였는데, 세조 때 이를 폐지하고, 다만 문관을 뽑아 예문관 응교를 겸임시켜 경연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 뒤 성종 초에는 예문관에 부제학 이하 수찬까지 모두 열일곱 명을 두어 경연관을 겸임시켜 집현전의 옛일을 잇게 하였는데, 얼마 뒤 홍문관으로 이름을 고쳐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예문관이라 부르던 시절에, 노분(자가 사문)이 교리로 있다가 죽었는데, 그 증손 노사회가 수령으로 부임하며 신원 조사(서경)를 받을 때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모두 "홍문관을 예문이라 잘못 썼다"며 서류를 되돌려 보냈는데, 이는 모두 옛일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문형이라는 칭호를 얻는 조건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선 초기에는 과거의 상시관을 맡은 사람이 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대사성을 겸해야 "문형(문단의 저울대, 즉 문단의 우두머리)"을 맡았다고 하였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비록 상시관의 일을 실제로 하더라도 문형에는 끼지 못하였으니, 안지와 박원형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성종 이후로는 홍문관·예문관 두 곳의 대제학과 성균관을 관장하는 지성균관사를 겸임해야 문형을 맡았다고 하였다.
홍문관 당직을 둘러싼 완평부원군의 인정 많은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홍문관에 당직 서는 일은 누구나 괴롭게 여겨 피하려 들지만, 선왕(선조) 때의 승지 성낙은 유독 더 당직을 거절하였고, 당직을 서더라도 곧 나가 버리곤 하였다.
그때 나의 둘째 형과 판중추부사 김수, 이조 판서 김찬, 호조 판서 이성중, 완평부원군 이원익, 좌의정 김응남이 함께 홍문관에 있었다. 이들이 서로 약속하기를 "성낙이 당직에 들거든 정해진 날짜대로 교대해 주지 말자" 하였다. 이런 약속이 있은 뒤, 성낙이 당직을 선 지 겨우 하루 만에 또 나가려 하여 홍문관의 아전을 몹시 심하게 매질하며 다그쳤다. 이에 아전이 여러 집을 다니며 교대해 줄 사람을 알아보았지만 모두 거절하였다. 남은 사람은 완평부원군뿐이었으나, 당직을 막 마치고 나온 터라 감히 청하지 못하였다. 일이 급해지자 시험 삼아 찾아가 부탁하니 완평부원군도 처음에는 응하려 하지 않다가, 아전이 서럽게 울면서 "여든 노모가 추운 옥중에 갇혀 계신데 이러다 돌아가시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하였다. 그때 완평부원군도 노모를 모시고 있던 터라 측은한 마음이 들어 교대를 허락하였다. 아전은 뛸 듯이 밖으로 나와서는 손뼉을 치며 "이 교리는 참으로 성인이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밤중 경연 술자리에서 이름을 날린 두 주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대개 임금이 밤중에 신하를 불러 만나는 야대가 있는 날에는, 반드시 임금이 술을 많이 권하여 흠뻑 취한 뒤에야 자리를 끝내었다. 술잔이 돌아오면 주량이 적은 사람은 실수할까 걱정되어 머뭇거리며 즉시 마시지 못하였다.
나의 둘째 형은 대개 큰 잔으로 마셨는데, 잔이 돌아오면 즉시 다 마셔 버렸다. 술을 따르는 내시는 아직 술이 남았으리라 생각하고 머뭇거리며 잔을 되받지 않았으나, 임금은 형이 벌써 다 마신 것을 알고는 웃곤 하였다.
당시에 술 마시는 사람 중에서 승지 강서가 형의 맞수였는데, 홍문관의 아전이 장부에 "허 전한과 강 교리는 술을 아낀다"라고 써 놓았는데, 여기서 "아낀다"는 것은 사실 "좋아한다"는 뜻으로 쓴 말이라, 보는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홍문관의 술 솥에 이름을 새긴 두 사람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홍문관에는 술 닷 되들이쯤 되는 무쇠솥이 하나 있는데, 이것으로 시원하게 단숨에 마시면 그 이름을 솥에 새겼다. 솥에 이름이 새겨진 사람은 예전에는 김천령뿐이었는데, 둘째 형의 이름이 비로소 그 뒤를 이어 새겨졌다.
예문관 신참 시절의 엄한 위계와 중시 장원 이야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승문원·성균관·교서관·예문관 네 관청의 풍속 가운데 아랫사람을 단속하는 것이 가장 심한 곳은 예문관이다. 자리마다 위계가 엄중해서 마주 앉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당직에서 마음대로 나가는 것도 용납되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방자하게 굴면 심한 매질을 당하였다.
갑오년(1594년) 여름에 내가 사관(역사 기록을 맡은 벼슬)으로 천거되었으나 상복을 입게 되어 시험에 응하지 못하였고, 정유년(1597년) 봄에야 비로소 예문관에 들어갔다.
심대(자 중경)와 이대중 등은 모두 나보다 늦게 관직에 들었는데도 나보다 윗자리에 있으면서 몹시 까다롭게 굴었다. 그때 다시 보는 과거 시험(중시)이 있었는데, 규정상 한림원의 아랫사람은 응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이 두 사람에게 응시를 청하였더니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시험을 며칠 앞두고 내가 공무상의 일로 파직되는 바람에 오히려 시험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뽑혔다.
예조의 낭관으로 임명되어 임금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대궐에 들어갔을 때, 윗자리에 있던 심학이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심중경이 사헌부·사간원에서 올라온 말을 접수하여 심학이에게 알리러 들어왔다. 관례상 선배가 그 자리에 있으면 후배가 먼저 선배에게 인사한 다음 윗사람에게 말을 전하게 되어 있었다.
이날 심중경이 먼저 내 앞에 엎드려 인사하고 나가므로, 내가 "중시에서 장원한 것은 별로 기분 좋은 줄 몰랐는데 이제야 기분이 좋다" 하였더니, 심학이가 크게 웃었다.
중시 장원 급제자들의 계보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선에서 맨 처음 시행한 중시(현직 관원을 대상으로 다시 보는 과거)에서는 춘정(변계량의 호)이 장원하였고, 그다음 회에는 김자가 장원하였으나 그의 답안은 사실 양여공이 대신 지어 준 것이었다. 양여공은 문장에 능했다. 그 뒤에 장원한 하동부원군 정인지, 남수문, 근보(성삼문의 자)는 모두 이름난 대가였다.
이영근은 나이도 어리고 명망도 없었는데 갑자기 장원하고, 김수온과 서거정이 도리어 2등과 3등에 그치자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으나, 이영근도 실은 글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 이후로도 중시에 합격한 사람은 모두 문장으로 이름난 사람이었는데, 나같이 재주 없는 사람이 그 안에 끼었으니 과분한 일이다.
중시를 대하는 사대부들의 서로 다른 태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선 역대 임금 때 사대부는 중시를 가장 중히 여겼다. 모재(김안국의 호)가 중시를 준비할 때 표문과 대책문을 많이 연습하였는데, 시험장에 들어가 보니 평소 대책문에 능한 대사헌 권홍도 응시한 것을 보고 모재가 말하기를 "내가 장원하려 하였는데 이분이 응시하였으니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발표하는 날 보니 과연 권홍이 장원이고 김안국은 2등이었다. 그런데 선왕(선조) 이후로는 이름난 관원은 으레 응시하지 않는데, 이것을 좋은 일로 여기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무릎을 꿇지 않으려던 사람들 이야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명종 11년(1556년) 중시에서 김홍도는 대책문은 짓지 않고 술만 마시면서 "이 무릎을 남에게 굽힌 적이 두 번밖에 없는데, 지금 양응정이 응시하였으니 내가 이연성 꼴이 될까 두렵다" 하였다. 이는 대개 연성군 이석형이 한 해에 세 번이나 장원하였으나 중시에서는 6등에 그치자, 근보(성삼문)의 집에 가서 절을 하며 "이 무릎을 남에게 굽힌 지 오래되었소" 한 데서 나온 말인데, 근보가 웃으며 "남에게 굽히지 않던 무릎을 내가 굽혔군" 하였다는 고사이다. 김홍도 역시 진사시와 문과에서 연이어 장원하였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대필 답안을 알아본 시험관의 안목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성종 17년(1486년) 중시에 정승 강귀손이 응시하였는데, 마침 그의 장인의 아우인 허백(성현의 자)이 승정원의 도승지로 궁궐 안에 있었다. 강귀손의 아버지인 진산(진산군 강희맹)은 오위도총부의 총관으로 당직을 서다가 허백에게 "우리 집안에서 잇달아 장원하는 것도 좋은 일이니, 그대와 내가 귀손의 대책문을 지어 주는 게 어떻겠나?" 하였다. 이리하여 서두에서 중간까지는 강희맹이 짓고, 그 뒤부터 끝까지는 성현이 지어서 강귀손에게 그대로 베껴 내도록 하였다.
당시 시험관이었던 사가(서거정의 호)와 삼탄(이승소의 호)은 모두 무릎을 치며 감탄하고 마땅히 1등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상시관으로 참석했던 괴애(김수온의 호)는 자는 척하며 귀담아듣지 않았다. 다른 시험관들이 의견을 물으니 "등수를 고치라"고 하였다. 다시 물어봐도 같은 대답이었다. 밤이라 피곤해서 그런가 하고 답안을 보관해 두었다가 새벽에 다시 읽어 보고 다시 의견을 물으니, "차상(그다음 등급)으로 매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모두들 이상하게 여겨 "이 글이 매우 훌륭한데 어째서 등수에도 들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김수온이 웃으며 "이 글의 작자가 성씨나 강씨 집안의 자제가 아니라면 마땅히 장원감이다" 하였다. 급히 답안지의 이름 봉한 부분을 뜯어 살펴보니, 과연 강 정승의 글이었다. 김수온이 "나는 강희맹과 함께 공부하였고 성현은 나에게 배웠으니, 그들의 글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저기까지는 강의 글이고 저기서 여기까지는 성이 지은 것이다. 내가 어찌 그들에게 속아서 나라의 시험을 그르치겠는가" 하니, 모두가 탄복하였다. 결국 강귀손의 답안은 빼 버리고 신종호를 장원으로 뽑았다고 한다.
문과 장원보다 사마시 장원을 더 귀하게 여긴 풍속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의 풍속은 문과의 장원은 그리 중시하지 않고, 사마시(생원시·진사시)의 장원을 더 귀하게 여긴다. 사마시는 문장의 우열을 따지지 않고 1, 2등 십여 명을 뽑으며 사람됨을 가려서 뽑기 때문에, 한번 합격자 명단에 들면 평생토록 존경을 받는다.
조선의 이석형과 배맹후는 생원시와 진사시 모두에서 장원하였다. 모재(김안국)가 이를 흠모하여 생원시와 진사시 두 시험에 모두 응시하였다. 둘 다 잘 지어 마땅히 둘 다 장원이 되어야 했으나 시험관이 한쪽 시험의 등수를 깎아 2등으로 만들었으므로, 모재는 늘 마음속으로 이를 분하게 여겼다.
그 뒤 자신이 시험관이 되었을 때, 김구가 두 시험장에서 지은 글이 나란히 1등감이었으므로 힘써 주장하여 두 시험 모두에서 그를 장원으로 뽑았다고 한다.
독서당의 연혁과 인재 양성의 전통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세종 때 처음으로 독서당을 설치하여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함으로써(사가독서) 훗날 크게 등용하려 하였는데, 당시에는 산속 절에서 책을 읽는 경우가 많았다.
맨 처음에는 권채·신석조·남수문이 사가독서를 하였고, 다음은 성삼문·신숙주·박팽년이 하였으며, 또 그다음은 이석형·최항·성간·이영서·하위지·이개·김수온·서거정·이승소·강희맹이 잇따라 하였다.
문종 때에는 홍응·홍귀달·어세겸·박기년이 사가독서를 하였다. 흉년이 들면 이 제도를 중단하였고, 특별한 이유 없이 사가독서를 시키지 않은 때도 있었다.
성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성현·채수·조위·허침·양희지·권건·유호인 등에게 용산사에서 책을 읽도록 하였다. 이때부터는 결원이 있으면 보충하였고, 동호(한강 동쪽 호수)에 독서당을 지어 어엿한 하나의 관청이 되었다.
중종 때에는 시험하여 성적을 매기는 방법이 매우 엄해져서, 잇달아 두 번 낙제하면 도태시켰다. 이들에 대한 특별한 은전과 대우는 홍문관에 못지않았는데, 전란이 일어나자 폐지되었다.
지금 임금(광해군) 초년에 대신과 의논하여 다시 설치하도록 명하여 이이첨 등 열두 명을 선발하였으나, 이듬해에 흉년이 들어 우선 중단하였다.
독서당원은 마흔 살이 안 된 사람 중에서 뽑는 것이 관례였는데, 청련(이후백의 호)이 처음으로 마흔 살에 뽑혔고, 이이첨은 마흔여덟 살에 뽑혔으니 파격적인 일이다. 당상관의 신분으로 사가독서를 한 사람은 박민헌과 이덕형이다.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 시를 대신 지어 준 이야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반드시 그 시대에 문장으로 이름난 사람을 뽑아 맡겼다. 박원형과 허종은 모두 훌륭한 풍채와 예의 바른 몸가짐으로 중국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박원형이 방주(명나라 유태의 호)와 주고받은 시와, 허종이 규봉(명나라 동월의 호)과 주고받은 시는 모두 종사관으로 수행한 삼탄(이승소)과 삼괴(신종호의 호)가 대신 지어 준 것이었다.
원접사와 종사관을 세 번씩 지낸 사람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연성군 박원형은 세 번 원접사(중국 사신을 국경까지 마중 나가 맞이하는 사신)가 되었고, 호음(정사룡의 호)도 세 번 원접사가 되었으나, 그중 한 번은 환관을 접대한 것이므로 박원형만큼 영예롭지는 못하다.
세 번 종사관이 된 사람으로는 삼탄(이승소)이 있고, 나도 세 번이었으나 그중 한 번은 환관을 접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접대한 유 태감은 시를 잘 지어서, 시를 주고받는 데 따르는 괴로움이 한림원이나 감찰·간쟁 담당 관원이 왔을 때보다도 더 심하였으니, 호음이 조용히 넘긴 것에 비하면 훨씬 힘이 들었던 셈이다.
낮은 벼슬로도 종사관이 된 특별한 사례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규봉(동월)이 중국 사신으로 왔을 때 허충정(시호가 충정인 허종)은 종사관 두 사람을 데리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삼괴(신종호)였고, 한 사람은 직장 박증영이었다. 참하관(7품 이하의 낮은 관원)으로서 종사관이 된 것이다. 그 뒤 주지번과 양유년이 왔을 때에는 조희일(자 이숙)이 박사에서 전적으로 특별히 승진하여 종사관이 되었으니, 이 또한 임금의 특별한 은혜였다.
사신 접대에 문장 담당자를 딸려 보낸 관례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는 반드시 글씨와 문서를 담당하는 사람을 따로 두었다. 조선에서 조신·홍유손 같은 사람을 등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시를 짓는 관원(제술관)을 따로 데리고 간 일이 없었는데, 임인년(1602년)에 고천준과 최정건이 왔을 때 월사(이정귀의 호)가 김현성·차천로·권필 세 사람을 데리고 갔고, 병오년(1606년)에 서경(유근의 호)이 다시 김현성과 권필 두 사람을 데려가겠다고 청하였으나 권필은 사양하고 김현성만 수행하였다. 기유년(1609년)에 서경이 또 차천로와 양경우를 데리고 갔는데, 이로부터 이것이 정해진 관례가 되었다고 한다.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급제가 취소된 정번과 한리학관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적암(조신의 호)은 규봉(동월)이 왔을 때부터 자양이 왔을 때까지, 그때마다 의전 실무를 맡아 직무를 잘 처리하였다. 이때는 아직 중국어 문서를 다루는 한리학관이라는 벼슬이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적암이 그때마다 의원이라는 직함으로 오갔다.
그 뒤 정번을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과거 합격자 명단에서 삭제하는 대신, 한리학관이라는 벼슬을 새로 만들어 그를 이 자리에 앉혔다. 이후로는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이 한리학관에게 글씨와 문서를 맡겼으니, 정번·어숙권·정화·박지화·권응인 등이 잇따라 이 일을 맡아 하였다.
지금은 이재영이 이 일을 모두 네 번이나 맡았는데, 무리 중에서 가장 민첩하고 총명하여 서경(유근)이 매우 감탄하였다. 그래서 주지번·양유년과 주고받은 시는 대부분이 그가 지은 것이라 한다.
놀라운 기억력을 지닌 사람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총명하고 민첩하기로 이름난 사람이 조선 이래로 많이 있다고 하지만,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므로 믿을 수가 없다.
근세에는 윤계선(자 사문)이 가장 총명하다고 이야기된다. 내가 태복시(임금의 말과 수레를 관장하던 관청)에 재직할 때였다. 어느 날 그가 태복시로 나를 찾아왔다. 마침 말 삼백여 필의 털빛과 사는 지명, 기르는 사람의 이름을 적은 말 명부(마적책)가 옆에 있었는데, 윤계선이 이를 한 번 보고는 다 외웠다. 사흘이 지난 뒤에 그의 집에 가서 물어보니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진사 임숙영도 중국 조정의 《이력편람》(관원들의 이력을 정리한 책)을 보고는 정확하게 다 기억하였다. 이 두 사람은 참으로 탄복할 만한 사람들이다.
족보에 통달한 두 사람의 밤샘 토론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서천(정곤수의 호)은 역사와 문헌에는 그리 총명하지 못했으나 족보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잘 알아서 막힘없이 줄줄 외웠다. 이실지(자, 이춘영)도 족보에 능통하였고 아울러 문장과 역사에도 해박하였지만, 문장과 역사보다는 족보에 대한 지식이 더 뛰어났다.
한번은 서천이 이실지와 강가에서 만났는데, 밤을 지새워 가며 족보에 관해 논변하였다. 나도 그 곁에서 듣고 있었는데, 지금의 이름난 가문치고 그 조상의 계보나 외가 쪽 갈래 가운데 흠 없는 집안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내용은 몰라서는 안 되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혹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을 염려도 있으니 말이다.
나의 조상과 권한공의 뜻밖의 인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내가 젊은 시절 당숙인 참봉공의 집에서 《고려사》를 뒤적이다가 권한공의 전기를 보고 그 옳고 그름을 논하였더니, 참봉공이 "어린 사람은 말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나라 재상들의 허물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하시면서 집안 족보를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는데, 알고 보니 권한공은 나의 5대조 호군 어른 부인의 외증조부였다.
내가 이 일이 있은 뒤로 5대에 걸쳐 안팎의 조상을 널리 조사해 보니, 고려 이전에 눈에 띄게 벼슬한 집안치고 나의 조상과 관계없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족보 세 권을 만들어서 자식과 조카들에게 보게 하였다.
여덟 고조를 아느냐고 물은 정곤수의 가르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내가 한번은 정서천(정곤수)을 찾아가니 그가 갑자기 "자네는 여덟 고조를 아는가? 하나하나 말해 보게" 하였다. 내가 여덟 고조가 무엇인지 몰라 멍하니 있으니, 서천이 "친조부모와 외조부모, 어머니의 친조부모와 외조부모, 그리고 아내의 친조부모와 외조부모다" 하였다. 내가 마침내 하나하나 헤아려 여덟에 이르니, 그가 "자네는 여덟 고조를 아니 참으로 조상을 잊지 않는 사람이군. 내가 이것을 물어보면 백 명에 한두 사람도 아는 이가 없더군. 자손으로서 자기 조상을 몰라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생각해 보면 그 말이 참으로 옳다.
명나라 황제가 감탄한 조선의 천리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사가(서거정의 호)의 《필원잡기》를 보면, 태종은 말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고 한다. 태종이 여윈 말을 일부러 골라 상급으로 쳐서 명나라에 조공으로 보내니, 성조(영락제)가 보고 "이것은 하늘이 낸 말이다. 너희 왕이 나를 아끼는구나" 하였다.
내가 언젠가 《증자계집》을 보니 〈천마가〉라는 시가 실려 있는데, "영락 연간에 조선에서 누런 말을 조공으로 바쳤는데 매우 좋은 말이었으므로 임금이 〈천마가〉를 짓도록 명하였다" 하였으니, 아마 이때 바친 말이 아닌가 싶다.
중국 황실에 딸을 보낸 집안이 누린 특별한 은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 여자로서 중국 조정에 뽑혀 들어가 황제를 모신 이는 누구나 총애를 받았다. 그 덕분에 권영균·여귀진·최득비는 그 아버지나 오라비가 높은 벼슬(열경)에 올랐고, 조선에 있으면서도 중국의 녹봉을 받았으니, 왕감주(왕세정의 호)가 〈이전술〉이라는 글에서 "외국인이 중국 관직을 지니고서 외국에 살고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 경우이다.
양절공 한확은 누이동생 두 사람이 중국 조정에 들어갔으므로 불러다 광록소경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조서를 받들어 우리나라에 반포하게까지 하였으니 더욱 특별한 은전이었다.
어진 환관 김영과 그를 아낀 명나라 효종의 선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내시로서 중국 조정에 들어간 사람은 대대로 있었는데, 홍치 연간(명나라 효종 때)에 이르러 더 이상 뽑아 보내지 말도록 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에 끼치는 폐해를 한 가지 덜어 준 것이니, 이를 명한 효종 황제는 참으로 성인이었다.
태감 김영은 안동 사람으로 중국 조정에 들어가 사례감 태감이 되어 헌종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사신이 되어 본국에 나오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내가 어찌 우리 국왕을 대등한 예로 만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를 보면 그는 어진 사람이었다. 이로 보아 중국의 역사 기록에 "김영은 겸손하고 사리를 알았으며, 바른 사람을 보호한 공이 있다"고 한 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조공로를 지켜 낸 명나라 관리 유대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가 중국에 조공하러 가는 길은, 해주에서 광녕을 거치지 않으면 곧바로 영원위로 통하게 되는데, 이 길은 오랑캐 지역과 가깝지 않고 또 빠르다.
내시로 중국 조정에 들어간 사람이 우리 사신과 의논하여 헌종 황제에게 아뢰어 조공로를 바꾸려 하니, 병부의 항충은 그대로 따르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동산(호) 유대하가 병부 직방사에 재직하고 있었는데, 이를 고집하고 허락하지 않으면서 "조선의 조공로는 애초에 명나라 초기 임금들이 상세히 정한 것으로서, 서너 곳의 큰 진영을 우회하여 산해관에 이르게 한 것은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니 경솔하게 고쳐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항충이 그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전 길 그대로 조공하고 바꾸지 못하였다.
중국 과거에 응시할 길이 막힌 억울한 사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의 인재가 중국 조정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된 것은, 고려 때 홍륜이 임금을 시해하고 김의가 중국 사신을 죽였기 때문이지, 우리 조선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런 사실을 들어 중국에 요청한다면 중국에서도 들어주지 않을 리가 없는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옹졸하고 남다른 절조가 없는 데다 멀리 나가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런 나쁜 평판을 뒤집어쓴 채 외국인을 위한 과거(빈공과)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내가 한번은 낭중 가유약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안남(베트남)과 유구(오키나와)는 모두 빈공과에 응시한다. 안남 출신 진유는 정덕 연간(명나라 무종 때)에 과거에 급제해서 우도어사를 지냈고, 완악은 가정 연간(명나라 세종 때)에 급제해서 공부 우시랑이 되었으며, 손응오는 본국에서 도망하여 광서 지방에 살다가 역시 과거에 합격하여 예부 시랑이 되었다. 지금도 향시나 회시 합격자 출신으로 지방 관리로 있는 자가 다섯 사람이나 있다." 이 말을 들으니 힘이 솟구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종계변무에 숨은 공로자, 허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 왕실 계보가 중국 기록에 잘못 실린 것을 바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선왕(선조)이 정성을 다하여 호소하고 변론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영양(봉호) 허국이 당시 내각에 있으면서 주선해 준 공이 있었다. 대개 허국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때, 마침 우리는 국상을 당해 몹시 경황이 없을 때였다. 그런데도 예우와 정성에 절도가 있었으므로, 그가 우리의 정성을 매우 아름답게 여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가 조정에 있으면서 힘써 주장하여 우리나라의 억울함을 씻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형 군문(형개)과 석 상서(석성)를 제사 지내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허국도 마땅히 함께 제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 왕실이 삼국시대 왕성 가운데 가장 번성한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 이래의 왕성 가운데 박씨와 김씨 두 성씨보다 더 번성한 성이 없다. 석씨와 고씨, 부여씨는 이제 아예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왕씨(고려 왕실)가 줄어든 것은 왕자들이 으레 승려가 되었기 때문에 종실의 성씨가 적어진 것이다. 고려가 망할 때에는 남은 종실이 겨우 오십여 명이었다.
조선은 뿌리가 깊고 잎이 무성하여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내가 전에 왕실 족보를 편찬하는 관원으로 있을 때 헤아려 보니, 종실 중에서 관대를 물려받아 녹봉을 받는 사람이 삼백여 명이고, 조정의 문관·무관과 과거를 거치지 않고 얻은 벼슬(남행)로 벼슬하는 사람도 백여 명이었다. 이 밖에 유생과 충의위(왕실 후손을 위한 군직), 무인에서부터 아래로 곁가지와 서얼에 이르기까지 천여 명에 가까웠으니 번성하다고 할 만하다.
왕실 성씨로서 정승에 오른 두 사람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왕실과 같은 성씨(전주 이씨)로서 정승이 된 사람은 두 명이니, 완평부원군 이원익과 완성부원군 이헌국이다. 두 사람 모두 나라를 세우거나 지키는 데 으뜸가는 공을 세운 공신이면서 정승으로서의 업적까지 남겼으니, 우리나라에서는 전에 없던 일이다.
성소부부고 제23권
10. 14:40
성소부부고 제23권 · 설부 2 · 성옹지소록 (중)
출처: 성소부부고 제23권, 설부 2, 성옹지소록 중
배경: "성옹지소록"은 허균이 스스로를 가리키는 별호인 "성옹"을 앞세워 지은 견문록으로, 조선 초기부터 자신이 살던 당대까지 이름난 재상과 학자, 선비들에 얽힌 크고 작은 일화를 두서없이 적어 내려간 글이다. 이 권에는 황희와 김종서 같은 나라를 세운 초기의 명재상들부터,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겪은 선비들, 허균 자신의 아버지와 두 형이 가르침을 받은 스승들, 그리고 임진왜란을 이끈 선조 시대의 대신들에 이르기까지 쉰 편이 넘는 짧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각 이야기에는 원문에 없는 소제목을 옮긴이가 붙여 내용을 짐작하기 쉽게 하였다.
일러두기: 이 글에는 조선 시대의 관직과 제도를 가리키는 말이 자주 나온다. "문형"은 나라의 글을 총괄하는 대제학의 별칭이고, "지제교"는 임금의 문서를 짓는 벼슬이며, "홍문록"은 홍문관 관원이 될 후보로 오른 명단을 말한다. "향안"은 지방에서 대대로 이름난 사대부 집안 출신만을 골라 이름을 올리던 명부이고, "궤장"은 임금이 나이 많은 공신이나 대신에게 내리던 지팡이와 앉는 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가독서"는 젊고 유능한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오로지 책만 읽게 하던 제도이고, "독서당"(또는 "호당")은 그들이 머물며 공부하던 곳이다. "계유정난"은 1453년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이 반대파 대신들을 없애고 정권을 잡은 사건이며, "기묘사화"는 1519년, "을사사화"는 1545년에 각각 조정에서 뜻있는 선비들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대광보국숭록대부"는 신하가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품계이다. 이런 말들은 문맥에서 필요할 때마다 짧게 풀어 놓았다.
황희와 허조 — 나라를 세운 초기의 명재상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라를 세운 초기의 이름난 재상으로는 황희와 허조를 꼽는다. 언젠가 《세종실록》을 살펴보니 이 두 사람이 특별히 무언가를 앞장서서 건의한 것은 없고, 다만 임금이 조금이라도 지나친 행동을 하면 반드시 굳게 고집하며 따르지 않았을 뿐이었다.
황희는 관리를 임명하는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고 제도를 함부로 바꾸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허조는 문학적 재능으로 조금 꾸미기는 했으나 조심스럽게 바른 법도를 지켰다.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다스리는 큰 그릇이나 시대를 구제할 만한 재주를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진 신하들이었다.
황희가 김종서를 엄히 대한 까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익성공 황희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 김종서는 호조판서로 있었다.
하루는 삼정승과 육조 판서들이 대궐에서 회의를 하는데 해가 저물자, 김종서가 간단한 밥상을 준비해 왔다. 황희는 그 밥상을 물리치고는 조정의 자리에 앉아 김종서를 불러 섬돌 위에 세워 놓고, 규정에도 없이 사사로이 음식을 대접한 일을 꾸짖었다. 말이 매우 엄하니 김종서는 진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였다. 한참을 그렇게 세워 두었다가 돌려보냈으니, 황희가 규범을 지키는 태도가 이와 같았다.
황희가 나랏일을 맡아보는 동안 김종서는 여러 차례 병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지냈는데, 한 가지 일이라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황희는 심하게 꾸짖고 때로는 그의 종을 매질하거나 몸종을 가두기까지 하였다. 동료들은 모두 너무 심하다고 여겼고, 김종서 자신도 몹시 곤욕스럽게 여겼다.
하루는 정승 맹사성이 물었다. "김종서는 당대의 이름난 재상인데 공은 어찌 그리도 심하게 대하십니까?"
황희가 대답했다. "이것은 내가 종서를 훌륭한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종서는 성품이 강직하고 기세가 날카로워 일을 과감하게 처리하니, 훗날 우리들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 때 스스로 신중하지 않으면 반드시 일을 그르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그 기세를 꺾어 경계하도록 하고 뜻을 단속하여 조심하게 함으로써, 일에 임하여 신중해지도록 하려는 것이 제 뜻이지, 그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맹사성이 이 말에 감복하였다. 훗날 황희가 사직을 청하면서 김종서를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하였다고 한다.
김종서가 함경도 북쪽 변경에 있을 때는 다스림이 매우 엄격하고 씀씀이는 매우 사치스러워 백성과 아전들이 그를 꺼렸다. 하루는 화살이 그의 책상에 날아와 꽂혔는데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의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여러 차례 독을 넣었으나 그를 죽이지는 못하였다.
무릇 잔치를 한 번 열면 부하 장교 백 명에게 저마다 쇠고기 다리 하나씩을 돌렸으므로, 어떤 사람이 낭비라고 간언하니 김종서가 이렇게 대답했다. "이 북쪽 변경은 우리 왕조가 일어난 곳으로, 선대 임금들이 개척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땅이다. 이제 다행히 이 땅을 개척하였으나, 장수와 병졸들이 이 먼 곳에서 십 년이나 수자리를 서고 있으니, 이렇게라도 잔치를 베풀지 않고서는 이들을 위로할 길이 없다. 더구나 이 일을 시작하는 마당에 쓸쓸하게 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비록 쇠고기 다리 하나씩을 쓰고 있지만, 십 년이 지난 뒤에는 닭다리 하나조차 넉넉지 못할 것이다. 장수와 병졸들이 노래를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게 되면, 대체 누구와 함께 이 변방을 지키겠는가?" 이 말을 듣고 간언하던 사람은 더는 말하지 못하였다.
김종서와 신숙주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종서는 신숙주를 천거하여 자신의 막료로 삼고, 그의 재주와 그릇을 지극히 아꼈다. 무슨 일을 계획할 때면 신숙주가 뒤에서 돕는 일이 많았다.
여진 지역에 아홉 개의 성을 설치하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를 두고 조정의 논의가 자신의 생각과 달랐으므로, 김종서가 글을 올려 이를 다투었는데 그 내용이 수만 자에 달하였다. 김종서가 신숙주에게 붓을 잡게 하고 자신은 입으로 부르는데, 마치 미리 지어 둔 글을 외우듯 줄줄 이어져 그치지 않았다. 신숙주는 명을 받들어 부르는 대로 받아 적으며 붓을 멈추지 않았는데, 한 글자도 되묻는 일이 없었고 한 자도 잘못 쓰거나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김종서가 감탄하여 말했다. "나는 본디 내 재주를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대야말로 참으로 드물게 보는 큰 재주로세."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날, 신숙주는 마침 관청에 있었다. 그의 부인은 남편이 반드시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스스로 목을 매려고 치마끈으로 목에 걸어 놓고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저물녘에 벽제 소리가 들리기에 알아보니 신숙주가 돌아온 것이었다. 부인이 치마끈을 풀며 말했다. "저는 당신이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신숙주는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허종과 허침 형제, 그리고 백세 할머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충정공 허종과 문정공 허침 두 형제는 모두 정승이 되었고 그 덕과 업적도 다 뚜렷하였으니, 우리나라에서 전에 없던 일이었다. 두 사람의 누님도 글과 행실,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고 백 살까지 사셨으므로, 집안에서는 지금까지도 그분을 "백세 할머니"라고 부른다. 두 형제는 이 누님을 매우 공손히 섬겼고, 조정에 중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찾아가 의견을 여쭈었다.
성종이 윤비를 폐위하려 할 때 두 형제가 누님에게 자문을 구하니, 이렇게 말하였다. "아들이 지금 세자로 있는데, 그 어미에게 죄를 준다면 어찌 나라가 편안하고 탈이 없겠느냐?" 이에 허종은 병을 핑계로 논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허침은 다른 의견을 내다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뒤 연산군이 정치를 어지럽히면서 "윤비를 폐위한 것이 마땅하다"고 논의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허침만은 홀로 화를 면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누님의 뛰어난 안목에 감탄하였다.
반정공신의 서열 — 성희안의 겸양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연산군을 폐위하는 일을 논의할 때, 성희안(창산)이 실로 그 계획을 가장 먼저 세웠고, 박원종(평성)이 여기에 참여하였으며, 유순정(청천)은 뒤늦게 참여하였다. 그런데 서열이 박원종과 유순정이 앞서고 성희안이 끝에 놓인 것은 원래 지니고 있던 벼슬의 등급에 따른 것이었다. 이것은 실은 성희안이 스스로 겸손하여 셋째 자리로 물러난 것이었다. 모든 일은 겸양해야 잘 이루어지는 법인데, 하물며 반정처럼 큰일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렇게 양보하여 큰 공을 이루었으니, 성희안의 안목은 따라갈 수가 없다.
성희안의 결단 — 형조참판 시절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성희안은 낮은 벼슬에 있을 때부터 이미 굳세고 과감하여 권력에 눌리지 않았다. 그가 형조참판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성균관 유생이 관아의 하인에게 모욕을 당하고는 동료들과 함께 이름을 나란히 올려 그 하인을 죽여 달라고 청하였다. 그런데 그 하인은 당시 영의정이던 신승선의 종이면서, 좌의정 이극배(광릉)의 여종의 남편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판서 한치형은 이 일의 죄를 판단하기 어려워 병을 핑계로 출근하지 않았다. 이 일로 이극배의 아우 이극돈이 성희안의 집을 두 차례나 찾아갔지만 병을 핑계로 만나 주지 않으니, 두 정승이 노하였다.
하루는 성희안이 조정에 나가자 두 정승이 그를 몰아세웠다. 성희안이 그 자리에서 여러 사람에게 대놓고 말했다. "여러 유생이 한낱 천한 종에게 얻어맞았으니, 그 종의 죄는 사형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나라의 법이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정승들을 위하여 이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임금께 아뢴 뒤에 저 스스로 물러나겠습니다." 두 정승은 부끄러워하며 사과하였다. 함께 있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성희안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물러나와 그 종에게 곤장을 쳐서 죽였으니, 그 결단력이 이와 같았다.
성희안의 안목 — 정광필을 천거하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성희안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일찍이 정광필(문익공)을 두고 참으로 정승이 될 만한 인물이라며 감탄하였다. 정광필이 함길도 감사로 있다가 우의정이 되어 돌아온 것도 모두 성희안이 천거한 덕분이었다. 당시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으나, 정광필이 훗날 기묘사화 때 선비들을 위해 공을 세우고 정승으로서의 업적도 훌륭하여, 시대는 다르지만 황희·허조와 나란한 명망을 얻게 되니, 사람들은 그제야 성희안의 안목에 감탄하였다.
박원종의 사치와 정사룡·황여헌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박원종(평성)은 영의정으로서 병조판서를 겸임하여 총애와 권세가 매우 높았다. 물러나려는 뜻으로 병을 핑계 삼아 도산의 별장에 가 있었는데, 조정에 큰일이 있을 때면 임금이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그때 정사룡(호음)과 황여헌(유촌)이 함께 병조의 낭관으로 있으면서 도산에 가서 자문을 구하곤 하였다. 박원종은 평소 사치를 매우 좋아하여 정원과 연못, 누각, 집을 크게 짓는 등 집을 매우 화려하게 꾸몄으며, 시중드는 첩 수십 명이 비단 치마를 입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능하였다. 박원종은 정사룡과 황여헌을 재주 있는 선비라 하여 매우 극진히 대접하였다. 진수성찬을 차리고 풍악을 울리며 술을 권하고, 시중드는 여종들에게 각자 시 한 수씩을 짓게 하여 잔뜩 취하고 한껏 즐긴 뒤에야 흩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반드시 박원종의 생활 가운데 한 가지를 본받겠다"고 다짐하였다. 정사룡은 만년에 음식을 사치스럽게 들었고, 황여헌은 큰 집을 짓고 여종에게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게 하였는데, 이는 모두 박원종을 흉내 낸 것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선비가 하는 일이 어찌 나라에 공을 세운 귀족과 같을 수 있겠는가.
정광필의 안목 — 황헌의 관상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광필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사람을 천거하거나 임용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용모를 살펴보았다. 그래서 그가 천거한 사람 가운데 높은 벼슬에 오른 이가 많았다.
정승 황헌이 막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서 정광필의 집을 찾아왔다. 정광필은 정성껏 음식을 대접하였다. 황헌이 하직 인사를 하자 일어나 전송하면서 그의 등을 한참 바라보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자제들이 이상히 여겨 까닭을 묻자 정광필이 말했다. "저 사람은 얼굴이 넉넉하면서도 수려하니 반드시 재상의 지위에 오를 것이다. 그런데 마시고 먹는 모습을 보니 반드시 빠르게 승진했다가 일찍 물러날 것이고, 등이 얼굴만 못하니 마땅히 자손이 없을 것이다." 황헌은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등용되었고, 막 정승이 되자마자 관직을 박탈당했으며 또 자식도 없었으니, 모두 정광필의 예언대로 되었다.
정광필의 식사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광필은 식사 때마다 자신이 먹고 남은 음식을 좌의정 정유길과 우의정 정지연에게만 먹게 하고 다른 자제들에게는 주지 않았다.
이헌국(완성)은 정광필의 먼 친척뻘 손자였는데, 어렸을 때 문안을 드리러 갔다. 마침 정광필이 식사 중이었고 정유길과 정지연 두 사람은 마침 집에 없었다. 식사를 마치자 정광필은 이헌국을 한참 바라보더니 여종을 불러 남은 음식을 걷어다 주게 하니, 이헌국이 그것을 먹고 물러나왔다. 여종들은 서로 눈짓을 하며 웃으면서 "저분도 정승이 될 상인가?" 하였다. 훗날 이헌국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고, 충직함으로 선조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여든 살에 세상을 떠났다. 정광필이 그의 관상을 보고 대개 짐작했던 것이다.
정사룡의 젊은 날과 만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사룡(호음)은 젊었을 때 행동을 조심하지 않아 정광필에게 칭찬받지 못하였고, 선비들도 이를 단점으로 여겨 지방으로 내쳐졌다. 기묘년(1519년)에 사화가 일어나자 그를 불러들여 사간으로 임명하니,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며 "저 사람이 오래 분한 마음을 품고 있었으니 반드시 분풀이를 하려 들 것이다" 하였다. 정광필이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내 조카가 비록 몸가짐은 조심스럽지 못했으나 결코 남을 해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정사룡이 사간이 되고 나서는 과연 스스로 사양하며 당시의 논의에 참여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이를 보고 정사룡을 훌륭하게 여겼고 정광필이 사람을 잘 알아본다고 칭찬하였다.
정사룡은 살림을 잘 꾸려 부자가 되자 자신의 생활은 왕족이나 다름없이 누렸으나, 성품이 인색하여 손님을 잘 대접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선비들 가운데 정사룡의 집 음식을 먹어 본 사람이 없었으나, 유독 어득강(관포)이 찾아오면 반드시 많은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정씨 집의 식객"이라 불렀다.
만년에는 서울 동쪽 교외로 물러나 살았는데, 임억령(석천), 신잠(원량)과 시와 술로 어울리며 맑은 복을 누린 것이 이십여 년이었다. 비록 세상을 구제한 공은 별로 없었으나 그 풍류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아, 마을 사람들 가운데는 그의 자를 따서 자신의 자로 삼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박상의 의리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박상(눌재)은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다. 기묘년(1519년)에 충주목사로 있었다. 조광조(정암)가 사화를 당하자 당시 선비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박상이 이들을 모두 돌보아 주었으므로 김세필(성동), 이자(음애), 이연경(탄수) 같은 사람들이 다 그에게 가서 의지하였다.
박상이 하루는 여주에 갔다가 김안국(모재)과 신광한(기재)이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는, 여주목사 이희보(안분당)를 찾아가 쌀 백 섬을 빌려 두 사람을 구제하였다. 충주로 돌아와서는 서둘러 쌀을 배에 실어 빌린 만큼을 이희보에게 갚았다. 옛 선배들은 벗들 사이에서 대개 이러하였다.
박수량과 김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박수량은 강릉 사람으로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갑자년(1504년) 사마시(진사시)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응시하지 못하였고, 현량으로 뽑혔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훗날 용궁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두어 달 만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김정(충암)이 금강산을 유람하는 길에 그의 집에 들렀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일꾼들 사이에 끼어 손수 새끼를 꼬고 있었으므로, 김정은 처음에 그가 주인인 줄 몰랐다. 마침내 풀을 깔고 앉아 술을 마셨는데, 질그릇에 담은 술과 나물 안주뿐이었다. 이틀 밤을 묵으며 한껏 놀다가 떠나면서, 헤어질 때 진달래나무 지팡이를 선물로 주며 이런 시를 지어 주었다.
높디높은 벼랑에서 늦가을 서리와 눈을 겪은 가지라네 가져와 그대에게 주노니 오래도록 이 마음 변치 말게나
소학과 근사록의 수난 — 나식과 부친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기묘년에 선비들이 화를 당한 뒤로는 집집마다 《소학》과 《근사록》을 입에 담기를 꺼렸고 자제들에게 배우지 못하게 금하였다.
나의 선친께서는 젊었을 때 나식(장음)에게 배우셨다. 한번은 외가에 갔다가 낡은 함 속에서 좀먹고 다 떨어진 《소학》 네 권을 보았다. 펴서 읽어 보고는 학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그중 첫째 권을 소매 속에 넣고 나식에게 가서 보여 드리니, 나식이 깜짝 놀라며 "네가 어디서 이런 귀신 붙은 물건을 얻었느냐?" 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사화로 죽은 옛 어진 이들의 불운을 슬퍼하였다. 선친이 이 책을 배우기를 청하니 나식이 크게 칭찬하며 《소학》과 《근사록》을 가르쳐 주었으나, 이 일을 남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
나식의 인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식은 타고난 재주가 총명하고 큰 절개가 있었다. 그의 문장은 매우 고상하고 옛 풍취가 있었으며, 과거에 응시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두 아우 나숙과 나익을 가르쳐 모두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최수성(원정)은 뜻이 높아 남을 좀처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나식을 보고는 감동하여 이렇게 칭찬하였다. "압록강 동쪽에는 나생 한 사람뿐이다."
부친과 이여 교리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선친은 젊었을 때 교리 이여에게서 《주역》을 배우셨다. 이여는 진천 사람으로 그의 형 이치와 함께 성리학에 밝았다. 이여는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오랫동안 곁에서 모시며 아침저녁으로 경계하고 강독하여 도움을 준 것이 매우 많았다.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인종이 친히 제문을 지어 궁의 신하를 보내 조문하였다.
이치도 높은 벼슬에는 이르지 못하고 박사로 세상을 떠났는데, 진천의 선비들이 두 형제를 위하여 서원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선친이 살아 계실 때는 매번 주선하여 제사가 끊이지 않도록 하셨다. 지금까지도 이 고장 선비들이 잇달아 과거에 급제하고 고을 풍속도 좋은 것은 모두 이여의 가르침 덕분이다.
조광조 이후의 성리학 — 김안국의 역할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광조가 화를 당한 뒤로는 이치와 성품의 근본을 탐구하는 성리학에 대해 감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김안국(모재)만은 여주에 은거하며 선비를 만날 때마다 성현의 일을 인용하여 논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언적(회재)은 영남에서 여주를 오가며 반드시 그에게 질문하고 논쟁하였으며, 이황(퇴계)도 단양군수로 부임하는 길에 그의 집에 들렀을 때 비로소 성리학의 근원을 들었다. 김안국은 이처럼 두 분에게도 길을 열어 준 공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있다. 나의 선친은 젊어서부터 김안국에게 배웠으므로 이 일을 두루 알고 계셨다. 대체로 김안국은 평소 문장가로만 칭송받았고 성품도 위세를 부리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그저 문인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김안국의 사람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안국은 성품이 경박하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사람을 사랑하였다. 처음에 김안로와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김안로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때마다 나무랐다. 김안로도 그의 솔직함을 알았으므로 화내지 않았다.
김안로가 정권을 잡자 김안국 형제를 가장 먼저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김안로가 이불을 가지고 그의 집에 가서 잤는데, 김안국이 베개를 맞대고 누워 자면서 경계하는 말을 너무도 간절하게 하니, 옆에 누워 있던 김정국(사재)이 그의 발을 밟으며 그만 말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안국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너도 안 자고 있었느냐. 내 다리에 기대지 말라" 하니, 김정국은 뜨끔하여 다시는 말리지 못하였다.
훗날 김안로가 권좌에서 물러나 죽임을 당했을 때, 김안국이 김정국에게 말했다. "안로가 간사하다는 것을 누군들 모르겠는가마는, 우리 형제가 이미 그와 깊이 사귀었으니 이제 와서 그의 단점을 말하지는 말자." 그러고는 매번 김안로의 가족들에게 음식을 보내 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김안국과 성세창의 호당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안국이 우의정 성세창과 함께 독서당에서 휴가를 받아 글을 읽을 때, 둘이 함께 숙직을 하게 되었다. 성세창은 본래 집이 넉넉하였으므로 이부자리를 모두 비단으로 만들어 매우 화려했고, 김안국은 본래 가난한 데다 성품도 사치를 좋아하지 않아 베 이불에 나무 베개를 베고 자니 가난한 선비처럼 쓸쓸하였다. 성세창은 몹시 부끄러워 밤새 잠을 설치고는, 날이 밝자 집으로 돌아가 부인에게 말했다. "국경(김안국의 자)이 차라리 내 사치를 비웃어 주기라도 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러고는 서둘러 검소한 것으로 바꾸게 한 뒤에야 한 방에서 함께 잤다고 한다.
서경덕과 부친의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선친은 서경덕(화담) 선생에게서 가장 오래 배우셨다. 한번은 7월에 선생의 집을 찾아갔더니, 화담 별장으로 떠난 지 이미 엿새가 되었다고 하므로 곧바로 그곳으로 갔는데, 가을 장마로 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날이 저물어서야 여울물이 조금 줄어 겨우 건너서 화담에 이르니, 선생은 거문고를 타며 큰 소리로 시를 읊조리고 계셨다.
선친이 저녁밥을 짓겠다고 청하니 선생이 말했다. "나도 아직 먹지 않았으니 내 몫까지 함께 지어라." 하인이 부엌에 들어가 보니 이끼가 솥 안에 가득 끼어 있었다. 선친이 이상히 여겨 까닭을 묻자 선생이 말했다. "물이 막혀 엿새 동안 집사람이 오지 못했으니 내가 오랫동안 밥을 짓지 못했다. 그러니 분명 솥에 이끼가 끼었을 것이다." 그 얼굴을 살펴보니 조금도 굶주린 기색이 없었다. 이는 옛날 증자가 이레를 굶고서도 신을 끌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마치 악기가 울리는 듯했다는 이야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유담년과 황형 — 삼포왜란 방어사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경오년(1510년) 삼포에서 왜적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담년이 병조판서로 있었다. 중종 임금이 여러 대신들을 불러 왜적을 정벌할 일을 의논하려 할 때, 삼정승이 먼저 유담년에게 물었다. "방어사로 삼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 유담년이 즉시 대답했다. "한쪽 길은 제가 가서 막겠고, 다른 한쪽 길은 따로 막을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삼정승이 누구냐고 묻자 유담년이 말했다. "말씀드리면 반드시 다투어 헐뜯을 것이니, 임금께 직접 아뢰겠습니다."
임금을 뵙는 자리에서 과연 임금이 "누구를 장수로 삼을 만한가?" 하고 물으니, 유담년이 대답했다. "왼쪽 길은 제가 맡겠습니다만, 오른쪽 길에 쓸 만한 사람이 있기는 해도 사람들이 반드시 안 된다고 할 것이니, 전하께서 뭇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등용해 주신다면 제가 응당 천거하겠지만, 그렇지 않으시다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임금이 뭇사람의 의견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허락하니, 유담년이 그제야 말했다. "전에 승지를 지낸 황형이 바로 그 적임자입니다."
그러자 주위에서 과연 반대하였다. "그 사람은 예전에 자기 장인을 매질하여 버림을 받은 사람이니 다시 등용해서는 안 됩니다." 유담년이 말했다. "지금은 설령 옛사람 효기나 미생처럼 훌륭한 행실을 지닌 자라도 전쟁의 승패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니 등용할 수 없습니다. 설령 황형에게 그런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 상황이 매우 급하니 다른 것을 따질 때가 아닌 데다가, 사실 그는 그런 나쁜 짓을 한 일이 없습니다. 사소한 흠 하나를 이유로 나라를 지킬 만한 인재를 버리는 것은 예로부터 옳지 않게 여겨졌습니다." 성희안(창산)도 유담년의 의견에 힘써 찬동하였으므로, 마침내 황형과 유담년이 각각 좌방어사와 우방어사로 임명되어 출정해 왜적을 무찔렀다. 결국 나라가 이 일로 무사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유담년의 공이었다.
(용어) 효기는 은나라 고종의 태자로,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계모의 참소로 쫓겨나 죽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미생은 춘추 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여인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물이 불어나는 다리 밑에서 끝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죽었다는 이야기로 전해진다.
황형과 강화 연미정의 소나무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황형(장무공)의 밭과 집은 강화 연미정에 있었다. 그가 일찍이 소나무 수천 그루를 심으니 사람들이 "공은 이미 늙었는데 소나무를 이렇게 많이 심어서 무엇하시렵니까?" 하고 물었다. 황형이 답했다. "훗날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그 뒤 임진년(1592년)에 창의사 김천일과 전라병사 최원이 강화도에 들어와 지키면서 배와 진영의 목책, 방패, 각종 기계를 만들 때 모두 이 소나무를 가져다 썼다. 이때 쓰고 남은 것은 정유년(1597년)에 명나라 경리 양호가 임금을 모시고 강화도로 가려 할 때, 관아에서 베어다가 임시 행궁을 짓고 성책을 세우는 데 썼다. 이때 와서야 사람들은 황형이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음을 알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김인후의 인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인후(하서)는 인품이 매우 높고 학문과 문장이 모두 뛰어나 스스로 터득한 바가 있었으나,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인종은 세자로 있을 때부터 그를 인재로 여겼으므로 왕위에 오르자 맨 먼저 불러들였는데, 그가 서울에 도착하자 인종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고향에서는 그의 덕에 감화되어 선량해진 사람이 매우 많았다.
양응정(송천)은 기개가 높기로 당대에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김인후를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눌려 그의 말을 공손히 받들 뿐 감히 한마디도 못 하였다. 김인후 앞에서 물러나와서는 반드시 여러 날 동안 감탄하며 말하였다. "후지(김인후의 자)는 지금 세상의 안자(공자의 제자 안회)로다."
송순의 기지 — 서소문과 남대문, 그리고 향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이조참판 송순(삼재)은 재직할 때 찬성 허자와 뜻을 합쳐 어진 이들을 천거하다가 권세 있는 신하의 미움을 받아 지방으로 오 년이나 유배되었다. 이후로는 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였다.
송순에게는 가깝게 지내는 서얼 숙부가 있었는데, 그가 매번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지방 출신으로 재상이 된 사람 가운데, 나는 서소문으로 떠나는 사람은 보았어도 남대문으로 떠나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이는 대개 서울에 와서 벼슬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서울을 떠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송순은 이 말을 늘 듣기 싫어하였다.
그 뒤 송순이 개성유수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 숙부가 강가에 나와 그를 전송하였다. 송순이 술잔을 잡고 말했다. "저는 이제 남대문으로 나왔습니다."
요즘 지방에는 향안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친가와 외가 양쪽 모두 사대부 집안 출신인 사람만을 가려 이름을 올린다. 외가나 아내의 집안이 다른 고을 출신이거나 이름난 가문이 아니면, 아무리 높은 벼슬을 지냈어도 여기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 그래서 여기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홍문록이나 이조의 천거 명단에 오르는 것보다도 어렵다고들 한다.
송순은 담양 사람이었다. 외가가 남원에서 왔고 뚜렷하게 이름난 벼슬을 한 이가 없었으므로, 그 역시 향안에 오를 수 없었다. 송순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 휴가를 얻어 성묘를 갔다가 고을 사람들이 모두 향청에 모여 있다는 말을 들었다. 즉시 음식을 성대하게 장만하여 수십 명의 짐꾼을 시켜 향청으로 보내고, 먼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시켜 향청의 어른들에게 이렇게 전하게 하였다. "대사헌께서 큰 잔치 음식을 보내어 마을의 원로와 학자들을 대접하고자 하시니, 이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향청의 어른들이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곧 음식을 차려 대접받는데, 한 노인이 "주인을 불러 우리와 함께 자리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니 모두 그러자고 하였다. 사람을 보내 청하였으나 사양하며 오지 않다가, 거듭 청한 뒤에야 왔다. 와서 좌우를 둘러보다가, 일찍이 훈도를 지낸 늙은 선비 가운데 자신과 나이는 같으나 생일이 앞선 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얼른 그 다음 자리로 가서 앉았다. 술이 거나해지자 향청의 어른들이 말했다. "대사헌이 이미 이 모임에 참석하였으니 향안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는 곧 향안을 가져다 그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송순의 재빠르고 총명함이 이와 같았다.
김인후와 유희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인후(하서)가 급제하기 전, 성균관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전염병에 걸려 위독하니 사람들이 감히 그를 돌보지 못하였다. 유희춘(미암)이 당시 성균관의 관원으로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아깝게 여겨 자기 집으로 옮겨 밤낮으로 돌보아 끝내 다시 일어나게 하였고, 김인후는 이를 늘 감사하게 여겼다. 훗날 유희춘이 종성으로 유배되었을 때,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매우 어리석었다. 김인후가 그를 사위로 맞으려 하니 집안사람들이 모두 반대하였으나 듣지 않고 끝내 혼인을 이루었으니, 사람들은 김인후와 유희춘 두 사람을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유희춘의 내력과 학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유희춘(미암)은 최부(금남)의 외손자이다. 최부는 성종과 연산군 때에 큰 명망이 있었고 문장에도 매우 능하였는데, 무오년(1498년)의 사화 때 죽임을 당하였다.
유희춘은 형 유성춘과 더불어 당대에 명망이 높았다. 유성춘은 벼슬이 헌납에 이르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유희춘은 정언으로 있을 때 을사년(1545년)의 변고를 만나 처음에는 제주로 유배되었으나, 고향과 가깝다 하여 다시 종성으로 옮겨졌다. 총명함이 남달라 읽은 책이라면 외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유배지에 있을 때 《속몽구》 네 권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모두 그가 암송하고 있던 것을 바탕으로 지은 것이다.
선조 임금 때 발탁되어 경연에 들어갔는데, 임금에게 도움을 준 공이 매우 많았다. 임금이 장차 그를 중히 쓰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임금이 몹시 슬퍼하며 그를 찬성에 추증하고 그 아들을 등용하였다.
유희춘의 학문과 성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두 형은 젊은 시절 유희춘에게서 배웠다. 그는 학문이 매우 정밀하고 행실이 지극히 독실하였으며, 배우는 사람을 대할 때마다 반드시 진실하고 밝은 학문을 자세히 가르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품이 매우 세상 물정에 어두워 집안일을 다스릴 줄 몰랐고, 옷과 버선이 때 묻고 해어져도 부인이 새것으로 바꿔 주지 않으면 스스로 갖춰 입을 줄을 몰랐다. 거처하는 방은 책을 펴 놓은 책상 외에는 먼지와 때가 끼어 더러워도 쓸고 닦지 않았다. 남을 만나 세상일을 이야기할 때는 전혀 아는 것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이야기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고 앎을 지극히 하는 공부,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이르면 뛰어난 견해와 해박한 지식이 다른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어 세밀히 분석하니 통쾌하고 명백하여, 듣는 사람이 정신을 쏟느라 피곤한 줄도 몰랐다.
대체로 이러하였으므로 경연에서 하는 말이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배운 바를 실천하게 함으로써 임금의 덕을 도왔던 것이다. 선조 초년의 정사 가운데 맑고 밝다고 일컬을 만한 것은 모두 유희춘이 잘 이끈 힘이었다고 한다.
유희춘의 회고 — 백인걸, 송인수와 세 차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유희춘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젊어서 남평현감으로 있을 때 좌참찬 백인걸은 무장현감이었다. 마침 참판 송인수가 관찰사로 부임하니 세 사람이 서로 뜻이 맞아 매우 즐겁게 지냈다.
송인수는 부안의 기생을 사랑하였는데, 정을 통하지는 않고 다만 마음으로 아껴 수레에 태워 데리고 다니게 하였다. 늘 편지를 보내 무장현감과 남평현감을 불렀고, 놀러 다닐 때마다 늘 함께 다니니, 고을 사람들이 이 세 사람을 "세 차비"라 불렀다고 한다.
송인수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여량역에서 그를 전별하는데 두 사람과 그 기생이 따라왔다. 송인수가 기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이 사람의 뛰어난 지혜를 아껴 일 년 동안이나 자리를 같이하면서도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은 것은, 내가 그것 때문에 몸을 상할까 염려해서였네." 그러자 기생이 즉시 앞산에 있는 여러 무덤을 가리키며 말했다. "과연 그러하십니다. 저기 보이는 저 많은 무덤들이 모두 저의 낭군이었습니다." 이는 그를 원망하며 한 말이었으므로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크게 웃었다. 그 기생은 훗날에도 늘 송인수의 일을 떠올리며 감탄하고 눈물까지 흘리곤 하였다.
권벽의 침묵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권벽(습재)은 나의 선친과 가장 가깝게 지낸 벗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안명세, 윤결과 함께 공부하였는데 서로 뜻이 맞아 매우 즐겁게 지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거리낌 없이 말하다가 화를 입어 죽은 뒤로, 권벽은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집에서도 남과 담소를 나누지 않았고 하루 종일 책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최렴과 최락 형제는 이웃에 사는 젊은이들로서 권벽에게 배운 지 거의 일 년이 되도록 그들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고, 그들이 진사시에 합격한 뒤에야 비로소 이름을 알 정도였다. 이 때문에 별로 높은 벼슬은 하지 못하였으나 일흔넷까지 살았다.
내가 어릴 때 권벽이 나의 선친을 뵈러 온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주인이 묻는 말에나 대답할 뿐,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그가 자신의 뜻을 철저히 지킨 것이 이와 같았다.
(용어) 안명세는 사관으로 있으면서 을사사화의 진상을 사초에 그대로 적어 넣었다가 이 일이 새어 나가 사형을 당한 인물이다. 윤결은 벗의 자리에서 안명세의 죽음이 억울하다고 말했다가 이를 고발당해 죽임을 당하였다.
윤결의 옥사와 부친의 위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윤결(자는 장원)의 옥사에서, 그의 진술 가운데 나의 선친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선친은 당시 병조의 낭관으로 관청에서 숙직하고 계셨다. 죄를 다스리는 관리가 선친을 문초하기를 청하자, 대사간으로 자리에 있던 진복창이 일어나 엎드리며 아뢰었다. "허모(허균의 아버지 허엽)는 경솔한 사람이 아니니 그럴 리가 없음을 제가 보증합니다. 지금 그를 잡아다 문초한다면 일이 더욱 커질까 염려되니 문제 삼지 마소서." 이렇게 두세 번이나 강경하게 주장하니, 문정왕후도 옳게 여겨 문초하지 않았다.
선친께서는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정원에 들어가니 승지들이 모두 축하하였으나, 그래도 영문을 모르다가 물러나 병조로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다. 승지들이 감탄하며 말했다. "화를 겨우 면했는데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으니 참으로 강직한 사람이다." 선친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까닭 없이 받는 칭찬이다"라고 하셨다.
진복창은 나의 선친과 평소 전혀 가깝게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는데도 선뜻 나서서 구해 주었으니, 이 또한 운명이라 할 만하다. 이런 일이 있었기에 나의 두 형은 진복창의 아들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후하게 대하곤 하였다.
임억령의 절개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임억령(석천)은 기개가 뛰어나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뒤로도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아 여러 차례 이름난 청요직(학식과 인망을 갖춘 사람만 맡을 수 있다고 여겨지던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지방 벼슬에 나가 있을 때가 많았다.
그의 아우 임백령이 을사년(1545년)의 공신에 들면서 그 권세가 한 시대를 뒤흔들게 되자, 당시 승지로 있던 임억령은 서둘러 벼슬을 버리고 서울을 떠났다. 임백령이 굳이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한강을 건너면서 이런 시를 지어 주었다.
"잘 있거라, 한강물아 고요히 흐르며 물결을 일으키지 마라"
그 뒤로 다시는 서울에 오지 않으니, 선비들의 여론이 그를 옳게 여겼다.
임백령이 죽은 뒤 만년에야 서울에 왔고, 스스로 청하여 강원도관찰사로 나가서는 바다와 산을 두루 구경하며 많은 글을 지었으므로 지금까지도 그곳 산수를 빛내고 있다. 그의 정치와 교화도 맑고 평온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기대승과 호남 인재의 성쇠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기대승(고봉)은 호남 선비들 가운데 걸출한 인물이었다. 학문이 높고 깊어 이황(문순공)이 매우 칭찬하였다.
선조 임금의 신임을 받았으나 제대로 쓰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죽은 뒤로는 호남 사람으로 조정에 등용된 이가 한 명도 없었다. 기대승이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호남 선비들의 기풍이 점차 해이해지고 있으니, 수십 년이 지나면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도 많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와서 보니 그 말이 과연 맞아떨어졌다. 그는 아마도 그 조짐을 미리 내다보았던 것 같다.
중종 임금 시절에는 호남 출신의 뛰어난 인재가 매우 많았다. 박상(눌재) 형제, 사인 최산두, 유희춘(미암) 형제, 교리 양팽손, 제학 나세찬, 목사 임형수, 김인후(하서), 임억령(석천), 송순(삼재), 찬성 오겸 같은 이들이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졌다.
그 뒤로도 박순(사암), 이항(일재), 양응정(송천), 기대승(고봉), 고경명(제봉) 같은 이들이 학문이나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재능과 행실로 당대에 이름을 떨치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도 점점 줄어드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나는 여러 해 동안 호남을 오가며 그곳의 풍습을 살펴보았는데, 대체로 후학을 이끌어 줄 큰 스승이 없는 데다, 사람들의 성품 또한 대체로 경박하고 자만하여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한다. 게다가 먹고사는 형편이 넉넉한 까닭에 모두들 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릴 뿐 앞일을 도모하는 사람이 없다. 이 세 가지가 학문을 게을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으니, 탄식할 일이다.
대신과 부모 — 성희안과 홍섬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라를 세운 이래로 대신 가운데 부모가 살아 계신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성희안(창산)의 경우는 모친이 살아 계셨으나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그 밖에는 기억할 만한 예가 아득하여 떠오르지 않는다. 선조 초년에 영의정 홍섬이 모친상을 당하자, 임금이 명하여 대신이 상을 당했을 때 상을 돌보고 부의를 보내는 예를 조사하게 하였으나 전례를 찾을 수 없어, 다만 관에서 대신의 예에 준하여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부의하게 하였다. 그 후 노수신(소재) 정승이 상을 당했을 때도 이 예를 따랐다.
이덕형의 이른 출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지금의 영의정 이덕형(한음)은 서른여덟 살에 정승이 되었으니, 이는 나라를 세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의 부친도 아직 건강하게 살아 계셨다. 이덕형이 정승으로 있을 때 그의 부친은 수안군수로 있었는데, 번거로운 일들을 잘 다스리며 게으르지 않았다.
이덕형이 지금 임금 초년에 임금의 세자 책봉을 명나라에 주청하는 일로 명나라에 다녀와 윤허를 받아 오자, 임금이 그의 부친을 특별히 당상관 품계로 올려 판결사(장례원의 우두머리 벼슬)에 제수하니, 당시 사람들이 아름다운 일이라 하였다.
홍섬의 삼종 정승과 궤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홍섬(인재)의 모친은 정승 송질의 딸이자 영의정 김언필의 아내였다. 이처럼 친정아버지, 남편, 아들이 모두 정승인 경우는 예전에 없던 일인 데다 나이도 아흔이었다. 그 부인이 노년을 보내던 무렵 홍섬은 일흔 살로 궤장을 하사받았으니, 이는 더욱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그리하여 노수신(소재)이 그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이런 시를 지었다.
"친정아버지와 남편과 아들, 셋 모두 정승 집안 문을 벗어나지 않은 것을 지금에야 처음으로 보게 되었네 관아에서 다시 지팡이를 짚으시고 집안에서는 다시 색동옷을 입으시네"
이는 사실을 잘 담아낸 시였다.
근래에 한집안에서 정승이 나온 경우로는, 이산해(아계)와 그의 매부인 좌의정 김응남, 그리고 사위인 이덕형(한음)뿐이다.
(용어) 마지막 시구의 "색동옷"은 춘추 시대 초나라의 효자 노래자가 일흔 살에도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부려 늙은 부모를 즐겁게 해 드렸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나이 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 집안의 정승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광필(문익공) 집안에서 세 정승이 나온 것도 세상에 드문 일이다. 이행(문정공)과 그의 형 이기, 심연원(충혜공)과 그의 아우 심통원도 한집안 형제가 정승이 된 경우다. 심수경(청천)과 그의 조부 심정은 할아버지와 손자가 정승이 된 경우다. 그러나 앞서 든 이행 이하의 경우는 모두 그 이름과 행적에 좋고 나쁨의 구분이 뚜렷하니 이상한 일이다. 무과와 정승 집안에 있었던 훌륭한 일 가운데 이미 성현의 《용재총화》에 실린 것은 다시 싣지 않는다.
부자·형제 정승의 여러 경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한집안에서 부자와 형제가 정승이 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중에서도 허종·허침 형제만은 흠잡을 데가 없다. 정창손과 그의 아들 정괄은 그리 내세울 만한 것이 없고, 그의 사위 김질도 정승이었으나 이는 성삼문의 거사를 고발한 공으로 발탁된 것이다.
심온과 그의 아들 심회, 윤사흔·윤사분 형제와 그들의 매부 성봉조, 신승선과 그의 아들 신수근 등은 모두 왕실과 혼인한 덕으로 정승이 된 것이니 특별히 칠 것이 못 된다. 부자가 이어서 대제학을 지낸 것은 오직 성현(문대공)과 그의 아들 성세창뿐이다.
유성룡과 유영경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유성룡(서애)과 유영경은 첩의 동서 간으로서 모두 영의정이 되었다. 유성룡은 배척받아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가 세상을 떠났고, 유영경은 죄를 지어 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도 같은 유씨이고 벼슬도 같은 영의정이었지만, 그 이름과 행적에는 이토록 좋고 나쁨의 구분이 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채수 집안의 장원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채수(인천군)는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그의 사위인 김안로(이숙)와 이자(차야)도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하루는 장원 급제자들만의 모임인 용두회를 여는데, 채수의 또 다른 사위인 김감(연창부원군)이 여기에 참여하려 하자 장원 급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김감이 부인을 보내 이렇게 청하였다. "제 사위는 서른다섯 살에 대제학이 되었으니, 이 사실로 모임에 참석시켜 주시기를 청합니다." 채수가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은 반드시 참석시켜야겠구나." 그러고는 곧 불러서 함께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문형을 지낸 나이와 가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이덕형(한음)은 서른한 살에 대제학의 소임(문형)을 맡았으니 가장 젊은 나이에 문형을 지낸 경우이고, 김감(연창)은 서른다섯 살이었으니 그다음이다. 이 밖에는 이행(용재)이 마흔 살에 문형을 맡았다.
가장 많은 문형을 배출한 집안으로는 권근(길창)의 집안이 으뜸이다. 나라를 세운 초기에 권근도 문형의 일을 맡았으며, 그의 아들 권제(지재)는 대제학이 되었고, 외손 서거정과 손자사위 최항도 나란히 오랫동안 문형을 맡았다. 그 밖에 신숙주(문충공)와 그의 손자 신용개, 신광한이 모두 문형을 맡았으니, 이 역시 세상에 특히 드문 일이다.
여러 번 장원한 사람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한 집안에서 정승이 나온 것과 과거에 여러 번 장원한 것에 대해서는 성현(용재)이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근래에 여러 차례 장원 급제한 사람으로는, 대사헌 권홍이 문과와 중시에서 장원하였고, 양응정(송천)은 생원시와 중시에서 장원하였으며, 진사시와 문과에서 연달아 장원한 사람으로는 김홍도와 강신이 있다.
율곡 선생은 한 해에 생원시와 문과에서 잇달아 장원하였다. 초시에서는 세 번의 시험을 내리 장원하였고, 회시에서도 장원하여 한 해에 여섯 번이나 장원하였으니 예전에 없던 일이다.
문형을 맡은 사람 가운데는 과거에 장원한 이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정인지(하동부원군)가 초시의 세 시험 모두에서 장원한 것이 가장 특별하고, 그다음이 율곡의 두 차례 장원이다.
변계량(춘정), 정사룡(호음)은 중시에서 장원하였고, 최영성, 김안로(이숙), 정유길(임당), 박순(사암), 노수신(소재), 유근(서경)은 문과에서 장원하였다. 판서 박충구, 홍성민(익성군), 이호민(연릉부원군)은 생원시에서 장원한 반면, 홍섬(인재)은 생원시에서 꼴찌를 하였으니 이 또한 전에 없던 일이다.
(용어) 조선의 과거 시험은 크게 지방에서 치르는 "초시", 서울에서 다시 치르는 "회시(복시)", 임금 앞에서 순위를 정하는 "전시"의 단계를 거쳤다. "중시"는 이미 벼슬하고 있는 문신들을 대상으로 다시 치르던 시험이다.
선조 말년의 정승과 대제학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조 임금 말년까지 대광보국숭록대부의 품계로 살아 있던 사람은 이산해, 유성룡, 심수경, 최흥원, 윤두수, 김응남, 정탁,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이렇게 모두 열 사람이었다. 정탁과 심수경(청천)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이헌국과 김명원이 정승이 되었고, 최흥원이 세상을 떠나자 윤승훈이 정승이 되었다.
그 뒤 윤두수가 세상을 떠나자 유영경이 그 자리를 채웠고, 정탁이 세상을 떠나자 허욱이 있었으며, 유성룡이 세상을 떠나자 한응인, 기자헌, 심희수가 차례로 정승이 되어 그때마다 열 명의 수를 채웠으니, 이 역시 근래에 없던 일이다.
선조 말년에 대제학도 열 사람이었으니, 곧 이산해, 유성룡, 황정욱, 이덕형, 윤근수, 이항복, 심희수, 이정귀, 이호민, 유근이다. 이 가운데 다섯 명이 정승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하고도 대단한 일이었으며, 일곱 사람이 부원군에 봉해진 것도 기이한 일이다.
선조 말년의 지제교와 홍문록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조 말년에는 지제교가 일흔두 명, 홍문록에 오른 사람이 여든네 명이나 되었으니, 나라를 세운 이래 없던 일이다. 그런데도 나라의 중요한 글을 지어야 할 때면 언제나 인재가 없다고 걱정하였다. 그래서 이조에서 홍문관 관원을 추천할 때도 매번 적격자가 없다고 하여, 지방관으로 나가 있는 사람이나 친인척 관계로 피해야 할 사람, 심지어 조사를 받던 사람까지 후보로 올려 임금께 아뢰곤 하였으니,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이헌국의 안목과 사양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이헌국(완성)은 성품이 충직하여 임금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피하거나 숨기지 않았으나, 선조 임금은 늘 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임진왜란 때 임금이 개성에 이르러 두 정승을 해임하였는데, 이헌국은 당시 대사간으로서 그 자리에 있었다. 임금이 막 새 정승을 뽑으려고 몸소 재상들의 명단을 펼쳐 놓고 이름을 짚어 가며 이헌국에게 물었다. "정탁은 어떠한가?" 이헌국이 답했다. "정탁은 비록 청렴하고 신중하나 세상을 구제할 만한 재주는 없습니다. 그는 옛사람이 말한 대로 '높은 다락에 묶어 놓고 태평한 시절을 기다리게 할' 사람입니다." 다시 물었다. "최황은 어떠한가?" 이헌국이 답했다. "강직한 면은 있지만 성품이 편협하니 큰일을 맡길 수 없습니다." 이어 유홍과 황정욱을 물었으나 모두 적당하지 않다고 답하다가, 임금이 최흥원과 윤두수 두 사람의 이름을 대니 이헌국이 합당하다고 하여 마침내 두 사람이 등용되었다. 사람들은 이 일을 듣고 모두 하기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하였다.
이헌국은 무술년과 기해년 사이에 잇달아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그 뒤 정승을 임명할 때 특별히 그를 발탁하며 임금이 말했다. "나는 이조판서를 사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이 사람은 두 번이나 물러났으니 정승으로 삼을 만하다." 이 말은 내시 이봉정이 직접 임금의 말을 듣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전한 것이라고 한다.
(용어) "높은 다락에 묶어 놓고 태평한 시절을 기다리게 한다"는 말은 전혀 쓸모가 없는 사람을 비유하는 옛말로, 중국 진나라 때 유익이라는 사람이 이름만 높고 실속 없는 이들을 두고 "천하가 태평해진 다음에야 이런 무리에게 일을 맡길지 의논할 수 있다"고 말한 데서 나왔다.
윤두수의 결단 — 의주행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평양에서 한창 왜적과 싸우고 있을 때, 임금이 윤두수(오음)에게 성을 지킬 것인지 버리고 떠날 것인지를 물었다. 윤두수는 그때마다 떠나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였는데, 수십 번을 물어도 대답은 늘 같았다. 그 뒤 영변에 이르자 조정의 의논이 갈라져 한쪽은 북쪽으로 가자 하고 한쪽은 강계로 가자고 하였으나, 윤두수 홀로 의주로 가자는 계책을 고집하였다. 끝내 이 결정으로 나라의 운명을 되돌릴 수 있었으니, 이는 모두 그의 힘이었다.
영변에 있을 때 우의정 유홍이 임금을 뵙는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종묘와 사직이 여기 있는데, 전하께서 떠나신다면 대체 어디로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면서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이 잘못임을 힘써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유홍은 곧바로 하직하고 세자가 있는 곳으로 가 버렸다.
신잡의 헛소동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유년(1597년) 봄 왜적이 다시 국경을 침범하자, 임금이 대신들과 의논하며 물었다. "적이 만일 계속 밀고 들어온다면 어가는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한쪽에서 말했다. "영변은 지세가 매우 튼튼하고 명나라와도 가까우니 가서 지킬 만합니다."
신잡(평천)이 예전에 그곳의 절도사를 지냈던 터라 그곳으로 가는 것의 편리한 점과 불편한 점을 모두 아뢰고 군량 저축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끝으로 백관의 수가 많으니 미리 장을 담가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
한준겸(유천)과 남이공(자안)이 홍문관에 숙직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남이공이 말했다. "신공을 '장 담그는 일을 맡은 관리'로 삼아 먼저 영변으로 보내 준비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한준겸이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공만은 결코 보낼 수 없네." 남이공이 까닭을 묻자 한준겸이 답했다. "책력에 신일에는 장을 담그면 안 좋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말에 듣는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날짜를 가리키는 "신일"의 "신"과 신잡의 성씨인 "신"이 소리가 같은 것을 두고 놀린 말이었다.
사관 시절의 회고 — 동정록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유년에 내가 외람되이 사관을 맡아,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들을 모두 조사해 보니, 명나라 장수들이 군사를 부린 일이나 우리나라 장수와 병사들이 세운 공, 그리고 왜적이 침입해 온 일들이 어느 하나도 제대로 밝혀져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기록만 보면 마치 태평하여 전쟁이 없었던 나라처럼 보이니, 이것이 어찌 사관이 제대로 기록한 것이라 하겠는가.
그 뒤 임금이 명하여 명나라가 군사를 보내 우리를 도운 사정을 모아 《동정록》을 편찬해 올리게 하였다. 이에 윤근수(월정)와 신흠(현옹)이 이 일을 총괄하는 당상관을 맡고, 나는 실무를 맡아 책을 엮어 올렸다. 지금 실록청에서도 이 《동정록》을 가져다 실록에 싣고 있으나, 정작 우리나라 자체의 사적에 대해서는 아득하여 한 가지도 기록에 남은 것이 없으니 탄식할 일이다.
선조의 검소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조 임금의 검소한 덕은 여러 임금 가운데서도 뛰어났다. 말년에 병이 들어 궁중 의원이 진찰하러 들어갔는데, 임금은 푸른 베로 만든 요를 깔고 자줏빛 명주 이불을 덮고 계셨으며, 입고 있는 옷도 푸른 명주로 지은 것인데 올이 매우 거칠었다. 약을 올릴 때 쓰는 그릇도 무늬 없는 흰 자기였고, 검소한 안석과 글씨를 쓴 병풍만 있을 뿐 화려한 휘장도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최천건(분음)이 직접 보고 나에게 들려준 것이다.
지제교 시절의 급박했던 일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는 오랫동안 지제교를 맡았는데, 그동안 가장 다급했던 일이 두 번 있었다.
경자년(1600년) 의인왕후의 장례 때, 나는 장생전의 낭관으로서 관을 모시고 능에 가 있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혼령을 모신 장막에 불이 나서, 겨우 관만을 불길에서 구해 내었다. 이 일로 아침 제사 때 위안제를 지내야 했는데, 세자궁에서 나에게 제문을 지어 오라는 명이 내렸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승정원에서 나를 불러 당장 지어 바치라 하였다. 다급하고 당황하여 글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급하게 지은 것이라고 하여 사람들이 오히려 칭찬을 많이 하였으나 나로서는 매우 부끄러웠다.
계묘년(1603년) 봄에는 이덕형(한음)이 묘를 옮기는 일로 사직을 청하였는데, 이준(숙평)이 임금이 이를 처음으로 물리치는 비답을 지었다. 그런데 임금이 이를 마땅치 않게 여겨, 특별히 나를 불러 대궐로 오게 하고는 급히 다시 지어 바치라 하였다. 이준이 이미 매우 잘 지어 놓은 글이 있었는데도 이를 버려두고 따로 지으라는 것인 데다, 묘를 옮기는 일에는 여러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말을 만들어 내기가 몹시 어려웠다. 땀이 흘러 붓을 제대로 댈 수 없을 정도였는데, 겨우 격식을 갖추어 직접 써서 바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임금의 말이란 마땅히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서투른 글로 임금의 칭찬까지 받은 것은 나로서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유영경을 둘러싼 갈등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유영경(전양)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가 어떤 사건으로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리자, 내가 이를 물리치는 비답을 짓게 되었다. 그 비답에서 그의 인품을 칭찬하며 "재주는 온갖 일에 능통하고 기개는 공경들을 압도한다"고 썼더니, 유영경이 이를 보고 나를 미워하였다. 그 뒤로는 사관들과 짜고서 다른 지제교에게 맡겨 글을 짓게 하였는데, 지나치게 칭찬하는 말이 많았다.
훗날 유영경이 몰락하자, 신요와 민경기는 그에게 아첨한 일로 지제교의 벼슬을 박탈당하고 죄를 받아 파직되었다고 한다.
이항복과의 약속 — 공신 녹권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이항복(오성상공)은 나의 글을 좋아하였다. 공신 명부에 이름을 올리기 전에 그가 이렇게 다짐하였다. "내 공신 녹권은 반드시 자네의 글로 받고 싶네." 나도 그러겠다고 승낙하였다. 그 뒤 공신들이 회맹하는 자리가 열렸을 때 나는 마침 지방에 나가 있었으므로, 이미 홍경신(녹문)에게 대신 짓도록 부탁해 놓은 뒤였다. 내가 서울에 도착하자 이항복이 자신의 장인인 도원수 권율의 녹권을 지어 달라 부탁하면서, 예전의 약속을 이것으로 대신 갚으라고 하였다. 내가 지어 보낸 초고의 끝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어 선친이 지내신 정승 자리를 이었고, 길창군에 봉해져 문충공 권근의 복된 터전을 이어받았네." 이항복이 이를 보고 매우 칭찬하였다. 이는 권율이 영의정으로 추증되어 그의 선친 권철과 벼슬이 같아졌고, 권근(양촌)의 후손으로서 봉해진 고을 이름도 서로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이었다.
정원군 녹권의 오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무릇 공신 녹권 안에는 "부모도 함께 벼슬을 추증받았다"는 등의 말을 으레 형식적으로 적어 넣는다. 승지 조정지가 정원군의 녹권을 지으면서 무심코 이 구절을 그대로 써넣어 "부모도 아울러 벼슬을 받았다"는 문구를 넣고 말았다. 임금이 이를 보고 물었다. "정원군의 부모가 언제 벼슬을 받은 일이 있었느냐?" 승정원에서 그를 문책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은 허락하지 않고, 나에게 다시 짓도록 명하였다. 나도 겨우 지어 바쳤으나 임금이 보고는 칭찬하는 말이 지나치다 하여 고쳐서 녹권에 쓰도록 하였다. 이를 보면 선조 임금이 말을 신중히 하려 했던 지극한 뜻을 알 수 있다.
월과 장원과 당상관 승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미년(1607년)에 나는 여름, 가을, 겨울 세 계절에 걸친 다달이 치르는 시험(월과)에서 연달아 장원을 하였는데, 임금이 법전을 살펴 상을 내리도록 하였다. 예조에서 《경국대전》을 살펴보니 "홍문관 월과에서 세 차례에 걸쳐 일등으로 수석을 차지한 사람은 품계를 올려 준다"는 규정이 있었다. 당시 대제학은 유근(서경)이었고 제학은 신흠(현옹)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이 법전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였다. 누군가가 "'세 차례'는 '연이은 세 등수'라는 뜻이고 '일등'은 곧 '수석'이라는 뜻이다"라고 하기에, 이 말대로 갖추어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특별히 품계를 올려 주도록 하였다. 나는 이렇게 하여 당상관이 되었다.
대개 법전에서 말한 "세 차례"란 석 달에 걸쳐 치른 아홉 번의 시험에서 모두 장원한 것을 말하고, "일등"이란 점수의 합계가 서른 점이 되어 수석을 차지한 것을 뜻한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세 계절에 걸쳐 아홉 달 동안 스물일곱 번의 시험에서 모두 장원하여 점수의 합계가 백두 점이나 되었으니, 법전에서 말한 내용과는 다소 다른 것이었다.
평소에는 글에 능한 사람이 많아서 누구도 혼자 장원을 독차지하는 경우가 없었으므로, 이 규정은 법전에만 있을 뿐 실제로 시행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를 직접 본 일이 없어 저마다의 추측으로 법을 헤아리다 보니 이런 착오가 생기게 된 것이다.
성소부부고 제24권
10. 14:40
성소부부고 제24권 · 설부 3 · 성옹지소록 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출처: 성소부부고 제24권, 설부 3
배경: 《성옹지소록》은 허균이 함열에 유배되어 있던 시기에 쓴 잡록으로, 보고 듣고 겪은 온갖 일을 두서없이 적어 내려간 글이다. 이 하권에는 선조 임금과 신하들 사이의 일화, 명필 한호와 화가들의 이야기, 조선의 옛 제도와 풍속, 음악과 기예에 뛰어났던 이들, 일찍 출세한 사람들의 사례, 강릉 지방의 인물과 효자·열녀 이야기, 중국 사신들과의 교유, 그리고 허균 자신의 집안 내력까지 폭넓게 담겨 있다.
돌아가신 선조 임금은 문장에 뛰어나 역대 임금 가운데서도 으뜸이었으므로 신하들이 감히 따라갈 수 없었는데, 그런데도 유독 돌아가신 내 둘째 형 허봉의 시를 칭찬하시곤 했다. 형이 북쪽 지방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뒤, 독서당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다달이 지어 올리던 글 가운데 거산역에서 지은 시가 있었다. 그 마지막 연에
천 년 전에 부러진 창은 모래에 묻혀 있고 십 리 너른 벌판엔 비 그치자 비린내가 풍기네
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임금께서 손수 붉은 점을 찍어 표시해 내려 주셨다.
임인년(1602년)에 고천준과 최정건, 두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월사 이정귀가 임금을 뵙는 자리에서 나를 해운판관 자리에서 갈아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임금께서 "그의 형 아무개와 견주면 재주는 누가 더 나은가?" 하고 물으셨다. 이것만 보아도 임금께서 만년에 이르도록 우리 형제를 잊지 않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선조 임금은 또 지천 황정욱의 문장을 좋아하셨는데, 소재 노수신 정승이 힘써 추천한 끝에 그는 제학에서 겸 대제학으로 승진하였다.
독서당을 설치하여 관리들에게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하는 사가독서 제도를 시행한 뒤로는, 문형, 곧 대제학 자리는 반드시 이 독서당을 거친 사람 가운데서 임용하였다.
이 때문에 어촌 심언광은 대제학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일찍이 독서당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 차례나 상소를 올려 스스로 물러났다. 그런데 유독 지천 황정욱만은 독서당을 거치지 않고도 대제학이 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영예로운 일로 여겼는데, 이 역시 임금께서 그를 칭찬하신 덕분이었다.
선조 임금은 《장자》를 몹시 좋아하여 신하들에게 내리는 글에서도 이따금 《장자》의 구절을 인용하였고, 글의 짜임새도 《장자》와 흡사한 데가 있었다. 이 때문에 임금께서는 오히려 공부하는 이들이 《장자》를 읽다가 거기에 빠져들까 염려하여, 예조에 명해 과거 시험의 논술과 대책 문제에는 결코 노자나 장자의 글을 인용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경자년(1600년) 전시에서 응시자 이함이 답안의 첫머리에 《장자》의 말을 인용했다는 이유로 그의 합격을 취소하도록 명하셨다. 이함은 그 뒤 기유년(1609년)에 다시 과거에 합격했다고 한다.
경홍 한호는 글씨에 뛰어나 선조 임금의 각별한 눈에 들어 극진한 사랑을 받았고, 임금은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려 그를 격려하였다. 그가 서울에 있을 때면 임금은 술과 쌀, 반찬거리, 붓과 종이를 넉넉히 내려 주도록 명하였고, 봄가을로 의복과 허리띠, 안장 얹은 말과 신발 같은 하사품이 끊이지 않았다. 특별히 명하여 가평 군수로 제수된 지 몇 해 뒤, 사헌부에서 그를 탄핵하자 임금은 그저 심문만 하고 넘어가게 하셨다. 그 뒤 공조의 낭관으로 있을 때 응당 갖추어 바쳐야 할 문서를 법대로 처리하지 않아 파직될 처지에 놓였으나, 임금은 문책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그가 병이 위급해지자 임금은 약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고, 그가 죽자 한동안 슬퍼하며 부의를 후하게 내리셨으니, 임금과 신하 사이에 서로를 알아주는 정이 이보다 더한 경우는 없었다.
석봉 한호가 임당 정유길 정승을 따라 압록강 가에서 명나라 사신 경당 한세능을 맞이하였는데, 한세능이 그의 글씨를 몹시 칭찬하였다.
그때 따라온 등계달이라는 이가 석봉의 글씨를 얻어 돌아가 왕세정에게 보이자, 왕세정은 "원나라의 명필 조맹부와 어깨를 겨룰 만하다"고 하였고, 도융이 이를 보고는 "성난 사자가 돌을 튕겨 내는 기세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의 이름이 중국에까지 떨치게 되었으니, 이는 근래에 없던 일이었다.
석봉은 일찍이 당나라 종이에다 이태백의 시를 써서 책 다섯 권을 만든 적이 있었다. 해서와 행서를 크고 작은 여러 서체로 모두 갖추어 쓰되 온갖 정성과 힘을 다 쏟았다. 또 큰 종이에다 옛 명필들의 글씨를 모아 놓은 《동서당집고첩》을 옮겨 썼는데, 하나하나 원래의 서체를 그대로 살려 조금도 다르지 않았으니 참으로 더할 나위 없는 보배였다. 선조 임금께서 이 소문을 들으시고 급히 내시를 보내 이 글씨들을 모두 찾아 궁궐 안으로 가져오게 하시고는, 이튿날 명주와 베, 소금, 쌀, 종이, 붓, 먹, 향, 임금이 쓰던 벼루, 옷, 신 등을 매우 후하게 내려 주셨으며, 이것으로 집을 사서 살도록 해 주셨다.
돌아가신 내 둘째 형은 사내 안경창에게서 《연화경》 금자 필사본 네 권을 얻은 일이 있었다. 이는 세조 임금 때 궁궐에서 화장사라는 절에 시주한 것으로, 강중 서거정과 중경 성임, 동래 정창손, 인재 강희안, 이 네 분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쓴 것이었는데, 끝에는 이들의 벼슬 이름까지 함께 적혀 있었다. 형은 곧 석봉을 청하여 그 뒤에 금색 글씨로 《주역》과 《중용》, 《참동계》, 《황정경》을 쓰게 하였는데, 작은 해서체 글씨가 더없이 절묘하여 마침내 둘도 없는 보배가 되었다. 형이 세상을 떠난 뒤 내가 이것을 물려받았다. 표구하는 일을 하던 김대건이 우리 집을 매우 가깝게 드나들었는데, 하루는 이 일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께서 이를 가져오게 하시고는 《자치통감》 한 질을 내려 주셨다.
왕실 종친인 석양정 이정은 먹으로 그린 대나무 그림에 뛰어났고 매화와 난초도 잘 그렸다. 선조 임금은 그를 몹시 칭찬하여, 그가 족자 한 폭을 그릴 때마다 많은 물품을 은혜롭게 내려 주셨다. 내가 귀한 분을 통해 임금이 손수 그린 대나무와 난초 그림을 얻어 이를 석양정에게 보였더니, 그는 감탄하며 "힘차고 씩씩하여 정해진 화법에 얽매이지 않았으니 참으로 신선의 경지에 이른 작품이다"라고 하였다.
신묘년(1591년)에 선조 임금께서 절구 한 수를 지어 벽에다 써 붙이셨는데
한밤중에 칼을 어루만지니 그 기세가 무지개를 토해 내는 듯하고 웅대한 마음은 일찍이 우리 동방을 평안케 하고자 했었네 그런데 지금 하는 일은 한단 사람의 걸음걸이를 배우려다 제 걸음마저 잊은 것과 같으니 서쪽 바람에 고개를 돌리니 한스러움이 끝이 없구나
라는 시였다. 그 시의 기세가 넓고도 드높아 참으로 임금다운 말씀이었다. 아, 이것이 혹 이듬해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지으신 것이었을까.
(용어) "한단 사람의 걸음걸이를 배우려다 제 걸음마저 잊었다"는 것은, 옛날 연나라의 한 젊은이가 조나라 한단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멋져 보여 그것을 배우러 갔다가, 끝내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채 자기 본래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려 기어서 돌아왔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남의 것을 어설프게 흉내 내려다 제 본모습마저 잃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정유년(1597년)에 창서 양호가 우리나라의 군무를 총괄하는 경리사로서 서울에 와 군대를 주둔시켰다. 선조 임금께서는 하루는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자 하여 손수 편지를 쓰시고 도승지 이호민을 시켜 양호에게 전하게 하셨는데, 그 사연이 수천 자에 이르렀고 뜻도 매우 간절하였다. 양호는 회답하는 편지에 "방패와 창이 어지러이 부딪치는 시기이니 정사를 게을리할 때가 아닙니다"라는 두 구절만을 적어 돌려보냈는데, 임금께서도 이를 매우 옳게 여기셨다.
양호는 문관 출신 대신이면서도 몸소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 나섰다.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를 울산 도산성으로 몰아넣어 거의 사로잡을 뻔하였다. 이보다 더 큰 공이 없었는데도 끝내 모함을 받아 파직되어 돌아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그가 돌아가는 것을 아쉬워하였고, 돌에 그의 초상을 새겨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하였다.
예로부터 우리 동방을 정벌한 장수와 병사들은 공을 세우고도 모두 죄를 뒤집어썼다.
한나라 무제 때 조선의 네 군을 평정한 뒤 순체와 양복이 모두 죄를 지어 옥에 갇혔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한 뒤에는 영국공 이적이 공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품계와 녹봉을 깎였다. 백제를 평정한 뒤에는 소정방과 설인귀가 서로 공을 다투다가 제후로 봉해지는 일이 정지되고 관작마저 낮아졌다. 강조를 사로잡고도 소손녕은 고려 왕을 끝까지 뒤쫓지 않았다는 이유로 변방으로 유배되었고, 원나라는 살리타이가 죽을죄를 지었다 하여 그 부장 아릭테무르 이하를 함께 죽였다.
임진년(1592년) 왜란 이래로도 이와 다르지 않아, 경략 송응창은 모함을 받아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제독 이여송은 공적을 지나치게 부풀려 보고했다는 모함을 받아 죄를 입었으며, 찬획사 유황상과 원황도 함께 파직되었다. 정유년(1597년)에는 경리 양호가 모함을 받아 돌아갔고, 군문 형개와 제독 마귀, 제독 유정도 함께 명나라 관리 정응태의 탄핵을 받았다. 그 뒤 정응태 또한 이 일로 관직이 낮아졌고, 경리 만세덕도 어사의 탄핵을 받아 녹봉이 정지되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용어) 순체와 양복은 한 무제가 고조선을 정벌할 때의 장수들이다. 이적은 당나라 장수로 영국공에 봉해졌으며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소정방과 설인귀는 당나라 장수로 백제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강조는 고려의 장수이고, 소손녕은 거란의 장수로 고려를 침입했다가 강조에게 사로잡혔다. 살리타이와 아릭테무르는 고려를 침입한 몽골의 장수들이다.
전란을 겪은 뒤로는 조정의 관원들이 갓과 도포, 관복용 띠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 군복 차림에 슬갑을 두르고 칼을 차고 다녔다. 그러다가 경자년(160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정에 나갈 때 입는 조복을 갖추게 되었는데, 당상관 이상은 담홍색 비단으로 지은 홑겹 도포를 입었고, 당하관은 담홍색 무명으로 지은 홑겹 도포를 입었다. 그런데 식자들이 "임금의 옷 빛깔도 붉은데 임금과 신하가 같은 색의 옷을 입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여 검은 옷을 입기 시작하였다. 그때 당하관이 비단옷을 입는 것을 임금께서 엄격히 금하셨다. 사람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다시 붉은색 옷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신축년(1601년) 의인왕후의 상복을 벗은 뒤 복색을 다시 의논하게 되었는데, 서경 유근이 예조 판서로 있으면서 붉은색 비단옷을 주장하였고, 나도 그때 예조의 의제사에 있으면서 이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모두 조정의 논의가 옳다고 하였으나, 유독 오성 이항복만은 그르다고 여겼다. 오성은 나를 불러 꾸짖기를 "일개 낭관이 붉은 비단옷을 입고 싶다고 감히 조정의 논의를 흔든단 말인가?" 하였다. 그 뒤 경술년(1610년) 담제를 지내는 날에 복색을 검은색으로 정하고자 하였으나 지금껏 실행되지 않고 있다.
대체로 우리나라에서는 잇꽃을 많이 심어 붉은색으로 물들이기가 쉬웠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손쉽게 여겼던 것이다. 조상 대의 임금들이 홍색과 회색, 백색 옷을 금하는 조목까지 세웠지만 끝내 막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의복과 모자, 그릇 등에는 옛 중국의 제도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모두 이를 칭찬한다.
남녀가 신는 버선은 곧 옛날에 이르던 족건이라는 것이고, 남자가 쓰는 갓은 옛날에 일컫던 곡병립이라는 것으로, 남조 시대의 시인 사영운이 즐겨 쓰던 것이다. 사대부 집안 부인들이 쓰던 머리쓰개는 옛날의 유모이고, 신부가 혼인날에 쓰던 족두리는 곧 옛 중국의 경전 《시경》에서 말한 머리 장식과 같은 것이며, 군복인 철릭은 곧 옛날의 바지와 슬갑이다. 종묘 제사에 쓰는 그릇과 항아리, 대나무로 짠 그릇 뚜껑은 모두 주나라의 제도이고, 임금의 행차에 쓰는 곰과 표범 문양의 의장 지팡이와 창은 모두 수나라의 제도이다. 병조와 도총부에서 붉은 갓에 날이 없는 창을 갖추고, 금 단추를 달고 가죽바지에 슬갑을 두르는 것 역시 당나라의 제도이다. 이 밖에도 오랜 세월에 걸쳐 이어져 온 풍속이 매우 많아 다 적을 수 없을 정도인데, 이런 것들은 정작 중국에는 남아 있지 않은 것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악기는 모두 옛 제도를 따른 것이다.
거문고는 옛날의 오현금을 본떠 줄 하나를 더한 것이고, 가야금은 옛날의 비파를 본떠 열세 줄을 줄인 것이다. 방향과 요고, 대금, 그리고 종묘 제사에 쓰는 편종ㆍ편경ㆍ축ㆍ어ㆍ훈ㆍ지 등의 악기는 모두 당나라의 제도이다. 종묘 제례악 가운데 등가 악장 역시 당나라 사람이 지은 것을 본뜬 것이다. 민간에서 쓰는 음악으로는 풍입송ㆍ서자고ㆍ수룡음ㆍ오운봉서도 등의 악장이 있는데, 이는 송나라 휘종 때 우리나라에 내려 준 대성악으로서 오히려 옛 풍악의 자취가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서는 남곡과 북곡이 성행한 뒤로 당나라와 송나라 때의 옛 풍악이 모두 사라져 남은 것이 없다. 이른바 "예가 사라지면 오히려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 구할 수 있다"는 옛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고려 초에 음악을 맡은 관원이 당나라 때의 궁중 정악을 본떠 황풍악을 지었다. 그 악장은 왕씨가 나라를 처음 일으킨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었는데, 임금이 크게 조회를 열거나 거둥할 때면 반드시 이 곡을 연주하였다.
조선 건국 초에는 임금이 문인들에게 명하여 《용비어천가》 다섯 권을 짓게 하였다. 그중 앞의 일곱 장과 뒤의 세 장을 뽑아 여민락을 만들고, 황풍악의 가락에 맞추어 함께 연주하게 하였다. 임금이 서쪽 교외로 나가 중국 사신의 조칙을 맞이할 때면 이 음악을 대궐 뜰에서부터 연주하기 시작하여 숭례문에 이르러서야 한 곡이 끝났다. 그리고 다시 연주하면서 모화관에 이르러 임금이 가마에서 내리면 그제야 마쳤다. 선조 임금 초년에는 가락이 점점 빨라져서 한 곡이 으레 광통교에 이르러 끝나게 되니, 음악을 맡은 관원들이 가락이 이렇게 조급하게 줄어드는 것을 몹시 걱정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년(1592년)의 전란이 일어났다. 지금은 그 가락이 슬프고 급박하며 흐트러져서 도무지 수습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젊었을 때 태평성대의 문물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악공 가운데 허억봉이라는 이가 있어 피리를 잘 불었는데, 만년에는 거문고로 옮겨서도 그 솜씨가 뛰어났다. 박소로는 거문고를 잘 타서 옛 가락에 능했고, 홍장근은 민간의 가락에 능하여 두 사람 모두 일류로 꼽혔다. 또 가야금은 이용수, 비파는 이한, 아쟁은 박막동이 모두 일류로 꼽혔다. 노래로는 기생 영주선과 여성군 송씨 집안의 여종 석개를 모두 으뜸으로 쳤다.
그 뒤로는 이한의 조카 전한수와 이용수의 제자 임환이 스승의 재주를 이어받았다. 이 밖에도 왕실 종친인 죽장감은 아쟁과 비파에 능했고, 김운란은 아쟁을 잘 타서 그 소리가 마치 사람이 말하는 듯하여 그 가락을 듣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렸다. 또 서자 출신 김연이 가야금을 잘 탔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런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용수는 이미 늙었고 오직 임환 한 사람만이 남아 있을 뿐이며, 노래는 그 대를 이을 만한 이가 한 사람도 없다. 이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인재가 모자라게 되어서 그런 것일까.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명종 임금 때 선비 이언방이라는 이가 노래를 잘 불렀다. 가락이 맑고도 높아 감히 그와 재주를 겨루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일찍이 〈최득비여자가〉라는 노래를 부르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가 평양을 유람할 때, 그곳 교방에 속한 기생이 거의 이백 명에 이르렀다. 관찰사가 이들을 죽 늘어앉힌 뒤,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가리지 않고 우두머리 기생부터 어린 기생까지 한 사람씩 노래를 부르게 하고, 그때마다 이언방이 곧바로 화답하여 불렀는데, 그 목소리가 저마다의 목소리와 흡사하게 들리도록 부르되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개성 기생 진랑, 곧 황진이가 그가 노래를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의 집을 찾아갔다. 이언방은 자신이 이언방의 아우인 척 속이며 "형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도 노래는 제법 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한 곡조를 불렀다. 진랑이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저를 속이지 마십시오. 세상에 이런 노랫소리가 어찌 또 있겠습니까. 당신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옛날 노래를 잘했다는 면구와 진청인들 이보다 더 잘할 수 있겠습니까?"
(용어) 면구와 진청은 옛 중국의 노래 잘하던 이들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진랑은 개성에 살던 앞 못 보는 사람의 딸이다. 성품이 거침없어 마치 남자와 같았다. 거문고를 잘 탔고 노래도 잘 불렀다.
일찍이 산수를 유람하며 금강산에서 태백산과 지리산을 지나 나주에 이르렀는데, 마침 고을 원이 절도사와 함께 한창 잔치를 벌이고 있어 풍악과 기생들이 자리에 가득하였다. 진랑은 해진 옷에 때 묻은 얼굴로 태연히 그 자리에 끼어 앉아 이를 잡으며 노래하고 거문고를 탔는데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으니, 자리에 있던 여러 기생이 그 기세에 눌리고 말았다.
진랑은 평생 화담 서경덕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반드시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의 농막을 찾아가 한껏 즐긴 뒤에야 떠나가곤 하였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지족 선사는 삼십 년을 벽만 바라보며 수양했지만 내가 그 지조를 꺾어 놓았다. 그런데 오직 화담 선생만은 여러 해를 가까이 지냈어도 끝내 나와 아무 일도 없었으니,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성인이시다." 진랑은 죽을 무렵 집안사람에게 이렇게 부탁하였다. "상여가 나갈 때 부디 곡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인도해 다오." 지금까지도 노래하는 이들이 그가 지은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그 또한 남다른 인물이었다.
진랑이 일찍이 화담을 찾아가 이렇게 아뢴 적이 있었다. "송도에는 세 가지 빼어난 것이 있습니다." 선생이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자, 진랑은 "박연폭포와 선생님, 그리고 소인입니다" 하였다. 선생께서 이 말을 듣고 웃으셨다. 이는 비록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또한 그럴듯한 말이었다.
대체로 송도, 곧 개성은 산수가 웅장하면서도 굽이굽이 감돌아 흘러 뛰어난 인재가 많이 났다. 화담의 성리학은 조선에서 으뜸이었고, 석봉의 글씨는 나라 안팎에 이름을 떨쳤으며, 근래에는 차씨 집안의 부자와 형제 또한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진랑 역시 여인들 가운데서도 빼어났으니, 이것만 보아도 그가 한 말이 결코 헛말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개성에 안경창이라는 이가 있어 스스로 호를 사내라 하였다.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배부름을 잘 견뎌 낸다 하여 그렇게 호를 지었다고 한다. 그는 젊어서부터 집을 떠나 산수 사이를 떠돌아다녔는데, 일흔 살이 되어서도 얼굴이 늙지 않았고, 소재 노수신 정승, 지천 황정욱, 그리고 돌아가신 내 둘째 형과 가깝게 지냈다. 갑신년(1584년) 눈 내리는 겨울, 그는 갑산으로 귀양 가 있던 형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눈 속에서 적생원의 우물물로 목욕을 하고도 살갗에 소름 하나 돋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신기하게 여기며 무슨 비법이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여든넷의 나이에 병 없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 사람 역시 남다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증선지가 지은 《십팔사략》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문대공 성현이 이를 구하여 몹시 좋아하였다. 그때 그의 아들인 번중 성세창 정승이 이미 과거에 올라 있었는데, 공은 그에게 한 차례 이 책을 외워 보게 하고는 "이 정도면 대제학을 맡기에 충분하겠다"고 하였다. 조선 건국 초에는 모든 사람이 《고문진보》의 전집과 후집을 배우고서 문장을 지었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도 처음 글을 배울 때면 반드시 이 책을 중히 여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십팔사략》은 온갖 역사서를 통독한 사람이 그 요점을 추려서 잊지 않도록 기록해 둔 것이고, 《고문진보》는 한 사람이 우연히 이런저런 글을 뽑아 모은 것에 지나지 않으니, 그 고르고 버린 기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굳이 읽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어린 학생이 글의 이치를 깨우치는 데에는 《논어》와 《맹자》, 《통감》만으로도 충분한데 하필 그런 책을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있겠는가.
사문 조위한이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중국 사람들이 우리 동방 사람의 문장이 자기네보다 뛰어남을 꺼려서 《십팔사략》과 《고문진보》 두 책을 지어 우리나라에 보내왔다. 이 책들이 들어온 뒤로 우리 문장의 규모가 좁고 막혀서 옛날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이는 농담으로 한 말이라서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나 스스로 겪어 본 바가 있다. 나는 열두 살에 처음 글을 배웠는데, 《십팔사략》부터 읽는 것이 부끄러워 먼저 《통감》과 《논어》를 배웠더니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글의 이치가 훤히 트였다. 그런데 이웃에 살던 이 아무개는 일곱 살 때부터 《십팔사략》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빠짐없이 외웠고 그렇게 십 년을 외웠지만, 《통감》은 한 줄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하였다. 그런가 하면 여장 권필과 자민 이안눌은 모두 《고문진보》를 읽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시는 하나같이 좋았으니, 지세 조위한의 말도 나름의 이치가 있는 셈이다.
판부사 김수는 젊었을 때 《십팔사략》 읽기를 좋아하여 그 공부가 깊었다. 그가 교리가 되자 선조 임금께서는 그에게 《십팔사략》을 교정하게 하시고, 그 끝에 발문을 짓도록 하셨다. 그의 동료들이 이를 두고 놀리며 "신하를 알아보는 데는 임금만 한 이가 없다"고 하였다.
세상에는 글의 이치에는 어두우면서도 글은 잘 짓는 사람이 있다. 나의 매형 김성립은 경전이나 역사책을 읽으라 하면 입도 떼지 못하지만, 과거 시험용 문장만큼은 요점을 정확히 짚어내어 논술과 대책 문제에서 여러 차례 높은 등수에 들었다.
그가 대책문을 지을 때에는 거꾸로, 곧 글의 맨 끝부분부터 지어 올라가는 방식을 썼다. 맨 나중에 들어갈 마무리 부분을 먼저 짓고, 그다음에 폐단을 바로잡는 방안을 쓰고, 다음으로 조목조목 따지는 부분을, 그다음에 글 중간의 핵심 대목을 지은 뒤, 마지막으로 시험지에 옮겨 적을 즈음에야 비로소 첫머리를 지었는데, 그렇게 하고도 앞뒤가 조금도 어긋남 없이 정연하였으니, 이 또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식년시에서 경서의 뜻을 구술로 시험 보게 하는 것은, 본래 그 뜻을 제대로 밝혀 알고 있는지를 살피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선비들은 그저 구절을 끊어 읽는 법만 익힐 뿐 그 뜻은 전혀 알지 못한다. 경서의 장구마다 첫머리가 많아 다 기억하기가 어려우므로, 그럴듯하게 지어낸 말을 함부로 적어 넣어 외우는데, 그 요란한 말들을 성현이 남기신 훈계의 말씀 위에다 마구 늘어놓는 것이다. 이는 옛 성현을 욕되게 하는 짓이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일찍이 우초춘이 엮은 《명퇴조록》과 왕세정이 지은 《성사술》을 보았는데, 일찍 출세한 이들을 하나하나 갖추어 기록해 놓아 열한 살부터 쉰 살까지 빠짐없이 찾아 실어 놓았다.
우리나라에는 상고할 만한 기록이 마땅치 않으므로 우선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적어 둔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 인재가 매우 적기 때문에, 요행으로 과거에 오르고 요행으로 재상 반열에까지 오른 이도 많다. 이제 스무 살 이전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으로부터, 서른 살 이전에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 마흔 살 이전에 공경의 지위에 오른 사람들의 이름을 나이별로 다음에 적어 둔다.
열네 살: 곽거완이 진사가 되었고, 그 뒤 과거에 올라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열다섯 살: 구수영이 돈녕부 도정이 되었고, 이희순ㆍ이승건ㆍ권주ㆍ김규는 진사가 되었으며, 심언광은 향시의 세 시험에서 모두 장원을 하였다.
열여섯 살: 권홍ㆍ심은ㆍ장계금ㆍ이명한이 진사가 되었다.
열일곱 살: 남지는 경상도 도사가 되었고, 이행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열여덟 살: 구성군 이준은 병조 판서가 되었고, 이파는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김수녕과 박호는 문과에 장원하였고, 허봉ㆍ윤훤ㆍ이구는 생원진사시에 장원하였다.
열아홉 살: 이대해ㆍ이집ㆍ이후는 문과에 합격하였고, 오남은 무과에 장원하였다. 우흥적은 진사시에 장원하였다.
스무 살: 박은ㆍ박홍린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구는 문과에서 갑과 둘째로 급제하였다.
스물한 살: 구성군 이준은 도원수가 되었고, 이파는 이조 좌랑이 되었으며, 윤계선은 문과에 장원하였다.
스물두 살: 성표는 정국공신에 녹훈되었다.
스물세 살: 엄흔이 이조 좌랑이 되었다.
스물네 살: 허봉과 김신국이 이조 좌랑이 되었고, 남이는 승지가 되었다.
스물다섯 살: 윤계겸은 승지가 되었고, 박동량은 당상관이 되었다.
스물여섯 살: 남이는 병조 판서가, 이파는 도승지가, 박원종은 병조 참의가, 김신국은 의정부 사인이 되었고, 정사룡은 중시에 장원하였다.
스물일곱 살: 허봉은 예문관 응교가, 성표는 당상관인 첨지가, 김수녕은 이조 참의가, 신면은 승지가 되었다.
스물여덟 살: 구성군 이준은 영의정이 되었고, 이행은 승지가 되었다.
스물아홉 살: 윤사흔은 관찰사가, 박은은 승지가, 한숙창은 호조 참의가, 이계동은 대사헌이 되었다.
서른 살: 권건ㆍ신종호는 모두 승지가 되었고, 유운은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서른한 살: 이덕형은 겸 대제학이 되었다.
서른두 살: 박원종은 한성부 판윤이, 윤계겸은 공조 판서가 되었다.
서른세 살: 김감은 예조 판서가, 김정은 형조 판서가 되었다.
서른네 살: 박은은 병조 판서가, 한확은 이조 판서가, 허종은 함경도 관찰사를 겸하였다.
서른다섯 살: 김감은 겸 대제학이, 윤사윤은 의정부 참찬이, 유담년은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서른여섯 살: 성준과 이극감이 모두 형조 판서가 되었고, 박동량은 호조 판서가 되었다.
서른일곱 살: 윤사흔은 찬성이, 이정귀는 호조 판서가, 이자는 참찬이 되었다.
서른여덟 살: 이덕형은 우의정이, 한확은 찬성이, 이정귀는 대제학이, 장운익은 형조 판서가 되었다.
서른아홉 살: 윤사흔은 우의정이, 이파는 찬성이, 황치신은 참찬이 되었고, 성표는 음직으로 군에 봉해졌다.
마흔 살: 김질은 부원군이 되었고, 남지는 우의정이, 최천건은 이조 판서가 되었다.
이 밖에도 일흔다섯 살에 정승이 된 이가 두 사람이니, 청천 심수경과 완성 이씨였다. 나의 외사촌 형 김자한은 예순두 살에 경서 구술시험에서 열네 점을 받아 합격하여 과거에 올랐으니, 늘그막에 귀하게 된 경우로서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근래 재상 반열에 오른 이 가운데 아흔 살을 넘긴 이가 두 사람이니, 판중추부사 원혼과 좌찬성 송찬이다.
형조 참판 이거의 어머니는 백세 살에 세상을 떠났다. 상을 당할 때 참판은 일흔일곱, 큰딸은 여든다섯, 다음 딸은 여든두 살이었는데 모두 병이 없었다. 그 노인이 나이 백 세가 되었을 때 임금께서 부인이라는 칭호를 내리고자 하셨으나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므로, 특별히 그 아들에게 한성부 우윤 벼슬을 내리시고 아들의 관직에 맞추어 부인에게 내리는 임명장을 내려 주셨으며, 이 밖에도 쌀과 폐백, 술과 고기를 후하게 내리는 등 은혜로운 하사품이 많았다. 참판의 다섯 아들이 모두 벼슬길에 나아갔고, 손자가 거의 백 명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그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었다.
강릉부 태화현의 갑사 임세적은 백열일곱 살에 세상을 떠났으니, 근래에 없던 일이었다.
근래에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한 집으로는 윤신의 아들 후ㆍ길ㆍ서ㆍ감ㆍ탁 다섯 형제가 있다. 이들은 모두 이삼 년 사이에 잇달아 급제하였는데, 끝의 세 사람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다음으로는 윤해원의 아들 방ㆍ양ㆍ휘ㆍ훤이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고 벼슬도 모두 당상관에 이르렀다. 맨 끝으로 서자인 한도 과거에 올라 품계와 녹봉이 당상관 급으로 올랐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오르고 나란히 당상관에 오른 것 또한 드문 일이다. 이 밖에 무과로는 원주의 이응해와 부안의 민정란 형제가 있다.
과거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높이 발탁된 경우로는, 우의정 정지연이 급제한 지 열세 해 만에 정승으로 등용된 일이 있는데 이는 세자를 가르친 노고 덕분이었고, 좌의정 기자헌은 열다섯 해 만에 정승으로 뽑혔는데 이는 왕실과 혼인으로 맺어진 인연으로 총애를 받아서였다.
연원군 이광정과 금계군 박동량이 급제한 지 네 해 만에 당상관의 옥관자를 붙이게 된 것은 임금을 모시고 피란한 공로 때문이었고, 안종록이 여덟 해 만에 정이품의 금띠를 두르게 된 것은 관리로서의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참의 송준과 참의 성이문이 모두 다섯 해 만에 당상관의 붉은 옷을 입게 된 것은 청요직에 제수되어 갑작스레 승진하였기 때문이었다.
낮은 관직에서 갑작스레 크게 승진한 경우로는 월사 이정귀가 있다. 그는 정유년(1597년)에 병조의 낭관으로 있다가 세자시강원 필선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식 벼슬로 사헌부 집의가 됨과 동시에 당상관에 올랐다. 무술년(1598년)에는 병조 참판으로 발탁되었고, 경자년(1600년)에는 호조 판서로 승진하였다. 신축년(1601년)에는 대제학이 되었는데, 이는 그의 문학이 임금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으로 유천 한준겸은 정유년에 사간에서 승지가 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분음 최천건은 정유년에 헌납에서 잇달아 사간과 승지로 승진하였고, 기해년(1599년)에 품계가 올라 도승지가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재주와 그릇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의정 정언신이 대신으로서 군기시 제조를 겸했을 때, 같은 해에 장원 급제했던 이충원은 겨우 군기시 정에 머물러 있었다. 그 뒤 오성 이항복 또한 대신으로서 군기시 제조가 되었을 때, 같은 해 장원 급제했던 황치성이 또한 군기시 정으로 있었다. 이 두 경우가 서로 꼭 들어맞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오성이 황치성에게 농담으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대가 완원 이충원처럼 되는 것은 좋지만, 내가 정 정승처럼 되는 것은 원치 않네." 이는 완원이 그 뒤 일품 벼슬에 이르러 부원군이 되었지만, 정 정승 정언신은 정승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귀양을 가서 그곳에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오성 정승은 우스갯소리를 잘하였다. 근래 나라에 변고가 잦아지자, 해당 관청에서는 으레 대신에게 의견을 물어 임금께 아뢰곤 하였는데, 이것이 도를 넘어 사소한 일까지도 대신에게 의견을 묻게 되니 대신들이 이를 괴롭게 여겼다. 하루는 예조의 낭관이 의견을 물으러 와서 앞에 앉아 있었다. 공이 막 생각을 정리하여 의견을 말하려는데, 어린 계집종이 안에서 여쭙기를 "말먹이 콩이 다 떨어졌는데 어찌할까요?" 하였다. 공이 꾸짖으며 "말먹이 콩을 채우는 일까지도 대신에게 의견을 물어야 하는가?" 하니, 듣던 사람들이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나의 친가는 건천동에 있었다. 청녕공주 저택 뒤에서 본방교까지 겨우 서른네 채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조선 건국 이래로 이름난 인물이 많이 나왔다.
김종서ㆍ정인지ㆍ이계동이 같은 시대에 살았고, 양성지ㆍ김수온ㆍ이병정이 또 한 시대를, 유순정ㆍ권민수ㆍ유담년이 같은 시대를 살았다. 그 뒤로도 정승 노수신과 나의 선친, 그리고 지사 변협이 같은 시대였으며, 근래에는 서애 유성룡과 나의 둘째 형, 그리고 덕풍군 이순신, 원성군 원균이 한 시대를 살았다. 서애는 나라를 중흥시킨 공이 있었고, 원균과 이순신 두 장수는 나라를 구해 낸 공이 있었으니, 이 무렵에 이르러 더욱 성대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 이야기를 오성 정승에게 들려주었더니, 정승이 "그 동네에는 무장도 있는가?" 하고 물었다. 내가 "성우길의 벼슬이 가장 높습니다" 하고 답하니, 정승이 다시 "그대들과 견줄 만한가?" 하고 물었다. 내가 웃으며 "성 장군도 북쪽 변방에서 공을 세운다면, 훗날 사람들이 오늘을 돌아볼 때 오늘 우리가 옛일을 돌아보는 것과 같지 않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니, 정승이 크게 웃었다.
정승 심연원은 호음 정사룡과 같은 신해년(1491년)생이었다. 정사룡이 병자년(1516년) 봄 중시에 장원하여 홍문관 응교가 되었을 때, 찬성 김당의 집에 간 일이 있었다. 심연원은 그 김찬성의 사위였는데, 김공이 그를 불러내어 정사룡과 서로 인사를 나누게 하였다. 자리에 앉은 뒤 나이를 물으니 서로 동갑이었다. 그런데 정사룡은 이미 두 차례나 과거에 올랐는데 심연원은 아직 벼슬 없는 유생 신분이었으므로, 그때 자못 부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그 뒤 심공도 과거에 올라 좋은 벼슬을 두루 거치고 마침내 의정부에 들어갔다. 그런데 정사룡은 여전히 돈녕부 지사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심공이 비로소 그를 추천하여 예조 판서가 되게 하였다. 세상의 벼슬살이가 수없이 뒤바뀌는 것이 대개 이런 식이다.
참의 박미는 아들이 셋이었다. 그중 소영과 증영은 둘 다 일찍 과거에 올라 나란히 이조의 낭관이 되었으니 당대의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맏아들 광영은 어찌 된 셈인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채 마흔 살의 나이로 성균관 학생으로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나무랐고 본인도 스스로 곤혹스럽게 여겼다.
그 뒤 두 아우가 잇달아 세상을 떠났고, 광영은 뒤늦게야 과거에 올라 청요직을 두루 거쳐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봉군까지 되었으며 일흔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자손들도 잇달아 과거에 올랐고 재상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의 운명이란 이러하니, 빠르고 늦음이나 잘 풀리고 막히는 것을 가지고 한탄할 일이 아니다.
나의 외조부 되시는 참판공은 계묘년(1543년)에 영남 관찰사를 지낸 뒤 두 번째로 호조 참판이 되었다. 당초에 유인숙 공이 이조 판서로 있었는데 참판공과 우의가 두터웠으므로 그를 추천하여 도승지로 삼았다. 공은 송인수ㆍ구수담ㆍ이임ㆍ이해 등과 더불어 자주 삼사의 후보 명단에 올라 무려 열여섯 차례나 추천되었으나 끝내 임금의 낙점을 받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공은 가장 늦게야 전주 부윤으로 제수되어 지방으로 나갔는데, 유공은 그가 외직으로 나가는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을사년(1545년)에 유공이 사약을 받아 죽자, 그가 천거하여 언관이 된 이들은 모두 뜻밖의 화를 당했다. 참판공의 강직한 성품으로 그때 조정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흉악한 무리의 노여움을 샀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지방에 나가 있었던 덕분에 오히려 화를 면할 수 있었으니, 화와 복이란 이처럼 사람의 헤아림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께서 사헌부 장령으로 계실 때, 조정의 논의는 김안로를 다시 불러들이려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할아버지의 고향 사람이었던 심언광 형제가 그때 요직에 있었다. 김안로는 이들과 은밀히 결탁하고서, 기묘년(1519년)의 사화로 쫓겨난 사람들을 다시 등용하겠노라 약속하였다. 대체로 두 심씨는 그때 화를 입은 선비들을 다시 불러들여 심정ㆍ이항과 맞서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와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김안로의 말을 믿고 힘써 이 일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회재 이언적 선생이 사간으로 있으면서 그 논의를 힘껏 반대하였다. 심언광이 "이 아무개가 조정에 있는 한 김안로는 조정에 들어올 수 없다" 하고, 그를 탄핵하여 쫓아내려 하였다. 할아버지께서 이를 만류하며 "복고 이언적은 정직한 사람이고 김안로는 단정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사림을 다시 등용하겠다는 그의 말만 믿고 착한 선비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으나, 심언광은 듣지 않았다.
그 뒤 김안로가 다시 조정에 들어오자 하는 짓이 좋지 못했고, 기묘년에 화를 입은 이들도 다시 등용하지 않았다. 심언광이 그제야 분하게 여겼고, 김안로가 장옥 부자를 죽이려 할 때 심언광이 힘써 이들을 구해 준 일로 김안로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이조에서 함경도 관찰사로 밀려나 지방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 뒤 다시 김안로가 쫓겨나자 심언광을 대사헌으로 불러들였는데, 당시 논의는 "심언광이 아니었다면 김안로가 어찌 조정에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그 뒤에 비록 그와 맞섰다고는 하나 대사헌 자리에 제수할 수는 없다"고 하여, 그를 탄핵해 파직시켰다. 할아버지께서 그때 강원도 관찰사로 계셨는데, 길에서 심언광을 만나 위로해 주셨다. 심언광이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말하였다. "군자는 사람을 천거하는 일에 신중하지 않으면 반드시 일을 그르친다고 예로부터 경계하였는데, 나는 그것을 지키지 못하였으니, 공께서 하셨던 말씀을 이제 와 생각하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결국 이 일로 한을 품은 채 집으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외조부의 아우 되시는 광진 역시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젊었을 때 판윤 최연과 함께 절에 들어가 공부한 적이 있었다. 《주역》을 읽다가 채 절반도 마치지 못했는데 설날이 다가왔다. 두 분이 함께 부모님을 뵈러 내려가는 길에 저마다 공부한 것을 외워 보았는데, 최연 공이 잊어버린 대목이 있음을 알고는 곧바로 절로 되돌아 올라가 다 왼 뒤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옛 선배들이 배움에 뜻을 두는 것이 이처럼 독실하였다.
최연은 문장에 뛰어났고, 용모가 단정하여 옛날 문장가 반악과 하후담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스물세 살에 과거에 급제하니 여러 대신이 그를 아꼈다. 그가 독서당과 홍문관에 들어가게 된 것도 모두 그 생김새 덕분이었다. 중종 임금께서도 그 아름다운 용모와 몸가짐을 칭찬하셨다. 일찍이 밤마다 연이어 경연을 열었는데, 내시가 너무 자주 여는 것이 아니냐고 아뢰자 임금께서 "내가 최연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하셨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수찬으로 있을 때의 일이라 한다.
가정 신축년(1541년)에 외조부께서 전라도 관찰사가 되셨다. 그 아우 참판공은 그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있었는데, 두 분이 쌍계역에 함께 모여 아버지의 제사를 지냈다. 갑진년(1544년)에는 할아버지께서 경상도 관찰사가 되셨고, 참판공은 또 전라도를 순찰하는 직임을 맡았다. 이때에도 다시 쌍계역에서 제사를 거행하니, 영남과 호남의 사람들이 모두 이를 영예로운 일로 여겼다.
강원도는 땅이 좁지만, 강릉과 원주에는 이름난 인재가 많았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강릉에서 이름난 정승이 많이 나왔으나, 명종 임금 때부터는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이 전혀 없다. 원주에서는 팔계군 정종영과 판서 이개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근래에는 과거에 높이 합격한 이가 잇달아 나왔으나,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는 이가 많다. 강릉에서는 태사 최대중이 과거에 급제한 지 서른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이오라는 이가 과거에 급제했다고 한다.
원주 사람 고경오는 을사년(1605년) 증광시 향시에서 〈홍수불벽〉이라는 제목의 부를 지어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서울에서 치른 회시에서는 〈서명벽상〉이라는 부를 지어 합격하였는데, 그 이듬해 성균관 관원으로 있다가 벽에 글을 써 붙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매를 맞고 죽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한강 정구가 강릉 부사가 되었을 때, 임명 소식을 담은 조보가 강릉에 내려왔다. 향교의 학생 함승술이 강릉부에 들어왔다가, 새로 부임할 부사의 이름 끝 글자가 자기 이름의 끝 글자와 같은 것을 보고는 그것을 자기 이름자로 잘못 알았다. 집에 돌아오자 친구들이 "누가 부사로 왔는가?" 하고 물으니 "정술이라는 사람이 되었다" 하여, 사람들이 이를 듣고 웃었다.
그 뒤 한강이 부임하여 향교의 학생 명부를 살펴보다가 승술이라는 이름을 보고는, 또 그것을 자기 이름의 글자와 같은 것으로 잘못 알고 "함승구의 자는 무엇인가?" 하고 물으니, 듣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관찰사 권윤은 외조부의 외증조부이시다. 성종 임금 때 성균관의 우두머리로 있은 지 스무 해나 되었다. 그리하여 중종 임금 때 학문한 선비들은 모두 그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의 손자 권연은 기묘년(1519년) 봄 과거에서 〈대악부〉와 〈어룡무동정시〉라는 글을 지었는데 둘 다 훌륭하였다. 답안지의 이름을 열어 보니 바로 공의 손자였다. 지정 남곤이 그때 시험을 주관하였는데, 서둘러 그를 뽑아 장원으로 삼았다. 그는 식년시의 경서 구술시험에 두 차례 응시한 적이 있었다. 집에 두 장이 떨어져 나간 《맹자》 책이 있었는데, 시험 문제가 설마 그 떨어져 나간 부분에서는 나오지 않으리라 여겨 그 부분은 읽지 않고 응시하였다. 그런데 두 차례 시험 모두 《맹자》 문제가 하필 그 부분에서 나왔으므로, 운명이라 여겨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 뒤 조정에서 세자익위사 세마와 왕자의 사부로 두 차례나 불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정원과 연못을 잘 꾸미고 풍류로 스스로를 즐기며 살아, 그 고을에서 첫손에 꼽혔고, 소박한 복을 마흔 해 넘도록 누렸다.
권 장원의 딸은 진사 신명화의 아내이다. 그 시어머니가 병으로 위독해지자 권씨는 향을 피우고 한데에 나가 밤낮 이레 동안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권씨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는데, 하루는 하늘에서 새알만 한 빨간 환약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를 주워다가 갈아서 시어머니께 먹게 하였더니, 향기가 방 안에 가득했고 시어머니의 병도 곧 나았다.
이는 정성 어린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 하여 지금까지도 그 고을 노인들이 이야기한다. 조정에서 이 일을 듣고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율곡 선생의 어머니는 바로 이 권씨의 외손녀이다. 그런 까닭에 선생은 북평에 있던 권 장원의 집에서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날 때 상서로운 빛이 하늘에 비쳤는데, 장원은 이 아기를 남달리 여겨 몹시 사랑하였다. 선생의 어머니는 성품이 고요하면서도 굳세었고 문장에 능했으며 그림도 그렸다. 몸가짐이 매우 엄정하여 여성의 법도로 스스로를 단속하였는데, 선생의 학문은 태교에서부터 얻은 바가 많았다고 한다.
강릉은 풍속이 순박하여 예로부터 효도와 정절을 지킨 이가 많았고, 이를 기려 세운 정문이 마을마다 잇달아 보였다. 송강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에 "집집마다 벼슬을 내려도 좋을 만하다"라고 한 것이 결코 헛말이 아니었다.
한강 정구가 부사로 와서 효자와 효손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는데 참석한 이가 쉰두 명이나 되었다. 이런 장한 일은 예나 지금이나 드문 것이었다.
첨지 김담은 강릉 사람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 섬기는 정성이 더할 나위 없었다. 맛있는 음식은 손수 만들었고,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모시기를 마흔 해가 넘도록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버이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곡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지팡이를 짚어야 겨우 몸을 일으킬 정도였다. 술을 잔에 부어 놓고 부모의 신위를 모신 휘장 앞에 엎드려 하루 종일 통곡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잔의 술이 문득 말라 있어 사람들이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그는 일찍이 산에 올라 돌을 떠내어 부모의 묘표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런데 마침 한창 얼어붙은 겨울이어서 돌이 쪼개지지 않자, 공이 그 돌을 붙들고 통곡하니 돌이 갑자기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사람들은 이를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 하여 모두 감탄하였다. 조정에서 세 차례나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고, 대신 정문을 세워 그의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 뒤 나이가 일흔에 이르자 관찰사가 이를 임금께 아뢰어 특별히 당상관인 첨지 벼슬을 내렸으며, 그는 아흔 살까지 살았다.
남사고는 울진 사람으로, 애써 공부하여 역학의 이치에 두루 통달하였다. 천문과 지리, 점술에도 밝아 그가 말한 일은 하나같이 신기하게 맞아떨어졌다.
향시에는 여러 번 합격했으나 끝내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벗들이 "자네는 남의 운명은 잘 알면서 정작 자기 운명은 헤아리지 못하고 해마다 헛걸음을 하니 어찌 된 일인가?" 하고 물으니, 남사고가 웃으며 이렇게 답하였다. "사사로운 욕심이 생기면 점술도 어두워지는 법일세. 내가 합격하지 못할 것을 분명히 알았더라면 애초에 과거장에 가지도 않았겠지만, 욕심에 이미 생각이 흐려진 까닭에 늘 혹시나 합격할까 하는 마음으로 들떠서 오갔던 것이라네."
만년에 그가 천문학 교수로 서울에 있을 때, 태사성이라는 별에 무리가 지는 변고가 일어났다. 이를 두고 관상감 정 이번신이 자기가 나이가 많으니 이 변고가 자신에게 해당될 것이라 하였는데, 남사고가 웃으며 "따로 해당될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두어 달 뒤 과연 남사고 자신이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 이는 옛날 오나라 땅의 은자가 별의 변고에 자신이 죽기를 바랐으나 끝내 죽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견주면 무엇이 다르다 하겠는가.
(용어) 옛날 진나라 때 달이 어느 별자리를 범하자 점치는 사람이 은자가 죽을 것이라 하였는데, 당시 이름난 은자였던 대규는 혹 자신이 그에 해당할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 다른 은자인 사부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대규가 죽기를 바랐으나 죽지 못했다며 놀렸다는 옛이야기가 전한다.
왕실 종친인 서천령은 장기를 잘 두었다. 하루는 금강산 백전암을 유람하다가 지엄이라는 화상을 만났다. 텅 빈 방에 아무것도 없었고 다만 장기판 주머니가 벽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서천령이 "스님도 장기를 두실 줄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삼십 년 전에 두어 본 적이 있소" 하였다. 서천령이 곧 그 장기판을 가져다가 대국을 청하니, 스님이 한쪽 포를 빼고 두겠다고 하였다. 이를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이 늙은 중은 평생 포 하나만으로 두어 왔소" 하였다. 서천령이 "나는 전국에서 첫손에 꼽히는 솜씨요. 다른 사람들은 나와 대국조차 못 하는데, 스님은 어찌 포 하나를 떼고 두려 하시오?" 하니, 스님이 "시험 삼아 한번 두어 봅시다" 하였다. 세 판을 두었으나 서천령이 번번이 지고 말았다. 화상이 웃으며 장기판을 치우고는 다시 두지 않았다. 서천령은 탄복하며 그곳을 떠났다.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온 이들은 문희 예겸으로부터 진즙희ㆍ규봉 동월ㆍ자양 당고 등이 모두 당대에 이름난 이들이었지만, 재상 반열인 내각에 들지 못했다는 이유로 한림학사로서 사신으로 정해지면 으레 이를 피하려 하였다.
정묘년(1567년)에 명나라 목종이 즉위하여 우리나라에 조서를 반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시강 정사미를 사신으로 삼았으나 병으로 교체되었고, 병록 범응기를 대신 임명하였으나 그 역시 이를 피하려 하였다. 그때 마침 검토관으로 있던 각로 허국이 스스로 가기를 자청하여, 사신의 임무를 훌륭히 마치고 돌아갔다.
그 뒤 정사미는 시랑이 되었으나 일찍 죽었고, 범응기는 탄핵을 당해 오래도록 하급 관서에서 맴돌다가 뒤늦게야 겨우 남경 국자감의 좨주가 되었지만 또 권신의 미움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허국 공은 을유년(1585년)에 내각에 들어가 벼슬이 소부와 이부 상서에 이르렀고 일흔 살까지 살았다. 이는 혹시 하늘이 정사미와 범응기 두 사람이 일부러 사신 가기를 피한 것을 미워해서가 아니었을까?
감주 왕세정이 한씨 성을 가진 태사가 지은 세계 기록에 발문을 쓴 적이 있는데, "조선 사람이 문장에 능하다"고 한 뒤, 우리나라의 시를 명나라 선덕ㆍ성화 연간의 시와 견주고, 우리나라의 글씨는 원나라 명필 조맹부와 견주었다. 왕세정의 문집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름난 이들이 이를 보고는 우리나라를 낮추어 본 것이라 하여 매우 치욕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 와서 자세히 살펴보니, 왕세정이 평한 것은 실은 우리를 기린 것이지 깎아내린 것이 아니었다. 왕세정은 일찍이 선덕 연간의 양사기와 성화 연간의 이동양ㆍ정민정 등 여러 사람의 작품을 당나라 경룡 연간의 시와 견준 일이 있다. 그런데 양사기와 이동양은 이태백과 두보에 견주면서 우리나라의 시는 경룡 연간에 견주었으니, 이는 지나친 처사였다. 왕세정은 또 글씨를 평하면서 왕희지와 왕헌지 이후로는 오직 조맹부가 있을 뿐이고, 구양순ㆍ저수량ㆍ우세남ㆍ안진경ㆍ채양ㆍ미불은 모두 그다음 자리라고 하였다. 그런데 석봉의 글씨를 조맹부에 견주었으니 이 또한 충분히 높인 셈이다. 잠깐 보고 분하게 여겼던 것이니 참으로 한바탕 웃어넘길 만한 일이다.
급사 서관란은 그 가운데서도 글씨에 가장 뛰어난 이였다. 우리나라에 왔던 어느 명나라 장수가 안평대군의 글씨로 된 족자를 손에 넣고는, 이를 조맹부의 친필이라 속여 서관란에게 바쳤다. 서관란은 나를 불러 이것이 누구의 글씨인지 물었다. 내가 "세종대왕의 아들이신 안평대군 이용의 글씨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서관란은 "나는 참으로 이것이 조맹부의 글씨가 아닌가 의심했었소. 세상에 어찌 이토록 신묘한 글씨가 있단 말이오" 하였다.
하루는 그가 석봉에게 글씨를 청하므로, 석봉이 옛사람들의 글씨체를 본떠 열 폭을 써서 바쳤다. 서관란이 이를 하나하나 가려내며 말하였다. "이것은 장지의 체이고, 이것은 왕희지와 왕헌지의 체이며, 이것은 저수량의 체이고, 이것은 구양순과 지영의 체이며, 이것은 안진경의 체이고, 이것은 미불과 조맹부의 체로다." 마지막 한 폭은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를 본뜬 것이었는데, 서관란은 "이것은 옛 법도에 맞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굳세고 아름다워 사랑스럽다"고 하였다. 석봉은 이 말에 깊이 감탄하였다.
서관란 급사가 일찍이 먹 한 장을 나에게 주면서 "이것은 금나라 장종 때 만든 먹이니, 평생을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내가 이를 갈아 보니 빛깔은 짙은 검은색에 살짝 엉기어 있었고 향기가 여전히 짙었다. 무술년(1598년) 겨울부터 쓰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열세 해가 되었는데도 겨우 한 글자 두께만큼밖에 갈리지 않았으니, 참으로 기이한 물건이다.
왕세정이 일찍이 말하기를 "선성 지방의 제갈씨가 만든 붓은 더없이 정밀해서 하루 종일 써도 닳지 않는다"고 하였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 태사가 나에게 그런 붓 다섯 자루를 준 적이 있었는데, 토끼털로 만든 것은 뻣뻣하여 쉬이 말랐고, 양털로 만든 것은 부드러워 쉬이 꺾여서, 모두 우리나라의 족제비털로 만든 붓만은 못하였다.
주지번은 내가 쓰던 붓을 써 보고는 "닷새를 썼는데도 닳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천하제일의 붓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이런 붓을 수천 자루나 구해 갔다. 그는 또 우리나라 종이도 좋아하여 그중에서도 아주 얇은 것을 골라 많이 가져가며 "이것은 탁본을 뜨거나 그림을 본떠 그리기에 좋다"고 하였다.
돌아가신 둘째 형이 일찍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황씨와 왕씨, 두 명나라 사신은 몸가짐이 매우 엄정하였다. 임금께서 종이와 붓, 먹을 내려 주셨으나 모두 받지 않았다. 하루는 궁궐 안에 보관하고 있던, 일본에서 나는 닥종이로 찍은 《이백집》과 《두시》를 한 질씩 나누어 주었는데, 부사 채양은 이를 펼쳐 보고는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였다. 그런데 정사가 이를 받아들였는지 사람을 보내 물어보게 하였는데, 정사가 이미 돌려주었다는 말을 듣고는 자기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아, 이런 사람을 어디서 다시 볼 수 있겠는가."
근래 사신으로 온 이들 가운데 유독 웅대행만은 청렴하다고 일컬어지지만, 그 역시 서책이나 종이, 붓만큼은 받아 갔다고 한다.
오봉 이호민은 고천준ㆍ최정건 두 사신을 접대하면서 이들이 자꾸 물품을 요구해 와 몹시 시달렸고, 서경 유근은 주지번ㆍ양유년 두 사신을 접대하면서 시와 부를 주고받느라 몹시 고생하였다. 여장 권필이 이를 두고 "오봉은 몸이 고달팠고 서경은 마음이 고달팠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이 옳다고 하였다.
역관 이화종은 젊었을 때 지정 남곤과 음애 이자를 따라 북경에 간 일이 있었다. 마침 명나라 무종 황제가 남쪽 지방을 순행하고 있어, 이화종은 역참의 말을 타고 황제가 머무는 행재소까지 갔다가 남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우 지방의 물가에 이르러 말이 지쳐 잠시 앉아 쉬게 되었다. 그때 모래 속에 삐죽이 뼈 하나가 나와 있는 것을 보고 파냈더니, 여섯 마디로 이루어져 있고 꾸불꾸불하며 눈처럼 하얀 것이었다. 그는 별생각 없이 이것을 짐 속에 챙겨 넣고 북경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장사꾼들이 물건을 벌여 놓고 값을 흥정하고 있었다. 이화종이 이 뼈를 꺼내 짐짓 자랑하며 속여 팔려 하니, 한 장사꾼이 이를 보고 절을 하며 말하였다. "이것은 뿔 없는 용의 등뼈인데 그 안에 큰 구슬이 여섯 개나 들어 있으니 참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입니다." 급히 톱으로 갈라 보니 과연 복숭아씨만 한 구슬 여섯 개가 나왔다. 그 장사꾼은 곧 천 냥어치의 비단을 값으로 치르고 이것을 사 갔다. 이화종은 "이것은 하늘이 내려 준 것이니 어찌 나 혼자 차지할 수 있겠는가" 하고, 그 비단을 모두 나누어 상통사부터 노복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주었다. 남곤과 이자, 두 분도 이를 아름답게 여겨 시를 지어 칭찬하였다.
영원백 이성량의 할아버지는 본래 우리나라 이산 지방의 독로강가에 살다가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부부가 함께 철령위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 아버지는 변경을 지킨 공으로 유격장군이 되었고, 이성량은 아버지의 음덕으로 지휘 벼슬을 받았다. 젊었을 때 오랑캐를 쳐서 사로잡은 이가 많아 험산보 참장으로 기용되었다.
명나라 사신 허영양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압록강 가까지 전송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법으로 정해진 호위 군사의 수를 줄이고 그 몫으로 남는 말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허 사신이 이를 탄핵하려 하자, 이성량이 역관 곽지원에게 부탁하여 이 일을 무마해 달라고 청하니 마침내 탄핵을 면하게 되었다.
그 뒤 몇 해가 지나지 않아 이성량은 공을 세워 총병이 되고, 영토를 천 리나 넓혀 다섯 곳에 성을 쌓았다. 백작으로 봉해졌고, 그의 아들과 사위 가운데 고관에 오른 이가 수십 명에 이르렀다. 이들의 위세가 요동 일대를 뒤덮어 거의 사십 년 동안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근래에는 이에 견줄 만한 이가 없었다.
곽지원은 일찍이 북경을 오갈 때마다 이성량에게서 매우 후한 대접을 받았는데, 이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 집안의 성씨는 가락국 왕비에게서 비롯되었으니 거의 칠백 년이나 되었다.
고려 초에 이르러 시조께서 다스리시던 고을이 양천이었으므로, 마침내 이곳에 본관을 붙이게 되었다. 고려 오백 년이 끝날 때까지 대대로 과거에 올라 높은 벼슬을 지냈다. 정승이 된 이가 열한 분이고, 추밀원에 들어간 이가 여섯 분이다. 학사가 아홉이고, 공주와 혼인한 이가 다섯이다.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한 이가 둘이고 군에 봉해진 이가 열넷인데, 대대로 문장으로 이름난 이가 있었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다소 쇠퇴하여, 정승이 세 사람, 찬성이 두 사람, 육조의 판서가 넷이다. 공신이 세 사람, 학사가 열둘이다. 그중에서도 충정공 형제와 지사 허집, 찬성 허자, 그리고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초당 선생을 가장 으뜸으로 꼽는다. 근래에는 유수를 지낸 허잠이 청백리로 뽑혔는데, 이 또한 선조들의 이름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라 하겠다.
유격장군 허국위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나를 보고 반가워하였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허태악의 후손이라는 그대들이 나와 같은 성씨라 하니 사람들이 터무니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가락국의 왕비가 다른 나라에서 배를 타고 건너왔다고 하니, 어쩌면 그분이 중국 사악 신을 제사 지내던 가문의 후손으로서, 스스로 어느 왕국의 딸이라 핑계 대고 혼인을 이룬 것이 아니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이 유격의 말에도 나름의 일리가 있었다.
우리 선대는 야당 선생 이후로 두 대에 걸쳐 연달아 과거에 오른 분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리 고조부 때에 이르러 형제분이 함께 과거에 뽑히셨으나, 아우 되시는 분은 겨우 사간에 머물렀고, 고조부께서는 벼슬에 나아가지도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그 사간의 아들인 허집은 벼슬이 지사에 이르렀고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우리 증조부는 과거에 오르지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그 아우 되시는 허위는 지평이, 허온은 승지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문장에 능하셨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집안이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 삼 형제가 함께 문과에 올랐는데, 큰형님은 육조의 판서에 이르렀고, 둘째 형님은 학사가 되었으며, 나 또한 당상관의 반열에 들었다. 큰형님의 아들 실도 문과에 올라 정언이 되었고, 여러 조카도 모두 맑고 뛰어나 문장으로 이름이 있다.
이는 모두 선조께서 쌓으신 공덕의 효과이니, 대개 세월이 오랠수록 더욱 뚜렷이 드러나는 법이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의 문장과 학문, 절개와 행실은 사림에서 높이 추앙받았다. 큰형은 아버지의 경학을 이어받았고, 문장도 간결하면서 무게가 있었다. 둘째 형은 학문이 넓고 문장이 매우 높고 고고하여 근래에는 견줄 이가 드물다. 누님의 시는 더더욱 맑으면서도 씩씩하고 높으면서도 아름다워, 당나라의 개원ㆍ대력 연간 시인들보다 뛰어나다는 명성이 중국에까지 퍼져서 그곳의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모두 이를 칭찬한다. 재종형인 체씨는 옛 문장을 공부하여 시의 격조가 매우 높고 굳세며 부는 더욱 뛰어나서, 조선 건국 이래로 그와 견줄 이가 드물다. 나 또한 우리 집안 문장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아, 문예를 논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중국 사람들에게서도 제법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아버지와 우리 세 형제, 이렇게 네 부자가 함께 임금의 교서를 짓는 일을 맡았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는 큰형이 또 독서당에서 사가독서를 하였으며, 우리 삼 형제가 모두 사관으로서 붓을 잡기도 하였다. 둘째 형과 나는 나란히 과거에 장원하였고, 나는 또 세 차례나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 무렵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난 집안을 꼽을 때면 반드시 우리 집안을 첫손에 꼽았다.
옛날 중국 남조 시대에 유효작의 집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자매가 함께 문장에 뛰어났는데, 일찍이 스스로 자랑하여 "허씨ㆍ사씨 집안의 부귀도, 왕씨ㆍ사씨 집안의 영화로움도 모두 우리 집안의 학문과 문장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는데, 나 또한 우리 집안이 그러하다고 말하고 싶다.
성소부부고 제25권
10. 15:50
성소부부고 제25권 — 설부 4
성수시화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출처: 성소부부고 제25권, 설부 4, 성수시화 인 및 성수시화
배경: 허균이 신해년(1611년, 광해군 3년) 함열(당시 이름은 함산)로 귀양 가 있던 시절에 쓴 우리나라 역대 시 비평집이다. 원래 정미년(1607년)에 우리나라 시를 골라 정리하고 두 권짜리 비평서까지 지었으나, 원고 두 벌이 모두 없어지는 바람에 기억을 더듬어 새로 써낸 것이 이 책이다. 신라 말부터 허균 당대까지 약 팔백 년에 걸친 시인들을 다루며, 시 하나하나에 대한 짧고 날카로운 평을 곁들인다. 허균 특유의 거침없는 호오와 자기 집안(양천 허씨) 문인들에 대한 자부심이 곳곳에 드러난다.
성수시화를 쓰게 된 사연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우리나라는 당나라 말기부터 지금까지 붓을 들어 시를 지은 사람이 아마 수천 명은 될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름도 없이 묻히고 전하지 않는 이가 절반을 넘는다. 게다가 전쟁까지 겪으면서 책이 거의 다 없어졌으니, 뒷날 공부하는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그 자취를 살필 수 있을지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다.
나는 어려서부터 형님들과 스승들이 하는 말을 귀에 익도록 들었고, 자라면서는 스스로 글하는 사람이라 자부하며 살아온 지 어느새 삼십 년이다. 그동안 보고 기억해 온 것이 적지 않고, 일찍부터 어느 시가 맑고 어느 시가 탁한지 나름의 안목도 지녀 왔다고 생각한다. 정미년(1607년)에는 우리나라 시를 추려 정리하는 일을 마치고 이어서 시에 대한 비평까지 지었다. 시로 이름이 전하는 이든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이든 가리지 않고 널리 모아, 하나하나 옳고 그름을 가리고 평을 붙인 것이 모두 두 권이었다. 거기서 고른 시구들이 격조 높은 안목에는 어긋날지 몰라도, 자료를 찾아본 정성만큼은 한 시대의 문헌이라 할 만큼 넉넉했다고 자부한다.
글이 완성되자 원고를 정리해 딱 두 벌을 베껴 두었다. 하나는 낭주(지금의 전라남도 영암 지역)에 두었는데 잃어버렸고, 또 하나는 서울 집에 두었는데 이 역시 없어지고 말았다. 아마 도교에서 말하는 육정 귀신이 내려와 가져간 것은 아닐까.
(용어) 육정 — 도교에서 하늘의 뜻을 받들어 신비한 일을 맡아본다는 신들의 이름이다.
다시 써 보려 해도 하늘이 꺼리는 일을 감히 다시 범하고 싶지 않아 그냥 손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 신해년(1611년, 광해군 3년)에 함열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마침 할 일 없이 한가한 처지라 예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기억나는 대로 종이에 옮겨 적어 보았다. 다 쓰고 나서 다시 읽어 보니 제법 마음에 들기에 이를 "시화"라 이름 붙였다. 모두 아흔여섯 항목이다. 위로 팔백 년의 시간에서 뽑아낸 것이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니 너무 간략한 것 같기도 하지만, 요컨대 이 역시 내 나름대로 정성을 다한 것이니 읽는 사람은 그 뜻을 헤아려 주기 바란다.
이해 사월 스무날, 교산이 쓴다.
신라·고려 시대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고운 최치원 학사의 시는 당나라 말기의 시인답게 정곡이나 한악 같은 이들의 풍을 크게 벗어나지 못해서, 대체로 가볍고 부박하여 무게가 부족하다. 다만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니 이 세상에 내 마음 알아줄 이 드물구나 깊은 밤 창밖에는 비가 내리는데 등불 앞에서 만 리 밖 고향을 생각하네
라 한 절구 한 수가 가장 뛰어나며, 또 다른 연구에
먼 나무들은 강둑길을 따라 들쭉날쭉하고 찬 구름은 말 앞 봉우리에 나직이 내려앉네
라 한 구절도 아름답다.
(용어) 최치원(857~?) — 신라 말의 학자·문장가.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살이를 했으며, 귀국 후에는 어지러운 정치 현실에 실망해 은거했다고 전한다. 호는 고운.
정 대간(정지상)의 시는 고려 전성기 시인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 남아 전하는 작품은 매우 적지만 편마다 모두 뛰어난 절창이다. 이를테면
바람에 실려 가는 나그네 배엔 조각구름 떠 있고 이슬 엉긴 궁궐 기와엔 옥빛이 번쩍이네
라 한 구절은 조금 가벼운 편이지만,
버드나무 늘어선 골목엔 예닐곱 집 문이 닫혔고 밝은 달 아래 발을 걷은 이는 서너너덧 사람일세
라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신기하고 빼어나다. 또
바위 위 소나무는 조각달 아래 늙어 가고 하늘 끝 구름은 천 개의 산봉우리에 나직이 걸렸네
라는 구절은 딱딱하고 까다롭지만 그런대로 맑고 깨끗한 맛이 있다.
(용어) 정지상(?~1135) — 고려 인종 때의 문신·시인. 서경(지금의 평양) 출신으로 묘청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대간은 그가 지낸 벼슬 이름.
정 대간이 서경에서 지은 시로
비 갠 긴 둑엔 풀빛이 더욱 짙고 님 보내는 남포엔 구슬픈 노래 울리네 대동강 물이야 어느 때에나 마르리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푸른 물결에 보태지는 것을
이라 한 것은 지금까지도 절창으로 꼽힌다. 부벽루 현판에 새겨진 시들은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모두 철거했지만 이 시만은 남겨 두었다. 훗날 최고죽(최경창)이 이 시에 화답하여
강 언덕엔 길고 긴 능수버들 휘늘어지고 연 따는 노랫가락 조각배에 요란하더니 붉은 꽃도 다 져서 서풍은 차갑기만 한데 해 저문 물가엔 흰 물결만 일어나네
라 했고, 이익지(이달)는
연잎은 들쭉날쭉 연밥은 주렁주렁 연꽃 사이사이로 아가씨들 노래하네 돌아올 땐 물목에서 벗 만나자 약속했기에 힘겹게 배를 저어 물결 거슬러 오르네
라 했다. 두 시 모두 매우 훌륭하여 당나라 왕창령이나 이군우의 여운이 느껴지지만, 이는 연밥 따는 노래일 뿐이지 서경에서 이별하는 본래의 뜻과는 다르다.
〈한림별곡〉에서도 유원순의 글과 이인로의 시를 함께 일컬었으니, 이 대간(이인로)의 시는 참으로 당대 제일이었다. 그의
한밤중 닭 울음소리에 벌떡 일어나 춤을 추고 몇 번이나 이를 잡으며 좋은 계책을 논했던가
라는 구절은 매우 훌륭하여, 명나라 구종길의
지난날엔 이광을 따라 범 바위를 쏘더니 한밤중 닭 울음에 유곤처럼 춤을 추네
라는 시와 비슷하며, 그의 팔경시 또한 아름답다.
(용어) "한밤중 닭 울음소리에 일어나 춤을 추고" — 진나라 조적이 벗 유곤과 함께 지내다가 한밤중 닭 울음소리를 듣고 "이것은 좋은 징조다" 하며 함께 일어나 춤을 추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따온 구절이다. "이를 잡으며 계책을 논했다"는 구절 역시, 진나라 왕맹이 권력자 환온 앞에서 거리낌 없이 이를 잡아가며 세상일을 논했다는 옛이야기에서 왔다. 이인로(1152~1220)는 고려 무신정권기의 문인으로, 호는 쌍명재, 대간은 그가 지낸 벼슬 이름.
이 대간이 승정원에서 숙직하며 지은 시에
공작 병풍 깊은 곳 촛불 그림자 희미한데 원앙새는 쌍쌍이 잠드니 어찌 저마다 날아가리 가엾어라 초췌한 청루 속의 여인이여 평생토록 남을 위해 시집갈 옷을 짓는구나
라 했다. 대체로 이 대간이 오래도록 낮은 벼슬에 머물러 있고 아직 등용되지 못했는데, 동료들은 모두 재상 길에 올라 있어서, 그들의 승진 사령장을 대신 쓰면서 느낀 바가 있어 이 시를 지은 것이다.
이 문순(이규보)의 시는 화려하고 거침이 없다. 그의 칠석우라는 시는 참으로 절창이다.
얇은 적삼에 삿자리 깔고 바람 부는 난간에 누웠다가 꾀꼬리 울음소리 두세 번에 꿈을 깨었네 짙은 잎에 가려진 꽃은 봄이 지나도록 남아 있고 엷은 구름 헤치고 나온 햇살은 빗속에서도 밝구나
라 했는데, 이 시는 읽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해진다. 또
관원이 한가로이 젓대를 골라 부니 부들자리는 바람 타고 날아갈 듯하구나 하늘에 걸린 달은 온 천하가 함께 보는 것인데 내 배에만 혼자 싣고 돌아가는 양 여기네
라 한 시도 더없이 고아하고 빼어나다.
(용어) 이규보(1168~1241) — 고려 무신정권기의 대표적 문인. 시와 술, 거문고를 즐겨 "삼혹호 선생"이라 불렸으며, 시호는 문순.
같은 시대의 한림 진화는 이규보와 나란히 이름을 떨쳤는데, 그의 시는 매우 맑고 아름답다.
매화는 떨어지고 버들가지는 늘어졌는데 한가로이 맑은 안개 밟으며 느릿느릿 걸어가네 어점은 문 닫혀 사람 소리 드문데 온 강에 내리는 봄비는 실실이 푸르구나
라 한 시는 맑고 굳세어 읊조릴 만하다.
사인 홍간의 시는 농염하고도 맑고 곱다. 그의 〈나부인〉과 〈고안〉 같은 시편은 가장 훌륭해서 당나라 전성기 시인들의 작품과 비슷하다.
이견간의 시에
여관에는 등불 하나, 남은 심지 돋우노라니 사신의 담백한 정취는 중보다 낫구나 창 너머 두견새 소리 밤새 듣노니 산꽃 몇째 층에서 우는 것인가
라 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절창이라 일렀다. 나는 관동 지방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사람들이 두견이라 부르는 그 새는 사실 소쩍새 종류였다. 절강 사람 왕자작과 사천 사람 상방기가 함께 강릉에 왔을 때 내가 물어보았더니, 둘 다 이것은 두견이 아니라고 했다. 시인들이란 흥에 겨워 말을 붙이는 법이라, 정작 그 물건이 아니더라도 시 속에서는 그런 말을 즐겨 쓰는 것이다. 이를테면
숲 너머 흰 잔나비 울음소리 부질없이 듣노라
와 같은 구절도, 사실 우리나라에는 본래 잔나비가 없다. 또
집집마다 긴 대숲에 비취새가 우는구나
와 같은 구절은, 파랑새를 보고서 남쪽 바다의 비취새라 부른 것이고,
자고새는 놀라 해당화를 흔드네
와 같은 구절은, 때까치가 깍깍 우는 소리를 듣고서 "가지 마오"라 우는 자고새로 여긴 것이니, 모두 이런 식이다.
원외 김극기는 시상이 매우 교묘하다. 겨울에 핀 오얏꽃을 읊으면서 마지막 구에
기이한 향기가 저절로 굴속에 모여드니 한나라 궁궐에서 이 부인을 다시 보는 듯하네
라 했으니, 이는 옛 시인들도 미처 말하지 못했던 발상이다. 의주에 있을 때 지은 시에는
문장이란 늙어서도 서로 즐길 만한 것 칼 한 자루 차고 변방을 돌며 다섯 수레 책을 우러르네 공무를 마치고서야 내가 변방 관리인 줄 깨닫나니 종이창 밝은 곳에 누워 책이나 보는구나
라 했으니, 세속의 근심을 훌훌 떨쳐 버리는 그 심사가 후련하게 느껴진다.
최해와 이제현, 그리고 고려 말의 문장가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사람들 말로는, 최예산(최해)이 이익재(이제현)의 시 원고를 모조리 먹칠해 지워 버리고 딱 한 편만 남겨 두었다고 한다. 그 시는
얇은 이불에 한기가 돌고 불등은 흐릿한데 상좌 스님은 한밤 내내 종을 울리지 않는구나 아마도 자고 난 손님이 문을 일찍 여는 게 못마땅해 뜰 앞에 눈 덮인 소나무를 못 보게 하려는 것이겠지
인데, 이를 보고 이제현이 크게 감탄하며 최해를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지나치게 꾸며낸 이야기다. 이제현의 시에는 좋은 작품이 매우 많다. 〈화오서곡〉과 〈민지〉 같은 옛 시체의 작품들은 모두 옛 시에 가깝고, 여러 율시들 역시 웅장하고 맑다. 젊을 때 지은 역사를 노래한 시 가운데
누가 알리오, 업 땅의 순문약이 끝내 요동의 관유안에 부끄러울 줄
이라 한 구절이나, 또
서시를 배에 싣고 떠나보내지 않았다면 월나라 궁궐에도 도리어 고소대 하나가 생겼으리
라 한 작품, 또
유비가 그저 잠총국(촉나라)만 사랑하고 있었다면 옛 마을에 우보개거 이야기는 부질없이 생겼을 것을
이라 한 작품들에 이르러서는 하나같이 규모가 반듯하고 이전 사람들이 미처 펼쳐 내지 못한 발상이니, 어찌 낮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다만 최해가 남긴 그 시 한 편으로 이제현을 감탄시켰다는 이야기는, 뛰어난 인물이 평범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식의 과장이라 전부 믿을 수는 없다.
(용어) 최해(1287
1340) — 고려 말의 문인. 가난한 살림에 만년에는 절에서 밭을 빌려 농사지으며 글을 썼다. 호는 예산농은. 이제현(1287
1367) — 고려 말의 대표적 문신·학자. 원나라에 오래 머물며 이름난 학자들과 교유했고, 호는 익재. "순문약", "관유안"은 각각 후한 말의 인물 순욱과 관녕을 가리킨다. 순욱은 절개를 굽혀 조조 밑에서 벼슬했고, 관녕은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산속에 은거하며 절개를 지켰다. "서시를 배에 실은" 고사는, 오나라에 패한 월나라가 미녀 서시를 오왕에게 바쳐 그 마음을 흐트러뜨린 뒤 결국 오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옛이야기다. "우보개거"는 촉나라를 세운 유비가 어릴 때 뽕나무 아래서 놀며 "내가 반드시 저 뽕나무 같은 화려한 수레를 타게 될 것이다"라고 농담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이제현의 장인은 국재공(권보)인데, 부부가 함께 아흔넷까지 살았으나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제현이 장인을 애도하며 지은 만시 한 구절에
항아는 광한전에서 님 오시길 기다리는데 거사는 그저 홀로 도솔천으로 돌아가네
라 했다. 권보 공이 부처를 좋아했으니 그를 도솔천에 오른 백낙천에 비유한 것은 괜찮지만, 항아가 남편의 약을 훔쳐 달로 달아났다는 이야기는 예로부터 시인들이 속세를 떠나 신선 세계로 올라간 것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었는데, 이를 장모에게 갖다 쓴 것은 그다지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용어) 권보(1262~1346) — 고려 말의 문신, 호는 국재. "항아" 이야기는 명궁 예의 아내 항아가 남편이 얻은 불사약을 몰래 훔쳐 먹고 달로 달아나 달의 선녀가 되었다는 중국 신화다. "거사가 도솔천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백낙천)가 만년에 자신을 도솔천에 사는 부처의 제자로 여겼던 데서 온 말이다.
이 문정(이색)의 〈어제 영명사에 들르다〉라는 작품은 특별히 꾸미거나 다듬은 흔적 없이 저절로 음률에 들어맞아, 읊으면 신비로울 정도로 빼어나다. 명나라 사신 허영양이 이 시를 보고 "그대 나라에도 이런 작품이 있구려" 하고 감탄했다. 그의 〈부벽루〉 시는 긴 작품인데 그 가운데
문머리엔 고려의 시가 여태 걸려 있으니 그 시절에도 이미 중국 글자를 깨쳤구나
라는 구절이 있다. 비록 우리나라 사람을 낮춰 보는 말이지만, 그 역시 이색의 시에는 탄복하고 있었던 셈이다.
(용어) 이색(1328~1396) — 고려 말의 대학자·문신. 원나라에 유학해 과거에 급제했으며 목은으로도 불린다. 시호는 문정. 정몽주, 정도전 등을 길러낸 스승 격의 인물이다.
이색은 원나라에 들어가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제과에 합격했는데, 그때 응봉한림 구양규재(이름은 현)와 우도원(이름은 집) 같은 이들이 모두 그를 추어올렸다. 규재는 감탄하며 "우리 학문의 정통은 마땅히 바다 건너 그대에게 전해질 것이오" 하고 말했다. 그 뒤 이색이 고려 말에 궁지에 몰려 이리저리 쫓겨 다닐 때는, 그의 문하생과 옛 동료들조차 모두 등을 돌리고 돌을 던졌다. 그때 공이 시를 지어
학문의 정통은 마땅히 바다 건너 전해지리라던 규재의 그 한마디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요즘 세상 물건값은 죄다 날개 돋친 듯 오르는데 내 글만은 홀로 한 푼어치도 안 나가는구나
라 했으니, 대개 좋은 시절을 만나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슬퍼한 것이다.
원나라가 반란을 일으킨 승려 무리를 보내왔을 때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놀랐는데, 우리 태조(이성계)가 적은 군사로 이들을 덕흥에서 크게 물리쳤다. 태조가 개선하자 공민왕은 그 공을 치하하며 이색과 태조에게 함께 나라의 큰일에 참여하도록 명했다. 임명을 알리는 교지를 내리던 날, 공민왕은 기뻐하며 좌우에게 "문관으로는 이색을 쓰고 무신으로는 이성계를 쓰니, 내 사람 쓰는 안목이 어떠하오" 하고 말했다. 태조는 이색과 우정이 매우 두터워, 자기 집의 당호를 지어 달라고 청했다. 이색은 "송헌"이라 이름 붙이고 그 뜻을 풀어 글까지 지어 권면했으며, 훗날 태조의 아버지 환조의 비문도 지어 주었다.
(용어) 송헌 —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쓰던 당호(집이나 서재에 붙이는 이름)로, "소나무 처마"라는 뜻이다.
훗날 이색이 지방으로 유배되고 아들 종학과 종선도 모두 먼 곳으로 귀양 가게 되자, 그의 문인이었던 정총과 정도전이 이색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그러자 공이 시를 지어
송헌(이성계)이 나라를 맡자 나는 유배를 가니 꿈속에서인들 이런 일을 한 번이나 생각했으랴 정씨 두 사람이 나라의 큰 논의에 참여한다니 우리 한 집안이 다시 모일 날이 언제나 있으리
라 했다. 첫 구절은 애처롭지만 둘째 구절 이하의 뜻은 몹시 오만하다.
정몽주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정 포은(정몽주)은 이학과 절의에서 당대 으뜸이었을 뿐 아니라 문장도 호방하고 걸출했다. 그가 함경도 북관 지역에서 지은 시에
정주 땅 중양절에 높은 곳에 올라보니 국화는 예전처럼 눈부시게 피었구나 갯벌은 남으로 선덕진에 이어지고 산줄기는 북으로 여진의 성에 닿아 있네 백 년 세월 전쟁 치른 나라의 흥망사에 만 리 밖 나그네는 강개한 마음 끓어오르네 술자리 파하자 원수는 말에 올라타고 낮은 산에 기운 해는 깃발을 비추는구나
라 했으니, 음절이 힘차고 시원스러워 당나라 전성기의 풍격이 있다. 또
풍류 넘치는 고을 태수는 이천 석 녹봉의 자리요 옛 친구 우연히 만나 삼백 잔 술을 기울이네
라 한 구절이나, 또
나그네는 고향에 못 가는데 제비 새끼 만나고 살구꽃 지고 나니 복사꽃도 따라 지네
라 한 구절, 또
매화 핀 창가엔 봄빛이 일찍 찾아들고 판자 지붕엔 빗소리가 유난히 많네
라 한 구절들은 모두 호탕하게 펄펄 날아오르는 기운이 있어, 그 사람됨과 꼭 닮았다.
포은의 시에
강남의 아가씨들은 머리에 꽃을 꽂고 웃으며 짝을 불러 물가에서 노니는데 노 저어 돌아오니 어느덧 날이 저물고 원앙새 쌍쌍이 나니 시름은 그지없네
라 했으니, 호탕한 풍류가 천고에 빛을 내며, 시 역시 옛 악부의 가락과 흡사하다.
(용어) 정몽주(1337~1392) — 고려 말의 대학자·충신.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다가 이방원 세력에게 죽임을 당했다. 호는 포은.
요동에 유배된 문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척약재 김구용의 시는 매우 맑고 참신하며 섬세하고 풍성했다. 목은 이색이 "경지(김구용의 자)가 붓을 들면 마치 구름과 안개가 피어나는 듯하다"고 칭찬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김구용은 일찍이 회례사가 되어 예물을 요동에 바쳤는데, 요동 도사 반규가 그를 명나라 수도로 잡아 보냈다. 예물 문서에 "말 오십 필"이라 써야 할 것을 실수로 "말 오천 필"이라 적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태조는 우리나라가 요동의 관리와 사사로이 교분을 맺었다며 화를 내고는 "말 오천 필이 오면 풀어 돌려보내겠다"고 했다. 이때 광평부원군 이인임이 나라 정치를 맡고 있었는데, 평소 김구용 무리와 사이가 나빠 끝내 말을 바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는 그를 대리(지금의 중국 윈난성 지역)로 유배 보냈다. 공이 시를 지어
죽고 사는 것이 운명이라니 하늘의 뜻을 어이하리 동쪽으로 고향 하늘 바라보니 갈 길은 아득한데 좋은 말 오천 필이 언제나 도착할는지 복사꽃 핀 문밖엔 풀만 무성히 우거졌네
라 했고, 또 무창에서 지은 시에는
황학루 앞엔 물결이 솟구치는데 강 따라 늘어선 주막은 몇천 채런가 추렴한 돈으로 술 사다 회포를 풀어 보나니 대별산은 푸른데 해는 이미 기울었구나
라 했는데, 공은 끝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용어) 김구용(1338~1384) — 고려 말의 문신·문인. 명나라와의 외교 문서 사고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호는 척약재.
그 뒤 참의 조서 역시 금치(지금의 중국 윈난성 지역)로 유배되었다가 몇 해 만에 풀려 돌아왔는데, 황주에서 지은 시에
물빛과 산 기운은 맑은 모래를 어루만지고 버들 푸른 긴 둑엔 천만 채 집이로세 무수한 장삿배는 성 아래 정박해 있고 대나무 누각의 안개 낀 달밤엔 피리 노래 드높구나
라 했다. 나는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좁은 이 땅에서만 살다 보니 천하를 두루 유람해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 두 사람은 비록 낯선 땅으로 유배되긴 했어도 그 덕분에 중국 오나라와 초나라의 산천을 다 보았으니, 이 또한 사람으로서 얻기 힘든 통쾌한 일이라 하겠다.
이 도은(이숭인)의 〈오호도시〉를 목은 이색은 크게 칭찬하며 당나라 전성기 시에 견줄 만하다고 했는데, 이 일로 삼봉 정도전과 사이가 나빠져 결국 기구한 화까지 입게 되었다. 예전에 명나라 사신 주태사가 이 작품을 보고 역시 매우 감탄했다고 한다. 그
산 북쪽과 산 남쪽으로 가느다란 길이 갈라지고 소나무 꽃은 비를 머금어 어지러이 떨어지네 도인이 물을 길어 초가집으로 돌아오니 한 줄기 푸른 연기가 흰 구름을 물들이네
라 한 시는, 당나라 시인 유장경에게 견주어도 모자랄 것이 없다.
(용어) 이숭인(1347~1392) — 고려 말의 문신·문인. 조선 개국 세력과 대립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호는 도은.
나라가 세워진 초기에는 정교은(정이오)과 이쌍매(이첨)의 시가 가장 훌륭했다. 정교은의 시에
이월도 다 저물고 삼월이 오려 하니 한 해의 봄빛이 꿈결처럼 돌아오네 천금으로도 이 좋은 시절은 살 수 없으니 술 익어 가는 어느 집에서 꽃이 한창 피었는고
라 한 시는 당나라 시인들의 아름다운 경지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쌍매의
신선이 차고 온 옥 소리 쟁그랑쟁그랑 높은 누각에 올라와 푸른 창에 걸어 놓고 밤 되어 다시금 유수곡을 타노라니 둥근 달 하나가 가을 강에 내려앉네
라 한 시도 빼어난 운치가 있다. 이쌍매의 〈꾀꼬리 소리를 듣고〉라는 시에
서른여섯 궁궐 후원 봄 나무 깊숙한데 미인이 꿈에서 깨니 남창엔 어스름 영롱한 백 가지 울음소리 시름겹게 들으니 모두가 향기로운 규방에서 임금을 기다리는 마음일세
라 했으니,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와 흡사하다.
(용어) 정이오(1354
1440) —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호는 교은. 이첨(1345
1405) —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호는 쌍매당.
조운흘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석간 조운흘은 고려 때 이미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늘그막에는 미친 척 세상을 즐기며 지내다가 스스로 사평원(지금의 서울 강동 지역 나루터 역원)의 원주가 되기를 자청했다. 하루는 권세가 임견미와 염흥방의 무리로 지목되어 지방으로 유배 가는 사람들이 길에 줄줄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한낮에 사람 불러 사립문 열고 숲 속 정자로 걸어나가 이끼 낀 돌에 앉으니 어젯밤 산속엔 비바람이 거칠더니 개울 가득 흐르는 물에 꽃잎이 떠내려오네
(용어) 조운흘(1332~1404) —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늘그막에 세상일에서 물러나 강가 나루터의 관리인을 자청하며 은둔했다. 호는 석간. 임견미와 염흥방은 고려 말 권세를 부리다 처형된 권신들이다.
세종 때의 문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세종 임금 때는 인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이름난 문장가와 학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옛 시체로 지은 고시는 옛사람들에 견주면 자못 부끄러운 수준이고, 율시나 절구에서도 딱히 놀랄 만한 작품은 없다. 다만 서사가(서거정)의 시는 다소 장황하기는 해도 풍성하고 아름다워 간간이 좋은 구절이 있다. 이를테면
노니는 벌은 쉴 새 없이 날아다니고 한가한 오리는 서로 기대어 조는구나 달빛은 풀벌레 소리 너머로 비치고 은하수는 까치 그림자 속으로 흐르네
라 한 구절이나
다시 한번 난새를 타고 쇠피리를 불며 깊은 밤 밝은 달빛 아래 강남을 찾고 싶네
와 같은 구절은 제법 운치가 있다.
(용어) 서거정(1420~1488) — 조선 초의 대표적 문신·학자. 여러 차례 대제학을 지내며 당대 문단을 이끌었다. 호는 사가정.
김괴애(김수온)의 시 또한 호방하다. 이를테면
사립문이 삐딱하게 시냇둑에 다다르니 산비 내리는 아침마다 물 불어나는 걸 보노라
라 한 구절이나,
밝은 창가에서 스님은 승복을 깁고 고요한 탑 아래서 나그네는 시를 짓네
라 한 구절은 매우 한가롭고 여유로워 운치가 있다.
(용어) 김수온(1409~1481) — 조선 초의 문신·학자.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호는 괴애.
강경순(강희맹)의 〈양초부〉는 대단히 훌륭하며 그의 시 역시 맑고 굳세다. 그의 〈병중에 읊다〉라는 시에
남창에 종일 앉아 세상일 다 잊었더니 뜨락엔 사람 없어 새가 나는 법을 배우는구나 가는 풀 사이 은은한 향기 어디서 오는지 묽은 연기 스러지는 볕에 가랑비 부슬부슬
이라 했고, 매화를 읊은 시에
어스름 울타리 가에서 뻗은 가지 바라보고 느릿느릿 향기 찾아 물가에 다다르니 천년 세월 나부산에 떠 있던 둥근 달이 오늘에 와 다시 비치니 꿈에서 깨어난 듯하네
라 했는데, 모두 한아하여 읊조릴 만하다.
(용어) 강희맹(1424~1483) — 조선 초의 문신·학자. 농업서 《금양잡록》을 짓기도 했다. 자는 경순, 봉호는 진산.
서사가가 오랫동안 대제학을 지냈기 때문에, 같은 시대의 강진산(강희맹)·이양성(이승소)·김영산(김수온) 같은 이들은 모두 문형(대제학 자리)을 맡아 보지 못한 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양성이 제비를 읊은 시에
버드나무 푸른 골목에 봄바람은 저물어 가고 풀빛 푸른 연못가에 가랑비는 자욱하네
라 한 구절은 당나라 시인의 시구와 흡사하다.
우리나라 시에는 옛 시체를 제대로 본뜬 것이 드문데, 오직 성화중(성간)이 안연지·도연명·포조 세 사람의 시체를 본떠 지은 세 편만은 그 법식을 깊이 터득했고, 여러 절구 역시 당나라의 악부체를 얻었으니, 이 사람 덕분에 우리 시단이 겨우 쓸쓸함을 면했다고 할 만하다.
(용어) 이승소(1422
1484) — 조선 초의 문신, 봉호는 양성군. 성간(1427
1456) — 조선 초의 문인, 자는 화중. 안연지·도연명·포조는 모두 중국 남북조 시대의 유명한 시인들이다.
김종직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점필재(김종직)의 글은 요체는 깨우쳤으나 높은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니, 최동고(최립)가 그를 가장 업신여겼다. 그의 시는 온전히 소식과 황정견에게서 나왔으니, 옛 시를 평가하는 사람들이 그를 낮추어 보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러나 나의 둘째 형(허봉)은 일찍이 그의 시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이 우니 맑은 이슬이 내려 맺히고 달이 뜨니 큰 물고기가 뛰어오르네
라 한 구절은 결코 당나라 전성기의 시에 뒤지지 않으며,
가랑비 속에 스님은 장삼을 꿰매고 찬 강 위로 나그네는 배 저어 가네
와 같은 구절은 매우 한적하고 담백한 맛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는 대체로 맞는 말씀이다.
(용어) 김종직(1431
1492) — 조선 초의 대학자. 영남 사림파의 종조로 꼽히며, 죽은 뒤 그가 쓴 〈조의제문〉이 빌미가 되어 부관참시를 당했다. 호는 점필재. 최립(1539
1612)은 선조 때의 문장가로 호는 동고. 소식(소동파)과 황정견은 중국 송나라를 대표하는 시인들이다.
이전 사람들은 점필재가 여강(지금의 경기도 여주 지역을 흐르는 남한강)에서 읊은
십 년의 세상일은 홀로 읊는 시 속에 담기고 팔월의 가을빛은 어지러운 숲 사이로 번지네
라는 구절을 칭송해 왔다. 그러나 신륵사에서 지은
절간에서 종이 울리니 여룡이 춤을 추고 온갖 구멍에서 바람이 우니 철봉이 나래를 치네
라 한 구절의 웅장하고 묵직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는 참으로 우주를 떠받칠 만한 시구다. 그의 〈보천탄즉사〉에서는
복사꽃 실은 물결이 몇 자나 높았는지 은빛 바위는 목까지 잠겨 어딘지 모르겠네 쌍쌍이 노니는 가마우지는 옛 여울돌을 잃고 물고기를 물고는 갈대숲으로 들어가네
라 했는데, 이는 가장 힘차고 높은 경지이며, 《동경악부》는 편마다 모두 예스러운 맛이 있다.
김시습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김열경(김시습)의 높은 절개는 우뚝하여 더할 나위가 없다. 그의 시문 역시 남다른 격을 지녔지만, 마음을 쏟지 않고 장난삼아 지은 것이 많아서 마치 세게 쏜 화살이 힘을 잃고 떨어지듯 하는 대목이 있고, 매번 허튼소리가 섞여 있어 당나라의 저속한 시인 장타유를 보는 듯 싫증이 나기도 한다.
(용어) "장타유" — 당나라의 장타유라는 사람이 지은 시가 하도 저속해서, 후대에 격 떨어지는 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누런 개는 몸이 하얗게 되고, 하얀 개는 몸이 부어올랐다" 같은 우스꽝스러운 구절이 대표적이다.
그가 세향원에 쓴 시에
아침 해가 떠오르려 새벽빛이 갈라지고 숲안개 걷힌 곳에 새는 무리를 부르는구나 먼 봉우리에 떠오른 푸른빛 창을 열고 바라보며 이웃 절 종소리는 언덕 너머로 듣는다 파랑새는 소식 전하며 약 달이는 솥을 엿보고 벽도화는 떨어져 이끼 위에 비치네 아마도 신선은 도관으로 돌아가서 솔 아래 한가로이 도교 경전을 펼쳐 보리
라 했고, 소양정에서는
새 너머로 하늘은 끝나려 하고 읊조림 끝에 한은 그지없어라 산은 첩첩이 북쪽으로 굽이쳐 가고 강은 절로 서쪽을 향해 흐르는구나 먼 물가엔 기러기 내려와 앉고 그윽한 옛 기슭엔 배 돌아오네 언제나 이 속세의 그물을 떨쳐 버리고 흥에 겨워 이곳에 다시 와 놀아 볼까
라 했으며, 산길을 가며 지은 시에는
아이는 잠자리 잡고 할아비는 울타리 고치고 작은 개울 봄물에 가마우지 목욕하네 푸른 산 끊긴 곳에 돌아갈 길은 머니 등나무 지팡이 하나 비스듬히 둘러메고 오누나
라 했는데, 모두 세속의 때를 훌훌 떨쳐 버려 화평하고 담백하니, 저 자잘하게 다듬기만 하는 시인들은 마땅히 이 앞에서 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이다.
(용어) 김시습(1435~1493) — 조선 초의 문인.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해 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떠돌며 살았던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열경.
연산군 시대 전후의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조매계(조위)와 유뇌계(유호인)는 한 시대에 함께 이름을 날렸지만 정순부(정희량)에는 미치지 못했다. 정순부의 〈혼돈주가〉는 매우 훌륭하여 소동파와 흡사하다.
조각달은 이 마음 비추며 고국에 다다르고 지는 별은 꿈을 따라 변방 성에 떨어지네
라 한 구절은 더없이 신비롭고 빼어나며,
나그넷길에 우연히 한식 비를 만나니 꿈속에서 오히려 고향의 봄을 떠올리네
라 한 구절에는 당나라 중기 시의 고아한 운치가 있고,
봄이 와도 꽃은 안 보이고 눈만 보이니 기러기도 안 오는 곳에 사람이 어찌 찾아오리
라 한 구절은 다듬은 흠이 조금 있지만 그래도 다정다감하다.
(용어) 조위(1454
1503) — 조선 초의 문신, 호는 매계. 유호인(1445
1494) — 조선 초의 문신·문인, 호는 뇌계. 정희량(1469~1502?) — 조선 초의 문신, 호는 순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망헌(이주)의 시는 가장 침착하여 당나라 전성기의 풍격이 있다.
아침 해는 붉은빛을 뿜으며 발해 위로 솟구치고 갠 구름은 하얗게 펼쳐져 무려산을 벗어나네
와 같은 시구는 매우 힘이 있으며,
언 비는 천 산마루의 눈으로 비껴 이어지고 주린 까마귀는 놀라 한 숲의 바람 속에 우짖네
라 한 시구는 노련하고 웅혼하며 기이하고 걸출하다. 통주에서 지은 시는
통주는 천하의 명승지라 누각들이 구름 낀 하늘로 솟았구나 저자에는 금릉의 물화가 쌓이고 강줄기는 양자강 물결로 이어지네 가을이라 찬 안개는 물가에 내리고 저물녘 외로운 학은 요동으로 돌아가네 말안장에 오른 이 몸은 천 리 밖 나그네 정자에 오르니 고국은 아득하기만 하네
라 했는데, 이 역시 놀랍게도 왕유와 맹호연의 수준에 가깝다.
(용어) 이주(1468~1504) — 조선 초의 문신, 호는 망헌.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남지정(남곤)은 일찍이 "김일손의 글이나 박은의 시는 쉽게 얻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참으로 옳다. 박은의 시는 비록 정통의 소리는 아니지만 엄격하고 치밀하며 굳세고 사납다.
흐린 봄날 비가 오려니 새들은 서로 지저귀고 늙은 나무는 무정한데 바람은 절로 슬퍼지네
와 같은 구절은, 당나라의 섬세하고 곱기만 한 시풍을 배운 사람으로는 감히 오를 수 없는 경지다.
(용어) 남곤(1471
1527)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지정. 기묘사화를 주도한 인물로 훗날 평이 나쁘다. 김일손(1464
1498) — 무오사화 때 처형된 사관·문신. 박은(1479~1504) — 조선 초의 문인,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연산군은 비록 정치가 어지러웠으나 시문은 좋아했다. 강목계(강혼)가 오랫동안 도승지로 있었는데, 연산군이 언젠가
한식이라 동산 숲에 삼월은 저물고 꽃 날리는 비바람에 오경은 싸늘하네
라는 시구를 시제로 내려 가까운 신하들에게 짓도록 했는데, 강목계의 시가 장원으로 뽑혔다. 그 시에
청명절이라 궁궐 버들은 찬 안개에 잠기고 쌀쌀한 봄바람은 새벽 되어 더욱 몰아치네 지는 꽃은 붉게 땅을 뒤덮고 나는 버들개지는 하늘을 하얗게 뒤덮누나 못물 너머 높은 누각에선 구슬발을 걷고 좋은 말은 꽃을 찾아 비단 언치를 빛내는구나 금 술동이 실컷 취해 별원으로 돌아오니 오색 끈이 흔들리며 그림 난간을 스치네
라 했는데, 연산군은 크게 칭찬하며 상으로 준 물건도 매우 많았다.
언젠가 연산군이 죽은 후궁을 슬퍼하여 신하들에게 애도시를 짓게 했는데, 이백익(이희보)이
궁궐 문은 깊이 잠겨 달빛도 황혼인 제 열두 번 종소리가 밤중에 울리는구나 어느 곳 청산에 그 옥 같은 몸을 묻었는지 가을바람에 지는 잎 소리 차마 못 듣겠네
라 하니, 연산군이 극찬하며 그를 이조 정랑에서 직제학으로 단번에 발탁했다. 두 사람의 시가 비록 좋기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 일 때문에 오히려 시인으로서 이름을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용어) 강혼(1464
1519) — 조선 초의 문신, 호는 목계. 이희보(1473
1548) — 조선 초의 문신, 자는 백익.
이행과 중종 때의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 시로는 이용재(이행)를 첫손에 꼽아야 마땅하다. 그의 시풍은 침착하고 화평하며 아담하고 원숙하다. 오언고시는 두보와 진후산(진사도)의 품격과 비슷하여 높고 예스러우며 간결하고 절실하니, 글이나 말로는 다 찬양할 수가 없다. 내가 평소 즐겨 읊던 절구 한 수는
평생에 사귄 벗들은 모두 늙어 죽어 가고 흰머리로 마주 보니 그림자와 몸뚱이만 남았네 때마침 높은 누각에 달이 밝은 이 밤엔 애처로운 피리 소리 차마 들을 수가 없구나
인데, 읽을 때마다 감개가 무량하여 가슴이 메어진다.
(용어) 이행(1478~1534) — 조선 중기의 문신·문장가. 갑자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후 복권되어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호는 용재.
조선 시는 중종 때 이르러 크게 무르익었다. 용재 이행이 그 시작을 열자, 눌재 박상·기재 신광한·충암 김정·호음 정사룡이 한 시대에 함께 나와 휘황하게 빛을 내고 금옥처럼 맑은 소리를 울렸으니, 족히 천고에 자랑할 만하다. 조선의 시는 다시 선조 때 이르러 크게 완비되었다. 노소재(노수신)는 두보의 법을 깨우쳤고 황지천(황정욱)이 그 뒤를 이어 일어났으며, 최경창·백광훈은 당나라 시를 본받았고 이익지(이달)가 그 흐름을 다시 밝혔다. 세상을 떠난 우리 형님(허봉)의 노래체 시는 이태백과 같고, 누님(허난설헌)의 시는 당나라 전성기의 경지에 가까웠다. 그 뒤로 권여장(권필)이 늦게 나와 힘껏 옛 어진 이들을 좇아 용재 이행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아, 참으로 장하다.
(용어) 박상(1474
1530) — 호는 눌재. 신광한(1484
1555) — 호는 기재. 김정(1486
1521) — 호는 충암, 기묘사화 때 사사되었다. 정사룡(1491
1570) — 호는 호음.
정호음(정사룡)은 남을 추앙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유독 눌재(박상)의 시만은 좋아했다. 일찍이 벽 위에
서북의 두 강은 태곳적부터 흘러오고 동남의 두 산줄기는 신라 땅을 파고드네
라는 구절과,
거문고 타던 이는 학 가의 달로 떠나가고 피리 부는 손은 솔 아래 바람 타고 찾아오네
라는 구절을 써 붙여 두고 스스로 탄식하며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여겼다. 또 이런 말도 했다. "허종경(허엽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시구를 이야기하는 대목)의
들길이 어두워 오는데 소는 홀로 돌아오고 강 구름이 비를 몰아오니 제비가 낮게 나네
라는 구절은, 강목계(강혼)의
붉은 제비 엇갈려 나니 바람은 버들을 스치고 청개구리 어지러이 울어대니 비는 산을 어둑하게 하네
라는 구절과 서로 겨룰 만하다." 그 당시 "신기재(신광한)의 시는 온갖 시체를 두루 갖추었지만, 호음은 칠언율시 하나에만 능하니 그에게 못 미칠 것 같다"는 말이 돌았는데, 호음은 "그가 아무리 온갖 시체를 갖추었다 해도 감히 내 율시 한 구절을 당해 내겠는가" 했으니, 그 자부심이 이러했다.
호음의 〈황산역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날 쫓기던 왜구를 이곳에서 섬멸할 때 혈전 벌인 신묘한 칼끝엔 붉은빛이 둘렸다네 한나라 깃대 꽂혔던 흔적은 바위 틈에 남아 있고 얼룩진 옷 적신 피는 노을빛을 물들이네 소슬바람에 살기 감돌아 수풀 산은 엄숙하고 도깨비불 음산하게 타오르니 성루는 황폐해졌네 동쪽 이 땅 사람이 물고기 신세를 면한 것은 우 임금 같은 그 공덕 때문이니 소신이 어찌 감히 해를 더듬는 격의 얕은 찬양을 하리오
라 했다. 기이하고 걸출하며 웅혼하고 묵직하니 참으로 훌륭한 작품이다. 절강 출신 명나라 사람 오명제가 이 시를 보고 "그대의 재주는 용을 잡을 만한데 도리어 개를 잡고 있으니 애석하다"고 평했는데, 이는 대개 당나라 시를 본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어찌 그것만으로 그를 낮추어 볼 수 있겠는가.
(용어) "황산역시"는 고려 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전투를 소재로 한 시다.
이익지(이달)는 어릴 때 두보의 시를 호음(정사룡)에게 배웠다. 하루는 호음이 익지더러 서가 위의 여러 책을 가져오라 시켰다. 그리고는 그 책들을 보다가 《춘정집》이 나오자 땅에 던져 버렸고, 《매계집》은 펴 보고 웃으며 덮었으니 대개 가볍게 여긴 것이었다. 오직 《점필재집》만은 손에 쥐고 익히 보기를 그치지 않았다. 익지가 몰래 보니 온통 줄을 그어 표시해 두었는데, 대개 좋아하는 구절을 뽑아 자기 시의 재료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언젠가 평생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구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사람들은
산 나무 함께 울며 바람 언뜻 일어나고 강물 소리 문득 거세지자 달이 홀로 걸렸네
라는 구절을 깎아낸 듯 아름답다고 했고,
산꼭대기 깜빡이는 별은 조각달과 빛을 다투고 나무 위에서 움직이는 새는 깊은 떨기 속에 숨는구나
라는 구절 역시 시상이 교묘하지만, 끝내는
빗기운이 노을을 눌러 산은 문득 어두워지고 냇물 빛은 달을 받아 밤에도 밝구나
라 한 구절만은 못하니, 이는 마치 귀신이 도운 듯한 시구라고 말했다 한다.
김충암(김정)의 시에
지는 해는 거친 들판에 뉘엿뉘엿 비치고 갈가마귀는 저문 마을로 내려앉는구나 빈 수풀엔 밥 짓는 연기 싸늘히 식고 초가집도 사립문을 걸어 닫았네
라 한 시는 당나라 유장경의 시와 흡사하다. 그의 〈우도가〉는 심오하고 황홀하며, 미묘한가 하면 뚜렷하기도 해서 가진 재주를 다 부린 작품이다. 그래서 신기재(신광한)는 그를 추어올려 당나라 시인 이하(장길)에 견주었다.
(용어) 이하(790~816) — 당나라의 천재 시인. 요절했으나 기이하고 몽환적인 시풍으로 유명하다. 자는 장길.
최수성과 조광조 일파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최원정(최수성)은 세상을 내려다보며 벼슬하지 않고 그저 화나 면하기를 바라며 살았다. 하루는 여러 어진 이들이 정암(조광조)의 집에 모였는데, 원정이 밖에서 들어오며 숨이 가빠 말도 제대로 못 한 채 황급히 물을 청해 마시고는 "내가 한강을 건너올 때 물결이 솟구치고 배가 부서져 거의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났다"고 했다. 주인이 웃으며 "이는 우리를 빗대어 하는 말이다"라고 했다.
원정이 붓을 잡아 벽에 산수를 그리자, 원충(김정)이 그 그림에 부쳐 시를 지었는데
맑은 새벽 바위산 봉우리는 우뚝하고 흰 구름은 산기슭에 비껴 있네 강촌엔 사람의 모습 보이지 않고 강가 나무는 저 멀리 아득하구나
라 했다. 원정이 만의사에 올라 지은 시에
옛 불전엔 몇 안 되는 스님이 지키고 있고 수풀 끝엔 저녁 종소리 맑게 울리네 창문은 트여 천 리 끝까지 닿고 담장은 눌러앉아 뭇 산이 나직해 보이네 나무는 몇 해나 늙어 왔는지 새는 유난히 별난 목청으로 우짖는구나 험난한 세상 그물에 걸릴까 근심하며 오늘의 내 인생을 한탄하노라
라 했는데, 마지막 구절에 뜻이 담겨 있으니 아마 스스로 화를 입을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닐까. 애석한 일이다.
(용어) 최수성(1487
1521) — 조선 중기의 문인·화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호는 원정. 조광조(1482
1519) — 기묘사화의 중심인물,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다 사사되었다. 호는 정암. 김정(1486~1521)은 앞서 나온 충암 김정과 같은 인물로, 자가 원충이다.
김안로와 신광한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김이숙(김안로)이 젊어서 관동 지방에 놀러 갔을 때, 꿈에 귀신이 나타나 시를 읊었다.
봄은 우 임금의 땅 산천 밖에 무르익고 풍악은 순 임금 조정의 새와 짐승 사이로 울려 퍼지네
라 하고는 "이것이 바로 네가 벼슬길을 얻을 시구다" 하고 말했다. 꿈에서 깨어 이를 기억해 두었는데, 이듬해 궁중에서 치른 시험에서 연산군이 율시 여섯 편을 시험 문제로 냈다. 그 가운데 "봄날 이원의 악공들이 침향정 가에서 한가로이 악보를 뒤적이다"라는 제목으로 '한' 자를 운으로 삼아 시를 지으라는 문제가 있었다. 김안로가 생각해 보니 꿈에서 들은 구절과 꼭 들어맞기에 그대로 써서 냈다. 강목계(강혼)가 시험관이 되어 크게 칭찬하며 장원으로 뽑았다. 김모재(김안국)는 본래 글을 잘 안다고 이름난 사람이었는데, 시험을 함께 감독하다가 "이 구절은 귀신의 소리지 사람의 시가 아니다" 하고는 그 자리에서 출처를 물었다. 김안로가 사실대로 대답하니, 사람들이 모두 김모재의 감식안에 탄복했다.
(용어) 김안로(1481
1537) — 조선 중기의 문신. 훗날 권세를 남용하다 사사되었다. 자는 이숙. 김안국(1478
1543)은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모재.
신낙봉(신광한)의 시는 맑고 빼어나 운치가 있다. 〈중추절에 배를 긴 여울에 대고〉라는 시에
갈대꽃 핀 물가에 외로운 배 매어 두니 두 갈래 맑은 강물에 사방은 산이로세 인간 세상에도 오늘 밤 같은 달이 없으랴만 백 년을 가도 이 가운데서 보는 달만은 못하리
라 했고, 〈배 위에서 삼각산을 바라보며〉라는 시에
외로운 배 잡아타고 광릉 나루 떠나오니 열다섯 해 동안 죽지 못한 이 몸이로세 나는야 정이 있어 아는 얼굴 같지만 청산이야 옛사람을 기억이나 할까
라 했다. 〈김공석의 옛집을 지나며〉라는 시에
그때 함께 쫓겨난 이들 몇이나 남았는지 동풍에 말 세우고 홀로 애를 태우네 한식이라 안개비 자욱한 개산 가는 길에 석양 마을 젓대 소리 차마 듣지 못할레라
라 했고, 〈삼월 삼짇날 박대립에게 부치다〉라는 시에
삼짇날과 중양절엔 해마다 만나자던 옛 약속은 남았어도 일은 그만 어그러져 방초에 답청할 날이 바로 오늘인데 맑은 동이 흰 술은 옛 친구와 함께가 아닐세 바람 앞 제비 소리는 갓 나온 듯 앳되고 비 온 뒤 꽃가지는 다시 보기 어렵구나 모동의 어른들은 속기를 벗은 이가 많으니 봄옷을 전당 잡힐 생각인들 없을쏘냐
라 했으니, 편마다 모두 읊을 만하다. 비록 웅장하고 기이함에서는 호음(정사룡)에 미치지 못하지만, 맑고 시원함에서는 오히려 그보다 낫다고 할 만하다.
(용어) 신광한(1484~1555) — 앞서 나온 기재 신광한과 같은 인물. 호가 낙봉이기도 하다.
나식과 소세양, 심언광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장음정 나식의 시는 시적 흥취가 있어 이따금 당나라 전성기 시에 가깝다. 신광한과 정사룡 같은 원로 대가들이 어느 집에 모여 마침 포도 그림 족자를 앞에 놓고 시를 읊으려 했는데, 생각에 잠겨 미처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술에 취한 나식이 찾아와 붓을 빼앗아 들고는 족자 위에 쓰려 했다. 주인이 말리려 하자 정사룡이 "그냥 두어라" 했고, 나식은 절구 두 수를 지었는데 그 하나에
늙은 원숭이 무리를 잃고 지는 해는 마른 등걸 위에 비치네 우뚝 앉아 고개도 돌리지 않으니 아마도 천 봉우리의 메아리를 듣는 것이겠지
라 했다. 정사룡이 크게 칭찬하며 붓을 놓고 더는 짓지 않았다. 손곡(이달)도 이렇게 말했다. "이는 당나라 전성기의 〈이주가〉 법식이니, 이른바 한 구절만 끊어 놓아도 시 한 편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용어) 나식(1498~1546) — 조선 중기의 문인, 호는 장음정.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소퇴휴(소세양)가 젊었을 때 상좌상(상진)과 동료로 지냈는데, 그때는 상진이 낮은 벼슬에 있었다. 훗날 상진이 재상이 되자 기러기 그림 족자를 가지고 소세양에게 시를 지어 달라 청했다. 소세양이 절구 한 수를 지어 보냈는데
쓸쓸한 외그림자 저녁 강가를 비추고 붉은 여뀌꽃 시들어 두 기슭에 그늘졌네 부질없이 서풍 향해 옛 짝을 불러 대며 구름과 물이 만 겹이나 깊은 줄은 모르는구나
라 했으니, 함축된 뜻이 깊고 멀어 상 정승이 보고는 탄식하며 서글퍼했다.
(용어) 소세양(1486
1562)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퇴휴당. 상진(1493
1564)은 조선 중기의 명재상, 호는 범허재.
심어촌(심언광)은 늘그막에 김안로와 사이가 벌어져 함경도 관찰사로 밀려났는데, 그때 지은 시에
넓은 강을 건너려니 나룻배가 없고 추운 나무 시들어 가는데 겨우살이만 붙어 있네
라 했으니, 대개 뒤늦게 후회하는 마음이 움튼 것이다.
(용어) 심언광(1487~1540)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어촌.
임억령과 임형수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임석천(임억령)은 사람됨이 고매했고 시 역시 그 사람됨과 같았다. 〈낙산사영〉은 마치 용이 오르고 비가 내리는 듯한 기세로 글의 흐름이 날아오르고 꿈틀거려, 그 경치의 기이함과 웅장함을 서로 다투는 듯하다. 그 시에
마음은 흐르는 물과 함께 세상으로 나오고 꿈에는 흰 갈매기 되어 강 위를 나는구나
라 한 구절은 기상이 드높아 신령한 용이 바다를 희롱하는 뜻이 있다.
(용어) 임억령(1496~1568) — 조선 중기의 문신·시인, 호는 석천.
금호 임형수는 풍류가 호탕하고 시원하며, 그의 시 역시 펄펄 나는 듯하다.
고개 숙인 꽃은 술에 취한 옥녀의 얼굴 같고 끊어진 산은 바닷물을 마시는 푸른 용의 허리로다
라 한 시는 지금까지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퇴계 이황 선생이 이 시를 몹시 아껴, 늘그막까지도 문득 그를 떠올리며 "어찌하면 임사수(임형수)와 다시 마주 앉을 수 있을까" 하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용어) 임형수(1504~1547)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금호. 을사사화 여파로 사사되었다.
김인후와 오세억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하서 김인후는 인품이 높고 트여 있으며 맑고 순수했는데, 시 역시 그 인품과 같았다. 양송천(양응정)은 그의 〈등취대시〉를 극찬하며 당나라 고적과 잠참에 비길 만큼 높은 운치라고 했다. 그 시에
양왕이 노래하고 춤추던 그 땅에 오늘은 나그네가 올라왔노라 구름을 넘어설 듯 강개한 흥취요 옛일을 조문하는 처량한 마음이로다 긴 바람은 먼 들판에서 일어나는데 밝은 해는 첩첩한 산 뒤로 숨어 버리네 그 시절의 번화했던 일들을 아득하니 이제 어디서 찾으리오
라 한 시는 침착하고 걸출하여 가늘고 여린 태를 단번에 씻어 냈으니 참으로 귀중히 여길 만하다.
(용어) 김인후(1510
1560) —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호는 하서. 양응정(1519
1581)은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송천. 고적과 잠참은 모두 당나라의 이름난 변방시 시인들이다.
하서가 세상을 떠난 뒤, 영남 하양 땅에 오세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이렇게 말했다. "꿈에 천상의 관청에 갔는데, 붉은 옷 입은 저승 사자가 작은 집으로 데려가니 그곳에 비단 두건을 쓴 학사가 있었다. '김하서'라 자칭하며 '너는 올해 하늘에 오를 운수가 아니니 나가서 힘써 행실을 닦으라' 하고는 시 한 수를 주며 보냈다"는 것이다. 그 시는
세억은 그 이름이요 대년은 그 자인데 천상의 문을 열고 들어와 자미 신선을 뵈었구나 일흔일곱 지난 뒤에 서로 다시 만나리니 인간 세상 돌아가 함부로 전하지 말라
였다. 오세억은 원래 효자였는데, 훗날 과연 일흔일곱 나이에 아무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
(용어) "천상의 관청", "자미 신선" 등은 도교에서 말하는 하늘의 관청과 신선 세계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아버지가 아끼신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선친께서는 늘 "윤장원의 재주는 따를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시며, 그의
넓은 바다 조각배 위에 꿈은 천 리를 떠도는데 두어 가락 젓대 소리 달 밝은 가을이로세
라는 구절과,
맞바람이 살구나무에 불어 겹문을 두드리네
라는 구절을 매양 칭송하시며, "맑고 절실하여 옛 시에 핍진하다"고 하셨다.
(용어) 윤장원 —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으며, 허엽(허균의 아버지)이 재주를 높이 산 인물로만 이 글에 등장한다.
선친께서는 기묘년(1519년으로 추정되나 문맥상 허엽이 영남 관찰사가 된 해)에 영남 관찰사를 제수받으셨는데, 권습재(권벽)가 동지사로 북경에 가면서 선친을 송별하며 지은 시에
평생의 회포를 좋이 풀리라 여겼더니 담소를 나눌 기회도 이제부턴 흔치 않겠구려 달빛 비친 요하를 건너 나는 사신길을 떠나고 그대는 부절을 안고 유령의 매화를 찾아가리 맡은 일과 갈 길이 모두 다 염려스럽고 이별과 노쇠함이 서로 재촉하는구려 공무 틈틈이 벗 그리는 노래를 짓거든 시통이나 자주자주 부쳐 주시기를
라 했는데, 선친께서는 간절하고 알맞다며 칭찬하셨다.
(용어) 권벽(1520
1593)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습재. 허엽(1517
1580)은 허균의 아버지로, 동인의 영수격 인물이었으며 호는 초당.
선친의 송별 시첩에 실린 소 정승(소세양)의 시 가운데
백옥당이 완성된 지 오래되었더니 황금 허리띠를 하사받은 것이 오늘이라네
라는 구절을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여긴다. 그러나 박수암(박지화)의 시 가운데,
경(벼슬)의 상징인 별이 높이 뜬 걸 문득 보노니 내 옷이 화려한들 누가 아까워하리
라는 절구야말로 정말 경계할 만한 명구다. 박수암이 미암(유희춘)을 애도하며 지은 시에
천추의 세월 푸른 바닷물 위에서 밝은 해처럼 큰 이름을 드리웠도다
라 한 것은 어찌 두보보다 못하다 하겠는가.
(용어) 박지화(1513
1592) —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수암. 유희춘(1513
1577)은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미암.
박수암이 청학동에서 노닐며 지은 시에,
고운(최치원)은 당나라의 진사였으니 애초에 신선술을 배운 것이 아니었네 만촉처럼 다투던 삼한(신라·고려·조선 이전 우리나라)의 시절 풍진은 온 세상에 가득 찼었구려 영웅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리오 참된 비결은 본디 전하지 않는 법 저 봉래산으로 한번 들어가 버린 뒤로 맑은 향기만 팔백 년을 남아 전하네
라 했으니, 깊고 굳세며 조촐하고 질박하여 사려 깊은 맛이 있으니, 두보와 진자앙의 진수를 깊이 얻은 작품이다.
(용어) "만촉"은 아주 작은 나라끼리 다투는 것을 비유하는 중국 옛이야기 속 두 나라 이름이다. 최치원이 만년에 가야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양사언과 이달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양봉래(양사언)가 금강산(풍악산)에서 놀 때 바위 위에 시를 새겼는데,
백옥경 봉래섬엔 아득한 안개 물결 예스럽고 따스한 바람과 볕은 좋기도 해라 푸른 복사꽃 아래 한가로이 오가며 학 등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에 천지는 늙어 가네
라 했으니 신선의 흥취가 있다. 같은 시대에 송경이라는 서얼 출신 문인이 있었는데, 그 역시 이 시에 이어 읊기를
학은 높이 날아오르고 봉황은 유유히 날아 삼신산 아래를 굽어보며 오색구름 사이를 가로질러 나네 천지는 세 자짜리 지팡이요 이 몸은 신선의 가벼운 옷 한 벌이라 바위 꼭대기 나무에 긴 칼을 걸어 두고 맑은 샘물 희롱하며 붉은 지초를 캐 먹노라
라 하니, 양사언은 극도의 찬사를 보냈고 세상을 떠난 우리 형님(허봉)도 기꺼이 칭찬하셨다.
(용어) 양사언(1517~1584) —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호는 봉래. 금강산을 즐겨 유람하며 이런 이름을 얻었다.
양봉래가 강릉 군수로 있을 때 익지(이달)를 손님으로 대우했는데, 이달은 행실이 검속되지 않아 고을 사람들의 비난을 샀다. 선친께서 편지를 보내 그를 변호하시며, "밤안개 속에 오동꽃 떨어지고, 바다 숲에 봄 구름 스러지네"라 읊었던 이달을 만약 소홀히 대한다면, 이는 위나라 진왕(조식)이 응양과 유정 같은 문인들을 처음 잃던 날과 다를 바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대접이 조금 허술해지자 이달은 시를 남기고 작별을 고했는데,
나그네가 떠나고 머무는 것은 주인이 눈썹을 까딱하는 데 달렸을 뿐 오늘 아침 반가운 낯빛을 잃었으니 머잖아 청산을 그리워하게 되리 노나라에서는 바닷새에 제사를 지냈고 남쪽 정벌 나가서는 율무만 싣고 돌아왔네 소진이 가을바람 만나 고향 그리워하듯 나는 또다시 목릉관을 나서는구나
라 하니, 양봉래는 크게 칭찬하고 아끼며 그를 처음처럼 다시 대접했다. 선배들이 벗 사이에 서로 바로잡아 주던 의리가 어떠했는지를 여기서 엿볼 수 있으며, 그 풍류 있는 뛰어난 재주 또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어) "바닷새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노나라 대부 장문중이 분수에 넘는 대접을 한 잘못을 가리키는 옛이야기다. "남쪽 정벌에서 율무만 싣고 돌아왔다"는 것은, 후한의 장수 마원이 남쪽 지방을 평정하고 돌아올 때 약재로 쓸 율무를 수레에 싣고 왔는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금은보화라고 모함했다는 옛이야기다. 둘 다 억울한 오해나 부당한 대접을 받는 상황을 비유하는 데 쓰인다. 소진은 전국시대의 유세가로, 타향을 떠돌다 가을바람에 고향을 그리워했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용어) 이달(1539~1618?) — 조선 중기의 시인. 서얼 출신이라 벼슬길이 막혔으나 시재가 뛰어나 최경창·백광훈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불렸다. 자는 익지, 호는 손곡. 허균과 허난설헌의 스승이기도 했다.
노수신과 최경창, 이달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소재 노(노수신) 정승이 어느 스님의 시첩에서 고죽(최경창)과 익지(이달)의 시를 보고 지은 시에
이 시대 제일가는 문장으로는 오직 이와 최를 일컫는다오
라 했는데, 대체로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우리 둘째 형(허봉) 또한 "이달의 시는 신라 이래로 당나라 시를 본받은 이들 가운데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일찍이 그의 시 중에서
중천의 생황 소리와 학은 가을 하늘에서 내려오고 천 년 전 신선 고운은 이미 아득한 옛일이 되었구나 밝은 달 아래 트인 문엔 흐르는 물이 놓였으니 어디쯤에 무릉교가 있는지 궁금하구나
라 한 작품을 칭송하며, 자신도 여기에 미치지 못하리라 여기셨다.
(용어) 노수신(1515~1590)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소재. 을사사화 여파로 오랜 유배 생활을 겪은 뒤 영의정까지 올랐다.
조지세(조위한)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지명은 시 속에 넣어도 우아한 맛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의
기운은 운몽택을 쪄서 올리고 파도는 악양성을 뒤흔든다네
와 같은 구절을 보면, 열 글자 가운데 여섯 글자가 지명이고 거기에 네 글자를 보탠 것일 뿐인데, 정작 공들인 곳은 '찐다'는 글자와 '뒤흔든다'는 글자 두 자뿐이다. 그러니 시를 짓는 일이 어찌 수월하지 않겠는가." 이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노 정승(노수신)의 시인
길은 평구역에서 다해 버리고 강물은 판사정에서 깊어지네
와
청파 마을 저녁엔 버들빛 짙고 백악산 봄날엔 하늘이 맑네
같은 구절 또한 대단히 훌륭하다. 이는 다만 글귀를 짓는 솜씨에 달린 문제일 뿐이니, 쇠로 금을 만든다 한들 무엇이 나쁘겠는가.
(용어) 조위한(1567~1649) —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자는 지세.
박순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박사암(박순)의 시에
은혜로운 물결에 오래 젖어 이 마음 부지런히 부려 왔건만 새벽닭 울자마자 조복부터 챙기는구나 강남의 시골집은 봄풀에 묻혀 가는데 도리어 산승에게 대숲이나 지키라 시키네
라 했으니, 아, 사대부라면 누군들 은퇴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한 치 녹봉에 끌려 고개를 숙이고 그 마음을 저버리는 자가 많을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 절로 탄식이 나오게 된다.
(용어) 박순(1523~1589)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사암. 영의정을 지냈다.
노소재(노수신)와 황지천(황정욱)은 근래의 대가로서 둘 다 근체시(율시와 절구)에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 노수신의 오언율시와 황정욱의 칠언율시는 모두 천 년 이래의 빼어난 가락이다. 그러나 긴 시에서는 이만 못하니 그 까닭은 알 수 없다.
(용어) 황정욱(1532~1607)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지천.
양경우가 일찍이 나에게 "우리나라에서는 칠언고시를 누가 가장 잘 짓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래서 "글쎄, 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니, 양경우가 박씨와 이씨 가운데 누가 앞서는지 차례로 물어 왔다. 내가 대답하기를 "둘 다 한퇴지에게서 나왔으되, 한 사람은 지나치게 억세고 한 사람은 지나치게 번거로우니, 그것이 최고의 경지는 아니오" 했다. 그러자 눌재(박상)의 〈진양형제도〉와 충암(김정)의 〈우도가〉는 어떠냐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진양형제도〉는 웅장하나 막힌 데가 있고, 〈우도가〉는 기이하나 어둡다" 했다. 그렇다면 결국 누구에게 돌아가겠느냐 물어서, "어잠부(어무적)의 〈유민탄〉과 이익지(이달)의 〈만랑무가〉일 것이오" 하고, 이어서 "시로 본다면 뛰어난 재주가 그대들 가운데서 많이 나왔소" 하니, 양경우도 크게 웃었다.
(용어) 양경우(1568~1638) —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한퇴지(한유)는 당나라의 대문장가. 어무적은 조선 중기의 서얼 출신 시인으로, 백성의 고통을 노래한 〈유민탄〉으로 유명하다. 자는 잠부.
선친께서는 자제들이 화순 지방에 있었던 까닭에 진사 김윤과 서로 사귀며 매양 그의 시를 칭찬하셨다. 병마절도사가 일찍이 진남루를 세우고 김윤을 맞아들여 긴 시를 지어 쓰게 했는데, 술에 취한 채 단숨에 붓을 휘둘러 육십 구를 지었다. 그 첫 구에
만 근 무게의 무지개 들보는 붉은 새 조각을 짓누르고 용 새겨진 처마엔 공손랑의 검무가 펼쳐지는 듯
이라 했으니, 참으로 굉장한 걸작이다. 일찍이 물길로 가다가 배가 부서져 겨우 기슭에 닿았을 때, 정자에 올라 지은 시에
의관은 모두 거센 물결에 휩쓸려 잃었지만 몸뚱이는 부모님께서 주신 그대로 남았구나 높은 정자에 다시 올라 갠 경치를 바라보니 가을 산 맑고 푸르러 새 시에 들어오는구나
라 했으니, 높은 흥취가 대단하다. 그는 예순 살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생원시에 합격해 유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용어) "유일"이란 벼슬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던 인재를 조정에서 특별히 추천해 등용하는 제도를 가리킨다.
내가 수안(지금의 황해도 수안군)에 부임하는 날, 황지천(황정욱)이 시를 지어 전송하며
시재는 우뚝하여 동료들 가운데 뛰어나건만 벼슬 복은 어그러져 분수 밖에 기구하구나 이 모두 인생에는 저마다 정해진 운명이 있으니 유유한 나머지 일은 미뤄 두고 지나갈밖에
라 했으니, 자못 감개가 깊다. 공이 젊어서 홍문관에 있을 때, 이백생(이순인)·최가운(최경창)·하대이(하응림) 같은 이들이 함께 당나라 시의 운치를 숭상하여 대궐 안의 어린 복사나무를 두고 읊은 작품이 꽤 많았는데, 공이 여기에 화답하여
무수한 궁중 꽃은 흰 담장에 기대었는데 벌과 나비는 노닐며 남은 향기를 좇아가네 늙은이는 봄바람도 채 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해를 향하는 해바라기 마음뿐이로세
라 했다. 함축된 뜻이 깊고 조사가 기이하고 굳세니, 시를 짓는다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부드럽고 고운 것, 바람이니 꽃이니 하는 것만 읊은 시는 오히려 그 중후한 맛을 해치는 것이다.
(용어) 이순인(1533
1592)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백생. 하응림(1536
1567)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대이.
박순을 애도하는 시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사암(박순) 정승이 세상을 떠나자 애도시가 거의 수백 편이나 되었는데, 오직 성우계(성혼)의 절구 한 수가 절창이었다. 그 시에
세상 밖 구름 산은 깊고 또 깊으니 시냇가 초가집은 이미 찾기 어려워라 배견와 위에 뜬 삼경의 저 달빛은 아마도 선생의 한 조각 마음을 비추리라
라 했는데, 무한한 슬픔이 말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으니, 서로 속 깊이 알던 사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용어) 성혼(1535~1598) —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우계. 배견와는 박순이 만년에 지내던 별장 이름.
이산해와 고경명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근래의 관각시(조정에서 짓는 격식 있는 시)로는 이아계(이산해)가 으뜸이다. 그의 시는 초년부터 당나라 시를 본받았으며, 늘그막에 평해로 귀양 가서야 비로소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고제봉(고경명)의 시 역시 벼슬을 내려놓고 한가로이 지내는 가운데 크게 나아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로써 문장이란 부귀영화에 달린 것이 아니라, 험난한 고초를 겪고 강산의 도움을 받은 뒤에야 오묘한 경지에 들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찌 이 두 사람뿐이겠는가. 옛사람들이 모두 그러했으니, 유주로 좌천되었던 유자후(유종원)나 영남 밖으로 귀양 갔던 소동파에게서도 이를 볼 수 있다.
(용어) 이산해(1539
1609)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아계. 영의정을 지냈다. 고경명(1533
1592) —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순절했다. 호는 제봉. 유종원(773~819)은 당나라의 문장가로, 자는 자후.
최고죽(최경창)의 시는 굳세고 힘차며, 백옥봉(백광훈)의 시는 메마른 듯 담백하다. 둘 다 당나라 시의 길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천 년에 드문 가락이다. 이익지(이달)는 이 둘보다 조금 더 크다. 그래서 최경창과 백광훈을 함께 묶어야 비로소 그 나름의 대가를 이룬다고 할 만하다.
고죽의 시는 편마다 다 아름다운데, 이는 반드시 갈고닦아 마음에 걸림이 없어진 뒤에야 세상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최경창, 백광훈)의 시 가운데 내가 골라 《국조시산》에 넣은 것이 각기 수십 편인데, 그 시들은 음절이 정통의 소리에 잘 들어맞지만, 나머지 시들은 남을 따라가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용어) 《국조시산》 — 허균이 직접 편찬한 조선 시대 시선집.
나는 일찍이 고죽의 오언 고시와 율시, 세상을 떠난 형님(허봉)의 노래체 시, 소재 정승(노수신)의 오언율시, 황지천(황정욱)의 칠언율시, 이손곡(이달)과 백옥봉(백광훈) 그리고 세상을 떠난 누님(허난설헌)의 칠언절구를 모아 한 질의 책으로 엮어 읽어 보았다. 그 음절과 격률이 모두 옛사람에 가까웠으나, 한스러운 것은 기운이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아, 누가 그 본래의 소리를 다시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이춘영과 권필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요즘에는 이실지(이춘영)가 시문에 능하다. 그의 시는 다소 번잡한 듯하지만 기운만큼은 나름대로 크고 힘차서 작가라 부를 만하다. 그러나 권여장(권필)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다. 이실지는 안목이 높아 당대 사람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오직 나와 여장(권필)·자민(이안눌)만은 괜찮다고 여겼다. 그는 "허균은 허세가 있고, 권필은 메마르며, 이안눌은 융통성이 없다"고 했는데, 이 또한 지당한 평이라 할 만하다.
(용어) 이춘영(1563
1606) —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자는 실지. 권필(1569
1612)은 조선 중기의 시인, 호는 석주. 허균과 가까웠으며 허난설헌의 시 스승이기도 했다.
이실지는 세상을 떠난 우리 형님의 글을 칭찬하며 "문장을 깊이 아는 이는 허미숙(허봉)이다" 했다. 그래서 내가 "후배 가운데 누가 형님의 뒤를 이을 만합니까" 하고 물으니, "신현옹(신흠)이 그럴 만하니, 맑고 청량함은 미치지 못해도 농후함은 오히려 그를 뛰어넘는다고 봅니다" 하고 대답했다.
(용어) 신흠(1566~1628) — 조선 중기의 문신·문장가, 호는 현옹.
정송강(정철)은 우리말 노래를 잘 지었으니, 〈사미인곡〉과 〈권주사〉는 모두 곡조가 맑고 씩씩하여 들을 만하다. 비록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은 이를 배척해 음란하고 사특하다고 하지만, 그 문채와 풍류만큼은 가릴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를 아까워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여장(권필)이 그의 묘를 지나며 지은 시에
빈 산에 나뭇잎 우수수 떨어지니 정승의 풍류가 이곳에 묻혀 적막하구나 서글퍼라 한 잔 술 다시 권하기 어려우니 지난날의 노랫가락은 오늘을 두고 지은 것이었네
라 했다. 자민(이안눌)이 〈강 위에서 노래를 듣고〉라는 시에
강가에서 누가 저리 미인사(사미인곡)를 부르는가 때마침 강가에 달이 지는 시각이라 서글퍼라 임 그리는 그지없는 마음을 세상엔 오직 저 여인만이 알고 있구나
라 했는데, 두 시 모두 정송강의 가사에서 비롯되어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민(이안눌)의 시가 둔해서 잘 드날리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그가 함흥에 있을 때 지은 시에
비 개자 관가의 버들은 푸르게 늘어지니 객지에서 처음 맞은 삼월 삼짇날이로세 다 함께 고향 떠나 돌아가지 못한 신세 가인이여, 망강남의 노래는 부르지 마오
라 했는데, 맑고 산뜻하며 유려하니 중국 시인들과 견주어도 그 차이가 얼마나 크다 하겠는가.
(용어) 이안눌(1571~1637) — 조선 중기의 문신·시인, 자는 자민.
둘째 형이 논평한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둘째 형(허봉)은 고제봉(고경명)에게 깊이 감복하며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양에서 함께 있을 때 어떤 이가 '교' 자로 운을 내니, 고경명 공이 이에 화답하여
이어진 마을마다 벼와 기장은 삼추가 지나 무르익고 한 고을의 서리 바람은 시월에 접어드는구나
라 하기에, 나도 모르게 감복하고 말았다."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참판 유영길의 시는 비록 시의 경지가 좁지만 좋은 곳이 있으니, 이를테면
거문고와 비단옷은 세월을 서둘러 녹이고 금 병풍 속에서는 웃음 사기도 더디구려 발에 비친 석류꽃은 곱기도 하고 연못으로 통하는 들물은 맑기도 하네
같은 구절은 밝고 굳세어 즐길 만하다."
(용어) 유영길(1538~1601) — 조선 중기의 문신.
윤 사문 면(윤면)이 임금의 명을 받들고 호남으로 가던 길에 어느 산을 지나는데, 산속에 초가집 한 채가 있고 한 늙은이가 나무 아래에서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어 펴 보려 하니, 늙은이가 다가와 빼앗으며 "변변찮은 작품이라 남에게 보여 줄 수가 없소" 했다. 그래서 겨우 첫머리에 쓰인, 얼레빗을 읊은 시만 보았는데 이러했다.
얼레빗으로 빗질하고 참빗으로 다시 빗질하니 천 번을 쓸어내려 이는 벌써 다 없어졌네 어찌하면 만 길이나 되는 큰 빗을 얻어다가 백성들 몸에 붙은 물것을 남김없이 쓸어낼까
이름을 물었으나 대답 없이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 어떤 이는 전주 진사 유호인이라고도 말한다.
(용어) 윤면 —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 인물이다. "물것"은 몸에 붙어 피를 빨아먹는 이나 벼룩 같은 벌레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를 빗댄 표현으로 읽힌다.
임제와 신제이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임자순(임제)은 시로 이름이 있었는데, 우리 두 형은 늘 그를 추어올리며 인정해 주었다. 그의 "삭풍 부는 눈이 변방 길에 휘몰아치네"라는 시 한 편은 당나라 전성기 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하셨다. 일찍이 그에게 들은 이야기로, 어느 절에 갔더니 승려의 시첩에
동화문에서 밥을 빌던 옛날의 학관이라 분산이 좋아 노닐 만하다 하지만 십 년이나 그리던 꿈은 비로봉을 감도니 베갯머리 솔바람 소리 밤마다 서늘하네
라는 시가 있었는데, 말이 매우 맑고 깨끗했으나 이름이 빠져 있어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세상에는 참으로 버려진 인재가 있어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법이다.
(용어) 임제(1549~1587) —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자는 자순. 얽매이지 않는 호방한 기질로 유명했다.
둘째 형이 임금의 명을 받들고 북방에 나가 압호정에 올라
백성들 사는 초라한 집엔 해묵은 병이 들고 파란 벼는 하룻밤 서리에 다 망쳐졌네
라 읊었는데, 임자순(임제)은 이를 극찬하며 "백성의 집과 파란 벼, 열 글자로 쓴 시로 남을 역사로다"라는 시를 지어 주었다. 형도 임자순의
오랑캐가 일찍이 스무 고을을 엿볼 적엔 장군은 말을 몰아 제후에 봉해질 공을 세웠는데 지금은 변방 요새에 전쟁이 없으니 장사는 옛 역루에서 한가로이 잠을 자네
라는 시를 칭찬하며 협기가 펄펄 뛴다고 하셨다.
형이 풍산 역에서 벽에 쓰인 시 한 수를 보았는데
세상엔 뛰어난 인재 알아줄 이 없는데 누굴 위해 황금으로 높은 대를 쌓았던가 변방 서리는 검푸른 귀밑머리를 다 물들이니 필마로 음산 땅을 열 번이나 오가는구나
라 했다. 말의 기운이 강개하고 매우 훌륭하여 역졸에게 누구의 작품인지 물었더니, 병영의 군관 손만호가 지은 것이라 했다 한다.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 유월 스무여드레는 명종의 기일이었다. 신제이(신노)가 곡구역에서 시를 썼는데,
선왕께서 이날 뭇 신하를 버리고 떠나실 적 남기신 유언은 은근히 성인께 부탁하셨네 스물여섯 해 만에 그 향불도 끊어지니 소리쳐 우는 이는 늙은 백성뿐이로세
라 하니, 보는 이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용어) 신노 — 자는 제이. 1592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이옥봉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나의 누님 난설헌과 같은 시기에 이옥봉이라는 여인 시인이 있었는데, 바로 조백옥(조원)의 첩이다. 그녀의 시 역시 맑고 씩씩하여 여인 특유의 꾸밈이 없다. 영월로 가는 길에 지은 시에
닷새는 장간에서, 사흘은 영월에서 노릉의 구름 아래 슬픈 노래에 목이 메네 첩의 몸도 이 또한 왕손의 딸이거늘 이곳의 두견 소리는 차마 듣지 못할레라
라 했으니, 품은 생각이 애처롭고 원한을 띠어, 이익지(이달)의
동풍에 촉나라 임금의 넋은 괴로워하고 석양에 노릉은 싸늘하기만 하네
라는 구절과 한가지로 쓰라린 가락이다.
(용어) 이옥봉 — 조선 중기의 여성 시인, 조원의 소실이었다. "노릉"은 단종이 묻힌 영월의 능(장릉의 옛 이름)을 가리키며, 왕위에서 쫓겨나 어린 나이에 죽은 단종을 애도하는 뜻이 시에 깔려 있다.
전우치와 정백련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도사 전우치는 세상 사람들 말로는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데, 그의 시는 매우 맑고 초탈하다. 일찍이 삼일포에서 지은 시에
늦가을 맑은 못에 서리 기운 해맑은데 공중의 퉁소 소리 바람 타고 내려오네 푸른 난새는 오지 않고 하늘 바다는 아득한데 서른여섯 봉우리에 밝은 달만 환하구나
라 했으니, 읽고 있으면 마음이 상쾌해진다.
(용어) 전우치 — 조선 중기에 활동한 것으로 전하는 도사·문인. 소설 〈전우치전〉의 실존 모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젊었을 때 정백련이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병들어 귀신을 만났다고 했는데, 절구도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그의 시 중 가장 좋은 것으로
봄잠 자고 나서 술을 따르니 발을 걷은 앞으로 꽃잎이 날리네 인생이란 것이 얼마나 되는가 비 내리는 하늘을 슬피 바라보노라
와 또
만 리 밖 거센 파도에 바다 해는 저무는데 벽도화 그림자는 하늘 문에 비치네 난새 수레 한 번 떠난 뒤로 천 년이나 고요터니 후령의 신비로운 퉁소 소리 한밤중에 들리네
가 있는데, 그 음운이 맑고 그윽하여 사람의 소리 같지 않았다.
(용어) 정백련 — 병중에 귀신을 만나 시를 지었다는 신이한 일화로만 전하는 인물이다.
부안의 계생과 신분 낮은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부안의 기생 계생(매창)은 시에 솜씨가 있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뛰어났다. 어떤 고을 태수가 그녀와 가깝게 지냈는데, 훗날 그 태수가 떠난 뒤 고을 사람들이 그를 기려 비석을 세웠다. 계생이 달밤에 그 비석 위에서 거문고를 타며 하소연하듯 길게 노래를 불렀다. 이원형이라는 이가 지나다가 이를 보고 시를 지었는데,
한 가락 거문고는 자고새를 원망하는데 묵은 비석은 말이 없고 달만 덩실 외롭구나 현산에서 그날 양호의 비석에도 눈물 떨구던 가인이 있었던가
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절창이라 했다. 이원형은 우리 집에 드나들던 문객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와 이여인(허균의 벗으로 추정)과 함께 지낸 까닭에 시를 지을 줄 알았고, 다른 작품에도 좋은 것이 있으며 석주(권필)가 그를 좋아하고 칭찬했다.
(용어) 계생(1573~1610) — 부안의 기생 시인, 호는 매창. 이달의 제자였으며 유희경과의 사랑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현산의 양호 비석" 이야기는, 중국 진나라의 명신 양호가 백성을 잘 다스려 그가 떠난 뒤 백성들이 세운 비석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그리워 눈물을 흘렸다는 옛이야기에서 왔다.
유희경이라는 이는 신분이 천한 노비였다. 사람됨이 맑고 신중하며 진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니 사대부 가운데 그를 아끼는 이가 많았고, 시에도 능해 매우 원숙했다. 젊었을 때 갈천 임훈을 따라 광주에 있으면서 석천(임억령)의 별장에 올라, 그 누각에 앞사람이 써 놓은 '성' 자 운을 따라 시를 지었는데
댓잎은 아침에 이슬을 따르고 솔가지엔 새벽에 별이 걸렸네
라 하니, 양송천(양응정)이 이를 보고 극찬했다.
(용어) 유희경(1545~1636) — 조선 중기의 천민 출신 시인. 기생 매창과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하며, 임진왜란 뒤 공을 인정받아 면천되었다.
백대붕이라는 이도 시에 능했다. 일찍이 궁궐 문지기를 했는데, 같은 처지의 동료들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의 시는 당나라 맹교와 가도를 배워 메마르고 담백하며 여렸다. 그래서 권여장(권필)은 늦은 당나라 시풍을 배우는 사람을 볼 때마다 반드시 "문지기 시체"라 불렀으니, 대개 그 여림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용어) 백대붕 — 조선 중기의 천민 출신 시인, 유희경과 함께 "풍월향도"라는 위항 시인 모임을 이끌었다. 맹교와 가도는 당나라의 시인으로, 고심하며 메마르고 처절한 시풍을 구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의 승려 가운데 시에 능한 이는 매우 드문데, 오직 참료가 으뜸이다. 그가 어떤 사람에게 준 시에
물 따라 구름 따라 떠도는 발자취 이미 여러 해 서로 뜻이 맞아 이런 인연을 맺은 것이 기쁘구나 종일토록 나그네 방엔 봄날이 적막한데 지는 꽃은 눈처럼 비 갠 하늘에 날리네
라 하니, 빼어나고 맑은 맛이 있다.
(용어) 참료 — 조선 중기에 활동한 승려 시인으로 전한다.
이상으로 성수시화를 마친다. 신라 말부터 허균 당대에 이르기까지 약 팔백 년 동안 이 땅에서 나온 시인들을 두루 살피며, 왕족과 고관대작에서부터 서얼과 여성, 천민과 승려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시의 좋고 나쁨만으로 평가한 것이 이 글의 특징이다. 허균 자신의 집안 사람들(아버지 허엽, 둘째 형 허봉, 누이 허난설헌)에 대한 자부심과, 신분이나 지위와 상관없이 뛰어난 시를 알아보려 한 그의 안목이 책 전체에 걸쳐 뚜렷이 드러난다.
성소부부고 제26권
10. 15:51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2 · 소(疏) 및 서(序)
출처: 성소부부고 제26권, 부록 2, 소 및 서
배경: 제26권 부록 2에는 두 갈래의 글이 실려 있다. 하나는 광해군 10년(1618) 기준격이 올린 무고 상소에 맞서 허균이 자신을 변호하며 올린 두 편의 상소문이다. 기준격은 영의정을 지낸 기자헌의 아들로, 허균에게 어려서부터 글을 배운 제자였는데, 아버지 기자헌이 인목대비 폐출 논의(대론)에 반대하다 귀양 간 뒤 원한을 품고 허균을 역모로 무고하였다. 이 소는 《광해군일기》에도 실려 있는 중요한 정치 문서로, 허균과 기자헌 집안의 오랜 반목, 계축옥사의 전말, 대비 폐출 논쟁 등 광해군 대 정치사의 이면을 생생히 보여준다. 다른 하나는 《태각지》(의정부의 연혁을 정리한 책)와 《청허당집》(서산대사 휴정의 문집)·《사명집》(사명대사 유정의 문집)에 붙인 세 편의 서문이다.
기준격의 상소에 대한 허균의 소 (1) (서기 1618년 2월 1일, 양력)
삼가 아룁니다. 신이 이달 초나흗날 밤 이경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데, 깜깜한 어둠 속 울타리 밑에 숨어 있던 장정 두 명이 손을 쓰려 할 때 말 뒤에 있던 종이 이를 발견하고 "도적이 있다"고 외치니, 도적이 도망하여 인가에 숨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 색출해 결박하고 추궁하니, 처음에는 문창(유희분의 봉호) 집의 종이라 했다가 다음에는 정승댁 종이라 했습니다. 어느 정승댁이냐고 강력히 추궁하였으나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제 포도청으로 송치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일선위의 여종이 풀어 주기를 청하면서 또 문창의 집에 드나드는 모피 장인이라고 했습니다. 신은 '내가 혼자서 대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원수진 사람이 미워한 나머지 당나라 때 이사도가 배도를 암살하려 했던 일을 행하려 했던 것인데, 남의 부탁을 받아 함부로 풀어 줄 수 있겠는가' 여겼습니다. 그런데 대장 등이 미루면서 지금까지 국문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권세가와 굳게 결탁하여 모의하는 바가 있다는 정황을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신은 기반이 미약한 사람인데도 화근을 제거하자는 의논을 강력히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이 신을 살해하려 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기씨 집안에서 원한 때문에 사람을 사주하여 흉악한 상소를 올리게 했습니다. 이영은 평소부터 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자인데, 지난번 아뢴 글에서 '군부를 위해하려 모의한다'는 네 글자를 저 스스로 지어 신에게 덮어씌웠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준격의 상소가 아직 임금께 내려지지도 않았는데 이영이 어떻게 그 내용을 미리 알고서 갑자기 이런 불측한 오명을 씌울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은 스스로 국청에 나아가 기필코 영과 대질하여, 영에게 어떻게 신이 군주를 위해하려 모의했다는 곡절을 알게 되었는지 따지고자 했는데, 서서히 처결하겠다는 전교가 있었으므로 신은 거적자리를 깔고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자헌을 귀양 보내는 일에 대해서도 다시 혈서로 쓴 상소를 올려 함께 변론하려 하였습니다만, 곧이어 대간의 아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조처하지 않고 서서히 정배하겠다고 전교하셨으므로 신은 임금을 뵙게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객이 횡행하며 신을 먼저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신이 한번 죽고 나면 이 지극한 원통함을 씻을 길이 없기 때문에, 감히 대론이 한창 일어나는 때에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고 우러러 간절한 충정을 아뢰었으니, 그 죄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대체로 자헌이 기필코 신을 죽이려 하는 것은 바로 신의 입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계축년의 변이 일어났을 처음, 서궁(인목대비)의 흉역스러운 정상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신이 자헌에게 "이는 신하 된 자로서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어찌 지극히 높은 대비의 자리에 그대로 두어 인륜을 무너뜨리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자헌이 "그대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김제남은 사리에 어둡고 유약한 사람인데 어떻게 비상한 모의를 할 수 있었겠는가? 궁중에서 저주했다는 일도 궁인들이 한 짓인데 그 화를 대비전으로 전가하는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더구나 심우영의 공초에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서양갑이 박응서의 계책 때문에 자신이 억울하게 죽게 된 데 분노하여 국가에 난을 끼치려 이런 흉역스러운 말을 지어낸 것이다. 저들이 흉역스러운 짓을 하려 한들 누가 따르려 하겠는가? 또 《위료자》에도 가혹한 형벌을 가하면 뜻있는 선비도 없는 죄를 스스로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지금 주상께 다른 아들이 없고 동궁에게도 아직 후사가 없으니, 만세 뒤에 바른 의론이 일어난다면 오늘날 이 일을 벌인 자들의 자손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나의 외조부가 바로 임백령인데, 지금 사람들이 을사년의 일을 말하면 내 얼굴이 붉어지니, 그대는 이런 의논을 주장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의 속마음은 김제남을 임유에 견주는 것이고, 서양갑 등도 억울하게 자백한 것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신은 한심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그의 자식과 조카들이 역적의 진술에 거론되었으므로 뒷날을 위해 이런 의논을 주장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뒤 기자헌은 이 말이 새어 나갈까 몹시 두려워하였고, 신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습니다. 이 밖에 신이 들은, 위를 원망하고 난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말들은 감히 함께 아뢰지 못하겠습니다.
기준격의 상소 내용에 대해서는 신이 알 수가 없습니다. 준격은 신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가르치는 것 외에는 나이 어린 사람과 시사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삼가야 할 일인데, 하물며 그 흉악한 상소에 거론된 불측한 말이겠습니까. 저가 그런 말을 실제로 들었다면 어째서 일찍 고변하지 않고 제 아비가 죄를 입은 때에야 이를 발설한단 말입니까? 고변하지 않은 죄 또한 심한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사람을 무고하여 죄에 빠뜨리려고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을 감히 글에다 쓸 수가 있겠습니까? 진실로 천륜을 모독하고 문란시키는 짓을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지어 성상께 아뢸 수 있겠습니까? 임금을 무시하는 패역스러운 말을 스스로 지어냈다면 그 죄는 역적보다도 더 심한 것입니다. 신은 삼가 통탄합니다.
1606년 겨울 신의 형 허성이 이조 판서로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허성에게 "이홍로가 이영을 광주 경주인의 집에 머물게 하고 밤낮으로 모여 교활한 음모를 꾸미는데 못하는 짓이 없다고 한다. 모름지기 동궁을 위해 외방으로 보임시켜야 한다" 하였으므로, 허성이 즉시 잇따라 외방 고을에 추천했는데, 그 뒤 정주에 있다가 마침내 파직되었습니다. 1608년에는 이홍로의 심복이라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5년간 관직을 삭탈당했으므로, 온 나라 사람이 그가 이홍로의 일당임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권세 있는 자의 연줄을 타고 요행히 화를 면하여 청요직(여기서는 대사헌)에 올랐습니다. 겉으로는 대론을 가탁하고 나섰으나 속으로는 실상 형세를 관망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초나흗날 올린 계사에는 '폐출'이라는 두 글자는 거론하지도 않은 채 바로 관작을 깎는 절목만 들고 나와서, 끝에는 "내택으로 옮겨 안치시켜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 본마음이 여기서 다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이영이 감히 사주를 받아 원한을 갚으려고 도리어 오명을 신에게 뒤집어씌우니, 신은 더없이 원통합니다. 신하 된 자로서 이런 대역의 죄명을 지고는 하루도 천지 사이에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급히 기자헌과 이영 등을 하옥시켜 대질하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반란의 모의를 어째서 일찍 고변하지 않았고 화근을 어째서 제거하려 하지 않았는지 기자헌에게 끝까지 캐어묻고, 이어 이영에게는 신이 임금을 위해하려는 모의를 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따져 주심으로써, 한편으로는 간사한 정상을 적발해 내고 한편으로는 미천한 신이 무고당한 정상을 씻어 주신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군부를 위해 만 번 죽을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종묘사직을 붙들어 세웠는데도 끝내 망극한 참소를 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횡행하는 자객이 신을 미워하는 자의 소행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통쾌히 가려 씻어 주시어 간악한 자들의 음모를 저지시키지 않으신다면, 충정한 신하가 남은 생을 보전하기 어렵게 됩니다. 마음이 막히고 말이 움츠러들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곡진히 살펴 주소서. (《광해군일기》 권123, 10년 정월 정해)
(용어) 대론은 1617년 인목대비의 삭호와 폐출에 대한 의논을 가리키며, 이에 반대한 기자헌은 귀양을 갔다. 계축년의 변은 1613년, 조령에서 은상을 약탈하다 잡힌 자들이 김제남이 역모하였다고 허위 진술하여 일어난 사화로, 이로 인해 김제남은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폐해졌다. 을사년의 일은 1545년에 일어난 사화로, 소윤의 윤원형이 대윤의 윤임을 몰아낸 사건이며 그 주동 인물이 임백령이었다. 경주인은 지방 관청과 중앙 관청의 연락 사무를 맡아보게 하기 위하여 지방에서 서울로 파견된 향리이다.
기준격의 상소에 대한 허균의 소 (2) (서기 1618년 6월 24일, 양력)
지난해 대론이 일어나자 신의 원수 자헌(기자헌)이 제일 먼저 흉악한 차자를 올렸다가 귀양 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서는 신이 은밀히 중상한 것으로 의심하여 신에 대한 원망이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자헌이 이런 차자를 올리지 않았다면 그의 원수가 백 명이라도 그를 모해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지만, 차자를 올렸다면 평소 원수진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벌을 내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기씨 집안에서는 신을 원망하여 그 아들 기준격이 외람되이 변고를 알리는 글을 올렸는데, 그 상소의 내용이 매우 비밀스러워 사람들이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양사에서 신문하기를 청하고 2품 이상이 국문하기를 청했는데도 전하께서는 고집하며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신은 사가에서 거적을 깔고 엎드려 다시 변론하는 글을 올립니다.
당초에는 그 상소의 내용이 이토록 참혹하고 지독한 줄은 몰랐었습니다. 지난번 곽영의 옥사 때문에 국청에서 그 상소를 내려 달라고 청하였는데, 그 내용 가운데 위를 저촉하고 모독하는 말들은 모두 차마 볼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허위 사실을 날조해 신을 무함하려는 온갖 계책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대신 이하가 그 글을 보고는 간담이 떨렸다 하니, 국청을 맡은 신하는 일각도 지체하지 말고 실정을 캐내어 나라의 법을 바로 세우는 것이 바로 신하 된 자의 대의입니다. 그와 뜰 아래에서 마주하여 시비를 가릴 수 있게 되기를 가슴을 두드리며 바라니, 하루가 일 년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의금부 판사가 아직 차임되지 않았고 전하께서도 병을 조리하시는 중이므로, 친히 심문하실 기회가 막연하기만 합니다.
신이 기씨 집안과 원수를 맺게 된 전후 곡절을 먼저 말씀드리고, 이어 없는 사실을 날조한 그 상소의 내용에 대해 하나하나 밝혀 아뢰겠습니다.
신의 형이 이홍로와 혼사를 끊자 홍로가 신이 상복 입는 법도를 삼가 지키지 않았다는 것으로 무함했기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되었다는 사정은, 신의 처음 상소에서 이미 상세히 아뢰었습니다. 홍로가 스스로 변명한 상소에 "허균도 그 일을 알고 함께했다"는 말은, 기씨 집안의 밀서에서 거짓임이 이미 드러났으니 다시 아뢰지 않겠습니다.
1601년 신이 해운판관으로 순찰차 전주에 갔었는데, 홍로가 감사로서 어미 상을 당하여 성복도 하기 전에 좋지 못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사람들이 신이 이 사실을 상세히 알고 있다고 하자 기자헌이 신에게 증언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홍로가 나를 상례를 삼가지 않았다는 것으로 무함했는데 내가 또 이것으로 그를 무함한다면 같은 방식으로 보복하는 것이니 누가 믿어 주겠는가? 결단코 따를 수 없다" 하였더니, 자헌이 비로소 유감을 품었습니다.
홍로가 서울로 올라와서는 신이 눈으로 본 일들을 퍼뜨렸는가 의심하여 원망하는 말을 마구 하였습니다. 신이 조카의 상을 조문하기 위해 그의 이웃에 갔다가 들러서 스스로 해명하려 하였는데, 마침 신현과 이성경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홍로가 급급히 저지시키면서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그대는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는데, 그때 기씨 집안의 문안 노자가 이를 보고 가서 자헌에게 고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이 상소에 참견했다는 말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스스로 해명한 서찰은 본디 긴요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자헌이 이것을 위협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밀서를 모방해 그 내용에 흉악한 말이 있는 것처럼 꾸몄습니다. 그리고 옥사를 일으켜 스스로 해명하려 한다는 설을 신에게 뒤집어씌워 몰아붙였습니다.
1603년 신의 형 성의 집에서 국혼을 할 적에 형수의 병이 위중하여 기일을 앞당겨 혼인을 치렀습니다. 궁인들도 병자를 보고 갔고, 그런지 닷새 만에 죽었습니다. 마침 상을 발설하지 않고 비밀에 부쳤다는 설이 궁중에 퍼졌는데, 이 말은 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자헌이 날조한 것이라고 지목되었습니다. 봄 꿩이 절로 울듯이 형의 집에 가서 해명하면서 "이는 균이 나를 잡아넣으려고 만든 말이니, 공이 대방(허성)에게 해명하라" 하였습니다.
자헌은 더욱 노하여 헌납 신률을 충동질하여 신을 탄핵케 하였으므로 신은 즉시 강릉으로 내려갔습니다. 자헌은 그래도 분풀이를 그치지 않았으므로 신의 형이 걱정하던 끝에 신에게 사과하는 서찰을 보내어 그의 노여움을 풀게 하라고 했습니다. 신은 즉시 서찰을 보내어 사과했고 그 내용에도 별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자헌이 "내가 이 서찰을 내놓으면 균은 틀림없이 죽는다" 하였습니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이 망발한 말이 있는 것인가 의심하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그 실제는 이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자헌이 전후 차자를 올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을 두루 비방할 적에도 신의 이름이 그 가운데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벽제에 왔을 때 신이 역관 박인상을 시켜 본국의 세자 책봉에 관한 일을 극력 아뢰게 하였더니, 주지번이 즉시 정문할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신이 돌아와 대신들에게 말하였더니 적신 유영경은 즐거워하지 않았으나 자헌과 심희수는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의 민심을 사신에게 전달하여 중국 조정의 벼슬아치들에게 알릴 수 있었습니다.
유영경이 분노와 시기를 품게 되었으므로 자헌 등도 잇따라 벼슬자리에서 밀려났고, 신도 곧이어 부처를 좋아한다는 비평을 당했습니다. 신과 자헌이 함께 유영경의 배척을 받았기 때문에 이로부터 자헌이 거짓 마음을 열고 대하는 체했습니다만, 신은 자헌이 음험한 마음을 품고 있어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수시로 만나기는 해도 사사로운 마음은 감히 토로하지 못하였으므로, 늘 시기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1613년 초겨울 화근을 제거하자는 의논이 발론되기 시작했습니다. 11월 초나흗날 신이 마침 자헌을 만나 조용히 물으면서 그의 마음을 염탐해 보았더니, 자헌이 머리를 흔들면서 동의하지 않고서 송순의 일을 핑계대면서 결연히 가버렸습니다. 그의 자식과 조카들이 모두 서양갑과 절친한 사이로 역적의 진술에 거론되었으나 요행히 나문을 면하였습니다. 때문에 뒷날 화를 면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기 위해 미리 이런 의논을 세움으로써 판국을 번복시키려 도모한 것입니다. 신은 이것으로 자헌이 끝내 임금을 등지고 대론을 저지시키려 할 줄 알았습니다.
1614년 봄 자헌이 들어와 영의정이 되자 삼사가 일제히 탄핵하였습니다. 이때 그 자제들이 신에게 시배들의 의논을 중지하게 해달라 하였으므로, 신이 널리 친우들에게 요청하여 그 탄핵을 그치게 했습니다. 그 뒤 그의 아우 기윤헌이 외설에 대한 일 때문에 신을 의심하여 유감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틈을 이용하여 그의 형에게 거짓말로 "삼사가 탄핵할 적에 허균이 힘써 저지시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덩달아서 배척하였다" 하니, 자헌이 그대로 믿고 매우 노하였습니다. 신이 요동에 있으면서 징병에 관한 일은 조처하기 어렵다는 곡절로 자헌에게 글을 보냈더니, 자헌은 곧 자기를 헐뜯는 것인가 의심하여 공공연히 신을 욕하였습니다. 북경에 도착하여 조종의 억울함을 밝히는 글을 올리자, 극도로 추잡한 비난을 가하고 사형에 처하려 했었습니다. 그때 신이 자헌의 탄핵을 저지시키기 위해 진력했음을 아는 사람이 자헌에게 가서 상세히 해명하고 그의 구원을 요청했던 서찰 세 통을 보이자 자헌이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시기하고 저해하는 마음은 더욱 더하였습니다. 《대명회전》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고 돌아오자 그는 늘 "뒷날 이것이 반드시 나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 매우 증오스럽다" 하면서, 밤낮으로 획책하여 기필코 신을 살해하려 하였습니다.
안서(해주)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는 자헌이 스스로 차자를 지어 신을 무함했는데 그 내용을 들으니 모두가 허위로 날조한 것이었습니다. 신도 상소를 올려 대면하여 변정하려 하였으나 자헌이 밖에서 위협을 가하여 왔으므로 중지하고 말았습니다. 흉격 사건이 있을 적에는 임금을 버리고 도주했고, 은연중 그 흉격을 신이 지은 것처럼 말했으며, 자기와 친한 사람들과 짜고 신을 무함하려 했습니다. 강릉의 차자에서는 신의 이름을 거론하여 드러나게 지적하지 못하였으며, 그가 조정으로 돌아와서도 감히 명백하게 드러내어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성명께서 그의 흉측함을 통촉하지 않으셨다면 신의 목숨이 어떻게 지금까지 붙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뒤 김진의 옥사 때에는 자헌이 신을 욕하면서 진회에다 비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신도 상소문을 올려 전일 원망을 맺게 된 상황과 저가 역적을 비호하고 임금을 저버린 정상을 아뢰어 면대해서 변정하기를 청하려 했더니, 자헌이 기겁하여 이복장을 보내어 화해할 것을 애걸하였습니다. 신은 대례가 이미 임박하였고 또 자헌이 이 때문에 도망하여 갈까 저어하여 일이 완전히 끝난 다음 아뢰어 변정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대론이 일어났고 저가 제일 먼저 죄를 받았습니다. 기회를 이용하여 남을 곤경에 몰아넣는 것은 의리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도록 덮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때 영남 사람이, 사산에 몰래 장사 지낸 일을 가지고 상소를 올려 죄줄 것을 청하려 하였습니다. 사산은 신라 이래 장사지내는 것을 금지해 오던 곳으로 사람들이 모두 만세에 군왕이 날 곳으로 일컬어 왔는데, 자헌이 그의 첩을 장사지냈습니다. 따라서 자헌이 패몰하기 전에도 모두들 위태하게 여겼었습니다. 이 상소를 올리려 하자 기씨 집안에서는 신이 사주한 것으로 의심하여 원망이 더욱 극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허균이 평소 우리 집안에서 대론을 따르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고의로 이런 꼬투리를 들추어내어 우리 집안을 무함하려는 것이다. 유배지를 여러 번 옮긴 것도 모두 그의 지휘에 의한 것이다" 하면서 부인으로 하여금 바로 임금께 호소하는 글을 올리게 하려다가 하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 성균관의 상소에도 준격과 기수발이 서양갑과 교분을 맺고 있는 정상을 거론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기윤헌이 이사호와 심복이기 때문에 신이 흉악한 정상을 자세히 염탐하여 알고 있다는 것으로 계속 신에게 공갈을 가하였습니다. 힘을 다하여 신을 제거하면 대론은 절로 와해되고 저의 화도 가벼워질 것으로 여겨 준격을 꾀어 저격할 계획을 세우게 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경망하다 해도 원수진 사람들의 자제들을 대할 때면 반듯이 말을 가려서 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고 귀로 차마 들을 수 없는 이런 흉역스러운 난언이겠습니까. 이는 풍병을 앓아 본심을 상실한 사람이라도 감히 할 수 없는 말인데, 신이 이런 말을 했으리라고 여기십니까?
흉악한 상소의 말은 전해 들은 데서 나온 것이므로 하나하나 해명할 수 없습니다만, 사람들에게 전파된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밝혀 말씀드리겠습니다. 준격이 나이 어릴 적에 그 아비의 명에 의해 신에게 와서 배웠고 신도 부득이하여 억지로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평상적인 이야기는 역시 하지 않았었습니다. 지금 이 1609년과 1611년의 이야기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데 증거할 수 없는 말을 글에다 썼으니, 신은 매우 통분스럽습니다. 의창군은 신의 형의 사위이기 때문에 신의 집안을 몰살하기 위해 문득 옹립하려 한다는 말을 만들어 내고 그 공을 자기 아비에게 돌리려는 것이 틀림없으니, 그 계책이 매우 참혹합니다.
형의 집에서 성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신은 곧 파직되어 시골로 내려갔었다가, 1604년 8월에 올라왔습니다. 올라와서는 수안 군수에 제수되어 부임했었고, 1605년 11월에 파직되어 돌아왔습니다. 12월에는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어 내려갔었습니다. 1606년 3월에 의주에서 조보를 보고서 비로소 영창대군이 탄생하여 진하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이 동료들에게 "대신들이 어떻게 감히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는데, 이는 성상(광해군)께서 춘궁의 자리에 계시고 억조창생이 마음으로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은 바로 공성왕후(광해군의 생모)의 촌수에 드는 친척이므로 추대하고픈 사정이 다른 신하들의 배나 되는데, 감히 흉측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겠으며 마침내 원수진 집 사람에게 토로할 수 있겠습니까?
1611년 겨울 유배지에서 사면하는 은혜를 받았고, 11월 12일에 서울에 와서 형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24일에 다시 부안의 별장으로 향하였고, 1612년 2월 초에 바야흐로 돌아왔습니다. 그간 준격이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신의 형제는 김제남과 평소 좋지 않게 지냈으므로 한 번도 그의 집에 간 적이 없는데, 혼인을 권하기 위해서 김제남과 함께 윤수겸의 집에 갈 리가 있겠습니까? 그해 겨울 서울에 머문 것이 열흘 남짓뿐이었기 때문에 수겸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수겸이 지금 있으니 물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김제남이 신과 접촉할 길이 없다는 것은 온 나라가 다 아는 일인데, 궁중의 이러이러한 등등의 일을 신이 어떻게 제남에게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두 구의 시신은 적자가 아니다"라는 말은 모두 저가 스스로 만든 말입니다. 어떻게 차마 이에 주석을 달아 감히 성람을 더럽히는 짓을 이토록 거리낌 없이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 마음에 이런 생각을 품은 자가 아니면 어떻게 이런 문자를 베낄 수 있단 말입니까? 저가 신을 무함하기 위해 망측한 욕을 도리어 군상에게 가하였으니, 고금 천하에 임금을 무시하는 부도한 말이 이렇게 극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습니다.
저가 만약 이런 흉측한 말을 실제로 들었다면, 신하의 도리에 있어 어떻게 온 조정의 신하들이 그 집을 미워한다는 것으로 그의 의논을 정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일이 만약 정확한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미워하더라도 어떻게 겁박하여 도리어 죄를 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실제로 흉역스러운 말을 토로했다면 신하로서 하루도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책을 가지고 와서 10년이 되도록 신에게 가르침을 받았겠으며, 저의 아비의 두 차례 공의 녹권을 기필코 신에게 지어달라 해서 후세에 전하려 했겠습니까? 이는 변명하지 않아도 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1608년 공주에서 파직되고 나서 전답을 물색하기 위해 부안에 갔다가 바닷가에 있는 산속의 거처할 만한 땅을 얻어 경영하고 있었는데 오래지 않아 도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 뒤 죄를 져서 유배될 적에 기필코 함열을 요구한 것은 이곳이 부안과 가까워서 사면받으면 즉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613년 봄에 또 부안에 내려갔던 것은 노복과 전답이 모두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지, 어찌 심광세와 모의하기 위해 부안에 내려갔을 리가 있겠습니까.
1611년 신의 집이 비어 있게 되자 수겸이 몇 달 간 빌려 들었었으므로 그 아들의 현부는 집을 지키는 종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심광세가 "윤씨의 집에 혼인을 청하려 하는데 아들 둘 가운데 누가 더 훌륭한가?" 묻기에 신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사람들이 모두 대군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데 사대부가 어떻게 혼인을 맺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송구와 그 혼인의 부당함을 말하고, 수겸의 절친한 벗인 이문란을 불러서 "광세가 자기의 질녀를 수겸의 아들과 결혼시키려 하니 그대는 모름지기 이 혼인을 극력 저지시키라" 하니, 문란이 그렇다며 이 말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즉시 수겸에게 말하니 수겸이 "그가 아무리 요구해도 내가 어찌 허락하겠는가. 나는 하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다음날 준격이 송구에게 찾아가서 이 일에 대해 묻자, 송구가 "어디에서 그런 말을 들었는가?" 하니 준격이 "숙부에게 들었다" 하므로, 송구도 허균이 저지시켰다고 말하여 보냈다고 했습니다. 지금 송구를 끌어대어 증거를 삼았는데 구가 아직 서울에 있으니 물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이문란의 지난해 상소를 가져다 고증해도 알 수가 있습니다.
《대명률》에 "참서를 집에 보관해 두는 것은 사죄를 범한 데 해당된다"고 했기 때문에 신은 비록 우연히 보았다 해도 집에다 보관해 두지도 않습니다. 이를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감히 하지 않고 있는데 하물며 원수진 집의 자제에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참설은 20여 년 전 선왕 때부터 있던 것으로 전해 내려온 지가 이미 오랩니다. 그리고 천도설은 1612년에 나왔으니 그 거짓됨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이른바 심우영은 신의 죽은 아내의 외서삼촌입니다. 약간 문재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대부들도 허여하였고, 신은 가족적인 친분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매우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품이 교만하고 사납고 적자를 멸시했기 때문에 온 집안이 그르게 여겼습니다. 1607년 겨울 이원형이 와서 "부디 우영을 친절히 대하지 말라. 우영이 이야기 끝에 나를 시켜 임해군에게 가서 살펴보라기에 내가 큰 소리로 준절히 나무랐더니 그가 얼굴빛을 변하면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늙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싶다' 하였다. 그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어 나도 이로부터 절교하겠다" 하므로 매우 이상스럽게 여겼습니다. 그 뒤 유념하여 살펴보니 말하는 즈음에 국가를 원망하는 것이 특별히 심했습니다. 그리고 드러나게 대군을 애호하는 말이 있어서 더욱 괴이하게 여겼었습니다.
그 뒤에 이의숭이 우영에게 재물을 빌리려고 하므로 신이 중지시키면서 "이들의 지향이 수상하니 부디 서로 가까이 지내지 말라" 하였습니다. 이른바 박응서란 자는 그 아비가 순으로 신의 아비 엽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임백령의 시호에 대한 일 때문에 순이 사죄를 받게 되자 신의 아비가 당국자에게 해명하여 사형을 면하였으므로 순이 항상 고맙게 여겼습니다. 1583년에 순이 임금께 아뢸 적에 신의 형 봉의 잘못을 극언하였는데 이 때문에 신의 형이 멀리 귀양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의 어미가 순을 원망하게 되었고 이어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화담서원에는 신의 아비를 배향하게 되어 있는데 순도 배향하려 함으로 신이 온당치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응서가 이 말을 듣고 원망을 품었으므로 우영이 응서를 위하여 갑자기 신의 집 및 의숭의 집과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노략질하던 날 밤 응서와 김비가 분명히 도둑이었으므로 신이 의숭에게 "내가 전에 한 말이 어떠한가. 이들이 끝내 국가의 대적이 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대장 이문전을 만나서 말했는데, 체포하려 할 즈음에 문전이 파직되었기 때문에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다음해에 응서가 은을 노략질한 것 때문에 체포되었는데 즉시 결단하지 않자, 의숭이 신의 말을 깨닫고 즉시 이이첨에게 가서 "필시 역적질을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첨이 즉시 한희길을 불러 임금께 알릴 것을 극력 권했기 때문에 죄인의 괴수를 끝내 잡게 된 것이고 종묘사직이 다시 편안하게 된 것입니다.
신이 정미년(1607) 겨울 혼자서 보기 위해 본조의 시를 골라 뽑을 적에 정도전과 권근은 모두 국초 사람이므로 이들의 것을 조사하여 쓰다가 보니 자연 이 두 사람의 것을 제일 앞에 쓰게 된 것이지, 어찌 감히 그 사람들을 사모하여 뽑아서 앞에다 실었겠습니까? 지금 《동문선》과 《청구풍아》 등의 책에 실린 국초의 시문은 정도전의 저작이 반드시 제일 앞에 있습니다. 신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버리고 기필코 이 사람을 으뜸으로 삼았겠습니까. 더구나 신이 1598년에 송도에 갔다가 포은의 옛집에 들러 시편을 지을 적에 말단에 정도전을 극력 배척하는 글을 지었었습니다. 이 시를 차운로가 늘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또 「도전권근론」을 지어 배척했는데 이는 본 사람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말은 마치 아이들의 장난과 같은 것입니다.
양갑의 자가 석선인 것은 지금 비로소 들었습니다. 천얼들의 자는 지극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알 수가 없는 것인데 준격이 홀로 그의 자를 알고 있고 신에게 죄를 씌우기 위해 신이 지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준격이 은밀히 양갑과 교결하여 굳은 교분을 맺은 정상이 이에 이르러 다 드러나 버렸습니다.
경준이 지은 흉격에 대한 일은 그때의 추안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는데도 준격이 지금 이런 말을 만들어 내면서 다른 증거는 세우지 않고 단지 신이 스스로 말했다고만 합니다. 흉격을 짓는 것은 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흉역인데 그것을 자신이 지었다고 끌어대어 원수진 집에다 말한다는 것이 사리에 맞는 말이겠습니까?
그의 "법궁으로 이어하는 데 대한 천시와 인사에 관한 설"은 신으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습니다. 처음 법궁을 지었을 때 비길 데 없이 성대하고 화려하여 신민들이 주야로 이어하시기를 바라고 있었고, 인심도 모두 우리 임금을 추대하고 있는데다가 시변과 천재도 별로 걱정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준격이 사람을 무함하기 위하여 스스로 흉언을 지어내고 천시와 인사에 대한 말을 끌어대어 인심을 선동, 현혹시켰는가 하면 필설로 나타냈으니, 그가 대군에게 귀부한 마음이 있는 것이 이미 여기에서 드러났습니다.
이이첨 집의 큰 뱀에 대한 설은 역시 무엇을 인연하여 신에게 미루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1589년부터 성균관에서 이이첨과 교제를 맺었습니다. 나이가 같지 않아서 형으로 섬겼고 30년을 하루같이 지내왔으며, 무신년 이래 모든 역적 토벌에 관한 일에 함께 힘을 합하여 온 것은 사람들이 다같이 아는 일인데, 어떻게 계축년 이후에 바야흐로 투탁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의 "대군을 세우고 수렴청정한다", "화살이 떨어지는 곳에 과녁을 세우라"고 했다는 말은, 이 얼마나 엄청난 흉역입니까? 가령 신이 저에게 분명히 그런 말을 했다면 어째서 들은 즉시 고변하지 않고 전혀 마음을 움직이지 않은 채 등한한 이야기로 서로 문답하듯 할 수 있겠습니까.
이기(심이기)에 대한 말은 간담이 떨리는 말입니다. 기필코 이 역적과 상의 앞에서 같이 죽음으로써 스스로 변별하고자 합니다. 난신적자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겠습니까만 이렇게 극악한 말을 한 자는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신이 이미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저가 스스로 만들어낸 말입니다.
저 자헌이 지극히 미세한 일로 의심을 내어 실정이 없는 말로 원수를 맺고 형적이 없는 일로 살해하려 하니, 그 마음의 흉악함과 참혹스러움이 이보다 더 극심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유념하시어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여 주소서. (《광해군일기》 권128, 10년 5월 기축)
(용어) 곽영의 옥사는 곽영이 이이첨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려 일어난 옥사이다. 계축옥사에서 서양갑은 서익의 아들로, 박응서·심우영 등과 강변칠우를 자처하다 은상을 살해하고 금품을 강탈하여 체포되자 영창대군 옹립을 계획했다고 허위 진술함으로써 계축옥사를 촉발시켰다. 진회는 남송 고종 때의 재상으로, 악비를 무고하여 죽이고 금나라와 굴욕적인 화약을 맺은 대표적 간신이다. 심이기는 한 고조 때 사람으로 여후와 정을 통한 인물이다.
태각지 서 (서기 1601년 2월 17일, 양력 추정)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 강헌대왕께서 천명을 받아 개국하셨는데, 그때 문하 우시중 배극렴은 고려의 정승으로서 태조의 개국에 실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문하성의 제도는 고려의 제도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았었다.
그 후 2년 만에 한성에 도읍을 정하고서 비로소 2부를 창설, 고려 말엽의 제도를 모방하여 도평의사를 설치해서 국정을 맡게 하고 삼군부를 설치해서 군무를 다스리도록 하니, 그 조직과 진의 제도가 한결같고 직무도 예전과 똑같았다. 그리고는 배극렴을 판도평의사로, 정도전을 영삼군부로 삼았다. 그리하여 조인옥·정희계·이옥·이서·설장수·조림 등이 모두 훈척 중신으로서 서로 전후하여 동판사사가 되었는데, 군국 대사의 경우는 혹 서로 참여하여 결정하곤 하였다.
2년 후에 배극렴이 해면되자 조준·김사형이 그 직임을 대신하였고, 또 삼군부의 직무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하여 정도전에게 도평의사의 직무를 겸관하도록 하였다. 조준·정도전이 그 자리를 떠나고 나서는 심덕부·이서가 서로 이어 그 일을 관장하였다. 안종원·이이·이승원·장사정·박위·이거이도 차례로 동판사사가 되었고 이지란·이온·조박·남은·전백영·이지·조온·황거정이 상의평리가 되었는데, 모두가 다른 관직에 있으면서 그 직무를 겸하였었다. 그러나 모든 군국 기무에 관계된 일은 두 재상이 주장하며 결단하였고 동판사사 이하는 감히 가부를 말하지 못한 채 자리만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공정대왕(정종) 때에 도평의사를 고쳐서 의정부로 만들었다. 그런데 태종이 즉위하여서는 의정부와 삼군부를 혁파하고 좌정승·우정승을 모두 정1품으로, 시랑찬성사를 종1품으로, 참찬을 정2품으로 하여 하륜·성석린을 좌정승·우정승에, 이첨·정탁을 찬성에, 이내·권근을 참찬에 임명하였다.
그 14년 후에는 영부사 1인·판부사 2인을 모두 정1품으로, 동판부사 2인을 종1품으로 설치하고 참찬지부사를 혁파하였다. 얼마 후에 제도를 다시 개정, 영의정·좌의정·우의정 각 1원을 모두 정1품으로 하여 이서·이직·조영무에게 그 직을 임명하였고, 좌찬성·우찬성 각 1원을 모두 종1품으로 하여 박은·한상경에게 그 직을 임명하였고, 좌참찬·우참찬 각 1원을 모두 정2품으로 하여 박석명·유관에게 그 직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의정부의 소속으로 사인·검상·사록 등의 관직은 모두 한때의 대단한 청선이었고, 녹사·도리는 모두 처음 벼슬한 문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렇게 하자 군국의 대정과 육조의 서무가 모두 의정부에 귀속되고 전장과 제도가 비로소 정해져서 그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삼공이 묘당에 앉아 있으면 육조의 관속들이 각기 소임을 가지고 조방에 모여서 처리하였고, 무릇 임금의 재가를 받은 공문서를 만나면 사인 이하의 관원들이 각기 소임을 분담, 평리하여 재상의 결재를 받은 다음에야 해당관이 그 일을 과감하게 시행하였으니, 그 직무를 맡겨서 완수하기를 책임 지우는 일의 중대함을 대강 상상할 수 있겠다.
세조가 즉위하여서는, 육조가 의정부에 가서 사건 결정하는 일을 혁파하고 대정만 의정부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사록을 사관의 겸관으로 삼고 녹사 이하는 옛 사례에 비추어 제수하니, 정부의 권한이 이로부터 약간 가벼워졌다.
나는 오랫동안 계속된 태평성대의 말엽에 태어나, 젊었을 적에 그윽이 조종조 때 어진 사대부들의 행적을 사모하고 좋아한 나머지 동부(상서성)의 서고에서 삼공의 전임안을 가져다가 한번 눈여겨 보았다. 그러나 당시에 내가 방종하여 그것을 초록해 두지 못하고 다만 마음 속에 기억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난리를 겪은 이후로 전적이 모두 없어져서 이에 관한 것을 찬술하려 해도 참고할 만한 것이 없었다.
지난번 오성 이항복 정승을 모시고 있을 때에 이 일에 언급되었으므로, 지금 기억하고 있는 대신의 성씨를 기록하여 바치고 즉시 각년의 등과기를 가져다가 그 집정자를 초록하되, 무관이나 음관으로 시작하여 대신이 된 사람들로서 가끔 기억할 만한 사람 또한 차례에 따라 적어 넣었다. 또 구상 윤해원(해원부원군 윤두수)에게서 이른바 '국조대신고'라는 것을 얻어 고사를 널리 상고하고 거기에 나의 듣고 본 바를 가지고 정정한 다음 연차를 편성하여 옛 문서의 잘못된 점을 보완하였다.
국초에는 판평의가 국정을 도맡았고 동판 이하는 정사의 권한을 행사하는 데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므로 판사만을 기록하였고, 또 문하성과 의정부에도 역시 정승과 영사만을 기록하였으며, 그 좌이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종실 가운데 재상이 된 사람은 이준 한 사람뿐이고, 음관으로 재상이 된 사람은 신수근 한 사람뿐이며, 무신으로 재상이 된 사람은 박원종 한 사람뿐이다. 그 후로는 모두 문관으로 재상을 삼았는 바, 통틀어 재상 156인을 가지고 국초 이후 대신 연표를 만들었다.
1601년 1월 일에 예조 정랑 허균은 서한다.
청허당집 서 (서기 1612년 2월 16일, 양력 추정)
불법이 동쪽으로 삼한에 들어오기는 신라 중엽부터였다고 한다. 그사이 불문에서 일컬어진 이가 수없이 많았으나, 거의가 교장이나 율장 두 가지에 벗어나지 못하여, 탑묘를 존숭하고 과보를 내세워 한 세대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을 뿐이었다.
그 염화의 밀지와 면벽의 은미한 뜻은 조금도 간파하지 못한 채, 아무 스승은 아무 전을 받고 아무 조사는 아무 법을 전했다고 하는데, 그 문도가 또 덩달아 이를 기념하는 데 끊임이 없어, 높다란 비를 세우고 커다란 종을 만들어 공적을 과시하는가 하면, 훌륭한 전당과 절이 총림을 빛나게 장식하되 수천 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으니, 어찌 너무 지나친 관습이 아니겠는가.
오직 도봉 영소국사가 중국에 들어가 법안 영명(오대·송의 승려 영명 연수)의 전수를 받고, 송나라 건륭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와 불교의 기풍을 크게 떨쳐 말법을 구제함으로써, 조사(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비로소 선양되고, 동토에 가사를 두른 이가 드디어 임제·조동의 종풍을 계승하게 되었으니, 선종에 끼친 공로가 어찌 적다 하겠는가.
이 스승의 정법안장은 도장 신범에게 전수되어 청량의 도국, 용문의 천은, 평산의 회해·현감·각조, 두류의 신수 등 6세를 거쳐 보제 나옹을 얻었고, 나옹은 오랫동안 중국에 있으면서 모든 선지식을 널리 찾아 두루 통하고 즉시 체득하여 울연히 선림의 사표가 되었다. 또 그의 법을 전수받은 이는 남봉 수능이 적사가 되었고, 정심 등계가 이를 바로 계승하였는데, 정심은 벽송 지엄의 스승이다. 벽송은 다시 부용 영관에게 전수하였는데, 그 도를 체득한 이는 오직 청허 노사를 수위로 일컫고 있다.
노사의 휘는 휴정, 고향은 안서(해주의 옛 이름)로 소시에 유가의 글을 익혀 이미 큰 뜻을 통하였고 문장에도 능하여 과거 볼 만한 정도의 공부는 매우 하찮게 여겼다. 뒤에 지리산에 노닐다가 갑자기 큰 서원을 발하여 부용의 문하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법을 받아 팔교를 통하고 삼관을 통하였으며, 도는 기미 이전에 비추고 생각은 번뇌 밖으로 벗어났다.
그 영원한 밝음과 간결한 조예는 곧장 달마·노능(혜능)의 맥락을 접하고, 심·성을 설하는 묘는 남양·영가·백장·남천과 어깨를 나란히 함으로써, 지혜의 빛이 거듭 밝고 지혜의 등이 더욱 빛났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그림자를 보거나 말을 듣고 그대로 집착하거나 믿는 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삼사(1사는 30리)나 물러설 것이며, 참되고 바른 것을 훼방하고 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려다가는 스스로 나쁜 업보를 지을 것이니, 소위 하등 사람은 도를 듣고 도리어 크게 웃는다는 말이 어찌 허위이겠는가.
이 스승은 큰 법을 간직하고 명산에 두루 머무른 법랍이 이미 70년이나 된다. 은고를 보방에서 울리고 금륜을 향지에서 굴려 뭇 미혹을 다 깨뜨리고 위엄스러운 지팡이를 혼자 세워, 도봉·보제의 가르침이 이에 이르러 더욱 크게 밝아졌다. 저 교·율에 구구하여 과·보나 믿는 이와 비교하면 그 거리가 어찌 백만 유순뿐이겠는가.
아, 그런데 부처의 말씀이 장차 갈라져 밝혀지려 하는데 옥첩(청허의 죽음을 뜻함)이 갑자기 재로 화하여, 기수(부처가 설법한 기원정사)에 그늘이 없어지고 자비의 배에 노를 잃었으니, 사람과 하늘의 비통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종봉 정공(유정을 높인 말)은 이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흥기한 이이다. 지혜의 깃발이 이미 꺾이고 계율의 보배가 오랫동안 사장된 것을 염려하여, 그 남긴 글을 주워 모아 영원히 사모하는 뜻을 붙이려 하였으나, 그 글을 간행하기도 전에 정공 또한 가고 말았다. 열반에 들던 날 저녁에 문인들을 불러 부탁하기를 "나의 스승의 남긴 글을 내가 간행하지 못하고 갑자기 감으로써 처음의 마음을 저버리게 되었으니, 너희가 나의 정성을 잊지 않고 그 일을 마쳐 준다면, 내가 지하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겠다" 하고 이어 "거사(허균을 이름)는 우리 불법과 은미한 인연이 있다" 하고는, 이 서문을 부탁하였다.
그의 문인 혜구가 나를 찾아와서 그 죽은 스승의 말을 전하고 서를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 그런 연유가 있었다. 청허는 나의 선친께서 뜻을 같이한 벗과 같이 보았고, 나도 젊었을 때 서찰 사이에서 보아 왔다. 지난해 서쪽 지방에 나가 노닐 때, 객사에서 노사를 만나 직접 오묘한 진리를 듣고 흐트러진 마음이 금세 없어졌으며, 노사 또한 사후의 비문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나는 유가의 선비이다. 불교와는 전혀 서로 맞지 않는데, 어찌 그 행적을 모사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스승이 이를 알고 부탁하였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에 선대의 우의를 감념하여 감히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그 법을 전수한 자취를 서술하고, 노사에 관한 줄거리를 대충 기록해 보낸다. 그러나 석가의 머리 위에 똥을 바를 수 없는 일인데, 혹 나의 혀를 뽑는 업보가 돌아올까 염려된다. 그 남긴 글의 현묘하고 탈쇄함은, 보는 이가 스스로 짐작할 것이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명나라 만력 40년(1612년, 광해군4) 정월에 양천 비야거사 허단보는 쓴다.
사명집 서 (서기 1612년 2월 16일, 양력 추정)
지난 병술년(1586) 여름에 내가 둘째 형을 모시고, 봉은사 아래 배를 댄 적이 있었다. 마침 한 승려가 갑자기 나타나 뱃머리에 서서 읍을 하는데, 헌걸찬 체구에 용모가 단정하였고, 함께 앉아 담화를 나누는데 말이 간단하였으나 그 뜻이 깊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물어 보았더니, 바로 종봉 유정 스님이었다. 나는 그만 진심으로 흠모하고 말았다.
밤이 되어 매당에 들어 유숙하다가, 그 시를 내어 보이는데 그 격조가 마치 거문고 소리와 같이 청고하였다. 둘째 형이 절찬을 되풀이하면서, 당나라 아홉 고승의 것과 동렬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때 나는 아직 연소하여 그 묘처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를 내심 간직하여 쉬 잊지 못하였다.
3년을 지나 둘째 형이 별세하자, 스님이 오대산에서 내조하여 슬피 곡하고 또 만시를 지었는데, 그 사구가 너무 처절하여 아직도 생사의 즈음에서 해탈하지 못한 듯하기에 내심 의아해하기를 '스님의 수도가 아직 상승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일까. 어찌 구구히 속인들의 슬픔과 기쁨을 본받는단 말인가' 하였다.
1592년 겨울에 병란을 피하여 명주(강릉)에 있다가, 스님이 의병을 규합하여 국난을 막을 때, 그 스승을 대신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여러 차례 왜적을 꺾었단 말을 듣고, 뛸듯이 기뻐하였다.
그 후에 스님이 왕명을 받들고 적의 진영을 찾아가 왜인을 효유하여 큰 공적을 세웠는데, 지금 생각하나 다시 만날 수 없으니 스스로 마음만 피로하다.
1596년 겨울에 내가 승문원에 있을 때, 공사로 인하여 영상 서애(유성룡)를 찾아 뵈었는데, 스님이 높은 고깔에 긴 수염으로 함께 앉아 있다가 반가이 손목을 잡고 옛날을 이야기하였다. 이에 함께 객사로 돌아와 당시의 시무를 담론하였는데, 강개한 기개로 손뼉을 치면서 이해를 타진하는 것은 옛날 의협의 풍도가 있고, 안장에 기대어 좌우를 돌아보면서 요사스러운 기운을 쓸어 버리려는 의지는 또 늙어서도 장건한 노장과도 같기에 내가 더욱 존경하며 '그의 시문은 부차적인 일에 불과하다. 그의 재주가 국난을 구제할 만한데, 아깝게도 잘못 불문에 투신했다'고 여기었다.
1603년 가을에 스님이 조정에 사퇴를 빌고 상원사 옛 처소로 돌아와 있다가, 감호(강릉)의 별장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 무렵 내가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잠시 불교 경전을 가져 장한 뜻을 달래던 터라 불가의 명심견성설에 약간의 소견을 가지고, 한두 가지를 시험삼아 논난해 보았더니, 스님이 모두 회통하고 환히 깨달아, 진정 조계(혜능)·황매(홍인)의 가법을 체득하였다. 진종의 적사와 염화의 밀전을 통투한 때문에, 세상을 제도하고 어려움을 구제한 것도 그 일단에서 나왔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며칠 오묘한 진리를 담론하는 사이에 일찍이 듣지 못했던 것을 많이 들었다. 이후부터는 스님이 도성에 오면 문득 서로 오가면서, 서로 늦게 알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었다.
1610년 9월에 스님이 입적하였단 말을 듣고, 글을 지어 조상하고 또 시로써 영결하였다. 나는 그의 풍모가 영영 멀어졌음을 섭섭해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스님이 둘째 형을 애도하던 마음이 오늘날 내가 스님을 애도하는 생각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정이 대체 무엇이기에 사람을 그처럼 속박시켰단 말인가.
이번에 그 문도 혜구가 스님의 문집을 가지고 와서 청하기를 "우리 스승이 지은 수천 수의 시는 일찍이 공의 둘째 형에게 보관되어 있다가 병화에 유실되었고, 이는 근자에 와서 주워 모은 것으로, 태산에 비해 털끝만한 격차입니다. 우리가 스승의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기에 이 시 몇 권을 편성, 간행에 붙여 우리 스승의 문의 고하와 도의 깊이를 알리려 하는데,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 하여 헛추앙을 하지 않을 이는 공밖에 없으니, 부디 한 말씀을 주어 영원히 전하도록 한다면, 이는 공의 은혜입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아, 내가 어찌 차마 스님의 글에 서를 쓰겠는가. 스님의 시가 이미 문단에 널리 추앙되었고, 스님의 공적이 이미 국토 수복에 있었으며, 스님의 도가 이미 여래의 경지에 들었으니, 어찌 나의 모사가 있어야만 그 추중이 더 증가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의 형제는 진정 스님과 인연이 있었던 터라 어찌 글재주가 없다 하여 사양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그 시종을 서술하여 그의 청에 응하는 한편, 감념하는 회포를 붙인다.
만력 임자년(1612년, 광해군4) 정월에 교산 허단보는 서한다.
성소부부고 제20권
10. 14:38
성소부부고 제20권 · 문부 17 · 척독 상(尺牘上)
출처: 성소부부고 제20권, 문부 17, 척독 상
배경: 제20권은 문부 열일곱 번째 갈래인 "척독(尺牘)" 가운데 첫 부분(상)이다. 척독은 짧은 편지, 곧 사사로운 안부와 부탁을 담은 개인적인 서신이다. 이 권에는 정승과 판서 등 당대 고관들, 그리고 벗과 문우들에게 보낸 여든두 통의 짧은 편지가 실려 있다. 벼슬을 청탁하거나 인사를 부탁하는 사연, 죽은 누님(허난설헌)과 둘째 형(허봉)의 문집 간행을 부탁하는 사연, 서적과 골동품을 주고받는 이야기, 벗과 나눈 문학 비평과 농담 섞인 안부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앞선 산문들보다 훨씬 짧고 격의 없어, 허균의 인간적인 면모와 당대 관료 사회의 풍경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서애 유성룡 정승께 올린 편지
1604년 8월 (서기 1604년 9월 8일, 양력 추정)
1591년에 세상을 떠난 누님의 시집에 서문을 지어 주셨는데, 제가 그것을 외워 두지 못한 채 전란을 만나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이 불민한 죄를 어찌 면하겠습니까.
요즘 어떤 사람이 그 서문이라며 보여 주기에 읽어 보니 마치 다른 시대의 일처럼 낯설어 진본인지 가려낼 수가 없었습니다. 삼가 이를 기록하여 집사께 바치오니, 노사께서 잘못된 곳을 바로잡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이는 문집 첫머리에 실어 간행하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남쪽을 바라보니 아득히 멀어 마음속 말을 다 하지 못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도를 위해 몸을 잘 보중하소서.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1605년 2월 (서기 1605년 4월 2일, 양력 추정)
형님의 시문은 대부분 흩어져 없어졌습니다. 겨우 몇 편을 모아 간행하고자 이제 깨끗이 베낀 책을 바치오니, 한번 읽어 보시고 서문을 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형님을 가장 깊이 아시는 분으로는 노사만 한 분이 없습니다. 세상에 그분의 글에 서문을 지을 사람으로 노사가 아니고서야 누가 있겠습니까. 천 리 먼 곳에서 간절히 부탁드리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서문을 지어 영광되게 해 주시면 어떨는지요. 돌아가신 형님이 이를 아신다면 마땅히 지하에서 감격하여 우실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헤아려 주소서.
1606년 1월 (서기 1606년 2월 21일, 양력 추정)
삼가 손수 써 주신 편지를 받으니 황홀하기가 마치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는 것과 같아 무척 기쁘고 위로가 됩니다. 돌아가신 형님의 시집 서문을 지어 주시겠다고 승낙하신 지 벌써 해가 넘었는데도 아직 지어 주지 않으시니, 바라는 마음이 갑절로 간절합니다.
김흥세(자 근언)의 맏형은 완력과 용기가 있고 지략까지 갖추어 임용할 만한 인재인데, 더구나 노사께서 이미 추천하셨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가 지금 청송 고을살이를 얻으려는 것은 대감을 뵙기 위해서입니다만, 하늘이 사람의 바람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습니다.
심부름꾼이 급히 돌아가는 바람에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살펴 주소서.
(용어) 유성룡(호 서애)은 선조 때의 정승이다. 작고한 누님은 허균의 누이인 여류 시인 허난설헌으로, 본명은 초희다.
한음 이덕형 정승께 올린 편지
1605년 3월 (서기 1605년 5월 2일, 양력 추정)
형님께서는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형님의 시문 또한 전란 통에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그 시문 몇 수를 겨우 모아 두 권으로 엮었습니다. 이제 제가 맡은 고을에 가서 봉급의 절반을 떼어 이를 간행하려 하는데, 이는 형님이 남긴 시문 전체에 비하면 정말 태산의 터럭 한 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한 부를 바치오니, 귀찮으시더라도 읽어 보시고 몇 마디 말씀으로 그 끝에 발문을 달아 주신다면, 돌아가신 형님도 큰 은혜를 입는 셈이 될 것입니다. 절하고 삼가 아룁니다.
1608년 3월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대감 곁을 떠나온 지 몇 달 사이에 나라에 여러 일이 많았습니다. 승하하신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이 소신도 이렇게 간절한데, 하물며 합하께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암자의 승려가 대감의 뜻을 전해 오기에, 종이에 인쇄한 《소학》 같은 책들을 주어 대감께 보내 드렸습니다.
작별하던 날 나중에 전별시를 지어 주시기로 약속하셨기에 훌륭한 시를 지어 주시기를 날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국상 중이라 감히 거듭 부탁드리지 못합니다. 황공하여 다 쓰지 못합니다.
(용어) 이덕형(호 한음)은 선조 때의 정승이다.
오성 이항복 정승께 올린 편지
1605년 3월 (서기 1605년 5월 2일, 양력 추정)
전에 《원각경》 토를 단 책을 대감께 올려 읽어 보시도록 했었는데, 제가 잘못 해석한 곳을 대감께서 이미 모두 지적하셨다고 하니, 저에게도 가르쳐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완위편》은 필사하는 사람을 시켜 베낀 뒤 곧 김충신 편에 부쳐 대감께 돌려보냈습니다.
돌아가신 형님의 시집은 이제야 간행하였습니다. 삼가 한 부를 대감께 바치오니 열람하시기 바랍니다.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1610년 5월 (서기 1610년 7월 5일, 양력 추정)
성우길은 저의 집안 조카입니다. 완력과 용기가 있고 지략까지 갖추어 이미 북방을 지키며 공을 세운 바 있습니다. 호남의 우수사 자리가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다니, 바라건대 합하께서 그를 그 자리에 추천해 주셨으면 합니다. 세상에서는 북방의 장수는 남쪽 변경을 지키는 데 맞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리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옛날 양복은 북쪽 사막 지역에서도 여러 차례 공을 세웠고, 바다에서 싸우는 누선 장군이 되어서도 그 정예 병력이 꺾인 적이 없었습니다. 마원(신식후)은 농서와 촉 지방을 평정하는 데도 좋은 계책을 다 썼고, 남쪽 오령 밖에 구리 기둥을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어디에서나 통하는 재주라면 어느 자리를 맡아도 뜻대로 해낼 수 있는 법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오늘날의 누선 장군이요 복파 장군이니, 합하께서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몸이 아파 직접 찾아뵙고 아뢰지 못해 죄송합니다.
(용어) 이항복(호 오성, 오성부원군)은 선조 때의 정승이다. 양복은 한 무제 때의 장수로 외적과 싸워 전공이 많았다. 마원(신식후)은 후한의 명장 복파장군으로, 교지 지방을 정벌하여 평정하고 그 경계에 구리 기둥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일송 심희수 정승께 올린 편지
1605년 2월 (서기 1605년 4월 2일, 양력 추정)
합하께서 정승이 되셨으니 어진 인재들이 뜻을 펼 수 있게 되어 태평한 세상을 기대할 만합니다. 저로서는 개인적으로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경사스럽습니다.
돌아가신 형님의 시문은 흩어져 거의 남지 않은 지경인데, 겨우 제 기억에 남은 몇 편과 남들 사이에 전해 오던 것들을 보태어 두 편으로 엮어 이미 간행하였습니다. 삼가 한 부를 대감께 올리려 합니다. 대감께서도 옛 벗을 그리워하는 감회가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대감께서 헤아려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용어) 심희수(호 일송)는 선조 중기의 정승이다. "산양의 감회"는 진나라 상수가 옛 벗의 고향인 산양을 지나다 피리 소리를 듣고 옛 생각에 잠겼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옛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황지천 황정욱에게 올린 편지
1604년 9월 (서기 1604년 9월 29일, 양력 추정)
요즘 세상에 깃발을 세우고 문단에 우뚝 설 사람이 합하가 아니고서야 누구이겠습니까. 어찌하여 이조의 논의가 공정하지 못하여 학덕 높으신 어른의 벼슬길을 오랫동안 막아 두고, 마땅히 그 아래에 있어야 할 사람이 도리어 높은 자리에 올라 있게 하는지요. 아, 이 또한 운명인가 봅니다.
저에게 보내 주신 훌륭한 편지에서는 칭찬이 너무 지나치고, 인재를 아끼시며 뜻을 펴지 못함을 애석해하시는 마음이 말씀 밖으로까지 간절하여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고을살이 나가는 일이 무척 급박하여 미처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봄에 성묘하러 서울에 가게 되면 마땅히 문하를 찾아뵙고 사례하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1606년 8월 (서기 1606년 9월 16일, 양력 추정)
주지번 태사의 그림에 합하의 시까지 곁들여 얻었으니 더욱 귀중합니다. 저는 갑작스레 두 가지 보물을 얻고 보니 이번 행차가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어찌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지 않겠습니까.
가을이 서늘해지는데 잘 보중하시기를 우러러 빕니다.
1607년 3월 (서기 1607년 4월 20일, 양력 추정)
멀리 영남 밖으로 고을살이를 나가게 되어 찾아뵙고 떠나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심생이 전별시를 가지고 왔더군요. 수십 번을 읽어 보니 막힘없고 호탕하여 차마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성품이 졸렬하고 게을러서 외지로 벼슬살이 나가면서도 여러 어르신들께 시를 지어 달라 청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귀한 시를 얻고 나서는 곧바로 이 시의 운을 따라 문장으로 자부하는 여러분에게 두루 시를 지어 달라 청했더니, 다들 과연 화답해 주시어 곧 커다란 시집이 되었습니다. 이는 군자의 말씀을 귀히 여긴 것이요, 저를 훌륭하게 꾸며 준 일이니, 감격스러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용어) 황정욱(호 지천)은 선조 때 예조 판서를 지내고 장계부원군에 봉해졌다. 주지번(주 태사)은 명나라 사람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인물이다.
윤월정 윤근수에게 올린 편지
1606년 8월 (서기 1606년 9월 16일, 양력 추정)
합하께서는 중국의 옛일에 무척 밝으시어 중국 사람 중에서도 어깨를 겨룰 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것을 저 같은 사람에게 물으시니, 이는 귀머거리에게 소리를 들어 달라 부탁하는 격입니다.
김주의 일은 전에 낭중 가유약에게서 《이문광독》이라는 책 속에 실린 고중현이 쓴 《병탑유언》 한 권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나라와 관련된 일이 세 조항 실려 있었는데, 하나는 종계에 관한 일이었고, 하나는 기순(기 천사)과 서거정이 주고받은 시에 얽힌 이야기였으며, 또 하나가 바로 김주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오래된 일이라 정확한 문구는 잊었지만, 삼가 그 대략을 기억하여 별지에 적어 올리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1607년 8월 (서기 1607년 10월 5일, 양력 추정)
왕경 상서의 일화 네 조목은 바로 하양준이 지은 《사우총설》에 실려 있습니다. 지금 이를 기록하여 바치니 읽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유청일찰》이라는 책은 전예형이 지은 것인데, 저는 전에 가 낭중에게서 빌려 한 번 읽고 돌려주었으니 지금은 가진 것이 없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장씨와 육씨는 장주와 육온을 가리키는 것이지, 강릉 장거정과 오대 육광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608년 5월 (서기 1608년 6월 26일, 양력 추정)
서울에 갔다가 장모상을 당하여 허둥지둥하느라 겨를이 없어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합하께서 먼저 저희 형님들의 집까지 찾아 주셨다는데, 저는 향을 올리러 가느라 미처 돌아오지 못해 맞이하지도 못했으니, 게으른 죄를 면하기 어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누님의 시집 한 질을 바치오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지번과 양유년, 두 분의 서문 중에 어느 쪽이 더 낫습니까? 양유년이 직금시를 인용한 것이 이치에 딱 맞아떨어지는 듯한데, 대감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용어) 윤근수(호 월정)는 선조 때 양관 대제학과 우찬성 등을 지냈다. 김주는 조선 문신으로 1563년 종계변무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그곳 객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오봉 이호민에게 올린 편지
1604년 9월 (서기 1604년 9월 29일, 양력 추정)
훌륭한 시를 받고 보니 마치 좋은 보옥을 얻은 것만 같습니다. 이번 행차는 정말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마땅히 아름다운 옥에 새겨 길이 전하겠습니다.
1606년 3월 (서기 1606년 4월 21일, 양력 추정)
윤청의 시권은 전부터 갖고 있었는데, 펴 보니 마치 벗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이것을 슬쩍 빼내어 어르신께 보내 드리고 싶었으나, 주인이 이를 지키는 태도가 마치 옛날 인상여가 구슬을 품에 안고 머리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내주지 않으려 기둥을 노려보고 서 있던 것과 같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용어) 이호민(호 오봉)은 선조 때 문신으로 좌찬성 등을 지냈다. 인상여는 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신으로, 진나라 소왕이 화씨벽 구슬을 속임수로 빼앗으려 하자 구슬을 품고 기둥에 기대어 목숨을 걸고 지켜 낸 고사로 유명하다.
유서경 유근에게 올린 편지
1605년 3월 (서기 1605년 5월 2일, 양력 추정)
공께서는 저희 형님 미숙(허봉)과 홍태고(홍적)와 더불어 문단의 중심 역할을 하셨는데, 저희 형님과 홍태고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공만이 남아 문형을 쥐고 예원의 우두머리로 군림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누구도 감히 그 글솜씨를 대적할 자가 없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듣자니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를 가려 뽑고 계신다 하기에, 돌아가신 저희 형님의 시도 그 안에 많이 실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감히 간행본 한 질을 올리오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1605년 9월 (서기 1605년 10월 26일, 양력 추정)
남창 김현성을 만났더니, 돌아가신 형님의 시는 시선에 들어간 것이 매우 적고 누님의 것은 다소 많더라고 하더군요. 옛날 용재 이행이 우리나라 글을 가려 뽑을 때 탁영 김일손의 문장과 읍취 박은의 시를 매우 많이 넣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문단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니, 혹 다른 사람들의 이견에 밀려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까? 돌아가신 형님의 칠언 가행은 가장 절묘한데 단 한 편도 들어가지 않았다니, 이 점이 더욱 이해되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다시 잘 헤아려 가려 뽑으시어, 넓은 바다에 빠뜨린 구슬처럼 묻히는 일이 없게 해 주십시오.
(용어) 유근(호 서경)은 선조 때 대제학과 좌찬성 등을 지냈다.
이월사 이정귀에게 보낸 편지
1610년 9월 (서기 1610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듣자니 공조에 자리가 하나 비었다는데, 그곳은 본디 한가하여 여유롭게 지낼 만한 자리입니다. 옛 시인 중에 공조 벼슬을 지낸 이로는 하손, 두보, 장적, 소식 등이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야 이 네 분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한 시대에 요행히 시로 이름을 얻어 공께서도 일찍이 칭찬하고 격려해 주신 바 있습니다. 지금 마침 공께서 인사를 맡고 계시니 이 일을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에게 이 자리를 맡겨 주셔서, 저 네 분이 저승에서나마 손뼉을 치도록 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19일, 양력 추정)
감옥에서 살아 나오자마자 유배 명령이 촉박하여 미처 찾아뵙고 인사드릴 겨를도 없었습니다. 어느 한이 이만하겠습니까. 편지와 귀한 약제까지 길 떠나는 사람을 위해 보내 주시니, 그 두터운 정을 이루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신문을 받던 날 진술 중에 여러 차례 공의 이름을 끌어들였는데, 그것은 상황이 몹시 위태롭고 급박한 나머지 그리된 것이지 감히 공을 모함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말썽이 적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제가 어찌 남을 모함하는 사람이겠으며, 또 어찌 남의 사주를 받는 사람이겠습니까. 이는 온 세상이 저를 너무 하찮게 여긴 탓이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공께서는 같은 죄를 지은 사람이 아직도 높은 벼슬을 그대로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는데, 그 말씀은 너무 지나칩니다. 제 조카는 시험에 합격했고 공의 장인은 합격하지 못했으니, 그 죄가 서로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밝혀질 일이니 감히 여러 말 하지 않겠습니다.
(용어) 이정귀(호 월사)는 선조 때 대제학을 지내고 인조 때 좌의정에 이른 문장가다.
신현옹 신흠에게 보낸 편지
1608년 3월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춘영」 백 편은 정직한 선비들이라면 입에 올리지 않을 내용이라 남에게 보여 드리기에 적합하지 않은데, 감히 보여 드리겠습니까. 이 졸렬한 사람이 입을 함부로 놀렸으니, 곧장 혓바닥을 뽑히는 지옥에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어 감히 보시라고 바치니, 보시면 반드시 더럽게 여기시며 상서롭지 못하다 하실 것입니다.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1608년 3월 (다른 편지)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훌륭한 서문을 지어 주셨는데, 칭찬이 너무 지나쳐서 제가 감당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 일이라 하여 감히 합하의 밝은 감식안을 가릴 수 없기에 그대로 서문으로 실었더니 명성이 훨씬 높아졌습니다. 저를 알아주신 은혜는 저를 낳아 주신 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죽어서도 그 은혜를 갚기로 기약하겠습니다.
1610년 10월 (서기 1610년 12월 4일, 양력 추정)
나주는 서남쪽 지역의 큰 고을입니다. 제가 전에 직접 그곳을 가 보고서, 벼슬이 이 고을 목사에 이르면 그것으로 그만두어도 좋겠다고 여겼습니다. 지금 마침 그 자리가 비었고 월사께서 이조를 맡고 계시니, 이는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합하께서 저를 그곳에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기회에 남쪽으로 아예 돌아가 버릴 계획입니다. 감히 진심을 말씀드립니다.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19일, 양력 추정)
감옥에서 여러 차례 보내 주신 소식을 받았습니다. 옛날 사마천이 궁형을 받던 날, 강도상을 지낸 동중서나 예 대부 같은 이들도 찾아와 안부를 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대야 천 년의 차이가 있지만, 옥에 갇힌 처지에서 이런 벗이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게다가 도교의 책까지 보내 주셔서 제가 그것을 읽으며 하늘로 오르는 상상이라도 하게 해 주셨으니, 지극한 정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리하셨겠습니까.
옛날 영웅들은 장수나 정승이 되지 못하면 신선이라도 되었는데, 저야 장수나 정승이 되기는 이미 틀렸으니, 마땅히 연문자·안기생 같은 옛 신선들과 더불어 노니는 것도 충분히 즐길 만한 일일 것입니다.
강남 천 리 길을 미처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떠나왔기에, 종이를 대하니 목이 메어 다 쓰지 못합니다.
(용어) 신흠(호 현옹)은 인조 때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이른 문장가다. "혓바닥을 뽑히는 지옥"은 불교에서 함부로 말을 지껄인 사람이 가게 된다는 지옥의 이름이다. 연문자와 안기생은 옛 전설 속의 신선들이다.
한유천 한준겸에게 보낸 편지
1601년 8월 (서기 1601년 9월 11일, 양력 추정)
해양의 모임에 어찌 감히 즐거이 달려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다만 부사가 계셔서 제가 함부로 참견할 처지가 아니니, 공께서 알아서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이번 제 행차를 두고 기이한 만남이라며 비웃는데, 이는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굳이 피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장부로 태어나 젊은 시절은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가는데, 한 차례의 즐거움이 충분히 만종의 녹봉만 한 가치가 있습니다. 참으로 그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면 욕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들 어찌 제 털구멍 하나라도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의리에 크게 해로운 일도 아닌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공께서 식사하시다가 이 편지를 보신다면 틀림없이 웃음이 터져 밥상 가득 입 속의 밥을 뿜고 마실 것입니다.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1601년 8월 (다른 편지) (서기 1601년 9월 11일, 양력 추정)
공께서는 용성으로 가시어 큰 고을의 음식을 드신다는데, 그 맛이 해양의 작은 고을 음식에 견주어 어떻습니까?
저는 공을 배웅하고 성을 나와 봉생정 위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한 줄기 연기가 대숲을 덮고 차가운 바람이 휘장에 불어왔습니다. 고개를 들어 동쪽을 바라보니 푸른 큰 들판 저 멀리 공의 깃발과 수레 일산이 이미 보이지 않았습니다.
타향에서 벗을 이별하는 것은 옛사람들도 모두 탄식했던 일인데, 뜻밖에 오늘 그 일을 직접 겪었습니다. 생각건대 아마 공께서도 저와 같은 심정이실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식사를 많이 하셔서 몸을 잘 보중하소서. 이만 갖추지 않습니다.
1601년 9월 (서기 1601년 10월 10일, 양력 추정)
조운을 맡은 병졸과 일반 군졸 문제는 형님께서 이미 저와 함께 타당하게 조정하여 공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나랏일인데 어찌 감히 고집을 부리겠습니까. 외적이 오지 않는다면 편안히 밥을 먹겠지만, 만약 급박한 일이 생긴다면 그 많은 곡식을 어떻게 바닷길로 운반하여 서울을 구제하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공께 다시 여쭐 필요는 없겠습니다. 다만 수군을 통솔하는 사람이 일을 제대로 모를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곁에서 어떤 사람이 공께서 식사를 잘 하시는지 묻고 있으니, 이 정성을 알아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용어) 한준겸(호 유천)은 선조·광해군 때 호조 판서와 영돈령부사 등을 지냈다.
이창해 이사홍에게 올린 편지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간이 최립의 아들은 바로 공께서 잘 아시는 사람입니다. 서경에서 숙천 고을 자리를 약속하신 적이 있으셨지요. 합하를 괴롭히기만 하는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일을 간청드려 왔습니다. 방금 조보를 보고서 감히 연락을 드립니다. 합하께서 어찌 남의 마음을 저버리실 분이겠습니까. 감히 대략 말씀드립니다.
1609년 9월 (다른 편지)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저의 육촌형 되는 체씨는 그 굳센 절개가 관리들에게 알려져 있고 학문과 행실이 선비들에게 존경받고 있는데도, 아직까지 벼슬에 오르지 못한 채 서울에서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어진 사람이나 군자들이 마음을 써야 할 곳입니다. 합하께서 그에게 한 말의 물이라도 부어 주시어, 수레바퀴 자국의 마른 물웅덩이에서 죽어 가는 붕어를 살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609년 10월 (서기 1609년 11월 11일, 양력 추정)
여러 저잣거리의 물가가 치솟는 데 대한 대책은 법령의 첫째 조항에 실려 있습니다. 만약 법령대로 시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횡포를 어떻게 징계하겠습니까. 애초에 이 일은 본조가 책임질 일입니다.
이번 초하루에는 공을 위해서 아전들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몹시 질 나쁜 물건을 가지고 높은 값을 받는 자들은 합하께서 다스리셔도 무방하겠습니다.
(용어) 이사홍(호 창해)은 선조 때의 유생이다.
황사숙 황신에게 보낸 편지
1609년 1월 (서기 1609년 2월 19일, 양력 추정)
듣자니 공께서 중국에서 《이담》이라는 책을 구해 오셨다는데, 그중 한 조목에 저희 누님에 관한 일이 실려 있다고 하니 참으로 그러합니까?
얼마 전 행주 정승(기자헌) 댁에서 그 책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런 내용은 없었습니다. 혹 나중에 다시 엮으며 덧붙인 것은 아닙니까?
이 일 때문에 다시 문하에 찾아가는 것도 마땅치 않으니, 그 책을 빌려주시기 바랍니다. 다 쓰지 못합니다.
(용어) 황신(자 사숙)은 광해군 때 호조 판서를 지낸 문장가다.
최분음 최천건에게 보낸 편지
1605년 11월 (서기 1605년 12월 24일, 양력 추정)
옛 도읍에서의 하룻밤 대화로는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회포를 풀기에 부족했습니다.
월성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리운 마음이 차가운 구름과 함께 모두 아득해졌습니다. 성 위의 낮은 담장 너머로 만월대를 바라보니 안개 낀 나무들만 푸르러, "지는 해"니 "비껴 내리는 비"니 하는 시구를 읊을 수가 없어 스스로 재주가 다한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느지막이 임진강에 이르니 커다란 얼음이 강을 막고 차가운 눈이 온 산에 가득하여, 문득 눈 구경의 흥취가 일었습니다. 생각건대 옥황상제가 계신다는 하늘 위 높은 누각은 그 추위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혹 공께서는 저를 위해 부 한 편을 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1606년 11월 (서기 1606년 12월 14일, 양력 추정)
예나 지금이나 비방을 받는 일은 성현이라도 피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형수와 정을 통했다는 누명이나 장인을 매질했다는 소문이 옛 진평이나 제오륜에게 무슨 해가 되었겠습니까. 공께서는 스스로 삭이시고, 남의 헐뜯음을 귀신 같은 사람과 견주거나 소나 말과 힘을 겨루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난초와 창초 같은 향초는 불에 태우고 삶아도 저절로 향기를 내는 법이니, 구중궁궐에 계신 임금께서도 이미 환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일이 곧 밝혀질 것이니, 억지로라도 직무에 나아가시어 성상의 기대에 부응해 주시기를 애타게 바랍니다.
1607년 6월 (서기 1607년 7월 8일, 양력 추정)
사흘 동안 내린 비도 더위를 식히지 못했습니다. 북쪽 창가에 다리를 뻗고 도연명의 시 몇 편을 읊으니,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와 문득 하늘 위 신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공께서는 이 찌는 더위 속에서 부채로나마 땀을 식히실 수 있는지요. 아마 마음과 힘을 많이 허비하고 계실 것 같은데, 이런 때는 오히려 못난 사람이 더 편한 법입니다.
한낮에 갑자기 보내 주신 편지를 받고 보니, 시원한 바람이 상쾌하게 답답한 제 가슴을 씻어 주는 듯했습니다. 성균관 사성 자리에 저를 추천하신 것은 불교를 좋아했다는 비난을 씻어 주시려는 뜻이었습니까? 저는 지금 이대로가 좋으니 무슨 수고인들 꺼리겠습니까. 다 닳은 붓도 천금 주고 산 것처럼 이대로 만족하며 스스로 즐기렵니다. 서울에 가서 귀인들과 가까이 지내는 일은 내키지 않습니다. 공께서 들으시면 틀림없이 이 미친 종놈의 옛 버릇이 또 도졌다 하실 것입니다.
지금 막 서첩을 들고 《갈고보》를 읽다가 다 마치지 못한 채 대강 써서 올립니다.
1607년 8월 (서기 1607년 10월 5일, 양력 추정)
지난번에 올린 열 편의 율시는 운자에 얽매여 좋은 흥취를 손상시켰으니 남겨 둘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술 항아리 덮개로나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수령의 인끈을 매고 대방주(남원)를 육 년쯤 다스리다가 지리산의 신선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공의 이조 판서 자리를 준다 해도 저는 바꾸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되도록 도모해 주시기 바랍니다.
1607년 9월 (서기 1607년 11월 4일, 양력 추정)
약초 임수정이 백옥루에 글을 지으러 저세상으로 떠났으니, 천고에 남을 한이 많습니다. 공께서도 이런 아픔을 느끼시는지요. 만시 한 편에 제 나름대로는 그의 일생을 다 담았다고 여깁니다. 이 시에 화답하여 죽은 이를 위로해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별지에 적어 둔 것은 부디 제 뜻에 곡진히 부응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1607년 9월 (다른 편지) (서기 1607년 11월 4일, 양력 추정)
저의 벼슬살이하는 심정은 마치 엷은 가을 구름 같아서, 가을바람이 한 차례 불어오자 옛날 장한이 고향의 농어회와 순챗국을 그리워하던 그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고을 하나를 얻어 입에 풀칠이라도 한다면 만호후에 봉해진 것과 다름없겠는데, 공께서는 어찌하여 그것을 아끼십니까? 공께서 인재를 아끼는 그 한마음이야 하늘에 물어도 부끄럽지 않겠지만, 때를 알지 못하니 그 사랑이 오히려 지혜를 어둡게 한 것이 아닙니까?
공명은 손에 들어오지 않은 채 젊은 시절의 뜻은 이미 시들었습니다. 마치 힘없는 망아지가 우리 안에서 서성이는 격이니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곤궁함과 영달은 분수에 이미 정해져 있어 하늘도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대장부의 일이란 관 뚜껑을 덮고 나서야 끝나는 법인데, 제 혀는 아직 건재하지 않습니까. 용을 고삐와 쇠사슬로 얽어매려 하지 마십시오. 용의 성질이란 본디 길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은주는 저희 선친께서 고을살이하셨던 곳인데, 제가 어찌 감히 기꺼이 부임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저는 선친의 일을 그대로 따를 수 없으니, 혹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다면 이는 선친의 가르침을 크게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가림(지금의 부여)은 바닷가에 있어 외지긴 하지만 생선과 게가 풍부하니 그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듣자니 공주와 같은 시기에 임명하신다는데, 그곳은 번잡한 데다 게도 없고 게다가 고을을 감독하는 관청까지 있으니, 제 이름은 그쪽에는 올리지 말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지역이 서로 가까워 혹 가림을 다투는 다른 사람에게 밀려날까 염려되어 번거롭게 말씀드립니다.
1607년 2월 (서기 1608년 1월 26일, 양력 추정)
가림은 얻지 못하고 도리어 공주를 맡게 되었으니, 이 역시 운명인데 어찌 공을 탓하겠습니까. 제가 벼슬을 하는 것은 가난 때문이니, 처자식을 지켜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게 하면 그것으로 족하지 달리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함부로 놀기만 하고 일을 게을리하여 공께서 천거해 주신 뜻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헌부의 서경이 끝나면 마땅히 찾아뵙고 사례하겠습니다.
적막한 겨울밤, 눈 녹인 물을 부어 새로 만든 차를 끓이는데, 불은 활활 타오르고 물맛은 좋으니 이 차 맛은 제호와 다를 바 없습니다. 공께서 어찌 이런 맛을 아시겠습니까.
1608년 1월 (서기 1608년 3월 1일, 양력 추정)
처음 부임할 때 간관 하나가 제가 그 자리에 걸맞지 않다며 심하게 헐뜯고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려다가 올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을에 부임해서는 새벽부터 많은 송사를 처리하고, 밤이면 등불 삼아 《좌씨전》 한 질을 읽고 있습니다. 이는 제 스스로 옛 한나라 관리의 방식을 따르면서 또한 천고의 성대한 일을 그만두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헐뜯는 자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세상에 쓸모없는 자라 하니, 이 또한 실없는 소리라 하겠습니다. 공께서는 틀림없이 크게 웃으실 것입니다.
(용어) 최천건(호 분음)은 선조 때 이조 판서를 지냈다. 진평(진 유자)은 한 고조의 공신으로 일찍이 형수와 정을 통했다는 모함을 받았다. 제오륜(자 백어)은 후한 광무제의 신하로, 장인을 매질했다는 놀림을 받자 자신은 장가를 세 번 갔지만 그때마다 장인이 안 계셨다고 답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장한(자 계응)은 진나라 사람으로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의 농어회와 순챗국이 그리워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최간이 최립에게 보낸 편지
1607년 3월 (서기 1607년 4월 11일, 양력 추정)
지천 황정욱의 시에 화답해 주신 시는 기걸차면서도 진중했습니다. 또 잘 맞지 않는 몇 글자를 고쳐 달라고 청하셨는데, 저는 마치 페르시아의 화려한 시장에서 진귀한 보석들에 눈이 부셔 어느 것이 더 값진 것인지 가늠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심정입니다.
그대로 둘 다 남겨 두어, 공께서 글을 지으실 때 얼마나 신중을 기하시는지 보여 드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1607년 3월 (다른 편지) (서기 1607년 4월 11일, 양력 추정)
세상에서 글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공의 시를 잘못 낮추어 보는데, 이는 그저 무지한 탓입니다. 공의 문장은 아무리 억세고 기걸하다 해도 역시 반고와 한유(창려)에게서 그 뿌리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 시는 본디 딱히 스승에게서 배운 바 없이 스스로 하나의 격을 창조해 낸 것인데, 그 뜻이 깊고 시어가 탁월하여 성률이나 익히고 꽃과 풀이나 읊는 자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저는 공의 시가 문장보다 더 훌륭하다고 여기는데, 공께서는 그렇게 인정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용어) 최립(호 간이)은 선조 때 문장가로 형조 참판을 지냈다.
정한강 정구에게 보낸 편지
1596년 9월 (서기 1596년 11월 4일, 양력 추정)
읍지를 만들면서 고을의 나이 든 노인들에게 물으니, 아전방·동문창·우계상방 등이 모두 신라 때 김흔 공이 지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아득한 옛사람을 떠올리니 마음이 감개무량합니다.
1596년 9월 (다른 편지) (서기 1596년 11월 4일, 양력 추정)
읍지의 범례를 명나라 전여성이 지은 《서호지》를 본받고자 했는데, 합하께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시다니 어째서입니까? 지리, 관청 건물, 토산물 등에 대해서는 말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읍지의 나머지 부분에는 그 사적을 싣되, 제 나름의 방법을 써서 신중히 하여 허물이 없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1601년 3월 (서기 1601년 4월 17일, 양력 추정)
오랫동안 어르신을 모시지 못하니 뵙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강릉지》에는 마땅히 빼야 할 것과 혹 보충해야 할 것이 있을 터이니, 전씨가 돌아올 때 편에 보내 보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릇 사실을 기록할 때는 핵심만 적되 너무 소략해서는 안 되고, 자세히 적더라도 거짓이 없어야만 후세까지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비루한 속어에서 비롯되었고, 저 또한 역사를 기록하는 재능이 부족한 데다 젊은 날의 경솔한 견해로 만든 것이니, 어찌 남의 안목에 흡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혹 이전 것보다 나은 점도 있을 것이기에 이렇게 세세히 늘어놓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1603년 8월 (서기 1603년 9월 19일, 양력 추정)
옛사람의 말에 "빌려 간 책은 늘 돌려주는 것이 더디다"고 했는데, 그 "더디다"는 말은 한두 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강》을 빌려드린 지가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벼슬할 뜻을 끊고 강릉으로 돌아가 그 책이나 읽으며 소일하려 하기에 감히 말씀드립니다.
(용어) 정구(호 한강)는 선조 때 공조 참판을 지낸 학자다.
김남창 김현성에게 보낸 편지
1605년 12월 (서기 1606년 1월 23일, 양력 추정)
《세가문헌》을 만든 일은 참으로 주제넘고 경솔한 짓이었습니다. 어르신께서 꾸짖지 않으시고 도리어 박식하고 우아하다며 격려해 주시니 부끄러우면서도 감격스럽습니다. 쪽지를 붙여 두신 곳은 하나하나 말씀하신 대로 고쳐서, 충고해 주신 말씀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한번 찾아뵙고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1606년 7월 (서기 1606년 8월 18일, 양력 추정)
돈녕부에 추천하는 일은 저희 형님께서 이미 승낙하셨습니다.
종이 열 첩을 책상 아래 바치니, 저를 위해 《황정경》, 임소경에게 보낸 편지, 「낙신부」, 「무조격」, 「추흥시」 여덟 수, 「양양가」, 「풍락정기」, 「전적벽부」, 「후적벽부」를 베껴 주신다면 마치 귀중한 구슬이 손안에 들어와 밤낮으로 빛나며 반짝이는 듯할 것입니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1606년 10월 (서기 1606년 11월 14일, 양력 추정)
저희 형님께서는 공을 여주 목사에 제수하는 것이 돈녕부에 제수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슨 힘을 썼겠습니까.
열 첩의 글씨는 정밀하고 단정하여 절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삼가 절하고 받았습니다. 다만 옛날 왕희지에게 글씨 값으로 바칠 흰 거위가 저에게는 없으니 몹시 한스럽습니다.
삼가 상자에 보관하여 대대로 전할 가보로 삼겠습니다.
1608년 8월 (서기 1608년 9월 15일, 양력 추정)
어르신께서 옥관자와 금띠를 두르고 높은 벼슬에 오르신 것은 모두 문필이 뛰어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조정이 인재를 아끼지 않는다고 말하겠습니까. 먼 고을에서 나랏녹이나 축내고 있는 저는 조보를 보고서, 한창 밥을 먹다가 저도 모르게 수저를 놓고 일어나 감히 이렇게 축하드립니다.
(용어) 김현성(호 남창)은 시·서·화에 두루 뛰어났고 벼슬은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왕희지(왕 우군)는 진나라의 명필로, 거위를 좋아하여 산음의 한 도사에게 《도덕경》을 써 주고 그 대가로 흰 거위를 받았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심학이 심열에게 보낸 편지
1608년 3월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황강의 꿈에서 이미 은화대를 얻는 조짐을 보았는데, 그 은화대는 어찌하여 아직 제 손에 들어오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길에서 마땅히 형수님을 만났어야 했는데, 아랫사람들이 저를 이끌어 홍경비를 피하라고 하는 바람에 결국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무척 안타깝습니다.
고을에 도착해서는 애써 일하여 겨우 열 달 치 봉급을 떼어 연나라산 소뿔을 사서 무기고를 채웠습니다. 그런 공로는 정말 형수님 덕분이지 제가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삼가 면첩을 봉하여 올립니다. 형께서 보시면 필시 "성인만이 성인을 안다"고 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우습습니다.
(용어) 심열(자 학이)은 인조 때 영의정에 이른 문신으로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연우각은 춘추시대 연나라에서 나던 소뿔로, 활을 만드는 데 가장 좋은 재료였다고 하며, 여기서는 좋은 무기를 가리키는 듯하다.
정화백 정협에게 보낸 편지
1610년 10월 (서기 1610년 12월 9일, 양력 추정)
모든 재앙은 언제나 소홀히 여기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번 일은 저 역시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바이니, 공인들 어찌 예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평생 너무 많은 비방을 받아 왔으니 한 차례 관직에서 쫓겨난 것이야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한스러운 것은 큰 고을을 잃은 일입니다.
그자가 전에 활을 당겨 자안(남이공)까지 쏘았다니, 하물며 사촌 동서 사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허물할 필요도, 탄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스스로 이해하고 넘어갈 뿐입니다.
(용어) 정협(자 화백)은 광해군 때 예조 참판을 지냈다.
이지봉 이수광에게 보낸 편지
1609년 12월 (서기 1610년 1월 9일, 양력 추정)
홍양시권은 몇 차례나 읽었는데 차마 손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소리와 운율이 잘 어울리는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책머리에 한마디 적고 싶었으나 훌륭한 책을 더럽히게 될까 염려되어 그만두었습니다. 더구나 차씨의 발문에서 이미 할 말을 다 해 놓았기에, 제가 하고 싶었던 말도 저절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삼가 원본 그대로 돌려보냅니다.
1610년 4월 (서기 1610년 6월 17일, 양력 추정)
제 병은 박지지 군이 말하기를, 몸속의 음기가 허해져 화기가 동해서 생긴 것 같다고 합니다. 몸이 있고 나서야 벼슬도 있는 법입니다. 이번에 사신 행차에 오르지 못한 벌이라야 고작 평민이 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제 다시 상소를 올렸으니 제대로 전달되도록 막지 말아 주십시오. 서강의 물을 터서 수레바퀴 자국에서 허덕이는 붕어를 살려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용어) 이수광(호 지봉)은 여러 관직을 거쳐 인조 때 이조 판서에 이른 학자다.
김여수 김상준에게 답한 편지
1610년 12월 (서기 1611년 1월 22일, 양력 추정)
제가 아주 부득이한 일이 아니고서야 어찌 부모님이 남겨 주신 이 귀중한 몸으로 모진 고문의 욕을 당하겠습니까. 이번 일은 제 스스로 결단한 것이지 남이 시켜서 한 일이 아닙니다.
형께서는 저를 자세히는 모르셨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형께서 저를 무척 아껴 주셨기에 있는 일이니, 비록 제 속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하셨더라도 저를 아껴 주신 은혜는 분명 있는 것입니다. 어찌 감히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말이 막혀 다 갖추지 못합니다.
(용어) 김상준(자 여수)은 광해군 때 형조 참판을 지냈다.
홍녹문 홍경신에게 보낸 편지
1607년 12월 (서기 1608년 1월 26일, 양력 추정)
옥과 현감의 관은 어느 날 마읍을 떠난다고 합니까? 만약 제가 임지로 내려가는 날까지 그 행렬이 이곳에 있다면 길모퉁이에서라도 제사를 올릴 수 있겠습니다. 기억하건대 예전 절에서 함께 노닐 때 그 형님이 지은 시에 "물이 어우러지니 산비가 잦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그 말이 이치에 참으로 딱 들어맞았습니다. 재주가 있으면서도 그 재주를 펼치지 못했으니 참으로 원통한 일입니다.
1608년 1월 (서기 1608년 3월 1일, 양력 추정)
그 형님의 관이 지나가던 날이 하필 제가 관아에 나가야 하는 날이라, 그저 아전 한 사람을 보내 상여꾼들을 감독하여 이 고을 경내를 지나가게 했을 뿐입니다. 살아 계실 때의 정분을 돌아가신 뒤에 저버린 것만 같아 부끄러워 눈물만 흘렸습니다. 만시에 이런 마음을 자세히 담았으니 그 형님도 응당 보실 것입니다. 이만 다 갖추지 못합니다.
(용어) 홍경신(호 녹문)은 선조 때 부제학과 병조 참의를 지냈다.
윤지중 윤의립에게 보낸 편지
1606년 8월 (서기 1606년 9월 16일, 양력 추정)
듣자니 형께서는 양유년(양 황문)을 몹시 허물하신다는데, 이는 섭씨 성을 가진 자가 명령을 거짓으로 꾸며 낸 일입니다. 주지번은 요구하는 것이 좀 있었던 듯하지만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고, 양유년 쪽은 아예 아무런 요구도 없었습니다.
그 두 분 모두 저를 잘 대우해 주셨던 분들인데, 제가 무엇 때문에 우열을 가려 양유년만 편들겠습니까. 다만 그가 억울하게 비난받는 것으로 여겨져 부득불 변명해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용어) 윤의립(자 지중)은 인조 때 예조 판서를 지냈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양유년(양 황문)은 1606년 주지번과 함께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 관리다.
남자안 남이공에게 보낸 편지
1610년 1월 (서기 1610년 2월 8일, 양력 추정)
형은 지금 어머님을 모시고 계시니 섣달에 내리는 약제도 다른 벗들보다 넉넉히 받으실 것입니다. 돌아가신 저희 어머님은 원주에 묻혀 계신데, 제사도 제가 직접 받들지 못하고 나무꾼이나 목동들이 묘소를 범하지 못하도록 막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어버이에 대한 슬픔이 늘 가슴에 맺혀 있는데, 언제쯤이나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성묘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식 된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는 대목입니다. 이만 다 갖추지 못합니다.
(용어) 남이공(자 자안)은 인조 때 공조 판서를 지냈다.
이중집에게 답한 편지
1609년 1월 (서기 1609년 2월 19일, 양력 추정)
이별한 지 십 년 만에 어제 처음으로 편지 한 장을 받으니 위로되고 다행스럽습니다. 제가 이 사신 행차에 끼인 것이 지금 벌써 세 번째인데, 형께서는 아직 한 번도 행차에 오르지 못하셨다니, 세상일이란 대체로 이런 것인가 봅니다.
용천과는 저 역시 대대로 이어 온 교분이 있으니, 어찌 감히 특별히 대우하지 않겠습니까.
한번 문하를 찾아뵙고 옛정과 이별의 회포를 풀고자 하니, 문지기가 저를 막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윤차야 윤훤에게 보낸 편지
1609년 10월 (서기 1609년 11월 11일, 양력 추정)
『시산』은 이미 익히 읽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권생 편에 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옥잠이 자주 꿈에 보이니 이상한 일입니다. 두 가지 모두 온전히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1610년 1월 (서기 1610년 2월 8일, 양력 추정)
《두시》는 기대했으나 손에 들어오지 않고 《초사》만 뜻밖에 도착했습니다. 하늘이 참으로 뜻있는 일을 방해하는군요. 이제부터는 감히 함부로 요행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용어) 윤훤(자 차야)은 인조 때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홍휘세 홍서봉에게 보낸 편지
1610년 4월 (서기 1610년 6월 6일, 양력 추정)
동쪽 교외에서 손을 맞잡고 이별할 때 저에게 노자를 아주 넉넉히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아 이상히 여기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금강산 만 이천 봉이 형을 만나 한층 빛을 발했을 것입니다. 비단 주머니에 담아 오신 시들을 아픈 눈을 씻고서라도 보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610년 7월 (서기 1610년 9월 2일, 양력 추정)
저는 병으로 북경 가는 길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파직되었다가 금세 다시 살길이 열렸으니 이 모두가 임금의 은혜라 그저 감격할 따름입니다.
듣자니 형께서는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가려 하시어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라 하는데, 제가 다시 등용되기를 기다렸다가 그 인끈을 저에게 대신 차게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우습습니다.
(용어) 홍서봉(자 휘세)은 인조 때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제강공자에게 보낸 편지
1601년 3월 (서기 1601년 4월 17일, 양력 추정)
몇 달을 이웃하여 지내다가 갑자기 이별하게 되니 섭섭한 마음을 스스로 가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소랑을 마주하고서는 늘 장흥동에서의 옛일을 이야기하며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팥 섞은 밥에 배추김치를 먹으면 그 맛이 엿처럼 달았는데, 지금 다시 그런 맛을 볼 수 있을까요. 비록 그 맛을 다시 보고 싶어도 저 같은 늙은이가 어찌하겠습니까. 이 처절한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1602년 2월 (서기 1602년 3월 8일, 양력 추정)
족하는 재주가 높은 사람인데도 나라의 법률에 얽매여 포부를 펴지 못하고 그저 하찮은 봉급이나 받는 자리를 맴돌고 계셨습니다. 만약 옛날 유향 같은 사람이 오늘날에 태어났다면, 천록각에서 신령스러운 지팡이 불빛을 마땅히 누구에게 비춰 주었겠습니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슬픕니다.
1609년 8월 (서기 1609년 9월 12일, 양력 추정)
공의 병환이 더욱 위중해지셨다고 들었습니다. 화평한 군자는 신령이 돕는 법이니 마땅히 약을 쓰지 않아도 나아지실 것입니다. 혼자서 애태우고 노심초사하여 정신을 상하게 하지 마십시오.
당류 약제 두 가지를 아드님 편에 보냅니다. 이것을 드시면 곧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장강이라는 자는 사리를 모르고 그저 쓴 약만 먹게 하니 우습습니다.
이관송 이이첨에게 보낸 편지
1608년 8월 (서기 1608년 9월 23일, 양력 추정)
형께서 예전에 가깝게 지내던 정을 생각하시어 온갖 비방 속에서 저를 구해 주셨으니, 재주를 아끼시는 마음이 지극하십니다. 이는 옛사람도 어렵게 여기던 일인데 그것을 실천하셨으니, 이제부터 온 세상의 어진 선비들이 모두 공의 문하로 모여들 것입니다.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4일, 양력 추정)
도성 문을 나가 배웅하며 작별하려 했는데, 어제저녁 갑자기 형조에 제수되었습니다. 여론을 기다리느라 오늘 은혜에 감사드리지 못하여 두터운 정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서쪽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할 뿐입니다. 서른 편의 율시는 석주 권필이 보고서 타당치 못하다고 하기에 다시 고쳐 뒤따라 보내 드리려 합니다. 늦어진다고 허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19일, 양력 추정)
편지가 도착하여 매우 기뻤으나 병 때문에 다시 나가 뵙지 못했습니다. 병이 아니었다 해도 어떻게 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이 마음만 지닌 채 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겠습니다. 남들은 제가 형과 비방을 나누어 지려고 형의 사위를 맞아들였다고 하는데, 형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시면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런 일이야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풀릴 것인데, 온 세상이 의혹스럽게 여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요.
한스러운 것은 저를 배신한 자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 가운데서 나왔다는 것인데, 이 역시 하늘이 시킨 일이겠지요. 제가 어찌 감히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겠습니까. 식사 잘 하시고 몸을 보중하소서.
(용어) 이이첨(호 관송)은 광해군 때의 권신이다.
이자민 이안눌에게 보낸 편지
1610년 3월 (서기 1610년 4월 8일, 양력 추정)
떠나는 일이 하도 급히 재촉당해 강가에서 손을 맞잡고 작별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삼 년을 떨어져 지내는 것도 짧은 기간이 아닌데, 더구나 저는 만 리 먼 길을 떠나야 하지 않습니까.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슬픔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오봉 이호민의 시는 저도 흉내 내 보려 애썼으니, 형도 이 운을 따라 시를 지어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형은 전에 제 시를 다소 약하다고 여기셨으니, 시험 삼아 무거운 가마솥도 들 수 있는 그 힘을 가벼운 손대야 하나 받쳐 드는 일에도 써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10년 3월 (다른 편지) (서기 1610년 4월 8일, 양력 추정)
요동 지방 관리의 요구는 부채 삼백 개면 해결될 수 있다는데, 저는 요직이나 관찰사도 아니니 누가 제 말을 들어 주겠습니까. 형의 고을에는 대나무가 많고 또 죽세공 장인이 있으니, 설령 삼백 개를 다 채우지 못하더라도 그 절반이면 좋겠습니다.
저는 마땅히 공의 어진 덕을 널리 칭송하여 요동 땅까지 빛나게 하겠습니다. 어찌 상자 속에 그대로 묵혀 두겠습니까.
1610년 4월 (서기 1610년 6월 6일, 양력 추정)
이 고을 기생 진랑은 제가 조운을 감독하던 시절에 가깝게 지냈던 여인인데, 지금은 혜민국에서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서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이를테면 저의 사람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그리도 심하게 다그치십니까? 꽃다운 나이도 지나고 자식까지 있어 굳이 찾아갈 흥은 나지 않지만, 그가 힘들어하는 말을 들으면 역시 동정심이 생깁니다. 바라건대 저를 봐서라도 그를 관대히 대해 주십시오. 하찮은 물오리를 잡으려다가 귀한 원앙새를 놀라게 하는 격입니다.
(같은 무렵) (서기 1610년 6월 19일, 양력 추정)
제 병은 참으로 깊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헤아리지 않고 겨우 감옥살이만 면해 주고 오히려 관직은 해면했습니다. 집 안에서 몸을 조섭하며 살아갈 길을 찾으니, 썩은 냄새 나는 세상일 따위야 어찌 마음에 두겠습니까.
부채 백 개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이 떠난 뒤에 도착하여 어쩔 수 없이 그냥 두었습니다. 더구나 부채 윗부분에 형의 시가 적혀 있어 읽어 보니, 맑은 바람이 상쾌하게 일어나 마치 갈증이 풀리는 듯했습니다.
종이는 진랑에게 돌려주었으니 우습습니다. 형은 과연 송광평 같은 철석간장을 지니셨나 봅니다.
(용어) 이안눌(자 자민)은 인조 때 예조 판서에 이른 시인으로, 시와 글씨에 모두 뛰어났다.
한석봉 한호에게 보낸 편지
1604년 10월 (서기 1604년 12월 5일, 양력 추정)
서울 집에서 만났을 때는 아이들 때문에 흥겨운 정취를 마음껏 누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요산(수안)의 수령으로 나가는데, 공께서도 마침 수령 자리를 그만두셨다고 들었습니다. 옛 도읍과 그리 멀지 않으니, 혹 공께서 이 고을 관아에 오신다면 연못가 누각에서 노닐며 인간 세상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명주 비단을 펼쳐 놓고 먹을 두어 말쯤 갈아 두어, 흥이 나는 대로 붓을 휘두르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노닌다면 어찌 왕희지만이 천고에 그 영예를 독차지하겠습니까. 애타게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1604년 3월 (서기 1604년 4월 13일, 양력 추정)
"하늘 바람과 바다 물결"이라는 네 글자 큰 글씨를 잘 받았습니다. 필세가 용이 뛰어오르고 호랑이가 덮치는 듯하여, 마치 동명산과 오대산이 웅장함을 겨루는 것 같았습니다. 옛 소실산의 은자가 이것을 본다면 틀림없이 집 네 채를 팔아서라도 사려 할 것입니다.
저는 그 글씨를 벽에 걸어 두고 사흘 동안이나 그 아래에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도 싫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화씨벽 같은 보배를 주셨으니 어찌 감히 고개 숙여 감사드리지 않겠습니까.
(용어) 한호(호 석봉)는 선조 때의 명필로 가평 군수 등을 지냈다.
송천옹에게 보낸 편지
1611년 2월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젊은 시절 《포박자》를 잘못 읽고서 금석으로 만든 약을 먹으면 신선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훗날 자양·해경·치허 같은 여러 진인들의 글을 읽고 나서는 스스로 실망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무릇 단약이란 서로 같은 성질끼리 합쳐져야 참된 경지에 들 수 있는 것이니, 정·기·신 이 세 가지 보배를 어찌 몸 밖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반드시 밝은 스승과 착한 벗을 만나 서로 경계하고 갈고닦아야만 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저의 스승이자 벗이 되어 줄 사람은 그대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다만 저는 죄를 지은 신하라 그대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바라건대 전해 오는 비결을 편지에 적어 보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11년 2월 (다른 편지)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옥청금사보록》과 《규중지남》, 《중화집》에는 모두 전해 오는 비결이 담겨 있는데, 이 세 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까? 숨기지 마시고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자격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전하는 것도 죄가 된다지만 그 죄는 가벼운 편이고, 아끼기만 하고 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무거운 죄입니다.
옛날 장평숙이 촉 땅으로 귀양 갔던 일은 경계로 삼을 만합니다. 공께서는 입을 다물고 침묵만 지키지 말아 주십시오.
(용어) 《포박자》는 중국 진나라 갈홍이 지은 도교 서적이다.
경홍(한호)을 초대한 편지
1605년 4월 (서기 1605년 6월 1일, 양력 추정)
봄은 이미 지나가, 그윽한 꽃들이 그대를 기다리다가 다 이울고 말았습니다.
녹음이 저리 무성하고 꾀꼬리 소리도 참으로 고우니, 봄빛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어찌 시냇가에 가득 핀 복숭아꽃뿐이겠습니까. 섬돌 곁에서 하늘거리는 붉은 작약도 볼만하니, 보내는 수레를 얼른 타고 와 주시기 바랍니다.
수수로 빚은 술이 한창 익었으니, 그물을 들고 냇가로 나가 그대와 함께 잉어를 잡아 회를 치려 합니다. 죽순 나물과 자라탕도 안주로 마련해 두겠습니다. 저는 평생 먹고 마시는 일만 밝혀 온 사람이라 이렇게 맛난 술과 음식으로 청하니, 먹는 것만 탐한다고 비웃지 마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용어) 경홍은 한호(한석봉)의 자다.
이실지 이춘영에게 보낸 편지
1607년 6월 (서기 1607년 7월 8일, 양력 추정)
족하께서는 온 세상을 만만하게 보시어 족하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저희 세 사람을 칭찬하시니, 부디 저희를 낮추어 보시고 너무 높이 평가하지는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나치게 넘치고, 석주 권필은 힘이 시들었고, 자민 이안눌은 막혀 있다고 하셨는데, 이 세 사람의 흠을 어떻게 해야 고칠 수 있겠습니까? 족하께서는 오늘날 문단의 대가이시니, 반드시 좋은 방법으로 다스려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05년 7월 (서기 1605년 8월 28일, 양력 추정)
이 통제사(이순신)의 공신록권은 족하께서 지으신 것이 참으로 뛰어난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물리쳐 두고 저 같은 사람에게 대신 지으라 하시니, 온종일 손만 아프도록 붓을 놀리면서도 한마디 말도 이루지 못하여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본래 변려문을 잘 짓지 못하는데, 사람들은 도리어 저를 변려문에 능하다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세상일이란 이런 것이니 우스운 노릇입니다. 부디 가르쳐 주시어 크게 나아지도록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607년 7월 (서기 1607년 9월 5일, 양력 추정)
족하께서 이미 저의 병을 고쳐 주셨는데 참으로 증세에 딱 맞는 좋은 약이었습니다. 즐겁고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족하께도 병이 있는지라 제가 침을 놓아 드리고자 하는데, 혹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남들은 재주가 적어서 걱정인데 족하는 오히려 재주가 너무 많은 것이 걱정입니다. 아무리 아깝더라도 조금 덜어 내어 거칠고 불필요한 것을 제거한다면 순수한 대가가 되실 것입니다. 이 말은 형을 몹시 아끼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이니, 자신의 병을 감추고 의원을 꺼려하다가 고질이 되도록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용어) 이춘영(자 실지)은 선조 때 문장가로 봉상시 첨정을 지냈다.
성소부부고 제21권
10. 14:39
성소부부고 제21권 · 문부 18 · 척독 하
출처: 성소부부고 제21권, 문부 18, 척독 하(짧은 개인 편지 모음, 둘째 권)
배경: 척독은 격식을 갖춘 정식 편지가 아니라, 벗이나 친척에게 안부를 전하거나 짧은 용건을 담아 보내는 사사로운 편지를 말한다. 이 권에는 허균이 여러 사람에게 보낸 짧은 편지 아흔네 통이 실려 있다. 사촌 형 허자하, 죽마고우 임자정과 임약초, 벗 조지세·권여장·임자승·이손곡(이달)·이여인(이재영)·양자점 등에게 보낸 편지가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그 밖에 조카들, 고을 원님들, 화가 이정(나옹), 승려 휴정대사(서산노사)와 유정대사(송운대사), 그리고 부안의 기생 계랑에게 보낸 편지도 실려 있다. 시를 논하고 벗의 죽음을 슬퍼하며, 벼슬살이의 답답함을 토로하고 그림을 주문하며, 참선을 이야기하고 정을 나누는 등 편지의 내용은 짧지만 허균의 다채로운 인간관계와 거침없는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계묘년, 1603년) (서기 1603년 9월 19일, 양력 추정)
허자하는 허균의 재종형인 허적의 자이며, 호는 상고재이다. 1597년 유효립 등이 인성군(선조의 일곱째 아들)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던 역모를 고발한 공으로 영사공신 1등에 책록되고 양릉군에 봉해졌다.
권세를 쥔 자들이 저를 궁지로 몰아넣어 결국 쫓아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관동 땅으로 가서 감호대에 올라 바라보니, 아득히 펼쳐진 푸른 물결이 삼신산에 닿아 있어 문득 옷자락을 걷고 발을 담그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이 말은 형만 알고 계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갑진년, 1604년 10월) (서기 1604년 12월 5일, 양력 추정)
고을 하나를 맡아 다스리면서도 이렇다 할 성과 하나 없이 그저 날짜만 보내며 관청의 곡식만 축내고 있습니다.
그나마 밀린 업무가 없어 좌수가 찾아와 재촉하는 일만은 겨우 면했습니다만, 형께서는 틀림없이 저를 몹시 꾸짖으실 것입니다.
(용어) 좌수는 조선 시대 각 고을의 향청(지방 자치를 맡아보던 기구)을 이끌던 우두머리를 말한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노형의 시는 성당 시절의 시풍에 매우 가깝습니다. 다만 기세가 지나치게 거세니, 조금만 평탄한 길로 들어선다면 심전기나 송지문 같은 시인이 되기가 뭐가 어렵겠습니까.
칠언고시는 도가의 경전인 황정경과 흡사한데,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노조린과 낙빈왕쯤은 응당 내려다보게 될 것입니다. 제 말이 지나치다고 의아해하지는 마십시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보내주신 부 두 편을 읽어보니 그 빼어남이 진나라의 손작(자는 흥공)과 좌사(자는 태충)에 견주어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요즘 세상에 정시 시대와 같은 시풍이 다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요즘 옛 문체로 글을 짓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인데, 뜻밖에도 우리 집안에 이런 대단한 보물이 있었으니, 하곡께서 살아 계셨다면 응당 깜짝 놀라며 이를 으뜸가는 작품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용어) 정시는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연호이다. 이 무렵 혜강, 완적을 비롯한 이른바 죽림칠현이 노장사상에 심취하여 자유분방하고 맑고 그윽한 시풍을 이루었는데, 이를 정시체라 한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율시 네 수가 매우 맑고 굳세어 우리 집안을 빛냈습니다.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고 싶었으나 공무에 매여 붓을 잡고도 도무지 생각을 짜낼 겨를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못생긴 모모가 서시의 찡그린 얼굴을 흉내 내다가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달아날까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3월) (서기 1610년 4월 8일, 양력 추정)
권필(자는 여장)의 말로는 이안눌(자는 자민)의 시가 점점 못해지고 있다는데,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무릇 시란 공력을 오래 기울이면 붓을 대는 대로 저절로 정신이 깃드는 법입니다. 비유하자면 열 편을 지으면 그중 몇 편은 볼 만하고, 나머지는 더러 평범하고 더러 졸렬하고 더러 비루하기도 합니다.
볼 만한 것은 남겨두고 평범한 것은 더 다듬고 비루하거나 졸렬한 것은 아예 버린다면 저절로 높고 오묘한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편마다 애써 교묘하게 지으려고만 하면 힘만 허비하고 말이 어긋나서 도리어 난삽하고 옹색한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이는 큰 시인들이 가장 꺼리는 일입니다.
자민은 너무 기교만 부리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힘을 허비하며 억지로 시상을 짜내는 데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품격은 모자라고 재능은 줄어들어 갈수록 무디어지고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노형께서도 부디 그 점을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6월) (서기 1610년 8월 3일, 양력 추정)
선녀 쌍성이 제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조강지처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형께서 멀리 떠난 채 돌아오지 않으신다면 형수께서 아이를 안고 우실 터이니, 너무 매정한 처사인 듯합니다. 기생들에 둘러싸여 비단에다 글을 쓰는 짓은 그야말로 중국의 철없는 젊은이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형은 나이 쉰이 가까우니 흰머리가 날 만도 합니다. 부디 조금씩이라도 몸가짐을 단속하시어 교송의 장수를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용어) 교송은 옛이야기 속 신선인 왕자교와 적송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둘 다 오래도록 살았다고 전해진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11년 1월 22일, 양력 추정)
문한을 담당하는 신하가 과거 시험관으로 참여했다가 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는 일은, 수나라가 과거 제도를 시작한 이래 없었던 일인데 아우가 몸소 그 일을 당했습니다. 게다가 하필이면 우리 집안에서 이런 일이 나왔으니 선대의 가르침을 욕되게 함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저 죽고 싶은 심정뿐입니다. 명나라의 정민정(호는 황돈)도 고문까지 당하지는 않았고, 당인(자는 백호)도 벼슬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일까지는 당하지 않았습니다.
법을 엄하게 적용하는 것이 요즘은 어찌하여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 또한 운명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임자정에게 답한 편지 (정미년, 1607년 8월) (서기 1607년 10월 5일, 양력 추정)
임자정은 허균과 어려서부터 함께 글을 배운 벗 임곤의 자이며, 훗날 풍안군에 봉해졌다.
자네는 내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말을 조심하여 요즘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의 태도를 본받게 하려는 모양인데, 세상에 일부러 이런 옹색한 처신을 하면서 그것으로 만족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총채를 손에 들고 고상한 이야기를 나누며, 거친 베옷을 입고 지팡이를 끌며 다니는 것이야말로 고상한 뜻대로 사는 삶이라네. 큰길가의 누각에 올라 주렴을 걷어 올린 채 앉아서, 쌍갈래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누런 적삼 소매를 걷어붙인 채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신유안이 지은 '천고강상' 한 편을 읊는다면, 그 순간만큼은 온 세상에 안하무인이 됨을 절로 깨닫게 될 것이니, 붉은 관복을 입고 요란하게 길을 트며 지나가는 고관 따위를 마음에나 두겠는가. 왕평지가 이 말을 듣는다면 응당 배를 잡고 웃을 것이네.
임자정에게 답한 편지 (정미년,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임수정(자는 약초)이 세상을 떠났으니, 후배들이 다시는 그의 풍류를 볼 수 없게 되었네. 주옥 같은 사람을 땅에 묻었으니 사무치는 정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구려.
세상일은 갈수록 변하고 세태는 나날이 야박해지기만 하는데, 그대 같은 부류는 멀쩡히 살아남고 이 사람은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대는 내 말을 탓하지 말게. 약초마저 죽었으니 이제 누가 다시 나를 받아주겠는가. 그 사람을 떠올려 보니 마치 방금 세상을 떠난 듯하네.
임자정에게 답한 편지 (무신년, 1608년 11월) (서기 1608년 12월 21일, 양력 추정)
병을 얻어 여관에 머물고 있는데, 닷새가 지나도록 땀 한 방울 나지 않아 이대로 죽는가 싶었네. 형께서 자주 안부를 물어주셨으니 그 두터운 정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구려. 내 병이야 곧 나아지겠지만, 정말로 걱정되는 것은 자네의 병일세. 마음만 편히 풀리면 저절로 나아질 터이니, 부디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시게.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조지세는 호가 현곡, 소옹이며, 벼슬이 공조 참판에 이르렀던 조위한의 자이다.
공의 할아버지뻘 되는 어른의 시는 호탕하여 시선집에 오를 만했으나, 애석하게도 옥에 티와 같은 흠이 있었습니다. 이반룡(자는 우린)이 남의 시를 깎아 다듬어 간행했던 일을 본받고 싶으나 감히 손대지 못하여 이렇게 감히 여쭙습니다.
(용어) 본문에서 "할아버지뻘 되는 어른"이라 옮긴 표현은 할아버지와 같은 항렬이면서도 가까운 친족은 아닌 남자 어른을 가리키는 옛말인데, 여기서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2월) (서기 1608년 1월 31일, 양력 추정)
제가 워낙 일 벌이기를 좋아하고 줏대도 없어서, 제 시를 평한 글을 형님께 보여드리고 말았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형님은 부디 입을 다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비방이 더 늘어날까 두렵습니다.
그동안 두세 형제들에게 이야기했던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결과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3월)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큰 고을을 맡아 이런 복을 누리면서도, 가난한 벗을 구제하지 못했던 원헌(공자의 제자)처럼 저 역시 가난한 친구를 돕지 못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고을 창고는 봄을 맞아 곡식 한 알이 구슬처럼 귀합니다.
보내드리는 것은 겨우 말 한 필에 실을 정도이지만, 제 월급의 절반입니다. 범순인이 친구 석만경에게 배 한 척 가득 보리를 실어 보냈다던 일에 비하면 부끄러워 땀이 날 지경입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9월) (서기 1608년 10월 9일, 양력 추정)
저는 세상의 입방아에 시달려 액운을 당했으니, 이참에 쉬고 싶은 것이 본디 제 뜻이었습니다. 다행히 이제 파직되어 곧장 부령(전라북도 부안의 옛 이름)으로 향합니다. 이제부터 저는 권세가의 문턱을 넘지 않으렵니다. 어떻게 해야 형과 은거지를 절반씩 나누어 살 수 있을까요? 종이를 마주하니 그저 서글플 뿐입니다.
(용어) 여기서 "권세가의 문"이란 지위 높은 벼슬아치들의 집 문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은거지를 나누어 산다"는 말은, 옛날 중국 화산에 숨어 살던 은사 진단을 많은 이들이 찾아와 함께 노닐었다는 데서 나온 표현으로, 존경하는 은사를 찾아가 함께 지내고 싶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2월) (서기 1609년 1월 20일, 양력 추정)
세상 사람들은 제가 산에서 사는 것을 그냥 두지 않고, 자꾸 북쪽으로 올라오라 재촉합니다. 어제 형이 계신 곳까지 갔었지만 날이 추워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궁궐 일이 아무리 바쁘다 한들 어찌 한가한 틈이 전혀 없겠습니까. 저를 찾아와 주실 수만 있다면, 마땅히 시 한 묶음을 드려 형의 평을 받고 싶습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2월) (서기 1609년 1월 20일, 양력 추정)
형이 겨우 문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저는 형이 맨 앞자리를 차지하기를,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간절히 바랐는데, 이번에도 결국 높은 자리에는 오르지 못하셨군요. 제가 낙방한 것과 다름없으니 그 한스러움을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그러나 한 번 넘어졌다고 마음 아파하지 마시고, 다시 천 리 먼 길을 나아갈 뜻을 세우셔야 합니다. 도성을 넘어서는 일쯤은 작은 흙덩이 하나 지나치듯 해내는 날랜 재주를 공은 본디 지니고 계십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군옥은 저와 가까이 지내는 사이인데, 어찌 형의 말씀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카가 아무리 고집이 세다 해도, 어찌 폐인들이 걸었던 전철을 밟아 부모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손가락질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겠습니까. 저더러 잘 타일러 달라 하신 말씀은 감히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화백(정협의 자)과 의논해 보십시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0월) (서기 1609년 11월 11일, 양력 추정)
제가 시험관이 되어 형의 책문을 2등으로 뽑았으니, 이른바 눈이 흐려 다섯 빛깔 햇살도 가려내지 못한 셈입니다. 그러나 형의 업적이 한기(송나라 재상, 자는 치규)와 같고 문장이 소식(자는 자첨)과 같기를 바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왕요신(송나라 사람, 시호는 문안)과 장형(송나라 사람, 관직명은 대제)은 그저 장원 급제를 했을 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시험 삼아 물어보십시오. 왕요신과 장형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있던가요. 세월이 흘러도 썩지 않는 큰 업적은 장원 급제 여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2월) (서기 1610년 3월 9일, 양력 추정)
이조 판서를 만났더니 여장을 동몽교관(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벼슬)으로 임용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가 응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형께서 한번 그에게 물어봐 주십시오. 벼슬이란 때로 가난 때문에 하기도 하는 법이니까요.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2월) (서기 1610년 3월 9일, 양력 추정)
사신으로 추천한 것은 남이공(자는 자안)에게서 나온 일이라고 합니다. 하늘이 사람의 욕심을 다 들어주지는 않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병마에 시달리기만 하니 그저 크게 탄식할 따름입니다.
권여장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5월) (서기 1610년 7월 5일, 양력 추정)
형이 강도(강화도의 옛 이름)에 계실 때는 한 해에 두어 번 서울에 오시면 언제나 우리 집에 눌러앉아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으니, 세상에 그보다 즐거운 일이 없었네. 그런데 온 가족을 이끌고 아예 서울로 올라오신 뒤로는 열흘이 넘도록 한가로이 어울린 적이 없으니, 강도에 계실 때보다 오히려 못하니 대체 무슨 까닭인가?
연못에는 물결이 출렁이고 버들빛은 한창 푸르며, 연꽃은 붉은 꽃잎을 반쯤 열었고 짙은 녹음은 푸른 일산처럼 은은히 비치는데, 마침 이럴 때 동동주를 빚어 두어 젖빛처럼 뽀얀 술이 동이에 넘실거리니 어서 오셔서 맛보시게. 바람 잘 드는 마루는 벌써 깨끗이 쓸어놓고 기다리고 있네.
권여장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5월) (서기 1610년 7월 5일, 양력 추정)
그대 어머님의 병환이 너무 오래 끄니 걱정스러운 마음이 마치 내가 우리 어머니 병환을 곁에서 돌보던 때와 같네. 마침 엿 한 덩이를 구했기에 이생 편에 부쳐 보내니 식사 후에 드시게 하게. 나는 이것을 우리 부모님께 드리고 싶어도 이제는 그럴 수가 없으니,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겠네.
권여장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3월) (서기 1610년 4월 8일, 양력 추정)
내가 떠날 날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네. 만 리 길 여행 봇짐에 자네의 글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오언율시(다섯 자씩 여덟 구로 짓는 한시 형식) 여덟 수를 노잣돈 삼아 반드시 지어 주게. 한 수라도 줄인다면 무정하다 할 것이네.
형의 오언율시는 잘 지은 것은 맹호연(중국 양양 출신의 시인)의 작품에 견줄 만하고, 못한 것이라 해도 진거비의 고상한 운율에 못지않으니, 저 먼 연경의 저잣거리에 내놓고 읽더라도 연나라와 조나라 땅에서 부르던 우국지사들의 슬픈 노래에 맞설 만할 걸세. 부디 게으르다는 핑계로 짓기를 미루지 말아 주게.
(용어) "연조의 비가"는 옛날 중국 연나라와 조나라 지역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들이 시국을 근심하며 부르던 슬픈 노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권여장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2월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여행길 노자 삼아 보내 주신 율시 두 편에는, 그 무렵 병드신 형님과 이별하느라 마음이 몹시 어지러워 답을 하지 못했었네. 남궁생이 서울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자네를 만날 테니, 그때 화답하는 글을 보낼 것이니 내가 실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걸세.
초췌한 몰골로 연못가나 밭두둑에서 읊조린 시가 고운 가락에 맞을 리 없으니, 형님이 보시면 틀림없이 탄식하며 슬퍼하실 걸세.
박숙야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2월 (서기 1610년 1월 9일, 양력 추정)
형조에서 벌금을 없애지 못한 것은, 공도 태수가 문을 닫아걸고 조정의 명을 거절한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문을 닫아걸고 명을 거절해 놓고서는, 제가 벌금을 없애지 못했다고 책망하시니, 이는 법으로는 자신을 단속하면서 예로는 남을 대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벗들이 서로 권면하는 의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저 저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입니다.
(용어) 박숙야는 박엽의 자로, 호는 국창이며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이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기해년, 1599년) 5월 (서기 1599년 7월 6일, 양력 추정)
조정에서 몸가짐을 단정히 하는 일이라면 내가 자네를 따르지 못하겠지만, 경치 좋고 숨어 살기 좋은 곳을 아는 데는 내가 더 낫다고 생각했었네. 그런데 몇 년 사이 고을살이에 얽매여 떠나지 못하다가 은거하려던 뜻마저 저버렸으니, 북산이문이 곧 나에게 들이닥쳐 내 얼굴을 부끄럽게 만들 것만 같네.
사람이 요임금 시대의 신선이었다는 방회처럼 되지 못한다면 결국 남에게 부림받는 종이 될 뿐이니, 나는 자신만만하기로 이름났던 한나라의 문장가 사마상여의 기개를 배우고 싶네. 형은 나를 나무라 주게.
(용어) 임약초는 임수정의 자로, 159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와 한림을 지냈으며 허균과는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낸 벗이었다. 3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북산이문은 남조 제나라 때, 북산에 숨어 살던 주옹이 벼슬길에 나섰다가 다시 산으로 돌아오려 하자 그의 벗 공치규가 산신의 뜻을 빌려 그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나무란 글이다. 여기서는 허균이 예전에 임약초와 벼슬을 버리고 함께 강가에 숨어 살자고 약속해 놓고 지키지 못한 일을 두고 한 말이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기해년, 1599년) 5월 (서기 1599년 7월 6일, 양력 추정)
천지와 사계절도 다 변화하는 이치가 있는데, 나는 늘 움츠러들기만 하고 펴지를 못하니, 자네 같은 사람이 백 명 있다 해도 나를 어쩌지 못할 듯하네.
떠돌아다니는 벼슬살이에 먹고사는 것마저 자주 곤궁하니, 차라리 한 고을의 수령 자리 하나 내려주는 것만 못하네. 궁지에 몰린 원숭이가 숲으로 달아나면서 나무를 가려잡겠는가. 그저 벼슬하기 전 평민 시절의 정을 믿고 늘 이렇게 하소연하는 것이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기해년, 1599년) 1월 (서기 1599년 2월 10일, 양력 추정)
형의 그늘 아래 있을 때는 추위도 더위도 잊고 지냈는데, 이제 또 천 리 먼 곳으로 헤어지게 되니 남몰래 가슴이 아픕니다.
평소 그대를 만날 때면 있는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강물처럼 많은 술을 빚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었는데, 이제 멀리 떠나는 이별길에 올라서는 술 백 동이를 차려 놓아도 형이 한 잔조차 마시지 않으니, 신선과 범인의 길이 서로 막혀 버린 것인가. 고개를 들어 층성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서 그리워한다네.
(용어) 층성은 신선 서왕모가 산다는 곤륜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신선의 세계, 곧 다다를 수 없는 아득한 경지를 뜻한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2월 (서기 1600년 3월 29일, 양력 추정)
지독한 추위에 목이 다 잠겼으니, 하늘이 이런저런 대꾸를 하는 번거로움을 줄여 주려는 것이 아닌가 싶네. 그런데 혀부터 먼저 내게서 떨어져 나갔으니, 팔다리마저 저마다 떨어져 나갈 날이 그리 멀지 않은 듯하네.
어제 윤계선을 만났더니, 모든 일이 딱히 잘된 것도 잘못된 것도 없으니 함께 힘쓰면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하였지만, 내 입은 굳게 다물어져 벌어지지가 않았네.
성현도 보통 사람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법인데, 하물며 한 시대를 함께 논하는 사람들 사이야 얼마나 차이가 나겠는가. 형이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이 말을 들으셨더라면, 생각이 서로 그리 동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3월 (서기 1600년 4월 27일, 양력 추정)
나는 아직 마흔도 안 되었는데 머리가 벌써 이 모양이니, 나이가 더 들면 어떤 꼴이 될지 모르겠네. 떠도는 인생이 몇 해나 산다고 억지로 남을 따라다니며 줏대 없이 살겠는가.
옛날 이름난 선비들은 으레 술을 실컷 마시면서도 굴원의 이소쯤은 훤히 외우는 사람들이었는데, 나는 그 두 가지를 다 하지 못하니 뭇 관료들 밑자리에 있는 것을 참으로 달게 여기고 있네. 그런데 자네는 나를 천 길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려 하니, 옛날 힘장사였던 오확만 한 힘이라도 있는 겐가? 아마 애만 쓰고 소용은 없을 것이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6월 (서기 1600년 7월 24일, 양력 추정)
맑은 이슬이 새벽마다 내리는 요즘, 새로 만든 거문고를 타고 있다네. 이런 것들을 대하다 보니 그대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이 마치 봄 버들가지에 물이 오르듯 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들으니 자네가 홍문관에서 비방을 받았다고 하던데,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면 개의치 말게. 때가 지나면 저절로 잠잠해질 것이네.
암행어사로 나가는 일은 언제쯤 떠나는가? 이가 아파 문밖에 나가지 못해 이렇게 글로나마 위로를 전하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2월 (서기 1600년 3월 29일, 양력 추정)
어떤 사람에게 들으니 자네가 서애 유성룡을 헐뜯어서 설서 벼슬을 얻었다고 하기에, 나는 그 말을 듣고 몹시 화가 났었네. 서애는 어진 정승이니 헐뜯어서는 안 되네. 소인배를 헐뜯고 벼슬을 얻는다 해도 좋은 일이 아닌데, 하물며 서애 정승을 헐뜯어서야 되겠는가.
바라건대 형은 차분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조급하게 행동하지 말게. 앞길이 아무리 멀다 해도 다 타고난 운명이 있는 법이고, 공명이란 괴상한 짓을 해서 요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네. 속담에 "급히 먹으면 목이 멘다."고 했으니, 비록 속된 말이지만 큰 깨우침을 주는 말일세.
(용어) 임자승은 임현의 자로, 허균과 같은 해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가까이 지낸 벗이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3월 (서기 1600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옛 책 만 권을 쌓아 놓고 한쪽에는 탁문군 같은 여인을 끼고서 그 속에서 거리낌 없이 지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한평생을 마치기에 충분할 것이네. 그런 풍류는 형 혼자 누리고, 나에게까지 너무 자랑하지는 말게. 나야 세상에서 버려진 몸이니 그대 일에 무슨 간섭을 하겠는가. 형은 나를 탓하지 말게.
비루하고 잡스러운 것을 가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도량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니, 비유하자면 만 리를 흐르는 긴 강이 어찌 천 리에 한 굽이도 없을 수 있겠는가. 이런 나의 미친 짓을 형이 용서해 주신다면 참으로 고맙겠네.
(용어) 탁문군은 한나라 때 큰 부자였던 탁왕손의 딸로, 사마상여가 타는 거문고 소리에 반해 한밤중에 몰래 집을 뛰쳐나가 그의 아내가 된 여인이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3월 (서기 1600년 4월 27일, 양력 추정)
형이 내가 잡스러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경계하여 편지를 두 번이나 보내 주시니 참으로 고마운 마음이네. 그러나 이것은 내 참마음을 해치는 일이 아니라네.
옛날 송나라의 곽충서는 시장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술을 마시며 "나와 어울리는 사람은 모두 이런 부류들이다."라고 말했다는데, 모르긴 해도 형이 사귀는 사람들이 시장 사람들보다 나은가?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3월 (서기 1600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어젯밤에는 자네가 아끼는 여인이 찾아와 강남곡을 부르는데, 가락마다 마치 구슬을 꿰어 놓은 듯하였네. 그 노래를 듣느라 지루한 줄도 모르고 무릎을 치며 화답하다가 나중엔 발까지 구르며 춤을 추었으니, 천지가 넓은 줄도 전혀 몰랐다네. 이때는 내가 옛사람을 만나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지 않고, 오히려 옛사람이 나를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형이 함께 있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는데, 신선이 산다는 금화궁의 하늘 위에서도 이백이 술 마시던 누각을 그리워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5월 (서기 1600년 6월 25일, 양력 추정)
자네는 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손님을 물리쳐서, 요직에 있는 사람이 만나지도 못한 채 돌아가 화를 내게 만들었다고 나를 나무라는데, 이건 나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네. 불행히도 내가 사는 곳이 임약초라는 사람과 대문을 마주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높은 벼슬아치들이 예전에 도사 벼슬이나 지낸 사람의 집을 뭐 하러 찾아오겠나. 옛날 장찬이라는 사람은 "나는 하경용을 찾아온 손님은 만나줄 수 없다"고 말했다는데,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이네.
(용어) 장찬은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 사람으로, 하경용을 찾아온 손님이 오는 길에 자신에게도 들르면 "나는 하경용의 손님은 만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허균은 이 이야기를 빌려, 자기 집이 우연히 높은 벼슬아치 임약초의 집과 마주해 있어 그를 찾아온 손님들이 착각하고 몰려드는 것을 이렇게 에둘러 말한 것이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5월 (서기 1600년 6월 25일, 양력 추정)
나는 불교를 믿는 게 아니네. 다만 그 글이 좋아서 읽으며 한가한 시간을 메울 뿐이지. 몇 천 호쯤 되는 고을 하나 얻으려 해도 못 얻는 처지에, 부처가 되겠다고 도모한다는 말인가. 그런 건 전혀 아니네. 다만 권력에 아부하며 떠들어대기만 하는 무식한 자들에 비한다면,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걸세.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7월 (서기 1600년 8월 23일, 양력 추정)
내가 남궁 — 예조의 별칭 — 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을 때 형이 뒤이어 들어왔으니, 한비자가 노자와 나란히 한 열전에 실리게 될 줄은 미처 몰랐네. 나는 우연히 비국랑(비변사의 낭청 벼슬)에 올라, 하루 종일 정승 앞에 엎드려 붓을 잡고 글씨를 쓰다 보니 흐르는 땀이 비 오듯 하여 거의 미칠 지경이었네. 그래서 왜 손작이 수초부에서 말한 것처럼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찾지 않고, 억지로 나랏일에나 참견하려 드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네. 벼슬을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가난 때문에 몇 말 안 되는 녹봉에 매달려 실행에 옮기지 못할 뿐이네.
(용어) 남궁은 예조의 별칭이다. 1597년 허균이 예조 좌랑으로 있을 때 임현도 뒤이어 예조 좌랑으로 들어왔는데, 허균은 이를 사상이 상반된 한비자와 노자가 사기의 같은 열전에 함께 실린 일에 빗대었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신축년, 1601년) 2월 (서기 1601년 3월 19일, 양력 추정)
남쪽으로 내려온 것은 원래 자네가 보고 싶어서였는데, 관찰사가 옛 규칙을 없애지 못하는 바람에 능양까지 함께 가지는 못했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수행하게 되었으니 서로 만날 날이 있을 걸세.
듣자니 형은 요즘 아내를 잃고 지나치게 상심한다는데, 대장부란 마땅히 이치를 따라야 하는 법이네. 세상에 예쁜 여인이 얼마나 많은가, 하필 그 사람 하나뿐이겠는가. 인생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네. 형은 예전에 순봉천이 아내를 잃고 슬퍼하다 따라 죽은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더니, 이제 와서는 그 전철을 밟으려는가. 자네 어머니가 살아 계시고 자네는 외아들로 아들마저 없는 처지이니, 부질없이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게.
자세한 이야기는 창평의 과거 시험장에서 하세. 말 위에서 대충 몇 자 적고 이만 줄이네.
(용어) 순봉천은 삼국시대 위나라 사람 순찬의 자이다. 아내를 몹시 사랑했는데 아내가 일찍 병들어 죽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심중경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9월 (서기 1610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어제 처음으로 자네의 애첩이 '여인행'을 읊는 것을 들었는데,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정확하고 곡조를 붙이는 솜씨도 제격에 딱 들어맞아 마치 전문 소리꾼 같았네. 그 소리가 쇠나 옥이 부딪는 소리처럼 쟁쟁하면서도 간드러졌네. 영이니 석이니 하는 두 기생에게도 이런 재주가 있었는지 모르겠군.
그 옛날 도엽이라는 기생도 이 앞에서는 아름다움을 뽐내지 못하게 되었으니, 형은 왕자경이 되기에 충분하네. 그러니 굳이 만 호를 다스리는 제후에 봉해지기를 바랄 게 무엇 있겠나.
(용어) 심중경은 훗날 인조 때 문신을 지낸 심액이며, 중경은 그의 자이다. 도엽은 진나라 왕헌지의 애첩 이름이고 자경은 왕헌지의 자로, 왕헌지가 애첩을 그리워하며 지은 '도엽가'가 유명하다. 허균은 이를 빌려 심중경을 왕헌지에 비유한 것이다.
윤명익에게 답한 편지 (경술년, 1610년) 12월 (서기 1611년 1월 22일, 양력 추정)
제가 당한 불행은 사대부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무신년(1608년) 사월에 형께서 당하신 액운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지옥에 견주어 이 세상이 평온하게 느껴지는 것과 같습니다. 둘 사이의 차이가 어찌 천 유순 정도밖에 안 되겠습니까. 그런데 고맙게도 무명 세 필을 재빨리 곤장 치는 사람에게 쥐여 주셨다니, 이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다만 옥리들이 함부로 침범해 오니 임금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남은 인생은 그저 고향에 돌아가 살 수만 있어도 다행이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남해 바닷가 어딘가 신선이 산다는 곳으로라도 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긴 말은 줄이고 이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용어) 유순은 옛 인도에서 쓰던 거리 단위로, 1유순을 대략 40리로 보는 설이 있다. 여기서는 아득히 먼 차이를 비유한 말이다.
조이숙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오랫동안 덕이 높으신 그대를 뵙지 못하니 마음속에 더러운 티끌만 쌓여갑니다.
누대에 기대어 지으신 시는 어째서 정묘교의 주인에게 보여주어, 한창 졸음에 빠져 있는 그를 깨우지 않으십니까.
《세설》은 빌려 간 지 오래되었는데 돌려주지 않으시니, 아직 다 읽지 못하신 겁니까?
저는 천 년 뒤에 태어나 진나라 사람들이 나누던 청담을 직접 들어보지 못했으니, 한 번 읽고서 그 자세한 내용을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찾아가는 종 편에 부쳐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심부안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7월 (서기 1608년 8월 24일, 양력 추정)
저는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처지가 되었으니 마땅히 스스로 탄핵하여 물러나야 할 것이나, 다시 말썽이 일어날까 두려워 지금까지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이미 어사에게 사정하여 애걸하였으니 다음 달에는 마땅히 판결이 날 것입니다.
남도에서 믿을 사람은 오직 형뿐이니, 산속으로 들어가 살 때 종 두어 명의 부역만 덜어 주신다면 저는 마땅히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가을바람이 솔솔 불고 귀뚜라미가 한창 울어댑니다. 남쪽 하늘을 바라보니 기러기와 함께 날아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조선술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9월 (서기 1610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저는 마침 남의 잔치에 다녀왔고 말은 돌아와 여물을 먹고 있던 참인데, 그대가 마침 우리 집을 찾아오셨더군요. 그래서 제가 집에 있는 줄로 오해하셨고, 게다가 취랑이라는 자가 그대의 의심을 부추겨 정시망(시망은 정응운의 자)에게까지 그 일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무슨 나랏일의 주도권이라도 쥔 사람이라고, 세상 사람이 싫어서 찾아오는 이를 거절했겠습니까.
십 년을 사귄 사이에도 이렇게 의심을 받게 되니, 남을 알기도 쉽지 않지만 남이 나를 알아주는 것도 쉽지 않다는 말이 과연 사실인가 봅니다.
어금니가 아파 만나서 말씀드리지 못하고, 우선 편지로 사정을 아룁니다. 이만 줄입니다.
(용어) 조선술은 문장이 뛰어나고 특히 시와 부에 능했던 조찬한의 자이며, 호는 현주이다.
기헌보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28일, 양력 추정)
이달 십오일에 유배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 새우는 부안의 것만 못하고, 게도 벽제의 것만 못합니다. 먹는 것만 밝히는 사람으로서는 이러다 굶어 죽겠습니다.
(용어) 기헌보는 기자헌의 동생인 기윤헌의 자이다.
정시망에게 답한 편지 (경술년, 1610년) 12월 (서기 1611년 2월 11일, 양력 추정)
저의 옥사는 거의 끝나 갑니다. 억울함을 품은 채 심문을 받으니 하늘이 어두컴컴해지고 해마저 캄캄해지는 듯했습니다. 그 때문에 울다가 지쳐서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이태백도 야랑으로 귀양을 갔고 소동파도 해남으로 귀양을 갔듯이, 옛사람들도 피하지 못했던 일인데 제가 어찌 귀양길 한 번 가는 것으로 마음 아파하겠습니까.
남쪽으로 가는 것이 결정되었으니, 형은 술 한 말과 닭 한 마리를 들고 길가로 나와 시 한 수 읊어 주고 가지 않으시렵니까?
수많은 사연을 다 적지 못합니다.
임무숙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7월) (서기 1610년 9월 2일, 양력 추정)
제가 사람들에게 무숙의 변려문이 최치원의 글보다 낫다고 말했을 때는 다들 이상하게 여기며 못마땅해했습니다. 그런데 또 무숙의 글이 왕세정의 글과 같다고 했을 때는 사람들이 별로 의아해하지 않더군요. 이는 다름이 아니라 옛사람은 귀하게 여기고 요즘 사람은 천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왕세정의 문장은 멀리 한나라의 사마천과 사마상여의 뒤를 이었다고 할 만하니, 최치원을 내려다보는 정도가 어찌 봉황과 참새의 차이뿐이겠습니까.
그대는 스스로를 믿고 남의 말에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용어) 무숙은 임숙영의 자로, 문장이 뛰어나고 경서와 역사에 밝았던 인물이다. 변려문은 넉 자와 여섯 자를 짝지어 쓰는 화려한 한문 문체다. 왕세정은 명나라의 문장가로 호가 감주다. 최치원은 신라 말의 대문장가이며, 사마천과 사마상여는 한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다.
장지국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1월) (서기 1611년 3월 4일, 양력 추정)
죄를 짓고 귀양 가는 사람을 찾아 위로해 주는 이가 드문데, 그대는 뭇사람에게 버림받은 저에게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어 주셨으니 그 후한 뜻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는 정말 저를 나라의 인재로 대우해 주신 것이니, 어찌 감히 그 은혜에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런 태평한 시절에 죄를 지었으니 백 번 귀양을 가더라도 속죄할 길이 없습니다. 귀문관 밖으로 쫓겨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니, 감히 먼 곳으로 귀양 가는 것을 한스러워하겠습니까.
세자를 돕고 지키는 일은 오로지 강학을 맡은 신하에게 달려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대가 배운 바를 실행할 때입니다. 힘써 바르게 보필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눈을 씻고 귀를 기울여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용어) 지국은 장유의 자로, 문장이 뛰어났던 인물이다. 귀문관은 장백산맥의 한 줄기로, 아주 멀고 험한 변방을 뜻하는 말이다.
조카 실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1월) (서기 1611년 3월 4일, 양력 추정)
너는 내가 양식이 떨어질까 걱정하지만, 나도 네가 위험을 무릅쓰고 무턱대고 행동하는 것이 걱정스럽구나. 내가 너를 걱정하는 마음이 네가 나를 걱정하는 마음보다 훨씬 클 터이니, 행동을 삼가서 다시는 어버이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도록 하여라.
(용어) 실은 허균의 맏형인 허성의 맏아들로, 허균의 조카다.
조카 실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조씨 집안에서 노래하는 기녀를 데려간 일은 나에게는 딱히 아쉬울 것이 없는데, 너는 왜 그렇게까지 서운해하느냐? 얼마 전에 기를 쓰고 막으려 하던 마음과는 사뭇 다르구나. 더없이 아끼던 보물이었으니 아깝기는 하겠지만, 이제 와서 나를 탓해서야 되겠느냐.
조양오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6월) (서기 1608년 7월 26일, 양력 추정)
북관에 계시면서 학계를 만나 보셨는지요? 그의 병세는 어떠하던가요?
저는 평생 절도를 지키지 못하여 온갖 곤경을 겪었습니다. 그래도 이런 화는 면했는데 그는 단번에 걸려들었으니, 운명이란 것이 정말 있는 것일까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도 가슴이 뛰는데, 저는 변변찮은 사람이라 또 입을 잘못 놀려 걸려들었습니다. 이는 모두 평소 그렇게 처신해온 데서 비롯된 일이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그저 파면되어 돌아가기를 앉아서 기다릴 뿐입니다.
(용어) 북관은 함경남도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학계는 심액의 호다.
