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록 제1권 · 은둔
출처: 허균, 《한정록》 제1권 〈은둔〉
배경: 《한정록》은 허균이 세상을 등지고 조용히 살아간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중국과 우리나라의 여러 책에서 뽑아 엮은 책이다. 벼슬길에서 여러 번 파직과 유배를 겪었던 허균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이 꿈꾸던 삶, 곧 권력과 이익을 좇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사는 삶을 그려 보였다. 제1권 〈은둔〉편에는 요임금 시절의 전설적인 은자부터 송나라·명나라 때 인물까지, 벼슬을 마다하고 산속이나 강가에 숨어 산 사람들의 짧은 일화 일흔 편 남짓이 실려 있다. 이야기마다 끝에 그 출전이 되는 책 이름을 밝혀 두었다. 《고사전》은 옛 은자들의 전기를 모은 책, 《하씨어림》과 《설부》, 《미공비급》 등은 중국의 여러 필기·잡록을 모은 총서들이다.
1. 소부, 허유의 가슴을 밀치다
소부는 요임금 시절의 은자다. 산속에 살면서 세상의 이익과 욕심을 좇지 않았다. 늙어서는 나무 위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소부'(둥지의 아비라는 뜻)라고 불렀다.
요임금이 천하를 허유에게 물려주려 하자, 허유가 소부를 찾아가 그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자 소부가 말했다.
"자네는 어찌하여 제 몸을 숨기지 않고 제 빛깔을 감추지 않는가?"
하고는 허유의 가슴을 밀쳐 버렸다. 허유는 서글픔을 이기지 못하고 맑고 찬 물가를 지나다가 귀를 씻고 눈을 씻으며 말했다.
"전에 탐욕스러운 말을 들은 탓에 내 벗을 저버리게 되었구나."
그러고는 마침내 떠나, 죽을 때까지 서로 만나지 않았다. (출전: 《고사전》)
2. 허유, 천하를 사양하고 귀를 씻다
허유는 사람됨이 의리를 지키고 행실이 발랐다. 옳지 않은 자리에는 앉지도 않고 옳지 않은 음식은 먹지도 않았다. 훗날 패택이라는 곳에 숨어 사는데, 요임금이 그에게 천하를 물려주려 하자 허유가 말했다.
"당신이 천하를 다스려 이미 잘 다스려지고 있는데, 내가 굳이 당신을 대신한다면 결국 명예를 바라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명예란 실질을 담는 그릇일 뿐인데, 내가 어찌 그런 그릇이 되어야 합니까. 나는 천하 같은 것은 쓸 데가 없습니다. 요리사가 제구실을 못한다고 해서, 제사를 맡은 사람이 술상을 넘어가 대신 요리를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고서 받아들이지 않고 몸을 피했다.
그 뒤 허유는 중악으로 가서, 영수 북쪽 기산 아래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요임금이 또다시 그를 불러 아홉 고을의 우두머리로 삼으려 하자, 허유는 그 말을 듣고 싶지도 않아 영수 가에서 귀를 씻었다. 그때 그의 벗 소부가 송아지를 끌고 와 물을 먹이려다, 허유가 귀를 씻는 것을 보고 까닭을 물었다. 허유가 대답했다.
"요임금이 나를 불러 아홉 고을의 우두머리로 삼으려 하는데, 그런 더러운 소리를 들었기에 귀를 씻는 것이네."
그러자 소부가 말했다.
"자네가 정말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높은 절벽 깊은 골짜기에 살았다면 누가 자네를 보았겠는가. 자네가 스스로 떠돌아다니며 명예를 구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일세. 우리 송아지 입이 더러워지겠네."
하고는 송아지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 물을 먹였다. (출전: 《고사전》)
3. 상용, 혀와 이로 세상 이치를 말하다
상용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병으로 눕자 노자가 물었다.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남겨 주실 가르침이 없으십니까?"
상용이 말했다.
"차차 말해 주겠는데, 고향을 지나다 수레에서 내리면 절로 알게 될 걸세."
노자가 물었다.
"고향을 잊지 말라는 말씀 아닙니까?"
상용이 말했다.
"큰 나무 밑을 지나가 보면 알게 되리라."
노자가 물었다.
"노인을 공경하라는 말씀 아닙니까?"
상용이 입을 벌리며 물었다.
"내 혀가 남아 있는가?"
"남아 있습니다."
"내 이가 남아 있는가?"
"없습니다."
"이제 알겠는가?"
노자가 말했다.
"강한 것은 없어지고 약한 것은 남는다는 말씀 아닙니까?"
상용이 말했다.
"천하의 이치를 다 말했구나."
(출전: 《준생팔전》)
4. 노래자, 벼슬을 마다한 아내를 따라 강남으로 떠나다
노래자는 초나라 사람이다. 세상이 어지러운 때를 만나 몽산 남쪽으로 피해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부들과 갈대로 엮은 울타리, 쑥대로 지붕을 인 집, 나뭇가지로 만든 평상, 톱풀 방석에서 살면서, 맹물에 콩밥을 먹고 지내며 산을 일구어 곡식을 심었다.
누군가 이런 사정을 초나라 임금에게 전했다. 임금이 수레를 타고 노래자의 집으로 찾아갔는데, 마침 노래자는 삼태기를 짜고 있었다. 임금이 말했다.
"나라 다스리는 일을 선생께 맡기고 싶소."
노래자가 말했다.
"그리 하십시오."
임금이 돌아가자, 산에서 나무를 해 오던 아내가 물었다.
"당신이 승낙했습니까?"
"그랬소."
아내가 말했다.
"제가 듣기로, 술과 고기로 대접받을 수 있는 사람은 채찍으로도 맞을 수 있고, 벼슬과 녹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형벌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남에게 매인 사람이 되지는 않겠습니다."
하고는 짜던 삼태기를 던져 버리고 떠났다. 노래자도 아내를 따라 강남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말했다.
"새와 짐승의 털로도 옷을 지어 입을 수 있고, 흘린 곡식알만 주워도 먹고살 수 있다."
공자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걱정스러운 낯빛을 했다고 한다. (출전: 《고사전》)
5. 검루 선생, 벼슬을 두 번 사양하다
검루 선생은 제나라 사람이다. 몸가짐을 닦고 지조가 청렴하여 제후들에게 등용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노나라 공공이 그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예를 다하며 곡식 삼천 종(예전의 곡식 단위로, 한 종은 쌀 열두 섬쯤 된다)을 내려 정승으로 삼으려 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제나라 임금 또한 예를 갖추어 금 백 근을 가지고 초빙해 높은 벼슬을 주려 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글 네 편을 지어 도가의 이치를 설명하고 책 이름을 《검루자》라 했으며, 죽을 때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출전: 《고사전》)
6. 갖옷 입은 노인, 길에 떨어진 금을 마다하다
피구공은 오나라 사람이다. 오나라 왕자 연릉 계자가 길을 가다 금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갖옷을 입고 나무를 지고 가던 피구공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 금을 가져가시오."
피구공이 낫을 내던지고 눈을 부릅뜨며 손을 저었다.
"어찌 당신은 스스로를 높이 여기면서 남은 낮추어 봅니까? 내가 비록 갖옷을 걸치고 나무를 지고 있지만, 어찌 길에 떨어진 금을 주워 가겠습니까?"
계자가 크게 놀라 한참을 이야기하다 이름을 물으니, 그가 말했다.
"내 이름은 말할 것 없습니다."
(출전: 《오월춘추》)
7. 영계기, 세 가지 즐거움을 말하다
영계기가 어디 사람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사슴 가죽 갖옷에 새끼줄을 띠 삼아 두르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는데, 공자가 태산에서 노닐다 이를 보고 물었다.
"선생은 어찌 그리 즐거워하십니까?"
그가 대답했다.
"제 즐거움은 매우 많습니다. 하늘이 낸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한데, 제가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것이 첫째 즐거움입니다. 남녀 가운데 남자가 귀하게 여겨지는데 제가 남자로 태어났으니 이것이 둘째 즐거움입니다. 세상에는 해와 달도 보지 못하고 강보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죽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이미 아흔 해를 살았으니 이것이 셋째 즐거움입니다. 가난은 선비의 일상이요 죽음은 사람의 끝인 법인데, 일상 속에 살며 그 끝을 기다리는 것이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출전: 《고사전》)
8. 삼태기 진 사람, 공자의 경쇠 소리를 듣고 평하다
하궤는 위나라 사람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벼슬하지 않고 스스로 이름을 숨겼다. 공자가 위나라에 머물며 경쇠(옛날 악기의 하나로, 돌이나 옥으로 만든 타악기)를 치는데, 하궤가 그 집 문 앞을 지나며 말했다.
"마음이 있구나, 저 경쇠 소리에는."
조금 있다가 다시 말했다.
"융통성이 없구나.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그만두면 그뿐인데, 물이 깊으면 옷 입은 채 건너고 얕으면 옷을 걷고 건너면 되는 법을."
공자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매정하구나. 그렇게만 한다면야 세상에 어려울 일이 없겠지."
(출전: 《고사전》)
9. 장저와 걸닉, 나란히 밭을 갈며 세상을 등지다
장저와 걸닉이 나란히 밭을 갈고 있었다. 공자가 그 앞을 지나다 제자 자로를 시켜 나루터를 물었다. 장저가 물었다.
"고삐를 잡고 수레에 있는 사람이 누구요?"
"공자님이십니다."
"노나라 공구라는 사람이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라면 나루터쯤은 알 것이오."
이번엔 걸닉에게 물으니 그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중유라는 사람입니다."
"노나라 공구의 제자요?"
"그렇습니다."
걸닉이 말했다.
"온 천하가 이렇듯 어지러워져 가는데, 누구와 함께 이를 바로잡겠소. 게다가 사람을 피해 다니는 사람(공자를 가리킴)을 따르는 것이, 어찌 세상 자체를 피해 사는 사람(걸닉 자신을 가리킴)을 따르는 것만 하겠소."
하고는 멈추지 않고 밭만 갈았다. 자로가 돌아가 공자에게 이 말을 전하니, 공자가 서글퍼하며 말했다.
"새나 짐승과 함께 무리 지어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내가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누구와 함께하겠는가. 천하에 도리가 살아 있다면, 내가 굳이 나서서 바로잡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출전: 《고사전》)
10. 삼태기 지팡이 짚은 노인, 자로를 나무라다
하조 장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자로가 공자를 따르다 뒤처졌을 때 그를 만나 물었다.
"저희 선생님을 보셨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사지도 놀리지 않고 곡식도 분간하지 못하면서, 누구를 선생이라 하는가."
하고는 지팡이를 세워 놓고 김만 맸다. 자로가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자, 노인은 자로를 붙들어 재워 주고 대접도 했으며 두 아들을 인사시켰다. 이튿날 자로가 떠나 공자에게 이 일을 전하니 공자가 말했다.
"숨어 사는 사람이다."
