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입헌군주제의 실패와 공화국으로 (1791 여름 - 1792 가을)
(알랭 마르탱의 목소리)
1791년 여름, 프랑스는 위태로운 외줄 위에 서 있었다. 국민 제헌 의회는 2년여의 격론 끝에 프랑스 최초의 성문 헌법을 완성하며 혁명의 1단계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입헌 군주제라는, 어쩌면 필연적인 타협이었을 그 체제는 과거의 절대 왕정과 미래의 급진 공화정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으려 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이 시기, 새로운 법과 제도를 통해 혁명의 성과를 다지려는 노력과 함께, 이미 치유할 수 없이 깊어진 균열을 동시에 보여준다. 사법 제도는 근대화되었고, 경제 질서는 자유주의 원칙 아래 재편되었지만, 바로 그 자유의 이름 아래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억눌렸다. 정치 클럽들은 혁명의 엔진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분열의 온상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헌법에 충성을 맹세한 왕의 마음은 이미 파리를 떠나 국경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바렌 도주 사건은 이 불안한 타협의 허구성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혁명을 돌이킬 수 없는 급류 속으로 밀어 넣었다. 마르스 광장의 피는 혁명 세력 내부의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을 상징했고, 새로 개원한 입법 의회는 시작부터 폭풍우를 예고하고 있었다. 혁명은 이제 막다른 길에 다다른 듯 보였다.
제41장: 사법 제도의 근대화, 법 앞의 평등을 향하여
(1790-1791년)
혁명의 불길은 낡은 정치 체제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회의 근간을 이루던 사법 시스템까지 녹여내고 있었다. 구체제 하의 사법 제도는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지역마다 다른 관습법과 로마법이 뒤섞여 있었고, 재판 절차는 복잡하고 불투명했으며, 무엇보다 신분에 따른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귀족과 성직자는 특별 재판소에서 재판받는 특권을 누렸고, 관직 매매는 사법 정의를 돈으로 사고파는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자의적인 체포와 구금, 고문의 사용은 왕권과 영주 권력의 상징이자 민중의 공포 대상이었다. 국민 제헌 의회는 이러한 전근대적인 사법 시스템을 철폐하고, 계몽사상이 제시한 이성과 합리성, 그리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천명한 법 앞의 평등 원칙에 기반한 근대적인 사법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1790년 8월, 의회는 사법 조직에 관한 중요한 법령을 통과시켰다. 가장 큰 변화는 수백 년간 왕권에 도전하며 특권층의 보루 역할을 했던 고등법원(Parlement)의 완전한 폐지였다. 대신, 새롭게 제정된 데파르트망 행정 구역에 맞춰 통일되고 위계적인 법원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가장 기초 단위에는 '치안 판사(Juge de paix)'가 임명되어 경미한 민사 분쟁 조정과 치안 유지 역할을 담당했다. 각 구(District)에는 '지방 법원(Tribunal de district)'이 설치되어 대부분의 민사 및 경범죄 사건을 처리했다. 그리고 최고 법원으로서 법률 해석의 통일성을 확보하고 하급 법원의 판결을 파기할 수 있는 '파기원(Tribunal de cassation)'이 파리에 설치되었다.
판사 선출 방식에도 혁명적인 변화가 도입되었다. 구체제하에서 판사직이 사실상 세습되거나 매매되었던 것과 달리, 새로운 시스템에서는 치안 판사와 지방 법원 판사를 포함한 모든 판사를 해당 지역의 '능동 시민'들이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하도록 규정했다. 이는 사법부의 독립성과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이상적인 시도였다. 변호사 자격 역시 개방되어, 능력과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변호사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재판 절차에서도 중요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야만적인 고문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형사 재판에서는 영국 제도를 참고하여 배심원 제도(Jury)가 도입되었다. 12명의 시민 배심원단이 사실 관계를 판단하고, 판사는 그에 따라 법률을 적용하여 형량을 선고하도록 했다. 또한, 모든 재판은 원칙적으로 공개되어 시민들이 직접 방청할 수 있게 되었고, 피고인의 변호받을 권리가 보장되었다. 이는 사법 과정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법 없이는 범죄 없고 형벌 없다(Nullum crimen, nulla poena sine lege)'는 죄형 법정주의와 '유죄 판결 확정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무죄 추정의 원칙 역시 법률로 명문화되었다.
