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록 제2권 · 고일
출처: 한정록 제2권, 고일
배경: 한정록은 허균이 직접 지은 책이 아니라, 명나라에 사신으로 오가면서 사 모은 수천 권의 중국 책 가운데서 세상을 등지고 한가로이 살았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와 글을 뽑아 엮은 책이다. 은둔, 고일, 한적, 퇴휴, 유흥 등 열여섯 가지 항목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두 번째 항목인 '고일'은 세상의 명예와 이익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히 높은 뜻을 지키며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이 권에는 중국 전국 시대부터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마흔 명 남짓한 인물들의 일화가 대략 시대순으로 실려 있으며, 각 이야기 끝에는 허균이 그 글을 뽑아 온 원래 책의 이름을 밝혀 두었다.
일러두기: 이 권에 실린 이야기는 허균이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 여러 중국 책에서 그대로 뽑아 온 것이므로, 이야기 끝에 적힌 책 이름은 허균이 인용한 원래의 출처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인물의 자(성인이 되면서 따로 지어 부르던 이름)나 호(본이름 대신 즐겨 부르던 별칭)가 자주 나오는데, 번역에서는 되도록 본이름을 앞세우고 자나 호는 괄호 안에 풀어서 밝혔다. 이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펴낸 기존 국역본을 참고하여, 그 뜻을 오늘의 쉬운 한글 문장으로 다시 옮긴 것이다.
노중련 — 전국 시대 최고의 인재
전국 시대의 인재를 꼽으라면 마땅히 노중련을 첫손에 꼽아야 한다. 그는 진나라 군대를 물러가게 하고도 조나라가 주려는 상을 받지 않았고, 연나라에 넘어간 제나라의 요성을 도로 항복시키고도 제나라의 벼슬을 마다하며 세상을 우습게 보고 제멋대로 행동했으니, 이 세상의 얽매임에서 초연히 벗어나려는 뜻이 있었다고 하겠다. 후대에는 오직 이백만이 그를 제대로 알아보았는데, 그의 시에 이렇게 노래했다.
제나라에 남달리 뛰어난 사람이 있으니 노중련이야말로 유난히 고상하고 빼어나다 깊은 바다 밑에서 솟아난 밝은 달구슬처럼 하루아침에 눈부신 빛을 뿌렸구나
또 이렇게도 노래했다.
하늘과 땅 사이에 홀로 우뚝 서니 맑은 바람이 난초와 눈을 씻어내는 듯하다
이 두 편의 시야말로 노중련의 빼어난 풍모를 제대로 그려냈다고 할 만하다. 이백은 본래 사람됨과 기상이 세속을 뛰어넘었고 스스로도 노중련과 같은 기개가 있었기에, 이렇게 그를 알아보고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장설소췌》에서
(용어) 노중련은 전국 시대 제나라의 책사다. 조나라가 진나라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 제후들이 진나라의 기세에 눌려 진나라 왕을 황제로 추대하려 하자 노중련이 나서서 이를 막고 진나라 군대를 물러가게 했다. 조나라의 평원군이 그 공으로 땅을 주려 했지만 세 번이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훗날 연나라가 제나라의 요성을 빼앗아 지키자, 노중련이 연나라 장수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권했다. 그 장수는 편지를 읽고 사흘을 울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요성은 제나라에 돌아왔다. 제나라 장수 전단이 그 공을 높이 사 벼슬을 내리려 했지만 노중련은 사양하고 바닷가로 숨어 버렸다. 이백은 당나라의 시인이다.
한나라 말의 고결한 선비들 — 엄광과 그 후예들
한나라 말기에는 뜻이 높고 고결한 선비가 많았다. 엄광은 만승의 천자 앞에서도 거만하게 대할 만큼 당당했고, 부춘산에 은거하여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이백의 시에서 "맑은 바람이 온 세상을 씻어내니 / 아득한 그 기상 감히 넘볼 수 없네"라고 한 것은 엄광의 기상을 제대로 안 것이라 하겠다.
그다음가는 인물로는 황헌(자는 숙도)과 서치(자는 유자)가 그 기풍을 이을 만하다. 이보다 한 단계 아래로는 혜강(자는 숙야)이 있는데, 향기로운 먼지를 밟고 다니는 듯한 고상한 기상이 있었다고 하겠으나, 때로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날카로운 성품 탓에 어지러운 세상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진나라 이후로는 "고결한 선비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 《장설소췌》에서
(용어) 엄광은 후한을 세운 광무제와 어릴 때 함께 공부한 벗이다. 광무제가 황제가 된 뒤 그를 찾아 벼슬을 주려 했지만 받지 않고 부춘산에 숨어 낚시로 여생을 보냈다. 혜강은 위나라 때 이름난 선비 일곱 사람, 이른바 죽림칠현 가운데 한 사람으로, 권력자 종회와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는데 그의 모함을 받아 처형되었다.