하고 자로를 다시 보내 만나 보게 했으나, 가 보니 이미 떠나고 없었다. (출전: 《고사전》)
11. 초나라 광인 접여, 공자 앞에서 봉황을 노래하다
육통은 자가 접여이며 초나라 사람이다. 천성이 몸과 마음을 닦기를 좋아하여 몸소 농사지어 먹고살았다. 초나라 소왕 때 나라 정사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며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초나라 광인'이라 불렀다.
공자가 초나라에 갔을 때, 이 초나라 광인 접여가 공자가 머무는 집 문 앞에서 노닐며 노래했다.
"봉황 같은 이여, 봉황 같은 이여, 어찌 그리 덕이 시들었는가. 앞으로 올 세상은 기대할 것이 없고, 지나간 세상은 좇을 수도 없는 것을."
공자가 수레에서 내려 말을 붙이려 했으나, 접여는 종종걸음으로 피해 버려 말을 걸 수 없었다.
초나라 왕이 육통이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금 백 일(옛 무게 단위)과 수레 두 대를 가지고 가 그를 초빙하게 했는데, 육통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사신이 떠나자 저자에서 돌아온 아내가 말했다.
"선생께서는 젊어서는 의로운 일을 하시더니, 늙어서는 어찌 그 뜻을 어기려 하십니까? 문밖에 수레바퀴 자국이 어찌 그리 깊이 났습니까? 제가 듣기로 의로운 선비는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 했습니다. 제가 당신을 모시며 몸소 농사지어 먹고 길쌈해서 옷을 지어 입으니, 배부르고 따뜻하여 우리의 즐거움이 이미 넉넉한데, 이보다는 차라리 떠나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에 남편은 솥과 시루를 지고 아내는 이부자리와 그릇을 이고서, 이름을 바꾸고 여러 이름난 산을 떠돌며 살았다. (출전: 《고사전》)
12. 상산의 네 노인, 진나라를 피해 산에 숨다
상산 사호는 하내 지 지방 사람들인데, 더러는 급 지방에서 살기도 했다. 한 사람은 동원공, 한 사람은 녹리 선생, 한 사람은 기리계, 한 사람은 하황공이라 했다. 이들 모두 도를 닦아 몸을 깨끗이 하고, 의롭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다.
진시황 때 나라 정사가 포악한 것을 보고 남전산으로 피해 들어가 이런 노래를 지어 불렀다.
"아득히 높은 산, 꾸불꾸불 깊은 골짜기, 윤기 나는 자줏빛 버섯으로 주림을 달랠 수 있도다. 요순의 태평한 세상은 멀리 가 버렸으니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높은 수레 타는 사람은 근심이 매우 큰 법, 부귀해도 남을 두려워함은 가난해도 마음 편한 것만 못하지."
그러고는 함께 상락 땅으로 들어가 지폐산에 숨어 살며 천하가 안정되기를 기다렸다. 진나라가 망하자 한나라 고조가 이 소식을 듣고 불렀으나 가지 않고, 종남산 깊숙이 숨어 끝내 나오지 않았다. (출전: 《고사전》)
13. 동방삭, 조정 안에서 세상을 피하다
동방삭(자는 만천)은 한 무제 때 낭관 벼슬을 했는데, 늘 제멋대로 행동하고 얽매이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미치광이라 불렀다. 동방삭이 말했다.
"나는 이른바 조정 안에서 세상을 피하는 사람이다. 어찌 옛사람처럼 꼭 깊은 산속에서만 세상을 피하겠는가."
술자리에서 술이 거나해지면 땅을 짚고 노래를 부르곤 했다.
"세속에 몸을 숨기고 이 세상을 피하노라. 대궐 안에서도 세상을 피하고 몸을 보전할 수 있는데, 어찌 꼭 깊은 산속 쑥대집 밑이어야 하리."
(출전: 《열선전》)
14. 정자진, 산속에서 밭 갈며 이름을 서울까지 떨치다
정자진(이름은 박)은 도를 닦아 고요히 지내며 말이 없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 고결함에 감복했다. 성제 때 임금의 외삼촌이던 대장군 왕봉이 예를 갖추어 초빙했으나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학자 양웅이 그의 덕을 칭찬하여 말했다.
"곡구의 정자진은 산속에서 밭을 갈지만 그 이름은 서울까지 떨치는구나."
풍익 지방 사람들은 비석을 세우고 지금껏 끊이지 않고 그를 기린다.
15. 엄군평, 점을 쳐 하루 벌이만 하고 문을 닫다
엄군평(이름은 준)은 숨어 살며 벼슬하지 않았다. 늘 성도의 저자에서 점을 쳐 주고 하루 백 전씩을 벌어 살았는데, 점치는 일이 끝나면 곧 가게 문을 닫고 발을 내린 뒤 책을 쓰는 일에 몰두했다. 학자 양웅이 젊을 때부터 그와 가깝게 지내며 자주 그의 덕을 칭찬했다.
이강이라는 사람이 지방 장관이 되어 기뻐하며 말했다.
"엄군평을 내 참모로 삼았으면 좋겠다."
양웅이 말했다.
"그대는 예를 갖추어 그를 만나 보아야지, 그를 억지로 굴복시켜서는 안 됩니다."
앞서 왕봉이 사귀기를 청했으나 응하지 않은 일도 있었다.
촉 지방의 부자 나충이라는 사람이 엄군평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찌 벼슬하지 않습니까?"
엄군평이 말했다.
"스스로 나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충이 그를 위해 수레와 말, 옷과 양식을 마련해 주려 하자 엄군평이 말했다.
"나는 그저 병이 났을 뿐이지, 부족한 것이 있어 그런 게 아닙니다. 나는 넉넉하고 당신은 부족한데, 어찌 부족한 당신이 넉넉한 나를 도와야 합니까?"
나충이 말했다.
"나는 만금을 가졌고 당신은 곡식 한 섬도 없는데, 당신이 넉넉하다는 말은 틀린 말 아닙니까?"
엄군평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에 내가 당신 집에서 자던 날, 밤이 깊어도 일이 끝나지 않아 밤낮으로 바빴고 만족할 때가 없었습니다. 지금 나는 점치는 일을 업으로 삼아 자리에서 내려갈 것도 없이 저절로 돈이 들어오고, 오히려 수백 냥이 남아돌아 먼지가 한 치나 쌓였는데도 어디에 쓸지를 모릅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넉넉하고 당신이 부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충이 크게 부끄러워했다. 엄군평이 탄식하며 말했다.
"나에게 재물을 보태 주는 사람은 내 정신을 해치고, 나를 이름나게 해 주는 사람은 내 몸을 죽이는 법이기에 벼슬하지 않는 것이오."
당시 사람들이 이 말에 탄복했다. (출전: 《고사전》)
16. 장원경, 뜰에 세 갈래 길만 남겨 두다
장원경(이름은 허)은 집 안에 소나무, 대나무, 국화가 심긴 세 갈래 오솔길만을 남겨 두고 살았다. 오직 양중과 구중이라는 두 사람만이 그와 어울렸는데, 이 둘 역시 염치를 지키며 이름나기를 꺼리던 선비들이었다. (출전: 《하씨어림》)
17. 정차도, 마름 잎으로 자리를 삼다
정차도는 벼슬을 버리고 의피라는 못의 남쪽에 숨어 살았다. 같은 고을의 등경이라는 사람과 함께 마름 잎을 따서 자리를 만들고 연잎에 안주를 차려 놓은 뒤, 바가지에 술을 가득 부어 놓고 웃고 이야기하며 하루를 보냈다. 쑥대와 나뭇가지로 가린 창가에서 홀로 거문고를 타고 책 읽기를 즐겼다. (출전: 《하씨어림》)
18. 왕군공, 저잣거리에 숨어 살다
왕군공은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고도 떠나지 않고, 소를 사고파는 거간꾼 노릇을 하며 저잣거리에 몸을 숨겼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두고 "세상을 피해 담장 동쪽에 사는 왕군공"이라 했다. (출전: 《세설신어보》)
19. 왕중자, 벗에게 문전박대를 당하다
왕중자(이름은 량)는 조정의 높은 감찰직에 있다가 병으로 물러나 고향에 돌아가 있었다. 뒤에 형양이라는 고을의 수령으로 다시 부름을 받았는데, 병이 심해 곧장 임지로 가지 못하고 벗의 집에 들렀다. 그런데 그 벗이 만나 주려 하지 않으며 말했다.
"충직한 말도 기묘한 계책도 없이 높은 자리만 차지하고서는, 어찌 그리 가만히 있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며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는가?"
(출전: 《사문유취》)
20. 양홍, 다섯 가지 슬픔의 노래를 짓다
양홍(자는 백란)은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궁궐 소유의 동산에서 돼지를 치며 살았는데, 한번은 실수로 불을 내어 이웃집까지 태우고 말았다. 양홍은 집이 불탄 사람을 찾아가 손해를 묻고 자기 돼지로 모두 갚았는데, 그 집주인이 그래도 적다고 여기자 양홍은 몸소 그 집 머슴이 되어 게으름 없이 일했다. 이웃 노인들이 양홍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보고 모두 주인을 나무라며 양홍을 장자답다고 칭찬하니, 주인이 그제야 놀라 돼지를 모두 돌려주려 했다. 그러나 양홍은 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세력 있는 집안에서 그의 높은 지조를 사모하여 사위로 삼으려는 사람이 많았으나, 양홍은 모두 거절하고 장가들지 않았다. 같은 고을의 맹씨 집에 얼굴이 못생긴 딸이 있었는데, 여러 혼처를 마다하고 시집가려 하지 않으므로 부모가 까닭을 물으니 딸이 말했다.
"양백란처럼 현명한 사람을 얻고 싶어서입니다."
양홍이 이 말을 전해 듣고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 그녀는 시집올 때 좋은 혼수를 갖추어 왔는데, 이레가 지나도록 양홍이 말을 건네지 않았다. 아내가 까닭을 말해 달라 청하니 양홍이 말했다.
"나는 너절한 옷을 입고 깊은 산중에 함께 숨어 살 수 있는 사람을 바랐는데, 지금 그대는 비단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있으니 어찌 내가 바라던 바이겠는가?"
아내가 말했다.
"당신의 뜻을 시험해 보려던 것뿐입니다. 저에게는 원래 숨어 살 때 입을 옷이 따로 있습니다."
하고는 곧바로 머리를 소박하게 틀어 올리고 베옷으로 갈아입고 일할 채비를 하고 나오니, 양홍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이야말로 참으로 나의 아내로다. 나를 잘 받들겠구나."
하고는 이름을 '덕요'라 지어 주었다. 얼마 뒤 부부는 함께 패릉산 속으로 들어가 밭 갈고 길쌈하는 것을 일삼았고, 시와 책을 읊조리고 거문고 타기를 낙으로 삼았다. 옛 고사들을 사모하여 상산 사호 이래 스물네 사람을 기리는 글을 짓기도 했다.