아버지 기욤 드샹은 변호사로서 이러한 사법 개혁의 과정을 깊은 관심과 함께 복잡한 심경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오랫동안 구체제 사법 시스템의 문제점을 비판해 왔기에, 통일되고 합리적인 법원 조직의 신설, 고문 폐지, 배심원 제도 도입 등 많은 개혁 조치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에티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진보라 할 수 있다.” 그는 아들에게 말했다. “더 이상 복잡하고 자의적인 법과 절차에 시민들이 고통받지 않게 되었어. 법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재판받을 권리를 갖게 된 것은 혁명의 가장 위대한 성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우려의 목소리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판사를 선거로 뽑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판사는 법률 지식과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이 중요한 덕목인데,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면 대중의 인기나 정치적 압력에 휘둘릴 위험이 크다. 또한,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해 경험 많은 법률가들이 부족하고 새로운 제도가 정착되기까지 상당한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게다.”
기욤의 우려처럼, 새로운 사법 제도의 시행은 초기에는 여러 어려움에 부딪혔다. 선출된 판사들 중에는 법률 지식이나 경험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고, 정치적 파벌의 영향력이 재판에 개입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배심원 제도 역시 시민들의 참여 경험 부족으로 운영에 미숙함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혁명 정부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개선해 나가면서 근대적인 사법 시스템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에티엔은 가끔 새로운 법정의 재판을 방청했다. 이전의 비밀스럽고 위압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재판은 공개되었고 시민 배심원들이 진지하게 토론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는 비록 운영상의 문제점들이 눈에 띄었지만, 적어도 법 앞의 평등이라는 원칙이 제도적으로 구현되려 하고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느꼈다. 구체제의 낡은 사법 질서는 무너지고, 법치주의라는 새로운 시대의 약속이 조금씩 현실화되고 있었다. 이는 혁명이 가져온 중요한 변화 중 하나였으며, 이후 프랑스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토대가 될 것이었다.
제42장: 경제적 자유와 노동의 족쇄: 길드 폐지와 르 샤플리에 법
(1791년 3월, 6월)
국민 제헌 의회의 개혁 작업은 정치와 사법 영역을 넘어 경제 분야로까지 확장되었다. 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 계급의 핵심적인 요구 중 하나는 바로 경제 활동의 자유였다. 그들은 구체제의 봉건적 잔재와 중상주의적 규제가 자유로운 기업 활동과 시장 경쟁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철폐하여 경제적 활력을 되찾고자 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경제관에 입각하여, 의회는 두 가지 중요한 법률을 제정했다. 바로 길드 폐지를 규정한 '알라르드 법(Loi d'Allarde)'과 노동자의 단결 및 파업을 금지한 '르 샤플리에 법(Loi Le Chapelier)'이었다.
1791년 3월 제정된 알라르드 법은 중세 이래 도시 상공업을 지배해 온 길드(Corporation 또는 Guilde) 체제를 전면적으로 폐지했다. 길드는 특정 직종의 장인들이 모여 생산 과정, 품질, 가격, 노동 조건 등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신규 진입을 제한하는 배타적인 조직이었다. 길드는 한때 장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기술 수준을 유지하는 긍정적인 역할도 했지만, 18세기에 이르러서는 기술 혁신을 가로막고 자유로운 경쟁을 저해하는 낡은 규제로 인식되고 있었다. 알라르드 법은 이러한 길드의 독점적 특권을 폐지하고, 모든 시민이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하고 기업을 설립하여 영업할 수 있는 권리를 선언했다.
이 조치는 특히 새로운 기술과 경영 방식을 도입하여 사업을 확장하려는 부르주아 상공인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드디어 낡은 규제의 족쇄에서 벗어났군! 이제 능력과 노력만 있다면 누구나 자유롭게 사업을 일으킬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거야!” 파리의 한 젊은 상인은 친구들에게 흥분해서 말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 변화를 반긴 것은 아니었다. 파리 생탄투안 구역의 숙련된 가구 장인 마티유 뒤부아는 길드 폐지 소식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길드가 우리 같은 장인들을 보호해주던 울타리였는데… 이제 아무나 싸구려 가구를 만들어 팔아댈 테고, 우리는 가격 경쟁에서 밀려나 굶어 죽게 생겼어.” 그는 어머니 마담 뒤부아에게 푸념했다. 길드는 그에게 단순히 규제가 아니라, 숙련 기술의 가치를 인정받고 동료들과 서로 돕고 의지하는 공동체이기도 했던 것이다. 길드 폐지는 경쟁을 촉진했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장인 공동체의 해체와 불안정성 심화를 의미하기도 했다.