왕희지 — 벼슬을 마다하고 산수를 벗 삼다
왕희지(우군장군을 지내 왕우군이라고도 부른다)는 원래 단약을 먹으며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양생법을 즐기고, 도성에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절강 지방에 부임했을 때부터 이미 그곳에서 한평생을 마치겠다는 뜻을 품었다. 회계 지방은 산수가 아름다워 이름난 선비들이 많이 모여 살았는데, 당시 손작, 이충, 허순, 지둔 같은 이들이 모두 문장과 학문으로 그 시대 으뜸가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회계(진나라가 남쪽으로 옮긴 뒤로는 이 지역을 '동토'라고도 불렀다) 지역에 함께 집을 짓고 살면서 왕희지와 가깝게 지냈다. — 《하씨어림》에서
왕희지 — 벼슬에서 물러난 뒤의 즐거움
왕희지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회계 지방의 선비들과 함께 산수 사이를 노닐며 사냥과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또 도사 허매와 함께 몸을 다스리는 법을 익히며 귀한 약초를 캐러 다녔다. 천 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회계 여러 고을의 이름난 산을 두루 유람했으며, 넓은 바다에 배를 띄우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여기서 한평생을 마치리라." — 《소창청기》에서
이흠 — 벼슬자리로 사람을 사려 하는가
이흠은 이무증의 다섯째 아들로, 맑고 곧으며 원대한 뜻을 지녔으나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혼인도 벼슬도 하지 않았다. 임해 지방에 있는 형 이식(시중 벼슬을 지냈다)의 묘 아래에서 지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승상 왕도가 그를 승상부의 관리로 불러들이려 했다. 이흠은 그 임명장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무홍(왕도의 자)이 또 벼슬자리로 사람을 사려 하는구나." — 《세설신어보》에서
완유 — 총애와 치욕에 흔들리지 않다
완유(광록 벼슬을 지내 완광록이라 부른다)가 동산에 은거할 때, 아무 일 없이 담담하게 지내며 늘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누군가 그에 대해 왕희지에게 묻자, 왕희지가 이렇게 답했다. "이 사람은 총애를 받거나 치욕을 당해도 거의 흔들리지 않으니, 옛날의 고요하여 자취조차 없던 은자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을 것이다." — 《세설신어보》에서
하준 — 벼슬 이름보다 나은 이름
표기장군을 지낸 하충의 아우 하준은 높은 뜻을 품고 세상을 피해 살았다. 형 하충이 그에게 벼슬하기를 권하자 하준이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다섯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이 어찌 형님의 '표기장군'이라는 이름보다 못하겠습니까." — 《세설신어보》에서
(용어) 중국에서는 한집안의 형제들을 나이 순서에 따라 '첫째', '둘째' 하는 식으로 불렀다. 하준은 사람들이 자신을 벼슬 이름이 아니라 그저 '하씨네 다섯째'로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장목지 — 대나무 울타리 너머로 손님을 가리다
장목지는 대숲 시냇가에 숨어 살며 세상 사람들과 사귀기를 즐기지 않았다. 손님이 찾아오면 대나무 울타리 틈으로 어떤 사람인지 엿보고, 풍류를 아는 훌륭한 사람일 때만 불러들여 자기 배에 태우거나 손수 노를 저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평범한 사람은 열이면 열 모두 그를 만나 볼 수 없었으므로, 그를 원망하고 헐뜯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 《하씨어림》에서
강승연 — 산속 절에서 이치를 탐구하다
강승연은 예장 지방에 있을 때 성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다. 그 절은 여러 봉우리와 긴 시내를 끼고 있었고, 뜰 앞에는 향기로운 숲이 우거지고 맑은 시내가 집 주위를 흘렀다. 그는 이곳에 조용히 머물며 학문을 닦고 깊은 이치를 찾아 음미했는데, 유량을 비롯한 여러 이름난 선비들이 자주 찾아와 그가 숨을 고르고 기운을 다스리며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 《하씨어림》에서
(용어) "숨을 고르고 기운을 다스린다"는 것은 도교에서 전해 오는 호흡법을 가리킨다.
묵지 — 왕희지가 벼루를 씻던 못
묵지는 남창현에 있는 못으로, 물과 대나무가 그윽하고 울창한 곳이다. 왕희지가 임천군을 다스릴 때 이곳을 지날 때마다 주위를 서성이며 떠나지 못했다고 하여 '먹물 못'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보다 앞서 한나라의 매복이 이곳에 꽃나무를 심었는데, 못 가운데서 꽃이 피자 이렇게 탄식했다. "삶은 나에게 괴로움이 되고, 몸은 나에게 속박이 되며, 겉모습은 나에게 부끄러움이 되고, 아내는 나에게 짐이 되는구나." 그러고는 마침내 아내를 버리고 홍애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 《하씨어림》에서
공순지 — 이름조차 남기지 않다
공순지는 회계 섬현에 살았는데,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여 노닐 때마다 반드시 그윽하고 험한 곳까지 다 살펴보았고, 어떤 때는 열흘 만에야 돌아오기도 했다. 한번은 산속을 노닐다가 법숭이라는 승려를 만나 그와 함께 삼 년을 머물렀다. 법숭이 감탄하며 말했다. "내가 속세를 벗어날 생각을 한 지 삼십 년인데, 이제 이 사람에게 마음이 쏠려 늙어 가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가 되었구나." 공순지는 그곳을 떠날 때도 자기 이름조차 알려 주지 않았다. — 《하씨어림》에서
(용어) "늙어 가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라는 말은, 옛날 공자가 자신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두고 "발분하여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움에 겨워 근심조차 잊어, 늙음이 다가오는 것도 모른다"고 말했다는 옛이야기에서 따온 표현이다.