민숙정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2월) (서기 1609년 1월 20일, 양력 추정)
수헐원에서 신령이 이백을 찬양하는 시를 읊었다는 일을, 제 맏형님조차 믿지 않으시니 결판은 그대의 입에 달려 있습니다. 저를 위해 속히 와서 증명해 주셔서, 한편으로는 제가 허튼소리를 한다는 누명을 벗겨 주시고, 한편으로는 형제간에 서로 믿지 못하는 마음을 없애 주십시오. 이 두 가지 문제가 모두 그대의 한 번 걸음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 조카들에게 곤욕을 치르고도 빠져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종을 보내어 모십니다.
(용어) 민숙정은 민인길의 자다. 수헐원 일화는 허균이 지은 "열선찬" 가운데 이백을 기린 구절("만리에 푸른 물결, 하늘 가득 밝은 달")이 있었는데, 허균이 직산 수헐원에서 민인길, 심우영과 함께 있을 때 외딴 폐가에서 신령이 그 시구를 읊는 소리를 들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다.
용산 고을 원님 이할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아침에 일어나니 집게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더니, 문득 좋은 물고기 선물을 받았습니다. 어찌 바다의 용왕만 이런 좋은 맛을 낼 수 있다 하겠습니까. 양강의 축항이라는 물고기나 서주의 독미라는 물고기라 한들, 그 맛이 이것을 당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실처럼 가늘게 썰어 회를 쳤더니 절로 군침이 돌더군요.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으니, 그동안 국수나 먹던 창자가 깜짝 놀라 천둥소리를 낼 정도였습니다. 감사한 마음에 아홉 번이라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용어) "집게손가락이 움직인다"는 말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조짐이라는 뜻의 옛 표현이다. 옛날 중국 정나라의 공자 송이 자기 집게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조짐이다"라고 말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함산 고을 원님 한회일에게 감사드리는 편지 (신해년,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28일, 양력 추정)
연어알젓 한 그릇을 받아 먹어보니, 그 맛이 사슴 태보다도 뛰어나고 구장보다도 더 좋았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용어) 구장은 구약나물 뿌리를 가루 내어 끓여 만든 음식이다.
함산 고을 원님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사람들이 이곳에 작은 방어와 준치가 많이 난다고 하여, 저는 일부러 이곳을 유배지로 원했습니다. 그런데 올봄에는 통 나지 않으니, 이 또한 운이 없는 모양입니다. 늙은 몸이 입맛 하나 보고 왔는데, 거친 거여목으로도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하니 우스운 일입니다.
남궁생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2월)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벌통 하나를 오동나무 그늘에 두고, 벌 떼가 아침저녁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질서를 살펴보니, 저희들끼리의 법도가 무척이나 엄격하더군요. 그런데 나라의 법도가 벌만도 못하니, 사람으로서 크게 실망스러울 따름입니다.
조카 채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네가 서울로 올라간 뒤로, 서울의 여러 친지들이 모두 형보(함열 현감 한회일의 자)가 나를 잘 대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더구나. 설령 네 말대로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 말이 우리 집에서 나왔다면 매우 의롭지 못한 일인데, 더구나 그런 일도 없지 않았느냐.
이 고을은 본디 쇠잔한 곳인 데다 형보의 살림 규모도 넉넉지 않으니, 어찌 고을마다 임피 같고 사람마다 경기 감사 같을 수 있겠느냐. 너무 심하게 남을 책망하는 것은 군자가 할 일이 아니다. 부디 이런 말을 하지 말아라. 괜스레 네가 박정하다는 말만 더 듣게 될 것이다.
(용어) 채는 허균의 둘째 형 허봉의 아들로, 허균의 조카다. 임피는 전라도의 고을 이름이고, 경기 감사는 경기도를 다스리던 지방관을 이르는 말이다.
이손곡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4월) (서기 1609년 5월 18일, 양력 추정)
어르신께서는 제 근체시가 지나치게 다듬어지고 빈틈없이 짜여서 성당 시대의 시풍과는 거리가 멀다 하여 물리치고 돌아보지 않으시면서, 오직 고시만 좋다 하시며 남조의 문장가 안연지와 사영운의 풍격이 있다고 하시니, 이는 어르신께서 고집만 부리시고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고시가 비록 예스럽다고는 하나 이는 그대로 옛것을 본떠 베낀 것이어서 옛사람의 시와 비슷할 뿐이니, 그렇게 겹쳐 놓은 것을 어찌 귀하다 하겠습니까. 근체시는 비록 당나라 시와 꼭 닮지는 않았어도 나름대로 저만의 새로운 경지가 있습니다. 저는 제 시가 당시나 송시와 비슷해질까 오히려 두렵고, 사람들이 "이것은 허균의 시로구나" 하고 말해 주는 것을 듣고 싶으니, 너무 건방진 생각은 아닐는지요.
(용어) 이손곡은 선조 임금 때의 문장가 이달로, 손곡은 그의 호다.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당나라 시풍에 뛰어나 세 사람을 일러 '삼당'이라 불렀다. 허균은 그에게서 시를 배웠다. 근체시는 정해진 형식과 운율을 지켜 짓는 한시이고, 고시는 그런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짓는 한시다. 안연지와 사영운은 중국 남북조 시대 남조의 문장가다.
이손곡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4월 (서기 1609년 5월 18일, 양력 추정)
어르신께서는 제가 쓴 풍악기행시를 가장 예스럽고 격조 높다 하시며, 이 시집에서 으뜸가는 작품이 될 만하다고 말씀하셨다더군요. 하지만 제가 스스로 헤아려 보면 그 시는 그저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적어 놓은 것일 뿐입니다. 어찌 감히 천하의 문장가로 이름난 진나라의 손작이나 포조 같은 이들과 더불어 천 년 뒤까지 솜씨를 겨룰 수 있겠습니까. 저를 지나치게 추어올리시며 짐짓 놀리시는 말씀이라 여겨져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시왕동, 망고대, 박달곶을 읊은 세 편의 옛 시는 참으로 어르신 말씀대로 지나치게 강한 느낌이 있습니다. 제 글은 부드러운 것이 흠이지 강한 것은 흠이 되지 않습니다. 이따금 강한 느낌이 있다 해도 거리낄 것은 없습니다. 만약 명나라의 큰 문장가인 이반룡이 이 글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자신이 엮은 『명시산』이라는 시선집에 넣었을 것이니, 왕씨 집안 자제들이 다소 자부심을 가진다 한들 그것이 강남의 풍류를 가로막을 것이 또한 무엇이겠습니까.
이손곡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10월 (서기 1610년 11월 29일, 양력 추정)
어르신께서는 본디 제 초사와 부 작품들이 부드럽고 아름답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히 스스로 그렇다고 믿지 못하겠습니다. 제 글은 근래에 한층 나아졌는데 어르신께서는 오히려 이를 알아보지 못하시니, 삼가 『한정록』 서문과 『박씨산장』, 『왕총이기』, 『십이론』, 『이절도뢰』, 『관묘비』, 『남궁생전』, 『대힐자』, 그리고 『북귀부』, 『훼벽사』를 한데 묶어 변씨 성을 가진 이 편에 부쳐 보냅니다. 가르침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윤오정에게 답한 편지 (기유년, 1609년) 7월 (서기 1609년 8월 14일, 양력 추정)
보내주신 포도를 받아 먹고 나니, 갈증병을 앓던 사마상여의 목마름이 풀리는 듯합니다. 다만 그것을 한 말쯤 얻어서 세도가를 찾아가 변방 고을의 벼슬자리 하나를 청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용어) 사마상여는 한나라 때의 이름난 문장가로, 소갈증(요즘으로 치면 심한 갈증을 동반하는 병)을 앓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옛날 중국에서 어떤 사람이 진귀한 포도주를 뇌물로 바치고 변방 고을살이 자리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허균은 이를 빌려 농담 삼아 한 말이다.
윤오정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4월 (서기 1611년 5월 26일, 양력 추정)
초췌한 몰골로 시골에 묻혀 시를 읊조리며 그대의 훌륭한 시를 음미하다 보니, 북쪽을 향해 그리운 마음만 하염없이 펼쳐집니다. 저는 요즘 입을 다물고 지내다 보니 시상마저 막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변변찮은 시로나마 화답하지 못하니 부끄러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홍중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그대는 시 짓기에 오십 년을 힘쓴 끝에 마침내 진사시에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경솔하게도 그대 혼자 기뻐하며
'하루 만에 장안의 꽃을 다 보았노라'
라고 읊었다지요. 부디 신중하게 처신하여 이런 일로 우쭐대지 마십시오. 선비 된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결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홍중인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12월 (서기 1611년 1월 28일, 양력 추정)
보내주신 편지를 옥중에서 받고 보니 그대 볼 낯이 없습니다. 진작 그대의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오늘 같은 일을 당했겠습니까. 옛날 마원 장군이 아우 소유의 말을 떠올렸던 것도 그것이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의 은혜가 두터우니 결코 저를 죽을 곳으로 내몰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영동 지방으로 귀양 가고 싶지만, 그곳이 제 고향이라서 안 된다고들 합니다. 우리에 갇힌 원숭이나 새장에 갇힌 새나 그 운명은 남의 손에 달렸으니, 풀어 주는 것도 운명이요 다그치는 것도 운명인데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용어) 마원은 후한 때의 장수로, 신식후라는 봉호를 받았다. 그의 아우 소유는 일찍이 형에게 "선비로 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저 먹고 입는 것이 모자라지 않고, 작은 수레와 느린 말을 타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착한 선비라는 말을 들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훗날 마원이 먼 남쪽 땅으로 정벌을 나가 고생하던 중 아우의 그 말을 문득 떠올렸다는 옛이야기이다. 허균은 이 고사를 빌려, 진작 홍중인의 충고를 들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뜻을 전하고 있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정유년, 1597년) 8월 (서기 1597년 9월 25일, 양력 추정)
강을 건너던 날, 한 미녀가 동쪽 언덕을 서성이고 있었네. 그런데 배는 어느새 강 한복판에 이르러, 돌아보니 마치 은하수 너머 직녀를 바라보는 듯 아득하기만 했네. 진강 나루에 이르러서는 마중 나왔던 벼슬아치도 인사를 하고 돌아갔지. 십 리쯤 가다가 다시 돌아보니 그 벼슬아치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하물며 그 미녀가 보이겠으며 그대인들 보였겠는가.
장자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대를 배웅하던 사람이 언덕에서 돌아가 버리니, 그대는 이제 그만큼 멀어져 버렸구나.'
나도 지금 꼭 그 말을 하고 싶다네.
(용어) 이여인은 이재영을 가리킨다. '여인'은 이재영의 자, 즉 흔히 부르던 또 다른 이름이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병오년, 1606년) 2월 (서기 1606년 3월 23일, 양력 추정)
어젯밤 소랑이라는 여인을 불러 왔는데, 박엽이 하도 조르는 바람에 마지못해 만나 보았네. 찬찬히 뜯어보다가 문득 서러움이 북받쳐 고개를 돌려 벽을 향했는데, 촛불 그림자 속에 비친 헝클어진 머리와 지워진 화장, 구겨진 옷차림, 부드러운 얼굴이 곱게 단장하고 고운 옷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웠네. 그제야 서시가 얼굴을 찡그리자 못생긴 모모가 그 흉내를 냈다는 이야기를 비로소 믿게 되었다네.
잠자리에 들어서는 우는 듯 하소연하는 듯하더니, 십 년 전 옛일을 이야기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사뭇 다정하게 이야기하면서도 한마디도 틀리는 법이 없어 또 한 번 넋을 잃었다네. 그대는 한번 정겨운 사연의 글을 지어 이 일을 기록해 주게.
(용어) 서시는 중국 월나라의 이름난 미인이고, 모모는 그와 반대로 못생긴 여인을 가리키던 이름이다. 서시가 속병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자 그 모습마저 아름답다고 여긴 못생긴 여인 모모가 덩달아 얼굴을 찡그렸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표현으로, 못난 사람이 함부로 남을 흉내 낸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병오년, 1606년) 5월 (서기 1606년 6월 19일, 양력 추정)
연주에서 온 나그네가 대정강에 이르러 배 위에서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말도 못 하고 눈물만 그렁그렁하기에, 나는 차마 마주 보지 못했네. 배가 떠나려 하자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헤어지는데, 그 순간 강산이 온통 빛을 잃은 듯했으니, 만약 자네가 곁에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병오년, 1606년) 5월 (서기 1606년 6월 23일, 양력 추정)
18일에 대동강을 건너려 하자 박엽이 굳이 붙들었네. 다시 붙잡힐까 겁이 나서 몰래 강가의 작은 거룻배를 찾아가 강을 건넜는데, 그날 밤에는 이별한 마음이 사무쳐 잠을 이루지 못했네. 뱃전을 베고 누워 있자니 꿈속에서 배가 움직이기에 채염이 배를 미는 것이라 착각했다네. 놀라 깨어 보니 돛이 바람을 받아 배가 나아가고 있더군.
정오 무렵 생양 땅에 이르니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려 섬돌 옆 약초를 적셨는데, 주룩주룩 떨어지는 그 빗물이 마치 상강가에서 아황이 흘리던 눈물 자국과도 같았으니, 이런 때에 마음이 괴롭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심이 아닌 꾸며낸 말일 것이네.
(용어) 채염은 후한 때 학자 채옹의 딸로, 전란 중에 북방으로 끌려가 오랑캐 땅에서 살다가 훗날 고향으로 돌아온 기구한 사연으로 유명한 여인이다. 아황은 순임금의 아내로, 순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상강가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진다. 허균은 이 두 여인의 이야기를 빌려 이별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월 (서기 1608년 3월 1일, 양력 추정)
나는 큰 고을의 수령이 되었는데, 마침 자네가 사는 곳과 가까우니 어머니를 모시고 이리로 오게. 내가 마땅히 내 녹봉의 절반을 나누어 대접할 터이니, 결코 양식이 떨어지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네.
자네와 나는 처지는 다르지만 취향은 같고, 자네의 재주는 나보다 열 배나 뛰어난데도 세상에서 버림받기는 나보다 훨씬 심하니, 이 점이 나는 늘 기가 막힐 따름이네. 나는 비록 운이 기박해도 몇 차례나마 고을 수령을 지내며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지만, 자네는 입에 풀칠하기조차 힘들지 않은가. 세상에 불우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우리 같은 이들의 책임일세. 밥상을 마주할 때마다 몹시 부끄러워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으니, 어서 오시게. 자네만 온다면 이 일로 비방을 듣는다 해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겠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4월) (서기 1608년 5월 28일, 양력 추정)
자네 애첩은 몹시 깜찍하고 지혜로우니, 젊음이 잠깐이라는 것쯤은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네. 그런데 그 사람이 비구니가 되어 끝까지 절개를 지킬 수 있겠는가? 속담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했으니, 한번 힘써 보게나.
그가 비록 화려한 휘장과 맛 좋은 고아주 맛에 익숙해 있다지만, 눈 녹은 물로 끓인 차도 나름대로 특별한 운치가 있는 법이네. 혹시 그가 나를 찾아온다면 틀림없이 "하마터면 인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다"고 말할 걸세. 자네가 그에게 "날아가는 자 위에 올라타는 자가 있다"고 말해 준다면, 반드시 그 말에 마음이 움직일 걸세.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7월) (서기 1608년 8월 24일, 양력 추정)
처마에서 빗물이 쓸쓸히 떨어지고 향로에서는 향내가 은은히 풍기는데, 지금 벗 두어 사람과 함께 소매를 걷고 맨발로 방석에 기대어 하얀 연꽃 곁에서 참외를 쪼개 먹으며 번뇌를 씻어 볼까 하네. 이런 자리에 우리 여인이 빠져서야 되겠는가.
자네의 늙은 아내가 틀림없이 으르렁대며 자네 얼굴을 고양이 상판처럼 만들어 놓을 테지만, 늙었다고 겁먹고 움츠러들지 말게. 문 앞에서 기다리는 종이 종이우산을 들고 있으니 가랑비쯤은 넉넉히 피할 수 있을 걸세. 어서 오시게. 모이고 흩어지는 일이 늘 있는 것은 아니니, 이런 모임인들 어찌 자주 있겠는가. 흩어진 뒤에는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2월) (서기 1609년 1월 20일, 양력 추정)
이번 부임은 사람들의 비방을 잠재우려는 것일 뿐, 오래 있을 생각은 없네. 그런데 승문원 판교에 임명된 것은 승진할 기회이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친구들도 나를 말리며 "벼슬살이는 붉은 옷을 입는 정도면 충분하다"(당상관이 되었다는 뜻이다)고 했는데, 나 역시 그 말대로 그대로 있기로 했네. 다만 우스운 것은 원숭이가 자루 속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꼴이라는 것이네.
계륵이 대체 무엇이기에 감히 사람을 이렇게까지 뒤흔든단 말인가. 이런 때는 도연명이 마치 하늘 위 신선처럼 우러러 보이네.
(용어) 계륵은 닭갈비를 뜻하는 말로, 먹을 것은 별로 없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하찮지만 버리기 아까운 벼슬자리를 빗댄 표현이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월) (서기 1609년 2월 19일, 양력 추정)
내가 이번에 또 사신 행차를 따라가게 되어, 십 년 사이에 세 번이나 그 밑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어찌 지겹지 않겠는가. 사신 대감이 꼭 자네를 데려가고 싶어 하시네. 자네가 나오고 싶지 않다면 그만이지만, 세상에 뜻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부디 나와 주게. 우리 두 사람이 함께 기록을 맡아 가는 것도 즐거운 일이고, 서쪽으로 천 리 길을 가며 예전에 노닐던 곳을 다시 밟는 것도 유쾌한 일이네. 비록 임금이 돌아가신 때라 풍류와 여색을 즐기지는 못하더라도, 여관의 푸른 등불 아래 마주 앉아 향을 피우고 옛일과 오늘 일을 이야기하며 시를 지으면서 봄 석 달을 보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네.
우리 두 사람 다 이제 늙어 가는 처지라 함께 모일 날이 많지 않고, 남은 날도 얼마 되지 않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자네도 틀림없이 갓을 털고 일어설 걸세. 간절히 기다리겠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3월) (서기 1609년 4월 18일, 양력 추정)
신흠(호는 현옹)이 내 '채호영'이라는 시를 구해 보고는 몹시 칭찬하며,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도 따라오지 못한다고 했다더군. 이건 지나친 칭찬일세. 자네는 평소에 말이 많으니 부디 조심해서 함부로 주석 같은 것은 달지 말게. 한나라의 모형과 정현이 시경의 위풍과 정풍에 주석을 달았다가 본래 뜻에서 크게 벗어나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말깨나 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데, 자네도 그런 잘못을 본받으려는 것인가.
훗날 늙어서 절간에서 차 달이는 연기가 봄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보게 될 때, 남이 귀찮게 재촉하기를 기다릴 것 없이 스스로 재미있고 달콤한 이야기를 지어, 마치 노공의 북리지에 화답하듯 한다면, 이 세상에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책이 보태지는 셈이 될 것이네.
(용어) 노공의 북리지는 당나라의 손계가 지은 책으로, 그 시대 황제와 사대부, 평민들이 기생과 어울려 놀던 일을 적은 것이다. 노공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손계인 듯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3월) (서기 1609년 4월 18일, 양력 추정)
어젯밤 달빛이 대낮처럼 밝기에 문 밖으로 산보를 나갔더니, 안개 낀 버드나무가 무성히 우거지고 흩날리는 꽃잎이 옷깃에 스쳐, 그윽한 봄기운이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더군.
늙은 중이 아니고서야 어찌 외로이 홀로 앉아 그냥 지낼 수 있겠는가. 자네 집을 내려다보니 고요하여 사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더군. 향기 그윽한 방 안 원앙 이불 속에서 달콤한 꿈을 꾸고 있으리라 상상하니, 그 즐거움 또한 더할 나위 없었겠네.
나는 붉은 종이 두 장을 자네의 한리 자리와 바꾸고 싶네. 한리 자리 정도면 내 소원으로는 충분하다고 보네. 누가 자네더러 운수가 기구하다 하겠는가. 자네가 이 말을 들으면 우스워서 배를 움켜쥐고 웃을 걸세.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5월) (서기 1610년 6월 21일, 양력 추정)
병 때문에 연경(중국 베이징)으로 가는 사신 행차에 오르지 못한 죄로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네. 살아 있어야 벼슬도 있는 법이지. 이제부터는 호남 땅의 벼슬 없는 선비 한 사람일 뿐이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내가 이곳으로 옮겨 오고서 자네를 자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뻐하였는데, 몇 달이 지나도록 만나지 못했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서글퍼지는데, 자네가 찾아와 이 서글픈 마음을 풀어 줄 날은 더디기만 하니, 하루가 천 년처럼 지루하네.
물줄기 하나만 건너면 닿을 거리이니, 서둘러 얼른 오도록 하게.
양자점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돌아가신 자네 아버님은 문장이 매우 뛰어나 참으로 큰 문장가였네. 나는 글재주가 부족한데 어떻게 그분의 이름을 더 빛나게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바쁘게 짓느라 하고 싶은 말을 다 담지도 못했으니, 부처님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버리든 취하든, 그것은 오직 자네에게 달려 있네.
(용어) 양자점은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양경우를 가리킨다. 자점은 그의 자다.
양자점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들으니 그대는 먹을 것조차 넉넉지 못하다던데, 목화솜은 대체 어디서 났는가. 거절하자니 공손치 못한 것 같고, 받자니 차마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그대의 후한 뜻이 고마워 그것으로 속옷을 지어 입었네. 앉으나 누우나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겠네.
가을 산의 단풍과 국화 사이에서 두건을 비스듬히 쓰고 길게 시를 읊조리기에 딱 좋은 계절이니, 방장산(지리산을 달리 부르는 이름)의 바람과 안개가 모두 그대의 시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리라 생각되네. 간절히 그리는 마음, 이루 다 말할 수 없네.
이사상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0월) (서기 1609년 11월 11일, 양력 추정)
그대가 지은 윤씨의 비문 시는 참으로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명작이지만, 나에게 끼친 해가 매우 크네. 그대가 직접 지었다고 말한들 '여장'이라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걸세. 앞으로 어떻게 해명할 셈인가? 나는 이 일 때문에 무려 세 번이나 조정 관리들의 탄핵 논의에 올라야 했는데, 여러 사람의 변호 덕분에 겨우 빠져나왔네. 이번 일로 그 시가 나를 비방받게 한 것이 적지 않으니, 앞으로는 부디 조심하여 이런 일을 벌이지 말게나.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어무적(자는 어잠부)이 '매화나무를 베다'라는 시를 읊었던 일 말일세. 아,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네.
(용어) 이사상은 이원형의 자다. 이문학관이라는 벼슬을 지냈다.
모씨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2월) (서기 1607년 3월 12일, 양력 추정)
서쪽에서 온 사람이 전하기를, 나옹(화가 이정의 호)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통곡하며 피눈물을 흘리노니, 하늘이여 원통하도다. 나는 이제 누구와 함께 세상 바깥에서 노닐 것인가.
세상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소중히 여기지만, 나는 그의 사람됨을 소중히 여긴다네. (※ 원문에 두 글자가 빠져 있다) 알아줄는지 모르겠네. 풍류가 하루아침에 다한 듯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용어) 이 편지를 받은 사람의 이름은 원문에도 밝혀져 있지 않아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나옹은 조선 중기의 화가 이정의 호다.
모씨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8월) (서기 1607년 10월 5일, 양력 추정)
어젯밤 꿈에 나옹을 만났는데, 그가 죽음이 참으로 즐겁다고 말하더군. 이거야말로 삶을 훤히 꿰뚫어 본 사람의 말일세. 꿈에서 깨어 생각해 보니, 이 몸조차 본디 내 것이 아닌데 덧없는 인생살이의 온갖 일을 뭐하러 마음에 담아 두겠는가.
결국에는 벼슬을 던져 버리고 바다 위 갈매기와 벗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네. 이 마음은 맑은 물을 두고 맹세하듯 변함이 없네.
이나옹에게 보낸 편지 (을사년, 1605년 7월) (서기 1605년 8월 28일, 양력 추정)
석봉과 작별한 지 겨우 몇십 일밖에 안 되었는데, 느닷없이 부고를 들으니 가슴이 미어지고 살을 꼬집어도 놀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세상 사람들이 자네의 그림을 굳이 배대유(자는 자장)라는 이의 그림과 우열을 다투는 맞수로 여기고 있다는 점일세. 자네도 필시 이를 욕되다 여길 텐데, 정말 어떠한가?
(용어) 이나옹은 선조 시대의 화가 이정을 가리킨다. 삼대에 걸쳐 화가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열 살에 이미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다. 나옹은 그의 호이고, 자는 공간이다.
이나옹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월) (서기 1607년 2월 11일, 양력 추정)
큰 비단 한 필과 갖가지 무늬의 노랗고 푸른 비단을 우리 집 종아이 편에 함께 부쳐, 서경(평양을 달리 이르는 말)에 있는 자네에게 보냈네. 산을 뒤로 하고 시냇물을 마주한 집을 그려 주되, 다음과 같이 배치해 주게.
온갖 꽃과 곧게 뻗은 대나무를 천여 그루 심고, 가운데는 남쪽으로 향한 마루를 틔워 그 앞 토방을 넓게 하고, 거기에 패랭이꽃과 금선초를 심고, 괴석과 오래된 화분을 늘어놓아 주게. 동쪽 안방은 휘장을 걷어 두고 책 천 권을 진열하며, 구리 병에는 공작 꼬리깃을 꽂고, 산 모양으로 빚은 술동이는 비자나무 탁자 위에 놓아 주게. 서쪽 창문을 열어 두면, 사랑하는 첩이 나물국을 끓이고 손수 동동주를 걸러 화로에 데우는 동안, 나는 방 한가운데 방석에 몸을 기대고 누워 책을 읽고 있고, 자네는 (※ 원문에 두 글자가 빠져 있다)와 함께 곁에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즐기는 모습을 그려 주게. 다들 두건을 쓰고 비단신을 신되 도복에는 띠를 두르지 않은 차림이고, 한 줄기 향 연기는 발 너머로 피어오르며, 학 두 마리는 돌이끼를 쪼고, 산에서 자란 아이 종은 빗자루를 들고 와 꽃잎을 쓸고 있는 모습이면 좋겠네. 이렇게만 된다면 사람으로 태어나 할 일은 다 한 셈이라고 생각하네.
그림이 다 되거든, 마침 돌아오는 태징공(이수준의 자가 태징이다) 편에 부쳐 주시길 간절히 바라네.
서산노사에게 보낸 편지 (임인년, 1602년 2월) (서기 1602년 3월 8일, 양력 추정)
노스님께서 금강산으로 떠나셨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묘향산에 계셨습니까? 저는 벼슬살이에 매여 바쁜 탓에 신선이 산다는 산을 눈앞에 두고도 오르지 못하니, 이 고단한 삶이 언제나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는 노스님을 벗처럼 여기셨으니, 저 역시 대대로 이어 온 정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저희 부형의 친필 글씨가 모두 그곳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랏일이 마무리되면 반드시 절을 찾아 뵙겠으니, 노스님께서는 문을 열어 두고 기다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용어) 서산노사는 선조 때의 이름난 승려이자 승병장이던 휴정대사를 가리킨다. 속세의 성은 최씨이고, 서산은 그의 호이다.
서산노사에게 보낸 편지 (임인년, 1602년 3월) (서기 1602년 5월 6일, 양력 추정)
저는 번뇌의 씨앗에서 태어난 몸이라,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이 육신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제 몸속에서는 눈·귀·코·혀·몸·마음이라는 여섯 감각의 구멍이 서로 부딪치며 끝없이 다투니, 어떻게 다툼 없는 고요한 경지로 이를 다스리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남이나 저나 세상 만물은 모두 텅 빈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중생의 몸은 아득히 텅 빈 하늘과 같으니, 번뇌인들 어디에 발붙일 곳이 있겠는가." 라고 했는데, 이 말이야말로 제 처지를 그대로 말해 주는 듯합니다. 노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디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용어) 육착은 눈·귀·코·혀·몸·마음, 이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통해 온갖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이르는 불교 용어다. 무쟁삼매는 다툼 없는 이치에 온전히 머물러 다른 것과 다투지 않으며, 흐트러진 마음을 한곳에 모아 헛된 생각에서 벗어난 고요한 경지를 뜻한다.
서산노사에게 보낸 편지 (임인년, 1602년 4월) (서기 1602년 6월 4일, 양력 추정)
큰 깨우침을 내려주시고 또 어록까지 보내주셔서 며칠을 두고 읽었더니, 속세의 잡념이 말끔히 사라져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꽃을 들어 보이자 미소로 화답했다는 그 유명한 이심전심의 경지가 과연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이제야 알 듯합니다. 이제는 노스님 문 앞에 세워 둔 깃대를 제가 넘어뜨려야 할 성싶습니다.
(용어) 염화미소는 석가모니가 연꽃을 들어 보이자 다른 제자들은 그 뜻을 알지 못했으나 가섭만이 미소지었고, 이에 석가모니가 그에게 불법의 진리를 전했다는 옛이야기로, 말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으로 뜻이 통하는 것을 이른다. 찰간은 절 앞에 세우는 깃대인데, 예로부터 선승들 사이에서는 법력을 다투는 상대의 깃대를 쓰러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가렸다고 하며, 여기서는 노스님을 상대로 한바탕 겨뤄 볼 만하다는 자신감 넘치는 농담이다.
서산노사에게 보낸 편지 (임인년, 1602년 5월) (서기 1602년 7월 4일, 양력 추정)
도의 핵심을 가르쳐 주셨지만, 솔직히 말씀만 헛되이 쓰신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저 있는 것은 죄다 텅 비우고, 없는 것은 굳이 채우려 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타고난 성품대로 유유히 노닐고 인연 따라 거리낌 없이 지내다가 속된 마음마저 사라진다면, 성인의 경지가 뭐 그리 멀겠습니까.
다만 걱정되는 것은, 형체도 자취도 없는 그 마음이 대체 어떤 계기로 우러나오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오나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마땅히 노스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 노스님께서는 너무 심하게 다그치지 말아 주십시오.
송운대사에게 보낸 편지 (갑진년, 1604년 2월) (서기 1604년 3월 15일, 양력 추정)
대사께서는 아직 선의 오묘한 이치에 통달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아 움직이지 않게 하는 일이 반드시 온갖 인연을 말끔히 끊어 낸 뒤에야 되는 것이겠습니까? 조정에서든 저잣거리에서든 마을 골목에서든,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제가 듣기로 한 생각이 밝으면 그 한 생각이 곧 깨달음이고, 한 생각이 편안하면 그 한 생각이 곧 열반이라 하였습니다. 저는 다만 이 마음이 오래도록 고요히 가라앉아 맑아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용어) 송운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승려로, 법명은 유정이고 속세의 성은 임씨다. 승병을 총괄하는 자리에서 활약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일본에 건너가 강화를 맺고 돌아왔다. 사명대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송운대사에게 보낸 편지 (병오년, 1606년 1월) (서기 1606년 2월 21일, 양력 추정)
능가경 네 권은 바로 첫 조사인 달마 선사가 마음으로 전한 가르침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도 유독 구절을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조차 알기 어렵고, 나와 있는 주석도 깊이 있는 풀이가 없습니다. 토도 없는 원문만으로 그 뜻을 어찌 깨칠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만 번을 읽으면 저절로 통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에 이 경전의 판본이 없어서, 뒤에 공부하는 이들에게 그 혜택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제가 가지고 있던 중국본을 꺼내어 보내 드리니, 주지 스님으로 하여금 자금을 모아 간행하게 하십시오. 이 또한 좋은 인연이 될 것입니다.
해안 경석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0월) (서기 1608년 11월 22일, 양력 추정)
너는 무엇에도 집착하지 말되, 그렇다고 아무 감각 없는 완고한 텅 빔에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만약 자기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스승들이 은밀히 전한 가르침조차 다 남의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만약 본성을 본다면 마귀나 여우의 허튼소리조차 모두 오묘한 진리가 된다. 집착하는 순간 나와 남의 구별이 생기고 만다. 부디 조심하여라.
작은 선행 하나라도 게으르고 나태한 데서는 결코 나오지 않는 법이니, 힘써 정진하여라.
(용어) 해안 경석은 조선의 승려로, 호는 중관이고 속세의 성은 오씨이며 경석은 그의 승명이다. 휴정대사(서산노사)의 문하에서 배워 깨달음의 요체를 얻었고, 임제종의 정통 법맥을 이어받았다고 전해진다.
계랑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월) (서기 1609년 2월 20일, 양력 추정)
그대가 보름날 저녁에 비파를 뜯으며 '산자고'라는 노래를 읊었다고 들었소. 어째서 조용하고 으슥한 곳에서 하지 않고, 하필 윤씨 선정비 앞에서 그리하여 남의 흠을 잡기 좋아하는 자들 눈에 띄고, 떠난 사또를 기리는 비석을 시로 더럽히게 만들었소? 그것은 그대의 잘못인데 비방은 애꿎게 나에게 돌아오니 억울하기 짝이 없구려.
요즘도 참선은 하고 있소? 그리운 마음이 사무치오.
(용어) 계랑은 전라도 부안 지방의 기생으로, 시와 글에 능하고 노래와 거문고 솜씨도 빼어났다고 전해진다.
계랑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봉래산에는 가을빛이 한창 무르익었을 테니, 돌아가고 싶은 흥이 도도하게 이는구려. 그대는 필경 이 성성옹(허균 자신을 가리키는 별호)이 시골로 돌아가겠다던 약속을 어겼다고 비웃을 것이오. 그때 만약 한순간이라도 마음이 잘못 흔들렸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십 년이나 이토록 다정할 수 있었겠소.
이제야 알겠소. 풍류를 안다던 진회해(송나라 시인 진관)조차 참된 사내는 아니었으며, 헛된 생각을 끊어 버리는 것이야말로 몸과 마음에 이로운 일이라는 것을. 언제나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을는지, 종이를 마주하니 마음이 서글퍼지오.
성소부부고 제22권
10. 14:40
성소부부고 제22권 · 설부 1 · 성옹지소록 (인 및 상)
출처: 성소부부고 제22권, 설부 1, 성옹지소록 인(서문) 및 상권
배경: 1610년, 허균은 죄를 얻어 의금부 옥에 마흔두 날 갇혀 있다가 함경도 홍원(함산)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잠 못 이루는 옥중의 밤마다 평소 듣고 겪은 조정의 이야기와 기이한 일들을 두서없이 적어 두었는데, 귀양지에 도착한 뒤 이를 정리하여 엮은 것이 이 "성옹지소록"이다. 남의 흠을 들추는 내용과 인과응보·귀신·꿈·점술·음란한 이야기는 모두 지우고 194편만 남겼다고 밝히고 있다. 상권은 명나라와 조선의 외교 의전, 조정 관청들의 연혁과 권한 변화, 과거 시험과 벼슬살이에 얽힌 온갖 일화, 그리고 허균 자신의 두 형과 집안에 얽힌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어, 조선 관료 사회의 실제 돌아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이다.
성옹지소록을 쓰게 된 사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경술년(1610년), 나는 죄를 지어 순군옥(의금부의 옥)에 갇힌 지 마흔두 날 만에 함산(함경도 홍원)으로 귀양지가 정해졌다. 옥에 있는 동안 여러 날 사람도 만날 수 없는 데다 밤 또한 길어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등불을 켜고 화로에 불을 피운 채 이불을 두르고 홀로 앉아 있노라니, 문득 평소에 들었던, 조선 역대 임금 때부터 내려온 어진 사대부들의 행적이나 사건 가운데 후일 전례와 고사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들, 그리고 보고 들은 여러 기이한 일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에 종이를 가져다 붓을 녹여 가며 생각나는 대로 적어 상자 속에 넣어 두었다. 그러나 이는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글을 다시 다듬지는 않았다.
귀양지인 함산에 도착한 뒤로는 한가하여 하는 일이 없었다. 하루는 상자를 열어 보니 예전에 적어 둔 것이 있었다. 다 읽어 보니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생각이 들어, 순서만 조금 정리하여 그대로 옮겨 적었다. 그 내용이 대개 자잘한 일들을 적은 것이므로 "성옹지소록", 즉 "성옹(허균)이 자잘한 것들을 적은 기록"이라 이름 붙였다.
정리하는 사이에 남의 단점을 드러내는 내용은 지워 버렸고, 인과응보를 말한 것과 귀신 이야기, 꿈과 점술에 관한 것, 남녀 간의 음란한 내용들도 모두 지우고 나니, 남은 것이 백아흔네 개의 이야기였다. 웃고 이야기하는 자리에 보탬이 되고 정사에 빠진 것을 보충하는 데는 조금이나마 취할 것이 있으리라.
명나라 만력 39년(1611년) 신해년 4월 19일, 교산(허균의 호)은 쓴다.
명나라가 우리나라를 특별히 대우한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명나라가 우리나라를 대우하는 것은 다른 외국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임금이 세상을 떠나거나 즉위할 때 알리는 조서를 내리고, 조문하며 제사 지낼 때 예물을 내려 주고 사신을 보내 위문하는 것이, 마치 명나라 안의 제후국이나 황실의 친왕에게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대개 성종 문황제(명나라 영락제)가 우리 공정대왕(태종의 시호)과 매우 친밀하여, 그를 특별히 대우하고 격려한 것이 다른 왕들에게 하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에 우리도 지극한 정성으로 공경하고 예를 다하였다. 이 때문에 그 뒤로도 대대로 이 관계가 변치 않아 백 년이 지나도록 계속 은총을 받았고, 임진왜란 때에는 명나라가 온 힘을 다해 우리를 구제해 주어 마침내 우리 국토를 되찾고 나라를 다시 일으키게 하였으니, 아,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명나라 사신을 보내는 절차와 환관 사신의 폐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명나라 황제가 즉위하거나 맏아들이 태어나거나 태자를 책봉할 때마다, 그때그때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서를 내렸다. 사신은 한림원이나 감찰·간쟁을 맡은 관원 중에서 보냈고, 자잘한 일이 있으면 육부의 실무 관원을 보냈으며, 조문하고 제사 지낼 때도 이런 실무 관원을 보냈다.
우리나라 임금을 책봉하거나 세자를 책봉할 때는 환관을 사신으로 보냈는데, 환관을 시켜 조서를 보내는 것은 큰 은전이었다.
중국에서는 황실의 친왕이나 제후를 책봉할 때도 환관을 보내지 않는데 우리나라에만 보냈으니 그 영예로움이 이보다 더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중국에 들어가 환관이 된 자가 처음에 사신으로 오기를 황제에게 청하여 파견된 데서 비롯되었는데, 이것이 그대로 관례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이것이 말할 수 없이 큰 폐단이 되고 있다.
황장손 탄생을 알린 특별한 조서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중국 영락 연간(명나라 성조 때)에 황제의 맏손자가 태어났을 때는 조서를 보내 알리지 않았는데, 지금 황제는 을사년에 맏손자가 태어나자 특별히 한림원 수찬 주지번과 형과 도급사 양유년을 보내 조서를 반포하였으니, 이 또한 남다른 예우였다.
조선 임금들이 중국에서 받은 시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가 역대 임금 때부터 중국에서 받은 시호는 모두 아름다웠다. 그중 강헌(태조의 시호)과 강정(성종의 시호)이 가장 훌륭한 시호이고, 장헌(세종의 시호)과 소경(선조의 시호)이 그다음이며, 공헌(명종의 시호)이 또 그다음이다. 다만 인종은 그 훌륭한 덕에도 불구하고 "영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시호를 정하는 법에 "총애와 녹봉이 빛나고 큰 것을 영이라 하고, 너그럽고 편안하게 천수를 다한 것을 정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처럼 평범한 시호는 인종의 높고 빛나는 업적과는 걸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이를 서운하게 여긴다.
시호를 정하는 절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는 처음에 시호 제도를 중하게 여겨서, 정2품 이상의 실제 벼슬을 지낸 사람과 공신으로 추증된 사람이 아니면, 아무리 선량한 행실과 큰 공로가 있어도 시호를 내리지 않았다.
시호를 의논할 때는 먼저 봉상시(제사와 시호를 맡은 관청)에서 해당자의 행적을 적은 글을 받아 어울릴 만한 여러 시호 후보를 적어 이조로 보내고, 이조에서는 홍문관에 모여 이를 정하여 임금의 재가를 받았으니 매우 신중하게 처리하였다.
시호를 받을 만한 사람이 죽으면 그 집안에서는 곧바로 행적을 적은 글을 갖추어 담당 관청으로 보낸다. 죽은 이가 평소 내세울 만한 공덕이나 행실이 없더라도 그 집안에서는 시호를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쁜 뜻을 담은 시호가 내려도 사양할 수 없었다. 근래에는 이러한 풍조가 없어졌다.
처음에는 시호를 논의할 만한 집안이 있어도 나쁜 시호를 받을까 두려워 청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는데, 끝내는 이름난 신하와 큰 공로가 있는 사람까지도 따라서 시호를 청하지 않게 되었다. 이리하여 임금이 만대에 걸쳐 시행해야 할 상벌의 도구를 시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개탄할 일이다.
선조 때 낮은 벼슬로도 시호를 받은 학자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왕(선조) 때에는 벼슬을 추증받고 시호를 받은 사람이 많았다. 그중 생전에 낮은 관직을 지냈으면서도 시호를 받은 이로는 김굉필(시호 문경)과 정여창(시호 문헌), 서경덕(시호 문강)이 있는데, 이는 실로 특별한 은전이었다. 정암(조광조의 호) 선생도 벼슬을 추증받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나의 둘째 형(허봉)이 경연에 참석했을 때 미암(유희춘의 호) 선생의 시호를 청했으나, 임금은 다만 좌찬성으로 벼슬을 추증하도록 하고 시호를 내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의정부의 권한이 약해진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 의정부의 권한은 문종 이전에는 매우 높고 무거웠다. 아침마다 삼정승(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출근하면 육조 이하 해당 관청에서 각기 맡은 업무를 가지고 와서 뵙고 아뢰었다.
승정원에서 임금의 재가를 받은 모든 공무는 어느 것이나 다 의정부로 보내어, 대신과 동벽·서벽(품계에 따라 나뉜 자리)의 관원들이 함께 모여 알맞게 처리함으로써 나라의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참여해 결정하였기 때문에, 재상의 권한은 높고 나라의 체통도 엄중하였다. 그 뒤 세조가 왕위를 이어받은 이래로 이런 절차를 없앴기 때문에 의정부의 권한은 줄어들었고, 나라의 기강도 차츰 해이해졌다.
의정부 관원들의 잔치 풍습과 그 폐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의정부에서 공무를 처결하던 시절에는, 좌사인·우사인과 검상(모두 의정부의 실무 관원)은 모두 이조의 낭관 중에서 뽑았고, 사록 두 명은 으레 홍문관의 낮은 관원으로서 예문관 벼슬을 겸임하고 있는 자를 임명하였으며, 새로 급제한 사람 한 명을 녹사로 삼았다. 이들이 각기 여섯 부서를 나누어 맡아 종일 응대하느라 몹시 바빠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기생과 음악을 베풀어 즐기게 하였는데, 의정부에서 공무를 처결하는 일이 없어진 뒤에도 이런 풍습은 그대로 남아, 대신은 대청에 모여 앉았는데 사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노랫소리와 풍악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였다.
심지어는 돈과 곡식을 관장하는 낭관을 불러다 벌주를 먹인 다음 그 술값을 받아 내거나, 저잣거리의 부자를 잡아들여 공공연히 비용을 뜯어내는 등의 방법으로 재물을 거두어 창고에 쌓아 두고 광대와 기생에게 주는 화대로 쓰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것이 선조 때에 장령(사헌부 관원) 유몽학이 경연에서 이 폐단을 강력히 아뢴 뒤로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사인을 대하는 정승들의 서로 다른 태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둘째 형이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인으로 오래 재직하다 보면 그동안 많은 정승을 겪어 보게 되는데, 그중 정승 권철은 성품이 매우 엄숙한 분이었지만 자신도 사인 벼슬을 거쳤기 때문에 사인들의 술잔치를 매우 기쁘게 여겼고, 노랫소리와 풍악 소리가 온 천지를 진동해도 모르는 척하였다. 반면에 정승 노수신은 매사에 지극히 너그러운 분이었지만, 사인들이 술자리를 벌일 때면 언제나 '노래와 풍악이 너무 소란스럽다'며 여러 차례 이를 금지시켰다. 이는 그분이 사인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검상이라는 벼슬 이름의 유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검상(의정부의 실무 관원)은 형조 상복사(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신중히 재심하던 부서)의 정랑을 관례상 겸임하였다. 그래서 예전에는 형조 낭관청 서편에 북루가 있었고,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곳을 검상청이라 부른다.
전례와 옛 기록을 관리하는 관청이 없는 아쉬움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는 전례와 고사를 전담하는 관청이 없다. 각 관청마다 마땅히 지난 기록을 모아 둔 등록이 있어야 할 텐데도 모두 없다. 역대 임금들의 길례와 흉례에 대해서도 모아 기록해 놓은 것이 없다. 그래서 한 시대의 제도와 그 변천을 살펴볼 길이 없다.
예전에는 의정부에 가각고라는 것이 있어 녹사가 맡아 관리하였다. 이곳에는 임금의 모든 지시와 대신들이 올린 의견, 군사와 나라의 중요한 문서들을 모두 보관해 두고 필요할 때 참고하도록 하였는데, 성종 이후로는 없어져서 더 이상 시행되지 않는다.
가각이라는 이름은 송나라 때의 관제에서 왔다. 송나라에서는 학문에 능한 신하를 뽑아 이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중서성과 추밀원 두 곳에 모두 두었다. 이는 대개 옛 전례와 고사 자료를 모으고 조사하기 위해 둔 제도였다. 우리나라도 초기에는 이를 본떠서 설치했던 듯하다.
사간원의 권한이 줄어든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사간원은 예전에 승정원에 딸려 있었다. 좌사간·우사간·좌사의·우사의를 두었는데, 이들은 당상관으로서 이름에 "대부"라는 두 글자를 붙여 불렀고, 이 밖에 헌납과 정언을 두 명씩 두었다. 이들이 각기 여섯 부서를 나누어 맡았고, 날마다 교대로 당직을 섰다.
무릇 여러 관청과 각 도로 내려지는 공문은 반드시 사간원을 거치게 되어 있었는데, 그중에 온당치 못한 것이 있으면 논박하여 되돌려 보냈다. 이는 중국의 육과(황제의 명을 살피고 되돌리는 여섯 부서)의 규정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간관과 사헌부를 따로 두어 서로 맞서는 두 관청으로 만든 다음, 사의대부는 없애고 대사간·사간·헌납·정언 두 명만을 두었다. 이때부터 임금의 명을 되돌려 보내던 일은 맡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여러 관청과 각 도에서 위에 청하여 이전의 지시를 고치는 것에 온당치 못한 점이 많아도, 사헌부와 사간원이 이를 규찰하여 바로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의금부의 유래와 그 권한 변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의금부는 옛날 중국의 집금오(궁궐과 도성을 지키던 벼슬)에 해당한다. 고려에서는 순군부라 하였는데, 상만호·부만호를 두어 궁궐을 지키는 친위군을 관장하였다.
처음에는 옥을 설치하여 친위군 가운데 군령을 어긴 자를 가두던 곳이었다. 중기에 와서는 국왕이 직접 죄수를 판결하였고, 조정의 신하로서 임금의 뜻을 거스른 자도 바로 이곳에 가두었다. 대개 당시 사대부는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죄를 지으면 모두 사헌부의 옥에서 다루었고, 임금이 직접 다루는 옥이나 특명으로 다스리는 옥은 따로 없었다. 말엽에 와서는 이곳이 벼슬아치만을 다루는 옥이 되어, 관직에 있는 자의 범죄는 모두 이곳에서 다루었다.
우리나라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따르다가 얼마 안 가서 곧 의용순금사로 이름을 고치고 판사·지사·동지사 네 명을 두었다. 낭관은 문관과 무관을 섞어 임용하였으며, 궁궐을 지키는 친위군을 거느리는 것은 고려 때와 같았다.
그 뒤 의금부로 이름을 고치면서 군사를 거느리는 권한은 없어지고 임금이 직접 관여하는 옥으로서 죄수를 판결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삼았으며, 임금의 행차가 있을 때와 안팎의 출입 금지 구역에 낭관이 하인들을 거느리고 가서 비상시에 대비하여 경계할 뿐이니, 이 또한 처음 관직을 설치한 본래의 뜻을 잃은 것이다.
부원군이라는 칭호의 유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지금은 공신으로서 정1품에 오른 사람을 으레 부원군이라 부르는데, 이 또한 본래의 뜻을 잃은 것이다.
고려에서는 대신을 으레 군에 봉하였고, 추밀원을 거쳐 문하부의 관직을 지낸 자는 두 관부의 벼슬을 두루 거쳤다 하여 그 관함을 부원군이라 하였다.
이 말은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으니, 성균관의 하례가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축하할 때 낮은 관직에서부터 삼정승 자리까지 좋은 관직을 죽 부르다가 끝에 가서 "부원군"이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영돈녕부사 두 명을 둔 일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1품이라 해서 정승이 아닌데도 부원군이라 부르는 것도 잘못된 일이다. 영돈녕부사는 《경국대전》에 한 사람만 두도록 되어 있는데, 지금은 특별히 두 사람을 두고 있으니 이는 지금 임금의 뜻이다.
무신년(1608년) 2월에 성영이 정권을 잡자, 연흥부원군 김제남을 영돈녕부사에서 물러나게 하고 문양부원군 유자신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기를 청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성영이 아첨한다고 하였으나, 조선 초기에도 이런 전례가 있었다고 한다.
동인과 서인이 갈라진 발단, 이조 낭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관직은 이조의 낭청이다. 직제학 이하 청요직(명망 있는 요직)에 사람을 올리고 내리는 일은 모두 낭청이 전담하고, 당상관은 이들의 의견을 그대로 따를 뿐이다. 그래서 이조 낭청으로 뽑히기가 매우 어려우며, 사화의 대부분이 바로 이 자리를 둘러싼 다툼에서 비롯되었다.
근래에 동인과 서인이 갈라진 것도, 나의 장인인 김인백(자가 인백, 본명 김효원)이 판서 심충겸이 전랑(이조의 인사 담당 낭관) 자리에 뽑히는 길을 막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서, 선비들의 논의가 지금까지도 갈라져 있다.
김응남이 당쟁을 돌아보며 한 말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승 김응남이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임금의 외척을 전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처음의 논의는 참으로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심충겸이 나랏일에 애쓰는 것을 보니 참으로 충신이다. 그때 선비들의 논의를 지나치게 따랐던 탓에 결국 붕당으로 갈라지고 말았으니, 이 점이 후회스럽다."
계미년(1583년)에 선왕(선조)께서 명하여 이조 낭관이 인사를 추천하는 관행을 폐지하였는데, 병조는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이조 낭관의 빠른 승진과 외직을 꺼리던 풍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옛 규례에 따르면 이조의 낭관은 좌랑(정6품)으로 서른 달을 재직하면 정랑(정5품)이 되고, 정랑에서 다시 서른 달을 재직하면 곧바로 의정부 사인(정4품)으로 승진하였으며, 한 달을 넘기기 전에 당하관 정3품에 올랐다. 여기서 다시 두어 해도 안 되어 당상관이 되었다. 미움을 받거나 선비들의 비판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난 경우에도, 차례를 건너뛰어 승진시키는 일에 급급해서 일 년 안에 반드시 다음 자리로 옮겨 갔다.
찰방(종6품)·판관(종5품)·도사(종5품) 같은 지방 관직은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고 싫어하여 피하고 가지 않으려던 자리였는데, 근래에는 이런 풍조가 사라졌다. 송인수와 김숙도는 모두 찰방으로 나갔고, 오여익은 늙은 아버지를 집에 두고 경성 판관으로 나갔는가 하면, 송홍보는 4품 벼슬을 지냈는데도 전라도사로 나갔으니 매우 이상한 일이다. 이러한 일은 모두 벼슬을 신중히 내리지 않아 요행으로 자리를 얻는 자가 많아진 데서 비롯된 것으로, 결국 사람들이 벼슬살이를 가볍게 여기게 되어 그리된 것이다.
병조의 권한이 비변사로 넘어간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시하는 곳은 병조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 병조 판서가 된 사람은 대부분 변방의 사정을 아는 사람을 뽑아 오래도록 맡겼다. 김종서 같은 이는 십 년 동안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이계동과 유담년은 무신이었으나 역시 십수 년 동안 나라의 군무를 도맡아, 작은 일은 모두 스스로 결단하고 큰일만 대신에게 아뢰었으며, 대신도 그의 조치를 따르고 조금만 손질할 뿐이었다.
비변사가 설치되면서부터는 크고 작은 군사 업무의 처리를 모두 비변사에서 맡게 되었는데, 실무를 맡은 당상관 몇 사람이 전적으로 관장하고 정승의 지시를 받아 시행하였으므로 병조는 멍하니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근래에는 지방의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까지도 비변사에서 뽑게 되어 병조의 권한이 더욱 줄어들었다.
대동법의 뿌리, 공물 제도의 폐단과 개혁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 공물 제도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연산군 때 처음 만들어졌다는 사람도 있지만 틀린 말이다. 성현(호 용재)의 말에 "성종 때 비로소 예산 명세서(횡간)를 만들었다" 하였으니, 연산군 때 시작된 것이 아니다.
찬성 이이가 이 제도를 고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갑오년(1594년)에 서애 선생(유성룡)이 나랏일을 맡았을 때 비로소 줄여서 다시 정하였으나 백성들의 고통은 오히려 심하였다.
근래에 오리 정승(이원익)이 선혜청을 설치하고 먼저 경기 지방에 시행하였는데, 경기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긴다. 그래서 능묘를 조성하는 일과 두 차례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치렀는데도 백성들이 큰 부역인 줄을 모르니, 그 효과가 이미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 어떻게 하면 팔도를 다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오례의를 정한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 쓰는 《오례의》(다섯 가지 국가 의례를 정리한 책)는 세조 때 신문충공(시호 문충, 신숙주)이 정승으로 있으면서 총괄하여 정한 것이다. 이는 당나라의 《개원례》를 본뜨면서 옛 예법도 참고한 것이다. 모든 것이 사리에 맞고 편리하여 시행한 지 백여 년이 되도록 폐단이 없었다.
선왕(선조) 때에 와서 유학자들이 오로지 옛 예법만을 따르면서 고친 부분이 많았는데, 간혹 서로 어긋나서 시행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이로써 옛사람들도 시험해 보지 않은 바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세 판서 자리를 비교한 큰형의 말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맏형(허성)이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조·예조·병조 세 판서 중에서 병조 판서는 몸은 힘들어도 계획을 세우는 것은 힘들지 않고, 이조 판서는 계획을 세우기는 힘들어도 마음까지 피곤하지는 않은데, 예조 판서는 마음과 몸이 다 피곤하다." 이는 대개 조정의 큰 의례는 반드시 예조 판서가 총괄하는데, 갑작스레 변통해야 할 예법이라도 생기면 늘 근거가 없음을 걱정하며 이를 정하는 동안 많은 신경을 쓰게 되기 때문에 한 말인 듯하다.
형조의 권한이 줄어든 사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형조는 나라를 세운 초기에는 업무상 권한이 사헌부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형벌과 옥사에 관련된 사건은 "형조에서 아뢰기를……" 하면서 직접 탄핵하였는데, 이런 관행이 언제부터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법을 어기는 것을 금하는 점에서는 사헌부와 같고, 도둑을 처벌하는 기능에서 보면 의금부의 권한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공조 창고를 유독 엄히 감독하는 까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공조는 다른 관청들과 마찬가지로 육조의 하나인데도, 창고의 물품을 출납할 때면 반드시 사헌부 감찰을 불러 놓고 출납한다. 그뿐 아니라 호조의 낭관이 수시로 그 창고를 순회하는데, 마치 호조 자신의 창고를 도는 것과 다름없이 하니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노비 소송을 형조가 아닌 장례원에서 맡는 까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형조가 관장하는 업무는 옥사를 다스리는 것만이 아니라, 숨은 인구를 찾아내는 일도 전담한다. 그러므로 중국 조정에서는 해마다 호구책을 반드시 형조에 해당하는 관청에 보내고, 그 관청이 이를 접수하여 위에 아뢰어 재가를 받은 뒤에 호적을 다루는 관청에서 보관하는 것이 관례다.
우리나라에서는 호적 장부를 모두 호조에서 다루고 형조는 관여하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노비에 관한 소송도 모두 장례원의 판결에 따르고 있는데,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노비를 관장하는 업무도 예전에는 형조에 속해 있어서 도관사가 노비 관련 소송을 전적으로 다루었는데, 지금은 별도로 관청(장례원)을 두어 관제만 번거로울 뿐이다.
승지 자리의 무게와 박원종의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승정원은 임금의 말을 전달하는 곳으로서 그 임무가 매우 중요하므로 조정에서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당상관 중에서도 이조나 사간원의 대사간을 지낸 사람이라야 겨우 맡을 수 있었다.
평성군(봉호가 평성) 박원종 같은 사람을 승지로 임명하였다가,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자리를 바꾸어 병조 참의를 내린 것이 이런 경우다.
근래에는 승지에 대한 물망이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보다 아래에 있다. 또 조선 초기부터 반드시 무신 한 사람씩을 승지로 참여시켰는데, 이는 대개 그 사람의 명망을 키워 훗날 크게 쓸 밑거름을 만들고자 해서였다. 그래서 서북 지방(서쪽은 황해·평안도, 북쪽은 함경도)의 장수는 모두 승정원을 거친 사람 가운데서 임명하였다. 그런데 근래에는 선왕(선조) 때의 남언경과 양사형 이후로는 한 사람도 없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승지가 된 이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근래에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서 승지가 된 사람은 내암(정인홍의 호)과 한강(정구의 호) 두 사람이다. 한강은 예방 승지로서 전시(임금이 참석하는 마지막 과거 시험)의 시험관이 되었으니 이 또한 특이한 일이다.
얼마 전에 강명지(자가 명지, 강복성)가 승지에 임명된 것은 임금이 세자 시절부터 그를 가르친 스승이었던 수고 때문이었다. 간옹(홍가신의 호)은 비록 승지는 되지 못했지만 형조 판서가 되었고, 서인원은 강원도 감사가 되었으며, 이 밖에 참의가 된 사람은 겨우 두세 명뿐이다.
선왕(선조) 때에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얻은 벼슬(남행)로 사헌부 벼슬을 한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과감하게 직언하여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이도 있었다. 간옹이 장령(사헌부의 정4품 벼슬)으로 있을 때 "안여경을 부윤으로 임명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아뢰었는데, 임금이 이에 노하여 안여경을 부윤 자리에서 물러나게 함과 동시에, 이후로는 과거를 거치지 않은 사람을 사헌부 관원으로 삼지 못하게 하였다.
4조 낭관에 남행 출신이 늘어난 사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왕(선조) 초년에는 형조·공조·호조·병조 네 관청의 낭관을 과거를 거치지 않은 사람(남행)과 무과 출신을 섞어 임용하였는데, 모두 명망 있는 사람 중에서 골랐다.
중년에 들어서는 이를 뽑는 일을 매우 신중히 하여 남행과 무과 출신은 일절 임명하지 않다가, 대신들이 경연에서 예전처럼 남행과 무과에서도 뽑는 제도를 되살리자고 청하여 겨우 이경욱이 호조 낭관, 이경준이 형조 낭관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모두 승진하였다. 전란 뒤에는 인재가 부족하여 되는대로 구차하게 자리만 채웠다.
근래에는 네 관청 낭관의 절반 이상이 남행 출신인 데 반해, 문관으로서 등용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백여 명이나 되므로 이를 논의하는 사람들이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문관으로서 형조와 호조의 낭관이 된 사람들도 대부분이 시험을 거쳐 뽑힌 사람이 아닌 데다 무능한 자들이 많다. 이 때문에 당상관으로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남행 출신 낭관을 찾게 된다. 이는 현재의 상황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감찰의 위세가 예전만 못한 사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감찰(사헌부의 실무 관원)의 임무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고려와 우리나라 초기에는 이를 뽑아 임명하는 데 매우 신중을 기하였다. 관청에 참알할 때마다 대관(사헌부 관원)의 잘못을 종이에 적어 품에 간직했다가 달려 들어가 뜰에 떨어뜨렸다. 재상 중에 탐욕스럽고 부패한 자가 있으면 밤에 그 집 문간에 모여서 대문에 먹을 칠했다. 그러면 그 재상은 감히 조정에 나오지 못했고 조정에서도 다시 등용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사헌부에 나올 때면, 비록 왕자나 대신이라도 이들을 만나면 말에서 내렸다.
지금도 뜰에 달려 들어가는 예법과 먹을 묻힌 자를 지니는 것은 예전과 같으나, 잘못을 적은 글을 품에 간직하는 것과 대문에 먹칠하는 것은 시행되지 않은 지 오래다. 사헌부에 나올 때 왕자나 대신이 말에서 내리는 것은 예전과 같다고 한다.
감찰을 청하는 값과 재종형 "강홉랑" 이야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각 관청에서 연말에 감찰의 검사를 청할 때는(청대) 그 관청의 아전이 사헌부에 값을 치르는데, 이 일은 수석 아전이 파견된 감찰과 의논한다. 이때 어물어물 너그럽게 처리해 주는 감찰인 경우에는 값이 비싸고, 강직하고 꼼꼼해서 속일 수 없는 경우에는 값이 싸게 마련이니 그 유래가 오래된 일이다.
나의 재종형인 허체는 감찰로 있었는데, 성품이 매우 총명하고 꼼꼼하여 아전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았으며, 또 모질고 박정해서 숨긴 것을 찾아내기를 좋아하였다.
하루는 혜민서(의약을 맡은 관청)의 약재 담당 아전이 형의 집에 와서 약을 짓고 있기에, 내가 장난삼아 "요즘 감찰에게 주는 값이 가장 싼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물었더니, "허 감찰은 피 쭉정이 다섯 홉입니다" 하였다. 이에 온 집안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전해 가며 웃었고, 재종형을 "강홉랑"(쭉정이 다섯 홉 도령)이라고 불렀다.
집현전에서 홍문관으로 이어진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선에서는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학에 능한 선비를 가려 뽑아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게 하였다. 인원은 스무 명을 두었는데, 그중 열 사람은 경연관을 겸임하고 열 사람은 세자를 가르치는 서연관을 겸임하였다. 교대로 숙직하였고 임금의 은혜와 예우가 특별하였는데, 세조 때 이를 폐지하고, 다만 문관을 뽑아 예문관 응교를 겸임시켜 경연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 뒤 성종 초에는 예문관에 부제학 이하 수찬까지 모두 열일곱 명을 두어 경연관을 겸임시켜 집현전의 옛일을 잇게 하였는데, 얼마 뒤 홍문관으로 이름을 고쳐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예문관이라 부르던 시절에, 노분(자가 사문)이 교리로 있다가 죽었는데, 그 증손 노사회가 수령으로 부임하며 신원 조사(서경)를 받을 때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모두 "홍문관을 예문이라 잘못 썼다"며 서류를 되돌려 보냈는데, 이는 모두 옛일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문형이라는 칭호를 얻는 조건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선 초기에는 과거의 상시관을 맡은 사람이 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대사성을 겸해야 "문형(문단의 저울대, 즉 문단의 우두머리)"을 맡았다고 하였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비록 상시관의 일을 실제로 하더라도 문형에는 끼지 못하였으니, 안지와 박원형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성종 이후로는 홍문관·예문관 두 곳의 대제학과 성균관을 관장하는 지성균관사를 겸임해야 문형을 맡았다고 하였다.
홍문관 당직을 둘러싼 완평부원군의 인정 많은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홍문관에 당직 서는 일은 누구나 괴롭게 여겨 피하려 들지만, 선왕(선조) 때의 승지 성낙은 유독 더 당직을 거절하였고, 당직을 서더라도 곧 나가 버리곤 하였다.
그때 나의 둘째 형과 판중추부사 김수, 이조 판서 김찬, 호조 판서 이성중, 완평부원군 이원익, 좌의정 김응남이 함께 홍문관에 있었다. 이들이 서로 약속하기를 "성낙이 당직에 들거든 정해진 날짜대로 교대해 주지 말자" 하였다. 이런 약속이 있은 뒤, 성낙이 당직을 선 지 겨우 하루 만에 또 나가려 하여 홍문관의 아전을 몹시 심하게 매질하며 다그쳤다. 이에 아전이 여러 집을 다니며 교대해 줄 사람을 알아보았지만 모두 거절하였다. 남은 사람은 완평부원군뿐이었으나, 당직을 막 마치고 나온 터라 감히 청하지 못하였다. 일이 급해지자 시험 삼아 찾아가 부탁하니 완평부원군도 처음에는 응하려 하지 않다가, 아전이 서럽게 울면서 "여든 노모가 추운 옥중에 갇혀 계신데 이러다 돌아가시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하였다. 그때 완평부원군도 노모를 모시고 있던 터라 측은한 마음이 들어 교대를 허락하였다. 아전은 뛸 듯이 밖으로 나와서는 손뼉을 치며 "이 교리는 참으로 성인이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밤중 경연 술자리에서 이름을 날린 두 주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대개 임금이 밤중에 신하를 불러 만나는 야대가 있는 날에는, 반드시 임금이 술을 많이 권하여 흠뻑 취한 뒤에야 자리를 끝내었다. 술잔이 돌아오면 주량이 적은 사람은 실수할까 걱정되어 머뭇거리며 즉시 마시지 못하였다.
나의 둘째 형은 대개 큰 잔으로 마셨는데, 잔이 돌아오면 즉시 다 마셔 버렸다. 술을 따르는 내시는 아직 술이 남았으리라 생각하고 머뭇거리며 잔을 되받지 않았으나, 임금은 형이 벌써 다 마신 것을 알고는 웃곤 하였다.
당시에 술 마시는 사람 중에서 승지 강서가 형의 맞수였는데, 홍문관의 아전이 장부에 "허 전한과 강 교리는 술을 아낀다"라고 써 놓았는데, 여기서 "아낀다"는 것은 사실 "좋아한다"는 뜻으로 쓴 말이라, 보는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홍문관의 술 솥에 이름을 새긴 두 사람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홍문관에는 술 닷 되들이쯤 되는 무쇠솥이 하나 있는데, 이것으로 시원하게 단숨에 마시면 그 이름을 솥에 새겼다. 솥에 이름이 새겨진 사람은 예전에는 김천령뿐이었는데, 둘째 형의 이름이 비로소 그 뒤를 이어 새겨졌다.
예문관 신참 시절의 엄한 위계와 중시 장원 이야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승문원·성균관·교서관·예문관 네 관청의 풍속 가운데 아랫사람을 단속하는 것이 가장 심한 곳은 예문관이다. 자리마다 위계가 엄중해서 마주 앉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당직에서 마음대로 나가는 것도 용납되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방자하게 굴면 심한 매질을 당하였다.
갑오년(1594년) 여름에 내가 사관(역사 기록을 맡은 벼슬)으로 천거되었으나 상복을 입게 되어 시험에 응하지 못하였고, 정유년(1597년) 봄에야 비로소 예문관에 들어갔다.
심대(자 중경)와 이대중 등은 모두 나보다 늦게 관직에 들었는데도 나보다 윗자리에 있으면서 몹시 까다롭게 굴었다. 그때 다시 보는 과거 시험(중시)이 있었는데, 규정상 한림원의 아랫사람은 응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이 두 사람에게 응시를 청하였더니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시험을 며칠 앞두고 내가 공무상의 일로 파직되는 바람에 오히려 시험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뽑혔다.
예조의 낭관으로 임명되어 임금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대궐에 들어갔을 때, 윗자리에 있던 심학이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심중경이 사헌부·사간원에서 올라온 말을 접수하여 심학이에게 알리러 들어왔다. 관례상 선배가 그 자리에 있으면 후배가 먼저 선배에게 인사한 다음 윗사람에게 말을 전하게 되어 있었다.
이날 심중경이 먼저 내 앞에 엎드려 인사하고 나가므로, 내가 "중시에서 장원한 것은 별로 기분 좋은 줄 몰랐는데 이제야 기분이 좋다" 하였더니, 심학이가 크게 웃었다.
중시 장원 급제자들의 계보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선에서 맨 처음 시행한 중시(현직 관원을 대상으로 다시 보는 과거)에서는 춘정(변계량의 호)이 장원하였고, 그다음 회에는 김자가 장원하였으나 그의 답안은 사실 양여공이 대신 지어 준 것이었다. 양여공은 문장에 능했다. 그 뒤에 장원한 하동부원군 정인지, 남수문, 근보(성삼문의 자)는 모두 이름난 대가였다.
이영근은 나이도 어리고 명망도 없었는데 갑자기 장원하고, 김수온과 서거정이 도리어 2등과 3등에 그치자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으나, 이영근도 실은 글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 이후로도 중시에 합격한 사람은 모두 문장으로 이름난 사람이었는데, 나같이 재주 없는 사람이 그 안에 끼었으니 과분한 일이다.
중시를 대하는 사대부들의 서로 다른 태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선 역대 임금 때 사대부는 중시를 가장 중히 여겼다. 모재(김안국의 호)가 중시를 준비할 때 표문과 대책문을 많이 연습하였는데, 시험장에 들어가 보니 평소 대책문에 능한 대사헌 권홍도 응시한 것을 보고 모재가 말하기를 "내가 장원하려 하였는데 이분이 응시하였으니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발표하는 날 보니 과연 권홍이 장원이고 김안국은 2등이었다. 그런데 선왕(선조) 이후로는 이름난 관원은 으레 응시하지 않는데, 이것을 좋은 일로 여기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무릎을 꿇지 않으려던 사람들 이야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명종 11년(1556년) 중시에서 김홍도는 대책문은 짓지 않고 술만 마시면서 "이 무릎을 남에게 굽힌 적이 두 번밖에 없는데, 지금 양응정이 응시하였으니 내가 이연성 꼴이 될까 두렵다" 하였다. 이는 대개 연성군 이석형이 한 해에 세 번이나 장원하였으나 중시에서는 6등에 그치자, 근보(성삼문)의 집에 가서 절을 하며 "이 무릎을 남에게 굽힌 지 오래되었소" 한 데서 나온 말인데, 근보가 웃으며 "남에게 굽히지 않던 무릎을 내가 굽혔군" 하였다는 고사이다. 김홍도 역시 진사시와 문과에서 연이어 장원하였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대필 답안을 알아본 시험관의 안목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성종 17년(1486년) 중시에 정승 강귀손이 응시하였는데, 마침 그의 장인의 아우인 허백(성현의 자)이 승정원의 도승지로 궁궐 안에 있었다. 강귀손의 아버지인 진산(진산군 강희맹)은 오위도총부의 총관으로 당직을 서다가 허백에게 "우리 집안에서 잇달아 장원하는 것도 좋은 일이니, 그대와 내가 귀손의 대책문을 지어 주는 게 어떻겠나?" 하였다. 이리하여 서두에서 중간까지는 강희맹이 짓고, 그 뒤부터 끝까지는 성현이 지어서 강귀손에게 그대로 베껴 내도록 하였다.
당시 시험관이었던 사가(서거정의 호)와 삼탄(이승소의 호)은 모두 무릎을 치며 감탄하고 마땅히 1등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상시관으로 참석했던 괴애(김수온의 호)는 자는 척하며 귀담아듣지 않았다. 다른 시험관들이 의견을 물으니 "등수를 고치라"고 하였다. 다시 물어봐도 같은 대답이었다. 밤이라 피곤해서 그런가 하고 답안을 보관해 두었다가 새벽에 다시 읽어 보고 다시 의견을 물으니, "차상(그다음 등급)으로 매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모두들 이상하게 여겨 "이 글이 매우 훌륭한데 어째서 등수에도 들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김수온이 웃으며 "이 글의 작자가 성씨나 강씨 집안의 자제가 아니라면 마땅히 장원감이다" 하였다. 급히 답안지의 이름 봉한 부분을 뜯어 살펴보니, 과연 강 정승의 글이었다. 김수온이 "나는 강희맹과 함께 공부하였고 성현은 나에게 배웠으니, 그들의 글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저기까지는 강의 글이고 저기서 여기까지는 성이 지은 것이다. 내가 어찌 그들에게 속아서 나라의 시험을 그르치겠는가" 하니, 모두가 탄복하였다. 결국 강귀손의 답안은 빼 버리고 신종호를 장원으로 뽑았다고 한다.
문과 장원보다 사마시 장원을 더 귀하게 여긴 풍속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의 풍속은 문과의 장원은 그리 중시하지 않고, 사마시(생원시·진사시)의 장원을 더 귀하게 여긴다. 사마시는 문장의 우열을 따지지 않고 1, 2등 십여 명을 뽑으며 사람됨을 가려서 뽑기 때문에, 한번 합격자 명단에 들면 평생토록 존경을 받는다.
조선의 이석형과 배맹후는 생원시와 진사시 모두에서 장원하였다. 모재(김안국)가 이를 흠모하여 생원시와 진사시 두 시험에 모두 응시하였다. 둘 다 잘 지어 마땅히 둘 다 장원이 되어야 했으나 시험관이 한쪽 시험의 등수를 깎아 2등으로 만들었으므로, 모재는 늘 마음속으로 이를 분하게 여겼다.
그 뒤 자신이 시험관이 되었을 때, 김구가 두 시험장에서 지은 글이 나란히 1등감이었으므로 힘써 주장하여 두 시험 모두에서 그를 장원으로 뽑았다고 한다.
독서당의 연혁과 인재 양성의 전통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세종 때 처음으로 독서당을 설치하여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함으로써(사가독서) 훗날 크게 등용하려 하였는데, 당시에는 산속 절에서 책을 읽는 경우가 많았다.
맨 처음에는 권채·신석조·남수문이 사가독서를 하였고, 다음은 성삼문·신숙주·박팽년이 하였으며, 또 그다음은 이석형·최항·성간·이영서·하위지·이개·김수온·서거정·이승소·강희맹이 잇따라 하였다.
문종 때에는 홍응·홍귀달·어세겸·박기년이 사가독서를 하였다. 흉년이 들면 이 제도를 중단하였고, 특별한 이유 없이 사가독서를 시키지 않은 때도 있었다.
성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성현·채수·조위·허침·양희지·권건·유호인 등에게 용산사에서 책을 읽도록 하였다. 이때부터는 결원이 있으면 보충하였고, 동호(한강 동쪽 호수)에 독서당을 지어 어엿한 하나의 관청이 되었다.
중종 때에는 시험하여 성적을 매기는 방법이 매우 엄해져서, 잇달아 두 번 낙제하면 도태시켰다. 이들에 대한 특별한 은전과 대우는 홍문관에 못지않았는데, 전란이 일어나자 폐지되었다.
지금 임금(광해군) 초년에 대신과 의논하여 다시 설치하도록 명하여 이이첨 등 열두 명을 선발하였으나, 이듬해에 흉년이 들어 우선 중단하였다.
독서당원은 마흔 살이 안 된 사람 중에서 뽑는 것이 관례였는데, 청련(이후백의 호)이 처음으로 마흔 살에 뽑혔고, 이이첨은 마흔여덟 살에 뽑혔으니 파격적인 일이다. 당상관의 신분으로 사가독서를 한 사람은 박민헌과 이덕형이다.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 시를 대신 지어 준 이야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반드시 그 시대에 문장으로 이름난 사람을 뽑아 맡겼다. 박원형과 허종은 모두 훌륭한 풍채와 예의 바른 몸가짐으로 중국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박원형이 방주(명나라 유태의 호)와 주고받은 시와, 허종이 규봉(명나라 동월의 호)과 주고받은 시는 모두 종사관으로 수행한 삼탄(이승소)과 삼괴(신종호의 호)가 대신 지어 준 것이었다.
원접사와 종사관을 세 번씩 지낸 사람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연성군 박원형은 세 번 원접사(중국 사신을 국경까지 마중 나가 맞이하는 사신)가 되었고, 호음(정사룡의 호)도 세 번 원접사가 되었으나, 그중 한 번은 환관을 접대한 것이므로 박원형만큼 영예롭지는 못하다.
세 번 종사관이 된 사람으로는 삼탄(이승소)이 있고, 나도 세 번이었으나 그중 한 번은 환관을 접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접대한 유 태감은 시를 잘 지어서, 시를 주고받는 데 따르는 괴로움이 한림원이나 감찰·간쟁 담당 관원이 왔을 때보다도 더 심하였으니, 호음이 조용히 넘긴 것에 비하면 훨씬 힘이 들었던 셈이다.
낮은 벼슬로도 종사관이 된 특별한 사례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규봉(동월)이 중국 사신으로 왔을 때 허충정(시호가 충정인 허종)은 종사관 두 사람을 데리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삼괴(신종호)였고, 한 사람은 직장 박증영이었다. 참하관(7품 이하의 낮은 관원)으로서 종사관이 된 것이다. 그 뒤 주지번과 양유년이 왔을 때에는 조희일(자 이숙)이 박사에서 전적으로 특별히 승진하여 종사관이 되었으니, 이 또한 임금의 특별한 은혜였다.
사신 접대에 문장 담당자를 딸려 보낸 관례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는 반드시 글씨와 문서를 담당하는 사람을 따로 두었다. 조선에서 조신·홍유손 같은 사람을 등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시를 짓는 관원(제술관)을 따로 데리고 간 일이 없었는데, 임인년(1602년)에 고천준과 최정건이 왔을 때 월사(이정귀의 호)가 김현성·차천로·권필 세 사람을 데리고 갔고, 병오년(1606년)에 서경(유근의 호)이 다시 김현성과 권필 두 사람을 데려가겠다고 청하였으나 권필은 사양하고 김현성만 수행하였다. 기유년(1609년)에 서경이 또 차천로와 양경우를 데리고 갔는데, 이로부터 이것이 정해진 관례가 되었다고 한다.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급제가 취소된 정번과 한리학관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적암(조신의 호)은 규봉(동월)이 왔을 때부터 자양이 왔을 때까지, 그때마다 의전 실무를 맡아 직무를 잘 처리하였다. 이때는 아직 중국어 문서를 다루는 한리학관이라는 벼슬이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적암이 그때마다 의원이라는 직함으로 오갔다.
그 뒤 정번을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과거 합격자 명단에서 삭제하는 대신, 한리학관이라는 벼슬을 새로 만들어 그를 이 자리에 앉혔다. 이후로는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이 한리학관에게 글씨와 문서를 맡겼으니, 정번·어숙권·정화·박지화·권응인 등이 잇따라 이 일을 맡아 하였다.
지금은 이재영이 이 일을 모두 네 번이나 맡았는데, 무리 중에서 가장 민첩하고 총명하여 서경(유근)이 매우 감탄하였다. 그래서 주지번·양유년과 주고받은 시는 대부분이 그가 지은 것이라 한다.
놀라운 기억력을 지닌 사람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총명하고 민첩하기로 이름난 사람이 조선 이래로 많이 있다고 하지만,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므로 믿을 수가 없다.
근세에는 윤계선(자 사문)이 가장 총명하다고 이야기된다. 내가 태복시(임금의 말과 수레를 관장하던 관청)에 재직할 때였다. 어느 날 그가 태복시로 나를 찾아왔다. 마침 말 삼백여 필의 털빛과 사는 지명, 기르는 사람의 이름을 적은 말 명부(마적책)가 옆에 있었는데, 윤계선이 이를 한 번 보고는 다 외웠다. 사흘이 지난 뒤에 그의 집에 가서 물어보니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진사 임숙영도 중국 조정의 《이력편람》(관원들의 이력을 정리한 책)을 보고는 정확하게 다 기억하였다. 이 두 사람은 참으로 탄복할 만한 사람들이다.
족보에 통달한 두 사람의 밤샘 토론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서천(정곤수의 호)은 역사와 문헌에는 그리 총명하지 못했으나 족보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잘 알아서 막힘없이 줄줄 외웠다. 이실지(자, 이춘영)도 족보에 능통하였고 아울러 문장과 역사에도 해박하였지만, 문장과 역사보다는 족보에 대한 지식이 더 뛰어났다.
한번은 서천이 이실지와 강가에서 만났는데, 밤을 지새워 가며 족보에 관해 논변하였다. 나도 그 곁에서 듣고 있었는데, 지금의 이름난 가문치고 그 조상의 계보나 외가 쪽 갈래 가운데 흠 없는 집안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내용은 몰라서는 안 되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혹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을 염려도 있으니 말이다.
나의 조상과 권한공의 뜻밖의 인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내가 젊은 시절 당숙인 참봉공의 집에서 《고려사》를 뒤적이다가 권한공의 전기를 보고 그 옳고 그름을 논하였더니, 참봉공이 "어린 사람은 말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나라 재상들의 허물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하시면서 집안 족보를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는데, 알고 보니 권한공은 나의 5대조 호군 어른 부인의 외증조부였다.
내가 이 일이 있은 뒤로 5대에 걸쳐 안팎의 조상을 널리 조사해 보니, 고려 이전에 눈에 띄게 벼슬한 집안치고 나의 조상과 관계없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족보 세 권을 만들어서 자식과 조카들에게 보게 하였다.
여덟 고조를 아느냐고 물은 정곤수의 가르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내가 한번은 정서천(정곤수)을 찾아가니 그가 갑자기 "자네는 여덟 고조를 아는가? 하나하나 말해 보게" 하였다. 내가 여덟 고조가 무엇인지 몰라 멍하니 있으니, 서천이 "친조부모와 외조부모, 어머니의 친조부모와 외조부모, 그리고 아내의 친조부모와 외조부모다" 하였다. 내가 마침내 하나하나 헤아려 여덟에 이르니, 그가 "자네는 여덟 고조를 아니 참으로 조상을 잊지 않는 사람이군. 내가 이것을 물어보면 백 명에 한두 사람도 아는 이가 없더군. 자손으로서 자기 조상을 몰라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생각해 보면 그 말이 참으로 옳다.
명나라 황제가 감탄한 조선의 천리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사가(서거정의 호)의 《필원잡기》를 보면, 태종은 말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고 한다. 태종이 여윈 말을 일부러 골라 상급으로 쳐서 명나라에 조공으로 보내니, 성조(영락제)가 보고 "이것은 하늘이 낸 말이다. 너희 왕이 나를 아끼는구나" 하였다.
내가 언젠가 《증자계집》을 보니 〈천마가〉라는 시가 실려 있는데, "영락 연간에 조선에서 누런 말을 조공으로 바쳤는데 매우 좋은 말이었으므로 임금이 〈천마가〉를 짓도록 명하였다" 하였으니, 아마 이때 바친 말이 아닌가 싶다.
중국 황실에 딸을 보낸 집안이 누린 특별한 은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 여자로서 중국 조정에 뽑혀 들어가 황제를 모신 이는 누구나 총애를 받았다. 그 덕분에 권영균·여귀진·최득비는 그 아버지나 오라비가 높은 벼슬(열경)에 올랐고, 조선에 있으면서도 중국의 녹봉을 받았으니, 왕감주(왕세정의 호)가 〈이전술〉이라는 글에서 "외국인이 중국 관직을 지니고서 외국에 살고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 경우이다.
양절공 한확은 누이동생 두 사람이 중국 조정에 들어갔으므로 불러다 광록소경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조서를 받들어 우리나라에 반포하게까지 하였으니 더욱 특별한 은전이었다.
어진 환관 김영과 그를 아낀 명나라 효종의 선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내시로서 중국 조정에 들어간 사람은 대대로 있었는데, 홍치 연간(명나라 효종 때)에 이르러 더 이상 뽑아 보내지 말도록 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에 끼치는 폐해를 한 가지 덜어 준 것이니, 이를 명한 효종 황제는 참으로 성인이었다.
태감 김영은 안동 사람으로 중국 조정에 들어가 사례감 태감이 되어 헌종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사신이 되어 본국에 나오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내가 어찌 우리 국왕을 대등한 예로 만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를 보면 그는 어진 사람이었다. 이로 보아 중국의 역사 기록에 "김영은 겸손하고 사리를 알았으며, 바른 사람을 보호한 공이 있다"고 한 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조공로를 지켜 낸 명나라 관리 유대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가 중국에 조공하러 가는 길은, 해주에서 광녕을 거치지 않으면 곧바로 영원위로 통하게 되는데, 이 길은 오랑캐 지역과 가깝지 않고 또 빠르다.
내시로 중국 조정에 들어간 사람이 우리 사신과 의논하여 헌종 황제에게 아뢰어 조공로를 바꾸려 하니, 병부의 항충은 그대로 따르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동산(호) 유대하가 병부 직방사에 재직하고 있었는데, 이를 고집하고 허락하지 않으면서 "조선의 조공로는 애초에 명나라 초기 임금들이 상세히 정한 것으로서, 서너 곳의 큰 진영을 우회하여 산해관에 이르게 한 것은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니 경솔하게 고쳐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항충이 그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전 길 그대로 조공하고 바꾸지 못하였다.
중국 과거에 응시할 길이 막힌 억울한 사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의 인재가 중국 조정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된 것은, 고려 때 홍륜이 임금을 시해하고 김의가 중국 사신을 죽였기 때문이지, 우리 조선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런 사실을 들어 중국에 요청한다면 중국에서도 들어주지 않을 리가 없는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옹졸하고 남다른 절조가 없는 데다 멀리 나가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런 나쁜 평판을 뒤집어쓴 채 외국인을 위한 과거(빈공과)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내가 한번은 낭중 가유약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안남(베트남)과 유구(오키나와)는 모두 빈공과에 응시한다. 안남 출신 진유는 정덕 연간(명나라 무종 때)에 과거에 급제해서 우도어사를 지냈고, 완악은 가정 연간(명나라 세종 때)에 급제해서 공부 우시랑이 되었으며, 손응오는 본국에서 도망하여 광서 지방에 살다가 역시 과거에 합격하여 예부 시랑이 되었다. 지금도 향시나 회시 합격자 출신으로 지방 관리로 있는 자가 다섯 사람이나 있다." 이 말을 들으니 힘이 솟구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종계변무에 숨은 공로자, 허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 왕실 계보가 중국 기록에 잘못 실린 것을 바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선왕(선조)이 정성을 다하여 호소하고 변론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영양(봉호) 허국이 당시 내각에 있으면서 주선해 준 공이 있었다. 대개 허국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때, 마침 우리는 국상을 당해 몹시 경황이 없을 때였다. 그런데도 예우와 정성에 절도가 있었으므로, 그가 우리의 정성을 매우 아름답게 여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가 조정에 있으면서 힘써 주장하여 우리나라의 억울함을 씻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형 군문(형개)과 석 상서(석성)를 제사 지내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허국도 마땅히 함께 제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 왕실이 삼국시대 왕성 가운데 가장 번성한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 이래의 왕성 가운데 박씨와 김씨 두 성씨보다 더 번성한 성이 없다. 석씨와 고씨, 부여씨는 이제 아예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왕씨(고려 왕실)가 줄어든 것은 왕자들이 으레 승려가 되었기 때문에 종실의 성씨가 적어진 것이다. 고려가 망할 때에는 남은 종실이 겨우 오십여 명이었다.
조선은 뿌리가 깊고 잎이 무성하여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내가 전에 왕실 족보를 편찬하는 관원으로 있을 때 헤아려 보니, 종실 중에서 관대를 물려받아 녹봉을 받는 사람이 삼백여 명이고, 조정의 문관·무관과 과거를 거치지 않고 얻은 벼슬(남행)로 벼슬하는 사람도 백여 명이었다. 이 밖에 유생과 충의위(왕실 후손을 위한 군직), 무인에서부터 아래로 곁가지와 서얼에 이르기까지 천여 명에 가까웠으니 번성하다고 할 만하다.
왕실 성씨로서 정승에 오른 두 사람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왕실과 같은 성씨(전주 이씨)로서 정승이 된 사람은 두 명이니, 완평부원군 이원익과 완성부원군 이헌국이다. 두 사람 모두 나라를 세우거나 지키는 데 으뜸가는 공을 세운 공신이면서 정승으로서의 업적까지 남겼으니, 우리나라에서는 전에 없던 일이다.
성소부부고 제23권
10. 14:40
성소부부고 제23권 · 설부 2 · 성옹지소록 (중)
출처: 성소부부고 제23권, 설부 2, 성옹지소록 중
배경: "성옹지소록"은 허균이 스스로를 가리키는 별호인 "성옹"을 앞세워 지은 견문록으로, 조선 초기부터 자신이 살던 당대까지 이름난 재상과 학자, 선비들에 얽힌 크고 작은 일화를 두서없이 적어 내려간 글이다. 이 권에는 황희와 김종서 같은 나라를 세운 초기의 명재상들부터,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겪은 선비들, 허균 자신의 아버지와 두 형이 가르침을 받은 스승들, 그리고 임진왜란을 이끈 선조 시대의 대신들에 이르기까지 쉰 편이 넘는 짧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각 이야기에는 원문에 없는 소제목을 옮긴이가 붙여 내용을 짐작하기 쉽게 하였다.
일러두기: 이 글에는 조선 시대의 관직과 제도를 가리키는 말이 자주 나온다. "문형"은 나라의 글을 총괄하는 대제학의 별칭이고, "지제교"는 임금의 문서를 짓는 벼슬이며, "홍문록"은 홍문관 관원이 될 후보로 오른 명단을 말한다. "향안"은 지방에서 대대로 이름난 사대부 집안 출신만을 골라 이름을 올리던 명부이고, "궤장"은 임금이 나이 많은 공신이나 대신에게 내리던 지팡이와 앉는 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가독서"는 젊고 유능한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오로지 책만 읽게 하던 제도이고, "독서당"(또는 "호당")은 그들이 머물며 공부하던 곳이다. "계유정난"은 1453년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이 반대파 대신들을 없애고 정권을 잡은 사건이며, "기묘사화"는 1519년, "을사사화"는 1545년에 각각 조정에서 뜻있는 선비들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대광보국숭록대부"는 신하가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품계이다. 이런 말들은 문맥에서 필요할 때마다 짧게 풀어 놓았다.
황희와 허조 — 나라를 세운 초기의 명재상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라를 세운 초기의 이름난 재상으로는 황희와 허조를 꼽는다. 언젠가 《세종실록》을 살펴보니 이 두 사람이 특별히 무언가를 앞장서서 건의한 것은 없고, 다만 임금이 조금이라도 지나친 행동을 하면 반드시 굳게 고집하며 따르지 않았을 뿐이었다.
황희는 관리를 임명하는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고 제도를 함부로 바꾸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허조는 문학적 재능으로 조금 꾸미기는 했으나 조심스럽게 바른 법도를 지켰다.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다스리는 큰 그릇이나 시대를 구제할 만한 재주를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진 신하들이었다.
황희가 김종서를 엄히 대한 까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익성공 황희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 김종서는 호조판서로 있었다.
하루는 삼정승과 육조 판서들이 대궐에서 회의를 하는데 해가 저물자, 김종서가 간단한 밥상을 준비해 왔다. 황희는 그 밥상을 물리치고는 조정의 자리에 앉아 김종서를 불러 섬돌 위에 세워 놓고, 규정에도 없이 사사로이 음식을 대접한 일을 꾸짖었다. 말이 매우 엄하니 김종서는 진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였다. 한참을 그렇게 세워 두었다가 돌려보냈으니, 황희가 규범을 지키는 태도가 이와 같았다.
황희가 나랏일을 맡아보는 동안 김종서는 여러 차례 병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지냈는데, 한 가지 일이라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황희는 심하게 꾸짖고 때로는 그의 종을 매질하거나 몸종을 가두기까지 하였다. 동료들은 모두 너무 심하다고 여겼고, 김종서 자신도 몹시 곤욕스럽게 여겼다.
하루는 정승 맹사성이 물었다. "김종서는 당대의 이름난 재상인데 공은 어찌 그리도 심하게 대하십니까?"
황희가 대답했다. "이것은 내가 종서를 훌륭한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종서는 성품이 강직하고 기세가 날카로워 일을 과감하게 처리하니, 훗날 우리들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 때 스스로 신중하지 않으면 반드시 일을 그르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그 기세를 꺾어 경계하도록 하고 뜻을 단속하여 조심하게 함으로써, 일에 임하여 신중해지도록 하려는 것이 제 뜻이지, 그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맹사성이 이 말에 감복하였다. 훗날 황희가 사직을 청하면서 김종서를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하였다고 한다.
김종서가 함경도 북쪽 변경에 있을 때는 다스림이 매우 엄격하고 씀씀이는 매우 사치스러워 백성과 아전들이 그를 꺼렸다. 하루는 화살이 그의 책상에 날아와 꽂혔는데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의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여러 차례 독을 넣었으나 그를 죽이지는 못하였다.
무릇 잔치를 한 번 열면 부하 장교 백 명에게 저마다 쇠고기 다리 하나씩을 돌렸으므로, 어떤 사람이 낭비라고 간언하니 김종서가 이렇게 대답했다. "이 북쪽 변경은 우리 왕조가 일어난 곳으로, 선대 임금들이 개척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땅이다. 이제 다행히 이 땅을 개척하였으나, 장수와 병졸들이 이 먼 곳에서 십 년이나 수자리를 서고 있으니, 이렇게라도 잔치를 베풀지 않고서는 이들을 위로할 길이 없다. 더구나 이 일을 시작하는 마당에 쓸쓸하게 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비록 쇠고기 다리 하나씩을 쓰고 있지만, 십 년이 지난 뒤에는 닭다리 하나조차 넉넉지 못할 것이다. 장수와 병졸들이 노래를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게 되면, 대체 누구와 함께 이 변방을 지키겠는가?" 이 말을 듣고 간언하던 사람은 더는 말하지 못하였다.
김종서와 신숙주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종서는 신숙주를 천거하여 자신의 막료로 삼고, 그의 재주와 그릇을 지극히 아꼈다. 무슨 일을 계획할 때면 신숙주가 뒤에서 돕는 일이 많았다.
여진 지역에 아홉 개의 성을 설치하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를 두고 조정의 논의가 자신의 생각과 달랐으므로, 김종서가 글을 올려 이를 다투었는데 그 내용이 수만 자에 달하였다. 김종서가 신숙주에게 붓을 잡게 하고 자신은 입으로 부르는데, 마치 미리 지어 둔 글을 외우듯 줄줄 이어져 그치지 않았다. 신숙주는 명을 받들어 부르는 대로 받아 적으며 붓을 멈추지 않았는데, 한 글자도 되묻는 일이 없었고 한 자도 잘못 쓰거나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김종서가 감탄하여 말했다. "나는 본디 내 재주를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대야말로 참으로 드물게 보는 큰 재주로세."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날, 신숙주는 마침 관청에 있었다. 그의 부인은 남편이 반드시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스스로 목을 매려고 치마끈으로 목에 걸어 놓고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저물녘에 벽제 소리가 들리기에 알아보니 신숙주가 돌아온 것이었다. 부인이 치마끈을 풀며 말했다. "저는 당신이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신숙주는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허종과 허침 형제, 그리고 백세 할머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충정공 허종과 문정공 허침 두 형제는 모두 정승이 되었고 그 덕과 업적도 다 뚜렷하였으니, 우리나라에서 전에 없던 일이었다. 두 사람의 누님도 글과 행실,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고 백 살까지 사셨으므로, 집안에서는 지금까지도 그분을 "백세 할머니"라고 부른다. 두 형제는 이 누님을 매우 공손히 섬겼고, 조정에 중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찾아가 의견을 여쭈었다.
성종이 윤비를 폐위하려 할 때 두 형제가 누님에게 자문을 구하니, 이렇게 말하였다. "아들이 지금 세자로 있는데, 그 어미에게 죄를 준다면 어찌 나라가 편안하고 탈이 없겠느냐?" 이에 허종은 병을 핑계로 논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허침은 다른 의견을 내다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뒤 연산군이 정치를 어지럽히면서 "윤비를 폐위한 것이 마땅하다"고 논의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허침만은 홀로 화를 면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누님의 뛰어난 안목에 감탄하였다.
반정공신의 서열 — 성희안의 겸양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연산군을 폐위하는 일을 논의할 때, 성희안(창산)이 실로 그 계획을 가장 먼저 세웠고, 박원종(평성)이 여기에 참여하였으며, 유순정(청천)은 뒤늦게 참여하였다. 그런데 서열이 박원종과 유순정이 앞서고 성희안이 끝에 놓인 것은 원래 지니고 있던 벼슬의 등급에 따른 것이었다. 이것은 실은 성희안이 스스로 겸손하여 셋째 자리로 물러난 것이었다. 모든 일은 겸양해야 잘 이루어지는 법인데, 하물며 반정처럼 큰일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렇게 양보하여 큰 공을 이루었으니, 성희안의 안목은 따라갈 수가 없다.
성희안의 결단 — 형조참판 시절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성희안은 낮은 벼슬에 있을 때부터 이미 굳세고 과감하여 권력에 눌리지 않았다. 그가 형조참판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성균관 유생이 관아의 하인에게 모욕을 당하고는 동료들과 함께 이름을 나란히 올려 그 하인을 죽여 달라고 청하였다. 그런데 그 하인은 당시 영의정이던 신승선의 종이면서, 좌의정 이극배(광릉)의 여종의 남편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판서 한치형은 이 일의 죄를 판단하기 어려워 병을 핑계로 출근하지 않았다. 이 일로 이극배의 아우 이극돈이 성희안의 집을 두 차례나 찾아갔지만 병을 핑계로 만나 주지 않으니, 두 정승이 노하였다.
하루는 성희안이 조정에 나가자 두 정승이 그를 몰아세웠다. 성희안이 그 자리에서 여러 사람에게 대놓고 말했다. "여러 유생이 한낱 천한 종에게 얻어맞았으니, 그 종의 죄는 사형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나라의 법이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정승들을 위하여 이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임금께 아뢴 뒤에 저 스스로 물러나겠습니다." 두 정승은 부끄러워하며 사과하였다. 함께 있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성희안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물러나와 그 종에게 곤장을 쳐서 죽였으니, 그 결단력이 이와 같았다.
성희안의 안목 — 정광필을 천거하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성희안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일찍이 정광필(문익공)을 두고 참으로 정승이 될 만한 인물이라며 감탄하였다. 정광필이 함길도 감사로 있다가 우의정이 되어 돌아온 것도 모두 성희안이 천거한 덕분이었다. 당시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으나, 정광필이 훗날 기묘사화 때 선비들을 위해 공을 세우고 정승으로서의 업적도 훌륭하여, 시대는 다르지만 황희·허조와 나란한 명망을 얻게 되니, 사람들은 그제야 성희안의 안목에 감탄하였다.
박원종의 사치와 정사룡·황여헌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박원종(평성)은 영의정으로서 병조판서를 겸임하여 총애와 권세가 매우 높았다. 물러나려는 뜻으로 병을 핑계 삼아 도산의 별장에 가 있었는데, 조정에 큰일이 있을 때면 임금이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그때 정사룡(호음)과 황여헌(유촌)이 함께 병조의 낭관으로 있으면서 도산에 가서 자문을 구하곤 하였다. 박원종은 평소 사치를 매우 좋아하여 정원과 연못, 누각, 집을 크게 짓는 등 집을 매우 화려하게 꾸몄으며, 시중드는 첩 수십 명이 비단 치마를 입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능하였다. 박원종은 정사룡과 황여헌을 재주 있는 선비라 하여 매우 극진히 대접하였다. 진수성찬을 차리고 풍악을 울리며 술을 권하고, 시중드는 여종들에게 각자 시 한 수씩을 짓게 하여 잔뜩 취하고 한껏 즐긴 뒤에야 흩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반드시 박원종의 생활 가운데 한 가지를 본받겠다"고 다짐하였다. 정사룡은 만년에 음식을 사치스럽게 들었고, 황여헌은 큰 집을 짓고 여종에게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게 하였는데, 이는 모두 박원종을 흉내 낸 것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선비가 하는 일이 어찌 나라에 공을 세운 귀족과 같을 수 있겠는가.
정광필의 안목 — 황헌의 관상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광필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사람을 천거하거나 임용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용모를 살펴보았다. 그래서 그가 천거한 사람 가운데 높은 벼슬에 오른 이가 많았다.
정승 황헌이 막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서 정광필의 집을 찾아왔다. 정광필은 정성껏 음식을 대접하였다. 황헌이 하직 인사를 하자 일어나 전송하면서 그의 등을 한참 바라보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자제들이 이상히 여겨 까닭을 묻자 정광필이 말했다. "저 사람은 얼굴이 넉넉하면서도 수려하니 반드시 재상의 지위에 오를 것이다. 그런데 마시고 먹는 모습을 보니 반드시 빠르게 승진했다가 일찍 물러날 것이고, 등이 얼굴만 못하니 마땅히 자손이 없을 것이다." 황헌은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등용되었고, 막 정승이 되자마자 관직을 박탈당했으며 또 자식도 없었으니, 모두 정광필의 예언대로 되었다.
정광필의 식사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광필은 식사 때마다 자신이 먹고 남은 음식을 좌의정 정유길과 우의정 정지연에게만 먹게 하고 다른 자제들에게는 주지 않았다.
이헌국(완성)은 정광필의 먼 친척뻘 손자였는데, 어렸을 때 문안을 드리러 갔다. 마침 정광필이 식사 중이었고 정유길과 정지연 두 사람은 마침 집에 없었다. 식사를 마치자 정광필은 이헌국을 한참 바라보더니 여종을 불러 남은 음식을 걷어다 주게 하니, 이헌국이 그것을 먹고 물러나왔다. 여종들은 서로 눈짓을 하며 웃으면서 "저분도 정승이 될 상인가?" 하였다. 훗날 이헌국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고, 충직함으로 선조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여든 살에 세상을 떠났다. 정광필이 그의 관상을 보고 대개 짐작했던 것이다.
정사룡의 젊은 날과 만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사룡(호음)은 젊었을 때 행동을 조심하지 않아 정광필에게 칭찬받지 못하였고, 선비들도 이를 단점으로 여겨 지방으로 내쳐졌다. 기묘년(1519년)에 사화가 일어나자 그를 불러들여 사간으로 임명하니,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며 "저 사람이 오래 분한 마음을 품고 있었으니 반드시 분풀이를 하려 들 것이다" 하였다. 정광필이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내 조카가 비록 몸가짐은 조심스럽지 못했으나 결코 남을 해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정사룡이 사간이 되고 나서는 과연 스스로 사양하며 당시의 논의에 참여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이를 보고 정사룡을 훌륭하게 여겼고 정광필이 사람을 잘 알아본다고 칭찬하였다.
정사룡은 살림을 잘 꾸려 부자가 되자 자신의 생활은 왕족이나 다름없이 누렸으나, 성품이 인색하여 손님을 잘 대접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선비들 가운데 정사룡의 집 음식을 먹어 본 사람이 없었으나, 유독 어득강(관포)이 찾아오면 반드시 많은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정씨 집의 식객"이라 불렀다.
만년에는 서울 동쪽 교외로 물러나 살았는데, 임억령(석천), 신잠(원량)과 시와 술로 어울리며 맑은 복을 누린 것이 이십여 년이었다. 비록 세상을 구제한 공은 별로 없었으나 그 풍류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아, 마을 사람들 가운데는 그의 자를 따서 자신의 자로 삼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박상의 의리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박상(눌재)은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다. 기묘년(1519년)에 충주목사로 있었다. 조광조(정암)가 사화를 당하자 당시 선비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박상이 이들을 모두 돌보아 주었으므로 김세필(성동), 이자(음애), 이연경(탄수) 같은 사람들이 다 그에게 가서 의지하였다.
박상이 하루는 여주에 갔다가 김안국(모재)과 신광한(기재)이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는, 여주목사 이희보(안분당)를 찾아가 쌀 백 섬을 빌려 두 사람을 구제하였다. 충주로 돌아와서는 서둘러 쌀을 배에 실어 빌린 만큼을 이희보에게 갚았다. 옛 선배들은 벗들 사이에서 대개 이러하였다.
박수량과 김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박수량은 강릉 사람으로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갑자년(1504년) 사마시(진사시)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응시하지 못하였고, 현량으로 뽑혔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훗날 용궁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두어 달 만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김정(충암)이 금강산을 유람하는 길에 그의 집에 들렀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일꾼들 사이에 끼어 손수 새끼를 꼬고 있었으므로, 김정은 처음에 그가 주인인 줄 몰랐다. 마침내 풀을 깔고 앉아 술을 마셨는데, 질그릇에 담은 술과 나물 안주뿐이었다. 이틀 밤을 묵으며 한껏 놀다가 떠나면서, 헤어질 때 진달래나무 지팡이를 선물로 주며 이런 시를 지어 주었다.
높디높은 벼랑에서 늦가을 서리와 눈을 겪은 가지라네 가져와 그대에게 주노니 오래도록 이 마음 변치 말게나
소학과 근사록의 수난 — 나식과 부친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기묘년에 선비들이 화를 당한 뒤로는 집집마다 《소학》과 《근사록》을 입에 담기를 꺼렸고 자제들에게 배우지 못하게 금하였다.
나의 선친께서는 젊었을 때 나식(장음)에게 배우셨다. 한번은 외가에 갔다가 낡은 함 속에서 좀먹고 다 떨어진 《소학》 네 권을 보았다. 펴서 읽어 보고는 학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그중 첫째 권을 소매 속에 넣고 나식에게 가서 보여 드리니, 나식이 깜짝 놀라며 "네가 어디서 이런 귀신 붙은 물건을 얻었느냐?" 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사화로 죽은 옛 어진 이들의 불운을 슬퍼하였다. 선친이 이 책을 배우기를 청하니 나식이 크게 칭찬하며 《소학》과 《근사록》을 가르쳐 주었으나, 이 일을 남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
나식의 인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식은 타고난 재주가 총명하고 큰 절개가 있었다. 그의 문장은 매우 고상하고 옛 풍취가 있었으며, 과거에 응시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두 아우 나숙과 나익을 가르쳐 모두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최수성(원정)은 뜻이 높아 남을 좀처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나식을 보고는 감동하여 이렇게 칭찬하였다. "압록강 동쪽에는 나생 한 사람뿐이다."
부친과 이여 교리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선친은 젊었을 때 교리 이여에게서 《주역》을 배우셨다. 이여는 진천 사람으로 그의 형 이치와 함께 성리학에 밝았다. 이여는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오랫동안 곁에서 모시며 아침저녁으로 경계하고 강독하여 도움을 준 것이 매우 많았다.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인종이 친히 제문을 지어 궁의 신하를 보내 조문하였다.
이치도 높은 벼슬에는 이르지 못하고 박사로 세상을 떠났는데, 진천의 선비들이 두 형제를 위하여 서원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선친이 살아 계실 때는 매번 주선하여 제사가 끊이지 않도록 하셨다. 지금까지도 이 고장 선비들이 잇달아 과거에 급제하고 고을 풍속도 좋은 것은 모두 이여의 가르침 덕분이다.
조광조 이후의 성리학 — 김안국의 역할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광조가 화를 당한 뒤로는 이치와 성품의 근본을 탐구하는 성리학에 대해 감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김안국(모재)만은 여주에 은거하며 선비를 만날 때마다 성현의 일을 인용하여 논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언적(회재)은 영남에서 여주를 오가며 반드시 그에게 질문하고 논쟁하였으며, 이황(퇴계)도 단양군수로 부임하는 길에 그의 집에 들렀을 때 비로소 성리학의 근원을 들었다. 김안국은 이처럼 두 분에게도 길을 열어 준 공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있다. 나의 선친은 젊어서부터 김안국에게 배웠으므로 이 일을 두루 알고 계셨다. 대체로 김안국은 평소 문장가로만 칭송받았고 성품도 위세를 부리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그저 문인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김안국의 사람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안국은 성품이 경박하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사람을 사랑하였다. 처음에 김안로와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김안로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때마다 나무랐다. 김안로도 그의 솔직함을 알았으므로 화내지 않았다.
김안로가 정권을 잡자 김안국 형제를 가장 먼저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김안로가 이불을 가지고 그의 집에 가서 잤는데, 김안국이 베개를 맞대고 누워 자면서 경계하는 말을 너무도 간절하게 하니, 옆에 누워 있던 김정국(사재)이 그의 발을 밟으며 그만 말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안국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너도 안 자고 있었느냐. 내 다리에 기대지 말라" 하니, 김정국은 뜨끔하여 다시는 말리지 못하였다.
훗날 김안로가 권좌에서 물러나 죽임을 당했을 때, 김안국이 김정국에게 말했다. "안로가 간사하다는 것을 누군들 모르겠는가마는, 우리 형제가 이미 그와 깊이 사귀었으니 이제 와서 그의 단점을 말하지는 말자." 그러고는 매번 김안로의 가족들에게 음식을 보내 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김안국과 성세창의 호당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안국이 우의정 성세창과 함께 독서당에서 휴가를 받아 글을 읽을 때, 둘이 함께 숙직을 하게 되었다. 성세창은 본래 집이 넉넉하였으므로 이부자리를 모두 비단으로 만들어 매우 화려했고, 김안국은 본래 가난한 데다 성품도 사치를 좋아하지 않아 베 이불에 나무 베개를 베고 자니 가난한 선비처럼 쓸쓸하였다. 성세창은 몹시 부끄러워 밤새 잠을 설치고는, 날이 밝자 집으로 돌아가 부인에게 말했다. "국경(김안국의 자)이 차라리 내 사치를 비웃어 주기라도 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러고는 서둘러 검소한 것으로 바꾸게 한 뒤에야 한 방에서 함께 잤다고 한다.
서경덕과 부친의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선친은 서경덕(화담) 선생에게서 가장 오래 배우셨다. 한번은 7월에 선생의 집을 찾아갔더니, 화담 별장으로 떠난 지 이미 엿새가 되었다고 하므로 곧바로 그곳으로 갔는데, 가을 장마로 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날이 저물어서야 여울물이 조금 줄어 겨우 건너서 화담에 이르니, 선생은 거문고를 타며 큰 소리로 시를 읊조리고 계셨다.
선친이 저녁밥을 짓겠다고 청하니 선생이 말했다. "나도 아직 먹지 않았으니 내 몫까지 함께 지어라." 하인이 부엌에 들어가 보니 이끼가 솥 안에 가득 끼어 있었다. 선친이 이상히 여겨 까닭을 묻자 선생이 말했다. "물이 막혀 엿새 동안 집사람이 오지 못했으니 내가 오랫동안 밥을 짓지 못했다. 그러니 분명 솥에 이끼가 끼었을 것이다." 그 얼굴을 살펴보니 조금도 굶주린 기색이 없었다. 이는 옛날 증자가 이레를 굶고서도 신을 끌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마치 악기가 울리는 듯했다는 이야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유담년과 황형 — 삼포왜란 방어사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경오년(1510년) 삼포에서 왜적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담년이 병조판서로 있었다. 중종 임금이 여러 대신들을 불러 왜적을 정벌할 일을 의논하려 할 때, 삼정승이 먼저 유담년에게 물었다. "방어사로 삼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 유담년이 즉시 대답했다. "한쪽 길은 제가 가서 막겠고, 다른 한쪽 길은 따로 막을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삼정승이 누구냐고 묻자 유담년이 말했다. "말씀드리면 반드시 다투어 헐뜯을 것이니, 임금께 직접 아뢰겠습니다."
임금을 뵙는 자리에서 과연 임금이 "누구를 장수로 삼을 만한가?" 하고 물으니, 유담년이 대답했다. "왼쪽 길은 제가 맡겠습니다만, 오른쪽 길에 쓸 만한 사람이 있기는 해도 사람들이 반드시 안 된다고 할 것이니, 전하께서 뭇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등용해 주신다면 제가 응당 천거하겠지만, 그렇지 않으시다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임금이 뭇사람의 의견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허락하니, 유담년이 그제야 말했다. "전에 승지를 지낸 황형이 바로 그 적임자입니다."
그러자 주위에서 과연 반대하였다. "그 사람은 예전에 자기 장인을 매질하여 버림을 받은 사람이니 다시 등용해서는 안 됩니다." 유담년이 말했다. "지금은 설령 옛사람 효기나 미생처럼 훌륭한 행실을 지닌 자라도 전쟁의 승패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니 등용할 수 없습니다. 설령 황형에게 그런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 상황이 매우 급하니 다른 것을 따질 때가 아닌 데다가, 사실 그는 그런 나쁜 짓을 한 일이 없습니다. 사소한 흠 하나를 이유로 나라를 지킬 만한 인재를 버리는 것은 예로부터 옳지 않게 여겨졌습니다." 성희안(창산)도 유담년의 의견에 힘써 찬동하였으므로, 마침내 황형과 유담년이 각각 좌방어사와 우방어사로 임명되어 출정해 왜적을 무찔렀다. 결국 나라가 이 일로 무사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유담년의 공이었다.
(용어) 효기는 은나라 고종의 태자로,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계모의 참소로 쫓겨나 죽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미생은 춘추 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여인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물이 불어나는 다리 밑에서 끝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죽었다는 이야기로 전해진다.
황형과 강화 연미정의 소나무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황형(장무공)의 밭과 집은 강화 연미정에 있었다. 그가 일찍이 소나무 수천 그루를 심으니 사람들이 "공은 이미 늙었는데 소나무를 이렇게 많이 심어서 무엇하시렵니까?" 하고 물었다. 황형이 답했다. "훗날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그 뒤 임진년(1592년)에 창의사 김천일과 전라병사 최원이 강화도에 들어와 지키면서 배와 진영의 목책, 방패, 각종 기계를 만들 때 모두 이 소나무를 가져다 썼다. 이때 쓰고 남은 것은 정유년(1597년)에 명나라 경리 양호가 임금을 모시고 강화도로 가려 할 때, 관아에서 베어다가 임시 행궁을 짓고 성책을 세우는 데 썼다. 이때 와서야 사람들은 황형이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음을 알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김인후의 인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인후(하서)는 인품이 매우 높고 학문과 문장이 모두 뛰어나 스스로 터득한 바가 있었으나,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인종은 세자로 있을 때부터 그를 인재로 여겼으므로 왕위에 오르자 맨 먼저 불러들였는데, 그가 서울에 도착하자 인종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고향에서는 그의 덕에 감화되어 선량해진 사람이 매우 많았다.
양응정(송천)은 기개가 높기로 당대에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김인후를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눌려 그의 말을 공손히 받들 뿐 감히 한마디도 못 하였다. 김인후 앞에서 물러나와서는 반드시 여러 날 동안 감탄하며 말하였다. "후지(김인후의 자)는 지금 세상의 안자(공자의 제자 안회)로다."
송순의 기지 — 서소문과 남대문, 그리고 향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이조참판 송순(삼재)은 재직할 때 찬성 허자와 뜻을 합쳐 어진 이들을 천거하다가 권세 있는 신하의 미움을 받아 지방으로 오 년이나 유배되었다. 이후로는 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였다.
송순에게는 가깝게 지내는 서얼 숙부가 있었는데, 그가 매번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지방 출신으로 재상이 된 사람 가운데, 나는 서소문으로 떠나는 사람은 보았어도 남대문으로 떠나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이는 대개 서울에 와서 벼슬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서울을 떠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송순은 이 말을 늘 듣기 싫어하였다.
그 뒤 송순이 개성유수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 숙부가 강가에 나와 그를 전송하였다. 송순이 술잔을 잡고 말했다. "저는 이제 남대문으로 나왔습니다."
요즘 지방에는 향안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친가와 외가 양쪽 모두 사대부 집안 출신인 사람만을 가려 이름을 올린다. 외가나 아내의 집안이 다른 고을 출신이거나 이름난 가문이 아니면, 아무리 높은 벼슬을 지냈어도 여기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 그래서 여기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홍문록이나 이조의 천거 명단에 오르는 것보다도 어렵다고들 한다.
송순은 담양 사람이었다. 외가가 남원에서 왔고 뚜렷하게 이름난 벼슬을 한 이가 없었으므로, 그 역시 향안에 오를 수 없었다. 송순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 휴가를 얻어 성묘를 갔다가 고을 사람들이 모두 향청에 모여 있다는 말을 들었다. 즉시 음식을 성대하게 장만하여 수십 명의 짐꾼을 시켜 향청으로 보내고, 먼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시켜 향청의 어른들에게 이렇게 전하게 하였다. "대사헌께서 큰 잔치 음식을 보내어 마을의 원로와 학자들을 대접하고자 하시니, 이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향청의 어른들이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곧 음식을 차려 대접받는데, 한 노인이 "주인을 불러 우리와 함께 자리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니 모두 그러자고 하였다. 사람을 보내 청하였으나 사양하며 오지 않다가, 거듭 청한 뒤에야 왔다. 와서 좌우를 둘러보다가, 일찍이 훈도를 지낸 늙은 선비 가운데 자신과 나이는 같으나 생일이 앞선 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얼른 그 다음 자리로 가서 앉았다. 술이 거나해지자 향청의 어른들이 말했다. "대사헌이 이미 이 모임에 참석하였으니 향안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는 곧 향안을 가져다 그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송순의 재빠르고 총명함이 이와 같았다.
김인후와 유희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인후(하서)가 급제하기 전, 성균관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전염병에 걸려 위독하니 사람들이 감히 그를 돌보지 못하였다. 유희춘(미암)이 당시 성균관의 관원으로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아깝게 여겨 자기 집으로 옮겨 밤낮으로 돌보아 끝내 다시 일어나게 하였고, 김인후는 이를 늘 감사하게 여겼다. 훗날 유희춘이 종성으로 유배되었을 때,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매우 어리석었다. 김인후가 그를 사위로 맞으려 하니 집안사람들이 모두 반대하였으나 듣지 않고 끝내 혼인을 이루었으니, 사람들은 김인후와 유희춘 두 사람을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유희춘의 내력과 학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유희춘(미암)은 최부(금남)의 외손자이다. 최부는 성종과 연산군 때에 큰 명망이 있었고 문장에도 매우 능하였는데, 무오년(1498년)의 사화 때 죽임을 당하였다.
유희춘은 형 유성춘과 더불어 당대에 명망이 높았다. 유성춘은 벼슬이 헌납에 이르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유희춘은 정언으로 있을 때 을사년(1545년)의 변고를 만나 처음에는 제주로 유배되었으나, 고향과 가깝다 하여 다시 종성으로 옮겨졌다. 총명함이 남달라 읽은 책이라면 외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유배지에 있을 때 《속몽구》 네 권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모두 그가 암송하고 있던 것을 바탕으로 지은 것이다.
선조 임금 때 발탁되어 경연에 들어갔는데, 임금에게 도움을 준 공이 매우 많았다. 임금이 장차 그를 중히 쓰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임금이 몹시 슬퍼하며 그를 찬성에 추증하고 그 아들을 등용하였다.
유희춘의 학문과 성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두 형은 젊은 시절 유희춘에게서 배웠다. 그는 학문이 매우 정밀하고 행실이 지극히 독실하였으며, 배우는 사람을 대할 때마다 반드시 진실하고 밝은 학문을 자세히 가르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품이 매우 세상 물정에 어두워 집안일을 다스릴 줄 몰랐고, 옷과 버선이 때 묻고 해어져도 부인이 새것으로 바꿔 주지 않으면 스스로 갖춰 입을 줄을 몰랐다. 거처하는 방은 책을 펴 놓은 책상 외에는 먼지와 때가 끼어 더러워도 쓸고 닦지 않았다. 남을 만나 세상일을 이야기할 때는 전혀 아는 것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이야기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고 앎을 지극히 하는 공부,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이르면 뛰어난 견해와 해박한 지식이 다른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어 세밀히 분석하니 통쾌하고 명백하여, 듣는 사람이 정신을 쏟느라 피곤한 줄도 몰랐다.
대체로 이러하였으므로 경연에서 하는 말이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배운 바를 실천하게 함으로써 임금의 덕을 도왔던 것이다. 선조 초년의 정사 가운데 맑고 밝다고 일컬을 만한 것은 모두 유희춘이 잘 이끈 힘이었다고 한다.
유희춘의 회고 — 백인걸, 송인수와 세 차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유희춘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젊어서 남평현감으로 있을 때 좌참찬 백인걸은 무장현감이었다. 마침 참판 송인수가 관찰사로 부임하니 세 사람이 서로 뜻이 맞아 매우 즐겁게 지냈다.
송인수는 부안의 기생을 사랑하였는데, 정을 통하지는 않고 다만 마음으로 아껴 수레에 태워 데리고 다니게 하였다. 늘 편지를 보내 무장현감과 남평현감을 불렀고, 놀러 다닐 때마다 늘 함께 다니니, 고을 사람들이 이 세 사람을 "세 차비"라 불렀다고 한다.
송인수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여량역에서 그를 전별하는데 두 사람과 그 기생이 따라왔다. 송인수가 기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이 사람의 뛰어난 지혜를 아껴 일 년 동안이나 자리를 같이하면서도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은 것은, 내가 그것 때문에 몸을 상할까 염려해서였네." 그러자 기생이 즉시 앞산에 있는 여러 무덤을 가리키며 말했다. "과연 그러하십니다. 저기 보이는 저 많은 무덤들이 모두 저의 낭군이었습니다." 이는 그를 원망하며 한 말이었으므로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크게 웃었다. 그 기생은 훗날에도 늘 송인수의 일을 떠올리며 감탄하고 눈물까지 흘리곤 하였다.
권벽의 침묵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권벽(습재)은 나의 선친과 가장 가깝게 지낸 벗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안명세, 윤결과 함께 공부하였는데 서로 뜻이 맞아 매우 즐겁게 지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거리낌 없이 말하다가 화를 입어 죽은 뒤로, 권벽은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집에서도 남과 담소를 나누지 않았고 하루 종일 책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최렴과 최락 형제는 이웃에 사는 젊은이들로서 권벽에게 배운 지 거의 일 년이 되도록 그들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고, 그들이 진사시에 합격한 뒤에야 비로소 이름을 알 정도였다. 이 때문에 별로 높은 벼슬은 하지 못하였으나 일흔넷까지 살았다.
내가 어릴 때 권벽이 나의 선친을 뵈러 온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주인이 묻는 말에나 대답할 뿐,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그가 자신의 뜻을 철저히 지킨 것이 이와 같았다.
(용어) 안명세는 사관으로 있으면서 을사사화의 진상을 사초에 그대로 적어 넣었다가 이 일이 새어 나가 사형을 당한 인물이다. 윤결은 벗의 자리에서 안명세의 죽음이 억울하다고 말했다가 이를 고발당해 죽임을 당하였다.
윤결의 옥사와 부친의 위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윤결(자는 장원)의 옥사에서, 그의 진술 가운데 나의 선친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선친은 당시 병조의 낭관으로 관청에서 숙직하고 계셨다. 죄를 다스리는 관리가 선친을 문초하기를 청하자, 대사간으로 자리에 있던 진복창이 일어나 엎드리며 아뢰었다. "허모(허균의 아버지 허엽)는 경솔한 사람이 아니니 그럴 리가 없음을 제가 보증합니다. 지금 그를 잡아다 문초한다면 일이 더욱 커질까 염려되니 문제 삼지 마소서." 이렇게 두세 번이나 강경하게 주장하니, 문정왕후도 옳게 여겨 문초하지 않았다.
선친께서는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정원에 들어가니 승지들이 모두 축하하였으나, 그래도 영문을 모르다가 물러나 병조로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다. 승지들이 감탄하며 말했다. "화를 겨우 면했는데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으니 참으로 강직한 사람이다." 선친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까닭 없이 받는 칭찬이다"라고 하셨다.
진복창은 나의 선친과 평소 전혀 가깝게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는데도 선뜻 나서서 구해 주었으니, 이 또한 운명이라 할 만하다. 이런 일이 있었기에 나의 두 형은 진복창의 아들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후하게 대하곤 하였다.
임억령의 절개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임억령(석천)은 기개가 뛰어나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뒤로도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아 여러 차례 이름난 청요직(학식과 인망을 갖춘 사람만 맡을 수 있다고 여겨지던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지방 벼슬에 나가 있을 때가 많았다.
그의 아우 임백령이 을사년(1545년)의 공신에 들면서 그 권세가 한 시대를 뒤흔들게 되자, 당시 승지로 있던 임억령은 서둘러 벼슬을 버리고 서울을 떠났다. 임백령이 굳이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한강을 건너면서 이런 시를 지어 주었다.
"잘 있거라, 한강물아 고요히 흐르며 물결을 일으키지 마라"
그 뒤로 다시는 서울에 오지 않으니, 선비들의 여론이 그를 옳게 여겼다.
임백령이 죽은 뒤 만년에야 서울에 왔고, 스스로 청하여 강원도관찰사로 나가서는 바다와 산을 두루 구경하며 많은 글을 지었으므로 지금까지도 그곳 산수를 빛내고 있다. 그의 정치와 교화도 맑고 평온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기대승과 호남 인재의 성쇠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기대승(고봉)은 호남 선비들 가운데 걸출한 인물이었다. 학문이 높고 깊어 이황(문순공)이 매우 칭찬하였다.
선조 임금의 신임을 받았으나 제대로 쓰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죽은 뒤로는 호남 사람으로 조정에 등용된 이가 한 명도 없었다. 기대승이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호남 선비들의 기풍이 점차 해이해지고 있으니, 수십 년이 지나면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도 많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와서 보니 그 말이 과연 맞아떨어졌다. 그는 아마도 그 조짐을 미리 내다보았던 것 같다.
중종 임금 시절에는 호남 출신의 뛰어난 인재가 매우 많았다. 박상(눌재) 형제, 사인 최산두, 유희춘(미암) 형제, 교리 양팽손, 제학 나세찬, 목사 임형수, 김인후(하서), 임억령(석천), 송순(삼재), 찬성 오겸 같은 이들이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졌다.
그 뒤로도 박순(사암), 이항(일재), 양응정(송천), 기대승(고봉), 고경명(제봉) 같은 이들이 학문이나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재능과 행실로 당대에 이름을 떨치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도 점점 줄어드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나는 여러 해 동안 호남을 오가며 그곳의 풍습을 살펴보았는데, 대체로 후학을 이끌어 줄 큰 스승이 없는 데다, 사람들의 성품 또한 대체로 경박하고 자만하여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한다. 게다가 먹고사는 형편이 넉넉한 까닭에 모두들 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릴 뿐 앞일을 도모하는 사람이 없다. 이 세 가지가 학문을 게을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으니, 탄식할 일이다.
대신과 부모 — 성희안과 홍섬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라를 세운 이래로 대신 가운데 부모가 살아 계신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성희안(창산)의 경우는 모친이 살아 계셨으나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그 밖에는 기억할 만한 예가 아득하여 떠오르지 않는다. 선조 초년에 영의정 홍섬이 모친상을 당하자, 임금이 명하여 대신이 상을 당했을 때 상을 돌보고 부의를 보내는 예를 조사하게 하였으나 전례를 찾을 수 없어, 다만 관에서 대신의 예에 준하여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부의하게 하였다. 그 후 노수신(소재) 정승이 상을 당했을 때도 이 예를 따랐다.
이덕형의 이른 출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지금의 영의정 이덕형(한음)은 서른여덟 살에 정승이 되었으니, 이는 나라를 세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의 부친도 아직 건강하게 살아 계셨다. 이덕형이 정승으로 있을 때 그의 부친은 수안군수로 있었는데, 번거로운 일들을 잘 다스리며 게으르지 않았다.
이덕형이 지금 임금 초년에 임금의 세자 책봉을 명나라에 주청하는 일로 명나라에 다녀와 윤허를 받아 오자, 임금이 그의 부친을 특별히 당상관 품계로 올려 판결사(장례원의 우두머리 벼슬)에 제수하니, 당시 사람들이 아름다운 일이라 하였다.
홍섬의 삼종 정승과 궤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홍섬(인재)의 모친은 정승 송질의 딸이자 영의정 김언필의 아내였다. 이처럼 친정아버지, 남편, 아들이 모두 정승인 경우는 예전에 없던 일인 데다 나이도 아흔이었다. 그 부인이 노년을 보내던 무렵 홍섬은 일흔 살로 궤장을 하사받았으니, 이는 더욱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그리하여 노수신(소재)이 그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이런 시를 지었다.
"친정아버지와 남편과 아들, 셋 모두 정승 집안 문을 벗어나지 않은 것을 지금에야 처음으로 보게 되었네 관아에서 다시 지팡이를 짚으시고 집안에서는 다시 색동옷을 입으시네"
이는 사실을 잘 담아낸 시였다.
근래에 한집안에서 정승이 나온 경우로는, 이산해(아계)와 그의 매부인 좌의정 김응남, 그리고 사위인 이덕형(한음)뿐이다.
(용어) 마지막 시구의 "색동옷"은 춘추 시대 초나라의 효자 노래자가 일흔 살에도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부려 늙은 부모를 즐겁게 해 드렸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나이 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 집안의 정승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광필(문익공) 집안에서 세 정승이 나온 것도 세상에 드문 일이다. 이행(문정공)과 그의 형 이기, 심연원(충혜공)과 그의 아우 심통원도 한집안 형제가 정승이 된 경우다. 심수경(청천)과 그의 조부 심정은 할아버지와 손자가 정승이 된 경우다. 그러나 앞서 든 이행 이하의 경우는 모두 그 이름과 행적에 좋고 나쁨의 구분이 뚜렷하니 이상한 일이다. 무과와 정승 집안에 있었던 훌륭한 일 가운데 이미 성현의 《용재총화》에 실린 것은 다시 싣지 않는다.
부자·형제 정승의 여러 경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한집안에서 부자와 형제가 정승이 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중에서도 허종·허침 형제만은 흠잡을 데가 없다. 정창손과 그의 아들 정괄은 그리 내세울 만한 것이 없고, 그의 사위 김질도 정승이었으나 이는 성삼문의 거사를 고발한 공으로 발탁된 것이다.
심온과 그의 아들 심회, 윤사흔·윤사분 형제와 그들의 매부 성봉조, 신승선과 그의 아들 신수근 등은 모두 왕실과 혼인한 덕으로 정승이 된 것이니 특별히 칠 것이 못 된다. 부자가 이어서 대제학을 지낸 것은 오직 성현(문대공)과 그의 아들 성세창뿐이다.
유성룡과 유영경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유성룡(서애)과 유영경은 첩의 동서 간으로서 모두 영의정이 되었다. 유성룡은 배척받아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가 세상을 떠났고, 유영경은 죄를 지어 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도 같은 유씨이고 벼슬도 같은 영의정이었지만, 그 이름과 행적에는 이토록 좋고 나쁨의 구분이 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채수 집안의 장원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채수(인천군)는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그의 사위인 김안로(이숙)와 이자(차야)도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하루는 장원 급제자들만의 모임인 용두회를 여는데, 채수의 또 다른 사위인 김감(연창부원군)이 여기에 참여하려 하자 장원 급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김감이 부인을 보내 이렇게 청하였다. "제 사위는 서른다섯 살에 대제학이 되었으니, 이 사실로 모임에 참석시켜 주시기를 청합니다." 채수가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은 반드시 참석시켜야겠구나." 그러고는 곧 불러서 함께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문형을 지낸 나이와 가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이덕형(한음)은 서른한 살에 대제학의 소임(문형)을 맡았으니 가장 젊은 나이에 문형을 지낸 경우이고, 김감(연창)은 서른다섯 살이었으니 그다음이다. 이 밖에는 이행(용재)이 마흔 살에 문형을 맡았다.
가장 많은 문형을 배출한 집안으로는 권근(길창)의 집안이 으뜸이다. 나라를 세운 초기에 권근도 문형의 일을 맡았으며, 그의 아들 권제(지재)는 대제학이 되었고, 외손 서거정과 손자사위 최항도 나란히 오랫동안 문형을 맡았다. 그 밖에 신숙주(문충공)와 그의 손자 신용개, 신광한이 모두 문형을 맡았으니, 이 역시 세상에 특히 드문 일이다.
여러 번 장원한 사람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한 집안에서 정승이 나온 것과 과거에 여러 번 장원한 것에 대해서는 성현(용재)이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근래에 여러 차례 장원 급제한 사람으로는, 대사헌 권홍이 문과와 중시에서 장원하였고, 양응정(송천)은 생원시와 중시에서 장원하였으며, 진사시와 문과에서 연달아 장원한 사람으로는 김홍도와 강신이 있다.
율곡 선생은 한 해에 생원시와 문과에서 잇달아 장원하였다. 초시에서는 세 번의 시험을 내리 장원하였고, 회시에서도 장원하여 한 해에 여섯 번이나 장원하였으니 예전에 없던 일이다.
문형을 맡은 사람 가운데는 과거에 장원한 이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정인지(하동부원군)가 초시의 세 시험 모두에서 장원한 것이 가장 특별하고, 그다음이 율곡의 두 차례 장원이다.
변계량(춘정), 정사룡(호음)은 중시에서 장원하였고, 최영성, 김안로(이숙), 정유길(임당), 박순(사암), 노수신(소재), 유근(서경)은 문과에서 장원하였다. 판서 박충구, 홍성민(익성군), 이호민(연릉부원군)은 생원시에서 장원한 반면, 홍섬(인재)은 생원시에서 꼴찌를 하였으니 이 또한 전에 없던 일이다.
(용어) 조선의 과거 시험은 크게 지방에서 치르는 "초시", 서울에서 다시 치르는 "회시(복시)", 임금 앞에서 순위를 정하는 "전시"의 단계를 거쳤다. "중시"는 이미 벼슬하고 있는 문신들을 대상으로 다시 치르던 시험이다.
선조 말년의 정승과 대제학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조 임금 말년까지 대광보국숭록대부의 품계로 살아 있던 사람은 이산해, 유성룡, 심수경, 최흥원, 윤두수, 김응남, 정탁,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이렇게 모두 열 사람이었다. 정탁과 심수경(청천)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이헌국과 김명원이 정승이 되었고, 최흥원이 세상을 떠나자 윤승훈이 정승이 되었다.
그 뒤 윤두수가 세상을 떠나자 유영경이 그 자리를 채웠고, 정탁이 세상을 떠나자 허욱이 있었으며, 유성룡이 세상을 떠나자 한응인, 기자헌, 심희수가 차례로 정승이 되어 그때마다 열 명의 수를 채웠으니, 이 역시 근래에 없던 일이다.
선조 말년에 대제학도 열 사람이었으니, 곧 이산해, 유성룡, 황정욱, 이덕형, 윤근수, 이항복, 심희수, 이정귀, 이호민, 유근이다. 이 가운데 다섯 명이 정승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하고도 대단한 일이었으며, 일곱 사람이 부원군에 봉해진 것도 기이한 일이다.
선조 말년의 지제교와 홍문록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조 말년에는 지제교가 일흔두 명, 홍문록에 오른 사람이 여든네 명이나 되었으니, 나라를 세운 이래 없던 일이다. 그런데도 나라의 중요한 글을 지어야 할 때면 언제나 인재가 없다고 걱정하였다. 그래서 이조에서 홍문관 관원을 추천할 때도 매번 적격자가 없다고 하여, 지방관으로 나가 있는 사람이나 친인척 관계로 피해야 할 사람, 심지어 조사를 받던 사람까지 후보로 올려 임금께 아뢰곤 하였으니,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이헌국의 안목과 사양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이헌국(완성)은 성품이 충직하여 임금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피하거나 숨기지 않았으나, 선조 임금은 늘 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임진왜란 때 임금이 개성에 이르러 두 정승을 해임하였는데, 이헌국은 당시 대사간으로서 그 자리에 있었다. 임금이 막 새 정승을 뽑으려고 몸소 재상들의 명단을 펼쳐 놓고 이름을 짚어 가며 이헌국에게 물었다. "정탁은 어떠한가?" 이헌국이 답했다. "정탁은 비록 청렴하고 신중하나 세상을 구제할 만한 재주는 없습니다. 그는 옛사람이 말한 대로 '높은 다락에 묶어 놓고 태평한 시절을 기다리게 할' 사람입니다." 다시 물었다. "최황은 어떠한가?" 이헌국이 답했다. "강직한 면은 있지만 성품이 편협하니 큰일을 맡길 수 없습니다." 이어 유홍과 황정욱을 물었으나 모두 적당하지 않다고 답하다가, 임금이 최흥원과 윤두수 두 사람의 이름을 대니 이헌국이 합당하다고 하여 마침내 두 사람이 등용되었다. 사람들은 이 일을 듣고 모두 하기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하였다.
이헌국은 무술년과 기해년 사이에 잇달아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그 뒤 정승을 임명할 때 특별히 그를 발탁하며 임금이 말했다. "나는 이조판서를 사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이 사람은 두 번이나 물러났으니 정승으로 삼을 만하다." 이 말은 내시 이봉정이 직접 임금의 말을 듣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전한 것이라고 한다.
(용어) "높은 다락에 묶어 놓고 태평한 시절을 기다리게 한다"는 말은 전혀 쓸모가 없는 사람을 비유하는 옛말로, 중국 진나라 때 유익이라는 사람이 이름만 높고 실속 없는 이들을 두고 "천하가 태평해진 다음에야 이런 무리에게 일을 맡길지 의논할 수 있다"고 말한 데서 나왔다.
윤두수의 결단 — 의주행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평양에서 한창 왜적과 싸우고 있을 때, 임금이 윤두수(오음)에게 성을 지킬 것인지 버리고 떠날 것인지를 물었다. 윤두수는 그때마다 떠나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였는데, 수십 번을 물어도 대답은 늘 같았다. 그 뒤 영변에 이르자 조정의 의논이 갈라져 한쪽은 북쪽으로 가자 하고 한쪽은 강계로 가자고 하였으나, 윤두수 홀로 의주로 가자는 계책을 고집하였다. 끝내 이 결정으로 나라의 운명을 되돌릴 수 있었으니, 이는 모두 그의 힘이었다.
영변에 있을 때 우의정 유홍이 임금을 뵙는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종묘와 사직이 여기 있는데, 전하께서 떠나신다면 대체 어디로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면서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이 잘못임을 힘써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유홍은 곧바로 하직하고 세자가 있는 곳으로 가 버렸다.
신잡의 헛소동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유년(1597년) 봄 왜적이 다시 국경을 침범하자, 임금이 대신들과 의논하며 물었다. "적이 만일 계속 밀고 들어온다면 어가는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한쪽에서 말했다. "영변은 지세가 매우 튼튼하고 명나라와도 가까우니 가서 지킬 만합니다."
신잡(평천)이 예전에 그곳의 절도사를 지냈던 터라 그곳으로 가는 것의 편리한 점과 불편한 점을 모두 아뢰고 군량 저축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끝으로 백관의 수가 많으니 미리 장을 담가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
한준겸(유천)과 남이공(자안)이 홍문관에 숙직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남이공이 말했다. "신공을 '장 담그는 일을 맡은 관리'로 삼아 먼저 영변으로 보내 준비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한준겸이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공만은 결코 보낼 수 없네." 남이공이 까닭을 묻자 한준겸이 답했다. "책력에 신일에는 장을 담그면 안 좋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말에 듣는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날짜를 가리키는 "신일"의 "신"과 신잡의 성씨인 "신"이 소리가 같은 것을 두고 놀린 말이었다.
사관 시절의 회고 — 동정록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유년에 내가 외람되이 사관을 맡아,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들을 모두 조사해 보니, 명나라 장수들이 군사를 부린 일이나 우리나라 장수와 병사들이 세운 공, 그리고 왜적이 침입해 온 일들이 어느 하나도 제대로 밝혀져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기록만 보면 마치 태평하여 전쟁이 없었던 나라처럼 보이니, 이것이 어찌 사관이 제대로 기록한 것이라 하겠는가.
그 뒤 임금이 명하여 명나라가 군사를 보내 우리를 도운 사정을 모아 《동정록》을 편찬해 올리게 하였다. 이에 윤근수(월정)와 신흠(현옹)이 이 일을 총괄하는 당상관을 맡고, 나는 실무를 맡아 책을 엮어 올렸다. 지금 실록청에서도 이 《동정록》을 가져다 실록에 싣고 있으나, 정작 우리나라 자체의 사적에 대해서는 아득하여 한 가지도 기록에 남은 것이 없으니 탄식할 일이다.
선조의 검소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조 임금의 검소한 덕은 여러 임금 가운데서도 뛰어났다. 말년에 병이 들어 궁중 의원이 진찰하러 들어갔는데, 임금은 푸른 베로 만든 요를 깔고 자줏빛 명주 이불을 덮고 계셨으며, 입고 있는 옷도 푸른 명주로 지은 것인데 올이 매우 거칠었다. 약을 올릴 때 쓰는 그릇도 무늬 없는 흰 자기였고, 검소한 안석과 글씨를 쓴 병풍만 있을 뿐 화려한 휘장도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최천건(분음)이 직접 보고 나에게 들려준 것이다.
지제교 시절의 급박했던 일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는 오랫동안 지제교를 맡았는데, 그동안 가장 다급했던 일이 두 번 있었다.
경자년(1600년) 의인왕후의 장례 때, 나는 장생전의 낭관으로서 관을 모시고 능에 가 있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혼령을 모신 장막에 불이 나서, 겨우 관만을 불길에서 구해 내었다. 이 일로 아침 제사 때 위안제를 지내야 했는데, 세자궁에서 나에게 제문을 지어 오라는 명이 내렸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승정원에서 나를 불러 당장 지어 바치라 하였다. 다급하고 당황하여 글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급하게 지은 것이라고 하여 사람들이 오히려 칭찬을 많이 하였으나 나로서는 매우 부끄러웠다.
계묘년(1603년) 봄에는 이덕형(한음)이 묘를 옮기는 일로 사직을 청하였는데, 이준(숙평)이 임금이 이를 처음으로 물리치는 비답을 지었다. 그런데 임금이 이를 마땅치 않게 여겨, 특별히 나를 불러 대궐로 오게 하고는 급히 다시 지어 바치라 하였다. 이준이 이미 매우 잘 지어 놓은 글이 있었는데도 이를 버려두고 따로 지으라는 것인 데다, 묘를 옮기는 일에는 여러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말을 만들어 내기가 몹시 어려웠다. 땀이 흘러 붓을 제대로 댈 수 없을 정도였는데, 겨우 격식을 갖추어 직접 써서 바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임금의 말이란 마땅히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서투른 글로 임금의 칭찬까지 받은 것은 나로서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유영경을 둘러싼 갈등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유영경(전양)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가 어떤 사건으로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리자, 내가 이를 물리치는 비답을 짓게 되었다. 그 비답에서 그의 인품을 칭찬하며 "재주는 온갖 일에 능통하고 기개는 공경들을 압도한다"고 썼더니, 유영경이 이를 보고 나를 미워하였다. 그 뒤로는 사관들과 짜고서 다른 지제교에게 맡겨 글을 짓게 하였는데, 지나치게 칭찬하는 말이 많았다.
훗날 유영경이 몰락하자, 신요와 민경기는 그에게 아첨한 일로 지제교의 벼슬을 박탈당하고 죄를 받아 파직되었다고 한다.
이항복과의 약속 — 공신 녹권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이항복(오성상공)은 나의 글을 좋아하였다. 공신 명부에 이름을 올리기 전에 그가 이렇게 다짐하였다. "내 공신 녹권은 반드시 자네의 글로 받고 싶네." 나도 그러겠다고 승낙하였다. 그 뒤 공신들이 회맹하는 자리가 열렸을 때 나는 마침 지방에 나가 있었으므로, 이미 홍경신(녹문)에게 대신 짓도록 부탁해 놓은 뒤였다. 내가 서울에 도착하자 이항복이 자신의 장인인 도원수 권율의 녹권을 지어 달라 부탁하면서, 예전의 약속을 이것으로 대신 갚으라고 하였다. 내가 지어 보낸 초고의 끝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어 선친이 지내신 정승 자리를 이었고, 길창군에 봉해져 문충공 권근의 복된 터전을 이어받았네." 이항복이 이를 보고 매우 칭찬하였다. 이는 권율이 영의정으로 추증되어 그의 선친 권철과 벼슬이 같아졌고, 권근(양촌)의 후손으로서 봉해진 고을 이름도 서로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이었다.
정원군 녹권의 오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무릇 공신 녹권 안에는 "부모도 함께 벼슬을 추증받았다"는 등의 말을 으레 형식적으로 적어 넣는다. 승지 조정지가 정원군의 녹권을 지으면서 무심코 이 구절을 그대로 써넣어 "부모도 아울러 벼슬을 받았다"는 문구를 넣고 말았다. 임금이 이를 보고 물었다. "정원군의 부모가 언제 벼슬을 받은 일이 있었느냐?" 승정원에서 그를 문책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은 허락하지 않고, 나에게 다시 짓도록 명하였다. 나도 겨우 지어 바쳤으나 임금이 보고는 칭찬하는 말이 지나치다 하여 고쳐서 녹권에 쓰도록 하였다. 이를 보면 선조 임금이 말을 신중히 하려 했던 지극한 뜻을 알 수 있다.
월과 장원과 당상관 승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미년(1607년)에 나는 여름, 가을, 겨울 세 계절에 걸친 다달이 치르는 시험(월과)에서 연달아 장원을 하였는데, 임금이 법전을 살펴 상을 내리도록 하였다. 예조에서 《경국대전》을 살펴보니 "홍문관 월과에서 세 차례에 걸쳐 일등으로 수석을 차지한 사람은 품계를 올려 준다"는 규정이 있었다. 당시 대제학은 유근(서경)이었고 제학은 신흠(현옹)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이 법전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였다. 누군가가 "'세 차례'는 '연이은 세 등수'라는 뜻이고 '일등'은 곧 '수석'이라는 뜻이다"라고 하기에, 이 말대로 갖추어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특별히 품계를 올려 주도록 하였다. 나는 이렇게 하여 당상관이 되었다.
대개 법전에서 말한 "세 차례"란 석 달에 걸쳐 치른 아홉 번의 시험에서 모두 장원한 것을 말하고, "일등"이란 점수의 합계가 서른 점이 되어 수석을 차지한 것을 뜻한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세 계절에 걸쳐 아홉 달 동안 스물일곱 번의 시험에서 모두 장원하여 점수의 합계가 백두 점이나 되었으니, 법전에서 말한 내용과는 다소 다른 것이었다.
평소에는 글에 능한 사람이 많아서 누구도 혼자 장원을 독차지하는 경우가 없었으므로, 이 규정은 법전에만 있을 뿐 실제로 시행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를 직접 본 일이 없어 저마다의 추측으로 법을 헤아리다 보니 이런 착오가 생기게 된 것이다.
성소부부고 제24권
10. 14:40
성소부부고 제24권 · 설부 3 · 성옹지소록 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출처: 성소부부고 제24권, 설부 3
배경: 《성옹지소록》은 허균이 함열에 유배되어 있던 시기에 쓴 잡록으로, 보고 듣고 겪은 온갖 일을 두서없이 적어 내려간 글이다. 이 하권에는 선조 임금과 신하들 사이의 일화, 명필 한호와 화가들의 이야기, 조선의 옛 제도와 풍속, 음악과 기예에 뛰어났던 이들, 일찍 출세한 사람들의 사례, 강릉 지방의 인물과 효자·열녀 이야기, 중국 사신들과의 교유, 그리고 허균 자신의 집안 내력까지 폭넓게 담겨 있다.
돌아가신 선조 임금은 문장에 뛰어나 역대 임금 가운데서도 으뜸이었으므로 신하들이 감히 따라갈 수 없었는데, 그런데도 유독 돌아가신 내 둘째 형 허봉의 시를 칭찬하시곤 했다. 형이 북쪽 지방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뒤, 독서당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다달이 지어 올리던 글 가운데 거산역에서 지은 시가 있었다. 그 마지막 연에
천 년 전에 부러진 창은 모래에 묻혀 있고 십 리 너른 벌판엔 비 그치자 비린내가 풍기네
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임금께서 손수 붉은 점을 찍어 표시해 내려 주셨다.
임인년(1602년)에 고천준과 최정건, 두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월사 이정귀가 임금을 뵙는 자리에서 나를 해운판관 자리에서 갈아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임금께서 "그의 형 아무개와 견주면 재주는 누가 더 나은가?" 하고 물으셨다. 이것만 보아도 임금께서 만년에 이르도록 우리 형제를 잊지 않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선조 임금은 또 지천 황정욱의 문장을 좋아하셨는데, 소재 노수신 정승이 힘써 추천한 끝에 그는 제학에서 겸 대제학으로 승진하였다.
독서당을 설치하여 관리들에게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하는 사가독서 제도를 시행한 뒤로는, 문형, 곧 대제학 자리는 반드시 이 독서당을 거친 사람 가운데서 임용하였다.
이 때문에 어촌 심언광은 대제학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일찍이 독서당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 차례나 상소를 올려 스스로 물러났다. 그런데 유독 지천 황정욱만은 독서당을 거치지 않고도 대제학이 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영예로운 일로 여겼는데, 이 역시 임금께서 그를 칭찬하신 덕분이었다.
선조 임금은 《장자》를 몹시 좋아하여 신하들에게 내리는 글에서도 이따금 《장자》의 구절을 인용하였고, 글의 짜임새도 《장자》와 흡사한 데가 있었다. 이 때문에 임금께서는 오히려 공부하는 이들이 《장자》를 읽다가 거기에 빠져들까 염려하여, 예조에 명해 과거 시험의 논술과 대책 문제에는 결코 노자나 장자의 글을 인용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경자년(1600년) 전시에서 응시자 이함이 답안의 첫머리에 《장자》의 말을 인용했다는 이유로 그의 합격을 취소하도록 명하셨다. 이함은 그 뒤 기유년(1609년)에 다시 과거에 합격했다고 한다.
경홍 한호는 글씨에 뛰어나 선조 임금의 각별한 눈에 들어 극진한 사랑을 받았고, 임금은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려 그를 격려하였다. 그가 서울에 있을 때면 임금은 술과 쌀, 반찬거리, 붓과 종이를 넉넉히 내려 주도록 명하였고, 봄가을로 의복과 허리띠, 안장 얹은 말과 신발 같은 하사품이 끊이지 않았다. 특별히 명하여 가평 군수로 제수된 지 몇 해 뒤, 사헌부에서 그를 탄핵하자 임금은 그저 심문만 하고 넘어가게 하셨다. 그 뒤 공조의 낭관으로 있을 때 응당 갖추어 바쳐야 할 문서를 법대로 처리하지 않아 파직될 처지에 놓였으나, 임금은 문책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그가 병이 위급해지자 임금은 약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고, 그가 죽자 한동안 슬퍼하며 부의를 후하게 내리셨으니, 임금과 신하 사이에 서로를 알아주는 정이 이보다 더한 경우는 없었다.
석봉 한호가 임당 정유길 정승을 따라 압록강 가에서 명나라 사신 경당 한세능을 맞이하였는데, 한세능이 그의 글씨를 몹시 칭찬하였다.
그때 따라온 등계달이라는 이가 석봉의 글씨를 얻어 돌아가 왕세정에게 보이자, 왕세정은 "원나라의 명필 조맹부와 어깨를 겨룰 만하다"고 하였고, 도융이 이를 보고는 "성난 사자가 돌을 튕겨 내는 기세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의 이름이 중국에까지 떨치게 되었으니, 이는 근래에 없던 일이었다.
석봉은 일찍이 당나라 종이에다 이태백의 시를 써서 책 다섯 권을 만든 적이 있었다. 해서와 행서를 크고 작은 여러 서체로 모두 갖추어 쓰되 온갖 정성과 힘을 다 쏟았다. 또 큰 종이에다 옛 명필들의 글씨를 모아 놓은 《동서당집고첩》을 옮겨 썼는데, 하나하나 원래의 서체를 그대로 살려 조금도 다르지 않았으니 참으로 더할 나위 없는 보배였다. 선조 임금께서 이 소문을 들으시고 급히 내시를 보내 이 글씨들을 모두 찾아 궁궐 안으로 가져오게 하시고는, 이튿날 명주와 베, 소금, 쌀, 종이, 붓, 먹, 향, 임금이 쓰던 벼루, 옷, 신 등을 매우 후하게 내려 주셨으며, 이것으로 집을 사서 살도록 해 주셨다.
돌아가신 내 둘째 형은 사내 안경창에게서 《연화경》 금자 필사본 네 권을 얻은 일이 있었다. 이는 세조 임금 때 궁궐에서 화장사라는 절에 시주한 것으로, 강중 서거정과 중경 성임, 동래 정창손, 인재 강희안, 이 네 분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쓴 것이었는데, 끝에는 이들의 벼슬 이름까지 함께 적혀 있었다. 형은 곧 석봉을 청하여 그 뒤에 금색 글씨로 《주역》과 《중용》, 《참동계》, 《황정경》을 쓰게 하였는데, 작은 해서체 글씨가 더없이 절묘하여 마침내 둘도 없는 보배가 되었다. 형이 세상을 떠난 뒤 내가 이것을 물려받았다. 표구하는 일을 하던 김대건이 우리 집을 매우 가깝게 드나들었는데, 하루는 이 일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께서 이를 가져오게 하시고는 《자치통감》 한 질을 내려 주셨다.
왕실 종친인 석양정 이정은 먹으로 그린 대나무 그림에 뛰어났고 매화와 난초도 잘 그렸다. 선조 임금은 그를 몹시 칭찬하여, 그가 족자 한 폭을 그릴 때마다 많은 물품을 은혜롭게 내려 주셨다. 내가 귀한 분을 통해 임금이 손수 그린 대나무와 난초 그림을 얻어 이를 석양정에게 보였더니, 그는 감탄하며 "힘차고 씩씩하여 정해진 화법에 얽매이지 않았으니 참으로 신선의 경지에 이른 작품이다"라고 하였다.
신묘년(1591년)에 선조 임금께서 절구 한 수를 지어 벽에다 써 붙이셨는데
한밤중에 칼을 어루만지니 그 기세가 무지개를 토해 내는 듯하고 웅대한 마음은 일찍이 우리 동방을 평안케 하고자 했었네 그런데 지금 하는 일은 한단 사람의 걸음걸이를 배우려다 제 걸음마저 잊은 것과 같으니 서쪽 바람에 고개를 돌리니 한스러움이 끝이 없구나
라는 시였다. 그 시의 기세가 넓고도 드높아 참으로 임금다운 말씀이었다. 아, 이것이 혹 이듬해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지으신 것이었을까.
(용어) "한단 사람의 걸음걸이를 배우려다 제 걸음마저 잊었다"는 것은, 옛날 연나라의 한 젊은이가 조나라 한단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멋져 보여 그것을 배우러 갔다가, 끝내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채 자기 본래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려 기어서 돌아왔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남의 것을 어설프게 흉내 내려다 제 본모습마저 잃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정유년(1597년)에 창서 양호가 우리나라의 군무를 총괄하는 경리사로서 서울에 와 군대를 주둔시켰다. 선조 임금께서는 하루는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자 하여 손수 편지를 쓰시고 도승지 이호민을 시켜 양호에게 전하게 하셨는데, 그 사연이 수천 자에 이르렀고 뜻도 매우 간절하였다. 양호는 회답하는 편지에 "방패와 창이 어지러이 부딪치는 시기이니 정사를 게을리할 때가 아닙니다"라는 두 구절만을 적어 돌려보냈는데, 임금께서도 이를 매우 옳게 여기셨다.
양호는 문관 출신 대신이면서도 몸소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 나섰다.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를 울산 도산성으로 몰아넣어 거의 사로잡을 뻔하였다. 이보다 더 큰 공이 없었는데도 끝내 모함을 받아 파직되어 돌아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그가 돌아가는 것을 아쉬워하였고, 돌에 그의 초상을 새겨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하였다.
예로부터 우리 동방을 정벌한 장수와 병사들은 공을 세우고도 모두 죄를 뒤집어썼다.
한나라 무제 때 조선의 네 군을 평정한 뒤 순체와 양복이 모두 죄를 지어 옥에 갇혔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한 뒤에는 영국공 이적이 공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품계와 녹봉을 깎였다. 백제를 평정한 뒤에는 소정방과 설인귀가 서로 공을 다투다가 제후로 봉해지는 일이 정지되고 관작마저 낮아졌다. 강조를 사로잡고도 소손녕은 고려 왕을 끝까지 뒤쫓지 않았다는 이유로 변방으로 유배되었고, 원나라는 살리타이가 죽을죄를 지었다 하여 그 부장 아릭테무르 이하를 함께 죽였다.
임진년(1592년) 왜란 이래로도 이와 다르지 않아, 경략 송응창은 모함을 받아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제독 이여송은 공적을 지나치게 부풀려 보고했다는 모함을 받아 죄를 입었으며, 찬획사 유황상과 원황도 함께 파직되었다. 정유년(1597년)에는 경리 양호가 모함을 받아 돌아갔고, 군문 형개와 제독 마귀, 제독 유정도 함께 명나라 관리 정응태의 탄핵을 받았다. 그 뒤 정응태 또한 이 일로 관직이 낮아졌고, 경리 만세덕도 어사의 탄핵을 받아 녹봉이 정지되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용어) 순체와 양복은 한 무제가 고조선을 정벌할 때의 장수들이다. 이적은 당나라 장수로 영국공에 봉해졌으며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소정방과 설인귀는 당나라 장수로 백제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강조는 고려의 장수이고, 소손녕은 거란의 장수로 고려를 침입했다가 강조에게 사로잡혔다. 살리타이와 아릭테무르는 고려를 침입한 몽골의 장수들이다.
전란을 겪은 뒤로는 조정의 관원들이 갓과 도포, 관복용 띠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 군복 차림에 슬갑을 두르고 칼을 차고 다녔다. 그러다가 경자년(160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정에 나갈 때 입는 조복을 갖추게 되었는데, 당상관 이상은 담홍색 비단으로 지은 홑겹 도포를 입었고, 당하관은 담홍색 무명으로 지은 홑겹 도포를 입었다. 그런데 식자들이 "임금의 옷 빛깔도 붉은데 임금과 신하가 같은 색의 옷을 입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여 검은 옷을 입기 시작하였다. 그때 당하관이 비단옷을 입는 것을 임금께서 엄격히 금하셨다. 사람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다시 붉은색 옷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신축년(1601년) 의인왕후의 상복을 벗은 뒤 복색을 다시 의논하게 되었는데, 서경 유근이 예조 판서로 있으면서 붉은색 비단옷을 주장하였고, 나도 그때 예조의 의제사에 있으면서 이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모두 조정의 논의가 옳다고 하였으나, 유독 오성 이항복만은 그르다고 여겼다. 오성은 나를 불러 꾸짖기를 "일개 낭관이 붉은 비단옷을 입고 싶다고 감히 조정의 논의를 흔든단 말인가?" 하였다. 그 뒤 경술년(1610년) 담제를 지내는 날에 복색을 검은색으로 정하고자 하였으나 지금껏 실행되지 않고 있다.
대체로 우리나라에서는 잇꽃을 많이 심어 붉은색으로 물들이기가 쉬웠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손쉽게 여겼던 것이다. 조상 대의 임금들이 홍색과 회색, 백색 옷을 금하는 조목까지 세웠지만 끝내 막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의복과 모자, 그릇 등에는 옛 중국의 제도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모두 이를 칭찬한다.
남녀가 신는 버선은 곧 옛날에 이르던 족건이라는 것이고, 남자가 쓰는 갓은 옛날에 일컫던 곡병립이라는 것으로, 남조 시대의 시인 사영운이 즐겨 쓰던 것이다. 사대부 집안 부인들이 쓰던 머리쓰개는 옛날의 유모이고, 신부가 혼인날에 쓰던 족두리는 곧 옛 중국의 경전 《시경》에서 말한 머리 장식과 같은 것이며, 군복인 철릭은 곧 옛날의 바지와 슬갑이다. 종묘 제사에 쓰는 그릇과 항아리, 대나무로 짠 그릇 뚜껑은 모두 주나라의 제도이고, 임금의 행차에 쓰는 곰과 표범 문양의 의장 지팡이와 창은 모두 수나라의 제도이다. 병조와 도총부에서 붉은 갓에 날이 없는 창을 갖추고, 금 단추를 달고 가죽바지에 슬갑을 두르는 것 역시 당나라의 제도이다. 이 밖에도 오랜 세월에 걸쳐 이어져 온 풍속이 매우 많아 다 적을 수 없을 정도인데, 이런 것들은 정작 중국에는 남아 있지 않은 것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악기는 모두 옛 제도를 따른 것이다.
거문고는 옛날의 오현금을 본떠 줄 하나를 더한 것이고, 가야금은 옛날의 비파를 본떠 열세 줄을 줄인 것이다. 방향과 요고, 대금, 그리고 종묘 제사에 쓰는 편종ㆍ편경ㆍ축ㆍ어ㆍ훈ㆍ지 등의 악기는 모두 당나라의 제도이다. 종묘 제례악 가운데 등가 악장 역시 당나라 사람이 지은 것을 본뜬 것이다. 민간에서 쓰는 음악으로는 풍입송ㆍ서자고ㆍ수룡음ㆍ오운봉서도 등의 악장이 있는데, 이는 송나라 휘종 때 우리나라에 내려 준 대성악으로서 오히려 옛 풍악의 자취가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서는 남곡과 북곡이 성행한 뒤로 당나라와 송나라 때의 옛 풍악이 모두 사라져 남은 것이 없다. 이른바 "예가 사라지면 오히려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 구할 수 있다"는 옛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고려 초에 음악을 맡은 관원이 당나라 때의 궁중 정악을 본떠 황풍악을 지었다. 그 악장은 왕씨가 나라를 처음 일으킨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었는데, 임금이 크게 조회를 열거나 거둥할 때면 반드시 이 곡을 연주하였다.
조선 건국 초에는 임금이 문인들에게 명하여 《용비어천가》 다섯 권을 짓게 하였다. 그중 앞의 일곱 장과 뒤의 세 장을 뽑아 여민락을 만들고, 황풍악의 가락에 맞추어 함께 연주하게 하였다. 임금이 서쪽 교외로 나가 중국 사신의 조칙을 맞이할 때면 이 음악을 대궐 뜰에서부터 연주하기 시작하여 숭례문에 이르러서야 한 곡이 끝났다. 그리고 다시 연주하면서 모화관에 이르러 임금이 가마에서 내리면 그제야 마쳤다. 선조 임금 초년에는 가락이 점점 빨라져서 한 곡이 으레 광통교에 이르러 끝나게 되니, 음악을 맡은 관원들이 가락이 이렇게 조급하게 줄어드는 것을 몹시 걱정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년(1592년)의 전란이 일어났다. 지금은 그 가락이 슬프고 급박하며 흐트러져서 도무지 수습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젊었을 때 태평성대의 문물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악공 가운데 허억봉이라는 이가 있어 피리를 잘 불었는데, 만년에는 거문고로 옮겨서도 그 솜씨가 뛰어났다. 박소로는 거문고를 잘 타서 옛 가락에 능했고, 홍장근은 민간의 가락에 능하여 두 사람 모두 일류로 꼽혔다. 또 가야금은 이용수, 비파는 이한, 아쟁은 박막동이 모두 일류로 꼽혔다. 노래로는 기생 영주선과 여성군 송씨 집안의 여종 석개를 모두 으뜸으로 쳤다.
그 뒤로는 이한의 조카 전한수와 이용수의 제자 임환이 스승의 재주를 이어받았다. 이 밖에도 왕실 종친인 죽장감은 아쟁과 비파에 능했고, 김운란은 아쟁을 잘 타서 그 소리가 마치 사람이 말하는 듯하여 그 가락을 듣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렸다. 또 서자 출신 김연이 가야금을 잘 탔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런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용수는 이미 늙었고 오직 임환 한 사람만이 남아 있을 뿐이며, 노래는 그 대를 이을 만한 이가 한 사람도 없다. 이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인재가 모자라게 되어서 그런 것일까.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명종 임금 때 선비 이언방이라는 이가 노래를 잘 불렀다. 가락이 맑고도 높아 감히 그와 재주를 겨루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일찍이 〈최득비여자가〉라는 노래를 부르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가 평양을 유람할 때, 그곳 교방에 속한 기생이 거의 이백 명에 이르렀다. 관찰사가 이들을 죽 늘어앉힌 뒤,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가리지 않고 우두머리 기생부터 어린 기생까지 한 사람씩 노래를 부르게 하고, 그때마다 이언방이 곧바로 화답하여 불렀는데, 그 목소리가 저마다의 목소리와 흡사하게 들리도록 부르되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개성 기생 진랑, 곧 황진이가 그가 노래를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의 집을 찾아갔다. 이언방은 자신이 이언방의 아우인 척 속이며 "형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도 노래는 제법 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한 곡조를 불렀다. 진랑이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저를 속이지 마십시오. 세상에 이런 노랫소리가 어찌 또 있겠습니까. 당신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옛날 노래를 잘했다는 면구와 진청인들 이보다 더 잘할 수 있겠습니까?"
(용어) 면구와 진청은 옛 중국의 노래 잘하던 이들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진랑은 개성에 살던 앞 못 보는 사람의 딸이다. 성품이 거침없어 마치 남자와 같았다. 거문고를 잘 탔고 노래도 잘 불렀다.
일찍이 산수를 유람하며 금강산에서 태백산과 지리산을 지나 나주에 이르렀는데, 마침 고을 원이 절도사와 함께 한창 잔치를 벌이고 있어 풍악과 기생들이 자리에 가득하였다. 진랑은 해진 옷에 때 묻은 얼굴로 태연히 그 자리에 끼어 앉아 이를 잡으며 노래하고 거문고를 탔는데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으니, 자리에 있던 여러 기생이 그 기세에 눌리고 말았다.
진랑은 평생 화담 서경덕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반드시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의 농막을 찾아가 한껏 즐긴 뒤에야 떠나가곤 하였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지족 선사는 삼십 년을 벽만 바라보며 수양했지만 내가 그 지조를 꺾어 놓았다. 그런데 오직 화담 선생만은 여러 해를 가까이 지냈어도 끝내 나와 아무 일도 없었으니,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성인이시다." 진랑은 죽을 무렵 집안사람에게 이렇게 부탁하였다. "상여가 나갈 때 부디 곡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인도해 다오." 지금까지도 노래하는 이들이 그가 지은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그 또한 남다른 인물이었다.
진랑이 일찍이 화담을 찾아가 이렇게 아뢴 적이 있었다. "송도에는 세 가지 빼어난 것이 있습니다." 선생이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자, 진랑은 "박연폭포와 선생님, 그리고 소인입니다" 하였다. 선생께서 이 말을 듣고 웃으셨다. 이는 비록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또한 그럴듯한 말이었다.
대체로 송도, 곧 개성은 산수가 웅장하면서도 굽이굽이 감돌아 흘러 뛰어난 인재가 많이 났다. 화담의 성리학은 조선에서 으뜸이었고, 석봉의 글씨는 나라 안팎에 이름을 떨쳤으며, 근래에는 차씨 집안의 부자와 형제 또한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진랑 역시 여인들 가운데서도 빼어났으니, 이것만 보아도 그가 한 말이 결코 헛말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개성에 안경창이라는 이가 있어 스스로 호를 사내라 하였다.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배부름을 잘 견뎌 낸다 하여 그렇게 호를 지었다고 한다. 그는 젊어서부터 집을 떠나 산수 사이를 떠돌아다녔는데, 일흔 살이 되어서도 얼굴이 늙지 않았고, 소재 노수신 정승, 지천 황정욱, 그리고 돌아가신 내 둘째 형과 가깝게 지냈다. 갑신년(1584년) 눈 내리는 겨울, 그는 갑산으로 귀양 가 있던 형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눈 속에서 적생원의 우물물로 목욕을 하고도 살갗에 소름 하나 돋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신기하게 여기며 무슨 비법이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여든넷의 나이에 병 없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 사람 역시 남다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증선지가 지은 《십팔사략》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문대공 성현이 이를 구하여 몹시 좋아하였다. 그때 그의 아들인 번중 성세창 정승이 이미 과거에 올라 있었는데, 공은 그에게 한 차례 이 책을 외워 보게 하고는 "이 정도면 대제학을 맡기에 충분하겠다"고 하였다. 조선 건국 초에는 모든 사람이 《고문진보》의 전집과 후집을 배우고서 문장을 지었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도 처음 글을 배울 때면 반드시 이 책을 중히 여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십팔사략》은 온갖 역사서를 통독한 사람이 그 요점을 추려서 잊지 않도록 기록해 둔 것이고, 《고문진보》는 한 사람이 우연히 이런저런 글을 뽑아 모은 것에 지나지 않으니, 그 고르고 버린 기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굳이 읽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어린 학생이 글의 이치를 깨우치는 데에는 《논어》와 《맹자》, 《통감》만으로도 충분한데 하필 그런 책을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있겠는가.
사문 조위한이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중국 사람들이 우리 동방 사람의 문장이 자기네보다 뛰어남을 꺼려서 《십팔사략》과 《고문진보》 두 책을 지어 우리나라에 보내왔다. 이 책들이 들어온 뒤로 우리 문장의 규모가 좁고 막혀서 옛날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이는 농담으로 한 말이라서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나 스스로 겪어 본 바가 있다. 나는 열두 살에 처음 글을 배웠는데, 《십팔사략》부터 읽는 것이 부끄러워 먼저 《통감》과 《논어》를 배웠더니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글의 이치가 훤히 트였다. 그런데 이웃에 살던 이 아무개는 일곱 살 때부터 《십팔사략》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빠짐없이 외웠고 그렇게 십 년을 외웠지만, 《통감》은 한 줄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하였다. 그런가 하면 여장 권필과 자민 이안눌은 모두 《고문진보》를 읽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시는 하나같이 좋았으니, 지세 조위한의 말도 나름의 이치가 있는 셈이다.
판부사 김수는 젊었을 때 《십팔사략》 읽기를 좋아하여 그 공부가 깊었다. 그가 교리가 되자 선조 임금께서는 그에게 《십팔사략》을 교정하게 하시고, 그 끝에 발문을 짓도록 하셨다. 그의 동료들이 이를 두고 놀리며 "신하를 알아보는 데는 임금만 한 이가 없다"고 하였다.
세상에는 글의 이치에는 어두우면서도 글은 잘 짓는 사람이 있다. 나의 매형 김성립은 경전이나 역사책을 읽으라 하면 입도 떼지 못하지만, 과거 시험용 문장만큼은 요점을 정확히 짚어내어 논술과 대책 문제에서 여러 차례 높은 등수에 들었다.
그가 대책문을 지을 때에는 거꾸로, 곧 글의 맨 끝부분부터 지어 올라가는 방식을 썼다. 맨 나중에 들어갈 마무리 부분을 먼저 짓고, 그다음에 폐단을 바로잡는 방안을 쓰고, 다음으로 조목조목 따지는 부분을, 그다음에 글 중간의 핵심 대목을 지은 뒤, 마지막으로 시험지에 옮겨 적을 즈음에야 비로소 첫머리를 지었는데, 그렇게 하고도 앞뒤가 조금도 어긋남 없이 정연하였으니, 이 또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식년시에서 경서의 뜻을 구술로 시험 보게 하는 것은, 본래 그 뜻을 제대로 밝혀 알고 있는지를 살피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선비들은 그저 구절을 끊어 읽는 법만 익힐 뿐 그 뜻은 전혀 알지 못한다. 경서의 장구마다 첫머리가 많아 다 기억하기가 어려우므로, 그럴듯하게 지어낸 말을 함부로 적어 넣어 외우는데, 그 요란한 말들을 성현이 남기신 훈계의 말씀 위에다 마구 늘어놓는 것이다. 이는 옛 성현을 욕되게 하는 짓이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일찍이 우초춘이 엮은 《명퇴조록》과 왕세정이 지은 《성사술》을 보았는데, 일찍 출세한 이들을 하나하나 갖추어 기록해 놓아 열한 살부터 쉰 살까지 빠짐없이 찾아 실어 놓았다.
우리나라에는 상고할 만한 기록이 마땅치 않으므로 우선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적어 둔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 인재가 매우 적기 때문에, 요행으로 과거에 오르고 요행으로 재상 반열에까지 오른 이도 많다. 이제 스무 살 이전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으로부터, 서른 살 이전에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 마흔 살 이전에 공경의 지위에 오른 사람들의 이름을 나이별로 다음에 적어 둔다.
열네 살: 곽거완이 진사가 되었고, 그 뒤 과거에 올라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열다섯 살: 구수영이 돈녕부 도정이 되었고, 이희순ㆍ이승건ㆍ권주ㆍ김규는 진사가 되었으며, 심언광은 향시의 세 시험에서 모두 장원을 하였다.
열여섯 살: 권홍ㆍ심은ㆍ장계금ㆍ이명한이 진사가 되었다.
열일곱 살: 남지는 경상도 도사가 되었고, 이행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열여덟 살: 구성군 이준은 병조 판서가 되었고, 이파는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김수녕과 박호는 문과에 장원하였고, 허봉ㆍ윤훤ㆍ이구는 생원진사시에 장원하였다.
열아홉 살: 이대해ㆍ이집ㆍ이후는 문과에 합격하였고, 오남은 무과에 장원하였다. 우흥적은 진사시에 장원하였다.
스무 살: 박은ㆍ박홍린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구는 문과에서 갑과 둘째로 급제하였다.
스물한 살: 구성군 이준은 도원수가 되었고, 이파는 이조 좌랑이 되었으며, 윤계선은 문과에 장원하였다.
스물두 살: 성표는 정국공신에 녹훈되었다.
스물세 살: 엄흔이 이조 좌랑이 되었다.
스물네 살: 허봉과 김신국이 이조 좌랑이 되었고, 남이는 승지가 되었다.
스물다섯 살: 윤계겸은 승지가 되었고, 박동량은 당상관이 되었다.
스물여섯 살: 남이는 병조 판서가, 이파는 도승지가, 박원종은 병조 참의가, 김신국은 의정부 사인이 되었고, 정사룡은 중시에 장원하였다.
스물일곱 살: 허봉은 예문관 응교가, 성표는 당상관인 첨지가, 김수녕은 이조 참의가, 신면은 승지가 되었다.
스물여덟 살: 구성군 이준은 영의정이 되었고, 이행은 승지가 되었다.
스물아홉 살: 윤사흔은 관찰사가, 박은은 승지가, 한숙창은 호조 참의가, 이계동은 대사헌이 되었다.
서른 살: 권건ㆍ신종호는 모두 승지가 되었고, 유운은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서른한 살: 이덕형은 겸 대제학이 되었다.
서른두 살: 박원종은 한성부 판윤이, 윤계겸은 공조 판서가 되었다.
서른세 살: 김감은 예조 판서가, 김정은 형조 판서가 되었다.
서른네 살: 박은은 병조 판서가, 한확은 이조 판서가, 허종은 함경도 관찰사를 겸하였다.
서른다섯 살: 김감은 겸 대제학이, 윤사윤은 의정부 참찬이, 유담년은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서른여섯 살: 성준과 이극감이 모두 형조 판서가 되었고, 박동량은 호조 판서가 되었다.
서른일곱 살: 윤사흔은 찬성이, 이정귀는 호조 판서가, 이자는 참찬이 되었다.
서른여덟 살: 이덕형은 우의정이, 한확은 찬성이, 이정귀는 대제학이, 장운익은 형조 판서가 되었다.
서른아홉 살: 윤사흔은 우의정이, 이파는 찬성이, 황치신은 참찬이 되었고, 성표는 음직으로 군에 봉해졌다.
마흔 살: 김질은 부원군이 되었고, 남지는 우의정이, 최천건은 이조 판서가 되었다.
이 밖에도 일흔다섯 살에 정승이 된 이가 두 사람이니, 청천 심수경과 완성 이씨였다. 나의 외사촌 형 김자한은 예순두 살에 경서 구술시험에서 열네 점을 받아 합격하여 과거에 올랐으니, 늘그막에 귀하게 된 경우로서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근래 재상 반열에 오른 이 가운데 아흔 살을 넘긴 이가 두 사람이니, 판중추부사 원혼과 좌찬성 송찬이다.
형조 참판 이거의 어머니는 백세 살에 세상을 떠났다. 상을 당할 때 참판은 일흔일곱, 큰딸은 여든다섯, 다음 딸은 여든두 살이었는데 모두 병이 없었다. 그 노인이 나이 백 세가 되었을 때 임금께서 부인이라는 칭호를 내리고자 하셨으나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므로, 특별히 그 아들에게 한성부 우윤 벼슬을 내리시고 아들의 관직에 맞추어 부인에게 내리는 임명장을 내려 주셨으며, 이 밖에도 쌀과 폐백, 술과 고기를 후하게 내리는 등 은혜로운 하사품이 많았다. 참판의 다섯 아들이 모두 벼슬길에 나아갔고, 손자가 거의 백 명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그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었다.
강릉부 태화현의 갑사 임세적은 백열일곱 살에 세상을 떠났으니, 근래에 없던 일이었다.
근래에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한 집으로는 윤신의 아들 후ㆍ길ㆍ서ㆍ감ㆍ탁 다섯 형제가 있다. 이들은 모두 이삼 년 사이에 잇달아 급제하였는데, 끝의 세 사람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다음으로는 윤해원의 아들 방ㆍ양ㆍ휘ㆍ훤이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고 벼슬도 모두 당상관에 이르렀다. 맨 끝으로 서자인 한도 과거에 올라 품계와 녹봉이 당상관 급으로 올랐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오르고 나란히 당상관에 오른 것 또한 드문 일이다. 이 밖에 무과로는 원주의 이응해와 부안의 민정란 형제가 있다.
과거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높이 발탁된 경우로는, 우의정 정지연이 급제한 지 열세 해 만에 정승으로 등용된 일이 있는데 이는 세자를 가르친 노고 덕분이었고, 좌의정 기자헌은 열다섯 해 만에 정승으로 뽑혔는데 이는 왕실과 혼인으로 맺어진 인연으로 총애를 받아서였다.
연원군 이광정과 금계군 박동량이 급제한 지 네 해 만에 당상관의 옥관자를 붙이게 된 것은 임금을 모시고 피란한 공로 때문이었고, 안종록이 여덟 해 만에 정이품의 금띠를 두르게 된 것은 관리로서의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참의 송준과 참의 성이문이 모두 다섯 해 만에 당상관의 붉은 옷을 입게 된 것은 청요직에 제수되어 갑작스레 승진하였기 때문이었다.
낮은 관직에서 갑작스레 크게 승진한 경우로는 월사 이정귀가 있다. 그는 정유년(1597년)에 병조의 낭관으로 있다가 세자시강원 필선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식 벼슬로 사헌부 집의가 됨과 동시에 당상관에 올랐다. 무술년(1598년)에는 병조 참판으로 발탁되었고, 경자년(1600년)에는 호조 판서로 승진하였다. 신축년(1601년)에는 대제학이 되었는데, 이는 그의 문학이 임금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으로 유천 한준겸은 정유년에 사간에서 승지가 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분음 최천건은 정유년에 헌납에서 잇달아 사간과 승지로 승진하였고, 기해년(1599년)에 품계가 올라 도승지가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재주와 그릇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의정 정언신이 대신으로서 군기시 제조를 겸했을 때, 같은 해에 장원 급제했던 이충원은 겨우 군기시 정에 머물러 있었다. 그 뒤 오성 이항복 또한 대신으로서 군기시 제조가 되었을 때, 같은 해 장원 급제했던 황치성이 또한 군기시 정으로 있었다. 이 두 경우가 서로 꼭 들어맞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오성이 황치성에게 농담으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대가 완원 이충원처럼 되는 것은 좋지만, 내가 정 정승처럼 되는 것은 원치 않네." 이는 완원이 그 뒤 일품 벼슬에 이르러 부원군이 되었지만, 정 정승 정언신은 정승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귀양을 가서 그곳에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오성 정승은 우스갯소리를 잘하였다. 근래 나라에 변고가 잦아지자, 해당 관청에서는 으레 대신에게 의견을 물어 임금께 아뢰곤 하였는데, 이것이 도를 넘어 사소한 일까지도 대신에게 의견을 묻게 되니 대신들이 이를 괴롭게 여겼다. 하루는 예조의 낭관이 의견을 물으러 와서 앞에 앉아 있었다. 공이 막 생각을 정리하여 의견을 말하려는데, 어린 계집종이 안에서 여쭙기를 "말먹이 콩이 다 떨어졌는데 어찌할까요?" 하였다. 공이 꾸짖으며 "말먹이 콩을 채우는 일까지도 대신에게 의견을 물어야 하는가?" 하니, 듣던 사람들이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나의 친가는 건천동에 있었다. 청녕공주 저택 뒤에서 본방교까지 겨우 서른네 채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조선 건국 이래로 이름난 인물이 많이 나왔다.
김종서ㆍ정인지ㆍ이계동이 같은 시대에 살았고, 양성지ㆍ김수온ㆍ이병정이 또 한 시대를, 유순정ㆍ권민수ㆍ유담년이 같은 시대를 살았다. 그 뒤로도 정승 노수신과 나의 선친, 그리고 지사 변협이 같은 시대였으며, 근래에는 서애 유성룡과 나의 둘째 형, 그리고 덕풍군 이순신, 원성군 원균이 한 시대를 살았다. 서애는 나라를 중흥시킨 공이 있었고, 원균과 이순신 두 장수는 나라를 구해 낸 공이 있었으니, 이 무렵에 이르러 더욱 성대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 이야기를 오성 정승에게 들려주었더니, 정승이 "그 동네에는 무장도 있는가?" 하고 물었다. 내가 "성우길의 벼슬이 가장 높습니다" 하고 답하니, 정승이 다시 "그대들과 견줄 만한가?" 하고 물었다. 내가 웃으며 "성 장군도 북쪽 변방에서 공을 세운다면, 훗날 사람들이 오늘을 돌아볼 때 오늘 우리가 옛일을 돌아보는 것과 같지 않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니, 정승이 크게 웃었다.
정승 심연원은 호음 정사룡과 같은 신해년(1491년)생이었다. 정사룡이 병자년(1516년) 봄 중시에 장원하여 홍문관 응교가 되었을 때, 찬성 김당의 집에 간 일이 있었다. 심연원은 그 김찬성의 사위였는데, 김공이 그를 불러내어 정사룡과 서로 인사를 나누게 하였다. 자리에 앉은 뒤 나이를 물으니 서로 동갑이었다. 그런데 정사룡은 이미 두 차례나 과거에 올랐는데 심연원은 아직 벼슬 없는 유생 신분이었으므로, 그때 자못 부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그 뒤 심공도 과거에 올라 좋은 벼슬을 두루 거치고 마침내 의정부에 들어갔다. 그런데 정사룡은 여전히 돈녕부 지사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심공이 비로소 그를 추천하여 예조 판서가 되게 하였다. 세상의 벼슬살이가 수없이 뒤바뀌는 것이 대개 이런 식이다.
참의 박미는 아들이 셋이었다. 그중 소영과 증영은 둘 다 일찍 과거에 올라 나란히 이조의 낭관이 되었으니 당대의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맏아들 광영은 어찌 된 셈인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채 마흔 살의 나이로 성균관 학생으로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나무랐고 본인도 스스로 곤혹스럽게 여겼다.
그 뒤 두 아우가 잇달아 세상을 떠났고, 광영은 뒤늦게야 과거에 올라 청요직을 두루 거쳐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봉군까지 되었으며 일흔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자손들도 잇달아 과거에 올랐고 재상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의 운명이란 이러하니, 빠르고 늦음이나 잘 풀리고 막히는 것을 가지고 한탄할 일이 아니다.
나의 외조부 되시는 참판공은 계묘년(1543년)에 영남 관찰사를 지낸 뒤 두 번째로 호조 참판이 되었다. 당초에 유인숙 공이 이조 판서로 있었는데 참판공과 우의가 두터웠으므로 그를 추천하여 도승지로 삼았다. 공은 송인수ㆍ구수담ㆍ이임ㆍ이해 등과 더불어 자주 삼사의 후보 명단에 올라 무려 열여섯 차례나 추천되었으나 끝내 임금의 낙점을 받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공은 가장 늦게야 전주 부윤으로 제수되어 지방으로 나갔는데, 유공은 그가 외직으로 나가는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을사년(1545년)에 유공이 사약을 받아 죽자, 그가 천거하여 언관이 된 이들은 모두 뜻밖의 화를 당했다. 참판공의 강직한 성품으로 그때 조정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흉악한 무리의 노여움을 샀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지방에 나가 있었던 덕분에 오히려 화를 면할 수 있었으니, 화와 복이란 이처럼 사람의 헤아림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께서 사헌부 장령으로 계실 때, 조정의 논의는 김안로를 다시 불러들이려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할아버지의 고향 사람이었던 심언광 형제가 그때 요직에 있었다. 김안로는 이들과 은밀히 결탁하고서, 기묘년(1519년)의 사화로 쫓겨난 사람들을 다시 등용하겠노라 약속하였다. 대체로 두 심씨는 그때 화를 입은 선비들을 다시 불러들여 심정ㆍ이항과 맞서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와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김안로의 말을 믿고 힘써 이 일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회재 이언적 선생이 사간으로 있으면서 그 논의를 힘껏 반대하였다. 심언광이 "이 아무개가 조정에 있는 한 김안로는 조정에 들어올 수 없다" 하고, 그를 탄핵하여 쫓아내려 하였다. 할아버지께서 이를 만류하며 "복고 이언적은 정직한 사람이고 김안로는 단정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사림을 다시 등용하겠다는 그의 말만 믿고 착한 선비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으나, 심언광은 듣지 않았다.
그 뒤 김안로가 다시 조정에 들어오자 하는 짓이 좋지 못했고, 기묘년에 화를 입은 이들도 다시 등용하지 않았다. 심언광이 그제야 분하게 여겼고, 김안로가 장옥 부자를 죽이려 할 때 심언광이 힘써 이들을 구해 준 일로 김안로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이조에서 함경도 관찰사로 밀려나 지방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 뒤 다시 김안로가 쫓겨나자 심언광을 대사헌으로 불러들였는데, 당시 논의는 "심언광이 아니었다면 김안로가 어찌 조정에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그 뒤에 비록 그와 맞섰다고는 하나 대사헌 자리에 제수할 수는 없다"고 하여, 그를 탄핵해 파직시켰다. 할아버지께서 그때 강원도 관찰사로 계셨는데, 길에서 심언광을 만나 위로해 주셨다. 심언광이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말하였다. "군자는 사람을 천거하는 일에 신중하지 않으면 반드시 일을 그르친다고 예로부터 경계하였는데, 나는 그것을 지키지 못하였으니, 공께서 하셨던 말씀을 이제 와 생각하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결국 이 일로 한을 품은 채 집으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외조부의 아우 되시는 광진 역시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젊었을 때 판윤 최연과 함께 절에 들어가 공부한 적이 있었다. 《주역》을 읽다가 채 절반도 마치지 못했는데 설날이 다가왔다. 두 분이 함께 부모님을 뵈러 내려가는 길에 저마다 공부한 것을 외워 보았는데, 최연 공이 잊어버린 대목이 있음을 알고는 곧바로 절로 되돌아 올라가 다 왼 뒤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옛 선배들이 배움에 뜻을 두는 것이 이처럼 독실하였다.
최연은 문장에 뛰어났고, 용모가 단정하여 옛날 문장가 반악과 하후담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스물세 살에 과거에 급제하니 여러 대신이 그를 아꼈다. 그가 독서당과 홍문관에 들어가게 된 것도 모두 그 생김새 덕분이었다. 중종 임금께서도 그 아름다운 용모와 몸가짐을 칭찬하셨다. 일찍이 밤마다 연이어 경연을 열었는데, 내시가 너무 자주 여는 것이 아니냐고 아뢰자 임금께서 "내가 최연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하셨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수찬으로 있을 때의 일이라 한다.
가정 신축년(1541년)에 외조부께서 전라도 관찰사가 되셨다. 그 아우 참판공은 그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있었는데, 두 분이 쌍계역에 함께 모여 아버지의 제사를 지냈다. 갑진년(1544년)에는 할아버지께서 경상도 관찰사가 되셨고, 참판공은 또 전라도를 순찰하는 직임을 맡았다. 이때에도 다시 쌍계역에서 제사를 거행하니, 영남과 호남의 사람들이 모두 이를 영예로운 일로 여겼다.
강원도는 땅이 좁지만, 강릉과 원주에는 이름난 인재가 많았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강릉에서 이름난 정승이 많이 나왔으나, 명종 임금 때부터는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이 전혀 없다. 원주에서는 팔계군 정종영과 판서 이개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근래에는 과거에 높이 합격한 이가 잇달아 나왔으나,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는 이가 많다. 강릉에서는 태사 최대중이 과거에 급제한 지 서른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이오라는 이가 과거에 급제했다고 한다.
원주 사람 고경오는 을사년(1605년) 증광시 향시에서 〈홍수불벽〉이라는 제목의 부를 지어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서울에서 치른 회시에서는 〈서명벽상〉이라는 부를 지어 합격하였는데, 그 이듬해 성균관 관원으로 있다가 벽에 글을 써 붙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매를 맞고 죽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한강 정구가 강릉 부사가 되었을 때, 임명 소식을 담은 조보가 강릉에 내려왔다. 향교의 학생 함승술이 강릉부에 들어왔다가, 새로 부임할 부사의 이름 끝 글자가 자기 이름의 끝 글자와 같은 것을 보고는 그것을 자기 이름자로 잘못 알았다. 집에 돌아오자 친구들이 "누가 부사로 왔는가?" 하고 물으니 "정술이라는 사람이 되었다" 하여, 사람들이 이를 듣고 웃었다.
그 뒤 한강이 부임하여 향교의 학생 명부를 살펴보다가 승술이라는 이름을 보고는, 또 그것을 자기 이름의 글자와 같은 것으로 잘못 알고 "함승구의 자는 무엇인가?" 하고 물으니, 듣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관찰사 권윤은 외조부의 외증조부이시다. 성종 임금 때 성균관의 우두머리로 있은 지 스무 해나 되었다. 그리하여 중종 임금 때 학문한 선비들은 모두 그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의 손자 권연은 기묘년(1519년) 봄 과거에서 〈대악부〉와 〈어룡무동정시〉라는 글을 지었는데 둘 다 훌륭하였다. 답안지의 이름을 열어 보니 바로 공의 손자였다. 지정 남곤이 그때 시험을 주관하였는데, 서둘러 그를 뽑아 장원으로 삼았다. 그는 식년시의 경서 구술시험에 두 차례 응시한 적이 있었다. 집에 두 장이 떨어져 나간 《맹자》 책이 있었는데, 시험 문제가 설마 그 떨어져 나간 부분에서는 나오지 않으리라 여겨 그 부분은 읽지 않고 응시하였다. 그런데 두 차례 시험 모두 《맹자》 문제가 하필 그 부분에서 나왔으므로, 운명이라 여겨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 뒤 조정에서 세자익위사 세마와 왕자의 사부로 두 차례나 불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정원과 연못을 잘 꾸미고 풍류로 스스로를 즐기며 살아, 그 고을에서 첫손에 꼽혔고, 소박한 복을 마흔 해 넘도록 누렸다.
권 장원의 딸은 진사 신명화의 아내이다. 그 시어머니가 병으로 위독해지자 권씨는 향을 피우고 한데에 나가 밤낮 이레 동안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권씨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는데, 하루는 하늘에서 새알만 한 빨간 환약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를 주워다가 갈아서 시어머니께 먹게 하였더니, 향기가 방 안에 가득했고 시어머니의 병도 곧 나았다.
이는 정성 어린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 하여 지금까지도 그 고을 노인들이 이야기한다. 조정에서 이 일을 듣고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율곡 선생의 어머니는 바로 이 권씨의 외손녀이다. 그런 까닭에 선생은 북평에 있던 권 장원의 집에서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날 때 상서로운 빛이 하늘에 비쳤는데, 장원은 이 아기를 남달리 여겨 몹시 사랑하였다. 선생의 어머니는 성품이 고요하면서도 굳세었고 문장에 능했으며 그림도 그렸다. 몸가짐이 매우 엄정하여 여성의 법도로 스스로를 단속하였는데, 선생의 학문은 태교에서부터 얻은 바가 많았다고 한다.
강릉은 풍속이 순박하여 예로부터 효도와 정절을 지킨 이가 많았고, 이를 기려 세운 정문이 마을마다 잇달아 보였다. 송강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에 "집집마다 벼슬을 내려도 좋을 만하다"라고 한 것이 결코 헛말이 아니었다.
한강 정구가 부사로 와서 효자와 효손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는데 참석한 이가 쉰두 명이나 되었다. 이런 장한 일은 예나 지금이나 드문 것이었다.
첨지 김담은 강릉 사람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 섬기는 정성이 더할 나위 없었다. 맛있는 음식은 손수 만들었고,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모시기를 마흔 해가 넘도록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버이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곡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지팡이를 짚어야 겨우 몸을 일으킬 정도였다. 술을 잔에 부어 놓고 부모의 신위를 모신 휘장 앞에 엎드려 하루 종일 통곡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잔의 술이 문득 말라 있어 사람들이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그는 일찍이 산에 올라 돌을 떠내어 부모의 묘표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런데 마침 한창 얼어붙은 겨울이어서 돌이 쪼개지지 않자, 공이 그 돌을 붙들고 통곡하니 돌이 갑자기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사람들은 이를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 하여 모두 감탄하였다. 조정에서 세 차례나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고, 대신 정문을 세워 그의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 뒤 나이가 일흔에 이르자 관찰사가 이를 임금께 아뢰어 특별히 당상관인 첨지 벼슬을 내렸으며, 그는 아흔 살까지 살았다.
남사고는 울진 사람으로, 애써 공부하여 역학의 이치에 두루 통달하였다. 천문과 지리, 점술에도 밝아 그가 말한 일은 하나같이 신기하게 맞아떨어졌다.
향시에는 여러 번 합격했으나 끝내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벗들이 "자네는 남의 운명은 잘 알면서 정작 자기 운명은 헤아리지 못하고 해마다 헛걸음을 하니 어찌 된 일인가?" 하고 물으니, 남사고가 웃으며 이렇게 답하였다. "사사로운 욕심이 생기면 점술도 어두워지는 법일세. 내가 합격하지 못할 것을 분명히 알았더라면 애초에 과거장에 가지도 않았겠지만, 욕심에 이미 생각이 흐려진 까닭에 늘 혹시나 합격할까 하는 마음으로 들떠서 오갔던 것이라네."
만년에 그가 천문학 교수로 서울에 있을 때, 태사성이라는 별에 무리가 지는 변고가 일어났다. 이를 두고 관상감 정 이번신이 자기가 나이가 많으니 이 변고가 자신에게 해당될 것이라 하였는데, 남사고가 웃으며 "따로 해당될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두어 달 뒤 과연 남사고 자신이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 이는 옛날 오나라 땅의 은자가 별의 변고에 자신이 죽기를 바랐으나 끝내 죽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견주면 무엇이 다르다 하겠는가.
(용어) 옛날 진나라 때 달이 어느 별자리를 범하자 점치는 사람이 은자가 죽을 것이라 하였는데, 당시 이름난 은자였던 대규는 혹 자신이 그에 해당할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 다른 은자인 사부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대규가 죽기를 바랐으나 죽지 못했다며 놀렸다는 옛이야기가 전한다.
왕실 종친인 서천령은 장기를 잘 두었다. 하루는 금강산 백전암을 유람하다가 지엄이라는 화상을 만났다. 텅 빈 방에 아무것도 없었고 다만 장기판 주머니가 벽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서천령이 "스님도 장기를 두실 줄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삼십 년 전에 두어 본 적이 있소" 하였다. 서천령이 곧 그 장기판을 가져다가 대국을 청하니, 스님이 한쪽 포를 빼고 두겠다고 하였다. 이를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이 늙은 중은 평생 포 하나만으로 두어 왔소" 하였다. 서천령이 "나는 전국에서 첫손에 꼽히는 솜씨요. 다른 사람들은 나와 대국조차 못 하는데, 스님은 어찌 포 하나를 떼고 두려 하시오?" 하니, 스님이 "시험 삼아 한번 두어 봅시다" 하였다. 세 판을 두었으나 서천령이 번번이 지고 말았다. 화상이 웃으며 장기판을 치우고는 다시 두지 않았다. 서천령은 탄복하며 그곳을 떠났다.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온 이들은 문희 예겸으로부터 진즙희ㆍ규봉 동월ㆍ자양 당고 등이 모두 당대에 이름난 이들이었지만, 재상 반열인 내각에 들지 못했다는 이유로 한림학사로서 사신으로 정해지면 으레 이를 피하려 하였다.
정묘년(1567년)에 명나라 목종이 즉위하여 우리나라에 조서를 반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시강 정사미를 사신으로 삼았으나 병으로 교체되었고, 병록 범응기를 대신 임명하였으나 그 역시 이를 피하려 하였다. 그때 마침 검토관으로 있던 각로 허국이 스스로 가기를 자청하여, 사신의 임무를 훌륭히 마치고 돌아갔다.
그 뒤 정사미는 시랑이 되었으나 일찍 죽었고, 범응기는 탄핵을 당해 오래도록 하급 관서에서 맴돌다가 뒤늦게야 겨우 남경 국자감의 좨주가 되었지만 또 권신의 미움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허국 공은 을유년(1585년)에 내각에 들어가 벼슬이 소부와 이부 상서에 이르렀고 일흔 살까지 살았다. 이는 혹시 하늘이 정사미와 범응기 두 사람이 일부러 사신 가기를 피한 것을 미워해서가 아니었을까?
감주 왕세정이 한씨 성을 가진 태사가 지은 세계 기록에 발문을 쓴 적이 있는데, "조선 사람이 문장에 능하다"고 한 뒤, 우리나라의 시를 명나라 선덕ㆍ성화 연간의 시와 견주고, 우리나라의 글씨는 원나라 명필 조맹부와 견주었다. 왕세정의 문집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름난 이들이 이를 보고는 우리나라를 낮추어 본 것이라 하여 매우 치욕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 와서 자세히 살펴보니, 왕세정이 평한 것은 실은 우리를 기린 것이지 깎아내린 것이 아니었다. 왕세정은 일찍이 선덕 연간의 양사기와 성화 연간의 이동양ㆍ정민정 등 여러 사람의 작품을 당나라 경룡 연간의 시와 견준 일이 있다. 그런데 양사기와 이동양은 이태백과 두보에 견주면서 우리나라의 시는 경룡 연간에 견주었으니, 이는 지나친 처사였다. 왕세정은 또 글씨를 평하면서 왕희지와 왕헌지 이후로는 오직 조맹부가 있을 뿐이고, 구양순ㆍ저수량ㆍ우세남ㆍ안진경ㆍ채양ㆍ미불은 모두 그다음 자리라고 하였다. 그런데 석봉의 글씨를 조맹부에 견주었으니 이 또한 충분히 높인 셈이다. 잠깐 보고 분하게 여겼던 것이니 참으로 한바탕 웃어넘길 만한 일이다.
급사 서관란은 그 가운데서도 글씨에 가장 뛰어난 이였다. 우리나라에 왔던 어느 명나라 장수가 안평대군의 글씨로 된 족자를 손에 넣고는, 이를 조맹부의 친필이라 속여 서관란에게 바쳤다. 서관란은 나를 불러 이것이 누구의 글씨인지 물었다. 내가 "세종대왕의 아들이신 안평대군 이용의 글씨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서관란은 "나는 참으로 이것이 조맹부의 글씨가 아닌가 의심했었소. 세상에 어찌 이토록 신묘한 글씨가 있단 말이오" 하였다.
하루는 그가 석봉에게 글씨를 청하므로, 석봉이 옛사람들의 글씨체를 본떠 열 폭을 써서 바쳤다. 서관란이 이를 하나하나 가려내며 말하였다. "이것은 장지의 체이고, 이것은 왕희지와 왕헌지의 체이며, 이것은 저수량의 체이고, 이것은 구양순과 지영의 체이며, 이것은 안진경의 체이고, 이것은 미불과 조맹부의 체로다." 마지막 한 폭은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를 본뜬 것이었는데, 서관란은 "이것은 옛 법도에 맞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굳세고 아름다워 사랑스럽다"고 하였다. 석봉은 이 말에 깊이 감탄하였다.
서관란 급사가 일찍이 먹 한 장을 나에게 주면서 "이것은 금나라 장종 때 만든 먹이니, 평생을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내가 이를 갈아 보니 빛깔은 짙은 검은색에 살짝 엉기어 있었고 향기가 여전히 짙었다. 무술년(1598년) 겨울부터 쓰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열세 해가 되었는데도 겨우 한 글자 두께만큼밖에 갈리지 않았으니, 참으로 기이한 물건이다.
왕세정이 일찍이 말하기를 "선성 지방의 제갈씨가 만든 붓은 더없이 정밀해서 하루 종일 써도 닳지 않는다"고 하였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 태사가 나에게 그런 붓 다섯 자루를 준 적이 있었는데, 토끼털로 만든 것은 뻣뻣하여 쉬이 말랐고, 양털로 만든 것은 부드러워 쉬이 꺾여서, 모두 우리나라의 족제비털로 만든 붓만은 못하였다.
주지번은 내가 쓰던 붓을 써 보고는 "닷새를 썼는데도 닳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천하제일의 붓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이런 붓을 수천 자루나 구해 갔다. 그는 또 우리나라 종이도 좋아하여 그중에서도 아주 얇은 것을 골라 많이 가져가며 "이것은 탁본을 뜨거나 그림을 본떠 그리기에 좋다"고 하였다.
돌아가신 둘째 형이 일찍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황씨와 왕씨, 두 명나라 사신은 몸가짐이 매우 엄정하였다. 임금께서 종이와 붓, 먹을 내려 주셨으나 모두 받지 않았다. 하루는 궁궐 안에 보관하고 있던, 일본에서 나는 닥종이로 찍은 《이백집》과 《두시》를 한 질씩 나누어 주었는데, 부사 채양은 이를 펼쳐 보고는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였다. 그런데 정사가 이를 받아들였는지 사람을 보내 물어보게 하였는데, 정사가 이미 돌려주었다는 말을 듣고는 자기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아, 이런 사람을 어디서 다시 볼 수 있겠는가."
근래 사신으로 온 이들 가운데 유독 웅대행만은 청렴하다고 일컬어지지만, 그 역시 서책이나 종이, 붓만큼은 받아 갔다고 한다.
오봉 이호민은 고천준ㆍ최정건 두 사신을 접대하면서 이들이 자꾸 물품을 요구해 와 몹시 시달렸고, 서경 유근은 주지번ㆍ양유년 두 사신을 접대하면서 시와 부를 주고받느라 몹시 고생하였다. 여장 권필이 이를 두고 "오봉은 몸이 고달팠고 서경은 마음이 고달팠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이 옳다고 하였다.
역관 이화종은 젊었을 때 지정 남곤과 음애 이자를 따라 북경에 간 일이 있었다. 마침 명나라 무종 황제가 남쪽 지방을 순행하고 있어, 이화종은 역참의 말을 타고 황제가 머무는 행재소까지 갔다가 남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우 지방의 물가에 이르러 말이 지쳐 잠시 앉아 쉬게 되었다. 그때 모래 속에 삐죽이 뼈 하나가 나와 있는 것을 보고 파냈더니, 여섯 마디로 이루어져 있고 꾸불꾸불하며 눈처럼 하얀 것이었다. 그는 별생각 없이 이것을 짐 속에 챙겨 넣고 북경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장사꾼들이 물건을 벌여 놓고 값을 흥정하고 있었다. 이화종이 이 뼈를 꺼내 짐짓 자랑하며 속여 팔려 하니, 한 장사꾼이 이를 보고 절을 하며 말하였다. "이것은 뿔 없는 용의 등뼈인데 그 안에 큰 구슬이 여섯 개나 들어 있으니 참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입니다." 급히 톱으로 갈라 보니 과연 복숭아씨만 한 구슬 여섯 개가 나왔다. 그 장사꾼은 곧 천 냥어치의 비단을 값으로 치르고 이것을 사 갔다. 이화종은 "이것은 하늘이 내려 준 것이니 어찌 나 혼자 차지할 수 있겠는가" 하고, 그 비단을 모두 나누어 상통사부터 노복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주었다. 남곤과 이자, 두 분도 이를 아름답게 여겨 시를 지어 칭찬하였다.
영원백 이성량의 할아버지는 본래 우리나라 이산 지방의 독로강가에 살다가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부부가 함께 철령위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 아버지는 변경을 지킨 공으로 유격장군이 되었고, 이성량은 아버지의 음덕으로 지휘 벼슬을 받았다. 젊었을 때 오랑캐를 쳐서 사로잡은 이가 많아 험산보 참장으로 기용되었다.
명나라 사신 허영양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압록강 가까지 전송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법으로 정해진 호위 군사의 수를 줄이고 그 몫으로 남는 말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허 사신이 이를 탄핵하려 하자, 이성량이 역관 곽지원에게 부탁하여 이 일을 무마해 달라고 청하니 마침내 탄핵을 면하게 되었다.
그 뒤 몇 해가 지나지 않아 이성량은 공을 세워 총병이 되고, 영토를 천 리나 넓혀 다섯 곳에 성을 쌓았다. 백작으로 봉해졌고, 그의 아들과 사위 가운데 고관에 오른 이가 수십 명에 이르렀다. 이들의 위세가 요동 일대를 뒤덮어 거의 사십 년 동안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근래에는 이에 견줄 만한 이가 없었다.
곽지원은 일찍이 북경을 오갈 때마다 이성량에게서 매우 후한 대접을 받았는데, 이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 집안의 성씨는 가락국 왕비에게서 비롯되었으니 거의 칠백 년이나 되었다.
고려 초에 이르러 시조께서 다스리시던 고을이 양천이었으므로, 마침내 이곳에 본관을 붙이게 되었다. 고려 오백 년이 끝날 때까지 대대로 과거에 올라 높은 벼슬을 지냈다. 정승이 된 이가 열한 분이고, 추밀원에 들어간 이가 여섯 분이다. 학사가 아홉이고, 공주와 혼인한 이가 다섯이다.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한 이가 둘이고 군에 봉해진 이가 열넷인데, 대대로 문장으로 이름난 이가 있었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다소 쇠퇴하여, 정승이 세 사람, 찬성이 두 사람, 육조의 판서가 넷이다. 공신이 세 사람, 학사가 열둘이다. 그중에서도 충정공 형제와 지사 허집, 찬성 허자, 그리고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초당 선생을 가장 으뜸으로 꼽는다. 근래에는 유수를 지낸 허잠이 청백리로 뽑혔는데, 이 또한 선조들의 이름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라 하겠다.
유격장군 허국위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나를 보고 반가워하였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허태악의 후손이라는 그대들이 나와 같은 성씨라 하니 사람들이 터무니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가락국의 왕비가 다른 나라에서 배를 타고 건너왔다고 하니, 어쩌면 그분이 중국 사악 신을 제사 지내던 가문의 후손으로서, 스스로 어느 왕국의 딸이라 핑계 대고 혼인을 이룬 것이 아니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이 유격의 말에도 나름의 일리가 있었다.
우리 선대는 야당 선생 이후로 두 대에 걸쳐 연달아 과거에 오른 분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리 고조부 때에 이르러 형제분이 함께 과거에 뽑히셨으나, 아우 되시는 분은 겨우 사간에 머물렀고, 고조부께서는 벼슬에 나아가지도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그 사간의 아들인 허집은 벼슬이 지사에 이르렀고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우리 증조부는 과거에 오르지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그 아우 되시는 허위는 지평이, 허온은 승지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문장에 능하셨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집안이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 삼 형제가 함께 문과에 올랐는데, 큰형님은 육조의 판서에 이르렀고, 둘째 형님은 학사가 되었으며, 나 또한 당상관의 반열에 들었다. 큰형님의 아들 실도 문과에 올라 정언이 되었고, 여러 조카도 모두 맑고 뛰어나 문장으로 이름이 있다.
이는 모두 선조께서 쌓으신 공덕의 효과이니, 대개 세월이 오랠수록 더욱 뚜렷이 드러나는 법이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의 문장과 학문, 절개와 행실은 사림에서 높이 추앙받았다. 큰형은 아버지의 경학을 이어받았고, 문장도 간결하면서 무게가 있었다. 둘째 형은 학문이 넓고 문장이 매우 높고 고고하여 근래에는 견줄 이가 드물다. 누님의 시는 더더욱 맑으면서도 씩씩하고 높으면서도 아름다워, 당나라의 개원ㆍ대력 연간 시인들보다 뛰어나다는 명성이 중국에까지 퍼져서 그곳의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모두 이를 칭찬한다. 재종형인 체씨는 옛 문장을 공부하여 시의 격조가 매우 높고 굳세며 부는 더욱 뛰어나서, 조선 건국 이래로 그와 견줄 이가 드물다. 나 또한 우리 집안 문장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아, 문예를 논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중국 사람들에게서도 제법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아버지와 우리 세 형제, 이렇게 네 부자가 함께 임금의 교서를 짓는 일을 맡았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는 큰형이 또 독서당에서 사가독서를 하였으며, 우리 삼 형제가 모두 사관으로서 붓을 잡기도 하였다. 둘째 형과 나는 나란히 과거에 장원하였고, 나는 또 세 차례나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 무렵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난 집안을 꼽을 때면 반드시 우리 집안을 첫손에 꼽았다.
옛날 중국 남조 시대에 유효작의 집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자매가 함께 문장에 뛰어났는데, 일찍이 스스로 자랑하여 "허씨ㆍ사씨 집안의 부귀도, 왕씨ㆍ사씨 집안의 영화로움도 모두 우리 집안의 학문과 문장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는데, 나 또한 우리 집안이 그러하다고 말하고 싶다.
성소부부고 제25권
10. 15:50
성소부부고 제25권 — 설부 4
성수시화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출처: 성소부부고 제25권, 설부 4, 성수시화 인 및 성수시화
배경: 허균이 신해년(1611년, 광해군 3년) 함열(당시 이름은 함산)로 귀양 가 있던 시절에 쓴 우리나라 역대 시 비평집이다. 원래 정미년(1607년)에 우리나라 시를 골라 정리하고 두 권짜리 비평서까지 지었으나, 원고 두 벌이 모두 없어지는 바람에 기억을 더듬어 새로 써낸 것이 이 책이다. 신라 말부터 허균 당대까지 약 팔백 년에 걸친 시인들을 다루며, 시 하나하나에 대한 짧고 날카로운 평을 곁들인다. 허균 특유의 거침없는 호오와 자기 집안(양천 허씨) 문인들에 대한 자부심이 곳곳에 드러난다.
성수시화를 쓰게 된 사연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우리나라는 당나라 말기부터 지금까지 붓을 들어 시를 지은 사람이 아마 수천 명은 될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름도 없이 묻히고 전하지 않는 이가 절반을 넘는다. 게다가 전쟁까지 겪으면서 책이 거의 다 없어졌으니, 뒷날 공부하는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그 자취를 살필 수 있을지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다.
나는 어려서부터 형님들과 스승들이 하는 말을 귀에 익도록 들었고, 자라면서는 스스로 글하는 사람이라 자부하며 살아온 지 어느새 삼십 년이다. 그동안 보고 기억해 온 것이 적지 않고, 일찍부터 어느 시가 맑고 어느 시가 탁한지 나름의 안목도 지녀 왔다고 생각한다. 정미년(1607년)에는 우리나라 시를 추려 정리하는 일을 마치고 이어서 시에 대한 비평까지 지었다. 시로 이름이 전하는 이든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이든 가리지 않고 널리 모아, 하나하나 옳고 그름을 가리고 평을 붙인 것이 모두 두 권이었다. 거기서 고른 시구들이 격조 높은 안목에는 어긋날지 몰라도, 자료를 찾아본 정성만큼은 한 시대의 문헌이라 할 만큼 넉넉했다고 자부한다.
글이 완성되자 원고를 정리해 딱 두 벌을 베껴 두었다. 하나는 낭주(지금의 전라남도 영암 지역)에 두었는데 잃어버렸고, 또 하나는 서울 집에 두었는데 이 역시 없어지고 말았다. 아마 도교에서 말하는 육정 귀신이 내려와 가져간 것은 아닐까.
(용어) 육정 — 도교에서 하늘의 뜻을 받들어 신비한 일을 맡아본다는 신들의 이름이다.
다시 써 보려 해도 하늘이 꺼리는 일을 감히 다시 범하고 싶지 않아 그냥 손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 신해년(1611년, 광해군 3년)에 함열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마침 할 일 없이 한가한 처지라 예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기억나는 대로 종이에 옮겨 적어 보았다. 다 쓰고 나서 다시 읽어 보니 제법 마음에 들기에 이를 "시화"라 이름 붙였다. 모두 아흔여섯 항목이다. 위로 팔백 년의 시간에서 뽑아낸 것이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니 너무 간략한 것 같기도 하지만, 요컨대 이 역시 내 나름대로 정성을 다한 것이니 읽는 사람은 그 뜻을 헤아려 주기 바란다.
이해 사월 스무날, 교산이 쓴다.
신라·고려 시대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고운 최치원 학사의 시는 당나라 말기의 시인답게 정곡이나 한악 같은 이들의 풍을 크게 벗어나지 못해서, 대체로 가볍고 부박하여 무게가 부족하다. 다만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니 이 세상에 내 마음 알아줄 이 드물구나 깊은 밤 창밖에는 비가 내리는데 등불 앞에서 만 리 밖 고향을 생각하네
라 한 절구 한 수가 가장 뛰어나며, 또 다른 연구에
먼 나무들은 강둑길을 따라 들쭉날쭉하고 찬 구름은 말 앞 봉우리에 나직이 내려앉네
라 한 구절도 아름답다.
(용어) 최치원(857~?) — 신라 말의 학자·문장가.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살이를 했으며, 귀국 후에는 어지러운 정치 현실에 실망해 은거했다고 전한다. 호는 고운.
정 대간(정지상)의 시는 고려 전성기 시인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 남아 전하는 작품은 매우 적지만 편마다 모두 뛰어난 절창이다. 이를테면
바람에 실려 가는 나그네 배엔 조각구름 떠 있고 이슬 엉긴 궁궐 기와엔 옥빛이 번쩍이네
라 한 구절은 조금 가벼운 편이지만,
버드나무 늘어선 골목엔 예닐곱 집 문이 닫혔고 밝은 달 아래 발을 걷은 이는 서너너덧 사람일세
라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신기하고 빼어나다. 또
바위 위 소나무는 조각달 아래 늙어 가고 하늘 끝 구름은 천 개의 산봉우리에 나직이 걸렸네
라는 구절은 딱딱하고 까다롭지만 그런대로 맑고 깨끗한 맛이 있다.
(용어) 정지상(?~1135) — 고려 인종 때의 문신·시인. 서경(지금의 평양) 출신으로 묘청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대간은 그가 지낸 벼슬 이름.
정 대간이 서경에서 지은 시로
비 갠 긴 둑엔 풀빛이 더욱 짙고 님 보내는 남포엔 구슬픈 노래 울리네 대동강 물이야 어느 때에나 마르리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푸른 물결에 보태지는 것을
이라 한 것은 지금까지도 절창으로 꼽힌다. 부벽루 현판에 새겨진 시들은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모두 철거했지만 이 시만은 남겨 두었다. 훗날 최고죽(최경창)이 이 시에 화답하여
강 언덕엔 길고 긴 능수버들 휘늘어지고 연 따는 노랫가락 조각배에 요란하더니 붉은 꽃도 다 져서 서풍은 차갑기만 한데 해 저문 물가엔 흰 물결만 일어나네
라 했고, 이익지(이달)는
연잎은 들쭉날쭉 연밥은 주렁주렁 연꽃 사이사이로 아가씨들 노래하네 돌아올 땐 물목에서 벗 만나자 약속했기에 힘겹게 배를 저어 물결 거슬러 오르네
라 했다. 두 시 모두 매우 훌륭하여 당나라 왕창령이나 이군우의 여운이 느껴지지만, 이는 연밥 따는 노래일 뿐이지 서경에서 이별하는 본래의 뜻과는 다르다.
〈한림별곡〉에서도 유원순의 글과 이인로의 시를 함께 일컬었으니, 이 대간(이인로)의 시는 참으로 당대 제일이었다. 그의
한밤중 닭 울음소리에 벌떡 일어나 춤을 추고 몇 번이나 이를 잡으며 좋은 계책을 논했던가
라는 구절은 매우 훌륭하여, 명나라 구종길의
지난날엔 이광을 따라 범 바위를 쏘더니 한밤중 닭 울음에 유곤처럼 춤을 추네
라는 시와 비슷하며, 그의 팔경시 또한 아름답다.
(용어) "한밤중 닭 울음소리에 일어나 춤을 추고" — 진나라 조적이 벗 유곤과 함께 지내다가 한밤중 닭 울음소리를 듣고 "이것은 좋은 징조다" 하며 함께 일어나 춤을 추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따온 구절이다. "이를 잡으며 계책을 논했다"는 구절 역시, 진나라 왕맹이 권력자 환온 앞에서 거리낌 없이 이를 잡아가며 세상일을 논했다는 옛이야기에서 왔다. 이인로(1152~1220)는 고려 무신정권기의 문인으로, 호는 쌍명재, 대간은 그가 지낸 벼슬 이름.
이 대간이 승정원에서 숙직하며 지은 시에
공작 병풍 깊은 곳 촛불 그림자 희미한데 원앙새는 쌍쌍이 잠드니 어찌 저마다 날아가리 가엾어라 초췌한 청루 속의 여인이여 평생토록 남을 위해 시집갈 옷을 짓는구나
라 했다. 대체로 이 대간이 오래도록 낮은 벼슬에 머물러 있고 아직 등용되지 못했는데, 동료들은 모두 재상 길에 올라 있어서, 그들의 승진 사령장을 대신 쓰면서 느낀 바가 있어 이 시를 지은 것이다.
이 문순(이규보)의 시는 화려하고 거침이 없다. 그의 칠석우라는 시는 참으로 절창이다.
얇은 적삼에 삿자리 깔고 바람 부는 난간에 누웠다가 꾀꼬리 울음소리 두세 번에 꿈을 깨었네 짙은 잎에 가려진 꽃은 봄이 지나도록 남아 있고 엷은 구름 헤치고 나온 햇살은 빗속에서도 밝구나
라 했는데, 이 시는 읽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해진다. 또
관원이 한가로이 젓대를 골라 부니 부들자리는 바람 타고 날아갈 듯하구나 하늘에 걸린 달은 온 천하가 함께 보는 것인데 내 배에만 혼자 싣고 돌아가는 양 여기네
라 한 시도 더없이 고아하고 빼어나다.
(용어) 이규보(1168~1241) — 고려 무신정권기의 대표적 문인. 시와 술, 거문고를 즐겨 "삼혹호 선생"이라 불렸으며, 시호는 문순.
같은 시대의 한림 진화는 이규보와 나란히 이름을 떨쳤는데, 그의 시는 매우 맑고 아름답다.
매화는 떨어지고 버들가지는 늘어졌는데 한가로이 맑은 안개 밟으며 느릿느릿 걸어가네 어점은 문 닫혀 사람 소리 드문데 온 강에 내리는 봄비는 실실이 푸르구나
라 한 시는 맑고 굳세어 읊조릴 만하다.
사인 홍간의 시는 농염하고도 맑고 곱다. 그의 〈나부인〉과 〈고안〉 같은 시편은 가장 훌륭해서 당나라 전성기 시인들의 작품과 비슷하다.
이견간의 시에
여관에는 등불 하나, 남은 심지 돋우노라니 사신의 담백한 정취는 중보다 낫구나 창 너머 두견새 소리 밤새 듣노니 산꽃 몇째 층에서 우는 것인가
라 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절창이라 일렀다. 나는 관동 지방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사람들이 두견이라 부르는 그 새는 사실 소쩍새 종류였다. 절강 사람 왕자작과 사천 사람 상방기가 함께 강릉에 왔을 때 내가 물어보았더니, 둘 다 이것은 두견이 아니라고 했다. 시인들이란 흥에 겨워 말을 붙이는 법이라, 정작 그 물건이 아니더라도 시 속에서는 그런 말을 즐겨 쓰는 것이다. 이를테면
숲 너머 흰 잔나비 울음소리 부질없이 듣노라
와 같은 구절도, 사실 우리나라에는 본래 잔나비가 없다. 또
집집마다 긴 대숲에 비취새가 우는구나
와 같은 구절은, 파랑새를 보고서 남쪽 바다의 비취새라 부른 것이고,
자고새는 놀라 해당화를 흔드네
와 같은 구절은, 때까치가 깍깍 우는 소리를 듣고서 "가지 마오"라 우는 자고새로 여긴 것이니, 모두 이런 식이다.
원외 김극기는 시상이 매우 교묘하다. 겨울에 핀 오얏꽃을 읊으면서 마지막 구에
기이한 향기가 저절로 굴속에 모여드니 한나라 궁궐에서 이 부인을 다시 보는 듯하네
라 했으니, 이는 옛 시인들도 미처 말하지 못했던 발상이다. 의주에 있을 때 지은 시에는
문장이란 늙어서도 서로 즐길 만한 것 칼 한 자루 차고 변방을 돌며 다섯 수레 책을 우러르네 공무를 마치고서야 내가 변방 관리인 줄 깨닫나니 종이창 밝은 곳에 누워 책이나 보는구나
라 했으니, 세속의 근심을 훌훌 떨쳐 버리는 그 심사가 후련하게 느껴진다.
최해와 이제현, 그리고 고려 말의 문장가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사람들 말로는, 최예산(최해)이 이익재(이제현)의 시 원고를 모조리 먹칠해 지워 버리고 딱 한 편만 남겨 두었다고 한다. 그 시는
얇은 이불에 한기가 돌고 불등은 흐릿한데 상좌 스님은 한밤 내내 종을 울리지 않는구나 아마도 자고 난 손님이 문을 일찍 여는 게 못마땅해 뜰 앞에 눈 덮인 소나무를 못 보게 하려는 것이겠지
인데, 이를 보고 이제현이 크게 감탄하며 최해를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지나치게 꾸며낸 이야기다. 이제현의 시에는 좋은 작품이 매우 많다. 〈화오서곡〉과 〈민지〉 같은 옛 시체의 작품들은 모두 옛 시에 가깝고, 여러 율시들 역시 웅장하고 맑다. 젊을 때 지은 역사를 노래한 시 가운데
누가 알리오, 업 땅의 순문약이 끝내 요동의 관유안에 부끄러울 줄
이라 한 구절이나, 또
서시를 배에 싣고 떠나보내지 않았다면 월나라 궁궐에도 도리어 고소대 하나가 생겼으리
라 한 작품, 또
유비가 그저 잠총국(촉나라)만 사랑하고 있었다면 옛 마을에 우보개거 이야기는 부질없이 생겼을 것을
이라 한 작품들에 이르러서는 하나같이 규모가 반듯하고 이전 사람들이 미처 펼쳐 내지 못한 발상이니, 어찌 낮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다만 최해가 남긴 그 시 한 편으로 이제현을 감탄시켰다는 이야기는, 뛰어난 인물이 평범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식의 과장이라 전부 믿을 수는 없다.
(용어) 최해(1287
1340) — 고려 말의 문인. 가난한 살림에 만년에는 절에서 밭을 빌려 농사지으며 글을 썼다. 호는 예산농은. 이제현(1287
1367) — 고려 말의 대표적 문신·학자. 원나라에 오래 머물며 이름난 학자들과 교유했고, 호는 익재. "순문약", "관유안"은 각각 후한 말의 인물 순욱과 관녕을 가리킨다. 순욱은 절개를 굽혀 조조 밑에서 벼슬했고, 관녕은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산속에 은거하며 절개를 지켰다. "서시를 배에 실은" 고사는, 오나라에 패한 월나라가 미녀 서시를 오왕에게 바쳐 그 마음을 흐트러뜨린 뒤 결국 오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옛이야기다. "우보개거"는 촉나라를 세운 유비가 어릴 때 뽕나무 아래서 놀며 "내가 반드시 저 뽕나무 같은 화려한 수레를 타게 될 것이다"라고 농담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이제현의 장인은 국재공(권보)인데, 부부가 함께 아흔넷까지 살았으나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제현이 장인을 애도하며 지은 만시 한 구절에
항아는 광한전에서 님 오시길 기다리는데 거사는 그저 홀로 도솔천으로 돌아가네
라 했다. 권보 공이 부처를 좋아했으니 그를 도솔천에 오른 백낙천에 비유한 것은 괜찮지만, 항아가 남편의 약을 훔쳐 달로 달아났다는 이야기는 예로부터 시인들이 속세를 떠나 신선 세계로 올라간 것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었는데, 이를 장모에게 갖다 쓴 것은 그다지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용어) 권보(1262~1346) — 고려 말의 문신, 호는 국재. "항아" 이야기는 명궁 예의 아내 항아가 남편이 얻은 불사약을 몰래 훔쳐 먹고 달로 달아나 달의 선녀가 되었다는 중국 신화다. "거사가 도솔천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백낙천)가 만년에 자신을 도솔천에 사는 부처의 제자로 여겼던 데서 온 말이다.
이 문정(이색)의 〈어제 영명사에 들르다〉라는 작품은 특별히 꾸미거나 다듬은 흔적 없이 저절로 음률에 들어맞아, 읊으면 신비로울 정도로 빼어나다. 명나라 사신 허영양이 이 시를 보고 "그대 나라에도 이런 작품이 있구려" 하고 감탄했다. 그의 〈부벽루〉 시는 긴 작품인데 그 가운데
문머리엔 고려의 시가 여태 걸려 있으니 그 시절에도 이미 중국 글자를 깨쳤구나
라는 구절이 있다. 비록 우리나라 사람을 낮춰 보는 말이지만, 그 역시 이색의 시에는 탄복하고 있었던 셈이다.
(용어) 이색(1328~1396) — 고려 말의 대학자·문신. 원나라에 유학해 과거에 급제했으며 목은으로도 불린다. 시호는 문정. 정몽주, 정도전 등을 길러낸 스승 격의 인물이다.
이색은 원나라에 들어가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제과에 합격했는데, 그때 응봉한림 구양규재(이름은 현)와 우도원(이름은 집) 같은 이들이 모두 그를 추어올렸다. 규재는 감탄하며 "우리 학문의 정통은 마땅히 바다 건너 그대에게 전해질 것이오" 하고 말했다. 그 뒤 이색이 고려 말에 궁지에 몰려 이리저리 쫓겨 다닐 때는, 그의 문하생과 옛 동료들조차 모두 등을 돌리고 돌을 던졌다. 그때 공이 시를 지어
학문의 정통은 마땅히 바다 건너 전해지리라던 규재의 그 한마디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요즘 세상 물건값은 죄다 날개 돋친 듯 오르는데 내 글만은 홀로 한 푼어치도 안 나가는구나
라 했으니, 대개 좋은 시절을 만나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슬퍼한 것이다.
원나라가 반란을 일으킨 승려 무리를 보내왔을 때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놀랐는데, 우리 태조(이성계)가 적은 군사로 이들을 덕흥에서 크게 물리쳤다. 태조가 개선하자 공민왕은 그 공을 치하하며 이색과 태조에게 함께 나라의 큰일에 참여하도록 명했다. 임명을 알리는 교지를 내리던 날, 공민왕은 기뻐하며 좌우에게 "문관으로는 이색을 쓰고 무신으로는 이성계를 쓰니, 내 사람 쓰는 안목이 어떠하오" 하고 말했다. 태조는 이색과 우정이 매우 두터워, 자기 집의 당호를 지어 달라고 청했다. 이색은 "송헌"이라 이름 붙이고 그 뜻을 풀어 글까지 지어 권면했으며, 훗날 태조의 아버지 환조의 비문도 지어 주었다.
(용어) 송헌 —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쓰던 당호(집이나 서재에 붙이는 이름)로, "소나무 처마"라는 뜻이다.
훗날 이색이 지방으로 유배되고 아들 종학과 종선도 모두 먼 곳으로 귀양 가게 되자, 그의 문인이었던 정총과 정도전이 이색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그러자 공이 시를 지어
송헌(이성계)이 나라를 맡자 나는 유배를 가니 꿈속에서인들 이런 일을 한 번이나 생각했으랴 정씨 두 사람이 나라의 큰 논의에 참여한다니 우리 한 집안이 다시 모일 날이 언제나 있으리
라 했다. 첫 구절은 애처롭지만 둘째 구절 이하의 뜻은 몹시 오만하다.
정몽주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정 포은(정몽주)은 이학과 절의에서 당대 으뜸이었을 뿐 아니라 문장도 호방하고 걸출했다. 그가 함경도 북관 지역에서 지은 시에
정주 땅 중양절에 높은 곳에 올라보니 국화는 예전처럼 눈부시게 피었구나 갯벌은 남으로 선덕진에 이어지고 산줄기는 북으로 여진의 성에 닿아 있네 백 년 세월 전쟁 치른 나라의 흥망사에 만 리 밖 나그네는 강개한 마음 끓어오르네 술자리 파하자 원수는 말에 올라타고 낮은 산에 기운 해는 깃발을 비추는구나
라 했으니, 음절이 힘차고 시원스러워 당나라 전성기의 풍격이 있다. 또
풍류 넘치는 고을 태수는 이천 석 녹봉의 자리요 옛 친구 우연히 만나 삼백 잔 술을 기울이네
라 한 구절이나, 또
나그네는 고향에 못 가는데 제비 새끼 만나고 살구꽃 지고 나니 복사꽃도 따라 지네
라 한 구절, 또
매화 핀 창가엔 봄빛이 일찍 찾아들고 판자 지붕엔 빗소리가 유난히 많네
라 한 구절들은 모두 호탕하게 펄펄 날아오르는 기운이 있어, 그 사람됨과 꼭 닮았다.
포은의 시에
강남의 아가씨들은 머리에 꽃을 꽂고 웃으며 짝을 불러 물가에서 노니는데 노 저어 돌아오니 어느덧 날이 저물고 원앙새 쌍쌍이 나니 시름은 그지없네
라 했으니, 호탕한 풍류가 천고에 빛을 내며, 시 역시 옛 악부의 가락과 흡사하다.
(용어) 정몽주(1337~1392) — 고려 말의 대학자·충신.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다가 이방원 세력에게 죽임을 당했다. 호는 포은.
요동에 유배된 문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척약재 김구용의 시는 매우 맑고 참신하며 섬세하고 풍성했다. 목은 이색이 "경지(김구용의 자)가 붓을 들면 마치 구름과 안개가 피어나는 듯하다"고 칭찬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김구용은 일찍이 회례사가 되어 예물을 요동에 바쳤는데, 요동 도사 반규가 그를 명나라 수도로 잡아 보냈다. 예물 문서에 "말 오십 필"이라 써야 할 것을 실수로 "말 오천 필"이라 적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태조는 우리나라가 요동의 관리와 사사로이 교분을 맺었다며 화를 내고는 "말 오천 필이 오면 풀어 돌려보내겠다"고 했다. 이때 광평부원군 이인임이 나라 정치를 맡고 있었는데, 평소 김구용 무리와 사이가 나빠 끝내 말을 바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는 그를 대리(지금의 중국 윈난성 지역)로 유배 보냈다. 공이 시를 지어
죽고 사는 것이 운명이라니 하늘의 뜻을 어이하리 동쪽으로 고향 하늘 바라보니 갈 길은 아득한데 좋은 말 오천 필이 언제나 도착할는지 복사꽃 핀 문밖엔 풀만 무성히 우거졌네
라 했고, 또 무창에서 지은 시에는
황학루 앞엔 물결이 솟구치는데 강 따라 늘어선 주막은 몇천 채런가 추렴한 돈으로 술 사다 회포를 풀어 보나니 대별산은 푸른데 해는 이미 기울었구나
라 했는데, 공은 끝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용어) 김구용(1338~1384) — 고려 말의 문신·문인. 명나라와의 외교 문서 사고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호는 척약재.
그 뒤 참의 조서 역시 금치(지금의 중국 윈난성 지역)로 유배되었다가 몇 해 만에 풀려 돌아왔는데, 황주에서 지은 시에
물빛과 산 기운은 맑은 모래를 어루만지고 버들 푸른 긴 둑엔 천만 채 집이로세 무수한 장삿배는 성 아래 정박해 있고 대나무 누각의 안개 낀 달밤엔 피리 노래 드높구나
라 했다. 나는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좁은 이 땅에서만 살다 보니 천하를 두루 유람해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 두 사람은 비록 낯선 땅으로 유배되긴 했어도 그 덕분에 중국 오나라와 초나라의 산천을 다 보았으니, 이 또한 사람으로서 얻기 힘든 통쾌한 일이라 하겠다.
이 도은(이숭인)의 〈오호도시〉를 목은 이색은 크게 칭찬하며 당나라 전성기 시에 견줄 만하다고 했는데, 이 일로 삼봉 정도전과 사이가 나빠져 결국 기구한 화까지 입게 되었다. 예전에 명나라 사신 주태사가 이 작품을 보고 역시 매우 감탄했다고 한다. 그
산 북쪽과 산 남쪽으로 가느다란 길이 갈라지고 소나무 꽃은 비를 머금어 어지러이 떨어지네 도인이 물을 길어 초가집으로 돌아오니 한 줄기 푸른 연기가 흰 구름을 물들이네
라 한 시는, 당나라 시인 유장경에게 견주어도 모자랄 것이 없다.
(용어) 이숭인(1347~1392) — 고려 말의 문신·문인. 조선 개국 세력과 대립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호는 도은.
나라가 세워진 초기에는 정교은(정이오)과 이쌍매(이첨)의 시가 가장 훌륭했다. 정교은의 시에
이월도 다 저물고 삼월이 오려 하니 한 해의 봄빛이 꿈결처럼 돌아오네 천금으로도 이 좋은 시절은 살 수 없으니 술 익어 가는 어느 집에서 꽃이 한창 피었는고
라 한 시는 당나라 시인들의 아름다운 경지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쌍매의
신선이 차고 온 옥 소리 쟁그랑쟁그랑 높은 누각에 올라와 푸른 창에 걸어 놓고 밤 되어 다시금 유수곡을 타노라니 둥근 달 하나가 가을 강에 내려앉네
라 한 시도 빼어난 운치가 있다. 이쌍매의 〈꾀꼬리 소리를 듣고〉라는 시에
서른여섯 궁궐 후원 봄 나무 깊숙한데 미인이 꿈에서 깨니 남창엔 어스름 영롱한 백 가지 울음소리 시름겹게 들으니 모두가 향기로운 규방에서 임금을 기다리는 마음일세
라 했으니,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와 흡사하다.
(용어) 정이오(1354
1440) —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호는 교은. 이첨(1345
1405) —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호는 쌍매당.
조운흘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석간 조운흘은 고려 때 이미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늘그막에는 미친 척 세상을 즐기며 지내다가 스스로 사평원(지금의 서울 강동 지역 나루터 역원)의 원주가 되기를 자청했다. 하루는 권세가 임견미와 염흥방의 무리로 지목되어 지방으로 유배 가는 사람들이 길에 줄줄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한낮에 사람 불러 사립문 열고 숲 속 정자로 걸어나가 이끼 낀 돌에 앉으니 어젯밤 산속엔 비바람이 거칠더니 개울 가득 흐르는 물에 꽃잎이 떠내려오네
(용어) 조운흘(1332~1404) —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늘그막에 세상일에서 물러나 강가 나루터의 관리인을 자청하며 은둔했다. 호는 석간. 임견미와 염흥방은 고려 말 권세를 부리다 처형된 권신들이다.
세종 때의 문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세종 임금 때는 인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이름난 문장가와 학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옛 시체로 지은 고시는 옛사람들에 견주면 자못 부끄러운 수준이고, 율시나 절구에서도 딱히 놀랄 만한 작품은 없다. 다만 서사가(서거정)의 시는 다소 장황하기는 해도 풍성하고 아름다워 간간이 좋은 구절이 있다. 이를테면
노니는 벌은 쉴 새 없이 날아다니고 한가한 오리는 서로 기대어 조는구나 달빛은 풀벌레 소리 너머로 비치고 은하수는 까치 그림자 속으로 흐르네
라 한 구절이나
다시 한번 난새를 타고 쇠피리를 불며 깊은 밤 밝은 달빛 아래 강남을 찾고 싶네
와 같은 구절은 제법 운치가 있다.
(용어) 서거정(1420~1488) — 조선 초의 대표적 문신·학자. 여러 차례 대제학을 지내며 당대 문단을 이끌었다. 호는 사가정.
김괴애(김수온)의 시 또한 호방하다. 이를테면
사립문이 삐딱하게 시냇둑에 다다르니 산비 내리는 아침마다 물 불어나는 걸 보노라
라 한 구절이나,
밝은 창가에서 스님은 승복을 깁고 고요한 탑 아래서 나그네는 시를 짓네
라 한 구절은 매우 한가롭고 여유로워 운치가 있다.
(용어) 김수온(1409~1481) — 조선 초의 문신·학자.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호는 괴애.
강경순(강희맹)의 〈양초부〉는 대단히 훌륭하며 그의 시 역시 맑고 굳세다. 그의 〈병중에 읊다〉라는 시에
남창에 종일 앉아 세상일 다 잊었더니 뜨락엔 사람 없어 새가 나는 법을 배우는구나 가는 풀 사이 은은한 향기 어디서 오는지 묽은 연기 스러지는 볕에 가랑비 부슬부슬
이라 했고, 매화를 읊은 시에
어스름 울타리 가에서 뻗은 가지 바라보고 느릿느릿 향기 찾아 물가에 다다르니 천년 세월 나부산에 떠 있던 둥근 달이 오늘에 와 다시 비치니 꿈에서 깨어난 듯하네
라 했는데, 모두 한아하여 읊조릴 만하다.
(용어) 강희맹(1424~1483) — 조선 초의 문신·학자. 농업서 《금양잡록》을 짓기도 했다. 자는 경순, 봉호는 진산.
서사가가 오랫동안 대제학을 지냈기 때문에, 같은 시대의 강진산(강희맹)·이양성(이승소)·김영산(김수온) 같은 이들은 모두 문형(대제학 자리)을 맡아 보지 못한 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양성이 제비를 읊은 시에
버드나무 푸른 골목에 봄바람은 저물어 가고 풀빛 푸른 연못가에 가랑비는 자욱하네
라 한 구절은 당나라 시인의 시구와 흡사하다.
우리나라 시에는 옛 시체를 제대로 본뜬 것이 드문데, 오직 성화중(성간)이 안연지·도연명·포조 세 사람의 시체를 본떠 지은 세 편만은 그 법식을 깊이 터득했고, 여러 절구 역시 당나라의 악부체를 얻었으니, 이 사람 덕분에 우리 시단이 겨우 쓸쓸함을 면했다고 할 만하다.
(용어) 이승소(1422
1484) — 조선 초의 문신, 봉호는 양성군. 성간(1427
1456) — 조선 초의 문인, 자는 화중. 안연지·도연명·포조는 모두 중국 남북조 시대의 유명한 시인들이다.
김종직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점필재(김종직)의 글은 요체는 깨우쳤으나 높은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니, 최동고(최립)가 그를 가장 업신여겼다. 그의 시는 온전히 소식과 황정견에게서 나왔으니, 옛 시를 평가하는 사람들이 그를 낮추어 보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러나 나의 둘째 형(허봉)은 일찍이 그의 시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이 우니 맑은 이슬이 내려 맺히고 달이 뜨니 큰 물고기가 뛰어오르네
라 한 구절은 결코 당나라 전성기의 시에 뒤지지 않으며,
가랑비 속에 스님은 장삼을 꿰매고 찬 강 위로 나그네는 배 저어 가네
와 같은 구절은 매우 한적하고 담백한 맛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는 대체로 맞는 말씀이다.
(용어) 김종직(1431
1492) — 조선 초의 대학자. 영남 사림파의 종조로 꼽히며, 죽은 뒤 그가 쓴 〈조의제문〉이 빌미가 되어 부관참시를 당했다. 호는 점필재. 최립(1539
1612)은 선조 때의 문장가로 호는 동고. 소식(소동파)과 황정견은 중국 송나라를 대표하는 시인들이다.
이전 사람들은 점필재가 여강(지금의 경기도 여주 지역을 흐르는 남한강)에서 읊은
십 년의 세상일은 홀로 읊는 시 속에 담기고 팔월의 가을빛은 어지러운 숲 사이로 번지네
라는 구절을 칭송해 왔다. 그러나 신륵사에서 지은
절간에서 종이 울리니 여룡이 춤을 추고 온갖 구멍에서 바람이 우니 철봉이 나래를 치네
라 한 구절의 웅장하고 묵직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는 참으로 우주를 떠받칠 만한 시구다. 그의 〈보천탄즉사〉에서는
복사꽃 실은 물결이 몇 자나 높았는지 은빛 바위는 목까지 잠겨 어딘지 모르겠네 쌍쌍이 노니는 가마우지는 옛 여울돌을 잃고 물고기를 물고는 갈대숲으로 들어가네
라 했는데, 이는 가장 힘차고 높은 경지이며, 《동경악부》는 편마다 모두 예스러운 맛이 있다.
김시습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김열경(김시습)의 높은 절개는 우뚝하여 더할 나위가 없다. 그의 시문 역시 남다른 격을 지녔지만, 마음을 쏟지 않고 장난삼아 지은 것이 많아서 마치 세게 쏜 화살이 힘을 잃고 떨어지듯 하는 대목이 있고, 매번 허튼소리가 섞여 있어 당나라의 저속한 시인 장타유를 보는 듯 싫증이 나기도 한다.
(용어) "장타유" — 당나라의 장타유라는 사람이 지은 시가 하도 저속해서, 후대에 격 떨어지는 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누런 개는 몸이 하얗게 되고, 하얀 개는 몸이 부어올랐다" 같은 우스꽝스러운 구절이 대표적이다.
그가 세향원에 쓴 시에
아침 해가 떠오르려 새벽빛이 갈라지고 숲안개 걷힌 곳에 새는 무리를 부르는구나 먼 봉우리에 떠오른 푸른빛 창을 열고 바라보며 이웃 절 종소리는 언덕 너머로 듣는다 파랑새는 소식 전하며 약 달이는 솥을 엿보고 벽도화는 떨어져 이끼 위에 비치네 아마도 신선은 도관으로 돌아가서 솔 아래 한가로이 도교 경전을 펼쳐 보리
라 했고, 소양정에서는
새 너머로 하늘은 끝나려 하고 읊조림 끝에 한은 그지없어라 산은 첩첩이 북쪽으로 굽이쳐 가고 강은 절로 서쪽을 향해 흐르는구나 먼 물가엔 기러기 내려와 앉고 그윽한 옛 기슭엔 배 돌아오네 언제나 이 속세의 그물을 떨쳐 버리고 흥에 겨워 이곳에 다시 와 놀아 볼까
라 했으며, 산길을 가며 지은 시에는
아이는 잠자리 잡고 할아비는 울타리 고치고 작은 개울 봄물에 가마우지 목욕하네 푸른 산 끊긴 곳에 돌아갈 길은 머니 등나무 지팡이 하나 비스듬히 둘러메고 오누나
라 했는데, 모두 세속의 때를 훌훌 떨쳐 버려 화평하고 담백하니, 저 자잘하게 다듬기만 하는 시인들은 마땅히 이 앞에서 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이다.
(용어) 김시습(1435~1493) — 조선 초의 문인.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해 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떠돌며 살았던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열경.
연산군 시대 전후의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조매계(조위)와 유뇌계(유호인)는 한 시대에 함께 이름을 날렸지만 정순부(정희량)에는 미치지 못했다. 정순부의 〈혼돈주가〉는 매우 훌륭하여 소동파와 흡사하다.
조각달은 이 마음 비추며 고국에 다다르고 지는 별은 꿈을 따라 변방 성에 떨어지네
라 한 구절은 더없이 신비롭고 빼어나며,
나그넷길에 우연히 한식 비를 만나니 꿈속에서 오히려 고향의 봄을 떠올리네
라 한 구절에는 당나라 중기 시의 고아한 운치가 있고,
봄이 와도 꽃은 안 보이고 눈만 보이니 기러기도 안 오는 곳에 사람이 어찌 찾아오리
라 한 구절은 다듬은 흠이 조금 있지만 그래도 다정다감하다.
(용어) 조위(1454
1503) — 조선 초의 문신, 호는 매계. 유호인(1445
1494) — 조선 초의 문신·문인, 호는 뇌계. 정희량(1469~1502?) — 조선 초의 문신, 호는 순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망헌(이주)의 시는 가장 침착하여 당나라 전성기의 풍격이 있다.
아침 해는 붉은빛을 뿜으며 발해 위로 솟구치고 갠 구름은 하얗게 펼쳐져 무려산을 벗어나네
와 같은 시구는 매우 힘이 있으며,
언 비는 천 산마루의 눈으로 비껴 이어지고 주린 까마귀는 놀라 한 숲의 바람 속에 우짖네
라 한 시구는 노련하고 웅혼하며 기이하고 걸출하다. 통주에서 지은 시는
통주는 천하의 명승지라 누각들이 구름 낀 하늘로 솟았구나 저자에는 금릉의 물화가 쌓이고 강줄기는 양자강 물결로 이어지네 가을이라 찬 안개는 물가에 내리고 저물녘 외로운 학은 요동으로 돌아가네 말안장에 오른 이 몸은 천 리 밖 나그네 정자에 오르니 고국은 아득하기만 하네
라 했는데, 이 역시 놀랍게도 왕유와 맹호연의 수준에 가깝다.
(용어) 이주(1468~1504) — 조선 초의 문신, 호는 망헌.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남지정(남곤)은 일찍이 "김일손의 글이나 박은의 시는 쉽게 얻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참으로 옳다. 박은의 시는 비록 정통의 소리는 아니지만 엄격하고 치밀하며 굳세고 사납다.
흐린 봄날 비가 오려니 새들은 서로 지저귀고 늙은 나무는 무정한데 바람은 절로 슬퍼지네
와 같은 구절은, 당나라의 섬세하고 곱기만 한 시풍을 배운 사람으로는 감히 오를 수 없는 경지다.
(용어) 남곤(1471
1527)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지정. 기묘사화를 주도한 인물로 훗날 평이 나쁘다. 김일손(1464
1498) — 무오사화 때 처형된 사관·문신. 박은(1479~1504) — 조선 초의 문인,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연산군은 비록 정치가 어지러웠으나 시문은 좋아했다. 강목계(강혼)가 오랫동안 도승지로 있었는데, 연산군이 언젠가
한식이라 동산 숲에 삼월은 저물고 꽃 날리는 비바람에 오경은 싸늘하네
라는 시구를 시제로 내려 가까운 신하들에게 짓도록 했는데, 강목계의 시가 장원으로 뽑혔다. 그 시에
청명절이라 궁궐 버들은 찬 안개에 잠기고 쌀쌀한 봄바람은 새벽 되어 더욱 몰아치네 지는 꽃은 붉게 땅을 뒤덮고 나는 버들개지는 하늘을 하얗게 뒤덮누나 못물 너머 높은 누각에선 구슬발을 걷고 좋은 말은 꽃을 찾아 비단 언치를 빛내는구나 금 술동이 실컷 취해 별원으로 돌아오니 오색 끈이 흔들리며 그림 난간을 스치네
라 했는데, 연산군은 크게 칭찬하며 상으로 준 물건도 매우 많았다.
언젠가 연산군이 죽은 후궁을 슬퍼하여 신하들에게 애도시를 짓게 했는데, 이백익(이희보)이
궁궐 문은 깊이 잠겨 달빛도 황혼인 제 열두 번 종소리가 밤중에 울리는구나 어느 곳 청산에 그 옥 같은 몸을 묻었는지 가을바람에 지는 잎 소리 차마 못 듣겠네
라 하니, 연산군이 극찬하며 그를 이조 정랑에서 직제학으로 단번에 발탁했다. 두 사람의 시가 비록 좋기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 일 때문에 오히려 시인으로서 이름을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용어) 강혼(1464
1519) — 조선 초의 문신, 호는 목계. 이희보(1473
1548) — 조선 초의 문신, 자는 백익.
이행과 중종 때의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 시로는 이용재(이행)를 첫손에 꼽아야 마땅하다. 그의 시풍은 침착하고 화평하며 아담하고 원숙하다. 오언고시는 두보와 진후산(진사도)의 품격과 비슷하여 높고 예스러우며 간결하고 절실하니, 글이나 말로는 다 찬양할 수가 없다. 내가 평소 즐겨 읊던 절구 한 수는
평생에 사귄 벗들은 모두 늙어 죽어 가고 흰머리로 마주 보니 그림자와 몸뚱이만 남았네 때마침 높은 누각에 달이 밝은 이 밤엔 애처로운 피리 소리 차마 들을 수가 없구나
인데, 읽을 때마다 감개가 무량하여 가슴이 메어진다.
(용어) 이행(1478~1534) — 조선 중기의 문신·문장가. 갑자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후 복권되어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호는 용재.
조선 시는 중종 때 이르러 크게 무르익었다. 용재 이행이 그 시작을 열자, 눌재 박상·기재 신광한·충암 김정·호음 정사룡이 한 시대에 함께 나와 휘황하게 빛을 내고 금옥처럼 맑은 소리를 울렸으니, 족히 천고에 자랑할 만하다. 조선의 시는 다시 선조 때 이르러 크게 완비되었다. 노소재(노수신)는 두보의 법을 깨우쳤고 황지천(황정욱)이 그 뒤를 이어 일어났으며, 최경창·백광훈은 당나라 시를 본받았고 이익지(이달)가 그 흐름을 다시 밝혔다. 세상을 떠난 우리 형님(허봉)의 노래체 시는 이태백과 같고, 누님(허난설헌)의 시는 당나라 전성기의 경지에 가까웠다. 그 뒤로 권여장(권필)이 늦게 나와 힘껏 옛 어진 이들을 좇아 용재 이행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아, 참으로 장하다.
(용어) 박상(1474
1530) — 호는 눌재. 신광한(1484
1555) — 호는 기재. 김정(1486
1521) — 호는 충암, 기묘사화 때 사사되었다. 정사룡(1491
1570) — 호는 호음.
정호음(정사룡)은 남을 추앙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유독 눌재(박상)의 시만은 좋아했다. 일찍이 벽 위에
서북의 두 강은 태곳적부터 흘러오고 동남의 두 산줄기는 신라 땅을 파고드네
라는 구절과,
거문고 타던 이는 학 가의 달로 떠나가고 피리 부는 손은 솔 아래 바람 타고 찾아오네
라는 구절을 써 붙여 두고 스스로 탄식하며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여겼다. 또 이런 말도 했다. "허종경(허엽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시구를 이야기하는 대목)의
들길이 어두워 오는데 소는 홀로 돌아오고 강 구름이 비를 몰아오니 제비가 낮게 나네
라는 구절은, 강목계(강혼)의
붉은 제비 엇갈려 나니 바람은 버들을 스치고 청개구리 어지러이 울어대니 비는 산을 어둑하게 하네
라는 구절과 서로 겨룰 만하다." 그 당시 "신기재(신광한)의 시는 온갖 시체를 두루 갖추었지만, 호음은 칠언율시 하나에만 능하니 그에게 못 미칠 것 같다"는 말이 돌았는데, 호음은 "그가 아무리 온갖 시체를 갖추었다 해도 감히 내 율시 한 구절을 당해 내겠는가" 했으니, 그 자부심이 이러했다.
호음의 〈황산역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날 쫓기던 왜구를 이곳에서 섬멸할 때 혈전 벌인 신묘한 칼끝엔 붉은빛이 둘렸다네 한나라 깃대 꽂혔던 흔적은 바위 틈에 남아 있고 얼룩진 옷 적신 피는 노을빛을 물들이네 소슬바람에 살기 감돌아 수풀 산은 엄숙하고 도깨비불 음산하게 타오르니 성루는 황폐해졌네 동쪽 이 땅 사람이 물고기 신세를 면한 것은 우 임금 같은 그 공덕 때문이니 소신이 어찌 감히 해를 더듬는 격의 얕은 찬양을 하리오
라 했다. 기이하고 걸출하며 웅혼하고 묵직하니 참으로 훌륭한 작품이다. 절강 출신 명나라 사람 오명제가 이 시를 보고 "그대의 재주는 용을 잡을 만한데 도리어 개를 잡고 있으니 애석하다"고 평했는데, 이는 대개 당나라 시를 본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어찌 그것만으로 그를 낮추어 볼 수 있겠는가.
(용어) "황산역시"는 고려 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전투를 소재로 한 시다.
이익지(이달)는 어릴 때 두보의 시를 호음(정사룡)에게 배웠다. 하루는 호음이 익지더러 서가 위의 여러 책을 가져오라 시켰다. 그리고는 그 책들을 보다가 《춘정집》이 나오자 땅에 던져 버렸고, 《매계집》은 펴 보고 웃으며 덮었으니 대개 가볍게 여긴 것이었다. 오직 《점필재집》만은 손에 쥐고 익히 보기를 그치지 않았다. 익지가 몰래 보니 온통 줄을 그어 표시해 두었는데, 대개 좋아하는 구절을 뽑아 자기 시의 재료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언젠가 평생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구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사람들은
산 나무 함께 울며 바람 언뜻 일어나고 강물 소리 문득 거세지자 달이 홀로 걸렸네
라는 구절을 깎아낸 듯 아름답다고 했고,
산꼭대기 깜빡이는 별은 조각달과 빛을 다투고 나무 위에서 움직이는 새는 깊은 떨기 속에 숨는구나
라는 구절 역시 시상이 교묘하지만, 끝내는
빗기운이 노을을 눌러 산은 문득 어두워지고 냇물 빛은 달을 받아 밤에도 밝구나
라 한 구절만은 못하니, 이는 마치 귀신이 도운 듯한 시구라고 말했다 한다.
김충암(김정)의 시에
지는 해는 거친 들판에 뉘엿뉘엿 비치고 갈가마귀는 저문 마을로 내려앉는구나 빈 수풀엔 밥 짓는 연기 싸늘히 식고 초가집도 사립문을 걸어 닫았네
라 한 시는 당나라 유장경의 시와 흡사하다. 그의 〈우도가〉는 심오하고 황홀하며, 미묘한가 하면 뚜렷하기도 해서 가진 재주를 다 부린 작품이다. 그래서 신기재(신광한)는 그를 추어올려 당나라 시인 이하(장길)에 견주었다.
(용어) 이하(790~816) — 당나라의 천재 시인. 요절했으나 기이하고 몽환적인 시풍으로 유명하다. 자는 장길.
최수성과 조광조 일파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최원정(최수성)은 세상을 내려다보며 벼슬하지 않고 그저 화나 면하기를 바라며 살았다. 하루는 여러 어진 이들이 정암(조광조)의 집에 모였는데, 원정이 밖에서 들어오며 숨이 가빠 말도 제대로 못 한 채 황급히 물을 청해 마시고는 "내가 한강을 건너올 때 물결이 솟구치고 배가 부서져 거의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났다"고 했다. 주인이 웃으며 "이는 우리를 빗대어 하는 말이다"라고 했다.
원정이 붓을 잡아 벽에 산수를 그리자, 원충(김정)이 그 그림에 부쳐 시를 지었는데
맑은 새벽 바위산 봉우리는 우뚝하고 흰 구름은 산기슭에 비껴 있네 강촌엔 사람의 모습 보이지 않고 강가 나무는 저 멀리 아득하구나
라 했다. 원정이 만의사에 올라 지은 시에
옛 불전엔 몇 안 되는 스님이 지키고 있고 수풀 끝엔 저녁 종소리 맑게 울리네 창문은 트여 천 리 끝까지 닿고 담장은 눌러앉아 뭇 산이 나직해 보이네 나무는 몇 해나 늙어 왔는지 새는 유난히 별난 목청으로 우짖는구나 험난한 세상 그물에 걸릴까 근심하며 오늘의 내 인생을 한탄하노라
라 했는데, 마지막 구절에 뜻이 담겨 있으니 아마 스스로 화를 입을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닐까. 애석한 일이다.
(용어) 최수성(1487
1521) — 조선 중기의 문인·화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호는 원정. 조광조(1482
1519) — 기묘사화의 중심인물,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다 사사되었다. 호는 정암. 김정(1486~1521)은 앞서 나온 충암 김정과 같은 인물로, 자가 원충이다.
김안로와 신광한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김이숙(김안로)이 젊어서 관동 지방에 놀러 갔을 때, 꿈에 귀신이 나타나 시를 읊었다.
봄은 우 임금의 땅 산천 밖에 무르익고 풍악은 순 임금 조정의 새와 짐승 사이로 울려 퍼지네
라 하고는 "이것이 바로 네가 벼슬길을 얻을 시구다" 하고 말했다. 꿈에서 깨어 이를 기억해 두었는데, 이듬해 궁중에서 치른 시험에서 연산군이 율시 여섯 편을 시험 문제로 냈다. 그 가운데 "봄날 이원의 악공들이 침향정 가에서 한가로이 악보를 뒤적이다"라는 제목으로 '한' 자를 운으로 삼아 시를 지으라는 문제가 있었다. 김안로가 생각해 보니 꿈에서 들은 구절과 꼭 들어맞기에 그대로 써서 냈다. 강목계(강혼)가 시험관이 되어 크게 칭찬하며 장원으로 뽑았다. 김모재(김안국)는 본래 글을 잘 안다고 이름난 사람이었는데, 시험을 함께 감독하다가 "이 구절은 귀신의 소리지 사람의 시가 아니다" 하고는 그 자리에서 출처를 물었다. 김안로가 사실대로 대답하니, 사람들이 모두 김모재의 감식안에 탄복했다.
(용어) 김안로(1481
1537) — 조선 중기의 문신. 훗날 권세를 남용하다 사사되었다. 자는 이숙. 김안국(1478
1543)은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모재.
신낙봉(신광한)의 시는 맑고 빼어나 운치가 있다. 〈중추절에 배를 긴 여울에 대고〉라는 시에
갈대꽃 핀 물가에 외로운 배 매어 두니 두 갈래 맑은 강물에 사방은 산이로세 인간 세상에도 오늘 밤 같은 달이 없으랴만 백 년을 가도 이 가운데서 보는 달만은 못하리
라 했고, 〈배 위에서 삼각산을 바라보며〉라는 시에
외로운 배 잡아타고 광릉 나루 떠나오니 열다섯 해 동안 죽지 못한 이 몸이로세 나는야 정이 있어 아는 얼굴 같지만 청산이야 옛사람을 기억이나 할까
라 했다. 〈김공석의 옛집을 지나며〉라는 시에
그때 함께 쫓겨난 이들 몇이나 남았는지 동풍에 말 세우고 홀로 애를 태우네 한식이라 안개비 자욱한 개산 가는 길에 석양 마을 젓대 소리 차마 듣지 못할레라
라 했고, 〈삼월 삼짇날 박대립에게 부치다〉라는 시에
삼짇날과 중양절엔 해마다 만나자던 옛 약속은 남았어도 일은 그만 어그러져 방초에 답청할 날이 바로 오늘인데 맑은 동이 흰 술은 옛 친구와 함께가 아닐세 바람 앞 제비 소리는 갓 나온 듯 앳되고 비 온 뒤 꽃가지는 다시 보기 어렵구나 모동의 어른들은 속기를 벗은 이가 많으니 봄옷을 전당 잡힐 생각인들 없을쏘냐
라 했으니, 편마다 모두 읊을 만하다. 비록 웅장하고 기이함에서는 호음(정사룡)에 미치지 못하지만, 맑고 시원함에서는 오히려 그보다 낫다고 할 만하다.
(용어) 신광한(1484~1555) — 앞서 나온 기재 신광한과 같은 인물. 호가 낙봉이기도 하다.
나식과 소세양, 심언광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장음정 나식의 시는 시적 흥취가 있어 이따금 당나라 전성기 시에 가깝다. 신광한과 정사룡 같은 원로 대가들이 어느 집에 모여 마침 포도 그림 족자를 앞에 놓고 시를 읊으려 했는데, 생각에 잠겨 미처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술에 취한 나식이 찾아와 붓을 빼앗아 들고는 족자 위에 쓰려 했다. 주인이 말리려 하자 정사룡이 "그냥 두어라" 했고, 나식은 절구 두 수를 지었는데 그 하나에
늙은 원숭이 무리를 잃고 지는 해는 마른 등걸 위에 비치네 우뚝 앉아 고개도 돌리지 않으니 아마도 천 봉우리의 메아리를 듣는 것이겠지
라 했다. 정사룡이 크게 칭찬하며 붓을 놓고 더는 짓지 않았다. 손곡(이달)도 이렇게 말했다. "이는 당나라 전성기의 〈이주가〉 법식이니, 이른바 한 구절만 끊어 놓아도 시 한 편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용어) 나식(1498~1546) — 조선 중기의 문인, 호는 장음정.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소퇴휴(소세양)가 젊었을 때 상좌상(상진)과 동료로 지냈는데, 그때는 상진이 낮은 벼슬에 있었다. 훗날 상진이 재상이 되자 기러기 그림 족자를 가지고 소세양에게 시를 지어 달라 청했다. 소세양이 절구 한 수를 지어 보냈는데
쓸쓸한 외그림자 저녁 강가를 비추고 붉은 여뀌꽃 시들어 두 기슭에 그늘졌네 부질없이 서풍 향해 옛 짝을 불러 대며 구름과 물이 만 겹이나 깊은 줄은 모르는구나
라 했으니, 함축된 뜻이 깊고 멀어 상 정승이 보고는 탄식하며 서글퍼했다.
(용어) 소세양(1486
1562)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퇴휴당. 상진(1493
1564)은 조선 중기의 명재상, 호는 범허재.
심어촌(심언광)은 늘그막에 김안로와 사이가 벌어져 함경도 관찰사로 밀려났는데, 그때 지은 시에
넓은 강을 건너려니 나룻배가 없고 추운 나무 시들어 가는데 겨우살이만 붙어 있네
라 했으니, 대개 뒤늦게 후회하는 마음이 움튼 것이다.
(용어) 심언광(1487~1540)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어촌.
임억령과 임형수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임석천(임억령)은 사람됨이 고매했고 시 역시 그 사람됨과 같았다. 〈낙산사영〉은 마치 용이 오르고 비가 내리는 듯한 기세로 글의 흐름이 날아오르고 꿈틀거려, 그 경치의 기이함과 웅장함을 서로 다투는 듯하다. 그 시에
마음은 흐르는 물과 함께 세상으로 나오고 꿈에는 흰 갈매기 되어 강 위를 나는구나
라 한 구절은 기상이 드높아 신령한 용이 바다를 희롱하는 뜻이 있다.
(용어) 임억령(1496~1568) — 조선 중기의 문신·시인, 호는 석천.
금호 임형수는 풍류가 호탕하고 시원하며, 그의 시 역시 펄펄 나는 듯하다.
고개 숙인 꽃은 술에 취한 옥녀의 얼굴 같고 끊어진 산은 바닷물을 마시는 푸른 용의 허리로다
라 한 시는 지금까지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퇴계 이황 선생이 이 시를 몹시 아껴, 늘그막까지도 문득 그를 떠올리며 "어찌하면 임사수(임형수)와 다시 마주 앉을 수 있을까" 하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용어) 임형수(1504~1547)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금호. 을사사화 여파로 사사되었다.
김인후와 오세억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하서 김인후는 인품이 높고 트여 있으며 맑고 순수했는데, 시 역시 그 인품과 같았다. 양송천(양응정)은 그의 〈등취대시〉를 극찬하며 당나라 고적과 잠참에 비길 만큼 높은 운치라고 했다. 그 시에
양왕이 노래하고 춤추던 그 땅에 오늘은 나그네가 올라왔노라 구름을 넘어설 듯 강개한 흥취요 옛일을 조문하는 처량한 마음이로다 긴 바람은 먼 들판에서 일어나는데 밝은 해는 첩첩한 산 뒤로 숨어 버리네 그 시절의 번화했던 일들을 아득하니 이제 어디서 찾으리오
라 한 시는 침착하고 걸출하여 가늘고 여린 태를 단번에 씻어 냈으니 참으로 귀중히 여길 만하다.
(용어) 김인후(1510
1560) —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호는 하서. 양응정(1519
1581)은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송천. 고적과 잠참은 모두 당나라의 이름난 변방시 시인들이다.
하서가 세상을 떠난 뒤, 영남 하양 땅에 오세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이렇게 말했다. "꿈에 천상의 관청에 갔는데, 붉은 옷 입은 저승 사자가 작은 집으로 데려가니 그곳에 비단 두건을 쓴 학사가 있었다. '김하서'라 자칭하며 '너는 올해 하늘에 오를 운수가 아니니 나가서 힘써 행실을 닦으라' 하고는 시 한 수를 주며 보냈다"는 것이다. 그 시는
세억은 그 이름이요 대년은 그 자인데 천상의 문을 열고 들어와 자미 신선을 뵈었구나 일흔일곱 지난 뒤에 서로 다시 만나리니 인간 세상 돌아가 함부로 전하지 말라
였다. 오세억은 원래 효자였는데, 훗날 과연 일흔일곱 나이에 아무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
(용어) "천상의 관청", "자미 신선" 등은 도교에서 말하는 하늘의 관청과 신선 세계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아버지가 아끼신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선친께서는 늘 "윤장원의 재주는 따를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시며, 그의
넓은 바다 조각배 위에 꿈은 천 리를 떠도는데 두어 가락 젓대 소리 달 밝은 가을이로세
라는 구절과,
맞바람이 살구나무에 불어 겹문을 두드리네
라는 구절을 매양 칭송하시며, "맑고 절실하여 옛 시에 핍진하다"고 하셨다.
(용어) 윤장원 —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으며, 허엽(허균의 아버지)이 재주를 높이 산 인물로만 이 글에 등장한다.
선친께서는 기묘년(1519년으로 추정되나 문맥상 허엽이 영남 관찰사가 된 해)에 영남 관찰사를 제수받으셨는데, 권습재(권벽)가 동지사로 북경에 가면서 선친을 송별하며 지은 시에
평생의 회포를 좋이 풀리라 여겼더니 담소를 나눌 기회도 이제부턴 흔치 않겠구려 달빛 비친 요하를 건너 나는 사신길을 떠나고 그대는 부절을 안고 유령의 매화를 찾아가리 맡은 일과 갈 길이 모두 다 염려스럽고 이별과 노쇠함이 서로 재촉하는구려 공무 틈틈이 벗 그리는 노래를 짓거든 시통이나 자주자주 부쳐 주시기를
라 했는데, 선친께서는 간절하고 알맞다며 칭찬하셨다.
(용어) 권벽(1520
1593)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습재. 허엽(1517
1580)은 허균의 아버지로, 동인의 영수격 인물이었으며 호는 초당.
선친의 송별 시첩에 실린 소 정승(소세양)의 시 가운데
백옥당이 완성된 지 오래되었더니 황금 허리띠를 하사받은 것이 오늘이라네
라는 구절을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여긴다. 그러나 박수암(박지화)의 시 가운데,
경(벼슬)의 상징인 별이 높이 뜬 걸 문득 보노니 내 옷이 화려한들 누가 아까워하리
라는 절구야말로 정말 경계할 만한 명구다. 박수암이 미암(유희춘)을 애도하며 지은 시에
천추의 세월 푸른 바닷물 위에서 밝은 해처럼 큰 이름을 드리웠도다
라 한 것은 어찌 두보보다 못하다 하겠는가.
(용어) 박지화(1513
1592) —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수암. 유희춘(1513
1577)은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미암.
박수암이 청학동에서 노닐며 지은 시에,
고운(최치원)은 당나라의 진사였으니 애초에 신선술을 배운 것이 아니었네 만촉처럼 다투던 삼한(신라·고려·조선 이전 우리나라)의 시절 풍진은 온 세상에 가득 찼었구려 영웅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리오 참된 비결은 본디 전하지 않는 법 저 봉래산으로 한번 들어가 버린 뒤로 맑은 향기만 팔백 년을 남아 전하네
라 했으니, 깊고 굳세며 조촐하고 질박하여 사려 깊은 맛이 있으니, 두보와 진자앙의 진수를 깊이 얻은 작품이다.
(용어) "만촉"은 아주 작은 나라끼리 다투는 것을 비유하는 중국 옛이야기 속 두 나라 이름이다. 최치원이 만년에 가야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양사언과 이달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양봉래(양사언)가 금강산(풍악산)에서 놀 때 바위 위에 시를 새겼는데,
백옥경 봉래섬엔 아득한 안개 물결 예스럽고 따스한 바람과 볕은 좋기도 해라 푸른 복사꽃 아래 한가로이 오가며 학 등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에 천지는 늙어 가네
라 했으니 신선의 흥취가 있다. 같은 시대에 송경이라는 서얼 출신 문인이 있었는데, 그 역시 이 시에 이어 읊기를
학은 높이 날아오르고 봉황은 유유히 날아 삼신산 아래를 굽어보며 오색구름 사이를 가로질러 나네 천지는 세 자짜리 지팡이요 이 몸은 신선의 가벼운 옷 한 벌이라 바위 꼭대기 나무에 긴 칼을 걸어 두고 맑은 샘물 희롱하며 붉은 지초를 캐 먹노라
라 하니, 양사언은 극도의 찬사를 보냈고 세상을 떠난 우리 형님(허봉)도 기꺼이 칭찬하셨다.
(용어) 양사언(1517~1584) —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호는 봉래. 금강산을 즐겨 유람하며 이런 이름을 얻었다.
양봉래가 강릉 군수로 있을 때 익지(이달)를 손님으로 대우했는데, 이달은 행실이 검속되지 않아 고을 사람들의 비난을 샀다. 선친께서 편지를 보내 그를 변호하시며, "밤안개 속에 오동꽃 떨어지고, 바다 숲에 봄 구름 스러지네"라 읊었던 이달을 만약 소홀히 대한다면, 이는 위나라 진왕(조식)이 응양과 유정 같은 문인들을 처음 잃던 날과 다를 바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대접이 조금 허술해지자 이달은 시를 남기고 작별을 고했는데,
나그네가 떠나고 머무는 것은 주인이 눈썹을 까딱하는 데 달렸을 뿐 오늘 아침 반가운 낯빛을 잃었으니 머잖아 청산을 그리워하게 되리 노나라에서는 바닷새에 제사를 지냈고 남쪽 정벌 나가서는 율무만 싣고 돌아왔네 소진이 가을바람 만나 고향 그리워하듯 나는 또다시 목릉관을 나서는구나
라 하니, 양봉래는 크게 칭찬하고 아끼며 그를 처음처럼 다시 대접했다. 선배들이 벗 사이에 서로 바로잡아 주던 의리가 어떠했는지를 여기서 엿볼 수 있으며, 그 풍류 있는 뛰어난 재주 또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어) "바닷새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노나라 대부 장문중이 분수에 넘는 대접을 한 잘못을 가리키는 옛이야기다. "남쪽 정벌에서 율무만 싣고 돌아왔다"는 것은, 후한의 장수 마원이 남쪽 지방을 평정하고 돌아올 때 약재로 쓸 율무를 수레에 싣고 왔는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금은보화라고 모함했다는 옛이야기다. 둘 다 억울한 오해나 부당한 대접을 받는 상황을 비유하는 데 쓰인다. 소진은 전국시대의 유세가로, 타향을 떠돌다 가을바람에 고향을 그리워했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용어) 이달(1539~1618?) — 조선 중기의 시인. 서얼 출신이라 벼슬길이 막혔으나 시재가 뛰어나 최경창·백광훈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불렸다. 자는 익지, 호는 손곡. 허균과 허난설헌의 스승이기도 했다.
노수신과 최경창, 이달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소재 노(노수신) 정승이 어느 스님의 시첩에서 고죽(최경창)과 익지(이달)의 시를 보고 지은 시에
이 시대 제일가는 문장으로는 오직 이와 최를 일컫는다오
라 했는데, 대체로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우리 둘째 형(허봉) 또한 "이달의 시는 신라 이래로 당나라 시를 본받은 이들 가운데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일찍이 그의 시 중에서
중천의 생황 소리와 학은 가을 하늘에서 내려오고 천 년 전 신선 고운은 이미 아득한 옛일이 되었구나 밝은 달 아래 트인 문엔 흐르는 물이 놓였으니 어디쯤에 무릉교가 있는지 궁금하구나
라 한 작품을 칭송하며, 자신도 여기에 미치지 못하리라 여기셨다.
(용어) 노수신(1515~1590)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소재. 을사사화 여파로 오랜 유배 생활을 겪은 뒤 영의정까지 올랐다.
조지세(조위한)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지명은 시 속에 넣어도 우아한 맛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의
기운은 운몽택을 쪄서 올리고 파도는 악양성을 뒤흔든다네
와 같은 구절을 보면, 열 글자 가운데 여섯 글자가 지명이고 거기에 네 글자를 보탠 것일 뿐인데, 정작 공들인 곳은 '찐다'는 글자와 '뒤흔든다'는 글자 두 자뿐이다. 그러니 시를 짓는 일이 어찌 수월하지 않겠는가." 이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노 정승(노수신)의 시인
길은 평구역에서 다해 버리고 강물은 판사정에서 깊어지네
와
청파 마을 저녁엔 버들빛 짙고 백악산 봄날엔 하늘이 맑네
같은 구절 또한 대단히 훌륭하다. 이는 다만 글귀를 짓는 솜씨에 달린 문제일 뿐이니, 쇠로 금을 만든다 한들 무엇이 나쁘겠는가.
(용어) 조위한(1567~1649) —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자는 지세.
박순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박사암(박순)의 시에
은혜로운 물결에 오래 젖어 이 마음 부지런히 부려 왔건만 새벽닭 울자마자 조복부터 챙기는구나 강남의 시골집은 봄풀에 묻혀 가는데 도리어 산승에게 대숲이나 지키라 시키네
라 했으니, 아, 사대부라면 누군들 은퇴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한 치 녹봉에 끌려 고개를 숙이고 그 마음을 저버리는 자가 많을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 절로 탄식이 나오게 된다.
(용어) 박순(1523~1589)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사암. 영의정을 지냈다.
노소재(노수신)와 황지천(황정욱)은 근래의 대가로서 둘 다 근체시(율시와 절구)에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 노수신의 오언율시와 황정욱의 칠언율시는 모두 천 년 이래의 빼어난 가락이다. 그러나 긴 시에서는 이만 못하니 그 까닭은 알 수 없다.
(용어) 황정욱(1532~1607)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지천.
양경우가 일찍이 나에게 "우리나라에서는 칠언고시를 누가 가장 잘 짓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래서 "글쎄, 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니, 양경우가 박씨와 이씨 가운데 누가 앞서는지 차례로 물어 왔다. 내가 대답하기를 "둘 다 한퇴지에게서 나왔으되, 한 사람은 지나치게 억세고 한 사람은 지나치게 번거로우니, 그것이 최고의 경지는 아니오" 했다. 그러자 눌재(박상)의 〈진양형제도〉와 충암(김정)의 〈우도가〉는 어떠냐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진양형제도〉는 웅장하나 막힌 데가 있고, 〈우도가〉는 기이하나 어둡다" 했다. 그렇다면 결국 누구에게 돌아가겠느냐 물어서, "어잠부(어무적)의 〈유민탄〉과 이익지(이달)의 〈만랑무가〉일 것이오" 하고, 이어서 "시로 본다면 뛰어난 재주가 그대들 가운데서 많이 나왔소" 하니, 양경우도 크게 웃었다.
(용어) 양경우(1568~1638) —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한퇴지(한유)는 당나라의 대문장가. 어무적은 조선 중기의 서얼 출신 시인으로, 백성의 고통을 노래한 〈유민탄〉으로 유명하다. 자는 잠부.
선친께서는 자제들이 화순 지방에 있었던 까닭에 진사 김윤과 서로 사귀며 매양 그의 시를 칭찬하셨다. 병마절도사가 일찍이 진남루를 세우고 김윤을 맞아들여 긴 시를 지어 쓰게 했는데, 술에 취한 채 단숨에 붓을 휘둘러 육십 구를 지었다. 그 첫 구에
만 근 무게의 무지개 들보는 붉은 새 조각을 짓누르고 용 새겨진 처마엔 공손랑의 검무가 펼쳐지는 듯
이라 했으니, 참으로 굉장한 걸작이다. 일찍이 물길로 가다가 배가 부서져 겨우 기슭에 닿았을 때, 정자에 올라 지은 시에
의관은 모두 거센 물결에 휩쓸려 잃었지만 몸뚱이는 부모님께서 주신 그대로 남았구나 높은 정자에 다시 올라 갠 경치를 바라보니 가을 산 맑고 푸르러 새 시에 들어오는구나
라 했으니, 높은 흥취가 대단하다. 그는 예순 살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생원시에 합격해 유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용어) "유일"이란 벼슬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던 인재를 조정에서 특별히 추천해 등용하는 제도를 가리킨다.
내가 수안(지금의 황해도 수안군)에 부임하는 날, 황지천(황정욱)이 시를 지어 전송하며
시재는 우뚝하여 동료들 가운데 뛰어나건만 벼슬 복은 어그러져 분수 밖에 기구하구나 이 모두 인생에는 저마다 정해진 운명이 있으니 유유한 나머지 일은 미뤄 두고 지나갈밖에
라 했으니, 자못 감개가 깊다. 공이 젊어서 홍문관에 있을 때, 이백생(이순인)·최가운(최경창)·하대이(하응림) 같은 이들이 함께 당나라 시의 운치를 숭상하여 대궐 안의 어린 복사나무를 두고 읊은 작품이 꽤 많았는데, 공이 여기에 화답하여
무수한 궁중 꽃은 흰 담장에 기대었는데 벌과 나비는 노닐며 남은 향기를 좇아가네 늙은이는 봄바람도 채 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해를 향하는 해바라기 마음뿐이로세
라 했다. 함축된 뜻이 깊고 조사가 기이하고 굳세니, 시를 짓는다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부드럽고 고운 것, 바람이니 꽃이니 하는 것만 읊은 시는 오히려 그 중후한 맛을 해치는 것이다.
(용어) 이순인(1533
1592)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백생. 하응림(1536
1567)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대이.
박순을 애도하는 시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사암(박순) 정승이 세상을 떠나자 애도시가 거의 수백 편이나 되었는데, 오직 성우계(성혼)의 절구 한 수가 절창이었다. 그 시에
세상 밖 구름 산은 깊고 또 깊으니 시냇가 초가집은 이미 찾기 어려워라 배견와 위에 뜬 삼경의 저 달빛은 아마도 선생의 한 조각 마음을 비추리라
라 했는데, 무한한 슬픔이 말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으니, 서로 속 깊이 알던 사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용어) 성혼(1535~1598) —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우계. 배견와는 박순이 만년에 지내던 별장 이름.
이산해와 고경명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근래의 관각시(조정에서 짓는 격식 있는 시)로는 이아계(이산해)가 으뜸이다. 그의 시는 초년부터 당나라 시를 본받았으며, 늘그막에 평해로 귀양 가서야 비로소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고제봉(고경명)의 시 역시 벼슬을 내려놓고 한가로이 지내는 가운데 크게 나아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로써 문장이란 부귀영화에 달린 것이 아니라, 험난한 고초를 겪고 강산의 도움을 받은 뒤에야 오묘한 경지에 들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찌 이 두 사람뿐이겠는가. 옛사람들이 모두 그러했으니, 유주로 좌천되었던 유자후(유종원)나 영남 밖으로 귀양 갔던 소동파에게서도 이를 볼 수 있다.
(용어) 이산해(1539
1609)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아계. 영의정을 지냈다. 고경명(1533
1592) —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순절했다. 호는 제봉. 유종원(773~819)은 당나라의 문장가로, 자는 자후.
최고죽(최경창)의 시는 굳세고 힘차며, 백옥봉(백광훈)의 시는 메마른 듯 담백하다. 둘 다 당나라 시의 길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천 년에 드문 가락이다. 이익지(이달)는 이 둘보다 조금 더 크다. 그래서 최경창과 백광훈을 함께 묶어야 비로소 그 나름의 대가를 이룬다고 할 만하다.
고죽의 시는 편마다 다 아름다운데, 이는 반드시 갈고닦아 마음에 걸림이 없어진 뒤에야 세상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최경창, 백광훈)의 시 가운데 내가 골라 《국조시산》에 넣은 것이 각기 수십 편인데, 그 시들은 음절이 정통의 소리에 잘 들어맞지만, 나머지 시들은 남을 따라가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용어) 《국조시산》 — 허균이 직접 편찬한 조선 시대 시선집.
나는 일찍이 고죽의 오언 고시와 율시, 세상을 떠난 형님(허봉)의 노래체 시, 소재 정승(노수신)의 오언율시, 황지천(황정욱)의 칠언율시, 이손곡(이달)과 백옥봉(백광훈) 그리고 세상을 떠난 누님(허난설헌)의 칠언절구를 모아 한 질의 책으로 엮어 읽어 보았다. 그 음절과 격률이 모두 옛사람에 가까웠으나, 한스러운 것은 기운이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아, 누가 그 본래의 소리를 다시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이춘영과 권필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요즘에는 이실지(이춘영)가 시문에 능하다. 그의 시는 다소 번잡한 듯하지만 기운만큼은 나름대로 크고 힘차서 작가라 부를 만하다. 그러나 권여장(권필)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다. 이실지는 안목이 높아 당대 사람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오직 나와 여장(권필)·자민(이안눌)만은 괜찮다고 여겼다. 그는 "허균은 허세가 있고, 권필은 메마르며, 이안눌은 융통성이 없다"고 했는데, 이 또한 지당한 평이라 할 만하다.
(용어) 이춘영(1563
1606) —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자는 실지. 권필(1569
1612)은 조선 중기의 시인, 호는 석주. 허균과 가까웠으며 허난설헌의 시 스승이기도 했다.
이실지는 세상을 떠난 우리 형님의 글을 칭찬하며 "문장을 깊이 아는 이는 허미숙(허봉)이다" 했다. 그래서 내가 "후배 가운데 누가 형님의 뒤를 이을 만합니까" 하고 물으니, "신현옹(신흠)이 그럴 만하니, 맑고 청량함은 미치지 못해도 농후함은 오히려 그를 뛰어넘는다고 봅니다" 하고 대답했다.
(용어) 신흠(1566~1628) — 조선 중기의 문신·문장가, 호는 현옹.
정송강(정철)은 우리말 노래를 잘 지었으니, 〈사미인곡〉과 〈권주사〉는 모두 곡조가 맑고 씩씩하여 들을 만하다. 비록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은 이를 배척해 음란하고 사특하다고 하지만, 그 문채와 풍류만큼은 가릴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를 아까워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여장(권필)이 그의 묘를 지나며 지은 시에
빈 산에 나뭇잎 우수수 떨어지니 정승의 풍류가 이곳에 묻혀 적막하구나 서글퍼라 한 잔 술 다시 권하기 어려우니 지난날의 노랫가락은 오늘을 두고 지은 것이었네
라 했다. 자민(이안눌)이 〈강 위에서 노래를 듣고〉라는 시에
강가에서 누가 저리 미인사(사미인곡)를 부르는가 때마침 강가에 달이 지는 시각이라 서글퍼라 임 그리는 그지없는 마음을 세상엔 오직 저 여인만이 알고 있구나
라 했는데, 두 시 모두 정송강의 가사에서 비롯되어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민(이안눌)의 시가 둔해서 잘 드날리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그가 함흥에 있을 때 지은 시에
비 개자 관가의 버들은 푸르게 늘어지니 객지에서 처음 맞은 삼월 삼짇날이로세 다 함께 고향 떠나 돌아가지 못한 신세 가인이여, 망강남의 노래는 부르지 마오
라 했는데, 맑고 산뜻하며 유려하니 중국 시인들과 견주어도 그 차이가 얼마나 크다 하겠는가.
(용어) 이안눌(1571~1637) — 조선 중기의 문신·시인, 자는 자민.
둘째 형이 논평한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둘째 형(허봉)은 고제봉(고경명)에게 깊이 감복하며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양에서 함께 있을 때 어떤 이가 '교' 자로 운을 내니, 고경명 공이 이에 화답하여
이어진 마을마다 벼와 기장은 삼추가 지나 무르익고 한 고을의 서리 바람은 시월에 접어드는구나
라 하기에, 나도 모르게 감복하고 말았다."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참판 유영길의 시는 비록 시의 경지가 좁지만 좋은 곳이 있으니, 이를테면
거문고와 비단옷은 세월을 서둘러 녹이고 금 병풍 속에서는 웃음 사기도 더디구려 발에 비친 석류꽃은 곱기도 하고 연못으로 통하는 들물은 맑기도 하네
같은 구절은 밝고 굳세어 즐길 만하다."
(용어) 유영길(1538~1601) — 조선 중기의 문신.
윤 사문 면(윤면)이 임금의 명을 받들고 호남으로 가던 길에 어느 산을 지나는데, 산속에 초가집 한 채가 있고 한 늙은이가 나무 아래에서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어 펴 보려 하니, 늙은이가 다가와 빼앗으며 "변변찮은 작품이라 남에게 보여 줄 수가 없소" 했다. 그래서 겨우 첫머리에 쓰인, 얼레빗을 읊은 시만 보았는데 이러했다.
얼레빗으로 빗질하고 참빗으로 다시 빗질하니 천 번을 쓸어내려 이는 벌써 다 없어졌네 어찌하면 만 길이나 되는 큰 빗을 얻어다가 백성들 몸에 붙은 물것을 남김없이 쓸어낼까
이름을 물었으나 대답 없이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 어떤 이는 전주 진사 유호인이라고도 말한다.
(용어) 윤면 —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 인물이다. "물것"은 몸에 붙어 피를 빨아먹는 이나 벼룩 같은 벌레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를 빗댄 표현으로 읽힌다.
임제와 신제이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임자순(임제)은 시로 이름이 있었는데, 우리 두 형은 늘 그를 추어올리며 인정해 주었다. 그의 "삭풍 부는 눈이 변방 길에 휘몰아치네"라는 시 한 편은 당나라 전성기 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하셨다. 일찍이 그에게 들은 이야기로, 어느 절에 갔더니 승려의 시첩에
동화문에서 밥을 빌던 옛날의 학관이라 분산이 좋아 노닐 만하다 하지만 십 년이나 그리던 꿈은 비로봉을 감도니 베갯머리 솔바람 소리 밤마다 서늘하네
라는 시가 있었는데, 말이 매우 맑고 깨끗했으나 이름이 빠져 있어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세상에는 참으로 버려진 인재가 있어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법이다.
(용어) 임제(1549~1587) —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자는 자순. 얽매이지 않는 호방한 기질로 유명했다.
둘째 형이 임금의 명을 받들고 북방에 나가 압호정에 올라
백성들 사는 초라한 집엔 해묵은 병이 들고 파란 벼는 하룻밤 서리에 다 망쳐졌네
라 읊었는데, 임자순(임제)은 이를 극찬하며 "백성의 집과 파란 벼, 열 글자로 쓴 시로 남을 역사로다"라는 시를 지어 주었다. 형도 임자순의
오랑캐가 일찍이 스무 고을을 엿볼 적엔 장군은 말을 몰아 제후에 봉해질 공을 세웠는데 지금은 변방 요새에 전쟁이 없으니 장사는 옛 역루에서 한가로이 잠을 자네
라는 시를 칭찬하며 협기가 펄펄 뛴다고 하셨다.
형이 풍산 역에서 벽에 쓰인 시 한 수를 보았는데
세상엔 뛰어난 인재 알아줄 이 없는데 누굴 위해 황금으로 높은 대를 쌓았던가 변방 서리는 검푸른 귀밑머리를 다 물들이니 필마로 음산 땅을 열 번이나 오가는구나
라 했다. 말의 기운이 강개하고 매우 훌륭하여 역졸에게 누구의 작품인지 물었더니, 병영의 군관 손만호가 지은 것이라 했다 한다.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 유월 스무여드레는 명종의 기일이었다. 신제이(신노)가 곡구역에서 시를 썼는데,
선왕께서 이날 뭇 신하를 버리고 떠나실 적 남기신 유언은 은근히 성인께 부탁하셨네 스물여섯 해 만에 그 향불도 끊어지니 소리쳐 우는 이는 늙은 백성뿐이로세
라 하니, 보는 이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용어) 신노 — 자는 제이. 1592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이옥봉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나의 누님 난설헌과 같은 시기에 이옥봉이라는 여인 시인이 있었는데, 바로 조백옥(조원)의 첩이다. 그녀의 시 역시 맑고 씩씩하여 여인 특유의 꾸밈이 없다. 영월로 가는 길에 지은 시에
닷새는 장간에서, 사흘은 영월에서 노릉의 구름 아래 슬픈 노래에 목이 메네 첩의 몸도 이 또한 왕손의 딸이거늘 이곳의 두견 소리는 차마 듣지 못할레라
라 했으니, 품은 생각이 애처롭고 원한을 띠어, 이익지(이달)의
동풍에 촉나라 임금의 넋은 괴로워하고 석양에 노릉은 싸늘하기만 하네
라는 구절과 한가지로 쓰라린 가락이다.
(용어) 이옥봉 — 조선 중기의 여성 시인, 조원의 소실이었다. "노릉"은 단종이 묻힌 영월의 능(장릉의 옛 이름)을 가리키며, 왕위에서 쫓겨나 어린 나이에 죽은 단종을 애도하는 뜻이 시에 깔려 있다.
전우치와 정백련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도사 전우치는 세상 사람들 말로는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데, 그의 시는 매우 맑고 초탈하다. 일찍이 삼일포에서 지은 시에
늦가을 맑은 못에 서리 기운 해맑은데 공중의 퉁소 소리 바람 타고 내려오네 푸른 난새는 오지 않고 하늘 바다는 아득한데 서른여섯 봉우리에 밝은 달만 환하구나
라 했으니, 읽고 있으면 마음이 상쾌해진다.
(용어) 전우치 — 조선 중기에 활동한 것으로 전하는 도사·문인. 소설 〈전우치전〉의 실존 모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젊었을 때 정백련이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병들어 귀신을 만났다고 했는데, 절구도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그의 시 중 가장 좋은 것으로
봄잠 자고 나서 술을 따르니 발을 걷은 앞으로 꽃잎이 날리네 인생이란 것이 얼마나 되는가 비 내리는 하늘을 슬피 바라보노라
와 또
만 리 밖 거센 파도에 바다 해는 저무는데 벽도화 그림자는 하늘 문에 비치네 난새 수레 한 번 떠난 뒤로 천 년이나 고요터니 후령의 신비로운 퉁소 소리 한밤중에 들리네
가 있는데, 그 음운이 맑고 그윽하여 사람의 소리 같지 않았다.
(용어) 정백련 — 병중에 귀신을 만나 시를 지었다는 신이한 일화로만 전하는 인물이다.
부안의 계생과 신분 낮은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부안의 기생 계생(매창)은 시에 솜씨가 있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뛰어났다. 어떤 고을 태수가 그녀와 가깝게 지냈는데, 훗날 그 태수가 떠난 뒤 고을 사람들이 그를 기려 비석을 세웠다. 계생이 달밤에 그 비석 위에서 거문고를 타며 하소연하듯 길게 노래를 불렀다. 이원형이라는 이가 지나다가 이를 보고 시를 지었는데,
한 가락 거문고는 자고새를 원망하는데 묵은 비석은 말이 없고 달만 덩실 외롭구나 현산에서 그날 양호의 비석에도 눈물 떨구던 가인이 있었던가
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절창이라 했다. 이원형은 우리 집에 드나들던 문객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와 이여인(허균의 벗으로 추정)과 함께 지낸 까닭에 시를 지을 줄 알았고, 다른 작품에도 좋은 것이 있으며 석주(권필)가 그를 좋아하고 칭찬했다.
(용어) 계생(1573~1610) — 부안의 기생 시인, 호는 매창. 이달의 제자였으며 유희경과의 사랑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현산의 양호 비석" 이야기는, 중국 진나라의 명신 양호가 백성을 잘 다스려 그가 떠난 뒤 백성들이 세운 비석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그리워 눈물을 흘렸다는 옛이야기에서 왔다.
유희경이라는 이는 신분이 천한 노비였다. 사람됨이 맑고 신중하며 진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니 사대부 가운데 그를 아끼는 이가 많았고, 시에도 능해 매우 원숙했다. 젊었을 때 갈천 임훈을 따라 광주에 있으면서 석천(임억령)의 별장에 올라, 그 누각에 앞사람이 써 놓은 '성' 자 운을 따라 시를 지었는데
댓잎은 아침에 이슬을 따르고 솔가지엔 새벽에 별이 걸렸네
라 하니, 양송천(양응정)이 이를 보고 극찬했다.
(용어) 유희경(1545~1636) — 조선 중기의 천민 출신 시인. 기생 매창과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하며, 임진왜란 뒤 공을 인정받아 면천되었다.
백대붕이라는 이도 시에 능했다. 일찍이 궁궐 문지기를 했는데, 같은 처지의 동료들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의 시는 당나라 맹교와 가도를 배워 메마르고 담백하며 여렸다. 그래서 권여장(권필)은 늦은 당나라 시풍을 배우는 사람을 볼 때마다 반드시 "문지기 시체"라 불렀으니, 대개 그 여림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용어) 백대붕 — 조선 중기의 천민 출신 시인, 유희경과 함께 "풍월향도"라는 위항 시인 모임을 이끌었다. 맹교와 가도는 당나라의 시인으로, 고심하며 메마르고 처절한 시풍을 구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의 승려 가운데 시에 능한 이는 매우 드문데, 오직 참료가 으뜸이다. 그가 어떤 사람에게 준 시에
물 따라 구름 따라 떠도는 발자취 이미 여러 해 서로 뜻이 맞아 이런 인연을 맺은 것이 기쁘구나 종일토록 나그네 방엔 봄날이 적막한데 지는 꽃은 눈처럼 비 갠 하늘에 날리네
라 하니, 빼어나고 맑은 맛이 있다.
(용어) 참료 — 조선 중기에 활동한 승려 시인으로 전한다.
이상으로 성수시화를 마친다. 신라 말부터 허균 당대에 이르기까지 약 팔백 년 동안 이 땅에서 나온 시인들을 두루 살피며, 왕족과 고관대작에서부터 서얼과 여성, 천민과 승려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시의 좋고 나쁨만으로 평가한 것이 이 글의 특징이다. 허균 자신의 집안 사람들(아버지 허엽, 둘째 형 허봉, 누이 허난설헌)에 대한 자부심과, 신분이나 지위와 상관없이 뛰어난 시를 알아보려 한 그의 안목이 책 전체에 걸쳐 뚜렷이 드러난다.
c성소부부고 제26권
베오81 2026. 9. 10. 15:51
성소부부고 제26권 · 설부 5 · 도문대작 (서기 1611년 6월 1일, 양력)
출처: 성소부부고 제26권, 설부 다섯 번째 갈래, 도문대작
배경: 제26권은 성소부부고의 마지막 권으로, 설부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갈래다. 여기에는 허균이 귀양지에서 지은 음식 수필 "도문대작"(뜻: 푸줏간 앞을 지나며 입맛을 다신다)과 그 서문, 그리고 부록으로 시화집 "학산초담", 광해군 때 올린 상소 두 편, 세 편의 서문이 함께 실려 있다. 이 파일은 그 가운데 도문대작 서문과 본문을 옮긴 것이다. 팔도 각지의 명물 음식을 떡·과일·고기·수산물·채소·기타로 나누어 적은 일종의 음식 백과로, 유배지에서 굶주리며 지난날 누렸던 진미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짙게 배어 있다.
도문대작을 지으며 (서기 1611년 6월 1일, 양력)
우리 집은 가난한 편이었지만, 선친이 살아 계실 때는 사방에서 나는 별미를 예물로 바치는 사람이 많아 나는 어릴 때부터 온갖 귀한 음식을 고루 맛볼 수 있었다. 자라서는 부유한 집안에 장가들어 산과 바다에서 나는 진귀한 음식을 다 맛보았다.
임진왜란 때는 병화를 피해 북쪽으로 갔다가 강릉으로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진기한 해산물을 두루 맛보았다. 벼슬길에 나선 뒤로는 남으로 북으로 옮겨 다니며 우리나라에서 나는 별미를 죄다 먹어 볼 수 있었다.
먹는 것과 색을 밝히는 것은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다. 더구나 먹는 것은 목숨과 관계된 일이다. 옛 선현들이 음식 바치는 자를 천하게 여긴 것은, 그저 먹는 것만 탐내어 제 잇속을 차리는 자를 가리켜 한 말이지, 어찌 먹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뜻이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예기》에 여덟 가지 진미를 적어 놓았으며, 맹자는 어찌하여 생선과 곰 발바닥 중 하나를 고르는 이야기를 했겠는가.
내가 일찍이 진나라 하증이 지었다는 《식경》과 당나라 위거원이 지었다는 《식단》을 본 적이 있는데, 두 사람 모두 천하의 진미를 빠짐없이 적어 그 가짓수가 만에 이를 만큼 많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저 그럴듯한 이름만 늘어놓아 눈만 어지럽히는 데 지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외진 곳에 있지만 바다로 둘러싸이고 높은 산이 솟아 있어 물산이 풍부하다. 만일 하증과 위거원 두 사람의 예를 따라 이름을 바꾸어 가며 하나하나 구분해 본다면, 우리나라의 물산도 아마 만 가지는 될 것이다.
내가 죄를 지어 바닷가로 귀양 갔을 때는 쌀겨조차 넉넉지 못해 밥상에 오르는 것이라고는 상한 생선이나 감자, 들미나리 따위뿐이었고, 그마저도 끼니마다 먹지 못해 굶주린 배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럴 때면 언제나 지난날 산해진미도 물리도록 먹어 싫증 내던 시절을 떠올리며 침을 삼켰다. 다시 한번 먹어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하늘나라 서왕모의 복숭아처럼 아득히 먼 일이었으니, 천도복숭아를 훔쳐 먹었다는 동방삭이 아닌 바에야 내가 어떻게 그걸 훔쳐 먹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종류별로 나열하여 적어 놓고 이따금 들여다보며 한 점 고기라도 되는 듯 여기기로 했다. 다 쓰고 나서 이 글에 "도문대작", 곧 "푸줏간 앞을 지나며 입맛을 다신다"는 이름을 붙였다. 먹는 것에 지나치게 사치를 부리며 절제할 줄 모르는 세상의 잘나가는 자들에게, 부귀와 영화란 이처럼 덧없을 뿐임을 일깨우고자 함이다.
1611년(광해군 3년) 4월 21일, 성성거사는 쓴다.
(용어) 팔진미는 《예기》에 나오는 여덟 가지 귀한 음식으로, 늙은 부모를 봉양할 때 올리던 것이다. 맹자가 생선과 곰 발바닥 중 하나를 고른다는 말은,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을 때는 더 귀한 쪽을 택한다는 비유다. 하증은 중국 진나라 사람으로 사치스러운 생활로 유명했으며, 한 끼 식사에 어마어마한 돈을 쓰고도 늘 먹을 것이 마땅찮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위거원은 당나라 측천무후 때 재상을 지낸 인물이다. 서왕모는 하늘나라에 살며 삼천 년에 한 번 열리는 신비한 복숭아를 지녔다는 여신이고, 동방삭은 그 복숭아를 훔쳐 먹어 오래 살았다는 전설 속 인물이다. 성성거사는 허균이 스스로 붙인 호다.
도문대작 (서기 1611년 6월 1일, 양력)
떡 종류 (서기 1611년 6월 1일, 양력 추정)
방풍죽 나의 외가는 강릉이다. 그곳에는 방풍이 많이 난다. 이월이 되면 강릉 사람들은 해가 뜨기 전에 이슬을 맞으며 갓 돋아난 싹을 딴다. 곱게 찧은 쌀로 죽을 끓이다가 반쯤 익었을 때 방풍 싹을 넣는다. 다 끓으면 차가운 사기그릇에 담아 따뜻할 때 먹는데, 달콤한 향이 입안에 가득해 사흘이 지나도 가시지 않는다. 세간에서는 참으로 으뜸가는 진미로 친다. 나는 훗날 수안(옛 이름 요산)에 있을 때 시험 삼아 한번 끓여 먹어 보았지만 강릉에서 먹던 맛에는 어림도 없었다.
석이떡 내가 금강산 구경을 갔을 때 표훈사에서 묵은 적이 있는데, 그 절 주지가 저녁상을 차려 왔다. 상에 오른 떡 한 그릇은 귀리를 빻아 여러 번 체로 쳐서 곱게 만든 다음 꿀물을 넣고 석이버섯과 반죽하여 놋쇠시루에 찐 것이었다. 맛이 매우 좋아 찹쌀떡이나 감떡보다도 훨씬 나았다.
백산자 속칭 박산이라 하는데, 전주 지방에서만 만든다.
다식 안동 사람들이 만든 것이 맛이 매우 좋다.
밤다식 밀양과 상주 사람들만 잘 만드는데, 다른 고을에서 만든 것은 매워서 먹을 수가 없다.
차수 여주 사람들이 아주 잘 만든다. 희고 부드러워 맛이 매우 달고 연하다.
엿 개성에서 만든 것이 으뜸이고 전주 것이 그다음이다. 근래에는 서울 송침교 부근에서도 잘 만든다.
큰 만두 의주 사람들이 중국 사람처럼 잘 만든다. 그 밖의 곳에서 만든 것은 모두 별로 좋지 않다.
두부 장의문 밖 사람들이 잘 만든다. 말할 수 없이 부드럽다.
곰기름 정과 회양 것이 가장 좋고 다른 곳 것은 모두 이만 못하다.
들쭉죽 갑산과 북청에서만 나는데 맛은 정과와 같다. 이 뒤에 나오는 포도 이하 과일들은 모두 이 들쭉죽만 못하다.
이상은 떡 종류다.
과일 종류 (서기 1611년 6월 1일, 양력 추정)
하늘배 성종 임금 때 강릉에 살던 진사 김영의 집에 갑자기 배나무 한 그루가 돋아났는데 열매가 사발만 했다. 지금은 여러 곳에 퍼졌는데 맛이 달고 연하다.
금색배 정선군에 많다.
검은배 평안도 산골 고을에 있다. 검푸른 빛인데 물이 많고 꿀맛이 난다.
붉은배 석왕사에서 난다. 붉고 큰데 맛이 산뜻하다.
대숙배 속칭 부리라고도 한다. 산중에 많은데 곡산과 이천 것이 매우 크고 맛도 으뜸이다.
금귤 제주에서 나는데 맛이 시다.
감귤 제주에서 나는데 금귤보다 조금 크고 달다.
청귤 제주에서 나는데 껍질이 푸르고 달다.
유감 제주에서 나는데 감자(귤의 일종)보다는 작지만 매우 달다.
감자 제주에서 난다.
유자 제주와 경상도·전라도 남쪽 해변에서 난다.
석류 영암과 함평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고 그 밖에는 이만 못하다.
일찍 붉어지는 감 온양에서 나는 것이 붉고 달고 물기가 많다. 그 밖에는 모두 이만 못하다.
각시감 남양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먹감 지리산에서 난다. 검푸른 빛에 둥글고 끝이 뾰족하다. 맛은 그런대로 좋으나 물기가 적다. 꼬챙이에 꿰어 말려 곶감으로 만들어 먹으면 더욱 좋다.
밤 상주에서 나는 밤은 작은데 껍질이 저절로 벗겨져 속칭 겉밤이라 한다. 그다음은 밀양에서 나는 밤이 크고 맛이 가장 좋으며, 지리산에서도 주먹만 한 큰 밤이 난다고 한다.
죽실(대나무 열매) 지리산에서 많이 난다. 내가 부안(옛 이름 낭주)에 있을 때 노스님 선수가 제자들을 시켜 보내온 적이 있는데, 감과 밤가루를 섞어 만든 것이었다. 몇 숟갈 먹었는데 온종일 든든했다. 참으로 신선이 먹는 음식이다.
대추 보은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크고 씨가 작으며 붉고 물기가 많아 달다. 그 밖에는 모두 이만 못하다.
앵두 저자도에서 나는 것이 작은 밤만큼 크고 맛이 달다. 흰 앵두는 영동 지방에서 많이 나는데 맛은 붉은 앵두만 못하다.
살구 서울 서쪽 교외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자두 삼척과 울진에서 많이 나는데 주먹만큼 크고 물기가 많다.
황도 춘천과 홍천에서 많이 난다.
오얏 서울에서 많이 나는데 서쪽 교외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자줏빛·누런빛 오얏은 모두 작아 지방에서 나는 것보다 못하다.
반도(납작복숭아) 금천과 과천 두 곳에서 많이 났었는데 지금은 없다. 내가 어렸을 때 친척이 안양에 살아서 냇가에 많이 심어 놓고 따서 보내 주곤 했다. 맛이 매우 좋았는데 지금은 얻을 수가 없어 안타깝다.
승도(털 없는 복숭아) 전주 부근에서는 어디서나 난다. 크고 달다.
포도 마유포도는 드물고, 신천에 사는 윤대련의 집에 한 그루가 있는데 맛이 매우 좋아 중국산에 뒤지지 않는다.
수박 고려 때 홍다구가 처음 개성에 심었다. 연대를 따져 보면 아마 홍호가 강남에서 들여온 것보다 먼저였을 것이다. 충주에서 나는 것이 으뜸인데 동아처럼 생긴 것이 좋다. 원주 것이 그다음이다.
참외 의주에서 나는 것이 좋다. 작으면서도 씨가 작은데 매우 달다.
모과 예천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맛이 배 같고 물기가 있다.
달복분자 갑산부에서만 나는데 맛이 앵두 같아 매우 달고 향기롭다.
이상은 과일 종류다.
(용어) 홍다구는 고려 후기 원나라 편에 서서 활동한 인물이고, 홍호는 남송에서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던 인물로 중국 강남 지방의 수박 재배와 관련해 거론된다.
새와 짐승 고기 종류 (서기 1611년 6월 1일, 양력 추정)
곰 발바닥 산골에는 어디에나 있다. 요리를 잘하지 않으면 제맛이 나지 않는다. 회양의 요리가 가장 좋고 의주·희천이 그다음이다.
표범 새끼 태 양양에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하나 있어 맛이 매우 좋다. 다른 곳에서 만든 것은 불결해서 먹을 수가 없다.
사슴 혀 회양 사람들이 요리한 것이 매우 맛있다.
사슴 꼬리 부안에서 그늘에 말린 것이 가장 좋고 제주도 것이 그다음이다.
기름진 꿩 황해도 산골에서 나는데 양덕과 맹산 것이 가장 좋다.
거위 의주 사람들이 잘 굽는다. 중국 요리 솜씨와 같다.
대체로 이 지방 어디서나 나는 돼지·노루·꿩·닭 등은 굳이 번거롭게 다 적을 필요가 없다. 다만 특산물이거나 요리 솜씨가 특별한 경우만 골라 적었다.
이상은 새와 짐승 고기 종류다.
물고기와 바다 음식 종류 (서기 1611년 6월 1일, 양력 추정)
숭어 서해 어디에나 있지만 한강 것이 가장 좋다. 나주에서 잡은 것은 매우 크고, 평양에서 잡아 얼린 것도 맛이 좋다.
붕어 어디에나 있지만 강릉 경포가 바닷물과 통해 흙냄새가 안 나서 가장 맛있다.
웅어(준치) 한강 것이 가장 좋다. 호남에서는 이월이면 잡히고 관서 지방에서는 오월에야 잡히는데 모두 맛이 좋다.
뱅어 얼음이 얼었을 때 한강에서 잡은 것이 가장 좋다. 임한·임피 지방에서는 정월과 이월에 잡는데 국수처럼 희고 가늘어 맛이 매우 좋다.
노란 조기 서해 어디에나 있는데 아산 것이 가장 좋아 삶으면 비린내가 안 난다.
오징어 서해 일부 지방에서만 잡히는데 흥덕과 부안에서 잡히는 것이 가장 좋다.
해양 인천과 남양 등지에서 잡힌다. 소 지라 맛과 비슷한데 두 지방 사람들이 요리를 잘한다.
죽합(대합조개) 경기와 해서 지방에서 많이 난다.
소라 서해에서 많이 나는데 옹진 것이 가장 좋다.
청어 네 종류가 있다. 북쪽 지방 것은 크고 배가 희며, 경상도 것은 등이 검고 배가 붉다. 호남 것은 조금 작고, 해주에서는 이월에 잡히는데 매우 맛이 좋다. 옛날에는 매우 흔했지만 고려 말에는 쌀 한 되에 마흔 마리밖에 주지 않았으므로, 목은 이색이 이를 한탄하는 시를 지었다. 난리가 나고 나라가 황폐해져 온갖 물건이 부족해진 탓에 청어마저 귀해진 것을 한탄한 것이다. 명종 임금 이전만 해도 쌀 한 말에 쉰 마리였는데 지금은 아예 잡히지 않으니 괴이한 일이다.
큰전복 제주에서 나는 것이 가장 크다. 맛은 작은 것만 못하지만 중국 사람들이 매우 귀히 여긴다.
꽃전복 경상북도 해안 사람들은 전복을 따서 꽃 모양으로 썰어 상을 장식하는데 이를 화복이라 한다. 또 큰 것은 얇게 썰어 만두를 빚는데 이 역시 좋다.
홍합 중국인들은 "동해부인"이라 부른다. 동해와 남해에 모두 있는데 남해 것이 조금 크다. 또 해삼도 있는데 옛날에는 "이"라 불렀다. 중국인들이 좋아한다.
은어(은구어) 영남에서 나는 것은 크고 강원도에서 나는 것은 작다. 해주에도 있다.
여항어 산골 어디에나 있는데 강릉 것이 가장 크고 맛도 좋다.
금린어(쏘가리) 산골 어디에나 있는데 양근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원래 이름은 "천자어"였는데 명나라 사신 동규봉이 먹고 맛이 좋다며 이름을 묻자 통역관이 얼떨결에 "금린어"라 하였고, 모두 좋다고 하여 그대로 금린어가 되었다.
누치 산골 어디에나 있는데 평안도 강변 것이 가장 크다.
궐어 서울 동쪽과 서쪽에서 많이 나는데 속칭 염만어라 한다.
복어 한강 것이 맛이 좋은데 독이 있어 사람이 많이 죽는다. 영동 지방 것은 맛이 조금 떨어지지만 독은 없다.
방어 동해에서 많이 나지만 독이 있어 임금께는 올리지 않는다.
연어 동해에서 나는데 알젓이 좋다.
송어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많이 나는데 바다에서 잡은 것은 좋지 않다. 알은 연어만 못하다.
황어 이월에 동해에서 난다.
가자미 동해에서 많이 난다. 옛날에 "비목어"라 부르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광어 동해에서 많이 나는데 가을에 말린 것이 끈적이지 않아 좋다.
대구 동해·남해·서해에서 모두 나는데 북쪽 것이 가장 크고 누런빛에 두껍다. 동해 것은 붉고 작은데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한다. 서해 것은 더욱 작다.
문어 동해에서 난다. 중국인들이 좋아한다.
정어 강문에서 나는데 곧 작은 숭어다.
은어(도로목) 동해에서 난다. 원래 이름은 "목어"였는데 고려 때 어떤 임금이 좋아하여 "은어"로 고쳤다가, 많이 먹어 싫증이 나자 다시 "목어"로 고쳤다 하여 "환목어(도로목)"라 부른다.
고등어 동해에서 나는데 내장으로 젓을 담근 것이 가장 좋다. 또 "미어"라는 작은 물고기가 있는데 가늘고 짧지만 기름져서 먹을 만하다.
제곡 자줏빛 껍질의 작은 조개다. 경포에 있는데 흉년에 이것을 먹으면 굶주림을 면할 수 있어 곡식과 같다는 뜻에서 "제곡"이라 한다.
살조개 북청과 홍원에서 많이 난다. 크고 살이 연해 맛이 좋다. 고려 때는 원나라의 요구로 모두 바쳐서 국내에서는 먹을 수 없었다.
자주조개 동해에서 난다. 크고 살이 희며 맛이 달다.
게 삼척에서 나는 것은 강아지만큼 커서 다리가 큰 대나무만 하다. 맛이 달고 포를 만들어 먹어도 좋다.
언 게 안악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굴 고원과 문천에서 나는 것이 크지만 맛은 서해에서 나는 작은 것만 못하다.
윤화(굴 종류) 동해에서 나는데 굴과 비슷한 것으로 큰 것이다. 맛이 달다.
왕새우 서해에서 난다. 평안도에서 나는 새우알로 젓을 담그면 매우 좋다.
곤쟁이새우 서해에서 난다. 옹강 것은 짜고 통인 것은 달고 호서 것은 맵고 크다. 의주 것은 가늘고 달다.
도하(복숭아새우) 부안과 옥구 등지에서 난다. 빛이 복숭아꽃 같은데 맛이 매우 좋다.
물고기 중 흔한 것으로는 민어·조기·밴댕이·낙지·준치 등이 있는데 서해 곳곳에서 나며 모두 맛이 좋아 다 적지 않았다. 병어와 그 밖의 변종 물고기는 맛이 좋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어 따로 적지 않았다.
이상은 수산물 종류다.
채소 종류 (서기 1611년 6월 1일, 양력 추정)
죽순젓 호남 노령 이남에서 잘 담그는데 맛이 매우 좋다.
원추리나물 의주 사람들이 중국인에게 배워 잘 요리하는데 매우 맛있다.
순채 호남 것이 가장 좋고 해서 것이 그다음이다.
돌김 영동 지방에서 많이 나는데 가장 좋다.
무 나주에서 나는 것이 매우 좋다. 맛이 배 같고 물기가 많다.
거여목 원주에서 나는 것이 줄기가 희고 매우 맛있다.
고사리·아욱·콩잎·부추·미나리·배추·송이·참버섯 등은 어디서 난 것이든 다 맛이 좋아 따로 구별하지 않았다.
표고버섯 제주에서 나는 것이 좋다. 오대산과 태백산에도 있다.
홍채 경기도 갯가에서 나는 것이 매우 좋다.
황각 해서에서 나는 것이 매우 좋다.
청각 서해 어디에나 나는데 해주와 옹진 것이 가장 좋다.
참가사리 서해 어디에나 나는데 해서 것이 가장 좋다. 또 우뭇가사리라는 것이 있는데 열을 가하면 녹는다.
산초젓 황주에서 만든 것이 매우 좋다.
인삼포 영평과 철원 사람들이 잘 만든다. 모양이 소고기포와 같다.
여뀌 이태원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동아 충주에서 나는 것도 좋다.
가지·오이·호박·무 등은 어디서나 나며 맛도 좋다.
산갓김치 함경남도와 회양·평강 등지에서 모두 나는데 맵고도 산뜻하다.
다시마 북쪽 바다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고 그다음은 미역이다.
올미역 삼척에서 정월에 딴 것이 좋다.
김 호남에서 나는데 함평·무안·나주 것이 엿처럼 달아 맛이 썩 좋다.
해의(김의 일종) 남해에서 나는데 동해 사람들이 주먹으로 짜서 말린 것이 가장 좋다.
토란 호남과 영남 것이 모두 좋아 매우 크다. 서울 지방 것은 맛은 좋은데 작다.
생강 전주에서 나는 것이 좋고 담양과 창평 것이 그다음이다.
겨자 해서에서 나는 것이 가장 맵다.
파 삭녕에서 나는 것이 매우 좋은데 부추·작은마늘·고수 등도 모두 좋다.
마늘 영월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먹어도 냄새가 안 난다.
이상은 채소 종류다.
그 밖의 음식 (서기 1611년 6월 1일, 양력 추정)
차 순천에서 나는 작설차가 가장 좋고 변산 것이 그다음이다.
술 개성부에서 빚는 태상주가 가장 좋은데 자주는 더욱 좋다. 그다음은 삭주 것도 좋다.
꿀 평창에서 나는 석청이 가장 좋고 곡산·수안 것도 좋다.
기름 중화부에서 짠 기름은 벌레에 물린 독을 바르면 해독이 되고, 인주로 쓰면 오래될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약밥 경주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까마귀에게 먹이는 풍습이 있다. 중국인들이 좋아해서 배워 만들어 먹는데 "고려반"이라 부른다.
서울에서 철따라 먹는 음식으로는, 봄에는 쑥떡·송편·느티떡·진달래전·배꽃전이 있고, 여름에는 장미전·수단·쌍화·만두가 있으며, 가을에는 경단·국화떡·감과 밤을 섞어 만든 찰떡이 있고, 겨울에는 탕떡이 있는데, 그 밖에 지지는 떡·찌는 떡·시절떡·달떡·인삼떡·송기유·꿀떡·혀떡 등은 사시사철 만들어 먹는다.
꿀떡 종류로는 약과·대계·중박계·홍산자·백산자·빙과·과과·봉접과·만두과 등이 있는데, 이는 모두 제사나 손님 접대에 쓰인다. 실국수는 오동이라는 사람이 잘 만들어 지금까지 전해 온다.
(용어) 목은 이색은 고려 말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학자다.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1 · 학산초담 (1부)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출처: 성소부부고 제26권, 부록 1, 학산초담
배경: 학산초담은 허균이 1593년(선조 26년) 스물다섯 살에 지은 시화집으로, 조선 초부터 당대까지 시인들의 작품과 일화를 모아 논평한 글이다. 임금과 세자의 시, 매월당 김시습부터 둘째 형 허봉과 누님 허난설헌, 벗 이달을 비롯한 당대 시인들의 작품과 인물평이 이어지며, 중국 사신들과의 교류, 신비로운 일화, 기녀들의 시까지 폭넓게 다룬다. 분량이 매우 많아 두 편으로 나누어 옮긴다. 이 편은 앞부분이다.
임금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제왕의 문장은 반드시 평범한 사람을 뛰어넘게 마련이다. 우리 역대 임금들의 작품은 대개 《대동시림》에 실려 있을 뿐, 그 밖에는 전하는 것이 드물다. 지금 임금(선조)은 하늘이 낸 어진 임금으로, 무릇 신하들을 타이르는 말은 손수 지으셨는데 질박하고 엄숙하여 기백이 있었다. 그러나 시를 지으셨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1591년(선조 24년) 가을, 바깥에서 임금이 지었다고 전하는 절구 한 수가 돌았으니 다음과 같다.
한밤에 칼을 어루만지니 호기가 무지개를 토해 내는 듯 웅장한 마음은 일찍이 우리 동방을 안정시키고자 했건만 이제껏 이룬 일이라곤 남의 걸음걸이 흉내 내다 제 걸음마저 잃은 격 가을바람에 고개 돌리니 한스럽기 그지없구나
시의 격조가 노련하고 굳세어 웬만한 시인에 못지않았는데, 어찌 그 이듬해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줄 알았으랴.
동궁이 지은 삼청동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동궁(광해군)도 즉위하기 전에 문학에 뜻을 두어 옛 책을 많이 모았다. 언젠가 삼청동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것이 진사 유희발의 상자 속에 있다기에 정중히 청하여 읽어 보았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푸른 이내 속 붉은 골짜기는 그늘지고 맑은 시냇가 기이한 풀들이 하늘 제단을 에워쌌네 노을 어린 옥솥에는 신선의 단약이 익어 가는데 다래 넝쿨에 달 비치고 솔바람 일어도 학은 아직 돌아오지 않네
시의 정취가 맑고 서늘하며 글자 쓰는 법도 기이하다. 임금이 지은 글은 저절로 속된 시인의 말투와는 다른 법이니, 아, 존경할 만하다.
(용어) 유희발은 문화 유씨로 광해군의 처남인데, 벼슬은 이조 참판에 이르렀으며 1623년 인조반정 때 죽임을 당했다.
우리나라 시학의 흐름과 매월당·망헌·충암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의 시학은 소식과 황정견을 위주로 삼아, 경렴당 같은 큰 학자조차도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나머지 세상에 이름난 사람들은 결국 그 찌꺼기나 빨아 먹으며 비위를 상하게 하는 촌스러운 말을 지어낼 뿐이니, 읽으면 진력이 날 지경이다. 성당 시대의 드높은 소리는 이제 다 사라져 들을 수가 없다.
매월당 김시습의 시는 맑고 호탕하며 세속을 초탈했다.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 스스로 다듬고 꾸미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았다. 더러는 마음 쓰지 않고 즉흥적으로 지은 것이 많아 간혹 거친 것도 섞여 있으니, 결국 정시 시대의 격조는 아니다.
망헌 이주의 시는 침착하고 노련하여, 나의 둘째 형(허봉)은 이것이 당나라 대력·정원 연간의 작품과 가깝다고 여겼다. 그러나 소식과 두보에서 나왔으면서도 대체로 순박하지는 못했다.
충암 김정은 맑고 굳세고 기이하고 아름다워 한 사람의 작가라 할 만하되, 거친 말과 겹치는 말이 다소 많다. 그 뒤로는 그 흐름을 되살린 사람이 없었다. 융경·만력 연간에 이르러 최가운(최경창)·백창경(백광훈)·이익지(이달) 등이 비로소 당나라 개원 시대의 시풍을 전공하여 정화를 이루기에 힘썼고 옛사람의 경지에 닿고자 했으나, 골격이 온전치 못하고 너무 아름답기만 했다. 당나라의 허혼·이교 사이에 놓는다면 곧 촌티가 드러날 터인데, 도리어 이백·왕유의 자리를 넘보려 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이 세 사람 덕분에 배우는 이들이 당풍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그 공을 덮어 버릴 수는 없다.
가운(최경창)의 "고봉군 산속 정자에 부쳐"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오래된 고을이라 성곽도 없는데 산속 집에는 다만 수풀뿐 백성도 아전도 흩어져 쓸쓸한데 물 건너 마을엔 겨울 다듬이 소리
창경(백광훈)의 "그림에 부쳐"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문서와 기록에 매달리다 보니 흰머리만 늘어 가는데 시내와 산은 그림 속에 담겼구나 모래톱 잔잔하니 옛 언덕 그대로인데 달빛은 하얗고 낚싯배만 외로워라
또 "스님의 시축에 부쳐"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지리산은 쌍계사가 절경이고 금강산은 만폭동이 기이하다는데 명산에는 몸소 가 보지도 못하고 매양 스님을 배웅하는 시만 짓는구나
익지(이달)의 "산사"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흰 구름 속에 절이 있으니 흰 구름이라 스님이 쓸지를 않네 손님이 와서야 비로소 문을 여니 골짜기엔 온통 송화 가루만 흐드러졌네
또 "배를 돌리며"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병든 가을 해오라기 모래밭에 내려앉고 늦매미는 강가 나무에서 울어 대네 흰 마름에 바람 일자 배를 돌리니 꿈속엔 서쪽 못에 비가 내리네
(용어) 매월당 김시습(자 열경)은 강릉 사람이며 처사로 지냈고 시호는 청간이다. 이주(호 망헌)는 고성 사람으로 벼슬은 정언이었다. 충암 김정은 경주 사람으로 벼슬은 형조 판서, 시호는 문간이다. 최경창(자 가운, 호 고죽)은 해주 사람으로 벼슬은 부사였다. 백광훈(자 창경, 호 옥봉)은 해미 사람으로 벼슬은 참봉이었다. 이달(자 익지, 호 손곡)은 홍주 사람으로 쌍매당 이첨의 서출 손자다.
최경창·백광훈·이달의 시풍 논쟁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최경창·백광훈·이달 세 사람의 시는 모두 정시 시대의 법도를 본받았는데, 최씨의 맑고 굳센 맛과 백씨의 담백한 맛은 귀하게 여길 만하나 기력이 미치지 못해 다소 얇은 결점이 있었다. 이달의 풍성하고 화려한 맛은 두 사람에 비해 범위가 약간 넓지만, 셋 다 맹교와 가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최경창과 백광훈은 일찍 죽었고, 이달은 늙어서야 문장이 크게 나아져 자기 나름의 일가를 이루어 화려함을 거두고 평이하고 진실한 경지로 돌아갔다. 나의 둘째 형은 자주 이렇게 칭찬했다.
"당나라 수주 자사 유장경과 어깨를 겨룬다 해도 크게 손색이 없을 것이다."
내가 말했다. "문장이란 세상의 흥망을 따라가는 법이니, 송나라가 당나라만 못하고 원나라가 송나라만 못한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어찌 두 시대를 뛰어넘어 당나라 작가와 우열을 다툴 리가 있겠습니까."
둘째 형이 말했다. "한퇴지는 당나라 사람인데 유자후가 '곧장 사마천과 나란히 달린다'고 했으니, 자후가 어찌 헛말을 할 사람이겠느냐? 이달도 이와 같으니라."
그러나 나는 끝내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둘째 형 허봉의 시 세계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나의 둘째 형의 시는 처음에는 소동파를 배워 전아하고 순실하며 온건하고 노숙했는데, 호당에 뽑히고 나서는 《당시품휘》를 익히 읽어 시가 비로소 맑고 굳세졌다. 늘그막에 갑산으로 귀양 갈 때 이백의 시집 한 부를 가지고 갔는데, 귀양이 풀려 돌아온 뒤의 시는 하늘의 신선 이백의 말을 깊이 체득하여 장편이든 단편이든 휘몰아치는 기세가 있었다. 일찍이 이익지(이달)가 말하기를,
"미숙 학사(허봉)의 시를 읽으면 공중에 흩날리는 꽃을 보는 것 같다."
라고 했는데, 둘째 형이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나 원대한 포부를 제대로 펴 보지 못했고, 남긴 글마저 흩어져 미처 수습하지도 못한 채 임진왜란을 만나 손쓸 겨를도 없이 병화에 다 타 버렸으니, 죽어도 잊지 못할 이 슬픔이 어찌 끝이 있으랴. 내가 강릉(별칭 경호)에 살 때, 놀란 마음이 좀 가라앉자 일찍이 외워 두었던 것을 생각해 내어 보니 겨우 오백여 편뿐이었다. 이를 베껴 세상에 전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저 태산의 터럭 한 올일 뿐이다.
최경창의 생애와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최경창(자 가운)은 1568년(선조 1년)에 진사가 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종성 부사가 되었는데, 어떤 일로 강등되었다가 국자감 직강을 제수받고는 세상을 떠났다. 언젠가 북경에 가서 도교 사원인 조천궁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한밤이라 옥단에 흰 구름을 쓸고 향 피우고 멀리 하늘 임금께 절한다 달빛 아래 절하는 모습 보는 이 없고 아름다운 나무만 겹겹이 궁문을 가리웠네
또 이렇게 지었다.
삼청궁 이슬 기운 구슬 궁전을 적시고 봉황 피리 부는 신선 달밤에 서성였건만 궁궐 길에는 지금 향기로운 수레 끊기고 푸른 복사꽃 붉은 살구꽃만 봄바람에 흐드러졌네
어떤 도사가 있었는데 성은 진씨이고 이름은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그 또한 시를 잘 지었다. 이 시를 크게 칭찬하여 통주 하청관까지 쫓아와 그 시집에 제사를 써 주기를 청하였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
푸른 하늘은 참된 세계를 나타내고 검은 제단은 태청궁에 가깝구나 난새는 구슬 정원 나무에 깃들고 노을은 자미성을 감돌았네 삼원의 보배 문서는 비장되어 있고 금단은 아홉 번 달여 이루어졌네 지초 수레 탄 신선은 보이지 않고 하늘 저 밖에 피리 소리만 들려오네
이 시가 중국에 퍼져 왕봉주(왕세정) 선생이 대단히 칭찬하였다. 충장공 양조의 무덤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구름 속에 해 지자 불빛이 산을 비치니 오랑캐는 이미 녹두관에 다가왔네 장군이 홀로 천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서 한밤에 요하 건너 싸우다 돌아오지 않았구려
이 시는 당나라 사람의 수준에 못지않으니 중국에서 사랑받는 것이 당연하다.
백광훈의 생애와 시, 허난설헌의 감우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백광훈(자 창경)은 글씨 쓰는 법이 왕희지·왕헌지에 가까웠고, 첫 벼슬은 예빈시 참봉이었다. 언젠가 홍경사를 지나다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풀 쓸쓸한 전 왕조의 절 낡은 비석엔 학사의 글 흐르는 물은 천 년토록 예와 같은데 해 질 무렵 떠가는 구름을 보네
1582년(선조 15년)에 병으로 서울 집에서 죽었다. 누님 난설헌이 그를 슬퍼하며 지은 감우시는 다음과 같다.
요즘 최씨 백씨 무리들이 성당을 본받아 시를 익혀 적막하던 대아의 음률이 이들을 만나 다시금 크게 떨쳤네 낮은 벼슬에 그저 녹만 받고 변방 고을살이에 서러운 처지 나이도 벼슬도 함께 시들어 가니 이제야 믿겠네,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함을
난설헌(이름 초희, 자 경번)은 초당 허엽의 딸이며 서당 김성립의 아내다. 난설헌의 "강남곡"은 다음과 같다.
남들은 강남땅 좋다 하지만 나 보기엔 강남땅 시름겹기만 해마다 모래톱 포구에 서서 애끊는 마음으로 가는 배만 바라보네
"가난한 여인의 노래"는 또 다음과 같다.
가위를 손에 잡으니 추운 밤 열 손가락 곱네 남 위해 시집갈 옷 지어 주건만 해마다 도리어 혼자 살다니
"연밥 따는 노래"는 다음과 같다.
가을이라 긴 호수엔 비취옥이 흐르는데 연꽃 깊숙한 곳에 목란배 매어 두고 물 건너 님을 만나 연밥을 던지다가 남의 눈에 그만 띄어 반나절이나 무안했네
(용어) 왕세정(호 봉주)은 명나라의 문장가다.
임제의 생애와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임제(자 자순)는 나주 사람이다. 1577년(선조 10년)에 진사가 되었다. 본성이 의협심이 있고 얽매이지 않아 세속과 맞지 않았으므로 불우한 채 일찍 죽었다. 벼슬은 예조 정랑에 그쳤다. 죽은 뒤 어떤 이가 "역적 정여립과 함께 시국을 논하면서 항우는 천하의 영웅인데 성공하지 못한 것이 애달프다고 말하고 마주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그를 무고했다. 그 말이 삼성에까지 전해지자 아들 임지가 국문을 받았는데, 임지가 선친이 지은 "오강에서 항우를 조상하는 부"를 올려 겨우 용서받고 변방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그의 "평사 이영을 보내며"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북방 눈 내리는 용황 가는 길 음산한 바람 부는 발해 바닷가 원수의 서기를 맡은 이는 한 시대의 미남아로다 칼집엔 별을 찌르는 칼이 있고 주머니엔 귀신도 울릴 시가 들었네 변방 모래바람 금갑옷에 자욱한데 관문 위의 달은 붉은 깃발을 비추누나 옥문관 어딘들 두루 다니지 않으리 공신각에 화상 걸릴 날 머지않으리 마주 보니 굳센 머리카락 곤두서고 먼 길 떠날 슬픈 기색 짓지 않네
시의 격조가 당나라 양영천(양형)과 매우 비슷하다.
임제의 호는 백호이며 벼슬은 북평사를 지냈다. 《잠영보》를 살펴보면 "임제의 맏아들은 임탄으로 호는 한정인데 벼슬을 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임기로 호는 월창, 벼슬은 좌랑이다"라고 하였다. 임탄은 혹 임지의 개명이 아닌지 모르겠다.
백호의 "규방의 원망"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열다섯 살 월계 아가씨 남 보기 부끄러워 말도 없이 헤어졌네 돌아와 겹문 닫고는 배꽃에 비친 달 보며 울었네
"산사"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한밤중 숲속에서 스님이 잠드는데 무거운 비구름이 풀옷을 적시누나 느지막이 사립문을 여니 깃든 새가 그제야 놀라서 나네
이영은 고성 사람으로 자는 언윤, 호는 남고이니 청파 이육의 손자로 벼슬은 목사를 지냈다.
(용어) 정여립의 옥사는 1589년(선조 22년) 일어난 사건으로, 이 일로 많은 사림이 화를 입었다.
둘째 형의 시와 최경창·허봉의 화답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둘째 형이 경흥 압호정에 제하여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국경에서 스산하게 바라다보니 인가의 연기는 오랑캐 땅과 접했구나 산은 외로운 장막 밖을 에웠고 물은 무너진 능 옆으로 흘러드는구나 초가집에서 해가 바뀌도록 병들었는데 푸른 모에 한밤중 서리 내렸네 이곳에 오르자 가장 서글퍼지니 까칠한 수염은 낙엽과 함께 누렇구나
임자순(임제)이 크게 칭찬하며 같은 운으로 화답하려 하였으나 종일 궁리해도 뜻대로 되지 않자 시를 보내기를,
백옥과 청묘는 열 글자의 역사로다
라 하였으니, 셋째와 넷째 구절이 역사적 사실을 담았음을 말한 것이다. 금성 객관에 옛사람이 "추" 자로 압운한 시를 판각해 걸어 놓았는데, 최고죽(최경창)이 차운하기를,
서글픈 대평소 소리 옛 고을에서 나는데 깊은 강물은 어둠 속 급히 흐르네 희미한 등불 아래 초나라 나그네의 꿈이요 한밤중 중선의 다락일레 찬비 비록 개었으나 고향 생각 또다시 가을을 만났네
라고 했다. 둘째 형이 이어 읊기를,
나그네 만리길 가매 말 멈추어 차가운 물을 먹이네 큰길엔 온통 꽃다운 풀들 저녁 연기 역루에서 피어오르네 나그네 회포는 어렴풋 꿈과 같아서 봄이라지만 거의 가을 같고나
라고 했다. 최고죽이 보고, "봄 시를 가을 추 자로 압운하기는 가장 어려운 일인데, 이 구절은 옛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하였다.
누대의 현판시에 대하여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내 생각에 누대 현판은 모조리 케케묵은 시들이라, 비록 청신한 구절이 있다 하더라도 가려내기 쉽지 않으니, 굳이 지을 필요가 없다. 임자순(임제)이 언젠가 가학루를 지나갔는데, 판시가 많아 만여 개나 되므로 그 되지 않은 잡소리를 싫어하여 관리를 불러 말하기를, "이 현판들은 관에서 명하여 만든 것이냐? 아니면 안 만들면 벌을 주느냐?" 하니, 관리가 "만들고 싶으면 만들고 싫으면 안 만들지요. 어찌 관명이나 처벌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자순이 "그렇다면 나는 짓지 않겠다" 하였다. 듣는 이들이 다 웃었다. 임진왜란에 적이 관사를 불태워 남은 것이 없었으며, 불태우지 않은 곳도 현판을 뜯어 불 속에 던져 버렸다. 아마 하늘도 시가 높은 벽에 걸려 있는 것을 싫어했나 보다.
임형수와 심언광의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누제에도 좋은 시구가 더러 있다. 임진년에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난리를 피해 북쪽 변경으로 들어가다가 곡구역에 이르니, 임형수가 지은 시의 셋째 넷째 구절에,
꽃이 고개 숙이니 술 취한 미녀의 얼굴 같고 산이 끊어지니 바닷물 마시는 푸른 용의 허리 같구나
하였다. 시어가 맑고 뛰어나니 어찌 누제라 하여 흠잡을 수 있겠는가. 임형수(자 사수, 호 금호)는 평택 사람으로 벼슬은 목사를 지냈는데, 1547년(명종 2년) 벽서 사건 때 원통하게 죽었다.
어촌(심언광)의 시는 혼후하고 부염하기가 호음(정사룡)에 못지않은데, 송계(권응인)가 중종 이래 대가를 평하면서 그 명단에 어촌이 들지 않았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내가 북쪽 변경의 누제를 보다가 어촌의 시를 읽고는 눈을 씻고 장단을 맞추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영동역"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총애와 굴욕 아득하다 둘 다 절로 놀라니 떠도는 남은 목숨 그 어디에 붙일까 하늘가 해 질 무렵 고향 그리는 눈물 변방 밖 늦가을 고국 떠나는 마음일세 구름송이 어지러이 날아 산은 온통 새까맣고 둥근 달 나직이 비치니 온 바다는 밝아라 나그네 신세 오늘 밤 유난히 시름겨워서 푸른 등불 마주하여 앉아 지새웠네
"수성역"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고향 떠나 가을 지나 국경 성에 머무니 낯선 땅 풍경은 모두가 고향을 그리게 하네 넓은 강 건너고 싶으나 뱃사공 없고 겨울나무 말라 가도 겨우살이는 매달렸네 일신을 도모함이 곧은 길 아님 우습고 세상 속여 헛된 이름에 붙들림 오히려 부끄럽네 새벽 문을 열고 푸른 바다 마주하니 아침 해 밝고 밝아 간담을 비치네
이와 같은 작품들이 어찌 호음(정사룡) 무리만 못하단 말인가? 아래 시의 넷째 구절은 권신 김안로가 죽었지만 그 잔당이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았음을 가리킨 것이다.
어촌 심언광(자 사형)은 삼척 사람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공이다. 호음 정사룡(자 운경)은 동래 사람이며 벼슬은 영중추부사이다. 송계 권응인은 안동 사람이니 벼슬은 학관이고 이조 참판 권응정의 서출 아우다. 김안로(자 이숙, 호 희락)는 연안 사람이고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다. 탐욕스럽고 간사하며 조정 일을 제멋대로 하였으므로 1537년(중종 32년)에 사약을 받았다.
어촌의 "사과꽃 지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붉고 흰 꽃 봄을 도와 늙은 가지에 피니 뉘 위해 단장하는고, 시골 사람 집에서 한밤중 비바람에 초췌할까 두렵더니 다닥다닥 핀 사과꽃 모조리 다 졌구나
송계(권응인)의 "촉석루"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구름 사이 새어 나는 희미한 달이 잔잔한 물결을 비추어 주니 잠자던 해오라기 나직이 날아 물언덕 모래톱에 내려앉는다 물가 정자에 발 거두고 기둥 기대어 앉아 있으니 나룻머리 노 젓는 소리 밤이라 크게 들리네
둘째 형이 근래 시인을 평하면서 소재 상공(노수신)을 대가로 여기고 제봉 고경명을 그다음으로 쳤다. 이익지(이달)는 둘째 형의 시와 문장이 모두 고경명보다 낫다고 여겨 논란이 오래되었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다. 내가 권응인을 만나 물어보니 이달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권응인이 갑산으로 귀양 가는 둘째 형을 보내는 시의 셋째 넷째 구절에,
정묘교 곁에 살던 당나라 시인이고 경인일에 태어나 쫓겨난 초나라 신하로다
라 하니, 고사 인용과 대구가 다 적절하다. 둘째 형이 서애 유성룡에게 부친 시에 또,
갑자년 참상을 말하지 마라 응당 경인년에 하강하는 때를 맞으리
하였다.
소재 노수신(자 과회)은 광산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간이다. 제봉 고경명(자 이순)은 장흥 사람이다. 벼슬은 목사이고 시호는 충렬이다. 서애 유성룡(자 이견)은 풍산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충이다.
둘째 형과 누님이 꿈속에서 지은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둘째 형이 귀양 가기 전 옥당에 있을 때 꿈속에서 시를 짓기를,
텃밭에 채마 부치노라니 솜씨야 늘었다만 하늘은 꿈결에도 어렴풋 오직 가의의 눈물만 남아 밤마다 차가운 옷을 적실 뿐
하더니, 가을이 되자 갑산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누님이 평시에 또한 꿈속에서 지은 시에,
푸른 바다는 신선 사는 요해에 젖어들고 파란 난새는 채색 봉황에 기대었구나 연꽃 스물일곱 송이 서리같이 싸늘한 달빛 아래 지는구나
하더니 이듬해 신선 되어 올라가니, 3에 9를 곱하면 27로서 누님 나이와 같으니, 사람 일에 있어 미리 정해진 운명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누님의 시문은 모두 타고난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선계에 노니는 시"를 즐겨 지었는데 시어가 모두 맑고 깨끗하여, 밥 짓고 반찬 익혀 먹는 속인으로서는 미칠 수가 없다. 산문도 우뚝하고 기이한데 사륙변려문이 가장 좋다. "백옥루상량문"이 세상에 전한다. 둘째 형이 일찍이, "경번(허난설헌의 자)의 재주는 배워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이태백과 이장길의 남은 울림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아, 살아서는 부부 금슬이 좋지 못했고 죽어서는 제사 받들 자식이 없으니 옥이 깨진 원통함이 한이 없다.
(용어) 가의는 한나라 초 문인으로 재주가 있었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젊어서 죽었다.
이옥봉의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이옥봉은 조원(자 백옥)의 소실이다. 그 시가 몹시 맑고 강건하여, 거의 아낙네들이 화장할 때 쓰는 말들이 아니다. 남편을 따라 진주부로 가는 길에 노산묘(단종의 무덤)를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닷새는 장간이요 사흘은 영월이라 참담한 노릉 구름 슬픈 노래 끊어지네 이 몸도 또한 왕손의 딸이라서 이 땅 두견새 소리 차마 들을 수 없구려
서익(자 군수)의 소실이 편액 글씨와 짧은 율시를 부쳐 준 데 사례하는 시는 다음과 같다.
여위고도 굳세게 하늘 밖의 정취 써서 이루니 유공권 서체의 남은 자취 보여 주네 해서체는 나부끼는 가운데 봉새처럼 날아오르고 큰 글씨는 뭉게구름이 응집되었네 시험 삼아 산속 집에 걸고 보니 호랑이가 뛰는 듯 문득 강가 누각에 거니 용이 오르는 양 위부인 필력이 바야흐로 굳건한 줄 알거니와 소야란의 재주라고 어찌 공교함을 독차지할 것인가 몸은 마치 혜초 가지 같아도 생각은 씩씩하며 가녀린 손 파처럼 곱건만 글씨를 쓰면 웅장하여라 정신적인 사귐이 만 리를 문묵으로 통하니 여의주를 갚기 위해 백옥 동자에게 알리노라
그 아우도 시를 잘 지었는데, 언젠가 절구 한 수를 읊었으니 그 뒷구절은 다음과 같다.
창 열고 새벽달 아래 거니노라니 이슬은 매화 가지에 함초롬하구나
그 전집을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옥봉(이름 원)은 완산 사람인데 충의위 이봉의 딸이다. 조원(자 백옥, 호 운강)은 임천 사람으로 벼슬은 승지다. 서익(호 만죽)은 부여 사람으로 벼슬은 부사다.
옥봉의 "규방의 정"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언약하신 서방님 어이 이리 더디신가 뜰가의 매화는 이울려 하는데 갑자기 가지 위에 까치 소리를 듣고 헛되이 거울 비쳐 눈썹 그리네
최고죽(최경창) 등이 언젠가 "우리나라 지명은 중국만 못하여 시 지을 때 지명을 구사할 수 없다"며 늘 한스럽게 여겼는데, 소재(노수신)의 시에,
길은 막다른 평구역이오 강물은 깊어라 판사정 앞에
라는 구절을 보니, 상하 구절이 모두 우리 지명을 썼건만 구법이 온당하고 적절했다. 그러니 대가의 솜씨는 절로 여느 사람과 다름을 알겠다.
이달의 불우함과 양사언의 우정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이익지(이달)는 젊어서 화류계에 드나든 실수 때문에, 그 재주를 시새우는 자들이 이를 가지고 비방하였고, 심지어는 "어머니도 잘 대우하지 않고 부인과의 예의도 닦지 않았다"며 비난해 마지않았다. 양봉래(양사언)가 강릉 부사로 부임했을 때 그를 스승의 예로 대우하자, 시샘하는 이들이 선친(허엽)에게 근거 없는 말을 해서 선친이 편지로 이달을 멀리하도록 권하였다. 양봉래가 답장을 보내기를, "오동꽃은 밤비에 지고, 바닷가 나무는 봄구름 속에 사라진다는 시를 짓는 이달을 만약 소홀히 대접한다면, 진왕 조식이 응탕과 유정을 잃을 때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였다. 그 뒤에 대우가 약간 소홀해지자 이달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작별을 고했다.
나그네의 떠나고 머무름은 주인의 눈썹 사이에 달렸나니 오늘 아침 반기는 빛 없으니 우리 집 고향산 그리워지네 노나라에선 원거를 잔치해 주고 남쪽 정벌엔 율무로 돌아갔다네 가을바람에 소진의 신세로 또다시 목릉관을 떠나노라
이에 양봉래가 놀라고 뉘우쳐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양사언(자 응빙, 호 봉래)은 청주 사람으로 벼슬은 부사다. 선친(자 태휘, 호 초당)의 이름은 엽이며 벼슬은 부제학이다.
양봉래의 "국도"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단청한 누대에 보랏빛 연기 떨치며 구름길에 용을 타고 여러 신선 내려오네 청산도 또한 인간 속세 싫어선지 푸른 바다 같은 만 리 장천으로 날아드누나
연산군 시절의 강혼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연산군이 집정하였을 때, 강혼은 도승지가 되어 가장 총애를 받았다. 언젠가 연산군이 출제하기를,
한식 동산에 삼월은 다가오고 비바람에 꽃 지는 새벽은 싸늘해라
하고, 승지·사관·경연관에게 칠언율시를 지어 바치게 하였는데, 강혼의 시는 다음과 같다.
청명이라 대궐 버들 찬 연기 서렸는데 쌀쌀한 봄바람 새벽 들어 한층 더 미친 듯하구나 붉은 꽃잎 땅을 덮도록 내버려두고 휘날리는 버들개지 온 하늘에 자욱하구나 물 건너 높은 누각에 구슬발 걷히니 꽃구경 가는 좋은 말 비단 안장 빛나네 금 동이 술 다 마시고 취하여 별원으로 돌아오노라니 단청한 난간가에 오색 드림 나부끼네
연산군이 크게 칭찬을 하며 금은보화를 많이 하사하였다.
강혼(자 사호, 호 목계)은 진주 사람이며 벼슬은 판중추부사이고 시호는 문간이다.
기준의 절명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응교 기준이 온성으로 귀양 가 있는데, 서울로부터 사약이 내려왔다. 그는 조용히 시를 읊어 스스로 만사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해 지자 하늘은 먹빛 같고 산 깊어 골짜기는 구름 같구나 천년토록 지키자던 군신의 의는 슬프다, 하나의 외로운 무덤뿐
이 시를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심장과 간장이 다 찢어지게 한다.
기준(자 자경, 호 복재)은 행주 사람이며 벼슬은 응교에 그쳤다. 시호는 문민이다.
최수성의 죽음과 나식의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최원정(최수성)은 늘 화를 입을까 두려워 세상 밖을 떠돌아다녔건만, 마침내 숙부의 참소를 받아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되었는데, 그가 만의사에 제하여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옛 불전에 몇몇 스님이 있고 나뭇가지엔 저물녘 경쇠 소리 맑아라 산굽이는 천 리나 아스라한데 담장은 우뚝, 뭇산이 하마 낮아 뵈네 나무는 하 늙었으니 몇 살이나 되었누 새들의 지저귐도 곳에 따라 유달라라 어려운 세상 죄의 그물 근심했더니 오늘이야말로 부끄럽다, 나의 삶이여
시어가 맑고도 빼어났다. 끝 구절은 대체 그가 화 입을 것을 미리 헤아렸단 말인가?
최수성(자 가진, 호 원정)은 강릉 사람이며 처사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그의 숙부 최세절(자 개지)은 벼슬이 호조 참판이다. 원정의 "망천도"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달이 서녘산에 내리니 어두운 연기 먼 나무에 피어나네 끊어진 다리에 복건 쓴 두 사나이 그 누가 망천의 주인인지
나공(나식)은 웅장한 글과 곧은 절개가 오랜 세월 빛난다.
외로운 배는 일찍 매어야만 하니 풍랑은 으레 밤 깊으면 더하다네
라는 구절은 선배들이 이미 칭찬하였던 것이고, 원숭이 그림에 제한 절구 두 편을 손곡(이달)은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칭찬하였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산 원숭이 포도를 안고는 다리로 긴긴 가지를 밟는구나 떨어진 열매 주울 때 뉘 능히 암수를 구별하리오
또 이런 시도 있다.
늙은 원숭이 그 무리를 잃고 마른 나무 등걸 위에 해는 지네 동그마니 앉아 고개조차 까딱 않으니 아마도 일천 봉의 메아리 듣나 보네
아랫시가 더욱 기발하다.
나식(자 장원)은 안정 사람이며 정암 조광조의 문인이다. 을사사화에 형인 부제학 나숙과 함께 참화를 당했다. 그의 "여강"이라는 시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푸른 강가에 해는 저물고 하늘이 차니 물결은 절로 이네
다른 야사를 참고해 보면 최원정(최수성)의 시로 되어 있다. 그의 숙부 최세절이 이 시를 가지고 그를 참소했다고도 하나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이달의 시구와 세평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손곡 이익지(이달)의 "한식"이라는 시에,
배꽃에 비바람 치는 한식철인데 병든 나그네로 떠돈 지 삼십 년일세
라든지, 임귀성에게 보낸 시에,
해마다 떠돌이라 옷은 벌써 해어지고 몇 달을 집 떠나니 허리춤 줄었구나 범숙의 이 가난 뉘 가엾이 여길 건가 소진처럼 곤궁하여 못 돌아감을 스스로 비웃노라
라든지, "노산묘"라는 시에,
봄바람에 귀촉새 울음 애닯고 해 저물녘 노릉은 스산도 해라
등의 시구는 대구가 자연스럽고 침착하고 무게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더러 바람 앞의 꽃이라 하여 결점으로 여기나, 글쎄 미처 생각을 못 해서 하는 말이 아닌지?
김정의 시와 이행의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김충암(김정) 시집 속에 "청산금야월"이라는 시는 바로 용재 이행(시호 문민)의 작품으로 시법이 같지 않다. 편찬한 자가 잘못 엮은 것이다. 내가 스님의 시축을 보니 충암의 시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고개 너머 한산사에 스님 만나니 문득 반가워라 돌샘 가의 같은 병든 나그네 천지간에 하나의 부평초 성긴 빗속 가물거리는 등불은 싸늘한데 잔 들자 들려오는 먼 바닷소리 창 열고 거듭 두런거리다 헤어지니 구름 설핏 새벽별만 밝구나
이 시가 충암 본집에는 없으니, 당시 편찬자가 혹 미처 못 본 것인가?
용재 이행(자 택지)은 덕수 사람이며 벼슬은 좌의정이다. 시호는 문민이었는데 문정으로 고쳤다가 다시 문헌으로 고쳤다. 용재의 "그림에 부쳐"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후둑후둑 소상강에 비가 내리고 아스라이 보이네, 반죽의 숲 그러나 거기서 묘사키 어렵기는 아황·여영 두 왕비의 심정
"관사 벽에 쓰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늙마에 분주타 보니 병은 약속이나 한 듯 찾아오고 봄 흥취라야 많지 않으니 시까지 지을 건 없다 졸다 깜짝 놀라 깨니 꽃철이 늦었구나 한 차례 보슬비가 장미를 적시누나
"합천에서 자규 소리를 듣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강북 봄 경치 밤이라 더 서글퍼서 잠깨자 까닭 없이 나그네 맘 설레이네 세상만사 고향에 돌아감만 못하니라고 건너 숲에 울어 대는 자규 소리 잦아라
"주운을 읊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허리에 칼이 있으니 청할 게 무어 있소 땅밑에 사람 없어도 또한 노닐 만하네 가석하다, 한나라 조정의 괴리령은 일생에 영신 머리 베기만을 알았구려
이달과 홍적의 시구 비교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나의 둘째 형이 언젠가 이손곡(이달)의 "송경에서 노닐며"라는 시 가운데,
대궐 앞 거둥하던 길엔 가을풀 스산하고 누대 아래 격구하던 뜰엔 저녁 소를 먹이누나
라는 구절을 칭찬하였으나, 사인 홍적의,
누대는 비었어도 반월대요 각은 황폐하나 옛 첨성각이네
만큼 절실하지는 못하다.
홍적(자 태고, 호 하의)은 남양 사람이다.
홍경신과 이덕형의 시재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나의 둘째 형이 일찍이, "홍덕공(홍경신)·이명보(이덕형)의 시는 모두 일가라 이를 만한데, 홍덕공은 장편을, 이명보는 칠언율시를 특히 잘 짓는다"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또, "명보는 반드시 대제학이 될 것이다" 하더니, 후에 이덕형은 나이 겨우 서른이 넘자 대제학에 임명되고 벼슬로는 예조 판서의 반열에 오르게 되니, 대제학이 되리라던 말이 비로소 증명되었다. 홍경신은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불행히도 뜻을 얻지 못해 벼슬이 변변치 못했으니, 재주와 팔자는 이처럼 같지 않다.
홍경신(호 녹문)은 남양 사람이다. 만전당 홍가신의 아우로 벼슬은 부제학을 지냈다. 이덕형(호 한음)은 광주 사람이며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익이다.
홍경신의 "봉래풍악가"를 나의 둘째 형이 아침저녁으로 한 번씩 죽 읊으면서 장단을 맞추며 감탄하였다. 그 시는 이태백의 "천로음"에 영향을 받은 것인데, 종횡으로 오르내림에 한 글자도 세속에 찌든 티가 없다. "반통투수사"·"기택요" 등 작품은 모두 호방하며 기력이 있으나, 율시나 절구는 장편만은 조금 못하고, 산문 또한 간결하고 엄정하다. "운부"·"격구부" 같은 작품은 양봉래(양사언)가 몹시 부러워하며, "사마상여와 천 년 뒤에 우열을 다툴 만하다"고 하였다.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1 · 학산초담 (2부)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출처: 성소부부고 제26권, 부록 1, 학산초담
배경: 학산초담 번역의 두 번째 편이다. 첫 편에 이어 명나라 시인들에 대한 품평, 임진왜란 전후의 시인들, 규수 시인들의 작품, 신비로운 일화, 강릉 지역 인물들에 대한 자부심 등이 이어지며 글 전체를 마무리한다.
명나라 시인들에 대한 논란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명나라 사람의 시를 이손곡(이달)은 하중묵(하경명)으로 첫째를 꼽되, 나의 둘째 형은 이헌길(이몽양)을 최고로 여겼고, 윤월정(윤근수)은 이우린(이반룡)을 그 두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여겼으니 정론을 내릴 수 없다. 봉주(왕세정)의 말은, "비교하자면 헌길은 높고 중묵은 통창하며 우린은 크다" 하고 그 또한 누가 첫째요 누가 다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달이 하루는 율시 한 수를 내어 보이며, "이것은 세상에 전하지 않는 중묵의 시일세" 하기에, 처음에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몰라서, "이 시는 맑고 뛰어났으니 율시를 고르는 자가 빠뜨렸을 리 없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지은 것일 겁니다" 하니, 이달이 자기도 모르게 껄껄 웃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나그네 이불에 스미는 가을 기운에 밤은 깊어 가고 그윽한 집 성긴 반딧불만 고요 속을 나는구나 밝은 달은 뜰에 가득, 서늘한 이슬은 함초롬 푸른 하늘은 물 같은데 은하수는 아득해라 이별의 꿈 고개고개 넘다 깨니 대궐 누수 소리 십이교에 여운지네 지척에서 새삼 동각로 그립건만 고관의 말굽 소린 하늘처럼 아득해라
짜임새와 구법이 대복(하경명)과 꼭 같아서, 웬만한 감식안이 있는 사람이라도 구별하기 쉽지 않다. 이 시는 바로 이달이 월정(윤근수)에게 올린 작품이다.
윤근수(자 자고, 호 월정)는 해평 사람이며 벼슬은 예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신노와 홍성민의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임진왜란 때 신노(자 제이)와 함께 북쪽으로 가는데 명종 임금의 제삿날이 되었다. 그가 객창에서 다음과 같이 지었다.
선왕이 이날 세상 뜨실 때 유언은 정녕 새 임금 부탁이었네 스물여섯 해 종묘 제례도 못 모시게 되니 센머리로 울부짖는 건 오직 유민들
뜻이 몹시 서글퍼서 익성군 홍성민이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어떤 사람은 "끊길 절" 자를 고쳐 "차가울 냉" 자로 하기도 하는데, 뜻은 좋으나 격은 먼저 글자만 못하다.
신노는 고령 사람이며 생원이다. 선대의 허물로 과거에서 보류되어 급제를 못했다. 홍성민(자 시가, 호 졸옹)은 남양 사람이며 벼슬은 판중추부사에 그쳤다. 시호는 문정이다.
명나라 사람 등계달과 조선 문인들의 교류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명나라 사람 등계달(자 진생)은 오 지방 사람으로 글과 시를 잘하고 글씨를 잘 쓰며, 천하의 명산대천을 두루 돌아다녔고 스스로 북해라 호하였다. 소재 한세능이 1573년(선조 6년) 우리나라에 조서를 반포할 때 북해가 따라왔는데, 그때 습재 권벽·문봉 정유일·서애 유성룡이 종사관이 되고, 석봉 한호가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수행하였다. 북해가 이 네 분과 서로 몹시 좋아하여 여러 번 시문으로 주고받았다. 그때 나의 둘째 형은 사관으로 임금을 모시고 거침없이 일을 기록하자, 사신이 누구냐고 물으니 재상 김계휘가 한림학사라 대답하였다. 북해가 만나고자 하였으나 기회가 닿지 않았다. 1574년(선조 7년) 둘째 형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조천궁에서 서로 만나 보고 늦게 만난 것을 한스러워하였고, 둘째 형이 우리나라로 돌아온 뒤에도 북해는 여러 번 사신 편에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첨사 황홍헌·도헌 왕경민이 1582년(선조 15년) 조서를 반포하러 올 때, 북해가 둘째 형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 부탁하고 또 그들에게, "모의 벼슬이 선위사가 되지 않았으면 반드시 도감이 되었을 것이오. 당신들은 그를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되오" 하였다. 첨사가 의순관에 이르러 역관 곽지원에게 물어 둘째 형이 나와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자, 편지를 보이고 쥘부채를 선사하였다. 둘째 형도 율시를 지어 두 사신에게 인사하자 서로 돌아보며 감탄하기를, "우리나라 밖 작은 나라에도 인재가 있구려" 하였다. 귀국하자 첨사가 북해에게, "노형은 참으로 사람을 볼 줄 아십니다그려" 하였다. 이것은 당성군 홍순언에게 들은 말이다.
권벽(자 대수)은 안동 사람이며 벼슬은 감사다. 정유일(자 자중)은 동래 사람이며 벼슬은 대사간이다. 한호(자 경호)는 삼화 사람으로 진사이며 벼슬은 호군이다. 김계휘(자 중회, 호 황강)는 광주 사람이며 벼슬은 대사헌이다. 홍순언은 역관이며 남양 사람으로 광국공신에 녹훈되었다.
등계달이 지은 만사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사구 정유일이 세상을 뜨자 북해(등계달)가 듣고 다음과 같이 만사를 지었다.
그리워라 지난날 현도 땅에 노닐 때 청강 위에 일산을 기울이고 즐긴 일 싸늘한 달빛 감미로운 술잔에 일렁이고 눈송인 털방장에 엉기었었지 그해 다섯 사람은 다리에 올라 바람머리에 손잡고 일어나 세 번이나 노래 불렀지 헤어진 뒤 갑자기 신선이 되어 학 타고 놀 속 만릿길을 소요하다니 가을밤은 쓸쓸하고 화표주에 푸른 하늘 가없는데 그대 오기만을 바라누나
말쑥하고 속기가 없어 읽으면 마음이 시원해진다. 중국인이 인재를 아끼기가 대개 이와 같다.
최립의 시와 문장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황 조사(황홍헌)의 시를 사람마다 시원찮게 여겼으나 나의 둘째 형만은, "이런 재주는 예로부터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했지만 남들은 믿지 않았다. 《풍교운전》에 첨사(황홍헌)의 글이 실린 것을 보면 문법이 간결하고 엄숙하며 전아하고 미려하며 온후하고 순수하였으니, 둘째 형은 인재를 알아보는 분이라 할 만하다.
중추 최립은 문장이 간결하고도 예스러워 당대의 대가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더러 그의 시가 문만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정랑 하응림을 제사 지내는 시는 다음과 같다.
나무 찍는 소리 쩡쩡 울려라, 산새도 슬퍼하네 홀로 와 어느 가지에 칼을 건단 말가 재주와 명망이 당시의 비방을 이기지 못했는데 사귐 도는 응당 저승 가야 알리라 영해에서 작별한 뒤에 영 이별을 하다니 역정에서 시 지은 뒤 그대 시가 끊어졌네 평생 술만 보면 다 마시고야 마시던 님 궤연에 부어 놓은 한잔 술 살피실지
역시 근엄하고도 기발하며 건장하니 어찌 문만 못하다 할 것인가.
최립(자 입지, 호 간이)은 통천 사람이며 벼슬은 형조 참판이다. 하응림(자 대이, 호 청천)은 진주 사람이다. 경재 하연의 오대손이며 벼슬은 수찬이다.
둘째 형의 독서법과 문장 배우는 순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나의 둘째 형은, "문장을 배우려면 반드시 한퇴지의 글을 익히 읽어 우선 문호를 세우고, 다음으로 《좌씨전》을 읽어 간결체를 배우고, 다음에는 《전국책》을 읽어 문장력이 종횡무진케 하고, 다음에는 《장자》를 읽어 신출귀몰하는 솜씨를 연구하고, 《한비자》·《여씨춘추》로 지류를 통창케 하고, 《고공기》·《단궁》을 읽어 뜻을 가다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마천의 《사기》를 익히 읽어 자유자재롭고 뛰어난 태를 키우는 것이다. 시를 배울 때는 먼저 《당음》을 읽고, 다음으로 이백의 시를 읽되, 소동파·두목은 그 솜씨만 따면 그만이다" 하였다.
나의 둘째 형은 언젠가, "내가 평생 두목(호 번천)을 익히 읽은 탓에 문장이 높지 못하다"고 한탄하였고, 이달 또한, "소동파·황산곡의 시가 내 폐부에 달라붙은 지 이미 오래인지라 시어를 만듦에 성당의 품격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시 짓기를 소동파·황산곡처럼 하면 그만이지, 하필 새삼스레 도연명·사영운 사이를 꾀할 것인가.
나의 둘째 형의 만년의 글은 유자후와 너무도 같아서, "주한정기"·"축려문" 같은 작품은 가히 대씨당·축필방 등의 글과 서로 어슷비슷하다. 최립이 "화기"에 대해 철로보지만 못지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명과 묘지는 무엇보다도 그의 장기인데도 세상 사람은 다 모르고, 보아도 아는 이가 드무니, 후세에 반드시 알아줄 이가 있을 것이다.
황정욱의 기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임진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고 바로 철령을 넘었다. 장계 황정욱이 북청 진남루에 올라 한탄하기를, "정입부(정언신)가 살았더라면 왜놈이 어찌 능히 철령을 넘었으랴" 하더니, 7월에 회령에서 사로잡혔다. 장계의 문장은 우뚝하고 웅건하며 속기가 없다. 조선 초부터 문형을 잡은 자가 모두 사가독서한 자 가운데서 나왔지만 장계만은 그렇지 않아 세상에선 그를 영화롭게 여기지만, 지난해 난리에 화를 유달리 더 입었다.
황정욱(자 경문, 호 지천)은 장수 사람이며 벼슬은 병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정언신(호 나암)은 동래 사람이며 벼슬은 우의정인데,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의 옥사에 원통하게 죽었다. 뒤에 신원되었다.
노수신의 비문과 중국 사신의 평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1590년(선조 23년) 병부 주사 왕사기는 봉주(왕세정)의 아들로 우리나라 사신의 짐을 검열하러 왔다가 마침 한집에 있게 되었다. 통역을 통해 우리나라 문장을 보기 원하자 어떤 이가 소재(노수신)가 지은 정암(조광조) 비문을 보였다. 주사가 소매에 넣고 가며, "우리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하고, 또 "비명은 추역산송 같으면서도 광채는 더하고, 서문은 법언 같으면서도 넓고 크기는 그보다 나으니, 당신네 나라에도 이런 인물과 이런 문장이 있단 말입니까?" 하였다고 한다.
정암 조광조(자 효직)는 한양 사람이며 벼슬은 대사헌, 시호는 문정이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소재의 시,
바다 달에 벌레 소리는 끝지고 산 바람에 이슬 기운 걷혔네
라는 구절은 소릉(두보)의 시집 중에서 찾는다 해도 흔히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애초에 우의정 사임하고 문득 판중추 되었다네
라는 구절은 대구가 자연스러워 솜씨를 부리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 신도비를 지을 때는 밋밋하여 우뚝한 곳이 없으니, 아마도 기발하게 하려고 마음 쓰다가 도리어 옹졸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나의 둘째 형은 논평하기를, 국초 이래 문장은 경렴당을 제일로 치고 지정(남곤)을 다음으로 치며, 시는 충암(김정)의 높음과 용재(이행)의 난숙함을 모두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나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충암은 세련되지 않은 것 같고 용재는 너무 진부하니, 시 또한 경렴당을 으뜸으로 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지정 남곤(자 사화)은 의령 사람이며 벼슬은 영의정, 시호는 문경이다. 기묘사화 때 간악한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누님의 소령 짓기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가사를 지으려면 반드시 글자의 맑고 흐림과 소리의 높낮이를 분간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음률은 중국과 달라서 가사를 짓는 이가 없다. 공용경과 오희맹이 왔을 때 호음(정사룡)이 차운하지 않자 세상에서는 체면을 지켰다고들 하였다. 그 뒤에 소퇴휴(소세양)가 시강의 운에 차운한 시에,
마음이 서글픈 이, 발 걷고 다시 보니 꽃다운 풀빛 위에 눈길이 멈추네
라는 구절은 중국인이 여러 차례 칭찬하였으니, 모두 음률에 맞아서인지 아니면 다만 그 말씨의 아름다움을 취한 것인지?
소세양(자 언겸)은 진주 사람이며 벼슬은 찬성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나의 누님이 언젠가 "시를 지으면 운율에 맞는다"고 스스로 자랑하며 소령 짓기를 좋아하기에 나는 속으로 남을 속이는구나 하였는데, 《시여도보》를 보니 구절마다 옆에 동그라미와 점으로 어떤 자는 전청·전탁, 어떤 자는 반청·반탁이라 하여 글자마다 음을 달았기에 시험 삼아 누님이 지은 시를 가지고 맞추어 보니, 어떤 것은 다섯 자, 어떤 것은 세 자의 착오가 있을 뿐 크게 서로 어긋나거나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제야 걸출하고 고매한 천재적 소질을 타고나 힘써 겸손했기 때문에 많은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이처럼 성취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어가오" 한 편은 모조리 음률에 맞고 다만 한 자가 맞지 않았다. 그 사는 다음과 같다.
뜰에는 봄바람 스산하고 담머리엔 한그루 배꽃 희어라 옥난간에 기대어 고향 그리나 갈 수는 없고 하늘과 맞닿은 우거진 꽃다운 풀빛만이 비단 방장 비단 창도 쓸쓸히 닫겼는데 단장한 얼굴에 두 줄기 눈물 붉은 가슴 적시네 강북과 강남은 무성한 나무가 가리었는데 이 그리움 어이하리 산 높고 물은 아득, 님 소식은 없으니
"붉을 주" 자는 마땅히 반탁 글자를 써야 하는 자리인데 전탁이다. 하긴 소장공(소동파) 같은 재주로도 굳이 운율에 맞추지를 않았거든, 하물며 그만 못한 사람일까 보냐.
둘째 형의 시구, 거산역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나의 둘째 형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쓸쓸한 들에 북두성 자루는 드리웠고 부서진 배 여울 모래에 놓였구나
이것을 소재(노수신) 상공이 몹시 칭찬하여 당나라 사람에 못지않다고 하였다.
나의 둘째 형의 "거산역"이라는 시는 이러하다.
새벽 별빛 아래 먼 길 떠나는 고각 소리 들리는데 터벅터벅 청주 옛 역정으로 향한다 나하동 그윽하고 산은 옹기종기 시중대를 감도는 바다는 아득아득 천 년 전 부러진 창 모래에 묻혀 짧고 십 리 황무지는 비 온 뒤에 비린내 나네 옛일은 아득해라 물을 데 없고 두어 가락 젓대 소리 차마 어이 들을 건가
이 시가 대궐에 들어가니 주상이 보고 몇 번이나 감탄하고는, 다섯째 여섯째 구절에 이르러서는 "작구법이 의당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율곡의 원접사 시절 일화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조사 황번충이 거련관의 소나무를 읊었는데, 그 맨 끝 구절에 "한" 자를 압운하니, 둘째 형이 한 선자가 각궁을 읊은 옛일을 인용하여 짓기를,
도리어 노나라의 좋은 나무처럼 북돋아 길러서 한 선자를 잊을쏜가
라 하였다. 이숙헌(이이) 선생이 당시 원접사였는데 이 시를 버리고 쓰지 않자 고제봉(고경명)이 크게 한탄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홍당릉이 몰래 황 조사에게 보이니 황 조사가 전편을 손수 베껴 가져오게 하고는 한동안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 사람은 시의 됨됨이를 아는 것이 이러하다.
이이(자 숙헌, 호 율곡)는 덕수 사람으로 벼슬은 정승에 이르고 시호는 문성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당릉은 당성의 잘못인 듯하다. 당성은 역관 홍순언의 호이다.
율곡의 "산중 절구"는 다음과 같다.
약 캐다 갑자기 길을 잃으니 산마다 온통 가을 낙엽뿐 산승이 물 길어 오더니 숲가에 피어나네, 차 달이는 연기
"성을 나서는 느낌"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아득히 사방에는 먹구름만 가득해도 중천엔 해 정히 밝구나 외론 신하의 한줌 눈물을 한양성 향하여 뿌리노라
지리산 신선 노인의 이야기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근세 어떤 선비가 지리산에 유람 갔는데, 한 외진 숲에 이르니 폭포는 이리저리 흐르고 푸른 대 우거진 가운데 한 띳집이 있었다.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섰다가 선비를 보고는 몹시 반기며 손을 맞아 솔 아래 앉혀 놓고 막걸리에 나물국으로 대접하고는 말하기를, "이 늙은 것이 평소 머리 빗기를 좋아하여 하루에 꼭 천 번은 빗어 내린다오" 하면서 쪽지를 내어 놓았는데, 그 속에 든 것이 바로 머리 빗는다는 소두시였다.
얼레빗으로 솰솰 가려 낸 다음 참빗으로 훑되 천 번이나 훑어내니 이는 벌써 없어졌네 어떻게 하면 만 길 되는 큰 빗 구하여 백성의 이 모조리 훑어 없앨꼬
선비가 자신도 모르게 뜰 아래 내려가 절하고 그 이름을 물으니 숨기고 알려 주지 않았다. 이튿날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두세 사람이 같이 다시 찾아가 보니, 집은 그대로 있었으나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성혼의 만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성혼(자 호원) 선생이 청양군(심의겸)을 애도한 시에,
속세에 벼슬살이 진정 뉘가 참인고 여관에서 만나니 바로 친구일레 오늘의 이별 자리 한 가락 노래로 고향 봄동산에 가서 누울 그대 전송하네
하였으니, 이른바 길게 읊는 가락의 서글픔이 통곡보다 더하다는 게 바로 이것이 아닌가?
성혼(호 우계)은 창녕 사람이다. 벼슬은 참찬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간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심의겸(자 방숙, 호 손암)은 청송 사람으로 벼슬은 대사헌에 이르렀다.
차천로의 웅장한 글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차천로(자 복원)의 글은 당시 사람들이 웅장한 문장이라 일컬었다. 글이란 기운으로 주를 삼아야 하건만 차천로는 하찮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았고, 사륙변려문은 전아해야 하는데도 그의 사륙문은 순정치 못하고 거칠다. 시는 그보다 더 못하다. 그의 일본 기행 원고가 매우 많아 천여 수나 되지만 읊을 만한 구절은 하나도 없다. 다만 명천으로 귀양 갈 때 지은,
하늘가에 성난 소린 발해의 파도 눈 속에 시름겹긴 음산의 빛이로다
라는 구절은 정말 웅혼하다. 그러나 전편이 다 그렇지는 못하다. 만약 복원이 조금만 사리를 추구하여 많이 짓거나 빨리 짓는 데 치우치지만 않았다면 고인의 경지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차천로(호 오산)는 연안 사람으로 벼슬은 봉정이다.
차천로가 "이필이 형산으로 돌아가기를 비는 표"를 지었는데,
객성이 임금 자릴 여러 번 침범하고 늘 경월이 궁궐 문을 두드렸네
라는 구절이 있어 세상에서 적절하다고 일컬었다. 나의 둘째 형이 상주 목사로 가는 윤칠계(윤탁연)를 보내는 시의 셋째 넷째 구절에 역시,
경월이 잠시 대궐을 하직하자 복성이 먼저 낙동강을 비추누나
라는 구절이 있으니, 차천로의 표에 비하면 나은 것 같다.
윤탁연(자 상중, 호 중호)은 칠원 사람으로 벼슬은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헌민이다.
한준겸의 재치 있는 대구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한익지(한준겸)가 어떤 일로 파직되어 농사를 짓기로 하고 온 식구가 원주로 내려갔다. 배가 종실 순치수의 별장에 닿았는데, 순치수가 마침 활을 쏘고 약초를 캐던 터라 사람을 보내 누구냐고 물어왔다. 한준겸은 대답하지 않고 절구 한 수로 대신했다.
공자의 풍류가 무리에 뛰어나니 봄이 오자 살구꽃 마을에 낚시질하네 쪽배 탄 나그네가 정겹게 문안드리니 이 사람은 금천의 옛 원이라오
순치수가 배를 타고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그때 한준겸은 금천 군수로 있다가 파면되어 가는 중이었고 순치수는 금천에 은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한준겸(호 유천)은 청주 사람으로 벼슬은 영돈녕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익이며 인조의 장인이다.
이달의 기녀와의 일화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이익지(이달)가 최가운(최경창)을 따라 영광에 노닐 적에, 사랑하는 기생이 있어 자줏빛 비단을 사 주려는데 그 비단 살 돈을 마련할 수 없어 이달이 시로써 다음과 같이 빌었다.
장사아치 강남 저자에서 비단을 파니 아침 해가 비치자 자줏빛 안개가 피어나는구나 미인은 그걸 사서 치마며 허리띠를 만들려는데 주머니 더듬어야 돈은 없구려
최경창이 말하기를, "손곡(이달)의 시는 한 자가 천금이니 감히 비용을 아끼랴" 하고는 한 자에 각각 세 필씩 쳐서 그 요구에 응해 주었으니, 그 재주를 아낌이 이와 같았다.