더욱 논란이 된 것은 1791년 6월에 제정된 르 샤플리에 법이었다. 이 법은 당시 파리 등지에서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조직하려는 노동자들의 움직임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으로 나왔다. 법안을 제안한 변호사 출신 의원 이자크 르네 기 르 샤플리에(Isaac René Guy le Chapelier)는 노동자들의 단결과 파업이 알라르드 법이 보장한 ‘노동의 자유’와 ‘기업 활동의 자유’를 침해하고, 구체제의 길드와 같은 ‘중간 집단’을 부활시키려는 시도라고 주장했다. 그는 “개별 시민과 공공 이익 사이에는 어떠한 중간 집단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을 왜곡하여 적용하면서, 노동자들이 동일 직종 내에서 단결하거나 공동으로 임금 협상을 벌이거나 파업하는 행위를 일체 금지시켰다.
이 법은 명백히 노동자들의 권리를 억압하고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에티엔 드샹은 이 법안이 의회에서 논의될 때부터 강한 우려를 표했다. 그는 자코뱅 클럽 모임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동지들이여, 르 샤플리에 법안은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모순적인 법입니다! 알라르드 법이 모든 시민에게 직업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면, 왜 노동자들에게는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단결할 자유를 주지 않는 것입니까? 이것은 명백히 부르주아 고용주들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불공정한 조치입니다. 혁명은 모든 시민의 평등을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당시 의회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부르주아 의원들에게 에티엔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어려웠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집단 행동을 사회 질서를 위협하고 경제 발전을 저해하는 위험한 행위로 간주했다. 장 발레와 같은 급진파 노동자들은 르 샤플리에 법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결국 똑같아! 왕과 귀족 대신 이제 돈 많은 부르주아 놈들이 우리를 억압하겠다는 거 아닌가! 단결해서 싸우지도 못하게 하다니! 이것이 혁명이 말하는 자유란 말인가!” 장 발레는 인쇄소 동료들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르 샤플리에 법은 이후 약 1세기 동안 프랑스 노동 운동을 탄압하는 법적 근거로 작용하게 된다. 이는 프랑스 혁명이 지닌 부르주아적 성격과 한계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혁명은 경제 활동의 자유를 선언했지만, 그 자유는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었지만,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는 단결하고 저항할 권리마저 박탈하는 ‘족쇄’가 될 수 있었다. 경제적 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새로운 형태의 계급 갈등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었다.
제43장: 클럽 정치의 시대, 혁명의 엔진 혹은 분열의 온상
(1791년)
1791년, 프랑스 혁명은 입헌 군주제라는 새로운 정치 틀을 마련했지만, 실제 정치의 동력은 공식적인 의회 기구보다는 파리의 활발한 정치 클럽들에서 나오고 있었다. 혁명 초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이 클럽들은 단순한 사교 모임이나 토론 그룹을 넘어, 여론을 형성하고, 정치적 압력을 조직하며, 나아가 혁명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질적인 정치 세력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클럽 정치는 혁명의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엔진 역할을 하는 동시에, 파벌 간의 격렬한 대립과 분열을 심화시키는 온상이 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클럽은 단연 '자코뱅 클럽(Club des Jacobins)'이었다. 원래 '헌법의 벗 협회(Société des amis de la Constitution)'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클럽은 처음에는 미라보, 라파예트, 시에예스 등 다양한 성향의 온건 개혁파 인사들이 주도했다. 그러나 1791년 바렌 도주 사건과 마르스 광장 학살을 계기로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입헌 군주제를 유지하려 했던 라파예트, 바이이 등 온건파 지도자들이 탈퇴하여 별도로 '푀양 클럽(Club des Feuillants)'을 결성하면서, 자코뱅 클럽은 점차 급진적인 공화주의자들의 거점이 되어갔다. 특히 변호사 출신의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가 청렴함과 확고한 원칙, 그리고 뛰어난 논리력을 바탕으로 클럽 내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제한 선거권, 노예제 등 혁명의 타협적인 측면을 비판하고, 인민 주권과 평등의 원칙을 철저히 구현할 것을 주장하며 좌파 세력의 구심점이 되어갔다. 자코뱅 클럽은 파리 본부 외에도 프랑스 전역에 수백 개의 지부(민중 협회)를 조직하여 강력한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여론을 동원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에티엔 드샹은 자코뱅 클럽의 정기적인 모임에 열심히 참여했다. 그는 옛 자코뱅 수도원의 도서관을 개조한 회의장의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벌이는 열띤 토론을 경청하고 때로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그는 로베스피에르의 청렴함과 논리 정연함에는 감탄했지만, 동시에 그의 냉정함과 비타협적인 태도에서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는 분명 위대한 애국자다. 하지만 그의 눈빛 속에는 인간적인 따뜻함보다는 차가운 원칙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 과연 그가 이끄는 혁명은 어디로 향할까?'