왕경현 — 벼슬 천거를 사양하다
강담이 왕경현을 이부랑 벼슬에 천거하자, 왕경현이 강담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옛날 엄군평이 '내 명성을 드러내는 것은 곧 내 몸을 해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늘이 내린 벼슬은 명성을 좇지 않아야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어찌 이부랑 자리를 바라겠습니까. 이런 천거는 비루한 일이요 옳지 못한 처사이니, 벼슬아치들뿐 아니라 종들까지도 다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강담과 인연을 끊었다. 그 뒤 십여 년이 넘도록 강담의 집 문턱을 넘은 일이 없어, 담장에 둘러싸인 그 집 뜨락에는 이끼와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 — 《하씨어림》에서
장경원 — 거사라 불린 사람
장경원은 뜻이 평이하고 소탈하여 부귀와 이익에 담백했다. 숲과 샘을 낀 집에 살면서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홀로 고고하게 지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거사'라고 불렀다. 그의 한가하고 소박한 삶을 사모하는 이들이 술을 싣고 그를 찾아오면, 장경원은 기꺼이 함께 마시며 싫증 내는 법이 없었다. — 《사문유취》에서
풍량 — 산속 절을 지어 은거하다
풍량(자는 영통)은 본래 산수를 즐길 뿐 아니라 생각이 몹시 정교하여, 그가 바위와 숲 사이에 얽어 놓은 집이 거처하고 노닐기에 더없이 알맞았으므로 그것으로 이름이 났다. 세조(황제)가 그 비용을 대어 주고 승려 승섬, 하남윤 견침과 함께 높은 산의 경치 좋은 곳을 두루 살펴 한가로이 지낼 절을 짓게 했다. 그가 지은 절은 숲과 샘이 기이하고 건축도 훌륭하여 산속에 사는 오묘한 정취를 남김없이 드러냈다. — 《소창청기》에서
왕적 — 밭 갈고 술 빚으며 살다
왕적(자는 무공)은 황하 가에 밭이 열여섯 이랑 있었는데, 노비 몇 사람에게 기장을 심게 했다. 봄가을로 술을 빚고, 오리와 기러기를 기르고 약초를 심어 스스로 먹고살았다. 은자인 중장자광과 함께 몸을 다스리는 법을 닦았으며, 형제가 보고 싶으면 곧바로 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북산의 동쪽 언덕에서 노닐었고, 책을 지어 스스로 '동고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 《유후당서》에서
무유서와 이백 — 세속을 벗어난 기상을 사모하다
무유서는 측천무후의 조카다. 성품이 담백하고 욕심이 적어 날마다 《주역》과 노자·장자의 책을 읽으며 즐겁게 지냈다. 용문과 소실봉 사이에 은거했는데, 겨울에는 띠풀과 산초나무로 지은 집에서, 여름에는 돌집에서 지냈다. 늘그막에도 피부에 윤기가 넘쳤고 눈동자에서 자줏빛 광채가 뿜어져 나와 낮에도 별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 《유후당서》에서
이백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나에게 사마상여의 〈자허부〉를 읽게 하셨는데, 그때부터 마음속으로 그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래서 장성한 뒤 남쪽으로 운몽 지방을 유람하며 칠택의 장관을 구경했고, 안륙 지방에서 술로 세월을 보내며 십여 년을 은거했다." — 《이한림집》에서
(용어) 사마상여는 한나라 때의 이름난 문장가다.
원덕수 — 그 얼굴만 보아도 세속의 욕심이 사라지다
원덕수(호는 노산)에 대해 방관이 이렇게 감탄했다. "자지(원덕수의 호)의 눈썹과 눈매를 보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명예와 이익을 향한 마음이 저절로 사라지게 만든다." 온 세상이 그의 행실을 높이 여겼는데, 그의 집에는 책이 시렁 가득 쌓여 있었으나 벼슬에서 물러날 때는 짐수레 하나만 몰고 떠났다. 죽은 뒤에는 베개와 신발, 소박한 밥그릇과 표주박만 남았을 뿐이었다. 예순 평생 여자를 가까이한 일이 없었다. — 《유후당서》에서
장지화 — 강호의 낚시꾼
장지화(자는 자동)는 부모의 상을 마친 뒤 다시는 벼슬하지 않고 강호에 살면서 스스로 '안개와 물결 속의 낚시꾼'이라 불렀다. 또 《현진자》라는 책을 지어 그 제목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의 형 장학령은 그가 세상을 피해 아주 숨어 버릴까 걱정하여 월주의 동쪽 성곽에 집을 지어 주었는데, 생풀로 지붕을 얹고 다듬지 않은 생나무로 기둥과 서까래를 삼았다. 그는 늘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미끼는 쓰지 않았으니, 그 뜻이 물고기를 잡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제가 노비를 각각 한 사람씩 내려 주자, 장지화는 그 둘을 부부로 맺어 주고 각각 '어동'과 '초청'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은자 육우가 물었다. "그대와 오가며 사귀는 사람이 누구인가?" 장지화가 답했다. "드넓은 하늘을 집으로 삼고 밝은 달을 촛불로 삼아 온 세상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니, 일찍이 잠시도 헤어진 적이 없는데 어찌 따로 오가는 사람이 있겠는가."
안진경이 호주 자사가 되었을 때 장지화가 찾아가 만났는데, 안진경은 그의 배가 낡아 물이 새는 것을 보고 새로 고쳐 주려 했다. 그러자 장지화가 말했다. "제 소원은 그저 물 위에 뜬 집에서 살면서 소계와 삽계(둘 다 저장 지방에 있는 시내다) 사이를 오가는 것뿐입니다." 이덕유는 장지화를 이렇게 칭송했다. "숨어 살면서도 이름이 알려지고, 뚜렷이 드러나면서도 아무 일에 얽매이지 않으니, 궁핍하다고도 출세했다고도 할 수 없다. 한나라의 엄광에 견줄 만하다." — 《유후당서》에서
이약 — 거문고와 원숭이를 벗 삼다
병부원외랑을 지낸 이약은 본래 그윽한 이치를 헤아릴 줄 알아 그 기상이 깊고 엄숙했다. 덕행이 높을 뿐 아니라 산수를 즐기는 운치도 있었으며, 거문고와 술, 그리고 도덕까지 한 시대에 빼어났다.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고 사람들과 사귀기는 좋아했지만 세속적인 이야기는 즐기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싸매고 손님과 함께 공차기 놀이를 하다 보면 어느새 한 달이 훌쩍 지나가곤 했다.