이어 동쪽으로 관문을 나서 서울을 지나며 '다섯 가지 슬픔'이라는 노래를 지었는데, 이를 들은 임금 숙종이 양홍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다. 이에 양홍은 성과 이름을 바꾸고 아내와 함께 제나라와 노나라 땅 사이를 떠돌며 살았다. 얼마 뒤 다시 그곳을 떠나 오나라로 가서, 고백통이라는 사람의 처마 밑에 몸을 붙이고 남의 방아를 찧어 주며 살았다.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가 늘 밥상을 눈썹 높이까지 받들어 올리며 내왔는데, 고백통이 이를 눈여겨보고 예사롭지 않게 여겨 자기 집에서 살도록 해 주었다. 양홍은 조용히 문을 닫고 열 몇 편의 글을 지었는데, 병들고 지친 끝에 주인에게 말했다.
"옛날 연릉 계자도 다른 지역에서 죽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으니, 우리 자식들도 내 시신을 옮겨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양홍이 죽자 고백통 등이 그를 위해, 옛 자객 요리의 무덤 곁에 자리를 구해 장사 지냈다. (출전: 《후한서》)
21. 장중울, 쑥대에 묻혀 살다
장중울은 같은 고을의 위경경이라는 사람과 함께 도를 닦으며, 몸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늘 곤궁하고 쓸쓸하게 지내, 사는 곳이 쑥대로 뒤덮여 길마저 가려질 정도였다. 문을 닫고 앉아 오직 타고난 성품을 기를 뿐 헛된 명성을 좇지 않았으므로, 그 시절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출전: 《하씨어림》)
22. 한강, 약초 값을 에누리해 주지 않다
한강(자는 백휴)은 늘 이름난 산을 다니며 약초를 캐다가 서울 저잣거리에서 팔았는데, 값을 에누리해 주지 않은 지가 벌써 삼십여 년이었다. 하루는 어떤 여인이 한강에게 약초를 사면서 그가 값을 고집하자 성을 내며 말했다.
"당신이 뭐 한백휴라도 되시오? 약초 값을 에누리해 주지 않으려 하게."
한강이 한탄하며 말했다.
"내가 이름을 숨기려 하는데, 지금 이런 여인네까지 나를 알아보니 어찌 약초 파는 일을 계속하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패릉산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출전: 《후한서》)
23. 상자평, 자식들 혼인을 마치고 훌쩍 떠나다
상장(자는 자평)은 숨어 살며 벼슬하지 않았다. 성품이 치우침 없는 조화로움을 숭상하여 《노자》와 《역경》의 이치를 즐겨 익혔다.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었으므로, 남을 돕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음식을 보내오면 먹을 만큼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보냈다. 왕망 밑에서 높은 벼슬을 하던 왕읍이 그를 만나 보고 해마다 찾아와 왕망에게 천거하려 했지만 상자평이 한사코 사양하므로 그만두었다.
집에서 조용히 《역경》을 읽다가 손괘와 익괘에 이르러서는 탄식하며 말했다.
"부유함이 가난함만 못하고 귀함이 미천함만 못하다는 것은 이미 알겠으나, 죽었다가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지는 아직 알지 못하겠다."
건무 연간 무렵 자녀들의 혼인을 모두 마치자, 집안일과는 인연을 끊고 마치 자기가 이미 죽은 것처럼 여기며 상관하지 말라 하고는, 마침내 마음 내키는 대로 떠났다. 서로 잘 지내던 북해 땅의 금경이라는 벗과 함께 이름난 산들을 두루 노닐었는데, 끝내 어디서 죽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출전: 《후한서》)
24. 대동, 태수에게 오히려 그대가 고통스럽겠다고 말하다
대동(자는 효위)은 벼슬하지 않고 무안의 산속에 굴을 파고 살며 약초를 캐어 먹고살았다. 나라에서 초기에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위군의 지방관이 대추와 밤을 예물로 가지고 와 대동을 만나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물었다.
"그대 생활이 이렇듯 고통스러운데, 어떻습니까?"
대동이 말했다.
"저는 다행히 타고난 성품을 끝까지 지키고 정신을 기르며 화평한 기운을 길러 왔습니다. 세상일을 경영하느라 정신을 지치게 하지 않고 욕심을 덜어 내어 담담한 마음으로 만족하니,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명하신 사군께서는 백성을 돌보고 다스리시느라 밤에도 일이 잘못될까 걱정이 크실 텐데, 그것이야말로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는 마침내 자취를 감추어 숨어 버리고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출전: 《고사전》)
25. 서치, 상 하나로 특별한 손님을 대접하다
서치(자는 유자)는 젊어서부터 학문과 행실로 남쪽 지방에 이름이 높았다. 환제 때 여남 사람 진번이 예장 지방의 태수가 되었는데, 평소 손님을 잘 받지 않다가도 오직 서치가 오면 특별히 의자 하나를 마련해 두었다가 그가 떠나면 그것을 다시 매달아 두었다. 다섯 차례나 어질고 청렴한 사람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일찍이 태위 벼슬의 황경에게서 부름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황경이 죽자 서치는 걸어서 장례에 가 닭고기와 술을 차려 놓고 울다가 떠났다. 그 자리에 모였던 곽태 등이 이 소식을 듣고 혹시 서치가 아니었나 하여, 말재주 좋은 모용이라는 사람을 보내 뒤쫓게 했다. 모용이 도중에 서치를 만나 술자리를 마련하니, 서치는 조용히 농사짓는 이야기만 하다가 떠나면서 이렇게 부탁했다.
"곽태에게 이렇게 전해 주시오. '큰 나무가 넘어지려 할 때는 새끼줄 하나로는 붙잡을 수 없는 법인데, 어찌 자꾸 기웃거리며 가만있지 못하는가.'"
(출전: 《고사전》)
26. 곽태, 부의 한 묶음을 보고 그 사람을 알아보다
곽태(자는 임종)는 젊어서부터 부모를 잘 섬겨 효자로 이름이 났다. 집이 가난하여 고을에서 관리로 삼으려 하자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
"대장부가 어찌 마부 노릇을 하며 하찮은 녹을 받겠는가."
하고는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같은 고을의 종중이라는 이와 함께 서울로 가서 굴백언에게 《춘추》를 배웠는데, 널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관상도 잘 보아 이 때문에 진나라와 양나라 지역에까지 이름이 났다.
한번은 길을 가다 비를 만나 두건 한쪽 귀가 접혔는데, 사람들이 그를 사모한 나머지 모두 일부러 두건 귀를 접었다. 선비들이 다투어 그를 따르며 관상 봐 달라 청한 쪽지가 수레에 가득했는데, 곽태가 알고 지내던 이름 없는 인사 육십여 명은 뒷날 모두 그의 말대로 되었다.
어머니 상을 당해 돌아왔을 때, 서치가 조문 와서 볏짚 한 묶음을 곽태의 여막 앞에 놓고 갔다. 곽태가 말했다.
"이는 틀림없이 남쪽의 서유자(서치)일 것이다. 《시경》에도 '볏짚 한 묶음인데, 그 사람됨이 옥과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구나."
(출전: 《후한서》)
27. 원굉, 흙집에서 어머니께 절만 올리다
원굉(자는 하보)은 뜰 가운데 흙으로 방을 쌓고 문을 닫은 채 손님을 만나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그 방 안에서 어머니를 향해 절을 올렸는데, 아들이 찾아와도 만나 주지 않아 아들 역시 방문을 향해 절만 하고 돌아갔다. 머리에는 두건도 쓰지 않고 몸에는 홑옷 한 벌 걸치지 않았으며 발에는 나무신을 신었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상복이나 신주를 마련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관용 수레를 두 차례나 보내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이를 두고 범방이 이렇게 칭찬했다.
"숨어 살면서도 어버이를 버리지 않았고, 지조를 지키면서도 세상과 인연을 끊지는 않았으니, 참으로 지극한 현자로다."
(출전: 《고사전》)
28. 신도반, 홀로 화를 면하다
신도반(자는 자룡)은 젊어서부터 명성과 지조가 있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몸이 여윌 정도로 슬퍼하며 그리워했고, 십여 년 동안 술도 마시지 않고 고기도 먹지 않았으며, 마침내 숨어 살면서 여러 차례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앞서 범방 등이 조정의 정책을 비판하자, 높은 벼슬아치들부터 몸을 낮추었고, 태학의 학생들도 서로 그 기개를 사모하며 학문이 앞으로 크게 일어나고 초야에 묻힌 선비들이 다시 쓰이게 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신도반만은 홀로 탄식하며 말했다.
"옛날 전국 시대에 초야의 선비들이 함부로 나서서 논란을 벌이자, 여러 나라의 임금들이 비를 들고 몸소 앞길을 쓸며 공경을 표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책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이는 화를 부르고 말았으니, 지금이 꼭 그 짝이다."
하고는 마침내 양갈이라는 곳에 자취를 숨기고 나무에 의지해 집을 짓고 살며, 스스로 품팔이꾼처럼 지냈다. 그로부터 두 해 뒤 과연 조정을 비판하던 선비들이 대거 화를 입어 형벌로 죽은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르렀으나, 신도반은 아무 탈 없이 그 화를 면했다.
29. 관영, 화흠과 자리를 나누어 앉다
관영(자는 유안)은 젊었을 때 화흠과 한방에서 함께 글을 읽었는데, 문밖으로 수레 탄 높은 사람이 지나가자 화흠이 책을 내던지고 뛰쳐나가 구경했다. 관영이 이를 부끄럽게 여겨 자리를 갈라 앉으며 말했다.
"자네는 내 벗이 아닐세."
또 한번은 화흠과 함께 남새밭을 매다 금덩이가 나왔는데, 관영은 호미질을 계속하며 돌아보지도 않았으나 화흠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가 던져 두었다.
한나라 말엽부터 위나라 초까지 스무 해 동안을 요동에서 살며 세상과 등지고 큰 뜻을 길렀는데, 위나라 명제가 편안한 수레와 비단과 구슬을 보내 초빙했지만 관영은 받지 않았다. 집이 가난한데도 학문을 좋아하여 명아주 나무로 만든 걸상 하나를 오십 년이나 써서, 무릎 닿는 자리가 모두 닳아 뚫렸다. (출전: 《고사전》)
30. 방덕공, 자손에게 편안함을 남겨 주다
방덕공은 현산 남쪽에 살며 관청이 있는 성안으로는 들어가는 일이 없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손님 대하듯 공경했다.
형주 지방의 장관 유표가 그를 초청했으나 따르게 할 수 없자, 몸소 찾아가 문안하며 말했다.
"제 한 몸 보전하는 것이 어찌 천하를 보전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방덕공이 말했다.
"큰 기러기는 높은 숲 위에 집을 지어 저물면 그곳에 깃들고, 자라와 악어는 깊은 못 속에 굴을 파 저녁이면 그곳에서 잡니다. 사람이 나아가고 물러나며 행동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로, 저마다 깃들고 잠들 곳이 있으면 그뿐이지 천하란 것은 애초에 보전할 대상이 아닙니다."
하고는 언덕 위에서 일손을 놓았는데, 그의 아내는 앞쪽 밭에서 김을 매고 있었다. 유표가 그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선생께서 이토록 고생스럽게 농사만 지으며 벼슬과 녹을 마다하시니, 훗날 자손에게 무엇을 남겨 주시렵니까?"