동파(소동파)의 시에,
슬프다, 사하 물가 십 리의 봄 한 차례 꽃 이울자 다음 꽃 새로워라 비낀 저녁놀에 작은 누각 예 같건만 그 당시 춤추던 이 어디 갔는지
라는 것이 있는데, 손곡(이달)이 죽은 아내를 슬퍼한 시에도 또한 동파의 말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깁 방장엔 향내 가시고 거울엔 먼지 닫힌 문엔 복사꽃만 쓸쓸한 봄날 작은 누각엔 옛날처럼 달은 밝은데 발 걷고 달 즐길 이 그 누구런가
이 시는 무르녹게 곱고 정겨워 옛사람의 말을 그대로 쓴 줄도 모를 정도다. 이달이 기생을 너무 좋아한다고 남에게 비방을 받으면서도 정에 끌린 것이 이러하단 말인가.
기녀에게 준 시가 명성을 좌우한 이야기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당나라 장우와 최애가 기생집에 시를 지어 주었는데, 만약 칭찬을 하면 네 필 말이 끄는 수레가 그 문을 메웠고, 그 시가 기생을 헐뜯으면 손님도 끊겼다. 신차소 선생이 상림춘이라는 기생에게 준 시에,
제오교 머리에 내 낀 버들 비꼈고 밤들자 바람 자고 날씨도 해맑아라 노르스름한 열두 난간에 아가씨 옥과 같으니 대궐 안 시인들도 말 가는 대로 찾아드네
라 하니 기생의 명성이 이로 인해 열 배나 올랐다. 이달이 옥하선이란 기생을 비웃기를,
빗자루 같은 머리털 그나마 센데다가 암말 않고 앉은 꼴 귀신 같구나 몸에 걸친 비단옷도 얻어 입은 듯 고작해야 곽충륜에게나 시집가겠군
이라 하였다. 곽충륜은 장님인데 돈은 있었다. 이 기생은 유명했었으나 이달의 시가 나오자 문득 그 집이 쓸쓸해졌다. 똑같이 이름난 기생이로되 한 편의 시로 그 값을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있었으니, 어찌 다만 기생뿐이겠는가? 대개 선비도 이와 같았다.
신종호(자 차소, 호 삼괴)는 고령 사람이다. 벼슬은 예조 참판에 이르렀는데 연경에 사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송도에서 죽었다.
삼괴의 "봄을 슬퍼하며"라는 절구에,
한 사발 차 마시자 졸음 막 깨니 이웃에서 들려오는 붉은 옥피리 소리 제비도 오잖고 꾀꼬리도 날아갔는데 뜰에 가득 붉은 꽃잎만 지네, 소리도 없이
라는 시가 있다.
임제의 익살, 이달의 애민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임자순(임제)은 스스로 소치(웃음거리 바보)라 호하였다. 둘째 형이 언젠가 기생들의 고사를 모아 글을 지었는데, 화치의 고사를 따서 이십사령을 지었다. 임제가 칠언시로 제하기를,
추리고 가린 명기 스물넷인데 소치의 차지는 하나도 없네 인간 만사 다 거짓이라고 곳곳마다 풍류랑은 소치라 말들 하네
라 하였는데 그의 글은 흔히 볼 수가 없다. 이른바 "수성지"라는 것은 문자가 생긴 이래로 특별한 글이니, 천지간에 절로 이런 문자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이달의 시를 세상 사람들은 기생에 대한 실수 때문에 트집을 잡지만, 그의 "동산역"이라는 시에,
이웃집 어린 며느린 저녁거리도 없어 비 맞으며 보리 베어 풀섶길로 돌아오네 축축한 생솔가지 불도 안 붙는데 문 들어서자 어린 것들 옷 잡고 칭얼대네
라 하였으니, 시골 살림의 식량 딸리는 보릿고개 실정을 직접 보는 듯하다. 그의 "이삭줍기 노래"에는,
논에서 이삭 줍는 어린이 하는 말 온종일 이리저리 주워도 소쿠리도 안 차요 올해는 벼 베는 이 솜씨 하 좋아 한 톨이라도 흘릴세라 관아 창고에 다 바쳤대요
라 하였으니 흉년에 시골 사람의 말을 마치 친히 듣는 듯하다. "영남 가는 길에"라는 시에서는,
영감은 솥 지고 숲길로 가 버렸는데 할멈은 어린 것을 데리고 따라가질 못하네 사람 만나 떠돌아다니는 괴로움 넋두리하되 종군하기 육 년이라 부자도 이별이라오
라 하였으니, 부역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살 수 없어 떠돌아다니는 모습이 한 편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이 시를 보고 가슴 아파하며 놀라 깨달아, 고달프고 병든 자를 어진 정치로 잘 살게 한다면 그 교화에 도움됨이 어찌 적다 할 것인가. 문장을 지음이 세상 교화와 관계가 없다면 한갓 짓는 데 그칠 뿐일 것이니, 이러한 작품이 어찌 그저 아름다운 말재간보다 낫지 않겠는가.
이주와 이원의 이별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이망헌(이주)이 진도로 귀양 갈 때 이낭옹(이원)을 작별하는 시에,
바닷가 정자에 가을밤도 짧은데 이번 작별에 새삼 무슨 말 할꼬 궂은비는 깊은 바닷속까지 연하였고 험상궂은 구름은 변방에까지 이었네 흰 구레나룻에 파리한 안색 두려운 눈물 자국 적삼에 그득 이소경의 말을 가지고 그대와 꼼꼼히 따질 날 그 언제런가
라 하였다. 그가 제주도로 옮겨 갈 때 배가 막 뜨려는데 친동생이 뒤쫓아 왔다. 떠나면서 시 한 수를 읊어 작별하기를,
찌걱거리는 노 굳이 멈추고 한평생을 서러워하니 밝은 해는 밝게밝게 우리 형제를 비추네 정위새 와서 바다를 메우기만 한다면 한 덩이 탐라도를 걸어서도 가련만
하였으니 천 년 뒤에도 읽는 이의 애를 끊어지게 하리라. 김경림(김명원)이 나의 형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원(호 재사당)은 경주 사람이다. 벼슬은 예조 정랑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장류되었고 갑자년에 원통하게 죽었다. 이주(호 망헌)의 아우 이려(자 홍재)는 벼슬이 수찬에 이르렀다. 김명원(자 응순, 호 주은)은 경주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익이다. 나의 큰형 허성(자 공언, 호 악록)은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망헌의 "우연히 짓다"라는 시에,
나이 드니 풍상은 두렵기만 하고 짓궂은 병은 더욱 떠날 줄 모르는데 외로운 처마 아침 해에 포단에 앉았네 이웃 중이 가 버린 뒤 사립 다시 닫았는데 산구름만 돌난간을 스쳐 지날 뿐
이라는 것이 있다. "스님에게 부친다"는 시는 또 다음과 같다.
종소리는 달을 두드려 가을 구름에 지고 산비는 주룩주룩 그대는 안 보이네 염정은 닫히고 불길만 보이는데 개울 너머 인기척 밤깊도록 두런두런
한호와 시마에 걸린 이현욱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한호(자 경홍)는 글씨를 잘 쓸뿐더러 시도 잘 지었다. 그러므로 한경당(한세능)·등북해(등계달)·황규양(황홍헌)이 모두 그를 시인으로 대접했다. "임궁아집시"를 한호에게도 운을 화답하게 하였으니 중국인이 그를 중히 여기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언젠가 《봉주집》을 보니 한 태사의 "동행록"에 발문을 지은 것이 있는데, 거기서 한석봉(한호)의 글씨를 칭찬하되 편액 글씨는 양속보다 나아서 성난 사자가 돌을 후벼 대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였고, 해서는 왕헌지와 비슷하고 초서는 바로 회소와 같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를 잘 알아주었다고 하겠다.
근세에 이현욱이라는 이가 있어 시마(시귀신)에 걸렸는데 아계 이산해 상공은 그런 줄도 모르고 굉장히 칭찬을 했다. 이달이 어느 날 상공을 뵈러 가니 상공은 이현욱의 시를 보여 주며 고하를 품평하게 했다. 그러자 이달은,
봄이 오는 걸음걸인 느릴 것도 없고 서두는 것도 아닌데 봄빛은 동서남북으로 고루 비치네
라는 구절을 들어, "이것은 정말 문장가의 말투입니다. 우리나라 서씨·이씨 같은 분도 일찍이 이런 말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나이도 어리니 필경 시마가 붙은 것입니다" 하였지만, 상공은 그렇게 여기질 않았으나 얼마 있다가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그가 허영주에게 차운한 시에,
봄 산길 외져 돌아가는 나무꾼에게 물으니 손가락으로 앞산 돌길을 가리키네 중도 흰 구름도 어두운 골짜기로 돌아간 뒤 달은 푸른 바다 찬 밀물을 따라 오르네 세상살이 늙을수록 도무지 믿을 수 없는데 유흥만은 요즘에도 삭을 줄 모르누나 둘러보니 외로운 배 벌써 자취 아득한데 물 건너 드문 종소리만 한밤에 은은해라
라 하였고, 이달에게 차운한 시는 다음과 같다.
바람에 휘몰려 놀란 기러긴 편편한 모래밭에 내려앉고 물맵시 산빛엔 어스름 빛 자욱해라 화가시켜 이 경치 그림폭에 옮기려 하는데 고깃배의 젓대 소린 이를 어쩐다지
말들이 모두 속기가 없고 격이 또한 노숙하다. 시마가 떠난 뒤로는 일자무식이 되어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이산해(자 여수, 호 아계)는 한산 사람인데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다.
정백련에게 붙은 시귀신 요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정용의 아들 정백련이 일찍이 중풍에 걸렸는데 하루는 스스로 말하기를, "어떤 젊은 서생을 만났는데 연꽃 관을 쓰고 용모는 옥설 같았다. 그는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당나라의 선비 요개로 이장길(이하)과 친한 친구 사이인데 안탕산에 산 지 이백 년이 되었다. 조선의 산천이 가장 아름답다기에 한라산으로 옮겨 산 지도 천 년 가까이 되었다. 다시 금강산으로 가려고 하다가 자네와 인연이 있으므로 삼각산에 와 살게 되었다. 그런 지도 벌써 삼십 년이 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여기에 왔다'고 했다" 하였다. 그의 시는 다음과 같다.
만리라 큰 바다에 날은 저문데 벽도꽃 그림자 하늘문에 비치네 신선 수레 한 번 쉬면 천 년이 훌쩍 지난다던데 구령의 신선 피리 소리 한밤에 들리누나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삼각산에 깃든 지 삼십 년인데 남녘 구름 바라보며 늘 울었네 솔바람 소리는 용의 울음만 못한데 기러기 소리는 또 삼릉의 학만 못하도다 삼릉의 학은 오지를 않고 촉도봉 앞엔 가을 달만 어둡구나
어떤 이가 "기러기"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난초가 시들 무렵이면 철새인 기러기가 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렇게 한 해 남짓 지나더니 시마가 떠나자 병도 나았다. 이현욱의 시마는 장편 대작도 다 지을 수 있었고 산문도 다 원숙했는데, 정백련에게 걸린 시마는 격은 이현욱보다 나았지만 율시는 절구에 못 미쳤으니, 하물며 그 문장이야 말할 게 있겠는가. 요개의 이름은 전기나 소설에도 보이지 않으니, 혹 당나라 말기에 절구로 이름난 이가 아닌가 한다. 나의 둘째 형은 그의 오언 절구를 사랑하여 성당에 못지않다고 여겼다. 그가 노산군(단종)의 옛집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사람은 복사꽃 핀 강 언덕을 지나가고 말은 버들에 스치는 바람 소리에 운다 노을진 산 그림자 속에 노산군댁은 쓸쓸도 하여라
"청명날 남에게 주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이월이라 제비가 바다를 뜨니 고을마다 꽃이 가득할 때로다 청명이면 으레 취한 지도 올 들어 하마 삼십 년일세
"늦봄"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봄잠 자고 나서 술잔 따르니 걷은 발 앞에 꽃이 흩날리네 덧없는 인생 얼마나 살리 비 내리는 하늘을 창연히 바라보네
"가을날"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국화는 빗속에 꽃 드리우고 뜨락의 오동잎은 가을에 놀래누나 오늘 아침 갑절이나 서글퍼짐은 어젯밤 시골 꿈을 꾸어서일세
"거문고 소리를 듣다"라는 시는 이러하다.
아름다운 여인 붉은 비파를 끼고 삐비 같은 섬수를 희롱하누나 갑자기 유수곡 타니 집이 고릉 서녘에 있네
이달이 또,
밝은 달은 큰 바다 저문 줄도 모르고 구의산 기슭엔 흰 구름만 자욱
이란 구절을 전해 주었는데, 이런 구절은 이미 꿈의 경지에 든 것이다. 정백련의 아우 정감은 나와 절친하므로 상세한 얘기를 갖추 들었다.
정용(호 오정)은 해주 사람이다. 시로 세상에 알려졌으나 일찍 죽었다. 정감(호 삼옥)은 벼슬이 정랑에 이르렀다.
강릉 지역 인물들에 대한 자부심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강릉부는 옛 명주 땅인데 산수의 아름답기가 우리나라에서 제일이다. 산천이 정기를 모아가지고 있어 뛰어난 인물이 가끔 나온다. 국초의 함동원(함부림)의 사업이 역사에 실려 있고, 참판 최치운 부자의 문장과 절개가 또한 함동원만 못지않다. 매월당(김시습)은 천고에 동떨어지게 뛰어났으니 온 천하에 찾아보더라도 참으로 찾아볼 수 없으며, 원정 최수성 또한 뛰어난 행실로 일컬어지고, 중종 때 어촌 심언광과 최간재(최연)의 문장이 세상에 유명하다. 요즘 이율곡(이이) 또한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 나의 둘째 형과 누님 또한 강릉의 정기를 받았다 할 수 있다. 현재는 최운보 이후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없어 뛰어난 인물이나 문인을 만나기 쉽지 않다. 그런데도 과거한 선비를 전혀 볼 수 없으니, 또한 극히 성했다가는 쇠해지는 것이 만물의 이치인가 보다.
함부림(호 난계)은 강릉 사람인데 벼슬은 대사헌이고 시호는 정평이다. 최치운(자 백경, 호 경호조은)은 강릉 사람인데 벼슬은 이조 참판이다. 그의 아들 최응현(자 보신, 호 수재)은 벼슬이 대사헌이다. 최연(호 간재)은 강릉 사람인데 벼슬은 참찬이고 시호는 문양이다. 최운보(자 대중)는 최연의 당질이다. 아버지 최해는 벼슬이 한림이다.
강릉부에서 구경할 만한 곳으로는 경포대가 으뜸이요 한송정이 다음간다. 이곳을 구경하는 사신이 하도 많은데도 사람 입에 전파된 아름다운 구절이 하나도 없으니, 이 어찌 묘사할 절경이 너무나 무궁해서가 아니겠는가. 두보나 맹양양(맹호연)이 이 경치를 본다면,
오와 초는 동남으로 트였고 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들뜬 듯하구나
라든지, 또,
운몽택엔 기운이 찌는 듯 파도는 악양성을 뒤흔든다
등의 구절이 반드시 현판에 걸렸을 터인데, 우리나라 인재는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또한 알 만하다.
명나라 시인 여민표의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명나라 사람 산동 참의 여민표(자 유경)는 시를 잘하였다. "장 시랑의 훌륭한 맏아들 초보에게 부치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온 냇벌엔 백 번 이상 싸운 자취 나그네 시름과 이운 풀은 한결같이 스산하다 쓸쓸한 산 오래된 역에선 말 탄 가을 손을 만나고 먼 숲과 가물대는 불빛은 밤낚시로다 땅이 소상강에 가깝고 보니 저녁 비는 늘 내리고 분포에 기러기는 온다만 고향 소식 드물구나 벗은 정녕 아득한 하늘가에 있거니 안개 낀 물가에 서글퍼 정처 없어라
이 시가 우리나라에 퍼져서 《송계만록》에는 나 장원(나만화)의 시로 실려 있는데 글자가 잘못된 것이 많으니, 송계(권응인)는 전하는 사람의 말을 들었을 뿐이기에 착오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명·중국 문장가들과 우리나라 문형의 비교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명나라 사람 중 글로 이름을 날린 십대가는 공동 이헌길(이몽양)·양명 왕백안(왕수인)·형천 당응덕(당순지)·좨주 왕윤령·안찰 왕신중·심양 동분·녹문 모곤·창명 이반룡·봉주 왕세정·남명 왕도곤인데, 이몽양은 오로지 서한 시대의 문장만 본받고, 왕세정·이반룡은 난삽한 글귀로 선진 시대를 앞지르고자 하고, 왕도곤은 화려하고 건실하며 동분·모곤은 평이하고 원숙하며 왕신중은 풍부하다. 그러나 명나라 사람은 모두 이를 역겹게 여기며 진부하고 속되다고 한다. 나의 의견도 거의 같다.
왕수인은 문장을 전공하지 않고 학문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박잡함을 면치 못하고, 당순지는 전아하고 순실하여 모두 대가가 될 만하다. 왕세정의 무리가 명나라 사람의 문장을 서한에 비기고, 이몽양을 태사공(사마천)에게 비기고, 이반룡은 양자운에게 비기고, 자기는 사마상여에게 비겼으니 그 자기 자랑이 너무도 심하다.
우리나라의 김종직·남곤(호 지정)·김정(호 충암)·노수신(호 소재)의 글은 명나라 십대가 속에 넣어 동분이나 모곤에게 비긴다면 그다지 못할 것 없으나, 중국에서 팔을 휘두르고 뽐낼 수 없음이 안타깝다.
김종직(자 계온, 호 점필재)은 선산 사람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충이다. 점필재가 제천정 운에 차운한 시에,
꽃을 흩날리고 버들을 꺾는 반강 바람에 돛그림잔 석양 기러기를 진 채 건드렁거린다 한 조각 고향 생각에 부질없이 기둥에 기대니 흰 구름만 날아서 술 실은 배를 스치는구나
라 하였고, "보천탄 즉흥"이란 시에는,
복사꽃 필 때 이는 파도 그 몇 자런가 은빛 바윈 이마까지 묻혀 보이도 않는구나 쌍쌍이 나는 가마우지 옛 놀던 자갈밭 잃고는 물고기 입에 문 채 줄과 부들 속으로 날아드네
라 하였으니 참 좋다.
조선과 명나라의 시 잘하는 이들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명나라 사람으로서 시로 이름난 이로는 대복 하경명·공동 이몽양이 있어 사람들이 이백·두보에 비긴다. 한 시대에 잘한다고 칭도된 자는 화천 변공과 박사 서정경·태백 손일원·검토 왕구사인데, 하경명·이몽양의 장편칠률은 근체·고체를 다 잘 쓴다. 이반룡·왕세정 역시 이대가라 일컬어지며, 오국륜·서중행·장가윤·왕세무·이세방·사진·여민표·장구일 등이 모두 나란히 달려 앞을 다투었다.
우리나라의 김종직·김시습·박은·이행·김정·정사룡·노수신 등의 작품이 비록 하경명·이몽양·왕세정·이반룡에게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어찌 오국륜·서중행 이하 사람에게야 뒤지겠는가. 그러나 칠자로 더불어 중국에서 서로 겨루지 못함이 한스럽다.
박은(호 읍취헌)은 고령 사람이다. 벼슬은 수찬이다. 열여덟 살에 문과에 급제하고 1504년(연산군 10년)에 사형되었다. 그때 나이는 스물여섯이었다.
요즘 중국인의 문학은 서경(전한)의 시조인 두보를 숭상하기 때문에, 두보의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고니를 새기다가 집오리를 만드는 셈은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문은 삼소(소순·소식·소철)를, 시는 황정견·진사도를 배우므로 저속하여 취할 게 없다. 시 잘한 최경창·백광훈·임제·허봉은 모두 일찍 죽고, 다만 이달 한 사람이 있을 뿐인데 이달은 비방이 산더미 같으니 세상이 너무도 재주를 아끼지 않는다.
명나라 명사들과 조선 문형의 쇠퇴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중국 근래 명사로 글 잘하는 이 중에 요천 신시행·영양 허국·동록 여유정·상서 육광조·사업 원응기·강주 나만화·시랑 심일관·규양 황홍헌·백담 손계고·태사 심무학·곤명 위윤중·태사 이정기가 더욱 두드러지고, 글을 잘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길 만한 이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옥당 벼슬을 하는 사람도 눈으로 흔한 글자를 구별 못하며, 임금의 글을 짓는 벼슬을 띠고 있는 사람도 사륙변려문에 익숙지 못하여 심지어는 잘하는 이에게 대신 짓게 해서 자기 직책을 메워 가기까지 하니, 남의 의론이나 추종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다. 고평을 하는 이도 또한 그 이름만 따라 등수의 고하를 매기니, 조선에는 신시행·허국의 무리를 바라볼 만한 사람도 없거든, 하물며 중국의 칠자와 재주를 겨룰 수 있겠는가.
대개 명나라 사람은 학문을 애써 쌓아서 문과에 오른 사람도 등잔불을 켜 놓고 새벽까지 글을 읽어 늙어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 시문이 모두 혼후하고 기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의 경우는 문구나 잘 꾸며서 과거를 보는데, 과거에 붙게 되면 곧바로 책 버리기를 원수같이 한다. 우리나라가 예전에는 문헌으로 일컬어졌는데 이제 와서는 어찌 이다지도 미약하단 말인가. 이 어찌 윗사람이 장려하고 이끌어 성취시키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아니면 혹 세상이 말세가 되고 풍속이 저속해져서 인재가 옛날에 미치지 못해서인가?
그러나 사람마다 다 요순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인데, 하찮은 하나의 기예를 어찌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포기하여 진력하지 않을 것인가. 애써 공부를 계속하면 옛사람에게 미치기도 어렵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중국의 칠자라든지 신시행·허국 따위일까 보냐. 우선 이것을 써서 스스로를 경계한다.
선친의 가르침과 정임당 상공의 일화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선친께서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 사람은 중국의 옛 역사만 전공하여 우리나라 사적은 알지 못하니 근본을 힘쓰는 도리가 결코 아니다" 하셨다. 그러므로 두 형과 나는 모두 《동국통감》을 읽었다. 그러나 젊었을 때는 읽을 만한 책이 하도 많은데 하필 이것을 읽을 것이 무엇인가 생각했었다. 그러다 황 조사(황홍헌)가 태평관에 이르러 관반인 정임당(정유길) 상공에게 고려와 신우(우왕) 부자의 내력을 묻자 정 상공이 입만 벌리고 대답을 못하니, 나의 둘째 형이 들어가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선친의 높은 견식이 여느 사람보다 매우 뛰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아, 재주가 임당 같은 분으로서도 중국 사신과 문답할 때 곤욕을 당했으니, 사신의 접반관이 되어 본국의 일을 몰라서 되겠는가.
정유길(자 길원, 호 임당)은 동래 사람이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정유길의 "사제극성"이란 시에,
성조에선 죽은 이에게도 은혜 베푸사 해마다 쓸쓸한 담장에 제사를 내려주시네 제사 마친 단 위엔 비바람도 잦아지고 흰 구름만 바다인 양 앞 마을에 자옥해라
라 하였고, "영유 이화정"이란 시에는,
꽃샘 비바람은 옛 시에도 있거니와 올봄 꽃은 공교롭게도 늦장부리네 꽃 필 때 되면 응당 달이 있겠고 그중의 봄빛 자규야 알고말고
라 하였으며, "몽뢰정 봄맞이 첩자"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선대의 백발 판서 한가컨 분망컨 깜냥대로 편안했네 고기잡이 영감 봄강이 따사롭다면서 꽃도 피기 전이건만 쏘가릴 진상하네
최부의 표류기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최부(자 연연, 호 금남)는 나주 사람이다. 문장에 능하여 문과와 문과중시에 거듭 급제하여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제주도에 추쇄경차관으로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바다를 건너오다 풍랑을 만나 표류한 지 사십 일 만에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 우두 바깥바다에 배가 닿게 되었다. 당두채 천호가 왜구라 무고하였으나 최부가 질문에 척척 응답하였으므로 화를 모면하였다. 항주에 이르자 삼사관이 본국의 역대 흥망과 군현의 설치, 산천·예악·인물에 대해 매우 꼼꼼히 물었으나 최부의 대답이 마치 대를 쪼개듯 정확하므로 삼사관이 모두 감탄하였다.
돌아오자 성종이 일기를 쓰도록 명하므로 이를 써서 바치니 모두 세 권이다. 최부의 시는 흔히 볼 수 없는데, "송사를 읽다"라는 시에,
등잔불 돋우고 다 읽고 나선 문득 긴 한숨 짓노니 중국 천지엔 대장부랄 사람 하나 없구나 삼백 년 내려온 중국 전토를 어쩌자고 늙은 선우에게 내어 주었나
하였다. 시가 침착하고 노련하니 그 사람됨을 짐작할 만하다.
최부는 벼슬이 사간인데 1504년(연산군 10년)에 처형되었다.
성종 때 정의 현감에 이섬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최부보다 앞서 역시 풍랑으로 표류하여 양주부 굴항채에 닿으니, 채관이 가두고 상부에 아뢰어 문초하게 하였다. 이섬이 옥중에서 지은 시에,
열 폭짜리 돛폭은 바람도 못 가리고
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책임자가 보고 그가 해적이 아님을 알아 잘 대우하여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섬은 무인이라 전할 만한 여행 기록이나 기사가 없어 애석하다.
표류자들에 얽힌 여러 일화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1572년(명종 17년) 간에 호음(정사룡) 상공의 이웃 사람으로 해상 무역을 업으로 하는 자가 풍랑으로 표류하여 절강성 영파부에 닿자, 지부에서는 호패를 근거로 신원을 확인하고 북경으로 보냈다. 북경 가는 길이 공 천사(공용경)의 집을 지나게 되었다. 공씨는 그때 국자감 좨주로 벼슬을 사직하고 집에 있었다. 조선 사람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역관에게 청하여 길을 늦추어 상인과 이야기를 나눈 결과, 상인이 호음의 가계와 벼슬 지낸 경위를 말하자 공씨가 크게 놀라 데리고 집으로 가서 처자를 나오라 하여 인사시키고, 호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또 후히 대접하여 보냈으니, 공씨가 호음에게 심복함이 이와 같았다.
장흥 사람 이언세가 왜인에게 사로잡혀 남쪽 오랑캐 땅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배를 타고 밤낮 사십 일을 가서야 중국의 광서 향산현 땅에 닿았다. 그는 한 배에 탄 중국 상인에게 물어서 그곳이 명나라 지방인 것을 알았다. 그는 동행자와 함께 밤을 타 도망쳐 그 지방 지현에게 호소하니 지현이 처음에는 오랑캐가 올린 소장이라고 팽개쳐 버리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며칠을 울부짖으니 그제야 조사 심문하였다. 이언세는 글을 좀 알았는데 "조선국 장흥 사는 사람으로 해전을 하다가 왜적에게 사로잡혀 오랑캐 배에 넘겨졌다"고만 썼다. 그것을 본 지현이 남웅부에 압송하니 삼사관이 그 문초에 의거 북경으로 이송했다. 그때 마침 동지사가 북경에 도착하였으므로 그 사행과 같이 돌아오게 되었다. 이언세는 남창과 항주·소주의 풍경이며 북경·남경의 훌륭한 경치를 말하기는 하나 자세하지는 못하다.
승지 이정립이 지은 "표류된 사람들을 돌려보내 준 데 감사하는 표"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만 이랑 파도 헤치고 빛나는 요임금 땅에 나아갔다가 천 리라 고향 땅에 돌아오게 되었으니 우임금 같은 임금 아니었던들 고기밥 되었으리
이 글은 대구가 적절하고 뜻이 좋다. 전편을 볼 수 없음이 섭섭하다.
이정립(자 자정, 호 계은)은 광주 사람으로 벼슬은 이조 참의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희이다.
1591년(선조 24년) 겨울에 중국 상인 스무 명 남짓이 사탕을 팔다가 우리나라 제주도에 표류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왔었다. 내가 친구와 같이 가서 보고 소주와 항주의 풍속을 물으니, 그중 한 사람이, "당신은 외국 사람으로서 어떻게 중국 풍토를 역력히 아십니까?" 하였다. 그중에 장덕오란 사람이 있어 자기 말로 복건 장포 사람이라 하기에, 내가 시랑 장국정과 시랑 주천구가 당신의 이웃인가고 묻자 장덕오가 놀라며, "장 시랑은 저의 당숙이고 주 시랑은 한 동네 사람입니다" 하였다. 내가 또 "그러면 태사 장이풍과 어사 장이명은 당신 사촌 형제이겠구려" 하자 장덕오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희끼리 이야기하며 껄껄대고 웃었다. 역관이 말하기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기를 "수재가 나이 젊어도 중국의 일을 잘 안다고 하더라"고 했다. 왕신민이라는 자가 나에게, "무슨 벼슬이요?" 하고 묻기에 무자년에 과거하여 국자감생이 되었다 하니, 왕씨가 "언제 추천되지요?" 하고 물었다. 대개 중국에서는 국자감 학생이 으레 이부에 추천되기 때문에 그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이다.
임진왜란 의병장들과 승려들의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학관 양대박은 시를 잘하며 순평하고 전아하였다. 일찍이 자기의 한 연구를 자랑하였는데,
산귀신은 밤마다 금정불을 엿보고 물새는 가을이라 석당 연기에 잠들었네
하였으니 시구가 절로 좋다.
양대박(자 사진, 호 청계)은 남평 사람으로 벼슬은 학관이었다. 임진년 왜란 때 고제봉(고경명)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고 무기며 군량을 모두 자기 집에서 대었다. 군중에서 병으로 죽자 병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를 충장으로 내렸다.
상사 정지승이 시를 잘했는데 임자순(임제)의 무리가 몹시 추앙하였다. 세상에 전하는 한 편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돋아나는 풀잎 속에 왕손의 한 스며들고 피어나는 꽃잎따라 두견이 시름을 더하누나 물가엔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바람에 목란배만 일렁이누나
"스님을 전송하다"란 시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서에서 돌아오고 나는 또 서로 가니 봄바람 한 지팡이 가는 길은 높고 낮네 그 언제 달 밝은 밤 소요사에서 동녘 숲 두견이 울음 함께 들을꼬
또 한 연은 다음과 같다.
손이 돌아가자 문을 닫으니 남은 건 달빛뿐 꿈 깨자 빈 산엔 흩어지느니 솔바람 소리
그 전집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정지승(자 자신, 호 총계)은 온양 사람으로 정렴의 조카이다. 벼슬은 하지 않았다.
송익필이란 자도 시를 잘하니 그의 "산속의 눈"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밤새도록 내린 찬 눈 층대에 수북 쌓였는데 다른 산에 묵은 주지승 돌아오질 않았네 등잔불 깜박이는 작은 절집 신령한 바람 고요한데 소나무 스쳐오는 밝은 달 홀로 보네
구법이 맑고 뛰어나니 사람의 신분이 미천하다 하여 어찌 그 좋은 말까지 무시할 것인가.
송익필(자 운장, 호 귀봉)은 흉인 송사련의 아들이다. 본디 천민의 자식이나 문학의 조예가 뛰어나서 우계 성혼, 율곡 이이와 서로 친했다. 아우 송한필(자 사로, 호 운곡)도 시를 잘했다. 송익필의 "저물녘 남계에 배를 띄우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꽃에 홀려 돌아오기 하마 늦었고 달 뜨기 기다리다 여울 내려오기 머뭇거렸네 거나한 가운데도 낚싯대 드리우니 배는 흘러가도 꿈은 그대로
송한필의 "우연히 읊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어제 비엔 꽃이 피더니 오늘 아침 바람에 그 꽃 지는구나 애닯다 한 철 봄이 비바람 속에 오고 가누나
최전의 신동 시절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최전(자 언침)이 신동이란 이름이 있었다. 어려서 금강산에 노닌 적이 있었는데 그 길로 영동 산천을 구경하고 경포대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봉래산 한번 들어 삼천 년을 은바다 아득아득 물은 맑고 얕아라 난새 타고 피리 불며 오늘 홀로 날아왔건만 벽도화 꽃 그늘에 님은 아니 보이네
둘째 형이 그 시를 매우 칭찬하고 그 운자에 이어 읊기까지 하였는데, 그는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최전(호 양포)은 해주 사람으로 진사였다. 양포의 "늙은 말"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늙은 말 솔뿌리 베고 누워 꿈결에 천 리 길 가네 가을바람 나뭇잎 지는 소리에 놀라 깨니 지는 해가 뉘엿뉘엿
"물고기 뱃속 등불에 제하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멱라수는 흘러 흘러 끝이 없는데 굴원은 불평을 원망했네 지금 물고기 뱃속에서도 속마음 밝은 것은 간직했겠지
금각과 이성윤의 재주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금각(자 언공)은 봉성 사람이다. 둘째 형에게 열두 살 때 글을 배워 육경을 통하고 제자백가서와 역사서를 두루 읽지 않은 게 없었다. 글 짓기를 전중하고도 온화하고 아름답게 하여 이미 작가가 되었는데, 그의 "조대기"·"주류천하기"·"한발문" 등의 글이 세상에 전한다. 열여섯 살에 해외에 유학하였다. 뱃속에 벌레가 생기는 병을 얻어 집에 있으면서 《풍창랑화》를 지으며 심심풀이로 세월을 보내다가 1588년(선조 21년) 가을에 죽었다. 죽는 날 스스로 명을 짓기를, "봉성 사람 금각, 자 언공은 아홉 살에 글을 배우고 열여덟 살에 죽는다. 뜻은 원대하나 목숨은 짧으니 운명이로다" 하였고, 또 다음과 같이 만사를 지었다.
아버님 어머님 나 때문에 울지 마세요
《조대집》 4권이 있다.
종실인 이성윤(자 경실)은 우리 둘째 형에게 글을 배웠다. 그의 시는 온정균과 이상은을 숭상하여 그들의 시풍을 터득하였다. 그의 "향렴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부용성 밖 예주궁에 난새 수레로 허 시중을 맞네 앵무부는 달 밝은 밤에 읊조리고 숙상 갖옷은 비단 병풍에 걸려 있네 추운 비단 방장엔 향로까지 곁들였고 꿈 깬 은등잔엔 등화가 맺혔네 앵무새에 말 전하노니 자주 손을 물리쳐서 운우의 정 총총히 흩어지게 말아다오
"달을 읊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운모병풍 썰렁하고 아름다운 방장 비었는데 옥같은 달에 이슬만 함초롬 맺혔구나 항아가 장생약이야 얻었다 한들 해마다 홀로 사는 애달픔 어쩌지
자못 부귀롭고 아름다운 운치가 있다. 임진왜란에 어버이를 하직하고 임금을 호종하기에 갖은 고생을 다하였으니 배운 바 정신을 저버리지 않았다 할 만하다.
이성윤(호 매창)은 성종의 4세손이요 왕자 익양군 회의 증손이다. 그 아버지는 청원도정 이간이다. 시호는 충정이다.
양정집과 박엽의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양정집은 호남 사람으로 나이 열 살에 글을 잘 써 고향에서 신동으로 소문났었다. 스님에게 보내는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노닥노닥 기워 입은 한 늙은 영감 지팡이 의지하여 바위 아래 서 있어 머리 돌려 뭔지 기다리는 듯하니 필경 동해바다 달일 테지
어린 나이에 임금의 잔치에도 초대받았었으나 불행히 세상을 떴다.
근세 선비들은 예를 병으로 여기고 다만 허무를 말하고 욀 뿐만 아니라 술에 취한 채 수레를 타고 태연히 거리를 나돌아다니며 조금도 꺼리낌이 없는 이가 있는데, 엄숙한 선비나 단아한 선비조차 이에 물들었다. 요즘 박엽(자 숙야)이라는 사람이 있어 시문을 잘하나 불행하였다. 기생집에서 나의 글씨 솜씨와 시법을 보고 본떠 가는 곳마다 벽에다 써 대었는데, 뒷사람이 와 보고는 으레 이를 아무개 글씨다 하였다. 그의 "봄을 슬퍼하는 노래"는 다음과 같다.
연분홍 꽃 오련한 푸른 잎은 아침햇살 머금고 꾀꼬리 읊조리고 제비는 지지배배 남의 시름 자아내네 이끼 자욱 이슬에 함초롬 비취빛으로 젖었는데 흩날리는 눈같은 살구꽃은 연지빛으로 향기롭다 봉황 무늬 저고리는 흐르르 얇아 봄추위 스며드는데 은병풍 기대어서 이별을 슬퍼하네 서방님 한 번 떠나 돌아오질 않아 손꼽아 기다리던 그 봄도 또 삼월이라니
박엽의 호는 국창이며 반남 사람이고 벼슬은 평안 감사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사형되었다.
풍자시와 익살, 애처가 이야기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두남 김일숙(김두남)은 글은 보통이었으나 남을 풍자하는 작품으로는 그 당시에 으뜸이었다. 이웃에 어른이 있었는데 앞니가 길어 홀 모양 같았으므로 다음과 같이 찬을 지었다.
나이 일흔에 긴 것이라곤 이[치아]니 이는 홀을 만들만 허구려
또 이웃 사람이 눈이 가늘어 겨우 볼 수 있을 정도였는데 다음과 같이 찬을 지었다.
모든 것 보고 싶지 않아 한세상을 하찮게 보는 자인가 보이는 것이 작으니 우물에서 하늘을 보는 자 아닌가 그 눈동자를 보면 그 사람 무슨 수로 속마음 숨길쏜가
나의 둘째 형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잘하였다.
김두남은 원주 사람이며 김응남의 사촌 동생이다. 음관으로 부윤을 지냈다.
내가 다리를 앓아 핑계삼아 장인댁에 가니, 둘째 형은 내가 나들이 않음을 빈정대어 시를 지어 보냈는데 첫 수는 다음과 같다.
하늘이 태왕을 사모하는 자네 마음 알아 짐짓 두 다리에 온통 부스럼이 나게 했구나 이웃이 지척이나 오히려 멀다 혐의하니 하물며 물마름 우거진 십 리 길이랴
또 다른 수는 다음과 같다.
짧은 수레도 안 타는 자네 덩그런 황문이 한길가에 서겠네 세상이 온통 공사에만 종사한다면 이 세상 어디메서 잠부를 찾을꼬
대개 태왕이 그 비를 사랑하기에 세상에서 애처가를 태왕이라 부르는 것이다. 황문은 옛날 어떤 사람이 그 아내를 너무 사랑하여 그 친구가 빈정대기를, "열녀는 홍살문을 세워 정문을 삼으니 정남은 마땅히 황문을 세워야겠지" 하였다 해서 쓴 것이니, 그 풍류와 익살이 모두 이와 같았다.
이달의 낙화시와 불우함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이달이 일찍이 "낙화"를 읊기를,
슬프다 진분홍에 또 연분홍 한꺼번에 풀풀 날아 작은 뜰에 지는구나 푸른 이끼에 붙어 남는 것만은 못하나 바람 따라 동서로 흩날리는 것보단 낫구나
하니 말뜻이 함축되어 있다. 또 감회를 읊은 절구 두 수는 다음과 같다.
성궐은 들쑥날쑥 솟을대문 늘어섰는데 오후의 집 풍악소리 하늘 높이 울리는구나 패릉교 위 나귀 탄 나그네 양양땅 맹호연 만은 아니라오
둘째 수는 다음과 같다.
벼슬 높은 고관들 가는 곳마다 만나게 되고 수레는 물 흐르듯 말은 용 같네 장안 밭두렁에 부질없이 고개 돌리니 지척인 대궐문 아홉 겹이 가렸구나
"용나루를 건너며"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이라 강물은 용나루에 급히 내리니 나루의 아전은 배 멈추고 웃었다 성냈다 서울 나들이 그 무슨 소용 십 년을 오가도 포의인 것을
그 뜻이 몹시 서글프니 참으로 불우한 사람의 시다.
양사언의 신선 같은 풍모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양봉래(양사언) 선생의 아량과 풍도는 세상의 숭상받는 바가 되거니와,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와 사마시·문과를 모두 같이 합격하였으므로 그 사귐이 가장 친밀한데, 문장이 높고 빼어나 구름을 앞지를 듯한 기상이 있고 행서·초서를 잘 쓰는데 그 쓰는 법이 마치 용이나 뱀처럼 분방하며, 본성이 벼슬살이를 우습게 알고 산수에 정을 붙여 짚신과 밀랍으로 결은 나막신 차림으로 어느 때고 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바위 골짜기에 사는 이들이 사강락(사영운)에 비겼다. 언젠가 강릉 부사가 되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비석을 세운 일도 있었다. 언젠가 금강산에서 시를 읊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봉래섬의 백옥루를 소문으로만 들었더니 이제야 구경하네 운모병 둘러치고 호박구슬 베개삼고 산호 발걸이로 수정발 거두었네 벽도화 피고 지니 일천 년인데 서왕모 머물기는 팔만 년이라네 요대 맨 위에 호올로 서니 흰 구름 누른 학은 한가롭게 가는구나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훨훨 노을처럼 공중에 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한다.
양사언의 "금수정"시는 다음과 같다.
비단물 은모래는 마냥 고운데 골구름 강비 속에 갈매기 산뜻 진인 찾아 그릇 봉랫길에 들었거니 고기잡이 배를 동구 밖으로 내몰진 마오
신선의 조짐이 된 꿈속의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하서 김인후가 죽은 뒤, 오세억이란 자가 갑자기 죽더니 반나절 만에 깨어나서는 스스로 하는 말이, 어떤 관부에 이르니 "자미지궁"이란 방이 붙었는데 누각이 우뚝하여 난새와 학이 훨훨 나는 가운데 어떤 학사 한 분이 하얀 비단옷을 입었는데, 흘긋 보니 바로 하서였다. 오씨는 평소에 그 얼굴을 알고 있는데, 하서가 손으로 붉은 명부를 뒤적이더니, "자네는 이번에 잘못 왔네. 나가야겠네그려" 하더니,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주었다고 했다.
세억은 그 이름 자는 대년 문 밀치고 와서 자미선 뵈었구려 일흔에 또 일곱 된 뒤에 다시 만나리니 인간 세상 돌아가선 함부로 말하지 마오
깨어나자 소재 상공(노수신)께 말씀드렸다. 그 뒤에 오씨가 일흔일곱 살에 죽었다.
김인후(자 후지)는 울주 사람이며 벼슬은 교리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문묘에 배향되었다.
하서가 충암(김정)의 시권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오기를 어디로부터 왔으며 가기를 또한 어디를 향해 가는고 가기도 오기도 정한 자취 없이 유유한 세월 백 년 남짓이로구나
양사언 시풍의 계승과 누님의 유선사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양봉래의 "풍악에서"란 시는 다음과 같다.
백옥경 봉래도에 허허 넓은 연파는 태고적이고 맑고 따사로운 날씨도 좋구나 벽도화 그늘에 한가로이 오가니 학 탄 신선 피리소리에 세월은 간다
신선 같은 풍채와 도인 같은 느낌이 짙다. 자동 차식이 흉내내기를 다음과 같이 했다.
아침엔 현포에 저물녘엔 봉래산에 산달 걸린 박연폭포요 향풍어린 계수대라 동해를 굽어보며 마고에게 절하고 삼십육동천에 돌아가노라
원숙하기는 하나 격이 미치지 못한다. 나의 둘째 형도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학은 훤칠하게 제비는 높게 낮게 삼신산에 돌아와 오색 구름에 나는구나 이 천지간 석 자짜리 지팡이에 포의로 한 세상 보내누나 바윗머리 나무에 긴 칼 척 걸어 두고 맑은 시내에 손 담그고 영지풀잎 씹네
비록 좋기는 해도 마침내 양봉래의 신선 같은 운치에는 미치질 못한다. 양사언의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산 위에 또 산 있으니 산이 땅에서 나오고 물가에 또 물 흐르니 물 속에 하늘 어리었네 아득해라 이 몸 공허 속에 있거니 연하도 아닌 것이 선경도 아니로세
불경의 게송과도 비슷하다. 또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금옥루대에 보랏빛 안개 떨치고 용이 나는 구름길에 신선 내려오네 청산도 인간 세상에 역겨웠던지 푸른 바다에 어린 구만리 장천 속에 날아들었네
삼천 년 만에 익는다는 신선 복숭아 한밤중 하얀 난새 쌍으로 왔네 중천에 신선 서왕모 내려오니 아롱진 바다기운 구름창에 이었네
역시 그를 따라 배울 만하다.
차식(자 경숙, 호 이재)은 연안 사람이며 벼슬은 군수이다.
내 누님(허난설헌)의 "보허사"는 다음과 같다.
난새 타고 한밤 중 봉래도에 내려서 기린수레 한가로이 몰고 아름다운 풀 밟기도 하네 바닷바람은 벽도화를 불어 꺾어오고 옥소반엔 가득찬 외만한 대추
또 다음과 같이도 읊었다.
구화의 치마폭에 육수의 웃옷 입고 학의 등 싸늘바람 자부로 돌아왔네 비취 바다 달도 지고 은하수 기우는데 옥피리 소리 속에 상서구름 날리네
유몽득(유우석)을 본받았으나 맑고 뛰어나긴 그보다 더하다. "선계에 노니는 시" 백 편은 모두 곽경순(곽박)의 남긴 뜻인데 조요빈 따위로는 미치지 못한다. 나의 둘째 형과 이달이 모두 모방하여 지었으되 마침내 그 울타리를 넘지 못했으니, 우리 누님은 하늘이 내린 신선의 재주라 할 만하다.
정승들의 기개와 청허당 천연 스님의 무용담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양봉래의 "선종암"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거울속 부용은 서른 여섯인데 하늘가에 바라뵈는 일만 이천 봉 그 가운데 한조각 창주석에는 한 백년 동안에 시라고 말할 수가 있다오
박 상공(박순)이 끝구절을 고쳐, "동녘에 온 해객이 졸기에 합당하네"라 하자, 양봉래가 온당하다고 하여 드디어 고치고 나중에 지천 황정욱 상공에게 말하니 상공이, "이는 공의 시어가 아니니 바른 대로 말하시오" 하므로 양봉래가 지천의 식견에 크게 탄복했다. 지천은 양봉래를 잘 알아보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박순(자 화숙, 호 사암)은 충주 사람이며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혜이다. 사암의 "퇴계 선생이 남으로 돌아감을 전송하며"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고향생각 끊임없어 고리인 양 이어지니 한필 말로 오늘아침 한관 떠나네 추위에 고갯매화 봄인데도 못 피니 늦은꽃 응당 늙은 신선 돌아오길 기다리리
총병 양조의 사당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철갑옷 금빛칼도 이미 흙이 되었고 문 닫힌 사당 소나무 전나무엔 저녁 까마귀 우네 슬프다 중국 날센 장수 죽었으니 갈대 피리 소리만 백낭하 자주 넘네
청풍 한벽루 시는 다음과 같다.
나그네 그리움 외로이 절로 시름 생기니 앉은 채 강물소리 듣노라 다락에서 내려올 줄 모르네 내일 또 벼슬길로 가버린다면 흰 구름에 단풍은 누구 위한 가을일꼬
견 상인에게 보내는 시는 다음과 같다.
오랫동안 입은 은혜이기에 이 마음 궁리 많아 새벽 닭소리에 조회 나갈 비녀를 꽂네 강남 땅 들집은 하마 황폐했겠지 산승을 고용하여 대밭을 돌보게 했네
무위자 천연 스님은 집안이 본래 좋았으나 잘못 중이 되었는데 씩씩하여 기개가 있었다. 언젠가 지리산 성모 음사가 대중을 미혹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겨 이를 쳐부수었다. 남명 선생(조식)이 "용사천연전"을 지었으며 양송천(양응정)이 그 책머리에 다음과 같이 제하였다.
주먹 한번 휘둘러 산꼭대기 돌 깨부수니 갈 곳 없는 잡귀가 대낮에 울더라
양봉래·박사암(박순)과 나의 둘째 형이 모두 천연의 친구가 되었다. 천연이 약간 시를 알아 둘째 형에게 준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잘못 고기 배에 걸린 용 곤핍함을 슬퍼하고 닭우리에 그릇 떨어진 봉황새 쇠해만 가네
임진란에 정화상(휴정)을 따라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조식(자 건중, 호 남명)은 창녕 사람이며 벼슬은 전첨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양응정(자 공섭, 호 송천)은 남원 사람이며 벼슬은 부윤이다. 휴정(호 청허)은 정화상이니 임진란 때 승병 대장으로 팔도도총섭이 되었다. 시를 잘하였다. 양응정의 "어양교를 지나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나무빛이며 풍경은 태평세월 그렸는데 강다리는 아직도 옛이름을 띠었구나 이주곡 양주곡이 순임금의 음악 같았더라면 어찌 오랑캐놈들이 두 서울을 침범하였으리
휴정의 "한성 가는 길에"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바닷가 나무엔 가을 서리 내리고 초관엔 이른 기러기 떠나네 종산 외론 새 나는 하늘가에 나그넨 배 안에 늙어만 가네
둘째 형이 무위자에게 준 시는 다음과 같다.
천왕봉 위로 나는 듯 달려가 천 년 묵은 돌덩이 주먹으로 부수고 돌아왔네 애닯다 영웅은 속절없이 늙어가고 산속에 밝은 달이 닫힌 사립문 비추네
또,
두만강가 나뭇잎은 시들고 여기저기 외론 산엔 깃발만 펄럭이네 산속에 하늘을 떠받칠 솜씨 버려졌으니 슬프다 월지국 선우 머리 벨 이 그 누구런가
그에 대한 칭찬이 이와 같았다. 또 장편시의 머리 두 구절은 다음과 같다.
무위자는 사람중에 용이니 전생엔 바다를 가르던 금시조였는데 벼락이 한밤에 천왕봉에 떨어졌네
말이 매우 기발하였는데 전편을 못 외우겠다. 필경 무위자의 책 속에 있을 것이다.
엄흔의 몰이해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호음(정사룡)이 이우정에 제한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물가에 가로 세로 밀물은 지고 나무숲 우수수 기러기 손이 오네
조어가 기이 건장한데 전한 엄흔은 하찮게 보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엄흔(자 계소, 호 십성)은 영월 사람으로 벼슬은 전한을 지냈다.
남효온의 시와 안응세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남추강(남효온)의 "한식"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흐린 날 울 밖에 저녁 해 나고 한식날 봄바람에 들 물은 맑다 배에 가득찬 장사아치 끝없이 지껄이는 말 버들꽃 필 무렵이라 고향의 정일레라
"안자정(안응세)을 꿈에 보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부귀 영화 덧없는 꿈 저문 산 앞에서 꾸니 넋과 넋 만남이란 정말 우연이라 가는 비 뜰에 내리고 봄은 쓸쓸한데 살구꽃 수없이 지네 붉은 돈처럼
"삼짇날 성남에서"란 시는 다음과 같다.
성남이고 성북이고 살구꽃 붉은데 해는 꽃 서녘에 있으니 꽃 그림잔 동에 있네 외로이 말 탄 병든 늙은이 철 바뀜에 놀라니 비낀 바람이 성가퀴에 눈물을 흩뿌려주네
이상 몇몇 시는 당나라 사람에 못지않다. "귀신론" 일편은 학문이 극히 높다. 훌륭한 재주를 지녔어도 펴 보지 못했으니 아깝다.
남효온(자 백공, 호 추강)은 의령 사람인데 진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이다. 안응세(호 월창)는 죽산 사람이다. 진사를 지냈다.
남효온의 "성거산"에 제한 절구는 다음과 같다.
동녘에 해 높이 돋으니 신령스러운 비에 나뭇잎 지네 창 열자 온갖 시름 스러지니 병든 몸이 날개가 돋는 듯
황형의 무공과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무절공 황형은 무장 출신으로 또한 글과 글씨에 능했다. 1510년(중종 5년)에 왜구를 진압하고 몰운대에 올라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높은 대에 깃발 세우니 큰 바람 이는구나 바다 구름 갓 걷히고 해는 둥실 붉어라 하늘에 비겨 칼 어루만지며 자주 고개 돌리니 탄환만한 대마도가 가까이 보이는구나
조어가 기이하고 장엄하여 마치 그 사람을 보는 듯하다. 어찌 인재가 옛사람에게 못 미치랴.
황형은 창원 사람이다. 무과급제로 공조 판서를 지냈다. 시호를 살펴보면 그의 시호는 장무이지, 무절이 아니었다.
명나라 재상들에 대한 논평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승암시화》에 명나라 초 이래 재상의 업적을 논함에 있어 유성의(유기)를 제일로 치켜세웠다. 유기가 실로 어질긴 하지만 재상의 업적에 대해서는 소문난 게 없다. 영락 연간에는 하원길을 제일로 삼고 삼양(양사기·양영·양보)은 그 축에 들지 않았으니 그 의논 또한 온당치 못하다. 이문달공(이현)이 그를 헐뜯어 심지어는 나륜을 내쳤으니, 비록 흠이 됨을 면할 수는 없으나 그 공정한 것만은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정덕 연간에 이르러는 거드름스럽게 자기 아버지를 제일로 쳤다. 젊어서는 비록 괜찮은 사람이었으나 입각하여서는 임금의 외척을 연줄로 삼았으니 이미 올바른 선비는 아닌데, 공평하여 사심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가정 연간 이래로 명정승은 문정공 사천과 충의공 양부가 더욱 드러나게 유명했는데, 소인도 제일 많았다. 계악·방헌부·장총·엄숭·이본이 모두 소인들인데, 그중 엄숭은 은총을 이십여 년이나 독차지했다. 그 뒤에는 소사 서계·소부 이춘방이 다 명정승인데, 서계는 남들이 사마공(사마광)에 비겼으니 오랫동안 국정을 담당했었다. 융경 연간 이래로 고공·장거정은 모두 약골이었으며 신시행은 기롱을 면할 수 없었고, 승상 마자강·소부 허국·소보 왕석작이 모두 괜찮은 사람이었으나 그들의 업적은 삼양에게 비기면 누가 나은지는 모르겠다. 인재가 날로 저하되니 개탄스러운 노릇이다.
우리나라 명상은 황희·허조를 제일로 삼는다. 세상에서는 더러 전조(고려)의 과거 제도를 병폐로 여기기도 하는데, 과연 그 뒤에는 별로 이름난 사람이 없었다. 중종 때 문익공 정광필은 전인에 부끄럽지 않다.
황희(자 구부, 호 방촌)는 장수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익성으로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허조(자 중통, 호 경암)는 하양 사람이다.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으로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정광필(자 사협, 호 수부)은 동래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고 중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여진 정벌의 세 장수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단간공 정효의 《오학편》에 우리나라가 여진 이만주를 정벌한 일의 본말이 아주 자상히 실려 있는데, 강순·어유소·남이의 이름을 대서특필하였다. 이 세 사람은 진실로 장군감으로 중국 역사서에 그 이름이 드러났으니 이보다 큰 영광이 무엇이겠는가?
강순(자 태초)은 신천 사람이다. 음관으로 좌의정을 지냈고 남이의 옥사에 죽었다.
어유소는 충주 사람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정장이다.
남이는 의령 사람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조 판서를 지냈다. 의산위 남휘의 손자이고 익평공 권람의 사위로 유자광의 무고에 의해 살해되었다. 남이의 "정남"이란 절구는 다음과 같다.
백두산 돌은 칼 갈아 닳아지고 두만강 물은 말 먹여 마르리라 사나이 스물에 북을 정벌치 못하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이언공, 승려 시인들, 노비 시인 백대붕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척 총병(척계광)은 위명과 사업이 남의 이목에 번쩍거릴뿐더러 또한 시문에 능하여 이창명(이반룡)의 무리가 치켜세웠다. 임회후 이언공(자 유인)은 또한 시문에 능하여 다음과 같은 시가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바람은 밀물소리 휘몰아 섬들 떠들썩하고 해에 비낀 돛 그림자 누대에 오르네
요즘 스님으로 시 잘 쓰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유정 산인(사명당)은 당나라 구승의 유를 배워 시가 몹시 맑고 고고하였다. 행사도 자못 좋은 시구가 있어 "상서로운 오색구름 아롱지니 나물 먹는 중이 아니다"라는 구가 있다. 요즘 홍정이란 분이 또한 시를 잘하여 "스님을 칭송하다"란 시가 있었는데 나의 둘째 형이 몹시 칭찬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 해 헤어질 땐 가을 강물에 단풍 지더니 올해 작별에는 봄 산언덕에 매화가 지네 물결은 아득하고 산언덕은 가렸는데 단풍잎 지는 매화 이 시름 어이하리
유정(호 송운)은 행사와 같이 일본에 사신 갔었다. 이 두 분의 시가 같이 《기아》에 들어 있다.
백대붕은 천한 종으로 중의 대열에 끼었다. 시를 잘 하였으므로 나의 둘째 형과 승지 심희수가 다 대등한 벗으로 사귀었는데,
가을 하늘에 엷은 그늘 어리어 화악의 그림자 침침해라
라는 시는 둘째 형이 칭찬해 마지않았다. 우리 큰형을 따라 일본에 오간 일이 있으며 아름다운 시가 매우 많다.
백대붕은 전함사의 종이다. 심희수(자 백구, 호 일송)는 청송 사람이며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이다.
이 책을 마치며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내가 어려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형님들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겨 차마 다그치거나 나무라지 않았기 때문에 게을러 빠져서 독서에 힘쓰지 않았다. 차츰 자라서는 남들이 과거하는 것을 보고 좋게 여겨 덩달아 해 보았으나, 글치레나 하는 것이 장부의 할 짓은 아니었다. 이제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으니 세상에 나갈 뜻은 이미 사그라졌다. 십 년 글읽기로 작정했으나, 아, 그 또한 늦었도다. 《학산초담》 한 권을 짓는다.
1593년(선조 26년) 시월 연등한 뒤 사흘 만에 교산자는 쓴다.
(용어) 한단학보는 연나라 소년이 한단 사람의 우아한 걸음걸이를 배우려다 제 걸음까지 잊어버렸다는 고사로, 자기 본분을 잊고 남의 흉내만 냄을 이른다. 정시는 위나라 제왕의 연호로, 그 시대 지식인들이 청담을 숭상했던 풍조에서 비롯된 맑고 초탈한 시풍을 가리킨다. 삼성은 강상죄인을 추국하는 세 관청, 곧 의정부·사헌부·의금부를 이른다. 칠자는 명나라 때 문학으로 이름 높았던 일곱 사람씩 두 그룹(전칠자·후칠자)을 가리킨다. 교산자는 허균이 스스로 붙인 호다.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2 · 소(상소)
출처: 성소부부고 제26권, 부록 2, 소
배경: 1618년(광해군 10년) 정월과 5월, 허균이 기준격의 밀소에 대응하여 올린 두 편의 상소다. 기준격은 영의정을 지낸 기자헌의 아들로, 허균과 그 아버지 기자헌 사이의 오랜 개인적 갈등을 배경으로 허균을 인목대비 폐위 논의의 배후이자 광해군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다는 혐의로 몰아붙이는 밀소를 올렸다. 허균은 두 차례에 걸쳐 이를 조목조목 반박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 상소들은 허균 생애 마지막 해의 정치적 위기를 생생히 보여 주는 자료로, 같은 해 8월 허균은 결국 역모 혐의로 처형되었다. 원문은 《광해군일기》에 실려 전한다.
기준격의 상소에 대한 첫 번째 해명 상소 (서기 1618년 2월 1일, 양력)
삼가 아뢰옵니다. 신이 이달 초나흗날 밤 이경이 지난 시각 집으로 돌아오는데, 깜깜한 어둠 속 울타리 밑에 숨어 있던 장정 두 명이 손을 쓰려 할 때 말 뒤에 있던 종이 발견하고 "도적이 있다"고 외치니, 도적이 도망하여 인가에 숨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 색출하여 결박시키고 추궁하니, 처음에는 문창(유희분)의 집 종이라고 했다가 다음에는 정승댁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정승댁이냐고 강력히 추궁하였으나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제 포도청으로 송치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일선위의 여종이 방면해 주기를 청하면서 또 문창의 집에 드나드는 모피장이라고 했습니다. 신은 '내가 혼자서 대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원수진 사람이 미워한 나머지 당나라 이사도가 배도를 암살하려 했던 일을 행하려 했던 것인데, 남의 부탁을 받아 풀어 줄 수 있겠는가' 여겼습니다. 그런데 대장 등이 미루면서 지금까지 국문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권세 있는 자와 굳게 결탁하여 모의하는 바가 있는 정황을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신은 기반이 미약한 사람으로서 화근을 제거하자는 의논을 강력히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견을 내는 자들이 신을 살해하려 한 지 오랩니다. 지금 기가에서 원한 때문에 사람을 사주하여 흉악한 상소를 올리게 했습니다. 이영은 평소부터 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자인데, 지난번 아뢴 글에서 "임금과 세자를 위해하려 모의한다"는 넉 자를 저 스스로 지어 신에게 덮어씌웠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기준격의 상소가 임금께 내려지지도 않았는데 이영이 어떻게 그 내용을 미리 알고서 갑자기 이런 불측한 오명을 씌울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이 스스로 국문하는 자리에 나아가 기필코 이영과 대변하여, 이영에게 어떻게 신이 임금을 위해하려 모의한 곡절을 알았는지 따지려 했는데, 서서히 처결하겠다고 전교하셨으므로 신은 거적자리를 깔고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자헌의 귀양살이에 대해 다시 혈서로 쓴 상소를 전달하여 함께 대변하려 하였습니다만, 곧이어 대간의 아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조처하지 않고 서서히 정배하겠다고 전교하셨으므로 신은 입대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객이 횡행하면서 신을 먼저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신이 한번 죽고 나면 신의 지극한 원통함을 씻을 길이 없기 때문에, 감히 대론이 한창 일어날 때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고 우러러 간절한 충정을 아뢰었으니 그 죄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대체로 기자헌이 기필코 신을 죽이려는 이유는 바로 신의 입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1613년 변고가 일어났을 처음, 서궁(인목대비)의 흉역스러운 정상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신이 기자헌에게 말하기를 "이는 신하로서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어떻게 지극히 높은 대비의 자리에 두어 인륜을 무너뜨리게 할 수가 있겠는가?" 하니, 기자헌이 "그대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김제남은 사리에 어둡고 유약한 사람인데 어떻게 비상한 모의를 할 수가 있었겠는가. 궁중에서 저주했다는 일도 궁인들이 하고서 그 화를 대비전으로 전가하는 것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더구나 심우영의 공초에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서양갑이 박응서의 계책에 자신이 횡사하게 된 데 분노하여 나라에 난을 끼치려 이런 흉역스러운 말을 낸 것이다. 저들이 흉역스러운 짓을 하려 한들 누가 따르려 하겠는가. 또 《위료자》에도 가혹한 형벌을 가하면 지사도 무복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지금 주상에게 다른 아들이 없고 동궁에게도 아직 후사가 없으니, 만세 뒤에 정론이 일어난다면 오늘날 이 일을 한 자의 자손들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나의 외조부가 바로 임백령인데, 지금 사람들이 을사년의 일을 말하면 내 얼굴이 붉어지니, 그대는 이런 의논을 주장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김제남을 임유에게 견준 것이고 서양갑 등도 억지로 자백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신은 한심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그의 자질들이 역모 사건의 초사에 거론되었으므로 뒷날을 위하여 이런 의논을 주장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뒤 기자헌이 이 말을 누설할까 매우 두려워하였고, 신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습니다. 이 밖에 신이 들은, 위를 원망하고 난이 일어나기를 바란 말은 감히 아울러 아뢰지 못하겠습니다. 기준격의 상소에 대해서는 신이 알 수가 없습니다. 준격은 신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훈회 이외에는 나이 어린 사람과 시사에 대해 말하는 것도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거든, 하물며 흉악한 상소에 거론된 불측한 말이겠습니까. 저가 그런 말을 들었다면 어째서 일찍 고변하지 않고 저의 아비가 죄를 입은 때에야 발론한단 말입니까? 고변하지 않은 죄 그 또한 심한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무고하여 사람을 죄에 빠뜨리기 위해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을 감히 글에다 쓸 수가 있겠습니까? 진실로 천륜을 모독하고 문란시키는 것을 상습적으로 행하는 자가 아니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하여 임금께 아뢸 수가 있겠습니까? 위를 무시하는 패역스러운 말을 스스로 지어냈다면 그 죄는 역신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신은 삼가 통탄하였습니다.
1606년(선조 39년) 겨울, 신의 형 허성이 이조 판서로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허성에게 "이홍로가 이영을 광주 경주인의 집에 우거시키고 밤낮으로 모여 교활한 음모를 획책, 못 하는 짓이 없다고 한다. 모름지기 동궁을 위하여 외방에 보임시켜야 한다" 하였으므로, 허성이 즉시 잇따라 외방 고을에 의망하여 제수했는데, 그 뒤 정주에 있다가 마침내 파출되었습니다. 1608년 이홍로의 심복이라는 것으로 탄핵을 받고 오 년간 관직을 삭탈당했으므로, 온 나라 사람이 그가 이홍로의 당여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권세 있는 자의 연줄을 타고 요행히 면하여 청반(대사헌)에 올랐습니다. 겉으로는 대론을 가탁하고 나섰으나 속으로는 실상 사세를 관망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의 초나흗날 계사에는 폐출이라는 두 글자를 거론하지도 않은 채 바로 폄삭절목을 들고 나와서 끝에는 "내택에 옮겨 안치시켜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의 본마음이 여기에 다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이영이 감히 사주를 받아 원한을 앙갚음하기 위해 도리어 오명을 신에게 뒤집어씌우니, 신은 더없이 원통합니다. 신하로서 이런 대역의 죄명을 지고는 하루도 천지 사이에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급급히 기자헌과 이영 등을 하옥시켜 대변하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난모를 어째서 일찍 고변하지 않았고 화근을 어째서 제거하려고 하지 않았는지를 기자헌에게 끝까지 캐어묻고, 이어 이영에게 신이 임금을 위해하려는 모의를 한 줄을 어떻게 알았는지를 따지게 하여 주심으로써, 한편으로는 간사한 정상을 적발해 내고 한편으로는 미천한 신이 무고당한 정상을 씻게 하여 주신다면 천만 다행하기 그지없겠습니다.
신은 임금을 위하여 만 번 죽을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종묘사직을 부둥켜 세웠는데도 끝내는 망극한 참소를 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횡행하는 자객이 신을 미워하는 자의 소행이 아니라고 기필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통쾌히 변별하여 씻어 줌으로써 간인들의 음모를 저지시키지 않으신다면, 충정한 신하가 남은 생을 보전하기 어렵게 됩니다. 마음이 막히고 말이 움츠러들어 조처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곡진히 살펴 주소서.
(용어) 대론은 1617년(광해군 9년) 발론된 인목대비 삭호·폐출 논의를 가리키며, 이에 반대한 기자헌은 귀양을 갔다. 계축년의 변은 1613년(광해군 5년) 조령에서 은상을 약탈하다 잡힌 이들이 김제남이 역모를 꾀했다고 허위 진술하여 일어난 사화로, 이 일로 김제남은 사약을 받고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폐해졌다. 을사년의 일은 1545년(명종 즉위년) 소윤 윤원형이 대윤 윤임 일파를 몰아낸 사화로, 이 일의 주동 인물이 임백령이었다.
기준격의 상소에 대한 두 번째 해명 상소 (서기 1618년 6월 24일, 양력)
지난해 대론이 일어나자 신의 원수인 기자헌이 제일 먼저 흉악한 차자를 올렸다가 귀양 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서는 신이 은밀히 중상한 것으로 의심하여 신에 대한 원망이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기자헌이 이런 차자를 올리지 않았다면 그의 원수가 백 명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모해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지만, 차자를 올렸다면 평소 원수진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벌을 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데도 기가에서는 신을 원망하여 그 아들(기준격)이 외람되이 변고를 아뢰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소의 내용이 매우 비밀스러워 사람들이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양사에서 추문하기를 청한 것과 2품 이상이 추국하기를 청한 것을 전하께서는 고집하면서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신은 사실에서 거적을 깔고 엎디어 다시 해명하는 글을 올립니다.
당초에는 상소의 내용이 이토록 참혹하고 악독한 줄 몰랐었습니다. 지난번 곽영의 옥사 때문에 국청에서 그 상소를 내려 달라고 청하였는데, 그 내용 가운데 위에 저촉되는 모독스러운 말들은 모두 차마 볼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허위의 사실을 날조하여 신을 무함하려는 온갖 계책이 비로소 전파되었습니다. 대신 이하가 그 글을 보고는 간담이 떨렸으니, 국청을 맡은 신하는 일각도 지체 없이 실정을 캐내어 나라의 법전을 바루는 것이 바로 신하의 대의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뜰 아래에서 대면하여 판별할 수 있게 되기를 가슴을 두드리며 바라노라니 하루가 일 년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판부사가 아직 임명되지 않았고 위에서도 병을 조리하는 중이므로 친히 물으실 기회가 막연하기만 합니다.
신이 기가와 원수를 맺게 된 전후 곡절을 먼저 말씀드리고, 이어 없는 사실을 날조한 상소의 내용에 대해 하나하나 해명하겠습니다.
신의 형이 이홍로와 혼인을 끊자 이홍로가 복제를 삼가 지키지 않았다는 것으로 신을 무함했기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되었다는 정상은, 신의 처음 상소에서 이미 상세히 아뢰었습니다. 이홍로가 스스로 변명한 상소에 "허균도 참여하여 알고 있다"고 한 말은 기가의 밀서에서 거짓임이 이미 드러났으니 신이 감히 다시 아뢰지 않겠습니다.
1601년(선조 34년)에 신이 해운판관으로 순찰차 전주에 갔었는데, 이홍로가 감사로서 어미 상을 당하여 성복도 하기 전에 좋지 못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사람들이 신이 이 사실을 상세히 알고 있다고 하자 기자헌이 신에게 증언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이홍로가 나를 복제를 삼가지 않았다는 것으로 무함했는데, 내가 또 이것으로 무함한다면 같은 내용으로 보복하는 것 같다. 누가 믿어 주겠는가? 결단코 따를 수 없다' 하였더니, 기자헌이 비로소 유감을 품었습니다.
이홍로가 서울로 올라와서는 신이 눈으로 본 일들을 전파했는가 의심하여 원망하는 말을 마구 하였습니다. 신이 조카의 상을 조문하기 위해 그의 이웃에 갔다가 들러서 스스로 해명하려 하였는데, 마침 신현과 이성경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홍로가 급급히 저지시키면서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그대는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는데, 그때 기가의 문안하는 종이 이를 보고 가서 기자헌에게 고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이홍로의 상소에 참견했다는 말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스스로 해명한 서찰은 본디 긴요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기자헌이 이것을 위협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밀서를 모방, 그 내용에 흉한 말이 있는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옥사를 일으켜 스스로 해명하려 한다는 말을 신에게 뒤집어씌워 몰아붙였습니다.
1603년(선조 36년) 신의 형 허성의 집에서 국혼을 할 적에 형수의 병이 침중하여 기일을 앞당겨 혼인을 치렀습니다. 궁인들도 병자를 보고 갔고, 그런지 닷새 만에 죽었습니다. 마침 상을 발설하지 않고 비밀에 부쳤다는 설이 궁중에 전파되었는데, 이 말은 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기자헌이 날조한 것이라고 지목당했습니다. 봄 꿩이 절로 울듯이 형의 집에 가서 해명하면서 "이는 균이 나를 잡아넣으려고 만든 말이니, 공이 대비전에 해명하라" 하였습니다.
기자헌은 더욱 노하여 헌납 신률을 충동질하여 신을 탄핵케 하였으므로 신은 즉시 강릉으로 내려갔습니다. 기자헌은 그래도 분풀이를 그치지 않았으므로 신의 형이 걱정하던 끝에 신에게 사과하는 서찰을 보내어 그의 노여움을 풀게 하라고 했습니다. 신은 즉시 서찰을 보내어 사과했고 그 내용에도 별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기자헌이 "내가 이 서찰을 내놓으면 균은 틀림없이 죽는다" 하였습니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이 망발한 말이 있는 것인가 의심하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그 실제는 이뿐이었습니다. 따라서 기자헌이 전후 차자를 올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을 두루 비방할 적에도 신의 이름이 그 가운데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606년(선조 39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벽제에 왔을 때, 신이 역관 박인상을 시켜 본국의 세자 책봉에 관한 일을 극력 아뢰게 하였더니, 사신이 즉시 정문할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신이 돌아와 대신들에게 말하였더니 적신 유영경은 즐거워하지 않았으나 기자헌과 심희수는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의 민정을 사신에게 아뢰어 중국 조정의 벼슬아치들에게 알릴 수 있었습니다.
유영경이 분노와 시기를 품게 되었으므로 기자헌 등도 잇따라 벼슬자리에서 밀려났고, 신도 곧이어 부처를 좋아한다는 비평을 당했습니다. 신과 기자헌이 함께 유영경의 배척을 받았기 때문에 이로부터 기자헌이 거짓 마음을 열고 대하는 체했습니다만, 신은 기자헌이 음험한 마음을 품고 있어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수시로 만나기는 해도 사사로운 정은 감히 토로하지 못하였으므로 늘 시기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1613년(광해군 5년) 초겨울 화근을 제거하자는 의논이 발론되기 시작했습니다. 11월 초나흗날 신이 마침 기자헌을 만나 조용히 물으면서 그의 마음을 염탐해 보았더니, 기자헌이 머리를 흔들면서 동의하지 않고서 송순의 일을 핑계 대면서 결연히 가 버렸습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신의 두 번째 상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다시 아뢰지 않겠습니다. 그의 자질들이 모두 서양갑과 절친한 사이로 역적의 초사에 거론되었으나 요행히 나문을 면하였습니다. 때문에 뒷날 화를 면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기 위해 미리 이런 의논을 세움으로써 판국을 번복시키려 도모한 것입니다. 신은 이것으로 기자헌이 끝내 임금을 등지고 대론을 저지시키려 할 줄 알았습니다.
1614년(광해군 6년) 봄 기자헌이 들어와 영의정이 되자 삼사가 일제히 탄핵하였습니다. 이때 그 자제들이 신에게 시배들의 의논을 중지하게 해 달라 하였으므로, 신이 널리 친우들에게 요청하여 그 탄핵을 그치게 했습니다. 그 뒤 그의 아우 기윤헌이 외설에 대한 일 때문에 신을 의심하여 유감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틈을 이용하여 그의 형에게 거짓말로 "삼사가 탄핵할 적에 허균이 힘써 저지시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덩달아서 배척하였다" 하니, 기자헌이 그대로 믿고 매우 노하였습니다. 신이 요동에 있으면서 징병에 관한 일은 조처하기 어렵다는 곡절로 기자헌에게 글을 보냈더니, 기자헌은 곧 자기를 헐뜯는 것인가 의심하여 공공연히 신을 욕하였습니다. 북경에 도착하여 조종의 무고를 밝히는 글을 올리자, 극도로 추잡한 비난을 가하고 사형에 처하려 했었습니다. 그때 신이 기자헌의 탄핵을 저지시키기 위해 진력했음을 아는 사람이 기자헌에게 가서 상세히 해명하고 그의 구원을 요청했던 서찰 세 통을 보이자 기자헌이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시기하고 방해하는 마음은 더욱 더하였습니다. 《대명회전》의 무고를 바로잡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그는 늘 "뒷날 이것이 반드시 나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 매우 증오스럽다" 하면서 밤낮으로 획책하여 기필코 신을 살해하려 하였습니다.
해주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는 기자헌이 스스로 차자를 지어 신을 무함했는데 그 내용을 들으니 모두가 허위로 날조한 것이었습니다. 신도 상소를 올려 대면하여 변정하려 하였으나 기자헌이 밖에서 위협을 가하여 왔으므로 중지하고 말았습니다. 흉격 사건이 있을 적에는 임금을 버리고 도주했고, 은연중 그 흉격을 신이 지은 것처럼 말했으며, 자기와 친한 사람들과 짜고 신을 무함하려 했습니다. 강릉의 차자에서는 신의 이름을 거론하여 드러나게 지적하지 못하였으며, 그가 조정으로 돌아와서도 감히 명백하게 드러내어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성명하신 전하께서 그의 흉측함을 통촉하지 않으셨다면 신의 목숨이 어떻게 지금까지 붙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뒤 김진의 옥사 때에는 기자헌이 신을 욕하면서 진회에다 비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신도 상소문을 올려 전일 원망을 맺게 된 상황과 저가 역적을 비호하고 임금을 저버린 정상을 아뢰어 면대해서 변정하기를 청하려 했더니, 기자헌이 기겁하여 이복장을 보내어 화해할 것을 애걸하였습니다. 신은 대례가 이미 임박하였고 또 기자헌이 이 때문에 도망하여 갈까 저어하여 일이 완전히 끝난 다음 아뢰어 변정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대론이 일어났고 저가 제일 먼저 죄를 받았습니다. 기회를 이용하여 남을 곤경에 몰아넣는 것은 의리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도록 덮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때 영남 사람이 사산에 몰래 장사 지낸 일을 가지고 상소를 올려 죄줄 것을 청하려 하였습니다. 사산은 신라 이래 장사지내는 것을 금지해 오던 곳으로 사람들이 모두 만세에 군왕이 날 곳으로 일컬어 왔는데, 기자헌이 그의 첩을 장사지냈습니다. 따라서 기자헌이 패몰하기 전에도 모두들 위태하게 여겼었습니다. 이 상소를 올리려 하자 기가에서는 신이 사주한 것으로 의심하여 원망이 더욱 극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허균이 평소 우리 집안에서 대론을 따르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고의로 이런 꼬투리를 들추어내어 우리 집안을 무함하려는 것이다. 배소를 여러 번 옮긴 것도 모두 그의 지휘에 의한 것이다" 하면서 부인으로 하여금 바로 상언하게 하려다가 하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에도 기준격과 기수발이 서양갑과 교분을 맺고 있는 정상을 거론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기윤헌이 이사호와 심복이기 때문에 신이 흉악한 정상을 자세히 염탐하여 알고 있다는 것으로 계속 신에게 공갈을 가하였습니다. 힘을 다하여 신을 제거하면 대론은 절로 와해되고 저의 화도 가벼워질 것으로 여겨 기준격을 꾀어 저격할 계획을 세우게 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경망하다 해도 원수진 사람들의 자제들을 대할 때면 반드시 말을 가려서 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고 귀로 차마 들을 수 없는 이런 흉역스러운 난언이겠습니까. 이는 풍병을 앓아 본심을 상실한 사람이라도 감히 할 수 없는 말인데, 신이 이런 말을 했으리라고 여기십니까?
흉악한 상소의 말은 전해 들은 데서 나온 것이므로 하나하나 해명할 수 없습니다만, 사람들에게 전파된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밝히겠습니다. 기준격이 나이 어릴 적에 그 아비의 명에 의해 신에게 와서 배웠고, 신도 부득이하여 억지로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평상적인 이야기도 역시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1609년과 1611년의 이야기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데 증거할 수 없는 말을 글에다 썼으니 신은 매우 통분스럽습니다. 의창군은 신의 형의 사위이기 때문에, 신의 집안을 죽이기 위해 문득 옹립하려 한다는 말을 만들어 내고 그 공을 자기 아비에게 돌리려는 것이 틀림없으니 그 계책이 매우 참혹합니다.
형의 집에서 혼인이 이루어진 지 얼마 안 되어 신은 곧 파직되어 시골로 내려갔었다가 1604년 8월에 올라왔습니다. 올라와서는 수안 군수에 제수되어 부임했었고, 1605년 11월에 파직되어 돌아왔습니다. 12월에는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어 내려갔었습니다. 1606년 3월에 의주에서 조보를 보고서 비로소 왕자(영창대군)가 탄생하여 진하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이 동료들에게 "대신들이 어떻게 감히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는데, 이는 성상께서 세자의 자리에 계시고 억조창생이 마음으로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은 바로 공빈 김씨의 친척에 드는 사람이므로 광해군을 추대하고픈 사정이 다른 신하들의 배나 되는데, 감히 흉측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겠으며 마침내 원수진 집 사람에게 토로할 수 있겠습니까?
1611년(광해군 3년) 겨울 유배지에서 사면하는 은혜를 받았고, 11월 12일에 서울에 와서 형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24일에 다시 부안의 농막으로 향하였고, 1612년 2월 초에 바야흐로 돌아왔습니다. 그간 기준격이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신의 형제는 김제남과 평소 좋지 않게 지냈으므로 한 번도 그의 집에 간 적이 없는데, 혼인을 권하기 위해서 김제남과 함께 윤수겸의 집에 갈 리가 있겠습니까? 그해 겨울 서울에 머문 것이 십여 일뿐이었기 때문에 윤수겸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윤수겸이 지금 있으니 물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김제남이 신과 접촉할 길이 없다는 것은 온 나라가 다 아는 일인데, 궁중의 이런저런 일을 신이 어떻게 김제남에게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두 시신은 적자가 아니다"라는 말은 모두 저가 스스로 만든 말입니다. 어떻게 차마 그런 말에 주석을 달아 감히 임금의 눈을 더럽히는 짓을 이토록 거리낌 없이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 마음에 이런 생각을 품은 자가 아니면 어떻게 이런 문자를 베낄 수 있단 말입니까? 저가 신을 무함하기 위해 망측한 욕을 도리어 임금께 가하였으니, 고금 천하에 임금을 무시하는 도리에 어긋난 말이 이렇게 극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습니다.
저가 만약 이런 흉측한 말을 실제로 들었다면, 신하 된 도리에 있어 어떻게 온 조정의 신하들이 그 집을 미워한다는 것으로 그의 의논을 정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일이 만약 정확한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미워하더라도 어떻게 겁박하여 도리어 죄를 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실제로 흉역스러운 말을 토로했다면 신하로서 하루도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책을 가지고 와서 십 년이 되도록 신에게 가르침을 받았겠으며, 저의 아비의 두 차례 공적을 기록한 문서를 기필코 신에게 지어 달라 해서 후세에 전하려 했겠습니까? 이는 변명하지 않아도 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1608년(선조 41년) 공주에서 파관되고 나서 전답을 물색하기 위해 부안에 갔다가 바닷가에 있는 산속의 거처할 만한 땅을 얻어 경영하고 있었는데 오래지 않아 도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 뒤 죄를 져서 유배될 적에 기필코 함열을 요구한 것은 이곳이 부안과 가까워서 사면받으면 즉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613년 봄에 또 부안에 내려갔던 것은 노복과 전토가 모두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지, 어찌 심광세와 모의하기 위해 부안에 내려갔을 리가 있겠습니까.
1611년 신의 집이 비어 있게 되자 윤수겸이 몇 달간 빌려 들었었으므로 그 아들의 훌륭함과 그렇지 못함은 집을 지키는 종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심광세가 "윤씨 집에 혼인을 청하려 하는데 아들 둘 가운데 누가 더 훌륭한가?"고 묻기에 신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사람들이 모두 대군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데 사대부가 어떻게 혼인을 맺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송구와 그 혼인의 부당함을 말하고, 윤수겸의 절친한 벗인 이문란을 불러서 "심광세가 자기의 질녀를 윤수겸의 아들과 결혼시키려 하니 그대는 모름지기 이 혼인을 극력 저지시키라" 하니, 이문란이 놀라 하면서 "이 말이 옳다" 하였습니다. 즉시 윤수겸에게 말하니 윤수겸이 "그가 아무리 요구해도 내가 어찌 허락하겠는가. 나는 하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다음날 기준격이 송구에게 찾아가서 이 일에 대해 묻자, 송구가 "어디에서 그런 말을 들었는가?" 하니 기준격이 "숙부에게 들었다" 하므로, 송구도 허균이 저지시켰다고 말하여 보냈다고 했습니다. 지금 송구를 끌어대어 증거를 삼았는데 송구가 아직 서울에 있으니 하문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이문란의 지난해 상소를 가져다 고증해도 알 수가 있습니다. 저의 상소 내용이 모두가 증거 없는 말이지만 이것만이 유독 증거가 있는 것인데, 윤수겸 등 세 사람이 모두 있습니다. 이것이 부실하다면 혼자서 말하고 혼자서 들은 근거 없는 말임을 유추해서 그의 거짓을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대명률》에 "참언을 담은 책을 집에 보관해 두는 것은 사형죄에 해당된다"고 했기 때문에 신은 비록 우연히 보았다 해도 집에다 보관해 두지도 않습니다. 이를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감히 하지 않고 있는데 하물며 원수진 집의 자제에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참설은 이십여 년 전 선왕 때부터 있던 것으로 전해 내려온 지가 이미 오랩니다. 그리고 천도설은 1612년에 나왔으니 그 거짓됨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이른바 심우영은 신의 죽은 아내의 서얼 외숙입니다. 약간 문재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대부들도 인정하였고, 신은 가족적인 친분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매우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품이 교만하고 사납고 적자를 멸시했기 때문에 온 집안이 그르게 여겼습니다. 1607년(선조 40년) 겨울 이원형이 와서 "부디 우영을 친절히 대하지 말라. 우영이 이야기 끝에 나를 시켜 임해군에게 가서 살펴보라기에 내가 큰 소리로 준절히 나무랐더니 그가 얼굴빛을 변하면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늙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싶다'고 하였다. 그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어 나도 이로부터 절교하겠다" 하므로 매우 이상스럽게 여겼습니다. 그 뒤 유념하여 살펴보니 말하는 즈음에 국가를 원망하는 것이 특별히 심했습니다. 그리고 드러나게 대군을 애호하는 말이 있어서 더욱 괴이하게 여겼었습니다.
그 뒤에 이의숭이 심우영에게 재물을 빌리려고 하므로 신이 중지시키면서 "이들의 지향이 수상하니 부디 서로 가까이 지내지 말라" 하였습니다. 이른바 박응서란 자는 그 아비가 박순으로 신의 아비 허엽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임백령의 시호에 대한 일 때문에 박순이 죄를 받게 되자, 신의 아비가 당국자에게 해명하여 사형을 면하였으므로 박순이 항상 고맙게 여겼습니다. 1583년(선조 16년)에 박순이 입대할 적에 신의 형 허봉의 잘못을 극언하였는데, 이 때문에 신의 형이 멀리 귀양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의 어미가 박순을 원망하게 되었고 이어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화담서원에는 신의 아비를 배향하게 되어 있는데 박순도 배향하려 함으로 신이 온당치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박응서가 이 말을 듣고 원망을 품었으므로 심우영이 박응서를 위하여 갑자기 신의 집 및 이의숭의 집과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노략질하던 날 밤 박응서와 김비가 분명히 도둑이었으므로 신이 이의숭에게 "내가 전에 한 말이 어떠한가. 이들이 끝내 국가의 큰 도적이 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대장 이문전을 만나서 말했는데, 체포하려 할 즈음에 이문전이 파직되었기 때문에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해에 박응서가 은을 노략질한 것 때문에 체포되었는데 즉시 결단하지 않자, 이의숭이 신의 말을 깨닫고 즉시 이이첨에게 가서 "필시 역적질을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이첨이 즉시 한희길을 불러 아뢰기를 극력 권했기 때문에 죄인의 괴수를 끝내 잡게 된 것이고 종묘사직이 다시 편안하게 된 것입니다.
신이 아무리 아둔하다 해도 보잘것없는 서얼 친족을 뜻을 같이하는 벗이라고 일컬었다는 것이 어찌 사리에 가까운 말이겠습니까?
신이 1607년(선조 40년) 겨울 혼자서 보기 위해 본조의 시를 뽑아 적을 적에, 정도전과 권근은 모두 국초 사람이므로 이들의 것을 조사하여 쓰다가 보니 자연 이 두 사람의 것을 제일 앞에 쓰게 된 것이지, 어찌 감히 그 사람들을 사모하여 뽑아서 앞에다 실었겠습니까? 지금 《동문선》과 《청구풍아》 등의 책에 실린 국초의 시문은 정도전의 저작이 반드시 제일 앞에 있습니다. 신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버리고 기필코 이 사람을 으뜸으로 삼았겠습니까. 더구나 신이 1598년(선조 31년)에 개성에 갔다가 정몽주의 옛집에 들러 시편을 지을 적에 말단에 정도전을 극력 배척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었습니다.
그대는 못 보았는가 삼군부 앞에 무기 벌여 놓고 임금 잊고 적자 바꾸어 천륜을 어긴 일을 계획을 끝내자 정도전이 죽었으니 다리 위에서 갑자기 죽은 것 사람의 재앙이 아니라네
이 시를 차운로가 늘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또 "정도전 권근론"을 지어 배척했는데 이는 본 사람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말은 마치 아이들의 장난과 같은 것입니다. 생존자들의 경우는 최립과 이달 외에는 뽑지 않은 것이 많은데, 서얼 친족을 위하여 그의 졸렬한 시를 뽑아 적으려 했겠습니까? 이 책이 지금 박엽의 집에 있으니 가져다가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이 남쪽으로 옮겨갈 때 옥에서 나와 몹시 총총한 형편이었고, 그때 심우영의 자취는 이미 신의 집과 소원해져 있었으므로 찾아온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찾아가서 시를 주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가 심우영의 집에 신이 증정한 시편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말을 날조하여 신을 무함하려 했으니, 또한 어리석지 않습니까?
서양갑의 자가 석선인 것은 지금 비로소 들었습니다. 천한 서얼들의 자는 지극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알 수가 없는 것인데, 기준격이 홀로 그의 자를 알고 있고 신에게 죄를 씌우기 위해 신이 지어 준 것이라고 합니다. 기준격이 은밀히 서양갑과 교결하여 굳은 교분을 맺은 정상이 이에 이르러 다 드러나 버렸습니다. 이는 바로 자기 자신이 서양갑과 절친하여 스스로 영웅이라고 일컫고서는 도리어 그 화를 신에게 돌리려는 짓이니 그 또한 참혹합니다.
이경준이 지은 흉격에 대한 일은 그때의 추안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는데도, 기준격이 지금 이런 말을 만들어 내면서 다른 증거는 세우지 않고 단지 신이 스스로 말했다고만 합니다. 흉격을 짓는 것은 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흉역인데 그것을 자신이 지었다고 끌어대어 원수진 집에다 말한다는 것이 사리에 맞는 말이겠습니까? 더구나 한집안의 조카들은 정이 부자와 같지만 사소한 일일지라도 감히 말하지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남에게 이렇게 전혀 사리에 맞지 않은 흉언을 했겠습니까. 그 말은 이번에 소명국이 은밀히 이대엽을 추대하려 했다는 것과 동일한 어리석은 계교입니다. 따라서 더욱 치가 떨립니다.
그의 "법궁으로 이어하는 데 대한 천시와 인사에 관한 말"은 신으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있는 얘기이겠습니까? 처음 법궁을 지었을 때 비길 데 없이 성대하고 화려하여 신민들이 밤낮으로 이어하시기를 바라고 있었고, 인심도 모두 우리 임금을 추대하고 있는데다가 시변과 천재도 별로 걱정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기준격이 사람을 무함하기 위하여 스스로 흉언을 지어내고 천시와 인사에 대한 말을 끌어대어 인심을 선동, 현혹시켰는가 하면 필설로 나타냈으니, 그가 영창대군에게 귀부한 마음이 있는 것이 이미 여기에서 드러났습니다. 아, 역시 참혹합니다.
이이첨 집의 큰 뱀에 대한 이야기는 역시 무엇을 인연하여 신에게 미루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1589년(선조 22년)부터 성균관에서 이이첨과 교제를 맺었습니다. 나이가 같지 않아서 형으로 섬겼고 삼십 년을 하루같이 지내왔으며, 1608년 이래 모든 역적 토벌에 관한 일에 함께 힘을 합하여 온 것은 사람들이 다같이 아는 일인데, 어떻게 1613년 이후에 바야흐로 투탁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1612년 겨울 신이 충주로 갈 때 이이첨에게 가서 작별을 고했는데 한찬남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인하여 "영창대군은 화의 근원이고 뜻을 잃은 자들이 침을 흘리고 있다. 훈련도감의 관원은 모두 서인들이니 불가불 우리들이 대신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좌중이 모두 옳게 여겼습니다. 신의 말이 불행하게도 1613년에 적중되었습니다. 신이 임금을 위해 시종 충성을 다한 실정은 동료들이 모두 아는데, 도리어 원수진 집안과 함께 흉언을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그의 "영창대군을 세우고 수렴청정한다", "화살이 떨어지는 곳에 과녁을 세우라"고 했다는 말은 이 얼마나 엄청난 흉역입니까? 가령 신이 저에게 분명히 그런 말을 했다면 어째서 들은 즉시 고변하지 않고 전혀 마음을 움직이지 않은 채 등한한 이야기로 서로 문답하듯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인데도 무고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임금을 우롱하는 정상이 빠짐없이 다 드러났습니다. 기준격이 아비의 원망을 앙갚음하기 위해 이런 소장을 올려 무함했으니 마음은 교사스럽고 계교는 어리석습니다.
저의 아비가 늘 신을 살해하려 하였으니, 만분의 일이라도 그런 기미가 있었다면 어찌 고변하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대론 때문에 패한 뒤로 그 원망을 신에게 돌려 사생 결단으로 만에 하나 요행을 바랐습니다. 그리고 의논을 달리하는 자들이 신을 미워하는 기회를 이용, 함께 힘을 합하여 함정에 밀어넣음으로써 신이 상해되기를 바랐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라도 원수가 원수를 공격하면 사실로 믿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이런 폐단은 앞으로 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원망을 보복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교묘하게 날조하는 짓을 끝내 그치게 할 수 없게 만들 것입니다. 따라서 신하로서 원망을 떠맡으면서 역적을 토벌한 사람들이 마침내 무함을 받아 죄에 빠진다면,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조종 선왕의 무고를 밝히는 일에 이르러서도 신이 언단을 발하자 기자헌이 극력 저지시켰습니다. 그러다가 《대명회전》을 완전히 고치고 돌아오는 경사가 있자, 기자헌은 이 때문에 죄를 얻어 공이 취소될까 깊이 우려했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이에 대한 말을 낼까 의심하여 기필코 신을 죽이려 했습니다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국가에서 공을 기록한 대전에 대해 기준격이 어떻게 감히 참여하여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기필코 남곤과 같다고 일컬으면서 신의 원훈을 저지시키려 하는 것은 역시 뒷날 저의 아비가 이 때문에 죄를 받을까 두려워해서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저가 소장에 부질없이 언급했으니 역시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더구나 대사를 연기하여 지체시킨 것이 어찌 신 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이는 성상께서 차마 사은을 갑자기 끊지 못했으며 묘당과 삼사가 때를 기다려 일제히 발론한 소치로 그렇게 된 허다한 곡절은 상께서도 환히 아시는 바입니다. 그런데도 기준격이 공적인 것을 빙자하여 사적인 보복을 한 것이고 자기 아비를 잡아넣기 위해서 대사를 연기시켰다고 한 것은 또한 너무도 무망한 말입니다.
1609년(광해군 1년) 겨울 신이 형조 참의로 있었는데, 그때 정협이 전옥 주부였습니다. 범죄인의 등급을 낮추는 것을 신이 실지로 주관했으므로 정협이 늘 신을 원망했습니다. 때문에 그가 자백하던 때 사람들이, 원망하기 때문에 무고하여 끌어들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도 있었습니다만, 신은 태연하였습니다. 그때 이원형은 바야흐로 광주에 있었으니 손을 잡으려 한들 될 수 있었겠습니까? 교묘하게 주워 모아 얽어낸 정상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끝에 심이기에 대한 말은 간담이 떨리는 말입니다. 기필코 이 역적과 상의 앞에서 같이 죽음으로써 스스로 변별하고자 합니다. 난신적자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겠습니까만 이렇게 극악한 말을 한 자는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신이 이미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저가 스스로 만들어 낸 말입니다. 금수 같은 행실을 익히 보고 인륜을 모독하는 것을 달게 여기는 집안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그의 집과 원수를 맺은 탓으로 선왕에게까지 욕이 미치게 하였으니, 차라리 가슴을 가르고 밝은 해 아래서 통쾌하게 설욕하고 싶습니다.
저 기자헌이 지극히 미세한 일로 의심을 내어 실정이 없는 말로 원수를 맺고 형적이 없는 일로 살해하려 하니, 그 마음의 흉악함과 참혹스러움이 이보다 더 극심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천지의 귀신이 위에 임하고 곁에 있는데, 어떻게 감히 거짓을 말하여 스스로 죄를 자초할 수 있겠습니까.
기준격이 무함한 내용은 비록 승지·사관이라 할지라도 기록할 수가 없는 것인데, 소명국이 그 말을 사용하여 잇따라 사람을 무함하였습니다. 그 흉격의 근거가 맹랑한 것이 이와 같아 형적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이는 소명국과 기준격이 앞뒤로 같이 모의하여 사림을 해친 것으로, 소명국과 기준격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입니다. 소명국은 이미 형을 받았지만 기준격은 터럭 하나도 다치지 않고 있으니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기자헌은 바로 왕실에 가까운 친족으로서 수상의 자리에 있는 몸입니다. 그런데 이런 흉언을 듣고도 위에 고하지 않았다면 그에게도 역적을 비호한 죄가 있는 것입니다. 기준격이 흉언을 듣고서 남의 혼인을 금하기까지 하였으면서도 그 사람에게 공부를 배우러 계속 왕래하였다면 저도 역시 역당인 것입니다.
온 나라가 두 집안이 원수진 집안이라는 것을 다 아는데, 패몰당한 뒤에는 그 허물을 신에게 돌려 감히 증거도 없고 형적도 없는 말로 선왕과 두 분 성상을 모독했고 신을 살해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대역부도한 죄에 빠지는 것을 몰랐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대간의 말은 공공의 의논에서 나온 것이므로 죄를 진 사람으로서는 혀를 놀려 스스로 변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양사가 함께 신을 배척하는 것은 억울한 데 관계된 점이 있기에 신은 이에 대해 아뢰어 해명하고 끝맺겠습니다.
신은 선왕 때부터 오직 전하만을 추대하여 여러 번 뜨거운 정성을 바쳐 왔습니다. 1613년 전에는 자주 동료와 함께 국가의 일에 대해 우려했었고 자못 선견지명이 있었기 때문에 이이첨도 신의 충심에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신이 대략 경사에 통달하고 널리 전고를 안다는 것으로, 화근을 제거하는 일이 있을 적에도 신하고만 의논하여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재야의 선비들 가운데 신과 두텁게 지내던 자들이 다투어 혈서로 쓴 글을 올려 정론을 부식했습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신도 참여해 안다고 여겼기 때문에, 패몰당하여 뜻을 잃고 이의를 제기하던 무리들이 신을 이이첨보다 더 미워하였으므로 초야에서 사림을 공격하기 위해 떼 지어 일어난 상소도 모두가 "균이 사주했다" 하니, 이보다 더한 불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뒤에 최심과 윤해수 등의 소장은 신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님이 분명한데도 그때 논의가 의심하였었습니다. 심지어 곽영의 상소에서도 "덕부도 균을 지척하면서 그의 술수에 빠졌다"고 하였습니다만, 소명국의 일이 드러나게 되자 덕부도 비로소 말이 없었습니다.
신이 대론을 주장한 때문에 저들에게 미움을 당했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늦추기를 주장하는 약간의 시배들에게도 미움을 샀기 때문에 사지에 이르게 되었으니, 어찌 애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거적자리를 깔고 명을 기다리고 있으므로 다른 일은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지난날 같이 일하던 유생들은 징병 때문에 인심이 술렁거려 내홍이 일어날까 걱정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초야와 성균관·사학이 함께 소장을 올려 대국을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혹 와서 상의하면, 역적을 토벌하는 정론은 의에 있어 저지시킬 수 없으니 그들이 다시 청하는 대로 맡겨 둘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이에 무슨 딴 뜻이 있었겠습니까? 덕부 한 사람에게 배척받은 것 때문에 끝내 평핵을 받는 것이 원수인 기준격에게서보다 더 심하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민인길의 상소에는 당초부터 신이 격서를 지었다는 말이 없었고 이홍로와 원수 맺은 자취는 나라 사람이 다 아는 일이며, 서찰 다섯을 밀서로 만든 것은 모두 허위 날조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양사에서 원수가 무함하는 말을 주워 모아 탄핵하는 소장에 기록한 것에 대해서는 신 또한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은 기준격의 무함을 받은 뒤부터는 조심스럽게 사명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친우의 집에도 일체 왕래하지 않았습니다. 혹 밤을 이용하여 다른 집으로 옮겨 갈 적에도 파리한 말과 시원찮은 동복을 데리고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높은 벼슬아치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초헌을 타고 구종을 데리고서 큰 소리로 길을 물리며 다녔다"는 것은 너무도 억울합니다.
신이 바야흐로 병고에 시달려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병을 무릅쓰고 요동으로 달려가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기에 기필코 유겸을 사주하여 이런 망령된 의논을 했겠습니까? 윤리를 모독하고 문란시켰다는 것은 반드시 근거가 있는 것으로, 신은 이제 오십 년토록 살아오면서 이런 비방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런 오명을 받았습니다. 윤상이라는 것이 지목하는 바가 있어서 한 말이 아닙니까?
신은 한 사람의 몸으로서 한 시대의 어진 재상이 극히 친밀하게 대우했고 국가의 대론에 참여하게 했는데, 하루아침에 언관이 배척하여 흉역이라 하고 윤상을 모독했다고 합니다. 금방 훌륭하다고 했다가 금방 간사하다 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습니까? 민인길의 상소가 올라간 지 이미 열일곱 달이 되었고 기준격의 무고하는 상소에 대해서도 반 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조용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여러 유생들의 곧은 논의가 일제히 발한 뒤에야 신을 지적하여 역적이라 하면서 세 사람을 국문하기를 청하였는데, 역적을 토벌하는 것을 이토록 완만하게 한다면 국가의 일을 알 만합니다.
대사가 처음 거론될 때 신이 과연 권면한 일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에 와서는 공의가 일제히 분노하고 있습니다. 유생들은 모두가 전일 제일 먼저 같이 일한 사람들로서 모의하지 않았어도 말이 같았으며 각자 스스로 정성을 다했습니다. 성균관·사학의 유생이 팔방에서 와 모여 공의를 인하여 충심을 바치고 있는데 이것도 신의 술수에 빠져서 그렇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신은 요직에 있지도 않은데 무슨 이익을 가지고 유생들을 꾈 수가 있겠습니까? 유생들이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것도 이 때문에 신을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전하를 부호한 것은 선왕 때부터였고, 역적을 걱정한 것은 1612년이었고, 대론을 세운 것은 1613년이었고, 유생들의 상소는 지난해 11월에 있었고, 기준격의 무고는 12월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을 가리켜 공을 세워 스스로 죄를 면하려는 여지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니, 또한 거짓이 아닙니까? 신은 삼가 비통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신의 죄악이 이러한데도 병을 조리하고 계신 중에 이렇게 번거롭히는 것은 부당한 줄 압니다. 그러나 양사에서 이미 "자신에게 죄가 없다면 언관이 국문할 것을 청하기도 전에 스스로 옥에 나와서 기필코 변명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고, 이런 양사의 의논이 매우 의리에 합당했기 때문에 부득이 무릅쓰고 아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유념하시어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여 주소서.
(용어) 서양갑은 서얼 출신으로 박응서·심우영 등과 함께 조령에서 은상을 살해하고 금품을 강탈하다 체포되자, 이이첨 등의 사주를 받아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고 허위 진술함으로써 계축옥사를 일으킨 인물이다. 이 상소가 올라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618년 8월, 허균은 결국 역모 혐의로 처형되었다.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2 · 서(서문)
출처: 성소부부고 제26권, 부록 2, 서
배경: 성소부부고 마지막에 실린 세 편의 서문이다. "태각지 서"는 1601년 예조 정랑 시절 허균이 조선 개국 이래 의정부(정승·재상)의 연혁과 역대 재상 명단을 정리하며 쓴 글이다. "청허당집 서"와 "사명집 서"는 각각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서산대사 휴정과 그 제자 사명당 유정의 문집에 부친 서문으로, 허균이 두 고승과 맺은 개인적 인연과 존경심이 잘 드러난다.
태각지 서 (서기 1601년 2월 17일, 양력 추정)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 강헌대왕께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여셨는데, 그때 문하 우시중 배극렴은 전 왕조(고려)의 재상으로서 태조가 나라를 여는 데 실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문하성의 제도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았다.
그 후 2년 만에 한성에 도읍을 정하고서 비로소 두 개의 관부를 창설, 고려 말엽의 제도를 본떠 도평의사를 설치해서 국정을 맡게 하고 삼군부를 설치해서 군무를 다스리도록 하니, 그 조와 진의 제도가 한결같고 맡은 일도 예전과 똑같았다. 그리고는 배극렴을 판도평의사로, 정도전을 영삼군부사로 삼았다. 그리하여 조인옥·정희계·이옥·이서·설장수·조림 등이 모두 공신이자 왕실의 외척인 중신으로서 서로 전후하여 동판사사가 되었는데, 나라의 큰일은 혹 서로 참여하여 결정하곤 하였다.
2년 후 배극렴이 물러나자 조준·김사형이 그 직임을 대신하였고, 또 삼군부의 직무에 지장이 없도록 정도전에게 도평의사의 직무를 겸하게 하였다. 조준·정도전이 그 자리를 떠나고 나서는 심덕부·이서가 서로 이어 그 일을 맡았다. 안종원·이이·이승원·장사정·박위·이거이도 차례로 동판사사가 되었고, 이지란·이온·조박·남은·전백영·이지·조온·황거정이 상의평리가 되었는데, 모두가 다른 관직에 있으면서 그 직무를 겸하였다. 그러나 모든 군국 기무에 관계된 일은 두 재상이 주장하며 결단하였고, 동판사사 이하는 감히 가부를 말하지 못한 채 자리만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공정대왕(정종) 때에 도평의사를 고쳐서 의정부로 만들었다. 그런데 태종이 즉위하여서는 의정부와 삼군부를 혁파하고 좌정승·우정승을 모두 정1품으로, 시랑찬성사를 종1품으로, 참찬을 정2품으로 하여 하륜·성석린을 좌정승·우정승에, 이첨·정탁을 찬성에, 이내·권근을 참찬에 임명하였다.
그 14년 후에는 영부사 1인, 판부사 2인을 모두 정1품으로, 동판부사 2인을 종1품으로 설치하고 참찬지부사를 혁파하였다. 얼마 후에 제도를 다시 개정, 영의정·좌의정·우의정 각 1원을 모두 정1품으로 하여 이서·이직·조영무에게 그 직을 임명하였고, 좌찬성·우찬성 각 1원을 모두 종1품으로 하여 박은·한상경에게 그 직을 임명하였고, 좌참찬·우참찬 각 1원을 모두 정2품으로 하여 박석명·유관에게 그 직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의정부의 소속으로 사인·검상·사록 등의 관직은 모두 한때의 대단한 청요직이었고, 녹사·도리는 모두 처음 벼슬한 문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렇게 하자 군국의 큰 정사와 육조의 온갖 업무가 모두 의정부에 귀속되고 전장과 제도가 비로소 정해져서 그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삼정승이 조정에 앉아 있으면 육조의 관속들이 각기 맡은 일을 가지고 조방에 모여서 처리하였고, 무릇 임금의 재가를 받은 공문서를 만나면 사인 이하의 관원들이 각기 소임을 분담, 평의하여 재상의 결재를 받은 다음에야 해당 관원이 그 일을 과감하게 시행하였으니, 그 직무를 맡겨서 완수하기를 책임 지우는 일의 중대함을 대강 상상할 수 있겠다.
세조가 즉위하여서는 육조가 의정부에 가서 사건 결정하는 일을 혁파하고 큰 정사만 의정부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사록을 성균관·사관 등 사관의 겸직으로 삼고 녹사 이하는 옛 관례에 비추어 제수하니, 정부의 권한이 이로부터 약간 가벼워졌다.
나는 오랫동안 계속된 태평성대의 말엽에 태어나, 젊었을 적에 그윽이 조종조 때 어진 사대부들의 행적을 사모하고 좋아한 나머지 의정부 서고에서 삼정승의 전임 명부를 가져다가 한번 눈여겨본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에 내가 방종하여 그것을 베껴 두지 못하고 다만 마음속에 기억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로 전적이 모두 없어져서 이에 관한 것을 찬술하려 해도 참고할 만한 것이 없었다.
지난번 오성 이항복 정승을 모시고 있을 때에 이 일에 대해 언급하게 되었으므로, 지금 기억하고 있는 대신들의 성씨를 기록하여 바치고, 즉시 각 연도의 과거 급제자 명부를 가져다가 그 집정자를 뽑아 적되, 무관이나 음관으로 시작하여 대신이 된 사람들로서 가끔 기억할 만한 사람 또한 차례에 따라 적어 넣었다. 또 옛 정승 해원부원군 윤두수에게서 이른바 "국조대신고"라는 것을 얻어 옛일을 널리 상고하고, 거기에 나의 듣고 본 바를 가지고 바로잡은 다음 연도 순서로 편성하여 옛 명부의 잘못된 점을 보완하였다.
나라를 세운 초기에는 판평의사가 국정을 도맡았고 동판 이하는 정사의 권한을 행사하는 데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므로 판사만을 기록하였고, 또 문하성과 의정부에도 역시 정승과 영사만을 기록하였으며, 그 부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종실 가운데 재상이 된 사람은 준(전주 이씨 종친) 한 사람뿐이고, 음관으로 재상이 된 사람은 신수근 한 사람뿐이며, 무신으로 재상이 된 사람은 박원종 한 사람뿐이다. 그 후로는 모두 문관으로 재상을 삼았는 바, 통틀어 재상 백오십육 인을 가지고 나라 세운 초기 이후 대신 연표를 만들었다.
1601년(선조 34년) 1월 일에 예조 정랑 허균은 서한다.
(용어) 이항복(호 오성, 오성부원군)은 선조 때의 정승이다. 윤두수(호 해원부원군)는 선조 때 정승을 지낸 인물이다.
청허당집 서 (서기 1612년 2월 16일, 양력 추정)
불법이 동쪽으로 삼한에 들어오기는 신라 중엽부터였다고 한다. 그사이 불문에서 일컬어진 이가 수없이 많았으나, 거의가 가르침을 담은 경전이나 계율 두 가지에 벗어나지 못하여 탑과 절을 높이고 인과응보를 내세워 한 세대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을 뿐이었다.
그 염화미소의 은밀한 뜻과 달마가 면벽 수행한 은미한 뜻은 조금도 간파하지 못한 채, 아무 스승은 아무의 전수를 받았고 아무 조사는 아무에게 법을 전했다고 하는데, 그 문도가 또 덩달아 이를 기념하는 데 끊임이 없어, 높다란 비를 세우고 커다란 종을 만들어 공적을 과시하는가 하면, 보배로운 전각과 연꽃 궁전이 사찰을 빛나게 장식하되 수천 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으니, 어찌 너무 참람된 관습이 아니겠는가.
오직 도봉산의 영소국사가 중국에 들어가 법안종 영명 연수의 전수를 받고, 송나라 건륭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와 불법의 기풍을 크게 떨쳐 말법의 세상을 구제함으로써, 조사(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비로소 드러나고, 이 땅에서 가사를 두른 이가 드디어 임제종·조동종의 종풍을 계승하게 되었으니, 선종에 끼친 공로가 어찌 적다 하겠는가.
영소국사의 깨달음은 도장 신범에게 전수되어 청량산의 도국, 용문산의 천은, 평산의 회해·현감·각조, 두류산의 신수 등 여섯 세대를 거쳐 보제 나옹에게 이르렀고, 나옹은 오랫동안 중국에 있으면서 모든 선지식을 널리 찾아 두루 통하고 즉시 체득하여 무성하게 선종의 사표가 되었다. 또 그의 법을 전수받은 이는 남봉 수능이 적통을 이었고, 정심 등계가 이를 바로 계승하였는데, 정심은 벽송 지엄의 스승이다. 벽송은 다시 부용 영관에게 전수하였는데, 그 도를 체득한 이는 오직 청허 노사를 으뜸으로 일컫고 있다.
청허 노사의 법명은 휴정, 고향은 안서(해주의 옛 이름)로, 어려서 유가의 글을 익혀 이미 큰 뜻을 통하였고 문장에도 능하여 과거 볼 만한 정도의 공부는 매우 하찮게 여겼다. 뒤에 두류산(지리산)에 노닐다가 갑자기 큰 서원을 발하여 부용 영관의 문하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법을 받아 여덟 가지 가르침을 통하고 세 가지 관법을 통하였으며, 도는 조짐 이전에 비추고 생각은 번뇌 밖으로 벗어났다.
그 영원한 밝음과 간결한 조예는 곧장 달마·혜능의 맥락을 접하고, 마음과 본성을 설하는 오묘함은 남양 혜충·영가 원각·백장·남천과 어깨를 나란히 함으로써, 지혜의 태양이 거듭 밝고 지혜의 등불이 더욱 빛났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그림자를 보거나 말을 듣고 그대로 집착하거나 믿는 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멀찌감치 물러설 것이며, 참되고 바른 것을 훼방하고 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려다가는 스스로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업보를 지을 것이니, 이른바 하등 사람은 도를 듣고 도리어 크게 웃는다는 말이 어찌 허위이겠는가.
노사는 큰 법을 간직하고 명산에 두루 머무른 법랍이 이미 칠십 년이나 된다. 은고를 보배로운 도량에서 울리고 금륜을 향기로운 땅에서 굴려 온갖 미혹을 다 깨뜨리고 검은 불자를 혼자 세워, 도봉산·보제의 가르침이 이에 이르러 더욱 크게 밝아졌다. 저 가르침과 계율에 구구하여 인과응보나 믿는 이와 비교하면 그 거리가 어찌 백만 유순뿐이겠는가.
아, 그런데 부처의 말씀이 장차 밝혀지려는데 옥으로 된 천이 갑자기 재로 변하여, 부처가 설법한 기원정사에 그늘이 없어지고 자비의 배에서 노를 잃었으니, 사람과 하늘의 비통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종봉 유정공은 노사의 가르침을 듣고 흥기한 이이다. 지혜의 깃발이 이미 꺾이고 계율의 보배가 오랫동안 묻혀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그 남긴 글을 주워 모아 영원히 사모하는 뜻을 붙이려 하였으나, 그 글을 간행하기도 전에 유정공 또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열반에 들던 날 저녁에 문인들을 불러 부탁하기를, "나의 스승 노사의 유문을 내가 간행하지 못하고 갑자기 감으로써 처음의 마음을 저버리게 되었으니, 너희가 나의 정성을 잊지 않고 그 일을 마쳐 준다면 내가 지하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겠다" 하고, 이어 "거사(허균)는 우리 불교와 은미한 인연이 있다" 하고는, 이 서문을 부탁하였다.
그의 문인 혜구가 나를 찾아와서 그 죽은 스승의 말을 전하고 서문을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 그런 연유가 있었다. 청허는 나의 선친께서 뜻을 같이한 벗으로 보았고, 나도 젊었을 때 서찰 사이에서 보아 왔다. 지난해 서쪽 지방에 나가 노닐 때 객사에서 노사를 만나 직접 묘한 진리를 듣고 어지러운 마음이 금세 없어졌으며, 노사 또한 사후의 비문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나는 유가의 선비이다. 불교와는 전혀 서로 맞지 않는데 어찌 그 행적을 모사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스승이 이를 알고 부탁하였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에 선대의 오랜 우의를 감념하여 감히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그 스승과 제자로 서로 전수한 자취를 서술하고 노사에 관한 줄거리를 대충 기록해 보낸다. 그러나 석가의 머리 위에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일인데, 혹 나의 혀를 뽑는 업보가 돌아올까 염려된다. 그 유문의 현묘하고 탈속함은 보는 이가 스스로 짐작할 것이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명나라 만력 40년 임자년(1612, 광해군 4년) 정월에 양천 비야거사 허단보는 쓴다.
(용어) 염화미소는 석가가 연꽃을 따서 제자에게 보였는데 오직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미소 지었다는 고사로, 말이나 글 없이 마음으로 마음에 전하는 불교의 깊은 진리를 이른다. 청허당 휴정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킨 서산대사이며, 허단보는 허균이 스스로 붙인 자다.
사명집 서 (서기 1612년 2월 16일, 양력 추정)
지난 1586년(선조 19년) 여름에 내가 둘째 형을 모시고 봉은사 아래 배를 댄 적이 있었다. 마침 한 스님이 갑자기 나타나 뱃머리에 서서 읍을 하는데, 헌걸찬 체구에 용모가 단정하였고, 함께 앉아 담화를 나누는데 말이 간단하였으나 그 뜻이 깊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물어보았더니 바로 종봉 유정 스님이었다. 나는 그만 진심으로 흠모하고 말았다.
밤이 되어 매당에 들어 유숙하다가 그가 지은 시를 내어 보이는데, 그 격조가 마치 거문고 소리와 같이 청아하고 높았다. 둘째 형이 몇 번이고 칭찬하면서, 당나라 아홉 고승의 시와 나란히 놓아도 될 만하다고 하였다. 그때 나는 아직 어려서 그 오묘한 경지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를 마음속에 간직하여 쉬이 잊지 못하였다.
3년을 지나 둘째 형이 별세하자, 스님이 오대산에서 와서 조문하며 슬피 곡하고 또 만시를 지었는데, 그 시구가 너무 처절하여 아직도 생사의 경계에서 해탈하지 못한 듯하기에 내심 의아해하기를 '스님의 수도가 아직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일까. 어찌 구구히 속인들의 슬픔과 기쁨을 그대로 본받는단 말인가' 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겨울, 임진왜란을 피하여 강릉에 있다가 스님이 의병을 규합하여 국난을 막을 때, 그 스승을 대신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여러 차례 왜적을 꺾었단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 뒤에 스님이 임금의 명을 받들고 적진을 찾아가 왜인을 타일러 큰 공적을 세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다시 만날 수 없으니 스스로 마음만 피로하다.
1596년(선조 29년) 겨울, 내가 승문원에 있을 때 공무로 인하여 영의정 서애 유성룡을 찾아뵈었는데, 스님이 높은 고깔에 긴 수염으로 함께 앉아 있다가 반가이 손목을 잡고 옛날을 이야기하였다. 이에 함께 객사로 돌아와 당시의 국사를 담론하였는데, 강개한 기개로 손뼉을 치면서 이해를 타진하는 것은 옛날 의협의 풍도가 있고, 안장에 기대어 좌우를 돌아보면서 요사한 기운을 쓸어버리려는 의지는 또 노장군의 굳세고 정정한 모습과도 같기에, 내가 더욱 공경하고 소중히 여기면서 '그의 시문은 여사에 불과하다. 그의 재주가 국난을 구제할 만한데 아깝게도 잘못 불문에 투신했다'고 여기었다.
1603년(선조 36년) 가을, 스님이 조정에 사퇴를 빌고 상원사 옛 처소로 돌아와 있다가, 강릉의 내 별장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 무렵 내가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잠시 불교 경전을 가져 큰 뜻을 달래던 터라 불가의 명심견성설에 약간의 소견을 가지고 한두 가지를 시험 삼아 논해 보았더니, 스님이 모두 통달하고 환히 깨달아 진정 조계·황매의 가법을 체득하였다. 참된 종지의 적통과 은밀히 전해지는 뜻을 통투한 때문에, 세상을 제도하고 어려움을 구제한 것도 그 일단에서 나왔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며칠 오묘한 진리를 담론하는 사이에 일찍이 듣지 못했던 것을 많이 들었다. 이후부터는 스님이 도성에 오면 문득 서로 오가면서 서로 늦게 알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었다.
1610년(광해군 2년) 9월에 스님이 입적하였단 말을 듣고 글을 지어 조상하고 또 시로써 영결하였다. 나는 그 높은 풍도가 영영 멀어졌음을 섭섭해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스님이 둘째 형을 애도하던 마음이 오늘날 내가 스님을 애도하는 생각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정이란 대체 무엇이기에 사람을 그처럼 속박시켰단 말인가.
이번에 그 문도 혜구가 스님의 문집을 가지고 와서 청하기를, "우리 스승께서 지은 수천 수의 시는 일찍이 공의 둘째 형님께 보관되어 있다가 전란에 유실되었고, 이는 근자에 와서 주워 모은 것으로 태산에 비해 터럭 한 올과 같은 격차입니다. 우리가 스승의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기에 이 시 몇 권을 편성, 간행에 붙여 우리 스승의 문장의 높낮이와 도의 깊이를 알리려 하는데,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 하여 헛되이 추앙만 하지 않을 이는 공밖에 없으니, 부디 한 말씀을 주어 영원히 전하도록 한다면 이는 공의 은혜입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아, 내가 어찌 차마 스승의 글에 서문을 쓰겠는가. 스님의 시가 이미 문단에 널리 추앙되었고, 스님의 공적이 이미 국토 수복에 있었으며, 스님의 도가 이미 부처의 경지에 들었으니, 어찌 나의 서술이 있어야만 그 추중이 더 증가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의 형제는 진정 스님과 인연이 있었던 터라 어찌 글재주가 없다 하여 사양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그 시종을 서술하여 그의 청에 응하는 한편, 마음속 회포를 붙인다.
명나라 만력 임자년(1612, 광해군 4년) 정월에 교산 허단보는 서한다.
(용어) 사명집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왜국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던 사명당 유정의 문집이다. 교산은 허균이 스스로 붙인 호다.다. 저는 내심 기뻐하며 그의 전집을 구하려 했는데, 올해 마침내 한양에서 책 한 질을 보내와 지방 관아의 심부름꾼 편에 전해 받았습니다.
이 책과 함께 아주 정성스러운 편지도 왔는데, '온 세상에 이름난 큰 학자의 말 한마디를 얻어 책머리를 빛나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비록 벼슬에서 물러나 산속에 계시지만, 지금 이 나라 문단을 이끌 분이 선생님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좋은 말씀을 써 주시어 먼 나라 사람의 정성을 위로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온 세상의 문장을 책임진 이들은 모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옛 한나라 서울이나 당나라의 가장 융성했던 시절에 태어났더라도 문단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만한 인물들인데, 유독 자기 집 반찬은 마다하고 남의 들오리를 즐기듯 제 나라 것은 마다하며, 마땅히 물리쳐야 할 것은 물리치지 못하면서 오히려 탐내려 드니,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닐는지요." (※ 이 문장 가운데 일부 표현은 정확한 뜻이 분명하지 않다 — 원문 불확실)
주지번이 답했다.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황제의 다스림이 온 천하를 하나로 아우른 위대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밝은 가르침이 나라 안에 넘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그 바깥까지 미친 것이지요. 조선은 예로부터 기자가 봉해졌던 땅이라 그 가르침을 가장 먼저 입었고, 허씨 집안은 아득한 옛 성인의 후예이기에 그 나라 문단을 으뜸으로 차지하였으니, 그의 형과 누이의 글 역시 이와 함께 크고 반듯한 격조를 갖추었다 할 것입니다. 이 문집은 명나라를 대표하는 일곱 문장가들 사이에 놓아도, 그 가운데 손꼽히는 두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합니다. 이런 인연이야말로 아침저녁으로 우연히 만난 것과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주지번이 인재를 아끼는 마음을 아름답게 여기는 한편, 황제의 가르침이 멀리까지 미친 것을 우러르며 이 일을 맡기로 하였다.
아, 인재가 태어나는 것은 땅의 기운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어찌 시운에 호응하지 않고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 있겠는가. 삼한(조선)은 아득한 옛날 주나라 때부터 중국과 왕래하였으나, 남긴 글이 그리 드러난 것이 없었다. 수나라와 당나라 때에 이르러서야 을지문덕이 적장 우중문에게 보낸 훈계의 시나, 신라 왕이 비단에 수놓아 당나라 황실의 공덕을 기린 노래 같은 것이 기록에 전하지만, 대개는 소박하여 뛰어난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 이 사람(허균)의 글만은 크고 넓은 세계에서 노닐어 우아하고 아름다운 울림을 지녔으니, 중원의 큰 문장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그 전통을 이어받을 만하다. 다만 그를 명나라의 이름난 문장가 두 사람에게 견주는 것은 조금 지나친 칭찬인 듯하지만, 주지번의 밝은 안목을 어찌 다 가릴 수 있으랴.
수천 년 만에 비로소 이런 글쓴이 하나를 얻었는데, 때마침 밝은 세상을 만났으니, 시운에 호응해 일어나는 인재는 땅의 기운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이 한 가지 일로도 알 수 있다. 내가 이렇게 거듭 칭송해 마지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애초에 "부부"(장독 뚜껑을 덮는다는 뜻으로, 별 볼 일 없는 글이라는 겸손한 표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지나친 겸양에서 나온 듯하지만, 이 책이 끝내 그런 하찮은 대접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 책 자체가 증명해 줄 것이다. 그렇다면 예전에 양웅의 《법언》과 《태현경》이 세상에 빠르게 알려진 것이 환담이라는 사람이 미리 그 가치를 알아본 덕분이었듯, 이번에 이 책이 널리 알려지는 것은 주지번의 공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가 낮아져 내가 그 환담의 역할을 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이 책에 누가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는 변방의 것이 중국 문단에 나아간 것일 뿐이니, 그저 중국의 것으로 여겨질 따름이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좋다고 기뻐 춤을 추어도, 그것은 마치 옛날 초나라의 광대 우맹이 손뼉을 치며 죽은 재상 손숙오의 흉내를 낸 것과 같은 노릇이니, 주지번께서는 아마 이를 두고 웃음거리라 놀리지 않으시겠는가. 이런 마음으로 이 글을 서문으로 삼는다.
1613년(광해군 5년) 음력 3월, 그달의 세 번째로 돌아온 '사'날에, 진강 사람 이정기(자는 이장)가 쓰다.
인물·용어 설명
주지번(호는 난우): 명나라의 학사로, 1606년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때 허균과 만나 깊이 교유하였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왕세정(호는 감주): 명나라의 문인으로 시문에 뛰어나 당대 최고 문장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다.
변공(호는 화천): 명나라의 문인으로, 뛰어난 시인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다.
기자: 옛 중국 은나라의 인물로, 전설에 따르면 조선 땅에 봉해졌다고 전해진다.
명나라를 대표하는 일곱 문장가: 명나라 후기에 활동한 일곱 문장가를 가리키며, 그 가운데 특히 손꼽히는 두 사람에 허균이 견주어졌다.
을지문덕: 고구려의 장군으로, 수나라 대군과 싸울 때 적장 우중문에게 훈계하는 시를 보낸 일화로 유명하다.
신라 왕의 노래: 신라 진덕여왕이 손수 지어 비단에 수놓아 당나라에 보낸 노래로, 당나라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양웅과 환담: 양웅은 한나라의 학자로 《법언》과 《태현경》을 지었고, 환담(자는 군산)은 이 책들이 후세에 반드시 전해질 것이라 미리 알아보고 칭찬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한 인물이다.
우맹과 손숙오: 우맹은 옛 초나라의 광대로, 죽은 재상 손숙오를 흉내 내어 그의 공덕을 임금에게 일깨운 일화로 유명하다.
원문에서 이정기는 자신을 옛 관직 이름(오늘날의 예조판서에 해당)으로 낮추어 표현한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는 이해하기 쉽도록 '나'로 풀어 옮겼다.
성소부부고 제1권
9. 18:23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정유조천록 —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정유조천록
배경: "정유조천록"은 허균이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 명나라에 사신 일행으로 다녀오면서 지은 연작시다. 임진왜란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요동, 산해관을 지나 명나라 수도까지 오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분량이 매우 많아 이번에는 앞부분 열 편만 먼저 옮긴다.
높은 누각에 올라 (서기 1597년 9월 14일, 양력 추정)
바람을 타고 선 누각이 아득히 트여 있어
한가로우면 부르지 않아도 절로 오르게 된다
전란을 여러 번 겪었어도 옛 풍경은 그대로 남아
이리저리 둘러보며 시를 읊는 것은 오늘 아침이 처음이다
밤비에 씻긴 푸른 산은 가까이 다가온 듯하고
연기에 잠긴 초록 들판은 아득히 멀어 보인다
먼 길 떠도는 나그네, 타향살이 시름도 어느새 잊었는데
서쪽으로 기우는 해는 긴 다리 너머로 저물어 간다
평양 가는 길에 (서기 1597년 9월 17일, 양력 추정)
쓸쓸하다, 소나무 심은 저 정원도
처량하다, 남포의 저 다리도
강산은 예전과 다름없지만
누각들은 절반이 불타 버렸다
부질없이 흥하고 망함을 슬퍼할 뿐
누구에게 기대어 이 적막을 깨뜨릴까
동풍은 나그네의 마음을 아는 듯
목련으로 만든 조각배에 불어온다
나그네로 지내는 밤에 있었던 일을 적다 (서기 1597년 9월 17일, 양력 추정)
시름 어린 등잔불이 바람에 흔들리는 휘장 사이로 가물거리고
꿈에서 깨어나니 조각달이 창틈으로 살짝 들여다본다
언덕 위에서 놀던 사람들은 아직 돌아갈 줄을 모르는지
밤이 깊도록 옥퉁소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백상루 (서기 1597년 9월 20일, 양력 추정)
높은 누각이 하늘 반쯤 걸려 있고
그 아래로는 긴 강이 흘러간다
틈을 내어 병든 몸을 이끌고 나와
붙잡고 올라 잠시 마음을 내려놓는다
고개 들어 향로봉을 바라보니
구름 밖에 붉고 푸른 빛이 두둥실 떠 있다
어찌하면 밀랍 바른 나막신을 신고
곧장 저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볼까
신선이 사는 곳은 너무도 아득하기만 하니
얽매인 이 세상살이가 시름겹기만 하다
홀로 서성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니
서산으로 지는 해가 발에 걸렸다
사람의 한평생은 백 년을 채우지 못하는데
세상일에 팔려 근심만 늘어난다
명예도 이익도 다 헛것일 뿐인데
왜 진작 그만두지 못했던가
이제라도 나랏일을 끝마치게 된다면
벼슬을 내려놓고 산골로 돌아가리라
학을 탄 신선에게 말을 건네 보나니
나도 즐거이 신선 세계에서 노닐게 해 주겠는가
공강정 (서기 1597년 9월 21일, 양력 추정)
강 안개는 아득아득하고 강물은 유유히 흐르는데
강가 붉은 정자에는 빗방울이 그칠 줄 모른다
돌아가는 저 기러기가 어찌 북쪽 땅을 잊을 수 있으랴
지는 꽃잎은 저 홀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을 따라간다
누각에 올라 고향을 그리던 왕찬의 한스러운 노래를 읊조려 보지만
나라를 떠나 사는 우번의 시름은 또 어찌하리
만 리 밖 사신의 여정, 하늘은 한없이 멀기만 한데
구름 저편 어드메가 바로 황제가 있는 서울인가
(용어) 왕찬은 후한 말 전란을 피해 형주로 몸을 의탁하고 성루에 올라 고향을 그리는 글을 남긴 문인이다. 우번은 삼국 시대에 바른말을 하다가 먼 곳으로 쫓겨나 살았던 인물이다. 두 사람 모두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지내야 했던 처지를 빌려 자신의 심정을 견준 것이다.
정주 가는 길에 (서기 1597년 9월 23일, 양력 추정)
사신의 여정으로 서쪽 관문을 서둘러 벗어나니
어젯밤 꿈은 벌써 고향 동산으로 돌아가 있었다
날은 덥고 말은 지쳐 걸음이 참으로 힘겨우니
하늘 끝 어디쯤이 정주의 산천인가
선천 (서기 1597년 9월 25일, 양력 추정)
선천 객사에 막 들어서니
난간 너머로 들판이 훤히 내다보인다
우거진 숲은 뜨거운 햇볕을 가려 주고
높다란 창문은 긴 바람을 받아들인다
상쾌한 기운에 시흥이 절로 솟아나고
게으름은 술기운 속에 던져 버렸다
뜰에 가득 작약꽃이 무르익어 피었으니
어느 것이 기생의 다홍치마보다 고울까
거련관 (서기 1597년 9월 26일, 양력 추정)
잠시 솔그늘을 빌려 누워 있노라니
뜨거운 여름 햇볕도 까맣게 잊었다
남은 꿈에서 문득 깨어나니
바람이 산들산들 얼굴에 불어온다
전문령에 오르다 (서기 1597년 9월 28일, 양력 추정)
(허균 자신이 남긴 설명): 나는 갑오년(1594년)에 나라의 공문을 가지고 가는 관원 자격으로 요동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허 급사를 맞이하고 배웅하는 접반사 윤국형 공의 종사관이 되어 무려 넉 달이나 그 일을 맡아보았다. 그때 의주에 머문 적이 있어 이 시에서 그 일을 언급하였다.
말을 달려 전문령에 오르고 보니
비껴 비치는 해가 앞세운 깃발을 비춘다
만 리 밖 타향 길을 가는 몸이니
삼 년 동안 오래도록 나그네로 지낸 심정이다
구름 저편에는 넓은 대륙이 펼쳐져 있고
파도 너머로는 관문의 성이 어렴풋이 보인다
백성이며 아전이며 서로 아는 이들이 많으니
길에 가득 몰려나와 정겹게 맞아 준다
의주 (서기 1597년 9월 28일, 양력 추정)
더운 기운은 대자리 위에서 맑게 식어 가고
강 안개는 먼 숲속까지 스며든다
창을 여니 오늘 밤엔 달이 휘영청 밝은데
베개에 기대니 옛 벗이 그리워진다
쓸쓸하여라, 데릴사위처럼 얹혀사는 이 신세가 서글프고
적적하여라, 절로 고향 노래가 흘러나온다
서늘한 밤, 나그네는 꿈조차 이루지 못하니
가을벌레 우는 소리 때문만은 아니다
(용어) 옛 중국 진나라에는 가난한 집 아들이 장성하면 남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여보내던 풍습이 있었다. 허균은 이 옛일을 빌려, 남의 나라에 몸을 의탁한 나그네 신세를 비유하였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정유조천록 (2) — 나머지 27편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정유조천록
배경: 앞서 옮긴 열 편에 이어, 정유조천록의 나머지 스물일곱 편이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 산해관을 지나 명나라 수도에 이르는 사행길이 이어지며, 도중에 정유재란 전황(원균·이억기·최호의 전사, 남원성 함락, 직산 전투 등)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고 읊은 시들도 여러 편 섞여 있다. 이로써 정유조천록 전체 서른일곱 편의 번역이 마무리된다.
압록강을 건너며 (서기 1597년 10월 1일, 양력 추정)
오늘은 날짜마저 길한 날이라
내 수레바퀴에 기름을 쳤네
수많은 벼슬아치들 줄지어 와서
강가에서 전별 잔치를 열어주네
긴 물결에는 배들이 빼곡히 들어차고
강 한복판엔 구슬픈 북소리 퉁소 소리
그대여 이 술잔일랑 다 비우게
정든 이들과 이제 여기서 헤어지는구나
앞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아득하기만 한데
연경과 계주 가는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하네
사내대장부는 큰 여행을 귀하게 여기지만
여인들은 그저 이별을 서러워할 뿐
사공이 일어나 노를 저으니
어느새 압록강을 건너버렸구나
고개 돌려 옛 장성을 바라보니
저녁 안개가 성가퀴에 잠겨 있네
해가 지니 변방의 관새는 어두워지고
밤이 깊으니 나그네는 배가 고프다
그래도 정겨운 내 고향의 저 달은
만 리 길을 마다 않고 나를 따라오는구나
(당대 평가): 손곡은 이 시를 두고 "위나라와 진나라 시대 시의 격조가 있어 참으로 진귀하다"고 평했다. (손곡은 허균에게 시를 가르친 스승 이달의 호이다.)
두관참 (서기 1597년 10월 9일, 양력 추정)
냇물은 넘실넘실 흐르고 들판은 아득히 넓은데
옛 수자리에서 들려오는 슬픈 피리 소리에 나그네 애가 끊어지네
변방이라 가을이 이토록 일찍 찾아오는 걸 이제야 깨닫는데
밤이 깊으니 벌레 소리가 벌써 침상까지 스며드는구나
회원관 (서기 1597년 10월 10일, 양력 추정)
드넓은 성벽으로 진영을 웅장하게 세우고
엄격한 절제로 오랑캐를 막아내네
이 땅의 풍속엔 아직 협객의 기풍이 남아 있고
백성들 사이엔 오랑캐 풍습도 섞여 있구나
여관에 묵어도 안부 물어줄 사람 없고
낯선 타향이라 계절은 벌써 서늘해지네
외로운 등불만 밝혀 놓고 잠 못 이루는데
철새 기러기는 어느새 남쪽으로 날아가는구나
주필산의 노래 (서기 1597년 10월 11일, 양력 추정)
잘려나간 산기슭이 용처럼 휘돌아
구불구불 우뚝 솟아 평지를 내려다보네
어느 해에 만승의 천자가 먼 원정에 지쳤던가
지금도 이따금 길 가던 사람이 화살촉을 줍는다지
공 세우기 좋아하고 일 벌이기 좋아한 수나라 황제는 말할 것도 없고
진시황과 한무제도 다 같이 교만한 임금이었네
작다고 얕볼쏘냐, 벌과 전갈에도 독이 있는 법
날아온 화살이 문득 검은 갑옷의 군대를 범했다네
안시성 꼭대기에선 북소리가 둥둥 울리고
이적의 검은 깃발 아래 모래먼지 자욱했지
비단 백 필을 내려 충성을 권해 본들 부질없어
차라리 연개소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편이 나았으리
화살이 눈을 맞혀 상처를 입고 돌아갔다지만
이 이야기도 전해지는 말일 뿐, 허황된 데 지나지 않네
이번 원정길에 설인귀 같은 명장 하나는 얻었다지만
훗날 무미랑을 비웃는 노래야 낸들 어이하리
태자궁 앞에서는 청동 말이 목메어 울고
방주성 안에는 해마저 핏빛처럼 붉었다네
저승에 간 수양제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니
당나라 왕실이 이어진 것도 겨우 머리카락 한 올 차이였구나
(용어) 무미랑은 당나라 태종이 재주 있는 여인으로 뽑아 궁에 들인 여인이었는데, 훗날 고종의 황후가 되어(측천무후라 불린다) 당나라 황실을 뒤흔든 인물이다. 이 시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안시성에서 크게 패퇴한 역사를 소재로 삼았다. 연개소문은 당시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였고, 이적은 당나라의 장수였으며, 설인귀는 이 원정에서 이름을 떨친 당나라의 장수다. 수양제, 진시황, 한무제는 모두 무리한 원정을 벌이다 나라를 위태롭게 한 중국 역대 황제들이다.
고평 (서기 1597년 10월 15일, 양력 추정)
너른 들판은 포류 땅으로 뚫려 있고
긴 담장은 변방의 언덕을 갈라놓았네
변방의 바람이 구슬프게 불자 말도 술렁이고
해가 지니 오랑캐 땅의 먼지가 자욱해지네
종군의 즐거움은 미처 노래하지 못한 채
고국을 떠난 마음만 상하는구나
슬픈 피리 소리 몇 가락 울려 퍼지자
저녁도 되기 전에 망루의 문을 닫아거네
광녕 (서기 1597년 10월 17일, 양력 추정)
일찍이 도호부가 이곳에 설치되었고
중승이 다시 제단을 쌓았다고 하네
깃발들은 해를 가릴 만큼 자욱하고
갑옷과 창은 서리에 비쳐 싸늘하구나
갈석산을 바라보니 하늘이 가까운 듯하고
개원 땅은 개척한 땅이 넓기도 하다
중국의 판도는 이곳을 믿고 튼튼하니
범 같은 군졸들이 더욱 씩씩하구나
장진보의 관왕묘 (서기 1597년 10월 18일, 양력 추정)
문 앞의 옛 비석은 이끼 속에 누워 있고
쓸쓸한 숲 한가운데 한 뙈기 사당이 서 있네
전각의 깃발은 저녁노을에 눈부시고
담장 위 삼나무와 회나무는 찬바람에 소리 내어 흔들리네
단청한 벽화에는 구름과 천둥이 굉장하게 그려져 있고
향불 타는 빈 사당엔 신상이 위엄 있게 서 있네
지전을 태워 원혼을 부르지는 말아다오
두견새 피 토하듯 울어 들꽃이 붉게 물들었으니
(허균이 남긴 설명): 사당 안에 핀 붉은 꽃이 우리나라의 진달래와 꼭 닮아 있어서, 시의 끝 구절에 그 이야기를 넣었다.
영원성에 들어와서 본 바를 적다 (서기 1597년 10월 21일, 양력 추정)
채찍을 비껴 잡고 말을 달려 긴 언덕을 내닫는데
서로 만난 젊은이들 의기가 드높구나
비단 저고리 벗어 던지고 좋은 술을 잔뜩 사서
청루에 머물러 앉아 여인의 노래를 듣는구나
행산 (서기 1597년 10월 22일, 양력 추정)
먼 길 나선 나그네 시름겨워 잠 못 이루는데
서늘한 새 기운이 살쩍으로 스며드네
하늘 저 멀리 기러기 소리 아스라하고
밤이 깊으니 풀벌레 소리 처량하구나
공을 세우기엔 때가 이미 늦었고
어부나 나무꾼으로 돌아갈 계획도 더디기만 하네
일어나 바라보니 은하수는 돌아가고
새벽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 성벽에 메아리치네
산해관 (서기 1597년 10월 25일, 양력 추정)
땅의 형세는 넓은 바다에 닿아 있고
긴 성벽은 견고한 벌판까지 이어졌네
관문의 방비는 사나운 자들이 발붙이지 못하게 하고
빗장은 겹겹의 문마다 튼튼하기만 하네
사방 들판엔 뽕나무와 삼을 심은 집들이요
이어진 병영엔 무기와 군량이 쌓여 있네
시절이 태평하여 전쟁이 없으니
이 모든 것이 다 임금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먼 변방에 웅장한 진영이 열려 있고
겹겹의 관문에는 큰 방비가 마련되었네
군사를 다스리는 이는 부도위요
빗장을 맡은 이는 직방랑일세
마을에서는 변방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나루터 다리에는 절강 상인들이 자리를 잡았네
먼 길 온 나그네가 어찌 즐겁지 않으랴
술을 사서 권하며 맛보라 하는구나
영평부 (서기 1597년 10월 28일, 양력 추정)
노룡성 안에 해가 저물기 시작하니
우북산 꼭대기에 먹구름이 뭉쳐드네
사람들은 저마다 오랑캐가 말을 먹이러 왔다고 떠드는데
한나라의 이 장군은 지금 대체 누구인가
(용어) 이 장군은 한나라 무제 때 북평 태수를 지낸 이광을 가리킨다. 팔이 길고 활을 잘 쏘아 흉노가 몹시 두려워한 나머지 "나는 장군"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제묘에서 사신 어른의 시에 화답하여 짓다 (서기 1597년 10월 28일, 양력 추정)
석상은 대체 어느 해에 세워졌을까
그 고결한 기풍은 백대가 지나도 오히려 맑기만 하네
말고삐를 잡고 극진히 간언하던 그 마음을
그 누가 알리, 임금 자리를 사양했던 그 심정에서 나온 것임을
전각에는 단청이 눈부시게 빛나고
봄가을 제사는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네
난하의 물은 맑고 맑아 바닥까지 보이니
위천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기도 부끄럽구나
(허균이 남긴 설명): 이 마지막 구절은 지을 당시에는 스스로 적절하다 여겼는데, 훗날 양송천의 시를 보니 "평생 서산의 높은 절개를 우러러보았는데, 난하가 위천보다 낫다는 것을 이제 또 깨닫는다"는 구절이 있어 내 뜻과 은연중에 들어맞았다. 다만 양송천의 시가 나보다 훨씬 낫다고 하겠다. 마땅히 이 구절을 지워야 하겠지만, 우연히 뜻이 일치했다는 점에서 그대로 남겨둔다.
(용어) 옛날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의 폭군 주왕을 정벌하러 갈 때, 백이와 숙제 형제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신하로서 임금을 치는 것은 옳지 않다"며 극구 말렸다. 또 이 형제의 아버지인 고죽군이 작은아들 숙제에게 나라를 물려주려 했으나, 아버지가 죽은 뒤 숙제는 형 백이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했고, 백이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한다며 몸을 피했으며, 숙제도 형을 따라 함께 나라를 떠나버렸다. 이들이 임금에게 바친 충성도 결국 아버지에 대한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뜻이다. 한편 위천은 강태공(여상)이 낚시하다가 주나라 문왕을 만났다는 강 이름으로, 여기서는 자신에게는 나라를 경영할 만한 재주가 없음을 부끄러워하는 뜻으로 썼다.
계주 (서기 1597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저물녘 성루의 피리 소리 구슬피 울려 퍼지자
정탐하던 기병이 훨훨 날듯 돌아오네
산이 낮아 하늘이 계주 땅에 바짝 붙은 듯하고
들이 트여 나무들이 연경 하늘에 떠 있는 듯하네
황성이 가까워졌음을 차츰 느끼게 되니
나그네의 잠자리도 한결 편안해지는구나
어양은 예로부터 협객들이 살던 땅이라
지금도 여전히 둥둥 북소리가 울려 퍼지네
통주 (서기 1597년 11월 2일, 양력 추정)
통주는 황성을 곁에 끼고 앉아
군량을 실어 나르는 목구멍과 같은 요충지일세
저잣거리엔 외국의 진귀한 물건이 널려 있고
강 다리에는 바다를 건너온 배들이 모여드네
만나는 사람마다 다 월 땅에서 온 상인들
술을 사 들고 나루터 누각에 오르는구나
떠도는 나그네는 그저 우두커니 서서 듣고만 있으니
양쪽 살쩍에는 쓸쓸한 가을만 스며드네
황제의 도성 (서기 1597년 12월 13일, 양력 추정)
제도는 어찌 이리도 웅장한지
누각과 궁전은 구름과 무지개처럼 솟아 있네
이백여 년 동안 불꽃처럼 번성하여
빛나는 업적이 이토록 장대하구나
정치와 교화는 온 세상에 두루 퍼지고
예악과 문물은 천하에 빛나는구나
천자는 매달 초하루마다 조회를 여시니
새벽녘 명광궁이 활짝 열리네
사방의 제후들이 모여들어 옥패 소리 울리고
뭇 공경대신들은 안개 속에서 부지런히 조회하네
의장을 이끄는 구진성이 돌아나오자
종소리 울리며 대궐문이 활짝 열리는구나
보좌를 오색구름이 둘러싸니
마치 해가 동쪽에서 솟아오르는 듯하네
먼 나라 사람들 여러 통역을 거쳐 찾아와
만 리 길 마다 않고 문물을 구경하는구나
뜰에는 조공으로 바친 폐백이 가득 늘어서고
사람들은 절하고 춤추며 임금을 우러르네
아, 우리 기자의 나라 백성들이야말로
그 은택을 유달리 크게 입었다 하리라
우임금이 물길을 다스리지 않았던들 우리는 모두 물고기 신세였으리니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구나
그런데 동쪽 바다에는 아직도 풍파가 일어
중승이 붉은 활을 하사받았다고 하네
바라건대 천자께서 아낌없이 토벌을 명하시어
끝내 흉악한 도적떼를 말끔히 없애 주소서
백성들이 밭 갈고 우물 파며 다시 편히 밥을 먹게 되면
길이길이 우리 황제의 공덕을 기리오리다
(용어) 구진은 하늘의 별자리 이름으로, 천제를 호위하는 별이라 한다. 여기서는 황제의 행차를 이끄는 의장 행렬을 비유한 말이다. 붉은 활은 천자가 공을 세운 제후에게 잔치와 함께 내려주던 활이다. 기자는 옛날 중국에서 조선으로 건너와 나라를 다스렸다고 전하는 인물로, 여기서는 조선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우임금은 중국 고대에 큰 홍수를 다스려 백성을 구했다고 전하는 임금이다.
8월 15일 밤, 사신 어른이 "한 해의 밝은 달은 오늘 밤이 제일이다"라는 구절로 운을 삼아 오언절구 일곱 수를 지어 보여주기에 화답하여 짓다 (서기 1597년 12월 23일, 양력 추정)
계절이 어느덧 한가을로 접어드니
올 한 해도 저무는 줄 모르고 지나갔네
달구경한 아름다운 시가 있다기에
그 재주와 정취가 으뜸이라 청하고 싶네
때마침 가을바람 부는 계절을 맞으니
하늘 가득 금빛 물결 넘실거리는구나
밤이 깊을수록 유난히 희고 맑아
올해 들어 가장 맑은 풍경일세
하얀 빛깔이 은하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차가운 빛이 옥경에 넘실거리네
항아가 마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둥글고 둥글어 저리도 환하구나
그림자를 이끌고 뜰을 거니노라니
싸늘한 빛이 뼛속까지 스며드네
귀양 온 신선이라 불리던 저 이백에게 말을 전하노니
술잔 들고 와서 저 달에게 물어보라고
맑은 빛이 아까워 술잔을 마주하니
서글픈 마음이 나그네 가슴에 사무치네
예로부터 사람마다 저 달을 바라보았지만
그 누가 지금까지 남아 있단 말인가
고향에도 저 달은 똑같이 밝을 테니
근심 어린 집안 식구들 얼마나 허전할까
만 리 밖 나그네 신세를 응당 가엾이 여기며
하늘가에서 이 밤을 지새우고 있으리라
북쪽 마을에서는 미인이 비파를 뜯고
동쪽 이웃에서는 나그네가 노래를 뽑네
시를 읊어 이 좋은 풍경에 화답하노니
저 달빛은 대체 누구를 위해 이리도 환한가
본국의 수군통제사 원균과 수사 이억기, 최호가 싸움에 져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기 1597년 12월 24일, 양력 추정)
나라 소식을 들어보니 동쪽의 왜적들이
바다 어귀를 지키고 있다가 우리 수군을 습격했다고 하네
전선이 순식간에 파도 속에 뒤집히니
통제사와 수사들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는구나
한나라 장수는 남월을 무찔렀다지만
주나라는 오랑캐를 피해 기산으로 도읍을 옮겼었지
한밤중에 홀로 앉아 눈물을 쏟으니
이 분함과 원통함을 그 누가 알아주리오
남원성이 함락되어 (명나라 장수) 양원이 도망쳐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서기 1597년 12월 25일, 양력 추정)
말을 들으니 남원성이 함락되어
장군은 어두운 밤을 틈타 포위를 뚫고 달아났다 하네
백제 땅을 남김없이 집어삼키고
날카로운 칼끝이 서울까지 육박했다지
가엾어라, 가까운 이들은 어디로 흩어졌을까
임금과 신하는 나라 잃은 서러움만 노래하는구나
옛 고향 동산은 승냥이와 범의 소굴이 되었으니
어디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용어) "식미"는 《시경》에 나오는 시의 편명이다. 옛날 여후라는 제후가 나라를 잃고 위나라에 몸을 의탁했을 때, 그를 따르던 신하들이 그 처지를 슬퍼하며 지은 노래라고 한다. 여기서는 나라를 잃고 떠도는 임금과 신하의 처지를 빗댄 말이다.
계주로 돌아와, 부총병 이씨가 오랑캐 추장을 사로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서기 1597년 12월 31일, 양력 추정)
계주진의 관문 방비는 웅장하기만 한데
가을을 맞아 오랑캐 군세가 강성해졌다고 하네
큰 사막에는 음산한 바람에 흙먼지 자욱하고
어양 땅은 해가 지자마자 어두워지는구나
싸움에 물든 깃발은 스산하게 나부끼고
군사들의 함성과 북소리 뿔피리 소리 드높구나
계주에 돌아오자마자 들려오는 소식은
"나는 장군" 이씨가 얼마 전 좌현왕을 사로잡았다는구나
(용어) "대로"는 옛날 진나라 장수 순오가 오랑캐를 크게 무찔렀던 땅의 이름이고, "어양"은 당나라 때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던 고을 이름이다. 둘 다 여기서는 전란이 벌어진 땅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나는 장군"은 앞서 나온 이광 장군의 별명을 빌려, 이번에 공을 세운 부총병 이씨를 비유한 것이다.
산해관에 이르러, 경리 양호가 곧장 한양에 이르고 왜적은 직산까지 왔다가 패하여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서기 1598년 1월 5일, 양력 추정)
말을 들으니 시서를 익힌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곧장 한양으로 들어왔다 하네
위례성 쪽에서 왜적의 기세가 크게 꺾이니
부여 땅을 뒤덮었던 요사한 기운도 활짝 걷혔구나
날랜 창끝에 왜적 일천 명이 쓰러지고
흙탕물 이는 강물 위로 만 마리 말이 내달렸다지
승전보가 유관까지 전해져 오니
이 먼 사행길이 다 헛수고였구나 싶어 우습기만 하네
산해관을 나서며 짓다 (서기 1598년 1월 5일, 양력 추정)
산해관을 막 벗어나자 날씨가 벌써 쌀쌀한데
북녘 바람이 우뚝한 갖옷 모자에 불어오네
상자 가득 책이 실려 행장은 풍성하지만
서리와 이슬이 옷에 스며 나그넷길이 힘겹구나
돌아갈 생각에 시흥은 오히려 더 왕성해지고
벼슬살이에 대한 마음도 나그네 마음처럼 시들해지네
감호의 옛집은 예전 그 모습 그대로일 텐데
낚싯대를 저버린 이 몸이 부끄럽기만 하구나
(용어) "혜문관"은 전국 시대 조나라 무령왕이 북방 오랑캐의 복장을 본떠 담비 꼬리로 장식해 쓰던 모자인데, 훗날 진나라가 조나라를 멸망시킨 뒤 이 모자를 가까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사신 행차에 쓴 관모를 가리킨다.
여양 (서기 1598년 1월 11일, 양력 추정)
변방이 가까워 가을 방비가 긴급한데
갈 길이 멀어 나그네 마음은 지쳐만 가네
말이 지치니 해가 벌써 기울어진 걸 알겠고
매가 빠르게 나니 바람이 매섭다는 걸 깨닫네
호각 소리 들려오는 저 황폐한 성보
술 깃발이 나부끼는 저 쓸쓸한 주막
시를 찾아 스스로 근심을 달래 보니
수염을 쓰다듬는 일도 나쁘지만은 않구나
삼분하에서 오랑캐의 경보를 듣고 (서기 1598년 1월 15일, 양력 추정)
창을 낀 채 만 마리 말이 내달리니
오랑캐 기병이 지나간다는 전갈이 왔네
가을 구름은 너른 사막에 뭉쳐 있고
차가운 해는 긴 강물 저편으로 떨어지네
조정의 계책이 저들을 깊숙이 끌어들이니
오만한 오랑캐들이 감히 화친을 청해 오는구나
평생토록 품어 온 청영의 뜻인데
칼을 매만지며 홀로 슬픈 노래만 부르는구나
(용어) "청영"은 군대에 나아가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뜻이다. 옛날 한나라의 종군이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긴 끈을 준다면 반드시 남월왕을 결박하여 대궐 아래로 끌고 오겠다고 자원했던 데서 나온 말이다.
해주위에서 본 것을 기록하다 (서기 1598년 1월 16일, 양력 추정)
해주는 큰 진영이라 불리는 곳
화려한 집들 붉은 처마가 눈부시게 빛나네
물건을 실어 온 오 땅 상인들이 모여들고
곱게 단장한 조나라 여인들이 마중을 나오네
항아리에는 천 일 묵은 술이 넘실대고
소반에는 오후의 진미가 가득 올랐네
비단 방석엔 미인들이 줄지어 앉아
맑은 노래에 북과 피리 소리 어우러지네
피워 놓은 향은 쪽 찐 머리를 감싸며 향기롭고
창에 걸린 달빛은 치맛자락을 환히 비추네
동으로 돌아가는 나그네를 그 누가 생각해 줄까
깊은 가을 홀로 서글픈 마음만 이는구나
(용어) "오후의 진미"란 한나라 성제 때 제후에 봉해진 왕씨 다섯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사람들이 저마다 진귀한 요리를 바쳤는데, 이 다섯 가지 요리를 한데 모아 끓인 것이 진짜 진미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는 매우 호화로운 요리상을 뜻한다.
요동에 이르러 집에서 온 편지를 보다 (서기 1598년 1월 18일, 양력 추정)
오랫동안 떠돌던 나그네가 집에서 온 편지를 보니
어찌나 반갑던지 마치 집에 다다른 것 같네
임금은 아직 서울에 계시고
여러 장수는 여전히 창을 비껴들고 있다 하네
두보가 편지 한 통을 천금처럼 여겼다더니 그 마음 이제 알겠고
이별할 땐 한마디 말도 오히려 많다더니 그 말도 이제 알겠네
다만 병든 아내가 가엾을 뿐이니
나는 지금 바다 서쪽 한구석을 떠도는 나그네 신세로구나
(용어) "하교"는 다리를 뜻하는데, 예로부터 이별을 다룬 시에 흔히 등장하는 곳으로, 헤어질 때는 한마디 말조차 많게 느껴진다는 뜻이 여기 담겨 있다. "내부"는 옛 초나라의 은사 노래자의 아내를 가리키는 말인데, 흔히 자기 아내를 낮추어 부르는 표현으로 쓰인다.
진강에서 통군정을 바라보면서 (서기 1598년 1월 24일, 양력 추정)
강 건너 아득히 통군정을 바라보니
정든 임을 본 것처럼 눈이 문득 반가워지네
나랏일을 다 마치고 만 리 길을 돌아오니
그저 양쪽 살쩍에 흰머리만 더 늘었을 뿐이구나
진산강 길 위에서 우연히 읊다 (서기 1598년 1월 25일, 양력 추정)
거친 물굽이 들판 물에는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데
강가의 나그네는 말 한 필로 홀로 돌아가네
전쟁터였던 산마다 옛 성가퀴는 다 허물어졌고
마을 집집마다 텅 빈 베틀만 덩그러니 놓여 있네
어느 해에나 이 몸을 빼내어 전원에서 늙어갈까
해마다 전쟁이 그치지 않아 포위망을 풀 길이 없구나
가을바람 앞에 홀로 서서 눈물을 펑펑 흘리는데
가을 하늘의 기러기는 남쪽을 향해 날아가는구나
(당대 평가): 석주는 이 시를 두고 "빈틈없이 매섭다"고 평했다. (석주는 허균과 가깝게 지낸 당대의 시인 권필의 호이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막부잡록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막부잡록
배경: "막부잡록"은 허균이 군영의 막료로 지내던 시절에 지은 시 열일곱 편을 모은 것이다. 벗과 주고받은 시, 세시풍속을 노래한 시, 장난삼아 지은 시 등 다양한 소재가 섞여 있다.
선성에서 묵다 (서기 1597년 11월 4일, 양력 추정)
밤이 깊어 선성관에 드니
사방이 고요하여 향을 피우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아쟁 줄 위로 기러기발이 굴러가고
가물거리는 등불 심지는 옥벌레처럼 파르르 떤다
이별을 이야기하니 갈 길이 아득하고
집 생각에 나그네의 한이 실타래처럼 얽힌다
밤이 이슥해도 잠은 오지 않는데
북두칠성만 서쪽 행랑 너머로 저물어 간다
거련에서 즉흥으로 쓰다 (서기 1597년 11월 5일, 양력 추정)
서풍이 나뭇잎을 날려 못가 누대에 가득 쌓이니
지친 나그네 고향 그리는 마음이 더욱 서글프다
막걸리로는 천 일을 취하게 한다는 신선의 술이 될 수 없지만
노란 국화는 때맞추어 늦가을에 피어 있으리라
높은 성엔 지는 노을 속으로 까마귀가 다 날아가고
먼 변방엔 첫서리를 기러기가 몰고 온다
찬 소나무를 홀로 마주하고 마음속으로 되뇌길
언제나 돌아가 북산의 나물을 벨 수 있으려나
(당대 평가): 석주는 이 시를 두고 "당나라 말기의 시인 이상은에 견줄 만하지만, 유우석과 유종원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라고 평했다.
(용어) 석주는 허균과 가까이 지낸 문인 권필의 호이다. 이상은, 유우석, 유종원은 모두 당나라 때의 이름난 시인들이다.
양책 (서기 1597년 11월 7일, 양력 추정)
빈 객관이라 밤은 유난히 길고
적막함을 견디지 못해 비단 휘장을 걷어 본다
초겨울 추위에 싸락눈이 살짝 내리고
북풍은 밤새도록 사납게 불어댄다
떠돌아다니는 신세라 마음은 늘 지치고
비방과 모함 속에 뼈마디가 다 녹아내린 듯하다
관문과 강을 넘어가기 참으로 어려우니
하늘 저편 은하수만 아득히 멀다
고진강에서 버들을 읊다 (서기 1597년 11월 8일, 양력 추정)
고진 나루 강가에 선 저 버드나무는
지난해 봄과는 어딘가 다르구나
먼 길 떠도는 나그네가 마치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
가지 하나 꺾어 누군가에게 건네주고 싶다
의주 (서기 1597년 11월 9일, 양력 추정)
사 년 동안 세 번이나 이곳에 왔는데
그때마다 슬픔과 기쁨이 달랐다
떠나도 머물러도 어차피 나그네 신세
얼굴이며 귀밑머리는 어느새 늙은이가 다 되었다
변방이 어두워지니 강 위 안개도 검게 짙어지고
밤이 길어지니 촛농은 눈물처럼 붉게 흘러내린다
남은 꿈마저 깨어지니 쓸쓸하고 외로운데
싸늘한 새벽바람이 주렴을 뚫고 들어온다
벗 여인과 함께 짓다 (서기 1597년 11월 18일, 양력 추정)
두 번이나 허망한 마음으로 임시 거처를 찾아가니
주렴 드리운 뒤채에서 옛 정취는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재주와 정취가 대단하다고 다들 칭찬하던 사람인데
무슨 일로 풍류가 예전만 못해졌는가
(용어) 여인은 이재영이라는 문인의 자(허물없이 부르던 이름)이다. 그는 부윤 벼슬을 지낸 이선의 서자로 태어나 과거에서 장원으로 뽑혔으나, 신분 문제로 급제가 나중에 취소된 인물이다.
장난삼아 윤이술의 운자를 빌려 짓다 (서기 1597년 11월 25일, 양력 추정)
- 월궁의 제일가는 가지를 두 번째로 붙잡았으니
천상의 향기가 밤에 내려와 비단 도포에 스며드는구나
하늘 위엔 관청이 많다고 불평하지 마오
인간 세상엔 이별이 하도 잦아 오히려 한스러울 뿐이라오
봉래섬 오색구름 속으로 사람이 떠나 아득하고
옥하의 밝은 달 아래 꿈길도 더디게 돌아온다
이미 신선 같은 이와 약속을 정해 두었으니
유신과 완조처럼 우연히 나를 찾아내도록 놔둘 리 있으랴 - 호주에서 나눈 은밀한 약속이 꽃가지에 걸려 있어
다닥다닥 필 때 내 진작 보아 두었다오
봄이 무르익어 젊은 마음이 솟구친들
지루한 병든 신세의 시인이 가엾을 뿐
은은한 향기가 가늘게 바람 따라 전해지고
비스듬히 고운 꽃송이 이슬에 젖어 오래도록 피어 있네
난간 바로 앞에 옮겨 심어 자리도 알맞으니
아리따운 그 자태에 나비가 행여 찾아올까 - 검은 머리 무거운 쪽에 봉황 비녀를 눌러 꽂았어라
쌍가닥 끈을 접어 만들 때를 처음 본 기억이 나네
나비 무늬 고운 치마는 그 빛깔이 화려하고
난새 새긴 옥 노리개는 무늬도 찬란했지
옛꿈이 마음에 걸려 아침 기상이 늦어지고
새 시름이 뺨에 어려 새벽 단장이 더디다오
한가로운 소식이란 여섯 폭 봄 편지지에
그리운 이에게 전하여 그가 알아주기만 하면 그뿐 - 성홍색 고운 빛깔이 해당화 가지에 갓 엉기니
해장술에 얼큰해진 미인의 낯빛과 마찬가지
예쁜 혀끝 잘도 굴려 귀염받기를 시새우고
새로 단장하기도 게을러진 건 이별에 마음 상해서라네
응당 사영운처럼 꽃을 서둘러 옮겨 심을 테지
버들가지 꺾기를 망설인 한랑 같은 짓은 나는 하지 않으리
이제부턴 비단 장막 두른 깊은 방 안에서
채색 구름 같은 소식을랑 아는 사람 없으리
(당대 평가): 손곡은 이 네 편을 두고 "비록 훌륭하기는 하나, 오히려 놀라 주저하는 듯한 데가 있다"라고 평했다.
(용어) 윤이술은 윤계선이라는 인물의 자이다. 손곡은 조선 중기의 시인 이달의 호로, 허균에게 시를 가르친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유신과 완조는 옛 중국 후한 때 사람들로, 산에 약초를 캐러 갔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 신선 같은 두 여인을 만나 한동안 함께 지냈다는 옛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호주의 은밀한 약속이라는 구절은 당나라 시인 두목이 호주에서 만난 소녀와 훗날을 기약했다는 옛이야기를 빌려 온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어떤 고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영운은 남조 송나라의 시인으로 산수와 화초를 몹시 사랑했다고 전하며, 한랑은 당나라 시인 한굉을 이르는 것으로, 사랑하는 이와 헤어졌다가 버들가지에 얽힌 사연으로 훗날 다시 인연을 맺었다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이 두 구절이 구체적으로 어떤 고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막부에 별다른 일이 없어 이우린의 각야시 운자를 빌려 스스로 마음을 달래며 짓다 (네 수) (서기 1597년 12월 22일, 양력 추정)
- 채색 편지지엔 그저 한스러운 마음이나 적어 볼 뿐
돈으로 어찌 즐거움을 다 살 수 있으랴
세상 인정은 유달리 삭막해지고
우리가 가는 길은 날로 더욱 어렵기만 하다
긴긴 밤 은하수는 캄캄하기만 한데
온 산엔 눈비가 내려 쌀쌀하구나
짤막한 저 등잔대가 나의 벗이니
옛 책을 비추어 가며 읽게 해 주는구나 - 궁핍한 신세라 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랏일을 감히 힘들다 말하리
이 몸은 늘 물 위를 떠도는 나무 인형 같은데
재주는 예전에 급제를 다투던 그 솜씨 그대로다
밤이 깊어 가니 등불 심지도 짧아지고
서리가 매서워지니 호각 소리 더욱 드높다
누가 서생이 병들었다 했던가
시 한 수 이루고 나니 기운이 절로 솟는구나 - 고향은 이미 천 리 밖으로 멀어졌는데
집에 보낼 편지는 오히려 쓰기가 게을러진다
구름은 저 푸른 바다로 돌아가고
기러기는 긴 강을 건너온다
풍금 소리는 밤이면 더욱 운치가 있고
서릿바람 속 피리 소리는 새벽이면 더욱 구슬프다
낯선 타향이라 애가 타서 끊어질 듯한데
눈물이 고향을 바라보는 누대에서 다하고 만다 - 빠른 가락으로 아쟁의 기둥을 재촉해 뜯는데
등불은 술 실은 배를 맑게 비춘다
빈 누각엔 바람 기세가 차갑게 일고
높은 성 위로는 북두성 자루가 비스듬히 걸렸다
위태로운 길을 다니며 세상 맛을 알게 되고
오랜 나그네 노릇에 인정을 보게 된다
그리운 이의 마음을 내 어찌 감히 저버리랴
담장 동쪽에는 송옥같이 사모하는 이가 있다고 하는데
(용어) 이우린은 명나라의 문인 이반룡을 말한다. 우린은 그의 자이며, 당나라 전성기의 시풍을 본받아 시를 지은 것으로 이름났다. 각야시는 그가 지은 시의 제목이다. 마지막 수의 "담장 동쪽에는 송옥같이 사모하는 이가 있다"는 구절은, 전국시대 문인 송옥의 이웃집 딸이 삼 년 동안 담장 너머로 그를 몰래 연모했지만 송옥이 끝내 마음을 주지 않았다는 옛이야기를 빌린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무제 (서기 1598년 1월 20일, 양력 추정)
한 그루 수양버들이 하얀 담장에 늘어져 있어
그 가지를 부여잡고 한밤중에 담을 넘어 서쪽 행랑으로 들어가니
난간 밖에서는 시녀가 등불을 옮겨 들고
낮은 목소리로 가만히 사랑하는 임을 부르는구나
떠나며 남기다 (서기 1598년 2월 1일, 양력 추정)
이제 여기를 떠나면 어느 날에나 다시 돌아오게 될지
비단 적삼에 눈물을 뿌리니 마음이 더욱 서글프다
길 가다 강남에 이르러 역참의 인편을 만나면
그윽한 매화 향기가 고갯마루 너머에서 먼저 전해오겠지
(용어) 옛날 중국 남북조 시대에 육개라는 사람이 매화 가지를 꺾어 역참의 인편에 실어 멀리 있는 벗에게 보내며 "강남에는 특별한 것이 없어, 그저 봄 한 가지를 부친다"는 시를 함께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그 옛이야기를 빌려, 멀리서도 전해지는 그리움과 봄소식을 표현한 것이다.
임반 마을집에서 묵다 (서기 1598년 2월 2일, 양력 추정)
황량한 초가 객점이라 눈빛마저 차갑게 느껴지는데
바람에 휘장이 들썩이고 새벽 등불은 가물가물 사그라든다
누가 알리, 베개 하나에 기대어 무르익은 봉래산의 꿈속에서
문득 채색 난새를 잡아타고 그리운 이를 만나러 갈 줄이야
(용어) 봉래산은 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의 산이다. 채색 난새를 타고 그리운 이를 만난다는 구절은, 옛이야기 속에서 신선의 새를 타고 인연을 맺었다는 사랑 이야기를 빌려 온 것으로, 여기서는 꿈속에서 그리운 사람을 만난 정경을 비유한 표현이다.
정주 (서기 1598년 2월 3일, 양력 추정)
여기 와서는 좋은 밤을 즐길 흥도 나지 않으니
관문과 산 너머 만 리 길이 아득하기만 하다
비단 아쟁도 옥 술잔도 도무지 흥이 나지 않고
촛농만 눈물처럼 흘러내려 병풍 속 파초를 등지고 있다
그믐밤을 지새우며 (서기 1598년 2월 5일, 양력)
묵은 해는 시각과 함께 다 지나가고
새해는 새벽을 따라 찾아온다
세월이란 참으로 아까운 것이라
나그네의 마음은 더욱더 서글퍼진다
보배로운 아쟁은 자주자주 기러기발을 옮겨 가고
향긋한 술은 잔마다 넘실댄다
날이 밝으면 어느새 나이 서른
노쇠함과 병이 나란히 나를 재촉하는구나
가평관에서 입춘을 맞이하다 (서기 1598년 2월 4일, 양력)
- 상서로운 빛이 북두성을 따라 어느새 동으로 돌아드니
아름다운 기운이 온 나라를 감쌌구나
동해엔 파도가 잠잠해지고 전쟁도 이미 그쳤으니
임금을 위해 해마다 풍년을 노래하리 - 옥잔에 술을 따라 황류주를 권하는데
새벽빛 스친 눈썹 위엔 어느새 봄빛이 떠올랐네
합환화 꺾어 꽂고 온갖 머리 장식을 벌여놓으니
봄의 뜻이 어느덧 비녀 끝까지 올라왔구나
(당대 평가): 홍옹이라는 이는 이 시를 두고 "강서 시파의 격조를 따르면서도 스스로 곱고 뛰어나, 당나라 말기 이상은의 시보다 오히려 낫다"라고 평가했다.
(용어) 강서 시파는 중국 북송 때 황정견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의 유파로, 형식과 격률을 중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은은 당나라 말기의 이름난 시인이다.
숙녕에서 인일을 맞다 (서기 1598년 2월 12일, 양력)
정월 초하루부터 인일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루도 맑고 화창하지 않은 날이 없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 하는 말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들 입을 모아 시절이 태평하다고 한다
내게도 두어 이랑 밭이 있어
강릉 땅 산골에 맡겨 두었으니
마침내 나랏일을 다 마치고 나면
돌아가 그 밭이나 갈며 살아야겠다
(용어) 인일은 음력 정월 초이렛날을 이르는 말이다. 옛 중국의 풍속을 적은 형초세시기라는 책에 따르면, 이날에는 일곱 가지 나물로 국을 끓이고 비단이나 금박을 사람 모양으로 오려 병풍에 붙이거나 머리에 꽂았다고 한다.
서경에서 곡일을 맞다 (서기 1598년 2월 13일, 양력)
인일에도 날이 맑더니 곡일에도 그러하니
집집마다 술을 걸러 풍년을 기뻐한다
늙은이는 낮은 땅에도 수레 가득 곡식이 실리기를 축원하며
돼지 발굽 하나 차려 놓고 토지신에게 절을 올린다
(용어) 곡일은 음력 정월 초여드렛날을 이르는 말이다. 늙은이의 축원은 옛 중국의 역사책 사기에 나오는 말을 빌린 것으로, 낮은 지대의 밭에서도 수레 가득 수확하고 높은 지대의 밭에서도 다래끼 가득 수확하게 해 달라고 비는 풍년 기원이다. 사공은 토지를 맡아 다스린다는 신을 이른다.
오봉의 운자를 빌려 황숙정의 도망첩에 쓰다 (서기 1598년 2월 15일, 양력 추정)
하늘의 향기가 흩날려도 떠난 이의 넋은 돌아오지 않으니
한밤중에 애끊는 듯한 퉁소 소리만 들려온다
그리운 방으로 건너가 차마 옷장을 열어 볼 수 있으랴
석류빛 치마에는 아직도 눈물 자국이 남아 있으리라
(용어) 오봉은 조선 중기의 문신 이호민의 호이다. 도망첩은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지은 글을 이른다. 이 시는 황숙정이라는 사람이 아내를 잃은 슬픔을 적은 글에, 허균이 이호민의 시에 쓰인 운자를 그대로 빌려 지어 준 것이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무술서행록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무술서행록
배경: "무술서행록"은 무술년(1598년) 서쪽 지방을 오가며 지은 시 열아홉 편을 모은 것이다. 평안도 일대의 나그넷길에서 느낀 감회와, 옛 인물(정몽주)의 자취를 찾은 감상 등을 담고 있다.
중화에서 홍수로 길이 막히다 (서기 1598년 8월 30일, 양력 추정)
장맛비가 가을 내내 날마다 쏟아지니
넓은 들판 흥건한 물이 하늘빛을 그대로 담았다
길 떠난 나그네는 물을 건널 일이 걱정이고
배편으로도 소식 한 자 전하기 어렵구나
외줄기 연기 저편으로 들녘 빛이 보이고
어지러이 우거진 숲속에서 강물 소리 들려온다
기둥에 기대어 서서 북쪽 하늘을 바라보니
아득한 하늘 끝으로 기러기 떼가 날아간다
평양의 나그네 밤 (서기 1598년 9월 1일, 양력 추정)
저녁 비 개고 나니 날씨가 차가워지고
한가로운 방 안으로 먼 데서 바람이 불어온다
오늘 밤 이런 만남을 누가 알았으랴
뜻밖에도 옛 벗과 자리를 함께하다니
달빛은 금빛 파초 잎에 비쳐 하얗고
촛불 앞의 꽃은 붉게 물들었다
고향 쪽을 바라봐도 끝이 보이지 않으니
소식은 그저 저 푸른 구름 속에 있을 뿐이다
백상루 (서기 1598년 9월 3일, 양력 추정)
저물녘 높은 누각에 기대어 서니
찬바람이 일어 저녁 물결을 흔든다
바위틈 가을꽃은 벌써 피어났고
물가에는 서리 기운이 유난히 짙다
고국을 떠나온 채 한 해가 저물어가니
어지러운 시절을 슬퍼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리
바닷가 산마루에 올라 슬피 읊조리나니
이 시구를 지어 먼 벗에게 전하고 싶구나
(용어)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양하"는 중국 남조 송나라의 시인 사영운과 가깝게 지내며 시를 주고받던 벗 양선지와 하장유 두 사람을 함께 부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마음을 나눌 만한 먼 벗을 가리키는 뜻으로 썼다.
대정강에서 짓다 (서기 1598년 9월 4일, 양력 추정)
말을 몰아 기나긴 강을 건너가노라니
일꾼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시름겹게 들려온다
여울물 소리는 가을이라 더욱 빠르게 흐르고
나뭇잎은 늦가을인데도 오히려 무성하구나
나무 저편으로는 돛단배가 나아가고
서리 내리기 전에 변방의 기러기가 지나간다
올 한 해 벌써 두 번째로 역마를 타는 몸이니
헛되이 흘려보낸 세월을 감히 원망할 수 있으랴
(당대 평가): 이손곡은 이 시를 두고 "가운데 두 연은 두보의 시와 같고, 또한 맹호연과 잠삼의 시와도 같다"고 평하였다.
(용어) 두보, 맹호연, 잠삼은 모두 중국 당나라 때의 이름난 시인들이다.
신안 (서기 1598년 9월 5일, 양력 추정)
저녁이 되니 풍류 소리도 흩어지고
향을 사르고서 객실 문을 닫아건다
관문과 강 저 멀리 외기러기 울음 아득하고
비바람 치는 밤 등불 하나만이 쓸쓸하다
눈발은 거문고 줄에 스며들어 차갑고
꽃잎은 붓끝에 날려 향기를 남긴다
사람 사는 일이란 본디 웃음과 즐거움을 귀히 여기는 법
그러나 어느 땅이 정녕 내 고향이란 말인가
곽산 동상 (서기 1598년 9월 6일, 양력 추정)
비단 자리에 애절한 거문고 소리 울려 퍼지니
아리따운 여인이 또다시 이 자리에 있구나
가을 구름은 저 바다 끝까지 펼쳐지고
저녁빛은 더디게 술잔 속으로 스며든다
자주 마주하다 보니 정도 어느새 익숙해지고
즐거움이 끝나갈 무렵엔 나그네 마음이 서글퍼진다
차가운 바위 틈엔 계수나무 꽃이 피어 있으니
숨어 사는 이를 부르는 새 시 한 수 지어봄 직하다
임반으로 가는 길에 짓다 (서기 1598년 9월 7일, 양력 추정)
시든 풀이 넓은 들판까지 이어져 있고
스산하게 서린 이슬 기운이 처량하구나
기러기는 북쪽 변방에서 날아오는데
나는 대동강 서쪽 땅에 있구나
말 한 필 몰아 외로운 성을 나서니
장정 위로 지는 해가 나직하게 걸렸다
황량한 역참이 점점 가까워지니
저녁 안개 낀 숲에서 갈까마귀가 운다
(용어) 장정은 옛길에서 나그네가 쉬어 가도록 세운 정자를 말한다. 5리마다 세운 것은 단정, 10리마다 세운 것은 장정이라 불렀다.
철산강을 건너다 (서기 1598년 9월 8일, 양력 추정)
지는 해가 오래된 나루에 걸렸는데
서풍을 맞으며 나 홀로 강을 건넌다
저녁 물결은 남쪽으로 빠르게 흘러가고
가을빛은 북쪽에서 짙게 밀려온다
흘러가는 한 해도 어느덧 다 저물어 가니
지금쯤 고향 동산은 어떤 모습일까
강 한가운데 이르자 문득 서글퍼지는데
강 위로 어부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고진강 (서기 1598년 9월 9일, 양력 추정)
옛 성곽에 가을 다듬이 소리 울리고
강가 들녘엔 나뭇잎이 흩날린다
어찌하여 나만 홀로 떠나가고
저 기러기처럼 함께 돌아가지 못하는가
햇살은 여위어 가고 연기가 막 피어오르는데
서리가 짙어도 풀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외로운 마음이 이토록 쓸쓸하고 서글픈데
겨울옷 한 벌 물어볼 사람조차 없구나
의주 (서기 1598년 9월 10일, 양력 추정)
한 해에 두 번씩이나 이곳에 다시 오니
마중 나온 아전을 보기가 부끄럽구나
높은 곳에 기대어 모처럼 한가로운 날을 얻어
먼 곳을 바라보니 시정이 절로 인다
물결 너머로는 드넓은 중원 땅이 펼쳐지고
술잔 앞으로는 잔잔한 발해 바다가 놓였다
자리를 뜨지 못하고 초승달 뜨기를 기다리니
옷소매에 맑은 이슬방울이 맺혀온다
대윤의 초대에 병으로 참여하지 못하다 (서기 1598년 9월 11일, 양력 추정)
새로 지은 정자에서 성대한 모임이 지난해와 같다는데
병든 몸이라 도리어 이 자리를 저버리고 마는구나
밤이 깊어지자 풍악 소리 멀리서도 귀를 시끄럽게 하니
사또께서는 아마 자지전에 흠뻑 빠져 계신 게 틀림없다
(허균이 남긴 설명): 여기서 대윤은 황진이라는 사람으로, 자는 경미이며 예조 판서를 지냈다. 대윤은 원래 고을을 다스리는 우두머리 벼슬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용어) 자지전은 옛 춤곡인 "자지"에 흠뻑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송나라의 구준이라는 사람이 이 춤을 매우 좋아하여, 그와 자리를 함께한 손님들도 으레 이 춤을 추었는데 한번 시작하면 하루가 다 지나서야 끝이 났다고 하여 이런 말이 생겼다.
옛일을 이야기하다 (서기 1598년 9월 12일, 양력 추정)
구름이 되었다가 비가 되었다가, 옛 초나라 누대의 꿈같은 이야기처럼
꿈속에서 서로 만나고 꿈속에서 헤어져 돌아온다
옷소매에 가득 밴 하늘의 향기를 그대는 아는가
나는 일찍이 봉래산 꼭대기까지 다녀온 적이 있다네
여섯 굽이 난간이 작은 연못을 굽어보고
연꽃과 연잎이 발 너머로 은은히 비친다
어젯밤 꾼 강남의 꿈은 이토록 또렷한데
그 꿈을 아는 이는 오직 저 여인의 비파 소리뿐이리
(용어) 첫째 수의 "구름이 되고 비가 되었다"는 표현은, 옛날 초나라 왕이 양대라는 곳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아침에는 구름이, 저녁에는 비가 된다는 여신을 만나 정을 나누었다는 옛이야기에서 온 말이다. 남녀 간의 애틋한 만남을 비유할 때 흔히 쓰였다.
나그네의 회포 (서기 1598년 9월 13일, 양력 추정)
옥 거문고 한 가락이 탁문군의 마음을 흔들었다더니
변방은 아득히 푸르고 해는 저물어간다
낙엽이 뜰 가득 쌓였는데 문은 벌써 닫혀 있고
기러기 울음소리만 유독 나그네의 귀에 파고든다
(용어) 탁문군은 한나라 때 사마상여가 거문고 가락으로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여인이다. 여기서는 거문고 소리에 마음이 흔들리는 정경을 빗대어 쓴 것이다.
가평에 돌아와 고을 원님에게 단술 대접을 받다 (서기 1598년 9월 15일, 양력 추정)
야자 잎은 차갑게 이슬을 머금은 듯하고
사탕수수즙은 옥병 속 얼음처럼 서늘하게 스며든다
이 시원한 맛이 목마름을 말끔히 씻어주니
사마상여가 병으로 앓아누웠다 한들 이제 무슨 걱정이랴
(허균이 남긴 설명): 여기서 고을 원님은 김공휘라는 사람으로, 김계휘의 아우이다.
(용어) 사마상여는 한나라 때의 이름난 문인으로, 효문원이라는 곳의 관리를 지내 후대 사람들이 그를 "문원"이라 불렀다. 그는 갈증을 심하게 앓는 병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시에서는 시원한 단술이 그런 갈증마저 씻어줄 만하다는 뜻으로 그의 이야기를 끌어왔다.
안주에서 장난삼아 쓰다 (서기 1598년 9월 17일, 양력 추정)
새로 한 단장이 얼굴에 곱게 어울려 아리땁고
집은 성 남쪽 두 번째 다리 곁에 있다 하네
밝은 달빛이 누각에 가득한데 그 사람은 보이지 않고
계수나무 꽃향기 속에서 홀로 퉁소 소리만 들려온다
서 황문을 따라 부벽루에 오르다 (서기 1598년 9월 19일, 양력 추정)
청쇄문의 신선 같은 낭관은 옥과 눈처럼 맑은 풍채를 지녔으니
붉은 누대에서 한가로이 흰 구름다리를 밟아 오른다
영롱한 채색 안개 속으로 은빛 궁궐이 열리니
혹시 항아가 자줏빛 퉁소를 부는 것은 아닐까
저녁놀도 무색하게 붉은 도포 빛이 곱더니
시흥이 훨훨 일어 소매 가득 바람이 인다
신선이 학을 타고 내려온 것은 아닌가 싶은데
맑은 옥피리 소리가 오색구름 속을 꿰뚫는구나
(용어) 황문은 궁궐을 드나들며 임금을 가까이 모시던 벼슬 이름이고, 악방은 잔치 자리에 마련한 장막 친 방을 말한다. 청쇄문은 궁궐의 문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이며, 항아는 달에 산다는 전설 속의 선녀이다. 여기서는 함께한 사람의 고운 풍모와 그 자리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신선 세계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송경에서 사내에게 고마움을 전하다 (서기 1598년 9월 27일, 양력 추정)
나그네길에 서로 만난 것은 해가 기울 무렵이었는데
옛 도읍의 풍경은 가을이 들어 더욱 서글프구나
수고롭게만 사는 내 인생을 그대는 도리어 비웃겠지
개성을 세 번이나 지나면서도 시 한 편 짓지 못했으니
(허균이 남긴 설명): 여기서 사내는 안경창이라는 사람이다.
포은의 옛집을 지나며 노래하다 (서기 1598년 9월 28일, 양력 추정)
포은 선생은 고려 말엽 그 어지러운 시절에도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늠름한 충절을 지키셨다
어찌 성리학을 전했는지 아닌지만으로 그분을 논하랴
선생이 조정에 계실 때는 나라가 그나마 목숨을 부지했거늘
송악산에 서린 왕기는 오백 년 만에 다하고
새 왕조의 상서로운 조짐은 하룻밤 새 수강궁으로 옮아갔네
선생은 관복 띠를 드리운 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깊은 숲에 웅크린 범처럼 의연히 앉아 계셨네
선죽교 다리 위에 뿌려진 한 줄기 피
그 이름은 서산의 봉우리처럼 우뚝하게 솟아났네
도읍이 남쪽으로 옮겨가 옛 저잣거리는 텅 비었지만
남아 있는 사당의 향불은 지금도 그윽이 피어오른다
나는 사내 형을 따라 선생의 옛집 터를 찾아가 보니
무너진 담장에는 들풀과 넝쿨만 어지러이 우거져 있었네
산바람은 쓸쓸히 불고 지는 해는 어둑해지는데
저녁 안개가 숲을 덮고 새들은 슬피 우는구나
옛일이 서글퍼 나도 모르게 눈물을 닦아내니
어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복을 내린다더니, 하늘도 그때는 취해 있었던가
사내대장부 한 번 죽는 일이야 본디 피할 수 없는 법
차라리 이 한 몸을 충의에 바치고 싶어라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삼군부 안에 칼날이 서릿발처럼 늘어서던 그날을
임금을 저버리고 적통을 바꾸어 하늘의 도리를 어겼던 그 일을
음모를 꾸며 놓기가 무섭게 사회는 목숨을 잃고 말았으니
중교에서의 그 갑작스런 죽음은 결코 사람이 내린 재앙이 아니었네
(당대 평가): 손곡은 이 시를 두고 "삼봉에게 만약 혼이 있다면 마땅히 혀를 내두르며 자기 죄를 스스로 인정할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용어) 포은은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를 가리키는 호이다. 그는 새 왕조를 세우려는 세력에 맞서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다가 선죽교라는 다리 위에서 죽임을 당했다. "송악산의 왕기"와 "새 왕조의 상서로운 조짐이 수강궁으로 옮아갔다"는 구절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일을 가리킨다. 삼봉은 조선 건국의 핵심 공신이었던 정도전의 호이다. 시의 끝부분에 나오는 사회는 중국 남조 송나라 사람으로, 어린 황제를 폐위시키는 음모에 가담했다가 훗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여기서는 이 사회의 옛일을 빌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음모에 가담했던 이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 하늘의 뜻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흔히 풀이된다.
길 위에서 (서기 1598년 9월 30일, 양력 추정)
구름 낀 산은 아득한데 나는 아직 돌아가지 못한 사람
검은 사모는 어느새 삼 년째 말먼지 속에 묻혀 있다
남으로 북으로 오가는 사이 어느덧 가을도 저물었으니
이 저무는 한 해에 또다시 임진강을 건널 일을 어찌 견디랴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좌막록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좌막록
배경: "좌막록"은 허균이 막료로 황해도 해주 일대에 머물던 시절에 지은 시 스물세 편을 모은 것이다. 해주와 인근 고을(신광사, 구월산, 풍천, 송화 등)을 오가며 겪은 일과 감회를 담고 있다.
해주 (서기 1599년 9월 20일, 양력 추정)
해서 지방에서도 손꼽히는 큰 고을
수양, 곧 해주는 그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번화한 곳이다
둘러친 해자는 겹겹이 참호를 두르고
딱따기 소리는 겹겹 성문을 엄중히 지킨다
그 안에는 수만 가구가 빼곡히 들어차 있고
늘어선 가게들은 구름처럼 모여 있다
밤낮으로 오가는 나그네와 손님이 몰려드니
수레와 말 소리 어찌나 요란한지
예로부터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라 했으니
이곳을 맡은 사람은 지금도 몹시 분주하다
근래에는 수령이 너무 자주 바뀌어
백성과 아전들이 새 수령 맞이하느라 여위어 간다
관아 건물은 풀더미처럼 황폐해지고
그릇들도 절반이나 사라져 버렸으니
손님이 찾아오면 싫은 기색이 역력하고
거친 밥과 나물 반찬으로 끼니를 때운다
하물며 나 같은 막료 신세는 어떻겠는가
그 고생이야 말로 다 하지 못한다
시큼한 술에 썩은 냄새 나는 안주를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답답하고 억울해진다
사신 행차는 대체 언제 떠나려나
나도 어서 내 수레를 재촉하고 싶다
서글피 고향 가는 길을 바라보니
해는 지고 가을 구름만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작은 잔치를 열어 주목 윤경에게 드리다 (서기 1599년 9월 23일, 양력 추정)
저물녘 부용당 문을 활짝 열어젖히니
맑은 향기가 침소 가득 엉겨 붙는다
한 동이 술을 열어 손님을 맞으니
천 마리 말이 동쪽에서 몰려드는 듯하다
산에서 내리는 비는 남은 더위를 씻어 내리고
숲을 스치는 바람은 저녁 서늘함을 재촉한다
평생 이렇게 실컷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으니
사군이 내주는 술잔을 기어이 다 비우고야 말리라
(용어) 후한 시대 북해 태수를 지낸 공융이라는 사람은 성격이 호방해서 그의 자리에는 늘 손님이 가득했고 술동이가 빈 적이 없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윤경이 베푼 이 자리를 그 옛 고사에 견주어 흥겹게 노래한 것이다.
신광사 (서기 1599년 9월 27일, 양력 추정)
산허리에 자리 잡은 화려한 궁전
상서로운 구름이 비단 창문을 떠받든다
이 절에 시주를 한 것은 공주로부터 비롯되었고
절을 지은 것은 고려 시대의 일이었다
땅에는 황금빛이 찬란하게 깔려 있고
누대는 은하수에 닿을 듯 아득히 솟았다
상서로운 빛은 삼계를 두루 비추고
천상의 음악은 하루 내내 울려 퍼진다
비스듬히 둘러선 회랑은 정교하고
삼엄하게 늘어선 불상들은 드높다
풍경 소리에 놀라 비둘기 날아오르고
여의주를 품은 용은 힘차게 뛰논다
꽃비는 옥으로 만든 일산을 적시고
등불 매단 틀은 붉은 하늘에 닿을 듯하다
그 장관에 참으로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윽한 구경에 잠시 가마를 멈춘다
부들자리 위의 공양은 맑고 정갈함을 베풀고
스님과 나눈 선문답은 적막함을 달래준다
불경들은 패엽 위에 또렷이 남아 있고
범종 소리는 산꼭대기까지 메아리친다
고통의 바다를 건너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니
자비의 배를 부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부처님 제자 사리자를 따라간다면
저 텅 빈 세계에서 서로 만날 수 있을는지
(용어) 등륜은 불교 행사 때 등불을 매다는 틀을 말한다. 당나라 예종 때는 성문 밖에 스무 길 높이의 등륜을 세우고 오만 개의 등불을 달아 마치 신비로운 꽃송이처럼 보였다고 한다. 패엽은 인도의 패다라수라는 나무의 잎으로, 옛 인도 사람들은 이 잎에 불경을 옮겨 적었다. 사리자는 석가모니의 십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스님의 시축에 적으며 서담의 운을 빌리다 (서기 1599년 9월 27일, 양력 추정)
송홧가루와 찻잎으로 지은 절밥을 먹고 나니
속세에 찌든 이 몰골로 푸른 산을 마주하기가 부끄럽다
숲의 달은 아직 둥글지 못해 넝쿨진 산길이 어둡고
산봉우리 구름이 막 걷히어 돌 누각이 차갑게 느껴진다
벼슬살이에 떠도는 신세 서글픈데 가을은 또 저물어가고
스님과 나누는 선문답에 붙들려 밤이 이토록 깊어졌다
도리어 한스러운 건 고달픈 이 삶이 늘 분주하기만 하다는 것
머리가 허옇게 세도록 아직도 말 위에서 일에 매여 있으니
금사사 (서기 1599년 10월 20일, 양력 추정)
이곳이 삼천대천세계에 가깝다면
노을빛 창은 사방으로 활짝 열려 있으리라
구름이 감싸안아 초승달은 숨어 버리고
밀물은 저녁 바람을 실은 채 밀려온다
지팡이를 짚은 스님은 언제나 이곳에 이를까
난새를 탄 신선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구나
옷깃을 헤치고 봉래섬 쪽을 바라보니
바다 위에 떠가는 이 흥취가 아득하기만 하다
(용어) 삼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삼천대천세계, 곧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백사정 (서기 1599년 10월 21일, 양력 추정)
눈이 쌓인 물굽이는 희고 깨끗하며
구슬을 깐 듯한 넓은 언덕이 굽이굽이 이어진다
은하수는 신선들의 세계로 통하는 듯하고
아름다운 바닷물은 얼음병처럼 맑기만 하다
발자국을 따라 걸으면 푹 빠질 것만 같고
솔가지는 눈에 덮여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긴 노래를 불러 밝은 달에게 화답하니
나야말로 술랑의 무리가 아니겠는가
(용어) 술랑은 신라시대 이름난 네 화랑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선의 문인 남곤이 지은 백사정에 관한 글에 따르면, 아랑포라는 곳은 옛날 화랑들이 노닐던 자리였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아랑포 (서기 1599년 10월 22일, 양력 추정)
외딴 수자리가 푸른 바다를 마주하고 서 있고
저무는 해는 파도치는 언덕으로 내려앉는다
연기가 피어오르자 외딴 섬은 자취를 감추고
바람 가득 안은 저녁 돛배가 돌아온다
구름 저편으로 옛 중국 땅이 가깝게 느껴지고
파도 속에서 해와 달이 함께 떠오르는 듯하다
층층이 솟은 저 누각은 신기루임을 알겠으니
사람들은 저것을 두고 봉래산이라 부른다
풍천으로 가는 길에 (서기 1599년 10월 26일, 양력)
단풍 숲은 비단결 같고 국화는 황금빛인데
걷다 보니 장정에 이르러 어느새 석양이 물든다
나그네 길 다니느라 계절 가는 줄도 몰랐는데
문득 놀란다, 내일이 벌써 중양절이라니
송화에서 중양절에 비를 만나다 (서기 1599년 10월 27일, 양력)
서리 맞은 배와 이슬 맞은 게를 안주 삼아 송순주를 올리는 날
집 떠난 나그네 마음은 중양절이라 더욱 답답하기만 하다
비바람이 온 성에 가득한데 나 홀로 앉아 있으니
국화꽃마저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한 나를 비웃는 듯하다
(용어) 옛날 중국 후한 때 환경이라는 사람이 신선술을 배우던 스승 비장방으로부터, 음력 구월 구일에 집안에 재앙이 닥칠 것이니 식구들에게 붉은 주머니에 산수유를 넣어 팔에 차고 높은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게 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대로 따랐더니 그날 집에 있던 닭과 개는 모두 죽었지만 식구들은 무사했다고 한다. 이 일에서 유래해 음력 구월 구일에 높은 곳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는 풍습이 생겼다.
길을 가다가 짓다 (서기 1599년 10월 28일, 양력 추정)
이어진 숲의 비단 같은 잎사귀들이 살짝 서리를 맞았는데
절 안으로 걸어 들어가니 나그네의 흥취가 더욱 길어진다
산 아래 핀 국화꽃은 술에 띄우기 딱 알맞으니
여기 머물러 중양절을 한 번 더 지낸다 해도 나쁘지 않으리
수증사 (서기 1599년 10월 29일, 양력 추정)
이 절의 불상은 고려 왕조 때 세운 것이고
요사채는 전란을 겪은 뒤에 새로 고친 것이다
시주를 한 것은 다름 아닌 내 선조의 힘이었고
건물을 지은 것은 이 절 스님들의 계획이었다
옛일에 마음이 아파 먼 후손인 내가 이곳에 절을 올리니
초상을 그린 족자가 고이 전해져 남아 있다
조용히 그 초상화를 우러러보니
서리와 이슬이 무덤가 소나무와 가래나무에 가득 내려 있다
(허균이 남긴 설명): 고려의 시중 양기라는 인물은 본래 원나라의 재상이었는데, 우리나라에 와서 공민왕이 그를 정승으로 삼았다. 이 절은 바로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원찰이어서 지금까지도 그의 초상이 보관되어 있고, 묘소는 이 산 아래에 있다. 나의 외조모가 바로 그의 칠대손이 되기 때문에 이 시에서 이 일을 이렇게 언급한 것이다.
잠시 돌로 지은 방을 빌려 앉으니
쓸쓸한 기운이 내 마음을 맑게 씻어 준다
비가 한바탕 지나가자 이끼 빛이 촉촉해지고
구름에 막혀 풍경 소리도 잦아든다
세상일이란 참으로 한바탕 꿈과 같은데
텅 빈 불문에 어찌 마음을 붙이겠는가
차라리 벼슬을 마다하고 은거했던 옛사람 허현도처럼
인끈을 벗어던지고 이곳을 오래도록 찾고 싶다
구월산 단군사 (서기 1599년 10월 30일, 양력 추정)
요임금 시절에 이 땅의 임금으로 서시어
신묘한 공덕으로 이 바닷가 땅을 평안케 하셨다
사당은 구월산에 자리를 잡아
그 향불이 몇천 년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우임금이 도산에서 제후들을 모았고
기자는 옥으로 만든 말을 타고 이 땅에 봉해져 왔다
동쪽 땅 백성들이 옛 임금께서 남기신 은혜에 보답하고자
산꼭대기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떠들썩하게 모인다
용연 (서기 1599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백 길이나 되는 깊은 웅덩이, 검은 물굽이가 둘러 있고
그 속에는 신령한 용이 만년 동안 서려 있다고 한다
땅 위 세상에는 해마다 가뭄이 심하게 드니
어서 우레와 비를 내려 이 뜨거운 세상을 씻어 주었으면
망해암 (서기 1599년 11월 1일, 양력 추정)
서쪽 봉우리에 자리한 이 절에 한번 올라보니
넓은 바다가 술잔처럼 작게 보여 마음이 후련해진다
만 리 밖으로 뻗은 돛대는 저 큰 나라와 통하고
하루 내내 울리는 범종 소리는 온 하늘을 울린다
제주도는 파도 저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고
봉래섬은 이 지팡이와 신발 바로 앞에 아득하게 있는 듯하다
비로소 깨닫는다, 이 장쾌한 유람이 온 우주를 다 둘러본 것임을
생황을 불며 학을 타고 오는 뭇 신선들을 불러 내리고 싶다
양산 (서기 1599년 11월 3일, 양력 추정)
온 집안이 고요히 가라앉고 밤기운은 맑고 스산한데
바람에 흔들리는 발 사이로 남은 촛불이 금빛 파초 잎에 반짝인다
노란 국화와 비단결 같은 돌이 그저 서로 짝하여 있으니
초록 소매에 붉은 치마 입은 여인을 굳이 부를 것도 없다
향기 스민 붉은 솜은 새벽 화장을 곱게 매만지고
구름 같은 쪽머리는 흐트러진 채 검푸른 눈썹이 길게 그려져 있다
원앙을 수놓은 휘장 속에서는 한밤중에 흘리는 눈물
비취빛 발 앞에는 하룻밤 사이 내린 서리 같은 슬픔이 어린다
남서에서 작은 술자리를 갖다 (서기 1599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막부의 일 중에 애오라지 짬을 내어
교외에 있는 별장에 잠시 들를 수 있었다
술자리를 열어 맑은 술을 따르고
손님을 붙잡아 노란 국화를 함께 구경한다
서리가 내려앉아 산의 모습은 야위어 보이고
하늘은 텅 비어 달빛만 가득하다
애처로운 쟁 소리는 줄이 끊어질 듯 이어지니
서글피 흘러가는 세월을 원망하게 된다
사면 조서를 맞이하고 차사원 홍난상 직장을 청하여 광원루에서 작은 술자리를 열다 (서기 1599년 11월 25일, 양력 추정)
(허균이 남긴 설명): 홍 직장의 이름은 난상으로, 홍이상의 아우다.
임금의 조서가 대궐로부터 나오니
임금의 글이 자줏빛 구름을 타고 이 땅에 내려온다
온 고을이 임금의 은택에 흠뻑 젖으니
수레와 일산이 그 귀한 글을 받들어 모신다
그물을 터 주었던 은나라 탕임금의 덕을 공경하며
만세를 부르며 요임금의 공덕을 기린다
성인의 기쁨은 온 세상 만물에까지 미치니
이 맑은 자리에서 그대를 만나니 참으로 기쁘다
화려한 누각에는 귀한 손님들이 모여들고
신선의 처소인 양 속세의 티끌은 사라졌다
옥으로 꾸민 자리에는 잔치의 기쁨이 펼쳐지고
노을빛 감도는 단술을 무르익은 흥 속에 나눈다
어스름 빛이 푸른 산에 잠겨 들고
초겨울 추위가 대자리 무늬 사이로 스며든다
노랫소리는 은근한 마음을 전하고
촛불 그림자는 살짝 취한 얼굴을 비춘다
별들은 처마 끝에 떨어질 듯 낮게 드리우고
파초 향기는 문 너머로 은은히 풍겨온다
흐르는 세월은 검푸른 귀밑머리를 재촉하고
웃음 섞인 농담은 기생들에게 맡겨 둔다
긴긴밤이라 정은 오히려 흡족하기만 한데
밝은 아침이 오면 차마 손을 놓고 헤어질 수 있을까
관서 땅 천 리 머나먼 길을 떠나며
고개 돌려 헤어진 벗을 그리며 눈물짓는다
(용어) 옛날 은나라 탕임금이 들에 나갔다가, 사냥꾼이 사방에 그물을 쳐 놓고 "온 세상 새와 짐승이 모두 내 그물에 걸리게 해 주소서" 하고 비는 것을 보았다. 탕임금은 이를 너무 심하다 여겨 그물 세 면을 터놓고 "피하고 싶은 짐승만 이 그물에 걸리게 해 주소서" 하고 다시 빌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제후들은 탕임금의 어진 덕을 크게 칭송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죄인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사면령을 이 옛 고사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황주의 사랑 노래 (서기 1599년 11월 28일, 양력 추정)
위에는 정방산이 있고
아래로는 족금계라는 시내가 흐른다
차라리 기생집 여인이 될지언정
장사꾼의 아내는 되지 말라
장사꾼 임은 강 위로 떠나가면서
팔월이면 돌아오마 약속했건만
중양절도 이미 다 지나가 버렸는데
빚어 놓은 술은 다 익었건만 어찌 이리 늦으시는가
화아라는 여인은 낮잠에 빠져 있고
학아라는 여인은 밤나들이에 빠져 있어
밤낮으로 저들끼리만 어울려 만나니
내 마음을 알아줄 이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나는 한 줄기에 두 송이 핀 연꽃처럼 변치 않는 사랑을 바라건만
임은 그저 멀리서 그리워만 하는 사랑을 좋아하시네
차라리 비단 빨래하러 시냇가에 나가는 편이 나으리니
그곳엔 오가는 길손들이 있지 않은가
밤에 태허루에 올라 (서기 1599년 11월 28일, 양력 추정)
몰래 좋은 임을 맞으려 했더니
뜻밖에도 상존 어른이 나타나서
누가 여기까지 오라 시켰냐고 묻는다
(용어) 태허루는 광원루라는 누각의 옛 이름인데, 허영양이라는 이가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때 이렇게 이름을 고쳐 불렀다. 상존은 호장이라는 지방 아전을 가리키는 호칭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성도 땅의 비단
꽃 사이로 나비가 날아다니는 듯 곱기도 한데
그대와 하룻밤을 함께한 값으로
춤출 때 입을 옷 한 벌을 지었다네
사신 행차는 해마다 돌아오니
임을 만날 생각에 그리움이 더욱 길어지는데
평양의 기생들만 없었더라면
흰 비단이 상자 가득 쌓였을 것을
한밤중에 창문을 넘어 들어가니
노란 명주 이불에서 짙은 향내가 풍겨온다
그대여, 부디 오리를 놀라게 하지 마오
오리가 놀라면 원앙까지 덩달아 놀란다오
옥류천 (서기 1599년 11월 29일, 양력 추정)
영롱한 물방울이 바위 꼭대기에서 떨어지니
그 빛깔과 향이 좋아 입에 넣으면 상큼하기 그지없다
이 물로 옥사발에 차를 달이면 조그만 둥근 달을 담아낸 듯하니
저 멀리 혜산의 샘물을 애써 길어 올 필요가 없구나
(용어) 혜산천은 중국의 이름난 샘으로, 예로부터 차를 달이기에 가장 좋은 물로 손꼽혔다. 이 시에서는 옥류천의 물이 그에 못지않게 좋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평산 산성 (서기 1599년 12월 1일, 양력 추정)
삼한이 먼저 이 땅에 나라를 세웠고
그 뒤 한사군이 국경을 나누었다
요충지에는 도호부가 자리를 잡았고
견고한 이 요새는 지도에도 기록되어 있다
천 년이 지나도록 험준한 요새로 남아
만 겹의 성가퀴가 아직도 산등성이를 두르고 있다
황폐해진 이곳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누구의 계획인가
바로 조정에서 세운 원대한 정책 덕분이다
회포를 적다 (서기 1599년 12월 12일, 양력 추정)
지방에 머물러 있는 이 나그네 신세는
재주는 있으나 불우했던 옛 문인 송옥과 다를 바 없다
헛된 영화란 참으로 한바탕 꿈일 뿐인데
세상일은 물밀듯이 자꾸만 나를 재촉한다
밤이 깊어가니 등잔불꽃이 활짝 피어나고
하늘은 아득한데 변방을 나는 기러기 울음소리 구슬프다
고향 관동 땅의 옛 가업은 이제 다 사라져 버렸으니
어디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용어) 송옥은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문인으로, 뛰어난 글재주를 지녔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불우하게 지낸 인물이다. 허균은 지방 관아의 막료로 떠도는 자신의 처지를 이 옛 문인에 견주었다.
운을 나누어 '산' 자를 얻다 (서기 1600년 1월 12일, 양력 추정)
(허균이 남긴 설명): 손곡과 오정이 내가 머무는 객사로 찾아와 모였는데 정시망도 뒤이어 왔다. 그래서 네 사람이 '눈이 온 산에 가득하다'는 구절로 운자를 나누어 시를 지었다.
병을 안고 누운 채 열흘을 보내니
쌓인 눈이 사립문마저 묻어 버렸다
어디에서 오셨는가, 시 짓는 저 노인네여
시름겨운 내 얼굴을 활짝 펴게 해 주는구나
등불을 돋우고 따뜻한 방에 둘러앉아
흰 두건을 높이 쓴 채 서로 마주 본다
정시망은 본래부터 얽매임 없이 시원스러운 사람이요
윤생 또한 맑고 한가로운 사람이라
격식을 잊고 실컷 웃고 이야기하니
좋은 이 밤도 어느덧 깊어만 간다
맛좋은 술로 서리 맞은 생선회를 씻어 내리고
고운 노랫가락으로 기녀에게 술잔을 권한다
타향에서 나그네로 지내는 신세임을 아주 잊었으니
아마도 여기가 서울 한복판이 아닌가 싶다
희부옇게 밝아 오는 새벽하늘엔 은하수가 돌고
아득한 하늘엔 초승달이 걸려 있다
흥이 다하면 이별이 오는 법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오
세상길은 원래 험하고 힘든 것을
사람이 살아 봤자 백 년일 뿐인데
빨리 달리는 수레 같은 세월을 오래 붙잡을 수야 있겠는가
몸이 이런 노역에 어찌 오래 얽매여 있으랴
끝내는 이 속세를 떠나야 할 것을
푸른 넝쿨 우거진 곳으로 돌아갈 계획이 있으니
머지않아 그 동산에서 마음껏 노닐 것이다
섣달그믐밤 (서기 1600년 2월 14일, 양력)
한밤중 문루에서 둥둥 울리는 저 북소리
사람 사는 이 세상의 기해년을 이렇게 떠나보낸다
폭죽 터뜨리고 산초꽃 노래 읊는 옛 풍속은 없을지언정
느린 노래와 잦은 비파 소리로 화려한 잔치를 벌인다
공명이란 술잔을 든 이 손에는 결코 들어오지 않으니
세월은 이불 덮고 한잠 자는 사이 덧없이 흘러가 버린다
내일 아침 서른두 살이 된다고 비웃지들 마오
그 옛날 반악도 서른두 살에 이미 흰머리가 가득했다니까
(허균이 남긴 설명): 올해 구월에 나도 비로소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렇게 적은 것이다.
(용어) 반악은 중국 서진 시대의 문인으로, 서른두 살의 나이에 이미 머리가 희끗희끗 세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남궁고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남궁고
배경: "남궁"은 예로부터 예조(禮曹)를 달리 이르던 이름이다. "남궁고"는 허균이 예조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지은 시 열네 편을 모은 것으로, 종묘 제사와 왕릉 행차 등 예조의 소임과 관련된 시들이 여럿 실려 있다.
마음에 품은 생각 (서기 1600년 4월 1일, 양력 추정)
공명이란 애초에 우리 같은 사람의 몫이 아니니
책이나 읽으며 그것과 정을 붙여 보자
깊은 산과 골짜기는 은자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루터에서 나를 건네줄 벗은 대체 누구인가
위태로운 벼슬길을 걷는 사이 검던 귀밑머리 세어버리고
가난한 옛 살림에는 흰 구름만 남았다
그래도 이제라도 돌아가자 노래 부른다면
산속의 아름다운 풀들은 날마다 봄빛이리라
지친 새는 언제쯤 둥지로 모여들까
외로운 구름은 유유히 떠갈 뿐 돌아올 줄 모른다
헛된 이름은 흰머리만 늘려 놓았는데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은 이미 청산을 저버리고 말았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나는 한자리에 눌러앉은 신세
천지는 좁아져 문지기 신세가 되었구나
음률에 얽매이지 않는 새 시를 쓰니
그나마 시름겨운 얼굴이 조금은 펴지는구나
(용어) 관영은 후한 때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요동 땅에 숨어 살던 선비로, 오십 년 넘게 나무 걸상 하나에 앉아 지내는 바람에 무릎이 닿는 자리가 움푹 팼다고 한다. "한자리에 눌러앉은 신세"는 이 옛이야기를 빌려 온 표현이다. "문지기 신세"는 어진 이가 밤마다 성문을 돌며 딱따기를 치고 그 삯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던 옛일을 빌려, 변변찮은 벼슬살이에 매인 자신의 처지를 빗댄 말이다.
대축이 되어 종묘에 제사를 올리다 (서기 1600년 8월 14일, 양력 추정)
큰 제사를 초가을에 올리게 되어
제관들이 한밤중부터 모여든다
사당 문이 열리자 향내가 감돌고
자리가 다 정해지니 옥패 소리 들려온다
북소리는 주로곡 가락을 전하고
섶 태우는 연기는 상서로운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정성을 다해 옥과 폐백을 올리니
밝으신 임금을 대신하는 정승의 모습이 보인다
(용어) 대축은 종묘나 사직 등에서 제사를 지낼 때 축문을 읽는 소임을 맡은 관원이다. 옛날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옥으로 만든 예물을 갖추고 단 위에서 섶나무를 태워 그 연기로 정성을 하늘에 알렸는데, 시 속의 "섶 태우는 연기"는 이를 가리킨다.
장생전에 나가 근무하다 (서기 1600년 8월 6일, 양력 추정)
후덕하신 그분을 사람마다 우러렀는데
신선놀음 가듯 갑자기 세상을 뜨셨다
동궁께서는 나물만 가려 드시고
성상께서는 소릉 쪽만 하염없이 바라보신다
황장목으로 짠 관에는 온갖 보물이 담기고
상여는 흰 장막으로 뒤덮였다
이 모든 일을 주선하는 것이 예조의 임무이니
일을 살피다 보면 절로 눈물이 가슴을 적신다
(용어) 장생전은 나라에 초상이 나면 관을 짜서 보관해 두던 관청이다. 당나라 태종은 아내 문덕황후를 소릉에 묻은 뒤에도 그리움을 못 이겨 궁 안에 높은 누각을 짓고 늘 그쪽을 바라보곤 했다. 하루는 신하 위징과 함께 누각에 올라 소릉 쪽을 가리키며 보라고 하니, 위징이 일부러 딴 곳을 보다가 "신은 폐하께서 선왕의 능을 보시는 줄 알았습니다. 소릉이라면 이미 보았습니다." 하고 아뢰자, 그날로 누각을 헐어 버렸다는 옛이야기가 전한다. 시에서는 이 이야기를 빌려 임금이 세상 뜬 이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황장목은 잣나무 가운데 속이 누런 부분으로 짠 관을 이르는 말이다.
중양절에 (서기 1600년 10월 15일, 양력)
중양절 좋은 시절에도 절로 긴 한숨이 나오니
모자가 벗겨져도 태연했던 맹가의 풍류가 부럽구나
찬비 내리는 성안, 사람 마음마저 쓸쓸한데
울타리 아래 노란 국화도 오늘은 볼 마음이 나지 않는다
(용어) 중양절은 음력 구월 구일을 이르는 명절이다. 옛날 진나라의 환온이 중양절에 여러 막료를 데리고 용산에 올라 잔치를 벌였는데, 바람이 불어 막료 맹가의 모자가 벗겨져 날아갔다. 그런데도 흥에 취한 맹가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태연히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능에 올라 짓다 (서기 1600년 12월 18일, 양력 추정)
이름난 지관들이 언덕에 모여 무덤 자리를 마련하니
휘장이 걷히자 정승이 나아가 예를 올린다
백발이 성성한 늙은 관원이 부장품을 옮기는데
두어 줄기 시든 눈물이 찬바람 속에 떨어진다
능이 있는 곳으로 가다 (서기 1601년 1월 24일, 양력 추정)
서글퍼라, 저 동쪽 능으로 가는 길을 바라보니
험한 길에 지친 여윈 말이 겨우 걸음을 이어간다
매서운 북풍은 너른 들판에 몰아치고
큰 눈은 이 산 저 산 가득 쌓여 있다
맡은 소임을 다하는 것이 나라의 정해진 예법이요
제사를 모시는 것도 시종하는 관원의 몫이라
추위를 무릅쓰고 영혼이 잠든 자리를 지키니
희끗희끗해진 이 귀밑머리를 어찌하리
장난삼아 봄맞이 글을 쓰다 (서기 1601년 2월 4일, 양력 추정)
반평생 낭관 노릇에 곤궁한 신세를 한탄하니
왕교처럼 신을 신고 섭현 땅으로 훌쩍 날아가고 싶구나
이제부터 나를 밖으로 보내줄 사람이 나타난다면
올해는 귀신의 야유만은 면할 수 있으리
(용어) 낭관은 여러 관청의 실무를 맡아보던 하급 관직으로, 한나라 때 풍당이라는 이가 나이 들도록 이 자리에 머물렀다는 옛이야기가 있어 기구한 벼슬살이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동한 시대 섭현의 현령이었던 왕교는 신묘한 술법을 부려 매달 초하루와 보름마다 조정에 나타났는데, 정작 타고 온 수레는 보이지 않았다. 임금이 이상히 여겨 지켜보게 하니 오리 한 쌍이 날아왔고, 그물로 잡아 보니 신발 두 짝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뒤로 "부석"이라는 말이 지방관을 다르게 이르는 표현으로 쓰이게 되었다. 진나라의 나우는 재주가 뛰어났지만 환온에게 크게 쓰이지 못했는데, 어느 날 동료의 승진을 축하하는 자리에 가장 늦게 나타나서는 "오는 길에 귀신이 나타나 '너는 남의 영전을 축하할 뿐 네 영전은 축하받지 못하리라' 야유하기에 부끄러워 늦었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시의 "귀신의 야유"는 이 고사를 빌려, 자신은 언제쯤 승진하겠느냐는 자조 섞인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마음에 품은 뜻을 부쳐 (서기 1601년 2월 20일, 양력 추정)
초야에 묻힌 미천한 몸을 밝으신 임금께서 알아주시어
예조에서 두 해 동안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오
이태백 같은 시가 있었던들 귀신인들 울리지 못했으랴만
사마상여 같은 부는 없으니 구름을 뚫을 재주가 없구나
세월은 물처럼 흘러가는데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가
시끄러운 세상의 시비는 귀에 담고 싶지 않다
초당에 봄이 와도 돌아가지 못하는 이 신세
산신령은 이미 어서 오라는 글을 내렸을 텐데
(용어) 이태백은 당나라의 시인 이백을, 사마상여는 한나라 때 부라는 화려한 문체의 글에 뛰어났던 문장가를 가리킨다. 허균은 자신에게 이 두 사람만 한 재주가 없음을 짐짓 겸손하게 한탄하고 있다.
작은 복사꽃 (서기 1601년 3월 19일, 양력 추정)
이월의 장안은 아직 봄을 느끼지 못했는데
담장 위 작은 복사나무에는 어느새 꽃눈이 텄다
시 짓는 이 늙은이를 향해 살포시 웃음을 지어 보이니
마치 하늘 끝에서 옛 벗을 만난 것만 같구나
명나라로 조회 가는 이자민을 전송하며 (서기 1601년 5월 29일, 양력)
이태백 같은 그대를 평소에 마주하면
한 시대에 몇 안 되는 인물임을 알겠네
그대와 세상을 함께한 것만도 다행이니
감히 어깨를 겨룬다고야 말할 수 있으랴
장부는 먼 이별을 가벼이 여기는 법
장한 광경은 바로 이제부터 펼쳐지리라
축하하는 행렬에 끼어 명나라 조정에 들어서면
천하의 선비들이 그대에게 마음을 기울이리
쓸쓸하여라, 훗날 화표주처럼 돌아오게 될까
맑고도 맑은 난하의 물이여
지난날 함께 노닐던 곳들이 아득히 떠올라
그대를 보내는 이 마음을 가눌 길이 없구나
(용어) 이자민은 이름이 안눌이며, 조선 중기 문신 이행(호는 용재)의 증손이다. 화표주는 무덤 앞에 세우는 돌기둥으로, 옛이야기에 요동 사람 정령위가 신선이 되어 학으로 변한 뒤 천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더니 성곽과 사람은 다 변하고 무덤의 화표주만 예전 그대로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여기서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돌아오게 될 쓸쓸한 처지를 빗댄 것으로 보인다. 난하는 중국 북방을 흐르는 강 이름이다.
성 동쪽 심씨의 별장에서 (서기 1601년 6월 1일, 양력 추정)
경치 좋기로 이름난 별장에
반갑게 불러 맞아 주는 벗이 있다
푸른 버들은 안개 너머로 겹겹이 늘어지고
꾀꼬리는 자리 옆까지 살갑게 다가온다
들에서 지은 밥은 줄풀 열매를 넣어 더욱 맛있고
산나물국은 순채를 넣어 향긋하다
입에 맞아 실컷 먹고 배를 두드리니
저절로 터지는 웃음에 꾸밈없는 참모습이 드러난다
(용어) 줄풀 열매와 순채는 옛사람들이 즐겨 먹던 물가의 곡식과 나물로, 여기서는 소박하면서도 맛깔스러운 시골 밥상을 나타낸다.
동료들과 동호에서 뱃놀이하고 느지막이 돌아오며 (서기 1601년 6월 3일, 양력 추정)
뙤약볕을 무릅쓰고 잠시 한강가로 나섰더니
어느새 청산이 내 시 속으로 들어와 있다
호수는 넘실넘실, 조각배는 마음대로 떠다니고
뱃놀이하는 이들은 모두 신선 같은 벗들일세
저녁놀 머금은 물안개는 나루터 숲에 낮게 엉기고
바람은 서늘한 그늘을 끌고 와 술잔 위를 스친다
흥에 겨워 돌아가기 싫어 말도 수레도 마다하는데
고개 돌려 성을 바라보니 초승달이 눈썹 같구나
(용어) 원문에서 함께 배를 탄 이들을 "신선 세계에 사는 이들"에 빗대어 표현했는데, 이는 실제로 신선을 만났다는 뜻이 아니라 뱃놀이에 함께한 벗들을 신선처럼 멋스럽게 추어올린 문학적 표현이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한 벗 박 아판에게 조운 벼슬자리를 구걸하며 보내다 (서기 1601년 6월 28일, 양력 추정)
동으로 만든 인장이 어찌 이 벼슬아치 집에까지 오겠냐마는
듣자니 조운을 맡은 관원의 임기가 다 찼다더군
지방을 감찰하는 관복을 얻어 입고 강과 바다 고을로 떠나가서
봉생대 아래에서 매화 구경이나 하고 싶네
(용어) 박 아판은 이름이 동량, 자는 자룡이다. "아판"은 판서를 보좌하는 버금 벼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벼슬 이름은 분명하지 않다). 조관은 조세로 거둔 곡식을 배로 실어 나르는 일을 맡아보던 관원이다. "지방을 감찰하는 관복"은 한나라 때 지방을 살피러 나가는 관원이 입던 수놓은 옷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여기서는 지방관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봉생대는 매화가 아름답기로 이름난 누대이다.
스스로 탄식하다 (서기 1601년 6월 29일, 양력 추정)
나는 본디 어리석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라
나이 서른둘인데 머리는 벌써 눈처럼 하얗다
수레바퀴 먼지에 굽실거리던 반악의 처지는 되기 싫고
오히려 수놓은 도끼를 지니고 자유로이 지낸 사상이 부럽구나
무거운 인끈과 긴 띠는 대체 누구의 몫인가
다가서기만 하면 정승의 꾸지람만 당하는걸
봉래산을 찾아가 생황 부는 학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복사꽃 핀 그 봄을 서왕모는 알려 주지 않는다
온 장안의 귀인들 얼굴이야 다 알지만
붉은 대문은 높디높아 만나보기 어렵구나
고을 하나 구걸하기가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려우니
삼천 리 약수마저 맑지도 얕지도 않다는군
(용어) 반악은 진나라 때의 미남 문인으로, 권세가 가밀의 수레가 지나갈 때마다 그 먼지를 바라보며 절을 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사상은 진나라 사람으로, 수놓은 도끼를 지니고 지방관으로 나가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지냈다고 전한다. 두 사람을 견주어, 권세에 아첨하는 처지보다는 자유로운 지방관의 삶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서왕모는 신선 세계에 산다는 여신으로, 삼천 년에 한 번 열린다는 전설 속 복사꽃(반도)을 가꾼다고 한다. 약수는 신선이 사는 곳을 둘러싸고 있어 배조차 뜨지 못한다는 전설 속의 강이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남정일록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남정일록
배경: "남정일록"은 허균이 과거 시험관으로 임명되어 호남(전라도) 지방으로 내려가던 여정과 그곳에서 지낸 일들을 담은 일기체 연작시 스물여섯 편이다. 전주·남평·담양·창평·장성·부안 등 전라도 각지를 오가며 시험을 감독하고 여러 인물과 교유한 기록이 담겨 있다.
과거 시험관이 되어 호남으로 떠나며 조정에 하직 인사를 올리고 짓다 (서기 1601년 3월 25일, 양력 추정)
이른 아침 궁궐에서 임금의 교서가 내려오니
총이말은 훨훨 내닫고 나는 어사의 관과 붉은 관복을 갖춰 입었네
감히 옛사람처럼 하늘과 사람의 이치에 통달했다 이를 수 있으랴
문장깨나 한다는 말도 그저 부끄러울 뿐
이 소임은 옛적 고을마다 반듯한 인재를 뽑던 그 권한을 이은 것이요
옛적 관리가 지방의 노래를 채집하던 그 직분과 같은 것이네
호남의 선비들에게 먼저 말을 전하노니
그 누구의 힘찬 붓끝이 무지개 같은 기운을 뿜어낼는지
(용어) 셋째 구절과 넷째 구절은 각각 하늘과 사람의 이치에 통달했다는 한나라 학자와, 뛰어난 문장으로 이름났던 한나라 문인에 자신을 견주면서도 겸손하게 부끄러움을 표한 대목이다. 다섯째 구절과 여섯째 구절은 옛 중국에서 지방마다 반듯하고 바른 인재를 천거하던 제도와, 조정 관리가 각 지방을 돌며 백성의 노래를 모아 민심을 살피던 옛 제도에 견주어, 자신이 맡은 시험관 소임의 뜻을 밝힌 것이다.
이른 새벽 판교원을 떠나며 (서기 1601년 3월 26일, 양력 추정)
새벽종이 울려 떠날 길을 재촉하니
다리 어귀를 벗어나자 짙은 안개가 자욱하다
언덕가 버드나무에는 봄빛이 살며시 돌아오고
말 앞의 봉우리에는 해가 막 둥실 떠오른다
한평생 글재주는 남보다 뒤떨어지는데
맑은 세상에서 공명을 구할 마음도 어느새 시들해졌다
조만간 이 몸 빼내어 속세 밖으로 떠날 터이니
남들이 나를 술집 심부름꾼이라 불러도 상관없다
스스로를 놀리며 (서기 1601년 3월 26일, 양력 추정)
승명전에서 밤새 숙직하니 촛불이 창가를 밝히고
일찍이 조서를 초 잡던 이 붓은 서까래처럼 굵었지
한 조정에 뛰어난 문장가가 둘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회음후야말로 나라에 둘도 없는 인재였네
요 몇 해 비방의 불길이 부질없이 뼛속까지 태우는데
늙어가도 내 시의 성채는 결코 항복하지 않으리
어찌하면 문장의 근원을 산골짜기 물처럼 기울여
천 리를 도도히 흘려보내 저 뛰어난 문장가의 강물에 마주 쏟을 수 있을까
(용어) 셋째 구절의 "둘"은 한나라의 역사가와 문장가로 나란히 이름을 떨쳤던 두 인물을 가리킨다. 회음후는 한나라 개국공신 한신을 말하며, 나라에 둘도 없는 인재라는 평을 받았던 인물이다. 마지막 구절의 강물은 진나라의 어느 문장가가 지녔던 뛰어난 글재주를 강물에 비유한 옛 표현을 빌려 온 것으로, 자신의 문장도 그에 못지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이른 아침 천안으로 향하면서 (서기 160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누런 진흙길이 미끄러워 말 걸음이 더디니
지친 나그네들이여 서로 탓하며 원망하지 마시게
나는 스스로 문장이 있어 이 적막함을 달래니
명예와 지위가 어긋난들 무엇을 한탄하랴
사람들 틈에서 옥을 품고 있으면 그것만으로 죄가 되고
어둠 속에서 구슬을 던지면 오히려 의심을 사는 법
이제 떠나간들 몸이 더 멀어진다고 근심할 것 없네
매화 소식은 벌써 남쪽 가지까지 이르렀을 테니
(용어) "옥을 품은 죄"는 옛 책에 나오는 말로, 평범한 사람이 값진 옥을 지니고 있으면 그 자체가 화를 부르는 죄가 된다는 뜻이다. 뛰어난 재능이나 값진 것을 지니고 있으면 오히려 남의 시기와 의심을 받기 쉽다는 것을 빗댄 말이다. "어둠 속에서 구슬을 던진다"는 표현은 당나라 어느 시인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상대가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밀면 오히려 의심만 산다는 뜻이다.
여산에서 윤지중을 만나다 (서기 1601년 3월 30일, 양력 추정)
붓을 귀에 꽂고 승명전에서 대궐을 지키며 숙직하던 그 시절
임금이 내리신 향내음이 시종하는 신하들 옷에 함께 배어들었지
천균성이 밤을 비추자 천 척의 배가 모여들고
수놓은 관복이 봄볕에 빛나며 네 필 말이 나란히 치달렸네
나그네 길에서 이불을 나란히 하고 자는 기쁨이 이보다 더할까
말고삐를 나란히 하며 아름다운 봄 경치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강남 만 리 밖에 꽃이 곧 피어날 터인데
대궐 문 마주 보며 별을 바라보던 그날을 능히 떠올릴 수 있을는지
총이말을 타고 잠시 지방 벼슬살이를 나서고 보니
고개 돌려 청운의 뜻을 돌아보매 그 자취가 점점 아득해지는구려
요즘 사람들이 아무리 가난을 좇는 내 신세를 비웃는다 해도
벗이라면 어찌 절교의 글을 쓰겠는가
봄이 오니 꽃과 새가 이별의 한을 더욱 보태고
늙어가니 숲과 샘이 있는 옛집이 그리워지네
우습구나, 밝은 조정에서 그대도 나도 다 함께 뜻을 펴지 못한 신세라니
언젠가 다시 나란히 벼슬아치 인끈을 차고 부름을 기다릴 수 있으려나
(용어) 지중은 윤의립의 자이다. 천균은 하늘의 창고를 맡았다는 별 이름이다. 둘째 수에 나오는 "가난을 좇는 글"은 한나라 문장가 양웅이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두고 지은 글이며, "절교의 글"은 진나라 혜강이 벗에게 절교를 선언하며 써 보낸 글이다. 허균은 이 두 고사를 빌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곤궁한 처지를 비웃더라도 참된 벗은 자신을 저버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나타냈다.
전주 (서기 1601년 3월 31일, 양력 추정)
전주는 태조 임금의 고향이자 나라의 두 번째 도읍
아름다운 기운이 용이 되어 서리니 왕업이 웅장하다
개와 닭조차 지금까지 이 고을을 알아보고
바람과 구름은 길이길이 이 고향 마을을 지켜주네
태평하던 시절엔 관아 건물들이 우뚝하고 빛났는데
난리를 겪은 뒤에도 산천만은 여전히 울창하구나
남쪽 지방의 큰 고을로는 첫손에 꼽히니
문신인 내가 어찌하면 이 고을 수령 자리를 얻어볼까
(용어) 셋째 구절의 "고향 마을"은 원래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의 고향 마을 이름에서 온 말로, 훗날 임금의 고향을 가리키는 말로 두루 쓰이게 되었다. 전주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본관이므로 이렇게 견주어 말한 것이다.
양진당 (서기 1601년 4월 1일, 양력 추정)
봄 그늘이 아득하게 드리워 처마 끝을 비추는데
동쪽 곁방에 베개 베고 누웠더니 어느새 한낮을 알리는 닭이 우네
바람은 하늘거리는 향 연기를 난간에 가늘게 휘감고
비는 산의 푸른빛을 머금은 채 발 위로 나직이 떨어지네
난간의 꽃은 무언가 아는 듯 사람을 맞아 웃음 짓고
골짜기 새는 정이 많아 나그네를 벗 삼아 지저귀네
이별의 회포 때문에 넋이 새삼 끊어지는 것만은 아니니
그리운 고향 옛 동산이 지금 저 서쪽 물가 다리 너머에 있어서라네
(용어) 양진당은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에 있던 정자이다. 마지막 구절의 "서쪽 물가 다리"는 중국 장안 근교에 있던 다리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예로부터 고향이나 그리운 곳을 가리키는 말로 즐겨 쓰였다. 여기서는 허균이 두고 온 자신의 고향 집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옛 장성으로 향하며 (서기 1601년 4월 2일, 양력 추정)
노령 고개를 막 넘어서니 경치가 문득 아름다워
무성한 향초들이 시냇가 언덕을 뒤덮었구나
목련꽃 꽃술이 흩날리며 봄기운을 재촉하는데
두견새 우는 소리는 한스러워 나그네 마음을 어지럽히네
이 몸 밖의 공명이야 얻든 잃든 무슨 상관이랴
세상의 영화와 쇠락도 그저 되어가는 대로 맡겨두리라
자연 속에 숨어 살자던 약속이 있으니 나는 언젠가 그리 숨으리라
어찌 늙기를 기다렸다가 그제야 벼슬을 그만두겠다 하겠는가
광주에서 즉흥으로 쓰다 (서기 1601년 4월 3일, 양력 추정)
봉생정 가에서 홀로 서성이니
옛 문장가가 스승을 그리며 화려한 글을 짓던 그 흥취조차 나지 않는구나
산새는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듯 지저귀고
들매화는 옛 벗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듯하네
시름이 스며들어 희끗한 귀밑머리가 온통 흰 눈발 같고
한이 맺혀 여린 마음은 한 줌 재가 되어버렸네
관사에 밤이 깊어 물시계 소리도 그치고 회랑에 달빛마저 어두운데
굽은 난간 깊숙한 문틈으로 그림자만 어른어른 비치네
(용어) 둘째 구절의 옛 문장가는 초나라의 송옥을 가리킨다. 그는 스승 굴원을 그리며 여러 편의 화려한 글을 지은 것으로 유명한데, 여기서는 그런 흥취조차 낼 수 없을 만큼 쓸쓸한 심경임을 견준 것이다.
능양의 시험장에서 영광 군수 경섬과 금산 현감 구의강을 만나 함께 시험장에 들어가다 (서기 1601년 4월 4일, 양력 추정)
연주관 안에 가벼운 수레를 멈추어 세우니
다행히도 풍류 넘치는 두 옥 같은 벗이 있었네
시험장에서 이들과 함께 시험을 치르게 되니 기쁘기 그지없고
낯선 고장에서 정겨운 벗들과 어울리게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사헌부에서 홀을 잡고 서 있던 예전 모습을 우러러보았고
홍문관에서 경서를 펴놓고 가르치던 그 뒷모습을 우러렀었지
잠시 조정의 반열을 떠나 수고로이 지방 수령으로 나왔으니
이는 임금께서 본디 영남 백성을 근심하셨기 때문이라네
(용어) 시험장은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가시나무 울타리를 둘러친 곳으로, 응시생과 시험관 모두 그 안에 갇혀 시험을 치렀다.
새벽녘 시험장에 앉아서 (서기 1601년 4월 5일, 양력 추정)
새벽 횃불이 휘황하게 가시울타리를 따라 늘어서고
뜰 아래에는 흰 도포 입은 선비들이 구름처럼 늘어섰네
안개는 곧 개려 하고 밤하늘엔 여전히 서린 기운이 있는데
어느 준마가 온 세상의 뭇 말들을 몰아내고 으뜸이 될는지
모두들 활을 당겨 과녁을 뚫겠노라 자랑하지만
몇 사람이나 성루를 무너뜨릴 실력을 갖추었을는지
예조에서 시험관 노릇 하며 먹물로 배를 채운 지 오래건만
오늘 아침 이 시험을 관장하게 된 것이 못내 부끄럽구나
(용어) 셋째 구절의 "서린 기운"은 옛날 진나라 사람이 밤하늘에 뻗친 검의 기운을 보고 땅을 파서 명검 두 자루를 찾아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뛰어난 인재가 세상에 묻혀 있음을 뜻한다.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는 날 술을 마시며 응시생들의 글을 풀이하다 (서기 1601년 4월 7일, 양력 추정)
급제자 명부를 처음 펼치니 흐린 먹빛이 뒤섞여 있고
바람과 우레 같은 세 관문을 거쳐 마침내 어렵다는 문을 뛰어올랐구나
옥돌을 품은 죄로 다시 발꿈치를 베이게 할 수야 있으랴
그렇다고 인재 하나 놓쳐 또 다른 억울함을 남길까도 두렵네
달나라로 가는 길은 열렸으나 계수나무 가지는 아직 하나 남았으니
잔치 노래를 부르며 벗들과 술잔을 나누어 보세
술잔을 마주하고 여러 응시생들을 위해 스스로 축원하노니
본디 품은 뜻은 배부르고 몸 따뜻한 데 있지 않았음을 잊지 마시게
(용어) 둘째 구절의 "어렵다는 문"은 황허강 상류의 협곡을 가리키는데, 잉어가 이 여울을 뛰어오르면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어 예로부터 사람의 입신출세를 빗대는 말로 쓰였다. 셋째 구절의 옥돌 이야기는 초나라의 어느 이가 귀한 옥돌을 얻고도 알아보는 이가 없어 두 차례나 발꿈치를 베이는 형벌을 당했다가 훗날에야 인정받았다는 옛이야기에서 온 것으로, 재능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외면당하는 것을 뜻한다. 여섯째 구절의 잔치 노래는 《시경》에 실린 노래로, 임금이 신하와 귀한 손님을 불러 잔치를 베풀 때 부르던 곡이다.
나그네 숙소에서 붓 가는 대로 쓰다 (서기 1601년 4월 8일, 양력 추정)
봄빛이 궁궐에서 바라보던 것과 견주면 어떠한가
엷은 그늘이 아득한데 살구꽃마저 차갑게 느껴지네
병든 몸으로 술잔을 마주하니 마음이 먼저 움츠러들고
늙어서 책을 읽으려니 흥마저 시들해지는구나
이 관을 벗어 궁궐 북쪽 문에 걸어두고 싶은 마음뿐
몸이 굳건하니 탄핵인들 어찌 두려워하랴
잠겼다 떴다 하며 그저 이 인간 세상을 구경할 뿐이니
밝은 시절에 벼슬을 벗어던지는 일조차 오히려 쉽지가 않구나
청명 절기의 풍물은 어느새 저물어 가고
동산의 붉은 꽃은 다 떨어져 땅 가득 얼룩졌네
하늘 밖에 머무는 저 구름은 어느 먼 극락의 그곳이런가
꿈속에서 본 향긋한 풀은 어느 신령한 산자락이런가
가벼운 추위 쓸쓸한데 봄기운은 장막 속으로 스며들고
보슬비 조용히 내려 대낮에도 문을 닫아걸었네
얼룩무늬 발을 스스로 걷어 올리고 짐짓 북녘을 바라보니
아득한 봉우리 안개 저편에 마치 쪽 찐 머리처럼 점이 찍혔구나
(용어) 첫 수의 "궁궐 북쪽 문"은 옛날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날 때 관을 벗어 걸어 두었다는 문으로, 벼슬에서 물러나고 싶은 마음을 나타낸다. "탄핵"은 사헌부 관원들이 잘못을 규찰하던 일을 가리킨다. 둘째 수의 "먼 극락"과 "신령한 산자락"은 불교 경전에 나오는 이상향으로, 여기서는 고향이나 그리운 곳을 빗댄 표현이다.
최 정언의 집에서 조촐한 술자리를 갖다 (서기 1601년 4월 9일, 양력 추정)
지난날엔 임금을 가까이 모시며 대궐 안뜰에 엎드리더니
이제는 임금의 은혜로 전원으로 돌아감을 허락받았네
솔과 국화 심긴 오솔길을 열어두었으니 여기서 여생을 마칠 만하고
집 안에 술상을 벌여놓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정겹구나
바람은 늦게 핀 꽃을 흔들며 새소리를 휘감고
비는 깊은 대숲에 머물러 차 달이는 연기를 촉촉이 적시네
한나절을 훌쩍 이 맑은 흥취에 마음껏 젖어 보았으니
이제야 알겠구나, 평지에도 신선이 있다는 것을
(용어) 최 정언은 이름이 홍재, 자는 덕여이며 화순 사람이다.
김영광의 집에서 장난삼아 쓰다 (서기 1601년 4월 10일, 양력 추정)
먼 서쪽 하늘로 상서로운 기운이 아득히 바라뵈고
남극 노인성이 고운 빛을 펼쳐 붉은 하늘이 환하게 밝았네
시가 완성되니 겹겹이 쌓인 옥구슬을 사람 앞에 던진 듯 찬란하고
경치 좋은 이 자리엔 온갖 꽃이 난간을 둘러싸 곱기도 하구나
진귀한 음식은 바다의 용왕이 뛰어난 맛을 실어 보낸 듯하고
옥술잔에는 어느 노파가 신선의 술을 올리는 듯하네
계수나무 향이 달빛에 실려 오니 달나라 궁전이 지척인 듯
혹시 옥퉁소 잘 부는 그 신선 같은 이가 어디선가 불고 있는 것은 아닐지
(용어) 첫째와 둘째 구절은 옛날 함곡관을 지키던 관원이 누각에 올라 사방을 살피다가 성인이 이곳을 지나가리라는 조짐으로 서쪽 하늘의 상서로운 기운을 보았는데, 과연 훌륭한 사상가를 만나 귀한 가르침을 전수받았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귀한 손님이 찾아올 상서로운 조짐을 뜻한다. 마지막 구절의 옥퉁소 부는 이는 옛이야기 속에서 퉁소를 잘 불어 봉황을 부르고 마침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적인 인물을 가리킨다. 영광 현감 김공희는 아버지가 김윤이다.
남평으로 가는 길에 (서기 1601년 4월 16일, 양력 추정)
한가로이 역마를 타고 너른 들판을 밟아가니
들 밖의 인가들은 어느새 새 이엉을 얹었구나
봄이 저물어 언덕의 꽃잎은 바람에 우수수 흩날리고
비가 개어 모래톱의 오리들은 꽥꽥 지저귀네
이제 가면 저 언덕과 동산에 이 몸을 맡겨 늙어가는 것이 마땅하리
그런데 근년 들어 산속의 벗들마저 나를 멀리하니 이를 어찌하리
졸렬한 벼슬살이에 겨우 말단 벼슬 노릇 하는 신세가 가엾은데
내 속뜻을 풀어줄 사람이 어찌 없으랴
(용어) 여섯째 구절의 "산속의 벗들"은 원숭이와 학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연 속에 숨어 사는 삶을 함께하던 벗을 뜻한다. 마지막 두 구절은 한나라 문장가 양웅이 너무 청렴만 지키다가는 녹봉과 벼슬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조롱을 받자 스스로 글을 지어 해명했던 옛일을 빌려, 자신의 곤궁한 벼슬살이를 그에 견준 것이다.
남평의 나그네 밤 (서기 1601년 4월 17일, 양력 추정)
온돌방에 배를 깔고 곤히 잠들었다가 문득 깨어보니
남쪽 처마 끝에는 어느새 둥근달이 높이 떠올랐네
궁중 악부에서 새로 지은 노래를 들을 복은 없을망정
예전 대궐에서 하사받은 도포 한 벌은 자랑스레 지녔다오
상서로운 안개가 장막을 감싸고 향로에서는 향 연기가 피어오르고
따뜻한 향기 머금은 이슬은 노란 복사꽃을 짓누르네
문득 화들짝 놀라 봉래산의 꿈에서 깨어나
열 폭 고운 종이에 채색 붓을 적셔 시를 써 내려가네
해양에서 품은 생각을 적다 (서기 1601년 4월 20일, 양력 추정)
거친 뜰은 적막하여 오가는 발길도 끊겼는데
온종일 나른하게 졸음으로 병든 몸을 달래네
향긋한 풀은 무성하여 신발이 파묻힐 지경이고
푸른 그늘은 어느새 난간 위까지 짙게 드리웠네
시름 속에 바라본 풍경은 봄이 다 가버렸음에 놀라게 하고
시를 읊고 나니 늙어가는 이 심정을 어찌할거나
오래 앉아 있다가 문득 꾀꼬리 소리를 들으니
그 영롱한 소리가 마치 나를 원망하는 노래 같구나
작은 뜰을 두른 회랑에 해가 어느덧 기울었으니
은사발에 갓 우려낸 새 차 맛이나 보아야겠다
못 위에 점점이 심긴 연꽃은 이제 막 잎을 띄우려 하고
비를 맞은 장미는 어느새 꽃을 활짝 피웠네
시름과 병이 늘 뒤엉켜 나는 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아름다운 봄빛이 다 저물어가니 나그네는 집 생각뿐이네
시를 지어 스스로 이별의 한스러움을 적어보지만
새벽놀을 노래하던 그 풍류와는 견줄 바가 못 되는구나
(용어) 해양은 지금의 광주 지역을 이르던 옛 이름이다. 첫 수의 "나를 원망하는 노래"라는 구절은, 허균이 이때 향시의 시험관으로 지방에 내려와 있던 처지를 스스로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둘째 수의 "이별의 한스러움"은 남북조 시대의 어느 문장가가 이별과 한스러움을 다룬 글을 잘 지은 것으로 유명했던 데서 따온 표현이다.
윤씨의 별장에서 베푼 잔치 (서기 1601년 4월 22일, 양력 추정)
술잔을 받든 곱게 단장한 여인들이 세 줄로 늘어서서
파초잎 술잔에 향기로운 술을 따라 손님에게 권하는구나
어느 이름난 집안은 예로부터 부엌 음식 맛 좋기로 자랑했다더니
또 다른 집안의 지극한 효심이 오늘도 이어지는 듯하네
화로 연기 자욱한 가운데 바람은 장막을 걷어 올리고
꽃안개 자욱한 회랑에는 달빛이 돌아드는구나
이제야 알겠구나, 벼슬 없는 부자라도 큰 제후에 견줄 만하다는 것을
세상에서 왕후장상이라는 게 대체 무슨 대단한 것이란 말인가
(용어) 이 잔치를 베푼 윤씨는 남쪽 지방의 부자이다. 셋째 구절의 이름난 집안은 한나라 때 부엌 음식이 맛좋기로 이름났던 집안을 가리킨다. 넷째 구절은 한나라의 한 인물이 닷새마다 돌아오는 휴가 때면 아버지의 속옷을 몰래 가져다 손수 빨아 드릴 만큼 지극한 효자였다는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일곱째 구절의 "큰 제후"는 벼슬은 없어도 넉넉한 살림을 가진 사람이 제후에 못지않은 부를 누린다는 뜻으로, 세속의 벼슬이나 신분보다 실질적인 삶의 풍요로움을 더 높이 산 표현이다.
담양의 비 오는 밤 (서기 1601년 4월 24일, 양력 추정)
문루의 종소리가 뎅그렁 울려 밤이 깊었음을 알리니
비단 이불 속 짙은 향기에 젖었던 꿈이 문득 깨어나네
귀한 술 한 잔 몰래 훔쳐 마시는 풍류쯤이야 해로울 것 없지만
갈증을 달래겠다고 신선의 이슬이나 바라는 헛된 욕심은 내키지 않네
등불 꽃은 또렷또렷 홀로 웃음 짓게 하고
처마의 대나무는 우수수 빗소리를 실어 보내네
비단 장막에 새벽 추위 스며들어 사람은 쓸쓸한데
굽은 난간 실버들 사이로 꾀꼬리 소리만 들려오는구나
(용어) 넷째 구절은 한나라의 어느 임금이 불로장생을 바라며 이슬을 받으려고 세운 구리 기둥 이야기를 빌린 것이다. 그 임금은 그 이슬을 마시면 갈증의 병을 고치고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헛된 욕심을 부리며 무언가를 갈구하는 태도를 빗댄 것이다.
창평에서 임자승을 만나다 (서기 1601년 4월 25일, 양력 추정)
낯선 고장에서 서로 만나니 반가운 눈빛이 서로 같고
남녘 하늘에 이렇게 벗들이 모일 줄 그 누가 헤아렸으랴
옛사람이 병을 얻은 것은 함부로 술을 마셔서가 아니라 아내를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었고
또 다른 옛사람을 위해 먼 길을 달려온 것도 형체를 잊은 깊은 사귐 때문이었지
지팡이 짚고 산골 서당을 노닐던 그 시절을 끝내 잊지 못하니
물가 정자에서 노래 듣던 잔치야 부디 그리워 말게나
얻고 잃음이란 그저 한바탕 봄꿈에 지나지 않음을 진작 알았으니
차라리 옛 현인을 따라 세상 밖에 노니는 도리나 배워보세
승화전 밤 당직 자리에서 궁중 이불을 걷고 물러나
고을을 맡겨 부모 봉양케 하신 임금의 은혜가 두터웠지
강 언덕에서 아쉽게 이별하며 일찍이 손을 맞잡았더니
이제 산골 객관에서 반갑게 다시 만나 등불 심지를 돋우네
트이고 막힘은 오직 하늘에 달렸음을 모름지기 알아야 하니
낮은 벼슬아치라 불린들 그것이 내 명성에 해가 될 것은 없지
흰머리 되어 조서나 짓는 것도 이제는 임금을 보필하는 자리가 아니니
봄이 오면 내 꿈은 늘 강릉으로 돌아가는구나
(용어) 임자승의 이름은 임만이다. 첫 수의 "벗들이 모일 줄"이라는 구절은 별 두 개 이상이 한데 모인 것, 또는 견우와 직녀 두 별을 가리키는 옛 표현을 빌려, 벗들이 서로 만난 것을 별에 빗댄 것이다. 셋째 구절의 옛사람은 삼국 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아내를 깊이 사랑하다가 아내가 죽자 자신도 슬픔에 겨워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넷째 구절의 두 옛사람은 진나라의 어느 명사와 그를 사모한 벗을 가리키는데, 그 벗은 그리울 때마다 천 리 길을 마다 않고 수레를 달려 찾아왔다고 한다. 이 두 고사는 모두 벗 사이의 깊은 정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동당에 들어가서 짓다 (서기 1601년 4월 26일, 양력 추정)
두루 통달한 인재는 예로부터 모든 방면에 다 뛰어나기 어려운 법인데
하물며 세 차례 시험마다 요구하는 문체가 저마다 다름에랴
송나라의 한 학자는 화려한 문체보다 실질적인 글을 중시했고
한나라의 한 학자는 오로지 역사서 한 가지 학문에만 매달렸지
한 분야에만 전념한다면 혹 옛 경전학자들을 따를 수 있을지언정
두루 배운다 한들 어찌 공자와 주공의 경지를 이을 수 있으랴
해가 뜰의 절반에 드리우도록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 답안을 써 내려가니
그 가운데 몇 사람이나 씩씩하고 날래어 으뜸 자리를 차지할는지
(용어) 동당은 과거 시험 가운데 문과의 정식 시험을 이르는 말이다. 셋째 구절의 학자는 송나라의 사마광을 가리킨다. 넷째 구절의 학자는 한나라의 동중서로, 역사서인 《춘추》 연구에 뛰어났다. 다섯째 구절의 "옛 경전학자들"은 한나라 시절 각각 시와 역사 경전에 정통했던 학자들을 가리킨다.
장성에서 조카 박씨와 헤어지다 (서기 1601년 5월 7일, 양력 추정)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십 년 묵은 속마음을 털어놓고
애써 꽃 앞으로 나아가 술잔을 마주하며 시를 읊조리네
풍진 세상에서 오만한 관리 노릇 하기도 이제는 싫증이 나니
산수 사이에서 맑은 거문고 소리를 이제 누구와 함께 즐기리
하늘 끝에서 살붙이와 헤어지는 이 마음이 못내 아프고
봄이 지난 동산 숲에는 어느새 여름 그늘이 짙어가네
만나고 헤어짐이 하도 분주하여 남은 날이 짧기만 한데
문득 흠칫 놀라 떨어지는 눈물이 옷깃을 흠뻑 적시는구나
(허균이 남긴 설명): 박생은 이름이 종현, 자는 정백이며, 거문고를 잘 탔으므로 이 시의 넷째 구절에서 그 일을 언급하였다.
부안에서 도위 민인길을 만나다 (서기 1601년 5월 9일, 양력 추정)
신성 도위의 내실은 그윽하고 깊기도 한데
잠시 말 멍에를 풀고 바람 부는 마루에 몸을 붙여 잠들었네
넓은 바다에 구름이 자욱이 깔리자 어느새 섬이 사라지고
변산에 해가 솟으니 잠깐 사이 안개가 걷히는구나
아리따운 이의 묘한 말솜씨로 시를 막 읊조리는데
도위와 나눈 정겨움에 술기운이 어느덧 거나해지네
짙은 그늘 속 꾀꼬리의 온갖 소리를 다 듣고 나니
수놓은 병풍 아래 높은 베개에 기대어 강남을 꿈꾸네
(용어) 도위는 조선 시대 임금의 사위나 왕실과 혼인으로 맺어진 이에게 내리던 벼슬이다. 민인길은 자가 숙정이며, 진사 민인백의 아우이다.
덕은관에 홀로 앉아서 (서기 1601년 5월 10일, 양력 추정)
먼 산이 창문을 향해 눈썹 끝처럼 둘러섰는데
남녘 하늘을 바라보니 그림 같은 처마가 훤히 트였네
계절은 거침없이 흘러 봄은 어느새 다 가버렸고
술상은 초라하여 도리어 마음이 씁쓸해지는구나
안개는 늘어진 조릿대를 감싸며 붉은 난간과 나란히 어우러지고
바람은 흩날리는 꽃잎을 걷어차 수놓은 발에 흩뿌리네
만 리 밖 이별의 회포는 아무리 애써도 삭일 수가 없으니
구름 밖으로 떠오를 밝은 달이나 기다려 볼 밖에
금강을 건너면서 (서기 1601년 5월 12일, 양력 추정)
곱게 꾸민 배 두 척이 가파른 바위에 나란히 매여 있는데
지친 몸을 뱃전에 기대니 빗줄기가 어지러이 흩날리네
맛좋은 단술을 사람에게 권하며 새 모양 술잔을 기울이고
고운 여인은 손님을 마주하려 매미 날개처럼 얇은 옷을 걸쳐보네
안개 잠긴 아랫섬에서는 어부의 노랫가락이 들려오고
바람 잔뜩 머금은 앞여울에는 바다로 향하는 돛이 떠오르네
돌아보니 나랏일로 가는 이 여정, 잠시도 머무를 수 없는 몸이라
부질없이 돛대에 앉은 제비만 재잘재잘 지저귀며 애쓰는구나
(용어) 일곱째 구절의 "나랏일로 가는 이 여정"은 임금의 명을 받든 공무로 분주히 오가는 여정을 뜻하는 말이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임인서행록 · 기성고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임인서행록 · 기성고
배경: "임인서행록"은 임인년(1602년)에 서쪽 지방을 오간 짧은 여정을 담은 여섯 편이다. 이어지는 "기성고"는 병조(兵曹)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지은 일곱 편으로, "기성"은 병조를 달리 이르던 이름이다. 두 소제목을 합쳐 모두 열세 편이다.
송경에 머물며 (서기 1602년 3월 31일, 양력 추정)
옛 나라의 자취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이 땅
허물어진 성 곁으로 나그네가 지나간다
오백 년이 흘러 왕조의 기운은 사라졌어도
험준한 산과 물은 그때 그대로 남아 있구나
해가 저무니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마저 쓸쓸하고
아직 남은 추위에 들판의 눈은 녹지 않았네
남쪽 누각에 올라 홀로 서글픔에 잠겨
옛일을 그리며 하염없이 노래를 읊는다
(용어) 송경은 고려의 옛 수도였던 개성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황주 가는 길에 (서기 1602년 4월 4일, 양력 추정)
들녘 주막에는 밥 짓는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르고
강 위 다리에 해가 저무니 시름이 밀려온다
천 리 길 떠도는 나그네를 그 누가 가여워해 줄까
오늘에야 겨우 황주에 이르렀구나
평양 가는 길에 (서기 1602년 4월 6일, 양력 추정)
한 필 말에 몸을 싣고 서경으로 가는 길
봄바람 맞으며 나그네 마음은 지쳐만 간다
맑은 물결 위로는 채색한 놀잇배가 떠 있고
비낀 햇살은 층층이 솟은 성벽에 반쯤 걸렸네
낙척한 신세라 지난 일들이 우습기만 하고
지루하게 이어지는 이 걸음이 슬프기만 하다
정자를 아무리 바라봐도 길은 끝이 없는데
나루터 숲에는 저녁 안개가 피어오른다
(허균이 남긴 설명): 지난 오 년 사이에 이곳을 네 번이나 지나왔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백상루 (서기 1602년 4월 8일, 양력 추정)
먼 길 떠도는 나그네의 시름은 끝이 없더니
누각에 오르니 잠시나마 얼굴이 펴진다
밀물 소리는 살수에 부딪쳐 울리고
푸른 이내는 향산을 온통 휘감아 도네
역참 길은 대체 언제나 끝이 날는지
고향 땅은 꿈속에서나 돌아갈 수 있구나
어여쁜 기생이 내 마음속 한을 알아채고는
잔을 멈추고 이별의 노래 양관곡을 불러 주네
(용어) 백상루는 평안도 안주에 있던 누각으로, 살수(지금의 청천강)와 향산(묘향산)이 내다보이는 자리에 있었다. 양관곡은 먼 길 떠나는 벗을 보낼 때 부르던 옛 이별의 노래다.
영훈루 (서기 1602년 4월 10일, 양력 추정)
낯선 땅이라 봄추위가 유난히 매섭고
높다란 누각에는 지는 해가 비껴 있다
어여쁜 기생이 자꾸만 술을 권하지만
나그네의 마음은 오로지 집 생각뿐
굽이진 언덕엔 녹다 만 눈이 남아 있는데
개나리는 벌써 일찌감치 꽃을 피웠구나
관문과 요새는 아득히 어두워져 가고
성 안 나무에는 벌써 까마귀가 깃든다
판문령 (서기 1602년 4월 12일, 양력 추정)
화살 오늬처럼 가파른 이 고개는 오르기도 힘겹고
자욱한 흙먼지는 나그네의 얼굴을 상하게 하네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낯설기만 하니
대체 어디가 내 고향이란 말인가
멀리 펼쳐진 물은 하늘 끝까지 이어지고
외로운 구름은 기러기를 데리고 돌아가네
아득히 안개 서린 저 너머로
한 점 솟아 있는 것이 바로 의주의 산이로구나
(용어) 판문령은 의주로 가는 길목에 있던 고개다.
면복과 고명을 내리는 의식이 끝난 뒤에 짓다 (서기 1602년 3월 1일, 양력)
상서로운 조서가 내려와 은총의 빛을 비추니
홀과 곤룡포, 면류관까지 의전이 두루 갖추어졌네
나라를 다시 일으켜 준 그 은혜에 어짊이 넘쳐흐르고
나라의 운이 다시 회복되는 때를 만나 왕업이 새로이 창성하네
궁궐 뜰에는 화려하게 풍악이 늘어서고
들쭉날쭉 늘어선 깃털 의장은 깃발이 되어 나부끼네
미천한 신하가 이 성대한 광경을 직접 보게 되니
이 벅찬 마음을 노래로 어찌 다 찬양할 수 있으랴
(용어) 면복은 관복을, 고명은 오품 이상 고관을 임명할 때 내리던 임명장을 뜻한다. 이 시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명나라 황제가 조선에 다시 관복과 임명장을 내려 준 일을 두고 지은 것이다. 재조의 은혜란 망해 가던 나라를 구해 준 은혜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 조선을 구해 준 일을 가리킨다.
무장 현감으로 부임하는 성칙생을 보내며 (이름은 계선이다) (서기 1602년 7월 19일, 양력 추정)
임금께서 장사 고을을 근심하시어
성씨 낭관에게 구리 도장을 내려 주셨네
쌍깃발을 앞세운 이 행차는 좌천이 아니라
어진 사람에게 백 리 고을을 맡기신 것이라네
채색 꿩은 거문고 소리를 듣고 모여들고
맑게 핀 꽃은 인끈을 스쳐 향기롭겠지
태수의 귀한 행차를 부질없이 바라보다가
서쪽으로 바삐 떠나야 할 내 신세가 우습구나
내 예전에 장사 고을에 이르렀을 때
시냇가 정자에 앉아 서늘한 저녁을 맞았었네
대숲 바람이 갓에 불어와 서늘하고
연잎의 이슬이 옷에 떨어져 향기로웠지
맛 좋은 안주로 붉은 잉어를 삶아 내오고
아리따운 여인이 옥잔을 올려 주었네
신선처럼 노닐던 그 시절이 이미 꿈만 같아
고개 돌려 떠올려 봐도 마음만 아득하구나
(용어) 백 리 땅이란 현 하나의 크기가 사방 백 리쯤 되었으므로, 그 고을을 다스리는 현령이나 현감을 뜻한다.
금오에서 자정을 찾아가다 (자정은 임곤이다) (서기 1602년 7월 28일, 양력 추정)
사내로 태어나 벼슬이 집금오에 그쳤어도
그 명성은 이미 온 장안을 뒤흔드는구려
낭관으로 있는 내 관아엔 근래 찾아오는 수레도 뜸하고
머리 허옇게 센 풍당처럼 나는 그저 궁한 길만 걷고 있다오
풍경 소리 뎅그렁 울리며 순라군이 외쳐 대고
검은 옷에 붉은 몽둥이 든 이들이 뜰 모퉁이를 둘러쌌구려
그대의 벼슬길이 이토록 빛나는 걸 보고 있자니
임금의 조서에 이름 올린 나 자신이 도리어 후회스럽소
젊은 시절엔 시로 이름나 무리 중 으뜸이라더니
늘그막에 금오 벼슬이 무슨 재주에 맞는 일이랴
흡사 한나라 때 중위 표가
백량대에서 칠언시로 임금께 화답하던 그 일과 같구려
지난날 권세가 중서성에 맞먹던 그 시절에는
밤새도록 노래와 피리 소리로 서지가 떠들썩했었지
태평했던 그 옛일을 그대로 좇을 수만 있다면
그저 오래된 이 병을 여의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소
(용어) 풍랑은 한나라 문제 때 중랑서장을 지낸 풍당이라는 인물을 가리킨다. 그는 무제 때에 이르러서야 어질고 현명하다 하여 뒤늦게 천거되었으니, 늘그막까지 뜻을 펴지 못한 인물의 대명사로 쓰인다. 한나라 무제가 백량대를 완공하고 신하들을 모아 칠언시로 화답하게 했을 때, 집금오 벼슬에 있던 중위 표도 그 자리에 끼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상대인 자정의 벼슬과 처지를 그 중위 표에 빗댄 것이다.
병조 관아에서 (서기 1602년 8월 5일, 양력 추정)
병조에서 숙직을 선 것도 이미 아홉 번째
죄인을 심리하는 일까지 겹치니 마음이 다시 고달프다
반랑처럼 벼슬은 서투르고 몸엔 병도 많으니
가을바람 기다릴 것도 없이 벌써 흰머리가 보이는구나
뜰의 횃불은 휘황하게 타오르고 옥졸들 떠들썩한데
밤새도록 매질 소리에 억울하다 울부짖는 소리 들려온다
이따금 문서 뒤편으로 살길을 터 주기도 하니
우습구나, 이 몸이 옥리들 가운데 으뜸이 되었다는 것이
(용어) 기조는 조선 시대 병조를 달리 이르던 말이다. 이모는 희끗희끗하게 세기 시작한 반백의 머리를 뜻한다. 독배는 문서의 뒷면을 이르는 말인데, 옛 중국 역사서 《사기》에 전하는 이야기에서 나왔다. 주발이라는 사람이 죄를 얻어 옥에 갇히자 천금을 옥리에게 주었더니, 옥리가 문서 뒷면에 "공주를 증인으로 삼는다"는 말을 써서 보여 주었고, 그 덕에 죄를 벗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유래하여, 문서 뒤편에 슬쩍 살길을 일러 준다는 것은 죄인을 너그러이 봐준다는 뜻으로 쓰인다.
병조에서 맞은 첫가을 (서기 1602년 8월 17일, 양력 추정)
병조에서 숙직한 지도 어느덧 오 년
낭관 벼슬은 대체 언제나 자리를 옮길는지
글공부는 저버린 지 오래니 변소의 뱃속에 부끄럽고
서리와 눈이 가득 내린 듯 풍당의 이마처럼 머리만 세었네
달빛은 은하수 저 너머 높이 떠 있고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섬돌가에서 그쳤구나
가을날의 회포는 참으로 쓸쓸하기만 한데
변방의 기러기마저 또다시 남쪽 하늘로 울며 떠나가네
(용어) 변소는 후한 시대의 학자로 학문이 매우 깊었는데, 하루는 낮잠을 자는 척 누워 있다가 제자에게 "뱃속에는 글은 안 읽고 낮잠만 자는군" 하고 놀림을 받자, "내 뱃속은 다섯 경전을 담은 책 상자다" 하고 되받아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여기서는 글공부를 게을리한 자신을 그와 견주어 부끄러워한 것이다. 풍당은 한나라 문제 때 사람으로 재주가 있었으나 늙도록 낮은 벼슬에 머물렀던 인물이다.
교외로 나가서 (서기 1602년 10월 5일, 양력 추정)
가을걷이 무르익어 들빛이 넉넉하니
여기저기서 기쁨에 겨운 소리가 들려온다
집집마다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곳곳마다 누렇게 익은 벼를 베어 들이네
밭 한 뙈기 없는 이 나그네가 우습기만 해서
부질없이 쌀을 꾸는 편지만 쓰고 있구나
성 동쪽에 세 이랑쯤 땅이나 빌려서
언제나 내 손으로 갈고 김을 매어 볼거나
(용어) 누렇게 익은 벼가 논밭에 가득 서 있는 모습을 구름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서신을 얻어 보고서 (서기 1602년 10월 8일, 양력 추정)
오성에서의 즐거운 모임을 꿈속에서 다시 만난 듯
편지를 막 펼쳐 드니 먹빛이 아직도 짙게 남아 있네
남쪽 거리 저편의 작은 누각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창문을 닫아걸고 달려와 함께 새벽 종소리를 듣던 그 밤이여
(용어) 옛사람들은 편지를 흔히 잉어에 빗대어 불렀다. 옛 악부시 〈음마장성굴행〉에 "먼 데서 온 손님이 나에게 잉어 두 마리를 주기에, 아이를 불러 삶으라 했더니 그 속에서 편지 한 통이 나왔다"는 구절이 있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태복고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태복고
배경: "태복"은 임금의 수레와 말, 목축을 관장하던 관청(사복시)을 달리 이르는 이름이다. "태복고"는 허균이 이 벼슬에 임명되어 궁궐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지은 시 열일곱 편을 모은 것이다.
태복 벼슬에 임명되어 짓다 (서기 1602년 11월 17일, 양력)
말 좋기로 이름난 그 고장에서 인재를 가려 뽑듯
조정은 나를 뽑아 남다른 은혜를 베풀었다
몸가짐 조심하며 신중하게 살피려 하지만
목장을 다스리고 말을 부리는 일에는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말이 날뛰어 수레가 뒤집힐 걱정은 늘 있기 마련이니
지나친 나들이를 경계하라던 그 옛 훈계를 어찌 헛소리라 하겠는가
언제라야 이 둔한 몸에 채찍질하여
천 리 먼 길을 마음껏 달려볼 수 있을까
(용어) 기북은 지금의 중국 화베이 지역 북쪽 땅으로, 좋은 말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예로부터 뛰어난 인재에 즐겨 비유되었다. 둘째 연의 "신중하게 살피려 한다"는 구절은, 한나라 때 석경이라는 사람이 태복 벼슬에 올라 여섯 마리 말을 부리면서 굳이 세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말의 수를 채찍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세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따온 것으로, 지나치리만치 신중한 태도를 뜻한다. 다섯째 연에서 말한 "수레가 뒤집힐 걱정"은 말이 성이 나서 재갈이 벗겨지고 굴대가 부러져 수레가 뒤집히는 사고를 이른다. "지나친 나들이를 경계하라던 옛 훈계"란 옛 시의 제목으로, 주나라 목왕이 천하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려 하자 신하 채공 모부가 이 시를 지어 임금의 마음을 가라앉혔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다.
겨울비 (서기 1602년 11월 21일, 양력 추정)
열흘이 넘도록 궂은 겨울비 이어지며
날은 어둑하고 부슬비는 걷힐 줄 모른다
튀는 흙탕물에 말은 흠뻑 젖고
구정물은 거리마다 넘실거린다
유향이 옛날 이상한 조짐들을 점쳐 기록해 두었듯
경방이 겨울 천둥을 두고 경계하라 일렀듯
하늘의 뜻은 여전히 살펴 알 수 있으니
정성으로 응하면 재앙도 마침내 스러지리라
(용어) 유향은 한나라 때 중루교위라는 벼슬을 지낸 학자로, 예로부터 전해 오는 상서로운 조짐과 재앙의 기록을 모아 그 결과를 살핀 책을 남겼다. 경방도 한나라 사람으로 역학에 밝아, 여름에 서리가 내리거나 겨울에 천둥이 치는 것과 같은 이상 현상을 두고 임금에게 경계할 것을 아뢰었다.
장난삼아 자정에게 답하다 (서기 1602년 12월 4일, 양력 추정)
몸에 병이 들고 보니 흥청거리던 나들이도 이제 싫증이 난다
옅은 정 붙들고 화려한 그 거리를 다시 어찌 찾아가겠나
글공부하던 붓과 벼루를 벗어났다니 그것 참 좋은 농담이로군
봉래산 꼭대기에는 밝은 달이 둥실 떠오르네
(용어) 둘째 줄의 "화려한 그 거리"는 옛 중국의 번화한 고을을 가리키는 표현을 우리말로 풀어 옮긴 것으로, 젊은 시절의 방탕한 놀음을 빗댄 말이다.
회포를 풀며 (서기 1602년 12월 14일, 양력 추정)
반평생을 근심 걱정으로 보내다 보니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졌다
시류에 영합하는 자들과 마주 앉아 웃는 낯을 짓기가 못내 싫다
세상과 매끄럽게 어우러지던 그 옛사람의 재주는 나는 끝내 배우지 못했다
가락 맞춰 시나 짓다 보면 가볍고 야한 노래에 가까워질까 두렵기도 하다
저무는 해를 좇듯 이제는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고 싶은데
말이나 세는 자잘한 소임으로 아직도 궁궐을 지키는 벼슬아치 반열에 머물러 있다
숨어 지낼 뜻이야 있지만 벼슬을 버리지 못해 남들의 비웃음을 사고 마는데
돌아가고픈 꿈은 언제나 저 산속 동산에 가 있건마는
(용어) "세상과 매끄럽게 어우러지던 옛사람"은 춘추 시대 노나라의 유하혜라는 인물로, 세속과 잘 융화하며 살았던 것으로 이름났다. "말이나 세는 자잘한 소임"이라는 표현은 앞서 나온 대로 한나라 관리 석경의 옛이야기에서 따온 말로, 여기서는 하찮은 직무에 매인 신세를 뜻한다. "숨어 지낼 뜻이 있으면서도 비웃음을 산다"는 구절은, 진나라의 사안이라는 선비가 원래 산속에 은거할 뜻을 품었다가 결국 다시 벼슬길에 나서자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따온 표현이다.
숙정헌에 여럿이 모여 (서기 1603년 2월 7일, 양력 추정)
섣달이 다 가도록 추위는 더욱 매섭고
밤은 길어 촛불은 차츰 가늘어진다
옥 술잔을 기울이니 노랫소리 맑고
비단옷을 풀어헤치자 향내가 풍겨온다
세상을 살아가려니 가난이 병이 되어 괴롭고
이름을 좇으려니 시비 다툼만 잦다
오늘 저녁만큼은 실컷 즐겨나 보세
세월이 어찌나 빠른지 날아가는 것만 같구나
이술이 보낸 시에 화답하다 (서기 1603년 2월 18일, 양력 추정)
벼슬살이 흔적이라야 아직 하찮은 녹봉뿐인데
시로 이름난 이가 그 누가 으뜸이던가
정에 지나치게 빠져 목숨을 잃은 순찬을 나는 경계로 삼겠지만
여색을 딱 끊어 버린 왕돈 같은 결단은 나는 갖지 못했다
마음만은 여전히 씩씩하여 태산에라도 오를 기세지만
실상은 말재주 하나로 이곳저곳 떠도는 신세일 뿐이다
같은 병을 앓는 나그네 신세를 가엾이 여겨
다시 한 번 이 사립문을 찾아와 주지 않겠는가
(용어) 순찬은 삼국 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여 아내가 열병을 앓자 자기 몸을 차갑게 식혀 열을 내려 주려다가, 결국 아내가 죽은 뒤 자신도 얼마 안 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왕돈은 진나라 사람으로, 여색에 빠져 몸이 쇠약해지자 주변의 간언을 듣고는 단번에 첩들을 모두 내보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여섯째 줄은 전국 시대의 유세가 장의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모진 곤욕을 당한 뒤에도 "혀만 남아 있으면 된다"며 자신했다는 옛이야기에서 따온 표현으로, 말재주 하나로 세상을 떠도는 처지를 빗댄 것이다.
심사눌의 집에서 피리 소리를 듣다 (서기 1603년 3월 23일, 양력 추정)
(허균이 남긴 설명): 사눌은 자이고, 본래 이름은 종민이다.
쌀쌀한 봄추위가 비단 휘장 속으로 스며들고
동풍이 불어와 어린 복사나무 가지를 흔든다
구름 낀 창, 안개 자욱한 방은 바다처럼 아득한데
그 옛날 듣던 옥피리 소리가 지금도 들려오는 듯하다
내사에서 숙직하며 (서기 1603년 4월 8일, 양력 추정)
손님 맞는 누대는 아득히 후궁 자리를 내리누르고
이부자리 안고 밤마다 대궐 가까이서 지낸다
한나라는 말과 목축을 살피는 태복 벼슬을 중히 여겼고
당나라는 임금의 말을 짓는 문신을 귀하게 여겼다지
욕실 딸린 전각에 바람 맑아 새벽 종소리 메아리치고
구름에 둘러싸인 궁궐엔 이른 아침 의장 행렬이 새롭다
해가 뜨자 마구간의 얼룩무늬 말들이 빛을 내니
말 기르는 이가 끌고 나와 뭇 준마들을 씻어 준다
(용어) 첫 줄의 "후궁 자리"는 궁궐 안 깊숙한 곳을 이르는 옛말이다. "임금의 말을 짓는 문신"이란 임금의 조서와 말씀을 대신 짓던 시종 신하를 가리킨다.
내사에서 이술이 보낸 시에 화답하다 (두 수) (서기 1603년 4월 17일, 양력 추정)
첫째 수
신령한 나무들이 궁궐을 에워싸고 있는데
궁궐 문에는 새벽빛이 밝아 온다
글재주를 사마상여에 견주어 본들 그저 문장가일 뿐이니
동방삭처럼 신선의 재주를 지녔다 한들 무엇하리
하늘의 음악이 공중에서 울려 내려오면
하늘의 향내가 소매 가득 스며드는 듯하다
왕족들은 말과 수레를 정돈하여
백량대에 모여 서로 시를 주고받는다
둘째 수
세상에 이바지하는 일이야 어찌 우리 몫이랴
반악처럼 나도 벌써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졌다
금을 대신 물어 주고도 의심을 다 풀지 못했다던 그 사람처럼
옥을 지녔다는 것만으로 죄가 된다니 어찌 피할 수 있으랴
내 행색은 벼슬길에 나설 기회조차 적어
어지러운 세상 속에 베개만 높이 하고 엎드려 있을 뿐이다
다만 그대의 다정한 마음이 고마워
나를 잊지 않고 보내 준 이 도포 한 벌이 사무친다
(용어) 사마상여는 한나라의 문장가로 뛰어난 부를 여럿 남겼고, 동방삭은 한 무제 때 익살과 신선술로 이름난 사람이다. 백량대는 한나라 무제가 세운 누대로, 신하들이 모여 함께 시를 짓던 곳이다. 반악은 진나라의 문장가로, 젊은 나이에 이미 머리가 세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금을 대신 물어 준 그 사람"은 한나라의 직불의로, 같은 방 사람의 금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도 변명 없이 그 값을 물어 주었는데 훗날 그의 결백이 밝혀졌다. 마지막 줄의 도포는 전국 시대 위나라의 수가가 곤궁한 옛 친구 범수를 안타까이 여겨 선물한 것으로, 여기서는 벗의 정을 잊지 않는 마음을 뜻한다.
대륙의 옛 시 운을 빌려 내 마음을 풀어보다 (서기 1603년 4월 28일, 양력 추정)
붉은 산에서 태어난 저 봉황새는
날개를 활짝 펴고 훨훨 날아올라
햇빛을 등에 지고 맑은 샘물을 마시며
깃을 접고 흰 물결에 몸을 씻는다
네 기둥이 떠받친 높은 누각의 둥지를 돌아보니
너무도 비좁아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숲 속에 숨어 사는 선비들은
산골짜기만을 마음 편히 쉴 곳으로 삼는다
아침이면 향긋한 숲을 서성이고
저녁이면 신선의 밭을 거니노라면
이렇게 자유로이 한평생을 마칠 수 있을 텐데
구태여 높은 관을 쓸 까닭이 있으랴
옥돌을 품고도 임금 앞에서 그저 울기만 하고
문 앞에 난 난초조차 뽑기를 꺼리는 세상이다
태평한 세상을 만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니
구름 수레를 채찍질하여 어서 떠나야겠다
이 마음을 다 털어 나를 알아주는 벗에게 맡기려니
품은 회포가 못내 한스럽기만 하다
(용어) 다섯째 줄의 "네 기둥이 떠받친 높은 누각"은 옛이야기 속에서 봉황이 둥지를 틀었다고 전해지는 화려한 누각을 말한다. "옥돌을 품고도 울기만 한다"는 구절은, 옛날 변화라는 사람이 진짜 옥돌을 임금에게 바쳤다가 거짓이라는 의심을 받아 두 발을 잘리고도 끝내 그 옥돌이 진짜임을 인정받지 못해 통곡했다는 이야기에서 따온 것으로, 참된 재능이나 진심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안타까움을 빗댄 표현이다.
어떤 이에게 주다 (서기 1603년 5월 5일, 양력 추정)
첫째 수
서울에는 봄이 이미 저물어 가는데
하늘 끝 떠도는 나그네는 돌아가지 못한다
아침에 높은 누각에 올라앉아 있노라니
뜰의 나무에서 꽃잎이 져 흩날린다
둘째 수
봄이 다 가도록 안부를 묻는 이 누구던가
외로이 지내다 보니 그대 생각이 갑절이나 더하다
병치레만 많이 겪고 나면
하늘을 찌를 듯한 명문장이 어찌 나오겠는가
(용어) 마지막 줄은 한나라의 문장가 사마상여가 병이 많았음에도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이 담긴 명문장을 지어 천자를 감탄시켰다는 옛이야기를 빌려, 병든 몸으로는 좋은 글을 쓰기 어렵다는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초여름 관아에서 짓다 (서기 1603년 5월 15일, 양력 추정)
첫째 수
묵어 버린 내 고향 동산, 언제나 돌아갈거나
귀밑머리 하얗게 세니 벼슬 생각도 시들해진다
적막한 궁궐 정원에 봄은 어느새 다 가 버렸는데
성긴 빗줄기가 또다시 장미꽃을 적신다
둘째 수
빗방울 보슬보슬 내리니 낮잠이 아쉬운데
베갯머리 훈훈한 바람이 전각 안에 감돈다
점심 어서 들라고 아전들은 재촉하지 마오
꿈속에서 한창 무창의 물고기를 먹고 있는 참인데
(용어) 무창의 물고기는 옛 중국 무창 지역에서 나던 물고기로, 삼국 시대 오나라 사람들이 도읍을 옮기면서도 무창의 물고기 맛을 잊지 못해 불렀다는 노래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여기서는 꿈속에서나마 누리는 소박한 즐거움을 가리킨다.
관아에서 비를 만나다 (서기 1603년 7월 15일, 양력 추정)
졸다가 일어나니 마루가 서늘하고
먼 하늘에서 우렛소리 은은히 들려온다
세찬 바람이 비를 몰고 밀려오는데
놀란 번갯불이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온다
바다처럼 내닫는 물줄기 넘실거리고
일렁이던 개울가 풀은 쓰러져 있다
석양 무렵 하늘이 문득 활짝 개니
갠 빛이 궁궐 가득 비쳐든다
숙정루에서 (서기 1603년 7월 30일, 양력 추정)
온 세상이 더위에 헐떡이는데
높은 누각만은 저물녘 홀로 서늘하다
한가로이 옥여의를 손에 쥐고서
높다랗게 대나무 평상에 누워 있노라
좋은 술은 맑은 이슬처럼 흘러내리고
찬 수박은 마치 눈서리를 씹는 듯하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젊은 여인이
석양 무렵 가로피리를 부는구나
(용어) 옥여의는 손에 쥐면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옥으로 만든 보배로운 지팡이를 가리킨다.
즉흥으로 짓다 (서기 1603년 8월 21일, 양력 추정)
첫째 수
저잣거리 누각의 등불은 꺼지고 물시계 소리만 재촉하는데
말을 타고 어둠 속을 거침없이 달려 돌아왔다
북두칠성 자루는 자리를 옮기고 은하수는 점점 잦아드는데
밝은 달을 다시 이끌고 궁궐 풍경을 구경한다
둘째 수
굽은 난간 저 서쪽엔 대나무꽃이 아스라한데
바람이 발을 흔들어 횃대 하나 나직이 드리웠다
달 밝은 한밤중에 쇠피리를 불고 있노라니
푸른 창가에서는 아마 채색 난새가 울고 있으리라
(용어) 채색 난새는 전설 속의 아름다운 새로, 여기서는 피리 소리에 화답하듯 어디선가 울고 있을 것만 같은 정취를 나타낸 것이다.
성 남쪽 이씨의 정자에서 (서기 1603년 8월 30일, 양력 추정)
성 밖에는 가을 기운이 일찍 서늘하고
들판 서쪽엔 오래 내리던 비가 활짝 걷혔다
연꽃의 서늘한 기운이 창문을 뚫고 들어오고
맑은 대바람이 옷섶에 스며든다
묘한 노랫가락은 들을수록 흥이 더하고
가득 채운 술잔은 아까워 다 기울이지 못한다
흥이 무르익자 저문 해는 어느덧 지고
황금 자물쇠가 겹겹 성문에 내려진다
춘추관에 임명되고 나서 (서기 1603년 9월 5일, 양력 추정)
한가로운 강호로 돌아가길 빌었건만
귀한 사서를 엮는 일에 또 능력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게 되었다
산골짜기의 맑은 풍류야 내 어찌 감히 바라랴만
한 해가 다 가도록 글을 교정하며 지내겠구나
드넓은 세상을 두루 다닌 것으로는 사마천을 따르지 못하니
어진 사관 중에 그 누가 동호의 곧은 붓을 이어받으랴
푸른 바다 삼만 이랑, 아득한 안개와 물결 속에서
어느 날에나 낚싯대가 산호나무를 스칠 수 있을까
(용어) 사마천은 한나라의 역사가로, 젊은 시절 천하를 두루 돌아다닌 뒤 방대한 역사서 《사기》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동호는 춘추 시대 진나라의 사관으로, 어떤 위세에도 굴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직필한 것으로 이름 높았다. 마지막 줄은 벼슬을 버리고 강호에 은거하고 싶은 마음을, 낚싯대가 산호나무를 스친다는 표현을 빌려 나타낸 것이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풍악기행 (1) — 앞부분 23편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풍악기행
배경: "풍악"은 가을철의 금강산을 부르는 이름이다. "풍악기행"은 허균이 금강산을 유람하며 지은 연작시로, 시부 1의 열두 소제목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은 마흔일곱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성을 나서 포천을 지나 금강산 안팎을 두루 돌아보는 여정을 담고 있으며, 분량이 많아 두 편으로 나누어 옮긴다. 이번 문서에는 앞부분 스물세 편을 실었다.
도성 문을 막 나서며 (서기 1603년 10월 7일, 양력 추정)
말 한 필에 몸을 싣고 도성 문을 나서니
맑게 갠 가을, 바다와 금강산으로 떠나는 길이다
서쪽 바람이 내 정갈한 옷자락에 불어오고
차가운 이슬은 허리에 찬 칼끝에 맺혀 반짝인다
뗏목 타고 바다로 떠나 세상을 등지려는 마음까지야 있으랴만
그래도 도성을 떠나는 서운함만은 어쩔 수가 없구나
고개 돌려 겹겹이 둘린 성벽을 돌아보니
대궐 위로 오색구름이 두둥실 떠 있다
(용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난다"는 구절은 공자가 세상에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차라리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버리겠다"고 한 《논어》의 말에서 따온 것으로,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등지고 싶은 마음을 가리킨다.
포천 가는 길에 (서기 1603년 10월 7일, 양력 추정)
벼를 다 벤 농부는 성 안으로 돌아가고
갈대를 문 기러기는 논밭에 내려앉는다
한 해가 이렇게 또 저물어가니
나그네 신세가 갈수록 쓸쓸하기만 하다
먼 산은 비스듬히 저녁 해를 삼키고
외딴 마을은 반쯤 저녁 연기에 잠겼다
평생을 떠돌아다니는 데 지친 이 마음이여
얼굴도 머리도 어느새 시들어가는 나이가 되었구나
김정경의 별장 수담에서 짓다 (서기 1603년 10월 7일, 양력 추정)
(허균이 남긴 설명): 김정경은 이름이 확이며, 내 전처의 오라버니다. 나와 같은 해에 생원진사시에 함께 합격한 사이이기도 하다.
겹겹 산이 띳집을 빙 둘러싸고
등나무 넝쿨에 서렸던 저녁 안개도 활짝 걷혔다
고요히 살아가는 이 사람의 뜻을 누가 알아주랴만
나는 벗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고 이렇게 찾아왔다
해가 지니 바위틈 샘물이 한결 더 곱게 빛나고
바람이 이니 대숲이 서글피 흔들려 운다
동쪽 봉우리에 초승달이 떠오르는 걸 보니
사조 같은 시인이라도 여기서라면 새 시 한 편 얻겠구나
(용어) 사조는 중국 남북조 시대 남제의 시인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로 이름이 높았다. 이런 좋은 풍경이라면 사조만큼 뛰어난 시인도 절로 좋은 시를 지어냈으리라는 뜻으로 빗댄 것이다.
풍전역에서 (서기 1603년 10월 8일, 양력 추정)
이른 서리 막 내리니 기러기들 서로 짝을 부르고
하늘 저 멀리 봉우리에는 저녁 구름이 피어오른다
해 저물녘 산기슭을 따라 옛 역참을 찾아드니
말 앞으로 붉은 단풍잎이 어지러이 흩날린다
늙은 나그네 아낙의 원한 (서기 1603년 10월 9일, 양력 추정)
철원 고을 성 서쪽으로 차가운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우뚝 솟은 보개산은 저녁 구름을 두르고 있다
백발이 성성한 늙은 할미가 다 해진 옷차림으로
손님을 맞으러 집을 나와 사립문을 열어준다
스스로 말하기를, 서울에서 온 늙은 나그네 아낙인데
떠돌다 가산을 다 잃고 이 타향에 몸을 의탁했다 한다
지난날 왜적이 서울을 함락시켰을 때
어린 자식 하나를 이끌고 시어머니와 남편을 따라
몇 백 리 길을 걸어 깊은 골짜기로 숨어들었단다
밤에는 나와 먹을 것을 구하고 낮에는 숨어 지냈는데
시어머니가 늙어 병이 나자 남편이 업고 걸었으니
험한 산길에 발바닥이 다 뚫려도 쉴 겨를조차 없었다고
그날은 마침 비가 내려 밤이 유난히 캄캄했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고 길이 미끄러워 뜻밖에 넘어지고 말았단다
그 순간 칼을 든 왜적 둘이 어디선가 나타나
어둠을 틈타 뒤를 밟았으니 마치 서로 짜기라도 한 듯했다고
성난 칼날이 목을 베어 목이 사방으로 찢어지고
시어머니와 남편이 함께 목숨을 잃어 원통한 피가 흘렀단다
자신은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수풀 속에 엎드렸는데
아이가 그만 울음을 터뜨려 왜적에게 들키고 끌려가고 말았다고
오직 이 한 몸만 겨우 범의 아가리를 벗어났으니
너무나 다급하여 큰 소리조차 내지 못했단다
이튿날 아침 와서 보니 두 구의 시신이 버려져 있었는데
어느 것이 시어머니고 어느 것이 남편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고
까마귀와 솔개는 창자를 쪼아 먹고 들개는 뼈를 물어뜯으니
삼태기와 흙수레라도 빌려 시신을 덮으려 한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리
갖은 고생 끝에 겨우 석 자 깊이 구덩이를 파서
남은 뼈를 손수 주워 담아 흙으로 덮었단다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이 몸, 끝내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싶었는데
이웃 아낙이 가엾이 여겨 함께 살자고 해서
마침내 이 주막에 몸을 의탁해 방아 찧고 물을 길으며 지냈다고
먹다 남은 밥을 얻어먹고 낡은 옷을 얻어 입으며
몸을 혹사하고 애를 태우며 어느덧 열두 해를 넘겼으니
얼굴은 검게 그을고 머리는 빠지고 허리와 다리는 이제 말을 듣지 않는다고
그런데 근래에 서울 소식이 어쩌다 전해져 왔는데
그때 잃어버린 그 아이가 왜적의 손에서 다행히 살아 돌아왔다고
어느 궁가에 들어가 종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옷장에는 비단이 남아돌고 곳간에는 곡식이 그득하다고
장가들어 집도 마련하고 살림도 넉넉해졌다는데
타향에서 떠도는 제 어미는 도무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낳아 기른 아들이 다 자라고도 그 덕을 보지 못하니
이 생각만 하면 한밤중에도 눈물이 가슴을 적신다고
내 몰골은 이미 다 시들었고 아이는 이미 다 자랐을 테니
설령 다시 만난다 한들 서로 알아볼 수나 있을지
이 늙은 몸이야 죽어 도랑에 뒹군들 말할 것도 없지만
어찌하면 그 아이가 따라준 술 한 잔을 아비 무덤에 부어볼 수 있을까
아, 슬프다, 어느 시대인들 난리가 없었으랴만
이 몸이 품은 원한만큼 깊은 것은 없으리라
(용어) "삼태기와 흙수레"는 흙을 담아 나르는 도구를 말하며, 여기서는 시신을 묻어줄 도구조차 없는 처지를 나타낸다. "궁가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궁궐에 딸린 집안의 하인이 되었다는 뜻으로, 원문에서는 이런 하인을 머리에 푸른 두건을 쓴 사람이라 하여 "창두"라 불렀다.
(당대 평가): 거침없이 도도하게 흘러가면서도 격조가 아름답고, 옛 시의 법도까지 두루 갖추었다는 평을 받았다.
금성에서 묵다 (서기 1603년 10월 10일, 양력 추정)
고을 성은 산기슭 나무 그늘에 기대어 있고
낡은 서재는 숲을 굽어보고 있다
원님이 후하게 대접해 주니
나그네의 마음이 절로 흐뭇해진다
떠돈 지 오래되어 가을도 거의 다 지나가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
바람에 발이 흔들려 등불 그림자 어른거리고
비 내리는 섬돌에는 벌레 소리가 서걱거린다
옥처럼 흰 생선회를 실같이 가늘게 썰어내고
향기로운 술을 조금씩 따라 마신다
궁색한 나그네 신세에 이렇게 한 번 배불리 먹으니
이 고마움을 잊기가 참으로 어렵구나
통구에서 (서기 1603년 10월 11일, 양력 추정)
시내를 건너 위태로운 벼랑길을 타고 오르니
산허리에는 낭떠러지에 매단 잔도가 갈라져 있다
외딴 마을엔 가랑비가 뿌옇게 내리고
먼 봉우리엔 찬 구름이 피어오른다
이따금 농사짓는 늙은이와 마주치고
멀리서 나무꾼의 노랫소리도 간간이 들려온다
개울가에 이르러 주막이 어디냐 물으니
안개 낀 숲엔 어느새 석양이 비껴 있다
환희령에서 (서기 1603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고개에 올라 봉래산을 바라보니
사방으로 옥 같은 봉우리들이 펼쳐진다
아득한 저 해와 달빛이
금대와 은대를 환하게 비춘다
높이 휘파람을 부니 일천 바위가 다 흔들리는 듯하고
만 리 밖에서 불어오는 긴 바람이다
신선 왕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늘 밖에서 학 한 마리 날아 돌아온다
(용어) 봉래산은 금강산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금대와 은대는 금강산의 아름다운 봉우리들을 신선 세계의 누대에 빗댄 표현이다. 왕교는 후한 시대 사람으로 신선술로 이름났던 인물이다.
(당대 평가): 이 시의 다섯째와 여섯째 구절이 기상이 높고 당당하다는 평을 받았다.
장안사에서 (서기 1603년 10월 13일, 양력 추정)
화성은 생대를 마주 바라보고
골짜기의 전각은 높은 봉우리에 기대어 서 있다
우뚝 솟은 처마는 봉황이 날아오르는 듯하고
들쭉날쭉한 전각들이 구름 속에 줄지어 있다
우물 모양 천장에는 연꽃이 거꾸로 매달려 있고
무지개처럼 휜 대들보는 처마의 물을 받아낸다
서린 용 조각이 금빛 불감을 뒤덮고
엎드린 사자상이 옥돌 섬돌에 웅크리고 있다
부처님 불상은 눈부시게 높고 장엄하며
조각된 귀신 형상들은 금방이라도 내달릴 듯 어지럽다
부처님 미간의 흰 터럭은 붉은 하늘에 눈부시게 빛나고
검푸른 놀은 맑게 갠 대낮에 하늘거린다
한낮이면 스님들이 불경을 뒤적이고
새벽이면 커다란 종을 쳐서 시각을 알린다
신묘한 향나무 향이 타오르고
하늘의 음악이 은은히 울려 퍼진다
사방에서 폐백과 보시가 모여들어
사람이고 하늘이고 다투어 몰려든다
젊었을 적엔 이런 먼 곳까지 구경 오지 못했더니
이번 유람에는 장관이 참으로 풍성하구나
기이한 경치를 찾아다니는 마음이 비로소 흡족해지고
그윽한 곳을 찾으려던 오랜 계획이 이제야 이루어졌다
움직이지 않는 저 부처님께 머리 숙여 절을 올리니
부처의 눈은 헛되이 보는 법이 없으리라
헛된 망상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다 떨쳐버리고
참된 진리는 본디 소리도 냄새도 없는 법이라 하니
마음을 씻고 불법에 귀의하기를 바라노라
등불이 등불로 이어지듯 진리도 대대로 전해지리라
(용어) 화성은 불교 경전 《법화경》에 나오는 비유로, 먼 길을 가다 지친 사람들을 위해 길잡이가 잠시 신통력으로 만들어낸 가짜 성을 말한다. 여기서는 절의 법당 이름으로 쓰였다. 생대는 절에서 스님들이 먹던 밥을 조금씩 덜어 새와 짐승에게 나누어 주던 대를 말한다. 옥호는 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다는 희고 빛나는 터럭으로, 그곳에서 끊임없이 빛이 뿜어져 나온다고 한다.
장안사 벽에 이정이 그린 그림을 보고 부른 노래 (서기 1603년 10월 13일, 양력 추정)
예로부터 부처를 잘 그린 이가 몇이나 되었던가
오도현은 신선이 되어 떠나갔고 이공린도 세상을 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장군(이사훈)을 첫손에 꼽는데
그 자손인 이정은 더더욱 기이하고 뛰어나다
장안사의 하얀 벽은 깊고도 그윽한데
이정이 이 그림을 그릴 때 나이가 겨우 열셋이었단다
생생한 기운이 흘러넘쳐 벽이 아직 젖어 있는 듯하고
해와 달이 환히 빛나며 안개와 구름을 머금었다
급고독원에는 금빛이 땅에 깔려 있고
기타 태자의 숲에는 첨복나무 향기가 감돈다
두둥실 채색 빛무리가 막 떠오른 해를 쏘아대니
그 공덕의 장엄함이란 이루 말로 다 못 하겠다
모든 하늘의 신들이 늘어서서 모시고 용신도 달려오는데
온갖 향내가 은은히 감돌고 하늘의 음악이 울려 퍼진다
오묘한 진리는 이미 사리불에게 전해졌는데
꽃을 들어 보이며 미소 지은 그 뜻을 아는 이 누구였던가
큰 종이 땅을 울리며 울고 철봉이 춤을 추듯 흔들리니
허공 저 너머로 하늘 꽃이 비 오듯 흩날린다
보배 자리가 잠깐 사이 자금산으로 옮겨가니
저 빛나는 구름은 누구를 위해 세워졌는가
그 가운데 정수리에 물을 받아 참된 불성을 얻은 이는 누구인가
흰 옷 입은 관음보살이 여의주를 손에 들고
물결치듯 수많은 게송과 법라 소리가 울려 퍼지니
육도의 중생이 모두 구제되고 뭇 마귀는 벌을 받는다
참으로 거룩하다, 그 구상의 자유분방함이여
자세히 보면 터럭 하나하나까지 곧 움직일 듯 생생하다
옷을 걷어붙이고 신들린 솜씨를 부릴 때에는
일천 부처와 팔부신중이 다 함께 둘러서서 손을 모은다
서쪽 행랑의 안개비 그림은 대낮에도 몽롱하고
그러고도 남는 힘으로 물가 은자의 풍경까지 그려냈다
곽희가 그린 봄산과 위언이 그린 나무들도
그 솜씨가 조물주와 다투어도 털끝만큼 뒤지지 않으니
내 듣기로 태연이라는 화가도 왕유도
개원 연간의 어느 재상도 모두 늘그막에야 붓의 경지에 이르렀다는데
이정은 어린 나이에 이미 그림 솜씨가 뭇사람을 뛰어넘어
가느다란 붓끝으로 부처의 황금빛 몸을 자유자재로 그려냈다
정이여, 정이여, 이렇게 큰 재주를 품었으니
큰 이름을 얻은 그 아래에는 궁한 운명이 뒤따르는 법
이 그림을 마주하니 내 기운이 절로 상쾌해지고
해 떨어진 넓은 법당에 긴 바람이 이는 듯하다
(용어) 오도현은 당나라의 화가로 불화와 산수화에 뛰어나 화성이라 불렸다. 이공린은 송나라의 화가로 시와 글씨와 그림에 두루 뛰어났다. 이장군은 당나라 종실 화가 이사훈을 가리키며, 북종화의 시조로 꼽힌다. 이정은 조선 선조 때의 화가로, 화가 집안에서 태어나 열 살 무렵부터 이름을 날렸고 열세 살에 장안사 벽화를 그려 크게 칭찬받았다. 급고독원은 인도 사위성에 있던 동산으로 부처가 설법하던 곳이며, 기타 태자가 원래 가지고 있던 땅을 급고독 장자가 사서 부처에게 바친 곳이다. 첨복은 향기가 멀리 퍼진다는 나무 이름이다. 사리불은 부처의 제자 가운데 지혜가 가장 뛰어났다는 인물이다. "꽃을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는 것은, 석가모니가 연꽃을 들어 보였을 때 오직 제자 가섭만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미소를 지어 진리를 전수받았다는 유명한 일화를 가리킨다. 관정은 부처가 물을 부어 깨달음을 인가해 주는 의식이며, 제호는 우유를 정제해 만든 최고급 음식으로 부처의 성품을 비유한 말이다. 백의대사는 흰 옷을 입고 흰 연꽃 위에 앉은 관음보살을 가리킨다. 곽희는 송나라의 산수화 대가이며, 위언은 당나라 때 소나무와 돌 그림에 뛰어났던 화가다. 왕유(자는 마힐)는 성당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화가다.
(당대 평가): 붓놀림이 자유자재로 살아 움직이는 듯하며, 소동파의 글맛이 얼마쯤 느껴진다는 평을 받았다.
시왕백천동 (서기 1603년 10월 14일, 양력 추정)
그늘진 골짜기를 들여다보니 고요하고 깊은데
굽이도는 시내는 넘실넘실 아득하다
실낱같은 길은 가파른 벼랑에 비껴 있고
깎아지른 절벽은 높이 솟은 봉우리를 둘러쌌다
기이한 경치를 찾느라 험한 길도 잊고
높은 곳에 오르느라 몸을 굽혔다 폈다 애쓴다
굽이치는 여울은 성난 듯 무너져 내리고
땅에서 솟구친 위태로운 봉우리가 우뚝 치솟았다
끊어진 벼랑에서는 몇 번이고 신을 고쳐 신고
기울어진 바위에서는 애써 지팡이를 옮겨 짚는다
폭포는 물을 흩뿌리다가 다시 잠잠해지고
삐죽삐죽한 바위 모서리들이 빽빽이 서로 마주 서 있다
파릇파릇한 단풍과 소나무가 어우러지고
아른아른한 산 안개가 자욱이 넘실댄다
신비한 이치를 멀리서 찾아 나서니
외딴 곳에 맑은 구경거리가 남아 있다
아름다운 경치는 그윽한 마음에 꼭 들어맞고
깊은 깨달음은 번뇌를 시원하게 씻어준다
신선이 사는 곳도 이 외진 골짜기와 통하는 듯
왕교의 퉁소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도 하다
귀양살이하는 이 몸도 신선의 반열에 통할 수 있으니
하늘 사다리를 타고 이따금 훨훨 날아오르는 듯하다
신선의 수레가 만약 이곳에 내려온다면
한바탕 웃으며 이 세상의 그물을 풀어버리리라
(용어) 왕교는 후한 때 사람으로 퉁소를 잘 불어 봉황 울음소리를 냈다는 신선이다.
(당대 평가): 깊고 힘 있는 시이지만, 표현이 다소 격해 운율을 해쳤다는 평도 있다.
영원사 (서기 1603년 10월 15일, 양력 추정)
깎아지른 푸른 봉우리에 절이 우뚝 서 있고
해가 돋으니 짙은 금빛이 창문을 쏜다
사리는 예로부터 다보탑에 간직되어 왔는데
어린 스님은 아직도 아래채의 종을 친다
연꽃 핀 곳에는 대낮에 새들이 모여들어 불경 읽는 소리를 듣고
가을 구름 기운은 골짜기로 드는 용처럼 서린다
외딴 이곳에서 우연히 속세 밖 경치를 구경하게 되어
옷자락을 떨쳐 입고 이내 망고봉에 올랐다
(당대 평가): 성당 시의 풍격을 닮았으나, 끝맺음이 너무 무르익어 오히려 못 미친다는 평을 받았다.
망고대에서 내려와 송라암에서 쉬다 (서기 1603년 10월 15일, 양력 추정)
험한 길을 올라 빈 벼랑을 지나
그윽한 곳에 이르러 못골에서 쉰다
어지러운 여울에서는 자꾸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위태로운 외나무다리에서는 겨우겨우 발꿈치를 옮긴다
등나무 넝쿨을 붙잡고 몇 번이나 발을 내디뎠던가
시내를 뛰어넘을 때는 먼저 마음을 다잡아 용기를 낸다
벼랑 끝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고
바위 배는 마치 옆으로 뉘어놓은 항아리 같다
위쪽은 미끄러운 이끼가 영롱하게 빛나고
아래쪽은 깊은 못물이 어둑어둑하다
끊어진 다리를 건너자니 몸을 웅크린 채 어질어질하고
쇠줄을 붙잡고도 여전히 두렵기만 하다
한 걸음 내디디면 넋이 날아갈 듯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정신이 놀라 오싹해진다
험한 곳을 다 넘어서니 마음이 비로소 놓이고
마루턱에 오르니 눈앞이 탁 트인다
첩첩 골짜기는 울퉁불퉁 내려다보이고
뭇 산봉우리들은 빙 둘러 솟아 있다
서늘한 바람이 난초숲을 흔들면
천지의 소리가 아름다운 음악을 끌어오는 듯하다
벼랑 곁에는 절집이 하나 있어
아름드리 기둥이 무지개처럼 공중에 솟아 있다
지친 몸에 짐을 내던지고 쉬면서
늘어놓은 소박한 공양으로 주린 배를 채운다
흥이 다하도록 목숨조차 잊었더니
놀란 넋이 아직도 두근두근 쓰리다
뒤에 올 사람들에게 이르노니
목숨이 소중함을 부디 잊지 마시게
(당대 평가): "나도 일찍이 이 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발바닥이 간지러워진다. 이 시는 그때의 경치를 남김없이 다 담아내어 더할 나위가 없다"는 평이 전한다. 다만 표현이 너무 매섭고 강해, 이 지역의 험하고도 아름다운 정취와는 잘 겨루지만 예스러운 멋은 다소 부족하다는 평도 함께 따른다.
명연 (서기 1603년 10월 16일, 양력 추정)
그늘진 굴을 들여다보니 아득하고 깊은데
어둑어둑한 물빛이 동그랗게 휘돌아 있다
그 아래에는 천 년 묵은 이무기 한 마리
힘차게 서린 채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다
이따금 하얀 기운을 뿜어내니
자욱하게 안개처럼 퍼져나간다
언제나 천둥과 비로 변하여
저 신선의 궁전 끝으로 날아오를 것인가
(용어) "명연"은 "우는 못"이라는 뜻으로, 물소리가 크게 울린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요대는 옥으로 지었다는 신선의 궁전을 가리킨다.
표훈사 (서기 1603년 10월 17일, 양력 추정)
영롱한 금빛 푸른빛이 숲 끝에 아롱져 걸려 있는데
넓은 법당엔 사람 없고 저녁 종소리만 잦아든다
아마 용신과 천신이 내려와 물 뿌리고 청소를 했나 보다
자욱한 향로 연기가 아득한 구름처럼 서린다
(당대 평가): 힘차면서도 운치가 있다는 평을 받았다.
폐허가 된 절이 다시 새로워진 것도 다 인연이 있어서니
늙은 스님의 신통한 힘이 하늘의 여러 신을 움직였다
구슬 같은 법당이 갑자기 연꽃 핀 땅에서 솟아났으니
생각건대 담무갈보살도 빙그레 웃고 있으리라
(용어) 담무갈보살은 금강산에 늘 머문다고 전해지는 보살로, 여기서는 절의 주지 스님을 빗대어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정양사 서쪽 누각에서 (서기 1603년 10월 18일, 양력 추정)
가을이 다 저문 일만 봉우리는 옥처럼 들쭉날쭉한데
해질 무렵 서쪽 누각에 기대어 절로 웃음이 난다
여산의 참모습을 시로 그려내고 싶지만
세상에 그럴 만한 이백 같은 시인이 어디 있으랴
(용어) 여산은 중국의 명산으로, 그 참모습을 시로 옮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빗댄 것이다. "적선"은 인간 세상에 귀양 온 신선이라는 뜻으로, 뛰어난 글재주를 지닌 사람을 가리키며 특히 이백을 일컫는 말이다.
(당대 평가): 정양사를 두고 시를 짓는다면 결국 이 정도에서 그칠 수밖에 없으리라는 평이 따랐다. "나 또한 이곳에 다섯 번이나 올랐지만, 지금까지 이곳을 노래한 시구를 한 줄도 제대로 짓지 못했다"는 술회도 함께 전한다.
팔각전에서 부처 그림을 보다 (서기 1603년 10월 19일, 양력 추정)
팔각전 네 벽의 그림이 삼엄하기도 한데
언제 그려졌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근엄한 자마금빛 부처님의 몸이요
채색 붓끝이 눈부시게 빛난다
용신과 천신이 앞다투어 달려와 모시고
일산과 깃발과 온갖 패물들이 뒤섞여 있다
좌우로 늘어선 호법신은
부릅뜬 눈으로 형형하게 서로 마주 노려본다
생동하는 기운이 훌쩍 정신을 사로잡고
흠뻑 배어난 정취가 그대로 드러난다
빛깔은 비록 바랬어도 뜻은 늘 새로우니
이 신묘한 솜씨가 참으로 사랑스럽다
모두들 말하기를 오도자가 와서
이 그림을 그려 천 년을 전했다 한다
하지만 오도자는 당나라의 귀한 신하였으니
무슨 연유로 바다 건너 이 나라까지 왔겠는가
근거 없는 전설을 어찌 다 믿을 수 있으리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자야말로 참으로 어리석다
비록 오도자의 그림이 아니라 할지라도
신라 시대의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리라
오래된 것에다 솜씨마저 뛰어나니
바라보면 마음이 절로 상쾌해진다
오도자의 것이냐 신라 것이냐 굳이 따지지 말고
소중히 간직하여 상하지 않게들 하시게
(용어) 자마금은 부처의 몸빛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인도의 전설에 나오는 자줏빛이 도는 순금을 말한다. 오도자는 당나라의 화가 오도현의 자로, 그림 솜씨가 뛰어나 화성이라 불렸다.
(당대 평가): 소동파의 참맛을 깊이 체득했고, 때로는 두보와 진사도(진무기)의 문체를 드나든다는 평을 받았다.
개심대 (서기 1603년 10월 20일, 양력 추정)
어제는 정양루에서
옥 같은 일만 봉우리를 우러러보았는데
오늘 아침 개심대에 다다르니
옥 같은 봉우리들이 문득 평지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지세가 그리 높은 것도 아닌데
무슨 까닭으로 뭇 산들을 다 눌러 보이는가
파릇파릇한 중향성이
아름다운 옥돌처럼 구름 밖에 늘어서 있다
서리에 흠뻑 취한 늦가을 단풍이
붉게붉게 온 벼랑을 물들였다
소리 높여 노래하며 붉은 하늘을 바라보니
마치 저 푸른 하늘도 잡아 오를 수 있을 것만 같다
신선이 공중에서 내려온다면
흰 난새 한 마리를 빌리고 싶구나
그 난새를 타고 팔방 끝까지 가로질러
옛 신선 선문과 함께 어울려 노닐고 싶다
백 년의 긴 세월도 번갯불처럼 스쳐 지나가니
어찌 굳이 이 속세에서 헤매야만 하는가
이제 여기서 옷자락을 떨쳐 털어버리고
봉래산으로 올라가리라
(용어) 중향성은 금강산에 있는 봉우리로, 이름 자체가 "온갖 향기의 성"이라는 뜻을 지녔다. 선문은 자고라는 이름을 가진 옛 신선이다.
(당대 평가): 개심대의 경치는 그려내기가 몹시 어렵다. 이 시는 글은 좋으나 힘이 조금 부족하다는 평도 있다.
계수를 노래하다 (서기 1603년 10월 20일, 양력 추정)
남해 저편에서 건너온 저 계수나무
어느 해에 이 산에 심어졌을까
바람이 부는 곳마다 하늘의 향기가 흩날리니
아마도 달 속에서 꺾어다 심은 것이 아닐까
(용어) 계수나무는 예로부터 달 속에 산다고 전해지는 나무로, 여기서는 실제로는 남쪽 바다에서 옮겨 심은 계수나무를 보고, 마치 달 속의 나무를 옮겨 온 것 같다고 상상한 것이다.
학을 기다리다 (서기 1603년 10월 20일, 양력 추정)
학을 기다려도 학은 오지 않으니
검은 치마 흰 저고리 차림의 학이 정말 있기는 한 것인지
서호는 아득히 어디쯤에 있을까
나야말로 그 옛날의 임포가 아니겠는가
(용어) "검은 치마 흰 저고리"는 학의 검은 꽁지깃과 흰 몸빛을 옷에 빗대어 부르는 학의 별칭이다. 임포는 송나라 때의 은자로, 서호의 외딴 산에 살며 이십 년 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고 매화와 학을 벗 삼아 지낸 인물이다.
정양사 동쪽 방에서 (서기 1603년 10월 20일, 양력 추정)
절집은 금빛 연꽃 봉우리에 어리어 비치는데
상좌 스님이 몸을 일으켜 이경 종을 친다
시험 삼아 창을 활짝 열어젖히니
서늘한 달이 누각 동쪽 봉우리 위로 솟아오른다
계수나무 그림자 하늘하늘한 저 하얀 달의 궁궐이여
일천 바위 일만 골짜기가 온통 옥으로 된 굴 같다
하늘 바람이 하늘하늘 내 옷자락에 불어오니
팔방 끝까지 훨훨 날아갈 듯 정신이 아득해진다
아마도 이 몸이 신선의 누대에 오른 것이 아닌가 싶은데
부구 신선님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
굳이 돌을 채찍질해 바다에 다리를 놓을 필요도 없겠구나
(용어) "이경"은 밤 열 시 무렵을 가리키는 옛 시간 단위다. 부구는 옛 신선의 이름으로, 여러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마지막 구절은 진시황이 돌다리를 놓아 바다를 건너려 했을 때 어느 신인이 돌을 채찍질해 바다로 몰아넣었다는 옛이야기를 빗댄 것으로, 이곳이 이미 신선 세계와 다름없으니 굳이 그런 기적까지 필요 없다는 뜻이다.
(당대 평가): 쉽게 나온 듯한 말이지만 그 안에 중당 시의 격조를 잃지 않았다는 평을 받았다.
만폭동 (서기 1603년 10월 21일, 양력 추정)
두 골짜기가 겹겹 벼랑을 갈라놓으니
온갖 시냇물이 그 안에서 세차게 쏟아진다
뿜어져 나오는 물살이 날마다 넘실거리고
흩날리는 물보라가 늘 자욱하다
처음엔 푸른 절벽이 갈라지는가 놀랐더니
두 마리 흰 용이 날아오르는 듯하다
자세히 보니 하늘에 틈이 벌어져
만 자나 되는 옥무지개가 거꾸로 걸린 듯하다
벽력 같은 소리가 대낮에도 울려대니
어지러운 바위들이 우레와 바람에 부딪는 듯하다
이 못 저 못이 굽이굽이 물을 모으는데
지척의 못끼리도 튀는 물결로 서로 통한다
이 장한 경관이 내 마음을 뒤흔드니
참으로 거룩하구나, 조물주의 솜씨여
사강락은 석문에서 노닐었다지만
이백은 향로봉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지
모르겠구나, 천 년 뒤에는
어느 곳이 이 경치와 우열을 겨룰 수 있을지
(용어) 사강락은 남조 송나라의 문장가 사영운을 가리키는데, 강락공에 봉해져 이렇게 불린다.
(당대 평가): 이 시는 여러 작품 가운데 가장 마음에 흡족한 작품으로 꼽힌다.
바위에 새겨진 양봉래의 여덟 글자 (서기 1603년 10월 21일, 양력 추정)
(허균이 남긴 설명): 바위에는 양봉래가 쓴 여덟 개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여덟 글자는 "봉래풍악원화동천"이다. 이는 "금강산은 신선이 사는 별천지"라는 뜻이다.
싸우는 용의 발톱이 서로 얽혀 아슬아슬한데
돌을 깎아 뛰어오르는 사자 모습이 만고에 새겨져 있다
공손대랑의 혼탈무를 굳이 기다리지 않고도
이 신들린 필력이 이미 장욱을 압도하는구나
(용어) 양봉래는 조선 중기의 서예가 양사언으로, 호가 봉래이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공손대랑은 당나라 때 궁중 기생으로 검무를 잘 추었는데, 그가 혼탈무라는 춤을 출 때 그 몸놀림을 보고 승려 회소와 서예가 장욱이 각각 초서의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고 전한다. 장전은 "미치광이 장씨"라는 뜻으로, 당나라의 서예가 장욱의 별명이다. 그는 술을 몹시 즐겨 크게 취하면 미친 듯이 소리치며 뛰어다니다가 붓을 잡으면 신기한 글씨가 나왔다고 한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풍악기행 (2) — 뒷부분 24편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풍악기행
배경: 앞서 옮긴 스물세 편에 이어, 풍악기행(금강산 기행시)의 나머지 스물네 편이다. 보덕굴에서 시작해 금강산 내산과 외산 곳곳의 암자·폭포·고개를 두루 거쳐, 동해안의 청간정·낙산사를 지나 이 여정을 마무리하는 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 시 "호정"에 붙은 손곡의 평으로 풍악기행 마흔일곱 편 전체에 대한 총평이 함께 전한다.
보덕굴 (서기 1603년 10월 21일, 양력 추정)
누가 만 길이나 되는 벼랑을 깎아
허공에 의지해 이토록 아슬아슬한 누각을 지어놓았을까
날아갈 듯한 서까래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은데
기둥 하나가 그 절반을 떠받치고 있구나
만년이 지나도록 버티어 조금도 기울지 않고
곧바로 천 길 벼랑을 내리누르고 있다
고개 들어 처마 끝을 올려다보니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날아오를 듯하다
돌길을 붙잡고 기어오르다 보니
훨훨 나는 듯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은 것만 같다
고승이 머무는 승방을 둘러보니
금빛과 푸른빛이 눈부시게 찬란하구나
나무를 파내어 그윽한 샘물을 끌어왔으니
한 모금 마시자 답답하던 병이 씻은 듯 사라진다
밤에 묵으려니 도무지 잠이 오지 않고
솔바람 소리만 귓가에 울려 퍼진다
(용어) 개사는 원래 보살을 달리 이르는 말인데, 바른 길을 열어 중생을 이끄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덕이 높은 승려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여기서는 이 굴에 머무는 고승을 가리킨다.
원통사 (서기 1603년 10월 22일, 양력 추정)
사자봉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골라
원통사에 이르렀다
등나무 가시가 옷자락을 마구 할퀴고
칡덩굴은 자꾸만 신발에 걸린다
가마꾼을 재촉해 시내를 건너니
단풍잎이 빈 웅덩이를 가득 메웠다
구름 사이 햇살이 큰 숲을 비추고
산 아지랑이는 산들바람에 활짝 걷힌다
문에 들어서니 늙은 스님이 마중 나와
나를 보고 반가운 낯빛을 짓는다
둘째 형님을 따라 노닐며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신비로운 곳을 두루 헤맸다면서
두루마리에 적힌 시를 꺼내 보이는데
읽어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이토록 슬플 수가 있을까, 아내를 잃은 그 마음이
아득히 구름을 바라보며 부모를 그리는 그 심정이
(당대 평가): 삶과 죽음, 이 두 가지를 나란히 놓아 시의 짜임이 참으로 절묘하다는 평을 얻었다.
(용어) "단현의 정"은 아내를 잃은 슬픔을 이르는 말로, 거문고와 비파의 줄이 끊어진 것에 빗댄 표현이다. "구름을 바라보는 생각"은 자식이 타향에서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하는데, 당나라 때 적인걸이 타향에 나가 있으면서 고향 쪽 구름을 바라보며 그 아래 계신 부모를 생각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화룡담 (서기 1603년 10월 22일, 양력 추정)
깊은 웅덩이 물빛은 검푸르러
굽어보니 어찌 이토록 으슥한지
양쪽 벼랑은 미끄럽고 또 기울어
몸이 오싹해 오래 서 있기 힘들다
이 아래에는 독한 용이 도사리고 있다니
단풍잎조차 함부로 던져서는 안 된다
구경하는 이들아, 부디 발걸음을 조심해
굶주린 용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하라
(당대 평가): 짧은 시구지만 이 또한 빼어나다는 평을 얻었다.
마하연 (서기 1603년 10월 22일, 양력 추정)
절집이 구름을 밀치고 우뚝 솟았으니
그 화려한 궁전이 햇빛마저 빼앗아 곱기만 하다
경전을 담은 상자는 패엽에 어리비쳐 빛나고
향로의 재에서는 전단향 내음이 그윽하다
스님은 홀로 참선에 잠겨 있는데
나는 그저 평상을 빌려 졸고 있구나
밤이 깊어지자 바람 소리 울려 퍼지니
생황 소리에 학을 탄 신선이 삼천세계에서 내려오는 듯하다
(용어) 생학은 하늘에 산다는 신선의 학을 가리키고, 삼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삼천대천세계, 곧 우주 전체를 뜻한다.
백전암 (서기 1603년 10월 23일, 양력 추정)
성문 골짜기마다 푸른 안개가 자욱하고
아득한 천지를 굽어보니 기운마저 흐릿하다
땅이 트여 높은 바위 위로 떠오르는 해가 나직하고
하늘에 걸린 깎아지른 벼랑엔 흘러가는 구름이 끊겨 있다
안팎으로 산이 트여 뭇 봉우리가 모여들고
동서로 갈라진 물줄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암자 안 늙은 스님은 편안히 앉아 있으니
귓속에 생황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가 보다
(당대 평가): 이 시는 웅숭깊고 뛰어나 참으로 당나라 전성기의 격조라 할 만하며, 왕세정과 이반룡 같은 이들도 이만큼은 해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을 얻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끝맺는 구절이 느슨하게 풀어져서 당나라 말기의 격조로 떨어지고 만 점이다.
(용어) 성문은 본래 군영의 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홍몽은 하늘과 땅이 아직 나뉘기 전의 광대한 원기, 또는 바다 위에 아득히 서린 기운을 이르는 말이다. 왕세정과 이반룡은 명나라 때 시로 이름 높았던 두 문인이다.
구정봉 (서기 1603년 10월 23일, 양력 추정)
내산은 빛깔이 희고 아기자기하며
외산은 검푸르고 웅장하다
아기자기함은 마치 사람의 손을 빌린 듯하고
웅장함은 참으로 하늘이 빚어낸 솜씨로다
새벽녘 구정봉에 오르자마자
굽어보니 마음과 눈이 활짝 트인다
두 산이 저마다의 자태를 지녔으니
어느 쪽이 낫고 못하다 누가 말할 수 있으랴
동녘 해는 어느새 솟아 골짜기를 벗어나고
바다 안개는 눅눅한 기운을 머금었다
아침노을이 흩날려 곱게 어리비치고
풀과 나무는 비취옥처럼 밝게 빛난다
뭇 골짜기는 다투어 오르내리니
마치 긴 바람이 파도를 부채질하는 듯하다
산꼭대기엔 구멍이 뚫려 아홉 웅덩이가 늘어섰는데
늙은 이무기가 그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더니
몇 해 전에 제 살던 곳을 옮겨 가서
못에 잠겨 용으로 변했다고들 한다
스님이 그 옛 자취를 이야기해 주며
꿈틀거리던 그 모습을 아직도 또렷이 짚어낸다
짙은 안개가 어느새 가랑비로 바뀌더니
대낮인데도 뭉게구름 속에 어둑해진다
지척에 비로봉 정상이 있건만
내 지팡이가 더는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구나
흥이 식어 절벽을 내려가려니
수풀 끝으로 절집이 언뜻 보인다
비스듬히 기대어 낮잠을 청하니
꿈은 요대로 들어가 아득히 사라진다
(당대 평가): 송나라풍도 아니요 당나라풍도 아니요 육조풍도 아니니, 스스로 하나의 격을 이루었다. 짙고 예스러운 맛이 있어 성문 골짜기의 풍경을 그려내는 데 조금의 아쉬움도 없다는 평을 얻었다.
(용어) 요대는 신선이 산다는 옥으로 된 누대를 가리킨다.
적멸암 (서기 1603년 10월 23일, 양력 추정)
금빛 은빛 누각이 향대에 비쳐 어리는데
부상을 굽어보니 동해가 술잔 하나만 하다
하얀 명주 드리운 듯 일천 폭포가 쏟아지고
옥 무지개 비끼듯 온갖 시내가 휘돌아든다
층진 벼랑은 갈라질 듯 천둥과 벼락이 맞부딪고
드넓은 골짜기엔 해와 달이 활짝 열려 있다
오래 앉아 있자니 어스름한 안개가 온 골짜기를 감싸는데
생황 소리에 학을 탄 신선은 봉래산에서 언제나 내려올까
(용어) 부상은 해가 뜨는 동쪽 바다 끝에 있다는 전설 속의 나무이며, 봉래산은 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의 산이다.
박달곶 (서기 1603년 10월 23일, 양력 추정)
비탈을 따라 슬슬 돌아 내려가니
그윽한 골짜기가 차츰 음산해진다
지나온 실낱같은 길을 돌아보니
아득하기가 마치 하늘길 같다
둥그런 하늘을 고개 들어 쳐다보니
햇빛이 양쪽 산자락에 걸려 있다
내달리는 물이 돌다리를 뛰어넘고
우렛소리처럼 성난 물굽이가 으르렁댄다
미끄러운 비탈길에 발을 자주 헛디디고
날카로운 돌부리에 다리를 다치기도 한다
냇물 한가운데 큰 바위가 마주 박혀 있어
사자가 엎드리고 범이 웅크린 듯하다
무시무시하게 사람을 덮칠 듯하니
잠깐 보아도 간담이 서늘해진다
원숭이처럼 얼마나 낭떠러지를 타고 넘었는지
기울어진 돌길에서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가까스로 남쪽 언덕을 건너고 나니
숨이 가쁘고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여기 이르니 마음에 흡족하여
아까 겪은 고생을 모두 잊어버렸다
(당대 평가): 이곳 경치에 이만한 작품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다 할 만하다. 쓰고 싶어도 미처 쓰지 못했던 것을 남김없이 다 드러냈다는 평을 얻었다.
(용어) 원문에서 "자꾸 뒤를 돌아본다"고 한 것은, 이리가 겁이 많아 늘 뒤를 돌아보는 습성에 빗대어 두려운 마음을 나타낸 표현이다.
은신대 (서기 1603년 10월 23일, 양력 추정)
한낮에야 겨우 자월암에 올라
목을 빼고 자꾸만 북쪽을 바라본다
이미 내산의 모습을 놓치고 나니
마치 어여쁜 사람을 놓친 것만 같다
이윽고 큰 구름이 퍼져 나가니
골짜기도 시내도 온통 보이지 않는다
다리 아래로는 소나기와 비바람이 몰아치고
섬돌 앞에는 천둥과 번개가 번쩍인다
천주봉에서의 이 놀이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듯
이슬 맺힌 잎사귀엔 아직도 햇빛이 비친다
우레의 신은 아직 노여움을 풀지 않았는데
비바람의 신은 어느새 활짝 걷어 가 버렸다
고개를 드니 일만 개의 옥 무지개가
철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폭포에 흩뿌려진다
폭포가 열둘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는데
우물 속에서 하늘을 보는 격이니 그 바깥을 어찌 알겠는가
이백에게 말을 전하노니
여산도 그리 부러워할 것 없다고
(용어) 아향은 우레를 몰고 다닌다는 전설 속의 여신이고, 병예는 비바람을 다스린다는 신이다. 청련은 당나라 시인 이백이 태어난 고향 마을의 이름으로, 이백은 스스로 청련거사라 불렀다. 여산은 지금의 중국 강서성에 있는 산으로, 옛날 고승 혜원이 이곳에 절을 세우고 도잠 같은 은사들과 어울려 지낸 곳으로 유명하다. 허균은 금강산이 여산에 못지않다는 뜻으로 이백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도솔암 (서기 1603년 10월 23일, 양력 추정)
(허균이 남긴 설명): 도솔암의 스님이 마침 한창 정진 수행을 하고 있었다.
도솔암은 이름난 절이라
아미타불은 본래 흔들림 없는 부처님
어떤 노스님이 이곳에 몸을 의탁하여
이 산문에서 이토록 편안히 지내는 것일까
해진 승복이 이끼 낀 벽에 걸려 있고
질그릇 동이에는 차가운 샘물이 담겨 있다
내 이제 와서 불법을 물으려 하는데
스님은 그저 합장만 할 뿐 아무 말이 없다
(용어) 아미타불을 줄여 미타라 부른다. 부동존은 온갖 악마를 항복시키기 위해 무서운 얼굴로 나타난 부처의 화신을 가리킨다.
성불암 (서기 1603년 10월 23일, 양력 추정)
깊은 숲속 승방은 자그마하고
층진 산자락에는 돌길이 갈라진다
한밤중에야 비로소 달을 보는데
넓은 바다는 구름 한 점 없이 활짝 트여 있다
향기는 하늘 저편에서 내려오는 듯하고
종소리는 인간 세상 아래로 울려 퍼진다
시원스럽기가 인간 세상 밖 같으니
무리를 떠나 오래 머무는 것도 그리 한스럽지 않다
불정대 (서기 1603년 10월 24일, 양력 추정)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성문이 크게 열려 있고
바위 첩첩한 불정봉은 한없이 높기만 하다
뭇 봉우리는 일관봉과 나란하고
폭포는 하늘 문에서 쏟아져 내린다
구름은 골짜기에 아득히 깔려 있더니
어느새 바다에서 해가 목욕하고 솟아오른다
앉은 자리에서 별들이 하나둘 스러지고
새벽빛이 닭이 우는 마을에 밝아 온다
유점사 (서기 1603년 10월 24일, 양력 추정)
금빛 종과 불상은 서역 월지국에서 들여왔고
우람한 전각들은 이 좋은 터에 늠름하게 열려 있다
여덟 부류의 용신은 부처님 옥좌 앞에 굽실거리고
하루 여섯 때마다 하늘의 음악이 향대에 울려 퍼진다
재를 올려 아직도 세조 임금의 명복을 빌고
민지가 지은 기문은 그 재주를 두고두고 칭송받는다
무슨 일로 나 허균은 근기가 이토록 얕아서
승려의 옷과 밥그릇을 세속의 먼지에 뒤섞고 마는가
(용어) 월지는 서역에 있던 나라 이름이다. 하루 여섯 때란 낮 세 번, 밤 세 번을 합한 것으로, 아침·낮·해질녘·초저녁·밤중·새벽을 이르며, 극락왕생을 바라는 이는 이 여섯 때마다 부처님께 예를 올린다고 한다. 조선 세조 임금은 불교를 깊이 믿어 1466년 유점사에 행차하여 승려 학열에게 명해 절을 새로 고쳐 짓게 하였고, 이로써 유점사는 큰 절이 되었다. 그 내력을 적은 기문은 고려 때 문신 민지가 지은 것이다. 마지막 구절의 "허순"은 중국 동진 때 사람으로, 한때 불교에 깊이 심취했다가 다시 세속으로 돌아간 인물이다. 허균은 같은 허씨 성을 빌려, 자신도 그처럼 수행에 전념하지 못하고 세속에 얽매여 있음을 자책하고 있다.
산영루 (서기 1603년 10월 24일, 양력 추정)
(허균이 남긴 설명): 도사 벼슬을 지내는 윤길과, 집경전 참봉 벼슬의 노승이 찾아와 함께 자리하였다.
가을이 이미 저물어 단풍잎도 늦었는데
국화가 가득 피어 마치 내 고향 동산 같다
잔칫상에는 고을에서 보내온 음식이 가득 차려지고
스님의 밥상에는 배추와 무 반찬이 올랐다
아사 벼슬의 그대는 이름을 안 지 이미 오래고
재랑 벼슬의 그대와도 오랜 정이 두텁다
우연히 이렇게 좋은 모임을 이루었으니
지는 해 아래 술동이엔 맑은 술이 넘실댄다
(용어) 도사는 각 도의 관찰사를 보좌하던 벼슬로, 흔히 아사라고도 불렸다. 참봉은 왕실의 사당이나 전각을 관리하던 말단 벼슬로, 여기서는 재랑이라고도 불렀다.
동단료에서 하룻밤 묵다 (서기 1603년 10월 24일, 양력 추정)
잎이 지고 나니 봉우리마다 말끔하고
가을 구름은 온 절을 음산하게 덮었다
나그네 마음은 이 해도 저무는가 놀라고
맑은 구경에 번거롭던 가슴이 후련해진다
등잔 그림자는 가물가물 밤은 깊어 가고
서리 짙은데 변방 기러기 소리 끼욱끼욱 울린다
잠이 오지 않아 창문을 열어젖히니
은하수는 새벽이 되어 벌써 희미해진다
경고에서 정생 두원과 이별하고 곧장 산을 내려오다 (서기 1603년 10월 25일, 양력 추정)
(허균이 남긴 설명): 정생은 도교의 수련법인 단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다.
산을 내려온 지 아직 하루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마치 한 해가 지난 듯 산이 그립다
다시 올라가 볼까 생각도 해 보지만
세속의 그물에 얽매인 몸을 어찌하랴
아득히 벗님마저 나를 떠나가니
가고 또 가는 저 낙양으로 흐르는 냇물처럼
나그네 신세에 또 다른 나그네를 떠나보내니
내 마음은 더욱더 처량하기만 하다
열 걸음에 아홉 번은 고개를 돌아보고
다섯 걸음에 세 번은 채찍을 멈춘다
멍하니 절집을 바라보며 눈길을 두는데
구름과 안개가 전각과 요사채를 감춰 버렸다
서글피 바라봐도 더는 보이지 않으니
서늘한 바람 앞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백천교 (서기 1603년 10월 25일, 양력 추정)
백 척 되는 다리가 수풀 끝에 걸터앉았는데
구월의 마른 우렛소리처럼 급한 여울물이 부딪는다
편리하게 물을 건너게 해 준 이 다리는 어느 해 누가 세웠는가
오늘 이곳에 와 노닐다 난간에 기대어 본다
서리 맑은 큰 골짜기엔 세찬 물결이 깨끗하고
바람 급한 층진 산에는 떨어지는 잎이 차갑기만 하다
서글프구나, 젊은 시절 다리 기둥에 써 놓았던 그 큰 뜻은
반평생이 다 가도록 얻은 것이라곤 희끗희끗한 귀밑머리뿐이니
(용어) 한나라 때 사마상여는 처음 벼슬길에 올라 서쪽으로 떠나던 날, 승선교라는 다리를 지나며 그 기둥에 "높은 수레와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지 않고서는 다시 이 다리를 지나지 않겠다"고 써 놓았다고 한다. 허균은 이 옛이야기를 빌려 자신의 젊은 시절 포부를 떠올리고 있다.
청간정에서 낮잠이 들다 (서기 1603년 10월 25일, 양력 추정)
풍악산이 그대 담무갈보살이라면
궁궐의 늙은 별, 세성은 바로 나일세
만남이 늦은 것이 비록 한스럽지만
사귄 정은 절로 격식을 잊게 한다
잠시 헤어짐은 세속의 얽매임 때문이니
그윽한 만남의 약속은 늘그막에나 맡길 수밖에
높은 정자에서 짧은 낮잠 한 자락 남기고 나니
하늘 밖으로 일만 봉우리가 새파랗게 펼쳐져 있다
(용어) 담무갈보살은 불교 경전에서 금강산에 머문다고 전하는 보살의 이름이다. 세성은 목성을 달리 이르는 말로, 옛사람들은 나이 든 이를 세성에 견주기도 하였다. 허균은 자신을 늙은 세성에, 금강산을 담무갈보살에 견주어 오래 별러 온 만남에 비긴 것이다.
쌍성호 (서기 1603년 10월 25일, 양력 추정)
바다를 아우르니 호수가 드넓은데
물길 따라 내려가는 나그네의 배는 가볍다
저무는 산은 붉은빛으로 안개에 엉기고
서리 내리니 저녁 물결이 유난히 맑다
뗏목 길이 은하수로 통한다면
신선의 거처가 옥경과 가까울 텐데
젓대 소리에 서왕모가 내려온다는데
동쌍성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용어) 서왕모는 곤륜산에 산다고 전하는 전설 속의 여자 신선이며, 동쌍성은 그 시녀로 알려진 옛 여선이다.
가는 길에 낙산을 바라보다 (서기 1603년 10월 26일, 양력 추정)
향로봉 자락이 흩어져 무리 진 구름 쟁반을 이루니
푸른빛 겹겹이 쌓인 사이로 고운 빛깔이 늘 환하게 빛난다
낙산사에서 하룻밤 묵어가려 물어보니
길 가던 이가 저 멀리 오봉산을 손으로 가리킨다
낙산사에 묵다 (서기 1603년 10월 26일, 양력 추정)
오봉산의 절을 두 번째로 찾아왔는데
풍경은 지난해와 다름이 없다
대숲 오솔길엔 오가는 발길이 이어지고
꽃 핀 누대에는 저녁 연기가 피어오른다
여러 스님이 줄지어 마중 나와 반겨 주니
이 멋진 유람이 마치 하늘나라를 밟는 듯하다
이미 나고 죽음이 없는 이치를 깨달았으니
속세의 인연은 아득히 멀어져 마음이 맑기만 하다
(용어) "나고 죽음이 없는 이치를 깨달았다"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는 참된 이치를 깨달아 흔들림 없이 그 자리에 편안히 머무는 경지를 뜻한다.
고을 원님이 술과 기생을 보내오다 (서기 1603년 10월 26일, 양력 추정)
(허균이 남긴 설명): 이 고을을 다스리는 원님은 홍여성이다.
원님은 사귀는 정이 참으로 두터워서
맑은 술동이에 곱게 꾸민 기생의 쪽 그림자가 어린다
바다로 나가 노닐 뜻을 품었더니
도리어 기생을 데리고 동산에서 노닐게 되었구나
(용어) 옛날 동진의 사안은 처음 동산에 은거하며 지냈는데, 산수의 흥취를 즐기면서도 나들이할 때마다 반드시 기생을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허균은 이 옛이야기를 빌려 자신의 처지를 빗대고 있다.
사촌에 이르다 (서기 1603년 10월 27일, 양력 추정)
사촌에 이르자 얼굴이 절로 환하게 풀리니
교산이 마치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듯하다
붉은 정자에 홀로 올라 보니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고
봉래산 아득한 그 사이에 내가 서 있구나
호정 (서기 1603년 10월 27일, 양력 추정)
안개와 아지랑이 푸르게 어리어 호수 빛이 넘실넘실
가을꽃을 사뿐사뿐 밟으며 대숲 속 방으로 들어선다
머리 허옇게 센 여덟 해 만에 이곳을 다시 찾았으니
그림배에 곱게 단장한 기생을 태우고 놀 마음이 이제는 없다
(당대 평가): 석간이 남긴 주석에는 "박공이 홍장이라는 기생을 이 정자 아래 숨겨 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손곡은 이렇게 평하였다. "이 마흔일곱 편이 모두 예스럽고 우아하며 맑고 아름다워, 높은 것은 한나라·위나라 시와 견줄 만하고 낮은 것도 당나라 전성기의 격조에 낄 만하니, 시가 쇠퇴하던 이 시대에 이런 바른 소리가 나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풍악산의 담무갈보살도 마땅히 기뻐서 춤을 출 것이다."
(용어) 개원과 대력은 각각 당나라 현종과 대종의 연호로, 현종의 개원 연간부터 대종의 대력 연간까지가 곧 당나라 시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 해당한다.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명주잡저 · 요산록
출처: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명주잡저 · 요산록
배경: "명주잡저"는 허균이 1603년(계묘년)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외가가 있는 강릉(옛 이름 명주)으로 돌아와 지낸 넉 달 동안 지은 시들을 모은 것이다. 마침 큰 풍년이 들고 여러 경사가 겹쳐 잦은 잔치에 시달리느라 많은 글을 남기지 못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어지는 "요산록"은 1604년(갑진년) 요산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한 뒤 지은 시들을 모은 것으로, 소송이 빗발쳐 글쓰기에 전념하지 못했다는 사정을 서문에서 직접 밝히고 있다. 이 두 편의 서문(허균이 직접 남긴 산문)과 그에 딸린 시들을 함께 옮긴다. 이로써 성소부부고 제1권(시부 1)에 실린 시 240편의 번역이 모두 마무리된다.
명주잡저 (서기 1604년 2월 27일, 양력 추정)
계묘년(1603년)에 나는 금강산에서 명주(지금의 강릉) 외갓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명주는 큰 풍년이 들었고, 원님으로 있던 유인길이라는 사람은 임기가 다 되어 떠나게 되었는데, 백성들이 그가 떠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집집마다 그를 위한 잔치를 열어 주었다.
거기다 김자징이 첩을 들이는 일로 이곳에 내려오게 되어, 우리 세 사람이 어울려 노닐게 되었는데, 그렇게 벌어진 큰 잔치만 무려 마흔두 차례나 되었다. 문과에 급제한 선비가 한 사람, 진사시에 오른 사람이 다섯이나 되어 그들이 집에 돌아올 때와 축하하는 자리마다 잔치가 벌어졌고, 진사시에 합격해 명부에 이름을 올린 사람도 여덟이나 되어 역시 잔치가 이어졌다. 그때마다 풍악 소리가 귀를 어지럽혀 마치 개구리 떼가 우는 것 같았고, 술과 음식이 넘쳐흘러 지옥이 따로 없어 보일 지경이었으며, 사람들을 응대하느라 정신을 차릴 틈조차 없었으니, 어느 겨를에 붓을 들고 시를 읊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넉 달을 머무는 동안 책 한 장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채 잔치 초대에 응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그래서 아프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해 다니기도 했다. 유 원님이 임기를 마치고 떠난 뒤에야 비로소 붓을 들기 시작해 겨우 마흔여섯 편을 얻었기에, 그 이름을 '명주잡저'라 하였다.
요산록 (서기 1605년 9월 15일, 양력 추정)
갑진년(1604년) 가을, 나는 지방관 자리를 자원하여 요산 고을을 얻었다. 이곳은 원래 외진 벽지로 알려져 있었기에, 나는 속으로 경전 공부에 전념하면서 틈틈이 글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부임하고 보니 소송 문서가 빗발치듯 밀려들어 귀가 시끄럽고 눈이 어지러워 밥 먹고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게다가 이 고을 백성들은 드세고 사나운 기질을 숭상하여 다스리고 억누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천 권이나 되는 책을 묶어 놓은 채 펼쳐 보지도 못했으니, 하물며 생각을 가다듬어 글을 짓는 일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2년 동안 지은 것이라고는 겨우 서른두 수뿐인데, 그나마 대부분 시끄럽고 번잡한 와중에 나온 것이라 딱히 남길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래도 다 낡은 빗자루라도 제 것이라고 아까워하는 마음처럼 선뜻 버리지 못하고, 우선 세 편만 남겨 '요산록'이라 이름 붙였다. 그 가운데 두 편은 화학루에서 최해성의 시에 운을 맞추어 지은 것인데, 최해성의 시에 "정공이 떠나간 지 삼천 년 뒤에, 태수가 찾아와 열두 난간에 기대었네"라는 구절이 자못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도 운을 맞추어 "사훈이 남긴 빼어난 글귀 늘 외우며, 높은 난간 현도관에 오래도록 기대리라"라고 지어 놓고 제법 잘 지었다고 여겼는데, 최해성의 맏아들이 이를 불쾌하게 여기기에, 나는 나중에 지은 것일 뿐이라고 둘러대고 그의 노여움을 풀어 주려 결국 그 시를 빼 버렸다. 또 다른 한 수도 운자가 같아서 함께 빼 버렸다.
고을에 부임하여 화학루에 오르다 (서기 1604년 10월 5일, 양력 추정)
아전들이 흩어지니 뜰이 고요해지고
누각에 오르니 나그네 마음도 활짝 열린다
사방의 산은 마치 팔짱을 끼고 인사를 하는 듯
한 줄기 강물은 저 홀로 굽이굽이 감돈다
저녁 새는 사람을 반기듯 지저귀고
가을꽃은 제멋대로 활짝 피었구나
몸이 이리도 홀가분해 들판의 흥취에 젖어드니
내가 원님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경무와 함께 학선당에서 묵다 (서기 1604년 10월 20일, 양력 추정)
벗이 먼 길도 마다 않고 나를 찾아와
함께 짝이 되어 관아 숙소에서 묵는다
오늘 겪는 총애와 수모에 새삼 놀라고
지난해 이야기를 나누며 슬픔과 기쁨을 함께한다
서리 맞은 기러기 울음 애처로운데 하늘은 아득하고
촛불 심지 다 타들어가고 물시계 소리도 멎었다
벼슬아치 체통을 지키려니 절로 거만해지지만
푸른 강에서 낚싯배를 띄우던 그 시절이 못내 그립다
(용어) 경무는 정상조라는 사람으로, 당대에 이름 높았던 시인 호음의 서자 계열 후손이다.
인백의 애첩이 부르는 노래를 듣다 (서기 1604년 10월 21일, 양력 추정)
변방의 노랫가락은 유달리 힘차고 웅장한데
그 노래 부르는 젊은 여인의 얼굴 또한 빼어나게 곱다
맑은 목소리는 마치 달을 흔드는 듯 애절하고
긴 여운은 느릿느릿 구름을 넘어간다
애끊는 그 노랫가락은 임을 그리는 곡조요
애달픈 그 노랫말은 술을 권하는 사연이라
벗을 붙잡아 두어 새벽까지 노래를 들으니
시름겨워 찡그린 고운 눈썹이야 아랑곳할까
(용어) 인백은 민희안이라는 사람이고, 노래를 부른 여인은 창성 출신으로 송강가사를 가장 잘 부르는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마음속 회포를 적다 (서기 1604년 11월 5일, 양력 추정)
도연명은 팽택 현령이 되었을 때 관아의 밭에 온통 수수를 심게 했고
반악은 하양 현령이 되었을 때 고을 전체에 복사꽃 오얏꽃을 가득 심었다지
그들은 벼슬을 벗고 돌아가 절로 편안했건만
나 같은 못난 벼슬아치는 정말이지 서글프기만 하다
술을 거르느라 두건이 삐딱하게 젖혀지고
먼지 속을 헤매고 다니느라 손에 쥔 수판마저 비뚤어졌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결국은 다 묻혀 사라지는 법
누런 인끈을 두른 벼슬살이가 무슨 자랑거리이겠는가
밭이랑은 거의 다 묵정밭이 되어 버렸고
백성은 절반이나 죽어 사라졌는데
부세는 여전히 예전처럼 거두어들이고
게다가 홍수와 가뭄, 벌레 피해까지 덮쳐 온다
이런 형편에 다스림이 어찌 좋은 평가를 받기 바라리
내 마음은 오히려 고향 생각뿐이다
지방 수령 자리에 있는 것이 부질없이 부끄러워라
한나라 때 어진 지방관들에게 어찌 미칠 수 있으랴
(용어) 도잠은 동진 시대의 문인으로 팽택 고을의 현령이 되었을 때 관아 소유의 밭에 모두 수수를 심게 하고 "늘 술에 취할 수 있으면 그만"이라 말했다고 한다. 반악은 진나라 때 하양 현령이 되어 고을에 복사꽃과 오얏꽃을 잔뜩 심어 놓아, 사람들이 "하양은 고을 전체가 꽃밭"이라 불렀다고 한다. "누런 인끈"과 "이천 석"은 모두 태수, 곧 지방장관을 가리키는 말로, 한나라 때 태수의 녹봉이 이천 석이었던 데서 나온 말이다. 순량은 법을 잘 지키며 백성을 잘 다스리는 관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과거 시험을 감독하고 돌아오는 길에 양산에 이르러 짓다 (서기 1605년 1월 10일, 양력 추정)
과거 시험장을 걷고 나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다가
양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잠시 긴장을 풀었다
좋은 술을 가득 따라 원님에게 권하니
곱게 쪽 찐 기녀들이 맑은 풍류를 울려낸다
촛불 심지를 돋우니 장막에 향내가 감돌고
주렴을 걷어 올리니 온 산에 눈이 가득 쌓였다
즐거움에 흠뻑 취해 그칠 줄을 모르는데
이 좋은 밤은 어느새 이토록 깊어 버렸구나
군무로 인해 새벽에 바다를 보며 황주에 이르러 그 일을 적다 (서기 1605년 1월 11일, 양력 추정)
칼 쓰는 병법 이야기는 내 재주가 아닌데
관아의 공문서 부름에 그저 시달릴 뿐이다
가득 찬 물살을 헤치며 별빛 아래 배를 저어 가고
살얼음판 위로 떨면서 말을 몰아간다
새벽달 아래 풍루에서 들려오는 젓대 소리
차가운 하늘 아래 눈 덮인 배에 켜진 등불
벼슬살이가 저절로 게을러지니
세상일이 귀먹은 승리마저 저버리는구나
(용어) 여기서 말하는 "귀먹은 승리"는 한나라 때 태수 황패 밑에서 일하던 허씨 성의 승리(태수를 보좌하는 관리)가 늙어 귀가 어두워지자, 그를 내쫓으려는 부하에게 황패가 "이 사람은 청렴한 관리이니 귀가 좀 어두운들 무슨 상관이냐"며 감싸 주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는 늙고 세상에서 밀려난 자신의 처지를 이 이야기에 빗댄 것으로 보인다.
황주에서 자다 (서기 1605년 1월 11일, 양력 추정)
병풍 속 파초 그림자가 등잔불을 가리는데
비파 줄을 막 고르니 옥구슬 부딪는 소리 쟁그랑쟁그랑
고량주 잔 그득 채우니 부귀한 잔치인 양 훈훈한 기운이 넘치는데
(※ 이 구절의 '금장'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눈바람이 창문을 두드려대든 말든 무슨 상관이랴
서흥의 인가에 묵다 (서기 1605년 1월 12일, 양력 추정)
가녀린 손으로 손수 찻잔을 받쳐 올리니
용단차가 다 우려지면 다시 더 넣어 준다
날이 차가워지니 바람이 장막을 걷어 올리고
밤이 깊어지니 달빛이 처마를 살며시 엿본다
산줄기는 탁문군의 비단 치마처럼 곱게 주름지고
방 안엔 가씨 집안 주렴처럼 그윽한 향이 감돈다
봉래산 신선 세계는 천 리 밖에 있건만
새벽마다 꿈속에서는 실컷 그곳을 넘나든다
(용어) 탁문군은 한나라 때의 이름난 여류 시인으로, 여기서는 산줄기의 결을 그녀의 곱게 짜인 비단 치맛자락에 견준 것이다. 가씨는 진나라 재상 가충의 딸을 가리키는데, 그녀가 아버지가 아끼던 귀한 향을 정인에게 몰래 나누어 주었다는 옛이야기에서, "가씨의 향"은 그윽하고 은밀한 향기를 뜻하는 표현으로 쓰이게 되었다. 봉래산은 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의 산으로, 여기서는 멀리 떨어진 그리운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고을에 있으면서 저녁에 짓다 (서기 1605년 1월 13일, 양력 추정)
한 줄기 파르스름한 연기가 관아 부엌에서 피어오르더니
사슴 새끼 고기며 곰 발바닥 요리를 안주로 차려 올린다
배불리 먹기만 하고 공무는 등한시하고 있으니
시인이라면 응당 하는 일 없이 녹만 축낸다고 비웃을 만하다
나옹이 오다 (서기 1605년 3월 24일, 양력 추정)
봄바람과 함께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니
묵은 병이 금세 씻은 듯 나을 것만 같다
그대는 사상처럼 흥에 겨워 춤도 잘 추니
본래부터 술 좋아하는 호탕한 무리가 아니던가
평생 이룬 일이라야 서까래만 한 큰 붓 하나 남았을 뿐
살아가는 방식은 그저 술병 하나에 맡겨 두었다
하찮은 벼슬자리 따위가 다 무엇이랴
돌아갈 길은 저 강호에 있을 뿐인 것을
(용어) 사상은 진나라 때 사람으로 총명하고 음악에 능했는데, 한 모임에서 재상 왕도가 춤을 청하자 흔쾌히 일어나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호탕한 무리"라는 말은, 한나라를 세운 유방을 찾아가 스스로 "나는 유생이 아니라 고양 땅의 술꾼이다"라고 당당히 말했다는 역이기의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술을 즐기는 호방한 사람을 가리킨다.
동헌에 막 나가 앉아서 (서기 1605년 3월 25일, 양력 추정)
타향에서 병을 앓은 지 벌써 석 달째
높다란 관 아래 어느새 흰머리가 비친다
이렇게 눌러앉아 있는 내 옹졸함이 가엾고
"돌아가리라" 외치고 미련 없이 떠난 이야말로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날씨는 남은 눈을 슬슬 녹여내는데
봄추위는 여전히 복사꽃 봉오리를 옥죄고 있다
동녘 바람이 불어와 돌아가고픈 흥을 돋우니
강호 어딘가에는 벌써 낚싯배가 떠 있겠지
안성관에서 조성 형제를 만나다 (서기 1605년 4월 6일, 양력 추정)
객지에서 한식을 지내고 보니
저물어가는 봄빛을 어찌할 수가 없구나
문을 나서면 어디나 고운 풀이 무성하고
지팡이에 기대서니 떨어지는 꽃잎이 많기도 하다
그대들은 말을 나란히 타고 나를 찾아왔고
고운 여인은 술을 권하는 노래를 불러 준다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새어 나오니
이 정도면 떠도는 서글픔을 달래기에 충분하다
(용어) 조성 형제는 허씨 집안의 친척이다.
고을에 돌아와서 (서기 1605년 4월 7일, 양력 추정)
멀리 떠도는 나그네는 저물어가는 봄에 놀라
누각에 올라 늦도록 자리를 뜨지 못한다
바람이 가벼운 빗줄기를 실어 저편으로 옮기고
푸른 산은 저녁노을을 두르고 다가온다
숲속 새는 발을 엿보며 지저귀고
복사꽃은 댓잎에 비쳐 활짝 피었다
그저 이 도주 고을의 선정을 본받아 기록으로 남기고자
(※ 이 구절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날마다 시를 읊조리며 이리저리 서성인다
새벽에 일어나서 (서기 1605년 4월 18일, 양력 추정)
게으르게 시를 읊으며 동쪽 난간에 기대어 서니
봄날은 어느새 벌써 절반이나 지나가 버렸다
보슬비가 발에 가득 맺혀 마음이 서글픈데
어젯밤 바람이 불더니 두어 가지에 꽃이 피었다
관아에 오가는 문서는 산더미처럼 계단에 쌓였는데
당직 서는 아전들은 오리처럼 뒤뚱뒤뚱 줄지어 걷는다
다행히 나도 왕휘지처럼 홀로 턱을 괴어 볼 수 있으니
서산에서 불어오는 저 시원한 기운이나 바라볼 수밖에
(용어) 왕휘지는 동진 때 사람으로, 자유라는 자를 썼다. 얽매임 없이 자유분방한 성품으로 유명했는데, 한번은 상관인 환충이 "내 밑에서 일한 지 오래되었으니 이제 좀 더 진지하게 임해 달라"고 하자, 그는 아무 대답 없이 손에 쥔 홀(관리들이 지니던 판)로 턱을 괸 채 "서산에 아침이 오니 시원한 기운이 감도는군"이라고만 답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말로, 세속의 일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한 태도를 뜻한다.
생각나는 대로 읊다 (서기 1605년 5월 8일, 양력 추정)
높다란 누각에서 낮잠을 깨어나
한가로이 시를 읊으니 마음도 느긋해진다
발을 걷어 올리니 꾀꼬리가 노래를 부르고
난간 가에는 푸른 그늘이 무르익었다
모든 물줄기는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데
외로운 저녁연기는 먼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다
마음 맞는 벗 두세 사람과 함께
경치를 바라보니 이 또한 한없이 조용하고 좋다
산으로 돌아가는 승려 무위를 배웅하며 (서기 1605년 5월 10일, 양력 추정)
더없이 아름다운 이 단하자여
일찌감치 불교의 오묘한 진리에 들어섰구나
나를 찾아와 관아 숙소에 묵으면서도
말 한마디 잊은 듯 고요히 지냈다
여러 달을 지내면서도 딱히 즐기는 것 하나 없이
곁에 둔 것이라곤 낡은 술항아리 하나뿐
취하면 문득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고
옷소매 펄럭이며 덩실덩실 춤도 추었지
안타깝구나, 사람 중의 영웅다운 그대가
평생을 산속에서 늙어가야 한다니
저 멀리 구월산을 찾아 들어가
구름 속에 절 하나를 새로 열었다지
작별을 고하며 문득 지팡이를 떨치고 일어서니
그 걸음걸이가 어찌 그리 홀가분한지
떠나가는 그대가 못내 아쉬워
저녁 내내 마음이 어수선했다
들판에 나가 거적자리 깔고 이별을 나누니
아득한 이별의 심정이 못내 서글프다
돌아가는 말 잔등에는 석양빛이 비껴들고
외로운 저녁연기는 먼 마을에서 피어오른다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지 없을지 그 누가 알랴
그저 이 숲 속 술이나 다 마셔 버리세
(용어) 감원은 절, 곧 사찰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인이 서경에서 오다 (서기 1605년 5월 14일, 양력 추정)
그대가 사뿐사뿐 걸음으로 찾아오니
(※ 원문의 '단부'라는 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문맥상 찾아온 벗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나그네의 맺힌 한도 스르르 풀리는구나
그대에게 시문을 다듬게 하고
못가 누각에서 함께 노닐게도 한다
낮잔치에는 향기로운 술이 오르고
밤이 되면 촛불을 밝히며 이야기를 나눈다
서경에서 꽃다운 소식이 전해오니
봄날 동교요 같은 미인이 그리움에 애태운다지
(용어) 동교요는 옛 소설 《전등여화》에 등장하는 미인의 이름이다.
황주 목사가 기생 두 명을 데려오다 (서기 1605년 5월 20일, 양력 추정)
해당화가 막 잠들 듯 나른한데 술기운도 얼근히 오르고
잎사귀마다 비단 치맛자락에 푸른 안개가 물든 듯하다
떠나려던 사람이 차마 발길을 떼지 못하니
그대여, '망강남' 노래를 다시 한번 불러다오
장미꽃이 부슬비와 어우러져 하늘하늘 떨어지고
한낮의 산들바람은 얇은 옷깃을 파고든다
비파 한 가락을 타니 졸던 제비가 놀라 깨어
주렴 높은 곳으로 날아올라 지저귄다
(용어) 이 자리에 있던 황주 목사는 박동량이라는 사람으로, 허균과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한 동기이자 그 시험의 장원이었다. 망강남은 노래 곡조의 이름으로, 수나라 양제가 서원이라는 정원을 만들고 연못에 화려한 배를 띄운 뒤 이 곡을 지어 부르게 했다고 전한다.
충천각에서 쓰다 (서기 1605년 6월 15일, 양력 추정)
느지막이 높은 누각에 올라앉으니
스쳐 가는 바람이 옷자락을 흔든다
꾀꼬리 소리가 노랫가락을 대신하고
작약꽃이 이 계절의 아름다움을 도맡았다
너른 들판에는 냇물 줄기가 가늘게 보이고
외딴 마을의 나무 빛깔은 희끄무레하다
산에서 기다리는 벗과의 약속을 저버렸으니
돌아가겠다는 말만 자꾸 어기다가 몸만 살쪄 가는 게 아닌가 싶다
석봉이 찾아오다 (서기 1605년 6월 16일, 양력 추정)
석봉은 온 세상이 알아주는 노대가로
그 드높은 기풍이 능히 나를 일으켜 세운다
새로 지은 시는 도연명의 글을 닮았고
붓놀림은 왕희지의 글씨를 방불케 한다
귀한 손님 맞으려 걸어둔 걸상을 내린 지 오래인데
바야흐로 큰 어른의 수레가 마침내 발길을 돌려 찾아왔다
높다란 누각에서 술 마시며 시를 읊는 이곳에
더운 바람이 연꽃 향기를 실어 오는구나
수수로 빚은 술 항아리를 막 기울여 따르니
기름진 소고기 안심에 족발까지 곁들여진다
누각 위에서 이렇게 잔치를 벌이니
화려한 난간 서쪽에 취한 채로 드러눕는다
이 뜬세상은 사람 살기에 참 좁기도 한데
높은 이야기를 나누니 세간의 평판도 절로 정리되는 듯하다
술기운이 얼근히 오르자 문득 붓을 놀리니
성난 사자가 바위를 할퀴어 찢는 듯 힘찬 글씨가 나온다
(용어) 도연명은 팽택 현령을 지낸 동진의 은자 도잠을 가리키고, 왕희지는 우군장군을 지낸 동진의 명필로 그의 글씨는 후대의 전범으로 꼽힌다. "걸상을 내리다"라는 말은 후한 말의 재상 진번이 평소 걸어 두었던 의자를 귀한 손님인 남주의 선비 서치가 찾아올 때만 내려 극진히 대접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것으로, 귀한 손님을 정성껏 맞이한다는 뜻이다.
석봉과 충천각에서 술을 나누다 (서기 1605년 6월 30일, 양력)
머리 숙여 훌륭한 글씨에 경의를 표하니
구양순이나 우세남인들 어찌 감히 잘난 체하리
술잔이 넘실거리자 붓끝을 적셔 글을 쓰고
이야기하고 노래하다 보니 어느새 격식조차 잊어버린다
은행은 주렁주렁 열려 난간에 닿을 듯하고
붉은 석류는 뚝뚝 떨어져 뜰에 가득하다
실컷 취한 끝에 산에 내리던 비마저 개니
구름 저편 먼 산이 유난히도 푸르다
(용어) 구양순과 우세남은 당나라의 이름난 서예가들로, 여기서는 석봉의 뛰어난 글씨를 이들에 견주어 극찬한 것이다.
사상이 오다 (서기 1605년 7월 4일, 양력 추정)
그대는 대체 어디서 이곳까지 찾아왔는가
그윽한 약속은 이미 봄을 놓쳐 버렸구려
서늘한 기운이 막 더위를 걷어 가는가 싶더니
줄곧 내리는 비가 사람의 발길을 붙들어 둔다
흥이 오르면 시를 천 수라도 읊어대고
시름이 밀려오면 술을 몇 순배나 마셨던가
평생토록 나를 알아주는 이는 오직 그대뿐
돌아가고픈 마음은 저 농어와 순채 나물에 있다네
(용어) 사상은 이원형이라는 사람이다. "농어와 순채 나물"은 진나라 때 장한이라는 사람이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의 농어회와 순챗국이 그리워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여기서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뜻한다.
석봉의 부음을 듣다 (서기 1605년 7월 10일, 양력 추정)
손을 맞잡고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사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될 줄이야
드높은 이름은 온 세상에 남을 것이요
큰 업적은 천 년을 두고 기억될 것이다
통곡하니 하늘과 땅이 아득해지고
슬픈 노래를 부르니 해와 달마저 시름겨워하는 듯하다
산양 땅에서 젓대 소리를 듣고 솟구치던 그 눈물처럼
나는 특별한 계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이미 눈물이 솟는다
(용어) 진나라 때 상수라는 사람은 죽은 벗의 옛집이 있던 산양 땅을 지나다가 이웃집 젓대 소리를 듣고 옛정을 못 이겨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 진나라 재상 사안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조카 양담은 슬픔에 겨워 삼촌과 자주 드나들던 서주문 근처를 차마 지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시에서는 이 두 옛이야기를 빌려, 특별한 장소나 계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벗을 잃은 슬픔이 곧바로 북받쳐 오른다는 뜻을 나타냈다.
가을 밤에 짓다 (서기 1605년 8월 20일, 양력 추정)
높은 누각에 밤이 깊어 사방이 어둑한데
나그네의 벗이라곤 가물거리는 등불 하나뿐
싸늘한 방에 쓸쓸히 홀로 앉아 있노라니
비바람이 서쪽 숲 가득 몰아친다
나그네의 밤 (서기 1605년 9월 15일, 양력 추정)
객지에서 밤이 되어도 잠은 오지 않는데
첫서리 내려 이불자락마저 싸늘하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신세이니
갓 떠오른 저 달을 누구와 함께 바라보리
북쪽 마을에서는 다듬이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오고
서쪽 이웃집에서는 젓대 소리가 여운을 남긴다
기둥에 몸을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노라니
울며 날아가는 저 기러기, 구름 끝자락에 걸려 있구나
성소부부고 제3권
9. 19:52
동정부 (서기 1603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부 / 1603년 허균이 금강산과 강릉 일대를 유람하고 지은 초사체 작품 / 병서(산문 서문)는 한문 원문 미확보로 이번 번역에서 제외)*
일찍이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외람되이 '기초'라는 간언의 소임을 맡았었네(기초: 옛 중국에서 신하가 임금의 지나친 유람을 경계하며 지었다는 노래)
화려한 누각을 돌아보고 이어진 회랑을 거닐었고
궁궐 높은 계단에서 옛 성군 시절의 음악을 들었네
아, 분수에 넘치는 자리에 앉아 스스로 어리석었으니
끝내 맑은 조정에서 화를 자초하고 말았네
이미 세상과 서로 어긋났으니
차라리 바다와 산에서 자유로이 노닐리라
슬프다, 내 발걸음 이다지도 더디니
도성 문을 나서 동쪽으로 향하네
기쁘다, 내 옷차림이 처음으로 돌아갔으니
통쾌하다, 거꾸로 매달렸던 이 몸이 마침내 풀려났구나(벼슬살이의 속박을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 비유하고, 거기서 풀려남을 이르던 표현)
내 말을 몰아 고향 마을로 치달려
내 수레를 금연에 멈추었네(원문 확인 필요)
반갑구나, 조카가 신발을 거꾸로 신고 뛰어나오니
손님 맞는 정자를 열어 잔치 자리를 마련하네
굽이진 계곡물 따라 술잔을 띄우고
뱃사공에게 명하여 배를 띄우게 하네
가늘게 썬 회가 젓가락 끝에서 나풀거리니
나는 배불리 먹고 돌아갈 일마저 잊었네
남쪽 언덕에서 외삼촌의 무덤을 찾아뵈니
슬프구나, 무덤가 나무들 저리도 무성하게 우거졌네
먼 길을 따라가며 한데서 먹고 자니
바람과 이슬에 지쳐 내 몰골 초췌해라
어떤 비탈인들 넘지 못하며
어떤 깊은 냇물인들 건너지 못하리
어느덧 금성에 다다르니(강원도의 옛 고을 이름)
그 고을 원님이 서쪽 행랑에 숙소를 마련해주네
세상 떠난 형제가 남긴 시를 읊조리니
눈물이 흘러넘쳐 눈시울 가득하네
통구를 따라가며 말채찍 휘두르니
우뚝 솟은 단발령을 오르네
구름 끝에 걸린 일만 개 옥 같은 봉우리를 바라보니
노닐고 싶은 흥이 벌써 저만치 앞서 내달림을 깨닫네
불어난 냇물을 건너 구불구불 나아가
저물녘에 장안사에 이르렀네
대웅전은 우뚝하니 하늘을 찌를 듯하고
칠해진 단청은 금빛 붉은빛으로 찬란하네
자마금으로 빚은 불상의 모습 엄숙하니(자마금: 붉은빛을 띤 금)
흡사 열반에 든 부처님 모습인가 싶네
벽화는 애초 이정이 그린 것인데(조선의 화가)
혹시 개원 연간 오도자의 그림은 아닌가 의아하네(개원: 당나라 현종 때 연호, 오도자: 그 시절의 이름난 화가)
어지러이 용신과 천신이 내달리고
구름 끝에서 부처님 미간의 흰 털이 눈부시게 빛나네
산에서 시중드는 아이 불러 바구니를 들리고
백천 물줄기를 따라 동쪽으로 길을 꺾네
폭포는 요란한 소리로 골짜기에 물을 뿜어내고
봉우리는 우뚝하니 험준하게 솟았네
시왕동의 세찬 여울을 건너
영원사라는 절을 슬쩍 엿보았네
이른 새벽 송라암에서 나막신 끈을 고쳐 매고
망고대를 웅크린 채 기어오르네
벼랑은 깎아지른 듯 아득한데 밧줄을 늘어뜨리니
목숨이 위태로울까 두려웠네
높은 산꼭대기에서 옷자락을 떨치니
뭇 골짜기가 발아래 나직이 주름져 있네
명연이라는 못에서 싸우는 용을 엿보니
꿈틀꿈틀 몸을 웅크린 채 잠겨 있네
정양사에서 오도자의 그림을 찾아보고
마침내 동쪽 누각으로 눈길을 달리네
묶어놓은 옥처럼 빽빽이 하늘을 찌르고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일만 겹으로 늘어섰네
어떤 것은 흰 난새가 훨훨 나는 듯하고
어떤 것은 흰 이무기가 재빨리 솟구치는 듯하네
어떤 것은 보살이 두 손으로 구슬을 받든 듯하고
어떤 것은 얽매이지 않는 성인이 나막신 신고 거니는 듯하네
어떤 것은 위엄 있는 봉황이 목을 치켜든 듯하고
어떤 것은 천마가 갈기를 떨치는 듯하네
어떤 것은 서리 맞은 연꽃이 아직 피지 않은 듯하고
어떤 것은 대모 비녀들이 서로 모여드는 듯하네
어떤 것은 세차게 내달리며 뛰어오르는 듯하고
어떤 것은 높이 솟구치며 우르르 몰려드는 듯하네
어떤 것은 고개를 젖혔다가 다시 굽어보는 듯하고
어떤 것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듯하네
어떤 것은 옥구슬을 쌓고 보석을 흩어놓은 듯하고
어떤 것은 동이를 기울이거나 삿갓을 엎어놓은 듯하네
놀랍구나, 온갖 모습이 저마다 기이함을 다투니
참으로 낱낱이 눈길 줄 겨를조차 없네
어느덧 석양이 서쪽으로 기우니
골짜기 가득한 서리 맞은 단풍에 비쳐드네
자줏빛 끈을 짜놓은 듯 촘촘히 엮이니
울퉁불퉁한 산봉우리들이 붉디붉게 취한 듯 물들었네
오색이 눈부시게 언덕을 두르니
바람에 뒤집히는 비단 휘장을 떠올리게 하네
허공을 딛듯 걸음을 옮겨 차츰 올라가
개심대 축대에 걸터앉네
땅의 형세가 그리 높이 오른 것도 아닌데
어느새 뭇 봉우리들이 눈 아래 있구나
어두운 안개가 넝쿨 우거진 길에 피어오르고
풍경 소리가 숲 너머로 울려 퍼지네
아흔 곳에 이르는 옛 암자를 하나하나 짚어보니
참선하는 등불들이 서로를 비추고 있네
생대에 홀로 우뚝 서 있으니(생대: 절에서 승려들이 밥을 조금씩 떼어 새나 짐승에게 나눠주던 자리)
어느새 고운 달이 빛을 토해내네
계수나무 그림자 찬란히 영롱하고
달빛 비친 바위 사이로 은빛 대궐이 활짝 트였네
맑은 달빛을 손으로 붙잡고 일어나 춤을 추니
온 세상이 작아 보여 비좁게 느껴지네
청학의 옛 둥지를 굽어보고
만폭동의 겹겹 폭포를 건너네
은하수를 기울여 벼랑에 쏟아붓는 듯하니
다투어 뿜어내며 우렛소리처럼 요란하네
옥무지개가 고개 숙여 물을 마시는 듯하고
바다로 치닫는 뭇 용들이 꼬리를 흔드는 듯하네
못과 골짜기에 물보라와 거품이 세차게 튀니
대낮인데도 갑자기 어둑어둑해지네
어지러이 펼쳐진 빼어난 경관에 가슴이 탁 트이니
웅장하구나, 조물주의 신묘한 솜씨여
바위에 새겨진 용의 이마를 어루만지니
일만 봉우리와 더불어 웅장함을 다투려 하네
보덕굴의 외기둥을 바라보니
천 년이 지나도록 넘어지지 않았구나
실낱같은 오솔길을 따라 원통사로 들어서서
용이 숨어 산다는 화룡담을 내려다보네
마하연이라는 절에서 묵으니
밤공기 맑고 서늘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네
바람에 흔들리는 전나무 소리와 샘물 소리 어우러지니
황홀하여라, 마치 생황과 퉁소 소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이른 새벽 잠자리를 걷어 백전을 지나 길을 나서서
아슬아슬한 꼭대기 구정봉에서 입을 헹구네
비로봉에서 신선을 만나볼까 하였으나
비바람이 가로막아 오르지 못하게 하네
적멸암에서 내려와 물을 가로질러 건너고
성문이라는 바위 어귀를 넘어 남쪽으로 건너가네
어지러이 늘어선 바위들이 사람을 덮칠 듯하니
마치 괴상한 짐승이 입을 쩍 벌린 듯하네
은신대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니
물은 아득히 넓고 산은 울퉁불퉁하네
삐죽삐죽한 산줄기 첩첩이 솟았다 가라앉았다 하니
긴 바람이 부채질하듯 바다 물결을 일으키네
누가 구름을 깔아 산골짜기를 가두었는가
발밑에서 번갯불이 번쩍이네
우렛소리 우르릉거리며 비를 몰아오는데
그래도 해는 산봉우리 틈새에 걸려 있네
금강산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라는 말이 참으로 헛말이 아니니
정녕 이번 유람은 자랑할 만하네
어느새 바람의 신이 그늘을 거두어가니
겹겹 봉우리 사이로 일천 폭포가 쏟아지네
누가 이 산을 일만이천 봉우리라 이름 지었는가
우물 안에 앉아 어림짐작한 것이 우습구나
가슴이 트이기가 마치 드넓은 옛 못을 여덟아홉 개라도 삼킬 듯하니
마침내 유점사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네
쉰 명 남짓한 금빛 불상에 절을 올리고(문수보살이 순금으로 빚어 보냈다는 전설이 전하는 쉰세 분의 불상)
백천교를 건너 잠시 머무네
삼일포 남쪽 바위에 신선들이 새겼다는 붉은 글씨를 바라보며(신라 화랑 네 명이 놀러 왔다가 바위에 이름을 새기고 갔다는 사선 전설)
동쪽 바위에 남은 그 옛 자취를 떠올리네
밝은 물결을 등지고 바다를 따라 나아가
어느 고을에서 나이 든 신선 같은 벗을 만났네(원문 확인 필요)
상자 속의 뛰어난 글을 꺼내 보니
진나라와 한나라 때의 그윽한 향기가 풍겨나네
가을 물결과 상서로운 비단을 펼쳐보는 듯하니
쟁쟁하게 우아한 음악이 크게 울리는 듯하네
천 년을 뛰어넘는 빼어난 자취를 보노라니
가을이면 풍악이라 부르는 이 금강산의 우뚝함과 맞먹는구나
참으로 이번 걸음이 가장 풍성하니
글과 산을 함께 만끽했음이라
안개 너머로 보타산을 바라보며(관음보살이 산다는 전설 속 산)
낙산에 내 수레를 멈추었네
동쪽 창을 활짝 열어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고
온 세상을 어루만지듯 큰소리로 노래하네
오직 감호 가의 초라한 내 오두막이야말로(강릉에 있는 호수)
노년을 한가로이 보내기에 마땅하네
천 리에 걸친 아름다운 자취를 거두어 안고
한 골짜기의 안개와 노을 속에 몸을 눕히네
가슴을 활짝 열어 스스로 즐거워하니
세상에 대한 생각이 단번에 사라지네
저 벼슬살이야말로 근심할 만한 것이니
벼슬길의 성난 파도가 두렵기만 하네
생각만 해도 이내 몸서리쳐지고 꿈에서도 가위눌리니
내 어찌 다시 그 길을 걸어 헛디디랴
만약 이 맑은 복을 오래도록 누릴 수 있다면
내가 얻은 것이 가장 많음을 알겠네
하늘이 내린 운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랴
내 뜻에 맞게 편안히 지내며 화평함을 지키리라
원숭이와 학을 벗 삼아 이리저리 노닐며
이 다짐을 골짜기 속 은거하는 삶에 부쳐보리라(옛 시경에서 골짜기에 숨어 유유자적하는 현자를 노래한 표현에서 따옴)
하루하루를 느긋하게 보내리니
인생 백 년이 그 얼마나 되겠는가
서쪽 하늘의 서왕모를 바라보다가
문득 서글퍼져 길게 읊조리네
사구부 (서기 1607년 5월 3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부 / 1607년 삼척부사로 부임하는 길에 옛 고향 강릉을 지나며, 큰 홍수와 오랜 세월로 쇠락한 모습을 보고 지은 초사체 작품 / 병서(산문 서문)는 한문 원문 미확보로 이번 번역에서 제외)
내가 세상의 모진 액운을 만나
슬프게도 벼슬길에서 자주 걸려 넘어졌네
영예와 녹봉이 이미 나와는 인연이 없으니
차라리 강호에 몸을 놓아버릴까 생각했었지
그래도 깃발 하나 앞세워 지방관으로 나가는 것도
역시 임금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라네
수레와 말을 정돈하여 동쪽으로 떠나가니
실직(삼척의 옛 이름)의 옛 도읍을 향해 가는 길
아침에는 횡계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저녁에는 대관령을 넘어섰네
명주(강릉의 옛 이름), 그 옛 고향에 다다르니
반갑게도 다시 신선의 땅을 보는구나
마부는 숨을 헐떡이며 서둘러 말을 몰아
긴 수풀을 뚫고 내달려 왔네
가슴 아파라, 백성들에게 복이 없어
하늘이 자꾸만 재앙을 내리시니
물의 신이 크게 노하여 울부짖으며
온 들판을 큰 파도로 뒤덮어버렸구나
튼튼한 둑을 무너뜨리고 큰 방죽마저 헐어
높이 솟은 벼랑까지 깎아내렸네
늙은이와 어린것들이 급류에 휩쓸려가
깊은 굴속 상어와 악어의 밥이 되었다니
성곽 곁에 빼곡히 늘어섰던 그 많은 집들
지금은 물에 잠겨 강으로 변해버렸네
혹시 새로 전쟁이라도 겪은 것인가 의아해하다가
아니면 세상이 통째로 뒤바뀐 것인가 생각해보네
아, 어찌 이리도 혹독한 벌이 이곳에만 내렸는가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구나
마을은 이미 절반도 채 남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 옛 벗은 누가 살아있는지 물어보았네
술상을 차려놓고 반갑게 나를 맞이하는데
양반이며 종놈이며 뒤섞여 앉아 있구나
내 마음이 조금은 위로가 되어
억지로라도 웃음 지으며 이리저리 서성였네
발길을 돌려 담장 동쪽으로 향해
청헌(원문 확인 필요, '맑은 정자'라는 뜻으로 보이는 이름)의 매화나무 두 그루를 찾아가 보았네
주인은 어디로 갔느냐 물으니
봉래산의 신선 학처럼 아득히 사라졌다 하네
쓸쓸하여라, 적막한 정원이여
먼지 낀 계수나무 집을 훔쳐보았네
뜰을 따라 거닐며 마음이 아려오는데
섬돌 가에는 아직도 붉은 작약꽃이 흐드러져 있네
아, 옛적 이곳을 드나들던 이들의 자취는 이미 흩어져 사라지고
어느새 푸른 이끼만 누각에 돋아나 있구나
지난날의 그 흥겨운 놀이는 다시 좇기 어렵고
정다운 목소리와 얼굴은 또다시 아득하기만 하네
일어나 바람을 마주하며 내 신세를 홀로 슬퍼하니
흩어지는 내 눈물만 하염없이 떨어지네
서글피 서성이며 차마 떠나지 못하는데
밝던 해는 어느새 서산으로 저물어가네
깊은 샘물은 목이 메어 흐르지 못하고
날아가는 새는 북쪽 숲에서 울부짖는구나
답답한 마음을 풀어보려 길게 휘파람 불어보지만
소리만 처량하고 거칠어 곡조를 이루지 못하네
슬프구나,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인생이여
고개 한 번 숙였다 드는 사이에 오늘이 어느새 옛날이 되어버리는구나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음을 보고서
이 몸도 오래 지니지 못할 것임을 알았네
낮과 밤이 어지러이 서로 갈마드니
왕자교와 적송자처럼 오래 살 자 그 누구인가
내 몸을 어루만지며 스스로 서러워하니
참으로 이 몸은 내가 영영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무슨 까닭으로 험한 길 무릅쓰고 이익을 좇아
어리석은 탐욕꾼들과 함께 썩어가야 하는가
저 맑고 빼어난 바닷가 산속에서
느긋하게 노닐며 남은 생을 보내리라
독우(감독하러 오는 관리, 도연명이 벼슬을 버린 고사에 나오는 인물)가 찾아와 나를 괴롭히기를 기다리지 않고
차라리 귀거래사 같은 글이나 지어볼까 헤아려보네
타고난 목숨을 다 살고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면
어쩌면 권력을 탐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네
울적한 마음을 안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니
객사는 고요하기만 하고 잠은 오지 않네
달은 그윽하게 휘장을 엿보고
등불은 희미하게 벽을 비추네
온갖 상념이 가슴속에 사무쳐오니
문득 산양 땅에서 들려오던 피리 소리가 떠오르는구나(진나라 상수가 죽은 벗을 그리며 지었다는 고사, 이 작품 제목의 유래)
곁에 있던 이에게 거문고를 건네주며 타보라 하고는
처량한 나의 한을 그 소리에 실어 쏟아내네
거문고에 눈물 적시며 새벽에 이르니
서글프게도 동녘은 어느새 밝아왔구나
죽루부 (서기 1607년 5월 10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부 / 1607년 삼척부사 시절, 죽서루에서 지은 작품)
정미년(1607년), 나는 삼척부사로 부임했다. 공무를 마친 틈에 경치 좋은 곳을 찾다가 죽서루에 올랐다.