옛 기물을 많이 모았는데, 호주에 있을 때 오래된 쇳조각 하나를 얻었다. 그것을 두드리면 소리가 몹시 맑고 우아했다. 또 원숭이 한 마리를 길러 '산공'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늘 데리고 다녔다. 달밤에 강에 배를 띄우고 금산에 올라 쇳조각을 두드리며 거문고를 타면 원숭이가 반드시 휘파람으로 화답했다.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였는데, 반드시 손님이 있어야만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 《하씨어림》에서
백거이 — 뱃놀이하는 고승과 마주치다
태부 벼슬을 지낸 백거이는 동도에서 한직으로 지낼 때 날마다 시와 술로 소일했다. 상서 벼슬을 지낸 노간사의 별장이 이수 근처에 있었는데 정자와 누각이 매우 훌륭했다. 어느 한겨울 백거이가 여러 조카들을 데리고 그곳에 올라 숭산과 낙수를 멀리 바라보고 있는데, 잠시 뒤 잔눈이 조금 내렸다. 그러자 백거이가 예전에 금릉 지방을 다스리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강남 지방은 산수가 아름다워, 그곳 사람들과 작은 배를 띄우고 줄풀과 농어로 끼니를 때우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삿갓을 쓴 두 사람이 물가를 따라 내려오기에 배를 이끌어 가까이 가 보니, 그 배 앞에는 푸른 장막이 쳐 있고 그 안에 흰옷을 입은 사람이 승려와 함께 앉아 있었다. 배 뒤편에는 작은 화로가 있고 구리 시루에 불을 피워 놓았는데, 어린 시동이 고기를 삶고 차를 끓이는 사이 뱃전에 물결이 부서지고 있었다. 배 안에서는 이야기 소리와 웃음소리가 한창 흥겹기에, 내가 그 고상하고 초연한 모습에 감탄하여 어떤 사람인지를 물으니, '이분은 백공(백거이)께서 불광이라는 승려와 함께 건춘문을 나서서 향산정사로 가는 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 《태평광기》에서
백거이 — 연못 위의 잔치
백거이는 동도에 있을 때 이도리에 살았다. 그 집에는 배를 띄울 만한 못이 있었는데, 백거이는 매번 손님들을 모아 배에 태우고는 기름종이 주머니 수백 개에 구운 고기를 매달아 물속에 담가 두었다가, 배를 띄우고 놀면서 하나씩 건져 먹었다. 다 먹고 나면 좌우에서 차례로 빈 주머니를 거두었고, 잔치가 끝나면 도구들을 다시 물속에 넣어 보관해 두었다. — 《하씨어림》에서
최당신 — 배 한 척으로 얻은 자유
최당신은 민중 지방 사람으로, 소송(자는 자용), 여진숙과 함께 공부하며 가깝게 지냈다. 그런데 소송과 여진숙만 과거에 합격하자 최당신은 서운한 마음으로 과거를 향한 뜻을 접었다. 훗날 소송과 여진숙 두 사람이 나란히 조정의 관청에 들어가 함께 말을 타고 나와 변수의 둑을 따라가다가, 작은 배의 창 아래 앉아 있는 한 선비를 보았는데 바로 최당신이었다. 급히 다가가 인사를 나누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으니, 최당신이 대답했다.
"처음에 가진 돈을 헤아려 보니 천 냥 남짓 되기에, 그 반으로 이 배를 사서 강호를 오가고, 나머지 반으로는 이런저런 물건을 사서 생활한다네. 비록 노 젓는 대로 정처 없이 떠다니지만, 과거를 보아 벼슬을 구하던 때보다 오히려 낫네."
두 사람이 함께 데려가려 했지만 최당신은 듣지 않고 그저 두 사람의 벼슬과 사는 곳만 물었다. 다음 날 두 사람이 다시 관청에서 나와 보니 최당신이 집에 명함만 남기고 가 버렸으므로, 서둘러 그가 있던 곳을 찾아갔지만 배는 이미 떠난 뒤였다. 돌아와 그가 남긴 명함을 살펴보니, 이름 아래 작은 글씨로 시 한 수가 적혀 있었다.
집현전의 옛 벗이 요즘 사는 모습을 묻기에 고깃배 한 척 사서 세월을 보낸다 답하네 책상에는 도가의 경전이 있고 술통에는 술이 있으니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가는 곳이 곧 내 집이라네
— 《용재수필》에서
(용어) '집현전'은 원문에서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학사들이 모여 학문을 논하던 관청이다.
신군 — 이름난 학자들의 외숙이면서도 숨어 산 사람
양적 지방의 신군은 선배들 가운데서도 어진 사람이었다. 어려서 아버지 덕에 벼슬자리를 얻었으나 은거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승상 소송의 처남이자, 정호·정이 두 형제(둘 다 훗날 성리학의 큰 학자가 되었다)의 외숙이었다. 당시 소송의 권세가 한창 높을 때여서 자주 그를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정이(호는 이천)가 원풍 연간에 해마다 낙양에서 영창 지방의 한유(자는 지국)를 찾아뵈러 갈 때면, 양적을 지날 때마다 반드시 신군의 집에서 열흘 남짓 머물렀다. 그의 집에는 일곱 칸짜리 큰 집이 있었는데, 집 뒤로는 온통 진기한 꽃과 풀이 피어 있어 평생을 그 속에서 즐기며 살았다. — 《와유록》에서
전주 — 대나무숲에 모여 산 다섯 형제
전주(자는 승군)는 굳세고 꼿꼿하여 스스로를 지키는 성품이었다. 그 형제 다섯 사람이 모두 기개와 절조가 있고 학식이 넓고 글에 능했으며, 형제가 함께 살며 서로 화목하게 지냈다. 최안(자는 덕부)과 진염(자는 숙이)을 벗으로 사귀었다. 전씨 형제들은 양적현 남쪽 십 리에 있는 죽림점이라는 곳에 살았는데, 그곳에 대나무가 많아서 죽림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열 칸 남짓한 집이 있어 글을 읽고 짓는 일로 넉넉하게 지낼 만했다.