방덕공이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위태로운 것을 자손에게 남기지만, 저는 홀로 안전한 것을 남겨 줄 것입니다. 남겨 주는 것이 남들과 다를 뿐이지, 남겨 줄 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유표가 탄식하고 돌아갔다. 그 뒤 방덕공은 마침내 아내를 데리고 녹문산에 올라 약초를 캐며 살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출전: 《고사전》)
31. 사마휘, 무엇을 물어도 좋다고만 답하다
사마휘(자는 덕조)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형주에 있을 때 그 지방 장관 유표가 어리석어 반드시 착한 사람을 해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다물고 다시는 남을 평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런저런 인물에 대해 사마휘에게 물으면, 그 사람이 뛰어난지 못한지를 가리지 않고 늘 좋다고만 대답했다. 그의 아내가 나무라며 말했다.
"사람들이 의심나는 것을 물으면 당신이 마땅히 시비를 가려 말해 주어야 하는데, 모두 좋다고만 하시니 어찌 사람들이 당신에게 묻는 본뜻에 맞겠습니까?"
사마휘가 말했다.
"당신의 그 말 역시 좋은 말이오."
32. 방통, 이천 리 길을 찾아가 사마휘를 만나다
남군 사람 방통(자는 사원)이 사마휘가 영천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이천 리 길을 찾아가 기다리다, 마침 뽕잎을 따고 있던 사마휘를 만났다. 방통이 수레에 앉은 채 말했다.
"제가 듣기로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살면 마땅히 칼을 차고 인끈을 두른 높은 벼슬에 올라야 한다 했는데, 어찌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을 역량을 지니고도 길쌈하는 아낙네의 일을 하고 계십니까?"
사마휘가 말했다.
"당신은 우선 수레에서 내리시오. 당신은 지름길이 빠른 줄만 알지, 자칫 길을 잃고 헤매게 될 수도 있음은 생각하지 않는군요. 옛날 백성자고(요임금 때 사람)는 짝지어 밭을 갈며 제후 되기를 바라지 않았고, 원헌(공자의 제자)은 오두막에서 살며 그것을 관청 건물과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집에 살고 살진 말을 타고 다니며 시중드는 여인이 수십 명은 되어야 대단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바로 허유와 소부가 개탄하고 백이와 숙제가 길게 탄식하던 바입니다. 설령 나라를 훔친 벼슬자리와 수레 천 대를 부릴 만한 부를 가진들 그리 귀할 것이 없습니다."
방통이 말했다.
"제가 변방에서 나고 자라 큰 도리를 볼 기회가 적었는데, 만약 오늘 큰 종을 한번 쳐 보고 큰 북을 한번 울려 보지 않았더라면, 그 웅장한 소리를 끝내 알지 못했을 뻔했습니다."
(출전: 《고사전》)
33. 손등, 불빛과 재주는 쓰기 나름이라 말하다
손등(자는 공화)은 가족 없이 고을 북쪽 산에 토굴을 파고 살았다. 《역경》 읽기와 외줄 거문고 타기를 좋아했으며 화내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이 짓궂게 그를 물속에 던져 화를 내는지 시험해 보아도, 손등은 물에서 나오면 그저 크게 웃을 뿐이었다.
한번은 의양산에 살며 숯을 굽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를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차려 말을 붙여 보려 해도 응답하지 않았다. 완적이 찾아가 말을 걸었으나 대답이 없었고, 혜강 또한 삼 년을 그와 어울리며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으나 끝내 답을 듣지 못했다. 혜강이 작별하며 말했다.
"선생께서는 끝내 말씀을 안 하시렵니까?"
그제야 손등이 말했다.
"당신은 불을 아십니까? 불은 타올라 빛을 내지만 그 빛을 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니, 빛이란 결국 쓰기에 달린 것입니다. 사람도 재주를 타고나지만 그 재주를 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니, 재주 역시 쓰기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을 쓰려면 땔감을 얻어야 그 빛을 오래 지킬 수 있고, 재주를 쓰려면 참된 이치를 알아야 제 목숨을 지킬 수 있는 법입니다. 지금 당신은 재주는 많으나 식견이 적어 지금 같은 세상에서 화를 면하기 어려울 듯한데, 달리 구할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혜강은 이 말을 따르지 않다가 결국 비명에 죽고 말았다. 혜강은 죽기 전 '유분'이라는 시를 지어 이렇게 읊었다.
"예전의 유하혜에게도 부끄럽고, 지금의 손등에게도 부끄럽구나."
손등은 끝내 어디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었다. (출전: 《위지》)
34. 손등, 완적과 휘파람으로 화답하다
손등은 마음이 맑고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아, 《역경》 읽기와 거문고 타기를 즐기며 자유롭게 지냈는데, 그 풍모를 보노라면 마치 속세를 떠나 노니는 듯했다. 위나라 말엽 북산 속에 살며 돌굴을 집으로 삼고 풀을 엮어 신을 삼아 신었다.
완적이 손등을 찾아갔을 때, 그가 머리를 풀어헤친 채 바위 밑에 단정히 앉아 거문고를 타고 있는 것을 멀리서 보고는 뛰어올라갔으나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이에 완적이 길게 휘파람을 불어 거문고 소리에 화답하니, 손등도 휘파람으로 화답하여 그 오묘한 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출전: 《고사전》)
35. 완적, 소문산에서 진인을 만나다
완적의 휘파람 소리는 수백 걸음 밖까지 들렸다. 나무하러 갔던 사람들이 소문산 속에 갑자기 도를 통달한 사람이 나타났다고 하므로, 완적이 찾아가 보니 그가 바위 곁에서 무릎을 끼고 앉아 있었다. 완적이 언덕을 올라 다가가니, 그는 두 다리를 뻗은 채 마주 앉았다.
완적이 아득한 옛날의 일을 논하여, 위로는 황제와 신농의 깊은 이치를 말하고 아래로는 하ㆍ은ㆍ주 삼대의 아름다운 덕을 물었으나, 그는 고개만 들 뿐 대답이 없었다. 완적이 다시 세상을 다스리는 가르침과 정신을 안정시키고 원기를 이끄는 양생법을 말했으나 그는 여전히 꿈쩍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완적이 마주 앉아 한참 동안 길게 휘파람을 불자, 그제야 그가 웃으며 말했다.
"다시 한번 해 보시오."
완적이 흥이 다하도록 다시 휘파람을 불었다. 완적이 고개를 반쯤 내려왔을 때, 위쪽에서 구슬픈 소리가 들려왔는데 마치 여러 악기가 산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돌아보니 바로 그 사람이 휘파람을 불고 있었던 것이다. (출전: 《고사전》)
36. 하통, 노래 한 자락에 바람과 구름을 부르다
하통(자는 중어)은 몸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어머니 병이 위독하여 낙양으로 약을 사러 갔는데, 마침 삼짇날이라 낙양의 높은 벼슬아치들이 모두 다리로 나와 구경하느라 수레가 구름처럼 모여 있었으나, 하통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세도가 가충이 배를 저어 다가가 말을 붙여 보니 하통의 대답이 메아리치듯 또렷했다. 가충이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하통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가충이 물었다.
"당신 고향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하통이 말했다.
"옛날 조아라는 효녀가 물에 빠져 죽자 나라 사람들이 애처롭게 여겨 그를 위해 노래를 지었고, 오자서가 충성하다 바다에 빠져 죽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위해 또 다른 노래를 지었습니다. 지금 그 노래를 불러 보고 싶습니다."
하고는 발로 뱃전을 두드리며 맑고 격렬하게 곡조를 뽑으니, 큰바람이 일고 구름과 비가 몰려들었다. 가충이 화려하게 꾸민 기녀들을 시켜 배를 세 겹으로 둘러싸게 했지만, 하통은 여전히 다리를 괸 채 앉아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했다. 가충이 탄식하며 말했다.
"이 오나라 사람은 목석 같은 심장을 지녔구나."
(출전: 《진서》)
37. 동경, 시 두 편만 남기고 사라지다
동경(자는 위연)은 젊은 시절 농서 지방의 회계 담당 관리와 함께 낙양으로 가서 머리를 풀어헤친 채 다녔고, 산책하며 시를 흥얼거렸는데 늘 백사라는 곳 근처에서 지냈다. 이때 저작랑 벼슬의 손초가 자주 백사로 찾아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런 지 두어 해 만에 동경은 떠나 버려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그가 잠자던 자리에는 다만 돌로 만든 작은 물건 하나와 시 두 편만이 남아 있었다. 그중 한 편은 이러했다.
"하늘의 도는 굳세고 간명하며, 땅의 몸은 두텁고 조밀하도다. 아득한 큰 자연을, 본받고 이어받아야 하거늘, 말세의 흐트러진 풍조는, 겉치레로 본질을 바꾸었구나. 지루한 세속의 일들, 누가 그 실상을 알리오. 이제 그 헛된 것들 버리고, 나는 자연의 방으로 돌아가리라."
또 다른 한 편은 이러했다.
"공자도 때를 만나지 못하여, 기린을 보고 감격하였네. 기린이여, 기린이여, 어찌 세상을 피하지 않고 그 참모습을 드러냈던가."
(출전: 《고사전》)
38. 장천, 참대밭 속으로 몸을 피하다
장천(자는 효거)은 숨어 살며 뜻을 닦았다. 집에 참대 수십 이랑이 있었는데, 장천이 그 대밭 속에 집을 짓고 늘 그 안에서 지냈다. 유명한 서예가 왕휘지가 이 말을 듣고 찾아갔으나, 장천은 대밭 속으로 몸을 피해 끝내 만나 주지 않았다. (출전: 《하씨어림》)
39. 도담, 홀로 앉아 남과 어울리지 않다
도담(자는 처정)은 열다섯 나이에 벌써 도가의 양생법을 익혀 곡식을 끊었다. 집에는 수천 냥의 재산이 있고 종과 식객이 수백 명이나 되었지만, 도담은 하루 종일 단정히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을 뿐 끝내 혼인도 벼슬도 하지 않았다. 임상현의 산속에 살며 작은 초가를 지었는데 겨우 몸 하나 들어갈 만한 크기였고, 이따금 집에 돌아오면 작은 평상을 가져다 혼자 앉을 뿐 남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출전: 《하씨어림》)
40. 유자기, 아버지께 먼저 인사드려야 한다며 손님을 물리다
유자기(진나라 사람으로, 본이름은 인지이고 자기는 그의 자다)는 겸허하여 욕심이 없고 세상을 등질 뜻을 품고 있었다. 세도가 환충이 그에게 참모 자리를 청했으나 굳이 사양했다. 환충이 몸소 그 집을 찾아갔을 때 유자기는 뽕나무 가지를 치고 있었는데, 심부름꾼이 환충의 뜻을 전하자 유자기가 말했다.