만 길 높이 솟은 두타산(삼척에 있는 산)을 우러르고
맑게 흐르는 오십천(삼척을 가로지르는 하천)을 굽어본다.
거센 바람을 마주하고 길게 휘파람을 불어
객지살이의 시름을 잠시 풀어본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데도
떠나기가 아쉬워 조금 더 머물고 싶어진다.
이맘때는 봄기운이 아직 남아 있고
여름 풍경이 막 곱게 물들기 시작한다.
갖가지 꽃이 난간을 비추고
짙은 그늘이 섬돌을 덮는다.
회랑은 고요해 인기척이 없고
새소리만 비 갠 뒤라 유난히 곱게 들려온다.
산의 푸른 기운은 이슬처럼 부슬부슬 맺혀 떨어지고
대숲의 안개는 하늘하늘 가늘게 피어오른다.
나는 새하얀 학창의를 걸치고
은자들이 쓴다는 화양건을 쓰고
옥자루 먼지떨이(옥주)를 손에 든 채
평상에 비스듬히 눕는다.
뜰 앞 우거진 숲을 내려다보니
화려하게 채색한 누각 창살 언저리에 맑은 향기가 서린다.
자리에 함께한 세 사람도 나와 흥취가 같아
서로 어울려 이리저리 노닌다.
그래서 요리사를 불러 성찬을 재촉하니
맛 좋은 감주가 올라오고 맛있는 방어가 차려진다.
표주박으로 만든 생황과 가래나무로 만든 슬(거문고 종류의 큰 현악기)이
여러 가락을 뒤섞어 연주하는데,
'자야곡'(옛 중국의 애틋한 노래 곡조)이라는 옛 노래를 새로운 가락으로 떨쳐 부르고
'결풍'이라는 옛 춤곡의 첫 가락을 이끌어 낸다.
흥이 다하도록 즐기며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니
타향에 나와 있는 이 몸조차 잊어버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빛은 아직 퍼지지 않았는데
계수나무 향 초를 높이 밝히니
밤빛은 맑고 서늘하며
물빛은 훤히 트여 아득하다.
은하수는 누각 지붕 위에서 반짝이고
북두칠성 자루 끝의 별은 맑은 하늘에 낮게 걸려 있다.
주렴을 걷어 올리고 느긋하게 흥에 겨우니
봉래섬(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 섬)을 가리켜도 멀지 않은 듯하다.
문득 솟구치는 흥취가 걷잡을 수 없이 날아오르니
전설 속 신선 부구공이라도 불러올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윽고 손님들은 이미 취해
즐거운 놀이가 한창 무르익었다.
어우러진 노랫소리는 그칠 줄 모르는데
내 마음속에는 문득 서글픔이 인다.
슬프구나, 흐르는 세월은 이토록 쉽게 사라지니
마치 흘러가는 냇물이 부서지는 물결과 같구나.
얽히고설킨 세상일이 사람을 재촉하니
아, 젊은 시절이 얼마나 되겠는가.
언젠가는 늙어 죽는 날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생각하니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겠다.
그러니 어찌 술잔을 마주하고도 마다하겠는가.
마음을 풀어헤치고 목청껏 노래 부르리라.
노래하기를,
자줏빛 퉁소 소리 목메어 울자 이슬 기운이 사방에 퍼지고
금빛 물시계에 물이 차오르니 향기로운 밤이 깊어간다.
덧없는 인생이란 잠시 세상에 몸을 얹어놓은 것 같으니
어찌 즐기지 않고 길게 탄식만 하겠는가.
노래를 마치고 한숨을 내쉬니
자리에 앉은 모두가 고요해진다.
난간에 기대어 쓸쓸히 바라보니
높은 하늘에 달이 떠 있다.
북귀부 (서기 1609년 1월 6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부 / 남쪽 임지·유배 생활을 마치고 한겨울에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의 고단함과, 세상이 옳고 그름을 뒤바꿔 놓은 데 대한 풍자를 담은 초사체 작품)
나는 관인을 풀어놓고 길을 나서며
정성껏 수레를 채비하여 몸을 편안히 실었네
고맙게도 남녘 고을의 따뜻한 기운이
헐벗은 나그네를 옷 없이도 견디게 해주었지
그런데 세상은 거만하게 흘겨볼 뿐 나를 돌아보지 않으니
나는 이제 멀리 떠나 훨훨 날아오르리라
붉은 봉황을 타고 붉은 준마를 곁마로 세워
신선 선문(전설 속 신선)과 함께 봉래산(동쪽 바다에 있다는 신선의 산)에서 노닐고
곤륜산 꼭대기 층성에 올라 서왕모(곤륜산에 산다는 전설 속 여신)를 뵙고
요대(서왕모가 산다는 궁궐)에서 편히 쉬어 보려 했건만
아, 세속의 굴레가 나를 옭아매어
다시 나를 붙잡아 북쪽으로 내닫게 하는구나
내 어찌 마음을 바꿔 부귀영화를 좇겠는가
사람들이 내 아름다움을 시샘할 뿐인 것을
속세 밖에서도 오래 머물 곳이 없으니
이 몸을 대체 어디에 두어야 하나
길은 자꾸 막히고 진창을 걸어야 하니
아, 타고난 운명조차 기약할 수 없구나
성문을 나서 말들을 가지런히 몰아
한겨울 매서운 바람을 헤치고 나아가네
마부는 콧물을 흘리며 춥다고 소리치고
냇물은 꽁꽁 얼어붙어 길마저 막혔네
아침에 용성을 떠나
저녁에는 금강을 건너니
아, 이 걸음이 어찌 이리도 더딘가
누가 좋아서 이런 길을 가겠는가
높은 봉우리를 넘으며 추위에 떨자니
산은 험준하게 솟아 하늘을 가리고
검은 구름이 해를 가려
쏟아지는 눈발에 대낮도 어둑하네
살갗은 얼어 터져 검게 그을린 듯하고
변방의 말은 몸을 웅크린 채 자꾸 쓰러지네
슬프다, 내 삶이 이토록 험난하니
마음이 어지러이 뒤엉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구나
공자도 광야에서 굶주림에 시달렸고(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양식이 떨어졌던 고사)
접여(미친 척하며 벼슬을 피한 초나라의 은자)는 미친 척 세상을 등졌으며
증자(공자의 제자로, 가난해도 절개를 지켰던 인물)는 헤진 신을 끌면서도 노래를 불렀고
그 노인(장자에 나오는, 힘들어도 기계를 마다하고 손으로 물을 길어 밭에 대던 인물)은 물동이를 안고 밭에 물을 주었으니
성인이라고 반드시 세상에 쓰이는 것은 아니고
현인이라고 반드시 등용되는 것도 아니라네
이는 예로부터 늘 그러하였으니
내 어찌 지금 사람들을 원망하리오
타고난 운명을 편히 받아들여 스스로 마음을 풀면
적어도 이 한 몸 욕되지는 않으리라
다시 노래하노라
천지에는 서슬 퍼런 살기가 감돌고
화창한 기운은 꽉 막혀버렸네
난새와 공작 같은 귀한 새들은 위세를 잃고
가시덤불 속으로 숨어드는데
올빼미와 부엉이 같은 것들은 뜻을 얻어
대궐 안에서 요란하게 설쳐대는구나
향기로운 난초는 내쳐져 향내를 못 내는데
누린내 나는 잡초를 도리어 향기롭다 하고
못생긴 얼굴을 곱다 하면서
모장(옛 전설 속의 미인) 같은 미인을 오히려 추하다 하네
어리석은 자들이 활개를 치며
헐뜯는 말을 무늬처럼 날마다 엮어
없는 죄를 부풀려 늘어놓는구나
답답하고 서글프구나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차라리 치욕을 견디며 낮은 벼슬자리에 머물렀던 그 사람(사마천이 궁형을 당하고도 역사서 저술을 완수한 고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나 확실하지 않음, 원문 확인 필요)처럼
세상과 더불어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리라
몽유연광정부 (서기 1597년 9월 17일, 양력 추정)
— 꿈에 연광정에서 노닐다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부 / 꿈속에서 신선 세계의 누각 연광정에 노닐며 선녀를 만나는 환상적인 초사체 작품)
붉은 용을 타고 아득히 멀리 떠나가다가
지성(봉래산에 있다는 신선의 궁전)에 이르러 붉은 깃대를 내려놓았네.
무지개 옷자락을 나부끼며 허공을 밟고
아찔하게 솟은 붉은 계단을 올랐어라.
붉은 하늘에 진주로 지은 궁궐이 걸려 있고
오색 난간은 텅 빈 하늘 속으로 훨훨 날아오르는 듯하네.
사자 모양 주춧돌 둘레엔 은빛 물결이 넘실거리고
붉은 기둥에는 상서로운 노을빛이 어리어 빛나네.
새우 수염으로 엮은 발을 걷어 올리고 느긋이 거닐며
맑고 차가운 밤이슬을 떠서 마셨어라.
이윽고 붉은 난새가 날개를 퍼덕이더니
노을 저편에서 옥패를 찬 선녀를 이끌고 왔네.
오색구름이 창문을 감싸고 은은히 비추는 가운데
붉은 깃발 든 시녀들이 어지러이 앞장서 길을 이끄네.
곱고 하늘거리는 옥돗자리를 펼쳐 놓고
향긋하고 시원한 옥 같은 술을 올리네.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고는 옷깃을 여미더니
나더러 요경(신선이 산다는 옥빛 궁궐)으로 함께 내려가자 하네.
봉래산에서 다시 만나자던 옛 약속을 가리키며
전생과 현생과 내생, 삼생에 걸쳐 이어진 묵은 인연이 아직 남았다 하네.
느긋이 거닐어 보자며 나를 부추기더니
견우와 직녀가 헤어질 때의 애틋한 사연을 하소연하네.
풍이(물의 신 하백)를 불러들여 북을 치게 하고
쌍성(서왕모를 모시던 전설 속 선녀)에게 생황을 불게 하네.
유하주(신선이 마신다는 술)를 기울여 뼛속까지 훈훈하게 하고
쟁그랑거리던 옥 귀걸이를 풀어 내려놓네.
은빛 병풍 뒤로 외로이 찌푸린 얼굴을 가리고
반짝이는 꽃무늬 베개 위로 스르르 쓰러지네.
즐거운 만남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느닷없이 성문 다락의 종소리가 뎅뎅 울려오네.
화들짝 놀라 깨어나 길게 탄식하니
기운 달만 서쪽 성벽에 반쯤 걸려 있구나.
동림성부 (서기 1597년 9월 26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부 / 제목 원주: 성은 선천(평안도 지역)의 서북쪽에 있다. 폐허가 된 옛 고구려 성터를 지나며 그 흥망을 늙은 마을 사람에게 전해 듣고 느낀 바를 적은 초사체 작품)
달리는 말을 서쪽으로 몰아
동림의 옛 성터를 찾아간다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는 허물어져 흔적도 없고
흙벽은 무너져 절반이나 주저앉았다
그 화려하던 문루는 다 어디로 갔는지
눈에 들어오는 건 무성한 쑥과 가시나무뿐
깨진 주춧돌이 묵은 풀숲에 뒹굴어도
저 자리가 예전엔 관아 건물 터였음을 알겠다
놀란 노루와 서로 다투는 날다람쥐가
어지러이 수풀 속에서 저희끼리 멋대로 논다
우거진 숲은 그늘져 대낮에도 어둑하고
산도깨비와 나무귀신이 우는 소리 들리는 듯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서성이며
물었다, 이곳은 어느 시대의 도읍이었느냐고
시골 노인이 옛말을 전해주었다
이 성은 고씨가 쌓은 것이라 한다
쳐들어오는 오랑캐 기병을 막으려고
평양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문을 겹겹이 세우고 딱따기를 치며 삼엄히 지킬 만큼
성은 튼튼하게 만들어져 낮지 않았는데
겨우 백 년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이곳은 서쪽 변방을 지키는 큰 진영이 되었다
완안(여진족, 훗날 금나라를 세운 부족)이 쳐들어왔을 때
장씨와 허씨(이 성을 지키다 함께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지는 이들로 보이나, 정확한 내력은 확인되지 않는다)가 함께 죽었다니 애석하다
산마루에 사당을 세워 향불을 올리니
백성들은 지금도 그 의로움에 감복한다
지금까지도 재앙과 복을 내린다 하니
그 굳센 넋은 아직 스러지지 않은 듯하다
고을 관아가 남쪽으로 옮겨가면서
이 성은 비로소 고려 말엽에 버려졌다
사람들은 그래도 이 땅을 못 잊어 눌러살아
마을에는 뽕나무와 삼밭이 무성했는데
중간에 전염병을 만나 다들 떠나버리고
나 같은 늙은이 한둘만 남았다고 했다
노인은 흥망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길게 탄식했는데
길 가던 나는 그보다 더 마음에 사무치는 바가 있었다
도읍을 옮긴 일과 오랑캐에 맞서 싸운 일은
마땅히 믿을 만한 역사책에 남아 있어야 할 텐데
둘 다 전해지지 않아 들을 길이 없으니
이 노인이 아니었다면 누가 알았겠는가
안타깝다, 훌륭한 자취가 이렇게 파묻히다니
세상에 드러나지 못한 일들이 다 이런 식이겠구나
기록이 사라지고 잊혀지면
훗날 누가 그 이름을 기억해 주겠는가
한때 제아무리 이름을 떨쳤다 해도
백 년만 지나면 믿을 곳이 없어짐을 이제 알겠다
이 몸과 이름이 함께 썩어 없어질 것을 알았으니
또 어찌 부질없는 영화와 이익을 탐내랴
내 마음이 서글퍼 서성이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으니
예나 지금이나 이치는 매한가지임을 깨닫는다
하늘은 아득히 넓고 구름은 검게 드리웠는데
사나운 회오리바람이 성난 듯 일어난다
산은 우뚝 솟아 하늘을 가리고
해는 벌써 저무는 물가(해가 지는 곳)에 다가섰다
서글피 서성이며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한 채
이 슬픔을 한 편의 조문 글에 담아 부쳐본다
별지부를 차운하여 적궤·석주 두 벗에게 주다 (서기 1592년 9월 20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부 / 벗이 드물고 세상과 어긋난 처지에서, 자신을 알아준 벗들과의 우정과 이별의 아쉬움을 노래한 초사체 작품. 석주는 허균의 절친한 벗인 시인 권필의 호)
아 나는 세상살이에 발이 묶여
십이 년 세월, 두 번의 목성 주기를 흘려보냈네
가려서 벗을 사귀었건만 마음 맞는 이는 드물었으니
누가 서로 부르며 짝을 찾을 수 있다 했던가
다들 뜨거운 불길처럼 어지러이 날뛰는데
나만 홀로 이 깨끗한 지조를 즐겨 지켰네
자하가 은거하던 서하 땅처럼 외지고 쓸쓸하게 지내며
그저 근심 속에서 글이나 지으며 살았지
털보 조씨와 술 벗 덕분에
세상 사람들 다 나를 버릴 때 그 둘만은 나를 거두어주었네
때때로 글과 예술을 논하며 손뼉을 치고
자주 궁벽한 골목까지 서로 찾아다녔지
애써 잘못을 씻어내며 서로 타이르고
넘어져 망신당할까 두려워했네
아득히 먼 대궐 쪽을 바라보며
근심 만난 처지에서 서로 하나로 뭉쳤었지
이 몸이 얽매여 있는 것이 슬퍼서
떨쳐 일어나 날아가고 싶어도 방법이 없네
지난날 이불 함께 덮고 지내던 그 시절 떠올리니
흐르는 눈물이 뒤섞여 뚝뚝 떨어지네
물길은 아득히 넓고도 험하니
누가 천 리 길 갈 수레를 대령해줄까
서산으로 지는 저 해를 가리키며
가슴속은 구불구불 답답하기만 하네
내닫는 구름은 시커멓게 사방에서 일어나고
검푸른 바다는 하늘까지 떠받쳐 든 듯하네
슬프다, 남쪽 고을에 오래 머물 수는 없는데
아득해라, 무슨 수로 얼굴을 다시 볼거나
아름다운 나뭇가지 꺾어 보내려다가
한탄하며 오래도록 서서 홀로 머뭇거리네
몽귀부 (서기 1611년 2월 27일, 양력 추정)
— 꿈속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다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부 / 유배지에 갇혀 밤마다 꿈속에서 혼백이 고향 집으로 날아가는 것을 그린 초사체 작품. 원문 중간에 글자가 유실된 부분은 "원문 결락"으로 표시)
머나먼 변방으로 쫓겨나 산속에 갇힌 몸,
아득하여라, 옛 도성으로는 돌아가지 못하네.
어찌 된 일인지 꿈속 넋은 갈피를 못 잡고
밤마다 (원문 결락)으로 날아가는가.
밤은 참담하도록 고요하여 하루가 일 년 같고
잠에서 깨면 두렵도록 온갖 생각만 꼬리를 무네.
억지로 베개를 베고 겨우 잠을 청하니
그제야 이 몸이 편안해지고 절로 느긋해지네.
정신이 가라앉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가느다란 숨결에 코 고는 소리 새어 나오는데,
문득 넋이 위로 떠올라
아득히 트인 하늘로 거침없이 날아가네.
우주의 기운을 곁눈질하며
망망한 창공을 가르고 불꽃처럼 솟구치네.
대체 무엇이 나를 몰아 이토록 멀리 가게 하는가,
회오리바람을 밟고 비스듬히 날아가네.
혜성을 붙잡고 세차게 내달리니
컴컴한 구름이 발아래 깔리고,
거꾸로 비친 풍경을 뚫고 높이 솟아
서북쪽을 바라보며 곧장 건너가네.
상서로운 기운이 자욱이 감돌고
희뿌연 안개가 느릿하게 떠도는데,
어지러운 속세를 굽어보니
아득하고 어수선하여 그저 짐작만 할 뿐이네.
번화한 도성조차 찾을 수 없거늘
하물며 궁궐과 큰길을 어찌 가려내랴.
홀로 우뚝 서서 서성이다가
서글피 아득함을 좇아 헤매네.
낡은 우리 집을 바라보며 정신을 모으니
넋이 아래로 내려가 빙빙 도는구나.
남산 기슭을 따라
내 발걸음을 옮겨 가네.
예조(조선의 중앙 관청)를 등지고 우리 집 쪽을 향하니
눈앞은 캄캄하고 길은 끝없이 이어지네.
울타리는 무너져 내렸고
쑥과 잡초만 무성하게 우거졌으며,
늘어진 버들가지는 꺾이고
버려진 연못은 메워져 있네.
산은 굽이굽이 창문을 감싸 안았고
도랑물은 흐느끼듯 샘으로 흘러드네.
맏형님을 마주하고 맺힌 울분을 토로하니
가슴에서 솟구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네.
보이는 것은 순식간에 스쳐 가고 들리는 것은 아득하니
머뭇거리는 넋은 의지할 곳이 없구나.
남쪽 변방으로 발길을 돌리려 하니
정신은 안절부절 쓸쓸하고 텅 비어버렸네.
문득 넋이 흔들리며 또렷해지더니
나는 소스라쳐 잠에서 깨어 가슴이 떨리네.
멀고 험한 길도 뛰어넘으면 지척이니
도성이 아득하다고는 말하지 마오.
이 꿈속 유람을 또다시 할 수 있으리니
정신이 참으로 향한다면 반드시 이르리라.
만약 밤마다 선뜻 돌아갈 수 있다면
어찌 갇힌 신세를 한탄하겠는가.
세상에 사는 인생이란 꿈과 같아
나는 이 몸을 그저 천지간에 잠시 두었을 뿐이네.
또한 땅, 물, 불, 바람 네 가지가 잠시 모여 이룬 것이니
어찌 고향 마을을 그리워하랴.
오직 도를 통달한 사람만이
천지를 여관집보다도 작게 여기고,
일찌감치 몸을 일으켜 멀리 떠나
아득히 넓고 외진 곳에서 노니는 법이라네.
모기떼 모인 웅덩이 같은 이 세상을 굽어보면
답답하여 오래 머물 수 없음을 알겠네.
저 지성(봉래산에 있다는 신선 궁전)과 현포(신선이 산다는 곳),
참으로 내 마음이 노닐고 싶은 곳이라네.
신선의 불사약을 구하여
마침내 단구(밤도 낮처럼 밝다는 신선의 나라)에서 수레를 멈추리라.
속정희부 (서기 1611년 2월 10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부 / 명나라 문인 왕세정(자 원미)이 지은 「정희부」를 본떠 지은 작품. 궁중에서 참소를 당해 쫓겨난 후궁의 처지에 자신을 빗대어 억울함과 충심을 노래한 초사체 작품. 병서(산문 서문)는 한문 원문 미확보로 이번 번역에서 제외)
승상(귀한 가문을 상징하는 자줏빛 갓끈)의 남은 복을 이어받아, 맑고 총명한 기질을 타고났네
몸가짐이 그윽하고 고요함을 스스로 살폈고, 부덕(옛 궁중 여성에게 요구되던 네 가지 덕목―말씨, 몸가짐, 일솜씨, 마음가짐)을 몸에 갖추었네
정숙하다는 소문이 귀한 마을에 퍼져나가, 마침내 높은 궁궐에서 임금을 뵙게 되었네
동쪽 하늘에 뜬 작은 별을 바라보며(시경에서, 후궁이 차례를 기다려 밤에 임금 침소에 드는 것을 별에 빗댄 표현), 낮은 후궁의 자리에 머물러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네
그런 처지에도 나는 본디 이런 고운 자태를 지녔고, 세상에 드문 진귀한 옷차림까지 갖추고 있었네
아름다운 옥 노리개를 허리에 차고, 옥 귀걸이에 상아 비녀를 꽂았네
봉황을 수놓은 신을 신고, 사각사각 소리 나는 비단옷을 걸쳤네
궁궐 전각에 올라 온화한 자태로, 새벽마다 삼가 일어나 손수 세숫물과 수건을 준비했네
거친 명주옷을 입었다는 옛 황후(검소함으로 이름났던 한나라 명덕황후)의 가르침을 받들고, 새벽에 임금을 깨워 정사를 살피게 했다는 어진 후비의 노래(시경 계명편)를 따랐네
유순한 가르침이 널리 펼쳐지기를 바랐고, 그 아름다움이 옛 성군의 어머니들(주나라를 일으킨 태임과 태사)과 나란하기를 기다렸네
그런데 어찌하여 온갖 헐뜯음과 참소가 한꺼번에 밀려오는가, 다들 내 고운 얼굴을 시샘하는 것이었네
뭇 여인들은 앞다투어 아첨하고 웃음으로 아양을 떨며, 예를 지켜 스스로를 다잡는 나를 미워했네
파리떼처럼 윙윙거리며 소매 뒤에서 헐뜯으니, 제멋대로 내 은총을 해치고 빼앗으려 들었네
수레를 사양한 것을 두고 거만하다 하고, 비녀를 빼고 근신한 것을 두고 트집 잡기 좋아한다 모함했네
어지러이 시끄럽게 떠들어 임금의 총명을 흐리니, 임금께서는 도리어 미혹되어 살피지 못하셨네
억울한 속마음을 밝혀 시비를 가려볼까도 했으나, 그저 내 분수를 지키며 홀로 마음 아파하기로 했네
장신궁(총애를 잃은 후비가 물러나 지내던 궁궐 이름)으로 물러나 조용히 지내기를 바랐고, 근심을 떨쳐내고 남은 생을 마치기를 바랐네
하늘은 내게 온전한 운명을 주지 않아, 슬프게도 억울한 허물을 만나게 했네
곧고 신실했건만 도리어 죄를 얻은 것이 마음 아파, 영항(죄를 지은 후궁을 가두던 궁중 처소)으로 내쳐져 영영 버려졌네
눈물을 훔치며 임금께 하직 인사를 올리니, 가슴속이 맺혀 지지듯 타들어갔네
높고 환한 합환전(부부가 함께 지내는 화목한 처소라는 뜻의 궁전 이름)을 등지고, 어둡고 외진 식실(후궁의 처소 이름)로 옮겨갔네
하늘은 캄캄하여 해조차 빛을 잃고, 흐린 무지개가 땅으로 드리웠네
회오리바람이 문득 어두운 안개를 흩날리니, 두려움에 숨죽이고 넋이 떨려왔네
떠도는 내 넋은 의지할 곳이 없어, 술 취한 듯 아득한 저 하늘이 그저 애통하기만 했네
아, 생명에는 정해진 운수가 있듯이, 사랑받음과 욕됨도 본디 서로 맞물려 도는 것이네
충심을 품고도 재앙을 만난 것은, 참소하는 입이 이간질하여 어진 마음을 해쳤기 때문이네
굴원(참소를 당해 강물에 몸을 던진 초나라의 충신)은 돌을 품고 초나라 도읍을 슬퍼했고, 비간(상나라 주왕에게 간언하다 죽은 충신)은 폭군에게 배를 갈렸네
먼 옛날 성현들도 이런 화를 면치 못했으니, 하물며 이 몸이야 무엇이 서럽겠는가
내 천한 목숨이야 아까울 것 없지만, 유순하신 그분마저 차츰 미혹당할까 두렵네
혹시라도 지존의 짝 되시는 분이 그 단아한 덕을 그르치신다면, 그것은 곧 임금의 법도가 무너지는 것과 다름없으리라
나라를 돌아보면 마음이 무너져, 차라리 잠들어 다시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네
이 또한 크나큰 운명에 달린 일이니, 나는 그저 하늘이 내게 준 본분에 편안히 머물겠네
다시 노래를 잇는다
깊고 높은 궁궐에 홀로 조용히 지내며, 옥으로 된 문을 걸어 잠그고 그윽한 방에 갇혔네
넓은 뜰은 황폐해지고 옥 섬돌엔 잡초가 우거졌는데, 찾아오는 이 없어 적막하고 이끼빛만 푸르네
수놓은 창문을 활짝 열고 비단 휘장을 걷어, 초풍전(후궁의 처소 이름)을 바라보고 미앙궁(황제가 정사를 보는 궁전)을 응시하네
뿔로 만든 베개엔 향내가 은은하고, 상아 침상 위엔 옷가지만 걷어놓았네
임금의 수레 소리 들릴까 귀 기울여도 아무 소리 없어, 푸른 깃발(임금의 행차를 상징하는 표현) 떠올리며 지금 어디쯤 계실까 생각하네
거문고를 뜯어보아도 임은 듣지 못하고, 술잔을 따라 올려도 임은 받지 않으시네
텅 빈 집은 고요하고 처량한데, 외로운 그림자만 벗 삼아 서성이네
가물가물한 등불 아래 벽을 등지고 앉았더니, 어느새 하늘이 어둑어둑 밝아오네
마음이 어지러워 옷깃마저 뒤바뀐 줄도 모르고, 콧물과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네
이 속마음 다 풀어 바른 말씀을 올려볼까, 주나라를 일으킨 태임과 태사의 덕을 아뢰어볼까
붉은 붓(동관―옛 여사관이 궁중의 일을 기록하던 붓)을 잡았다가 도로 내려놓으니, 다시 죄를 얻어 화를 입을까 두려워서네
임금 계신 문으로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데, 이 해도 이미 저물어가고 근심만 자꾸 쌓여가네
훼벽사 (서기 1589년 3월 20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사 / 일찍 죽은 손위 누이를 애도하며, 그 넋이 신선 세계로 훨훨 돌아가 편히 노닐기를 기원하는 초혼 형식의 작품. 병서(산문 서문)는 한문 원문 미확보로 이번 번역에서 제외)
구슬이 깨지고 옥이 떨어졌으니
누이의 삶은 참으로 기구했구나
하늘은 어찌 그리 풍성한 재능을 주고서는
어찌 그리 모질게 벌하여 주고 빼앗기를 이토록 서둘렀는가
거문고와 비파는 버려진 채 아무도 타지 않고
아침 밥상을 차려도 그대는 다시 맛볼 수 없네
고요한 침실은 적막하기 그지없는데
갓 돋아난 난초 싹은 서리를 맞아 꺾이고 말았네
돌아오라, 자유로이 노닐던 그곳으로
슬프다, 이 덧없는 세상은 눈 깜짝할 사이일 뿐
문득 왔다가 홀연히 떠나가니
단 한 해도 머물지 못했구나
구름은 뭉게뭉게 광릉의 무덤길 위로 피어오르고
밝은 해도 저승 궁전 앞에서 빛을 잃네
우거진 숲은 짙고 아득히 어두운데
넋은 훨훨 날아 어디로 가는가
머나먼 요압(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신선 세계의 먼 곳)을 찾아 아득히 떠나가는가
백옥루(하늘의 문인들이 죽으면 간다는 누각)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돌아오라, 자유로이 노닐던 그곳으로
줄지어 선 신선들을 따라 한가로이 노닐라
속세는 어지러이 소용돌이치고 온갖 잡귀들이 우글거리는 곳
훨훨 멀리 솟아올라 구름 속으로 가라
무지개를 깃발 삼고 난새를 수레 삼아
하늘에 계신 이를 뵈러 서늘한 긴 바람을 타고 가라
요지(서왕모가 산다는 곤륜산의 연못)에서 서왕모께 술을 따라 올리면
해와 달과 별이 그 아래 늘어서 있으리라
티끌 세상을 굽어보며 내 근심을 눌러 준다면
이 어두운 마음도 자연의 이치 속에 아득히 풀리리라
오직 살아남은 나만이 슬픔을 품은 채
아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애간장이 끊어지네
돌아오라, 자유로이 노닐던 그곳으로
옥황상제의 뜰이야말로 노닐기에 좋으리라
도원량의 귀거래사에 화답함 (서기 1611년 2월 25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3권, 부부 1 · 사 /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운을 빌려, 벼슬살이보다 독서를 통한 정신적 자유를 예찬하며 유배지든 어디든 책만 있으면 그곳이 곧 자기 집이라는 배포를 노래한 작품. 병인(산문 서문)은 한문 원문 미확보로 이번 번역에서 제외)
돌아가자.
내가 책을 끼고 돌아갈 곳은 오직 이곳뿐이다.
총애를 받았을 때도 기쁘지 않았는데
치욕을 당한들 무엇이 슬프겠는가.
책 끈이 세 번 끊어지도록 읽어(공자가 주역을 즐겨 읽어 책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공자의 경지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고 싶다.
도리와 의리를 곱씹고 덕을 마주하니
쉰 살에 이르러 지난 마흔아홉 해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거백옥(위나라의 현자)과 같은 심정이다.
옛사람이 걸어간 길을 살펴 몸가짐을 바로잡으니
속에 보배를 품고 거친 베옷을 입고 살아도 그만이다.
아,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모가 나서
툭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작은 낌새에도 어두웠다.
벌을 받은 것도 은혜요
결국 남쪽으로 쫓겨났다.
이 액운이 사마천이 당한 궁형만큼 참혹한 것은 아니며
가는 길이 저승으로 가는 문도 아니다.
몸에 지니고 갈 것이 무엇인가
만 권의 책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 깊은 맛을 떠내는 일은
술동이에서 술을 퍼 마시는 것과 같다.
초가집 문을 활짝 열어 볕을 마주하고
책들을 죽 벌여 놓으니 얼굴이 절로 환해진다.
내 정신을 가라앉혀 깊이 파고들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성인과 어리석은 자가 갈리는 까닭을 헤아리고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생각한다.
제자백가가 어지러이 뒤섞여 저마다 내달리지만
그 온갖 주장을 한데 모아 하나로 꿰뚫어 본다.
기쁘고 즐거워 잠자는 것도 잊으니
오래 떠돌던 나그네가 마침내 고향에 돌아온 것 같다.
책 읽다가 양을 잃어버렸다는 종의 이야기(장자에 나오는 우화)처럼 여기에 빠져들고
수레바퀴 깎던 장인이 환공을 깨우친 일(장자에서, 참된 이치는 말로 전할 수 없다고 한 이야기)처럼 그 속에서 참뜻을 얻는다.
돌아가자.
이렇게 노닐다가 여기서 내 삶을 마치리라.
이것이 바로 백 년을 편안히 살 집이니
어찌 이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구하랴.
관동이든 호남이든
책을 이끌고 오가는 데 무슨 근심이 있으랴.
곁에 있던 사람이 내게 묻는다, 무엇을 본받아 사느냐고.
나는 기자가 전했다는 홍범구주(기자가 무왕에게 전한 정치 사상)를 따를 뿐이라고 답한다.
생각을 말로 삼고
지식을 배로 삼아
학문의 바다, 아득히 먼 뱃길을 떠가서
마침내 구구(중국 여러 고을의 지리와 산물을 기록한 옛 책)에 이르러 멍에를 풀고 쉬리라.
학문의 동산에 숨은 보배를 캐내고
아홉 학파에 마음을 맡겨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듯 흘러들리라.
내 집 문을 나서지 않고도
내가 만족할 것을 만족하며, 삶과 죽음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맡기리라.
그만두자. 나는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살아왔으니
본디 떠난 적도 없는데 하물며 다시 머무를 일이 있겠는가.
유유히 노닐 뿐, 이곳을 떠난들 어디로 가겠는가.
크고 좋은 집이 어찌 내가 좋아하는 것이며
대궐 문(청쇄, 벼슬살이를 뜻함)도 본디 내가 바라던 바가 아니다.
집 뒤뜰의 마음 밭을 가꾸어
밤낮으로 쉬지 않고 부지런히 김을 매리라.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고 한결같이 하여 그 중심을 잡으라"던 순임금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생각에 삿됨이 없다"는 시경의 노래(공자가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요약한 말)를 읊으리라.
대장부는 천하에서 가장 넓은 집에 사는 법이니
이는 자여(증자의 자)가 한 말이니 그대는 의심하지 말게.
성소부부고 제4권
9. 19:53
성소부부고 제4권 · 문부 1 · 서(序)
출처: 성소부부고 제4권, 문부 1, 서
배경: 제4권부터는 시가 아니라 산문이다. 그중 첫 갈래인 "서"는 남을 떠나보내며 써 준 글, 남의 책이나 자신이 엮은 책에 붙인 서문 등 열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교와 유교를 오간 자신의 젊은 시절 독서 편력, 벗 권필의 시를 향한 파격적인 찬사, 옛 명나라·송나라 시선집을 직접 편찬하며 세운 안목, 전쟁터에서 순국한 시인 양대박을 향한 애도 등 허균의 문학관과 인간관계가 두루 드러나는 글들이다.
기달산으로 돌아가는 이나옹을 전송하며 쓴 글 (서기 1606년 2월 26일, 양력 추정)
나는 젊었을 때 옛날의 글 잘 짓는 사람들을 무척이나 흠모해서, 손에 잡히는 책이란 책은 다 읽어치웠다. 그렇게 읽은 책 가운데는 찬란하고 진기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것들도 많았다.
그러다 소동파가 《능엄경》이라는 불경을 읽고 나서 문장이 더욱 높고 오묘해졌다는 이야기, 그리고 근래의 학자 왕양명과 당순지의 글도 모두 불경을 통해 깨우친 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속으로 그럴듯하다 싶어서 자주 승려들을 따라 이른바 불경이라는 것을 구해다 읽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툭 트인 안목은 마치 도랑이 뚫리고 강둑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뜻을 풀어내고 말을 부리는 솜씨는 마치 나는 용이 구름을 타고 오르는 듯 아득하여 도무지 형용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글로 치자면 귀신같은 것이었다.
시름겨울 때 읽으면 즐거워지고, 지루할 때 읽으면 정신이 번쩍 들어서,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번 생을 거의 헛되이 보낼 뻔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일 년도 안 되어 백여 상자에 이르는 불경을 다 읽었는데, 마음을 밝히고 본성을 다잡는 대목에서는 무언가 환하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는 듯했다. 마음속에 얽혀 있던 세속의 잡생각들이 훌훌 풀려나가는 느낌이었고, 글도 절로 술술 풀려나와 그 넘실거림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은근히 스스로 무언가를 얻었다고 자부하며 그 책을 아끼고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해 고을 수령이 되고 보니, 벽지라 다스릴 일도 적어 매일 한가한 날이 많았다. 그래서 젊어서 읽었던 사서와 성리학 책들을 다시 꺼내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이른바 불교에서 본성을 논하고 마음을 논하는 것들이, 언뜻 이치에 가까운 듯 보여도 사실은 우리 유학과는 번번이 어긋난다는 것을, 그리고 그 허황된 견해와 헛된 이야기들이 하늘의 이치에 온통 위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진주(眞珠)를 두고 말해 보자. 둘 다 조개에서 나는 것은 같지만, 유학에서는 진주가 조개의 태에서부터 생겨난다고 보는 반면, 불교에서는 진주가 밖에서 조개의 태 속으로 들어와 깃든다고 본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까닭은, 유학은 하늘을 근본으로 삼고 불교는 자기 자신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 같은 온갖 감정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온다고 보는 것이 우리 유학의 설명인 데 비해, 불교에서는 그것을 눈·귀·코·혀·몸·생각의 여섯 감각기관이니, 몸·느낌·생각·행동·의식의 다섯 가지 쌓임이니 하는 말로 설명한다. 이것만 봐도 어느 쪽이 참이고 어느 쪽이 거짓인지 가늠할 수 있다.
불경에 나오는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느니 "한 법도 놓지 않는다"느니 하는 말들은 도에 제법 가까운 듯하지만, 거기엔 그저 그럴듯한 뜻만 있을 뿐 정작 그것을 뒷받침할 이치는 없다. 말은 그럴싸하게 할 수 있어도 실제로는 아무 쓸모가 없으니, 이것을 두고 정말 도를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훌륭하도다, 주자의 다음과 같은 말이여. "이 세상 이치가 빈틈없이 꽉 차 있어서, 자기 한 몸이 이치가 미치지 않는 자리를 단 한 군데도 얻어 제멋대로 안주하지 못하는 것을 미워하고, 이 이치가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 돌아가서 자기가 단 한 순간도 이치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싫어한 나머지, 이른바 텅 비고 아무것도 없는 적멸의 경지로 도망쳐 숨는 것이다." 이 말이 한 번 나오자, 부처님도 저승에서 남몰래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한유와 구양수가 불교를 배척한 것은 모두 겉으로만 배척한 것이었기에 승려들의 기세를 조금도 꺾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불경을 직접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뼈대까지 꿰뚫어 보고 칼을 댔더라면, 불교가 어찌 그토록 오랜 세월 제멋대로 행세하며 공자와 주공의 가르침과 맞서 겨룰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내 생각은 여기서 그친다.
이나옹은 젊어서 풍악산(금강산)에 들어가 신여상인이라는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장차 머리를 깎으려 했으나, 난리 통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자라서는 여러 해 동안 서쪽 지방을 이리저리 떠돌았는데, 올봄에 다시 그 신선 같은 산으로 돌아가 옛 스승을 다시 찾아가겠다고 한다. 비록 승복을 입지는 않았지만 불경을 두루 읽어 마음을 닦고 본성을 지키기를, 옛날 속세에 있으면서도 보살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유마힐이나 방 거사처럼 하고 싶다면서, 나를 찾아와 떠나겠노라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대가 그리하는 것은, 배움에는 어둡고 이익만 쫓는 자들보다는 훨씬 낫다. 그러나 이 책을 볼 때는 마땅히 먼저 그 안의 참과 거짓을 가려내야 한다. 만약 그 말이 허황된 견해요 헛된 이야기여서 하늘의 이치와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환하게 알게 된다면, 그 말이 그대를 흘리지는 못할 것이며 오히려 그 글이 그대의 문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뜻을 조금이라도 마음속에 담아 둔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그 속으로 끌려 들어가 결국은 인과응보와 죄와 복 같은 것에 빠져들고 말 것이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나옹이여, 부디 힘쓸지어다. 아, 나 역시 일찍이 이 문제로 크게 데어 본 적이 있어 그 병통을 깊이 안다. 아무쪼록 주자의 이 한마디를 늘 마음에 새기고 살펴 나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헤어지는 자리에 이르러 이 글을 써 주었다.
(용어) 왕양명은 명나라 학자로, 사물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서 이치를 찾아야 한다는 학문을 세운 사람이다. 당순지는 옛 문체에 뛰어나 명나라 중엽 문단의 큰 어른으로 꼽혔던 학자이다. 사서는 《논어》·《대학》·《중용》·《맹자》 네 책을 가리키고, 성리학 책이란 송나라 학자 주돈이와 정호·정이 형제가 남긴 책들을 말한다. 눈·귀·코·혀·몸·생각의 여섯 감각기관과 몸·느낌·생각·행동·의식의 다섯 가지 쌓임은 모두 불교에서 사람의 몸과 마음이 이루어지는 원리를 설명하는 용어들이다. 유마힐은 인도의 한 부유한 사람으로 집에 있으면서도 보살의 수행을 닦았다는 인물이고, 방 거사는 당나라 사람 방온으로 재산을 강물에 버리고 수행하여 선종에 통달했다고 전한다.
석주소고에 부친 서문 (서기 1606년 6월 10일, 양력 추정)
나의 벗 권여장(자를 여장이라 하며, 본명은 권필이다)은 스무 살도 안 되어 이미 시를 잘 지어서 그 높은 경지가 옛사람을 능가할 만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는 늘 지금 세상에서 시를 가장 잘 짓는 사람을 꼽을 때마다 반드시 "여장이다, 여장이야" 하고 말하곤 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괴이하게 여겼고, 다음에는 비웃었으며, 나중에는 결국 믿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정확히 어느 경지까지 이르렀는지는 다들 알지 못했다.
하루는 홍녹문이 내게 물었다. "여장의 시는 우리 조선에서 누구와 견줄 만한가?" 내가 "점필재 김종직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답하자, 홍녹문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서 "허튼소리는 하지 말게" 하고 말렸다. 나는 슬며시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점필재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가라고 사람들이 일컫기에 우선 그렇게 견주어 본 것일 뿐이다. 만약 여장이 홀로 이르러 간 경지와 그 깊은 깨달음을 논한다면, 맑기로는 당나라 왕유와 같고, 맛깊기로는 당나라 유종원과 같으며, 부드럽고 능숙하기로는 송나라 진여의와 같으니, 어찌 점필재 정도와 나란히 놓고 논할 수 있겠는가?"
여장은 명망과 지위가 남을 움직일 만하지 못한데다, 세상 사람들은 그저 눈앞에서 직접 본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를 하찮게 여긴다. 하지만 그가 만약 옛날에 태어났더라면 사람들의 우러름이 어찌 점필재 정도에 그쳤겠는가.
어떤 이는 여장이 학문의 축적이 적고 원기가 모자라니 마땅히 점필재보다 한 수 아래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더더욱 시라는 것을 모르는 소리다. 시에는 별도의 독특한 흥취가 있어서 이치와는 상관이 없으며, 시에는 별도의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그저 많이 읽고 쓴 글과도 상관이 없다. 오직 하늘이 부린 재주를 자유자재로 놀리고 조물주의 오묘함을 빼앗아 오는 그 순간, 정신이 빼어나고 울림이 밝으며 격조가 뛰어나고 생각이 깊은 것이야말로 가장 으뜸가는 경지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학식의 축적이 풍부하다 해도, 비유하자면 그것은 마치 점진적인 수행을 강조하는 불교 종파에서 교리만 읊는 것과 같으니, 어찌 감히 단박에 깨우침을 얻는 임제종의 경지를 넘볼 수 있겠는가.
이실지는 평소 안목이 높아서 남을 인정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여장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이실지조차 여장의 경지를 다 알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여장은 원래 게을러서 자기가 지은 글을 모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심생이라는 사람이 세상에 전해지던 그의 시 수백 편을 모아 《석주소고》라는 제목을 붙이고 내게 보여 주었다. 읽어 보니 마음이 흐뭇해져서 이렇게 말했다. "내 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이 책을 보면 여장의 온전한 모습을 다 볼 수 있으니, 옛사람을 압도하고 지금 시대에 으뜸가는 이가 여장이 아니면 대체 누구겠는가? 세상이 그를 귀히 여기지 않는다 한들 여장에게 무슨 흠이 되겠는가? 하물며 훗날에는 그의 진가를 알아줄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그리고 마침내 이 글을 비평 삼아 적는다.
이따금 소리 내어 그의 시를 외워 보면, 이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절로 일어 나도 모르게 정신이 아득히 높은 하늘까지 날아오른다. 아, 참으로 지극하다.
여장은 안동 권씨로, 본명은 필이고 석주는 그의 호이다. 그의 인품이 높은 것은 시보다도 더욱 우뚝한데, 세상이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시에 대한 푸대접보다도 더 심하니, 아, 애석하기 그지없다.
(용어) 점필재는 조선 초기의 학자 김종직의 호로,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사림의 으뜸으로 꼽혔던 인물이다. 임제종은 단박에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시하는 불교의 한 종파 이름이다. 이실지는 이춘영이라는 사람으로, 시문에 능했던 학자 성혼의 제자다.
세설산보주해에 부친 서문 (서기 1606년 7월 15일, 양력 추정)
옛 중국 진나라 사람들은 세속을 벗어난 청담을 즐겼다. 표현은 짧아도 뜻하는 바는 멀리 나아갔고, 한마디 한마디에 깊은 깨달음이 담겨 있었으니, 이러한 풍류를 숭상하는 기풍은 동진 시대에 이르러 정점에 달했다.
그중 좋은 것만 가려 뽑아 책으로 엮은 이가 있었으니, 맨 처음이 유의경이었다. 세상에 전하는 《세설신어》가 바로 그 책이다.
그 뒤 육조 시대부터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이름난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남긴 한마디 말이나 짧은 논평 가운데 진나라의 여러 인물들과 견줄 만한 것들, 그리고 한나라·위나라·진나라 세 시대 명사들의 이야기 가운데 유의경이 빠뜨린 것들을 모아 책을 엮은 이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하씨어림》이다. 세상에서 하양준(자는 원랑이다)의 저술이라 일컫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두 책을 합쳐서 다시 엮되, 말이 어렵고 껄끄러운 유의경의 글은 열에 두셋을 덜어 내고, 잡다하고 지루한 하양준의 글은 열에 일고여덟을 쳐내어, 오롯이 자기 나름의 안목으로 새로운 관점을 세워 두 책에서 알맹이만 골라 하나의 독자적인 책을 만든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오군 지방의 왕세정(자는 원미)이다.
원미는 문장이 넓고 통달하기가 천고에 드문 사람이었는데, 이 책을 몹시 아껴서 늘 되풀이해 읊조리며 입에서 놓지 않았고, 심지어 자기 손으로 직접 덜어 내고 보태는 작업까지 했다. 그가 뭔가 보는 눈이 없었다면 어찌 그렇게까지 했겠는가?
대개 한마디 말이라도 은미한 뜻을 담은 것들, 짧은 한 구절이라도 절묘하게 짜인 것들에는 어떤 풍모와 정취가 은은히 흩어져 있어서, 겉으로 드러난 말 바깥에 무한한 뜻이 절로 서려 있고 지극히 깊은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으니, 원미가 이 책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그칠 줄을 몰랐던 것도 그 때문이다.
당나라와 송나라의 시인들은 이 책을 그저 시구에 쓸 소재로만 가져다 썼을 뿐이니, 이미 한 단계 낮은 쓰임에 그친 것이다.
유의경의 책과 하양준의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읽혀 왔지만, 이른바 왕세정이 손질했다는 그 판본만은 볼 수가 없었다. 예전에 왕세정의 문집에서 그가 직접 쓴 서문을 보고서 전체 책을 구해 보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병오년(1606년) 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조서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왔을 때, 나는 그를 맞이하는 접반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그에게 깊은 대접을 받았다. 그가 떠날 때가 되어 몇 종의 책을 꺼내 내게 선물로 주었는데, 이 책도 그중 하나였다. 사신의 특별한 은혜에 감격했고, 평생 보고 싶던 책을 마침내 얻었기에 마치 큰 보배를 받듯 절을 하고 받았다. 끝까지 다 읽고 나서야, 유의경과 하양준의 책은 두루뭉술한 데가 있지만 왕세정의 책은 독창적인 경지를 이루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 옛 전적을 두루 살펴 주석을 덧붙였는데, 비록 옛 주석가 유효표의 상세하고 견실한 주석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왕세정에게 부끄럽지 않은 충실한 해설자는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왕원미가 이 사실을 안다면 저승에서라도 반드시 손뼉을 치며 기뻐할 것이다.
(용어) 청담은 세속의 명예나 이익을 벗어나 철학적이고 초탈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말한다. 육조는 중국 남북조 시대에 강남 지역에 세워졌던 여섯 왕조를 가리킨다.
사한전방에 부친 서문 (서기 1607년 6월 9일, 양력 추정)
정미년(1607년) 여름, 나는 삼척에 있었다. 그런데 사헌부로부터 불교를 두둔하는 논의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쫓겨나 시골로 돌아가게 되었다. 가는 길에 지평 땅을 지나게 되어, 이웃 어른인 양사눌의 별장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때 이름은 잊었지만 이생이라는 사람이 책 한 권을 들고 와서 보여 주었는데, 표지에 《사한전방》이라 적혀 있었다. 펴 보니 세조 임금 때 총애를 받던 승려 신미의 시를 모은 시권이었다.
김수온(자는 문량)이 서문을 썼고, 서거정·강희안·강희맹·성임·이승소가 시를 지었는데 모두 손수 글씨를 썼다. 찬을 지은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글씨는 정사룡이 썼고, 안견(자는 가도)이 그린 석가여래와 아미타불 두 상으로 끝을 맺었는데 그 그림이 참으로 미묘했다. 맨 마지막에는 임금의 도장이 하나 찍혀 있었으니, 참으로 귀한 옛 물건이었다. 나는 종이 이백 장을 주고 이 책과 맞바꾸었다.
아, 조선 초기의 문장은 웅혼했고 그 시절 선배들은 하나같이 이름난 대가와 큰 인물이었으며, 글씨와 그림 또한 모두 이름을 떨친 이들의 솜씨이니, 참으로 귀중한 물건이라 감히 그 사이에 함부로 입을 놀릴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글은 불교의 이치에는 밝아서 손 가는 대로 뽑아 쓰긴 했지만 이따금 진부한 데로 흘렀고, 시는 웅혼하고 무게가 있어 기세는 있으나 아름다운 울림이 부족해 다소 속된 데로 떨어졌으며, 글씨는 짜임새는 정밀하지만 둔하고 막혀서 활달함이 없어 왕희지나 조맹부의 뛰어난 필법에는 미치지 못하고, 그림은 실물과 닮기는 했으나 불교 그림다운 격조가 부족한데다 채색도 풍부하지 못하다.
만약 요즘 시대의 문장가인 최립에게 서문을 쓰게 하고, 유근·이달·권필·이안눌에게 시를 짓게 하고, 한호·김현성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 이정(호는 나옹)에게 채색을 입혀 상을 그리게 했더라면, 이 옛 작품이 어찌 그들만 못하다 할 수 있겠는가?
훗날 안목을 갖춘 사람이 이 두 가지를 견주어 본다면 어느 쪽에 손을 들어 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무릇 문장과 서화는 마치 귀한 옥이나 보배로운 구슬처럼 저마다 정해진 값어치가 있는 법이지만, 세상에 안목 있는 감정가가 아닌 이상 어찌 그 우열을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요즘 안목이 어두운 자들은 하나같이 시문도 세태를 따라 오르내린다면서, 직접 눈으로 본 것은 낮잡아 보고 귀로 전해 들은 것만 귀하게 여겨 옛사람은 도무지 따를 수 없다고 말한다. 아, 큰 물이 밀려와 하늘까지 넘실거리면 산호가 어디에 잠겼는지도 알 수 없게 되는 법인데, 그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손가락질하며 찾는구나. 이것이 바로 귀로만 듣고 먹는 자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책은 오래된 물건이기에 소장하는 것이지, 그 글과 시와 그림 자체를 보배로 여겨서가 아니다. 훗날 이 책을 보는 사람이 자세히 살펴 기록해 준다면 다행이겠다.
(용어) 세조 임금은 왕위에 오르기 전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뒤 불교를 깊이 믿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고시선에 부친 서문 (서기 1610년 6월 21일, 양력 추정)
《고시선》은 나 허균이 손수 뽑은 시선집이다.
나는 머리가 채 마르기도 전인 어린 시절부터 옛 시를 읽는 것을 좋아해서, 뜻을 다 이해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책만 펴면 밥 먹는 것조차 잊었다. 그렇게 몇십 년을 쌓아 오면서 단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시의 아름다움이란 반드시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대개 뛰어난 작가란 한 시대에 몇 사람 되지 않고, 한 사람의 작품 중에서도 정말 뛰어난 것은 몇 편 되지 않으니, 후세 사람이 외우고 본받고자 할 때 굳이 많은 것을 취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먼 옛날 순임금·우임금 시대부터 시를 지은 사람이 적지 않았을 텐데도, 《서경》과 《예기》에 실린 것이나 공자가 골라 엮은 《시경》에 실린 시가 이토록 적은 것을 보면, 후세에 울림을 절실히 하고 아름다움만 취하려 애쓰는 것이 그리 취할 만한 방법이 아님이 분명하다.
한나라 시대의 시 가운데 자주 일컬어지는 것은 오직 〈고시십구수〉와, 소무와 이릉이 서로 이별하며 지은 증별시뿐이다. 이들은 옛 노래의 원형이 아직 흩어지지 않아서 《시경》 삼백 편에 가깝다고 할 만하다. 탁문군, 반첩여의 시나 옛 악부에 실린 채옹·송자후 이하 수십 편도 겨우 전아하고 화려하다 할 만하고, 나머지는 어떤 것은 투박하고 어떤 것은 지나치게 화려하며 어떤 것은 형식조차 갖추지 못했으니, 요컨대 모두 바른 소리는 아니다.
위나라·진나라 이후로는 전아함은 그런대로 갖추었지만 익살스러운 기교로 인해 그 기상을 손상시켰고, 육조 시대에는 화려함이 더해지면서 옛 시의 정신과는 더욱 멀어졌다.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아예 스스로 당나라만의 시를 이룬 것이지, 더 이상 옛 시라고 할 수는 없다.
지금 내가 가려 뽑은 것은 대체로 한나라와 위나라의 것은 자세히 다루고 진나라와 송나라의 것은 간략히 다루었으며, 양나라와 진나라에 이르러서는 뽑은 것이 더욱 적다.
간혹 옛 시라 하더라도 근래의 시풍에 가까운 것은 굳이 취하지 않았고, 근래의 시라 하더라도 옛 시에 견줄 만한 것은 감히 버리지 않았으니, 오직 옛 시의 정신에 맞는 것만을 구했을 따름이다.
전체 여섯 편으로 나누어 엮었는데, 뽑은 것은 모두 삼백 편뿐이다. 간혹 내 나름의 좁은 소견으로 몇몇 작품을 빼놓고 평을 달기도 했는데, 이는 세상에 널리 전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저 내 나름대로 얻은 바를 나타내어 때때로 외우고 본받고자 함일 뿐이다.
당나라 시인은 워낙 많기에 따로 엮은 《당시선》이 있으므로, 여기에는 섞어 싣지 않았다.
(용어) 〈고시십구수〉는 지은이를 알 수 없는 한나라 때의 옛 시 열아홉 편을 가리킨다. 탁문군은 한나라 때 학식과 문재로 이름났던 여인이고, 반첩여는 한나라 성제의 후궁으로 시가에 뛰어났으나 훗날 총애를 잃고 쓸쓸한 처지를 시로 노래한 인물이다.
당시선에 부친 서문 (서기 1610년 7월 20일, 양력 추정)
당나라 삼백 년 동안 시를 지은 사람이 천 명을 넘었으니, 시의 도가 이토록 융성했던 시절은 앞뒤로 다시없었다.
이를 모아 뽑아 놓은 책들도 수십 종에 이르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간략하게 알맹이만 골라낸 것은 양사홍이 처음 엮은 《당음》이고, 상세하고 방대하게 뽑아 놓은 것은 고병(초명은 고정례)의 《당시품휘》이며, 독자적인 안목으로 옛 틀을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기준을 세운 것은 이반룡의 《당시산》이다.
이 세 책이 나오자 그전까지 나왔던 온갖 당시 선집들은 모두 쓸모없어져 사라졌으니, 아,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나는 일찍이 이 세 사람이 뽑은 책들을 가져다 읽어 보았는데, 다소 다른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양사홍은 비록 정밀함을 힘써 추구했다지만 바른 소리와 그 나머지 여운을 가려내는 데 있어 갈피를 잡지 못한 데가 있고, 웅장하고 예스러운 소리를 채택하지 않은 곳도 있어서, 안목 있는 이로 하여금 구슬을 빠뜨렸다는 개탄을 자아내게 한다. 고병이 모은 것은 지극히 방대하기는 하나 시대별로 사람을 늘어놓고 작가별로 작품을 늘어놓아, 곱고 추한 것을 함께 나란히 두고 우아함과 속됨을 몽땅 뒤섞어 버렸으니, 안목 있는 이들이 "물고기 눈알을 진주와 섞어 놓았다"고 나무란 것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이반룡이 가려 뽑은 것에 이르러서는, 오직 굳세고 빼어난 것만을 택하여 자기 기준에 맞으면 싣고 맞지 않으면 아무리 값진 구슬이라도 미련 없이 내던져 버렸으니, 이는 마치 영웅이 사람을 속이는 듯한 데가 있어 전부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여러 작품들 사이에 묻혀 오랜 세월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뛰어난 시편들을 능히 찾아내어 윗자리에 올려놓은 것만큼은, 확실히 겉으로 드러난 말 너머의 독자적인 통찰이라 세속의 눈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있다.
나는 이 시들을 소리 내어 읽고 연구하기를 여러 해 동안 계속했는데, 어렴풋이 깨달아지는 바가 있는 듯하여 마침내 고병이 모은 것을 가져다 먼저 그 잡다하고 어지러운 것을 걸러 내어 열에 다섯을 남기고, 양사홍의 것을 참고하고 이반룡의 것을 이어받아, 전에 뽑아 두었던 것과 합쳐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시의 형식별로 나누고 시대순으로 작가를 배열하되, 진실로 오묘한 것이라면 비록 당나라 말기의 것이라도 자세히 다루었고, 흠이 있거나 속된 것이라면 비록 당나라 전성기의 것이라도 남겨 두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모두 육십 권, 이천육백여 수를 엮었으니, 당나라 시는 이 책에 거의 다 실린 셈이다.
송오가시초에 부친 서문 (서기 1610년 8월 19일, 양력 추정)
시는 송나라에 이르러 사라졌다고 할 만하다. 사라졌다는 것은 말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 원리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시의 근본 원리는 자세하고 완곡하게 다 풀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지고, 가리키는 바는 가까워도 그 취지는 아득히 멀며, 이치에 얽매이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자취에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으뜸가는 경지가 되는 것이니, 당나라 사람들의 시가 왕왕 이런 경지에 가까웠다.
송나라 시대에 작가가 적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나같이 뜻을 남김없이 다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옛 고사를 인용하는 데만 힘썼으며, 게다가 어려운 운자와 억지스러운 압운으로 스스로 격조를 손상시켰으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천 편 만 편의 시가 모두 다 낡은 상투어의 냄새를 풍기며 시의 참된 도에서 아득히 멀어졌으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는가?
저 소식(호는 동파) 같은 사람도 하늘이 내린 재주를 지녔지만 그저 폭넓게 세상을 교화하려 했다는 나무람을 면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나는 일찍이 송나라 여러 시인들의 작품을 얻어 읽어 보고, 그들이 공들여 노력한 것은 부지런했으나 참된 도에서 멀어진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도 감히 내 좁은 소견만으로 옛사람들이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짜낸 것을 완전히 내치지는 못하고, 낮잡아 보면서도 남겨 두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지은 시조차 점점 송나라 강서파의 시풍으로 흘러들어 옛 정신을 버리고 손쉬운 쪽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으니, 낮고 속된 것이 사람을 물들이는 것이 이토록 빠른 줄을 알 만하다.
그저 대응하기 편하다는 이유로 이런 시풍이 내 뜻에 맞다고 여겨 차마 버리지 못했으니, 이는 마치 아름다운 여자가 그 시절 유행하는 화장법을 배워 저잣거리 문 앞에 기대어 선 것과 다름없다. 어찌 부끄러움이 얼굴에 가득하지 않겠는가?
한가한 날 왕안석(시호는 문공)과 소식, 황정견, 진사도와 진여의의 시를 가져다 음미하다가, 그중 짧은 시와 근체시 가운데 다소 아름다운 것을 뽑아 이 책에 실었다. 그러자 어떤 이가 힐난하며 말했다. "그대가 이미 옛 시에 능통하니 옛 시만으로도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후세에 전할 만한데, 어째서 굳이 송나라 시까지 다루는가?" 나는 이렇게 답했다.
"아니, 그렇지 않소. 이건 말하기가 쉽지 않소. 옛 시는 마치 옥으로 만든 귀한 술잔과 같아서 저 종묘나 조정 같은 큰 자리에나 쓸 수 있을 뿐, 마을 잔치 같은 자리에서는 흙으로 빚은 그릇이나 도자기 술병만큼 편리하지 못하오. 내가 송나라 시를 버리지 않는 것도 이와 같소. 나는 그저 세상일에 대응하려는 것일 뿐이니 어찌 시의 참된 도를 해칠 수 있겠소. 하물며 왕안석(자는 개보)의 정밀하고 알찬 맛, 소식(자는 자첨)의 시원스럽고 힘찬 기세, 황정견(자는 노직)의 깊고 웅숭깊은 멋, 진사도(자는 무기)의 침착하고 간결한 맛, 진여의(자는 거비)의 부드럽고 환한 정취는, 당나라 시인들 사이에 놓아도 능히 명가로 꼽힐 만한데, 어찌 송나라 사람이라 하여 몽땅 내버릴 수 있겠소."
그러자 힐난하던 사람도 "그렇겠구려" 하고 수긍했다. 그래서 그 말을 이 책 첫머리에 적어 둔다.
명사가시선에 부친 서문 (서기 1610년 9월 17일, 양력 추정)
명나라 사람으로 시를 짓는 이들은 툭하면 "나는 당나라 전성기의 풍모다", "나는 이백과 두보의 계승자다", "나는 육조의 풍류다", "나는 한나라와 위나라의 정통이다" 하고 스스로 내세우며, 저마다 자기가 문단의 우두머리가 될 만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어떤 이는 남의 말을 그대로 베끼고 어떤 이는 남의 뜻만 흉내 내어, 하나같이 남의 집 아래 또 다른 집을 지은 격을 면치 못하면서도 과장되게 스스로 잘났다고 하니, 이는 마치 세상에서 자기 나라가 가장 크다고 우겼다는 저 오랑캐 나라 임금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명나라 효종·무종의 홍치·정덕 연간에는 하늘과 땅의 맑은 기운이 온전하여 뛰어난 인재들이 무성하게 일어났다. 이때 이몽양(호는 북지)이 첫 깃발을 세우고 하경명(호는 신양)이 그 뒤를 이었는데, 그 시가 쟁쟁하고 화려하여 자못 당나라 전성기와 우열을 다툴 만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시절 이런 풍조를 너도나도 좇는 바람에 온 세상이 바람에 쓸리듯 따라 하다가, 결국은 "몸에 성한 살갗이 없다"는 비웃음을 사게 되었으니, 이는 흉내만 낸 자들의 허물이지 어찌 원래의 작가들을 탓할 일이겠는가.
이반룡(호는 역하생)은 뛰어난 재주로 때를 만나 일어나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떨쳤고, 왕세정(호는 오군)이 마침내 그 뒤를 이어 중원 땅에 산처럼 우뚝 서서 천고를 굽어보며 곧바로 한나라의 사마상여, 사마천과 백대 뒤에 우열을 겨루었으니, 아, 또한 기이한 일이다.
이 네 위대한 인물은 참으로 하늘이 재주를 내려 명나라의 융성함을 세상에 울려 퍼지게 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지은 시는 모두 하늘의 조화에 동참하여 뒷사람들에게 빛을 주고 앞사람들을 능가할 만하니, 어찌 흉내나 내고 베끼기만 하는 자들과 나란히 놓고 꼽을 수 있겠는가?
하경명(자는 중묵)의 시는 화창하고 수려하여 옛것을 흉내 낸 흠은 있지만, 육조와 이백·두보의 경지를 자유로이 넘나들어 마치 꽃송이처럼 사랑스럽다. 이몽양(자는 헌길)은 시상을 조이고 늦추는 웅장한 힘이 오로지 두보에게서 나왔지만 도도하고 광대하여 기운이 절로 창대하니, 이 두 사람은 당나라로 치면 개원·천보 연간의 명가라 할 만하다.
이반룡은 우뚝하고 맑고 장엄하여, 논하는 이들이 저 우뚝한 민산과 아미산의 쌓인 눈에 비유하는데 거의 합당한 비유다. 옛 악부시는 그저 옛것을 모방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수천 년 동안 아무도 감히 흉내조차 내지 못하던 것을 이반룡만은 홀로 그 진수와 비슷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가 스스로 말한바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변화를 이루었다"는 말이 결코 헛말이 아니다. 오언시는 그 격률에 꼭 들어맞아 심전기와 송지문의 맑고 힘찬 기풍 그대로다.
왕세정(자는 원미)에 이르러서는 마치 큰 바다가 넘실거리듯 그 축적한 바가 지극히 방대하다. 비록 이따금 격조가 근래의 수준으로 떨어진 것도 있지만, 그래도 만대를 아우르고 백 명의 작가를 망라하며 앞선 세 대가를 자기 나름으로 취사선택하여 채찍질하듯 자유자재로 다루었으니, 무예에 비유하자면 마치 초나라 항우가 거록에서 벌인 큰 싸움과 같다고 하겠다.
이 네 사람에 이르러서는 명나라 시의 정수를 다했다고 할 만하다.
내가 가려 뽑은 이 네 사람의 시는 모두 천삼백여 편, 스물여섯 권이다. 서정경(호는 창곡)·변공(자는 정실)·오국륜(자는 명경)·서중행(자는 자여) 등 여러 사람의 작품도 마땅히 갖추어 두어야 할 것이나, 바빠서 미처 손대지 못했으니 훗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청계집에 부친 서문 (서기 1607년 6월 20일, 양력 추정)
지난 임오년(1582년), 나는 아직 젊었을 때였다. 돌아가신 형님 하곡(허봉의 호) 선생을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 마침 손곡 이달(자는 익지)이 《용성창수집》이라는 책 한 권을 소매에 넣고 찾아와 물었다. "제가 몇 해 전 남원에 갔을 때 백광훈(자는 창경)·임제(자는 자순)·양대박(자는 사진)과 함께 지냈는데, 이 책은 바로 그때 서로 주고받으며 지은 시들입니다. 이 네 사람의 작품 중 누가 뛰어나고 누가 못한지요?" 하곡 선생은 그 시들을 소리 내어 읊어 보시더니 한참 만에 말씀하셨다. "다른 이들의 시도 모두 맑고 산뜻하지만, 좋게 지으려는 데만 힘을 써서 말이 다소 겉도는 느낌이 있다. 아무래도 매끄럽고 원숙한 양대박의 시만은 못하구나." 손곡도 그 말에 깊이 동감했다.
나는 이때 비로소 남녘 땅에 양대박이라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 등계달의 《번경칠자시》를 읽어 보니 양대박도 그 가운데 이름을 올리고 있어서, 더욱더 그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한 번도 직접 만나 보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경인년(1590년) 가을, 화중의 처소에서 마침내 양대박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 그의 고운 용모는 마치 옥이 맑고 봄기운이 온화한 듯했고, 맑은 그의 몸가짐은 마치 노을이 피어오르고 구름이 퍼져 나가는 듯했다. 나아가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흥망성쇠와 뛰어난 인물들의 출처거취를 이야기할 때는 막힘없이 술술 이어져 마치 구슬을 꿴 듯, 강물을 쳐서 바다로 쏟아 붓는 듯했다. 아, 참으로 기이한 인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렇게 하여 그와 사귐을 맺고 자주 오가며, 날마다 듣지 못하던 이야기를 듣고 그가 지은 시를 보게 되었다. 그의 필치는 도도하여 나아갈 때는 냇물이 흐르는 듯했고 멈출 때는 산이 우뚝 선 듯했으며, 소재를 고르는 데는 당나라 시를 본받으면서도 송나라 강서파의 시풍까지 넘나들어 천고 시인들의 우아한 운치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를 몹시 존경하고 감복했다.
임진년(1592년)에 전란을 피해 바닷가에 있을 때, 남쪽에서 온 어떤 사람에게서 양대박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자기 재산을 다 털어 의병을 모집해서 고경명(호는 태헌공)에게 넘겨주고 함께 왜적에 맞서 싸우게 했는데, 그 충의가 강개하고 분발하여 남녘 땅의 사기를 크게 북돋우다가 결국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한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그 절개와 의로움이 참으로 나라를 위한 큰 인물다운 풍모가 있어 결코 한낱 구구한 선비가 아님을 더욱 절감했다.
그 뒤 유성룡(호는 서애) 정승이 지은 양대박의 전기를 읽고서야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또한 눈물을 흘리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까워했다.
정유년(1597년) 봄, 나는 굉사과라는 과거 시험에서 장원으로 급제했는데, 양대박의 아들 양경우(자는 자점)가 마침 과거 명부에 이름을 올리며 아버지와의 오랜 인연으로 나를 찾아왔다. 만나 보니 온화하고 우아하며 문장까지 풍부하여 능히 그 집안의 명성을 이어 갈 만한 사람이었다. 나는 다시금 양대박의 남은 복이 자손에게까지 이렇게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착한 사람을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주 고을의 수령 자리에서 물러나 돌아왔을 때, 양경우가 우리 집으로 찾아와 아버지의 유고를 내게 맡기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의 시는 넉넉히 후세에 전할 만하기에 이제 판각하여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는데, 지금 세상에 재주를 아끼고 선비를 사랑하는 이 가운데 그대만 한 사람이 없고, 우리 아버지를 알아주고 감탄하며 칭찬해 주신 이 가운데도 그대만 한 사람이 없으며, 시의 아름다운 전통을 널리 알려 후세 사람에게 믿음을 전할 만한 이로도 그대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부디 그대가 한마디 서문을 써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그대의 선친은 포부가 남달랐으나 나라의 법에 매여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고 마음에 품은 채 세상을 떠났으니, 이는 뜻있는 이라면 누구나 탄식할 일이다. 다만 등계달은 온 세상에 이름난 선비인데도 그대의 선친을 찬탄했고, 하곡 선생은 평생 안중에 두는 인물이 드물었는데도 그를 자주 칭찬하였으며, 서애 정승은 밝고 지혜로운 군자였는데도 그 행적을 전기로 남겼으니, 글재주도 없는 내가 어찌 그 본말을 새삼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대의 집안에서는 부자 이대에 걸쳐 모두에게 참된 벗이라는 소리를 들은 사람으로는 나보다 더한 사람이 없을 것이니, 어찌 감히 내 글이 거칠고 서투르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마침내 내가 보고 듣고 마음에 아끼고 정을 느꼈던 바를 위와 같이 적어 그 청에 보답하는 바이다. 그의 시문에 관해서는 마치 곡식이나 삼베처럼 일상에 꼭 필요한 것과 같으니, 보는 사람이 마땅히 스스로 알아보고 소중히 여길 것이므로 여기에 굳이 덧붙이지 않는다.
섭생월찬에 부친 서문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세상에서 신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걸핏하면 수련과 화후의 비법을 들먹이며 "나는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 "나는 신선의 몸을 이룰 수 있다", "나는 오래도록 살아 죽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득한 수백 년 동안 실제로 그런 사람을 본 적은 거의 없으니, 이는 다 거짓말이다.
일찍이 호남 땅에서 남궁두라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나이가 아흔인데도 용모가 조금도 늙지 않았기에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저 계절에 맞게 생활하고 음식을 조절할 뿐이라고 답했다. 생각해 보니, 연단술 같은 어려운 수련은 손대기가 쉽지 않지만, 먹고 마시고 움직이고 앉는 일상의 순간마다 몸을 돌보고 잘 기르는 것은 일상생활에 매우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빨리 효과를 거두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또한 확실히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나의 벗 천옹은 도교의 수련법에 조예가 깊어서 노자(자는 백양)가 남긴 뜻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으니, 그가 세속의 낡은 틀을 벗어던지고 한마음으로 참됨을 닦는다면, 신선이 되어 죽지 않는 경지에 이르는 일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다만 상자평(후한 시대의 신선으로 전하는 인물)처럼 세속의 인연에 매여 신선의 경지에 이르는 일이 자꾸 늦어지고 있으니, 아, 대체 누가 그렇게 만드는 것인가?
이 책을 지은 것은 도를 닦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다. 몸을 잘 다스릴 수 있다면 정신을 보존할 수 있고, 혼백을 단련할 수 있으며, 신선이 되어 오래도록 죽지 않을 수도 있다. 처음에는 얕고 가까운 이야기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모두 지극한 도에 이르는 길이니, 그 쓸모가 크지 않은가?
내가 몸을 돌보고 잘 기르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일상생활에 가장 절실하기 때문에 가장 반갑다. 그래서 이를 깨끗이 정리하여 상자 속에 보관해 두고, 늘 마음에 새겨 익히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움직일 때나 고요히 있을 때나 반드시 이를 법도로 삼으려 한다. 천옹이 말하기를 "진실로 이 일에 전념한다면 신선이 되어 죽지 않는 효험은 당장에라도 이룰 수 있다"고 하기에, 나는 머리를 조아려 공손히 그 말을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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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부부고 제5권
9. 22:11
서변비로고 서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5권, 문부 2 · 서 / 조선의 서북 국경(평안도 방면) 방비가 허술함을 통렬히 비판하고 대비책을 촉구한 글. 한문 원문이 전해지지 않아 한국고전번역원 기존 번역문을 내용 이해용으로만 삼아 전면 재작문함)
조선은 산과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좁은 땅이다. 동남쪽은 왜구와 마주하고, 북쪽은 말갈(옛 북방의 이민족)과 국경을 맞대며, 서쪽은 여진족의 세 부족(흔히 삼위 여진이라 불렀다)이 강 하나만 사이에 두고 바짝 다가와 있다. 그런데 정작 이런 나라를 지켜야 할 무기는 낡아 빠지고 병사는 지칠 대로 지쳤으며, 성곽마저 손질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다. 막상 적을 막아 내려 해도 힘이 턱없이 모자란 것이 지금 우리의 형편이다.
북쪽 지역은 조선 왕조가 일어난 뿌리와 같은 곳이다. 그래서 역대 임금들은 일찌감치 국경을 다지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성을 고치고 해자를 파고, 팔도의 재물을 끌어모아 그곳 군사를 먹였으며, 정예 병사와 말을 뽑아 지키게 했다. 그 덕에 급한 일이 터져도 어렵지 않게 막아 낼 수 있었다. 북방 오랑캐들 또한 국경 초소가 촘촘히 이어져 있지 않았기에 이따금 노략질을 벌이기는 했어도, 대군을 몰아 땅을 다투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백 년 동안 자잘한 침탈은 있었을지언정 나라가 크게 상하는 일은 없었다. 남쪽 왜구로 말하자면 넓은 바다가 가로막고 뱃길이 아득히 멀어, 일본 본토는 애초에 먼 곳까지 쳐들어올 마음이 없었다. 다만 그 사이에 자리 잡은 대마도(쓰시마섬, 일본과 조선 사이에 있는 섬)의 왜인들이 꾀와 위협을 앞세워 잇속을 챙기려 들었을 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끌어들여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며 침략의 명분을 만든 것도, 실은 평조신(당시 조선과 일본 사이를 오가며 강화를 주선하던 일본 측 인물)이 두 나라를 얽어 잇속을 보려던 술수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백만 대군이 함부로 밀고 들어와 이 강토를 짓밟은 그 사건은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재앙이지, 해마다 벌어질 일은 아니다. 대마도 왜인들은 그저 교역을 청해 쌀이나 얻어 가려는 정도이니, 남쪽 국경은 그다지 걱정할 것이 없다. 지금 나라의 걱정거리 가운데 가장 크고 심각한 것은 다름 아닌 서쪽 국경이다.
서쪽의 방어선이라고는 압록강 하나와 연평이라는 고개 하나를 믿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겨울이 되어 강이 얼어붙으면 평지나 다름없어져 누구든 마음대로 건널 수 있고, 고개 또한 막혀 있지 않아 말을 탄 채로 쉽게 넘을 수 있다. 그곳만 지나면 수레 두 대가 나란히 달릴 만큼 길이 넓게 트여 있고, 대정강(평안도의 강 이름)에서 사현(고개 이름)에 이르기까지는 막아 낼 만한 지형조차 없다. 적이 일단 강을 건너면 열흘도 못 되어 서쪽 성 아래까지 들이닥칠 것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태평한 세월이 이어지다 보니, 평안도와 황해도 고을들은 그저 연못과 누각을 꾸미고 손님 접대용 물품이나 화려하게 갖추어 중국 사신을 즐겁게 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을 뿐, 국경을 굳건히 해야 할 이유는 아예 안중에도 없다. 문관이든 무관이든 지방 수령들은 그저 세월이나 보내며 임기가 끝나 다른 자리로 옮겨 가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군적에는 이름이 반이나 비어 있고 군사 훈련도 흐지부지된 지 오래다. 성은 무너지고 해자는 메워졌으며, 병기는 녹슬고 군량은 바닥났다. 백성들은 가혹한 수탈에 시달려 강변 여섯 고을 사람들 가운데 열에 여덟아홉이 내륙으로 흘러들어 갔다. 이는 곧 일이 터지면 흙담 무너지듯 순식간에 무너질 조건이 이미 다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구차하게나마 의지할 곳이라고는 오직 명나라뿐인데, 오랑캐 우두머리의 사나움과 명나라의 쇠약함은 이미 중국 자신도 근심하는 바다. 저들의 세력은 날로 커지고 주변 부족들은 날로 꺾여 굴복하고 있으니, 몇 해 지나지 않아 요동 땅조차 알을 쌓아 놓은 듯 위태로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총알만큼이나 작은 우리 서쪽 땅이 짓밟히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으며, 명나라가 반드시 와서 구해 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우리 역사를 살펴본 적이 있다. 요나라가 세 차례, 거란이 한 차례, 몽고가 여섯 차례, 홍두적(원나라 말기의 홍건적)이 두 차례 쳐들어왔는데, 모두 서쪽 변경을 통해 들어왔다.
고려 때는 장수가 잘 단련되고 병사가 강해서 적이 오면 그때마다 물리쳤다. 이는 지략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들의 힘으로 외침을 막아 낸 것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이 미리 방비를 튼튼히 하여 "만만한 상대"로 보이지 않을 태세를 갖추어 놓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백 년 동안 끝내 외침 때문에 나라의 명운을 그르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과연 오늘날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이 고려가 미리 대비하던 그 자세로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좋은 장수를 가려 뽑지도 않고, 병사를 훈련시키지도 않으며, 성곽조차 미리 정비해 두지 않은 채, 조정에서는 팔짱을 끼고 헛된 말로 세월만 보내다가, 혹시라도 일이 터질까 걱정되면 곧바로 "명나라가 위에 버티고 있으니" 또는 "하늘이 반드시 송나라를 도왔듯 우리도 도울 것이니"라는 말로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해 버린다. 아, 우리 땅이 고려 때보다 줄어든 것도 아니요 백성 수가 줄어든 것도 아니다. 저 오랑캐들 또한 완안(여진족, 훗날 금나라를 세운 부족)이나 철목(테무친, 곧 몽고족)보다 강해졌다고 할 수도 없다. 망할 조짐이 이렇게 뻔히 보이는데도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지조차 모르고 있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법과 정치가 밝지 못하고 기강이 서 있지 않아, 고위 관리들이 늘 안일에 젖어 눈앞의 편안함에만 안주해 버린 탓이다.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서쪽 변경을 오간 지가 오늘로 벌써 십이 년이 넘었고, 그동안 산천의 지형을 직접 눈으로 보아 잘 알고 있다. 또한 나이 든 장교와 퇴역한 병사들을 만날 때마다 방비책의 실효성을 물어 그들의 생각을 두루 들어 보았는데,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조정에서 참으로 한 도의 불필요한 경비와 부역을 덜어 내어, 재능 있는 사람을 뽑아 군사 업무를 맡긴다면 좋을 것입니다. 양반이든 천민이든 가리지 말고 젊은이는 군에 편입시키고 늙은이와 아이들은 그들 먹을 것을 돕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략 있는 사람을 뽑아 강변 고을 수령으로 보내고 자금을 넉넉히 대주어 성곽 수리를 맡기고, 산 고개나 좁은 길목마다 관문을 세워 지키게 해야 합니다. 삭주, 구성, 안주 같은 고을에는 진영을 두어 정예 병력을 주둔시키고 보루를 쌓아 방비를 다져야 합니다. 군량과 병력을 넉넉히 갖추고 칼을 벼리고 갑옷을 걸친 채 늘 적이 쳐들어올 것처럼 대비하고 있다면, 저들의 기병이 아무리 수만이라 한들 어찌 함부로 쳐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런 대비는 하지 않고, 그저 '급하면 강화도로 피하면 된다'거나 '안동으로 도망가면 된다'는 말만 늘어놓습니다.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저들도 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런 말이 저 오랑캐들 귀에 들어가면 오히려 마음을 놓고 팔을 걷어붙이며 쳐들어오리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으니, 편히 지내는 고위 관리들의 이런 생각이 어찌 딱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보잘것없는 선비이니 어찌 내 권한 밖의 일을 감히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근심이 깊은 사람은 반드시 대책도 주도면밀하게 마련하는 법이다. 내 마음에 이런 근심이 있으니,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도 오래 생각하면 쓸 만한 생각 하나쯤은 얻는다고 했듯이 나 역시 얻은 바가 없지 않았다.
그래서 고려가 서쪽 국경을 방비했던 기록들을 찾아 앞머리에 싣고, 또한 여지(우리나라 지리서인 《여지승람》 등을 가리킴)에 실린 산천의 형세와 관문 지역의 험하고 평탄한 정도, 그리고 지금의 병력 수와 군량의 많고 적음을 모두 정리하여 두 권의 책으로 엮은 뒤, 제목을 《서변비로고》(서쪽 변경의 오랑캐 방비를 살핀 기록)라 붙였다.
이 책을 상자에 넣어 두고 이 뜻을 알아줄 사람을 기다린다. 세상의 뜻있는 이가 이 글을 보고 받아들여 내가 말한 바가 실제로 행해진다면, 내 근심도 비로소 놓일 것이다.
귀전록 서 (서기 1608년 10월 23일, 양력 추정)
내가 어릴 때 두 형님 밑에서 글쓰기를 배우다가, 그때 처음으로 호남 출신의 김공이라는 분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 자란 뒤에는, 김공이 사문박사(국자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벼슬)로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어서, 심우승(호는 청계) 댁에서 직접 뵐 기회가 있었다. 만나 보니 과연 인정 많고 온화한 어른이었고, 겉치레 없이 속이 꽉 찬 참된 선비였다. 다만 그때 나는 너무 젊어서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그저 마음속으로만 '저런 분이 계시구나' 하고 새겨 두었을 뿐이다.
1601년 봄, 나는 명을 받아 호남의 선비들을 능양에서 시험 쳐서 뽑는 일을 맡게 되었다. 가는 길에 화순현을 지나게 되어, 그 기회에 김공의 집에 들러 마루에 올라 인사를 드렸다. 그새 공은 노인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반가워하며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된 것을 아쉬워했고, 며칠 머무르며 술잔도 몇 번 주고받았다. 공은 그동안 지은 글 수십 편을 꺼내어 보여주었는데, 읽어 보니 문장은 마치 중국 장안과 낙양을 두루 돌아보고 온 사람의 글 같았고, 시는 위응물과 유종원(둘 다 당나라의 이름난 시인이다)의 중간쯤 되는 맛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공의 글이 옛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는 것을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다.
시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공의 집에 들렀다. 공은 식견 좁은 나를 마다하지 않고 책 한 질을 꺼내 보여주었는데, 《귀전록》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끝까지 읽었다. 책의 내용은, 옛날에 세상을 등지고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살았던 사람들을 골라, 그들이 산 시대 순서대로 사실을 정리해 싣고, 거기에 관련된 시와 글을 덧붙인 것으로, 모두 두 권이었다. 나는 감탄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그냥 심심풀이로 쓰신 게 아니고, 공 한 사람만 좋으라고 쓰신 것도 아닙니다. 아마 세상에서 벼슬길로만 정신없이 내달리는 사람들이 이 책을 보고 무언가 깨닫는 게 있어서, 이익과 녹봉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누구나 쉽게 물러날 마음을 먹게 하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이 책이 쓰이는 방식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저도 지금 벼슬살이를 하는 사람인지라, 구름 낀 산속에 들어가 살고 싶은 생각이 늘 마음에 맺혀 있습니다. 언젠가는 벼슬을 내놓고 동쪽으로 돌아가, 감호(중국의 이름난 호수로, 예로부터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는 선비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전해진다) 가에서 남은 생을 보낼 작정입니다. 그러니 이 책은 저에게도 그곳까지 건너가게 해 줄 나룻배 같은 책이 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을 빌려 베껴 두었다가, 나중에 은거하며 지낼 때 들여다볼 거리로 삼고 싶습니다."
그러자 공은 기뻐하며 말했다.
"바로 내가 바라던 뜻이오."
그래서 나는 그 책을 받아 깨끗한 종이에 옮겨 베끼고, 원본은 공에게 돌려드렸다.
그 뒤로 나는 계속해서 큰 고을의 수령을 맡았는데, 감독하러 오는 관리에게 자주 지적을 받으면서도 얼마 안 되는 녹봉에 연연해 스스로 결단을 내려 벼슬을 떠나지 못했으니, 그때 공에게 했던 말을 저버리고 있는 셈이다. 공이 계신 남쪽 하늘 — 예로부터 어진 사람이 있는 곳엔 상서로운 기운이 감돈다던 그 하늘 — 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얼굴이 붉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가끔 상자를 열어 이 책을 들여다보면, 마치 선생님이 직접 쓰신 그 뜻이 눈앞에 환히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 마음에 감탄한 끝에, 이 책을 얻게 된 사연을 이렇게 책머리에 적어, 내가 품고 있는 이 부끄러움과 아쉬움을 풀어 본다.
공의 이름은 공희이고, 문과에 올라 벼슬길에 나섰으며, 관직은 영광 군수까지 지냈다. 지금은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서 지내고 있다.
산으로 돌아가는 해안을 보내며 (서기 1608년 11월 22일, 양력 추정)
나는 고을 수령 자리를 내놓고 부령(지금의 전라북도 부안 지역에 있던 바닷가 고을)으로 옮겨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해안이라는 스님이 무안(전라남도의 한 고을)에서 찾아와 인사를 했는데, 첫눈에 보기에도 기품이 남달라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학식을 떠보니 불교 경전에는 이미 통달해 있었고, 거기에 더해 시와 글에도 능해서 지어낸 글이 상당히 훌륭했다. 어떤 집안 사람인지 물으니 본래 양반 집안 출신이라 했다. 나이를 물으니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났고, 태어난 달과 날, 심지어 태어난 시각까지도 나와 똑같았다. 나는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나는 평소에 사주로 운명을 점치는 사람들이 내놓는 풀이가 대개 맞지 않는다고 의심해왔다. 분명 점술가들이 근거 없이 이론을 만들어 책으로 엮어놓고는, 운 좋게 맞아떨어지는 경우를 내세워 세상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이 일을 보니 그 의심이 더욱 굳어진다.
그대는 나와 태어난 시가 완전히 같은데도 해진 승복 한 벌과 밥그릇 하나로 산속 바위굴에 숨어 살고 있다. 나 또한 세상과 잘 맞지 않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집안을 일으킨 지 열여섯 해 동안 세 번이나 고을 수령 자리에 올랐고, 젊은 시절에는 궁궐 서고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며 글을 짓는 벼슬까지 지냈다. 이렇게 잘되고 못되고, 막히고 풀리는 정도가 서로 이토록 차이가 나는 걸 보면, 태어난 시를 잘못 짚은 것인가, 아니면 점술가가 제대로 가려내지 못한 것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곁에 있던 민정걸이라는 사람이 음양오행을 잘 다루었으므로, 우리 두 사람의 태어난 시를 다시 짚어 추산해 보았다. 그 결과 일찍 죽을 수도 있고 오래 살 수도 있으며, 크게 될 수도 있고 막힐 수도 있지만, 둘 중 누구의 사주에도 집을 떠나 스님이 될 조짐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말했다.
"평소에도 점을 믿지 않았지만, 이번 일을 겪고 나니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더욱 굳게 믿게 되었다."
그렇긴 하지만, 해안은 불교를 믿는 사람이고 나 또한 불교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언젠가 그의 글을 읽어보니 환하게 마음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아 다 헛것으로 돌려버리니, 마치 완전한 깨달음을 바로 눈앞에서 증명해 보이고 부처의 경지로 곧장 넘어가려는 듯했다. 벼슬을 버리고 바닷가에 숨어 사는 것은 본래 한 생애의 인연을 마무리하려는 뜻일 터이니, 설령 엄격한 옛 법도를 지키는 승려들에게 비난과 공격을 받는다 해도 나는 거리낄 것이 없다. 나고 죽음이 없는 이치를 깨달아 번뇌와 몸까지 모두 사라지는 열반에 들어, 달마대사와 홍인대사가 고요히 세상을 떠난 것과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지 않았다 해도 해안과 나는 똑같은 불교도라 할 수 있다.
더구나 해안은 구름과 물 사이에서 스스로 즐기며 마음이 맑고 편안한데, 나는 비방과 모함, 질책과 벌에 시달려 마음 편할 날이 하루도 없다. 좋은 수레를 타고 비단옷을 입고 있어도 오히려 물병과 밥그릇만 들고 다니는 자유로움에는 미치지 못하니, 내가 누리는 영화와 그가 겪는 쓸쓸함은 서로 맞바꿀 만하다. 정말로 그렇다면, 운명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도 어느 정도는 그럴듯하다 하겠다.
열흘 남짓 머물다가 해안이 자기가 있던 산으로 돌아가겠다며 작별을 고하기에, 이 글을 써서 떠나는 그에게 선물로 준다.
황지천시권 서 (서기 1609년 4월 18일, 양력 추정)
나는 젊었을 때 지천 노인(황정욱의 호)을 뵌 적이 있다. 그분은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태도가 몹시 거만해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글에 대해 말할 때 좋다고 인정해 주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우리나라 시에 대해서는 한술 더 떠서, 아예 따져볼 가치도 없다는 듯 순위에 넣지도 않았다.
이를테면 용재 이행 같은 사람을 두고는 "지나치게 기름지다"고 깎아내렸고, 이달에 대해서는 "남의 것을 본뜬 것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 정도이니 그 아래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오직 눌재 박상만은 떠받들며 "아무도 따라갈 수 없다"고 했고, 호음 정사룡과 소재 노수신에 대해서는 "그나마 작가라고 불러 줄 만하다"는 정도로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마치 저 멀리 아득한 은하수를 올려다보는 것 같아서, 그 깊이와 끝을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을 그저 혼자 마음에 담아 두고만 있었다. 그분이 세상을 떠난 뒤로는 남긴 글을 제대로 볼 기회가 없어서 늘 아쉬워했고, 한편으로는 '정작 자신이 쓴 글도 그렇게 큰소리친 만큼 정말 대단할까' 하는 의심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내 벗 조지세가 그분이 근래에 지은 율시 백여 편을 모아 둔 것이 있어서, 나는 비로소 그 글을 직접 읽어 볼 수 있었다. 과연 그 기개와 굳건함, 속 깊고 드넓은 기상은 천 년을 사이에 두고도 홀로 울려 퍼질 만큼 남다른 것이었다.
그 시가 어떤 길을 거쳐 이렇게 되었는지 따라가며 살펴보니, 대체로 눌재에게서 뻗어 나와 노수신과 정사룡의 경지를 넘나들면서 거의 같은 흐름을 타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 두 사람보다 한 수 위였다. 이것을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그가 평소에 큰소리쳤던 말과 실제로 쓴 글이 정확히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아, 만약 이런 분들이 중국에서 태어났더라면 그 성취가 어찌 북지 이몽양이나 제남 이반룡, 태창 왕세정 같은 이들(명나라 때 이름을 떨친 문장가들)보다 못했겠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탓에 그 재능을 다 펼치지 못했고, 천하와 후세에 이름을 널리 알리지도 못한 채 이대로 사라져 전해지지 않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분의 이름은 정욱이고 자는 경문이다. 선조(무덤 이름을 따 '목릉'이라고도 부른다)를 섬겨 광국원훈(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에게 내리는 칭호)에 봉해지고 1품(조선시대 관직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의 지위까지 올랐으며, 한때는 문단을 이끄는 자리까지 맡았는데, 이는 소세양 정승이 그를 밀어준 덕분이었다.
왕자를 모시고 있다가 적의 손에 붙잡혔는데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책을 당해 관직을 빼앗기고 세상을 떠났다. '지천'은 그가 스스로 지어 부른 호이다.
적암유고 서 (서기 1609년 5월 18일, 양력 추정)
조신은 매계(조위의 호)의 배다른 동생이다.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달과 날로 따지면 조위보다 늦게 태어났다.
형과 동생이 나란히 글재주를 타고나서 둘 다 성종의 눈에 들어 아낌을 받았다. 조위는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품계를 훌쩍 뛰어넘어 소사도(호조와 관련된 벼슬 이름)까지 올랐지만, 조신은 신분이 낮아 정식으로 벼슬길에 나설 수 없었다. 처음에는 사알(궁궐에서 찾아오는 사람을 임금에게 알리는 낮은 벼슬)이 되어 궐문에서 임금을 모시는 일을 맡았다.
성종은 아무 때나 그를 불러들여 만났고, 가끔 까다로운 운자를 던져 시를 지어 보라고 시키면 그 자리에서 써서 바쳤는데, 말도 뜻도 다 아름다워서 옷과 비단을 상으로 받곤 했다.
그 뒤 일본에 다녀온 공으로 군직(군대 쪽 벼슬)을 얻었고, 이어서 내시교관(궁중 관원들을 가르치는 벼슬)이 되었다. 얼마 안 가 대군(정실 왕비가 낳은 왕자)의 스승이 되었고, 나라의 법전이 반포되자 그제야 내의원(궁궐의 의료를 맡은 관청)에서 정식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또 북경에 다녀온 공으로 사역원(외국어 통역을 담당하는 관청)의 관원이 되었고, 공을 쌓아 3품 벼슬까지 올랐다. 이쯤 보면 조신은 글재주만이 아니라 여러 방면에 두루 능했던 사람이다.
중종은 어렸을 때 조신에게 배운 적이 있어 두 사람 사이에는 스승과 제자로서 맺은 오랜 정이 있었다. 그래서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조신을 불러 내의원의 수장 자리에 앉히고 책을 편찬하는 관청에서 일하게 했으며, 특별히 당상관(정3품 이상의 고위 품계)까지 올려 주었다. 그런데 간언하는 신하들이 반대하자 그 명을 도로 거두고 말았다.
조신은 일흔다섯에 금산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내가 조신이 남긴 《백년록》이라는 글을 읽어 보니 그의 삶이 대략 이러했다.
성종과 중종, 두 임금이 다스리던 시절은 학문과 문화가 크게 꽃피어서 홍문관이니 예문관이니 하는 학술 기관에 거물로 불릴 만한 원로 학자들이 매우 많았다. 그런데도 다들 조신을 첫손에 꼽았다. 남곤(호는 지정), 박은(호는 읍취), 이문민, 김안로(자는 이숙), 김안국(호는 문경), 이호숙, 김문정 같은 이들이 모두 의문이 생기면 조신에게 물어서 결론을 냈으니, 그들이 조신을 얼마나 높이 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사룡(호는 호음)은 고집이 세고 남에게 잘 굽히지 않아서 누구든 함부로 인정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정진 나루터에 지은 별장에는 조신의 시와 더불어 용재·눌재라는 호를 쓴 두 사람(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원문에 밝혀져 있지 않다)의 작품까지 단 세 사람의 글만 마루에 걸어 두었다. 이것만 보아도 조신이 당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조여익이라는 사람에게서 조신의 시 두 권을 얻었다. 원래 세 권이었는데 한 권은 이미 사라지고 남은 것이 이 두 권뿐이었다.
읽어 보니 시어가 굳세고 절실하며 간결하면서도 무게가 있어서, 대체로 황정견과 진사도(둘 다 송나라의 이름난 시인이다) 쪽의 시풍에서 나왔지만 그보다 한결 부드럽게 무르익은 느낌이었다. 태허라는 호를 쓴 시인(원문 확인 필요)과 견주면, 두루 녹아든 원만함은 조신이 더 나았지만 격조와 울림과 화려한 문채는 그에 못 미쳤다. 그래도 조신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이름난 시인이라 할 만하다.
우리나라에서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세상에 이름을 떨친 사람으로는 어무적, 이효칙, 어숙권, 권응인, 이달, 양대박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조신은 그들보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실제로 나라에 쓰였다.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문서를 작성하는 일은 반드시 그가 맡아 처리했다.
한때 그 많은 대가들이 이렇게까지 그를 받들고 높였는데도, 남아 전하는 시는 이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세상에 묻힌 인재는 다시 얻기 어렵다는 뜻으로 보이는 옛말(원문 확인 필요)이 더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북경에 가는 김자중을 전송한 서 (서기 1610년 9월 22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5권, 문부 2 · 서 / 한문 원문이 없어 한국고전번역원 기존 번역문을 내용 이해용으로만 삼아 전면 재작문함)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기는 자세는 한결같았다. 제후국으로서 지켜야 할 예법, 이를테면 조회에 나가고 선물을 보내고 청원을 올리고 사은하는 일 같은 것들을 앞에 두고 언제나 정성과 예의를 다하고 공경과 삼가는 마음을 잃지 않았으니, 이렇게 해온 지 벌써 이백 년이 넘었는데도 마치 어제 시작한 일처럼 변함이 없다.
그래서 이 일을 맡는 사신도 반드시 학문과 글재주가 빼어나고 예법에 밝으며 옛 법도와 관례까지 잘 아는 선비 중에서 골라 뽑아야 한다. 그래야 임금의 뜻을 제대로 펼치고 사신의 임무를 다하여, 애써 사람을 고른 보람을 저버리지 않게 된다. 그런 까닭에 나라가 세워진 이래 이 인선만큼은 무엇보다 중히 여겨왔으니, 그 뜻을 짐작할 만하다.
사신 밑에는 서장관을 두어 감찰의 권한까지 함께 맡겼다. 일행 중에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가려내어 바로잡는 자리다. 그러니 나라의 법도를 어긴 자라면 비록 정사(사신단의 우두머리)라 해도 서장관의 탄핵을 피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서장관을 뽑는 일도 사신을 뽑는 일에 못지않게 중요했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꺼리는 정도는 오히려 사신 자리보다 한 수 위였다고 한다.
내가 들은 이야기가 있다. 성종 때 정승 윤사분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정희왕후의 동생이었다. 그가 중국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개인적으로 물건을 엄청나게 많이 챙겨 왔다. 그런데 서장관 권경우가 강가에서 이 짐을 뒤져 장물을 찾아냈다. 성종이 이를 알고 윤사분을 불러들여 가두고 법대로 죄를 물으려 하니, 윤사분은 두려움과 걱정에 시달리다 옥에서 죽고 말았다.
권경우는 윤사분이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고 대신이라 해서 봐주지 않았고, 성종도 그가 왕후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감싸주지 않았으며, 왕후 또한 자기 동생을 용서해 달라고 빌어볼 데가 없었다. 이만하면 선왕이 법을 지키는 자세가 얼마나 확고했는지 알 수 있고, 권경우가 권세 있는 친척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은 기개 또한 높이 살 만하다. 임금도 신하도 이렇게만 한다면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까 걱정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요즘 사대부들이 법을 지키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상 여론이 지나치게 각박해서 털끝만 한 실수도 그냥 넘기지 못하다 보니, 억울하게 법에 걸려드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슬쩍 빠져나가는 사람도 많다. 아, 위아래가 모두 법을 바르게 지키면서도 누구 눈치도 보지 않던 성종 시절 같은 그 기풍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을까.
내 벗 김자중은 천하에 드문 선비다. 보고 들은 것이 많고 기억력이 좋으며 글솜씨도 뛰어나, 스무 살 갓 넘어 과거에 올라 줄곧 이름난 벼슬자리를 거쳐 왔다. 몸가짐은 언제나 법도에 맞추었고 옛 어진 이들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공적인 일을 처리하고 법을 집행할 때는 한결같이 정직함에서 출발해 힘 있는 자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당당한 기세에 거칠고 못된 자들도 마음을 고쳤으니, 참으로 곁에 두고 그릇된 일을 바로잡고 잘못을 꾸짖게 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가 언젠가 간언하는 신하가 되거나 감찰을 맡는 관리가 되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서둘러 발탁되어 동지를 축하하러 가는 사신의 서장관으로 뽑혔다. 여론은 "아깝다"며 못마땅해했지만, 자중 본인은 오히려 반겼다. 만 리 밖까지 시원하게 다녀올 기회가 생겼으니 바라던 바에 꼭 맞는다며 아주 기뻐했다고 한다. 나는 이 일을 보고 자중의 그릇이 얼마나 넓은지 알았다. 등용되든 버려지든 그는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법이 없으니, 보통 사람과는 격이 다르다.
인사를 맡은 이들이 그를 추천하고 임금이 그를 뽑아 쓴 데에는 분명 뜻이 있었을 것이다. 위아래가 모두 법과 바른 도리를 지키며 사사로운 정에 끌리지 않던 성종 때의 기풍을 다시 세워보고 싶었던 게 아니겠는가. 자중은 본래 뜻이 무겁고 굳은 사람이니, 가만히 참고 조용히 얼버무리며 조정이 그에게 건 기대를 저버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런다면 저 권경우마저도 요즘 사람들이 너무 물러 터졌다고 웃을 것이다. 자중이여, 힘쓰시게.
이번 사행길에 정사는 덕이 두텁고 사리에 밝아 선비다운 기품으로 일행을 잘 다스릴 만한 분이고, 부사(정사를 보좌하는 사신) 또한 자기 재능을 믿고 당당히 나설 만한 사람이다. 여기에 자중의 강직한 기개와 의기가 더해져 서로 마음을 합쳐 돕는다면, 이 사행의 임무는 반드시 성공을 거둘 것이다. 옛날 오나라의 계찰(어진 덕으로 이름난 오나라 왕자)이 주나라를 찾아가고 정나라의 자산(뛰어난 외교로 이름난 정나라 대부)이 이웃 나라를 예방했던 일과, 시대는 다르지만 그 뜻과 결과는 꼭 닮을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자중이여, 힘쓰시게.
떠나는 자리에서 자중이 나에게 한마디 적어 전송해 달라 청하기에, 이렇게 써서 그를 격려하고 당부한다.
북경에 가는 조지세를 전송한 서 (서기 1610년 10월 1일, 양력 추정)
(성소부부고 제5권, 문부 2 · 서 / 한문 원문이 없어 한국고전번역원 기존 번역문을 내용 이해용으로만 삼아 전면 재작문함)
내 벗 조지세는 마흔이 되도록 과거에 붙지 못해 여전히 시험공부에 매달려 있고, 나는 벼슬하지 않던 선비의 신세를 벗어난 지 열여섯 해가 되었는데도 낮은 자리에 머물러 아직 높은 벼슬아치의 붉은 옷을 입어보지 못했다. 바라는 뜻이 같을 뿐 아니라 세상에서 외면당한 처지까지 닮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되어 마음이 꽤 잘 맞았다. 아침저녁으로 서로 찾아다니며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고, 날마다 시와 문장을 품평하고 옛날과 지금의 일을 따져보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며,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고 이렇게 몇 해를 지냈다.
어느 날 내가 먼 나라로 사신 가는 일의 고생스러움을 이야기하자 지세가 말했다.
"우리가 중국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만으로도 이미 불행한 일인데, 거기다 길 위의 고생을 핑계로 그 웅장하고 멋진 구경까지 놓친다면 이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와 다를 게 뭐 있겠나."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과거에 붙고 그대가 붉은 옷을 입게 되면, 만 리 길 장한 구경을 어찌 같이 안 하겠는가."
나는 대답했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두 번이라도 마다하겠나. 다만 모르겠네, 하늘이 과연 사람 욕심대로 다 들어줄지, 아니면 운명을 가지고 장난치는 심술꾼이 또 훼방을 놓지나 않을지."
그러고는 서로 쳐다보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
1609년(기유년) 여름, 나는 성균관에서 치른 시험에서 세 번이나 장원을 하여 형조참의(형조의 고위 관직)로 승진했고, 그해 초겨울에는 전시(임금 앞에서 치르는 과거의 마지막 시험) 답안을 채점하는 대독관에 임명되었다. 지세도 이때 사책(정책 논술 시험)으로 갑과(과거 합격자 중 최상위 등급)에 급제하여 명성이 자못 높았다. 내가 축하하러 찾아가니 그가 말했다.
"예전에 우리끼리 한 약속, 중국에 함께 가자던 그 약속이 내년쯤엔 이루어지지 않겠나?"
내가 대답했다.
"그대는 이미 급제했고 나도 붉은 옷을 입었으니 원은 다 이룬 셈인데, 모르겠네, 하늘이 사람 바라는 대로 끝까지 다 들어줄지, 아니면 그 심술꾼이 끝내 샘이 나서 또 방해하지나 않을지."
그런데 올봄, 나는 정말로 천추사(중국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는 사신)로 임명되었다. 나는 급히 지세에게 말했다.
"서장관 후보 명단에는 분명 그대 이름이 올라갈 걸세."
그가 웃으며 말했다.
"하늘이 정말 사람 바라는 대로 해줄까?"
마침 인사 일을 맡은 사람에게서 들으니, 지세의 이름이 후보 명단 맨 앞에 올랐는데도 위에서 쓰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
"이것도 그 심술꾼이 훼방 놓은 건가?"
그 후 한 달 남짓 지나 나는 병을 얻어 위태로운 지경까지 갔고, 거듭 상소를 올려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청했다. 지세가 찾아와 나를 다독였다.
"힘써 약을 챙겨 먹으면 병마도 저절로 물러갈 걸세. 그대 재주로 나이와 벼슬이 어찌 이 정도에서 멈추겠나. 내년에는 전에 한 약속도 이룰 수 있을 걸세. 혹시 아나, 하늘이 이 병을 내린 것도 결국 우리 바람을 이루어주려는 뜻일지. 그렇다면 그 심술꾼이 그대를 괴롭힌 게 아니라는 얘기지."
그러면서 정성껏 나를 위로하고 돌아갔다.
결국 나는 이 병 때문에 문책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지세는 오히려 의제랑중(예법과 의식을 담당하는 관청의 관리)으로 승진하여 사은사(중국 황제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러 가는 사신)의 서장관으로 뽑혔다. 나는 한탄했다.
"결국 하늘이 사람 바라는 대로 다 들어주지는 않는 모양이군. 그 심술꾼이 샘이 나서 끝내 훼방을 놓은 게 아니겠나."
지세도 이 일을 못내 아쉬워했다.
떠나는 자리에서 그는 시 한 편을 청하며, 우리의 오랜 우정을 적어 작별의 선물로 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병을 앓은 지 오래라 글 짓는 일과는 멀어진 터인데, 못난 얼굴에 분칠을 하고 미인 행세를 하는 꼴을 어찌 보이겠는가.
그렇다 해도, 빼어난 산천과 아름다운 경관이라면 눈으로 대강 보고 마음에 새겨둔 것이 있다. 언젠가 기념비 기둥을 어루만지며, 학으로 변해 신선이 되어 고향에 돌아왔다는 정령위(옛 전설 속 인물)의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그 신선됨을 선망했고, 주필산(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러 가는 길에 머물렀던 곳)에 올라서는 당 태종이 무력을 과시하다 체면을 구긴 일을 두고 웃음을 지었으며, 의무려산(요동 지역의 이름난 산)을 바라보며 어진 이를 우러르는 마음이 일었고, 백이숙제(은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 산나물만 캐 먹고 살다 죽은 형제)의 사당을 보고는 그 지조 앞에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겹겹의 관문과 거대한 둑으로 중국과 바깥 땅을 갈라놓고, 겹겹의 해자와 층층의 건물로 황제가 사는 곳을 위엄 있게 꾸며놓았으며, 머리 장식과 옷과 패옥은 화려하게 빛나고, 저잣거리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려 그 모습을 노래로 짓거나 글로 그려낼 만한 것이 참 많았다. 하지만 그때는 우리나라가 전란을 겪던 시절이라, 나는 일을 맡은 관리들에게 매달려 사정을 호소하느라 하루도 여유가 없었다. 붓을 들어 뭔가 써보려다가도 걱정과 두려움에 그만두기를 거듭했으니, 꼭 재주가 모자라서만은 아니었다.
지금은 나라가 평안하고 중국도 태평하여 특별한 일이 없으니, 조회 가는 사신들은 그저 시를 짓고 경치를 기록하는 것으로 소임을 삼을 수 있다. 더구나 지세처럼 남다른 재주와 아름다운 문장을 지닌 이라면, 좋은 경치를 마주할 때마다 붓을 들어 글을 지을 것이고, 날마다 눈부신 글들이 그의 주머니에 가득 쌓일 것이다. 이 얼마나 문단을 위해 반가운 일인가.
다만 나는 안타깝게도 그 곁에서 시를 부르면 곧바로 화답하며 서로 주고받지 못하고, 전에 갚지 못한 빚마저 갚을 길이 없게 되어 몇몇 형제들에게나 의지해 지낼 처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나도 모르게 하늘을 원망하고 그 심술꾼에게 분풀이를 하게 된다.
그래서 전에 생각했던 것들을 이렇게 하나하나 풀어내어 작별의 선물로 삼는다. 아울러 사람의 계획이 하늘을 이기지 못하고, 그 심술꾼이 일을 훼방 놓기를 이토록 즐긴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세상 이치를 모르고 헛되이 행운만 바라는 이들을 일깨우고자 한다.
사체성당 서 (서기 1610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이 글을 다 쓰고 나니 어떤 손님이 찾아와 따지듯 물었다. 나는 이렇게 주고받았다.
"어째서 '네 갈래'라는 이름을 붙이셨습니까?"
"일곱 자로 쓰는 '가'와 '행'이라는 노래체 시 두 가지, 그리고 다섯 자와 일곱 자로 쓰는 율시(정해진 격식을 갖춘 정형시) 두 가지, 이렇게 네 가지 형식은 당나라 시가 가장 흐드러지게 피었던 전성기, 이른바 '성당'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틀을 완전히 갖추었다. 그래서 내가 이 책에 고른 시도 딱 그 네 가지, 그 범위까지만 다룬 것이다."
"그럼 왜 성당 시기 것만 고르셨습니까?"
"시를 짓는 재주가 이토록 크게 일어난 시대는 당나라 말고는 없다. 그중에서도 경룡(당나라 중종 황제 때 쓰던 연호)과 개원(현종 황제 때 연호) 무렵이 가장 화려했다. 그 뒤 대력(대종 황제 때 연호) 이후로 내려가면, 솔직히 더 따져볼 가치조차 없다."
"그렇다면 다섯 자로 된 옛 시체, 오언고시는 어째서 빼셨습니까?"
"비유하자면 참선을 논하는 것과 똑같다. 한나라와 위나라 시가 가장 높은 경지에 있다면, 반악과 육기는 이미 그보다 한 단계 떨어진 둘째 경지에 있고, 포조·사령운·조식·강엄(모두 중국 한시를 대표하는 옛 시인들) 같은 이들은 그보다 더 낮은 경지에 있다. 그런데 당나라에 와서는, 그야말로 남의 말을 얻어듣고서야 겨우 깨치는 가장 낮은 수준밖에 안 된다."
"당나라 삼백 년을 통틀어 절구(넉 줄로 끝나는 짧은 정형시)로 이름난 시인이 가장 많았는데, 그건 왜 빼셨습니까?"
"아니, 아니, 그런 말이 아니다. 내가 고른 것은 처음부터 성당 시기의 시뿐이다. 그런데 절구라는 형식은 당나라가 기울어가던 말기까지도 누구나 당연히 짓던 것이어서, 이게 성당 때 지은 것인지 말기에 지은 것인지 딱 잘라 가를 수가 없다. 그러니 내가 따로 가려 실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이백과 두보도 빼버릴 수 있습니까?"
"이 두 사람은 하늘에 맞닿은 거대한 강물을 보는 것과 같다. 됫박 같은 작은 잣대로 어떻게 그걸 재겠는가. 게다가 매씨라는 사람이 골라 엮은 책(정확히 누구인지는 원문 확인 필요)이 이미 두 사람의 시를 충분히 다 담아 놓았으니, 더 보탤 말도 없다."
손님은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갔다. 그래서 나는 이 주고받은 말을 적어 서문으로 삼는다.
당절선산 서 (서기 1610년 11월 29일, 양력 추정)
예로부터 사람들은 "시의 모든 이치는 시경(유교의 경전으로 꼽히는 옛 노래 모음집) 삼백 편 안에 이미 다 갖추어져 있다"고 말해 왔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인정이 넉넉해서 사람의 착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나쁜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국풍(시경 가운데 민간의 노래를 모은 부분)이 가장 뛰어나다. 아와 송(시경 가운데 궁중의 의례와 제사에 쓰인 노래를 모은 부분)은 이치와 논리를 따지는 데 치우쳐서 사람의 본디 감정과는 다소 거리가 생겼다.
한나라와 위나라 이후로도 시를 쓴 사람이 적지 않았고, 그 가운데 아름다운 작품도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지나치게 꼼꼼하고 세세한 데로 흘러 버렸다. 이는 다름 아니라 아와 송의 경향이 지나치게 번져 나간 탓이니, 이런 시를 사람의 본디 마음과 감정을 다루는 참된 시라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당나라에 이르러 시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 수천 명에 달했지만, 대부분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화려하고 곱기만 한 말, 바람과 꽃 같은 가벼운 소재에 치우쳐 시의 바른 기운을 해치는 경우도 있었으니, 결국 백성을 가르치고 이끌어야 할 책임자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것이야말로 시의 정신에 닥친 재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당나라 사람들이 지은 오언절구와 칠언절구로 지금까지 판에 새겨 전해지는 것만 해도 무려 만 수에 이른다. 이 시들은 말은 짧아도 뜻은 멀리까지 뻗어 있고, 표현은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다. 곧이곧대로 할 말을 오히려 뒤집어 말하는 듯하고,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은 도리어 거칠고 투박하게 들린다. 그러면서도 할 말의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말의 자취에만 머물지도 않는다. 풍자하고 간언하려는 뜻을 은근히 품어, 먼저 다른 사물을 노래하고 그에 기대어 속뜻을 펴는 시경의 표현법('흥'이라 부르는 기법)에 실어 전하며, 남을 비꼬아 놀리는 대목도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딱 알맞은 정도를 지킨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 사람을 거듭 감탄하게 만드니, 참으로 국풍이 남긴 울림을 이어받아 시경 삼백 편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다고 할 만하다.
그래서 당시 음악을 다루던 사람들이 이 시들을 가져다 노래 가락에 얹어 불렀다. 왕유나 이익 같은 시인의 작품은 천금을 주고 사들여 궁중 음악(악부)에 올릴 정도였고, 왕창령(자는 소백)과 고적(자는 달부)이 지은 노랫말은 궁중 음악을 맡은 관청인 운소부 소속 기생들까지 모두 외워 부를 줄 알았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당나라의 여러 시인들은 대체로 훌륭했지만, 중당과 만당(당나라의 중기와 후기)에 이르러서는 그 기세가 차츰 기울었다. 그런데 절구만은 성당(당나라의 전성기)이든 만당이든 가리지 않고 시인들의 빼어난 작품이 꾸준히 나와 하나하나가 읊고 외울 만했다. 심지어 저잣거리의 여인이나 세상 밖 신선과 기이한 존재가 지었다는 작품까지도 모두 뛰어났으니, 당나라의 시는 절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한가한 날이면 이반룡(호는 창명)의 《고금시산》, 서자충의 《백가선》, 양사홍(자는 백겸)의 《당음》, 고병의 《품휘》 같은 책들을 꺼내어 그 안에 실린 절구 가운데 빼어난 작품을 골라 몇 수씩 뽑아냈다. 이것을 간추려 열 권으로 묶고 《당절선산》이라는 이름을 붙여 책상 머리에 두고서, 아침저녁으로 틈날 때마다 읊고 외운다.
아, 당나라 절구의 정수는 이 책에 다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시경 삼백 편이 남긴 울림도 이 책을 통해 미루어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본디 마음과 감정을 다루는 시의 길에 이 책이 비록 작게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손곡집 서 (서기 1618년 4월 9일, 양력 추정)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문운이 밝고 아름다워서, 학사와 대부 가운데 시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 수십 수백 명에 이른다. 저마다 전설 속 신령한 뱀이 물고 있었다는 진주처럼 좀처럼 얻기 어려운 보배로운 글귀를 손에 쥐었다고 여기니, 참으로 많고도 성대하다.
대략 나누어 보면 세 갈래 흐름이 있었다.
첫째는 차분하고 점잖으며 원만하고 적절하여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두루 들어맞아, 하나의 독자적인 경지를 이룬 흐름이다. 이 방면에서는 용재 이행 정승(조선 중종 때 정승을 지낸 문신)을 첫자리에 놓을 만하고, 낙봉 신광한, 그리고 영가 부자(영가가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원문 확인 필요)가 그 화려함을 나누어 가졌다.
둘째는 기상이 드넓고 아득하며 정밀함과 깊이를 두루 갖추고 재료가 엄정하고 풍부하여, 한 시대를 대표하는 큰 문장가로 자리매김한 흐름이다. 사가 서거정, 점필재 김종직, 허백당 성현(모두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문신이자 학자) 같은 이들이 이 자리에서 웅대함을 마음껏 펼쳤다.
셋째는 뾰족하고 우뚝하여 생각이 치밀하고 기교가 섬세하며, 기이하고 웅장한 기상과 험준하고 빼어난 멋을 귀하게 여긴 흐름이다. 눌재 박상, 호음 정사룡, 소상 소세양, 지천 황정욱(모두 조선 중기의 이름난 시인들) 같은 거장들이 저마다의 걸출함을 한껏 뽐냈다. 참으로 대단하다.
그러나 부드럽고 너그러우며 도탑고 후하면서도 울림이 바르고 격조가 높아서, 당나라의 개원ㆍ천보ㆍ대력 연간(당나라 시가 가장 활짝 피어난 시절의 연호들)의 법도에 나란히 놓을 만한 이는 세상에 드물었다. 시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점을 못내 아쉬워했다.
예전 홍치ㆍ정덕 연간(명나라 연호로, 조선 성종 후반에서 중종 초반 무렵에 해당한다)에 망헌 이주라는 이가 처음으로 당나라 시를 배워 차분하고 아름다운 시를 썼고, 뒤이어 충암 김정(시호는 문간)이 일어나 위응물과 전기(둘 다 당나라의 이름난 시인)의 소리를 냈다. 이 두 사람은 당시의 참맛을 살짝 엿본 셈이라 할 만하지만, 아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 거기서 그치고 말았다.
그 뒤 융경ㆍ만력 연간(명나라 연호로, 조선 선조 무렵에 해당한다)에 사암 박순 정승이 성당(당나라 시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의 이백을 높이 받들어, 그가 읊은 시가 제법 맑고 높은 기상을 지녔다. 법도로 보면 다소 모자랐지만, 뒷사람을 북돋아 일으킨 공은 적지 않았다.
그러다 늦게 최경창과 백광훈을 얻어 마침내 그 터를 넓고 크게 일으켰으니, 이것이야말로 진나라 말에 진섭이 먼저 들고일어나 훗날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다투는 길을 터 준 것과 같은 격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 무렵, 손곡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는 호음 정사룡에게서 두보와 소동파를 배웠다. 그 읊는 솜씨가 이미 웅대하고 치밀했지만, 최경창ㆍ백광훈과 사귀게 되자 스스로 배운 것이 허술함을 깨닫고 진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배운 것을 모두 내던지고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그의 시는 이백에 뿌리를 두고, 왕유와 유장경(둘 다 당나라의 이름난 시인) 사이를 넘나들었다. 기운은 따스하고 정취는 빼어나며, 빛깔은 곱고 말은 담담했다.
그 고움은 남위와 서시(춘추시대의 이름난 미인들)가 화려하게 차려입고 환한 화장을 한 것과 같고, 그 온화함은 봄볕이 온갖 풀 위에 고르게 내리쬐는 것과 같으며, 그 맑음은 서릿발 같은 물줄기가 큰 골짜기를 씻어 내리는 것과 같다. 그 울림이 맑게 퍼지는 모양은 학을 탄 신선이 하늘 높은 곳에서 피리를 불며 오색구름 너머를 떠도는 듯하다. 끌어당기면 저녁노을 같은 비단과 잔바람에 이는 물결 같고, 펼쳐 놓으면 구슬이 내려앉고 옥이 구르는 듯하며, 두드리고 문지르면 비파 소리의 애절함과 구슬이 부딪는 울림 같고, 누르고 억눌러 놓으면 천리마가 발을 멈추고 용이 몸을 움츠린 것과 같다. 할 일 없이 느긋하게 거닐 때는 잔잔한 물결이 천 리를 굽이치며 흘러가는 듯하고, 태산에 낀 구름이 바위에 부딪혀 흰 옷이 되었다가 이내 푸른 개의 모습으로 바뀌는 것과도 같다(구름이 순식간에 모습을 바꾸는 것을 빗댄 옛 표현이다).
이런 시를 당나라 개원ㆍ천보ㆍ대력 연간에 가져다 놓아도 왕유와 잠삼(당나라의 또 다른 이름난 시인)의 반열에서 크게 기울지 않을 것이며, 우리나라의 여러 이름난 작가들과 나란히 놓고 보아도 그들이 눈이 휘둥그레져 구십 리는 뒤로 물러설 것이다.
옹은 신분이 미천하여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지은 글이 수천 편에 이르렀으나 모두 흩어져 없어지고 남은 것이 거의 없다.
나는 젊은 시절 둘째 형님(허봉을 가리킨다)의 명을 받아 옹에게 시를 배우러 다녔는데, 그 덕분에 시가 가야 할 방향을 알게 되었다.
옹이 세상을 떠난 뒤 남긴 글이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평소 외워 두었던 시 이백여 수를 모아 책으로 엮으려 했다. 그러다 성균관 유생 홍유형의 집에서 다시 백삼십여 수를 얻게 되어, 이재영에게 부탁해 이를 한데 모으고 갈래를 나누어 여섯 권으로 엮게 했다.
옹의 시는 우리나라의 여러 이름난 작가들을 뛰어넘는다. 그러니 내 글 따위를 빌려야 썩지 않고 전해질 까닭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흩어진 시를 애써 주워 모아 천 년 뒤까지 전하고자 하는 것이 내 마음이니, 부처님 머리에 진흙을 덧바른다는(이미 완벽한 것에 쓸데없이 손을 댄다는 뜻의 옛 비유) 꾸지람을 들을지언정 어찌 마다하겠는가.
위아래로 수백 년에 걸친 여러 노련한 대가들을 평하면서 그 사이에 옹을 끼워 넣는다는 것이 얼마나 분수에 넘치는 일인지, 그래서 한 시대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일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지나면 평가는 저절로 정해지는 법이니, 어찌 세상에 이 말을 알아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겠는가. 그래서 끝내 이 글을 써서 서문으로 삼는다.
옹의 성은 이, 이름은 달, 자는 익지이다. 쌍매당 이첨(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친 문신)의 후손이지만 서자 쪽 집안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이며, 손곡은 스스로 지어 쓴 호이다.
성소부부고 제6권
9. 22:12
출처: 성소부부고 제6권, 문부 3, 기
배경: 제6권은 문부 세 번째 갈래인 "기"로 이루어져 있다. "기"는 누각, 정자, 서원, 절, 무덤 같은 곳을 두고 그 내력과 감회를 적은 글이다. 허균이 강원도 강릉·원주 등지에서 지방관으로 지내며 보고 겪은 일들, 옛 인물과 유적을 돌아보며 떠오른 감회, 꿈속에서 겪었다는 신비로운 체험, 그리고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옛사람들과의 상상 속 우정으로 달랜 글까지 모두 열한 편이 실려 있다. 지방관으로서의 실무와 자부심, 신비한 일에 대한 열린 태도, 세상을 향한 거침없는 냉소가 두루 드러난다.
강릉 호숫가 서재, 장서각에 부친 글 (서기 1604년 7월 11일, 양력 추정)
강릉은 영동 동해안 지역에서 손꼽히는 큰 고을이다. 신라 때는 북빈경, 또는 동경이라고 불렀다. 김주원이 이 땅을 다스리는 왕족으로 봉해진 뒤로 집과 거리의 꾸밈새가 화려하고 뛰어나 서울과 견줄 만했고, 고을 풍속이 글공부를 귀하게 여겨서 의관을 갖춘 선비들이 과거 시험장으로 줄지어 몰려들 정도였다. 인심은 두텁고 너그러워 노인을 공경하고 검소함을 숭상했으며, 백성들은 꾸밈없고 성실해서 잔꾀를 부리지 않았다. 물고기와 쌀이 풍족하게 나서, 산과 물의 아름다움이 우리나라 동쪽 땅에서 으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래서 이 고을을 다스리다 떠나는 관리들은 대개 이곳을 못 잊어 눈물을 흘렸다고 하며, 그 때문에 생긴 고갯길 이름이 지금도 남아 있다 — 사람들은 이를 '원님이 울고 넘는 고개'라 불렀다 — 이만하면 강릉이 얼마나 좋은 고을인지 알 만하다.
유인길이라는 분이 이 고을 수령으로 부임해 왔는데, 맑고 엄정하면서도 어질고 너그러워 백성들이 그를 떠받들며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여겼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일으키는 일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선비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는 데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 덕분에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는 선비가 많아졌다.
임기를 마치고 떠나면서 그는 손질이 잘된 인삼 서른두 냥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이건 나라에 바치고 남은 것이오. 돌아가는 짐에 이런 걸 챙겨 가면 뒷말이 날 테니, 그대가 맡아 약으로나 쓰시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이걸 저 혼자 쓸 수는 없지요. 이 고을 학자들과 함께 쓰고 싶습니다." 그러고는 상자에 담아 서울로 가지고 돌아왔다.
마침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그 인삼 판 돈으로 유교의 여섯 경전과 사서, 《성리대전》, 《좌전》, 《국어》, 《사기》, 《문선》, 이백·두보·한유·구양수의 문집, 변려문 모음과 《통감》 같은 책들을 북경 저잣거리에서 사서 돌아왔다. 이 책들을 노새에 실어 강릉 향교로 보냈다. 그런데 향교의 선비들이 자신들은 이 일을 상의한 적이 없다며 받기를 사양했다. 그래서 나는 호숫가에 있던 내 별장의 누각 하나를 비워 책을 보관해 두고, 고을 선비 누구든 빌려 읽고 싶으면 와서 읽고 다시 갖다 두게 했다. 옛날 이공택이 자기 서재를 남에게 개방했던 일과 같은 방식이었다. 이렇게 하면 유인길이 학문을 일으키고 인재를 기르려 했던 뜻을 어느 정도 이룰 수 있을 것이고, 의관을 갖춘 선비들이 줄지어 몰려들던 옛 강릉의 흥성한 모습을 되살릴 수 있다면, 나 역시 그 공을 나눠 가질 수 있을 터이니 이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뜻밖의 화를 당해 벼슬길이 갈수록 쓸쓸해지니, 장차 관인을 내던지고 이 동쪽 땅으로 돌아와 수만 권 책 속의 좀벌레처럼 남은 생을 보내고 싶다. 이 책을 이곳에 갖춰 둔 것이 그런 나의 노년을 즐길 밑천이 될 것이니 그저 기쁠 따름이다. 학생들은 부디 책을 상자에 넣어 좀약을 치고 볕에 말려 잃어버리거나 못 쓰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해 주기 바란다. 그리한다면 하늘의 기운을 살펴 점치는 사람이 필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비슬라 옛 고을 터에 무지개가 하늘을 찌르고 달을 꿰뚫으니, 틀림없이 그 아래 진기한 책이 있구나." 삼가 이 글을 적는다.
(용어) 김주원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6대손으로, 강릉 지역을 다스리는 명주군왕에 봉해져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사서는 논어·대학·중용·맹자 네 책을 가리킨다. 이공택은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젊어서 여산에서 공부한 뒤 과거에 급제하자 자신이 모은 책 만 권을 공부하던 집에 기증하여 누구나 빌려 볼 수 있게 했다. 비슬라는 강릉의 옛 이름이다.
화학루를 고쳐 세우고 쓴 글 (서기 1605년 9월 2일, 양력 추정)
나는 젊었을 때 이것저것 벌이기를 좋아해서,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를 펴 놓고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산천의 아름다움과 누각·정자의 빼어남을 상상해 보곤 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셈이었지만, 몸이 약하고 게으른 탓에 직접 그 경치를 찾아가 보지는 못해 내심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러다 전란을 만나 동쪽으로 피난을 가게 되면서, 대관령 안팎의 진기하고 빼어난 곳들을 남김없이 둘러볼 수 있었다.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하게 된 뒤로는 사신 행렬에 끼어 평안도의 빼어난 경치도 두루 구경하고 북경까지 다녀왔으니, 이만하면 가 볼 만한 명승지의 열에 예닐곱은 본 셈이다. 그런데 유독 요산의 화학루만은 소문은 무성히 들었으면서도 직접 가 보지는 못했다.
1599년, 재해 상황을 살피라는 왕명을 받고 이 고을 경계에 이르렀을 때, 나는 속으로 다행이다 싶어 이번에야말로 이 누각에 올라 빼어난 경치를 보고 묵은 소원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9월 9일 중양절에 고을에 이르러 보니 왕비께서 아직 그곳을 떠나지 않으신 터라 감히 구경도 하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말 위에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누각에는 끝내 오르지 못하는구나. 하늘의 뜻인가. 언젠가 이 고을 수령이 되어 다시 와서 이 못다 한 빚을 갚으리라.'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604년 가을, 요산 수령의 임기가 끝나자 나는 마지막 순번으로 추천되어 운 좋게도 임금의 낙점을 받았다. 아마 하늘이 내 마음을 헤아려 소원을 이루어 준 모양이었다. 기뻐 날뛰며 길을 나선 지 나흘도 안 되어 고을 경계에 이르니 마을 노인들이 나와 맞아 주었다. 나는 대뜸 물었다. "이 누각은 언제 지어졌기에 《동국여지승람》에는 기록이 없습니까?" 노인들이 답했다. "아, 그건 최황이라는 분이 지으신 것인데, 그해가 무인년이라 《여지승람》 편찬 때는 미처 실리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저희 고을을 어질고 밝게 다스리셔서 관리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그리워했지요. 지금까지도 그분을 기리는 노래가 그치지 않고, 비석까지 세워 사모하고 있습니다."
다음 날 새벽 고을에 들어가 보니 과연 우뚝 선 비석이 있었는데, 최황 공의 이름이 길 왼편에 새겨져 있었다. 마침내 관아에 이르러 업무를 처리하자마자 곧장 화학루에 올랐다. 누각은 과연 훤하게 트여 있으면서도 짜임새가 치밀했다.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게 지세에 맞춰 반듯하게 자리 잡았고, 난간과 기둥도 규격에 딱 맞았다. 동쪽에는 충천각이, 북쪽에는 학선당이 있어 추울 때는 따뜻하고 더울 때는 서늘하니 머물며 지내기에도, 쉬기에도 좋았다. 서쪽은 무기고로 둘러싸여 있어, 평화로운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다는 뜻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석양 무렵부터 밤늦도록 둘러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마침내 지난 기록들을 가져오게 해서 살펴보았다. 백성들에게 편리했던 공사, 고을에 이로웠던 일들부터 부엌과 창고에 흙을 바르고 벽을 바른 자잘한 일, 나무 한 그루 돌 하나 배치한 것까지, 누가 처음 시작한 일이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최황 공입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감탄하며, 참으로 유능하고 훌륭한 관리였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현판에 걸린 글을 보니 최황 공이 지은 기문과 시가 있어 되풀이해 읊어 보고서야, 그분이 글솜씨도 이만큼 뛰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둘러보니 지은 지 이미 오래되어 서까래가 썩은 곳이 있고 기와도 삭고 금이 간 곳이 있었다. 단청이 바랜 곳이 열에 일고여덟이었고, 동쪽 누각 터도 반쯤 꺼져 있었다. 나는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이 누각이 세워진 지 벌써 27년이 지났고, 그동안 이 고을을 거쳐 간 수령이 몇 명인데 아무도 이 무너져 가는 것을 바로잡을 책임을 지지 않았으니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외람되이 이 고을에 부임했으니 이를 손봐 되살리는 일은 나의 직책이거늘, 번거롭고 성가시다고 게을리할 수야 있겠는가. 서둘러 내 녹봉의 절반을 털어 목수를 부르고 일손을 모아, 이듬해 7월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썩고 갈라진 목재는 새것으로 갈고, 깨지고 상한 기와는 단단한 것으로 바꿔 끼웠다. 바랜 단청은 다시 색을 입혔고, 꺼져서 기울어진 동쪽 누각 터는 흙으로 다져 나무를 새로 심었다. 처마 끝과 천장, 빈 다락과 붉은 사다리는 옛 모습 그대로 두고 손질만 했으며, 휘장과 방석, 놀이 도구도 새로 갖춰 놓았다.
20일 만에 공사가 끝나자 고을 노인들과 아전들, 그리고 예전 모습을 알던 이들을 불러 보여 주니 모두들 "이제야 누각이 옛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하고 말했다. 낙성하는 날 손님들을 모아 잔치를 벌였는데, 손님 하나가 일어나 말했다. "이 누각을 처음 지은 최공께서는 이미 기문을 남기셨는데, 오늘 이렇게 다시 고쳐 세운 마당에 성주께서는 어찌 글을 지어 이 일을 남기지 않으십니까?"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이곳의 빼어난 경치는 젊었을 때부터 이미 소상히 알고 있었지만, 반평생을 상상만 하다가 다행히 숙원을 이룬 것이오. 이곳의 깊은 산수와 넓고 아름다운 누각은 우리나라에서 견줄 데가 드물 것이오. 다만 하찮은 내 몸으로 외람되이 훌륭한 관리의 뒤를 이어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는 일을 맡았을 뿐이니, 이 빼어난 승경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부족하여 부끄러운 땀에 이미 말문이 막힐 지경이오. 어찌 감히 하찮은 글로 앞사람의 훌륭한 글에 이어 붙일 수 있겠소. 그렇지만 경치를 다시 잘 갖추어 앞사람의 미덕을 기리는 것도 고을을 다스리는 일의 하나이니, 어찌 이 일을 기록해 전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러고는 붓을 들어 위와 같이 적었다. 건물이 지어진 경위와 그 경치의 아름다움에 관해서는 앞사람이 남긴 기문에 이미 다 나와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쓰지 않는다.
(용어) 최황은 조선 선조 때 문신으로, 자는 언명, 호는 월담이다. 수안 군수를 지냈고 훗날 좌찬성 겸 세자이사에 이르렀다.
수헐원에서 신선의 목소리를 들은 일을 적은 글 (서기 1608년 7월 26일, 양력 추정)
내가 공주에 있을 때, 화공을 불러 여러 신선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거기에 찬을 지어 붙인 적이 있다. 그중 이백을 찬양한 글의 마지막 구절은 이러했다. "만 리에 펼쳐진 푸른 물결, 하늘 가득한 밝은 달." 처음에는 이 구절이 얼마나 신묘한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마침 향을 나라에 바치러 서울로 올라가게 되어, 화공을 재촉해 표구를 만들고는 상자에 넣어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서울에 도착한 지 열흘 남짓 만에 돌아오는 길에 직산의 수헐원에 이르렀는데, 마침 관찰사의 중군 민인길과 은진 교수 심우영을 함께 만나게 되었다. 때는 한창 무더운 여름이라 주막 아래로 가서 버선을 벗고 갓도 벗은 채 샘물을 길어 손발을 씻었고, 데리고 온 종 셋이 좌우에서 시중을 들었다. 그 동쪽에 집이 하나 있었는데 초라하고 담장도 낮았으며 인기척 없이 고요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집 안에서 누군가 내가 이백을 찬양하며 지은 그 마지막 구절을 읊는 소리가 들렸다. 그 가락이 맑고 흥이 넘치며 정겹고 시원해서 듣기에 좋았다.
심우영이 먼저 물었다. "방금 시 읊는 소리 들으셨소?" 민인길이 답했다. "나도 들었소." 나는 이상하게 여겼다. 이것은 내가 이백을 찬양하며 지은 구절인데, 지은 지도 얼마 안 됐고 아직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보여 준 적도 없는데 어떻게 남이 알고 있단 말인가.
문하생 정 아무개를 불러 급히 가 보라 했더니, 대문 자물쇠가 단단히 잠겨 있고 안을 들여다봐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우리 세 사람은 이상하게 여겨 직접 낮은 담장 너머로 자세히 들여다보았는데, 과연 텅 빈 집이었다. 먼지 쌓인 걸상과 깨진 항아리 몇 개, 그리고 낡은 벽만 있을 뿐이었다. "주인은 어디 있소?" 물으니, "이 집은 빈 지 벌써 서른 날이나 되었습니다" 하는 답이 돌아왔다.
아, 그렇다면 그것은 신선이었을까, 귀신이었을까. 귀신이라면 대낮에 시를 읊고 소리 낼 리가 없고, 신선이라면 이런 낮고 좁은 땅에 내려올 까닭이 없으니,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심우영이 말했다. "그대의 글이 이백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옛사람도 말하지 못한 경지까지 이르렀으니,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 이백의 넋이 기뻐서 찾아와 읊조리며 그 반가운 마음을 드러낸 것이 아니겠소.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을 것이오."
나는 말했다. "이태백은 하늘의 신선이니 지금쯤 옥황상제가 계신 궁궐에서 노닐고 있을 텐데, 어찌 세상 사람들의 칭찬이나 험담에 일희일비하여 몸을 굽혀 저잣거리까지 내려와 속된 귀에 스스로 영험을 드러내겠소. 결코 그럴 리 없을 것이오." 심우영이 말했다. "하늘과 사람의 이치는 본디 하나라서 저절로 서로 통하는 법이 있기 마련이오. 그대의 말 한마디가 위로 신선의 영혼을 감동시켜, 어느새 그가 숙연히 바람을 타고 내려와 그대 곁에서 노닌 것인지 누가 알겠소. 더구나 그대가 지은 백 편의 찬 가운데 하필 신이 이 구절만을 읊었으니, 나는 그것이 바로 이태백이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 나는 웃으며 "그럴지도 모르겠소" 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일을 글로 적어 두어, 훗날 이 이치를 알아볼 사람을 기다리는 바이다.
정사암을 고쳐 세우고 쓴 글 (서기 1608년 10월 18일, 양력 추정)
부안현 바닷가에 변산이 있고, 변산 남쪽에는 계곡이 하나 있어 우반동이라 부른다. 그 고을 출신인 부사 김청 공이 이 빼어난 곳을 골라 암자를 짓고 '정사암'이라 이름 붙여, 노년에 즐겨 쉬는 곳으로 삼았다. 나는 예전에 사명을 받들어 호남을 오가면서 이곳의 경치에 대한 소문은 여러 번 들었지만 직접 가 보지는 못했다.
나는 본디 명예와 이익을 좋아하지 않아 늘 상자평처럼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고 싶은 뜻을 품어 왔지만, 그 소원을 아직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올해 공주에서 벼슬을 잃자, 남쪽 지방으로 돌아가 이 우반동에 집을 짓고 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김청 공의 아들인 진사 김등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희 선친께서 지으신 낡은 집이 있는데 제가 지키고 있을 형편이 못 되니, 공께서 손보아 사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기뻐서, 마침내 고달부라는 벗과 이씨 성을 가진 벗 둘과 함께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가서 그곳을 둘러보았다.
바닷가를 따라 좁은 길이 나 있어 그 길을 따라 골짜기로 들어서니, 시냇물 소리가 옥이 부딪는 듯 맑게 울리며 숲 속을 졸졸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내를 따라 몇 리쯤 가자 산이 갈라지고 넓은 땅이 트였는데, 좌우로 솟은 가파른 봉우리들은 마치 봉황과 난새가 날아오르는 듯 높이를 가늠하기 어려웠고, 동쪽 산기슭에는 소나무 수만 그루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었다.
나는 세 사람과 함께 곧장 앞으로 살 곳을 향해 나아갔다. 동서로 세 개의 언덕이 있는데 그중 가운데 언덕이 가장 반듯하게 둘러 있고 대나무 수백 그루가 울창하게 푸르러, 여기가 예전에 사람이 살던 폐허였음을 알 수 있었다. 남쪽으로는 넓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데 금수도라는 섬이 그 가운데 떠 있었고, 서쪽에는 숲이 무성한 가운데 서림사라는 절이 있어 승려 몇이 살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 동쪽으로 거슬러 올라 오래된 마을 신목을 지나 정사암이라는 곳에 이르니, 암자는 겨우 방 네 칸짜리로 바위 언덕에 지어져 있었는데, 앞으로는 맑은 못이 내려다보이고 세 봉우리가 높이 마주 서 있었다.
폭포수가 푸른 절벽 위로 쏟아져 내려 마치 흰 무지개가 걸린 듯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시내로 내려가 물을 마시고, 우리 네 사람은 머리를 풀고 옷깃을 풀어헤친 채 못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가을꽃이 막 피어나고 단풍은 반쯤 붉게 물들었는데, 석양이 산봉우리를 비추고 그 그림자가 물속에 거꾸로 비쳤다. 위아래로 둘러보며 시를 읊조리니 어느새 티끌세상을 벗어난 듯한 기분이 들어, 마치 옛 신선 안기생·선문자와 함께 삼신산에서 노니는 듯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다행히 몸이 성할 때 벼슬을 버려 오랜 계획을 이루고 또한 이렇게 은거할 곳을 얻어 몸을 편히 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하늘이 내게 베푼 보답도 참으로 넉넉하구나. 이른바 벼슬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토록 얽매어 놓는단 말인가.
이 고을 원님인 심덕현이라는 분이 암자가 낡아 가는데도 돌보는 이가 없는 것을 보고, 승려 셋을 모아 쌀과 소금 몇 섬을 얹어 주고 목재를 베어 수리하게 한 뒤, 관아의 부역을 면제해 주는 대신 그곳에 머물며 암자를 지키도록 했다. 암자는 이렇게 해서 다시 복구되었다고 한다.
(용어) 상자평은 중국 후한 때의 은사로, 벼슬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간 인물이며 흔히 은거의 뜻으로 인용된다. 안기생과 선문자는 옛 중국 진나라 때 전해지는 신선들이다. 삼신산은 봉래·영주·방장, 신선이 산다고 전해지는 세 산을 가리킨다.
도산 박씨 집안 별장에 부친 글 (서기 1609년 10월 17일, 양력 추정)
서울 동대문에서 40리 떨어진 곳에 도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산 아래는 온통 기름진 땅으로, 평성공 박원종 정승의 현손인 박몽필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1609년, 나는 휴가를 얻어 동쪽으로 성묘를 갔다가 박씨 댁에서 묵게 되었는데, 주인은 나를 몹시 후하게 대접했다. 주인이 말했다. "저희 선조들은 평양공 이하로 모두 이곳에 묻히셨습니다. 칠팔 대에 걸쳐 뽕나무밭을 일구어 왔으니, 사방 십 리 밖까지 모두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지요. 태평한 시절에는 이 근방 인가 수백 채가 다 저희 집 노비였는데, 전쟁을 겪은 뒤로는 대부분 달아나 버려서 개간하지 못한 밭이 열에 아홉입니다. 저는 조상 제사를 받들기 위해 겨우 집 십수 채만 손봐서 남은 종 서넛을 모아 여기서 산 지가 벌써 십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나를 이끌고 집 뒤 언덕에 올랐는데, 예전의 연못과 누대는 다 무너져 흩어졌고, 가시덤불이 우거진 채 무너진 담과 깨진 주춧돌만이 스산한 안개와 야생 덩굴 사이에 남아 있었다. 주인은 손으로 가리키며 하나하나 설명했다. "저기가 사당 자리이고 저기가 안방 자리입니다. 저곳은 한가히 쉬시던 집이었고, 저 땅은 활터, 저기는 곡식 창고였지요. 저 터는 손님을 맞아 잔치를 벌이던 정자였고, 저곳은 풍악을 울리던 집이었습니다. 저 폐허는 격구를 하고 말을 타던 곳이고, 저곳은 아랫사람들이 찾아와 문안드리던 대청이었습니다." 나는 이리저리 둘러보며 그 옛날의 호화롭던 자취를 낱낱이 마음에 새겼다.
아, 사람의 일이란 늘 그대로 있기 어려워 흥하고 쇠함이 번갈아 오는 법이니, 이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다 마찬가지여서 아무리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평성공이 한창 잘나가던 때에는, 그 손으로 세상의 운행을 바로잡아 온 나라 백성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 그 크고 위대한 공적이 나라와 백성에게 두루 미쳤으니, 그가 누린 부귀영화는 바로 그런 노력에 대한 보답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누리며 살았다. 누대와 별채, 살림집으로 몸을 편안케 하고, 노랫가락과 비단옷, 화초와 대나무로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손님과 벗, 제자와 옛 부하들이 대문과 담장 안을 가득 메웠고, 사방 여러 고을에서 보내온 예물이 중국 한나라의 권신 곽광이나 장안세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름다운 여인을 곁에 끼고 흥겨운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고 춤을 구경하며 한창 세도를 부리던 그때, 백 년 뒤에는 논밭과 집이 황폐해지고 정자와 누각이 불타 없어지며, 외로운 후손들은 몰락하여 평민이 되고 손바닥만 한 땅도 지키지 못하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부귀란 이렇듯 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영화란 이렇듯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찌하여 이것을 경계로 삼지 않고, 권세를 탐하고 임금의 총애와 재물에 연연하는가. 스스로는 평성공만큼의 공적도 쌓지 못하면서 평성공만큼의 호사를 누리고 싶어 하고, 게다가 그것이 오래도록 이어지리라 믿고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주인이 이 이야기를 글로 남겨 오래도록 전해 달라 청하기에, 이렇게 별 도움 안 되는 글이나마 적어서 돌려보낸다.
(용어) 곽광과 장안세는 중국 한나라 때 큰 권세를 누렸던 신하들이다.
원주 향교를 다시 세우고 쓴 글 (서기 1609년 10월 28일, 양력)
우리나라는 건국 이래 역대 임금들께서 유학을 받드는 일을 가장 급한 과제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서울에는 성균관과 오부 학당을 두고, 지방에는 부·주·군·현마다 향교를 세워 학생들을 길러 냈다. 이백 년이 지나는 동안 학문과 교육의 찬란함이 중국보다도 나았으니, 참으로 거룩한 일이라 할 만하다.
관립 학교 외에도 서원을 세워 그 지방의 어진 인물을 제사 지내고, 뛰어난 선비를 가려 뽑아 그곳에서 학문을 익히게 했다. 나라에서는 전답과 노비를 내려 먹고살 수 있게 해 주었고, 서원의 우두머리로는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학문과 덕행을 갖춘 이를 뽑아 교육과 서원 운영을 함께 맡겼다. 개성에서 정몽주와 서경덕을 받들고, 영곡에서 조광조를 제사 지내는 것이 바로 이런 예이니, 그 뜻 또한 훌륭하다 하겠다.
그런데 학문을 숭상하는 기풍이 극에 달하자 도리어 겉치레로 흘러, 여러 고을의 선비들이 다투어 이를 흉내 내어 서원을 세우기 시작했다. 선배 중에 조금이라도 도리를 논한 이가 있으면 그 행적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무작정 받들어 모시면서 "누구는 이 고을 출신이고, 누구는 여기서 벼슬을 산 적이 있으니 제사를 지낼 만하다"고 했다. 그마저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지명을 갖다 붙여 강릉의 구산 서원에서 공자를 제사 지내는 것처럼 엉뚱한 경우도 자주 있었다.
서원의 선비들은 논밭을 늘리고 곡식을 불리는 데만 힘써 고을의 권세를 독점하고 제멋대로 위세를 부렸다. 수령조차 감히 건드리지 못했고, 조금이라도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곧바로 이웃 고을 선비들에게 통보해 무리 지어 비방하게 만들어 기어이 쫓아내고야 말았다. 이렇게 되니 서원의 권세가 군수보다 더 무거워져서, 선비로서 서원에 들지 못하면 다들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러는 사이 정작 나라에서 세운 향교는 버림받은 땅이 되어, 그저 군역을 면하려는 자들만 이름을 채워 넣었다. 그러니 사당은 무너지고 뜰은 거칠어져, 봄가을 제사 때가 지나고 나면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그에 반해 서원은 높다란 본당과 넓은 곁채를 갖추고 식구가 백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그런데 조정의 일에 관여하는 게 아니면 그저 관리들의 잘잘못이나 논평하는 데 그치고, 정작 이치를 탐구하고 본성을 궁구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케 하는 학문에는 대체로 어둡기 짝이 없었다. 조정과 지방 관리들이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쉽사리 고치지를 못하니, 무엇이든 극에 달하면 오히려 폐단이 생긴다는 이치가 여기서도 그대로 들어맞았다.
그런데 우리 원주만은 이와 달랐다. 지난 백 년 동안 이곳 사람들은 다들 향교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알아, 고을의 선비들이 모두 향교로 모여들어 정성을 다해 받들었다. 또한 공자·맹자와 정자·주자의 책을 부지런히 외고 익히며, 세상일이나 남의 잘잘못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이곳 선비들은 하나같이 인정이 두텁고 태도가 우아했다. 근년에는 과거에 장원 급제하는 이가 많이 나왔고, 그중에는 재상의 자리까지 오른 이도 있었으니, 가히 학문을 올바르게 익혀 일의 경중과 선후를 안다고 할 만하다.
이유인이라는 수령이 이 고을을 다스릴 때, 창고에 남은 곡식 수백 석을 내고 노비도 함께 내려서 서원을 세우게 했다. 그러자 고을 사대부들이 의논하기를, 그 재물로 향교 동쪽을 넓혀 재실을 하나 더 짓고, 노비를 시켜 남은 곡식으로 이자를 불려 장학금으로 삼자고 했다. 그리고 경서를 잘 외거나 부·논 시험에 합격한 학생은 그 재실에서 지내게 하며 나라에서 식사를 대 주고 '서원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렇게 해서 향교는 더욱 중시되었고 서원의 좋은 제도까지 그 안에 스며들었으니, 사람들은 모두 "핵심을 잘 짚었다"고 칭찬했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로 향교가 어느 정도 복구되기는 했지만 제대로 손보지는 못한 상태였다. 1608년 봄, 임취정이라는 수령이 부임해서 은혜롭게 고을을 다스리니 온 고을 사람들이 기뻐했다. 마침내 그가 고을의 사대부와 학생들을 모아 사당을 다시 지을 방도를 의논하자, 모인 이들이 모두 기꺼이 뜻을 모아 하루도 안 되어 일이 성사되었고, 수령도 자신의 녹봉 절반을 내어 도왔다.
이듬해인 1609년 여름에 공사가 마무리되자, 서원의 전답과 노비까지 함께 내어 동쪽에 집을 세우고 다시 서원생들을 그곳에 살게 했다. 이로써 원주 고을 학교의 옛 모습이 온전히 복구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며 칭찬했다. "수령의 재능과 고을 선비들의 정성이 참으로 훌륭하다. 향교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서원까지 함께 세운 아름다운 뜻은 다른 고을의 본보기가 될 만하구나. 만약 영남의 여러 고을이 다 우리 원주 같다면 나라에서 그 폐단을 걱정할 일이 뭐 있으며, 관리와 유생들 사이에 다툴 일이 뭐 있겠는가." 이렇게만 된다면 이 아름다운 교화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 사람마다 옛날 공자·맹자의 고향 사람들처럼 될 것을 단언하고 기다릴 수 있으리라.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는 기록해 둘 만한 일이다.
이해 시월 초하루에 쓰다.
원주 법천사에 부친 글 (서기 1609년 10월 25일, 양력)
원주에서 남쪽으로 50리쯤 되는 곳에 비봉산이라는 산이 있고, 그 산 아래 신라 때부터 있던 오래된 절인 법천사가 있다. 나는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태재 유방선 선생이 이 절 아래에 살자, 권남·한명회·서거정·이승소·성간 같은 이들이 모두 그를 찾아와 배우며 이 절에서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이들은 훗날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기도 하고 공을 세워 나라를 안정시키기도 했으니, 그 덕분에 이 절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이 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산소가 그 북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 나는 해마다 한 번씩 성묘를 갔지만, 정작 법천사라는 곳에는 아직 가 본 적이 없었다. 올가을 휴가를 얻어 와서 며칠 머무는데, 마침 지관이라는 승려가 산소 근처 암자로 나를 찾아왔다. 이야기를 나눠 보니 그는 기축년에 법천사에서 일 년간 지낸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문득 유람하고 싶은 흥이 일어, 지관을 데리고 새벽밥을 먹은 뒤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험한 두멧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이른바 명봉산에 이르니, 산은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봉우리 네 개가 서로 마주 보는 모양이 마치 새가 날아오르는 듯했다. 시내 두 줄기가 동쪽과 서쪽에서 흘러나와 골짜기 입구에서 하나로 합쳐지는데, 절은 바로 그 한가운데 남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전란에 불타 버려 이제는 터만 남았고, 무너진 주춧돌은 토끼나 사슴이 다니는 길목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며, 비석은 반 토막이 난 채 잡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살펴보니 고려의 승려 지광 스님의 탑비였다. 글도 깊이가 있고 글씨도 힘이 있었지만 누가 짓고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니, 참으로 오래되고 기이한 유물이었다. 나는 해 질 녘까지 그 비석을 어루만지며, 탁본을 뜨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지관 스님이 말했다. "이 절은 원래 대단히 커서 한창때는 상주하는 승려가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전에 지내던 이른바 선당이라는 곳은 지금 찾아보려 해도 어디였는지 가려낼 수가 없습니다." 그 말에 우리는 한참 동안 함께 탄식했다.
절의 동쪽에 돌로 만든 상과 자그마한 비석이 있어 살펴보니 무덤이 세 개 있었는데, 모두 표지석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조선의 정승 이원의 어머니 무덤이었고, 다른 하나는 태재 유방선의 무덤인데 그 아들인 승지 유윤겸이 그 뒤에 묻혀 있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원 정승의 어머니는 바로 우리 선조이신 야당 선생의 따님이시오. 내가 듣기로, 정승이 처음 어머니를 장사 지낼 때 풍수가가 '이 땅에는 왕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 했는데, 결국 이 때문에 죄를 얻어 자손들이 감히 그 곁에 뒤따라 묻히지 못했다고 하오. 태재 선생은 곧 이원 정승의 사위인데 이곳에 살았으니, 아마도 이 때문에 끝내 곤궁하게 살다 세상을 떠나 여기 묻히게 된 것이 아니겠소. 워낙 오래된 일이라 정확히는 알 수 없구려."
이리저리 거닐며 옛일에 마음 아파하다가 지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삶에 곤궁과 영달, 흥함과 쇠함이 있는 것은 참으로 운명이오. 그리고 영원히 남는 명성이란 이런 데 있는 것이 아니오. 이원 공은 좌명공신으로서 정승의 자리에 올라 한때 부귀와 권세가 자자했고 사람마다 우러러 따랐지만, 결국 그 때문에 미움을 사서 버림받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소. 유윤겸은 세종대왕을 모시는 시종신이 되어 궁궐을 드나들며 거듭 큰 은총을 입고 마침내 왕명을 전달하는 요직까지 맡았으니, 귀하게 되었다 할 만하오. 그런데 태재 선생은 학문과 덕행을 지니고도 집안에 우환이 있어 벼슬길이 막힌 채 곤궁하게 지냈소. 삼베옷 한 벌로 몸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날마다 끼니를 걸러 가며 도토리와 밤 따위를 주워 먹으며 산속에서 곤궁하게 살다가 남은 생을 마쳤소. 지금 그의 시를 보면 마치 곤궁했던 당나라 시인 맹교나 가도와 같으니, 얼마나 궁핍하고 고달팠는지 짐작이 가오. 앞의 두 분과 견주면 영달과 초췌함이 하늘과 땅 차이인데,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태재 선생의 글을 읊으며 그 인품을 그리워하고 있소. 심지어 이 보잘것없는 산과 촌스러운 절도 딱히 기이하거나 화려한 구경거리가 아닌데도 세상에 이름이 나고 《동국여지승람》에까지 실려 전하고 있소. 그런데 저 화려하게 드날리던 두 분은 지금 어디에 있소? 몸만 땅에 묻혀 사라진 게 아니라, 그 이름을 말해도 사람들은 어느 시대 사람인지조차 모르지 않소. 그렇다면 한때 누린 이득이 어찌 만대에 이름을 전하는 것과 같을 수 있겠소? 후세 사람들에게 둘 중 하나를 고르라 한다면 앞의 것을 고르겠소, 뒤의 것을 고르겠소?"
지관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다만 두보의 시에 '천추만세의 이름은 죽은 뒤의 적막한 일일 뿐'이라는 구절이 있지요. 옛사람 중에는 명성이 도리어 짐이 된다며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은 이들도 있었으니, 대체 그들은 홀로 무슨 마음이었을까요?" 나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말로 그대들 불가의 가르침이 아니오." 그러고는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돌아섰다.
1609년 9월 28일에 쓰다.
(용어) 유방선(호는 태재)은 조선 세종 때 학자로, 그 문하에서 권남·한명회·서거정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지광은 고려 문종 때의 국사로, 이 법천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원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고려와 조선을 함께 섬긴 인물인데, 세종 때 노비 문제로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야당선생은 고려의 문신 허금의 호로, 허균의 선조다. 맹교와 가도는 당나라 때 가난에 시달리며 시를 지은 것으로 유명한 시인들이다.
상원군의 옛 왕릉, 왕총에 부친 글 (서기 1610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상원군 북쪽으로 15리쯤 되는 곳에 왕산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 북쪽에 나무 하나 없이 민둥하게 우뚝 솟은 산이 있어 이를 '왕총'이라 부른다.
1607년 7월에 큰비가 내려 이 왕총이 무너졌다. 마을 사람 조벽이라는 이는 어려서 승려가 되어 글을 조금 아는 사람인데, 무덤이 무너졌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살펴보았다. 무덤 구덩이의 깊이는 두 길 남짓 되었는데, 벽돌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네 귀퉁이를 빙 둘러 통로는 없이 돌로 뚜껑을 덮어 놓았다. 뚜껑을 들춰 보니 푸른 옥돌로 덮여 있고 그 틈은 재로 막아 놓았으며, 그 안에는 기와로 만든 관을 안치하고 풀과 나무로 만든 인형들을 늘어놓았으며, 도자기·솥·술잔 등이 매우 많이 놓여 있었다. 북쪽에는 등이 하나 있었는데 기름이 반쯤 남아 있었고, 뼈 두 무더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무덤 남쪽에는 돌로 만든 종이 흙에 묻혀 있어서 깨끗이 씻어 보니 '신명대왕묘'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글씨체가 크고 투박했다. 조벽은 마을 노인들을 불러 모아 삼태기와 가래로 흙을 날라 다시 무덤을 덮었다.
그날 밤 조벽의 꿈에 붉은 옷을 입고 금띠를 두른 신인이 나타나, 조벽과 함께 일한 사람들에게 두루 감사 인사를 하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왕총의 신이오. 그대들이 내 유골을 다시 묻어 준 큰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히 풍년을 들게 하여 보답하겠소." 그 후로 삼 년 연달아 과연 큰 풍년이 들었고, 노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병에 걸리거나 일찍 죽는 이가 없었다니, 참으로 신령스럽지 않은가. 조벽이 내게 찾아와 들려준 이야기가 바로 이러했다.
내 생각에는, 우리나라에 지도와 문헌이 드물어 삼국 시대 이전의 일은 상고할 길이 없지만, '신명왕'이라는 칭호는 고구려 역사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니 주몽의 후손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이 무덤이 성천에서 가깝고, 성천은 옛날 송양국이 있던 곳이니, 아마도 이 무덤의 주인은 그 나라의 왕이 아닐까 싶지만 내가 감히 확신할 수는 없다.
옛날에 제후들은 무덤에 긴 통로를 만들지 않았고, 무덤을 '능'이라 높여 부르지도 않았으며, 옛 성인들은 지나치게 후하게 장사 지내는 것을 그릇된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이 왕총은 통로도 없이 그저 '묘'라 칭했으니 예의에 맞고, 금은보화를 넣지 않아 도둑맞을 일이 없게 했으니 지혜롭다 할 만하며, 게다가 죽어서도 백성들에게 복을 내려 그 은혜에 보답했으니 어질다 할 만하다. 지혜롭고 어질고 예의까지 갖췄다면, 살아서는 훌륭한 임금이었고 죽어서는 밝은 신령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사관들이 이를 빠뜨려 그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했으니, 이에 이 글을 지어 역사에서 빠진 부분을 조금이나마 채워 넣는 바이다.
(용어) 송양국은 고구려 초기에 있던 부족국가로 비류국이라고도 하며, 그 왕 송양이 고구려 동명왕 2년에 항복하여 병합되었다.
임창헌에 부친 글 (서기 1610년 11월 15일, 양력 추정)
심우민이라는 사람은 서울을 떠나 아선현 북쪽 지방으로 내려와 살았는데, 그곳 지명이 송령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직접 농사짓고 채소를 가꾸며, 밭 갈고 낚시하는 이웃들과 어울려 살면서 평생을 그렇게 지내려 했다.
그가 어느 날 나를 찾아와 말했다. "저는 바닷가에 살아 물고기와 소금에서 이득을 보고, 땅이 기름져서 해마다 반드시 풍년이 들며, 백성들은 순박하고 이곳은 외진 곳이지요. 저는 이곳이 몹시 마음에 들어 사는 곳 남쪽에 집을 짓고 임창헌이라 이름 붙였는데, 노년을 여기서 즐기며 살고자 합니다. 공께서 저를 위해 기문을 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무릇 정자나 집을 지을 때는 반드시 땅이 탁 트이고 넓은 곳을 골라야 하고, 경치가 아름답고 산수가 빼어난 곳이라야 자리 잡을 만하오. 그런데 아선은 외지고 초라한 고을인데, 어째서 하필 여기에 정자를 지었소?"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 집은 서쪽으로 큰 바다가 있고 넓은 들판이 우뚝 펼쳐져 있으며, 가야산·연암산·용성산 같은 여러 산이 좌우로 둘러싸고 있어 푸른 봉우리 빛이 창가에 은은히 비치지요. 남쪽으로는 큰 방죽이 가로질러 있는데 연꽃과 수초가 뒤덮여 있고, 일조사와 망월사 같은 절들이 눈앞에 서로 마주 보여, 새벽 종소리와 경쇠 소리가 늘 구름과 안개 자욱한 그 사이에서 울려 옵니다. 집 앞뒤로 소나무·대나무·온갖 꽃을 심어 놓았더니 봄이면 고운 새들이 지저귀지요. 저는 안석에 기대어 배를 문지르며 하루 종일 시를 읊고 휘파람을 부니, 이만하면 정자라 부를 만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물었다. "임창헌이라 이름 붙인 것은 무슨 뜻이오?" 그가 답했다. "이 정자에서 바라보는 것 중 가장 큰 것이 바다입니다. 멀리 보면 큰 파도가 만 리에 뻗쳐 곧장 중국 산둥 땅에 맞닿아 있는 듯하고, 바람과 물결이 용솟음칠 때면 신기루가 들락날락하며, 장삿배와 고깃배들이 돛을 달고 오가며 저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른바 '구름이 드리우니 큰 붕새가 날아오르고, 파도가 요동치니 큰 자라가 자취를 감춘다'는 옛 시구가 딱 들어맞는 풍경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저는 세속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입니다. 만약 하루라도 제 마음에 딱 맞는 삶을 살며 제 뜻을 기를 수 있다면, 그 즐거움이 벼슬살이보다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정자를 지어 그런 삶을 굳히려는 것이지요. 저 금띠를 두르고 옥패를 울리는 벼슬아치들은 몸은 화려할지 몰라도 정작 자기 마음에 딱 맞는 삶을 살지는 못합니다. 저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옳은 말씀이오. 서울에서 벼슬하는 높은 관리들은 벼슬자리를 제 집처럼 여기며 백 년이라도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으리라 여기지만, 하루아침에 쫓겨나면 돌아갈 곳조차 없어 낭패한 채 떠도는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오. 그런 처지가 되면 손바닥만 한 땅 한 조각을 얻고 싶어도 뜻대로 안 되지요. 그런데 그대는 지금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고 이렇게 빼어난 곳을 골라 정자까지 지어 스스로 즐기고 있으니, 그 지혜로움이 벼슬아치보다 만 배는 나은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어찌 이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래서 마침내 이 글을 지어, 세상 화를 미처 내다보지 못하고 이익만 탐내는 자들에게 경계로 삼는 바이다.
주흘옹의 꿈 이야기를 적은 글 (서기 1610년 11월 29일, 양력 추정)
주흘옹이라는 호를 쓰는 유연숙이라는 사람을 나는 20년 전 과거 시험장에서 처음 만나 사귀었는데, 서로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중년에는 함께 과거에 급제하기도 했다. 주흘옹은 이따금 높은 벼슬에 오르기도 했지만, 나는 벼슬길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신세를 면치 못한 채 서울에서 벼슬자리를 구하러 이리저리 다녔으므로 서로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도 가끔 친구 집에서 만나면 몹시 반가워하며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근년에 서쪽 변방에서 함께 벼슬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세상 여론에 동조하지 않고 가슴속에 쌓인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늘어놓은 적이 많았다. 때로는 유교·불교·도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는 이따금 이치를 따져 설명하기도 했지만 그다지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았다.
올해 토산으로 성묘를 갔다가 단주의 한 민가에서 묵게 되었다. 그날 밤 주흘옹의 꿈에 검은 옷을 입은 자가 나타나 그를 끌고 가는데 몹시 빨랐다. 놓아 달라고 애걸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큰 관청에 이르니 무장한 호위병들이 몹시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고, 문을 네 겹이나 지나는 동안 보니 집 모퉁이마다 갑옷과 방패로 진을 치고 있었다. 대전에는 주렴이 드리워지고 촛불이 밝혀져 있었으며, 좌우 행랑에는 푸른 옷을 입고 상아 홀을 쥔 관리들이 문서를 처리하고 있었다. 거의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뜰에 나뉘어 서서 소장을 심사하고 있었는데, 남녀가 뒤섞여 있으면서도 엄숙하여 떠드는 이가 없었다.
검은 옷 입은 자가 주흘옹을 계단 중간쯤에 무릎 꿇게 했다. 잠시 후 옅은 황색 가사를 걸친 젊은 승려 넷이 서쪽 계단에서 내려와 손가락질하며 "저 사내는 예전에 우리 불법을 배척한 자다" 하고는 빙 둘러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조금 있으니 대전 위에서 주렴이 걷히며, 멀리 원유관을 쓰고 자줏빛 옷에 옥으로 된 띠를 두른 이가 보였다. 그가 안석에 기대어 "아무개를 국문하라" 명하니, 붉은 옷을 입은 관리 하나가 뜰 가운데로 내려와 종이와 붓을 쥐여 주며 대답을 쓰라고 했다. 주흘옹은 영문을 몰라 붓을 쥐고도 쓰지 못했다.
그런데 그 관리는 예전부터 알던 사람 같았는데, 손톱으로 문서 뒤에 몰래 이렇게 적어 주었다. "평생토록 불교를 비방한 적이 없습니다. 동료인 허 아무개가 압니다." 주흘옹은 즉시 이 내용대로 대답을 적어 냈다. 그러자 전상에 앉은 이가 "그럼 허 아무개를 데려와야겠구나" 했다.
잠시 후 동쪽 회랑의 첫째 문이 열리며 희미하게 패옥 소리가 들리더니, 화양건을 쓰고 흰 도포에 검푸른 바지, 붉은 비단 속옷을 갖춰 입고 구슬 달린 신발에 자줏빛 혁대를 두른 이가 나타났다. 그는 동쪽 계단으로 올라와 왼쪽 기둥 곁에 서서 주흘옹을 슬쩍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주흘옹이 고개를 들어 흘깃 보니, 바로 나였다.
전상에서 물었다. "이 사람이 그대를 증인으로 내세워 자기가 불법을 비방한 적이 없다고 증명했는데, 정말 그러한가." 내가 답했다. "저 사람이 비록 선교의 깊은 이치에는 통달하지 못했지만 크게 배척하지도 않았습니다." 전상에서 웃으며 "그렇다면 어서 놓아주어라" 했다. 검은 옷 입은 자가 주흘옹을 데리고 대문을 나서는 순간, 그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깼는데 이미 닭이 울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주흘옹이 맨 먼저 나를 찾아와 그 꿈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며 말했다. "그대가 비록 인간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어 있는 모양이오." 나는 이렇게 답했다. "도교와 불교는 우리 유학에서 굳이 말하지 않는 것들이오. 나는 마땅히 스스로 정성과 밝음의 학문을 다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안케 하는 일에 힘쓸 뿐이지, 굳이 떠들며 시비를 가려 배척할 것까지야 없다고 여기오. 내가 예전에 불교에 아첨한다는 탄핵을 받은 적이 있긴 하지만, 내가 어찌 불교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겠소. 다만 딱히 비방하지 않았을 뿐인데 세상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이 꿈이야 우연일 테니 딱히 믿을 만한 것은 아니지만, 도를 알지도 못하면서 억지로 아는 척하는 세속 사람들에게는 경계가 될 만할 것이오." 그러고는 붓을 들어 이 일을 기록해 두었다.
주흘옹은 술을 좋아해서 취하면 혀가 꼬여 말을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흘'이라는 호를 스스로 지었다고 한다.
순군부 신당의 마루를 두고 쓴 글 (서기 1611년 2월 27일, 양력 추정)
1610년 겨울, 나는 과거 전시의 시험관 중 하나인 대독관을 맡았는데, 그때 마침 내 조카가 급제를 했다. 그러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내가 사사로운 정을 개입시켰다는 혐의를 걸어 번갈아 상소를 올려 국문할 것을 청했다. 임금께서는 이 주장을 옳다고 여겨 나를 의금부에 가두셨다.
처음 옥에 들어가던 날 저녁, 국경을 지키던 변방 장수 여럿이 함께 갇혀 있었는데, 그들이 나무를 깎아 남자 성기 모양을 만들고 있기에 무엇에 쓰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이 답했다. "순군부의 신령은 여자분이시라 이런 걸 아주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갇힌 죄수들이 이걸 바치며 복을 비는 것이지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죽은 이가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만이지만, 알고 있다면 어찌 감히 이런 걸로 희롱한단 말이오. 귀신을 업신여기고 예의를 모독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는데, 이런 것으로 복을 빈다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 아니겠소."
이윽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꿈에 신을 모신 사당에 가 보니 신은 열예닐곱쯤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소녀였는데 화장기 없는 얼굴에, 위로는 자줏빛 실로 짠 저고리를, 아래로는 옅은 황색 명주치마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비녀도 꽂지 않은 채 얼굴을 찡그리고 앉아 있다가, 나를 보자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예를 갖추며 말했다. "대부께서는 밝고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지난밤 하신 말씀이 제 생각과 꼭 맞았기에, 이렇게 모셔 온 것은 제 마음속 깊이 맺힌 원한을 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절을 올려 답례하려 하자 신은 몸을 일으켜 나를 붙들고 절을 못하게 막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량 땅의 명문가 출신입니다. 명나라 영락 연간에 제 아버지는 찬성사 벼슬을 지내셨고 집에는 시녀도 많았지요. 그때 저는 열일곱 살로 아직 시집가지 않은 처녀였습니다. 뜰에는 꽃이 한창 만발해서 저는 여러 시녀들과 함께 뒤뜰에서 달구경을 하고, 밤 삼경이 되자 혼자 앞채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웬 불량배가 담을 넘어와 제 머리채를 휘어잡고 겁탈하려 하기에 제가 소리치며 힘껏 반항했습니다. 그러자 그 불량배는 발각될까 겁이 나서 칼을 뽑아 제 배를 베고는 남쪽 담을 넘어 도망쳤는데, 그 담 너머는 마침 이웃에 사는 한 서생의 집이었습니다. 날이 밝아 집안사람들이 뒤쫓아 가 보니 그 담장에 핏자국이 있었고, 그래서 다들 그 서생이 저를 죽였다고 여겨 순군부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형조와 사헌부, 한성부 세 관청이 번갈아 가며 몹시 처참하게 고문을 하니 그 서생은 거짓으로 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옥사는 곧 마무리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전날 밤, 이 사건을 맡은 관리 유정현의 꿈에 나타나 '내일 낮에 커다란 검은 나비가 판부사의 모자 끝에 앉을 것이니, 즉시 관리를 풀어 그 나비를 쫓게 하면 진범이 저절로 잡힐 것이다'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이 꿈을 세 관청의 여러 관원들에게도 두루 보여 주었습니다. 날이 밝자 관원들이 모여 저마다 꾼 꿈을 맞춰 보니 모두 똑같았습니다. 다들 이상하게 여기며 지켜보았는데, 정말로 한낮이 되자 나비 한 마리가 판부사 유정현의 모자 끝에 날아와 앉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낭리에게 명해 그 나비를 뒤쫓게 했더니, 마시 거리에서 범인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나비가 바로 그자가 쓴 굽은 챙의 삿갓 위에 앉았던 것입니다. 그자를 꽁꽁 묶어 순군부로 끌고 오니 단 한 번의 심문 만에 죄를 자백하여 곧 처형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저는 제 원수를 갚고 그 서생의 억울함도 풀어 주었습니다. 그 뒤로 순군부 사람들이 저를 신령스럽게 여겨 제사를 지내고 향불을 올린 지가 벌써 이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제사야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지만, 날마다 음란한 모욕을 당해 왔으니 저는 이를 몹시 수치스럽게 여겨 낯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옥에 갇힌 이들이 제때 재판을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오래도록 지체되어 옥중에서 죽는 일까지 있었는데, 이는 모두 제가 이 일을 분하게 여겨 그렇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으로 물려받아 이 잘못된 관습을 고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슬퍼할 만한 일입니다. 이제 대부의 밝은 지혜를 빌려 세상에 이 사정을 알리고자 하니, 대부께서는 부디 이를 잘 말씀해 주십시오."
신은 이어서 말했다. "공은 지금 액운이 무거우니, 혹시 견책을 받는 은전이 내려지거든 남쪽 지방으로 가는 것이 가장 길할 것입니다." 나는 답했다. "어찌 감히 신령님의 밝은 말씀을 세상에 알리지 않겠습니까." 그러고는 일어나 읍을 하려는 순간 번쩍 잠에서 깼다. 아, 참으로 신령스러운 일이 아닌가. 나는 즉시 함께 갇힌 이들에게 이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다들 "그렇겠군요" 하며 나무로 깎은 성기 모양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그러자 과연 함께 갇혔던 장수들이 잇달아 풀려났고, 나 역시 남쪽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으니, 이 또한 꿈이 들어맞은 것이다.
'순군'이란 옛날 의금부를 부르던 이름이다. 조선 초에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순군부를 두고 도만호·상만호·부만호·만호 네 사람이 총괄해 다스리게 했는데, 나중에는 의용순금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세조 때 이르러 지금의 의금부라는 이름이 되었다. 그런데도 옥에 딸린 하인들은 옛 습관대로 지금까지도 '순군'이라 부르는 까닭에, 이 신에게도 그처럼 순군부군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용어) 유정현은 조선 초의 문신이다.
사우재 기 — 네 벗의 서재에 부친 글 (서기 1611년 3월 21일, 양력)
이 서재를 '사우재', 곧 '네 벗의 집'이라 이름 지은 까닭은 무엇인가. 나에게 벗이 셋 있는데 내가 그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보니 합쳐서 넷이 되는 셈이다. 나머지 세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세상 사람이 아니라 모두 옛사람이다. 나는 성격이 소탈하고 거침없어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하니, 당시 사람들이 무리 지어 나를 꾸짖고 떼 지어 배척했다. 그래서 문을 찾아오는 이도 없고, 밖에 나가도 마음 맞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탄식했다. "벗이란 오륜의 하나인데 나만 홀로 이것을 갖지 못했으니, 어찌 심히 부끄럽지 않겠는가."
물러나 생각해 보니, 온 세상이 나를 하찮게 여겨 사귀려 하지 않으니 내가 어디 가서 벗을 구하겠는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옛사람 가운데 사귈 만한 이를 골라 벗으로 삼기로 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는 진나라의 처사 도연명이다. 그는 한가하고 고요하며 매인 데 없이 활달하여 세상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고, 가난도 편안히 여기며 주어진 운명을 즐기다가 자연의 흐름을 따라 삶을 마쳤다. 그 맑은 풍모와 빼어난 절개는 아득하여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나는 그를 몹시 사모하지만 도저히 그 경지에는 미칠 수가 없다.
그다음은 당나라 한림학사 이태백이다. 그는 비범하고 호탕하여 온 세상을 좁다 여기고 귀인들을 개미 보듯 했으며, 스스로 산수 사이를 마음껏 떠돌았으니, 나는 그를 부러워하며 따라가려 애쓰는 처지다.
또 그다음은 송나라 학사 소동파이다. 그는 마음이 활짝 트여 남과 벽을 두지 않으니, 현명한 이든 어리석은 이든, 귀한 이든 천한 이든 누구나 그와 더불어 즐거워했다. 이는 옛 유하혜가 자신의 빛을 감추고 세속과 어울렸다는 것을 본받으려는 것인데, 나는 아직 그런 경지에도 이르지 못했다.
이 세 분 군자는 문장으로도 천고에 이름을 떨쳤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그들에게는 그저 부차적인 일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세 분에게서 취하는 것은 그들의 삶과 인품이지, 문장 그 자체가 아니다. 이렇게 세 분 군자를 벗으로 삼는 마당에, 어찌 속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소매를 맞대며 소곤소곤 귓속말이나 나누는 것을 벗 사귀는 도리로 삼겠는가.
나는 화가 이정에게 명하여 이 세 군자의 초상을 똑같이 그리게 하고, 거기에 찬을 지어 붙인 뒤 명필 석봉 한호에게 해서체로 쓰게 했다. 어디에 머물든 그 자리 한쪽에 반드시 이 초상을 걸어 두니, 세 군자가 엄연히 마주 앉아 서로 시비를 가리고 평가를 나누며 마치 함께 웃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심지어 그들의 말소리와 인기척까지 들리는 것만 같아, 홀로 지내는 쓸쓸함을 좀처럼 느끼지 못했다. 이렇게 하고 보니 비로소 나도 오륜을 온전히 갖추게 된 셈이었고, 이제는 더더욱 세속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즐겁지 않게 되었다.
아, 나는 사실 글재주도 변변찮아 세 분 군자가 부차적으로 남긴 문장에도 미치지 못하고, 성격도 솔직하고 어리숙해서 감히 그런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 바랄 처지도 못 된다. 다만 그분들을 존경하고 사모하여 벗으로 삼고자 하는 이 정성만큼은 신명을 감동시킬 만하다고 믿는다. 그래서인지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나의 행보는 어느새 은연중에 그분들과 꼭 맞아떨어졌다.
도연명은 팽택 현령이 된 지 팔십 일 만에 벼슬을 벗어던졌는데, 나는 세 번이나 고을 수령이 되었지만 그때마다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갑작스레 배척받아 쫓겨났다. 이태백은 심양과 야랑으로 유배 갔고, 소동파는 어사대 옥에 갇혔다가 황주로 유배 갔다. 이는 모두 어진 이들이 겪은 불행이지만, 나 역시 죄를 지어 형틀에 묶이고 매를 맞는 고문을 겪은 뒤 남쪽으로 유배되었다. 아마도 조물주가 장난삼아 그 어려움만은 나에게도 똑같이 맛보게 했지만, 타고난 재주와 성품까지는 갑자기 옮겨 줄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하늘의 복을 입어 혹시라도 시골로 돌아가도록 허락된다면, 관동 지방은 나의 옛 고향 땅이라 그 경치와 풍물이 중국의 시상산이나 채석산에 견줄 만하고, 백성은 부지런하고 땅은 기름져서 중국의 상숙현이나 양선현에도 뒤지지 않는다. 그곳에서 세 군자를 모시고 호숫가에서 벼슬하기 전의 소박한 옷차림으로 돌아간다면, 어찌 인간 세상의 한 가지 즐거움이 되지 않겠는가. 저 세 분 군자께서 이 마음을 아신다면 역시 장차 즐겁고 유쾌하게 여기실 것이다.
내가 사는 집은 한적하고 외져서 찾아오는 이가 아무도 없다. 오동나무가 뜰에 그늘을 드리우고, 대나무와 들매화가 집 뒤에 줄지어 심겨 있다. 나는 그 그윽하고 고요한 정취를 즐기며, 북쪽 창가에 세 군자의 초상을 펼쳐 놓고 향을 사르며 읍을 올린다. 그래서 마침내 이 서재의 편액을 '사우재'라 짓고, 그 사연을 이와 같이 기록해 둔다.
1611년 2월, 봄맞이 제사를 지내는 날에 쓰다.
(용어) 도연명(도원량)은 중국 진나라의 대표적인 은일 시인이다. 이태백은 당나라의 대표적 시인으로, 자유분방한 삶으로 유명하다. 소동파(소자첨)는 송나라의 대문호로, 여러 차례 유배를 겪으면서도 활달한 삶의 태도를 잃지 않았다. 유하혜는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현인으로, 남과 잘 어울리면서도 자신의 지조를 잃지 않았다는 '화광동진'의 고사로 유명하다. 이정은 조선 선조 때의 유명한 화가로 산수화와 인물화에 뛰어났고 글씨도 잘 썼다. 석봉은 명필 한호의 호다. 초복은 벼슬하기 전에 입던 옷, 곧 벼슬하기 전의 소박했던 시절을 뜻한다.
성소부부고 제7권
9. 22:12
출처: 성소부부고 제7권, 문부 4, 기
배경: 제7권부터는 "기"라는 갈래의 글들이 실려 있다. 기는 어떤 장소나 사물, 사람에 얽힌 사연을 적어 두는 글이다. 외조부의 옛집을 되찾아 손질한 이야기, 장인이 지은 서원 이야기, 강릉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신비로운 옛이야기, 조상의 초상화를 되찾아 표구한 이야기, 벗들이 지은 정자와 서실 이야기, 고을살이를 잘한 수령을 기린 글 등이 실려 있어, 허균의 집안 내력과 강원도·전라도 지방에서 맺은 인간관계, 그리고 세상을 보는 그 나름의 눈이 두루 드러난다.
애일당 이야기 (서기 1592년 9월 20일, 양력 추정)
강릉부에서 30리쯤 되는 곳에 사촌이라는 마을이 있다. 동쪽으로는 넓은 바다에 닿아 있고 북쪽으로는 오대산·청학산·보현산 같은 산들이 바라보인다. 백병산에서 흘러나온 큰 냇물 하나가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데, 이 냇물을 따라 위아래 수십 리에 걸쳐 거의 수백 가구가 살고 있으며, 모두 양쪽 언덕에 의지해 냇가 쪽으로 문을 내었다.
냇물 동쪽 산은 북대산에서 뻗어 내려와 구불구불 이어진 모습이 마치 용 같은데, 바닷가에 이르러 문득 솟구쳐 사화산의 봉수대가 되었다. 봉수대 아래에는 옛날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냇가가 무너질 때 늙은 교룡 한 마리가 그 밑바닥에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그 교룡이 신유년(1501년) 가을에 그 바위를 깨뜨리고 떠나면서 바위가 두 동강 나 구멍이 문처럼 뚫렸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이를 "교룡의 문바위"라 불렀다.
조금 남쪽으로는 언덕 하나가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름을 쌍한정이라 한다. 이 고을 사람인 박공달과 박수량이 노닐던 곳이라 그렇게 이름 붙였다. 이곳의 산수가 울창하고 깊숙하며 기운이 힘차게 솟구치는 까닭에, 예로부터 이 땅에서 유난히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났다.
나의 외조부이신 참판 어른께서는 바다에 가장 가까운 자리를 골라 이 집을 지으셨다. 새벽에 일어나 창을 열면 해돋이를 볼 수 있는 자리였는데, 마침 노모를 모시며 부모의 늙음을 안타까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에 계셨으므로,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에서 "애일당"이라 이름 붙이셨다. 명나라의 오희맹이라는 이가 큰 현판 글씨를 써 주었고, 공용경이라는 이가 시를 지어 읊었는데, 그러자 당대의 여러 이름난 이들이 잇달아 화답하는 시를 짓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집은 이 일로 강릉 땅에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임진년(1592년) 가을,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왜적을 피해 북쪽에서 배를 타고 교산에 이르러, 이 집을 청소하고 거기서 지냈다. 외조부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어느덧 서른세 해가 지난 뒤였다. 뜰에는 풀도 베지 않아 덩굴이 묵어 엉키고 잡목이 무성했으며, 담은 무너지고 집은 곧 내려앉을 듯했고, 지붕은 금이 가고 벽은 벗겨져 있었다. 시를 적어 걸어 둔 현판은 반도 남아 있지 않았고, 빗물이 새어 들보와 서까래를 더럽혀 어떤 곳은 이미 썩어 있었으며, 창문과 지게문도 삭아 문드러진 곳이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고 통곡하며 우셨다. 나는 서둘러 종들을 재촉하여 더러워진 것은 쓸어 내고 덩굴은 걷어 내어, 집을 깨끗이 치우고 그곳에서 지냈다.
아, 선조께서 이 터를 힘써 닦고 늙은 부모를 모실 곳을 마련하시느라 이토록 부지런히 애쓰셨는데, 후손 된 우리가 변변치 못하여 이 몇 칸 되지 않는 집조차 지켜 내지 못하고 무너지게 하였으니, 그 죄가 참으로 크다. 나는 비록 부족한 사람이나 마침 노모를 모시고 이 집을 이어받아 지키게 되었으니, 하루하루를 아끼는 그 마음이 어찌 선조 대에서 끊어지게 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마음을 다하고 힘을 쏟아 정성껏 이 집을 보전함으로써 어머니의 마음을 편안케 하고 선조의 터전을 손질하여, 한가로이 노닐며 편안히 지내다가 생을 마친다면, 저세상에서라도 외조부를 다시 모실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이렇게 기록하여 뒷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한다.
(용어) 박수량은 명종 임금 때의 학자이자 효자로, 사섬시 주부라는 벼슬을 지내다가 기묘사화 때 파직되어 강릉으로 돌아와 조카 박공달과 함께 시와 술을 즐기며 여생을 보낸 인물이다. "애일"이란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안타까워한다는 뜻으로, 자식이 부모를 오래도록 모시고 싶어 하는 마음을 비유한 말이다.
반곡서원 이야기 (서기 1593년 4월 16일, 양력 추정)
사촌 마을에서 서쪽으로 10리를 가면 두 산이 맞닿는 곳이 있는데, 흐르는 냇물이 그 사이를 돌아 나가고 그 위쪽으로 깊은 골짜기가 있다. 울창하고 심원하며, 맑은 여울과 고운 바위가 위아래로 서로 비친다. 골짜기에 들어서서 한 마장도 못 가면 비탈에 바위가 있는데, 냇물 동쪽에서 물이 들이쳐 폭포를 이루고 흩날리는 물거품이 자욱하며 그 소리가 은은히 우렛소리 같다. 단풍나무·삼나무·소나무·상수리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해를 가려, 그 빽빽하고 깊숙하며 맑고 상쾌한 정취가 참으로 세상을 등진 이가 노닐며 지내기에 알맞았다.
나의 장인이신 직장 어른께서 이곳에 집을 짓고 사셨는데, 이름을 반곡서원이라 하였다. 공은 우뚝하여 남다른 기상을 지니셨고, 학문에 힘써 문장에 능하셨으나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하셨기에, 늘 세상 밖에서 노닐고자 하는 뜻을 품고 계셨다. 그래서 벼슬을 버리고 떠돈 옛사람 상자평을 본받고 싶어 하셨지만, 노부모를 모시고 있어 그 뜻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셨다. 마침내 부모님을 여의시자 관직을 내려놓고 이름난 산들을 두루 유람하며, 선의 이치를 깊이 깨치고 본성의 근원을 꿰뚫어 보게 되셨다. 한 해의 반 이상을 금강산에서 지내셨고, 집에 계실 때도 시를 짓는 승려 한둘을 곁에 두고 이따금 거리낌 없는 행동을 하며 세상을 흘려 넘기셨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손가락질하며 웃음거리로 삼았으나, 공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홀로 기뻐하며 자부하셨다. 만년에는 이 서원을 짓고 책 천 권을 갖추어 그 안에서 노닐며 시를 지어 스스로 즐거워하셨다. 여든 살에 병 없이 돌아가시니, 어떤 이는 신선이 되어 떠나신 것이라고도 했다.
공의 맏아드님이 그 뒤를 이어 그곳에서 살고 계신데, 하루는 나를 이끌고 함께 놀러 가셨다. 시냇가를 따라 복숭아나무 백여 그루가 서 있어 꽃이 반쯤 떨어져 있었고, 비단결 같은 물결이 도도히 흘렀으며, 그윽한 꽃과 야생초가 우거져 사랑스러웠다. 새들은 숲 사이를 오르내리며 갖가지로 지저귀는데, 마치 노니는 사람을 놀리는 듯했다. 소나무 그늘이 땅에 드리우고 이끼가 방석처럼 깔린 자리에서, 형님께서는 나를 위해 술과 안주를 차리시고 시녀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여 흥을 돋우셨다. 술기운이 조금 오르자 돌을 딛고 발을 씻으며 양지쪽에서 머리를 말리고, 천지를 굽어보니 한없이 넓어 마치 허공에 기댄 듯한 생각이 들어 그 상상이 몹시 유쾌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나는 형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하늘이 무심하여 지금 한창 전쟁이 그치지 않으니, 서울의 이름난 집안들도 선대의 가업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갈 곳을 정하지 못하는 이가 태반인데, 우리 강릉 땅은 전쟁의 화가 그리 심하지 않아 고을과 마을 어디에도 불타 무너진 집이 없습니다. 형님께서는 선친께서 남기신 가업을 삼가 지켜 그 책과 기물 하나 썩거나 잃어버린 것이 없고, 또한 유유히 누워 쉬시며 즐거이 평생을 보내고 계십니다. 이는 물론 조상께서 덕을 쌓아 하늘이 은밀히 도와주신 바이기도 하지만, 아버님의 가업을 저버리지 않고 훌륭히 이어받은 것은 형님께서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셨기 때문이니, 어찌 대단하지 않다 하겠습니까." 형님께서는 기뻐하시며 "그렇겠구나. 나를 위해 이 말을 적어 벽에 걸어 두면 좋겠다" 하셨다. 나는 마침내 붓을 들어 이 일을 적는다.
별연사에 얽힌 옛이야기 (서기 1596년 4월 12일, 양력 추정)
강릉부 남쪽에 큰 냇물이 있고, 그 냇물 남쪽에 별연사라는 절이 있으며, 절 뒤쪽 언덕은 연화봉이라 부른다. 노인들이 전하기를, 주원공의 어머니이신 연화부인이 예전에 이곳에 사셨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봉우리 이름을 지었고, 절은 곧 그 옛집 자리라고 한다. 절 앞에는 돌로 된 못이 있는데 이름을 양어지, 즉 "물고기를 기르던 못"이라 한다.
노인들은 또 이렇게 전한다. 옛 명주 땅에 어떤 서생이 있었는데, 이곳으로 공부하러 왔다가 한 처녀와 혼약을 맺었다. 처녀의 부모는 이 사실을 모르고 딸을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려 하자, 처녀가 편지를 못에 던졌는데 한 자쯤 되는 잉어 한 마리가 그것을 물어다 서생에게 전해 주어 마침내 그 인연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을 엮은 이가 이 이야기를 믿어 옛 자취를 적는 항목에 실어 놓았다.
그 기록에는 "혹은 그 서생이 동원군 함부림이라고도 한다"고 되어 있는데, 나는 속으로 이를 의심했었다. 봉우리 이름이 이미 부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니, 절은 분명 그 부인이 살던 집 자리일 것이다. 그런데 이 절이 신라 시절에 세워졌다면 강릉부는 그때 아직 "동원경"이라 불리던 시절일 텐데 어찌 "명주"라 했을까? 또 절 안에 어찌 사람이 처녀를 데리고 살았을 수 있을까? 더구나 함부림 공은 조선 건국 때의 공신으로 원래 이 고을 사람이었는데, 어찌 그보다 훨씬 이전인 고려 초 명주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를 등장시키며 "이곳에 공부하러 왔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이야기가 거짓임을 보여 주는 단서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거짓이 거짓인 채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데도 옛 기록을 널리 살펴 그 잘못된 부분을 밝혀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병신년(1596년) 봄, 관찰사로 순행하던 정구 선생께서 평창군에 이르렀는데, 그 고을이 옛 동원경 시절에는 강릉부에 속해 있었으므로 고을 사람 중에는 지금까지도 그 시절 이야기를 전하는 이가 있었다. 선생께서 옛 문서들을 두루 물어 아전에게서 옛 기록을 얻으셨는데, 그것을 내게 가져와 보여 주셨다. 살펴보니 강릉부사를 지낸 이거인이 쓴 글이 여럿 있었고, 그중에 연화부인의 사연이 매우 자세히 실려 있었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신라 시절 명주는 동원경이라 불렸는데, 그곳을 다스리는 유후관은 반드시 왕자나 왕실 친척, 장수와 재상, 대신 가운데서 맡게 하였고, 웬만한 일은 그 아래 고을들에 알아서 처리하도록 맡겨 두었다. 왕의 아우 되는 무월랑이라는 이가 있어 어린 나이에 그 자리를 맡았는데, 업무는 보좌관의 말을 따라 대신 처리하게 하고 자신은 화랑도를 이끌고 산과 물 사이를 노닐었다.
하루는 홀로 이른바 연화봉에 올랐는데, 한 처녀가 있어 용모가 매우 빼어났고 돌로 된 못에서 옷을 빨고 있었다. 낭은 기뻐하며 그 여인을 유혹하였는데, 처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양반 집안 출신이라 예를 갖추지 않고서는 혼인할 수 없습니다. 낭께서 아직 혼인하지 않으셨다면 혼약을 맺을 수는 있으나, 정식으로 예를 갖추어 맞아 주셔야 늦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미 낭께 마음을 허락하였으니 다른 이에게 시집가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낭은 이를 허락하고, 이후로 안부를 묻고 선물을 보내기를 끊이지 않았다. 임기가 차서 낭이 서라벌로 돌아가 반년 동안 소식이 없자, 처녀의 아버지는 딸을 북평 마을의 한 청년에게 시집보내기로 하고 이미 날짜까지 정해 놓았다. 처녀는 감히 부모께 사정을 말씀드리지 못하고 속으로 몰래 애를 태우다가 마침내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
하루는 못에 가서 예전의 맹세를 떠올리며, 기르던 못 속의 황금 잉어에게 말했다. "옛날에 잉어 한 쌍이 편지를 전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너는 내게서 오래도록 보살핌을 받았으니 낭이 계신 곳까지 나의 마음을 전해 줄 수 없겠니?" 그러자 갑자기 한 자 반쯤 되는 황금 잉어가 못에서 튀어 올라 입을 딱 벌리는데, 마치 승낙하는 듯했다. 처녀는 이를 신기하게 여겨 옷소매를 찢어 글을 썼다. "저는 감히 혼약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나 부모님의 명을 앞으로는 거스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낭께서 만약 이 맹약을 버리지 않으셨다면 서둘러 아무 날까지 이르러 주시면 아직 가능하지만, 그렇지 못하시면 저는 마땅히 목숨을 끊어 낭을 따르겠습니다." 이것을 잉어의 입속에 넣어 큰 냇물에 던지니, 잉어는 유유히 사라졌다.
그다음 날 새벽, 무월랑은 아랫사람을 알천에 보내 물고기를 잡아 오게 했는데, 회를 뜰 생선을 찾던 중 금빛 나는 한 자짜리 잉어가 갈대 사이에 있는 것을 보았다. 아랫사람이 이것을 낭에게 가져다 보였더니, 잉어는 펄쩍 뛰며 빠르게 움직여 마치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했고, 잠시 뒤 거품을 한 되쯤 토했는데 그 속에 흰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이상히 여겨 읽어 보니 처녀가 손수 쓴 것이었다. 낭은 즉시 그 편지와 잉어를 가지고 왕께 아뢰었다.
왕은 크게 놀라며 잉어를 궁궐 안의 연못에 놓아주게 하고, 급히 대신 한 사람에게 명하여 비단을 갖추게 하고 낭과 함께 동원경으로 말을 달려가게 하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 겨우 약속한 날짜에 맞춰 도착했다. 도착해 보니 유후관을 비롯한 여러 관리와 고을 노인들이 모두 잔칫상 아래 모여 있어 자리가 무척 성대했다. 문을 지키던 관리가 낭이 오는 것을 이상히 여기며 "무월랑이 오십니다!"라고 소리쳐 알렸다. 유후관이 나가 맞이해 보니 대신이 함께 와 있었다. 마침내 그간의 사연을 낱낱이 알려 드렸다. 북평 마을의 신랑은 이미 도착해 있었으나, 대신이 사람을 보내 혼례를 잠시 멈추게 했다. 처녀는 하루 전부터 병을 핑계 대며 머리도 빗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어머니가 아무리 다그쳐도 듣지 않아 한창 꾸지람을 듣던 중이었는데, 낭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 벌떡 일어나 곱게 단장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아갔다. 이렇게 하여 양가의 혼인이 무사히 이루어지니, 온 고을 사람이 모두 놀라며 신기해하였다.
부인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곧 주원공이요 둘째는 훗날의 경신왕이다. 신라의 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뒤를 이을 자손이 없자 나라 사람들 모두가 주원공을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하필 그날 큰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갑자기 불어났다. 주원공이 알천 북쪽에서 사흘이나 물을 건너지 못하자, 나라의 재상이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하고는 마침내 경신을 왕위에 올렸다. 이 때문에 마땅히 왕위에 올랐어야 할 주원공은 즉위하지 못하고, 대신 강릉 땅에 봉해져 주변 여섯 고을을 받아 명원군의 왕이 되었다. 부인은 주원공에게 가서 봉양을 받았는데, 살던 집을 절로 만들었으며 왕은 해마다 한 번씩 찾아와 어머니를 뵈었다. 사대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지며 명주가 되었고, 신라도 뒤이어 망하였다.
나는 이 기록을 보고서야 비로소 이 못에 얽힌 사연을 남김없이 알게 되어, 마치 구름을 헤치고 해를 본 듯한 기분이었다. 더욱이 고을 노인들이 전하던 이야기가 얼마나 소략한지, 또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내용이 얼마나 엉성한지도 알게 되었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께서는 주원공의 후손이시니, 곧 이 부인은 나의 조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찌 언제까지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내가 태어난 근원을 흐리고 욕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이렇게 낱낱이 갖추어 기록하여 강릉부의 옛 기록으로 삼는다.
(용어) 주원공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6대손인 김주원을 가리키며, 명주군왕에 봉해졌고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함부림은 조선 개국공신으로, 처음에는 명성군에 봉해졌다가 뒷날 동원군으로 다시 봉해졌다. 이거인은 고려 때 경상우도 관찰사를 지냈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판개성부사를 지낸 뒤 청성백에 봉해진 인물이다.
돌아가신 형조참판 성공의 초상화 이야기 (서기 1599년 9월 18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는 초상화를 즐겨 그리지 않는다. 그래서 초상을 그려 후세에 전하는 이가 매우 드물고, 오직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들만 초상화가 있는데, 그마저도 관아에서 그려 준 것이지 그 집안에서 따로 그리게 한 것이 아니니 그 솜씨가 얼마나 엉성하고 볼품없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반면 중국 사람들은 이름난 이나 훌륭한 선비라면 으레 초상화가 있어 오랜 세월 전해지므로, 뒷사람들이 그 그림을 우러르며 마치 그 사람을 직접 뵙는 듯이 여긴다. 심지어 자손들도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초상을 그려 걸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섬기기를 마치 살아 계실 때 말씀을 받드는 듯이 한다. 이로써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온전히 품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뒷날의 자손들도 비록 직접 얼굴을 뵙지는 못했어도 그 그림 앞에 나아가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어 마치 살아 계신 날과 같이 여기게 되니, 이 어찌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가 초상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돌아가신 형조참판 성순조 공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길에 올라 세종·문종·세조 세 임금을 섬겼는데, 강직하다는 칭송이 자자하였고 여러 차례 큰 고을을 맡아 그 소임을 훌륭히 해내었으며,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벼슬에서 형조참판으로 발탁되었다. 일찍이 신숙주의 청혼을 물리친 일이 있어 이 때문에 공신의 반열에는 들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 처신을 훌륭하게 여겼다. 공의 증손 되는 희는 곧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의 외조부이시다.
공에게는 그려 둔 초상화가 있어 서손 되는 윤박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나도 어릴 적에 한 번 뵌 적이 있다. 전란이 일어났을 때 그 집에서는 두루마리를 잘라 옷으로 싸서 연안 땅에 모셔 두었는데, 내가 마침 부사로서 그 고을에 이르렀을 때 찾아가 삼가 살펴보았다.
공은 긴 수염에 붉은 얼굴, 넓은 이마에 우뚝한 콧대, 번개처럼 번뜩이는 두 눈을 지니셨고, 조복을 입고 관을 쓰신 채 의자 위에서 두 손을 마주 잡고 앉아 계셨는데, 늠름하여 위엄이 있었고 정신이 상쾌하여 금방이라도 움직이실 듯했다.
나는 그 앞에 삼가 서서 이렇게 아뢰었다. "공께서는 임금이 총애하는 재상에게도 굽히지 않으시어 비록 공신의 명부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하셨으나, 자손이 능히 그 초상을 그려 정성껏 모신 지가 지금까지 백오십 년이니, 후손들로 하여금 이 초상을 뵙고 우러러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함이 마치 살아 계신 것과 같고 그 말씀을 직접 듣는 듯합니다. 어찌 반드시 관아에서 그려 준 초상이라야 영광스럽다 하겠습니까? 또 듣자니 나라를 세운 이래 열다섯 차례의 공신 책봉이 있어 그 초상을 그린 이가 거의 수백 명에 이른다는데, 전란을 겪으며 그 그림이 온전히 보전된 집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니 초상이 보전되고 안 되고는 그 사람의 공적이 기록되었는지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이 정녕 존경받을 만한가에 달려 있음이 분명합니다."
나는 우러러 공의 안색을 살펴보니, 남달리 빼어나고 우뚝하여 참으로 열렬한 대장부이시라, 마땅히 지체 높은 이에게도 굽히지 않고 부귀와 공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을 것이다. 비록 옛날의 이름난 이들이라 한들 어찌 이보다 낫겠는가? 마땅히 이 초상을 그려 천 년 뒤까지 전해야 할 것이니, 후손 된 이가 어찌 감히 소홀히 하여 가문의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나는 급히 솜씨 좋은 장인을 구해 그 두루마리를 손질하고 다시 표구하여 성씨 집안에 돌려주니, 후손들은 대대로 이를 맡아 소중히 지키기를 게을리하지 말기 바란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기록해 둔다.
수증사에 있는 양 시중 부부의 초상화 이야기 (서기 1599년 10월 29일, 양력 추정)
송화현 북쪽 10리쯤에 묵산이라는 산이 있고, 그 산에 수증사라는 절이 있는데, 고려 시중을 지낸 양공이 세운 원찰이다. 공의 이름은 기이며, 집안은 홍농 땅의 큰 가문으로 한나라 때 대부를 지낸 양표의 후손이다. 공민왕 시절 노국공주가 우리나라에 시집올 때 공이 그를 모시고 왔으므로, 왕이 시중 벼슬을 내리고 청주를 본관으로 삼게 하였다. 부인 진씨가 집안의 재물을 내어 이 절을 지었는데, 크고 아름다우며 정교하여 지금까지도 이름난 절이 되었고 상주하는 승려가 백 명에 이른다. 법당 뒤쪽으로 가면 별채가 하나 서 있는데, 시중과 그 부인의 모습을 그려 그 안에 걸어 놓고 향불을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올리고 있다. 나의 외조모 되시는 양 부인은 바로 그분의 7대손이시다.
나는 예전부터 이 절에 초상화가 있다는 말을 들어 왔는데, 마침 보좌관이 되어 재해를 조사하는 일로 이 절에 이르러 술잔을 갖추어 절을 올렸다. 시중은 얼굴이 네모지고 콧수염이 적었으며, 눈에 흰자위가 많고 코가 우뚝하며 입술이 두툼하였고, 사모를 쓰고 옥대를 두른 채 붉은 도포에 참새 무늬 흉배를 달고 의자에 앉아 계셨다. 부인은 자줏빛 꽃을 수놓은 저고리를 입고 금테를 두른 푸른 큰 띠와 금빛 봉황 무늬 흉배를 걸쳤으며, 아래에는 노란 명주치마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려 은구슬 아홉 갈래와 난새 모양 비녀를 꽂고 계셨다.
술잔을 올리기를 마치고 곁에 서서 찬찬히 살펴보니, 부인의 모습이 나의 외조모와 참으로 닮아 있어 몹시 놀라웠다. 잠시 뒤 천연이라는 승려가 뒤에서 다가와 "부인의 모습이 부사 어른의 얼굴과 흡사합니다" 하였다. 곁에 있던 승려들도 모두 이미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여기고 있었지만 감히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다가, 이 말을 듣고는 일제히 "천연 스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고 맞장구쳤다. 우리 집안에서도 내가 외조모를 닮았다는 말을 종종 하였으므로, 나는 더욱 신기하게 여겼다. 옛날에 도적이 오예라는 이의 무덤에 들어갔다가 그 후손의 얼굴을 알아보았다는 이야기가 있고, 왕방경이라는 이는 먼 외조부인 사문정과 몹시 닮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무릇 사람은 부모의 정기를 받아 태어나는 법이다. 그러니 아버지는 나의 할아버지에게서 그것을 받으시고, 나는 다시 나의 아버지에게서 받았으며, 어머니와 할머니의 기운까지 함께 받아 이 몸이 이루어졌으니, 그 생김새가 서로 닮는 것은 이치상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서 나로, 나에서 다시 자손으로 대대로 이어질 때, 비록 수십 대가 지나더라도 서로 닮은 데가 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니, 어찌 이상하다 할 것이 있겠는가?
이에 이렇게 기록하여 이 절의 주지스님에게 맡겨 대대로 전하게 한다.
(용어) 여기서 "보좌관"으로 옮긴 자리는 감사·유수·병사·수사 등을 따라다니며 보좌하던 벼슬인 "비장"을 가리킨다.
탐원와 이야기 (서기 1599년 7월 6일, 양력 추정)
"탐원와"란 맹인으로서 점을 치는 이광의라는 사람의 거처를 이르는 이름이다. 어째서 "탐원", 즉 "근원을 찾는다"고 이름 붙였는가 하면, 이백이 옛 점술가 엄군평을 노래한 시에 "근원을 찾아 사람들을 깨우친다"는 구절이 있어 이를 따서 이름 지은 것이다. 이광의는 양반 집안 출신으로, 그 먼 조상 되는 이무는 조선 개국과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대대로 충의위라는 벼슬을 받아 녹을 먹으며 왕궁을 지켰다. 이광의 또한 일찍이 이 벼슬을 이어받아 계속 낮은 품계의 녹을 받았으나, 이윽고 눈에 병이 생겨 궁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운명을 점치는 술법을 배웠다. 그런데 그 솜씨가 남달리 신묘하여 점을 쳤다 하면 죄다 들어맞았다. 전란 중 이천 땅에서 병화를 피할 때에도, 그는 매번 왜적이 쳐들어올지 여부를 미리 알아내어 사람들을 이끌고 먼저 자리를 옮겼으므로, 그 덕에 목숨을 건진 사람이 많아 다들 그를 신이라 일컬었다. 계사년(1593년)에 중화부 북쪽에 살면서 집을 짓고 스스로 이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나는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점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동강 서쪽을 오간 것이 무릇 다섯 차례요, 이광의라는 이를 만난 것도 여러 번이었지만 그때마다 운명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양창서를 따라 중화 땅에 묵을 때 이광의와 한 침상에 눕게 되었는데, 그가 우연히 내 운명을 묻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수명은 마땅히 길어질 것이고 지위도 마땅히 높아질 것이다. 다만 내년 여름에는 황해도 지방의 보좌관이 될 것이니, 나는 마땅히 황강 땅으로 그대를 찾아갈 것이다." 그런데 이듬해 과연 그 말대로 보좌관이 되었다. 황강에 이른 지 며칠 만에 이광의가 정말로 찾아와 "내 말이 들어맞았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이를 신기하게 여기며 "아, 세상 사람들이 점술을 믿고 즐겨 점을 치는 것은 모두 이런 일 때문이겠구려" 하였다. 이광의는 또 아무 해는 길하고 아무 해는 흉하며, 아무 해에는 감사가 되고 병마절도사가 되며,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가 되었다가 좌찬성과 우찬성 같은 높은 벼슬에 오를 것이라고 낱낱이 짚어 말하였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앞날은 내가 이미 잘 알고 있소. 나는 하늘에 맡기고 운명에 맡기는 사람이오. 하늘과 운명이 내게 내려 주는 것이라면 그대가 예언하지 않아도 나는 마땅히 누릴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설령 위나라 무공처럼 오래 살고 주공처럼 부귀를 누릴 것이라 말해도 나는 믿지 않을 것이오."
그러자 곁에 있던 다리 없는 조씨 성을 가진 이가 말했다. "옛말에 임금과 재상은 운명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했는데, 이광의가 그대를 재상이 될 것이라 하였으니 운명을 말하지 않는 것이 옳겠소." 이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아니오, 그렇지 않소. 《서경》에 '우리 인생은 운명이 하늘에 달려 있지 않은가' 하는 말이 있는데, 만약 이 말이 요임금이나 순임금, 혹은 기나 고요 같은 어진 신하의 입에서 나왔다면 참으로 나라를 망칠 말이 될 것이오. 하지만 이 말이 완적이나 도잠 같은 이의 입에서 나왔다면, 사람들은 반드시 그를 두고 인생에 통달했다느니, 하늘의 뜻을 즐기고 운명을 안다느니 하고 일컬었을 것이오. 나는 시대와 맞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니 기나 고요와 같은 큰 사업을 감히 바라지는 못하지만, 완적의 거침없음과 도잠의 소탈함이라면 나와 거의 뜻이 통한다 할 것인즉, 비록 '운명이 하늘에 달려 있지 않다' 말해도 또한 괜찮지 않겠소?" 그러고는 농담 삼아 웃으며 이야기를 마쳤다. 이광의가 이 이야기로 제 거처를 꾸미고 싶다고 청하므로, 마침내 종이에 적어 그에게 주었다.
(용어) "우리 인생은 운명이 하늘에 달려 있지 않은가"라는 말은 《서경》 서백감려 편에 나오는 구절로, 원래는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주가 제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한 말이다.
통곡헌 이야기 (서기 1599년 11월 1일, 양력 추정)
내 조카 친이라는 이가 자신의 서재를 짓고 편액을 "통곡헌"이라 달았다.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즐거운 일이 이토록 많은데 어찌하여 통곡이라는 말로 집의 이름을 삼는단 말인가? 더구나 통곡하는 이란 아버지를 여읜 자식이거나 사랑하는 이를 잃은 부인네인데,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법이거늘, 그대만 홀로 사람들이 꺼리는 것을 굳이 골라 거처에 걸어 놓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친은 이렇게 답했다. "저는 세상의 취향과는 반대로 가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쁨을 즐기니 저는 슬픔을 좋아하고, 세상 사람들이 흔쾌해하니 저는 근심하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부귀와 영화조차 세상은 기뻐하는 바이지만, 저는 이를 몸을 더럽히는 것인 양 여겨 내던지고, 오직 가난하고 검소한 것을 본받아 그렇게 살아가며, 무슨 일에서든 세상과 어긋나고자 합니다. 그러니 세상이 가장 싫어하는 것을 굳이 고르자면 통곡만 한 것이 없으므로, 저는 그것으로 제 서재의 이름을 삼은 것입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비웃던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릇 곡을 하는 데에도 나름의 이치가 있소. 대체로 사람의 온갖 감정 가운데 쉽게 일어나 마음을 움직이는 것으로는 슬픔만 한 것이 없소. 슬픔이 일면 반드시 곡을 하게 되는데, 그 슬픔이 일어나는 까닭도 여러 가지지요. 그래서 시대의 일을 어찌할 수 없음을 슬퍼하여 통곡한 이는 가의였고, 흰 실이 본바탕을 잃는 것을 슬퍼하여 곡을 한 이는 묵적이었으며, 갈림길이 여럿으로 나뉜 것을 슬퍼해 운 이는 양주였고, 길이 막혀 곡을 한 이는 완적이었으며, 운명이 불우함을 한탄하여 스스로를 세상 밖으로 내치고 그 심정을 통곡에 담은 이는 당구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마음속에 품은 뜻이 있어 운 것이지, 이별을 서러워하거나 억울함을 품고서 하찮은 일로 부녀자처럼 통곡을 흉내 낸 이들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는 그들이 살던 시대보다 더욱 말세가 되었으니, 나랏일은 날로 그릇되어 가고 선비들의 행실은 날로 야박해져서, 벗들 사이에서 등을 돌리는 일이 갈림길이 갈라지는 것보다 심하고, 어진 선비가 고생을 겪는 것도 그저 길이 막힌 정도가 아니어서, 다들 인간 세상 밖으로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만약 앞서 말한 그 몇 분의 어진 이들이 이 시대를 직접 보게 된다면 과연 어떤 마음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통곡할 겨를조차 없이, 모두 굴원처럼 돌을 안고 강물에 몸을 던지려 할 것입니다. 조카 친이 서재의 이름을 '통곡'이라 한 것도 바로 이런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여러분은 그 통곡을 비웃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비웃던 이들이 이 말을 알아듣고 물러가기에, 이렇게 글로 남겨 여러 사람의 의심을 풀어 준다.
취학정 이야기 (서기 1599년 11월 3일, 양력 추정)
나의 당질 이장경 군이 양산 북쪽에 집을 짓고 사는데, 앞으로는 바닷물이 임하고 뒤로는 아름드리 소나무 백여 그루가 울타리를 이루어 그 광활하고 그윽한 정취를 즐기며, 탁 트이고 밝은 자리를 골라 집을 짓고 한가로이 지내는 곳으로 삼았는데, 이름을 "취학정"이라 하였다. 내가 그 이름의 뜻을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비록 벼슬길을 잃고 서쪽으로 왔으나, 바닷가 고을에서 밭 십여 이랑을 얻어 힘써 갈아 생활하니, 그럭저럭 죽이나마 먹고 지낼 만합니다. 그 나머지로 술을 빚어 마시곤 하지요. 제가 원래 술이 세지 못하여 몇 잔만 마셔도 얼근히 취해 마음이 화창해지고 종일토록 즐거워서, 답답한 시름이 가슴에 걸려 있다는 것도 잊고 흐뭇하게 그 기분을 즐깁니다.
집에서 학을 한 마리 기르는데 소나무 숲 사이에 풀어 놓으면 맑은 밤에 길게 우는데 그 소리가 하늘까지 들릴 듯합니다. 제가 대나무 지팡이를 두드리며 부르면 학은 반드시 훨훨 날개를 치며 다가오고, 제가 앞에서 박자를 맞춰 노래하고 손뼉을 치며 화답하면 학은 문득 날개를 퍼덕이며 껑충거리고 춤을 추면서 집 주위를 천천히 돌지요. 노래의 곡조에 맞춰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하다가 노래가 끝나면 그제야 멈춥니다. 학이 춤을 출 때면 제 마음이 몹시 즐거워서 술에 취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옛사람들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를 흠모하여 '백에 취한다'고 하였고, 대나무 그림을 사랑하여 '먹에 취한다'고 하였는데, 저는 술을 조금만 마셔도 곧 술을 많이 마신 사람 못지않게 취하고, 또 춤추는 학에도 이렇게 취하니, 정자를 학으로 이름 지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잘 알겠네. 하지만 술이란 시름을 잊게 해 주는 것이지만, 도가 지나쳐 술로 연못을 이루고 술지게미로 언덕을 쌓을 지경이 되면 하나라와 상나라가 그 때문에 망하였고, 학이란 깨끗함을 즐기고 한가함과 짝하는 것이지만, 학을 실은 수레가 삼백 대나 되었을 때 위나라는 그 때문에 어지러워졌다네. 무릇 어떤 것에 유독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그 아래에는 곧 화가 뒤따르는 법인데, 지금 그대가 술과 학을 지나치게 좋아하다가 도리어 그로 인한 허물을 불러들이는 것은 아닌가?"
그가 답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나라를 다스리는 소임을 맡은 이들이었는데,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돌보는 일은 뒷전으로 하고 오직 술과 학에만 빠져 있었으니 패망한 것이 마땅합니다. 완적과 유영은 아무리 술을 좋아하였어도 그저 거침없고 통달한 사람이 되었을 뿐이고, 임포가 아무리 학을 사랑하였어도 그 고고하고 활달한 성품을 드러냈을 뿐이니, 어찌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해가 되었겠습니까? 다만 그들의 빼어남을 더해 주었을 뿐입니다. 저는 백성과 나랏일에 얽매인 몸이 아니고 관직에도 매인 바가 없으니, 제가 술을 사랑하고 학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그러겠습니까?"
나는 부끄러워하며 그 말이 맞다고 사과하고 물러났고, 이렇게 글을 지어 그의 정자에 남긴다.
(용어) "학을 실은 수레가 삼백 대나 되었을 때 위나라가 어지러워졌다"는 것은, 춘추시대 위나라 임금 의공이 학을 지나치게 좋아하여 대부에 봉한 학이 삼백 마리에 이르렀다는 옛이야기를 가리킨다.
산월헌 이야기 (서기 1611년 2월 27일, 양력 추정)
나는 젊었을 때 전운판관이라는 벼슬로 전라도에서 조운을 감독하며 바다를 자주 오갔다. 부안 땅의 봉산을 몹시 좋아하여 그 산기슭에 오두막이나 짓고 살고 싶었다. 사람들 말이, 그 산속에 골짜기가 있어 우반이라 하는데 그곳이 가장 살 만하다 하였으나, 정작 가서 보지는 못하고 그저 마음만 그리로 향할 뿐이었다.
무신년(1608년) 가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온 가족을 데리고 부안으로 가서 이른바 우반이라는 곳으로 나아갔다. 경치 좋은 언덕을 골라 나무를 베어 몇 칸의 집을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칠 계획을 세웠는데, 일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당시 세상의 여론이 나를 조정에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시골에 묻혀 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려 하여, 여럿이 모여 함께 나를 헐뜯으며 "태평한 세상을 만났는데도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 뜻을 품으니 너무도 옳지 않다"고 하여, 마침내 나를 끌어다 북쪽으로 가게 하였다. 그 아름다운 곳을 돌아보면 마치 하늘 저편에 떨어져 있는 듯하니, 아, 운명이라 한들 어찌하겠는가.
예전에 듣기로, 구인기라는 이가 골짜기 너머에 집을 짓고 속세를 멀리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기에, 나는 참으로 속으로 그를 부러워하면서도 은근히 이렇게 생각했다. "구군은 부모님이 살아 계시고 벼슬도 비록 음직이라고는 하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도 아닌데, 어찌 까닭 없이 그것을 내던지고 옛사람 상자평처럼 떠돌려 하는가? 이것은 잠시 몇 해쯤 머무르며 흉년에 양식이나 얻으려는 것일 뿐,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신해년(1611년) 봄, 내가 함산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을 때 구군이 여관으로 나를 찾아왔다. 내가 "자네가 비록 봉산에 집을 지었다지만 어찌 오래도록 그곳에서 지낼 사람이겠는가?" 하였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부안은 서울과의 거리가 겨우 닷새 길이고 길도 평탄하여 왕래하며 부모님을 뵙기에 그리 어렵지 않으며, 땅도 바다에 가까워 물고기와 소금으로 생계를 꾸리기에 넉넉합니다. 그대가 보기에도 서울의 인심과 세태가 함께 살 만하던가요? 저는 이 때문에 결단코 떠나 멀리 숨어 그것을 피하려는 것입니다. 더구나 벼슬의 녹을 받는 것은 원래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함인데, 부모님께서 제가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니, 제가 감히 한 몸의 영화를 위해 이해득실을 좇아 부모님께 근심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이어 말했다. "그곳에 몇 칸의 집을 지었는데, 지형이 탁 트이고 밝으면서도 깊숙하며, 서쪽으로는 봉산이 바라보이는데 아침 구름과 저녁 안개가 삼켰다 뱉었다 밝았다 어두웠다 하며 책상머리에서 아양을 떠는 듯하고, 남쪽으로는 두승산과 소요산 같은 여러 산이 눈 아래로 빙 둘러 떠받치고 있으며, 큰 바다가 그 남쪽을 지나는데 파도가 거세게 일어 하늘에 닿을 듯하고, 밀물이 포구에 들면 마치 물의 신이 흰 수레에 백마를 몰고 오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서 종일토록 기대어 누웠다가 매번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숲속을 거닐며 그림자를 끌고 배회하는데, 서늘하기가 마치 얼음 항아리나 신선의 궁궐에 들어간 듯하여 몸과 마음이 모두 상쾌해집니다. 그리하여 이를 몹시 즐거워하여 집의 편액을 '산월'이라 달았으니, 그대가 어찌 저를 위해 기록을 남겨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봉산은 내가 살고 싶어 했던 곳인데 그대가 먼저 가서 살게 되었으니, 그곳을 그토록 즐거워하는 마음이 나와 다르지 않을 터, 어찌 글재주가 없다는 핑계로 사양하겠는가? 더구나 그 바라보이는 경치가 아름답고 안개와 노을이 곱다는 것은, 내가 비록 그대의 집에 올라 보지는 못했어도 이미 그 십중팔구는 대략 알고 있네. 사면이 내려진 뒤에는 마땅히 곧장 그 옛 골짜기로 향해 가서 그대와 더불어 그 아름다운 땅을 반씩 나누어 갖고 내 목숨을 그곳에서 마칠 것이니, 그대의 집이 곧 나의 집인데 어찌 감히 즐거이 글을 지어 그대의 집을 빛내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위와 같이 적는다.
(용어) 무신년의 파직은 1608년, 허균의 나이 마흔 살 때 공주 목사 자리에서 파면된 일을 가리킨다.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 뜻"이란 원래 "복숭아꽃 피는 마을을 그리는 뜻"이라는 표현을 옮긴 것으로, 세상을 피해 숨어 살고자 하는 마음을 뜻한다. 이상향을 뜻하는 "무릉도원"에서 나온 말이다.
능파서실 이야기 (서기 1611년 2월 20일, 양력 추정)
나의 이웃 벗 이할 군은 용안 고을의 수령으로 다섯 해를 지냈는데, 다스림의 공이 있어 쇠락한 고을을 변화시켜 번성하게 하니 그 소문과 칭송이 호남 땅에 자자하였으므로, 나는 실로 그 소식을 듣고 부러워하였다. 신해년(1611년), 내가 죄를 얻어 함산으로 옮겨 가게 되었는데 마침 그 고을을 지나게 되어 더욱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그가 하루는 나를 여관으로 찾아왔기에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우연히 벼슬아치들이 관직에서 물러나면 돌아갈 곳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그에게 관직이 끝나면 어디로 갈 것인지 물었다. 그가 이렇게 답했다. "제게는 부모님이 계신데 서울에 계시니 마땅히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려야겠지요. 하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저는 돌아갈 곳이 없을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저의 선대 가업이 양근군에 있는데, 그 고을 남쪽에 상교암이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그 바위는 큰 강에 우뚝 임하여 산을 등지고 있는데, 층층이 가파르게 겹쳐 있어 아래로 여울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저는 옛터를 이용해 그 위에 서실을 지었는데, 난간과 격자창이 모두 물결을 향해 탁 트여 있어, 누워 있으면 마치 바다 한가운데를 항해하는 듯하고, 내려다보면 물이 깊고 맑아 물속에서 노니는 물고기까지 셀 수 있을 정도이며, 햇빛이 부딪쳐 반사되면 맑은 빛이 들보와 기둥에서 일렁입니다. 그리하여 물결에서 얻는 경치가 으뜸이므로 이름을 '능파서실', 즉 물결을 타고 넘는 서실이라 하였습니다.
강의 북쪽은 용문산과 마주하고 있어 푸른 안개와 아지랑이가 책상에 비쳐 아침저녁으로 색다른 정취를 자아내고, 산봉우리가 물결 속에 거꾸로 비치면 또렷하여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입니다. 동쪽으로 추익산을 바라보면 해가 뜰 때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이 상서롭고 고와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을 정도이며, 앞으로 강가 십여 리를 바라보면 흰 모래와 푸른 풀이 눈 아래로 종횡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강의 상류는 오대산에서 시작되어 여러 고을에서 배로 오르내리는 이들이 반드시 이 난간 앞을 지나가야 하니, 바람 받은 돛과 부드러운 노질이 안개와 물결 아득한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여 마치 이 기이한 풍경을 거들어 주는 듯합니다. 저는 이를 매우 즐거워하여 지팡이 짚고 신 신은 채 한가로이 거닐며, 봄이면 산꽃을 감상하고 여름이면 서늘한 낮을 맞이하고, 가을이면 서리 맞은 단풍이 취한 듯 붉고 겨울이면 산봉우리의 눈이 옥을 쌓은 듯하니, 사계절의 경치를 두루 갖추었습니다. 아침이면 먹일 소가 나가고 저녁이면 기러기가 손님처럼 모여들며, 굽이진 여울에는 밤낮으로 고기잡이 등불이 어지럽고 모래톱에는 새벽달이 흐르니, 곧 황혼과 새벽, 아침과 저녁의 풍경을 두루 갖춘 셈입니다. 게다가 밭 다섯 이랑이 있어 부지런히 갈면 죽은 먹을 만하니, 저는 이곳에서 편안히 노년을 보내기에 족합니다. 벼슬의 녹봉이란 그저 뜬구름 같은 것에 지나지 않으니, 그 썩고 냄새나는 것이 무엇이관대 감히 사람을 오래도록 붙잡아 두겠습니까?"
나는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그대는 참으로 어질다 할 만하네. 세상 사람들은 명예와 이익에 취해 부지런히 뒤쫓기를 마다하지 않아, 비록 파직되면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앞의 편안함만을 좇아 물러날 곳을 미리 마련하려 하지 않으며, 설령 그런 곳이 있다 해도 권세의 길에 빠져 역시 돌아보지 않는 이가 대부분이고, 그 가운데 조금이나마 사리를 아는 이라 해도 비용이 부족하거나 계책이 서투른 탓에 실행하지 못하니, 요즘 사대부들 가운데 몰락하여 낭패를 겪는 이들은 대개 이 세 가지 경우를 벗어나지 못한다네. 이 또한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그대는 능히 선대의 가업을 일으키고 빼어난 경치를 독차지하였으니, 비록 벼슬아치의 인장을 몸에 지니고 있어도 늘 물러나 쉴 뜻을 품고 있으며, 훌쩍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면 그 맑은 복을 편안히 누릴 것이니, 요즘 사대부들보다 훨씬 현명하다 하겠네.
다만 그대가 훌륭한 관리라는 칭송을 받고 있으니, 임명 문서가 조만간 내려온다면 이 고을이나 다른 고을에서도 그대의 공을 인정하여 곧 조정의 벼슬로 승진해 들어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니, 이런 때를 당하여 비록 물러나고자 한들 어찌 물러날 수 있겠는가? 나 같은 사람은 사리는 조금 알지만 계책이 서투르고 형편도 넉넉지 못하여, 뜻은 있어도 물러나지 못하고 자주 곤경에 빠졌으니 그대에 견주어 부끄러운 점이 많네. 다행히 사면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 강가에 나의 선산이 있어 다시 벼슬 없는 평범한 선비의 차림으로 성묘를 갈 것이니, 길이 반드시 그대의 서실 아래를 지날 것이오. 그때는 마땅히 배를 그 바위에 대고 서성이며 그대를 위해 '주인은 드물게 오는데 손님은 자주 온다'는 옛 시구를 읊는다면, 이 또한 강산의 맑은 경치를 저버리지 않는 일이 될 것이오."
그는 이 말을 듣고 배를 잡고 웃었다. 마침내 이렇게 써서 기록해 둔다.
사계정사 이야기 (서기 1611년 6월 25일, 양력 추정)
남원은 옛 대방국이 있던 곳으로, 옛날에 이른바 방장산이 있던 삼한 땅이다. 진나라 시절부터 방사들은 삼신산이 동해 가운데 있으며 그곳에 신선과 불로장생약이 있다고 하였는데, 임금치고 이 말을 반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나는 일찍이 《오악진형도》와 《동명기》, 《십주기》 같은 책들을 구해 살펴보았는데, "삼신산이 동해에 있다"고 하나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이런 곳이 있을 수 없으며, 그중 이른바 "방장산에 있다"는 말은 이미 대방 땅에 있다는 것이니, 영주와 봉래 또한 금강산과 묘향산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만약 그렇다면 그곳은 신령스럽고 아득한 구역이어서 사람이 쉬이 올라갈 수 없는 곳이니, 반드시 그 위에는 참된 신선들이 있어 복된 땅을 다스리고 신선의 세계를 맡아 그 일을 관장하고 있을 텐데도 세상에는 이를 아는 이가 없다. 이 어찌 참된 신선의 무리가 세속의 혼탁함을 꺼려 손사래를 치며 만나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사람에게 스스로 인연이 없어 다다르지 못하는 것인가?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른바 방장산이란 곧 오늘날 지리산이라 부르는 곳이다. 그 산의 우람하고 우뚝한 모습은 영남과 호남에서 으뜸이고, 수행이 높은 승려들이 이곳에 모여들며, 크고 화려한 절과 암자가 거의 수백 곳에 이르고, 층층이 이어진 돌길과 우뚝 솟은 봉우리, 그 위의 풀과 나무, 안개와 구름의 기이하고 풍성함이 이 세 신산 가운데 으뜸이니, 유람하는 이들은 눈이 어지럽고 정신이 아찔하여 돌아갈 것도 잊는다. 만약 진나라나 한나라의 임금이 이 소문을 들었더라면 반드시 옷자락을 걷고 발 적실 겨를도 없이 달려왔을 것이니, 아, 참으로 기이한 산이 아닌가! 이 산자락 아래에서는 오직 남원부만이 가장 크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 우뚝하고 우람한 기운을 받고 태어나, 나아가서는 나라의 기둥이 되고 물러나서는 고을에서 우러름을 받는 선비가 되어, 이름이 역사에 기록되고 뒷사람의 본보기가 된 이가 대대로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니, 이 또한 성대하다 할 만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방씨 집안이 더욱 뛰어난 인재를 냈는데, 지금 생존해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이 가운데는 상사 방군을 가장 으뜸으로 꼽는다. 그는 문장과 행실을 두루 갖추어 여러 해 동안 자신을 수양하며 지내 왔다. 세상 사람들이 그의 재주가 쓰이기를 바란 지 이미 오래이지만 그는 아직 옥돌을 품은 채 세상에 내놓지 않고 있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안타까워하였지만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데 급급해하지 않고 산수 사이에서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하였고, 사계 땅에 있던 선대의 가업이 전란으로 무너지자 서둘러 정사를 지어 옛 모습을 되살리고 그곳에서 살았다. 이미 이정귀와 신흠 두 분에게 글을 청하여 그 일의 자초지종을 기록하였고, 또한 조식과 노수신 두 분의 시를 걸어 두어 당대의 명작으로 그 뒤를 잇게 하였으니, 숲과 산이 더욱 빛나고 못과 정자가 생기를 띠어 참으로 인간 세상 밖의 신선 세계와 같았다. 그가 또한 보잘것없는 나의 글까지 구해 그 뒤에 이으려 하니, 나는 이런 글에 서툰 사람이라 어찌 감히 여러분의 훌륭한 글에 부족한 글을 덧붙여 그대의 아름다운 옥돌에 흠집을 내겠는가? 그렇지만 지리산은 내가 노닐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곳이고, 대방 땅은 내가 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곳이므로, 평소의 꿈은 늘 반야봉과 교룡산 사이를 맴돌았다. 듣자니 그의 정사 또한 빼어난 경치를 독차지했다 하니, 마음이 끌리고 흥이 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라, 어찌 잠자코 있어 그 정성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아, 방장산은 이미 신선의 산이라 하여 여러 신선이 오가며 노닐던 곳이라 하는데, 나는 끝내 가 보지 못하였고, 삼화와 신비한 영지는 불로장생의 약이라 하나 역시 문득 얻을 수가 없었다. 방군은 정신이 인간 세상 밖에서 노닐고 마음이 도와 하나가 되어 그 아래 편안히 앉아 여러 해를 지냈으니, 혹시 신선과 불로장생약을 만나고도 이를 비밀로 하여 남에게 알리지 않는 것은 아닌가?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귀양살이하는 이 몸에게 만약 사면이 내려 자유로워진다면, 마땅히 신선의 산에 올라 신선과 불로장생약을 찾아볼 것이며, 하늘의 운이 좋아 그대의 집에 오를 수 있다면 골짜기와 산, 대나무와 나무들이 나를 빙 둘러 맞아 줄 것이고, 주인은 두건을 쓰고 학창의를 입은 채 안개와 노을 속을 거닐며 들나물과 산과일을 소반에 올릴 것이니, 이 또한 복된 땅이요 신비로운 곳이라 할 만하다. 신선과 불로장생약이 모두 이 안에 있을 터인데, 하필이면 저 멀리 신선의 정원에 올라 옛 신선인 안기생과 선문자를 만나 보고 신선의 과일을 먹은 뒤라야 유쾌하다 할 수 있겠는가?
그 집안의 맑게 닦아 온 가업과 아름다운 경치는 이미 앞서 두 분의 글이 다 말해 놓았으므로 다시 논하지 않고, 다만 이것만을 적어 돌려보낸다.
(용어) "상사"는 생원이나 진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옥돌을 품은 채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는 것은 훌륭한 학문과 재주를 지니고도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옛날 초나라의 변화라는 이가 산속에서 얻었다는 보배로운 옥돌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함열현 객사 대청을 다시 지은 이야기 (서기 1611년 10월 20일, 양력 추정)
함열은 외따로 떨어져 호남의 바닷가에 있는 고을이다. 땅은 사방이 모두 20리가 채 되지 않고, 백성은 가난하여 모아 둔 재물이 없으며, 큰 산도 없어 좋은 재목이 될 만한 나무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관아의 건물들은 낮고 비좁으며 민가는 대개 띠풀로 지붕을 이었다. 게다가 정유년(1597년)의 전란을 겪으며 왜적이 몹시 잔인하게 굴어, 노비는 죽거나 도망친 이가 절반이 넘고 논밭은 황폐한 채 버려진 것이 열에 일고여덟이었다. 이 고을에 부임한 수령들은 모두 눈앞의 편안함만을 좇아 제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으므로, 관아와 창고는 어느 하나 새로 지어진 것이 없었다. 이것이 비록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라고는 하나, 고을을 맡은 수령으로서 그 책임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근래에 홍우라는 수령이 겨우 관아의 동쪽 곁채를 지어 사신을 맞아 머물게 하였으나, 임금을 상징하는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마다 대궐을 향한 예를 올릴 곳을 짓는 데까지는 미처 손이 미치지 못했다.
경술년(1610년)에 한씨 성을 가진 수령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법도를 삼가 받들며 조금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고, 검소함으로 몸가짐을 삼고 은혜로 백성을 보살피니, 백성들이 이미 화목해져 도망갔던 이들이 모두 돌아왔고 물이 고이고 잡초가 무성하던 땅이 모두 개간되었으니, 참으로 잘 다스려졌다 할 만하였다. 씀씀이를 아껴 재정이 넉넉해지자 관아의 힘을 모아 황폐한 터에 다시 관사를 세워 옛 모습을 되찾고 대청을 짓고자 하였다. 예를 행하는 자리는 법도상 마땅히 먼저 지어야 하므로, 이웃 고을 수령들에게 공문을 보내 배로 변산에서 목재를 실어 오게 하고, 세금으로 거둔 것 가운데 남는 것을 덜어 일꾼들을 먹이니,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목수들이 일을 마쳤음을 아뢰었는데, 그 모습이 훤하니 옛 모습보다 나았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관아에 큰 공사가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였다. 온 고을의 남녀노소가 모두 그 덕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우리 원님은 어질고도 재주가 있으시니, 어디서 이런 분을 다시 얻겠는가."
나는 죄를 지어 이곳으로 귀양을 왔는데, 이 수령의 보살핌을 받아 그 다스림을 익히 알게 되었으므로, 그 고을 노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대체로 요즘 수령이 되는 이들 가운데 가장 낫다는 이도 겉치레만 일삼으며 어리석은 백성에게 아첨하는 데 힘쓰고, 감사나 병사가 보내는 공문을 막아 내는 데에만 힘써 관아의 사무가 흐트러지고 지체되는 것은 돌보지 않으며, 함부로 옛 법규를 뜯어고쳐 좋은 평판을 얻으려 하다가, 조금만 견디기 힘들면 곧바로 자리를 버리고 떠나 버리니, 이런 이들은 다스렸다는 이름은 얻을지언정 고을은 그 때문에 오히려 버려지고 마는 것이오. 그다음가는 이들은 수완을 닦는 데에만 힘써 제 능력을 뽐내고,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일을 서둘러 벌이면서 그로 인한 폐단이 불어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저 남의 이목을 즐겁게 하는 데에만 신경을 쓸 뿐이니, 지치고 쇠약한 백성으로 하여금 힘든 부역에 시달리며 근심하고 탄식하게 만들지요. 가장 못한 이들은 제 직분도 다하지 않고 백성도 위로하지 않으면서 그저 백성의 살과 뼈를 벗겨 먹을 뿐이니, 이는 노약자들을 날로 흩어지게 하고 제 주머니만 날로 불려, 그 이익이 자기 한 몸 살찌우는 데에만 돌아가게 하는 것인데, 대개는 다들 이러합니다.
그런데 이 수령은 그대 백성들을 어질게 사랑하고 그대 고을의 황폐함을 되살려, 그대들로 하여금 베개를 높이 베고 마을에서 배를 두드리며 편히 지내게 하고, 순식간에 이토록 크고 훤한 집을 지었으되, 그대들은 집에서 편안히 잠을 자며 나무 한 개비 나르지 않았고 힘든 부역의 신음 소리도 듣지 않았으며, 또한 능히 그 청렴한 가풍을 지켜 세금 외에는 따로 거두어 가는 일이 없어 그대들의 살림을 넉넉하게 하였으니, 이 수령의 치적을 앞서 말한 세 부류의 수령과 견주어 본다면 어떠하며, 그 덕은 마땅히 비석에 새겨 둘 만하니, 여러 어르신들께서 어찌 이를 잊을 수 있겠소?"
그러자 여러 노인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대부께서 이 사실을 글로 남겨 후세까지 사라지지 않게 해 주시겠습니까?" 그 청이 하도 간곡하여, 내가 비록 죄를 지어 벼슬에서 쫓겨난 몸이나 예나 지금이나 어진 사대부의 올바른 행실이 무엇인지는 자못 이야기할 줄 알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 해서 함부로 아첨할 줄은 모른다. 그러니 어찌 감히 이 수령의 다스림을 묻어 버려 노인들의 뜻을 저버리겠는가? 마침내 이 소임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대신 이렇게 적는다.
수령의 이름은 회일이며, 상당 지방의 큰 가문 출신이다. 그 부친 상서공은 당대에 크게 이름이 높았는데, 이 수령은 삼가 집안의 가르침을 받들어 젊은 나이에도 벼슬살이의 이치를 알고 익숙히 처리함이 이와 같으니, 그래서 군자들이 더욱 그를 어렵게(대단하게) 여겼다.
성소부부고 제8권
9. 22:13
성소부부고 제8권 · 문부 5 · 전(傳)
출처: 성소부부고 제8권, 문부 5, 전
배경: 제8권은 문부 다섯 번째 갈래인 "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은 실존 인물의 삶을 기록하여 그 인품과 행적을 후세에 전하는 글이다. 효행으로 이름난 은사 엄 처사, 신분의 굴레에 갇혔던 천재 시인 이달, 신비한 도술을 부린 장한웅, 나병을 앓고 신선의 길을 걸었던 남궁두, 그리고 기이한 재주를 지닌 걸인 장생까지, 신분과 처지는 저마다 달랐지만 모두 세상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살아간 인물들이다. 허균은 이들의 삶을 기록하며 신분 제도의 부조리와 재능이 묻혀 버리는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을 곳곳에 드러낸다.
엄 처사의 삶을 기록한 글 (서기 1606년 6월 5일, 양력 추정)
엄 처사는 이름이 충정이며, 강릉 사람이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그는 직접 땔감을 하고 먹을거리를 마련해야 했다. 어머니를 모시는 데 효성을 다하여 아침저녁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어머니가 조금만 편찮으셔도 마음 편히 잠들지 못하고 손수 음식을 만들어 올렸다.
어머니가 비둘기 고기를 좋아하시자, 그물을 짜고 낚싯대에 끈끈이를 발라서라도 반드시 잡아다가 대접했다.
어머니가 글을 배워 과거를 보라고 타이르자, 그는 더욱 열심히 글공부에 힘을 쏟았다. 시와 부를 짓는 솜씨가 우아하고 힘이 있어 여러 번 지방 과거 시험에 뽑혔고, 마침내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렸다.
그는 어느 책이든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주역》과 《중용》을 깊이 파고들어 이치를 높고 멀리까지 밀고 나갔다. 그가 지은 글들은 옛 하도와 낙서의 깊은 뜻과도 서로 맞아떨어질 정도였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해지자 그는 하늘에 빌었다. 자신을 데려가고 어머니를 살려 달라고. 그러나 어머니가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자, 그는 여러 날 동안 물조차 마시지 않아 지팡이를 짚어야 겨우 일어설 수 있을 정도였다. 삼 년 동안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도 죽만 마시며 지냈다.
상복을 벗을 때가 되자 벗들이 다시 과거를 보라고 권했다. 처사는 울면서 말했다. "나는 늙으신 어머니를 위해 과거를 보려 했던 것이오. 이제 와서 과거를 보아 내 몸만 영화롭게 한들, 어머니께서는 그걸 누리실 수 없지 않소.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소." 그러고는 목메어 울음을 그치지 않으니, 사람들도 감히 다시 권하지 못했다.
만년에는 강릉에 속한 우계현으로 옮겨 가서, 산수가 그윽하고 빼어난 곳을 골라 띠풀로 지붕을 이은 집을 짓고 그곳에서 생을 마치려 했다. 궁핍하여 몸 하나 제대로 의탁할 곳이 없었지만 마음만은 편안하게 지냈다.
사람됨이 온화하고 순수하며 평탄하고 활달해서 남들과 부딪히는 일이 없었다. 평소에는 공손하고 정성스러웠지만, 고을의 잘잘못을 논하거나 사양하고 받고 취하고 주는 일에 있어서는 확고부동하여 아무도 함부로 범할 수 없었다. 모든 일을 오로지 의로움으로 재단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사랑하고 공경했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반드시 충과 효를 첫째로 삼았고, 화려한 명예나 이익 따위는 아예 벗어난 사람처럼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역사책을 읽다가 성공과 실패, 잘 다스려진 시대와 어지러운 시대, 군자와 소인을 가려내는 대목에 이르면 언제나 강개하여 명확하게 판단을 내렸는데, 막힘이 없어 듣기에 참으로 좋았다. 송나라의 충신 악비나 문천상이 죽어 가는 대목에서는 별안간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의 글은 간결하고 절실하면서도 운치가 있었고, 시 또한 장엄하고 아름답게 지어 냈다. 그래서 세상에 전해지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시가 백여 편이나 되었는데, 모두 시 짓는 법도에 딱 맞았지만 처사 자신은 그것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조정에서도 이 소문을 듣고 가상히 여겨 두 번이나 참봉 자리를 내렸지만 그는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일흔여덟 살에 세상을 떠났다. 생을 마치려 할 즈음, 오랫동안 왕래하던 몇몇 지인과 학자 십여 명을 불러 모아 술상을 차려 대접했다. 그러고는 이어서 자기가 죽은 뒤의 일을 부탁했으니, 반드시 선산에 장사 지내 달라는 것과 어린 손자를 잘 돌봐 달라는 것이었다. 아끼던 책들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단정히 앉은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평소 알지 못하던 선비들까지도 모두 찾아와 조문했다.
남긴 글들은 흩어지고 없어져서 제대로 모아 두지 못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논평한다. 처사는 집안에서는 효를 다했고 고을에서는 절도 있는 행실을 보였으니, 마땅히 높은 자리에도 오를 수 있었을 사람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궁핍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나, 그 훌륭한 재능이 조금도 쓰이지 못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사는 선비들 가운데는 이분처럼 이름이 묻혀 전해지지 않는 이가 처사 한 사람만은 아닐 것이니, 그래서 더욱 슬퍼진다.
(용어) 하도와 낙서는 옛 중국의 전설에서 유래한 그림과 글로, 각각 《주역》의 팔괘와 《서경》 홍범 편의 근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악비(무목)와 문천상(문산)은 중국 송나라의 충신으로, 각각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거나 원나라에 끝까지 맞서다가 처형된 인물이다.
손곡산인 이달의 삶을 기록한 글 (서기 1606년 6월 20일, 양력 추정)
손곡산인 이달은 자가 익지이며, 쌍매당 이첨의 후손이다. 그는 어머니가 천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세상에 나가 쓰일 수가 없었다. 원주의 손곡이라는 곳에 살면서 그 지명을 자기 호로 삼았다.
이달은 젊었을 때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지은 글도 무척 많았다. 사역원 소속의 한리학관이라는 벼슬을 얻었지만, 부당한 일을 겪고는 벼슬을 버리고 떠나 버렸다.
그는 최경창, 백광훈과 어울려 노닐었는데 서로 마음이 잘 맞아 몹시 기뻐하며 시 짓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달은 한창 소동파의 시법을 본받아 그 요체를 터득해서, 한 번 붓을 잡으면 순식간에 수백 편을 써 냈는데, 모두 풍성하고 화려해서 읊기에 좋은 시들이었다.
하루는 사암 박순 정승이 이달에게 말했다. "시를 짓는 길은 마땅히 당나라 시를 따르는 것이 정도라네. 소동파의 시는 호방하긴 하지만 이미 당시의 격에는 미치지 못하지." 그러고는 서가에서 이태백의 악부와 노래시, 왕유와 맹호연의 근체시를 꺼내 보여 주었다. 이달은 깜짝 놀란 듯, 시를 짓는 참된 법도가 바로 여기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예전에 배운 기법을 완전히 버리고, 옛날 숨어 살던 손곡의 농장으로 돌아갔다.
그는 《문선》과 이태백의 시, 성당 시대의 뛰어난 시인 열두 사람, 유장경, 위응물의 시, 그리고 양사홍이 엮은 《당음》까지 꺼내 놓고 문을 닫아걸고 외웠다. 밤을 꼬박 새운 적도 있었고 온종일 무릎을 자리에서 떼지 않은 적도 있었다. 이렇게 오 년을 보내자 어렴풋이 깨닫는 바가 있었다. 시험 삼아 시를 지어 보니 어휘가 무척 맑고 절실해져서, 옛날의 수법은 완전히 씻겨 나가 있었다.
그리하여 당나라 여러 시인들의 시 형식을 본받아 장편과 단편, 율시와 절구를 지어냈다. 글자와 구절을 다듬고 소리와 운율을 골똘히 헤아리면서, 법도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몇 달이 지나고 몇 해가 지나도록 고치고 또 고쳤다.
그렇게 애를 써서 십여 편을 지은 뒤 비로소 세상에 내놓고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읊으니, 모두 감탄을 그치지 못하며 놀라워했다. 최경창, 백광훈 같은 이들도 모두 자기는 따라갈 수 없다고 했고, 고경명, 허봉 같이 당대에 시로 이름난 이들도 모두 그가 성당 시대 풍의 시를 짓는다고 치켜세웠다.
그의 시는 맑고 새로우며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잘 지어진 것은 왕유·맹호연·고적·잠삼에 버금갔고, 다소 못한 것이라도 유장경과 전기의 운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신라와 고려 이래로 당나라 풍의 시를 지었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그를 따를 수 없었다. 이는 참으로 사암 박순이 그를 일으켜 세워 준 힘이었으니, 마치 진승이 봉기하여 한 고조가 나라를 세울 길을 열어 준 것과 같다고나 할까.
이달은 이 일로 이름이 온 나라에 울렸고, 신분은 접어 두고서라도 그를 귀하게 여겨 칭찬을 아끼지 않는 시문의 거장이 세네 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세속의 사람들 중에는 그를 미워하는 자들도 끊이지 않아, 여러 번 더러운 누명을 씌워 형벌의 그물로 몰아넣기도 했지만, 끝내 그를 죽게 하거나 그의 명성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이달은 용모가 그리 단정하지 못했고 성품도 호탕해서 스스로를 단속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시대의 예법에도 서툴러서 이런 점들 때문에 세상의 흐름에 자꾸 거슬렸다.
그는 옛날과 지금의 이야기를 잘했고,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이르면 술을 즐겨 마셨다. 글씨도 옛 진나라 명필들에 가까울 만큼 잘 썼다. 마음이 툭 트여 한계가 없었고, 먹고사는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았는데, 사람들 중에는 오히려 그 때문에 그를 더 좋아하는 이도 있었다.
평생 몸 하나 붙일 곳이 없어 사방으로 떠돌며 걸식까지 했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천하게 여겼다. 그가 궁색한 신세로 늙어 간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오로지 시 짓는 일에만 몰두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몸은 비록 곤궁했어도 그는 영원히 남을 명시를 남겼으니, 한때의 부귀로 어찌 그런 명예와 바꿀 수 있겠는가.
그가 지은 글들이 거의 다 흩어져 사라질 지경이었는데, 내가 골라 모아 네 권으로 만들어 전해지게 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논평한다. 명나라 태사 주지번은 일찍이 이달의 시를 보았다. 그가 지은 「만랑무가」를 읽고서는 무릎을 치며 감탄해 마지않으며 말했다. "이 작품이 이태백의 시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석주 권필도 이달의 「반죽원」이라는 시를 보고 말했다. "이백의 시집 속에 끼워 넣어도, 안목을 갖춘 사람이라도 가려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이 어찌 함부로 헛말을 할 사람들이겠는가. 슬프다, 이달의 시야말로 참으로 기이하게 뛰어났던 것이다.
(용어) 이첨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문신이자 문장가로, 호는 쌍매당이다. 최경창(호 고죽)과 백광훈(호 옥봉)은 이달과 함께 당나라풍 시를 잘 지어 '삼당시인'이라 불렸다. 사암은 정승 박순의 호다. 성당의 십이가는 당나라 성당 시대에 이름을 떨친 열두 시인을 가리킨다. 유장경(유수주)과 위응물(위좌사)은 당나라 중당 때의 시인이며, 백겸은 원나라 사람 양사홍으로 《당음》이라는 시선집을 엮었다. 제봉은 시인이자 의병장인 고경명의 호이며, 하곡은 허균의 친형인 허봉의 호다. 전기는 당나라 중당의 대표적 시인이다. 진섭(진승)은 진나라 말에 처음 반란을 일으켜 한 고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 길을 열어 준 인물이다. 주지번은 명나라 사람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왔으며 글씨와 그림, 시로 이름이 높았다. 권필(호 석주)은 정철의 문인으로 시와 문장에 이름을 떨쳤으나 광해군의 정치를 비판하는 시를 지어 귀양 가는 길에 죽었다.
장산인 장한웅의 삶을 기록한 글 (서기 1608년 10월 20일, 양력 추정)
장산인은 이름이 한웅인데, 어떤 내력을 지닌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그의 할아버지 대부터 삼 대에 걸쳐 외과 의술을 업으로 삼았다. 그의 아버지는 예전에 자리공이라는 약재를 먹고서 귀신을 볼 수도 있고 부릴 수도 있었다고 한다. 나이 아흔여덟이 되었을 때도 마흔 살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집을 떠나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집을 떠날 때 아들에게 책 두 권을 주었으니, 바로 《옥추경》과 《운화현추》였다.
장한웅은 그 책을 받아 수만 번을 읽고 나자, 자신도 귀신을 부릴 수 있게 되었고 학질도 고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던 일을 그만두고 마흔 살에 집을 떠나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곧 기이한 사람을 만나 마귀를 다루는 법을 배웠고, 도교의 이치를 담은 책 열 권도 읽었다. 빈 암자에 앉아 거의 먹지도 않으면서 삼 년을 보냈다.
하루는 계곡을 지나는데 승려 두 사람이 그를 따라왔다. 우거진 숲 사이에 이르자 호랑이 두 마리가 나타나 엎드려 그를 맞이했다. 장산인이 꾸짖자 호랑이들은 귀를 내리고 꼬리를 흔들며 목숨을 애걸하는 태도를 보였다. 장산인이 그중 한 호랑이에 올라타고 두 승려를 다른 호랑이에 함께 태워 절 문 앞에 이르니, 호랑이들은 그들을 내려놓고 물러갔다.
산에서 지낸 지 18년 만에 서울로 돌아와 흥인문 밖에서 살았다. 나이가 예순이었지만 용모는 정정했다.
이웃에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있었는데, 흉측한 일이 자꾸 일어나 살 수가 없다 하여 집주인이 그에게 귀신을 물리쳐 달라고 청했다. 장산인이 밤에 그 집으로 가 보니, 귀신 둘이 와서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저희는 문을 지키는 귀신과 부엌을 지키는 귀신입니다. 요사스러운 뱀이 이 집을 차지하고 간사한 짓을 벌이고 있으니, 제발 저것을 없애 주십시오." 그러고는 뜰 가운데 있는 큰 회화나무 밑동을 가리켰다. 장산인이 주술이 담긴 물을 뿜자 잠시 뒤 사람 얼굴을 한 큰 뱀이 번쩍이는 눈빛으로 꿈틀거리며 나오다가, 절반도 채 빠져나오지 못한 채 죽어 버렸다. 그것을 태워 버리게 하니 집은 마침내 깨끗해졌다.
사람들과 어울려 놀다가 화살로 물고기를 잡으면, 장산인은 그중 죽은 것만 골라 물동이에 넣고 단약을 넣었는데, 그러면 물고기가 다시 살아나 유유히 헤엄쳤다. 사람들이 죽은 꿩으로도 시험해 보라 하니, 역시 단약을 입에 넣어 주자 훨훨 날개를 치며 살아났다.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죽은 사람도 다시 살려낼 수 있습니까?" 장산인이 답했다. "보통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정욕에 방자하여, 몸을 떠난 넋과 혼백이 삼 년이 지난 뒤에야 완전히 끊어지니, 약으로는 살려낼 수 없소."
장산인은 실제와는 다르게 자기는 글자를 모른다고 말했지만 글만은 잘 지어 냈고, 밤눈이 어둡다고 하면서 밤에는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지만 어두운 곳에서도 작은 글자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삼베로 만든 병에 술을 담거나 종이로 만든 그릇에 불을 피우는 것과 같이, 세상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는 잡기 재주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이 많았다.
점쟁이 이화라는 사람이 점을 잘 친다고 한창 이름을 날렸는데, 장산인은 그를 자기보다 한 수 아래로 여겼다. 이화가 점치는 것을 볼 때마다 잘 맞히지 못하면 장산인이 고쳐서 말해 주었는데, 그 말이 모두 딱딱 들어맞아서 이화가 한마디도 감히 덧붙이지 못했다. 이화가 말했다. "장산인의 곁에는 늘 삼백 명의 귀신이 호위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사람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장산인의 나이는 일흔넷이었다. 그는 집안 재산을 처리하여 조카들에게 나누어 주고, 승복 차림에 지팡이 하나만 짚고 5월에 소요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의 승려에게 "금년은 내 명이 다하는 해이니 반드시 화장해 달라"고 일러 두었다. 오래지 않아 왜군이 들어와 앉은 채로 칼에 찔렸는데, 그의 피는 하얀 기름 같았고 시체가 쓰러지지도 않았다. 잠시 뒤 큰 뇌성이 울리며 비가 쏟아지자 왜군은 겁이 나서 물러갔다.
산의 승려가 그를 화장하니, 상서로운 빛이 사흘 밤낮으로 하늘에 이어졌고, 사리 일흔두 개를 얻었다. 그중 큰 것은 가시연 열매만큼 컸고 검푸른 빛을 띠었다. 이를 모두 탑 속에 안치해 두었다.
그해 9월, 장산인이 강화도에 사는 정붕이라는 사람의 집을 찾아왔다. 정붕은 그의 죽음을 알지 못했고, 그는 사흘을 머물다가 떠나면서 금강산으로 간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듬해에야 비로소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 사람들은 그가 죽은 뒤에 신선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정붕이라는 사람 또한 기이한 사람을 만나 점과 관상을 잘 보게 된 술사였다. 그가 하는 말은 대부분 신통하게 맞아들었고, 조정에서 참봉 자리를 내렸지만 받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그가 귀신을 부릴 수 있었지만 젊어서 죽었다고 말했다.
(용어) 양의는 옛 중국 주나라 때 외과 진료를 맡았던 벼슬 이름으로, 지금의 외과의를 뜻한다. 자리공은 뿌리를 약재로 쓰는 풀이다. 《옥추경》은 도교의 경전이고, 《운화현추》는 도술을 익히는 책으로 전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남궁 선생의 삶을 기록한 글 (서기 1608년 10월 25일, 양력 추정)
선생의 이름은 두이며, 대대로 임피에서 살아온 집안 출신으로 뿌리도 깊고 재산도 넉넉해서 고을에서 손꼽히는 집안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두 세대는 과거에 나가 벼슬살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남궁두만은 스승을 따라 과거 공부를 하여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서른 살에 처음으로 1555년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해 시험장에 이름을 울렸다. 일찍이 "큰 믿음은 약속하지 않는다"는 뜻의 글을 지어 성균관 시험에서 수석으로 뽑히니, 사람들이 모두 그 글을 서로 베껴 외우고 다녔다.
남궁두는 거만하고 고집이 세며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성격이어서, 재주만 믿고 고을에서 호기롭게 멋대로 지냈다. 잘난 체하며 고을 수령에게도 예의를 갖추지 않으니, 고을의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그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보며 앙심을 품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선생은 처음에 서울로 옮겨 가 벼슬길에 나설 계획을 세우고, 첩 한 사람만 시골집에 남겨 두었다. 그리고 해마다 가을이면 곧장 내려가 그해 수확을 처리했다.
첩은 무인의 딸이었지만 몹시 예쁘고 영특해서, 글과 셈법을 가르쳐 주면 남보다 빨리 알아챘다. 그래서 남궁두는 그녀를 가장 사랑했다. 그러나 남궁두가 서울에 살게 되면서 여러 달 동안 홀로 지내야 했던 그녀는, 몰래 남궁두와 성이 다른 먼 친척 조카와 정을 통하고 있었다.
1558년 가을, 남궁두는 급한 일로 고향으로 내려가다가 30리를 남기고 날이 저물었다. 하인들은 그 자리에 머물게 하고 혼자 말 한 필을 몰아 시골집으로 달려가 보니, 이미 등불이 켜진 밤이었다. 종들도 모두 잠자리에 들었는데 중문이 활짝 열려 있고, 그 안에 첩이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은 채 섬돌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조카 녀석이 동쪽의 낮은 담을 넘느라 발이 땅에서 반 자쯘 떠 있었는데, 첩이 급히 달려가 그를 안아 맞아들이고 있었다.
남궁두는 분노를 억누르며 일이 끝까지 이르기를 짐짓 천천히 기다렸다. 말을 바깥문 기둥에 매어 두고 몸을 숨긴 채 틈으로 두 사람을 엿보았다. 둘이 희희덕거리며 온갖 추잡한 짓을 하다가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남궁두는 그 실체를 확실히 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었다. 걸려 있던 화살통에 화살 두 개와 활 하나가 있었다. 마침내 화살을 당겨 쏘아 먼저 계집의 가슴을 꿰뚫어 즉시 쓰러뜨렸다. 그 사내가 놀라 일어나 북쪽 창문으로 뛰어넘으려 하자, 다시 쏘아 늑골에 적중시켜 죽게 만들었다.
남궁두는 관아에 알리고도 싶었지만, 그러면 가문을 더럽히는 일이 되고 고을 수령의 마음도 믿을 수 없어, 곧바로 두 시체를 끌어다 논 도랑 속에 묻어 버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말을 몰아 서울로 돌아왔다.
다음 날 날이 훤히 밝은 뒤에야 집안 종들이 첩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와 그 조카가 함께 도망친 것으로 여기고 조카의 집에 가서 물어보니, 그쪽에서도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있었다.
농장에 있던 종 하나가 예전에 남궁두의 곡식 백여 섬을 훔친 적이 있어, 남궁두가 오면 반드시 자신을 죽일 것이라 늘 걱정하고 있었다. 그자는 남궁두가 이번에 그 두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며 자취를 뒤지고 다녔다. 논 도랑 물 위에 기름이 떠 있는 것을 보고 삽으로 파 보니 두 시체가 엎어지고 뒤집어진 채로 나왔다. 그자는 곧바로 첩의 집안에 알렸고, 그 집의 늙은 병졸이 현령에게 고발하면서 남궁두의 집안과 사내의 집안 사이에 오래된 원한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로 내세웠다. 현령과 아전들은 본래부터 남궁두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기에 모두 잘됐다며 기뻐하고, 사사로운 미움 때문에 조카를 모살했다는 죄목을 씌워 사건을 꾸몄다.
서울에서 남궁두는 형틀에 묶이고 온갖 형구가 갖춰진 죄인의 수레에 실려 이산까지 끌려갔다. 남궁두의 아내가 어린 딸을 업고 뒤늦게 그곳에 도착해, 간수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밤에 형틀을 풀어 남궁두를 빼내 주었다. 날이 밝아서야 간수가 그가 없어진 것을 알았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를 읍내까지 끌고 와 어린 딸과 함께 옥중에 가두어 굶겨 죽였다.
임피에 있던 남궁두의 논밭과 재산은 모조리 몰수되어 죽은 두 사람의 집안에 나누어졌다.
남궁두는 곧바로 금대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법명을 총지라 했다. 계율을 몹시 엄하게 지키며 일 년을 보냈다. 그런데 원수로 여기던 집안에서 그가 있는 곳을 알아내고 병졸을 거느려 붙잡으러 오고 있었다. 그날 새벽 꿈에 산신이 나타나 "원수진 사람들이 곧 올 것이니 급히 달아나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급히 산을 내려가니, 그를 잡으러 오던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무도 붙잡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남궁두는 두류산(지리산)으로 향하다가 쌍계사에서 한 달가량 머물렀다. 이름난 절이라 승려와 속인들이 몰려드는 것에 싫증이 나서, 그곳을 떠나 태백산으로 향했다. 의령에 있는 한 들판의 암자에 이르러 쉬고 있었는데, 뒤따라 승려 한 사람이 도착했다. 곱게 생겼고 나이도 어린데, 삿갓을 벗고 당에 올라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그대는 사족이시군요. 어째서 뒤늦게 머리를 깎으셨습니까?" 잠시 뒤에는 "참을성이 있는 분이시군요" 하더니, 조금 있다가 "유학을 업으로 하셨으면 큰 벼슬을 하셨을 텐데요" 했다. 얼마 지나서는 껄껄 웃으며 "두 사람의 목숨을 해치고 죄를 지어 도망 온 분이시군요" 하는데, 말한 네 가지가 모두 딱 들어맞았다.
남궁두는 깜짝 놀라 어찌할 줄 모르다가, 밤이 되자 그의 방으로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그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인정하고, 무척 간곡하게 스승이 되어 달라고 청했다. 그 젊은 승려가 말했다. "나는 겨우 관상 보는 법만 이해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스승께서는 온갖 방술을 다 아십니다. 사람의 관상을 보고 그에 맞는 방술을 전해 주시는데, 더러는 부적과 주문으로, 더러는 천문으로, 더러는 풍수지리로, 더러는 점술로, 그 사람의 그릇에 맞춰 친절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관상법만 전수받았을 뿐 아직 지극한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어찌 감히 남의 스승이 되겠습니까." 남궁두가 지금 스승이 어디 계시냐고 묻자 승려가 답했다. "무주의 치상산에 계십니다. 그대가 그곳으로 가면 만나 뵐 수 있을 것입니다." 남궁두는 절하고 물러났다. 다음 날 아침 그의 안부를 살피러 가 보니 이미 떠나 버린 뒤였다.
남궁두는 곧바로 방향을 돌려 지팡이를 짚고 치상산에 이르러 온 산을 두루 살폈다. 절이 거의 수십 곳이나 있었지만, 어느 절에도 유별난 승려는 없었다.
한 해 동안 머물며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돌이 구르는 험한 비탈과 산꼭대기, 나는 새조차 이른 적 없는 곳까지 찾아다녔다. 세 번 네 번을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젊은 승려가 자기를 속인 것이라 여기고 서운한 마음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우연히 한 골짜기에 이르러 숲속을 흐르는 시내를 보니, 물 위에 큰 복숭아씨가 떠내려 오고 있었다. 남궁두는 속으로 기뻐하며 '이 계곡 안쯐에 신선 스승이 계신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는, 걸음을 재촉해 물줄기를 따라 몇 리쯤 들어가 우뚝 솟은 봉우리를 바라보니, 소나무와 삼나무가 해를 가리고 있는 곳에 허름한 세 칸짜리 집이 있었다.
벼랑에 기대어 지은 집으로, 돌을 쌓아 만든 층계 위에 대를 두었고 맑고 깨끗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옷자락을 거머쥐고 길을 따라 올라가니 동자가 맞이하며 물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남궁두가 읍하며 "총지가 신선 스승님을 찾아뵈러 왔습니다" 하니, 동자가 동쪽의 왼편 쪽문을 열어 주었다.
그 안에는 늙은 승려가 있는데, 모습은 마른 나뭇가지 같았고 해진 가사를 입은 채 나오며 말했다. "화상의 기골이 우람하여 보통 사람 같지 않은데, 무슨 일로 오셨는가?" 남궁두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어리석고 우둔한 저는 아무런 재주도 없습니다. 노스승님께서 온갖 방술을 다 아신다는 말을 듣고, 세상에서 그중 한 가지라도 익혀 보고 싶어 천 리 먼 길을 마다 않고 스승을 찾아왔습니다. 한 해를 헤매고서야 겨우 이곳을 찾았습니다. 제자가 되어 배우고자 하니 가르쳐 주십시오."
장로가 말했다. "산속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늙은이일 뿐인데, 무슨 방술이 있겠는가." 남궁두는 계속 절하며 간절히 애걸했지만 장로는 굳게 거절하며 문밖으로도 나오지 않았다. 남궁두는 처마 밑에 엎드린 채 새벽이 되도록 애타게 빌었고 아침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지만, 장로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여기며 가부좌를 틀고 선정에 들어 돌아보지도 않은 채 사흘을 보냈다. 남궁두가 갈수록 더 정성을 다하니, 그제야 장로는 그 정성을 알아보고 문을 열어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방은 한 길밖에 되지 않을 만큼 작았고, 나무 베개 하나가 놓여 있었으며, 북쪽 벽을 파서 여섯 굽이의 벽감을 만들어 놓았다. 자물쇠로 잠가 두고 열쇠 하나는 벽감 기둥에 걸어 두었으며, 남쪽 창문 위의 선반에는 책 대여섯 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장로가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군. 투박한 성품이니 다른 방술은 가르쳐 줄 수 없지만, 오직 죽지 않는 방술만은 가르쳐 줄 수 있겠네." 남궁두가 일어나 절하며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장로가 말했다. "무릇 모든 방술은 먼저 정신을 하나로 모은 뒤에야 이룰 수 있는 법인데, 더구나 넋과 정신을 단련하여 신선으로 탈바꿈하려는 사람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네. 정신을 모으는 일은 잠을 자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니, 그대는 먼저 잠을 자지 않도록 해 보게."
남궁두가 그곳에 도착한 지 나흘이 되었는데도 장로는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어린아이 대하듯 하루에 검은 콩가루 한 홉만 먹으면서도 전혀 배고프거나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남궁두는 이를 마음속으로 특이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런 가르침을 받고서는 온 정성을 다해 큰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빌었다.
첫날 밤에는 앉아서 밤 깊은 시각까지 견디자 눈이 저절로 감겼지만 참고 새벽까지 버텼다. 이튿날에도 정신이 흐리고 몸이 고달파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각고의 뜻으로 굳게 참았다. 사흘, 나흘째 되는 밤에도 몸이 지치고 고달파 앉아 있기조차 힘들어 더러는 머리를 벽에 찧으며 겨우 견뎌 냈다. 일곱째 밤을 넘기자 마음이 툭 트이듯 밝게 깨어나 상쾌한 기운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장로가 기뻐하며 말했다. "그대에게는 참으로 큰 인내력이 있으니, 무슨 일을 이루지 못하겠는가." 그러고는 경전 두 권을 꺼내 주며 말했다. "이것은 위백양이 지은 《참동계》라는 책으로, 수련하는 데 가장 좋은 비결이며 도가에서 가장 높은 가르침이다. 《황정경》의 내옥경 편은 기를 이끌고 오장을 단련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역시 도가의 오묘한 진리다. 이 두 책을 만 번쯀 읽으면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이니, 매일 열 번씩 읽도록 하게."
그리고 이어 말했다. "무릇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르려는 사람은 마음속 생각을 끊어 없애고 편안히 앉아 기와 정신을 단련해야 하며, 눈과 입과 귀 이 세 가지를 굳게 닫아 몸속의 상반된 기운이 다투는 그 틈에서도 도가 이루어지니,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네. 스스로 뛰어난 지혜와 타고난 자질이 없다면 빨리 이룰 수는 없네. 그대의 성품은 투박하고 굳세며 잘 참아 내니, 높은 가르침으로 이끌기는 어렵겠네. 먼저 곡식으로 하는 식사를 끊어 보게. 그것이 가장 낮은 데서 가장 높은 곳까지 이르는 방법일세.
무릇 사람의 생명이란 오행에서 정기를 받은 것이기에, 오장은 각각 오행이 주관하는 것이라네. 위장은 흙의 기운을 받아서, 사람이 마시고 먹는 것은 모두 위장으로 들어가지. 곡식의 정기로 몸을 건강하게 하고 병 없이 지낼 수 있다 해도, 그 기운이 결국 흙에 끌려 찌꺼기가 되어 땅으로 돌아가고 마니, 옛날에 곡식을 먹지 않았던 사람들이 다 이런 까닭이었네. 그대는 먼저 곡식을 끊는 것을 시험해 보게."
그러고는 곧 남궁두에게 이레 동안 하루 두 끼만 먹게 했다. 다시 이레 동안은 한 끼는 밥, 한 끼는 죽을 먹게 했고, 또 이레 동안은 죽 한 끼를 없애고 밥만 한 끼 먹게 했다. 다시 이레 동안은 밥 대신 죽만 한 끼 먹게 하고는, 이렇게 스물여드레가 지나자 밥이든 죽이든 아예 먹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열쇠로 위쪽 벽감의 자물쇠를 열어 칠을 입힌 합 두 개를 꺼냈는데, 하나는 검은 콩가루가 든 것이고 하나는 황정 뿌리와 복숭아씨 가루가 든 것이었다. 각각 한 숟가락씩 물에 타서 하루에 두 차례 먹게 했다.
남궁두는 본래 식사량이 커서 허기를 견디기 힘들었고, 몸이 수척해지고 피곤해지며 눈이 흐려져 물건을 분별하기 어려웠지만 계속 참아 냈다. 검은 콩가루를 스물한 번째 먹던 날, 갑자기 배 속이 가득 찬 듯한 느낌이 들며 더는 먹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그 뒤로는 측백나무 잎과 참깨를 먹게 했더니, 온몸에 부스럼이 촘촘히 돋아 견디기 힘들었다. 다시 백 일이 지나자 부스럼 딱지가 떨어지고 새살이 나와 완전히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다. 장로가 기뻐하며 말했다. "그대는 참으로 훌륭한 성품과 체질을 타고났군. 다만 욕심만 없애면 되겠네."
삼 년 동안 그곳에 머물며 두 가지 비결서를 각각 만 번씩 읽었다. 가슴속이 씻은 듯 시원해져 정신이 하늘과 통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장로는 자주 호흡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기를 운행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어 기가 이윽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자시·오시·묘시·유시에 맞춰 정해진 호흡 비결을 행하여 호흡의 길을 완성하니, 얼굴에 점점 살이 오르고 기운은 갈수록 상쾌해지며 온갖 잡념이 모두 사라졌다.
육 년이 지나자 장로가 말했다. "그대에게는 도를 이룰 골격이 있어 법대로 하자면 마땅히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를 만하네. 이 수준에서 그치더라도 옛날의 왕자교나 전갱 정도는 될 것이네. 욕심이 비록 일어나더라도 오직 그것을 참아 내야 하네. 무릇 욕심이란 먹고 성욕을 탐하는 욕심이 아니더라도, 일체의 망상은 참됨에 해로우니 반드시 모든 것을 비워 내고 고요한 마음으로 단련해야 하네."
그런 뒤 비어 있는 두 번째 방에 남궁두를 앉히고, 기운을 오르내리고 굴리고 뒤집는 수련법을 가르쳐 주었다. 가르치는 말마다 자상하고 친절했다. 남궁두는 배운 대로 태연히 앉아 움직이지 않은 채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장로를 떠올렸다. 그러는 동안에는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배부름을 모두 견뎌 낼 수 있었다.
하루는 윗 잇몸에서 자두 씨만 한 것이 생겨 단물을 혀 위로 흘려보내는 것을 느끼고 장로에게 알리니, 장로는 그것을 천천히 빨아 뱃속으로 삼키게 하고는 기뻐하며 말했다. "수련의 기초가 세워졌으니 이제 불기운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네." 그러고는 곧바로 벽에 하늘·땅·사람을 비춘다는 거울을 걸고 좌우에 칠성검 두 개를 꽂은 뒤, 절뚝거리는 걸음을 걸으며 주문을 외워 마귀를 물리치고 도를 이루게 해 달라고 빌었다.
수련한 지 거의 여섯 달 만에 단전이 가득 채워지고 배꼽 아래에서 금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남궁두는 도가 이루어져 가는 것을 기뻐하다가, 어서 빨리 완성하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솟아 억누를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몸속의 신비로운 기운에 불이 붙어 머리끝까지 타올랐고, 그는 고함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장로가 지팡이로 그의 머리를 내리치며 "슬프다, 크게는 이루지 못하겠구나" 하고는, 급히 남궁두를 앉혀 안정시키고 기운을 아래로 내리게 했다.
기운은 비록 가라앉았지만 마음이 두근거려 온종일 안정되지 않았다. 장로가 탄식하며 말했다. "세상에 드문 사람을 만나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전생의 업장을 다 걷어 내지 못해 끝내 일을 그르치고 말았으니, 이는 그대의 운명이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그러고는 회복시키는 차를 마시게 했다. 이레가 지나서야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운에 열이 오르지 않게 되었다.
장로가 말했다. "그대는 비록 신선의 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지상의 신선은 될 수 있을 것이며, 조금만 더 수양하면 팔백 살의 수명을 누릴 수 있을 것이네. 그대의 운명에는 마땅히 아들을 두게 되어 있지만 정자가 나오는 길이 이미 막혔으니, 약을 먹어 그 길을 열어야 하네." 그러고는 오동나무 열매만 한 붉은 환약 두 알을 꺼내 주었고, 남궁두는 그것을 삼켰다.
남궁두가 청했다. "우둔한 이 사람이 가르침대로 이루지 못한 것은 제 운명이 기박한 탓이니 무엇을 한스러워하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스승님을 모신 지 이제 칠 년인데도 아직 스승님이 어디서 오신 분인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부디 자세히 알려 주셔서, 훗날에라도 사모하는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게 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장로가 웃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물었다면 결코 말해 주지 않았겠지만, 그대는 그토록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자세히 말해 주겠네.
나는 상주 땅 큰 성씨 집안의 후손으로, 태사 권행의 증손자였네. 송나라 희령 2년, 곧 1069년에 태어났지. 열네 살에 나병에 걸렸는데, 부모가 나를 거두지 않고 숲속에 내버렸네. 밤에 호랑이 한 마리가 나를 안아다 돌집에 놓아 주고는, 눈에 불을 켠 채 새끼 두 마리에게 젖을 먹이면서도 곁에 있는 나를 끝내 해치지 않더군. 통증이 극에 달했을 때는 오히려 호랑이 어금니에 물려 속히 죽지 못하는 것만이 한스러울 정도였네.
초라라는 풀이 벼랑의 구멍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잎이 넓고 뿌리가 크더군. 시험 삼아 씻어서 먹어 보니 뱃속이 조금 채워지더군. 그것을 먹으며 몇 달이 지나자 부스럼이 줄어들고 점점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네. 그래서 많이 캐다가 끼니마다 그것을 먹었네. 산 중턱에 있는 것을 거의 다 캐 먹으며 몇백 일을 지내자 부스럼이 모두 벗겨지고 온몸에 푸른 털이 돋아나기에, 기뻐하며 실컷 먹었더니 다시 백 일이 지나 몸이 저절로 움직여져 산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네. 나병은 이미 나았지만 예전에 살던 마을을 알아볼 수 없어, 길에 나와도 갈 곳을 몰라 서성이고 있었네.
그런데 뜻밖에 승려 한 사람이 산봉우리 아래로 지나가기에, 찾아가 길을 막으며 물었네. '이곳은 어떤 산입니까?' 승려가 답하기를 '여기는 태백산이고, 진주부에 속한 땅입니다' 하더군. 근방에 절이 있느냐고 물으니 승려가 '서쪽 봉우리에 절이 있지만 길이 끊겨 쉽게 오를 수 없습니다' 했네. 나는 곧 몸이 날듯이 가벼워져 그 암자에 이르렀는데, 선방은 낮에도 문이 닫혀 있고 사람이라곤 없더군.
손으로 곁채의 문을 열고 들어가 안채로 가 보았더니, 늙고 병든 승려 한 사람이 굵은 삼베옷을 두르고 탁자에 기댄 채 숨을 헐떡이며 거의 죽어 가는 모습이었네.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더니 '지난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 「우리 스승님의 비결서를 전할 사람이 지금 오고 있다」고 하더니, 그대의 얼굴을 보니 참으로 그 사람이구나' 하면서, 일어나 보자기를 풀어 책 한 뭉치를 꺼내 주었네.
그러고는 '이것을 만 번 읽으면 그 뜻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니, 애써 힘쓰고 게으름 피우지 말게' 하였네.
내가 이 책을 누가 전한 것이냐고 물으니, '신라의 의상대사께서 중국에 들어가 정양진인을 만나 이 책을 받으셨는데, 세상을 떠나실 때 나에게 이 책을 맡기며 이백 년 뒤에는 반드시 전할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 하셨네. 그대가 바로 그 예언에 맞는 사람이니 받아서 힘써 정진하게. 나는 이제 전할 사람을 만났으니 죽으려네' 하고는, 가부좌를 튼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네. 나는 곧바로 그분을 화장하여 검푸른 빛의 사리 백 개를 얻어 탑 속에 안치했네.
책 뭉치를 풀어 살펴보니 《황제음부경》, 《금벽용호경》, 《참동계》, 《황정내외경》, 《최공입약경》, 《태식심인》, 《통고정관》, 《대통청정》 같은 경전들이었네.
나는 그 암자에 들어가 홀로 살며 수련을 했네. 마귀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둘러쌌지만, 듣지도 보지도 않으니 저절로 사라져 갔네. 온갖 애를 쓴 지 열한 해 만에야 신선의 태를 이루었네. 법대로라면 마땅히 세상을 벗어나 떠났겠지만, 옥황상제께서 이곳에 머물며 우리나라 세 지방의 모든 신을 거느리라 명하셨네. 그래서 여기 머문 지가 벌써 오백여 년이 되었네.
기한이 차면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네. 그동안 수십 명을 만나 보았지만, 더러는 기운이 지나치게 예민하고 더러는 너무 둔하고 더러는 인내력이 부족하고 더러는 인연이 얕고 더러는 욕심이 많아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네. 만약 도를 이루는 사람이 있었다면 마땅히 내 임무를 맡기고 옥경으로 돌아갔을 텐데, 수백 년을 헛되이 보내고도 그런 사람 하나 만나지 못했으니, 이는 아마 내가 아직 이 티끌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지 못해서 그런 것일 게야."
남궁두는 장로와 오랫동안 같은 방에서 잠을 자면서도, 그가 늘 숨기는 것이 있어 이상하게 여겼다. 배꼽 아래 한 치쯤 되는 부분을 늘 가리고 남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 까닭을 묻고 한번 보고 싶다고 청하니, 장로가 웃으며 말했다. "그걸 어찌 쉽게 보여 주겠나. 보여 주면 그대는 깜짝 놀라 까무러칠 것인데." 남궁두가 "왜 놀라겠습니까, 한 번 보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하니, 장로가 싸맨 것을 풀어 놓았다. 그러자 눈부신 금빛 백여 줄기가 천장까지 뻗쳐 나왔다. 도저히 마주 볼 수가 없어 의자 밑으로 숨으니, 장로는 다시 그것을 감싸 원래대로 해 놓았다.
남궁두가 또 물었다. "스승님께서는 진작부터 모든 신들을 다스린다 하셨는데, 어째서 찾아와 뵙는 신이 하나도 없습니까?" 장로가 답했다. "나는 정신을 날려 보내 그들의 조화를 받아 왔을 뿐이네." 남궁두가 여러 신들을 직접 보고 싶다고 청하니, 장로가 말했다. "다음 해 정월 보름날을 기다려야 하네."
그날이 되자 장로는 벽감 속에서 옷 상자를 꺼내, 여덟 가지 색깔로 된 두건을 쓰고, 일곱 별과 해와 달의 무늬를 수놓은 도포를 입고, 둥근 청옥에 사자를 그린 띠를 두르고, 다섯 가지 꽃무늬를 놓은 신을 신었다. 손에는 여덟 모난 옥으로 만든 여의주를 쥐고 섬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남궁두는 서쪽을 향해 그를 모셨고, 동자는 한쪽 모퉁이에 서 있었다.
갑자기 대 위의 잣나무 두 그루에 각각 울긋불긋한 꽃등불이 걸리더니, 잠시 뒤 산골짜기를 가득 채운 수천수만 그루의 나무마다 모두 꽃등불이 걸려 붉은 불꽃이 온 공간을 가득 채워 대낮같이 밝아졌다. 기이하고 괴상한 짐승들이 나타났는데, 더러는 곰이나 호랑이 같기도 하고 더러는 사자나 코끼리 같기도 했다. 어떤 것은 표범인데 다리가 둘뿐이었고, 어떤 것은 뿔 없는 규룡의 모습에 날개가 달려 있었으며, 어떤 것은 뿔 없는 용의 모습이었다. 어떤 것은 용의 몸에 말의 머리가 달렸고, 어떤 것은 뿔이 셋인데 사람처럼 서서 빨리 달렸으며, 어떤 것은 사람 얼굴을 하고 눈동자가 세 개나 달렸는데, 이런 것들이 수백 마리나 되었다.
또 코끼리, 노루, 사슴, 돼지 모습을 한 것들로 노란 눈에 하얀 이빨, 붉은 털에 하얀 발굽을 지니고 뛰고 할퀴어 대는 것들이 천여 마리쯤 되어 모두 줄지어 좌우에 모시고 섰다. 그 밖에도 금빛 사내아이와 옥빛 계집아이 차림을 한 이들이 지휘 깃발을 들고 수백 명이나 서 있었고, 창검을 든 군사들도 천여 명이 빙 둘러서 있었다.
대 위에는 온갖 향기가 물씬 풍기고 옥 노리개가 부딧치는 소리가 쟁쟁거렸다. 곧이어 푸른 장삼을 입고 상아로 만든 홀을 들고 물빛 옥을 차고 고깔을 쓴 두 사람이 섬돌 아래서 몸을 굽히며 외쳤다. "동방의 극호림, 광하, 홍영산 세 대신군께서 뵙습니다." 이 세 대신은 모두 붉은 금관을 쓰고 붉은 도포에 옥띠를 두르고, 홀을 단정히 쥐고 구름 무늬가 그려진 신을 신고 칼과 노리개를 찬 채 키가 훤칠했다. 얼굴은 희고 길었으며 눈매가 밝고 수려했다. 장로가 일어서서 두 손을 맞잡아 예를 표하니, 세 대신은 함께 두 번 읍하고 물러갔다.
또 외쳤다. "봉호, 방장, 도교, 조주, 영해 다섯 신선 고을의 참된 관리들이 뵙습니다." 다섯 신은 각각 자기 지방의 색을 나타내는 도포를 입었는데, 관이나 노리개는 앞의 이들과 같았고 모두 헌걸차고 수려했다. 장로가 일어서니 다섯 신은 모두 두 번 절하고 물러갔다.
또 외쳤다. "동해, 남해, 서해에 있는 장리, 광야, 옥초, 현롱, 지폐, 총진, 여궤, 동화, 선원, 임소 등 열 개 섬의 여관들이 뵙습니다." 그러자 선녀 열 명이 모두 꽃을 수놓은 금빛 두건을 쓰고 붉은 구슬로 된 흔들이 노리개를 꽂았는데, 구슬과 비취옥이 얼굴에 영롱하게 반사되어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금빛 봉황 무늬를 놓은 하얀 저고리에 파란 비단으로 지은 무릎 아래까지 닿는 긴 치마를 드리우고, 태을영부라는 부적을 차서 번쩍번쩍 번갯불이 일었으며, 푸르고 붉은 모가 난 낮은 신을 신었다. 훤칠하고 허리가 긴 그들이 남자들처럼 절을 올리니, 장로는 일어나지 않고 앉은 채로 절을 받았고 여관들은 곧 물러갔다.
또 외쳤다. "천인, 자개, 금마, 단릉, 천량, 남루, 목주 일곱 지역을 다스리는 사명신장들이 뵙습니다." 그러자 붉은 머리띠에 깃을 꽂고 무인들이 입는 홑바지와 꽃수를 놓은 앞가림 옷을 입은 이들이 나타났는데, 팔에는 활집과 화살통을 비스듬히 걸고 손에는 붉은 창을 쥐고 있었다. 모두 사자와 호랑이를 섞은 듯한 모습으로 붉은 머리털을 곧추세우고 금빛 눈동자에 용의 수염이 달려 있었다. 이들은 읍만 하고 절은 하지 않은 채 물러갔다.
또 외쳤다. "단산, 현림, 창구, 소천, 자야 다섯 신을 따르는 산과 숲, 늪과 못, 고개와 물길, 성황당 등의 모든 귀신 우두머리들이 함께 뵙습니다."
이 다섯 신장의 모습은 앞의 일곱 지역 신장들과 비슷했고, 각각 백여 명씩의 영관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어떤 것은 키가 작고 못생겼으며 어떤 것은 키가 컸고, 어떤 것은 말쑥했으며 어떤 것은 팔이 여섯 개, 눈이 네 개나 달려 있었다. 여자들 중에는 늙고 못생긴 이도 있고 곱고 젊은 이도 있었는데, 옷은 모두 자기 지방의 색을 따라 입고 줄지어 서서 네 번 절한 뒤 물러나 다섯 줄로 늘어섰다.
장로가 어린 동자에게 명하여 붉은 깃발을 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갔다가 남쪽으로 돌아 서쪽에 이르러 중앙 부대 앞에 서게 하니, 동자가 아뢰었다. "모든 신령들이 다 모였지만, 오직 위주의 조 부인만 오지 않았습니다." 소천신이 나와 무릎을 꿇고 말했다. "그분은 귀양을 가서 이제 인간으로 강등되었고, 그를 대신할 이가 아직 오지 못했습니다."
장로는 광하를 비롯한 세 진인을 불러 앞에 세우고 물었다. "경들은 세 방면을 나누어 다스리며 상제의 어진 덕을 실천해서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입은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요즘 액운이 닥쳐와 만백성이 재앙에 걸려들고 있는데, 이를 구할 방책을 세워 놓았는가?" 세 사람은 모두 거듭 탄식하며 말했다. "참으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어제 봉래산의 치수대감이 자하원군이 계신 곳에서 와서 홍영산에 들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진인들이 구광전 위에서 상제를 모시고 있는데, 삼도제군께서 말씀하시길, 「이 속세에 사는 삼한의 백성들이 지나치게 교활하고 간사하여 속임수를 잘 쓰고 복을 아낄 줄 모르며,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효불충하며 귀신을 모독하였다. 그래서 어느 골짜기에 사는 여우 얼굴을 한 큰 마귀를 빌려다가 붉은 땅의 군대를 모두 모아 소탕하려 한다. 그리하여 이어질 전쟁 칠 년째에는 나라가 다행히 망하지는 않더라도 세 지방 백성의 열에 다섯이나 여섯을 죽여서 경계로 삼으려 한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신하인 저희도 그 말을 듣고 모두 두려워 마음이 떨렸습니다. 그러나 이는 큰 운수가 정한 바인데, 어찌 저희 힘으로 감히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장로도 역시 탄식을 그치지 못했다. 잠깐 사이에 중앙 부대에서 대포 한 발을 쏘는 소리가 울리자 네 개의 부대가 모두 호응하여 북과 쇠북을 울려 대었다. 그러자 나무 위에 걸려 있던 등불이 하나씩 땅으로 떨어지고, 아득히 깊은 골짜기에 짙은 구름이 내리깔렸다.
장로는 방으로 들어와 관과 옷을 벗고 등불을 밝히더니 방 한가운데 앉았다. 남궁두는 깜짝 놀라 한동안 정신을 놓고 있었다.
다음 날 남궁두를 불러 말했다. "그대는 이미 이곳과의 인연이 얕아 오래 머무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니, 산을 내려가 머리를 기르고 황정을 먹으며 북두칠성에 절하도록 하게. 음탕한 자나 도둑이라도 죽이지 말고, 매운 채소와 소고기·개고기 따위를 먹지 말며, 남을 몰래 해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땅 위의 신선일세. 이렇게 행하고 수양하기를 쉬지 않는다면 또한 하늘로 오르는 신선도 될 수 있을 것이네. 《황정경》과 《참동계》는 도가의 높은 가르침이니 외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게. 《도인경》은 노자의 도를 전하는 글이고, 《옥추경》은 우레를 맡은 여러 신들을 존숭하는 글이니, 늘 지니고 다니면 귀신들이 두려워하고 우러러볼 것이네. 이 밖에 마음을 닦는 요체로는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이 최상일세. 보통 사람이 선과 악 한 가지를 생각만 해도 귀신들이 곁에 벌려 서서 그것을 먼저 알아채고, 상제께서 굽어보심이 몹시 가까워서 무슨 일을 하나 하면 그것을 곧바로 하늘의 기록에 남기니, 억제하고 응답해 주는 효과가 그림자나 메아리보다도 빠른 것이네. 이치에 어두운 자들은 이것을 업신여기며 하늘은 꽉 막혀 있으니 두려울 게 없다고 하지만, 저 창창한 하늘 위에 참다운 주재자가 세상을 다스리는 손잡이를 쥐고 있음을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그대는 참아내는 마음이 강하긴 하지만 욕심을 아직 다 없애지 못했으니, 혹시라도 삼가지 않으면 한 번 그릇된 길에 떨어지는 것으로도 끝없이 오랜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네. 삼가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남궁두는 눈물을 흘리며 가르침을 받고, 곧 인사를 드리고 산을 내려왔다. 돌아보니 사람이 살던 그곳은 이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임피에 이르러 보니, 예전의 집은 터도 남아 있지 않았고 농장은 이미 두세 차례나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서울로 가 보아도 옛집은 터만 남아 주춧돌이 묵은 풀 속에 이리저리 널려 있을 뿐이었다. 눈물을 삼키며 그대로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예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착실한 늙은 종이 하나 있었는데, 해남에 살며 논밭과 집도 넉넉하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몸을 의지했다.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얼마 뒤 자기 주인임을 알아채고는 서로 붙잡고 통곡했다. 그 종은 자기가 살던 곳을 비워 남궁두가 지내게 해 주었다. 남궁두는 그곳에서 평민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아들과 딸을 하나씩 낳았다.
선생은 비록 다시 가업을 일으켰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끝까지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는 해남을 떠나 용담 지역에 은거했는데, 깊은 산골짜기를 골라 산 것은 치상산에서 가까운 곳이라 다시 그 신선 스승을 만나기를 바랐던 계획이었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 황정과 솔잎을 캐어 식사로 삼으니 몸이 날이 갈수록 더욱 건강해져, 수염도 희어지지 않고 걸음걸이도 날아갈 듯 가벼웠다.
1608년 가을, 나 허균이 공주에서 파직당하고 부안에 살고 있었다. 선생께서 고부에서부터 걸어서 내 여관방을 찾아오셨다. 그리하여 네 가지 경전의 오묘한 뜻을 나에게 전해 주시고, 또 그분이 신선 스승을 만났던 그 전말에 대해서도 위에서 말한 것처럼 상세히 들려주셨다.
선생의 나이는 그해로 여든셋이었으나 얼굴은 마치 마흔여섯이나 일곱쯤 된 사람 같았다. 시력이나 청력도 조금도 쇠약하지 않았고, 형형한 눈동자와 검은 머리털이 의연하여 여윈 학과 같은 풍모였다. 어떤 때는 며칠씩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참동계》나 《황정경》을 쉬지 않고 외우기도 했다.
이따금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몰래 해로운 일을 하지 말고, 귀신이 없다고 말하지 말게. 착한 일을 하고 덕을 쌓으며 욕심을 끊고 마음을 단련한다면 최고의 신선 경지에 이를 수 있으니, 난새와 학이 며칠 안에 내려와 그대를 맞이할 것이네."
나는 선생의 음식과 거처가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씀드리니, 선생이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하늘로 날아오르려 했는데, 너무 빨리 이루고 싶은 마음에 결국 이루지 못하고 말았네. 우리 스승께서는 이미 지상의 신선이 되었다면서, 부지런히 수련하면 팔백 살까지 기약할 수 있다고 허락해 주셨네. 그런데 요즘은 산속이 너무 한가하고 적막해서 속세로 내려왔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고, 가는 곳마다 젊은이들이 늙고 누추한 나를 멸시하니 인간 세상의 재미라곤 전혀 없네. 사람이 오래도록 곁에 두고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본래 즐거운 일인데, 이렇게 쓸쓸하고 즐거움이라곤 없으니 내가 왜 오래 살려 하겠는가. 그래서 속세의 음식을 가리지 않고, 아들을 안고 손자를 재롱부리게 하면서 남은 생을 보내다가, 자연의 흐름을 따라 깨끗이 세상을 떠나 하늘이 정해 준 바를 따르려 하네. 그대야말로 신선의 재주와 도를 이룰 골격을 지녔으니, 힘써 행하고 쉬지 않는다면 참된 신선이 되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네.
우리 스승께서 일찍이 나에게 인내력이 있다 하셨지만 나는 끝내 참아 내지 못하고 이 지경이 되었네. '참을 인' 이 한 글자야말로 도가의 오묘한 비결이니, 그대 또한 이를 삼가 지니고 놓치지 말게." 얼마간 머무시다가 붙잡는 손을 뿌리치고 떠나셨는데, 사람들은 그가 다시 용담으로 갔다고들 했다.
내가 논한다. 전해 오는 말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교는 숭상했지만 도교는 숭상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신라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몇천 년이 지났지만, 도를 얻어 신선이 되어 떠나간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 전해 오는 말이 과연 맞는 말인가. 그러나 내가 직접 만나 본 남궁 선생을 두고 말한다면,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선생이 스승으로 모셨던 분이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관상 보는 사람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그 일도 확실히 믿을 만한 것은 아니며, 이야기 속에 나온 여러 일들도 다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요컨대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실체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다만 선생의 나이와 용모로 본다면, 참으로 도를 얻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여든의 나이에도 그처럼 건강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이 또한 도교를 숭상하는 일이 실제로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궁벽한 바다 밖 먼 곳에 있어, 옛 선문자나 안기생 같은 뛰어난 은자가 드물었다. 그러나 바위틈에 그런 기이한 사람이 있어, 천백 년 만에 남궁 선생으로 하여금 그를 만날 수 있게 했으니, 그 누가 "이 좁은 땅에는 그런 인물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도에 통달하면 신선이 되고, 도에 어두우면 평범한 사람으로 남는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이 귀로 주워듣고 그대로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만약 선생이 빨리 이루려는 욕심을 없애고 끝내 수련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면, 저 선문자나 안기생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다만 그 한 가지를 다스려 내지 못해 거의 다 이루어진 공을 마지막에 놓치고 말았으니, 아,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용어) 오독은 참혹한 형벌을 가하는 다섯 가지 형구를 말한다. 위백양은 한나라 사람으로 도술을 익혀 산에 들어가 도를 이루었으며, 도가의 중심 경전인 《참동계》와 《오행상류》라는 책을 남겼다. 《황정경》은 도교의 경전으로, 내경·외경·둔갑연신경 세 종류가 있다. 삼보는 도가에서 말하는 귀·입·눈을 가리킨다. 염부제는 불교 경전에서 말하는 이 세상, 곧 사람이 사는 세계를 뜻하는 말이다. 뇌부는 도가에서 우레를 맡은 신들의 관청을 뜻한다.
걸인 장생의 삶을 기록한 글 (서기 1608년 11월 20일, 양력 추정)
장생이라는 사람은 어떤 내력을 지닌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1589년 무렵 서울을 오가며 구걸로 살아갔다. 그의 이름을 물으면 자기 자신도 모른다고 했고,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어디서 살았는지 물으면 이렇게 답했다. "아버지는 밀양의 좌수였는데, 제가 태어난 지 세 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가 종첩의 속임수에 빠져 저를 농장 종의 집으로 쫓아냈습니다. 열다섯 살에 그 종이 상민의 딸에게 장가들게 해 주어 몇 해를 살았는데, 아내가 죽자 이곳저곳을 떠돌며 호남과 호서 지방 수십 고을을 거쳐 이제 서울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용모는 매우 우아하고 수려했으며 눈매도 그린 듯이 고왔다. 이야기와 웃음이 막힘없이 술술 흘러나왔고, 더욱이 노래를 잘 불러서 그 소리가 애절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키곤 했다. 늘 자줏빛 비단으로 지은 겹옷을 입고 다녔는데, 춥거나 더울 때에도 갈아입는 법이 없었다.
기생집이라면 안 다녀 본 곳이 없어 서로 잘 알고 지냈고, 술만 있으면 곧바로 스스로 떠다가 잔뜩 마시고는 노래를 불러 흥겹게 해 주고는 훌쩍 떠나가 버렸다.
어느 때는 술이 한창 취하면 눈먼 점쟁이, 취한 무당, 게으른 선비, 소박맞은 여인, 걸인, 노파 들이 하는 짓을 흉내 냈는데, 하나하나가 아주 똑같아 보였다. 또 얼굴로 십팔나한의 표정을 흉내 내면 꼭 그대로 닮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입을 찡그려 피리, 거문고, 비파, 기러기, 고니, 두루미, 집오리, 갈매기, 학 등의 소리를 내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밤에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내면 이웃의 닭과 개들이 모두 따라 울고 짖어 댈 정도였다.
아침이면 밖으로 나와 거리와 저잣거리에서 구걸을 했는데, 하루에 얻는 것이 거의 서너 말이나 되었다. 그중 몇 되쯗만 끓여 먹고 나머지는 다른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밖에 나오기만 하면 거지 아이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다음 날도 또 그렇게 하니, 사람들은 그가 하는 짓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전에 악공 이한이라는 사람 집에 더부살이한 적이 있었다. 그 집에서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계집아이가 호금을 배우느라 아침저녁으로 마주쳐서 서로 친숙해졌다. 하루는 그 아이가 구슬로 이어진 자줏빛 봉미 노리개를 잃어버렸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했다. 사연을 들어 보니, 아침에 길거리를 지나오다 잘생긴 소년과 마주쳐 웃으며 장난을 걸다가 몸이 닿고 스쳤는데 그러고 나니 봉미가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애처롭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러자 장생이 말했다. "우습구나, 어린 것들이 감히 그런 짓을 하다니. 아가씨야 울지 마라. 저녁이면 반드시 내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오마." 그러고는 훌쩍 나가 버렸다.
저녁이 되자 그 아이를 불러 따라오게 하고는 서쪽 거리를 지나 경복궁 서쪽 담장을 따라 신무문 모퉁이에 이르렀다. 그는 아이의 허리를 큰 띠로 묶어 왼쪽 어깨에 들쳐 메고, 풀쩍 뛰어 몇 겹으로 겹쳐진 문을 날듯이 넘어 들어갔다. 한창 어두울 때라 길도 분간할 수 없었지만, 급히 경회루 위로 올라가니 소년 둘이 있었다. 그들은 촛불을 들고 마중 나와 서로 보며 껄껄 웃었다. 그러더니 대들보 위 뚫린 구멍에서 금구슬, 비단, 명주가 무척 많이 나왔는데, 그 아이가 잃어버린 봉미도 그 안에 있었다.
소년들이 그것을 돌려주자 장생이 말했다. "두 아우는 행동을 삼가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 종적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게." 그런 뒤 다시 아이를 끌고 날듯이 북쪽 성벽을 넘어 그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아이는 다음 날 아침이 밝기도 전에 이씨의 집으로 가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했는데, 장생은 술에 취해 누워 코를 쿨쿨 골고 있었고, 집안사람들 역시 그가 밤에 외출한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1592년 4월 초하루, 그는 값을 나중에 갚기로 하고 술 몇 말을 사 와 아주 취한 채 길을 가로막고 춤추고 노래하기를 그치지 않다가, 거의 밤이 되어서야 수표교 위에서 쓰러졌다. 다음 날 해가 뜬 뒤 늦게서야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는데,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뒤였다. 시체가 부패해서 벌레가 되더니 모두 날개가 돋아 하룻밤 사이에 다 날아가 버리고, 옷과 버선만이 남아 있었다.
무인 홍세희라는 사람은 연화방에 살았는데, 장생과 친하게 지냈다. 그해 4월 이일 장군을 따라 왜적을 막으러 나섰는데, 조령에 이르렀을 때 장생을 만났다. 장생은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끌며 그의 손을 붙잡고 무척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사실 죽지 않았소. 바다 동쪽으로 건너가 어느 나라를 찾아 떠났던 것이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지금 죽을 나이가 아니니, 병란을 만나면 높은 숲으로 몸을 피하고 물에는 들어가지 마시오. 정유년에는 몸을 삼가서 남쪽으로 가지 마시오. 혹 나라의 공무를 맡더라도 산성으로는 오르지 마시오." 말을 끝내고는 날듯이 사라져 버려, 순식간에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홍세희는 과연 탄금대 전투에서 그 말을 기억해 내고 산 위로 달아나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597년 7월, 궁궐을 지키는 금군으로 숙직하다가 오리 정승 이원익에게 임금의 교지를 전하는 임무를 맡게 되면서, 장생이 일러 준 경계를 그만 모두 잊고 말았다. 돌아오던 길에 성주에서 적군의 추격을 받게 되자, 황석성이 전쟁 준비가 잘 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는데, 성이 함락되면서 그도 함께 죽고 말았다.
나는 젊었을 때 의협심 있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장생과도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가깝게 지내며 그의 온갖 재주를 다 구경할 수 있었다.
슬프다, 그는 신이었을까, 아니면 옛날에 이른바 검선이라 부르던 부류의 사람이었을까!
(용어) 좌수는 조선시대 지방 고을의 향청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자리다. 호금은 깡깡이와 비슷한 현악기다. 이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순변사로 상주·충주 등지에서 왜적과 싸웠다.
성소부부고 제9권
9. 22:14
출처: 성소부부고 제9권, 문부 6, 서(편지)
배경: 제9권부터는 허균이 실제로 주고받은 편지글이 실려 있다. 조정의 요직에 있던 재상들에게 정치적 조언을 올리는 편지, 벗들에게 유배지의 생활이나 벼슬살이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편지, 형에게 억울한 사정을 해명하는 편지, 벼슬을 그만 내려놓고 싶다는 뜻을 밝히는 편지 등 열한 통이 실려 있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던 허균의 처지와, 직설적이면서도 할 말은 하는 그의 성격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완성 이 정승께 올리는 글 (서기 1600년 8월 7일, 양력 추정)
어제는 오랫동안 문하에 있었으나 경림군이 온종일 나가지 않고 저녁도 안 먹은 채 배고픔을 참고 돌아왔습니다. 아침에 심부름꾼이 편지를 가지고 왔으니 마땅히 달려가 뵙고 가르침을 들어야 하겠으나, 마침 임금의 관에 옻칠을 하는 일로 장생전에 와 있고 날도 저물어 가는 터라 편지로 아뢰옵니다.
요즘 사람들이 좌우 정승 자리에 계신 분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대감께서도 잘 아실 줄 압니다만, 이는 한두 젊은 사람이 일부러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퍼뜨린 것일 뿐입니다. 이제 만약 다시 사직을 청하신다면 바로 그들이 바라는 바를 들어주는 셈이 됩니다. 주상께서 노련하고 신중한 분을 구하여 이 자리를 맡기신 것은 참으로 올바른 공론을 듣고자 하심이니, 부디 쉽게 물러나실 계책을 세우지 마시고, 옳고 그름을 힘써 가려내고 바른 여론을 북돋우시어, 간사한 무리가 발붙일 문은 막고 충성스러운 신하가 나아올 길은 여시며, 붕당을 흩어 버리고 온 나라와 더불어 새롭게 일을 시작하심으로써 주상의 각별한 은혜에 보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들이 백관을 이끌려 하는 것을 결코 따르지 않으셔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대감의 말씀과 같으니, 부디 뜻을 바꾸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박씨 성을 가진 젊은이의 비석 일은 지난번에 이미 형님댁에 편지로 알려 드렸으니 마땅히 처리하여 아뢸 것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 찾아뵙고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삼가 아룁니다.
완성께 올리는 두 번째 편지 (서기 1600년 8월 12일, 양력 추정)
어제저녁 대감댁 하인이 쪽지를 제 처소에 던져 주고 갔는데, 그때 제사 준비하는 곳에 있었기에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받아 보니 타이르시는 말씀이 자상하시어, 저를 버리지 않으셨음을 깊이 느꼈습니다.
윤씨 성을 가진 선비 한 사람과 저는 글로써 서로 사귀게 된 사이입니다. 그가 자주 시를 보내와 화답을 구했고 또 자기가 지은 글을 가지고 와 좋고 나쁨을 묻곤 하여 이로 인해 정이 제법 익숙해졌습니다. 그는 또 거리낌 없이 제게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지만 저는 매번 그저 듣기만 했을 뿐입니다.
지난번에는 그가 임금을 뵙고 나서 곧바로 저희 집에 찾아와 임금 앞에서 여러 신하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자세히 전해 주었습니다. 또 그가 정승 앞에서 그 뜻을 정면으로 꺾어 버린 일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옳음과 그름이 있는 법인데 정승께서는 둘 다 그르다 여기시고, 홍씨와 이씨 두 분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안목이 퍽 부족하니, 이첨이 함께 죄를 얻은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 이첨은 곧 제가 어릴 적부터 한 책상에서 함께 공부한 벗으로 지금까지도 사귐이 변함없기에, 저는 그저 "홍씨와 이씨와 함께 견책을 받는다면 이첨으로서는 참으로 원통할 것입니다" 하고 대꾸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일어나 문득 자리를 떠나 버렸습니다.
지금 대감의 말씀을 받들어 보니,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은 중간에서 이 이야기를 전한 자가 누구이기에 감히 갖가지 말을 지어내어 대감의 귀를 어지럽혔는가 하는 점입니다. 참으로 괴이한 노릇입니다. 대감께서 저를 친혈육처럼 여겨 주시는 정이 너무도 지극한 터에, 제가 어찌 어린아이의 지껄임을 듣고 그 말에 부화뇌동하여 스스로 마음을 저버리는 죄에 빠지겠습니까. 결코 그럴 리가 없으니 부디 마음에 두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조판서 후보에 오른 일을 두고 사람들은 모두 대감께서 해원부원군의 말씀에 치우쳐 그리하신 것이라 하며, 대감 역시 후회를 면치 못하실 것이라고들 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서인 쪽 의견을 내는 이라 해서 반드시 나쁘다 할 수는 없고, 천거받은 세 분 판서 후보 또한 모두 여러 사람이 바라던 인물들이니, 이 천거는 참으로 여론에 부합하는 것이므로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서인들이 송강 정철을 옹호하는 것도 저마다 자기 소신을 지키는 것이니 다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만, 성혼과 이이의 문인들에 이르러서는 다른 인재의 등용 길을 너무도 많이 막고 있습니다. 벼슬자리는 나라의 공적인 그릇이며 하늘과 땅, 사계절에도 순환이 있는 법인데, 어찌 한쪽 사람들에게만 벼슬을 몰아주어 훌륭한 인재들이 낮은 자리에서 헛되이 늙어 가게 한단 말입니까. 이렇게 계속 나가다가는 하늘이 인재를 낳아 주는 그 어진 뜻을 저버리게 되고 나라가 나라 꼴을 갖추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정승께서 서인을 등용하시는 것은 사사로움 없는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일이니 저로서는 그 처사가 지당하다 여기는데, 대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제사가 끝나면 곧바로 달려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감의 헤아림을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김정경에게 준 글 (서기 1603년 10월 1일, 양력 추정)
손수 쓰신 편지를 받으니 얼굴을 뵙는 듯한데, 더구나 위로해 주시는 말씀까지 지극하니 기쁨과 감격이 한꺼번에 밀려오네. 벼슬자리란 내 몸 밖의 것이니, 한 번 물러났다 해서 어찌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
내 평생 유보로 인해 곤욕을 치른 일이 참으로 많았다네. 지난번 호남에서 전주에 이르렀을 때 유보가 마침 모친상을 당했는데, 상을 치르는 처사가 비록 크게 미진했다 하더라도 지방에서 온 나그네인 내가 그 일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유보를 헐뜯는 사람 가운데 어떤 이가 나를 끌어들여 증인으로 삼으려 하니, 사람들이 나를 보기만 하면 다투어 그 경위를 묻곤 했네. 그런데 유보는 예전에 내가 상중의 몸으로 행실이 근실치 못하다며 나를 욕한 적이 있었으니, 설령 그가 상중에 도장을 함부로 써서 관아의 재물을 빼돌리고 하인을 마구 때린 일을 내가 직접 보았다 한들 어찌 그것을 입에 담아 마치 보복하듯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까닭에 묻는 사람이 백 명이 넘었어도 나는 모두 잘 모른다고 답했었네. 그런데 이 때문에 도리어 의심이 내게 쏠려 마침내 사람들은 "이제는 오히려 서로 짜고 모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까지 말하니, 이보다 더 원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양오가 이 소문을 듣고 와서 말해 주기에, 나로서는 애초에 이런 일이 없었기에 이렇게 내 입으로 밝혀 두려는 것이네.
유보가 기씨와 송씨 두 집안을 다그쳐 캐물은 것도 어찌 내가 그들과 친해서 그리된 것이겠는가. 미움을 사게 된 실마리는 참으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네. 그 후에 형님댁에서 왕실과 혼인을 맺을 때, 천한 종 몇 사람이 유보의 지시를 받아 이조판서를 임금께 이간질하려고 언문 편지를 조작하여 귀한 분들을 얽어매려 하였고, 마침내 이 일로 소란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그로 인해 나에게까지 의심이 미친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네. 오늘날 사대부 집안의 혼인에서도 신부의 작은아버지가 감히 말을 전하여 그 시어머니에게 통할 수는 없는 법인데, 하물며 궁궐 속 깊고 엄한 곳에서 어찌 그럴 수 있었겠는가. 오래 두면 저절로 밝혀질 일이라 굳이 변명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었네.
나는 본디 벼슬의 영달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제 한 가지 구실을 얻어 절로 파직되었으니, 가을비가 잠시 그치면 마땅히 말 한 필을 타고 자네 집을 찾아본 뒤 그길로 동쪽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네. 이즈음 자네가 만약 별장에 있다면 지나는 길에 며칠 묵으면서 옛일과 오늘의 일을 마음껏 이야기해 보세. 항아리에 남은 단술로도 술 못하는 손님을 대접할 수 있을 것이고, 석순과 자라로도 술상 안주로 충분할 것이니, 부디 바람 드는 난간을 치워 놓고 기다리시게. 끝내 이 약속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네. 이만 줄이네.
석주에게 준 글 (서기 160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서울에 있을 때 형이 강화도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 보니, 내가 벼슬을 잃은 것을 위로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이미 수레를 단속하여 도성 문을 나서던 참이었는데, 찾아온 심부름꾼이 편지만 놓고 곧 떠나겠다 하기에 워낙 경황이 없어 답장을 쓰지 못했으니, 예의를 갖추지 못한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집을 떠난 지 이틀 만에 김정경의 영평 별장에 이르니 샘과 골짜기, 시내와 산의 아름다움은 지난해와 다름없었으나, 다만 아쉬운 것은 무너진 누각을 아직 다시 세우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방 안에 들어서니 단술이 항아리에 가득하여 술 위에 뜬 밥알이 한창 부풀어 오르고 있었는데, 형을 모셔다 큰 잔으로 권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었습니다. 형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틀림없이 군침을 흘릴 것입니다. 지금도 성벽에는 최경창과 허봉의 시가 남아 있어 맑고 깨끗하여 읊조릴 만했고, 이안눌의 시도 있었으나 바빠서 화답하는 시를 짓지는 못했습니다.
비를 만나 통구에서 자고 단발령을 넘어 멀리 일만이천봉을 바라보니, 빙 둘러선 봉우리들이 마치 서로 인사를 나누며 저의 나들이를 맞아 주는 듯했습니다. 유람의 흥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것을 스스로 억누를 수 없어 말을 재촉하여 장안사에 드니 날이 이미 저물어 있었습니다. 도관이라는 승려가 호남에서 왔는데 그가 글을 제법 알기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매우 총명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시왕백천동에 들어서니,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땅 위로 삐죽삐죽 솟아 있고 물은 솟구쳐 흘러내리며 단풍은 우거져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15리쯤 가서 영원암에 이르러 그곳에서 묵고, 새벽에 망고대를 향해 가는데 골짜기는 좁고 벼랑은 깎아지른 듯하여 쇠줄을 붙잡고 겨우 올랐습니다. 소나무 겨우살이 아래에서 잠시 쉬고 마침내 만폭동에 들어가 양사언이 써 놓은 여덟 글자를 감상하니, 그 필세가 나는 듯하여 이 산과 더불어 웅장함을 다툴 만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명연에 이르렀다가 저녁에는 표훈사에서 쉬니, 그 절의 주지 담유 스님이 자리와 상을 마련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날이 밝자 진헐대에 올랐다가 거기서 가마를 버리고 걸어서 개심사에 오르니, 일만 봉우리가 눈앞에 죽 늘어서 있어 그 모습을 무어라 이름 붙이기 어려웠습니다. 높이 솟아 치켜든 봉우리는 마치 형이 우뚝하게 홀로 빼어난 모습 같고, 헌걸차게 기울어진 봉우리는 마치 형이 취해서 옥이 무너지듯 쓰러지는 모습 같으니, 이런 풍경을 보며 제 마음을 넉넉히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17일 밤에는 정양루 동쪽에서 달구경을 하였습니다.
원통암에서 아침을 먹은 뒤, 지름길로 사자봉을 질러가 보덕굴에서 묵고 화룡담을 거쳐 마하연에 이르렀습니다. 바람과 물, 삼나무와 회나무가 밤새도록 서로 부딪치고 너울거리며 소리를 내니, 마치 생황 소리와 학의 울음이 서늘하게 구름 밖에서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곧장 운흥을 거쳐 구정봉에 오르다가 비가 내려 비로봉에는 오르지 못하고, 적멸암에 이르러 성문동을 내려다보니 뭇 골짜기가 층층이 겹쳐 있어 마치 긴 바람이 바다에 파도를 일으켜 놓은 듯했습니다. 두 승려가 말하기를 "이곳에서 박달곶으로 가면 은신대까지 다다를 수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저는 신발을 단단히 매고 새벽 기운을 헤치며 백전에서부터 구불구불한 길을 5리쯤 내려가니,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한데 모인 곳에 거센 물줄기가 그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데, 바위들은 모두 괴물처럼 생겨 마치 서로 다투어 치고받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맨발로 그곳을 건넜습니다.
한낮에는 자월암에서 쉬었는데, 이 암자는 내산과 외산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 그 빼어난 경치를 모두 모아 놓은 곳이었으나, 대개는 구경꾼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남쪽 비탈을 구불구불 내려와 불정대에 이르렀는데, 잠시 후 바람과 천둥이 골짜기 안에서 일어나며 큰 구름이 평평하게 깔리고 발아래로 번갯불이 번쩍이며 우렛소리가 쿵쾅거리니 놀라서 내려다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윽고 천둥이 그치자 천 개의 폭포가 푸른 절벽에 시원하게 쏟아져 내려, 마치 옥빛 무지개들이 다투어 자태를 뽐내는 듯했습니다.
날이 저물어 유점사에 이르니 정두원이 뒤미처 찾아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습니다. 하루를 쉬고 산을 내려오면서 백천교를 거쳐 가섭동 쪽으로 길을 잡아 명파에서 묵었습니다. 삼일포는 예전에 익히 지나던 곳이므로 이번에는 곧장 강릉 쪽으로 향했으니, 같은 곳을 두 번 구경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수성에서 최립을 만났는데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사흘이나 저를 붙잡아 두었습니다. 또 형이 요사이 어떻게 지내는지 물으시며, 자기가 지은 시문을 모두 꺼내 보여 주셨는데 편편이 주옥같았습니다.
이어 예전에 머물렀던 낙산 땅을 찾으니, 그 고을 노인들이 모두 술병과 땔감을 가지고 와 다리를 데워 주었고, 태수 또한 기생과 풍류를 더하여 성대히 대접해 주니, 옛 사안이 동산에서 노닐던 흥취가 절로 일었습니다.
말이 절뚝거려 닷새를 머물다가 강릉 외가로 돌아오니, 고향집을 떠난 지 벌써 여덟 해라 세월의 풍상을 겪은 서글픈 마음이 갑절이나 더했습니다. 읍 동쪽에 작은 서당이 있어 학생 대여섯 명이 문을 닫고 책을 읽고 있으니, 남은 생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으나 하늘이 사람의 욕심을 허락해 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바다와 산을 두루 구경한 이야기는 대략 이러합니다. 그러나 그때 만약 형과 함께 다녔더라면 그사이에 지은 훌륭한 시가 마땅히 많았을 터이니, 형이 이 말을 들으면 틀림없이 유쾌해하면서도 크게 아쉬워하실 것입니다.
벼슬할 뜻은 식은 재처럼 싸늘해지고 세상맛은 씀바귀처럼 쓰기만 하니, 조용히 지내는 즐거움이 벼슬살이보다 나은데 어찌 이 편안함을 버리고 남을 위해 애쓰겠습니까. 다만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슴에 맺히지만 거리가 멀어 만나기 어려우니 회포를 다 풀 길이 없습니다. 가을 기운이 점점 짙어 가니 부디 부모님을 잘 모시고 그 뜻을 잘 받들기 바랍니다. 편지로는 하고 싶은 말과 뜻을 다 적지 못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용어) "옥이 무너지듯 쓰러지는 모습"이라는 표현은 용모가 매우 아름다운 사람이 술에 취해 넘어지는 모습을 형용하는 옛말이다. 동진 시대 산도라는 이가 혜강을 두고 "그 사람됨이 마치 우뚝 선 외로운 소나무 같고, 술에 취했을 때는 마치 옥산이 무너지려는 것 같다"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사안이 동산에서 노닐던 흥취"란, 동진의 사안이 일찍이 동산에 은거하며 자손들과 함께 시 모임을 열 때마다 반드시 기생과 술상을 푸짐히 마련하여 노닐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표현이다.
이조판서 허욱께 올리는 글 (서기 1604년 12월 26일, 양력 추정)
아래로 내려온 통지를 받고 삼가 살펴보았습니다.
이조판서로 승진하시어 온 조정 관원을 두루 관장하는 소임을 맡으시니, 선비들의 여론이 한마음으로 화합하여 대감을 받드니, 참으로 종묘사직과 만백성이 의지할 바입니다. 감히 조정을 위하여 이런 인재를 얻은 것을 축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집안의 말석에 끼어 있는 사람이니,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축하하며 바라는 그 마음을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어르신께서는 맑고 충성스러우며 도탑고 소박하시어 충정공의 훌륭한 가풍을 넉넉히 이어받으셨으니, 벼슬길에 오르신 지 30여 년 만에 지위가 재상급에 이르셨음에도 털끝만큼도 권세에 기댄 흔적이 없으시며, 그 청렴한 이름과 맑은 행실은 세상 사람들이 다 듣고 본 바입니다. 주상께서 깊이 헤아리시어 이조판서로 등용하셨으니, 이 어찌 어르신의 신중하고 성실한 마음이 평소부터 여론에 부합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선비들의 여론이 둘로 갈라지고 참된 인재는 아득히 보이지 않는데, 윗자리에 있는 이들조차 더러 스스로 자만한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여, 뜻있는 선비들은 물러나 숨어 지내고 도리어 간사한 자들이 관을 털고 벼슬길에 나서니, "물고기 눈알을 옥구슬로 착각한다"는 옛 탄식이 오늘에 이르러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본디 어느 당파에도 치우치지 않으시고 밝게 살피시어 공평하고 명석한 판단에 어긋남이 없으시니, 부디 옛사람 진관이 남긴 "배는 한쪽으로 치우치면 갈 수 없다"는 가르침을 본받으시어, 그때그때의 여론에 휘둘리지 마시고 훌륭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가려 뽑아 인재들이 모두 어르신의 문하에 모이게 하신다면, 이는 나라가 복을 받고 어진 이들이 경사를 맞이할 뿐 아니라 우리 가문의 충직한 가풍이 오늘에 이르러 다시 떨쳐 일어나는 일이 될 것이니, 어찌 거룩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을 굽히고 남의 뜻에 영합하여 구차하게 벼슬자리나 지키려 하거나, 좋은 자리에 앉아 제 한 몸의 호사만 누리는 것은 속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니, 어르신께서는 결코 그런 마음을 품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만약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을 것 같으면 미련 없이 몸을 빼내어 물러나시고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는 것 또한 좋은 방책일 것입니다. 어르신께서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그 사람의 옳은 말까지 저버리지 않으신다면 온 집안에 참으로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훗날 마무리가 좋지 않아 한 번 그르치는 바람에 모든 일이 어그러진다면 아무리 후회한들 어찌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 부디 어르신께서는 스스로를 아끼시어 임금의 은총과 벼슬을 영광으로만 여기지 마시고, 위로는 선조의 유훈을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자신을 위해 헤아리시기를 천 번 만 번 정성을 다해 비옵니다.
어르신 문하에 드나드는 한두 젊은이는 본디 점잖은 선비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오가며 부추기고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낸다면 어르신께 끼치는 해가 반드시 클 것이니, 부디 그들과 깊이 이야기를 나누지 마시고 인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들이 권세에 빌붙는 것이 너무도 심하니, 훗날 그들이 어르신을 저버리는 날이 오면 반드시 오늘 제가 드린 말씀을 떠올리시게 될 것입니다.
어르신을 아끼는 간절한 마음에서 저도 모르게 함부로 마음에 거슬리는 말씀을 올리게 되었으니, 부디 잘못이라 꾸짖지 말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만 갖추어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용어) 진관은 송나라 때 사람으로 호가 요옹이다. 장돈이 재상이 되어 진관이 그를 찾아뵙자, 진관의 명망을 익히 들었던 장돈이 그에게 지금 가장 급한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진관은 이렇게 답했다. "배에 비유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무게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배가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왼쪽 물건을 오른쪽으로 옮겨 놓아도 이는 여전히 치우친 것입니다. …… 천자께서 공에게 정치를 맡기셨으니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장돈이 "사마광이 간사하니 그를 처단하는 것이 가장 급합니다" 하고 답하자, 진관이 말했다. "공의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배의 균형을 잡으려 하면서 왼쪽 물건을 오른쪽으로 옮기는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이렇게 하신다면 천하의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입니다."
형님께 답해 올리는 글 (서기 1605년 9월 2일, 양력 추정)
고을 아전이 이르러 손수 쓰신 편지를 받들어 보니 타이르시는 말씀이 사무치게 자상하시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이고 얼굴에 땀이 흘러 절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저는 본디 성품이 자유분방하여 세속을 따르기 좋아하지 않고 마음 또한 좁아서 참고 받아들이지를 못하니, 벼슬살이하며 일을 처리할 때에도 간혹 엉성하게 얼버무리는 실수를 면치 못하고, 일이 그르쳐진 뒤에야 마음속으로 자책한 적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러나 분한 마음에 사람을 함부로 죽여 그 욕이 감사에게까지 미쳤다는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제가 비록 경솔하고 못났다 해도 거기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니, 말을 전한 사람이 잘못 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고을에 이방헌이라는 힘깨나 쓰는 백성이 있어 고을에서 함부로 위세를 부리며 도망친 백성을 받아들이고 힘없는 백성들의 땅을 삼켜 한 지방에 해를 끼쳐 온 지 오래인데, 제가 부관으로 있을 때부터 그의 못된 행실을 귀에 익히 들어 왔습니다. 지난번 근거 없는 소문이 두 고을 수령을 잇달아 얽어매어 사람들 귀에 널리 퍼졌기에, 저는 틈을 보아 그에게 죄를 주어 변방으로 내쫓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침 같은 고향 사람인 병마절도사 이봉수와 술을 마시다가 시비가 붙어 봉수를 때리고 갓을 찢고 옷을 뜯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일로 고을 사람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관아에 잇달아 소장을 올려 하소연하므로, 저는 사정을 갖추어 감사에게 보고했더니 감사는 신문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두 집안이 모두 세력 있는 가문인 데다, 중전께서 이 지방에 머물러 계실 때 조정 사대부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었던 터라 청탁하는 편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미처 다 읽어 볼 겨를조차 없었으니, 저 역시 처벌을 결정하기가 어려워 짐짓 열흘 동안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보름날 밤 관아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니 계집종이 와서 아뢰기를, 흰 명주 예순 필이 담 안쪽에 떨어져 있고 정갈한 글씨로 쓴 익명의 편지 한 통이 그 보자기 속에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히 여겨 가져다 보니, 바로 이씨 집안에서 뇌물을 바치며 죄를 풀어 달라 청하는 편지였습니다. 저는 곧 고을 아전을 불러 편지를 전한 자를 대청 아래 꿇리고 곤장 서른 대를 치라 분부하였는데, 화가 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지나치게 엄히 치라 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재차 신문하라는 명이 내리자 그 집안에서는 뇌물로는 일을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닫고 감사에게 급히 애걸하는 한편, 전양이라는 자에게 뇌물을 먹여 안에서 압박을 가하게 하니, 감사가 과연 그 말에 흔들려 갑자기 고을로 달려와 이방헌을 다시 신문했는지를 물었습니다. 아직 하지 못했다고 답하니 감사는 "그의 죄가 죽을 죄에까지 이르지는 않고, 신문에 이미 승복하여 자백을 받았으니 법에 따라 변방으로 추방하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저는 그러겠다 답하고 물러났는데, 감사는 이윽고 고을의 호장을 불러 장부를 가져오게 하고 기록을 살피며 법률 담당자에게 "추방죄에 해당하는 사람이 나이 일흔이면 어떻게 하는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냥 풀어 준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고 답하니, 알고 보니 이방헌은 실제 나이가 예순이었으나 호적에는 일흔한 살로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미 그 속셈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재촉이 잇달았어도 꿈쩍하지 않고 사흘을 머물다가 비로소 그를 보냈습니다. 이튿날 제가 엄중히 신문해야 한다고 보고하자, 감사는 형벌을 멈추고 돌려보내라 하였습니다.
그자는 본디 곤장을 맞아 본 적이 없는 몸이라 이틀 뒤 자기 집에서 기력이 다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아들이 감사에게 소장을 올렸고, 감사는 형방과 곤장을 친 자를 가두라 명하였습니다. 제가 감사께 따져 물었습니다. "감영의 지시를 받아 형법을 시행한 것이니 설령 백 사람을 때려 죽였다 해도 이는 군수의 죄가 아닌데, 담당 아전을 가두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자 감사는 부끄러워하며 기가 꺾였습니다. 대개 이 대목에서 그들의 얽히고설킨 속셈이 모조리 드러난 셈입니다. 그 자초지종은 이러할 뿐입니다. 처음 담 안에 명주가 던져졌을 때 저의 마음은 참으로 분했으나, 형벌을 내리던 그날은 실은 감사가 저의 노기를 더욱 부추긴 셈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일 처리가 매우 온당함을 잃었으나, 아무리 후회한들 무엇을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
감사가 뇌물을 받은 일에 대해서는 온 도가 다 알고 있으나, 제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닌 이상 어찌 감히 반드시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다만 명주를 던져 놓은 그 일을 미루어 볼 때, 자식으로서 아비를 구하려는 마음에는 못할 짓이 없을 터이니, 관아의 담 안에 놓였던 그 명주가 감영 문 안에는 놓이지 않았으리라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법을 굽혀 슬그머니 풀어 주려 했던 여러 정황이 공문서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근래 이 일로 호되게 곤욕을 치러 바야흐로 사직하고 떠나기로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 집안에서 또 형조에 소장을 올려 형조가 이 도에 공문을 보내는 바람에 고을 아전 몇 사람이 바야흐로 서흥에서 대질 심문을 받고 있으니, 이 일이 마무리되면 저는 이 고을 수령 자리를 마치 헌신짝 벗어 던지듯 버리려 합니다. 어찌 하찮은 녹봉 때문에 오래도록 허리를 굽히려 하겠습니까. 성품이 거칠어 자세히 갖추어 말씀드리지 못하니, 헤아리시고 가르침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허 신창께 답하는 글 (서기 1605년 9월 4일, 양력 추정)
제가 이 고을로 부임하던 날 경계에 이르니, 한 늙은이가 산에서 딴 과일 한 광주리를 들고 길가에 꿇어앉아 있기에 누구냐고 물었더니 이 고을에 사는 유방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찾아온 까닭을 물으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허 신창님댁 종입니다. 태수께서 허씨 성을 쓰시니 저희 주인 어른과 한집안이 아니시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물건을 가지고 와 바치는 것입니다." 저는 웃으며 그것을 받았는데, 그 뒤로 그가 종종 관아에 찾아오기에 이따금 술을 대접하였고, 백성들의 고초를 물으면 숨김없이 모두 아뢰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그의 순박함이 좋고 정직함이 가상하여, 면제해 줄 만한 부역은 이따금 특별히 면제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존장께서 편지에 다시 외람되게도 그를 불쌍히 여겨 달라 이르시니, 굳이 가르쳐 주지 않으셔도 저 스스로 힘써 온 일인데 하물며 편지 가운데 거듭 당부해 주시기까지 하시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저는 다스림에 능하지 못하여 아침저녁으로 탄핵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인데, 힘깨나 쓰는 백성을 죽인 일로 저를 비방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한 가지 일만 더 생기면 곧바로 그만두고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동해 바닷가 고향집은 이미 다 황폐해졌으니, 가을에는 그곳에 가서 고쳐 지을 생각이 간절합니다. 어찌 이런 객지 생활에 미련을 두어 스스로 고향의 보금자리를 버려두겠습니까. 하찮은 벼슬자리 하나가 무엇이라고 장한처럼 결단을 미루고 머뭇거린다면 참으로 대장부가 아닐 것입니다.
지난해 양릉공께서 처음 이조판서가 되셨을 때, 저는 속으로 걱정이 되어 편지를 써서 넌지시 말씀을 올렸으나, 양릉공께서는 겉으로는 옳다 하시면서도 속으로는 사실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더니 요즈음 일이 되어 가는 모습이 모두 어그러져 가고, 또 그분과 몹시 가까운 한두 젊은이가 따라다니며 판단을 흐리게 하니, 몇 해가 지나지 않아 반드시 낭패를 보고 말 것입니다. 존장께서는 두터운 친분과 가까운 친척 관계로써 눈물을 흘리며 그분께 말씀을 드릴 수 없으시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물러나신다면 오히려 허물을 면할 수 있으시겠지만, 만약 다시 미련을 두어 허물을 더 쌓으신다면 위로는 선대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여 우리 집안의 수치가 될까 두렵습니다. 양릉공께서는 늘 저를 아우처럼 대해 주시니 정이 두텁고 정성이 지극합니다만, 알고도 말씀드리지 않는 것은 그 마음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존장께서는 이를 미친 소리나 어두운 생각이라 여기지 마시고 한번 말씀하시어 그만두시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만 갖추어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용어) "닭 갈비"는 먹을 것은 별로 없으나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 것을 이르는 말로, 여기서는 하찮은 벼슬자리를 빗댄 것이다. 장한은 진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계응이다. 그는 낙양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중 가을바람이 일자 고향의 순챗국과 농어회가 그리워져 "인생이란 자기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중요한데, 무엇하러 수천 리 타향에서 고생하며 벼슬을 구하겠는가" 하고는 그길로 수레를 몰아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금계정께 답하는 글 (서기 1605년 12월 29일, 양력 추정)
거듭 찾아 주셔서 한창 감격스럽고 다행스럽게 여기던 참인데, 또 외람되이 편지까지 주시어 타이르시는 말씀이 곡진하시니, 지극한 정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러실 수 있겠습니까.
저의 병은 거짓이 아닙니다. 지난 9월부터 감기가 제법 심하게 들어 폐에 열이 오르고 가래가 끼며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고, 심장은 마치 큰 걱정이라도 있는 듯 두근거립니다.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입맛은 뚝 떨어졌으니, 억지로 몸을 움직이다가는 반드시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몇 달을 조리하고 치료해야 예전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어찌 한낱 당상의 자리 하나 때문에 나랏일을 모두 폐하고 스스로 피할 계책을 꾸미겠습니까.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왕실 족보를 편찬하는 일은 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담당자가 만약 제멋대로 이름을 올리고 빼면서 왕실 핏줄이 아닌 이를 뒤섞어 싣고 마땅히 실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빠뜨린다면, 하늘에 계신 조상님들의 영령이 이를 어떻게 여기시겠습니까? 주상께서 저를 부족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편찬하는 대열에 끼워 주셨으니, 여러 갈래의 편집에서 잘못된 부분을 하나하나 다 바로잡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거짓임이 훤히 드러나 도무지 감추고 덮을 수 없는 일에 대해서까지 그저 그 무리의 간청에 못 이겨 접어 두고 감싸 주어 기어이 족보에 싣게 한다면, 이는 위로 조상님들을 욕되게 하는 일이니 신하 된 도리로 결코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회안군의 부인 김씨가 태조의 능 비문에 실려 있는데, 유배지에 안치된 뒤에 황씨에게 장가들고 또 금씨에게 장가들었다고 되어 있으나, 이럴 리는 없을 듯합니다. 설령 금령을 어기고 몰래 혼인한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조정이 알 바 아닌데, 또 어찌 감히 정실부인의 자손이라 자처할 수 있단 말입니까. 게다가 가지고 온 문서에는 "역대 임금께서 모두 뽑아 기록하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되어 있으니, 그 어긋나고 틀린 흔적이 한둘이 아닙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홍치 원년 3월에 도승지 신 허종이 담당하여 올린 계에 의거하여 윤허하셨다"고 한 대목인데, 허종은 그때 이미 숭정대부 이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사신 동월을 접대하는 일로 의주에 가 있었으니, 어찌 그보다 낮은 도승지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또 "가정 12년 4월에 우승지 신 김정국이 담당하여 올린 것에 의거하여 윤허하셨다"고 되어 있으나, 김정국은 이미 정덕 기묘년에 황해감사로서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금지령이 매우 엄하여 한 번 쫓겨난 어진 선비 가운데 다시 벼슬길에 풀려난 이가 하나도 없었는데, 김정국이 어찌 홀로 먼저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거기 등장하는 전주부윤 김광진이라는 이는 바로 저의 외할아버지의 아우입니다. 정미년에 부윤이 되어 그 일가와 종들이 지금도 그곳에 남아 있으나, 가정 12년에 그 고을에 부임한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이 문서를 위조한 자가 전주 사람이었기에 김정국이 승지가 되었던 일과 김광진이 부윤이 되었던 일을 익히 알고서 그 이름만 따다가 제멋대로 지어낸 것이니, 이는 굳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어도 그 간사함을 알아챌 수 있는 일입니다.
더구나 순녕군의 양자로 들어간 천례의 아들 문제는, 형께서 본디 그 실마리를 꺼내셨다고는 하나 이는 참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니, 금산군께서 힘써 다투시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만약 저에게 이 일을 맡기신다면 결코 핏줄을 끊어 하늘의 이치를 저버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니, 이런 일까지 차마 한다면 대체 무엇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종친 가운데 이품 벼슬을 지낸 이가 나이 마흔이 넘도록 오촌 과부 형수를 어머니라 부르고 그 형수 또한 그를 자식으로 대했으니, 남들의 비난이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또 이에 더하여 그 후사마저 빼앗아 왕실 족보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하게 한다면, 예나 지금이나 이보다 더 원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형의 소견은 일반 법도에 얽매인 것이고, 저희들이 다투는 바는 하늘의 이치에서 나온 것이니, 옛 임금들도 하늘의 이치를 바탕으로 법을 마련하였을 뿐, 하늘의 이치를 저버리고서 능히 나라를 다스린 이는 없었습니다. 금산군께서 나서지 않으신다면 저 역시 이 일을 맡아 처리할 형편이 못 되니, 형께서 헤아려 다시 회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대중께 보낸 첫 번째 글 (서기 1608년 1월 21일, 양력 추정)
형께서는 높은 재주와 무거운 명망으로 임금의 신망이 두터우니, 한 시대의 선비들이 모두 그 풍채를 우러르며 형의 문하에서 배출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더구나 저처럼 일찍부터 형의 아낌과 사랑을 받은 사람이야 감히 스스로 소외감을 갖지 않고 그 따뜻한 은덕이 미치기를 힘껏 바라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분수를 지키고 만족할 줄 아는 구구한 마음으로 조용히 형께 아뢰고 싶은 것이 있으니, 시험 삼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엄한 가르침을 받지 못했고, 어머니와 형은 저를 어여삐 여기기만 하고 가르치고 타이르지는 않으셨기에 저는 제멋대로 떠돌아다니며, 거리를 쏘다니고 찻집과 술집까지 드나들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이를 본 사람들은 분명 저를 가벼이 여겼을 것입니다. 점점 자라면서 익힌 것도 자잘한 재주뿐 취할 만한 것이 없었고, 남을 비웃고 잘잘못을 가려 남의 이목이나 즐겁게 하는 데에만 힘쓰다 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경박한 데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불행히도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공명을 손쉽게 얻으리라 여기고는, 소매를 떨치며 자신만만하게 당돌히 굴다가 죄와 허물을 쌓았으니, 곁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저를 노리고 있었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얼마 전 큰 조카가 이씨 집안과 혼인이 깨졌는데, 그 집안에서 노하여 기어이 앙갚음하려고 근거 없는 소문을 지어내어 저를 헤아릴 수 없는 곤경에 빠뜨리려 하자, 저를 미워하던 무리들이 서로 그 말을 주고받으며 마침내 구실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10여 년 동안 가는 곳마다 비방이 태산처럼 쌓여 여러 차례 일어났다 넘어지곤 하였으니, 이제는 영영 세상에서 버림받아야 할 몸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니 화려한 벼슬길을 지나가는 일은 마치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아득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집 안에 틀어박혀 오로지 글과 역사책에만 몰두하였으며, 벼슬에서 얻는 녹봉은 그저 가난을 면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 혹 권세 있는 요직에 오르면 저는 일부러 소식을 끊었으니, 이는 대개 선대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고 집안의 명성을 실추시키는 것이 부끄러워, 감히 스스로 어진 사대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형께서 인사를 보좌하시던 날에는 도리어 우경과 더불어 저의 재주를 아깝게 여기시고 애써 이끌어 주려 하셨으나, 뒤이어 실권을 쥔 이들의 미움을 사서 두 분 형님들마저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잇달아 지방으로 나가시게 되었고, 저 또한 벼슬에서 떨려나 고향으로 돌아갔으니, 이는 저의 운수가 기박한 탓이었을 뿐 달리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겠습니까.
지금 형께서는 또 승정원이나 예문관, 홍문관 같은 관청으로 저를 이끌어, 정사에 대한 의견을 올려 임금의 다스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게 하려 하시니, 그 뜻이 참으로 간곡하고 지극하여, 저를 후하게 대해 주시고 아껴 주시는 그 은혜를 이미 뼈와 간에 새겨 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제 평생을 익히 헤아려 보았으니, 비유하자면 강물의 물고기나 들판의 새와 같아서 연못에 가두고 새장에 길들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제 소원한 처지로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귀한 자리 언저리를 기웃거리게 된다면, 편협한 마음과 모난 행동이 남의 비위나 맞추고 아첨하는 데 익숙지 못하여 말 한마디라도 거슬리면 문득 천 길 낭떠러지로 밀려나고 불난 데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입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비록 형과 같은 이가 백 사람 있다 한들 두레박줄을 끌어당겨 저를 구해 주기는 어려울 것이며, 도리어 그 화가 가까운 벗들에게까지 번져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이 어찌 크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집안이 가난하고 형은 이미 늙으셔서 아주 떠날 수는 없으니, 다만 작은 고을 하나나 맡아 처자식의 입에 풀칠이나 하고, 겸하여 책이나 읽으며 늘그막에 소일거리로 삼고 싶을 따름입니다. 형께서 저를 아깝게 여기신다면 실권을 쥔 이에게 힘써 말씀하시어 고을 하나 얻어 나가게 해 주신다면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저의 진심에서 나온 것이지 공연히 꾸며 낸 말이 아닙니다. 이만 줄입니다.
(용어) 여기 나오는 "유여의 기름"이라는 옛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대중께 보낸 두 번째 글 (서기 1608년 1월 22일, 양력 추정)
답해 주신 편지를 받아 보니 그 내용이 은근하고 간절하였습니다. 제 재주를 어여삐 여기고 벗을 아끼는 정이 말 밖으로 넘쳐흘러, 서너 번을 되풀이해 읽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 제가 무엇이관대 이런 은혜를 받는단 말입니까. 참으로 마땅히 벼슬길에 나설 채비를 하고 저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이라도 바쳐야 할 터인데, 다른 일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불행히도 엄청난 비방에 걸려 있습니다. 비방하는 자 한 사람이 족히 저를 칭찬하는 사람 백 명의 입을 막아 버릴 수 있는 법인데, 하물며 저를 헐뜯는 이들은 온 나라에 가득하고 칭찬하는 이는 겨우 형들 몇 사람뿐이니, 설령 제 이름이 추천 명단에 올라 몸이 조정의 반열에 든다 한들 저를 탄핵하는 상소가 뒤미처 이르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당시의 여론이 제가 오랫동안 낙담해 있는 것을 가엾이 여겨 마지못해 벼슬 하나를 내려 체면을 세워 주고, 이리저리 손을 써서 낭패는 면하게 해 준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 나아가고 물러날 때마다 저와 사이가 좋지 않던 사람들이 뒤따라오며 손가락질하고 욕하기를 "이 사람은 예전부터 행실이 좋지 못하여 배척받던 자인데 대체 누구에게 빌붙어 벼슬을 얻었는가" 한다면, 그 욕됨은 탄핵 상소를 받는 것보다도 더욱 심할 것입니다.
더구나 저는 말이 가볍고 도량이 좁아 참고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임금을 모시는 강론 자리에 있거나 정사에 대해 말할 자리에 참여하게 된다면, 논의하고 탄핵하는 사이에 툭하면 반드시 임금이나 정승에게 죄를 얻어, 크게는 멀리 귀양 가거나 목숨을 잃고 작게는 벼슬에서 쫓겨나고 말 것이 너무도 뻔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누가 저를 이끌어 주신 형께도 미치게 될 것이고 이 맑은 시절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할 것이니, 제가 가장 걱정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동쪽 이웃에 한 아낙이 있었는데, 몸집은 작고 앳되었으나 길쌈 솜씨는 제법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일찌감치 시집을 갔다가 남편을 여의자 시댁에서 재혼을 권했지만 10년 동안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이 들어 남의 꼬임에 넘어가 개가를 하고 보니 본부인과 마음이 맞지 않고 시어머니의 뜻에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몇 달도 못 되어 쫓겨나 친정으로 돌아와서는 스스로 절개를 잃은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오늘날 저의 처지도 참으로 이 이웃 아낙과 같이 될까 두렵습니다.
제게 만약 성 밑에 밭 두 이랑만 있다 하더라도 어찌 즐겨 귀한 분들 앞에서 낯빛을 낮추어 가며 구차하게 하찮은 녹봉을 얻어 처자식을 보전할 계책을 세우겠습니까.
듣자니 홍양 고을에 자리가 비어 있다 하니, 가능하다면 이조참판께 말씀하시어 그 후보 명단에 들 수 있게 해 주시고, 부디 제 분수에 맞지 않는 일로는 서로 애쓰지 말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만 다 적지 못합니다.
이대중께 보낸 세 번째 글 (서기 1608년 1월 23일, 양력 추정)
두 번째로 보내 주신 답장은 그 내용이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형의 지극한 정성과 저를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은 보통 사람의 만 배는 될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부서진들 어떻게 이 은혜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어제 인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저를 홍양으로 보내는 명이 몹시 기다려졌다는 것은 덕보가 와서 전해 주었습니다. 제 이름이 검토관 후보에 올랐는데, 명단을 살피던 이가 서명 절차를 문제 삼아 우선 정지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몹시 불쾌하여 밤새도록 애를 태우며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제가 굳이 좋은 자리를 마다하는 그 사정은 이미 앞서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다 말씀드렸으니, 이제 다시 구구하게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일이 있어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으나, 이제는 이미 너무도 다급한 지경에 이르렀기에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으니, 형께서는 제 말을 헤아려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집안은 불행히도 궁궐과 혼인을 맺었는데, 인척 가운데 지위가 높고 또 가장 총애받던 이가 몇 해 전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모진 수법을 써서 위태로운 죄목으로 저를 얽어매려 하여 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깥 조정의 여러 신하들은 저에게 별다른 잘못이 없음을 알았고, 저와 사이가 좋지 않던 이들조차도 결코 그럴 리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궁궐 안은 깊고도 엄한 곳이라, 줄을 대어 참소를 들여보내는 자들이 너무도 심하니, 제 집안에서조차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마치 넘어지는 나무에 외로운 새가 깃드는 격이었으니, 감히 하루하루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는 처지에 어찌 영화롭고 좋은 자리를 넘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붉은 옷 입은 이들이 길을 인도하고 은패를 앞세우며, 아름다운 누대와 한가한 관사를 거닐고 궁궐의 여러 문을 드나드는 것이 어찌 나쁜 일이라서 굳이 재물이나 관리하는 하찮은 벼슬아치가 되고 싶어 하겠습니까. 이는 너무도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나랏일은 크게 걱정스러운 때인데, 형들께서는 그저 임금과 정승 자리만 믿고 다시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시며, 불붙은 나무 위에 편안히 누워 계신 것과 다름없으니 그 위태로움이 전보다 더한데도 오히려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미 그런 형세를 뚜렷이 보고 있는데, 저를 끌고 함께 깊은 웅덩이 속으로 들어가자 하시니, 아무리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인들 어찌 즐겨 손을 맞잡고 소매를 나란히 하여 재앙의 소굴로 함께 들어가겠습니까.
부디 형께서는 스스로를 아끼시고 저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다행히 한가한 고을에 결원이 생긴다면 후보 명단에 힘써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형께서도 기러기처럼 높이 날아 곡식 낟알에 미련을 두지 않으신다면 그물에 걸리거나 화살에 맞을 걱정은 영영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리하지 못하시겠다면, 수상 대감께 권하시어 세자 책봉의 일을 조정에 아뢰고 널리 선비들을 규합하며 조정 관원들에게 두루 알려, 참된 마음을 열고 공정한 도리를 펴서 온 세상을 위해 태평한 터전을 마련한다면, 신선처럼 긴 수명과 반석처럼 굳건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며 역사에도 빛나게 기록될 것입니다.
미친 사람처럼 함부로 말씀을 올렸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이만 갖추어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성소부부고 제10권
9. 22:20
출처: 성소부부고 제10권, 문부 7, 서
배경: 제10권은 문부 일곱 번째 갈래인 "서(書)"로 이루어져 있다. "서"는 편지, 곧 척독이다. 지방관으로 재직하며 겪은 파직과 탄핵, 정치적 풍파에 대한 솔직한 심경, 벗들과 나눈 은거의 꿈, 그리고 우리나라 한문학의 계보를 정리한 편지까지 열한 통이 실려 있다. 공적인 글보다 훨씬 격의 없고 직설적인 어조로, 허균 특유의 자부심과 세상에 대한 반발, 그리고 정치적 처세의 실상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성덕보에게 보내는 편지 (서기 1608년 1월 24일, 양력 추정)
어제 찾아와 주셔서 마음속에 쌓인 이야기를 형께 다 털어놓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그저 한담으로 흘러가 버렸습니다. 밤새도록 안타까워하다가 새벽에 뵈러 갔더니 이미 떠나신 뒤였습니다.
이대중이 온 힘을 다해 저를 북돋아 주는 것은 정이야 두텁지만, 저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편지를 보내 알아듣도록 했지만 갈수록 이해하지 못하니, 형의 도움을 빌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형은 그 사람과 이웃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서로 오가는 사이니,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 주신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지금은 크고 작은 일 가릴 것 없이 모두 수규 대신 한 사람에게서 나오는데, 그가 저를 대하는 뜻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큽니다. 그런데 몇몇 벗들이 그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저를 억지로 끌어들이려 하니, 이는 서로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일이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국 낭패에 이르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얼마 전 분음공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수규께서 그대의 재능을 기특하게 여겨 경연에서 학문을 논하는 자리에 두고 싶어 하시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형님께서 평소 수규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는데, 수규가 그 동생인 저를 홍문관이나 예문관 같은 자리에 발탁한다면, 사람들은 장차 제가 친형을 배반하고 권세에 아부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결코 그런 처지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자 분음공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는데, 이것이 바로 저의 본심이었습니다.
형은 진실하고 믿음직한 분이니 틀림없이 이 마음을 헤아려 주실 겁니다. 마침 들으니 진주 부사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그 고을은 제 외가가 있는 시골과 가까운 곳입니다. 산과 강이 아름답고 소송할 일도 적으며 백성들이 순박하고, 연못과 정자가 있어 노닐기에도 좋은 곳입니다. 그곳의 수령이 되어 벼슬살이하면서도 은거하듯 육 년을 지내고 싶습니다.
은사들 중에는 그곳 산 귀신이 요사스러운 짓을 부려 수령에게 불리한 곳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저는 본래 보화군을 섬겨 왔으니 우레를 다스리는 여러 신을 동원해서라도 산 귀신을 눌러 놓을 수 있습니다. 도깨비 따위가 무엇이라고 감히 사람을 농락하겠습니까.
이 일을 결정할 권한은 온전히 형의 입에 달려 있으니, 부디 뜻을 바꾸지 말아 주시면 어떨는지요. 하고 싶은 말을 다 적지는 못합니다.
(용어) 성준구(호 장곡)는 조선 선조 때 문신으로,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여러 공을 세웠다. 뇌부는 도가에서 우레를 맡은 신들의 관청을 뜻한다.
최분음에게 답하는 편지 (서기 1607년 6월 1일, 양력 추정)
교외까지 나오셔서 손을 붙잡고 배웅해 주신 것은 정이 두텁고 간곡한 일이었고, 깨우쳐 주신 말씀은 생각할수록 잠시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고을에 도착한 지 열사흘째 되던 날, 아전이 조정의 소식지와 손수 써 주신 편지를 가지고 왔기에 살펴보았더니, 5월 6일에 대관의 탄핵으로 파면되었다고 하더군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돌아가신 제 아버님도 이 고을을 맡으신 지 열사흘째에 교체되셨는데, 저도 또 이렇게 되었으니, 이건 거의 조물주의 장난이지 어찌 사람의 꾀로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세상과 잘 맞지 않아, 죽고 사는 일이나 얻고 잃는 일을 마음에 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차츰 노자와 불교 쪽으로 몸을 의탁해 스스로 세상을 피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저도 모르게 그 안에 젖어 들어 더욱 불경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불경의 뛰어난 견해를 보면 골짜기가 갈라지고 강물이 터지는 듯했고, 그 글이 황홀하고 아득하여 마치 나는 용이 구름을 타고 오르는 듯 꼬리와 갈기, 발톱과 비늘조차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읽을수록 더욱 아득해져서 정신이 온 세상 밖을 노니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늘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아마 일생을 헛되이 보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깊이 찾아 연구하며 그 속에 쌓인 온갖 이치를 꿰뚫어 보니, 마음과 본성이 저절로 또렷해져서 마치 깨달음이 있는 듯했습니다. 때때로 젊었을 때 배웠던 사서와 성리학 책들을 꺼내 놓고 불교에서 마음과 본성을 말한 부분과 견주어 보았습니다. 같고 다른 견해와 참되고 거짓됨의 경계를 따져 가며 논하다 보니 제법 스스로 얻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글로 지어 그 뜻을 밝혔는데, 이른바 "불교에 아첨한다"는 말이 필시 이것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세상에서 거슬리는 사람이 되어 여러 번 더러운 치욕으로 탄핵을 받았지만 털끝만큼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찌 이런 일로 제 정신을 손상시키겠습니까. 더구나 곽공과 함께 저를 간하는 글에 나란히 이름이 올랐으니, 이른바 이백과 두보처럼 명성을 나란히 하게 된 셈인데, 죽는다 해도 또 무엇을 한스러워하겠습니까.
형과 이대중, 성덕보가 처음에 저에게 좋은 벼슬길을 터 주려 하신 것은, 아마 일의 형세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탓이 아닐까요. 고을 수령 자리도 허락되지 않는데, 옥당의 높은 자리가 허락되겠습니까.
오래지 않아 서울에 도착하면 손을 붙잡고 다 말씀드리겠으니, 여기서는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용어) 사서(사자)는 논어·대학·중용·맹자를, 염락은 주돈이와 정자 형제를 가리키며, 둘 다 성리학의 근본이 되는 학문을 뜻한다. 영불은 불교에 지나치게 기대어 복을 비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임자정에게 보내는 편지 (서기 1608년 3월 7일, 양력 추정)
심부름꾼인 박씨와 김씨가 와서 이달 17일 자 조정 소식지를 전해 주었는데, 내암공이 수규를 죄주자는 상소를 올렸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이를 펴 보며 밥을 먹다가 저도 모르게 밥을 뱉으며 일어나 손뼉을 치고 감탄했습니다. 천하에 이런 선비가 있으니, 뜻있는 이들이 기세를 떨칠 만합니다.
지난해 겨울, 형께서 이 일을 하려 하셨을 때 제가 애써 말렸던 것은, 우리가 본디 무거운 명망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라 이런 일을 한 번 벌였다가는 나라에서 외로운 새 새끼나 썩은 쥐 새끼처럼 버림받을 것이고, 또 더 큰일에도 불리해질까 걱정되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분이 우리가 감히 하지 못한 일을 해냈으니, 그 강개한 충절이야말로 어찌 옛 열사에게 뒤진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수규 역시 무거운 명망을 지닌 이라 말을 꺼내면 한 시대를 진동시킬 만하니, 죽기로 마음먹고 그와 맞서 싸운다면 그 나름 후련한 점은 있을 것입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지금 임금께서 격노해 계시니, 이 일을 계기로 지나친 일이 벌어지면 그분 자신의 몸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고, 그 화가 사림에까지 미쳐 끝내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 미치니 춥지 않아도 몸이 떨립니다.
그렇지만 어진 임금께서는 공명하시니, 흉측한 무리들이 소란을 피운다 해도 어찌 소인의 말만 듣고 바른말을 하는 이를 해치겠습니까.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형께서는 평소 이분을 늘 불만스럽게 여겨 잘못을 너무 심하게 지적하셨습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선비를 논할 때는 큰 줄기를 취해야 하고, 자잘한 것들을 모아 어진 사람의 허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형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게 하지 않으시더군요.
오늘 일어난 이 사건은 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요? 비유하자면, 큰 강물이 도도하게 흘러가는데 백 리쯤 가서 한 번 굽이가 있다 한들 그 강물의 웅대함에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형께서는 스스로 남을 잘 안다고 여기지 마시고, 이 점만은 저에게 양보해 주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고을 사무가 무척 바쁘고 온종일 소송 사건이 비 오듯 밀려들지만, 그래도 제가 휘파람 불며 시를 읊는 것까지 방해하지는 못합니다. 때때로 서산의 상쾌한 기운을 마주하면 저 또한 홀을 턱에 괴고 감상에 잠기지요. 이만 다 갖추지 못합니다.
(용어) "서산의 아침 기운" 이야기는 진나라 왕희지가 상관에게서 일을 서두르라는 말을 듣고도 아무 대꾸 없이 홀을 턱에 괴고 "서산의 아침 기운이 상쾌하기 그지없다"고 답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청고한 관리의 태도를 뜻한다.
임자정에게 답하는 편지 (서기 1608년 8월 19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가 복이 없어 선왕께서 신하들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나셨으니, 그 승하의 쓰라림이야 안팎으로 어찌 다르겠습니까.
더구나 저는 선왕께서 두텁게 칭찬하고 이끌어 주셨고 어려울 때마다 건져 주셔서 오늘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저의 티끌만 한 것 하나까지도 어찌 모두 임금의 은덕이 아니겠습니까.
새 임금의 큰 밝음이 이어 비추고 온 나라가 새로워지니, 슬픔과 경사가 겹쳐 오는 것이 황홀하기 그지없습니다. 게다가 형께서 병조에서 물러나 언관의 자리로 나아가셨다니, 이야말로 참으로 군자가 뜻을 펴 볼 때입니다. 새로 등극하신 임금을 보좌하는 일은 참으로 임금의 눈과 귀가 되는 신하에게 달려 있으니, 형께서는 온 힘과 충성을 다하시어 평소 배우신 바를 저버리지 않으시면 어떨는지요.
그 사람이 백성들을 대할 때 스스로 패망을 자초해서 얼마 전 진도로 귀양을 갔다고 합니다. 이 고을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몰래 그가 했던 짓을 들어 보니 참으로 사람 같지 않더군요. 우리가 지난해 애태웠던 것은 지나친 근심이었던 셈입니다. 상복을 입은 사람이 어떻게 남을 대하며 술을 즐기고 기생과 마차 이야기나 하면서 껄껄 웃음을 그치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런 사람이 비상한 일을 해낼 리가 있겠습니까? 이는 그저 남을 해치기 좋아하고 복을 바라는 자들이 부추기고 아첨한 결과일 뿐이니, 한 번 웃고 넘길 만합니다.
내암공이 서울에 도착했다는데 형께서도 가서 그 사람됨을 보셨는지요. 그분의 논의와 풍채가 소문으로 듣던 것과 맞아떨어지던가요. 이분의 지조와 절개는 우뚝 솟은 바위처럼 뛰어나니, 세속 사람들로서는 바라거나 따라가지 못할 점이 있습니다. 다만 그분의 제자들이 반드시 모두 훌륭하지만은 않을 것이니, 형의 넓은 식견으로는 제 말을 듣지 않고도 이미 스스로 꿰뚫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주 만나면 친해지고, 친해지면 그 안에 빠져들고, 빠져들면 같아지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같아지고 마는 법입니다. 그러니 경계하는 마음과 경모하는 마음을, 마치 책 속에서 만난 사람을 대하듯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중국에 관한 일은 논의가 늘 타당하지 못하니, 먼 고을에 있는 관리로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어 쓸데없는 근심을 견디지 못합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흉측한 무리들이 간사한 계책을 부려 큰일을 그르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형들은 나라의 일을 맡은 처지이니 그런 일까지 염려하고 계시는지요.
향을 올리러 서울로 올라갈 날이 이달 20일 무렵입니다. 모시고 말씀드릴 날이 머지않으니 이만 다 갖추지 않습니다.
큰 조카에게 답하는 편지 (서기 1608년 9월 23일, 양력 추정)
헤어진 뒤로 마음이 몹시 언짢았는데, 곧이어 손수 쓴 편지를 받아 보니 가슴이 트이는 것 같구나.
나는 평생 동안 그 누구보다 심하게 비방만 받았다. 해가 가고 날이 갈수록 비방이 더욱 새롭고 기이해졌지만, 들을수록 털끝만큼도 마음에 두지 않았고 스스로 해명하려 들지도 않았다. 오래 두면 저절로 풀리기도 하는데, 지금까지 십오 년을 그렇게 지내 왔다. 요즘 들어서는 치아와 머리털이 쇠약해져서 세상일에 대한 흥미도 줄고 꺾여 버렸다. 그저 고요한 곳에서 책이나 보면서 그 즐거움으로 겨우 만족하고 있는데, 어찌 예를 범하고 법을 어기기를 즐겨서 상을 당한 여인을 거느리고 범법의 소굴을 다스리는 주인 노릇을 했겠느냐.
서울에서 이 일을 두고 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사헌부에서 문제를 제기하기에까지 이르렀는데, 다행히 임자정과 이득여가 온 힘을 다해 주선해 준 덕분에 겨우 무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벼슬을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니, 그렇게만 되면 내 행적이 곧 분명히 드러나 비방하던 자들도 저절로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설령 다른 일로 물러나도록 탄핵한다면 상관없겠지만, 역관이라는 신분이 나와 같은 처지도 아닌데 그저 아쟁과 노래를 듣기 위해 그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하니,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도 실로 그럴 만한 일이다. 오히려 누구를 탓하겠느냐.
들으니 기 정승이 탄핵을 당해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이 모두 들고 일어났고, 사관들도 계속해서 그 뒤를 이을 것이라 하는데, 너는 이 논의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옳겠다. 그분은 선왕의 만년에 원흉과 뜻이 갈려 세자를 도운 공이 실로 많았던 분이니, 저 무리들이 한창 떠들어 댄다고 해서 그 논조에 덩달아 따라서는 안 될 것이다. 뒷날 저절로 알게 될 일이니 번거롭게 더 말하지 않겠다.
아계 이산해의 손자 두 사람은 나이도 젊고 허물이 없으며 재주도 넉넉하다. 사관으로 추천될 무렵 너는 굳이 이를 막지 말아야 한다. 예부터 선비들이 화를 입은 일은 대부분 이런 병통에서 비롯되었다. 형님도 이미 연로하시고 나 또한 고달프게 지내고 있으니, 바른 의논이야 마음에 두는 것이 옳겠지만 어찌 몸과 집안을 지킬 계획도 세우지 않으려느냐.
너는 성정이 고집스럽고 또한 지나치게 진실하여, 이해를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위험한 길에 부딪치니, 그 패망은 이미 정해진 것과 같다. 온 세상이 다 흐린데 너 한 사람이 어떻게 맑게 할 수 있겠느냐. 세상과 더불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곳 토호 가운데 나를 미워하는 자가 어사에게 말을 꾸며 댄 모양인데, 어사도 그 말을 자못 믿는 눈치다. 나는 이 일로 벼슬을 그만두고 싶으니 그 또한 방해될 것은 없지만, 바라는 것은 좋은 말로 나를 내보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내가 이미 덕구에게도 말해 두었지만, 너도 이 점을 생각해 다오.
사회가 죄에 연루되어 물에 젖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형편이니, 거의 한시도 견딜 수 없는 모습이다. 더는 말하지 않겠다.
(용어) 삼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함께 이르는 말로, 임금에게 옳은 말을 아뢰는 일을 맡았다.
조지세에게 보내는 편지 (서기 1608년 9월 28일, 양력 추정)
심부름꾼이 돌아와 형의 가르침을 전해 주었는데, 이는 참으로 벗 사이의 도리를 다한 것이라, 읽고 나니 고마운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함께 밀려옵니다.
제가 지난번 보낸 편지는 그저 농담이었는데, 형께서 지나치게 믿으시고 걱정하시며 제가 실제로 그렇게 할 계획인 것으로 여기셨더군요. 제가 비록 몹시 어리석고 경솔하지만, 어찌 이렇게 남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끝내 그릇된 생각을 고집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평생 세 가지 일로 비방을 받아 왔는데, 그 모두가 의심받을 만한 자취가 있었습니다. 처음 현산에서 받은 비방으로 말하자면, 유보가 비록 큰 조카와의 혼사 문제로 저를 미워해서 이간질하는 말로 남의 귀를 어지럽혔다 하더라도, 만약 제가 영위 앞의 궤연을 지키며 서울을 지나가지 않았다면 유보가 백 마디를 한들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었겠습니까.
기 정승과의 일에 있어서도 저에게 잘못이 있었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저와 기 정승은 정이 아주 긴밀했으니, 그 당시 사소한 말들을 먼저 정승께 고해서 스스로 풀어지도록 했다면 반드시 막히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못된 사람들에게 누설하는 바람에 갈수록 속임과 의혹으로 변해서 끝내 그분의 분노를 자극하고 말았습니다. 저에게 애초부터 그런 일이 없었기에 저절로 풀린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 화란이 어찌 한 차례 쫓겨나는 것으로만 끝났겠습니까. 뒤늦게 생각하면 후회스러워 말문이 막힙니다.
오늘 일어난 말썽은 제가 당연히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늘 드나들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 집은 본래 저를 의심하던 처지였는데, 그 여인이 도망친 때에 마침 저는 향을 올리러 가야 할 날을 맞았습니다. 그러자 그 남편 집안에서 평소 서로 가까이 지내던 흔적을 잡아 이간질하여 말썽의 뿌리를 만들어 낸 것이니, 이 역시 제가 스스로 그 비방을 불러들인 셈입니다. 어찌 남을 원망하겠습니까.
저는 여러 차례 세상일에 걸려 넘어져 벼슬할 생각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미 변산 남쪽에 집터를 잡아서 백 년토록 은거할 곳으로 만들어 두었습니다. 아름다운 절벽의 계수나무 그늘에서 맑은 물에 발을 씻고, 산 위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채 신선주를 기울이며 스스로 즐기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노래 잘하는 사람 하나가 곽경순의 「유선시」를 읊어 권주가로 삼아 준다면 어찌 인간 세상의 더없이 유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고 보니, 그동안 기이한 재앙들을 겪어 온 것이 오히려 후회스럽습니다. 형께서 보신다면 틀림없이 크게 웃으실 것입니다. 이만 다 갖추지 않습니다.
(용어) 곽박(자 경순)은 중국 진나라 사람으로 재주가 뛰어났고, 사부와 점술에 능했으며, 신선을 노래한 「유선시」로 유명하다.
형님께 올리는 편지 (서기 1608년 10월 13일, 양력 추정)
가을 날씨가 점점 서늘해지는데, 삼가 여쭙건대 몸조리는 더욱 잘 하고 계신지요. 그리운 마음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는 마침내 탈 없이 파직되었으니 아주 원하던 대로 되었습니다. 당연히 곧 서울로 돌아가 형님과 함께 베개를 나란히 하는 즐거움을 누려야 마땅하겠지만, 구설의 곤욕을 너무 많이 겪었으니 멀리 떠나서 그 액운을 완전히 녹여 없애고자 합니다. 그래서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마음먹고 북쪽 하늘을 바라보니 마음이 더욱 슬퍼졌습니다.