양적 사람으로 재능 있는 선비인 장종문은 전씨 집안과 친척 사이였는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난해 어느 달밤에 성안에서부터 걸어서 전씨 형제를 찾아갔더니 마침 술이 익고 꽃이 활짝 피어 있어 열흘 남짓 머물렀다. 서로 문장을 지으며 어울리다가 마음껏 즐긴 뒤에야 돌아왔다." — 《와유록》에서
전주 — 시냇가 바위에 앉아 시를 읊다
첩첩산중에 전주의 초가집이 있었는데, 앞에는 대나무가 있고 옆으로는 시내가 흘렀다. 그 시냇가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었고, 그 앞뒤로 배나무와 대추나무를 심어 두었다. 그는 날마다 두 아우와 함께 대숲을 지나 시내를 건너다니다가, 지치면 그 바위 위에 앉거나 풀밭에서 쉬었다. 칡베로 만든 두건과 짚신 차림으로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곤 했는데, 그 흥취만으로도 늙어 감과 세상 근심을 넉넉히 잊을 만했다. — 《소창청기》에서
소상 — 바둑 한 수에 담긴 자부심
소상(자는 양직)은 경구와 소흥 사이에 은거해 살았다. 서부(자는 사천)와 함께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서부가 조정에 나아가는 길에 소상이 사는 곳을 지나게 되어, 그곳에 머물며 여러 날 함께 술을 마시고 즐겼다. 두 사람은 평소 바둑 상대였는데 서부의 실력이 소상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런데 이날은 소상이 바둑돌 한 점을 놓으며 서부에게 말했다. "자네가 오늘은 이 늙은이의 한 점을 양보해야 할 걸세." 서부는 부끄러운 낯빛이 되었다. — 《학림옥로》에서
주돈유 — 피리 소리를 따라간 곳
주돈유(자는 희진)는 가화 지방에 살았는데, 어느 날 벗들과 어울리다 안개 자욱한 물결 사이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들었다. 지나가던 행인에게 물으니 "우리 선생님이 부는 피리 소리입니다"라고 답했다. 얼마 뒤 피리를 불던 이가 작은 배를 저어 왔으므로, 모두 함께 그가 사는 곳으로 따라갔다.
그의 집에는 여러 악기가 걸려 있었는데 모두 주돈유가 평소 마음에 두었던 것들이었다. 처마 사이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기한 새들을 기르고 있었고, 방 안의 푸른 자기 그릇에는 과일과 음식이 담겨 있어 손님이 오면 그것으로 대접했다. 그가 지은 시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푸른 비단으로 상투를 싸매고 흰 행전을 두르니 평범한 사람도 아니요 신선도 아니라네 집은 낙양성 안에 있건만 누워서 피리를 불며 이천 땅을 지나가네
— 《옥호빙》에서
예찬 — 세속 밖에 지은 서재
예찬(별호는 운림)의 집에는 '청비각'이라는 서재가 있었는데, 깊고 아늑하여 세속의 먼지가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그 안에는 수천 권의 책이 있었는데 모두 그가 손수 교정을 본 것이었고, 유교 경전과 역사서, 제자백가의 글에서 불교와 도교의 책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읽고 읊조렸다. 집 안에는 옛 청동 그릇과 이름난 거문고가 좌우에 놓여 있었고, 소나무와 계수나무, 난초와 대나무가 집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집 밖으로는 높은 나무와 긴 대나무가 울창하게 깊은 숲을 이루었는데, 비가 그치고 바람이 잦아들면 그는 지팡이를 짚고 신을 끌며 마음 내키는 대로 주위를 거닐다가 때때로 시구를 읊으며 즐거워했다. 그래서 그를 보는 사람들은 그가 속세를 벗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 《하씨어림》에서
고덕휘 — 옥산가처에 모인 문인들
고덕휘(자는 중영)는 재산이 많았으나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손님을 좋아했다. 옛 명필의 글씨와 이름난 그림, 귀한 청동 그릇 등을 사서 모았고, 서경이라는 곳 서쪽에 별장을 짓고 '옥산가처'라는 현판을 달았다. 밤낮으로 손님들과 그 안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다.
그리하여 하동의 장저, 회계의 양유정, 천태의 가구사, 영가의 이효광 같은 사방의 문인들과, 장우(자는 백우), 우립(자는 언성), 기원박 같은 세속을 벗어난 인사들, 그리고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이 모두 그의 집에 모여들었다. 정원과 연못의 화려함, 도서의 풍부함은 음식과 건물, 음악과 기예에 이르기까지 모두 당시 으뜸이었다. 게다가 그 자신의 재주와 정취가 빼어나 앞서 말한 여러 문인들과도 얼마든지 어울릴 수 있었으므로, 그 풍류와 문아함이 사방에 이름났다. — 《하씨어림》에서
왕면 — 매화옥의 은자
왕면은 배를 사서 동오 지방으로 내려갔다가 큰 강을 건너 초회 지방으로 가서 이름난 산천을 두루 유람했다. 그러다가 재주 있는 이나 협객, 혹은 옛 호걸들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면 곧 그를 불러 함께 술을 마시며 강개한 뜻을 시로 읊었다. 북쪽으로 당시 원나라의 수도였던 연경을 유람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십 년이 지나지 않아 이곳은 여우와 토끼가 뛰노는 벌판이 되리라."