한편, 에티엔의 옛 친구 뤽 모로는 자코뱅 클럽을 떠나 푀양 클럽에 가담했다. 그는 여전히 입헌 군주제가 프랑스에 가장 적합한 체제라고 믿었고, 자코뱅 클럽의 급진화와 민중 선동을 위험하게 여겼다. 푀양 클럽은 구 귀족, 부유한 부르주아지, 온건 개혁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질서와 안정을 강조하며 더 이상의 혁명 심화를 막으려 했다. 에티엔은 가끔 거리에서 뤽과 마주쳤지만, 이제 그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과거의 우정은 정치적 이념의 벽 앞에서 힘없이 스러져가고 있었다.
자코뱅 클럽보다 더 급진적이고 민중적인 성격을 띤 클럽은 '코르들리에 클럽(Club des Cordeliers)'이었다. 정식 명칭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 협회(Société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였지만, 옛 코르들리에 수도원에서 모였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이곳은 변호사 출신의 정력적인 웅변가 조르주 당통, '인민의 벗(L'Ami du peuple)'이라는 신문을 통해 민중의 분노를 대변했던 장 폴 마라, 그리고 재치 있는 문필가이자 선동가인 카미유 데물랭 등이 주도하는 급진 민주주의자들의 본거지였다. 코르들리에 클럽은 자코뱅 클럽보다 가입 조건이 덜 까다로워 소상인, 장인, 노동자 등 상퀼로트들이 많이 참여했고, 회의 분위기도 훨씬 더 자유롭고 소란스러웠다. 그들은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 직접 민주주의(국민 소환제 등), 그리고 부의 재분배와 같은 급진적인 요구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인쇄공 장 발레는 코르들리에 클럽의 열렬한 회원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분노와 열정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었고, 당통의 호탕한 연설과 마라의 신랄한 비판에 열광했다. 그는 클럽 활동을 통해 다른 상퀼로트 활동가들과 연대하고, 파리 민중을 조직하여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는 자코뱅 클럽의 지식인 중심적인 분위기보다는 코르들리에 클럽의 민중적이고 행동적인 분위기를 더 선호했다. 그에게 혁명은 점잖은 토론이 아니라, 거리에서의 직접적인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파리에는 다양한 성격의 정치 클럽과 협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활동했다. 여성들만의 정치 클럽도 등장했고(비록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각 지역 구역(Section) 단위의 민중 협회들도 활발하게 움직였다. 신문과 팸플릿은 클럽들의 주장을 전파하고 논쟁을 확산시키는 중요한 매체 역할을 했다.
클럽 정치는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그것은 시민들이 정치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했으며, 혁명의 동력을 유지하고 급진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동시에 클럽 정치는 파벌 간의 극단적인 대립과 불신을 심화시키고, 때로는 폭력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온상이 되기도 했다. 자코뱅과 코르들리에, 그리고 푀양 클럽 간의 치열한 경쟁과 갈등은 이후 혁명의 경로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었다. 1791년, 파리의 클럽들은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뜨거운 열정과 함께 위험한 분열의 씨앗을 동시에 키워나가고 있었다.
제44장: 1791년 헌법 제정, 입헌 군주제의 완성
(1791년 9월)
1791년 9월, 2년여에 걸친 격렬한 토론과 논쟁 끝에 국민 제헌 의회는 마침내 프랑스 최초의 성문 헌법을 완성하고 채택했다. 이 헌법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의 원칙을 바탕으로, 프랑스를 절대 왕정에서 입헌 군주제로 전환시키는 제도적 틀을 마련한 역사적인 문서였다. 그것은 혁명의 초기 성과를 집약하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법적으로 공고히 하려는 노력이었지만, 동시에 혁명 세력 내부의 타협과 갈등,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모순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불완전한 창조물이기도 했다.