부안에 도착하니 이곳 원님인 심군이 성안의 아전 집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게 해 주고, 날마다 고기와 곡식을 대 주며, 아침저녁으로 찾아와 무엇이든 요구하는 대로 바로바로 응해 줍니다. 마음도 안정되고 몸도 편안하여 오직 책과 역사서로 즐기며 지내고 있으니, 참으로 속세 안의 신선 고을입니다. 지난날 벼슬길에서 골몰하던 때를 돌이켜 보면, 그 차이가 어찌 하늘과 땅만 하겠습니까.
변산 남쪽 기슭에는 우반곡이라는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 안이 기름지고 평탄하여 물과 바위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씨 성을 가진 두 벗을 데리고 가서 집터를 정해 놓으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하고 시내와 계곡이 깊고 아름다워 참으로 은자가 살 만한 곳이었습니다. 그 지역이 또 바닷가라서 물고기와 조개가 풍부하게 나고, 소금을 굽고 곡식을 심으면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사람이 굶어 죽을 일이 없습니다.
심군이 목수들을 모아 나무를 베어 이미 시냇가에 몇 칸짜리 집을 지어 놓았으니, 이런 곳에서 이리저리 거닐며 남은 생을 보낼 수 있겠습니다. 더구나 서울까지 거리가 겨우 닷새 길인데 큰 언덕이나 높은 고개, 큰 강이 가로막는 것도 없으니, 형님이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면 저는 마땅히 말 한 필로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니, 이 아니 편리하겠습니까.
저는 불행히도 처음에는 형중에게 배척을 당했고, 중간에는 일송 정승 심희수의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자정이 인사를 돕게 된 날에 이르러서는 그만 사훈에게 파면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저들은 제가 이 고을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제 행적만 붙잡고서는 손뼉을 치며 기뻐하며 "저 사람은 남인이 아니면서도 본래부터 우리와 뜻을 같이했다"고 말할 것이니, 이 모욕이야말로 궁형보다 더 심한 것인데, 불행히 이를 당하고 보니 자못 분이 납니다.
지난달 임자정이 보낸 편지에서, "다시 등용하라는 명이 내리면 요즘 논의로는 옥당에 벼슬을 시키고 싶어 한다"고 했던 것도 참으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뜻을 펴지 못한 신세이니 좋은 벼슬을 바라는 마음은 이미 사라졌는데, 어찌 남에게 목을 끌려 굽히고 젊은 무리의 뒤를 따라다니며 벼슬 한 자리를 구해 스스로 영예와 은총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에 가고 싶던 생각도 이 소식을 듣고 더욱 절망스러워졌습니다.
심부름꾼이 바쁘다 하니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다만 계절에 맞추어 몸을 스스로 아끼시기를 빌며, 종이를 대하니 목이 메옵니다.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정 대사간에게 주는 편지 (서기 1611년 1월 3일, 양력 추정)
저는 불행하여 그동안 지위 높은 분들에게 미움을 산 일이 무척 많았습니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감히 변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는 참으로 제 운수가 나쁜 탓이니 하늘의 뜻에 맡길 뿐 달리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에는 백진의 성난 꾸짖음이 또 뜻밖에 터져 나왔으니, 집집마다 말 잘하는 사람을 세워 변명하게 한다 해도 그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째서 그토록 고집이 세어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요.
그 누각을 처음 지은 것이 해성이 한 일이라면, 그 뒤를 이어 중수한 사람이 그 시를 철거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기문과 차운시는 모두 제 문집 속에 남아 있는데, 백진은 이를 보고도 믿지 않으며 그저 제가 뒤늦게 지어서 그의 화를 누그러뜨리려 한 것이라고만 여기니, 이는 저를 얼마나 하찮게 대하는 것입니까.
제가 비록 어리석고 거칠지만, 세상 만물이 다 티끌 같은 것임을 알고 있는데, 벼슬아치의 행세를 탐내어 스스로를 속이는 지경에 빠지겠습니까.
요산군에 살던 어느 부유한 백성이 죽자 그 자손들이 저를 걸고 넘어지려는 계략이 천 가지 만 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각에 걸린 글 가운데 제 이름이 있는 것은 모두 철거하고, 해성과 참판 유영길, 황주 목사 박동열 등의 시도 모두 뜯어내 버린 뒤 이 세 집안에 하소연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백진은 먼저 들은 말만 믿고서 그 맺힌 감정을 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화담서원의 상량문에서도 제가 불교에 아첨했다는 이유로 제 이름을 지우도록 명하고 형님의 이름으로 대신 쓰게 했으니, 이 역시 그 원한을 갚으려 한 까닭입니다. 이것이 어찌 군자의 마음씨라 하겠습니까.
시판을 훼철한 일로 그 화가 사림 전체에 미쳤던 사례가 지난날에 명백히 있었습니다. 제가 비록 망령되고 어리석지만 조선 이래의 옛일을 조금은 알고 있는데, 어찌 다시 김종직의 경솔했던 잘못을 되풀이하여 참혹한 화란에 스스로 빠져들겠습니까.
승지와 참의 사이에 무슨 높고 낮음이 있겠습니까. 벼슬길이 열리고 막히는 것은 하늘의 명에 달린 것인데 백진이 어찌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마흔 나이에 이미 상대부가 되어 형조 참의 벼슬까지 지냈으니, 장자나 양웅에 비교한다면 이미 얻은 것이 많은 셈입니다. 이제 관을 벗어 걸고 기러기처럼 높이 날아 마땅히 세상 밖의 맑은 복을 누리려 합니다. 남의 눈치를 살피며 아양 떠는 말로 스스로를 변명하는 짓만은 차마 하지 않으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절대로 백진이 알게 하지는 마십시오. 그의 성내고 꾸짖음이 더 커질까 두렵습니다. 이만 다 갖추지 못합니다.
(용어) 김종직(자 계온)이 일찍이 유자광의 시판을 철거한 일이 있었는데, 유자광이 이를 원한으로 품고 결국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다시 벤 일이 있었다.
유 시어에게 주는 편지 (서기 1611년 1월 5일, 양력 추정)
어제 수레를 몰고 찾아 주셨는데, 형께서 한창 술에 취하신 터라 그 이야기를 끝맺지 못했습니다.
편지로 다 담아내려면 너무 번거로울 듯하지만, 이미 말이 나온 이상 끝내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야 있겠습니까. 형께서는 한번 들어 보아 주십시오.
1603년 벼슬에서 파직된 뒤 금강산을 유람하러 가는 길에 철원에 이르러, 풍전 북쪽 2리쯗 되는 곳의 민가에서 묵었습니다. 늙은 아낙 하나가 맞아 주어 주막으로 들어갔는데, 집이 몹시 조촐하고 깔아 놓은 자리도 깨끗한지라 이상히 여겨 물어보았더니 아낙이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대대로 향교동의 포전랑 뒤에서 살았는데, 남편 유세영이 제 외가에 드나들었던 사람이라 선대의 일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외가의 종들 이름까지 하나하나 불러 댔습니다. 어째서 이곳에서 살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아낙은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남편을 따라 시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왜적이 밤에 갑자기 들이닥치자 남편이 엉겁결에 시어머니를 업고 밖으로 나가 숲속에 엎드려 있었는데, 왜적을 만나 한 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 아이는 풀숲 사이에서 울고 있었는데 왜적이 데리고 가 버렸습니다. 날이 밝으니 피가 낭자했지만, 제 손으로 구덩이를 파서 그분들을 묻었습니다. 그 뒤로 이곳 토박이들에게 의지하며 살다가, 이듬해 왜적이 물러가자 사람을 모아 무덤을 다시 옮겨 갈무리했습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술을 팔아 생계를 잇고 있습니다. 서울에는 일가친척도 없어 결국 이곳에 눌러 살며 봄가을로 두 무덤에 제사를 지내다가 이 몸도 여기서 마치려 합니다."
제가 그 아이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아낙이 답했습니다. "1593년에 왕자를 따라 나갔는데, 지금은 어느 궁에 있다고 하는데도 아직까지 저를 찾아와 주지 않습니다."
저는 그 사연에 느낀 바가 있어 「늙은 나그네 아낙의 원한」이라는 시 한 편을 지었는데, 그 첫머리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동주성 동쪽에 차가운 날이 저무는데, 보개산은 높이 솟아 저녁 구름을 두르고 있네." 그런데 이 시를 본 사람들이 이를 송공을 가리켜 배척한 것이라 오해하고 그렇게 퍼뜨렸습니다. 송공이 밤낮으로 저에게 이를 갈며 반드시 앙갚음하려 하는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피란했던 사람을 통해 송공이 변을 당했던 사정을 매우 자상하게 들었는데, 그것은 적군을 만나 정신없이 뒤섞이는 바람에 그 아버지가 계신 곳을 놓쳤다가 돌아와 보니 이미 적군에게 해를 입은 뒤라 끝내 어찌할 수 없었던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만약 이 시를 직접 본다면 필시 전하는 사람의 망령됨을 알아챌 것입니다. 다만 이 시를 어떻게 그에게 보여 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도 진실로 그럴 방도가 없으니, 저 역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송공이 만약 그 아낙을 저버린 일이 없다면, 백 편의 놀리고 나무라는 시가 있다 한들 그 몸에 무슨 손상이 있겠습니까. 반대로 만약 조금이라도 부족한 점이 있다면, 집안에 말 잘하는 사람을 아무리 배치하고 저잣거리에 천금을 풀어놓아 스스로를 밝히고 씻으려 해도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이룰 수 없을 것이니, 제 시 한 편이 어찌 그 무게를 더하거나 덜하겠습니까.
군자는 그저 자신을 닦을 따름이니, 뭇사람의 입이란 흐르는 냇물과 같아서 한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법입니다. 만약 자기를 논하는 사람을 일일이 중상하려 든다면 너무도 수고롭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형께서 이 실정을 자세히 아시고 잘 말씀해 주셔서 이 분란을 풀어 주신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이만 다 갖추지 않습니다.
정생에게 답하는 편지 (서기 1611년 1월 7일, 양력 추정)
어제는 재계할 일이 있어 관아에서 묵었습니다. 하필 그때 형께서 찾아 주셨는데,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습니다. 보여 주신 내암공에 관한 이야기는 한바탕 웃어넘길 거리도 못 됩니다.
저는 내암과는 한 번 만나 사귄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그 사람을 오히려 불만스럽게 여겼는데, 다만 몇 년 전 유씨를 성토한 상소가 보통 사람보다는 좀 뛰어나다고 여겨서 임자정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점을 언급했던 것이지, 그의 주장에 동조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악부에 실려 있는 것도 그 나름의 억양이 있으니, 큰 새가 날개를 잃었다느니 뜬구름이 해를 가린다느니 한 것은 역시 그때 있었던 일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윤과 여상에 견준 것도 시인들이 즐겨 쓰는 반어법의 한 예일 뿐이니, 무엇이 이상하겠습니까.
저는 평생 제 처지를 스스로 익숙히 헤아려 왔습니다. 한 집안 사람들끼리도 의논이 다 같지는 않은 법입니다. 저는 좋은 벼슬 자리를 그저 부평초나 떠내려가는 장승처럼 여기는 사람인데, 만약 뚫고 나가고자 한다면 제 집안에서 스스로 구할 일이지 어찌 하필 멀리 새 친구를 맺어 남의 비웃음과 꾸짖음을 크게 받겠습니까. 임자정, 이대중과 서로 친하게 지낸 것은 오늘 시작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저를 이끌어 주고자 하는 것은 참으로 제 떠도는 신세를 가련히 여기기 때문이지, 어찌 의견이나 마음이 서로 같아서라고 하겠습니까.
임자정이 자순과 명익 등을 등용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가 없는데, 유독 저에 대해서만 의심을 품으니, 이보다 더 원통한 일이 있겠습니까.
아무개는 시판을 훼철한 일 때문에 품은 분노를 풀지 못해 온갖 흠집을 찾아내느라 못할 짓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아무리 말을 잘 꾸미는 사람이라 해도 누가 믿겠습니까.
내암은 비록 세간의 이런저런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본래 산속에 숨어 지낸 깨끗한 선비였으니, 그를 사귀는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 무턱대고 동조하지만 않는다면 무슨 손상이 있겠습니까. 정작 붙고 엉겨서 남의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은 과연 어느 집안입니까. 그런데도 감히 이러쿵저러쿵하며 남이 누구와 교제하고 누구와 친하다고 헐뜯습니다. 만약 제가 권세 있는 집안에 드나들었다면 저들은 장차 무엇으로 입방아를 찧었겠습니까.
요즘 몇 해 사이에 허리와 다리가 무척 아파서 직책 수행하는 일 외에는 형님을 자주 뵙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저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들의 분노를 풀어 주려고 염탐하며 아양 떠는 웃음 따위는 게을러서도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 설령 그 집에 찾아간다 해도 반드시 수치스러운 봉변을 당할 것이 틀림없기에, 이처럼 간곡한 가르침을 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만 그칩니다.
이생에게 답하는 편지 (서기 1611년 1월 18일, 양력 추정)
보내온 편지에서 영원히 남을 큰 사업에 대해 물으셨으니 참으로 훌륭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저의 얕고 거친 식견으로 어찌 만에 하나라도 제대로 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대의 질문이 선진 시대나 한나라·당나라의 이른바 대가들에게는 미치지 않고 유독 우리나라에 대해서만 자세히 물으셨으니, 이것이 어찌 낮춰 보는 논의이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외져서 바다 한구석에 있으니 당나라 이전의 문헌은 까마득히 멀고, 비록 을지문덕과 진덕여왕의 시가 역사책에 실려 있다고는 하나 정말 그분들이 직접 지은 것인지는 감히 믿기 어렵소.
신라 말엽에 이르러 최치원(호 고운) 학사가 처음 큰 이름을 얻었는데, 오늘날의 눈으로 본다면 그의 문장은 너무 곱기만 해서 힘이 시들었고 시는 거칠고 약해서, 허혼이나 정곡 같은 만당 시인들 사이에 넣어도 오히려 누추함이 드러날 지경이니, 성당의 작품들과 그 기법을 겨루려 해서야 되겠습니까.
고려 시대의 정지상은 표범 무늬의 얼룩 하나쯤은 보았다 할 만하지만, 그래도 만당 시 가운데 화려한 부류에 그쳤을 뿐입니다. 이인로와 이규보는 간혹 맑고 기이한 맛이 있었고, 진화와 홍간도 기름지고 곱기는 했지만 모두 소동파의 그늘을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익재 이제현에 이르러 새로운 문풍이 시작되었고,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이 그 뒤를 이었으며,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척약재 김구용이 고려 말엽의 명가가 되었습니다.
조선 초엽에 이르러서는 삼봉 정도전과 양촌 권근이 그 명성을 독점했으니, 문장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원숙해졌다고 할 만하여 아름답게 다듬어지고 크게 변모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흥의 공로는 문정공 이색이 가장 큽니다.
중간에 문간공 김종직이 포은과 양촌의 문맥을 이어받아 사람들이 그를 대가라 일컬었지만, 한스러운 것은 그 문장의 트임이 그리 높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 뒤로는 용재 이행 정승이 시에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고, 신광한과 정사룡도 그 뒤를 이어 뚜렷한 이름을 남겼습니다. 소재 노수신 정승도 애써 문명을 떨쳤으니, 이 몇 분이 중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어찌 모두 중국의 이름난 문장가들에게 뒤진다 하겠습니까.
지금 세상에서 글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문장으로는 동고 최립을 추대하고 시로는 이달(자 익지)을 추대하는데, 두 분 모두 천 년 이래 견줄 데 없는 절조입니다. 같은 연배 중에서는 여장 권필이 매우 부드럽고 맑으며, 자민 이안눌이 매우 깊고 굳세니, 이 밖에는 잘 알지 못합니다.
문장이란 비록 작은 재주라고들 하지만, 학문의 힘이 없고 안목이 없으며 꾸준한 노력이 없다면 그 극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루어 낸 바에 크고 작음, 높고 낮음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 오묘한 이치에 있어서는 다 한가지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글을 널리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학문의 힘이 없고, 스승을 찾아가 배우지 않기 때문에 안목이 없으며, 배운 것을 계속 익히지 않기 때문에 꾸준한 노력이 없습니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서 함부로 자기가 옛사람을 뛰어넘어 이름을 후세에 남기겠다고 큰소리치니, 저는 감히 그 말을 믿지 못합니다.
저는 열두 살에 아버지를 여의어, 어머니와 형님들이 저를 애처롭게 여기고 사랑만 해서 따로 엄한 다그침을 주지 않았습니다. 좀 더 자라서는 과거 공부를 익히는 사람들을 보고 따라 배웠는데, 그저 빨리 이루고 싶은 마음만 있어 육경과 여러 사서를 두루 읽고 대략의 뜻은 알았지만, 몸소 실천하고 침잠하는 공부는 즐기지 않았습니다.
호탕한 마음과 함부로 된 기세로 하루에 수만 자를 외워 입에서 글이 줄줄 흘러나오니, 사람들은 저를 총명하고 민첩하기가 무리에서 뛰어나다고 여겼고, 저 또한 그저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뿐, 학문과 문장이 애초에 많이 외고 널리 읽은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둘째 형님이 유배지에서 돌아오신 뒤 비로소 저에게 고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뒤 문장은 서애 유성룡 정승에게서 배우고, 시는 손곡 이달에게서 배우고서야 비로소 문장의 참된 길이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차츰 그 길로 들어서고자 했지만 세상의 흐름에 끌려 세상에 나가 과거에서 장원으로 뽑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격이 소탈하고 스스로를 단속하는 데 부족하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배척을 받아, 마침내 문을 닫고 학업에 몰두한 지가 이제 열여섯 해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무엇을 이루었는지는 제가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맑고 힘차며 깊고 굳세어 스스로 새로운 경지를 열어 가는 데는 저 앞선 분들에게 조금 못 미친다 하더라도, 여러 것을 품고 쌓아 두어 손 가는 대로 뽑아내면 마땅히 갈 데에 가고 마땅히 그칠 데에 그치며, 넘실넘실 흐르는 큰 강물이 하늘에 닿아 조개 궁전과 이무기 궁궐, 혹은 굴 산과 뱀장어 집이 끼어 있는 듯해서 그 웅대함을 잃지 않는 점만은, 저 여러 사람들과 견주어 제법 한 치쯤의 장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안목 있는 이들이 이를 인정해 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만약 스승과 벗들에게서 그 근원을 전해 받지 못했다면 또 어찌 이럴 수 있었겠습니까.
형님들과 누님의 글은 집안 내력에서 나온 것인데, 선친께서 젊었을 때 모재 김안국에게 배우셨고, 모재의 스승은 허백당 성현이며, 성현은 그 형 성간과 괴애 김수온에게서 배웠습니다. 이 두 분은 모두 태재 유방선의 제자였고, 유방선 공은 바로 문정공 이색이 아끼던 문인이었습니다.
문정공은 중국에 유학하여 한림원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오랫동안 우집과 구양현의 문하에 있으면서 그들의 칭찬을 받았는데, 심지어 그 학문의 도가 바다 밖 우리나라로 전해졌다는 구절까지 있었습니다.
구양현은 강서 지방 사람이라 몸소 여러 학자를 스승으로 모셨으니, 옛 문인들의 유훈을 익숙하게 들었고, 더구나 왕안석, 증공, 구양수, 황정견 등 옛 대가들의 업적이 여전히 찬란했던 터라, 이 학업을 전수하여 목은 이색에게까지 이어 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글 짓는 일의 내력을 조금이라도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목은이 중국에서 돌아온 덕분이니, 어찌 위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장 권필의 선친은 낙봉 신광한에게 배웠고, 낙봉은 용재 이행의 추천과 칭찬을 받은 사람이며, 자민 이안눌은 또 용재의 증손자이니, 이 역시 집안 대대로 이어진 학문으로 이름을 세운 사람들입니다.
낙봉과 용재 두 분은 모두 점필재 김종직이 남긴 학문을 이었고, 점필재의 아버지는 야은 길재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야은은 양촌 권근 형제에게 배웠고, 목은 이색 역시 그들의 스승이었으니, 결국 모두 목은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무릇 시와 글을 짓는 사람으로서 이 흐름을 떠나 따로 문파를 세운다면, 망령된 일이 아니라면 분수를 넘는 일일 것입니다.
보내 주신 편지에서 최경창과 백광훈을 말씀하셨는데, 두 분은 당나라에 있었더라도 역시 명가라 할 만하지만, 다만 그 세계가 좁았던 것이 한스럽습니다. 말씀하신 아계 이산해와 제봉 고경명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그들의 전집을 보지 못했으니, 어찌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침 형조의 회의에 참석해야 해서 문 앞에서 재촉하는 통에 대강 답장을 적을 뿐,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만나서 충분히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이만 갖추지 않습니다.
(용어) 최치원(호 고운)은 신라 말의 학자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이름을 떨쳤다. 이제현(호 익재), 이곡(호 가정), 이색(호 목은, 시호 문정)은 고려 말의 대표적 문인들이며, 정몽주(호 포은), 이숭인(호 도은), 김구용(호 척약재)도 고려 말의 이름난 문인이다. 정도전(호 삼봉)과 권근(호 양촌)은 조선 초의 문신이다. 김종직(호 점필재, 시호 문간)은 조선 초의 성리학자로 사림파의 뿌리가 된 인물이다. 이행(호 용재), 신광한(호 낙봉), 정사룡, 노수신(호 소재)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들이다. 최립(호 동고)과 이달(자 익지, 호 손곡)은 당대에 문장과 시로 이름난 인물이고, 권필(자 여장)과 이안눌(자 자민)도 같은 시기의 시인이다. 김안국(호 모재), 성현(호 허백당), 성간, 김수온(호 괴애), 유방선(호 태재)은 조선 초·중기에 이어진 학문 계보 속의 인물들이다. 우집과 구양현은 원나라의 학자로, 이색이 중국 유학 시절 가르침을 받은 스승들이다. 길재(호 야은)는 고려 말의 절개 높은 학자다.
성소부부고 제11권
9. 22:21
출처: 성소부부고 제11권, 문부 8, 논
배경: 제11권은 허균이 정치와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한 논설 열두 편을 모은 곳이다. 학문하는 태도, 정치와 인재 등용, 관직 제도, 군사, 신분에 따른 인재 차별, 관리의 녹봉, 붕당의 폐해, 그리고 힘없는 백성이 마침내 나라를 뒤엎는 "호민"이 될 수 있다는 경고까지 다룬다. 뒤이어 정도전과 권근, 김종직, 남효온, 이장곤 등 조선 초기 인물들의 처신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인물론이 이어진다. 허균 특유의 거침없는 비판 정신과 신분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글들로, 그중 〈호민론〉과 〈유재론〉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는 대표작이다.
학문을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5일, 양력 추정)
옛날에 학문을 하던 사람들은 저 혼자만 착한 사람이 되려고 공부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세상의 온갖 변화에 대응하고, 사람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밝혀 뒤에 올 학문의 길을 열어 주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훗날 세상 사람들이 "우리 학문은 존중할 만하고, 그 맥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 것은 바로 이 사람 덕분이다"라고 환히 알게 되기를 바랐다. 이것을 선비가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로 삼았으니, 그 마음씀이야말로 공정하다 할 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요즘 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우리 학문을 존중하려는 마음도 없을뿐더러, 저 혼자만 착한 사람이 되려는 마음조차 없다. 그저 입으로 몇 마디 주워섬기고 귀로 얻어들은 것을 긁어모아 겉으로 말과 행동을 그럴듯하게 꾸밀 뿐이면서도, 스스로는 "나는 도를 밝히는 사람이다, 나는 이치를 끝까지 파고드는 사람이다"라고 떠벌려 한 시대 사람들의 눈과 귀를 흐려 놓는다. 그러나 그 결과를 가만히 살펴보면, 턱없이 높은 명망을 거저 거머쥐려 했을 뿐이고, 정작 타고난 본성을 높이고 도를 후세에 전하는 참된 알맹이에 있어서는 멍하니 아무것도 엿본 바가 없는 듯하니, 그 마음씀은 결국 사사로움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공과 사를 가르는 기준이요, 참과 거짓을 가르는 기준이다.
어찌하여 수십 년 전부터 사람들은 입만 열면 "아무개는 학자다, 아무개는 참된 선비다" 하며 함부로 서로 치켜세우고 자랑하기에 바쁜가? 이 또한 미혹된 짓이다.
일찍이 보건대, 이른바 참된 선비란 세상에 쓰이면 요임금과 순임금 시절의 다스림, 우임금·탕임금·문왕·무왕의 공적이 실제 일로 드러난 것이 그와 같았고, 설령 쓰이지 못하더라도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 그리고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학설을 책에 남긴 것이 또한 그와 같아서, 비록 천만 년이 지나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그 마음씀이 공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거짓 선비들은 실속도 근거도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입만 열면 마치 옛적 재상 이윤·부열이나 주공·공자가 했던 큰일을 자기가 떠맡을 수 있다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써 보면 손발 하나 제대로 놀리지 못하고 일을 그르쳐 스스로도 수습하지 못하니, 당대의 비웃음과 후세의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조금 더 교활한 자들은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헤아리고는 명망이 무너질까 두려워, 아예 나서지도 않은 채 제 졸렬함을 감추어 버린다. 이 또한 다름이 아니라 그 마음씀이 사사로웠기 때문이다.
슬프다! 거짓이 참됨을 어지럽혀 마침내 이런 극단에까지 이르렀고, 그 바람에 임금마저 도학이라는 것을 싫어하여 쓸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는 거짓과 사사로움을 품은 자들의 죄이지, 어찌 참된 선비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겠는가.
우리나라에서도 이른바 도학을 한다는 선비들이 더러는 화를 입었고, 더러는 끝내 자신의 경륜을 펴 보지도 못했다. 잘 모르겠지만, 그 시절 임금들이 과연 그들의 도를 받아들여 실제로 펼쳤더라면, 그 공적을 옛사람에게 견줄 만했을까, 이 세상을 요순시대처럼 만들 수 있었을까?
조정의 논의가 두 갈래로 갈라진 뒤로는 사사로움에 치우친 논쟁이 몹시 치열해져서, 어떤 이는 제 편만 옳다며 남을 헐뜯고, 어떤 이는 갑만 떠받들고 을은 배척하여, 시끄럽게 갈라진 채 옳고 그름이 정해지지 못했다. 이는 모두 사사로운 마음으로 듣고 보아서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니, 대체 누구를 탓하겠는가!
얼마 전에는 이른바 오현(다섯 어진 이)을 공자를 모신 사당에 함께 모셨다. 그때 논의하던 사람들은 "이 다섯 분 말고는 더 모셔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 또한 몹시 우스운 일이다. 어진 이라는 것이 어찌 정해진 숫자가 있어서 반드시 다섯 명으로 한정된다는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 공자나 안자 같은 학자가 나오더라도 함께 모실 수 없다는 말인가? 공자나 안자 같은 인물이 언제 태어날지는 아무도 미리 정할 수 없는 법이다.
또한 충절로 이름난 길재가 우탁과 정몽주의 학맥을 직접 이어받은 일이나, 서경덕이 홀로 깨우친 초월한 경지, 이이의 밝은 식견과 넓은 도량 같은 것을, 어찌 "비중이 크지 않으니 취할 게 없다"며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는가? 심지어 더러는 헐뜯기까지 하니, 이 또한 사사로움과 거짓이 빚어낸 해악이다.
만약 김굉필과 정여창이 불행히도 백 년 뒤에 태어났더라면 그런 헐뜯음을 당하지 않았으리라고 어찌 장담하며, 이이가 다행히 백 년 앞서 태어났더라면 그가 존중받지 못했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이는 마음씀이 공정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 것이요, 스스로 살펴보기는 싫어하고 남의 말만 떠받드는 세태에서 나온 것이다.
임금이 참으로 공과 사를 밝게 가릴 수 있다면,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일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미 공과 사, 참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다면 반드시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고 도리를 밝히는 사람이 나와 배운 바를 실천할 것이다. 겉만 그럴듯하게 꾸미던 자들은 감히 제 잔꾀를 부리지 못하고 모두 깨끗이 거짓을 버릴 것이며, 나라의 큰 시비 또한 저절로 정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열쇠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임금 한 사람의 몸에 있으니, 결국 "그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한마디로 귀결될 뿐이다.
(용어) 오현은 조선의 학자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다섯 사람을 가리키며, 이들을 공자를 모신 사당(문묘)에 함께 모신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탁과 정몽주는 고려 말의 학자이고, 길재는 호가 야은으로 이들의 학맥을 이었다고 전해지는 학자다. 서경덕은 호가 화담으로 혼자 힘으로 학문의 경지를 깨우친 학자이며, 이이는 호가 율곡으로 조선 중기의 대학자다. 안자는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 안회를 가리킨다.
정치를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7일, 양력 추정)
예로부터 임금이 나라를 다스릴 때 혼자서 정치를 한 경우는 없었다. 반드시 그를 도와줄 신하가 곁에 있어야 했다. 그 돕는 자리에 적합한 사람만 얻으면 천하와 나라의 일을 알맞게 다스릴 수 있었다. 이 이치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예로는, 요임금·순임금·우임금·탕임금이 임금 자리에 있을 때 반드시 고요·후직·익·이윤 같은 신하의 보좌를 받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런 다음에야 태평한 다스림을 이룰 수 있었으니, 하물며 지금 세상에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훗날의 임금들은 비록 잘 다스리기를 바란 이들도 있었지만, 늘 마땅한 보좌를 얻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신하 된 사람도 옛사람과 같은 포부를 지녔더라도, 더러는 어진 임금을 만나지 못함을 걱정하고 더러는 끝내 제대로 쓰이지 못함을 걱정하였다. 그러니 정치가 옛날만 못하고 다스림이 날이 갈수록 저속해지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으니, 어찌 백성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가 비록 외진 곳의 작은 나라이지만, 임금과 신하가 있고 백성과 나라가 있다. 정치를 맡은 사람이 참으로 하나라·은나라·주나라 세 시대를 본받는다면, 그 시절의 태평한 다스림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세종대왕이 황희와 허조를 등용한 예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황희와 허조는 학자도 아니었고 뛰어난 재능을 지닌 신하도 아니었다. 다만 묵직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임금이 잘못하는 일이라도 무작정 따르지만은 않을 정도의 사람이었다. 세종 당시에는 나라의 틀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 개혁할 만한 국사가 많았는데도, 두 신하는 큰 도리로써 힘쓰기보다는 그저 너그럽게 진정시키는 것만을 최선으로 여겼다. 이래서야 어찌 임금의 정사를 도와 옛적 익·후직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겠는가?
그런데도 나라가 신망을 얻어 오늘날까지 유지된 것은 모두 세종의 힘이었고, 두 신하가 보좌의 역할을 했다고들 말한다. 만약 고요·익·후직 같은 인물이 보좌하여 정치를 했더라면 그 공적이 어찌 이 정도에 그쳤겠는가.
아, 선왕(선조)의 정치는 밝았다고 할 만하다. 그 시절 보좌하던 신하야 많았지만, 아끼고 서로 믿었던 이는 이이였고, 온전히 맡기고 책임을 지워 일하게 한 이는 유성룡이었다. 두 신하는 참으로 학자이자 재능 있는 신하였다고 할 만하다. 그들에게 일을 맡기고 성과를 채근하던 뜻이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나, 끝내 그 포부를 펴지 못한 것은 그들의 재능이 미치지 못해서가 아니라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어지럽기 짝이 없던 임진왜란을 맞아 온 힘과 지혜를 다했으나, 어떤 일은 건져 냈고 어떤 일은 막혔으니, 이는 당시 형편이 유리했느냐 불리했느냐에 달린 것이었다. 그가 이순신을 등용한 일 하나만으로도 나라를 다시 일으킨 큰 발판이 되었다. 그런데 유성룡을 공격하던 자들은 이순신까지 싸잡아 죄를 물었으니, 그 해악이 나라에 미친 것이 그보다 클 수 없었다.
이이가 곤욕을 치른 것은, 논의하던 자들이 "공물 장부를 고치는 것은 불편하다", "여러 고을에 정원 밖의 병사를 두는 것은 마땅치 않다", "곡식을 바치고 벼슬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서얼에게 벼슬길을 열어 주는 것도 옳지 않다", "성과 보루를 다시 쌓는 것도 합당치 않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란을 겪은 뒤 왜적을 막고 백성을 편안케 하려고 부지런히 강구한 방책이라는 것이 결국 이 다섯 가지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째서인가? 대체로 이이가 앞날을 내다본 것은 수십 년 전에 이미 명확하였다. 그는 이 몇 가지 시행책이 평상시라면 번거로운 일임을 알았지만, 환란에 대비하려면 고쳐 나가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뭇사람의 꺼림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속에 얽매인 선비들이 좁은 소견에 이끌려 소란스럽다느니 온당치 않다느니 하며 요란하게 어깃장을 놓았으니, 그의 지위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도, 나라가 제대로 되지 못한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지금 논의하는 자들은 온 힘을 다해 이이를 배척하면서도, 정작 앞서 말한 다섯 가지 방책을 시행하는 데는 오히려 힘을 다하려 하지 않으니, 이야말로 몹시 우스운 일이다.
선왕이 온 정성을 다해 다스림을 도모하던 시절에, 두 신하가 조용히 쌓아 둔 포부를 펼 수 있었더라면, 그리하여 위에서는 그 뜻을 따르고 아래에서는 받들어 다른 논의가 없었더라면, 비록 태평성대를 온전히 되찾지는 못했더라도 외적의 침략만큼은 막아 낼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떠들어 대는 자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 쪼아 대며 기어이 가로막고 배척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설령 황희나 허조가 그런 처지에 놓였더라도, 반드시 "두 왕조를 섬겼다"는 트집을 잡혀 하루도 조정에 편히 있지 못했을 것이니, 어찌 세종 때처럼 여유롭고 진중하게 일할 수 있었겠는가.
훗날 훌륭한 다스림이 없었던 것은 모두 이런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밝음으로써 아랫사람을 살피고, 믿음으로써 신하에게 일을 맡긴다"는 이 두 가지면 충분하다 하겠는데, 그 결실은 오로지 굳은 의지와 결단에서 나올 뿐이다.
(용어) 고요·후직·익은 순임금을 도운 신하들이고, 이윤은 은나라 탕왕을 도와 왕도 정치를 이룬 명재상이다. 황희와 허조는 세종 때의 정승으로 묵직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이름났다. 이이는 호가 율곡으로 선조 때의 학자이자 재상이며, 유성룡은 호가 서애로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내며 이순신을 천거한 인물이다. 황희와 허조는 원래 고려의 신하였다가 조선에서 벼슬했기에, 트집을 잡자면 "두 왕조를 섬겼다"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었다.
벼슬자리를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9일, 양력 추정)
하·은·주 세 시대 이후로 관직을 함부로 늘리고 관원이 넘쳐 났던 나라로는 당나라만 한 나라가 없었다.
관직을 함부로 늘리면 권한이 이리저리 흩어져 어느 자리도 무게를 갖지 못하고, 관원이 넘쳐 나면 녹봉만 허비될 뿐 일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하고서도 훌륭한 정치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당나라(이씨의 나라)가 번창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나라의 관제는 당나라를 본받았으나, 오히려 관직은 더 늘어났고 헛되이 드는 비용도 더 많다. 중국처럼 큰 천하로도 오히려 권한이 흩어지고 녹봉이 낭비되는 것을 걱정했는데, 하물며 외지고 작은 우리나라에서야 어떠하겠는가. 나는 감히 먼 옛일을 끌어다 쓰지는 못하고, 명나라의 제도를 예로 들어 말해 보겠다.
명나라는 두 서울(남경과 북경)에 군사를 다스리는 관청 다섯 곳을 두고, 각 업무를 나누어 맡는 부서 여섯 곳을 두었다. 그 밖에 종실을 관장하는 관청, 감찰을 맡은 관청, 재판을 맡은 관청, 소식을 전하는 관청, 제사를 맡은 관청, 말과 수레를 맡은 관청, 궁중의 음식을 맡은 관청, 외국 사신을 맞는 관청 같은 여러 중간급 관청과, 국립 교육기관, 태자를 모시는 관청, 학사들이 모이는 관청, 임금께 간언하는 여섯 부서, 옥새를 관리하는 관청, 문서를 작성하는 관청 등이 각기 일을 나누어 맡았다. 궁궐 호위를 맡은 관청은 임금을 지키고 길을 순찰하는 일을 맡았고, 천문을 살피는 관청, 임금의 병을 돌보는 관청, 궁중 정원을 관리하는 관청, 도성 다섯 구역의 치안을 맡은 병사들은 예를 담당하는 부서와 군사를 담당하는 부서에 딸려 있을 뿐이었다. 이렇듯 관청은 이 정도에 그쳤고 관원 또한 쓸데없이 많지 않았지만, 그것으로도 천하의 일을 다스리기에 충분했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의정부·육조·삼사와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관원을 제외하고도, 관청과 관원의 수가 넘쳐 나고 번잡한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종친과 외척을 관장하는 데는 관청 하나면 충분한데, 종친부·의빈부·종부시가 나란히 있다. 재물을 관장하는 데는 호조 하나면 넉넉한데, 제용감·상의원·사섬시를 따로 두었다. 궁중의 술과 음식을 관장하는 데도 관청 하나면 넉넉한데, 내자시·내섬시·예빈시·사도시·사재감·사온서가 나뉘어 이 일을 맡고 있다. 형조 하나만 있으면 될 것을 장례원으로 굳이 나눌 필요가 없고, 군자감 하나면 될 것을 풍저창·광흥창 두 창고로 나눌 필요가 없다. 종묘의 음악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것인데, 정작 그 일을 맡은 관청(태상)은 버려두고 따로 장악원을 세웠으며, 제사에 쓸 짐승 한 가지만 기르면 될 것을 전생서와 사축서 두 곳에서 나누어 기른다. 심지어 잔치와 자리를 준비하는 관청조차 둘로 나누었고, 의약을 맡은 관청도 셋(내의원·전의감·혜민서)으로 나누었다.
그 밖에도 뒤섞이고 중복된 것들이 하도 많아 낱낱이 들기도 어려운데, 관청 하나에 한 사람이면 충분한 자리도 모두 두 자리로 만들었으며, 많은 경우는 열서너 명, 적어도 예닐곱 명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게다가 여러 관청이 저마다 제 소견을 고집하여, 어떤 관청은 다른 관청보다 더 많은 업무를 차지하려 하고 다른 관청은 또 그 업무를 침범하려 하여, 서로 다투며 지혜를 겨루느라 번갈아 임금의 재가를 받아 내니, 정작 그 일을 총괄해야 할 부서에서는 어리둥절하여 제대로 받들어 처리하지 못한다. 그래서 일이 이 때문에 성사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관청의 책임자도 하나하나 가려 뽑지 못해 대부분 어리석고 재능 없는 사람으로 구차하게 채우니, 아전들이나 멍하니 쳐다보며 일이 되어 가는 대로 내버려 둔다. 갑작스레 그 책임을 물으면 아무것도 모른 채 대답조차 못하니, 이런 까닭으로 그 자리도 높임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나랏일이 날이 갈수록 어지러워지고 기강도 날로 땅에 떨어지고 있다. 권한이 이 때문에 흩어져 하나로 모이지 못하고, 녹봉이 이 때문에 낭비되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날이 갈수록 쇠퇴한 말세로 빠져드는 것은, 관직을 함부로 늘린 것을 빌미로 삼지 않은 것이 없다.
얼마 전에 논의하던 사람들이 쓸모없는 관원을 걸러 내려 했으나, 걸러 내면 걸러 낼수록 도로 복귀되어 끝내 그 정책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이는 그저 쓸모없는 관원이 있다는 것만 살폈을 뿐, 관청이 너무 많은 것이 정작 큰 병폐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청을 합치기만 하면 그런 쓸모없는 관원은 저절로 줄어들 것이다.
우리나라를 중국에 견주면 한 지방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중국의 호남이나 광동 같은 한 지방에는 녹을 받는 사람이 칠백여 명에 불과한데, 우리나라는 관원이 많아 수천 명에 이르고, 관청의 수도 중국의 다섯 배나 되니, 권한이 흩어지고 녹봉이 낭비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당나라를 경계로 삼고 명나라를 본받는다면, 그런대로 괜찮을 것이다.
(용어) 종친부·의빈부·종부시는 모두 왕실 친족을 관리하던 관청이고, 제용감·상의원·사섬시는 모두 재물과 옷감을 다루던 관청이다. 내자시·내섬시·예빈시·사도시·사재감·사온서는 모두 궁중의 음식·술·물자를 나누어 맡던 관청이며, 전생서·사축서는 모두 제사에 쓸 짐승을 기르던 관청, 내의원·전의감·혜민서는 모두 의약을 다루던 관청이다.
군사를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11일, 양력 추정)
천하에 군대 없는 나라가 있을까? 그런 나라는 없다. 나라에 군대가 없다면 무엇으로 포악한 무리를 막아 내겠는가? 포악한 것을 막을 장비가 없다면 나라가 어찌 자립하며, 임금이 어찌 스스로를 지키며, 백성이 어찌 하루라도 편히 잠자리를 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천하에 군대 없는 나라가 있다. 군대가 없고도 오히려 수십 년이나 오래도록 보존된 예는 고금에 없는데, 우리나라가 바로 그런 나라다. 그렇다면 포악한 것을 막을 장비도 없이 오히려 제후의 왕위를 유지하고 있으니, 여기에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런 비결은 없고, 그저 우연일 뿐이다. 왜 우연이라 하는가? 왜적이 물러간 뒤로 우연히 다시 쳐들어오지 않았고, 북쪽 오랑캐가 우연히 우리를 침범하지 않았으며, 서북의 다른 오랑캐 무리도 우연히 북쪽 변경을 어지럽히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걱정거리가 없는 채로 그저 세월만 보내고 있는 것이다.
군대가 없다는 것도 군대가 아예 없다는 말이 아니라, 군사 수가 적어 싸울 수 없다는 뜻이다. 군사 수가 적다는 것은 군정이 제대로 닦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싸울 수 없다는 것은 자격 있는 장수가 없다는 뜻이다. 참으로 군정을 엄히 하고 장수를 제대로 골라 윗사람이 그를 믿고 전권을 맡긴다면, 훈련받은 군사 십만 명이 남북에서 뛰쳐나와 치고 공격하는 위엄을 떨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해 볼 생각도 없이 계책은 세우지 않고, 난리만 나면 도망칠 궁리부터 하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앞선 왕조인 고려 때는 군정이 가장 엄했다. 조정 관원으로서 정오품 이상, 즉 붉은 비단옷을 입지 못한 사람은 모두 임금을 호위하는 친군에 예속되었고, 재상의 아들도 으레 무관직을 받았으며, 학관에서 공부하던 유생들도 군에 종사토록 했다. 안팎의 정규 군대는 공노비든 사노비든 가리지 않고 모두 군적에 매여 있었다.
장수는 최고 관부의 대신 이하 여러 사람이 통솔했으며, 안팎의 크고 작은 여러 장수에게는 모두 몸소 이끄는 병사가 있었다. 평상시에는 이들의 의식주를 넉넉히 해 주며 훈련시켰고, 사변이 일어나면 장수와 병졸이 서로 손발이 맞아 마치 팔이 손가락을 부리듯 하였으므로, 백만 대군도 하루아침에 채울 수 있었다.
거란 장수 소손녕이 쳐들어왔을 때는 순탄하게 물리쳤고, 거란 왕자 금산과 금시가 쳐들어왔을 때는 궁색한 지경까지 몰아붙였으며, 늑대같이 사나웠던 몽골 장수 살리타와의 싸움에서도, 병력이 많기로 이름났던 모거경·유사·관선생의 침입에서도, 옛 고려는 모두 맞서 싸워 물리칠 수 있었다.
지금 우리 강토는 고려에 비해 더 줄어들지도 않았고, 백성도 더 줄어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겁을 먹고 늘 "군대가 없다"고 두려워하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군대는 조정 관원과 재상의 아들, 학관의 선비들이 예속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종이나 천한 신분의 사람들까지도 모두 군적에서 빠지기를 꾀하고, 병사를 다루는 관리들이 군사에게서 재물을 빼앗아 쓰니 그 골수가 이미 다 빠져 버렸다.
평상시에 넉넉히 먹여 주어도, 난리를 당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게 하면 더러 물러나 달아나며 살길을 찾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하물며 모질게 부려 먹다가 죽을 자리로 몰아넣음에야 어떠하겠는가! 그들이 흩어져 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장수를 고르는 일도 반드시 백성을 잘 다스리는 사람 가운데서 임용해야 한다. 백성을 다스리는 것과 군사를 다스리는 것은 본래 방법이 같지 않다. 하물며 백성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그저 임금 곁의 사람들에게만 잘 보이려는 자들이겠는가. 그런 까닭에 어쩌다 이런 사람이 장수가 되면 아무것도 모르고 손발조차 놀릴 줄 모르며, 적군을 바라보기도 전에 먼저 무너지는 일이 왕왕 다 이래서 벌어졌다.
아, 이런 사람으로 장수를 삼아 이런 군대를 거느리게 했으니, 군대가 없다고 해도 옳은 말이다. 나라가 그런대로 나라 노릇을 하고 있는 것도 역시 우연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폐단을 어떻게 고쳐야 할까? 고려의 제도만 본받아도 군대는 씩씩해지고 장수도 제대로 고를 수 있어 나라가 나라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렇게 하더라도, 장수 된 신하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오래도록 변방에 있으면 남의 헐뜯음을 받아 임금의 의심을 사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군대를 강하게 하고 병졸을 훈련시키며, 부하들을 엄히 단속하고 명령이 분명하며, 위아래가 서로 친숙하여 적국이 두려워할 만한 장수라 할지라도, 한 번 임금의 의심을 살 꼬투리가 생기면 미처 발길을 돌리기도 전에 자신이 무너지고 나라도 따라서 위태로워진다. 이렇게 본다면, 군대를 다스리고 장수를 통솔하여 나라를 스스로 강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임금뿐이다.
(용어) 소손녕은 거란의 장수로 고려 성종 때 침입했다가 서희의 담판으로 물러난 인물이다. 금산·금시는 거란의 왕자로 고려 고종 때 침입했다가 김취려에게 격퇴되었다. 살리타는 몽골의 장수로 고려 고종 때 여러 차례 고려를 침입했다. 붉은 비단옷은 다섯째 품계 이상의 벼슬아치가 입던 관복을 가리킨다.
버려지는 인재를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13일, 양력 추정)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과 하늘이 맡긴 직분을 함께 다스릴 사람은 인재가 아니고서는 되지 않는다.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하는 것은 본래 한 시대에 쓰이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인재를 낼 때, 하늘은 귀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그 품성을 풍부하게 해 주지 않고,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그 품성을 인색하게 주지도 않는다. 그런 까닭에 옛날의 밝은 선철들은 이 이치를 분명히 알아서, 더러는 초야에서도 인재를 구했고, 더러는 병사들 사이에서 뽑아냈으며, 더러는 싸움에 져서 항복한 적장을 발탁하기도 했고, 더러는 도둑 무리 가운데서 고르며, 더러는 창고지기를 등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임용한 사람마다 모두 그 일을 맡기기에 적당했고, 임용된 사람들도 저마다 지닌 재능을 마음껏 펼쳤다. 나라가 복을 받고 다스림이 날로 융성했던 것은 바로 이런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하를 다스리는 큰 나라조차도 혹시 그런 인재를 놓칠까 오히려 걱정하여,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앉으나 누우나 생각하고 밥상머리에서도 탄식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산림과 들판에서 보배 같은 포부를 가슴에 품고도 벼슬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리도 흔하며, 영특하고 준수한 인재가 낮은 벼슬자리에 파묻혀 끝내 그 포부를 시험해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그리도 많은가! 참으로 인재를 다 찾아내기도 어렵고, 찾아 쓰더라도 그 재능을 다하도록 하는 일 역시 어렵다.
우리나라는 땅부터가 좁아서 인재가 드물게 나는 것이 예로부터 걱정거리였다. 그런데 조선에 들어와서는 인재를 등용하는 길이 더욱 좁아져서, 대대로 벼슬한 이름난 집안이 아니면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없었고, 바위굴이나 띠집 같은 데 사는 선비라면 아무리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억울하게 쓰이지 못했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서는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없어, 아무리 덕과 업적이 매우 훌륭한 사람이라도 끝내 판서나 정승 자리에는 오르지 못한다. 하늘이 재능을 부여함은 누구에게나 고른데, 대대로 벼슬한 집안과 과거 급제자로만 등용을 한정하고 있으니, 늘 인재가 모자람을 애태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예부터 지금까지 시대가 멀고 오래며 세상이 넓다고는 하지만, 서얼 출신이라 하여 어진 인재를 내버리고, 어머니가 재혼했다는 이유로 그 재능을 쓰지 않는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으니, 어머니가 신분이 미천하거나 재혼한 경우라면 그 자손은 모두 벼슬길의 차례에 끼지도 못한다. 보잘것없는 나라로서 두 오랑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니, 모든 인재가 나라에 쓰이지 못할까 오히려 걱정해도 나랏일이 제대로 구제될지 예측하기 어려운데, 그런데도 도리어 스스로 그 길을 막아 놓고는 탄식하기를 "인재가 없다, 인재가 없다" 하니, 이는 마치 월나라로 가면서 수레를 북쪽으로 돌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이웃 나라에도 알리지 못할 일이다.
한 사내와 한 아낙네가 원한을 품어도 하늘은 그들을 위해 마음 아파하는 법인데, 하물며 원망에 찬 남정네와 홀어미가 나라 안에 절반이나 되니, 화평한 기운을 이루기도 어려울 것이다.
옛날의 어진 인재는 대부분 미천한 데서 나왔다. 그 시절에 만약 우리나라의 법을 썼더라면, 송나라의 명재상 범중엄은 정승이 되어 이룬 공업이 없었을 것이고, 진관과 반양귀는 곧은 말을 하는 신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마양저와 위청 같은 장수, 왕부 같은 문장가도 끝내 세상에 쓰이지 못했을 것이다.
하늘이 낳아 준 것을 사람이 내버리니, 이는 하늘을 거스르는 짓이다. 하늘을 거스르고서 하늘에 빌어 나라의 명이 길기를 바란 사람은 예로부터 없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그대로 행한다면, 큰 복도 또한 저절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용어) 범중엄은 송나라의 어진 재상으로,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재혼하였으나 후에 송나라 제일의 재상으로 이름을 남겼다. 진관과 반양귀는 모두 송나라의 강직한 신하였다. 사마양저는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병법에 밝아 제나라의 대사마에 오른 인물이고, 위청은 어머니가 재혼하여 성이 바뀐 인물이었으나 한나라의 대장군에 올랐다. 왕부는 벼슬하지 않고 《잠부론》이라는 책을 지어 문장으로 이름을 남긴 후한의 학자다.
녹봉을 후하게 줌을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15일, 양력 추정)
《예기》에 이런 말이 있다. "충심과 믿음으로 대접하고 녹봉을 후하게 주는 것은 선비를 권장하기 위해서다." 이 말이야말로 의미심장하다. 남의 윗사람 된 자가 아랫사람에게 녹봉을 후하게 내려 주지 않는다면, 선비 된 사람들이 무엇으로 스스로를 가다듬어 청렴한 정신을 기르고, 이익 앞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겠는가.
이 때문에 옛날 군자로서 나라에 벼슬하던 사람은 녹봉이 넉넉하여 살림을 채우기에 충분했으니, 봉급만으로도 아내와 자식을 돌보기에 넉넉했다. 그래서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지 않고, 뇌물을 받는 일도 없이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기르는 물품이 저절로 넉넉했다. 여유롭게 한가하고 편안한 틈을 내어 쌓아 둔 포부를 펼 수 있었으니, "공 없이 녹만 먹는다"는 나무람을 면할 수 있었고, 염치가 뚜렷이 세워져 세상의 기풍이 도타워졌다. 옛날의 훌륭한 시대에는 대개 이런 제도를 시행하였다.
비록 그렇다 해도 군자라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고, 제 몸만 이롭게 하려는 자들이 너무도 많다. "임금이 나를 이토록 후하게 대접해 주시니, 내가 임금께 보답할 길은 무엇이 마땅한가"를 생각해야 할 텐데, 정작 검소함으로 스스로를 다잡으라는 옛 훈계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재물이나 쌓아 둔다는 나무람만 여러 차례 터져 나왔다. 제 말채찍 꾸미기는 그만두지 않으면서 정작 제사 그릇은 꾸밈이 없으니, 선비들이 스스로를 대접하는 수준이 이토록 낮고 얕다.
《주역》에 이런 말이 있다. "기른다는 것을 보는 것은 자신이 남을 기르는 모습을 살피는 것이요,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한다는 것은 자기가 길러지는 모습을 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그저 따뜻하고 배부르기만 생각하며 벌떡 일어나 곡식 창고와 재물 자루에만 매달리고, "너의 밝은 지혜는 던져 버리고 나의 탐욕스러운 모습만 살핀다"는 것은 군자에게 바랄 만한 일이 아니다.
옛 제도는 다 상고할 수 없으나, 공자의 제자 원헌이 노나라의 고을 수령이 되었을 때 공자는 그에게 곡식 구백을 주었고, 맹자가 제나라의 경이 되었을 때 그 녹봉은 십만이었다. 제나라와 노나라는 제후의 나라였을 뿐인데도 녹봉을 후하게 주어 염치를 기르게 함이 이와 같았으니, 하·은·주 세 시대의 녹봉이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할 만하다.
한나라의 녹봉도 후했고, 특히 하급 관리들을 가장 우대하였으니 이 또한 훌륭한 일이었다. 송나라도 어진 이를 기르는 데 더욱 마음을 써서, 봉급을 모두에게 충실히 주었고 별도의 지급금도 넉넉히 베풀었다. 하급 관리를 우대하니 청렴한 기풍이 세워졌고, 지방관을 우대하니 지방 벼슬을 하찮게 여기는 걱정이 사라졌으며, 퇴직한 노신을 우대하니 어진 이를 대접하고 원로를 높이는 뜻이 도타웠다.
역대의 제도가 저마다 같지는 않으나, 녹봉을 후하게 주어 선비를 권장했다는 점만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관리들의 녹봉을 깎으면서도 그들의 청렴만을 다그치고 있으니, 천하에 이런 이치는 없다. 신라 때는 일품 벼슬의 녹봉이 일 년에 삼백이었고, 고려는 그 절반이었는데, 이는 대체로 고려가 신라보다 관직을 많이 두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관직이 세 곱절로 늘어나 녹봉을 깎지 않을 수 없었다. 삼분의 이를 깎고 나니 봉급이 턱없이 부족해졌다. 대부나 선비마다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기르는 데 곤궁하여 청렴할 겨를조차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임진왜란 뒤에는 다달이 주던 요를 다시 녹으로 바꾸어 설계하면서 예전의 절반으로 또 줄었고, 됫박 수량마저 줄여 받는 사람이 열흘도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제사를 받드는 규모나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이를 장송하는 데 드는 물품은 평상시보다 줄인 것이 없고, 의복과 말 꾸미기와 먹고 마시는 것은 사치스러워 절제할 줄 모르니, 이는 예전 임금들 시절보다 열 배나 되는 씀씀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힘없는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게 되고, 마지못해 뇌물까지 받게 된다. 이 때문에 예의와 염치가 펴지지 못하고 세상의 기풍은 날로 야박해지는데도, 사대부들은 태평스레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백성들은 윗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뇌물을 바쳐 벼슬을 얻거나 죄를 가볍게 하려는 자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으니, 이는 모두 선비를 권장하는 제도를 시행할 수 없어서 생긴 일이다. 이 또한 가슴 아픈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를 구제할 수 있을까?
쓸데없이 들어가는 관청 비용을 줄이고, 윗사람이 공손하고 검소한 태도로 이끈다면 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용어) 원헌은 공자의 제자로 자가 자사이며, 지조가 높아 가난 속에서도 도를 즐긴 인물이다. "요"는 다달이 주던 봉급을, "녹"은 해마다 주던 봉급을 가리키는 옛 이름이다.
소인을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17일, 양력 추정)
요즈음 나라에는 소인도 없으니, 또한 군자도 없다.
소인이 없다면 나라의 다행이지만, 만약 군자마저 없다면 어찌 나라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는 않다. 군자가 없기 때문에 역시 소인도 없는 것이다. 만약 나라에 군자가 있다면 소인들이 감히 제 자취를 숨기지 못한다.
대저 군자와 소인은 음과 양, 낮과 밤과 같아서, 음이 있으면 반드시 양이 있고 낮이 있으면 반드시 밤이 있듯이, 군자가 있으면 반드시 소인도 있다. 요임금과 순임금 때도 역시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뒷세상에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대개 군자는 바르고 소인은 간사하며, 군자는 옳고 소인은 그르며, 군자는 공정하고 소인은 사사롭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사특함과 바름, 옳음과 그름, 공정함과 사사로움을 가려 살핀다면, 저 소인들이 어찌 감히 제 실정을 숨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요즘 이른바 군자와 소인이라는 것은 서로 큰 차이가 없다. 자기와 뜻을 같이하면 모두 군자로 여기고, 뜻을 달리하면 모두 소인으로 여긴다. 저편이 이쪽과 다르면 배척하여 사특하다 하고, 이쪽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면 치켜세워 바르다고 한다. 옳다는 것은 그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옳음이요, 그르다는 것은 그들이 그르다고 여기는 것이 그름이니, 이는 모두 공정함이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만약 참으로 학식과 행실과 재주와 식견이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대인군자로 하여금 나와서 높은 지위에 있게 하고, 모든 관료를 이끌고 권장하며, 지체 높은 대부들로 하여금 모두 바름을 지키고 공을 받들며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알게 한다면, 한 시대의 음흉한 붕당 무리들도 머지않아 그 낯빛을 고칠 것이다. 어찌 감히 요즘처럼 사분오열하여 함부로 날뛸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음흉한 붕당의 해로움이 소인이 국권을 함부로 휘두르는 것보다 심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라에서 소인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나라에 해를 끼치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은, 권세 잡은 간신이 국정을 홀로 쥔 것도 아닌데 이토록 극에 달했으니, 이는 모두 사사로운 뜻이 크게 행해져서 권한이 한곳에서 나오지 않고, 기강이 이미 무너져 다시는 떨쳐 세울 수 없게 된 까닭이다.
이른바 권세를 쥔 간신이라는 자들도 예전에 있었다. 김안로가 일찍이 농간을 부렸고, 윤원형도 일찍이 전권을 휘둘렀으며, 요즘에는 최영경 또한 전횡하려 하여 저 혼자만 이롭게 하고 뜻을 달리하는 사람을 배척했으니 그 수법은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나라의 기강만큼은 여전했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권한이 한곳에서 나왔기 때문에, 전횡하던 자가 물러가면 곧바로 예전대로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권한이 여러 군데서 나오고, 저 혼자만 이롭게 하며 뜻을 달리하는 사람을 배척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 그러하다. 이런 것을 물리치려 해도 이루 다 쫓아낼 수가 없고, 나라의 기강도 끝내 수습할 수 없게 된다.
아, 어찌해야 소인이 국권을 전횡하게 만들었다가, 그 기세가 다하기를 기다려 공격하여 제거할 수 있을까? 또 어찌해야 대인군자가 나와서 그 바람으로 저 음흉한 붕당 무리를 흩어 놓을 수 있을까? 이 때문에 "지금의 나라에는 소인도 없으니 또한 군자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또 하나 말해 둘 것이 있다. 옛날의 이른바 소인이라는 자들은 그 학문이 자기의 언변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했고, 그 행실이 세상 사람을 속이기에 충분했으며, 그 재주가 사태의 변화에 대응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므로 그가 자리에 있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그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고, 그는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행할 수 있었다. 그들이 군자와 다른 것은 오직 공과 사라는 아주 작은 차이일 뿐이지만, 그들이 끼치는 화란은 오히려 참혹했다. 하물며 재주도 행실도 학식도 없으면서 오직 좋은 벼슬만 탐내고 요직에만 기를 쓰며 구차한 태도로 조정에 가득 찬 자들이라면, 그 화가 마침내 어느 지경에 이를 것인가. 그러므로 "음흉한 붕당의 해로움이 소인이 조정을 전횡하는 것보다 심함이 분명하다"고 말한 것이다.
(용어) 김안로는 중종 때 권력을 남용하며 정적을 가리지 않고 축출하고 살해한 인물로, 뒤에 유배 가서 사약을 받았다. 윤원형은 명종 때 이십 년 동안 집권하며 온갖 횡포를 부린 인물로, 역시 유배지에서 죽었다. 최영경은 조식의 제자로, 정여립 모반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었으나 뒤에 누명을 벗었다.
호민을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19일, 양력 추정)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백성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나 표범보다도 훨씬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늘 백성을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인가?
대저 이루어진 것을 함께 즐거워하기만 하면서 늘 눈앞의 일에 얽매이고, 그저 법이나 지키며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을 항민(늘 그러한 백성)이라 한다. 항민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모질게 수탈당하여 살이 벗겨지고 뼈가 부서지도록 시달리며, 집안의 수입과 땅에서 나는 것을 죄다 바치면서도 끝없는 요구에 시달리느라 시름하고 탄식하며 그 윗사람을 원망하는 사람들을 원민(원망하는 백성)이라 한다. 원민도 결코 두려워할 것이 없다. 자취를 저잣거리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마음을 품은 채 천지간을 흘겨보다가, 혹시라도 시대에 변고가 생기면 자기 뜻을 이루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호민(호걸다운 백성)이라 한다. 대저 호민이야말로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
호민은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이 벌어질 형세를 노리다가, 팔을 휘두르며 밭두렁 위에서 한 번 소리쳐 외치면, 저 원민이라는 자들이 그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도 함께 외쳐 대기 마련이다. 저 항민이라는 자들도 역시 살길을 찾느라 호미와 고무래와 창자루를 들고 따라와서, 무도한 자들을 쳐 죽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진나라가 멸망한 것은 진승과 오광 때문이었고, 한나라가 어지러워진 것도 역시 황건적이 그 원인이었다. 당나라가 쇠퇴하자 왕선지와 황소가 그 틈을 타고 일어섰는데, 마침내 이 때문에 백성과 나라가 함께 멸망하고 말았다. 이는 모두 백성을 괴롭혀 제 배만 채우던 자들의 죄과이며, 호민들이 그 틈을 편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저 하늘이 백성을 다스릴 사람(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기르게 하기 위함이지, 한 사람이 위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 아무리 채워도 차지 않는 구렁 같은 욕심을 채우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저 진나라와 한나라 이래로 벌어진 화란은 당연한 결과이지, 불행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땅이 좁고 험준하여 사람도 적고, 백성은 또 나약하고 조심스러워 남달리 기개 있거나 의협심 강한 이가 드물다. 그런 까닭에 평상시에도 큰 인물이나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가 나와 세상에 쓰이는 일이 없었지만, 난리를 당해서도 호민이나 사나운 병졸이 앞장서서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었던 일 역시 없었으니, 그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비록 그렇다 해도, 지금 이 시대는 고려 때와는 같지 않다. 고려 시대에는 백성에게 거두는 세금에 정해진 한도가 있었고, 산림과 하천과 못에서 나는 이익도 백성들과 함께 나누어 가졌다. 장사는 자유로이 통하도록 했고, 장인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게 했다. 또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정할 수 있게 하였으므로 나라에는 여분의 저축이 있었다. 그래서 갑작스레 큰 전란이나 상사가 있어도 세금을 더 늘리지 않았다. 고려는 말기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나라의 세 가지 궁핍을 걱정할 정도였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변변찮은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귀신을 섬기고 윗사람을 받드는 격식만은 중국과 대등하게 갖추려 한다. 백성이 내는 세금이 다섯 몫이라면 나라에 돌아오는 이익은 겨우 한 몫이고, 나머지는 간사한 사인들에게 어지러이 흩어져 버린다. 게다가 고을 관청에는 남은 저축이 없어 일만 생기면 일 년에 두 번씩 세금을 부과하는 일도 있고, 수령들은 이를 핑계 삼아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것이 또한 극에 달하지 않은 바가 없다.
그런 까닭에 백성의 시름과 원망은 고려 말엽보다 훨씬 심하다.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태평스레 두려워할 줄을 모르니, 이는 우리나라에 호민이 없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견훤이나 궁예 같은 자가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시름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몰려가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으며, 저 중국 기주·양주 지방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큰 변란이 없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발돋움하고 서서 기다려도 좋을 만큼 가까운 일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두려워해야 할 형세를 명확히 알아서 지금까지의 잘못된 자취를 고친다면, 그런대로 나라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용어) 진승과 오광은 진나라 말기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켜 진나라 멸망의 발단이 된 인물들이다. 왕선지와 황소는 당나라 말기에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를 크게 뒤흔든 인물들이다. 세 가지 궁핍이란 흉년이 들어 제사를 거르고, 서당에 학생이 오지 않고, 뜰에 개마저 없는 가난을 이르는 옛말이다.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엽 각각 후백제와 후고구려(태봉)를 세운 인물들이다. 기주·양주의 변란은 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을 가리킨다.
정도전과 권근을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21일, 양력 추정)
무릇 높은 벼슬아치로 영화와 이권을 누리던 사람이 나라가 뒤바뀌는 혁명을 만났을 때, 의리를 위해 죽거나 절개를 지키지 않는다면 반드시 목숨을 도모하여 원수를 섬기게 된다.
그런데 목숨을 도모하여 원수를 섬기는 자들에게도 두 갈래 길이 있다. 형세가 돌아가는 것을 엿보아 제 임금과 나라를 팔아넘기며 그런 계책을 부추겨 부귀를 도모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겁이 많고 나약하여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오직 욕되게 살아남기만을 일삼으며, 부끄러움을 참고 원수를 잊은 채 구차하게 다른 성씨를 섬기는 자도 있다. 그 죄악에는 비록 무겁고 가벼움이 있으나, 절의를 잃었다는 점에서는 같다.
겁이 많아 욕된 목숨을 탐내고 수치를 참으며 남을 섬기는 자들은, 그 마음이 애초에 제 한 몸을 아끼는 데서 나온 것이지 제 임금을 팔아넘기는 짓까지는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하늘은 더러 그들이 여생을 마치도록 용서해 주었으니, 위나라의 정충과 하증 같은 이들이 그러하다. 이 두 사람은 결국 제집에서 늙어 죽었다.
형세를 엿보아 나라를 팔아넘기기까지 부추긴 자들은 그 마음이 애초부터 부귀에 있었으니, 오직 제 한 몸만을 이롭게 하려 했다. 그래서 하늘은 문득 혹독한 재앙을 내려 그 응보를 갚아 주었으니, 남조 송나라의 사회·부량·서선지 같은 이들이 그러하다. 이 세 사람은 마침내 죽임을 당하고 그 일족까지 목이 베였다. 이런 일은 예나 지금이나 이미 그러했던 자취요 필연의 이치이니,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정도전과 권근은 둘 다 고려 임금을 가까이 모시던 신하이자 높은 벼슬아치였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도 두 사람 모두 훌륭한 벼슬을 얻었는데, 권근은 제 명대로 살다가 죽었고 정도전은 죽임을 당하고 일족까지 멸망당했으니, 나는 여기서 더욱 확신을 얻게 된다.
정도전은 일찍부터 우리 태조대왕의 인정을 받아, 외적을 정벌하고 토벌하던 시절에 막부의 계책을 세우는 일에 참여하였다. 태조대왕은 임금 자리에 오르려는 마음이 없었지만, 정도전이 먼저 그를 추대하려는 꾀를 냈다. 비록 하늘의 명과 백성의 마음이 저절로 합해져서 온당한 형편으로 왕위를 이어받은 것이었으나, 고려의 입장에서 정도전은 충신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참으로 제 몸을 이롭게 하는 데 있었으니, 그 때문에 끝내 죽임을 면하지 못했다.
권근은 이색의 일에 연루되어 지방으로 유배되었는데, 강헌왕(태조)의 부름을 받고 임금이 임시로 머물던 곳으로 나아가 마침내 등용되어 벼슬이 계속 높아졌다. 권근의 입장에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계속 물러나기를 청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였으나, 겁을 먹고 제 목숨을 아낀 나머지 마지못해 몸을 굽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이름과 지위가 높아졌고 제 명대로 살다가 죽었다. 이는 남의 신하 된 사람이 마땅히 경계로 삼을 일이다.
고려가 망할 때를 당하여, 정도전이 만약 충절을 위해 죽었고 권근이 벼슬하지 않고 돌아가기를 애걸했더라면, 사람들이 정몽주와 길재를 우러르는 것과 무엇이 달랐겠는가. 그런 계책을 내지 못하고 나라를 팔아넘긴 죄에 빠지거나, 더러는 비겁하게 목숨을 부지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으니, 사대부가 죽고 살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처세에 있어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지를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정도전이 태종이 왕위에 오르던 날 자신이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더라면, 결코 몇 년의 목숨을 아끼려고 제 명성을 훼손하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부귀만을 생각하다가 그 지혜가 어두워져, 자신의 공로만 믿고 어린 왕자를 세자로 세우자는 계책까지 임금에게 권하여 제 세력을 굳히려 하였다. 그것은 자신을 편안하게 하려던 것이었으나 결국 자신을 위태롭게 만든 셈이었다.
나는 이 두 사람 가운데 정도전에게 더욱 죄가 있다고 여긴다.
(용어) 정충과 하증은 중국 위나라에서 진나라로 넘어갈 때 살아남아 제 명대로 죽은 신하들이다. 사회·부량·서선지는 남조 송나라의 건국공신이었으나 뒤에 반역죄로 죽임을 당한 인물들이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으로 새 왕조의 기틀을 세웠으나,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 무렵 죽임을 당했다. 권근은 정도전과 함께 고려 말 조선 초를 살았던 학자이자 문신으로, 이색의 문인이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가 조선에서 다시 등용되어 천수를 누렸다. 이색은 고려 말의 대표적인 학자로, 정몽주·길재와 더불어 흔히 고려 말 세 은사(삼은)로 꼽힌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던 날"은 이방원이 실권을 잡아 가던 과정, 곧 정도전 등이 제거된 왕자의 난 무렵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옮겼다.
김종직을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23일, 양력 추정)
천하에 이익과 봉록이나 취하고 제 명망을 훔치는 자가 있는데, 세상에서 그를 군자라 한다면 사람들이 그 말을 믿겠는가? 나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겠다.
어찌하여 믿지 못하는가? 무언가를 제 것으로 만들거나 훔치는 짓이라면, 비록 그것이 도덕과 인의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거짓됨을 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익과 명망임에랴. 이미 이익과 봉록을 취하고 명망을 훔쳐서 한 세상을 속이고 제 영화와 녹봉을 누린다면, 참으로 제 지혜를 다하고 온 마음을 기울여 제 직분에 마땅히 해야 할 일에 힘써야만 그 허물을 조금이라도 메울 수 있다. 그런데 도리어 "영화와 녹봉은 내 본뜻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능청스럽게 한갓 붉은 수레를 꾸미고 붉은 인끈을 매단 채 일생을 마친다면, 그 죄악은 죽어 마땅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김종직은 근세에 이른바 대학자로 꼽히는 사람이다. 젊은 시절에는 벼슬하려 하지 않다가, 세조가 과거를 보라고 다그치자 마지못해 과거에 올랐고,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자리를 거치며 벼슬이 높아졌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마지못해 벼슬한다고 둘러댔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천수를 다 누리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히려 벼슬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의 문인이 시정에 대한 건의를 올리지 않는다고 간언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벼슬하는 것은 내 본뜻이 아니다. 그러니 건의하고 싶지 않다."
김종직 같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익과 봉록을 취하고 명망을 훔치면서도 능청스럽게 한갓 수레를 붉게 하고 인끈을 붉게 했다고 말할 만한 사람이다.
정란이 일어난 날, 김종직은 박팽년이나 성삼문 무리처럼 녹을 먹던 신하도 아니었고, 김시습처럼 평소에 특별한 은택을 입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시골의 보잘것없는 한 선비였으니 옛 임금(단종)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도 없었다. 그가 벼슬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부터가 본래 위선이었다. 그러나 비록 위선이었더라도 이미 그런 뜻을 세웠다면, 임금이 아무리 다그치더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나아가지 않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화를 두려워하여 억지로 나온 것처럼 행세하였다. 이미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는 붓을 귀에 꽂고 임금의 말을 받아 적었으며, 사초를 끼고 고운 털자리 위에 엎드리기도 하였다. 또 고을을 맡아서는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니, 그가 이익과 봉록을 취한 것이 도를 넘었다. 게다가 명망까지 훔치고 싶어 남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에게는 어버이가 계신다. 그러나 끝내는 백이·숙제가 지킨 뜻을 지키리라." 그러나 이미 어머니의 상복을 벗고 나서도 응교라는 벼슬을 받았고, 십 년 사이에 형조판서 자리까지 뛰어올랐다. 그쯤이면 그만 물러날 만도 한데 오히려 더 탐내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자리만 지키고 녹만 축내며 마땅히 해야 할 직분조차 하지 않다가, 문인이 그 점을 지적하면 얼버무리는 말로 둘러댔다. 이것이 과연 군자라 할 만한가? 그 죄는 마땅히 죽임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지금까지 이 사람을 칭찬하고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내가 가만히 그 사람됨을 살펴보니, 집안에서 물려받은 학문을 주워 모으고 문장 공부를 하여 스스로 출세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교활하여 제 명망을 높이려고 한 시대 사람들을 들썩이게 하고, 임금의 귀를 흐려 이익과 봉록을 훔치는 밑천으로 삼았다. 이미 그런 꾀를 부렸지만 스스로 제 재능을 헤아려 보니 백성을 편안케 하고 구제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런 까닭에 넉넉히 할 수 있는 일조차 하기 싫은 것처럼 꾸며 제 졸렬함을 감추는 수단으로 삼았으니, 그 또한 교묘한 짓이었다.
그가 〈조의제문〉을 짓고 술 이야기를 노래한 시를 지은 것은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이미 벼슬을 했다면 그분(세조)이 바로 자신의 임금인데도, 온 힘을 다해 그를 넌지시 꾸짖었으니 그 죄는 더욱 무겁다. 죽은 뒤에 화를 입은 것은 불행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그 간사하고 교활함에 노하여 사람의 손을 빌려 분명하게 벌을 내린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세상 사람들이 그의 실제 자취는 살피지 않고 헛되이 그 명성만 떠받들어 지금까지도 그를 대학자로 치켜세우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그런 까닭에 특별히 이렇게 밝혀 기록해 둔다.
(용어) 정란은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이 김종서·황보인 등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할 발판을 마련한 사건을 가리킨다. 박팽년과 성삼문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임을 당한 사육신이고,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하여 평생 벼슬하지 않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백이·숙제가 지킨 뜻"이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절개를 뜻하는 말로, 주나라 무왕에게 항복하지 않고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은나라 유신 백이와 숙제의 고사에서 나왔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일을 옛 중국 초나라 회왕(의제)이 항우에게 죽임당한 고사에 빗대어 은근히 비판한 글로, 훗날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빌미가 되었다.
남효온을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25일, 양력 추정)
김종직이 보잘것없는 선비로서 벼슬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 그 속뜻은 거짓이었다면, 남효온이 벼슬하지 않은 것 또한 의롭지 못한 일일까? 아니다. 남효온이 벼슬하지 않은 것은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 것이었다.
성종 임금 때를 맞아 나라 안이 한창 태평하니, 위에 있는 임금이 아랫사람들과 함께 지극한 다스림을 이루려 하여, 남다른 포부를 지닌 사람이라면 까치가 뛰듯 일어서던 시절이었다. 남효온은 먼저 명분을 바로잡으려고 상소를 올려 논의를 폈다. 그의 뜻은 대체로 우리 임금이 밝고 뛰어나니 반드시 자기 말을 받아들이리라 믿는 데 있었다. 그런 까닭에 쌓아 온 포부를 다하여 말을 올렸다. 나라의 근본이 될 원칙을 정하여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를 바라며, 다스림을 바라던 임금의 뜻에 부응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상소가 올라갔으나 임금은 감히 시행하지 못했다. 남효온은 이미 자신이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선비가 임금에게 쓰이기를 구하는 것은 그 도를 행하려 함이다. 그러나 도를 행하지 못한 채 헛되이 이익만 좇는다면 선비가 아니다"라고 하며, 마침내 뜻을 굳혀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과거 공부를 하라고 말씀하시면 사마시(진사시)에는 합격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그러고는 평생토록 녹봉을 입에 담지 않아 처음에 했던 말을 그대로 지켰다. 이것은 뜻있는 선비나 지조 굳은 사람이 강개한 마음으로 부귀에 마음 두지 않을 때나 하는 일이다. 어찌 이익이나 취하고 명망이나 훔치던 자들과 나란히 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해도 나는 남효온의 뜻을 애석하게 여긴다. 그의 지혜가 밝지 못했고 그의 도량이 좁았기 때문이다. 그 상소를 올리던 해에 남효온은 겨우 스무 살이었다. 그가 닦아 온 바가 과연 다 무르익었는지도 알 수 없거니와, 그저 가슴속에 격앙된 것만으로 기어이 임금이 시행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때가 될 만한지 아닌지도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임금과 더불어 큰일을 이루겠다고만 알았지, 자기가 한 말이 그렇게 갑작스레는 다 시행되기 어려우리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교분이 얕은 사람 앞에서 지나치게 말한 데다, 말이 이미 날카로웠고 책망도 너무 길었다. 결국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세상에서 저절로 밀려나고 말았으니, 그 실언한 바가 심하였다. 나이가 젊고 도량이 좁은 사람은 예전에도 이미 이러했으니 탄식을 이길 수 없다.
그렇지 않고, 만약 남효온이 조용히 스스로를 닦으며 때를 기다려 도로써 벼슬하고, 신하와 임금이 이미 도가 같아 서로 친해지고 믿게 되기를 헤아리면서 세월을 보냈어야 했다. 그리 심각하지 않은 일이라면 시험 삼아 먼저 그것부터 없애 나가면서, 정희왕후(세조의 왕비)가 세상을 떠나고 세조 때의 옛 신하들이 모두 죽기를 기다려서야 비로소 그런 논의를 꺼냈더라면, 성종도 그 말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온 나라와 더불어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니, 어찌 신하와 임금이 함께 영광스러워 역사책에 빛나게 기록되지 않았겠는가.
계책이 이렇게 나오지 못하고, 그저 빨리 이루려고만 하다가 끝내 실언했다는 허물에 빠져서, 곤궁하게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이것이 한나라의 가의가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다가 스스로 죽어 간 것과 무엇이 다르랴. 슬프도다.
(용어) 성종은 세조의 손자로, 학문을 숭상하고 인재를 널리 등용한 조선의 임금이다. 정희왕후는 세조의 왕비이며, 남효온이 명분을 바로잡자고 올린 상소는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능묘를 복원하자는 내용이었다고 전해진다. 가의는 한나라의 학자이자 문장가로, 재능이 뛰어났으나 주변의 시기와 모함에 걸려 뜻을 펴지 못하고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이장곤을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27일, 양력 추정)
내가 기묘당적이라는 것을 보았는데, 거기에 넣어야 할 사람과 넣지 말아야 할 사람을 가려 놓은 데는 참으로 따져 볼 만한 점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것은 이장곤조차 그 명단에 들어 있다는 것이니, 자못 이해할 수가 없다.
조선의 사화는 처음 무오년(1498년)에 격렬하였고, 다음 기묘년(1519년)에 심했으며, 마지막 을사년(1545년)에 가장 극심하였다. 그런데 이 사화들은 모두 역모의 변고를 고발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고발하고 나서 도리어 후회한 사람들도 있었으니, 무오사화 때의 노사신, 을사사화 때의 허자, 기묘사화 때의 이장곤이 그들이다. 이 세 사람은 비록 소인배들에게 이용당했으나 자신들의 허물을 뉘우치고 깨달았다면, 군자들도 오히려 이들을 용서해 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들을 여러 어진 이들의 반열에 함께 넣는다면 너무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유자광이 노사신을 움직일 때는 세조의 은택을 내세우면서 〈조의제문〉을 거론했다고 하니, 노사신이 그를 따른 것은 혹 깊이 생각하지 못한 데서 나온 일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가 그토록 지나치게 되리라고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가혹한 형벌을 주지 말자고 힘써 청하기까지 했으니, 그가 한 일은 상황에 어두워 경솔하게 처신한 허물일 뿐이다.
윤임을 둘러싼 모략에 있어서도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명종이 어린 나이였던 때를 당하여 인심마저 흉흉하던 참이었으니, 세 사람(윤임·유숙·유관)을 잠시 죄주자고 말한 것은 참으로 노여움을 가라앉히고 화를 늦추려던 계책이었다. 허자가 이기와 정순붕에게 속임을 당한 것도 지나치게 걱정하다가 운수에 맡겨 버린 탓이었다. 이 두 사람의 잘못에는 과연 용서할 만한 구석이 없지 않을까?
기묘사화의 일로 말하자면, 소인들이 군자들을 미워하여 모략한 것이 너무도 참혹했으니,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있었다. 이장곤은 한 시대의 이름난 재상으로서, 처음에는 여러 어진 이들과 함께 일하다가 도리어 간사한 무리의 계획에 마음을 합쳐 함께 신무문(북문)으로 나아갔다. 군자들이 극형에 빠지리라는 것을 그가 헤아리지 못한 것도 아니었건만, 차마 그런 짓을 하였다. 그의 죄악은 남곤·심정과 다를 바 없는데도, 끝내는 거짓으로 피해자들을 구제한다고 하여 제 행적을 감추려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말할 수 없이 지나친 짓이었다. 그가 흉악한 무리에게 배척당했던 것도, 바로 남곤과 심정이 이장곤을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들이 이장곤을 의심하지 않고 배격하지 않았더라면, 그 역시 소인배들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부귀를 지키는 데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기묘당적을 만든 사람은 이장곤이 임금 앞에서 올린 말 한마디에 현혹되어, 그가 신무문으로 함께 들어갔던 죄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가 흉악한 무리에게 배척당했던 자취만 기록해 놓고서, 흉악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그를 의심했던 덕분에 이장곤이 지금까지 선비다운 명망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였다.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이장곤은 본래 학문과 덕행이 없었고, 그저 유능한 신하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의 한평생을 따져 보면 물러나고 나아가는 데 잔꾀나 부리던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부터 알아보기 어려운 사람이 아니었으나, 기묘 명현들이 지나치게 그를 추어올리다가 끝내 배신당하는 화를 입었으니, 오히려 누구를 탓하겠는가.
교동에 있던 임금(연산군)이 이장곤을 죽이려 했었다. 그가 비록 무도했으나 우리에게는 그래도 임금이었건만, 이장곤은 임금의 명을 피해 달아났으니 이는 임금을 거역한 짓이다. 저 이극균과 성준 같은 이들은 대신으로서 나란히 목이 잘려 죽었다. 그들이라고 어찌 몇 해쯤 구차하게 살아남아 임금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릴 줄 몰랐겠는가. 그런데도 서로 이끌고 죽음의 길로 나아가며, 감히 도망칠 꾀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참으로 임금과 신하 사이의 분수가 이미 정해졌으니, 의리상 도망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애써 운명인 듯 편안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저 두 분의 지혜가 어찌 이장곤만 못해서 그리했겠는가?
대개 그 당시 사람들은 홍수나 화재처럼 연산군을 싫어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장곤이 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는, 마침내 그가 임금을 거역한 것이 큰 죄였음을 깨닫지 못했다. 예전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기묘년의 여러 어진 이들이 그의 허물을 살피지 못한 것인가? 이렇게 되면 마땅히 그 화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의 참된 자취는 가리지 않고 그저 그 명망만을 취하는 일이 매우 많다. 그러므로 내가 부득이 이렇게 가려서 밝히는 것이다.
(용어) 기묘당적은 기묘사화에 억울하게 연루된 여러 어진 이들을 기록한 문서다. 노사신은 성종 때의 영의정으로 무오사화를 일으켰으나 뒤에 뉘우치고 많은 선비를 구제한 공이 있었다. 허자는 을사사화를 일으킨 소윤 일파에 가담했다가 뒤에 대윤 일파를 편들었다는 죄로 탄핵받아 유배지에서 죽었다. 유자광은 무오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윤임은 을사사화 때 화를 입은 대윤의 우두머리였다. 이기와 정순붕은 소윤 편에 서서 을사사화를 일으킨 인물들이다. 신무문(북문)은 궁성의 북쪽 문으로, 기묘사화 때 홍경주 등이 이 문을 통해 밤에 임금에게 변고를 고했다 하여 "북문의 화"라 불린다. 교동은 강화도에 딸린 섬으로,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되었던 곳이다. 이극균과 성준은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으려다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한 대신들이다.
성소부부고 제12권
9. 22:21
출처: 성소부부고 제12권, 문부 9, 설·변·해·잡문
배경: 제12권부터는 갈래가 다시 바뀌어 "설", "변", "해", "잡문"이라는 네 가지 글이 실려 있다. "설"은 어떤 이치나 세태를 논한 글이고, "변"은 세상에 떠도는 오해나 잘못된 소문을 조목조목 따져 바로잡는 글이며, "해"는 궁금증에 답하듯 이치를 풀어내는 글이고, "잡문"은 이 세 갈래에 딱 들어맞지 않는 여러 성격의 글을 함께 모아 놓은 것이다. 이 권에는 글쓰기와 시에 대한 허균 자신의 문학관, 백 살 넘도록 건강했던 노인에게서 얻은 깨달음, 전쟁을 피해 어디로 가야 할지를 둘러싼 논쟁, 의병장 곽재우의 처신을 둘러싼 세간의 오해, 꿈의 이치를 둘러싼 논쟁,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스스로 풀어낸 글, 벗들과의 사귐을 변호하는 글, 고을 서낭당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개의 몸을 빌려 참회하는 짐승의 이야기까지, 허균의 인생관과 문학관, 그리고 특유의 풍자와 자부심이 고루 드러나는 다채로운 글들이 실려 있다.
설 — 세상 이치를 논한 글 세 편
글쓰기에 대하여 (서기 1610년 11월 7일, 양력 추정)
손님이 허자에게 물었다.
"요즘 세상에서 옛 문장에 능하다는 사람들은 다들 그대를 첫손에 꼽는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대의 글은 넓고 커서 끝이 없어 보이기는 해도, 실은 그저 평소에 쓰는 말을 가져다 쓴 것이어서 문장이 매끄럽고 글자도 순탄하다. 그것을 읽으면 마치 입을 벌려 목구멍 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서,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걸리는 데가 전혀 없다. 옛 문장을 전문으로 공부한 사람의 글이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내가 대답했다.
"바로 이런 것이 옛 문장이다. 그대는 순임금과 우임금 시절의 기록과 은나라의 가르침, 주나라의 여러 글들을 보라. 모두 글로서는 더 이를 데 없는 것들이지만, 거기에 어디 문장에 갈고리를 걸고 가시를 붙이듯 어려운 말로 짐짓 꾸며 놓은 곳이 있던가? 공자께서도 '글이란 뜻을 전달하면 그만이다'라고 하셨다. 옛날에는 글로써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뜻을 통하고 글로써 도리를 실어 후세에 전하였기 때문에, 뜻이 명백하고 발라서 듣는 사람이 그 가리키는 바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글의 쓸모다.
하나라·은나라·주나라 삼대의 여섯 경전과 성인의 글, 그리고 황제와 노자에서 비롯된 도가의 책이며 여러 사상가들의 말도 모두 저마다의 도리를 논하였기 때문에 그 글이 알기 쉬웠고 저절로 예스럽고 우아하였다. 그런데 후세로 내려오면서 글과 도리가 서로 다른 길로 갈라져, 비로소 남의 문장에서 이 구절 저 구절을 따다 붙이고 어렵고 교묘한 말로 문장을 꾸미는 일이 생겨났다. 이것은 글의 재앙이지, 글의 극치가 아니다. 내가 비록 둔한 사람이지만 그런 식으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뜻을 전달하는 것을 첫째로 삼아 쉽게 글을 지을 뿐이다."
손님이 다시 말했다.
"그렇지 않다. 그대는 좌구명, 장자, 사마천, 반고, 그리고 근래의 한유, 유종원, 구양수, 소식 같은 이들의 글을 보지 않았는가? 그들의 글이 그저 일상의 말만 가져다 쓴 것이던가? 게다가 그대의 글은 옛것을 본받지도 않고 거침없이 흘러넘치는 것만 일삼으니, 스스로를 너무 대단하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내가 말했다.
"그분들의 글 또한 일상의 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내가 보기에는 간결한 듯도 하고 웅장한 듯도 하며, 깊은 듯도 하고 거침없는 듯도 하고 단단하고 특이한 듯도 하지만, 결국은 그 시대에 흔히 쓰던 말을 가져다가 솜씨 있게 다듬어 격을 높인 것이다. 정말이지 무쇠를 달구어 황금을 만들었다고 할 만하다. 뒷사람이 오늘날의 글을 볼 때, 오늘 우리가 그 옛 몇 분의 글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게다가 내 글이 거침없이 흘러넘치는 것은 참으로 웅장하게 짓고 싶어서 그런 것이고, 옛것을 본받지 않는 것 역시 나름대로 우뚝 서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 여기에 무슨 자만이 있겠는가? 그대는 그 몇 분을 자세히 살펴본 적이 있는가? 좌구명은 스스로 좌구명이고, 장자는 스스로 장자이며, 사마천과 반고는 스스로 사마천과 반고이고, 한유·유종원·구양수·소식 역시 저마다 한유·유종원·구양수·소식이어서, 서로 흉내 내지 않고 각자 하나의 일가를 이루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배우는 것이지, 지붕 밑에 또 지붕을 얹듯 남의 글을 그대로 따라 하여 표절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것은 부끄러워한다."
손님이 말했다.
"그대의 글이 이렇게 쉽고 유창한데, 그렇다면 이른바 '옛것을 본받는다'는 것은 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내가 대답했다.
"그것은 마땅히 한 편 전체를 짜는 법, 한 단락을 짜는 법, 그리고 글자를 고르는 법에서 찾아야 한다. 한 편의 글에는 하나의 뜻으로 곧장 밀고 내려가는 것도 있고, 서로 걸어 이어져 여닫히는 것도 있으며, 마디마디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냉정한 한마디로 끝맺는 것도 있고, 자세하고 번잡하면서도 나름의 법도가 있는 것도 있다. 한 단락에는 조리가 정연하여 흐트러지지 않는 것도 있고, 뒤섞여 있으면서도 잡스럽지 않은 것도 있으며, 끊어진 듯하면서도 앞뒤가 이어지는 것도 있고, 아주 지루하게 늘어지는 것도 있고, 아주 짧게 끝나는 것도 있고, 할 말을 다 하지 않고 여운을 남기는 것도 있다. 글자를 고르는 데에는 울림을 주는 자리, 방향을 돌리는 자리, 숨죽이는 자리, 거두어들이는 자리, 겹쳐 쓰되 어지럽지 않은 자리, 강하게 나가되 억지스럽지 않은 자리, 끌어당기되 힘을 남용하지 않는 자리, 열고 닫는 자리, 소리쳐 부르는 자리가 있다. 글자가 또렷하지 못하면 구절이 고상해질 수 없고, 단락이 안정되지 못하면 뜻이 통하지 않으니, 이 두 가지가 갖추어져야 비로소 한 편의 글이 이루어진다. 내 글은 다만 이 이치를 깨달아 쓴 것일 뿐이고, 옛 문장 또한 바로 이런 이치를 따라 지어진 것이다. 요즘 사람들 가운데 글을 안다고 하는 이들도 이 이치를 제대로 엿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손님이 말했다.
"훌륭하다. 내가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용어) 좌구명은 공자와 같은 시대 노나라의 학자로 역사서 《춘추좌씨전》을 지었다고 전해지며, 장자는 전국시대의 사상가, 사마천과 반고는 각각 《사기》와 《한서》라는 역사책을 지은 한나라 때의 역사가다. 한유·유종원은 당나라, 구양수·소식은 송나라의 이름난 문장가들이다. 순임금·우임금 시절의 기록과 은나라의 가르침, 주나라의 글이라 한 것은 모두 유교 경전인 《서경》에 실린 오래된 글들을 가리키는데, 요임금·순임금·우임금의 정치를 적은 글, 은나라 임금이 신하를 가르친 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며 병사들에게 고한 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임 노인의 장수 비결 (서기 1603년 11월 2일, 양력 추정)
강릉부 태화현에 임세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백열세 살이 되었는데도 얼굴이 쉰 살 남짓 되어 보였고 보고 듣는 것도 쇠하지 않았다. 계묘년(1603년)에 내가 그를 만났는데,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습이 젊은이와 다름없었다. 살아온 내력을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젊었을 때 갑사(궁궐과 도성을 지키던 군인)로 있다가, 명나라 가정 연간의 신해년(1551년)에 나이가 차서 군적에서 빠지고는 이곳에 살게 되었소."
내가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무슨 특별한 방술이라도 지니고 계신 겁니까? 어찌 이토록 건강하십니까?"
노인이 답했다. "시골에 묻혀 사는 사람이 무슨 수로 방술을 지녔겠는가."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럼 무슨 약이라도 드십니까?"
"먹은 적이 없소."
나는 이 대답이 이상해서 다시 물었다. "세상에 정말로 몸을 닦지 않고도 이렇게 오래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노인이 대답했다.
"내가 어릴 때는 병치레가 많아 일찍부터 몸이 허약해서, 어쩌다 배불리 먹기라도 하면 반드시 배 속이 더부룩했소. 그래서 날마다 묵은 쌀 다섯 홉 정도만 먹고, 기름진 고기나 날것, 찬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소. 그렇게 십여 년을 지내니 병이 차츰 나아졌지요. 마흔 살에 아내를 잃었는데, 그때는 두 아들이 이미 장성해서 나를 봉양하기에 충분했으므로 첩을 두지 않고, 논밭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어 번갈아 가며 나를 먹여 살리게 했소. 겨울에는 두꺼운 갖옷, 여름에는 시원한 홑옷을 형제가 돌아가며 마련해 주게 하고, 바람이 들지 않는 으슥한 방을 골라 지냈소. 두 아들이 나를 잘 봉양해서 화낼 일도 없고 살림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으니, 그저 조용히 앉아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면서 지낸 지가 어느덧 육십 년이 넘었소.
집이 산골짜기에 있어서 날마다 삽주뿌리와 황정이라는 약초 뿌리를 캐 먹었소. 이런 세월이 오래되니 눈이 점점 밝아지고 귀도 점점 잘 들리고, 빠졌던 이가 다시 나고 다리 힘도 점점 튼튼해졌소. 두 아들이 죽은 뒤로도 손자가 다섯이나 있어서 그 봉양이 끊이지 않았으니, 그 덕에 나는 내 몸의 기운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을 뿐이오. 내게 무슨 특별한 방술이 있겠소?"
내가 말했다. "제가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서야 몸을 다스리는 참된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선이 되는 사람은 반드시 정과 기와 신, 이 세 가지를 온전히 지키는 법입니다. 어르신께서 다시 장가들지 않으신 것은 정을 지킨 것이고, 음식을 가려 먹고 배부르게 먹지 않으신 것은 기를 지킨 것이며, 화를 내거나 살림 걱정을 하지 않으신 것은 신을 지킨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이미 다 갖추셨으니 이토록 오래 사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더구나 타고난 기운을 함부로 흔들지 않고 그저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 것이야말로 마음을 고요히 안정시키는 첫걸음이며, 삽주뿌리와 황정 역시 약 중에서도 으뜸가는 것들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이것을 몸소 실천하시고 또 그것을 드셨으니,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르실 날이 어찌 멀겠습니까?
세상에서 신비로운 영약을 다려 먹고 오래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하늘과 땅을 화로와 솥에 비유하고, 물과 불을 부부에 비유하고, 용과 호랑이며 갖가지 광물을 들먹이고, 불을 밀고 당기는 이치를 논하며, 입으로는 도교의 오래된 경전과 비결을 외우면서 스스로 참된 신선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조급하게 무언가를 얻으려 하고 이익을 탐내는 마음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쳐서 끝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르신을 본다면 어찌 이마에 진땀이 나지 않겠습니까? 스승이십니다, 참으로 저의 스승이십니다, 어르신은."
(용어) 삽주뿌리와 황정은 예로부터 몸을 보하는 데 쓰인 대표적인 약초 뿌리다. "정과 기와 신"은 도교에서 사람의 생명을 이루는 세 가지 근본 요소로 여기는 것으로, 정은 몸의 정수, 기는 생명의 기운, 신은 정신을 뜻한다.
관동으로는 난리를 피할 수 없다는 이야기 (서기 1610년 10월 15일, 양력 추정)
요즘 전쟁을 피해 다닐 곳을 찾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반드시 이렇게 말한다.
"영동의 아홉 고을은 멀리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그 땅에 곡식이 넉넉하고 물고기와 소금도 풍부하니, 그곳에 가면 굶주릴 걱정이 없다. 게다가 위치도 외져서 전쟁을 겪을 일이 거의 없을 테니 그곳이 제일이다. 그다음으로는 영서만 한 곳이 없으니, 산이 가파르고 물길이 험해서 적이 오더라도 오래 머물 수 없고 사람이 몸을 피해 숨기도 쉬울 것이다. 호남과 영남은 왜적과 가깝고, 함경도와 평안도는 북쪽 오랑캐와 가까워서 마치 배가 뒤집힐까 봐, 혹은 배 안이 온통 적일까 봐 걱정하는 것과 같으니 모두 믿을 수 없다."
나는 이런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모두 이치를 밝게 알지 못하고 형세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탓이다. 영동과 영서는 모두 내 고향이라 그곳 사정을 매우 잘 알고 있으니,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 형편을 내가 자세히 말해 주겠다.
영동은 땅이 좁고 사람이 적어서, 풍년이 든 해에는 쌀값이 헐한 것 같다가도 조금만 바람이나 가뭄 피해를 입으면 금세 굶주림에 시달린다. 왜란이 일어났던 계사년(1593년)에 충주와 원주 두 고을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강릉으로 피란 와서 먹고살려 했는데,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원래 살던 사람이나 피란 온 사람이나 모두 곤궁해져서, 나무껍질을 벗기고 조개를 주워 겨우 요기하다가 그마저 떨어지면 서로 시체를 베고 죽어 갔다. 지금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곳으로 몰려가 먹고살려는 사람이 충주와 원주 사람들만이 아니라 온 나라 사람들로 미어터질 것이니, 그렇게 되면 원래 살던 사람이나 피란 온 사람이나 모두 함께 죽어 가리라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남쪽의 왜적이야 혹 올라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북쪽 오랑캐는 본디 함경도 동북 지역을 노리고 있다. 만약 정주와 평산 이북 땅을 고려 시대처럼 저들이 차지한다면, 적의 배들이 관동의 아홉 고을을 고려 때처럼 드나들 것이 틀림없으니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지체 높은 집안과 온갖 문물이 만약 영남으로 몰려든다면, 적이 내려오는 길로는 바닷길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될 터이니 더더욱 좋은 곳이 아니다. 이런 이치는 매우 분명하고 이런 형세는 매우 간단하다.
영서는 비록 험준하다고는 해도 서울에서 겨우 며칠 걸리는 거리다. 임진왜란 때 서울의 사대부 집안으로 이리저리 떠돌던 사람들이 죄다 이곳으로 몰려들자, 적들은 나라의 백성과 재물이 모두 여기 모였다고 여겨 몹시 혹독하게 수색하고 약탈했으므로, 칼에 맞거나 능욕을 당한 사람이 열에 예닐곱이나 되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나면 짐을 꾸려 그곳으로 갈 사람이 서울 사람들만이 아니라 호남과 호서의 백성들까지 모두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몰려드는 사람이 많을수록 도적을 불러들이는 속도도 더 빨라지는 법이다. 게다가 회양 일대는 옛날 거란 같은 북쪽 오랑캐가 드나들던 관문이었고, 원주와 충주는 왜적이 드나들던 길목이었다. 고려 때 거란이 쳐들어온 일과 임진년의 전쟁은 앞선 시대의 거울이라 할 만한데도, 고집 세고 겁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니, 이 또한 이치에 밝지 못하고 형세를 알지 못하는 탓이다."
피란을 계획하던 사람이 물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로 피해야 하는가?"
내가 말했다. "그대는 신씨 집안 형제의 일을 들어 보지 못했는가? 그들은 수원 바닷가에 살았는데, 왜구가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서로 이끌고 북쪽으로 들어갔다가 회령에서 포위를 당해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이듬해에 겨우 돌아와 보니 예전에 살던 농장과 마을이 고스란히 잘 보전되어 있어서, 떠났던 일을 몹시 후회했다고 한다. 이것은 대개 수원이 서울과 가까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적이 서울로 들어가려면 먼저 반드시 서울 근방부터 침범할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살던 사람들은 옮겨 가고 피란민들도 오지 않았으므로, 적이 얻을 것이 없어 가지 않은 것이다. 얻을 것이 없으면 가지 않는 것이 도적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만약 얻을 것이 없는데도 고을마다 일일이 뒤진다면 적 또한 힘들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전쟁을 피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원래 살던 사람들은 떠나가고 피란민도 몰려들지 않는 곳을 골라서 가야만 비로소 안전하고 탈이 없을 것이다. 육로로 갈지 뱃길로 갈지는 그때그때 형편을 보고 판단할 일이니, 어찌 미리 정해 둘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이 또 말했다.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다. 북쪽 오랑캐에 대해서는 나도 그렇다고 여기겠으나, 남쪽 왜적을 피하기에는 관동이 반드시 좋은 곳이 아니겠는가."
내가 다시 말했다. "왜적이 영동으로 갑자기 밀고 내려왔을 때 사람들은 피할 곳이 없었다. 겨우 며칠 노략질을 당했을 뿐인데도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으니, 만약 열흘만 더 머물렀다면 사람들이 모두 죽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물며 사람이 많이 몰려들어 적이 반드시 그것을 이롭게 여길 곳이야 말할 것도 없다. 관동의 형세를 알고 그 이치를 헤아려 아는 사람으로는 나만 한 이가 없을 텐데도 내 말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미혹된 사람일 것이다."
그러자 묻던 사람이 옳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갔다.
(용어) "영동"과 "영서"는 강원도를 대관령을 경계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눈 옛 말이며, 영동의 아홉 고을이란 대관령 동쪽 동해안 지역의 고을들을 가리킨다. "양계"라 불리던 함경도와 평안도는 조선 시대 내내 북쪽 여진족(오랑캐)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던 변방 지역이었다.
변 — 세간의 오해를 바로잡은 글 두 편
벽곡을 변론하다 (서기 1609년 6월 20일, 양력 추정)
곽재우 공은 도가의 수련법에 깊이 빠져 세상일을 마다하고 산에 살면서, 화식을 하지 않고 날것과 생식만 먹는 벽곡을 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곽공처럼 명석하고 슬기로운 사람이 높은 벼슬을 버리고 스스로 세상 밖에서 유유히 노닐었으니, 만약 인성과 천명의 이치를 깨달은 바가 얕고 적었다면 결코 이런 일을 즐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정도라는 큰길을 놓아두고 부정한 옆길로 들어서서 죽을 때까지 애썼는데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니, 그가 도를 알았다는 증거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 말을 듣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어찌 세상 사람들이 알 만한 일이겠는가. 곽공은 명석하고 슬기로운 사람이었으니, 신선이 그렇게 쉽사리 될 수 없다는 것과 날개가 돋아 하늘로 날아오르는 일이 황당하여 믿기 어렵다는 것쯤은 진작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온종일 쓸쓸히 앉아 도교 경전을 천 번 읽는 일이, 차라리 미인을 곁에 끼고 한가로운 곳으로 물러나 놀며 비파를 타고 술을 따라 놓고 잉어회를 먹으면서 여생을 보내는 것만 못하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끝내 부귀영화를 벗어던지고 궁벽한 산속으로 들어가 곡식을 끊고 스스로 메마르게 지낸 데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있지 않고서야 그가 결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옛날 장자방(장량)이 한나라를 도와 공을 이룬 뒤 물러나 벽곡을 하였는데, 이 사람이 어찌 참으로 신선이 되고 싶어서 그랬겠는가. 짐짓 그것을 핑계 삼아 제 몸을 지키려 한 것이었으니, 이 또한 신묘한 계책이었다.
지금 곽공은 평민의 신분으로 칼을 들고 일어나 지방 장관들을 꾸짖고 그 권세를 손에 넣으니 그를 따르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렇게 하여 한창 날뛰던 왜적을 무찔러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우니, 적이 두려워 꺼리는 존재가 되었고 그 기세와 공로가 한 시대를 뒤흔들었다. 이것은 참으로 사람들에게 '혹시 딴마음을 품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만한 일이었다. 공은 대체로 '공적이 너무 높으면 그에 걸맞은 상을 내리기 어렵다'는 이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물러나고자 했는데, 물러날 명분을 세우기가 마땅치 않았으므로 벽곡을 핑계 삼아 자취를 감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장자방이 걸었던 옛길이며, 곽공이 그 길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런데 어찌 억지로도 이룰 수 없는 신선이 되고자 하여 도리어 그 황당한 이야기를 믿었겠는가.
또 한편 도교의 옛 경전을 지은 위백양의 뜻도 몸의 정수와 기운과 정신, 이 세 가지를 다스리는 데서 벗어나지 않았을 뿐인데, 이 세 가지 수련은 반드시 남의 이목을 놀라게 한 뒤에야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남의 이목을 놀라게 할 만한 행동을 굳이 골라 하려면 벽곡만 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곽공은 반드시 벽곡을 내세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었다. 그러니 세상에서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은 참으로 그의 계략에 말려든 것이다.
이진을 서인으로 폐위할 당시, 대신들은 그 죄를 너그럽게 봐주자고 주장했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도 이에 반대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곽공 또한 조정의 논의가 옳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자기 직책도 아닌 일에 나서서 두 차례나 임금께 간언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것은 역적으로 몰린 이진을 벌해야 한다고 힘써 주장함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놓이게 하는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시기와 의심을 풀어 버리려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오가는 처신이 일반적인 관례를 따르지 않고 대체로 제멋대로였으니, 이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의아하게 여기거나 비웃으며 올바른 행동이 아니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의아해하고 비웃으며 옳지 않다고 책망하는 것을, 곽공은 오히려 속으로 기쁘게 여겼을 텐데, 온 세상 사람들은 도리어 그의 계략에 빠져들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곽공의 속마음은 그저 제 몸을 보전하고 화를 멀리하려는 데 있었을 뿐인데, 세상 사람들은 그가 정말로 신선이 되려고 벽곡을 한다고 여겨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니, 내가 이를 밝혀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용어) "벽곡"이란 불을 써서 익힌 음식을 먹지 않고 날것이나 특정 약초만 먹는 도교의 수련법이다. 장자방은 한나라 건국공신 장량을 가리키고, 위백양은 한나라 때 사람으로 신선술을 설명한 도교의 오래된 경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진은 선조의 아들로, 광해군이 즉위한 뒤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죄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죽임을 당한 임해군을 가리킨다.
시를 논하다 (서기 1610년 11월 9일, 양력 추정)
요즘 시를 짓는 사람들은, 가장 높은 수준에서는 한나라와 위나라, 육조 시대의 시를 배우고, 그다음으로는 당나라 현종 때의 개원·천보 연간이나 대종 때의 대력 연간의 시를 배우며, 가장 낮은 수준에서는 송나라의 소식과 진사도를 들먹이면서, 저마다 스스로 "내가 그들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망령된 소리일 뿐이다. 이것은 그저 그들의 말과 뜻을 주워 모아 그대로 따라 하고 베껴 써서 스스로를 뽐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런 사람들과 어찌 시의 참된 도리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시경》의 삼백 편은 스스로 삼백 편이고, 한나라는 스스로 한나라이며, 위진과 육조는 스스로 위진과 육조이고, 당나라는 스스로 당나라이며, 소식과 진사도 또한 스스로 소식과 진사도이니, 어찌 서로를 흉내 내어 하나로 똑같이 만들었겠는가. 대개 저마다 나름대로 하나의 일가를 이룬 뒤에야 비로소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간혹 옛사람의 글을 본떠 지어 보는 일도 있지만, 이 또한 시험 삼아 한번 지어 보아 하나의 격식을 나름대로 갖추어 보는 것일 뿐 늘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니, 남의 발밑에서만 맴도는 사람은 결코 뛰어난 시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시는 어떻게 해야 지극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흥취를 먼저 세우고 뜻을 정한 다음, 격조를 그다음으로 삼고 말을 엮어 나간다. 구절은 살아 움직이듯 하고 글자는 둥글둥글 원만하게 하며, 소리는 맑고 절주는 굳건한 것을 기본으로 삼고, 소재를 취해 엮되 마땅한 자리를 침범하지 말고 지나치게 화려한 빛깔을 입히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두드리면 쇳소리가 나듯 단단하게, 만지면 화려한 무늬가 만져지듯 풍성하게, 눌러 내리면 깊이가 느껴지도록, 끌어올리면 치닫듯 높게, 닫을 때는 맑고 힘차게, 열 때는 여유롭고 호탕하게 지어야 한다. 생각을 마음껏 부리며 흥취에 흠뻑 젖어 마치 북 치고 춤추듯 신명 나게 지어야 한다. 무쇠를 가져다 황금을 만들 듯, 썩은 것을 싱싱하게 되살리듯 하되, 평범하고 담담하게 짓더라도 천박하고 속되게 흐르지 말고, 기이하고 고고하게 짓더라도 괴상한 데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사물의 모습을 읊되 그 사물에 얽매이지 말고, 말을 펼쳐 늘어놓되 소리와 운율을 해치지 말며, 화려하게 꾸미되 이치를 손상시키지 말고, 논의를 펼치되 겉모습을 흐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 비유와 흥취를 깊이 있게 쓰는 사람은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 사람이고, 옛사람의 말을 잘 끌어다 쓰는 사람은 마치 제 입에서 저절로 나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쓰는 사람이다. 이렇게 하면 한 편 전체에 품격이 드러나 흠잡을 데 없이 온전해지고, 말 너머로 기운과 힘이 넘쳐흘러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게 된다. 이런 법칙을 모두 갖춘 뒤에야 세상에 내놓을 만한 시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와 위나라 이래의 여러 시인들은 모두 이 법칙을 깨닫고 힘써 지켜 낸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한나라의 걸음걸이를 따라가고 위나라의 발걸음을 흉내 내며, 육조의 옷을 걸치고 당나라의 말투로 행동하며, 소식과 진사도를 마부 삼아 뒤쫓아 치달린다 해도, 그저 제 스스로의 추한 꼴만 드러낼 뿐이니, 아, 참으로 틀린 생각이다.
(용어) 개원·천보는 당나라 현종의 연호, 대력은 당나라 대종의 연호로, 모두 당나라 시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를 가리킨다. 진사도는 송나라 때 소식과 나란히 이름을 떨친 시인이다.
해 — 궁금증을 풀어낸 글 한 편
꿈을 풀이하다 (서기 1611년 3월 10일, 양력 추정)
성성옹(허균의 별호)은 젊었을 때는 꿈을 적게 꾸었는데 꿈을 꾸면 잘 들어맞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꿈이 점점 많아지고, 꾸는 꿈은 점점 맞지 않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꿈이란 공연한 망상에서 생기는 법이다. 그대가 젊었을 때는 욕심이 적어 마음이 담담하고 흔들리지 않았으니 망상도 적었고, 그래서 꿈도 드물었으며, 드물었기 때문에 잘 들어맞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나이가 들고 나서는 총애와 수모, 얻음과 잃음에 대한 잡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히니, 생각의 불꽃이 활활 타올라 꿈도 잦아지고, 잦아졌기 때문에 점점 맞지 않게 된 것이다."
내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꿈이 많고 적은 것은 혹 망상 탓이라 할 수 있겠지만, 꿈이 들어맞는지 아닌지는 망상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장차 무언가를 얻을 것을 미리 알려 주는 꿈으로는 어진 신하를 얻거나 오래 살 것을 예고해 준 옛이야기들이 있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 주는 꿈으로는 낯선 사람이 훗날 큰일을 하리라는 것을 미리 보여 준 옛이야기나 나라가 망할 조짐을 미리 알려 준 옛이야기 같은 것이 있으며, 몸이 아프려 하면 꿈에 음식을 먹고 노래를 부르려 하면 꿈에 울며, 새가 머리카락을 물고 날아가는 것을 보면 하늘을 나는 꿈을 꾸게 되는 것과 같은 일들이 모두 과연 망상 때문이겠는가. 이것은 마음이 신령스럽게 밝으면 일이 딱 들어맞고 정신이 맑으면 조짐이 나타나는 것이니, 다만 캄캄한 가운데서 우연히 서로 맞아떨어져 하나의 징조가 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꿈은 꿈대로, 일은 일대로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는 해도, 생각이 맑으면 마음과 정신이 저절로 밝아지고, 맑고 밝아지면 저절로 자연의 이치와 맞아떨어진다. 자연의 이치와 맞아떨어지면 근원이 되는 기운이 맑고 비어 있고 오묘한 작용이 흘러 움직여서, 다가오는 길흉화복이 마치 형체가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능히 미루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꿈으로 점을 치는 일이 생겨난 까닭이다."
어떤 사람이 또 말했다.
"망상이라는 말이 아마도 맞는 것 같다. 그대는 오랫동안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먹고살기 곤란할 때면 지체 높은 사람의 문을 찾아가 고을 원 자리 하나를 애걸하곤 했다. 그때 자리가 비기를 엿보며 요행을 바랄 때는 꿈만 꾸면 그대로 이루어졌고, 나중에 얻기도 하고 못 얻기도 했던 것은 그만큼 잡생각에 흔들린 정도가 깊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변고를 겪은 뒤로는 명예와 이익을 딱 끊고 오로지 도를 닦는 데만 뜻을 두어, 도가의 경전과 비결을 많이 읽으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연구에 몰두하자, 꿈에 이름난 여러 도인들을 만나 그 오묘한 비결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신선이 되어 하늘의 궁궐로 날아가, 난새와 학을 타고 오색구름 속에서 신선의 퉁소 소리를 듣는 꿈까지 수없이 꾸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망상에 골몰한 것이 극에 달한 것이다."
이 사람의 말이 여기에 이르니 더욱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렇다면 온 천하 사람들의 꿈은 모두 망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일 뿐이리라. 다만 "꿈이 적으면 잘 들어맞는다"는 말에 있어서는, 마음이 맑고 정신이 밝으면 혼이 밖으로 치닫지 않는 법이며, 맑고 밝기 때문에 반드시 사람의 일에서 조짐이 나타나는 것이니, 참으로 이런 이치는 있는 것이다. 이 사람 정도라면 함께 도를 이야기할 만하다.
(용어) 여기서 든 옛이야기들은 모두 중국 고전에 전해지는 꿈에 관한 일화들이다. 은나라 임금이 꿈에서 본 사람을 그림으로 그려 찾아내 재상으로 삼았다는 이야기, 주나라 무왕이 꿈에 하늘로부터 긴 수명을 받았다는 이야기, 어떤 사람이 꿈에서 본 아이를 훗날 실제로 만나 거두었다는 이야기, 나라가 망할 조짐을 알리는 인물이 꿈에 나타났다는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잡문 — 여러 갈래의 글 네 편
운명을 풀이하는 글 (서기 1611년 4월 1일, 양력 추정)
나는 기사년(1569년), 병자월이라 부르는 달(음력 열한 달째에 해당한다), 임신일이라는 날, 계묘시라는 시각에 태어났다. 사주를 보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신금이라는 기운이 명목이라는 기운을 해치고 신수마저 비어 있으니, 액운이 많고 가난하며 병치레가 잦고 무슨 일을 꾀하든 이루어지지 않겠다. 그러나 자수라는 기운이 그 사이에 끼어 있어서 목숨이 짧지는 않을 것이며, 강물이 맑고 깨끗한 형국이라 재주가 대단할 것이고, 묘금이라는 기운이 또 울리고 있으니 이름이 후세 천하에까지 전해질 것이다."
나는 늘 이 말을 미덥지 않게 여겨 왔는데, 벼슬길에 나온 지 열일고여덟 해가 지나는 동안 넘어지고 자빠지는 일과 총애를 받고 수모를 당하는 일들이 은연중에 그 말과 딱딱 맞아떨어지니, 이상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보니 한유는 마갈궁이 그 몸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었고 소식 또한 마갈궁이 운명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었는데, 이 마갈궁이라는 별자리는 사주에서 태어난 시각인 "묘"라는 자리와 대응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아, 나 또한 묘시에 태어난 사람이니, 문장과 기개로 보면 참으로 이 두 분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모함과 시기를 당하여 시대에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억눌리고 버림받은 자취는 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마치 부절을 맞춘 듯 다름이 없으니, 아,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마침내 나는 나의 운명을 풀어내는 글을 지어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는
쇠와 나무의 기운이 서로 부딪쳤다
다행히 물의 기운이 중간에서 구해 주었지만
운수 자리는 또 텅 비어 있었네
태어난 시각마저 마갈궁을 건드렸으니
아, 하늘이 정해 준 것이라 바꾸기 어려워
참으로 내 운명은 곤궁하기만 하구나
쇠가 나무를 치려 드니
몸은 늘 허약하고
운수 자리가 텅 비었으니
무슨 일을 꾀하든 이루어지지 않네
말을 함부로 하여 남들과 부딪치니
이 또한 마갈궁이 빌미가 된 탓이라
아, 하늘도 나를 돌보지 않는구나
힘겨운 액운을 만나 죽을 지경이 되었네
깊은 밤 책상에 기대어
눈물지으며 생각에 잠겼는데
꿈속에서 도인 한 사람을 만났네
헌칠하고 풍채가 좋은 이였다
내 방으로 들어오더니
명아주 줄기로 엮은 평상에 걸터앉아 이렇게 말했네
"그대는 어찌 운명을 원망하는가
그대의 수명은 매우 길 것이네
내 일러 주노니 하늘을 원망하지 마오
하늘이 그대에게 문장을 내려 주지 않았는가
육기처럼 풍성하고 사영운처럼 화려하며
송옥처럼 곱고 반고처럼 향기로우니
비단결 무늬처럼 휘황찬란하고
생황과 종소리처럼 성대히 울려 퍼진다
이것만으로도 한 시대에 우뚝 서기에 충분한데
높은 벼슬이 어찌 이것을 당해 내겠는가
저 높은 갓을 쓰고 호령하는 자들은
그 속마음이 더럽기 그지없어서
비록 화려한 옷을 걸치고 있어도
흙으로 빚은 인형을 수레에 태우고 종들이 떠받드는 꼴과 다름없다
그렇게 부귀만 누리다가 흔적도 없이 스러져 버리니
그대도 이런 것은 원하지 않을 것이네
내가 이제 하늘의 참된 주재자께 아뢰어
그대가 태어난 해를 바꾸어 달라 청하고
그리하여 그대의 재주를 빼앗고
그대의 총명함을 흐리게 한 다음
그대에게 높은 벼슬을 내리고
두터운 총애와 권세를 안겨 준다면 어떻겠는가
하지만 풀과 나무처럼 한때 무성하다 이내 썩어 스러지는 삶을
그대는 결코 바라지 않을 것이네
아, 군자란 그저 하늘에 맡길 뿐인 것을
재주와 부귀영화를 굳이 함께 얻고자 한다면
저 좌구명과 사마천이 이미 그러다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창려 땅 출신의 큰 선비 한유와
미산 땅 출신의 문장가 소식도
모두 태어난 때가 마갈궁을 만나
다 함께 고상한 문장을 세상에 전했을 뿐이라네
두 사람 모두 늘 고단한 제 운명을 원망했지만
후세에 이름을 전하는 데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네
한유가 조양 땅으로 쫓겨나고
소식이 무창 땅으로 좌천된 것도
그저 태어난 시각이 좋지 않았던 탓일 뿐이지
운명 자체가 순탄치 못했던 것은 아니라오
이제 그대의 이름은
이 두 분과 나란히 설 것이니
원망하며 탓하지 말게나
물길이 평탄하면 흘러가고 웅덩이를 만나면 멈추듯이
그저 유유자적하게 인간 세상의 남은 세월을 보내다가
훗날에는 신선의 세계에서 나를 찾아오시게
푸른 난새를 타고
붉은 규룡을 몰아
오색구름이 찬란한 누각에서
나와 함께 올라 보세나"
이 말을 마치자 도인은 사라지고
나는 잠에서 깨어 일어났네
쓸쓸히 그 말을 되새겨 보니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울리는구나
그 도인은 결코 나를 속이지 않았을 터이니
내 마음이 더없이 상쾌하다
옥황상제의 뜻을 따라 나 스스로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리니
그저 하늘이 정한 명을 즐길 뿐,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용어) 앞부분에 나오는 "신금", "명목", "자수", "묘금" 같은 말은 태어난 해와 달, 날, 시각을 오행과 십이지로 나타내는 사주 풀이의 전통적인 용어들이다. "마갈궁"은 서양의 별자리로 치면 염소자리에 해당하는데, 예로부터 사주에서 "묘"라는 지지와 대응하는 별자리로 여겨져 왔다. 한유는 창려 땅 출신이고 소식은 미산 땅 출신이어서 각각 "창려"와 "미산"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한유는 황제에게 직간하다가 조양 땅으로 좌천되었고, 소식도 직간하다가 무창 땅으로 좌천된 일이 있다. 육기·사영운·송옥·반고는 모두 문장으로 이름난 옛사람들이다.
힐문하는 자에게 답하다 (서기 1610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풍채가 헌칠하고 갓을 단정히 쓴 사람이 나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대는 뛰어난 문장을 지녔고 벼슬은 상대부에 이르렀다. 높은 관을 쓰고 넓은 띠를 두른 채 임금을 가까이서 모실 때면 따르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그대를 둘러싸고 큰길에서는 앞서 소리쳐 길을 틔웠다. 마땅히 사귀는 사람들도 공경과 재상 같은 높은 이들이어야 할 터, 서로 어울려 따르며 나랏일을 함께 의논해야 마땅한데, 차례를 뛰어넘어 권력을 잡아 호화로운 삶을 누릴 수도 있었건만 어찌하여 조회를 마치고 나면 입을 다물고 바보처럼 지내는가.
출세한 사람들은 찾아오는 일이 없고 그 대신 기이하게 생긴 사람들만 그대 곁에 있으니, 얼굴이 검은 사람도 있고 수염이 붉은 사람도 있구나. 수염 붉은 사람은 실없는 농담이나 늘어놓고 얼굴 검은 사람은 허리에 술병을 차고 다니며, 키 작은 한 사내는 코가 여우처럼 생겼고 애꾸눈인 사람도 있고 눈썹이 붉은 사람도 있다. 날마다 마루에 모여 떠들썩하게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세상 만물을 이리저리 아로새기는 시나 지으면서 그것으로 스스로 즐거워하고 있으니, 그대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뭇 선비들도 그대에게서 등을 돌리는구나. 그대 몸이 진흙탕에서 허덕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니, 어찌하여 이런 자들과의 사귐을 끊고 권세 있는 요로의 사람들과 인연을 맺지 않는가."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대의 말은 세상 물정에 어둡구려. 내 천성이 비루하고 옹졸하여 엉성하고 거칠기만 하다오. 권모술수도 부릴 줄 모르고 아첨도 할 줄 모르며, 무엇이든 하나라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잠깐도 참아 내지 못한다오. 남을 칭찬하는 말을 하려 들면 벌써 입이 더듬거리고, 권세가의 문턱에 발을 디디면 발꿈치가 곧바로 쑤셔 온다오. 지체 높은 이와 인사를 나눌 때면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리니, 이런 건방진 태도로 재상을 찾아뵙는다면 그 재상은 나를 미워하여 당장 목이라도 베고 싶을 것이오.
어찌할 도리가 없어 차라리 강호로 떠나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가난한 살림에 먹고살아야 하니 물러나고 싶어도 망설여진다오. 다만 저 두세 사람만은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내 재주를 아껴 주고, 혹은 내 소탈한 성품을 좋아해 주어서 찾아와 함께 내 술에 취하고 서로 부르고 따르며 지낸다오. 이 사람이 시를 지어 부르면 저 사람이 화답하니, 지어 내는 편편이 마치 아름다운 옥돌과 산호와도 같다오. 내 스스로 이 보물을 귀하게 여길 뿐 남에게 팔리기를 바라지 않는다오. 《시경》의 노래들을 내 벗으로 삼고 이름난 옛 시가를 내 종처럼 부리면서, 이것을 큰 사업인 양 뿌듯해하며 온 세상이 오히려 좁다고 여긴다오.
벼슬살이를 할 때도 권모술수를 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왔으며, 타고난 성품 그대로 어느덧 늘그막에 이르렀다오. 권세와 이익으로 맺은 사귐은 언젠가 반드시 변하기 마련이지만 우리의 사귐은 변하지 않으니 돌이나 무쇠와 같다고 할 만하오. 마음이 흡족할 때면 기쁘고 즐거워서 내가 나인 것조차 잊고 잠자고 먹는 일마저 잊어버린다오. 이럴 때 높은 벼슬 따위가 어찌 눈에 들어오겠소.
저 부귀한 사람들은 자줏빛 푸른빛 인끈을 늘어뜨리고 긴 옷자락에 옥을 찬 채 그저 아녀자들이나 즐겁게 할 뿐이지만, 우리처럼 세상에서 물러나 조용히 지내는 사람은 우리 나름의 즐거움을 즐길 뿐 음악과 여색을 탐하지 않고 엄한 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오. 도잠과 사영운, 이백과 소식, 이들과 같아지기만을 바랄 뿐 번성하고 쇠락하는 것은 돌아보지 않는다오.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나는 싫어하고 사람들이 떠받드는 것을 나는 더럽게 여기니, 남들은 나더러 실성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웃고 노는 것이 좋을 뿐이오.
그러니 내 몸이 늘 큰 허물에 빠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 사귐을 끊느니 차라리 이 몸이 잘리는 편이 낫소. 세상 인심은 칼날처럼 날카롭고 세상길은 더할 나위 없이 험하여 터럭 끝까지 쪼개어 따지고 이해득실은 눈금 하나까지 헤아리려 드니, 이런 세상과 맞지 않는 내 마음을 참으로 남에게 믿게 하기가 어렵구려."
따지던 사람이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기는 하나 내 노둔함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었고, 내가 그대를 아끼는 마음은 있으나 덕으로 그리한 것은 아니었소. 알겠소. 내가 참으로 사리에 어두웠구려.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치 큰 무당을 본 듯한 기분이오. 그대의 사귐은 훌륭하고 그대의 말도 틀림이 없소. 내가 실없는 말을 하였으니, 참으로 좀스러운 사람이었던 셈이오."
말을 마치고 물러가는데, 그 걸음걸이가 한결 시원스러워 보였다.
(용어) 도잠(도연명)과 사영운은 남북조 시대, 이백은 당나라의 이름난 시인이며 소식은 앞서 나온 송나라의 문장가다. 이들은 모두 벼슬과 부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던 인물로 흔히 꼽힌다.
가림신을 꾸짖다 (서기 1611년 4월 10일, 양력 추정)
함산 꼭대기에 우뚝 솟은 사당이 하나 있어 성황당이라 부르며 백성들이 정성껏 제사를 올린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캄캄한 흙먼지가 하늘을 뒤덮더니 흙비가 쏟아지고 거센 회오리바람이 몰아쳐 수풀을 헤집고 지붕을 뒤흔들며 성황신의 이마를 후려쳤다. 이튿날 무당이 찾아와 신의 자리를 정돈하고 머리와 옷매무새를 단장했는데 바람이 또다시 불어닥쳤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되풀이되니 나는 몹시 이상하게 여겨 무당에게 그 까닭을 물었더니, 무당이 절을 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함산의 신은 남편이요 가림산의 신은 그 아내입니다. 함산의 신이 첩에게 빠져 아내를 못났다고 흉을 보았는데, 그 첩 때문에 화가 난 아내가 찾아와서 닥치는 대로 짓밟고 비바람을 몰고 와 비를 뿌리며 욕설을 퍼붓고 남편의 저고리를 찢고 첩의 머리털을 쥐어뜯었답니다. 갔다가도 금세 다시 돌아오기를 밤에도 문득, 낮에도 문득 되풀이하니 무당인 저로서도 달랠 도리가 없어 이 싸움을 말릴 길이 없습니다. 그저 신상의 갓과 옷이나 고쳐 드리고 흙으로 빚은 신의 상을 다시 단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 말했다. "허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구나. 신이 감히 남편에게 그토록 사납게 대들다니. 내가 이 신의 허물을 낱낱이 늘어놓아 북두성께 그 죄를 고하리라."
그러고는 향을 피우고 축문을 지어 불사르며, 뜰 아래에서 허리를 굽혀 이렇게 아뢰었다.
"삼가 아뢰옵니다. 하느님께서 땅을 나누고 고을을 갈라 저마다 맡은 신을 두시어 백성을 보살피게 하셨으니, 이는 볕이 잘 들고 비가 알맞게 내려 농사가 잘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직책을 저버린다면 하늘이 반드시 벌을 내리시어 사당을 부수어 신 스스로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이 두 신은 본디 금슬 좋은 한 쌍의 부부로서 시냇물 하나를 경계 삼아 땅을 나누어 각기 그 주인이 되어 천 년 동안 끊임없이 제사를 받아 왔으니, 마땅히 복을 내려 그 땅을 넉넉하게 하고 비바람을 순조롭게 하여 곡식이 잘 자라도록 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여인 하나를 두고 다투어 그 눈에 노기를 번뜩이는 것입니까. 뇌신을 잡아타고 번개 창을 손에 쥔 채 안개를 헤치고 바람을 밟으며 들어와 신의 휘장을 베어 버리고 그 허리를 자르고 깃발을 부수어 놓으니, 날뛰며 물어뜯고 내동댕이치는 그 위세가 대단합니다. 금슬 좋던 부부가 서로 으르렁거리며 사이좋던 남편을 원수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나쁜 기운이 뒤따라와 가축과 꼴을 해치고 우리 농사를 망쳐 놓으니 백성들에게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한 번만으로도 심한 일인데 서너 번, 대여섯 번을 그치지 않으니, 상제께서는 더없이 밝으신 분이시니 부디 그들의 죄를 낱낱이 살피시어 그 죄를 널리 알려 꾸짖으실 때 저의 혀를 빌려 쓰소서. 또한 우레의 신들에게 명을 내리시어 날아와 이 요사스러운 기운을 물리치게 하소서. 천둥소리와 번갯불로 구름을 타고 바람을 몰아, 팔괘의 여러 신들과 사나운 말을 앞세우고 요란한 방울 소리와 번쩍이는 도끼를 갖추어 내려와 그 소굴을 소탕하시고 후련하게 그 요사한 것들을 없애 주소서. 그 눈을 파내고 그 목을 잘라 버리시고 귀신의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워 다시는 날뛰지 못하도록 경계하소서. 그리하여 백성들이 재앙을 면해 얼굴 찌푸릴 일이 없게 하시고, 찰벼와 기장을 풍성히 거두어 저마다 편안히 살아가게 하소서."
이렇게 아뢰기를 마치고 두 번 절한 뒤 무릎을 꿇고 하늘의 명을 기다렸다.
이윽고 머리에 투구를 쓰고 붉은 도포에 붉은 신을 신은 이가 신령스러운 깃발을 앞세우고 내려오더니, 내 귀를 잡아끌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무당이 그대를 속인 것이지 신의 잘못이 아니다. 가림산의 신도 본디 여신이 아니라 남신이다. 신이 신을 공격한다는 것이 어디 이치에 맞는 말인가. 바람과 안개로 인한 이 재앙은 오로지 이 고을 백성들이 불러들인 것이다. 사납고 요사스러운 백성들이 무당을 믿고 삿된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공경할 줄 모르고 오만하여 더러운 짓만 일삼고 있다. 충성도 효도도 하지 않고 믿음도 의리도 없으며, 거간꾼들은 간사한 꾀를 부려 잔재주로 이익만 취하려 든다. 이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자들 또한 바르게 처신하는 관리가 드물어, 겉으로는 바른 체하면서 속으로 욕심을 채우고 헛된 명예를 훔치려 든다. 사람을 속이고 겁박하며 염치없이 그릇된 짓만 일삼으니, 가르침과 교화가 제대로 펴지지 않아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속고 속인다. 이런 태도로 신을 섬기고 있으니 신이 노여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요사스러운 기운과 재앙이 내리는 것은 모두 이 때문인데도, 사람들은 제 허물은 돌아보지 않고 도리어 신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며 질투 때문에 다투는 것이라 여겨 거리낌 없이 헛소문을 퍼뜨리니, 신은 더욱 노여움을 품게 되어 재앙이 더욱 심해진 것이다. 천둥과 같은 벌을 내린 것은 오직 그 거짓말하는 무당을 징계하려 함이었는데, 그대처럼 명석한 관리마저 여기에 미혹되었으니 하물며 세상의 어리석은 백성들이야 현혹되기가 얼마나 쉽겠는가."
나는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내가 슬기롭지 못했음을 사죄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신은 이미 훌쩍 하늘로 올라가 버렸고, 아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그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용어) "성황"은 마을과 고을을 지켜 준다고 믿어진 수호신으로, 흔히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리는 사당에 모셔졌다. "상제"는 하늘을 다스리는 하느님을 뜻하며, "팔괘의 신"은 하늘·땅·물·불 등 여덟 가지 자연의 기운을 맡은 신들을 가리킨다.
산속 개의 게송 (서기 1611년 5월 1일, 양력 추정)
바싹 여윈 저 개는
애초에 어디서 왔는가
또 어디로 가려 하며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개가 대답했다.
"진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나고 죽음이 없는 이치를 깨달아 증명하고자 합니다. 저는 전생에 사람이었는데, 이익과 권력과 총애를 좋아하여 사람들을 형벌과 재앙에 빠뜨리고, 욕심이 많아 재물을 끌어모았습니다. 그 때문에 천벌을 받아 저 아비지옥에 떨어져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고통을 받았고, 이제 겨우 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저는 전생의 잘못을 참회하며 큰 서원을 세웠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고 집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부처님과 보살님께 참배하고 아미타불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되뇝니다. 그리하여 성거산으로 들어갔다가 사방을 두루 떠돌았으니, 금강산의 낙가사며 오대산과 태백산, 지리산의 천왕봉이며 속리산과 묘향산까지, 가는 곳마다 참선을 하고 머무는 곳마다 반드시 염불을 하였습니다.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그 짧은 순간에라도 저의 천 겁에 걸친 죄를 씻어 주시고 저를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주시기를 발원하며 불법승 삼보께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그리하여 진실한 가르침에 귀의하여 여래의 경지로 뛰어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는 뜰에 꿇어앉아 귀를 축 늘어뜨리는데, 마치 제 잘못을 호소하는 듯했다.
내가 그 개의 목에 매달린 패를 보니 여러 산 이름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정말로 고기를 먹지 않느냐고 곁에 있던 승려에게 물으니, 참으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내가 듣기로 석가모니께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하셨다는데, 이 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사람으로 태어나서 개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용어) "무생인"이란 불교에서 모든 것이 본래 나고 사라짐이 없다는 이치를 깨달아 확고히 아는 경지를 뜻한다. "아비지옥"은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이며, "겁"은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의 단위를, "삼보"는 부처와 부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따르는 승려 공동체, 이 세 가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게송"은 불교에서 깨달음이나 가르침을 시의 형식으로 담아낸 글을 뜻한다.
성소부부고 제13권
9. 22:22
출처: 성소부부고 제13권, 문부 10, 제발 및 독
배경: 제13권은 두 갈래의 짧은 글로 이루어져 있다. 앞부분인 "제발"은 책이나 그림, 글씨 뒤에 붙이는 짧은 발문으로, 허균이 아끼던 명나라 문징명의 글씨, 화가 이정과 이징의 그림, 승려 휴정에게서 전해 받은 옛 초상화, 도교 경전 《참동계》, 스스로 엮은 시선집 《시산》, 중국 문인들의 편지글을 모은 《명척독》 등 그가 평생 소중히 여기던 책과 서화에 얽힌 사연이 담겨 있다. 뒷부분인 "독"은 허균이 부안에 머물던 시절 제자백가의 책을 두루 읽고 그 끝에 적어 둔 독후감으로, 노자에서 문중자에 이르기까지 열여섯 사상가의 책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자신만의 거침없는 평가를 남겼다.
제발
돌에 새긴 여러 경전 뒤에 쓰다 (서기 1606년 7월 15일, 양력 추정)
형산 문징명 선생은 서예 솜씨가 명나라를 통틀어 첫째가는 인물로, 왕희지·왕헌지·조맹부와 나란히 견줄 만하다고 하니, 왕세정이 이들을 일러 "고금의 사대가"라고 부른 것이 결코 빈말이 아니다. 문징명은 만년에 《음부경》, 《황정경》, 《정관경》, 《심인경》, 《청정경》, 《태식경》, 《통고경》 같은 여러 도교 경전을 붓으로 옮겨 썼는데, 작은 글씨의 해서체가 매우 힘차고 단단했다. 어떤 것은 옛 명필의 글씨로 전해지는 "방삭찬"이라는 글을 본떠 썼고, 어떤 것은 "낙신부"라는 옛 문장을 옮길 때 쓰던 서체를 따랐으며, 어떤 것은 왕희지가 쓴 《황정경》을 본받았고, 어떤 것은 승려 지영의 《천자문》 글씨를 흉내 냈는데, 획의 굵기가 한결같이 고르면서도 고운 맵시가 넘쳐흘러 참으로 진기한 보물이라 할 만하다. 나는 이 글씨를 궁유 벼슬을 지낸 주씨 성의 어떤 이에게서 얻었는데, 어찌나 아끼고 좋아하는지 차마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아, 이 여러 경전은 모두 신선이 되는 지름길을 알려 주는 글이다. 사람이 참으로 천 번 만 번 되풀이해 읽는다면 그 깊은 뜻을 저절로 환히 깨치게 될 것이다. 게다가 형산 선생의 붓끝으로 그 무게를 더하였으니, 읽는 이가 그 깊은 뜻을 통해 도를 터득하고 그 마음이 담긴 글씨를 통해 서예의 이치까지 얻는다면, 이야말로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는 셈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글씨를 삼가 보자기에 싸서 간직하며 아침저녁으로 본받고자 한다.
(용어) "궁유"는 중국에서 황태자를 가르치던 벼슬 이름이다. "방삭찬"과 "낙신부"는 모두 예로부터 전해 오는 이름난 글로, 여러 서예가들이 즐겨 베껴 쓴 본보기 글이었다.
《시산》 뒤에 쓰다 (서기 1607년 12월 20일, 양력 추정)
《시산》이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은, 내가 감히 시를 새로 뽑아낸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이미 뽑아 놓은 것을 추려 깎아 낸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깎아 내는 일을 맡았을 뿐 뽑는 일을 맡은 사람이 아니다. 시를 뽑는 사람의 공은 대단히 크면서도 정작 일 자체는 수월하지만, 깎아 내는 사람은 정신을 몹시 고달프게 써야 한다. 대체로 여러 사람의 글을 두루 모으되 길고 짧은 잣대를 따지지 않고 그저 화려한 것만 골라 엮는 것이 뽑는 사람의 간편함이라면, 여러 사람이 이미 뽑아 놓은 것을 한데 모아 그 잣대의 길고 짧음과 두텁고 얕음을 다시 가려내고, 화려함은 따지지 않은 채 오직 격식에 순수하게 들어맞는 것만을 가려 비로소 책에 올리는 것은 깎아 내는 사람의 수고로움이다.
우리나라 시를 뽑은 사람은 모두 여섯이니, 그들이 남긴 책이 바로 앞뒤로 이어진 《청구풍아》와 《속청구풍아》, 《동문선》과 《속동문선》, 그리고 《시부》와 《선시》이다. 이 여러 분은 모두 대단한 인물들이었지만, 그렇더라도 수많은 선비의 글을 두루 모으려면 처음부터 상당한 정신을 쏟아야 했을 것이다. 하물며 나처럼 얕은 식견과 좁은 배움으로 뭇사람의 논평을 모아 취하고 버리는 일을 하였으니, 그 깎아 내는 작업이 고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 해도 격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 바닷속에 던져 버리듯 빼 버린 시를 두고, 혹 아까운 구슬 하나를 빠뜨렸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격식에 맞지 않는 것을 함부로 올려놓은 적은 없으니, 물고기 눈알과 진주가 뒤섞였다는 비난만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깎아 낸 뒤에 남은 분량도 결코 적지 않아서, 모두 열 권에 천 편에 이르니 거의 빠짐없이 갖추었다고 할 만하다.
이정의 불화첩 뒤에 쓰다 (서기 1606년 6월 15일, 양력 추정)
호를 나옹이라 하는 화가 이정이 그린 불화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그 대강을 논한 적이 있고, 명나라 사신 주지번, 호를 난우라 하는 이 또한 뒤이어 그 그림을 논했으므로, 이제는 그 오묘한 이치는 다시 말하지 않고 다만 그림 자체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정의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 가운데는 지나치게 치켜세우는 이도 있고 지나치게 깎아내리는 이도 있다. 그를 당나라의 오도자나 송나라의 이공린과 나란히 견주는 것은 참으로 분수에 넘치는 일이며, 반대로 그의 할아버지와 숙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깎아내리는 것 또한 터무니없는 말이다. 그런데 굳이 따지자면, 깎아내리는 쪽이 그림을 더 모르는 사람이라 하겠다.
이정의 산수화는 그 기법이 안견에게서 나왔으나 더욱 노련하고, 인물화는 할아버지에게서 전수받았으나 광채가 더욱 생동하니, 이것이 그의 장점이다. 불화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신묘하고 기이하여 색을 다루는 솜씨가 모두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눈동자를 그리는 솜씨 같은 것은 번쩍번쩍 빛을 내며 사람을 쏘아보아 마치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하다. 지금 오도자나 이공린과 견주면 과연 그 차이가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으나, 훗날에는 반드시 이를 알아볼 사람이 있을 것이므로 나는 이 그림을 귀하게 간직해 둔다.
풍간 초상화첩 뒤에 쓰다 (서기 1605년 4월 1일, 양력 추정)
옛날 향산에 당나라 화가 오도자가 그렸다는 풍간의 초상이 있어 절집에서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끝내 구하지 못했다. 그런데 서산대사, 법명은 휴정이라는 스님이 세상을 뜨기 직전에 제자인 원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교산(허균의 호)이 늘 이 그림을 갖고 싶어 했지만 내가 여태 숨겨 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보물이니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다. 그대는 본디 선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니 이것을 가져다주도록 하라. 죽기 전에 틀림없이 우리에게 되돌려 줄 것이다."
이듬해 봄, 원준 스님이 다른 승려 한 사람을 시켜 그림을 보내왔다. 살펴보니 작은 폭의 그림으로, 늙은 스님이 호랑이를 타고 앉아 있고 산에서 시중드는 아이 하나가 보따리를 지팡이에 걸어 어깨에 메고 그 뒤를 따르는 모습이었다. 빛깔은 비록 어둡게 바래고 군데군데 벗겨지고 떨어져 나갔지만, 붓놀림만큼은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으니 참으로 오래된 보물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오도자는 당나라 현종 때보다 앞선 개원 연간 이전의 인물이고 풍간 역시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그러니 같은 시대의 화가가 같은 시대의 인물을 그렸다고 알려진 것은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무리가 있는 듯하다. 만약 이 그림이 정말 풍간의 초상이라면 오도자의 그림이 아닐 것이고, 만약 오도자의 그림이 맞다면 풍간의 초상이 아닐 것이니, 반드시 둘 중 하나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을 그린 이가 당나라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매우 분명하니, 보물로 여길 만하다.
화가 이정은 이 그림을 구경하고 사흘 밤낮을 손에서 놓지 못했고, 화가 이징은 이 그림을 보고서 옛 그림 십여 점을 내어 이것과 바꾸자고 애걸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당대에 손꼽히는 화가들이었으니 틀림없이 그 진가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나는 다만 이 그림을 배접해 소중히 간직해 두었다가, 내가 죽을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절로 돌려보낼 생각이다.
(용어) 풍간은 당나라 때 이름난 승려로, 아미타불의 화신이었다고 전해진다.
옛 글자체로 된 참동계 뒤에 쓰다 (서기 1608년 12월 5일, 양력 추정)
옛 글자체로 쓰인 《참동계》는 명나라 영락 연간에 세상에 나왔다. 어떤 농부가 서주 땅 산속에서 밭을 갈다가 돌상자 하나를 파냈는데, 그 속에 책 세 권이 들어 있었고 글씨는 비단 폭에 붉은 주사로 적혀 있었다고 한다. 자를 용수라 하는 학자 양신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진본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 책은 넉 자로 된 구절을 모아 위백양이 지은 경문이라 하고, 다섯 자로 된 구절을 모아 서경휴가 붙인 주석이라 하며, 또 《오행삼상류》라는 글을 순우숙통이 지은 것이라 하는 등, 체제가 짜임새 있고 매우 뚜렷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진본일까? 이 책이 세상에 돌아다닌 지가 어느덧 천 년 가까이 되었고 이 책에 주석을 단 사람만도 백여 명에 이르는데, 그동안 아무도 그 잘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는 혹 이 책이 도교 서적이라 그 뜻이 은미하고, 은어와 뒤섞인 문장이 많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 탓이 아닐까?
그렇다 하더라도, 진일이라 불리는 팽효, 포일이라 불리는 진두징, 상양이라 불리는 진관오, 이 세 사람은 세상에서 모두 도를 깨달았다고 일컬어지는 이들로, 저마다 이 책에 주석을 달면서도 그 그릇된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세 사람이 정말로 도를 깨달았다면 반드시 신선이 되어 하늘의 세계로 올라가 여러 진인들을 만났을 것이고, 위백양과 서경휴 또한 이미 하늘의 궁궐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 책의 뜻을 서로 의논하여 잘못된 곳을 바로잡았어야 할 텐데, 지금까지 그리되었다는 말이 없으니, 혹 팽효 등이 실은 도를 깨닫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미 도를 깨달았으면서도 굳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인간 세상에 남아 이 주석을 지은 뒤에야 신선이 되어 떠난 것일까? 이 점은 알 수가 없다.
이 옛 글자체 판본은 이미 장과 구절이 질서 있게 나뉘어 있어서, 뒤죽박죽 흐트러진 예전 판본과는 다르니, 나는 우선 이 판본이 옳다고 여겨 이것을 읽는다. 순우숙통과 서경휴는 위백양과 더불어 모두 신선의 도를 빙자한 사람들이니, 그 글이나 뜻은 본디 우열을 가릴 것 없이 한 사람의 솜씨에서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읽는 이가 이 책을 두루 읽고 자세히 음미해 본다면 틀림없이 스스로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천고최성》 뒤에 쓰다 (서기 1607년 7월 1일, 양력 추정)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오씨 성의 화가 망천의 솜씨를 빌려 그린 작은 풍경화 스무 폭이 있다. 모두 이름난 이들의 시문 가운데 그림으로 옮길 만한 구절을 골라 담았고, 또 손수 그 그림 아래에 문장과 부와 시를 써넣었으니 참으로 훌륭한 작업이었다. 이 화첩은 원래 궁궐 안에 있던 것인데 지금은 의창군, 곧 선조 임금의 여덟째 서자로 이름이 광이라는 분의 집에 전해지고 있다. 나의 형님 되시는 허성께서 화가 이징의 솜씨를 빌려 그 그림을 옮겨 그리게 하시고, 이징의 적형 되는 이축에게 글씨를 쓰게 하셨다. 글씨는 비록 주지번의 것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림만큼은 오히려 더 뛰어났다.
그 그림에는 도화원, 시상, 산양, 산음, 학림장, 토원, 업원, 죽루, 자릉대, 등왕각, 악양루, 기부성, 촉으로 가는 길, 풍락정, 취옹정, 적벽, 희우정, 여산 등 이름난 명승지가 두루 담겨 있어, 대체로 내가 한번 노닐어 보고 싶었던 곳들을 이 그림 하나로 한눈에 다 볼 수 있으니, 이 어찌 인간 세상의 큰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나는 몹시 기뻐서 이 그림을 감상하며 즐거움을 그칠 줄 몰랐다.
나는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평소에도 훌훌 벼슬을 벗어던지고 도연명처럼 〈귀거래사〉를 짓고 싶다는 생각을 품어 온 지 이미 오래다. 만약 내 몸이 정말 그렇게 떠날 수만 있다면, 이 그림 속에 담긴 아름다운 일들을 나 또한 세상 밖에서 몸소 누릴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옛사람을 부러워만 하겠는가. 결국 빼어난 경치와 절경이란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가에 달려 있을 뿐이니, 내가 노닐 감호가 어찌 엄자릉의 낚시터나 왕희지의 난정보다 못하겠는가. 다만 나라는 사람이 그 낚시터와 난정에서 노닐던 몇몇 인물들에 미치지 못할까 그것이 걱정될 뿐이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은 틀림없이 손뼉을 치며 배를 잡고 웃을 것이다.
이징의 화첩 뒤에 쓰다 (서기 1608년 1월 15일, 양력 추정)
이징은 봉호가 학림정인 이경윤의 서자이다. 그 아버지와 숙부가 모두 그림에 능했기에 이징이 그 솜씨를 이어받아 마침내 독자적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산수화와 인물화는 물론, 온갖 새와 대나무, 풀벌레, 꽃과 나무에 이르기까지 그리지 못하는 것이 없어 모두 법도를 얻었으니, 사람들은 이를 두고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며 칭찬한다. 호를 나옹이라 하는 화가 이정이 세상을 뜬 뒤로는 이징이 곧 우리나라에서 첫손에 꼽히는 화가가 되었다.
나는 이징에게 여러 가지 그림을 작은 화첩에 그리게 하고, 마지막은 아이를 씻기는 두 여인의 그림으로 장식하게 하였다. 이정의 솜씨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풍성한 살결과 아양 떠는 웃음이 그 요염함을 한껏 드러내어 아리따운 자태가 실물과 거의 다름없으니, 이 또한 신묘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 그림만은 오래 펼쳐 놓고 싶지 않으니, 오래 펼쳐 두면 밤잠을 설칠까 두려워서이다.
《당음》 뒤에 쓰다 (서기 1608년 11월 24일, 양력 추정)
원나라 사람으로 자를 백겸이라 하는 양사홍이 당나라 시를 뽑아 시·정·유 세 등급으로 나누고 이름을 《당음》이라 붙였는데, 시를 논하는 이들이 이 책을 으뜸으로 삼는다. 오군 땅의 고린, 호를 동교라 하는 이가 다시 이 책에 평과 점을 매기자, 온 나라의 선비들이 모두 이 책을 떠받들어 시를 배우는 첫걸음으로 삼았으니, 두 분의 공로가 참으로 대단하다 하겠다. 그러나 양사홍이 《정음》과 《유향》을 나누어 놓은 것부터가 이미 매우 질서가 없는 데다, 고린은 아예 《유향》은 손대지 않고 평과 점을 매기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이 《정음》 몇 편만으로 당나라 시인들의 시를 죄다 아우를 수 있단 말인가? 자를 운경이라 하는 심전기와 자를 소백이라 하는 왕창령, 자를 달부라 하는 고적 같은 시인들의 작품이 《유향》 여기저기에 흩어져 실려 있으니, 이분들의 시가 장구령이나 왕유, 허운, 이백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옛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식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내가 임오년(1582년)에 이 책을 처음 얻었는데, 그때는 나이가 어려 이 책이 잘되었는지 아닌지조차 가릴 줄 몰랐다. 그러고도 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거의 십 년 넘게 읽고 외웠는데, 전란 통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늘 그 책이 생각났지만 다시 구할 길이 없었는데, 지난해 어떤 사람이 중국 시장에서 구해 와 내게 주었다. 펼쳐서 읽어 보니 마치 어릴 적 친한 벗을 다시 만난 듯하여 몹시 기뻐서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였다. 다만 《유향》까지는 함께 얻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그 평하는 말들은 어떤 곳은 시원하게 막힌 데를 뚫어 주기도 하고 어떤 곳은 얽혀서 통하지 않기도 하며, 어떤 곳은 뜻을 분명하게 밝혀 주기도 하고 어떤 곳은 도리어 모호하기도 하지만, 버리고 취하는 데 있어서는 대체로 올바른 격식을 잃지 않았으니, 그 노력이 결코 게으르지 않았음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책은 마치 옛 벗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으므로 늘 곁에 두고 놓지 않는다.
《사가궁사》 뒤에 쓰다 (서기 1608년 11월 26일, 양력 추정)
《사가궁사》란 바로 당나라의 왕건과 촉나라의 비씨, 그리고 송나라 휘종 임금과 왕규 등 네 사람이 지은, 궁중을 노래한 절구시를 가리킨다. 이들의 노래는 모두 궁궐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담고 있는데 문장 또한 풍부하고 아름다워서, 이 글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직접 옛 궁전 안으로 들어가 대궐의 화려한 문물을 구경하는 듯한 기분이 드니, 이것이 바로 내가 이 글을 즐겨 읽는 까닭이다.
그렇지만 왕건은 궁중의 귀인들과 가까이 지내며 궁궐 안의 온갖 일을 속속들이 알았던 사람으로, 시는 훌륭했을지언정 그 인품은 본디 말할 것이 못 되었다. 비씨는 시 짓는 재주만 있었을 뿐 절개를 잃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 줄은 몰랐으니, 이는 그저 문장 재주 하나만 지녔던 셈이다. 휘종 황제는 결국 이런 취미로 나라를 망쳐 버렸고, 왕규는 간신에게 빌붙어 그 밑에서 쓰임을 받았으니, 이 네 사람은 모두 딱히 본받을 만한 인물은 못 되고, 오히려 후세 사람들이 경계로 삼아야 할 이들이다. 읽는 이가 이 노래들의 절묘한 솜씨에 취해 이들의 인품마저 잊어버리는 일만 없다면, 세속을 벗어난 뜻을 가다듬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명척독》 뒤에 쓰다 (서기 1608년 11월 28일, 양력 추정)
자를 용수라 하는 양신이 《적독청재》를 지었고, 자를 원미라 하는 왕세정이 이를 더욱 늘려 보탰다. 그러자 월 땅 사람으로 자를 여림이라 하는 장윤이 이 두 책을 합쳐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만 추려 《고척독》이라는 책을 엮었는데, 뽑은 것이 간결하면서도 곡진하여 그 위세가 천하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하니, 참으로 이미 집집마다 전해 외워질 만한 책이 되었다.
우리 시대 명나라 여러 문인들의 글 가운데는 편지글이 가장 뛰어난데, 이를 모은 능씨, 황씨, 도씨, 서씨 같은 이들이 저마다 널리 찾아다니고 끝까지 뒤져서 한데 모아 방대한 책을 만들었다. 그 책을 펼쳐 보면 마치 병기고에 창과 투구, 갑옷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듯하고, 보물 시장에 진귀한 조개껍데기와 옥돌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듯하며, 거대한 파도가 하늘까지 치솟는 듯하니, 참으로 장관이라 할 만하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짧은 한마디 말로 이치의 뿌리를 곧바로 꿰뚫고 사람의 마음을 절로 수긍하게 만들어 말 밖에 뜻이 서리게 하는 데에서는 《고척독》에 견주어 다소 못한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가가 있을 때마다 여러 종류의 책들을 죄다 꺼내 놓고 그 가운데 짧은 한두 마디로도 충분히 옛사람의 글에 견줄 만한 것들을 가려 뽑아, 따로 한 권을 만들어 네 권으로 나누고 이름을 《명척독》이라 붙여 장윤의 《고척독》 뒤에 덧붙였으니, 그런대로 양신과 왕세정 두 분의 뜻을 저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소문략》 뒤에 쓰다 (서기 1608년 11월 30일, 양력 추정)
구양수와 소식의 글은 송나라를 대표하는 대가라 할 수 있다. 구양수는 그 문장의 기운이 힘차고도 아름다우며 정취가 사람을 감동시키면서도 온화하고 간절하니 옛사람 가운데도 그만한 이가 없었고, 소식은 마치 베를 짜듯 자유자재로 글을 지어내어 그 변화가 끝이 없어 사람들이 그 신묘함을 헤아리지 못할 정도이니, 그 역시 천 년에 다시없을 절창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 가운데는 진나라 이전과 전한 시절의 문장만을 으뜸으로 여겨 이 두 사람의 글을 가벼이 여기고 배우려 들지 않는 이들이 있으니, 이는 참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문장이란 저마다 나름의 맛이 있는 법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대궐 푸줏간의 쇠고기와 표범의 태, 곰 발바닥 같은 진귀한 음식을 맛보고는 스스로 천하의 좋은 음식을 다 먹어 보았다고 여겨, 마침내 기장밥이나 회, 구운 고기 같은 평범한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면 굶어 죽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이다. 이것이 어찌 진나라 이전과 융성했던 한나라의 문장만을 으뜸으로 여기고 구양수와 소식을 가벼이 보는 것과 다르겠는가.
왕세정은 만년에 소식의 글을 즐겨 읽었고, 호를 녹문이라 하는 모곤은 평생토록 구양수를 한유보다 뛰어나다고 추어올렸으니, 이 두 사람이 결코 남을 속일 이들이 아니다. 어느 한 사람의 문집만 오로지 파고들다 보면 혹 너무 배가 불러 소화하지 못하고 도리어 체할까 염려되므로, 나는 그 가운데 가장 간결하고 절실한 글만을 가려, 구양수의 문장 예순여덟 편과 소식의 문장 일흔두 편을 뽑아 《문략》이라 이름 붙였으니 모두 여덟 권이다. 앞으로 틈틈이 이 책을 읽어 글쓰기의 법을 배울 생각이다.
《명시산보》 뒤에 쓰다 (서기 1608년 12월 2일, 양력 추정)
자를 우린이라 하는 이반룡이 명나라 시 몇 수를 가려 뽑아 《고시산》 뒤에 덧붙였는데, 그 버리고 취한 기준이 종잡을 수 없는 데가 있었으니, 왕세정이 이른바 "영웅도 사람을 속이니 다 믿을 수는 없다"고 한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명나라 사람 가운데 "성당 시대의 격조를 이루었다"고 일컬어지는 이라 해서 반드시 모두가 정말로 성당의 격조를 이룬 것은 아니다. 만약 양사홍의 방식대로 명나라 시를 취하고 버린다면, 내 생각에는 아마 그 기준 안에 들지 못할 시가 많을 듯하다.
나는 이반룡이 깎아 낸 것을 바탕으로 그 가운데 열에 서넛을 다시 덜어 내고, 또 왕정상의 《풍아》와 고기원의 《국아》, 그리고 여러 사람의 문집을 살펴 음률에 들어맞는 것만을 가려 보태었으니, 모두 육백스물네 편이 되었다. 당나라 삼백 년 동안 나온 수백 명의 시인에 대해서도 양사홍은 천여 편으로 정리를 마쳤으니, 지금 내가 가려 뽑은 명나라 시의 분량은 마침 그 절반쯤에 해당하는 셈이라, 이 역시 명나라 시인들의 시를 충분히 망라했다고 할 만하다. 그러니 나를 두고 주제넘다고 나무라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우총설》 뒤에 쓰다 (서기 1607년 8월 1일, 양력 추정)
내가 젊었을 때 하량준의 《어림》을 읽고서 비로소 중국에 자를 원랑이라 하는 하량준이라는 학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전집을 보고 싶었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고씨의 《시여》에서 하량준이 쓴 서문을 보았는데, 그 자상하고 고아한 문체가 참으로 이름난 문장가다웠다. 또 여러 사람의 편지글 가운데서 그가 쓴 짧은 글 한두 편을 대강 보고서는 마음속으로 은근히 그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전 중국에 들어가는 역관에게 부탁하여 《동해집》이라는 책을 구해 달라고 하였더니, 그 책은 구하지 못하고 대신 《사우총설》이라는 책 여덟 권을 사 왔다.
내가 조심스레 이 책을 살펴보니, 옛 경전과 여러 학자·역사가의 글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명나라 조정의 옛일이며 야사와 소설에 기록된 것에 이르기까지 두루 언급하였고, 곁들여 불교와 노래·희곡을 다루는 이들의 학문에까지 통달하여, 참으로 광범위하게 종합해서 기록하였으며, 그의 견해와 논평은 모두 보통 사람의 생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으니, 참으로 남다른 책이라 할 만하다.
내가 비록 그의 전집은 보지 못하였으나, 이 책 하나만으로도 하량준의 학문의 깊이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으니, 마치 구름을 헤치고 하늘을 본 듯 통쾌하였다. 옛날 중랑 벼슬을 지낸 후한 때 사람 채옹이 오나라 땅에 들어가 왕충의 《논형》을 읽고서 그 뒤로 말솜씨가 갑자기 명쾌해지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남다른 인물을 만나지 못한다면 마땅히 남다른 책이라도 보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나 역시 이 책을 읽고서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 바이다.
《사동방록》 뒤에 쓰다 (서기 1607년 10월 1일, 양력 추정)
황문시랑 벼슬을 지낸 양유년이 병오년(1606년) 봄에 황손이 태어났다는 조서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와서 이를 반포하였는데, 사람됨이 온화하고 단정하였으며, 정사로 함께 온 태사 벼슬의 주지번과 더불어 문장과 풍류를 나란히 갖추어, 입만 열면 주옥같은 문장이 절로 이루어지니 참으로 한 쌍의 보배와 같은 인물들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마치 한집안 사람 대하듯 하여 속마음을 터놓고 정성을 다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대하고 공손하고 부지런한 태도에서는 두 분이 서로 같았으나, 스스로를 법도로 단속하고 강직하게 바른길을 지키는 데에서는 양유년이 더 나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두 분을 마치 하늘에서 노니는 상서로운 기린과 봉황을 우러르듯 떠받들었고, 두 분이 떠난 뒤에는 마치 아름다운 이를 이별한 것처럼 그리워하였다. 하물며 여러 달 동안 곁에서 모시고 따르며 칭찬과 사랑을 받았던 나로서는, 그리워하는 마음이 마땅히 다른 사람보다 몇 곱절은 더할 수밖에 없다.
양유년은 조정으로 돌아가 사신으로 왔을 때 지은 작품들을 책으로 엮으면서 조선 사람들이 화답한 글까지 함께 붙여 《사동방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보낸 사신 편에 이 책을 실어 보내와 나도 한 부를 얻어 볼 수 있었다. 나의 보잘것없고 속된 글을 이 책에 붙여 온 천하에 전하여 빛냄으로써, 글을 짓고 문예를 논하는 천하의 선비들로 하여금 바다 건너에 허균이라는 선비가 있음을 알게 하였으니, 이 어찌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책 이름을 "동방"이라 하고 굳이 "조선"이라 하지 않은 것은 대개 더없이 가깝게 여긴다는 뜻에서였고, 우리 쪽에서 화답한 글을 함께 실은 것은, 지난날 시호가 문희인 예겸이라든가, 좨주 벼슬을 지낸 공용경이라든가, 규양이라 불리는 황홍헌 같은 이들이 각기 《요해편》이니 《조선록》이니 《유헌록》이니 하는 책을 남긴 것과 비슷한 예이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독창적으로 우리 쪽 화답시까지 함께 붙였으니 이는 깊이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양유년은 시를 채집하려는 뜻을 잘 헤아렸고, 또 우리가 공손히 대하려는 뜻도 자세히 알았으니, 그 친애함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이것이 어찌 나 한 사람만의 영광이 되겠는가.
《온리염체》 뒤에 쓰다 (서기 1605년 6월 22일, 양력 추정)
이 《온리염체》 한 권은 당나라의 자를 비경이라 하는 온정균과 남당의 마지막 임금 이욱이 지은 사와 곡들을 모은 것이다. 사와 곡이라는 갈래는 애초 이백에게서 비롯되었는데, 온정균에 이르러 비로소 편수가 크게 늘어나며 성황을 이루어 그 말이 빠르면서도 화려했고, 이욱은 이를 변화시켜 다소 유창하게 다듬어 그 말이 교묘하고 곡진하였으니, 두 사람 모두 이 갈래의 절정에 이르렀다고 할 만하다.
송나라의 구양수, 안수, 진관, 황정견에 이르러서는 유려하고 화려하며 웅장한 면에서는 뛰어나지만, 날카로운 맛에 있어서는 마땅히 조금 뒤떨어진다. 내가 지방관으로 요산에 있을 때, 여름철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 한가한 틈을 타서 두 사람의 작품을 가려 뽑아 서른아홉 수를 모아 한 권으로 엮고, 호를 석봉이라 하는 명필 한호에게 부탁해 이를 옮겨 쓰게 한 뒤 상자 깊이 간직해 두었다. 훗날 벼슬을 벗고 전원으로 돌아가 술 마시는 벗들을 이끌고 높은 누각에 기대어 노래를 읊으려 할 때, 이 책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권근의 응제시 뒤에 쓰다 (서기 1608년 12월 6일, 양력 추정)
문충공 권근이 외국 사신의 신분으로 명나라 천자를 알현하고 그 재주를 칭찬받았는데, 천자가 그에게 시를 내리고는 이에 화답하여 올리라는 명까지 내렸으니, 그 은총과 영광이 지극하였다. 이는 천고에 보기 드문 일이었으니, 그 자손이 이 글들을 모아 따로 책을 엮고 주석을 붙여 세상에 펴낸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그 특별한 은총과 남다른 대우가 함께 사행을 갔던 여러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명나라에 동행했던 여러 인물들이 저마다 충분히 칭송을 다하였다고 본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권근 공의 이 사행이 명나라 홍무 25년, 곧 1392년 이전에 있었더라면 더욱 빛났을 터인데, 공교롭게도 그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뜻있는 사람이라면 이를 두고 애석하게 여길 것이니, 슬픈 일이다.
《서유록》 뒤에 쓰다 (서기 1608년 12월 8일, 양력 추정)
나는 예전에 여러 통속 소설 수십 종을 구해 읽어 보았는데, 《삼국지연의》와 《수당지전》을 빼놓고는 다른 것들이 모두 시원치 않았다. 《양한지》는 앞뒤가 맞지 않고, 《제위지》는 옹졸하며, 《잔당오대사연의》는 거칠고 엉성하고, 《송태조용호풍운회》는 내용이 소략하며, 《수호전》은 간사한 속임수에 잔재주를 부렸다. 이것들은 모두 독자를 제대로 가르치기에는 부족한 것들인데, 이 여러 책이 나관중 한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고 하니, 그 자손이 삼대에 걸쳐 벙어리로 살았다는 이야기도 무리는 아닌 듯하다.
한편 《서유기》라는 책이 있는데, 어느 왕실 종친의 집안에서 나왔다고 하며, 이는 곧 현장 스님이 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 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살을 붙인 것이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석보》와 《신승전》 같은 책에 대략 나타나 있기는 하나, 반쯤은 믿고 반쯤은 의심스러운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이 책을 보니, 독특하게도 불가에서 몸과 마음을 닦는 수련의 이치를 빗대어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다. 원숭이 왕이 좌선하는 대목은 곧 몸을 단련하는 것을 뜻하고, 노조궁에서 단약을 훔치는 대목은 곧 신선의 구슬을 삼키는 것을 뜻하며, 하늘 궁전을 크게 어지럽히는 대목은 곧 잡생각을 다스려 없애는 것을 뜻하고, 삼장법사를 모시고 서역으로 가는 대목은 곧 몸속의 기운을 돌리는 것을 뜻하며, 화염산과 홍해아 대목은 곧 수련할 때의 불기운 조절을 뜻하고, 검은 물이 하늘의 강과 통한다는 대목은 곧 기운을 거두어들이는 절차를 뜻하며, 서쪽에서 다시 동쪽으로 돌아온다는 대목은 곧 서쪽의 범과 동쪽의 용이 서로 만나는 것을 뜻하고, 하루 만에 서역 십만 리를 오간다는 대목은 곧 하늘의 무수한 별을 한꺼번에 헤아린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비록 장황하고 막연하며 그 말이 다 이치에 맞는 것은 아니지만, 곳곳에서 단약을 만드는 비결을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으니 정말 하찮게 여겨 내버릴 수는 없다. 나는 이 책을 각별히 간직해 두고서, 참된 이치를 닦는 틈틈이 피곤할 때면 이것으로 졸음을 쫓아낼 생각이다.
독
머리말
내가 부안에 머물 때 딱히 할 일이 없던 차에, 마침 여러 제자백가의 전집을 구해 꼼꼼히 읽게 되었다. 그리하여 읽으며 깨달은 바를 풀어서 각 책의 끝에 적어 두었다. 이는 감히 내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보잘것없는 소견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노자 (서기 1608년 10월 16일, 양력 추정)
《노자》를 여러 장으로 나눈 것이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본래 글의 뜻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데도 억지로 끊어 놓은 곳이 있어 매우 잘못되었다. 다만 마땅히 전체를 이어서 읽어야 비로소 뜻이 통할 수 있다.
세상에서는 흔히 "《노자》는 유교의 육경에 넣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큰 도를 논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 뜻이 현묘하고 은미하여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 이는 《주역》이나 《중용》에서도 말하지 못한 것을 여기서 끄집어내어 말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노자》가 유교의 경전들과 나란히 서기를 마다하고 홀로 우뚝 떨어져 나가고 싶어 하는 까닭이니, 아, 참으로 신기한 책이다.
후세에 노자를 따르는 무리들이 그 학문을 이리저리 굴려 신비롭게 꾸며 내었고, 그것이 더 흘러가서는 몸을 단련하는 법이니 약을 먹는 법이니 부적이니 굿이니 하는 것들을 만들어 내어 괴이하고 황당하며 바르지 못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로써 세상을 현혹하고 사람을 속이는 일이 많아졌다. 이런 무리들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그 여파로 노자까지 싸잡아 비방하게 된 것이니, 괴이하고 황당한 짓거리가 어찌 본디 노자가 말한 맑고 고요함의 참뜻이겠는가. 노자의 글은 곧 경전이요, 그 뜻은 곧 그것을 풀이한 전이며, 도를 논함에 이르러서는 곧바로 하늘의 핵심을 꿰뚫었으니, 나의 재주로는 도무지 그 윤곽조차 잡을 수가 없다. 참으로 용과 같다 하겠다.
열자 (서기 1608년 10월 19일, 양력 추정)
《열자》 가운데 천서편과 황제편, 이 두 편은 도를 논한 부분이 그윽하고 미묘한 이치를 남김없이 끝까지 파고들어 숨김이 없으니, 노자의 《도덕경》이나 장자의 《남화경》과 서로 안팎을 이루어 짝할 만하며 문장 또한 예스럽고 우아하며 깊이가 있다. 그런데 그 뒤로 갈수록 문장이 차츰 흐트러지고 느슨해지며, 도리를 논한 것도 어긋나고 그릇된 곳이 많아져서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지가 않다. 그러니 한나라의 유향이 이 책을 두고 의아하게 여긴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여덟 편은 아마도 진나라가 남쪽으로 옮겨 간 이후에 여러 사람의 저술이 뒤섞여 나온 것인 듯하며, 유향이 손수 교열한 그 책은 아닌 듯하다. 장자가 자주 이름이 어구인 열자를 인용한 것을 보면 그 인물됨이나 사상이 참으로 귀하게 여길 만한데, 지금 그 온전한 책을 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내 생각으로는, 첫머리 두 편은 《열자》의 옛 판본이고, 그 나머지는 한나라 사람이나 혹은 위·진 시대 사람이 나중에 보태 넣은 것이 아닌가 한다.
장자 (서기 1608년 10월 22일, 양력 추정)
내가 어릴 때는 《장자》를 읽으면서도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문체를 살피고 구절을 따다가 글쓰기에 써먹는 정도였다. 그러다 중년에 다시 읽어 보니, 뜻이 크고 재주가 뛰어나며 생각이 황홀하여 도무지 헤아릴 수 없을 듯했지만, 이미 그 우화들이 마음에 들었고, 삶과 죽음을 똑같이 보고 얻음과 잃음을 똑같이 여기는 그 태도만큼은 소중히 여길 만하였다. 지금 다시 이 책을 보니, 담박하고 고요하며 맑고 무위한 그 사상이 은연중에 부처의 가르침과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 다만 그 아득하고 황당한 말들이 이치에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니기에 깊이 파고들지 않았으니, 그 실마리를 다 알 수는 없다.
그 가운데 대종사편에서 "안회가 가만히 앉아 사물과 나를 다 잊었다"고 한 한 구절을 유가에서는 몹시 비방하지만, 《예기》에도 "앉을 때는 마치 재계하는 사람처럼 하고, 설 때는 마치 신주 노릇을 하는 아이처럼 하라"고 하였고, 《논어》에는 "안회는 하루 종일 마치 어리석은 사람 같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앉아서 사물과 나를 잊었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또한 그 뜻을 부연하여 표현한 것일 뿐 함부로 지어낸 망언은 아니다.
그리고 "주공과 공자를 비방했다"는 말도 사실은 잘못된 것이다. 노자는 장자의 스승인데, 진일이라는 이가 노자의 죽음을 조문한 이야기를 빌려 노자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한 것은, 이 늙은이 특유의 해학적이고 능청스러운 평소 태도에서 나온 것일 뿐 참으로 비방한 것은 아니다. 천하편에서 유가를 맨 앞자리에 놓고 언급한 것을 보아도, 그가 실은 주공과 공자를 높이 받들었음을 알 수 있다.
관자 (서기 1608년 10월 25일, 양력 추정)
《관자》의 글은 뒤섞이고 겹치는 부분이 많아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지 않다. 그 가운데 심술편과 내업편 같은 것은 모두 도가의 학설을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고, 주합편을 비롯한 여러 편은 하나같이 은어를 써서 까다롭고 괴상하니, 실질적인 일을 앞세워 세상을 이끌던 관중의 학문과 방식으로 어찌 이렇게 현실과 동떨어지고 아득한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이것이 정말로 관중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는 일부러 이런 알쏭달쏭한 말을 지어 자기의 참모습을 감추어 꾸민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관중의 참뜻이 담긴 부분은 오직 목민편, 대광편, 경중편 정도뿐이며, 그 가운데서도 목민편이 가장 간단명료하다.
병사를 부리는 진법이며 농사와 누에치기 같은 살림살이의 근본을 논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조리가 정연하여 그 핵심을 정확히 짚었으니, 이를 실제 정치에 적용하자 곧바로 실효가 나타났고, 마침내 안으로는 나라와 군대를 부강하게 하고 밖으로는 이웃 나라에 위세와 패권을 떨쳐, 그 임금을 춘추오패 가운데 으뜸으로 만드는 데까지 이르렀다.
아, 세상의 도리는 이미 쇠퇴할 대로 쇠퇴하였다. 왕도 정치를 끝내 행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관중 같은 인물을 얻어 정치를 맡기고 백성을 다스릴 수 있을까?
안자 (서기 1608년 10월 28일, 양력 추정)
안영은 옛날 이른바 법가에 속하는 인물로, 흔히 "관중과 안영"이라고 나란히 일컬어진다. 이제 그의 글을 보니 다만 제나라를 섬긴 사적만을 담고 있는데, 문장이 그저 예스럽고 우아할 뿐, 정치를 일으키고 백성을 다스리는 요체를 자세히 논한 관중의 글과는 다르다. 안영은 그저 제 몸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남의 뜻을 따라 세상에서 인정받은 사람일 뿐이니, 권신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할 만하다. 만약 그가 제나라 환공의 시대를 만났더라면 그 업적은 틀림없이 관중에 미치지 못했을 것인데, 이 두 사람을 나란히 일컫는 것은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상자 (서기 1608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상앙이 처음 진나라 효공을 만나 왕도와 패도로써 설득하였으나 효공은 시큰둥하게 여겼는데,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하는 방법으로 설득하자 그제야 자리를 앞으로 당겨 다가앉으며 싫증 내지 않고 들었다고 한다. 상앙의 학문은 본디 왕도나 패도와는 거리가 멀고, 오직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만 뛰어났을 뿐이었다. 처음에 왕도와 패도로 설득한 것은 그저 말을 그럴듯하게 꾸민 것에 지나지 않았고, 결국은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을 꺼내어 진왕의 마음을 정확히 찔렀던 것이다. 그의 글은 매우 강경하고 사나워서 이 또한 진나라 이전 시대다운 필치이기는 하나, 후대 사람이 억지로 끼워 넣은 글도 많을 것으로 의심된다. 그의 글 가운데 한 편에서 말한 "부정을 고발한 사람에게는 상을 내린다"는 것이 바로 그가 평생토록 즐겨 쓰던 방편이었는데, 결국 이 방편으로 자기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니, 돌고 도는 것을 좋아하는 하늘의 이치로 보면 당연한 일이다.
후세의 군자들은 걸핏하면 왕도만을 내세우며 관중과 상앙을 하찮게 여겨 깎아내리지만, 정작 그 실제 공적을 따져 보면 오히려 이들에게 미치지 못한다. 아, 어떻게 해야 상앙 같은 인물을 얻어 그의 계책을 써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아 낼 수 있을까?
한비자 (서기 1608년 11월 3일, 양력 추정)
진나라 이전 제자백가의 글 가운데 《노자》와 《장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어떤 것은 뒤섞여 어수선하고 어떤 것은 난해하며 어떤 것은 논리가 끊어져 있다. 그런데 유독 한비자의 글만은 바르고 아름다우며 분명하고 확실할 뿐 아니라, 비슷한 말들을 엮어 일을 서술하는 데 뛰어나며, 게다가 현실 사정에 몹시 절실하니, 문장만 놓고 논한다면 참으로 대가라 할 만하다.
그 가운데서도 세난편과 팔간편이 더욱 뛰어난데, 시험 삼아 열고 닫으며 억누르고 치켜올리고 내달리다가 멈추고 끊었다가 다시 이어 가는 대목들을 살펴보면, 은연중에 후세에 글을 짓는 이들에게 문장을 촘촘히 짜고 얽어매는 방법의 실마리를 열어 준 셈이다. 그리고 옛 글이 애초에는 꾸밈없이 순박하였던 것이 이 사람에 이르러 임기응변의 계략을 갖추게 되었다. 그가 논변하는 학문은 대체로 상앙과 신불해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엄격하고 각박한 면은 오히려 그들보다 한술 더 뜬다고 하겠다.
묵자 (서기 1608년 11월 6일, 양력 추정)
묵자의 학문은 그 도의 큰 틀이 우 임금과 비슷한 점이 있어서 자주 우 임금의 도라고 일컬어지는데, 이는 마치 허행이 농사짓는 법을 닦으면서 스스로 "신농씨의 가르침을 말한다"고 일컬었던 것과 같다. 애초에는 모두 옛 성인에게서 비롯되었으나, 그 말류의 폐단이 결국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이 때문에 맹자가 있는 힘을 다해 이를 배척하였던 것이다. 유가와 나란히 일컬어지는 까닭은, 특히 어짊과 의로움에 뿌리를 두고 어진 이를 높이며 덕을 숭상하는 점이 유가와 서로 가까운 데가 있기 때문인데, 이는 옳은 듯하면서도 실은 그른 것이어서 사람을 쉬이 홀리기 딱 좋다. 그런데 한유가 "공자께서 지금 계신다면 반드시 묵자의 뜻을 받아들이셨을 것이다"라고 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인가? 그의 글은 비록 예스럽고 우아하기는 하나 간혹 뒤섞여 조리가 없으니, 혹 후대 사람이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은 아닐까?
순자 (서기 1608년 11월 9일, 양력 추정)
순황이 노자를 배척하며 "굽힐 줄만 알았지 펼 줄은 몰랐다"고 하였고, 장자를 배척하며 "하늘의 도리에 가려 사람의 일은 알지 못했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자못 타당하다. 또한 왕도를 높이고 패도를 낮추어 볼 줄 알았으며, 공자를 높이고 이단을 배척할 줄 알았으니, 이 점에서는 맹자 이후 첫손에 꼽을 만하다. 다만 그 타고난 성품이 거만하고 어리석어서 함부로 도를 안다고 자처하며, 증자와 자사, 맹자를 제쳐 두고 곧장 공자의 학통을 직접 이으려 하였으므로, 이론을 세우고 가르침을 전하는 데 있어 다른 유학자들과는 다르게 하려고 애를 썼다. 맹자가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고 하자, 순황은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고 말하여 맹자를 이기려 하였으나 끝내 이기지 못했다.
만약 순황이 순순히 자사와 맹자의 학통을 지키고 남다른 학설과 특이한 논변을 애써 내세우지 않았더라면, "작은 흠이 있다"는 배척이나 "가린 것이 정밀하지 못하고 말이 자상하지 못하다"는 한유의 꾸짖음이 대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오로지 거만하고 어리석어서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며 제멋대로 행동하였기 때문에, 그의 학문이 한 번 전해지자 이사와 한비자의 사상으로 변질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양자 (서기 1608년 11월 12일, 양력 추정)
순황은 스스로 자기 학문을 크게 떠벌리고 스스로 자기 지혜를 남다르게 여겨 다른 제자백가들보다 뛰어나고자 하였고, 양웅은 스스로 자기 학문을 낮추고 스스로 자기 지혜를 겸손하게 여겨 성인의 뜻에 부합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두 사람 모두 지혜로운 이들에게 배척을 받았으니, 이들이 도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양웅이 《법언》을 지을 때는 《논어》를 본떴고, 《태현》을 지을 때는 《주역》을 본떴는데, 이는 그의 마음속에 자기 학문이 성인에 미치지 못하고 자기 지혜가 다른 제자백가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여겨, 따로 새로운 이론을 세워 경전을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 책을 지어 성인의 뜻에 부합하고자 하였으니, 그 뜻이 자못 고루하다. 그가 어렵고 심오한 말을 즐겨 쓴 까닭은 얕고 보잘것없는 자기 학설을 그럴듯하게 꾸미려 했기 때문이니,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오히려 더 얕아 보이고, 깊으면 깊을수록 오히려 더 얄팍해 보이며, 통하면 통할수록 오히려 더 막혀 보여서, 결국 그 옹졸함을 가리지 못했다.
만약 양웅이 이런 일을 벌이지 않고 그저 시와 부만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더라면, 사람들이 그의 잘잘못을 굳이 따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온 정신과 힘을 쏟아부어 유학의 학통에 부합하고자 애쓰다가, 결국 왕망의 신하라는 손가락질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양웅의 허물은 고루함에 있고 순황의 잘못은 스스로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데 있으니, 차라리 고루할지언정 그처럼 어리석어서는 안 될 일이다.
(용어) "왕망의 신하"라는 말은, 한나라 말에 왕망이 한나라 황실을 찬탈해 나라 이름을 신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라 칭했을 때 양웅이 절개를 잃고 왕망 밑에서 벼슬을 지냈다 하여, 훗날 송나라의 주희가 역사책 《자치통감강목》을 지으면서 그를 낮추어 부른 데서 나온 말이다.
자화자 (서기 1608년 11월 15일, 양력 추정)
세상에서 흔히 자화자라고 부르는, 춘추시대 진나라 사람 정본이라는 이 인물은, 공자가 길을 가다가 마주쳐 마치 오래 사귄 벗처럼 여기며 수레의 덮개를 서로 기울인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전해지는 사람이니, 이 사람은 틀림없이 도를 아는 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책을 살펴보니, 문장이 매우 조잡하게 끊어지고 잡다한 글이 많이 섞여 있는데, 《순자》, 《맹자》, 《국어》, 《노자》, 《장자》, 《소문》, 《한비자》, 《초사》 같은 여러 책의 문장을 죄다 그러모아 마치 백가의 옷을 얻어 입힌 것 같으니, 이는 틀림없이 한나라 시대 유학자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도를 아는 자화자 같은 이가 어찌 이러하겠는가.
다만 그 마지막 편에서 한 말은, 비록 도의 근원을 밝히지는 못했으나 그 뜻이 그런대로 좋고 문장도 뛰어나다. 그 가운데 "사람의 수명이 얼마나 된다고 자신을 알아줄 날이 오기를 기다린단 말인가"라고 한 말은, 아마도 당시 여러 나라가 구름처럼 어지러이 다투고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때를 만나지 못한 선비들을 슬퍼하여 한 말인 듯하다. 이것이 곧 자화자가 직접 지은 글인데, 진나라의 분서 통에 그의 전집이 사라져 버리자 후대 사람이 이 한 편을 빌미 삼아 나머지를 위조해 지어내어 전한 것이 아닐까 한다.
손자 (서기 1608년 11월 18일, 양력 추정)
춘추전국 시대 이래로 병법을 논한 사람으로는 손무 한 사람뿐이다. 후세에 용병을 잘한다는 이들도 그의 그릇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비록 왕도를 이룬 임금의 스승이라 할 수는 없어도 참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글도 풀었다 잠갔다 열었다 닫았다 하는 대목들이 있어 마디마디 정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진나라 이전 제자백가의 글 가운데 한비자와 손무가 최고의 문장가로서, 간절하고 분명하게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다른 이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오자 (서기 1608년 11월 21일, 양력 추정)
어떤 이가 이르기를 "손자는 오로지 임기응변의 권도에만 능했고, 오기는 정도에 가까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손무가 오기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는 다만 오기의 책이 예의를 숭상하고 가르침을 밝히면서 주나라 시절의 사마 병법을 인용한 것을 보고서 그의 병법이 정도에 가깝지 않은가 여긴 것일 뿐이니, 이는 오기가 겉으로 꾸민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기가 군사를 부리는 임기응변의 술수는 모두 손무의 병법을 근본으로 삼은 것인데, 다만 이따금 따로 잔재주를 부려 스스로 그 흔적을 감추었을 뿐이다. 손무와 마찬가지로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고 할 만하지만, 그 계략의 깊이는 손무가 더 낫다. 그 글이 간결하고 절실한 점도 손무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그에 못 미친다.
여자 (서기 1608년 11월 24일, 양력 추정)
《여씨춘추》는 곧 《여자》라고도 불린다. 옛날에는 이치를 논하고 사물을 논한 책을 모두 "춘추"라고 일컬었기 때문에 《안자》도 《춘추》라 불렀던 것이니, 이 책을 《여자》라 부르는 까닭도 이와 마찬가지다. 여불위가 이 책을 만들 때, 자신이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천하의 뛰어난 변론가들을 모아들여 그들의 말을 채집하고 기록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 글이 정연하거나 능숙하지 못하여 어떤 곳은 매우 바르고 어떤 곳은 매우 잡되고 거칠다. 그 까닭을 따져 보면, 여불위가 이를 제대로 가려내고 버리지 못하여 그대로 함께 보존한 채 후세에 전해진 것이다. 그 가운데 팔람은 문장이 가장 예스럽고 우아하므로, 후세에 글을 짓는 이들이 이를 따로 《여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회남자 (서기 1608년 11월 27일, 양력 추정)
유안은 손님을 좋아하여 손님이 머물 집을 비워 두고 뛰어난 인재들을 대접하였으니, 대산과 소산, 그리고 팔공이라 불리는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고 기이한 인물들로, 그 말솜씨는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일을 꿰뚫기에 충분하였고, 문장은 제자백가를 두루 아우르기에 충분하였다. 그리하여 이들과 함께 이 책을 지었는데, 대체로 유가, 도가, 명가, 법가 등 여러 학파와 천문, 지리, 역법, 양생술 같은 학설이 두루 뒤섞여 나와, 폭넓게 종합하고 갖추 관통하여 광대하고 해박하니 참으로 완비되었다고 이를 만하다. 다만 그 말들이 서로 어긋나고 뒤섞여 조리가 딱 들어맞지 않으니, 이 역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 《여씨춘추》의 경우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한서》에서는 "유안이 반역죄로 처형되었다"고 하였고, 《신선전》에서는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였으니, 이는 혹 팔공의 무리가 세상을 현혹하려고 지어낸 말이 아닐까? 위백양의 《참동계》에도 그가 신선이 되어 떠났다는 말이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 혹 그 진짜 사실을 꺼려 숨긴 것은 아닌지, 분명히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그의 문장이 웅장하고 걸출하며,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고 음양의 원리를 탐구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또한 크게 남보다 뛰어난 데가 있으니, 전한 시대 제자백가 가운데 그가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 할 만하다.
문중자 (서기 1608년 11월 30일, 양력 추정)
왕통의 글은 육조 시대 이후에 나왔기 때문에 그 문장에 힘이 없다. 그가 지은 《속고시》, 《원경》, 《중론》은 각각 《시경》, 《춘추》, 《논어》를 본떠 지은 것으로, 그 논설이 모두 왕도 정치에서 우러나온 것이므로, 옛사람 가운데는 이를 두고 유교 경전들의 종노릇을 한다고 견준 이도 있었다. 종이라는 신분은 참으로 천하지만, 정말로 성인의 종이 되었다면 그 또한 성인의 문 앞이나마 엿본 셈이니, 성인의 경전을 벗어나 도를 저버리고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하는 잘못에 빠진 자들과는 그 거리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 것이다.
성소부부고 제14권
9. 22:23
출처: 성소부부고 제14권
배경: 제14권에는 잠(스스로를 경계하는 짧은 글), 명(사물이나 거처에 새겨 두는 글), 송(공덕을 기리는 글), 찬(인물이나 그림을 기리는 글)이 두루 실려 있다. 자신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다잡는 개인적인 글에서부터, 돌아가신 선조 임금을 그리워하는 글, 강릉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김유신 산신 신앙을 기리는 글, 그림 속 부처와 신선들을 노래한 연작까지 폭넓게 담겨 있어, 허균의 내면과 신앙, 예술적 취향이 두루 드러난다.
문부 11 · 잠
졸음을 경계하는 글 (서기 1611년 1월 20일, 양력 추정)
세상 사람들은 잠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밤이면 으레 밤새 자고도 낮에 또 눈을 붙이는 이가 많다. 그러다 잠이 조금만 부족해도 다들 병이라도 난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 서로 안부를 물을 때도 으레 먹는 것과 함께 묶어 "잠은 잘 주무시고 진지는 잘 드십니까?" 하고 묻는다. 이것만 보아도 사람들이 잠을 얼마나 대단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젊었을 때는 잠이 적어도 별로 앓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서는 잠은 오히려 늘었는데도 몸은 갈수록 약해지기만 한다. 그런데도 나는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잠이라는 것이 바로 병으로 가는 길이었다.
사람의 몸은 혼과 백, 이 두 가지가 함께 움직여 나간다. 혼은 양이고 백은 음이다. 음의 기운이 강해지면 몸이 약해지고 병들며, 양의 기운이 강해지면 몸이 건강하고 병이 없다. 그런데 잠을 자면 혼은 몸 밖으로 나가고 백만 홀로 안에서 움직이게 되니, 음의 기운이 강해져서 몸이 약해지고 병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반대로 잠을 자지 않으면 혼이 제 역할을 하여 백을 잘 다스려서, 음이 양을 침범하지 못하게 막아 준다.
그러니 잠을 너무 많이 자서는 안 된다. 불경에 이르기를 "번뇌는 독사와 같으니, 잠이 그대 마음에 자리 잡으면 바로 그 독사가 된다. 이 독사를 몰아내야만 비로소 편안히 잠들 수 있다"라고 하였다. 세상의 잠꾸러기들은 다들 이 독사 같은 번뇌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잠을 짓고 스스로 경계로 삼는다.
아, 늘 깨어 있으려는 이 늙은이여
눈은 잠들어도 마음은 잠들지 말라
눈만 잠들면 마음으로 얼마든지 밝힐 수 있지만
마음까지 잠들면 음의 기운이 밀려와 덮쳐 온다
음의 기운이 밀려와 양의 기운이 깎이면 몸은 변하여 음이 되고 마니
그리되면 귀신과 하나가 되어 버릴 것이다
아, 두렵고 두렵구나, 늘 깨어 있으려는 이 늙은이여
(용어) "늘 깨어 있으려는 늙은이"란 허균이 스스로를 부르던 호를 풀어 옮긴 것이다.
순리에 몸을 맡기며 스스로 경계하는 글 (서기 1611년 1월 22일, 양력 추정)
몸을 고요함에 내맡기면 몸이 순리를 따르게 되어 하늘이 정한 운명에 몸을 맡기게 되므로 남과도 잘 어울릴 수 있고, 마음을 훤히 트인 데 내맡기면 마음이 순리를 따르게 되어 도에 몸을 맡기게 되므로 만물과도 잘 어울릴 수 있으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에 내맡기면 세상이 순리를 따르게 되어 때에 몸을 맡기게 되므로 온갖 변화에도 잘 대응할 수 있고, 일을 자연스러운 흐름에 내맡기면 일이 순리를 따르게 되어 이치에 몸을 맡기게 되므로 갖가지 일에도 잘 대응할 수 있다. 이렇게 내맡기고 순리를 따르고 잘 대응할 수 있으면, 쓸데없는 생각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아 마음을 갈고닦을 수 있게 된다.
내맡길 수 있으면 화를 내지 않게 되고, 순리를 따를 수 있으면 남과 다투지 않게 되며, 잘 대응할 수 있으면 그 쓰임이 끝없이 이어져서, 마침내 바르고 참되어 고요함에 이르면, 밝은 달과 맑은 물결처럼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어지러운 생각을 갈고닦을 수 있고 타고난 성품과 목숨의 이치를 바로 세울 수 있으니, 이것으로 세상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는 셈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잠을 짓는다.
어지러운 생각을 갈고닦는 글 (서기 1611년 1월 24일, 양력 추정)
마음의 본바탕은
맑고도 깨끗하여
움직이지 않을 때는
물처럼 맑고 거울처럼 밝다
더없이 비어 있으면서도 더없이 신령하고
더없이 신묘하면서도 더없이 순수하니
한 기운이 근원으로 통하여
냄새도 없고 소리도 없다
그런데 조금만 마음을 놓아두면
쓸데없는 생각이 문득 일어난다
이것저것 갈피를 잃고
미친 듯 놀란 듯 흔들리니
슬픔과 기쁨, 즐거움과 노여움
막힘과 트임, 시듦과 번영이
헛된 것이 또 다른 헛된 것을 낳아
백 가지 생각이 뒤엉켜 다툰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마음은 눈먼 사람처럼 어두워져서
업을 짓고 화를 불러들여
악한 길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저 도에 이른 사람은
화의 싹을 미리 알아차려서
쓸데없는 생각 보기를 원수 보듯 하고
쓸데없는 생각 두려워하기를 무기 대하듯 하며
쓸데없는 생각 감추기를 보물 감추듯 하고
쓸데없는 생각 지키기를 성을 지키듯 하여
부지런히 또 부지런히 마음을 다잡아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한다
그렇다면 그 갈고닦는 방법은 무엇인가
고요하게, 한결같이, 정성을 다해
갈고닦고 또 갈고닦아
억지로 하지 않음으로써 굳혀 나가는 것이다
갈고닦으면 성인이 되고
갈고닦지 않으면 평범한 사람으로 그친다
이 지극한 도를
누가 처음으로 애써 말로 남겼던가
황제 헌원씨가
광성자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갈고닦으면
하늘의 옥황상제 계신 곳에도 나아가 뵐 수 있으리라
(용어) 광성자는 아주 오랜 옛날의 신선으로, 공동산의 동굴에 숨어 살았다고 전해진다. 황제 헌원씨가 일찍이 그에게 도의 요체를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문부 11 · 명
각헌명 (서기 1611년 2월 1일, 양력 추정)
사람이란 오직 하나의 깨어 있는 성품, 곧 '깨달음'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깨달음' 이 한 글자만으로도 의심과 삿된 생각을 끊어 낼 수 있고, 그릇된 마음과 헛된 생각을 없앨 수 있으며, 뒤섞이고 어지러운 것을 하나로 가지런히 할 수 있고, 참되고 한결같은 본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
사람의 기운이 참으로 맑고, 몸과 마음이 참으로 훤히 트여 밝다면, 삿된 기운이 어디로 비집고 들어오겠는가. 다만 마음이 절로 어둡고 어지러워져서 보고 판단하는 것이 뒤집히기 때문에, 바깥의 삿된 기운과 낯선 기운이 그 틈을 타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바깥의 삿된 기운과 낯선 기운도 알고 보면 내 마음의 판단이 뒤집힌 데서 생겨나는 것이지, 정말로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내 안이 스스로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바깥의 삿된 기운'이라 부르는 것이고, 내 마음에 스스로 중심을 잡는 바가 없기 때문에 '낯선 기운'이라 부르는 것일 뿐이다. 사람의 깨어 있는 성품이란 이토록 쉽게 흐려진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깨어 있는 성품은 오직 정성으로 길러야만 밝아지고, 흔들림 없는 안정으로 지켜야만 맑아지니, 맑음과 밝음이 극에 이르러야 비로소 도를 이룰 수 있다. 온갖 정성을 다해 귀신을 섬기는 것도, 사실은 내가 본래 타고난 자연스러운 성품을 잘 섬기는 것만 못하다.
나는 이 말을 가슴에 깊이 새겨 두었기에 내 서재의 이름을 '각헌', 곧 '깨달음의 집'이라 짓고, 그 이름에 걸맞게 다음과 같이 새겨 둔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타고난 성품이 있어
깨달으면 어둡지 않으나
깨닫지 못한 자는
물욕에 뒤섞여 어두워진다
거울에 먼지가 낀 것과 같아서
그 먼지를 털어 내면 다시 맑아지듯
깨달은 뒤에는 성품이 온전히 둥글어져
크고 맑은 거울과 같아진다
밖으로는 헛되고 삿된 것을 막아 내고
안으로는 맑고 밝은 것을 지켜 나가니
그 맑음과 밝음은
공경과 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신선의 것도 아니요
부처의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성인만의 것도 아니니
오직 이 마음으로 하늘을 마주하는 일일 뿐이다
누추한 집에 새기는 글 (서기 1611년 2월 5일, 양력 추정)
내 방은 너비가 두어 평 남짓
남쪽으로 문 두 짝을 내었더니
한낮의 햇살이 그대로 들어와
이미 밝고도 따뜻하다
집이라야 그저 벽만 서 있을 뿐이지만
책만큼은 그런대로 갖출 것 다 갖추었다
쇠코잠방이 하나 걸친 이 몸이지만
탁문군의 짝이었던 사마상여와 다를 바 없다
차 반 사발을 기울이고
향 한 자루를 피우면서
세상을 등지고 조용히 지내며
하늘과 땅, 옛날과 오늘을 가늠해 본다
집이 누추한데 어떻게 사느냐고
남들은 말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곳이 바로 신선의 세계다
내 마음이 고요하고 이 몸이 편안한데
그 누가 이곳을 누추하다 하겠는가
내가 정작 누추하다고 여기는 것은
몸과 이름이 함께 스러져 가는 일이니
옛날 원헌은 쑥대로 엮은 지게문 아래서 살았고
도잠 또한 다 낡은 떼집에서 살았다
군자가 산다면
그곳이 누추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용어) 원헌은 공자의 제자로, 몹시 청빈하게 살아 지게문을 쑥대로 엮어 달고 지붕을 풀로 이은 집에서 지냈다고 한다. 도잠은 동진 시대의 시인으로, 역시 청빈하여 바람과 햇빛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다 낡은 집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쇠코잠방이 하나 걸친 이 몸이 탁문군의 짝"이라는 구절은, 한나라 때 사마상여가 부유한 집안의 딸 탁문군과 어렵게 혼인한 뒤 함께 술장사를 하며 살았는데, 탁문군은 술을 팔고 사마상여는 다 낡은 잠방이 차림으로 궂은일을 도맡았다는 옛이야기를 빌려 온 것이다.
꿈에 네 가지 물건을 받고 새기는 글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신해년(1611년, 광해군 3년) 2월 보름날, 꿈속에서 선정전으로 들어갔더니, 돌아가신 선조 임금께서 네모난 관을 쓰시고 하얀 홑저고리 차림에 띠도 두르지 않은 채 뒷간으로 가고 계셨는데, 궁녀 둘과 내시 하나가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내가 엎드려 절을 올리니 임금께서 "너는 어찌하여 띠도 없고 신도 없고 붓집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조금 뒤에 어린 궁녀가 누런 무소뿔 띠 하나와 꽃무늬를 놓은 금띠 하나, 중국식으로 만든 초록 비단신 한 켤레, 그리고 다홍빛 모시실로 엮은 주머니에 담긴 족제비털 큰 붓 두 자루를 직접 내게 가져다주었다.
내가 먼저 신을 신고 붓 주머니를 차고서 내 몸을 돌아보니 이미 은띠를 두르고 있었으므로, 그 위에 차마 겹쳐 두르지 못하고 물러나 엎드렸더니, 임금께서 "그 위에 덧대어 두르거라" 하셨다. 내가 무소뿔 띠부터 먼저 집으려 하자 임금께서 다시 "먼저 금띠를 두르고, 그다음에 무소뿔 띠를 둘러라" 하셨다. 내가 먼저 금띠를 둘러 보니 그 만듦새가 무척 좁고 가벼웠다. 이어 무소뿔 띠를 둘러 보니 아주 넉넉하고 묵직했다. 일어나서 막 절을 올리려는데 몸이 굽혀지지 않았다. 임금께서 "꿇어앉아라" 하시기에, 내가 그대로 꿇어앉아 인사를 올리려는 순간 그만 꿈에서 깨고 말았다. 아, 참으로 이상한 꿈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이 네 가지 물건에 대한 명을 짓는다.
무소뿔 띠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불그스름하고 푸르스름한 그 무늬여
결은 희디희구나
빛깔조차 한가운데를 상징하듯
안팎이 온통 노랗게 트여 있다
네가 차기에 꼭 알맞으니
넉넉하고도 치렁치렁하구나
금띠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금못을 다닥다닥 박은 아름다운 드림이여
백 번을 불려 낸 순금 띠로다
임금께서 내려 주신 것이니
이 띠를 두르고 조정에 나아가야지
붓주머니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고운 비단으로 지은 조붓한 띠에
붓 두 자루가 담겨 있구나
임금의 조서를 짓는 자리를 맡은 이라면
마땅히 이것을 차고 다녀야 하리
문장으로 이루는 큰 업적, 영원히 스러지지 않을 이름을
그대에게 내려 주노라
신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물결무늬가 아른아른하고
푸른빛이 짙게 감도는구나
군자가 신는 신이니
순하면서도 곧다
옛 순임금의 신하였던 고요의 걸음걸이와 설의 발걸음에도
오직 너의 곧은 소리만이 따라 울렸으리라
(용어) 고요와 설은 순임금을 보좌한 어진 신하들로 전해진다.
벼루에 새기는 글 (서기 1611년 3월 30일, 양력 추정)
철철 흘러넘치는 아홉 물줄기가
흐르고 흘러 큰 바다로 들어간다
그 바닷속에서 기이한 돌 하나가 났으니
겉은 붉고 속은 푸르구나
그 돌을 다듬어 용의 꼬리 모양으로 새기고
갈고 또 갈았더니
봉황의 부리처럼 빛이 나고
구관조 눈처럼 반짝반짝하는구나
갈고 또 적셔 가며
잠시도 손을 멈추지 못하겠다
임금의 역사를 누가 엮어 내며
깊은 경전의 주석을 누가 낼 것인가
내 글은 내가 짓는 것이지만
오직 너의 신령한 힘을 빌릴 뿐이니
서로 따르며 저버리지 말고
남은 삶을 함께 마치자꾸나
(용어) "구관조 눈"이란 좋은 벼루의 표면에 나타나는, 눈 모양의 무늬를 가리킨다. 예로부터 귀하게 여겨 온 벼루의 무늬다.
문부 11 · 송
임금의 편지를 기리는 글 (서기 1611년 3월 17일, 양력 추정)
돌아가신 선조 임금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벌써 세 해가 지났다. 그런데도 위로는 벼슬하는 이들부터 아래로는 평범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안팎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하루도 다름없이 임금의 훌륭한 덕을 그리워하며 차마 잊지 못하고, 흐느껴 울며 사모하기를 마치 이제 막 돌아가신 날인 양 하고 있다.
나의 큰형님께서 아우인 나 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선왕의 덕을 신하 된 자로서 고맙게 여기고 떠받들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나는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던 신하로서 벼슬이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을 뿐 아니라 왕실과 사돈까지 맺었으니, 수십 년 동안 유난히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병이라도 앓으면 임금께서 어의를 보내 병을 살피게 하시고 이어 약까지 보내 주셨으며, 궁중 부엌의 진귀한 음식을 잇달아 내려 주시기까지 하셨으니, 마음과 뼈에 새길 만한 그 은혜는 지금 흐느껴 울며 사모하는 안팎의 신하와 백성들에 견주어도 실로 갑절은 될 것이다.
내가 병조판서가 되던 날, 임금께서는 친히 편지를 내려 그 자리에 나아갈 것을 친절히 타이르시고, 한편으로는 미리 대비책을 세우라고 권면하셨는데, 그 말씀의 간절함이 마치 여염집 식구끼리, 혹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귀를 잡아당겨 들려주고 눈앞에서 타이르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그 말씀을 받들어 일을 처리함에 감히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나를 낳고 길러 주신 것과 다름없는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는 재주도 지혜도 부족하여 끝내 그 뜻의 만분의 일도 제대로 받들지 못하였다.
이 편지는 문장이 아름답고 필세가 힘차며, 타이르시는 말씀은 참으로 《서경》에 실린 요임금의 훈계, 우임금의 계책과 다를 바 없으므로, 받들어 읽고 손으로 어루만지며 음미할 때마다 황홀하기가 마치 임금의 깃발 끝에 이는 먼지를 바로 우러러보고, 임금을 모시고 따르는 수레바퀴 소리를 들으며 그 모습을 직접 뵙는 듯하다. 나는 돌아가신 임금님을 사모하는 마음에, 삼가 장인을 시켜 이 편지를 곱게 꾸미게 하여 아침저녁으로 펼쳐 보고 완상하고 있다.
너는 일찍이 글솜씨로 임금의 칭찬을 받았고, 또한 지난날 대궐에서 붓을 귀에 꽂고 글 쓰는 일을 맡았던 신하이니, 송을 지어 우리 자손들에게 전해서 먼 후손들까지도 이 일을 잊지 않게 하여라."
이 말씀을 듣고 신 균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아뢰고 송을 짓는다.
"선왕께서는 신하를 지극히 정성스럽고 돈독하게 대해 주셨고,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기리고 사모하는 저희 아랫사람들 또한 충성과 정성을 다하였으니, 이 두 가지는 모두 글로 엮어 둘 만합니다. 더구나 선왕의 은덕이 뭇 백성에게 따뜻하게 미친 지가 마흔두 해나 되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미천한 백성일지라도 그 은덕을 슬퍼하고 읊조릴 줄 아는데, 하물며 저처럼 어려서부터 대궐을 드나들며 친히 임금의 훌륭한 덕을 우러러보고 하나하나 이루어 주심을 입은 자로서, 어찌 임금을 기릴 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하옵건대 우리 선조 임금님
그 덕은 하늘이 내려 주신 것
몸소 온 벼슬아치를 거느리시고
하늘과 땅과 사람의 도리를 새롭게 하셨네
한결같으신 그 마음을 누가 알아 맞추었나
오직 우리 대대로 임금을 섬긴 신하들뿐이었네
오직 충성되고 곧았기에
대궐에서 칭찬과 권면을 받았네
내 그대의 벼슬을 가려
병조판서로 삼으니
내 군사를 보살피되
군율을 씩씩하게 세우라
그 누가 우리 땅을 넘보며
그 누가 그대의 말을 가벼이 여기리
그대의 계책을 그대 스스로 헤아려
나의 국경을 튼튼히 하라
이에 아름다운 종이 위에
임금의 붓끝을 적시니
해와 별처럼 빛나고
구름과 노을처럼 찬란하다
뜻은 바르고 말씀은 간절하니
《서경》의 요전과 우모 같아라
나라를 꾸려 갈 계책을
병조판서인 그대에게 내리노라
형님께서는 절하고 이 글을 받아
서두르지도 게으르지도 않게
한결같이 가르치고 정돈하시니
이로써 군대가 잘 다스려졌네
오직 이 편지만이
집안에 간직되어 남았을 뿐
임금 계시던 그 시절은 아득히 멀어졌으니
눈물 흘리며 탄식한들 무엇하리
옥처럼 보배로이 간직하는 것은
오직 임금께서 내려 주신 것이기 때문
맑으신 모습을 그리며
그 붓 자국을 어루만지네
펼쳐 보고 다시 펴 보니
무지개 빛이 난간에 비치는 듯하고
엎드려 소리 내어 읽어 보니
임금의 말씀이 또렷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선왕의 덕은
하늘과 같고 아버지와 같으니
백성 된 자로서 그 누가 그리워하지 않으리오
어찌 나 홀로 그리워하겠는가
아, 우리 형제와
자식들, 손자들까지
아, 몇천만 년이 흐르도록
우리 임금의 은혜를 기리고 또 기리리라
(용어) "대사마"는 병조판서, 곧 지금으로 치면 국방을 총괄하는 벼슬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다. "총재"는 이조판서, 곧 관리들의 인사를 총괄하는 벼슬을 이르는 옛말이다. 요전과 우모는 유교 경전인 《서경》에 실린 편명으로, 요임금과 우임금이 남긴 훈계와 계책을 적은 글이다. 여기서는 선조 임금의 편지가 그만큼 훌륭하다는 뜻으로 빗댄 것이다. "아름다운 종이"라 옮긴 것은 원래 촉 지방에서 나던 열 가지 채색 종이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채색 무늬가 놓인 고급 종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성옹을 스스로 기리는 글 (서기 1611년 1월 28일, 양력 추정)
성옹이 대체 누구이기에
감히 스스로 제 덕을 기리려 하는가
그의 덕이 어떠하냐 하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데다 무식하기까지 하다
무식한 정도가 아니라 고루하고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라 미련하다
그렇게 미련하고 고루한 것을
대체 무슨 자랑거리로 내세운단 말인가
고루하니 성급하게 굴지 않고
미련하니 화를 내지 않는다
화도 안 내고 성급하지도 않으니
겉으로 보기엔 그저 못나 보일 뿐이다
온 세상이 허겁지겁 달려가는 그 길을
성옹만은 따라가지 않고
남들은 다들 고생스럽다 여기는 것을
성옹만은 달갑게 여기니
마음은 편안하고 정신은 맑아서
못나고 고루해 보여도
그 속의 정기는 오히려 단단히 뭉쳐 있다
어리석고 무식하니
형벌을 받아도 두려워하지 않고
좌천을 당해도 슬퍼하지 않는다
헐뜯든 꾸짖든 내버려 두고
그저 기뻐하고 즐거워할 뿐이니
제 스스로 이렇게 송을 짓지 않는다면
그 누가 그대를 기려 주겠는가
성옹이 대체 누구인가
바로 단보, 허균 그 사람이다
(용어) 단보는 허균의 자이다. 성옹은 허균이 스스로에게 붙인 호로, "늘 깨어 있는 늙은이"라는 뜻이다.
문부 11 · 찬
대령산신을 기리는 글 (서기 1603년 6월 13일, 양력 추정)
계묘년(1603년, 선조 36년) 여름이었다. 나는 명주, 지금의 강릉 땅에 있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5월 초하루가 되면 대령신을 맞이하는 풍속이 있었다. 그 까닭을 아전의 우두머리에게 물었더니 그가 이렇게 답했다.
"대령신이란 바로 신라의 대장군 김유신 공입니다. 공이 젊었을 때 이곳 명주에서 공부하였는데, 산신이 검술을 가르쳐 주었고, 명주 남쪽에 있는 선지사라는 절에서 칼을 만들었는데, 아흔 날 만에 불 속에서 꺼내니 그 빛이 햇빛도 무색하게 할 만큼 번쩍였다고 합니다. 공이 이 칼을 차고 다녔는데, 화가 나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오곤 했다고 하며, 끝내 이 칼로 고구려를 쳐부수고 백제를 평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대령산의 산신이 되어 지금까지도 신령스러운 자취를 보이고 있으므로, 고을 사람들은 해마다 5월 초하루가 되면 깃발과 일산과 향과 꽃을 갖추어 대령에서 신을 맞이하여 명주부의 관아에 모십니다. 그렇게 닷새가 되는 날에는 온갖 놀이를 벌여 신을 기쁘게 해 드립니다. 신이 기뻐하면 하루 종일 일산이 쓰러지지 않아 그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노하면 일산이 쓰러져 그해는 반드시 바람의 재해나 가뭄이 든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상하게 여겨 그날 직접 가서 지켜보았다. 과연 일산이 쓰러지지 않으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환호성을 지르고, 경사스러운 일로 여겨 서로 손뼉을 치며 춤을 추었다.
내 생각에 이 공은 살아서는 왕실에 큰 공을 세워 삼국을 통일하는 큰 업적을 이루었고, 죽어서는 수천 년이 지나도록 오히려 이 백성에게 화와 복을 내려 그 신령스러움을 드러내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기록해 둘 만한 일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음과 같이 찬을 짓는다.
갸륵하여라, 귀한 가문의 후손이여
씩씩하고도 우람하도다
나라의 용맹한 장수가 되어
북채를 들고 장수의 단에 올랐다
무장을 갖추고 군문에 나서니
그 기상이 고구려와 백제를 삼킬 듯하고
용맹한 장수들을 채찍질하듯 이끌며
날쌘 정예부대를 몰고 나아갔다
날카로운 칼을 허리에 차고 가니
곤오산에서 나는 쇠붙이로 벼린 칼이다
시뻘겋고도 아름다워
당장이라도 붉은 불꽃을 뿜어낼 듯하다
웅진에서 적장의 목을 베고
당나라의 배 만 척이 와서 도왔다
백마강에서 약속한 때를 놓치자
백제의 삼군이 두려움에 떨었는데
공의 수염이 분노로 곤두서서
칼을 어루만지며 큰 소리로 꾸짖으니
붉은 용이 번득이는 듯하고
놀라운 번개가 칼집을 에워싸는 듯했다
마침내 임금의 군대가 힘을 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꿈틀대던 고구려 무리가
서쪽 변방에서 날뛰자
군사를 풀어 가서 치니
황제의 위엄이 우레처럼 떨쳐 울렸다
동쪽 군사 일만 명을 거느리고
북을 울리며 앞장서서
긴 창을 모아 세차게 무찌르니
멧부리가 쪼개지고 연못이 치솟아 오를 듯했다
갑옷을 쌓아 두고 창을 내던지니
소라바다에 썩은 시체가 겹겹이 쌓였다
당나라 장수 이적이 웃음을 지으니
칠부의 군졸들이 땅에 무릎을 꿇었다
이웃 나라의 발악을 없애고 나니
나라의 근심거리가 사라졌다
해와 달도 툭 트여 맑아지고
하늘과 땅도 다시 빛을 발했다
삼한의 강토를 에워
모조리 나라의 판도 안에 거두어들이니
그 큰 공훈을 종묘의 그릇과 깃발에 새기고
역사책에 실어 영원히 빛나게 하였다
동해의 동쪽 땅에서
그 공에 견줄 이가 없다
웅장한 풍모와 빼어난 기개가
어느덧 수천 년이 지났건만
대령산 꼭대기에서
지금까지도 제사를 받고 계시니
해마다 올리는 향불을
누가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공의 넋은 어둡지 않으시니
내려 주시는 복도 크고 크다
구름을 타고 바람결에
살포시 내려오시네
오곡은 무르익어 풍년이 들고
백성에게는 재앙이 없다
동해 바다는 넘실넘실
오대산은 굽이굽이 들쭉날쭉
천추만대에 이르도록
이 향불이 어찌 끊이겠는가
이 몸 또한 공과 같은 겨레요
같은 강릉 땅의 백성이기에
이제 이렇게 송을 지어
우리 신령을 찬양하노라
(용어) 오구는 갈고리 모양으로 생긴 명검의 이름이다. 이적은 당나라의 장수로 영국공에 봉해진 인물이다.
교리 이여를 기리는 글 (서기 1611년 3월 5일, 양력 추정)
이 선생 여는 진천 사람이다. 그 형인 박사 이치와 더불어 성리학에 밝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고 지조와 행실이 매우 독실하였다. 형인 박사 이치는 끝내 벼슬길에서 크게 뜻을 펴지 못하였으나, 선생은 영정왕, 곧 인종의 눈에 들어 10여 년 동안이나 각별한 은총을 받았는데, 아침저녁으로 강론하며 임금의 훌륭한 덕을 이루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왕은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 문학과 함께 있으면 마치 얼음처럼 맑은 옥항아리 속에 들어간 듯하여, 내 마음속 비루한 생각의 꼬투리마저 사라짐을 느낀다."
교리 벼슬에 있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니, 왕은 몹시 슬퍼하며 친히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 주었다. 내가 일찍이 사관이 되어 여러 서고에 간직된 귀중한 문서들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선생의 행적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고, 야사를 다룬 이들이나 옛일을 기록해 온 이들의 글까지 찾아보았지만 역시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께서 일찍이 이 선생께 《주역》을 여쭈어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적에 집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어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너무 오래 흐르면 이런 사실이 아예 전해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이를 위해 찬을 지어 기록해 두니, 그 찬사는 다음과 같다.
진실하도다, 선생이여
유학자 중의 유학자로다
《대학》에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법을 배우고
《중용》에서 정성을 다해 성품을 밝히는 법을 배웠는데
공은 이를 배우면서
증자와 자사를 본받았다
복희씨와 문왕과 공자가 이룩한 《주역》
그 속의 효와 상과 길흉의 이치를
공은 남김없이 밝히면서
정이와 소옹을 스승으로 삼았다
벼슬길에 나아가 임금을 섬기니
그 이름이 구중궁궐에까지 떨쳐졌고
종묘의 제사에 오르니
흰 옥이나 누런 옥처럼 귀하게 여겨졌다
홍문관에 오르니
금종이요 큰 쇠북 같은 존재였다
때는 마침
인종대왕께서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이었는데
옛날 상산에 숨어 살던 동원공과 기리계 같은 이가 어디 있었으랴
오직 선생만이 정성을 다해 공경하였다
큰 계책을 바르게 가르치고
법도 있는 몸가짐에 패옥 소리가 쟁그랑쟁그랑 울렸다
한가로운 때에도 왕을
아침저녁으로 모시니
정성스러운 그 말씀이요
다소곳한 그 모습이었다
왕은 이를 듣고 스스로를 닦아 나가니
마치 쇠가 용광로에서 불려지듯
얼음처럼 맑은 항아리 속에 들어간 듯
인색한 마음이 사라져 갔다
왕의 덕이 날로 빛나 간 것은
다른 산의 돌로 내 옥을 갈고닦는 것과 같은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을 보필할 적격자를 얻은 것이
마치 나라를 지키는 성과도 같았다
행여 그 신묘한 교화로
오래도록 왕을 지켜 주시기를 바랐더니
하늘은 어찌하여 이 훌륭한 본보기를 앗아가서
그 농사를 다 짓지도 못하게 하였는가
칠십 년이 지난 뒤에
미련한 이 사람이
선생의 훌륭한 덕을 추모하니
보잘것없는 정성이나마 갑절로 더하고 싶다
이렇게 찬사를 지어
그 한평생을 기리노라
(용어) 동원공과 기리계는 한나라 고조 때 상산에 숨어 살던 네 노인, 곧 '상산사호' 가운데 두 사람으로, 뒷날 고조의 초빙을 받아 태자를 보필하였다.
세 분 선생을 기리는 글 (서기 1605년 6월 20일, 양력 추정)
나는 일찍부터, 팽택 현령 도연명이 관직에 오른 지 여든 날 만에 그 자리를 내던지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일과,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 이백이 총애받는 권세가조차 우습게 여겨 다리를 뻗고 앉아 제 신을 벗기게 한 일과, 소동파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만물을 사랑하여 귀한 이든 천한 이든 가리지 않고 저마다 제멋대로 살아가게 한 일에 대하여,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생생한 기운이 살아 있음을 사모해 왔다.
아, 나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나는 하찮은 봉록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모욕을 당하면서도 떠날 줄을 모르고, 은총을 입은 권세가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려 내 뜻 한번 제대로 펴 보지도 못하며, 좁은 마음에 모난 성격 탓에 뜻이 맞지 않는 이들에게 미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 세 분 선생처럼 살고 싶지만 아득하기만 하여 도무지 붙잡고 따라갈 수가 없다. 아,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래서 나는 화가 이정에게 명하여 세 분 선생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거기에 찬을 지어 붙였다. 마침 명필 한호가 군청에 들렀기에, 자잘한 해서체로 세 분의 이름과 호, 벼슬, 고향을 그 위에 금색 글씨로 써 달라고 청하였다. 이제 때때로 이 그림을 꺼내 보면서 세 분을 사모하려 한다.
도연명
팽택 현령 자리를 달가워하지 않고
〈귀거래사〉를 읊으며 떠나갔다
칡베로 만든 두건은 본래 지니고 있었고
거문고에는 줄조차 매어 두지 않았다
아득한 옛 태평성대의 임금 복희씨에게 뜻을 두고
소나무와 국화에 마음을 붙였다
만고에 변함없는 북쪽 창가에는
그 맑은 바람이 어제 일인 양 아직도 불어온다
(용어) 도연명은 여름날 북쪽 창가에 누워 시원한 바람을 쐬며 스스로를 아득한 옛 태평성대인 복희씨 시절의 사람이라 여겼다고 한다.
이백
구름과 노을이 피어오르듯 헌칠하니
참으로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로다
술 한 말을 마시면 시 백 편을 짓는데
비바람같이, 귀신같이 거침이 없구나
임금이 내려 준 비단 도포도 그에게는 딱히 영화로울 것이 없었고
야랑 땅으로 귀양 간 일도 수치스러울 것이 없었다
물속에 어린 달인 양
그대는 만고에 변치 않는 빛이로다
(용어) 이백은 당나라 현종에게 문재를 인정받아 비단 도포를 하사받은 적이 있었으나, 뒷날 영왕 이린의 역모에 연루되어 야랑 땅으로 귀양 가는 처벌을 받았다. 곽자의의 도움으로 사형은 면하였다.
소식
높고 준엄한 언론은 하늘에 멍에를 씌운 듯하고
곧은 기상은 땅 위에 우뚝 서 있다
재주가 워낙 크다 보니 오히려 세상에 쓰이기 어려워
몇 번이고 일어섰다가 또 쓰러지곤 하였다
적벽강에서 노닐며 시를 지었고
궁중의 촛불 아래서 나랏일을 의논하기도 했다
영예와 치욕은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법
그 이름만은 천년만년 스러지지 않으리라
(용어) "궁중의 촛불"이라 옮긴 것은 연꽃 모양으로 만든 궁중용 촛대를 가리키는 말로, 신하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영예를 비유하는 표현이다. 소식이 궁중에서 숙직하던 중 임금의 부름을 받아 정사를 의논한 뒤, 임금이 이 촛대의 불빛으로 그를 배웅해 주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탄은이 그린 대나무 그림을 기리며 — 낙가선사 스님 극융의 두루마리에 쓰다 (서기 1606년 8월 10일, 양력 추정)
푸르고 푸른 저 대나무여
잎사귀마다 모두 참된 진리로구나
이 말을 나는 늙은 스님에게서 들었다. 그런데 이것은 대나무가 먹으로 모습을 바꾼 것인가, 아니면 먹이 대나무로 모습을 바꾼 것인가? 허깨비 같은 꽃은 이미 시들어 사라졌으니, 무엇을 굳이 다시 모습으로 바꾸겠는가. 하늘은 텅 비어 있고 바다는 아득히 넓은데, 달이 떠오르고 구름이 걷히니, 대나무 그림자는 길게 어른거리고 그 잎사귀 소리는 우수수 울린다. 전각 안에 그려진 이 두 그루 대나무를, 스님은 가서 찬찬히 감상해 보시오. 그러면 옛 화가 문동과 혜숭의 빼어난 솜씨가 마음속에 그대로 들어와, 이 그림을 조금도 가벼이 여길 수 없게 될 것이오. 스님은 이 두루마리를 부처님 다비에 올려도 좋을 만큼 귀하게 여겨도 좋을 것이오.
(용어) 탄은은 화가 이정의 호이다. 문동은 송나라의 화가로 대나무 그림에 가장 뛰어났던 인물이고, 혜숭은 송나라의 승려 화가로 작은 풍경화에 뛰어났다.
이나옹이 그린 부처님과 조사들을 기리는 글 (서기 1605년 6월 25일, 양력 추정)
내가 요산에 있을 때, 명필 한호에게 부탁하여 구양순의 서체를 본떠 《반야심경》을 금색 글씨로 다시 쓰게 하여 첩을 만들고, 이어 화가 이정에게 명하여 부처님 상 셋과 보살상 하나, 조사상 둘, 거사상 둘을 그리게 하여 그 뒤에 붙였다. 그리고 마침내 절구 두 수씩을 지어 찬사로 덧붙이고, 이를 '선문법보'라 이름하였다.
석가모니불
흐르는 샘물은 옥돌을 씻어 내고
그윽한 꽃은 붉게 피어나는데
저 법을 들으러 온 이들은
아낙네와 어린아이로구나
경전을 막 펼쳐 놓았는데
단향 향은 이미 다 사그라들었구나
마음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그 둘 모두가 부처가 되었네
아미타불
아마도 저 극락세계에서는
땅에서 푸른 연꽃이 절로 솟아나겠지
그 푸른 연꽃을 받쳐 든 옥동자 둘은
사람으로도 되고 하늘의 존재로도 되겠지
애당초 인연이 아니라면
타고난 본성도 아닐 것이다
아미타불께 여쭈어 보아도
부처님은 고요히 선정에 드신 채 말씀이 없으시네
미륵불
지나간 시절은 아득히 멀고
지금 이 세상은 온갖 더러움이 뒤섞인 세상이라
오직 다가올 미래에나
원만한 깨달음을 증험할 수 있으리라
불현듯 선재동자가
어찌하여 눈앞에 와 있는가
법을 잊고서 법을 물으니
바다에 비친 달만이 창공을 흐르는구나
(용어) 선재동자는 불교 경전 《화엄경》에 나오는 구도자로,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깨달음을 구한 인물이다.
관세음보살
구슬 목걸이에 화려한 머리 장식을 하고
바닷속에 둥실 떠 계시니
용궁이든 물의 나라든
어디인들 가지 못하시리
손에는 커다란 여의주를 들고
돌 사이 물결 위에서 노니시는구나
저 보물을 간직하신 분은
그 신통력 또한 자유자재로구나
초조 달마
우뚝한 사라쌍수 숲이여
부처님 이마의 흰 터럭에서 나오는 빛이 비치는구나
《능가경》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데
상아로 만든 축에 푸르고 누런 표지를 둘렀구나
법을 전하는 일은 마음에 달려 있고
마음을 전하는 일은 다시 물건에 담기는 법이니
그대가 스스로 남겨 둔 것은
가사 한 벌과 바리때 하나뿐이었지
(용어) 초조 달마는 중국 선종의 첫 조사인 달마 대사를 가리킨다.
육조 혜능
나부산은 땅에서 우뚝 솟아 있고
유령 고개는 하늘을 가리고 있는데
그 누가 나의 발자취를 밟아
스승께서 전하신 법을 엿볼 수 있으랴
수미산은 오히려 옮길 수 있을지언정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가사와 바리때는 옮기기 어려운 법
끝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바로 마음이니
겨자씨 한 알조차도 그 무게가 가볍지 않구나
(용어) 육조 노능은 중국 선종의 여섯 번째 조사인 혜능 대사를 가리킨다.
유마힐 거사
한 길 남짓한 조그만 방 안에
하늘의 여러 신들이 자리를 함께하니
거사의 병을 두고
찾아오는 사람마다 병을 살펴 사람마다 낫는구나
누가 찾아와 병문안을 하는가
바로 문수보살이로다
말씀은 따로 없어도
깨달음의 법문은 오직 하나로 통하는구나
(용어) 유마힐 거사는 부처님 당시 속세에 살면서도 높은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전해지는 재가 신도이다. 그가 병을 핑계로 방에 누워 있을 때 문수보살이 문병을 갔다는 이야기가 불교 경전에 전한다.
방 거사
수정 구슬마저 던져 버리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저 거사님은
말없이 곧 세상을 떠나려 하는가
대나무 조리며 사슴 가죽 자리며
가진 것 모두 내려놓은들 무슨 거리낄 것이 있으랴
시험 삼아 보라
저 밝은 대낮의 해가 바로 내 손가락 끝에 있음을
(용어) 방 거사는 당나라 때의 재가 불교 신도로, 세속의 재산을 모두 강물에 버리고 대나무 조리를 짜서 팔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여러 신선들을 기리는 글 (서기 1608년 12월 15일, 양력 추정)
감주 왕세정(원미는 그의 자이다)이 엮은 《열선전》을 나는 헌보 허갈을 통해 그 진본을 볼 수 있었는데, 그림을 옮겨 그리고 새긴 솜씨가 더할 나위 없이 정묘하여 참으로 세상에 보기 드문 보배였다. 내가 이를 다 보고 나서 장인에게 그중에서도 특히 빼어난 것들을 가려 흰 비단에 옮겨 그리고 채색으로 꾸미게 한 뒤, 찬사를 붙였다. 때때로 이것을 꺼내어 감상하면서 신선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래려 한다.
노자
하늘이 열리기 전 태초는 끝이 없고
큰 도는 억지로 하지 않는 데 있으니
그윽하고 고요하며 순수하고 정갈한 것이
온갖 법의 스승이로다
오천 자에 이르는 그 글을 읽어 보니
아, 밝게 빛나는구나, 지극한 그 덕이여
숨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며 변화가 끝이 없으니
마치 용과 같아 그 조화를 헤아릴 수가 없구나
(용어) "오천 자에 이르는 그 글"은 노자가 지었다는 《도덕경》을 가리킨다.
왕예
넋을 갈고닦아 정신을 날려 보내니
숨었다 드러났다 종잡을 수가 없구나
나는 이 도를
복희씨와 신농씨의 시절부터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태양의 신 울화에게 배운 것도 아니요
제자 설결에게 전수해 준 것도 아니다
끝없는 근원은 늘 그 자리에 있으니
온갖 법은 결국 하나로 돌아간다
(용어) 왕예는 아주 오랜 옛날의 신선으로, 요임금 시대의 현인 설결이 그에게서 도를 배웠다고 전해진다. 울화는 태양의 정기, 곧 태양신을 가리킨다.
광성자
아득하고 그윽함이야말로
지극한 도의 정기이니
정신을 감싸고 몸을 바로 세워
잠잠하고 고요하고 맑기 그지없구나
그대는 하늘과 같은 존재이니
오래 산다는 것조차 오히려 군더더기일 뿐이다
꿈속에서 이상향에 노닐고 있으니
인간 세상이야 대체 어떤 곳이란 말인가
서왕모
빛나는구나, 서왕모여
기운을 다스리고 하늘을 받드는구나
여인의 몸이면서도 도를 구하여
그 바탕으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랐다네
화림의 어여쁜 난초요
현대의 푸른 물이로다
주나라 목왕은 무엇을 얻었으며
한나라 무제는 헛된 짓만 하였구나
(용어) 주 목왕은 일찍이 곤륜산으로 순행하여 서왕모에게서 요지의 잔치를 대접받았다고 전해진다. 유철은 한 무제의 이름으로, 옛이야기에 따르면 서왕모가 내려와 무제에게 신선의 복숭아 네 개를 주었다고 한다. 두 이야기 모두 서왕모를 만나고도 끝내 신선이 되지는 못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상원부인
하얀 옷이 눈부시게 빛나는구나
기린을 타고 이리저리 노니는구나
그 누가 신선의 명부를 가지고
영대로 찾아오는가
세 하늘의 이치를 어찌 다 헤아리며
몸속의 다섯 가지 거친 기운을 어찌 다스릴 것인가
도의 요체를 가르쳐 주니
《영비경》에 담긴 열두 가지 수행법이로다
(용어) 상원부인은 도교의 여신으로, 한 무제에게 몸속의 다섯 가지 사납고 거친 기운을 다스려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영비경》은 도교의 경전으로, 그 안에 도를 닦는 열두 가지 방법이 실려 있다고 한다.
윤희
하늘에서는 붉은 노을이 드리우고
땅에서는 황금빛 연꽃이 솟아났다
눈을 들어 언뜻 바라보니
보랏빛 기운이 함곡관을 감싸고 있는데
흰 수레에 검푸른 소를 타고
노자께서 서쪽으로 천천히 나아가시는구나
오천 자에 이르는 《도덕경》을 일러 주시니
그 현묘한 이치를 비로소 깨달았다네
(용어) 윤희는 함곡관을 지키던 관리로, 노자가 서쪽으로 떠나려 할 때 그를 알아보고 붙잡아 《도덕경》을 받아 적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광속
아름답구나, 광씨 성을 지닌 임금이여
그 정기를 북두성에서 받았다네
기운을 먹고 정신을 갈고닦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구나
폭포를 병풍으로 삼고
향로봉을 궁궐로 삼았네
만고에 신선의 산으로 이름난 남장산에는
푸른 물과 가을 달빛만이 남아 있구나
(용어) 광속은 은나라 말엽 또는 주나라 초엽의 은자로, 여산에 숨어 살며 도를 닦았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여산의 다른 이름인 광산, 남장산 등은 모두 그의 성씨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장주
소요는 그저 노니는 것이 아니며
만물에 대한 온갖 이론도 하나로 가지런한 것이 아니다
인간 세상에 머물러 있어도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 도의 이치이니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할 뿐인데
태초의 혼돈에게 일곱 구멍을 뚫어 주자 이레 만에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있구나
좋은 뜻을 기록한 여러 편의 글은
그 자취가 더더욱 크고 뚜렷하구나
(용어) 장주, 곧 장자는 저서 《장자》에서 소요유, 제물론 등의 편을 지었다. "태초의 혼돈에게 일곱 구멍을 뚫어 주자 이레 만에 죽었다"는 것은 《장자》에 실린 우화로, 자연 그대로의 혼돈에게 억지로 사람처럼 이목구비를 뚫어 주었더니 오히려 혼돈이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갈유
나무를 깎아 양을 만들어
저잣거리에 내다 팔더니
그 나무 양을 타고 촉 땅으로 들어가
수산에서 살았다고 하네
아미산은 구름에 닿을 듯 높이 솟아 있고
옥루산에는 저녁노을이 물드는데
저 아름다운 여인들이 서로 뒤따르며
신선의 수레를 함께 탔다네
금고자
순임금이 타던 거문고를 잘도 타고
팽조에게 전해지는 신선의 술법도 지녔다네
기주 벌판과 탁주의 물가를
제집인 양 여기며 지냈다네
깃발을 앞세우고 수레를 몰아
용의 자식들을 이끌어 내오고
저 잉어 두 마리를 타고서
끝없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네
(용어) 금고자는 옛 신선으로, 잉어를 타고 물속을 자유로이 오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갱은 팽조의 다른 이름으로, 오래 살았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이팔백
하루에 팔백 리를 걷고
팔백 살을 살았다 하여
'팔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니
그 누가 그가 신선인 줄 알았으랴
저잣거리에서는 한가로운 듯 지내고
산림 속에서는 시끌벅적한 듯 지내니
숨었다 나타났다 자유자재로 하는구나
도의 본바탕이 절로 이토록 묘할 수밖에
섭정
석뇌를 먹고 금단을 먹고
기운을 다스리며 욕심을 끊었다
욕심과 기호가 마음과 다투기에
아예 내 눈을 꼭 감아 버렸다네
그 누가 눈을 뜨라고 권할 것이며
어찌 한순간 번갯불 같은 것을 겁내겠는가
오묘한 도를 이미 이루었으니
그윽이 아홉 방위의 임금들을 찬양하노라
(용어) 섭정은 도교의 은자로, 광물성 약재인 석뇌와 신선의 단약인 금단을 복용하며 수련했다고 전해진다.
안기생
소매 속에 든 오이가 대추만 한데
회오리바람을 타고 바닷속 봉래산으로 향한다
진나라의 어지러운 정치에 진저리가 나니
지극한 도를 어찌 그런 이들에게 말해 줄 수 있으랴
옥으로 만든 신과 금색 글씨로 쓴 글을
속세에 남겨 두었으니
신선의 복숭아가 열리거든
봉래산으로 나를 찾아오시게
(용어) 안기생은 진시황 시절의 신선으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진시황이 그에게 도를 물었으나 안기생은 진나라의 정치를 못마땅히 여겨 옥신과 편지만 남기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모군
훌륭하도다, 큰 모군이여
서왕모를 따르는 무리로다
태극의 그윽하고 참된 이치는
있는 듯 없는 듯하구나
금빛 깃발과 의장이
펄럭펄럭 노을 속으로 떠오르니
땅에 남은 저 두 아우, 땅의 신선들은
부질없이 고개를 빼고 기다리는구나
(용어) 모군은 한나라 때 삼형제가 모두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는 모씨 삼형제 가운데 맏이를 가리킨다. 맏이는 하늘로 올라가고 두 아우는 땅의 신선으로 남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동방삭
세 번이나 신선의 복숭아를 훔쳐 먹고
궁궐 문 안에 귀양 온 신세로 살았다
어느 누가 공경대부이며
어느 누가 임금이던가
천고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고
온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호탕하게 구름을 타고
홀로 떠나가니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용어) 동방삭은 한 무제 때의 신하로, 서왕모의 복숭아를 세 번 훔쳐 먹어 죽지 않고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황안
그 몸은 시원스럽고
등골뼈는 곧기도 하구나
목을 한 번 움츠렸다 펴는 데에
삼천 년 가까운 세월이 걸린다네
한 무제는 타고난 바탕이 흐리고 탁하여
그저 태산에 올라 봉선 의식이나 치를 뿐이었네
수레를 타고 다닌들 그것이 무슨 영화이리오
차라리 이 몸을 속세 밖으로 날려 보내리라
(용어) 황안은 신선으로, 삼천 년마다 한 번씩 목을 움츠렸다 편다는 검은 거북을 타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타고난 바탕"이라 옮긴 말은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타고나는 기질을 이르는 말이다.
장 진인
북두성이 하늘에서 내려와
비범한 사람으로 태어났도다
바른 법으로 마귀를 다스리고
지극한 도로 참됨을 이루었으니
그 공덕과 아름다운 업적은
만대에 이르도록 전해지리라
보랏빛 수레에 검은 용을 타고
신선의 나라로 높이 올라갔도다
마고
하늘이든 땅이든
마음 내키는 대로 노닐었다
괄창산이든 곤륜산이든
어디를 간들 거리낄 것이 있으랴
마고는 속세의 사람이 아니요
채경 또한 참된 신선은 아니었으나
다만 이렇게 기약하였으니
봉래산 바다가 다시 뭍으로 변하여 먼지가 날릴 때 돌아오겠노라고
(용어) 마고는 손톱이 새 발톱처럼 길다는 선녀로, 동해가 세 번이나 뽕나무밭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채경은 후한 때 사람으로, 신선 왕방평과 마고를 만난 이야기로 전해진다.
황초평
네가 내 양들을
금화산 꼭대기에서 기르고 있었건만
네 주인이 너를 보지 못한 지가
이제 십 년이나 되었구나
흰 돌들이 나란히 늘어서더니
염소들이 뿔을 맞대고 모여드는구나
속세의 꿈에서 한번 깨어나니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는구나
(용어) 황초평은 어릴 적 양을 치다가 신선을 만나 도를 배웠는데, 마흔 해가 지나 그의 형이 찾아가 흰 돌들을 향해 "양들아" 하고 외치자 흰 돌이 모두 양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호공
하늘과 땅이 용광로라면
해와 달은 그 안의 구슬이로다
그 누가 이것을 실컷 가지고 놀다가
옥항아리 속으로 몸을 숨기는가
옥항아리 안으로 들어가면 금빛 전각이요
항아리 밖으로 나오면 그저 저잣거리로다
저자의 아전조차도 신선이 되었으니
겨우 그 안을 엿보는 것만도 허락받은 셈이다
(용어) 호공은 옛 신선으로, 늘 저잣거리에서 약을 팔다가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면 옥항아리 속으로 몸을 숨겼다고 한다. 후한 때 저자의 아전이던 비장방이 이 호공을 스승으로 섬겨 신선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온
나를 옥치 선녀에게로 이끌고
나를 영방에게로 이끄는구나
뱃사공에게 손짓을 하니
오강에는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내 스스로 물결 따위는 우습게 여기니
그 누가 감히 노를 멈추게 할 수 있으랴
저 돌로 된 감실에서 살아가며
저 향기로운 산자락의 삶을 누리리라
(용어) 조선온은 여자 신선으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옥치는 서왕모의 셋째 딸로 알려진 선녀의 이름이다.
도홍경
푸른 용이 품속에서 나오니
그 누가 이 오묘한 자질을 알아보았으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푸른 하늘에 밝은 해가 떠 있는 듯하다
너울너울 노을 위로 올라
봉래산에서 물을 다스리는구나
호령산 고개에서 발을 씻고
단대에서 머리를 말리는구나
(용어) 도홍경은 남조 시대 양나라의 도사로, 산속에 은거하며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과 도를 닦은 인물이다.
이백
아미산과 민산에 구름이 비껴 있는데
태백성이 가을 하늘에 다다랐구나
그대는 본래 신선의 재주를 타고났으니
속세로 귀양 온 것이 아니라 그저 노닐고 있는 것일 뿐
푸른 용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듯
비단 도포를 입고 송골매를 탄 채 날아가는구나
만 리에 이르는 푸른 물결 위로
온 하늘에는 밝은 달빛만 가득하구나
여순양
그 도는 하늘과 땅에 견줄 만하고
그 이름은 해와 달처럼 밝게 빛난다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고 나서
비로소 신선의 세계로 올라갔다네
어디에서나 숨었다 드러났다 하니
그 조화가 끝이 없구나
가을 하늘은 해맑기만 한데
이슬이 금단을 적시는구나
(용어) 여순양은 도교에서 여덟 신선으로 꼽는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여동빈의 호이다.
유해섬
오직 해섬옹은
정양자를 스승으로 삼았다네
환단의 도를 가르쳐 주고
달걀을 층층이 쌓아 위태로움을 보여 주었다네
흰 학이 되어 하늘로 떠오르니
붉은 노을이 바야흐로 스러지는구나
하늘과 땅이 다 무너진다 해도
그는 자기만의 해와 달을 따로 지니고 있다네
(용어) 유해섬은 오대·송나라 초의 도사로, 정양자, 곧 종리권에게서 도를 배웠다고 전해진다.
장자양
타고난 성품과 목숨을 갈고닦으니
정기는 엉기고 형체는 흩어졌구나
내가 옥구슬 같은 꽃을 손에 들어 보인들
그 신령함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으랴
《사리진편》이라는 글에
그 신묘한 조화를 남겨 보였다네
아, 이 진인을 애달파하노니
만고에 걸쳐 긴 밤이 이어지는구나
(용어) 장자양은 송나라의 도사로, 도교 내단 수련서인 《오진편》을 지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진남
하늘 높은 곳의 옥으로 된 글이며
태을이 전한 금단의 비법이라
그 누가 이 비법을 가져다가
금단을 만드는 오묘한 법을 가르쳐 주었는가
손에는 쇠채찍을 들고
발밑에는 테를 두른 삿갓을 신은 채
용을 몰아 바닷속으로 들어가니
비바람조차 그의 부름에 따르는구나
(용어) 진남은 송나라의 도사로, 비를 부르고 마귀를 물리치는 도술로 이름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무지사
까막까치가 놓은 오작교도 아니요 은하수도 아니건만
비단을 던져서 다리를 만들고
그 다리를 뛰어넘어 구름 위로 올라
보랏빛 하늘에서 날개를 펼치는구나
아름다운 바다는 천 리요
봉래산은 만 리나 떨어져 있는데
둥근 달 하나가 밝게 떠올라
가을 물결을 환히 비추는구나
살수견
그 누가 벼락을 내려
우리 사당을 불살랐는가
옥황상제께서 옥도끼를 내려 주시어
삼 년 동안 그 뒤를 따르게 하였다네
돈으로 뱃삯을 치르니
어두운 곳에서도 속임이 없구나
법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데에
어찌 예전의 유감을 담아 두겠는가
(용어) 살수견은 송나라 때의 도사로, 신령스러운 도술로 이름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여도장
이마는 옥처럼 빛나고
옥으로 지은 누각은 노을 위에 떠 있는 듯하다
하늘 끝에 닿은 황하는
만고에 걸쳐 늘 동쪽으로 흘러간다
내가 할 일을 다 마치고 나서는
옷자락을 뗏목 삼아 올라타니
겨드랑이 밑에는 하늘의 바람이 일고
소매 속에는 밝은 달빛이 담겨 있구나
성소부부고 제15권
10. 00:05
출처: 성소부부고 제15권, 문부 12, 뇌
배경: 뇌사는 죽은 이의 생전 공적과 인품을 기리며 짓는 애도의 글로, 산문으로 된 전기와 운문으로 된 애도시가 함께 실리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는 두 편이 실려 있다. 하나는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다 순국한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을 위한 글이고, 다른 하나는 재주는 뛰어났으나 기축옥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불우하게 살다 쉰도 못 되어 세상을 뜬 문인 이실지(이춘영)를 위한 글이다.
이복남 장군을 위한 뇌사 (서기 1598년 2월 15일, 양력 추정)
1597년 8월 16일, 왜적이 남원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명나라 부총병 양원은 포위를 뚫고 겨우 본국으로 달아났으나,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은 성을 지키다 목숨을 버렸다. 조정에서는 그의 충절을 높이 사 병조판서를 추증하여 그 뜻을 기렸으니, 마땅한 일이다.
공은 우계를 본관으로 하는 이씨 집안 사람으로, 고려 시대의 이름난 장수 이의의 후손이다. 고조부 이지방, 증조부 이광식, 조부 이전은 모두 나라를 지키는 든든한 방패 같은 존재들이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세상일에 울분을 품는 큰 뜻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글공부를 했으나 마음이 내키지 않아 그만두고, 손자와 오자의 병법을 배워 그 큰 줄기를 통달했으며, 평생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장순, 악비, 문천상의 전기를 읽을 때마다 반드시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곤 했다.
(용어) 장순, 악비, 문천상은 모두 중국 역사에 이름을 남긴 충신들이다. 장순은 당나라 때 사람으로,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관의 항복 명령을 거부하고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수양성을 지키던 중 전사했다. 악비는 남송의 명장으로 금나라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했으나, 금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하다가 간신 진회의 모함을 받아 옥중에서 죽임을 당했다. 문천상은 남송 말기의 충신으로, 원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혔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다가 죽임을 당했다.
공은 글을 지으면 기상이 넘쳤지만 그런 일에 마음을 쏟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과 마주 앉아 옛날과 지금의 흥망성쇠를 논할 때면 그 말솜씨가 시원스러워 들을 만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특별하게 여겼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금성 통판이 되었는데, 관직에 있으면서 매우 꿋꿋하여 남에게 아첨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몹시 좋게 여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날마다 군마를 훈련시키며 죽을힘을 다해 여러 차례 적을 베고 적의 깃발을 빼앗아 바치니, 그 공으로 붉은 비단옷을 하사받았다. 이어 목사로 승진했는데, 다스림이 엄정하면서도 밝고 인자하면서도 너그러워 교화가 크게 이루어졌다.
전쟁이 그치지 않던 때라, 공은 완력 있고 용감한 사람들 — 돌 던지는 솜씨, 힘겨루기, 활쏘기에 능한 이들을 따로 모아 오백 명을 얻었다. 이들을 막하에 두어 번갈아 숙직하게 하고, 밤낮으로 함께 지내며 맛있는 음식은 손대지 않고 적은 것도 나누어 먹으면서 충의로 그들의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감격하고 분발하여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를 다졌다. 마침내 무기를 잡고 호남의 방패가 되어 적을 막으니, 나라에서는 그를 큰 성벽처럼 든든히 여겨 의지하게 되었다.
(용어) 돌 던지는 무예와 힘겨루기는 옛 무인들이 전장에서 익히던 무예의 한 종류다. 돌 던지는 무예는 돌을 멀리 던져 적을 맞히는 것이고, 힘겨루기는 여러 사람이 땅에 엎드려 버티고 있는 것을 완력으로 떼어내거나 장애물을 뛰어넘는 훈련으로, 완력을 겨루는 놀이 겸 무예였다.
양원이 남원에 머물고 있을 때, 왜적의 큰 장수 가토 기요마사가 수만 병력으로 호남과 영남을 집어삼키려 했으니, 그 기세가 마치 우레가 진동하고 바다가 뒤집히는 듯했다. 그런데 양원은 두려움에 떨며 외로운 성 하나에 의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명나라 장수 진우충과 장유성은 각기 군대를 거느리고도 감히 구원하러 나서지 못했다. 양원은 이복남에게 격문을 보내 구원을 청했다. 마침 공은 바닷가에서 섬진강 일대를 방어하며 왜장 행장과 석만의 군대를 막으려던 참이었다. 격문을 받자 곧바로 떠날 채비를 하며 군리를 불러 군사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적은 많고 원병은 끊겼으니 성이 함락될 것은 뻔한 일이다. 나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고 가지 않을 수는 없다. 지금 수천 군사로 저 많은 적을 당해내려는 것은 마치 큰 용광로에 기러기 깃털 하나를 던져 넣는 것과 같으니, 형편으로 보아 요행을 바랄 수 없음은 뻔한 일이다. 그러나 사내대장부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에 죽음을 사양할 수야 있겠는가. 오늘이 바로 내가 죽는 날이다. 다만 그대들까지 부질없이 함께 죽을 필요는 없다. 가고 싶은 자는 가고, 남고 싶은 자는 남아라."
그러자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공을 따라 죽고 싶습니다."
이에 정예 병사 오백 명을 뽑아 남원으로 달려가니, 적은 이미 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공은 영을 내려 "누구든 조금도 동요하지 말라. 물러서는 자는 반드시 벤다"고 하고는, 병사들을 물고기 꿰미처럼 한 줄로 세워 진을 짠 뒤, 징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북을 치고 진격했다. 적들은 이를 보고 놀라 "조선에도 인물이 있구나" 하며 서둘러 길을 터 주었다. 공은 말고삐를 늦추어 유유히 포위망 안으로 들어가니, 성안 사람들은 그 두려움 없는 늠름한 모습을 믿음직하게 여겨 우레 같은 환성을 질렀다.
양원은 공의 손을 잡고 절하며 말했다.
"지금 강한 군대를 거느린 장수들도 모두 둘러앉아 구경만 할 뿐 구원하러 오지 않는데, 절도사는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 달려왔으니, 어찌 옛날 위기의 성에 홀로 군량을 날라 준 그 이안민 장군과 다르겠소."
그러고는 공의 등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용어) 이안민은 중국 남북조 시대 남제의 장군이다. 반란이 일어나 아군 장수가 위태로운 성에 갇히고 군량마저 끊겨 위기에 몰렸을 때, 이안민이 배에 군량 수백 석을 싣고 적진을 뚫고 들어가 구원했으며 이어 적을 크게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양원은 이복남을 이 이안민에 견주어 칭송한 것이다.
공은 이에 군사들을 독려해 바윗돌과 통나무, 무기를 날라 남쪽 성벽을 지키며 온종일 피 튀기는 싸움을 벌였다. 적이 성벽에 붙어 오르려 할 때마다 그때그때 물리쳐 수없이 죽이니, 마침내 적은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이튿날 성의 동쪽이 무너지자, 공은 남원부 관아 대청으로 달려 들어가 의자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양원이 부하를 보내 함께 도망치자고 권하자, 공은 칼을 손에 쥔 채 꾸짖었다.
"나는 맹세코 이 성과 생사를 함께하겠다. 어찌 구차하게 목숨을 탐내겠는가."
곁에 있던 이들은 감히 더 권하지 못했다. 얼마 뒤 병사들이 섶을 가져다 둘러쌓고 불을 지르니, 바람을 타고 불길이 매섭게 번져 갔다. 공은 그 불길 속에서도 꼿꼿이 앉아 있었으니, 이를 본 적들마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공은 마침내 의로써 목숨을 버렸으니, 호남 사람들은 지금도 이 일을 이야기할 때면 눈물을 흘린다.
군자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흔들림 없이 지조를 지키는 것은 충이요, 죽을 것을 알면서도 과감히 나아가는 것은 지혜요, 태연히 의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용기다. 이 셋 가운데 하나만 이루기도 어려운 법인데, 하물며 세 가지를 모두 갖춘 사람에 있어서랴. 마땅히 이 사람을 위해 뇌사를 지어야 한다." 그 뇌사는 다음과 같다.
공은 남달리 걸출한 인물
장군 집안의 자손답게
남다른 자질을 타고나
우뚝한 이마에 긴 팔을 지녔네
일찍부터 바른 가르침 받으니
오직 효와 충뿐이었네
마침내 경전과 학문을 익혀
큰 뜻을 진작에 깨쳤네
문득 붓을 내던지고
몸을 던져 새처럼 날아오르려 했네
(※ 이 구절은 정확한 뜻이 분명하지 않다)
하늘이 내린 병법과
여러 병서들을
꿰뚫어 통달하니
황석공도 그의 스승 되기 부끄러우리
(용어) 황석공은 중국 진나라 말엽, 장량에게 병법서를 전해 주었다는 전설 속 인물이다.
기략은 깊고 식견은 통철하여
정공법으로 나아가 기이한 계책을 냈네
버들잎을 쏘아 맞히듯 묘한 활솜씨로
과거 급제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네
(용어) 버들잎을 쏘아 맞히는 활솜씨는 전국 시대 명궁 양유기가 백 걸음 밖에서 버들잎을 쏘아 백발백중시켰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활솜씨가 매우 뛰어남을 가리킨다.
임금 계신 대궐을
가까이서 지키니 임금이 그를 의지했네
공이 병권을 손에 쥐자
금위군도 함부로 떠들지 못했고
병조에 글을 올려
은밀히 전쟁을 그치도록 도왔네
오직 금성 고을은
서남쪽을 지키는 큰 울타리
식량을 쌓고 군사를 길러
미친개 같은 왜적을 막아야 했네
누가 이 고을을 맡아
군사를 조련하고 물자를 비축할까
공이 가야 한다고
원로들이 나서서 그를 추천했네
이에 곳간마다
활과 창이 가득 차고
짧은 저고리에 수수한 갓끈 맨
뛰어난 검객들이
우뚝 서서 남쪽을 지키니
마치 물을 막아선 제방과 같았네
(용어) 짧은 저고리와 수수한 갓끈은 옛 무인들이 즐겨 입던 옷차림으로, 뒷자락을 짧게 지어 움직이기 편하게 만든 저고리와 무늬 없이 소박하게 만든 갓끈을 가리킨다.
왜적이 호남으로 마구 밀려들 때
장졸들을 이끌고 홀로 막아섰네
은빛 투구에 흰 깃발
쇠갑옷 위에 비단 웃옷
적들은 바라보기만 해도 달아나니
그 눈에는 굳센 적수가 없었네
무리로 사로잡고 목을 베어 바치니
그 공을 견줄 자가 없었네
그대에게 옥관자를 내리고
붉은 관복에 가죽띠를 내리고
절도사의 병부까지 내리니
백성들은 노래하며 어찌 이제야 오셨느냐 반겼네
보리이삭도 두 갈래로 파릇파릇 자라니
백 리 고을이 태평한 세월을 이루었네
(용어) 보리이삭이 두 갈래로 자란다는 것은 지방관의 선정으로 풍년이 든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후한 때 어양태수 장감이 선정을 베풀자 백성들이 "뽕나무엔 곁가지가 없고 보리이삭은 두 갈래라, 장 태수가 다스리니 그 즐거움 헤아릴 수 없네"라고 노래한 옛일에서 나왔다.
군대를 크게 사열하니
우뚝 솟은 산악 같았고
갑옷도 뚫는 굳센 활솜씨는
화려한 옷차림 따위는 하찮게 여겼네
술을 나눠 줘도 고르게 나누니
그 은혜는 부하의 종기를 빨아 준 것보다 깊어
죽음도 제집 가듯 여긴 것은
오직 공의 군졸들뿐이었네
(용어) 부하의 종기를 빨아 준 일은 전국 시대 위나라 장수 오기가 병사의 몸에 난 종기를 직접 입으로 빨아 치료해 주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것으로, 장수가 병사를 자식처럼 아끼는 두터운 은혜를 뜻한다.
이에 장막을 열고
지휘의 자리에 나아갔네
남쪽 바닷가를 눌러 제압하니
군령이 빠르기가 바람과 우레 같았네
한 말들이 그릇만큼 작은 고을 용성은
호남과 영남이 만나는 요충지라
적은 진작부터 군침을 흘리며
이곳을 삼키려 벼르고 있었네
적의 기병 삼천이나 되니
누가 그 예봉을 막아 낼 것인가
형세는 알을 쌓아 올린 듯 위태로운데
누가 그 성벽을 굳게 지킬 것인가
하란진명 같은 원병은 오지 않고
단도제 같은 이는 달아나려 하는데
공은 격문을 받자마자
곧바로 달려갔네
번개처럼 회오리바람처럼
하루 만에 남원에 이르렀네
(용어) 하란진명은 당나라 숙종 때의 하남절도사다. 수양성이 포위되었을 때 장순이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하란진명은 장순의 명성을 시기하여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고, 결국 수양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여기서는 정작 위급할 때 구원병이 오지 않는 상황을 빗댄 것이다. 단도제는 남조 송나라의 장군으로 짐작되나 확실하지 않다.
즉묵 싸움처럼 맞붙어 싸우고
수양성처럼 굳게 지켰네
(용어) 즉묵 싸움은 전국 시대 제나라 장수 전단이 즉묵성을 지키다가, 소 떼의 꼬리에 불붙은 갈대를 매달아 밤중에 적진으로 몰아쳐 연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른 싸움이다. 수양성을 지킨 일은 당나라 충신 장순이 안녹산의 난 때 허원과 함께 수양성을 끝까지 지키다가 끝내 전사한 일을 가리킨다.
군졸들을 독려하고
적의 허점을 무너뜨리며
징을 치고 깃발을 날리며
북을 치며 나아갔네
적들은 바라보다 놀라
문득 한쪽 모퉁이가 무너졌네
위급함을 구하러 달려가니
양원은 눈물 흘리고 병사들은 함성을 질렀네
낮은 성가퀴를 둘러보고는
약한 곳을 철통같이 고쳐 놓았네
북과 징은 두드리다 못해 가운데가 갈라지고
사다리와 공성 기구는 바깥에서 꺾여 나갔네
힘은 다하고 형세는 기울어
마침내 성을 포기하게 되었네
누가 그 말고삐를 잡고서
함께 가자 외칠 것인가
오직 임금과 나라뿐
오직 죽음만이 나의 본분이라
성과 함께 죽을지언정
내 맹세는 어김이 없으리
불타는 집을 편안히 여기고
뜨거운 불꽃도 서늘하게 여겼네
사는 것은 구차한 일
죽음이야말로 내가 돌아갈 곳
누가 감히 태연할 수 있으랴
생사가 갈리는 이 순간에
동쪽 고을에서 강개한 마음 북받쳐
장순처럼 그 넋은 죽어서도 사나운 귀신이 되었네
해와 달도 빛을 잃고
하늘과 땅도 어두워졌네
대궐에도 슬픔이 서렸으나
그대 넋을 어찌 위로하리
병조판서 자리도
재상의 지위라 할지라도
그대의 삶을 호사스럽게 하진 못했으나
그대의 죽음만은 마땅히 영예롭게 하리라
자손에게 벼슬과 땅을 내려
슬픔과 영광을 함께 다하게 했네
아, 죽을 자리에서 죽었으니
공은 뜻을 이루었네
그 공훈은 종묘의 솥과 종에 새겨지고
그 이름은 역사책에 길이 빛나리
누구인들 한 번은 죽지 않으랴만
공의 죽음은 유독 깨끗하여라
남원의 백성들이 떼 지어 모여
공을 그리워하며 눈물 흘리고
공의 덕을 마음에 새기고
공의 공훈을 사모하니
백 대가 흐르도록
공을 향한 그리움은 변치 않으리
지리산 남쪽 자락에
마땅히 제사를 받아야 하리
사당 짓는 일 늦출 수 없건만
아직 조정의 명을 기다리네
나는 공의 얼굴을 아나니
참으로 열렬한 대장부였네
남원으로 달려가던 그날
그 뜻이 더욱 또렷해졌으니
마음이 변치 않음은 충이요
죽을 줄 알고도 나아감은 지혜요
의로움을 향해 나아감은 용기이니
이 세 가지를 누가 다 갖추었던가
죽었어도 썩지 않으리니
문천상의 굳센 절개와 같아
무엇이 유감이며 무엇이 후회되리
천 년이 지나도 그대로이리
내 이 뇌사를 지어
후대에 알리노라
이실지를 위한 뇌사 (서기 1606년 7월 1일, 양력 추정)
이실지는 이춘영의 자다. 그는 젊어서부터 기개로 스스로를 내세웠고, 제 재주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성혼과 정철 사이를 오가며 세상에 자신만 한 선비가 없다고 여겼다. 일찍부터 세상을 향해 팔뚝을 걷어붙이고 뽐냈으므로, 선비 신분이면서도 제 의견으로 조정의 논의를 좌우하려 들었다.
기축옥사 무렵에는 집정자들 사이에서 손뼉을 치며 활개 쳤는데, 집정자들도 그의 말을 따랐고 당대 선비들도 그를 기이하게 여겨 다들 그에게 붙좇았다. 그와 가깝지 않던 이들은 모두 벼르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해 사관이 되어 홍문관과 규장각에서 붓을 잡았으니, 이미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 그러다 집정자가 곤경에 몰리자 실지 역시 삼수군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그에게 붙좇던 자들이 도리어 그를 공격했고, 평소 벼르던 자들은 몹시 고소해했다. 이는 실지가 나이 어리고 세상 물정에 어두워 망령되고 거칠고 어리석었던 탓이겠으나, 집정자를 감싸던 이들마저 덩달아 실지에게 죄를 뒤집어씌웠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만약 당시 집정자들이 온화하고 바르며 진중하여 조급하고 난폭한 이들의 부추김에 휘둘리지 않았더라면, 실지 같은 사람이 백 명이 있은들 어찌 감히 함부로 입을 놀려 일을 벌였겠는가. 그렇게 하지 못하여 이런 분란이 일어난 것이니, 이는 실로 집정자들의 잘못이다. 그런데 어찌 실지 한 사람만을 벌한단 말인가.
친구에게 버림받고 뜻이 맞지 않는 이들에게 미움을 받아 뜻을 펴지 못하게 되자, 그는 마침내 세상에 스스로를 내던져 술꾼들과 어울리며 마을 사이를 떠들썩하게 오갔다. 그럴수록 그의 글은 더욱 크고 거침이 없어졌다. 그의 산문은 양한 시대 이후의 글을 좇았고, 시는 두보와 한유와 소식 세 사람을 본받아 호탕하고 뛰어나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다만 사람됨이 신중하지 못해 경솔함을 면치 못했으므로 남들에게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의 안목을 얕보았고, 명성과 지위도 당대에 떨치지 못했다. 끝내 그를 추천하는 이가 없어 세상에 쓰이지 못한 채 뜻만 품고 죽었으니, 참으로 가엾다.
나는 그와 글로 벗을 삼아 늘그막에 서로 자주 오가며 지냈으므로 그의 사람됨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의 글은 견줄 사람이 드물었으나, 끝내 세상을 떠돌며 뜻을 펴지 못하고 쉰 살도 채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를 각별히 안타깝게 여겨 뇌사를 짓는다. 그 뇌사는 다음과 같다.
아, 문운이
지금 크게 막혀 있구나
오직 두세 벗들만이
문단에서 이름을 떨쳤네
그대는 기개로 호기롭게
수염을 떨치며 일어섰네
쌓인 지식이 깊고 두터우니
글로 마땅히 쏟아 냈네
넘실대는 문학의 물결이
큰 강을 따라 동으로 흘렀으니
흙탕물에 썩은 고기가 떠다닌들
그 광대함에 무슨 해가 되리
시 또한 재기 넘쳐
풍성하고도 힘찼네
용과 지렁이가 뒤섞인 듯해도
그 방대함에는 거리낄 것 없었네
북 치고 소리치며 나서니
그 주장을 누가 다 받아들였으랴
정사룡과 노수신 이하로는
그의 입에 성한 사람이 없었건만
(용어) 정사룡과 노수신은 모두 조선 중기의 이름난 시인이자 문장가다. 정사룡은 호가 호음이고, 노수신은 호가 소재다.
오직 권필과 이안눌
그리고 허균만을 추어올렸네
(용어) 권필과 이안눌은 이춘영과 같은 시대에 활동한 시인들로, 허균과도 가까이 지낸 벗들이었다.
더러는 메마르고 더러는 막혔어도
더러는 물릴 만해도 그런대로 다 마땅했네
그가 입을 열면
온 좌중이 조용해졌으니
그 값이 낮아진 것도
실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네
세상은 그 재주를 아까워하지 않았어도
그대는 조금도 굽히지 않았네
더욱 고고한 언론을 펼치니
미워하는 자들은 곁에서 그대를 노려보았네
수부 벼슬도 안 된다 하고
종정 벼슬도 막아서서
마침내 쫓겨나 재야로 밀려났으니
아, 운명은 여기서 그치고 말았네
(용어) 수부와 종정은 모두 관직 이름이다. 수부는 공조 계통의 벼슬을, 종정은 왕실 종친과 관련된 벼슬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그가 이런저런 벼슬자리마다 가로막혀 결국 조정에 설 자리를 얻지 못했음을 말한 것이다.
아, 슬프도다.
지난날 진주 고을
응벽루에 묵을 적에
그대가 이정을 데리고
표연히 찾아왔었지
손뼉 치며 옛날과 지금을 논하고
여러 대가의 글을 이러니저러니 품평하며
죽는 것이 차라리 편하고
사는 것이 오히려 한숨겹다 하더니
어느 날 문득 훌쩍 세상을 뜨니
그 낭랑한 목소리 아직도 귀에 쟁쟁하네
싸늘한 바람 부는 장막 앞에서
그대를 위해 눈물 한 줄기 흘리네
아, 슬프다.
그대가 세상에 쓰일 때는
다들 참으로 기특하다더니
그대가 밀려나게 되자
모두가 등을 돌렸네
등만 돌린 게 아니라
돌까지 던졌었지
알랑대던 그 무리들은
도리어 붉은 신을 신고 높은 자리에 올랐네
남들은 그대에게 화를 내지만
나는 그대를 위해 원통해하네
그대 넋이 안다면
반드시 내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리
아, 슬프도다.
장주는 가라앉아 자취 없고
양웅은 적막하게 되었으니
부귀를 누리다 스러지는 것은
애초에 그대가 바라던 바 아니었네
(용어) 장주는 전국 시대의 사상가 장자를 가리킨다. 그가 한때 칠원이라는 고을의 관리를 지냈으므로 후대에 그를 칠원이라 부르기도 했다. 양웅은 전한 시대의 문장가로, 그의 집에 있던 정자 이름을 따 현정이라고도 불렸다.
그대의 가없는 지혜는
맺히어 오랜 생명이 되리니
천고에 길이 빛나
해와 달처럼 늘 밝으리
그가 굽힌 것을 슬퍼 말고
그가 일찍 죽은 것을 슬퍼 말라
아, 슬프도다.
대체 무엇을 탄식하리오.
성소부부고 제15권 · 문부 12 · 애사
출처: 성소부부고 제15권, 문부 12, 애사
배경: 애사는 특히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를 애도하며 짓는 글이다. 여기에는 3대에 걸쳐 그림으로 이름난 집안에서 태어나 명나라 사신마저 감탄시킨 재주를 지녔으나, 가난과 방랑 속에 술병으로 평양에서 요절한 승려 화가 이정을 위한 애사 한 편이 실려 있다.
이정을 위한 애사 (서기 1607년 3월 12일, 양력 추정)
이정의 자는 공간이고, 스스로 나옹이라 불렀다. 아버지 이숭효, 할아버지 이배련, 증조할아버지 이소불이 모두 그림으로 이름을 날린 집안이었다. 그가 태어나려 할 때, 어머니는 온몸이 금빛으로 빛나는 나한(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제자)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 나한이 이렇게 말했다.
"너희 집안은 3대에 걸쳐 네 사람이 모두 부처 그림을 잘 그려서, 그려낸 부처가 수천 구에 이른다. 그래서 내가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너에게 아들을 주어 그 보답으로 삼겠다."
꿈에서 깨어난 뒤 아이를 낳았는데, 상서로운 빛이 해를 꿰뚫었고 아이의 생김새는 꿈속의 나한과 꼭 닮아 있었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 작은아버지 이흥효 밑에서 자랐다. 다섯 살에 저절로 그림 그리는 법을 터득해 붓을 들어 승려를 그렸는데, 그 모습이 아주 그럴듯했다. 이흥효가 기특하게 여겨 집안에 전해오던 화법대로 가르쳤더니, 열 살에 이미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다. 산수화에도 정통했지만 인물화와 불화가 특히 옛 명작에 가까웠다. 그림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할아버지와 견주면서도, 그림에서 뿜어나오는 기운만큼은 오히려 그가 한 수 위라고 말했다. 열한 살에 금강산에 들어가더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589년(선조 22년) 장안사를 고쳐 지을 때, 그가 그린 벽화와 산수화, 그리고 여러 폭의 천왕상은 하나같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생생하고 서슬이 퍼랬다.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주지번(호는 난우, 명나라의 이름난 학자이자 사신)이 그 그림을 보고 크게 감탄하여 "천고에 으뜸이니 천하에 이만한 이가 없다"고 극찬하고는, 결국 산수화 여러 점을 그에게서 얻어 가지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정은 천성이 게을러 좀처럼 그림을 그리려 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 전하는 그의 작품은 드물다. 1607년(선조 40년) 2월, 술병으로 평양에서 죽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이정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어 아버지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으므로,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놓고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며 울곤 했다. 작은아버지 내외를 친부모처럼 섬겨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고, 작은아버지 내외 역시 그를 친자식처럼 여겼다. 술을 좋아했고 마음이 활달했다. 글씨도 잘 쓰고 시도 지을 줄 알았는데, 모두 속된 티를 벗어나 범상치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흐리멍덩해서 무슨 일이든 야무지게 해내지 못할 사람 같았지만, 속은 훤히 트여 있었고 조예도 깊었다. 불교에 대한 이해는 더욱 깊어서 남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비록 가난하여 남의 집에 얹혀 지냈지만 옳지 않은 것은 하나도 취하지 않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가 아무리 권세 있고 지위 높은 사람이라도 더럽게 여겨, 마치 자신까지 더럽혀질까 두려운 듯 매몰차게 내쳤다. 벗인 심우영, 이경준과는 형제처럼 도탑게 지냈는데, 이 두 사람은 여러 해를 그와 사귀면서도 털끝만한 불의조차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좋은 시절이나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술이 거나해져서 목청껏 노래를 불렀고, 길을 가다 멋진 산수를 만나면 흥에 겨워 바라보느라 집에 돌아갈 생각도 잊었다.
남에게 주기를 좋아해서 추위에 떠는 사람을 보면 자기 옷을 벗어 입혀주곤 했는데, 속된 사람들은 그런 그를 어리석다고 헐뜯기만 할 뿐 아무도 거두어 주지 않았다.
한번은 세도 있는 정승이 그를 불러다 그림을 그리게 하면서, 흰 비단을 준비해주고 술을 넉넉히 대접했다. 그러자 이정은 일부러 취한 척 드러누웠다가 한참 만에 일어나더니, 솟을대문으로 소 두 마리에 짐을 가득 싣고 두 사람이 몰고 들어오는 그림 한 폭을 그려놓고는 붓을 내던지고 가버렸다(대문으로 짐이 쏟아져 들어오는 모습을 그려 정승의 탐욕을 은근히 풍자한 것으로 보인다). 정승이 노하여 죽이려 들자 그는 쫓겨 평양으로 달아났는데, 그곳의 아름다움을 못내 사랑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다가 끝내 그곳에서 죽고 말았다. 시신은 우선 선연동(평양 대동강 가에 있던, 옛 기생들의 무덤이 많이 모여 있던 골짜기)에 묻었다.
나는 소탈하고 영특하면서도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점이 서로 통해서, 나이도 벼슬도 따지지 않고 누구보다 깊이 그를 아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문득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 슬프다.
그가 참선(불교 수행의 한 방법으로, 고요히 앉아 진리를 궁구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면 현묘한 이치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내 마음을 맑게 틔워주곤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신선과 부처의 진리에서 터득한 것이었으리라. 그 이야기에 빠지면 밥 먹는 것조차 잊곤 했으니, 아, 금빛 나한이 꿈에 나타난 일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런 사람이 태어났겠는가. 그 또한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에 글을 지어 그를 애도한다.
아, 나옹이여
그대의 목숨은 어찌 이리도 짧았던가
그러나 썩지 않고 남을 것이 있으니
내 어찌 그저 슬퍼만 하겠는가
완적 같은 호방함과
왕헌지 같은 거침없음
정단 같은 맑고 꼿꼿함과
고개지 같은 우직함까지
이 모든 아름다운 덕을 한 몸에 지니고서
그대는 이 모두를 버려두고 어디로 가는가
나는 속세와 어울리지 못해
세상에서 쓸모없는 쭉정이 취급을 받았을 때
그대만은 나와 뜻이 맞아
일찌감치 벗을 맺어 둘도 없는 짝이 되었지
사람들은 저마다 시끄럽게 헐뜯고 손가락질했으니
이 몸은 슬프게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네
그대 손만 이끌고 함께 돌아가
산속에 숨어 살아볼까 생각했었지
먼지가 날아와 흰 옷을 더럽히듯이
난초와 지초(향기로운 풀, 곧고 맑은 사람을 빗댄 표현)는 가을바람에 여위어 갔네
세월은 자꾸 저물어 가니
어서 수레에 멍에를 메워 동쪽으로 떠나자 약속했건만
누가 알았으랴, 하늘의 옥루(옥황상제가 산다는 하늘 위 누각으로, 죽음을 뜻한다)가 그대를 이리 서둘러 불러갈 줄을
그대는 애초에 이 인간 세상에 미련이 없었나 보다
아득히 회오리바람을 타고 떠나가니 붙잡을 길이 없고
봉래산(신선이 산다고 전해지는 전설 속의 산) 위로 오색구름만 아스라이 떠 있네
어디선가 아득히 옥퉁소 소리 들려오는 듯
내 눈물은 줄줄 흘러내리네
서러워라, 이제 이 몸은 누구를 의지해야 하나
원통하여라, 나를 알아주던 벗은 이미 신선의 세계로 떠나버렸네
계수나무는 차가운 바위산에 서 있고
가을꽃은 그윽한 골짜기에 피어 있네
누구와 함께 갈까 서성이다가
외로운 내 그림자를 조문하듯 돌아보니 서럽기만 하여라
요담(옥처럼 맑다는 뜻을 지닌, 전설 속의 못)은 맑고도 깨끗한데
달빛은 환하게 온 세상을 비추네
어렴풋이 그대 모습을 보는 듯하니
오장을 소리 높여 읊는 그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구나
아, 천년만년이 지난들 어찌 다할까
그대를 그리워하는 이 마음, 나는 결코 잊지 못하리라
(용어)
완적(원문에서는 그의 자인 '사종'으로 표현했다):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문인으로, 세속을 등지고 대나무 숲에 모여 지냈다는 일곱 선비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노장 사상을 좋아하고 얽매임 없이 살았으며, 술을 몹시 즐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왕헌지(원문에서는 그의 자인 '자경'으로 표현했다): 중국 진나라 때의 이름난 서예가로, 성품이 거침없고 고매하여 세상의 예법에 얽매이지 않았다. 특히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고 그림에도 능했다.
정단: 중국 후한 때의 은사(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숨어 산 선비)로, 유교 경전에 정통했으며 성품이 청렴하고 꼿꼿하여 아무리 지위 높은 사람 앞에서도 굽히지 않았다.
고개지(원문에서는 그의 자인 '장강'으로 표현했다): 중국 진나라 때의 화가로, 학식이 넓고 재주가 뛰어나 사람들이 그를 재주와 그림과 천진한 우직함 세 가지 모두에서 으뜸이라 하여 이르던 이름이 있었다.
오장: 옛 역사서 《사기》의 음악을 다룬 편에 나오는 노래의 이름으로 짐작되나,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 이 구절은 정확한 뜻이 분명하지 않다)
성소부부고 제15권 · 문부 12 · 제문
출처: 성소부부고 제15권, 문부 12, 제문
배경: 제문은 죽은 이의 영전에 술과 음식을 올리며 읽는 제사글이다. 여기에는 사촌 형, 벗, 정승, 지방관, 서예가 한석봉, 승려 장군 사명당 유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을 애도하는 열 편의 글이 실려 있으며, 그 가운데는 허균 자신의 첫 부인을 애도하는 짧고 애틋한 글도 포함되어 있다. 이 부인에 관한 이야기는 뒤에 실린 행장에서 더 자세히 이어진다.
사촌 형 허기를 위한 제문 (서기 1601년 4월 20일, 양력 추정)
아, 형님은 타고난 인품이 듬직하고
성품은 굳세면서도 곧았습니다.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고
바른 도리로 자식들을 가르쳤습니다.
우리 종가의 제사를
정성껏 받들어 모셨고
그 이름이 고을에 널리 알려져
여러 차례 추천장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끝내 벼슬 한 번 얻지 못하고
남들 앞줄에 서보지도 못한 채 지내셨습니다.
그래도 하늘의 보답은 어긋나지 않아
아들들이 저마다 훌륭하게 자랐으니
늘그막엔 그 효도를 받으며
술과 안주 가득한 상을 받으실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오래오래 사시어
끝없는 복을 누리시리라 여겼는데,
하늘은 어찌 이리도 무심하여
느닷없이 이런 재앙을 내린단 말입니까.
대들보가 부러지고 서까래가 무너지듯
집안은 이제 더욱 쓸쓸해졌습니다.
저는 마침 과거 시험관이 되어
남쪽 지방에 가 있었던 탓에
형님 계신 서쪽 고을을 돌아보면서도
초상에는 끝내 달려가지 못했습니다.
돈독하셨던 가르침을 떠올리면
눈물만 하염없이 흐를 뿐입니다.
상여는 어디로 향하는 것입니까,
바로 선대 어른들이 묻히신 그 언덕입니다.
묘 쓸 날은 이미 정해졌지만
저는 장례에도 가지 못합니다.
형님의 한평생을 그려보노라니
애간장이 끊어지는 듯합니다.
조카에게 부탁하여
대신 제물을 올리게 하니
오, 형님이시여
아우가 올리는 이 잔을 받으소서.
임자승을 위한 제문 (서기 1601년 8월 29일, 양력)
아, 자승이여.
하늘은 어찌하여 그대를 태어나게 하고
또 어찌하여 이렇게 앗아간단 말인가.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 법이니
그대인들 무엇을 슬퍼하겠는가마는,
그대의 그 뛰어난 재주는
당대에 쓰이고 밝은 세상에 떨칠 만한 것이었는데,
너무 일찍 앗아가 크게 펼쳐보지도 못하게 했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 벗들 모두가 애석해하는 까닭일세.
아, 자승이여.
늙은 어머니는 살아 계시는데 슬하엔 아들 하나 없고
젊은 아내는 어린 딸을 품에 안고
아이고 아이고 울고 있네.
그토록 덕이 높던 사람에게 대 이을 자식조차 주지 않다니
아, 하늘의 도리란 참으로 알기 어렵구나.
남쪽 하늘은 아득하고
그 길은 굽이굽이 멀기만 한데
나는 흰 말을 타고
흰 장막을 부여잡네.
그대를 위해 우는 이 눈물은 저승까지 뚫고 갈 것이요
그대를 슬퍼하는 이 마음은 말로 다 할 수 없네.
그대에게 만약 영혼이 있다면
분명 나를 위해서도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리라.
지난봄 해양 땅에서
한 이불 덮고 정답게 지내던 때,
그대가 자신의 병은 고칠 수 없다고 말하기에
내가 잘 타이르며 이렇게 일러주었지.
"군평은 너무 옹졸했고
봉천은 너무 어리석었다"고.
그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 생각을 조금은 누그러뜨렸었지.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한 해도 채 못 되어
그대가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영영 등질 줄을.
산은 험하고 구름은 어둡고
해는 뉘엿뉘엿 서쪽으로 저무는데
굽어보니 묘 구덩이는 캄캄하고 아득하여
이제 그대와는 여기서 영영 헤어질 수밖에 없구나.
아, 슬프다.
가슴을 친들 통곡한들 어찌 그대를 따라잡으리.
지난날 허물없이 어울려 놀던 때를 생각하니
다시 만날 기약 없음이 서럽기만 하네.
정갈한 제물을 차려 올리고
피눈물로 이 글을 지어 바치니
영령이시여, 나를 굽어살피시고
이 잔을 다 받아주소서.
(용어) 군평 — 중국 진나라 때 사람 공탄의 자. 강직하기로 이름났으나 재상 왕도의 뜻을 거스른 뒤 지방관으로 좌천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봉천 —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사람 순찬의 자.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는데 아내가 일찍 죽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허균은 벗 임자승에게 이 두 사람처럼 지나치게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지 말라고 타일렀던 일을 떠올리고 있다.
이헌국을 위한 제문 (서기 1602년 7월 1일, 양력 추정)
공은 곧고 바르고 도량이 넓어
문중에서도 손꼽히는 큰 인물이었습니다.
일찍이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면서
비로소 그 명성이 세상에 크게 알려졌고
조정의 요직을 맡아서도
선비로서의 이름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여러 고을을 옮겨 다니며 애쓴 끝에
마침내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가까이서 모셨고
거듭 큰 은총을 입었습니다.
의리를 앞세워 토벌을 자청했고
임금을 호종하는 일에도 성실했습니다.
공을 세우는 데 힘써
다시 공신의 반열에 올랐고
이조판서 자리를 거듭 사양하니
임금께서도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셨습니다.
끝내 정승의 자리에까지 오르신
우리의 원로이셨습니다.
공정한 여론에 따라 일을 처리하니
그 공평함은 본보기가 될 만했습니다.
그 인자함은 어진 옛 재상들에 못지않았고
그 근엄함은 강직했던 옛 선비들에 못지않았습니다.
임금께서 겸허히 받아들이시니
온갖 법도가 바로 섰고
음탕하고 사사로운 무리는 절로 흩어져
서로 다투는 이가 없었습니다.
옛날 이름 높던 어진 재상들인들
그 명예가 공보다 컸겠습니까.
물러나야겠다는 공의 말씀은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뿐이었으나
여러 차례 사직 상소를 올리시니
벼슬에 연연하던 이들이 오히려 부끄러워했습니다.
장수를 상징하는 별이 저리 밝게 빛나니
이는 나라의 상서로운 징조라 여겼는데,
하늘은 어찌하여 더 머무르게 하지 않고
기둥과 서까래를 이리도 갑자기 기울게 하십니까.
이제 임금을 위해 몸 바쳐 대신 죽어드릴 이 누가 있으며
임금과 더불어 서로 경계하며 화답할 이 누가 있겠습니까.
슬픔에 잠기신 임금께서는
후한 부의를 내리셨습니다.
아, 하늘의 뜻은 참으로 믿기 어렵습니다.
그 보답이 어찌 이리도 야박할 수 있습니까.
끝내 뒤를 이을 자손도 주지 않으시니
살아서도 죽어서도 누구에게 의탁하란 말입니까.
남은 이들은 눈물을 흘리고
아낙들은 시름에 잠겨 있습니다.
나라의 예법에 따라
무덤 자리도 이미 마련되었습니다.
선대부터 이어온 정의로
저의 형님이 공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척 간의 정으로 늘 저희를 돌보아 주시고
벼슬자리에도 이끌어 주셨으며
재주를 아껴 앞길을 밀어주시어
막힌 운을 트이게 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이제 그 의지할 곳을 잃었으니
눈물만 하염없이 흐릅니다.
성 밖 하늘은 어둑어둑하고
붉은 명정이 바람에 나부낍니다.
곡하며 이 잔을 올리오니
이 낮은 정성을 굽어살피소서.
(용어) 천관 — 옛 중국에서 이조(관리의 인사를 맡아보던 관청)를 달리 부르던 이름. 이헌국이 이조판서 자리를 두 번이나 사양하였으므로 이렇게 표현했다. 한거와 우가 — 한거는 중국 한나라 고조의 장수 기신이 항우에게 포위되었을 때 고조를 대신하여 그 수레를 타고 대신 죽은 옛일을 가리키며, 우가는 순임금과 신하들이 서로 경계하며 주고받았다는 노래를 가리킨다. 둘 다 나라를 위해 몸 바치고 임금을 진심으로 보필한 충신을 그리워하는 뜻으로 쓰였다.
심우승을 위한 제문 (서기 1602년 11월 1일, 양력 추정)
공의 인품은 옥처럼 맑고 곧아
나라의 큰일을 맡을 만한 그릇이었습니다.
일찍이 조정에 나아갔으나
순탄치만은 않은 길이었습니다.
임금께서 의주로 몽진하실 때에는
그 뒤를 따라 모셨고
상소를 자주 올려
정성을 다해 잘못된 일을 바로잡았습니다.
지위와 명망이 걸맞아지니
앞으로 더 큰 은택을 베풀어 주시리라 기대했습니다.
중국으로 달려가
원병을 청하여
왜적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우니
그 공적은 솥과 술잔에 새겨질 만했습니다.
승지의 자리에 있으면서는
왕명을 받들어 전하는 일을 맡았고
늘그막에 고을을 다스릴 때는
백성들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조서가 막 도착하던 즈음
갑자기 건강이 크게 나빠졌습니다.
정성을 다해 병간호를 했으나
어찌할 수 없는 병이었기에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아, 목숨이 여기서 그치고 마니
나라는 보배로운 신하를 잃었고
임금께서는 슬픔에 잠기셨습니다.
어진 아내는 두었으나 대를 이을 자식은 없었으니
복을 내리는 데 이리도 인색하다니
하늘의 뜻은 참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세월은 자꾸만 흘러
장삿날이 다가오고
상여가 이제 막 떠나려 하니
거리마다 눈물바다입니다.
저는 공과 인척의 정을 맺어
누구보다 공과 가까이 지냈던 사이였기에
공의 행적을 정리하여
정성껏 이 글을 지었습니다.
잔을 마련하여 길 떠나시는 제사를 올리오니
저의 이 슬픔을 알아주소서.
(용어) 금루와 백도 — 금루는 중국 남제 때 사람 유금루를 가리킨다. 그가 죽었을 때 집이 가난하여 이불 하나로 염을 했는데, 얼굴을 덮으면 발이 드러나고 발을 덮으면 얼굴이 드러날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의 아내는 이불을 반듯하게 그대로 두어야 한다며, 남편이 평생 올바르게 살아온 뜻을 지켰다고 한다. 백도는 중국 진나라 때 사람 등유의 자이다. 전란 중에 자기 아들과 조카를 둘 다 살릴 수 없게 되자 아들을 버리고 조카를 살렸는데, 끝내 자기 아들은 얻지 못했다. 여기서는 심우승에게 어진 아내는 있으나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음을 이 두 옛사람의 이야기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권협을 위한 제문 (서기 1618년 5월 21일, 양력 추정)
공은 강릉 땅에서 존경받던 어른으로,
성실하고 단정하며 어질고 진실한 데다
청렴하고 결백하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그 명성은 고을의 인물평에서 으뜸이었고
자리는 향촌의 예우에서도 으뜸이었습니다.
재주와 식견이 뛰어나
벼슬 없이도 부유한 이 못지않은 삶을 누렸고
만년에는 마침내 벼슬길에 올라
많은 녹봉을 받았습니다.
꽃나무와 대숲, 연못과 누대를 두루 갖추고
집안 뜰에서는 풍악을 울리게 하며
손님을 맞아 잔치를 베풀고
술잔을 주고받았습니다.
이렇게 마음껏 즐기며
만년을 보내셨는데,
하늘이 돕지 않아
갑자기 수족에 병이 들어
그 화려한 자리를 미처 다 옮기지도 못한 채
어느새 상 치를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상여꾼의 요령 소리는 바람결에 울리고
붉은 명정은 달빛 아래 나부낍니다.
숲이 우거진 저 무덤 자리는
안국 땅 언덕이온데
상여 행렬은 더디게 나아가
서문 밖에서 노제를 지냈습니다.
제가 이토록 슬퍼하며 잊지 못하는 까닭은
누구보다 저를 아껴 주셨기 때문입니다.
손수 염을 하고 관에 모셨으니
이제 그 옛 교분을 다시 나눌 길이 없습니다.
공의 풍류를 오래도록 떠올리노라니
눈물만 하염없이 흐릅니다.
정성껏 안주와 단술을 올리오니
이 낮은 정성을 헤아려 주소서.
(용어) 월단평 — 인물을 평가하는 것을 이르는 말. 중국 후한 때 허소와 허정이 함께 명망이 높았는데, 이들이 매달 초하루마다 고향 사람들의 인물됨을 평가하고 그 등급을 새로 매겼던 데서 나온 말이다. 소봉 — 벼슬을 하지 않고도 농사나 장사로 얻은 재산이 넉넉하여, 마치 벼슬과 봉토를 받은 사람처럼 부유하게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혜장 — 가늘고 성긴 베로 만든 휘장으로, 상을 당한 집에서 영정이나 신주 앞에 치는 휘장을 이른다.
한석봉을 위한 제문 (서기 1605년 7월 10일, 양력 추정)
숭산의 정기를 타고나
남다른 재주를 이루었으니
공이 태어나면서부터
여러 사람 중에 단연 으뜸이었네
서까래만 한 큰 붓을 들고
연못이 온통 먹물이 되도록 글씨를 익히더니
마침내 사마시에 합격하여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떨쳤네
작은 글씨는 사자가 발톱으로 돌을 할퀸 듯하고
큰 글자는 용이 서린 듯하여
왕희지와 조맹부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천 년 만에 나온 솜씨였네
왕원미가 무릎을 치며
달리는 준마 같다고 감탄하며 칭찬했네
임금께서 그 재능을 아끼시어
벼슬을 내리시고
여러 차례 궁중의 술을 내리시고
귤과 유자와 좋은 물고기까지 내리셨네
곱고 가벼운 비단에
종이와 붓까지 함께 내리시니
베푸신 은혜가 두터워
한 세상에 둘도 없었네
벼슬은 공조의 낭관에 올랐고
두 고을의 원도 지냈네
만년에는 시에도 통달하여
도연명과 유종원의 경지를 밟았고
그 시가 평탄하고 넓고 맑고 순수하여
읊으면 맑은 기운이 감돌았기에
우리 둘째 형님과는
서로 막역한 벗이었네
그 인연으로 나도 공과 사귀게 되어
곧 종자기와 백아 같은 사이가 되었네
우리 집은 서울에 있었고
공도 서울에 머물러 지내셨으니
제법 자주 어울렸지만
세상일에 얽매인 것이 늘 한스러웠네
내가 요산 고을살이를 나가게 되니
마침내 예전의 약속을 지키게 되었네
공을 맞아 충천각에 묵게 하니
달빛 비치는 난간과 바람 부는 창가에서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네
나를 위해 금가루로
반야심경을 써 주었는데
필법이 굳세고 기세가 힘차
저수량과 구양순도 무색할 정도였네
어울려 읊는 흥이 흠뻑 무르익어
인간 세상의 즐거움이 극에 달했네
두 달이 지나
공은 너무 오래 머물렀다며 떠나려 하기에
교외까지 나가 절하며 배웅하고
가을에 다시 만나자 약속했었네
그런데 가을이 되기도 전에
갑자기 부고를 받았네
처음엔 놀라 믿기지 않아
말보다 눈물이 먼저 쏟아졌네
하늘이 무심하게도
나의 어진 벗을 앗아갔으니
어진 사람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을
누가 있어 하늘에 따지겠는가
높은 자리에 먼지가 앉기도 전에
아득히 저세상으로 떠나셨네
신선처럼 떠나신 것을 생각하면
애통하여 간과 골수가 토막토막 도려지는 듯하네
빼어난 넋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어찌 한 줌 재와 티끌로 돌아가리오
천지의 정기와 하나가 되어
달과 별처럼 하늘에 빛나리라
적막한 정자와
쓸쓸하고 텅 빈 집에서는
그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
그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리라
이름이 썩지 않을 것이니
죽음이 그리 슬플 것도 없으련만
살아남은 우리들만
부질없이 슬퍼하고 있네
맡은 직분에 매여
호리로 가는 길을 배웅하지도 못하고
멀리서 변변찮은 제수를 올리니
이 조문의 글을 들어주시기 바라네
아, 슬프다
(용어) 왕원미 — 명나라의 이름난 문인 왕세정을 가리킨다. 원문에는 "태창 왕원미"라고 나오는데, "태창"은 그의 호이고 "원미"는 그의 자이다. / 왕희지, 조맹부, 저수량, 구양순 — 모두 중국 역대의 이름난 서예가들이다. / 도연명, 유종원 — 중국 동진과 당나라 때의 이름난 시인들이다. / 종자기와 백아 —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탔고 종자기는 그 소리를 누구보다 잘 알아들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서로를 가장 잘 알아주는 벗 사이를 이르는 표현이다. / 사마시 — 조선시대에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 시험을 말한다. / 공조의 낭관 — 공조는 토목과 건축 등을 맡아보던 관청이고, 낭관은 그곳의 실무를 맡은 관리이다. / 충천각 — 허균이 요산 고을살이를 할 때 지내던 누각의 이름으로 보인다. / 호리 — 원래는 태산 남쪽에 있다는, 죽은 사람들이 산다고 전해지는 산 이름인데, 흔히 무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임약초를 애도하는 글 (서기 1606년 9월 16일, 양력 추정)
아, 내가 열아홉 살 되던 해,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상곡이라는 곳으로 이사하셨는데, 그때 그대를 처음 만났다. 그대는 나보다 한 살 어렸고, 아직 댕기머리를 드리운 소년이었지만 벌써 어른처럼 의젓했다. 우리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 마음이 통해 더없이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파피리를 불고 죽마를 타고 놀던 어린 시절부터 책을 끼고 스승을 찾아다니며 글방에서 재주를 겨루던 시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늘 함께 다녔고 한시도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낮에는 마주 앉아 글을 읽고 밤에는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잠들어, 잠시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살면서 어려운 일을 겪든 뜻대로 되든, 슬프든 기쁘든, 살든 죽든 우리는 언제나 같은 길을 가자고, 이 마음을 간직하여 아무리 힘든 때가 와도 변치 말자고 다짐하곤 했다.
전쟁(임진왜란)이 일어난 뒤로는 서로 다니는 곳이 달라졌지만, 그리워하고 아끼는 마음은 둘 다 변함없었다. 내가 벼슬길에 나가 사관이 되었을 무렵, 그대도 과거에 급제하여 함께 조정에 서게 되었으니, 예전에 다짐했던 뜻을 이제야 함께 실천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벼슬살이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한 달을 서울에서 함께 지낸 적도 없었고, 헤어질 때마다 늘 한숨을 쉬며 서로를 떠나보내야 했다. 그대는 정말 재주가 있어 요직에 있었지만, 나는 거칠고 세상 물정에 어두워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헛되이 나이만 먹고 있었다. 나는 그대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을 늘 안타깝게 여겨 힘써 추천했지만 끝내 그대의 뜻을 이루어 주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잘되고 못되는 것은 운명이로구나. 그대 같은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렇게 어렵게 지내는 것은 내 책임이다." 하고 탄식하곤 했다.
그대가 견책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내가 광릉으로 그대를 찾아갔다. 그날 밤 그대가 나에게 말했다.
"그대는 본래 몸이 약하고 나는 병이 많으니, 지루하게 이어지는 인생이라 해봐야 몇십 년이면 이 몸도 다 사라질 것이다. 잘되고 못되고, 기쁘고 슬픈 것이 마음에 걸릴 게 무엇인가? 그대 벼슬도 오르내림이 있을 텐데, 차라리 다 떨쳐 버리고 함께 시골로 내려가 같이 늙어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내가 대답했다.
"나아가고 물러나는 계책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니, 어찌 그대의 말을 기다릴 것까지야 있겠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섬강에서 함께 살자고 약속했다.
요산 고을의 원 노릇을 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대를 소려에서 만났는데, 안색은 초췌하고 정신도 상해 있어 남몰래 걱정했다. 그러나 하늘이 그대 같은 사람을 낳았는데 어찌 이런 정도에서 그치겠는가, 그대처럼 도량이 넓고 덕이 두터운 사람이라면 반드시 오래 살고 잘될 것이니, 슬픔이 다하면 다시 좋은 날이 오리라 여겼다.
얼마 전, 그대가 상소를 올리면서 흰 병풍 종이를 구한다는 말을 들었고, 가슴앓이가 갑자기 생겨 걱정이라는 소식도 들었지만, 나는 그저 한때의 우연한 병이려니 여겼다. 그런데 닷새도 지나지 않아 갑자기 부고가 날아들었으니, 이것이 정말인가, 꿈인가? 어찌 이런 소식이 내 귀에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그대가 죽은 것이 누군가의 헐뜯음 때문인가, 아니면 가슴앓이 때문인가?
그 아픔이 정녕 헐뜯음에서 비롯된 것인가? 눈물을 거두고 소리 내어 우니 창자가 찢기고 간이 무너지는 듯하다. 높은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해마저 빛을 잃은 것만 같다.
그대처럼 넓은 도량과 두터운 덕을 하늘이 무슨 뜻이 있어 이 세상에 내었다면, 어째서 이제 와 문득 앗아간단 말인가? 하늘의 뜻이란 참으로 믿기 어렵구나. 나는 본래 친구가 적어 오직 그대만을 믿고 지냈는데, 이제 그대를 잃었으니 나는 또 누구와 짝하겠는가? 생각한 바가 있어도 누구와 상의하며, 의심나는 바가 있어도 누구에게 물어보겠는가? 넘어지면 누가 나를 붙잡아 주고, 물에 빠지면 누가 나를 건져 주겠는가? 인생살이는 험하고 벗을 사귀는 일은 구름처럼 이랬다저랬다 하지만, 그대와 나는 오직 처음 먹은 마음 하나만을 간직해 왔는데 이제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옛날 초나라의 장석이라는 목수는 함께 재주를 겨루던 영땅 사람이 죽고 나자 다시는 도끼를 쓰지 않았고, 백아는 자기 음악을 가장 잘 알아주던 벗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어 버렸다고 한다. 이제 온 세상을 둘러보아도 나는 그저 외로운 그림자 하나로 남았을 뿐이다.
아, 슬프다. 섬강에서 함께 살자던 약속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채 몇십 년도 지나지 않아 그대가 먼저 죽어 저승 사람이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이제 살아 있는 나 또한 이 세상을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내 비록 아직 목숨은 붙어 있다 해도 비방과 헐뜯음이 뒤엉켜 있으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차라리 죽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칭찬도 헐뜯음도, 옳고 그름도, 근심도 즐거움도, 영예도 욕됨도 모른 채 제 마음 가는 대로 텅 빈 산에 홀로 누워 하늘을 이웃 삼고 해와 달을 벗 삼아 자기만의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다. 나 또한 오래지 않아 저승으로 그대를 따라가 이 즐거움을 함께 누리며 젊은 시절의 우정을 이어 가리니, 이렇게 슬퍼하며 그대를 그리워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도 한 잔 술을 그대에게 올리며 이렇게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넋이여, 아는가 모르는가? 물어도 대답이 없으니 내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으랴. 아, 슬프다.
죽은 아내를 위한 제문 (서기 1609년 10월 3일, 양력 추정)
그대는 성품이 공손하고 정성스러웠고
그 덕은 그윽하고 고요했네
일찍이 시어머니를 섬겨
시어머니의 마음이 몹시도 흡족했었네
죽어서도 시어머니를 따라
이 산에 와 묻혔구려
황량한 들판엔 안개가 자욱하고
달빛은 처량하고 서리는 차갑네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넋
그 홀로 있는 그림자 얼마나 서러울까
십팔 년이 지나
남편이 귀하게 되어 높은 벼슬에 올랐네
은혜로이 추증하라는
조서가 내려왔네
가난하던 시절 함께 고생하며
내가 높은 벼슬에 오르기를 빌었건만
정작 벼슬에 오르니 그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라
추증의 은혜만 부질없이 내려졌네
어찌하면 이 영화를 함께 누릴 수 있을까
내 마음 아득하기만 하네
그대의 넋이 아는 바 있다면
그대 또한 눈물 줄줄 흘리리라
나라에서 내린 술 한 잔 받아 드시게
서러움에 나도 눈물이 줄줄 흐르네
심장원을 위한 제문 (서기 1607년 11월 2일, 양력 추정)
아, 형은
일찍부터 학문을 갈고닦아
문장이 가멸찼네
하손과 유준처럼 화려한 글을 지었고
온정균과 이상은처럼
시단을 독차지했네
상자 속에 쌓인 백 편의 글이
마치 구슬처럼 찬란했지만
끝내 과거에 한 번도 급제하지 못하니
사람마다 안타까워하며 탄식했네
선비의 푸른 도포는 해지고 낡았으며
드넓은 조정에는 발붙일 곳 하나 없었네
운명이려니 하고 편안히 여겨
오직 붓과 벼루, 종이와 먹만을 벗 삼았네
강과 산을 벗 삼아 호탕하게 노닐고
글과 역사에 마음껏 빠져 지냈네
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아
등잔 밑에서 잔글씨를 쓰며
그렇게 즐기다가 세상을 떠났으니
무엇을 원망하고 무엇을 슬퍼하리
공경히 조상의 뜻을 이어받아
물려받은 가업을 욕되게 하지 않았네
초라한 무덤은
감천 물가에 있구려
맹동야처럼 재주 있어도 자식이 없으니
하늘의 이치도 믿을 수가 없구나
산이 멀리 가로막혀
궤연 앞에 가서 울지도 못하고
글을 보내 제사를 올리니
눈물만 하염없이 쏟아지네
(용어) 하손과 유준 — 중국 남북조 시대의 문인들로, 시문을 잘 짓기로 이름났다. / 온정균과 이상은 — 중국 당나라 말기의 시인들로, 두 사람 모두 시를 잘 짓기로 이름났다. / 맹동야 — 중국 당나라 시인 맹교의 호이다. 맹교에게 자식이 없었다는 데서, 시에 뛰어났으나 마찬가지로 자식이 없던 심장원의 처지를 빗대어 말한 것이다. / 감천 — 심장원의 무덤이 있는 강가의 이름으로 보인다.
사명당 유정 스님을 위한 제문 (서기 1610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부처께서 말씀하시길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 하셨는데
지금 그대가 죽었다 하니
이것이 참인가 거짓인가
죽음이 없다면 누가 죽으며
태어남이 없다면 누가 태어나는가
사대마저 헛것이라면
어디가 저승이고 어디가 이승인가
한결같은 마니구슬은
만고에 닳거나 이지러지지 않듯이
한 점 밝은 넋은
물에 비친 가을 달과 같으리
큰 화두를 다 마치고
큰 인연을 다 끊고서
한순간에
서방정토로 뛰어넘어 가셨네
말 없는 글로써
죽음이 없는 이를 조문하니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허공을 깨뜨려 버리네
바라건대 흠향하소서
(용어) 사대 — 불교에서 세상 모든 것을 이루는 네 가지 요소, 곧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이 네 가지로 이루어진 사람의 몸을 가리킨다.
성소부부고 제15권 · 문부 12 · 행장
출처: 성소부부고 제15권, 문부 12, 행장
배경: 행장은 죽은 이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는 전기문이다. 여기에는 허균이 자신의 첫 부인 김씨의 생애를 직접 기록한 글 한 편이 실려 있으며, 임진왜란 피난길에서 그녀가 겪은 고초와 스물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사연이 상세히 담겨 있다. 앞서 제문에 실린 "죽은 아내를 위한 제문"과 함께 읽으면 좋다.
먼저 세상을 뜬 아내 김씨의 생애를 적다 (서기 1609년 10월 3일, 양력 추정)
부인의 성은 김씨로, 서울에서 손꼽히던 명문가 출신이다. 고려 때 정승을 지낸 김방경의 현손인 척약재 김구용은 고려 말에 이름을 떨쳐 벼슬이 삼사 좌사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사대를 내려온 김윤종은 무과에 급제하여 절도사를 지냈고, 그 아들 김진기는 경자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별제로 첫 벼슬을 얻었다. 김진기가 낳은 아들 김대섭 역시 계유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도사로 첫 벼슬을 시작했다. 김대섭은 관찰사를 지낸 심전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인은 바로 그 둘째 딸이다.
부인은 1571년(선조 4년)에 태어나, 열다섯 살에 우리 집안으로 시집왔다. 성격이 조심스럽고 성실하며 꾸밈이 없었고, 길쌈하는 일에 부지런하여 조금도 게으른 법이 없었으며, 말수가 적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시어머니를 섬기는 태도가 매우 공손하여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몸소 문안을 드렸고, 음식을 올릴 때는 꼭 먼저 맛을 본 뒤에 드렸다. 철이 바뀔 때마다 제철 음식을 풍성하게 마련해 드렸다.
종들을 다스릴 때는 엄격했지만 잘못을 저질러도 너그럽게 용서했고, 욕설로 꾸짖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시어머니께서는 늘 "우리 집 어진 며느리로다" 하며 칭찬하셨다.
내가 한창 젊었을 때 아내에게 짓궂게 굴며 장난치기를 좋아했는데도, 아내는 싫은 내색을 얼굴에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다. 다만 내가 어쩌다 조금이라도 방자하게 굴면 반드시 이렇게 말하곤 했다.
"군자의 처신은 마땅히 엄중해야지요. 옛사람은 술집이나 찻집에도 드나들지 않았다는데, 하물며 그보다 더한 짓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부끄러워, 이따금 스스로를 다잡곤 했다. 아내는 또 늘 나에게 공부에 힘쓰라고 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 부모를 영화롭게 하고 제 몸에도 이롭게 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은 가난하고 시어머님은 이미 연로하시니, 재주만 믿고 허송세월해서는 안 됩니다. 세월은 빨리 흐르니, 나중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592년(선조 25년) 왜적을 피해 다닐 때, 마침 아내는 임신 중이었는데도 지친 몸을 이끌고 단천까지 가서 7월 7일에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이틀 뒤 왜적이 갑자기 들이닥쳐, 순변사 이영이 물러나 마천령을 지키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를 이끌고 밤을 새워 고개를 넘어 임명역에 이르렀는데, 그때 아내는 기력이 다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마침 성이 같은 집안사람 허행이 우리를 맞아 함께 바닷가 섬으로 피란했지만,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억지로 몸을 이끌고 산성원에 사는 백성 박논억의 집에 이르렀는데, 열흘째 되던 날 저녁 아내는 그만 숨을 거두었다. 소를 팔아 관을 마련하고 옷을 찢어 염을 했으나, 몸에서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아 차마 묻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왜적이 성진창을 친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장인어른이 서둘러 명하여 뒷산에 임시로 묻게 하였다. 그때 아내의 나이 스물둘이었고, 나와 함께 산 지 여덟 해째였다.
아, 슬프다. 그렇게 낳은 아들은 젖을 먹지 못해 일찍 세상을 떠났고, 맏딸은 자라서 진사 이사성에게 시집가 아들딸을 하나씩 낳았다.
1609년(광해군 1년) 내가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형조 참의에 임명되니, 관례에 따라 아내에게도 숙부인이라는 칭호가 추증되었다. 아, 그토록 맑은 덕을 지니고도 오래 살지 못한 데다 뒤를 이을 아들마저 없으니, 하늘의 뜻도 믿기 어렵구나.
우리가 한창 가난하던 시절, 나는 아내와 마주 앉아 짧은 등잔 심지를 돋우며 가물거리는 불빛 아래 밤새 책을 펼쳐 놓고 글을 읽곤 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싫증을 내는 기색을 보이면 아내는 꼭 농담 삼아 이렇게 말했다.
"게으름 부리지 마세요. 안 그러면 제 부인첩이 늦어집니다."
그로부터 열여덟 해가 지난 지금, 나는 그저 빈 칭호 문서 한 장을 아내의 영전에 바칠 뿐이니, 그 영예를 누릴 사람이 나와 함께 젊은 시절을 보낸 바로 그 사람이 아닐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대가 만약 저세상에서도 이 사실을 안다면, 반드시 슬퍼하리라.
아, 슬프다. 1595년(선조 28년) 가을, 길주에서 돌아와 강릉 바깥채 근처에 임시로 묻어 두었다가, 1600년(선조 33년) 3월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뒤따라 원주 서면 노수 땅에 영원히 묻었다. 그 무덤은 선산 왼쪽에 있으며, 동북동쪽을 등지고 서남서쪽을 바라보는 자리다. 삼가 이 글로 아내가 살아온 자취를 적는다.
(용어)
척약재 김구용: 고려 말의 학자로, 척약재는 그의 호이다.
삼사 좌사: 고려시대에 나라의 재정을 맡아보던 관청인 삼사의 높은 벼슬.
사마시: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 시험.
도사: 관찰사를 보좌하며 지방 행정과 감찰을 맡던 벼슬.
관찰사: 조선시대 한 도를 다스리던 최고 지방 장관.
순변사: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왕명을 받아 파견되던 군사 지휘관.
마천령·임명역·산성원·성진창: 각각 함경도 일대의 고개, 역참, 지명, 그리고 곡식을 쌓아 두던 관아 창고를 가리킨다.
당상관: 정삼품 이상의 높은 벼슬아치를 이르던 말.
형조 참의: 형조(오늘날의 법무부에 해당하는 관청)의 정삼품 벼슬.
숙부인: 정삼품·종삼품 벼슬아치의 아내에게 나라에서 내리던 칭호.
진사: 과거 시험 가운데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을 이르는 말.
부인첩: 나라에서 벼슬아치 아내의 정식 칭호를 인정하며 내려 주던 문서.
인좌 신향: 무덤이 앉은 방향을 가리키는 전통 풍수 용어로, 동북동쪽을 등지고 서남서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뜻한다.
성소부부고 제16권
10. 00:07
성소부부고 제16권 · 문부 13 · 비(碑) · 신도비(神道碑) · 갈(碣)
출처: 성소부부고 제16권, 문부 13, 비·신도비·갈
배경: 제16권은 문부 열세 번째 갈래로, "비(碑)", "신도비(神道碑)", "갈(碣)" 세 하위 갈래를 함께 묶고 있다. "비"는 사찰이나 사당을 세우거나 고쳐 세운 내력을 새긴 비석의 글이고, "신도비"와 "갈"은 세상을 떠난 인물의 행적을 기려 무덤 근처에 세우는 비석의 글이다. 이 권에는 임진왜란 때 나타났다는 관왕(관우) 신령을 기려 세운 사당비, 동해 용왕을 모신 사당을 고쳐 세운 내력을 새긴 비, 금강산 도솔원 미타전을 중수한 내력을 새긴 비 세 편의 비문과, 문신 최연의 신도비명, 그리고 홍문관 교리 임수정과 화가 이흥효 두 사람의 묘갈명이 실려 있다. 각 비문 끝에는 그 내용을 요약하여 찬양하는 운문인 "송(頌)" 또는 "명(銘)"이 함께 붙어 있다.
임금의 명으로 세운 현령관왕묘비 (서기 1602년 11월 14일, 양력)
이 비문을 지어 올린 뒤, 대제학 심희수가 비문을 지은 사람의 벼슬이 낮다는 이유로 자신이 다시 짓겠다고 나섰는데, 마침 비석을 굳이 세울 필요는 없다는 임금의 하교가 있었다. 아마도 명나라에서 파견한 관리를 의식해서 비석 세우는 일 자체를 그대로 덮어 둔 것이 아닐까 싶다.
1602년 10월 초하루, 임금께서 태복시 관리인 신 허균을 부르시기에 궁궐 문 앞으로 나아가니,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리셨다.
"나는 덕이 부족하여 선왕이 이루신 업적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하고 있는 터에, 근래 왜구의 침입을 받아 서울 밖으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 나라의 운명을 스스로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께서는 대대로 이어 온 충성을 헤아리시고, 또 우리가 의리를 지켜 외적에 맞서 싸운 정성을 살피시어 이 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다 하시고, 조정의 반대 의견을 힘써 물리치시며 외적을 치기로 결단을 내리셨다. 그리하여 앞뒤로 병사 수십만을 보내시고 황제의 사사로운 재물 수백만 냥을 내놓으시어 중국 안이 떠들썩해져도 개의치 않으셨다. 그 덕분에 마침내 서울을 되찾아 나로 하여금 종묘를 다시 지킬 수 있게 해 주셨다. 이로써 수천 리 이 땅에 사는 새와 짐승까지도 평안히 살 수 있게 되었고, 바다는 잔잔해졌으며 중국의 울타리인 우리나라는 더욱 견고해졌으니, 이는 바로 성스러운 황제께서 먼 지방을 어루만지고 작은 나라를 보살피시는 자애로운 마음이 역대 그 어느 임금보다 뛰어나신 까닭이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 조상들께서 대대로 황제께 독실히 공순해 온 보람일 뿐이니, 내가 무슨 힘이 되었겠는가.
지난번 우리나라에 왔던 명나라 장수와 병사들이 하나같이 말하기를, '전투가 있는 날이면 번번이 관왕(관우를 이르는 말)의 신령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덕분에 평양에서의 승리, 한산도 전투, 그리고 충청·전라·경상 세 길에서 왜구를 쫓던 싸움에서 모두 그 신묘한 자취를 드러내시어 황제의 위엄을 널리 펴고 왜구를 크게 겁먹게 하시고 사악한 기운을 쓸어버려, 마침내 삼한의 옛 땅을 속국에게 돌려줄 수 있게 되었으니, 제사를 지내어 그 은혜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황제께서는 '그렇구나' 하시며 즉시 사천 금을 신하 만세덕에게 내려 조선의 서울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게 하셨다. 만세덕은 황제의 명을 받아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관공의 혼령은 본디 중국에서 나타나셨지만 왜구를 평정하는 싸움에도 함께하시어 조선을 위해 애써 주셨으니 마땅히 제사를 지내어 숭배해야 한다. 황제께서 먼저 그 비용을 보내셨으니, 왕은 이 명을 받들어 잘 주선해서 황제의 뜻을 실행하여 그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나는 이 명을 듣고 공손히 '관왕의 덕과 황제의 명을 이 소자가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하고는, 곧바로 공조 판서에게 명하여 산에서 재목을 베어 오고 쇠를 다루는 도구와 기와를 굽는 도구, 그리고 여러 기술자들을 모아 공사에 착수하게 했다. 그리고 흥인문 동쪽에 터를 잡고 대신에게 명하여 이 일을 감독하게 했다.
1600년 겨울에 공사를 시작하여 2년 뒤 봄에 완공하였다. 소상과 그림, 큰 전당과 곁채, 문과 창고, 북과 종을 두는 누각 등 백여 칸을 모두 중국의 격식에 따라 짓고, 크게 제사를 올려 낙성식을 거행했다. 봄가을과 여름겨울 사철의 제사와 초하루 보름의 분향은 예조의 관리가 엄격히 수행하고 교위 한 사람을 파견하여 이를 지켜보게 했다.
그리고 명나라에 현판 글씨를 청하였는데, 올해 황제의 뜻을 받들어 '현령소덕왕 관공지묘'라는 현판을 문에 걸게 하시고 제물 한 벌을 내려 주셨다. 내가 생각건대, 이 왕이란 바로 한나라 수정후 관공, 곧 관우 운장(운장은 관우의 자)이다.
공은 충렬과 의로운 용맹으로 소열왕 유비를 섬기며 한나라 황실의 부흥을 도모하여, 한수 일대를 범 같은 눈초리로 감시하니 그 위세가 온 중국에 떨쳤다. 그리하여 조조 같은 간웅도 두려워 도읍을 옮겨 피하려 했고, 손권 같은 애송이도 겁에 질려 감히 맞서지 못했는데,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곧 하늘이 한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지 어찌 공의 잘못이겠는가.
이런 까닭에 공의 충성스럽고 강개한 뜻은 죽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아,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히려 여러 신령들을 불러 모으고 바람과 우레를 몰아 그 위엄 있는 영험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옛날 명 태조 주원장이 파양호에서 싸울 때 황제가 탄 배가 얕은 물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게 되자 모든 병사들이 새파랗게 질렸는데, 이때 관왕이 구름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며 바람의 방향을 돌려 주어 적의 함선을 불태우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는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그래서 온 천하가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고 호구마다 예를 올리는 것은 바로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나라의 난리까지 구해 주시어 황제께서 동방에 대해 갖고 계셨던 근심을 덜어 드렸고, 우리나라 백만 백성이 그 복을 입어 평안하게 되었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당을 지어 후세까지 길이길이 제사 지내려 하는 것도 마땅한 일이라 하겠다.
나는 우러러 생각건대, 황제의 은혜와 관왕의 덕을 감히 잊을 수가 없다. 이 마음을 글로 지어 후대에 전하고자 한다. 너는 글을 짓는 신하이니 나의 뜻을 돌에 새겨 길이 보존하게 하라."
신 허균은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하고 물러 나와, 이 교지를 글머리에 싣고 이어서 칭송하는 노래를 짓는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한나라의 불꽃이 사그라지고 도적떼가 날뛰니
옥황상제께서 이를 물리치고자
밝으신 분을 이 땅에 내리셨네
유비·장비와 의로 형제를 맺고
칼을 들고 말에 올라 내달리니
그 기운이 움직여 온 누리를 밝게 비추었네
문추의 목을 베고 안량을 무찌르니
그 날카로운 창끝 당할 자 없어
뭇 영웅들이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었네
면수와 양수를 범처럼 넘나들며
우금을 항복시키고 방덕을 죽이니
온 중국이 그 위세에 쏠렸다네
촉을 지키니 촉이 강성해지고
오를 위협하니 오가 두려워 떨었고
조조를 노려보니 조조가 근심에 잠겼는데
상서로운 조짐은 사라지고 불길한 구름만 일어
무운이 다하고 마니
그 몸을 바쳐 충절을 지켰네
그 영검한 신령이 크게 드날려
나타나는 감응이 더욱 빛나서
마침내 하늘과 통하는 감응을 드러냈다네
파양호 싸움을 도와 순조롭게 이끌어
거센 바람 몰아쳐 적선을 불태우니
황제의 대업이 이로써 융성해졌다네
성이 다른 이에게도 왕의 칭호를 내리시고
사람마다 제물 올리고 집집마다 향 피워
그 덕에 보답하고 그 공에 보답하네
사나운 기운이 동방에 모여들어
왜적의 침략이 한창 기세를 떨쳐
지친 우리 병사를 몰아 적과 싸울 때
관왕의 신령이 앞장서서
선봉에서 천둥처럼 부숴 대니
뒤에서는 우레의 신처럼 굳세어져
수많은 적을 무찔러 크게 상처 입히고
마침내 저 왜국을 평정하여
우리나라를 다시금 안정시켜 주셨기에
이 변방 나라가 이제 평안해졌으니
그 높은 공훈을 어찌 감히 잊으리오
위로 황제의 마음을 감동시키니
황제께서 곳간의 재물을 내려주시고
훌륭한 예장나무를 베어다가
터를 잡아 공사를 시작하였네
높고 높은 전당에
날개처럼 뻗은 곁채와 둘러친 회랑
곱게 단청을 입혔다네
겹겹이 늘어선 기둥과 둘러친 담장
쟁쟁 울리는 종소리와 북소리
고요히 자리한 사당일세
폐백을 올리고 술잔을 부어
온갖 제물을 정성껏 바치니
관왕께서 크게 기뻐하시리
바람처럼 빠른 수레에 배자를 걸치고
구름 깃발 펄럭이며
강림하시어 이 제사를 흠향하시네
이 정성에 흡족하시어 상서로움을 내려 주시고
불길처럼 일어나고 번창하게 하시며
온갖 무기를 거두게 하시어
황제의 나라를 길이 지켜 주시고
포악한 무리를 영영 꺾어 주시어
천자의 큰 법도가 바로 서게 하소서
우뚝 솟은 사당의 담장
반듯한 이 터가 오래오래 이어져
제삿술과 음식이 언제나 풍성하리라
신은 보잘것없는 재주나마 다하여
이 칭송하는 글을 지어서
길이 후대에 전하옵니다
(용어) 문추와 안량은 후한 말 원소의 장수로, 안량은 관우에게 죽임을 당했다. 면수는 중국 섬서성의 강으로 동남으로 흘러 한수가 되며, 양수는 한수의 지류다. 우금과 방덕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수로, 조조를 섬기다 관우와 싸웠는데 우금은 항복했고 방덕은 홍수에 휩쓸려 죽었다. 양당은 소매 없는 저고리, 곧 배자를 뜻한다.
다시 고쳐 세운 동해용왕묘비 (서기 1607년 5월 10일, 양력 추정)
1604년 7월, 양양부 동산에 사는 어부 지익복이 배를 타고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바람이 그 배를 몰아가는데 몹시 빠른 속도였다. 이렇게 하루 밤낮을 달려 동쪽으로 한 섬에 닿았는데,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그를 이끌어 왕궁으로 데려갔다.
왕궁에 나아가니 뜰에는 창을 든 병사들의 경계가 몹시 삼엄했다. 왕이라 불리는 이가 보랏빛 옷을 입고 궁전에 앉아 말했다. "내가 강릉에서 제사를 받아 온 지 수천 년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강릉부 사람들에게 쫓겨 이곳으로 옮겨 와 보니 좋은 곳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상제께 호소한 끝에 이제 비로소 허락을 받았으니, 너의 힘을 빌려 관원에게 이 뜻을 전하고 옛 터인 내 집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너는 이 고을을 다스리는 관리에게 이를 알리라.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몰아 재앙을 내릴 것이니, 백성들이 나로 인한 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러고는 바람을 일으켜 그를 돌려보냈는데, 하루도 채 못 되어 동해 바닷가로 돌아왔다.
어부는 몹시 이상히 여겼지만 감히 관아에 직접 나아가 스스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향임 이석림에게 말하여 대신 관에 보고하게 했다.
부사 홍여성은 이 말을 듣고 몹시 이상하게 여겨 옛 기록을 뒤져 상고해 보니, 1536년에 사당이 강릉부 정동촌에서 이곳 양양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감히 귀신의 말을 그대로 근거로 삼을 수는 없었기에, 폐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당을 옛 자리로 되돌려 달라고 관찰사에게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듬해인 1605년 7월, 관동 지방에 큰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져 안변과 통천에서부터 남쪽으로 안동에 이르기까지 수십 고을이 혹독한 수해를 입었다. 죽은 백성과 가축의 수가 수만에 이르렀는데, 그중에서도 강릉이 특히 심했다.
부사 홍공은 더욱 이상하게 여겨 지방 관리와 백성들을 불러 의논하며 말했다. "귀신이 사당을 옮기지 않으면 해를 내리겠다고 경고한 지 일 년 만에 이런 수해가 났으니, 이야말로 그 징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 힘으로는 사당을 옮길 수 없지만, 살펴보니 그 사당이 퇴락하고 무너진 채 보수되지 않고 있다. 우리가 힘을 모아 이를 새롭게 단장하여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우리가 할 도리를 다하고 정성으로 받든다면, 신께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시겠는가." 모두가 "그렇습니다" 하니, 마침내 녹봉을 떼어 목수와 인부를 모으고 향임에게 감독을 맡겨, 기와를 갈고 벽을 바르고 담장을 둘러 쌓고 신문을 만들고 마당을 고르는 일을 두어 달 만에 마쳤다.
그런 다음 홍공이 몸소 제사를 지내니, 이때부터 양양에는 큰바람이 없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강릉부 사람들이 이를 신기하게 여겨 비석을 세워 후대에 전하고자 내게 글을 청하기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사해의 용왕을 위해 사당을 세우되 지리적으로 그 중심이 되는 곳을 가려 설치했는데, 강릉은 동해의 한가운데이자 정동쪽에 해당하고, 더욱이 고을 한가운데가 앞이 탁 트여 밝은 땅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정동'이라 이름 짓고 신라 때부터 이곳에서 용왕께 제사를 지내 왔다. 그런데 공희왕(중종) 때, 강릉부 출신으로 장원 급제한 심언경·심언광 형제가 용왕의 사당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관찰사에게 말하여 임금께 글을 올리고, 아무 까닭도 없이 사당을 옮겨 버렸다. 요즘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동해 용왕의 사당은 양양에 있는데 지금까지도 복구되지 않고 있다. 현재의 사당 자리는 낮고 더러워 귀신의 영을 편안케 하기에는 적당치 않다'고 적혀 있으니, 귀신이 노여워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심언광 형제가 몰락한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며, 을사년의 그 바람과 비의 재변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신이 사람에게 분명히 고한 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은 다들 미혹한 탓이다. 부사가 사당을 고쳐 지은 것은 예에 맞는 처사이니, 어찌 이를 그냥 덮어 둘 수 있겠는가."
이렇게 갖추어 기록하고, 이에 칭송하는 노래를 짓는다.
바다는 천지 사이에서
가장 큰 존재인데
그 누가 그 가운데서 왕이 되어
바람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하는가
굳세고 굳센 용왕신이시라
하늘의 용이라도 이만 못하리
복을 내리고 재앙을 내리시매
그 신령스러운 응보 참으로 미덥도다
누가 그 낮은 곳으로
내 집을 옮기게 했던가
적은 비용을 아끼려다
신의 노여움을 산 것도 마땅하네
귀신이 머무는 곳은
조개 대궐과 구슬 궁전인데
속세의 초라한 거처를
무엇하러 그리워하고 서운해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정성과 공경은
신께서 흠향하시는 바이니
공경하지 않는 자는 방자한 것이고
정성이 없으면 곧 게으른 것이라
땅을 쓸고 물 한 그릇 떠 놓아도
정성과 공경이 있으면 신이 강림하시지만
좋은 자리에 좋은 음식을 차려 놓아도
방자하면 흠향하지 않으시네
옮겨 놓고 더럽힌 것은
곧 게으르고 방자한 일이니
어찌 제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기뻐하거나 탄식하시겠는가
알려 주어도 따르지 않으니
홍수의 재앙도 마땅하도다
온화한 이 고을 원님이
공경으로 신을 받들어
사당을 새로 단장하고
제수를 넉넉히 차려 제사를 올리니
신께서 돌아보시고 기뻐하시어
바람처럼 오시어 흠향하시네
공경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받든다면
어찌 강릉이니 양양이니 가리시겠는가
원컨대 이곳에 길이 진정하시어
해마다 풍년이 들도록 도와주시고
백성들이 다치거나 요절하지 않게 하시고
전란이 미치지 못하게 하시어
길이길이 만년이 다하도록
우리 고을을 도와주소서
(용어) 심언광은 조선 중종 때 사람으로 자는 사형, 호는 어촌이며, 문과에 급제하고 형과 함께 임금께 청하여 예조 판서에 이르렀다. 문장에 뛰어나 《어촌집》을 남겼다.
도솔원 미타전을 다시 고쳐 세운 비 (서기 1602년 9월 30일, 양력 추정)
도헌 벼슬의 송언진이 이 글을 보자마자 곧바로 삼척과 관련한 탄핵 상소가 올라왔다.
금강산 동쪽에 내수라는 고개가 있다. 그 고개 아래로 6~7리쯤 가서 북쪽으로 꺾어 조금 더 가면 도솔원이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고려 중엽에 창건되었다.
이곳에는 아미타불상 한 구가 모셔져 있는데, 일찍부터 신령하고 기이한 일을 자주 보여 사람들이 다투어 향을 올리고 복을 빌었다. 이 절은 조선에 들어와서는 전각이 무너져도 고치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1549년, 덕흥대원군(선조의 아버지) 부인 정씨가 사재를 내어 승려 법우에게 이를 고치게 하니, 짜임새가 몹시 아름다웠다. 불전이 완성되자 지금의 임금께서 태어나셨고, 그 밖에도 상서로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부인은 이 모든 것을 절을 수리한 공덕으로 돌렸다.
또 화원 이배련과 그의 아들 이흥효에게 명하여 붉은 비단에 금물로 용선을 맞이하는 그림을 그리게 하여 큰 족자로 만들어 서쪽 벽에 걸고, 전하를 위해 복을 빌었다. 그 붓놀림이 뛰는 듯 나는 듯 엄숙하여 불전과 더불어 그 장엄함을 겨룰 만했다.
그 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시어 천고에 짝할 데 없는 태평의 기틀과 중흥의 대업을 여셨으니, 아, 이것이 어찌 부처의 힘이 아니며, 대원군 부인의 정성이 천지를 감동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옛날 중악산에 빌어 하나라 계왕을 낳고 니구산에 빌어 공자를 낳았다는 일과 견줄 만한, 참으로 세상에 드문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이 절을 관리하던 이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마침내 절이 황폐해지고 수리되지 않아, 그 족자는 표훈사로 옮겨지게 되었다.
1599년 의인왕후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는 내수사에 명하여 일을 맡을 승려를 보내 이를 수리하게 하시고, 왕실의 사사로운 재물을 후하게 내려 이 일에 쓰게 하셨다. 승려 도관이 그 일을 주관했는데, 일이 완성되기 전에 왕후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내수사에서 공사를 끝내지 못한 것을 아뢰니, 임금께서 이르셨다. "어머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고 돌아가신 왕후가 그 뒤를 이은 일인데, 중도에 그만두어 그 정성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 대군에게 지급하는 공물과 폐백 약간을 보내어 완성하도록 하라."
도관은 이 재물을 받아 공사를 독촉하여 마침내 완성하고, 그 남은 돈으로 이정을 시켜 백의관음상을 그려 동쪽 벽에 걸고, 용선 족자를 옮겨다 서쪽 벽에 걸어 놓으니, 동쪽과 서쪽이 서로 마주 보게 되었다. 그림이 훌륭하여 법당에 들어서면 환하게 사람을 비추니, 금빛 푸른빛 단청이 도리어 그 빛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어 미타회를 열어 낙성식을 거행하니 채색 구름과 흰 학, 하늘의 꽃 같은 신이한 일이 나타나, 시주한 사람들이 모두 큰절을 올렸다.
1602년 가을, 도관은 사람을 내게 보내 이 일을 글로 지어 돌에 새겨 달라고 청하였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라에서 이단을 배척하고 불교를 숭상하지 않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사람이 부처와 신령에게 복을 비는 것도 하나의 길이다. 위로는 바른 학문을 높여 깨끗한 선비들이 이를 익히고, 아래로는 부처의 인연과 인과응보로 백성들의 마음을 경계한다면, 그 정치는 균형 잡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절의 중수는 처음에 대원군 부인께서 시작하시고 의인왕후께서 이를 이어 마치셨으니, 두 분이 전하를 위해 쏟으신 정성은 모두 지극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편견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마땅히 그 공사를 끝마치시어 선대 부인의 뜻을 이루고 왕비의 소원을 완성하셨으니, 이를 어찌 지난 시대의 왕들이 이단의 가르침을 숭상하여 국력을 낭비하고 탑과 사당을 높이 세워 나라의 운수가 오래가기를 빌다가 마침내 혼란과 멸망을 초래한 일과 한데 묶어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글을 지어 기록하고 이어서 칭송하는 노래를 짓는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아아, 아미타 부처님은
헤아릴 수 없는 빛의 부처이시니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찾아와 기뻐하며
전각을 지어 높이 받드네
이 도솔천을
신묘하게 아름다운 구조로 지으니
땅에서는 금빛 연꽃이 솟아나네
오래도록 황폐했던 것을 고치신 분은
아, 우리의 성모이시고
그 뒤를 이어받아 그치지 않으신 분은
바로 우리 의인왕후시라
왕후와 왕의 어머니께서
왕을 위한 정성이 지극하시니
왕께서는 그 정성을 빼앗지 말라 하시고
공사를 재촉하여 완성하게 하셨네
층진 처마 고운 지붕에
금빛과 푸른빛을 곱게 칠했다네
이씨 성을 가진 세 화가가 그림을 그리니
고운 채색이 서로 어우러져 빛나네
용선 그림은 넓고 환하며
보배로운 그림은 빛을 뿜어내고
부처님 모습은 가장 아름다우니
사람들이 귀의함도 마땅하다네
이에 상서로움을 내리시어
큰 복과 작은 복을 두루 내려 주시니
온 세상 바다의 파도도 잠잠해지고
임금의 수명은 천억 년토록 길어
그 복록은 길이길이 이어지고
그 백성을 길이 도우시리
이 노래를 지어 돌에 새겨
천년토록 그 빛을 드리우리라
(용어) 이정은 조선 선조 때의 화가로 자는 공간, 호는 나옹·나재·나와·설악이며, 3대에 걸친 화가 집안 출신으로 열 살 때 이미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다. 산수화와 인물화에 뛰어났으며 서른 살에 요절했다.
신도비 — 한성부 판윤을 지낸 최연 공의 신도비명 (서기 1607년 5월 10일, 양력 추정)
공의 이름은 연이고 자는 연지이며, 강릉 사람이다. 아버지는 아무 벼슬을 지내고 훗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는 진사로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증조할아버지는 사간원 정언으로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니, 삼대 조상이 모두 공 덕분에 높은 벼슬을 받게 되었다. 어머니 김씨는 생원 아무개의 딸로 역시 정부인에 봉해졌다. 공은 1500년에 태어나 1519년에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1522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에서 문서 작성을 담당하다가 홍문관에 들어가 저작랑으로 승진했고, 호당에서 휴가를 받아 독서에 전념했으며, 이어 세자시강원 설서로 옮겼다가 곧 사서로 승진하고, 수찬·정언·지제교·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두루 지냈다.
밖으로 나가서는 충청 감영의 막료가 되었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가 다시 홍문관으로 돌아가 교리가 되었으며, 이조 정랑으로 옮겼다. 그 자리에 오래 있다가 검상으로 옮기고 사인으로 승진해서는 소세양을 따라 명나라 사신 시독을 맞이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돌아와서는 태복시 벼슬로 승진했다.
다시 홍문관으로 돌아가 응교가 되고, 전한·직제학·부제학으로 차례로 승진했으며, 대사간으로 옮겼다가 다시 승지로 승진했다. 1545년에는 도승지로서 공신 명단에 들어 품계가 오르고 동원군에 봉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성부윤으로 발탁되고 홍문관 제학을 겸하였다. 1546년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평양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는데, 조정에서는 그 죽음을 애도하여 관청에서 장례를 주관하고 좌찬성 겸 대제학으로 추증했다. 1577년에 다시 공신 작위를 받고 관계를 추증받았으며, 나머지 사항은 예전과 같다.
공은 천성이 호탕하고 한 번 들으면 곧 외우는 재주가 남보다 뛰어나, 하루에 만 자씩 외우고는 평생토록 잊지 않았다. 그래서 글을 쓸 때는 붓만 잡으면 바로 이루어졌고, 그 글은 찬란하여 볼만했다.
집안에서는 효성으로 부모님을 섬겼고 세 아우와의 우애가 극진했으며, 청렴결백하여 집에는 사사로운 재물이라고는 없었다. 직분을 수행할 때는 공손함으로 임하고 신중함으로 자신을 지켰으며, 조심스러워 남과 권세를 다투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심정, 김안로,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에도 몸을 온전히 보전하여 끝내 화를 입지 않았다.
소세양이 공을 천거하여 시독의 임무를 맡게 하였는데, 시를 짓는 재주가 넓고 컸다. 명나라 사신 설황문이 날마다 수십 편의 어려운 운자를 내놓았지만, 긴 작품을 짓는 일이나 온갖 문체를 공이 모두 감당하여 말 위에서 즉석으로 지어 올렸다. 그 시의 말과 뜻이 모두 아름다워 퇴휴 소세양이 몹시 감탄하며 칭찬했고, 명나라의 두 사신도 공의 재주를 알아보고 매우 우대했다.
중종대왕 말년에 오래도록 왕명을 짓는 일을 맡았으므로 조정에서 내리는 중대한 문서는 모두 공의 손에서 나왔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가 마땅히 대제학의 자리를 맡아야 한다고 여겼다.
당시에는 중종과 인종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시어 나라에 일이 많았다. 신광한은 글 지을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을 추천했으므로, 애사와 시호를 청하는 글, 사면령 같은 글은 모두 공이 대신 지었다. 중종의 애책문은 글이 매우 아름답고 유려하여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칭송하고 있다. 기재 신광한은 여러 차례 대제학의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고 공에게 넘겨주려 했다.
공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던 중 그의 동생이 도중에 세상을 떠나자, 공은 양친이 마음 아파하실 것을 염려하며 근심하다가 그것이 병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하늘이 그에게 맡긴 소임을 다 마치지 못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공은 아무 벼슬을 지낸 김씨 집안의 딸과 혼인하여, 사직 벼슬에 있는 아들 아무개를 낳았다. 손자는 둘인데 모두 무과에 급제했고, 증손은 넷인데 그중 최용은 진사였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예순 해가 되는 1607년 4월, 최용이 자기 아버지의 관을 갈아 다시 장사 지내고 공의 행장을 간행하고자 하여, 진주 고을 원으로 있던 나 허균에게 명문을 지어 줄 것을 청했다. 그는 나와 같은 고향 사람이다. 어찌 감히 글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산과 바다의 빼어난 기운이 모여
글재주가 풍성하니
중종을 섬겨 벼슬하며
옥당에서 이름을 드날렸네
왕명 짓는 솜씨가 전아하여
옛 중국의 명문장가들에 견줄 만하네
임금의 예복이 휘황하게 빛나고
생황과 종소리 쟁그랑 울리네
나라의 덕을 널리 펴고
임금의 다스림을 도왔네
이제 막 문형의 자리가 비었는데
공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니
임금께서 탄식하시고
글하는 선비들도 마음 아파하네
그 재주는 시들지 않고 남아
길이 그 향기를 남기리라
울창한 저 좋은 무덤은
신림의 언덕에 있으니
묘도비에 이 노래를 새겨
길이길이 후세에 알리노라
(용어) 소세양(호 양곡·퇴휴당)은 중종 때 문신으로 명나라 사신을 문장으로 응대하여 이름을 떨쳤고 좌찬성으로 은퇴했다. 심정은 중종반정 공신이었으나 훗날 기묘사화를 일으키고 스스로도 사사되었다. 김안로는 여러 차례 파직과 재등용을 거듭하며 권세를 휘두르다 사사되었다. 이기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으나 훗날 관직이 모두 삭탈되었다. 신광한(호 기재)은 영의정 신숙주의 손자로 문장과 필력이 뛰어났던 문신이다.
갈 — 홍문관 교리 임수정 공의 묘갈명 (서기 1607년 11월 4일, 양력 추정)
홍문관 교리 임공의 장례를 치른 이듬해 9월, 그의 부인인 의인(정·종 6품 문무관 아내에게 내리는 봉작) 김씨가 나 허균에게 부탁하며 말했다.
"제 남편이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 묘비를 세우려 했으나, 그의 관직이 복권되지 않아 세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임금의 은혜를 입어 그의 관작이 되돌아왔으니, 그 이름을 끝내 묻힌 채로 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제 남편의 행적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당신 말고는 없으며, 남편의 집안 내력과 벼슬살이에 대해서도 당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행장이나 가계 같은 것을 따로 보내지 않고 이렇게 부탁드리니, 저를 위해 이를 기록하여 후대에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나는 울면서 말했다. "아아, 슬프다. 내가 차마 내 친구의 묘비명을 써야 한단 말인가. 내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그와 알고 지낸 지 오래되었고 또한 교분이 두터웠으니,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상고해 보건대, 임씨는 풍천 출신이며 대대로 명문 거족이다. 아버지는 아무개로 이조 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는 승지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증조할아버지는 참봉으로 찬성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청주 한씨는 목사를 지낸 아무개의 딸이다.
그의 이름은 수정이요, 자는 약초다. 1570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뜻을 지녀 매우 어른스러웠고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라면서는 딱히 정해진 스승 밑에서 배우지 않았어도 학문이 날로 발전했고, 너그럽고 속이 깊어 의연하게 큰 도량을 지녔다. 기쁨과 노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남의 허물을 입에 올리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늘 겸손했다. 그래서 부모가 특히 그를 아꼈다.
1588년에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했는데, 그 명성이 높았다. 주관이 뚜렷하고 행동이 법도에 맞아 동료들이 그를 어렵게 여겼고, 모두 그가 훗날 재상이 될 것이라 말했다. 문장을 지을 때는 조리가 매우 분명했지만, 오래도록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다가 1597년 봄에야 비로소 을과에 급제하니 사람들이 모두 축하해 주었다.
사관으로 임명되니 그가 쓰는 기록과 논평이 매우 공평하여 동료들이 모두 탄복했다. 관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고 이어 세자시강원 사서로 임명되었는데, 세자에게 학문을 권하는 방식에 법도가 있었다.
사간원 정언이 되어서는 탄핵하고 규찰하는 일에 사사로운 정을 두지 않았고,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자 글을 올려 임금께서 자주 경연에 나오시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하게 여겼다.
1600년에 사헌부와 사간원이 서로 논쟁을 벌였는데, 그 처리는 온당했지만 동료 신하들의 의견은 매우 치우쳐 있었다. 그러자 그는 분연히 말했다. "사간원에서 김씨와 남씨를 공격한 것도 이미 잘못인데, 사헌부에서 또 다른 중신을 끌어들여 보복하려 하니, 양사가 똑같이 의롭지 못하다. 양사 모두 교체할 것을 청해야 한다." 동료들은 결코 안 된다고 했지만, 그는 끝내 서명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조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이는 그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가 끌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분한 기색도 없이 말했다. "남씨와 홍씨는 모두 나와 가까운 사이인데, 옥당이 남씨를 공격한다면 내가 어찌 그대로 따르겠는가. 이번 논쟁은 큰 시비거리가 될 만한 것도 아닌데, 내가 그저 우정을 지키려다 불행히 비난을 받게 되었으니, 잘못은 저쪽에 있다."
그 뒤 사헌부 지평(정오품)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을 때 시국의 여론이 또다시 홍씨를 공격했다. 그가 그때 홍씨 편에 서 있었으므로, 홍씨를 공격하는 자들은 바로 그가 그 일에 가담했다고 의심하여 심하게 꾸짖었지만, 그는 잠자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 일로 그는 면직되고 말았다.
광릉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지내는 동안 아침저녁으로 늘 즐거운 마음으로 지냈고, 정호·정이 형제의 책을 열심히 읽어 이치를 밝히면서 세상일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1605년 할머니의 상을 당해 슬픔으로 몸이 상해 지팡이를 짚고서도 상주 노릇을 하기가 벅찼으므로, 어머니께서 예법을 다소 완화하라고 권했지만 따르지 않았다. 그러다 이듬해 8월에 끝내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했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공을 잘 아는 선비들 가운데 눈물 흘리며 조문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해 10월 조상의 무덤 곁에 묻혔다.
병마절도사를 지낸 아무개의 딸 김씨는 현숙하고 행실이 반듯했다.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는데, 맏딸은 선비 이상문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아직 어리니, 그가 남긴 복은 마땅히 이 아이들에게 있을 것이다.
그와 나, 그리고 지금 재상으로 있는 최여이, 예조에 있는 임자승은 상곡에서 함께 자라 그 정이 형제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자승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그마저 떠나 버리니,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두 사람뿐이다.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 곤궁하고 형통한 것이 이토록 고르지 않으니, 앞으로 남은 일인들 어찌 온전하기를 기약할 수 있겠는가.
그와 나는 예전에 장난삼아 서로의 묘비문을 지어 준 일이 있었다. 그때 그가 말하기를 "내가 나이가 더 적으니, 내가 자네의 비문을 지어야겠지" 하기에, 나는 "앞일이란 알 수 없는 법일세. 세상에 어린아이의 무덤이 왜 있겠는가" 하며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었다. 아아, 슬프다. 나이 많고 몸 약한 이 사람이 먼저 그의 묘에 명문을 짓게 되다니, 하늘의 이치는 믿기 어렵고 사람의 일 또한 늘 그대로가 아니로구나. 명은 다음과 같다.
그릇은 넓고 크며 행동은 굳세고 강직하니
그대 나이 들면 마땅히 조정에 오를 줄 알았거늘
하늘은 어찌 이리 무정하여 내 좋은 벗을 앗아 갔는가
벗들은 슬퍼하고 선비들은 낙담하네
잘 자란 자식들이 의젓하게 줄지어 서 있으니
쌓인 경사가 마땅히 오래 이어지리라
광릉의 무덤 길은 어찌 그리 울창한가
단단하고 고운 돌에 새겨 그 향기를 기록하니
아아, 천추토록 잊지 말지어다
증 공조판서 행 대호군 이흥효 공의 묘갈명 (서기 1610년 3월 9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화가 집안으로는 이씨 가문을 꼽는다. 이씨 집안은 4대에 걸쳐 그 명성을 독차지해 왔는데, 그중에서도 중순공(이흥효)이 가장 뛰어났다. 채색이 특히 훌륭했고, 산수화에 능했다.
돌아가신 내 아버님께서는 중순공을 그저 그림쟁이로 대접하지 않으셨으므로, 그는 거리낌 없이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나는 둘째 형님께 여쭈었다. "중순이 어떤 사람이기에 아버님께서 저토록 후하게 대접하십니까?" 형님이 답했다. "그 사람은 아름다운 선비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옛 현인을 사모하며 시를 좋아하고 거문고와 바둑에도 밝으며, 마음이 탁 트여 세속에 얽매이지 않으니 특별히 대접하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이미 그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의 조카 이정과 나는 나이 차이도 잊고 매우 친하게 지냈다. 이정의 그림 또한 매우 훌륭했고, 그 성품은 깨끗하고 고매하여 먹고사는 일에는 통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숙모께서는 그의 먹고 입는 일을 친자식보다도 더 잘 챙겨 주셨다. 나는 이것이 몹시 신기하게 여겨졌는데, 이정이 말했다.
"숙부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제 숙부께서는 성품이 소박하여 화려한 것을 즐기지 않으셨고, 집안 살림이 넉넉한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말은 가려서 하고 행동은 신중히 하셨으며, 부모님 상을 당해서는 정성껏 시묘살이를 하며 예를 다하셨습니다. 명종 때는 문정왕후께서 숙부의 그림을 칭찬하시며 자주 물건을 내려 주셨는데, 숙부께서는 이에 감격하여 삼 년 상복을 입으신 듯한 마음으로 지내시고, 왕후의 기일이 되면 술과 마늘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고 친척들과는 화목하게 지내셨으며, 사람을 가려 공경으로 사귀셨습니다. 부부로 삼십 년을 함께 사시면서 단 한 번도 실없이 히히덕거린 일이 없었고, 어떤 일을 당해도 당황하여 낭패를 겪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옛 책을 많이 모으셨고, 유학자를 만나면 학문을 토론하는 데 게으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림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찮은 기색 없이 그려 주셨습니다. 제가 일찍 부모를 여의자 숙부께서는 저를 당신 자식처럼 길러 주셨습니다. 1593년 6월 숙부께서 병환이 심해지시자 저를 숙모께 부탁하셨는데, 숙모께서는 그 유언을 저버리지 않고 지키셨습니다. 숙모님 또한 신중하고 예의가 발라, 십여 년 동안이나 채식만 하고 흰옷을 입으며 돌아가신 남편을 그리워하셨습니다. 그 절개와 행실이 하늘에 닿을 만하니, 저를 잘 대우해 주신 것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 역시 이 이야기를 통해 그의 집안에서의 행실이 바로 그런 가정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정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 이듬해인 1608년 7월에는 그의 숙모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의 이름은 흥효요 자는 중순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그림에 뛰어났다. 그는 1537년에 태어나 여덟 살에 이미 집안의 화업을 이어받았다. 명종 때 중종의 초상화를 그린 공으로 대비께서 그를 내수사의 서제로 발탁하시고 농토를 내려 대대로 지어 먹게 하셨다. 선조 5년에는 수문장에 특별히 제수되어 품계가 어모장군까지 올랐고, 호군으로서 원종 광국공신에 녹훈되었다. 향년 쉰일곱이었다.
아들 이장이 선무 원종공신에 책봉되었으므로 그는 공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부인 김씨는 정부인에 봉해졌다. 부인 김씨는 병오년에 태어나 예순셋에 세상을 떠나 양주 아차산의 어느 자리에 합장되었다.
그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이추요 둘째는 이장으로, 둘 다 역관을 직업으로 삼았다. 이장은 공을 쌓아 2품 벼슬까지 올랐다. 막내 이주는 대대로 내려오는 화업을 이어받았다. 딸 넷은 각각 아무개에게 시집갔다.
경술년 봄, 그의 아들들이 찾아와 묘에 새길 글을 청했다. 나는 말했다. "이는 마땅히 써야 할 일이다. 나는 둘째 형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고인에 대해 잘 알게 되었고, 이정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반듯한 품행을 자세히 알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글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재주도 있고 품행도 있으며
벼슬도 있고 대를 이을 아들도 두었으니
온전한 삶을 다 살고 돌아갔으니
그 누가 그를 죽었다 하겠는가
무덤 길에 표석을 세워
천 년토록 이를 알리노라
성소부부고 제17권
10. 00:08
성소부부고 제17권 · 문부 14 · 묘표·묘지
출처: 성소부부고 제17권, 문부 14, 묘표·묘지
배경: 제17권에는 "묘표"와 "묘지"라는 두 갈래의 글이 실려 있다. 묘표는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에 새기는 글이고, 묘지(묘지명)는 죽은 이의 행적을 적어 관과 함께 땅에 묻는 글로, 대개 마지막에 후손에게 남기는 짧은 운문(이를 "명"이라 한다)을 덧붙인다. 이 권에는 허균이 고향 강릉에서 만난 인물들, 과거를 함께 보고 벼슬살이를 함께한 벗들, 그리고 임진왜란 중에 목숨을 잃거나 의병을 일으킨 이들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어, 조선 중기 사대부 사회의 인간관계와 전란의 상흔이 함께 드러난다.
일러두기 하나: 원문에는 죽은 이의 증조부·조부·아버지의 이름이나 벼슬이 확실하지 않을 때 "아무개"라는 뜻의 표시를 임시로 넣어 둔 곳이 많다. 이런 곳은 모두 "이름(또는 벼슬)이 전하지 않는다"거나 "아무개"로 옮겼다. 일러두기 둘: 이 권에는 조선 시대의 과거 제도와 관직 이름이 많이 나온다. "생원시·진사시(또는 사마시)"는 성균관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예비 시험이고, "문과(대과)"는 관리가 되는 본시험이며, "향시"는 지방에서 치르는 예비 시험, "발해"는 그 예비 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뜻한다. "좌랑·정랑"은 육조(호조·예조·형조 등 여섯 중앙 관청)의 실무 벼슬이고, "지평·헌납"은 관리를 감찰하고 임금께 간언하는 사헌부·사간원의 벼슬이며, "검열·대교·봉교"는 예문관에서 임금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던 벼슬이다. 이런 용어들은 매번 풀어쓰지 않고, 문맥상 필요할 때만 따로 설명을 붙였다.
묘표 —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 글 두 편
승정원 우승지 박시형의 묘표 (서기 1597년 5월 7일, 양력)
우리 강릉에는 본디 조선에서 이름난 학자와 큰선비가 많이 나왔다. 나라에 공이 많아 어진 신하가 된 사람으로는 최치운 부자가 있고, 학문과 몸가짐으로 선비 사회에서 칭송받은 이는 박공달과 박수량이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이는 심언광과 최연 등이니, 모두 역사를 기록하는 이들의 글에 실려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런데 승지를 지낸 박공만은 성종 임금 시절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가 되어 오랫동안 성종의 총애를 받았고, 주역에 밝아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로 발탁되는 아주 특별한 대우를 받았는데도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라의 오래된 전례와 옛일을 제대로 고증할 줄 모르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들을 따로 기록해 두는 이도 없었으므로, 비록 벼슬과 공적이 빛났던 사람일지라도 그 행적이 묻혀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 애석한 일이다.
공의 아들은 박공달이요 손자는 박수량인데, 고향 사람들이 그의 아들과 손자는 일컬을 줄 알면서 정작 공을 일컫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그의 사람됨이 오직 소박하고 겉을 꾸밀 줄 몰랐기 때문이다.
만력 정유년(1597년)에 박공달의 손자 박인각이 찾아와 말하였다.
"저의 증조부의 행장은 저의 당숙이 이미 기록하여 무덤 속에 함께 묻었습니다만, 묘비에는 이름만 새겨져 있을 뿐 비문은 없습니다. 그대가 저를 위해 비문을 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박공에 관한 일이라면 내가 잘 알고 있어 예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소. 그러나 그의 행적과 업적, 집안 내력, 과거에 급제한 과목, 관직의 이력은 모두 지문에 실려 있을 터이니 다시 쓸 필요가 없소. 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들을 내가 본 대로 적어 보리다."
내가 젊었을 때 승정원 일기를 보니 이런 기록이 있었다.
"공이 국자박사로 있으면서 상소를 올려 유학을 숭상할 것을 청하니, 성종께서 가상히 여겨 특별히 홍문관에 배치하였다."
또 내가 사관이 되어 은밀히 전해지는 기록들을 살펴보다가 우연히 공에 관한 기사를 보았는데 이렇게 되어 있었다.
"공이 사헌부 지평으로 임금을 뵈었을 때, 내수사의 여종들이 음악을 익히는 것을 금지해 달라고 청하니 왕께서 이를 허락하셨다."
또한 홍귀달의 문집에는 "공이 경전의 뜻에 밝고 품행이 방정하다"고 되어 있고, 성현의 문집에는 "공이 안동을 다스릴 때 청렴결백하여 교화가 크게 행해졌다"고 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공이 성균관을 수리하고 그 기문을 썼는데 매우 법도가 있었다"고 되어 있는가 하면, 김종직의 문집에서도 공의 일을 여러 차례 칭찬하고 있다.
이상으로 본다면 공의 학문과 행실, 벼슬살이, 문장이 모두 남보다 뛰어났으며, 임금 앞에서 곧은 말을 하는 강직한 신하의 풍모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송하였으나, 다만 나이가 짧고 벼슬이 높이 오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컬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아들 박공달은 기묘년(1519년)에 어질고 청렴하다 하여 천거된 인재, 곧 "현량"으로 뽑혀 뜻있는 선비들의 추대를 받았으니, 이것만 보아도 그가 자식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알 수 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마땅히 이 일을 드러내어 앞서 든 여러 인물들과 함께 후세에 전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손자 인각이 마침내 그 일을 해냈으니, 이는 그가 능히 효를 다하고 조상의 뜻을 이어받았다고 할 만하다.
공의 이름은 시형이요, 자는 조겸이며, 벼슬은 우승선에 이르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지금 그의 자손 서른 명 남짓이 북촌에 살고 있으며, 그의 무덤도 그 안에 있다고 한다.
정유년(1597년) 3월 22일, 고향 사람인 통선랑 행 예문관 검열 겸 춘추기사관 세자시강원설서 허균은 삼가 이 글을 쓴다.
(용어) 최치운은 강릉 출신의 조선 초기 문신으로 이조판서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박수량은 연산군 때 모친상을 삼 년 동안 정성껏 치른 효행으로 이름났던 학자다. "우승선"은 승지를 옛말로 이르는 이름이다. "국자박사"는 성균관에서 유학을 가르치던 벼슬이며, "지문"은 죽은 이의 행적을 적어 무덤 속에 함께 묻는 글을 뜻한다. "현량"은 중종 때 학문과 인품을 갖춘 인재를 시험 없이 천거하여 뽑던 현량과 급제자를 가리키는데, 이 제도로 뽑힌 이들은 대개 개혁적인 젊은 선비들이었으나 훗날 기묘사화 때 대부분 화를 입었다.
진사 심장원의 묘표 (서기 1608년 5월 28일, 양력 추정)
진사 심형의 이름은 장원이요, 자는 경혼이다. 삼척 사람으로 고려 때 학사를 지낸 심동로의 후손이다. 증조부 심준은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시랑을 지냈고 뒤에 좌찬성으로 추증되었다. 할아버지 심언광은 중종대왕을 섬겨 이조판서까지 올라 매우 귀하고 현달하였으나 만년에는 관직을 삭탈당한 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심운은 어질고 글을 잘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강릉 김씨로 예조참판 김광철의 딸이다. 공은 가정 신묘년(1531년)에 태어나 만력 정미년(1607년) 7월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일흔일곱이었다.
공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으나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여 학문이 매우 해박하였다. 성격이 고고하고 결백하여 세속에 잘 맞지 않았으며 의롭지 않은 것은 털끝만큼도 취하지 않았다. 남과 사귀는 일도 별로 없이 대문을 걸어 잠그고 날마다 글만을 전공하였다. 제사를 모실 때에는 매우 정갈하게 하였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이 되면 하루 종일 무릎을 꿇고 몸가짐을 바로 한 채 울었다. 시와 부로 여러 차례 향시와 서울에서 치르는 복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무진년(1568년)에야 비로소 진사가 되었으나 끝내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강릉으로 가서 살았는데, 감호 가에 선대의 묘가 있었으므로 그 비어 있는 땅 중에 호수를 마주한 자리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낚시를 벗 삼았으며 꽃과 대나무를 심어 놓고 그 사이를 거닐면서 날마다 시를 읊조렸다. 또한 옛 서화를 많이 수집하였는데, 어디서든 특이한 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찾아가 그것을 구하여 손수 베껴 쓰면서도 지루한 줄을 몰랐다. 누구든 장기 두는 사람을 보면 공부는 하지 않고 쓸데없는 짓만 한다고 꾸짖었다. 관청에는 한 번도 드나든 일이 없었으며, 선비를 만나면 번번이 유학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지은 시문이 수십 권에 달하였다. 그의 시는 당나라 이상은의 시풍을 본받아 내용이 매우 풍부하고 부드러웠으며 힘이 있으면서도 아름다웠다. 이율곡이 함께 시를 지어 화답해 보고는 도저히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한다.
처음에는 이씨와 결혼하고 두 번째로 김씨와 결혼하였으나 모두 자식이 없었고, 서출로 심각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좌랑을 지낸 조카 심열에게 조상의 제사를 맡기고 자기가 지니고 있던 책을 모두 그에게 물려주었다. 호숫가 선산의 남쪽을 바라보는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그해 9월 13일이었다. 이종사촌 동생 공주목사 허균은 삼가 이 글을 쓴다.
(용어) 이상은은 당나라의 시인으로, 그의 시풍을 본받아 옛이야기와 고사를 즐겨 인용하고 수사에 공을 들인 화려한 시풍을 훗날 사람들이 따로 이름 붙여 불렀다. "경향해"란 지방에서 뽑힌 인재를 다시 서울에서 시험 보게 하던 일을 가리킨다.
묘지 — 죽은 이와 함께 묻은 행장과 명 아홉 편
예조좌랑 임현의 묘지명 (서기 1602년 10월 30일, 양력 추정)
군은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났으나 달과 날은 나보다 앞섰고, 함께 남상곡에서 자랐으니 대구를 짓는 법을 배울 때부터 함께 공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을유년(1585년) 봄에 함께 한성부에서 향시를 치를 때 군은 갑자기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남쪽으로 떠났고, 이어 조부모의 상까지 당하여 경인년(1590년) 여름이 되어서야 서울로 올라와 승지 민준의 집안에 장가들었다. 나는 그를 찾아가 그의 학문을 살펴보니 넓고 깊었으며, 글을 짓는 솜씨는 마치 봇물이 터지듯 말이 치닫듯 하여 도무지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신묘년(1591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정유년(1597년) 여름 임금이 친히 주관한 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기해년(1599년) 봄에 승정원 주서로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세자시강원 설서로 옮기고, 가을에는 예문관 검열로 천거되어 이어 대교와 봉교로 승진하였다.
이때 한 재상이 군을 인재로 인정하여, 군은 가만히 앉아서도 좋은 벼슬자리를 얻은 셈이었다. 그러나 군은 한 번도 그를 찾아가 감사 인사를 한 일이 없었다. 오직 강가에 살던 나와 아침저녁으로 만나 시를 짓고 가야금과 노랫소리를 듣는 것으로 일을 삼았을 뿐이다. 그가 지조를 지키고 권세와 이권을 좋아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경자년(1600년) 여름에 예조좌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군은 본디 몸이 허약한 데다 잇달아 상을 당하며 얻은 병으로 몹시 고생하고 있었으므로, 지방관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강진 현감이 되었으니, 이는 어른을 모시고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었다. 이듬해 내가 왕명을 받들어 호남에서 선비들을 시험할 때 군도 함께 시험관이 되었는데, 이미 병이 깊었으므로 나가서 그 자리를 그만두고 돌아가 병을 치료하라고 권하였다. 그리하여 4월에 과연 사직하고 돌아갔으나, 끝내 이 병으로 6월 어느 날 영암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서른셋이었고, 아들은 없고 딸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군의 성품은 소박하고 벼슬에 나아가는 데 담담하였으며 남의 허물을 입에 담지 않았다. 집안이 본디 넉넉하였으므로 재산에는 별로 마음 쓰지 않아, 궁한 사람을 보면 번번이 베풀어 주었다. 지극한 정성으로 홀어머니를 모셨고, 그의 숙부에게 아들이 없자 마치 자기 아버지 제사를 지내듯 그 제사를 받드니 친척들이 모두 그를 칭송하였다.
군의 이름은 현이요, 자는 자승이며, 숭선 사람이다. 증조부와 조부는 이름과 벼슬이 전하지 않으며, 아버지는 진사였으나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외조부 이씨도 벼슬이 전하지 않는다. 장사 지낸 이듬해 부인 민씨가 나에게 명문을 지어 달라 청하니, 이에 울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그대가 묻힐 때
나는 조운을 맡은 관리였다네
무덤 구덩이를 들여다보며
울면서 관을 내렸네
내 정성을 다했건만
그대는 어찌 기뻐함도 서운함도 없는가
그대의 행적을 기록하여
이제 이 땅에 묻노라
(용어) "권지 승문원부정자"는 외교 문서를 담당하던 관청인 승문원의 임시직 벼슬이다.
사헌부지평 윤계선의 묘지명 (서기 1604년 8월 1일, 양력 추정)
정유년(1597년), 임금이 성균관에 나아가 인재를 뽑는 시험을 치를 때 오성부원군(이항복)이 시험관이 되어 군의 글을 보고는 혀를 내두르며 "기이하고도 아름답다. 필시 대가의 솜씨다" 하고는 마침내 장원으로 뽑았으니, 그때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명성이 자자하여 안팎에서 인재를 얻었다고 기뻐하였다. 예조를 거쳐 병조좌랑, 세자시강원사서, 사간원헌납으로 임명되고, 홍문관에 들어가 검토관이 되었다. 경자년(1600년)에 사헌부지평으로서 임금을 뵙고 자문에 응하였다. 당시 임금은 두 이씨가 홍여순을 탄핵하는 일로 노여워하고 있었는데, 완성부원군 이헌국이 양쪽 모두에게 죄를 물을 것을 청하였다. 군은 임금 앞에서 대놓고 그가 양쪽 모두의 편을 드는 것을 배척하였다. 임금이 크게 노하셨으나 군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더욱 간절하게 말씀을 올렸다. 임금이 군을 옹진현령으로 내보내니, 당시 여론이 그를 아까워하였다.
그러나 군은 개의치 않고 임지로 가서 부지런히 직무를 수행하였는데, 청렴하고 엄격하며 분명하고도 너그러워 아전과 백성들이 감히 그를 젊다고 가벼이 여기지 못하였다. 또한 관청 일을 처리하는 데 능하여 무슨 일이 생기면 성가시게 여기지 않고 시원하게 판정을 내렸다. 지방 장관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임금께 아뢰어 상으로 옷감을 내리게 하였다. 옹진현에 있을 때 중풍을 얻어 집으로 돌아갔다가, 얼마 뒤 평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이 다시 도져 들것에 실려 돌아온 뒤 갑신년(1604년)에 세상을 떠나니 스물여덟 살이었다.
군의 이름은 계선, 자는 이술이며 파평 사람이니, 고려의 태사 신달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이조참판을 지냈고 조부는 예조판서를 지냈다. 아버지 희굉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이씨는 벼슬한 이의 딸이다. 큰숙부 윤희정에게 아들이 없어 군이 그 뒤를 이었다. 군수를 지낸 윤씨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아들은 없고 어린 딸이 하나 있다. 어느 달 어느 날 선산에 묻었다.
군은 성품이 높고 뛰어나 범상치 않았으며 큰 뜻과 굳센 결단력이 있었으므로 남에게 영합하지 않고 일을 만나면 과감하게 행동하였다. 사람을 대할 때는 생각한 바를 그대로 털어놓았고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그와 사귀는 사람들이 모두 이 점을 칭찬하였다. 그의 문장은 넓고 풍부하여 붓만 잡으면 그 자리에서 만여 자를 써 내려갔다. 특히 넉 자와 여섯 자로 짝을 맞추어 짓는 화려한 문체에 뛰어났는데, 산뜻하고 풍부하며 매우 시원스러웠다. 그의 시는 당나라의 두 시인 유우석과 두목 사이를 넘나들어 그 웅장하고 화려한 품격이 사람들의 눈을 놀라게 하였으니,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 성취가 어찌 이 정도에 그쳤겠는가. 참으로 안타깝다. 나는 그와 문장으로 절친하게 지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하늘이 재주 있는 사람을 내는 것이
만약 쓰일 데가 있어서라면
어찌하여 이토록 빨리 앗아 갔는지
그 이치를 도무지 알기 어렵네
썩지 않을 덕이 남아 있으니
내 또한 어찌 슬퍼만 하리오
그대의 옛일을 자세히 알고자 하는 이는
내가 지은 이 글을 보아 주기를
(용어) 오성부원군은 임진왜란 때 다섯 차례나 병조판서를 지내며 나라를 이끌었던 명신 이항복을 가리킨다. 홍여순을 둘러싼 탄핵 다툼은 선조 말년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벌어진 정치 다툼이다. 유우석과 두목은 모두 당나라의 이름난 시인이다.
성균생원 신노의 묘지명 (서기 1594년 3월 6일, 양력 추정)
우리 큰형은 벗을 사귀는 데 매우 신중하여 그 수가 적었는데, 유독 신공하고만은 서로 마음을 열고 사귀었다. 그 무렵 공이 과거를 보러 가지 않아 비난이 자자하였고,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그와 사귀는 사람까지 함께 비방하였는데도 형은 조금도 태도를 바꾸지 않고 오히려 더욱 다정하게 대하였다.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공이 주먹을 불끈 쥐고 세상일에 분통해하며 이발의 억울함을 힘주어 말하면서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보고는, 형은 그가 강개한 뜻을 지닌 선비임을 알아보고 그때부터 그의 견해를 따르게 되었다.
공의 사람됨은 절개가 굳고 고집스러워 남을 쉽게 용납하지 못하였고, 성품이 깨끗함을 좋아하여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사귀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문을 걸어 잠그고 날마다 옛 책을 읽었으며 세속의 일에 어울리기를 싫어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두고 세상의 병폐를 아는 사람이라 일컬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임진년(1592년)에 함께 북쪽으로 피난하면서는 나라가 흔들리는 것을 슬퍼하여 목메어 울며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벼슬길에 나가지는 못하였으나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어찌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보다 못하겠는가?"
곡구역에 이르러 명종의 기일을 맞았을 때는 울면서 역관 벽에 시를 적었는데, 그 말과 뜻이 처절하여 홍시가와 김숙부 등 여러 사람이 보고는 감동하여 칭찬하였다. 단천에 이르러서는 군수 강찬에게 권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격문을 지었는데, 듣는 사람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 왜적이 회령에서 두 왕자를 사로잡았을 때, 공은 포위된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빠져나와 석막에 숨어 지내면서 집안사람 석린과 함께 정견룡 등을 설득하여 병사를 일으키게 하고, 평사 정문부를 추대하여 장수로 삼아 마침내 왜적을 무찌르고 육진을 되찾았으니, 이 모든 일을 실은 공이 주도한 것이었다. 나라를 위하는 그의 정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내가 큰형에게 "신공이야말로 참된 열사인데, 세상의 비방이 형에게까지 미치는 것이 참으로 한스럽습니다" 하니, 형은 웃으면서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기란 본디 쉽지 않은 법이니, 사람들이 그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뿐이다" 하였다.
계사년(1593년) 겨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마흔여덟 살이었다. 공의 이름은 노요, 자는 제이인데, 고령군 문충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이름과 벼슬이 전하지 않고, 할아버지는 공주에게 장가들어 고원위에 봉해졌다. 증조부는 예조참판을 지냈고 어머니는 아무개 씨였다. 아무개 씨와 결혼하여 어린 아들 하나와 시집간 딸 하나가 있다.
공은 문장이 풍부하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옛 문장에 능했는데 대범하고 엄격하여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시는 송나라 시인 진사도와 진여의의 시풍에서 나와 뜻이 깊고 경계하는 바가 뚜렷했다. 특히 넉 자와 여섯 자로 짝을 맞춘 문체에 뛰어나 사람들이 그를 옛 중국의 이름난 문장가들에 견주었다. 전해지는 글이 수백 편이나 되어 후배들이 모두 외우고 본받았다. 정묘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끝내 곧고 강직한 성품 탓에 세상의 미움을 받아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북쪽으로 피난하였을 때 세운 공으로 오품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유언에 따라 명정에는 진사라고만 기록하였다. 공의 아우 신부가, 나의 형제가 공을 잘 안다 하여 묘지에 넣을 글을 청하니, 이에 울면서 다음과 같이 명한다.
군자가 겪는 어려움은
그 몸을 깎아 내어
뒷사람에게 남겨 주는 것이라네
(용어) 기축옥사는 선조 22년(1589년)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큰 옥사로, 이 일로 여러 인물이 화를 입었다. 이발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된 문신이다. "명정"은 죽은 이의 관직과 이름을 적어 상여 앞에 세우는 깃발을 말한다.
순천부사 성계선의 묘지명 (서기 1610년 9월 1일, 양력 추정)
갑오년(1594년) 봄, 내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신참 관원 모임에 나갔을 때 민유경·정곡·박동망·성진선과 성계선 형제·민여신·박원, 이렇게 일곱 사람이 함께 나갔다. 열흘 남짓 만에 마치 오래된 동료처럼 서로 허물없이 지냈다. 나와 성계선은 나이가 가장 어렸으므로 유독 가깝게 자주 오가며 서로 일찍 알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하였다. 그 뒤 나는 왕명을 받들어 동쪽 지방으로 돌아가고 세상에서 따돌림을 받아 여러 차례 변방에 머무느라 소식을 전하지 못하다가, 임인년(1602년) 봄에 병조에 자리를 얻었을 때 군도 마침 같은 관청에 있어 서로 만나 몇 달을 즐겁게 지냈다. 그러다가 군이 무장현감으로 나가게 되어 서울 남쪽 교외에서 손을 맞잡고 헤어졌는데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군은 어려운 고을을 잘 다스려 여러 차례 포상을 받았고, 이어 서천군수와 남원부사로 자리를 옮기며 유능하다는 소문이 안팎에 자자하였다.
병오년(1606년) 봄, 내가 용만으로 부임하러 가려 할 때, 군이 벼슬을 그만두고 남산 집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더니, 군의 얼굴은 초췌하고 수염에는 흰 터럭이 섞였으며 이도 서너 개나 빠져 있었다. 이상히 여겨 물었더니 군은 "나는 일찍 늙고 게다가 병까지 들었으니 어찌 오래 살겠는가?" 하였다. 내가 "세상에는 튼튼하고 병 없이도 일찍 죽는 사람이 있고, 쇠약하고 지쳐 보여도 오래 사는 사람이 있으니, 그대가 몸을 아끼고 잘 다스리면 저절로 오래 살 수 있을 것이오" 하였더니, 군은 "그렇겠지" 하였다. 얼마 뒤 군은 순천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병 때문에 돌아왔다. 나는 그때 공주로 부임하던 길이라 작별 인사를 하러 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이듬해 정월 어느 날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향년 마흔셋이었다.
아, 슬프다. 그대는 재능이 있어 지방관의 일을 잘 해내었다. 가는 곳마다 백성에게 이로운 일을 일으키고 해로운 것을 없애는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 천성이 낙천적이어서 남과 시비를 다투는 일이 없었다. 그대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으며 벗에게는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웠으니 마땅히 크게 현달했어야 할 터인데, 나이와 지위가 여기서 그치고 자손도 없으니 하늘의 이치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춘추관에서 여덟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함께 노닐 때 세상에서는 모두 우리가 밝은 하늘에 우뚝 솟아오를 것이라 기대하였는데, 지금까지 열예닐곱 해 사이에 곤궁함과 형통함, 영화로움과 초췌함이 저마다 다른 가운데, 그대와 민여신, 박원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나머지 다섯 사람도 혹은 늙고 혹은 병들고 혹은 운수가 어그러졌으니, 예닐곱 해가 지나면 이 다섯 사람인들 어찌 모두 살아 있으리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새것과 헌것이 서로 바뀌는 이치가 이와 같으니, 나 또한 무엇을 탓하겠는가.
그대는 하산의 이름난 집안 출신으로, 증조부와 조부는 이름과 벼슬이 전하지 않으며, 아버지는 예조참판을 지냈고 어머니는 아무개 씨로 정부인에 봉해졌다. 대사성 이충작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대의 이력이 이처럼 빛나고 또 빛나며, 일찍이 호조·예조·형조 세 부서의 좌랑을 지냈고 성균관 전적도 지냈다. 어느 달 어느 날 어느 산에 장사 지내니, 그 아버지 묘가 있는 곳이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 창녕군은
아들이 셋이라 들었네
막내로 그대가 태어났는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났네
험한 고을을 네 차례나 맡아 다스려
백성들의 간사한 마음을 가라앉혔건만
쉰도 못 채우고 일찍 세상을 떠나니
하늘은 어찌 그리 인색하신가
파주산 동쪽
울창한 숲 속 그대의 무덤
내가 이 글을 지어
영원토록 전하노라
(용어) "정부인"은 조선 시대 종이품 이상 문무관의 아내에게 내리던 봉작이다.