구리산에 은거하며 콩은 세 이랑, 밤나무는 그 두 배를 심었고, 매화는 천 그루, 복숭아와 살구는 각기 오백 그루씩 심었으며, 토란 한 구획과 부추 백 포기씩을 가꾸었다. 또 물을 끌어 못을 만들어 물고기 천여 마리를 기르고, 초가삼간을 지어 스스로 '매화옥'이라 이름 붙였다. — 《명야사휘》에서
왕공 — 도끼자루는 아직 무사하다네
왕공이 예순 남짓한 나이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도성으로 가게 되었는데, 같은 고을에 사는 왕칭이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회계 태수의 인끈을 숨겨 가지고 오는 일이 없도록 하게." 왕공이 웃으며 답했다. "산속의 도끼자루가 다행히 아직 무사하다네." — 《명세설신어》에서
(용어) 옛날 한나라의 주매신은 늙어서야 크게 출세했는데, 회계 태수가 되어 부임할 때 처음에는 인끈을 감추고 있어서 옛 친구들이 그가 태수인 줄 모르다가, 나중에야 알고 크게 놀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왕칭은 이 옛이야기를 빗대어 왕공을 놀린 것이고, 왕공은 주매신이 벼슬하기 전 아내와 함께 산에서 나무를 하며 살았던 일을 빗대어, 자신은 비록 아직 벼슬을 못했어도 살아갈 방도는 있다고 받아친 것이다.
서홍 — 재산을 버리고 떠난 부자
상숙 지방의 부자 서홍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유간 지방 사람 반규에게 말했다. "우리 집 재산이 많으니 자네가 대신 맡아 처리하게. 나는 이제 이것을 버리고 떠나겠네." 그러고는 자기 땅과 집을 모두 반규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처자식을 데리고 조상의 묘 옆에 집을 짓고 살면서, 베옷을 입고 나물밥을 먹으며 바깥사람들과의 교제를 사양하고 스스로를 '복사꽃 마을에 숨은 사람'이라 불렀다. — 《장설소췌》에서
왕빈 — 사사로운 답례는 관청 일이 아니다
고소 지방의 왕빈은 누추한 골목에서 홀로 살았는데, 군수 요선이 그를 찾아갔다. 요선은 수레에서 내려 몸소 걸어서 그 집 문 앞에 이르렀는데, 왕빈이 누구냐고 묻자 요선이라고 대답하니 그제야 문을 열고 맞아들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왕빈이 관청 문 앞에 가서 두 번 절하고 돌아가려 하자, 요선이 몸소 나와 맞아들이려 했다. 그러자 왕빈이 사양하며 말했다. "이것은 관청의 일이 아니므로 감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 — 《명세설신어》에서
(용어) 옛날 공자의 제자 자유가 무성 고을의 원이 되었을 때, 공자가 어떤 인재를 얻었느냐고 묻자 자유는 "담대멸명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다닐 때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제 집에 찾아오는 일이 없습니다"라고 답한 적이 있다. 왕빈은 이 옛이야기를 빌려, 자신이 요선을 찾아간 것은 어제 사사로이 찾아와 준 데 대한 개인적인 답례일 뿐, 공적인 용무로 관청에 드나드는 것은 아니라는 뜻을 밝힌 것이다.
화여덕과 심주 — 옛 물건을 알아보는 두 안목
화여덕에게는 '상고루'라는 집이 있었는데, 그는 갓과 신발, 소반과 탁자 같은 것들을 모두 옛사람의 방식을 본떠 만들었다. 특히 옛 명필과 명화, 청동 그릇 등을 좋아하여 상금을 걸고서라도 열심히 모았다. 또 진품과 모조품,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낼 줄 알았으므로 그가 모은 것들은 모두 상당한 수준 이상이었다.
당시 오 지방에는 심주라는 사람이 있어 옛 물건을 잘 감별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그래서 화여덕은 이따금 작은 배에 골동품을 싣고 심주를 찾아가 사귀며, 서로 소장품을 내놓고 감정하고 평가하느라 어떤 때는 수십 일씩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명나라 성화·홍치 연간(황제들의 재위 시기를 가리키는 말이다)에 중국 동남 지방에서 옛것을 좋아하고 학식이 넓은 선비들은 심주를 첫손에 꼽고 화여덕을 그다음으로 쳤다. — 《미공십부집》에서
손일원 — 학을 위해 마련한 밭
관중 지방의 손일원(호는 태백산인)은 허상경(호는 구기산인)과 가깝게 지냈다. 어느 날 남병산을 지나는데 학 한 마리가 그를 따라왔으므로, 허상경이 그 학을 위해 밭을 사서 해마다 곡식을 깊은 산중까지 날라다 주도록 했다. 그 내용을 문서로 만들어 소중히 간직했는데,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태백산인의 학 밭은 구기산 서원 남쪽에 있다. 산을 끼고 호수를 앞에 두었으며 왼쪽은 숲이요 오른쪽은 길이다. 밭의 크기는 사방 백 걸음이며 해마다 곡식 세 섬을 거둔다. 만약 남는 것이 있으면 곡식을 나르는 비용으로 쓰고, 세 섬의 곡식은 항주 서호에 있는 남병산으로 보낸다. 흉년이 들면 그 절반으로 줄이되, 나머지는 허상경이 남에게 글씨를 써 주고 받은 사례금으로 채운다. 그 밭을 가는 사람은 이웃 사람 이인이요, 곡식을 나르는 사람은 종 귀의이며, 보증인은 아우 허장경(자는 주중)이다. 주인이 누구냐 하면, 태백산인의 벗인 허중보(호는 기천자)이다."