"사군께서 이렇게 몸소 왕림하셨으니, 먼저 제 아버지께 인사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환충이 유자기의 아버지에게 가니, 그 아버지는 유자기를 불러들여 다시 거친 베옷으로 갈아입게 하고는 환충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들 유자기를 시켜 안에서 막걸리와 채소를 가져다 손님을 대접하게 했다. 환충이 사람을 시켜 유자기를 대신해 술을 따르게 하려 하자, 그 아버지가 사양하며 말했다.
"그것은 마치 시중드는 사람을 시키는 것과 같아, 초야에 사는 우리의 본분에 맞지 않습니다."
환충이 이 말을 듣고 흡족하게 여기며 칭찬했고, 날이 저물어서야 자리를 떴다. (출전: 《하씨어림》)
41. 곽우, 날아가는 기러기를 가리키다
곽우(자는 원유)는 젊어서부터 세속을 벗어난 기품이 있었다. 바위굴에 숨어 사는데, 지방 세력가 장천석이 사신을 보내 예물을 갖추어 초빙하자, 곽우는 사신에게 날아가는 기러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새를 어떻게 가두어 둘 수 있겠소."
(출전: 《하씨어림》)
42. 색습, 태수를 감탄하게 하다
색습(자는 위조)은 잡념이 없고 마음이 안정되어 학문을 좋아했다. 고을에서 불러도 응하지 않았는데, 한번은 태수 음담이 찾아와 하루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돌아가려 하면서 이렇게 탄식했다.
"세상 사람들이 넉넉하다고 여기는 것은 부귀입니다. 눈은 화려한 빛깔을 좋아하고 귀는 음악 소리를 즐거워하지요. 그런데 선생께서는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을 버리고 사람들이 버리는 것을 취하시며, 아무 맛도 없는 것을 황홀한 경지가 되도록 음미하시고, 지극히 오묘한 이치를 온갖 묘리 속에서 아울러 지니셨습니다. 살림살이는 몇 이랑 밭에 지나지 않는데 마음은 온 세상을 잊으셨고, 몸은 속세에 있으면서 마음은 하늘 밖에 두셨으니, 옛 은자 검루의 고매함이나 장자의 초연함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겠습니다."
하고는 그를 기려 '현거 선생'이라는 호를 지어 올렸다. (출전: 《고사전》)
43. 대옹, 병 요양차 옮긴 곳이 절로 그윽해지다
대옹(자는 중약)은 동려 땅이 외지고 멀어 병을 요양하기 어려웠으므로 오나라 지역으로 나와 살았다. 그곳 선비들이 나서서 집을 지어 주었는데, 돌을 모으고 물을 끌어들이고 나무를 심고 시내를 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이 우거져 마치 원래부터 그러했던 자연 풍경처럼 보였다. (출전: 《하씨어림》)
44. 저백옥, 뒷문으로 나가 산속으로 들어가다
저백옥(자는 원거)은 젊어서부터 은거하려는 뜻이 있어 즐기는 것도 욕심내는 것도 없었다. 열여덟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새 며느리를 맞아 앞문으로 들이는 날 저백옥은 뒷문으로 빠져나가, 마침내 섬거 지방의 폭포산에서 살았다. 추위와 더위를 잘 견뎌 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옛 은자 왕중부에 견주었다. (출전: 《하씨어림》)
45. 유영예, 임금의 편지에 은자의 도리로 답하다
유영예는 임금이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경릉왕이 편지를 보내 뜻을 전하자 유영예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늘 병으로 누워 지내는 몸으로, 하루 세끼 요기만 하면 산수 사이에서 남은 정을 풀고 물고기와 새에게 남은 생을 의탁하며 지내니, 이 어찌 요순과 같은 크나큰 은덕이요 주공이나 소공 같은 큰 혜택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세상 온갖 기미를 살펴 오묘한 경지에 이르지도 못했으니 옛 현자들과 견줄 바탕도 없고, 마음을 하나로 모아 세속의 얽매임을 벗어나지도 못했으니 옛 은자들만 한 지조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먼 곳까지 은덕이 미치고 어진 예를 먼저 베풀어 주시니, 삼가 나무꾼이라는 부끄러움을 거두고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그 후한 뜻을 기릴 따름입니다."
(출전: 《하씨어림》)
46. 고암, 산새가 손바닥에 날아들다
고암(자는 장유)은 은거하려는 뜻이 있어 벗 고경이와 함께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고경이는 만년에 양생법을 익히며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는데, 아침마다 문을 나서면 산새들이 그의 손바닥에 모여들어 먹이를 쪼아 먹었다. (출전: 《하씨어림》)
47. 종측, 남의 녹을 먹으며 그 근심까지 짊어질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다
종측(자는 경미)은 일찍이 이렇게 탄식한 적이 있었다.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으면 벼슬자리를 가리지 않고 나선다'는 말을 옛 현인들은 아름다운 이야기로 여기지만, 나는 그것이 미혹된 생각이라 여긴다. 땅속에 묻힌 금을 절로 튀어나오게 하거나 강 속의 잉어를 절로 뛰쳐나오게 할 수는 없지만, 하늘의 이치를 따르고 땅의 이로움을 잘 살피면 되는 것을, 어찌 남에게서 후한 녹을 받아먹으며 그의 큰 근심까지 짊어져야 하는가."
예장왕이 종측을 불러 참모로 삼으려 하자, 종측이 사양하며 말했다.
"저는 성품이 물고기나 새와 같아서 산골짜기에 있기를 좋아하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그리워하며, 사람 다니는 길을 놓치기 일쑤고 바위 계곡을 미친 사람처럼 쏘다니느라 늙는 줄도 몰랐습니다. 지금은 귀밑머리가 이미 희어졌는데, 어찌 헛된 책임을 지고서 물고기와 새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어복후라는 이가 강주의 수령이 되어 종측에게 후하게 예물을 보내자, 종측이 이렇게 사양했다.
"젊어서부터 산에 미쳐 약초를 캐느라 먼 이곳까지 흘러들었습니다. 배고프면 솔잎을 먹고 옷이 없으면 칡덩굴로 옷을 지어 입어도 담담히 만족스러운데, 어찌 이런 과분한 것을 받겠습니까."
(출전: 《하씨어림》)
48. 손백예, 벼슬에 끌려다니는 것은 혜강도 견디지 못한 일이라 말하다
손백예는 뜻을 세속 밖에 두고 마음을 산골짜기에 두었다. 벼슬 높은 왕씨와 범씨 두 사람과 가깝게 지냈는데, 이 둘이 대를 이어 정승 자리에 오르며 손백예에게도 벼슬을 시키려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 백 년이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것이니, 정말로 마음을 화평하게 하고 타고난 성품을 기르며 거문고와 술에 정을 붙여야 하거늘, 어찌 기웃거리며 이 세상일에 끌려다니겠는가. 이는 혜강조차 견디지 못한 일이었으니, 나 또한 하지 못할 일이다."
(출전: 《하씨어림》)
49. 도홍경, 산속엔 흰 구름만 가득하다 답하다
양나라의 도홍경은 화양산에 숨어 살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임금 고조가 찾아가 물었다.
"산속에 무엇이 있소?"
도홍경이 이렇게 답했다.
"산속에 무엇이 있느냐 하시니, 산마루 위엔 흰 구름만 가득합니다. 다만 혼자서 즐길 수 있을 뿐, 가져다 임금님께 드릴 수는 없지요."
그 뒤 무제가 여러 차례 초빙했지만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출전: 《사문유취》)
50. 명승소, 임금이 오면 뒷담을 뚫고 도망가겠다 답하다
명승소(자는 승렬)는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일찍이 승려 승원의 풍모와 덕행을 전해 듣고 정림사로 찾아갔다. 이때 태조가 절에 나와 그를 만나려 하니, 승원이 명승소에게 물었다.
"만일 천자께서 오신다면 거사께서는 어떻게 대하시렵니까?"
명승소가 말했다.
"산속 사람인 저로서는 마땅히 뒷담을 뚫고 도망쳐야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옛 은자 대공이 했던 대로 하겠습니다."
(출전: 《하씨어림》)
51. 장영서, 벗과 함께 두 은자로 불리다
장영서가 관강지라는 벗과 경구 땅에 숨어 살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 둘을 '경구의 두 은자'라 불렀다. (출전: 《하씨어림》)
52. 하구, 벼슬을 피해 하룻밤 사이 배로 달아나다
하구(자는 자유)는 맑고 고결하며 겸손하여 욕심이 없었다. 오나라의 피약사라는 절에 살며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송나라 명제가 도성으로 불러 영가 지방의 태수 벼슬을 내렸다. 하구는 그때 남간사에 머물며 조정에 나아가지 않으려고 교외에서 임금의 명을 받겠다고 청하여 허락을 얻어 냈는데, 하룻밤 사이 작은 배를 타고 호구산으로 도망쳐 숨어 버렸다. (출전: 《하씨어림》)
53. 유언도, 나무에 격문을 걸어 두고 달아나다
유언도는 젊어서부터 은거하려는 뜻이 있었다. 형이 아내 될 사람을 데려와 며칠 안으로 혼사를 치르려 하자, 유언도는 이 말을 듣고 도망쳐 숨었다가 혼사가 미루어지고 나서야 돌아왔다. 고을의 장관 장직이 불러 문서 담당 벼슬을 시키려 하자, 유언도는 사직서를 나무에 걸어 놓고 도망쳤다.
진류 땅의 완효서는 학식이 넓고 숨어 살면서 세상과 접촉하지 않아, 사람들이 찾아가도 만날 수 없었는데, 유언도가 다짜고짜 한번 찾아가자 완효서는 한 번 보고 곧 마음이 통하는 벗이 되었다. 유언도의 친척 형 유사광 역시 고결한 지조로 살아가, 세 사람이 밤낮으로 서로 어울리므로 도성 사람들이 이들을 '세 은자'라 불렀다. (출전: 《빈사전》)
54. 송섬, 겹겹이 다락문을 닫아걸고 태수를 물리치다
송섬(자는 영애)은 젊어서부터 원대한 뜻이 있고 마음이 차분하여 세상 사람들과 사귀지 않았다. 주천 땅 남산에 살았는데 배우러 오는 제자가 삼천여 명이나 되었다. 고을에서 여러 차례 불러도 응하지 않으니, 당시 태수 양선이 그의 초상을 누각에 그려 놓고 드나들 때마다 보며 이런 기림의 글을 지었다.
"베개 삼는 것은 어느 곳 돌이며 이 닦는 것은 어느 곳 물인가. 그를 만날 수도 없고 이름조차 찾을 수 없구나."
주천의 태수 마급이 위엄을 갖추고 징과 북을 울리며 찾아갔으나, 송섬은 다락문을 겹겹이 닫아걸고 거절하며 만나 주지 않았다. 마급이 탄식하며 말했다.
"이름은 들을 수 있어도 몸은 만날 수 없고, 덕은 사모할 수 있어도 모습은 볼 수 없구나. 내 이제야 선생이 사람들 중의 용과 같은 존재인 줄 알겠도다."
하고는 절벽에 이런 시를 새겨 두었다.