헌법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주권은 왕이 아닌 국민에게 속한다고 명시하여 국민 주권 원칙을 확립했다. 둘째, 몽테스키외의 영향 아래 권력 분립 원칙을 채택하여, 입법권은 선출된 단원제 의회(입법 의회)에, 행정권은 세습 군주인 국왕에게, 사법권은 독립된 법원에 부여했다. 셋째, 입법 의회는 법률 제정, 예산 심의, 선전 포고 등 중요한 권한을 가졌지만, 국왕은 법률안에 대해 일시적인 정지 거부권(Veto suspensif, 최대 4년간 효력 정지 가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넷째, 국왕은 '프랑스인의 왕'으로서 법에 따라 통치하며, 행정부 수반으로서 각료를 임명하고 군대를 통솔하는 권한을 가졌다. 다섯째, 선거권은 앞서 논의된 대로 재산 자격에 따라 '능동 시민'에게만 주어지는 제한 선거 제도를 채택했다.
이 헌법은 분명 구체제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진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절대 왕권은 폐지되었고, 국민 대표 기관인 의회가 입법권을 장악했으며, 법 앞의 평등과 기본적인 시민적 자유가 보장되었다. 봉건적 특권은 철폐되었고, 합리적인 행정 및 사법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는 프랑스를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정치 체제를 가진 국가 중 하나로 만들었다.
에티엔 드샹은 완성된 헌법 조항들을 읽으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혁명의 기본적인 원칙들이 법제화된 것에 대해 안도감과 자부심을 느꼈지만, 동시에 그 안에 담긴 한계들, 특히 제한 선거 제도와 국왕에게 부여된 거부권에 대해서는 깊은 아쉬움과 우려를 감출 수 없었다.
“아버지, 드디어 헌법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프랑스는 법치 국가로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에티엔이 말했다.
기욤 드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다. 특히 법 앞의 평등과 사법 개혁은 큰 진전이라 할 수 있지. 하지만 에티엔, 나는 여전히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다. 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을 나눈 것은 평등 원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사회 갈등의 불씨가 될 것이다. 또한, 왕에게 거부권을 준 것은… 글쎄, 왕께서 진심으로 이 헌법을 존중하고 협력할 의지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바렌 사건 이후 나는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본다. 결국 왕과 의회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되는구나.”
기욤의 우려는 정확했다. 1791년 헌법은 본질적으로 온건 부르주아지와 왕권 사이의 불안정한 타협의 산물이었다. 왕은 자신의 권력 상실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공화정을 원하는 급진파와 정치에서 배제된 민중들은 헌법에 만족하지 못했다. 입헌 군주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왕과 의회, 그리고 국민 사이의 상호 신뢰와 협력이 필수적이었지만, 이미 그 기반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 제정은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어야 했다. 1791년 9월 14일, 루이 16세는 국민 제헌 의회에 출석하여 새로운 헌법에 대한 충성을 엄숙히 서약했다. 그의 표정은 어두웠고 목소리는 기어들어갔지만, 의원들은 예의상 박수를 보냈다. 9월 30일, 국민 제헌 의회는 2년여의 활동을 마치고 역사적인 임무를 완수했음을 선언하며 공식적으로 해산했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생산적인 의회 중 하나였던 제헌 의회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제 프랑스는 새로운 헌법 아래, 새롭게 선출될 입법 의회와 함께 입헌 군주제라는 미지의 항해를 시작해야 했다. 에티엔은 헌법의 완성을 축하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폭풍우가 몰아칠지도 모르는 불안한 미래를 예감하고 있었다. 과연 이 헌법은 프랑스에 안정과 번영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아니면 더 큰 혼란과 격변으로 가는 길목에 불과할까? 역사의 다음 장은 아직 쓰이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제45장: 왕의 이중 생활, 탈출 계획 구체화
(1790년 말 - 1791년 봄)
파리 튈르리 궁에서의 삶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굴욕과 감금의 나날이었다. 베르사유 행진 이후 파리 시민들의 감시 아래 놓인 그들은 더 이상 프랑스의 절대 군주가 아니었다. 루이 16세는 국민 제헌 의회가 내놓는 개혁 법안들에 마지못해 서명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혁명 이전의 질서로 돌아가 있었다. 특히 1790년 7월 제정된 '성직자 시민 헌장'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에게 깊은 신앙적 고뇌와 함께 혁명 정부에 대한 결정적인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고 성직자에게 충성 서약을 강요하는 것을 신성 모독으로 여겼고, 이는 그가 혁명과의 타협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소, 앙투아네트. 저들은 나의 신앙까지 빼앗으려 하고 있소. 우리는 이곳을 벗어나야 하오.” 루이 16세는 아내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단호함이 실려 있었다.