이 문서를 일러 '학전권'이라 불렀다. — 《미공십부집》에서
문징명 — 손수 그림을 골라 그려 준 사람
문징명(호는 형산)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한림원 대조 벼슬로 그를 부르기도 했지만 반 년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명나라 황족인 영왕이 그의 명성을 사모하여 초청했으나 나아가지 않고 날마다 글씨와 그림으로 소일했다. 평생 다른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고 번화한 시내에 드나들지 않았다. 권세 있고 지체 높은 사람들이 그의 글씨와 그림을 바라면 결코 주지 않았지만, 평범한 백성들이 과일이나 떡을 가지고 와서 청하면 흔쾌히 붓을 휘둘러 그려 주었다. 아흔두 살에 이렇다 할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 — 《명야사휘》에서
왕총 — 천년 전 옛사람을 사모하는 마음
왕총(자는 이길)은 손수 경서를 두 번이나 베껴 썼다. 속된 말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고 풍모가 의젓하고 행동이 헌걸찼다. 그러면서도 늘 겸손하여, 명성이 자자했음에도 신중하고 진중한 태도를 지켰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마주해도 학문 이야기를 꺼내는 법이 없었으니, 대개 자기 재주로 남보다 뛰어나 보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품이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여 동정호에서 삼 년을 살았고, 그 뒤로는 석호에서 이십 년을 책 읽으며 지냈는데, 명절이나 부모님을 뵈러 갈 때가 아니면 성안에 드나들지 않았다. 경치 좋은 산수를 만나면 문득 즐거운 마음이 일어 떠날 줄을 몰라, 어떤 때는 무성한 숲이나 풀밭에 비스듬히 누워 쉬면서 향기를 맡고 시를 읊으며 노래를 부르니, 아득히 천년 전 옛사람을 그리워하는 듯한 풍취가 있었다. — 《명야사휘》에서
웅제화 — 맑은 물을 보면 마음이 맑아진다
웅제화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길수현의 추남고리를 지나다 보니 그곳 맑은 물이 얼마나 시원한지, 참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욕심 많은 자는 청렴해지고 겁 많은 자는 뜻을 세우게 할 만했다. 그곳에서 어떤 선생을 만났는데, 말 한마디를 채 끝내기도 전에 이미 자연과 더불어 노래하며 돌아가고 싶은 흥취가 일었다." — 《명세설신어》에서
전선 — 바위 소리를 즐기던 은자와 신선
진나라 무제 태강 연간에 전선이라는 사람이 명석암에 은거했다. 서리가 바람에 날리고 낙엽이 지면 그는 늘 그 바위를 어루만지며 홀로 즐거워했다. 그런데 매번 흰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바위 위를 서성이다가 새벽이 되면 사라지곤 했는데,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왕중륜이라는 사람으로 주나라 선왕 때 사람인데, 이 바위에서 나는 소리가 맑고 우렁차서 자주 여기 와서 듣곤 한다." — 《소창청기》에서
이름 모를 은자 — 나부산의 야인
어느 야인이 나부산에서 노닐며 긴 휘파람을 불면 그 소리가 온 숲에 메아리쳤다. 송나라 함순 연간(황제의 재위 시기를 가리키는 말이다)에 어떤 사람이 검은 모자를 쓰고 신을 신은 채 나부산을 오가며, 사람만 보면 크게 웃고는 달아나곤 했다. 삼 년이 지나도록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어느 날 잔뜩 취해 돌아가다가 문득 숯 검댕이를 들어 벽에 이런 글을 썼다.
구름은 넓은 바다로 흘러가려 하지 않고 봄빛만 홀로 푸른 산봉우리로 오르려 하네 인간 세상에 떨어진 지 천 겁이 지났건만 오히려 매화를 사랑하여 돌아가지 못하네
이 사람은 대개 세상을 등진 무리였을 것이다. — 《소창청기》에서
주진촌 — 두 시인이 노래한 이상향
주진촌이라는 마을은 서주 풍현에서 동남쪽으로 백 리쯤 떨어진 깊은 산중에 있다. 그곳 풍속이 매우 순박한데, 고을에는 오직 주씨와 진씨 두 성씨만 살아 대대로 서로 혼인을 맺는다. 백거이(자는 낙천)에게 〈주진촌〉이라는 서른네 구절의 긴 시가 있는데, 그 대략은 이렇다.
고을이 멀어 관청 일이 적고 땅이 깊숙해 풍속이 순후하다 재물이 있어도 장사를 하지 않고 장정이 있어도 군대에 나가지 않는다 집집마다 대대로 하던 일을 지켜 머리가 세도록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살아서는 이 마을 사람이요 죽어서도 이 마을 흙이 된다 밭 가운데 노인과 아이들이 서로 바라보며 어찌 저리 즐거운가 한 마을에 오직 두 성씨가 살아 대대로 서로 혼인을 맺는다 친척끼리 모여 살고 늙은이 젊은이가 함께 어울려 논다 누런 닭과 흰 술로 열흘이 멀다 하고 모여 즐긴다 살아서는 멀리 떨어져 사는 일이 없고 시집 장가도 가까운 이웃끼리 고른다 죽어서도 먼 곳에 묻히지 않아 무덤들이 옹기종기 마을을 둘렀다 이미 삶과 죽음이 다 편안하니 몸도 마음도 시달리지 않는다 그래서 오래 사는 사람이 많아 때로는 고손자를 보는 이도 있다
나(허균)는 이 시를 읊을 때마다 속된 마음이 단번에 씻기는 듯하여, 그곳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곤 했다. 그런데 훗날 소식(호는 동파)의 〈주진촌가취도〉라는 시를 보니 이러했다.