목천현감 이군정의 묘지명 (서기 1609년 4월 18일, 양력 추정)
만력 기유년(1609년)에 벗 목천현감 이군정은 당대의 훌륭한 사람이었는데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고를 듣고는 곡할 자리를 마련하여 곡을 하였다. 3월에 임천의 선산에 장사 지냈다.
그의 아들 이제운이 급히 사람을 보내 묘지에 넣을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슬프다, 내가 차마 내 벗의 명문을 지어야 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대는 한산의 이름난 집안 출신으로 목은 이색의 9대손이다. 증조부와 조부는 이름과 벼슬이 전하지 않으며, 아버지는 사헌부 집의를 지냈고 어머니는 아무개 씨였는데, 이 두 분 사이에서 그대가 태어났다. 그대는 일찍부터 남다른 뜻을 품어 스스로 뜻을 세우는 바가 있었다. 아버지가 해남으로 유배를 가고 어머니는 서울에 계실 때는 두 곳을 오가며 부지런히 봉양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두 분의 상을 극진히 예를 갖추어 치렀다. 남과 사귀기를 잘하여 그가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대의 이름난 이들이었다. 평생토록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하였고 남의 환난을 자기 일처럼 여겼다. 큰집에 화가 미쳐 아무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을 때, 그대는 의연히 나서서 네 분의 상을 치러 주고 그 집 살림까지 도와주었다. 임진년에 홍흥진이 집안은 내버려 둔 채 임금을 호종하여 떠나고 그 아들 홍여율은 남쪽에 남아 있었으니, 그 집안은 슬프고 두려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대는 홍여율과 교분이 있었으므로 그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피난하여 마침내 전란의 화를 면하고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 그가 이처럼 의리에 두터운 사람이었다.
그대는 어려서 글을 배워 여러 차례 향시에 올랐으나 쉰이 되어서야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별좌와 도사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천성이 온화하여 남과 나누는 농담도 들을 만하였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손님 맞기를 즐겼다. 전란을 겪은 뒤로 집안 살림이 바닥나 먹고 입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만나면 번번이 도와주었다. 벗들이 찾아오는 일이 많았는데 이들을 잘 대접하고도 오히려 부족하다 여겼으며, 자신은 여러 차례 양식이 떨어져도 마음이 편안하였다. 천문과 관상, 점, 그리고 집터와 묏자리를 살피는 풍수의 이치에도 두루 통하였다. 또한 시를 좋아하여 이달에게 배워 늦은 당나라 시풍의 기품이 있었다.
만년에 서울로 올라오니, 나의 형이 그의 재간을 알아보고 의금부의 낭관으로 뽑아 처음으로 육품에 올라 장례원 사평이 되었다. 무신년(1608년)에 목천현감으로 나가 어진 정사를 베풀었다. 나이 쉰넷에 갑자기 중풍으로 세상을 떠나니 고을 사람 백여 명이 곡하며 그를 전송하였다.
완산 이씨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니 바로 이제운이다. 그는 성실하고 재간이 있어 집안을 잘 꾸려 나갔다. 지혜와 용기가 있어 그대는 그에게 무과 공부를 시켰는데 아직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덕을 지니고도 수명과 벼슬이 따르지 않았으니, 남은 복은 아마 이 아들 제운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인끈을 차고 백성을 다스렸으니
어찌 공의 영광이 아니겠는가
하늘은 대과 급제도 내려 주지 않고
또한 수명마저 아끼셨으니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는가
그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그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여
그대의 행적을 새겨
이 무덤에 길이 남기노라
(용어) 이달은 최경창·백광훈과 함께 당나라 시풍을 따른 시인으로 이름난 세 사람, 이른바 "삼당시인"의 한 사람이며 허균의 스승이기도 했다.
변흡의 묘지명 (서기 1594년 8월 1일, 양력 추정)
변흡의 자는 사화요, 원주 사람이다. 증조부와 조부는 이름과 벼슬이 전하지 않으며, 아버지는 나의 성이 다른 재종형이다. 어머니는 아무개 씨의 딸이다.
군은 정묘년(1567년)에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의젓하여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열 살에 《소학》과 《논어》에 통달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장래를 기대하였다. 장성해서는 용모가 옥처럼 맑고 온화하며 사랑스러웠다.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는데, 어머니가 병환이 들자 수십 일 동안이나 허리띠도 풀지 않고 몸소 음식을 맛보아 올렸다. 신의로 벗을 사귀어 단 한 번도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은 일이 없었다. 나와는 나이가 비슷하여 늘 함께 어울려 다녔는데, 십여 년 동안 한 번도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떠드는 자리에서도 흔들림 없이 엄숙하였고, 마음속에 굳게 지키는 바가 있어 예에 어긋나는 태도로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시와 부를 공부하여 향시에는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끝내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갑오년(1594년)에 스물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니 슬프다. 아무개 씨와 결혼하여 딸 하나가 있을 뿐이다.
군은 금각과 함께 백운사에 머물며 우리 둘째 형에게서 글을 배웠다. 둘째 형은 두 사람을 남다르게 여겨 시를 지어 주었다.
"나는 변군의 성품을 사랑하노니
온화함이야말로 덕의 바탕이라네
금군은 참으로 영특한 사람이니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보태고 채워 주게나"
이 시는 아마 두 사람을 격려하기 위해 지은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불행히도 두 사람이 모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는 것이 어찌 이토록 어긋난단 말인가. 이에 울면서 그의 행적을 적어 무덤 속에 넣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
의젓하고 온화하며
단정하고 결백한
이 네 가지 덕을 모두 갖추었는데
어찌하여 그 명이 길지 못하였는가
하늘이 베풂에 이토록 인색하시니
어찌 이러시는가, 하늘이시여
이광림의 묘지 (서기 1606년 10월 1일, 양력 추정)
산음현감 이보명 형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어질고 반듯하여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다. 셋째 아들 이광림은 더욱 남달리 총명하여 글도 가장 잘 지었는데,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나니 형은 매우 마음 아파하였다. 장례를 치른 뒤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나를 바로잡아 줄 아들을 잃고 말았네. 그 아이의 행적을 무덤 속에 넣어 후대에 전하고 싶으니." 나는 "착한 아드님은 저도 아끼던 사람인데 어찌 말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씨는 전의 지방의 큰 성씨로, 태사 이도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병조판서를 지냈고 조부는 은산현감을 지냈다. 어머니는 의령 남씨이다.
을해년(1575년)에 태어났다. 일고여덟 살에 이미 성숙하기가 어른 같아서 말수도 적고 웃는 일도 별로 없었으며 장난치며 노는 일도 없었다. 스스로를 올바르게 단속하고 옛 현인을 본받아 행동하였다. 힘써 배우고 싫증 내지 않았으며, 지은 글은 깊고 넓어 생각이 미치는 바가 있었다. 특히 시를 잘 지었는데 당나라 전성기의 시를 본받아 왕유·맹호연·고적·잠삼의 시풍을 넘나들었으므로 산뜻하고 씩씩하여 그 사람됨과 같았다. 그리하여 스무 살 무렵부터 이미 훌륭한 소문이 나서 모두들 그를 나라의 큰 그릇으로 지목하였다. 어머니 남씨의 상을 당해서는 수십 일 동안 미음도 먹지 않아 곁에서 부축해야 겨우 일어날 지경이었고, 마침 임진왜란을 만나 떠돌아다니며 몹시 고생스럽고 궁핍할 때에도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상식을 거른 적이 없었으며 틈이 나면 반드시 《예기》를 읽었다. 아버지를 섬김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고, 작은 잘못이 있으면 부드러운 낯빛과 온화한 목소리로 해명하였다. 형제간의 우애가 도타워 잠잘 때도 꼭 이불을 함께 덮었다. 그의 벗 허실, 한신과 함께 지낼 때도 오랫동안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농담을 건네는 일도 없었고, 더구나 세상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언급하지 않았다. 재주가 있었으나 과거에는 여러 번 낙방하였다. 어떤 이가 과목을 바꾸어 보라고 권하니, 그는 거만한 듯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이렇게 말하였다. "곤궁함과 영달함은 하늘이 정한 것인데, 내 어찌 좋아하는 것을 굽혀 가며 남을 따르겠는가?"
임인년(1602년) 가을 감기 기운을 느끼더니 마침내 그것으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아, 안타깝다. 광릉 이씨로 세상을 떠난 재상 충정공의 손자이자 정랑을 지낸 이의 딸과 결혼하니, 부인은 아내로서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덕을 고루 갖추었다. 아들딸을 하나씩 낳았으니 남은 복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씨 부인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병오년(1606년)에 끝내 정절을 지킨 채 세상을 떠나니, 형의 분부로 파주 어머니 묘 뒤편 언덕에 함께 묻었다.
(용어) 왕유·맹호연·고적·잠삼은 모두 당나라의 이름난 시인들이다. "사덕"은 부녀자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덕목인 말씨·행실·솜씨·용모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제목의 "회경"은 이광림의 자로 전해진다.
신평 이씨 삼 형제의 묘지 (서기 1610년 7월 1일, 양력 추정)
돌아가신 형조참판 이모의 부인 이씨는 자신의 외사촌 동생 허균을 불러 울면서 말하였다.
"내가 이씨 집안 며느리가 된 지 이제 쉰일곱 해가 되었다. 조상의 복을 입어 아들 여덟을 낳았는데 모두 잘 자랐으나, 지금 남은 아이는 다섯이다. 이들은 모두 관복을 입고 임금을 섬기고 있으니 이 어찌 행복이 아니겠는가. 다만 나의 맏아들 이문시와 그 아우 이문지, 이문봉은 이천에서 왜적을 만난 날 효를 다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죽은 아이들이야 여한이 없겠으나, 어미 된 정으로는 늘 살점을 도려내는 것 같아 잊을 수가 없구나. 막내 봉은 더욱 잊지 못한다. 태어날 때부터 아름다운 자질이 있어 성실하고 언행을 삼가며 남과 실없이 웃고 떠드는 일이 없었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열여덟 살에 목사 나급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나씨는 행실이 어질고 부부가 서로 공경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임진년(1592년) 여름에 그의 아버지는 나의 시어머님을 모시고 산골짜기로 피난하였는데, 왜적 수십 명이 갑자기 나타났다. 넷째 아들이 나와 제 누이동생을 데리고 높은 숲을 넘어 몸을 숨겼고, 죽은 세 아들은 할머니와 아버지를 부축하고 있었다. 왜적이 할머니를 베려 하자 아버지가 몸으로 막아섰는데 그 칼날에 귀를 다쳤다. 맏아들 문시가 먼저 싸우다 목숨을 잃고, 문지가 뒤이어 칼 아래 쓰러졌다. 문봉은 산골 물가에 있다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옷을 벗어 던지고 뛰쳐나와 몸으로 아버지를 덮고 손으로 왜적에 맞서 싸우니, 열 손가락이 모두 잘려 나갔는데도 소리는 조금도 잦아들지 않았다. 열여섯 군데나 칼을 맞고서야 끝내 숨이 끊어졌다. 마침 날이 저물어 왜적이 물러갔으므로 할머니와 아버지는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고을 관아에서 이 사정을 적어 임금께 보고하니, 특명으로 그 집안을 포상하였다. 이듬해 파주 선산에 아이들을 묻었다. 나씨는 자식이 없고 서출만 있을 뿐이니 나는 이것이 늘 마음 아프다. 이제 우리 집안이 묘를 교하로 옮기게 되어 아이들의 무덤도 함께 옮기게 되었으니, 그 행적이 그대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구나. 아우가 글을 지어 이 아이들의 저승길을 밝혀 길이 전해지도록 잘 써 주게."
균은 절하고 그 말씀을 받들어 이렇게 적는다.
금각의 묘지명 (서기 1610년 3월 9일, 양력 추정)
을유년(1585년) 둘째 형이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백운산에서 글을 읽고 계실 때, 금생이라는 사람이 그곳에 가서 함께 공부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나는 혼인하는 일 때문에 함께 가지 못하였다. 며칠 뒤 편지가 왔기에 열어 보니 단정한 해서체로 정갈하게 쓴 편지였다. 글은 매우 간결하고 조리가 분명했으며, 그 표현에는 은근한 뜻이 많이 담겨 있어 마치 옛사람의 글을 읽는 듯하였다. 그 내용은 대개 만나고 싶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과 함께 형을 찾아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급히 그가 사는 집을 찾아가 매우 가깝게 지냈다.
이듬해 봄 김확을 데리고 백운산에 가니, 군과 심액은 이미 먼저 와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함께 노닐고 서로 학문을 다듬어 주어, 그 정이 친형제나 다름없었으니 늙을 때까지 함께 지내기를 바랐는데, 불행히도 군이 병들어 8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아아, 애통하다.
공은 영남에서 태어났으니 고려 때 학사를 지낸 금의의 후손이다. 사람됨이 재기가 뛰어나고 호탕하였으며 생김새는 마치 옥을 세워 놓은 듯하여, 바라보면 신선 가운데 한 사람 같았다. 아버지인 봉화공은 그를 각별히 사랑하였다. 다섯 살 때 무덤 옆 초막에서 글을 배우다가 벽에 붙여 놓은 《주역》의 괘상을 보고 그 자리에서 외웠는데 순서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때 산소에서 제기를 보관할 창고를 짓느라 일꾼이 많았는데, 그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였다. 글 읽기에 몰두한 나머지 어머니를 뵈러 갔다가도 반드시 정해진 기한에 돌아왔다. 아홉 살 때는 아버지를 따라 신의왕후의 능에 가서 옛 도읍의 산과 물을 보았고, 아버지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또한 경주의 옛 자취를 두루 찾아보았다. 어려서부터 이렇듯 남다른 뜻을 지니고 있었다.
계미년(1583년)에 아버지가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자 군은 아버지를 따라와 송미로에게 소식의 시를 배웠고, 열다섯 살에 비로소 나의 둘째 형에게서 옛 문장과 시를 배웠다. 그의 글은 날로 나아졌고, 무엇을 읽든 바로 그 요체를 터득하였으며, 논하는 바는 세속의 티를 벗어나 깔끔하여 보통 사람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데서 나왔다. 둘째 형은 그를 아끼고 감탄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댁의 아드님이 멀리서 찾아와 그의 말을 들어 보고 그 깨끗한 마음가짐을 살펴보니, 맑고 빼어나기가 또래들보다 이만저만 뛰어난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제가 그 아이의 스승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아이가 저의 스승이 되어야 할 정도입니다."
그가 지은 《주류천하기》, 《풍창낭화》, 《일동록》, 《전의독서문》 같은 글들은 당시 문예를 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여 서로 베껴 외웠으므로 서울의 종이 값이 갑자기 오를 정도였다. 둘째 형은 크게 칭찬하며, 옛사람의 글이라도 이 글에 함부로 평을 매길 수 없다고 하였다.
군은 마음이 편안하고 욕심이 없었으며 행동에 법도가 있었다. 비록 글짓기를 좋아하였으나, 유학자가 할 일이 말을 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 늘 정성을 다해 사리를 철저히 밝히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책을 두루 연구하며 늘 성현과 같아지기를 스스로 기약하였다. 옛날과 지금의 여러 책을 두루 읽어, 나라가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며 흥하고 망하는 원인과 어진 이와 간사한 이를 가르는 기준을 논함에 있어 그 옳고 그름과 잘잘못을 명백하고 시원스럽게 짚어 내니, 듣는 사람이 지루해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오랜 전례와 옛일에도 밝아 마치 직접 겪은 사람 같았으니, 그의 학문이 높고 깊으며 뜻이 원대함이 이와 같았다.
병술년(1586년) 가을에 폐병에 걸려 날로 쇠약해졌으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부지런히 읽었다. 어른들이 병이 더할까 걱정하여 이를 말리자 그는 따르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침에 도리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조금도 힘들지 않은데 어찌 몸이 상하겠습니까." 그러고는 마침내 사마광의 《자치통감》과 《통감강목》, 그리고 여러 의학 서적을 읽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몇 해만 더 빌려주어 아직 보지 못한 책들을 모조리 읽게 해 준다면, 내 소원은 다 이룬 셈이다."
병이 몹시 위중해졌는데도 정신은 또렷하여 부질없는 기도를 못 하게 막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데 기도한다고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저는 어린 나이에 죽는 것이니 신주를 세우지 않아도 됩니다. 하물며 몸과 넋이 땅으로 돌아가면 혼은 어디에나 있을 터이니, 저를 이곳에 장사 지내도 괜찮습니다. 어찌 굳이 고향 선산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까? 고향 길이 험하고 머니 부모님께 근심만 더할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병중에 스스로 자기 묘지를 지어 이렇게 썼다. "봉화 사람 금각은 자가 언공이다. 일곱 살에 공부를 시작하여 열여덟 살에 세상을 떠났다. 뜻은 원대했으나 명이 짧았으니, 아마도 하늘이 정한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는 스스로 제문을 지어 이렇게 썼다. "아버지, 어머니, 저를 위해 울지 마십시오. 아아, 가슴이 아픕니다."
그해 9월, 예안 땅 백운동 남향 언덕에 장사 지냈다.
그가 지은 시문 두 권을 묶어 《조대집》이라 하였다. 경술년(1610년) 봄에 그의 형인 의부랑 금개가 그의 행장을 가지고 찾아와 이렇게 말하였다. "죽은 아우의 행실은 형이 자세히 아는 바입니다. 그의 묘지를 기록하려 하는데, 글을 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는 울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백운사에 함께 있었을 때 우리 세 사람은 군을 우러러보기를 마치 쑥대가 큰 소나무를 우러러보듯 하였소. 그가 살아 있었다면 반드시 문장의 우두머리가 되어 나라의 보배가 되었을 것이오. 내가 어찌 감히 글로써 세상에 이름을 날렸겠소. 불행히도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 이름을 뒷사람에게 전할 책임은 참으로 나에게 있소. 어찌 부족하다는 핑계로 세상을 떠난 그와의 두터운 우정을 저버리겠소." 그러고는 피눈물을 닦으며 다음과 같이 명한다.
공의 글은 옛글보다 뛰어나고
공의 학문은 미세한 이치까지 이르렀네
문단에 우뚝한 깃발을 꽂을 사람은
공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저세상에
우리의 슬픔을 적어 두려고
마침내 서투른 솜씨를 놀리려니
때로 손끝에서 피가 흐르는 듯하네
공의 행적을 더듬는 데
어찌 감히 많은 말이 필요하리오
다만 나의 정을 적을 뿐이니
공도 아마 그 마음을 알아주시리라
(용어) 사마광은 송나라의 학자로 역사서 《자치통감》을 지었고, 《통감강목》은 주희가 이 책을 다시 정리한 역사서다.
성소부부고 제18권
10. 00:08
성소부부고 제18권 · 문부 15 · 기행 상
출처: 성소부부고 제18권, 문부 15, 기행 상
배경: 제18권은 허균이 직접 다닌 여정을 날짜별로 기록한 세 편의 기행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조관기행〉은 1601년, 전운판관에 임명되어 충청도와 전라도 해안의 세곡 운반을 감독하러 다닌 반년 남짓의 기록이며, 그 사이 어머니의 상을 당하는 일도 겪는다. 두 번째 〈서행기〉는 1602년,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의주까지 다녀온 기록이다. 세 번째 〈병오기행〉은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과 양유년을 맞이하러 의주까지 갔다 오면서 주지번과 나눈 문학 이야기를 자세히 담고 있어, 세 편 가운데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조관기행 (서기 1602년 1월 27일, 양력 추정)
신축년(1601년, 선조 34년) 6월, 사복시의 낭관으로 있던 나는 전운판관(세곡을 배로 실어 나르는 일을 감독하는 벼슬)에 임명되어 삼창(세곡을 모아 두던 세 곳의 창고)으로 가서 조운을 감독하게 되었다.
7월 8일(정유) 조정에 하직 인사를 드리고 동작나루를 건넜다. 장마로 강물이 한창 불어나 배를 저어 물살을 헤치며 모래섬을 따라 겨우 강 남쪽 기슭에 이르렀다. 정오 무렵 과천에 도착하니 원인초는 마침 자리에 없고 그의 첩 설아가 작은 마루로 나와 맞으며 술을 대접했다. 볕이 뜨거워 그의 파란 양산을 빌려 쓰고 길을 떠났다. 저물녘 수원에 이르니, 부사 박이장(자는 숙빈)은 딸이 천연두를 앓는다며 나오지 않았고, 변경지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묵었다. 나는 예전 을유년(1585년)에도 이곳에 들른 적이 있는데, 그때 보았던 연못가 정자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잡초만 우거져 있었다. 옛날에 알던 이들의 안부를 물으려 해도 이제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으니, 지난 일을 생각하매 서글퍼졌다.
9일(무술) 시골집에 머물던 제로를 찾아갔다. 잉어를 잡고 눈처럼 흰 연뿌리와 멥쌀밥을 배불리 먹은 뒤 잠시 머물다가, 저물녘에 나루에 이르니 삼창의 아전이 거룻배를 가지고 마중을 나왔다. 어두워져서야 숙소에 드니 방은 비좁고 눅눅한 데다 파리와 벼룩이 들끓었다. 상에 오른 안주는 이미 상해서 냄새가 지독해 가까이 갈 수도 없었으니,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10일(기해) 각 고을의 강리들을 모아 세곡 걷은 실적을 검사했다. 배가 다 모이지 않아 백호 세 사람에게 각각 곤장 마흔 대씩을 쳤다. 정오에는 유선원과, 창고 감독을 위해 파견된 신창 현감 정사억이 찾아와 술자리를 마련했다. 아내의 사촌동생인 용궁 현감 김지회와 육촌 형뻘 되는 윤지복도 함께 왔다가 어두워져서야 헤어졌다.
11일(경자) 배가 비로소 모두 모여, 두 번째로 운반할 세곡 사천이백 석을 배 열두 척에 나누어 실었다. 저녁에 당진 현감 윤성지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12일(신축) 배를 출발시키고 조정에 보고서를 올렸다.
13일(임인) 동지 벼슬을 지낸 홍가신 어른을 그의 농막으로 찾아뵈었다. 서로 만나니 더없이 반가워 하루 종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가슴이 다 시원해지고 비루한 생각이 절로 씻겨 나가는 듯했다. 저녁에는 용궁 현감의 집에서 묵었다. 유선원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14일(계묘) 온양에 가서 관찰사 이용순 공을 만나 조운선의 사공들을 수군으로 편입할 수 있는지 의논하였다. 공은 해안 열여섯 고을의 세곡을 서울 창고에 곧바로 납입하게 하면 일이 훨씬 수월할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에 따라 예전대로 곧바로 납입하게 하고, 파발을 보내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15일(갑진) 온양에서 돌아와 용궁 현감의 집에서 묵었는데, 득초 형이 찾아와 한방에서 잤다.
16일(을사) 아산을 떠나 정오에 신창에서 쉬고 저녁에는 예산에서 묵었다. 관아 동헌 뒤에 석가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대나무가 푸르러 그윽하고 맑은 운치가 있었다. 그 사이를 거닐고 있으니 현감 이지화가 간단히 술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하였으나, 술을 잘 못한다는 핑계로 사양하였다.
17일(병오) 홍주에 이르러 동쪽 곁채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벌목을 감독하는 박경현이 관아의 안채에 와 있으면서 아전을 보내 내가 어느 방에 묵을 것인지 물어왔다. 나는 그가 동쪽 곁채로 들어오려는 속셈임을 알아채고는 따지지 않고 곧장 지름길로 안채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박경현과 목사 우복룡이 이미 잔치를 벌이고 있었고 노래하는 기녀들이 앞에 가득했다. 나는 취한 김에 "목사께서는 제 형님이나 다름없으시니, 안채에서 며칠 묵고 싶습니다. 이쪽으로 옮겨 와도 되겠습니까?" 하고 청했더니 목사가 흔쾌히 허락했다. 저녁에 박경현은 동쪽 곁채로 옮겨 갔다. 밤에 박경현의 방으로 들어가야 할 기녀가 잘못하여 내가 있는 곳으로 들어왔으므로 돌려보내고, 기녀들의 우두머리에게 곤장 수십 대를 때렸다.
18일(정미) 박경현이 떠났다. 저녁에 목사가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19일(무신) 보령에서 점심을 먹고 남포에서 묵었다.
20일(기유) 비를 맞으며 서천으로 향했다. 진흙탕이 미끄러운 데다 옷에까지 튀어 종들이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어서는 몹시 투덜거렸다. 정오 무렵 고을에 이르니 태수 김희태가 잔치 자리를 사치스럽게 꾸미고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서는 마치 큰 나라의 제후를 섬기듯 대접하였다. 대낮부터 밤이 깊도록 묵은 회포를 풀고서야 자리를 마쳤다. 밀물이 곧 들 것이라고 하였다.
21일(경술) 새벽에 말을 달려 포구에 이르니 태수가 뒤쫓아 나와 배웅해 주었다. 조수가 고르지 않고 매우 사나웠다. 가마를 타고 배에 오르니 서풍이 매섭게 불고 파도가 산더미처럼 솟구쳤다. 돛을 반쯤 올린 채 곧장 창고 마을에 이르니, 마을 어른인 별좌 이원두가 먼저 나와 맞으며 술자리를 마련해 위로해 주었다. 배와 세곡에 대해 알아보니 모두 정리가 되어 있다고 하였다.
22일(신해) 세곡을 배에 싣는 일을 감독하고 장계를 올렸다. 현감 김기가 세곡 싣는 일의 감독을 마치고 내게 인사를 왔다. 오후 늦게 길을 떠나 어두워져서야 만경에 도착했다. 이곳 현감 민형은 나와 같은 해 무과에 급제한 사람이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삼경(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이 되었다.
23일(임자) 부안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그대로 머물기로 했다. 고홍달이 인사를 왔다. 이곳 기녀 계생은 이귀(자는 옥여)의 정인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그리 곱지 않으나 재주와 정취가 있어 함께 이야기 나눌 만하였으므로, 종일 술잔을 앞에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했다.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잠자리에 들게 했으니, 남의 정인을 건드린다는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24일(계축) 비 때문에 떠날 수 없었다. 정오 무렵 비가 개어 고부에 도착해서는 이우 어른을 만났다. 율곡 이이 선생의 아우 되시는 분으로, 내게는 고향의 어른이신데 시와 그림과 글씨에 모두 능하여 내가 존경하는 분이다. 민인길(자는 숙정)이 죄를 지어 부안 현감 자리에서 파직되어 고을에 붙잡혀 있었으므로, 불러서 함께 묵었다.
25일(갑인) 흥덕에서 잠시 머물고 저녁에 무장에 도착했다.
26일(을묘) 법성창에 이르니 태수 경섬(자는 퇴부)이 세곡 싣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나를 고을 관아로 맞아들였다. 어릴 적 친구인 정홍연이 임희윤과 함께 찾아왔다. 서울 기녀 낙빈, 선래, 산월이 그곳에 함께 살고 있어 모두 찾아와 위로해 주었다. 술이 잔에 넘치도록 오가고 거문고와 노래가 번갈아 이어지며 우스갯소리로 흥을 돋우다가 새벽닭이 울고서야 자리를 파했다.
27일(병진) 좌랑 강항이 인사를 왔다. 부체찰사 한준겸과 관찰사 이홍로가 광주에서 군사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열고 있었고, 태사 벼슬의 소광진도 왕명을 받들고 그곳에 와 있어서 모두에게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한준겸은 조졸을 사공을 돕는 인력으로 배치하는 문제는 직접 만나 의논해야 한다며 나를 부르는 편지를 보내왔다.
28일(정사) 지름길로 사기원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친척인 정성일과 그의 아들 경득, 희득이 찾아왔다. 해질 무렵에야 광주에 도착했는데, 마침 광주에서는 사신을 대접하는 잔치가 한창이었다.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잔치에 참석하라고 여러 차례 청했으나 가지 않았다. 광주에는 젊은 시절 서울에서 정을 주고받던 기녀 광산월이 있었는데, 그를 보내 굳이 재촉하기에 어쩔 수 없이 참석했다. 이웃 고을의 소리 잘하는 기녀들을 죄다 불러 모았는데, 술은 동이마다 넘치고 고기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오히려 품위가 없어 보였다. 저녁에는 한준겸과 함께 묵었다. 광산월이 찾아와 위로해 주었는데, 평생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며 밤을 지새웠다.
29일(무오) 소광진이 장성으로 떠난다며 인사를 왔다. 그가 데리고 있던 나주 기녀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노래로 부를 줄 알았다. 술을 조금 마시고 떠났다. 저녁에는 옛 관아에서 묵었다. 광산월이 반찬을 보내왔으니, 그 두터운 정이 느껴졌다.
30일(기미) 한준겸과 관찰사는 모두 떠났고, 나는 만류를 받아 그대로 머물렀다.
8월 1일(경신) 목사 이상길 공과 초닷새에 광산월을 오성(법성)으로 보내기로 약속하고 말 두 필과 역리 하나를 남겨 두었다. 정오에 나주 관아에 이르러 목사 권협 공을 뵙고는, 곧바로 임현(자는 자승)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영암 땅 구림으로 향했다. 길이 몹시 멀어 산소 곁 재실에 도착하니 밤은 이미 칠흑같이 어두웠다. 고을에서 마련해 주기로 한 음식이 오지 않아, 상가에서 나물 반찬으로 소찬을 대접받았다.
2일(신유) 영구 앞에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고 글을 지어 곡했다.
3일(임술) 묘시(새벽 5시에서 7시 사이)에 관을 내려 묘혈에 안치하니, 아, 아득한 이 이별로 평생의 일이 이제 다 끝났구나. 돌아와 금성(나주)에서 묵었다. 같은 해 급제한 진사 진경문이 찾아와 율시 한 수를 지어 주었는데, 시가 매우 맑아 깨우쳐 주는 바가 있었다.
4일(계해) 권협 공과 작별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기원에 이르니, 정씨 집안 다섯 사람과 외가 쪽 첨지 유대린이 술과 음식을 마련해 위로해 주었다. 저녁에 법성으로 돌아와 경섬, 덕원, 그리고 기녀 내기와 먼저 만나 즐겁게 마시고 놀았다. 잠자리에 들자 내기가 "해양(광주)에서 옛 정인을 만났습니까?" 하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그가 여기 올 생각은 없던가요?" 하기에 나는 "목사가 보내주려 했지만 내가 사양했다"고 거짓으로 둘러댔다.
5일(갑자) 새벽녘에 내기가 먼저 일어나기에 이상하다 여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경섬과 짜고 나를 속일 계책을 꾸민 것이었다. 먼저 역졸을 속여 "광산월이 사기원에서 묵고 아침 일찍 고을로 들어올 것이다"라고 말해 두었는데, 역졸은 광산월에게 말을 맡겨 둔 것을 보았던 터라 그 말을 곧이듣고 내게 와서 고했다. 나는 속으로 '광주는 여기서 하루 거리인데 그가 왜 중간에 묵겠는가' 하고 짐작하였다. 세 사람은 늙고 못생긴 기생을 곱게 꾸며서는 내가 관아 정청에 나간 틈을 타 방에 숨겨 두었다. 얼마 뒤 강태초와 고을 사람 이곤, 강극문이 찾아왔다. 이윽고 시중드는 이를 시켜 내 귀에 대고 "광산월이 벌써 와서 방에 들었습니다" 하고 속삭이게 하고는, 방 안에서 거짓으로 애틋한 말을 늘어놓게 했다. 나는 경섬의 얼굴에 웃음을 참는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이미 눈치를 챘다. 경섬이 "방에 들어가면 즐거운 일이 있을 테니 다녀오라"고 하는데, 아마 내가 방에 들어가면 늙은 기생이 나를 끌어안고 곤란하게 만들어 웃음거리로 삼으려는 속셈인 듯했다. 나는 굳이 사양하고 일어나지 않았다. 경섬도 방에 들어가 문안 인사를 극진히 늘어놓았다. 얼마 뒤 점심때가 되자 상까지 차려 대접하였다. 역졸은 광주에 남겨 두었던 역리가 도착하지 않은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속은 줄을 알아차렸다. 나는 시중꾼을 불러 귓속말로 광산월이 오는 길목에 가서 걸음을 재촉하게 하라고 일렀다. 해가 저물 무렵 과연 광산월이 당도했는데, 곱게 화장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들어서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멍하니 쳐다보았다. 경섬은 자기 계책이 성공하지 못한 것을 몹시 분해하고 내기도 못마땅한 기색이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어 술과 풍악으로 실컷 즐기다가 사경(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두 기녀도 모두 그곳에 머물렀다.
6일(을축) 법성창에 나가 먼저 관선에 올라 태수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닷물이 빠지기 시작하기에 어쩔 수 없이 먼저 내려갔다. 태수는 덕원과 여러 기녀를 데리고 뒤쫓아 와서는 작은 배를 타고, 내가 먼저 내려간 것을 안타까워하며 강 가운데로 노를 저어 따라오면서도 관선에는 오르지 않았다. 배 안에서는 퉁소와 북소리, 노랫소리가 뒤섞여 시끌벅적한 채 관선 주위를 예닐곱 바퀴나 맴돌았다. 내가 율시 한 수를 지어 보내고서야 경섬이 관선에 올랐다. 노를 저어 바다 어귀를 나서니 바람이 세차고 물결이 용솟음쳤다. 해질 무렵에야 창고 마을로 돌아왔다.
7일(병인) 첫 번째로 거둔 세곡 삼천칠십 석과 세금으로 받은 콩 천 석을 배 열세 척에 나누어 실었다. 익산 태수 정언충이 석란창의 쌀을 옮겨 오지 않았으므로 이를 함께 보고하고, 해운으로 실어 나르는 곡식을 훔친 혐의로 영암의 아전 서른 명을 신문했다.
8일(정묘) 경섬, 덕원과 작별하고 무장에 이르니, 그곳 현감 이충(자는 거용)이 매우 정성스럽게 대접해 주었다. 광산월은 완산(전주)으로 간다며 따라왔다.
9일(무진) 고창에 도착하니, 관찰사가 13일이 자기 어머니의 생신이라 근신하느라 잔치를 열지 않고 대신 15일에 잔치를 마련할 테니 참석해 달라고 하여 답장을 보냈다.
10일(기사) 떠나려 했으나 비가 와서 머물렀는데, 현감 황입중이 조촐한 술상을 차려 주었다. 저녁에 비가 개어 정읍에 도착했다. 광주 기녀 둘이 관찰사의 잔치 때문에 뒤따라와 있기에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게 하다가 이경(밤 9시에서 11시 사이)이 되어서야 자리를 파했다.
11일(경오) 태인에 도착하니 현감 김자가 굳이 만류하여 양진당에서 묵었다.
12일(신미) 점심때 금구현에서 쉬고 저물녘 전주에 들어가니 관찰사가 찾아와 인사했다.
13일(임신) 진남헌에 나가 관찰사와 함께 장대타기, 줄타기, 뜀뛰기 등 온갖 재주놀이를 구경했다. 저녁 무렵 어머님께서 설익은 감을 드신 것이 체하여 부축을 받고 들어가시더니, 초저녁에는 병세가 매우 위태로워지셨다. 나는 부사 채형, 중군 이홍사, 판관 신지제와 함께 밤새도록 동헌에 앉아 소식을 기다렸다.
14일(계유) 진시(오전 7시에서 9시 사이)에 병세를 돌이키지 못하고 어머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그대로 머물러 상을 치르기로 했다.
15일(갑술) 전라우도의 재해를 조사하는 관원 강홍립이 도착했다. 강홍립은 어릴 적 친구이자 같은 해 급제한 사이라 정이 매우 두터웠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니 기뻤다. 그의 숙소에서 함께 묵었다.
16일(을해) 대렴을 마치고 빈소를 마련하였다. 전라좌도의 재해 조사관 김정목이 도착하여 강홍립의 숙소에서 만났다.
17일(병자) 성복(상복을 갖춰 입는 예)을 하였다. 나는 김정목, 강홍립 두 행대와 작별하고 저물녘 익산에 도착했다.
18일(정축) 비가 와서 머물렀다. 고산 현감 신순일이 찾아왔다. 저녁에 이유위가 임천에서 찾아왔다.
19일(무인) 진안 현감 심인조가 인사하러 왔다.
20일(기묘) 고을의 무과 급제자 소문진의 첩과 그 집에서 함께 지내는 계집종이 일솜씨가 매우 야무졌다. 이들이 술상을 차려 와서 위로하니 광산월도 함께 거들었다. 종일토록 피리 불고 노래하며 즐거워했는데, 이유위는 일어나 춤까지 추었다.
21일(경진) 소문진 첩의 집을 방문했다. 술상이 매우 푸짐했다. 동네 사람들이 구경하러 꽉 들어차게 모여들었다. 저녁에 임피에 도착하니, 현감 김료가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22일(신사) 이유위와 함께 소안역으로 윤강길을 찾아가니 노래와 피리로 즐겁게 해 주었다.
23일(임오) 광산월과 작별하고 이유위와 함께 나시포를 건너 한산에 도착해서는 태수 한회를 만났다. 저녁에 임천에서 묵었는데, 조보를 보니 큰형님이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있었다.
24일(계미) 이유위와 헤어져 고원에서 점심을 먹고 정산에서 묵었다. 현감 이사손과 그의 아들 필수가 찾아왔다.
25일(갑신) 유구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 온양에 도착했다.
26일(을유) 홍가신 공(호는 간옹)의 댁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저녁에 용궁 현감의 집에서 묵었다.
27일(병술) 창고 마을에 도착했다.
28일(정해) 거두어들인 쌀 이천삼백 석을 배 여섯 척에 싣고 보고서를 올렸다.
29일(무자) 직산에서 형님을 맞이했다. 현감 임자중과 진천 현감 임희지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물녘에 형님이 도착하셨다. 헤어진 지 삼 년 만에 만나니 몹시 기뻤다. 한 이불을 덮고 잤다.
9월 1일(기축) 변산에서 조운선 여섯 척을 만들어 보고서를 올렸다. 남쪽으로 돌아가 형수님을 기다렸다.
2일(경인) 형수님이 조카 셋을 데리고 도착하셨다.
3일(신묘) 형수님을 모시고 전주로 향했다. 천안에서 점심을 먹고 덕평원에서 묵었다.
4일(임진) 궁원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 공주에 도착했다. 목사 김상준이 극진히 대접해 주어 하인들까지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5일(계사) 목사가 안채로 와서 형수님께 인사드렸다. 정오에는 니산에서 쉬고 저녁에는 은진에서 묵었다.
6일(갑오) 여산에서 묵었다. 이곳 태수는 장원급제한 이성길인데, 그의 관아로 가서 인사했다.
7일(을미) 삼례에서 점심을 먹고 전주로 들어가는데, 판관이 풍악과 놀이패를 이끌고 반 마장이나 마중을 나왔다. 북소리 피리소리가 천지를 뒤흔들고, 바다 귀신춤과 학춤, 장대 위에서 공 놀리는 놀이, 탈춤 등 온갖 재주가 길을 가득 메워 구경하는 사람들이 성곽까지 넘쳐났다. 나는 큰조카에게 "이 길이 네가 과거에 급제하여 돌아오는 길이 아닌 것이 한스럽구나" 하고 농담을 던졌더니 그도 배를 잡고 웃었다. 마침내 동헌에서 형님을 뵈었다. 형님은 중동헌을 비워 나의 숙소로 내주셨다.
8일(병신) 그대로 머물렀다.
9일(정유) 전주를 떠나 점심때 금구에서 쉬고 태인에 이르러 양진당에 도착했다. 주위에 노란 국화와 아름다운 돌들이 어우러졌는데, 뉘엿뉘엿 지는 석양에 푸른 산빛이 피어올라 유난히 맑은 정취가 있었다. 오늘이 마침 중양절(음력 9월 9일)이라 주인이 높은 곳에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내가 이곳을 지나간 지 겨우 스무이렛날밖에 안 되었는데 풍경이 완전히 딴판이고, 함께 감상할 사람도 없으니 도리어 옛일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니, 이토록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나도 참 도량이 좁구나.
10일(무술) 천원에서 잠깐 쉬고 어두워져서야 장성에 도착했다. 조카 박정백은, 그의 큰형이 벼슬이 갈려 떠나면서 이곳에 남아 후임자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11일(기해) 광산월이 도착했다. 청암도 찰방 김효남이 찾아왔다.
12일(경자) 그대로 머물렀다.
13일(신축) 사기원 정씨 집에 이르러 그 누각에서 묵었다.
14일(임인) 경섬, 덕원, 그리고 현감 이정경이 강태초와 함께 와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밤중이 되어서야 자리를 파했다.
15일(계묘) 모두 떠났다.
16일(갑진) 그대로 머물렀다.
17일(을사) 배 여섯 척의 사공 조수들이 모두 도착하여 점검을 마치고 장부를 작성해 장계를 올렸다.
18일(병오) 나주에 도착했다. 도사와 목사가 찾아왔다.
19일(정미) 맏형님이 순시차 도착하니 목사가 큰 잔치를 마련해 대접했다.
20일(무신) 우수사 유형이 찾아와 인사했다. 저녁에는 노인과 함께 묵었다. 노인은 나주 사람이다. 정유년(1597년)에 왜적에게 붙잡혀 황해도까지 끌려갔을 때 몰래 중국 배에 올라타 복주(중국 복건성의 지명)에 이르러 무원 벼슬의 김학증에게 사정을 호소하니, 김학증이 돈을 후하게 주어 무이서원에 머물게 해 주었다. 서원의 여러 학생들도 모두 그를 잘 돌보아 주었다. 학문을 감독하는 벼슬아치 서즉등이 노인에게 우리나라에서 가장 받드는 학문이 무엇인지 글로 자세히 답하게 하였는데, 노인은 주자를 가장 받든다고 답하였다. 서즉등은 육구연과 왕수인의 학설을 비판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매우 기뻐하여 자기 책을 죄다 내어 주고 귀한 손님처럼 극진히 대접하였다. 기해년(1599년)에 사신 편에 딸려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무원 김학증에게 청하였더니, 김학증이 이를 허락하고 사여림이라는 이를 딸려 만세덕에게 보내는 공문서를 주었다. 마침내 태주를 거쳐 천태산, 안탕산, 진망산의 빼어난 경치를 구경하고, 소흥에 이르러 섬계, 운문, 약야, 난정 같은 유적지를 둘러본 뒤, 여항에서 열흘을 머물며 서호와 서산의 경치를 샅샅이 찾아보고, 가흥, 호주, 소주를 거쳐 오월 땅의 산천을 두루 돌아보고, 남경에 들어가 육조 시대의 유적을 찾아보고, 진회를 지나 양주의 스물네 다리에서 노닐었는데, 번화한 거리의 모습이 마치 당나라 전성기와 같았다고 한다. 서주를 지나 산동에 이르러서는 곡부에 가서 공자의 사당에 절하고 태산을 바라본 뒤 명나라 수도를 거쳐 본국으로 돌아왔다. 노인이 먼 곳을 노닐고 경치 좋은 곳을 두루 돌아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마치 눈앞에 보는 듯 생생하여 들을 만했다. 나는 부질없이 이곳저곳에 얽매여 마치 항아리 속에 갇힌 듯한 내 신세가 한스러워, 노인 앞에 부끄러운 점이 많았다.
21일(기유) 관찰사, 수사, 도사, 목사 등이 임탁의 강가 정자에서 노닐 때 나도 함께 하였다. 정자는 매우 산뜻하고 멀리까지 시야가 트여 물과 바위의 경치가 아름다웠다. 주인은 본디 세상을 피해 조용히 살기를 좋아하고 선의 이치를 깨쳐 함께 담론할 만한 사람이었는데, 성대한 음식과 시끄러운 풍악 소리에 귀와 눈이 피곤해져 오히려 흥이 나지 않았다. 시중드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하룻밤 조용히 담소를 나누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바쁜 여행길에 이런 기회를 어찌 다시 쉬이 얻을 수 있을까 안타까운 일이다.
22일(경술) 형님과 헤어져 장성에 도착했다.
23일(신해) 노령을 넘어 고부에서 묵었다.
24일(임자) 부안에 가서 배 만드는 목수 예순일곱 명을 점검하여 일을 시작하게 했다. 이 고을에 공문을 보내 나무를 운반할 인부 삼백 명을 징발하니, 부안 현감 임정이 찾아와 그로 인한 여러 폐단을 말하며 몹시 난색을 표했으나 그의 말을 따를 수는 없었다.
25일(계축) 그대로 머물렀다.
26일(갑인) 김제에서 묵었다.
27일(을묘) 돌아와 전주에 머물렀다. 이번 여정에서 지은 시가 쉰여섯 편이었다.
10월 13일(신미) 형님이 순시를 마치고 돌아오셨다.
16일(갑술) 열두 고을의 삼수병(포수, 사수, 살수)이 연병장에 모여 전체 사열을 하였는데, 나는 형님을 모시고 이를 지켜보았다. 군사들이 하나같이 주먹이 날래고 용맹스러웠다. 좌우로 군을 펼쳐 어려진과 아관진 같은 진법을 이루었는데, 병기는 예리하고 깃발은 선명하며 북과 피리로 신호하는 소리가 우렁찼다. 나아가고 물러서고 앉고 서는 동작이 모두 절도에 딱딱 들어맞았으니, 이 정도면 능히 적을 물리칠 만한데도 다들 벌벌 떨며 남쪽을 걱정하고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저녁이 되어서야 사열을 마치고 온갖 놀이를 벌여 군사들을 잔치로 먹였다. 밤이 되자 성안에 불을 밝혀 대낮처럼 환했다.
22일(병진) 배 만드는 일이 끝났다.
11월 1일(무자) 큰눈이 내렸다.
3일(병인) 오늘은 내 생일이다. 형님께서 큰 잔치를 베풀어 축하해 주셨다.
23일(병술) 조보를 보니 명나라 황제가 맏아들을 태자로 책봉하였으므로 조서를 받든 사신이 올 것이라 하였다.
12월 2일(무오) 우리 집 종이 서울에서 와서 전하기를, 한림시강 고천준과 행인 최정건이 사신으로 나오는데 나는 원접사 이정귀의 건의로 교체되고 사직 권운경이 나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형님과 헤어진 지 삼 년 만에 처음으로 한데 모여 여러 조카들까지 곁에 두고 몇 달을 함께 즐겨도 흡족하지 않을 판인데, 갑자기 멀리 떨어져야 할 일이 생겼으니 몹시 서운하다.
9일(을축) 형님이 송별연을 마련해 주셨다.
12일(무진) 하직 인사를 드렸다. 북풍이 스산하게 불고 찬 눈이 길에 가득하니 떠나는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눈물을 닦으며 길을 떠나 저녁에 여산에 이르러 장원급제자 이성길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13일(기사) 은진에서 묵었다.
14일(경오) 광산월과 헤어졌다.
15일(신미) 공주에 도착하여 삼창의 아전들을 모아 인수인계 서류를 작성했다. 목사는 서울로 올라갔고, 이유위가 찾아와 인사했다.
16일(임신) 그대로 머물렀다.
17일(계유) 연기에서 묵었다.
18일(갑술) 큰누님과 매형인 사어 박순원을 사탄으로 찾아뵈었다.
19일(을해) 그대로 머물렀다.
20일(병자) 청주에 들어갔다. 목사 서인원 공이 찾아왔다.
21일(정축) 낮에 청안현에서 쉬고 저녁에 음성에 이르렀다.
22일(무인) 충주에 도착하여 목사 김정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좌 손을남이 찾아와 인사했다.
23일(기묘) 엄정에 도착하여 지사 김신원 어른을 뵈었다.
24일(경진) 노수의 재실에 이르러 성묘하였다.
25일(신사) 고을에 들어가니 목사 강대호가 찾아와 인사했다. 저녁에 처가에 도착했다.
30일(병술) 재실로 돌아와 연말을 보냈다.
임인년(1602년, 선조 35년) 1월 1일(정해) 산소에 제사를 올리고 저물녘에 여주에 이르니 목사 송진보가 찾아왔다.
2일(무자) 양근에서 묵었다. 고을에 군수가 없어 아랫사람들이 나오지 않는 바람에 저녁도 굶은 채 묵었다.
3일(기축) 광주에서 묵었다. 목사 최중망이 찾아와 인사했다.
4일(경인) 서울에 들어갔다.
5일(신묘)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예를 올렸다. 권운경이 찾아왔으므로 문서와 도장을 모두 그에게 넘겨주었다.
서행기 (서기 1602년 6월 17일, 양력 추정)
이해(1602년, 선조 35년) 2월 6일, 원접사 이정귀는 종사관 박동열이 병으로 뒤처져 따라가지 못하게 되자, 나를 그 대신 종사관으로 삼아 보내 달라고 재촉하는 급한 보고서를 올렸다. 주상께서는 도감에 명하여 날짜를 정해 놓고 나를 뒤따라가게 재촉하셨다.
13일 조정에 하직 인사를 드리고 벽제에서 점심을 먹은 뒤 파주에서 묵었다.
14일 오목원을 지나 개성에 도착하니 유수 유희서가 찾아와 인사하고는, 박동열(자는 열지)이 의주에서 이미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하기에 곧바로 파발을 띄워 평산에 사실을 확인했다. 박청의 집에서 묵었다.
16일 아침에 평산에서 온 보고에 박동열이 떠난 지 엿새가 되었다고 하여, 관반 심일송에게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문의하고 그대로 머물며 명을 기다렸다.
19일 평산에서 소식이 왔다. 박동열이 중화에 도착하자마자 급히 출발한다는 보고를 올렸다니, 곧 돌아올 것이라 한다. 나는 이 소식을 다시 심일송 정승에게 보고했다.
20일 처음 올린 보고에 대한 회답이 비로소 왔다. 또 관반 심일송의 편지를 받았는데, 내 일을 주상께 아뢰니 그대로 가라고 명하셨다고 한다.
21일 마침내 길을 떠나 평산에 도착하니 자진과 자룡이 모두 찾아와 문안했다.
22일 안성을 지나 용천에서 묵었다.
23일 검수를 지나 길 위에서 박동열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동선에서 묵었다.
24일 황주에 도착했다.
25일 중화를 지나 평양에 들어가 관찰사 허욱(호는 양릉)에게 인사했다.
26일 순안을 지나 숙천에서 묵었다.
27일 파발을 만났는데, 이정귀(호는 월사)가 병이 났다는 보고였다.
28일 안주에서 묵었다.
29일 가산에서 묵었다. 파발을 만났는데, 두 사신이 이미 산해관을 통과했다고 한다.
30일 정주에 도착하니 목사 임직초의 병이 위중하여 그 동생 임약초가 와서 돌보고 있었으므로, 함께 지난 일을 이야기했다.
윤2월 1일 비 때문에 머물렀다. 임약초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2일 곽산에서 묵었다. 선전관이 표신을 가지고 왔는데, 이호민 공이 이정귀를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3일 감기가 들어 약을 먹고 땀을 냈다. 그대로 머물렀다.
4일 선천에 도착했다.
5일 그대로 머물렀다. 이호민(호는 오봉)이 떠난 지 사흘째였다.
6일 차연에서 묵었다.
7일 양책에서 묵었다.
8일 고진강에 이르니 이정귀가 배에 타고 있었고 양만세가 뒤따르고 있어, 함께 머물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곶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의주에 도착하여 이호민을 뵈었다. 동료 이자민, 홍휘세, 권여장 등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사 최염 공과 판관 홍유의가 찾아왔는데, 홍유의는 나와 같은 해 생원진사시에 급제한 사람이다. 통역관 표헌, 박인검, 박인상, 정득, 임준, 박대근과 이문학관 박희현, 사자관 이해룡, 승문원 서원 이자관 등이 함께 와서 인사했다. 제술관 김남창, 차천로(호는 오산), 한호(호는 석봉)도 함께 와서 문안했다.
9일 요동의 백패와 탐청통사가 와서, 두 사신이 초이렛날 이미 해주위에 도착했으므로 초열흘에는 요동에 당도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10일 원접사는 표헌과 박인검을 요동으로 보내기로 의논했다. 두 사신이 데려오는 수행원이 매우 많다는 말을 듣고, 예전에 다녀간 황씨·왕씨 두 사신 이전의 규정대로 고치려 한 것이었다. 도사선위사 정시회, 문례관 오여익이 의주에 도착하여 서로 만났다.
11일 연위사 황진이 의주에 도착하여 찾아가 뵈었다.
12일 의주부에서 관문에 하마연(도착을 환영하는 연회)을 베풀었다.
18일 표헌 등이 돌아와 전하기를, 두 사신이 데려오는 인원은 모두 동정대아문(왜란 때의 원정군 지휘부)의 전례에 따라 중군기고관 이하 각기 서른 명 남짓이라 한다. 또 동충이라는 자가 실권을 쥐고 사람을 부리는 솜씨가 몹시 능란하여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라고 한다. 그날 저녁 두 사신이 진강에 도착했다.
19일 동충이 먼저 왔다. 미리 결정해야 할 일이 너무 번거롭고 많아, 원접사는 이를 모두 주상께 보고했다.
21일 두 사신이 강을 건넜다. 원접사 일행과 관찰사 이하 관원들이 성문 밖에 나가 맞이하고, 관사에 들어가 환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상사는 연회에 딸린 예물이 없다며 잔치를 받지 않으려 하여, 간신히 청한 끝에야 잔치를 열 수 있었다.
22일 소관에서 점심을 먹고 양책에서 묵었다. 쉬고 묵는 곳마다 비용을 지불했다.
23일 차연에서 점심을 먹고 임반에서 묵었다.
24일 운흥에서 점심을 먹고 정주에서 묵었다. 이번에는 연회를 받지 않았다.
25일 납청정에서 점심을 먹었다. 처음으로 상사 석일오(호는 반송)가 시를 내놓아 원접사가 이에 차운하였고, 부사의 시에는 내가 차운했다. 상사는 원접사의 시를 손수 고쳐서 보여 주었다. 저녁에 가평에 도착하여 정주에서 마련한 연회를 받았다.
26일 안주에서 묵었다. 처음으로 연회를 받았다.
27일 숙녕에서 묵었다.
28일 순안에서 점심을 먹고 평양에서 묵었다. 그믐날 연회를 받았다.
3월 1일 뱃놀이를 했다.
2일 생양에서 점심을 먹고 황주에 이르러 연회를 받았다.
3일 동선에서 묵었다.
4일 검수에서 점심을 먹고 용천에서 묵었다.
5일 안성에서 점심을 먹고 평산에서 묵었다.
6일 금교에서 점심을 먹고 개성에 도착했다.
7일 연회를 받았다.
8일 오목에서 점심을 먹고 마산에서 묵었다.
9일 벽제에 도착했다.
10일 새벽에 서울 서쪽 교외에 이르렀다. 주상께서 황제의 조서를 맞이하여 태평관에 드셨다. 조서를 선포하는 의식을 마치고 두 사신은 남별궁(지금의 송현동에 있던 별궁으로, 한때 종묘를 임시로 모셨다가 이후로는 외국 사신의 숙소로 쓰였다)에 자리를 잡았다.
21일 두 사신이 돌아가게 되었다. 홍휘세는 탄핵을 받고 김남창은 병이 들어 둘 다 따르지 못했으며 박희현도 사양하고 가지 않았으므로, 원접사는 송효남을 추가로 데리고 벽제에서 묵었다.
22일 마산과 오목을 거쳐 송경에서 묵었다.
23일 금교와 오조천을 지나 평산에서 묵었다.
24일 안성에서 점심을 먹고 용천에서 묵었다.
25일 검수와 동선을 지나 황주에서 묵었다.
26일 생양에서 점심을 먹고 평양에서 묵었다.
27일 안정과 숙녕을 거쳐 안주에서 묵었다.
28일 자산을 거쳐 정주에서 묵었다.
29일 운흥과 임반을 거쳐 차연에서 묵었다.
30일 양책과 소관을 지나 의주에 도착했다.
4월 1일 비를 무릅쓰고 강을 건넌 뒤 일행은 중강에서 작별하고 돌아왔다.
2일 그대로 머물렀다.
3일 의주부에서 관문에 상마연(출발할 때 베푸는 이별연)을 열었다.
4일 두 사신은 진강을 출발했다.
5일 일행이 의주를 출발하여 용천에서 묵었다.
6일 차연에서 묵었다.
7일 선천에 도착했다.
8일 태수 강인이 일행을 머물게 하고 연등 잔치를 베풀었다.
9일 곽산에 먼저 가서 묵었다.
10일 먼저 정주에 도착했다. 저물녘에 원접사 일행이 막 오산에 도착했는데, 나는 먼저 떠났다.
11일 그대로 머물렀다.
12일 가산에서 묵었다.
13일 안주에서 묵었다.
14일 숙천에서 묵었다. 권여장은 먼저 성천으로 갔다.
15일 순안에서 묵었다.
17일 평양에 도착했다.
18일 그대로 머물렀다. 관찰사가 잔치를 마련해 위로해 주었다.
19일 사은사 정사호, 조정지와 서장관 윤안국이 평양부에 들어와, 낮부터 밤까지 함께 뱃놀이를 했다. 이정이 정사호 공을 따라 연경으로 가게 되어 그와 만나니 매우 즐거웠다.
20일 원접사는 먼저 상원으로 떠났다. 상원은 원접사의 조카가 현감으로 있는 고을이라, 그곳에서 첩과 작별하려는 것이었다.
21일 그대로 머물렀다. 관찰사를 추향당으로 찾아뵙고 종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22일 중화에서 묵었다.
23일 원접사와 만나 황주에서 묵었다.
24일 용천에서 묵었다.
25일 송경에서 묵었다.
26일 파주에서 묵었다.
27일 서울 서쪽 성 밖에서 묵었다.
28일 복명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병오기행 (서기 1606년 7월 6일, 양력 추정)
을사년(1605년, 선조 38년) 겨울, 명나라 황제의 맏손자가 태어났다. 황제는 한림수찬 주지번과 형과도급사 양유년을 파견하여 조서를 받들고 오게 하였다. 나는 그때 요산의 벼슬을 그만두고 서울 집에 있었는데, 원접사 유근 공이 나를 데려가겠다고 주상께 청하였다.
병오년(1606년, 선조 39년) 정월 초엿샛날, 의흥위 대호군 직을 제수받았다. 이달 21일 조정에 하직 인사를 드렸다. 동료인 필선 이지완은 어머니를 뵈러 성천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나와 전적 조희일만이 함께 따랐다. 김남창이 제술관으로, 진사 백진남이 서사관으로 함께 따르고, 통역관 표헌, 이해룡, 박인상, 진예남, 이운상, 신계도와 이문학관 이재영, 양만세, 사자관 이해룡, 송효남, 화원 이정, 서원 이자관이 뒤따랐다. 이날은 뒤따라와 베풀어 준 송별연이 번거로워 겨우 연서까지 가서 묵었다. 나는 여인과 함께 묵었다.
22일 벽제에서 점심을 먹었다. 고양 군수 김흡이 찾아와 인사했다. 저물녘에 파주에 도착하여 이지완, 송효남 두 사람과 함께 묵었다.
23일 오목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에 개성부에 도착했다. 개성 유수 홍가신(호는 간옹)이 찾아왔다.
24일 금교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평산에 이르니 관찰사 심열이 찾아왔다.
25일 안성에서 점심을 먹었다. 수안 군수 이경천이 찾아와 인사했다. 용천에서 묵었는데, 재령 군수 유희발과 소강 첨사 민인길, 강령 현감 조호룡 등이 만호 심눌의 소개로 함께 찾아와 인사했다.
26일 검수에서 점심을 먹고 동선에서 묵었다.
27일 소선령을 거쳐 황주에 도착했다. 저녁에 관찰사 심열과 목사 박동열(자는 열지), 조희일(자는 이숙), 여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상조가 인사하러 찾아와 송효남, 이지완 등과 함께 묵었다. 밤중에 기녀 학랑이 휘장을 걷으며 들어오기에 나는 곧 알아채고는, 정상조에게 "지금 임고의 밑을 지나 내게 인사하면서 적벽에서의 놀음이 즐거웠느냐고 묻더라"고 짐짓 둘러대었더니 세 사람이 껄껄 웃어대는 통에 학랑이 달아나 버렸다.
28일 원접사는 조카와 고을에서 만나기로 하여 중화에 머물렀다. 조희일은 나와 함께 먼저 평양에 도착했다. 서윤 박엽(자는 숙야)이 구름무늬로 꾸민 놀잇배에 춤추는 기녀들을 싣고 와 잔치를 베풀었다. 내가 관서 지방을 아홉 차례나 오갔지만 이번 잔치가 가장 성대했다. 기녀 향란은 예전에 내 형님께서 돌봐주던 이였는데, 노래와 우스갯소리에 능하므로 백가관서곡을 부르게 했다. 관찰사 박자룡이 중화에서 돌아와 함께 뱃놀이를 했다. 성 위에 횃불을 밝혀 놓으니 성가퀴가 대낮처럼 밝았다. 이경(밤 9시에서 11시 사이)에 가마를 타고 들어오니 박엽이 나를 자기 처소로 불러들였다. 내가 예전에 돌봐주던 기녀 춘랑이 기적에서 빠진 지 오래되었는데 서울에서 온 지 두어 달이 되었다고 한다. 박엽이 굳이 그를 데려다 밀어 넣었다. 그런데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매무새도 어지러워 몹시 앓고 있는 듯하기에 내가 만류했다.
그믐날 조희일이 먼저 왔다.
2월 4일 원접사가 비로소 도착했다.
5일 동지사 이상신, 정협과 서장관 유시행이 평양부에 당도했다. 저녁에 이지완(자는 양오)이 성천에서 왔다.
6일 평양부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7일 평양을 출발하여 순안에 도착했다. 박엽도 도차사원으로 따라왔다. 밤에 박엽, 여인과 함께 서쪽 곁채에서 묵었다. 성천 부사 이충(자는 거용)이 술자리를 성대하게 차려 놓고 노래를 청하기에 허락했더니, 기녀 넷이 들어와 인사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생김새가 몹시 곱지 않았다. 내가 "저 아이는 분명 노래를 잘할 것이다" 하니, 여인이 "어떻게 아는가?" 하고 물었다. 내가 "재주가 없으면 어떻게 이 자리에 낄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방 안 사람들이 한바탕 웃었다. 그런데 그 기녀는 과연 노래를 잘하였다. 발성이 맑고도 웅장하여 평안도에서 으뜸이라 할 만했으나 곡조에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이 흠이었다. 이날 밤 백패가 와서, 대 감생과 등황을 가지고 오는 관원이 온다고 보고했다 한다.
8일 숙녕에서 묵었다.
9일 안주에서 묵었다. 영변 기녀 생랑이 찾아와 인사하고 옛정을 나누었다.
10일 가산에서 묵었다. 영유 현령 홍영이 찾아와 인사했다.
11일 정주에 도착했다. 기녀 문아가 찾아와 인사하고 옛정을 나누었다.
12일 운흥에서 점심을 먹고 임반에서 묵었다.
13일 차연에서 묵었다. 병사 성윤문이 찾아와 인사했다.
14일 양책에서 묵었다.
15일 소곶에서 점심을 먹었다. 부윤 구의강, 판관 최간이 마중을 나왔다. 저녁에 성에 들어갔다. 나는 관아 노비 송풍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이지완과 조희일 두 사람, 양만세, 송효남 등도 모두 근처에 숙소를 정해 아침저녁으로 함께 어울렸다. 수세관 원외 이오는 나의 재종형인데, 찾아와 주니 매우 반가웠다.
16일 원접사가 매일 정해진 일과로 시를 짓게 하기로 하였다. 나는 이때부터 비로소 한유, 왕유, 이백의 시집을 읽었다.
22일 부윤이 관문에서 하마연을 베풀었다.
3월 2일 대 감생의 접반사 민인백이 들어왔다.
3일 원접사를 모시고 구룡연에서 노닐었다.
4일 연위사로 신흠(호는 현옹)이 왔다고 들었는데, 저물녘에 성에 들어가 보니 실은 대 감생의 연위사 송기였다. 백패통사가 두 사신이 초이튿날 산해관을 지났고 대 감생은 요동에 도착하자마자 되돌아갔다고 보고하니, 민인백과 송기 두 분은 서울로 되돌아갔다.
6일 도사연위사 유몽인이 왔다. 저녁에 박엽이 왔다.
7일 백패가 지나갔다.
8일 원접사는 표헌과 이해룡 두 통역관을 요동으로 보내 두 사신을 만나게 했다.
9일 관찰사가 도착했다.
10일 문례관 전한 유희분이 도착했다.
11일 도차사원 정주 목사 최기가 도착했다.
12일 진하사 민몽룡, 유사원과 서장관 이척이 도착했다.
13일 백패통사가 두 사신이 14일에 요동에 도착한다고 알려 왔다.
15일 관사에서 예행 의식을 행하였다.
16일 진하사 일행이 강을 건넜다.
18일 표헌과 이해룡이 돌아와 전하기를, "두 사신은 매우 너그럽게 대해 주었으나, 데려온 관속이 예전 고천준과 최정건이 왔을 때보다 적어서 따라온 요동 사람들이 모두 화를 내며 욕하고 손찌검까지 하려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20일 두 사신이 진강에 도착하니 원접사는 박인상과 진예남 두 통역관을 보내 인사하게 했다. 두 사신은 접대를 위해 차출된 이들의 성과 자, 호를 자세히 물었다고 한다. 하인들 말로는 오는 길에 지은 시가 매우 많다고 한다.
21일 다시 표헌과 이해룡을 보내 수행원의 수를 상세히 정하려 하였으나 결말을 짓지 못하고 돌아왔다.
22일 다시 예행 의식을 행하였다.
23일 두 사신이 강을 건넜다. 원접사 이하와 관찰사 등 모든 관원이 성 밖에 나가 맞이하고 환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조금 뒤 관원들이 인사드리는 예를 행하고 저녁에는 연위연을 베풀었는데, 하인들이 으스대며 위협하고 소란을 피우는 것이 고천준과 최정건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같은 날, 소관에서 점심을 먹고 양책에서 묵었다. 상사는 강가에서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시를 아홉 수나 지었고 부사가 지은 시도 그 절반이나 되어, 화답하기가 매우 군색하여 원접사와 나, 그리고 여인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24일 차연에서 점심을 먹고 임반에서 묵었다. 이날도 대여섯 편의 시를 지었는데, 부사가 으레 그 절반을 짓는 것이 아예 상례가 되어 버렸다.
25일 운흥에서 점심을 먹고 정주에서 묵었다. 상사는 원접사에게 《천고최성》이라는 책자를 내놓고 발문을 짓게 했다.
26일 가산에서 묵었다.
27일 상사가 먼저 공강정에 이르렀기에 나도 뒤따라갔다. 상사는 나를 불러들여 내 누님의 시에 관해 물으므로 누님의 시집을 드렸더니, 상사는 이를 읽으며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의 시는 책으로 펴내지 않았는가?" 하고 묻기에 나는 감히 펴내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어서 우리나라의 산천과 지리를 매우 자세히 물으므로 모두 글로 써서 답했더니, 상사는 부채를 꺼내어 자신이 지은 〈제산정시〉를 적어 주고는 화답하라 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즉시 입으로 불러 화답하였더니 상사가 감탄하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저물녘에 안주에 도착하여 녹주의 집에서 묵었다. 연주의 옛 정인이 찾아와 인사하고는 창아와 상의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했다.
28일 숙녕에 이르렀다. 상사가 나를 불러들여 "귀국에서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지어진 시가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낱낱이 적어 가지고 오시오" 한 다음, 내 과거 시험 성적을 물었다. 중시에서 일등한 것을 듣고는 "이것은 당나라·송나라 때의 과거 시험 방식이오" 하고는 이어서 "지금 무슨 관직에 있소?" 하고 물었다. 나는 "예빈시 부정이니 바로 중국의 광록소경에 해당합니다. 손님 접대를 관장하는 직책이기에, 국왕께서 저를 보내 음식과 역마를 마련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였다. 상사가 다시 내 경력을 물으므로, 나는 "처음에는 사관에 제수되었다가 병조의 직방과 예조의 주객 두 원외를 거쳐, 급사중으로 옮겼다가 무선랑중으로 승진하고, 해운판관이 되었으며, 사복시정에 승진하였다가 서쪽 고을(수안)의 수령으로 나갔고, 그다음에 지금의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사는 "이런 사람이 만약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마땅히 승정원이나 홍문관 같은 요직에 오래 머물렀을 텐데, 죄를 짓지 않고서야 어찌 낮은 벼슬과 지방 고을 사이만 오갈 수 있단 말이오?" 하고는 《세설산보》, 《시준》, 《고척독》 같은 책들을 꺼내 주었다. 또 이지완과 조희일을 불러 위로하며 그들의 과거 급제와 이력을 물었다. 부사도 이들을 불러 노고를 위로하고 〈형산석각첩〉을 주었다.
29일 평양에 도착하여 이아(관아의 별채)에서 묵었다. 춘랑은 화려하게 단장하고 상냥한 모습이 지난번 앓아 보이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여인이 시를 지어 나더러 화답하게 하기에 나는 그 자리에서 응했다.
30일 그대로 머물렀다. 두 사신과 뱃놀이를 했다. 목은 이색의 "종일토록 읊조려도 짓지 못했네"라는 시구를 보고는 사신들이 웃으며 내게 "매일 이런 부류의 시를 찾아 올려 주면 우리 마음이 한결 편할 것이오" 하였다. 부벽루에 이르자 두 사신이 나를 불러 "연주하는 음악이 중국 음악과 아주 비슷한데, 가사가 있소?" 하고 물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보당〉과 〈자야심사〉를 적어 드렸더니, 두 사신은 그 가사가 《화간집》(중국 오대 시절의 사를 모은 책)에 실린 것보다 못하지 않다고 칭찬했다.
4월 1일 생양에서 점심을 먹고 황주에서 묵었다. 민인길(자는 숙정)이 문 가운데 서 있기에, 나는 상사를 모시는 왕 장반에게 귀띔하여 그의 뺨을 후려치게 했더니 숙정이 아슬아슬하게 피했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저녁에 상사가 나를 불러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북경에서 옛 판본의 《황화집》을 보았는데, 이행, 정사룡, 이이 같은 이들은 모두 문집이 있소?" 하고 물었다. 나는 왜란 통에 판본이 모두 불타 버렸다고 답하니, 상사는 안타까워하며 "요즘 유영경의 작품을 보니 원만하고 유려한 것이 옛사람들보다도 훌륭합디다. 귀국 사람들의 시를 어서 베껴서 보여 주시오" 하였다. 나는 "길 위라 경황이 없고 글씨 쓸 사람도 없으니, 며칠만 기다려 주시면 모두 베껴 드리겠습니다" 하였다. 상사가 "길가 역관의 벽판에는 왜 귀국 사람들의 시문이 붙어 있지 않소?" 하고 묻기에, 나는 "황제의 조서를 받든 사신께서 지나는 곳에 변변찮은 시를 걸어 둘 수 없어 예로부터 붙이지 않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사가 웃으며 "나라로 치면 중국과 오랑캐의 구별이 있다지만 시에 무슨 안팎이 있겠소? 더구나 지금은 천하가 한집안 같고 사방이 모두 형제가 되어, 나와 그대가 모두 천자의 백성으로 태어났는데 어찌 중국에서 태어났다고 뽐낼 수 있겠소. 요즘 귀국의 사대부들을 보니 예절이 한아하고 문장이 빼어나서, 이들을 중국에 데려다 벼슬을 시킨다 해도 어찌 우리보다 못하겠소" 하였다.
2일 동선에서 묵었다. 상사가 원접사와 우리 세 사람(허균, 이지완, 조희일)을 초대하여 차를 마시는데, 갑자기 부사가 나타나서 우리 세 사람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처마 밑에서 절을 하였다. 부사는 매우 공손하게 답례하고는, 다시 함께 차를 마시며 서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갔다.
3일 검수에서 점심을 먹고 용천에서 묵었다.
4일 상사가 먼저 총수산에 도착하여 나를 불러 함께 동월과 공용경의 비석 두 개를 구경했다. 옥류천의 물을 떠 마시고는 서호(중국 항주의 호수)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야기해 주었다. 한참 뒤 부사가 와서 원접사와 우리 세 사람을 불러 즐겁게 술잔을 주고받았다. 저물녘에 평산에 이르렀다.
5일 회란석 위에서 잠시 쉬고 금교에서 점심을 먹은 뒤 송경에 들어갔다. 저녁에는 우리나라 사람의 시, 최치원(호는 고운) 이하 백스물네 명의 시 팔백서른 편을 골라 네 권으로 엮고 노란 표지를 씌워 두 벌을 만들어 두 사신에게 올렸다. 상사는 답례로 녹화단(꽃무늬를 놓은 푸른 비단) 한 필과 안식향 천 매를 주었고, 부사는 남화사 한 필과 《태평광기》 한 질을 주었다.
6일 개성에 머물렀다. 잔치가 끝난 뒤 상사가 나를 불러 우리나라 사람의 시를 평하였다. "최치원의 시는 거칠고 힘이 약한 듯하고, 이인로와 홍간의 시가 매우 좋습니다. 이숭인의 〈오호도〉, 김종직의 〈금강일출〉, 어무적의 〈유민탄〉이 아주 좋고, 이달의 시는 여러 형태가 하경명(호는 대복)과 매우 비슷하나 그릇이 크지는 않습니다. 노수신은 힘차고 깊이가 있어 왕세정(호는 감주)에 비해 다소 고집스러운 데가 있으나 오언율시는 두보의 시법을 깊이 터득하고 있습니다. 이색의 시들은 모두 부벽루에서 지은 시만은 못합니다. 내가 밤새 불을 밝히고 읽어 보았는데, 귀국의 시는 대체로 음률이 밝고 맑아 매우 좋습니다" 하고는, 이달의 〈만랑가〉를 소리 높여 읊으며 무릎을 치고 칭찬했다.
7일 오목에서 점심을 먹고 마산에서 묵었다.
8일 벽제에 당도했다.
9일 그대로 머물며 연회를 받았다. 상사가 나를 불러들여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왕세정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상사가 답했다. "계사년(1593년) 봄에 태창에 가서 왕세정 공에게 한 번 가르침을 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공은 남경 형부상서 자리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인물은 그리 잘생기지 않았으나 눈빛이 형형했습니다. 화원에 고고당, 박고당 같은 집을 짓고 시 짓는 벗들과 문하생들을 모아 온종일 시를 짓고 술을 마셨는데, 하루에 대여섯 말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시문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시녀에게 피리 불고 거문고 뜯으며 노래하게 하고는, 그 자리에서 종이를 펴 곧바로 완성하였습니다." 학문과 문장을 어떻게 공부했는지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젊었을 적에는 왕수인과 육구연의 새로운 학설을 공연히 좋아했는데, 늙어서 보니 주자가 주석을 단 사서가 으뜸이었습니다. 학문의 뜻은 여기서 찾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문장은 누구나 이반룡(자는 우린)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진나라 이전과 전한 시절의 문장, 한나라·위나라의 고시, 성당의 근체시 등도 반드시 읽어야 하지만, 소식의 시문이 가장 가깝고 배우기 쉽습니다. 나도 백거이와 소식의 시를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또 내가 지금 한림원에서 시를 잘 짓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남사중, 구대상, 고기원 등이 잘합니다. 병부랑 사조제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시는 하경명과 아주 비슷한 경지입니다."
10일 나는 먼저 서울에 와서 복명했다. 주상께서 교외까지 나오시어 일행을 맞이하셨다. 두 사신은 서울에 열흘 동안 머물렀다.
20일 두 사신이 돌아갔다. 일행이 모두 따랐는데 김남창과 백진남은 뒤처져 가지 않았고 역관 남윤함, 전대이가 새로 추가되었다. 벽제에서 묵었다. 저녁에 상사는 우리 세 사람을 불러 만난 자리에서 《양천세고》의 서문과 돌아가신 누님의 시집에 붙일 서문을 지어 주었다. 이정이 그린 불화첩을 보고는 좋아하며 이런 그림은 중국에서도 보기 드물다고 하고서 끝에 몇 마디 글을 적어 주었다.
21일 마산과 오목을 지나 송경에서 묵었다.
22일 금교에서 묵었다. 저녁에 상사가 나를 불러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옛 시집을 찾았다. 마침 보따리 속에 외할아버지께서 주신 〈후산시〉 여섯 권이 있어 드렸더니 상사가 두 손을 모아 사례했다.
23일 오조천에서 점심을 먹고 어두워져서야 평산에 이르렀다.
24일 옥류천에서 조촐한 술자리를 벌였는데 분위기가 매우 자연스럽고 부드러웠다. 저물녘 어두워져서야 용천에 도착하여 원인초와 함께 묵었는데, 못생긴 계집종을 잠자리에 들여보내려 하니 우스운 일이었다.
25일 검수와 동선을 지나 황주에 이르렀다.
26일 생양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평양에 닿아 배 안에서 연회를 받았다. 박엽은 어사가 장계를 올린 일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내가 찾아가 억지로 끌어내어 비로소 배 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원접사가 내게 회문시에 화답하라 하기에 숙소에 돌아와 고생고생하며 겨우 운을 맞추어 명에 응했다. 저물녘 두 사신은 쾌재정에 올라 나를 불러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부사에게 《세고》의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부사가 허락했다. 상사가 "우리나라 시는 유영경(호는 춘호)을 제일로 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부사가 "의기는 높고 말은 강직하지만 시가 무엇인지는 모르는 사람이오" 하였다. 그러자 상사는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듯하나 그 문장이 매우 신중하니, 이야말로 최고의 작가요" 하였다. 이는 영의정 유영경의 작품이 오로지 최립(호는 동고)의 작품을 본떴기 때문에 두 사신이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저녁에 이아에서 묵었다. 박엽이 새벽이 되도록 번거롭게 굴어 견디기 힘들었다.
27일 안정에서 점심을 먹고 숙녕에 이르렀다. 저녁에 부사가 나를 불러 직접 〈세고서〉를 내어 주므로 두 번 절하여 사례하고 물러났다.
28일 안주에 이르렀다. 저녁에 두 사신이 원접사와 우리 세 사람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해 위로해 주었다. 원접사와 나는 술을 잘 못하여 단술을 대접받았는데 맛은 술과 같았으나 취하지는 않았다.
29일 가산을 지나 정주에 이르렀다. 저녁에 두 사신이 한호(호는 석봉)의 글씨를 구하기에, 마침 내게 〈옥루문〉 두 벌이 있어 나누어 주었다. 상사는 "해서의 법이 아주 묘하다. 안진경보다는 위요, 왕헌지(자는 자경)보다는 아래이니, 조맹부(호는 송설)와 문징명(호는 형산)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할 듯하다" 하였다. 또 진본을 얻고자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장문부〉를 내주었다.
30일 운흥과 임반을 지나 거련에 이르렀다. 저녁에 상사는 황홍헌(호는 규양)의 〈증망형시〉의 운을 써서 장률 두 수를 짓고 큰 족자로 만들어 우리에게 주었다.
5월 1일 양책을 지나 의주에 이르렀다. 상사가 이별시를 재촉하기에 소매 속에서 스무 운으로 된 칠언율시를 꺼내 드리고 부사의 시와 나란히 펼쳐 놓으니, 상사는 "아름답고 섬세하며 바르고 전아하니, 참으로 관각체(조정의 문서에 쓰는 격식 있는 문체)를 터득했다"고 하였다.
2일 두 사신이 강을 건넜다. 상사는 아침부터 복통이 일어나 연회장에는 들어가지 않고 강 위에서 곧바로 헤어졌으며, 부사는 연회장에 들어가 나를 불러서는 〈감호영〉을 직접 내어 주고 정중하게 작별했다. 저녁에 동쪽 곁채로 돌아와 묵었다.
3일 표헌과 이해룡을 보내 문안하게 하였더니, 상사는 병이 심하여 만날 수 없었다.
4일 관문에서 상마연을 행하였는데, 원접사는 중건의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이라 참석하지 못했다.
5일 박인상, 진예남이 가서 문안하니 상사가 좀 나아졌다고는 하나 만나 보지는 못했다.
6일 조희일이 병이 심해 고생했다.
7일 표헌과 이해룡이 다시 두 사신을 문안하니, 상사는 아직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고 했다.
8일 조희일의 열이 좀 내렸다.
9일 박인상, 진예남이 다시 문안하니 상사가 불러서 만나 보았는데 매우 초췌한 모습이었으며, 13일에는 길을 떠나려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10일 부윤이 세관의 숙소에서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노랫소리와 피릿소리가 뒤섞였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11일 이지완이 먼저 떠났다.
12일 영과 조희일이 먼저 떠났다. 부윤이 남산에서 전별연을 베풀었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자 영이 내가 예전에 돌보았던 기녀들을 늙고 젊음을 가리지 않고 죄다 끌어내 앉히니 서른 명이 넘었는데, 그 가운데 진짜가 아닌 사람이 여섯이나 섞여 있어 더욱 우스웠다. 조희일의 정인 연아는 이별이 서러워 흐느끼며 고개도 들지 못했다. 나는 "내 정인은 이렇게 많아도 슬퍼 우는 이가 없는데, 이숙은 단 하나뿐이면서 이렇게 연연해하니, 많아 봤자 소용없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구려" 하니 모두 크게 웃었다. 저녁에 양책에서 묵었다. 연아가 나의 정인 봉랑을 데리고 조희일을 뒤따라왔다. 나는 "서른 명 가운데 너만 왜 왔느냐. 그대로 남아 있다가 용리와 이별하는 편이 나을 것을" 하였더니 조희일이 "형은 어찌 그리 박정한 말씀을 하십니까" 하였다.
13일 아침에 연아는 조희일을 붙들고 슬피 울며 데굴데굴 굴렀다. 봉랑도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울음을 아껴 두었다가 용리와 이별할 때 울어라" 하였다. 봉랑은 옥당의 관리 용우린과 좋아하는 사이였으나 나 때문에 뜻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14일 선천에 도착하여 천추사 홍경신(호는 녹문) 공과 함께 묵었다.
15일 점심때 곽산에서 쉬며 성절사 이각, 서장관 유경종과 만났다. 저녁에 정주에 이르렀다.
16일 가산을 지나 대정강에 이르렀다. 연주의 기녀가 원접사의 방기와 함께 있는 것을 배 위에서 만나자 서로 정을 품고 바라보았다. 조희일은 그를 데리고 안주로 갈 계획을 세웠으나, 원접사의 기녀가 혼자서는 갈 수 없다며 굳이 말리는 바람에 그는 슬퍼하며 가 버렸다. 저녁에 안주에 이르니 이지완과 점마 조여익이 배에서 맞이해 주었다.
17일 나는 먼저 영유로 가서 자인의 아내를 만났다.
18일 그대로 머물렀다.
19일 순안을 지나 평양에 도착했다. 사은사 한술, 황정철과 서장관 송인급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 이아에서 묵었다. 서장관이 방기 옥일을 빼앗아 가 버렸다.
20일 원접사 일행이 떠났다.
21일 원접사가 비로소 도착했다.
23일 나는 먼저 중화로 돌아갔고, 우리 세 사람은 박엽, 대동도찰방 송영구(자는 인수)와 함께 매우 즐겁게 뱃놀이를 했다.
25일 중화를 지나 원접사를 모시고 황주에서 묵었다.
26일 동선에서 묵었다. 《황화집》이 비로소 완성되니 모두 여섯 권이었다.
27일 평산에서 묵었다.
28일 개성부에서 묵었다. 조보를 보니 형님이 총재(이조 판서)로 제수되어 있었다. 원접사가 나를 불러 몹시 근심하였으니, 때가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29일 오목에서 점심을 먹고 송도로 부임하는 경력 심집을 만났다. 성균관 벽에 방을 붙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서로 탄식했다. 저녁에 마산에서 묵었다.
6월 2일 서울에 들어가 복명하고 형님을 뵈니, 형님은 이조 판서 자리를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다시 말미를 주었으므로 마침 사직 상소를 써 놓고 앉아 계셨다.
(용어) 《황화집》은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올 때 접대관과 주고받은 시를 모아 엮은 시집으로, 1450년(세종 32년) 세종의 명으로 처음 편찬된 뒤 사신이 오갈 때마다 새로 엮어 펴냈다. "성균관 벽에 방을 붙인 사건"은 1606년 5월, 성균관 문묘의 담벼락에 조정 대신과 내시의 이름을 나열해 비방하고 좌의정 기자헌의 비행을 규탄하는 글이 나붙자 선조가 노하여 관련자들을 하옥시키고, 그 가운데 학유 고경오와 관노 등이 매를 맞아 죽은 사건을 가리킨다.
성소부부고 제19권
10. 00:09
성소부부고 제19권 · 문부 16 · 잡기
출처: 성소부부고 제19권, 문부 16, 잡기, 몽기
배경: "몽기"는 허균이 1609년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임무로 강가에 머물던 중 꾸었다는 신비로운 꿈을 적은 짧은 글이다. 꿈속에서 하늘의 궁전으로 인도되어, 자신이 전생에 신선 세계의 관리였다가 실수로 인간 세상에 귀양 온 것이라는 사연을 듣는 도교적 환상담으로, 허균의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자신의 파란만장한 처지를 신선의 운명에 빗대어 풀어내는 태도가 잘 드러난다.
몽기 (서기 1609년 5월 18일, 양력 추정)
1609년, 광해군 즉위 원년의 일이다. 명나라 황제가 우리 임금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는 조서를 내리기로 하고, 황실 내시 관청인 사례감 소속의 유 태감에게 그 조서를 받들고 오게 했다. 나는 분에 넘치게도 사신을 맞이하는 임시 관청의 관리인 도감관을 맡아 강가에 나가 열흘 넘게 머물러 있었다.
4월 어느 날 밤, 잠자리에 누워 미처 잠들기도 전이었다. 금박을 입힌 자주색 사각 관을 쓰고 꽃무늬를 수놓은 비단 도포를 입고 둥근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를 두르고 푸른 인끈을 늘어뜨리고 비단실로 짠 신을 신은, 점잖고 풍채가 훌륭한 사람 둘이 손에 금빛 깃발을 들고 나타나 나를 이끌며 말했다.
"옥황상제께서 그대에게 봉래산의 식양을 내리셨으니, 하늘 문에 나아가 조서를 받으시오."
그러고는 나를 긴 끌채가 달린 수레에 태우고 눈을 감으라 했다. 귓가에 바람 스치는 소리가 무섭도록 빠르게 지나갔다. 얼마쯤 지나 "이제 눈을 떠도 좋습니다" 하는 말에 눈을 뜨니, 대낮처럼 환하게 빛나는 은빛 궁궐이 홀연히 눈앞에 펼쳐졌다. 그 안에는 커다란 전각 하나가 자개와 온갖 보석으로 장식되어 눈이 부셔 똑바로 볼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영소보전'이라는 네 글자가 크게 적힌 현판이 걸려 있었다. 흰옷 입은 선녀 수천 명이 구름 같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줄지어 서 있었고, 비단 두건을 쓰고 학 깃털로 지은 옷을 입은 이들도 계단 양쪽으로 수백 명씩 늘어서 있었다. 흰 난새와 자줏빛 봉황이 아름다운 꽃나무 사이를 날아다녔다.
조금 있으니 전각 위에서 말을 전하는 사람이 하나 나타났다. 흰 명주옷을 입고 수염을 길렀으며 키는 작지만 눈빛이 번갯불처럼 형형했다. 그는 나를 알아보는 듯 웃으며 말했다.
"자부선조께서는 굶주림에 시달리다 보니 예전에 노닐던 하늘 세계도 못 알아보십니까."
그러고는 옥으로 만든 함에서 책 세 권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책마다 금빛 글씨로 제목이 적혀 있었는데, 첫째는 《옥청금사비록》, 둘째는 《구천뢰부영부》, 셋째는 《오암진형도》라 했고, 모두 보라색 꽃무늬 비단으로 표지를 입혔다. 나는 네 번 절하고 그것을 받아, 송아지 같은 얼굴에 수염이 무성하고 흰옷을 입은 자에게 건네 양손으로 받들게 했다. 잠시 뒤 섬돌 위에서 생황과 퉁소 소리가 울려 퍼지고, 난새와 학들이 오색구름 사이에서 날개를 펼치며 시원스레 춤을 추었다.
조금 있다가 흰 명주옷을 입은 그 사람이 상제의 명이라며 나를 이끌고 동쪽 문을 지나, 옆으로 난 하얀 홀 모양의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어둑한 회랑을 한참 걸어가니 별채 하나가 나왔는데, 고요하고 시원스레 트인 곳이었다. 맑은 물이 주위를 감돌아 흐르고 세 가지 꽃을 심어 놓은 작은 정자에는 '봉래도산'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흰 명주옷의 그 사람은 작은 방문을 열고 나에게 들여다보라 했다. 들여다보니 상아로 만든 침상 위에 산호 베개가 놓이고 용수초로 엮은 자리가 깔려 있었으며, 물소 뿔로 눌러 놓은 금빛 휘장이 드리워 있었다. 향은 가물가물 타오르고, 옥으로 만든 책상 위에는 《황정경》 한 권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는데 사람 기척 하나 없이 고요했다. 그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대가 예전에 살던 곳입니다. 떠난 지 마흔 날 만에 돌아오셨군요. 이곳의 하루가 인간 세상의 한 해와 같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십니까."
나는 놀랍고 당황스러워 한참을 넋 놓고 서 있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그대는 본디 벽하원군을 모시는 관리로서 봉래산의 물을 다스리는 총책임을 맡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북쪽 마을의 마귀 우두머리들과 어울려 지내고, 특히 상원의 시녀인 위성군을 지나치게 아끼신 나머지 맡은 일을 게을리하셨지요. 그 일로 상제께서 노하시어 그대를 남쪽 마을 한산주로 귀양 보내시고, 그대를 따르던 여러 귀신들을 내쫓고 누리던 복도 거두어들이셨습니다. 위성군은 원교라는 곳으로 쫓겨났고, 그를 모시던 시녀 백 명은 창기 신세로 떨어져 정해진 기한이 차야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대가 속세에 있으면서도 풍류와 멋스러움만큼은 당대에 이름을 날렸지만, 운명만큼은 일부러 곤궁하고 군색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제가 여러 귀신들을 불러 하나하나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옥으로 만든 지휘봉으로 오른쪽 작은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풍도산 자금원 팔환 무상마두신 행태보는 나오라."
잠시 후, 검은 두건을 쓰고 붉은 비단 저고리를 입은, 눈이 툭 튀어나오고 얼굴은 뾰족하며 키가 크고 수염이 없는 데다 걸음이 몹시 빠른 자가 나타나 꿇어앉아 공손히 대답했다. 이번에는 왼쪽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광상동주 초신원 육압대도통 팔비나타는 나오라."
그러자 갑자기, 구슬 아홉 개를 꿴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검은 담비 가죽옷을 입은, 쥐 눈처럼 생긴 눈으로 돼지처럼 힐끔거리며 성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코가 크고 배가 불룩한 자가 나와 꿇어앉아 공손히 대답했다. 이번에는 남쪽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연화동 교태산 좌도관 육원 대마두 적발귀는 나오라."
그러자 곧바로, 물고기 나는 무늬를 놓은 푸른 도포를 입고 손에 쇠스랑 모양의 칼을 쥔, 모자도 신도 걸치지 않은 네모진 얼굴에 뺨에는 시뻘건 수염이 난 자가 나와 꿇어앉았다. 다시 북쪽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무당진군좌하 귀관사명 금랑백일서는 나오라."
그러자 곧, 네모난 옥띠를 두르고 자줏빛 짧은 도포를 입고 양쪽으로 뿔 모양이 솟은 두건을 쓴, 얼굴이 시퍼렇고 키가 작으며 귀가 상투처럼 위로 뾰족한 조그만 사람이 나와 꿇어앉았다.
이번에는 방 북쪽에 세워진 운모 병풍을 지휘봉으로 깨부수니, 병풍 뒤에서 사람 하나가 튀어나왔다. 화양건을 쓰고 명주 창의를 입었는데 허리띠도 신도 걸치지 않았지만 풍채만큼은 맑고 빼어났으며, 얼굴은 검고 눈은 희고 윗입술이 드러나 보이는 자였다. 그는 앞의 넷과 달리 꿇어앉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 곁에는 두 존재가 따르고 있었다. 하나는 뺨이 누렇고 눈이 움푹 들어가고 이빨 두 개가 길게 튀어나와 마치 늙은이 같은 모습으로, 검은 어깨에 금패를 두르고 오랑캐 말로 뭐라 뭐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얼굴이 붉고 수염이 적으며 살집이 좋고 술에 취한 듯한 모습으로, 꽃무늬 속옷을 입고 붓주머니를 차고 벼루를 받든 채 몸을 기울여 소매를 털고 있었다. 흰 명주옷의 그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조주권진군이 치수를 맡았던 그대의 방탕한 나들이를 바로잡지 못해 함께 귀양을 오게 된 것인데, 어찌하여 새태세운리금강까지 데리고 왔는가."
이어서 그가 다시 외쳤다.
"성군을 모시는 시녀, 광한궁 봉록여사 모대충은 어디 있는가."
그러자 북쪽 방의 두 짝 문이 갑자기 활짝 열리며 부인 하나가 나와 섰다. 자줏빛 노을빛 어깨걸이를 걸치고 위에는 수를 놓은 초록빛 저고리를, 아래에는 비취빛 노을 무늬 치마를 입었으며 구슬로 아홉 가지 무늬를 놓은 신을 신었는데, 호리호리하고 키가 크며 얼굴은 뾰족하고 몸에는 공작 무늬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나는 놀랍고 의아하기만 했다. 한동안 여섯 존재는 서로 곁눈질만 할 뿐 감히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얼마 뒤 흰 명주옷의 그가 붉은 깃발 하나를 들고 나를 불러 남쪽 문을 지나, 처음 왔던 길을 되짚어 궁전 아래에 이르렀다. 그가 말했다.
"그대는 인간 세상의 재미를 실컷 맛보셨습니까. 상제의 명령은 이렇습니다. 그대에게는 원래 백 일의 액운이 정해져 있으니, 타고난 정기를 잘 지켜 몸을 보전하고, 남몰래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세상의 유행을 좇지 말고 지내십시오. 그렇게 예순 날의 기한이 차기를 기다리면, 가벼운 구름 수레가 저절로 그대를 맞으러 내려올 것입니다. 세상을 피해 숨어서 수련할 곳은 식양이니, 그리로 가서 공을 원만히 이룬다면 어찌 굳이 백 일을 다 채운 뒤에야 오르겠습니까. 부디 힘써 노력하십시오."
그러고는 나를 궁전 동쪽 문 밖으로 떠밀고, 문 왼쪽에 걸린 큰 종을 한 번 쳤다. 요란한 종소리에 놀라 깨어 보니, 그것은 한낱 꿈이었다.
아, 이것이 정말 있었던 일일까, 아니면 헛된 것일까. 나는 급히 촛불을 켜고 이 일을 적어, 훗날 그 진위를 확인할 날을 기다린다.
(용어) 상제: 하늘을 다스린다는 옥황상제. / 식양: 강릉의 옛 이름. / 도감관: 외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도감)에 속한 관리. / 사례감·태감: 사례감은 명나라 황실에서 환관을 관리하던 관청이고, 태감은 그 소속 환관에게 주어진 벼슬 이름이다. / 영소보전: 옥황상제가 머무는 궁전의 이름. / 자부선조: 하늘 세계에 속한 신선 관리를 이르는 말로, 꿈속에서 허균을 부르는 호칭이다. / 봉래도산: 허균이 전생에 신선으로 살았다는 처소의 이름. / 황정경: 도교에서 몸과 마음을 닦을 때 읽는 경전. / 벽하원군: 도교에서 섬기는 여신의 이름. 이 글에서 허균은 전생에 이 여신을 모시는 관리였다고 나온다. / 한산주: 이 글에서 허균이 살고 있는 인간 세상, 곧 강릉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였다. / 상원·북원: 하늘 세계 안에 있는 구역의 이름으로 보이나, 원문에 자세한 설명은 없다. / 원교: 위성군이 쫓겨나 갔다는 곳의 이름. / 창기 신세: 노래와 춤으로 사람을 접대하던 천한 신분으로 떨어졌다는 뜻. / 행태보, 팔비나타, 적발귀, 백일서, 조주권진군, 새태세운리금강, 봉록여사 모대충, 그리고 병풍 뒤에서 나온 이름 없는 이: 모두 저승 또는 신선 세계에 속한 귀신과 관리들의 이름이다. 원문에도 이 이름들의 뜻에 대한 설명이 따로 없어, 발음 나는 대로만 옮겼다. / 성군: 앞서 나온 벽하원군을 높여 부르는 말로 보인다. / 광한궁: 전설 속에서 달에 있다고 하는 궁전.
성소부부고 제20권
10. 14:38
성소부부고 제20권 · 문부 17 · 척독 상(尺牘上)
출처: 성소부부고 제20권, 문부 17, 척독 상
배경: 제20권은 문부 열일곱 번째 갈래인 "척독(尺牘)" 가운데 첫 부분(상)이다. 척독은 짧은 편지, 곧 사사로운 안부와 부탁을 담은 개인적인 서신이다. 이 권에는 정승과 판서 등 당대 고관들, 그리고 벗과 문우들에게 보낸 여든두 통의 짧은 편지가 실려 있다. 벼슬을 청탁하거나 인사를 부탁하는 사연, 죽은 누님(허난설헌)과 둘째 형(허봉)의 문집 간행을 부탁하는 사연, 서적과 골동품을 주고받는 이야기, 벗과 나눈 문학 비평과 농담 섞인 안부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앞선 산문들보다 훨씬 짧고 격의 없어, 허균의 인간적인 면모와 당대 관료 사회의 풍경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서애 유성룡 정승께 올린 편지
1604년 8월 (서기 1604년 9월 8일, 양력 추정)
1591년에 세상을 떠난 누님의 시집에 서문을 지어 주셨는데, 제가 그것을 외워 두지 못한 채 전란을 만나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이 불민한 죄를 어찌 면하겠습니까.
요즘 어떤 사람이 그 서문이라며 보여 주기에 읽어 보니 마치 다른 시대의 일처럼 낯설어 진본인지 가려낼 수가 없었습니다. 삼가 이를 기록하여 집사께 바치오니, 노사께서 잘못된 곳을 바로잡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이는 문집 첫머리에 실어 간행하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남쪽을 바라보니 아득히 멀어 마음속 말을 다 하지 못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도를 위해 몸을 잘 보중하소서.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1605년 2월 (서기 1605년 4월 2일, 양력 추정)
형님의 시문은 대부분 흩어져 없어졌습니다. 겨우 몇 편을 모아 간행하고자 이제 깨끗이 베낀 책을 바치오니, 한번 읽어 보시고 서문을 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형님을 가장 깊이 아시는 분으로는 노사만 한 분이 없습니다. 세상에 그분의 글에 서문을 지을 사람으로 노사가 아니고서야 누가 있겠습니까. 천 리 먼 곳에서 간절히 부탁드리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서문을 지어 영광되게 해 주시면 어떨는지요. 돌아가신 형님이 이를 아신다면 마땅히 지하에서 감격하여 우실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헤아려 주소서.
1606년 1월 (서기 1606년 2월 21일, 양력 추정)
삼가 손수 써 주신 편지를 받으니 황홀하기가 마치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는 것과 같아 무척 기쁘고 위로가 됩니다. 돌아가신 형님의 시집 서문을 지어 주시겠다고 승낙하신 지 벌써 해가 넘었는데도 아직 지어 주지 않으시니, 바라는 마음이 갑절로 간절합니다.
김흥세(자 근언)의 맏형은 완력과 용기가 있고 지략까지 갖추어 임용할 만한 인재인데, 더구나 노사께서 이미 추천하셨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가 지금 청송 고을살이를 얻으려는 것은 대감을 뵙기 위해서입니다만, 하늘이 사람의 바람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습니다.
심부름꾼이 급히 돌아가는 바람에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살펴 주소서.
(용어) 유성룡(호 서애)은 선조 때의 정승이다. 작고한 누님은 허균의 누이인 여류 시인 허난설헌으로, 본명은 초희다.
한음 이덕형 정승께 올린 편지
1605년 3월 (서기 1605년 5월 2일, 양력 추정)
형님께서는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형님의 시문 또한 전란 통에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그 시문 몇 수를 겨우 모아 두 권으로 엮었습니다. 이제 제가 맡은 고을에 가서 봉급의 절반을 떼어 이를 간행하려 하는데, 이는 형님이 남긴 시문 전체에 비하면 정말 태산의 터럭 한 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한 부를 바치오니, 귀찮으시더라도 읽어 보시고 몇 마디 말씀으로 그 끝에 발문을 달아 주신다면, 돌아가신 형님도 큰 은혜를 입는 셈이 될 것입니다. 절하고 삼가 아룁니다.
1608년 3월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대감 곁을 떠나온 지 몇 달 사이에 나라에 여러 일이 많았습니다. 승하하신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이 소신도 이렇게 간절한데, 하물며 합하께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암자의 승려가 대감의 뜻을 전해 오기에, 종이에 인쇄한 《소학》 같은 책들을 주어 대감께 보내 드렸습니다.
작별하던 날 나중에 전별시를 지어 주시기로 약속하셨기에 훌륭한 시를 지어 주시기를 날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국상 중이라 감히 거듭 부탁드리지 못합니다. 황공하여 다 쓰지 못합니다.
(용어) 이덕형(호 한음)은 선조 때의 정승이다.
오성 이항복 정승께 올린 편지
1605년 3월 (서기 1605년 5월 2일, 양력 추정)
전에 《원각경》 토를 단 책을 대감께 올려 읽어 보시도록 했었는데, 제가 잘못 해석한 곳을 대감께서 이미 모두 지적하셨다고 하니, 저에게도 가르쳐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완위편》은 필사하는 사람을 시켜 베낀 뒤 곧 김충신 편에 부쳐 대감께 돌려보냈습니다.
돌아가신 형님의 시집은 이제야 간행하였습니다. 삼가 한 부를 대감께 바치오니 열람하시기 바랍니다.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1610년 5월 (서기 1610년 7월 5일, 양력 추정)
성우길은 저의 집안 조카입니다. 완력과 용기가 있고 지략까지 갖추어 이미 북방을 지키며 공을 세운 바 있습니다. 호남의 우수사 자리가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다니, 바라건대 합하께서 그를 그 자리에 추천해 주셨으면 합니다. 세상에서는 북방의 장수는 남쪽 변경을 지키는 데 맞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리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옛날 양복은 북쪽 사막 지역에서도 여러 차례 공을 세웠고, 바다에서 싸우는 누선 장군이 되어서도 그 정예 병력이 꺾인 적이 없었습니다. 마원(신식후)은 농서와 촉 지방을 평정하는 데도 좋은 계책을 다 썼고, 남쪽 오령 밖에 구리 기둥을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어디에서나 통하는 재주라면 어느 자리를 맡아도 뜻대로 해낼 수 있는 법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오늘날의 누선 장군이요 복파 장군이니, 합하께서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몸이 아파 직접 찾아뵙고 아뢰지 못해 죄송합니다.
(용어) 이항복(호 오성, 오성부원군)은 선조 때의 정승이다. 양복은 한 무제 때의 장수로 외적과 싸워 전공이 많았다. 마원(신식후)은 후한의 명장 복파장군으로, 교지 지방을 정벌하여 평정하고 그 경계에 구리 기둥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일송 심희수 정승께 올린 편지
1605년 2월 (서기 1605년 4월 2일, 양력 추정)
합하께서 정승이 되셨으니 어진 인재들이 뜻을 펼 수 있게 되어 태평한 세상을 기대할 만합니다. 저로서는 개인적으로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경사스럽습니다.
돌아가신 형님의 시문은 흩어져 거의 남지 않은 지경인데, 겨우 제 기억에 남은 몇 편과 남들 사이에 전해 오던 것들을 보태어 두 편으로 엮어 이미 간행하였습니다. 삼가 한 부를 대감께 올리려 합니다. 대감께서도 옛 벗을 그리워하는 감회가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대감께서 헤아려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용어) 심희수(호 일송)는 선조 중기의 정승이다. "산양의 감회"는 진나라 상수가 옛 벗의 고향인 산양을 지나다 피리 소리를 듣고 옛 생각에 잠겼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옛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황지천 황정욱에게 올린 편지
1604년 9월 (서기 1604년 9월 29일, 양력 추정)
요즘 세상에 깃발을 세우고 문단에 우뚝 설 사람이 합하가 아니고서야 누구이겠습니까. 어찌하여 이조의 논의가 공정하지 못하여 학덕 높으신 어른의 벼슬길을 오랫동안 막아 두고, 마땅히 그 아래에 있어야 할 사람이 도리어 높은 자리에 올라 있게 하는지요. 아, 이 또한 운명인가 봅니다.
저에게 보내 주신 훌륭한 편지에서는 칭찬이 너무 지나치고, 인재를 아끼시며 뜻을 펴지 못함을 애석해하시는 마음이 말씀 밖으로까지 간절하여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고을살이 나가는 일이 무척 급박하여 미처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봄에 성묘하러 서울에 가게 되면 마땅히 문하를 찾아뵙고 사례하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1606년 8월 (서기 1606년 9월 16일, 양력 추정)
주지번 태사의 그림에 합하의 시까지 곁들여 얻었으니 더욱 귀중합니다. 저는 갑작스레 두 가지 보물을 얻고 보니 이번 행차가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어찌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지 않겠습니까.
가을이 서늘해지는데 잘 보중하시기를 우러러 빕니다.
1607년 3월 (서기 1607년 4월 20일, 양력 추정)
멀리 영남 밖으로 고을살이를 나가게 되어 찾아뵙고 떠나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심생이 전별시를 가지고 왔더군요. 수십 번을 읽어 보니 막힘없고 호탕하여 차마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성품이 졸렬하고 게을러서 외지로 벼슬살이 나가면서도 여러 어르신들께 시를 지어 달라 청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귀한 시를 얻고 나서는 곧바로 이 시의 운을 따라 문장으로 자부하는 여러분에게 두루 시를 지어 달라 청했더니, 다들 과연 화답해 주시어 곧 커다란 시집이 되었습니다. 이는 군자의 말씀을 귀히 여긴 것이요, 저를 훌륭하게 꾸며 준 일이니, 감격스러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용어) 황정욱(호 지천)은 선조 때 예조 판서를 지내고 장계부원군에 봉해졌다. 주지번(주 태사)은 명나라 사람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인물이다.
윤월정 윤근수에게 올린 편지
1606년 8월 (서기 1606년 9월 16일, 양력 추정)
합하께서는 중국의 옛일에 무척 밝으시어 중국 사람 중에서도 어깨를 겨룰 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것을 저 같은 사람에게 물으시니, 이는 귀머거리에게 소리를 들어 달라 부탁하는 격입니다.
김주의 일은 전에 낭중 가유약에게서 《이문광독》이라는 책 속에 실린 고중현이 쓴 《병탑유언》 한 권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나라와 관련된 일이 세 조항 실려 있었는데, 하나는 종계에 관한 일이었고, 하나는 기순(기 천사)과 서거정이 주고받은 시에 얽힌 이야기였으며, 또 하나가 바로 김주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오래된 일이라 정확한 문구는 잊었지만, 삼가 그 대략을 기억하여 별지에 적어 올리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1607년 8월 (서기 1607년 10월 5일, 양력 추정)
왕경 상서의 일화 네 조목은 바로 하양준이 지은 《사우총설》에 실려 있습니다. 지금 이를 기록하여 바치니 읽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유청일찰》이라는 책은 전예형이 지은 것인데, 저는 전에 가 낭중에게서 빌려 한 번 읽고 돌려주었으니 지금은 가진 것이 없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장씨와 육씨는 장주와 육온을 가리키는 것이지, 강릉 장거정과 오대 육광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608년 5월 (서기 1608년 6월 26일, 양력 추정)
서울에 갔다가 장모상을 당하여 허둥지둥하느라 겨를이 없어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합하께서 먼저 저희 형님들의 집까지 찾아 주셨다는데, 저는 향을 올리러 가느라 미처 돌아오지 못해 맞이하지도 못했으니, 게으른 죄를 면하기 어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누님의 시집 한 질을 바치오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지번과 양유년, 두 분의 서문 중에 어느 쪽이 더 낫습니까? 양유년이 직금시를 인용한 것이 이치에 딱 맞아떨어지는 듯한데, 대감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용어) 윤근수(호 월정)는 선조 때 양관 대제학과 우찬성 등을 지냈다. 김주는 조선 문신으로 1563년 종계변무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그곳 객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오봉 이호민에게 올린 편지
1604년 9월 (서기 1604년 9월 29일, 양력 추정)
훌륭한 시를 받고 보니 마치 좋은 보옥을 얻은 것만 같습니다. 이번 행차는 정말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마땅히 아름다운 옥에 새겨 길이 전하겠습니다.
1606년 3월 (서기 1606년 4월 21일, 양력 추정)
윤청의 시권은 전부터 갖고 있었는데, 펴 보니 마치 벗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이것을 슬쩍 빼내어 어르신께 보내 드리고 싶었으나, 주인이 이를 지키는 태도가 마치 옛날 인상여가 구슬을 품에 안고 머리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내주지 않으려 기둥을 노려보고 서 있던 것과 같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용어) 이호민(호 오봉)은 선조 때 문신으로 좌찬성 등을 지냈다. 인상여는 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신으로, 진나라 소왕이 화씨벽 구슬을 속임수로 빼앗으려 하자 구슬을 품고 기둥에 기대어 목숨을 걸고 지켜 낸 고사로 유명하다.
유서경 유근에게 올린 편지
1605년 3월 (서기 1605년 5월 2일, 양력 추정)
공께서는 저희 형님 미숙(허봉)과 홍태고(홍적)와 더불어 문단의 중심 역할을 하셨는데, 저희 형님과 홍태고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공만이 남아 문형을 쥐고 예원의 우두머리로 군림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누구도 감히 그 글솜씨를 대적할 자가 없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듣자니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를 가려 뽑고 계신다 하기에, 돌아가신 저희 형님의 시도 그 안에 많이 실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감히 간행본 한 질을 올리오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1605년 9월 (서기 1605년 10월 26일, 양력 추정)
남창 김현성을 만났더니, 돌아가신 형님의 시는 시선에 들어간 것이 매우 적고 누님의 것은 다소 많더라고 하더군요. 옛날 용재 이행이 우리나라 글을 가려 뽑을 때 탁영 김일손의 문장과 읍취 박은의 시를 매우 많이 넣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문단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니, 혹 다른 사람들의 이견에 밀려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까? 돌아가신 형님의 칠언 가행은 가장 절묘한데 단 한 편도 들어가지 않았다니, 이 점이 더욱 이해되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다시 잘 헤아려 가려 뽑으시어, 넓은 바다에 빠뜨린 구슬처럼 묻히는 일이 없게 해 주십시오.
(용어) 유근(호 서경)은 선조 때 대제학과 좌찬성 등을 지냈다.
이월사 이정귀에게 보낸 편지
1610년 9월 (서기 1610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듣자니 공조에 자리가 하나 비었다는데, 그곳은 본디 한가하여 여유롭게 지낼 만한 자리입니다. 옛 시인 중에 공조 벼슬을 지낸 이로는 하손, 두보, 장적, 소식 등이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야 이 네 분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한 시대에 요행히 시로 이름을 얻어 공께서도 일찍이 칭찬하고 격려해 주신 바 있습니다. 지금 마침 공께서 인사를 맡고 계시니 이 일을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에게 이 자리를 맡겨 주셔서, 저 네 분이 저승에서나마 손뼉을 치도록 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19일, 양력 추정)
감옥에서 살아 나오자마자 유배 명령이 촉박하여 미처 찾아뵙고 인사드릴 겨를도 없었습니다. 어느 한이 이만하겠습니까. 편지와 귀한 약제까지 길 떠나는 사람을 위해 보내 주시니, 그 두터운 정을 이루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신문을 받던 날 진술 중에 여러 차례 공의 이름을 끌어들였는데, 그것은 상황이 몹시 위태롭고 급박한 나머지 그리된 것이지 감히 공을 모함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말썽이 적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제가 어찌 남을 모함하는 사람이겠으며, 또 어찌 남의 사주를 받는 사람이겠습니까. 이는 온 세상이 저를 너무 하찮게 여긴 탓이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공께서는 같은 죄를 지은 사람이 아직도 높은 벼슬을 그대로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는데, 그 말씀은 너무 지나칩니다. 제 조카는 시험에 합격했고 공의 장인은 합격하지 못했으니, 그 죄가 서로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밝혀질 일이니 감히 여러 말 하지 않겠습니다.
(용어) 이정귀(호 월사)는 선조 때 대제학을 지내고 인조 때 좌의정에 이른 문장가다.
신현옹 신흠에게 보낸 편지
1608년 3월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춘영」 백 편은 정직한 선비들이라면 입에 올리지 않을 내용이라 남에게 보여 드리기에 적합하지 않은데, 감히 보여 드리겠습니까. 이 졸렬한 사람이 입을 함부로 놀렸으니, 곧장 혓바닥을 뽑히는 지옥에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어 감히 보시라고 바치니, 보시면 반드시 더럽게 여기시며 상서롭지 못하다 하실 것입니다.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1608년 3월 (다른 편지)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훌륭한 서문을 지어 주셨는데, 칭찬이 너무 지나쳐서 제가 감당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 일이라 하여 감히 합하의 밝은 감식안을 가릴 수 없기에 그대로 서문으로 실었더니 명성이 훨씬 높아졌습니다. 저를 알아주신 은혜는 저를 낳아 주신 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죽어서도 그 은혜를 갚기로 기약하겠습니다.
1610년 10월 (서기 1610년 12월 4일, 양력 추정)
나주는 서남쪽 지역의 큰 고을입니다. 제가 전에 직접 그곳을 가 보고서, 벼슬이 이 고을 목사에 이르면 그것으로 그만두어도 좋겠다고 여겼습니다. 지금 마침 그 자리가 비었고 월사께서 이조를 맡고 계시니, 이는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합하께서 저를 그곳에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기회에 남쪽으로 아예 돌아가 버릴 계획입니다. 감히 진심을 말씀드립니다.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19일, 양력 추정)
감옥에서 여러 차례 보내 주신 소식을 받았습니다. 옛날 사마천이 궁형을 받던 날, 강도상을 지낸 동중서나 예 대부 같은 이들도 찾아와 안부를 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대야 천 년의 차이가 있지만, 옥에 갇힌 처지에서 이런 벗이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게다가 도교의 책까지 보내 주셔서 제가 그것을 읽으며 하늘로 오르는 상상이라도 하게 해 주셨으니, 지극한 정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리하셨겠습니까.
옛날 영웅들은 장수나 정승이 되지 못하면 신선이라도 되었는데, 저야 장수나 정승이 되기는 이미 틀렸으니, 마땅히 연문자·안기생 같은 옛 신선들과 더불어 노니는 것도 충분히 즐길 만한 일일 것입니다.
강남 천 리 길을 미처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떠나왔기에, 종이를 대하니 목이 메어 다 쓰지 못합니다.
(용어) 신흠(호 현옹)은 인조 때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이른 문장가다. "혓바닥을 뽑히는 지옥"은 불교에서 함부로 말을 지껄인 사람이 가게 된다는 지옥의 이름이다. 연문자와 안기생은 옛 전설 속의 신선들이다.
한유천 한준겸에게 보낸 편지
1601년 8월 (서기 1601년 9월 11일, 양력 추정)
해양의 모임에 어찌 감히 즐거이 달려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다만 부사가 계셔서 제가 함부로 참견할 처지가 아니니, 공께서 알아서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이번 제 행차를 두고 기이한 만남이라며 비웃는데, 이는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굳이 피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장부로 태어나 젊은 시절은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가는데, 한 차례의 즐거움이 충분히 만종의 녹봉만 한 가치가 있습니다. 참으로 그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면 욕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들 어찌 제 털구멍 하나라도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의리에 크게 해로운 일도 아닌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공께서 식사하시다가 이 편지를 보신다면 틀림없이 웃음이 터져 밥상 가득 입 속의 밥을 뿜고 마실 것입니다.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1601년 8월 (다른 편지) (서기 1601년 9월 11일, 양력 추정)
공께서는 용성으로 가시어 큰 고을의 음식을 드신다는데, 그 맛이 해양의 작은 고을 음식에 견주어 어떻습니까?
저는 공을 배웅하고 성을 나와 봉생정 위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한 줄기 연기가 대숲을 덮고 차가운 바람이 휘장에 불어왔습니다. 고개를 들어 동쪽을 바라보니 푸른 큰 들판 저 멀리 공의 깃발과 수레 일산이 이미 보이지 않았습니다.
타향에서 벗을 이별하는 것은 옛사람들도 모두 탄식했던 일인데, 뜻밖에 오늘 그 일을 직접 겪었습니다. 생각건대 아마 공께서도 저와 같은 심정이실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식사를 많이 하셔서 몸을 잘 보중하소서. 이만 갖추지 않습니다.
1601년 9월 (서기 1601년 10월 10일, 양력 추정)
조운을 맡은 병졸과 일반 군졸 문제는 형님께서 이미 저와 함께 타당하게 조정하여 공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나랏일인데 어찌 감히 고집을 부리겠습니까. 외적이 오지 않는다면 편안히 밥을 먹겠지만, 만약 급박한 일이 생긴다면 그 많은 곡식을 어떻게 바닷길로 운반하여 서울을 구제하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공께 다시 여쭐 필요는 없겠습니다. 다만 수군을 통솔하는 사람이 일을 제대로 모를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곁에서 어떤 사람이 공께서 식사를 잘 하시는지 묻고 있으니, 이 정성을 알아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용어) 한준겸(호 유천)은 선조·광해군 때 호조 판서와 영돈령부사 등을 지냈다.
이창해 이사홍에게 올린 편지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간이 최립의 아들은 바로 공께서 잘 아시는 사람입니다. 서경에서 숙천 고을 자리를 약속하신 적이 있으셨지요. 합하를 괴롭히기만 하는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일을 간청드려 왔습니다. 방금 조보를 보고서 감히 연락을 드립니다. 합하께서 어찌 남의 마음을 저버리실 분이겠습니까. 감히 대략 말씀드립니다.
1609년 9월 (다른 편지)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저의 육촌형 되는 체씨는 그 굳센 절개가 관리들에게 알려져 있고 학문과 행실이 선비들에게 존경받고 있는데도, 아직까지 벼슬에 오르지 못한 채 서울에서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어진 사람이나 군자들이 마음을 써야 할 곳입니다. 합하께서 그에게 한 말의 물이라도 부어 주시어, 수레바퀴 자국의 마른 물웅덩이에서 죽어 가는 붕어를 살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609년 10월 (서기 1609년 11월 11일, 양력 추정)
여러 저잣거리의 물가가 치솟는 데 대한 대책은 법령의 첫째 조항에 실려 있습니다. 만약 법령대로 시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횡포를 어떻게 징계하겠습니까. 애초에 이 일은 본조가 책임질 일입니다.
이번 초하루에는 공을 위해서 아전들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몹시 질 나쁜 물건을 가지고 높은 값을 받는 자들은 합하께서 다스리셔도 무방하겠습니다.
(용어) 이사홍(호 창해)은 선조 때의 유생이다.
황사숙 황신에게 보낸 편지
1609년 1월 (서기 1609년 2월 19일, 양력 추정)
듣자니 공께서 중국에서 《이담》이라는 책을 구해 오셨다는데, 그중 한 조목에 저희 누님에 관한 일이 실려 있다고 하니 참으로 그러합니까?
얼마 전 행주 정승(기자헌) 댁에서 그 책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런 내용은 없었습니다. 혹 나중에 다시 엮으며 덧붙인 것은 아닙니까?
이 일 때문에 다시 문하에 찾아가는 것도 마땅치 않으니, 그 책을 빌려주시기 바랍니다. 다 쓰지 못합니다.
(용어) 황신(자 사숙)은 광해군 때 호조 판서를 지낸 문장가다.
최분음 최천건에게 보낸 편지
1605년 11월 (서기 1605년 12월 24일, 양력 추정)
옛 도읍에서의 하룻밤 대화로는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회포를 풀기에 부족했습니다.
월성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리운 마음이 차가운 구름과 함께 모두 아득해졌습니다. 성 위의 낮은 담장 너머로 만월대를 바라보니 안개 낀 나무들만 푸르러, "지는 해"니 "비껴 내리는 비"니 하는 시구를 읊을 수가 없어 스스로 재주가 다한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느지막이 임진강에 이르니 커다란 얼음이 강을 막고 차가운 눈이 온 산에 가득하여, 문득 눈 구경의 흥취가 일었습니다. 생각건대 옥황상제가 계신다는 하늘 위 높은 누각은 그 추위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혹 공께서는 저를 위해 부 한 편을 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1606년 11월 (서기 1606년 12월 14일, 양력 추정)
예나 지금이나 비방을 받는 일은 성현이라도 피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형수와 정을 통했다는 누명이나 장인을 매질했다는 소문이 옛 진평이나 제오륜에게 무슨 해가 되었겠습니까. 공께서는 스스로 삭이시고, 남의 헐뜯음을 귀신 같은 사람과 견주거나 소나 말과 힘을 겨루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난초와 창초 같은 향초는 불에 태우고 삶아도 저절로 향기를 내는 법이니, 구중궁궐에 계신 임금께서도 이미 환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일이 곧 밝혀질 것이니, 억지로라도 직무에 나아가시어 성상의 기대에 부응해 주시기를 애타게 바랍니다.
1607년 6월 (서기 1607년 7월 8일, 양력 추정)
사흘 동안 내린 비도 더위를 식히지 못했습니다. 북쪽 창가에 다리를 뻗고 도연명의 시 몇 편을 읊으니,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와 문득 하늘 위 신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공께서는 이 찌는 더위 속에서 부채로나마 땀을 식히실 수 있는지요. 아마 마음과 힘을 많이 허비하고 계실 것 같은데, 이런 때는 오히려 못난 사람이 더 편한 법입니다.
한낮에 갑자기 보내 주신 편지를 받고 보니, 시원한 바람이 상쾌하게 답답한 제 가슴을 씻어 주는 듯했습니다. 성균관 사성 자리에 저를 추천하신 것은 불교를 좋아했다는 비난을 씻어 주시려는 뜻이었습니까? 저는 지금 이대로가 좋으니 무슨 수고인들 꺼리겠습니까. 다 닳은 붓도 천금 주고 산 것처럼 이대로 만족하며 스스로 즐기렵니다. 서울에 가서 귀인들과 가까이 지내는 일은 내키지 않습니다. 공께서 들으시면 틀림없이 이 미친 종놈의 옛 버릇이 또 도졌다 하실 것입니다.
지금 막 서첩을 들고 《갈고보》를 읽다가 다 마치지 못한 채 대강 써서 올립니다.
1607년 8월 (서기 1607년 10월 5일, 양력 추정)
지난번에 올린 열 편의 율시는 운자에 얽매여 좋은 흥취를 손상시켰으니 남겨 둘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술 항아리 덮개로나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수령의 인끈을 매고 대방주(남원)를 육 년쯤 다스리다가 지리산의 신선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공의 이조 판서 자리를 준다 해도 저는 바꾸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되도록 도모해 주시기 바랍니다.
1607년 9월 (서기 1607년 11월 4일, 양력 추정)
약초 임수정이 백옥루에 글을 지으러 저세상으로 떠났으니, 천고에 남을 한이 많습니다. 공께서도 이런 아픔을 느끼시는지요. 만시 한 편에 제 나름대로는 그의 일생을 다 담았다고 여깁니다. 이 시에 화답하여 죽은 이를 위로해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별지에 적어 둔 것은 부디 제 뜻에 곡진히 부응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1607년 9월 (다른 편지) (서기 1607년 11월 4일, 양력 추정)
저의 벼슬살이하는 심정은 마치 엷은 가을 구름 같아서, 가을바람이 한 차례 불어오자 옛날 장한이 고향의 농어회와 순챗국을 그리워하던 그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고을 하나를 얻어 입에 풀칠이라도 한다면 만호후에 봉해진 것과 다름없겠는데, 공께서는 어찌하여 그것을 아끼십니까? 공께서 인재를 아끼는 그 한마음이야 하늘에 물어도 부끄럽지 않겠지만, 때를 알지 못하니 그 사랑이 오히려 지혜를 어둡게 한 것이 아닙니까?
공명은 손에 들어오지 않은 채 젊은 시절의 뜻은 이미 시들었습니다. 마치 힘없는 망아지가 우리 안에서 서성이는 격이니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곤궁함과 영달은 분수에 이미 정해져 있어 하늘도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대장부의 일이란 관 뚜껑을 덮고 나서야 끝나는 법인데, 제 혀는 아직 건재하지 않습니까. 용을 고삐와 쇠사슬로 얽어매려 하지 마십시오. 용의 성질이란 본디 길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은주는 저희 선친께서 고을살이하셨던 곳인데, 제가 어찌 감히 기꺼이 부임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저는 선친의 일을 그대로 따를 수 없으니, 혹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다면 이는 선친의 가르침을 크게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가림(지금의 부여)은 바닷가에 있어 외지긴 하지만 생선과 게가 풍부하니 그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듣자니 공주와 같은 시기에 임명하신다는데, 그곳은 번잡한 데다 게도 없고 게다가 고을을 감독하는 관청까지 있으니, 제 이름은 그쪽에는 올리지 말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지역이 서로 가까워 혹 가림을 다투는 다른 사람에게 밀려날까 염려되어 번거롭게 말씀드립니다.
1607년 2월 (서기 1608년 1월 26일, 양력 추정)
가림은 얻지 못하고 도리어 공주를 맡게 되었으니, 이 역시 운명인데 어찌 공을 탓하겠습니까. 제가 벼슬을 하는 것은 가난 때문이니, 처자식을 지켜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게 하면 그것으로 족하지 달리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함부로 놀기만 하고 일을 게을리하여 공께서 천거해 주신 뜻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헌부의 서경이 끝나면 마땅히 찾아뵙고 사례하겠습니다.
적막한 겨울밤, 눈 녹인 물을 부어 새로 만든 차를 끓이는데, 불은 활활 타오르고 물맛은 좋으니 이 차 맛은 제호와 다를 바 없습니다. 공께서 어찌 이런 맛을 아시겠습니까.
1608년 1월 (서기 1608년 3월 1일, 양력 추정)
처음 부임할 때 간관 하나가 제가 그 자리에 걸맞지 않다며 심하게 헐뜯고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려다가 올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을에 부임해서는 새벽부터 많은 송사를 처리하고, 밤이면 등불 삼아 《좌씨전》 한 질을 읽고 있습니다. 이는 제 스스로 옛 한나라 관리의 방식을 따르면서 또한 천고의 성대한 일을 그만두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헐뜯는 자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세상에 쓸모없는 자라 하니, 이 또한 실없는 소리라 하겠습니다. 공께서는 틀림없이 크게 웃으실 것입니다.
(용어) 최천건(호 분음)은 선조 때 이조 판서를 지냈다. 진평(진 유자)은 한 고조의 공신으로 일찍이 형수와 정을 통했다는 모함을 받았다. 제오륜(자 백어)은 후한 광무제의 신하로, 장인을 매질했다는 놀림을 받자 자신은 장가를 세 번 갔지만 그때마다 장인이 안 계셨다고 답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장한(자 계응)은 진나라 사람으로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의 농어회와 순챗국이 그리워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최간이 최립에게 보낸 편지
1607년 3월 (서기 1607년 4월 11일, 양력 추정)
지천 황정욱의 시에 화답해 주신 시는 기걸차면서도 진중했습니다. 또 잘 맞지 않는 몇 글자를 고쳐 달라고 청하셨는데, 저는 마치 페르시아의 화려한 시장에서 진귀한 보석들에 눈이 부셔 어느 것이 더 값진 것인지 가늠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심정입니다.
그대로 둘 다 남겨 두어, 공께서 글을 지으실 때 얼마나 신중을 기하시는지 보여 드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1607년 3월 (다른 편지) (서기 1607년 4월 11일, 양력 추정)
세상에서 글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공의 시를 잘못 낮추어 보는데, 이는 그저 무지한 탓입니다. 공의 문장은 아무리 억세고 기걸하다 해도 역시 반고와 한유(창려)에게서 그 뿌리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 시는 본디 딱히 스승에게서 배운 바 없이 스스로 하나의 격을 창조해 낸 것인데, 그 뜻이 깊고 시어가 탁월하여 성률이나 익히고 꽃과 풀이나 읊는 자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저는 공의 시가 문장보다 더 훌륭하다고 여기는데, 공께서는 그렇게 인정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용어) 최립(호 간이)은 선조 때 문장가로 형조 참판을 지냈다.
정한강 정구에게 보낸 편지
1596년 9월 (서기 1596년 11월 4일, 양력 추정)
읍지를 만들면서 고을의 나이 든 노인들에게 물으니, 아전방·동문창·우계상방 등이 모두 신라 때 김흔 공이 지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아득한 옛사람을 떠올리니 마음이 감개무량합니다.
1596년 9월 (다른 편지) (서기 1596년 11월 4일, 양력 추정)
읍지의 범례를 명나라 전여성이 지은 《서호지》를 본받고자 했는데, 합하께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시다니 어째서입니까? 지리, 관청 건물, 토산물 등에 대해서는 말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읍지의 나머지 부분에는 그 사적을 싣되, 제 나름의 방법을 써서 신중히 하여 허물이 없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1601년 3월 (서기 1601년 4월 17일, 양력 추정)
오랫동안 어르신을 모시지 못하니 뵙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강릉지》에는 마땅히 빼야 할 것과 혹 보충해야 할 것이 있을 터이니, 전씨가 돌아올 때 편에 보내 보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릇 사실을 기록할 때는 핵심만 적되 너무 소략해서는 안 되고, 자세히 적더라도 거짓이 없어야만 후세까지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비루한 속어에서 비롯되었고, 저 또한 역사를 기록하는 재능이 부족한 데다 젊은 날의 경솔한 견해로 만든 것이니, 어찌 남의 안목에 흡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혹 이전 것보다 나은 점도 있을 것이기에 이렇게 세세히 늘어놓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1603년 8월 (서기 1603년 9월 19일, 양력 추정)
옛사람의 말에 "빌려 간 책은 늘 돌려주는 것이 더디다"고 했는데, 그 "더디다"는 말은 한두 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강》을 빌려드린 지가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벼슬할 뜻을 끊고 강릉으로 돌아가 그 책이나 읽으며 소일하려 하기에 감히 말씀드립니다.
(용어) 정구(호 한강)는 선조 때 공조 참판을 지낸 학자다.
김남창 김현성에게 보낸 편지
1605년 12월 (서기 1606년 1월 23일, 양력 추정)
《세가문헌》을 만든 일은 참으로 주제넘고 경솔한 짓이었습니다. 어르신께서 꾸짖지 않으시고 도리어 박식하고 우아하다며 격려해 주시니 부끄러우면서도 감격스럽습니다. 쪽지를 붙여 두신 곳은 하나하나 말씀하신 대로 고쳐서, 충고해 주신 말씀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한번 찾아뵙고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1606년 7월 (서기 1606년 8월 18일, 양력 추정)
돈녕부에 추천하는 일은 저희 형님께서 이미 승낙하셨습니다.
종이 열 첩을 책상 아래 바치니, 저를 위해 《황정경》, 임소경에게 보낸 편지, 「낙신부」, 「무조격」, 「추흥시」 여덟 수, 「양양가」, 「풍락정기」, 「전적벽부」, 「후적벽부」를 베껴 주신다면 마치 귀중한 구슬이 손안에 들어와 밤낮으로 빛나며 반짝이는 듯할 것입니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1606년 10월 (서기 1606년 11월 14일, 양력 추정)
저희 형님께서는 공을 여주 목사에 제수하는 것이 돈녕부에 제수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슨 힘을 썼겠습니까.
열 첩의 글씨는 정밀하고 단정하여 절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삼가 절하고 받았습니다. 다만 옛날 왕희지에게 글씨 값으로 바칠 흰 거위가 저에게는 없으니 몹시 한스럽습니다.
삼가 상자에 보관하여 대대로 전할 가보로 삼겠습니다.
1608년 8월 (서기 1608년 9월 15일, 양력 추정)
어르신께서 옥관자와 금띠를 두르고 높은 벼슬에 오르신 것은 모두 문필이 뛰어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조정이 인재를 아끼지 않는다고 말하겠습니까. 먼 고을에서 나랏녹이나 축내고 있는 저는 조보를 보고서, 한창 밥을 먹다가 저도 모르게 수저를 놓고 일어나 감히 이렇게 축하드립니다.
(용어) 김현성(호 남창)은 시·서·화에 두루 뛰어났고 벼슬은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왕희지(왕 우군)는 진나라의 명필로, 거위를 좋아하여 산음의 한 도사에게 《도덕경》을 써 주고 그 대가로 흰 거위를 받았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심학이 심열에게 보낸 편지
1608년 3월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황강의 꿈에서 이미 은화대를 얻는 조짐을 보았는데, 그 은화대는 어찌하여 아직 제 손에 들어오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길에서 마땅히 형수님을 만났어야 했는데, 아랫사람들이 저를 이끌어 홍경비를 피하라고 하는 바람에 결국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무척 안타깝습니다.
고을에 도착해서는 애써 일하여 겨우 열 달 치 봉급을 떼어 연나라산 소뿔을 사서 무기고를 채웠습니다. 그런 공로는 정말 형수님 덕분이지 제가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삼가 면첩을 봉하여 올립니다. 형께서 보시면 필시 "성인만이 성인을 안다"고 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우습습니다.
(용어) 심열(자 학이)은 인조 때 영의정에 이른 문신으로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연우각은 춘추시대 연나라에서 나던 소뿔로, 활을 만드는 데 가장 좋은 재료였다고 하며, 여기서는 좋은 무기를 가리키는 듯하다.
정화백 정협에게 보낸 편지
1610년 10월 (서기 1610년 12월 9일, 양력 추정)
모든 재앙은 언제나 소홀히 여기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번 일은 저 역시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바이니, 공인들 어찌 예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평생 너무 많은 비방을 받아 왔으니 한 차례 관직에서 쫓겨난 것이야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한스러운 것은 큰 고을을 잃은 일입니다.
그자가 전에 활을 당겨 자안(남이공)까지 쏘았다니, 하물며 사촌 동서 사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허물할 필요도, 탄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스스로 이해하고 넘어갈 뿐입니다.
(용어) 정협(자 화백)은 광해군 때 예조 참판을 지냈다.
이지봉 이수광에게 보낸 편지
1609년 12월 (서기 1610년 1월 9일, 양력 추정)
홍양시권은 몇 차례나 읽었는데 차마 손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소리와 운율이 잘 어울리는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책머리에 한마디 적고 싶었으나 훌륭한 책을 더럽히게 될까 염려되어 그만두었습니다. 더구나 차씨의 발문에서 이미 할 말을 다 해 놓았기에, 제가 하고 싶었던 말도 저절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삼가 원본 그대로 돌려보냅니다.
1610년 4월 (서기 1610년 6월 17일, 양력 추정)
제 병은 박지지 군이 말하기를, 몸속의 음기가 허해져 화기가 동해서 생긴 것 같다고 합니다. 몸이 있고 나서야 벼슬도 있는 법입니다. 이번에 사신 행차에 오르지 못한 벌이라야 고작 평민이 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제 다시 상소를 올렸으니 제대로 전달되도록 막지 말아 주십시오. 서강의 물을 터서 수레바퀴 자국에서 허덕이는 붕어를 살려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용어) 이수광(호 지봉)은 여러 관직을 거쳐 인조 때 이조 판서에 이른 학자다.
김여수 김상준에게 답한 편지
1610년 12월 (서기 1611년 1월 22일, 양력 추정)
제가 아주 부득이한 일이 아니고서야 어찌 부모님이 남겨 주신 이 귀중한 몸으로 모진 고문의 욕을 당하겠습니까. 이번 일은 제 스스로 결단한 것이지 남이 시켜서 한 일이 아닙니다.
형께서는 저를 자세히는 모르셨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형께서 저를 무척 아껴 주셨기에 있는 일이니, 비록 제 속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하셨더라도 저를 아껴 주신 은혜는 분명 있는 것입니다. 어찌 감히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말이 막혀 다 갖추지 못합니다.
(용어) 김상준(자 여수)은 광해군 때 형조 참판을 지냈다.
홍녹문 홍경신에게 보낸 편지
1607년 12월 (서기 1608년 1월 26일, 양력 추정)
옥과 현감의 관은 어느 날 마읍을 떠난다고 합니까? 만약 제가 임지로 내려가는 날까지 그 행렬이 이곳에 있다면 길모퉁이에서라도 제사를 올릴 수 있겠습니다. 기억하건대 예전 절에서 함께 노닐 때 그 형님이 지은 시에 "물이 어우러지니 산비가 잦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그 말이 이치에 참으로 딱 들어맞았습니다. 재주가 있으면서도 그 재주를 펼치지 못했으니 참으로 원통한 일입니다.
1608년 1월 (서기 1608년 3월 1일, 양력 추정)
그 형님의 관이 지나가던 날이 하필 제가 관아에 나가야 하는 날이라, 그저 아전 한 사람을 보내 상여꾼들을 감독하여 이 고을 경내를 지나가게 했을 뿐입니다. 살아 계실 때의 정분을 돌아가신 뒤에 저버린 것만 같아 부끄러워 눈물만 흘렸습니다. 만시에 이런 마음을 자세히 담았으니 그 형님도 응당 보실 것입니다. 이만 다 갖추지 못합니다.
(용어) 홍경신(호 녹문)은 선조 때 부제학과 병조 참의를 지냈다.
윤지중 윤의립에게 보낸 편지
1606년 8월 (서기 1606년 9월 16일, 양력 추정)
듣자니 형께서는 양유년(양 황문)을 몹시 허물하신다는데, 이는 섭씨 성을 가진 자가 명령을 거짓으로 꾸며 낸 일입니다. 주지번은 요구하는 것이 좀 있었던 듯하지만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고, 양유년 쪽은 아예 아무런 요구도 없었습니다.
그 두 분 모두 저를 잘 대우해 주셨던 분들인데, 제가 무엇 때문에 우열을 가려 양유년만 편들겠습니까. 다만 그가 억울하게 비난받는 것으로 여겨져 부득불 변명해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용어) 윤의립(자 지중)은 인조 때 예조 판서를 지냈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양유년(양 황문)은 1606년 주지번과 함께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 관리다.
남자안 남이공에게 보낸 편지
1610년 1월 (서기 1610년 2월 8일, 양력 추정)
형은 지금 어머님을 모시고 계시니 섣달에 내리는 약제도 다른 벗들보다 넉넉히 받으실 것입니다. 돌아가신 저희 어머님은 원주에 묻혀 계신데, 제사도 제가 직접 받들지 못하고 나무꾼이나 목동들이 묘소를 범하지 못하도록 막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어버이에 대한 슬픔이 늘 가슴에 맺혀 있는데, 언제쯤이나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성묘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식 된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는 대목입니다. 이만 다 갖추지 못합니다.
(용어) 남이공(자 자안)은 인조 때 공조 판서를 지냈다.
이중집에게 답한 편지
1609년 1월 (서기 1609년 2월 19일, 양력 추정)
이별한 지 십 년 만에 어제 처음으로 편지 한 장을 받으니 위로되고 다행스럽습니다. 제가 이 사신 행차에 끼인 것이 지금 벌써 세 번째인데, 형께서는 아직 한 번도 행차에 오르지 못하셨다니, 세상일이란 대체로 이런 것인가 봅니다.
용천과는 저 역시 대대로 이어 온 교분이 있으니, 어찌 감히 특별히 대우하지 않겠습니까.
한번 문하를 찾아뵙고 옛정과 이별의 회포를 풀고자 하니, 문지기가 저를 막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윤차야 윤훤에게 보낸 편지
1609년 10월 (서기 1609년 11월 11일, 양력 추정)
『시산』은 이미 익히 읽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권생 편에 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옥잠이 자주 꿈에 보이니 이상한 일입니다. 두 가지 모두 온전히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1610년 1월 (서기 1610년 2월 8일, 양력 추정)
《두시》는 기대했으나 손에 들어오지 않고 《초사》만 뜻밖에 도착했습니다. 하늘이 참으로 뜻있는 일을 방해하는군요. 이제부터는 감히 함부로 요행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용어) 윤훤(자 차야)은 인조 때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홍휘세 홍서봉에게 보낸 편지
1610년 4월 (서기 1610년 6월 6일, 양력 추정)
동쪽 교외에서 손을 맞잡고 이별할 때 저에게 노자를 아주 넉넉히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아 이상히 여기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금강산 만 이천 봉이 형을 만나 한층 빛을 발했을 것입니다. 비단 주머니에 담아 오신 시들을 아픈 눈을 씻고서라도 보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610년 7월 (서기 1610년 9월 2일, 양력 추정)
저는 병으로 북경 가는 길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파직되었다가 금세 다시 살길이 열렸으니 이 모두가 임금의 은혜라 그저 감격할 따름입니다.
듣자니 형께서는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가려 하시어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라 하는데, 제가 다시 등용되기를 기다렸다가 그 인끈을 저에게 대신 차게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우습습니다.
(용어) 홍서봉(자 휘세)은 인조 때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제강공자에게 보낸 편지
1601년 3월 (서기 1601년 4월 17일, 양력 추정)
몇 달을 이웃하여 지내다가 갑자기 이별하게 되니 섭섭한 마음을 스스로 가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소랑을 마주하고서는 늘 장흥동에서의 옛일을 이야기하며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팥 섞은 밥에 배추김치를 먹으면 그 맛이 엿처럼 달았는데, 지금 다시 그런 맛을 볼 수 있을까요. 비록 그 맛을 다시 보고 싶어도 저 같은 늙은이가 어찌하겠습니까. 이 처절한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1602년 2월 (서기 1602년 3월 8일, 양력 추정)
족하는 재주가 높은 사람인데도 나라의 법률에 얽매여 포부를 펴지 못하고 그저 하찮은 봉급이나 받는 자리를 맴돌고 계셨습니다. 만약 옛날 유향 같은 사람이 오늘날에 태어났다면, 천록각에서 신령스러운 지팡이 불빛을 마땅히 누구에게 비춰 주었겠습니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슬픕니다.
1609년 8월 (서기 1609년 9월 12일, 양력 추정)
공의 병환이 더욱 위중해지셨다고 들었습니다. 화평한 군자는 신령이 돕는 법이니 마땅히 약을 쓰지 않아도 나아지실 것입니다. 혼자서 애태우고 노심초사하여 정신을 상하게 하지 마십시오.
당류 약제 두 가지를 아드님 편에 보냅니다. 이것을 드시면 곧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장강이라는 자는 사리를 모르고 그저 쓴 약만 먹게 하니 우습습니다.
이관송 이이첨에게 보낸 편지
1608년 8월 (서기 1608년 9월 23일, 양력 추정)
형께서 예전에 가깝게 지내던 정을 생각하시어 온갖 비방 속에서 저를 구해 주셨으니, 재주를 아끼시는 마음이 지극하십니다. 이는 옛사람도 어렵게 여기던 일인데 그것을 실천하셨으니, 이제부터 온 세상의 어진 선비들이 모두 공의 문하로 모여들 것입니다.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4일, 양력 추정)
도성 문을 나가 배웅하며 작별하려 했는데, 어제저녁 갑자기 형조에 제수되었습니다. 여론을 기다리느라 오늘 은혜에 감사드리지 못하여 두터운 정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서쪽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할 뿐입니다. 서른 편의 율시는 석주 권필이 보고서 타당치 못하다고 하기에 다시 고쳐 뒤따라 보내 드리려 합니다. 늦어진다고 허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19일, 양력 추정)
편지가 도착하여 매우 기뻤으나 병 때문에 다시 나가 뵙지 못했습니다. 병이 아니었다 해도 어떻게 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이 마음만 지닌 채 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겠습니다. 남들은 제가 형과 비방을 나누어 지려고 형의 사위를 맞아들였다고 하는데, 형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시면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런 일이야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풀릴 것인데, 온 세상이 의혹스럽게 여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요.
한스러운 것은 저를 배신한 자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 가운데서 나왔다는 것인데, 이 역시 하늘이 시킨 일이겠지요. 제가 어찌 감히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겠습니까. 식사 잘 하시고 몸을 보중하소서.
(용어) 이이첨(호 관송)은 광해군 때의 권신이다.
이자민 이안눌에게 보낸 편지
1610년 3월 (서기 1610년 4월 8일, 양력 추정)
떠나는 일이 하도 급히 재촉당해 강가에서 손을 맞잡고 작별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삼 년을 떨어져 지내는 것도 짧은 기간이 아닌데, 더구나 저는 만 리 먼 길을 떠나야 하지 않습니까.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슬픔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오봉 이호민의 시는 저도 흉내 내 보려 애썼으니, 형도 이 운을 따라 시를 지어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형은 전에 제 시를 다소 약하다고 여기셨으니, 시험 삼아 무거운 가마솥도 들 수 있는 그 힘을 가벼운 손대야 하나 받쳐 드는 일에도 써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10년 3월 (다른 편지) (서기 1610년 4월 8일, 양력 추정)
요동 지방 관리의 요구는 부채 삼백 개면 해결될 수 있다는데, 저는 요직이나 관찰사도 아니니 누가 제 말을 들어 주겠습니까. 형의 고을에는 대나무가 많고 또 죽세공 장인이 있으니, 설령 삼백 개를 다 채우지 못하더라도 그 절반이면 좋겠습니다.
저는 마땅히 공의 어진 덕을 널리 칭송하여 요동 땅까지 빛나게 하겠습니다. 어찌 상자 속에 그대로 묵혀 두겠습니까.
1610년 4월 (서기 1610년 6월 6일, 양력 추정)
이 고을 기생 진랑은 제가 조운을 감독하던 시절에 가깝게 지냈던 여인인데, 지금은 혜민국에서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서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이를테면 저의 사람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그리도 심하게 다그치십니까? 꽃다운 나이도 지나고 자식까지 있어 굳이 찾아갈 흥은 나지 않지만, 그가 힘들어하는 말을 들으면 역시 동정심이 생깁니다. 바라건대 저를 봐서라도 그를 관대히 대해 주십시오. 하찮은 물오리를 잡으려다가 귀한 원앙새를 놀라게 하는 격입니다.
(같은 무렵) (서기 1610년 6월 19일, 양력 추정)
제 병은 참으로 깊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헤아리지 않고 겨우 감옥살이만 면해 주고 오히려 관직은 해면했습니다. 집 안에서 몸을 조섭하며 살아갈 길을 찾으니, 썩은 냄새 나는 세상일 따위야 어찌 마음에 두겠습니까.
부채 백 개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이 떠난 뒤에 도착하여 어쩔 수 없이 그냥 두었습니다. 더구나 부채 윗부분에 형의 시가 적혀 있어 읽어 보니, 맑은 바람이 상쾌하게 일어나 마치 갈증이 풀리는 듯했습니다.
종이는 진랑에게 돌려주었으니 우습습니다. 형은 과연 송광평 같은 철석간장을 지니셨나 봅니다.
(용어) 이안눌(자 자민)은 인조 때 예조 판서에 이른 시인으로, 시와 글씨에 모두 뛰어났다.
한석봉 한호에게 보낸 편지
1604년 10월 (서기 1604년 12월 5일, 양력 추정)
서울 집에서 만났을 때는 아이들 때문에 흥겨운 정취를 마음껏 누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요산(수안)의 수령으로 나가는데, 공께서도 마침 수령 자리를 그만두셨다고 들었습니다. 옛 도읍과 그리 멀지 않으니, 혹 공께서 이 고을 관아에 오신다면 연못가 누각에서 노닐며 인간 세상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명주 비단을 펼쳐 놓고 먹을 두어 말쯤 갈아 두어, 흥이 나는 대로 붓을 휘두르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노닌다면 어찌 왕희지만이 천고에 그 영예를 독차지하겠습니까. 애타게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1604년 3월 (서기 1604년 4월 13일, 양력 추정)
"하늘 바람과 바다 물결"이라는 네 글자 큰 글씨를 잘 받았습니다. 필세가 용이 뛰어오르고 호랑이가 덮치는 듯하여, 마치 동명산과 오대산이 웅장함을 겨루는 것 같았습니다. 옛 소실산의 은자가 이것을 본다면 틀림없이 집 네 채를 팔아서라도 사려 할 것입니다.
저는 그 글씨를 벽에 걸어 두고 사흘 동안이나 그 아래에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도 싫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화씨벽 같은 보배를 주셨으니 어찌 감히 고개 숙여 감사드리지 않겠습니까.
(용어) 한호(호 석봉)는 선조 때의 명필로 가평 군수 등을 지냈다.
송천옹에게 보낸 편지
1611년 2월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젊은 시절 《포박자》를 잘못 읽고서 금석으로 만든 약을 먹으면 신선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훗날 자양·해경·치허 같은 여러 진인들의 글을 읽고 나서는 스스로 실망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무릇 단약이란 서로 같은 성질끼리 합쳐져야 참된 경지에 들 수 있는 것이니, 정·기·신 이 세 가지 보배를 어찌 몸 밖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반드시 밝은 스승과 착한 벗을 만나 서로 경계하고 갈고닦아야만 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저의 스승이자 벗이 되어 줄 사람은 그대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다만 저는 죄를 지은 신하라 그대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바라건대 전해 오는 비결을 편지에 적어 보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11년 2월 (다른 편지)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옥청금사보록》과 《규중지남》, 《중화집》에는 모두 전해 오는 비결이 담겨 있는데, 이 세 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까? 숨기지 마시고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자격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전하는 것도 죄가 된다지만 그 죄는 가벼운 편이고, 아끼기만 하고 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무거운 죄입니다.
옛날 장평숙이 촉 땅으로 귀양 갔던 일은 경계로 삼을 만합니다. 공께서는 입을 다물고 침묵만 지키지 말아 주십시오.
(용어) 《포박자》는 중국 진나라 갈홍이 지은 도교 서적이다.
경홍(한호)을 초대한 편지
1605년 4월 (서기 1605년 6월 1일, 양력 추정)
봄은 이미 지나가, 그윽한 꽃들이 그대를 기다리다가 다 이울고 말았습니다.
녹음이 저리 무성하고 꾀꼬리 소리도 참으로 고우니, 봄빛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어찌 시냇가에 가득 핀 복숭아꽃뿐이겠습니까. 섬돌 곁에서 하늘거리는 붉은 작약도 볼만하니, 보내는 수레를 얼른 타고 와 주시기 바랍니다.
수수로 빚은 술이 한창 익었으니, 그물을 들고 냇가로 나가 그대와 함께 잉어를 잡아 회를 치려 합니다. 죽순 나물과 자라탕도 안주로 마련해 두겠습니다. 저는 평생 먹고 마시는 일만 밝혀 온 사람이라 이렇게 맛난 술과 음식으로 청하니, 먹는 것만 탐한다고 비웃지 마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용어) 경홍은 한호(한석봉)의 자다.
이실지 이춘영에게 보낸 편지
1607년 6월 (서기 1607년 7월 8일, 양력 추정)
족하께서는 온 세상을 만만하게 보시어 족하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저희 세 사람을 칭찬하시니, 부디 저희를 낮추어 보시고 너무 높이 평가하지는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나치게 넘치고, 석주 권필은 힘이 시들었고, 자민 이안눌은 막혀 있다고 하셨는데, 이 세 사람의 흠을 어떻게 해야 고칠 수 있겠습니까? 족하께서는 오늘날 문단의 대가이시니, 반드시 좋은 방법으로 다스려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05년 7월 (서기 1605년 8월 28일, 양력 추정)
이 통제사(이순신)의 공신록권은 족하께서 지으신 것이 참으로 뛰어난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물리쳐 두고 저 같은 사람에게 대신 지으라 하시니, 온종일 손만 아프도록 붓을 놀리면서도 한마디 말도 이루지 못하여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본래 변려문을 잘 짓지 못하는데, 사람들은 도리어 저를 변려문에 능하다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세상일이란 이런 것이니 우스운 노릇입니다. 부디 가르쳐 주시어 크게 나아지도록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607년 7월 (서기 1607년 9월 5일, 양력 추정)
족하께서 이미 저의 병을 고쳐 주셨는데 참으로 증세에 딱 맞는 좋은 약이었습니다. 즐겁고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족하께도 병이 있는지라 제가 침을 놓아 드리고자 하는데, 혹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남들은 재주가 적어서 걱정인데 족하는 오히려 재주가 너무 많은 것이 걱정입니다. 아무리 아깝더라도 조금 덜어 내어 거칠고 불필요한 것을 제거한다면 순수한 대가가 되실 것입니다. 이 말은 형을 몹시 아끼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이니, 자신의 병을 감추고 의원을 꺼려하다가 고질이 되도록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용어) 이춘영(자 실지)은 선조 때 문장가로 봉상시 첨정을 지냈다.
성소부부고 제21권
10. 14:39
성소부부고 제21권 · 문부 18 · 척독 하
출처: 성소부부고 제21권, 문부 18, 척독 하(짧은 개인 편지 모음, 둘째 권)
배경: 척독은 격식을 갖춘 정식 편지가 아니라, 벗이나 친척에게 안부를 전하거나 짧은 용건을 담아 보내는 사사로운 편지를 말한다. 이 권에는 허균이 여러 사람에게 보낸 짧은 편지 아흔네 통이 실려 있다. 사촌 형 허자하, 죽마고우 임자정과 임약초, 벗 조지세·권여장·임자승·이손곡(이달)·이여인(이재영)·양자점 등에게 보낸 편지가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그 밖에 조카들, 고을 원님들, 화가 이정(나옹), 승려 휴정대사(서산노사)와 유정대사(송운대사), 그리고 부안의 기생 계랑에게 보낸 편지도 실려 있다. 시를 논하고 벗의 죽음을 슬퍼하며, 벼슬살이의 답답함을 토로하고 그림을 주문하며, 참선을 이야기하고 정을 나누는 등 편지의 내용은 짧지만 허균의 다채로운 인간관계와 거침없는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계묘년, 1603년) (서기 1603년 9월 19일, 양력 추정)
허자하는 허균의 재종형인 허적의 자이며, 호는 상고재이다. 1597년 유효립 등이 인성군(선조의 일곱째 아들)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던 역모를 고발한 공으로 영사공신 1등에 책록되고 양릉군에 봉해졌다.
권세를 쥔 자들이 저를 궁지로 몰아넣어 결국 쫓아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관동 땅으로 가서 감호대에 올라 바라보니, 아득히 펼쳐진 푸른 물결이 삼신산에 닿아 있어 문득 옷자락을 걷고 발을 담그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이 말은 형만 알고 계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갑진년, 1604년 10월) (서기 1604년 12월 5일, 양력 추정)
고을 하나를 맡아 다스리면서도 이렇다 할 성과 하나 없이 그저 날짜만 보내며 관청의 곡식만 축내고 있습니다.
그나마 밀린 업무가 없어 좌수가 찾아와 재촉하는 일만은 겨우 면했습니다만, 형께서는 틀림없이 저를 몹시 꾸짖으실 것입니다.
(용어) 좌수는 조선 시대 각 고을의 향청(지방 자치를 맡아보던 기구)을 이끌던 우두머리를 말한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노형의 시는 성당 시절의 시풍에 매우 가깝습니다. 다만 기세가 지나치게 거세니, 조금만 평탄한 길로 들어선다면 심전기나 송지문 같은 시인이 되기가 뭐가 어렵겠습니까.
칠언고시는 도가의 경전인 황정경과 흡사한데,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노조린과 낙빈왕쯤은 응당 내려다보게 될 것입니다. 제 말이 지나치다고 의아해하지는 마십시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보내주신 부 두 편을 읽어보니 그 빼어남이 진나라의 손작(자는 흥공)과 좌사(자는 태충)에 견주어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요즘 세상에 정시 시대와 같은 시풍이 다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요즘 옛 문체로 글을 짓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인데, 뜻밖에도 우리 집안에 이런 대단한 보물이 있었으니, 하곡께서 살아 계셨다면 응당 깜짝 놀라며 이를 으뜸가는 작품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용어) 정시는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연호이다. 이 무렵 혜강, 완적을 비롯한 이른바 죽림칠현이 노장사상에 심취하여 자유분방하고 맑고 그윽한 시풍을 이루었는데, 이를 정시체라 한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율시 네 수가 매우 맑고 굳세어 우리 집안을 빛냈습니다.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고 싶었으나 공무에 매여 붓을 잡고도 도무지 생각을 짜낼 겨를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못생긴 모모가 서시의 찡그린 얼굴을 흉내 내다가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달아날까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3월) (서기 1610년 4월 8일, 양력 추정)
권필(자는 여장)의 말로는 이안눌(자는 자민)의 시가 점점 못해지고 있다는데,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무릇 시란 공력을 오래 기울이면 붓을 대는 대로 저절로 정신이 깃드는 법입니다. 비유하자면 열 편을 지으면 그중 몇 편은 볼 만하고, 나머지는 더러 평범하고 더러 졸렬하고 더러 비루하기도 합니다.
볼 만한 것은 남겨두고 평범한 것은 더 다듬고 비루하거나 졸렬한 것은 아예 버린다면 저절로 높고 오묘한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편마다 애써 교묘하게 지으려고만 하면 힘만 허비하고 말이 어긋나서 도리어 난삽하고 옹색한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이는 큰 시인들이 가장 꺼리는 일입니다.
자민은 너무 기교만 부리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힘을 허비하며 억지로 시상을 짜내는 데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품격은 모자라고 재능은 줄어들어 갈수록 무디어지고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노형께서도 부디 그 점을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6월) (서기 1610년 8월 3일, 양력 추정)
선녀 쌍성이 제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조강지처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형께서 멀리 떠난 채 돌아오지 않으신다면 형수께서 아이를 안고 우실 터이니, 너무 매정한 처사인 듯합니다. 기생들에 둘러싸여 비단에다 글을 쓰는 짓은 그야말로 중국의 철없는 젊은이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형은 나이 쉰이 가까우니 흰머리가 날 만도 합니다. 부디 조금씩이라도 몸가짐을 단속하시어 교송의 장수를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용어) 교송은 옛이야기 속 신선인 왕자교와 적송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둘 다 오래도록 살았다고 전해진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11년 1월 22일, 양력 추정)
문한을 담당하는 신하가 과거 시험관으로 참여했다가 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는 일은, 수나라가 과거 제도를 시작한 이래 없었던 일인데 아우가 몸소 그 일을 당했습니다. 게다가 하필이면 우리 집안에서 이런 일이 나왔으니 선대의 가르침을 욕되게 함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저 죽고 싶은 심정뿐입니다. 명나라의 정민정(호는 황돈)도 고문까지 당하지는 않았고, 당인(자는 백호)도 벼슬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일까지는 당하지 않았습니다.
법을 엄하게 적용하는 것이 요즘은 어찌하여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 또한 운명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임자정에게 답한 편지 (정미년, 1607년 8월) (서기 1607년 10월 5일, 양력 추정)
임자정은 허균과 어려서부터 함께 글을 배운 벗 임곤의 자이며, 훗날 풍안군에 봉해졌다.
자네는 내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말을 조심하여 요즘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의 태도를 본받게 하려는 모양인데, 세상에 일부러 이런 옹색한 처신을 하면서 그것으로 만족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총채를 손에 들고 고상한 이야기를 나누며, 거친 베옷을 입고 지팡이를 끌며 다니는 것이야말로 고상한 뜻대로 사는 삶이라네. 큰길가의 누각에 올라 주렴을 걷어 올린 채 앉아서, 쌍갈래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누런 적삼 소매를 걷어붙인 채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신유안이 지은 '천고강상' 한 편을 읊는다면, 그 순간만큼은 온 세상에 안하무인이 됨을 절로 깨닫게 될 것이니, 붉은 관복을 입고 요란하게 길을 트며 지나가는 고관 따위를 마음에나 두겠는가. 왕평지가 이 말을 듣는다면 응당 배를 잡고 웃을 것이네.
임자정에게 답한 편지 (정미년,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임수정(자는 약초)이 세상을 떠났으니, 후배들이 다시는 그의 풍류를 볼 수 없게 되었네. 주옥 같은 사람을 땅에 묻었으니 사무치는 정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구려.
세상일은 갈수록 변하고 세태는 나날이 야박해지기만 하는데, 그대 같은 부류는 멀쩡히 살아남고 이 사람은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대는 내 말을 탓하지 말게. 약초마저 죽었으니 이제 누가 다시 나를 받아주겠는가. 그 사람을 떠올려 보니 마치 방금 세상을 떠난 듯하네.
임자정에게 답한 편지 (무신년, 1608년 11월) (서기 1608년 12월 21일, 양력 추정)
병을 얻어 여관에 머물고 있는데, 닷새가 지나도록 땀 한 방울 나지 않아 이대로 죽는가 싶었네. 형께서 자주 안부를 물어주셨으니 그 두터운 정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구려. 내 병이야 곧 나아지겠지만, 정말로 걱정되는 것은 자네의 병일세. 마음만 편히 풀리면 저절로 나아질 터이니, 부디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시게.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조지세는 호가 현곡, 소옹이며, 벼슬이 공조 참판에 이르렀던 조위한의 자이다.
공의 할아버지뻘 되는 어른의 시는 호탕하여 시선집에 오를 만했으나, 애석하게도 옥에 티와 같은 흠이 있었습니다. 이반룡(자는 우린)이 남의 시를 깎아 다듬어 간행했던 일을 본받고 싶으나 감히 손대지 못하여 이렇게 감히 여쭙습니다.
(용어) 본문에서 "할아버지뻘 되는 어른"이라 옮긴 표현은 할아버지와 같은 항렬이면서도 가까운 친족은 아닌 남자 어른을 가리키는 옛말인데, 여기서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2월) (서기 1608년 1월 31일, 양력 추정)
제가 워낙 일 벌이기를 좋아하고 줏대도 없어서, 제 시를 평한 글을 형님께 보여드리고 말았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형님은 부디 입을 다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비방이 더 늘어날까 두렵습니다.
그동안 두세 형제들에게 이야기했던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결과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3월)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큰 고을을 맡아 이런 복을 누리면서도, 가난한 벗을 구제하지 못했던 원헌(공자의 제자)처럼 저 역시 가난한 친구를 돕지 못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고을 창고는 봄을 맞아 곡식 한 알이 구슬처럼 귀합니다.
보내드리는 것은 겨우 말 한 필에 실을 정도이지만, 제 월급의 절반입니다. 범순인이 친구 석만경에게 배 한 척 가득 보리를 실어 보냈다던 일에 비하면 부끄러워 땀이 날 지경입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9월) (서기 1608년 10월 9일, 양력 추정)
저는 세상의 입방아에 시달려 액운을 당했으니, 이참에 쉬고 싶은 것이 본디 제 뜻이었습니다. 다행히 이제 파직되어 곧장 부령(전라북도 부안의 옛 이름)으로 향합니다. 이제부터 저는 권세가의 문턱을 넘지 않으렵니다. 어떻게 해야 형과 은거지를 절반씩 나누어 살 수 있을까요? 종이를 마주하니 그저 서글플 뿐입니다.
(용어) 여기서 "권세가의 문"이란 지위 높은 벼슬아치들의 집 문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은거지를 나누어 산다"는 말은, 옛날 중국 화산에 숨어 살던 은사 진단을 많은 이들이 찾아와 함께 노닐었다는 데서 나온 표현으로, 존경하는 은사를 찾아가 함께 지내고 싶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2월) (서기 1609년 1월 20일, 양력 추정)
세상 사람들은 제가 산에서 사는 것을 그냥 두지 않고, 자꾸 북쪽으로 올라오라 재촉합니다. 어제 형이 계신 곳까지 갔었지만 날이 추워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궁궐 일이 아무리 바쁘다 한들 어찌 한가한 틈이 전혀 없겠습니까. 저를 찾아와 주실 수만 있다면, 마땅히 시 한 묶음을 드려 형의 평을 받고 싶습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2월) (서기 1609년 1월 20일, 양력 추정)
형이 겨우 문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저는 형이 맨 앞자리를 차지하기를,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간절히 바랐는데, 이번에도 결국 높은 자리에는 오르지 못하셨군요. 제가 낙방한 것과 다름없으니 그 한스러움을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그러나 한 번 넘어졌다고 마음 아파하지 마시고, 다시 천 리 먼 길을 나아갈 뜻을 세우셔야 합니다. 도성을 넘어서는 일쯤은 작은 흙덩이 하나 지나치듯 해내는 날랜 재주를 공은 본디 지니고 계십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군옥은 저와 가까이 지내는 사이인데, 어찌 형의 말씀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카가 아무리 고집이 세다 해도, 어찌 폐인들이 걸었던 전철을 밟아 부모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손가락질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겠습니까. 저더러 잘 타일러 달라 하신 말씀은 감히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화백(정협의 자)과 의논해 보십시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0월) (서기 1609년 11월 11일, 양력 추정)
제가 시험관이 되어 형의 책문을 2등으로 뽑았으니, 이른바 눈이 흐려 다섯 빛깔 햇살도 가려내지 못한 셈입니다. 그러나 형의 업적이 한기(송나라 재상, 자는 치규)와 같고 문장이 소식(자는 자첨)과 같기를 바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왕요신(송나라 사람, 시호는 문안)과 장형(송나라 사람, 관직명은 대제)은 그저 장원 급제를 했을 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시험 삼아 물어보십시오. 왕요신과 장형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있던가요. 세월이 흘러도 썩지 않는 큰 업적은 장원 급제 여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2월) (서기 1610년 3월 9일, 양력 추정)
이조 판서를 만났더니 여장을 동몽교관(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벼슬)으로 임용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가 응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형께서 한번 그에게 물어봐 주십시오. 벼슬이란 때로 가난 때문에 하기도 하는 법이니까요.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2월) (서기 1610년 3월 9일, 양력 추정)
사신으로 추천한 것은 남이공(자는 자안)에게서 나온 일이라고 합니다. 하늘이 사람의 욕심을 다 들어주지는 않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병마에 시달리기만 하니 그저 크게 탄식할 따름입니다.
권여장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5월) (서기 1610년 7월 5일, 양력 추정)
형이 강도(강화도의 옛 이름)에 계실 때는 한 해에 두어 번 서울에 오시면 언제나 우리 집에 눌러앉아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으니, 세상에 그보다 즐거운 일이 없었네. 그런데 온 가족을 이끌고 아예 서울로 올라오신 뒤로는 열흘이 넘도록 한가로이 어울린 적이 없으니, 강도에 계실 때보다 오히려 못하니 대체 무슨 까닭인가?
연못에는 물결이 출렁이고 버들빛은 한창 푸르며, 연꽃은 붉은 꽃잎을 반쯤 열었고 짙은 녹음은 푸른 일산처럼 은은히 비치는데, 마침 이럴 때 동동주를 빚어 두어 젖빛처럼 뽀얀 술이 동이에 넘실거리니 어서 오셔서 맛보시게. 바람 잘 드는 마루는 벌써 깨끗이 쓸어놓고 기다리고 있네.
권여장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5월) (서기 1610년 7월 5일, 양력 추정)
그대 어머님의 병환이 너무 오래 끄니 걱정스러운 마음이 마치 내가 우리 어머니 병환을 곁에서 돌보던 때와 같네. 마침 엿 한 덩이를 구했기에 이생 편에 부쳐 보내니 식사 후에 드시게 하게. 나는 이것을 우리 부모님께 드리고 싶어도 이제는 그럴 수가 없으니,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겠네.
권여장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3월) (서기 1610년 4월 8일, 양력 추정)
내가 떠날 날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네. 만 리 길 여행 봇짐에 자네의 글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오언율시(다섯 자씩 여덟 구로 짓는 한시 형식) 여덟 수를 노잣돈 삼아 반드시 지어 주게. 한 수라도 줄인다면 무정하다 할 것이네.
형의 오언율시는 잘 지은 것은 맹호연(중국 양양 출신의 시인)의 작품에 견줄 만하고, 못한 것이라 해도 진거비의 고상한 운율에 못지않으니, 저 먼 연경의 저잣거리에 내놓고 읽더라도 연나라와 조나라 땅에서 부르던 우국지사들의 슬픈 노래에 맞설 만할 걸세. 부디 게으르다는 핑계로 짓기를 미루지 말아 주게.
(용어) "연조의 비가"는 옛날 중국 연나라와 조나라 지역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들이 시국을 근심하며 부르던 슬픈 노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권여장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2월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여행길 노자 삼아 보내 주신 율시 두 편에는, 그 무렵 병드신 형님과 이별하느라 마음이 몹시 어지러워 답을 하지 못했었네. 남궁생이 서울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자네를 만날 테니, 그때 화답하는 글을 보낼 것이니 내가 실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걸세.
초췌한 몰골로 연못가나 밭두둑에서 읊조린 시가 고운 가락에 맞을 리 없으니, 형님이 보시면 틀림없이 탄식하며 슬퍼하실 걸세.
박숙야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2월 (서기 1610년 1월 9일, 양력 추정)
형조에서 벌금을 없애지 못한 것은, 공도 태수가 문을 닫아걸고 조정의 명을 거절한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문을 닫아걸고 명을 거절해 놓고서는, 제가 벌금을 없애지 못했다고 책망하시니, 이는 법으로는 자신을 단속하면서 예로는 남을 대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벗들이 서로 권면하는 의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저 저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입니다.
(용어) 박숙야는 박엽의 자로, 호는 국창이며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이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기해년, 1599년) 5월 (서기 1599년 7월 6일, 양력 추정)
조정에서 몸가짐을 단정히 하는 일이라면 내가 자네를 따르지 못하겠지만, 경치 좋고 숨어 살기 좋은 곳을 아는 데는 내가 더 낫다고 생각했었네. 그런데 몇 년 사이 고을살이에 얽매여 떠나지 못하다가 은거하려던 뜻마저 저버렸으니, 북산이문이 곧 나에게 들이닥쳐 내 얼굴을 부끄럽게 만들 것만 같네.
사람이 요임금 시대의 신선이었다는 방회처럼 되지 못한다면 결국 남에게 부림받는 종이 될 뿐이니, 나는 자신만만하기로 이름났던 한나라의 문장가 사마상여의 기개를 배우고 싶네. 형은 나를 나무라 주게.
(용어) 임약초는 임수정의 자로, 159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와 한림을 지냈으며 허균과는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낸 벗이었다. 3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북산이문은 남조 제나라 때, 북산에 숨어 살던 주옹이 벼슬길에 나섰다가 다시 산으로 돌아오려 하자 그의 벗 공치규가 산신의 뜻을 빌려 그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나무란 글이다. 여기서는 허균이 예전에 임약초와 벼슬을 버리고 함께 강가에 숨어 살자고 약속해 놓고 지키지 못한 일을 두고 한 말이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기해년, 1599년) 5월 (서기 1599년 7월 6일, 양력 추정)
천지와 사계절도 다 변화하는 이치가 있는데, 나는 늘 움츠러들기만 하고 펴지를 못하니, 자네 같은 사람이 백 명 있다 해도 나를 어쩌지 못할 듯하네.
떠돌아다니는 벼슬살이에 먹고사는 것마저 자주 곤궁하니, 차라리 한 고을의 수령 자리 하나 내려주는 것만 못하네. 궁지에 몰린 원숭이가 숲으로 달아나면서 나무를 가려잡겠는가. 그저 벼슬하기 전 평민 시절의 정을 믿고 늘 이렇게 하소연하는 것이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기해년, 1599년) 1월 (서기 1599년 2월 10일, 양력 추정)
형의 그늘 아래 있을 때는 추위도 더위도 잊고 지냈는데, 이제 또 천 리 먼 곳으로 헤어지게 되니 남몰래 가슴이 아픕니다.
평소 그대를 만날 때면 있는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강물처럼 많은 술을 빚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었는데, 이제 멀리 떠나는 이별길에 올라서는 술 백 동이를 차려 놓아도 형이 한 잔조차 마시지 않으니, 신선과 범인의 길이 서로 막혀 버린 것인가. 고개를 들어 층성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서 그리워한다네.
(용어) 층성은 신선 서왕모가 산다는 곤륜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신선의 세계, 곧 다다를 수 없는 아득한 경지를 뜻한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2월 (서기 1600년 3월 29일, 양력 추정)
지독한 추위에 목이 다 잠겼으니, 하늘이 이런저런 대꾸를 하는 번거로움을 줄여 주려는 것이 아닌가 싶네. 그런데 혀부터 먼저 내게서 떨어져 나갔으니, 팔다리마저 저마다 떨어져 나갈 날이 그리 멀지 않은 듯하네.
어제 윤계선을 만났더니, 모든 일이 딱히 잘된 것도 잘못된 것도 없으니 함께 힘쓰면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하였지만, 내 입은 굳게 다물어져 벌어지지가 않았네.
성현도 보통 사람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법인데, 하물며 한 시대를 함께 논하는 사람들 사이야 얼마나 차이가 나겠는가. 형이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이 말을 들으셨더라면, 생각이 서로 그리 동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3월 (서기 1600년 4월 27일, 양력 추정)
나는 아직 마흔도 안 되었는데 머리가 벌써 이 모양이니, 나이가 더 들면 어떤 꼴이 될지 모르겠네. 떠도는 인생이 몇 해나 산다고 억지로 남을 따라다니며 줏대 없이 살겠는가.
옛날 이름난 선비들은 으레 술을 실컷 마시면서도 굴원의 이소쯤은 훤히 외우는 사람들이었는데, 나는 그 두 가지를 다 하지 못하니 뭇 관료들 밑자리에 있는 것을 참으로 달게 여기고 있네. 그런데 자네는 나를 천 길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려 하니, 옛날 힘장사였던 오확만 한 힘이라도 있는 겐가? 아마 애만 쓰고 소용은 없을 것이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6월 (서기 1600년 7월 24일, 양력 추정)
맑은 이슬이 새벽마다 내리는 요즘, 새로 만든 거문고를 타고 있다네. 이런 것들을 대하다 보니 그대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이 마치 봄 버들가지에 물이 오르듯 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들으니 자네가 홍문관에서 비방을 받았다고 하던데,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면 개의치 말게. 때가 지나면 저절로 잠잠해질 것이네.
암행어사로 나가는 일은 언제쯤 떠나는가? 이가 아파 문밖에 나가지 못해 이렇게 글로나마 위로를 전하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2월 (서기 1600년 3월 29일, 양력 추정)
어떤 사람에게 들으니 자네가 서애 유성룡을 헐뜯어서 설서 벼슬을 얻었다고 하기에, 나는 그 말을 듣고 몹시 화가 났었네. 서애는 어진 정승이니 헐뜯어서는 안 되네. 소인배를 헐뜯고 벼슬을 얻는다 해도 좋은 일이 아닌데, 하물며 서애 정승을 헐뜯어서야 되겠는가.
바라건대 형은 차분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조급하게 행동하지 말게. 앞길이 아무리 멀다 해도 다 타고난 운명이 있는 법이고, 공명이란 괴상한 짓을 해서 요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네. 속담에 "급히 먹으면 목이 멘다."고 했으니, 비록 속된 말이지만 큰 깨우침을 주는 말일세.
(용어) 임자승은 임현의 자로, 허균과 같은 해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가까이 지낸 벗이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3월 (서기 1600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옛 책 만 권을 쌓아 놓고 한쪽에는 탁문군 같은 여인을 끼고서 그 속에서 거리낌 없이 지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한평생을 마치기에 충분할 것이네. 그런 풍류는 형 혼자 누리고, 나에게까지 너무 자랑하지는 말게. 나야 세상에서 버려진 몸이니 그대 일에 무슨 간섭을 하겠는가. 형은 나를 탓하지 말게.
비루하고 잡스러운 것을 가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도량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니, 비유하자면 만 리를 흐르는 긴 강이 어찌 천 리에 한 굽이도 없을 수 있겠는가. 이런 나의 미친 짓을 형이 용서해 주신다면 참으로 고맙겠네.
(용어) 탁문군은 한나라 때 큰 부자였던 탁왕손의 딸로, 사마상여가 타는 거문고 소리에 반해 한밤중에 몰래 집을 뛰쳐나가 그의 아내가 된 여인이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3월 (서기 1600년 4월 27일, 양력 추정)
형이 내가 잡스러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경계하여 편지를 두 번이나 보내 주시니 참으로 고마운 마음이네. 그러나 이것은 내 참마음을 해치는 일이 아니라네.
옛날 송나라의 곽충서는 시장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술을 마시며 "나와 어울리는 사람은 모두 이런 부류들이다."라고 말했다는데, 모르긴 해도 형이 사귀는 사람들이 시장 사람들보다 나은가?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3월 (서기 1600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어젯밤에는 자네가 아끼는 여인이 찾아와 강남곡을 부르는데, 가락마다 마치 구슬을 꿰어 놓은 듯하였네. 그 노래를 듣느라 지루한 줄도 모르고 무릎을 치며 화답하다가 나중엔 발까지 구르며 춤을 추었으니, 천지가 넓은 줄도 전혀 몰랐다네. 이때는 내가 옛사람을 만나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지 않고, 오히려 옛사람이 나를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형이 함께 있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는데, 신선이 산다는 금화궁의 하늘 위에서도 이백이 술 마시던 누각을 그리워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5월 (서기 1600년 6월 25일, 양력 추정)
자네는 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손님을 물리쳐서, 요직에 있는 사람이 만나지도 못한 채 돌아가 화를 내게 만들었다고 나를 나무라는데, 이건 나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네. 불행히도 내가 사는 곳이 임약초라는 사람과 대문을 마주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높은 벼슬아치들이 예전에 도사 벼슬이나 지낸 사람의 집을 뭐 하러 찾아오겠나. 옛날 장찬이라는 사람은 "나는 하경용을 찾아온 손님은 만나줄 수 없다"고 말했다는데,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이네.
(용어) 장찬은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 사람으로, 하경용을 찾아온 손님이 오는 길에 자신에게도 들르면 "나는 하경용의 손님은 만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허균은 이 이야기를 빌려, 자기 집이 우연히 높은 벼슬아치 임약초의 집과 마주해 있어 그를 찾아온 손님들이 착각하고 몰려드는 것을 이렇게 에둘러 말한 것이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5월 (서기 1600년 6월 25일, 양력 추정)
나는 불교를 믿는 게 아니네. 다만 그 글이 좋아서 읽으며 한가한 시간을 메울 뿐이지. 몇 천 호쯤 되는 고을 하나 얻으려 해도 못 얻는 처지에, 부처가 되겠다고 도모한다는 말인가. 그런 건 전혀 아니네. 다만 권력에 아부하며 떠들어대기만 하는 무식한 자들에 비한다면,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걸세.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7월 (서기 1600년 8월 23일, 양력 추정)
내가 남궁 — 예조의 별칭 — 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을 때 형이 뒤이어 들어왔으니, 한비자가 노자와 나란히 한 열전에 실리게 될 줄은 미처 몰랐네. 나는 우연히 비국랑(비변사의 낭청 벼슬)에 올라, 하루 종일 정승 앞에 엎드려 붓을 잡고 글씨를 쓰다 보니 흐르는 땀이 비 오듯 하여 거의 미칠 지경이었네. 그래서 왜 손작이 수초부에서 말한 것처럼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찾지 않고, 억지로 나랏일에나 참견하려 드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네. 벼슬을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가난 때문에 몇 말 안 되는 녹봉에 매달려 실행에 옮기지 못할 뿐이네.
(용어) 남궁은 예조의 별칭이다. 1597년 허균이 예조 좌랑으로 있을 때 임현도 뒤이어 예조 좌랑으로 들어왔는데, 허균은 이를 사상이 상반된 한비자와 노자가 사기의 같은 열전에 함께 실린 일에 빗대었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신축년, 1601년) 2월 (서기 1601년 3월 19일, 양력 추정)
남쪽으로 내려온 것은 원래 자네가 보고 싶어서였는데, 관찰사가 옛 규칙을 없애지 못하는 바람에 능양까지 함께 가지는 못했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수행하게 되었으니 서로 만날 날이 있을 걸세.
듣자니 형은 요즘 아내를 잃고 지나치게 상심한다는데, 대장부란 마땅히 이치를 따라야 하는 법이네. 세상에 예쁜 여인이 얼마나 많은가, 하필 그 사람 하나뿐이겠는가. 인생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네. 형은 예전에 순봉천이 아내를 잃고 슬퍼하다 따라 죽은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더니, 이제 와서는 그 전철을 밟으려는가. 자네 어머니가 살아 계시고 자네는 외아들로 아들마저 없는 처지이니, 부질없이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게.
자세한 이야기는 창평의 과거 시험장에서 하세. 말 위에서 대충 몇 자 적고 이만 줄이네.
(용어) 순봉천은 삼국시대 위나라 사람 순찬의 자이다. 아내를 몹시 사랑했는데 아내가 일찍 병들어 죽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심중경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9월 (서기 1610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어제 처음으로 자네의 애첩이 '여인행'을 읊는 것을 들었는데,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정확하고 곡조를 붙이는 솜씨도 제격에 딱 들어맞아 마치 전문 소리꾼 같았네. 그 소리가 쇠나 옥이 부딪는 소리처럼 쟁쟁하면서도 간드러졌네. 영이니 석이니 하는 두 기생에게도 이런 재주가 있었는지 모르겠군.
그 옛날 도엽이라는 기생도 이 앞에서는 아름다움을 뽐내지 못하게 되었으니, 형은 왕자경이 되기에 충분하네. 그러니 굳이 만 호를 다스리는 제후에 봉해지기를 바랄 게 무엇 있겠나.
(용어) 심중경은 훗날 인조 때 문신을 지낸 심액이며, 중경은 그의 자이다. 도엽은 진나라 왕헌지의 애첩 이름이고 자경은 왕헌지의 자로, 왕헌지가 애첩을 그리워하며 지은 '도엽가'가 유명하다. 허균은 이를 빌려 심중경을 왕헌지에 비유한 것이다.
윤명익에게 답한 편지 (경술년, 1610년) 12월 (서기 1611년 1월 22일, 양력 추정)
제가 당한 불행은 사대부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무신년(1608년) 사월에 형께서 당하신 액운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지옥에 견주어 이 세상이 평온하게 느껴지는 것과 같습니다. 둘 사이의 차이가 어찌 천 유순 정도밖에 안 되겠습니까. 그런데 고맙게도 무명 세 필을 재빨리 곤장 치는 사람에게 쥐여 주셨다니, 이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다만 옥리들이 함부로 침범해 오니 임금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남은 인생은 그저 고향에 돌아가 살 수만 있어도 다행이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남해 바닷가 어딘가 신선이 산다는 곳으로라도 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긴 말은 줄이고 이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용어) 유순은 옛 인도에서 쓰던 거리 단위로, 1유순을 대략 40리로 보는 설이 있다. 여기서는 아득히 먼 차이를 비유한 말이다.
조이숙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오랫동안 덕이 높으신 그대를 뵙지 못하니 마음속에 더러운 티끌만 쌓여갑니다.
누대에 기대어 지으신 시는 어째서 정묘교의 주인에게 보여주어, 한창 졸음에 빠져 있는 그를 깨우지 않으십니까.
《세설》은 빌려 간 지 오래되었는데 돌려주지 않으시니, 아직 다 읽지 못하신 겁니까?
저는 천 년 뒤에 태어나 진나라 사람들이 나누던 청담을 직접 들어보지 못했으니, 한 번 읽고서 그 자세한 내용을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찾아가는 종 편에 부쳐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심부안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7월 (서기 1608년 8월 24일, 양력 추정)
저는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처지가 되었으니 마땅히 스스로 탄핵하여 물러나야 할 것이나, 다시 말썽이 일어날까 두려워 지금까지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이미 어사에게 사정하여 애걸하였으니 다음 달에는 마땅히 판결이 날 것입니다.
남도에서 믿을 사람은 오직 형뿐이니, 산속으로 들어가 살 때 종 두어 명의 부역만 덜어 주신다면 저는 마땅히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가을바람이 솔솔 불고 귀뚜라미가 한창 울어댑니다. 남쪽 하늘을 바라보니 기러기와 함께 날아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조선술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9월 (서기 1610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저는 마침 남의 잔치에 다녀왔고 말은 돌아와 여물을 먹고 있던 참인데, 그대가 마침 우리 집을 찾아오셨더군요. 그래서 제가 집에 있는 줄로 오해하셨고, 게다가 취랑이라는 자가 그대의 의심을 부추겨 정시망(시망은 정응운의 자)에게까지 그 일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무슨 나랏일의 주도권이라도 쥔 사람이라고, 세상 사람이 싫어서 찾아오는 이를 거절했겠습니까.
십 년을 사귄 사이에도 이렇게 의심을 받게 되니, 남을 알기도 쉽지 않지만 남이 나를 알아주는 것도 쉽지 않다는 말이 과연 사실인가 봅니다.
어금니가 아파 만나서 말씀드리지 못하고, 우선 편지로 사정을 아룁니다. 이만 줄입니다.
(용어) 조선술은 문장이 뛰어나고 특히 시와 부에 능했던 조찬한의 자이며, 호는 현주이다.
기헌보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28일, 양력 추정)
이달 십오일에 유배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 새우는 부안의 것만 못하고, 게도 벽제의 것만 못합니다. 먹는 것만 밝히는 사람으로서는 이러다 굶어 죽겠습니다.
(용어) 기헌보는 기자헌의 동생인 기윤헌의 자이다.
정시망에게 답한 편지 (경술년, 1610년) 12월 (서기 1611년 2월 11일, 양력 추정)
저의 옥사는 거의 끝나 갑니다. 억울함을 품은 채 심문을 받으니 하늘이 어두컴컴해지고 해마저 캄캄해지는 듯했습니다. 그 때문에 울다가 지쳐서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이태백도 야랑으로 귀양을 갔고 소동파도 해남으로 귀양을 갔듯이, 옛사람들도 피하지 못했던 일인데 제가 어찌 귀양길 한 번 가는 것으로 마음 아파하겠습니까.
남쪽으로 가는 것이 결정되었으니, 형은 술 한 말과 닭 한 마리를 들고 길가로 나와 시 한 수 읊어 주고 가지 않으시렵니까?
수많은 사연을 다 적지 못합니다.
임무숙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7월) (서기 1610년 9월 2일, 양력 추정)
제가 사람들에게 무숙의 변려문이 최치원의 글보다 낫다고 말했을 때는 다들 이상하게 여기며 못마땅해했습니다. 그런데 또 무숙의 글이 왕세정의 글과 같다고 했을 때는 사람들이 별로 의아해하지 않더군요. 이는 다름이 아니라 옛사람은 귀하게 여기고 요즘 사람은 천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왕세정의 문장은 멀리 한나라의 사마천과 사마상여의 뒤를 이었다고 할 만하니, 최치원을 내려다보는 정도가 어찌 봉황과 참새의 차이뿐이겠습니까.
그대는 스스로를 믿고 남의 말에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용어) 무숙은 임숙영의 자로, 문장이 뛰어나고 경서와 역사에 밝았던 인물이다. 변려문은 넉 자와 여섯 자를 짝지어 쓰는 화려한 한문 문체다. 왕세정은 명나라의 문장가로 호가 감주다. 최치원은 신라 말의 대문장가이며, 사마천과 사마상여는 한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다.
장지국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1월) (서기 1611년 3월 4일, 양력 추정)
죄를 짓고 귀양 가는 사람을 찾아 위로해 주는 이가 드문데, 그대는 뭇사람에게 버림받은 저에게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어 주셨으니 그 후한 뜻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는 정말 저를 나라의 인재로 대우해 주신 것이니, 어찌 감히 그 은혜에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런 태평한 시절에 죄를 지었으니 백 번 귀양을 가더라도 속죄할 길이 없습니다. 귀문관 밖으로 쫓겨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니, 감히 먼 곳으로 귀양 가는 것을 한스러워하겠습니까.
세자를 돕고 지키는 일은 오로지 강학을 맡은 신하에게 달려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대가 배운 바를 실행할 때입니다. 힘써 바르게 보필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눈을 씻고 귀를 기울여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용어) 지국은 장유의 자로, 문장이 뛰어났던 인물이다. 귀문관은 장백산맥의 한 줄기로, 아주 멀고 험한 변방을 뜻하는 말이다.
조카 실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1월) (서기 1611년 3월 4일, 양력 추정)
너는 내가 양식이 떨어질까 걱정하지만, 나도 네가 위험을 무릅쓰고 무턱대고 행동하는 것이 걱정스럽구나. 내가 너를 걱정하는 마음이 네가 나를 걱정하는 마음보다 훨씬 클 터이니, 행동을 삼가서 다시는 어버이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도록 하여라.
(용어) 실은 허균의 맏형인 허성의 맏아들로, 허균의 조카다.
조카 실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조씨 집안에서 노래하는 기녀를 데려간 일은 나에게는 딱히 아쉬울 것이 없는데, 너는 왜 그렇게까지 서운해하느냐? 얼마 전에 기를 쓰고 막으려 하던 마음과는 사뭇 다르구나. 더없이 아끼던 보물이었으니 아깝기는 하겠지만, 이제 와서 나를 탓해서야 되겠느냐.
조양오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6월) (서기 1608년 7월 26일, 양력 추정)
북관에 계시면서 학계를 만나 보셨는지요? 그의 병세는 어떠하던가요?
저는 평생 절도를 지키지 못하여 온갖 곤경을 겪었습니다. 그래도 이런 화는 면했는데 그는 단번에 걸려들었으니, 운명이란 것이 정말 있는 것일까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도 가슴이 뛰는데, 저는 변변찮은 사람이라 또 입을 잘못 놀려 걸려들었습니다. 이는 모두 평소 그렇게 처신해온 데서 비롯된 일이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그저 파면되어 돌아가기를 앉아서 기다릴 뿐입니다.
(용어) 북관은 함경남도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학계는 심액의 호다.
민숙정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2월) (서기 1609년 1월 20일, 양력 추정)
수헐원에서 신령이 이백을 찬양하는 시를 읊었다는 일을, 제 맏형님조차 믿지 않으시니 결판은 그대의 입에 달려 있습니다. 저를 위해 속히 와서 증명해 주셔서, 한편으로는 제가 허튼소리를 한다는 누명을 벗겨 주시고, 한편으로는 형제간에 서로 믿지 못하는 마음을 없애 주십시오. 이 두 가지 문제가 모두 그대의 한 번 걸음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 조카들에게 곤욕을 치르고도 빠져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종을 보내어 모십니다.
(용어) 민숙정은 민인길의 자다. 수헐원 일화는 허균이 지은 "열선찬" 가운데 이백을 기린 구절("만리에 푸른 물결, 하늘 가득 밝은 달")이 있었는데, 허균이 직산 수헐원에서 민인길, 심우영과 함께 있을 때 외딴 폐가에서 신령이 그 시구를 읊는 소리를 들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다.
용산 고을 원님 이할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아침에 일어나니 집게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더니, 문득 좋은 물고기 선물을 받았습니다. 어찌 바다의 용왕만 이런 좋은 맛을 낼 수 있다 하겠습니까. 양강의 축항이라는 물고기나 서주의 독미라는 물고기라 한들, 그 맛이 이것을 당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실처럼 가늘게 썰어 회를 쳤더니 절로 군침이 돌더군요.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으니, 그동안 국수나 먹던 창자가 깜짝 놀라 천둥소리를 낼 정도였습니다. 감사한 마음에 아홉 번이라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용어) "집게손가락이 움직인다"는 말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조짐이라는 뜻의 옛 표현이다. 옛날 중국 정나라의 공자 송이 자기 집게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조짐이다"라고 말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함산 고을 원님 한회일에게 감사드리는 편지 (신해년,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28일, 양력 추정)
연어알젓 한 그릇을 받아 먹어보니, 그 맛이 사슴 태보다도 뛰어나고 구장보다도 더 좋았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용어) 구장은 구약나물 뿌리를 가루 내어 끓여 만든 음식이다.
함산 고을 원님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사람들이 이곳에 작은 방어와 준치가 많이 난다고 하여, 저는 일부러 이곳을 유배지로 원했습니다. 그런데 올봄에는 통 나지 않으니, 이 또한 운이 없는 모양입니다. 늙은 몸이 입맛 하나 보고 왔는데, 거친 거여목으로도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하니 우스운 일입니다.
남궁생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2월)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벌통 하나를 오동나무 그늘에 두고, 벌 떼가 아침저녁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질서를 살펴보니, 저희들끼리의 법도가 무척이나 엄격하더군요. 그런데 나라의 법도가 벌만도 못하니, 사람으로서 크게 실망스러울 따름입니다.
조카 채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네가 서울로 올라간 뒤로, 서울의 여러 친지들이 모두 형보(함열 현감 한회일의 자)가 나를 잘 대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더구나. 설령 네 말대로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 말이 우리 집에서 나왔다면 매우 의롭지 못한 일인데, 더구나 그런 일도 없지 않았느냐.
이 고을은 본디 쇠잔한 곳인 데다 형보의 살림 규모도 넉넉지 않으니, 어찌 고을마다 임피 같고 사람마다 경기 감사 같을 수 있겠느냐. 너무 심하게 남을 책망하는 것은 군자가 할 일이 아니다. 부디 이런 말을 하지 말아라. 괜스레 네가 박정하다는 말만 더 듣게 될 것이다.
(용어) 채는 허균의 둘째 형 허봉의 아들로, 허균의 조카다. 임피는 전라도의 고을 이름이고, 경기 감사는 경기도를 다스리던 지방관을 이르는 말이다.
이손곡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4월) (서기 1609년 5월 18일, 양력 추정)
어르신께서는 제 근체시가 지나치게 다듬어지고 빈틈없이 짜여서 성당 시대의 시풍과는 거리가 멀다 하여 물리치고 돌아보지 않으시면서, 오직 고시만 좋다 하시며 남조의 문장가 안연지와 사영운의 풍격이 있다고 하시니, 이는 어르신께서 고집만 부리시고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고시가 비록 예스럽다고는 하나 이는 그대로 옛것을 본떠 베낀 것이어서 옛사람의 시와 비슷할 뿐이니, 그렇게 겹쳐 놓은 것을 어찌 귀하다 하겠습니까. 근체시는 비록 당나라 시와 꼭 닮지는 않았어도 나름대로 저만의 새로운 경지가 있습니다. 저는 제 시가 당시나 송시와 비슷해질까 오히려 두렵고, 사람들이 "이것은 허균의 시로구나" 하고 말해 주는 것을 듣고 싶으니, 너무 건방진 생각은 아닐는지요.
(용어) 이손곡은 선조 임금 때의 문장가 이달로, 손곡은 그의 호다.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당나라 시풍에 뛰어나 세 사람을 일러 '삼당'이라 불렀다. 허균은 그에게서 시를 배웠다. 근체시는 정해진 형식과 운율을 지켜 짓는 한시이고, 고시는 그런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짓는 한시다. 안연지와 사영운은 중국 남북조 시대 남조의 문장가다.
이손곡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4월 (서기 1609년 5월 18일, 양력 추정)
어르신께서는 제가 쓴 풍악기행시를 가장 예스럽고 격조 높다 하시며, 이 시집에서 으뜸가는 작품이 될 만하다고 말씀하셨다더군요. 하지만 제가 스스로 헤아려 보면 그 시는 그저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적어 놓은 것일 뿐입니다. 어찌 감히 천하의 문장가로 이름난 진나라의 손작이나 포조 같은 이들과 더불어 천 년 뒤까지 솜씨를 겨룰 수 있겠습니까. 저를 지나치게 추어올리시며 짐짓 놀리시는 말씀이라 여겨져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시왕동, 망고대, 박달곶을 읊은 세 편의 옛 시는 참으로 어르신 말씀대로 지나치게 강한 느낌이 있습니다. 제 글은 부드러운 것이 흠이지 강한 것은 흠이 되지 않습니다. 이따금 강한 느낌이 있다 해도 거리낄 것은 없습니다. 만약 명나라의 큰 문장가인 이반룡이 이 글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자신이 엮은 『명시산』이라는 시선집에 넣었을 것이니, 왕씨 집안 자제들이 다소 자부심을 가진다 한들 그것이 강남의 풍류를 가로막을 것이 또한 무엇이겠습니까.
이손곡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10월 (서기 1610년 11월 29일, 양력 추정)
어르신께서는 본디 제 초사와 부 작품들이 부드럽고 아름답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히 스스로 그렇다고 믿지 못하겠습니다. 제 글은 근래에 한층 나아졌는데 어르신께서는 오히려 이를 알아보지 못하시니, 삼가 『한정록』 서문과 『박씨산장』, 『왕총이기』, 『십이론』, 『이절도뢰』, 『관묘비』, 『남궁생전』, 『대힐자』, 그리고 『북귀부』, 『훼벽사』를 한데 묶어 변씨 성을 가진 이 편에 부쳐 보냅니다. 가르침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윤오정에게 답한 편지 (기유년, 1609년) 7월 (서기 1609년 8월 14일, 양력 추정)
보내주신 포도를 받아 먹고 나니, 갈증병을 앓던 사마상여의 목마름이 풀리는 듯합니다. 다만 그것을 한 말쯤 얻어서 세도가를 찾아가 변방 고을의 벼슬자리 하나를 청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용어) 사마상여는 한나라 때의 이름난 문장가로, 소갈증(요즘으로 치면 심한 갈증을 동반하는 병)을 앓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옛날 중국에서 어떤 사람이 진귀한 포도주를 뇌물로 바치고 변방 고을살이 자리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허균은 이를 빌려 농담 삼아 한 말이다.
윤오정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4월 (서기 1611년 5월 26일, 양력 추정)
초췌한 몰골로 시골에 묻혀 시를 읊조리며 그대의 훌륭한 시를 음미하다 보니, 북쪽을 향해 그리운 마음만 하염없이 펼쳐집니다. 저는 요즘 입을 다물고 지내다 보니 시상마저 막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변변찮은 시로나마 화답하지 못하니 부끄러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홍중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그대는 시 짓기에 오십 년을 힘쓴 끝에 마침내 진사시에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경솔하게도 그대 혼자 기뻐하며
'하루 만에 장안의 꽃을 다 보았노라'
라고 읊었다지요. 부디 신중하게 처신하여 이런 일로 우쭐대지 마십시오. 선비 된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결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홍중인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12월 (서기 1611년 1월 28일, 양력 추정)
보내주신 편지를 옥중에서 받고 보니 그대 볼 낯이 없습니다. 진작 그대의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오늘 같은 일을 당했겠습니까. 옛날 마원 장군이 아우 소유의 말을 떠올렸던 것도 그것이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의 은혜가 두터우니 결코 저를 죽을 곳으로 내몰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영동 지방으로 귀양 가고 싶지만, 그곳이 제 고향이라서 안 된다고들 합니다. 우리에 갇힌 원숭이나 새장에 갇힌 새나 그 운명은 남의 손에 달렸으니, 풀어 주는 것도 운명이요 다그치는 것도 운명인데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용어) 마원은 후한 때의 장수로, 신식후라는 봉호를 받았다. 그의 아우 소유는 일찍이 형에게 "선비로 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저 먹고 입는 것이 모자라지 않고, 작은 수레와 느린 말을 타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착한 선비라는 말을 들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훗날 마원이 먼 남쪽 땅으로 정벌을 나가 고생하던 중 아우의 그 말을 문득 떠올렸다는 옛이야기이다. 허균은 이 고사를 빌려, 진작 홍중인의 충고를 들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뜻을 전하고 있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정유년, 1597년) 8월 (서기 1597년 9월 25일, 양력 추정)
강을 건너던 날, 한 미녀가 동쪽 언덕을 서성이고 있었네. 그런데 배는 어느새 강 한복판에 이르러, 돌아보니 마치 은하수 너머 직녀를 바라보는 듯 아득하기만 했네. 진강 나루에 이르러서는 마중 나왔던 벼슬아치도 인사를 하고 돌아갔지. 십 리쯤 가다가 다시 돌아보니 그 벼슬아치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하물며 그 미녀가 보이겠으며 그대인들 보였겠는가.
장자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대를 배웅하던 사람이 언덕에서 돌아가 버리니, 그대는 이제 그만큼 멀어져 버렸구나.'
나도 지금 꼭 그 말을 하고 싶다네.
(용어) 이여인은 이재영을 가리킨다. '여인'은 이재영의 자, 즉 흔히 부르던 또 다른 이름이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병오년, 1606년) 2월 (서기 1606년 3월 23일, 양력 추정)
어젯밤 소랑이라는 여인을 불러 왔는데, 박엽이 하도 조르는 바람에 마지못해 만나 보았네. 찬찬히 뜯어보다가 문득 서러움이 북받쳐 고개를 돌려 벽을 향했는데, 촛불 그림자 속에 비친 헝클어진 머리와 지워진 화장, 구겨진 옷차림, 부드러운 얼굴이 곱게 단장하고 고운 옷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웠네. 그제야 서시가 얼굴을 찡그리자 못생긴 모모가 그 흉내를 냈다는 이야기를 비로소 믿게 되었다네.
잠자리에 들어서는 우는 듯 하소연하는 듯하더니, 십 년 전 옛일을 이야기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사뭇 다정하게 이야기하면서도 한마디도 틀리는 법이 없어 또 한 번 넋을 잃었다네. 그대는 한번 정겨운 사연의 글을 지어 이 일을 기록해 주게.
(용어) 서시는 중국 월나라의 이름난 미인이고, 모모는 그와 반대로 못생긴 여인을 가리키던 이름이다. 서시가 속병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자 그 모습마저 아름답다고 여긴 못생긴 여인 모모가 덩달아 얼굴을 찡그렸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표현으로, 못난 사람이 함부로 남을 흉내 낸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병오년, 1606년) 5월 (서기 1606년 6월 19일, 양력 추정)
연주에서 온 나그네가 대정강에 이르러 배 위에서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말도 못 하고 눈물만 그렁그렁하기에, 나는 차마 마주 보지 못했네. 배가 떠나려 하자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헤어지는데, 그 순간 강산이 온통 빛을 잃은 듯했으니, 만약 자네가 곁에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병오년, 1606년) 5월 (서기 1606년 6월 23일, 양력 추정)
18일에 대동강을 건너려 하자 박엽이 굳이 붙들었네. 다시 붙잡힐까 겁이 나서 몰래 강가의 작은 거룻배를 찾아가 강을 건넜는데, 그날 밤에는 이별한 마음이 사무쳐 잠을 이루지 못했네. 뱃전을 베고 누워 있자니 꿈속에서 배가 움직이기에 채염이 배를 미는 것이라 착각했다네. 놀라 깨어 보니 돛이 바람을 받아 배가 나아가고 있더군.
정오 무렵 생양 땅에 이르니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려 섬돌 옆 약초를 적셨는데, 주룩주룩 떨어지는 그 빗물이 마치 상강가에서 아황이 흘리던 눈물 자국과도 같았으니, 이런 때에 마음이 괴롭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심이 아닌 꾸며낸 말일 것이네.
(용어) 채염은 후한 때 학자 채옹의 딸로, 전란 중에 북방으로 끌려가 오랑캐 땅에서 살다가 훗날 고향으로 돌아온 기구한 사연으로 유명한 여인이다. 아황은 순임금의 아내로, 순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상강가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진다. 허균은 이 두 여인의 이야기를 빌려 이별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월 (서기 1608년 3월 1일, 양력 추정)
나는 큰 고을의 수령이 되었는데, 마침 자네가 사는 곳과 가까우니 어머니를 모시고 이리로 오게. 내가 마땅히 내 녹봉의 절반을 나누어 대접할 터이니, 결코 양식이 떨어지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네.
자네와 나는 처지는 다르지만 취향은 같고, 자네의 재주는 나보다 열 배나 뛰어난데도 세상에서 버림받기는 나보다 훨씬 심하니, 이 점이 나는 늘 기가 막힐 따름이네. 나는 비록 운이 기박해도 몇 차례나마 고을 수령을 지내며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지만, 자네는 입에 풀칠하기조차 힘들지 않은가. 세상에 불우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우리 같은 이들의 책임일세. 밥상을 마주할 때마다 몹시 부끄러워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으니, 어서 오시게. 자네만 온다면 이 일로 비방을 듣는다 해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겠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4월) (서기 1608년 5월 28일, 양력 추정)
자네 애첩은 몹시 깜찍하고 지혜로우니, 젊음이 잠깐이라는 것쯤은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네. 그런데 그 사람이 비구니가 되어 끝까지 절개를 지킬 수 있겠는가? 속담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했으니, 한번 힘써 보게나.
그가 비록 화려한 휘장과 맛 좋은 고아주 맛에 익숙해 있다지만, 눈 녹은 물로 끓인 차도 나름대로 특별한 운치가 있는 법이네. 혹시 그가 나를 찾아온다면 틀림없이 "하마터면 인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다"고 말할 걸세. 자네가 그에게 "날아가는 자 위에 올라타는 자가 있다"고 말해 준다면, 반드시 그 말에 마음이 움직일 걸세.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7월) (서기 1608년 8월 24일, 양력 추정)
처마에서 빗물이 쓸쓸히 떨어지고 향로에서는 향내가 은은히 풍기는데, 지금 벗 두어 사람과 함께 소매를 걷고 맨발로 방석에 기대어 하얀 연꽃 곁에서 참외를 쪼개 먹으며 번뇌를 씻어 볼까 하네. 이런 자리에 우리 여인이 빠져서야 되겠는가.
자네의 늙은 아내가 틀림없이 으르렁대며 자네 얼굴을 고양이 상판처럼 만들어 놓을 테지만, 늙었다고 겁먹고 움츠러들지 말게. 문 앞에서 기다리는 종이 종이우산을 들고 있으니 가랑비쯤은 넉넉히 피할 수 있을 걸세. 어서 오시게. 모이고 흩어지는 일이 늘 있는 것은 아니니, 이런 모임인들 어찌 자주 있겠는가. 흩어진 뒤에는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2월) (서기 1609년 1월 20일, 양력 추정)
이번 부임은 사람들의 비방을 잠재우려는 것일 뿐, 오래 있을 생각은 없네. 그런데 승문원 판교에 임명된 것은 승진할 기회이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친구들도 나를 말리며 "벼슬살이는 붉은 옷을 입는 정도면 충분하다"(당상관이 되었다는 뜻이다)고 했는데, 나 역시 그 말대로 그대로 있기로 했네. 다만 우스운 것은 원숭이가 자루 속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꼴이라는 것이네.
계륵이 대체 무엇이기에 감히 사람을 이렇게까지 뒤흔든단 말인가. 이런 때는 도연명이 마치 하늘 위 신선처럼 우러러 보이네.
(용어) 계륵은 닭갈비를 뜻하는 말로, 먹을 것은 별로 없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하찮지만 버리기 아까운 벼슬자리를 빗댄 표현이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월) (서기 1609년 2월 19일, 양력 추정)
내가 이번에 또 사신 행차를 따라가게 되어, 십 년 사이에 세 번이나 그 밑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어찌 지겹지 않겠는가. 사신 대감이 꼭 자네를 데려가고 싶어 하시네. 자네가 나오고 싶지 않다면 그만이지만, 세상에 뜻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부디 나와 주게. 우리 두 사람이 함께 기록을 맡아 가는 것도 즐거운 일이고, 서쪽으로 천 리 길을 가며 예전에 노닐던 곳을 다시 밟는 것도 유쾌한 일이네. 비록 임금이 돌아가신 때라 풍류와 여색을 즐기지는 못하더라도, 여관의 푸른 등불 아래 마주 앉아 향을 피우고 옛일과 오늘 일을 이야기하며 시를 지으면서 봄 석 달을 보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네.
우리 두 사람 다 이제 늙어 가는 처지라 함께 모일 날이 많지 않고, 남은 날도 얼마 되지 않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자네도 틀림없이 갓을 털고 일어설 걸세. 간절히 기다리겠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3월) (서기 1609년 4월 18일, 양력 추정)
신흠(호는 현옹)이 내 '채호영'이라는 시를 구해 보고는 몹시 칭찬하며,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도 따라오지 못한다고 했다더군. 이건 지나친 칭찬일세. 자네는 평소에 말이 많으니 부디 조심해서 함부로 주석 같은 것은 달지 말게. 한나라의 모형과 정현이 시경의 위풍과 정풍에 주석을 달았다가 본래 뜻에서 크게 벗어나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말깨나 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데, 자네도 그런 잘못을 본받으려는 것인가.
훗날 늙어서 절간에서 차 달이는 연기가 봄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보게 될 때, 남이 귀찮게 재촉하기를 기다릴 것 없이 스스로 재미있고 달콤한 이야기를 지어, 마치 노공의 북리지에 화답하듯 한다면, 이 세상에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책이 보태지는 셈이 될 것이네.
(용어) 노공의 북리지는 당나라의 손계가 지은 책으로, 그 시대 황제와 사대부, 평민들이 기생과 어울려 놀던 일을 적은 것이다. 노공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손계인 듯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3월) (서기 1609년 4월 18일, 양력 추정)
어젯밤 달빛이 대낮처럼 밝기에 문 밖으로 산보를 나갔더니, 안개 낀 버드나무가 무성히 우거지고 흩날리는 꽃잎이 옷깃에 스쳐, 그윽한 봄기운이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더군.
늙은 중이 아니고서야 어찌 외로이 홀로 앉아 그냥 지낼 수 있겠는가. 자네 집을 내려다보니 고요하여 사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더군. 향기 그윽한 방 안 원앙 이불 속에서 달콤한 꿈을 꾸고 있으리라 상상하니, 그 즐거움 또한 더할 나위 없었겠네.
나는 붉은 종이 두 장을 자네의 한리 자리와 바꾸고 싶네. 한리 자리 정도면 내 소원으로는 충분하다고 보네. 누가 자네더러 운수가 기구하다 하겠는가. 자네가 이 말을 들으면 우스워서 배를 움켜쥐고 웃을 걸세.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5월) (서기 1610년 6월 21일, 양력 추정)
병 때문에 연경(중국 베이징)으로 가는 사신 행차에 오르지 못한 죄로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네. 살아 있어야 벼슬도 있는 법이지. 이제부터는 호남 땅의 벼슬 없는 선비 한 사람일 뿐이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내가 이곳으로 옮겨 오고서 자네를 자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뻐하였는데, 몇 달이 지나도록 만나지 못했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서글퍼지는데, 자네가 찾아와 이 서글픈 마음을 풀어 줄 날은 더디기만 하니, 하루가 천 년처럼 지루하네.
물줄기 하나만 건너면 닿을 거리이니, 서둘러 얼른 오도록 하게.
양자점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돌아가신 자네 아버님은 문장이 매우 뛰어나 참으로 큰 문장가였네. 나는 글재주가 부족한데 어떻게 그분의 이름을 더 빛나게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바쁘게 짓느라 하고 싶은 말을 다 담지도 못했으니, 부처님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버리든 취하든, 그것은 오직 자네에게 달려 있네.
(용어) 양자점은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양경우를 가리킨다. 자점은 그의 자다.
양자점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들으니 그대는 먹을 것조차 넉넉지 못하다던데, 목화솜은 대체 어디서 났는가. 거절하자니 공손치 못한 것 같고, 받자니 차마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그대의 후한 뜻이 고마워 그것으로 속옷을 지어 입었네. 앉으나 누우나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겠네.
가을 산의 단풍과 국화 사이에서 두건을 비스듬히 쓰고 길게 시를 읊조리기에 딱 좋은 계절이니, 방장산(지리산을 달리 부르는 이름)의 바람과 안개가 모두 그대의 시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리라 생각되네. 간절히 그리는 마음, 이루 다 말할 수 없네.
이사상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0월) (서기 1609년 11월 11일, 양력 추정)
그대가 지은 윤씨의 비문 시는 참으로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명작이지만, 나에게 끼친 해가 매우 크네. 그대가 직접 지었다고 말한들 '여장'이라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걸세. 앞으로 어떻게 해명할 셈인가? 나는 이 일 때문에 무려 세 번이나 조정 관리들의 탄핵 논의에 올라야 했는데, 여러 사람의 변호 덕분에 겨우 빠져나왔네. 이번 일로 그 시가 나를 비방받게 한 것이 적지 않으니, 앞으로는 부디 조심하여 이런 일을 벌이지 말게나.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어무적(자는 어잠부)이 '매화나무를 베다'라는 시를 읊었던 일 말일세. 아,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네.
(용어) 이사상은 이원형의 자다. 이문학관이라는 벼슬을 지냈다.
모씨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2월) (서기 1607년 3월 12일, 양력 추정)
서쪽에서 온 사람이 전하기를, 나옹(화가 이정의 호)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통곡하며 피눈물을 흘리노니, 하늘이여 원통하도다. 나는 이제 누구와 함께 세상 바깥에서 노닐 것인가.
세상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소중히 여기지만, 나는 그의 사람됨을 소중히 여긴다네. (※ 원문에 두 글자가 빠져 있다) 알아줄는지 모르겠네. 풍류가 하루아침에 다한 듯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용어) 이 편지를 받은 사람의 이름은 원문에도 밝혀져 있지 않아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나옹은 조선 중기의 화가 이정의 호다.
모씨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8월) (서기 1607년 10월 5일, 양력 추정)
어젯밤 꿈에 나옹을 만났는데, 그가 죽음이 참으로 즐겁다고 말하더군. 이거야말로 삶을 훤히 꿰뚫어 본 사람의 말일세. 꿈에서 깨어 생각해 보니, 이 몸조차 본디 내 것이 아닌데 덧없는 인생살이의 온갖 일을 뭐하러 마음에 담아 두겠는가.
결국에는 벼슬을 던져 버리고 바다 위 갈매기와 벗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네. 이 마음은 맑은 물을 두고 맹세하듯 변함이 없네.
이나옹에게 보낸 편지 (을사년, 1605년 7월) (서기 1605년 8월 28일, 양력 추정)
석봉과 작별한 지 겨우 몇십 일밖에 안 되었는데, 느닷없이 부고를 들으니 가슴이 미어지고 살을 꼬집어도 놀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세상 사람들이 자네의 그림을 굳이 배대유(자는 자장)라는 이의 그림과 우열을 다투는 맞수로 여기고 있다는 점일세. 자네도 필시 이를 욕되다 여길 텐데, 정말 어떠한가?
(용어) 이나옹은 선조 시대의 화가 이정을 가리킨다. 삼대에 걸쳐 화가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열 살에 이미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다. 나옹은 그의 호이고, 자는 공간이다.
이나옹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월) (서기 1607년 2월 11일, 양력 추정)
큰 비단 한 필과 갖가지 무늬의 노랗고 푸른 비단을 우리 집 종아이 편에 함께 부쳐, 서경(평양을 달리 이르는 말)에 있는 자네에게 보냈네. 산을 뒤로 하고 시냇물을 마주한 집을 그려 주되, 다음과 같이 배치해 주게.
온갖 꽃과 곧게 뻗은 대나무를 천여 그루 심고, 가운데는 남쪽으로 향한 마루를 틔워 그 앞 토방을 넓게 하고, 거기에 패랭이꽃과 금선초를 심고, 괴석과 오래된 화분을 늘어놓아 주게. 동쪽 안방은 휘장을 걷어 두고 책 천 권을 진열하며, 구리 병에는 공작 꼬리깃을 꽂고, 산 모양으로 빚은 술동이는 비자나무 탁자 위에 놓아 주게. 서쪽 창문을 열어 두면, 사랑하는 첩이 나물국을 끓이고 손수 동동주를 걸러 화로에 데우는 동안, 나는 방 한가운데 방석에 몸을 기대고 누워 책을 읽고 있고, 자네는 (※ 원문에 두 글자가 빠져 있다)와 함께 곁에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즐기는 모습을 그려 주게. 다들 두건을 쓰고 비단신을 신되 도복에는 띠를 두르지 않은 차림이고, 한 줄기 향 연기는 발 너머로 피어오르며, 학 두 마리는 돌이끼를 쪼고, 산에서 자란 아이 종은 빗자루를 들고 와 꽃잎을 쓸고 있는 모습이면 좋겠네. 이렇게만 된다면 사람으로 태어나 할 일은 다 한 셈이라고 생각하네.
그림이 다 되거든, 마침 돌아오는 태징공(이수준의 자가 태징이다) 편에 부쳐 주시길 간절히 바라네.
서산노사에게 보낸 편지 (임인년, 1602년 2월) (서기 1602년 3월 8일, 양력 추정)
노스님께서 금강산으로 떠나셨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묘향산에 계셨습니까? 저는 벼슬살이에 매여 바쁜 탓에 신선이 산다는 산을 눈앞에 두고도 오르지 못하니, 이 고단한 삶이 언제나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는 노스님을 벗처럼 여기셨으니, 저 역시 대대로 이어 온 정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저희 부형의 친필 글씨가 모두 그곳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랏일이 마무리되면 반드시 절을 찾아 뵙겠으니, 노스님께서는 문을 열어 두고 기다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용어) 서산노사는 선조 때의 이름난 승려이자 승병장이던 휴정대사를 가리킨다. 속세의 성은 최씨이고, 서산은 그의 호이다.
서산노사에게 보낸 편지 (임인년, 1602년 3월) (서기 1602년 5월 6일, 양력 추정)
저는 번뇌의 씨앗에서 태어난 몸이라,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이 육신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제 몸속에서는 눈·귀·코·혀·몸·마음이라는 여섯 감각의 구멍이 서로 부딪치며 끝없이 다투니, 어떻게 다툼 없는 고요한 경지로 이를 다스리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남이나 저나 세상 만물은 모두 텅 빈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중생의 몸은 아득히 텅 빈 하늘과 같으니, 번뇌인들 어디에 발붙일 곳이 있겠는가." 라고 했는데, 이 말이야말로 제 처지를 그대로 말해 주는 듯합니다. 노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디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용어) 육착은 눈·귀·코·혀·몸·마음, 이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통해 온갖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이르는 불교 용어다. 무쟁삼매는 다툼 없는 이치에 온전히 머물러 다른 것과 다투지 않으며, 흐트러진 마음을 한곳에 모아 헛된 생각에서 벗어난 고요한 경지를 뜻한다.
서산노사에게 보낸 편지 (임인년, 1602년 4월) (서기 1602년 6월 4일, 양력 추정)
큰 깨우침을 내려주시고 또 어록까지 보내주셔서 며칠을 두고 읽었더니, 속세의 잡념이 말끔히 사라져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꽃을 들어 보이자 미소로 화답했다는 그 유명한 이심전심의 경지가 과연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이제야 알 듯합니다. 이제는 노스님 문 앞에 세워 둔 깃대를 제가 넘어뜨려야 할 성싶습니다.
(용어) 염화미소는 석가모니가 연꽃을 들어 보이자 다른 제자들은 그 뜻을 알지 못했으나 가섭만이 미소지었고, 이에 석가모니가 그에게 불법의 진리를 전했다는 옛이야기로, 말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으로 뜻이 통하는 것을 이른다. 찰간은 절 앞에 세우는 깃대인데, 예로부터 선승들 사이에서는 법력을 다투는 상대의 깃대를 쓰러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가렸다고 하며, 여기서는 노스님을 상대로 한바탕 겨뤄 볼 만하다는 자신감 넘치는 농담이다.
서산노사에게 보낸 편지 (임인년, 1602년 5월) (서기 1602년 7월 4일, 양력 추정)
도의 핵심을 가르쳐 주셨지만, 솔직히 말씀만 헛되이 쓰신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저 있는 것은 죄다 텅 비우고, 없는 것은 굳이 채우려 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타고난 성품대로 유유히 노닐고 인연 따라 거리낌 없이 지내다가 속된 마음마저 사라진다면, 성인의 경지가 뭐 그리 멀겠습니까.
다만 걱정되는 것은, 형체도 자취도 없는 그 마음이 대체 어떤 계기로 우러나오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오나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마땅히 노스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 노스님께서는 너무 심하게 다그치지 말아 주십시오.
송운대사에게 보낸 편지 (갑진년, 1604년 2월) (서기 1604년 3월 15일, 양력 추정)
대사께서는 아직 선의 오묘한 이치에 통달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아 움직이지 않게 하는 일이 반드시 온갖 인연을 말끔히 끊어 낸 뒤에야 되는 것이겠습니까? 조정에서든 저잣거리에서든 마을 골목에서든,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제가 듣기로 한 생각이 밝으면 그 한 생각이 곧 깨달음이고, 한 생각이 편안하면 그 한 생각이 곧 열반이라 하였습니다. 저는 다만 이 마음이 오래도록 고요히 가라앉아 맑아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용어) 송운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승려로, 법명은 유정이고 속세의 성은 임씨다. 승병을 총괄하는 자리에서 활약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일본에 건너가 강화를 맺고 돌아왔다. 사명대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송운대사에게 보낸 편지 (병오년, 1606년 1월) (서기 1606년 2월 21일, 양력 추정)
능가경 네 권은 바로 첫 조사인 달마 선사가 마음으로 전한 가르침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도 유독 구절을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조차 알기 어렵고, 나와 있는 주석도 깊이 있는 풀이가 없습니다. 토도 없는 원문만으로 그 뜻을 어찌 깨칠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만 번을 읽으면 저절로 통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에 이 경전의 판본이 없어서, 뒤에 공부하는 이들에게 그 혜택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제가 가지고 있던 중국본을 꺼내어 보내 드리니, 주지 스님으로 하여금 자금을 모아 간행하게 하십시오. 이 또한 좋은 인연이 될 것입니다.
해안 경석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0월) (서기 1608년 11월 22일, 양력 추정)
너는 무엇에도 집착하지 말되, 그렇다고 아무 감각 없는 완고한 텅 빔에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만약 자기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스승들이 은밀히 전한 가르침조차 다 남의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만약 본성을 본다면 마귀나 여우의 허튼소리조차 모두 오묘한 진리가 된다. 집착하는 순간 나와 남의 구별이 생기고 만다. 부디 조심하여라.
작은 선행 하나라도 게으르고 나태한 데서는 결코 나오지 않는 법이니, 힘써 정진하여라.
(용어) 해안 경석은 조선의 승려로, 호는 중관이고 속세의 성은 오씨이며 경석은 그의 승명이다. 휴정대사(서산노사)의 문하에서 배워 깨달음의 요체를 얻었고, 임제종의 정통 법맥을 이어받았다고 전해진다.
계랑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월) (서기 1609년 2월 20일, 양력 추정)
그대가 보름날 저녁에 비파를 뜯으며 '산자고'라는 노래를 읊었다고 들었소. 어째서 조용하고 으슥한 곳에서 하지 않고, 하필 윤씨 선정비 앞에서 그리하여 남의 흠을 잡기 좋아하는 자들 눈에 띄고, 떠난 사또를 기리는 비석을 시로 더럽히게 만들었소? 그것은 그대의 잘못인데 비방은 애꿎게 나에게 돌아오니 억울하기 짝이 없구려.
요즘도 참선은 하고 있소? 그리운 마음이 사무치오.
(용어) 계랑은 전라도 부안 지방의 기생으로, 시와 글에 능하고 노래와 거문고 솜씨도 빼어났다고 전해진다.
계랑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봉래산에는 가을빛이 한창 무르익었을 테니, 돌아가고 싶은 흥이 도도하게 이는구려. 그대는 필경 이 성성옹(허균 자신을 가리키는 별호)이 시골로 돌아가겠다던 약속을 어겼다고 비웃을 것이오. 그때 만약 한순간이라도 마음이 잘못 흔들렸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십 년이나 이토록 다정할 수 있었겠소.
이제야 알겠소. 풍류를 안다던 진회해(송나라 시인 진관)조차 참된 사내는 아니었으며, 헛된 생각을 끊어 버리는 것이야말로 몸과 마음에 이로운 일이라는 것을. 언제나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을는지, 종이를 마주하니 마음이 서글퍼지오.
성소부부고 제22권
10. 14:40
성소부부고 제22권 · 설부 1 · 성옹지소록 (인 및 상)
출처: 성소부부고 제22권, 설부 1, 성옹지소록 인(서문) 및 상권
배경: 1610년, 허균은 죄를 얻어 의금부 옥에 마흔두 날 갇혀 있다가 함경도 홍원(함산)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잠 못 이루는 옥중의 밤마다 평소 듣고 겪은 조정의 이야기와 기이한 일들을 두서없이 적어 두었는데, 귀양지에 도착한 뒤 이를 정리하여 엮은 것이 이 "성옹지소록"이다. 남의 흠을 들추는 내용과 인과응보·귀신·꿈·점술·음란한 이야기는 모두 지우고 194편만 남겼다고 밝히고 있다. 상권은 명나라와 조선의 외교 의전, 조정 관청들의 연혁과 권한 변화, 과거 시험과 벼슬살이에 얽힌 온갖 일화, 그리고 허균 자신의 두 형과 집안에 얽힌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어, 조선 관료 사회의 실제 돌아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이다.
성옹지소록을 쓰게 된 사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경술년(1610년), 나는 죄를 지어 순군옥(의금부의 옥)에 갇힌 지 마흔두 날 만에 함산(함경도 홍원)으로 귀양지가 정해졌다. 옥에 있는 동안 여러 날 사람도 만날 수 없는 데다 밤 또한 길어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등불을 켜고 화로에 불을 피운 채 이불을 두르고 홀로 앉아 있노라니, 문득 평소에 들었던, 조선 역대 임금 때부터 내려온 어진 사대부들의 행적이나 사건 가운데 후일 전례와 고사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들, 그리고 보고 들은 여러 기이한 일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에 종이를 가져다 붓을 녹여 가며 생각나는 대로 적어 상자 속에 넣어 두었다. 그러나 이는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글을 다시 다듬지는 않았다.
귀양지인 함산에 도착한 뒤로는 한가하여 하는 일이 없었다. 하루는 상자를 열어 보니 예전에 적어 둔 것이 있었다. 다 읽어 보니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생각이 들어, 순서만 조금 정리하여 그대로 옮겨 적었다. 그 내용이 대개 자잘한 일들을 적은 것이므로 "성옹지소록", 즉 "성옹(허균)이 자잘한 것들을 적은 기록"이라 이름 붙였다.
정리하는 사이에 남의 단점을 드러내는 내용은 지워 버렸고, 인과응보를 말한 것과 귀신 이야기, 꿈과 점술에 관한 것, 남녀 간의 음란한 내용들도 모두 지우고 나니, 남은 것이 백아흔네 개의 이야기였다. 웃고 이야기하는 자리에 보탬이 되고 정사에 빠진 것을 보충하는 데는 조금이나마 취할 것이 있으리라.
명나라 만력 39년(1611년) 신해년 4월 19일, 교산(허균의 호)은 쓴다.
명나라가 우리나라를 특별히 대우한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명나라가 우리나라를 대우하는 것은 다른 외국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임금이 세상을 떠나거나 즉위할 때 알리는 조서를 내리고, 조문하며 제사 지낼 때 예물을 내려 주고 사신을 보내 위문하는 것이, 마치 명나라 안의 제후국이나 황실의 친왕에게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대개 성종 문황제(명나라 영락제)가 우리 공정대왕(태종의 시호)과 매우 친밀하여, 그를 특별히 대우하고 격려한 것이 다른 왕들에게 하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에 우리도 지극한 정성으로 공경하고 예를 다하였다. 이 때문에 그 뒤로도 대대로 이 관계가 변치 않아 백 년이 지나도록 계속 은총을 받았고, 임진왜란 때에는 명나라가 온 힘을 다해 우리를 구제해 주어 마침내 우리 국토를 되찾고 나라를 다시 일으키게 하였으니, 아,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명나라 사신을 보내는 절차와 환관 사신의 폐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명나라 황제가 즉위하거나 맏아들이 태어나거나 태자를 책봉할 때마다, 그때그때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서를 내렸다. 사신은 한림원이나 감찰·간쟁을 맡은 관원 중에서 보냈고, 자잘한 일이 있으면 육부의 실무 관원을 보냈으며, 조문하고 제사 지낼 때도 이런 실무 관원을 보냈다.
우리나라 임금을 책봉하거나 세자를 책봉할 때는 환관을 사신으로 보냈는데, 환관을 시켜 조서를 보내는 것은 큰 은전이었다.
중국에서는 황실의 친왕이나 제후를 책봉할 때도 환관을 보내지 않는데 우리나라에만 보냈으니 그 영예로움이 이보다 더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중국에 들어가 환관이 된 자가 처음에 사신으로 오기를 황제에게 청하여 파견된 데서 비롯되었는데, 이것이 그대로 관례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이것이 말할 수 없이 큰 폐단이 되고 있다.
황장손 탄생을 알린 특별한 조서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중국 영락 연간(명나라 성조 때)에 황제의 맏손자가 태어났을 때는 조서를 보내 알리지 않았는데, 지금 황제는 을사년에 맏손자가 태어나자 특별히 한림원 수찬 주지번과 형과 도급사 양유년을 보내 조서를 반포하였으니, 이 또한 남다른 예우였다.
조선 임금들이 중국에서 받은 시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가 역대 임금 때부터 중국에서 받은 시호는 모두 아름다웠다. 그중 강헌(태조의 시호)과 강정(성종의 시호)이 가장 훌륭한 시호이고, 장헌(세종의 시호)과 소경(선조의 시호)이 그다음이며, 공헌(명종의 시호)이 또 그다음이다. 다만 인종은 그 훌륭한 덕에도 불구하고 "영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시호를 정하는 법에 "총애와 녹봉이 빛나고 큰 것을 영이라 하고, 너그럽고 편안하게 천수를 다한 것을 정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처럼 평범한 시호는 인종의 높고 빛나는 업적과는 걸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이를 서운하게 여긴다.
시호를 정하는 절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는 처음에 시호 제도를 중하게 여겨서, 정2품 이상의 실제 벼슬을 지낸 사람과 공신으로 추증된 사람이 아니면, 아무리 선량한 행실과 큰 공로가 있어도 시호를 내리지 않았다.
시호를 의논할 때는 먼저 봉상시(제사와 시호를 맡은 관청)에서 해당자의 행적을 적은 글을 받아 어울릴 만한 여러 시호 후보를 적어 이조로 보내고, 이조에서는 홍문관에 모여 이를 정하여 임금의 재가를 받았으니 매우 신중하게 처리하였다.
시호를 받을 만한 사람이 죽으면 그 집안에서는 곧바로 행적을 적은 글을 갖추어 담당 관청으로 보낸다. 죽은 이가 평소 내세울 만한 공덕이나 행실이 없더라도 그 집안에서는 시호를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쁜 뜻을 담은 시호가 내려도 사양할 수 없었다. 근래에는 이러한 풍조가 없어졌다.
처음에는 시호를 논의할 만한 집안이 있어도 나쁜 시호를 받을까 두려워 청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는데, 끝내는 이름난 신하와 큰 공로가 있는 사람까지도 따라서 시호를 청하지 않게 되었다. 이리하여 임금이 만대에 걸쳐 시행해야 할 상벌의 도구를 시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개탄할 일이다.
선조 때 낮은 벼슬로도 시호를 받은 학자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왕(선조) 때에는 벼슬을 추증받고 시호를 받은 사람이 많았다. 그중 생전에 낮은 관직을 지냈으면서도 시호를 받은 이로는 김굉필(시호 문경)과 정여창(시호 문헌), 서경덕(시호 문강)이 있는데, 이는 실로 특별한 은전이었다. 정암(조광조의 호) 선생도 벼슬을 추증받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나의 둘째 형(허봉)이 경연에 참석했을 때 미암(유희춘의 호) 선생의 시호를 청했으나, 임금은 다만 좌찬성으로 벼슬을 추증하도록 하고 시호를 내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의정부의 권한이 약해진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 의정부의 권한은 문종 이전에는 매우 높고 무거웠다. 아침마다 삼정승(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출근하면 육조 이하 해당 관청에서 각기 맡은 업무를 가지고 와서 뵙고 아뢰었다.
승정원에서 임금의 재가를 받은 모든 공무는 어느 것이나 다 의정부로 보내어, 대신과 동벽·서벽(품계에 따라 나뉜 자리)의 관원들이 함께 모여 알맞게 처리함으로써 나라의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참여해 결정하였기 때문에, 재상의 권한은 높고 나라의 체통도 엄중하였다. 그 뒤 세조가 왕위를 이어받은 이래로 이런 절차를 없앴기 때문에 의정부의 권한은 줄어들었고, 나라의 기강도 차츰 해이해졌다.
의정부 관원들의 잔치 풍습과 그 폐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의정부에서 공무를 처결하던 시절에는, 좌사인·우사인과 검상(모두 의정부의 실무 관원)은 모두 이조의 낭관 중에서 뽑았고, 사록 두 명은 으레 홍문관의 낮은 관원으로서 예문관 벼슬을 겸임하고 있는 자를 임명하였으며, 새로 급제한 사람 한 명을 녹사로 삼았다. 이들이 각기 여섯 부서를 나누어 맡아 종일 응대하느라 몹시 바빠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기생과 음악을 베풀어 즐기게 하였는데, 의정부에서 공무를 처결하는 일이 없어진 뒤에도 이런 풍습은 그대로 남아, 대신은 대청에 모여 앉았는데 사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노랫소리와 풍악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였다.
심지어는 돈과 곡식을 관장하는 낭관을 불러다 벌주를 먹인 다음 그 술값을 받아 내거나, 저잣거리의 부자를 잡아들여 공공연히 비용을 뜯어내는 등의 방법으로 재물을 거두어 창고에 쌓아 두고 광대와 기생에게 주는 화대로 쓰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것이 선조 때에 장령(사헌부 관원) 유몽학이 경연에서 이 폐단을 강력히 아뢴 뒤로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사인을 대하는 정승들의 서로 다른 태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둘째 형이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인으로 오래 재직하다 보면 그동안 많은 정승을 겪어 보게 되는데, 그중 정승 권철은 성품이 매우 엄숙한 분이었지만 자신도 사인 벼슬을 거쳤기 때문에 사인들의 술잔치를 매우 기쁘게 여겼고, 노랫소리와 풍악 소리가 온 천지를 진동해도 모르는 척하였다. 반면에 정승 노수신은 매사에 지극히 너그러운 분이었지만, 사인들이 술자리를 벌일 때면 언제나 '노래와 풍악이 너무 소란스럽다'며 여러 차례 이를 금지시켰다. 이는 그분이 사인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검상이라는 벼슬 이름의 유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검상(의정부의 실무 관원)은 형조 상복사(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신중히 재심하던 부서)의 정랑을 관례상 겸임하였다. 그래서 예전에는 형조 낭관청 서편에 북루가 있었고,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곳을 검상청이라 부른다.
전례와 옛 기록을 관리하는 관청이 없는 아쉬움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는 전례와 고사를 전담하는 관청이 없다. 각 관청마다 마땅히 지난 기록을 모아 둔 등록이 있어야 할 텐데도 모두 없다. 역대 임금들의 길례와 흉례에 대해서도 모아 기록해 놓은 것이 없다. 그래서 한 시대의 제도와 그 변천을 살펴볼 길이 없다.
예전에는 의정부에 가각고라는 것이 있어 녹사가 맡아 관리하였다. 이곳에는 임금의 모든 지시와 대신들이 올린 의견, 군사와 나라의 중요한 문서들을 모두 보관해 두고 필요할 때 참고하도록 하였는데, 성종 이후로는 없어져서 더 이상 시행되지 않는다.
가각이라는 이름은 송나라 때의 관제에서 왔다. 송나라에서는 학문에 능한 신하를 뽑아 이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중서성과 추밀원 두 곳에 모두 두었다. 이는 대개 옛 전례와 고사 자료를 모으고 조사하기 위해 둔 제도였다. 우리나라도 초기에는 이를 본떠서 설치했던 듯하다.
사간원의 권한이 줄어든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사간원은 예전에 승정원에 딸려 있었다. 좌사간·우사간·좌사의·우사의를 두었는데, 이들은 당상관으로서 이름에 "대부"라는 두 글자를 붙여 불렀고, 이 밖에 헌납과 정언을 두 명씩 두었다. 이들이 각기 여섯 부서를 나누어 맡았고, 날마다 교대로 당직을 섰다.
무릇 여러 관청과 각 도로 내려지는 공문은 반드시 사간원을 거치게 되어 있었는데, 그중에 온당치 못한 것이 있으면 논박하여 되돌려 보냈다. 이는 중국의 육과(황제의 명을 살피고 되돌리는 여섯 부서)의 규정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간관과 사헌부를 따로 두어 서로 맞서는 두 관청으로 만든 다음, 사의대부는 없애고 대사간·사간·헌납·정언 두 명만을 두었다. 이때부터 임금의 명을 되돌려 보내던 일은 맡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여러 관청과 각 도에서 위에 청하여 이전의 지시를 고치는 것에 온당치 못한 점이 많아도, 사헌부와 사간원이 이를 규찰하여 바로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의금부의 유래와 그 권한 변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의금부는 옛날 중국의 집금오(궁궐과 도성을 지키던 벼슬)에 해당한다. 고려에서는 순군부라 하였는데, 상만호·부만호를 두어 궁궐을 지키는 친위군을 관장하였다.
처음에는 옥을 설치하여 친위군 가운데 군령을 어긴 자를 가두던 곳이었다. 중기에 와서는 국왕이 직접 죄수를 판결하였고, 조정의 신하로서 임금의 뜻을 거스른 자도 바로 이곳에 가두었다. 대개 당시 사대부는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죄를 지으면 모두 사헌부의 옥에서 다루었고, 임금이 직접 다루는 옥이나 특명으로 다스리는 옥은 따로 없었다. 말엽에 와서는 이곳이 벼슬아치만을 다루는 옥이 되어, 관직에 있는 자의 범죄는 모두 이곳에서 다루었다.
우리나라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따르다가 얼마 안 가서 곧 의용순금사로 이름을 고치고 판사·지사·동지사 네 명을 두었다. 낭관은 문관과 무관을 섞어 임용하였으며, 궁궐을 지키는 친위군을 거느리는 것은 고려 때와 같았다.
그 뒤 의금부로 이름을 고치면서 군사를 거느리는 권한은 없어지고 임금이 직접 관여하는 옥으로서 죄수를 판결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삼았으며, 임금의 행차가 있을 때와 안팎의 출입 금지 구역에 낭관이 하인들을 거느리고 가서 비상시에 대비하여 경계할 뿐이니, 이 또한 처음 관직을 설치한 본래의 뜻을 잃은 것이다.
부원군이라는 칭호의 유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지금은 공신으로서 정1품에 오른 사람을 으레 부원군이라 부르는데, 이 또한 본래의 뜻을 잃은 것이다.
고려에서는 대신을 으레 군에 봉하였고, 추밀원을 거쳐 문하부의 관직을 지낸 자는 두 관부의 벼슬을 두루 거쳤다 하여 그 관함을 부원군이라 하였다.
이 말은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으니, 성균관의 하례가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축하할 때 낮은 관직에서부터 삼정승 자리까지 좋은 관직을 죽 부르다가 끝에 가서 "부원군"이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영돈녕부사 두 명을 둔 일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1품이라 해서 정승이 아닌데도 부원군이라 부르는 것도 잘못된 일이다. 영돈녕부사는 《경국대전》에 한 사람만 두도록 되어 있는데, 지금은 특별히 두 사람을 두고 있으니 이는 지금 임금의 뜻이다.
무신년(1608년) 2월에 성영이 정권을 잡자, 연흥부원군 김제남을 영돈녕부사에서 물러나게 하고 문양부원군 유자신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기를 청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성영이 아첨한다고 하였으나, 조선 초기에도 이런 전례가 있었다고 한다.
동인과 서인이 갈라진 발단, 이조 낭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관직은 이조의 낭청이다. 직제학 이하 청요직(명망 있는 요직)에 사람을 올리고 내리는 일은 모두 낭청이 전담하고, 당상관은 이들의 의견을 그대로 따를 뿐이다. 그래서 이조 낭청으로 뽑히기가 매우 어려우며, 사화의 대부분이 바로 이 자리를 둘러싼 다툼에서 비롯되었다.
근래에 동인과 서인이 갈라진 것도, 나의 장인인 김인백(자가 인백, 본명 김효원)이 판서 심충겸이 전랑(이조의 인사 담당 낭관) 자리에 뽑히는 길을 막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서, 선비들의 논의가 지금까지도 갈라져 있다.
김응남이 당쟁을 돌아보며 한 말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승 김응남이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임금의 외척을 전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처음의 논의는 참으로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심충겸이 나랏일에 애쓰는 것을 보니 참으로 충신이다. 그때 선비들의 논의를 지나치게 따랐던 탓에 결국 붕당으로 갈라지고 말았으니, 이 점이 후회스럽다."
계미년(1583년)에 선왕(선조)께서 명하여 이조 낭관이 인사를 추천하는 관행을 폐지하였는데, 병조는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이조 낭관의 빠른 승진과 외직을 꺼리던 풍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옛 규례에 따르면 이조의 낭관은 좌랑(정6품)으로 서른 달을 재직하면 정랑(정5품)이 되고, 정랑에서 다시 서른 달을 재직하면 곧바로 의정부 사인(정4품)으로 승진하였으며, 한 달을 넘기기 전에 당하관 정3품에 올랐다. 여기서 다시 두어 해도 안 되어 당상관이 되었다. 미움을 받거나 선비들의 비판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난 경우에도, 차례를 건너뛰어 승진시키는 일에 급급해서 일 년 안에 반드시 다음 자리로 옮겨 갔다.
찰방(종6품)·판관(종5품)·도사(종5품) 같은 지방 관직은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고 싫어하여 피하고 가지 않으려던 자리였는데, 근래에는 이런 풍조가 사라졌다. 송인수와 김숙도는 모두 찰방으로 나갔고, 오여익은 늙은 아버지를 집에 두고 경성 판관으로 나갔는가 하면, 송홍보는 4품 벼슬을 지냈는데도 전라도사로 나갔으니 매우 이상한 일이다. 이러한 일은 모두 벼슬을 신중히 내리지 않아 요행으로 자리를 얻는 자가 많아진 데서 비롯된 것으로, 결국 사람들이 벼슬살이를 가볍게 여기게 되어 그리된 것이다.
병조의 권한이 비변사로 넘어간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시하는 곳은 병조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 병조 판서가 된 사람은 대부분 변방의 사정을 아는 사람을 뽑아 오래도록 맡겼다. 김종서 같은 이는 십 년 동안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이계동과 유담년은 무신이었으나 역시 십수 년 동안 나라의 군무를 도맡아, 작은 일은 모두 스스로 결단하고 큰일만 대신에게 아뢰었으며, 대신도 그의 조치를 따르고 조금만 손질할 뿐이었다.
비변사가 설치되면서부터는 크고 작은 군사 업무의 처리를 모두 비변사에서 맡게 되었는데, 실무를 맡은 당상관 몇 사람이 전적으로 관장하고 정승의 지시를 받아 시행하였으므로 병조는 멍하니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근래에는 지방의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까지도 비변사에서 뽑게 되어 병조의 권한이 더욱 줄어들었다.
대동법의 뿌리, 공물 제도의 폐단과 개혁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 공물 제도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연산군 때 처음 만들어졌다는 사람도 있지만 틀린 말이다. 성현(호 용재)의 말에 "성종 때 비로소 예산 명세서(횡간)를 만들었다" 하였으니, 연산군 때 시작된 것이 아니다.
찬성 이이가 이 제도를 고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갑오년(1594년)에 서애 선생(유성룡)이 나랏일을 맡았을 때 비로소 줄여서 다시 정하였으나 백성들의 고통은 오히려 심하였다.
근래에 오리 정승(이원익)이 선혜청을 설치하고 먼저 경기 지방에 시행하였는데, 경기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긴다. 그래서 능묘를 조성하는 일과 두 차례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치렀는데도 백성들이 큰 부역인 줄을 모르니, 그 효과가 이미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 어떻게 하면 팔도를 다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오례의를 정한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 쓰는 《오례의》(다섯 가지 국가 의례를 정리한 책)는 세조 때 신문충공(시호 문충, 신숙주)이 정승으로 있으면서 총괄하여 정한 것이다. 이는 당나라의 《개원례》를 본뜨면서 옛 예법도 참고한 것이다. 모든 것이 사리에 맞고 편리하여 시행한 지 백여 년이 되도록 폐단이 없었다.
선왕(선조) 때에 와서 유학자들이 오로지 옛 예법만을 따르면서 고친 부분이 많았는데, 간혹 서로 어긋나서 시행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이로써 옛사람들도 시험해 보지 않은 바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세 판서 자리를 비교한 큰형의 말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맏형(허성)이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조·예조·병조 세 판서 중에서 병조 판서는 몸은 힘들어도 계획을 세우는 것은 힘들지 않고, 이조 판서는 계획을 세우기는 힘들어도 마음까지 피곤하지는 않은데, 예조 판서는 마음과 몸이 다 피곤하다." 이는 대개 조정의 큰 의례는 반드시 예조 판서가 총괄하는데, 갑작스레 변통해야 할 예법이라도 생기면 늘 근거가 없음을 걱정하며 이를 정하는 동안 많은 신경을 쓰게 되기 때문에 한 말인 듯하다.
형조의 권한이 줄어든 사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형조는 나라를 세운 초기에는 업무상 권한이 사헌부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형벌과 옥사에 관련된 사건은 "형조에서 아뢰기를……" 하면서 직접 탄핵하였는데, 이런 관행이 언제부터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법을 어기는 것을 금하는 점에서는 사헌부와 같고, 도둑을 처벌하는 기능에서 보면 의금부의 권한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공조 창고를 유독 엄히 감독하는 까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공조는 다른 관청들과 마찬가지로 육조의 하나인데도, 창고의 물품을 출납할 때면 반드시 사헌부 감찰을 불러 놓고 출납한다. 그뿐 아니라 호조의 낭관이 수시로 그 창고를 순회하는데, 마치 호조 자신의 창고를 도는 것과 다름없이 하니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노비 소송을 형조가 아닌 장례원에서 맡는 까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형조가 관장하는 업무는 옥사를 다스리는 것만이 아니라, 숨은 인구를 찾아내는 일도 전담한다. 그러므로 중국 조정에서는 해마다 호구책을 반드시 형조에 해당하는 관청에 보내고, 그 관청이 이를 접수하여 위에 아뢰어 재가를 받은 뒤에 호적을 다루는 관청에서 보관하는 것이 관례다.
우리나라에서는 호적 장부를 모두 호조에서 다루고 형조는 관여하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노비에 관한 소송도 모두 장례원의 판결에 따르고 있는데,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노비를 관장하는 업무도 예전에는 형조에 속해 있어서 도관사가 노비 관련 소송을 전적으로 다루었는데, 지금은 별도로 관청(장례원)을 두어 관제만 번거로울 뿐이다.
승지 자리의 무게와 박원종의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승정원은 임금의 말을 전달하는 곳으로서 그 임무가 매우 중요하므로 조정에서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당상관 중에서도 이조나 사간원의 대사간을 지낸 사람이라야 겨우 맡을 수 있었다.
평성군(봉호가 평성) 박원종 같은 사람을 승지로 임명하였다가,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자리를 바꾸어 병조 참의를 내린 것이 이런 경우다.
근래에는 승지에 대한 물망이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보다 아래에 있다. 또 조선 초기부터 반드시 무신 한 사람씩을 승지로 참여시켰는데, 이는 대개 그 사람의 명망을 키워 훗날 크게 쓸 밑거름을 만들고자 해서였다. 그래서 서북 지방(서쪽은 황해·평안도, 북쪽은 함경도)의 장수는 모두 승정원을 거친 사람 가운데서 임명하였다. 그런데 근래에는 선왕(선조) 때의 남언경과 양사형 이후로는 한 사람도 없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승지가 된 이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근래에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서 승지가 된 사람은 내암(정인홍의 호)과 한강(정구의 호) 두 사람이다. 한강은 예방 승지로서 전시(임금이 참석하는 마지막 과거 시험)의 시험관이 되었으니 이 또한 특이한 일이다.
얼마 전에 강명지(자가 명지, 강복성)가 승지에 임명된 것은 임금이 세자 시절부터 그를 가르친 스승이었던 수고 때문이었다. 간옹(홍가신의 호)은 비록 승지는 되지 못했지만 형조 판서가 되었고, 서인원은 강원도 감사가 되었으며, 이 밖에 참의가 된 사람은 겨우 두세 명뿐이다.
선왕(선조) 때에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얻은 벼슬(남행)로 사헌부 벼슬을 한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과감하게 직언하여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이도 있었다. 간옹이 장령(사헌부의 정4품 벼슬)으로 있을 때 "안여경을 부윤으로 임명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아뢰었는데, 임금이 이에 노하여 안여경을 부윤 자리에서 물러나게 함과 동시에, 이후로는 과거를 거치지 않은 사람을 사헌부 관원으로 삼지 못하게 하였다.
4조 낭관에 남행 출신이 늘어난 사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왕(선조) 초년에는 형조·공조·호조·병조 네 관청의 낭관을 과거를 거치지 않은 사람(남행)과 무과 출신을 섞어 임용하였는데, 모두 명망 있는 사람 중에서 골랐다.
중년에 들어서는 이를 뽑는 일을 매우 신중히 하여 남행과 무과 출신은 일절 임명하지 않다가, 대신들이 경연에서 예전처럼 남행과 무과에서도 뽑는 제도를 되살리자고 청하여 겨우 이경욱이 호조 낭관, 이경준이 형조 낭관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모두 승진하였다. 전란 뒤에는 인재가 부족하여 되는대로 구차하게 자리만 채웠다.
근래에는 네 관청 낭관의 절반 이상이 남행 출신인 데 반해, 문관으로서 등용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백여 명이나 되므로 이를 논의하는 사람들이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문관으로서 형조와 호조의 낭관이 된 사람들도 대부분이 시험을 거쳐 뽑힌 사람이 아닌 데다 무능한 자들이 많다. 이 때문에 당상관으로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남행 출신 낭관을 찾게 된다. 이는 현재의 상황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감찰의 위세가 예전만 못한 사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감찰(사헌부의 실무 관원)의 임무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고려와 우리나라 초기에는 이를 뽑아 임명하는 데 매우 신중을 기하였다. 관청에 참알할 때마다 대관(사헌부 관원)의 잘못을 종이에 적어 품에 간직했다가 달려 들어가 뜰에 떨어뜨렸다. 재상 중에 탐욕스럽고 부패한 자가 있으면 밤에 그 집 문간에 모여서 대문에 먹을 칠했다. 그러면 그 재상은 감히 조정에 나오지 못했고 조정에서도 다시 등용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사헌부에 나올 때면, 비록 왕자나 대신이라도 이들을 만나면 말에서 내렸다.
지금도 뜰에 달려 들어가는 예법과 먹을 묻힌 자를 지니는 것은 예전과 같으나, 잘못을 적은 글을 품에 간직하는 것과 대문에 먹칠하는 것은 시행되지 않은 지 오래다. 사헌부에 나올 때 왕자나 대신이 말에서 내리는 것은 예전과 같다고 한다.
감찰을 청하는 값과 재종형 "강홉랑" 이야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각 관청에서 연말에 감찰의 검사를 청할 때는(청대) 그 관청의 아전이 사헌부에 값을 치르는데, 이 일은 수석 아전이 파견된 감찰과 의논한다. 이때 어물어물 너그럽게 처리해 주는 감찰인 경우에는 값이 비싸고, 강직하고 꼼꼼해서 속일 수 없는 경우에는 값이 싸게 마련이니 그 유래가 오래된 일이다.
나의 재종형인 허체는 감찰로 있었는데, 성품이 매우 총명하고 꼼꼼하여 아전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았으며, 또 모질고 박정해서 숨긴 것을 찾아내기를 좋아하였다.
하루는 혜민서(의약을 맡은 관청)의 약재 담당 아전이 형의 집에 와서 약을 짓고 있기에, 내가 장난삼아 "요즘 감찰에게 주는 값이 가장 싼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물었더니, "허 감찰은 피 쭉정이 다섯 홉입니다" 하였다. 이에 온 집안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전해 가며 웃었고, 재종형을 "강홉랑"(쭉정이 다섯 홉 도령)이라고 불렀다.
집현전에서 홍문관으로 이어진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선에서는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학에 능한 선비를 가려 뽑아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게 하였다. 인원은 스무 명을 두었는데, 그중 열 사람은 경연관을 겸임하고 열 사람은 세자를 가르치는 서연관을 겸임하였다. 교대로 숙직하였고 임금의 은혜와 예우가 특별하였는데, 세조 때 이를 폐지하고, 다만 문관을 뽑아 예문관 응교를 겸임시켜 경연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 뒤 성종 초에는 예문관에 부제학 이하 수찬까지 모두 열일곱 명을 두어 경연관을 겸임시켜 집현전의 옛일을 잇게 하였는데, 얼마 뒤 홍문관으로 이름을 고쳐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예문관이라 부르던 시절에, 노분(자가 사문)이 교리로 있다가 죽었는데, 그 증손 노사회가 수령으로 부임하며 신원 조사(서경)를 받을 때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모두 "홍문관을 예문이라 잘못 썼다"며 서류를 되돌려 보냈는데, 이는 모두 옛일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문형이라는 칭호를 얻는 조건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선 초기에는 과거의 상시관을 맡은 사람이 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대사성을 겸해야 "문형(문단의 저울대, 즉 문단의 우두머리)"을 맡았다고 하였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비록 상시관의 일을 실제로 하더라도 문형에는 끼지 못하였으니, 안지와 박원형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성종 이후로는 홍문관·예문관 두 곳의 대제학과 성균관을 관장하는 지성균관사를 겸임해야 문형을 맡았다고 하였다.
홍문관 당직을 둘러싼 완평부원군의 인정 많은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홍문관에 당직 서는 일은 누구나 괴롭게 여겨 피하려 들지만, 선왕(선조) 때의 승지 성낙은 유독 더 당직을 거절하였고, 당직을 서더라도 곧 나가 버리곤 하였다.
그때 나의 둘째 형과 판중추부사 김수, 이조 판서 김찬, 호조 판서 이성중, 완평부원군 이원익, 좌의정 김응남이 함께 홍문관에 있었다. 이들이 서로 약속하기를 "성낙이 당직에 들거든 정해진 날짜대로 교대해 주지 말자" 하였다. 이런 약속이 있은 뒤, 성낙이 당직을 선 지 겨우 하루 만에 또 나가려 하여 홍문관의 아전을 몹시 심하게 매질하며 다그쳤다. 이에 아전이 여러 집을 다니며 교대해 줄 사람을 알아보았지만 모두 거절하였다. 남은 사람은 완평부원군뿐이었으나, 당직을 막 마치고 나온 터라 감히 청하지 못하였다. 일이 급해지자 시험 삼아 찾아가 부탁하니 완평부원군도 처음에는 응하려 하지 않다가, 아전이 서럽게 울면서 "여든 노모가 추운 옥중에 갇혀 계신데 이러다 돌아가시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하였다. 그때 완평부원군도 노모를 모시고 있던 터라 측은한 마음이 들어 교대를 허락하였다. 아전은 뛸 듯이 밖으로 나와서는 손뼉을 치며 "이 교리는 참으로 성인이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밤중 경연 술자리에서 이름을 날린 두 주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대개 임금이 밤중에 신하를 불러 만나는 야대가 있는 날에는, 반드시 임금이 술을 많이 권하여 흠뻑 취한 뒤에야 자리를 끝내었다. 술잔이 돌아오면 주량이 적은 사람은 실수할까 걱정되어 머뭇거리며 즉시 마시지 못하였다.
나의 둘째 형은 대개 큰 잔으로 마셨는데, 잔이 돌아오면 즉시 다 마셔 버렸다. 술을 따르는 내시는 아직 술이 남았으리라 생각하고 머뭇거리며 잔을 되받지 않았으나, 임금은 형이 벌써 다 마신 것을 알고는 웃곤 하였다.
당시에 술 마시는 사람 중에서 승지 강서가 형의 맞수였는데, 홍문관의 아전이 장부에 "허 전한과 강 교리는 술을 아낀다"라고 써 놓았는데, 여기서 "아낀다"는 것은 사실 "좋아한다"는 뜻으로 쓴 말이라, 보는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홍문관의 술 솥에 이름을 새긴 두 사람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홍문관에는 술 닷 되들이쯤 되는 무쇠솥이 하나 있는데, 이것으로 시원하게 단숨에 마시면 그 이름을 솥에 새겼다. 솥에 이름이 새겨진 사람은 예전에는 김천령뿐이었는데, 둘째 형의 이름이 비로소 그 뒤를 이어 새겨졌다.
예문관 신참 시절의 엄한 위계와 중시 장원 이야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승문원·성균관·교서관·예문관 네 관청의 풍속 가운데 아랫사람을 단속하는 것이 가장 심한 곳은 예문관이다. 자리마다 위계가 엄중해서 마주 앉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당직에서 마음대로 나가는 것도 용납되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방자하게 굴면 심한 매질을 당하였다.
갑오년(1594년) 여름에 내가 사관(역사 기록을 맡은 벼슬)으로 천거되었으나 상복을 입게 되어 시험에 응하지 못하였고, 정유년(1597년) 봄에야 비로소 예문관에 들어갔다.
심대(자 중경)와 이대중 등은 모두 나보다 늦게 관직에 들었는데도 나보다 윗자리에 있으면서 몹시 까다롭게 굴었다. 그때 다시 보는 과거 시험(중시)이 있었는데, 규정상 한림원의 아랫사람은 응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이 두 사람에게 응시를 청하였더니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시험을 며칠 앞두고 내가 공무상의 일로 파직되는 바람에 오히려 시험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뽑혔다.
예조의 낭관으로 임명되어 임금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대궐에 들어갔을 때, 윗자리에 있던 심학이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심중경이 사헌부·사간원에서 올라온 말을 접수하여 심학이에게 알리러 들어왔다. 관례상 선배가 그 자리에 있으면 후배가 먼저 선배에게 인사한 다음 윗사람에게 말을 전하게 되어 있었다.
이날 심중경이 먼저 내 앞에 엎드려 인사하고 나가므로, 내가 "중시에서 장원한 것은 별로 기분 좋은 줄 몰랐는데 이제야 기분이 좋다" 하였더니, 심학이가 크게 웃었다.
중시 장원 급제자들의 계보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선에서 맨 처음 시행한 중시(현직 관원을 대상으로 다시 보는 과거)에서는 춘정(변계량의 호)이 장원하였고, 그다음 회에는 김자가 장원하였으나 그의 답안은 사실 양여공이 대신 지어 준 것이었다. 양여공은 문장에 능했다. 그 뒤에 장원한 하동부원군 정인지, 남수문, 근보(성삼문의 자)는 모두 이름난 대가였다.
이영근은 나이도 어리고 명망도 없었는데 갑자기 장원하고, 김수온과 서거정이 도리어 2등과 3등에 그치자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으나, 이영근도 실은 글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 이후로도 중시에 합격한 사람은 모두 문장으로 이름난 사람이었는데, 나같이 재주 없는 사람이 그 안에 끼었으니 과분한 일이다.
중시를 대하는 사대부들의 서로 다른 태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선 역대 임금 때 사대부는 중시를 가장 중히 여겼다. 모재(김안국의 호)가 중시를 준비할 때 표문과 대책문을 많이 연습하였는데, 시험장에 들어가 보니 평소 대책문에 능한 대사헌 권홍도 응시한 것을 보고 모재가 말하기를 "내가 장원하려 하였는데 이분이 응시하였으니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발표하는 날 보니 과연 권홍이 장원이고 김안국은 2등이었다. 그런데 선왕(선조) 이후로는 이름난 관원은 으레 응시하지 않는데, 이것을 좋은 일로 여기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무릎을 꿇지 않으려던 사람들 이야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명종 11년(1556년) 중시에서 김홍도는 대책문은 짓지 않고 술만 마시면서 "이 무릎을 남에게 굽힌 적이 두 번밖에 없는데, 지금 양응정이 응시하였으니 내가 이연성 꼴이 될까 두렵다" 하였다. 이는 대개 연성군 이석형이 한 해에 세 번이나 장원하였으나 중시에서는 6등에 그치자, 근보(성삼문)의 집에 가서 절을 하며 "이 무릎을 남에게 굽힌 지 오래되었소" 한 데서 나온 말인데, 근보가 웃으며 "남에게 굽히지 않던 무릎을 내가 굽혔군" 하였다는 고사이다. 김홍도 역시 진사시와 문과에서 연이어 장원하였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대필 답안을 알아본 시험관의 안목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성종 17년(1486년) 중시에 정승 강귀손이 응시하였는데, 마침 그의 장인의 아우인 허백(성현의 자)이 승정원의 도승지로 궁궐 안에 있었다. 강귀손의 아버지인 진산(진산군 강희맹)은 오위도총부의 총관으로 당직을 서다가 허백에게 "우리 집안에서 잇달아 장원하는 것도 좋은 일이니, 그대와 내가 귀손의 대책문을 지어 주는 게 어떻겠나?" 하였다. 이리하여 서두에서 중간까지는 강희맹이 짓고, 그 뒤부터 끝까지는 성현이 지어서 강귀손에게 그대로 베껴 내도록 하였다.
당시 시험관이었던 사가(서거정의 호)와 삼탄(이승소의 호)은 모두 무릎을 치며 감탄하고 마땅히 1등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상시관으로 참석했던 괴애(김수온의 호)는 자는 척하며 귀담아듣지 않았다. 다른 시험관들이 의견을 물으니 "등수를 고치라"고 하였다. 다시 물어봐도 같은 대답이었다. 밤이라 피곤해서 그런가 하고 답안을 보관해 두었다가 새벽에 다시 읽어 보고 다시 의견을 물으니, "차상(그다음 등급)으로 매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모두들 이상하게 여겨 "이 글이 매우 훌륭한데 어째서 등수에도 들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김수온이 웃으며 "이 글의 작자가 성씨나 강씨 집안의 자제가 아니라면 마땅히 장원감이다" 하였다. 급히 답안지의 이름 봉한 부분을 뜯어 살펴보니, 과연 강 정승의 글이었다. 김수온이 "나는 강희맹과 함께 공부하였고 성현은 나에게 배웠으니, 그들의 글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저기까지는 강의 글이고 저기서 여기까지는 성이 지은 것이다. 내가 어찌 그들에게 속아서 나라의 시험을 그르치겠는가" 하니, 모두가 탄복하였다. 결국 강귀손의 답안은 빼 버리고 신종호를 장원으로 뽑았다고 한다.
문과 장원보다 사마시 장원을 더 귀하게 여긴 풍속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의 풍속은 문과의 장원은 그리 중시하지 않고, 사마시(생원시·진사시)의 장원을 더 귀하게 여긴다. 사마시는 문장의 우열을 따지지 않고 1, 2등 십여 명을 뽑으며 사람됨을 가려서 뽑기 때문에, 한번 합격자 명단에 들면 평생토록 존경을 받는다.
조선의 이석형과 배맹후는 생원시와 진사시 모두에서 장원하였다. 모재(김안국)가 이를 흠모하여 생원시와 진사시 두 시험에 모두 응시하였다. 둘 다 잘 지어 마땅히 둘 다 장원이 되어야 했으나 시험관이 한쪽 시험의 등수를 깎아 2등으로 만들었으므로, 모재는 늘 마음속으로 이를 분하게 여겼다.
그 뒤 자신이 시험관이 되었을 때, 김구가 두 시험장에서 지은 글이 나란히 1등감이었으므로 힘써 주장하여 두 시험 모두에서 그를 장원으로 뽑았다고 한다.
독서당의 연혁과 인재 양성의 전통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세종 때 처음으로 독서당을 설치하여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함으로써(사가독서) 훗날 크게 등용하려 하였는데, 당시에는 산속 절에서 책을 읽는 경우가 많았다.
맨 처음에는 권채·신석조·남수문이 사가독서를 하였고, 다음은 성삼문·신숙주·박팽년이 하였으며, 또 그다음은 이석형·최항·성간·이영서·하위지·이개·김수온·서거정·이승소·강희맹이 잇따라 하였다.
문종 때에는 홍응·홍귀달·어세겸·박기년이 사가독서를 하였다. 흉년이 들면 이 제도를 중단하였고, 특별한 이유 없이 사가독서를 시키지 않은 때도 있었다.
성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성현·채수·조위·허침·양희지·권건·유호인 등에게 용산사에서 책을 읽도록 하였다. 이때부터는 결원이 있으면 보충하였고, 동호(한강 동쪽 호수)에 독서당을 지어 어엿한 하나의 관청이 되었다.
중종 때에는 시험하여 성적을 매기는 방법이 매우 엄해져서, 잇달아 두 번 낙제하면 도태시켰다. 이들에 대한 특별한 은전과 대우는 홍문관에 못지않았는데, 전란이 일어나자 폐지되었다.
지금 임금(광해군) 초년에 대신과 의논하여 다시 설치하도록 명하여 이이첨 등 열두 명을 선발하였으나, 이듬해에 흉년이 들어 우선 중단하였다.
독서당원은 마흔 살이 안 된 사람 중에서 뽑는 것이 관례였는데, 청련(이후백의 호)이 처음으로 마흔 살에 뽑혔고, 이이첨은 마흔여덟 살에 뽑혔으니 파격적인 일이다. 당상관의 신분으로 사가독서를 한 사람은 박민헌과 이덕형이다.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 시를 대신 지어 준 이야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반드시 그 시대에 문장으로 이름난 사람을 뽑아 맡겼다. 박원형과 허종은 모두 훌륭한 풍채와 예의 바른 몸가짐으로 중국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박원형이 방주(명나라 유태의 호)와 주고받은 시와, 허종이 규봉(명나라 동월의 호)과 주고받은 시는 모두 종사관으로 수행한 삼탄(이승소)과 삼괴(신종호의 호)가 대신 지어 준 것이었다.
원접사와 종사관을 세 번씩 지낸 사람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연성군 박원형은 세 번 원접사(중국 사신을 국경까지 마중 나가 맞이하는 사신)가 되었고, 호음(정사룡의 호)도 세 번 원접사가 되었으나, 그중 한 번은 환관을 접대한 것이므로 박원형만큼 영예롭지는 못하다.
세 번 종사관이 된 사람으로는 삼탄(이승소)이 있고, 나도 세 번이었으나 그중 한 번은 환관을 접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접대한 유 태감은 시를 잘 지어서, 시를 주고받는 데 따르는 괴로움이 한림원이나 감찰·간쟁 담당 관원이 왔을 때보다도 더 심하였으니, 호음이 조용히 넘긴 것에 비하면 훨씬 힘이 들었던 셈이다.
낮은 벼슬로도 종사관이 된 특별한 사례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규봉(동월)이 중국 사신으로 왔을 때 허충정(시호가 충정인 허종)은 종사관 두 사람을 데리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삼괴(신종호)였고, 한 사람은 직장 박증영이었다. 참하관(7품 이하의 낮은 관원)으로서 종사관이 된 것이다. 그 뒤 주지번과 양유년이 왔을 때에는 조희일(자 이숙)이 박사에서 전적으로 특별히 승진하여 종사관이 되었으니, 이 또한 임금의 특별한 은혜였다.
사신 접대에 문장 담당자를 딸려 보낸 관례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는 반드시 글씨와 문서를 담당하는 사람을 따로 두었다. 조선에서 조신·홍유손 같은 사람을 등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시를 짓는 관원(제술관)을 따로 데리고 간 일이 없었는데, 임인년(1602년)에 고천준과 최정건이 왔을 때 월사(이정귀의 호)가 김현성·차천로·권필 세 사람을 데리고 갔고, 병오년(1606년)에 서경(유근의 호)이 다시 김현성과 권필 두 사람을 데려가겠다고 청하였으나 권필은 사양하고 김현성만 수행하였다. 기유년(1609년)에 서경이 또 차천로와 양경우를 데리고 갔는데, 이로부터 이것이 정해진 관례가 되었다고 한다.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급제가 취소된 정번과 한리학관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적암(조신의 호)은 규봉(동월)이 왔을 때부터 자양이 왔을 때까지, 그때마다 의전 실무를 맡아 직무를 잘 처리하였다. 이때는 아직 중국어 문서를 다루는 한리학관이라는 벼슬이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적암이 그때마다 의원이라는 직함으로 오갔다.
그 뒤 정번을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과거 합격자 명단에서 삭제하는 대신, 한리학관이라는 벼슬을 새로 만들어 그를 이 자리에 앉혔다. 이후로는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이 한리학관에게 글씨와 문서를 맡겼으니, 정번·어숙권·정화·박지화·권응인 등이 잇따라 이 일을 맡아 하였다.
지금은 이재영이 이 일을 모두 네 번이나 맡았는데, 무리 중에서 가장 민첩하고 총명하여 서경(유근)이 매우 감탄하였다. 그래서 주지번·양유년과 주고받은 시는 대부분이 그가 지은 것이라 한다.
놀라운 기억력을 지닌 사람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총명하고 민첩하기로 이름난 사람이 조선 이래로 많이 있다고 하지만,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므로 믿을 수가 없다.
근세에는 윤계선(자 사문)이 가장 총명하다고 이야기된다. 내가 태복시(임금의 말과 수레를 관장하던 관청)에 재직할 때였다. 어느 날 그가 태복시로 나를 찾아왔다. 마침 말 삼백여 필의 털빛과 사는 지명, 기르는 사람의 이름을 적은 말 명부(마적책)가 옆에 있었는데, 윤계선이 이를 한 번 보고는 다 외웠다. 사흘이 지난 뒤에 그의 집에 가서 물어보니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진사 임숙영도 중국 조정의 《이력편람》(관원들의 이력을 정리한 책)을 보고는 정확하게 다 기억하였다. 이 두 사람은 참으로 탄복할 만한 사람들이다.
족보에 통달한 두 사람의 밤샘 토론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서천(정곤수의 호)은 역사와 문헌에는 그리 총명하지 못했으나 족보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잘 알아서 막힘없이 줄줄 외웠다. 이실지(자, 이춘영)도 족보에 능통하였고 아울러 문장과 역사에도 해박하였지만, 문장과 역사보다는 족보에 대한 지식이 더 뛰어났다.
한번은 서천이 이실지와 강가에서 만났는데, 밤을 지새워 가며 족보에 관해 논변하였다. 나도 그 곁에서 듣고 있었는데, 지금의 이름난 가문치고 그 조상의 계보나 외가 쪽 갈래 가운데 흠 없는 집안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내용은 몰라서는 안 되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혹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을 염려도 있으니 말이다.
나의 조상과 권한공의 뜻밖의 인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내가 젊은 시절 당숙인 참봉공의 집에서 《고려사》를 뒤적이다가 권한공의 전기를 보고 그 옳고 그름을 논하였더니, 참봉공이 "어린 사람은 말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나라 재상들의 허물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하시면서 집안 족보를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는데, 알고 보니 권한공은 나의 5대조 호군 어른 부인의 외증조부였다.
내가 이 일이 있은 뒤로 5대에 걸쳐 안팎의 조상을 널리 조사해 보니, 고려 이전에 눈에 띄게 벼슬한 집안치고 나의 조상과 관계없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족보 세 권을 만들어서 자식과 조카들에게 보게 하였다.
여덟 고조를 아느냐고 물은 정곤수의 가르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내가 한번은 정서천(정곤수)을 찾아가니 그가 갑자기 "자네는 여덟 고조를 아는가? 하나하나 말해 보게" 하였다. 내가 여덟 고조가 무엇인지 몰라 멍하니 있으니, 서천이 "친조부모와 외조부모, 어머니의 친조부모와 외조부모, 그리고 아내의 친조부모와 외조부모다" 하였다. 내가 마침내 하나하나 헤아려 여덟에 이르니, 그가 "자네는 여덟 고조를 아니 참으로 조상을 잊지 않는 사람이군. 내가 이것을 물어보면 백 명에 한두 사람도 아는 이가 없더군. 자손으로서 자기 조상을 몰라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생각해 보면 그 말이 참으로 옳다.
명나라 황제가 감탄한 조선의 천리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사가(서거정의 호)의 《필원잡기》를 보면, 태종은 말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고 한다. 태종이 여윈 말을 일부러 골라 상급으로 쳐서 명나라에 조공으로 보내니, 성조(영락제)가 보고 "이것은 하늘이 낸 말이다. 너희 왕이 나를 아끼는구나" 하였다.
내가 언젠가 《증자계집》을 보니 〈천마가〉라는 시가 실려 있는데, "영락 연간에 조선에서 누런 말을 조공으로 바쳤는데 매우 좋은 말이었으므로 임금이 〈천마가〉를 짓도록 명하였다" 하였으니, 아마 이때 바친 말이 아닌가 싶다.
중국 황실에 딸을 보낸 집안이 누린 특별한 은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 여자로서 중국 조정에 뽑혀 들어가 황제를 모신 이는 누구나 총애를 받았다. 그 덕분에 권영균·여귀진·최득비는 그 아버지나 오라비가 높은 벼슬(열경)에 올랐고, 조선에 있으면서도 중국의 녹봉을 받았으니, 왕감주(왕세정의 호)가 〈이전술〉이라는 글에서 "외국인이 중국 관직을 지니고서 외국에 살고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 경우이다.
양절공 한확은 누이동생 두 사람이 중국 조정에 들어갔으므로 불러다 광록소경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조서를 받들어 우리나라에 반포하게까지 하였으니 더욱 특별한 은전이었다.
어진 환관 김영과 그를 아낀 명나라 효종의 선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내시로서 중국 조정에 들어간 사람은 대대로 있었는데, 홍치 연간(명나라 효종 때)에 이르러 더 이상 뽑아 보내지 말도록 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에 끼치는 폐해를 한 가지 덜어 준 것이니, 이를 명한 효종 황제는 참으로 성인이었다.
태감 김영은 안동 사람으로 중국 조정에 들어가 사례감 태감이 되어 헌종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사신이 되어 본국에 나오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내가 어찌 우리 국왕을 대등한 예로 만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를 보면 그는 어진 사람이었다. 이로 보아 중국의 역사 기록에 "김영은 겸손하고 사리를 알았으며, 바른 사람을 보호한 공이 있다"고 한 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조공로를 지켜 낸 명나라 관리 유대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가 중국에 조공하러 가는 길은, 해주에서 광녕을 거치지 않으면 곧바로 영원위로 통하게 되는데, 이 길은 오랑캐 지역과 가깝지 않고 또 빠르다.
내시로 중국 조정에 들어간 사람이 우리 사신과 의논하여 헌종 황제에게 아뢰어 조공로를 바꾸려 하니, 병부의 항충은 그대로 따르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동산(호) 유대하가 병부 직방사에 재직하고 있었는데, 이를 고집하고 허락하지 않으면서 "조선의 조공로는 애초에 명나라 초기 임금들이 상세히 정한 것으로서, 서너 곳의 큰 진영을 우회하여 산해관에 이르게 한 것은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니 경솔하게 고쳐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항충이 그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전 길 그대로 조공하고 바꾸지 못하였다.
중국 과거에 응시할 길이 막힌 억울한 사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의 인재가 중국 조정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된 것은, 고려 때 홍륜이 임금을 시해하고 김의가 중국 사신을 죽였기 때문이지, 우리 조선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런 사실을 들어 중국에 요청한다면 중국에서도 들어주지 않을 리가 없는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옹졸하고 남다른 절조가 없는 데다 멀리 나가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런 나쁜 평판을 뒤집어쓴 채 외국인을 위한 과거(빈공과)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내가 한번은 낭중 가유약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안남(베트남)과 유구(오키나와)는 모두 빈공과에 응시한다. 안남 출신 진유는 정덕 연간(명나라 무종 때)에 과거에 급제해서 우도어사를 지냈고, 완악은 가정 연간(명나라 세종 때)에 급제해서 공부 우시랑이 되었으며, 손응오는 본국에서 도망하여 광서 지방에 살다가 역시 과거에 합격하여 예부 시랑이 되었다. 지금도 향시나 회시 합격자 출신으로 지방 관리로 있는 자가 다섯 사람이나 있다." 이 말을 들으니 힘이 솟구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종계변무에 숨은 공로자, 허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 왕실 계보가 중국 기록에 잘못 실린 것을 바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선왕(선조)이 정성을 다하여 호소하고 변론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영양(봉호) 허국이 당시 내각에 있으면서 주선해 준 공이 있었다. 대개 허국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때, 마침 우리는 국상을 당해 몹시 경황이 없을 때였다. 그런데도 예우와 정성에 절도가 있었으므로, 그가 우리의 정성을 매우 아름답게 여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가 조정에 있으면서 힘써 주장하여 우리나라의 억울함을 씻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형 군문(형개)과 석 상서(석성)를 제사 지내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허국도 마땅히 함께 제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 왕실이 삼국시대 왕성 가운데 가장 번성한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 이래의 왕성 가운데 박씨와 김씨 두 성씨보다 더 번성한 성이 없다. 석씨와 고씨, 부여씨는 이제 아예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왕씨(고려 왕실)가 줄어든 것은 왕자들이 으레 승려가 되었기 때문에 종실의 성씨가 적어진 것이다. 고려가 망할 때에는 남은 종실이 겨우 오십여 명이었다.
조선은 뿌리가 깊고 잎이 무성하여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내가 전에 왕실 족보를 편찬하는 관원으로 있을 때 헤아려 보니, 종실 중에서 관대를 물려받아 녹봉을 받는 사람이 삼백여 명이고, 조정의 문관·무관과 과거를 거치지 않고 얻은 벼슬(남행)로 벼슬하는 사람도 백여 명이었다. 이 밖에 유생과 충의위(왕실 후손을 위한 군직), 무인에서부터 아래로 곁가지와 서얼에 이르기까지 천여 명에 가까웠으니 번성하다고 할 만하다.
왕실 성씨로서 정승에 오른 두 사람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왕실과 같은 성씨(전주 이씨)로서 정승이 된 사람은 두 명이니, 완평부원군 이원익과 완성부원군 이헌국이다. 두 사람 모두 나라를 세우거나 지키는 데 으뜸가는 공을 세운 공신이면서 정승으로서의 업적까지 남겼으니, 우리나라에서는 전에 없던 일이다.
성소부부고 제23권
10. 14:40
성소부부고 제23권 · 설부 2 · 성옹지소록 (중)
출처: 성소부부고 제23권, 설부 2, 성옹지소록 중
배경: "성옹지소록"은 허균이 스스로를 가리키는 별호인 "성옹"을 앞세워 지은 견문록으로, 조선 초기부터 자신이 살던 당대까지 이름난 재상과 학자, 선비들에 얽힌 크고 작은 일화를 두서없이 적어 내려간 글이다. 이 권에는 황희와 김종서 같은 나라를 세운 초기의 명재상들부터,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겪은 선비들, 허균 자신의 아버지와 두 형이 가르침을 받은 스승들, 그리고 임진왜란을 이끈 선조 시대의 대신들에 이르기까지 쉰 편이 넘는 짧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각 이야기에는 원문에 없는 소제목을 옮긴이가 붙여 내용을 짐작하기 쉽게 하였다.
일러두기: 이 글에는 조선 시대의 관직과 제도를 가리키는 말이 자주 나온다. "문형"은 나라의 글을 총괄하는 대제학의 별칭이고, "지제교"는 임금의 문서를 짓는 벼슬이며, "홍문록"은 홍문관 관원이 될 후보로 오른 명단을 말한다. "향안"은 지방에서 대대로 이름난 사대부 집안 출신만을 골라 이름을 올리던 명부이고, "궤장"은 임금이 나이 많은 공신이나 대신에게 내리던 지팡이와 앉는 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가독서"는 젊고 유능한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오로지 책만 읽게 하던 제도이고, "독서당"(또는 "호당")은 그들이 머물며 공부하던 곳이다. "계유정난"은 1453년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이 반대파 대신들을 없애고 정권을 잡은 사건이며, "기묘사화"는 1519년, "을사사화"는 1545년에 각각 조정에서 뜻있는 선비들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대광보국숭록대부"는 신하가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품계이다. 이런 말들은 문맥에서 필요할 때마다 짧게 풀어 놓았다.
황희와 허조 — 나라를 세운 초기의 명재상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라를 세운 초기의 이름난 재상으로는 황희와 허조를 꼽는다. 언젠가 《세종실록》을 살펴보니 이 두 사람이 특별히 무언가를 앞장서서 건의한 것은 없고, 다만 임금이 조금이라도 지나친 행동을 하면 반드시 굳게 고집하며 따르지 않았을 뿐이었다.
황희는 관리를 임명하는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고 제도를 함부로 바꾸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허조는 문학적 재능으로 조금 꾸미기는 했으나 조심스럽게 바른 법도를 지켰다.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다스리는 큰 그릇이나 시대를 구제할 만한 재주를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진 신하들이었다.
황희가 김종서를 엄히 대한 까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익성공 황희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 김종서는 호조판서로 있었다.
하루는 삼정승과 육조 판서들이 대궐에서 회의를 하는데 해가 저물자, 김종서가 간단한 밥상을 준비해 왔다. 황희는 그 밥상을 물리치고는 조정의 자리에 앉아 김종서를 불러 섬돌 위에 세워 놓고, 규정에도 없이 사사로이 음식을 대접한 일을 꾸짖었다. 말이 매우 엄하니 김종서는 진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였다. 한참을 그렇게 세워 두었다가 돌려보냈으니, 황희가 규범을 지키는 태도가 이와 같았다.
황희가 나랏일을 맡아보는 동안 김종서는 여러 차례 병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지냈는데, 한 가지 일이라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황희는 심하게 꾸짖고 때로는 그의 종을 매질하거나 몸종을 가두기까지 하였다. 동료들은 모두 너무 심하다고 여겼고, 김종서 자신도 몹시 곤욕스럽게 여겼다.
하루는 정승 맹사성이 물었다. "김종서는 당대의 이름난 재상인데 공은 어찌 그리도 심하게 대하십니까?"
황희가 대답했다. "이것은 내가 종서를 훌륭한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종서는 성품이 강직하고 기세가 날카로워 일을 과감하게 처리하니, 훗날 우리들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 때 스스로 신중하지 않으면 반드시 일을 그르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그 기세를 꺾어 경계하도록 하고 뜻을 단속하여 조심하게 함으로써, 일에 임하여 신중해지도록 하려는 것이 제 뜻이지, 그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맹사성이 이 말에 감복하였다. 훗날 황희가 사직을 청하면서 김종서를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하였다고 한다.
김종서가 함경도 북쪽 변경에 있을 때는 다스림이 매우 엄격하고 씀씀이는 매우 사치스러워 백성과 아전들이 그를 꺼렸다. 하루는 화살이 그의 책상에 날아와 꽂혔는데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의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여러 차례 독을 넣었으나 그를 죽이지는 못하였다.
무릇 잔치를 한 번 열면 부하 장교 백 명에게 저마다 쇠고기 다리 하나씩을 돌렸으므로, 어떤 사람이 낭비라고 간언하니 김종서가 이렇게 대답했다. "이 북쪽 변경은 우리 왕조가 일어난 곳으로, 선대 임금들이 개척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땅이다. 이제 다행히 이 땅을 개척하였으나, 장수와 병졸들이 이 먼 곳에서 십 년이나 수자리를 서고 있으니, 이렇게라도 잔치를 베풀지 않고서는 이들을 위로할 길이 없다. 더구나 이 일을 시작하는 마당에 쓸쓸하게 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비록 쇠고기 다리 하나씩을 쓰고 있지만, 십 년이 지난 뒤에는 닭다리 하나조차 넉넉지 못할 것이다. 장수와 병졸들이 노래를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게 되면, 대체 누구와 함께 이 변방을 지키겠는가?" 이 말을 듣고 간언하던 사람은 더는 말하지 못하였다.
김종서와 신숙주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종서는 신숙주를 천거하여 자신의 막료로 삼고, 그의 재주와 그릇을 지극히 아꼈다. 무슨 일을 계획할 때면 신숙주가 뒤에서 돕는 일이 많았다.
여진 지역에 아홉 개의 성을 설치하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를 두고 조정의 논의가 자신의 생각과 달랐으므로, 김종서가 글을 올려 이를 다투었는데 그 내용이 수만 자에 달하였다. 김종서가 신숙주에게 붓을 잡게 하고 자신은 입으로 부르는데, 마치 미리 지어 둔 글을 외우듯 줄줄 이어져 그치지 않았다. 신숙주는 명을 받들어 부르는 대로 받아 적으며 붓을 멈추지 않았는데, 한 글자도 되묻는 일이 없었고 한 자도 잘못 쓰거나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김종서가 감탄하여 말했다. "나는 본디 내 재주를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대야말로 참으로 드물게 보는 큰 재주로세."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날, 신숙주는 마침 관청에 있었다. 그의 부인은 남편이 반드시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스스로 목을 매려고 치마끈으로 목에 걸어 놓고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저물녘에 벽제 소리가 들리기에 알아보니 신숙주가 돌아온 것이었다. 부인이 치마끈을 풀며 말했다. "저는 당신이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신숙주는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허종과 허침 형제, 그리고 백세 할머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충정공 허종과 문정공 허침 두 형제는 모두 정승이 되었고 그 덕과 업적도 다 뚜렷하였으니, 우리나라에서 전에 없던 일이었다. 두 사람의 누님도 글과 행실,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고 백 살까지 사셨으므로, 집안에서는 지금까지도 그분을 "백세 할머니"라고 부른다. 두 형제는 이 누님을 매우 공손히 섬겼고, 조정에 중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찾아가 의견을 여쭈었다.
성종이 윤비를 폐위하려 할 때 두 형제가 누님에게 자문을 구하니, 이렇게 말하였다. "아들이 지금 세자로 있는데, 그 어미에게 죄를 준다면 어찌 나라가 편안하고 탈이 없겠느냐?" 이에 허종은 병을 핑계로 논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허침은 다른 의견을 내다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뒤 연산군이 정치를 어지럽히면서 "윤비를 폐위한 것이 마땅하다"고 논의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허침만은 홀로 화를 면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누님의 뛰어난 안목에 감탄하였다.
반정공신의 서열 — 성희안의 겸양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연산군을 폐위하는 일을 논의할 때, 성희안(창산)이 실로 그 계획을 가장 먼저 세웠고, 박원종(평성)이 여기에 참여하였으며, 유순정(청천)은 뒤늦게 참여하였다. 그런데 서열이 박원종과 유순정이 앞서고 성희안이 끝에 놓인 것은 원래 지니고 있던 벼슬의 등급에 따른 것이었다. 이것은 실은 성희안이 스스로 겸손하여 셋째 자리로 물러난 것이었다. 모든 일은 겸양해야 잘 이루어지는 법인데, 하물며 반정처럼 큰일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렇게 양보하여 큰 공을 이루었으니, 성희안의 안목은 따라갈 수가 없다.
성희안의 결단 — 형조참판 시절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성희안은 낮은 벼슬에 있을 때부터 이미 굳세고 과감하여 권력에 눌리지 않았다. 그가 형조참판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성균관 유생이 관아의 하인에게 모욕을 당하고는 동료들과 함께 이름을 나란히 올려 그 하인을 죽여 달라고 청하였다. 그런데 그 하인은 당시 영의정이던 신승선의 종이면서, 좌의정 이극배(광릉)의 여종의 남편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판서 한치형은 이 일의 죄를 판단하기 어려워 병을 핑계로 출근하지 않았다. 이 일로 이극배의 아우 이극돈이 성희안의 집을 두 차례나 찾아갔지만 병을 핑계로 만나 주지 않으니, 두 정승이 노하였다.
하루는 성희안이 조정에 나가자 두 정승이 그를 몰아세웠다. 성희안이 그 자리에서 여러 사람에게 대놓고 말했다. "여러 유생이 한낱 천한 종에게 얻어맞았으니, 그 종의 죄는 사형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나라의 법이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정승들을 위하여 이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임금께 아뢴 뒤에 저 스스로 물러나겠습니다." 두 정승은 부끄러워하며 사과하였다. 함께 있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성희안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물러나와 그 종에게 곤장을 쳐서 죽였으니, 그 결단력이 이와 같았다.
성희안의 안목 — 정광필을 천거하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성희안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일찍이 정광필(문익공)을 두고 참으로 정승이 될 만한 인물이라며 감탄하였다. 정광필이 함길도 감사로 있다가 우의정이 되어 돌아온 것도 모두 성희안이 천거한 덕분이었다. 당시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으나, 정광필이 훗날 기묘사화 때 선비들을 위해 공을 세우고 정승으로서의 업적도 훌륭하여, 시대는 다르지만 황희·허조와 나란한 명망을 얻게 되니, 사람들은 그제야 성희안의 안목에 감탄하였다.
박원종의 사치와 정사룡·황여헌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박원종(평성)은 영의정으로서 병조판서를 겸임하여 총애와 권세가 매우 높았다. 물러나려는 뜻으로 병을 핑계 삼아 도산의 별장에 가 있었는데, 조정에 큰일이 있을 때면 임금이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그때 정사룡(호음)과 황여헌(유촌)이 함께 병조의 낭관으로 있으면서 도산에 가서 자문을 구하곤 하였다. 박원종은 평소 사치를 매우 좋아하여 정원과 연못, 누각, 집을 크게 짓는 등 집을 매우 화려하게 꾸몄으며, 시중드는 첩 수십 명이 비단 치마를 입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능하였다. 박원종은 정사룡과 황여헌을 재주 있는 선비라 하여 매우 극진히 대접하였다. 진수성찬을 차리고 풍악을 울리며 술을 권하고, 시중드는 여종들에게 각자 시 한 수씩을 짓게 하여 잔뜩 취하고 한껏 즐긴 뒤에야 흩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반드시 박원종의 생활 가운데 한 가지를 본받겠다"고 다짐하였다. 정사룡은 만년에 음식을 사치스럽게 들었고, 황여헌은 큰 집을 짓고 여종에게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게 하였는데, 이는 모두 박원종을 흉내 낸 것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선비가 하는 일이 어찌 나라에 공을 세운 귀족과 같을 수 있겠는가.
정광필의 안목 — 황헌의 관상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광필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사람을 천거하거나 임용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용모를 살펴보았다. 그래서 그가 천거한 사람 가운데 높은 벼슬에 오른 이가 많았다.
정승 황헌이 막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서 정광필의 집을 찾아왔다. 정광필은 정성껏 음식을 대접하였다. 황헌이 하직 인사를 하자 일어나 전송하면서 그의 등을 한참 바라보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자제들이 이상히 여겨 까닭을 묻자 정광필이 말했다. "저 사람은 얼굴이 넉넉하면서도 수려하니 반드시 재상의 지위에 오를 것이다. 그런데 마시고 먹는 모습을 보니 반드시 빠르게 승진했다가 일찍 물러날 것이고, 등이 얼굴만 못하니 마땅히 자손이 없을 것이다." 황헌은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등용되었고, 막 정승이 되자마자 관직을 박탈당했으며 또 자식도 없었으니, 모두 정광필의 예언대로 되었다.
정광필의 식사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광필은 식사 때마다 자신이 먹고 남은 음식을 좌의정 정유길과 우의정 정지연에게만 먹게 하고 다른 자제들에게는 주지 않았다.
이헌국(완성)은 정광필의 먼 친척뻘 손자였는데, 어렸을 때 문안을 드리러 갔다. 마침 정광필이 식사 중이었고 정유길과 정지연 두 사람은 마침 집에 없었다. 식사를 마치자 정광필은 이헌국을 한참 바라보더니 여종을 불러 남은 음식을 걷어다 주게 하니, 이헌국이 그것을 먹고 물러나왔다. 여종들은 서로 눈짓을 하며 웃으면서 "저분도 정승이 될 상인가?" 하였다. 훗날 이헌국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고, 충직함으로 선조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여든 살에 세상을 떠났다. 정광필이 그의 관상을 보고 대개 짐작했던 것이다.
정사룡의 젊은 날과 만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사룡(호음)은 젊었을 때 행동을 조심하지 않아 정광필에게 칭찬받지 못하였고, 선비들도 이를 단점으로 여겨 지방으로 내쳐졌다. 기묘년(1519년)에 사화가 일어나자 그를 불러들여 사간으로 임명하니,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며 "저 사람이 오래 분한 마음을 품고 있었으니 반드시 분풀이를 하려 들 것이다" 하였다. 정광필이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내 조카가 비록 몸가짐은 조심스럽지 못했으나 결코 남을 해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정사룡이 사간이 되고 나서는 과연 스스로 사양하며 당시의 논의에 참여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이를 보고 정사룡을 훌륭하게 여겼고 정광필이 사람을 잘 알아본다고 칭찬하였다.
정사룡은 살림을 잘 꾸려 부자가 되자 자신의 생활은 왕족이나 다름없이 누렸으나, 성품이 인색하여 손님을 잘 대접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선비들 가운데 정사룡의 집 음식을 먹어 본 사람이 없었으나, 유독 어득강(관포)이 찾아오면 반드시 많은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정씨 집의 식객"이라 불렀다.
만년에는 서울 동쪽 교외로 물러나 살았는데, 임억령(석천), 신잠(원량)과 시와 술로 어울리며 맑은 복을 누린 것이 이십여 년이었다. 비록 세상을 구제한 공은 별로 없었으나 그 풍류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아, 마을 사람들 가운데는 그의 자를 따서 자신의 자로 삼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박상의 의리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박상(눌재)은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다. 기묘년(1519년)에 충주목사로 있었다. 조광조(정암)가 사화를 당하자 당시 선비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박상이 이들을 모두 돌보아 주었으므로 김세필(성동), 이자(음애), 이연경(탄수) 같은 사람들이 다 그에게 가서 의지하였다.
박상이 하루는 여주에 갔다가 김안국(모재)과 신광한(기재)이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는, 여주목사 이희보(안분당)를 찾아가 쌀 백 섬을 빌려 두 사람을 구제하였다. 충주로 돌아와서는 서둘러 쌀을 배에 실어 빌린 만큼을 이희보에게 갚았다. 옛 선배들은 벗들 사이에서 대개 이러하였다.
박수량과 김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박수량은 강릉 사람으로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갑자년(1504년) 사마시(진사시)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응시하지 못하였고, 현량으로 뽑혔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훗날 용궁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두어 달 만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김정(충암)이 금강산을 유람하는 길에 그의 집에 들렀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일꾼들 사이에 끼어 손수 새끼를 꼬고 있었으므로, 김정은 처음에 그가 주인인 줄 몰랐다. 마침내 풀을 깔고 앉아 술을 마셨는데, 질그릇에 담은 술과 나물 안주뿐이었다. 이틀 밤을 묵으며 한껏 놀다가 떠나면서, 헤어질 때 진달래나무 지팡이를 선물로 주며 이런 시를 지어 주었다.
높디높은 벼랑에서 늦가을 서리와 눈을 겪은 가지라네 가져와 그대에게 주노니 오래도록 이 마음 변치 말게나
소학과 근사록의 수난 — 나식과 부친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기묘년에 선비들이 화를 당한 뒤로는 집집마다 《소학》과 《근사록》을 입에 담기를 꺼렸고 자제들에게 배우지 못하게 금하였다.
나의 선친께서는 젊었을 때 나식(장음)에게 배우셨다. 한번은 외가에 갔다가 낡은 함 속에서 좀먹고 다 떨어진 《소학》 네 권을 보았다. 펴서 읽어 보고는 학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그중 첫째 권을 소매 속에 넣고 나식에게 가서 보여 드리니, 나식이 깜짝 놀라며 "네가 어디서 이런 귀신 붙은 물건을 얻었느냐?" 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사화로 죽은 옛 어진 이들의 불운을 슬퍼하였다. 선친이 이 책을 배우기를 청하니 나식이 크게 칭찬하며 《소학》과 《근사록》을 가르쳐 주었으나, 이 일을 남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
나식의 인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식은 타고난 재주가 총명하고 큰 절개가 있었다. 그의 문장은 매우 고상하고 옛 풍취가 있었으며, 과거에 응시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두 아우 나숙과 나익을 가르쳐 모두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최수성(원정)은 뜻이 높아 남을 좀처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나식을 보고는 감동하여 이렇게 칭찬하였다. "압록강 동쪽에는 나생 한 사람뿐이다."
부친과 이여 교리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선친은 젊었을 때 교리 이여에게서 《주역》을 배우셨다. 이여는 진천 사람으로 그의 형 이치와 함께 성리학에 밝았다. 이여는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오랫동안 곁에서 모시며 아침저녁으로 경계하고 강독하여 도움을 준 것이 매우 많았다.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인종이 친히 제문을 지어 궁의 신하를 보내 조문하였다.
이치도 높은 벼슬에는 이르지 못하고 박사로 세상을 떠났는데, 진천의 선비들이 두 형제를 위하여 서원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선친이 살아 계실 때는 매번 주선하여 제사가 끊이지 않도록 하셨다. 지금까지도 이 고장 선비들이 잇달아 과거에 급제하고 고을 풍속도 좋은 것은 모두 이여의 가르침 덕분이다.
조광조 이후의 성리학 — 김안국의 역할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광조가 화를 당한 뒤로는 이치와 성품의 근본을 탐구하는 성리학에 대해 감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김안국(모재)만은 여주에 은거하며 선비를 만날 때마다 성현의 일을 인용하여 논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언적(회재)은 영남에서 여주를 오가며 반드시 그에게 질문하고 논쟁하였으며, 이황(퇴계)도 단양군수로 부임하는 길에 그의 집에 들렀을 때 비로소 성리학의 근원을 들었다. 김안국은 이처럼 두 분에게도 길을 열어 준 공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있다. 나의 선친은 젊어서부터 김안국에게 배웠으므로 이 일을 두루 알고 계셨다. 대체로 김안국은 평소 문장가로만 칭송받았고 성품도 위세를 부리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그저 문인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김안국의 사람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안국은 성품이 경박하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사람을 사랑하였다. 처음에 김안로와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김안로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때마다 나무랐다. 김안로도 그의 솔직함을 알았으므로 화내지 않았다.
김안로가 정권을 잡자 김안국 형제를 가장 먼저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김안로가 이불을 가지고 그의 집에 가서 잤는데, 김안국이 베개를 맞대고 누워 자면서 경계하는 말을 너무도 간절하게 하니, 옆에 누워 있던 김정국(사재)이 그의 발을 밟으며 그만 말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안국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너도 안 자고 있었느냐. 내 다리에 기대지 말라" 하니, 김정국은 뜨끔하여 다시는 말리지 못하였다.
훗날 김안로가 권좌에서 물러나 죽임을 당했을 때, 김안국이 김정국에게 말했다. "안로가 간사하다는 것을 누군들 모르겠는가마는, 우리 형제가 이미 그와 깊이 사귀었으니 이제 와서 그의 단점을 말하지는 말자." 그러고는 매번 김안로의 가족들에게 음식을 보내 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김안국과 성세창의 호당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안국이 우의정 성세창과 함께 독서당에서 휴가를 받아 글을 읽을 때, 둘이 함께 숙직을 하게 되었다. 성세창은 본래 집이 넉넉하였으므로 이부자리를 모두 비단으로 만들어 매우 화려했고, 김안국은 본래 가난한 데다 성품도 사치를 좋아하지 않아 베 이불에 나무 베개를 베고 자니 가난한 선비처럼 쓸쓸하였다. 성세창은 몹시 부끄러워 밤새 잠을 설치고는, 날이 밝자 집으로 돌아가 부인에게 말했다. "국경(김안국의 자)이 차라리 내 사치를 비웃어 주기라도 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러고는 서둘러 검소한 것으로 바꾸게 한 뒤에야 한 방에서 함께 잤다고 한다.
서경덕과 부친의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선친은 서경덕(화담) 선생에게서 가장 오래 배우셨다. 한번은 7월에 선생의 집을 찾아갔더니, 화담 별장으로 떠난 지 이미 엿새가 되었다고 하므로 곧바로 그곳으로 갔는데, 가을 장마로 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날이 저물어서야 여울물이 조금 줄어 겨우 건너서 화담에 이르니, 선생은 거문고를 타며 큰 소리로 시를 읊조리고 계셨다.
선친이 저녁밥을 짓겠다고 청하니 선생이 말했다. "나도 아직 먹지 않았으니 내 몫까지 함께 지어라." 하인이 부엌에 들어가 보니 이끼가 솥 안에 가득 끼어 있었다. 선친이 이상히 여겨 까닭을 묻자 선생이 말했다. "물이 막혀 엿새 동안 집사람이 오지 못했으니 내가 오랫동안 밥을 짓지 못했다. 그러니 분명 솥에 이끼가 끼었을 것이다." 그 얼굴을 살펴보니 조금도 굶주린 기색이 없었다. 이는 옛날 증자가 이레를 굶고서도 신을 끌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마치 악기가 울리는 듯했다는 이야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유담년과 황형 — 삼포왜란 방어사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경오년(1510년) 삼포에서 왜적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담년이 병조판서로 있었다. 중종 임금이 여러 대신들을 불러 왜적을 정벌할 일을 의논하려 할 때, 삼정승이 먼저 유담년에게 물었다. "방어사로 삼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 유담년이 즉시 대답했다. "한쪽 길은 제가 가서 막겠고, 다른 한쪽 길은 따로 막을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삼정승이 누구냐고 묻자 유담년이 말했다. "말씀드리면 반드시 다투어 헐뜯을 것이니, 임금께 직접 아뢰겠습니다."
임금을 뵙는 자리에서 과연 임금이 "누구를 장수로 삼을 만한가?" 하고 물으니, 유담년이 대답했다. "왼쪽 길은 제가 맡겠습니다만, 오른쪽 길에 쓸 만한 사람이 있기는 해도 사람들이 반드시 안 된다고 할 것이니, 전하께서 뭇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등용해 주신다면 제가 응당 천거하겠지만, 그렇지 않으시다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임금이 뭇사람의 의견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허락하니, 유담년이 그제야 말했다. "전에 승지를 지낸 황형이 바로 그 적임자입니다."
그러자 주위에서 과연 반대하였다. "그 사람은 예전에 자기 장인을 매질하여 버림을 받은 사람이니 다시 등용해서는 안 됩니다." 유담년이 말했다. "지금은 설령 옛사람 효기나 미생처럼 훌륭한 행실을 지닌 자라도 전쟁의 승패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니 등용할 수 없습니다. 설령 황형에게 그런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 상황이 매우 급하니 다른 것을 따질 때가 아닌 데다가, 사실 그는 그런 나쁜 짓을 한 일이 없습니다. 사소한 흠 하나를 이유로 나라를 지킬 만한 인재를 버리는 것은 예로부터 옳지 않게 여겨졌습니다." 성희안(창산)도 유담년의 의견에 힘써 찬동하였으므로, 마침내 황형과 유담년이 각각 좌방어사와 우방어사로 임명되어 출정해 왜적을 무찔렀다. 결국 나라가 이 일로 무사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유담년의 공이었다.
(용어) 효기는 은나라 고종의 태자로,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계모의 참소로 쫓겨나 죽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미생은 춘추 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여인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물이 불어나는 다리 밑에서 끝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죽었다는 이야기로 전해진다.
황형과 강화 연미정의 소나무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황형(장무공)의 밭과 집은 강화 연미정에 있었다. 그가 일찍이 소나무 수천 그루를 심으니 사람들이 "공은 이미 늙었는데 소나무를 이렇게 많이 심어서 무엇하시렵니까?" 하고 물었다. 황형이 답했다. "훗날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그 뒤 임진년(1592년)에 창의사 김천일과 전라병사 최원이 강화도에 들어와 지키면서 배와 진영의 목책, 방패, 각종 기계를 만들 때 모두 이 소나무를 가져다 썼다. 이때 쓰고 남은 것은 정유년(1597년)에 명나라 경리 양호가 임금을 모시고 강화도로 가려 할 때, 관아에서 베어다가 임시 행궁을 짓고 성책을 세우는 데 썼다. 이때 와서야 사람들은 황형이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음을 알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김인후의 인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인후(하서)는 인품이 매우 높고 학문과 문장이 모두 뛰어나 스스로 터득한 바가 있었으나,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인종은 세자로 있을 때부터 그를 인재로 여겼으므로 왕위에 오르자 맨 먼저 불러들였는데, 그가 서울에 도착하자 인종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고향에서는 그의 덕에 감화되어 선량해진 사람이 매우 많았다.
양응정(송천)은 기개가 높기로 당대에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김인후를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눌려 그의 말을 공손히 받들 뿐 감히 한마디도 못 하였다. 김인후 앞에서 물러나와서는 반드시 여러 날 동안 감탄하며 말하였다. "후지(김인후의 자)는 지금 세상의 안자(공자의 제자 안회)로다."
송순의 기지 — 서소문과 남대문, 그리고 향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이조참판 송순(삼재)은 재직할 때 찬성 허자와 뜻을 합쳐 어진 이들을 천거하다가 권세 있는 신하의 미움을 받아 지방으로 오 년이나 유배되었다. 이후로는 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였다.
송순에게는 가깝게 지내는 서얼 숙부가 있었는데, 그가 매번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지방 출신으로 재상이 된 사람 가운데, 나는 서소문으로 떠나는 사람은 보았어도 남대문으로 떠나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이는 대개 서울에 와서 벼슬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서울을 떠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송순은 이 말을 늘 듣기 싫어하였다.
그 뒤 송순이 개성유수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 숙부가 강가에 나와 그를 전송하였다. 송순이 술잔을 잡고 말했다. "저는 이제 남대문으로 나왔습니다."
요즘 지방에는 향안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친가와 외가 양쪽 모두 사대부 집안 출신인 사람만을 가려 이름을 올린다. 외가나 아내의 집안이 다른 고을 출신이거나 이름난 가문이 아니면, 아무리 높은 벼슬을 지냈어도 여기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 그래서 여기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홍문록이나 이조의 천거 명단에 오르는 것보다도 어렵다고들 한다.
송순은 담양 사람이었다. 외가가 남원에서 왔고 뚜렷하게 이름난 벼슬을 한 이가 없었으므로, 그 역시 향안에 오를 수 없었다. 송순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 휴가를 얻어 성묘를 갔다가 고을 사람들이 모두 향청에 모여 있다는 말을 들었다. 즉시 음식을 성대하게 장만하여 수십 명의 짐꾼을 시켜 향청으로 보내고, 먼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시켜 향청의 어른들에게 이렇게 전하게 하였다. "대사헌께서 큰 잔치 음식을 보내어 마을의 원로와 학자들을 대접하고자 하시니, 이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향청의 어른들이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곧 음식을 차려 대접받는데, 한 노인이 "주인을 불러 우리와 함께 자리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니 모두 그러자고 하였다. 사람을 보내 청하였으나 사양하며 오지 않다가, 거듭 청한 뒤에야 왔다. 와서 좌우를 둘러보다가, 일찍이 훈도를 지낸 늙은 선비 가운데 자신과 나이는 같으나 생일이 앞선 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얼른 그 다음 자리로 가서 앉았다. 술이 거나해지자 향청의 어른들이 말했다. "대사헌이 이미 이 모임에 참석하였으니 향안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는 곧 향안을 가져다 그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송순의 재빠르고 총명함이 이와 같았다.
김인후와 유희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인후(하서)가 급제하기 전, 성균관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전염병에 걸려 위독하니 사람들이 감히 그를 돌보지 못하였다. 유희춘(미암)이 당시 성균관의 관원으로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아깝게 여겨 자기 집으로 옮겨 밤낮으로 돌보아 끝내 다시 일어나게 하였고, 김인후는 이를 늘 감사하게 여겼다. 훗날 유희춘이 종성으로 유배되었을 때,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매우 어리석었다. 김인후가 그를 사위로 맞으려 하니 집안사람들이 모두 반대하였으나 듣지 않고 끝내 혼인을 이루었으니, 사람들은 김인후와 유희춘 두 사람을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유희춘의 내력과 학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유희춘(미암)은 최부(금남)의 외손자이다. 최부는 성종과 연산군 때에 큰 명망이 있었고 문장에도 매우 능하였는데, 무오년(1498년)의 사화 때 죽임을 당하였다.
유희춘은 형 유성춘과 더불어 당대에 명망이 높았다. 유성춘은 벼슬이 헌납에 이르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유희춘은 정언으로 있을 때 을사년(1545년)의 변고를 만나 처음에는 제주로 유배되었으나, 고향과 가깝다 하여 다시 종성으로 옮겨졌다. 총명함이 남달라 읽은 책이라면 외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유배지에 있을 때 《속몽구》 네 권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모두 그가 암송하고 있던 것을 바탕으로 지은 것이다.
선조 임금 때 발탁되어 경연에 들어갔는데, 임금에게 도움을 준 공이 매우 많았다. 임금이 장차 그를 중히 쓰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임금이 몹시 슬퍼하며 그를 찬성에 추증하고 그 아들을 등용하였다.
유희춘의 학문과 성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두 형은 젊은 시절 유희춘에게서 배웠다. 그는 학문이 매우 정밀하고 행실이 지극히 독실하였으며, 배우는 사람을 대할 때마다 반드시 진실하고 밝은 학문을 자세히 가르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품이 매우 세상 물정에 어두워 집안일을 다스릴 줄 몰랐고, 옷과 버선이 때 묻고 해어져도 부인이 새것으로 바꿔 주지 않으면 스스로 갖춰 입을 줄을 몰랐다. 거처하는 방은 책을 펴 놓은 책상 외에는 먼지와 때가 끼어 더러워도 쓸고 닦지 않았다. 남을 만나 세상일을 이야기할 때는 전혀 아는 것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이야기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고 앎을 지극히 하는 공부,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이르면 뛰어난 견해와 해박한 지식이 다른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어 세밀히 분석하니 통쾌하고 명백하여, 듣는 사람이 정신을 쏟느라 피곤한 줄도 몰랐다.
대체로 이러하였으므로 경연에서 하는 말이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배운 바를 실천하게 함으로써 임금의 덕을 도왔던 것이다. 선조 초년의 정사 가운데 맑고 밝다고 일컬을 만한 것은 모두 유희춘이 잘 이끈 힘이었다고 한다.
유희춘의 회고 — 백인걸, 송인수와 세 차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유희춘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젊어서 남평현감으로 있을 때 좌참찬 백인걸은 무장현감이었다. 마침 참판 송인수가 관찰사로 부임하니 세 사람이 서로 뜻이 맞아 매우 즐겁게 지냈다.
송인수는 부안의 기생을 사랑하였는데, 정을 통하지는 않고 다만 마음으로 아껴 수레에 태워 데리고 다니게 하였다. 늘 편지를 보내 무장현감과 남평현감을 불렀고, 놀러 다닐 때마다 늘 함께 다니니, 고을 사람들이 이 세 사람을 "세 차비"라 불렀다고 한다.
송인수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여량역에서 그를 전별하는데 두 사람과 그 기생이 따라왔다. 송인수가 기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이 사람의 뛰어난 지혜를 아껴 일 년 동안이나 자리를 같이하면서도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은 것은, 내가 그것 때문에 몸을 상할까 염려해서였네." 그러자 기생이 즉시 앞산에 있는 여러 무덤을 가리키며 말했다. "과연 그러하십니다. 저기 보이는 저 많은 무덤들이 모두 저의 낭군이었습니다." 이는 그를 원망하며 한 말이었으므로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크게 웃었다. 그 기생은 훗날에도 늘 송인수의 일을 떠올리며 감탄하고 눈물까지 흘리곤 하였다.
권벽의 침묵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권벽(습재)은 나의 선친과 가장 가깝게 지낸 벗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안명세, 윤결과 함께 공부하였는데 서로 뜻이 맞아 매우 즐겁게 지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거리낌 없이 말하다가 화를 입어 죽은 뒤로, 권벽은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집에서도 남과 담소를 나누지 않았고 하루 종일 책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최렴과 최락 형제는 이웃에 사는 젊은이들로서 권벽에게 배운 지 거의 일 년이 되도록 그들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고, 그들이 진사시에 합격한 뒤에야 비로소 이름을 알 정도였다. 이 때문에 별로 높은 벼슬은 하지 못하였으나 일흔넷까지 살았다.
내가 어릴 때 권벽이 나의 선친을 뵈러 온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주인이 묻는 말에나 대답할 뿐,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그가 자신의 뜻을 철저히 지킨 것이 이와 같았다.
(용어) 안명세는 사관으로 있으면서 을사사화의 진상을 사초에 그대로 적어 넣었다가 이 일이 새어 나가 사형을 당한 인물이다. 윤결은 벗의 자리에서 안명세의 죽음이 억울하다고 말했다가 이를 고발당해 죽임을 당하였다.
윤결의 옥사와 부친의 위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윤결(자는 장원)의 옥사에서, 그의 진술 가운데 나의 선친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선친은 당시 병조의 낭관으로 관청에서 숙직하고 계셨다. 죄를 다스리는 관리가 선친을 문초하기를 청하자, 대사간으로 자리에 있던 진복창이 일어나 엎드리며 아뢰었다. "허모(허균의 아버지 허엽)는 경솔한 사람이 아니니 그럴 리가 없음을 제가 보증합니다. 지금 그를 잡아다 문초한다면 일이 더욱 커질까 염려되니 문제 삼지 마소서." 이렇게 두세 번이나 강경하게 주장하니, 문정왕후도 옳게 여겨 문초하지 않았다.
선친께서는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정원에 들어가니 승지들이 모두 축하하였으나, 그래도 영문을 모르다가 물러나 병조로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다. 승지들이 감탄하며 말했다. "화를 겨우 면했는데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으니 참으로 강직한 사람이다." 선친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까닭 없이 받는 칭찬이다"라고 하셨다.
진복창은 나의 선친과 평소 전혀 가깝게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는데도 선뜻 나서서 구해 주었으니, 이 또한 운명이라 할 만하다. 이런 일이 있었기에 나의 두 형은 진복창의 아들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후하게 대하곤 하였다.
임억령의 절개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임억령(석천)은 기개가 뛰어나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뒤로도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아 여러 차례 이름난 청요직(학식과 인망을 갖춘 사람만 맡을 수 있다고 여겨지던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지방 벼슬에 나가 있을 때가 많았다.
그의 아우 임백령이 을사년(1545년)의 공신에 들면서 그 권세가 한 시대를 뒤흔들게 되자, 당시 승지로 있던 임억령은 서둘러 벼슬을 버리고 서울을 떠났다. 임백령이 굳이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한강을 건너면서 이런 시를 지어 주었다.
"잘 있거라, 한강물아 고요히 흐르며 물결을 일으키지 마라"
그 뒤로 다시는 서울에 오지 않으니, 선비들의 여론이 그를 옳게 여겼다.
임백령이 죽은 뒤 만년에야 서울에 왔고, 스스로 청하여 강원도관찰사로 나가서는 바다와 산을 두루 구경하며 많은 글을 지었으므로 지금까지도 그곳 산수를 빛내고 있다. 그의 정치와 교화도 맑고 평온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기대승과 호남 인재의 성쇠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기대승(고봉)은 호남 선비들 가운데 걸출한 인물이었다. 학문이 높고 깊어 이황(문순공)이 매우 칭찬하였다.
선조 임금의 신임을 받았으나 제대로 쓰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죽은 뒤로는 호남 사람으로 조정에 등용된 이가 한 명도 없었다. 기대승이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호남 선비들의 기풍이 점차 해이해지고 있으니, 수십 년이 지나면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도 많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와서 보니 그 말이 과연 맞아떨어졌다. 그는 아마도 그 조짐을 미리 내다보았던 것 같다.
중종 임금 시절에는 호남 출신의 뛰어난 인재가 매우 많았다. 박상(눌재) 형제, 사인 최산두, 유희춘(미암) 형제, 교리 양팽손, 제학 나세찬, 목사 임형수, 김인후(하서), 임억령(석천), 송순(삼재), 찬성 오겸 같은 이들이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졌다.
그 뒤로도 박순(사암), 이항(일재), 양응정(송천), 기대승(고봉), 고경명(제봉) 같은 이들이 학문이나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재능과 행실로 당대에 이름을 떨치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도 점점 줄어드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나는 여러 해 동안 호남을 오가며 그곳의 풍습을 살펴보았는데, 대체로 후학을 이끌어 줄 큰 스승이 없는 데다, 사람들의 성품 또한 대체로 경박하고 자만하여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한다. 게다가 먹고사는 형편이 넉넉한 까닭에 모두들 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릴 뿐 앞일을 도모하는 사람이 없다. 이 세 가지가 학문을 게을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으니, 탄식할 일이다.
대신과 부모 — 성희안과 홍섬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라를 세운 이래로 대신 가운데 부모가 살아 계신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성희안(창산)의 경우는 모친이 살아 계셨으나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그 밖에는 기억할 만한 예가 아득하여 떠오르지 않는다. 선조 초년에 영의정 홍섬이 모친상을 당하자, 임금이 명하여 대신이 상을 당했을 때 상을 돌보고 부의를 보내는 예를 조사하게 하였으나 전례를 찾을 수 없어, 다만 관에서 대신의 예에 준하여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부의하게 하였다. 그 후 노수신(소재) 정승이 상을 당했을 때도 이 예를 따랐다.
이덕형의 이른 출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지금의 영의정 이덕형(한음)은 서른여덟 살에 정승이 되었으니, 이는 나라를 세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의 부친도 아직 건강하게 살아 계셨다. 이덕형이 정승으로 있을 때 그의 부친은 수안군수로 있었는데, 번거로운 일들을 잘 다스리며 게으르지 않았다.
이덕형이 지금 임금 초년에 임금의 세자 책봉을 명나라에 주청하는 일로 명나라에 다녀와 윤허를 받아 오자, 임금이 그의 부친을 특별히 당상관 품계로 올려 판결사(장례원의 우두머리 벼슬)에 제수하니, 당시 사람들이 아름다운 일이라 하였다.
홍섬의 삼종 정승과 궤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홍섬(인재)의 모친은 정승 송질의 딸이자 영의정 김언필의 아내였다. 이처럼 친정아버지, 남편, 아들이 모두 정승인 경우는 예전에 없던 일인 데다 나이도 아흔이었다. 그 부인이 노년을 보내던 무렵 홍섬은 일흔 살로 궤장을 하사받았으니, 이는 더욱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그리하여 노수신(소재)이 그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이런 시를 지었다.
"친정아버지와 남편과 아들, 셋 모두 정승 집안 문을 벗어나지 않은 것을 지금에야 처음으로 보게 되었네 관아에서 다시 지팡이를 짚으시고 집안에서는 다시 색동옷을 입으시네"
이는 사실을 잘 담아낸 시였다.
근래에 한집안에서 정승이 나온 경우로는, 이산해(아계)와 그의 매부인 좌의정 김응남, 그리고 사위인 이덕형(한음)뿐이다.
(용어) 마지막 시구의 "색동옷"은 춘추 시대 초나라의 효자 노래자가 일흔 살에도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부려 늙은 부모를 즐겁게 해 드렸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나이 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 집안의 정승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광필(문익공) 집안에서 세 정승이 나온 것도 세상에 드문 일이다. 이행(문정공)과 그의 형 이기, 심연원(충혜공)과 그의 아우 심통원도 한집안 형제가 정승이 된 경우다. 심수경(청천)과 그의 조부 심정은 할아버지와 손자가 정승이 된 경우다. 그러나 앞서 든 이행 이하의 경우는 모두 그 이름과 행적에 좋고 나쁨의 구분이 뚜렷하니 이상한 일이다. 무과와 정승 집안에 있었던 훌륭한 일 가운데 이미 성현의 《용재총화》에 실린 것은 다시 싣지 않는다.
부자·형제 정승의 여러 경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한집안에서 부자와 형제가 정승이 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중에서도 허종·허침 형제만은 흠잡을 데가 없다. 정창손과 그의 아들 정괄은 그리 내세울 만한 것이 없고, 그의 사위 김질도 정승이었으나 이는 성삼문의 거사를 고발한 공으로 발탁된 것이다.
심온과 그의 아들 심회, 윤사흔·윤사분 형제와 그들의 매부 성봉조, 신승선과 그의 아들 신수근 등은 모두 왕실과 혼인한 덕으로 정승이 된 것이니 특별히 칠 것이 못 된다. 부자가 이어서 대제학을 지낸 것은 오직 성현(문대공)과 그의 아들 성세창뿐이다.
유성룡과 유영경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유성룡(서애)과 유영경은 첩의 동서 간으로서 모두 영의정이 되었다. 유성룡은 배척받아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가 세상을 떠났고, 유영경은 죄를 지어 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도 같은 유씨이고 벼슬도 같은 영의정이었지만, 그 이름과 행적에는 이토록 좋고 나쁨의 구분이 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채수 집안의 장원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채수(인천군)는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그의 사위인 김안로(이숙)와 이자(차야)도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하루는 장원 급제자들만의 모임인 용두회를 여는데, 채수의 또 다른 사위인 김감(연창부원군)이 여기에 참여하려 하자 장원 급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김감이 부인을 보내 이렇게 청하였다. "제 사위는 서른다섯 살에 대제학이 되었으니, 이 사실로 모임에 참석시켜 주시기를 청합니다." 채수가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은 반드시 참석시켜야겠구나." 그러고는 곧 불러서 함께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문형을 지낸 나이와 가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이덕형(한음)은 서른한 살에 대제학의 소임(문형)을 맡았으니 가장 젊은 나이에 문형을 지낸 경우이고, 김감(연창)은 서른다섯 살이었으니 그다음이다. 이 밖에는 이행(용재)이 마흔 살에 문형을 맡았다.
가장 많은 문형을 배출한 집안으로는 권근(길창)의 집안이 으뜸이다. 나라를 세운 초기에 권근도 문형의 일을 맡았으며, 그의 아들 권제(지재)는 대제학이 되었고, 외손 서거정과 손자사위 최항도 나란히 오랫동안 문형을 맡았다. 그 밖에 신숙주(문충공)와 그의 손자 신용개, 신광한이 모두 문형을 맡았으니, 이 역시 세상에 특히 드문 일이다.
여러 번 장원한 사람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한 집안에서 정승이 나온 것과 과거에 여러 번 장원한 것에 대해서는 성현(용재)이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근래에 여러 차례 장원 급제한 사람으로는, 대사헌 권홍이 문과와 중시에서 장원하였고, 양응정(송천)은 생원시와 중시에서 장원하였으며, 진사시와 문과에서 연달아 장원한 사람으로는 김홍도와 강신이 있다.
율곡 선생은 한 해에 생원시와 문과에서 잇달아 장원하였다. 초시에서는 세 번의 시험을 내리 장원하였고, 회시에서도 장원하여 한 해에 여섯 번이나 장원하였으니 예전에 없던 일이다.
문형을 맡은 사람 가운데는 과거에 장원한 이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정인지(하동부원군)가 초시의 세 시험 모두에서 장원한 것이 가장 특별하고, 그다음이 율곡의 두 차례 장원이다.
변계량(춘정), 정사룡(호음)은 중시에서 장원하였고, 최영성, 김안로(이숙), 정유길(임당), 박순(사암), 노수신(소재), 유근(서경)은 문과에서 장원하였다. 판서 박충구, 홍성민(익성군), 이호민(연릉부원군)은 생원시에서 장원한 반면, 홍섬(인재)은 생원시에서 꼴찌를 하였으니 이 또한 전에 없던 일이다.
(용어) 조선의 과거 시험은 크게 지방에서 치르는 "초시", 서울에서 다시 치르는 "회시(복시)", 임금 앞에서 순위를 정하는 "전시"의 단계를 거쳤다. "중시"는 이미 벼슬하고 있는 문신들을 대상으로 다시 치르던 시험이다.
선조 말년의 정승과 대제학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조 임금 말년까지 대광보국숭록대부의 품계로 살아 있던 사람은 이산해, 유성룡, 심수경, 최흥원, 윤두수, 김응남, 정탁,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이렇게 모두 열 사람이었다. 정탁과 심수경(청천)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이헌국과 김명원이 정승이 되었고, 최흥원이 세상을 떠나자 윤승훈이 정승이 되었다.
그 뒤 윤두수가 세상을 떠나자 유영경이 그 자리를 채웠고, 정탁이 세상을 떠나자 허욱이 있었으며, 유성룡이 세상을 떠나자 한응인, 기자헌, 심희수가 차례로 정승이 되어 그때마다 열 명의 수를 채웠으니, 이 역시 근래에 없던 일이다.
선조 말년에 대제학도 열 사람이었으니, 곧 이산해, 유성룡, 황정욱, 이덕형, 윤근수, 이항복, 심희수, 이정귀, 이호민, 유근이다. 이 가운데 다섯 명이 정승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하고도 대단한 일이었으며, 일곱 사람이 부원군에 봉해진 것도 기이한 일이다.
선조 말년의 지제교와 홍문록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조 말년에는 지제교가 일흔두 명, 홍문록에 오른 사람이 여든네 명이나 되었으니, 나라를 세운 이래 없던 일이다. 그런데도 나라의 중요한 글을 지어야 할 때면 언제나 인재가 없다고 걱정하였다. 그래서 이조에서 홍문관 관원을 추천할 때도 매번 적격자가 없다고 하여, 지방관으로 나가 있는 사람이나 친인척 관계로 피해야 할 사람, 심지어 조사를 받던 사람까지 후보로 올려 임금께 아뢰곤 하였으니,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이헌국의 안목과 사양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이헌국(완성)은 성품이 충직하여 임금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피하거나 숨기지 않았으나, 선조 임금은 늘 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임진왜란 때 임금이 개성에 이르러 두 정승을 해임하였는데, 이헌국은 당시 대사간으로서 그 자리에 있었다. 임금이 막 새 정승을 뽑으려고 몸소 재상들의 명단을 펼쳐 놓고 이름을 짚어 가며 이헌국에게 물었다. "정탁은 어떠한가?" 이헌국이 답했다. "정탁은 비록 청렴하고 신중하나 세상을 구제할 만한 재주는 없습니다. 그는 옛사람이 말한 대로 '높은 다락에 묶어 놓고 태평한 시절을 기다리게 할' 사람입니다." 다시 물었다. "최황은 어떠한가?" 이헌국이 답했다. "강직한 면은 있지만 성품이 편협하니 큰일을 맡길 수 없습니다." 이어 유홍과 황정욱을 물었으나 모두 적당하지 않다고 답하다가, 임금이 최흥원과 윤두수 두 사람의 이름을 대니 이헌국이 합당하다고 하여 마침내 두 사람이 등용되었다. 사람들은 이 일을 듣고 모두 하기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하였다.
이헌국은 무술년과 기해년 사이에 잇달아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그 뒤 정승을 임명할 때 특별히 그를 발탁하며 임금이 말했다. "나는 이조판서를 사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이 사람은 두 번이나 물러났으니 정승으로 삼을 만하다." 이 말은 내시 이봉정이 직접 임금의 말을 듣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전한 것이라고 한다.
(용어) "높은 다락에 묶어 놓고 태평한 시절을 기다리게 한다"는 말은 전혀 쓸모가 없는 사람을 비유하는 옛말로, 중국 진나라 때 유익이라는 사람이 이름만 높고 실속 없는 이들을 두고 "천하가 태평해진 다음에야 이런 무리에게 일을 맡길지 의논할 수 있다"고 말한 데서 나왔다.
윤두수의 결단 — 의주행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평양에서 한창 왜적과 싸우고 있을 때, 임금이 윤두수(오음)에게 성을 지킬 것인지 버리고 떠날 것인지를 물었다. 윤두수는 그때마다 떠나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였는데, 수십 번을 물어도 대답은 늘 같았다. 그 뒤 영변에 이르자 조정의 의논이 갈라져 한쪽은 북쪽으로 가자 하고 한쪽은 강계로 가자고 하였으나, 윤두수 홀로 의주로 가자는 계책을 고집하였다. 끝내 이 결정으로 나라의 운명을 되돌릴 수 있었으니, 이는 모두 그의 힘이었다.
영변에 있을 때 우의정 유홍이 임금을 뵙는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종묘와 사직이 여기 있는데, 전하께서 떠나신다면 대체 어디로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면서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이 잘못임을 힘써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유홍은 곧바로 하직하고 세자가 있는 곳으로 가 버렸다.
신잡의 헛소동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유년(1597년) 봄 왜적이 다시 국경을 침범하자, 임금이 대신들과 의논하며 물었다. "적이 만일 계속 밀고 들어온다면 어가는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한쪽에서 말했다. "영변은 지세가 매우 튼튼하고 명나라와도 가까우니 가서 지킬 만합니다."
신잡(평천)이 예전에 그곳의 절도사를 지냈던 터라 그곳으로 가는 것의 편리한 점과 불편한 점을 모두 아뢰고 군량 저축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끝으로 백관의 수가 많으니 미리 장을 담가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
한준겸(유천)과 남이공(자안)이 홍문관에 숙직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남이공이 말했다. "신공을 '장 담그는 일을 맡은 관리'로 삼아 먼저 영변으로 보내 준비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한준겸이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공만은 결코 보낼 수 없네." 남이공이 까닭을 묻자 한준겸이 답했다. "책력에 신일에는 장을 담그면 안 좋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말에 듣는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날짜를 가리키는 "신일"의 "신"과 신잡의 성씨인 "신"이 소리가 같은 것을 두고 놀린 말이었다.
사관 시절의 회고 — 동정록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유년에 내가 외람되이 사관을 맡아,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들을 모두 조사해 보니, 명나라 장수들이 군사를 부린 일이나 우리나라 장수와 병사들이 세운 공, 그리고 왜적이 침입해 온 일들이 어느 하나도 제대로 밝혀져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기록만 보면 마치 태평하여 전쟁이 없었던 나라처럼 보이니, 이것이 어찌 사관이 제대로 기록한 것이라 하겠는가.
그 뒤 임금이 명하여 명나라가 군사를 보내 우리를 도운 사정을 모아 《동정록》을 편찬해 올리게 하였다. 이에 윤근수(월정)와 신흠(현옹)이 이 일을 총괄하는 당상관을 맡고, 나는 실무를 맡아 책을 엮어 올렸다. 지금 실록청에서도 이 《동정록》을 가져다 실록에 싣고 있으나, 정작 우리나라 자체의 사적에 대해서는 아득하여 한 가지도 기록에 남은 것이 없으니 탄식할 일이다.
선조의 검소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조 임금의 검소한 덕은 여러 임금 가운데서도 뛰어났다. 말년에 병이 들어 궁중 의원이 진찰하러 들어갔는데, 임금은 푸른 베로 만든 요를 깔고 자줏빛 명주 이불을 덮고 계셨으며, 입고 있는 옷도 푸른 명주로 지은 것인데 올이 매우 거칠었다. 약을 올릴 때 쓰는 그릇도 무늬 없는 흰 자기였고, 검소한 안석과 글씨를 쓴 병풍만 있을 뿐 화려한 휘장도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최천건(분음)이 직접 보고 나에게 들려준 것이다.
지제교 시절의 급박했던 일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는 오랫동안 지제교를 맡았는데, 그동안 가장 다급했던 일이 두 번 있었다.
경자년(1600년) 의인왕후의 장례 때, 나는 장생전의 낭관으로서 관을 모시고 능에 가 있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혼령을 모신 장막에 불이 나서, 겨우 관만을 불길에서 구해 내었다. 이 일로 아침 제사 때 위안제를 지내야 했는데, 세자궁에서 나에게 제문을 지어 오라는 명이 내렸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승정원에서 나를 불러 당장 지어 바치라 하였다. 다급하고 당황하여 글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급하게 지은 것이라고 하여 사람들이 오히려 칭찬을 많이 하였으나 나로서는 매우 부끄러웠다.
계묘년(1603년) 봄에는 이덕형(한음)이 묘를 옮기는 일로 사직을 청하였는데, 이준(숙평)이 임금이 이를 처음으로 물리치는 비답을 지었다. 그런데 임금이 이를 마땅치 않게 여겨, 특별히 나를 불러 대궐로 오게 하고는 급히 다시 지어 바치라 하였다. 이준이 이미 매우 잘 지어 놓은 글이 있었는데도 이를 버려두고 따로 지으라는 것인 데다, 묘를 옮기는 일에는 여러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말을 만들어 내기가 몹시 어려웠다. 땀이 흘러 붓을 제대로 댈 수 없을 정도였는데, 겨우 격식을 갖추어 직접 써서 바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임금의 말이란 마땅히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서투른 글로 임금의 칭찬까지 받은 것은 나로서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유영경을 둘러싼 갈등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유영경(전양)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가 어떤 사건으로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리자, 내가 이를 물리치는 비답을 짓게 되었다. 그 비답에서 그의 인품을 칭찬하며 "재주는 온갖 일에 능통하고 기개는 공경들을 압도한다"고 썼더니, 유영경이 이를 보고 나를 미워하였다. 그 뒤로는 사관들과 짜고서 다른 지제교에게 맡겨 글을 짓게 하였는데, 지나치게 칭찬하는 말이 많았다.
훗날 유영경이 몰락하자, 신요와 민경기는 그에게 아첨한 일로 지제교의 벼슬을 박탈당하고 죄를 받아 파직되었다고 한다.
이항복과의 약속 — 공신 녹권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이항복(오성상공)은 나의 글을 좋아하였다. 공신 명부에 이름을 올리기 전에 그가 이렇게 다짐하였다. "내 공신 녹권은 반드시 자네의 글로 받고 싶네." 나도 그러겠다고 승낙하였다. 그 뒤 공신들이 회맹하는 자리가 열렸을 때 나는 마침 지방에 나가 있었으므로, 이미 홍경신(녹문)에게 대신 짓도록 부탁해 놓은 뒤였다. 내가 서울에 도착하자 이항복이 자신의 장인인 도원수 권율의 녹권을 지어 달라 부탁하면서, 예전의 약속을 이것으로 대신 갚으라고 하였다. 내가 지어 보낸 초고의 끝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어 선친이 지내신 정승 자리를 이었고, 길창군에 봉해져 문충공 권근의 복된 터전을 이어받았네." 이항복이 이를 보고 매우 칭찬하였다. 이는 권율이 영의정으로 추증되어 그의 선친 권철과 벼슬이 같아졌고, 권근(양촌)의 후손으로서 봉해진 고을 이름도 서로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이었다.
정원군 녹권의 오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무릇 공신 녹권 안에는 "부모도 함께 벼슬을 추증받았다"는 등의 말을 으레 형식적으로 적어 넣는다. 승지 조정지가 정원군의 녹권을 지으면서 무심코 이 구절을 그대로 써넣어 "부모도 아울러 벼슬을 받았다"는 문구를 넣고 말았다. 임금이 이를 보고 물었다. "정원군의 부모가 언제 벼슬을 받은 일이 있었느냐?" 승정원에서 그를 문책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은 허락하지 않고, 나에게 다시 짓도록 명하였다. 나도 겨우 지어 바쳤으나 임금이 보고는 칭찬하는 말이 지나치다 하여 고쳐서 녹권에 쓰도록 하였다. 이를 보면 선조 임금이 말을 신중히 하려 했던 지극한 뜻을 알 수 있다.
월과 장원과 당상관 승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미년(1607년)에 나는 여름, 가을, 겨울 세 계절에 걸친 다달이 치르는 시험(월과)에서 연달아 장원을 하였는데, 임금이 법전을 살펴 상을 내리도록 하였다. 예조에서 《경국대전》을 살펴보니 "홍문관 월과에서 세 차례에 걸쳐 일등으로 수석을 차지한 사람은 품계를 올려 준다"는 규정이 있었다. 당시 대제학은 유근(서경)이었고 제학은 신흠(현옹)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이 법전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였다. 누군가가 "'세 차례'는 '연이은 세 등수'라는 뜻이고 '일등'은 곧 '수석'이라는 뜻이다"라고 하기에, 이 말대로 갖추어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특별히 품계를 올려 주도록 하였다. 나는 이렇게 하여 당상관이 되었다.
대개 법전에서 말한 "세 차례"란 석 달에 걸쳐 치른 아홉 번의 시험에서 모두 장원한 것을 말하고, "일등"이란 점수의 합계가 서른 점이 되어 수석을 차지한 것을 뜻한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세 계절에 걸쳐 아홉 달 동안 스물일곱 번의 시험에서 모두 장원하여 점수의 합계가 백두 점이나 되었으니, 법전에서 말한 내용과는 다소 다른 것이었다.
평소에는 글에 능한 사람이 많아서 누구도 혼자 장원을 독차지하는 경우가 없었으므로, 이 규정은 법전에만 있을 뿐 실제로 시행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를 직접 본 일이 없어 저마다의 추측으로 법을 헤아리다 보니 이런 착오가 생기게 된 것이다.
성소부부고 제24권
10. 14:40
성소부부고 제24권 · 설부 3 · 성옹지소록 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출처: 성소부부고 제24권, 설부 3
배경: 《성옹지소록》은 허균이 함열에 유배되어 있던 시기에 쓴 잡록으로, 보고 듣고 겪은 온갖 일을 두서없이 적어 내려간 글이다. 이 하권에는 선조 임금과 신하들 사이의 일화, 명필 한호와 화가들의 이야기, 조선의 옛 제도와 풍속, 음악과 기예에 뛰어났던 이들, 일찍 출세한 사람들의 사례, 강릉 지방의 인물과 효자·열녀 이야기, 중국 사신들과의 교유, 그리고 허균 자신의 집안 내력까지 폭넓게 담겨 있다.
돌아가신 선조 임금은 문장에 뛰어나 역대 임금 가운데서도 으뜸이었으므로 신하들이 감히 따라갈 수 없었는데, 그런데도 유독 돌아가신 내 둘째 형 허봉의 시를 칭찬하시곤 했다. 형이 북쪽 지방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뒤, 독서당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다달이 지어 올리던 글 가운데 거산역에서 지은 시가 있었다. 그 마지막 연에
천 년 전에 부러진 창은 모래에 묻혀 있고 십 리 너른 벌판엔 비 그치자 비린내가 풍기네
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임금께서 손수 붉은 점을 찍어 표시해 내려 주셨다.
임인년(1602년)에 고천준과 최정건, 두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월사 이정귀가 임금을 뵙는 자리에서 나를 해운판관 자리에서 갈아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임금께서 "그의 형 아무개와 견주면 재주는 누가 더 나은가?" 하고 물으셨다. 이것만 보아도 임금께서 만년에 이르도록 우리 형제를 잊지 않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선조 임금은 또 지천 황정욱의 문장을 좋아하셨는데, 소재 노수신 정승이 힘써 추천한 끝에 그는 제학에서 겸 대제학으로 승진하였다.
독서당을 설치하여 관리들에게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하는 사가독서 제도를 시행한 뒤로는, 문형, 곧 대제학 자리는 반드시 이 독서당을 거친 사람 가운데서 임용하였다.
이 때문에 어촌 심언광은 대제학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일찍이 독서당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 차례나 상소를 올려 스스로 물러났다. 그런데 유독 지천 황정욱만은 독서당을 거치지 않고도 대제학이 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영예로운 일로 여겼는데, 이 역시 임금께서 그를 칭찬하신 덕분이었다.
선조 임금은 《장자》를 몹시 좋아하여 신하들에게 내리는 글에서도 이따금 《장자》의 구절을 인용하였고, 글의 짜임새도 《장자》와 흡사한 데가 있었다. 이 때문에 임금께서는 오히려 공부하는 이들이 《장자》를 읽다가 거기에 빠져들까 염려하여, 예조에 명해 과거 시험의 논술과 대책 문제에는 결코 노자나 장자의 글을 인용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경자년(1600년) 전시에서 응시자 이함이 답안의 첫머리에 《장자》의 말을 인용했다는 이유로 그의 합격을 취소하도록 명하셨다. 이함은 그 뒤 기유년(1609년)에 다시 과거에 합격했다고 한다.
경홍 한호는 글씨에 뛰어나 선조 임금의 각별한 눈에 들어 극진한 사랑을 받았고, 임금은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려 그를 격려하였다. 그가 서울에 있을 때면 임금은 술과 쌀, 반찬거리, 붓과 종이를 넉넉히 내려 주도록 명하였고, 봄가을로 의복과 허리띠, 안장 얹은 말과 신발 같은 하사품이 끊이지 않았다. 특별히 명하여 가평 군수로 제수된 지 몇 해 뒤, 사헌부에서 그를 탄핵하자 임금은 그저 심문만 하고 넘어가게 하셨다. 그 뒤 공조의 낭관으로 있을 때 응당 갖추어 바쳐야 할 문서를 법대로 처리하지 않아 파직될 처지에 놓였으나, 임금은 문책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그가 병이 위급해지자 임금은 약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고, 그가 죽자 한동안 슬퍼하며 부의를 후하게 내리셨으니, 임금과 신하 사이에 서로를 알아주는 정이 이보다 더한 경우는 없었다.
석봉 한호가 임당 정유길 정승을 따라 압록강 가에서 명나라 사신 경당 한세능을 맞이하였는데, 한세능이 그의 글씨를 몹시 칭찬하였다.
그때 따라온 등계달이라는 이가 석봉의 글씨를 얻어 돌아가 왕세정에게 보이자, 왕세정은 "원나라의 명필 조맹부와 어깨를 겨룰 만하다"고 하였고, 도융이 이를 보고는 "성난 사자가 돌을 튕겨 내는 기세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의 이름이 중국에까지 떨치게 되었으니, 이는 근래에 없던 일이었다.
석봉은 일찍이 당나라 종이에다 이태백의 시를 써서 책 다섯 권을 만든 적이 있었다. 해서와 행서를 크고 작은 여러 서체로 모두 갖추어 쓰되 온갖 정성과 힘을 다 쏟았다. 또 큰 종이에다 옛 명필들의 글씨를 모아 놓은 《동서당집고첩》을 옮겨 썼는데, 하나하나 원래의 서체를 그대로 살려 조금도 다르지 않았으니 참으로 더할 나위 없는 보배였다. 선조 임금께서 이 소문을 들으시고 급히 내시를 보내 이 글씨들을 모두 찾아 궁궐 안으로 가져오게 하시고는, 이튿날 명주와 베, 소금, 쌀, 종이, 붓, 먹, 향, 임금이 쓰던 벼루, 옷, 신 등을 매우 후하게 내려 주셨으며, 이것으로 집을 사서 살도록 해 주셨다.
돌아가신 내 둘째 형은 사내 안경창에게서 《연화경》 금자 필사본 네 권을 얻은 일이 있었다. 이는 세조 임금 때 궁궐에서 화장사라는 절에 시주한 것으로, 강중 서거정과 중경 성임, 동래 정창손, 인재 강희안, 이 네 분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쓴 것이었는데, 끝에는 이들의 벼슬 이름까지 함께 적혀 있었다. 형은 곧 석봉을 청하여 그 뒤에 금색 글씨로 《주역》과 《중용》, 《참동계》, 《황정경》을 쓰게 하였는데, 작은 해서체 글씨가 더없이 절묘하여 마침내 둘도 없는 보배가 되었다. 형이 세상을 떠난 뒤 내가 이것을 물려받았다. 표구하는 일을 하던 김대건이 우리 집을 매우 가깝게 드나들었는데, 하루는 이 일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께서 이를 가져오게 하시고는 《자치통감》 한 질을 내려 주셨다.
왕실 종친인 석양정 이정은 먹으로 그린 대나무 그림에 뛰어났고 매화와 난초도 잘 그렸다. 선조 임금은 그를 몹시 칭찬하여, 그가 족자 한 폭을 그릴 때마다 많은 물품을 은혜롭게 내려 주셨다. 내가 귀한 분을 통해 임금이 손수 그린 대나무와 난초 그림을 얻어 이를 석양정에게 보였더니, 그는 감탄하며 "힘차고 씩씩하여 정해진 화법에 얽매이지 않았으니 참으로 신선의 경지에 이른 작품이다"라고 하였다.
신묘년(1591년)에 선조 임금께서 절구 한 수를 지어 벽에다 써 붙이셨는데
한밤중에 칼을 어루만지니 그 기세가 무지개를 토해 내는 듯하고 웅대한 마음은 일찍이 우리 동방을 평안케 하고자 했었네 그런데 지금 하는 일은 한단 사람의 걸음걸이를 배우려다 제 걸음마저 잊은 것과 같으니 서쪽 바람에 고개를 돌리니 한스러움이 끝이 없구나
라는 시였다. 그 시의 기세가 넓고도 드높아 참으로 임금다운 말씀이었다. 아, 이것이 혹 이듬해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지으신 것이었을까.
(용어) "한단 사람의 걸음걸이를 배우려다 제 걸음마저 잊었다"는 것은, 옛날 연나라의 한 젊은이가 조나라 한단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멋져 보여 그것을 배우러 갔다가, 끝내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채 자기 본래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려 기어서 돌아왔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남의 것을 어설프게 흉내 내려다 제 본모습마저 잃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정유년(1597년)에 창서 양호가 우리나라의 군무를 총괄하는 경리사로서 서울에 와 군대를 주둔시켰다. 선조 임금께서는 하루는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자 하여 손수 편지를 쓰시고 도승지 이호민을 시켜 양호에게 전하게 하셨는데, 그 사연이 수천 자에 이르렀고 뜻도 매우 간절하였다. 양호는 회답하는 편지에 "방패와 창이 어지러이 부딪치는 시기이니 정사를 게을리할 때가 아닙니다"라는 두 구절만을 적어 돌려보냈는데, 임금께서도 이를 매우 옳게 여기셨다.
양호는 문관 출신 대신이면서도 몸소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 나섰다.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를 울산 도산성으로 몰아넣어 거의 사로잡을 뻔하였다. 이보다 더 큰 공이 없었는데도 끝내 모함을 받아 파직되어 돌아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그가 돌아가는 것을 아쉬워하였고, 돌에 그의 초상을 새겨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하였다.
예로부터 우리 동방을 정벌한 장수와 병사들은 공을 세우고도 모두 죄를 뒤집어썼다.
한나라 무제 때 조선의 네 군을 평정한 뒤 순체와 양복이 모두 죄를 지어 옥에 갇혔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한 뒤에는 영국공 이적이 공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품계와 녹봉을 깎였다. 백제를 평정한 뒤에는 소정방과 설인귀가 서로 공을 다투다가 제후로 봉해지는 일이 정지되고 관작마저 낮아졌다. 강조를 사로잡고도 소손녕은 고려 왕을 끝까지 뒤쫓지 않았다는 이유로 변방으로 유배되었고, 원나라는 살리타이가 죽을죄를 지었다 하여 그 부장 아릭테무르 이하를 함께 죽였다.
임진년(1592년) 왜란 이래로도 이와 다르지 않아, 경략 송응창은 모함을 받아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제독 이여송은 공적을 지나치게 부풀려 보고했다는 모함을 받아 죄를 입었으며, 찬획사 유황상과 원황도 함께 파직되었다. 정유년(1597년)에는 경리 양호가 모함을 받아 돌아갔고, 군문 형개와 제독 마귀, 제독 유정도 함께 명나라 관리 정응태의 탄핵을 받았다. 그 뒤 정응태 또한 이 일로 관직이 낮아졌고, 경리 만세덕도 어사의 탄핵을 받아 녹봉이 정지되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용어) 순체와 양복은 한 무제가 고조선을 정벌할 때의 장수들이다. 이적은 당나라 장수로 영국공에 봉해졌으며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소정방과 설인귀는 당나라 장수로 백제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강조는 고려의 장수이고, 소손녕은 거란의 장수로 고려를 침입했다가 강조에게 사로잡혔다. 살리타이와 아릭테무르는 고려를 침입한 몽골의 장수들이다.
전란을 겪은 뒤로는 조정의 관원들이 갓과 도포, 관복용 띠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 군복 차림에 슬갑을 두르고 칼을 차고 다녔다. 그러다가 경자년(160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정에 나갈 때 입는 조복을 갖추게 되었는데, 당상관 이상은 담홍색 비단으로 지은 홑겹 도포를 입었고, 당하관은 담홍색 무명으로 지은 홑겹 도포를 입었다. 그런데 식자들이 "임금의 옷 빛깔도 붉은데 임금과 신하가 같은 색의 옷을 입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여 검은 옷을 입기 시작하였다. 그때 당하관이 비단옷을 입는 것을 임금께서 엄격히 금하셨다. 사람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다시 붉은색 옷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신축년(1601년) 의인왕후의 상복을 벗은 뒤 복색을 다시 의논하게 되었는데, 서경 유근이 예조 판서로 있으면서 붉은색 비단옷을 주장하였고, 나도 그때 예조의 의제사에 있으면서 이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모두 조정의 논의가 옳다고 하였으나, 유독 오성 이항복만은 그르다고 여겼다. 오성은 나를 불러 꾸짖기를 "일개 낭관이 붉은 비단옷을 입고 싶다고 감히 조정의 논의를 흔든단 말인가?" 하였다. 그 뒤 경술년(1610년) 담제를 지내는 날에 복색을 검은색으로 정하고자 하였으나 지금껏 실행되지 않고 있다.
대체로 우리나라에서는 잇꽃을 많이 심어 붉은색으로 물들이기가 쉬웠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손쉽게 여겼던 것이다. 조상 대의 임금들이 홍색과 회색, 백색 옷을 금하는 조목까지 세웠지만 끝내 막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의복과 모자, 그릇 등에는 옛 중국의 제도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모두 이를 칭찬한다.
남녀가 신는 버선은 곧 옛날에 이르던 족건이라는 것이고, 남자가 쓰는 갓은 옛날에 일컫던 곡병립이라는 것으로, 남조 시대의 시인 사영운이 즐겨 쓰던 것이다. 사대부 집안 부인들이 쓰던 머리쓰개는 옛날의 유모이고, 신부가 혼인날에 쓰던 족두리는 곧 옛 중국의 경전 《시경》에서 말한 머리 장식과 같은 것이며, 군복인 철릭은 곧 옛날의 바지와 슬갑이다. 종묘 제사에 쓰는 그릇과 항아리, 대나무로 짠 그릇 뚜껑은 모두 주나라의 제도이고, 임금의 행차에 쓰는 곰과 표범 문양의 의장 지팡이와 창은 모두 수나라의 제도이다. 병조와 도총부에서 붉은 갓에 날이 없는 창을 갖추고, 금 단추를 달고 가죽바지에 슬갑을 두르는 것 역시 당나라의 제도이다. 이 밖에도 오랜 세월에 걸쳐 이어져 온 풍속이 매우 많아 다 적을 수 없을 정도인데, 이런 것들은 정작 중국에는 남아 있지 않은 것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악기는 모두 옛 제도를 따른 것이다.
거문고는 옛날의 오현금을 본떠 줄 하나를 더한 것이고, 가야금은 옛날의 비파를 본떠 열세 줄을 줄인 것이다. 방향과 요고, 대금, 그리고 종묘 제사에 쓰는 편종ㆍ편경ㆍ축ㆍ어ㆍ훈ㆍ지 등의 악기는 모두 당나라의 제도이다. 종묘 제례악 가운데 등가 악장 역시 당나라 사람이 지은 것을 본뜬 것이다. 민간에서 쓰는 음악으로는 풍입송ㆍ서자고ㆍ수룡음ㆍ오운봉서도 등의 악장이 있는데, 이는 송나라 휘종 때 우리나라에 내려 준 대성악으로서 오히려 옛 풍악의 자취가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서는 남곡과 북곡이 성행한 뒤로 당나라와 송나라 때의 옛 풍악이 모두 사라져 남은 것이 없다. 이른바 "예가 사라지면 오히려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 구할 수 있다"는 옛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고려 초에 음악을 맡은 관원이 당나라 때의 궁중 정악을 본떠 황풍악을 지었다. 그 악장은 왕씨가 나라를 처음 일으킨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었는데, 임금이 크게 조회를 열거나 거둥할 때면 반드시 이 곡을 연주하였다.
조선 건국 초에는 임금이 문인들에게 명하여 《용비어천가》 다섯 권을 짓게 하였다. 그중 앞의 일곱 장과 뒤의 세 장을 뽑아 여민락을 만들고, 황풍악의 가락에 맞추어 함께 연주하게 하였다. 임금이 서쪽 교외로 나가 중국 사신의 조칙을 맞이할 때면 이 음악을 대궐 뜰에서부터 연주하기 시작하여 숭례문에 이르러서야 한 곡이 끝났다. 그리고 다시 연주하면서 모화관에 이르러 임금이 가마에서 내리면 그제야 마쳤다. 선조 임금 초년에는 가락이 점점 빨라져서 한 곡이 으레 광통교에 이르러 끝나게 되니, 음악을 맡은 관원들이 가락이 이렇게 조급하게 줄어드는 것을 몹시 걱정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년(1592년)의 전란이 일어났다. 지금은 그 가락이 슬프고 급박하며 흐트러져서 도무지 수습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젊었을 때 태평성대의 문물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악공 가운데 허억봉이라는 이가 있어 피리를 잘 불었는데, 만년에는 거문고로 옮겨서도 그 솜씨가 뛰어났다. 박소로는 거문고를 잘 타서 옛 가락에 능했고, 홍장근은 민간의 가락에 능하여 두 사람 모두 일류로 꼽혔다. 또 가야금은 이용수, 비파는 이한, 아쟁은 박막동이 모두 일류로 꼽혔다. 노래로는 기생 영주선과 여성군 송씨 집안의 여종 석개를 모두 으뜸으로 쳤다.
그 뒤로는 이한의 조카 전한수와 이용수의 제자 임환이 스승의 재주를 이어받았다. 이 밖에도 왕실 종친인 죽장감은 아쟁과 비파에 능했고, 김운란은 아쟁을 잘 타서 그 소리가 마치 사람이 말하는 듯하여 그 가락을 듣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렸다. 또 서자 출신 김연이 가야금을 잘 탔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런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용수는 이미 늙었고 오직 임환 한 사람만이 남아 있을 뿐이며, 노래는 그 대를 이을 만한 이가 한 사람도 없다. 이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인재가 모자라게 되어서 그런 것일까.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명종 임금 때 선비 이언방이라는 이가 노래를 잘 불렀다. 가락이 맑고도 높아 감히 그와 재주를 겨루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일찍이 〈최득비여자가〉라는 노래를 부르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가 평양을 유람할 때, 그곳 교방에 속한 기생이 거의 이백 명에 이르렀다. 관찰사가 이들을 죽 늘어앉힌 뒤,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가리지 않고 우두머리 기생부터 어린 기생까지 한 사람씩 노래를 부르게 하고, 그때마다 이언방이 곧바로 화답하여 불렀는데, 그 목소리가 저마다의 목소리와 흡사하게 들리도록 부르되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개성 기생 진랑, 곧 황진이가 그가 노래를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의 집을 찾아갔다. 이언방은 자신이 이언방의 아우인 척 속이며 "형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도 노래는 제법 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한 곡조를 불렀다. 진랑이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저를 속이지 마십시오. 세상에 이런 노랫소리가 어찌 또 있겠습니까. 당신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옛날 노래를 잘했다는 면구와 진청인들 이보다 더 잘할 수 있겠습니까?"
(용어) 면구와 진청은 옛 중국의 노래 잘하던 이들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진랑은 개성에 살던 앞 못 보는 사람의 딸이다. 성품이 거침없어 마치 남자와 같았다. 거문고를 잘 탔고 노래도 잘 불렀다.
일찍이 산수를 유람하며 금강산에서 태백산과 지리산을 지나 나주에 이르렀는데, 마침 고을 원이 절도사와 함께 한창 잔치를 벌이고 있어 풍악과 기생들이 자리에 가득하였다. 진랑은 해진 옷에 때 묻은 얼굴로 태연히 그 자리에 끼어 앉아 이를 잡으며 노래하고 거문고를 탔는데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으니, 자리에 있던 여러 기생이 그 기세에 눌리고 말았다.
진랑은 평생 화담 서경덕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반드시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의 농막을 찾아가 한껏 즐긴 뒤에야 떠나가곤 하였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지족 선사는 삼십 년을 벽만 바라보며 수양했지만 내가 그 지조를 꺾어 놓았다. 그런데 오직 화담 선생만은 여러 해를 가까이 지냈어도 끝내 나와 아무 일도 없었으니,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성인이시다." 진랑은 죽을 무렵 집안사람에게 이렇게 부탁하였다. "상여가 나갈 때 부디 곡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인도해 다오." 지금까지도 노래하는 이들이 그가 지은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그 또한 남다른 인물이었다.
진랑이 일찍이 화담을 찾아가 이렇게 아뢴 적이 있었다. "송도에는 세 가지 빼어난 것이 있습니다." 선생이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자, 진랑은 "박연폭포와 선생님, 그리고 소인입니다" 하였다. 선생께서 이 말을 듣고 웃으셨다. 이는 비록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또한 그럴듯한 말이었다.
대체로 송도, 곧 개성은 산수가 웅장하면서도 굽이굽이 감돌아 흘러 뛰어난 인재가 많이 났다. 화담의 성리학은 조선에서 으뜸이었고, 석봉의 글씨는 나라 안팎에 이름을 떨쳤으며, 근래에는 차씨 집안의 부자와 형제 또한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진랑 역시 여인들 가운데서도 빼어났으니, 이것만 보아도 그가 한 말이 결코 헛말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개성에 안경창이라는 이가 있어 스스로 호를 사내라 하였다.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배부름을 잘 견뎌 낸다 하여 그렇게 호를 지었다고 한다. 그는 젊어서부터 집을 떠나 산수 사이를 떠돌아다녔는데, 일흔 살이 되어서도 얼굴이 늙지 않았고, 소재 노수신 정승, 지천 황정욱, 그리고 돌아가신 내 둘째 형과 가깝게 지냈다. 갑신년(1584년) 눈 내리는 겨울, 그는 갑산으로 귀양 가 있던 형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눈 속에서 적생원의 우물물로 목욕을 하고도 살갗에 소름 하나 돋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신기하게 여기며 무슨 비법이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여든넷의 나이에 병 없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 사람 역시 남다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증선지가 지은 《십팔사략》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문대공 성현이 이를 구하여 몹시 좋아하였다. 그때 그의 아들인 번중 성세창 정승이 이미 과거에 올라 있었는데, 공은 그에게 한 차례 이 책을 외워 보게 하고는 "이 정도면 대제학을 맡기에 충분하겠다"고 하였다. 조선 건국 초에는 모든 사람이 《고문진보》의 전집과 후집을 배우고서 문장을 지었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도 처음 글을 배울 때면 반드시 이 책을 중히 여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십팔사략》은 온갖 역사서를 통독한 사람이 그 요점을 추려서 잊지 않도록 기록해 둔 것이고, 《고문진보》는 한 사람이 우연히 이런저런 글을 뽑아 모은 것에 지나지 않으니, 그 고르고 버린 기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굳이 읽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어린 학생이 글의 이치를 깨우치는 데에는 《논어》와 《맹자》, 《통감》만으로도 충분한데 하필 그런 책을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있겠는가.
사문 조위한이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중국 사람들이 우리 동방 사람의 문장이 자기네보다 뛰어남을 꺼려서 《십팔사략》과 《고문진보》 두 책을 지어 우리나라에 보내왔다. 이 책들이 들어온 뒤로 우리 문장의 규모가 좁고 막혀서 옛날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이는 농담으로 한 말이라서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나 스스로 겪어 본 바가 있다. 나는 열두 살에 처음 글을 배웠는데, 《십팔사략》부터 읽는 것이 부끄러워 먼저 《통감》과 《논어》를 배웠더니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글의 이치가 훤히 트였다. 그런데 이웃에 살던 이 아무개는 일곱 살 때부터 《십팔사략》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빠짐없이 외웠고 그렇게 십 년을 외웠지만, 《통감》은 한 줄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하였다. 그런가 하면 여장 권필과 자민 이안눌은 모두 《고문진보》를 읽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시는 하나같이 좋았으니, 지세 조위한의 말도 나름의 이치가 있는 셈이다.
판부사 김수는 젊었을 때 《십팔사략》 읽기를 좋아하여 그 공부가 깊었다. 그가 교리가 되자 선조 임금께서는 그에게 《십팔사략》을 교정하게 하시고, 그 끝에 발문을 짓도록 하셨다. 그의 동료들이 이를 두고 놀리며 "신하를 알아보는 데는 임금만 한 이가 없다"고 하였다.
세상에는 글의 이치에는 어두우면서도 글은 잘 짓는 사람이 있다. 나의 매형 김성립은 경전이나 역사책을 읽으라 하면 입도 떼지 못하지만, 과거 시험용 문장만큼은 요점을 정확히 짚어내어 논술과 대책 문제에서 여러 차례 높은 등수에 들었다.
그가 대책문을 지을 때에는 거꾸로, 곧 글의 맨 끝부분부터 지어 올라가는 방식을 썼다. 맨 나중에 들어갈 마무리 부분을 먼저 짓고, 그다음에 폐단을 바로잡는 방안을 쓰고, 다음으로 조목조목 따지는 부분을, 그다음에 글 중간의 핵심 대목을 지은 뒤, 마지막으로 시험지에 옮겨 적을 즈음에야 비로소 첫머리를 지었는데, 그렇게 하고도 앞뒤가 조금도 어긋남 없이 정연하였으니, 이 또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식년시에서 경서의 뜻을 구술로 시험 보게 하는 것은, 본래 그 뜻을 제대로 밝혀 알고 있는지를 살피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선비들은 그저 구절을 끊어 읽는 법만 익힐 뿐 그 뜻은 전혀 알지 못한다. 경서의 장구마다 첫머리가 많아 다 기억하기가 어려우므로, 그럴듯하게 지어낸 말을 함부로 적어 넣어 외우는데, 그 요란한 말들을 성현이 남기신 훈계의 말씀 위에다 마구 늘어놓는 것이다. 이는 옛 성현을 욕되게 하는 짓이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일찍이 우초춘이 엮은 《명퇴조록》과 왕세정이 지은 《성사술》을 보았는데, 일찍 출세한 이들을 하나하나 갖추어 기록해 놓아 열한 살부터 쉰 살까지 빠짐없이 찾아 실어 놓았다.
우리나라에는 상고할 만한 기록이 마땅치 않으므로 우선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적어 둔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 인재가 매우 적기 때문에, 요행으로 과거에 오르고 요행으로 재상 반열에까지 오른 이도 많다. 이제 스무 살 이전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으로부터, 서른 살 이전에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 마흔 살 이전에 공경의 지위에 오른 사람들의 이름을 나이별로 다음에 적어 둔다.
열네 살: 곽거완이 진사가 되었고, 그 뒤 과거에 올라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열다섯 살: 구수영이 돈녕부 도정이 되었고, 이희순ㆍ이승건ㆍ권주ㆍ김규는 진사가 되었으며, 심언광은 향시의 세 시험에서 모두 장원을 하였다.
열여섯 살: 권홍ㆍ심은ㆍ장계금ㆍ이명한이 진사가 되었다.
열일곱 살: 남지는 경상도 도사가 되었고, 이행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열여덟 살: 구성군 이준은 병조 판서가 되었고, 이파는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김수녕과 박호는 문과에 장원하였고, 허봉ㆍ윤훤ㆍ이구는 생원진사시에 장원하였다.
열아홉 살: 이대해ㆍ이집ㆍ이후는 문과에 합격하였고, 오남은 무과에 장원하였다. 우흥적은 진사시에 장원하였다.
스무 살: 박은ㆍ박홍린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구는 문과에서 갑과 둘째로 급제하였다.
스물한 살: 구성군 이준은 도원수가 되었고, 이파는 이조 좌랑이 되었으며, 윤계선은 문과에 장원하였다.
스물두 살: 성표는 정국공신에 녹훈되었다.
스물세 살: 엄흔이 이조 좌랑이 되었다.
스물네 살: 허봉과 김신국이 이조 좌랑이 되었고, 남이는 승지가 되었다.
스물다섯 살: 윤계겸은 승지가 되었고, 박동량은 당상관이 되었다.
스물여섯 살: 남이는 병조 판서가, 이파는 도승지가, 박원종은 병조 참의가, 김신국은 의정부 사인이 되었고, 정사룡은 중시에 장원하였다.
스물일곱 살: 허봉은 예문관 응교가, 성표는 당상관인 첨지가, 김수녕은 이조 참의가, 신면은 승지가 되었다.
스물여덟 살: 구성군 이준은 영의정이 되었고, 이행은 승지가 되었다.
스물아홉 살: 윤사흔은 관찰사가, 박은은 승지가, 한숙창은 호조 참의가, 이계동은 대사헌이 되었다.
서른 살: 권건ㆍ신종호는 모두 승지가 되었고, 유운은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서른한 살: 이덕형은 겸 대제학이 되었다.
서른두 살: 박원종은 한성부 판윤이, 윤계겸은 공조 판서가 되었다.
서른세 살: 김감은 예조 판서가, 김정은 형조 판서가 되었다.
서른네 살: 박은은 병조 판서가, 한확은 이조 판서가, 허종은 함경도 관찰사를 겸하였다.
서른다섯 살: 김감은 겸 대제학이, 윤사윤은 의정부 참찬이, 유담년은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서른여섯 살: 성준과 이극감이 모두 형조 판서가 되었고, 박동량은 호조 판서가 되었다.
서른일곱 살: 윤사흔은 찬성이, 이정귀는 호조 판서가, 이자는 참찬이 되었다.
서른여덟 살: 이덕형은 우의정이, 한확은 찬성이, 이정귀는 대제학이, 장운익은 형조 판서가 되었다.
서른아홉 살: 윤사흔은 우의정이, 이파는 찬성이, 황치신은 참찬이 되었고, 성표는 음직으로 군에 봉해졌다.
마흔 살: 김질은 부원군이 되었고, 남지는 우의정이, 최천건은 이조 판서가 되었다.
이 밖에도 일흔다섯 살에 정승이 된 이가 두 사람이니, 청천 심수경과 완성 이씨였다. 나의 외사촌 형 김자한은 예순두 살에 경서 구술시험에서 열네 점을 받아 합격하여 과거에 올랐으니, 늘그막에 귀하게 된 경우로서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근래 재상 반열에 오른 이 가운데 아흔 살을 넘긴 이가 두 사람이니, 판중추부사 원혼과 좌찬성 송찬이다.
형조 참판 이거의 어머니는 백세 살에 세상을 떠났다. 상을 당할 때 참판은 일흔일곱, 큰딸은 여든다섯, 다음 딸은 여든두 살이었는데 모두 병이 없었다. 그 노인이 나이 백 세가 되었을 때 임금께서 부인이라는 칭호를 내리고자 하셨으나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므로, 특별히 그 아들에게 한성부 우윤 벼슬을 내리시고 아들의 관직에 맞추어 부인에게 내리는 임명장을 내려 주셨으며, 이 밖에도 쌀과 폐백, 술과 고기를 후하게 내리는 등 은혜로운 하사품이 많았다. 참판의 다섯 아들이 모두 벼슬길에 나아갔고, 손자가 거의 백 명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그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었다.
강릉부 태화현의 갑사 임세적은 백열일곱 살에 세상을 떠났으니, 근래에 없던 일이었다.
근래에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한 집으로는 윤신의 아들 후ㆍ길ㆍ서ㆍ감ㆍ탁 다섯 형제가 있다. 이들은 모두 이삼 년 사이에 잇달아 급제하였는데, 끝의 세 사람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다음으로는 윤해원의 아들 방ㆍ양ㆍ휘ㆍ훤이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고 벼슬도 모두 당상관에 이르렀다. 맨 끝으로 서자인 한도 과거에 올라 품계와 녹봉이 당상관 급으로 올랐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오르고 나란히 당상관에 오른 것 또한 드문 일이다. 이 밖에 무과로는 원주의 이응해와 부안의 민정란 형제가 있다.
과거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높이 발탁된 경우로는, 우의정 정지연이 급제한 지 열세 해 만에 정승으로 등용된 일이 있는데 이는 세자를 가르친 노고 덕분이었고, 좌의정 기자헌은 열다섯 해 만에 정승으로 뽑혔는데 이는 왕실과 혼인으로 맺어진 인연으로 총애를 받아서였다.
연원군 이광정과 금계군 박동량이 급제한 지 네 해 만에 당상관의 옥관자를 붙이게 된 것은 임금을 모시고 피란한 공로 때문이었고, 안종록이 여덟 해 만에 정이품의 금띠를 두르게 된 것은 관리로서의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참의 송준과 참의 성이문이 모두 다섯 해 만에 당상관의 붉은 옷을 입게 된 것은 청요직에 제수되어 갑작스레 승진하였기 때문이었다.
낮은 관직에서 갑작스레 크게 승진한 경우로는 월사 이정귀가 있다. 그는 정유년(1597년)에 병조의 낭관으로 있다가 세자시강원 필선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식 벼슬로 사헌부 집의가 됨과 동시에 당상관에 올랐다. 무술년(1598년)에는 병조 참판으로 발탁되었고, 경자년(1600년)에는 호조 판서로 승진하였다. 신축년(1601년)에는 대제학이 되었는데, 이는 그의 문학이 임금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으로 유천 한준겸은 정유년에 사간에서 승지가 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분음 최천건은 정유년에 헌납에서 잇달아 사간과 승지로 승진하였고, 기해년(1599년)에 품계가 올라 도승지가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재주와 그릇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의정 정언신이 대신으로서 군기시 제조를 겸했을 때, 같은 해에 장원 급제했던 이충원은 겨우 군기시 정에 머물러 있었다. 그 뒤 오성 이항복 또한 대신으로서 군기시 제조가 되었을 때, 같은 해 장원 급제했던 황치성이 또한 군기시 정으로 있었다. 이 두 경우가 서로 꼭 들어맞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오성이 황치성에게 농담으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대가 완원 이충원처럼 되는 것은 좋지만, 내가 정 정승처럼 되는 것은 원치 않네." 이는 완원이 그 뒤 일품 벼슬에 이르러 부원군이 되었지만, 정 정승 정언신은 정승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귀양을 가서 그곳에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오성 정승은 우스갯소리를 잘하였다. 근래 나라에 변고가 잦아지자, 해당 관청에서는 으레 대신에게 의견을 물어 임금께 아뢰곤 하였는데, 이것이 도를 넘어 사소한 일까지도 대신에게 의견을 묻게 되니 대신들이 이를 괴롭게 여겼다. 하루는 예조의 낭관이 의견을 물으러 와서 앞에 앉아 있었다. 공이 막 생각을 정리하여 의견을 말하려는데, 어린 계집종이 안에서 여쭙기를 "말먹이 콩이 다 떨어졌는데 어찌할까요?" 하였다. 공이 꾸짖으며 "말먹이 콩을 채우는 일까지도 대신에게 의견을 물어야 하는가?" 하니, 듣던 사람들이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나의 친가는 건천동에 있었다. 청녕공주 저택 뒤에서 본방교까지 겨우 서른네 채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조선 건국 이래로 이름난 인물이 많이 나왔다.
김종서ㆍ정인지ㆍ이계동이 같은 시대에 살았고, 양성지ㆍ김수온ㆍ이병정이 또 한 시대를, 유순정ㆍ권민수ㆍ유담년이 같은 시대를 살았다. 그 뒤로도 정승 노수신과 나의 선친, 그리고 지사 변협이 같은 시대였으며, 근래에는 서애 유성룡과 나의 둘째 형, 그리고 덕풍군 이순신, 원성군 원균이 한 시대를 살았다. 서애는 나라를 중흥시킨 공이 있었고, 원균과 이순신 두 장수는 나라를 구해 낸 공이 있었으니, 이 무렵에 이르러 더욱 성대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 이야기를 오성 정승에게 들려주었더니, 정승이 "그 동네에는 무장도 있는가?" 하고 물었다. 내가 "성우길의 벼슬이 가장 높습니다" 하고 답하니, 정승이 다시 "그대들과 견줄 만한가?" 하고 물었다. 내가 웃으며 "성 장군도 북쪽 변방에서 공을 세운다면, 훗날 사람들이 오늘을 돌아볼 때 오늘 우리가 옛일을 돌아보는 것과 같지 않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니, 정승이 크게 웃었다.
정승 심연원은 호음 정사룡과 같은 신해년(1491년)생이었다. 정사룡이 병자년(1516년) 봄 중시에 장원하여 홍문관 응교가 되었을 때, 찬성 김당의 집에 간 일이 있었다. 심연원은 그 김찬성의 사위였는데, 김공이 그를 불러내어 정사룡과 서로 인사를 나누게 하였다. 자리에 앉은 뒤 나이를 물으니 서로 동갑이었다. 그런데 정사룡은 이미 두 차례나 과거에 올랐는데 심연원은 아직 벼슬 없는 유생 신분이었으므로, 그때 자못 부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그 뒤 심공도 과거에 올라 좋은 벼슬을 두루 거치고 마침내 의정부에 들어갔다. 그런데 정사룡은 여전히 돈녕부 지사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심공이 비로소 그를 추천하여 예조 판서가 되게 하였다. 세상의 벼슬살이가 수없이 뒤바뀌는 것이 대개 이런 식이다.
참의 박미는 아들이 셋이었다. 그중 소영과 증영은 둘 다 일찍 과거에 올라 나란히 이조의 낭관이 되었으니 당대의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맏아들 광영은 어찌 된 셈인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채 마흔 살의 나이로 성균관 학생으로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나무랐고 본인도 스스로 곤혹스럽게 여겼다.
그 뒤 두 아우가 잇달아 세상을 떠났고, 광영은 뒤늦게야 과거에 올라 청요직을 두루 거쳐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봉군까지 되었으며 일흔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자손들도 잇달아 과거에 올랐고 재상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의 운명이란 이러하니, 빠르고 늦음이나 잘 풀리고 막히는 것을 가지고 한탄할 일이 아니다.
나의 외조부 되시는 참판공은 계묘년(1543년)에 영남 관찰사를 지낸 뒤 두 번째로 호조 참판이 되었다. 당초에 유인숙 공이 이조 판서로 있었는데 참판공과 우의가 두터웠으므로 그를 추천하여 도승지로 삼았다. 공은 송인수ㆍ구수담ㆍ이임ㆍ이해 등과 더불어 자주 삼사의 후보 명단에 올라 무려 열여섯 차례나 추천되었으나 끝내 임금의 낙점을 받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공은 가장 늦게야 전주 부윤으로 제수되어 지방으로 나갔는데, 유공은 그가 외직으로 나가는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을사년(1545년)에 유공이 사약을 받아 죽자, 그가 천거하여 언관이 된 이들은 모두 뜻밖의 화를 당했다. 참판공의 강직한 성품으로 그때 조정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흉악한 무리의 노여움을 샀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지방에 나가 있었던 덕분에 오히려 화를 면할 수 있었으니, 화와 복이란 이처럼 사람의 헤아림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께서 사헌부 장령으로 계실 때, 조정의 논의는 김안로를 다시 불러들이려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할아버지의 고향 사람이었던 심언광 형제가 그때 요직에 있었다. 김안로는 이들과 은밀히 결탁하고서, 기묘년(1519년)의 사화로 쫓겨난 사람들을 다시 등용하겠노라 약속하였다. 대체로 두 심씨는 그때 화를 입은 선비들을 다시 불러들여 심정ㆍ이항과 맞서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와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김안로의 말을 믿고 힘써 이 일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회재 이언적 선생이 사간으로 있으면서 그 논의를 힘껏 반대하였다. 심언광이 "이 아무개가 조정에 있는 한 김안로는 조정에 들어올 수 없다" 하고, 그를 탄핵하여 쫓아내려 하였다. 할아버지께서 이를 만류하며 "복고 이언적은 정직한 사람이고 김안로는 단정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사림을 다시 등용하겠다는 그의 말만 믿고 착한 선비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으나, 심언광은 듣지 않았다.