"붉은 절벽 수백 길이요, 파란 절벽은 수만 길인데, 기이한 나무 울창하여 전설 속 신령한 숲처럼 무성하구나. 옥과 같은 그분이야말로 오직 나라의 보배인데, 가까이 있어도 만나지 못하니 참으로 내 마음 괴롭도다."
(출전: 《준생팔전》)
55. 왕통, 세상이 평화롭기를 바랄 뿐 벼슬은 원치 않는다 하다
왕통(자는 중엄)은 수나라 때 황하와 분수 지역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세도가 양소가 그를 매우 중히 여겨 벼슬하기를 권하자 왕통이 이렇게 말했다.
"저에게는 아버지께서 남겨 주신 집이 있어 비바람을 가릴 수 있고, 척박한 밭이 있어 끼니를 이을 수 있으며, 책을 읽고 도를 이야기하다 보면 스스로 즐거움을 누릴 만합니다. 바라건대 현명하신 공께서 몸소 자신을 바로잡아 천하를 다스리시어 시절이 평화롭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면, 저는 그 혜택을 크게 입을 것이니 벼슬은 원하지 않습니다."
(출전: 《빈사전》)
56. 주도퇴, 신을 삼아 길에 놓아두다
주도퇴는 담박하여 세속과 인연을 끊고 갖옷을 걸치고 새끼줄을 끌고 다녔다. 산속에 집을 짓고 늘 짚신을 삼아 길가에 놓아두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것이 그 거사가 삼은 신이라 여기고 쌀이나 차를 그 자리에 놓아두고 바꾸어 갔다. (출전: 《빈사전》)
57. 공극, 비를 피하다 벼슬 생각을 잊다
공극이 시랑 벼슬로 있을 때, 조회를 마치고 돌아가다 비를 만나 어느 노인의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했는데, 노인이 대청으로 맞아들이므로 들어가 보니 두건과 얇은 비단 건을 갖춰 쓴 노인이 매우 공손하게 맞이했다. 이어 술과 음식을 마련해 내오는데 하나하나가 정갈하고 좋았다. 공극이 비옷을 빌려 달라 하자 노인이 말했다.
"추워도 나가지 않고 더워도 나가지 않으며, 바람이 불어도 나가지 않고 비가 와도 나가지 않기에, 한 번도 비옷을 마련해 본 일이 없습니다."
공극은 자기도 모르게 벼슬살이의 이런저런 사정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출전: 《태평광기》)
58. 사마승정,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몸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고 답하다
사마승정(자는 자미)은 반사정을 스승으로 섬기며 곡기를 끊고 기운을 이끄는 수련법을 배워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반사정이 그를 남달리 여겨 말했다.
"내가 도홍경의 정일법을 터득하여 이제 4대에 걸쳐 전하게 되었구나."
이윽고 스승과 헤어져 이름난 산들을 두루 다니다 천태산에 살며 나다니지 않았는데, 임금 예종이 불러 방술을 묻자 그가 답했다.
"도를 닦는 이는 날마다 욕심을 덜어 내어, 덜고 또 덜어서 아무것도 억지로 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마음과 눈으로 알고 보는 것들을 하나하나 덜어 내도 여전히 끝이 없는 법인데, 하물며 이단의 술법을 다루어 잡스러운 지혜와 생각을 늘려서야 되겠습니까."
임금이 물었다.
"몸을 다스리는 것은 그렇다 쳐도, 나라를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가 답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몸을 다스리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을 담담하게 놀리고 기운을 자연의 큰 기운과 합치시켜, 만물과 하나가 되고 사사로운 마음이 없게 한다면 천하가 절로 다스려집니다."
임금이 감탄하며 말했다.
"옛 신선 광성자의 말과 같도다."
(출전: 《유후당서》)
59. 전유암, 산수를 사랑함이 고질병 같다 답하다
전유암은 영휘 연간에 태학생으로 보임되었다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태백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는데, 그 어머니와 아내도 모두 세속을 벗어나려는 뜻이 있었다. 훗날 기산으로 들어가 허유의 무덤 곁에 살면서 스스로 '허유의 동쪽 이웃'이라는 호를 지었고, 여러 차례 불러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고종이 몸소 그를 찾아가니, 전유암은 평민의 옷차림으로 절하며 뵈었는데 행동이 매우 근엄했다. 황제가 그를 보고 물었다.
"선생은 요즘 편안하신가?"
전유암이 대답했다.
"신은 이른바 산수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것이 고질병처럼 되어 버린 사람입니다."
(출전: 《구당서》)
60. 오균, 노자의 오천 자 말고는 모두 종이 낭비라 답하다
오균(자는 정절)은 경전의 뜻에 밝고 성품이 고상하고 굳세어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숭산으로 들어가 살았다. 현종이 사신을 보내 그를 불러 도에 대해 묻자 그가 답했다.
"도 가운데 가장 깊은 것으로는 노자가 남긴 오천 자 만한 것이 없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종이만 낭비하는 것일 뿐입니다."
현종이 다시 신선이 되는 연단술을 묻자 그가 답했다.
"이는 재야에 묻힌 사람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오랜 세월이 걸리는 것이니 임금께서 마음 두실 바가 아닙니다."
오균이 늘 임금 앞에서 아뢰는 것은 모두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와 실무에 관한 것이었고, 넌지시 돌려 말하는 방식으로 임금에게 간언했으므로 임금도 그를 소중히 여겼다. 오균은 세상이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산으로 돌아가기를 간청하니, 임금은 조서를 내려 그를 위해 도관을 지어 주도록 했다. (출전: 《역대진선체도통감》)
61. 장지화, 어부의 노래를 짓다
장지화(본이름은 귀령)는 학문이 넓고 문장과 그림에도 능했으며 술 서 말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몸속의 기운을 잘 다스려 얼음 위에 누워도 춥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았으며, 천하의 이름난 산들을 두루 유람했다. 낚시질로 낙을 삼아 어부의 노래를 지었는데 이러했다.
"서새산 앞에는 백로가 날고, 복숭아꽃 흐르는 물엔 쏘가리가 살졌네. 푸른 삿갓 쓰고 도롱이 걸쳤으니, 비껴 부는 바람 가랑비 속에도 돌아갈 것 없네."
(출전: 《열선전》)
62. 육구몽, 평민인 내가 부지런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말하다
육구몽(자는 노망)은 젊어서부터 고상하고 호방했다. 수백 이랑의 밭과 큰 집을 가지고 있었으나, 밭이 저지대에 있어 장마가 지면 곡식 싹을 강물이 모두 쓸어 가곤 했다. 그런 탓에 늘 굶주렸으나 손수 삼태기와 삽을 들고 쉴 새 없이 일했다. 누군가 그의 부지런함을 놀리자 그가 말했다.
"요순도 얼굴이 그을리고 야위었으며 우임금도 손발에 못이 박혔다. 그분들은 성인이었는데도 그러했는데, 나 같은 평민이 감히 부지런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는 차를 즐겨 이저산 아래에 다원을 만들어 남에게 대신 재배하게 하고 해마다 임대료로 차를 받아 등급을 매겼다. 세속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아 자기 집을 찾아오는 손님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말을 타지 않고 배를 타고 다니는데, 뱃바닥에 거적을 깔고 책과 차 항아리, 붓, 책상, 낚시 도구를 싣고 오갔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강호를 떠도는 사람'이라 불렀다. (출전: 《유후당서》)
63. 진박, 세상을 다스리는 데 신선술이 무슨 소용이냐 답하다
진박(자는 도남)은 무당산에 들어가 이십 년 동안 곡기를 끊고 기운을 다스리는 수련을 했고, 뒤에는 화산 운대관에 살았다. 태평흥국 연간에 진박이 두 차례 조정에 들어가니 황제가 매우 후하게 대접했다. 이때 다시 와서 황제를 뵈니, 황제가 신하들에게 말했다.
"진박은 홀로 자기 몸을 잘 닦으며 권세와 이익을 구하지 않으니, 이른바 세속을 벗어난 선비로다."
하고는 궁중의 사신을 보내 그를 중서성까지 배웅하게 했다. 재상 송기 등이 조용한 틈에 물었다.
"선생께서는 노자가 말한 고요한 도의 수양법을 터득하셨으니,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진박이 말했다.
"저는 산야에 묻힌 사람이라 지금 세상에 쓰일 곳이 없고, 또 신선이 금과 은을 만든다는 술법이나 숨을 고르며 몸을 기르는 이치도 알지 못하니 전해 드릴 방술이 없습니다. 설령 대낮에 하늘로 날아오른다 한들 세상을 다스리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지금 임금께서는 용모가 준수하시어 하늘이 낸 사람다운 풍모를 지니셨고, 옛일과 오늘의 일에 두루 통달하시어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워짐의 지난 자취를 깊이 살피시니, 참으로 도리를 아시는 어진 임금이십니다. 이러한 때야말로 임금과 신하가 한마음 한뜻으로 교화를 일으키고 다스림을 이루어야 할 시기이니, 수련을 부지런히 행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송기 등이 이 말을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는 그를 더욱 소중히 여겨, 조서를 내려 '희이 선생'이라는 호를 내리고 화산으로 돌려보냈다. (출전: 《선전습유》)
64. 충방, 어머니가 붓과 벼루를 태워 버리다
순화 연간에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충방(자는 명일)을 부르니, 그 어머니가 노하여 말했다.
"늘 너에게 학생들 모아 가르치지 말라고 타일렀거늘, 결국 남들에게 알려져 편히 살 수 없게 되었구나. 몸은 이미 세상을 등졌는데 학문이 다 무슨 소용이냐! 나는 이제 너를 버리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겠다."
충방이 이 말을 듣고 병을 핑계 삼아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 어머니는 마침내 붓과 벼루를 모두 태워 버리고 충방과 함께 사람 발길이 드문 외딴곳으로 이사했다.
진종이 동쪽 지방으로 나아가 앞선 임금들의 능에 참배할 때, 은사 양박을 만나 임금이 물었다.
"그대가 떠나올 때 시를 지어 배웅한 사람이 있었는가?"
양박이 대답했다.
"제 아내가 이런 시를 지어 저를 배웅했습니다.
'낙심하여 술만 탐하지 마시고, 지나치게 시 짓기도 즐기지 마소서. 오늘 관청에 붙잡혀 가시면, 늙은 목숨 잘려서 돌아오시리이다.'"
임금이 이 시를 보고 웃으며 양박에게 비단을 내리고 산으로 돌려보냈다.
충방의 어머니와 양박의 아내는 아들과 남편의 은거를 잘 지켜 준 사람들이라 할 만하다. 다만 충방은 끝내 말년의 지조가 좋지 못하여 그 명예를 잃고 말았으니, 이는 아마도 어머니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안 계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출전: 《금뢰자》)
65. 위야, 조정의 조서보다 산에 이는 흰 구름을 따르다
위야(자는 중선, 호는 초당거사이며,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는 숨어 살며 벼슬하지 않았고, 일찍이 이런 시를 지어 읊었다.
"이름이 있으면 부귀에 가려지고, 일이 없으니 신선에 가깝네. 벼루를 씻으니 물고기가 먹물을 마시고, 차를 끓이니 학이 연기를 피해 가네."