내가 예전 주진촌의 고을 관리가 되어 농사를 권하러 살구꽃 핀 마을을 찾았더니 요즘 그곳 풍경은 차마 그려 낼 수가 없구나 고을 아전이 세금 내라 밤중에도 문을 두드리니
이렇게 보면 송나라 때의 주진촌은 당나라 때의 주진촌과 이미 달랐던 것이다. 하물며 지금에 와서 본다면 또 얼마나 변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 《지비록》에서
석연년 — 얼굴 모르는 부호의 잔치
석연년(자는 만경)은 채하 지방에 살았는데, 이웃의 한 부잣집에서 날마다 노래와 악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집 하인 수십 명이 늘 석연년의 집 앞을 오갔으므로, 석연년이 그 부호가 어떤 사람인지 물으며 한번 만나 보고 싶어 했다. 그러자 하인이 이렇게 답했다. "저희 주인어른께서는 본래 사대부와 사귀지 않으시지만, 술 마시기는 좋아하십니다. 학사님께서 술을 잘하신다는 소문을 자주 들으셨으니 한번 만나 보고 싶어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시험 삼아 뜻을 여쭤 보겠습니다."
하루는 과연 사람을 보내 석연년을 초청했다. 석연년이 그 집에 이르러 마루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니, 주인이라는 사람이 나왔는데 두건을 허리춤에 매달았을 뿐 옷차림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인사도 나누지 않고 곧바로 그를 어느 별채로 데려갔는데, 휘장 등이 매우 화려했다. 여종 둘이 각각 작은 쟁반을 들고 왔는데, 한 쟁반에는 안주 이름을 적은 패가 있었고 다른 쟁반에는 열 가지 남짓한 술이 놓여 있었다. 석연년더러 패 하나와 술 다섯 가지를 고르게 했다.
잠시 뒤 두 여종이 물러가자 기생 십여 명이 저마다 안주와 과일과 악기를 받쳐 들고 들어왔는데, 옷차림과 얼굴이 하나같이 곱고 화려했다. 그중 한 기생이 나와 술을 따르면 한 순배가 끝날 때마다 음악이 울렸다. 안주와 과일을 든 기생들은 그 앞에 늘어서 있다가 술이 끝나면 다시 좌우로 물러섰다. 이렇게 다섯 차례 술을 돌리고 나자 기생들이 모두 물러가고 주인도 안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손님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석연년은 하는 수 없이 혼자 걸어서 나왔다.
석연년은 "저 부자의 사람됨이 흐리멍덩한 듯한데 이렇게 호사스럽게 사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하고는, 훗날 다시 사람을 보내 정중히 만나기를 청했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문을 닫아걸고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꾸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이웃 사람이 말했다. "그는 일찍이 다른 사람과 사귄 일이 없어서 이웃조차 그의 얼굴을 모릅니다." — 《몽계필담》에서
맹씨 — 어부의 집에 숨겨진 부귀
장순민(자는 운수)의 《남천록》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심양의 맹씨 집안은 대대로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집 대문에는 어딘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감돌았고 대나무 울타리로 가려져 있었다. 맹씨 집안의 아들이 나와 손님을 맞았는데, 칡베 적삼에 짚신을 신은 차림이었고 몸가짐과 말투가 강가의 여느 어부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손바닥만 한 초가로 안내했는데, 좌우에는 온통 고기잡이 도구뿐이라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조금 더 들어가 대청에 이르자 완전히 부귀한 집안의 모습이었다. 잠시 뒤 '중당'이라는 현판이 걸린 곳에 다다르니 기둥과 서까래는 모두 검붉게 칠해져 있었고, 그 사이에 놓인 조각과 자수로 장식한 여러 그릇과 옷가지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했다. 술과 음식도 하나같이 진귀한 맛이었다. 얼마 뒤 기생 서너 명이 나왔는데 모두 값진 재물을 들여 지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모두 도성에서 새로 유행하는 곡이어서 온종일 황홀경에 빠져들게 했다."
이는 대개 의협심 많은 사람이 신분을 숨기고 부유하게 사는 경우일 것이다. — 《문기유림》에서
소식이 전한 이야기 — 사냥꾼처럼 살던 은자의 의리
내(허균)가 어렸을 때 소식(호는 동파)을 뵈었는데, 그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세상에는 호걸스러운 선비이면서도 은거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내 고향에 대대로 미산에 살던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때 날짜는 임박했는데 묘지에 쓸 벽돌이 모자랐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을 찾아가면 즉시 해결해 줄 것입니다. 다만 그는 사냥하러 떠도는 날이 많고 사는 곳도 세상과 멀리 떨어진 깊은 산속이라 어떨지 모르겠지만, 한번 가 보십시오.'
그래서 이틀을 걸려 그 집에 이르렀는데, 해가 저물도록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저녁이 되어서야 종자 몇 사람을 거느린 이가 나타났는데, 그 집 주인은 젊은 소년이었다. 명함을 들이니 소년이 옷을 갈아입고 나와 앉아 찾아온 까닭을 물었다. 내가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자 소년이 말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잠시 식사를 하시고 이 집에서 쉬십시오. 기한 안에 필요하신 것을 마련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뒤 여종 몇이 무릎을 꿇고 식사를 올렸는데 모두 그날 잡은 신선한 것들이었다. 술을 몇 잔 마신 뒤 식사가 끝나고 나서야 조용히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그가 종과 말을 보내 나를 산 아래까지 배웅하게 했는데,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일을 시작해 땅을 파는데 그날 저녁이 다 되도록 벽돌 한 장 오지 않아 내가 크게 후회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묘지 옆을 가 보니 벽돌 오만 장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 일을 마친 뒤 다시 그를 찾아가 감사 인사를 하려 했으나 만날 수 없었고, 훗날 벽돌 값을 가지고 간 사람도 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 《단연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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