그 뒤 김안로가 다시 조정에 들어오자 하는 짓이 좋지 못했고, 기묘년에 화를 입은 이들도 다시 등용하지 않았다. 심언광이 그제야 분하게 여겼고, 김안로가 장옥 부자를 죽이려 할 때 심언광이 힘써 이들을 구해 준 일로 김안로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이조에서 함경도 관찰사로 밀려나 지방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 뒤 다시 김안로가 쫓겨나자 심언광을 대사헌으로 불러들였는데, 당시 논의는 "심언광이 아니었다면 김안로가 어찌 조정에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그 뒤에 비록 그와 맞섰다고는 하나 대사헌 자리에 제수할 수는 없다"고 하여, 그를 탄핵해 파직시켰다. 할아버지께서 그때 강원도 관찰사로 계셨는데, 길에서 심언광을 만나 위로해 주셨다. 심언광이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말하였다. "군자는 사람을 천거하는 일에 신중하지 않으면 반드시 일을 그르친다고 예로부터 경계하였는데, 나는 그것을 지키지 못하였으니, 공께서 하셨던 말씀을 이제 와 생각하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결국 이 일로 한을 품은 채 집으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외조부의 아우 되시는 광진 역시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젊었을 때 판윤 최연과 함께 절에 들어가 공부한 적이 있었다. 《주역》을 읽다가 채 절반도 마치지 못했는데 설날이 다가왔다. 두 분이 함께 부모님을 뵈러 내려가는 길에 저마다 공부한 것을 외워 보았는데, 최연 공이 잊어버린 대목이 있음을 알고는 곧바로 절로 되돌아 올라가 다 왼 뒤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옛 선배들이 배움에 뜻을 두는 것이 이처럼 독실하였다.
최연은 문장에 뛰어났고, 용모가 단정하여 옛날 문장가 반악과 하후담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스물세 살에 과거에 급제하니 여러 대신이 그를 아꼈다. 그가 독서당과 홍문관에 들어가게 된 것도 모두 그 생김새 덕분이었다. 중종 임금께서도 그 아름다운 용모와 몸가짐을 칭찬하셨다. 일찍이 밤마다 연이어 경연을 열었는데, 내시가 너무 자주 여는 것이 아니냐고 아뢰자 임금께서 "내가 최연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하셨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수찬으로 있을 때의 일이라 한다.
가정 신축년(1541년)에 외조부께서 전라도 관찰사가 되셨다. 그 아우 참판공은 그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있었는데, 두 분이 쌍계역에 함께 모여 아버지의 제사를 지냈다. 갑진년(1544년)에는 할아버지께서 경상도 관찰사가 되셨고, 참판공은 또 전라도를 순찰하는 직임을 맡았다. 이때에도 다시 쌍계역에서 제사를 거행하니, 영남과 호남의 사람들이 모두 이를 영예로운 일로 여겼다.
강원도는 땅이 좁지만, 강릉과 원주에는 이름난 인재가 많았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강릉에서 이름난 정승이 많이 나왔으나, 명종 임금 때부터는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이 전혀 없다. 원주에서는 팔계군 정종영과 판서 이개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근래에는 과거에 높이 합격한 이가 잇달아 나왔으나,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는 이가 많다. 강릉에서는 태사 최대중이 과거에 급제한 지 서른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이오라는 이가 과거에 급제했다고 한다.
원주 사람 고경오는 을사년(1605년) 증광시 향시에서 〈홍수불벽〉이라는 제목의 부를 지어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서울에서 치른 회시에서는 〈서명벽상〉이라는 부를 지어 합격하였는데, 그 이듬해 성균관 관원으로 있다가 벽에 글을 써 붙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매를 맞고 죽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한강 정구가 강릉 부사가 되었을 때, 임명 소식을 담은 조보가 강릉에 내려왔다. 향교의 학생 함승술이 강릉부에 들어왔다가, 새로 부임할 부사의 이름 끝 글자가 자기 이름의 끝 글자와 같은 것을 보고는 그것을 자기 이름자로 잘못 알았다. 집에 돌아오자 친구들이 "누가 부사로 왔는가?" 하고 물으니 "정술이라는 사람이 되었다" 하여, 사람들이 이를 듣고 웃었다.
그 뒤 한강이 부임하여 향교의 학생 명부를 살펴보다가 승술이라는 이름을 보고는, 또 그것을 자기 이름의 글자와 같은 것으로 잘못 알고 "함승구의 자는 무엇인가?" 하고 물으니, 듣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관찰사 권윤은 외조부의 외증조부이시다. 성종 임금 때 성균관의 우두머리로 있은 지 스무 해나 되었다. 그리하여 중종 임금 때 학문한 선비들은 모두 그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의 손자 권연은 기묘년(1519년) 봄 과거에서 〈대악부〉와 〈어룡무동정시〉라는 글을 지었는데 둘 다 훌륭하였다. 답안지의 이름을 열어 보니 바로 공의 손자였다. 지정 남곤이 그때 시험을 주관하였는데, 서둘러 그를 뽑아 장원으로 삼았다. 그는 식년시의 경서 구술시험에 두 차례 응시한 적이 있었다. 집에 두 장이 떨어져 나간 《맹자》 책이 있었는데, 시험 문제가 설마 그 떨어져 나간 부분에서는 나오지 않으리라 여겨 그 부분은 읽지 않고 응시하였다. 그런데 두 차례 시험 모두 《맹자》 문제가 하필 그 부분에서 나왔으므로, 운명이라 여겨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 뒤 조정에서 세자익위사 세마와 왕자의 사부로 두 차례나 불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정원과 연못을 잘 꾸미고 풍류로 스스로를 즐기며 살아, 그 고을에서 첫손에 꼽혔고, 소박한 복을 마흔 해 넘도록 누렸다.
권 장원의 딸은 진사 신명화의 아내이다. 그 시어머니가 병으로 위독해지자 권씨는 향을 피우고 한데에 나가 밤낮 이레 동안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권씨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는데, 하루는 하늘에서 새알만 한 빨간 환약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를 주워다가 갈아서 시어머니께 먹게 하였더니, 향기가 방 안에 가득했고 시어머니의 병도 곧 나았다.
이는 정성 어린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 하여 지금까지도 그 고을 노인들이 이야기한다. 조정에서 이 일을 듣고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율곡 선생의 어머니는 바로 이 권씨의 외손녀이다. 그런 까닭에 선생은 북평에 있던 권 장원의 집에서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날 때 상서로운 빛이 하늘에 비쳤는데, 장원은 이 아기를 남달리 여겨 몹시 사랑하였다. 선생의 어머니는 성품이 고요하면서도 굳세었고 문장에 능했으며 그림도 그렸다. 몸가짐이 매우 엄정하여 여성의 법도로 스스로를 단속하였는데, 선생의 학문은 태교에서부터 얻은 바가 많았다고 한다.
강릉은 풍속이 순박하여 예로부터 효도와 정절을 지킨 이가 많았고, 이를 기려 세운 정문이 마을마다 잇달아 보였다. 송강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에 "집집마다 벼슬을 내려도 좋을 만하다"라고 한 것이 결코 헛말이 아니었다.
한강 정구가 부사로 와서 효자와 효손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는데 참석한 이가 쉰두 명이나 되었다. 이런 장한 일은 예나 지금이나 드문 것이었다.
첨지 김담은 강릉 사람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 섬기는 정성이 더할 나위 없었다. 맛있는 음식은 손수 만들었고,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모시기를 마흔 해가 넘도록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버이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곡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지팡이를 짚어야 겨우 몸을 일으킬 정도였다. 술을 잔에 부어 놓고 부모의 신위를 모신 휘장 앞에 엎드려 하루 종일 통곡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잔의 술이 문득 말라 있어 사람들이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그는 일찍이 산에 올라 돌을 떠내어 부모의 묘표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런데 마침 한창 얼어붙은 겨울이어서 돌이 쪼개지지 않자, 공이 그 돌을 붙들고 통곡하니 돌이 갑자기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사람들은 이를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 하여 모두 감탄하였다. 조정에서 세 차례나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고, 대신 정문을 세워 그의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 뒤 나이가 일흔에 이르자 관찰사가 이를 임금께 아뢰어 특별히 당상관인 첨지 벼슬을 내렸으며, 그는 아흔 살까지 살았다.
남사고는 울진 사람으로, 애써 공부하여 역학의 이치에 두루 통달하였다. 천문과 지리, 점술에도 밝아 그가 말한 일은 하나같이 신기하게 맞아떨어졌다.
향시에는 여러 번 합격했으나 끝내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벗들이 "자네는 남의 운명은 잘 알면서 정작 자기 운명은 헤아리지 못하고 해마다 헛걸음을 하니 어찌 된 일인가?" 하고 물으니, 남사고가 웃으며 이렇게 답하였다. "사사로운 욕심이 생기면 점술도 어두워지는 법일세. 내가 합격하지 못할 것을 분명히 알았더라면 애초에 과거장에 가지도 않았겠지만, 욕심에 이미 생각이 흐려진 까닭에 늘 혹시나 합격할까 하는 마음으로 들떠서 오갔던 것이라네."
만년에 그가 천문학 교수로 서울에 있을 때, 태사성이라는 별에 무리가 지는 변고가 일어났다. 이를 두고 관상감 정 이번신이 자기가 나이가 많으니 이 변고가 자신에게 해당될 것이라 하였는데, 남사고가 웃으며 "따로 해당될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두어 달 뒤 과연 남사고 자신이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 이는 옛날 오나라 땅의 은자가 별의 변고에 자신이 죽기를 바랐으나 끝내 죽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견주면 무엇이 다르다 하겠는가.
(용어) 옛날 진나라 때 달이 어느 별자리를 범하자 점치는 사람이 은자가 죽을 것이라 하였는데, 당시 이름난 은자였던 대규는 혹 자신이 그에 해당할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 다른 은자인 사부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대규가 죽기를 바랐으나 죽지 못했다며 놀렸다는 옛이야기가 전한다.
왕실 종친인 서천령은 장기를 잘 두었다. 하루는 금강산 백전암을 유람하다가 지엄이라는 화상을 만났다. 텅 빈 방에 아무것도 없었고 다만 장기판 주머니가 벽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서천령이 "스님도 장기를 두실 줄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삼십 년 전에 두어 본 적이 있소" 하였다. 서천령이 곧 그 장기판을 가져다가 대국을 청하니, 스님이 한쪽 포를 빼고 두겠다고 하였다. 이를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이 늙은 중은 평생 포 하나만으로 두어 왔소" 하였다. 서천령이 "나는 전국에서 첫손에 꼽히는 솜씨요. 다른 사람들은 나와 대국조차 못 하는데, 스님은 어찌 포 하나를 떼고 두려 하시오?" 하니, 스님이 "시험 삼아 한번 두어 봅시다" 하였다. 세 판을 두었으나 서천령이 번번이 지고 말았다. 화상이 웃으며 장기판을 치우고는 다시 두지 않았다. 서천령은 탄복하며 그곳을 떠났다.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온 이들은 문희 예겸으로부터 진즙희ㆍ규봉 동월ㆍ자양 당고 등이 모두 당대에 이름난 이들이었지만, 재상 반열인 내각에 들지 못했다는 이유로 한림학사로서 사신으로 정해지면 으레 이를 피하려 하였다.
정묘년(1567년)에 명나라 목종이 즉위하여 우리나라에 조서를 반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시강 정사미를 사신으로 삼았으나 병으로 교체되었고, 병록 범응기를 대신 임명하였으나 그 역시 이를 피하려 하였다. 그때 마침 검토관으로 있던 각로 허국이 스스로 가기를 자청하여, 사신의 임무를 훌륭히 마치고 돌아갔다.
그 뒤 정사미는 시랑이 되었으나 일찍 죽었고, 범응기는 탄핵을 당해 오래도록 하급 관서에서 맴돌다가 뒤늦게야 겨우 남경 국자감의 좨주가 되었지만 또 권신의 미움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허국 공은 을유년(1585년)에 내각에 들어가 벼슬이 소부와 이부 상서에 이르렀고 일흔 살까지 살았다. 이는 혹시 하늘이 정사미와 범응기 두 사람이 일부러 사신 가기를 피한 것을 미워해서가 아니었을까?
감주 왕세정이 한씨 성을 가진 태사가 지은 세계 기록에 발문을 쓴 적이 있는데, "조선 사람이 문장에 능하다"고 한 뒤, 우리나라의 시를 명나라 선덕ㆍ성화 연간의 시와 견주고, 우리나라의 글씨는 원나라 명필 조맹부와 견주었다. 왕세정의 문집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름난 이들이 이를 보고는 우리나라를 낮추어 본 것이라 하여 매우 치욕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 와서 자세히 살펴보니, 왕세정이 평한 것은 실은 우리를 기린 것이지 깎아내린 것이 아니었다. 왕세정은 일찍이 선덕 연간의 양사기와 성화 연간의 이동양ㆍ정민정 등 여러 사람의 작품을 당나라 경룡 연간의 시와 견준 일이 있다. 그런데 양사기와 이동양은 이태백과 두보에 견주면서 우리나라의 시는 경룡 연간에 견주었으니, 이는 지나친 처사였다. 왕세정은 또 글씨를 평하면서 왕희지와 왕헌지 이후로는 오직 조맹부가 있을 뿐이고, 구양순ㆍ저수량ㆍ우세남ㆍ안진경ㆍ채양ㆍ미불은 모두 그다음 자리라고 하였다. 그런데 석봉의 글씨를 조맹부에 견주었으니 이 또한 충분히 높인 셈이다. 잠깐 보고 분하게 여겼던 것이니 참으로 한바탕 웃어넘길 만한 일이다.
급사 서관란은 그 가운데서도 글씨에 가장 뛰어난 이였다. 우리나라에 왔던 어느 명나라 장수가 안평대군의 글씨로 된 족자를 손에 넣고는, 이를 조맹부의 친필이라 속여 서관란에게 바쳤다. 서관란은 나를 불러 이것이 누구의 글씨인지 물었다. 내가 "세종대왕의 아들이신 안평대군 이용의 글씨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서관란은 "나는 참으로 이것이 조맹부의 글씨가 아닌가 의심했었소. 세상에 어찌 이토록 신묘한 글씨가 있단 말이오" 하였다.
하루는 그가 석봉에게 글씨를 청하므로, 석봉이 옛사람들의 글씨체를 본떠 열 폭을 써서 바쳤다. 서관란이 이를 하나하나 가려내며 말하였다. "이것은 장지의 체이고, 이것은 왕희지와 왕헌지의 체이며, 이것은 저수량의 체이고, 이것은 구양순과 지영의 체이며, 이것은 안진경의 체이고, 이것은 미불과 조맹부의 체로다." 마지막 한 폭은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를 본뜬 것이었는데, 서관란은 "이것은 옛 법도에 맞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굳세고 아름다워 사랑스럽다"고 하였다. 석봉은 이 말에 깊이 감탄하였다.
서관란 급사가 일찍이 먹 한 장을 나에게 주면서 "이것은 금나라 장종 때 만든 먹이니, 평생을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내가 이를 갈아 보니 빛깔은 짙은 검은색에 살짝 엉기어 있었고 향기가 여전히 짙었다. 무술년(1598년) 겨울부터 쓰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열세 해가 되었는데도 겨우 한 글자 두께만큼밖에 갈리지 않았으니, 참으로 기이한 물건이다.
왕세정이 일찍이 말하기를 "선성 지방의 제갈씨가 만든 붓은 더없이 정밀해서 하루 종일 써도 닳지 않는다"고 하였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 태사가 나에게 그런 붓 다섯 자루를 준 적이 있었는데, 토끼털로 만든 것은 뻣뻣하여 쉬이 말랐고, 양털로 만든 것은 부드러워 쉬이 꺾여서, 모두 우리나라의 족제비털로 만든 붓만은 못하였다.
주지번은 내가 쓰던 붓을 써 보고는 "닷새를 썼는데도 닳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천하제일의 붓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이런 붓을 수천 자루나 구해 갔다. 그는 또 우리나라 종이도 좋아하여 그중에서도 아주 얇은 것을 골라 많이 가져가며 "이것은 탁본을 뜨거나 그림을 본떠 그리기에 좋다"고 하였다.
돌아가신 둘째 형이 일찍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황씨와 왕씨, 두 명나라 사신은 몸가짐이 매우 엄정하였다. 임금께서 종이와 붓, 먹을 내려 주셨으나 모두 받지 않았다. 하루는 궁궐 안에 보관하고 있던, 일본에서 나는 닥종이로 찍은 《이백집》과 《두시》를 한 질씩 나누어 주었는데, 부사 채양은 이를 펼쳐 보고는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였다. 그런데 정사가 이를 받아들였는지 사람을 보내 물어보게 하였는데, 정사가 이미 돌려주었다는 말을 듣고는 자기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아, 이런 사람을 어디서 다시 볼 수 있겠는가."
근래 사신으로 온 이들 가운데 유독 웅대행만은 청렴하다고 일컬어지지만, 그 역시 서책이나 종이, 붓만큼은 받아 갔다고 한다.
오봉 이호민은 고천준ㆍ최정건 두 사신을 접대하면서 이들이 자꾸 물품을 요구해 와 몹시 시달렸고, 서경 유근은 주지번ㆍ양유년 두 사신을 접대하면서 시와 부를 주고받느라 몹시 고생하였다. 여장 권필이 이를 두고 "오봉은 몸이 고달팠고 서경은 마음이 고달팠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이 옳다고 하였다.
역관 이화종은 젊었을 때 지정 남곤과 음애 이자를 따라 북경에 간 일이 있었다. 마침 명나라 무종 황제가 남쪽 지방을 순행하고 있어, 이화종은 역참의 말을 타고 황제가 머무는 행재소까지 갔다가 남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우 지방의 물가에 이르러 말이 지쳐 잠시 앉아 쉬게 되었다. 그때 모래 속에 삐죽이 뼈 하나가 나와 있는 것을 보고 파냈더니, 여섯 마디로 이루어져 있고 꾸불꾸불하며 눈처럼 하얀 것이었다. 그는 별생각 없이 이것을 짐 속에 챙겨 넣고 북경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장사꾼들이 물건을 벌여 놓고 값을 흥정하고 있었다. 이화종이 이 뼈를 꺼내 짐짓 자랑하며 속여 팔려 하니, 한 장사꾼이 이를 보고 절을 하며 말하였다. "이것은 뿔 없는 용의 등뼈인데 그 안에 큰 구슬이 여섯 개나 들어 있으니 참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입니다." 급히 톱으로 갈라 보니 과연 복숭아씨만 한 구슬 여섯 개가 나왔다. 그 장사꾼은 곧 천 냥어치의 비단을 값으로 치르고 이것을 사 갔다. 이화종은 "이것은 하늘이 내려 준 것이니 어찌 나 혼자 차지할 수 있겠는가" 하고, 그 비단을 모두 나누어 상통사부터 노복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주었다. 남곤과 이자, 두 분도 이를 아름답게 여겨 시를 지어 칭찬하였다.
영원백 이성량의 할아버지는 본래 우리나라 이산 지방의 독로강가에 살다가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부부가 함께 철령위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 아버지는 변경을 지킨 공으로 유격장군이 되었고, 이성량은 아버지의 음덕으로 지휘 벼슬을 받았다. 젊었을 때 오랑캐를 쳐서 사로잡은 이가 많아 험산보 참장으로 기용되었다.
명나라 사신 허영양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압록강 가까지 전송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법으로 정해진 호위 군사의 수를 줄이고 그 몫으로 남는 말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허 사신이 이를 탄핵하려 하자, 이성량이 역관 곽지원에게 부탁하여 이 일을 무마해 달라고 청하니 마침내 탄핵을 면하게 되었다.
그 뒤 몇 해가 지나지 않아 이성량은 공을 세워 총병이 되고, 영토를 천 리나 넓혀 다섯 곳에 성을 쌓았다. 백작으로 봉해졌고, 그의 아들과 사위 가운데 고관에 오른 이가 수십 명에 이르렀다. 이들의 위세가 요동 일대를 뒤덮어 거의 사십 년 동안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근래에는 이에 견줄 만한 이가 없었다.
곽지원은 일찍이 북경을 오갈 때마다 이성량에게서 매우 후한 대접을 받았는데, 이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 집안의 성씨는 가락국 왕비에게서 비롯되었으니 거의 칠백 년이나 되었다.
고려 초에 이르러 시조께서 다스리시던 고을이 양천이었으므로, 마침내 이곳에 본관을 붙이게 되었다. 고려 오백 년이 끝날 때까지 대대로 과거에 올라 높은 벼슬을 지냈다. 정승이 된 이가 열한 분이고, 추밀원에 들어간 이가 여섯 분이다. 학사가 아홉이고, 공주와 혼인한 이가 다섯이다.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한 이가 둘이고 군에 봉해진 이가 열넷인데, 대대로 문장으로 이름난 이가 있었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다소 쇠퇴하여, 정승이 세 사람, 찬성이 두 사람, 육조의 판서가 넷이다. 공신이 세 사람, 학사가 열둘이다. 그중에서도 충정공 형제와 지사 허집, 찬성 허자, 그리고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초당 선생을 가장 으뜸으로 꼽는다. 근래에는 유수를 지낸 허잠이 청백리로 뽑혔는데, 이 또한 선조들의 이름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라 하겠다.
유격장군 허국위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나를 보고 반가워하였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허태악의 후손이라는 그대들이 나와 같은 성씨라 하니 사람들이 터무니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가락국의 왕비가 다른 나라에서 배를 타고 건너왔다고 하니, 어쩌면 그분이 중국 사악 신을 제사 지내던 가문의 후손으로서, 스스로 어느 왕국의 딸이라 핑계 대고 혼인을 이룬 것이 아니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이 유격의 말에도 나름의 일리가 있었다.
우리 선대는 야당 선생 이후로 두 대에 걸쳐 연달아 과거에 오른 분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리 고조부 때에 이르러 형제분이 함께 과거에 뽑히셨으나, 아우 되시는 분은 겨우 사간에 머물렀고, 고조부께서는 벼슬에 나아가지도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그 사간의 아들인 허집은 벼슬이 지사에 이르렀고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우리 증조부는 과거에 오르지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그 아우 되시는 허위는 지평이, 허온은 승지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문장에 능하셨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집안이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 삼 형제가 함께 문과에 올랐는데, 큰형님은 육조의 판서에 이르렀고, 둘째 형님은 학사가 되었으며, 나 또한 당상관의 반열에 들었다. 큰형님의 아들 실도 문과에 올라 정언이 되었고, 여러 조카도 모두 맑고 뛰어나 문장으로 이름이 있다.
이는 모두 선조께서 쌓으신 공덕의 효과이니, 대개 세월이 오랠수록 더욱 뚜렷이 드러나는 법이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의 문장과 학문, 절개와 행실은 사림에서 높이 추앙받았다. 큰형은 아버지의 경학을 이어받았고, 문장도 간결하면서 무게가 있었다. 둘째 형은 학문이 넓고 문장이 매우 높고 고고하여 근래에는 견줄 이가 드물다. 누님의 시는 더더욱 맑으면서도 씩씩하고 높으면서도 아름다워, 당나라의 개원ㆍ대력 연간 시인들보다 뛰어나다는 명성이 중국에까지 퍼져서 그곳의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모두 이를 칭찬한다. 재종형인 체씨는 옛 문장을 공부하여 시의 격조가 매우 높고 굳세며 부는 더욱 뛰어나서, 조선 건국 이래로 그와 견줄 이가 드물다. 나 또한 우리 집안 문장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아, 문예를 논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중국 사람들에게서도 제법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아버지와 우리 세 형제, 이렇게 네 부자가 함께 임금의 교서를 짓는 일을 맡았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는 큰형이 또 독서당에서 사가독서를 하였으며, 우리 삼 형제가 모두 사관으로서 붓을 잡기도 하였다. 둘째 형과 나는 나란히 과거에 장원하였고, 나는 또 세 차례나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 무렵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난 집안을 꼽을 때면 반드시 우리 집안을 첫손에 꼽았다.
옛날 중국 남조 시대에 유효작의 집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자매가 함께 문장에 뛰어났는데, 일찍이 스스로 자랑하여 "허씨ㆍ사씨 집안의 부귀도, 왕씨ㆍ사씨 집안의 영화로움도 모두 우리 집안의 학문과 문장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는데, 나 또한 우리 집안이 그러하다고 말하고 싶다.
성소부부고 제25권
10. 15:50
성소부부고 제25권 — 설부 4
성수시화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출처: 성소부부고 제25권, 설부 4, 성수시화 인 및 성수시화
배경: 허균이 신해년(1611년, 광해군 3년) 함열(당시 이름은 함산)로 귀양 가 있던 시절에 쓴 우리나라 역대 시 비평집이다. 원래 정미년(1607년)에 우리나라 시를 골라 정리하고 두 권짜리 비평서까지 지었으나, 원고 두 벌이 모두 없어지는 바람에 기억을 더듬어 새로 써낸 것이 이 책이다. 신라 말부터 허균 당대까지 약 팔백 년에 걸친 시인들을 다루며, 시 하나하나에 대한 짧고 날카로운 평을 곁들인다. 허균 특유의 거침없는 호오와 자기 집안(양천 허씨) 문인들에 대한 자부심이 곳곳에 드러난다.
성수시화를 쓰게 된 사연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우리나라는 당나라 말기부터 지금까지 붓을 들어 시를 지은 사람이 아마 수천 명은 될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름도 없이 묻히고 전하지 않는 이가 절반을 넘는다. 게다가 전쟁까지 겪으면서 책이 거의 다 없어졌으니, 뒷날 공부하는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그 자취를 살필 수 있을지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다.
나는 어려서부터 형님들과 스승들이 하는 말을 귀에 익도록 들었고, 자라면서는 스스로 글하는 사람이라 자부하며 살아온 지 어느새 삼십 년이다. 그동안 보고 기억해 온 것이 적지 않고, 일찍부터 어느 시가 맑고 어느 시가 탁한지 나름의 안목도 지녀 왔다고 생각한다. 정미년(1607년)에는 우리나라 시를 추려 정리하는 일을 마치고 이어서 시에 대한 비평까지 지었다. 시로 이름이 전하는 이든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이든 가리지 않고 널리 모아, 하나하나 옳고 그름을 가리고 평을 붙인 것이 모두 두 권이었다. 거기서 고른 시구들이 격조 높은 안목에는 어긋날지 몰라도, 자료를 찾아본 정성만큼은 한 시대의 문헌이라 할 만큼 넉넉했다고 자부한다.
글이 완성되자 원고를 정리해 딱 두 벌을 베껴 두었다. 하나는 낭주(지금의 전라남도 영암 지역)에 두었는데 잃어버렸고, 또 하나는 서울 집에 두었는데 이 역시 없어지고 말았다. 아마 도교에서 말하는 육정 귀신이 내려와 가져간 것은 아닐까.
(용어) 육정 — 도교에서 하늘의 뜻을 받들어 신비한 일을 맡아본다는 신들의 이름이다.
다시 써 보려 해도 하늘이 꺼리는 일을 감히 다시 범하고 싶지 않아 그냥 손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 신해년(1611년, 광해군 3년)에 함열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마침 할 일 없이 한가한 처지라 예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기억나는 대로 종이에 옮겨 적어 보았다. 다 쓰고 나서 다시 읽어 보니 제법 마음에 들기에 이를 "시화"라 이름 붙였다. 모두 아흔여섯 항목이다. 위로 팔백 년의 시간에서 뽑아낸 것이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니 너무 간략한 것 같기도 하지만, 요컨대 이 역시 내 나름대로 정성을 다한 것이니 읽는 사람은 그 뜻을 헤아려 주기 바란다.
이해 사월 스무날, 교산이 쓴다.
신라·고려 시대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고운 최치원 학사의 시는 당나라 말기의 시인답게 정곡이나 한악 같은 이들의 풍을 크게 벗어나지 못해서, 대체로 가볍고 부박하여 무게가 부족하다. 다만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니 이 세상에 내 마음 알아줄 이 드물구나 깊은 밤 창밖에는 비가 내리는데 등불 앞에서 만 리 밖 고향을 생각하네
라 한 절구 한 수가 가장 뛰어나며, 또 다른 연구에
먼 나무들은 강둑길을 따라 들쭉날쭉하고 찬 구름은 말 앞 봉우리에 나직이 내려앉네
라 한 구절도 아름답다.
(용어) 최치원(857~?) — 신라 말의 학자·문장가.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살이를 했으며, 귀국 후에는 어지러운 정치 현실에 실망해 은거했다고 전한다. 호는 고운.
정 대간(정지상)의 시는 고려 전성기 시인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 남아 전하는 작품은 매우 적지만 편마다 모두 뛰어난 절창이다. 이를테면
바람에 실려 가는 나그네 배엔 조각구름 떠 있고 이슬 엉긴 궁궐 기와엔 옥빛이 번쩍이네
라 한 구절은 조금 가벼운 편이지만,
버드나무 늘어선 골목엔 예닐곱 집 문이 닫혔고 밝은 달 아래 발을 걷은 이는 서너너덧 사람일세
라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신기하고 빼어나다. 또
바위 위 소나무는 조각달 아래 늙어 가고 하늘 끝 구름은 천 개의 산봉우리에 나직이 걸렸네
라는 구절은 딱딱하고 까다롭지만 그런대로 맑고 깨끗한 맛이 있다.
(용어) 정지상(?~1135) — 고려 인종 때의 문신·시인. 서경(지금의 평양) 출신으로 묘청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대간은 그가 지낸 벼슬 이름.
정 대간이 서경에서 지은 시로
비 갠 긴 둑엔 풀빛이 더욱 짙고 님 보내는 남포엔 구슬픈 노래 울리네 대동강 물이야 어느 때에나 마르리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푸른 물결에 보태지는 것을
이라 한 것은 지금까지도 절창으로 꼽힌다. 부벽루 현판에 새겨진 시들은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모두 철거했지만 이 시만은 남겨 두었다. 훗날 최고죽(최경창)이 이 시에 화답하여
강 언덕엔 길고 긴 능수버들 휘늘어지고 연 따는 노랫가락 조각배에 요란하더니 붉은 꽃도 다 져서 서풍은 차갑기만 한데 해 저문 물가엔 흰 물결만 일어나네
라 했고, 이익지(이달)는
연잎은 들쭉날쭉 연밥은 주렁주렁 연꽃 사이사이로 아가씨들 노래하네 돌아올 땐 물목에서 벗 만나자 약속했기에 힘겹게 배를 저어 물결 거슬러 오르네
라 했다. 두 시 모두 매우 훌륭하여 당나라 왕창령이나 이군우의 여운이 느껴지지만, 이는 연밥 따는 노래일 뿐이지 서경에서 이별하는 본래의 뜻과는 다르다.
〈한림별곡〉에서도 유원순의 글과 이인로의 시를 함께 일컬었으니, 이 대간(이인로)의 시는 참으로 당대 제일이었다. 그의
한밤중 닭 울음소리에 벌떡 일어나 춤을 추고 몇 번이나 이를 잡으며 좋은 계책을 논했던가
라는 구절은 매우 훌륭하여, 명나라 구종길의
지난날엔 이광을 따라 범 바위를 쏘더니 한밤중 닭 울음에 유곤처럼 춤을 추네
라는 시와 비슷하며, 그의 팔경시 또한 아름답다.
(용어) "한밤중 닭 울음소리에 일어나 춤을 추고" — 진나라 조적이 벗 유곤과 함께 지내다가 한밤중 닭 울음소리를 듣고 "이것은 좋은 징조다" 하며 함께 일어나 춤을 추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따온 구절이다. "이를 잡으며 계책을 논했다"는 구절 역시, 진나라 왕맹이 권력자 환온 앞에서 거리낌 없이 이를 잡아가며 세상일을 논했다는 옛이야기에서 왔다. 이인로(1152~1220)는 고려 무신정권기의 문인으로, 호는 쌍명재, 대간은 그가 지낸 벼슬 이름.
이 대간이 승정원에서 숙직하며 지은 시에
공작 병풍 깊은 곳 촛불 그림자 희미한데 원앙새는 쌍쌍이 잠드니 어찌 저마다 날아가리 가엾어라 초췌한 청루 속의 여인이여 평생토록 남을 위해 시집갈 옷을 짓는구나
라 했다. 대체로 이 대간이 오래도록 낮은 벼슬에 머물러 있고 아직 등용되지 못했는데, 동료들은 모두 재상 길에 올라 있어서, 그들의 승진 사령장을 대신 쓰면서 느낀 바가 있어 이 시를 지은 것이다.
이 문순(이규보)의 시는 화려하고 거침이 없다. 그의 칠석우라는 시는 참으로 절창이다.
얇은 적삼에 삿자리 깔고 바람 부는 난간에 누웠다가 꾀꼬리 울음소리 두세 번에 꿈을 깨었네 짙은 잎에 가려진 꽃은 봄이 지나도록 남아 있고 엷은 구름 헤치고 나온 햇살은 빗속에서도 밝구나
라 했는데, 이 시는 읽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해진다. 또
관원이 한가로이 젓대를 골라 부니 부들자리는 바람 타고 날아갈 듯하구나 하늘에 걸린 달은 온 천하가 함께 보는 것인데 내 배에만 혼자 싣고 돌아가는 양 여기네
라 한 시도 더없이 고아하고 빼어나다.
(용어) 이규보(1168~1241) — 고려 무신정권기의 대표적 문인. 시와 술, 거문고를 즐겨 "삼혹호 선생"이라 불렸으며, 시호는 문순.
같은 시대의 한림 진화는 이규보와 나란히 이름을 떨쳤는데, 그의 시는 매우 맑고 아름답다.
매화는 떨어지고 버들가지는 늘어졌는데 한가로이 맑은 안개 밟으며 느릿느릿 걸어가네 어점은 문 닫혀 사람 소리 드문데 온 강에 내리는 봄비는 실실이 푸르구나
라 한 시는 맑고 굳세어 읊조릴 만하다.
사인 홍간의 시는 농염하고도 맑고 곱다. 그의 〈나부인〉과 〈고안〉 같은 시편은 가장 훌륭해서 당나라 전성기 시인들의 작품과 비슷하다.
이견간의 시에
여관에는 등불 하나, 남은 심지 돋우노라니 사신의 담백한 정취는 중보다 낫구나 창 너머 두견새 소리 밤새 듣노니 산꽃 몇째 층에서 우는 것인가
라 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절창이라 일렀다. 나는 관동 지방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사람들이 두견이라 부르는 그 새는 사실 소쩍새 종류였다. 절강 사람 왕자작과 사천 사람 상방기가 함께 강릉에 왔을 때 내가 물어보았더니, 둘 다 이것은 두견이 아니라고 했다. 시인들이란 흥에 겨워 말을 붙이는 법이라, 정작 그 물건이 아니더라도 시 속에서는 그런 말을 즐겨 쓰는 것이다. 이를테면
숲 너머 흰 잔나비 울음소리 부질없이 듣노라
와 같은 구절도, 사실 우리나라에는 본래 잔나비가 없다. 또
집집마다 긴 대숲에 비취새가 우는구나
와 같은 구절은, 파랑새를 보고서 남쪽 바다의 비취새라 부른 것이고,
자고새는 놀라 해당화를 흔드네
와 같은 구절은, 때까치가 깍깍 우는 소리를 듣고서 "가지 마오"라 우는 자고새로 여긴 것이니, 모두 이런 식이다.
원외 김극기는 시상이 매우 교묘하다. 겨울에 핀 오얏꽃을 읊으면서 마지막 구에
기이한 향기가 저절로 굴속에 모여드니 한나라 궁궐에서 이 부인을 다시 보는 듯하네
라 했으니, 이는 옛 시인들도 미처 말하지 못했던 발상이다. 의주에 있을 때 지은 시에는
문장이란 늙어서도 서로 즐길 만한 것 칼 한 자루 차고 변방을 돌며 다섯 수레 책을 우러르네 공무를 마치고서야 내가 변방 관리인 줄 깨닫나니 종이창 밝은 곳에 누워 책이나 보는구나
라 했으니, 세속의 근심을 훌훌 떨쳐 버리는 그 심사가 후련하게 느껴진다.
최해와 이제현, 그리고 고려 말의 문장가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사람들 말로는, 최예산(최해)이 이익재(이제현)의 시 원고를 모조리 먹칠해 지워 버리고 딱 한 편만 남겨 두었다고 한다. 그 시는
얇은 이불에 한기가 돌고 불등은 흐릿한데 상좌 스님은 한밤 내내 종을 울리지 않는구나 아마도 자고 난 손님이 문을 일찍 여는 게 못마땅해 뜰 앞에 눈 덮인 소나무를 못 보게 하려는 것이겠지
인데, 이를 보고 이제현이 크게 감탄하며 최해를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지나치게 꾸며낸 이야기다. 이제현의 시에는 좋은 작품이 매우 많다. 〈화오서곡〉과 〈민지〉 같은 옛 시체의 작품들은 모두 옛 시에 가깝고, 여러 율시들 역시 웅장하고 맑다. 젊을 때 지은 역사를 노래한 시 가운데
누가 알리오, 업 땅의 순문약이 끝내 요동의 관유안에 부끄러울 줄
이라 한 구절이나, 또
서시를 배에 싣고 떠나보내지 않았다면 월나라 궁궐에도 도리어 고소대 하나가 생겼으리
라 한 작품, 또
유비가 그저 잠총국(촉나라)만 사랑하고 있었다면 옛 마을에 우보개거 이야기는 부질없이 생겼을 것을
이라 한 작품들에 이르러서는 하나같이 규모가 반듯하고 이전 사람들이 미처 펼쳐 내지 못한 발상이니, 어찌 낮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다만 최해가 남긴 그 시 한 편으로 이제현을 감탄시켰다는 이야기는, 뛰어난 인물이 평범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식의 과장이라 전부 믿을 수는 없다.
(용어) 최해(1287
1340) — 고려 말의 문인. 가난한 살림에 만년에는 절에서 밭을 빌려 농사지으며 글을 썼다. 호는 예산농은. 이제현(1287
1367) — 고려 말의 대표적 문신·학자. 원나라에 오래 머물며 이름난 학자들과 교유했고, 호는 익재. "순문약", "관유안"은 각각 후한 말의 인물 순욱과 관녕을 가리킨다. 순욱은 절개를 굽혀 조조 밑에서 벼슬했고, 관녕은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산속에 은거하며 절개를 지켰다. "서시를 배에 실은" 고사는, 오나라에 패한 월나라가 미녀 서시를 오왕에게 바쳐 그 마음을 흐트러뜨린 뒤 결국 오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옛이야기다. "우보개거"는 촉나라를 세운 유비가 어릴 때 뽕나무 아래서 놀며 "내가 반드시 저 뽕나무 같은 화려한 수레를 타게 될 것이다"라고 농담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이제현의 장인은 국재공(권보)인데, 부부가 함께 아흔넷까지 살았으나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제현이 장인을 애도하며 지은 만시 한 구절에
항아는 광한전에서 님 오시길 기다리는데 거사는 그저 홀로 도솔천으로 돌아가네
라 했다. 권보 공이 부처를 좋아했으니 그를 도솔천에 오른 백낙천에 비유한 것은 괜찮지만, 항아가 남편의 약을 훔쳐 달로 달아났다는 이야기는 예로부터 시인들이 속세를 떠나 신선 세계로 올라간 것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었는데, 이를 장모에게 갖다 쓴 것은 그다지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용어) 권보(1262~1346) — 고려 말의 문신, 호는 국재. "항아" 이야기는 명궁 예의 아내 항아가 남편이 얻은 불사약을 몰래 훔쳐 먹고 달로 달아나 달의 선녀가 되었다는 중국 신화다. "거사가 도솔천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백낙천)가 만년에 자신을 도솔천에 사는 부처의 제자로 여겼던 데서 온 말이다.
이 문정(이색)의 〈어제 영명사에 들르다〉라는 작품은 특별히 꾸미거나 다듬은 흔적 없이 저절로 음률에 들어맞아, 읊으면 신비로울 정도로 빼어나다. 명나라 사신 허영양이 이 시를 보고 "그대 나라에도 이런 작품이 있구려" 하고 감탄했다. 그의 〈부벽루〉 시는 긴 작품인데 그 가운데
문머리엔 고려의 시가 여태 걸려 있으니 그 시절에도 이미 중국 글자를 깨쳤구나
라는 구절이 있다. 비록 우리나라 사람을 낮춰 보는 말이지만, 그 역시 이색의 시에는 탄복하고 있었던 셈이다.
(용어) 이색(1328~1396) — 고려 말의 대학자·문신. 원나라에 유학해 과거에 급제했으며 목은으로도 불린다. 시호는 문정. 정몽주, 정도전 등을 길러낸 스승 격의 인물이다.
이색은 원나라에 들어가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제과에 합격했는데, 그때 응봉한림 구양규재(이름은 현)와 우도원(이름은 집) 같은 이들이 모두 그를 추어올렸다. 규재는 감탄하며 "우리 학문의 정통은 마땅히 바다 건너 그대에게 전해질 것이오" 하고 말했다. 그 뒤 이색이 고려 말에 궁지에 몰려 이리저리 쫓겨 다닐 때는, 그의 문하생과 옛 동료들조차 모두 등을 돌리고 돌을 던졌다. 그때 공이 시를 지어
학문의 정통은 마땅히 바다 건너 전해지리라던 규재의 그 한마디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요즘 세상 물건값은 죄다 날개 돋친 듯 오르는데 내 글만은 홀로 한 푼어치도 안 나가는구나
라 했으니, 대개 좋은 시절을 만나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슬퍼한 것이다.
원나라가 반란을 일으킨 승려 무리를 보내왔을 때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놀랐는데, 우리 태조(이성계)가 적은 군사로 이들을 덕흥에서 크게 물리쳤다. 태조가 개선하자 공민왕은 그 공을 치하하며 이색과 태조에게 함께 나라의 큰일에 참여하도록 명했다. 임명을 알리는 교지를 내리던 날, 공민왕은 기뻐하며 좌우에게 "문관으로는 이색을 쓰고 무신으로는 이성계를 쓰니, 내 사람 쓰는 안목이 어떠하오" 하고 말했다. 태조는 이색과 우정이 매우 두터워, 자기 집의 당호를 지어 달라고 청했다. 이색은 "송헌"이라 이름 붙이고 그 뜻을 풀어 글까지 지어 권면했으며, 훗날 태조의 아버지 환조의 비문도 지어 주었다.
(용어) 송헌 —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쓰던 당호(집이나 서재에 붙이는 이름)로, "소나무 처마"라는 뜻이다.
훗날 이색이 지방으로 유배되고 아들 종학과 종선도 모두 먼 곳으로 귀양 가게 되자, 그의 문인이었던 정총과 정도전이 이색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그러자 공이 시를 지어
송헌(이성계)이 나라를 맡자 나는 유배를 가니 꿈속에서인들 이런 일을 한 번이나 생각했으랴 정씨 두 사람이 나라의 큰 논의에 참여한다니 우리 한 집안이 다시 모일 날이 언제나 있으리
라 했다. 첫 구절은 애처롭지만 둘째 구절 이하의 뜻은 몹시 오만하다.
정몽주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정 포은(정몽주)은 이학과 절의에서 당대 으뜸이었을 뿐 아니라 문장도 호방하고 걸출했다. 그가 함경도 북관 지역에서 지은 시에
정주 땅 중양절에 높은 곳에 올라보니 국화는 예전처럼 눈부시게 피었구나 갯벌은 남으로 선덕진에 이어지고 산줄기는 북으로 여진의 성에 닿아 있네 백 년 세월 전쟁 치른 나라의 흥망사에 만 리 밖 나그네는 강개한 마음 끓어오르네 술자리 파하자 원수는 말에 올라타고 낮은 산에 기운 해는 깃발을 비추는구나
라 했으니, 음절이 힘차고 시원스러워 당나라 전성기의 풍격이 있다. 또
풍류 넘치는 고을 태수는 이천 석 녹봉의 자리요 옛 친구 우연히 만나 삼백 잔 술을 기울이네
라 한 구절이나, 또
나그네는 고향에 못 가는데 제비 새끼 만나고 살구꽃 지고 나니 복사꽃도 따라 지네
라 한 구절, 또
매화 핀 창가엔 봄빛이 일찍 찾아들고 판자 지붕엔 빗소리가 유난히 많네
라 한 구절들은 모두 호탕하게 펄펄 날아오르는 기운이 있어, 그 사람됨과 꼭 닮았다.
포은의 시에
강남의 아가씨들은 머리에 꽃을 꽂고 웃으며 짝을 불러 물가에서 노니는데 노 저어 돌아오니 어느덧 날이 저물고 원앙새 쌍쌍이 나니 시름은 그지없네
라 했으니, 호탕한 풍류가 천고에 빛을 내며, 시 역시 옛 악부의 가락과 흡사하다.
(용어) 정몽주(1337~1392) — 고려 말의 대학자·충신.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다가 이방원 세력에게 죽임을 당했다. 호는 포은.
요동에 유배된 문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척약재 김구용의 시는 매우 맑고 참신하며 섬세하고 풍성했다. 목은 이색이 "경지(김구용의 자)가 붓을 들면 마치 구름과 안개가 피어나는 듯하다"고 칭찬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김구용은 일찍이 회례사가 되어 예물을 요동에 바쳤는데, 요동 도사 반규가 그를 명나라 수도로 잡아 보냈다. 예물 문서에 "말 오십 필"이라 써야 할 것을 실수로 "말 오천 필"이라 적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태조는 우리나라가 요동의 관리와 사사로이 교분을 맺었다며 화를 내고는 "말 오천 필이 오면 풀어 돌려보내겠다"고 했다. 이때 광평부원군 이인임이 나라 정치를 맡고 있었는데, 평소 김구용 무리와 사이가 나빠 끝내 말을 바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는 그를 대리(지금의 중국 윈난성 지역)로 유배 보냈다. 공이 시를 지어
죽고 사는 것이 운명이라니 하늘의 뜻을 어이하리 동쪽으로 고향 하늘 바라보니 갈 길은 아득한데 좋은 말 오천 필이 언제나 도착할는지 복사꽃 핀 문밖엔 풀만 무성히 우거졌네
라 했고, 또 무창에서 지은 시에는
황학루 앞엔 물결이 솟구치는데 강 따라 늘어선 주막은 몇천 채런가 추렴한 돈으로 술 사다 회포를 풀어 보나니 대별산은 푸른데 해는 이미 기울었구나
라 했는데, 공은 끝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용어) 김구용(1338~1384) — 고려 말의 문신·문인. 명나라와의 외교 문서 사고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호는 척약재.
그 뒤 참의 조서 역시 금치(지금의 중국 윈난성 지역)로 유배되었다가 몇 해 만에 풀려 돌아왔는데, 황주에서 지은 시에
물빛과 산 기운은 맑은 모래를 어루만지고 버들 푸른 긴 둑엔 천만 채 집이로세 무수한 장삿배는 성 아래 정박해 있고 대나무 누각의 안개 낀 달밤엔 피리 노래 드높구나
라 했다. 나는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좁은 이 땅에서만 살다 보니 천하를 두루 유람해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 두 사람은 비록 낯선 땅으로 유배되긴 했어도 그 덕분에 중국 오나라와 초나라의 산천을 다 보았으니, 이 또한 사람으로서 얻기 힘든 통쾌한 일이라 하겠다.
이 도은(이숭인)의 〈오호도시〉를 목은 이색은 크게 칭찬하며 당나라 전성기 시에 견줄 만하다고 했는데, 이 일로 삼봉 정도전과 사이가 나빠져 결국 기구한 화까지 입게 되었다. 예전에 명나라 사신 주태사가 이 작품을 보고 역시 매우 감탄했다고 한다. 그
산 북쪽과 산 남쪽으로 가느다란 길이 갈라지고 소나무 꽃은 비를 머금어 어지러이 떨어지네 도인이 물을 길어 초가집으로 돌아오니 한 줄기 푸른 연기가 흰 구름을 물들이네
라 한 시는, 당나라 시인 유장경에게 견주어도 모자랄 것이 없다.
(용어) 이숭인(1347~1392) — 고려 말의 문신·문인. 조선 개국 세력과 대립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호는 도은.
나라가 세워진 초기에는 정교은(정이오)과 이쌍매(이첨)의 시가 가장 훌륭했다. 정교은의 시에
이월도 다 저물고 삼월이 오려 하니 한 해의 봄빛이 꿈결처럼 돌아오네 천금으로도 이 좋은 시절은 살 수 없으니 술 익어 가는 어느 집에서 꽃이 한창 피었는고
라 한 시는 당나라 시인들의 아름다운 경지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쌍매의
신선이 차고 온 옥 소리 쟁그랑쟁그랑 높은 누각에 올라와 푸른 창에 걸어 놓고 밤 되어 다시금 유수곡을 타노라니 둥근 달 하나가 가을 강에 내려앉네
라 한 시도 빼어난 운치가 있다. 이쌍매의 〈꾀꼬리 소리를 듣고〉라는 시에
서른여섯 궁궐 후원 봄 나무 깊숙한데 미인이 꿈에서 깨니 남창엔 어스름 영롱한 백 가지 울음소리 시름겹게 들으니 모두가 향기로운 규방에서 임금을 기다리는 마음일세
라 했으니,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와 흡사하다.
(용어) 정이오(1354
1440) —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호는 교은. 이첨(1345
1405) —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호는 쌍매당.
조운흘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석간 조운흘은 고려 때 이미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늘그막에는 미친 척 세상을 즐기며 지내다가 스스로 사평원(지금의 서울 강동 지역 나루터 역원)의 원주가 되기를 자청했다. 하루는 권세가 임견미와 염흥방의 무리로 지목되어 지방으로 유배 가는 사람들이 길에 줄줄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한낮에 사람 불러 사립문 열고 숲 속 정자로 걸어나가 이끼 낀 돌에 앉으니 어젯밤 산속엔 비바람이 거칠더니 개울 가득 흐르는 물에 꽃잎이 떠내려오네
(용어) 조운흘(1332~1404) —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늘그막에 세상일에서 물러나 강가 나루터의 관리인을 자청하며 은둔했다. 호는 석간. 임견미와 염흥방은 고려 말 권세를 부리다 처형된 권신들이다.
세종 때의 문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세종 임금 때는 인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이름난 문장가와 학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옛 시체로 지은 고시는 옛사람들에 견주면 자못 부끄러운 수준이고, 율시나 절구에서도 딱히 놀랄 만한 작품은 없다. 다만 서사가(서거정)의 시는 다소 장황하기는 해도 풍성하고 아름다워 간간이 좋은 구절이 있다. 이를테면
노니는 벌은 쉴 새 없이 날아다니고 한가한 오리는 서로 기대어 조는구나 달빛은 풀벌레 소리 너머로 비치고 은하수는 까치 그림자 속으로 흐르네
라 한 구절이나
다시 한번 난새를 타고 쇠피리를 불며 깊은 밤 밝은 달빛 아래 강남을 찾고 싶네
와 같은 구절은 제법 운치가 있다.
(용어) 서거정(1420~1488) — 조선 초의 대표적 문신·학자. 여러 차례 대제학을 지내며 당대 문단을 이끌었다. 호는 사가정.
김괴애(김수온)의 시 또한 호방하다. 이를테면
사립문이 삐딱하게 시냇둑에 다다르니 산비 내리는 아침마다 물 불어나는 걸 보노라
라 한 구절이나,
밝은 창가에서 스님은 승복을 깁고 고요한 탑 아래서 나그네는 시를 짓네
라 한 구절은 매우 한가롭고 여유로워 운치가 있다.
(용어) 김수온(1409~1481) — 조선 초의 문신·학자.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호는 괴애.
강경순(강희맹)의 〈양초부〉는 대단히 훌륭하며 그의 시 역시 맑고 굳세다. 그의 〈병중에 읊다〉라는 시에
남창에 종일 앉아 세상일 다 잊었더니 뜨락엔 사람 없어 새가 나는 법을 배우는구나 가는 풀 사이 은은한 향기 어디서 오는지 묽은 연기 스러지는 볕에 가랑비 부슬부슬
이라 했고, 매화를 읊은 시에
어스름 울타리 가에서 뻗은 가지 바라보고 느릿느릿 향기 찾아 물가에 다다르니 천년 세월 나부산에 떠 있던 둥근 달이 오늘에 와 다시 비치니 꿈에서 깨어난 듯하네
라 했는데, 모두 한아하여 읊조릴 만하다.
(용어) 강희맹(1424~1483) — 조선 초의 문신·학자. 농업서 《금양잡록》을 짓기도 했다. 자는 경순, 봉호는 진산.
서사가가 오랫동안 대제학을 지냈기 때문에, 같은 시대의 강진산(강희맹)·이양성(이승소)·김영산(김수온) 같은 이들은 모두 문형(대제학 자리)을 맡아 보지 못한 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양성이 제비를 읊은 시에
버드나무 푸른 골목에 봄바람은 저물어 가고 풀빛 푸른 연못가에 가랑비는 자욱하네
라 한 구절은 당나라 시인의 시구와 흡사하다.
우리나라 시에는 옛 시체를 제대로 본뜬 것이 드문데, 오직 성화중(성간)이 안연지·도연명·포조 세 사람의 시체를 본떠 지은 세 편만은 그 법식을 깊이 터득했고, 여러 절구 역시 당나라의 악부체를 얻었으니, 이 사람 덕분에 우리 시단이 겨우 쓸쓸함을 면했다고 할 만하다.
(용어) 이승소(1422
1484) — 조선 초의 문신, 봉호는 양성군. 성간(1427
1456) — 조선 초의 문인, 자는 화중. 안연지·도연명·포조는 모두 중국 남북조 시대의 유명한 시인들이다.
김종직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점필재(김종직)의 글은 요체는 깨우쳤으나 높은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니, 최동고(최립)가 그를 가장 업신여겼다. 그의 시는 온전히 소식과 황정견에게서 나왔으니, 옛 시를 평가하는 사람들이 그를 낮추어 보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러나 나의 둘째 형(허봉)은 일찍이 그의 시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이 우니 맑은 이슬이 내려 맺히고 달이 뜨니 큰 물고기가 뛰어오르네
라 한 구절은 결코 당나라 전성기의 시에 뒤지지 않으며,
가랑비 속에 스님은 장삼을 꿰매고 찬 강 위로 나그네는 배 저어 가네
와 같은 구절은 매우 한적하고 담백한 맛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는 대체로 맞는 말씀이다.
(용어) 김종직(1431
1492) — 조선 초의 대학자. 영남 사림파의 종조로 꼽히며, 죽은 뒤 그가 쓴 〈조의제문〉이 빌미가 되어 부관참시를 당했다. 호는 점필재. 최립(1539
1612)은 선조 때의 문장가로 호는 동고. 소식(소동파)과 황정견은 중국 송나라를 대표하는 시인들이다.
이전 사람들은 점필재가 여강(지금의 경기도 여주 지역을 흐르는 남한강)에서 읊은
십 년의 세상일은 홀로 읊는 시 속에 담기고 팔월의 가을빛은 어지러운 숲 사이로 번지네
라는 구절을 칭송해 왔다. 그러나 신륵사에서 지은
절간에서 종이 울리니 여룡이 춤을 추고 온갖 구멍에서 바람이 우니 철봉이 나래를 치네
라 한 구절의 웅장하고 묵직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는 참으로 우주를 떠받칠 만한 시구다. 그의 〈보천탄즉사〉에서는
복사꽃 실은 물결이 몇 자나 높았는지 은빛 바위는 목까지 잠겨 어딘지 모르겠네 쌍쌍이 노니는 가마우지는 옛 여울돌을 잃고 물고기를 물고는 갈대숲으로 들어가네
라 했는데, 이는 가장 힘차고 높은 경지이며, 《동경악부》는 편마다 모두 예스러운 맛이 있다.
김시습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김열경(김시습)의 높은 절개는 우뚝하여 더할 나위가 없다. 그의 시문 역시 남다른 격을 지녔지만, 마음을 쏟지 않고 장난삼아 지은 것이 많아서 마치 세게 쏜 화살이 힘을 잃고 떨어지듯 하는 대목이 있고, 매번 허튼소리가 섞여 있어 당나라의 저속한 시인 장타유를 보는 듯 싫증이 나기도 한다.
(용어) "장타유" — 당나라의 장타유라는 사람이 지은 시가 하도 저속해서, 후대에 격 떨어지는 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누런 개는 몸이 하얗게 되고, 하얀 개는 몸이 부어올랐다" 같은 우스꽝스러운 구절이 대표적이다.
그가 세향원에 쓴 시에
아침 해가 떠오르려 새벽빛이 갈라지고 숲안개 걷힌 곳에 새는 무리를 부르는구나 먼 봉우리에 떠오른 푸른빛 창을 열고 바라보며 이웃 절 종소리는 언덕 너머로 듣는다 파랑새는 소식 전하며 약 달이는 솥을 엿보고 벽도화는 떨어져 이끼 위에 비치네 아마도 신선은 도관으로 돌아가서 솔 아래 한가로이 도교 경전을 펼쳐 보리
라 했고, 소양정에서는
새 너머로 하늘은 끝나려 하고 읊조림 끝에 한은 그지없어라 산은 첩첩이 북쪽으로 굽이쳐 가고 강은 절로 서쪽을 향해 흐르는구나 먼 물가엔 기러기 내려와 앉고 그윽한 옛 기슭엔 배 돌아오네 언제나 이 속세의 그물을 떨쳐 버리고 흥에 겨워 이곳에 다시 와 놀아 볼까
라 했으며, 산길을 가며 지은 시에는
아이는 잠자리 잡고 할아비는 울타리 고치고 작은 개울 봄물에 가마우지 목욕하네 푸른 산 끊긴 곳에 돌아갈 길은 머니 등나무 지팡이 하나 비스듬히 둘러메고 오누나
라 했는데, 모두 세속의 때를 훌훌 떨쳐 버려 화평하고 담백하니, 저 자잘하게 다듬기만 하는 시인들은 마땅히 이 앞에서 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이다.
(용어) 김시습(1435~1493) — 조선 초의 문인.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해 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떠돌며 살았던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열경.
연산군 시대 전후의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조매계(조위)와 유뇌계(유호인)는 한 시대에 함께 이름을 날렸지만 정순부(정희량)에는 미치지 못했다. 정순부의 〈혼돈주가〉는 매우 훌륭하여 소동파와 흡사하다.
조각달은 이 마음 비추며 고국에 다다르고 지는 별은 꿈을 따라 변방 성에 떨어지네
라 한 구절은 더없이 신비롭고 빼어나며,
나그넷길에 우연히 한식 비를 만나니 꿈속에서 오히려 고향의 봄을 떠올리네
라 한 구절에는 당나라 중기 시의 고아한 운치가 있고,
봄이 와도 꽃은 안 보이고 눈만 보이니 기러기도 안 오는 곳에 사람이 어찌 찾아오리
라 한 구절은 다듬은 흠이 조금 있지만 그래도 다정다감하다.
(용어) 조위(1454
1503) — 조선 초의 문신, 호는 매계. 유호인(1445
1494) — 조선 초의 문신·문인, 호는 뇌계. 정희량(1469~1502?) — 조선 초의 문신, 호는 순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망헌(이주)의 시는 가장 침착하여 당나라 전성기의 풍격이 있다.
아침 해는 붉은빛을 뿜으며 발해 위로 솟구치고 갠 구름은 하얗게 펼쳐져 무려산을 벗어나네
와 같은 시구는 매우 힘이 있으며,
언 비는 천 산마루의 눈으로 비껴 이어지고 주린 까마귀는 놀라 한 숲의 바람 속에 우짖네
라 한 시구는 노련하고 웅혼하며 기이하고 걸출하다. 통주에서 지은 시는
통주는 천하의 명승지라 누각들이 구름 낀 하늘로 솟았구나 저자에는 금릉의 물화가 쌓이고 강줄기는 양자강 물결로 이어지네 가을이라 찬 안개는 물가에 내리고 저물녘 외로운 학은 요동으로 돌아가네 말안장에 오른 이 몸은 천 리 밖 나그네 정자에 오르니 고국은 아득하기만 하네
라 했는데, 이 역시 놀랍게도 왕유와 맹호연의 수준에 가깝다.
(용어) 이주(1468~1504) — 조선 초의 문신, 호는 망헌.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남지정(남곤)은 일찍이 "김일손의 글이나 박은의 시는 쉽게 얻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참으로 옳다. 박은의 시는 비록 정통의 소리는 아니지만 엄격하고 치밀하며 굳세고 사납다.
흐린 봄날 비가 오려니 새들은 서로 지저귀고 늙은 나무는 무정한데 바람은 절로 슬퍼지네
와 같은 구절은, 당나라의 섬세하고 곱기만 한 시풍을 배운 사람으로는 감히 오를 수 없는 경지다.
(용어) 남곤(1471
1527)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지정. 기묘사화를 주도한 인물로 훗날 평이 나쁘다. 김일손(1464
1498) — 무오사화 때 처형된 사관·문신. 박은(1479~1504) — 조선 초의 문인,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연산군은 비록 정치가 어지러웠으나 시문은 좋아했다. 강목계(강혼)가 오랫동안 도승지로 있었는데, 연산군이 언젠가
한식이라 동산 숲에 삼월은 저물고 꽃 날리는 비바람에 오경은 싸늘하네
라는 시구를 시제로 내려 가까운 신하들에게 짓도록 했는데, 강목계의 시가 장원으로 뽑혔다. 그 시에
청명절이라 궁궐 버들은 찬 안개에 잠기고 쌀쌀한 봄바람은 새벽 되어 더욱 몰아치네 지는 꽃은 붉게 땅을 뒤덮고 나는 버들개지는 하늘을 하얗게 뒤덮누나 못물 너머 높은 누각에선 구슬발을 걷고 좋은 말은 꽃을 찾아 비단 언치를 빛내는구나 금 술동이 실컷 취해 별원으로 돌아오니 오색 끈이 흔들리며 그림 난간을 스치네
라 했는데, 연산군은 크게 칭찬하며 상으로 준 물건도 매우 많았다.
언젠가 연산군이 죽은 후궁을 슬퍼하여 신하들에게 애도시를 짓게 했는데, 이백익(이희보)이
궁궐 문은 깊이 잠겨 달빛도 황혼인 제 열두 번 종소리가 밤중에 울리는구나 어느 곳 청산에 그 옥 같은 몸을 묻었는지 가을바람에 지는 잎 소리 차마 못 듣겠네
라 하니, 연산군이 극찬하며 그를 이조 정랑에서 직제학으로 단번에 발탁했다. 두 사람의 시가 비록 좋기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 일 때문에 오히려 시인으로서 이름을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용어) 강혼(1464
1519) — 조선 초의 문신, 호는 목계. 이희보(1473
1548) — 조선 초의 문신, 자는 백익.
이행과 중종 때의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 시로는 이용재(이행)를 첫손에 꼽아야 마땅하다. 그의 시풍은 침착하고 화평하며 아담하고 원숙하다. 오언고시는 두보와 진후산(진사도)의 품격과 비슷하여 높고 예스러우며 간결하고 절실하니, 글이나 말로는 다 찬양할 수가 없다. 내가 평소 즐겨 읊던 절구 한 수는
평생에 사귄 벗들은 모두 늙어 죽어 가고 흰머리로 마주 보니 그림자와 몸뚱이만 남았네 때마침 높은 누각에 달이 밝은 이 밤엔 애처로운 피리 소리 차마 들을 수가 없구나
인데, 읽을 때마다 감개가 무량하여 가슴이 메어진다.
(용어) 이행(1478~1534) — 조선 중기의 문신·문장가. 갑자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후 복권되어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호는 용재.
조선 시는 중종 때 이르러 크게 무르익었다. 용재 이행이 그 시작을 열자, 눌재 박상·기재 신광한·충암 김정·호음 정사룡이 한 시대에 함께 나와 휘황하게 빛을 내고 금옥처럼 맑은 소리를 울렸으니, 족히 천고에 자랑할 만하다. 조선의 시는 다시 선조 때 이르러 크게 완비되었다. 노소재(노수신)는 두보의 법을 깨우쳤고 황지천(황정욱)이 그 뒤를 이어 일어났으며, 최경창·백광훈은 당나라 시를 본받았고 이익지(이달)가 그 흐름을 다시 밝혔다. 세상을 떠난 우리 형님(허봉)의 노래체 시는 이태백과 같고, 누님(허난설헌)의 시는 당나라 전성기의 경지에 가까웠다. 그 뒤로 권여장(권필)이 늦게 나와 힘껏 옛 어진 이들을 좇아 용재 이행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아, 참으로 장하다.
(용어) 박상(1474
1530) — 호는 눌재. 신광한(1484
1555) — 호는 기재. 김정(1486
1521) — 호는 충암, 기묘사화 때 사사되었다. 정사룡(1491
1570) — 호는 호음.
정호음(정사룡)은 남을 추앙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유독 눌재(박상)의 시만은 좋아했다. 일찍이 벽 위에
서북의 두 강은 태곳적부터 흘러오고 동남의 두 산줄기는 신라 땅을 파고드네
라는 구절과,
거문고 타던 이는 학 가의 달로 떠나가고 피리 부는 손은 솔 아래 바람 타고 찾아오네
라는 구절을 써 붙여 두고 스스로 탄식하며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여겼다. 또 이런 말도 했다. "허종경(허엽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시구를 이야기하는 대목)의
들길이 어두워 오는데 소는 홀로 돌아오고 강 구름이 비를 몰아오니 제비가 낮게 나네
라는 구절은, 강목계(강혼)의
붉은 제비 엇갈려 나니 바람은 버들을 스치고 청개구리 어지러이 울어대니 비는 산을 어둑하게 하네
라는 구절과 서로 겨룰 만하다." 그 당시 "신기재(신광한)의 시는 온갖 시체를 두루 갖추었지만, 호음은 칠언율시 하나에만 능하니 그에게 못 미칠 것 같다"는 말이 돌았는데, 호음은 "그가 아무리 온갖 시체를 갖추었다 해도 감히 내 율시 한 구절을 당해 내겠는가" 했으니, 그 자부심이 이러했다.
호음의 〈황산역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날 쫓기던 왜구를 이곳에서 섬멸할 때 혈전 벌인 신묘한 칼끝엔 붉은빛이 둘렸다네 한나라 깃대 꽂혔던 흔적은 바위 틈에 남아 있고 얼룩진 옷 적신 피는 노을빛을 물들이네 소슬바람에 살기 감돌아 수풀 산은 엄숙하고 도깨비불 음산하게 타오르니 성루는 황폐해졌네 동쪽 이 땅 사람이 물고기 신세를 면한 것은 우 임금 같은 그 공덕 때문이니 소신이 어찌 감히 해를 더듬는 격의 얕은 찬양을 하리오
라 했다. 기이하고 걸출하며 웅혼하고 묵직하니 참으로 훌륭한 작품이다. 절강 출신 명나라 사람 오명제가 이 시를 보고 "그대의 재주는 용을 잡을 만한데 도리어 개를 잡고 있으니 애석하다"고 평했는데, 이는 대개 당나라 시를 본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어찌 그것만으로 그를 낮추어 볼 수 있겠는가.
(용어) "황산역시"는 고려 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전투를 소재로 한 시다.
이익지(이달)는 어릴 때 두보의 시를 호음(정사룡)에게 배웠다. 하루는 호음이 익지더러 서가 위의 여러 책을 가져오라 시켰다. 그리고는 그 책들을 보다가 《춘정집》이 나오자 땅에 던져 버렸고, 《매계집》은 펴 보고 웃으며 덮었으니 대개 가볍게 여긴 것이었다. 오직 《점필재집》만은 손에 쥐고 익히 보기를 그치지 않았다. 익지가 몰래 보니 온통 줄을 그어 표시해 두었는데, 대개 좋아하는 구절을 뽑아 자기 시의 재료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언젠가 평생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구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사람들은
산 나무 함께 울며 바람 언뜻 일어나고 강물 소리 문득 거세지자 달이 홀로 걸렸네
라는 구절을 깎아낸 듯 아름답다고 했고,
산꼭대기 깜빡이는 별은 조각달과 빛을 다투고 나무 위에서 움직이는 새는 깊은 떨기 속에 숨는구나
라는 구절 역시 시상이 교묘하지만, 끝내는
빗기운이 노을을 눌러 산은 문득 어두워지고 냇물 빛은 달을 받아 밤에도 밝구나
라 한 구절만은 못하니, 이는 마치 귀신이 도운 듯한 시구라고 말했다 한다.
김충암(김정)의 시에
지는 해는 거친 들판에 뉘엿뉘엿 비치고 갈가마귀는 저문 마을로 내려앉는구나 빈 수풀엔 밥 짓는 연기 싸늘히 식고 초가집도 사립문을 걸어 닫았네
라 한 시는 당나라 유장경의 시와 흡사하다. 그의 〈우도가〉는 심오하고 황홀하며, 미묘한가 하면 뚜렷하기도 해서 가진 재주를 다 부린 작품이다. 그래서 신기재(신광한)는 그를 추어올려 당나라 시인 이하(장길)에 견주었다.
(용어) 이하(790~816) — 당나라의 천재 시인. 요절했으나 기이하고 몽환적인 시풍으로 유명하다. 자는 장길.
최수성과 조광조 일파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최원정(최수성)은 세상을 내려다보며 벼슬하지 않고 그저 화나 면하기를 바라며 살았다. 하루는 여러 어진 이들이 정암(조광조)의 집에 모였는데, 원정이 밖에서 들어오며 숨이 가빠 말도 제대로 못 한 채 황급히 물을 청해 마시고는 "내가 한강을 건너올 때 물결이 솟구치고 배가 부서져 거의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났다"고 했다. 주인이 웃으며 "이는 우리를 빗대어 하는 말이다"라고 했다.
원정이 붓을 잡아 벽에 산수를 그리자, 원충(김정)이 그 그림에 부쳐 시를 지었는데
맑은 새벽 바위산 봉우리는 우뚝하고 흰 구름은 산기슭에 비껴 있네 강촌엔 사람의 모습 보이지 않고 강가 나무는 저 멀리 아득하구나
라 했다. 원정이 만의사에 올라 지은 시에
옛 불전엔 몇 안 되는 스님이 지키고 있고 수풀 끝엔 저녁 종소리 맑게 울리네 창문은 트여 천 리 끝까지 닿고 담장은 눌러앉아 뭇 산이 나직해 보이네 나무는 몇 해나 늙어 왔는지 새는 유난히 별난 목청으로 우짖는구나 험난한 세상 그물에 걸릴까 근심하며 오늘의 내 인생을 한탄하노라
라 했는데, 마지막 구절에 뜻이 담겨 있으니 아마 스스로 화를 입을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닐까. 애석한 일이다.
(용어) 최수성(1487
1521) — 조선 중기의 문인·화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호는 원정. 조광조(1482
1519) — 기묘사화의 중심인물,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다 사사되었다. 호는 정암. 김정(1486~1521)은 앞서 나온 충암 김정과 같은 인물로, 자가 원충이다.
김안로와 신광한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김이숙(김안로)이 젊어서 관동 지방에 놀러 갔을 때, 꿈에 귀신이 나타나 시를 읊었다.
봄은 우 임금의 땅 산천 밖에 무르익고 풍악은 순 임금 조정의 새와 짐승 사이로 울려 퍼지네
라 하고는 "이것이 바로 네가 벼슬길을 얻을 시구다" 하고 말했다. 꿈에서 깨어 이를 기억해 두었는데, 이듬해 궁중에서 치른 시험에서 연산군이 율시 여섯 편을 시험 문제로 냈다. 그 가운데 "봄날 이원의 악공들이 침향정 가에서 한가로이 악보를 뒤적이다"라는 제목으로 '한' 자를 운으로 삼아 시를 지으라는 문제가 있었다. 김안로가 생각해 보니 꿈에서 들은 구절과 꼭 들어맞기에 그대로 써서 냈다. 강목계(강혼)가 시험관이 되어 크게 칭찬하며 장원으로 뽑았다. 김모재(김안국)는 본래 글을 잘 안다고 이름난 사람이었는데, 시험을 함께 감독하다가 "이 구절은 귀신의 소리지 사람의 시가 아니다" 하고는 그 자리에서 출처를 물었다. 김안로가 사실대로 대답하니, 사람들이 모두 김모재의 감식안에 탄복했다.
(용어) 김안로(1481
1537) — 조선 중기의 문신. 훗날 권세를 남용하다 사사되었다. 자는 이숙. 김안국(1478
1543)은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모재.
신낙봉(신광한)의 시는 맑고 빼어나 운치가 있다. 〈중추절에 배를 긴 여울에 대고〉라는 시에
갈대꽃 핀 물가에 외로운 배 매어 두니 두 갈래 맑은 강물에 사방은 산이로세 인간 세상에도 오늘 밤 같은 달이 없으랴만 백 년을 가도 이 가운데서 보는 달만은 못하리
라 했고, 〈배 위에서 삼각산을 바라보며〉라는 시에
외로운 배 잡아타고 광릉 나루 떠나오니 열다섯 해 동안 죽지 못한 이 몸이로세 나는야 정이 있어 아는 얼굴 같지만 청산이야 옛사람을 기억이나 할까
라 했다. 〈김공석의 옛집을 지나며〉라는 시에
그때 함께 쫓겨난 이들 몇이나 남았는지 동풍에 말 세우고 홀로 애를 태우네 한식이라 안개비 자욱한 개산 가는 길에 석양 마을 젓대 소리 차마 듣지 못할레라
라 했고, 〈삼월 삼짇날 박대립에게 부치다〉라는 시에
삼짇날과 중양절엔 해마다 만나자던 옛 약속은 남았어도 일은 그만 어그러져 방초에 답청할 날이 바로 오늘인데 맑은 동이 흰 술은 옛 친구와 함께가 아닐세 바람 앞 제비 소리는 갓 나온 듯 앳되고 비 온 뒤 꽃가지는 다시 보기 어렵구나 모동의 어른들은 속기를 벗은 이가 많으니 봄옷을 전당 잡힐 생각인들 없을쏘냐
라 했으니, 편마다 모두 읊을 만하다. 비록 웅장하고 기이함에서는 호음(정사룡)에 미치지 못하지만, 맑고 시원함에서는 오히려 그보다 낫다고 할 만하다.
(용어) 신광한(1484~1555) — 앞서 나온 기재 신광한과 같은 인물. 호가 낙봉이기도 하다.
나식과 소세양, 심언광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장음정 나식의 시는 시적 흥취가 있어 이따금 당나라 전성기 시에 가깝다. 신광한과 정사룡 같은 원로 대가들이 어느 집에 모여 마침 포도 그림 족자를 앞에 놓고 시를 읊으려 했는데, 생각에 잠겨 미처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술에 취한 나식이 찾아와 붓을 빼앗아 들고는 족자 위에 쓰려 했다. 주인이 말리려 하자 정사룡이 "그냥 두어라" 했고, 나식은 절구 두 수를 지었는데 그 하나에
늙은 원숭이 무리를 잃고 지는 해는 마른 등걸 위에 비치네 우뚝 앉아 고개도 돌리지 않으니 아마도 천 봉우리의 메아리를 듣는 것이겠지
라 했다. 정사룡이 크게 칭찬하며 붓을 놓고 더는 짓지 않았다. 손곡(이달)도 이렇게 말했다. "이는 당나라 전성기의 〈이주가〉 법식이니, 이른바 한 구절만 끊어 놓아도 시 한 편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용어) 나식(1498~1546) — 조선 중기의 문인, 호는 장음정.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소퇴휴(소세양)가 젊었을 때 상좌상(상진)과 동료로 지냈는데, 그때는 상진이 낮은 벼슬에 있었다. 훗날 상진이 재상이 되자 기러기 그림 족자를 가지고 소세양에게 시를 지어 달라 청했다. 소세양이 절구 한 수를 지어 보냈는데
쓸쓸한 외그림자 저녁 강가를 비추고 붉은 여뀌꽃 시들어 두 기슭에 그늘졌네 부질없이 서풍 향해 옛 짝을 불러 대며 구름과 물이 만 겹이나 깊은 줄은 모르는구나
라 했으니, 함축된 뜻이 깊고 멀어 상 정승이 보고는 탄식하며 서글퍼했다.
(용어) 소세양(1486
1562)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퇴휴당. 상진(1493
1564)은 조선 중기의 명재상, 호는 범허재.
심어촌(심언광)은 늘그막에 김안로와 사이가 벌어져 함경도 관찰사로 밀려났는데, 그때 지은 시에
넓은 강을 건너려니 나룻배가 없고 추운 나무 시들어 가는데 겨우살이만 붙어 있네
라 했으니, 대개 뒤늦게 후회하는 마음이 움튼 것이다.
(용어) 심언광(1487~1540)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어촌.
임억령과 임형수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임석천(임억령)은 사람됨이 고매했고 시 역시 그 사람됨과 같았다. 〈낙산사영〉은 마치 용이 오르고 비가 내리는 듯한 기세로 글의 흐름이 날아오르고 꿈틀거려, 그 경치의 기이함과 웅장함을 서로 다투는 듯하다. 그 시에
마음은 흐르는 물과 함께 세상으로 나오고 꿈에는 흰 갈매기 되어 강 위를 나는구나
라 한 구절은 기상이 드높아 신령한 용이 바다를 희롱하는 뜻이 있다.
(용어) 임억령(1496~1568) — 조선 중기의 문신·시인, 호는 석천.
금호 임형수는 풍류가 호탕하고 시원하며, 그의 시 역시 펄펄 나는 듯하다.
고개 숙인 꽃은 술에 취한 옥녀의 얼굴 같고 끊어진 산은 바닷물을 마시는 푸른 용의 허리로다
라 한 시는 지금까지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퇴계 이황 선생이 이 시를 몹시 아껴, 늘그막까지도 문득 그를 떠올리며 "어찌하면 임사수(임형수)와 다시 마주 앉을 수 있을까" 하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용어) 임형수(1504~1547)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금호. 을사사화 여파로 사사되었다.
김인후와 오세억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하서 김인후는 인품이 높고 트여 있으며 맑고 순수했는데, 시 역시 그 인품과 같았다. 양송천(양응정)은 그의 〈등취대시〉를 극찬하며 당나라 고적과 잠참에 비길 만큼 높은 운치라고 했다. 그 시에
양왕이 노래하고 춤추던 그 땅에 오늘은 나그네가 올라왔노라 구름을 넘어설 듯 강개한 흥취요 옛일을 조문하는 처량한 마음이로다 긴 바람은 먼 들판에서 일어나는데 밝은 해는 첩첩한 산 뒤로 숨어 버리네 그 시절의 번화했던 일들을 아득하니 이제 어디서 찾으리오
라 한 시는 침착하고 걸출하여 가늘고 여린 태를 단번에 씻어 냈으니 참으로 귀중히 여길 만하다.
(용어) 김인후(1510
1560) —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호는 하서. 양응정(1519
1581)은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송천. 고적과 잠참은 모두 당나라의 이름난 변방시 시인들이다.
하서가 세상을 떠난 뒤, 영남 하양 땅에 오세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이렇게 말했다. "꿈에 천상의 관청에 갔는데, 붉은 옷 입은 저승 사자가 작은 집으로 데려가니 그곳에 비단 두건을 쓴 학사가 있었다. '김하서'라 자칭하며 '너는 올해 하늘에 오를 운수가 아니니 나가서 힘써 행실을 닦으라' 하고는 시 한 수를 주며 보냈다"는 것이다. 그 시는
세억은 그 이름이요 대년은 그 자인데 천상의 문을 열고 들어와 자미 신선을 뵈었구나 일흔일곱 지난 뒤에 서로 다시 만나리니 인간 세상 돌아가 함부로 전하지 말라
였다. 오세억은 원래 효자였는데, 훗날 과연 일흔일곱 나이에 아무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
(용어) "천상의 관청", "자미 신선" 등은 도교에서 말하는 하늘의 관청과 신선 세계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아버지가 아끼신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선친께서는 늘 "윤장원의 재주는 따를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시며, 그의
넓은 바다 조각배 위에 꿈은 천 리를 떠도는데 두어 가락 젓대 소리 달 밝은 가을이로세
라는 구절과,
맞바람이 살구나무에 불어 겹문을 두드리네
라는 구절을 매양 칭송하시며, "맑고 절실하여 옛 시에 핍진하다"고 하셨다.
(용어) 윤장원 —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으며, 허엽(허균의 아버지)이 재주를 높이 산 인물로만 이 글에 등장한다.
선친께서는 기묘년(1519년으로 추정되나 문맥상 허엽이 영남 관찰사가 된 해)에 영남 관찰사를 제수받으셨는데, 권습재(권벽)가 동지사로 북경에 가면서 선친을 송별하며 지은 시에
평생의 회포를 좋이 풀리라 여겼더니 담소를 나눌 기회도 이제부턴 흔치 않겠구려 달빛 비친 요하를 건너 나는 사신길을 떠나고 그대는 부절을 안고 유령의 매화를 찾아가리 맡은 일과 갈 길이 모두 다 염려스럽고 이별과 노쇠함이 서로 재촉하는구려 공무 틈틈이 벗 그리는 노래를 짓거든 시통이나 자주자주 부쳐 주시기를
라 했는데, 선친께서는 간절하고 알맞다며 칭찬하셨다.
(용어) 권벽(1520
1593)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습재. 허엽(1517
1580)은 허균의 아버지로, 동인의 영수격 인물이었으며 호는 초당.
선친의 송별 시첩에 실린 소 정승(소세양)의 시 가운데
백옥당이 완성된 지 오래되었더니 황금 허리띠를 하사받은 것이 오늘이라네
라는 구절을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여긴다. 그러나 박수암(박지화)의 시 가운데,
경(벼슬)의 상징인 별이 높이 뜬 걸 문득 보노니 내 옷이 화려한들 누가 아까워하리
라는 절구야말로 정말 경계할 만한 명구다. 박수암이 미암(유희춘)을 애도하며 지은 시에
천추의 세월 푸른 바닷물 위에서 밝은 해처럼 큰 이름을 드리웠도다
라 한 것은 어찌 두보보다 못하다 하겠는가.
(용어) 박지화(1513
1592) —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수암. 유희춘(1513
1577)은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미암.
박수암이 청학동에서 노닐며 지은 시에,
고운(최치원)은 당나라의 진사였으니 애초에 신선술을 배운 것이 아니었네 만촉처럼 다투던 삼한(신라·고려·조선 이전 우리나라)의 시절 풍진은 온 세상에 가득 찼었구려 영웅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리오 참된 비결은 본디 전하지 않는 법 저 봉래산으로 한번 들어가 버린 뒤로 맑은 향기만 팔백 년을 남아 전하네
라 했으니, 깊고 굳세며 조촐하고 질박하여 사려 깊은 맛이 있으니, 두보와 진자앙의 진수를 깊이 얻은 작품이다.
(용어) "만촉"은 아주 작은 나라끼리 다투는 것을 비유하는 중국 옛이야기 속 두 나라 이름이다. 최치원이 만년에 가야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양사언과 이달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양봉래(양사언)가 금강산(풍악산)에서 놀 때 바위 위에 시를 새겼는데,
백옥경 봉래섬엔 아득한 안개 물결 예스럽고 따스한 바람과 볕은 좋기도 해라 푸른 복사꽃 아래 한가로이 오가며 학 등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에 천지는 늙어 가네
라 했으니 신선의 흥취가 있다. 같은 시대에 송경이라는 서얼 출신 문인이 있었는데, 그 역시 이 시에 이어 읊기를
학은 높이 날아오르고 봉황은 유유히 날아 삼신산 아래를 굽어보며 오색구름 사이를 가로질러 나네 천지는 세 자짜리 지팡이요 이 몸은 신선의 가벼운 옷 한 벌이라 바위 꼭대기 나무에 긴 칼을 걸어 두고 맑은 샘물 희롱하며 붉은 지초를 캐 먹노라
라 하니, 양사언은 극도의 찬사를 보냈고 세상을 떠난 우리 형님(허봉)도 기꺼이 칭찬하셨다.
(용어) 양사언(1517~1584) —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호는 봉래. 금강산을 즐겨 유람하며 이런 이름을 얻었다.
양봉래가 강릉 군수로 있을 때 익지(이달)를 손님으로 대우했는데, 이달은 행실이 검속되지 않아 고을 사람들의 비난을 샀다. 선친께서 편지를 보내 그를 변호하시며, "밤안개 속에 오동꽃 떨어지고, 바다 숲에 봄 구름 스러지네"라 읊었던 이달을 만약 소홀히 대한다면, 이는 위나라 진왕(조식)이 응양과 유정 같은 문인들을 처음 잃던 날과 다를 바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대접이 조금 허술해지자 이달은 시를 남기고 작별을 고했는데,
나그네가 떠나고 머무는 것은 주인이 눈썹을 까딱하는 데 달렸을 뿐 오늘 아침 반가운 낯빛을 잃었으니 머잖아 청산을 그리워하게 되리 노나라에서는 바닷새에 제사를 지냈고 남쪽 정벌 나가서는 율무만 싣고 돌아왔네 소진이 가을바람 만나 고향 그리워하듯 나는 또다시 목릉관을 나서는구나
라 하니, 양봉래는 크게 칭찬하고 아끼며 그를 처음처럼 다시 대접했다. 선배들이 벗 사이에 서로 바로잡아 주던 의리가 어떠했는지를 여기서 엿볼 수 있으며, 그 풍류 있는 뛰어난 재주 또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어) "바닷새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노나라 대부 장문중이 분수에 넘는 대접을 한 잘못을 가리키는 옛이야기다. "남쪽 정벌에서 율무만 싣고 돌아왔다"는 것은, 후한의 장수 마원이 남쪽 지방을 평정하고 돌아올 때 약재로 쓸 율무를 수레에 싣고 왔는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금은보화라고 모함했다는 옛이야기다. 둘 다 억울한 오해나 부당한 대접을 받는 상황을 비유하는 데 쓰인다. 소진은 전국시대의 유세가로, 타향을 떠돌다 가을바람에 고향을 그리워했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용어) 이달(1539~1618?) — 조선 중기의 시인. 서얼 출신이라 벼슬길이 막혔으나 시재가 뛰어나 최경창·백광훈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불렸다. 자는 익지, 호는 손곡. 허균과 허난설헌의 스승이기도 했다.
노수신과 최경창, 이달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소재 노(노수신) 정승이 어느 스님의 시첩에서 고죽(최경창)과 익지(이달)의 시를 보고 지은 시에
이 시대 제일가는 문장으로는 오직 이와 최를 일컫는다오
라 했는데, 대체로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우리 둘째 형(허봉) 또한 "이달의 시는 신라 이래로 당나라 시를 본받은 이들 가운데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일찍이 그의 시 중에서
중천의 생황 소리와 학은 가을 하늘에서 내려오고 천 년 전 신선 고운은 이미 아득한 옛일이 되었구나 밝은 달 아래 트인 문엔 흐르는 물이 놓였으니 어디쯤에 무릉교가 있는지 궁금하구나
라 한 작품을 칭송하며, 자신도 여기에 미치지 못하리라 여기셨다.
(용어) 노수신(1515~1590)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소재. 을사사화 여파로 오랜 유배 생활을 겪은 뒤 영의정까지 올랐다.
조지세(조위한)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지명은 시 속에 넣어도 우아한 맛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의
기운은 운몽택을 쪄서 올리고 파도는 악양성을 뒤흔든다네
와 같은 구절을 보면, 열 글자 가운데 여섯 글자가 지명이고 거기에 네 글자를 보탠 것일 뿐인데, 정작 공들인 곳은 '찐다'는 글자와 '뒤흔든다'는 글자 두 자뿐이다. 그러니 시를 짓는 일이 어찌 수월하지 않겠는가." 이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노 정승(노수신)의 시인
길은 평구역에서 다해 버리고 강물은 판사정에서 깊어지네
와
청파 마을 저녁엔 버들빛 짙고 백악산 봄날엔 하늘이 맑네
같은 구절 또한 대단히 훌륭하다. 이는 다만 글귀를 짓는 솜씨에 달린 문제일 뿐이니, 쇠로 금을 만든다 한들 무엇이 나쁘겠는가.
(용어) 조위한(1567~1649) —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자는 지세.
박순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박사암(박순)의 시에
은혜로운 물결에 오래 젖어 이 마음 부지런히 부려 왔건만 새벽닭 울자마자 조복부터 챙기는구나 강남의 시골집은 봄풀에 묻혀 가는데 도리어 산승에게 대숲이나 지키라 시키네
라 했으니, 아, 사대부라면 누군들 은퇴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한 치 녹봉에 끌려 고개를 숙이고 그 마음을 저버리는 자가 많을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 절로 탄식이 나오게 된다.
(용어) 박순(1523~1589)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사암. 영의정을 지냈다.
노소재(노수신)와 황지천(황정욱)은 근래의 대가로서 둘 다 근체시(율시와 절구)에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 노수신의 오언율시와 황정욱의 칠언율시는 모두 천 년 이래의 빼어난 가락이다. 그러나 긴 시에서는 이만 못하니 그 까닭은 알 수 없다.
(용어) 황정욱(1532~1607)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지천.
양경우가 일찍이 나에게 "우리나라에서는 칠언고시를 누가 가장 잘 짓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래서 "글쎄, 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니, 양경우가 박씨와 이씨 가운데 누가 앞서는지 차례로 물어 왔다. 내가 대답하기를 "둘 다 한퇴지에게서 나왔으되, 한 사람은 지나치게 억세고 한 사람은 지나치게 번거로우니, 그것이 최고의 경지는 아니오" 했다. 그러자 눌재(박상)의 〈진양형제도〉와 충암(김정)의 〈우도가〉는 어떠냐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진양형제도〉는 웅장하나 막힌 데가 있고, 〈우도가〉는 기이하나 어둡다" 했다. 그렇다면 결국 누구에게 돌아가겠느냐 물어서, "어잠부(어무적)의 〈유민탄〉과 이익지(이달)의 〈만랑무가〉일 것이오" 하고, 이어서 "시로 본다면 뛰어난 재주가 그대들 가운데서 많이 나왔소" 하니, 양경우도 크게 웃었다.
(용어) 양경우(1568~1638) —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한퇴지(한유)는 당나라의 대문장가. 어무적은 조선 중기의 서얼 출신 시인으로, 백성의 고통을 노래한 〈유민탄〉으로 유명하다. 자는 잠부.
선친께서는 자제들이 화순 지방에 있었던 까닭에 진사 김윤과 서로 사귀며 매양 그의 시를 칭찬하셨다. 병마절도사가 일찍이 진남루를 세우고 김윤을 맞아들여 긴 시를 지어 쓰게 했는데, 술에 취한 채 단숨에 붓을 휘둘러 육십 구를 지었다. 그 첫 구에
만 근 무게의 무지개 들보는 붉은 새 조각을 짓누르고 용 새겨진 처마엔 공손랑의 검무가 펼쳐지는 듯
이라 했으니, 참으로 굉장한 걸작이다. 일찍이 물길로 가다가 배가 부서져 겨우 기슭에 닿았을 때, 정자에 올라 지은 시에
의관은 모두 거센 물결에 휩쓸려 잃었지만 몸뚱이는 부모님께서 주신 그대로 남았구나 높은 정자에 다시 올라 갠 경치를 바라보니 가을 산 맑고 푸르러 새 시에 들어오는구나
라 했으니, 높은 흥취가 대단하다. 그는 예순 살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생원시에 합격해 유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용어) "유일"이란 벼슬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던 인재를 조정에서 특별히 추천해 등용하는 제도를 가리킨다.
내가 수안(지금의 황해도 수안군)에 부임하는 날, 황지천(황정욱)이 시를 지어 전송하며
시재는 우뚝하여 동료들 가운데 뛰어나건만 벼슬 복은 어그러져 분수 밖에 기구하구나 이 모두 인생에는 저마다 정해진 운명이 있으니 유유한 나머지 일은 미뤄 두고 지나갈밖에
라 했으니, 자못 감개가 깊다. 공이 젊어서 홍문관에 있을 때, 이백생(이순인)·최가운(최경창)·하대이(하응림) 같은 이들이 함께 당나라 시의 운치를 숭상하여 대궐 안의 어린 복사나무를 두고 읊은 작품이 꽤 많았는데, 공이 여기에 화답하여
무수한 궁중 꽃은 흰 담장에 기대었는데 벌과 나비는 노닐며 남은 향기를 좇아가네 늙은이는 봄바람도 채 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해를 향하는 해바라기 마음뿐이로세
라 했다. 함축된 뜻이 깊고 조사가 기이하고 굳세니, 시를 짓는다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부드럽고 고운 것, 바람이니 꽃이니 하는 것만 읊은 시는 오히려 그 중후한 맛을 해치는 것이다.
(용어) 이순인(1533
1592)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백생. 하응림(1536
1567)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대이.
박순을 애도하는 시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사암(박순) 정승이 세상을 떠나자 애도시가 거의 수백 편이나 되었는데, 오직 성우계(성혼)의 절구 한 수가 절창이었다. 그 시에
세상 밖 구름 산은 깊고 또 깊으니 시냇가 초가집은 이미 찾기 어려워라 배견와 위에 뜬 삼경의 저 달빛은 아마도 선생의 한 조각 마음을 비추리라
라 했는데, 무한한 슬픔이 말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으니, 서로 속 깊이 알던 사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용어) 성혼(1535~1598) —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우계. 배견와는 박순이 만년에 지내던 별장 이름.
이산해와 고경명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근래의 관각시(조정에서 짓는 격식 있는 시)로는 이아계(이산해)가 으뜸이다. 그의 시는 초년부터 당나라 시를 본받았으며, 늘그막에 평해로 귀양 가서야 비로소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고제봉(고경명)의 시 역시 벼슬을 내려놓고 한가로이 지내는 가운데 크게 나아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로써 문장이란 부귀영화에 달린 것이 아니라, 험난한 고초를 겪고 강산의 도움을 받은 뒤에야 오묘한 경지에 들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찌 이 두 사람뿐이겠는가. 옛사람들이 모두 그러했으니, 유주로 좌천되었던 유자후(유종원)나 영남 밖으로 귀양 갔던 소동파에게서도 이를 볼 수 있다.
(용어) 이산해(1539
1609)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아계. 영의정을 지냈다. 고경명(1533
1592) —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순절했다. 호는 제봉. 유종원(773~819)은 당나라의 문장가로, 자는 자후.
최고죽(최경창)의 시는 굳세고 힘차며, 백옥봉(백광훈)의 시는 메마른 듯 담백하다. 둘 다 당나라 시의 길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천 년에 드문 가락이다. 이익지(이달)는 이 둘보다 조금 더 크다. 그래서 최경창과 백광훈을 함께 묶어야 비로소 그 나름의 대가를 이룬다고 할 만하다.
고죽의 시는 편마다 다 아름다운데, 이는 반드시 갈고닦아 마음에 걸림이 없어진 뒤에야 세상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최경창, 백광훈)의 시 가운데 내가 골라 《국조시산》에 넣은 것이 각기 수십 편인데, 그 시들은 음절이 정통의 소리에 잘 들어맞지만, 나머지 시들은 남을 따라가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용어) 《국조시산》 — 허균이 직접 편찬한 조선 시대 시선집.
나는 일찍이 고죽의 오언 고시와 율시, 세상을 떠난 형님(허봉)의 노래체 시, 소재 정승(노수신)의 오언율시, 황지천(황정욱)의 칠언율시, 이손곡(이달)과 백옥봉(백광훈) 그리고 세상을 떠난 누님(허난설헌)의 칠언절구를 모아 한 질의 책으로 엮어 읽어 보았다. 그 음절과 격률이 모두 옛사람에 가까웠으나, 한스러운 것은 기운이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아, 누가 그 본래의 소리를 다시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이춘영과 권필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요즘에는 이실지(이춘영)가 시문에 능하다. 그의 시는 다소 번잡한 듯하지만 기운만큼은 나름대로 크고 힘차서 작가라 부를 만하다. 그러나 권여장(권필)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다. 이실지는 안목이 높아 당대 사람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오직 나와 여장(권필)·자민(이안눌)만은 괜찮다고 여겼다. 그는 "허균은 허세가 있고, 권필은 메마르며, 이안눌은 융통성이 없다"고 했는데, 이 또한 지당한 평이라 할 만하다.
(용어) 이춘영(1563
1606) —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자는 실지. 권필(1569
1612)은 조선 중기의 시인, 호는 석주. 허균과 가까웠으며 허난설헌의 시 스승이기도 했다.
이실지는 세상을 떠난 우리 형님의 글을 칭찬하며 "문장을 깊이 아는 이는 허미숙(허봉)이다" 했다. 그래서 내가 "후배 가운데 누가 형님의 뒤를 이을 만합니까" 하고 물으니, "신현옹(신흠)이 그럴 만하니, 맑고 청량함은 미치지 못해도 농후함은 오히려 그를 뛰어넘는다고 봅니다" 하고 대답했다.
(용어) 신흠(1566~1628) — 조선 중기의 문신·문장가, 호는 현옹.
정송강(정철)은 우리말 노래를 잘 지었으니, 〈사미인곡〉과 〈권주사〉는 모두 곡조가 맑고 씩씩하여 들을 만하다. 비록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은 이를 배척해 음란하고 사특하다고 하지만, 그 문채와 풍류만큼은 가릴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를 아까워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여장(권필)이 그의 묘를 지나며 지은 시에
빈 산에 나뭇잎 우수수 떨어지니 정승의 풍류가 이곳에 묻혀 적막하구나 서글퍼라 한 잔 술 다시 권하기 어려우니 지난날의 노랫가락은 오늘을 두고 지은 것이었네
라 했다. 자민(이안눌)이 〈강 위에서 노래를 듣고〉라는 시에
강가에서 누가 저리 미인사(사미인곡)를 부르는가 때마침 강가에 달이 지는 시각이라 서글퍼라 임 그리는 그지없는 마음을 세상엔 오직 저 여인만이 알고 있구나
라 했는데, 두 시 모두 정송강의 가사에서 비롯되어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민(이안눌)의 시가 둔해서 잘 드날리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그가 함흥에 있을 때 지은 시에
비 개자 관가의 버들은 푸르게 늘어지니 객지에서 처음 맞은 삼월 삼짇날이로세 다 함께 고향 떠나 돌아가지 못한 신세 가인이여, 망강남의 노래는 부르지 마오
라 했는데, 맑고 산뜻하며 유려하니 중국 시인들과 견주어도 그 차이가 얼마나 크다 하겠는가.
(용어) 이안눌(1571~1637) — 조선 중기의 문신·시인, 자는 자민.
둘째 형이 논평한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둘째 형(허봉)은 고제봉(고경명)에게 깊이 감복하며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양에서 함께 있을 때 어떤 이가 '교' 자로 운을 내니, 고경명 공이 이에 화답하여
이어진 마을마다 벼와 기장은 삼추가 지나 무르익고 한 고을의 서리 바람은 시월에 접어드는구나
라 하기에, 나도 모르게 감복하고 말았다."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참판 유영길의 시는 비록 시의 경지가 좁지만 좋은 곳이 있으니, 이를테면
거문고와 비단옷은 세월을 서둘러 녹이고 금 병풍 속에서는 웃음 사기도 더디구려 발에 비친 석류꽃은 곱기도 하고 연못으로 통하는 들물은 맑기도 하네
같은 구절은 밝고 굳세어 즐길 만하다."
(용어) 유영길(1538~1601) — 조선 중기의 문신.
윤 사문 면(윤면)이 임금의 명을 받들고 호남으로 가던 길에 어느 산을 지나는데, 산속에 초가집 한 채가 있고 한 늙은이가 나무 아래에서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어 펴 보려 하니, 늙은이가 다가와 빼앗으며 "변변찮은 작품이라 남에게 보여 줄 수가 없소" 했다. 그래서 겨우 첫머리에 쓰인, 얼레빗을 읊은 시만 보았는데 이러했다.
얼레빗으로 빗질하고 참빗으로 다시 빗질하니 천 번을 쓸어내려 이는 벌써 다 없어졌네 어찌하면 만 길이나 되는 큰 빗을 얻어다가 백성들 몸에 붙은 물것을 남김없이 쓸어낼까
이름을 물었으나 대답 없이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 어떤 이는 전주 진사 유호인이라고도 말한다.
(용어) 윤면 —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 인물이다. "물것"은 몸에 붙어 피를 빨아먹는 이나 벼룩 같은 벌레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를 빗댄 표현으로 읽힌다.
임제와 신제이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임자순(임제)은 시로 이름이 있었는데, 우리 두 형은 늘 그를 추어올리며 인정해 주었다. 그의 "삭풍 부는 눈이 변방 길에 휘몰아치네"라는 시 한 편은 당나라 전성기 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하셨다. 일찍이 그에게 들은 이야기로, 어느 절에 갔더니 승려의 시첩에
동화문에서 밥을 빌던 옛날의 학관이라 분산이 좋아 노닐 만하다 하지만 십 년이나 그리던 꿈은 비로봉을 감도니 베갯머리 솔바람 소리 밤마다 서늘하네
라는 시가 있었는데, 말이 매우 맑고 깨끗했으나 이름이 빠져 있어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세상에는 참으로 버려진 인재가 있어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법이다.
(용어) 임제(1549~1587) —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자는 자순. 얽매이지 않는 호방한 기질로 유명했다.
둘째 형이 임금의 명을 받들고 북방에 나가 압호정에 올라
백성들 사는 초라한 집엔 해묵은 병이 들고 파란 벼는 하룻밤 서리에 다 망쳐졌네
라 읊었는데, 임자순(임제)은 이를 극찬하며 "백성의 집과 파란 벼, 열 글자로 쓴 시로 남을 역사로다"라는 시를 지어 주었다. 형도 임자순의
오랑캐가 일찍이 스무 고을을 엿볼 적엔 장군은 말을 몰아 제후에 봉해질 공을 세웠는데 지금은 변방 요새에 전쟁이 없으니 장사는 옛 역루에서 한가로이 잠을 자네
라는 시를 칭찬하며 협기가 펄펄 뛴다고 하셨다.
형이 풍산 역에서 벽에 쓰인 시 한 수를 보았는데
세상엔 뛰어난 인재 알아줄 이 없는데 누굴 위해 황금으로 높은 대를 쌓았던가 변방 서리는 검푸른 귀밑머리를 다 물들이니 필마로 음산 땅을 열 번이나 오가는구나
라 했다. 말의 기운이 강개하고 매우 훌륭하여 역졸에게 누구의 작품인지 물었더니, 병영의 군관 손만호가 지은 것이라 했다 한다.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 유월 스무여드레는 명종의 기일이었다. 신제이(신노)가 곡구역에서 시를 썼는데,
선왕께서 이날 뭇 신하를 버리고 떠나실 적 남기신 유언은 은근히 성인께 부탁하셨네 스물여섯 해 만에 그 향불도 끊어지니 소리쳐 우는 이는 늙은 백성뿐이로세
라 하니, 보는 이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용어) 신노 — 자는 제이. 1592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이옥봉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나의 누님 난설헌과 같은 시기에 이옥봉이라는 여인 시인이 있었는데, 바로 조백옥(조원)의 첩이다. 그녀의 시 역시 맑고 씩씩하여 여인 특유의 꾸밈이 없다. 영월로 가는 길에 지은 시에
닷새는 장간에서, 사흘은 영월에서 노릉의 구름 아래 슬픈 노래에 목이 메네 첩의 몸도 이 또한 왕손의 딸이거늘 이곳의 두견 소리는 차마 듣지 못할레라
라 했으니, 품은 생각이 애처롭고 원한을 띠어, 이익지(이달)의
동풍에 촉나라 임금의 넋은 괴로워하고 석양에 노릉은 싸늘하기만 하네
라는 구절과 한가지로 쓰라린 가락이다.
(용어) 이옥봉 — 조선 중기의 여성 시인, 조원의 소실이었다. "노릉"은 단종이 묻힌 영월의 능(장릉의 옛 이름)을 가리키며, 왕위에서 쫓겨나 어린 나이에 죽은 단종을 애도하는 뜻이 시에 깔려 있다.
전우치와 정백련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도사 전우치는 세상 사람들 말로는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데, 그의 시는 매우 맑고 초탈하다. 일찍이 삼일포에서 지은 시에
늦가을 맑은 못에 서리 기운 해맑은데 공중의 퉁소 소리 바람 타고 내려오네 푸른 난새는 오지 않고 하늘 바다는 아득한데 서른여섯 봉우리에 밝은 달만 환하구나
라 했으니, 읽고 있으면 마음이 상쾌해진다.
(용어) 전우치 — 조선 중기에 활동한 것으로 전하는 도사·문인. 소설 〈전우치전〉의 실존 모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젊었을 때 정백련이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병들어 귀신을 만났다고 했는데, 절구도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그의 시 중 가장 좋은 것으로
봄잠 자고 나서 술을 따르니 발을 걷은 앞으로 꽃잎이 날리네 인생이란 것이 얼마나 되는가 비 내리는 하늘을 슬피 바라보노라
와 또
만 리 밖 거센 파도에 바다 해는 저무는데 벽도화 그림자는 하늘 문에 비치네 난새 수레 한 번 떠난 뒤로 천 년이나 고요터니 후령의 신비로운 퉁소 소리 한밤중에 들리네
가 있는데, 그 음운이 맑고 그윽하여 사람의 소리 같지 않았다.
(용어) 정백련 — 병중에 귀신을 만나 시를 지었다는 신이한 일화로만 전하는 인물이다.
부안의 계생과 신분 낮은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부안의 기생 계생(매창)은 시에 솜씨가 있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뛰어났다. 어떤 고을 태수가 그녀와 가깝게 지냈는데, 훗날 그 태수가 떠난 뒤 고을 사람들이 그를 기려 비석을 세웠다. 계생이 달밤에 그 비석 위에서 거문고를 타며 하소연하듯 길게 노래를 불렀다. 이원형이라는 이가 지나다가 이를 보고 시를 지었는데,
한 가락 거문고는 자고새를 원망하는데 묵은 비석은 말이 없고 달만 덩실 외롭구나 현산에서 그날 양호의 비석에도 눈물 떨구던 가인이 있었던가
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절창이라 했다. 이원형은 우리 집에 드나들던 문객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와 이여인(허균의 벗으로 추정)과 함께 지낸 까닭에 시를 지을 줄 알았고, 다른 작품에도 좋은 것이 있으며 석주(권필)가 그를 좋아하고 칭찬했다.
(용어) 계생(1573~1610) — 부안의 기생 시인, 호는 매창. 이달의 제자였으며 유희경과의 사랑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현산의 양호 비석" 이야기는, 중국 진나라의 명신 양호가 백성을 잘 다스려 그가 떠난 뒤 백성들이 세운 비석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그리워 눈물을 흘렸다는 옛이야기에서 왔다.
유희경이라는 이는 신분이 천한 노비였다. 사람됨이 맑고 신중하며 진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니 사대부 가운데 그를 아끼는 이가 많았고, 시에도 능해 매우 원숙했다. 젊었을 때 갈천 임훈을 따라 광주에 있으면서 석천(임억령)의 별장에 올라, 그 누각에 앞사람이 써 놓은 '성' 자 운을 따라 시를 지었는데
댓잎은 아침에 이슬을 따르고 솔가지엔 새벽에 별이 걸렸네
라 하니, 양송천(양응정)이 이를 보고 극찬했다.
(용어) 유희경(1545~1636) — 조선 중기의 천민 출신 시인. 기생 매창과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하며, 임진왜란 뒤 공을 인정받아 면천되었다.
백대붕이라는 이도 시에 능했다. 일찍이 궁궐 문지기를 했는데, 같은 처지의 동료들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의 시는 당나라 맹교와 가도를 배워 메마르고 담백하며 여렸다. 그래서 권여장(권필)은 늦은 당나라 시풍을 배우는 사람을 볼 때마다 반드시 "문지기 시체"라 불렀으니, 대개 그 여림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용어) 백대붕 — 조선 중기의 천민 출신 시인, 유희경과 함께 "풍월향도"라는 위항 시인 모임을 이끌었다. 맹교와 가도는 당나라의 시인으로, 고심하며 메마르고 처절한 시풍을 구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의 승려 가운데 시에 능한 이는 매우 드문데, 오직 참료가 으뜸이다. 그가 어떤 사람에게 준 시에
물 따라 구름 따라 떠도는 발자취 이미 여러 해 서로 뜻이 맞아 이런 인연을 맺은 것이 기쁘구나 종일토록 나그네 방엔 봄날이 적막한데 지는 꽃은 눈처럼 비 갠 하늘에 날리네
라 하니, 빼어나고 맑은 맛이 있다.
(용어) 참료 — 조선 중기에 활동한 승려 시인으로 전한다.
이상으로 성수시화를 마친다. 신라 말부터 허균 당대에 이르기까지 약 팔백 년 동안 이 땅에서 나온 시인들을 두루 살피며, 왕족과 고관대작에서부터 서얼과 여성, 천민과 승려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시의 좋고 나쁨만으로 평가한 것이 이 글의 특징이다. 허균 자신의 집안 사람들(아버지 허엽, 둘째 형 허봉, 누이 허난설헌)에 대한 자부심과, 신분이나 지위와 상관없이 뛰어난 시를 알아보려 한 그의 안목이 책 전체에 걸쳐 뚜렷이 드러난다.
성소부부고 제26권
10. 15:51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2 · 소(疏) 및 서(序)
출처: 성소부부고 제26권, 부록 2, 소 및 서
배경: 제26권 부록 2에는 두 갈래의 글이 실려 있다. 하나는 광해군 10년(1618) 기준격이 올린 무고 상소에 맞서 허균이 자신을 변호하며 올린 두 편의 상소문이다. 기준격은 영의정을 지낸 기자헌의 아들로, 허균에게 어려서부터 글을 배운 제자였는데, 아버지 기자헌이 인목대비 폐출 논의(대론)에 반대하다 귀양 간 뒤 원한을 품고 허균을 역모로 무고하였다. 이 소는 《광해군일기》에도 실려 있는 중요한 정치 문서로, 허균과 기자헌 집안의 오랜 반목, 계축옥사의 전말, 대비 폐출 논쟁 등 광해군 대 정치사의 이면을 생생히 보여준다. 다른 하나는 《태각지》(의정부의 연혁을 정리한 책)와 《청허당집》(서산대사 휴정의 문집)·《사명집》(사명대사 유정의 문집)에 붙인 세 편의 서문이다.
기준격의 상소에 대한 허균의 소 (1) (서기 1618년 2월 1일, 양력)
삼가 아룁니다. 신이 이달 초나흗날 밤 이경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데, 깜깜한 어둠 속 울타리 밑에 숨어 있던 장정 두 명이 손을 쓰려 할 때 말 뒤에 있던 종이 이를 발견하고 "도적이 있다"고 외치니, 도적이 도망하여 인가에 숨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 색출해 결박하고 추궁하니, 처음에는 문창(유희분의 봉호) 집의 종이라 했다가 다음에는 정승댁 종이라 했습니다. 어느 정승댁이냐고 강력히 추궁하였으나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제 포도청으로 송치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일선위의 여종이 풀어 주기를 청하면서 또 문창의 집에 드나드는 모피 장인이라고 했습니다. 신은 '내가 혼자서 대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원수진 사람이 미워한 나머지 당나라 때 이사도가 배도를 암살하려 했던 일을 행하려 했던 것인데, 남의 부탁을 받아 함부로 풀어 줄 수 있겠는가' 여겼습니다. 그런데 대장 등이 미루면서 지금까지 국문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권세가와 굳게 결탁하여 모의하는 바가 있다는 정황을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신은 기반이 미약한 사람인데도 화근을 제거하자는 의논을 강력히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이 신을 살해하려 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기씨 집안에서 원한 때문에 사람을 사주하여 흉악한 상소를 올리게 했습니다. 이영은 평소부터 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자인데, 지난번 아뢴 글에서 '군부를 위해하려 모의한다'는 네 글자를 저 스스로 지어 신에게 덮어씌웠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준격의 상소가 아직 임금께 내려지지도 않았는데 이영이 어떻게 그 내용을 미리 알고서 갑자기 이런 불측한 오명을 씌울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은 스스로 국청에 나아가 기필코 영과 대질하여, 영에게 어떻게 신이 군주를 위해하려 모의했다는 곡절을 알게 되었는지 따지고자 했는데, 서서히 처결하겠다는 전교가 있었으므로 신은 거적자리를 깔고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자헌을 귀양 보내는 일에 대해서도 다시 혈서로 쓴 상소를 올려 함께 변론하려 하였습니다만, 곧이어 대간의 아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조처하지 않고 서서히 정배하겠다고 전교하셨으므로 신은 임금을 뵙게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객이 횡행하며 신을 먼저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신이 한번 죽고 나면 이 지극한 원통함을 씻을 길이 없기 때문에, 감히 대론이 한창 일어나는 때에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고 우러러 간절한 충정을 아뢰었으니, 그 죄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대체로 자헌이 기필코 신을 죽이려 하는 것은 바로 신의 입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계축년의 변이 일어났을 처음, 서궁(인목대비)의 흉역스러운 정상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신이 자헌에게 "이는 신하 된 자로서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어찌 지극히 높은 대비의 자리에 그대로 두어 인륜을 무너뜨리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자헌이 "그대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김제남은 사리에 어둡고 유약한 사람인데 어떻게 비상한 모의를 할 수 있었겠는가? 궁중에서 저주했다는 일도 궁인들이 한 짓인데 그 화를 대비전으로 전가하는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더구나 심우영의 공초에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서양갑이 박응서의 계책 때문에 자신이 억울하게 죽게 된 데 분노하여 국가에 난을 끼치려 이런 흉역스러운 말을 지어낸 것이다. 저들이 흉역스러운 짓을 하려 한들 누가 따르려 하겠는가? 또 《위료자》에도 가혹한 형벌을 가하면 뜻있는 선비도 없는 죄를 스스로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지금 주상께 다른 아들이 없고 동궁에게도 아직 후사가 없으니, 만세 뒤에 바른 의론이 일어난다면 오늘날 이 일을 벌인 자들의 자손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나의 외조부가 바로 임백령인데, 지금 사람들이 을사년의 일을 말하면 내 얼굴이 붉어지니, 그대는 이런 의논을 주장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의 속마음은 김제남을 임유에 견주는 것이고, 서양갑 등도 억울하게 자백한 것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신은 한심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그의 자식과 조카들이 역적의 진술에 거론되었으므로 뒷날을 위해 이런 의논을 주장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뒤 기자헌은 이 말이 새어 나갈까 몹시 두려워하였고, 신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습니다. 이 밖에 신이 들은, 위를 원망하고 난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말들은 감히 함께 아뢰지 못하겠습니다.
기준격의 상소 내용에 대해서는 신이 알 수가 없습니다. 준격은 신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가르치는 것 외에는 나이 어린 사람과 시사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삼가야 할 일인데, 하물며 그 흉악한 상소에 거론된 불측한 말이겠습니까. 저가 그런 말을 실제로 들었다면 어째서 일찍 고변하지 않고 제 아비가 죄를 입은 때에야 이를 발설한단 말입니까? 고변하지 않은 죄 또한 심한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사람을 무고하여 죄에 빠뜨리려고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을 감히 글에다 쓸 수가 있겠습니까? 진실로 천륜을 모독하고 문란시키는 짓을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지어 성상께 아뢸 수 있겠습니까? 임금을 무시하는 패역스러운 말을 스스로 지어냈다면 그 죄는 역적보다도 더 심한 것입니다. 신은 삼가 통탄합니다.
1606년 겨울 신의 형 허성이 이조 판서로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허성에게 "이홍로가 이영을 광주 경주인의 집에 머물게 하고 밤낮으로 모여 교활한 음모를 꾸미는데 못하는 짓이 없다고 한다. 모름지기 동궁을 위해 외방으로 보임시켜야 한다" 하였으므로, 허성이 즉시 잇따라 외방 고을에 추천했는데, 그 뒤 정주에 있다가 마침내 파직되었습니다. 1608년에는 이홍로의 심복이라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5년간 관직을 삭탈당했으므로, 온 나라 사람이 그가 이홍로의 일당임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권세 있는 자의 연줄을 타고 요행히 화를 면하여 청요직(여기서는 대사헌)에 올랐습니다. 겉으로는 대론을 가탁하고 나섰으나 속으로는 실상 형세를 관망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초나흗날 올린 계사에는 '폐출'이라는 두 글자는 거론하지도 않은 채 바로 관작을 깎는 절목만 들고 나와서, 끝에는 "내택으로 옮겨 안치시켜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 본마음이 여기서 다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이영이 감히 사주를 받아 원한을 갚으려고 도리어 오명을 신에게 뒤집어씌우니, 신은 더없이 원통합니다. 신하 된 자로서 이런 대역의 죄명을 지고는 하루도 천지 사이에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급히 기자헌과 이영 등을 하옥시켜 대질하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반란의 모의를 어째서 일찍 고변하지 않았고 화근을 어째서 제거하려 하지 않았는지 기자헌에게 끝까지 캐어묻고, 이어 이영에게는 신이 임금을 위해하려는 모의를 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따져 주심으로써, 한편으로는 간사한 정상을 적발해 내고 한편으로는 미천한 신이 무고당한 정상을 씻어 주신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군부를 위해 만 번 죽을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종묘사직을 붙들어 세웠는데도 끝내 망극한 참소를 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횡행하는 자객이 신을 미워하는 자의 소행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통쾌히 가려 씻어 주시어 간악한 자들의 음모를 저지시키지 않으신다면, 충정한 신하가 남은 생을 보전하기 어렵게 됩니다. 마음이 막히고 말이 움츠러들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곡진히 살펴 주소서. (《광해군일기》 권123, 10년 정월 정해)
(용어) 대론은 1617년 인목대비의 삭호와 폐출에 대한 의논을 가리키며, 이에 반대한 기자헌은 귀양을 갔다. 계축년의 변은 1613년, 조령에서 은상을 약탈하다 잡힌 자들이 김제남이 역모하였다고 허위 진술하여 일어난 사화로, 이로 인해 김제남은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폐해졌다. 을사년의 일은 1545년에 일어난 사화로, 소윤의 윤원형이 대윤의 윤임을 몰아낸 사건이며 그 주동 인물이 임백령이었다. 경주인은 지방 관청과 중앙 관청의 연락 사무를 맡아보게 하기 위하여 지방에서 서울로 파견된 향리이다.
기준격의 상소에 대한 허균의 소 (2) (서기 1618년 6월 24일, 양력)
지난해 대론이 일어나자 신의 원수 자헌(기자헌)이 제일 먼저 흉악한 차자를 올렸다가 귀양 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서는 신이 은밀히 중상한 것으로 의심하여 신에 대한 원망이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자헌이 이런 차자를 올리지 않았다면 그의 원수가 백 명이라도 그를 모해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지만, 차자를 올렸다면 평소 원수진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벌을 내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기씨 집안에서는 신을 원망하여 그 아들 기준격이 외람되이 변고를 알리는 글을 올렸는데, 그 상소의 내용이 매우 비밀스러워 사람들이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양사에서 신문하기를 청하고 2품 이상이 국문하기를 청했는데도 전하께서는 고집하며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신은 사가에서 거적을 깔고 엎드려 다시 변론하는 글을 올립니다.
당초에는 그 상소의 내용이 이토록 참혹하고 지독한 줄은 몰랐었습니다. 지난번 곽영의 옥사 때문에 국청에서 그 상소를 내려 달라고 청하였는데, 그 내용 가운데 위를 저촉하고 모독하는 말들은 모두 차마 볼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허위 사실을 날조해 신을 무함하려는 온갖 계책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대신 이하가 그 글을 보고는 간담이 떨렸다 하니, 국청을 맡은 신하는 일각도 지체하지 말고 실정을 캐내어 나라의 법을 바로 세우는 것이 바로 신하 된 자의 대의입니다. 그와 뜰 아래에서 마주하여 시비를 가릴 수 있게 되기를 가슴을 두드리며 바라니, 하루가 일 년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의금부 판사가 아직 차임되지 않았고 전하께서도 병을 조리하시는 중이므로, 친히 심문하실 기회가 막연하기만 합니다.
신이 기씨 집안과 원수를 맺게 된 전후 곡절을 먼저 말씀드리고, 이어 없는 사실을 날조한 그 상소의 내용에 대해 하나하나 밝혀 아뢰겠습니다.
신의 형이 이홍로와 혼사를 끊자 홍로가 신이 상복 입는 법도를 삼가 지키지 않았다는 것으로 무함했기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되었다는 사정은, 신의 처음 상소에서 이미 상세히 아뢰었습니다. 홍로가 스스로 변명한 상소에 "허균도 그 일을 알고 함께했다"는 말은, 기씨 집안의 밀서에서 거짓임이 이미 드러났으니 다시 아뢰지 않겠습니다.
1601년 신이 해운판관으로 순찰차 전주에 갔었는데, 홍로가 감사로서 어미 상을 당하여 성복도 하기 전에 좋지 못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사람들이 신이 이 사실을 상세히 알고 있다고 하자 기자헌이 신에게 증언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홍로가 나를 상례를 삼가지 않았다는 것으로 무함했는데 내가 또 이것으로 그를 무함한다면 같은 방식으로 보복하는 것이니 누가 믿어 주겠는가? 결단코 따를 수 없다" 하였더니, 자헌이 비로소 유감을 품었습니다.
홍로가 서울로 올라와서는 신이 눈으로 본 일들을 퍼뜨렸는가 의심하여 원망하는 말을 마구 하였습니다. 신이 조카의 상을 조문하기 위해 그의 이웃에 갔다가 들러서 스스로 해명하려 하였는데, 마침 신현과 이성경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홍로가 급급히 저지시키면서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그대는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는데, 그때 기씨 집안의 문안 노자가 이를 보고 가서 자헌에게 고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이 상소에 참견했다는 말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스스로 해명한 서찰은 본디 긴요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자헌이 이것을 위협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밀서를 모방해 그 내용에 흉악한 말이 있는 것처럼 꾸몄습니다. 그리고 옥사를 일으켜 스스로 해명하려 한다는 설을 신에게 뒤집어씌워 몰아붙였습니다.
1603년 신의 형 성의 집에서 국혼을 할 적에 형수의 병이 위중하여 기일을 앞당겨 혼인을 치렀습니다. 궁인들도 병자를 보고 갔고, 그런지 닷새 만에 죽었습니다. 마침 상을 발설하지 않고 비밀에 부쳤다는 설이 궁중에 퍼졌는데, 이 말은 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자헌이 날조한 것이라고 지목되었습니다. 봄 꿩이 절로 울듯이 형의 집에 가서 해명하면서 "이는 균이 나를 잡아넣으려고 만든 말이니, 공이 대방(허성)에게 해명하라" 하였습니다.
자헌은 더욱 노하여 헌납 신률을 충동질하여 신을 탄핵케 하였으므로 신은 즉시 강릉으로 내려갔습니다. 자헌은 그래도 분풀이를 그치지 않았으므로 신의 형이 걱정하던 끝에 신에게 사과하는 서찰을 보내어 그의 노여움을 풀게 하라고 했습니다. 신은 즉시 서찰을 보내어 사과했고 그 내용에도 별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자헌이 "내가 이 서찰을 내놓으면 균은 틀림없이 죽는다" 하였습니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이 망발한 말이 있는 것인가 의심하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그 실제는 이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자헌이 전후 차자를 올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을 두루 비방할 적에도 신의 이름이 그 가운데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벽제에 왔을 때 신이 역관 박인상을 시켜 본국의 세자 책봉에 관한 일을 극력 아뢰게 하였더니, 주지번이 즉시 정문할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신이 돌아와 대신들에게 말하였더니 적신 유영경은 즐거워하지 않았으나 자헌과 심희수는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의 민심을 사신에게 전달하여 중국 조정의 벼슬아치들에게 알릴 수 있었습니다.
유영경이 분노와 시기를 품게 되었으므로 자헌 등도 잇따라 벼슬자리에서 밀려났고, 신도 곧이어 부처를 좋아한다는 비평을 당했습니다. 신과 자헌이 함께 유영경의 배척을 받았기 때문에 이로부터 자헌이 거짓 마음을 열고 대하는 체했습니다만, 신은 자헌이 음험한 마음을 품고 있어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수시로 만나기는 해도 사사로운 마음은 감히 토로하지 못하였으므로, 늘 시기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1613년 초겨울 화근을 제거하자는 의논이 발론되기 시작했습니다. 11월 초나흗날 신이 마침 자헌을 만나 조용히 물으면서 그의 마음을 염탐해 보았더니, 자헌이 머리를 흔들면서 동의하지 않고서 송순의 일을 핑계대면서 결연히 가버렸습니다. 그의 자식과 조카들이 모두 서양갑과 절친한 사이로 역적의 진술에 거론되었으나 요행히 나문을 면하였습니다. 때문에 뒷날 화를 면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기 위해 미리 이런 의논을 세움으로써 판국을 번복시키려 도모한 것입니다. 신은 이것으로 자헌이 끝내 임금을 등지고 대론을 저지시키려 할 줄 알았습니다.
1614년 봄 자헌이 들어와 영의정이 되자 삼사가 일제히 탄핵하였습니다. 이때 그 자제들이 신에게 시배들의 의논을 중지하게 해달라 하였으므로, 신이 널리 친우들에게 요청하여 그 탄핵을 그치게 했습니다. 그 뒤 그의 아우 기윤헌이 외설에 대한 일 때문에 신을 의심하여 유감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틈을 이용하여 그의 형에게 거짓말로 "삼사가 탄핵할 적에 허균이 힘써 저지시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덩달아서 배척하였다" 하니, 자헌이 그대로 믿고 매우 노하였습니다. 신이 요동에 있으면서 징병에 관한 일은 조처하기 어렵다는 곡절로 자헌에게 글을 보냈더니, 자헌은 곧 자기를 헐뜯는 것인가 의심하여 공공연히 신을 욕하였습니다. 북경에 도착하여 조종의 억울함을 밝히는 글을 올리자, 극도로 추잡한 비난을 가하고 사형에 처하려 했었습니다. 그때 신이 자헌의 탄핵을 저지시키기 위해 진력했음을 아는 사람이 자헌에게 가서 상세히 해명하고 그의 구원을 요청했던 서찰 세 통을 보이자 자헌이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시기하고 저해하는 마음은 더욱 더하였습니다. 《대명회전》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고 돌아오자 그는 늘 "뒷날 이것이 반드시 나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 매우 증오스럽다" 하면서, 밤낮으로 획책하여 기필코 신을 살해하려 하였습니다.
안서(해주)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는 자헌이 스스로 차자를 지어 신을 무함했는데 그 내용을 들으니 모두가 허위로 날조한 것이었습니다. 신도 상소를 올려 대면하여 변정하려 하였으나 자헌이 밖에서 위협을 가하여 왔으므로 중지하고 말았습니다. 흉격 사건이 있을 적에는 임금을 버리고 도주했고, 은연중 그 흉격을 신이 지은 것처럼 말했으며, 자기와 친한 사람들과 짜고 신을 무함하려 했습니다. 강릉의 차자에서는 신의 이름을 거론하여 드러나게 지적하지 못하였으며, 그가 조정으로 돌아와서도 감히 명백하게 드러내어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성명께서 그의 흉측함을 통촉하지 않으셨다면 신의 목숨이 어떻게 지금까지 붙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뒤 김진의 옥사 때에는 자헌이 신을 욕하면서 진회에다 비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신도 상소문을 올려 전일 원망을 맺게 된 상황과 저가 역적을 비호하고 임금을 저버린 정상을 아뢰어 면대해서 변정하기를 청하려 했더니, 자헌이 기겁하여 이복장을 보내어 화해할 것을 애걸하였습니다. 신은 대례가 이미 임박하였고 또 자헌이 이 때문에 도망하여 갈까 저어하여 일이 완전히 끝난 다음 아뢰어 변정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대론이 일어났고 저가 제일 먼저 죄를 받았습니다. 기회를 이용하여 남을 곤경에 몰아넣는 것은 의리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도록 덮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때 영남 사람이, 사산에 몰래 장사 지낸 일을 가지고 상소를 올려 죄줄 것을 청하려 하였습니다. 사산은 신라 이래 장사지내는 것을 금지해 오던 곳으로 사람들이 모두 만세에 군왕이 날 곳으로 일컬어 왔는데, 자헌이 그의 첩을 장사지냈습니다. 따라서 자헌이 패몰하기 전에도 모두들 위태하게 여겼었습니다. 이 상소를 올리려 하자 기씨 집안에서는 신이 사주한 것으로 의심하여 원망이 더욱 극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허균이 평소 우리 집안에서 대론을 따르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고의로 이런 꼬투리를 들추어내어 우리 집안을 무함하려는 것이다. 유배지를 여러 번 옮긴 것도 모두 그의 지휘에 의한 것이다" 하면서 부인으로 하여금 바로 임금께 호소하는 글을 올리게 하려다가 하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 성균관의 상소에도 준격과 기수발이 서양갑과 교분을 맺고 있는 정상을 거론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기윤헌이 이사호와 심복이기 때문에 신이 흉악한 정상을 자세히 염탐하여 알고 있다는 것으로 계속 신에게 공갈을 가하였습니다. 힘을 다하여 신을 제거하면 대론은 절로 와해되고 저의 화도 가벼워질 것으로 여겨 준격을 꾀어 저격할 계획을 세우게 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경망하다 해도 원수진 사람들의 자제들을 대할 때면 반듯이 말을 가려서 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고 귀로 차마 들을 수 없는 이런 흉역스러운 난언이겠습니까. 이는 풍병을 앓아 본심을 상실한 사람이라도 감히 할 수 없는 말인데, 신이 이런 말을 했으리라고 여기십니까?
흉악한 상소의 말은 전해 들은 데서 나온 것이므로 하나하나 해명할 수 없습니다만, 사람들에게 전파된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밝혀 말씀드리겠습니다. 준격이 나이 어릴 적에 그 아비의 명에 의해 신에게 와서 배웠고 신도 부득이하여 억지로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평상적인 이야기는 역시 하지 않았었습니다. 지금 이 1609년과 1611년의 이야기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데 증거할 수 없는 말을 글에다 썼으니, 신은 매우 통분스럽습니다. 의창군은 신의 형의 사위이기 때문에 신의 집안을 몰살하기 위해 문득 옹립하려 한다는 말을 만들어 내고 그 공을 자기 아비에게 돌리려는 것이 틀림없으니, 그 계책이 매우 참혹합니다.
형의 집에서 성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신은 곧 파직되어 시골로 내려갔었다가, 1604년 8월에 올라왔습니다. 올라와서는 수안 군수에 제수되어 부임했었고, 1605년 11월에 파직되어 돌아왔습니다. 12월에는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어 내려갔었습니다. 1606년 3월에 의주에서 조보를 보고서 비로소 영창대군이 탄생하여 진하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이 동료들에게 "대신들이 어떻게 감히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는데, 이는 성상(광해군)께서 춘궁의 자리에 계시고 억조창생이 마음으로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은 바로 공성왕후(광해군의 생모)의 촌수에 드는 친척이므로 추대하고픈 사정이 다른 신하들의 배나 되는데, 감히 흉측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겠으며 마침내 원수진 집 사람에게 토로할 수 있겠습니까?
1611년 겨울 유배지에서 사면하는 은혜를 받았고, 11월 12일에 서울에 와서 형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24일에 다시 부안의 별장으로 향하였고, 1612년 2월 초에 바야흐로 돌아왔습니다. 그간 준격이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신의 형제는 김제남과 평소 좋지 않게 지냈으므로 한 번도 그의 집에 간 적이 없는데, 혼인을 권하기 위해서 김제남과 함께 윤수겸의 집에 갈 리가 있겠습니까? 그해 겨울 서울에 머문 것이 열흘 남짓뿐이었기 때문에 수겸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수겸이 지금 있으니 물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김제남이 신과 접촉할 길이 없다는 것은 온 나라가 다 아는 일인데, 궁중의 이러이러한 등등의 일을 신이 어떻게 제남에게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두 구의 시신은 적자가 아니다"라는 말은 모두 저가 스스로 만든 말입니다. 어떻게 차마 이에 주석을 달아 감히 성람을 더럽히는 짓을 이토록 거리낌 없이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 마음에 이런 생각을 품은 자가 아니면 어떻게 이런 문자를 베낄 수 있단 말입니까? 저가 신을 무함하기 위해 망측한 욕을 도리어 군상에게 가하였으니, 고금 천하에 임금을 무시하는 부도한 말이 이렇게 극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습니다.
저가 만약 이런 흉측한 말을 실제로 들었다면, 신하의 도리에 있어 어떻게 온 조정의 신하들이 그 집을 미워한다는 것으로 그의 의논을 정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일이 만약 정확한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미워하더라도 어떻게 겁박하여 도리어 죄를 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실제로 흉역스러운 말을 토로했다면 신하로서 하루도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책을 가지고 와서 10년이 되도록 신에게 가르침을 받았겠으며, 저의 아비의 두 차례 공의 녹권을 기필코 신에게 지어달라 해서 후세에 전하려 했겠습니까? 이는 변명하지 않아도 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1608년 공주에서 파직되고 나서 전답을 물색하기 위해 부안에 갔다가 바닷가에 있는 산속의 거처할 만한 땅을 얻어 경영하고 있었는데 오래지 않아 도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 뒤 죄를 져서 유배될 적에 기필코 함열을 요구한 것은 이곳이 부안과 가까워서 사면받으면 즉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613년 봄에 또 부안에 내려갔던 것은 노복과 전답이 모두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지, 어찌 심광세와 모의하기 위해 부안에 내려갔을 리가 있겠습니까.
1611년 신의 집이 비어 있게 되자 수겸이 몇 달 간 빌려 들었었으므로 그 아들의 현부는 집을 지키는 종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심광세가 "윤씨의 집에 혼인을 청하려 하는데 아들 둘 가운데 누가 더 훌륭한가?" 묻기에 신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사람들이 모두 대군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데 사대부가 어떻게 혼인을 맺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송구와 그 혼인의 부당함을 말하고, 수겸의 절친한 벗인 이문란을 불러서 "광세가 자기의 질녀를 수겸의 아들과 결혼시키려 하니 그대는 모름지기 이 혼인을 극력 저지시키라" 하니, 문란이 그렇다며 이 말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즉시 수겸에게 말하니 수겸이 "그가 아무리 요구해도 내가 어찌 허락하겠는가. 나는 하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다음날 준격이 송구에게 찾아가서 이 일에 대해 묻자, 송구가 "어디에서 그런 말을 들었는가?" 하니 준격이 "숙부에게 들었다" 하므로, 송구도 허균이 저지시켰다고 말하여 보냈다고 했습니다. 지금 송구를 끌어대어 증거를 삼았는데 구가 아직 서울에 있으니 물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이문란의 지난해 상소를 가져다 고증해도 알 수가 있습니다.
《대명률》에 "참서를 집에 보관해 두는 것은 사죄를 범한 데 해당된다"고 했기 때문에 신은 비록 우연히 보았다 해도 집에다 보관해 두지도 않습니다. 이를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감히 하지 않고 있는데 하물며 원수진 집의 자제에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참설은 20여 년 전 선왕 때부터 있던 것으로 전해 내려온 지가 이미 오랩니다. 그리고 천도설은 1612년에 나왔으니 그 거짓됨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이른바 심우영은 신의 죽은 아내의 외서삼촌입니다. 약간 문재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대부들도 허여하였고, 신은 가족적인 친분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매우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품이 교만하고 사납고 적자를 멸시했기 때문에 온 집안이 그르게 여겼습니다. 1607년 겨울 이원형이 와서 "부디 우영을 친절히 대하지 말라. 우영이 이야기 끝에 나를 시켜 임해군에게 가서 살펴보라기에 내가 큰 소리로 준절히 나무랐더니 그가 얼굴빛을 변하면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늙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싶다' 하였다. 그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어 나도 이로부터 절교하겠다" 하므로 매우 이상스럽게 여겼습니다. 그 뒤 유념하여 살펴보니 말하는 즈음에 국가를 원망하는 것이 특별히 심했습니다. 그리고 드러나게 대군을 애호하는 말이 있어서 더욱 괴이하게 여겼었습니다.
그 뒤에 이의숭이 우영에게 재물을 빌리려고 하므로 신이 중지시키면서 "이들의 지향이 수상하니 부디 서로 가까이 지내지 말라" 하였습니다. 이른바 박응서란 자는 그 아비가 순으로 신의 아비 엽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임백령의 시호에 대한 일 때문에 순이 사죄를 받게 되자 신의 아비가 당국자에게 해명하여 사형을 면하였으므로 순이 항상 고맙게 여겼습니다. 1583년에 순이 임금께 아뢸 적에 신의 형 봉의 잘못을 극언하였는데 이 때문에 신의 형이 멀리 귀양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의 어미가 순을 원망하게 되었고 이어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화담서원에는 신의 아비를 배향하게 되어 있는데 순도 배향하려 함으로 신이 온당치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응서가 이 말을 듣고 원망을 품었으므로 우영이 응서를 위하여 갑자기 신의 집 및 의숭의 집과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노략질하던 날 밤 응서와 김비가 분명히 도둑이었으므로 신이 의숭에게 "내가 전에 한 말이 어떠한가. 이들이 끝내 국가의 대적이 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대장 이문전을 만나서 말했는데, 체포하려 할 즈음에 문전이 파직되었기 때문에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다음해에 응서가 은을 노략질한 것 때문에 체포되었는데 즉시 결단하지 않자, 의숭이 신의 말을 깨닫고 즉시 이이첨에게 가서 "필시 역적질을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첨이 즉시 한희길을 불러 임금께 알릴 것을 극력 권했기 때문에 죄인의 괴수를 끝내 잡게 된 것이고 종묘사직이 다시 편안하게 된 것입니다.
신이 정미년(1607) 겨울 혼자서 보기 위해 본조의 시를 골라 뽑을 적에 정도전과 권근은 모두 국초 사람이므로 이들의 것을 조사하여 쓰다가 보니 자연 이 두 사람의 것을 제일 앞에 쓰게 된 것이지, 어찌 감히 그 사람들을 사모하여 뽑아서 앞에다 실었겠습니까? 지금 《동문선》과 《청구풍아》 등의 책에 실린 국초의 시문은 정도전의 저작이 반드시 제일 앞에 있습니다. 신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버리고 기필코 이 사람을 으뜸으로 삼았겠습니까. 더구나 신이 1598년에 송도에 갔다가 포은의 옛집에 들러 시편을 지을 적에 말단에 정도전을 극력 배척하는 글을 지었었습니다. 이 시를 차운로가 늘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또 「도전권근론」을 지어 배척했는데 이는 본 사람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말은 마치 아이들의 장난과 같은 것입니다.
양갑의 자가 석선인 것은 지금 비로소 들었습니다. 천얼들의 자는 지극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알 수가 없는 것인데 준격이 홀로 그의 자를 알고 있고 신에게 죄를 씌우기 위해 신이 지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준격이 은밀히 양갑과 교결하여 굳은 교분을 맺은 정상이 이에 이르러 다 드러나 버렸습니다.
경준이 지은 흉격에 대한 일은 그때의 추안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는데도 준격이 지금 이런 말을 만들어 내면서 다른 증거는 세우지 않고 단지 신이 스스로 말했다고만 합니다. 흉격을 짓는 것은 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흉역인데 그것을 자신이 지었다고 끌어대어 원수진 집에다 말한다는 것이 사리에 맞는 말이겠습니까?
그의 "법궁으로 이어하는 데 대한 천시와 인사에 관한 설"은 신으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습니다. 처음 법궁을 지었을 때 비길 데 없이 성대하고 화려하여 신민들이 주야로 이어하시기를 바라고 있었고, 인심도 모두 우리 임금을 추대하고 있는데다가 시변과 천재도 별로 걱정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준격이 사람을 무함하기 위하여 스스로 흉언을 지어내고 천시와 인사에 대한 말을 끌어대어 인심을 선동, 현혹시켰는가 하면 필설로 나타냈으니, 그가 대군에게 귀부한 마음이 있는 것이 이미 여기에서 드러났습니다.
이이첨 집의 큰 뱀에 대한 설은 역시 무엇을 인연하여 신에게 미루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1589년부터 성균관에서 이이첨과 교제를 맺었습니다. 나이가 같지 않아서 형으로 섬겼고 30년을 하루같이 지내왔으며, 무신년 이래 모든 역적 토벌에 관한 일에 함께 힘을 합하여 온 것은 사람들이 다같이 아는 일인데, 어떻게 계축년 이후에 바야흐로 투탁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의 "대군을 세우고 수렴청정한다", "화살이 떨어지는 곳에 과녁을 세우라"고 했다는 말은, 이 얼마나 엄청난 흉역입니까? 가령 신이 저에게 분명히 그런 말을 했다면 어째서 들은 즉시 고변하지 않고 전혀 마음을 움직이지 않은 채 등한한 이야기로 서로 문답하듯 할 수 있겠습니까.
이기(심이기)에 대한 말은 간담이 떨리는 말입니다. 기필코 이 역적과 상의 앞에서 같이 죽음으로써 스스로 변별하고자 합니다. 난신적자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겠습니까만 이렇게 극악한 말을 한 자는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신이 이미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저가 스스로 만들어낸 말입니다.
저 자헌이 지극히 미세한 일로 의심을 내어 실정이 없는 말로 원수를 맺고 형적이 없는 일로 살해하려 하니, 그 마음의 흉악함과 참혹스러움이 이보다 더 극심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유념하시어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여 주소서. (《광해군일기》 권128, 10년 5월 기축)
(용어) 곽영의 옥사는 곽영이 이이첨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려 일어난 옥사이다. 계축옥사에서 서양갑은 서익의 아들로, 박응서·심우영 등과 강변칠우를 자처하다 은상을 살해하고 금품을 강탈하여 체포되자 영창대군 옹립을 계획했다고 허위 진술함으로써 계축옥사를 촉발시켰다. 진회는 남송 고종 때의 재상으로, 악비를 무고하여 죽이고 금나라와 굴욕적인 화약을 맺은 대표적 간신이다. 심이기는 한 고조 때 사람으로 여후와 정을 통한 인물이다.
태각지 서 (서기 1601년 2월 17일, 양력 추정)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 강헌대왕께서 천명을 받아 개국하셨는데, 그때 문하 우시중 배극렴은 고려의 정승으로서 태조의 개국에 실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문하성의 제도는 고려의 제도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았었다.
그 후 2년 만에 한성에 도읍을 정하고서 비로소 2부를 창설, 고려 말엽의 제도를 모방하여 도평의사를 설치해서 국정을 맡게 하고 삼군부를 설치해서 군무를 다스리도록 하니, 그 조직과 진의 제도가 한결같고 직무도 예전과 똑같았다. 그리고는 배극렴을 판도평의사로, 정도전을 영삼군부로 삼았다. 그리하여 조인옥·정희계·이옥·이서·설장수·조림 등이 모두 훈척 중신으로서 서로 전후하여 동판사사가 되었는데, 군국 대사의 경우는 혹 서로 참여하여 결정하곤 하였다.
2년 후에 배극렴이 해면되자 조준·김사형이 그 직임을 대신하였고, 또 삼군부의 직무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하여 정도전에게 도평의사의 직무를 겸관하도록 하였다. 조준·정도전이 그 자리를 떠나고 나서는 심덕부·이서가 서로 이어 그 일을 관장하였다. 안종원·이이·이승원·장사정·박위·이거이도 차례로 동판사사가 되었고 이지란·이온·조박·남은·전백영·이지·조온·황거정이 상의평리가 되었는데, 모두가 다른 관직에 있으면서 그 직무를 겸하였었다. 그러나 모든 군국 기무에 관계된 일은 두 재상이 주장하며 결단하였고 동판사사 이하는 감히 가부를 말하지 못한 채 자리만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공정대왕(정종) 때에 도평의사를 고쳐서 의정부로 만들었다. 그런데 태종이 즉위하여서는 의정부와 삼군부를 혁파하고 좌정승·우정승을 모두 정1품으로, 시랑찬성사를 종1품으로, 참찬을 정2품으로 하여 하륜·성석린을 좌정승·우정승에, 이첨·정탁을 찬성에, 이내·권근을 참찬에 임명하였다.
그 14년 후에는 영부사 1인·판부사 2인을 모두 정1품으로, 동판부사 2인을 종1품으로 설치하고 참찬지부사를 혁파하였다. 얼마 후에 제도를 다시 개정, 영의정·좌의정·우의정 각 1원을 모두 정1품으로 하여 이서·이직·조영무에게 그 직을 임명하였고, 좌찬성·우찬성 각 1원을 모두 종1품으로 하여 박은·한상경에게 그 직을 임명하였고, 좌참찬·우참찬 각 1원을 모두 정2품으로 하여 박석명·유관에게 그 직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의정부의 소속으로 사인·검상·사록 등의 관직은 모두 한때의 대단한 청선이었고, 녹사·도리는 모두 처음 벼슬한 문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렇게 하자 군국의 대정과 육조의 서무가 모두 의정부에 귀속되고 전장과 제도가 비로소 정해져서 그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삼공이 묘당에 앉아 있으면 육조의 관속들이 각기 소임을 가지고 조방에 모여서 처리하였고, 무릇 임금의 재가를 받은 공문서를 만나면 사인 이하의 관원들이 각기 소임을 분담, 평리하여 재상의 결재를 받은 다음에야 해당관이 그 일을 과감하게 시행하였으니, 그 직무를 맡겨서 완수하기를 책임 지우는 일의 중대함을 대강 상상할 수 있겠다.
세조가 즉위하여서는, 육조가 의정부에 가서 사건 결정하는 일을 혁파하고 대정만 의정부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사록을 사관의 겸관으로 삼고 녹사 이하는 옛 사례에 비추어 제수하니, 정부의 권한이 이로부터 약간 가벼워졌다.
나는 오랫동안 계속된 태평성대의 말엽에 태어나, 젊었을 적에 그윽이 조종조 때 어진 사대부들의 행적을 사모하고 좋아한 나머지 동부(상서성)의 서고에서 삼공의 전임안을 가져다가 한번 눈여겨 보았다. 그러나 당시에 내가 방종하여 그것을 초록해 두지 못하고 다만 마음 속에 기억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난리를 겪은 이후로 전적이 모두 없어져서 이에 관한 것을 찬술하려 해도 참고할 만한 것이 없었다.
지난번 오성 이항복 정승을 모시고 있을 때에 이 일에 언급되었으므로, 지금 기억하고 있는 대신의 성씨를 기록하여 바치고 즉시 각년의 등과기를 가져다가 그 집정자를 초록하되, 무관이나 음관으로 시작하여 대신이 된 사람들로서 가끔 기억할 만한 사람 또한 차례에 따라 적어 넣었다. 또 구상 윤해원(해원부원군 윤두수)에게서 이른바 '국조대신고'라는 것을 얻어 고사를 널리 상고하고 거기에 나의 듣고 본 바를 가지고 정정한 다음 연차를 편성하여 옛 문서의 잘못된 점을 보완하였다.
국초에는 판평의가 국정을 도맡았고 동판 이하는 정사의 권한을 행사하는 데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므로 판사만을 기록하였고, 또 문하성과 의정부에도 역시 정승과 영사만을 기록하였으며, 그 좌이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종실 가운데 재상이 된 사람은 이준 한 사람뿐이고, 음관으로 재상이 된 사람은 신수근 한 사람뿐이며, 무신으로 재상이 된 사람은 박원종 한 사람뿐이다. 그 후로는 모두 문관으로 재상을 삼았는 바, 통틀어 재상 156인을 가지고 국초 이후 대신 연표를 만들었다.
1601년 1월 일에 예조 정랑 허균은 서한다.
청허당집 서 (서기 1612년 2월 16일, 양력 추정)
불법이 동쪽으로 삼한에 들어오기는 신라 중엽부터였다고 한다. 그사이 불문에서 일컬어진 이가 수없이 많았으나, 거의가 교장이나 율장 두 가지에 벗어나지 못하여, 탑묘를 존숭하고 과보를 내세워 한 세대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을 뿐이었다.
그 염화의 밀지와 면벽의 은미한 뜻은 조금도 간파하지 못한 채, 아무 스승은 아무 전을 받고 아무 조사는 아무 법을 전했다고 하는데, 그 문도가 또 덩달아 이를 기념하는 데 끊임이 없어, 높다란 비를 세우고 커다란 종을 만들어 공적을 과시하는가 하면, 훌륭한 전당과 절이 총림을 빛나게 장식하되 수천 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으니, 어찌 너무 지나친 관습이 아니겠는가.
오직 도봉 영소국사가 중국에 들어가 법안 영명(오대·송의 승려 영명 연수)의 전수를 받고, 송나라 건륭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와 불교의 기풍을 크게 떨쳐 말법을 구제함으로써, 조사(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비로소 선양되고, 동토에 가사를 두른 이가 드디어 임제·조동의 종풍을 계승하게 되었으니, 선종에 끼친 공로가 어찌 적다 하겠는가.
이 스승의 정법안장은 도장 신범에게 전수되어 청량의 도국, 용문의 천은, 평산의 회해·현감·각조, 두류의 신수 등 6세를 거쳐 보제 나옹을 얻었고, 나옹은 오랫동안 중국에 있으면서 모든 선지식을 널리 찾아 두루 통하고 즉시 체득하여 울연히 선림의 사표가 되었다. 또 그의 법을 전수받은 이는 남봉 수능이 적사가 되었고, 정심 등계가 이를 바로 계승하였는데, 정심은 벽송 지엄의 스승이다. 벽송은 다시 부용 영관에게 전수하였는데, 그 도를 체득한 이는 오직 청허 노사를 수위로 일컫고 있다.
노사의 휘는 휴정, 고향은 안서(해주의 옛 이름)로 소시에 유가의 글을 익혀 이미 큰 뜻을 통하였고 문장에도 능하여 과거 볼 만한 정도의 공부는 매우 하찮게 여겼다. 뒤에 지리산에 노닐다가 갑자기 큰 서원을 발하여 부용의 문하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법을 받아 팔교를 통하고 삼관을 통하였으며, 도는 기미 이전에 비추고 생각은 번뇌 밖으로 벗어났다.
그 영원한 밝음과 간결한 조예는 곧장 달마·노능(혜능)의 맥락을 접하고, 심·성을 설하는 묘는 남양·영가·백장·남천과 어깨를 나란히 함으로써, 지혜의 빛이 거듭 밝고 지혜의 등이 더욱 빛났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그림자를 보거나 말을 듣고 그대로 집착하거나 믿는 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삼사(1사는 30리)나 물러설 것이며, 참되고 바른 것을 훼방하고 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려다가는 스스로 나쁜 업보를 지을 것이니, 소위 하등 사람은 도를 듣고 도리어 크게 웃는다는 말이 어찌 허위이겠는가.
이 스승은 큰 법을 간직하고 명산에 두루 머무른 법랍이 이미 70년이나 된다. 은고를 보방에서 울리고 금륜을 향지에서 굴려 뭇 미혹을 다 깨뜨리고 위엄스러운 지팡이를 혼자 세워, 도봉·보제의 가르침이 이에 이르러 더욱 크게 밝아졌다. 저 교·율에 구구하여 과·보나 믿는 이와 비교하면 그 거리가 어찌 백만 유순뿐이겠는가.
아, 그런데 부처의 말씀이 장차 갈라져 밝혀지려 하는데 옥첩(청허의 죽음을 뜻함)이 갑자기 재로 화하여, 기수(부처가 설법한 기원정사)에 그늘이 없어지고 자비의 배에 노를 잃었으니, 사람과 하늘의 비통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종봉 정공(유정을 높인 말)은 이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흥기한 이이다. 지혜의 깃발이 이미 꺾이고 계율의 보배가 오랫동안 사장된 것을 염려하여, 그 남긴 글을 주워 모아 영원히 사모하는 뜻을 붙이려 하였으나, 그 글을 간행하기도 전에 정공 또한 가고 말았다. 열반에 들던 날 저녁에 문인들을 불러 부탁하기를 "나의 스승의 남긴 글을 내가 간행하지 못하고 갑자기 감으로써 처음의 마음을 저버리게 되었으니, 너희가 나의 정성을 잊지 않고 그 일을 마쳐 준다면, 내가 지하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겠다" 하고 이어 "거사(허균을 이름)는 우리 불법과 은미한 인연이 있다" 하고는, 이 서문을 부탁하였다.
그의 문인 혜구가 나를 찾아와서 그 죽은 스승의 말을 전하고 서를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 그런 연유가 있었다. 청허는 나의 선친께서 뜻을 같이한 벗과 같이 보았고, 나도 젊었을 때 서찰 사이에서 보아 왔다. 지난해 서쪽 지방에 나가 노닐 때, 객사에서 노사를 만나 직접 오묘한 진리를 듣고 흐트러진 마음이 금세 없어졌으며, 노사 또한 사후의 비문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나는 유가의 선비이다. 불교와는 전혀 서로 맞지 않는데, 어찌 그 행적을 모사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스승이 이를 알고 부탁하였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에 선대의 우의를 감념하여 감히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그 법을 전수한 자취를 서술하고, 노사에 관한 줄거리를 대충 기록해 보낸다. 그러나 석가의 머리 위에 똥을 바를 수 없는 일인데, 혹 나의 혀를 뽑는 업보가 돌아올까 염려된다. 그 남긴 글의 현묘하고 탈쇄함은, 보는 이가 스스로 짐작할 것이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명나라 만력 40년(1612년, 광해군4) 정월에 양천 비야거사 허단보는 쓴다.
사명집 서 (서기 1612년 2월 16일, 양력 추정)
지난 병술년(1586) 여름에 내가 둘째 형을 모시고, 봉은사 아래 배를 댄 적이 있었다. 마침 한 승려가 갑자기 나타나 뱃머리에 서서 읍을 하는데, 헌걸찬 체구에 용모가 단정하였고, 함께 앉아 담화를 나누는데 말이 간단하였으나 그 뜻이 깊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물어 보았더니, 바로 종봉 유정 스님이었다. 나는 그만 진심으로 흠모하고 말았다.
밤이 되어 매당에 들어 유숙하다가, 그 시를 내어 보이는데 그 격조가 마치 거문고 소리와 같이 청고하였다. 둘째 형이 절찬을 되풀이하면서, 당나라 아홉 고승의 것과 동렬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때 나는 아직 연소하여 그 묘처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를 내심 간직하여 쉬 잊지 못하였다.
3년을 지나 둘째 형이 별세하자, 스님이 오대산에서 내조하여 슬피 곡하고 또 만시를 지었는데, 그 사구가 너무 처절하여 아직도 생사의 즈음에서 해탈하지 못한 듯하기에 내심 의아해하기를 '스님의 수도가 아직 상승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일까. 어찌 구구히 속인들의 슬픔과 기쁨을 본받는단 말인가' 하였다.
1592년 겨울에 병란을 피하여 명주(강릉)에 있다가, 스님이 의병을 규합하여 국난을 막을 때, 그 스승을 대신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여러 차례 왜적을 꺾었단 말을 듣고, 뛸듯이 기뻐하였다.
그 후에 스님이 왕명을 받들고 적의 진영을 찾아가 왜인을 효유하여 큰 공적을 세웠는데, 지금 생각하나 다시 만날 수 없으니 스스로 마음만 피로하다.
1596년 겨울에 내가 승문원에 있을 때, 공사로 인하여 영상 서애(유성룡)를 찾아 뵈었는데, 스님이 높은 고깔에 긴 수염으로 함께 앉아 있다가 반가이 손목을 잡고 옛날을 이야기하였다. 이에 함께 객사로 돌아와 당시의 시무를 담론하였는데, 강개한 기개로 손뼉을 치면서 이해를 타진하는 것은 옛날 의협의 풍도가 있고, 안장에 기대어 좌우를 돌아보면서 요사스러운 기운을 쓸어 버리려는 의지는 또 늙어서도 장건한 노장과도 같기에 내가 더욱 존경하며 '그의 시문은 부차적인 일에 불과하다. 그의 재주가 국난을 구제할 만한데, 아깝게도 잘못 불문에 투신했다'고 여기었다.
1603년 가을에 스님이 조정에 사퇴를 빌고 상원사 옛 처소로 돌아와 있다가, 감호(강릉)의 별장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 무렵 내가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잠시 불교 경전을 가져 장한 뜻을 달래던 터라 불가의 명심견성설에 약간의 소견을 가지고, 한두 가지를 시험삼아 논난해 보았더니, 스님이 모두 회통하고 환히 깨달아, 진정 조계(혜능)·황매(홍인)의 가법을 체득하였다. 진종의 적사와 염화의 밀전을 통투한 때문에, 세상을 제도하고 어려움을 구제한 것도 그 일단에서 나왔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며칠 오묘한 진리를 담론하는 사이에 일찍이 듣지 못했던 것을 많이 들었다. 이후부터는 스님이 도성에 오면 문득 서로 오가면서, 서로 늦게 알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었다.
1610년 9월에 스님이 입적하였단 말을 듣고, 글을 지어 조상하고 또 시로써 영결하였다. 나는 그의 풍모가 영영 멀어졌음을 섭섭해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스님이 둘째 형을 애도하던 마음이 오늘날 내가 스님을 애도하는 생각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정이 대체 무엇이기에 사람을 그처럼 속박시켰단 말인가.
이번에 그 문도 혜구가 스님의 문집을 가지고 와서 청하기를 "우리 스승이 지은 수천 수의 시는 일찍이 공의 둘째 형에게 보관되어 있다가 병화에 유실되었고, 이는 근자에 와서 주워 모은 것으로, 태산에 비해 털끝만한 격차입니다. 우리가 스승의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기에 이 시 몇 권을 편성, 간행에 붙여 우리 스승의 문의 고하와 도의 깊이를 알리려 하는데,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 하여 헛추앙을 하지 않을 이는 공밖에 없으니, 부디 한 말씀을 주어 영원히 전하도록 한다면, 이는 공의 은혜입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아, 내가 어찌 차마 스님의 글에 서를 쓰겠는가. 스님의 시가 이미 문단에 널리 추앙되었고, 스님의 공적이 이미 국토 수복에 있었으며, 스님의 도가 이미 여래의 경지에 들었으니, 어찌 나의 모사가 있어야만 그 추중이 더 증가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의 형제는 진정 스님과 인연이 있었던 터라 어찌 글재주가 없다 하여 사양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그 시종을 서술하여 그의 청에 응하는 한편, 감념하는 회포를 붙인다.
만력 임자년(1612년, 광해군4) 정월에 교산 허단보는 서한다.
성소부부고 제20권
10. 14:38
성소부부고 제20권 · 문부 17 · 척독 상(尺牘上)
출처: 성소부부고 제20권, 문부 17, 척독 상
배경: 제20권은 문부 열일곱 번째 갈래인 "척독(尺牘)" 가운데 첫 부분(상)이다. 척독은 짧은 편지, 곧 사사로운 안부와 부탁을 담은 개인적인 서신이다. 이 권에는 정승과 판서 등 당대 고관들, 그리고 벗과 문우들에게 보낸 여든두 통의 짧은 편지가 실려 있다. 벼슬을 청탁하거나 인사를 부탁하는 사연, 죽은 누님(허난설헌)과 둘째 형(허봉)의 문집 간행을 부탁하는 사연, 서적과 골동품을 주고받는 이야기, 벗과 나눈 문학 비평과 농담 섞인 안부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앞선 산문들보다 훨씬 짧고 격의 없어, 허균의 인간적인 면모와 당대 관료 사회의 풍경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서애 유성룡 정승께 올린 편지
1604년 8월 (서기 1604년 9월 8일, 양력 추정)
1591년에 세상을 떠난 누님의 시집에 서문을 지어 주셨는데, 제가 그것을 외워 두지 못한 채 전란을 만나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이 불민한 죄를 어찌 면하겠습니까.
요즘 어떤 사람이 그 서문이라며 보여 주기에 읽어 보니 마치 다른 시대의 일처럼 낯설어 진본인지 가려낼 수가 없었습니다. 삼가 이를 기록하여 집사께 바치오니, 노사께서 잘못된 곳을 바로잡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이는 문집 첫머리에 실어 간행하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남쪽을 바라보니 아득히 멀어 마음속 말을 다 하지 못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도를 위해 몸을 잘 보중하소서.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1605년 2월 (서기 1605년 4월 2일, 양력 추정)
형님의 시문은 대부분 흩어져 없어졌습니다. 겨우 몇 편을 모아 간행하고자 이제 깨끗이 베낀 책을 바치오니, 한번 읽어 보시고 서문을 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형님을 가장 깊이 아시는 분으로는 노사만 한 분이 없습니다. 세상에 그분의 글에 서문을 지을 사람으로 노사가 아니고서야 누가 있겠습니까. 천 리 먼 곳에서 간절히 부탁드리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서문을 지어 영광되게 해 주시면 어떨는지요. 돌아가신 형님이 이를 아신다면 마땅히 지하에서 감격하여 우실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헤아려 주소서.
1606년 1월 (서기 1606년 2월 21일, 양력 추정)
삼가 손수 써 주신 편지를 받으니 황홀하기가 마치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는 것과 같아 무척 기쁘고 위로가 됩니다. 돌아가신 형님의 시집 서문을 지어 주시겠다고 승낙하신 지 벌써 해가 넘었는데도 아직 지어 주지 않으시니, 바라는 마음이 갑절로 간절합니다.
김흥세(자 근언)의 맏형은 완력과 용기가 있고 지략까지 갖추어 임용할 만한 인재인데, 더구나 노사께서 이미 추천하셨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가 지금 청송 고을살이를 얻으려는 것은 대감을 뵙기 위해서입니다만, 하늘이 사람의 바람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습니다.
심부름꾼이 급히 돌아가는 바람에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살펴 주소서.
(용어) 유성룡(호 서애)은 선조 때의 정승이다. 작고한 누님은 허균의 누이인 여류 시인 허난설헌으로, 본명은 초희다.
한음 이덕형 정승께 올린 편지
1605년 3월 (서기 1605년 5월 2일, 양력 추정)
형님께서는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형님의 시문 또한 전란 통에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그 시문 몇 수를 겨우 모아 두 권으로 엮었습니다. 이제 제가 맡은 고을에 가서 봉급의 절반을 떼어 이를 간행하려 하는데, 이는 형님이 남긴 시문 전체에 비하면 정말 태산의 터럭 한 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한 부를 바치오니, 귀찮으시더라도 읽어 보시고 몇 마디 말씀으로 그 끝에 발문을 달아 주신다면, 돌아가신 형님도 큰 은혜를 입는 셈이 될 것입니다. 절하고 삼가 아룁니다.
1608년 3월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대감 곁을 떠나온 지 몇 달 사이에 나라에 여러 일이 많았습니다. 승하하신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이 소신도 이렇게 간절한데, 하물며 합하께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암자의 승려가 대감의 뜻을 전해 오기에, 종이에 인쇄한 《소학》 같은 책들을 주어 대감께 보내 드렸습니다.
작별하던 날 나중에 전별시를 지어 주시기로 약속하셨기에 훌륭한 시를 지어 주시기를 날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국상 중이라 감히 거듭 부탁드리지 못합니다. 황공하여 다 쓰지 못합니다.
(용어) 이덕형(호 한음)은 선조 때의 정승이다.
오성 이항복 정승께 올린 편지
1605년 3월 (서기 1605년 5월 2일, 양력 추정)
전에 《원각경》 토를 단 책을 대감께 올려 읽어 보시도록 했었는데, 제가 잘못 해석한 곳을 대감께서 이미 모두 지적하셨다고 하니, 저에게도 가르쳐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완위편》은 필사하는 사람을 시켜 베낀 뒤 곧 김충신 편에 부쳐 대감께 돌려보냈습니다.
돌아가신 형님의 시집은 이제야 간행하였습니다. 삼가 한 부를 대감께 바치오니 열람하시기 바랍니다.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1610년 5월 (서기 1610년 7월 5일, 양력 추정)
성우길은 저의 집안 조카입니다. 완력과 용기가 있고 지략까지 갖추어 이미 북방을 지키며 공을 세운 바 있습니다. 호남의 우수사 자리가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다니, 바라건대 합하께서 그를 그 자리에 추천해 주셨으면 합니다. 세상에서는 북방의 장수는 남쪽 변경을 지키는 데 맞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리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옛날 양복은 북쪽 사막 지역에서도 여러 차례 공을 세웠고, 바다에서 싸우는 누선 장군이 되어서도 그 정예 병력이 꺾인 적이 없었습니다. 마원(신식후)은 농서와 촉 지방을 평정하는 데도 좋은 계책을 다 썼고, 남쪽 오령 밖에 구리 기둥을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어디에서나 통하는 재주라면 어느 자리를 맡아도 뜻대로 해낼 수 있는 법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오늘날의 누선 장군이요 복파 장군이니, 합하께서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몸이 아파 직접 찾아뵙고 아뢰지 못해 죄송합니다.
(용어) 이항복(호 오성, 오성부원군)은 선조 때의 정승이다. 양복은 한 무제 때의 장수로 외적과 싸워 전공이 많았다. 마원(신식후)은 후한의 명장 복파장군으로, 교지 지방을 정벌하여 평정하고 그 경계에 구리 기둥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일송 심희수 정승께 올린 편지
1605년 2월 (서기 1605년 4월 2일, 양력 추정)
합하께서 정승이 되셨으니 어진 인재들이 뜻을 펼 수 있게 되어 태평한 세상을 기대할 만합니다. 저로서는 개인적으로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경사스럽습니다.
돌아가신 형님의 시문은 흩어져 거의 남지 않은 지경인데, 겨우 제 기억에 남은 몇 편과 남들 사이에 전해 오던 것들을 보태어 두 편으로 엮어 이미 간행하였습니다. 삼가 한 부를 대감께 올리려 합니다. 대감께서도 옛 벗을 그리워하는 감회가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대감께서 헤아려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용어) 심희수(호 일송)는 선조 중기의 정승이다. "산양의 감회"는 진나라 상수가 옛 벗의 고향인 산양을 지나다 피리 소리를 듣고 옛 생각에 잠겼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옛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황지천 황정욱에게 올린 편지
1604년 9월 (서기 1604년 9월 29일, 양력 추정)
요즘 세상에 깃발을 세우고 문단에 우뚝 설 사람이 합하가 아니고서야 누구이겠습니까. 어찌하여 이조의 논의가 공정하지 못하여 학덕 높으신 어른의 벼슬길을 오랫동안 막아 두고, 마땅히 그 아래에 있어야 할 사람이 도리어 높은 자리에 올라 있게 하는지요. 아, 이 또한 운명인가 봅니다.
저에게 보내 주신 훌륭한 편지에서는 칭찬이 너무 지나치고, 인재를 아끼시며 뜻을 펴지 못함을 애석해하시는 마음이 말씀 밖으로까지 간절하여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고을살이 나가는 일이 무척 급박하여 미처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봄에 성묘하러 서울에 가게 되면 마땅히 문하를 찾아뵙고 사례하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1606년 8월 (서기 1606년 9월 16일, 양력 추정)
주지번 태사의 그림에 합하의 시까지 곁들여 얻었으니 더욱 귀중합니다. 저는 갑작스레 두 가지 보물을 얻고 보니 이번 행차가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어찌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지 않겠습니까.
가을이 서늘해지는데 잘 보중하시기를 우러러 빕니다.
1607년 3월 (서기 1607년 4월 20일, 양력 추정)
멀리 영남 밖으로 고을살이를 나가게 되어 찾아뵙고 떠나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심생이 전별시를 가지고 왔더군요. 수십 번을 읽어 보니 막힘없고 호탕하여 차마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성품이 졸렬하고 게을러서 외지로 벼슬살이 나가면서도 여러 어르신들께 시를 지어 달라 청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귀한 시를 얻고 나서는 곧바로 이 시의 운을 따라 문장으로 자부하는 여러분에게 두루 시를 지어 달라 청했더니, 다들 과연 화답해 주시어 곧 커다란 시집이 되었습니다. 이는 군자의 말씀을 귀히 여긴 것이요, 저를 훌륭하게 꾸며 준 일이니, 감격스러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용어) 황정욱(호 지천)은 선조 때 예조 판서를 지내고 장계부원군에 봉해졌다. 주지번(주 태사)은 명나라 사람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인물이다.
윤월정 윤근수에게 올린 편지
1606년 8월 (서기 1606년 9월 16일, 양력 추정)
합하께서는 중국의 옛일에 무척 밝으시어 중국 사람 중에서도 어깨를 겨룰 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것을 저 같은 사람에게 물으시니, 이는 귀머거리에게 소리를 들어 달라 부탁하는 격입니다.
김주의 일은 전에 낭중 가유약에게서 《이문광독》이라는 책 속에 실린 고중현이 쓴 《병탑유언》 한 권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나라와 관련된 일이 세 조항 실려 있었는데, 하나는 종계에 관한 일이었고, 하나는 기순(기 천사)과 서거정이 주고받은 시에 얽힌 이야기였으며, 또 하나가 바로 김주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오래된 일이라 정확한 문구는 잊었지만, 삼가 그 대략을 기억하여 별지에 적어 올리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1607년 8월 (서기 1607년 10월 5일, 양력 추정)
왕경 상서의 일화 네 조목은 바로 하양준이 지은 《사우총설》에 실려 있습니다. 지금 이를 기록하여 바치니 읽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유청일찰》이라는 책은 전예형이 지은 것인데, 저는 전에 가 낭중에게서 빌려 한 번 읽고 돌려주었으니 지금은 가진 것이 없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장씨와 육씨는 장주와 육온을 가리키는 것이지, 강릉 장거정과 오대 육광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608년 5월 (서기 1608년 6월 26일, 양력 추정)
서울에 갔다가 장모상을 당하여 허둥지둥하느라 겨를이 없어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합하께서 먼저 저희 형님들의 집까지 찾아 주셨다는데, 저는 향을 올리러 가느라 미처 돌아오지 못해 맞이하지도 못했으니, 게으른 죄를 면하기 어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누님의 시집 한 질을 바치오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지번과 양유년, 두 분의 서문 중에 어느 쪽이 더 낫습니까? 양유년이 직금시를 인용한 것이 이치에 딱 맞아떨어지는 듯한데, 대감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용어) 윤근수(호 월정)는 선조 때 양관 대제학과 우찬성 등을 지냈다. 김주는 조선 문신으로 1563년 종계변무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그곳 객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오봉 이호민에게 올린 편지
1604년 9월 (서기 1604년 9월 29일, 양력 추정)
훌륭한 시를 받고 보니 마치 좋은 보옥을 얻은 것만 같습니다. 이번 행차는 정말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마땅히 아름다운 옥에 새겨 길이 전하겠습니다.
1606년 3월 (서기 1606년 4월 21일, 양력 추정)
윤청의 시권은 전부터 갖고 있었는데, 펴 보니 마치 벗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이것을 슬쩍 빼내어 어르신께 보내 드리고 싶었으나, 주인이 이를 지키는 태도가 마치 옛날 인상여가 구슬을 품에 안고 머리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내주지 않으려 기둥을 노려보고 서 있던 것과 같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용어) 이호민(호 오봉)은 선조 때 문신으로 좌찬성 등을 지냈다. 인상여는 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신으로, 진나라 소왕이 화씨벽 구슬을 속임수로 빼앗으려 하자 구슬을 품고 기둥에 기대어 목숨을 걸고 지켜 낸 고사로 유명하다.
유서경 유근에게 올린 편지
1605년 3월 (서기 1605년 5월 2일, 양력 추정)
공께서는 저희 형님 미숙(허봉)과 홍태고(홍적)와 더불어 문단의 중심 역할을 하셨는데, 저희 형님과 홍태고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공만이 남아 문형을 쥐고 예원의 우두머리로 군림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누구도 감히 그 글솜씨를 대적할 자가 없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듣자니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를 가려 뽑고 계신다 하기에, 돌아가신 저희 형님의 시도 그 안에 많이 실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감히 간행본 한 질을 올리오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1605년 9월 (서기 1605년 10월 26일, 양력 추정)
남창 김현성을 만났더니, 돌아가신 형님의 시는 시선에 들어간 것이 매우 적고 누님의 것은 다소 많더라고 하더군요. 옛날 용재 이행이 우리나라 글을 가려 뽑을 때 탁영 김일손의 문장과 읍취 박은의 시를 매우 많이 넣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문단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니, 혹 다른 사람들의 이견에 밀려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까? 돌아가신 형님의 칠언 가행은 가장 절묘한데 단 한 편도 들어가지 않았다니, 이 점이 더욱 이해되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다시 잘 헤아려 가려 뽑으시어, 넓은 바다에 빠뜨린 구슬처럼 묻히는 일이 없게 해 주십시오.
(용어) 유근(호 서경)은 선조 때 대제학과 좌찬성 등을 지냈다.
이월사 이정귀에게 보낸 편지
1610년 9월 (서기 1610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듣자니 공조에 자리가 하나 비었다는데, 그곳은 본디 한가하여 여유롭게 지낼 만한 자리입니다. 옛 시인 중에 공조 벼슬을 지낸 이로는 하손, 두보, 장적, 소식 등이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야 이 네 분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한 시대에 요행히 시로 이름을 얻어 공께서도 일찍이 칭찬하고 격려해 주신 바 있습니다. 지금 마침 공께서 인사를 맡고 계시니 이 일을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에게 이 자리를 맡겨 주셔서, 저 네 분이 저승에서나마 손뼉을 치도록 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19일, 양력 추정)
감옥에서 살아 나오자마자 유배 명령이 촉박하여 미처 찾아뵙고 인사드릴 겨를도 없었습니다. 어느 한이 이만하겠습니까. 편지와 귀한 약제까지 길 떠나는 사람을 위해 보내 주시니, 그 두터운 정을 이루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신문을 받던 날 진술 중에 여러 차례 공의 이름을 끌어들였는데, 그것은 상황이 몹시 위태롭고 급박한 나머지 그리된 것이지 감히 공을 모함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말썽이 적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제가 어찌 남을 모함하는 사람이겠으며, 또 어찌 남의 사주를 받는 사람이겠습니까. 이는 온 세상이 저를 너무 하찮게 여긴 탓이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공께서는 같은 죄를 지은 사람이 아직도 높은 벼슬을 그대로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는데, 그 말씀은 너무 지나칩니다. 제 조카는 시험에 합격했고 공의 장인은 합격하지 못했으니, 그 죄가 서로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밝혀질 일이니 감히 여러 말 하지 않겠습니다.
(용어) 이정귀(호 월사)는 선조 때 대제학을 지내고 인조 때 좌의정에 이른 문장가다.
신현옹 신흠에게 보낸 편지
1608년 3월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춘영」 백 편은 정직한 선비들이라면 입에 올리지 않을 내용이라 남에게 보여 드리기에 적합하지 않은데, 감히 보여 드리겠습니까. 이 졸렬한 사람이 입을 함부로 놀렸으니, 곧장 혓바닥을 뽑히는 지옥에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어 감히 보시라고 바치니, 보시면 반드시 더럽게 여기시며 상서롭지 못하다 하실 것입니다.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1608년 3월 (다른 편지)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훌륭한 서문을 지어 주셨는데, 칭찬이 너무 지나쳐서 제가 감당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 일이라 하여 감히 합하의 밝은 감식안을 가릴 수 없기에 그대로 서문으로 실었더니 명성이 훨씬 높아졌습니다. 저를 알아주신 은혜는 저를 낳아 주신 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죽어서도 그 은혜를 갚기로 기약하겠습니다.
1610년 10월 (서기 1610년 12월 4일, 양력 추정)
나주는 서남쪽 지역의 큰 고을입니다. 제가 전에 직접 그곳을 가 보고서, 벼슬이 이 고을 목사에 이르면 그것으로 그만두어도 좋겠다고 여겼습니다. 지금 마침 그 자리가 비었고 월사께서 이조를 맡고 계시니, 이는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합하께서 저를 그곳에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기회에 남쪽으로 아예 돌아가 버릴 계획입니다. 감히 진심을 말씀드립니다.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19일, 양력 추정)
감옥에서 여러 차례 보내 주신 소식을 받았습니다. 옛날 사마천이 궁형을 받던 날, 강도상을 지낸 동중서나 예 대부 같은 이들도 찾아와 안부를 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대야 천 년의 차이가 있지만, 옥에 갇힌 처지에서 이런 벗이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게다가 도교의 책까지 보내 주셔서 제가 그것을 읽으며 하늘로 오르는 상상이라도 하게 해 주셨으니, 지극한 정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리하셨겠습니까.
옛날 영웅들은 장수나 정승이 되지 못하면 신선이라도 되었는데, 저야 장수나 정승이 되기는 이미 틀렸으니, 마땅히 연문자·안기생 같은 옛 신선들과 더불어 노니는 것도 충분히 즐길 만한 일일 것입니다.
강남 천 리 길을 미처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떠나왔기에, 종이를 대하니 목이 메어 다 쓰지 못합니다.
(용어) 신흠(호 현옹)은 인조 때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이른 문장가다. "혓바닥을 뽑히는 지옥"은 불교에서 함부로 말을 지껄인 사람이 가게 된다는 지옥의 이름이다. 연문자와 안기생은 옛 전설 속의 신선들이다.
한유천 한준겸에게 보낸 편지
1601년 8월 (서기 1601년 9월 11일, 양력 추정)
해양의 모임에 어찌 감히 즐거이 달려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다만 부사가 계셔서 제가 함부로 참견할 처지가 아니니, 공께서 알아서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이번 제 행차를 두고 기이한 만남이라며 비웃는데, 이는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굳이 피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장부로 태어나 젊은 시절은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가는데, 한 차례의 즐거움이 충분히 만종의 녹봉만 한 가치가 있습니다. 참으로 그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면 욕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들 어찌 제 털구멍 하나라도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의리에 크게 해로운 일도 아닌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공께서 식사하시다가 이 편지를 보신다면 틀림없이 웃음이 터져 밥상 가득 입 속의 밥을 뿜고 마실 것입니다.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1601년 8월 (다른 편지) (서기 1601년 9월 11일, 양력 추정)
공께서는 용성으로 가시어 큰 고을의 음식을 드신다는데, 그 맛이 해양의 작은 고을 음식에 견주어 어떻습니까?
저는 공을 배웅하고 성을 나와 봉생정 위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한 줄기 연기가 대숲을 덮고 차가운 바람이 휘장에 불어왔습니다. 고개를 들어 동쪽을 바라보니 푸른 큰 들판 저 멀리 공의 깃발과 수레 일산이 이미 보이지 않았습니다.
타향에서 벗을 이별하는 것은 옛사람들도 모두 탄식했던 일인데, 뜻밖에 오늘 그 일을 직접 겪었습니다. 생각건대 아마 공께서도 저와 같은 심정이실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식사를 많이 하셔서 몸을 잘 보중하소서. 이만 갖추지 않습니다.
1601년 9월 (서기 1601년 10월 10일, 양력 추정)
조운을 맡은 병졸과 일반 군졸 문제는 형님께서 이미 저와 함께 타당하게 조정하여 공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나랏일인데 어찌 감히 고집을 부리겠습니까. 외적이 오지 않는다면 편안히 밥을 먹겠지만, 만약 급박한 일이 생긴다면 그 많은 곡식을 어떻게 바닷길로 운반하여 서울을 구제하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공께 다시 여쭐 필요는 없겠습니다. 다만 수군을 통솔하는 사람이 일을 제대로 모를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곁에서 어떤 사람이 공께서 식사를 잘 하시는지 묻고 있으니, 이 정성을 알아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용어) 한준겸(호 유천)은 선조·광해군 때 호조 판서와 영돈령부사 등을 지냈다.
이창해 이사홍에게 올린 편지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간이 최립의 아들은 바로 공께서 잘 아시는 사람입니다. 서경에서 숙천 고을 자리를 약속하신 적이 있으셨지요. 합하를 괴롭히기만 하는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일을 간청드려 왔습니다. 방금 조보를 보고서 감히 연락을 드립니다. 합하께서 어찌 남의 마음을 저버리실 분이겠습니까. 감히 대략 말씀드립니다.
1609년 9월 (다른 편지)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저의 육촌형 되는 체씨는 그 굳센 절개가 관리들에게 알려져 있고 학문과 행실이 선비들에게 존경받고 있는데도, 아직까지 벼슬에 오르지 못한 채 서울에서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어진 사람이나 군자들이 마음을 써야 할 곳입니다. 합하께서 그에게 한 말의 물이라도 부어 주시어, 수레바퀴 자국의 마른 물웅덩이에서 죽어 가는 붕어를 살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609년 10월 (서기 1609년 11월 11일, 양력 추정)
여러 저잣거리의 물가가 치솟는 데 대한 대책은 법령의 첫째 조항에 실려 있습니다. 만약 법령대로 시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횡포를 어떻게 징계하겠습니까. 애초에 이 일은 본조가 책임질 일입니다.
이번 초하루에는 공을 위해서 아전들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몹시 질 나쁜 물건을 가지고 높은 값을 받는 자들은 합하께서 다스리셔도 무방하겠습니다.
(용어) 이사홍(호 창해)은 선조 때의 유생이다.
황사숙 황신에게 보낸 편지
1609년 1월 (서기 1609년 2월 19일, 양력 추정)
듣자니 공께서 중국에서 《이담》이라는 책을 구해 오셨다는데, 그중 한 조목에 저희 누님에 관한 일이 실려 있다고 하니 참으로 그러합니까?
얼마 전 행주 정승(기자헌) 댁에서 그 책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런 내용은 없었습니다. 혹 나중에 다시 엮으며 덧붙인 것은 아닙니까?
이 일 때문에 다시 문하에 찾아가는 것도 마땅치 않으니, 그 책을 빌려주시기 바랍니다. 다 쓰지 못합니다.
(용어) 황신(자 사숙)은 광해군 때 호조 판서를 지낸 문장가다.
최분음 최천건에게 보낸 편지
1605년 11월 (서기 1605년 12월 24일, 양력 추정)
옛 도읍에서의 하룻밤 대화로는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회포를 풀기에 부족했습니다.
월성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리운 마음이 차가운 구름과 함께 모두 아득해졌습니다. 성 위의 낮은 담장 너머로 만월대를 바라보니 안개 낀 나무들만 푸르러, "지는 해"니 "비껴 내리는 비"니 하는 시구를 읊을 수가 없어 스스로 재주가 다한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느지막이 임진강에 이르니 커다란 얼음이 강을 막고 차가운 눈이 온 산에 가득하여, 문득 눈 구경의 흥취가 일었습니다. 생각건대 옥황상제가 계신다는 하늘 위 높은 누각은 그 추위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혹 공께서는 저를 위해 부 한 편을 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1606년 11월 (서기 1606년 12월 14일, 양력 추정)
예나 지금이나 비방을 받는 일은 성현이라도 피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형수와 정을 통했다는 누명이나 장인을 매질했다는 소문이 옛 진평이나 제오륜에게 무슨 해가 되었겠습니까. 공께서는 스스로 삭이시고, 남의 헐뜯음을 귀신 같은 사람과 견주거나 소나 말과 힘을 겨루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난초와 창초 같은 향초는 불에 태우고 삶아도 저절로 향기를 내는 법이니, 구중궁궐에 계신 임금께서도 이미 환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일이 곧 밝혀질 것이니, 억지로라도 직무에 나아가시어 성상의 기대에 부응해 주시기를 애타게 바랍니다.
1607년 6월 (서기 1607년 7월 8일, 양력 추정)
사흘 동안 내린 비도 더위를 식히지 못했습니다. 북쪽 창가에 다리를 뻗고 도연명의 시 몇 편을 읊으니,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와 문득 하늘 위 신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공께서는 이 찌는 더위 속에서 부채로나마 땀을 식히실 수 있는지요. 아마 마음과 힘을 많이 허비하고 계실 것 같은데, 이런 때는 오히려 못난 사람이 더 편한 법입니다.
한낮에 갑자기 보내 주신 편지를 받고 보니, 시원한 바람이 상쾌하게 답답한 제 가슴을 씻어 주는 듯했습니다. 성균관 사성 자리에 저를 추천하신 것은 불교를 좋아했다는 비난을 씻어 주시려는 뜻이었습니까? 저는 지금 이대로가 좋으니 무슨 수고인들 꺼리겠습니까. 다 닳은 붓도 천금 주고 산 것처럼 이대로 만족하며 스스로 즐기렵니다. 서울에 가서 귀인들과 가까이 지내는 일은 내키지 않습니다. 공께서 들으시면 틀림없이 이 미친 종놈의 옛 버릇이 또 도졌다 하실 것입니다.
지금 막 서첩을 들고 《갈고보》를 읽다가 다 마치지 못한 채 대강 써서 올립니다.
1607년 8월 (서기 1607년 10월 5일, 양력 추정)
지난번에 올린 열 편의 율시는 운자에 얽매여 좋은 흥취를 손상시켰으니 남겨 둘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술 항아리 덮개로나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수령의 인끈을 매고 대방주(남원)를 육 년쯤 다스리다가 지리산의 신선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공의 이조 판서 자리를 준다 해도 저는 바꾸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되도록 도모해 주시기 바랍니다.
1607년 9월 (서기 1607년 11월 4일, 양력 추정)
약초 임수정이 백옥루에 글을 지으러 저세상으로 떠났으니, 천고에 남을 한이 많습니다. 공께서도 이런 아픔을 느끼시는지요. 만시 한 편에 제 나름대로는 그의 일생을 다 담았다고 여깁니다. 이 시에 화답하여 죽은 이를 위로해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별지에 적어 둔 것은 부디 제 뜻에 곡진히 부응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1607년 9월 (다른 편지) (서기 1607년 11월 4일, 양력 추정)
저의 벼슬살이하는 심정은 마치 엷은 가을 구름 같아서, 가을바람이 한 차례 불어오자 옛날 장한이 고향의 농어회와 순챗국을 그리워하던 그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고을 하나를 얻어 입에 풀칠이라도 한다면 만호후에 봉해진 것과 다름없겠는데, 공께서는 어찌하여 그것을 아끼십니까? 공께서 인재를 아끼는 그 한마음이야 하늘에 물어도 부끄럽지 않겠지만, 때를 알지 못하니 그 사랑이 오히려 지혜를 어둡게 한 것이 아닙니까?
공명은 손에 들어오지 않은 채 젊은 시절의 뜻은 이미 시들었습니다. 마치 힘없는 망아지가 우리 안에서 서성이는 격이니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곤궁함과 영달은 분수에 이미 정해져 있어 하늘도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대장부의 일이란 관 뚜껑을 덮고 나서야 끝나는 법인데, 제 혀는 아직 건재하지 않습니까. 용을 고삐와 쇠사슬로 얽어매려 하지 마십시오. 용의 성질이란 본디 길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은주는 저희 선친께서 고을살이하셨던 곳인데, 제가 어찌 감히 기꺼이 부임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저는 선친의 일을 그대로 따를 수 없으니, 혹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다면 이는 선친의 가르침을 크게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가림(지금의 부여)은 바닷가에 있어 외지긴 하지만 생선과 게가 풍부하니 그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듣자니 공주와 같은 시기에 임명하신다는데, 그곳은 번잡한 데다 게도 없고 게다가 고을을 감독하는 관청까지 있으니, 제 이름은 그쪽에는 올리지 말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지역이 서로 가까워 혹 가림을 다투는 다른 사람에게 밀려날까 염려되어 번거롭게 말씀드립니다.
1607년 2월 (서기 1608년 1월 26일, 양력 추정)
가림은 얻지 못하고 도리어 공주를 맡게 되었으니, 이 역시 운명인데 어찌 공을 탓하겠습니까. 제가 벼슬을 하는 것은 가난 때문이니, 처자식을 지켜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게 하면 그것으로 족하지 달리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함부로 놀기만 하고 일을 게을리하여 공께서 천거해 주신 뜻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헌부의 서경이 끝나면 마땅히 찾아뵙고 사례하겠습니다.
적막한 겨울밤, 눈 녹인 물을 부어 새로 만든 차를 끓이는데, 불은 활활 타오르고 물맛은 좋으니 이 차 맛은 제호와 다를 바 없습니다. 공께서 어찌 이런 맛을 아시겠습니까.
1608년 1월 (서기 1608년 3월 1일, 양력 추정)
처음 부임할 때 간관 하나가 제가 그 자리에 걸맞지 않다며 심하게 헐뜯고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려다가 올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을에 부임해서는 새벽부터 많은 송사를 처리하고, 밤이면 등불 삼아 《좌씨전》 한 질을 읽고 있습니다. 이는 제 스스로 옛 한나라 관리의 방식을 따르면서 또한 천고의 성대한 일을 그만두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헐뜯는 자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세상에 쓸모없는 자라 하니, 이 또한 실없는 소리라 하겠습니다. 공께서는 틀림없이 크게 웃으실 것입니다.
(용어) 최천건(호 분음)은 선조 때 이조 판서를 지냈다. 진평(진 유자)은 한 고조의 공신으로 일찍이 형수와 정을 통했다는 모함을 받았다. 제오륜(자 백어)은 후한 광무제의 신하로, 장인을 매질했다는 놀림을 받자 자신은 장가를 세 번 갔지만 그때마다 장인이 안 계셨다고 답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장한(자 계응)은 진나라 사람으로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의 농어회와 순챗국이 그리워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최간이 최립에게 보낸 편지
1607년 3월 (서기 1607년 4월 11일, 양력 추정)
지천 황정욱의 시에 화답해 주신 시는 기걸차면서도 진중했습니다. 또 잘 맞지 않는 몇 글자를 고쳐 달라고 청하셨는데, 저는 마치 페르시아의 화려한 시장에서 진귀한 보석들에 눈이 부셔 어느 것이 더 값진 것인지 가늠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심정입니다.
그대로 둘 다 남겨 두어, 공께서 글을 지으실 때 얼마나 신중을 기하시는지 보여 드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1607년 3월 (다른 편지) (서기 1607년 4월 11일, 양력 추정)
세상에서 글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공의 시를 잘못 낮추어 보는데, 이는 그저 무지한 탓입니다. 공의 문장은 아무리 억세고 기걸하다 해도 역시 반고와 한유(창려)에게서 그 뿌리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 시는 본디 딱히 스승에게서 배운 바 없이 스스로 하나의 격을 창조해 낸 것인데, 그 뜻이 깊고 시어가 탁월하여 성률이나 익히고 꽃과 풀이나 읊는 자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저는 공의 시가 문장보다 더 훌륭하다고 여기는데, 공께서는 그렇게 인정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용어) 최립(호 간이)은 선조 때 문장가로 형조 참판을 지냈다.
정한강 정구에게 보낸 편지
1596년 9월 (서기 1596년 11월 4일, 양력 추정)
읍지를 만들면서 고을의 나이 든 노인들에게 물으니, 아전방·동문창·우계상방 등이 모두 신라 때 김흔 공이 지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아득한 옛사람을 떠올리니 마음이 감개무량합니다.
1596년 9월 (다른 편지) (서기 1596년 11월 4일, 양력 추정)
읍지의 범례를 명나라 전여성이 지은 《서호지》를 본받고자 했는데, 합하께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시다니 어째서입니까? 지리, 관청 건물, 토산물 등에 대해서는 말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읍지의 나머지 부분에는 그 사적을 싣되, 제 나름의 방법을 써서 신중히 하여 허물이 없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1601년 3월 (서기 1601년 4월 17일, 양력 추정)
오랫동안 어르신을 모시지 못하니 뵙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강릉지》에는 마땅히 빼야 할 것과 혹 보충해야 할 것이 있을 터이니, 전씨가 돌아올 때 편에 보내 보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릇 사실을 기록할 때는 핵심만 적되 너무 소략해서는 안 되고, 자세히 적더라도 거짓이 없어야만 후세까지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비루한 속어에서 비롯되었고, 저 또한 역사를 기록하는 재능이 부족한 데다 젊은 날의 경솔한 견해로 만든 것이니, 어찌 남의 안목에 흡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혹 이전 것보다 나은 점도 있을 것이기에 이렇게 세세히 늘어놓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1603년 8월 (서기 1603년 9월 19일, 양력 추정)
옛사람의 말에 "빌려 간 책은 늘 돌려주는 것이 더디다"고 했는데, 그 "더디다"는 말은 한두 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강》을 빌려드린 지가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벼슬할 뜻을 끊고 강릉으로 돌아가 그 책이나 읽으며 소일하려 하기에 감히 말씀드립니다.
(용어) 정구(호 한강)는 선조 때 공조 참판을 지낸 학자다.
김남창 김현성에게 보낸 편지
1605년 12월 (서기 1606년 1월 23일, 양력 추정)
《세가문헌》을 만든 일은 참으로 주제넘고 경솔한 짓이었습니다. 어르신께서 꾸짖지 않으시고 도리어 박식하고 우아하다며 격려해 주시니 부끄러우면서도 감격스럽습니다. 쪽지를 붙여 두신 곳은 하나하나 말씀하신 대로 고쳐서, 충고해 주신 말씀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한번 찾아뵙고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1606년 7월 (서기 1606년 8월 18일, 양력 추정)
돈녕부에 추천하는 일은 저희 형님께서 이미 승낙하셨습니다.
종이 열 첩을 책상 아래 바치니, 저를 위해 《황정경》, 임소경에게 보낸 편지, 「낙신부」, 「무조격」, 「추흥시」 여덟 수, 「양양가」, 「풍락정기」, 「전적벽부」, 「후적벽부」를 베껴 주신다면 마치 귀중한 구슬이 손안에 들어와 밤낮으로 빛나며 반짝이는 듯할 것입니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1606년 10월 (서기 1606년 11월 14일, 양력 추정)
저희 형님께서는 공을 여주 목사에 제수하는 것이 돈녕부에 제수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슨 힘을 썼겠습니까.
열 첩의 글씨는 정밀하고 단정하여 절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삼가 절하고 받았습니다. 다만 옛날 왕희지에게 글씨 값으로 바칠 흰 거위가 저에게는 없으니 몹시 한스럽습니다.
삼가 상자에 보관하여 대대로 전할 가보로 삼겠습니다.
1608년 8월 (서기 1608년 9월 15일, 양력 추정)
어르신께서 옥관자와 금띠를 두르고 높은 벼슬에 오르신 것은 모두 문필이 뛰어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조정이 인재를 아끼지 않는다고 말하겠습니까. 먼 고을에서 나랏녹이나 축내고 있는 저는 조보를 보고서, 한창 밥을 먹다가 저도 모르게 수저를 놓고 일어나 감히 이렇게 축하드립니다.
(용어) 김현성(호 남창)은 시·서·화에 두루 뛰어났고 벼슬은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왕희지(왕 우군)는 진나라의 명필로, 거위를 좋아하여 산음의 한 도사에게 《도덕경》을 써 주고 그 대가로 흰 거위를 받았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심학이 심열에게 보낸 편지
1608년 3월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황강의 꿈에서 이미 은화대를 얻는 조짐을 보았는데, 그 은화대는 어찌하여 아직 제 손에 들어오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길에서 마땅히 형수님을 만났어야 했는데, 아랫사람들이 저를 이끌어 홍경비를 피하라고 하는 바람에 결국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무척 안타깝습니다.
고을에 도착해서는 애써 일하여 겨우 열 달 치 봉급을 떼어 연나라산 소뿔을 사서 무기고를 채웠습니다. 그런 공로는 정말 형수님 덕분이지 제가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삼가 면첩을 봉하여 올립니다. 형께서 보시면 필시 "성인만이 성인을 안다"고 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우습습니다.
(용어) 심열(자 학이)은 인조 때 영의정에 이른 문신으로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연우각은 춘추시대 연나라에서 나던 소뿔로, 활을 만드는 데 가장 좋은 재료였다고 하며, 여기서는 좋은 무기를 가리키는 듯하다.
정화백 정협에게 보낸 편지
1610년 10월 (서기 1610년 12월 9일, 양력 추정)
모든 재앙은 언제나 소홀히 여기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번 일은 저 역시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바이니, 공인들 어찌 예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평생 너무 많은 비방을 받아 왔으니 한 차례 관직에서 쫓겨난 것이야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한스러운 것은 큰 고을을 잃은 일입니다.
그자가 전에 활을 당겨 자안(남이공)까지 쏘았다니, 하물며 사촌 동서 사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허물할 필요도, 탄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스스로 이해하고 넘어갈 뿐입니다.
(용어) 정협(자 화백)은 광해군 때 예조 참판을 지냈다.
이지봉 이수광에게 보낸 편지
1609년 12월 (서기 1610년 1월 9일, 양력 추정)
홍양시권은 몇 차례나 읽었는데 차마 손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소리와 운율이 잘 어울리는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책머리에 한마디 적고 싶었으나 훌륭한 책을 더럽히게 될까 염려되어 그만두었습니다. 더구나 차씨의 발문에서 이미 할 말을 다 해 놓았기에, 제가 하고 싶었던 말도 저절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삼가 원본 그대로 돌려보냅니다.
1610년 4월 (서기 1610년 6월 17일, 양력 추정)
제 병은 박지지 군이 말하기를, 몸속의 음기가 허해져 화기가 동해서 생긴 것 같다고 합니다. 몸이 있고 나서야 벼슬도 있는 법입니다. 이번에 사신 행차에 오르지 못한 벌이라야 고작 평민이 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제 다시 상소를 올렸으니 제대로 전달되도록 막지 말아 주십시오. 서강의 물을 터서 수레바퀴 자국에서 허덕이는 붕어를 살려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용어) 이수광(호 지봉)은 여러 관직을 거쳐 인조 때 이조 판서에 이른 학자다.
김여수 김상준에게 답한 편지
1610년 12월 (서기 1611년 1월 22일, 양력 추정)
제가 아주 부득이한 일이 아니고서야 어찌 부모님이 남겨 주신 이 귀중한 몸으로 모진 고문의 욕을 당하겠습니까. 이번 일은 제 스스로 결단한 것이지 남이 시켜서 한 일이 아닙니다.
형께서는 저를 자세히는 모르셨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형께서 저를 무척 아껴 주셨기에 있는 일이니, 비록 제 속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하셨더라도 저를 아껴 주신 은혜는 분명 있는 것입니다. 어찌 감히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말이 막혀 다 갖추지 못합니다.
(용어) 김상준(자 여수)은 광해군 때 형조 참판을 지냈다.
홍녹문 홍경신에게 보낸 편지
1607년 12월 (서기 1608년 1월 26일, 양력 추정)
옥과 현감의 관은 어느 날 마읍을 떠난다고 합니까? 만약 제가 임지로 내려가는 날까지 그 행렬이 이곳에 있다면 길모퉁이에서라도 제사를 올릴 수 있겠습니다. 기억하건대 예전 절에서 함께 노닐 때 그 형님이 지은 시에 "물이 어우러지니 산비가 잦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그 말이 이치에 참으로 딱 들어맞았습니다. 재주가 있으면서도 그 재주를 펼치지 못했으니 참으로 원통한 일입니다.
1608년 1월 (서기 1608년 3월 1일, 양력 추정)
그 형님의 관이 지나가던 날이 하필 제가 관아에 나가야 하는 날이라, 그저 아전 한 사람을 보내 상여꾼들을 감독하여 이 고을 경내를 지나가게 했을 뿐입니다. 살아 계실 때의 정분을 돌아가신 뒤에 저버린 것만 같아 부끄러워 눈물만 흘렸습니다. 만시에 이런 마음을 자세히 담았으니 그 형님도 응당 보실 것입니다. 이만 다 갖추지 못합니다.
(용어) 홍경신(호 녹문)은 선조 때 부제학과 병조 참의를 지냈다.
윤지중 윤의립에게 보낸 편지
1606년 8월 (서기 1606년 9월 16일, 양력 추정)
듣자니 형께서는 양유년(양 황문)을 몹시 허물하신다는데, 이는 섭씨 성을 가진 자가 명령을 거짓으로 꾸며 낸 일입니다. 주지번은 요구하는 것이 좀 있었던 듯하지만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고, 양유년 쪽은 아예 아무런 요구도 없었습니다.
그 두 분 모두 저를 잘 대우해 주셨던 분들인데, 제가 무엇 때문에 우열을 가려 양유년만 편들겠습니까. 다만 그가 억울하게 비난받는 것으로 여겨져 부득불 변명해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용어) 윤의립(자 지중)은 인조 때 예조 판서를 지냈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양유년(양 황문)은 1606년 주지번과 함께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 관리다.
남자안 남이공에게 보낸 편지
1610년 1월 (서기 1610년 2월 8일, 양력 추정)
형은 지금 어머님을 모시고 계시니 섣달에 내리는 약제도 다른 벗들보다 넉넉히 받으실 것입니다. 돌아가신 저희 어머님은 원주에 묻혀 계신데, 제사도 제가 직접 받들지 못하고 나무꾼이나 목동들이 묘소를 범하지 못하도록 막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어버이에 대한 슬픔이 늘 가슴에 맺혀 있는데, 언제쯤이나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성묘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식 된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는 대목입니다. 이만 다 갖추지 못합니다.
(용어) 남이공(자 자안)은 인조 때 공조 판서를 지냈다.
이중집에게 답한 편지
1609년 1월 (서기 1609년 2월 19일, 양력 추정)
이별한 지 십 년 만에 어제 처음으로 편지 한 장을 받으니 위로되고 다행스럽습니다. 제가 이 사신 행차에 끼인 것이 지금 벌써 세 번째인데, 형께서는 아직 한 번도 행차에 오르지 못하셨다니, 세상일이란 대체로 이런 것인가 봅니다.
용천과는 저 역시 대대로 이어 온 교분이 있으니, 어찌 감히 특별히 대우하지 않겠습니까.
한번 문하를 찾아뵙고 옛정과 이별의 회포를 풀고자 하니, 문지기가 저를 막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윤차야 윤훤에게 보낸 편지
1609년 10월 (서기 1609년 11월 11일, 양력 추정)
『시산』은 이미 익히 읽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권생 편에 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옥잠이 자주 꿈에 보이니 이상한 일입니다. 두 가지 모두 온전히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1610년 1월 (서기 1610년 2월 8일, 양력 추정)
《두시》는 기대했으나 손에 들어오지 않고 《초사》만 뜻밖에 도착했습니다. 하늘이 참으로 뜻있는 일을 방해하는군요. 이제부터는 감히 함부로 요행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용어) 윤훤(자 차야)은 인조 때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홍휘세 홍서봉에게 보낸 편지
1610년 4월 (서기 1610년 6월 6일, 양력 추정)
동쪽 교외에서 손을 맞잡고 이별할 때 저에게 노자를 아주 넉넉히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아 이상히 여기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금강산 만 이천 봉이 형을 만나 한층 빛을 발했을 것입니다. 비단 주머니에 담아 오신 시들을 아픈 눈을 씻고서라도 보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610년 7월 (서기 1610년 9월 2일, 양력 추정)
저는 병으로 북경 가는 길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파직되었다가 금세 다시 살길이 열렸으니 이 모두가 임금의 은혜라 그저 감격할 따름입니다.
듣자니 형께서는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가려 하시어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라 하는데, 제가 다시 등용되기를 기다렸다가 그 인끈을 저에게 대신 차게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우습습니다.
(용어) 홍서봉(자 휘세)은 인조 때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제강공자에게 보낸 편지
1601년 3월 (서기 1601년 4월 17일, 양력 추정)
몇 달을 이웃하여 지내다가 갑자기 이별하게 되니 섭섭한 마음을 스스로 가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소랑을 마주하고서는 늘 장흥동에서의 옛일을 이야기하며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팥 섞은 밥에 배추김치를 먹으면 그 맛이 엿처럼 달았는데, 지금 다시 그런 맛을 볼 수 있을까요. 비록 그 맛을 다시 보고 싶어도 저 같은 늙은이가 어찌하겠습니까. 이 처절한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1602년 2월 (서기 1602년 3월 8일, 양력 추정)
족하는 재주가 높은 사람인데도 나라의 법률에 얽매여 포부를 펴지 못하고 그저 하찮은 봉급이나 받는 자리를 맴돌고 계셨습니다. 만약 옛날 유향 같은 사람이 오늘날에 태어났다면, 천록각에서 신령스러운 지팡이 불빛을 마땅히 누구에게 비춰 주었겠습니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슬픕니다.
1609년 8월 (서기 1609년 9월 12일, 양력 추정)
공의 병환이 더욱 위중해지셨다고 들었습니다. 화평한 군자는 신령이 돕는 법이니 마땅히 약을 쓰지 않아도 나아지실 것입니다. 혼자서 애태우고 노심초사하여 정신을 상하게 하지 마십시오.
당류 약제 두 가지를 아드님 편에 보냅니다. 이것을 드시면 곧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장강이라는 자는 사리를 모르고 그저 쓴 약만 먹게 하니 우습습니다.
이관송 이이첨에게 보낸 편지
1608년 8월 (서기 1608년 9월 23일, 양력 추정)
형께서 예전에 가깝게 지내던 정을 생각하시어 온갖 비방 속에서 저를 구해 주셨으니, 재주를 아끼시는 마음이 지극하십니다. 이는 옛사람도 어렵게 여기던 일인데 그것을 실천하셨으니, 이제부터 온 세상의 어진 선비들이 모두 공의 문하로 모여들 것입니다.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4일, 양력 추정)
도성 문을 나가 배웅하며 작별하려 했는데, 어제저녁 갑자기 형조에 제수되었습니다. 여론을 기다리느라 오늘 은혜에 감사드리지 못하여 두터운 정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서쪽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할 뿐입니다. 서른 편의 율시는 석주 권필이 보고서 타당치 못하다고 하기에 다시 고쳐 뒤따라 보내 드리려 합니다. 늦어진다고 허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19일, 양력 추정)
편지가 도착하여 매우 기뻤으나 병 때문에 다시 나가 뵙지 못했습니다. 병이 아니었다 해도 어떻게 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이 마음만 지닌 채 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겠습니다. 남들은 제가 형과 비방을 나누어 지려고 형의 사위를 맞아들였다고 하는데, 형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시면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런 일이야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풀릴 것인데, 온 세상이 의혹스럽게 여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요.
한스러운 것은 저를 배신한 자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 가운데서 나왔다는 것인데, 이 역시 하늘이 시킨 일이겠지요. 제가 어찌 감히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겠습니까. 식사 잘 하시고 몸을 보중하소서.
(용어) 이이첨(호 관송)은 광해군 때의 권신이다.
이자민 이안눌에게 보낸 편지
1610년 3월 (서기 1610년 4월 8일, 양력 추정)
떠나는 일이 하도 급히 재촉당해 강가에서 손을 맞잡고 작별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삼 년을 떨어져 지내는 것도 짧은 기간이 아닌데, 더구나 저는 만 리 먼 길을 떠나야 하지 않습니까.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슬픔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오봉 이호민의 시는 저도 흉내 내 보려 애썼으니, 형도 이 운을 따라 시를 지어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형은 전에 제 시를 다소 약하다고 여기셨으니, 시험 삼아 무거운 가마솥도 들 수 있는 그 힘을 가벼운 손대야 하나 받쳐 드는 일에도 써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10년 3월 (다른 편지) (서기 1610년 4월 8일, 양력 추정)
요동 지방 관리의 요구는 부채 삼백 개면 해결될 수 있다는데, 저는 요직이나 관찰사도 아니니 누가 제 말을 들어 주겠습니까. 형의 고을에는 대나무가 많고 또 죽세공 장인이 있으니, 설령 삼백 개를 다 채우지 못하더라도 그 절반이면 좋겠습니다.
저는 마땅히 공의 어진 덕을 널리 칭송하여 요동 땅까지 빛나게 하겠습니다. 어찌 상자 속에 그대로 묵혀 두겠습니까.
1610년 4월 (서기 1610년 6월 6일, 양력 추정)
이 고을 기생 진랑은 제가 조운을 감독하던 시절에 가깝게 지냈던 여인인데, 지금은 혜민국에서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서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이를테면 저의 사람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그리도 심하게 다그치십니까? 꽃다운 나이도 지나고 자식까지 있어 굳이 찾아갈 흥은 나지 않지만, 그가 힘들어하는 말을 들으면 역시 동정심이 생깁니다. 바라건대 저를 봐서라도 그를 관대히 대해 주십시오. 하찮은 물오리를 잡으려다가 귀한 원앙새를 놀라게 하는 격입니다.
(같은 무렵) (서기 1610년 6월 19일, 양력 추정)
제 병은 참으로 깊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헤아리지 않고 겨우 감옥살이만 면해 주고 오히려 관직은 해면했습니다. 집 안에서 몸을 조섭하며 살아갈 길을 찾으니, 썩은 냄새 나는 세상일 따위야 어찌 마음에 두겠습니까.
부채 백 개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이 떠난 뒤에 도착하여 어쩔 수 없이 그냥 두었습니다. 더구나 부채 윗부분에 형의 시가 적혀 있어 읽어 보니, 맑은 바람이 상쾌하게 일어나 마치 갈증이 풀리는 듯했습니다.
종이는 진랑에게 돌려주었으니 우습습니다. 형은 과연 송광평 같은 철석간장을 지니셨나 봅니다.
(용어) 이안눌(자 자민)은 인조 때 예조 판서에 이른 시인으로, 시와 글씨에 모두 뛰어났다.
한석봉 한호에게 보낸 편지
1604년 10월 (서기 1604년 12월 5일, 양력 추정)
서울 집에서 만났을 때는 아이들 때문에 흥겨운 정취를 마음껏 누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요산(수안)의 수령으로 나가는데, 공께서도 마침 수령 자리를 그만두셨다고 들었습니다. 옛 도읍과 그리 멀지 않으니, 혹 공께서 이 고을 관아에 오신다면 연못가 누각에서 노닐며 인간 세상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명주 비단을 펼쳐 놓고 먹을 두어 말쯤 갈아 두어, 흥이 나는 대로 붓을 휘두르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노닌다면 어찌 왕희지만이 천고에 그 영예를 독차지하겠습니까. 애타게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1604년 3월 (서기 1604년 4월 13일, 양력 추정)
"하늘 바람과 바다 물결"이라는 네 글자 큰 글씨를 잘 받았습니다. 필세가 용이 뛰어오르고 호랑이가 덮치는 듯하여, 마치 동명산과 오대산이 웅장함을 겨루는 것 같았습니다. 옛 소실산의 은자가 이것을 본다면 틀림없이 집 네 채를 팔아서라도 사려 할 것입니다.
저는 그 글씨를 벽에 걸어 두고 사흘 동안이나 그 아래에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도 싫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화씨벽 같은 보배를 주셨으니 어찌 감히 고개 숙여 감사드리지 않겠습니까.
(용어) 한호(호 석봉)는 선조 때의 명필로 가평 군수 등을 지냈다.
송천옹에게 보낸 편지
1611년 2월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젊은 시절 《포박자》를 잘못 읽고서 금석으로 만든 약을 먹으면 신선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훗날 자양·해경·치허 같은 여러 진인들의 글을 읽고 나서는 스스로 실망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무릇 단약이란 서로 같은 성질끼리 합쳐져야 참된 경지에 들 수 있는 것이니, 정·기·신 이 세 가지 보배를 어찌 몸 밖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반드시 밝은 스승과 착한 벗을 만나 서로 경계하고 갈고닦아야만 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저의 스승이자 벗이 되어 줄 사람은 그대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다만 저는 죄를 지은 신하라 그대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바라건대 전해 오는 비결을 편지에 적어 보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11년 2월 (다른 편지)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옥청금사보록》과 《규중지남》, 《중화집》에는 모두 전해 오는 비결이 담겨 있는데, 이 세 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까? 숨기지 마시고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자격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전하는 것도 죄가 된다지만 그 죄는 가벼운 편이고, 아끼기만 하고 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무거운 죄입니다.
옛날 장평숙이 촉 땅으로 귀양 갔던 일은 경계로 삼을 만합니다. 공께서는 입을 다물고 침묵만 지키지 말아 주십시오.
(용어) 《포박자》는 중국 진나라 갈홍이 지은 도교 서적이다.
경홍(한호)을 초대한 편지
1605년 4월 (서기 1605년 6월 1일, 양력 추정)
봄은 이미 지나가, 그윽한 꽃들이 그대를 기다리다가 다 이울고 말았습니다.
녹음이 저리 무성하고 꾀꼬리 소리도 참으로 고우니, 봄빛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어찌 시냇가에 가득 핀 복숭아꽃뿐이겠습니까. 섬돌 곁에서 하늘거리는 붉은 작약도 볼만하니, 보내는 수레를 얼른 타고 와 주시기 바랍니다.
수수로 빚은 술이 한창 익었으니, 그물을 들고 냇가로 나가 그대와 함께 잉어를 잡아 회를 치려 합니다. 죽순 나물과 자라탕도 안주로 마련해 두겠습니다. 저는 평생 먹고 마시는 일만 밝혀 온 사람이라 이렇게 맛난 술과 음식으로 청하니, 먹는 것만 탐한다고 비웃지 마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용어) 경홍은 한호(한석봉)의 자다.
이실지 이춘영에게 보낸 편지
1607년 6월 (서기 1607년 7월 8일, 양력 추정)
족하께서는 온 세상을 만만하게 보시어 족하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저희 세 사람을 칭찬하시니, 부디 저희를 낮추어 보시고 너무 높이 평가하지는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나치게 넘치고, 석주 권필은 힘이 시들었고, 자민 이안눌은 막혀 있다고 하셨는데, 이 세 사람의 흠을 어떻게 해야 고칠 수 있겠습니까? 족하께서는 오늘날 문단의 대가이시니, 반드시 좋은 방법으로 다스려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605년 7월 (서기 1605년 8월 28일, 양력 추정)
이 통제사(이순신)의 공신록권은 족하께서 지으신 것이 참으로 뛰어난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물리쳐 두고 저 같은 사람에게 대신 지으라 하시니, 온종일 손만 아프도록 붓을 놀리면서도 한마디 말도 이루지 못하여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본래 변려문을 잘 짓지 못하는데, 사람들은 도리어 저를 변려문에 능하다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세상일이란 이런 것이니 우스운 노릇입니다. 부디 가르쳐 주시어 크게 나아지도록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607년 7월 (서기 1607년 9월 5일, 양력 추정)
족하께서 이미 저의 병을 고쳐 주셨는데 참으로 증세에 딱 맞는 좋은 약이었습니다. 즐겁고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족하께도 병이 있는지라 제가 침을 놓아 드리고자 하는데, 혹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남들은 재주가 적어서 걱정인데 족하는 오히려 재주가 너무 많은 것이 걱정입니다. 아무리 아깝더라도 조금 덜어 내어 거칠고 불필요한 것을 제거한다면 순수한 대가가 되실 것입니다. 이 말은 형을 몹시 아끼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이니, 자신의 병을 감추고 의원을 꺼려하다가 고질이 되도록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용어) 이춘영(자 실지)은 선조 때 문장가로 봉상시 첨정을 지냈다.
성소부부고 제21권
10. 14:39
성소부부고 제21권 · 문부 18 · 척독 하
출처: 성소부부고 제21권, 문부 18, 척독 하(짧은 개인 편지 모음, 둘째 권)
배경: 척독은 격식을 갖춘 정식 편지가 아니라, 벗이나 친척에게 안부를 전하거나 짧은 용건을 담아 보내는 사사로운 편지를 말한다. 이 권에는 허균이 여러 사람에게 보낸 짧은 편지 아흔네 통이 실려 있다. 사촌 형 허자하, 죽마고우 임자정과 임약초, 벗 조지세·권여장·임자승·이손곡(이달)·이여인(이재영)·양자점 등에게 보낸 편지가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그 밖에 조카들, 고을 원님들, 화가 이정(나옹), 승려 휴정대사(서산노사)와 유정대사(송운대사), 그리고 부안의 기생 계랑에게 보낸 편지도 실려 있다. 시를 논하고 벗의 죽음을 슬퍼하며, 벼슬살이의 답답함을 토로하고 그림을 주문하며, 참선을 이야기하고 정을 나누는 등 편지의 내용은 짧지만 허균의 다채로운 인간관계와 거침없는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계묘년, 1603년) (서기 1603년 9월 19일, 양력 추정)
허자하는 허균의 재종형인 허적의 자이며, 호는 상고재이다. 1597년 유효립 등이 인성군(선조의 일곱째 아들)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던 역모를 고발한 공으로 영사공신 1등에 책록되고 양릉군에 봉해졌다.
권세를 쥔 자들이 저를 궁지로 몰아넣어 결국 쫓아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관동 땅으로 가서 감호대에 올라 바라보니, 아득히 펼쳐진 푸른 물결이 삼신산에 닿아 있어 문득 옷자락을 걷고 발을 담그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이 말은 형만 알고 계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갑진년, 1604년 10월) (서기 1604년 12월 5일, 양력 추정)
고을 하나를 맡아 다스리면서도 이렇다 할 성과 하나 없이 그저 날짜만 보내며 관청의 곡식만 축내고 있습니다.
그나마 밀린 업무가 없어 좌수가 찾아와 재촉하는 일만은 겨우 면했습니다만, 형께서는 틀림없이 저를 몹시 꾸짖으실 것입니다.
(용어) 좌수는 조선 시대 각 고을의 향청(지방 자치를 맡아보던 기구)을 이끌던 우두머리를 말한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노형의 시는 성당 시절의 시풍에 매우 가깝습니다. 다만 기세가 지나치게 거세니, 조금만 평탄한 길로 들어선다면 심전기나 송지문 같은 시인이 되기가 뭐가 어렵겠습니까.
칠언고시는 도가의 경전인 황정경과 흡사한데,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노조린과 낙빈왕쯤은 응당 내려다보게 될 것입니다. 제 말이 지나치다고 의아해하지는 마십시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보내주신 부 두 편을 읽어보니 그 빼어남이 진나라의 손작(자는 흥공)과 좌사(자는 태충)에 견주어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요즘 세상에 정시 시대와 같은 시풍이 다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요즘 옛 문체로 글을 짓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인데, 뜻밖에도 우리 집안에 이런 대단한 보물이 있었으니, 하곡께서 살아 계셨다면 응당 깜짝 놀라며 이를 으뜸가는 작품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용어) 정시는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연호이다. 이 무렵 혜강, 완적을 비롯한 이른바 죽림칠현이 노장사상에 심취하여 자유분방하고 맑고 그윽한 시풍을 이루었는데, 이를 정시체라 한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율시 네 수가 매우 맑고 굳세어 우리 집안을 빛냈습니다.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고 싶었으나 공무에 매여 붓을 잡고도 도무지 생각을 짜낼 겨를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못생긴 모모가 서시의 찡그린 얼굴을 흉내 내다가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달아날까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3월) (서기 1610년 4월 8일, 양력 추정)
권필(자는 여장)의 말로는 이안눌(자는 자민)의 시가 점점 못해지고 있다는데,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무릇 시란 공력을 오래 기울이면 붓을 대는 대로 저절로 정신이 깃드는 법입니다. 비유하자면 열 편을 지으면 그중 몇 편은 볼 만하고, 나머지는 더러 평범하고 더러 졸렬하고 더러 비루하기도 합니다.
볼 만한 것은 남겨두고 평범한 것은 더 다듬고 비루하거나 졸렬한 것은 아예 버린다면 저절로 높고 오묘한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편마다 애써 교묘하게 지으려고만 하면 힘만 허비하고 말이 어긋나서 도리어 난삽하고 옹색한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이는 큰 시인들이 가장 꺼리는 일입니다.
자민은 너무 기교만 부리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힘을 허비하며 억지로 시상을 짜내는 데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품격은 모자라고 재능은 줄어들어 갈수록 무디어지고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노형께서도 부디 그 점을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6월) (서기 1610년 8월 3일, 양력 추정)
선녀 쌍성이 제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조강지처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형께서 멀리 떠난 채 돌아오지 않으신다면 형수께서 아이를 안고 우실 터이니, 너무 매정한 처사인 듯합니다. 기생들에 둘러싸여 비단에다 글을 쓰는 짓은 그야말로 중국의 철없는 젊은이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형은 나이 쉰이 가까우니 흰머리가 날 만도 합니다. 부디 조금씩이라도 몸가짐을 단속하시어 교송의 장수를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용어) 교송은 옛이야기 속 신선인 왕자교와 적송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둘 다 오래도록 살았다고 전해진다.
허자하 형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11년 1월 22일, 양력 추정)
문한을 담당하는 신하가 과거 시험관으로 참여했다가 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는 일은, 수나라가 과거 제도를 시작한 이래 없었던 일인데 아우가 몸소 그 일을 당했습니다. 게다가 하필이면 우리 집안에서 이런 일이 나왔으니 선대의 가르침을 욕되게 함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저 죽고 싶은 심정뿐입니다. 명나라의 정민정(호는 황돈)도 고문까지 당하지는 않았고, 당인(자는 백호)도 벼슬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일까지는 당하지 않았습니다.
법을 엄하게 적용하는 것이 요즘은 어찌하여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 또한 운명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임자정에게 답한 편지 (정미년, 1607년 8월) (서기 1607년 10월 5일, 양력 추정)
임자정은 허균과 어려서부터 함께 글을 배운 벗 임곤의 자이며, 훗날 풍안군에 봉해졌다.
자네는 내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말을 조심하여 요즘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의 태도를 본받게 하려는 모양인데, 세상에 일부러 이런 옹색한 처신을 하면서 그것으로 만족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총채를 손에 들고 고상한 이야기를 나누며, 거친 베옷을 입고 지팡이를 끌며 다니는 것이야말로 고상한 뜻대로 사는 삶이라네. 큰길가의 누각에 올라 주렴을 걷어 올린 채 앉아서, 쌍갈래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누런 적삼 소매를 걷어붙인 채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신유안이 지은 '천고강상' 한 편을 읊는다면, 그 순간만큼은 온 세상에 안하무인이 됨을 절로 깨닫게 될 것이니, 붉은 관복을 입고 요란하게 길을 트며 지나가는 고관 따위를 마음에나 두겠는가. 왕평지가 이 말을 듣는다면 응당 배를 잡고 웃을 것이네.
임자정에게 답한 편지 (정미년,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임수정(자는 약초)이 세상을 떠났으니, 후배들이 다시는 그의 풍류를 볼 수 없게 되었네. 주옥 같은 사람을 땅에 묻었으니 사무치는 정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구려.
세상일은 갈수록 변하고 세태는 나날이 야박해지기만 하는데, 그대 같은 부류는 멀쩡히 살아남고 이 사람은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대는 내 말을 탓하지 말게. 약초마저 죽었으니 이제 누가 다시 나를 받아주겠는가. 그 사람을 떠올려 보니 마치 방금 세상을 떠난 듯하네.
임자정에게 답한 편지 (무신년, 1608년 11월) (서기 1608년 12월 21일, 양력 추정)
병을 얻어 여관에 머물고 있는데, 닷새가 지나도록 땀 한 방울 나지 않아 이대로 죽는가 싶었네. 형께서 자주 안부를 물어주셨으니 그 두터운 정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구려. 내 병이야 곧 나아지겠지만, 정말로 걱정되는 것은 자네의 병일세. 마음만 편히 풀리면 저절로 나아질 터이니, 부디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시게.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조지세는 호가 현곡, 소옹이며, 벼슬이 공조 참판에 이르렀던 조위한의 자이다.
공의 할아버지뻘 되는 어른의 시는 호탕하여 시선집에 오를 만했으나, 애석하게도 옥에 티와 같은 흠이 있었습니다. 이반룡(자는 우린)이 남의 시를 깎아 다듬어 간행했던 일을 본받고 싶으나 감히 손대지 못하여 이렇게 감히 여쭙습니다.
(용어) 본문에서 "할아버지뻘 되는 어른"이라 옮긴 표현은 할아버지와 같은 항렬이면서도 가까운 친족은 아닌 남자 어른을 가리키는 옛말인데, 여기서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2월) (서기 1608년 1월 31일, 양력 추정)
제가 워낙 일 벌이기를 좋아하고 줏대도 없어서, 제 시를 평한 글을 형님께 보여드리고 말았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형님은 부디 입을 다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비방이 더 늘어날까 두렵습니다.
그동안 두세 형제들에게 이야기했던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결과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3월) (서기 1608년 4월 29일, 양력 추정)
큰 고을을 맡아 이런 복을 누리면서도, 가난한 벗을 구제하지 못했던 원헌(공자의 제자)처럼 저 역시 가난한 친구를 돕지 못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고을 창고는 봄을 맞아 곡식 한 알이 구슬처럼 귀합니다.
보내드리는 것은 겨우 말 한 필에 실을 정도이지만, 제 월급의 절반입니다. 범순인이 친구 석만경에게 배 한 척 가득 보리를 실어 보냈다던 일에 비하면 부끄러워 땀이 날 지경입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9월) (서기 1608년 10월 9일, 양력 추정)
저는 세상의 입방아에 시달려 액운을 당했으니, 이참에 쉬고 싶은 것이 본디 제 뜻이었습니다. 다행히 이제 파직되어 곧장 부령(전라북도 부안의 옛 이름)으로 향합니다. 이제부터 저는 권세가의 문턱을 넘지 않으렵니다. 어떻게 해야 형과 은거지를 절반씩 나누어 살 수 있을까요? 종이를 마주하니 그저 서글플 뿐입니다.
(용어) 여기서 "권세가의 문"이란 지위 높은 벼슬아치들의 집 문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은거지를 나누어 산다"는 말은, 옛날 중국 화산에 숨어 살던 은사 진단을 많은 이들이 찾아와 함께 노닐었다는 데서 나온 표현으로, 존경하는 은사를 찾아가 함께 지내고 싶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2월) (서기 1609년 1월 20일, 양력 추정)
세상 사람들은 제가 산에서 사는 것을 그냥 두지 않고, 자꾸 북쪽으로 올라오라 재촉합니다. 어제 형이 계신 곳까지 갔었지만 날이 추워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궁궐 일이 아무리 바쁘다 한들 어찌 한가한 틈이 전혀 없겠습니까. 저를 찾아와 주실 수만 있다면, 마땅히 시 한 묶음을 드려 형의 평을 받고 싶습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2월) (서기 1609년 1월 20일, 양력 추정)
형이 겨우 문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저는 형이 맨 앞자리를 차지하기를,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간절히 바랐는데, 이번에도 결국 높은 자리에는 오르지 못하셨군요. 제가 낙방한 것과 다름없으니 그 한스러움을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그러나 한 번 넘어졌다고 마음 아파하지 마시고, 다시 천 리 먼 길을 나아갈 뜻을 세우셔야 합니다. 도성을 넘어서는 일쯤은 작은 흙덩이 하나 지나치듯 해내는 날랜 재주를 공은 본디 지니고 계십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군옥은 저와 가까이 지내는 사이인데, 어찌 형의 말씀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카가 아무리 고집이 세다 해도, 어찌 폐인들이 걸었던 전철을 밟아 부모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손가락질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겠습니까. 저더러 잘 타일러 달라 하신 말씀은 감히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화백(정협의 자)과 의논해 보십시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0월) (서기 1609년 11월 11일, 양력 추정)
제가 시험관이 되어 형의 책문을 2등으로 뽑았으니, 이른바 눈이 흐려 다섯 빛깔 햇살도 가려내지 못한 셈입니다. 그러나 형의 업적이 한기(송나라 재상, 자는 치규)와 같고 문장이 소식(자는 자첨)과 같기를 바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왕요신(송나라 사람, 시호는 문안)과 장형(송나라 사람, 관직명은 대제)은 그저 장원 급제를 했을 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시험 삼아 물어보십시오. 왕요신과 장형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있던가요. 세월이 흘러도 썩지 않는 큰 업적은 장원 급제 여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2월) (서기 1610년 3월 9일, 양력 추정)
이조 판서를 만났더니 여장을 동몽교관(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벼슬)으로 임용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가 응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형께서 한번 그에게 물어봐 주십시오. 벼슬이란 때로 가난 때문에 하기도 하는 법이니까요.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2월) (서기 1610년 3월 9일, 양력 추정)
사신으로 추천한 것은 남이공(자는 자안)에게서 나온 일이라고 합니다. 하늘이 사람의 욕심을 다 들어주지는 않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병마에 시달리기만 하니 그저 크게 탄식할 따름입니다.
권여장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5월) (서기 1610년 7월 5일, 양력 추정)
형이 강도(강화도의 옛 이름)에 계실 때는 한 해에 두어 번 서울에 오시면 언제나 우리 집에 눌러앉아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으니, 세상에 그보다 즐거운 일이 없었네. 그런데 온 가족을 이끌고 아예 서울로 올라오신 뒤로는 열흘이 넘도록 한가로이 어울린 적이 없으니, 강도에 계실 때보다 오히려 못하니 대체 무슨 까닭인가?
연못에는 물결이 출렁이고 버들빛은 한창 푸르며, 연꽃은 붉은 꽃잎을 반쯤 열었고 짙은 녹음은 푸른 일산처럼 은은히 비치는데, 마침 이럴 때 동동주를 빚어 두어 젖빛처럼 뽀얀 술이 동이에 넘실거리니 어서 오셔서 맛보시게. 바람 잘 드는 마루는 벌써 깨끗이 쓸어놓고 기다리고 있네.
권여장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5월) (서기 1610년 7월 5일, 양력 추정)
그대 어머님의 병환이 너무 오래 끄니 걱정스러운 마음이 마치 내가 우리 어머니 병환을 곁에서 돌보던 때와 같네. 마침 엿 한 덩이를 구했기에 이생 편에 부쳐 보내니 식사 후에 드시게 하게. 나는 이것을 우리 부모님께 드리고 싶어도 이제는 그럴 수가 없으니,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겠네.
권여장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3월) (서기 1610년 4월 8일, 양력 추정)
내가 떠날 날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네. 만 리 길 여행 봇짐에 자네의 글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오언율시(다섯 자씩 여덟 구로 짓는 한시 형식) 여덟 수를 노잣돈 삼아 반드시 지어 주게. 한 수라도 줄인다면 무정하다 할 것이네.
형의 오언율시는 잘 지은 것은 맹호연(중국 양양 출신의 시인)의 작품에 견줄 만하고, 못한 것이라 해도 진거비의 고상한 운율에 못지않으니, 저 먼 연경의 저잣거리에 내놓고 읽더라도 연나라와 조나라 땅에서 부르던 우국지사들의 슬픈 노래에 맞설 만할 걸세. 부디 게으르다는 핑계로 짓기를 미루지 말아 주게.
(용어) "연조의 비가"는 옛날 중국 연나라와 조나라 지역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들이 시국을 근심하며 부르던 슬픈 노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권여장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2월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여행길 노자 삼아 보내 주신 율시 두 편에는, 그 무렵 병드신 형님과 이별하느라 마음이 몹시 어지러워 답을 하지 못했었네. 남궁생이 서울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자네를 만날 테니, 그때 화답하는 글을 보낼 것이니 내가 실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걸세.
초췌한 몰골로 연못가나 밭두둑에서 읊조린 시가 고운 가락에 맞을 리 없으니, 형님이 보시면 틀림없이 탄식하며 슬퍼하실 걸세.
박숙야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2월 (서기 1610년 1월 9일, 양력 추정)
형조에서 벌금을 없애지 못한 것은, 공도 태수가 문을 닫아걸고 조정의 명을 거절한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문을 닫아걸고 명을 거절해 놓고서는, 제가 벌금을 없애지 못했다고 책망하시니, 이는 법으로는 자신을 단속하면서 예로는 남을 대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벗들이 서로 권면하는 의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저 저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입니다.
(용어) 박숙야는 박엽의 자로, 호는 국창이며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이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기해년, 1599년) 5월 (서기 1599년 7월 6일, 양력 추정)
조정에서 몸가짐을 단정히 하는 일이라면 내가 자네를 따르지 못하겠지만, 경치 좋고 숨어 살기 좋은 곳을 아는 데는 내가 더 낫다고 생각했었네. 그런데 몇 년 사이 고을살이에 얽매여 떠나지 못하다가 은거하려던 뜻마저 저버렸으니, 북산이문이 곧 나에게 들이닥쳐 내 얼굴을 부끄럽게 만들 것만 같네.
사람이 요임금 시대의 신선이었다는 방회처럼 되지 못한다면 결국 남에게 부림받는 종이 될 뿐이니, 나는 자신만만하기로 이름났던 한나라의 문장가 사마상여의 기개를 배우고 싶네. 형은 나를 나무라 주게.
(용어) 임약초는 임수정의 자로, 159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와 한림을 지냈으며 허균과는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낸 벗이었다. 3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북산이문은 남조 제나라 때, 북산에 숨어 살던 주옹이 벼슬길에 나섰다가 다시 산으로 돌아오려 하자 그의 벗 공치규가 산신의 뜻을 빌려 그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나무란 글이다. 여기서는 허균이 예전에 임약초와 벼슬을 버리고 함께 강가에 숨어 살자고 약속해 놓고 지키지 못한 일을 두고 한 말이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기해년, 1599년) 5월 (서기 1599년 7월 6일, 양력 추정)
천지와 사계절도 다 변화하는 이치가 있는데, 나는 늘 움츠러들기만 하고 펴지를 못하니, 자네 같은 사람이 백 명 있다 해도 나를 어쩌지 못할 듯하네.
떠돌아다니는 벼슬살이에 먹고사는 것마저 자주 곤궁하니, 차라리 한 고을의 수령 자리 하나 내려주는 것만 못하네. 궁지에 몰린 원숭이가 숲으로 달아나면서 나무를 가려잡겠는가. 그저 벼슬하기 전 평민 시절의 정을 믿고 늘 이렇게 하소연하는 것이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기해년, 1599년) 1월 (서기 1599년 2월 10일, 양력 추정)
형의 그늘 아래 있을 때는 추위도 더위도 잊고 지냈는데, 이제 또 천 리 먼 곳으로 헤어지게 되니 남몰래 가슴이 아픕니다.
평소 그대를 만날 때면 있는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강물처럼 많은 술을 빚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었는데, 이제 멀리 떠나는 이별길에 올라서는 술 백 동이를 차려 놓아도 형이 한 잔조차 마시지 않으니, 신선과 범인의 길이 서로 막혀 버린 것인가. 고개를 들어 층성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서 그리워한다네.
(용어) 층성은 신선 서왕모가 산다는 곤륜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신선의 세계, 곧 다다를 수 없는 아득한 경지를 뜻한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2월 (서기 1600년 3월 29일, 양력 추정)
지독한 추위에 목이 다 잠겼으니, 하늘이 이런저런 대꾸를 하는 번거로움을 줄여 주려는 것이 아닌가 싶네. 그런데 혀부터 먼저 내게서 떨어져 나갔으니, 팔다리마저 저마다 떨어져 나갈 날이 그리 멀지 않은 듯하네.
어제 윤계선을 만났더니, 모든 일이 딱히 잘된 것도 잘못된 것도 없으니 함께 힘쓰면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하였지만, 내 입은 굳게 다물어져 벌어지지가 않았네.
성현도 보통 사람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법인데, 하물며 한 시대를 함께 논하는 사람들 사이야 얼마나 차이가 나겠는가. 형이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이 말을 들으셨더라면, 생각이 서로 그리 동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3월 (서기 1600년 4월 27일, 양력 추정)
나는 아직 마흔도 안 되었는데 머리가 벌써 이 모양이니, 나이가 더 들면 어떤 꼴이 될지 모르겠네. 떠도는 인생이 몇 해나 산다고 억지로 남을 따라다니며 줏대 없이 살겠는가.
옛날 이름난 선비들은 으레 술을 실컷 마시면서도 굴원의 이소쯤은 훤히 외우는 사람들이었는데, 나는 그 두 가지를 다 하지 못하니 뭇 관료들 밑자리에 있는 것을 참으로 달게 여기고 있네. 그런데 자네는 나를 천 길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려 하니, 옛날 힘장사였던 오확만 한 힘이라도 있는 겐가? 아마 애만 쓰고 소용은 없을 것이네.
임약초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6월 (서기 1600년 7월 24일, 양력 추정)
맑은 이슬이 새벽마다 내리는 요즘, 새로 만든 거문고를 타고 있다네. 이런 것들을 대하다 보니 그대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이 마치 봄 버들가지에 물이 오르듯 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들으니 자네가 홍문관에서 비방을 받았다고 하던데,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면 개의치 말게. 때가 지나면 저절로 잠잠해질 것이네.
암행어사로 나가는 일은 언제쯤 떠나는가? 이가 아파 문밖에 나가지 못해 이렇게 글로나마 위로를 전하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2월 (서기 1600년 3월 29일, 양력 추정)
어떤 사람에게 들으니 자네가 서애 유성룡을 헐뜯어서 설서 벼슬을 얻었다고 하기에, 나는 그 말을 듣고 몹시 화가 났었네. 서애는 어진 정승이니 헐뜯어서는 안 되네. 소인배를 헐뜯고 벼슬을 얻는다 해도 좋은 일이 아닌데, 하물며 서애 정승을 헐뜯어서야 되겠는가.
바라건대 형은 차분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조급하게 행동하지 말게. 앞길이 아무리 멀다 해도 다 타고난 운명이 있는 법이고, 공명이란 괴상한 짓을 해서 요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네. 속담에 "급히 먹으면 목이 멘다."고 했으니, 비록 속된 말이지만 큰 깨우침을 주는 말일세.
(용어) 임자승은 임현의 자로, 허균과 같은 해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가까이 지낸 벗이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3월 (서기 1600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옛 책 만 권을 쌓아 놓고 한쪽에는 탁문군 같은 여인을 끼고서 그 속에서 거리낌 없이 지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한평생을 마치기에 충분할 것이네. 그런 풍류는 형 혼자 누리고, 나에게까지 너무 자랑하지는 말게. 나야 세상에서 버려진 몸이니 그대 일에 무슨 간섭을 하겠는가. 형은 나를 탓하지 말게.
비루하고 잡스러운 것을 가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도량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니, 비유하자면 만 리를 흐르는 긴 강이 어찌 천 리에 한 굽이도 없을 수 있겠는가. 이런 나의 미친 짓을 형이 용서해 주신다면 참으로 고맙겠네.
(용어) 탁문군은 한나라 때 큰 부자였던 탁왕손의 딸로, 사마상여가 타는 거문고 소리에 반해 한밤중에 몰래 집을 뛰쳐나가 그의 아내가 된 여인이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3월 (서기 1600년 4월 27일, 양력 추정)
형이 내가 잡스러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경계하여 편지를 두 번이나 보내 주시니 참으로 고마운 마음이네. 그러나 이것은 내 참마음을 해치는 일이 아니라네.
옛날 송나라의 곽충서는 시장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술을 마시며 "나와 어울리는 사람은 모두 이런 부류들이다."라고 말했다는데, 모르긴 해도 형이 사귀는 사람들이 시장 사람들보다 나은가?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3월 (서기 1600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어젯밤에는 자네가 아끼는 여인이 찾아와 강남곡을 부르는데, 가락마다 마치 구슬을 꿰어 놓은 듯하였네. 그 노래를 듣느라 지루한 줄도 모르고 무릎을 치며 화답하다가 나중엔 발까지 구르며 춤을 추었으니, 천지가 넓은 줄도 전혀 몰랐다네. 이때는 내가 옛사람을 만나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지 않고, 오히려 옛사람이 나를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형이 함께 있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는데, 신선이 산다는 금화궁의 하늘 위에서도 이백이 술 마시던 누각을 그리워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5월 (서기 1600년 6월 25일, 양력 추정)
자네는 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손님을 물리쳐서, 요직에 있는 사람이 만나지도 못한 채 돌아가 화를 내게 만들었다고 나를 나무라는데, 이건 나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네. 불행히도 내가 사는 곳이 임약초라는 사람과 대문을 마주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높은 벼슬아치들이 예전에 도사 벼슬이나 지낸 사람의 집을 뭐 하러 찾아오겠나. 옛날 장찬이라는 사람은 "나는 하경용을 찾아온 손님은 만나줄 수 없다"고 말했다는데,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이네.
(용어) 장찬은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 사람으로, 하경용을 찾아온 손님이 오는 길에 자신에게도 들르면 "나는 하경용의 손님은 만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허균은 이 이야기를 빌려, 자기 집이 우연히 높은 벼슬아치 임약초의 집과 마주해 있어 그를 찾아온 손님들이 착각하고 몰려드는 것을 이렇게 에둘러 말한 것이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5월 (서기 1600년 6월 25일, 양력 추정)
나는 불교를 믿는 게 아니네. 다만 그 글이 좋아서 읽으며 한가한 시간을 메울 뿐이지. 몇 천 호쯤 되는 고을 하나 얻으려 해도 못 얻는 처지에, 부처가 되겠다고 도모한다는 말인가. 그런 건 전혀 아니네. 다만 권력에 아부하며 떠들어대기만 하는 무식한 자들에 비한다면,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걸세.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경자년, 1600년) 7월 (서기 1600년 8월 23일, 양력 추정)
내가 남궁 — 예조의 별칭 — 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을 때 형이 뒤이어 들어왔으니, 한비자가 노자와 나란히 한 열전에 실리게 될 줄은 미처 몰랐네. 나는 우연히 비국랑(비변사의 낭청 벼슬)에 올라, 하루 종일 정승 앞에 엎드려 붓을 잡고 글씨를 쓰다 보니 흐르는 땀이 비 오듯 하여 거의 미칠 지경이었네. 그래서 왜 손작이 수초부에서 말한 것처럼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찾지 않고, 억지로 나랏일에나 참견하려 드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네. 벼슬을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가난 때문에 몇 말 안 되는 녹봉에 매달려 실행에 옮기지 못할 뿐이네.
(용어) 남궁은 예조의 별칭이다. 1597년 허균이 예조 좌랑으로 있을 때 임현도 뒤이어 예조 좌랑으로 들어왔는데, 허균은 이를 사상이 상반된 한비자와 노자가 사기의 같은 열전에 함께 실린 일에 빗대었다.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 (신축년, 1601년) 2월 (서기 1601년 3월 19일, 양력 추정)
남쪽으로 내려온 것은 원래 자네가 보고 싶어서였는데, 관찰사가 옛 규칙을 없애지 못하는 바람에 능양까지 함께 가지는 못했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수행하게 되었으니 서로 만날 날이 있을 걸세.
듣자니 형은 요즘 아내를 잃고 지나치게 상심한다는데, 대장부란 마땅히 이치를 따라야 하는 법이네. 세상에 예쁜 여인이 얼마나 많은가, 하필 그 사람 하나뿐이겠는가. 인생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네. 형은 예전에 순봉천이 아내를 잃고 슬퍼하다 따라 죽은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더니, 이제 와서는 그 전철을 밟으려는가. 자네 어머니가 살아 계시고 자네는 외아들로 아들마저 없는 처지이니, 부질없이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게.
자세한 이야기는 창평의 과거 시험장에서 하세. 말 위에서 대충 몇 자 적고 이만 줄이네.
(용어) 순봉천은 삼국시대 위나라 사람 순찬의 자이다. 아내를 몹시 사랑했는데 아내가 일찍 병들어 죽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심중경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9월 (서기 1610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어제 처음으로 자네의 애첩이 '여인행'을 읊는 것을 들었는데,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정확하고 곡조를 붙이는 솜씨도 제격에 딱 들어맞아 마치 전문 소리꾼 같았네. 그 소리가 쇠나 옥이 부딪는 소리처럼 쟁쟁하면서도 간드러졌네. 영이니 석이니 하는 두 기생에게도 이런 재주가 있었는지 모르겠군.
그 옛날 도엽이라는 기생도 이 앞에서는 아름다움을 뽐내지 못하게 되었으니, 형은 왕자경이 되기에 충분하네. 그러니 굳이 만 호를 다스리는 제후에 봉해지기를 바랄 게 무엇 있겠나.
(용어) 심중경은 훗날 인조 때 문신을 지낸 심액이며, 중경은 그의 자이다. 도엽은 진나라 왕헌지의 애첩 이름이고 자경은 왕헌지의 자로, 왕헌지가 애첩을 그리워하며 지은 '도엽가'가 유명하다. 허균은 이를 빌려 심중경을 왕헌지에 비유한 것이다.
윤명익에게 답한 편지 (경술년, 1610년) 12월 (서기 1611년 1월 22일, 양력 추정)
제가 당한 불행은 사대부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무신년(1608년) 사월에 형께서 당하신 액운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지옥에 견주어 이 세상이 평온하게 느껴지는 것과 같습니다. 둘 사이의 차이가 어찌 천 유순 정도밖에 안 되겠습니까. 그런데 고맙게도 무명 세 필을 재빨리 곤장 치는 사람에게 쥐여 주셨다니, 이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다만 옥리들이 함부로 침범해 오니 임금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남은 인생은 그저 고향에 돌아가 살 수만 있어도 다행이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남해 바닷가 어딘가 신선이 산다는 곳으로라도 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긴 말은 줄이고 이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용어) 유순은 옛 인도에서 쓰던 거리 단위로, 1유순을 대략 40리로 보는 설이 있다. 여기서는 아득히 먼 차이를 비유한 말이다.
조이숙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오랫동안 덕이 높으신 그대를 뵙지 못하니 마음속에 더러운 티끌만 쌓여갑니다.
누대에 기대어 지으신 시는 어째서 정묘교의 주인에게 보여주어, 한창 졸음에 빠져 있는 그를 깨우지 않으십니까.
《세설》은 빌려 간 지 오래되었는데 돌려주지 않으시니, 아직 다 읽지 못하신 겁니까?
저는 천 년 뒤에 태어나 진나라 사람들이 나누던 청담을 직접 들어보지 못했으니, 한 번 읽고서 그 자세한 내용을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찾아가는 종 편에 부쳐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심부안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7월 (서기 1608년 8월 24일, 양력 추정)
저는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처지가 되었으니 마땅히 스스로 탄핵하여 물러나야 할 것이나, 다시 말썽이 일어날까 두려워 지금까지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이미 어사에게 사정하여 애걸하였으니 다음 달에는 마땅히 판결이 날 것입니다.
남도에서 믿을 사람은 오직 형뿐이니, 산속으로 들어가 살 때 종 두어 명의 부역만 덜어 주신다면 저는 마땅히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가을바람이 솔솔 불고 귀뚜라미가 한창 울어댑니다. 남쪽 하늘을 바라보니 기러기와 함께 날아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조선술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9월 (서기 1610년 10월 31일, 양력 추정)
저는 마침 남의 잔치에 다녀왔고 말은 돌아와 여물을 먹고 있던 참인데, 그대가 마침 우리 집을 찾아오셨더군요. 그래서 제가 집에 있는 줄로 오해하셨고, 게다가 취랑이라는 자가 그대의 의심을 부추겨 정시망(시망은 정응운의 자)에게까지 그 일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무슨 나랏일의 주도권이라도 쥔 사람이라고, 세상 사람이 싫어서 찾아오는 이를 거절했겠습니까.
십 년을 사귄 사이에도 이렇게 의심을 받게 되니, 남을 알기도 쉽지 않지만 남이 나를 알아주는 것도 쉽지 않다는 말이 과연 사실인가 봅니다.
어금니가 아파 만나서 말씀드리지 못하고, 우선 편지로 사정을 아룁니다. 이만 줄입니다.
(용어) 조선술은 문장이 뛰어나고 특히 시와 부에 능했던 조찬한의 자이며, 호는 현주이다.
기헌보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28일, 양력 추정)
이달 십오일에 유배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 새우는 부안의 것만 못하고, 게도 벽제의 것만 못합니다. 먹는 것만 밝히는 사람으로서는 이러다 굶어 죽겠습니다.
(용어) 기헌보는 기자헌의 동생인 기윤헌의 자이다.
정시망에게 답한 편지 (경술년, 1610년) 12월 (서기 1611년 2월 11일, 양력 추정)
저의 옥사는 거의 끝나 갑니다. 억울함을 품은 채 심문을 받으니 하늘이 어두컴컴해지고 해마저 캄캄해지는 듯했습니다. 그 때문에 울다가 지쳐서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이태백도 야랑으로 귀양을 갔고 소동파도 해남으로 귀양을 갔듯이, 옛사람들도 피하지 못했던 일인데 제가 어찌 귀양길 한 번 가는 것으로 마음 아파하겠습니까.
남쪽으로 가는 것이 결정되었으니, 형은 술 한 말과 닭 한 마리를 들고 길가로 나와 시 한 수 읊어 주고 가지 않으시렵니까?
수많은 사연을 다 적지 못합니다.
임무숙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7월) (서기 1610년 9월 2일, 양력 추정)
제가 사람들에게 무숙의 변려문이 최치원의 글보다 낫다고 말했을 때는 다들 이상하게 여기며 못마땅해했습니다. 그런데 또 무숙의 글이 왕세정의 글과 같다고 했을 때는 사람들이 별로 의아해하지 않더군요. 이는 다름이 아니라 옛사람은 귀하게 여기고 요즘 사람은 천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왕세정의 문장은 멀리 한나라의 사마천과 사마상여의 뒤를 이었다고 할 만하니, 최치원을 내려다보는 정도가 어찌 봉황과 참새의 차이뿐이겠습니까.
그대는 스스로를 믿고 남의 말에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용어) 무숙은 임숙영의 자로, 문장이 뛰어나고 경서와 역사에 밝았던 인물이다. 변려문은 넉 자와 여섯 자를 짝지어 쓰는 화려한 한문 문체다. 왕세정은 명나라의 문장가로 호가 감주다. 최치원은 신라 말의 대문장가이며, 사마천과 사마상여는 한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다.
장지국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1월) (서기 1611년 3월 4일, 양력 추정)
죄를 짓고 귀양 가는 사람을 찾아 위로해 주는 이가 드문데, 그대는 뭇사람에게 버림받은 저에게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어 주셨으니 그 후한 뜻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는 정말 저를 나라의 인재로 대우해 주신 것이니, 어찌 감히 그 은혜에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런 태평한 시절에 죄를 지었으니 백 번 귀양을 가더라도 속죄할 길이 없습니다. 귀문관 밖으로 쫓겨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니, 감히 먼 곳으로 귀양 가는 것을 한스러워하겠습니까.
세자를 돕고 지키는 일은 오로지 강학을 맡은 신하에게 달려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대가 배운 바를 실행할 때입니다. 힘써 바르게 보필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눈을 씻고 귀를 기울여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용어) 지국은 장유의 자로, 문장이 뛰어났던 인물이다. 귀문관은 장백산맥의 한 줄기로, 아주 멀고 험한 변방을 뜻하는 말이다.
조카 실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1월) (서기 1611년 3월 4일, 양력 추정)
너는 내가 양식이 떨어질까 걱정하지만, 나도 네가 위험을 무릅쓰고 무턱대고 행동하는 것이 걱정스럽구나. 내가 너를 걱정하는 마음이 네가 나를 걱정하는 마음보다 훨씬 클 터이니, 행동을 삼가서 다시는 어버이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도록 하여라.
(용어) 실은 허균의 맏형인 허성의 맏아들로, 허균의 조카다.
조카 실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조씨 집안에서 노래하는 기녀를 데려간 일은 나에게는 딱히 아쉬울 것이 없는데, 너는 왜 그렇게까지 서운해하느냐? 얼마 전에 기를 쓰고 막으려 하던 마음과는 사뭇 다르구나. 더없이 아끼던 보물이었으니 아깝기는 하겠지만, 이제 와서 나를 탓해서야 되겠느냐.
조양오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6월) (서기 1608년 7월 26일, 양력 추정)
북관에 계시면서 학계를 만나 보셨는지요? 그의 병세는 어떠하던가요?
저는 평생 절도를 지키지 못하여 온갖 곤경을 겪었습니다. 그래도 이런 화는 면했는데 그는 단번에 걸려들었으니, 운명이란 것이 정말 있는 것일까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도 가슴이 뛰는데, 저는 변변찮은 사람이라 또 입을 잘못 놀려 걸려들었습니다. 이는 모두 평소 그렇게 처신해온 데서 비롯된 일이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그저 파면되어 돌아가기를 앉아서 기다릴 뿐입니다.
(용어) 북관은 함경남도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학계는 심액의 호다.
민숙정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2월) (서기 1609년 1월 20일, 양력 추정)
수헐원에서 신령이 이백을 찬양하는 시를 읊었다는 일을, 제 맏형님조차 믿지 않으시니 결판은 그대의 입에 달려 있습니다. 저를 위해 속히 와서 증명해 주셔서, 한편으로는 제가 허튼소리를 한다는 누명을 벗겨 주시고, 한편으로는 형제간에 서로 믿지 못하는 마음을 없애 주십시오. 이 두 가지 문제가 모두 그대의 한 번 걸음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 조카들에게 곤욕을 치르고도 빠져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종을 보내어 모십니다.
(용어) 민숙정은 민인길의 자다. 수헐원 일화는 허균이 지은 "열선찬" 가운데 이백을 기린 구절("만리에 푸른 물결, 하늘 가득 밝은 달")이 있었는데, 허균이 직산 수헐원에서 민인길, 심우영과 함께 있을 때 외딴 폐가에서 신령이 그 시구를 읊는 소리를 들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다.
용산 고을 원님 이할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아침에 일어나니 집게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더니, 문득 좋은 물고기 선물을 받았습니다. 어찌 바다의 용왕만 이런 좋은 맛을 낼 수 있다 하겠습니까. 양강의 축항이라는 물고기나 서주의 독미라는 물고기라 한들, 그 맛이 이것을 당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실처럼 가늘게 썰어 회를 쳤더니 절로 군침이 돌더군요.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으니, 그동안 국수나 먹던 창자가 깜짝 놀라 천둥소리를 낼 정도였습니다. 감사한 마음에 아홉 번이라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용어) "집게손가락이 움직인다"는 말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조짐이라는 뜻의 옛 표현이다. 옛날 중국 정나라의 공자 송이 자기 집게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조짐이다"라고 말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함산 고을 원님 한회일에게 감사드리는 편지 (신해년, 1611년 1월) (서기 1611년 2월 28일, 양력 추정)
연어알젓 한 그릇을 받아 먹어보니, 그 맛이 사슴 태보다도 뛰어나고 구장보다도 더 좋았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용어) 구장은 구약나물 뿌리를 가루 내어 끓여 만든 음식이다.
함산 고을 원님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사람들이 이곳에 작은 방어와 준치가 많이 난다고 하여, 저는 일부러 이곳을 유배지로 원했습니다. 그런데 올봄에는 통 나지 않으니, 이 또한 운이 없는 모양입니다. 늙은 몸이 입맛 하나 보고 왔는데, 거친 거여목으로도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하니 우스운 일입니다.
남궁생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2월) (서기 1611년 3월 28일, 양력 추정)
벌통 하나를 오동나무 그늘에 두고, 벌 떼가 아침저녁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질서를 살펴보니, 저희들끼리의 법도가 무척이나 엄격하더군요. 그런데 나라의 법도가 벌만도 못하니, 사람으로서 크게 실망스러울 따름입니다.
조카 채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네가 서울로 올라간 뒤로, 서울의 여러 친지들이 모두 형보(함열 현감 한회일의 자)가 나를 잘 대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더구나. 설령 네 말대로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 말이 우리 집에서 나왔다면 매우 의롭지 못한 일인데, 더구나 그런 일도 없지 않았느냐.
이 고을은 본디 쇠잔한 곳인 데다 형보의 살림 규모도 넉넉지 않으니, 어찌 고을마다 임피 같고 사람마다 경기 감사 같을 수 있겠느냐. 너무 심하게 남을 책망하는 것은 군자가 할 일이 아니다. 부디 이런 말을 하지 말아라. 괜스레 네가 박정하다는 말만 더 듣게 될 것이다.
(용어) 채는 허균의 둘째 형 허봉의 아들로, 허균의 조카다. 임피는 전라도의 고을 이름이고, 경기 감사는 경기도를 다스리던 지방관을 이르는 말이다.
이손곡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4월) (서기 1609년 5월 18일, 양력 추정)
어르신께서는 제 근체시가 지나치게 다듬어지고 빈틈없이 짜여서 성당 시대의 시풍과는 거리가 멀다 하여 물리치고 돌아보지 않으시면서, 오직 고시만 좋다 하시며 남조의 문장가 안연지와 사영운의 풍격이 있다고 하시니, 이는 어르신께서 고집만 부리시고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고시가 비록 예스럽다고는 하나 이는 그대로 옛것을 본떠 베낀 것이어서 옛사람의 시와 비슷할 뿐이니, 그렇게 겹쳐 놓은 것을 어찌 귀하다 하겠습니까. 근체시는 비록 당나라 시와 꼭 닮지는 않았어도 나름대로 저만의 새로운 경지가 있습니다. 저는 제 시가 당시나 송시와 비슷해질까 오히려 두렵고, 사람들이 "이것은 허균의 시로구나" 하고 말해 주는 것을 듣고 싶으니, 너무 건방진 생각은 아닐는지요.
(용어) 이손곡은 선조 임금 때의 문장가 이달로, 손곡은 그의 호다.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당나라 시풍에 뛰어나 세 사람을 일러 '삼당'이라 불렀다. 허균은 그에게서 시를 배웠다. 근체시는 정해진 형식과 운율을 지켜 짓는 한시이고, 고시는 그런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짓는 한시다. 안연지와 사영운은 중국 남북조 시대 남조의 문장가다.
이손곡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4월 (서기 1609년 5월 18일, 양력 추정)
어르신께서는 제가 쓴 풍악기행시를 가장 예스럽고 격조 높다 하시며, 이 시집에서 으뜸가는 작품이 될 만하다고 말씀하셨다더군요. 하지만 제가 스스로 헤아려 보면 그 시는 그저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적어 놓은 것일 뿐입니다. 어찌 감히 천하의 문장가로 이름난 진나라의 손작이나 포조 같은 이들과 더불어 천 년 뒤까지 솜씨를 겨룰 수 있겠습니까. 저를 지나치게 추어올리시며 짐짓 놀리시는 말씀이라 여겨져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시왕동, 망고대, 박달곶을 읊은 세 편의 옛 시는 참으로 어르신 말씀대로 지나치게 강한 느낌이 있습니다. 제 글은 부드러운 것이 흠이지 강한 것은 흠이 되지 않습니다. 이따금 강한 느낌이 있다 해도 거리낄 것은 없습니다. 만약 명나라의 큰 문장가인 이반룡이 이 글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자신이 엮은 『명시산』이라는 시선집에 넣었을 것이니, 왕씨 집안 자제들이 다소 자부심을 가진다 한들 그것이 강남의 풍류를 가로막을 것이 또한 무엇이겠습니까.
이손곡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10월 (서기 1610년 11월 29일, 양력 추정)
어르신께서는 본디 제 초사와 부 작품들이 부드럽고 아름답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히 스스로 그렇다고 믿지 못하겠습니다. 제 글은 근래에 한층 나아졌는데 어르신께서는 오히려 이를 알아보지 못하시니, 삼가 『한정록』 서문과 『박씨산장』, 『왕총이기』, 『십이론』, 『이절도뢰』, 『관묘비』, 『남궁생전』, 『대힐자』, 그리고 『북귀부』, 『훼벽사』를 한데 묶어 변씨 성을 가진 이 편에 부쳐 보냅니다. 가르침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윤오정에게 답한 편지 (기유년, 1609년) 7월 (서기 1609년 8월 14일, 양력 추정)
보내주신 포도를 받아 먹고 나니, 갈증병을 앓던 사마상여의 목마름이 풀리는 듯합니다. 다만 그것을 한 말쯤 얻어서 세도가를 찾아가 변방 고을의 벼슬자리 하나를 청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용어) 사마상여는 한나라 때의 이름난 문장가로, 소갈증(요즘으로 치면 심한 갈증을 동반하는 병)을 앓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옛날 중국에서 어떤 사람이 진귀한 포도주를 뇌물로 바치고 변방 고을살이 자리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허균은 이를 빌려 농담 삼아 한 말이다.
윤오정에게 답한 편지 (신해년, 1611년) 4월 (서기 1611년 5월 26일, 양력 추정)
초췌한 몰골로 시골에 묻혀 시를 읊조리며 그대의 훌륭한 시를 음미하다 보니, 북쪽을 향해 그리운 마음만 하염없이 펼쳐집니다. 저는 요즘 입을 다물고 지내다 보니 시상마저 막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변변찮은 시로나마 화답하지 못하니 부끄러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홍중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그대는 시 짓기에 오십 년을 힘쓴 끝에 마침내 진사시에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경솔하게도 그대 혼자 기뻐하며
'하루 만에 장안의 꽃을 다 보았노라'
라고 읊었다지요. 부디 신중하게 처신하여 이런 일로 우쭐대지 마십시오. 선비 된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결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홍중인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12월 (서기 1611년 1월 28일, 양력 추정)
보내주신 편지를 옥중에서 받고 보니 그대 볼 낯이 없습니다. 진작 그대의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오늘 같은 일을 당했겠습니까. 옛날 마원 장군이 아우 소유의 말을 떠올렸던 것도 그것이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의 은혜가 두터우니 결코 저를 죽을 곳으로 내몰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영동 지방으로 귀양 가고 싶지만, 그곳이 제 고향이라서 안 된다고들 합니다. 우리에 갇힌 원숭이나 새장에 갇힌 새나 그 운명은 남의 손에 달렸으니, 풀어 주는 것도 운명이요 다그치는 것도 운명인데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용어) 마원은 후한 때의 장수로, 신식후라는 봉호를 받았다. 그의 아우 소유는 일찍이 형에게 "선비로 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저 먹고 입는 것이 모자라지 않고, 작은 수레와 느린 말을 타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착한 선비라는 말을 들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훗날 마원이 먼 남쪽 땅으로 정벌을 나가 고생하던 중 아우의 그 말을 문득 떠올렸다는 옛이야기이다. 허균은 이 고사를 빌려, 진작 홍중인의 충고를 들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뜻을 전하고 있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정유년, 1597년) 8월 (서기 1597년 9월 25일, 양력 추정)
강을 건너던 날, 한 미녀가 동쪽 언덕을 서성이고 있었네. 그런데 배는 어느새 강 한복판에 이르러, 돌아보니 마치 은하수 너머 직녀를 바라보는 듯 아득하기만 했네. 진강 나루에 이르러서는 마중 나왔던 벼슬아치도 인사를 하고 돌아갔지. 십 리쯤 가다가 다시 돌아보니 그 벼슬아치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하물며 그 미녀가 보이겠으며 그대인들 보였겠는가.
장자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대를 배웅하던 사람이 언덕에서 돌아가 버리니, 그대는 이제 그만큼 멀어져 버렸구나.'
나도 지금 꼭 그 말을 하고 싶다네.
(용어) 이여인은 이재영을 가리킨다. '여인'은 이재영의 자, 즉 흔히 부르던 또 다른 이름이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병오년, 1606년) 2월 (서기 1606년 3월 23일, 양력 추정)
어젯밤 소랑이라는 여인을 불러 왔는데, 박엽이 하도 조르는 바람에 마지못해 만나 보았네. 찬찬히 뜯어보다가 문득 서러움이 북받쳐 고개를 돌려 벽을 향했는데, 촛불 그림자 속에 비친 헝클어진 머리와 지워진 화장, 구겨진 옷차림, 부드러운 얼굴이 곱게 단장하고 고운 옷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웠네. 그제야 서시가 얼굴을 찡그리자 못생긴 모모가 그 흉내를 냈다는 이야기를 비로소 믿게 되었다네.
잠자리에 들어서는 우는 듯 하소연하는 듯하더니, 십 년 전 옛일을 이야기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사뭇 다정하게 이야기하면서도 한마디도 틀리는 법이 없어 또 한 번 넋을 잃었다네. 그대는 한번 정겨운 사연의 글을 지어 이 일을 기록해 주게.
(용어) 서시는 중국 월나라의 이름난 미인이고, 모모는 그와 반대로 못생긴 여인을 가리키던 이름이다. 서시가 속병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자 그 모습마저 아름답다고 여긴 못생긴 여인 모모가 덩달아 얼굴을 찡그렸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표현으로, 못난 사람이 함부로 남을 흉내 낸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병오년, 1606년) 5월 (서기 1606년 6월 19일, 양력 추정)
연주에서 온 나그네가 대정강에 이르러 배 위에서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말도 못 하고 눈물만 그렁그렁하기에, 나는 차마 마주 보지 못했네. 배가 떠나려 하자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헤어지는데, 그 순간 강산이 온통 빛을 잃은 듯했으니, 만약 자네가 곁에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병오년, 1606년) 5월 (서기 1606년 6월 23일, 양력 추정)
18일에 대동강을 건너려 하자 박엽이 굳이 붙들었네. 다시 붙잡힐까 겁이 나서 몰래 강가의 작은 거룻배를 찾아가 강을 건넜는데, 그날 밤에는 이별한 마음이 사무쳐 잠을 이루지 못했네. 뱃전을 베고 누워 있자니 꿈속에서 배가 움직이기에 채염이 배를 미는 것이라 착각했다네. 놀라 깨어 보니 돛이 바람을 받아 배가 나아가고 있더군.
정오 무렵 생양 땅에 이르니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려 섬돌 옆 약초를 적셨는데, 주룩주룩 떨어지는 그 빗물이 마치 상강가에서 아황이 흘리던 눈물 자국과도 같았으니, 이런 때에 마음이 괴롭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심이 아닌 꾸며낸 말일 것이네.
(용어) 채염은 후한 때 학자 채옹의 딸로, 전란 중에 북방으로 끌려가 오랑캐 땅에서 살다가 훗날 고향으로 돌아온 기구한 사연으로 유명한 여인이다. 아황은 순임금의 아내로, 순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상강가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진다. 허균은 이 두 여인의 이야기를 빌려 이별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월 (서기 1608년 3월 1일, 양력 추정)
나는 큰 고을의 수령이 되었는데, 마침 자네가 사는 곳과 가까우니 어머니를 모시고 이리로 오게. 내가 마땅히 내 녹봉의 절반을 나누어 대접할 터이니, 결코 양식이 떨어지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네.
자네와 나는 처지는 다르지만 취향은 같고, 자네의 재주는 나보다 열 배나 뛰어난데도 세상에서 버림받기는 나보다 훨씬 심하니, 이 점이 나는 늘 기가 막힐 따름이네. 나는 비록 운이 기박해도 몇 차례나마 고을 수령을 지내며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지만, 자네는 입에 풀칠하기조차 힘들지 않은가. 세상에 불우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우리 같은 이들의 책임일세. 밥상을 마주할 때마다 몹시 부끄러워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으니, 어서 오시게. 자네만 온다면 이 일로 비방을 듣는다 해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겠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4월) (서기 1608년 5월 28일, 양력 추정)
자네 애첩은 몹시 깜찍하고 지혜로우니, 젊음이 잠깐이라는 것쯤은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네. 그런데 그 사람이 비구니가 되어 끝까지 절개를 지킬 수 있겠는가? 속담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했으니, 한번 힘써 보게나.
그가 비록 화려한 휘장과 맛 좋은 고아주 맛에 익숙해 있다지만, 눈 녹은 물로 끓인 차도 나름대로 특별한 운치가 있는 법이네. 혹시 그가 나를 찾아온다면 틀림없이 "하마터면 인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다"고 말할 걸세. 자네가 그에게 "날아가는 자 위에 올라타는 자가 있다"고 말해 준다면, 반드시 그 말에 마음이 움직일 걸세.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7월) (서기 1608년 8월 24일, 양력 추정)
처마에서 빗물이 쓸쓸히 떨어지고 향로에서는 향내가 은은히 풍기는데, 지금 벗 두어 사람과 함께 소매를 걷고 맨발로 방석에 기대어 하얀 연꽃 곁에서 참외를 쪼개 먹으며 번뇌를 씻어 볼까 하네. 이런 자리에 우리 여인이 빠져서야 되겠는가.
자네의 늙은 아내가 틀림없이 으르렁대며 자네 얼굴을 고양이 상판처럼 만들어 놓을 테지만, 늙었다고 겁먹고 움츠러들지 말게. 문 앞에서 기다리는 종이 종이우산을 들고 있으니 가랑비쯤은 넉넉히 피할 수 있을 걸세. 어서 오시게. 모이고 흩어지는 일이 늘 있는 것은 아니니, 이런 모임인들 어찌 자주 있겠는가. 흩어진 뒤에는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2월) (서기 1609년 1월 20일, 양력 추정)
이번 부임은 사람들의 비방을 잠재우려는 것일 뿐, 오래 있을 생각은 없네. 그런데 승문원 판교에 임명된 것은 승진할 기회이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친구들도 나를 말리며 "벼슬살이는 붉은 옷을 입는 정도면 충분하다"(당상관이 되었다는 뜻이다)고 했는데, 나 역시 그 말대로 그대로 있기로 했네. 다만 우스운 것은 원숭이가 자루 속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꼴이라는 것이네.
계륵이 대체 무엇이기에 감히 사람을 이렇게까지 뒤흔든단 말인가. 이런 때는 도연명이 마치 하늘 위 신선처럼 우러러 보이네.
(용어) 계륵은 닭갈비를 뜻하는 말로, 먹을 것은 별로 없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하찮지만 버리기 아까운 벼슬자리를 빗댄 표현이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월) (서기 1609년 2월 19일, 양력 추정)
내가 이번에 또 사신 행차를 따라가게 되어, 십 년 사이에 세 번이나 그 밑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어찌 지겹지 않겠는가. 사신 대감이 꼭 자네를 데려가고 싶어 하시네. 자네가 나오고 싶지 않다면 그만이지만, 세상에 뜻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부디 나와 주게. 우리 두 사람이 함께 기록을 맡아 가는 것도 즐거운 일이고, 서쪽으로 천 리 길을 가며 예전에 노닐던 곳을 다시 밟는 것도 유쾌한 일이네. 비록 임금이 돌아가신 때라 풍류와 여색을 즐기지는 못하더라도, 여관의 푸른 등불 아래 마주 앉아 향을 피우고 옛일과 오늘 일을 이야기하며 시를 지으면서 봄 석 달을 보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네.
우리 두 사람 다 이제 늙어 가는 처지라 함께 모일 날이 많지 않고, 남은 날도 얼마 되지 않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자네도 틀림없이 갓을 털고 일어설 걸세. 간절히 기다리겠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3월) (서기 1609년 4월 18일, 양력 추정)
신흠(호는 현옹)이 내 '채호영'이라는 시를 구해 보고는 몹시 칭찬하며,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도 따라오지 못한다고 했다더군. 이건 지나친 칭찬일세. 자네는 평소에 말이 많으니 부디 조심해서 함부로 주석 같은 것은 달지 말게. 한나라의 모형과 정현이 시경의 위풍과 정풍에 주석을 달았다가 본래 뜻에서 크게 벗어나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말깨나 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데, 자네도 그런 잘못을 본받으려는 것인가.
훗날 늙어서 절간에서 차 달이는 연기가 봄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보게 될 때, 남이 귀찮게 재촉하기를 기다릴 것 없이 스스로 재미있고 달콤한 이야기를 지어, 마치 노공의 북리지에 화답하듯 한다면, 이 세상에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책이 보태지는 셈이 될 것이네.
(용어) 노공의 북리지는 당나라의 손계가 지은 책으로, 그 시대 황제와 사대부, 평민들이 기생과 어울려 놀던 일을 적은 것이다. 노공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손계인 듯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3월) (서기 1609년 4월 18일, 양력 추정)
어젯밤 달빛이 대낮처럼 밝기에 문 밖으로 산보를 나갔더니, 안개 낀 버드나무가 무성히 우거지고 흩날리는 꽃잎이 옷깃에 스쳐, 그윽한 봄기운이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더군.
늙은 중이 아니고서야 어찌 외로이 홀로 앉아 그냥 지낼 수 있겠는가. 자네 집을 내려다보니 고요하여 사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더군. 향기 그윽한 방 안 원앙 이불 속에서 달콤한 꿈을 꾸고 있으리라 상상하니, 그 즐거움 또한 더할 나위 없었겠네.
나는 붉은 종이 두 장을 자네의 한리 자리와 바꾸고 싶네. 한리 자리 정도면 내 소원으로는 충분하다고 보네. 누가 자네더러 운수가 기구하다 하겠는가. 자네가 이 말을 들으면 우스워서 배를 움켜쥐고 웃을 걸세.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경술년, 1610년 5월) (서기 1610년 6월 21일, 양력 추정)
병 때문에 연경(중국 베이징)으로 가는 사신 행차에 오르지 못한 죄로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네. 살아 있어야 벼슬도 있는 법이지. 이제부터는 호남 땅의 벼슬 없는 선비 한 사람일 뿐이네.
이여인에게 보낸 편지 (신해년, 1611년 3월) (서기 1611년 4월 27일, 양력 추정)
내가 이곳으로 옮겨 오고서 자네를 자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뻐하였는데, 몇 달이 지나도록 만나지 못했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서글퍼지는데, 자네가 찾아와 이 서글픈 마음을 풀어 줄 날은 더디기만 하니, 하루가 천 년처럼 지루하네.
물줄기 하나만 건너면 닿을 거리이니, 서둘러 얼른 오도록 하게.
양자점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0월) (서기 1607년 12월 3일, 양력 추정)
돌아가신 자네 아버님은 문장이 매우 뛰어나 참으로 큰 문장가였네. 나는 글재주가 부족한데 어떻게 그분의 이름을 더 빛나게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바쁘게 짓느라 하고 싶은 말을 다 담지도 못했으니, 부처님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버리든 취하든, 그것은 오직 자네에게 달려 있네.
(용어) 양자점은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양경우를 가리킨다. 자점은 그의 자다.
양자점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들으니 그대는 먹을 것조차 넉넉지 못하다던데, 목화솜은 대체 어디서 났는가. 거절하자니 공손치 못한 것 같고, 받자니 차마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그대의 후한 뜻이 고마워 그것으로 속옷을 지어 입었네. 앉으나 누우나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겠네.
가을 산의 단풍과 국화 사이에서 두건을 비스듬히 쓰고 길게 시를 읊조리기에 딱 좋은 계절이니, 방장산(지리산을 달리 부르는 이름)의 바람과 안개가 모두 그대의 시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리라 생각되네. 간절히 그리는 마음, 이루 다 말할 수 없네.
이사상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0월) (서기 1609년 11월 11일, 양력 추정)
그대가 지은 윤씨의 비문 시는 참으로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명작이지만, 나에게 끼친 해가 매우 크네. 그대가 직접 지었다고 말한들 '여장'이라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걸세. 앞으로 어떻게 해명할 셈인가? 나는 이 일 때문에 무려 세 번이나 조정 관리들의 탄핵 논의에 올라야 했는데, 여러 사람의 변호 덕분에 겨우 빠져나왔네. 이번 일로 그 시가 나를 비방받게 한 것이 적지 않으니, 앞으로는 부디 조심하여 이런 일을 벌이지 말게나.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어무적(자는 어잠부)이 '매화나무를 베다'라는 시를 읊었던 일 말일세. 아,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네.
(용어) 이사상은 이원형의 자다. 이문학관이라는 벼슬을 지냈다.
모씨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2월) (서기 1607년 3월 12일, 양력 추정)
서쪽에서 온 사람이 전하기를, 나옹(화가 이정의 호)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통곡하며 피눈물을 흘리노니, 하늘이여 원통하도다. 나는 이제 누구와 함께 세상 바깥에서 노닐 것인가.
세상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소중히 여기지만, 나는 그의 사람됨을 소중히 여긴다네. (※ 원문에 두 글자가 빠져 있다) 알아줄는지 모르겠네. 풍류가 하루아침에 다한 듯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용어) 이 편지를 받은 사람의 이름은 원문에도 밝혀져 있지 않아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나옹은 조선 중기의 화가 이정의 호다.
모씨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8월) (서기 1607년 10월 5일, 양력 추정)
어젯밤 꿈에 나옹을 만났는데, 그가 죽음이 참으로 즐겁다고 말하더군. 이거야말로 삶을 훤히 꿰뚫어 본 사람의 말일세. 꿈에서 깨어 생각해 보니, 이 몸조차 본디 내 것이 아닌데 덧없는 인생살이의 온갖 일을 뭐하러 마음에 담아 두겠는가.
결국에는 벼슬을 던져 버리고 바다 위 갈매기와 벗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네. 이 마음은 맑은 물을 두고 맹세하듯 변함이 없네.
이나옹에게 보낸 편지 (을사년, 1605년 7월) (서기 1605년 8월 28일, 양력 추정)
석봉과 작별한 지 겨우 몇십 일밖에 안 되었는데, 느닷없이 부고를 들으니 가슴이 미어지고 살을 꼬집어도 놀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세상 사람들이 자네의 그림을 굳이 배대유(자는 자장)라는 이의 그림과 우열을 다투는 맞수로 여기고 있다는 점일세. 자네도 필시 이를 욕되다 여길 텐데, 정말 어떠한가?
(용어) 이나옹은 선조 시대의 화가 이정을 가리킨다. 삼대에 걸쳐 화가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열 살에 이미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다. 나옹은 그의 호이고, 자는 공간이다.
이나옹에게 보낸 편지 (정미년, 1607년 1월) (서기 1607년 2월 11일, 양력 추정)
큰 비단 한 필과 갖가지 무늬의 노랗고 푸른 비단을 우리 집 종아이 편에 함께 부쳐, 서경(평양을 달리 이르는 말)에 있는 자네에게 보냈네. 산을 뒤로 하고 시냇물을 마주한 집을 그려 주되, 다음과 같이 배치해 주게.
온갖 꽃과 곧게 뻗은 대나무를 천여 그루 심고, 가운데는 남쪽으로 향한 마루를 틔워 그 앞 토방을 넓게 하고, 거기에 패랭이꽃과 금선초를 심고, 괴석과 오래된 화분을 늘어놓아 주게. 동쪽 안방은 휘장을 걷어 두고 책 천 권을 진열하며, 구리 병에는 공작 꼬리깃을 꽂고, 산 모양으로 빚은 술동이는 비자나무 탁자 위에 놓아 주게. 서쪽 창문을 열어 두면, 사랑하는 첩이 나물국을 끓이고 손수 동동주를 걸러 화로에 데우는 동안, 나는 방 한가운데 방석에 몸을 기대고 누워 책을 읽고 있고, 자네는 (※ 원문에 두 글자가 빠져 있다)와 함께 곁에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즐기는 모습을 그려 주게. 다들 두건을 쓰고 비단신을 신되 도복에는 띠를 두르지 않은 차림이고, 한 줄기 향 연기는 발 너머로 피어오르며, 학 두 마리는 돌이끼를 쪼고, 산에서 자란 아이 종은 빗자루를 들고 와 꽃잎을 쓸고 있는 모습이면 좋겠네. 이렇게만 된다면 사람으로 태어나 할 일은 다 한 셈이라고 생각하네.
그림이 다 되거든, 마침 돌아오는 태징공(이수준의 자가 태징이다) 편에 부쳐 주시길 간절히 바라네.
서산노사에게 보낸 편지 (임인년, 1602년 2월) (서기 1602년 3월 8일, 양력 추정)
노스님께서 금강산으로 떠나셨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묘향산에 계셨습니까? 저는 벼슬살이에 매여 바쁜 탓에 신선이 산다는 산을 눈앞에 두고도 오르지 못하니, 이 고단한 삶이 언제나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는 노스님을 벗처럼 여기셨으니, 저 역시 대대로 이어 온 정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저희 부형의 친필 글씨가 모두 그곳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랏일이 마무리되면 반드시 절을 찾아 뵙겠으니, 노스님께서는 문을 열어 두고 기다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용어) 서산노사는 선조 때의 이름난 승려이자 승병장이던 휴정대사를 가리킨다. 속세의 성은 최씨이고, 서산은 그의 호이다.
서산노사에게 보낸 편지 (임인년, 1602년 3월) (서기 1602년 5월 6일, 양력 추정)
저는 번뇌의 씨앗에서 태어난 몸이라,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이 육신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제 몸속에서는 눈·귀·코·혀·몸·마음이라는 여섯 감각의 구멍이 서로 부딪치며 끝없이 다투니, 어떻게 다툼 없는 고요한 경지로 이를 다스리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남이나 저나 세상 만물은 모두 텅 빈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중생의 몸은 아득히 텅 빈 하늘과 같으니, 번뇌인들 어디에 발붙일 곳이 있겠는가." 라고 했는데, 이 말이야말로 제 처지를 그대로 말해 주는 듯합니다. 노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디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용어) 육착은 눈·귀·코·혀·몸·마음, 이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통해 온갖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이르는 불교 용어다. 무쟁삼매는 다툼 없는 이치에 온전히 머물러 다른 것과 다투지 않으며, 흐트러진 마음을 한곳에 모아 헛된 생각에서 벗어난 고요한 경지를 뜻한다.
서산노사에게 보낸 편지 (임인년, 1602년 4월) (서기 1602년 6월 4일, 양력 추정)
큰 깨우침을 내려주시고 또 어록까지 보내주셔서 며칠을 두고 읽었더니, 속세의 잡념이 말끔히 사라져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꽃을 들어 보이자 미소로 화답했다는 그 유명한 이심전심의 경지가 과연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이제야 알 듯합니다. 이제는 노스님 문 앞에 세워 둔 깃대를 제가 넘어뜨려야 할 성싶습니다.
(용어) 염화미소는 석가모니가 연꽃을 들어 보이자 다른 제자들은 그 뜻을 알지 못했으나 가섭만이 미소지었고, 이에 석가모니가 그에게 불법의 진리를 전했다는 옛이야기로, 말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으로 뜻이 통하는 것을 이른다. 찰간은 절 앞에 세우는 깃대인데, 예로부터 선승들 사이에서는 법력을 다투는 상대의 깃대를 쓰러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가렸다고 하며, 여기서는 노스님을 상대로 한바탕 겨뤄 볼 만하다는 자신감 넘치는 농담이다.
서산노사에게 보낸 편지 (임인년, 1602년 5월) (서기 1602년 7월 4일, 양력 추정)
도의 핵심을 가르쳐 주셨지만, 솔직히 말씀만 헛되이 쓰신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저 있는 것은 죄다 텅 비우고, 없는 것은 굳이 채우려 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타고난 성품대로 유유히 노닐고 인연 따라 거리낌 없이 지내다가 속된 마음마저 사라진다면, 성인의 경지가 뭐 그리 멀겠습니까.
다만 걱정되는 것은, 형체도 자취도 없는 그 마음이 대체 어떤 계기로 우러나오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오나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마땅히 노스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 노스님께서는 너무 심하게 다그치지 말아 주십시오.
송운대사에게 보낸 편지 (갑진년, 1604년 2월) (서기 1604년 3월 15일, 양력 추정)
대사께서는 아직 선의 오묘한 이치에 통달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아 움직이지 않게 하는 일이 반드시 온갖 인연을 말끔히 끊어 낸 뒤에야 되는 것이겠습니까? 조정에서든 저잣거리에서든 마을 골목에서든,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제가 듣기로 한 생각이 밝으면 그 한 생각이 곧 깨달음이고, 한 생각이 편안하면 그 한 생각이 곧 열반이라 하였습니다. 저는 다만 이 마음이 오래도록 고요히 가라앉아 맑아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용어) 송운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승려로, 법명은 유정이고 속세의 성은 임씨다. 승병을 총괄하는 자리에서 활약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일본에 건너가 강화를 맺고 돌아왔다. 사명대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송운대사에게 보낸 편지 (병오년, 1606년 1월) (서기 1606년 2월 21일, 양력 추정)
능가경 네 권은 바로 첫 조사인 달마 선사가 마음으로 전한 가르침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도 유독 구절을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조차 알기 어렵고, 나와 있는 주석도 깊이 있는 풀이가 없습니다. 토도 없는 원문만으로 그 뜻을 어찌 깨칠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만 번을 읽으면 저절로 통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에 이 경전의 판본이 없어서, 뒤에 공부하는 이들에게 그 혜택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제가 가지고 있던 중국본을 꺼내어 보내 드리니, 주지 스님으로 하여금 자금을 모아 간행하게 하십시오. 이 또한 좋은 인연이 될 것입니다.
해안 경석에게 보낸 편지 (무신년, 1608년 10월) (서기 1608년 11월 22일, 양력 추정)
너는 무엇에도 집착하지 말되, 그렇다고 아무 감각 없는 완고한 텅 빔에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만약 자기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스승들이 은밀히 전한 가르침조차 다 남의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만약 본성을 본다면 마귀나 여우의 허튼소리조차 모두 오묘한 진리가 된다. 집착하는 순간 나와 남의 구별이 생기고 만다. 부디 조심하여라.
작은 선행 하나라도 게으르고 나태한 데서는 결코 나오지 않는 법이니, 힘써 정진하여라.
(용어) 해안 경석은 조선의 승려로, 호는 중관이고 속세의 성은 오씨이며 경석은 그의 승명이다. 휴정대사(서산노사)의 문하에서 배워 깨달음의 요체를 얻었고, 임제종의 정통 법맥을 이어받았다고 전해진다.
계랑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1월) (서기 1609년 2월 20일, 양력 추정)
그대가 보름날 저녁에 비파를 뜯으며 '산자고'라는 노래를 읊었다고 들었소. 어째서 조용하고 으슥한 곳에서 하지 않고, 하필 윤씨 선정비 앞에서 그리하여 남의 흠을 잡기 좋아하는 자들 눈에 띄고, 떠난 사또를 기리는 비석을 시로 더럽히게 만들었소? 그것은 그대의 잘못인데 비방은 애꿎게 나에게 돌아오니 억울하기 짝이 없구려.
요즘도 참선은 하고 있소? 그리운 마음이 사무치오.
(용어) 계랑은 전라도 부안 지방의 기생으로, 시와 글에 능하고 노래와 거문고 솜씨도 빼어났다고 전해진다.
계랑에게 보낸 편지 (기유년, 1609년 9월) (서기 1609년 10월 12일, 양력 추정)
봉래산에는 가을빛이 한창 무르익었을 테니, 돌아가고 싶은 흥이 도도하게 이는구려. 그대는 필경 이 성성옹(허균 자신을 가리키는 별호)이 시골로 돌아가겠다던 약속을 어겼다고 비웃을 것이오. 그때 만약 한순간이라도 마음이 잘못 흔들렸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십 년이나 이토록 다정할 수 있었겠소.
이제야 알겠소. 풍류를 안다던 진회해(송나라 시인 진관)조차 참된 사내는 아니었으며, 헛된 생각을 끊어 버리는 것이야말로 몸과 마음에 이로운 일이라는 것을. 언제나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을는지, 종이를 마주하니 마음이 서글퍼지오.
성소부부고 제22권
10. 14:40
성소부부고 제22권 · 설부 1 · 성옹지소록 (인 및 상)
출처: 성소부부고 제22권, 설부 1, 성옹지소록 인(서문) 및 상권
배경: 1610년, 허균은 죄를 얻어 의금부 옥에 마흔두 날 갇혀 있다가 함경도 홍원(함산)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잠 못 이루는 옥중의 밤마다 평소 듣고 겪은 조정의 이야기와 기이한 일들을 두서없이 적어 두었는데, 귀양지에 도착한 뒤 이를 정리하여 엮은 것이 이 "성옹지소록"이다. 남의 흠을 들추는 내용과 인과응보·귀신·꿈·점술·음란한 이야기는 모두 지우고 194편만 남겼다고 밝히고 있다. 상권은 명나라와 조선의 외교 의전, 조정 관청들의 연혁과 권한 변화, 과거 시험과 벼슬살이에 얽힌 온갖 일화, 그리고 허균 자신의 두 형과 집안에 얽힌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어, 조선 관료 사회의 실제 돌아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이다.
성옹지소록을 쓰게 된 사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경술년(1610년), 나는 죄를 지어 순군옥(의금부의 옥)에 갇힌 지 마흔두 날 만에 함산(함경도 홍원)으로 귀양지가 정해졌다. 옥에 있는 동안 여러 날 사람도 만날 수 없는 데다 밤 또한 길어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등불을 켜고 화로에 불을 피운 채 이불을 두르고 홀로 앉아 있노라니, 문득 평소에 들었던, 조선 역대 임금 때부터 내려온 어진 사대부들의 행적이나 사건 가운데 후일 전례와 고사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들, 그리고 보고 들은 여러 기이한 일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에 종이를 가져다 붓을 녹여 가며 생각나는 대로 적어 상자 속에 넣어 두었다. 그러나 이는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글을 다시 다듬지는 않았다.
귀양지인 함산에 도착한 뒤로는 한가하여 하는 일이 없었다. 하루는 상자를 열어 보니 예전에 적어 둔 것이 있었다. 다 읽어 보니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생각이 들어, 순서만 조금 정리하여 그대로 옮겨 적었다. 그 내용이 대개 자잘한 일들을 적은 것이므로 "성옹지소록", 즉 "성옹(허균)이 자잘한 것들을 적은 기록"이라 이름 붙였다.
정리하는 사이에 남의 단점을 드러내는 내용은 지워 버렸고, 인과응보를 말한 것과 귀신 이야기, 꿈과 점술에 관한 것, 남녀 간의 음란한 내용들도 모두 지우고 나니, 남은 것이 백아흔네 개의 이야기였다. 웃고 이야기하는 자리에 보탬이 되고 정사에 빠진 것을 보충하는 데는 조금이나마 취할 것이 있으리라.
명나라 만력 39년(1611년) 신해년 4월 19일, 교산(허균의 호)은 쓴다.
명나라가 우리나라를 특별히 대우한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명나라가 우리나라를 대우하는 것은 다른 외국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임금이 세상을 떠나거나 즉위할 때 알리는 조서를 내리고, 조문하며 제사 지낼 때 예물을 내려 주고 사신을 보내 위문하는 것이, 마치 명나라 안의 제후국이나 황실의 친왕에게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대개 성종 문황제(명나라 영락제)가 우리 공정대왕(태종의 시호)과 매우 친밀하여, 그를 특별히 대우하고 격려한 것이 다른 왕들에게 하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에 우리도 지극한 정성으로 공경하고 예를 다하였다. 이 때문에 그 뒤로도 대대로 이 관계가 변치 않아 백 년이 지나도록 계속 은총을 받았고, 임진왜란 때에는 명나라가 온 힘을 다해 우리를 구제해 주어 마침내 우리 국토를 되찾고 나라를 다시 일으키게 하였으니, 아,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명나라 사신을 보내는 절차와 환관 사신의 폐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명나라 황제가 즉위하거나 맏아들이 태어나거나 태자를 책봉할 때마다, 그때그때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서를 내렸다. 사신은 한림원이나 감찰·간쟁을 맡은 관원 중에서 보냈고, 자잘한 일이 있으면 육부의 실무 관원을 보냈으며, 조문하고 제사 지낼 때도 이런 실무 관원을 보냈다.
우리나라 임금을 책봉하거나 세자를 책봉할 때는 환관을 사신으로 보냈는데, 환관을 시켜 조서를 보내는 것은 큰 은전이었다.
중국에서는 황실의 친왕이나 제후를 책봉할 때도 환관을 보내지 않는데 우리나라에만 보냈으니 그 영예로움이 이보다 더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중국에 들어가 환관이 된 자가 처음에 사신으로 오기를 황제에게 청하여 파견된 데서 비롯되었는데, 이것이 그대로 관례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이것이 말할 수 없이 큰 폐단이 되고 있다.
황장손 탄생을 알린 특별한 조서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중국 영락 연간(명나라 성조 때)에 황제의 맏손자가 태어났을 때는 조서를 보내 알리지 않았는데, 지금 황제는 을사년에 맏손자가 태어나자 특별히 한림원 수찬 주지번과 형과 도급사 양유년을 보내 조서를 반포하였으니, 이 또한 남다른 예우였다.
조선 임금들이 중국에서 받은 시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가 역대 임금 때부터 중국에서 받은 시호는 모두 아름다웠다. 그중 강헌(태조의 시호)과 강정(성종의 시호)이 가장 훌륭한 시호이고, 장헌(세종의 시호)과 소경(선조의 시호)이 그다음이며, 공헌(명종의 시호)이 또 그다음이다. 다만 인종은 그 훌륭한 덕에도 불구하고 "영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시호를 정하는 법에 "총애와 녹봉이 빛나고 큰 것을 영이라 하고, 너그럽고 편안하게 천수를 다한 것을 정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처럼 평범한 시호는 인종의 높고 빛나는 업적과는 걸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이를 서운하게 여긴다.
시호를 정하는 절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는 처음에 시호 제도를 중하게 여겨서, 정2품 이상의 실제 벼슬을 지낸 사람과 공신으로 추증된 사람이 아니면, 아무리 선량한 행실과 큰 공로가 있어도 시호를 내리지 않았다.
시호를 의논할 때는 먼저 봉상시(제사와 시호를 맡은 관청)에서 해당자의 행적을 적은 글을 받아 어울릴 만한 여러 시호 후보를 적어 이조로 보내고, 이조에서는 홍문관에 모여 이를 정하여 임금의 재가를 받았으니 매우 신중하게 처리하였다.
시호를 받을 만한 사람이 죽으면 그 집안에서는 곧바로 행적을 적은 글을 갖추어 담당 관청으로 보낸다. 죽은 이가 평소 내세울 만한 공덕이나 행실이 없더라도 그 집안에서는 시호를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쁜 뜻을 담은 시호가 내려도 사양할 수 없었다. 근래에는 이러한 풍조가 없어졌다.
처음에는 시호를 논의할 만한 집안이 있어도 나쁜 시호를 받을까 두려워 청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는데, 끝내는 이름난 신하와 큰 공로가 있는 사람까지도 따라서 시호를 청하지 않게 되었다. 이리하여 임금이 만대에 걸쳐 시행해야 할 상벌의 도구를 시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개탄할 일이다.
선조 때 낮은 벼슬로도 시호를 받은 학자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왕(선조) 때에는 벼슬을 추증받고 시호를 받은 사람이 많았다. 그중 생전에 낮은 관직을 지냈으면서도 시호를 받은 이로는 김굉필(시호 문경)과 정여창(시호 문헌), 서경덕(시호 문강)이 있는데, 이는 실로 특별한 은전이었다. 정암(조광조의 호) 선생도 벼슬을 추증받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나의 둘째 형(허봉)이 경연에 참석했을 때 미암(유희춘의 호) 선생의 시호를 청했으나, 임금은 다만 좌찬성으로 벼슬을 추증하도록 하고 시호를 내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의정부의 권한이 약해진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 의정부의 권한은 문종 이전에는 매우 높고 무거웠다. 아침마다 삼정승(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출근하면 육조 이하 해당 관청에서 각기 맡은 업무를 가지고 와서 뵙고 아뢰었다.
승정원에서 임금의 재가를 받은 모든 공무는 어느 것이나 다 의정부로 보내어, 대신과 동벽·서벽(품계에 따라 나뉜 자리)의 관원들이 함께 모여 알맞게 처리함으로써 나라의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참여해 결정하였기 때문에, 재상의 권한은 높고 나라의 체통도 엄중하였다. 그 뒤 세조가 왕위를 이어받은 이래로 이런 절차를 없앴기 때문에 의정부의 권한은 줄어들었고, 나라의 기강도 차츰 해이해졌다.
의정부 관원들의 잔치 풍습과 그 폐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의정부에서 공무를 처결하던 시절에는, 좌사인·우사인과 검상(모두 의정부의 실무 관원)은 모두 이조의 낭관 중에서 뽑았고, 사록 두 명은 으레 홍문관의 낮은 관원으로서 예문관 벼슬을 겸임하고 있는 자를 임명하였으며, 새로 급제한 사람 한 명을 녹사로 삼았다. 이들이 각기 여섯 부서를 나누어 맡아 종일 응대하느라 몹시 바빠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기생과 음악을 베풀어 즐기게 하였는데, 의정부에서 공무를 처결하는 일이 없어진 뒤에도 이런 풍습은 그대로 남아, 대신은 대청에 모여 앉았는데 사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노랫소리와 풍악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였다.
심지어는 돈과 곡식을 관장하는 낭관을 불러다 벌주를 먹인 다음 그 술값을 받아 내거나, 저잣거리의 부자를 잡아들여 공공연히 비용을 뜯어내는 등의 방법으로 재물을 거두어 창고에 쌓아 두고 광대와 기생에게 주는 화대로 쓰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것이 선조 때에 장령(사헌부 관원) 유몽학이 경연에서 이 폐단을 강력히 아뢴 뒤로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사인을 대하는 정승들의 서로 다른 태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둘째 형이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인으로 오래 재직하다 보면 그동안 많은 정승을 겪어 보게 되는데, 그중 정승 권철은 성품이 매우 엄숙한 분이었지만 자신도 사인 벼슬을 거쳤기 때문에 사인들의 술잔치를 매우 기쁘게 여겼고, 노랫소리와 풍악 소리가 온 천지를 진동해도 모르는 척하였다. 반면에 정승 노수신은 매사에 지극히 너그러운 분이었지만, 사인들이 술자리를 벌일 때면 언제나 '노래와 풍악이 너무 소란스럽다'며 여러 차례 이를 금지시켰다. 이는 그분이 사인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검상이라는 벼슬 이름의 유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검상(의정부의 실무 관원)은 형조 상복사(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신중히 재심하던 부서)의 정랑을 관례상 겸임하였다. 그래서 예전에는 형조 낭관청 서편에 북루가 있었고,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곳을 검상청이라 부른다.
전례와 옛 기록을 관리하는 관청이 없는 아쉬움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는 전례와 고사를 전담하는 관청이 없다. 각 관청마다 마땅히 지난 기록을 모아 둔 등록이 있어야 할 텐데도 모두 없다. 역대 임금들의 길례와 흉례에 대해서도 모아 기록해 놓은 것이 없다. 그래서 한 시대의 제도와 그 변천을 살펴볼 길이 없다.
예전에는 의정부에 가각고라는 것이 있어 녹사가 맡아 관리하였다. 이곳에는 임금의 모든 지시와 대신들이 올린 의견, 군사와 나라의 중요한 문서들을 모두 보관해 두고 필요할 때 참고하도록 하였는데, 성종 이후로는 없어져서 더 이상 시행되지 않는다.
가각이라는 이름은 송나라 때의 관제에서 왔다. 송나라에서는 학문에 능한 신하를 뽑아 이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중서성과 추밀원 두 곳에 모두 두었다. 이는 대개 옛 전례와 고사 자료를 모으고 조사하기 위해 둔 제도였다. 우리나라도 초기에는 이를 본떠서 설치했던 듯하다.
사간원의 권한이 줄어든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사간원은 예전에 승정원에 딸려 있었다. 좌사간·우사간·좌사의·우사의를 두었는데, 이들은 당상관으로서 이름에 "대부"라는 두 글자를 붙여 불렀고, 이 밖에 헌납과 정언을 두 명씩 두었다. 이들이 각기 여섯 부서를 나누어 맡았고, 날마다 교대로 당직을 섰다.
무릇 여러 관청과 각 도로 내려지는 공문은 반드시 사간원을 거치게 되어 있었는데, 그중에 온당치 못한 것이 있으면 논박하여 되돌려 보냈다. 이는 중국의 육과(황제의 명을 살피고 되돌리는 여섯 부서)의 규정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간관과 사헌부를 따로 두어 서로 맞서는 두 관청으로 만든 다음, 사의대부는 없애고 대사간·사간·헌납·정언 두 명만을 두었다. 이때부터 임금의 명을 되돌려 보내던 일은 맡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여러 관청과 각 도에서 위에 청하여 이전의 지시를 고치는 것에 온당치 못한 점이 많아도, 사헌부와 사간원이 이를 규찰하여 바로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의금부의 유래와 그 권한 변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의금부는 옛날 중국의 집금오(궁궐과 도성을 지키던 벼슬)에 해당한다. 고려에서는 순군부라 하였는데, 상만호·부만호를 두어 궁궐을 지키는 친위군을 관장하였다.
처음에는 옥을 설치하여 친위군 가운데 군령을 어긴 자를 가두던 곳이었다. 중기에 와서는 국왕이 직접 죄수를 판결하였고, 조정의 신하로서 임금의 뜻을 거스른 자도 바로 이곳에 가두었다. 대개 당시 사대부는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죄를 지으면 모두 사헌부의 옥에서 다루었고, 임금이 직접 다루는 옥이나 특명으로 다스리는 옥은 따로 없었다. 말엽에 와서는 이곳이 벼슬아치만을 다루는 옥이 되어, 관직에 있는 자의 범죄는 모두 이곳에서 다루었다.
우리나라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따르다가 얼마 안 가서 곧 의용순금사로 이름을 고치고 판사·지사·동지사 네 명을 두었다. 낭관은 문관과 무관을 섞어 임용하였으며, 궁궐을 지키는 친위군을 거느리는 것은 고려 때와 같았다.
그 뒤 의금부로 이름을 고치면서 군사를 거느리는 권한은 없어지고 임금이 직접 관여하는 옥으로서 죄수를 판결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삼았으며, 임금의 행차가 있을 때와 안팎의 출입 금지 구역에 낭관이 하인들을 거느리고 가서 비상시에 대비하여 경계할 뿐이니, 이 또한 처음 관직을 설치한 본래의 뜻을 잃은 것이다.
부원군이라는 칭호의 유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지금은 공신으로서 정1품에 오른 사람을 으레 부원군이라 부르는데, 이 또한 본래의 뜻을 잃은 것이다.
고려에서는 대신을 으레 군에 봉하였고, 추밀원을 거쳐 문하부의 관직을 지낸 자는 두 관부의 벼슬을 두루 거쳤다 하여 그 관함을 부원군이라 하였다.
이 말은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으니, 성균관의 하례가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축하할 때 낮은 관직에서부터 삼정승 자리까지 좋은 관직을 죽 부르다가 끝에 가서 "부원군"이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영돈녕부사 두 명을 둔 일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1품이라 해서 정승이 아닌데도 부원군이라 부르는 것도 잘못된 일이다. 영돈녕부사는 《경국대전》에 한 사람만 두도록 되어 있는데, 지금은 특별히 두 사람을 두고 있으니 이는 지금 임금의 뜻이다.
무신년(1608년) 2월에 성영이 정권을 잡자, 연흥부원군 김제남을 영돈녕부사에서 물러나게 하고 문양부원군 유자신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기를 청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성영이 아첨한다고 하였으나, 조선 초기에도 이런 전례가 있었다고 한다.
동인과 서인이 갈라진 발단, 이조 낭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관직은 이조의 낭청이다. 직제학 이하 청요직(명망 있는 요직)에 사람을 올리고 내리는 일은 모두 낭청이 전담하고, 당상관은 이들의 의견을 그대로 따를 뿐이다. 그래서 이조 낭청으로 뽑히기가 매우 어려우며, 사화의 대부분이 바로 이 자리를 둘러싼 다툼에서 비롯되었다.
근래에 동인과 서인이 갈라진 것도, 나의 장인인 김인백(자가 인백, 본명 김효원)이 판서 심충겸이 전랑(이조의 인사 담당 낭관) 자리에 뽑히는 길을 막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서, 선비들의 논의가 지금까지도 갈라져 있다.
김응남이 당쟁을 돌아보며 한 말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승 김응남이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임금의 외척을 전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처음의 논의는 참으로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심충겸이 나랏일에 애쓰는 것을 보니 참으로 충신이다. 그때 선비들의 논의를 지나치게 따랐던 탓에 결국 붕당으로 갈라지고 말았으니, 이 점이 후회스럽다."
계미년(1583년)에 선왕(선조)께서 명하여 이조 낭관이 인사를 추천하는 관행을 폐지하였는데, 병조는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이조 낭관의 빠른 승진과 외직을 꺼리던 풍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옛 규례에 따르면 이조의 낭관은 좌랑(정6품)으로 서른 달을 재직하면 정랑(정5품)이 되고, 정랑에서 다시 서른 달을 재직하면 곧바로 의정부 사인(정4품)으로 승진하였으며, 한 달을 넘기기 전에 당하관 정3품에 올랐다. 여기서 다시 두어 해도 안 되어 당상관이 되었다. 미움을 받거나 선비들의 비판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난 경우에도, 차례를 건너뛰어 승진시키는 일에 급급해서 일 년 안에 반드시 다음 자리로 옮겨 갔다.
찰방(종6품)·판관(종5품)·도사(종5품) 같은 지방 관직은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고 싫어하여 피하고 가지 않으려던 자리였는데, 근래에는 이런 풍조가 사라졌다. 송인수와 김숙도는 모두 찰방으로 나갔고, 오여익은 늙은 아버지를 집에 두고 경성 판관으로 나갔는가 하면, 송홍보는 4품 벼슬을 지냈는데도 전라도사로 나갔으니 매우 이상한 일이다. 이러한 일은 모두 벼슬을 신중히 내리지 않아 요행으로 자리를 얻는 자가 많아진 데서 비롯된 것으로, 결국 사람들이 벼슬살이를 가볍게 여기게 되어 그리된 것이다.
병조의 권한이 비변사로 넘어간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시하는 곳은 병조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 병조 판서가 된 사람은 대부분 변방의 사정을 아는 사람을 뽑아 오래도록 맡겼다. 김종서 같은 이는 십 년 동안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이계동과 유담년은 무신이었으나 역시 십수 년 동안 나라의 군무를 도맡아, 작은 일은 모두 스스로 결단하고 큰일만 대신에게 아뢰었으며, 대신도 그의 조치를 따르고 조금만 손질할 뿐이었다.
비변사가 설치되면서부터는 크고 작은 군사 업무의 처리를 모두 비변사에서 맡게 되었는데, 실무를 맡은 당상관 몇 사람이 전적으로 관장하고 정승의 지시를 받아 시행하였으므로 병조는 멍하니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근래에는 지방의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까지도 비변사에서 뽑게 되어 병조의 권한이 더욱 줄어들었다.
대동법의 뿌리, 공물 제도의 폐단과 개혁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 공물 제도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연산군 때 처음 만들어졌다는 사람도 있지만 틀린 말이다. 성현(호 용재)의 말에 "성종 때 비로소 예산 명세서(횡간)를 만들었다" 하였으니, 연산군 때 시작된 것이 아니다.
찬성 이이가 이 제도를 고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갑오년(1594년)에 서애 선생(유성룡)이 나랏일을 맡았을 때 비로소 줄여서 다시 정하였으나 백성들의 고통은 오히려 심하였다.
근래에 오리 정승(이원익)이 선혜청을 설치하고 먼저 경기 지방에 시행하였는데, 경기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긴다. 그래서 능묘를 조성하는 일과 두 차례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치렀는데도 백성들이 큰 부역인 줄을 모르니, 그 효과가 이미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 어떻게 하면 팔도를 다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오례의를 정한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에서 쓰는 《오례의》(다섯 가지 국가 의례를 정리한 책)는 세조 때 신문충공(시호 문충, 신숙주)이 정승으로 있으면서 총괄하여 정한 것이다. 이는 당나라의 《개원례》를 본뜨면서 옛 예법도 참고한 것이다. 모든 것이 사리에 맞고 편리하여 시행한 지 백여 년이 되도록 폐단이 없었다.
선왕(선조) 때에 와서 유학자들이 오로지 옛 예법만을 따르면서 고친 부분이 많았는데, 간혹 서로 어긋나서 시행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이로써 옛사람들도 시험해 보지 않은 바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세 판서 자리를 비교한 큰형의 말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맏형(허성)이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조·예조·병조 세 판서 중에서 병조 판서는 몸은 힘들어도 계획을 세우는 것은 힘들지 않고, 이조 판서는 계획을 세우기는 힘들어도 마음까지 피곤하지는 않은데, 예조 판서는 마음과 몸이 다 피곤하다." 이는 대개 조정의 큰 의례는 반드시 예조 판서가 총괄하는데, 갑작스레 변통해야 할 예법이라도 생기면 늘 근거가 없음을 걱정하며 이를 정하는 동안 많은 신경을 쓰게 되기 때문에 한 말인 듯하다.
형조의 권한이 줄어든 사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형조는 나라를 세운 초기에는 업무상 권한이 사헌부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형벌과 옥사에 관련된 사건은 "형조에서 아뢰기를……" 하면서 직접 탄핵하였는데, 이런 관행이 언제부터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법을 어기는 것을 금하는 점에서는 사헌부와 같고, 도둑을 처벌하는 기능에서 보면 의금부의 권한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공조 창고를 유독 엄히 감독하는 까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공조는 다른 관청들과 마찬가지로 육조의 하나인데도, 창고의 물품을 출납할 때면 반드시 사헌부 감찰을 불러 놓고 출납한다. 그뿐 아니라 호조의 낭관이 수시로 그 창고를 순회하는데, 마치 호조 자신의 창고를 도는 것과 다름없이 하니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노비 소송을 형조가 아닌 장례원에서 맡는 까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형조가 관장하는 업무는 옥사를 다스리는 것만이 아니라, 숨은 인구를 찾아내는 일도 전담한다. 그러므로 중국 조정에서는 해마다 호구책을 반드시 형조에 해당하는 관청에 보내고, 그 관청이 이를 접수하여 위에 아뢰어 재가를 받은 뒤에 호적을 다루는 관청에서 보관하는 것이 관례다.
우리나라에서는 호적 장부를 모두 호조에서 다루고 형조는 관여하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노비에 관한 소송도 모두 장례원의 판결에 따르고 있는데,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노비를 관장하는 업무도 예전에는 형조에 속해 있어서 도관사가 노비 관련 소송을 전적으로 다루었는데, 지금은 별도로 관청(장례원)을 두어 관제만 번거로울 뿐이다.
승지 자리의 무게와 박원종의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승정원은 임금의 말을 전달하는 곳으로서 그 임무가 매우 중요하므로 조정에서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당상관 중에서도 이조나 사간원의 대사간을 지낸 사람이라야 겨우 맡을 수 있었다.
평성군(봉호가 평성) 박원종 같은 사람을 승지로 임명하였다가,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자리를 바꾸어 병조 참의를 내린 것이 이런 경우다.
근래에는 승지에 대한 물망이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보다 아래에 있다. 또 조선 초기부터 반드시 무신 한 사람씩을 승지로 참여시켰는데, 이는 대개 그 사람의 명망을 키워 훗날 크게 쓸 밑거름을 만들고자 해서였다. 그래서 서북 지방(서쪽은 황해·평안도, 북쪽은 함경도)의 장수는 모두 승정원을 거친 사람 가운데서 임명하였다. 그런데 근래에는 선왕(선조) 때의 남언경과 양사형 이후로는 한 사람도 없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승지가 된 이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근래에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서 승지가 된 사람은 내암(정인홍의 호)과 한강(정구의 호) 두 사람이다. 한강은 예방 승지로서 전시(임금이 참석하는 마지막 과거 시험)의 시험관이 되었으니 이 또한 특이한 일이다.
얼마 전에 강명지(자가 명지, 강복성)가 승지에 임명된 것은 임금이 세자 시절부터 그를 가르친 스승이었던 수고 때문이었다. 간옹(홍가신의 호)은 비록 승지는 되지 못했지만 형조 판서가 되었고, 서인원은 강원도 감사가 되었으며, 이 밖에 참의가 된 사람은 겨우 두세 명뿐이다.
선왕(선조) 때에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얻은 벼슬(남행)로 사헌부 벼슬을 한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과감하게 직언하여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이도 있었다. 간옹이 장령(사헌부의 정4품 벼슬)으로 있을 때 "안여경을 부윤으로 임명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아뢰었는데, 임금이 이에 노하여 안여경을 부윤 자리에서 물러나게 함과 동시에, 이후로는 과거를 거치지 않은 사람을 사헌부 관원으로 삼지 못하게 하였다.
4조 낭관에 남행 출신이 늘어난 사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왕(선조) 초년에는 형조·공조·호조·병조 네 관청의 낭관을 과거를 거치지 않은 사람(남행)과 무과 출신을 섞어 임용하였는데, 모두 명망 있는 사람 중에서 골랐다.
중년에 들어서는 이를 뽑는 일을 매우 신중히 하여 남행과 무과 출신은 일절 임명하지 않다가, 대신들이 경연에서 예전처럼 남행과 무과에서도 뽑는 제도를 되살리자고 청하여 겨우 이경욱이 호조 낭관, 이경준이 형조 낭관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모두 승진하였다. 전란 뒤에는 인재가 부족하여 되는대로 구차하게 자리만 채웠다.
근래에는 네 관청 낭관의 절반 이상이 남행 출신인 데 반해, 문관으로서 등용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백여 명이나 되므로 이를 논의하는 사람들이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문관으로서 형조와 호조의 낭관이 된 사람들도 대부분이 시험을 거쳐 뽑힌 사람이 아닌 데다 무능한 자들이 많다. 이 때문에 당상관으로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남행 출신 낭관을 찾게 된다. 이는 현재의 상황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감찰의 위세가 예전만 못한 사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감찰(사헌부의 실무 관원)의 임무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고려와 우리나라 초기에는 이를 뽑아 임명하는 데 매우 신중을 기하였다. 관청에 참알할 때마다 대관(사헌부 관원)의 잘못을 종이에 적어 품에 간직했다가 달려 들어가 뜰에 떨어뜨렸다. 재상 중에 탐욕스럽고 부패한 자가 있으면 밤에 그 집 문간에 모여서 대문에 먹을 칠했다. 그러면 그 재상은 감히 조정에 나오지 못했고 조정에서도 다시 등용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사헌부에 나올 때면, 비록 왕자나 대신이라도 이들을 만나면 말에서 내렸다.
지금도 뜰에 달려 들어가는 예법과 먹을 묻힌 자를 지니는 것은 예전과 같으나, 잘못을 적은 글을 품에 간직하는 것과 대문에 먹칠하는 것은 시행되지 않은 지 오래다. 사헌부에 나올 때 왕자나 대신이 말에서 내리는 것은 예전과 같다고 한다.
감찰을 청하는 값과 재종형 "강홉랑" 이야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각 관청에서 연말에 감찰의 검사를 청할 때는(청대) 그 관청의 아전이 사헌부에 값을 치르는데, 이 일은 수석 아전이 파견된 감찰과 의논한다. 이때 어물어물 너그럽게 처리해 주는 감찰인 경우에는 값이 비싸고, 강직하고 꼼꼼해서 속일 수 없는 경우에는 값이 싸게 마련이니 그 유래가 오래된 일이다.
나의 재종형인 허체는 감찰로 있었는데, 성품이 매우 총명하고 꼼꼼하여 아전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았으며, 또 모질고 박정해서 숨긴 것을 찾아내기를 좋아하였다.
하루는 혜민서(의약을 맡은 관청)의 약재 담당 아전이 형의 집에 와서 약을 짓고 있기에, 내가 장난삼아 "요즘 감찰에게 주는 값이 가장 싼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물었더니, "허 감찰은 피 쭉정이 다섯 홉입니다" 하였다. 이에 온 집안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전해 가며 웃었고, 재종형을 "강홉랑"(쭉정이 다섯 홉 도령)이라고 불렀다.
집현전에서 홍문관으로 이어진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선에서는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학에 능한 선비를 가려 뽑아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게 하였다. 인원은 스무 명을 두었는데, 그중 열 사람은 경연관을 겸임하고 열 사람은 세자를 가르치는 서연관을 겸임하였다. 교대로 숙직하였고 임금의 은혜와 예우가 특별하였는데, 세조 때 이를 폐지하고, 다만 문관을 뽑아 예문관 응교를 겸임시켜 경연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 뒤 성종 초에는 예문관에 부제학 이하 수찬까지 모두 열일곱 명을 두어 경연관을 겸임시켜 집현전의 옛일을 잇게 하였는데, 얼마 뒤 홍문관으로 이름을 고쳐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예문관이라 부르던 시절에, 노분(자가 사문)이 교리로 있다가 죽었는데, 그 증손 노사회가 수령으로 부임하며 신원 조사(서경)를 받을 때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모두 "홍문관을 예문이라 잘못 썼다"며 서류를 되돌려 보냈는데, 이는 모두 옛일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문형이라는 칭호를 얻는 조건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선 초기에는 과거의 상시관을 맡은 사람이 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대사성을 겸해야 "문형(문단의 저울대, 즉 문단의 우두머리)"을 맡았다고 하였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비록 상시관의 일을 실제로 하더라도 문형에는 끼지 못하였으니, 안지와 박원형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성종 이후로는 홍문관·예문관 두 곳의 대제학과 성균관을 관장하는 지성균관사를 겸임해야 문형을 맡았다고 하였다.
홍문관 당직을 둘러싼 완평부원군의 인정 많은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홍문관에 당직 서는 일은 누구나 괴롭게 여겨 피하려 들지만, 선왕(선조) 때의 승지 성낙은 유독 더 당직을 거절하였고, 당직을 서더라도 곧 나가 버리곤 하였다.
그때 나의 둘째 형과 판중추부사 김수, 이조 판서 김찬, 호조 판서 이성중, 완평부원군 이원익, 좌의정 김응남이 함께 홍문관에 있었다. 이들이 서로 약속하기를 "성낙이 당직에 들거든 정해진 날짜대로 교대해 주지 말자" 하였다. 이런 약속이 있은 뒤, 성낙이 당직을 선 지 겨우 하루 만에 또 나가려 하여 홍문관의 아전을 몹시 심하게 매질하며 다그쳤다. 이에 아전이 여러 집을 다니며 교대해 줄 사람을 알아보았지만 모두 거절하였다. 남은 사람은 완평부원군뿐이었으나, 당직을 막 마치고 나온 터라 감히 청하지 못하였다. 일이 급해지자 시험 삼아 찾아가 부탁하니 완평부원군도 처음에는 응하려 하지 않다가, 아전이 서럽게 울면서 "여든 노모가 추운 옥중에 갇혀 계신데 이러다 돌아가시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하였다. 그때 완평부원군도 노모를 모시고 있던 터라 측은한 마음이 들어 교대를 허락하였다. 아전은 뛸 듯이 밖으로 나와서는 손뼉을 치며 "이 교리는 참으로 성인이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밤중 경연 술자리에서 이름을 날린 두 주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대개 임금이 밤중에 신하를 불러 만나는 야대가 있는 날에는, 반드시 임금이 술을 많이 권하여 흠뻑 취한 뒤에야 자리를 끝내었다. 술잔이 돌아오면 주량이 적은 사람은 실수할까 걱정되어 머뭇거리며 즉시 마시지 못하였다.
나의 둘째 형은 대개 큰 잔으로 마셨는데, 잔이 돌아오면 즉시 다 마셔 버렸다. 술을 따르는 내시는 아직 술이 남았으리라 생각하고 머뭇거리며 잔을 되받지 않았으나, 임금은 형이 벌써 다 마신 것을 알고는 웃곤 하였다.
당시에 술 마시는 사람 중에서 승지 강서가 형의 맞수였는데, 홍문관의 아전이 장부에 "허 전한과 강 교리는 술을 아낀다"라고 써 놓았는데, 여기서 "아낀다"는 것은 사실 "좋아한다"는 뜻으로 쓴 말이라, 보는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홍문관의 술 솥에 이름을 새긴 두 사람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홍문관에는 술 닷 되들이쯤 되는 무쇠솥이 하나 있는데, 이것으로 시원하게 단숨에 마시면 그 이름을 솥에 새겼다. 솥에 이름이 새겨진 사람은 예전에는 김천령뿐이었는데, 둘째 형의 이름이 비로소 그 뒤를 이어 새겨졌다.
예문관 신참 시절의 엄한 위계와 중시 장원 이야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승문원·성균관·교서관·예문관 네 관청의 풍속 가운데 아랫사람을 단속하는 것이 가장 심한 곳은 예문관이다. 자리마다 위계가 엄중해서 마주 앉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당직에서 마음대로 나가는 것도 용납되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방자하게 굴면 심한 매질을 당하였다.
갑오년(1594년) 여름에 내가 사관(역사 기록을 맡은 벼슬)으로 천거되었으나 상복을 입게 되어 시험에 응하지 못하였고, 정유년(1597년) 봄에야 비로소 예문관에 들어갔다.
심대(자 중경)와 이대중 등은 모두 나보다 늦게 관직에 들었는데도 나보다 윗자리에 있으면서 몹시 까다롭게 굴었다. 그때 다시 보는 과거 시험(중시)이 있었는데, 규정상 한림원의 아랫사람은 응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이 두 사람에게 응시를 청하였더니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시험을 며칠 앞두고 내가 공무상의 일로 파직되는 바람에 오히려 시험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뽑혔다.
예조의 낭관으로 임명되어 임금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대궐에 들어갔을 때, 윗자리에 있던 심학이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심중경이 사헌부·사간원에서 올라온 말을 접수하여 심학이에게 알리러 들어왔다. 관례상 선배가 그 자리에 있으면 후배가 먼저 선배에게 인사한 다음 윗사람에게 말을 전하게 되어 있었다.
이날 심중경이 먼저 내 앞에 엎드려 인사하고 나가므로, 내가 "중시에서 장원한 것은 별로 기분 좋은 줄 몰랐는데 이제야 기분이 좋다" 하였더니, 심학이가 크게 웃었다.
중시 장원 급제자들의 계보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선에서 맨 처음 시행한 중시(현직 관원을 대상으로 다시 보는 과거)에서는 춘정(변계량의 호)이 장원하였고, 그다음 회에는 김자가 장원하였으나 그의 답안은 사실 양여공이 대신 지어 준 것이었다. 양여공은 문장에 능했다. 그 뒤에 장원한 하동부원군 정인지, 남수문, 근보(성삼문의 자)는 모두 이름난 대가였다.
이영근은 나이도 어리고 명망도 없었는데 갑자기 장원하고, 김수온과 서거정이 도리어 2등과 3등에 그치자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으나, 이영근도 실은 글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 이후로도 중시에 합격한 사람은 모두 문장으로 이름난 사람이었는데, 나같이 재주 없는 사람이 그 안에 끼었으니 과분한 일이다.
중시를 대하는 사대부들의 서로 다른 태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선 역대 임금 때 사대부는 중시를 가장 중히 여겼다. 모재(김안국의 호)가 중시를 준비할 때 표문과 대책문을 많이 연습하였는데, 시험장에 들어가 보니 평소 대책문에 능한 대사헌 권홍도 응시한 것을 보고 모재가 말하기를 "내가 장원하려 하였는데 이분이 응시하였으니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발표하는 날 보니 과연 권홍이 장원이고 김안국은 2등이었다. 그런데 선왕(선조) 이후로는 이름난 관원은 으레 응시하지 않는데, 이것을 좋은 일로 여기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무릎을 꿇지 않으려던 사람들 이야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명종 11년(1556년) 중시에서 김홍도는 대책문은 짓지 않고 술만 마시면서 "이 무릎을 남에게 굽힌 적이 두 번밖에 없는데, 지금 양응정이 응시하였으니 내가 이연성 꼴이 될까 두렵다" 하였다. 이는 대개 연성군 이석형이 한 해에 세 번이나 장원하였으나 중시에서는 6등에 그치자, 근보(성삼문)의 집에 가서 절을 하며 "이 무릎을 남에게 굽힌 지 오래되었소" 한 데서 나온 말인데, 근보가 웃으며 "남에게 굽히지 않던 무릎을 내가 굽혔군" 하였다는 고사이다. 김홍도 역시 진사시와 문과에서 연이어 장원하였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대필 답안을 알아본 시험관의 안목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성종 17년(1486년) 중시에 정승 강귀손이 응시하였는데, 마침 그의 장인의 아우인 허백(성현의 자)이 승정원의 도승지로 궁궐 안에 있었다. 강귀손의 아버지인 진산(진산군 강희맹)은 오위도총부의 총관으로 당직을 서다가 허백에게 "우리 집안에서 잇달아 장원하는 것도 좋은 일이니, 그대와 내가 귀손의 대책문을 지어 주는 게 어떻겠나?" 하였다. 이리하여 서두에서 중간까지는 강희맹이 짓고, 그 뒤부터 끝까지는 성현이 지어서 강귀손에게 그대로 베껴 내도록 하였다.
당시 시험관이었던 사가(서거정의 호)와 삼탄(이승소의 호)은 모두 무릎을 치며 감탄하고 마땅히 1등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상시관으로 참석했던 괴애(김수온의 호)는 자는 척하며 귀담아듣지 않았다. 다른 시험관들이 의견을 물으니 "등수를 고치라"고 하였다. 다시 물어봐도 같은 대답이었다. 밤이라 피곤해서 그런가 하고 답안을 보관해 두었다가 새벽에 다시 읽어 보고 다시 의견을 물으니, "차상(그다음 등급)으로 매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모두들 이상하게 여겨 "이 글이 매우 훌륭한데 어째서 등수에도 들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김수온이 웃으며 "이 글의 작자가 성씨나 강씨 집안의 자제가 아니라면 마땅히 장원감이다" 하였다. 급히 답안지의 이름 봉한 부분을 뜯어 살펴보니, 과연 강 정승의 글이었다. 김수온이 "나는 강희맹과 함께 공부하였고 성현은 나에게 배웠으니, 그들의 글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저기까지는 강의 글이고 저기서 여기까지는 성이 지은 것이다. 내가 어찌 그들에게 속아서 나라의 시험을 그르치겠는가" 하니, 모두가 탄복하였다. 결국 강귀손의 답안은 빼 버리고 신종호를 장원으로 뽑았다고 한다.
문과 장원보다 사마시 장원을 더 귀하게 여긴 풍속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의 풍속은 문과의 장원은 그리 중시하지 않고, 사마시(생원시·진사시)의 장원을 더 귀하게 여긴다. 사마시는 문장의 우열을 따지지 않고 1, 2등 십여 명을 뽑으며 사람됨을 가려서 뽑기 때문에, 한번 합격자 명단에 들면 평생토록 존경을 받는다.
조선의 이석형과 배맹후는 생원시와 진사시 모두에서 장원하였다. 모재(김안국)가 이를 흠모하여 생원시와 진사시 두 시험에 모두 응시하였다. 둘 다 잘 지어 마땅히 둘 다 장원이 되어야 했으나 시험관이 한쪽 시험의 등수를 깎아 2등으로 만들었으므로, 모재는 늘 마음속으로 이를 분하게 여겼다.
그 뒤 자신이 시험관이 되었을 때, 김구가 두 시험장에서 지은 글이 나란히 1등감이었으므로 힘써 주장하여 두 시험 모두에서 그를 장원으로 뽑았다고 한다.
독서당의 연혁과 인재 양성의 전통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세종 때 처음으로 독서당을 설치하여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함으로써(사가독서) 훗날 크게 등용하려 하였는데, 당시에는 산속 절에서 책을 읽는 경우가 많았다.
맨 처음에는 권채·신석조·남수문이 사가독서를 하였고, 다음은 성삼문·신숙주·박팽년이 하였으며, 또 그다음은 이석형·최항·성간·이영서·하위지·이개·김수온·서거정·이승소·강희맹이 잇따라 하였다.
문종 때에는 홍응·홍귀달·어세겸·박기년이 사가독서를 하였다. 흉년이 들면 이 제도를 중단하였고, 특별한 이유 없이 사가독서를 시키지 않은 때도 있었다.
성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성현·채수·조위·허침·양희지·권건·유호인 등에게 용산사에서 책을 읽도록 하였다. 이때부터는 결원이 있으면 보충하였고, 동호(한강 동쪽 호수)에 독서당을 지어 어엿한 하나의 관청이 되었다.
중종 때에는 시험하여 성적을 매기는 방법이 매우 엄해져서, 잇달아 두 번 낙제하면 도태시켰다. 이들에 대한 특별한 은전과 대우는 홍문관에 못지않았는데, 전란이 일어나자 폐지되었다.
지금 임금(광해군) 초년에 대신과 의논하여 다시 설치하도록 명하여 이이첨 등 열두 명을 선발하였으나, 이듬해에 흉년이 들어 우선 중단하였다.
독서당원은 마흔 살이 안 된 사람 중에서 뽑는 것이 관례였는데, 청련(이후백의 호)이 처음으로 마흔 살에 뽑혔고, 이이첨은 마흔여덟 살에 뽑혔으니 파격적인 일이다. 당상관의 신분으로 사가독서를 한 사람은 박민헌과 이덕형이다.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 시를 대신 지어 준 이야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반드시 그 시대에 문장으로 이름난 사람을 뽑아 맡겼다. 박원형과 허종은 모두 훌륭한 풍채와 예의 바른 몸가짐으로 중국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박원형이 방주(명나라 유태의 호)와 주고받은 시와, 허종이 규봉(명나라 동월의 호)과 주고받은 시는 모두 종사관으로 수행한 삼탄(이승소)과 삼괴(신종호의 호)가 대신 지어 준 것이었다.
원접사와 종사관을 세 번씩 지낸 사람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연성군 박원형은 세 번 원접사(중국 사신을 국경까지 마중 나가 맞이하는 사신)가 되었고, 호음(정사룡의 호)도 세 번 원접사가 되었으나, 그중 한 번은 환관을 접대한 것이므로 박원형만큼 영예롭지는 못하다.
세 번 종사관이 된 사람으로는 삼탄(이승소)이 있고, 나도 세 번이었으나 그중 한 번은 환관을 접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접대한 유 태감은 시를 잘 지어서, 시를 주고받는 데 따르는 괴로움이 한림원이나 감찰·간쟁 담당 관원이 왔을 때보다도 더 심하였으니, 호음이 조용히 넘긴 것에 비하면 훨씬 힘이 들었던 셈이다.
낮은 벼슬로도 종사관이 된 특별한 사례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규봉(동월)이 중국 사신으로 왔을 때 허충정(시호가 충정인 허종)은 종사관 두 사람을 데리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삼괴(신종호)였고, 한 사람은 직장 박증영이었다. 참하관(7품 이하의 낮은 관원)으로서 종사관이 된 것이다. 그 뒤 주지번과 양유년이 왔을 때에는 조희일(자 이숙)이 박사에서 전적으로 특별히 승진하여 종사관이 되었으니, 이 또한 임금의 특별한 은혜였다.
사신 접대에 문장 담당자를 딸려 보낸 관례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는 반드시 글씨와 문서를 담당하는 사람을 따로 두었다. 조선에서 조신·홍유손 같은 사람을 등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시를 짓는 관원(제술관)을 따로 데리고 간 일이 없었는데, 임인년(1602년)에 고천준과 최정건이 왔을 때 월사(이정귀의 호)가 김현성·차천로·권필 세 사람을 데리고 갔고, 병오년(1606년)에 서경(유근의 호)이 다시 김현성과 권필 두 사람을 데려가겠다고 청하였으나 권필은 사양하고 김현성만 수행하였다. 기유년(1609년)에 서경이 또 차천로와 양경우를 데리고 갔는데, 이로부터 이것이 정해진 관례가 되었다고 한다.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급제가 취소된 정번과 한리학관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적암(조신의 호)은 규봉(동월)이 왔을 때부터 자양이 왔을 때까지, 그때마다 의전 실무를 맡아 직무를 잘 처리하였다. 이때는 아직 중국어 문서를 다루는 한리학관이라는 벼슬이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적암이 그때마다 의원이라는 직함으로 오갔다.
그 뒤 정번을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과거 합격자 명단에서 삭제하는 대신, 한리학관이라는 벼슬을 새로 만들어 그를 이 자리에 앉혔다. 이후로는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이 한리학관에게 글씨와 문서를 맡겼으니, 정번·어숙권·정화·박지화·권응인 등이 잇따라 이 일을 맡아 하였다.
지금은 이재영이 이 일을 모두 네 번이나 맡았는데, 무리 중에서 가장 민첩하고 총명하여 서경(유근)이 매우 감탄하였다. 그래서 주지번·양유년과 주고받은 시는 대부분이 그가 지은 것이라 한다.
놀라운 기억력을 지닌 사람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총명하고 민첩하기로 이름난 사람이 조선 이래로 많이 있다고 하지만,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므로 믿을 수가 없다.
근세에는 윤계선(자 사문)이 가장 총명하다고 이야기된다. 내가 태복시(임금의 말과 수레를 관장하던 관청)에 재직할 때였다. 어느 날 그가 태복시로 나를 찾아왔다. 마침 말 삼백여 필의 털빛과 사는 지명, 기르는 사람의 이름을 적은 말 명부(마적책)가 옆에 있었는데, 윤계선이 이를 한 번 보고는 다 외웠다. 사흘이 지난 뒤에 그의 집에 가서 물어보니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진사 임숙영도 중국 조정의 《이력편람》(관원들의 이력을 정리한 책)을 보고는 정확하게 다 기억하였다. 이 두 사람은 참으로 탄복할 만한 사람들이다.
족보에 통달한 두 사람의 밤샘 토론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서천(정곤수의 호)은 역사와 문헌에는 그리 총명하지 못했으나 족보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잘 알아서 막힘없이 줄줄 외웠다. 이실지(자, 이춘영)도 족보에 능통하였고 아울러 문장과 역사에도 해박하였지만, 문장과 역사보다는 족보에 대한 지식이 더 뛰어났다.
한번은 서천이 이실지와 강가에서 만났는데, 밤을 지새워 가며 족보에 관해 논변하였다. 나도 그 곁에서 듣고 있었는데, 지금의 이름난 가문치고 그 조상의 계보나 외가 쪽 갈래 가운데 흠 없는 집안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내용은 몰라서는 안 되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혹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을 염려도 있으니 말이다.
나의 조상과 권한공의 뜻밖의 인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내가 젊은 시절 당숙인 참봉공의 집에서 《고려사》를 뒤적이다가 권한공의 전기를 보고 그 옳고 그름을 논하였더니, 참봉공이 "어린 사람은 말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나라 재상들의 허물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하시면서 집안 족보를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는데, 알고 보니 권한공은 나의 5대조 호군 어른 부인의 외증조부였다.
내가 이 일이 있은 뒤로 5대에 걸쳐 안팎의 조상을 널리 조사해 보니, 고려 이전에 눈에 띄게 벼슬한 집안치고 나의 조상과 관계없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족보 세 권을 만들어서 자식과 조카들에게 보게 하였다.
여덟 고조를 아느냐고 물은 정곤수의 가르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내가 한번은 정서천(정곤수)을 찾아가니 그가 갑자기 "자네는 여덟 고조를 아는가? 하나하나 말해 보게" 하였다. 내가 여덟 고조가 무엇인지 몰라 멍하니 있으니, 서천이 "친조부모와 외조부모, 어머니의 친조부모와 외조부모, 그리고 아내의 친조부모와 외조부모다" 하였다. 내가 마침내 하나하나 헤아려 여덟에 이르니, 그가 "자네는 여덟 고조를 아니 참으로 조상을 잊지 않는 사람이군. 내가 이것을 물어보면 백 명에 한두 사람도 아는 이가 없더군. 자손으로서 자기 조상을 몰라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생각해 보면 그 말이 참으로 옳다.
명나라 황제가 감탄한 조선의 천리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사가(서거정의 호)의 《필원잡기》를 보면, 태종은 말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고 한다. 태종이 여윈 말을 일부러 골라 상급으로 쳐서 명나라에 조공으로 보내니, 성조(영락제)가 보고 "이것은 하늘이 낸 말이다. 너희 왕이 나를 아끼는구나" 하였다.
내가 언젠가 《증자계집》을 보니 〈천마가〉라는 시가 실려 있는데, "영락 연간에 조선에서 누런 말을 조공으로 바쳤는데 매우 좋은 말이었으므로 임금이 〈천마가〉를 짓도록 명하였다" 하였으니, 아마 이때 바친 말이 아닌가 싶다.
중국 황실에 딸을 보낸 집안이 누린 특별한 은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 여자로서 중국 조정에 뽑혀 들어가 황제를 모신 이는 누구나 총애를 받았다. 그 덕분에 권영균·여귀진·최득비는 그 아버지나 오라비가 높은 벼슬(열경)에 올랐고, 조선에 있으면서도 중국의 녹봉을 받았으니, 왕감주(왕세정의 호)가 〈이전술〉이라는 글에서 "외국인이 중국 관직을 지니고서 외국에 살고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 경우이다.
양절공 한확은 누이동생 두 사람이 중국 조정에 들어갔으므로 불러다 광록소경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조서를 받들어 우리나라에 반포하게까지 하였으니 더욱 특별한 은전이었다.
어진 환관 김영과 그를 아낀 명나라 효종의 선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내시로서 중국 조정에 들어간 사람은 대대로 있었는데, 홍치 연간(명나라 효종 때)에 이르러 더 이상 뽑아 보내지 말도록 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에 끼치는 폐해를 한 가지 덜어 준 것이니, 이를 명한 효종 황제는 참으로 성인이었다.
태감 김영은 안동 사람으로 중국 조정에 들어가 사례감 태감이 되어 헌종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사신이 되어 본국에 나오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내가 어찌 우리 국왕을 대등한 예로 만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를 보면 그는 어진 사람이었다. 이로 보아 중국의 역사 기록에 "김영은 겸손하고 사리를 알았으며, 바른 사람을 보호한 공이 있다"고 한 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조공로를 지켜 낸 명나라 관리 유대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가 중국에 조공하러 가는 길은, 해주에서 광녕을 거치지 않으면 곧바로 영원위로 통하게 되는데, 이 길은 오랑캐 지역과 가깝지 않고 또 빠르다.
내시로 중국 조정에 들어간 사람이 우리 사신과 의논하여 헌종 황제에게 아뢰어 조공로를 바꾸려 하니, 병부의 항충은 그대로 따르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동산(호) 유대하가 병부 직방사에 재직하고 있었는데, 이를 고집하고 허락하지 않으면서 "조선의 조공로는 애초에 명나라 초기 임금들이 상세히 정한 것으로서, 서너 곳의 큰 진영을 우회하여 산해관에 이르게 한 것은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니 경솔하게 고쳐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항충이 그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전 길 그대로 조공하고 바꾸지 못하였다.
중국 과거에 응시할 길이 막힌 억울한 사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의 인재가 중국 조정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된 것은, 고려 때 홍륜이 임금을 시해하고 김의가 중국 사신을 죽였기 때문이지, 우리 조선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런 사실을 들어 중국에 요청한다면 중국에서도 들어주지 않을 리가 없는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옹졸하고 남다른 절조가 없는 데다 멀리 나가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런 나쁜 평판을 뒤집어쓴 채 외국인을 위한 과거(빈공과)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내가 한번은 낭중 가유약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안남(베트남)과 유구(오키나와)는 모두 빈공과에 응시한다. 안남 출신 진유는 정덕 연간(명나라 무종 때)에 과거에 급제해서 우도어사를 지냈고, 완악은 가정 연간(명나라 세종 때)에 급제해서 공부 우시랑이 되었으며, 손응오는 본국에서 도망하여 광서 지방에 살다가 역시 과거에 합격하여 예부 시랑이 되었다. 지금도 향시나 회시 합격자 출신으로 지방 관리로 있는 자가 다섯 사람이나 있다." 이 말을 들으니 힘이 솟구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종계변무에 숨은 공로자, 허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 왕실 계보가 중국 기록에 잘못 실린 것을 바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선왕(선조)이 정성을 다하여 호소하고 변론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영양(봉호) 허국이 당시 내각에 있으면서 주선해 준 공이 있었다. 대개 허국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때, 마침 우리는 국상을 당해 몹시 경황이 없을 때였다. 그런데도 예우와 정성에 절도가 있었으므로, 그가 우리의 정성을 매우 아름답게 여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가 조정에 있으면서 힘써 주장하여 우리나라의 억울함을 씻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형 군문(형개)과 석 상서(석성)를 제사 지내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허국도 마땅히 함께 제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 왕실이 삼국시대 왕성 가운데 가장 번성한 내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 이래의 왕성 가운데 박씨와 김씨 두 성씨보다 더 번성한 성이 없다. 석씨와 고씨, 부여씨는 이제 아예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왕씨(고려 왕실)가 줄어든 것은 왕자들이 으레 승려가 되었기 때문에 종실의 성씨가 적어진 것이다. 고려가 망할 때에는 남은 종실이 겨우 오십여 명이었다.
조선은 뿌리가 깊고 잎이 무성하여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내가 전에 왕실 족보를 편찬하는 관원으로 있을 때 헤아려 보니, 종실 중에서 관대를 물려받아 녹봉을 받는 사람이 삼백여 명이고, 조정의 문관·무관과 과거를 거치지 않고 얻은 벼슬(남행)로 벼슬하는 사람도 백여 명이었다. 이 밖에 유생과 충의위(왕실 후손을 위한 군직), 무인에서부터 아래로 곁가지와 서얼에 이르기까지 천여 명에 가까웠으니 번성하다고 할 만하다.
왕실 성씨로서 정승에 오른 두 사람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왕실과 같은 성씨(전주 이씨)로서 정승이 된 사람은 두 명이니, 완평부원군 이원익과 완성부원군 이헌국이다. 두 사람 모두 나라를 세우거나 지키는 데 으뜸가는 공을 세운 공신이면서 정승으로서의 업적까지 남겼으니, 우리나라에서는 전에 없던 일이다.
성소부부고 제23권
10. 14:40
성소부부고 제23권 · 설부 2 · 성옹지소록 (중)
출처: 성소부부고 제23권, 설부 2, 성옹지소록 중
배경: "성옹지소록"은 허균이 스스로를 가리키는 별호인 "성옹"을 앞세워 지은 견문록으로, 조선 초기부터 자신이 살던 당대까지 이름난 재상과 학자, 선비들에 얽힌 크고 작은 일화를 두서없이 적어 내려간 글이다. 이 권에는 황희와 김종서 같은 나라를 세운 초기의 명재상들부터,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겪은 선비들, 허균 자신의 아버지와 두 형이 가르침을 받은 스승들, 그리고 임진왜란을 이끈 선조 시대의 대신들에 이르기까지 쉰 편이 넘는 짧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각 이야기에는 원문에 없는 소제목을 옮긴이가 붙여 내용을 짐작하기 쉽게 하였다.
일러두기: 이 글에는 조선 시대의 관직과 제도를 가리키는 말이 자주 나온다. "문형"은 나라의 글을 총괄하는 대제학의 별칭이고, "지제교"는 임금의 문서를 짓는 벼슬이며, "홍문록"은 홍문관 관원이 될 후보로 오른 명단을 말한다. "향안"은 지방에서 대대로 이름난 사대부 집안 출신만을 골라 이름을 올리던 명부이고, "궤장"은 임금이 나이 많은 공신이나 대신에게 내리던 지팡이와 앉는 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가독서"는 젊고 유능한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오로지 책만 읽게 하던 제도이고, "독서당"(또는 "호당")은 그들이 머물며 공부하던 곳이다. "계유정난"은 1453년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이 반대파 대신들을 없애고 정권을 잡은 사건이며, "기묘사화"는 1519년, "을사사화"는 1545년에 각각 조정에서 뜻있는 선비들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대광보국숭록대부"는 신하가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품계이다. 이런 말들은 문맥에서 필요할 때마다 짧게 풀어 놓았다.
황희와 허조 — 나라를 세운 초기의 명재상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라를 세운 초기의 이름난 재상으로는 황희와 허조를 꼽는다. 언젠가 《세종실록》을 살펴보니 이 두 사람이 특별히 무언가를 앞장서서 건의한 것은 없고, 다만 임금이 조금이라도 지나친 행동을 하면 반드시 굳게 고집하며 따르지 않았을 뿐이었다.
황희는 관리를 임명하는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고 제도를 함부로 바꾸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허조는 문학적 재능으로 조금 꾸미기는 했으나 조심스럽게 바른 법도를 지켰다.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다스리는 큰 그릇이나 시대를 구제할 만한 재주를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진 신하들이었다.
황희가 김종서를 엄히 대한 까닭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익성공 황희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 김종서는 호조판서로 있었다.
하루는 삼정승과 육조 판서들이 대궐에서 회의를 하는데 해가 저물자, 김종서가 간단한 밥상을 준비해 왔다. 황희는 그 밥상을 물리치고는 조정의 자리에 앉아 김종서를 불러 섬돌 위에 세워 놓고, 규정에도 없이 사사로이 음식을 대접한 일을 꾸짖었다. 말이 매우 엄하니 김종서는 진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였다. 한참을 그렇게 세워 두었다가 돌려보냈으니, 황희가 규범을 지키는 태도가 이와 같았다.
황희가 나랏일을 맡아보는 동안 김종서는 여러 차례 병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지냈는데, 한 가지 일이라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황희는 심하게 꾸짖고 때로는 그의 종을 매질하거나 몸종을 가두기까지 하였다. 동료들은 모두 너무 심하다고 여겼고, 김종서 자신도 몹시 곤욕스럽게 여겼다.
하루는 정승 맹사성이 물었다. "김종서는 당대의 이름난 재상인데 공은 어찌 그리도 심하게 대하십니까?"
황희가 대답했다. "이것은 내가 종서를 훌륭한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종서는 성품이 강직하고 기세가 날카로워 일을 과감하게 처리하니, 훗날 우리들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 때 스스로 신중하지 않으면 반드시 일을 그르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그 기세를 꺾어 경계하도록 하고 뜻을 단속하여 조심하게 함으로써, 일에 임하여 신중해지도록 하려는 것이 제 뜻이지, 그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맹사성이 이 말에 감복하였다. 훗날 황희가 사직을 청하면서 김종서를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하였다고 한다.
김종서가 함경도 북쪽 변경에 있을 때는 다스림이 매우 엄격하고 씀씀이는 매우 사치스러워 백성과 아전들이 그를 꺼렸다. 하루는 화살이 그의 책상에 날아와 꽂혔는데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의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여러 차례 독을 넣었으나 그를 죽이지는 못하였다.
무릇 잔치를 한 번 열면 부하 장교 백 명에게 저마다 쇠고기 다리 하나씩을 돌렸으므로, 어떤 사람이 낭비라고 간언하니 김종서가 이렇게 대답했다. "이 북쪽 변경은 우리 왕조가 일어난 곳으로, 선대 임금들이 개척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땅이다. 이제 다행히 이 땅을 개척하였으나, 장수와 병졸들이 이 먼 곳에서 십 년이나 수자리를 서고 있으니, 이렇게라도 잔치를 베풀지 않고서는 이들을 위로할 길이 없다. 더구나 이 일을 시작하는 마당에 쓸쓸하게 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비록 쇠고기 다리 하나씩을 쓰고 있지만, 십 년이 지난 뒤에는 닭다리 하나조차 넉넉지 못할 것이다. 장수와 병졸들이 노래를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게 되면, 대체 누구와 함께 이 변방을 지키겠는가?" 이 말을 듣고 간언하던 사람은 더는 말하지 못하였다.
김종서와 신숙주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종서는 신숙주를 천거하여 자신의 막료로 삼고, 그의 재주와 그릇을 지극히 아꼈다. 무슨 일을 계획할 때면 신숙주가 뒤에서 돕는 일이 많았다.
여진 지역에 아홉 개의 성을 설치하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를 두고 조정의 논의가 자신의 생각과 달랐으므로, 김종서가 글을 올려 이를 다투었는데 그 내용이 수만 자에 달하였다. 김종서가 신숙주에게 붓을 잡게 하고 자신은 입으로 부르는데, 마치 미리 지어 둔 글을 외우듯 줄줄 이어져 그치지 않았다. 신숙주는 명을 받들어 부르는 대로 받아 적으며 붓을 멈추지 않았는데, 한 글자도 되묻는 일이 없었고 한 자도 잘못 쓰거나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김종서가 감탄하여 말했다. "나는 본디 내 재주를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대야말로 참으로 드물게 보는 큰 재주로세."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날, 신숙주는 마침 관청에 있었다. 그의 부인은 남편이 반드시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스스로 목을 매려고 치마끈으로 목에 걸어 놓고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저물녘에 벽제 소리가 들리기에 알아보니 신숙주가 돌아온 것이었다. 부인이 치마끈을 풀며 말했다. "저는 당신이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신숙주는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허종과 허침 형제, 그리고 백세 할머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충정공 허종과 문정공 허침 두 형제는 모두 정승이 되었고 그 덕과 업적도 다 뚜렷하였으니, 우리나라에서 전에 없던 일이었다. 두 사람의 누님도 글과 행실,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고 백 살까지 사셨으므로, 집안에서는 지금까지도 그분을 "백세 할머니"라고 부른다. 두 형제는 이 누님을 매우 공손히 섬겼고, 조정에 중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찾아가 의견을 여쭈었다.
성종이 윤비를 폐위하려 할 때 두 형제가 누님에게 자문을 구하니, 이렇게 말하였다. "아들이 지금 세자로 있는데, 그 어미에게 죄를 준다면 어찌 나라가 편안하고 탈이 없겠느냐?" 이에 허종은 병을 핑계로 논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허침은 다른 의견을 내다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뒤 연산군이 정치를 어지럽히면서 "윤비를 폐위한 것이 마땅하다"고 논의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허침만은 홀로 화를 면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누님의 뛰어난 안목에 감탄하였다.
반정공신의 서열 — 성희안의 겸양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연산군을 폐위하는 일을 논의할 때, 성희안(창산)이 실로 그 계획을 가장 먼저 세웠고, 박원종(평성)이 여기에 참여하였으며, 유순정(청천)은 뒤늦게 참여하였다. 그런데 서열이 박원종과 유순정이 앞서고 성희안이 끝에 놓인 것은 원래 지니고 있던 벼슬의 등급에 따른 것이었다. 이것은 실은 성희안이 스스로 겸손하여 셋째 자리로 물러난 것이었다. 모든 일은 겸양해야 잘 이루어지는 법인데, 하물며 반정처럼 큰일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렇게 양보하여 큰 공을 이루었으니, 성희안의 안목은 따라갈 수가 없다.
성희안의 결단 — 형조참판 시절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성희안은 낮은 벼슬에 있을 때부터 이미 굳세고 과감하여 권력에 눌리지 않았다. 그가 형조참판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성균관 유생이 관아의 하인에게 모욕을 당하고는 동료들과 함께 이름을 나란히 올려 그 하인을 죽여 달라고 청하였다. 그런데 그 하인은 당시 영의정이던 신승선의 종이면서, 좌의정 이극배(광릉)의 여종의 남편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판서 한치형은 이 일의 죄를 판단하기 어려워 병을 핑계로 출근하지 않았다. 이 일로 이극배의 아우 이극돈이 성희안의 집을 두 차례나 찾아갔지만 병을 핑계로 만나 주지 않으니, 두 정승이 노하였다.
하루는 성희안이 조정에 나가자 두 정승이 그를 몰아세웠다. 성희안이 그 자리에서 여러 사람에게 대놓고 말했다. "여러 유생이 한낱 천한 종에게 얻어맞았으니, 그 종의 죄는 사형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나라의 법이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정승들을 위하여 이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임금께 아뢴 뒤에 저 스스로 물러나겠습니다." 두 정승은 부끄러워하며 사과하였다. 함께 있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성희안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물러나와 그 종에게 곤장을 쳐서 죽였으니, 그 결단력이 이와 같았다.
성희안의 안목 — 정광필을 천거하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성희안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일찍이 정광필(문익공)을 두고 참으로 정승이 될 만한 인물이라며 감탄하였다. 정광필이 함길도 감사로 있다가 우의정이 되어 돌아온 것도 모두 성희안이 천거한 덕분이었다. 당시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으나, 정광필이 훗날 기묘사화 때 선비들을 위해 공을 세우고 정승으로서의 업적도 훌륭하여, 시대는 다르지만 황희·허조와 나란한 명망을 얻게 되니, 사람들은 그제야 성희안의 안목에 감탄하였다.
박원종의 사치와 정사룡·황여헌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박원종(평성)은 영의정으로서 병조판서를 겸임하여 총애와 권세가 매우 높았다. 물러나려는 뜻으로 병을 핑계 삼아 도산의 별장에 가 있었는데, 조정에 큰일이 있을 때면 임금이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그때 정사룡(호음)과 황여헌(유촌)이 함께 병조의 낭관으로 있으면서 도산에 가서 자문을 구하곤 하였다. 박원종은 평소 사치를 매우 좋아하여 정원과 연못, 누각, 집을 크게 짓는 등 집을 매우 화려하게 꾸몄으며, 시중드는 첩 수십 명이 비단 치마를 입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능하였다. 박원종은 정사룡과 황여헌을 재주 있는 선비라 하여 매우 극진히 대접하였다. 진수성찬을 차리고 풍악을 울리며 술을 권하고, 시중드는 여종들에게 각자 시 한 수씩을 짓게 하여 잔뜩 취하고 한껏 즐긴 뒤에야 흩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반드시 박원종의 생활 가운데 한 가지를 본받겠다"고 다짐하였다. 정사룡은 만년에 음식을 사치스럽게 들었고, 황여헌은 큰 집을 짓고 여종에게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게 하였는데, 이는 모두 박원종을 흉내 낸 것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선비가 하는 일이 어찌 나라에 공을 세운 귀족과 같을 수 있겠는가.
정광필의 안목 — 황헌의 관상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광필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사람을 천거하거나 임용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용모를 살펴보았다. 그래서 그가 천거한 사람 가운데 높은 벼슬에 오른 이가 많았다.
정승 황헌이 막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서 정광필의 집을 찾아왔다. 정광필은 정성껏 음식을 대접하였다. 황헌이 하직 인사를 하자 일어나 전송하면서 그의 등을 한참 바라보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자제들이 이상히 여겨 까닭을 묻자 정광필이 말했다. "저 사람은 얼굴이 넉넉하면서도 수려하니 반드시 재상의 지위에 오를 것이다. 그런데 마시고 먹는 모습을 보니 반드시 빠르게 승진했다가 일찍 물러날 것이고, 등이 얼굴만 못하니 마땅히 자손이 없을 것이다." 황헌은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등용되었고, 막 정승이 되자마자 관직을 박탈당했으며 또 자식도 없었으니, 모두 정광필의 예언대로 되었다.
정광필의 식사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광필은 식사 때마다 자신이 먹고 남은 음식을 좌의정 정유길과 우의정 정지연에게만 먹게 하고 다른 자제들에게는 주지 않았다.
이헌국(완성)은 정광필의 먼 친척뻘 손자였는데, 어렸을 때 문안을 드리러 갔다. 마침 정광필이 식사 중이었고 정유길과 정지연 두 사람은 마침 집에 없었다. 식사를 마치자 정광필은 이헌국을 한참 바라보더니 여종을 불러 남은 음식을 걷어다 주게 하니, 이헌국이 그것을 먹고 물러나왔다. 여종들은 서로 눈짓을 하며 웃으면서 "저분도 정승이 될 상인가?" 하였다. 훗날 이헌국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고, 충직함으로 선조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여든 살에 세상을 떠났다. 정광필이 그의 관상을 보고 대개 짐작했던 것이다.
정사룡의 젊은 날과 만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사룡(호음)은 젊었을 때 행동을 조심하지 않아 정광필에게 칭찬받지 못하였고, 선비들도 이를 단점으로 여겨 지방으로 내쳐졌다. 기묘년(1519년)에 사화가 일어나자 그를 불러들여 사간으로 임명하니,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며 "저 사람이 오래 분한 마음을 품고 있었으니 반드시 분풀이를 하려 들 것이다" 하였다. 정광필이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내 조카가 비록 몸가짐은 조심스럽지 못했으나 결코 남을 해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정사룡이 사간이 되고 나서는 과연 스스로 사양하며 당시의 논의에 참여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이를 보고 정사룡을 훌륭하게 여겼고 정광필이 사람을 잘 알아본다고 칭찬하였다.
정사룡은 살림을 잘 꾸려 부자가 되자 자신의 생활은 왕족이나 다름없이 누렸으나, 성품이 인색하여 손님을 잘 대접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선비들 가운데 정사룡의 집 음식을 먹어 본 사람이 없었으나, 유독 어득강(관포)이 찾아오면 반드시 많은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정씨 집의 식객"이라 불렀다.
만년에는 서울 동쪽 교외로 물러나 살았는데, 임억령(석천), 신잠(원량)과 시와 술로 어울리며 맑은 복을 누린 것이 이십여 년이었다. 비록 세상을 구제한 공은 별로 없었으나 그 풍류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아, 마을 사람들 가운데는 그의 자를 따서 자신의 자로 삼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박상의 의리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박상(눌재)은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다. 기묘년(1519년)에 충주목사로 있었다. 조광조(정암)가 사화를 당하자 당시 선비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박상이 이들을 모두 돌보아 주었으므로 김세필(성동), 이자(음애), 이연경(탄수) 같은 사람들이 다 그에게 가서 의지하였다.
박상이 하루는 여주에 갔다가 김안국(모재)과 신광한(기재)이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는, 여주목사 이희보(안분당)를 찾아가 쌀 백 섬을 빌려 두 사람을 구제하였다. 충주로 돌아와서는 서둘러 쌀을 배에 실어 빌린 만큼을 이희보에게 갚았다. 옛 선배들은 벗들 사이에서 대개 이러하였다.
박수량과 김정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박수량은 강릉 사람으로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갑자년(1504년) 사마시(진사시)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응시하지 못하였고, 현량으로 뽑혔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훗날 용궁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두어 달 만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김정(충암)이 금강산을 유람하는 길에 그의 집에 들렀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일꾼들 사이에 끼어 손수 새끼를 꼬고 있었으므로, 김정은 처음에 그가 주인인 줄 몰랐다. 마침내 풀을 깔고 앉아 술을 마셨는데, 질그릇에 담은 술과 나물 안주뿐이었다. 이틀 밤을 묵으며 한껏 놀다가 떠나면서, 헤어질 때 진달래나무 지팡이를 선물로 주며 이런 시를 지어 주었다.
높디높은 벼랑에서 늦가을 서리와 눈을 겪은 가지라네 가져와 그대에게 주노니 오래도록 이 마음 변치 말게나
소학과 근사록의 수난 — 나식과 부친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기묘년에 선비들이 화를 당한 뒤로는 집집마다 《소학》과 《근사록》을 입에 담기를 꺼렸고 자제들에게 배우지 못하게 금하였다.
나의 선친께서는 젊었을 때 나식(장음)에게 배우셨다. 한번은 외가에 갔다가 낡은 함 속에서 좀먹고 다 떨어진 《소학》 네 권을 보았다. 펴서 읽어 보고는 학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그중 첫째 권을 소매 속에 넣고 나식에게 가서 보여 드리니, 나식이 깜짝 놀라며 "네가 어디서 이런 귀신 붙은 물건을 얻었느냐?" 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사화로 죽은 옛 어진 이들의 불운을 슬퍼하였다. 선친이 이 책을 배우기를 청하니 나식이 크게 칭찬하며 《소학》과 《근사록》을 가르쳐 주었으나, 이 일을 남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
나식의 인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식은 타고난 재주가 총명하고 큰 절개가 있었다. 그의 문장은 매우 고상하고 옛 풍취가 있었으며, 과거에 응시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두 아우 나숙과 나익을 가르쳐 모두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최수성(원정)은 뜻이 높아 남을 좀처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나식을 보고는 감동하여 이렇게 칭찬하였다. "압록강 동쪽에는 나생 한 사람뿐이다."
부친과 이여 교리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선친은 젊었을 때 교리 이여에게서 《주역》을 배우셨다. 이여는 진천 사람으로 그의 형 이치와 함께 성리학에 밝았다. 이여는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오랫동안 곁에서 모시며 아침저녁으로 경계하고 강독하여 도움을 준 것이 매우 많았다.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인종이 친히 제문을 지어 궁의 신하를 보내 조문하였다.
이치도 높은 벼슬에는 이르지 못하고 박사로 세상을 떠났는데, 진천의 선비들이 두 형제를 위하여 서원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선친이 살아 계실 때는 매번 주선하여 제사가 끊이지 않도록 하셨다. 지금까지도 이 고장 선비들이 잇달아 과거에 급제하고 고을 풍속도 좋은 것은 모두 이여의 가르침 덕분이다.
조광조 이후의 성리학 — 김안국의 역할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조광조가 화를 당한 뒤로는 이치와 성품의 근본을 탐구하는 성리학에 대해 감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김안국(모재)만은 여주에 은거하며 선비를 만날 때마다 성현의 일을 인용하여 논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언적(회재)은 영남에서 여주를 오가며 반드시 그에게 질문하고 논쟁하였으며, 이황(퇴계)도 단양군수로 부임하는 길에 그의 집에 들렀을 때 비로소 성리학의 근원을 들었다. 김안국은 이처럼 두 분에게도 길을 열어 준 공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있다. 나의 선친은 젊어서부터 김안국에게 배웠으므로 이 일을 두루 알고 계셨다. 대체로 김안국은 평소 문장가로만 칭송받았고 성품도 위세를 부리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그저 문인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김안국의 사람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안국은 성품이 경박하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사람을 사랑하였다. 처음에 김안로와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김안로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때마다 나무랐다. 김안로도 그의 솔직함을 알았으므로 화내지 않았다.
김안로가 정권을 잡자 김안국 형제를 가장 먼저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김안로가 이불을 가지고 그의 집에 가서 잤는데, 김안국이 베개를 맞대고 누워 자면서 경계하는 말을 너무도 간절하게 하니, 옆에 누워 있던 김정국(사재)이 그의 발을 밟으며 그만 말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안국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너도 안 자고 있었느냐. 내 다리에 기대지 말라" 하니, 김정국은 뜨끔하여 다시는 말리지 못하였다.
훗날 김안로가 권좌에서 물러나 죽임을 당했을 때, 김안국이 김정국에게 말했다. "안로가 간사하다는 것을 누군들 모르겠는가마는, 우리 형제가 이미 그와 깊이 사귀었으니 이제 와서 그의 단점을 말하지는 말자." 그러고는 매번 김안로의 가족들에게 음식을 보내 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김안국과 성세창의 호당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안국이 우의정 성세창과 함께 독서당에서 휴가를 받아 글을 읽을 때, 둘이 함께 숙직을 하게 되었다. 성세창은 본래 집이 넉넉하였으므로 이부자리를 모두 비단으로 만들어 매우 화려했고, 김안국은 본래 가난한 데다 성품도 사치를 좋아하지 않아 베 이불에 나무 베개를 베고 자니 가난한 선비처럼 쓸쓸하였다. 성세창은 몹시 부끄러워 밤새 잠을 설치고는, 날이 밝자 집으로 돌아가 부인에게 말했다. "국경(김안국의 자)이 차라리 내 사치를 비웃어 주기라도 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러고는 서둘러 검소한 것으로 바꾸게 한 뒤에야 한 방에서 함께 잤다고 한다.
서경덕과 부친의 일화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선친은 서경덕(화담) 선생에게서 가장 오래 배우셨다. 한번은 7월에 선생의 집을 찾아갔더니, 화담 별장으로 떠난 지 이미 엿새가 되었다고 하므로 곧바로 그곳으로 갔는데, 가을 장마로 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날이 저물어서야 여울물이 조금 줄어 겨우 건너서 화담에 이르니, 선생은 거문고를 타며 큰 소리로 시를 읊조리고 계셨다.
선친이 저녁밥을 짓겠다고 청하니 선생이 말했다. "나도 아직 먹지 않았으니 내 몫까지 함께 지어라." 하인이 부엌에 들어가 보니 이끼가 솥 안에 가득 끼어 있었다. 선친이 이상히 여겨 까닭을 묻자 선생이 말했다. "물이 막혀 엿새 동안 집사람이 오지 못했으니 내가 오랫동안 밥을 짓지 못했다. 그러니 분명 솥에 이끼가 끼었을 것이다." 그 얼굴을 살펴보니 조금도 굶주린 기색이 없었다. 이는 옛날 증자가 이레를 굶고서도 신을 끌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마치 악기가 울리는 듯했다는 이야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유담년과 황형 — 삼포왜란 방어사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경오년(1510년) 삼포에서 왜적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담년이 병조판서로 있었다. 중종 임금이 여러 대신들을 불러 왜적을 정벌할 일을 의논하려 할 때, 삼정승이 먼저 유담년에게 물었다. "방어사로 삼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 유담년이 즉시 대답했다. "한쪽 길은 제가 가서 막겠고, 다른 한쪽 길은 따로 막을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삼정승이 누구냐고 묻자 유담년이 말했다. "말씀드리면 반드시 다투어 헐뜯을 것이니, 임금께 직접 아뢰겠습니다."
임금을 뵙는 자리에서 과연 임금이 "누구를 장수로 삼을 만한가?" 하고 물으니, 유담년이 대답했다. "왼쪽 길은 제가 맡겠습니다만, 오른쪽 길에 쓸 만한 사람이 있기는 해도 사람들이 반드시 안 된다고 할 것이니, 전하께서 뭇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등용해 주신다면 제가 응당 천거하겠지만, 그렇지 않으시다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임금이 뭇사람의 의견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허락하니, 유담년이 그제야 말했다. "전에 승지를 지낸 황형이 바로 그 적임자입니다."
그러자 주위에서 과연 반대하였다. "그 사람은 예전에 자기 장인을 매질하여 버림을 받은 사람이니 다시 등용해서는 안 됩니다." 유담년이 말했다. "지금은 설령 옛사람 효기나 미생처럼 훌륭한 행실을 지닌 자라도 전쟁의 승패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니 등용할 수 없습니다. 설령 황형에게 그런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 상황이 매우 급하니 다른 것을 따질 때가 아닌 데다가, 사실 그는 그런 나쁜 짓을 한 일이 없습니다. 사소한 흠 하나를 이유로 나라를 지킬 만한 인재를 버리는 것은 예로부터 옳지 않게 여겨졌습니다." 성희안(창산)도 유담년의 의견에 힘써 찬동하였으므로, 마침내 황형과 유담년이 각각 좌방어사와 우방어사로 임명되어 출정해 왜적을 무찔렀다. 결국 나라가 이 일로 무사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유담년의 공이었다.
(용어) 효기는 은나라 고종의 태자로,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계모의 참소로 쫓겨나 죽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미생은 춘추 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여인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물이 불어나는 다리 밑에서 끝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죽었다는 이야기로 전해진다.
황형과 강화 연미정의 소나무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황형(장무공)의 밭과 집은 강화 연미정에 있었다. 그가 일찍이 소나무 수천 그루를 심으니 사람들이 "공은 이미 늙었는데 소나무를 이렇게 많이 심어서 무엇하시렵니까?" 하고 물었다. 황형이 답했다. "훗날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그 뒤 임진년(1592년)에 창의사 김천일과 전라병사 최원이 강화도에 들어와 지키면서 배와 진영의 목책, 방패, 각종 기계를 만들 때 모두 이 소나무를 가져다 썼다. 이때 쓰고 남은 것은 정유년(1597년)에 명나라 경리 양호가 임금을 모시고 강화도로 가려 할 때, 관아에서 베어다가 임시 행궁을 짓고 성책을 세우는 데 썼다. 이때 와서야 사람들은 황형이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음을 알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김인후의 인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인후(하서)는 인품이 매우 높고 학문과 문장이 모두 뛰어나 스스로 터득한 바가 있었으나,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인종은 세자로 있을 때부터 그를 인재로 여겼으므로 왕위에 오르자 맨 먼저 불러들였는데, 그가 서울에 도착하자 인종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고향에서는 그의 덕에 감화되어 선량해진 사람이 매우 많았다.
양응정(송천)은 기개가 높기로 당대에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김인후를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눌려 그의 말을 공손히 받들 뿐 감히 한마디도 못 하였다. 김인후 앞에서 물러나와서는 반드시 여러 날 동안 감탄하며 말하였다. "후지(김인후의 자)는 지금 세상의 안자(공자의 제자 안회)로다."
송순의 기지 — 서소문과 남대문, 그리고 향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이조참판 송순(삼재)은 재직할 때 찬성 허자와 뜻을 합쳐 어진 이들을 천거하다가 권세 있는 신하의 미움을 받아 지방으로 오 년이나 유배되었다. 이후로는 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였다.
송순에게는 가깝게 지내는 서얼 숙부가 있었는데, 그가 매번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지방 출신으로 재상이 된 사람 가운데, 나는 서소문으로 떠나는 사람은 보았어도 남대문으로 떠나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이는 대개 서울에 와서 벼슬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서울을 떠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송순은 이 말을 늘 듣기 싫어하였다.
그 뒤 송순이 개성유수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 숙부가 강가에 나와 그를 전송하였다. 송순이 술잔을 잡고 말했다. "저는 이제 남대문으로 나왔습니다."
요즘 지방에는 향안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친가와 외가 양쪽 모두 사대부 집안 출신인 사람만을 가려 이름을 올린다. 외가나 아내의 집안이 다른 고을 출신이거나 이름난 가문이 아니면, 아무리 높은 벼슬을 지냈어도 여기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 그래서 여기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홍문록이나 이조의 천거 명단에 오르는 것보다도 어렵다고들 한다.
송순은 담양 사람이었다. 외가가 남원에서 왔고 뚜렷하게 이름난 벼슬을 한 이가 없었으므로, 그 역시 향안에 오를 수 없었다. 송순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 휴가를 얻어 성묘를 갔다가 고을 사람들이 모두 향청에 모여 있다는 말을 들었다. 즉시 음식을 성대하게 장만하여 수십 명의 짐꾼을 시켜 향청으로 보내고, 먼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시켜 향청의 어른들에게 이렇게 전하게 하였다. "대사헌께서 큰 잔치 음식을 보내어 마을의 원로와 학자들을 대접하고자 하시니, 이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향청의 어른들이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곧 음식을 차려 대접받는데, 한 노인이 "주인을 불러 우리와 함께 자리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니 모두 그러자고 하였다. 사람을 보내 청하였으나 사양하며 오지 않다가, 거듭 청한 뒤에야 왔다. 와서 좌우를 둘러보다가, 일찍이 훈도를 지낸 늙은 선비 가운데 자신과 나이는 같으나 생일이 앞선 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얼른 그 다음 자리로 가서 앉았다. 술이 거나해지자 향청의 어른들이 말했다. "대사헌이 이미 이 모임에 참석하였으니 향안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는 곧 향안을 가져다 그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송순의 재빠르고 총명함이 이와 같았다.
김인후와 유희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김인후(하서)가 급제하기 전, 성균관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전염병에 걸려 위독하니 사람들이 감히 그를 돌보지 못하였다. 유희춘(미암)이 당시 성균관의 관원으로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아깝게 여겨 자기 집으로 옮겨 밤낮으로 돌보아 끝내 다시 일어나게 하였고, 김인후는 이를 늘 감사하게 여겼다. 훗날 유희춘이 종성으로 유배되었을 때,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매우 어리석었다. 김인후가 그를 사위로 맞으려 하니 집안사람들이 모두 반대하였으나 듣지 않고 끝내 혼인을 이루었으니, 사람들은 김인후와 유희춘 두 사람을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유희춘의 내력과 학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유희춘(미암)은 최부(금남)의 외손자이다. 최부는 성종과 연산군 때에 큰 명망이 있었고 문장에도 매우 능하였는데, 무오년(1498년)의 사화 때 죽임을 당하였다.
유희춘은 형 유성춘과 더불어 당대에 명망이 높았다. 유성춘은 벼슬이 헌납에 이르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유희춘은 정언으로 있을 때 을사년(1545년)의 변고를 만나 처음에는 제주로 유배되었으나, 고향과 가깝다 하여 다시 종성으로 옮겨졌다. 총명함이 남달라 읽은 책이라면 외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유배지에 있을 때 《속몽구》 네 권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모두 그가 암송하고 있던 것을 바탕으로 지은 것이다.
선조 임금 때 발탁되어 경연에 들어갔는데, 임금에게 도움을 준 공이 매우 많았다. 임금이 장차 그를 중히 쓰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임금이 몹시 슬퍼하며 그를 찬성에 추증하고 그 아들을 등용하였다.
유희춘의 학문과 성품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의 두 형은 젊은 시절 유희춘에게서 배웠다. 그는 학문이 매우 정밀하고 행실이 지극히 독실하였으며, 배우는 사람을 대할 때마다 반드시 진실하고 밝은 학문을 자세히 가르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품이 매우 세상 물정에 어두워 집안일을 다스릴 줄 몰랐고, 옷과 버선이 때 묻고 해어져도 부인이 새것으로 바꿔 주지 않으면 스스로 갖춰 입을 줄을 몰랐다. 거처하는 방은 책을 펴 놓은 책상 외에는 먼지와 때가 끼어 더러워도 쓸고 닦지 않았다. 남을 만나 세상일을 이야기할 때는 전혀 아는 것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이야기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고 앎을 지극히 하는 공부,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이르면 뛰어난 견해와 해박한 지식이 다른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어 세밀히 분석하니 통쾌하고 명백하여, 듣는 사람이 정신을 쏟느라 피곤한 줄도 몰랐다.
대체로 이러하였으므로 경연에서 하는 말이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배운 바를 실천하게 함으로써 임금의 덕을 도왔던 것이다. 선조 초년의 정사 가운데 맑고 밝다고 일컬을 만한 것은 모두 유희춘이 잘 이끈 힘이었다고 한다.
유희춘의 회고 — 백인걸, 송인수와 세 차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유희춘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젊어서 남평현감으로 있을 때 좌참찬 백인걸은 무장현감이었다. 마침 참판 송인수가 관찰사로 부임하니 세 사람이 서로 뜻이 맞아 매우 즐겁게 지냈다.
송인수는 부안의 기생을 사랑하였는데, 정을 통하지는 않고 다만 마음으로 아껴 수레에 태워 데리고 다니게 하였다. 늘 편지를 보내 무장현감과 남평현감을 불렀고, 놀러 다닐 때마다 늘 함께 다니니, 고을 사람들이 이 세 사람을 "세 차비"라 불렀다고 한다.
송인수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여량역에서 그를 전별하는데 두 사람과 그 기생이 따라왔다. 송인수가 기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이 사람의 뛰어난 지혜를 아껴 일 년 동안이나 자리를 같이하면서도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은 것은, 내가 그것 때문에 몸을 상할까 염려해서였네." 그러자 기생이 즉시 앞산에 있는 여러 무덤을 가리키며 말했다. "과연 그러하십니다. 저기 보이는 저 많은 무덤들이 모두 저의 낭군이었습니다." 이는 그를 원망하며 한 말이었으므로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크게 웃었다. 그 기생은 훗날에도 늘 송인수의 일을 떠올리며 감탄하고 눈물까지 흘리곤 하였다.