진종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사신에게 이렇게 답했다.
"대궐 깊은 곳의 붉은 조서와 은혜로운 교서를 사신께서 물어다 주셨으나, 산야에 묻힌 이 한 조각 마음은 이미 흰 구름이 붙들어 놓았습니다."
(출전: 《문기유림》)
66. 관사복, 흰 구름과 밝은 달이 나의 소득이라 답하다
송나라의 관사복은 대대로 용천 땅에 살며 학자 호원과 가깝게 지냈고, 스스로 '와운 선생'이라는 호를 지었다. 인종이 관사복을 불러 보고 물었다.
"경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관사복이 답했다.
"마을 가득한 흰 구름은 갈아도 다함이 없고, 맑은 못에 잠긴 밝은 달은 낚아도 흔적이 없으니, 이것이 신이 얻은 것입니다."
하고는 끝내 벼슬을 받지 않았다. (출전: 《문기유림》)
67. 위야, 벽에 시를 남기고 몸을 피하다
진종 때 임금이 처음 사신을 보내 위야를 부르니, 위야는 벗의 집 벽에 이런 시를 써 놓고 달아났다.
"도리를 아는 사람은 벼슬을 가벼이 여기고, 숲과 샘을 이웃 삼아 살아가네. 벼루를 씻으니 물고기가 먹물을 마시고, 차를 끓이니 학이 연기를 피해 가네. 한가로이 태평한 시절을 노래하며, 늙어 가는 세월도 한스럽지 않네. 한가로이 사는 이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도리어 내가 가장 마음 편하구나."
사신이 돌아가 이 시를 아뢰니 임금이 말했다.
"위야는 오지 않겠구나."
이에 앞서 임금은 충방이 사는 곳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위야가 사는 곳의 풍경이 그윽하다는 말을 듣고 그것도 그리게 했다. 또 위야에게는 이런 시도 있었다.
"숨어 사는 이의 본성은 흐려지기 쉽고, 세상의 시비는 가려내기 어렵네. 아내는 심어 놓은 꽃 피는 것을 즐기고, 아이는 풀 무성한 것을 자랑하는구나."
이 시는 한가로운 삶의 정취를 극진히 담아냈다고 할 만하다. (출전: 《패해》)
68. 임포, 학이 날면 손님이 온 줄을 알다
임포는 항주의 고산에 숨어 살며 늘 학 두 마리를 길렀다. 학을 둥지에서 놓아주면 하늘 높이 날아 구름 속으로 들어가 한동안 빙빙 돌다가 다시 내려와 둥지로 들어갔다. 임포는 늘 서호에서 작은 배를 타고 여러 절을 돌아다니곤 했다. 그를 찾아오는 손님이 있으면 시중드는 아이가 손님을 맞아 앉히고 학의 둥지를 열어 학을 날려 보냈는데, 조금 있으면 반드시 임포가 작은 배를 저어 돌아왔다. 학이 나는 것을 보고 손님이 온 줄을 늘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출전: 《사문유취》)
69. 곽연경, 정승 앞에서도 태연히 술상을 내오다
곽연경은 서경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문정공 장제현, 문목공 여몽정과 함께 문장과 행실로 마을에서 칭송을 받았다. 장제현과 여몽정이 정승이 되어 번갈아 곽연경을 천거했으나 그는 나아가지 않고, 그윽한 곳에 정자를 짓고 꽃과 풀을 가꾸며 스스로 즐거워할 뿐 성안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그의 나이 여든 살 무렵, 문희공 전유연이 서경의 지방관이 되었는데, 그 밑의 관원 사강, 윤수, 구양수가 모두 당대에 이름난 문인들이었다. 하루는 전유연이 여러 관원을 거느리고 성을 나와 곽연경이 사는 곳에서 약 일 리쯤 떨어진 곳에서 놀이를 하다가, 시종을 물리고 몇몇만 데리고서 곽연경을 찾아가 이름도 밝히지 않았는데, 곽연경은 흔쾌히 맞아들여 도복을 입고 담소를 나누었다.
곽연경이 웃으며 말했다.
"이 누추한 곳을 찾는 이가 드문데, 지금껏 찾아온 사람 중 여러분처럼 점잖은 손님은 없었으니 저는 매우 기쁩니다. 잠시 머물며 꽃 아래서 한잔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는 질그릇 술잔과 과일, 채소를 내왔다. 전유연은 그 소탈함을 좋게 여겨 권하는 술잔을 마다하지 않고 받았다. 얼마 뒤 관리 하나가 전유연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통지문을 든 관속과 호위 군사들이 이미 뜰 앞에 가득 모였습니다."
곽연경이 천천히 물었다.
"여러분은 무슨 벼슬을 하시기에 따르는 사람이 이렇게 많습니까?"
윤수가 대답했다.
"지방관이신 상공이십니다."
곽연경이 웃으며 말했다.
"정승께서 이런 시골 사람을 찾아오시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고는 전유연과 함께 크게 웃었다. 곽연경이 다시 물었다.
"여러분은 좀 더 드실 수 있습니까?"
전유연이 흔쾌히 그 말을 받아들여 다시 술을 마셨다. 곽연경은 전유연이 지방관임을 알고 나서도 술상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태연히 담소를 나누었다. 날이 저물어 전유연이 떠나려 하자 곽연경은 문 앞까지 나가 배웅하며 말했다.
"저는 늙고 병들어 답례로 찾아뵙지 못하니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전유연 일행은 수레에 오르면서도 넋을 잃은 듯했다. 전유연은 이튿날 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숨어 사는 선비다. 부귀 보기를 하찮은 것 보듯 하는구나."
하고는 여러 날 동안 감탄해 마지않았다. (출전: 《설부》)
70. 소동파, 산에는 어디에나 도인이 있다 말하다
소동파가 남쪽으로 귀양 갈 때 고개를 넘어 숲 속에서 묵게 되었는데, 거기서 두 도인을 만났다. 도인들은 동파를 보고는 안으로 깊이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동파가 자신을 호송하던 사신에게 말했다.
"이 집 안에 특별한 사람이 있으니 함께 들어가 봅시다."
하고 문안으로 들어가 보니, 몇 칸짜리 초가에 두 도인의 기상이 매우 맑고 깨끗해 보였다. 도인이 사신을 돌아보며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묻기에 '소 학사'라 답하니 도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소자첨(소동파의 자) 아니오?"
사신이 말했다.
"소 학사는 처음엔 문장으로 뜻을 얻었으나 끝내는 문장 때문에 뜻을 잃었습니다."
도인들이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문장이 어찌 사람의 뜻을 얻게도 하고 잃게도 할 수 있겠소. 부귀란 본디 흥하고 쇠하기 마련인 것을."
동파가 말했다.
"어느 산속인들 도사가 없으리요마는, 그중에서도 남달랐던 이로는 여인 가운데 춘몽파가 있었고, 이곳에는 이 두 도인이 있구나."
그가 귀양길에 만난 사람 중에는 어찌 이토록 남다른 이가 많았던가. (출전: 《장공외기》)
71. 송강의 어부, 그대와 취향이 다르니 상관 말라 답하다
송강의 한 어부는 늘 작은 배를 저어 긴 다리 아래를 오가며 술을 마셨고, 취하면 뱃전을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마음을 노래했다. 소성 연간에 민중 지방 사람 반유가 서울에서 지방관으로 옮겨 가던 길에 오나라를 지나며 이 어부를 찾아가 말했다.
"선생은 몸을 깨끗이 하고 도덕을 닦으셨는데, 지금 밝으신 임금께서 위에 계신데 어찌 벼슬에 나서지 않으십니까?"
어부가 웃으며 말했다.
"군자의 도리란 어떤 때는 벼슬에 나서고 어떤 때는 숨어 사는 것입니다. 제가 비록 바위굴에 묻혀 살지는 못했으나, 한나라 고조 때의 은자 동원공과 기리계의 자취를 따르고, 노자가 말한 '지혜를 숨겨 몸을 온전히 한다'는 뜻을 사모합니다. 또 뜻을 닦는 사람은 몸의 형체를 잊는 법이요, 몸을 기르는 사람은 헛된 영예와 이익을 잊는 법이며, 도를 이루는 사람은 마음마저 잊는 법이니, 마음과 몸을 다 잊는다면 벼슬 보기를 썩은 흙 보듯 할 뿐입니다. 저는 그대와 뜻이 같지 않으니 제 일에 간섭하지 마십시오."
(출전: 《작애집》)
72. 두오랑, 삼십 년째 문밖을 나가지 않다
양적현에 두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다만 마을 사람들이 그를 '두오랑'이라 불렀다. 현에서 삼십오 리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집이라고는 두 칸뿐이고 집 앞에 열 자쯤 되는 빈터가 있었다. 그가 사립문을 나서지 않은 지 벌써 삼십 년이었다.
여양이라는 고을의 관리가 일찍이 그를 찾아가 문밖에 나가지 않는 까닭을 물으니, 그는 문 앞의 뽕나무 한 그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십오 년 전에 저 뽕나무 밑에서 더위를 피한 적이 있었을 뿐, 그저 딱히 일이 없어 우연히 나가지 않게 되었을 따름입니다."
생활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그가 답했다.
"남에게 날짜를 잡아 주기도 하고 약을 팔기도 하여 싸라기죽으로 연명했는데, 자식이 자라 농사를 짓게 되면서부터는 양식이 넉넉해져 날짜 잡는 일과 약 파는 일을 모두 그만두었습니다."
평소에는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니 그가 답했다.
"그저 단정히 앉아 있을 뿐입니다."
책을 보느냐고 물으니 그가 답했다.
"이십 년 전에 일찍이 어느 불경을 보고 그 논의를 좋아한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 잊었고, 그 책마저 어디 있는지 모른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는 기품이 한가롭고 넉넉하며 말씨가 맑고 간결하니, 참으로 도가 있는 선비였다. 한겨울에도 베옷에 짚신을 신었고 방 안에는 의자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출전: 《몽계필담》)
73. 순창산인, 지금이 몇 해인지도 모른 채 살다
순창산인은 성과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고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 없다. 정강 연간 말엽에 순창산 속으로 피난 간 사람들이 산 깊숙이 들어가다 초가 한 채를 만났는데, 그 집주인은 풍채가 단정하고 이야기를 나눠 보니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이었다. 주인이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여러분들은 무슨 일로 처자식을 데리고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사람들이 사정을 이야기해 주니 주인이 다시 물었다.
"난리가 어디서부터 일어났습니까?"
사람들이 다투어 난리가 난 사정을 이야기해 주자, 주인이 한참 탄식하다 말했다.
"제 아버지는 인종 때 사람인데, 가우 연간 말엽부터 이곳에 자리 잡고 다시는 나가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다만 희령이라는 연호가 있다는 것만 알 뿐, 지금이 몇 해가 되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출전: 《설부》)
74. 소운경, 예물과 편지를 펴 보지도 않고 달아나다
소운경은 예전에 훗날 정승이 된 장덕원(이름은 준)과 벗이었다. 송나라가 금나라에 밀려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뒤 장덕원은 귀하게 되어 이름을 떨쳤지만, 소운경은 세상을 피해 동호 가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자갈밭을 일구어 채소를 기르고 신을 삼아 팔며 생계를 이어 간 것이 어느덧 삼십 년 가까이 되었다.
훗날 장덕원이 다시 정승이 되었을 때, 예물을 갖추어 예장 지방의 관청으로 편지를 보내 이렇게 부탁했다.
"내 벗 소운경이 그곳에 살고 있는데, 이 사람은 옛 명재상 관중이나 명장 악의에 견줄 만한 인물이니 짧은 편지 한 장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오. 반드시 예를 갖추어 모셔 와야 하오."
그 지방의 관원들이 즉시 소운경을 찾아가 장 승상의 편지를 전하고 함께 갈 것을 청하니, 소운경은 이튿날 관청으로 찾아가겠다고 답했다. 관원들이 이를 믿고 돌아가 다음 날 사람을 보내 소운경을 맞으러 갔더니, 소운경은 편지와 예물을 펴 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두고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출전: 《빈사전》)
75. 여휘지, 즉석에서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다
여휘지는 깊은 산속에 살며 농사와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었다. 하루는 돈을 가지고 부잣집으로 씨앗을 사러 갔는데 마침 큰눈이 내렸다. 그 집 누각에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 운을 나누어 눈을 노래하는 시를 짓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어려운 운자를 만나 시를 짓지 못해 애를 먹는다는 말을 듣고 여휘지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누각에 있던 사람들이 이를 듣고 그 까닭을 캐물으니 여휘지가 마지못해 답했다.
"저는 그저 옛 그림 속 나비 그림 하나가 떠올랐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그제야 감탄하며 여휘지를 자리로 맞아들이고, 같은 운자들을 다시 사용해 시를 지어 보라 청했다. 여휘지는 즉시 붓을 들어 이런 시를 지었다.
"하늘 위 아홉 용은 법의 물을 뿌리는데, 인간 세상 두 마리 쥐는 세월을 갉아먹네. 오리와 거위 울음소리로 어지럽혀 채주에서 공을 세우더니, 나비는 훨훨 날아 옛 그림 속을 지나가네."
사람들이 이번엔 다른 운자를 사용해 다시 지어 보라 청하니, 여휘지는 또 붓을 들어 이렇게 지었다.
"만 리 변방 강산은 얼어붙으려 하는데, 어우러진 천지는 아직 세 갈래 기운을 머금었네. 다리가의 나귀 등 위에선 시상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고, 장막 아래에서는 새끼 양 잡아 취하도록 마셨네. 대나무처럼 긴 몸을 세우니 차가운 게와 같고, 소나무 아래 짧은 머리 묻으니 늙은 승려로세. 이참에 오랑캐 우두머리를 사로잡아, 강남의 부끄러움을 말끔히 씻어 냄만 못하리."
(이 두 시는 모두 그 자리에서 미리 정해진 운자에 맞추어 즉흥으로 지은 것이라, 옛 그림이나 옛 전쟁 이야기를 끌어와 재치 있게 운자를 맞춘 것이 특징이다.)
여휘지는 시를 다 쓰고는 곧바로 일어나 나가 버렸다. 사람들이 이름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씨앗도 거저 주려 하자 도리어 성을 내며 말했다.
"어찌 의롭지 않은 것을 받겠습니까."
하고는 기어이 돈을 치르고 씨앗을 사서 배에 싣고 떠났다. 누각에 있던 사람들이 한 사람을 시켜 그의 뒤를 밟게 했는데, 길이 매우 외지고 멀어 잊지 않으려고 곳곳에 표시를 해 두고 돌아왔다.
눈이 갠 뒤 여휘지의 집을 찾아가니 단칸짜리 초가뿐이었는데, 방 안에는 한 여인이 쌀뒤주 속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날씨가 추워 쌀뒤주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으로, 바로 여휘지의 아내였다. 여휘지가 어디 갔는지 물으니 시내로 고기 잡으러 갔다고 하므로, 찾아온 사람들은 그를 찾아 시내로 올라갔다. 과연 여휘지가 그들을 보고 시내 건너편에서 말했다.
"여러분은 제 집으로 내려가 기다리십시오. 제가 고기를 잡아 술과 바꾸어 대접하겠습니다."
얼마 뒤 그는 고기와 술을 가지고 와서 손님들과 함께 실컷 마시고 좋은 기분으로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손님들은 도중의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여관 주인에게 여휘지 이야기를 하니 주인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 사람이야말로 제가 평소 한번 만나 보고 싶어 하던 사람입니다."
이튿날 손님들을 보낸 뒤 여관 주인이 일러 준 길을 따라 찾아가 보니, 여휘지는 이미 거처를 옮기고 없었다. (출전: 《철경록》)
76. 백옥섬, 안개와 노을만 마시며 살다
백옥섬은 술 마시기를 좋아했으나 취한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다. 온갖 책에 두루 밝고 글을 짓는 데도 초고를 다시 고치는 일이 없었으며, 무이동에서 도를 닦았다. 송나라 영종 가정 연간 초엽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태을궁에 머물렀는데, 하루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렸으므로 영종이 조서를 내려 '자청진인'이라는 호를 내렸다. 그는 늘 스스로를 이렇게 기렸다.
"영원히 흐트러진 머리에 맨발로 지내며, 평생 동안 맑은 기운과 안개와 노을만을 마시며 살았노라."
하고는 웃으며 무이산 아래 흰 구름 자욱한 곳을 가리켜 자기 집이라 했다. (출전: 《선전습유》)
77. 호장유, 굶주려도 환관을 위한 글은 짓지 않다
호장유(자는 급중)는 남달리 꼿꼿하고 독자적으로 처신하여, 혹독한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도 지조를 지켰다. 서예가 조맹부(자는 자앙)가 한번은 어느 환관을 위해 돈 백 정을 가지고 가 묘비명을 부탁하니, 호장유가 노하여 말했다.
"내 어찌 환관을 위해 묘비명을 짓겠는가."
그날 호장유의 집에는 양식이 떨어져 있었으므로 그 아들이 사정을 말하자, 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모두 그 돈을 받으라고 권했으나 호장유는 더욱 완강히 물리쳤다. 일찍이 동양 땅으로 떠나는 채여우를 배웅하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죽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옷도 따뜻하지 않으나, 시를 읊는 소리만은 오히려 종과 경쇠 소리 같도다."
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것이 바로 나만이 아는 아름다운 양식이다."
(출전: 《빈사전》)
78. 초모, 벼슬을 받은 뒤 관과 띠를 뽕나무에 걸어 두고 떠나다
명나라 태조의 옛 친구 초모라는 사람은, 태조가 여러 차례 불러도 오지 않으므로 사람을 시켜 그를 찾게 했다. 하루는 초모가 닭과 술을 들고 곧장 대궐로 들어오니, 임금이 기뻐하며 궁중 음식을 담당하는 관청에 음식을 마련하게 하여 함께 술을 마시며 매우 즐거워했다. 술자리가 끝난 뒤 태조는 금띠, 은띠, 뿔로 만든 띠를 늘어놓고 초모에게 마음대로 고르게 하여, 그가 고른 띠에 맞는 벼슬을 내리려 했다. 초모가 뿔로 만든 띠를 고르니 그에 맞는 벼슬을 내렸다.
며칠 뒤 초모는 고교문으로 나가 관과 띠를 뽕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가 버렸다. (출전: 《명세설신어》)
79. 왕빈, 옛 벗의 출세를 부끄러워하며 문을 닫아걸다
소주 고을의 은자 왕빈(자는 중광, 호는 광암)은 본래 승려 요광효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요광효가 훗날 임금이 된 연왕을 도와 성공한 뒤 태자를 가르치는 높은 벼슬에 오르자, 왕빈은 그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겨 상대하지 않았다. 요광효가 시종을 물리고 허름한 옷을 입은 채 왕빈을 찾아갔으나 왕빈은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광효가 간곡히 청하니 왕빈은 짐짓 모르는 체하며 누구냐고 물었다. 요광효가 대답했다.
"바로 옛날의 도연(요광효의 옛 이름)이다."
왕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요광효가 큰 소리로 말했다.
"광암아, 옛정을 생각해서 이 늙은 중을 한번만 만나 다오."
왕빈이 대답했다.
"저는 지금 마침 풀을 베느라 바빠서 만날 틈이 없습니다."
(출전: 《미공비급》)
80. 오관, 은자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문밖에서 기다리다
오관이 궁중 살림을 맡는 벼슬에 있을 때, 고향집으로 가던 길에 은자 형량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니 형량이 말했다.
"저는 지금 막 밥을 먹는 중인데 공을 모실 아이도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오관은 그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문밖에 앉아 기다린 뒤에야 들어가 만났다. (출전: 《미공비급》)
81. 진해옹, 나를 아끼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다
진해옹(호는 용담노인)은 옛 학문에 마음을 쏟으며 세상을 피해 살면서도 근심이 없었으므로, 그 장인 오여필도 그를 공경하고 소중히 여겼다.
학자 진헌장(자는 공보, 호는 백사)이 일찍이 스승 오여필에게 《주역》의 의문점을 물으니 오여필이 말했다.
"청강 땅으로 가서 용담노인을 찾아보게."
진헌장이 그 말대로 진해옹을 찾아가니, 마침 진해옹은 빗속에서 도롱이에 삿갓을 쓰고 밭을 매다가 그를 맞아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책상을 가운데 놓고 마주 앉아 이틀 밤을 새워 가며 의문점을 논하고 풀어내니 진헌장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진헌장이 돌아간 뒤 진해옹은 집안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여필은 나를 아끼는 사람이 아니다."
(출전: 《지비록》)
82. 왕경미, 두 노인을 태고의 백성이라 부르다
왕경미가 관서 지방을 여행하다 한음을 거쳐 자오곡으로 들어가 산길을 가는데, 절벽은 높고 가파르며 숲은 우거져 무성했다. 시냇가 길에서 지팡이를 짚고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 두 노인을 보고 은자라 여겨 다가가 읍하며 물었다.
"어르신들은 무엇을 하시는 분들입니까?"
산속에서 글이나 읽는 사람들이라 답하기에, 어떻게 이리 마음 편히 지내실 수 있느냐고 물으니 한 노인이 답했다.
"힘써 농사지으니 싸라기죽은 먹을 수 있고, 차조를 빚어 술을 담그니 벗을 청할 수 있으며, 냇가에 나가 대숲과 구름을 구경할 뿐 세상일은 전혀 듣지 않습니다."
다른 한 노인이 말했다.
"못을 파서 물고기를 기르고 채마밭에 물을 주어 채소를 가꾸며 자식에게 글을 읽힐 뿐, 세금 독촉하는 아전도 모르고 고을 원님 얼굴도 본 일이 없습니다."
왕경미가 곧 일어나 감사하며 말했다.
"두 분이야말로 참으로 아득한 옛 태평 시절 백성이십니다."
(출전: 《미공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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