권벽의 침묵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권벽(습재)은 나의 선친과 가장 가깝게 지낸 벗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안명세, 윤결과 함께 공부하였는데 서로 뜻이 맞아 매우 즐겁게 지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거리낌 없이 말하다가 화를 입어 죽은 뒤로, 권벽은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집에서도 남과 담소를 나누지 않았고 하루 종일 책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최렴과 최락 형제는 이웃에 사는 젊은이들로서 권벽에게 배운 지 거의 일 년이 되도록 그들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고, 그들이 진사시에 합격한 뒤에야 비로소 이름을 알 정도였다. 이 때문에 별로 높은 벼슬은 하지 못하였으나 일흔넷까지 살았다.
내가 어릴 때 권벽이 나의 선친을 뵈러 온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주인이 묻는 말에나 대답할 뿐,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그가 자신의 뜻을 철저히 지킨 것이 이와 같았다.
(용어) 안명세는 사관으로 있으면서 을사사화의 진상을 사초에 그대로 적어 넣었다가 이 일이 새어 나가 사형을 당한 인물이다. 윤결은 벗의 자리에서 안명세의 죽음이 억울하다고 말했다가 이를 고발당해 죽임을 당하였다.
윤결의 옥사와 부친의 위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윤결(자는 장원)의 옥사에서, 그의 진술 가운데 나의 선친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선친은 당시 병조의 낭관으로 관청에서 숙직하고 계셨다. 죄를 다스리는 관리가 선친을 문초하기를 청하자, 대사간으로 자리에 있던 진복창이 일어나 엎드리며 아뢰었다. "허모(허균의 아버지 허엽)는 경솔한 사람이 아니니 그럴 리가 없음을 제가 보증합니다. 지금 그를 잡아다 문초한다면 일이 더욱 커질까 염려되니 문제 삼지 마소서." 이렇게 두세 번이나 강경하게 주장하니, 문정왕후도 옳게 여겨 문초하지 않았다.
선친께서는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정원에 들어가니 승지들이 모두 축하하였으나, 그래도 영문을 모르다가 물러나 병조로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다. 승지들이 감탄하며 말했다. "화를 겨우 면했는데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으니 참으로 강직한 사람이다." 선친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까닭 없이 받는 칭찬이다"라고 하셨다.
진복창은 나의 선친과 평소 전혀 가깝게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는데도 선뜻 나서서 구해 주었으니, 이 또한 운명이라 할 만하다. 이런 일이 있었기에 나의 두 형은 진복창의 아들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후하게 대하곤 하였다.
임억령의 절개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임억령(석천)은 기개가 뛰어나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뒤로도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아 여러 차례 이름난 청요직(학식과 인망을 갖춘 사람만 맡을 수 있다고 여겨지던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지방 벼슬에 나가 있을 때가 많았다.
그의 아우 임백령이 을사년(1545년)의 공신에 들면서 그 권세가 한 시대를 뒤흔들게 되자, 당시 승지로 있던 임억령은 서둘러 벼슬을 버리고 서울을 떠났다. 임백령이 굳이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한강을 건너면서 이런 시를 지어 주었다.
"잘 있거라, 한강물아 고요히 흐르며 물결을 일으키지 마라"
그 뒤로 다시는 서울에 오지 않으니, 선비들의 여론이 그를 옳게 여겼다.
임백령이 죽은 뒤 만년에야 서울에 왔고, 스스로 청하여 강원도관찰사로 나가서는 바다와 산을 두루 구경하며 많은 글을 지었으므로 지금까지도 그곳 산수를 빛내고 있다. 그의 정치와 교화도 맑고 평온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기대승과 호남 인재의 성쇠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기대승(고봉)은 호남 선비들 가운데 걸출한 인물이었다. 학문이 높고 깊어 이황(문순공)이 매우 칭찬하였다.
선조 임금의 신임을 받았으나 제대로 쓰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죽은 뒤로는 호남 사람으로 조정에 등용된 이가 한 명도 없었다. 기대승이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호남 선비들의 기풍이 점차 해이해지고 있으니, 수십 년이 지나면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도 많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와서 보니 그 말이 과연 맞아떨어졌다. 그는 아마도 그 조짐을 미리 내다보았던 것 같다.
중종 임금 시절에는 호남 출신의 뛰어난 인재가 매우 많았다. 박상(눌재) 형제, 사인 최산두, 유희춘(미암) 형제, 교리 양팽손, 제학 나세찬, 목사 임형수, 김인후(하서), 임억령(석천), 송순(삼재), 찬성 오겸 같은 이들이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졌다.
그 뒤로도 박순(사암), 이항(일재), 양응정(송천), 기대승(고봉), 고경명(제봉) 같은 이들이 학문이나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재능과 행실로 당대에 이름을 떨치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도 점점 줄어드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나는 여러 해 동안 호남을 오가며 그곳의 풍습을 살펴보았는데, 대체로 후학을 이끌어 줄 큰 스승이 없는 데다, 사람들의 성품 또한 대체로 경박하고 자만하여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한다. 게다가 먹고사는 형편이 넉넉한 까닭에 모두들 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릴 뿐 앞일을 도모하는 사람이 없다. 이 세 가지가 학문을 게을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으니, 탄식할 일이다.
대신과 부모 — 성희안과 홍섬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라를 세운 이래로 대신 가운데 부모가 살아 계신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성희안(창산)의 경우는 모친이 살아 계셨으나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그 밖에는 기억할 만한 예가 아득하여 떠오르지 않는다. 선조 초년에 영의정 홍섬이 모친상을 당하자, 임금이 명하여 대신이 상을 당했을 때 상을 돌보고 부의를 보내는 예를 조사하게 하였으나 전례를 찾을 수 없어, 다만 관에서 대신의 예에 준하여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부의하게 하였다. 그 후 노수신(소재) 정승이 상을 당했을 때도 이 예를 따랐다.
이덕형의 이른 출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지금의 영의정 이덕형(한음)은 서른여덟 살에 정승이 되었으니, 이는 나라를 세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의 부친도 아직 건강하게 살아 계셨다. 이덕형이 정승으로 있을 때 그의 부친은 수안군수로 있었는데, 번거로운 일들을 잘 다스리며 게으르지 않았다.
이덕형이 지금 임금 초년에 임금의 세자 책봉을 명나라에 주청하는 일로 명나라에 다녀와 윤허를 받아 오자, 임금이 그의 부친을 특별히 당상관 품계로 올려 판결사(장례원의 우두머리 벼슬)에 제수하니, 당시 사람들이 아름다운 일이라 하였다.
홍섬의 삼종 정승과 궤장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홍섬(인재)의 모친은 정승 송질의 딸이자 영의정 김언필의 아내였다. 이처럼 친정아버지, 남편, 아들이 모두 정승인 경우는 예전에 없던 일인 데다 나이도 아흔이었다. 그 부인이 노년을 보내던 무렵 홍섬은 일흔 살로 궤장을 하사받았으니, 이는 더욱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그리하여 노수신(소재)이 그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이런 시를 지었다.
"친정아버지와 남편과 아들, 셋 모두 정승 집안 문을 벗어나지 않은 것을 지금에야 처음으로 보게 되었네 관아에서 다시 지팡이를 짚으시고 집안에서는 다시 색동옷을 입으시네"
이는 사실을 잘 담아낸 시였다.
근래에 한집안에서 정승이 나온 경우로는, 이산해(아계)와 그의 매부인 좌의정 김응남, 그리고 사위인 이덕형(한음)뿐이다.
(용어) 마지막 시구의 "색동옷"은 춘추 시대 초나라의 효자 노래자가 일흔 살에도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부려 늙은 부모를 즐겁게 해 드렸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나이 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 집안의 정승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광필(문익공) 집안에서 세 정승이 나온 것도 세상에 드문 일이다. 이행(문정공)과 그의 형 이기, 심연원(충혜공)과 그의 아우 심통원도 한집안 형제가 정승이 된 경우다. 심수경(청천)과 그의 조부 심정은 할아버지와 손자가 정승이 된 경우다. 그러나 앞서 든 이행 이하의 경우는 모두 그 이름과 행적에 좋고 나쁨의 구분이 뚜렷하니 이상한 일이다. 무과와 정승 집안에 있었던 훌륭한 일 가운데 이미 성현의 《용재총화》에 실린 것은 다시 싣지 않는다.
부자·형제 정승의 여러 경우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한집안에서 부자와 형제가 정승이 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중에서도 허종·허침 형제만은 흠잡을 데가 없다. 정창손과 그의 아들 정괄은 그리 내세울 만한 것이 없고, 그의 사위 김질도 정승이었으나 이는 성삼문의 거사를 고발한 공으로 발탁된 것이다.
심온과 그의 아들 심회, 윤사흔·윤사분 형제와 그들의 매부 성봉조, 신승선과 그의 아들 신수근 등은 모두 왕실과 혼인한 덕으로 정승이 된 것이니 특별히 칠 것이 못 된다. 부자가 이어서 대제학을 지낸 것은 오직 성현(문대공)과 그의 아들 성세창뿐이다.
유성룡과 유영경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유성룡(서애)과 유영경은 첩의 동서 간으로서 모두 영의정이 되었다. 유성룡은 배척받아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가 세상을 떠났고, 유영경은 죄를 지어 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도 같은 유씨이고 벼슬도 같은 영의정이었지만, 그 이름과 행적에는 이토록 좋고 나쁨의 구분이 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채수 집안의 장원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채수(인천군)는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그의 사위인 김안로(이숙)와 이자(차야)도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하루는 장원 급제자들만의 모임인 용두회를 여는데, 채수의 또 다른 사위인 김감(연창부원군)이 여기에 참여하려 하자 장원 급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김감이 부인을 보내 이렇게 청하였다. "제 사위는 서른다섯 살에 대제학이 되었으니, 이 사실로 모임에 참석시켜 주시기를 청합니다." 채수가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은 반드시 참석시켜야겠구나." 그러고는 곧 불러서 함께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문형을 지낸 나이와 가문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이덕형(한음)은 서른한 살에 대제학의 소임(문형)을 맡았으니 가장 젊은 나이에 문형을 지낸 경우이고, 김감(연창)은 서른다섯 살이었으니 그다음이다. 이 밖에는 이행(용재)이 마흔 살에 문형을 맡았다.
가장 많은 문형을 배출한 집안으로는 권근(길창)의 집안이 으뜸이다. 나라를 세운 초기에 권근도 문형의 일을 맡았으며, 그의 아들 권제(지재)는 대제학이 되었고, 외손 서거정과 손자사위 최항도 나란히 오랫동안 문형을 맡았다. 그 밖에 신숙주(문충공)와 그의 손자 신용개, 신광한이 모두 문형을 맡았으니, 이 역시 세상에 특히 드문 일이다.
여러 번 장원한 사람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한 집안에서 정승이 나온 것과 과거에 여러 번 장원한 것에 대해서는 성현(용재)이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근래에 여러 차례 장원 급제한 사람으로는, 대사헌 권홍이 문과와 중시에서 장원하였고, 양응정(송천)은 생원시와 중시에서 장원하였으며, 진사시와 문과에서 연달아 장원한 사람으로는 김홍도와 강신이 있다.
율곡 선생은 한 해에 생원시와 문과에서 잇달아 장원하였다. 초시에서는 세 번의 시험을 내리 장원하였고, 회시에서도 장원하여 한 해에 여섯 번이나 장원하였으니 예전에 없던 일이다.
문형을 맡은 사람 가운데는 과거에 장원한 이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정인지(하동부원군)가 초시의 세 시험 모두에서 장원한 것이 가장 특별하고, 그다음이 율곡의 두 차례 장원이다.
변계량(춘정), 정사룡(호음)은 중시에서 장원하였고, 최영성, 김안로(이숙), 정유길(임당), 박순(사암), 노수신(소재), 유근(서경)은 문과에서 장원하였다. 판서 박충구, 홍성민(익성군), 이호민(연릉부원군)은 생원시에서 장원한 반면, 홍섬(인재)은 생원시에서 꼴찌를 하였으니 이 또한 전에 없던 일이다.
(용어) 조선의 과거 시험은 크게 지방에서 치르는 "초시", 서울에서 다시 치르는 "회시(복시)", 임금 앞에서 순위를 정하는 "전시"의 단계를 거쳤다. "중시"는 이미 벼슬하고 있는 문신들을 대상으로 다시 치르던 시험이다.
선조 말년의 정승과 대제학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조 임금 말년까지 대광보국숭록대부의 품계로 살아 있던 사람은 이산해, 유성룡, 심수경, 최흥원, 윤두수, 김응남, 정탁,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이렇게 모두 열 사람이었다. 정탁과 심수경(청천)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이헌국과 김명원이 정승이 되었고, 최흥원이 세상을 떠나자 윤승훈이 정승이 되었다.
그 뒤 윤두수가 세상을 떠나자 유영경이 그 자리를 채웠고, 정탁이 세상을 떠나자 허욱이 있었으며, 유성룡이 세상을 떠나자 한응인, 기자헌, 심희수가 차례로 정승이 되어 그때마다 열 명의 수를 채웠으니, 이 역시 근래에 없던 일이다.
선조 말년에 대제학도 열 사람이었으니, 곧 이산해, 유성룡, 황정욱, 이덕형, 윤근수, 이항복, 심희수, 이정귀, 이호민, 유근이다. 이 가운데 다섯 명이 정승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하고도 대단한 일이었으며, 일곱 사람이 부원군에 봉해진 것도 기이한 일이다.
선조 말년의 지제교와 홍문록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조 말년에는 지제교가 일흔두 명, 홍문록에 오른 사람이 여든네 명이나 되었으니, 나라를 세운 이래 없던 일이다. 그런데도 나라의 중요한 글을 지어야 할 때면 언제나 인재가 없다고 걱정하였다. 그래서 이조에서 홍문관 관원을 추천할 때도 매번 적격자가 없다고 하여, 지방관으로 나가 있는 사람이나 친인척 관계로 피해야 할 사람, 심지어 조사를 받던 사람까지 후보로 올려 임금께 아뢰곤 하였으니,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이헌국의 안목과 사양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이헌국(완성)은 성품이 충직하여 임금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피하거나 숨기지 않았으나, 선조 임금은 늘 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임진왜란 때 임금이 개성에 이르러 두 정승을 해임하였는데, 이헌국은 당시 대사간으로서 그 자리에 있었다. 임금이 막 새 정승을 뽑으려고 몸소 재상들의 명단을 펼쳐 놓고 이름을 짚어 가며 이헌국에게 물었다. "정탁은 어떠한가?" 이헌국이 답했다. "정탁은 비록 청렴하고 신중하나 세상을 구제할 만한 재주는 없습니다. 그는 옛사람이 말한 대로 '높은 다락에 묶어 놓고 태평한 시절을 기다리게 할' 사람입니다." 다시 물었다. "최황은 어떠한가?" 이헌국이 답했다. "강직한 면은 있지만 성품이 편협하니 큰일을 맡길 수 없습니다." 이어 유홍과 황정욱을 물었으나 모두 적당하지 않다고 답하다가, 임금이 최흥원과 윤두수 두 사람의 이름을 대니 이헌국이 합당하다고 하여 마침내 두 사람이 등용되었다. 사람들은 이 일을 듣고 모두 하기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하였다.
이헌국은 무술년과 기해년 사이에 잇달아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그 뒤 정승을 임명할 때 특별히 그를 발탁하며 임금이 말했다. "나는 이조판서를 사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이 사람은 두 번이나 물러났으니 정승으로 삼을 만하다." 이 말은 내시 이봉정이 직접 임금의 말을 듣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전한 것이라고 한다.
(용어) "높은 다락에 묶어 놓고 태평한 시절을 기다리게 한다"는 말은 전혀 쓸모가 없는 사람을 비유하는 옛말로, 중국 진나라 때 유익이라는 사람이 이름만 높고 실속 없는 이들을 두고 "천하가 태평해진 다음에야 이런 무리에게 일을 맡길지 의논할 수 있다"고 말한 데서 나왔다.
윤두수의 결단 — 의주행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평양에서 한창 왜적과 싸우고 있을 때, 임금이 윤두수(오음)에게 성을 지킬 것인지 버리고 떠날 것인지를 물었다. 윤두수는 그때마다 떠나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였는데, 수십 번을 물어도 대답은 늘 같았다. 그 뒤 영변에 이르자 조정의 의논이 갈라져 한쪽은 북쪽으로 가자 하고 한쪽은 강계로 가자고 하였으나, 윤두수 홀로 의주로 가자는 계책을 고집하였다. 끝내 이 결정으로 나라의 운명을 되돌릴 수 있었으니, 이는 모두 그의 힘이었다.
영변에 있을 때 우의정 유홍이 임금을 뵙는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종묘와 사직이 여기 있는데, 전하께서 떠나신다면 대체 어디로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면서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이 잘못임을 힘써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유홍은 곧바로 하직하고 세자가 있는 곳으로 가 버렸다.
신잡의 헛소동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유년(1597년) 봄 왜적이 다시 국경을 침범하자, 임금이 대신들과 의논하며 물었다. "적이 만일 계속 밀고 들어온다면 어가는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한쪽에서 말했다. "영변은 지세가 매우 튼튼하고 명나라와도 가까우니 가서 지킬 만합니다."
신잡(평천)이 예전에 그곳의 절도사를 지냈던 터라 그곳으로 가는 것의 편리한 점과 불편한 점을 모두 아뢰고 군량 저축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끝으로 백관의 수가 많으니 미리 장을 담가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
한준겸(유천)과 남이공(자안)이 홍문관에 숙직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남이공이 말했다. "신공을 '장 담그는 일을 맡은 관리'로 삼아 먼저 영변으로 보내 준비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한준겸이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공만은 결코 보낼 수 없네." 남이공이 까닭을 묻자 한준겸이 답했다. "책력에 신일에는 장을 담그면 안 좋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말에 듣는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날짜를 가리키는 "신일"의 "신"과 신잡의 성씨인 "신"이 소리가 같은 것을 두고 놀린 말이었다.
사관 시절의 회고 — 동정록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유년에 내가 외람되이 사관을 맡아,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들을 모두 조사해 보니, 명나라 장수들이 군사를 부린 일이나 우리나라 장수와 병사들이 세운 공, 그리고 왜적이 침입해 온 일들이 어느 하나도 제대로 밝혀져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기록만 보면 마치 태평하여 전쟁이 없었던 나라처럼 보이니, 이것이 어찌 사관이 제대로 기록한 것이라 하겠는가.
그 뒤 임금이 명하여 명나라가 군사를 보내 우리를 도운 사정을 모아 《동정록》을 편찬해 올리게 하였다. 이에 윤근수(월정)와 신흠(현옹)이 이 일을 총괄하는 당상관을 맡고, 나는 실무를 맡아 책을 엮어 올렸다. 지금 실록청에서도 이 《동정록》을 가져다 실록에 싣고 있으나, 정작 우리나라 자체의 사적에 대해서는 아득하여 한 가지도 기록에 남은 것이 없으니 탄식할 일이다.
선조의 검소함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선조 임금의 검소한 덕은 여러 임금 가운데서도 뛰어났다. 말년에 병이 들어 궁중 의원이 진찰하러 들어갔는데, 임금은 푸른 베로 만든 요를 깔고 자줏빛 명주 이불을 덮고 계셨으며, 입고 있는 옷도 푸른 명주로 지은 것인데 올이 매우 거칠었다. 약을 올릴 때 쓰는 그릇도 무늬 없는 흰 자기였고, 검소한 안석과 글씨를 쓴 병풍만 있을 뿐 화려한 휘장도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최천건(분음)이 직접 보고 나에게 들려준 것이다.
지제교 시절의 급박했던 일들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나는 오랫동안 지제교를 맡았는데, 그동안 가장 다급했던 일이 두 번 있었다.
경자년(1600년) 의인왕후의 장례 때, 나는 장생전의 낭관으로서 관을 모시고 능에 가 있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혼령을 모신 장막에 불이 나서, 겨우 관만을 불길에서 구해 내었다. 이 일로 아침 제사 때 위안제를 지내야 했는데, 세자궁에서 나에게 제문을 지어 오라는 명이 내렸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승정원에서 나를 불러 당장 지어 바치라 하였다. 다급하고 당황하여 글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급하게 지은 것이라고 하여 사람들이 오히려 칭찬을 많이 하였으나 나로서는 매우 부끄러웠다.
계묘년(1603년) 봄에는 이덕형(한음)이 묘를 옮기는 일로 사직을 청하였는데, 이준(숙평)이 임금이 이를 처음으로 물리치는 비답을 지었다. 그런데 임금이 이를 마땅치 않게 여겨, 특별히 나를 불러 대궐로 오게 하고는 급히 다시 지어 바치라 하였다. 이준이 이미 매우 잘 지어 놓은 글이 있었는데도 이를 버려두고 따로 지으라는 것인 데다, 묘를 옮기는 일에는 여러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말을 만들어 내기가 몹시 어려웠다. 땀이 흘러 붓을 제대로 댈 수 없을 정도였는데, 겨우 격식을 갖추어 직접 써서 바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임금의 말이란 마땅히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서투른 글로 임금의 칭찬까지 받은 것은 나로서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유영경을 둘러싼 갈등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유영경(전양)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가 어떤 사건으로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리자, 내가 이를 물리치는 비답을 짓게 되었다. 그 비답에서 그의 인품을 칭찬하며 "재주는 온갖 일에 능통하고 기개는 공경들을 압도한다"고 썼더니, 유영경이 이를 보고 나를 미워하였다. 그 뒤로는 사관들과 짜고서 다른 지제교에게 맡겨 글을 짓게 하였는데, 지나치게 칭찬하는 말이 많았다.
훗날 유영경이 몰락하자, 신요와 민경기는 그에게 아첨한 일로 지제교의 벼슬을 박탈당하고 죄를 받아 파직되었다고 한다.
이항복과의 약속 — 공신 녹권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이항복(오성상공)은 나의 글을 좋아하였다. 공신 명부에 이름을 올리기 전에 그가 이렇게 다짐하였다. "내 공신 녹권은 반드시 자네의 글로 받고 싶네." 나도 그러겠다고 승낙하였다. 그 뒤 공신들이 회맹하는 자리가 열렸을 때 나는 마침 지방에 나가 있었으므로, 이미 홍경신(녹문)에게 대신 짓도록 부탁해 놓은 뒤였다. 내가 서울에 도착하자 이항복이 자신의 장인인 도원수 권율의 녹권을 지어 달라 부탁하면서, 예전의 약속을 이것으로 대신 갚으라고 하였다. 내가 지어 보낸 초고의 끝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어 선친이 지내신 정승 자리를 이었고, 길창군에 봉해져 문충공 권근의 복된 터전을 이어받았네." 이항복이 이를 보고 매우 칭찬하였다. 이는 권율이 영의정으로 추증되어 그의 선친 권철과 벼슬이 같아졌고, 권근(양촌)의 후손으로서 봉해진 고을 이름도 서로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이었다.
정원군 녹권의 오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무릇 공신 녹권 안에는 "부모도 함께 벼슬을 추증받았다"는 등의 말을 으레 형식적으로 적어 넣는다. 승지 조정지가 정원군의 녹권을 지으면서 무심코 이 구절을 그대로 써넣어 "부모도 아울러 벼슬을 받았다"는 문구를 넣고 말았다. 임금이 이를 보고 물었다. "정원군의 부모가 언제 벼슬을 받은 일이 있었느냐?" 승정원에서 그를 문책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은 허락하지 않고, 나에게 다시 짓도록 명하였다. 나도 겨우 지어 바쳤으나 임금이 보고는 칭찬하는 말이 지나치다 하여 고쳐서 녹권에 쓰도록 하였다. 이를 보면 선조 임금이 말을 신중히 하려 했던 지극한 뜻을 알 수 있다.
월과 장원과 당상관 승진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정미년(1607년)에 나는 여름, 가을, 겨울 세 계절에 걸친 다달이 치르는 시험(월과)에서 연달아 장원을 하였는데, 임금이 법전을 살펴 상을 내리도록 하였다. 예조에서 《경국대전》을 살펴보니 "홍문관 월과에서 세 차례에 걸쳐 일등으로 수석을 차지한 사람은 품계를 올려 준다"는 규정이 있었다. 당시 대제학은 유근(서경)이었고 제학은 신흠(현옹)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이 법전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였다. 누군가가 "'세 차례'는 '연이은 세 등수'라는 뜻이고 '일등'은 곧 '수석'이라는 뜻이다"라고 하기에, 이 말대로 갖추어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특별히 품계를 올려 주도록 하였다. 나는 이렇게 하여 당상관이 되었다.
대개 법전에서 말한 "세 차례"란 석 달에 걸쳐 치른 아홉 번의 시험에서 모두 장원한 것을 말하고, "일등"이란 점수의 합계가 서른 점이 되어 수석을 차지한 것을 뜻한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세 계절에 걸쳐 아홉 달 동안 스물일곱 번의 시험에서 모두 장원하여 점수의 합계가 백두 점이나 되었으니, 법전에서 말한 내용과는 다소 다른 것이었다.
평소에는 글에 능한 사람이 많아서 누구도 혼자 장원을 독차지하는 경우가 없었으므로, 이 규정은 법전에만 있을 뿐 실제로 시행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를 직접 본 일이 없어 저마다의 추측으로 법을 헤아리다 보니 이런 착오가 생기게 된 것이다.
성소부부고 제24권
10. 14:40
성소부부고 제24권 · 설부 3 · 성옹지소록 하 (서기 1611년 5월 30일, 양력 추정)
출처: 성소부부고 제24권, 설부 3
배경: 《성옹지소록》은 허균이 함열에 유배되어 있던 시기에 쓴 잡록으로, 보고 듣고 겪은 온갖 일을 두서없이 적어 내려간 글이다. 이 하권에는 선조 임금과 신하들 사이의 일화, 명필 한호와 화가들의 이야기, 조선의 옛 제도와 풍속, 음악과 기예에 뛰어났던 이들, 일찍 출세한 사람들의 사례, 강릉 지방의 인물과 효자·열녀 이야기, 중국 사신들과의 교유, 그리고 허균 자신의 집안 내력까지 폭넓게 담겨 있다.
돌아가신 선조 임금은 문장에 뛰어나 역대 임금 가운데서도 으뜸이었으므로 신하들이 감히 따라갈 수 없었는데, 그런데도 유독 돌아가신 내 둘째 형 허봉의 시를 칭찬하시곤 했다. 형이 북쪽 지방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뒤, 독서당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다달이 지어 올리던 글 가운데 거산역에서 지은 시가 있었다. 그 마지막 연에
천 년 전에 부러진 창은 모래에 묻혀 있고 십 리 너른 벌판엔 비 그치자 비린내가 풍기네
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임금께서 손수 붉은 점을 찍어 표시해 내려 주셨다.
임인년(1602년)에 고천준과 최정건, 두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월사 이정귀가 임금을 뵙는 자리에서 나를 해운판관 자리에서 갈아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임금께서 "그의 형 아무개와 견주면 재주는 누가 더 나은가?" 하고 물으셨다. 이것만 보아도 임금께서 만년에 이르도록 우리 형제를 잊지 않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선조 임금은 또 지천 황정욱의 문장을 좋아하셨는데, 소재 노수신 정승이 힘써 추천한 끝에 그는 제학에서 겸 대제학으로 승진하였다.
독서당을 설치하여 관리들에게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하는 사가독서 제도를 시행한 뒤로는, 문형, 곧 대제학 자리는 반드시 이 독서당을 거친 사람 가운데서 임용하였다.
이 때문에 어촌 심언광은 대제학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일찍이 독서당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 차례나 상소를 올려 스스로 물러났다. 그런데 유독 지천 황정욱만은 독서당을 거치지 않고도 대제학이 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영예로운 일로 여겼는데, 이 역시 임금께서 그를 칭찬하신 덕분이었다.
선조 임금은 《장자》를 몹시 좋아하여 신하들에게 내리는 글에서도 이따금 《장자》의 구절을 인용하였고, 글의 짜임새도 《장자》와 흡사한 데가 있었다. 이 때문에 임금께서는 오히려 공부하는 이들이 《장자》를 읽다가 거기에 빠져들까 염려하여, 예조에 명해 과거 시험의 논술과 대책 문제에는 결코 노자나 장자의 글을 인용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경자년(1600년) 전시에서 응시자 이함이 답안의 첫머리에 《장자》의 말을 인용했다는 이유로 그의 합격을 취소하도록 명하셨다. 이함은 그 뒤 기유년(1609년)에 다시 과거에 합격했다고 한다.
경홍 한호는 글씨에 뛰어나 선조 임금의 각별한 눈에 들어 극진한 사랑을 받았고, 임금은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려 그를 격려하였다. 그가 서울에 있을 때면 임금은 술과 쌀, 반찬거리, 붓과 종이를 넉넉히 내려 주도록 명하였고, 봄가을로 의복과 허리띠, 안장 얹은 말과 신발 같은 하사품이 끊이지 않았다. 특별히 명하여 가평 군수로 제수된 지 몇 해 뒤, 사헌부에서 그를 탄핵하자 임금은 그저 심문만 하고 넘어가게 하셨다. 그 뒤 공조의 낭관으로 있을 때 응당 갖추어 바쳐야 할 문서를 법대로 처리하지 않아 파직될 처지에 놓였으나, 임금은 문책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그가 병이 위급해지자 임금은 약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고, 그가 죽자 한동안 슬퍼하며 부의를 후하게 내리셨으니, 임금과 신하 사이에 서로를 알아주는 정이 이보다 더한 경우는 없었다.
석봉 한호가 임당 정유길 정승을 따라 압록강 가에서 명나라 사신 경당 한세능을 맞이하였는데, 한세능이 그의 글씨를 몹시 칭찬하였다.
그때 따라온 등계달이라는 이가 석봉의 글씨를 얻어 돌아가 왕세정에게 보이자, 왕세정은 "원나라의 명필 조맹부와 어깨를 겨룰 만하다"고 하였고, 도융이 이를 보고는 "성난 사자가 돌을 튕겨 내는 기세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의 이름이 중국에까지 떨치게 되었으니, 이는 근래에 없던 일이었다.
석봉은 일찍이 당나라 종이에다 이태백의 시를 써서 책 다섯 권을 만든 적이 있었다. 해서와 행서를 크고 작은 여러 서체로 모두 갖추어 쓰되 온갖 정성과 힘을 다 쏟았다. 또 큰 종이에다 옛 명필들의 글씨를 모아 놓은 《동서당집고첩》을 옮겨 썼는데, 하나하나 원래의 서체를 그대로 살려 조금도 다르지 않았으니 참으로 더할 나위 없는 보배였다. 선조 임금께서 이 소문을 들으시고 급히 내시를 보내 이 글씨들을 모두 찾아 궁궐 안으로 가져오게 하시고는, 이튿날 명주와 베, 소금, 쌀, 종이, 붓, 먹, 향, 임금이 쓰던 벼루, 옷, 신 등을 매우 후하게 내려 주셨으며, 이것으로 집을 사서 살도록 해 주셨다.
돌아가신 내 둘째 형은 사내 안경창에게서 《연화경》 금자 필사본 네 권을 얻은 일이 있었다. 이는 세조 임금 때 궁궐에서 화장사라는 절에 시주한 것으로, 강중 서거정과 중경 성임, 동래 정창손, 인재 강희안, 이 네 분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쓴 것이었는데, 끝에는 이들의 벼슬 이름까지 함께 적혀 있었다. 형은 곧 석봉을 청하여 그 뒤에 금색 글씨로 《주역》과 《중용》, 《참동계》, 《황정경》을 쓰게 하였는데, 작은 해서체 글씨가 더없이 절묘하여 마침내 둘도 없는 보배가 되었다. 형이 세상을 떠난 뒤 내가 이것을 물려받았다. 표구하는 일을 하던 김대건이 우리 집을 매우 가깝게 드나들었는데, 하루는 이 일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께서 이를 가져오게 하시고는 《자치통감》 한 질을 내려 주셨다.
왕실 종친인 석양정 이정은 먹으로 그린 대나무 그림에 뛰어났고 매화와 난초도 잘 그렸다. 선조 임금은 그를 몹시 칭찬하여, 그가 족자 한 폭을 그릴 때마다 많은 물품을 은혜롭게 내려 주셨다. 내가 귀한 분을 통해 임금이 손수 그린 대나무와 난초 그림을 얻어 이를 석양정에게 보였더니, 그는 감탄하며 "힘차고 씩씩하여 정해진 화법에 얽매이지 않았으니 참으로 신선의 경지에 이른 작품이다"라고 하였다.
신묘년(1591년)에 선조 임금께서 절구 한 수를 지어 벽에다 써 붙이셨는데
한밤중에 칼을 어루만지니 그 기세가 무지개를 토해 내는 듯하고 웅대한 마음은 일찍이 우리 동방을 평안케 하고자 했었네 그런데 지금 하는 일은 한단 사람의 걸음걸이를 배우려다 제 걸음마저 잊은 것과 같으니 서쪽 바람에 고개를 돌리니 한스러움이 끝이 없구나
라는 시였다. 그 시의 기세가 넓고도 드높아 참으로 임금다운 말씀이었다. 아, 이것이 혹 이듬해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지으신 것이었을까.
(용어) "한단 사람의 걸음걸이를 배우려다 제 걸음마저 잊었다"는 것은, 옛날 연나라의 한 젊은이가 조나라 한단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멋져 보여 그것을 배우러 갔다가, 끝내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채 자기 본래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려 기어서 돌아왔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남의 것을 어설프게 흉내 내려다 제 본모습마저 잃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정유년(1597년)에 창서 양호가 우리나라의 군무를 총괄하는 경리사로서 서울에 와 군대를 주둔시켰다. 선조 임금께서는 하루는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자 하여 손수 편지를 쓰시고 도승지 이호민을 시켜 양호에게 전하게 하셨는데, 그 사연이 수천 자에 이르렀고 뜻도 매우 간절하였다. 양호는 회답하는 편지에 "방패와 창이 어지러이 부딪치는 시기이니 정사를 게을리할 때가 아닙니다"라는 두 구절만을 적어 돌려보냈는데, 임금께서도 이를 매우 옳게 여기셨다.
양호는 문관 출신 대신이면서도 몸소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 나섰다.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를 울산 도산성으로 몰아넣어 거의 사로잡을 뻔하였다. 이보다 더 큰 공이 없었는데도 끝내 모함을 받아 파직되어 돌아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그가 돌아가는 것을 아쉬워하였고, 돌에 그의 초상을 새겨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하였다.
예로부터 우리 동방을 정벌한 장수와 병사들은 공을 세우고도 모두 죄를 뒤집어썼다.
한나라 무제 때 조선의 네 군을 평정한 뒤 순체와 양복이 모두 죄를 지어 옥에 갇혔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한 뒤에는 영국공 이적이 공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품계와 녹봉을 깎였다. 백제를 평정한 뒤에는 소정방과 설인귀가 서로 공을 다투다가 제후로 봉해지는 일이 정지되고 관작마저 낮아졌다. 강조를 사로잡고도 소손녕은 고려 왕을 끝까지 뒤쫓지 않았다는 이유로 변방으로 유배되었고, 원나라는 살리타이가 죽을죄를 지었다 하여 그 부장 아릭테무르 이하를 함께 죽였다.
임진년(1592년) 왜란 이래로도 이와 다르지 않아, 경략 송응창은 모함을 받아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제독 이여송은 공적을 지나치게 부풀려 보고했다는 모함을 받아 죄를 입었으며, 찬획사 유황상과 원황도 함께 파직되었다. 정유년(1597년)에는 경리 양호가 모함을 받아 돌아갔고, 군문 형개와 제독 마귀, 제독 유정도 함께 명나라 관리 정응태의 탄핵을 받았다. 그 뒤 정응태 또한 이 일로 관직이 낮아졌고, 경리 만세덕도 어사의 탄핵을 받아 녹봉이 정지되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용어) 순체와 양복은 한 무제가 고조선을 정벌할 때의 장수들이다. 이적은 당나라 장수로 영국공에 봉해졌으며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소정방과 설인귀는 당나라 장수로 백제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강조는 고려의 장수이고, 소손녕은 거란의 장수로 고려를 침입했다가 강조에게 사로잡혔다. 살리타이와 아릭테무르는 고려를 침입한 몽골의 장수들이다.
전란을 겪은 뒤로는 조정의 관원들이 갓과 도포, 관복용 띠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 군복 차림에 슬갑을 두르고 칼을 차고 다녔다. 그러다가 경자년(160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정에 나갈 때 입는 조복을 갖추게 되었는데, 당상관 이상은 담홍색 비단으로 지은 홑겹 도포를 입었고, 당하관은 담홍색 무명으로 지은 홑겹 도포를 입었다. 그런데 식자들이 "임금의 옷 빛깔도 붉은데 임금과 신하가 같은 색의 옷을 입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여 검은 옷을 입기 시작하였다. 그때 당하관이 비단옷을 입는 것을 임금께서 엄격히 금하셨다. 사람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다시 붉은색 옷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신축년(1601년) 의인왕후의 상복을 벗은 뒤 복색을 다시 의논하게 되었는데, 서경 유근이 예조 판서로 있으면서 붉은색 비단옷을 주장하였고, 나도 그때 예조의 의제사에 있으면서 이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모두 조정의 논의가 옳다고 하였으나, 유독 오성 이항복만은 그르다고 여겼다. 오성은 나를 불러 꾸짖기를 "일개 낭관이 붉은 비단옷을 입고 싶다고 감히 조정의 논의를 흔든단 말인가?" 하였다. 그 뒤 경술년(1610년) 담제를 지내는 날에 복색을 검은색으로 정하고자 하였으나 지금껏 실행되지 않고 있다.
대체로 우리나라에서는 잇꽃을 많이 심어 붉은색으로 물들이기가 쉬웠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손쉽게 여겼던 것이다. 조상 대의 임금들이 홍색과 회색, 백색 옷을 금하는 조목까지 세웠지만 끝내 막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의복과 모자, 그릇 등에는 옛 중국의 제도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모두 이를 칭찬한다.
남녀가 신는 버선은 곧 옛날에 이르던 족건이라는 것이고, 남자가 쓰는 갓은 옛날에 일컫던 곡병립이라는 것으로, 남조 시대의 시인 사영운이 즐겨 쓰던 것이다. 사대부 집안 부인들이 쓰던 머리쓰개는 옛날의 유모이고, 신부가 혼인날에 쓰던 족두리는 곧 옛 중국의 경전 《시경》에서 말한 머리 장식과 같은 것이며, 군복인 철릭은 곧 옛날의 바지와 슬갑이다. 종묘 제사에 쓰는 그릇과 항아리, 대나무로 짠 그릇 뚜껑은 모두 주나라의 제도이고, 임금의 행차에 쓰는 곰과 표범 문양의 의장 지팡이와 창은 모두 수나라의 제도이다. 병조와 도총부에서 붉은 갓에 날이 없는 창을 갖추고, 금 단추를 달고 가죽바지에 슬갑을 두르는 것 역시 당나라의 제도이다. 이 밖에도 오랜 세월에 걸쳐 이어져 온 풍속이 매우 많아 다 적을 수 없을 정도인데, 이런 것들은 정작 중국에는 남아 있지 않은 것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악기는 모두 옛 제도를 따른 것이다.
거문고는 옛날의 오현금을 본떠 줄 하나를 더한 것이고, 가야금은 옛날의 비파를 본떠 열세 줄을 줄인 것이다. 방향과 요고, 대금, 그리고 종묘 제사에 쓰는 편종ㆍ편경ㆍ축ㆍ어ㆍ훈ㆍ지 등의 악기는 모두 당나라의 제도이다. 종묘 제례악 가운데 등가 악장 역시 당나라 사람이 지은 것을 본뜬 것이다. 민간에서 쓰는 음악으로는 풍입송ㆍ서자고ㆍ수룡음ㆍ오운봉서도 등의 악장이 있는데, 이는 송나라 휘종 때 우리나라에 내려 준 대성악으로서 오히려 옛 풍악의 자취가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서는 남곡과 북곡이 성행한 뒤로 당나라와 송나라 때의 옛 풍악이 모두 사라져 남은 것이 없다. 이른바 "예가 사라지면 오히려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 구할 수 있다"는 옛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고려 초에 음악을 맡은 관원이 당나라 때의 궁중 정악을 본떠 황풍악을 지었다. 그 악장은 왕씨가 나라를 처음 일으킨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었는데, 임금이 크게 조회를 열거나 거둥할 때면 반드시 이 곡을 연주하였다.
조선 건국 초에는 임금이 문인들에게 명하여 《용비어천가》 다섯 권을 짓게 하였다. 그중 앞의 일곱 장과 뒤의 세 장을 뽑아 여민락을 만들고, 황풍악의 가락에 맞추어 함께 연주하게 하였다. 임금이 서쪽 교외로 나가 중국 사신의 조칙을 맞이할 때면 이 음악을 대궐 뜰에서부터 연주하기 시작하여 숭례문에 이르러서야 한 곡이 끝났다. 그리고 다시 연주하면서 모화관에 이르러 임금이 가마에서 내리면 그제야 마쳤다. 선조 임금 초년에는 가락이 점점 빨라져서 한 곡이 으레 광통교에 이르러 끝나게 되니, 음악을 맡은 관원들이 가락이 이렇게 조급하게 줄어드는 것을 몹시 걱정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년(1592년)의 전란이 일어났다. 지금은 그 가락이 슬프고 급박하며 흐트러져서 도무지 수습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젊었을 때 태평성대의 문물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악공 가운데 허억봉이라는 이가 있어 피리를 잘 불었는데, 만년에는 거문고로 옮겨서도 그 솜씨가 뛰어났다. 박소로는 거문고를 잘 타서 옛 가락에 능했고, 홍장근은 민간의 가락에 능하여 두 사람 모두 일류로 꼽혔다. 또 가야금은 이용수, 비파는 이한, 아쟁은 박막동이 모두 일류로 꼽혔다. 노래로는 기생 영주선과 여성군 송씨 집안의 여종 석개를 모두 으뜸으로 쳤다.
그 뒤로는 이한의 조카 전한수와 이용수의 제자 임환이 스승의 재주를 이어받았다. 이 밖에도 왕실 종친인 죽장감은 아쟁과 비파에 능했고, 김운란은 아쟁을 잘 타서 그 소리가 마치 사람이 말하는 듯하여 그 가락을 듣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렸다. 또 서자 출신 김연이 가야금을 잘 탔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런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용수는 이미 늙었고 오직 임환 한 사람만이 남아 있을 뿐이며, 노래는 그 대를 이을 만한 이가 한 사람도 없다. 이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인재가 모자라게 되어서 그런 것일까.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명종 임금 때 선비 이언방이라는 이가 노래를 잘 불렀다. 가락이 맑고도 높아 감히 그와 재주를 겨루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일찍이 〈최득비여자가〉라는 노래를 부르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가 평양을 유람할 때, 그곳 교방에 속한 기생이 거의 이백 명에 이르렀다. 관찰사가 이들을 죽 늘어앉힌 뒤,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가리지 않고 우두머리 기생부터 어린 기생까지 한 사람씩 노래를 부르게 하고, 그때마다 이언방이 곧바로 화답하여 불렀는데, 그 목소리가 저마다의 목소리와 흡사하게 들리도록 부르되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개성 기생 진랑, 곧 황진이가 그가 노래를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의 집을 찾아갔다. 이언방은 자신이 이언방의 아우인 척 속이며 "형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도 노래는 제법 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한 곡조를 불렀다. 진랑이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저를 속이지 마십시오. 세상에 이런 노랫소리가 어찌 또 있겠습니까. 당신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옛날 노래를 잘했다는 면구와 진청인들 이보다 더 잘할 수 있겠습니까?"
(용어) 면구와 진청은 옛 중국의 노래 잘하던 이들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진랑은 개성에 살던 앞 못 보는 사람의 딸이다. 성품이 거침없어 마치 남자와 같았다. 거문고를 잘 탔고 노래도 잘 불렀다.
일찍이 산수를 유람하며 금강산에서 태백산과 지리산을 지나 나주에 이르렀는데, 마침 고을 원이 절도사와 함께 한창 잔치를 벌이고 있어 풍악과 기생들이 자리에 가득하였다. 진랑은 해진 옷에 때 묻은 얼굴로 태연히 그 자리에 끼어 앉아 이를 잡으며 노래하고 거문고를 탔는데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으니, 자리에 있던 여러 기생이 그 기세에 눌리고 말았다.
진랑은 평생 화담 서경덕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반드시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의 농막을 찾아가 한껏 즐긴 뒤에야 떠나가곤 하였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지족 선사는 삼십 년을 벽만 바라보며 수양했지만 내가 그 지조를 꺾어 놓았다. 그런데 오직 화담 선생만은 여러 해를 가까이 지냈어도 끝내 나와 아무 일도 없었으니,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성인이시다." 진랑은 죽을 무렵 집안사람에게 이렇게 부탁하였다. "상여가 나갈 때 부디 곡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인도해 다오." 지금까지도 노래하는 이들이 그가 지은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그 또한 남다른 인물이었다.
진랑이 일찍이 화담을 찾아가 이렇게 아뢴 적이 있었다. "송도에는 세 가지 빼어난 것이 있습니다." 선생이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자, 진랑은 "박연폭포와 선생님, 그리고 소인입니다" 하였다. 선생께서 이 말을 듣고 웃으셨다. 이는 비록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또한 그럴듯한 말이었다.
대체로 송도, 곧 개성은 산수가 웅장하면서도 굽이굽이 감돌아 흘러 뛰어난 인재가 많이 났다. 화담의 성리학은 조선에서 으뜸이었고, 석봉의 글씨는 나라 안팎에 이름을 떨쳤으며, 근래에는 차씨 집안의 부자와 형제 또한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진랑 역시 여인들 가운데서도 빼어났으니, 이것만 보아도 그가 한 말이 결코 헛말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개성에 안경창이라는 이가 있어 스스로 호를 사내라 하였다.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배부름을 잘 견뎌 낸다 하여 그렇게 호를 지었다고 한다. 그는 젊어서부터 집을 떠나 산수 사이를 떠돌아다녔는데, 일흔 살이 되어서도 얼굴이 늙지 않았고, 소재 노수신 정승, 지천 황정욱, 그리고 돌아가신 내 둘째 형과 가깝게 지냈다. 갑신년(1584년) 눈 내리는 겨울, 그는 갑산으로 귀양 가 있던 형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눈 속에서 적생원의 우물물로 목욕을 하고도 살갗에 소름 하나 돋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신기하게 여기며 무슨 비법이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여든넷의 나이에 병 없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 사람 역시 남다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증선지가 지은 《십팔사략》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문대공 성현이 이를 구하여 몹시 좋아하였다. 그때 그의 아들인 번중 성세창 정승이 이미 과거에 올라 있었는데, 공은 그에게 한 차례 이 책을 외워 보게 하고는 "이 정도면 대제학을 맡기에 충분하겠다"고 하였다. 조선 건국 초에는 모든 사람이 《고문진보》의 전집과 후집을 배우고서 문장을 지었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도 처음 글을 배울 때면 반드시 이 책을 중히 여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십팔사략》은 온갖 역사서를 통독한 사람이 그 요점을 추려서 잊지 않도록 기록해 둔 것이고, 《고문진보》는 한 사람이 우연히 이런저런 글을 뽑아 모은 것에 지나지 않으니, 그 고르고 버린 기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굳이 읽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어린 학생이 글의 이치를 깨우치는 데에는 《논어》와 《맹자》, 《통감》만으로도 충분한데 하필 그런 책을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있겠는가.
사문 조위한이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중국 사람들이 우리 동방 사람의 문장이 자기네보다 뛰어남을 꺼려서 《십팔사략》과 《고문진보》 두 책을 지어 우리나라에 보내왔다. 이 책들이 들어온 뒤로 우리 문장의 규모가 좁고 막혀서 옛날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이는 농담으로 한 말이라서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나 스스로 겪어 본 바가 있다. 나는 열두 살에 처음 글을 배웠는데, 《십팔사략》부터 읽는 것이 부끄러워 먼저 《통감》과 《논어》를 배웠더니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글의 이치가 훤히 트였다. 그런데 이웃에 살던 이 아무개는 일곱 살 때부터 《십팔사략》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빠짐없이 외웠고 그렇게 십 년을 외웠지만, 《통감》은 한 줄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하였다. 그런가 하면 여장 권필과 자민 이안눌은 모두 《고문진보》를 읽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시는 하나같이 좋았으니, 지세 조위한의 말도 나름의 이치가 있는 셈이다.
판부사 김수는 젊었을 때 《십팔사략》 읽기를 좋아하여 그 공부가 깊었다. 그가 교리가 되자 선조 임금께서는 그에게 《십팔사략》을 교정하게 하시고, 그 끝에 발문을 짓도록 하셨다. 그의 동료들이 이를 두고 놀리며 "신하를 알아보는 데는 임금만 한 이가 없다"고 하였다.
세상에는 글의 이치에는 어두우면서도 글은 잘 짓는 사람이 있다. 나의 매형 김성립은 경전이나 역사책을 읽으라 하면 입도 떼지 못하지만, 과거 시험용 문장만큼은 요점을 정확히 짚어내어 논술과 대책 문제에서 여러 차례 높은 등수에 들었다.
그가 대책문을 지을 때에는 거꾸로, 곧 글의 맨 끝부분부터 지어 올라가는 방식을 썼다. 맨 나중에 들어갈 마무리 부분을 먼저 짓고, 그다음에 폐단을 바로잡는 방안을 쓰고, 다음으로 조목조목 따지는 부분을, 그다음에 글 중간의 핵심 대목을 지은 뒤, 마지막으로 시험지에 옮겨 적을 즈음에야 비로소 첫머리를 지었는데, 그렇게 하고도 앞뒤가 조금도 어긋남 없이 정연하였으니, 이 또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식년시에서 경서의 뜻을 구술로 시험 보게 하는 것은, 본래 그 뜻을 제대로 밝혀 알고 있는지를 살피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선비들은 그저 구절을 끊어 읽는 법만 익힐 뿐 그 뜻은 전혀 알지 못한다. 경서의 장구마다 첫머리가 많아 다 기억하기가 어려우므로, 그럴듯하게 지어낸 말을 함부로 적어 넣어 외우는데, 그 요란한 말들을 성현이 남기신 훈계의 말씀 위에다 마구 늘어놓는 것이다. 이는 옛 성현을 욕되게 하는 짓이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일찍이 우초춘이 엮은 《명퇴조록》과 왕세정이 지은 《성사술》을 보았는데, 일찍 출세한 이들을 하나하나 갖추어 기록해 놓아 열한 살부터 쉰 살까지 빠짐없이 찾아 실어 놓았다.
우리나라에는 상고할 만한 기록이 마땅치 않으므로 우선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적어 둔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 인재가 매우 적기 때문에, 요행으로 과거에 오르고 요행으로 재상 반열에까지 오른 이도 많다. 이제 스무 살 이전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으로부터, 서른 살 이전에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 마흔 살 이전에 공경의 지위에 오른 사람들의 이름을 나이별로 다음에 적어 둔다.
열네 살: 곽거완이 진사가 되었고, 그 뒤 과거에 올라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열다섯 살: 구수영이 돈녕부 도정이 되었고, 이희순ㆍ이승건ㆍ권주ㆍ김규는 진사가 되었으며, 심언광은 향시의 세 시험에서 모두 장원을 하였다.
열여섯 살: 권홍ㆍ심은ㆍ장계금ㆍ이명한이 진사가 되었다.
열일곱 살: 남지는 경상도 도사가 되었고, 이행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열여덟 살: 구성군 이준은 병조 판서가 되었고, 이파는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김수녕과 박호는 문과에 장원하였고, 허봉ㆍ윤훤ㆍ이구는 생원진사시에 장원하였다.
열아홉 살: 이대해ㆍ이집ㆍ이후는 문과에 합격하였고, 오남은 무과에 장원하였다. 우흥적은 진사시에 장원하였다.
스무 살: 박은ㆍ박홍린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구는 문과에서 갑과 둘째로 급제하였다.
스물한 살: 구성군 이준은 도원수가 되었고, 이파는 이조 좌랑이 되었으며, 윤계선은 문과에 장원하였다.
스물두 살: 성표는 정국공신에 녹훈되었다.
스물세 살: 엄흔이 이조 좌랑이 되었다.
스물네 살: 허봉과 김신국이 이조 좌랑이 되었고, 남이는 승지가 되었다.
스물다섯 살: 윤계겸은 승지가 되었고, 박동량은 당상관이 되었다.
스물여섯 살: 남이는 병조 판서가, 이파는 도승지가, 박원종은 병조 참의가, 김신국은 의정부 사인이 되었고, 정사룡은 중시에 장원하였다.
스물일곱 살: 허봉은 예문관 응교가, 성표는 당상관인 첨지가, 김수녕은 이조 참의가, 신면은 승지가 되었다.
스물여덟 살: 구성군 이준은 영의정이 되었고, 이행은 승지가 되었다.
스물아홉 살: 윤사흔은 관찰사가, 박은은 승지가, 한숙창은 호조 참의가, 이계동은 대사헌이 되었다.
서른 살: 권건ㆍ신종호는 모두 승지가 되었고, 유운은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서른한 살: 이덕형은 겸 대제학이 되었다.
서른두 살: 박원종은 한성부 판윤이, 윤계겸은 공조 판서가 되었다.
서른세 살: 김감은 예조 판서가, 김정은 형조 판서가 되었다.
서른네 살: 박은은 병조 판서가, 한확은 이조 판서가, 허종은 함경도 관찰사를 겸하였다.
서른다섯 살: 김감은 겸 대제학이, 윤사윤은 의정부 참찬이, 유담년은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서른여섯 살: 성준과 이극감이 모두 형조 판서가 되었고, 박동량은 호조 판서가 되었다.
서른일곱 살: 윤사흔은 찬성이, 이정귀는 호조 판서가, 이자는 참찬이 되었다.
서른여덟 살: 이덕형은 우의정이, 한확은 찬성이, 이정귀는 대제학이, 장운익은 형조 판서가 되었다.
서른아홉 살: 윤사흔은 우의정이, 이파는 찬성이, 황치신은 참찬이 되었고, 성표는 음직으로 군에 봉해졌다.
마흔 살: 김질은 부원군이 되었고, 남지는 우의정이, 최천건은 이조 판서가 되었다.
이 밖에도 일흔다섯 살에 정승이 된 이가 두 사람이니, 청천 심수경과 완성 이씨였다. 나의 외사촌 형 김자한은 예순두 살에 경서 구술시험에서 열네 점을 받아 합격하여 과거에 올랐으니, 늘그막에 귀하게 된 경우로서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근래 재상 반열에 오른 이 가운데 아흔 살을 넘긴 이가 두 사람이니, 판중추부사 원혼과 좌찬성 송찬이다.
형조 참판 이거의 어머니는 백세 살에 세상을 떠났다. 상을 당할 때 참판은 일흔일곱, 큰딸은 여든다섯, 다음 딸은 여든두 살이었는데 모두 병이 없었다. 그 노인이 나이 백 세가 되었을 때 임금께서 부인이라는 칭호를 내리고자 하셨으나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므로, 특별히 그 아들에게 한성부 우윤 벼슬을 내리시고 아들의 관직에 맞추어 부인에게 내리는 임명장을 내려 주셨으며, 이 밖에도 쌀과 폐백, 술과 고기를 후하게 내리는 등 은혜로운 하사품이 많았다. 참판의 다섯 아들이 모두 벼슬길에 나아갔고, 손자가 거의 백 명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그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었다.
강릉부 태화현의 갑사 임세적은 백열일곱 살에 세상을 떠났으니, 근래에 없던 일이었다.
근래에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한 집으로는 윤신의 아들 후ㆍ길ㆍ서ㆍ감ㆍ탁 다섯 형제가 있다. 이들은 모두 이삼 년 사이에 잇달아 급제하였는데, 끝의 세 사람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다음으로는 윤해원의 아들 방ㆍ양ㆍ휘ㆍ훤이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고 벼슬도 모두 당상관에 이르렀다. 맨 끝으로 서자인 한도 과거에 올라 품계와 녹봉이 당상관 급으로 올랐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오르고 나란히 당상관에 오른 것 또한 드문 일이다. 이 밖에 무과로는 원주의 이응해와 부안의 민정란 형제가 있다.
과거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높이 발탁된 경우로는, 우의정 정지연이 급제한 지 열세 해 만에 정승으로 등용된 일이 있는데 이는 세자를 가르친 노고 덕분이었고, 좌의정 기자헌은 열다섯 해 만에 정승으로 뽑혔는데 이는 왕실과 혼인으로 맺어진 인연으로 총애를 받아서였다.
연원군 이광정과 금계군 박동량이 급제한 지 네 해 만에 당상관의 옥관자를 붙이게 된 것은 임금을 모시고 피란한 공로 때문이었고, 안종록이 여덟 해 만에 정이품의 금띠를 두르게 된 것은 관리로서의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참의 송준과 참의 성이문이 모두 다섯 해 만에 당상관의 붉은 옷을 입게 된 것은 청요직에 제수되어 갑작스레 승진하였기 때문이었다.
낮은 관직에서 갑작스레 크게 승진한 경우로는 월사 이정귀가 있다. 그는 정유년(1597년)에 병조의 낭관으로 있다가 세자시강원 필선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식 벼슬로 사헌부 집의가 됨과 동시에 당상관에 올랐다. 무술년(1598년)에는 병조 참판으로 발탁되었고, 경자년(1600년)에는 호조 판서로 승진하였다. 신축년(1601년)에는 대제학이 되었는데, 이는 그의 문학이 임금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으로 유천 한준겸은 정유년에 사간에서 승지가 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분음 최천건은 정유년에 헌납에서 잇달아 사간과 승지로 승진하였고, 기해년(1599년)에 품계가 올라 도승지가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재주와 그릇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의정 정언신이 대신으로서 군기시 제조를 겸했을 때, 같은 해에 장원 급제했던 이충원은 겨우 군기시 정에 머물러 있었다. 그 뒤 오성 이항복 또한 대신으로서 군기시 제조가 되었을 때, 같은 해 장원 급제했던 황치성이 또한 군기시 정으로 있었다. 이 두 경우가 서로 꼭 들어맞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오성이 황치성에게 농담으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대가 완원 이충원처럼 되는 것은 좋지만, 내가 정 정승처럼 되는 것은 원치 않네." 이는 완원이 그 뒤 일품 벼슬에 이르러 부원군이 되었지만, 정 정승 정언신은 정승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귀양을 가서 그곳에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오성 정승은 우스갯소리를 잘하였다. 근래 나라에 변고가 잦아지자, 해당 관청에서는 으레 대신에게 의견을 물어 임금께 아뢰곤 하였는데, 이것이 도를 넘어 사소한 일까지도 대신에게 의견을 묻게 되니 대신들이 이를 괴롭게 여겼다. 하루는 예조의 낭관이 의견을 물으러 와서 앞에 앉아 있었다. 공이 막 생각을 정리하여 의견을 말하려는데, 어린 계집종이 안에서 여쭙기를 "말먹이 콩이 다 떨어졌는데 어찌할까요?" 하였다. 공이 꾸짖으며 "말먹이 콩을 채우는 일까지도 대신에게 의견을 물어야 하는가?" 하니, 듣던 사람들이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나의 친가는 건천동에 있었다. 청녕공주 저택 뒤에서 본방교까지 겨우 서른네 채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조선 건국 이래로 이름난 인물이 많이 나왔다.
김종서ㆍ정인지ㆍ이계동이 같은 시대에 살았고, 양성지ㆍ김수온ㆍ이병정이 또 한 시대를, 유순정ㆍ권민수ㆍ유담년이 같은 시대를 살았다. 그 뒤로도 정승 노수신과 나의 선친, 그리고 지사 변협이 같은 시대였으며, 근래에는 서애 유성룡과 나의 둘째 형, 그리고 덕풍군 이순신, 원성군 원균이 한 시대를 살았다. 서애는 나라를 중흥시킨 공이 있었고, 원균과 이순신 두 장수는 나라를 구해 낸 공이 있었으니, 이 무렵에 이르러 더욱 성대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 이야기를 오성 정승에게 들려주었더니, 정승이 "그 동네에는 무장도 있는가?" 하고 물었다. 내가 "성우길의 벼슬이 가장 높습니다" 하고 답하니, 정승이 다시 "그대들과 견줄 만한가?" 하고 물었다. 내가 웃으며 "성 장군도 북쪽 변방에서 공을 세운다면, 훗날 사람들이 오늘을 돌아볼 때 오늘 우리가 옛일을 돌아보는 것과 같지 않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니, 정승이 크게 웃었다.
정승 심연원은 호음 정사룡과 같은 신해년(1491년)생이었다. 정사룡이 병자년(1516년) 봄 중시에 장원하여 홍문관 응교가 되었을 때, 찬성 김당의 집에 간 일이 있었다. 심연원은 그 김찬성의 사위였는데, 김공이 그를 불러내어 정사룡과 서로 인사를 나누게 하였다. 자리에 앉은 뒤 나이를 물으니 서로 동갑이었다. 그런데 정사룡은 이미 두 차례나 과거에 올랐는데 심연원은 아직 벼슬 없는 유생 신분이었으므로, 그때 자못 부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그 뒤 심공도 과거에 올라 좋은 벼슬을 두루 거치고 마침내 의정부에 들어갔다. 그런데 정사룡은 여전히 돈녕부 지사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심공이 비로소 그를 추천하여 예조 판서가 되게 하였다. 세상의 벼슬살이가 수없이 뒤바뀌는 것이 대개 이런 식이다.
참의 박미는 아들이 셋이었다. 그중 소영과 증영은 둘 다 일찍 과거에 올라 나란히 이조의 낭관이 되었으니 당대의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맏아들 광영은 어찌 된 셈인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채 마흔 살의 나이로 성균관 학생으로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나무랐고 본인도 스스로 곤혹스럽게 여겼다.
그 뒤 두 아우가 잇달아 세상을 떠났고, 광영은 뒤늦게야 과거에 올라 청요직을 두루 거쳐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봉군까지 되었으며 일흔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자손들도 잇달아 과거에 올랐고 재상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의 운명이란 이러하니, 빠르고 늦음이나 잘 풀리고 막히는 것을 가지고 한탄할 일이 아니다.
나의 외조부 되시는 참판공은 계묘년(1543년)에 영남 관찰사를 지낸 뒤 두 번째로 호조 참판이 되었다. 당초에 유인숙 공이 이조 판서로 있었는데 참판공과 우의가 두터웠으므로 그를 추천하여 도승지로 삼았다. 공은 송인수ㆍ구수담ㆍ이임ㆍ이해 등과 더불어 자주 삼사의 후보 명단에 올라 무려 열여섯 차례나 추천되었으나 끝내 임금의 낙점을 받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공은 가장 늦게야 전주 부윤으로 제수되어 지방으로 나갔는데, 유공은 그가 외직으로 나가는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을사년(1545년)에 유공이 사약을 받아 죽자, 그가 천거하여 언관이 된 이들은 모두 뜻밖의 화를 당했다. 참판공의 강직한 성품으로 그때 조정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흉악한 무리의 노여움을 샀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지방에 나가 있었던 덕분에 오히려 화를 면할 수 있었으니, 화와 복이란 이처럼 사람의 헤아림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께서 사헌부 장령으로 계실 때, 조정의 논의는 김안로를 다시 불러들이려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할아버지의 고향 사람이었던 심언광 형제가 그때 요직에 있었다. 김안로는 이들과 은밀히 결탁하고서, 기묘년(1519년)의 사화로 쫓겨난 사람들을 다시 등용하겠노라 약속하였다. 대체로 두 심씨는 그때 화를 입은 선비들을 다시 불러들여 심정ㆍ이항과 맞서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와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김안로의 말을 믿고 힘써 이 일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회재 이언적 선생이 사간으로 있으면서 그 논의를 힘껏 반대하였다. 심언광이 "이 아무개가 조정에 있는 한 김안로는 조정에 들어올 수 없다" 하고, 그를 탄핵하여 쫓아내려 하였다. 할아버지께서 이를 만류하며 "복고 이언적은 정직한 사람이고 김안로는 단정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사림을 다시 등용하겠다는 그의 말만 믿고 착한 선비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으나, 심언광은 듣지 않았다.
그 뒤 김안로가 다시 조정에 들어오자 하는 짓이 좋지 못했고, 기묘년에 화를 입은 이들도 다시 등용하지 않았다. 심언광이 그제야 분하게 여겼고, 김안로가 장옥 부자를 죽이려 할 때 심언광이 힘써 이들을 구해 준 일로 김안로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이조에서 함경도 관찰사로 밀려나 지방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 뒤 다시 김안로가 쫓겨나자 심언광을 대사헌으로 불러들였는데, 당시 논의는 "심언광이 아니었다면 김안로가 어찌 조정에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그 뒤에 비록 그와 맞섰다고는 하나 대사헌 자리에 제수할 수는 없다"고 하여, 그를 탄핵해 파직시켰다. 할아버지께서 그때 강원도 관찰사로 계셨는데, 길에서 심언광을 만나 위로해 주셨다. 심언광이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말하였다. "군자는 사람을 천거하는 일에 신중하지 않으면 반드시 일을 그르친다고 예로부터 경계하였는데, 나는 그것을 지키지 못하였으니, 공께서 하셨던 말씀을 이제 와 생각하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결국 이 일로 한을 품은 채 집으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외조부의 아우 되시는 광진 역시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젊었을 때 판윤 최연과 함께 절에 들어가 공부한 적이 있었다. 《주역》을 읽다가 채 절반도 마치지 못했는데 설날이 다가왔다. 두 분이 함께 부모님을 뵈러 내려가는 길에 저마다 공부한 것을 외워 보았는데, 최연 공이 잊어버린 대목이 있음을 알고는 곧바로 절로 되돌아 올라가 다 왼 뒤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옛 선배들이 배움에 뜻을 두는 것이 이처럼 독실하였다.
최연은 문장에 뛰어났고, 용모가 단정하여 옛날 문장가 반악과 하후담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스물세 살에 과거에 급제하니 여러 대신이 그를 아꼈다. 그가 독서당과 홍문관에 들어가게 된 것도 모두 그 생김새 덕분이었다. 중종 임금께서도 그 아름다운 용모와 몸가짐을 칭찬하셨다. 일찍이 밤마다 연이어 경연을 열었는데, 내시가 너무 자주 여는 것이 아니냐고 아뢰자 임금께서 "내가 최연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하셨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수찬으로 있을 때의 일이라 한다.
가정 신축년(1541년)에 외조부께서 전라도 관찰사가 되셨다. 그 아우 참판공은 그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있었는데, 두 분이 쌍계역에 함께 모여 아버지의 제사를 지냈다. 갑진년(1544년)에는 할아버지께서 경상도 관찰사가 되셨고, 참판공은 또 전라도를 순찰하는 직임을 맡았다. 이때에도 다시 쌍계역에서 제사를 거행하니, 영남과 호남의 사람들이 모두 이를 영예로운 일로 여겼다.
강원도는 땅이 좁지만, 강릉과 원주에는 이름난 인재가 많았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강릉에서 이름난 정승이 많이 나왔으나, 명종 임금 때부터는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이 전혀 없다. 원주에서는 팔계군 정종영과 판서 이개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근래에는 과거에 높이 합격한 이가 잇달아 나왔으나,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는 이가 많다. 강릉에서는 태사 최대중이 과거에 급제한 지 서른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이오라는 이가 과거에 급제했다고 한다.
원주 사람 고경오는 을사년(1605년) 증광시 향시에서 〈홍수불벽〉이라는 제목의 부를 지어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서울에서 치른 회시에서는 〈서명벽상〉이라는 부를 지어 합격하였는데, 그 이듬해 성균관 관원으로 있다가 벽에 글을 써 붙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매를 맞고 죽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한강 정구가 강릉 부사가 되었을 때, 임명 소식을 담은 조보가 강릉에 내려왔다. 향교의 학생 함승술이 강릉부에 들어왔다가, 새로 부임할 부사의 이름 끝 글자가 자기 이름의 끝 글자와 같은 것을 보고는 그것을 자기 이름자로 잘못 알았다. 집에 돌아오자 친구들이 "누가 부사로 왔는가?" 하고 물으니 "정술이라는 사람이 되었다" 하여, 사람들이 이를 듣고 웃었다.
그 뒤 한강이 부임하여 향교의 학생 명부를 살펴보다가 승술이라는 이름을 보고는, 또 그것을 자기 이름의 글자와 같은 것으로 잘못 알고 "함승구의 자는 무엇인가?" 하고 물으니, 듣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관찰사 권윤은 외조부의 외증조부이시다. 성종 임금 때 성균관의 우두머리로 있은 지 스무 해나 되었다. 그리하여 중종 임금 때 학문한 선비들은 모두 그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의 손자 권연은 기묘년(1519년) 봄 과거에서 〈대악부〉와 〈어룡무동정시〉라는 글을 지었는데 둘 다 훌륭하였다. 답안지의 이름을 열어 보니 바로 공의 손자였다. 지정 남곤이 그때 시험을 주관하였는데, 서둘러 그를 뽑아 장원으로 삼았다. 그는 식년시의 경서 구술시험에 두 차례 응시한 적이 있었다. 집에 두 장이 떨어져 나간 《맹자》 책이 있었는데, 시험 문제가 설마 그 떨어져 나간 부분에서는 나오지 않으리라 여겨 그 부분은 읽지 않고 응시하였다. 그런데 두 차례 시험 모두 《맹자》 문제가 하필 그 부분에서 나왔으므로, 운명이라 여겨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 뒤 조정에서 세자익위사 세마와 왕자의 사부로 두 차례나 불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정원과 연못을 잘 꾸미고 풍류로 스스로를 즐기며 살아, 그 고을에서 첫손에 꼽혔고, 소박한 복을 마흔 해 넘도록 누렸다.
권 장원의 딸은 진사 신명화의 아내이다. 그 시어머니가 병으로 위독해지자 권씨는 향을 피우고 한데에 나가 밤낮 이레 동안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권씨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는데, 하루는 하늘에서 새알만 한 빨간 환약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를 주워다가 갈아서 시어머니께 먹게 하였더니, 향기가 방 안에 가득했고 시어머니의 병도 곧 나았다.
이는 정성 어린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 하여 지금까지도 그 고을 노인들이 이야기한다. 조정에서 이 일을 듣고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율곡 선생의 어머니는 바로 이 권씨의 외손녀이다. 그런 까닭에 선생은 북평에 있던 권 장원의 집에서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날 때 상서로운 빛이 하늘에 비쳤는데, 장원은 이 아기를 남달리 여겨 몹시 사랑하였다. 선생의 어머니는 성품이 고요하면서도 굳세었고 문장에 능했으며 그림도 그렸다. 몸가짐이 매우 엄정하여 여성의 법도로 스스로를 단속하였는데, 선생의 학문은 태교에서부터 얻은 바가 많았다고 한다.
강릉은 풍속이 순박하여 예로부터 효도와 정절을 지킨 이가 많았고, 이를 기려 세운 정문이 마을마다 잇달아 보였다. 송강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에 "집집마다 벼슬을 내려도 좋을 만하다"라고 한 것이 결코 헛말이 아니었다.
한강 정구가 부사로 와서 효자와 효손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는데 참석한 이가 쉰두 명이나 되었다. 이런 장한 일은 예나 지금이나 드문 것이었다.
첨지 김담은 강릉 사람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 섬기는 정성이 더할 나위 없었다. 맛있는 음식은 손수 만들었고,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모시기를 마흔 해가 넘도록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버이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곡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지팡이를 짚어야 겨우 몸을 일으킬 정도였다. 술을 잔에 부어 놓고 부모의 신위를 모신 휘장 앞에 엎드려 하루 종일 통곡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잔의 술이 문득 말라 있어 사람들이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그는 일찍이 산에 올라 돌을 떠내어 부모의 묘표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런데 마침 한창 얼어붙은 겨울이어서 돌이 쪼개지지 않자, 공이 그 돌을 붙들고 통곡하니 돌이 갑자기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사람들은 이를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 하여 모두 감탄하였다. 조정에서 세 차례나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고, 대신 정문을 세워 그의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 뒤 나이가 일흔에 이르자 관찰사가 이를 임금께 아뢰어 특별히 당상관인 첨지 벼슬을 내렸으며, 그는 아흔 살까지 살았다.
남사고는 울진 사람으로, 애써 공부하여 역학의 이치에 두루 통달하였다. 천문과 지리, 점술에도 밝아 그가 말한 일은 하나같이 신기하게 맞아떨어졌다.
향시에는 여러 번 합격했으나 끝내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벗들이 "자네는 남의 운명은 잘 알면서 정작 자기 운명은 헤아리지 못하고 해마다 헛걸음을 하니 어찌 된 일인가?" 하고 물으니, 남사고가 웃으며 이렇게 답하였다. "사사로운 욕심이 생기면 점술도 어두워지는 법일세. 내가 합격하지 못할 것을 분명히 알았더라면 애초에 과거장에 가지도 않았겠지만, 욕심에 이미 생각이 흐려진 까닭에 늘 혹시나 합격할까 하는 마음으로 들떠서 오갔던 것이라네."
만년에 그가 천문학 교수로 서울에 있을 때, 태사성이라는 별에 무리가 지는 변고가 일어났다. 이를 두고 관상감 정 이번신이 자기가 나이가 많으니 이 변고가 자신에게 해당될 것이라 하였는데, 남사고가 웃으며 "따로 해당될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두어 달 뒤 과연 남사고 자신이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 이는 옛날 오나라 땅의 은자가 별의 변고에 자신이 죽기를 바랐으나 끝내 죽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견주면 무엇이 다르다 하겠는가.
(용어) 옛날 진나라 때 달이 어느 별자리를 범하자 점치는 사람이 은자가 죽을 것이라 하였는데, 당시 이름난 은자였던 대규는 혹 자신이 그에 해당할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 다른 은자인 사부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대규가 죽기를 바랐으나 죽지 못했다며 놀렸다는 옛이야기가 전한다.
왕실 종친인 서천령은 장기를 잘 두었다. 하루는 금강산 백전암을 유람하다가 지엄이라는 화상을 만났다. 텅 빈 방에 아무것도 없었고 다만 장기판 주머니가 벽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서천령이 "스님도 장기를 두실 줄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삼십 년 전에 두어 본 적이 있소" 하였다. 서천령이 곧 그 장기판을 가져다가 대국을 청하니, 스님이 한쪽 포를 빼고 두겠다고 하였다. 이를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이 늙은 중은 평생 포 하나만으로 두어 왔소" 하였다. 서천령이 "나는 전국에서 첫손에 꼽히는 솜씨요. 다른 사람들은 나와 대국조차 못 하는데, 스님은 어찌 포 하나를 떼고 두려 하시오?" 하니, 스님이 "시험 삼아 한번 두어 봅시다" 하였다. 세 판을 두었으나 서천령이 번번이 지고 말았다. 화상이 웃으며 장기판을 치우고는 다시 두지 않았다. 서천령은 탄복하며 그곳을 떠났다.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온 이들은 문희 예겸으로부터 진즙희ㆍ규봉 동월ㆍ자양 당고 등이 모두 당대에 이름난 이들이었지만, 재상 반열인 내각에 들지 못했다는 이유로 한림학사로서 사신으로 정해지면 으레 이를 피하려 하였다.
정묘년(1567년)에 명나라 목종이 즉위하여 우리나라에 조서를 반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시강 정사미를 사신으로 삼았으나 병으로 교체되었고, 병록 범응기를 대신 임명하였으나 그 역시 이를 피하려 하였다. 그때 마침 검토관으로 있던 각로 허국이 스스로 가기를 자청하여, 사신의 임무를 훌륭히 마치고 돌아갔다.
그 뒤 정사미는 시랑이 되었으나 일찍 죽었고, 범응기는 탄핵을 당해 오래도록 하급 관서에서 맴돌다가 뒤늦게야 겨우 남경 국자감의 좨주가 되었지만 또 권신의 미움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허국 공은 을유년(1585년)에 내각에 들어가 벼슬이 소부와 이부 상서에 이르렀고 일흔 살까지 살았다. 이는 혹시 하늘이 정사미와 범응기 두 사람이 일부러 사신 가기를 피한 것을 미워해서가 아니었을까?
감주 왕세정이 한씨 성을 가진 태사가 지은 세계 기록에 발문을 쓴 적이 있는데, "조선 사람이 문장에 능하다"고 한 뒤, 우리나라의 시를 명나라 선덕ㆍ성화 연간의 시와 견주고, 우리나라의 글씨는 원나라 명필 조맹부와 견주었다. 왕세정의 문집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름난 이들이 이를 보고는 우리나라를 낮추어 본 것이라 하여 매우 치욕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 와서 자세히 살펴보니, 왕세정이 평한 것은 실은 우리를 기린 것이지 깎아내린 것이 아니었다. 왕세정은 일찍이 선덕 연간의 양사기와 성화 연간의 이동양ㆍ정민정 등 여러 사람의 작품을 당나라 경룡 연간의 시와 견준 일이 있다. 그런데 양사기와 이동양은 이태백과 두보에 견주면서 우리나라의 시는 경룡 연간에 견주었으니, 이는 지나친 처사였다. 왕세정은 또 글씨를 평하면서 왕희지와 왕헌지 이후로는 오직 조맹부가 있을 뿐이고, 구양순ㆍ저수량ㆍ우세남ㆍ안진경ㆍ채양ㆍ미불은 모두 그다음 자리라고 하였다. 그런데 석봉의 글씨를 조맹부에 견주었으니 이 또한 충분히 높인 셈이다. 잠깐 보고 분하게 여겼던 것이니 참으로 한바탕 웃어넘길 만한 일이다.
급사 서관란은 그 가운데서도 글씨에 가장 뛰어난 이였다. 우리나라에 왔던 어느 명나라 장수가 안평대군의 글씨로 된 족자를 손에 넣고는, 이를 조맹부의 친필이라 속여 서관란에게 바쳤다. 서관란은 나를 불러 이것이 누구의 글씨인지 물었다. 내가 "세종대왕의 아들이신 안평대군 이용의 글씨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서관란은 "나는 참으로 이것이 조맹부의 글씨가 아닌가 의심했었소. 세상에 어찌 이토록 신묘한 글씨가 있단 말이오" 하였다.
하루는 그가 석봉에게 글씨를 청하므로, 석봉이 옛사람들의 글씨체를 본떠 열 폭을 써서 바쳤다. 서관란이 이를 하나하나 가려내며 말하였다. "이것은 장지의 체이고, 이것은 왕희지와 왕헌지의 체이며, 이것은 저수량의 체이고, 이것은 구양순과 지영의 체이며, 이것은 안진경의 체이고, 이것은 미불과 조맹부의 체로다." 마지막 한 폭은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를 본뜬 것이었는데, 서관란은 "이것은 옛 법도에 맞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굳세고 아름다워 사랑스럽다"고 하였다. 석봉은 이 말에 깊이 감탄하였다.
서관란 급사가 일찍이 먹 한 장을 나에게 주면서 "이것은 금나라 장종 때 만든 먹이니, 평생을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내가 이를 갈아 보니 빛깔은 짙은 검은색에 살짝 엉기어 있었고 향기가 여전히 짙었다. 무술년(1598년) 겨울부터 쓰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열세 해가 되었는데도 겨우 한 글자 두께만큼밖에 갈리지 않았으니, 참으로 기이한 물건이다.
왕세정이 일찍이 말하기를 "선성 지방의 제갈씨가 만든 붓은 더없이 정밀해서 하루 종일 써도 닳지 않는다"고 하였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 태사가 나에게 그런 붓 다섯 자루를 준 적이 있었는데, 토끼털로 만든 것은 뻣뻣하여 쉬이 말랐고, 양털로 만든 것은 부드러워 쉬이 꺾여서, 모두 우리나라의 족제비털로 만든 붓만은 못하였다.
주지번은 내가 쓰던 붓을 써 보고는 "닷새를 썼는데도 닳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천하제일의 붓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이런 붓을 수천 자루나 구해 갔다. 그는 또 우리나라 종이도 좋아하여 그중에서도 아주 얇은 것을 골라 많이 가져가며 "이것은 탁본을 뜨거나 그림을 본떠 그리기에 좋다"고 하였다.
돌아가신 둘째 형이 일찍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황씨와 왕씨, 두 명나라 사신은 몸가짐이 매우 엄정하였다. 임금께서 종이와 붓, 먹을 내려 주셨으나 모두 받지 않았다. 하루는 궁궐 안에 보관하고 있던, 일본에서 나는 닥종이로 찍은 《이백집》과 《두시》를 한 질씩 나누어 주었는데, 부사 채양은 이를 펼쳐 보고는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였다. 그런데 정사가 이를 받아들였는지 사람을 보내 물어보게 하였는데, 정사가 이미 돌려주었다는 말을 듣고는 자기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아, 이런 사람을 어디서 다시 볼 수 있겠는가."
근래 사신으로 온 이들 가운데 유독 웅대행만은 청렴하다고 일컬어지지만, 그 역시 서책이나 종이, 붓만큼은 받아 갔다고 한다.
오봉 이호민은 고천준ㆍ최정건 두 사신을 접대하면서 이들이 자꾸 물품을 요구해 와 몹시 시달렸고, 서경 유근은 주지번ㆍ양유년 두 사신을 접대하면서 시와 부를 주고받느라 몹시 고생하였다. 여장 권필이 이를 두고 "오봉은 몸이 고달팠고 서경은 마음이 고달팠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이 옳다고 하였다.
역관 이화종은 젊었을 때 지정 남곤과 음애 이자를 따라 북경에 간 일이 있었다. 마침 명나라 무종 황제가 남쪽 지방을 순행하고 있어, 이화종은 역참의 말을 타고 황제가 머무는 행재소까지 갔다가 남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우 지방의 물가에 이르러 말이 지쳐 잠시 앉아 쉬게 되었다. 그때 모래 속에 삐죽이 뼈 하나가 나와 있는 것을 보고 파냈더니, 여섯 마디로 이루어져 있고 꾸불꾸불하며 눈처럼 하얀 것이었다. 그는 별생각 없이 이것을 짐 속에 챙겨 넣고 북경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장사꾼들이 물건을 벌여 놓고 값을 흥정하고 있었다. 이화종이 이 뼈를 꺼내 짐짓 자랑하며 속여 팔려 하니, 한 장사꾼이 이를 보고 절을 하며 말하였다. "이것은 뿔 없는 용의 등뼈인데 그 안에 큰 구슬이 여섯 개나 들어 있으니 참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입니다." 급히 톱으로 갈라 보니 과연 복숭아씨만 한 구슬 여섯 개가 나왔다. 그 장사꾼은 곧 천 냥어치의 비단을 값으로 치르고 이것을 사 갔다. 이화종은 "이것은 하늘이 내려 준 것이니 어찌 나 혼자 차지할 수 있겠는가" 하고, 그 비단을 모두 나누어 상통사부터 노복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주었다. 남곤과 이자, 두 분도 이를 아름답게 여겨 시를 지어 칭찬하였다.
영원백 이성량의 할아버지는 본래 우리나라 이산 지방의 독로강가에 살다가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부부가 함께 철령위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 아버지는 변경을 지킨 공으로 유격장군이 되었고, 이성량은 아버지의 음덕으로 지휘 벼슬을 받았다. 젊었을 때 오랑캐를 쳐서 사로잡은 이가 많아 험산보 참장으로 기용되었다.
명나라 사신 허영양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압록강 가까지 전송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법으로 정해진 호위 군사의 수를 줄이고 그 몫으로 남는 말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허 사신이 이를 탄핵하려 하자, 이성량이 역관 곽지원에게 부탁하여 이 일을 무마해 달라고 청하니 마침내 탄핵을 면하게 되었다.
그 뒤 몇 해가 지나지 않아 이성량은 공을 세워 총병이 되고, 영토를 천 리나 넓혀 다섯 곳에 성을 쌓았다. 백작으로 봉해졌고, 그의 아들과 사위 가운데 고관에 오른 이가 수십 명에 이르렀다. 이들의 위세가 요동 일대를 뒤덮어 거의 사십 년 동안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근래에는 이에 견줄 만한 이가 없었다.
곽지원은 일찍이 북경을 오갈 때마다 이성량에게서 매우 후한 대접을 받았는데, 이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 집안의 성씨는 가락국 왕비에게서 비롯되었으니 거의 칠백 년이나 되었다.
고려 초에 이르러 시조께서 다스리시던 고을이 양천이었으므로, 마침내 이곳에 본관을 붙이게 되었다. 고려 오백 년이 끝날 때까지 대대로 과거에 올라 높은 벼슬을 지냈다. 정승이 된 이가 열한 분이고, 추밀원에 들어간 이가 여섯 분이다. 학사가 아홉이고, 공주와 혼인한 이가 다섯이다.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한 이가 둘이고 군에 봉해진 이가 열넷인데, 대대로 문장으로 이름난 이가 있었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다소 쇠퇴하여, 정승이 세 사람, 찬성이 두 사람, 육조의 판서가 넷이다. 공신이 세 사람, 학사가 열둘이다. 그중에서도 충정공 형제와 지사 허집, 찬성 허자, 그리고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초당 선생을 가장 으뜸으로 꼽는다. 근래에는 유수를 지낸 허잠이 청백리로 뽑혔는데, 이 또한 선조들의 이름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라 하겠다.
유격장군 허국위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나를 보고 반가워하였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허태악의 후손이라는 그대들이 나와 같은 성씨라 하니 사람들이 터무니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가락국의 왕비가 다른 나라에서 배를 타고 건너왔다고 하니, 어쩌면 그분이 중국 사악 신을 제사 지내던 가문의 후손으로서, 스스로 어느 왕국의 딸이라 핑계 대고 혼인을 이룬 것이 아니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이 유격의 말에도 나름의 일리가 있었다.
우리 선대는 야당 선생 이후로 두 대에 걸쳐 연달아 과거에 오른 분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리 고조부 때에 이르러 형제분이 함께 과거에 뽑히셨으나, 아우 되시는 분은 겨우 사간에 머물렀고, 고조부께서는 벼슬에 나아가지도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그 사간의 아들인 허집은 벼슬이 지사에 이르렀고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우리 증조부는 과거에 오르지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그 아우 되시는 허위는 지평이, 허온은 승지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문장에 능하셨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집안이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 삼 형제가 함께 문과에 올랐는데, 큰형님은 육조의 판서에 이르렀고, 둘째 형님은 학사가 되었으며, 나 또한 당상관의 반열에 들었다. 큰형님의 아들 실도 문과에 올라 정언이 되었고, 여러 조카도 모두 맑고 뛰어나 문장으로 이름이 있다.
이는 모두 선조께서 쌓으신 공덕의 효과이니, 대개 세월이 오랠수록 더욱 뚜렷이 드러나는 법이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의 문장과 학문, 절개와 행실은 사림에서 높이 추앙받았다. 큰형은 아버지의 경학을 이어받았고, 문장도 간결하면서 무게가 있었다. 둘째 형은 학문이 넓고 문장이 매우 높고 고고하여 근래에는 견줄 이가 드물다. 누님의 시는 더더욱 맑으면서도 씩씩하고 높으면서도 아름다워, 당나라의 개원ㆍ대력 연간 시인들보다 뛰어나다는 명성이 중국에까지 퍼져서 그곳의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모두 이를 칭찬한다. 재종형인 체씨는 옛 문장을 공부하여 시의 격조가 매우 높고 굳세며 부는 더욱 뛰어나서, 조선 건국 이래로 그와 견줄 이가 드물다. 나 또한 우리 집안 문장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아, 문예를 논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중국 사람들에게서도 제법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아버지와 우리 세 형제, 이렇게 네 부자가 함께 임금의 교서를 짓는 일을 맡았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는 큰형이 또 독서당에서 사가독서를 하였으며, 우리 삼 형제가 모두 사관으로서 붓을 잡기도 하였다. 둘째 형과 나는 나란히 과거에 장원하였고, 나는 또 세 차례나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 무렵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난 집안을 꼽을 때면 반드시 우리 집안을 첫손에 꼽았다.
옛날 중국 남조 시대에 유효작의 집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자매가 함께 문장에 뛰어났는데, 일찍이 스스로 자랑하여 "허씨ㆍ사씨 집안의 부귀도, 왕씨ㆍ사씨 집안의 영화로움도 모두 우리 집안의 학문과 문장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는데, 나 또한 우리 집안이 그러하다고 말하고 싶다.
성소부부고 제25권
10. 15:50
성소부부고 제25권 — 설부 4
성수시화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출처: 성소부부고 제25권, 설부 4, 성수시화 인 및 성수시화
배경: 허균이 신해년(1611년, 광해군 3년) 함열(당시 이름은 함산)로 귀양 가 있던 시절에 쓴 우리나라 역대 시 비평집이다. 원래 정미년(1607년)에 우리나라 시를 골라 정리하고 두 권짜리 비평서까지 지었으나, 원고 두 벌이 모두 없어지는 바람에 기억을 더듬어 새로 써낸 것이 이 책이다. 신라 말부터 허균 당대까지 약 팔백 년에 걸친 시인들을 다루며, 시 하나하나에 대한 짧고 날카로운 평을 곁들인다. 허균 특유의 거침없는 호오와 자기 집안(양천 허씨) 문인들에 대한 자부심이 곳곳에 드러난다.
성수시화를 쓰게 된 사연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우리나라는 당나라 말기부터 지금까지 붓을 들어 시를 지은 사람이 아마 수천 명은 될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름도 없이 묻히고 전하지 않는 이가 절반을 넘는다. 게다가 전쟁까지 겪으면서 책이 거의 다 없어졌으니, 뒷날 공부하는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그 자취를 살필 수 있을지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다.
나는 어려서부터 형님들과 스승들이 하는 말을 귀에 익도록 들었고, 자라면서는 스스로 글하는 사람이라 자부하며 살아온 지 어느새 삼십 년이다. 그동안 보고 기억해 온 것이 적지 않고, 일찍부터 어느 시가 맑고 어느 시가 탁한지 나름의 안목도 지녀 왔다고 생각한다. 정미년(1607년)에는 우리나라 시를 추려 정리하는 일을 마치고 이어서 시에 대한 비평까지 지었다. 시로 이름이 전하는 이든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이든 가리지 않고 널리 모아, 하나하나 옳고 그름을 가리고 평을 붙인 것이 모두 두 권이었다. 거기서 고른 시구들이 격조 높은 안목에는 어긋날지 몰라도, 자료를 찾아본 정성만큼은 한 시대의 문헌이라 할 만큼 넉넉했다고 자부한다.
글이 완성되자 원고를 정리해 딱 두 벌을 베껴 두었다. 하나는 낭주(지금의 전라남도 영암 지역)에 두었는데 잃어버렸고, 또 하나는 서울 집에 두었는데 이 역시 없어지고 말았다. 아마 도교에서 말하는 육정 귀신이 내려와 가져간 것은 아닐까.
(용어) 육정 — 도교에서 하늘의 뜻을 받들어 신비한 일을 맡아본다는 신들의 이름이다.
다시 써 보려 해도 하늘이 꺼리는 일을 감히 다시 범하고 싶지 않아 그냥 손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 신해년(1611년, 광해군 3년)에 함열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마침 할 일 없이 한가한 처지라 예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기억나는 대로 종이에 옮겨 적어 보았다. 다 쓰고 나서 다시 읽어 보니 제법 마음에 들기에 이를 "시화"라 이름 붙였다. 모두 아흔여섯 항목이다. 위로 팔백 년의 시간에서 뽑아낸 것이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니 너무 간략한 것 같기도 하지만, 요컨대 이 역시 내 나름대로 정성을 다한 것이니 읽는 사람은 그 뜻을 헤아려 주기 바란다.
이해 사월 스무날, 교산이 쓴다.
신라·고려 시대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고운 최치원 학사의 시는 당나라 말기의 시인답게 정곡이나 한악 같은 이들의 풍을 크게 벗어나지 못해서, 대체로 가볍고 부박하여 무게가 부족하다. 다만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니 이 세상에 내 마음 알아줄 이 드물구나 깊은 밤 창밖에는 비가 내리는데 등불 앞에서 만 리 밖 고향을 생각하네
라 한 절구 한 수가 가장 뛰어나며, 또 다른 연구에
먼 나무들은 강둑길을 따라 들쭉날쭉하고 찬 구름은 말 앞 봉우리에 나직이 내려앉네
라 한 구절도 아름답다.
(용어) 최치원(857~?) — 신라 말의 학자·문장가.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살이를 했으며, 귀국 후에는 어지러운 정치 현실에 실망해 은거했다고 전한다. 호는 고운.
정 대간(정지상)의 시는 고려 전성기 시인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 남아 전하는 작품은 매우 적지만 편마다 모두 뛰어난 절창이다. 이를테면
바람에 실려 가는 나그네 배엔 조각구름 떠 있고 이슬 엉긴 궁궐 기와엔 옥빛이 번쩍이네
라 한 구절은 조금 가벼운 편이지만,
버드나무 늘어선 골목엔 예닐곱 집 문이 닫혔고 밝은 달 아래 발을 걷은 이는 서너너덧 사람일세
라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신기하고 빼어나다. 또
바위 위 소나무는 조각달 아래 늙어 가고 하늘 끝 구름은 천 개의 산봉우리에 나직이 걸렸네
라는 구절은 딱딱하고 까다롭지만 그런대로 맑고 깨끗한 맛이 있다.
(용어) 정지상(?~1135) — 고려 인종 때의 문신·시인. 서경(지금의 평양) 출신으로 묘청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대간은 그가 지낸 벼슬 이름.
정 대간이 서경에서 지은 시로
비 갠 긴 둑엔 풀빛이 더욱 짙고 님 보내는 남포엔 구슬픈 노래 울리네 대동강 물이야 어느 때에나 마르리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푸른 물결에 보태지는 것을
이라 한 것은 지금까지도 절창으로 꼽힌다. 부벽루 현판에 새겨진 시들은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모두 철거했지만 이 시만은 남겨 두었다. 훗날 최고죽(최경창)이 이 시에 화답하여
강 언덕엔 길고 긴 능수버들 휘늘어지고 연 따는 노랫가락 조각배에 요란하더니 붉은 꽃도 다 져서 서풍은 차갑기만 한데 해 저문 물가엔 흰 물결만 일어나네
라 했고, 이익지(이달)는
연잎은 들쭉날쭉 연밥은 주렁주렁 연꽃 사이사이로 아가씨들 노래하네 돌아올 땐 물목에서 벗 만나자 약속했기에 힘겹게 배를 저어 물결 거슬러 오르네
라 했다. 두 시 모두 매우 훌륭하여 당나라 왕창령이나 이군우의 여운이 느껴지지만, 이는 연밥 따는 노래일 뿐이지 서경에서 이별하는 본래의 뜻과는 다르다.
〈한림별곡〉에서도 유원순의 글과 이인로의 시를 함께 일컬었으니, 이 대간(이인로)의 시는 참으로 당대 제일이었다. 그의
한밤중 닭 울음소리에 벌떡 일어나 춤을 추고 몇 번이나 이를 잡으며 좋은 계책을 논했던가
라는 구절은 매우 훌륭하여, 명나라 구종길의
지난날엔 이광을 따라 범 바위를 쏘더니 한밤중 닭 울음에 유곤처럼 춤을 추네
라는 시와 비슷하며, 그의 팔경시 또한 아름답다.
(용어) "한밤중 닭 울음소리에 일어나 춤을 추고" — 진나라 조적이 벗 유곤과 함께 지내다가 한밤중 닭 울음소리를 듣고 "이것은 좋은 징조다" 하며 함께 일어나 춤을 추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따온 구절이다. "이를 잡으며 계책을 논했다"는 구절 역시, 진나라 왕맹이 권력자 환온 앞에서 거리낌 없이 이를 잡아가며 세상일을 논했다는 옛이야기에서 왔다. 이인로(1152~1220)는 고려 무신정권기의 문인으로, 호는 쌍명재, 대간은 그가 지낸 벼슬 이름.
이 대간이 승정원에서 숙직하며 지은 시에
공작 병풍 깊은 곳 촛불 그림자 희미한데 원앙새는 쌍쌍이 잠드니 어찌 저마다 날아가리 가엾어라 초췌한 청루 속의 여인이여 평생토록 남을 위해 시집갈 옷을 짓는구나
라 했다. 대체로 이 대간이 오래도록 낮은 벼슬에 머물러 있고 아직 등용되지 못했는데, 동료들은 모두 재상 길에 올라 있어서, 그들의 승진 사령장을 대신 쓰면서 느낀 바가 있어 이 시를 지은 것이다.
이 문순(이규보)의 시는 화려하고 거침이 없다. 그의 칠석우라는 시는 참으로 절창이다.
얇은 적삼에 삿자리 깔고 바람 부는 난간에 누웠다가 꾀꼬리 울음소리 두세 번에 꿈을 깨었네 짙은 잎에 가려진 꽃은 봄이 지나도록 남아 있고 엷은 구름 헤치고 나온 햇살은 빗속에서도 밝구나
라 했는데, 이 시는 읽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해진다. 또
관원이 한가로이 젓대를 골라 부니 부들자리는 바람 타고 날아갈 듯하구나 하늘에 걸린 달은 온 천하가 함께 보는 것인데 내 배에만 혼자 싣고 돌아가는 양 여기네
라 한 시도 더없이 고아하고 빼어나다.
(용어) 이규보(1168~1241) — 고려 무신정권기의 대표적 문인. 시와 술, 거문고를 즐겨 "삼혹호 선생"이라 불렸으며, 시호는 문순.
같은 시대의 한림 진화는 이규보와 나란히 이름을 떨쳤는데, 그의 시는 매우 맑고 아름답다.
매화는 떨어지고 버들가지는 늘어졌는데 한가로이 맑은 안개 밟으며 느릿느릿 걸어가네 어점은 문 닫혀 사람 소리 드문데 온 강에 내리는 봄비는 실실이 푸르구나
라 한 시는 맑고 굳세어 읊조릴 만하다.
사인 홍간의 시는 농염하고도 맑고 곱다. 그의 〈나부인〉과 〈고안〉 같은 시편은 가장 훌륭해서 당나라 전성기 시인들의 작품과 비슷하다.
이견간의 시에
여관에는 등불 하나, 남은 심지 돋우노라니 사신의 담백한 정취는 중보다 낫구나 창 너머 두견새 소리 밤새 듣노니 산꽃 몇째 층에서 우는 것인가
라 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절창이라 일렀다. 나는 관동 지방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사람들이 두견이라 부르는 그 새는 사실 소쩍새 종류였다. 절강 사람 왕자작과 사천 사람 상방기가 함께 강릉에 왔을 때 내가 물어보았더니, 둘 다 이것은 두견이 아니라고 했다. 시인들이란 흥에 겨워 말을 붙이는 법이라, 정작 그 물건이 아니더라도 시 속에서는 그런 말을 즐겨 쓰는 것이다. 이를테면
숲 너머 흰 잔나비 울음소리 부질없이 듣노라
와 같은 구절도, 사실 우리나라에는 본래 잔나비가 없다. 또
집집마다 긴 대숲에 비취새가 우는구나
와 같은 구절은, 파랑새를 보고서 남쪽 바다의 비취새라 부른 것이고,
자고새는 놀라 해당화를 흔드네
와 같은 구절은, 때까치가 깍깍 우는 소리를 듣고서 "가지 마오"라 우는 자고새로 여긴 것이니, 모두 이런 식이다.
원외 김극기는 시상이 매우 교묘하다. 겨울에 핀 오얏꽃을 읊으면서 마지막 구에
기이한 향기가 저절로 굴속에 모여드니 한나라 궁궐에서 이 부인을 다시 보는 듯하네
라 했으니, 이는 옛 시인들도 미처 말하지 못했던 발상이다. 의주에 있을 때 지은 시에는
문장이란 늙어서도 서로 즐길 만한 것 칼 한 자루 차고 변방을 돌며 다섯 수레 책을 우러르네 공무를 마치고서야 내가 변방 관리인 줄 깨닫나니 종이창 밝은 곳에 누워 책이나 보는구나
라 했으니, 세속의 근심을 훌훌 떨쳐 버리는 그 심사가 후련하게 느껴진다.
최해와 이제현, 그리고 고려 말의 문장가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사람들 말로는, 최예산(최해)이 이익재(이제현)의 시 원고를 모조리 먹칠해 지워 버리고 딱 한 편만 남겨 두었다고 한다. 그 시는
얇은 이불에 한기가 돌고 불등은 흐릿한데 상좌 스님은 한밤 내내 종을 울리지 않는구나 아마도 자고 난 손님이 문을 일찍 여는 게 못마땅해 뜰 앞에 눈 덮인 소나무를 못 보게 하려는 것이겠지
인데, 이를 보고 이제현이 크게 감탄하며 최해를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지나치게 꾸며낸 이야기다. 이제현의 시에는 좋은 작품이 매우 많다. 〈화오서곡〉과 〈민지〉 같은 옛 시체의 작품들은 모두 옛 시에 가깝고, 여러 율시들 역시 웅장하고 맑다. 젊을 때 지은 역사를 노래한 시 가운데
누가 알리오, 업 땅의 순문약이 끝내 요동의 관유안에 부끄러울 줄
이라 한 구절이나, 또
서시를 배에 싣고 떠나보내지 않았다면 월나라 궁궐에도 도리어 고소대 하나가 생겼으리
라 한 작품, 또
유비가 그저 잠총국(촉나라)만 사랑하고 있었다면 옛 마을에 우보개거 이야기는 부질없이 생겼을 것을
이라 한 작품들에 이르러서는 하나같이 규모가 반듯하고 이전 사람들이 미처 펼쳐 내지 못한 발상이니, 어찌 낮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다만 최해가 남긴 그 시 한 편으로 이제현을 감탄시켰다는 이야기는, 뛰어난 인물이 평범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식의 과장이라 전부 믿을 수는 없다.
(용어) 최해(1287
1340) — 고려 말의 문인. 가난한 살림에 만년에는 절에서 밭을 빌려 농사지으며 글을 썼다. 호는 예산농은. 이제현(1287
1367) — 고려 말의 대표적 문신·학자. 원나라에 오래 머물며 이름난 학자들과 교유했고, 호는 익재. "순문약", "관유안"은 각각 후한 말의 인물 순욱과 관녕을 가리킨다. 순욱은 절개를 굽혀 조조 밑에서 벼슬했고, 관녕은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산속에 은거하며 절개를 지켰다. "서시를 배에 실은" 고사는, 오나라에 패한 월나라가 미녀 서시를 오왕에게 바쳐 그 마음을 흐트러뜨린 뒤 결국 오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옛이야기다. "우보개거"는 촉나라를 세운 유비가 어릴 때 뽕나무 아래서 놀며 "내가 반드시 저 뽕나무 같은 화려한 수레를 타게 될 것이다"라고 농담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이제현의 장인은 국재공(권보)인데, 부부가 함께 아흔넷까지 살았으나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제현이 장인을 애도하며 지은 만시 한 구절에
항아는 광한전에서 님 오시길 기다리는데 거사는 그저 홀로 도솔천으로 돌아가네
라 했다. 권보 공이 부처를 좋아했으니 그를 도솔천에 오른 백낙천에 비유한 것은 괜찮지만, 항아가 남편의 약을 훔쳐 달로 달아났다는 이야기는 예로부터 시인들이 속세를 떠나 신선 세계로 올라간 것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었는데, 이를 장모에게 갖다 쓴 것은 그다지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용어) 권보(1262~1346) — 고려 말의 문신, 호는 국재. "항아" 이야기는 명궁 예의 아내 항아가 남편이 얻은 불사약을 몰래 훔쳐 먹고 달로 달아나 달의 선녀가 되었다는 중국 신화다. "거사가 도솔천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백낙천)가 만년에 자신을 도솔천에 사는 부처의 제자로 여겼던 데서 온 말이다.
이 문정(이색)의 〈어제 영명사에 들르다〉라는 작품은 특별히 꾸미거나 다듬은 흔적 없이 저절로 음률에 들어맞아, 읊으면 신비로울 정도로 빼어나다. 명나라 사신 허영양이 이 시를 보고 "그대 나라에도 이런 작품이 있구려" 하고 감탄했다. 그의 〈부벽루〉 시는 긴 작품인데 그 가운데
문머리엔 고려의 시가 여태 걸려 있으니 그 시절에도 이미 중국 글자를 깨쳤구나
라는 구절이 있다. 비록 우리나라 사람을 낮춰 보는 말이지만, 그 역시 이색의 시에는 탄복하고 있었던 셈이다.
(용어) 이색(1328~1396) — 고려 말의 대학자·문신. 원나라에 유학해 과거에 급제했으며 목은으로도 불린다. 시호는 문정. 정몽주, 정도전 등을 길러낸 스승 격의 인물이다.
이색은 원나라에 들어가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제과에 합격했는데, 그때 응봉한림 구양규재(이름은 현)와 우도원(이름은 집) 같은 이들이 모두 그를 추어올렸다. 규재는 감탄하며 "우리 학문의 정통은 마땅히 바다 건너 그대에게 전해질 것이오" 하고 말했다. 그 뒤 이색이 고려 말에 궁지에 몰려 이리저리 쫓겨 다닐 때는, 그의 문하생과 옛 동료들조차 모두 등을 돌리고 돌을 던졌다. 그때 공이 시를 지어
학문의 정통은 마땅히 바다 건너 전해지리라던 규재의 그 한마디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요즘 세상 물건값은 죄다 날개 돋친 듯 오르는데 내 글만은 홀로 한 푼어치도 안 나가는구나
라 했으니, 대개 좋은 시절을 만나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슬퍼한 것이다.
원나라가 반란을 일으킨 승려 무리를 보내왔을 때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놀랐는데, 우리 태조(이성계)가 적은 군사로 이들을 덕흥에서 크게 물리쳤다. 태조가 개선하자 공민왕은 그 공을 치하하며 이색과 태조에게 함께 나라의 큰일에 참여하도록 명했다. 임명을 알리는 교지를 내리던 날, 공민왕은 기뻐하며 좌우에게 "문관으로는 이색을 쓰고 무신으로는 이성계를 쓰니, 내 사람 쓰는 안목이 어떠하오" 하고 말했다. 태조는 이색과 우정이 매우 두터워, 자기 집의 당호를 지어 달라고 청했다. 이색은 "송헌"이라 이름 붙이고 그 뜻을 풀어 글까지 지어 권면했으며, 훗날 태조의 아버지 환조의 비문도 지어 주었다.
(용어) 송헌 —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쓰던 당호(집이나 서재에 붙이는 이름)로, "소나무 처마"라는 뜻이다.
훗날 이색이 지방으로 유배되고 아들 종학과 종선도 모두 먼 곳으로 귀양 가게 되자, 그의 문인이었던 정총과 정도전이 이색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그러자 공이 시를 지어
송헌(이성계)이 나라를 맡자 나는 유배를 가니 꿈속에서인들 이런 일을 한 번이나 생각했으랴 정씨 두 사람이 나라의 큰 논의에 참여한다니 우리 한 집안이 다시 모일 날이 언제나 있으리
라 했다. 첫 구절은 애처롭지만 둘째 구절 이하의 뜻은 몹시 오만하다.
정몽주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정 포은(정몽주)은 이학과 절의에서 당대 으뜸이었을 뿐 아니라 문장도 호방하고 걸출했다. 그가 함경도 북관 지역에서 지은 시에
정주 땅 중양절에 높은 곳에 올라보니 국화는 예전처럼 눈부시게 피었구나 갯벌은 남으로 선덕진에 이어지고 산줄기는 북으로 여진의 성에 닿아 있네 백 년 세월 전쟁 치른 나라의 흥망사에 만 리 밖 나그네는 강개한 마음 끓어오르네 술자리 파하자 원수는 말에 올라타고 낮은 산에 기운 해는 깃발을 비추는구나
라 했으니, 음절이 힘차고 시원스러워 당나라 전성기의 풍격이 있다. 또
풍류 넘치는 고을 태수는 이천 석 녹봉의 자리요 옛 친구 우연히 만나 삼백 잔 술을 기울이네
라 한 구절이나, 또
나그네는 고향에 못 가는데 제비 새끼 만나고 살구꽃 지고 나니 복사꽃도 따라 지네
라 한 구절, 또
매화 핀 창가엔 봄빛이 일찍 찾아들고 판자 지붕엔 빗소리가 유난히 많네
라 한 구절들은 모두 호탕하게 펄펄 날아오르는 기운이 있어, 그 사람됨과 꼭 닮았다.
포은의 시에
강남의 아가씨들은 머리에 꽃을 꽂고 웃으며 짝을 불러 물가에서 노니는데 노 저어 돌아오니 어느덧 날이 저물고 원앙새 쌍쌍이 나니 시름은 그지없네
라 했으니, 호탕한 풍류가 천고에 빛을 내며, 시 역시 옛 악부의 가락과 흡사하다.
(용어) 정몽주(1337~1392) — 고려 말의 대학자·충신.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다가 이방원 세력에게 죽임을 당했다. 호는 포은.
요동에 유배된 문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척약재 김구용의 시는 매우 맑고 참신하며 섬세하고 풍성했다. 목은 이색이 "경지(김구용의 자)가 붓을 들면 마치 구름과 안개가 피어나는 듯하다"고 칭찬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김구용은 일찍이 회례사가 되어 예물을 요동에 바쳤는데, 요동 도사 반규가 그를 명나라 수도로 잡아 보냈다. 예물 문서에 "말 오십 필"이라 써야 할 것을 실수로 "말 오천 필"이라 적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태조는 우리나라가 요동의 관리와 사사로이 교분을 맺었다며 화를 내고는 "말 오천 필이 오면 풀어 돌려보내겠다"고 했다. 이때 광평부원군 이인임이 나라 정치를 맡고 있었는데, 평소 김구용 무리와 사이가 나빠 끝내 말을 바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는 그를 대리(지금의 중국 윈난성 지역)로 유배 보냈다. 공이 시를 지어
죽고 사는 것이 운명이라니 하늘의 뜻을 어이하리 동쪽으로 고향 하늘 바라보니 갈 길은 아득한데 좋은 말 오천 필이 언제나 도착할는지 복사꽃 핀 문밖엔 풀만 무성히 우거졌네
라 했고, 또 무창에서 지은 시에는
황학루 앞엔 물결이 솟구치는데 강 따라 늘어선 주막은 몇천 채런가 추렴한 돈으로 술 사다 회포를 풀어 보나니 대별산은 푸른데 해는 이미 기울었구나
라 했는데, 공은 끝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용어) 김구용(1338~1384) — 고려 말의 문신·문인. 명나라와의 외교 문서 사고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호는 척약재.
그 뒤 참의 조서 역시 금치(지금의 중국 윈난성 지역)로 유배되었다가 몇 해 만에 풀려 돌아왔는데, 황주에서 지은 시에
물빛과 산 기운은 맑은 모래를 어루만지고 버들 푸른 긴 둑엔 천만 채 집이로세 무수한 장삿배는 성 아래 정박해 있고 대나무 누각의 안개 낀 달밤엔 피리 노래 드높구나
라 했다. 나는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좁은 이 땅에서만 살다 보니 천하를 두루 유람해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 두 사람은 비록 낯선 땅으로 유배되긴 했어도 그 덕분에 중국 오나라와 초나라의 산천을 다 보았으니, 이 또한 사람으로서 얻기 힘든 통쾌한 일이라 하겠다.
이 도은(이숭인)의 〈오호도시〉를 목은 이색은 크게 칭찬하며 당나라 전성기 시에 견줄 만하다고 했는데, 이 일로 삼봉 정도전과 사이가 나빠져 결국 기구한 화까지 입게 되었다. 예전에 명나라 사신 주태사가 이 작품을 보고 역시 매우 감탄했다고 한다. 그
산 북쪽과 산 남쪽으로 가느다란 길이 갈라지고 소나무 꽃은 비를 머금어 어지러이 떨어지네 도인이 물을 길어 초가집으로 돌아오니 한 줄기 푸른 연기가 흰 구름을 물들이네
라 한 시는, 당나라 시인 유장경에게 견주어도 모자랄 것이 없다.
(용어) 이숭인(1347~1392) — 고려 말의 문신·문인. 조선 개국 세력과 대립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호는 도은.
나라가 세워진 초기에는 정교은(정이오)과 이쌍매(이첨)의 시가 가장 훌륭했다. 정교은의 시에
이월도 다 저물고 삼월이 오려 하니 한 해의 봄빛이 꿈결처럼 돌아오네 천금으로도 이 좋은 시절은 살 수 없으니 술 익어 가는 어느 집에서 꽃이 한창 피었는고
라 한 시는 당나라 시인들의 아름다운 경지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쌍매의
신선이 차고 온 옥 소리 쟁그랑쟁그랑 높은 누각에 올라와 푸른 창에 걸어 놓고 밤 되어 다시금 유수곡을 타노라니 둥근 달 하나가 가을 강에 내려앉네
라 한 시도 빼어난 운치가 있다. 이쌍매의 〈꾀꼬리 소리를 듣고〉라는 시에
서른여섯 궁궐 후원 봄 나무 깊숙한데 미인이 꿈에서 깨니 남창엔 어스름 영롱한 백 가지 울음소리 시름겹게 들으니 모두가 향기로운 규방에서 임금을 기다리는 마음일세
라 했으니,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와 흡사하다.
(용어) 정이오(1354
1440) —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호는 교은. 이첨(1345
1405) —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호는 쌍매당.
조운흘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석간 조운흘은 고려 때 이미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늘그막에는 미친 척 세상을 즐기며 지내다가 스스로 사평원(지금의 서울 강동 지역 나루터 역원)의 원주가 되기를 자청했다. 하루는 권세가 임견미와 염흥방의 무리로 지목되어 지방으로 유배 가는 사람들이 길에 줄줄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한낮에 사람 불러 사립문 열고 숲 속 정자로 걸어나가 이끼 낀 돌에 앉으니 어젯밤 산속엔 비바람이 거칠더니 개울 가득 흐르는 물에 꽃잎이 떠내려오네
(용어) 조운흘(1332~1404) —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늘그막에 세상일에서 물러나 강가 나루터의 관리인을 자청하며 은둔했다. 호는 석간. 임견미와 염흥방은 고려 말 권세를 부리다 처형된 권신들이다.
세종 때의 문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세종 임금 때는 인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이름난 문장가와 학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옛 시체로 지은 고시는 옛사람들에 견주면 자못 부끄러운 수준이고, 율시나 절구에서도 딱히 놀랄 만한 작품은 없다. 다만 서사가(서거정)의 시는 다소 장황하기는 해도 풍성하고 아름다워 간간이 좋은 구절이 있다. 이를테면
노니는 벌은 쉴 새 없이 날아다니고 한가한 오리는 서로 기대어 조는구나 달빛은 풀벌레 소리 너머로 비치고 은하수는 까치 그림자 속으로 흐르네
라 한 구절이나
다시 한번 난새를 타고 쇠피리를 불며 깊은 밤 밝은 달빛 아래 강남을 찾고 싶네
와 같은 구절은 제법 운치가 있다.
(용어) 서거정(1420~1488) — 조선 초의 대표적 문신·학자. 여러 차례 대제학을 지내며 당대 문단을 이끌었다. 호는 사가정.
김괴애(김수온)의 시 또한 호방하다. 이를테면
사립문이 삐딱하게 시냇둑에 다다르니 산비 내리는 아침마다 물 불어나는 걸 보노라
라 한 구절이나,
밝은 창가에서 스님은 승복을 깁고 고요한 탑 아래서 나그네는 시를 짓네
라 한 구절은 매우 한가롭고 여유로워 운치가 있다.
(용어) 김수온(1409~1481) — 조선 초의 문신·학자.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호는 괴애.
강경순(강희맹)의 〈양초부〉는 대단히 훌륭하며 그의 시 역시 맑고 굳세다. 그의 〈병중에 읊다〉라는 시에
남창에 종일 앉아 세상일 다 잊었더니 뜨락엔 사람 없어 새가 나는 법을 배우는구나 가는 풀 사이 은은한 향기 어디서 오는지 묽은 연기 스러지는 볕에 가랑비 부슬부슬
이라 했고, 매화를 읊은 시에
어스름 울타리 가에서 뻗은 가지 바라보고 느릿느릿 향기 찾아 물가에 다다르니 천년 세월 나부산에 떠 있던 둥근 달이 오늘에 와 다시 비치니 꿈에서 깨어난 듯하네
라 했는데, 모두 한아하여 읊조릴 만하다.
(용어) 강희맹(1424~1483) — 조선 초의 문신·학자. 농업서 《금양잡록》을 짓기도 했다. 자는 경순, 봉호는 진산.
서사가가 오랫동안 대제학을 지냈기 때문에, 같은 시대의 강진산(강희맹)·이양성(이승소)·김영산(김수온) 같은 이들은 모두 문형(대제학 자리)을 맡아 보지 못한 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양성이 제비를 읊은 시에
버드나무 푸른 골목에 봄바람은 저물어 가고 풀빛 푸른 연못가에 가랑비는 자욱하네
라 한 구절은 당나라 시인의 시구와 흡사하다.
우리나라 시에는 옛 시체를 제대로 본뜬 것이 드문데, 오직 성화중(성간)이 안연지·도연명·포조 세 사람의 시체를 본떠 지은 세 편만은 그 법식을 깊이 터득했고, 여러 절구 역시 당나라의 악부체를 얻었으니, 이 사람 덕분에 우리 시단이 겨우 쓸쓸함을 면했다고 할 만하다.
(용어) 이승소(1422
1484) — 조선 초의 문신, 봉호는 양성군. 성간(1427
1456) — 조선 초의 문인, 자는 화중. 안연지·도연명·포조는 모두 중국 남북조 시대의 유명한 시인들이다.
김종직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점필재(김종직)의 글은 요체는 깨우쳤으나 높은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니, 최동고(최립)가 그를 가장 업신여겼다. 그의 시는 온전히 소식과 황정견에게서 나왔으니, 옛 시를 평가하는 사람들이 그를 낮추어 보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러나 나의 둘째 형(허봉)은 일찍이 그의 시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이 우니 맑은 이슬이 내려 맺히고 달이 뜨니 큰 물고기가 뛰어오르네
라 한 구절은 결코 당나라 전성기의 시에 뒤지지 않으며,
가랑비 속에 스님은 장삼을 꿰매고 찬 강 위로 나그네는 배 저어 가네
와 같은 구절은 매우 한적하고 담백한 맛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는 대체로 맞는 말씀이다.
(용어) 김종직(1431
1492) — 조선 초의 대학자. 영남 사림파의 종조로 꼽히며, 죽은 뒤 그가 쓴 〈조의제문〉이 빌미가 되어 부관참시를 당했다. 호는 점필재. 최립(1539
1612)은 선조 때의 문장가로 호는 동고. 소식(소동파)과 황정견은 중국 송나라를 대표하는 시인들이다.
이전 사람들은 점필재가 여강(지금의 경기도 여주 지역을 흐르는 남한강)에서 읊은
십 년의 세상일은 홀로 읊는 시 속에 담기고 팔월의 가을빛은 어지러운 숲 사이로 번지네
라는 구절을 칭송해 왔다. 그러나 신륵사에서 지은
절간에서 종이 울리니 여룡이 춤을 추고 온갖 구멍에서 바람이 우니 철봉이 나래를 치네
라 한 구절의 웅장하고 묵직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는 참으로 우주를 떠받칠 만한 시구다. 그의 〈보천탄즉사〉에서는
복사꽃 실은 물결이 몇 자나 높았는지 은빛 바위는 목까지 잠겨 어딘지 모르겠네 쌍쌍이 노니는 가마우지는 옛 여울돌을 잃고 물고기를 물고는 갈대숲으로 들어가네
라 했는데, 이는 가장 힘차고 높은 경지이며, 《동경악부》는 편마다 모두 예스러운 맛이 있다.
김시습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김열경(김시습)의 높은 절개는 우뚝하여 더할 나위가 없다. 그의 시문 역시 남다른 격을 지녔지만, 마음을 쏟지 않고 장난삼아 지은 것이 많아서 마치 세게 쏜 화살이 힘을 잃고 떨어지듯 하는 대목이 있고, 매번 허튼소리가 섞여 있어 당나라의 저속한 시인 장타유를 보는 듯 싫증이 나기도 한다.
(용어) "장타유" — 당나라의 장타유라는 사람이 지은 시가 하도 저속해서, 후대에 격 떨어지는 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누런 개는 몸이 하얗게 되고, 하얀 개는 몸이 부어올랐다" 같은 우스꽝스러운 구절이 대표적이다.
그가 세향원에 쓴 시에
아침 해가 떠오르려 새벽빛이 갈라지고 숲안개 걷힌 곳에 새는 무리를 부르는구나 먼 봉우리에 떠오른 푸른빛 창을 열고 바라보며 이웃 절 종소리는 언덕 너머로 듣는다 파랑새는 소식 전하며 약 달이는 솥을 엿보고 벽도화는 떨어져 이끼 위에 비치네 아마도 신선은 도관으로 돌아가서 솔 아래 한가로이 도교 경전을 펼쳐 보리
라 했고, 소양정에서는
새 너머로 하늘은 끝나려 하고 읊조림 끝에 한은 그지없어라 산은 첩첩이 북쪽으로 굽이쳐 가고 강은 절로 서쪽을 향해 흐르는구나 먼 물가엔 기러기 내려와 앉고 그윽한 옛 기슭엔 배 돌아오네 언제나 이 속세의 그물을 떨쳐 버리고 흥에 겨워 이곳에 다시 와 놀아 볼까
라 했으며, 산길을 가며 지은 시에는
아이는 잠자리 잡고 할아비는 울타리 고치고 작은 개울 봄물에 가마우지 목욕하네 푸른 산 끊긴 곳에 돌아갈 길은 머니 등나무 지팡이 하나 비스듬히 둘러메고 오누나
라 했는데, 모두 세속의 때를 훌훌 떨쳐 버려 화평하고 담백하니, 저 자잘하게 다듬기만 하는 시인들은 마땅히 이 앞에서 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이다.
(용어) 김시습(1435~1493) — 조선 초의 문인.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해 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떠돌며 살았던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열경.
연산군 시대 전후의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조매계(조위)와 유뇌계(유호인)는 한 시대에 함께 이름을 날렸지만 정순부(정희량)에는 미치지 못했다. 정순부의 〈혼돈주가〉는 매우 훌륭하여 소동파와 흡사하다.
조각달은 이 마음 비추며 고국에 다다르고 지는 별은 꿈을 따라 변방 성에 떨어지네
라 한 구절은 더없이 신비롭고 빼어나며,
나그넷길에 우연히 한식 비를 만나니 꿈속에서 오히려 고향의 봄을 떠올리네
라 한 구절에는 당나라 중기 시의 고아한 운치가 있고,
봄이 와도 꽃은 안 보이고 눈만 보이니 기러기도 안 오는 곳에 사람이 어찌 찾아오리
라 한 구절은 다듬은 흠이 조금 있지만 그래도 다정다감하다.
(용어) 조위(1454
1503) — 조선 초의 문신, 호는 매계. 유호인(1445
1494) — 조선 초의 문신·문인, 호는 뇌계. 정희량(1469~1502?) — 조선 초의 문신, 호는 순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망헌(이주)의 시는 가장 침착하여 당나라 전성기의 풍격이 있다.
아침 해는 붉은빛을 뿜으며 발해 위로 솟구치고 갠 구름은 하얗게 펼쳐져 무려산을 벗어나네
와 같은 시구는 매우 힘이 있으며,
언 비는 천 산마루의 눈으로 비껴 이어지고 주린 까마귀는 놀라 한 숲의 바람 속에 우짖네
라 한 시구는 노련하고 웅혼하며 기이하고 걸출하다. 통주에서 지은 시는
통주는 천하의 명승지라 누각들이 구름 낀 하늘로 솟았구나 저자에는 금릉의 물화가 쌓이고 강줄기는 양자강 물결로 이어지네 가을이라 찬 안개는 물가에 내리고 저물녘 외로운 학은 요동으로 돌아가네 말안장에 오른 이 몸은 천 리 밖 나그네 정자에 오르니 고국은 아득하기만 하네
라 했는데, 이 역시 놀랍게도 왕유와 맹호연의 수준에 가깝다.
(용어) 이주(1468~1504) — 조선 초의 문신, 호는 망헌.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남지정(남곤)은 일찍이 "김일손의 글이나 박은의 시는 쉽게 얻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참으로 옳다. 박은의 시는 비록 정통의 소리는 아니지만 엄격하고 치밀하며 굳세고 사납다.
흐린 봄날 비가 오려니 새들은 서로 지저귀고 늙은 나무는 무정한데 바람은 절로 슬퍼지네
와 같은 구절은, 당나라의 섬세하고 곱기만 한 시풍을 배운 사람으로는 감히 오를 수 없는 경지다.
(용어) 남곤(1471
1527)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지정. 기묘사화를 주도한 인물로 훗날 평이 나쁘다. 김일손(1464
1498) — 무오사화 때 처형된 사관·문신. 박은(1479~1504) — 조선 초의 문인,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연산군은 비록 정치가 어지러웠으나 시문은 좋아했다. 강목계(강혼)가 오랫동안 도승지로 있었는데, 연산군이 언젠가
한식이라 동산 숲에 삼월은 저물고 꽃 날리는 비바람에 오경은 싸늘하네
라는 시구를 시제로 내려 가까운 신하들에게 짓도록 했는데, 강목계의 시가 장원으로 뽑혔다. 그 시에
청명절이라 궁궐 버들은 찬 안개에 잠기고 쌀쌀한 봄바람은 새벽 되어 더욱 몰아치네 지는 꽃은 붉게 땅을 뒤덮고 나는 버들개지는 하늘을 하얗게 뒤덮누나 못물 너머 높은 누각에선 구슬발을 걷고 좋은 말은 꽃을 찾아 비단 언치를 빛내는구나 금 술동이 실컷 취해 별원으로 돌아오니 오색 끈이 흔들리며 그림 난간을 스치네
라 했는데, 연산군은 크게 칭찬하며 상으로 준 물건도 매우 많았다.
언젠가 연산군이 죽은 후궁을 슬퍼하여 신하들에게 애도시를 짓게 했는데, 이백익(이희보)이
궁궐 문은 깊이 잠겨 달빛도 황혼인 제 열두 번 종소리가 밤중에 울리는구나 어느 곳 청산에 그 옥 같은 몸을 묻었는지 가을바람에 지는 잎 소리 차마 못 듣겠네
라 하니, 연산군이 극찬하며 그를 이조 정랑에서 직제학으로 단번에 발탁했다. 두 사람의 시가 비록 좋기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 일 때문에 오히려 시인으로서 이름을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용어) 강혼(1464
1519) — 조선 초의 문신, 호는 목계. 이희보(1473
1548) — 조선 초의 문신, 자는 백익.
이행과 중종 때의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 시로는 이용재(이행)를 첫손에 꼽아야 마땅하다. 그의 시풍은 침착하고 화평하며 아담하고 원숙하다. 오언고시는 두보와 진후산(진사도)의 품격과 비슷하여 높고 예스러우며 간결하고 절실하니, 글이나 말로는 다 찬양할 수가 없다. 내가 평소 즐겨 읊던 절구 한 수는
평생에 사귄 벗들은 모두 늙어 죽어 가고 흰머리로 마주 보니 그림자와 몸뚱이만 남았네 때마침 높은 누각에 달이 밝은 이 밤엔 애처로운 피리 소리 차마 들을 수가 없구나
인데, 읽을 때마다 감개가 무량하여 가슴이 메어진다.
(용어) 이행(1478~1534) — 조선 중기의 문신·문장가. 갑자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후 복권되어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호는 용재.
조선 시는 중종 때 이르러 크게 무르익었다. 용재 이행이 그 시작을 열자, 눌재 박상·기재 신광한·충암 김정·호음 정사룡이 한 시대에 함께 나와 휘황하게 빛을 내고 금옥처럼 맑은 소리를 울렸으니, 족히 천고에 자랑할 만하다. 조선의 시는 다시 선조 때 이르러 크게 완비되었다. 노소재(노수신)는 두보의 법을 깨우쳤고 황지천(황정욱)이 그 뒤를 이어 일어났으며, 최경창·백광훈은 당나라 시를 본받았고 이익지(이달)가 그 흐름을 다시 밝혔다. 세상을 떠난 우리 형님(허봉)의 노래체 시는 이태백과 같고, 누님(허난설헌)의 시는 당나라 전성기의 경지에 가까웠다. 그 뒤로 권여장(권필)이 늦게 나와 힘껏 옛 어진 이들을 좇아 용재 이행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아, 참으로 장하다.
(용어) 박상(1474
1530) — 호는 눌재. 신광한(1484
1555) — 호는 기재. 김정(1486
1521) — 호는 충암, 기묘사화 때 사사되었다. 정사룡(1491
1570) — 호는 호음.
정호음(정사룡)은 남을 추앙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유독 눌재(박상)의 시만은 좋아했다. 일찍이 벽 위에
서북의 두 강은 태곳적부터 흘러오고 동남의 두 산줄기는 신라 땅을 파고드네
라는 구절과,
거문고 타던 이는 학 가의 달로 떠나가고 피리 부는 손은 솔 아래 바람 타고 찾아오네
라는 구절을 써 붙여 두고 스스로 탄식하며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여겼다. 또 이런 말도 했다. "허종경(허엽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시구를 이야기하는 대목)의
들길이 어두워 오는데 소는 홀로 돌아오고 강 구름이 비를 몰아오니 제비가 낮게 나네
라는 구절은, 강목계(강혼)의
붉은 제비 엇갈려 나니 바람은 버들을 스치고 청개구리 어지러이 울어대니 비는 산을 어둑하게 하네
라는 구절과 서로 겨룰 만하다." 그 당시 "신기재(신광한)의 시는 온갖 시체를 두루 갖추었지만, 호음은 칠언율시 하나에만 능하니 그에게 못 미칠 것 같다"는 말이 돌았는데, 호음은 "그가 아무리 온갖 시체를 갖추었다 해도 감히 내 율시 한 구절을 당해 내겠는가" 했으니, 그 자부심이 이러했다.
호음의 〈황산역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날 쫓기던 왜구를 이곳에서 섬멸할 때 혈전 벌인 신묘한 칼끝엔 붉은빛이 둘렸다네 한나라 깃대 꽂혔던 흔적은 바위 틈에 남아 있고 얼룩진 옷 적신 피는 노을빛을 물들이네 소슬바람에 살기 감돌아 수풀 산은 엄숙하고 도깨비불 음산하게 타오르니 성루는 황폐해졌네 동쪽 이 땅 사람이 물고기 신세를 면한 것은 우 임금 같은 그 공덕 때문이니 소신이 어찌 감히 해를 더듬는 격의 얕은 찬양을 하리오
라 했다. 기이하고 걸출하며 웅혼하고 묵직하니 참으로 훌륭한 작품이다. 절강 출신 명나라 사람 오명제가 이 시를 보고 "그대의 재주는 용을 잡을 만한데 도리어 개를 잡고 있으니 애석하다"고 평했는데, 이는 대개 당나라 시를 본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어찌 그것만으로 그를 낮추어 볼 수 있겠는가.
(용어) "황산역시"는 고려 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전투를 소재로 한 시다.
이익지(이달)는 어릴 때 두보의 시를 호음(정사룡)에게 배웠다. 하루는 호음이 익지더러 서가 위의 여러 책을 가져오라 시켰다. 그리고는 그 책들을 보다가 《춘정집》이 나오자 땅에 던져 버렸고, 《매계집》은 펴 보고 웃으며 덮었으니 대개 가볍게 여긴 것이었다. 오직 《점필재집》만은 손에 쥐고 익히 보기를 그치지 않았다. 익지가 몰래 보니 온통 줄을 그어 표시해 두었는데, 대개 좋아하는 구절을 뽑아 자기 시의 재료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언젠가 평생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구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사람들은
산 나무 함께 울며 바람 언뜻 일어나고 강물 소리 문득 거세지자 달이 홀로 걸렸네
라는 구절을 깎아낸 듯 아름답다고 했고,
산꼭대기 깜빡이는 별은 조각달과 빛을 다투고 나무 위에서 움직이는 새는 깊은 떨기 속에 숨는구나
라는 구절 역시 시상이 교묘하지만, 끝내는
빗기운이 노을을 눌러 산은 문득 어두워지고 냇물 빛은 달을 받아 밤에도 밝구나
라 한 구절만은 못하니, 이는 마치 귀신이 도운 듯한 시구라고 말했다 한다.
김충암(김정)의 시에
지는 해는 거친 들판에 뉘엿뉘엿 비치고 갈가마귀는 저문 마을로 내려앉는구나 빈 수풀엔 밥 짓는 연기 싸늘히 식고 초가집도 사립문을 걸어 닫았네
라 한 시는 당나라 유장경의 시와 흡사하다. 그의 〈우도가〉는 심오하고 황홀하며, 미묘한가 하면 뚜렷하기도 해서 가진 재주를 다 부린 작품이다. 그래서 신기재(신광한)는 그를 추어올려 당나라 시인 이하(장길)에 견주었다.
(용어) 이하(790~816) — 당나라의 천재 시인. 요절했으나 기이하고 몽환적인 시풍으로 유명하다. 자는 장길.
최수성과 조광조 일파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최원정(최수성)은 세상을 내려다보며 벼슬하지 않고 그저 화나 면하기를 바라며 살았다. 하루는 여러 어진 이들이 정암(조광조)의 집에 모였는데, 원정이 밖에서 들어오며 숨이 가빠 말도 제대로 못 한 채 황급히 물을 청해 마시고는 "내가 한강을 건너올 때 물결이 솟구치고 배가 부서져 거의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났다"고 했다. 주인이 웃으며 "이는 우리를 빗대어 하는 말이다"라고 했다.
원정이 붓을 잡아 벽에 산수를 그리자, 원충(김정)이 그 그림에 부쳐 시를 지었는데
맑은 새벽 바위산 봉우리는 우뚝하고 흰 구름은 산기슭에 비껴 있네 강촌엔 사람의 모습 보이지 않고 강가 나무는 저 멀리 아득하구나
라 했다. 원정이 만의사에 올라 지은 시에
옛 불전엔 몇 안 되는 스님이 지키고 있고 수풀 끝엔 저녁 종소리 맑게 울리네 창문은 트여 천 리 끝까지 닿고 담장은 눌러앉아 뭇 산이 나직해 보이네 나무는 몇 해나 늙어 왔는지 새는 유난히 별난 목청으로 우짖는구나 험난한 세상 그물에 걸릴까 근심하며 오늘의 내 인생을 한탄하노라
라 했는데, 마지막 구절에 뜻이 담겨 있으니 아마 스스로 화를 입을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닐까. 애석한 일이다.
(용어) 최수성(1487
1521) — 조선 중기의 문인·화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호는 원정. 조광조(1482
1519) — 기묘사화의 중심인물,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다 사사되었다. 호는 정암. 김정(1486~1521)은 앞서 나온 충암 김정과 같은 인물로, 자가 원충이다.
김안로와 신광한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김이숙(김안로)이 젊어서 관동 지방에 놀러 갔을 때, 꿈에 귀신이 나타나 시를 읊었다.
봄은 우 임금의 땅 산천 밖에 무르익고 풍악은 순 임금 조정의 새와 짐승 사이로 울려 퍼지네
라 하고는 "이것이 바로 네가 벼슬길을 얻을 시구다" 하고 말했다. 꿈에서 깨어 이를 기억해 두었는데, 이듬해 궁중에서 치른 시험에서 연산군이 율시 여섯 편을 시험 문제로 냈다. 그 가운데 "봄날 이원의 악공들이 침향정 가에서 한가로이 악보를 뒤적이다"라는 제목으로 '한' 자를 운으로 삼아 시를 지으라는 문제가 있었다. 김안로가 생각해 보니 꿈에서 들은 구절과 꼭 들어맞기에 그대로 써서 냈다. 강목계(강혼)가 시험관이 되어 크게 칭찬하며 장원으로 뽑았다. 김모재(김안국)는 본래 글을 잘 안다고 이름난 사람이었는데, 시험을 함께 감독하다가 "이 구절은 귀신의 소리지 사람의 시가 아니다" 하고는 그 자리에서 출처를 물었다. 김안로가 사실대로 대답하니, 사람들이 모두 김모재의 감식안에 탄복했다.
(용어) 김안로(1481
1537) — 조선 중기의 문신. 훗날 권세를 남용하다 사사되었다. 자는 이숙. 김안국(1478
1543)은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모재.
신낙봉(신광한)의 시는 맑고 빼어나 운치가 있다. 〈중추절에 배를 긴 여울에 대고〉라는 시에
갈대꽃 핀 물가에 외로운 배 매어 두니 두 갈래 맑은 강물에 사방은 산이로세 인간 세상에도 오늘 밤 같은 달이 없으랴만 백 년을 가도 이 가운데서 보는 달만은 못하리
라 했고, 〈배 위에서 삼각산을 바라보며〉라는 시에
외로운 배 잡아타고 광릉 나루 떠나오니 열다섯 해 동안 죽지 못한 이 몸이로세 나는야 정이 있어 아는 얼굴 같지만 청산이야 옛사람을 기억이나 할까
라 했다. 〈김공석의 옛집을 지나며〉라는 시에
그때 함께 쫓겨난 이들 몇이나 남았는지 동풍에 말 세우고 홀로 애를 태우네 한식이라 안개비 자욱한 개산 가는 길에 석양 마을 젓대 소리 차마 듣지 못할레라
라 했고, 〈삼월 삼짇날 박대립에게 부치다〉라는 시에
삼짇날과 중양절엔 해마다 만나자던 옛 약속은 남았어도 일은 그만 어그러져 방초에 답청할 날이 바로 오늘인데 맑은 동이 흰 술은 옛 친구와 함께가 아닐세 바람 앞 제비 소리는 갓 나온 듯 앳되고 비 온 뒤 꽃가지는 다시 보기 어렵구나 모동의 어른들은 속기를 벗은 이가 많으니 봄옷을 전당 잡힐 생각인들 없을쏘냐
라 했으니, 편마다 모두 읊을 만하다. 비록 웅장하고 기이함에서는 호음(정사룡)에 미치지 못하지만, 맑고 시원함에서는 오히려 그보다 낫다고 할 만하다.
(용어) 신광한(1484~1555) — 앞서 나온 기재 신광한과 같은 인물. 호가 낙봉이기도 하다.
나식과 소세양, 심언광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장음정 나식의 시는 시적 흥취가 있어 이따금 당나라 전성기 시에 가깝다. 신광한과 정사룡 같은 원로 대가들이 어느 집에 모여 마침 포도 그림 족자를 앞에 놓고 시를 읊으려 했는데, 생각에 잠겨 미처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술에 취한 나식이 찾아와 붓을 빼앗아 들고는 족자 위에 쓰려 했다. 주인이 말리려 하자 정사룡이 "그냥 두어라" 했고, 나식은 절구 두 수를 지었는데 그 하나에
늙은 원숭이 무리를 잃고 지는 해는 마른 등걸 위에 비치네 우뚝 앉아 고개도 돌리지 않으니 아마도 천 봉우리의 메아리를 듣는 것이겠지
라 했다. 정사룡이 크게 칭찬하며 붓을 놓고 더는 짓지 않았다. 손곡(이달)도 이렇게 말했다. "이는 당나라 전성기의 〈이주가〉 법식이니, 이른바 한 구절만 끊어 놓아도 시 한 편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용어) 나식(1498~1546) — 조선 중기의 문인, 호는 장음정.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소퇴휴(소세양)가 젊었을 때 상좌상(상진)과 동료로 지냈는데, 그때는 상진이 낮은 벼슬에 있었다. 훗날 상진이 재상이 되자 기러기 그림 족자를 가지고 소세양에게 시를 지어 달라 청했다. 소세양이 절구 한 수를 지어 보냈는데
쓸쓸한 외그림자 저녁 강가를 비추고 붉은 여뀌꽃 시들어 두 기슭에 그늘졌네 부질없이 서풍 향해 옛 짝을 불러 대며 구름과 물이 만 겹이나 깊은 줄은 모르는구나
라 했으니, 함축된 뜻이 깊고 멀어 상 정승이 보고는 탄식하며 서글퍼했다.
(용어) 소세양(1486
1562)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퇴휴당. 상진(1493
1564)은 조선 중기의 명재상, 호는 범허재.
심어촌(심언광)은 늘그막에 김안로와 사이가 벌어져 함경도 관찰사로 밀려났는데, 그때 지은 시에
넓은 강을 건너려니 나룻배가 없고 추운 나무 시들어 가는데 겨우살이만 붙어 있네
라 했으니, 대개 뒤늦게 후회하는 마음이 움튼 것이다.
(용어) 심언광(1487~1540)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어촌.
임억령과 임형수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임석천(임억령)은 사람됨이 고매했고 시 역시 그 사람됨과 같았다. 〈낙산사영〉은 마치 용이 오르고 비가 내리는 듯한 기세로 글의 흐름이 날아오르고 꿈틀거려, 그 경치의 기이함과 웅장함을 서로 다투는 듯하다. 그 시에
마음은 흐르는 물과 함께 세상으로 나오고 꿈에는 흰 갈매기 되어 강 위를 나는구나
라 한 구절은 기상이 드높아 신령한 용이 바다를 희롱하는 뜻이 있다.
(용어) 임억령(1496~1568) — 조선 중기의 문신·시인, 호는 석천.
금호 임형수는 풍류가 호탕하고 시원하며, 그의 시 역시 펄펄 나는 듯하다.
고개 숙인 꽃은 술에 취한 옥녀의 얼굴 같고 끊어진 산은 바닷물을 마시는 푸른 용의 허리로다
라 한 시는 지금까지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퇴계 이황 선생이 이 시를 몹시 아껴, 늘그막까지도 문득 그를 떠올리며 "어찌하면 임사수(임형수)와 다시 마주 앉을 수 있을까" 하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용어) 임형수(1504~1547)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금호. 을사사화 여파로 사사되었다.
김인후와 오세억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하서 김인후는 인품이 높고 트여 있으며 맑고 순수했는데, 시 역시 그 인품과 같았다. 양송천(양응정)은 그의 〈등취대시〉를 극찬하며 당나라 고적과 잠참에 비길 만큼 높은 운치라고 했다. 그 시에
양왕이 노래하고 춤추던 그 땅에 오늘은 나그네가 올라왔노라 구름을 넘어설 듯 강개한 흥취요 옛일을 조문하는 처량한 마음이로다 긴 바람은 먼 들판에서 일어나는데 밝은 해는 첩첩한 산 뒤로 숨어 버리네 그 시절의 번화했던 일들을 아득하니 이제 어디서 찾으리오
라 한 시는 침착하고 걸출하여 가늘고 여린 태를 단번에 씻어 냈으니 참으로 귀중히 여길 만하다.
(용어) 김인후(1510
1560) —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호는 하서. 양응정(1519
1581)은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송천. 고적과 잠참은 모두 당나라의 이름난 변방시 시인들이다.
하서가 세상을 떠난 뒤, 영남 하양 땅에 오세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이렇게 말했다. "꿈에 천상의 관청에 갔는데, 붉은 옷 입은 저승 사자가 작은 집으로 데려가니 그곳에 비단 두건을 쓴 학사가 있었다. '김하서'라 자칭하며 '너는 올해 하늘에 오를 운수가 아니니 나가서 힘써 행실을 닦으라' 하고는 시 한 수를 주며 보냈다"는 것이다. 그 시는
세억은 그 이름이요 대년은 그 자인데 천상의 문을 열고 들어와 자미 신선을 뵈었구나 일흔일곱 지난 뒤에 서로 다시 만나리니 인간 세상 돌아가 함부로 전하지 말라
였다. 오세억은 원래 효자였는데, 훗날 과연 일흔일곱 나이에 아무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
(용어) "천상의 관청", "자미 신선" 등은 도교에서 말하는 하늘의 관청과 신선 세계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아버지가 아끼신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선친께서는 늘 "윤장원의 재주는 따를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시며, 그의
넓은 바다 조각배 위에 꿈은 천 리를 떠도는데 두어 가락 젓대 소리 달 밝은 가을이로세
라는 구절과,
맞바람이 살구나무에 불어 겹문을 두드리네
라는 구절을 매양 칭송하시며, "맑고 절실하여 옛 시에 핍진하다"고 하셨다.
(용어) 윤장원 —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으며, 허엽(허균의 아버지)이 재주를 높이 산 인물로만 이 글에 등장한다.
선친께서는 기묘년(1519년으로 추정되나 문맥상 허엽이 영남 관찰사가 된 해)에 영남 관찰사를 제수받으셨는데, 권습재(권벽)가 동지사로 북경에 가면서 선친을 송별하며 지은 시에
평생의 회포를 좋이 풀리라 여겼더니 담소를 나눌 기회도 이제부턴 흔치 않겠구려 달빛 비친 요하를 건너 나는 사신길을 떠나고 그대는 부절을 안고 유령의 매화를 찾아가리 맡은 일과 갈 길이 모두 다 염려스럽고 이별과 노쇠함이 서로 재촉하는구려 공무 틈틈이 벗 그리는 노래를 짓거든 시통이나 자주자주 부쳐 주시기를
라 했는데, 선친께서는 간절하고 알맞다며 칭찬하셨다.
(용어) 권벽(1520
1593)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습재. 허엽(1517
1580)은 허균의 아버지로, 동인의 영수격 인물이었으며 호는 초당.
선친의 송별 시첩에 실린 소 정승(소세양)의 시 가운데
백옥당이 완성된 지 오래되었더니 황금 허리띠를 하사받은 것이 오늘이라네
라는 구절을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여긴다. 그러나 박수암(박지화)의 시 가운데,
경(벼슬)의 상징인 별이 높이 뜬 걸 문득 보노니 내 옷이 화려한들 누가 아까워하리
라는 절구야말로 정말 경계할 만한 명구다. 박수암이 미암(유희춘)을 애도하며 지은 시에
천추의 세월 푸른 바닷물 위에서 밝은 해처럼 큰 이름을 드리웠도다
라 한 것은 어찌 두보보다 못하다 하겠는가.
(용어) 박지화(1513
1592) —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수암. 유희춘(1513
1577)은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미암.
박수암이 청학동에서 노닐며 지은 시에,
고운(최치원)은 당나라의 진사였으니 애초에 신선술을 배운 것이 아니었네 만촉처럼 다투던 삼한(신라·고려·조선 이전 우리나라)의 시절 풍진은 온 세상에 가득 찼었구려 영웅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리오 참된 비결은 본디 전하지 않는 법 저 봉래산으로 한번 들어가 버린 뒤로 맑은 향기만 팔백 년을 남아 전하네
라 했으니, 깊고 굳세며 조촐하고 질박하여 사려 깊은 맛이 있으니, 두보와 진자앙의 진수를 깊이 얻은 작품이다.
(용어) "만촉"은 아주 작은 나라끼리 다투는 것을 비유하는 중국 옛이야기 속 두 나라 이름이다. 최치원이 만년에 가야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양사언과 이달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양봉래(양사언)가 금강산(풍악산)에서 놀 때 바위 위에 시를 새겼는데,
백옥경 봉래섬엔 아득한 안개 물결 예스럽고 따스한 바람과 볕은 좋기도 해라 푸른 복사꽃 아래 한가로이 오가며 학 등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에 천지는 늙어 가네
라 했으니 신선의 흥취가 있다. 같은 시대에 송경이라는 서얼 출신 문인이 있었는데, 그 역시 이 시에 이어 읊기를
학은 높이 날아오르고 봉황은 유유히 날아 삼신산 아래를 굽어보며 오색구름 사이를 가로질러 나네 천지는 세 자짜리 지팡이요 이 몸은 신선의 가벼운 옷 한 벌이라 바위 꼭대기 나무에 긴 칼을 걸어 두고 맑은 샘물 희롱하며 붉은 지초를 캐 먹노라
라 하니, 양사언은 극도의 찬사를 보냈고 세상을 떠난 우리 형님(허봉)도 기꺼이 칭찬하셨다.
(용어) 양사언(1517~1584) —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호는 봉래. 금강산을 즐겨 유람하며 이런 이름을 얻었다.
양봉래가 강릉 군수로 있을 때 익지(이달)를 손님으로 대우했는데, 이달은 행실이 검속되지 않아 고을 사람들의 비난을 샀다. 선친께서 편지를 보내 그를 변호하시며, "밤안개 속에 오동꽃 떨어지고, 바다 숲에 봄 구름 스러지네"라 읊었던 이달을 만약 소홀히 대한다면, 이는 위나라 진왕(조식)이 응양과 유정 같은 문인들을 처음 잃던 날과 다를 바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대접이 조금 허술해지자 이달은 시를 남기고 작별을 고했는데,
나그네가 떠나고 머무는 것은 주인이 눈썹을 까딱하는 데 달렸을 뿐 오늘 아침 반가운 낯빛을 잃었으니 머잖아 청산을 그리워하게 되리 노나라에서는 바닷새에 제사를 지냈고 남쪽 정벌 나가서는 율무만 싣고 돌아왔네 소진이 가을바람 만나 고향 그리워하듯 나는 또다시 목릉관을 나서는구나
라 하니, 양봉래는 크게 칭찬하고 아끼며 그를 처음처럼 다시 대접했다. 선배들이 벗 사이에 서로 바로잡아 주던 의리가 어떠했는지를 여기서 엿볼 수 있으며, 그 풍류 있는 뛰어난 재주 또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어) "바닷새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노나라 대부 장문중이 분수에 넘는 대접을 한 잘못을 가리키는 옛이야기다. "남쪽 정벌에서 율무만 싣고 돌아왔다"는 것은, 후한의 장수 마원이 남쪽 지방을 평정하고 돌아올 때 약재로 쓸 율무를 수레에 싣고 왔는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금은보화라고 모함했다는 옛이야기다. 둘 다 억울한 오해나 부당한 대접을 받는 상황을 비유하는 데 쓰인다. 소진은 전국시대의 유세가로, 타향을 떠돌다 가을바람에 고향을 그리워했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용어) 이달(1539~1618?) — 조선 중기의 시인. 서얼 출신이라 벼슬길이 막혔으나 시재가 뛰어나 최경창·백광훈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불렸다. 자는 익지, 호는 손곡. 허균과 허난설헌의 스승이기도 했다.
노수신과 최경창, 이달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소재 노(노수신) 정승이 어느 스님의 시첩에서 고죽(최경창)과 익지(이달)의 시를 보고 지은 시에
이 시대 제일가는 문장으로는 오직 이와 최를 일컫는다오
라 했는데, 대체로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우리 둘째 형(허봉) 또한 "이달의 시는 신라 이래로 당나라 시를 본받은 이들 가운데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일찍이 그의 시 중에서
중천의 생황 소리와 학은 가을 하늘에서 내려오고 천 년 전 신선 고운은 이미 아득한 옛일이 되었구나 밝은 달 아래 트인 문엔 흐르는 물이 놓였으니 어디쯤에 무릉교가 있는지 궁금하구나
라 한 작품을 칭송하며, 자신도 여기에 미치지 못하리라 여기셨다.
(용어) 노수신(1515~1590)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소재. 을사사화 여파로 오랜 유배 생활을 겪은 뒤 영의정까지 올랐다.
조지세(조위한)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지명은 시 속에 넣어도 우아한 맛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의
기운은 운몽택을 쪄서 올리고 파도는 악양성을 뒤흔든다네
와 같은 구절을 보면, 열 글자 가운데 여섯 글자가 지명이고 거기에 네 글자를 보탠 것일 뿐인데, 정작 공들인 곳은 '찐다'는 글자와 '뒤흔든다'는 글자 두 자뿐이다. 그러니 시를 짓는 일이 어찌 수월하지 않겠는가." 이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노 정승(노수신)의 시인
길은 평구역에서 다해 버리고 강물은 판사정에서 깊어지네
와
청파 마을 저녁엔 버들빛 짙고 백악산 봄날엔 하늘이 맑네
같은 구절 또한 대단히 훌륭하다. 이는 다만 글귀를 짓는 솜씨에 달린 문제일 뿐이니, 쇠로 금을 만든다 한들 무엇이 나쁘겠는가.
(용어) 조위한(1567~1649) —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자는 지세.
박순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박사암(박순)의 시에
은혜로운 물결에 오래 젖어 이 마음 부지런히 부려 왔건만 새벽닭 울자마자 조복부터 챙기는구나 강남의 시골집은 봄풀에 묻혀 가는데 도리어 산승에게 대숲이나 지키라 시키네
라 했으니, 아, 사대부라면 누군들 은퇴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한 치 녹봉에 끌려 고개를 숙이고 그 마음을 저버리는 자가 많을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 절로 탄식이 나오게 된다.
(용어) 박순(1523~1589)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사암. 영의정을 지냈다.
노소재(노수신)와 황지천(황정욱)은 근래의 대가로서 둘 다 근체시(율시와 절구)에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 노수신의 오언율시와 황정욱의 칠언율시는 모두 천 년 이래의 빼어난 가락이다. 그러나 긴 시에서는 이만 못하니 그 까닭은 알 수 없다.
(용어) 황정욱(1532~1607)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지천.
양경우가 일찍이 나에게 "우리나라에서는 칠언고시를 누가 가장 잘 짓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래서 "글쎄, 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니, 양경우가 박씨와 이씨 가운데 누가 앞서는지 차례로 물어 왔다. 내가 대답하기를 "둘 다 한퇴지에게서 나왔으되, 한 사람은 지나치게 억세고 한 사람은 지나치게 번거로우니, 그것이 최고의 경지는 아니오" 했다. 그러자 눌재(박상)의 〈진양형제도〉와 충암(김정)의 〈우도가〉는 어떠냐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진양형제도〉는 웅장하나 막힌 데가 있고, 〈우도가〉는 기이하나 어둡다" 했다. 그렇다면 결국 누구에게 돌아가겠느냐 물어서, "어잠부(어무적)의 〈유민탄〉과 이익지(이달)의 〈만랑무가〉일 것이오" 하고, 이어서 "시로 본다면 뛰어난 재주가 그대들 가운데서 많이 나왔소" 하니, 양경우도 크게 웃었다.
(용어) 양경우(1568~1638) —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한퇴지(한유)는 당나라의 대문장가. 어무적은 조선 중기의 서얼 출신 시인으로, 백성의 고통을 노래한 〈유민탄〉으로 유명하다. 자는 잠부.
선친께서는 자제들이 화순 지방에 있었던 까닭에 진사 김윤과 서로 사귀며 매양 그의 시를 칭찬하셨다. 병마절도사가 일찍이 진남루를 세우고 김윤을 맞아들여 긴 시를 지어 쓰게 했는데, 술에 취한 채 단숨에 붓을 휘둘러 육십 구를 지었다. 그 첫 구에
만 근 무게의 무지개 들보는 붉은 새 조각을 짓누르고 용 새겨진 처마엔 공손랑의 검무가 펼쳐지는 듯
이라 했으니, 참으로 굉장한 걸작이다. 일찍이 물길로 가다가 배가 부서져 겨우 기슭에 닿았을 때, 정자에 올라 지은 시에
의관은 모두 거센 물결에 휩쓸려 잃었지만 몸뚱이는 부모님께서 주신 그대로 남았구나 높은 정자에 다시 올라 갠 경치를 바라보니 가을 산 맑고 푸르러 새 시에 들어오는구나
라 했으니, 높은 흥취가 대단하다. 그는 예순 살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생원시에 합격해 유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용어) "유일"이란 벼슬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던 인재를 조정에서 특별히 추천해 등용하는 제도를 가리킨다.
내가 수안(지금의 황해도 수안군)에 부임하는 날, 황지천(황정욱)이 시를 지어 전송하며
시재는 우뚝하여 동료들 가운데 뛰어나건만 벼슬 복은 어그러져 분수 밖에 기구하구나 이 모두 인생에는 저마다 정해진 운명이 있으니 유유한 나머지 일은 미뤄 두고 지나갈밖에
라 했으니, 자못 감개가 깊다. 공이 젊어서 홍문관에 있을 때, 이백생(이순인)·최가운(최경창)·하대이(하응림) 같은 이들이 함께 당나라 시의 운치를 숭상하여 대궐 안의 어린 복사나무를 두고 읊은 작품이 꽤 많았는데, 공이 여기에 화답하여
무수한 궁중 꽃은 흰 담장에 기대었는데 벌과 나비는 노닐며 남은 향기를 좇아가네 늙은이는 봄바람도 채 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해를 향하는 해바라기 마음뿐이로세
라 했다. 함축된 뜻이 깊고 조사가 기이하고 굳세니, 시를 짓는다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부드럽고 고운 것, 바람이니 꽃이니 하는 것만 읊은 시는 오히려 그 중후한 맛을 해치는 것이다.
(용어) 이순인(1533
1592)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백생. 하응림(1536
1567)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대이.
박순을 애도하는 시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사암(박순) 정승이 세상을 떠나자 애도시가 거의 수백 편이나 되었는데, 오직 성우계(성혼)의 절구 한 수가 절창이었다. 그 시에
세상 밖 구름 산은 깊고 또 깊으니 시냇가 초가집은 이미 찾기 어려워라 배견와 위에 뜬 삼경의 저 달빛은 아마도 선생의 한 조각 마음을 비추리라
라 했는데, 무한한 슬픔이 말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으니, 서로 속 깊이 알던 사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용어) 성혼(1535~1598) —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우계. 배견와는 박순이 만년에 지내던 별장 이름.
이산해와 고경명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근래의 관각시(조정에서 짓는 격식 있는 시)로는 이아계(이산해)가 으뜸이다. 그의 시는 초년부터 당나라 시를 본받았으며, 늘그막에 평해로 귀양 가서야 비로소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고제봉(고경명)의 시 역시 벼슬을 내려놓고 한가로이 지내는 가운데 크게 나아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로써 문장이란 부귀영화에 달린 것이 아니라, 험난한 고초를 겪고 강산의 도움을 받은 뒤에야 오묘한 경지에 들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찌 이 두 사람뿐이겠는가. 옛사람들이 모두 그러했으니, 유주로 좌천되었던 유자후(유종원)나 영남 밖으로 귀양 갔던 소동파에게서도 이를 볼 수 있다.
(용어) 이산해(1539
1609)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아계. 영의정을 지냈다. 고경명(1533
1592) —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순절했다. 호는 제봉. 유종원(773~819)은 당나라의 문장가로, 자는 자후.
최고죽(최경창)의 시는 굳세고 힘차며, 백옥봉(백광훈)의 시는 메마른 듯 담백하다. 둘 다 당나라 시의 길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천 년에 드문 가락이다. 이익지(이달)는 이 둘보다 조금 더 크다. 그래서 최경창과 백광훈을 함께 묶어야 비로소 그 나름의 대가를 이룬다고 할 만하다.
고죽의 시는 편마다 다 아름다운데, 이는 반드시 갈고닦아 마음에 걸림이 없어진 뒤에야 세상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최경창, 백광훈)의 시 가운데 내가 골라 《국조시산》에 넣은 것이 각기 수십 편인데, 그 시들은 음절이 정통의 소리에 잘 들어맞지만, 나머지 시들은 남을 따라가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용어) 《국조시산》 — 허균이 직접 편찬한 조선 시대 시선집.
나는 일찍이 고죽의 오언 고시와 율시, 세상을 떠난 형님(허봉)의 노래체 시, 소재 정승(노수신)의 오언율시, 황지천(황정욱)의 칠언율시, 이손곡(이달)과 백옥봉(백광훈) 그리고 세상을 떠난 누님(허난설헌)의 칠언절구를 모아 한 질의 책으로 엮어 읽어 보았다. 그 음절과 격률이 모두 옛사람에 가까웠으나, 한스러운 것은 기운이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아, 누가 그 본래의 소리를 다시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이춘영과 권필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요즘에는 이실지(이춘영)가 시문에 능하다. 그의 시는 다소 번잡한 듯하지만 기운만큼은 나름대로 크고 힘차서 작가라 부를 만하다. 그러나 권여장(권필)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다. 이실지는 안목이 높아 당대 사람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오직 나와 여장(권필)·자민(이안눌)만은 괜찮다고 여겼다. 그는 "허균은 허세가 있고, 권필은 메마르며, 이안눌은 융통성이 없다"고 했는데, 이 또한 지당한 평이라 할 만하다.
(용어) 이춘영(1563
1606) —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자는 실지. 권필(1569
1612)은 조선 중기의 시인, 호는 석주. 허균과 가까웠으며 허난설헌의 시 스승이기도 했다.
이실지는 세상을 떠난 우리 형님의 글을 칭찬하며 "문장을 깊이 아는 이는 허미숙(허봉)이다" 했다. 그래서 내가 "후배 가운데 누가 형님의 뒤를 이을 만합니까" 하고 물으니, "신현옹(신흠)이 그럴 만하니, 맑고 청량함은 미치지 못해도 농후함은 오히려 그를 뛰어넘는다고 봅니다" 하고 대답했다.
(용어) 신흠(1566~1628) — 조선 중기의 문신·문장가, 호는 현옹.
정송강(정철)은 우리말 노래를 잘 지었으니, 〈사미인곡〉과 〈권주사〉는 모두 곡조가 맑고 씩씩하여 들을 만하다. 비록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은 이를 배척해 음란하고 사특하다고 하지만, 그 문채와 풍류만큼은 가릴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를 아까워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여장(권필)이 그의 묘를 지나며 지은 시에
빈 산에 나뭇잎 우수수 떨어지니 정승의 풍류가 이곳에 묻혀 적막하구나 서글퍼라 한 잔 술 다시 권하기 어려우니 지난날의 노랫가락은 오늘을 두고 지은 것이었네
라 했다. 자민(이안눌)이 〈강 위에서 노래를 듣고〉라는 시에
강가에서 누가 저리 미인사(사미인곡)를 부르는가 때마침 강가에 달이 지는 시각이라 서글퍼라 임 그리는 그지없는 마음을 세상엔 오직 저 여인만이 알고 있구나
라 했는데, 두 시 모두 정송강의 가사에서 비롯되어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민(이안눌)의 시가 둔해서 잘 드날리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그가 함흥에 있을 때 지은 시에
비 개자 관가의 버들은 푸르게 늘어지니 객지에서 처음 맞은 삼월 삼짇날이로세 다 함께 고향 떠나 돌아가지 못한 신세 가인이여, 망강남의 노래는 부르지 마오
라 했는데, 맑고 산뜻하며 유려하니 중국 시인들과 견주어도 그 차이가 얼마나 크다 하겠는가.
(용어) 이안눌(1571~1637) — 조선 중기의 문신·시인, 자는 자민.
둘째 형이 논평한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둘째 형(허봉)은 고제봉(고경명)에게 깊이 감복하며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양에서 함께 있을 때 어떤 이가 '교' 자로 운을 내니, 고경명 공이 이에 화답하여
이어진 마을마다 벼와 기장은 삼추가 지나 무르익고 한 고을의 서리 바람은 시월에 접어드는구나
라 하기에, 나도 모르게 감복하고 말았다."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참판 유영길의 시는 비록 시의 경지가 좁지만 좋은 곳이 있으니, 이를테면
거문고와 비단옷은 세월을 서둘러 녹이고 금 병풍 속에서는 웃음 사기도 더디구려 발에 비친 석류꽃은 곱기도 하고 연못으로 통하는 들물은 맑기도 하네
같은 구절은 밝고 굳세어 즐길 만하다."
(용어) 유영길(1538~1601) — 조선 중기의 문신.
윤 사문 면(윤면)이 임금의 명을 받들고 호남으로 가던 길에 어느 산을 지나는데, 산속에 초가집 한 채가 있고 한 늙은이가 나무 아래에서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어 펴 보려 하니, 늙은이가 다가와 빼앗으며 "변변찮은 작품이라 남에게 보여 줄 수가 없소" 했다. 그래서 겨우 첫머리에 쓰인, 얼레빗을 읊은 시만 보았는데 이러했다.
얼레빗으로 빗질하고 참빗으로 다시 빗질하니 천 번을 쓸어내려 이는 벌써 다 없어졌네 어찌하면 만 길이나 되는 큰 빗을 얻어다가 백성들 몸에 붙은 물것을 남김없이 쓸어낼까
이름을 물었으나 대답 없이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 어떤 이는 전주 진사 유호인이라고도 말한다.
(용어) 윤면 —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 인물이다. "물것"은 몸에 붙어 피를 빨아먹는 이나 벼룩 같은 벌레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를 빗댄 표현으로 읽힌다.
임제와 신제이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임자순(임제)은 시로 이름이 있었는데, 우리 두 형은 늘 그를 추어올리며 인정해 주었다. 그의 "삭풍 부는 눈이 변방 길에 휘몰아치네"라는 시 한 편은 당나라 전성기 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하셨다. 일찍이 그에게 들은 이야기로, 어느 절에 갔더니 승려의 시첩에
동화문에서 밥을 빌던 옛날의 학관이라 분산이 좋아 노닐 만하다 하지만 십 년이나 그리던 꿈은 비로봉을 감도니 베갯머리 솔바람 소리 밤마다 서늘하네
라는 시가 있었는데, 말이 매우 맑고 깨끗했으나 이름이 빠져 있어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세상에는 참으로 버려진 인재가 있어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법이다.
(용어) 임제(1549~1587) —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자는 자순. 얽매이지 않는 호방한 기질로 유명했다.
둘째 형이 임금의 명을 받들고 북방에 나가 압호정에 올라
백성들 사는 초라한 집엔 해묵은 병이 들고 파란 벼는 하룻밤 서리에 다 망쳐졌네
라 읊었는데, 임자순(임제)은 이를 극찬하며 "백성의 집과 파란 벼, 열 글자로 쓴 시로 남을 역사로다"라는 시를 지어 주었다. 형도 임자순의
오랑캐가 일찍이 스무 고을을 엿볼 적엔 장군은 말을 몰아 제후에 봉해질 공을 세웠는데 지금은 변방 요새에 전쟁이 없으니 장사는 옛 역루에서 한가로이 잠을 자네
라는 시를 칭찬하며 협기가 펄펄 뛴다고 하셨다.
형이 풍산 역에서 벽에 쓰인 시 한 수를 보았는데
세상엔 뛰어난 인재 알아줄 이 없는데 누굴 위해 황금으로 높은 대를 쌓았던가 변방 서리는 검푸른 귀밑머리를 다 물들이니 필마로 음산 땅을 열 번이나 오가는구나
라 했다. 말의 기운이 강개하고 매우 훌륭하여 역졸에게 누구의 작품인지 물었더니, 병영의 군관 손만호가 지은 것이라 했다 한다.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 유월 스무여드레는 명종의 기일이었다. 신제이(신노)가 곡구역에서 시를 썼는데,
선왕께서 이날 뭇 신하를 버리고 떠나실 적 남기신 유언은 은근히 성인께 부탁하셨네 스물여섯 해 만에 그 향불도 끊어지니 소리쳐 우는 이는 늙은 백성뿐이로세
라 하니, 보는 이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용어) 신노 — 자는 제이. 1592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이옥봉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나의 누님 난설헌과 같은 시기에 이옥봉이라는 여인 시인이 있었는데, 바로 조백옥(조원)의 첩이다. 그녀의 시 역시 맑고 씩씩하여 여인 특유의 꾸밈이 없다. 영월로 가는 길에 지은 시에
닷새는 장간에서, 사흘은 영월에서 노릉의 구름 아래 슬픈 노래에 목이 메네 첩의 몸도 이 또한 왕손의 딸이거늘 이곳의 두견 소리는 차마 듣지 못할레라
라 했으니, 품은 생각이 애처롭고 원한을 띠어, 이익지(이달)의
동풍에 촉나라 임금의 넋은 괴로워하고 석양에 노릉은 싸늘하기만 하네
라는 구절과 한가지로 쓰라린 가락이다.
(용어) 이옥봉 — 조선 중기의 여성 시인, 조원의 소실이었다. "노릉"은 단종이 묻힌 영월의 능(장릉의 옛 이름)을 가리키며, 왕위에서 쫓겨나 어린 나이에 죽은 단종을 애도하는 뜻이 시에 깔려 있다.
전우치와 정백련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도사 전우치는 세상 사람들 말로는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데, 그의 시는 매우 맑고 초탈하다. 일찍이 삼일포에서 지은 시에
늦가을 맑은 못에 서리 기운 해맑은데 공중의 퉁소 소리 바람 타고 내려오네 푸른 난새는 오지 않고 하늘 바다는 아득한데 서른여섯 봉우리에 밝은 달만 환하구나
라 했으니, 읽고 있으면 마음이 상쾌해진다.
(용어) 전우치 — 조선 중기에 활동한 것으로 전하는 도사·문인. 소설 〈전우치전〉의 실존 모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젊었을 때 정백련이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병들어 귀신을 만났다고 했는데, 절구도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그의 시 중 가장 좋은 것으로
봄잠 자고 나서 술을 따르니 발을 걷은 앞으로 꽃잎이 날리네 인생이란 것이 얼마나 되는가 비 내리는 하늘을 슬피 바라보노라
와 또
만 리 밖 거센 파도에 바다 해는 저무는데 벽도화 그림자는 하늘 문에 비치네 난새 수레 한 번 떠난 뒤로 천 년이나 고요터니 후령의 신비로운 퉁소 소리 한밤중에 들리네
가 있는데, 그 음운이 맑고 그윽하여 사람의 소리 같지 않았다.
(용어) 정백련 — 병중에 귀신을 만나 시를 지었다는 신이한 일화로만 전하는 인물이다.
부안의 계생과 신분 낮은 시인들 (서기 1611년 5월 31일, 양력 추정)
부안의 기생 계생(매창)은 시에 솜씨가 있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뛰어났다. 어떤 고을 태수가 그녀와 가깝게 지냈는데, 훗날 그 태수가 떠난 뒤 고을 사람들이 그를 기려 비석을 세웠다. 계생이 달밤에 그 비석 위에서 거문고를 타며 하소연하듯 길게 노래를 불렀다. 이원형이라는 이가 지나다가 이를 보고 시를 지었는데,
한 가락 거문고는 자고새를 원망하는데 묵은 비석은 말이 없고 달만 덩실 외롭구나 현산에서 그날 양호의 비석에도 눈물 떨구던 가인이 있었던가
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절창이라 했다. 이원형은 우리 집에 드나들던 문객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와 이여인(허균의 벗으로 추정)과 함께 지낸 까닭에 시를 지을 줄 알았고, 다른 작품에도 좋은 것이 있으며 석주(권필)가 그를 좋아하고 칭찬했다.
(용어) 계생(1573~1610) — 부안의 기생 시인, 호는 매창. 이달의 제자였으며 유희경과의 사랑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현산의 양호 비석" 이야기는, 중국 진나라의 명신 양호가 백성을 잘 다스려 그가 떠난 뒤 백성들이 세운 비석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그리워 눈물을 흘렸다는 옛이야기에서 왔다.
유희경이라는 이는 신분이 천한 노비였다. 사람됨이 맑고 신중하며 진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니 사대부 가운데 그를 아끼는 이가 많았고, 시에도 능해 매우 원숙했다. 젊었을 때 갈천 임훈을 따라 광주에 있으면서 석천(임억령)의 별장에 올라, 그 누각에 앞사람이 써 놓은 '성' 자 운을 따라 시를 지었는데
댓잎은 아침에 이슬을 따르고 솔가지엔 새벽에 별이 걸렸네
라 하니, 양송천(양응정)이 이를 보고 극찬했다.
(용어) 유희경(1545~1636) — 조선 중기의 천민 출신 시인. 기생 매창과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하며, 임진왜란 뒤 공을 인정받아 면천되었다.
백대붕이라는 이도 시에 능했다. 일찍이 궁궐 문지기를 했는데, 같은 처지의 동료들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의 시는 당나라 맹교와 가도를 배워 메마르고 담백하며 여렸다. 그래서 권여장(권필)은 늦은 당나라 시풍을 배우는 사람을 볼 때마다 반드시 "문지기 시체"라 불렀으니, 대개 그 여림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용어) 백대붕 — 조선 중기의 천민 출신 시인, 유희경과 함께 "풍월향도"라는 위항 시인 모임을 이끌었다. 맹교와 가도는 당나라의 시인으로, 고심하며 메마르고 처절한 시풍을 구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의 승려 가운데 시에 능한 이는 매우 드문데, 오직 참료가 으뜸이다. 그가 어떤 사람에게 준 시에
물 따라 구름 따라 떠도는 발자취 이미 여러 해 서로 뜻이 맞아 이런 인연을 맺은 것이 기쁘구나 종일토록 나그네 방엔 봄날이 적막한데 지는 꽃은 눈처럼 비 갠 하늘에 날리네
라 하니, 빼어나고 맑은 맛이 있다.
(용어) 참료 — 조선 중기에 활동한 승려 시인으로 전한다.
이상으로 성수시화를 마친다. 신라 말부터 허균 당대에 이르기까지 약 팔백 년 동안 이 땅에서 나온 시인들을 두루 살피며, 왕족과 고관대작에서부터 서얼과 여성, 천민과 승려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시의 좋고 나쁨만으로 평가한 것이 이 글의 특징이다. 허균 자신의 집안 사람들(아버지 허엽, 둘째 형 허봉, 누이 허난설헌)에 대한 자부심과, 신분이나 지위와 상관없이 뛰어난 시를 알아보려 한 그의 안목이 책 전체에 걸쳐 뚜렷이 드러난다.
c성소부부고 제26권
베오81 2026. 9. 10. 15:51
성소부부고 제26권 · 설부 5 · 도문대작 (서기 1611년 6월 1일, 양력)
출처: 성소부부고 제26권, 설부 다섯 번째 갈래, 도문대작
배경: 제26권은 성소부부고의 마지막 권으로, 설부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갈래다. 여기에는 허균이 귀양지에서 지은 음식 수필 "도문대작"(뜻: 푸줏간 앞을 지나며 입맛을 다신다)과 그 서문, 그리고 부록으로 시화집 "학산초담", 광해군 때 올린 상소 두 편, 세 편의 서문이 함께 실려 있다. 이 파일은 그 가운데 도문대작 서문과 본문을 옮긴 것이다. 팔도 각지의 명물 음식을 떡·과일·고기·수산물·채소·기타로 나누어 적은 일종의 음식 백과로, 유배지에서 굶주리며 지난날 누렸던 진미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짙게 배어 있다.
도문대작을 지으며 (서기 1611년 6월 1일, 양력)
우리 집은 가난한 편이었지만, 선친이 살아 계실 때는 사방에서 나는 별미를 예물로 바치는 사람이 많아 나는 어릴 때부터 온갖 귀한 음식을 고루 맛볼 수 있었다. 자라서는 부유한 집안에 장가들어 산과 바다에서 나는 진귀한 음식을 다 맛보았다.
임진왜란 때는 병화를 피해 북쪽으로 갔다가 강릉으로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진기한 해산물을 두루 맛보았다. 벼슬길에 나선 뒤로는 남으로 북으로 옮겨 다니며 우리나라에서 나는 별미를 죄다 먹어 볼 수 있었다.
먹는 것과 색을 밝히는 것은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다. 더구나 먹는 것은 목숨과 관계된 일이다. 옛 선현들이 음식 바치는 자를 천하게 여긴 것은, 그저 먹는 것만 탐내어 제 잇속을 차리는 자를 가리켜 한 말이지, 어찌 먹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뜻이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예기》에 여덟 가지 진미를 적어 놓았으며, 맹자는 어찌하여 생선과 곰 발바닥 중 하나를 고르는 이야기를 했겠는가.
내가 일찍이 진나라 하증이 지었다는 《식경》과 당나라 위거원이 지었다는 《식단》을 본 적이 있는데, 두 사람 모두 천하의 진미를 빠짐없이 적어 그 가짓수가 만에 이를 만큼 많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저 그럴듯한 이름만 늘어놓아 눈만 어지럽히는 데 지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외진 곳에 있지만 바다로 둘러싸이고 높은 산이 솟아 있어 물산이 풍부하다. 만일 하증과 위거원 두 사람의 예를 따라 이름을 바꾸어 가며 하나하나 구분해 본다면, 우리나라의 물산도 아마 만 가지는 될 것이다.
내가 죄를 지어 바닷가로 귀양 갔을 때는 쌀겨조차 넉넉지 못해 밥상에 오르는 것이라고는 상한 생선이나 감자, 들미나리 따위뿐이었고, 그마저도 끼니마다 먹지 못해 굶주린 배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럴 때면 언제나 지난날 산해진미도 물리도록 먹어 싫증 내던 시절을 떠올리며 침을 삼켰다. 다시 한번 먹어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하늘나라 서왕모의 복숭아처럼 아득히 먼 일이었으니, 천도복숭아를 훔쳐 먹었다는 동방삭이 아닌 바에야 내가 어떻게 그걸 훔쳐 먹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종류별로 나열하여 적어 놓고 이따금 들여다보며 한 점 고기라도 되는 듯 여기기로 했다. 다 쓰고 나서 이 글에 "도문대작", 곧 "푸줏간 앞을 지나며 입맛을 다신다"는 이름을 붙였다. 먹는 것에 지나치게 사치를 부리며 절제할 줄 모르는 세상의 잘나가는 자들에게, 부귀와 영화란 이처럼 덧없을 뿐임을 일깨우고자 함이다.
1611년(광해군 3년) 4월 21일, 성성거사는 쓴다.
(용어) 팔진미는 《예기》에 나오는 여덟 가지 귀한 음식으로, 늙은 부모를 봉양할 때 올리던 것이다. 맹자가 생선과 곰 발바닥 중 하나를 고른다는 말은,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을 때는 더 귀한 쪽을 택한다는 비유다. 하증은 중국 진나라 사람으로 사치스러운 생활로 유명했으며, 한 끼 식사에 어마어마한 돈을 쓰고도 늘 먹을 것이 마땅찮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위거원은 당나라 측천무후 때 재상을 지낸 인물이다. 서왕모는 하늘나라에 살며 삼천 년에 한 번 열리는 신비한 복숭아를 지녔다는 여신이고, 동방삭은 그 복숭아를 훔쳐 먹어 오래 살았다는 전설 속 인물이다. 성성거사는 허균이 스스로 붙인 호다.
도문대작 (서기 1611년 6월 1일, 양력)
떡 종류 (서기 1611년 6월 1일, 양력 추정)
방풍죽 나의 외가는 강릉이다. 그곳에는 방풍이 많이 난다. 이월이 되면 강릉 사람들은 해가 뜨기 전에 이슬을 맞으며 갓 돋아난 싹을 딴다. 곱게 찧은 쌀로 죽을 끓이다가 반쯤 익었을 때 방풍 싹을 넣는다. 다 끓으면 차가운 사기그릇에 담아 따뜻할 때 먹는데, 달콤한 향이 입안에 가득해 사흘이 지나도 가시지 않는다. 세간에서는 참으로 으뜸가는 진미로 친다. 나는 훗날 수안(옛 이름 요산)에 있을 때 시험 삼아 한번 끓여 먹어 보았지만 강릉에서 먹던 맛에는 어림도 없었다.
석이떡 내가 금강산 구경을 갔을 때 표훈사에서 묵은 적이 있는데, 그 절 주지가 저녁상을 차려 왔다. 상에 오른 떡 한 그릇은 귀리를 빻아 여러 번 체로 쳐서 곱게 만든 다음 꿀물을 넣고 석이버섯과 반죽하여 놋쇠시루에 찐 것이었다. 맛이 매우 좋아 찹쌀떡이나 감떡보다도 훨씬 나았다.
백산자 속칭 박산이라 하는데, 전주 지방에서만 만든다.
다식 안동 사람들이 만든 것이 맛이 매우 좋다.
밤다식 밀양과 상주 사람들만 잘 만드는데, 다른 고을에서 만든 것은 매워서 먹을 수가 없다.
차수 여주 사람들이 아주 잘 만든다. 희고 부드러워 맛이 매우 달고 연하다.
엿 개성에서 만든 것이 으뜸이고 전주 것이 그다음이다. 근래에는 서울 송침교 부근에서도 잘 만든다.
큰 만두 의주 사람들이 중국 사람처럼 잘 만든다. 그 밖의 곳에서 만든 것은 모두 별로 좋지 않다.
두부 장의문 밖 사람들이 잘 만든다. 말할 수 없이 부드럽다.
곰기름 정과 회양 것이 가장 좋고 다른 곳 것은 모두 이만 못하다.
들쭉죽 갑산과 북청에서만 나는데 맛은 정과와 같다. 이 뒤에 나오는 포도 이하 과일들은 모두 이 들쭉죽만 못하다.
이상은 떡 종류다.
과일 종류 (서기 1611년 6월 1일, 양력 추정)
하늘배 성종 임금 때 강릉에 살던 진사 김영의 집에 갑자기 배나무 한 그루가 돋아났는데 열매가 사발만 했다. 지금은 여러 곳에 퍼졌는데 맛이 달고 연하다.
금색배 정선군에 많다.
검은배 평안도 산골 고을에 있다. 검푸른 빛인데 물이 많고 꿀맛이 난다.
붉은배 석왕사에서 난다. 붉고 큰데 맛이 산뜻하다.
대숙배 속칭 부리라고도 한다. 산중에 많은데 곡산과 이천 것이 매우 크고 맛도 으뜸이다.
금귤 제주에서 나는데 맛이 시다.
감귤 제주에서 나는데 금귤보다 조금 크고 달다.
청귤 제주에서 나는데 껍질이 푸르고 달다.
유감 제주에서 나는데 감자(귤의 일종)보다는 작지만 매우 달다.
감자 제주에서 난다.
유자 제주와 경상도·전라도 남쪽 해변에서 난다.
석류 영암과 함평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고 그 밖에는 이만 못하다.
일찍 붉어지는 감 온양에서 나는 것이 붉고 달고 물기가 많다. 그 밖에는 모두 이만 못하다.
각시감 남양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먹감 지리산에서 난다. 검푸른 빛에 둥글고 끝이 뾰족하다. 맛은 그런대로 좋으나 물기가 적다. 꼬챙이에 꿰어 말려 곶감으로 만들어 먹으면 더욱 좋다.
밤 상주에서 나는 밤은 작은데 껍질이 저절로 벗겨져 속칭 겉밤이라 한다. 그다음은 밀양에서 나는 밤이 크고 맛이 가장 좋으며, 지리산에서도 주먹만 한 큰 밤이 난다고 한다.
죽실(대나무 열매) 지리산에서 많이 난다. 내가 부안(옛 이름 낭주)에 있을 때 노스님 선수가 제자들을 시켜 보내온 적이 있는데, 감과 밤가루를 섞어 만든 것이었다. 몇 숟갈 먹었는데 온종일 든든했다. 참으로 신선이 먹는 음식이다.
대추 보은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크고 씨가 작으며 붉고 물기가 많아 달다. 그 밖에는 모두 이만 못하다.
앵두 저자도에서 나는 것이 작은 밤만큼 크고 맛이 달다. 흰 앵두는 영동 지방에서 많이 나는데 맛은 붉은 앵두만 못하다.
살구 서울 서쪽 교외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자두 삼척과 울진에서 많이 나는데 주먹만큼 크고 물기가 많다.
황도 춘천과 홍천에서 많이 난다.
오얏 서울에서 많이 나는데 서쪽 교외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자줏빛·누런빛 오얏은 모두 작아 지방에서 나는 것보다 못하다.
반도(납작복숭아) 금천과 과천 두 곳에서 많이 났었는데 지금은 없다. 내가 어렸을 때 친척이 안양에 살아서 냇가에 많이 심어 놓고 따서 보내 주곤 했다. 맛이 매우 좋았는데 지금은 얻을 수가 없어 안타깝다.
승도(털 없는 복숭아) 전주 부근에서는 어디서나 난다. 크고 달다.
포도 마유포도는 드물고, 신천에 사는 윤대련의 집에 한 그루가 있는데 맛이 매우 좋아 중국산에 뒤지지 않는다.
수박 고려 때 홍다구가 처음 개성에 심었다. 연대를 따져 보면 아마 홍호가 강남에서 들여온 것보다 먼저였을 것이다. 충주에서 나는 것이 으뜸인데 동아처럼 생긴 것이 좋다. 원주 것이 그다음이다.
참외 의주에서 나는 것이 좋다. 작으면서도 씨가 작은데 매우 달다.
모과 예천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맛이 배 같고 물기가 있다.
달복분자 갑산부에서만 나는데 맛이 앵두 같아 매우 달고 향기롭다.
이상은 과일 종류다.
(용어) 홍다구는 고려 후기 원나라 편에 서서 활동한 인물이고, 홍호는 남송에서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던 인물로 중국 강남 지방의 수박 재배와 관련해 거론된다.
새와 짐승 고기 종류 (서기 1611년 6월 1일, 양력 추정)
곰 발바닥 산골에는 어디에나 있다. 요리를 잘하지 않으면 제맛이 나지 않는다. 회양의 요리가 가장 좋고 의주·희천이 그다음이다.
표범 새끼 태 양양에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하나 있어 맛이 매우 좋다. 다른 곳에서 만든 것은 불결해서 먹을 수가 없다.
사슴 혀 회양 사람들이 요리한 것이 매우 맛있다.
사슴 꼬리 부안에서 그늘에 말린 것이 가장 좋고 제주도 것이 그다음이다.
기름진 꿩 황해도 산골에서 나는데 양덕과 맹산 것이 가장 좋다.
거위 의주 사람들이 잘 굽는다. 중국 요리 솜씨와 같다.
대체로 이 지방 어디서나 나는 돼지·노루·꿩·닭 등은 굳이 번거롭게 다 적을 필요가 없다. 다만 특산물이거나 요리 솜씨가 특별한 경우만 골라 적었다.
이상은 새와 짐승 고기 종류다.
물고기와 바다 음식 종류 (서기 1611년 6월 1일, 양력 추정)
숭어 서해 어디에나 있지만 한강 것이 가장 좋다. 나주에서 잡은 것은 매우 크고, 평양에서 잡아 얼린 것도 맛이 좋다.
붕어 어디에나 있지만 강릉 경포가 바닷물과 통해 흙냄새가 안 나서 가장 맛있다.
웅어(준치) 한강 것이 가장 좋다. 호남에서는 이월이면 잡히고 관서 지방에서는 오월에야 잡히는데 모두 맛이 좋다.
뱅어 얼음이 얼었을 때 한강에서 잡은 것이 가장 좋다. 임한·임피 지방에서는 정월과 이월에 잡는데 국수처럼 희고 가늘어 맛이 매우 좋다.
노란 조기 서해 어디에나 있는데 아산 것이 가장 좋아 삶으면 비린내가 안 난다.
오징어 서해 일부 지방에서만 잡히는데 흥덕과 부안에서 잡히는 것이 가장 좋다.
해양 인천과 남양 등지에서 잡힌다. 소 지라 맛과 비슷한데 두 지방 사람들이 요리를 잘한다.
죽합(대합조개) 경기와 해서 지방에서 많이 난다.
소라 서해에서 많이 나는데 옹진 것이 가장 좋다.
청어 네 종류가 있다. 북쪽 지방 것은 크고 배가 희며, 경상도 것은 등이 검고 배가 붉다. 호남 것은 조금 작고, 해주에서는 이월에 잡히는데 매우 맛이 좋다. 옛날에는 매우 흔했지만 고려 말에는 쌀 한 되에 마흔 마리밖에 주지 않았으므로, 목은 이색이 이를 한탄하는 시를 지었다. 난리가 나고 나라가 황폐해져 온갖 물건이 부족해진 탓에 청어마저 귀해진 것을 한탄한 것이다. 명종 임금 이전만 해도 쌀 한 말에 쉰 마리였는데 지금은 아예 잡히지 않으니 괴이한 일이다.
큰전복 제주에서 나는 것이 가장 크다. 맛은 작은 것만 못하지만 중국 사람들이 매우 귀히 여긴다.
꽃전복 경상북도 해안 사람들은 전복을 따서 꽃 모양으로 썰어 상을 장식하는데 이를 화복이라 한다. 또 큰 것은 얇게 썰어 만두를 빚는데 이 역시 좋다.
홍합 중국인들은 "동해부인"이라 부른다. 동해와 남해에 모두 있는데 남해 것이 조금 크다. 또 해삼도 있는데 옛날에는 "이"라 불렀다. 중국인들이 좋아한다.
은어(은구어) 영남에서 나는 것은 크고 강원도에서 나는 것은 작다. 해주에도 있다.
여항어 산골 어디에나 있는데 강릉 것이 가장 크고 맛도 좋다.
금린어(쏘가리) 산골 어디에나 있는데 양근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원래 이름은 "천자어"였는데 명나라 사신 동규봉이 먹고 맛이 좋다며 이름을 묻자 통역관이 얼떨결에 "금린어"라 하였고, 모두 좋다고 하여 그대로 금린어가 되었다.
누치 산골 어디에나 있는데 평안도 강변 것이 가장 크다.
궐어 서울 동쪽과 서쪽에서 많이 나는데 속칭 염만어라 한다.
복어 한강 것이 맛이 좋은데 독이 있어 사람이 많이 죽는다. 영동 지방 것은 맛이 조금 떨어지지만 독은 없다.
방어 동해에서 많이 나지만 독이 있어 임금께는 올리지 않는다.
연어 동해에서 나는데 알젓이 좋다.
송어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많이 나는데 바다에서 잡은 것은 좋지 않다. 알은 연어만 못하다.
황어 이월에 동해에서 난다.
가자미 동해에서 많이 난다. 옛날에 "비목어"라 부르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광어 동해에서 많이 나는데 가을에 말린 것이 끈적이지 않아 좋다.
대구 동해·남해·서해에서 모두 나는데 북쪽 것이 가장 크고 누런빛에 두껍다. 동해 것은 붉고 작은데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한다. 서해 것은 더욱 작다.
문어 동해에서 난다. 중국인들이 좋아한다.
정어 강문에서 나는데 곧 작은 숭어다.
은어(도로목) 동해에서 난다. 원래 이름은 "목어"였는데 고려 때 어떤 임금이 좋아하여 "은어"로 고쳤다가, 많이 먹어 싫증이 나자 다시 "목어"로 고쳤다 하여 "환목어(도로목)"라 부른다.
고등어 동해에서 나는데 내장으로 젓을 담근 것이 가장 좋다. 또 "미어"라는 작은 물고기가 있는데 가늘고 짧지만 기름져서 먹을 만하다.
제곡 자줏빛 껍질의 작은 조개다. 경포에 있는데 흉년에 이것을 먹으면 굶주림을 면할 수 있어 곡식과 같다는 뜻에서 "제곡"이라 한다.
살조개 북청과 홍원에서 많이 난다. 크고 살이 연해 맛이 좋다. 고려 때는 원나라의 요구로 모두 바쳐서 국내에서는 먹을 수 없었다.
자주조개 동해에서 난다. 크고 살이 희며 맛이 달다.
게 삼척에서 나는 것은 강아지만큼 커서 다리가 큰 대나무만 하다. 맛이 달고 포를 만들어 먹어도 좋다.
언 게 안악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굴 고원과 문천에서 나는 것이 크지만 맛은 서해에서 나는 작은 것만 못하다.
윤화(굴 종류) 동해에서 나는데 굴과 비슷한 것으로 큰 것이다. 맛이 달다.
왕새우 서해에서 난다. 평안도에서 나는 새우알로 젓을 담그면 매우 좋다.
곤쟁이새우 서해에서 난다. 옹강 것은 짜고 통인 것은 달고 호서 것은 맵고 크다. 의주 것은 가늘고 달다.
도하(복숭아새우) 부안과 옥구 등지에서 난다. 빛이 복숭아꽃 같은데 맛이 매우 좋다.
물고기 중 흔한 것으로는 민어·조기·밴댕이·낙지·준치 등이 있는데 서해 곳곳에서 나며 모두 맛이 좋아 다 적지 않았다. 병어와 그 밖의 변종 물고기는 맛이 좋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어 따로 적지 않았다.
이상은 수산물 종류다.
채소 종류 (서기 1611년 6월 1일, 양력 추정)
죽순젓 호남 노령 이남에서 잘 담그는데 맛이 매우 좋다.
원추리나물 의주 사람들이 중국인에게 배워 잘 요리하는데 매우 맛있다.
순채 호남 것이 가장 좋고 해서 것이 그다음이다.
돌김 영동 지방에서 많이 나는데 가장 좋다.
무 나주에서 나는 것이 매우 좋다. 맛이 배 같고 물기가 많다.
거여목 원주에서 나는 것이 줄기가 희고 매우 맛있다.
고사리·아욱·콩잎·부추·미나리·배추·송이·참버섯 등은 어디서 난 것이든 다 맛이 좋아 따로 구별하지 않았다.
표고버섯 제주에서 나는 것이 좋다. 오대산과 태백산에도 있다.
홍채 경기도 갯가에서 나는 것이 매우 좋다.
황각 해서에서 나는 것이 매우 좋다.
청각 서해 어디에나 나는데 해주와 옹진 것이 가장 좋다.
참가사리 서해 어디에나 나는데 해서 것이 가장 좋다. 또 우뭇가사리라는 것이 있는데 열을 가하면 녹는다.
산초젓 황주에서 만든 것이 매우 좋다.
인삼포 영평과 철원 사람들이 잘 만든다. 모양이 소고기포와 같다.
여뀌 이태원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동아 충주에서 나는 것도 좋다.
가지·오이·호박·무 등은 어디서나 나며 맛도 좋다.
산갓김치 함경남도와 회양·평강 등지에서 모두 나는데 맵고도 산뜻하다.
다시마 북쪽 바다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고 그다음은 미역이다.
올미역 삼척에서 정월에 딴 것이 좋다.
김 호남에서 나는데 함평·무안·나주 것이 엿처럼 달아 맛이 썩 좋다.
해의(김의 일종) 남해에서 나는데 동해 사람들이 주먹으로 짜서 말린 것이 가장 좋다.
토란 호남과 영남 것이 모두 좋아 매우 크다. 서울 지방 것은 맛은 좋은데 작다.
생강 전주에서 나는 것이 좋고 담양과 창평 것이 그다음이다.
겨자 해서에서 나는 것이 가장 맵다.
파 삭녕에서 나는 것이 매우 좋은데 부추·작은마늘·고수 등도 모두 좋다.
마늘 영월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먹어도 냄새가 안 난다.
이상은 채소 종류다.
그 밖의 음식 (서기 1611년 6월 1일, 양력 추정)
차 순천에서 나는 작설차가 가장 좋고 변산 것이 그다음이다.
술 개성부에서 빚는 태상주가 가장 좋은데 자주는 더욱 좋다. 그다음은 삭주 것도 좋다.
꿀 평창에서 나는 석청이 가장 좋고 곡산·수안 것도 좋다.
기름 중화부에서 짠 기름은 벌레에 물린 독을 바르면 해독이 되고, 인주로 쓰면 오래될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약밥 경주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까마귀에게 먹이는 풍습이 있다. 중국인들이 좋아해서 배워 만들어 먹는데 "고려반"이라 부른다.
서울에서 철따라 먹는 음식으로는, 봄에는 쑥떡·송편·느티떡·진달래전·배꽃전이 있고, 여름에는 장미전·수단·쌍화·만두가 있으며, 가을에는 경단·국화떡·감과 밤을 섞어 만든 찰떡이 있고, 겨울에는 탕떡이 있는데, 그 밖에 지지는 떡·찌는 떡·시절떡·달떡·인삼떡·송기유·꿀떡·혀떡 등은 사시사철 만들어 먹는다.
꿀떡 종류로는 약과·대계·중박계·홍산자·백산자·빙과·과과·봉접과·만두과 등이 있는데, 이는 모두 제사나 손님 접대에 쓰인다. 실국수는 오동이라는 사람이 잘 만들어 지금까지 전해 온다.
(용어) 목은 이색은 고려 말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학자다.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1 · 학산초담 (1부)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출처: 성소부부고 제26권, 부록 1, 학산초담
배경: 학산초담은 허균이 1593년(선조 26년) 스물다섯 살에 지은 시화집으로, 조선 초부터 당대까지 시인들의 작품과 일화를 모아 논평한 글이다. 임금과 세자의 시, 매월당 김시습부터 둘째 형 허봉과 누님 허난설헌, 벗 이달을 비롯한 당대 시인들의 작품과 인물평이 이어지며, 중국 사신들과의 교류, 신비로운 일화, 기녀들의 시까지 폭넓게 다룬다. 분량이 매우 많아 두 편으로 나누어 옮긴다. 이 편은 앞부분이다.
임금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제왕의 문장은 반드시 평범한 사람을 뛰어넘게 마련이다. 우리 역대 임금들의 작품은 대개 《대동시림》에 실려 있을 뿐, 그 밖에는 전하는 것이 드물다. 지금 임금(선조)은 하늘이 낸 어진 임금으로, 무릇 신하들을 타이르는 말은 손수 지으셨는데 질박하고 엄숙하여 기백이 있었다. 그러나 시를 지으셨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1591년(선조 24년) 가을, 바깥에서 임금이 지었다고 전하는 절구 한 수가 돌았으니 다음과 같다.
한밤에 칼을 어루만지니 호기가 무지개를 토해 내는 듯 웅장한 마음은 일찍이 우리 동방을 안정시키고자 했건만 이제껏 이룬 일이라곤 남의 걸음걸이 흉내 내다 제 걸음마저 잃은 격 가을바람에 고개 돌리니 한스럽기 그지없구나
시의 격조가 노련하고 굳세어 웬만한 시인에 못지않았는데, 어찌 그 이듬해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줄 알았으랴.
동궁이 지은 삼청동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동궁(광해군)도 즉위하기 전에 문학에 뜻을 두어 옛 책을 많이 모았다. 언젠가 삼청동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것이 진사 유희발의 상자 속에 있다기에 정중히 청하여 읽어 보았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푸른 이내 속 붉은 골짜기는 그늘지고 맑은 시냇가 기이한 풀들이 하늘 제단을 에워쌌네 노을 어린 옥솥에는 신선의 단약이 익어 가는데 다래 넝쿨에 달 비치고 솔바람 일어도 학은 아직 돌아오지 않네
시의 정취가 맑고 서늘하며 글자 쓰는 법도 기이하다. 임금이 지은 글은 저절로 속된 시인의 말투와는 다른 법이니, 아, 존경할 만하다.
(용어) 유희발은 문화 유씨로 광해군의 처남인데, 벼슬은 이조 참판에 이르렀으며 1623년 인조반정 때 죽임을 당했다.
우리나라 시학의 흐름과 매월당·망헌·충암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우리나라의 시학은 소식과 황정견을 위주로 삼아, 경렴당 같은 큰 학자조차도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나머지 세상에 이름난 사람들은 결국 그 찌꺼기나 빨아 먹으며 비위를 상하게 하는 촌스러운 말을 지어낼 뿐이니, 읽으면 진력이 날 지경이다. 성당 시대의 드높은 소리는 이제 다 사라져 들을 수가 없다.
매월당 김시습의 시는 맑고 호탕하며 세속을 초탈했다.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 스스로 다듬고 꾸미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았다. 더러는 마음 쓰지 않고 즉흥적으로 지은 것이 많아 간혹 거친 것도 섞여 있으니, 결국 정시 시대의 격조는 아니다.
망헌 이주의 시는 침착하고 노련하여, 나의 둘째 형(허봉)은 이것이 당나라 대력·정원 연간의 작품과 가깝다고 여겼다. 그러나 소식과 두보에서 나왔으면서도 대체로 순박하지는 못했다.
충암 김정은 맑고 굳세고 기이하고 아름다워 한 사람의 작가라 할 만하되, 거친 말과 겹치는 말이 다소 많다. 그 뒤로는 그 흐름을 되살린 사람이 없었다. 융경·만력 연간에 이르러 최가운(최경창)·백창경(백광훈)·이익지(이달) 등이 비로소 당나라 개원 시대의 시풍을 전공하여 정화를 이루기에 힘썼고 옛사람의 경지에 닿고자 했으나, 골격이 온전치 못하고 너무 아름답기만 했다. 당나라의 허혼·이교 사이에 놓는다면 곧 촌티가 드러날 터인데, 도리어 이백·왕유의 자리를 넘보려 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이 세 사람 덕분에 배우는 이들이 당풍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그 공을 덮어 버릴 수는 없다.
가운(최경창)의 "고봉군 산속 정자에 부쳐"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오래된 고을이라 성곽도 없는데 산속 집에는 다만 수풀뿐 백성도 아전도 흩어져 쓸쓸한데 물 건너 마을엔 겨울 다듬이 소리
창경(백광훈)의 "그림에 부쳐"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문서와 기록에 매달리다 보니 흰머리만 늘어 가는데 시내와 산은 그림 속에 담겼구나 모래톱 잔잔하니 옛 언덕 그대로인데 달빛은 하얗고 낚싯배만 외로워라
또 "스님의 시축에 부쳐"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지리산은 쌍계사가 절경이고 금강산은 만폭동이 기이하다는데 명산에는 몸소 가 보지도 못하고 매양 스님을 배웅하는 시만 짓는구나
익지(이달)의 "산사"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흰 구름 속에 절이 있으니 흰 구름이라 스님이 쓸지를 않네 손님이 와서야 비로소 문을 여니 골짜기엔 온통 송화 가루만 흐드러졌네
또 "배를 돌리며"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병든 가을 해오라기 모래밭에 내려앉고 늦매미는 강가 나무에서 울어 대네 흰 마름에 바람 일자 배를 돌리니 꿈속엔 서쪽 못에 비가 내리네
(용어) 매월당 김시습(자 열경)은 강릉 사람이며 처사로 지냈고 시호는 청간이다. 이주(호 망헌)는 고성 사람으로 벼슬은 정언이었다. 충암 김정은 경주 사람으로 벼슬은 형조 판서, 시호는 문간이다. 최경창(자 가운, 호 고죽)은 해주 사람으로 벼슬은 부사였다. 백광훈(자 창경, 호 옥봉)은 해미 사람으로 벼슬은 참봉이었다. 이달(자 익지, 호 손곡)은 홍주 사람으로 쌍매당 이첨의 서출 손자다.
최경창·백광훈·이달의 시풍 논쟁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최경창·백광훈·이달 세 사람의 시는 모두 정시 시대의 법도를 본받았는데, 최씨의 맑고 굳센 맛과 백씨의 담백한 맛은 귀하게 여길 만하나 기력이 미치지 못해 다소 얇은 결점이 있었다. 이달의 풍성하고 화려한 맛은 두 사람에 비해 범위가 약간 넓지만, 셋 다 맹교와 가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최경창과 백광훈은 일찍 죽었고, 이달은 늙어서야 문장이 크게 나아져 자기 나름의 일가를 이루어 화려함을 거두고 평이하고 진실한 경지로 돌아갔다. 나의 둘째 형은 자주 이렇게 칭찬했다.
"당나라 수주 자사 유장경과 어깨를 겨룬다 해도 크게 손색이 없을 것이다."
내가 말했다. "문장이란 세상의 흥망을 따라가는 법이니, 송나라가 당나라만 못하고 원나라가 송나라만 못한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어찌 두 시대를 뛰어넘어 당나라 작가와 우열을 다툴 리가 있겠습니까."
둘째 형이 말했다. "한퇴지는 당나라 사람인데 유자후가 '곧장 사마천과 나란히 달린다'고 했으니, 자후가 어찌 헛말을 할 사람이겠느냐? 이달도 이와 같으니라."
그러나 나는 끝내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둘째 형 허봉의 시 세계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나의 둘째 형의 시는 처음에는 소동파를 배워 전아하고 순실하며 온건하고 노숙했는데, 호당에 뽑히고 나서는 《당시품휘》를 익히 읽어 시가 비로소 맑고 굳세졌다. 늘그막에 갑산으로 귀양 갈 때 이백의 시집 한 부를 가지고 갔는데, 귀양이 풀려 돌아온 뒤의 시는 하늘의 신선 이백의 말을 깊이 체득하여 장편이든 단편이든 휘몰아치는 기세가 있었다. 일찍이 이익지(이달)가 말하기를,
"미숙 학사(허봉)의 시를 읽으면 공중에 흩날리는 꽃을 보는 것 같다."
라고 했는데, 둘째 형이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나 원대한 포부를 제대로 펴 보지 못했고, 남긴 글마저 흩어져 미처 수습하지도 못한 채 임진왜란을 만나 손쓸 겨를도 없이 병화에 다 타 버렸으니, 죽어도 잊지 못할 이 슬픔이 어찌 끝이 있으랴. 내가 강릉(별칭 경호)에 살 때, 놀란 마음이 좀 가라앉자 일찍이 외워 두었던 것을 생각해 내어 보니 겨우 오백여 편뿐이었다. 이를 베껴 세상에 전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저 태산의 터럭 한 올일 뿐이다.
최경창의 생애와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최경창(자 가운)은 1568년(선조 1년)에 진사가 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종성 부사가 되었는데, 어떤 일로 강등되었다가 국자감 직강을 제수받고는 세상을 떠났다. 언젠가 북경에 가서 도교 사원인 조천궁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한밤이라 옥단에 흰 구름을 쓸고 향 피우고 멀리 하늘 임금께 절한다 달빛 아래 절하는 모습 보는 이 없고 아름다운 나무만 겹겹이 궁문을 가리웠네
또 이렇게 지었다.
삼청궁 이슬 기운 구슬 궁전을 적시고 봉황 피리 부는 신선 달밤에 서성였건만 궁궐 길에는 지금 향기로운 수레 끊기고 푸른 복사꽃 붉은 살구꽃만 봄바람에 흐드러졌네
어떤 도사가 있었는데 성은 진씨이고 이름은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그 또한 시를 잘 지었다. 이 시를 크게 칭찬하여 통주 하청관까지 쫓아와 그 시집에 제사를 써 주기를 청하였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
푸른 하늘은 참된 세계를 나타내고 검은 제단은 태청궁에 가깝구나 난새는 구슬 정원 나무에 깃들고 노을은 자미성을 감돌았네 삼원의 보배 문서는 비장되어 있고 금단은 아홉 번 달여 이루어졌네 지초 수레 탄 신선은 보이지 않고 하늘 저 밖에 피리 소리만 들려오네
이 시가 중국에 퍼져 왕봉주(왕세정) 선생이 대단히 칭찬하였다. 충장공 양조의 무덤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구름 속에 해 지자 불빛이 산을 비치니 오랑캐는 이미 녹두관에 다가왔네 장군이 홀로 천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서 한밤에 요하 건너 싸우다 돌아오지 않았구려
이 시는 당나라 사람의 수준에 못지않으니 중국에서 사랑받는 것이 당연하다.
백광훈의 생애와 시, 허난설헌의 감우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백광훈(자 창경)은 글씨 쓰는 법이 왕희지·왕헌지에 가까웠고, 첫 벼슬은 예빈시 참봉이었다. 언젠가 홍경사를 지나다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풀 쓸쓸한 전 왕조의 절 낡은 비석엔 학사의 글 흐르는 물은 천 년토록 예와 같은데 해 질 무렵 떠가는 구름을 보네
1582년(선조 15년)에 병으로 서울 집에서 죽었다. 누님 난설헌이 그를 슬퍼하며 지은 감우시는 다음과 같다.
요즘 최씨 백씨 무리들이 성당을 본받아 시를 익혀 적막하던 대아의 음률이 이들을 만나 다시금 크게 떨쳤네 낮은 벼슬에 그저 녹만 받고 변방 고을살이에 서러운 처지 나이도 벼슬도 함께 시들어 가니 이제야 믿겠네,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함을
난설헌(이름 초희, 자 경번)은 초당 허엽의 딸이며 서당 김성립의 아내다. 난설헌의 "강남곡"은 다음과 같다.
남들은 강남땅 좋다 하지만 나 보기엔 강남땅 시름겹기만 해마다 모래톱 포구에 서서 애끊는 마음으로 가는 배만 바라보네
"가난한 여인의 노래"는 또 다음과 같다.
가위를 손에 잡으니 추운 밤 열 손가락 곱네 남 위해 시집갈 옷 지어 주건만 해마다 도리어 혼자 살다니
"연밥 따는 노래"는 다음과 같다.
가을이라 긴 호수엔 비취옥이 흐르는데 연꽃 깊숙한 곳에 목란배 매어 두고 물 건너 님을 만나 연밥을 던지다가 남의 눈에 그만 띄어 반나절이나 무안했네
(용어) 왕세정(호 봉주)은 명나라의 문장가다.
임제의 생애와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임제(자 자순)는 나주 사람이다. 1577년(선조 10년)에 진사가 되었다. 본성이 의협심이 있고 얽매이지 않아 세속과 맞지 않았으므로 불우한 채 일찍 죽었다. 벼슬은 예조 정랑에 그쳤다. 죽은 뒤 어떤 이가 "역적 정여립과 함께 시국을 논하면서 항우는 천하의 영웅인데 성공하지 못한 것이 애달프다고 말하고 마주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그를 무고했다. 그 말이 삼성에까지 전해지자 아들 임지가 국문을 받았는데, 임지가 선친이 지은 "오강에서 항우를 조상하는 부"를 올려 겨우 용서받고 변방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그의 "평사 이영을 보내며"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북방 눈 내리는 용황 가는 길 음산한 바람 부는 발해 바닷가 원수의 서기를 맡은 이는 한 시대의 미남아로다 칼집엔 별을 찌르는 칼이 있고 주머니엔 귀신도 울릴 시가 들었네 변방 모래바람 금갑옷에 자욱한데 관문 위의 달은 붉은 깃발을 비추누나 옥문관 어딘들 두루 다니지 않으리 공신각에 화상 걸릴 날 머지않으리 마주 보니 굳센 머리카락 곤두서고 먼 길 떠날 슬픈 기색 짓지 않네
시의 격조가 당나라 양영천(양형)과 매우 비슷하다.
임제의 호는 백호이며 벼슬은 북평사를 지냈다. 《잠영보》를 살펴보면 "임제의 맏아들은 임탄으로 호는 한정인데 벼슬을 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임기로 호는 월창, 벼슬은 좌랑이다"라고 하였다. 임탄은 혹 임지의 개명이 아닌지 모르겠다.
백호의 "규방의 원망"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열다섯 살 월계 아가씨 남 보기 부끄러워 말도 없이 헤어졌네 돌아와 겹문 닫고는 배꽃에 비친 달 보며 울었네
"산사"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한밤중 숲속에서 스님이 잠드는데 무거운 비구름이 풀옷을 적시누나 느지막이 사립문을 여니 깃든 새가 그제야 놀라서 나네
이영은 고성 사람으로 자는 언윤, 호는 남고이니 청파 이육의 손자로 벼슬은 목사를 지냈다.
(용어) 정여립의 옥사는 1589년(선조 22년) 일어난 사건으로, 이 일로 많은 사림이 화를 입었다.
둘째 형의 시와 최경창·허봉의 화답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둘째 형이 경흥 압호정에 제하여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국경에서 스산하게 바라다보니 인가의 연기는 오랑캐 땅과 접했구나 산은 외로운 장막 밖을 에웠고 물은 무너진 능 옆으로 흘러드는구나 초가집에서 해가 바뀌도록 병들었는데 푸른 모에 한밤중 서리 내렸네 이곳에 오르자 가장 서글퍼지니 까칠한 수염은 낙엽과 함께 누렇구나
임자순(임제)이 크게 칭찬하며 같은 운으로 화답하려 하였으나 종일 궁리해도 뜻대로 되지 않자 시를 보내기를,
백옥과 청묘는 열 글자의 역사로다
라 하였으니, 셋째와 넷째 구절이 역사적 사실을 담았음을 말한 것이다. 금성 객관에 옛사람이 "추" 자로 압운한 시를 판각해 걸어 놓았는데, 최고죽(최경창)이 차운하기를,
서글픈 대평소 소리 옛 고을에서 나는데 깊은 강물은 어둠 속 급히 흐르네 희미한 등불 아래 초나라 나그네의 꿈이요 한밤중 중선의 다락일레 찬비 비록 개었으나 고향 생각 또다시 가을을 만났네
라고 했다. 둘째 형이 이어 읊기를,
나그네 만리길 가매 말 멈추어 차가운 물을 먹이네 큰길엔 온통 꽃다운 풀들 저녁 연기 역루에서 피어오르네 나그네 회포는 어렴풋 꿈과 같아서 봄이라지만 거의 가을 같고나
라고 했다. 최고죽이 보고, "봄 시를 가을 추 자로 압운하기는 가장 어려운 일인데, 이 구절은 옛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하였다.
누대의 현판시에 대하여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내 생각에 누대 현판은 모조리 케케묵은 시들이라, 비록 청신한 구절이 있다 하더라도 가려내기 쉽지 않으니, 굳이 지을 필요가 없다. 임자순(임제)이 언젠가 가학루를 지나갔는데, 판시가 많아 만여 개나 되므로 그 되지 않은 잡소리를 싫어하여 관리를 불러 말하기를, "이 현판들은 관에서 명하여 만든 것이냐? 아니면 안 만들면 벌을 주느냐?" 하니, 관리가 "만들고 싶으면 만들고 싫으면 안 만들지요. 어찌 관명이나 처벌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자순이 "그렇다면 나는 짓지 않겠다" 하였다. 듣는 이들이 다 웃었다. 임진왜란에 적이 관사를 불태워 남은 것이 없었으며, 불태우지 않은 곳도 현판을 뜯어 불 속에 던져 버렸다. 아마 하늘도 시가 높은 벽에 걸려 있는 것을 싫어했나 보다.
임형수와 심언광의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누제에도 좋은 시구가 더러 있다. 임진년에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난리를 피해 북쪽 변경으로 들어가다가 곡구역에 이르니, 임형수가 지은 시의 셋째 넷째 구절에,
꽃이 고개 숙이니 술 취한 미녀의 얼굴 같고 산이 끊어지니 바닷물 마시는 푸른 용의 허리 같구나
하였다. 시어가 맑고 뛰어나니 어찌 누제라 하여 흠잡을 수 있겠는가. 임형수(자 사수, 호 금호)는 평택 사람으로 벼슬은 목사를 지냈는데, 1547년(명종 2년) 벽서 사건 때 원통하게 죽었다.
어촌(심언광)의 시는 혼후하고 부염하기가 호음(정사룡)에 못지않은데, 송계(권응인)가 중종 이래 대가를 평하면서 그 명단에 어촌이 들지 않았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내가 북쪽 변경의 누제를 보다가 어촌의 시를 읽고는 눈을 씻고 장단을 맞추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영동역"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총애와 굴욕 아득하다 둘 다 절로 놀라니 떠도는 남은 목숨 그 어디에 붙일까 하늘가 해 질 무렵 고향 그리는 눈물 변방 밖 늦가을 고국 떠나는 마음일세 구름송이 어지러이 날아 산은 온통 새까맣고 둥근 달 나직이 비치니 온 바다는 밝아라 나그네 신세 오늘 밤 유난히 시름겨워서 푸른 등불 마주하여 앉아 지새웠네
"수성역"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고향 떠나 가을 지나 국경 성에 머무니 낯선 땅 풍경은 모두가 고향을 그리게 하네 넓은 강 건너고 싶으나 뱃사공 없고 겨울나무 말라 가도 겨우살이는 매달렸네 일신을 도모함이 곧은 길 아님 우습고 세상 속여 헛된 이름에 붙들림 오히려 부끄럽네 새벽 문을 열고 푸른 바다 마주하니 아침 해 밝고 밝아 간담을 비치네
이와 같은 작품들이 어찌 호음(정사룡) 무리만 못하단 말인가? 아래 시의 넷째 구절은 권신 김안로가 죽었지만 그 잔당이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았음을 가리킨 것이다.
어촌 심언광(자 사형)은 삼척 사람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공이다. 호음 정사룡(자 운경)은 동래 사람이며 벼슬은 영중추부사이다. 송계 권응인은 안동 사람이니 벼슬은 학관이고 이조 참판 권응정의 서출 아우다. 김안로(자 이숙, 호 희락)는 연안 사람이고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다. 탐욕스럽고 간사하며 조정 일을 제멋대로 하였으므로 1537년(중종 32년)에 사약을 받았다.
어촌의 "사과꽃 지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붉고 흰 꽃 봄을 도와 늙은 가지에 피니 뉘 위해 단장하는고, 시골 사람 집에서 한밤중 비바람에 초췌할까 두렵더니 다닥다닥 핀 사과꽃 모조리 다 졌구나
송계(권응인)의 "촉석루"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구름 사이 새어 나는 희미한 달이 잔잔한 물결을 비추어 주니 잠자던 해오라기 나직이 날아 물언덕 모래톱에 내려앉는다 물가 정자에 발 거두고 기둥 기대어 앉아 있으니 나룻머리 노 젓는 소리 밤이라 크게 들리네
둘째 형이 근래 시인을 평하면서 소재 상공(노수신)을 대가로 여기고 제봉 고경명을 그다음으로 쳤다. 이익지(이달)는 둘째 형의 시와 문장이 모두 고경명보다 낫다고 여겨 논란이 오래되었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다. 내가 권응인을 만나 물어보니 이달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권응인이 갑산으로 귀양 가는 둘째 형을 보내는 시의 셋째 넷째 구절에,
정묘교 곁에 살던 당나라 시인이고 경인일에 태어나 쫓겨난 초나라 신하로다
라 하니, 고사 인용과 대구가 다 적절하다. 둘째 형이 서애 유성룡에게 부친 시에 또,
갑자년 참상을 말하지 마라 응당 경인년에 하강하는 때를 맞으리
하였다.
소재 노수신(자 과회)은 광산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간이다. 제봉 고경명(자 이순)은 장흥 사람이다. 벼슬은 목사이고 시호는 충렬이다. 서애 유성룡(자 이견)은 풍산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충이다.
둘째 형과 누님이 꿈속에서 지은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둘째 형이 귀양 가기 전 옥당에 있을 때 꿈속에서 시를 짓기를,
텃밭에 채마 부치노라니 솜씨야 늘었다만 하늘은 꿈결에도 어렴풋 오직 가의의 눈물만 남아 밤마다 차가운 옷을 적실 뿐
하더니, 가을이 되자 갑산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누님이 평시에 또한 꿈속에서 지은 시에,
푸른 바다는 신선 사는 요해에 젖어들고 파란 난새는 채색 봉황에 기대었구나 연꽃 스물일곱 송이 서리같이 싸늘한 달빛 아래 지는구나
하더니 이듬해 신선 되어 올라가니, 3에 9를 곱하면 27로서 누님 나이와 같으니, 사람 일에 있어 미리 정해진 운명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누님의 시문은 모두 타고난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선계에 노니는 시"를 즐겨 지었는데 시어가 모두 맑고 깨끗하여, 밥 짓고 반찬 익혀 먹는 속인으로서는 미칠 수가 없다. 산문도 우뚝하고 기이한데 사륙변려문이 가장 좋다. "백옥루상량문"이 세상에 전한다. 둘째 형이 일찍이, "경번(허난설헌의 자)의 재주는 배워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이태백과 이장길의 남은 울림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아, 살아서는 부부 금슬이 좋지 못했고 죽어서는 제사 받들 자식이 없으니 옥이 깨진 원통함이 한이 없다.
(용어) 가의는 한나라 초 문인으로 재주가 있었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젊어서 죽었다.
이옥봉의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이옥봉은 조원(자 백옥)의 소실이다. 그 시가 몹시 맑고 강건하여, 거의 아낙네들이 화장할 때 쓰는 말들이 아니다. 남편을 따라 진주부로 가는 길에 노산묘(단종의 무덤)를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닷새는 장간이요 사흘은 영월이라 참담한 노릉 구름 슬픈 노래 끊어지네 이 몸도 또한 왕손의 딸이라서 이 땅 두견새 소리 차마 들을 수 없구려
서익(자 군수)의 소실이 편액 글씨와 짧은 율시를 부쳐 준 데 사례하는 시는 다음과 같다.
여위고도 굳세게 하늘 밖의 정취 써서 이루니 유공권 서체의 남은 자취 보여 주네 해서체는 나부끼는 가운데 봉새처럼 날아오르고 큰 글씨는 뭉게구름이 응집되었네 시험 삼아 산속 집에 걸고 보니 호랑이가 뛰는 듯 문득 강가 누각에 거니 용이 오르는 양 위부인 필력이 바야흐로 굳건한 줄 알거니와 소야란의 재주라고 어찌 공교함을 독차지할 것인가 몸은 마치 혜초 가지 같아도 생각은 씩씩하며 가녀린 손 파처럼 곱건만 글씨를 쓰면 웅장하여라 정신적인 사귐이 만 리를 문묵으로 통하니 여의주를 갚기 위해 백옥 동자에게 알리노라
그 아우도 시를 잘 지었는데, 언젠가 절구 한 수를 읊었으니 그 뒷구절은 다음과 같다.
창 열고 새벽달 아래 거니노라니 이슬은 매화 가지에 함초롬하구나
그 전집을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옥봉(이름 원)은 완산 사람인데 충의위 이봉의 딸이다. 조원(자 백옥, 호 운강)은 임천 사람으로 벼슬은 승지다. 서익(호 만죽)은 부여 사람으로 벼슬은 부사다.
옥봉의 "규방의 정"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언약하신 서방님 어이 이리 더디신가 뜰가의 매화는 이울려 하는데 갑자기 가지 위에 까치 소리를 듣고 헛되이 거울 비쳐 눈썹 그리네
최고죽(최경창) 등이 언젠가 "우리나라 지명은 중국만 못하여 시 지을 때 지명을 구사할 수 없다"며 늘 한스럽게 여겼는데, 소재(노수신)의 시에,
길은 막다른 평구역이오 강물은 깊어라 판사정 앞에
라는 구절을 보니, 상하 구절이 모두 우리 지명을 썼건만 구법이 온당하고 적절했다. 그러니 대가의 솜씨는 절로 여느 사람과 다름을 알겠다.
이달의 불우함과 양사언의 우정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이익지(이달)는 젊어서 화류계에 드나든 실수 때문에, 그 재주를 시새우는 자들이 이를 가지고 비방하였고, 심지어는 "어머니도 잘 대우하지 않고 부인과의 예의도 닦지 않았다"며 비난해 마지않았다. 양봉래(양사언)가 강릉 부사로 부임했을 때 그를 스승의 예로 대우하자, 시샘하는 이들이 선친(허엽)에게 근거 없는 말을 해서 선친이 편지로 이달을 멀리하도록 권하였다. 양봉래가 답장을 보내기를, "오동꽃은 밤비에 지고, 바닷가 나무는 봄구름 속에 사라진다는 시를 짓는 이달을 만약 소홀히 대접한다면, 진왕 조식이 응탕과 유정을 잃을 때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였다. 그 뒤에 대우가 약간 소홀해지자 이달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작별을 고했다.
나그네의 떠나고 머무름은 주인의 눈썹 사이에 달렸나니 오늘 아침 반기는 빛 없으니 우리 집 고향산 그리워지네 노나라에선 원거를 잔치해 주고 남쪽 정벌엔 율무로 돌아갔다네 가을바람에 소진의 신세로 또다시 목릉관을 떠나노라
이에 양봉래가 놀라고 뉘우쳐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양사언(자 응빙, 호 봉래)은 청주 사람으로 벼슬은 부사다. 선친(자 태휘, 호 초당)의 이름은 엽이며 벼슬은 부제학이다.
양봉래의 "국도"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단청한 누대에 보랏빛 연기 떨치며 구름길에 용을 타고 여러 신선 내려오네 청산도 또한 인간 속세 싫어선지 푸른 바다 같은 만 리 장천으로 날아드누나
연산군 시절의 강혼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연산군이 집정하였을 때, 강혼은 도승지가 되어 가장 총애를 받았다. 언젠가 연산군이 출제하기를,
한식 동산에 삼월은 다가오고 비바람에 꽃 지는 새벽은 싸늘해라
하고, 승지·사관·경연관에게 칠언율시를 지어 바치게 하였는데, 강혼의 시는 다음과 같다.
청명이라 대궐 버들 찬 연기 서렸는데 쌀쌀한 봄바람 새벽 들어 한층 더 미친 듯하구나 붉은 꽃잎 땅을 덮도록 내버려두고 휘날리는 버들개지 온 하늘에 자욱하구나 물 건너 높은 누각에 구슬발 걷히니 꽃구경 가는 좋은 말 비단 안장 빛나네 금 동이 술 다 마시고 취하여 별원으로 돌아오노라니 단청한 난간가에 오색 드림 나부끼네
연산군이 크게 칭찬을 하며 금은보화를 많이 하사하였다.
강혼(자 사호, 호 목계)은 진주 사람이며 벼슬은 판중추부사이고 시호는 문간이다.
기준의 절명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응교 기준이 온성으로 귀양 가 있는데, 서울로부터 사약이 내려왔다. 그는 조용히 시를 읊어 스스로 만사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해 지자 하늘은 먹빛 같고 산 깊어 골짜기는 구름 같구나 천년토록 지키자던 군신의 의는 슬프다, 하나의 외로운 무덤뿐
이 시를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심장과 간장이 다 찢어지게 한다.
기준(자 자경, 호 복재)은 행주 사람이며 벼슬은 응교에 그쳤다. 시호는 문민이다.
최수성의 죽음과 나식의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최원정(최수성)은 늘 화를 입을까 두려워 세상 밖을 떠돌아다녔건만, 마침내 숙부의 참소를 받아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되었는데, 그가 만의사에 제하여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옛 불전에 몇몇 스님이 있고 나뭇가지엔 저물녘 경쇠 소리 맑아라 산굽이는 천 리나 아스라한데 담장은 우뚝, 뭇산이 하마 낮아 뵈네 나무는 하 늙었으니 몇 살이나 되었누 새들의 지저귐도 곳에 따라 유달라라 어려운 세상 죄의 그물 근심했더니 오늘이야말로 부끄럽다, 나의 삶이여
시어가 맑고도 빼어났다. 끝 구절은 대체 그가 화 입을 것을 미리 헤아렸단 말인가?
최수성(자 가진, 호 원정)은 강릉 사람이며 처사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그의 숙부 최세절(자 개지)은 벼슬이 호조 참판이다. 원정의 "망천도"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달이 서녘산에 내리니 어두운 연기 먼 나무에 피어나네 끊어진 다리에 복건 쓴 두 사나이 그 누가 망천의 주인인지
나공(나식)은 웅장한 글과 곧은 절개가 오랜 세월 빛난다.
외로운 배는 일찍 매어야만 하니 풍랑은 으레 밤 깊으면 더하다네
라는 구절은 선배들이 이미 칭찬하였던 것이고, 원숭이 그림에 제한 절구 두 편을 손곡(이달)은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칭찬하였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산 원숭이 포도를 안고는 다리로 긴긴 가지를 밟는구나 떨어진 열매 주울 때 뉘 능히 암수를 구별하리오
또 이런 시도 있다.
늙은 원숭이 그 무리를 잃고 마른 나무 등걸 위에 해는 지네 동그마니 앉아 고개조차 까딱 않으니 아마도 일천 봉의 메아리 듣나 보네
아랫시가 더욱 기발하다.
나식(자 장원)은 안정 사람이며 정암 조광조의 문인이다. 을사사화에 형인 부제학 나숙과 함께 참화를 당했다. 그의 "여강"이라는 시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푸른 강가에 해는 저물고 하늘이 차니 물결은 절로 이네
다른 야사를 참고해 보면 최원정(최수성)의 시로 되어 있다. 그의 숙부 최세절이 이 시를 가지고 그를 참소했다고도 하나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이달의 시구와 세평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손곡 이익지(이달)의 "한식"이라는 시에,
배꽃에 비바람 치는 한식철인데 병든 나그네로 떠돈 지 삼십 년일세
라든지, 임귀성에게 보낸 시에,
해마다 떠돌이라 옷은 벌써 해어지고 몇 달을 집 떠나니 허리춤 줄었구나 범숙의 이 가난 뉘 가엾이 여길 건가 소진처럼 곤궁하여 못 돌아감을 스스로 비웃노라
라든지, "노산묘"라는 시에,
봄바람에 귀촉새 울음 애닯고 해 저물녘 노릉은 스산도 해라
등의 시구는 대구가 자연스럽고 침착하고 무게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더러 바람 앞의 꽃이라 하여 결점으로 여기나, 글쎄 미처 생각을 못 해서 하는 말이 아닌지?
김정의 시와 이행의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김충암(김정) 시집 속에 "청산금야월"이라는 시는 바로 용재 이행(시호 문민)의 작품으로 시법이 같지 않다. 편찬한 자가 잘못 엮은 것이다. 내가 스님의 시축을 보니 충암의 시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고개 너머 한산사에 스님 만나니 문득 반가워라 돌샘 가의 같은 병든 나그네 천지간에 하나의 부평초 성긴 빗속 가물거리는 등불은 싸늘한데 잔 들자 들려오는 먼 바닷소리 창 열고 거듭 두런거리다 헤어지니 구름 설핏 새벽별만 밝구나
이 시가 충암 본집에는 없으니, 당시 편찬자가 혹 미처 못 본 것인가?
용재 이행(자 택지)은 덕수 사람이며 벼슬은 좌의정이다. 시호는 문민이었는데 문정으로 고쳤다가 다시 문헌으로 고쳤다. 용재의 "그림에 부쳐"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후둑후둑 소상강에 비가 내리고 아스라이 보이네, 반죽의 숲 그러나 거기서 묘사키 어렵기는 아황·여영 두 왕비의 심정
"관사 벽에 쓰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늙마에 분주타 보니 병은 약속이나 한 듯 찾아오고 봄 흥취라야 많지 않으니 시까지 지을 건 없다 졸다 깜짝 놀라 깨니 꽃철이 늦었구나 한 차례 보슬비가 장미를 적시누나
"합천에서 자규 소리를 듣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강북 봄 경치 밤이라 더 서글퍼서 잠깨자 까닭 없이 나그네 맘 설레이네 세상만사 고향에 돌아감만 못하니라고 건너 숲에 울어 대는 자규 소리 잦아라
"주운을 읊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허리에 칼이 있으니 청할 게 무어 있소 땅밑에 사람 없어도 또한 노닐 만하네 가석하다, 한나라 조정의 괴리령은 일생에 영신 머리 베기만을 알았구려
이달과 홍적의 시구 비교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나의 둘째 형이 언젠가 이손곡(이달)의 "송경에서 노닐며"라는 시 가운데,
대궐 앞 거둥하던 길엔 가을풀 스산하고 누대 아래 격구하던 뜰엔 저녁 소를 먹이누나
라는 구절을 칭찬하였으나, 사인 홍적의,
누대는 비었어도 반월대요 각은 황폐하나 옛 첨성각이네
만큼 절실하지는 못하다.
홍적(자 태고, 호 하의)은 남양 사람이다.
홍경신과 이덕형의 시재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나의 둘째 형이 일찍이, "홍덕공(홍경신)·이명보(이덕형)의 시는 모두 일가라 이를 만한데, 홍덕공은 장편을, 이명보는 칠언율시를 특히 잘 짓는다"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또, "명보는 반드시 대제학이 될 것이다" 하더니, 후에 이덕형은 나이 겨우 서른이 넘자 대제학에 임명되고 벼슬로는 예조 판서의 반열에 오르게 되니, 대제학이 되리라던 말이 비로소 증명되었다. 홍경신은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불행히도 뜻을 얻지 못해 벼슬이 변변치 못했으니, 재주와 팔자는 이처럼 같지 않다.
홍경신(호 녹문)은 남양 사람이다. 만전당 홍가신의 아우로 벼슬은 부제학을 지냈다. 이덕형(호 한음)은 광주 사람이며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익이다.
홍경신의 "봉래풍악가"를 나의 둘째 형이 아침저녁으로 한 번씩 죽 읊으면서 장단을 맞추며 감탄하였다. 그 시는 이태백의 "천로음"에 영향을 받은 것인데, 종횡으로 오르내림에 한 글자도 세속에 찌든 티가 없다. "반통투수사"·"기택요" 등 작품은 모두 호방하며 기력이 있으나, 율시나 절구는 장편만은 조금 못하고, 산문 또한 간결하고 엄정하다. "운부"·"격구부" 같은 작품은 양봉래(양사언)가 몹시 부러워하며, "사마상여와 천 년 뒤에 우열을 다툴 만하다"고 하였다.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1 · 학산초담 (2부)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출처: 성소부부고 제26권, 부록 1, 학산초담
배경: 학산초담 번역의 두 번째 편이다. 첫 편에 이어 명나라 시인들에 대한 품평, 임진왜란 전후의 시인들, 규수 시인들의 작품, 신비로운 일화, 강릉 지역 인물들에 대한 자부심 등이 이어지며 글 전체를 마무리한다.
명나라 시인들에 대한 논란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명나라 사람의 시를 이손곡(이달)은 하중묵(하경명)으로 첫째를 꼽되, 나의 둘째 형은 이헌길(이몽양)을 최고로 여겼고, 윤월정(윤근수)은 이우린(이반룡)을 그 두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여겼으니 정론을 내릴 수 없다. 봉주(왕세정)의 말은, "비교하자면 헌길은 높고 중묵은 통창하며 우린은 크다" 하고 그 또한 누가 첫째요 누가 다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달이 하루는 율시 한 수를 내어 보이며, "이것은 세상에 전하지 않는 중묵의 시일세" 하기에, 처음에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몰라서, "이 시는 맑고 뛰어났으니 율시를 고르는 자가 빠뜨렸을 리 없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지은 것일 겁니다" 하니, 이달이 자기도 모르게 껄껄 웃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나그네 이불에 스미는 가을 기운에 밤은 깊어 가고 그윽한 집 성긴 반딧불만 고요 속을 나는구나 밝은 달은 뜰에 가득, 서늘한 이슬은 함초롬 푸른 하늘은 물 같은데 은하수는 아득해라 이별의 꿈 고개고개 넘다 깨니 대궐 누수 소리 십이교에 여운지네 지척에서 새삼 동각로 그립건만 고관의 말굽 소린 하늘처럼 아득해라
짜임새와 구법이 대복(하경명)과 꼭 같아서, 웬만한 감식안이 있는 사람이라도 구별하기 쉽지 않다. 이 시는 바로 이달이 월정(윤근수)에게 올린 작품이다.
윤근수(자 자고, 호 월정)는 해평 사람이며 벼슬은 예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신노와 홍성민의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임진왜란 때 신노(자 제이)와 함께 북쪽으로 가는데 명종 임금의 제삿날이 되었다. 그가 객창에서 다음과 같이 지었다.
선왕이 이날 세상 뜨실 때 유언은 정녕 새 임금 부탁이었네 스물여섯 해 종묘 제례도 못 모시게 되니 센머리로 울부짖는 건 오직 유민들
뜻이 몹시 서글퍼서 익성군 홍성민이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어떤 사람은 "끊길 절" 자를 고쳐 "차가울 냉" 자로 하기도 하는데, 뜻은 좋으나 격은 먼저 글자만 못하다.
신노는 고령 사람이며 생원이다. 선대의 허물로 과거에서 보류되어 급제를 못했다. 홍성민(자 시가, 호 졸옹)은 남양 사람이며 벼슬은 판중추부사에 그쳤다. 시호는 문정이다.
명나라 사람 등계달과 조선 문인들의 교류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명나라 사람 등계달(자 진생)은 오 지방 사람으로 글과 시를 잘하고 글씨를 잘 쓰며, 천하의 명산대천을 두루 돌아다녔고 스스로 북해라 호하였다. 소재 한세능이 1573년(선조 6년) 우리나라에 조서를 반포할 때 북해가 따라왔는데, 그때 습재 권벽·문봉 정유일·서애 유성룡이 종사관이 되고, 석봉 한호가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수행하였다. 북해가 이 네 분과 서로 몹시 좋아하여 여러 번 시문으로 주고받았다. 그때 나의 둘째 형은 사관으로 임금을 모시고 거침없이 일을 기록하자, 사신이 누구냐고 물으니 재상 김계휘가 한림학사라 대답하였다. 북해가 만나고자 하였으나 기회가 닿지 않았다. 1574년(선조 7년) 둘째 형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조천궁에서 서로 만나 보고 늦게 만난 것을 한스러워하였고, 둘째 형이 우리나라로 돌아온 뒤에도 북해는 여러 번 사신 편에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첨사 황홍헌·도헌 왕경민이 1582년(선조 15년) 조서를 반포하러 올 때, 북해가 둘째 형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 부탁하고 또 그들에게, "모의 벼슬이 선위사가 되지 않았으면 반드시 도감이 되었을 것이오. 당신들은 그를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되오" 하였다. 첨사가 의순관에 이르러 역관 곽지원에게 물어 둘째 형이 나와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자, 편지를 보이고 쥘부채를 선사하였다. 둘째 형도 율시를 지어 두 사신에게 인사하자 서로 돌아보며 감탄하기를, "우리나라 밖 작은 나라에도 인재가 있구려" 하였다. 귀국하자 첨사가 북해에게, "노형은 참으로 사람을 볼 줄 아십니다그려" 하였다. 이것은 당성군 홍순언에게 들은 말이다.
권벽(자 대수)은 안동 사람이며 벼슬은 감사다. 정유일(자 자중)은 동래 사람이며 벼슬은 대사간이다. 한호(자 경호)는 삼화 사람으로 진사이며 벼슬은 호군이다. 김계휘(자 중회, 호 황강)는 광주 사람이며 벼슬은 대사헌이다. 홍순언은 역관이며 남양 사람으로 광국공신에 녹훈되었다.
등계달이 지은 만사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사구 정유일이 세상을 뜨자 북해(등계달)가 듣고 다음과 같이 만사를 지었다.
그리워라 지난날 현도 땅에 노닐 때 청강 위에 일산을 기울이고 즐긴 일 싸늘한 달빛 감미로운 술잔에 일렁이고 눈송인 털방장에 엉기었었지 그해 다섯 사람은 다리에 올라 바람머리에 손잡고 일어나 세 번이나 노래 불렀지 헤어진 뒤 갑자기 신선이 되어 학 타고 놀 속 만릿길을 소요하다니 가을밤은 쓸쓸하고 화표주에 푸른 하늘 가없는데 그대 오기만을 바라누나
말쑥하고 속기가 없어 읽으면 마음이 시원해진다. 중국인이 인재를 아끼기가 대개 이와 같다.
최립의 시와 문장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황 조사(황홍헌)의 시를 사람마다 시원찮게 여겼으나 나의 둘째 형만은, "이런 재주는 예로부터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했지만 남들은 믿지 않았다. 《풍교운전》에 첨사(황홍헌)의 글이 실린 것을 보면 문법이 간결하고 엄숙하며 전아하고 미려하며 온후하고 순수하였으니, 둘째 형은 인재를 알아보는 분이라 할 만하다.
중추 최립은 문장이 간결하고도 예스러워 당대의 대가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더러 그의 시가 문만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정랑 하응림을 제사 지내는 시는 다음과 같다.
나무 찍는 소리 쩡쩡 울려라, 산새도 슬퍼하네 홀로 와 어느 가지에 칼을 건단 말가 재주와 명망이 당시의 비방을 이기지 못했는데 사귐 도는 응당 저승 가야 알리라 영해에서 작별한 뒤에 영 이별을 하다니 역정에서 시 지은 뒤 그대 시가 끊어졌네 평생 술만 보면 다 마시고야 마시던 님 궤연에 부어 놓은 한잔 술 살피실지
역시 근엄하고도 기발하며 건장하니 어찌 문만 못하다 할 것인가.
최립(자 입지, 호 간이)은 통천 사람이며 벼슬은 형조 참판이다. 하응림(자 대이, 호 청천)은 진주 사람이다. 경재 하연의 오대손이며 벼슬은 수찬이다.
둘째 형의 독서법과 문장 배우는 순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나의 둘째 형은, "문장을 배우려면 반드시 한퇴지의 글을 익히 읽어 우선 문호를 세우고, 다음으로 《좌씨전》을 읽어 간결체를 배우고, 다음에는 《전국책》을 읽어 문장력이 종횡무진케 하고, 다음에는 《장자》를 읽어 신출귀몰하는 솜씨를 연구하고, 《한비자》·《여씨춘추》로 지류를 통창케 하고, 《고공기》·《단궁》을 읽어 뜻을 가다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마천의 《사기》를 익히 읽어 자유자재롭고 뛰어난 태를 키우는 것이다. 시를 배울 때는 먼저 《당음》을 읽고, 다음으로 이백의 시를 읽되, 소동파·두목은 그 솜씨만 따면 그만이다" 하였다.
나의 둘째 형은 언젠가, "내가 평생 두목(호 번천)을 익히 읽은 탓에 문장이 높지 못하다"고 한탄하였고, 이달 또한, "소동파·황산곡의 시가 내 폐부에 달라붙은 지 이미 오래인지라 시어를 만듦에 성당의 품격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시 짓기를 소동파·황산곡처럼 하면 그만이지, 하필 새삼스레 도연명·사영운 사이를 꾀할 것인가.
나의 둘째 형의 만년의 글은 유자후와 너무도 같아서, "주한정기"·"축려문" 같은 작품은 가히 대씨당·축필방 등의 글과 서로 어슷비슷하다. 최립이 "화기"에 대해 철로보지만 못지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명과 묘지는 무엇보다도 그의 장기인데도 세상 사람은 다 모르고, 보아도 아는 이가 드무니, 후세에 반드시 알아줄 이가 있을 것이다.
황정욱의 기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임진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고 바로 철령을 넘었다. 장계 황정욱이 북청 진남루에 올라 한탄하기를, "정입부(정언신)가 살았더라면 왜놈이 어찌 능히 철령을 넘었으랴" 하더니, 7월에 회령에서 사로잡혔다. 장계의 문장은 우뚝하고 웅건하며 속기가 없다. 조선 초부터 문형을 잡은 자가 모두 사가독서한 자 가운데서 나왔지만 장계만은 그렇지 않아 세상에선 그를 영화롭게 여기지만, 지난해 난리에 화를 유달리 더 입었다.
황정욱(자 경문, 호 지천)은 장수 사람이며 벼슬은 병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정언신(호 나암)은 동래 사람이며 벼슬은 우의정인데,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의 옥사에 원통하게 죽었다. 뒤에 신원되었다.
노수신의 비문과 중국 사신의 평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1590년(선조 23년) 병부 주사 왕사기는 봉주(왕세정)의 아들로 우리나라 사신의 짐을 검열하러 왔다가 마침 한집에 있게 되었다. 통역을 통해 우리나라 문장을 보기 원하자 어떤 이가 소재(노수신)가 지은 정암(조광조) 비문을 보였다. 주사가 소매에 넣고 가며, "우리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하고, 또 "비명은 추역산송 같으면서도 광채는 더하고, 서문은 법언 같으면서도 넓고 크기는 그보다 나으니, 당신네 나라에도 이런 인물과 이런 문장이 있단 말입니까?" 하였다고 한다.
정암 조광조(자 효직)는 한양 사람이며 벼슬은 대사헌, 시호는 문정이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소재의 시,
바다 달에 벌레 소리는 끝지고 산 바람에 이슬 기운 걷혔네
라는 구절은 소릉(두보)의 시집 중에서 찾는다 해도 흔히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애초에 우의정 사임하고 문득 판중추 되었다네
라는 구절은 대구가 자연스러워 솜씨를 부리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 신도비를 지을 때는 밋밋하여 우뚝한 곳이 없으니, 아마도 기발하게 하려고 마음 쓰다가 도리어 옹졸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나의 둘째 형은 논평하기를, 국초 이래 문장은 경렴당을 제일로 치고 지정(남곤)을 다음으로 치며, 시는 충암(김정)의 높음과 용재(이행)의 난숙함을 모두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나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충암은 세련되지 않은 것 같고 용재는 너무 진부하니, 시 또한 경렴당을 으뜸으로 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지정 남곤(자 사화)은 의령 사람이며 벼슬은 영의정, 시호는 문경이다. 기묘사화 때 간악한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누님의 소령 짓기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가사를 지으려면 반드시 글자의 맑고 흐림과 소리의 높낮이를 분간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음률은 중국과 달라서 가사를 짓는 이가 없다. 공용경과 오희맹이 왔을 때 호음(정사룡)이 차운하지 않자 세상에서는 체면을 지켰다고들 하였다. 그 뒤에 소퇴휴(소세양)가 시강의 운에 차운한 시에,
마음이 서글픈 이, 발 걷고 다시 보니 꽃다운 풀빛 위에 눈길이 멈추네
라는 구절은 중국인이 여러 차례 칭찬하였으니, 모두 음률에 맞아서인지 아니면 다만 그 말씨의 아름다움을 취한 것인지?
소세양(자 언겸)은 진주 사람이며 벼슬은 찬성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나의 누님이 언젠가 "시를 지으면 운율에 맞는다"고 스스로 자랑하며 소령 짓기를 좋아하기에 나는 속으로 남을 속이는구나 하였는데, 《시여도보》를 보니 구절마다 옆에 동그라미와 점으로 어떤 자는 전청·전탁, 어떤 자는 반청·반탁이라 하여 글자마다 음을 달았기에 시험 삼아 누님이 지은 시를 가지고 맞추어 보니, 어떤 것은 다섯 자, 어떤 것은 세 자의 착오가 있을 뿐 크게 서로 어긋나거나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제야 걸출하고 고매한 천재적 소질을 타고나 힘써 겸손했기 때문에 많은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이처럼 성취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어가오" 한 편은 모조리 음률에 맞고 다만 한 자가 맞지 않았다. 그 사는 다음과 같다.
뜰에는 봄바람 스산하고 담머리엔 한그루 배꽃 희어라 옥난간에 기대어 고향 그리나 갈 수는 없고 하늘과 맞닿은 우거진 꽃다운 풀빛만이 비단 방장 비단 창도 쓸쓸히 닫겼는데 단장한 얼굴에 두 줄기 눈물 붉은 가슴 적시네 강북과 강남은 무성한 나무가 가리었는데 이 그리움 어이하리 산 높고 물은 아득, 님 소식은 없으니
"붉을 주" 자는 마땅히 반탁 글자를 써야 하는 자리인데 전탁이다. 하긴 소장공(소동파) 같은 재주로도 굳이 운율에 맞추지를 않았거든, 하물며 그만 못한 사람일까 보냐.
둘째 형의 시구, 거산역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나의 둘째 형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쓸쓸한 들에 북두성 자루는 드리웠고 부서진 배 여울 모래에 놓였구나
이것을 소재(노수신) 상공이 몹시 칭찬하여 당나라 사람에 못지않다고 하였다.
나의 둘째 형의 "거산역"이라는 시는 이러하다.
새벽 별빛 아래 먼 길 떠나는 고각 소리 들리는데 터벅터벅 청주 옛 역정으로 향한다 나하동 그윽하고 산은 옹기종기 시중대를 감도는 바다는 아득아득 천 년 전 부러진 창 모래에 묻혀 짧고 십 리 황무지는 비 온 뒤에 비린내 나네 옛일은 아득해라 물을 데 없고 두어 가락 젓대 소리 차마 어이 들을 건가
이 시가 대궐에 들어가니 주상이 보고 몇 번이나 감탄하고는, 다섯째 여섯째 구절에 이르러서는 "작구법이 의당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율곡의 원접사 시절 일화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조사 황번충이 거련관의 소나무를 읊었는데, 그 맨 끝 구절에 "한" 자를 압운하니, 둘째 형이 한 선자가 각궁을 읊은 옛일을 인용하여 짓기를,
도리어 노나라의 좋은 나무처럼 북돋아 길러서 한 선자를 잊을쏜가
라 하였다. 이숙헌(이이) 선생이 당시 원접사였는데 이 시를 버리고 쓰지 않자 고제봉(고경명)이 크게 한탄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홍당릉이 몰래 황 조사에게 보이니 황 조사가 전편을 손수 베껴 가져오게 하고는 한동안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 사람은 시의 됨됨이를 아는 것이 이러하다.
이이(자 숙헌, 호 율곡)는 덕수 사람으로 벼슬은 정승에 이르고 시호는 문성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당릉은 당성의 잘못인 듯하다. 당성은 역관 홍순언의 호이다.
율곡의 "산중 절구"는 다음과 같다.
약 캐다 갑자기 길을 잃으니 산마다 온통 가을 낙엽뿐 산승이 물 길어 오더니 숲가에 피어나네, 차 달이는 연기
"성을 나서는 느낌"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아득히 사방에는 먹구름만 가득해도 중천엔 해 정히 밝구나 외론 신하의 한줌 눈물을 한양성 향하여 뿌리노라
지리산 신선 노인의 이야기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근세 어떤 선비가 지리산에 유람 갔는데, 한 외진 숲에 이르니 폭포는 이리저리 흐르고 푸른 대 우거진 가운데 한 띳집이 있었다.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섰다가 선비를 보고는 몹시 반기며 손을 맞아 솔 아래 앉혀 놓고 막걸리에 나물국으로 대접하고는 말하기를, "이 늙은 것이 평소 머리 빗기를 좋아하여 하루에 꼭 천 번은 빗어 내린다오" 하면서 쪽지를 내어 놓았는데, 그 속에 든 것이 바로 머리 빗는다는 소두시였다.
얼레빗으로 솰솰 가려 낸 다음 참빗으로 훑되 천 번이나 훑어내니 이는 벌써 없어졌네 어떻게 하면 만 길 되는 큰 빗 구하여 백성의 이 모조리 훑어 없앨꼬
선비가 자신도 모르게 뜰 아래 내려가 절하고 그 이름을 물으니 숨기고 알려 주지 않았다. 이튿날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두세 사람이 같이 다시 찾아가 보니, 집은 그대로 있었으나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성혼의 만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성혼(자 호원) 선생이 청양군(심의겸)을 애도한 시에,
속세에 벼슬살이 진정 뉘가 참인고 여관에서 만나니 바로 친구일레 오늘의 이별 자리 한 가락 노래로 고향 봄동산에 가서 누울 그대 전송하네
하였으니, 이른바 길게 읊는 가락의 서글픔이 통곡보다 더하다는 게 바로 이것이 아닌가?
성혼(호 우계)은 창녕 사람이다. 벼슬은 참찬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간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심의겸(자 방숙, 호 손암)은 청송 사람으로 벼슬은 대사헌에 이르렀다.
차천로의 웅장한 글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차천로(자 복원)의 글은 당시 사람들이 웅장한 문장이라 일컬었다. 글이란 기운으로 주를 삼아야 하건만 차천로는 하찮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았고, 사륙변려문은 전아해야 하는데도 그의 사륙문은 순정치 못하고 거칠다. 시는 그보다 더 못하다. 그의 일본 기행 원고가 매우 많아 천여 수나 되지만 읊을 만한 구절은 하나도 없다. 다만 명천으로 귀양 갈 때 지은,
하늘가에 성난 소린 발해의 파도 눈 속에 시름겹긴 음산의 빛이로다
라는 구절은 정말 웅혼하다. 그러나 전편이 다 그렇지는 못하다. 만약 복원이 조금만 사리를 추구하여 많이 짓거나 빨리 짓는 데 치우치지만 않았다면 고인의 경지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차천로(호 오산)는 연안 사람으로 벼슬은 봉정이다.
차천로가 "이필이 형산으로 돌아가기를 비는 표"를 지었는데,
객성이 임금 자릴 여러 번 침범하고 늘 경월이 궁궐 문을 두드렸네
라는 구절이 있어 세상에서 적절하다고 일컬었다. 나의 둘째 형이 상주 목사로 가는 윤칠계(윤탁연)를 보내는 시의 셋째 넷째 구절에 역시,
경월이 잠시 대궐을 하직하자 복성이 먼저 낙동강을 비추누나
라는 구절이 있으니, 차천로의 표에 비하면 나은 것 같다.
윤탁연(자 상중, 호 중호)은 칠원 사람으로 벼슬은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헌민이다.
한준겸의 재치 있는 대구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한익지(한준겸)가 어떤 일로 파직되어 농사를 짓기로 하고 온 식구가 원주로 내려갔다. 배가 종실 순치수의 별장에 닿았는데, 순치수가 마침 활을 쏘고 약초를 캐던 터라 사람을 보내 누구냐고 물어왔다. 한준겸은 대답하지 않고 절구 한 수로 대신했다.
공자의 풍류가 무리에 뛰어나니 봄이 오자 살구꽃 마을에 낚시질하네 쪽배 탄 나그네가 정겹게 문안드리니 이 사람은 금천의 옛 원이라오
순치수가 배를 타고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그때 한준겸은 금천 군수로 있다가 파면되어 가는 중이었고 순치수는 금천에 은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한준겸(호 유천)은 청주 사람으로 벼슬은 영돈녕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익이며 인조의 장인이다.
이달의 기녀와의 일화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이익지(이달)가 최가운(최경창)을 따라 영광에 노닐 적에, 사랑하는 기생이 있어 자줏빛 비단을 사 주려는데 그 비단 살 돈을 마련할 수 없어 이달이 시로써 다음과 같이 빌었다.
장사아치 강남 저자에서 비단을 파니 아침 해가 비치자 자줏빛 안개가 피어나는구나 미인은 그걸 사서 치마며 허리띠를 만들려는데 주머니 더듬어야 돈은 없구려
최경창이 말하기를, "손곡(이달)의 시는 한 자가 천금이니 감히 비용을 아끼랴" 하고는 한 자에 각각 세 필씩 쳐서 그 요구에 응해 주었으니, 그 재주를 아낌이 이와 같았다.
동파(소동파)의 시에,
슬프다, 사하 물가 십 리의 봄 한 차례 꽃 이울자 다음 꽃 새로워라 비낀 저녁놀에 작은 누각 예 같건만 그 당시 춤추던 이 어디 갔는지
라는 것이 있는데, 손곡(이달)이 죽은 아내를 슬퍼한 시에도 또한 동파의 말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깁 방장엔 향내 가시고 거울엔 먼지 닫힌 문엔 복사꽃만 쓸쓸한 봄날 작은 누각엔 옛날처럼 달은 밝은데 발 걷고 달 즐길 이 그 누구런가
이 시는 무르녹게 곱고 정겨워 옛사람의 말을 그대로 쓴 줄도 모를 정도다. 이달이 기생을 너무 좋아한다고 남에게 비방을 받으면서도 정에 끌린 것이 이러하단 말인가.
기녀에게 준 시가 명성을 좌우한 이야기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당나라 장우와 최애가 기생집에 시를 지어 주었는데, 만약 칭찬을 하면 네 필 말이 끄는 수레가 그 문을 메웠고, 그 시가 기생을 헐뜯으면 손님도 끊겼다. 신차소 선생이 상림춘이라는 기생에게 준 시에,
제오교 머리에 내 낀 버들 비꼈고 밤들자 바람 자고 날씨도 해맑아라 노르스름한 열두 난간에 아가씨 옥과 같으니 대궐 안 시인들도 말 가는 대로 찾아드네
라 하니 기생의 명성이 이로 인해 열 배나 올랐다. 이달이 옥하선이란 기생을 비웃기를,
빗자루 같은 머리털 그나마 센데다가 암말 않고 앉은 꼴 귀신 같구나 몸에 걸친 비단옷도 얻어 입은 듯 고작해야 곽충륜에게나 시집가겠군
이라 하였다. 곽충륜은 장님인데 돈은 있었다. 이 기생은 유명했었으나 이달의 시가 나오자 문득 그 집이 쓸쓸해졌다. 똑같이 이름난 기생이로되 한 편의 시로 그 값을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있었으니, 어찌 다만 기생뿐이겠는가? 대개 선비도 이와 같았다.
신종호(자 차소, 호 삼괴)는 고령 사람이다. 벼슬은 예조 참판에 이르렀는데 연경에 사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송도에서 죽었다.
삼괴의 "봄을 슬퍼하며"라는 절구에,
한 사발 차 마시자 졸음 막 깨니 이웃에서 들려오는 붉은 옥피리 소리 제비도 오잖고 꾀꼬리도 날아갔는데 뜰에 가득 붉은 꽃잎만 지네, 소리도 없이
라는 시가 있다.
임제의 익살, 이달의 애민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임자순(임제)은 스스로 소치(웃음거리 바보)라 호하였다. 둘째 형이 언젠가 기생들의 고사를 모아 글을 지었는데, 화치의 고사를 따서 이십사령을 지었다. 임제가 칠언시로 제하기를,
추리고 가린 명기 스물넷인데 소치의 차지는 하나도 없네 인간 만사 다 거짓이라고 곳곳마다 풍류랑은 소치라 말들 하네
라 하였는데 그의 글은 흔히 볼 수가 없다. 이른바 "수성지"라는 것은 문자가 생긴 이래로 특별한 글이니, 천지간에 절로 이런 문자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이달의 시를 세상 사람들은 기생에 대한 실수 때문에 트집을 잡지만, 그의 "동산역"이라는 시에,
이웃집 어린 며느린 저녁거리도 없어 비 맞으며 보리 베어 풀섶길로 돌아오네 축축한 생솔가지 불도 안 붙는데 문 들어서자 어린 것들 옷 잡고 칭얼대네
라 하였으니, 시골 살림의 식량 딸리는 보릿고개 실정을 직접 보는 듯하다. 그의 "이삭줍기 노래"에는,
논에서 이삭 줍는 어린이 하는 말 온종일 이리저리 주워도 소쿠리도 안 차요 올해는 벼 베는 이 솜씨 하 좋아 한 톨이라도 흘릴세라 관아 창고에 다 바쳤대요
라 하였으니 흉년에 시골 사람의 말을 마치 친히 듣는 듯하다. "영남 가는 길에"라는 시에서는,
영감은 솥 지고 숲길로 가 버렸는데 할멈은 어린 것을 데리고 따라가질 못하네 사람 만나 떠돌아다니는 괴로움 넋두리하되 종군하기 육 년이라 부자도 이별이라오
라 하였으니, 부역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살 수 없어 떠돌아다니는 모습이 한 편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이 시를 보고 가슴 아파하며 놀라 깨달아, 고달프고 병든 자를 어진 정치로 잘 살게 한다면 그 교화에 도움됨이 어찌 적다 할 것인가. 문장을 지음이 세상 교화와 관계가 없다면 한갓 짓는 데 그칠 뿐일 것이니, 이러한 작품이 어찌 그저 아름다운 말재간보다 낫지 않겠는가.
이주와 이원의 이별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이망헌(이주)이 진도로 귀양 갈 때 이낭옹(이원)을 작별하는 시에,
바닷가 정자에 가을밤도 짧은데 이번 작별에 새삼 무슨 말 할꼬 궂은비는 깊은 바닷속까지 연하였고 험상궂은 구름은 변방에까지 이었네 흰 구레나룻에 파리한 안색 두려운 눈물 자국 적삼에 그득 이소경의 말을 가지고 그대와 꼼꼼히 따질 날 그 언제런가
라 하였다. 그가 제주도로 옮겨 갈 때 배가 막 뜨려는데 친동생이 뒤쫓아 왔다. 떠나면서 시 한 수를 읊어 작별하기를,
찌걱거리는 노 굳이 멈추고 한평생을 서러워하니 밝은 해는 밝게밝게 우리 형제를 비추네 정위새 와서 바다를 메우기만 한다면 한 덩이 탐라도를 걸어서도 가련만
하였으니 천 년 뒤에도 읽는 이의 애를 끊어지게 하리라. 김경림(김명원)이 나의 형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원(호 재사당)은 경주 사람이다. 벼슬은 예조 정랑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장류되었고 갑자년에 원통하게 죽었다. 이주(호 망헌)의 아우 이려(자 홍재)는 벼슬이 수찬에 이르렀다. 김명원(자 응순, 호 주은)은 경주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익이다. 나의 큰형 허성(자 공언, 호 악록)은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망헌의 "우연히 짓다"라는 시에,
나이 드니 풍상은 두렵기만 하고 짓궂은 병은 더욱 떠날 줄 모르는데 외로운 처마 아침 해에 포단에 앉았네 이웃 중이 가 버린 뒤 사립 다시 닫았는데 산구름만 돌난간을 스쳐 지날 뿐
이라는 것이 있다. "스님에게 부친다"는 시는 또 다음과 같다.
종소리는 달을 두드려 가을 구름에 지고 산비는 주룩주룩 그대는 안 보이네 염정은 닫히고 불길만 보이는데 개울 너머 인기척 밤깊도록 두런두런
한호와 시마에 걸린 이현욱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한호(자 경홍)는 글씨를 잘 쓸뿐더러 시도 잘 지었다. 그러므로 한경당(한세능)·등북해(등계달)·황규양(황홍헌)이 모두 그를 시인으로 대접했다. "임궁아집시"를 한호에게도 운을 화답하게 하였으니 중국인이 그를 중히 여기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언젠가 《봉주집》을 보니 한 태사의 "동행록"에 발문을 지은 것이 있는데, 거기서 한석봉(한호)의 글씨를 칭찬하되 편액 글씨는 양속보다 나아서 성난 사자가 돌을 후벼 대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였고, 해서는 왕헌지와 비슷하고 초서는 바로 회소와 같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를 잘 알아주었다고 하겠다.
근세에 이현욱이라는 이가 있어 시마(시귀신)에 걸렸는데 아계 이산해 상공은 그런 줄도 모르고 굉장히 칭찬을 했다. 이달이 어느 날 상공을 뵈러 가니 상공은 이현욱의 시를 보여 주며 고하를 품평하게 했다. 그러자 이달은,
봄이 오는 걸음걸인 느릴 것도 없고 서두는 것도 아닌데 봄빛은 동서남북으로 고루 비치네
라는 구절을 들어, "이것은 정말 문장가의 말투입니다. 우리나라 서씨·이씨 같은 분도 일찍이 이런 말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나이도 어리니 필경 시마가 붙은 것입니다" 하였지만, 상공은 그렇게 여기질 않았으나 얼마 있다가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그가 허영주에게 차운한 시에,
봄 산길 외져 돌아가는 나무꾼에게 물으니 손가락으로 앞산 돌길을 가리키네 중도 흰 구름도 어두운 골짜기로 돌아간 뒤 달은 푸른 바다 찬 밀물을 따라 오르네 세상살이 늙을수록 도무지 믿을 수 없는데 유흥만은 요즘에도 삭을 줄 모르누나 둘러보니 외로운 배 벌써 자취 아득한데 물 건너 드문 종소리만 한밤에 은은해라
라 하였고, 이달에게 차운한 시는 다음과 같다.
바람에 휘몰려 놀란 기러긴 편편한 모래밭에 내려앉고 물맵시 산빛엔 어스름 빛 자욱해라 화가시켜 이 경치 그림폭에 옮기려 하는데 고깃배의 젓대 소린 이를 어쩐다지
말들이 모두 속기가 없고 격이 또한 노숙하다. 시마가 떠난 뒤로는 일자무식이 되어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이산해(자 여수, 호 아계)는 한산 사람인데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다.
정백련에게 붙은 시귀신 요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정용의 아들 정백련이 일찍이 중풍에 걸렸는데 하루는 스스로 말하기를, "어떤 젊은 서생을 만났는데 연꽃 관을 쓰고 용모는 옥설 같았다. 그는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당나라의 선비 요개로 이장길(이하)과 친한 친구 사이인데 안탕산에 산 지 이백 년이 되었다. 조선의 산천이 가장 아름답다기에 한라산으로 옮겨 산 지도 천 년 가까이 되었다. 다시 금강산으로 가려고 하다가 자네와 인연이 있으므로 삼각산에 와 살게 되었다. 그런 지도 벌써 삼십 년이 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여기에 왔다'고 했다" 하였다. 그의 시는 다음과 같다.
만리라 큰 바다에 날은 저문데 벽도꽃 그림자 하늘문에 비치네 신선 수레 한 번 쉬면 천 년이 훌쩍 지난다던데 구령의 신선 피리 소리 한밤에 들리누나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삼각산에 깃든 지 삼십 년인데 남녘 구름 바라보며 늘 울었네 솔바람 소리는 용의 울음만 못한데 기러기 소리는 또 삼릉의 학만 못하도다 삼릉의 학은 오지를 않고 촉도봉 앞엔 가을 달만 어둡구나
어떤 이가 "기러기"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난초가 시들 무렵이면 철새인 기러기가 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렇게 한 해 남짓 지나더니 시마가 떠나자 병도 나았다. 이현욱의 시마는 장편 대작도 다 지을 수 있었고 산문도 다 원숙했는데, 정백련에게 걸린 시마는 격은 이현욱보다 나았지만 율시는 절구에 못 미쳤으니, 하물며 그 문장이야 말할 게 있겠는가. 요개의 이름은 전기나 소설에도 보이지 않으니, 혹 당나라 말기에 절구로 이름난 이가 아닌가 한다. 나의 둘째 형은 그의 오언 절구를 사랑하여 성당에 못지않다고 여겼다. 그가 노산군(단종)의 옛집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사람은 복사꽃 핀 강 언덕을 지나가고 말은 버들에 스치는 바람 소리에 운다 노을진 산 그림자 속에 노산군댁은 쓸쓸도 하여라
"청명날 남에게 주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이월이라 제비가 바다를 뜨니 고을마다 꽃이 가득할 때로다 청명이면 으레 취한 지도 올 들어 하마 삼십 년일세
"늦봄"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봄잠 자고 나서 술잔 따르니 걷은 발 앞에 꽃이 흩날리네 덧없는 인생 얼마나 살리 비 내리는 하늘을 창연히 바라보네
"가을날"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국화는 빗속에 꽃 드리우고 뜨락의 오동잎은 가을에 놀래누나 오늘 아침 갑절이나 서글퍼짐은 어젯밤 시골 꿈을 꾸어서일세
"거문고 소리를 듣다"라는 시는 이러하다.
아름다운 여인 붉은 비파를 끼고 삐비 같은 섬수를 희롱하누나 갑자기 유수곡 타니 집이 고릉 서녘에 있네
이달이 또,
밝은 달은 큰 바다 저문 줄도 모르고 구의산 기슭엔 흰 구름만 자욱
이란 구절을 전해 주었는데, 이런 구절은 이미 꿈의 경지에 든 것이다. 정백련의 아우 정감은 나와 절친하므로 상세한 얘기를 갖추 들었다.
정용(호 오정)은 해주 사람이다. 시로 세상에 알려졌으나 일찍 죽었다. 정감(호 삼옥)은 벼슬이 정랑에 이르렀다.
강릉 지역 인물들에 대한 자부심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강릉부는 옛 명주 땅인데 산수의 아름답기가 우리나라에서 제일이다. 산천이 정기를 모아가지고 있어 뛰어난 인물이 가끔 나온다. 국초의 함동원(함부림)의 사업이 역사에 실려 있고, 참판 최치운 부자의 문장과 절개가 또한 함동원만 못지않다. 매월당(김시습)은 천고에 동떨어지게 뛰어났으니 온 천하에 찾아보더라도 참으로 찾아볼 수 없으며, 원정 최수성 또한 뛰어난 행실로 일컬어지고, 중종 때 어촌 심언광과 최간재(최연)의 문장이 세상에 유명하다. 요즘 이율곡(이이) 또한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 나의 둘째 형과 누님 또한 강릉의 정기를 받았다 할 수 있다. 현재는 최운보 이후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없어 뛰어난 인물이나 문인을 만나기 쉽지 않다. 그런데도 과거한 선비를 전혀 볼 수 없으니, 또한 극히 성했다가는 쇠해지는 것이 만물의 이치인가 보다.
함부림(호 난계)은 강릉 사람인데 벼슬은 대사헌이고 시호는 정평이다. 최치운(자 백경, 호 경호조은)은 강릉 사람인데 벼슬은 이조 참판이다. 그의 아들 최응현(자 보신, 호 수재)은 벼슬이 대사헌이다. 최연(호 간재)은 강릉 사람인데 벼슬은 참찬이고 시호는 문양이다. 최운보(자 대중)는 최연의 당질이다. 아버지 최해는 벼슬이 한림이다.
강릉부에서 구경할 만한 곳으로는 경포대가 으뜸이요 한송정이 다음간다. 이곳을 구경하는 사신이 하도 많은데도 사람 입에 전파된 아름다운 구절이 하나도 없으니, 이 어찌 묘사할 절경이 너무나 무궁해서가 아니겠는가. 두보나 맹양양(맹호연)이 이 경치를 본다면,
오와 초는 동남으로 트였고 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들뜬 듯하구나
라든지, 또,
운몽택엔 기운이 찌는 듯 파도는 악양성을 뒤흔든다
등의 구절이 반드시 현판에 걸렸을 터인데, 우리나라 인재는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또한 알 만하다.
명나라 시인 여민표의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명나라 사람 산동 참의 여민표(자 유경)는 시를 잘하였다. "장 시랑의 훌륭한 맏아들 초보에게 부치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온 냇벌엔 백 번 이상 싸운 자취 나그네 시름과 이운 풀은 한결같이 스산하다 쓸쓸한 산 오래된 역에선 말 탄 가을 손을 만나고 먼 숲과 가물대는 불빛은 밤낚시로다 땅이 소상강에 가깝고 보니 저녁 비는 늘 내리고 분포에 기러기는 온다만 고향 소식 드물구나 벗은 정녕 아득한 하늘가에 있거니 안개 낀 물가에 서글퍼 정처 없어라
이 시가 우리나라에 퍼져서 《송계만록》에는 나 장원(나만화)의 시로 실려 있는데 글자가 잘못된 것이 많으니, 송계(권응인)는 전하는 사람의 말을 들었을 뿐이기에 착오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명·중국 문장가들과 우리나라 문형의 비교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명나라 사람 중 글로 이름을 날린 십대가는 공동 이헌길(이몽양)·양명 왕백안(왕수인)·형천 당응덕(당순지)·좨주 왕윤령·안찰 왕신중·심양 동분·녹문 모곤·창명 이반룡·봉주 왕세정·남명 왕도곤인데, 이몽양은 오로지 서한 시대의 문장만 본받고, 왕세정·이반룡은 난삽한 글귀로 선진 시대를 앞지르고자 하고, 왕도곤은 화려하고 건실하며 동분·모곤은 평이하고 원숙하며 왕신중은 풍부하다. 그러나 명나라 사람은 모두 이를 역겹게 여기며 진부하고 속되다고 한다. 나의 의견도 거의 같다.
왕수인은 문장을 전공하지 않고 학문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박잡함을 면치 못하고, 당순지는 전아하고 순실하여 모두 대가가 될 만하다. 왕세정의 무리가 명나라 사람의 문장을 서한에 비기고, 이몽양을 태사공(사마천)에게 비기고, 이반룡은 양자운에게 비기고, 자기는 사마상여에게 비겼으니 그 자기 자랑이 너무도 심하다.
우리나라의 김종직·남곤(호 지정)·김정(호 충암)·노수신(호 소재)의 글은 명나라 십대가 속에 넣어 동분이나 모곤에게 비긴다면 그다지 못할 것 없으나, 중국에서 팔을 휘두르고 뽐낼 수 없음이 안타깝다.
김종직(자 계온, 호 점필재)은 선산 사람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충이다. 점필재가 제천정 운에 차운한 시에,
꽃을 흩날리고 버들을 꺾는 반강 바람에 돛그림잔 석양 기러기를 진 채 건드렁거린다 한 조각 고향 생각에 부질없이 기둥에 기대니 흰 구름만 날아서 술 실은 배를 스치는구나
라 하였고, "보천탄 즉흥"이란 시에는,
복사꽃 필 때 이는 파도 그 몇 자런가 은빛 바윈 이마까지 묻혀 보이도 않는구나 쌍쌍이 나는 가마우지 옛 놀던 자갈밭 잃고는 물고기 입에 문 채 줄과 부들 속으로 날아드네
라 하였으니 참 좋다.
조선과 명나라의 시 잘하는 이들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명나라 사람으로서 시로 이름난 이로는 대복 하경명·공동 이몽양이 있어 사람들이 이백·두보에 비긴다. 한 시대에 잘한다고 칭도된 자는 화천 변공과 박사 서정경·태백 손일원·검토 왕구사인데, 하경명·이몽양의 장편칠률은 근체·고체를 다 잘 쓴다. 이반룡·왕세정 역시 이대가라 일컬어지며, 오국륜·서중행·장가윤·왕세무·이세방·사진·여민표·장구일 등이 모두 나란히 달려 앞을 다투었다.
우리나라의 김종직·김시습·박은·이행·김정·정사룡·노수신 등의 작품이 비록 하경명·이몽양·왕세정·이반룡에게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어찌 오국륜·서중행 이하 사람에게야 뒤지겠는가. 그러나 칠자로 더불어 중국에서 서로 겨루지 못함이 한스럽다.
박은(호 읍취헌)은 고령 사람이다. 벼슬은 수찬이다. 열여덟 살에 문과에 급제하고 1504년(연산군 10년)에 사형되었다. 그때 나이는 스물여섯이었다.
요즘 중국인의 문학은 서경(전한)의 시조인 두보를 숭상하기 때문에, 두보의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고니를 새기다가 집오리를 만드는 셈은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문은 삼소(소순·소식·소철)를, 시는 황정견·진사도를 배우므로 저속하여 취할 게 없다. 시 잘한 최경창·백광훈·임제·허봉은 모두 일찍 죽고, 다만 이달 한 사람이 있을 뿐인데 이달은 비방이 산더미 같으니 세상이 너무도 재주를 아끼지 않는다.
명나라 명사들과 조선 문형의 쇠퇴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중국 근래 명사로 글 잘하는 이 중에 요천 신시행·영양 허국·동록 여유정·상서 육광조·사업 원응기·강주 나만화·시랑 심일관·규양 황홍헌·백담 손계고·태사 심무학·곤명 위윤중·태사 이정기가 더욱 두드러지고, 글을 잘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길 만한 이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옥당 벼슬을 하는 사람도 눈으로 흔한 글자를 구별 못하며, 임금의 글을 짓는 벼슬을 띠고 있는 사람도 사륙변려문에 익숙지 못하여 심지어는 잘하는 이에게 대신 짓게 해서 자기 직책을 메워 가기까지 하니, 남의 의론이나 추종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다. 고평을 하는 이도 또한 그 이름만 따라 등수의 고하를 매기니, 조선에는 신시행·허국의 무리를 바라볼 만한 사람도 없거든, 하물며 중국의 칠자와 재주를 겨룰 수 있겠는가.
대개 명나라 사람은 학문을 애써 쌓아서 문과에 오른 사람도 등잔불을 켜 놓고 새벽까지 글을 읽어 늙어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 시문이 모두 혼후하고 기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의 경우는 문구나 잘 꾸며서 과거를 보는데, 과거에 붙게 되면 곧바로 책 버리기를 원수같이 한다. 우리나라가 예전에는 문헌으로 일컬어졌는데 이제 와서는 어찌 이다지도 미약하단 말인가. 이 어찌 윗사람이 장려하고 이끌어 성취시키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아니면 혹 세상이 말세가 되고 풍속이 저속해져서 인재가 옛날에 미치지 못해서인가?
그러나 사람마다 다 요순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인데, 하찮은 하나의 기예를 어찌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포기하여 진력하지 않을 것인가. 애써 공부를 계속하면 옛사람에게 미치기도 어렵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중국의 칠자라든지 신시행·허국 따위일까 보냐. 우선 이것을 써서 스스로를 경계한다.
선친의 가르침과 정임당 상공의 일화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선친께서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 사람은 중국의 옛 역사만 전공하여 우리나라 사적은 알지 못하니 근본을 힘쓰는 도리가 결코 아니다" 하셨다. 그러므로 두 형과 나는 모두 《동국통감》을 읽었다. 그러나 젊었을 때는 읽을 만한 책이 하도 많은데 하필 이것을 읽을 것이 무엇인가 생각했었다. 그러다 황 조사(황홍헌)가 태평관에 이르러 관반인 정임당(정유길) 상공에게 고려와 신우(우왕) 부자의 내력을 묻자 정 상공이 입만 벌리고 대답을 못하니, 나의 둘째 형이 들어가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선친의 높은 견식이 여느 사람보다 매우 뛰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아, 재주가 임당 같은 분으로서도 중국 사신과 문답할 때 곤욕을 당했으니, 사신의 접반관이 되어 본국의 일을 몰라서 되겠는가.
정유길(자 길원, 호 임당)은 동래 사람이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정유길의 "사제극성"이란 시에,
성조에선 죽은 이에게도 은혜 베푸사 해마다 쓸쓸한 담장에 제사를 내려주시네 제사 마친 단 위엔 비바람도 잦아지고 흰 구름만 바다인 양 앞 마을에 자옥해라
라 하였고, "영유 이화정"이란 시에는,
꽃샘 비바람은 옛 시에도 있거니와 올봄 꽃은 공교롭게도 늦장부리네 꽃 필 때 되면 응당 달이 있겠고 그중의 봄빛 자규야 알고말고
라 하였으며, "몽뢰정 봄맞이 첩자"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선대의 백발 판서 한가컨 분망컨 깜냥대로 편안했네 고기잡이 영감 봄강이 따사롭다면서 꽃도 피기 전이건만 쏘가릴 진상하네
최부의 표류기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최부(자 연연, 호 금남)는 나주 사람이다. 문장에 능하여 문과와 문과중시에 거듭 급제하여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제주도에 추쇄경차관으로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바다를 건너오다 풍랑을 만나 표류한 지 사십 일 만에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 우두 바깥바다에 배가 닿게 되었다. 당두채 천호가 왜구라 무고하였으나 최부가 질문에 척척 응답하였으므로 화를 모면하였다. 항주에 이르자 삼사관이 본국의 역대 흥망과 군현의 설치, 산천·예악·인물에 대해 매우 꼼꼼히 물었으나 최부의 대답이 마치 대를 쪼개듯 정확하므로 삼사관이 모두 감탄하였다.
돌아오자 성종이 일기를 쓰도록 명하므로 이를 써서 바치니 모두 세 권이다. 최부의 시는 흔히 볼 수 없는데, "송사를 읽다"라는 시에,
등잔불 돋우고 다 읽고 나선 문득 긴 한숨 짓노니 중국 천지엔 대장부랄 사람 하나 없구나 삼백 년 내려온 중국 전토를 어쩌자고 늙은 선우에게 내어 주었나
하였다. 시가 침착하고 노련하니 그 사람됨을 짐작할 만하다.
최부는 벼슬이 사간인데 1504년(연산군 10년)에 처형되었다.
성종 때 정의 현감에 이섬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최부보다 앞서 역시 풍랑으로 표류하여 양주부 굴항채에 닿으니, 채관이 가두고 상부에 아뢰어 문초하게 하였다. 이섬이 옥중에서 지은 시에,
열 폭짜리 돛폭은 바람도 못 가리고
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책임자가 보고 그가 해적이 아님을 알아 잘 대우하여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섬은 무인이라 전할 만한 여행 기록이나 기사가 없어 애석하다.
표류자들에 얽힌 여러 일화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1572년(명종 17년) 간에 호음(정사룡) 상공의 이웃 사람으로 해상 무역을 업으로 하는 자가 풍랑으로 표류하여 절강성 영파부에 닿자, 지부에서는 호패를 근거로 신원을 확인하고 북경으로 보냈다. 북경 가는 길이 공 천사(공용경)의 집을 지나게 되었다. 공씨는 그때 국자감 좨주로 벼슬을 사직하고 집에 있었다. 조선 사람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역관에게 청하여 길을 늦추어 상인과 이야기를 나눈 결과, 상인이 호음의 가계와 벼슬 지낸 경위를 말하자 공씨가 크게 놀라 데리고 집으로 가서 처자를 나오라 하여 인사시키고, 호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또 후히 대접하여 보냈으니, 공씨가 호음에게 심복함이 이와 같았다.
장흥 사람 이언세가 왜인에게 사로잡혀 남쪽 오랑캐 땅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배를 타고 밤낮 사십 일을 가서야 중국의 광서 향산현 땅에 닿았다. 그는 한 배에 탄 중국 상인에게 물어서 그곳이 명나라 지방인 것을 알았다. 그는 동행자와 함께 밤을 타 도망쳐 그 지방 지현에게 호소하니 지현이 처음에는 오랑캐가 올린 소장이라고 팽개쳐 버리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며칠을 울부짖으니 그제야 조사 심문하였다. 이언세는 글을 좀 알았는데 "조선국 장흥 사는 사람으로 해전을 하다가 왜적에게 사로잡혀 오랑캐 배에 넘겨졌다"고만 썼다. 그것을 본 지현이 남웅부에 압송하니 삼사관이 그 문초에 의거 북경으로 이송했다. 그때 마침 동지사가 북경에 도착하였으므로 그 사행과 같이 돌아오게 되었다. 이언세는 남창과 항주·소주의 풍경이며 북경·남경의 훌륭한 경치를 말하기는 하나 자세하지는 못하다.
승지 이정립이 지은 "표류된 사람들을 돌려보내 준 데 감사하는 표"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만 이랑 파도 헤치고 빛나는 요임금 땅에 나아갔다가 천 리라 고향 땅에 돌아오게 되었으니 우임금 같은 임금 아니었던들 고기밥 되었으리
이 글은 대구가 적절하고 뜻이 좋다. 전편을 볼 수 없음이 섭섭하다.
이정립(자 자정, 호 계은)은 광주 사람으로 벼슬은 이조 참의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희이다.
1591년(선조 24년) 겨울에 중국 상인 스무 명 남짓이 사탕을 팔다가 우리나라 제주도에 표류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왔었다. 내가 친구와 같이 가서 보고 소주와 항주의 풍속을 물으니, 그중 한 사람이, "당신은 외국 사람으로서 어떻게 중국 풍토를 역력히 아십니까?" 하였다. 그중에 장덕오란 사람이 있어 자기 말로 복건 장포 사람이라 하기에, 내가 시랑 장국정과 시랑 주천구가 당신의 이웃인가고 묻자 장덕오가 놀라며, "장 시랑은 저의 당숙이고 주 시랑은 한 동네 사람입니다" 하였다. 내가 또 "그러면 태사 장이풍과 어사 장이명은 당신 사촌 형제이겠구려" 하자 장덕오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희끼리 이야기하며 껄껄대고 웃었다. 역관이 말하기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기를 "수재가 나이 젊어도 중국의 일을 잘 안다고 하더라"고 했다. 왕신민이라는 자가 나에게, "무슨 벼슬이요?" 하고 묻기에 무자년에 과거하여 국자감생이 되었다 하니, 왕씨가 "언제 추천되지요?" 하고 물었다. 대개 중국에서는 국자감 학생이 으레 이부에 추천되기 때문에 그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이다.
임진왜란 의병장들과 승려들의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학관 양대박은 시를 잘하며 순평하고 전아하였다. 일찍이 자기의 한 연구를 자랑하였는데,
산귀신은 밤마다 금정불을 엿보고 물새는 가을이라 석당 연기에 잠들었네
하였으니 시구가 절로 좋다.
양대박(자 사진, 호 청계)은 남평 사람으로 벼슬은 학관이었다. 임진년 왜란 때 고제봉(고경명)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고 무기며 군량을 모두 자기 집에서 대었다. 군중에서 병으로 죽자 병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를 충장으로 내렸다.
상사 정지승이 시를 잘했는데 임자순(임제)의 무리가 몹시 추앙하였다. 세상에 전하는 한 편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돋아나는 풀잎 속에 왕손의 한 스며들고 피어나는 꽃잎따라 두견이 시름을 더하누나 물가엔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바람에 목란배만 일렁이누나
"스님을 전송하다"란 시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서에서 돌아오고 나는 또 서로 가니 봄바람 한 지팡이 가는 길은 높고 낮네 그 언제 달 밝은 밤 소요사에서 동녘 숲 두견이 울음 함께 들을꼬
또 한 연은 다음과 같다.
손이 돌아가자 문을 닫으니 남은 건 달빛뿐 꿈 깨자 빈 산엔 흩어지느니 솔바람 소리
그 전집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정지승(자 자신, 호 총계)은 온양 사람으로 정렴의 조카이다. 벼슬은 하지 않았다.
송익필이란 자도 시를 잘하니 그의 "산속의 눈"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밤새도록 내린 찬 눈 층대에 수북 쌓였는데 다른 산에 묵은 주지승 돌아오질 않았네 등잔불 깜박이는 작은 절집 신령한 바람 고요한데 소나무 스쳐오는 밝은 달 홀로 보네
구법이 맑고 뛰어나니 사람의 신분이 미천하다 하여 어찌 그 좋은 말까지 무시할 것인가.
송익필(자 운장, 호 귀봉)은 흉인 송사련의 아들이다. 본디 천민의 자식이나 문학의 조예가 뛰어나서 우계 성혼, 율곡 이이와 서로 친했다. 아우 송한필(자 사로, 호 운곡)도 시를 잘했다. 송익필의 "저물녘 남계에 배를 띄우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꽃에 홀려 돌아오기 하마 늦었고 달 뜨기 기다리다 여울 내려오기 머뭇거렸네 거나한 가운데도 낚싯대 드리우니 배는 흘러가도 꿈은 그대로
송한필의 "우연히 읊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어제 비엔 꽃이 피더니 오늘 아침 바람에 그 꽃 지는구나 애닯다 한 철 봄이 비바람 속에 오고 가누나
최전의 신동 시절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최전(자 언침)이 신동이란 이름이 있었다. 어려서 금강산에 노닌 적이 있었는데 그 길로 영동 산천을 구경하고 경포대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봉래산 한번 들어 삼천 년을 은바다 아득아득 물은 맑고 얕아라 난새 타고 피리 불며 오늘 홀로 날아왔건만 벽도화 꽃 그늘에 님은 아니 보이네
둘째 형이 그 시를 매우 칭찬하고 그 운자에 이어 읊기까지 하였는데, 그는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최전(호 양포)은 해주 사람으로 진사였다. 양포의 "늙은 말"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늙은 말 솔뿌리 베고 누워 꿈결에 천 리 길 가네 가을바람 나뭇잎 지는 소리에 놀라 깨니 지는 해가 뉘엿뉘엿
"물고기 뱃속 등불에 제하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멱라수는 흘러 흘러 끝이 없는데 굴원은 불평을 원망했네 지금 물고기 뱃속에서도 속마음 밝은 것은 간직했겠지
금각과 이성윤의 재주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금각(자 언공)은 봉성 사람이다. 둘째 형에게 열두 살 때 글을 배워 육경을 통하고 제자백가서와 역사서를 두루 읽지 않은 게 없었다. 글 짓기를 전중하고도 온화하고 아름답게 하여 이미 작가가 되었는데, 그의 "조대기"·"주류천하기"·"한발문" 등의 글이 세상에 전한다. 열여섯 살에 해외에 유학하였다. 뱃속에 벌레가 생기는 병을 얻어 집에 있으면서 《풍창랑화》를 지으며 심심풀이로 세월을 보내다가 1588년(선조 21년) 가을에 죽었다. 죽는 날 스스로 명을 짓기를, "봉성 사람 금각, 자 언공은 아홉 살에 글을 배우고 열여덟 살에 죽는다. 뜻은 원대하나 목숨은 짧으니 운명이로다" 하였고, 또 다음과 같이 만사를 지었다.
아버님 어머님 나 때문에 울지 마세요
《조대집》 4권이 있다.
종실인 이성윤(자 경실)은 우리 둘째 형에게 글을 배웠다. 그의 시는 온정균과 이상은을 숭상하여 그들의 시풍을 터득하였다. 그의 "향렴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부용성 밖 예주궁에 난새 수레로 허 시중을 맞네 앵무부는 달 밝은 밤에 읊조리고 숙상 갖옷은 비단 병풍에 걸려 있네 추운 비단 방장엔 향로까지 곁들였고 꿈 깬 은등잔엔 등화가 맺혔네 앵무새에 말 전하노니 자주 손을 물리쳐서 운우의 정 총총히 흩어지게 말아다오
"달을 읊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운모병풍 썰렁하고 아름다운 방장 비었는데 옥같은 달에 이슬만 함초롬 맺혔구나 항아가 장생약이야 얻었다 한들 해마다 홀로 사는 애달픔 어쩌지
자못 부귀롭고 아름다운 운치가 있다. 임진왜란에 어버이를 하직하고 임금을 호종하기에 갖은 고생을 다하였으니 배운 바 정신을 저버리지 않았다 할 만하다.
이성윤(호 매창)은 성종의 4세손이요 왕자 익양군 회의 증손이다. 그 아버지는 청원도정 이간이다. 시호는 충정이다.
양정집과 박엽의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양정집은 호남 사람으로 나이 열 살에 글을 잘 써 고향에서 신동으로 소문났었다. 스님에게 보내는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노닥노닥 기워 입은 한 늙은 영감 지팡이 의지하여 바위 아래 서 있어 머리 돌려 뭔지 기다리는 듯하니 필경 동해바다 달일 테지
어린 나이에 임금의 잔치에도 초대받았었으나 불행히 세상을 떴다.
근세 선비들은 예를 병으로 여기고 다만 허무를 말하고 욀 뿐만 아니라 술에 취한 채 수레를 타고 태연히 거리를 나돌아다니며 조금도 꺼리낌이 없는 이가 있는데, 엄숙한 선비나 단아한 선비조차 이에 물들었다. 요즘 박엽(자 숙야)이라는 사람이 있어 시문을 잘하나 불행하였다. 기생집에서 나의 글씨 솜씨와 시법을 보고 본떠 가는 곳마다 벽에다 써 대었는데, 뒷사람이 와 보고는 으레 이를 아무개 글씨다 하였다. 그의 "봄을 슬퍼하는 노래"는 다음과 같다.
연분홍 꽃 오련한 푸른 잎은 아침햇살 머금고 꾀꼬리 읊조리고 제비는 지지배배 남의 시름 자아내네 이끼 자욱 이슬에 함초롬 비취빛으로 젖었는데 흩날리는 눈같은 살구꽃은 연지빛으로 향기롭다 봉황 무늬 저고리는 흐르르 얇아 봄추위 스며드는데 은병풍 기대어서 이별을 슬퍼하네 서방님 한 번 떠나 돌아오질 않아 손꼽아 기다리던 그 봄도 또 삼월이라니
박엽의 호는 국창이며 반남 사람이고 벼슬은 평안 감사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사형되었다.
풍자시와 익살, 애처가 이야기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두남 김일숙(김두남)은 글은 보통이었으나 남을 풍자하는 작품으로는 그 당시에 으뜸이었다. 이웃에 어른이 있었는데 앞니가 길어 홀 모양 같았으므로 다음과 같이 찬을 지었다.
나이 일흔에 긴 것이라곤 이[치아]니 이는 홀을 만들만 허구려
또 이웃 사람이 눈이 가늘어 겨우 볼 수 있을 정도였는데 다음과 같이 찬을 지었다.
모든 것 보고 싶지 않아 한세상을 하찮게 보는 자인가 보이는 것이 작으니 우물에서 하늘을 보는 자 아닌가 그 눈동자를 보면 그 사람 무슨 수로 속마음 숨길쏜가
나의 둘째 형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잘하였다.
김두남은 원주 사람이며 김응남의 사촌 동생이다. 음관으로 부윤을 지냈다.
내가 다리를 앓아 핑계삼아 장인댁에 가니, 둘째 형은 내가 나들이 않음을 빈정대어 시를 지어 보냈는데 첫 수는 다음과 같다.
하늘이 태왕을 사모하는 자네 마음 알아 짐짓 두 다리에 온통 부스럼이 나게 했구나 이웃이 지척이나 오히려 멀다 혐의하니 하물며 물마름 우거진 십 리 길이랴
또 다른 수는 다음과 같다.
짧은 수레도 안 타는 자네 덩그런 황문이 한길가에 서겠네 세상이 온통 공사에만 종사한다면 이 세상 어디메서 잠부를 찾을꼬
대개 태왕이 그 비를 사랑하기에 세상에서 애처가를 태왕이라 부르는 것이다. 황문은 옛날 어떤 사람이 그 아내를 너무 사랑하여 그 친구가 빈정대기를, "열녀는 홍살문을 세워 정문을 삼으니 정남은 마땅히 황문을 세워야겠지" 하였다 해서 쓴 것이니, 그 풍류와 익살이 모두 이와 같았다.
이달의 낙화시와 불우함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이달이 일찍이 "낙화"를 읊기를,
슬프다 진분홍에 또 연분홍 한꺼번에 풀풀 날아 작은 뜰에 지는구나 푸른 이끼에 붙어 남는 것만은 못하나 바람 따라 동서로 흩날리는 것보단 낫구나
하니 말뜻이 함축되어 있다. 또 감회를 읊은 절구 두 수는 다음과 같다.
성궐은 들쑥날쑥 솟을대문 늘어섰는데 오후의 집 풍악소리 하늘 높이 울리는구나 패릉교 위 나귀 탄 나그네 양양땅 맹호연 만은 아니라오
둘째 수는 다음과 같다.
벼슬 높은 고관들 가는 곳마다 만나게 되고 수레는 물 흐르듯 말은 용 같네 장안 밭두렁에 부질없이 고개 돌리니 지척인 대궐문 아홉 겹이 가렸구나
"용나루를 건너며"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이라 강물은 용나루에 급히 내리니 나루의 아전은 배 멈추고 웃었다 성냈다 서울 나들이 그 무슨 소용 십 년을 오가도 포의인 것을
그 뜻이 몹시 서글프니 참으로 불우한 사람의 시다.
양사언의 신선 같은 풍모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양봉래(양사언) 선생의 아량과 풍도는 세상의 숭상받는 바가 되거니와,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와 사마시·문과를 모두 같이 합격하였으므로 그 사귐이 가장 친밀한데, 문장이 높고 빼어나 구름을 앞지를 듯한 기상이 있고 행서·초서를 잘 쓰는데 그 쓰는 법이 마치 용이나 뱀처럼 분방하며, 본성이 벼슬살이를 우습게 알고 산수에 정을 붙여 짚신과 밀랍으로 결은 나막신 차림으로 어느 때고 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바위 골짜기에 사는 이들이 사강락(사영운)에 비겼다. 언젠가 강릉 부사가 되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비석을 세운 일도 있었다. 언젠가 금강산에서 시를 읊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봉래섬의 백옥루를 소문으로만 들었더니 이제야 구경하네 운모병 둘러치고 호박구슬 베개삼고 산호 발걸이로 수정발 거두었네 벽도화 피고 지니 일천 년인데 서왕모 머물기는 팔만 년이라네 요대 맨 위에 호올로 서니 흰 구름 누른 학은 한가롭게 가는구나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훨훨 노을처럼 공중에 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한다.
양사언의 "금수정"시는 다음과 같다.
비단물 은모래는 마냥 고운데 골구름 강비 속에 갈매기 산뜻 진인 찾아 그릇 봉랫길에 들었거니 고기잡이 배를 동구 밖으로 내몰진 마오
신선의 조짐이 된 꿈속의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하서 김인후가 죽은 뒤, 오세억이란 자가 갑자기 죽더니 반나절 만에 깨어나서는 스스로 하는 말이, 어떤 관부에 이르니 "자미지궁"이란 방이 붙었는데 누각이 우뚝하여 난새와 학이 훨훨 나는 가운데 어떤 학사 한 분이 하얀 비단옷을 입었는데, 흘긋 보니 바로 하서였다. 오씨는 평소에 그 얼굴을 알고 있는데, 하서가 손으로 붉은 명부를 뒤적이더니, "자네는 이번에 잘못 왔네. 나가야겠네그려" 하더니,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주었다고 했다.
세억은 그 이름 자는 대년 문 밀치고 와서 자미선 뵈었구려 일흔에 또 일곱 된 뒤에 다시 만나리니 인간 세상 돌아가선 함부로 말하지 마오
깨어나자 소재 상공(노수신)께 말씀드렸다. 그 뒤에 오씨가 일흔일곱 살에 죽었다.
김인후(자 후지)는 울주 사람이며 벼슬은 교리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문묘에 배향되었다.
하서가 충암(김정)의 시권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오기를 어디로부터 왔으며 가기를 또한 어디를 향해 가는고 가기도 오기도 정한 자취 없이 유유한 세월 백 년 남짓이로구나
양사언 시풍의 계승과 누님의 유선사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양봉래의 "풍악에서"란 시는 다음과 같다.
백옥경 봉래도에 허허 넓은 연파는 태고적이고 맑고 따사로운 날씨도 좋구나 벽도화 그늘에 한가로이 오가니 학 탄 신선 피리소리에 세월은 간다
신선 같은 풍채와 도인 같은 느낌이 짙다. 자동 차식이 흉내내기를 다음과 같이 했다.
아침엔 현포에 저물녘엔 봉래산에 산달 걸린 박연폭포요 향풍어린 계수대라 동해를 굽어보며 마고에게 절하고 삼십육동천에 돌아가노라
원숙하기는 하나 격이 미치지 못한다. 나의 둘째 형도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학은 훤칠하게 제비는 높게 낮게 삼신산에 돌아와 오색 구름에 나는구나 이 천지간 석 자짜리 지팡이에 포의로 한 세상 보내누나 바윗머리 나무에 긴 칼 척 걸어 두고 맑은 시내에 손 담그고 영지풀잎 씹네
비록 좋기는 해도 마침내 양봉래의 신선 같은 운치에는 미치질 못한다. 양사언의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산 위에 또 산 있으니 산이 땅에서 나오고 물가에 또 물 흐르니 물 속에 하늘 어리었네 아득해라 이 몸 공허 속에 있거니 연하도 아닌 것이 선경도 아니로세
불경의 게송과도 비슷하다. 또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금옥루대에 보랏빛 안개 떨치고 용이 나는 구름길에 신선 내려오네 청산도 인간 세상에 역겨웠던지 푸른 바다에 어린 구만리 장천 속에 날아들었네
삼천 년 만에 익는다는 신선 복숭아 한밤중 하얀 난새 쌍으로 왔네 중천에 신선 서왕모 내려오니 아롱진 바다기운 구름창에 이었네
역시 그를 따라 배울 만하다.
차식(자 경숙, 호 이재)은 연안 사람이며 벼슬은 군수이다.
내 누님(허난설헌)의 "보허사"는 다음과 같다.
난새 타고 한밤 중 봉래도에 내려서 기린수레 한가로이 몰고 아름다운 풀 밟기도 하네 바닷바람은 벽도화를 불어 꺾어오고 옥소반엔 가득찬 외만한 대추
또 다음과 같이도 읊었다.
구화의 치마폭에 육수의 웃옷 입고 학의 등 싸늘바람 자부로 돌아왔네 비취 바다 달도 지고 은하수 기우는데 옥피리 소리 속에 상서구름 날리네
유몽득(유우석)을 본받았으나 맑고 뛰어나긴 그보다 더하다. "선계에 노니는 시" 백 편은 모두 곽경순(곽박)의 남긴 뜻인데 조요빈 따위로는 미치지 못한다. 나의 둘째 형과 이달이 모두 모방하여 지었으되 마침내 그 울타리를 넘지 못했으니, 우리 누님은 하늘이 내린 신선의 재주라 할 만하다.
정승들의 기개와 청허당 천연 스님의 무용담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양봉래의 "선종암"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거울속 부용은 서른 여섯인데 하늘가에 바라뵈는 일만 이천 봉 그 가운데 한조각 창주석에는 한 백년 동안에 시라고 말할 수가 있다오
박 상공(박순)이 끝구절을 고쳐, "동녘에 온 해객이 졸기에 합당하네"라 하자, 양봉래가 온당하다고 하여 드디어 고치고 나중에 지천 황정욱 상공에게 말하니 상공이, "이는 공의 시어가 아니니 바른 대로 말하시오" 하므로 양봉래가 지천의 식견에 크게 탄복했다. 지천은 양봉래를 잘 알아보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박순(자 화숙, 호 사암)은 충주 사람이며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혜이다. 사암의 "퇴계 선생이 남으로 돌아감을 전송하며"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고향생각 끊임없어 고리인 양 이어지니 한필 말로 오늘아침 한관 떠나네 추위에 고갯매화 봄인데도 못 피니 늦은꽃 응당 늙은 신선 돌아오길 기다리리
총병 양조의 사당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철갑옷 금빛칼도 이미 흙이 되었고 문 닫힌 사당 소나무 전나무엔 저녁 까마귀 우네 슬프다 중국 날센 장수 죽었으니 갈대 피리 소리만 백낭하 자주 넘네
청풍 한벽루 시는 다음과 같다.
나그네 그리움 외로이 절로 시름 생기니 앉은 채 강물소리 듣노라 다락에서 내려올 줄 모르네 내일 또 벼슬길로 가버린다면 흰 구름에 단풍은 누구 위한 가을일꼬
견 상인에게 보내는 시는 다음과 같다.
오랫동안 입은 은혜이기에 이 마음 궁리 많아 새벽 닭소리에 조회 나갈 비녀를 꽂네 강남 땅 들집은 하마 황폐했겠지 산승을 고용하여 대밭을 돌보게 했네
무위자 천연 스님은 집안이 본래 좋았으나 잘못 중이 되었는데 씩씩하여 기개가 있었다. 언젠가 지리산 성모 음사가 대중을 미혹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겨 이를 쳐부수었다. 남명 선생(조식)이 "용사천연전"을 지었으며 양송천(양응정)이 그 책머리에 다음과 같이 제하였다.
주먹 한번 휘둘러 산꼭대기 돌 깨부수니 갈 곳 없는 잡귀가 대낮에 울더라
양봉래·박사암(박순)과 나의 둘째 형이 모두 천연의 친구가 되었다. 천연이 약간 시를 알아 둘째 형에게 준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잘못 고기 배에 걸린 용 곤핍함을 슬퍼하고 닭우리에 그릇 떨어진 봉황새 쇠해만 가네
임진란에 정화상(휴정)을 따라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조식(자 건중, 호 남명)은 창녕 사람이며 벼슬은 전첨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양응정(자 공섭, 호 송천)은 남원 사람이며 벼슬은 부윤이다. 휴정(호 청허)은 정화상이니 임진란 때 승병 대장으로 팔도도총섭이 되었다. 시를 잘하였다. 양응정의 "어양교를 지나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나무빛이며 풍경은 태평세월 그렸는데 강다리는 아직도 옛이름을 띠었구나 이주곡 양주곡이 순임금의 음악 같았더라면 어찌 오랑캐놈들이 두 서울을 침범하였으리
휴정의 "한성 가는 길에"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바닷가 나무엔 가을 서리 내리고 초관엔 이른 기러기 떠나네 종산 외론 새 나는 하늘가에 나그넨 배 안에 늙어만 가네
둘째 형이 무위자에게 준 시는 다음과 같다.
천왕봉 위로 나는 듯 달려가 천 년 묵은 돌덩이 주먹으로 부수고 돌아왔네 애닯다 영웅은 속절없이 늙어가고 산속에 밝은 달이 닫힌 사립문 비추네
또,
두만강가 나뭇잎은 시들고 여기저기 외론 산엔 깃발만 펄럭이네 산속에 하늘을 떠받칠 솜씨 버려졌으니 슬프다 월지국 선우 머리 벨 이 그 누구런가
그에 대한 칭찬이 이와 같았다. 또 장편시의 머리 두 구절은 다음과 같다.
무위자는 사람중에 용이니 전생엔 바다를 가르던 금시조였는데 벼락이 한밤에 천왕봉에 떨어졌네
말이 매우 기발하였는데 전편을 못 외우겠다. 필경 무위자의 책 속에 있을 것이다.
엄흔의 몰이해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호음(정사룡)이 이우정에 제한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물가에 가로 세로 밀물은 지고 나무숲 우수수 기러기 손이 오네
조어가 기이 건장한데 전한 엄흔은 하찮게 보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엄흔(자 계소, 호 십성)은 영월 사람으로 벼슬은 전한을 지냈다.
남효온의 시와 안응세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남추강(남효온)의 "한식"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흐린 날 울 밖에 저녁 해 나고 한식날 봄바람에 들 물은 맑다 배에 가득찬 장사아치 끝없이 지껄이는 말 버들꽃 필 무렵이라 고향의 정일레라
"안자정(안응세)을 꿈에 보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부귀 영화 덧없는 꿈 저문 산 앞에서 꾸니 넋과 넋 만남이란 정말 우연이라 가는 비 뜰에 내리고 봄은 쓸쓸한데 살구꽃 수없이 지네 붉은 돈처럼
"삼짇날 성남에서"란 시는 다음과 같다.
성남이고 성북이고 살구꽃 붉은데 해는 꽃 서녘에 있으니 꽃 그림잔 동에 있네 외로이 말 탄 병든 늙은이 철 바뀜에 놀라니 비낀 바람이 성가퀴에 눈물을 흩뿌려주네
이상 몇몇 시는 당나라 사람에 못지않다. "귀신론" 일편은 학문이 극히 높다. 훌륭한 재주를 지녔어도 펴 보지 못했으니 아깝다.
남효온(자 백공, 호 추강)은 의령 사람인데 진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이다. 안응세(호 월창)는 죽산 사람이다. 진사를 지냈다.
남효온의 "성거산"에 제한 절구는 다음과 같다.
동녘에 해 높이 돋으니 신령스러운 비에 나뭇잎 지네 창 열자 온갖 시름 스러지니 병든 몸이 날개가 돋는 듯
황형의 무공과 시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무절공 황형은 무장 출신으로 또한 글과 글씨에 능했다. 1510년(중종 5년)에 왜구를 진압하고 몰운대에 올라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높은 대에 깃발 세우니 큰 바람 이는구나 바다 구름 갓 걷히고 해는 둥실 붉어라 하늘에 비겨 칼 어루만지며 자주 고개 돌리니 탄환만한 대마도가 가까이 보이는구나
조어가 기이하고 장엄하여 마치 그 사람을 보는 듯하다. 어찌 인재가 옛사람에게 못 미치랴.
황형은 창원 사람이다. 무과급제로 공조 판서를 지냈다. 시호를 살펴보면 그의 시호는 장무이지, 무절이 아니었다.
명나라 재상들에 대한 논평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승암시화》에 명나라 초 이래 재상의 업적을 논함에 있어 유성의(유기)를 제일로 치켜세웠다. 유기가 실로 어질긴 하지만 재상의 업적에 대해서는 소문난 게 없다. 영락 연간에는 하원길을 제일로 삼고 삼양(양사기·양영·양보)은 그 축에 들지 않았으니 그 의논 또한 온당치 못하다. 이문달공(이현)이 그를 헐뜯어 심지어는 나륜을 내쳤으니, 비록 흠이 됨을 면할 수는 없으나 그 공정한 것만은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정덕 연간에 이르러는 거드름스럽게 자기 아버지를 제일로 쳤다. 젊어서는 비록 괜찮은 사람이었으나 입각하여서는 임금의 외척을 연줄로 삼았으니 이미 올바른 선비는 아닌데, 공평하여 사심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가정 연간 이래로 명정승은 문정공 사천과 충의공 양부가 더욱 드러나게 유명했는데, 소인도 제일 많았다. 계악·방헌부·장총·엄숭·이본이 모두 소인들인데, 그중 엄숭은 은총을 이십여 년이나 독차지했다. 그 뒤에는 소사 서계·소부 이춘방이 다 명정승인데, 서계는 남들이 사마공(사마광)에 비겼으니 오랫동안 국정을 담당했었다. 융경 연간 이래로 고공·장거정은 모두 약골이었으며 신시행은 기롱을 면할 수 없었고, 승상 마자강·소부 허국·소보 왕석작이 모두 괜찮은 사람이었으나 그들의 업적은 삼양에게 비기면 누가 나은지는 모르겠다. 인재가 날로 저하되니 개탄스러운 노릇이다.
우리나라 명상은 황희·허조를 제일로 삼는다. 세상에서는 더러 전조(고려)의 과거 제도를 병폐로 여기기도 하는데, 과연 그 뒤에는 별로 이름난 사람이 없었다. 중종 때 문익공 정광필은 전인에 부끄럽지 않다.
황희(자 구부, 호 방촌)는 장수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익성으로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허조(자 중통, 호 경암)는 하양 사람이다.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으로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정광필(자 사협, 호 수부)은 동래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고 중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여진 정벌의 세 장수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단간공 정효의 《오학편》에 우리나라가 여진 이만주를 정벌한 일의 본말이 아주 자상히 실려 있는데, 강순·어유소·남이의 이름을 대서특필하였다. 이 세 사람은 진실로 장군감으로 중국 역사서에 그 이름이 드러났으니 이보다 큰 영광이 무엇이겠는가?
강순(자 태초)은 신천 사람이다. 음관으로 좌의정을 지냈고 남이의 옥사에 죽었다.
어유소는 충주 사람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정장이다.
남이는 의령 사람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조 판서를 지냈다. 의산위 남휘의 손자이고 익평공 권람의 사위로 유자광의 무고에 의해 살해되었다. 남이의 "정남"이란 절구는 다음과 같다.
백두산 돌은 칼 갈아 닳아지고 두만강 물은 말 먹여 마르리라 사나이 스물에 북을 정벌치 못하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이언공, 승려 시인들, 노비 시인 백대붕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척 총병(척계광)은 위명과 사업이 남의 이목에 번쩍거릴뿐더러 또한 시문에 능하여 이창명(이반룡)의 무리가 치켜세웠다. 임회후 이언공(자 유인)은 또한 시문에 능하여 다음과 같은 시가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바람은 밀물소리 휘몰아 섬들 떠들썩하고 해에 비낀 돛 그림자 누대에 오르네
요즘 스님으로 시 잘 쓰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유정 산인(사명당)은 당나라 구승의 유를 배워 시가 몹시 맑고 고고하였다. 행사도 자못 좋은 시구가 있어 "상서로운 오색구름 아롱지니 나물 먹는 중이 아니다"라는 구가 있다. 요즘 홍정이란 분이 또한 시를 잘하여 "스님을 칭송하다"란 시가 있었는데 나의 둘째 형이 몹시 칭찬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 해 헤어질 땐 가을 강물에 단풍 지더니 올해 작별에는 봄 산언덕에 매화가 지네 물결은 아득하고 산언덕은 가렸는데 단풍잎 지는 매화 이 시름 어이하리
유정(호 송운)은 행사와 같이 일본에 사신 갔었다. 이 두 분의 시가 같이 《기아》에 들어 있다.
백대붕은 천한 종으로 중의 대열에 끼었다. 시를 잘 하였으므로 나의 둘째 형과 승지 심희수가 다 대등한 벗으로 사귀었는데,
가을 하늘에 엷은 그늘 어리어 화악의 그림자 침침해라
라는 시는 둘째 형이 칭찬해 마지않았다. 우리 큰형을 따라 일본에 오간 일이 있으며 아름다운 시가 매우 많다.
백대붕은 전함사의 종이다. 심희수(자 백구, 호 일송)는 청송 사람이며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이다.
이 책을 마치며 (서기 1593년 11월 10일, 양력 추정)
내가 어려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형님들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겨 차마 다그치거나 나무라지 않았기 때문에 게을러 빠져서 독서에 힘쓰지 않았다. 차츰 자라서는 남들이 과거하는 것을 보고 좋게 여겨 덩달아 해 보았으나, 글치레나 하는 것이 장부의 할 짓은 아니었다. 이제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으니 세상에 나갈 뜻은 이미 사그라졌다. 십 년 글읽기로 작정했으나, 아, 그 또한 늦었도다. 《학산초담》 한 권을 짓는다.
1593년(선조 26년) 시월 연등한 뒤 사흘 만에 교산자는 쓴다.
(용어) 한단학보는 연나라 소년이 한단 사람의 우아한 걸음걸이를 배우려다 제 걸음까지 잊어버렸다는 고사로, 자기 본분을 잊고 남의 흉내만 냄을 이른다. 정시는 위나라 제왕의 연호로, 그 시대 지식인들이 청담을 숭상했던 풍조에서 비롯된 맑고 초탈한 시풍을 가리킨다. 삼성은 강상죄인을 추국하는 세 관청, 곧 의정부·사헌부·의금부를 이른다. 칠자는 명나라 때 문학으로 이름 높았던 일곱 사람씩 두 그룹(전칠자·후칠자)을 가리킨다. 교산자는 허균이 스스로 붙인 호다.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2 · 소(상소)
출처: 성소부부고 제26권, 부록 2, 소
배경: 1618년(광해군 10년) 정월과 5월, 허균이 기준격의 밀소에 대응하여 올린 두 편의 상소다. 기준격은 영의정을 지낸 기자헌의 아들로, 허균과 그 아버지 기자헌 사이의 오랜 개인적 갈등을 배경으로 허균을 인목대비 폐위 논의의 배후이자 광해군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다는 혐의로 몰아붙이는 밀소를 올렸다. 허균은 두 차례에 걸쳐 이를 조목조목 반박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 상소들은 허균 생애 마지막 해의 정치적 위기를 생생히 보여 주는 자료로, 같은 해 8월 허균은 결국 역모 혐의로 처형되었다. 원문은 《광해군일기》에 실려 전한다.
기준격의 상소에 대한 첫 번째 해명 상소 (서기 1618년 2월 1일, 양력)
삼가 아뢰옵니다. 신이 이달 초나흗날 밤 이경이 지난 시각 집으로 돌아오는데, 깜깜한 어둠 속 울타리 밑에 숨어 있던 장정 두 명이 손을 쓰려 할 때 말 뒤에 있던 종이 발견하고 "도적이 있다"고 외치니, 도적이 도망하여 인가에 숨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 색출하여 결박시키고 추궁하니, 처음에는 문창(유희분)의 집 종이라고 했다가 다음에는 정승댁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정승댁이냐고 강력히 추궁하였으나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제 포도청으로 송치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일선위의 여종이 방면해 주기를 청하면서 또 문창의 집에 드나드는 모피장이라고 했습니다. 신은 '내가 혼자서 대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원수진 사람이 미워한 나머지 당나라 이사도가 배도를 암살하려 했던 일을 행하려 했던 것인데, 남의 부탁을 받아 풀어 줄 수 있겠는가' 여겼습니다. 그런데 대장 등이 미루면서 지금까지 국문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권세 있는 자와 굳게 결탁하여 모의하는 바가 있는 정황을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신은 기반이 미약한 사람으로서 화근을 제거하자는 의논을 강력히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견을 내는 자들이 신을 살해하려 한 지 오랩니다. 지금 기가에서 원한 때문에 사람을 사주하여 흉악한 상소를 올리게 했습니다. 이영은 평소부터 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자인데, 지난번 아뢴 글에서 "임금과 세자를 위해하려 모의한다"는 넉 자를 저 스스로 지어 신에게 덮어씌웠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기준격의 상소가 임금께 내려지지도 않았는데 이영이 어떻게 그 내용을 미리 알고서 갑자기 이런 불측한 오명을 씌울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이 스스로 국문하는 자리에 나아가 기필코 이영과 대변하여, 이영에게 어떻게 신이 임금을 위해하려 모의한 곡절을 알았는지 따지려 했는데, 서서히 처결하겠다고 전교하셨으므로 신은 거적자리를 깔고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자헌의 귀양살이에 대해 다시 혈서로 쓴 상소를 전달하여 함께 대변하려 하였습니다만, 곧이어 대간의 아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조처하지 않고 서서히 정배하겠다고 전교하셨으므로 신은 입대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객이 횡행하면서 신을 먼저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신이 한번 죽고 나면 신의 지극한 원통함을 씻을 길이 없기 때문에, 감히 대론이 한창 일어날 때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고 우러러 간절한 충정을 아뢰었으니 그 죄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대체로 기자헌이 기필코 신을 죽이려는 이유는 바로 신의 입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1613년 변고가 일어났을 처음, 서궁(인목대비)의 흉역스러운 정상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신이 기자헌에게 말하기를 "이는 신하로서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어떻게 지극히 높은 대비의 자리에 두어 인륜을 무너뜨리게 할 수가 있겠는가?" 하니, 기자헌이 "그대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김제남은 사리에 어둡고 유약한 사람인데 어떻게 비상한 모의를 할 수가 있었겠는가. 궁중에서 저주했다는 일도 궁인들이 하고서 그 화를 대비전으로 전가하는 것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더구나 심우영의 공초에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서양갑이 박응서의 계책에 자신이 횡사하게 된 데 분노하여 나라에 난을 끼치려 이런 흉역스러운 말을 낸 것이다. 저들이 흉역스러운 짓을 하려 한들 누가 따르려 하겠는가. 또 《위료자》에도 가혹한 형벌을 가하면 지사도 무복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지금 주상에게 다른 아들이 없고 동궁에게도 아직 후사가 없으니, 만세 뒤에 정론이 일어난다면 오늘날 이 일을 한 자의 자손들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나의 외조부가 바로 임백령인데, 지금 사람들이 을사년의 일을 말하면 내 얼굴이 붉어지니, 그대는 이런 의논을 주장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김제남을 임유에게 견준 것이고 서양갑 등도 억지로 자백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신은 한심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그의 자질들이 역모 사건의 초사에 거론되었으므로 뒷날을 위하여 이런 의논을 주장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뒤 기자헌이 이 말을 누설할까 매우 두려워하였고, 신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습니다. 이 밖에 신이 들은, 위를 원망하고 난이 일어나기를 바란 말은 감히 아울러 아뢰지 못하겠습니다. 기준격의 상소에 대해서는 신이 알 수가 없습니다. 준격은 신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훈회 이외에는 나이 어린 사람과 시사에 대해 말하는 것도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거든, 하물며 흉악한 상소에 거론된 불측한 말이겠습니까. 저가 그런 말을 들었다면 어째서 일찍 고변하지 않고 저의 아비가 죄를 입은 때에야 발론한단 말입니까? 고변하지 않은 죄 그 또한 심한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무고하여 사람을 죄에 빠뜨리기 위해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을 감히 글에다 쓸 수가 있겠습니까? 진실로 천륜을 모독하고 문란시키는 것을 상습적으로 행하는 자가 아니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하여 임금께 아뢸 수가 있겠습니까? 위를 무시하는 패역스러운 말을 스스로 지어냈다면 그 죄는 역신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신은 삼가 통탄하였습니다.
1606년(선조 39년) 겨울, 신의 형 허성이 이조 판서로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허성에게 "이홍로가 이영을 광주 경주인의 집에 우거시키고 밤낮으로 모여 교활한 음모를 획책, 못 하는 짓이 없다고 한다. 모름지기 동궁을 위하여 외방에 보임시켜야 한다" 하였으므로, 허성이 즉시 잇따라 외방 고을에 의망하여 제수했는데, 그 뒤 정주에 있다가 마침내 파출되었습니다. 1608년 이홍로의 심복이라는 것으로 탄핵을 받고 오 년간 관직을 삭탈당했으므로, 온 나라 사람이 그가 이홍로의 당여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권세 있는 자의 연줄을 타고 요행히 면하여 청반(대사헌)에 올랐습니다. 겉으로는 대론을 가탁하고 나섰으나 속으로는 실상 사세를 관망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의 초나흗날 계사에는 폐출이라는 두 글자를 거론하지도 않은 채 바로 폄삭절목을 들고 나와서 끝에는 "내택에 옮겨 안치시켜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의 본마음이 여기에 다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이영이 감히 사주를 받아 원한을 앙갚음하기 위해 도리어 오명을 신에게 뒤집어씌우니, 신은 더없이 원통합니다. 신하로서 이런 대역의 죄명을 지고는 하루도 천지 사이에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급급히 기자헌과 이영 등을 하옥시켜 대변하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난모를 어째서 일찍 고변하지 않았고 화근을 어째서 제거하려고 하지 않았는지를 기자헌에게 끝까지 캐어묻고, 이어 이영에게 신이 임금을 위해하려는 모의를 한 줄을 어떻게 알았는지를 따지게 하여 주심으로써, 한편으로는 간사한 정상을 적발해 내고 한편으로는 미천한 신이 무고당한 정상을 씻게 하여 주신다면 천만 다행하기 그지없겠습니다.
신은 임금을 위하여 만 번 죽을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종묘사직을 부둥켜 세웠는데도 끝내는 망극한 참소를 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횡행하는 자객이 신을 미워하는 자의 소행이 아니라고 기필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통쾌히 변별하여 씻어 줌으로써 간인들의 음모를 저지시키지 않으신다면, 충정한 신하가 남은 생을 보전하기 어렵게 됩니다. 마음이 막히고 말이 움츠러들어 조처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곡진히 살펴 주소서.
(용어) 대론은 1617년(광해군 9년) 발론된 인목대비 삭호·폐출 논의를 가리키며, 이에 반대한 기자헌은 귀양을 갔다. 계축년의 변은 1613년(광해군 5년) 조령에서 은상을 약탈하다 잡힌 이들이 김제남이 역모를 꾀했다고 허위 진술하여 일어난 사화로, 이 일로 김제남은 사약을 받고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폐해졌다. 을사년의 일은 1545년(명종 즉위년) 소윤 윤원형이 대윤 윤임 일파를 몰아낸 사화로, 이 일의 주동 인물이 임백령이었다.
기준격의 상소에 대한 두 번째 해명 상소 (서기 1618년 6월 24일, 양력)
지난해 대론이 일어나자 신의 원수인 기자헌이 제일 먼저 흉악한 차자를 올렸다가 귀양 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서는 신이 은밀히 중상한 것으로 의심하여 신에 대한 원망이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기자헌이 이런 차자를 올리지 않았다면 그의 원수가 백 명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모해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지만, 차자를 올렸다면 평소 원수진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벌을 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데도 기가에서는 신을 원망하여 그 아들(기준격)이 외람되이 변고를 아뢰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소의 내용이 매우 비밀스러워 사람들이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양사에서 추문하기를 청한 것과 2품 이상이 추국하기를 청한 것을 전하께서는 고집하면서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신은 사실에서 거적을 깔고 엎디어 다시 해명하는 글을 올립니다.
당초에는 상소의 내용이 이토록 참혹하고 악독한 줄 몰랐었습니다. 지난번 곽영의 옥사 때문에 국청에서 그 상소를 내려 달라고 청하였는데, 그 내용 가운데 위에 저촉되는 모독스러운 말들은 모두 차마 볼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허위의 사실을 날조하여 신을 무함하려는 온갖 계책이 비로소 전파되었습니다. 대신 이하가 그 글을 보고는 간담이 떨렸으니, 국청을 맡은 신하는 일각도 지체 없이 실정을 캐내어 나라의 법전을 바루는 것이 바로 신하의 대의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뜰 아래에서 대면하여 판별할 수 있게 되기를 가슴을 두드리며 바라노라니 하루가 일 년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판부사가 아직 임명되지 않았고 위에서도 병을 조리하는 중이므로 친히 물으실 기회가 막연하기만 합니다.
신이 기가와 원수를 맺게 된 전후 곡절을 먼저 말씀드리고, 이어 없는 사실을 날조한 상소의 내용에 대해 하나하나 해명하겠습니다.
신의 형이 이홍로와 혼인을 끊자 이홍로가 복제를 삼가 지키지 않았다는 것으로 신을 무함했기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되었다는 정상은, 신의 처음 상소에서 이미 상세히 아뢰었습니다. 이홍로가 스스로 변명한 상소에 "허균도 참여하여 알고 있다"고 한 말은 기가의 밀서에서 거짓임이 이미 드러났으니 신이 감히 다시 아뢰지 않겠습니다.
1601년(선조 34년)에 신이 해운판관으로 순찰차 전주에 갔었는데, 이홍로가 감사로서 어미 상을 당하여 성복도 하기 전에 좋지 못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사람들이 신이 이 사실을 상세히 알고 있다고 하자 기자헌이 신에게 증언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이홍로가 나를 복제를 삼가지 않았다는 것으로 무함했는데, 내가 또 이것으로 무함한다면 같은 내용으로 보복하는 것 같다. 누가 믿어 주겠는가? 결단코 따를 수 없다' 하였더니, 기자헌이 비로소 유감을 품었습니다.
이홍로가 서울로 올라와서는 신이 눈으로 본 일들을 전파했는가 의심하여 원망하는 말을 마구 하였습니다. 신이 조카의 상을 조문하기 위해 그의 이웃에 갔다가 들러서 스스로 해명하려 하였는데, 마침 신현과 이성경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홍로가 급급히 저지시키면서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그대는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는데, 그때 기가의 문안하는 종이 이를 보고 가서 기자헌에게 고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이홍로의 상소에 참견했다는 말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스스로 해명한 서찰은 본디 긴요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기자헌이 이것을 위협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밀서를 모방, 그 내용에 흉한 말이 있는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옥사를 일으켜 스스로 해명하려 한다는 말을 신에게 뒤집어씌워 몰아붙였습니다.
1603년(선조 36년) 신의 형 허성의 집에서 국혼을 할 적에 형수의 병이 침중하여 기일을 앞당겨 혼인을 치렀습니다. 궁인들도 병자를 보고 갔고, 그런지 닷새 만에 죽었습니다. 마침 상을 발설하지 않고 비밀에 부쳤다는 설이 궁중에 전파되었는데, 이 말은 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기자헌이 날조한 것이라고 지목당했습니다. 봄 꿩이 절로 울듯이 형의 집에 가서 해명하면서 "이는 균이 나를 잡아넣으려고 만든 말이니, 공이 대비전에 해명하라" 하였습니다.
기자헌은 더욱 노하여 헌납 신률을 충동질하여 신을 탄핵케 하였으므로 신은 즉시 강릉으로 내려갔습니다. 기자헌은 그래도 분풀이를 그치지 않았으므로 신의 형이 걱정하던 끝에 신에게 사과하는 서찰을 보내어 그의 노여움을 풀게 하라고 했습니다. 신은 즉시 서찰을 보내어 사과했고 그 내용에도 별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기자헌이 "내가 이 서찰을 내놓으면 균은 틀림없이 죽는다" 하였습니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이 망발한 말이 있는 것인가 의심하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그 실제는 이뿐이었습니다. 따라서 기자헌이 전후 차자를 올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을 두루 비방할 적에도 신의 이름이 그 가운데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606년(선조 39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벽제에 왔을 때, 신이 역관 박인상을 시켜 본국의 세자 책봉에 관한 일을 극력 아뢰게 하였더니, 사신이 즉시 정문할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신이 돌아와 대신들에게 말하였더니 적신 유영경은 즐거워하지 않았으나 기자헌과 심희수는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의 민정을 사신에게 아뢰어 중국 조정의 벼슬아치들에게 알릴 수 있었습니다.
유영경이 분노와 시기를 품게 되었으므로 기자헌 등도 잇따라 벼슬자리에서 밀려났고, 신도 곧이어 부처를 좋아한다는 비평을 당했습니다. 신과 기자헌이 함께 유영경의 배척을 받았기 때문에 이로부터 기자헌이 거짓 마음을 열고 대하는 체했습니다만, 신은 기자헌이 음험한 마음을 품고 있어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수시로 만나기는 해도 사사로운 정은 감히 토로하지 못하였으므로 늘 시기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1613년(광해군 5년) 초겨울 화근을 제거하자는 의논이 발론되기 시작했습니다. 11월 초나흗날 신이 마침 기자헌을 만나 조용히 물으면서 그의 마음을 염탐해 보았더니, 기자헌이 머리를 흔들면서 동의하지 않고서 송순의 일을 핑계 대면서 결연히 가 버렸습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신의 두 번째 상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다시 아뢰지 않겠습니다. 그의 자질들이 모두 서양갑과 절친한 사이로 역적의 초사에 거론되었으나 요행히 나문을 면하였습니다. 때문에 뒷날 화를 면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기 위해 미리 이런 의논을 세움으로써 판국을 번복시키려 도모한 것입니다. 신은 이것으로 기자헌이 끝내 임금을 등지고 대론을 저지시키려 할 줄 알았습니다.
1614년(광해군 6년) 봄 기자헌이 들어와 영의정이 되자 삼사가 일제히 탄핵하였습니다. 이때 그 자제들이 신에게 시배들의 의논을 중지하게 해 달라 하였으므로, 신이 널리 친우들에게 요청하여 그 탄핵을 그치게 했습니다. 그 뒤 그의 아우 기윤헌이 외설에 대한 일 때문에 신을 의심하여 유감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틈을 이용하여 그의 형에게 거짓말로 "삼사가 탄핵할 적에 허균이 힘써 저지시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덩달아서 배척하였다" 하니, 기자헌이 그대로 믿고 매우 노하였습니다. 신이 요동에 있으면서 징병에 관한 일은 조처하기 어렵다는 곡절로 기자헌에게 글을 보냈더니, 기자헌은 곧 자기를 헐뜯는 것인가 의심하여 공공연히 신을 욕하였습니다. 북경에 도착하여 조종의 무고를 밝히는 글을 올리자, 극도로 추잡한 비난을 가하고 사형에 처하려 했었습니다. 그때 신이 기자헌의 탄핵을 저지시키기 위해 진력했음을 아는 사람이 기자헌에게 가서 상세히 해명하고 그의 구원을 요청했던 서찰 세 통을 보이자 기자헌이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시기하고 방해하는 마음은 더욱 더하였습니다. 《대명회전》의 무고를 바로잡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그는 늘 "뒷날 이것이 반드시 나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 매우 증오스럽다" 하면서 밤낮으로 획책하여 기필코 신을 살해하려 하였습니다.
해주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는 기자헌이 스스로 차자를 지어 신을 무함했는데 그 내용을 들으니 모두가 허위로 날조한 것이었습니다. 신도 상소를 올려 대면하여 변정하려 하였으나 기자헌이 밖에서 위협을 가하여 왔으므로 중지하고 말았습니다. 흉격 사건이 있을 적에는 임금을 버리고 도주했고, 은연중 그 흉격을 신이 지은 것처럼 말했으며, 자기와 친한 사람들과 짜고 신을 무함하려 했습니다. 강릉의 차자에서는 신의 이름을 거론하여 드러나게 지적하지 못하였으며, 그가 조정으로 돌아와서도 감히 명백하게 드러내어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성명하신 전하께서 그의 흉측함을 통촉하지 않으셨다면 신의 목숨이 어떻게 지금까지 붙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뒤 김진의 옥사 때에는 기자헌이 신을 욕하면서 진회에다 비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신도 상소문을 올려 전일 원망을 맺게 된 상황과 저가 역적을 비호하고 임금을 저버린 정상을 아뢰어 면대해서 변정하기를 청하려 했더니, 기자헌이 기겁하여 이복장을 보내어 화해할 것을 애걸하였습니다. 신은 대례가 이미 임박하였고 또 기자헌이 이 때문에 도망하여 갈까 저어하여 일이 완전히 끝난 다음 아뢰어 변정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대론이 일어났고 저가 제일 먼저 죄를 받았습니다. 기회를 이용하여 남을 곤경에 몰아넣는 것은 의리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도록 덮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때 영남 사람이 사산에 몰래 장사 지낸 일을 가지고 상소를 올려 죄줄 것을 청하려 하였습니다. 사산은 신라 이래 장사지내는 것을 금지해 오던 곳으로 사람들이 모두 만세에 군왕이 날 곳으로 일컬어 왔는데, 기자헌이 그의 첩을 장사지냈습니다. 따라서 기자헌이 패몰하기 전에도 모두들 위태하게 여겼었습니다. 이 상소를 올리려 하자 기가에서는 신이 사주한 것으로 의심하여 원망이 더욱 극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허균이 평소 우리 집안에서 대론을 따르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고의로 이런 꼬투리를 들추어내어 우리 집안을 무함하려는 것이다. 배소를 여러 번 옮긴 것도 모두 그의 지휘에 의한 것이다" 하면서 부인으로 하여금 바로 상언하게 하려다가 하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에도 기준격과 기수발이 서양갑과 교분을 맺고 있는 정상을 거론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기윤헌이 이사호와 심복이기 때문에 신이 흉악한 정상을 자세히 염탐하여 알고 있다는 것으로 계속 신에게 공갈을 가하였습니다. 힘을 다하여 신을 제거하면 대론은 절로 와해되고 저의 화도 가벼워질 것으로 여겨 기준격을 꾀어 저격할 계획을 세우게 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경망하다 해도 원수진 사람들의 자제들을 대할 때면 반드시 말을 가려서 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고 귀로 차마 들을 수 없는 이런 흉역스러운 난언이겠습니까. 이는 풍병을 앓아 본심을 상실한 사람이라도 감히 할 수 없는 말인데, 신이 이런 말을 했으리라고 여기십니까?
흉악한 상소의 말은 전해 들은 데서 나온 것이므로 하나하나 해명할 수 없습니다만, 사람들에게 전파된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밝히겠습니다. 기준격이 나이 어릴 적에 그 아비의 명에 의해 신에게 와서 배웠고, 신도 부득이하여 억지로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평상적인 이야기도 역시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1609년과 1611년의 이야기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데 증거할 수 없는 말을 글에다 썼으니 신은 매우 통분스럽습니다. 의창군은 신의 형의 사위이기 때문에, 신의 집안을 죽이기 위해 문득 옹립하려 한다는 말을 만들어 내고 그 공을 자기 아비에게 돌리려는 것이 틀림없으니 그 계책이 매우 참혹합니다.
형의 집에서 혼인이 이루어진 지 얼마 안 되어 신은 곧 파직되어 시골로 내려갔었다가 1604년 8월에 올라왔습니다. 올라와서는 수안 군수에 제수되어 부임했었고, 1605년 11월에 파직되어 돌아왔습니다. 12월에는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어 내려갔었습니다. 1606년 3월에 의주에서 조보를 보고서 비로소 왕자(영창대군)가 탄생하여 진하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이 동료들에게 "대신들이 어떻게 감히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는데, 이는 성상께서 세자의 자리에 계시고 억조창생이 마음으로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은 바로 공빈 김씨의 친척에 드는 사람이므로 광해군을 추대하고픈 사정이 다른 신하들의 배나 되는데, 감히 흉측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겠으며 마침내 원수진 집 사람에게 토로할 수 있겠습니까?
1611년(광해군 3년) 겨울 유배지에서 사면하는 은혜를 받았고, 11월 12일에 서울에 와서 형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24일에 다시 부안의 농막으로 향하였고, 1612년 2월 초에 바야흐로 돌아왔습니다. 그간 기준격이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신의 형제는 김제남과 평소 좋지 않게 지냈으므로 한 번도 그의 집에 간 적이 없는데, 혼인을 권하기 위해서 김제남과 함께 윤수겸의 집에 갈 리가 있겠습니까? 그해 겨울 서울에 머문 것이 십여 일뿐이었기 때문에 윤수겸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윤수겸이 지금 있으니 물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김제남이 신과 접촉할 길이 없다는 것은 온 나라가 다 아는 일인데, 궁중의 이런저런 일을 신이 어떻게 김제남에게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두 시신은 적자가 아니다"라는 말은 모두 저가 스스로 만든 말입니다. 어떻게 차마 그런 말에 주석을 달아 감히 임금의 눈을 더럽히는 짓을 이토록 거리낌 없이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 마음에 이런 생각을 품은 자가 아니면 어떻게 이런 문자를 베낄 수 있단 말입니까? 저가 신을 무함하기 위해 망측한 욕을 도리어 임금께 가하였으니, 고금 천하에 임금을 무시하는 도리에 어긋난 말이 이렇게 극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습니다.
저가 만약 이런 흉측한 말을 실제로 들었다면, 신하 된 도리에 있어 어떻게 온 조정의 신하들이 그 집을 미워한다는 것으로 그의 의논을 정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일이 만약 정확한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미워하더라도 어떻게 겁박하여 도리어 죄를 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실제로 흉역스러운 말을 토로했다면 신하로서 하루도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책을 가지고 와서 십 년이 되도록 신에게 가르침을 받았겠으며, 저의 아비의 두 차례 공적을 기록한 문서를 기필코 신에게 지어 달라 해서 후세에 전하려 했겠습니까? 이는 변명하지 않아도 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1608년(선조 41년) 공주에서 파관되고 나서 전답을 물색하기 위해 부안에 갔다가 바닷가에 있는 산속의 거처할 만한 땅을 얻어 경영하고 있었는데 오래지 않아 도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 뒤 죄를 져서 유배될 적에 기필코 함열을 요구한 것은 이곳이 부안과 가까워서 사면받으면 즉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613년 봄에 또 부안에 내려갔던 것은 노복과 전토가 모두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지, 어찌 심광세와 모의하기 위해 부안에 내려갔을 리가 있겠습니까.
1611년 신의 집이 비어 있게 되자 윤수겸이 몇 달간 빌려 들었었으므로 그 아들의 훌륭함과 그렇지 못함은 집을 지키는 종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심광세가 "윤씨 집에 혼인을 청하려 하는데 아들 둘 가운데 누가 더 훌륭한가?"고 묻기에 신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사람들이 모두 대군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데 사대부가 어떻게 혼인을 맺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송구와 그 혼인의 부당함을 말하고, 윤수겸의 절친한 벗인 이문란을 불러서 "심광세가 자기의 질녀를 윤수겸의 아들과 결혼시키려 하니 그대는 모름지기 이 혼인을 극력 저지시키라" 하니, 이문란이 놀라 하면서 "이 말이 옳다" 하였습니다. 즉시 윤수겸에게 말하니 윤수겸이 "그가 아무리 요구해도 내가 어찌 허락하겠는가. 나는 하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다음날 기준격이 송구에게 찾아가서 이 일에 대해 묻자, 송구가 "어디에서 그런 말을 들었는가?" 하니 기준격이 "숙부에게 들었다" 하므로, 송구도 허균이 저지시켰다고 말하여 보냈다고 했습니다. 지금 송구를 끌어대어 증거를 삼았는데 송구가 아직 서울에 있으니 하문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이문란의 지난해 상소를 가져다 고증해도 알 수가 있습니다. 저의 상소 내용이 모두가 증거 없는 말이지만 이것만이 유독 증거가 있는 것인데, 윤수겸 등 세 사람이 모두 있습니다. 이것이 부실하다면 혼자서 말하고 혼자서 들은 근거 없는 말임을 유추해서 그의 거짓을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대명률》에 "참언을 담은 책을 집에 보관해 두는 것은 사형죄에 해당된다"고 했기 때문에 신은 비록 우연히 보았다 해도 집에다 보관해 두지도 않습니다. 이를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감히 하지 않고 있는데 하물며 원수진 집의 자제에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참설은 이십여 년 전 선왕 때부터 있던 것으로 전해 내려온 지가 이미 오랩니다. 그리고 천도설은 1612년에 나왔으니 그 거짓됨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이른바 심우영은 신의 죽은 아내의 서얼 외숙입니다. 약간 문재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대부들도 인정하였고, 신은 가족적인 친분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매우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품이 교만하고 사납고 적자를 멸시했기 때문에 온 집안이 그르게 여겼습니다. 1607년(선조 40년) 겨울 이원형이 와서 "부디 우영을 친절히 대하지 말라. 우영이 이야기 끝에 나를 시켜 임해군에게 가서 살펴보라기에 내가 큰 소리로 준절히 나무랐더니 그가 얼굴빛을 변하면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늙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싶다'고 하였다. 그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어 나도 이로부터 절교하겠다" 하므로 매우 이상스럽게 여겼습니다. 그 뒤 유념하여 살펴보니 말하는 즈음에 국가를 원망하는 것이 특별히 심했습니다. 그리고 드러나게 대군을 애호하는 말이 있어서 더욱 괴이하게 여겼었습니다.
그 뒤에 이의숭이 심우영에게 재물을 빌리려고 하므로 신이 중지시키면서 "이들의 지향이 수상하니 부디 서로 가까이 지내지 말라" 하였습니다. 이른바 박응서란 자는 그 아비가 박순으로 신의 아비 허엽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임백령의 시호에 대한 일 때문에 박순이 죄를 받게 되자, 신의 아비가 당국자에게 해명하여 사형을 면하였으므로 박순이 항상 고맙게 여겼습니다. 1583년(선조 16년)에 박순이 입대할 적에 신의 형 허봉의 잘못을 극언하였는데, 이 때문에 신의 형이 멀리 귀양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의 어미가 박순을 원망하게 되었고 이어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화담서원에는 신의 아비를 배향하게 되어 있는데 박순도 배향하려 함으로 신이 온당치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박응서가 이 말을 듣고 원망을 품었으므로 심우영이 박응서를 위하여 갑자기 신의 집 및 이의숭의 집과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노략질하던 날 밤 박응서와 김비가 분명히 도둑이었으므로 신이 이의숭에게 "내가 전에 한 말이 어떠한가. 이들이 끝내 국가의 큰 도적이 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대장 이문전을 만나서 말했는데, 체포하려 할 즈음에 이문전이 파직되었기 때문에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해에 박응서가 은을 노략질한 것 때문에 체포되었는데 즉시 결단하지 않자, 이의숭이 신의 말을 깨닫고 즉시 이이첨에게 가서 "필시 역적질을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이첨이 즉시 한희길을 불러 아뢰기를 극력 권했기 때문에 죄인의 괴수를 끝내 잡게 된 것이고 종묘사직이 다시 편안하게 된 것입니다.
신이 아무리 아둔하다 해도 보잘것없는 서얼 친족을 뜻을 같이하는 벗이라고 일컬었다는 것이 어찌 사리에 가까운 말이겠습니까?
신이 1607년(선조 40년) 겨울 혼자서 보기 위해 본조의 시를 뽑아 적을 적에, 정도전과 권근은 모두 국초 사람이므로 이들의 것을 조사하여 쓰다가 보니 자연 이 두 사람의 것을 제일 앞에 쓰게 된 것이지, 어찌 감히 그 사람들을 사모하여 뽑아서 앞에다 실었겠습니까? 지금 《동문선》과 《청구풍아》 등의 책에 실린 국초의 시문은 정도전의 저작이 반드시 제일 앞에 있습니다. 신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버리고 기필코 이 사람을 으뜸으로 삼았겠습니까. 더구나 신이 1598년(선조 31년)에 개성에 갔다가 정몽주의 옛집에 들러 시편을 지을 적에 말단에 정도전을 극력 배척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었습니다.
그대는 못 보았는가 삼군부 앞에 무기 벌여 놓고 임금 잊고 적자 바꾸어 천륜을 어긴 일을 계획을 끝내자 정도전이 죽었으니 다리 위에서 갑자기 죽은 것 사람의 재앙이 아니라네
이 시를 차운로가 늘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또 "정도전 권근론"을 지어 배척했는데 이는 본 사람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말은 마치 아이들의 장난과 같은 것입니다. 생존자들의 경우는 최립과 이달 외에는 뽑지 않은 것이 많은데, 서얼 친족을 위하여 그의 졸렬한 시를 뽑아 적으려 했겠습니까? 이 책이 지금 박엽의 집에 있으니 가져다가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이 남쪽으로 옮겨갈 때 옥에서 나와 몹시 총총한 형편이었고, 그때 심우영의 자취는 이미 신의 집과 소원해져 있었으므로 찾아온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찾아가서 시를 주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가 심우영의 집에 신이 증정한 시편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말을 날조하여 신을 무함하려 했으니, 또한 어리석지 않습니까?
서양갑의 자가 석선인 것은 지금 비로소 들었습니다. 천한 서얼들의 자는 지극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알 수가 없는 것인데, 기준격이 홀로 그의 자를 알고 있고 신에게 죄를 씌우기 위해 신이 지어 준 것이라고 합니다. 기준격이 은밀히 서양갑과 교결하여 굳은 교분을 맺은 정상이 이에 이르러 다 드러나 버렸습니다. 이는 바로 자기 자신이 서양갑과 절친하여 스스로 영웅이라고 일컫고서는 도리어 그 화를 신에게 돌리려는 짓이니 그 또한 참혹합니다.
이경준이 지은 흉격에 대한 일은 그때의 추안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는데도, 기준격이 지금 이런 말을 만들어 내면서 다른 증거는 세우지 않고 단지 신이 스스로 말했다고만 합니다. 흉격을 짓는 것은 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흉역인데 그것을 자신이 지었다고 끌어대어 원수진 집에다 말한다는 것이 사리에 맞는 말이겠습니까? 더구나 한집안의 조카들은 정이 부자와 같지만 사소한 일일지라도 감히 말하지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남에게 이렇게 전혀 사리에 맞지 않은 흉언을 했겠습니까. 그 말은 이번에 소명국이 은밀히 이대엽을 추대하려 했다는 것과 동일한 어리석은 계교입니다. 따라서 더욱 치가 떨립니다.
그의 "법궁으로 이어하는 데 대한 천시와 인사에 관한 말"은 신으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있는 얘기이겠습니까? 처음 법궁을 지었을 때 비길 데 없이 성대하고 화려하여 신민들이 밤낮으로 이어하시기를 바라고 있었고, 인심도 모두 우리 임금을 추대하고 있는데다가 시변과 천재도 별로 걱정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기준격이 사람을 무함하기 위하여 스스로 흉언을 지어내고 천시와 인사에 대한 말을 끌어대어 인심을 선동, 현혹시켰는가 하면 필설로 나타냈으니, 그가 영창대군에게 귀부한 마음이 있는 것이 이미 여기에서 드러났습니다. 아, 역시 참혹합니다.
이이첨 집의 큰 뱀에 대한 이야기는 역시 무엇을 인연하여 신에게 미루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1589년(선조 22년)부터 성균관에서 이이첨과 교제를 맺었습니다. 나이가 같지 않아서 형으로 섬겼고 삼십 년을 하루같이 지내왔으며, 1608년 이래 모든 역적 토벌에 관한 일에 함께 힘을 합하여 온 것은 사람들이 다같이 아는 일인데, 어떻게 1613년 이후에 바야흐로 투탁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1612년 겨울 신이 충주로 갈 때 이이첨에게 가서 작별을 고했는데 한찬남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인하여 "영창대군은 화의 근원이고 뜻을 잃은 자들이 침을 흘리고 있다. 훈련도감의 관원은 모두 서인들이니 불가불 우리들이 대신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좌중이 모두 옳게 여겼습니다. 신의 말이 불행하게도 1613년에 적중되었습니다. 신이 임금을 위해 시종 충성을 다한 실정은 동료들이 모두 아는데, 도리어 원수진 집안과 함께 흉언을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그의 "영창대군을 세우고 수렴청정한다", "화살이 떨어지는 곳에 과녁을 세우라"고 했다는 말은 이 얼마나 엄청난 흉역입니까? 가령 신이 저에게 분명히 그런 말을 했다면 어째서 들은 즉시 고변하지 않고 전혀 마음을 움직이지 않은 채 등한한 이야기로 서로 문답하듯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인데도 무고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임금을 우롱하는 정상이 빠짐없이 다 드러났습니다. 기준격이 아비의 원망을 앙갚음하기 위해 이런 소장을 올려 무함했으니 마음은 교사스럽고 계교는 어리석습니다.
저의 아비가 늘 신을 살해하려 하였으니, 만분의 일이라도 그런 기미가 있었다면 어찌 고변하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대론 때문에 패한 뒤로 그 원망을 신에게 돌려 사생 결단으로 만에 하나 요행을 바랐습니다. 그리고 의논을 달리하는 자들이 신을 미워하는 기회를 이용, 함께 힘을 합하여 함정에 밀어넣음으로써 신이 상해되기를 바랐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라도 원수가 원수를 공격하면 사실로 믿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이런 폐단은 앞으로 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원망을 보복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교묘하게 날조하는 짓을 끝내 그치게 할 수 없게 만들 것입니다. 따라서 신하로서 원망을 떠맡으면서 역적을 토벌한 사람들이 마침내 무함을 받아 죄에 빠진다면,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조종 선왕의 무고를 밝히는 일에 이르러서도 신이 언단을 발하자 기자헌이 극력 저지시켰습니다. 그러다가 《대명회전》을 완전히 고치고 돌아오는 경사가 있자, 기자헌은 이 때문에 죄를 얻어 공이 취소될까 깊이 우려했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이에 대한 말을 낼까 의심하여 기필코 신을 죽이려 했습니다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국가에서 공을 기록한 대전에 대해 기준격이 어떻게 감히 참여하여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기필코 남곤과 같다고 일컬으면서 신의 원훈을 저지시키려 하는 것은 역시 뒷날 저의 아비가 이 때문에 죄를 받을까 두려워해서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저가 소장에 부질없이 언급했으니 역시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더구나 대사를 연기하여 지체시킨 것이 어찌 신 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이는 성상께서 차마 사은을 갑자기 끊지 못했으며 묘당과 삼사가 때를 기다려 일제히 발론한 소치로 그렇게 된 허다한 곡절은 상께서도 환히 아시는 바입니다. 그런데도 기준격이 공적인 것을 빙자하여 사적인 보복을 한 것이고 자기 아비를 잡아넣기 위해서 대사를 연기시켰다고 한 것은 또한 너무도 무망한 말입니다.
1609년(광해군 1년) 겨울 신이 형조 참의로 있었는데, 그때 정협이 전옥 주부였습니다. 범죄인의 등급을 낮추는 것을 신이 실지로 주관했으므로 정협이 늘 신을 원망했습니다. 때문에 그가 자백하던 때 사람들이, 원망하기 때문에 무고하여 끌어들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도 있었습니다만, 신은 태연하였습니다. 그때 이원형은 바야흐로 광주에 있었으니 손을 잡으려 한들 될 수 있었겠습니까? 교묘하게 주워 모아 얽어낸 정상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끝에 심이기에 대한 말은 간담이 떨리는 말입니다. 기필코 이 역적과 상의 앞에서 같이 죽음으로써 스스로 변별하고자 합니다. 난신적자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겠습니까만 이렇게 극악한 말을 한 자는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신이 이미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저가 스스로 만들어 낸 말입니다. 금수 같은 행실을 익히 보고 인륜을 모독하는 것을 달게 여기는 집안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그의 집과 원수를 맺은 탓으로 선왕에게까지 욕이 미치게 하였으니, 차라리 가슴을 가르고 밝은 해 아래서 통쾌하게 설욕하고 싶습니다.
저 기자헌이 지극히 미세한 일로 의심을 내어 실정이 없는 말로 원수를 맺고 형적이 없는 일로 살해하려 하니, 그 마음의 흉악함과 참혹스러움이 이보다 더 극심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천지의 귀신이 위에 임하고 곁에 있는데, 어떻게 감히 거짓을 말하여 스스로 죄를 자초할 수 있겠습니까.
기준격이 무함한 내용은 비록 승지·사관이라 할지라도 기록할 수가 없는 것인데, 소명국이 그 말을 사용하여 잇따라 사람을 무함하였습니다. 그 흉격의 근거가 맹랑한 것이 이와 같아 형적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이는 소명국과 기준격이 앞뒤로 같이 모의하여 사림을 해친 것으로, 소명국과 기준격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입니다. 소명국은 이미 형을 받았지만 기준격은 터럭 하나도 다치지 않고 있으니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기자헌은 바로 왕실에 가까운 친족으로서 수상의 자리에 있는 몸입니다. 그런데 이런 흉언을 듣고도 위에 고하지 않았다면 그에게도 역적을 비호한 죄가 있는 것입니다. 기준격이 흉언을 듣고서 남의 혼인을 금하기까지 하였으면서도 그 사람에게 공부를 배우러 계속 왕래하였다면 저도 역시 역당인 것입니다.
온 나라가 두 집안이 원수진 집안이라는 것을 다 아는데, 패몰당한 뒤에는 그 허물을 신에게 돌려 감히 증거도 없고 형적도 없는 말로 선왕과 두 분 성상을 모독했고 신을 살해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대역부도한 죄에 빠지는 것을 몰랐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대간의 말은 공공의 의논에서 나온 것이므로 죄를 진 사람으로서는 혀를 놀려 스스로 변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양사가 함께 신을 배척하는 것은 억울한 데 관계된 점이 있기에 신은 이에 대해 아뢰어 해명하고 끝맺겠습니다.
신은 선왕 때부터 오직 전하만을 추대하여 여러 번 뜨거운 정성을 바쳐 왔습니다. 1613년 전에는 자주 동료와 함께 국가의 일에 대해 우려했었고 자못 선견지명이 있었기 때문에 이이첨도 신의 충심에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신이 대략 경사에 통달하고 널리 전고를 안다는 것으로, 화근을 제거하는 일이 있을 적에도 신하고만 의논하여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재야의 선비들 가운데 신과 두텁게 지내던 자들이 다투어 혈서로 쓴 글을 올려 정론을 부식했습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신도 참여해 안다고 여겼기 때문에, 패몰당하여 뜻을 잃고 이의를 제기하던 무리들이 신을 이이첨보다 더 미워하였으므로 초야에서 사림을 공격하기 위해 떼 지어 일어난 상소도 모두가 "균이 사주했다" 하니, 이보다 더한 불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뒤에 최심과 윤해수 등의 소장은 신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님이 분명한데도 그때 논의가 의심하였었습니다. 심지어 곽영의 상소에서도 "덕부도 균을 지척하면서 그의 술수에 빠졌다"고 하였습니다만, 소명국의 일이 드러나게 되자 덕부도 비로소 말이 없었습니다.
신이 대론을 주장한 때문에 저들에게 미움을 당했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늦추기를 주장하는 약간의 시배들에게도 미움을 샀기 때문에 사지에 이르게 되었으니, 어찌 애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거적자리를 깔고 명을 기다리고 있으므로 다른 일은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지난날 같이 일하던 유생들은 징병 때문에 인심이 술렁거려 내홍이 일어날까 걱정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초야와 성균관·사학이 함께 소장을 올려 대국을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혹 와서 상의하면, 역적을 토벌하는 정론은 의에 있어 저지시킬 수 없으니 그들이 다시 청하는 대로 맡겨 둘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이에 무슨 딴 뜻이 있었겠습니까? 덕부 한 사람에게 배척받은 것 때문에 끝내 평핵을 받는 것이 원수인 기준격에게서보다 더 심하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민인길의 상소에는 당초부터 신이 격서를 지었다는 말이 없었고 이홍로와 원수 맺은 자취는 나라 사람이 다 아는 일이며, 서찰 다섯을 밀서로 만든 것은 모두 허위 날조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양사에서 원수가 무함하는 말을 주워 모아 탄핵하는 소장에 기록한 것에 대해서는 신 또한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은 기준격의 무함을 받은 뒤부터는 조심스럽게 사명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친우의 집에도 일체 왕래하지 않았습니다. 혹 밤을 이용하여 다른 집으로 옮겨 갈 적에도 파리한 말과 시원찮은 동복을 데리고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높은 벼슬아치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초헌을 타고 구종을 데리고서 큰 소리로 길을 물리며 다녔다"는 것은 너무도 억울합니다.
신이 바야흐로 병고에 시달려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병을 무릅쓰고 요동으로 달려가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기에 기필코 유겸을 사주하여 이런 망령된 의논을 했겠습니까? 윤리를 모독하고 문란시켰다는 것은 반드시 근거가 있는 것으로, 신은 이제 오십 년토록 살아오면서 이런 비방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런 오명을 받았습니다. 윤상이라는 것이 지목하는 바가 있어서 한 말이 아닙니까?
신은 한 사람의 몸으로서 한 시대의 어진 재상이 극히 친밀하게 대우했고 국가의 대론에 참여하게 했는데, 하루아침에 언관이 배척하여 흉역이라 하고 윤상을 모독했다고 합니다. 금방 훌륭하다고 했다가 금방 간사하다 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습니까? 민인길의 상소가 올라간 지 이미 열일곱 달이 되었고 기준격의 무고하는 상소에 대해서도 반 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조용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여러 유생들의 곧은 논의가 일제히 발한 뒤에야 신을 지적하여 역적이라 하면서 세 사람을 국문하기를 청하였는데, 역적을 토벌하는 것을 이토록 완만하게 한다면 국가의 일을 알 만합니다.
대사가 처음 거론될 때 신이 과연 권면한 일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에 와서는 공의가 일제히 분노하고 있습니다. 유생들은 모두가 전일 제일 먼저 같이 일한 사람들로서 모의하지 않았어도 말이 같았으며 각자 스스로 정성을 다했습니다. 성균관·사학의 유생이 팔방에서 와 모여 공의를 인하여 충심을 바치고 있는데 이것도 신의 술수에 빠져서 그렇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신은 요직에 있지도 않은데 무슨 이익을 가지고 유생들을 꾈 수가 있겠습니까? 유생들이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것도 이 때문에 신을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전하를 부호한 것은 선왕 때부터였고, 역적을 걱정한 것은 1612년이었고, 대론을 세운 것은 1613년이었고, 유생들의 상소는 지난해 11월에 있었고, 기준격의 무고는 12월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을 가리켜 공을 세워 스스로 죄를 면하려는 여지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니, 또한 거짓이 아닙니까? 신은 삼가 비통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신의 죄악이 이러한데도 병을 조리하고 계신 중에 이렇게 번거롭히는 것은 부당한 줄 압니다. 그러나 양사에서 이미 "자신에게 죄가 없다면 언관이 국문할 것을 청하기도 전에 스스로 옥에 나와서 기필코 변명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고, 이런 양사의 의논이 매우 의리에 합당했기 때문에 부득이 무릅쓰고 아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유념하시어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여 주소서.
(용어) 서양갑은 서얼 출신으로 박응서·심우영 등과 함께 조령에서 은상을 살해하고 금품을 강탈하다 체포되자, 이이첨 등의 사주를 받아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고 허위 진술함으로써 계축옥사를 일으킨 인물이다. 이 상소가 올라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618년 8월, 허균은 결국 역모 혐의로 처형되었다.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2 · 서(서문)
출처: 성소부부고 제26권, 부록 2, 서
배경: 성소부부고 마지막에 실린 세 편의 서문이다. "태각지 서"는 1601년 예조 정랑 시절 허균이 조선 개국 이래 의정부(정승·재상)의 연혁과 역대 재상 명단을 정리하며 쓴 글이다. "청허당집 서"와 "사명집 서"는 각각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서산대사 휴정과 그 제자 사명당 유정의 문집에 부친 서문으로, 허균이 두 고승과 맺은 개인적 인연과 존경심이 잘 드러난다.
태각지 서 (서기 1601년 2월 17일, 양력 추정)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 강헌대왕께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여셨는데, 그때 문하 우시중 배극렴은 전 왕조(고려)의 재상으로서 태조가 나라를 여는 데 실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문하성의 제도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았다.
그 후 2년 만에 한성에 도읍을 정하고서 비로소 두 개의 관부를 창설, 고려 말엽의 제도를 본떠 도평의사를 설치해서 국정을 맡게 하고 삼군부를 설치해서 군무를 다스리도록 하니, 그 조와 진의 제도가 한결같고 맡은 일도 예전과 똑같았다. 그리고는 배극렴을 판도평의사로, 정도전을 영삼군부사로 삼았다. 그리하여 조인옥·정희계·이옥·이서·설장수·조림 등이 모두 공신이자 왕실의 외척인 중신으로서 서로 전후하여 동판사사가 되었는데, 나라의 큰일은 혹 서로 참여하여 결정하곤 하였다.
2년 후 배극렴이 물러나자 조준·김사형이 그 직임을 대신하였고, 또 삼군부의 직무에 지장이 없도록 정도전에게 도평의사의 직무를 겸하게 하였다. 조준·정도전이 그 자리를 떠나고 나서는 심덕부·이서가 서로 이어 그 일을 맡았다. 안종원·이이·이승원·장사정·박위·이거이도 차례로 동판사사가 되었고, 이지란·이온·조박·남은·전백영·이지·조온·황거정이 상의평리가 되었는데, 모두가 다른 관직에 있으면서 그 직무를 겸하였다. 그러나 모든 군국 기무에 관계된 일은 두 재상이 주장하며 결단하였고, 동판사사 이하는 감히 가부를 말하지 못한 채 자리만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공정대왕(정종) 때에 도평의사를 고쳐서 의정부로 만들었다. 그런데 태종이 즉위하여서는 의정부와 삼군부를 혁파하고 좌정승·우정승을 모두 정1품으로, 시랑찬성사를 종1품으로, 참찬을 정2품으로 하여 하륜·성석린을 좌정승·우정승에, 이첨·정탁을 찬성에, 이내·권근을 참찬에 임명하였다.
그 14년 후에는 영부사 1인, 판부사 2인을 모두 정1품으로, 동판부사 2인을 종1품으로 설치하고 참찬지부사를 혁파하였다. 얼마 후에 제도를 다시 개정, 영의정·좌의정·우의정 각 1원을 모두 정1품으로 하여 이서·이직·조영무에게 그 직을 임명하였고, 좌찬성·우찬성 각 1원을 모두 종1품으로 하여 박은·한상경에게 그 직을 임명하였고, 좌참찬·우참찬 각 1원을 모두 정2품으로 하여 박석명·유관에게 그 직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의정부의 소속으로 사인·검상·사록 등의 관직은 모두 한때의 대단한 청요직이었고, 녹사·도리는 모두 처음 벼슬한 문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렇게 하자 군국의 큰 정사와 육조의 온갖 업무가 모두 의정부에 귀속되고 전장과 제도가 비로소 정해져서 그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삼정승이 조정에 앉아 있으면 육조의 관속들이 각기 맡은 일을 가지고 조방에 모여서 처리하였고, 무릇 임금의 재가를 받은 공문서를 만나면 사인 이하의 관원들이 각기 소임을 분담, 평의하여 재상의 결재를 받은 다음에야 해당 관원이 그 일을 과감하게 시행하였으니, 그 직무를 맡겨서 완수하기를 책임 지우는 일의 중대함을 대강 상상할 수 있겠다.
세조가 즉위하여서는 육조가 의정부에 가서 사건 결정하는 일을 혁파하고 큰 정사만 의정부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사록을 성균관·사관 등 사관의 겸직으로 삼고 녹사 이하는 옛 관례에 비추어 제수하니, 정부의 권한이 이로부터 약간 가벼워졌다.
나는 오랫동안 계속된 태평성대의 말엽에 태어나, 젊었을 적에 그윽이 조종조 때 어진 사대부들의 행적을 사모하고 좋아한 나머지 의정부 서고에서 삼정승의 전임 명부를 가져다가 한번 눈여겨본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에 내가 방종하여 그것을 베껴 두지 못하고 다만 마음속에 기억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로 전적이 모두 없어져서 이에 관한 것을 찬술하려 해도 참고할 만한 것이 없었다.
지난번 오성 이항복 정승을 모시고 있을 때에 이 일에 대해 언급하게 되었으므로, 지금 기억하고 있는 대신들의 성씨를 기록하여 바치고, 즉시 각 연도의 과거 급제자 명부를 가져다가 그 집정자를 뽑아 적되, 무관이나 음관으로 시작하여 대신이 된 사람들로서 가끔 기억할 만한 사람 또한 차례에 따라 적어 넣었다. 또 옛 정승 해원부원군 윤두수에게서 이른바 "국조대신고"라는 것을 얻어 옛일을 널리 상고하고, 거기에 나의 듣고 본 바를 가지고 바로잡은 다음 연도 순서로 편성하여 옛 명부의 잘못된 점을 보완하였다.
나라를 세운 초기에는 판평의사가 국정을 도맡았고 동판 이하는 정사의 권한을 행사하는 데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므로 판사만을 기록하였고, 또 문하성과 의정부에도 역시 정승과 영사만을 기록하였으며, 그 부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종실 가운데 재상이 된 사람은 준(전주 이씨 종친) 한 사람뿐이고, 음관으로 재상이 된 사람은 신수근 한 사람뿐이며, 무신으로 재상이 된 사람은 박원종 한 사람뿐이다. 그 후로는 모두 문관으로 재상을 삼았는 바, 통틀어 재상 백오십육 인을 가지고 나라 세운 초기 이후 대신 연표를 만들었다.
1601년(선조 34년) 1월 일에 예조 정랑 허균은 서한다.
(용어) 이항복(호 오성, 오성부원군)은 선조 때의 정승이다. 윤두수(호 해원부원군)는 선조 때 정승을 지낸 인물이다.
청허당집 서 (서기 1612년 2월 16일, 양력 추정)
불법이 동쪽으로 삼한에 들어오기는 신라 중엽부터였다고 한다. 그사이 불문에서 일컬어진 이가 수없이 많았으나, 거의가 가르침을 담은 경전이나 계율 두 가지에 벗어나지 못하여 탑과 절을 높이고 인과응보를 내세워 한 세대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을 뿐이었다.
그 염화미소의 은밀한 뜻과 달마가 면벽 수행한 은미한 뜻은 조금도 간파하지 못한 채, 아무 스승은 아무의 전수를 받았고 아무 조사는 아무에게 법을 전했다고 하는데, 그 문도가 또 덩달아 이를 기념하는 데 끊임이 없어, 높다란 비를 세우고 커다란 종을 만들어 공적을 과시하는가 하면, 보배로운 전각과 연꽃 궁전이 사찰을 빛나게 장식하되 수천 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으니, 어찌 너무 참람된 관습이 아니겠는가.
오직 도봉산의 영소국사가 중국에 들어가 법안종 영명 연수의 전수를 받고, 송나라 건륭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와 불법의 기풍을 크게 떨쳐 말법의 세상을 구제함으로써, 조사(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비로소 드러나고, 이 땅에서 가사를 두른 이가 드디어 임제종·조동종의 종풍을 계승하게 되었으니, 선종에 끼친 공로가 어찌 적다 하겠는가.
영소국사의 깨달음은 도장 신범에게 전수되어 청량산의 도국, 용문산의 천은, 평산의 회해·현감·각조, 두류산의 신수 등 여섯 세대를 거쳐 보제 나옹에게 이르렀고, 나옹은 오랫동안 중국에 있으면서 모든 선지식을 널리 찾아 두루 통하고 즉시 체득하여 무성하게 선종의 사표가 되었다. 또 그의 법을 전수받은 이는 남봉 수능이 적통을 이었고, 정심 등계가 이를 바로 계승하였는데, 정심은 벽송 지엄의 스승이다. 벽송은 다시 부용 영관에게 전수하였는데, 그 도를 체득한 이는 오직 청허 노사를 으뜸으로 일컫고 있다.
청허 노사의 법명은 휴정, 고향은 안서(해주의 옛 이름)로, 어려서 유가의 글을 익혀 이미 큰 뜻을 통하였고 문장에도 능하여 과거 볼 만한 정도의 공부는 매우 하찮게 여겼다. 뒤에 두류산(지리산)에 노닐다가 갑자기 큰 서원을 발하여 부용 영관의 문하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법을 받아 여덟 가지 가르침을 통하고 세 가지 관법을 통하였으며, 도는 조짐 이전에 비추고 생각은 번뇌 밖으로 벗어났다.
그 영원한 밝음과 간결한 조예는 곧장 달마·혜능의 맥락을 접하고, 마음과 본성을 설하는 오묘함은 남양 혜충·영가 원각·백장·남천과 어깨를 나란히 함으로써, 지혜의 태양이 거듭 밝고 지혜의 등불이 더욱 빛났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그림자를 보거나 말을 듣고 그대로 집착하거나 믿는 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멀찌감치 물러설 것이며, 참되고 바른 것을 훼방하고 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려다가는 스스로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업보를 지을 것이니, 이른바 하등 사람은 도를 듣고 도리어 크게 웃는다는 말이 어찌 허위이겠는가.
노사는 큰 법을 간직하고 명산에 두루 머무른 법랍이 이미 칠십 년이나 된다. 은고를 보배로운 도량에서 울리고 금륜을 향기로운 땅에서 굴려 온갖 미혹을 다 깨뜨리고 검은 불자를 혼자 세워, 도봉산·보제의 가르침이 이에 이르러 더욱 크게 밝아졌다. 저 가르침과 계율에 구구하여 인과응보나 믿는 이와 비교하면 그 거리가 어찌 백만 유순뿐이겠는가.
아, 그런데 부처의 말씀이 장차 밝혀지려는데 옥으로 된 천이 갑자기 재로 변하여, 부처가 설법한 기원정사에 그늘이 없어지고 자비의 배에서 노를 잃었으니, 사람과 하늘의 비통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종봉 유정공은 노사의 가르침을 듣고 흥기한 이이다. 지혜의 깃발이 이미 꺾이고 계율의 보배가 오랫동안 묻혀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그 남긴 글을 주워 모아 영원히 사모하는 뜻을 붙이려 하였으나, 그 글을 간행하기도 전에 유정공 또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열반에 들던 날 저녁에 문인들을 불러 부탁하기를, "나의 스승 노사의 유문을 내가 간행하지 못하고 갑자기 감으로써 처음의 마음을 저버리게 되었으니, 너희가 나의 정성을 잊지 않고 그 일을 마쳐 준다면 내가 지하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겠다" 하고, 이어 "거사(허균)는 우리 불교와 은미한 인연이 있다" 하고는, 이 서문을 부탁하였다.
그의 문인 혜구가 나를 찾아와서 그 죽은 스승의 말을 전하고 서문을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 그런 연유가 있었다. 청허는 나의 선친께서 뜻을 같이한 벗으로 보았고, 나도 젊었을 때 서찰 사이에서 보아 왔다. 지난해 서쪽 지방에 나가 노닐 때 객사에서 노사를 만나 직접 묘한 진리를 듣고 어지러운 마음이 금세 없어졌으며, 노사 또한 사후의 비문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나는 유가의 선비이다. 불교와는 전혀 서로 맞지 않는데 어찌 그 행적을 모사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스승이 이를 알고 부탁하였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에 선대의 오랜 우의를 감념하여 감히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그 스승과 제자로 서로 전수한 자취를 서술하고 노사에 관한 줄거리를 대충 기록해 보낸다. 그러나 석가의 머리 위에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일인데, 혹 나의 혀를 뽑는 업보가 돌아올까 염려된다. 그 유문의 현묘하고 탈속함은 보는 이가 스스로 짐작할 것이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명나라 만력 40년 임자년(1612, 광해군 4년) 정월에 양천 비야거사 허단보는 쓴다.
(용어) 염화미소는 석가가 연꽃을 따서 제자에게 보였는데 오직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미소 지었다는 고사로, 말이나 글 없이 마음으로 마음에 전하는 불교의 깊은 진리를 이른다. 청허당 휴정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킨 서산대사이며, 허단보는 허균이 스스로 붙인 자다.
사명집 서 (서기 1612년 2월 16일, 양력 추정)
지난 1586년(선조 19년) 여름에 내가 둘째 형을 모시고 봉은사 아래 배를 댄 적이 있었다. 마침 한 스님이 갑자기 나타나 뱃머리에 서서 읍을 하는데, 헌걸찬 체구에 용모가 단정하였고, 함께 앉아 담화를 나누는데 말이 간단하였으나 그 뜻이 깊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물어보았더니 바로 종봉 유정 스님이었다. 나는 그만 진심으로 흠모하고 말았다.
밤이 되어 매당에 들어 유숙하다가 그가 지은 시를 내어 보이는데, 그 격조가 마치 거문고 소리와 같이 청아하고 높았다. 둘째 형이 몇 번이고 칭찬하면서, 당나라 아홉 고승의 시와 나란히 놓아도 될 만하다고 하였다. 그때 나는 아직 어려서 그 오묘한 경지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를 마음속에 간직하여 쉬이 잊지 못하였다.
3년을 지나 둘째 형이 별세하자, 스님이 오대산에서 와서 조문하며 슬피 곡하고 또 만시를 지었는데, 그 시구가 너무 처절하여 아직도 생사의 경계에서 해탈하지 못한 듯하기에 내심 의아해하기를 '스님의 수도가 아직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일까. 어찌 구구히 속인들의 슬픔과 기쁨을 그대로 본받는단 말인가' 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겨울, 임진왜란을 피하여 강릉에 있다가 스님이 의병을 규합하여 국난을 막을 때, 그 스승을 대신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여러 차례 왜적을 꺾었단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 뒤에 스님이 임금의 명을 받들고 적진을 찾아가 왜인을 타일러 큰 공적을 세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다시 만날 수 없으니 스스로 마음만 피로하다.
1596년(선조 29년) 겨울, 내가 승문원에 있을 때 공무로 인하여 영의정 서애 유성룡을 찾아뵈었는데, 스님이 높은 고깔에 긴 수염으로 함께 앉아 있다가 반가이 손목을 잡고 옛날을 이야기하였다. 이에 함께 객사로 돌아와 당시의 국사를 담론하였는데, 강개한 기개로 손뼉을 치면서 이해를 타진하는 것은 옛날 의협의 풍도가 있고, 안장에 기대어 좌우를 돌아보면서 요사한 기운을 쓸어버리려는 의지는 또 노장군의 굳세고 정정한 모습과도 같기에, 내가 더욱 공경하고 소중히 여기면서 '그의 시문은 여사에 불과하다. 그의 재주가 국난을 구제할 만한데 아깝게도 잘못 불문에 투신했다'고 여기었다.
1603년(선조 36년) 가을, 스님이 조정에 사퇴를 빌고 상원사 옛 처소로 돌아와 있다가, 강릉의 내 별장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 무렵 내가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잠시 불교 경전을 가져 큰 뜻을 달래던 터라 불가의 명심견성설에 약간의 소견을 가지고 한두 가지를 시험 삼아 논해 보았더니, 스님이 모두 통달하고 환히 깨달아 진정 조계·황매의 가법을 체득하였다. 참된 종지의 적통과 은밀히 전해지는 뜻을 통투한 때문에, 세상을 제도하고 어려움을 구제한 것도 그 일단에서 나왔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며칠 오묘한 진리를 담론하는 사이에 일찍이 듣지 못했던 것을 많이 들었다. 이후부터는 스님이 도성에 오면 문득 서로 오가면서 서로 늦게 알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었다.
1610년(광해군 2년) 9월에 스님이 입적하였단 말을 듣고 글을 지어 조상하고 또 시로써 영결하였다. 나는 그 높은 풍도가 영영 멀어졌음을 섭섭해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스님이 둘째 형을 애도하던 마음이 오늘날 내가 스님을 애도하는 생각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정이란 대체 무엇이기에 사람을 그처럼 속박시켰단 말인가.
이번에 그 문도 혜구가 스님의 문집을 가지고 와서 청하기를, "우리 스승께서 지은 수천 수의 시는 일찍이 공의 둘째 형님께 보관되어 있다가 전란에 유실되었고, 이는 근자에 와서 주워 모은 것으로 태산에 비해 터럭 한 올과 같은 격차입니다. 우리가 스승의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기에 이 시 몇 권을 편성, 간행에 붙여 우리 스승의 문장의 높낮이와 도의 깊이를 알리려 하는데,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 하여 헛되이 추앙만 하지 않을 이는 공밖에 없으니, 부디 한 말씀을 주어 영원히 전하도록 한다면 이는 공의 은혜입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아, 내가 어찌 차마 스승의 글에 서문을 쓰겠는가. 스님의 시가 이미 문단에 널리 추앙되었고, 스님의 공적이 이미 국토 수복에 있었으며, 스님의 도가 이미 부처의 경지에 들었으니, 어찌 나의 서술이 있어야만 그 추중이 더 증가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의 형제는 진정 스님과 인연이 있었던 터라 어찌 글재주가 없다 하여 사양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그 시종을 서술하여 그의 청에 응하는 한편, 마음속 회포를 붙인다.
명나라 만력 임자년(1612, 광해군 4년) 정월에 교산 허단보는 서한다.
(용어) 사명집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왜국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던 사명당 유정의 문집이다. 교산은 허균이 스스로 붙인 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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