“폐하, 진작 그러셨어야지요!”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의 결심을 재촉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주였던 그녀는 혁명 발발 초기부터 오빠인 레오폴트 2세 황제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보내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는 등 반혁명적인 태도를 견지해왔다. 그녀는 파리 시민들의 적대감과 모욕적인 언사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어떻게든 이 ‘감옥’에서 벗어나 예전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 했다. “어서 빨리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오라버니께서도 우리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셨어요.”
왕비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스웨덴 귀족인 악셀 폰 페르센 백작이 이 비밀 탈출 계획의 총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그는 왕비에 대한 깊은 연모의 감정(혹은 그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왕족을 구출하는 것을 자신의 명예로운 임무로 여겼다. 그는 치밀하고 대담하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계획의 핵심은 왕족 일가가 한밤중에 비밀리에 튈르리 궁을 빠져나가, 미리 준비된 마차를 타고 프랑스 동북부 국경 근처 몽메디(Montmédy) 요새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왕당파 장군인 부이예 후작이 지휘하는 충성스러운 군대가 기다리고 있었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 벨기에) 국경과도 가까워 유사시 외국의 지원을 받기도 용이했다. 몽메디에서 왕은 혁명 정부를 부정하고 왕권 복고를 선언할 계획이었다.
페르센은 모든 준비를 극도의 비밀 속에서 진행했다. 그는 러시아 남작 부인과 그 수행원들로 위장할 왕족들의 가짜 여권과 의상을 준비했다. 루이 16세는 하인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가정교사로, 왕세자와 공주는 남작 부인의 자녀로 변장할 예정이었다. 그는 또한 장거리 여행을 위해 특별히 튼튼하고 안락하게 제작된 대형 마차, ‘베를린(Berline)’을 주문 제작했다. 이 마차는 여러 필의 말이 끌어야 할 만큼 크고 무거웠지만, 왕족의 안락함과 위엄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도주 경로와 일정 역시 세심하게 계획되었다. 파리를 빠져나가는 경로, 각 지점에서 말을 교체할 역참, 그리고 국경 근처에서 부이예 후작의 부대가 마차를 호위하며 합류할 지점까지 미리 정해졌다. 페르센은 직접 마부로 변장하여 파리 외곽까지 왕족을 안내하기로 했고, 이후에는 충성스러운 하인들이 마부 역할을 맡기로 했다. 부이예 후작에게는 비밀 서신을 통해 구체적인 접선 시간과 장소를 전달하고 군대 배치를 요청했다.
튈르리 궁 안에서는 긴장감과 비밀스러운 기대감이 교차했다. 왕족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건 이 위험한 계획에 대해 끊임없이 속삭였고, 충성스러운 소수의 시종들만이 이 비밀을 공유했다. 왕의 동생 엘리자베트 공주와 아이들의 가정교사 마담 투르젤도 동행하기로 했다.
“정말 성공할 수 있을까요?” 마리 앙투아네트가 불안한 목소리로 페르센에게 물었다.
“염려 마십시오, 마마. 모든 준비는 완벽합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며칠 후면 우리는 자유를 되찾고, 폐하께서는 다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시게 될 것입니다.” 페르센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왕비를 안심시켰지만, 그의 마음속에도 성공에 대한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다. 아주 작은 실수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는 위험천만한 계획이었다.
탈출 예정일은 여러 차례 연기된 끝에 마침내 1791년 6월 20일 밤으로 결정되었다. 그날 밤, 튈르리 궁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프랑스 왕족 일가는 운명의 도주를 감행할 참이었다. 그들의 성공 여부는 프랑스 혁명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터였다. 왕의 이중생활은 이제 극적인 탈출 시도라는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제46장: 바렌의 밤, 엇갈린 운명
(1791년 6월 20일 밤 - 21일 낮)
1791년 6월 20일 밤, 튈르리 궁은 겉보기에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서는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비밀스러운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왕족들은 평소보다 일찍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방으로 물러갔다. 감시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평소처럼 잠자리에 드는 척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약속된 시간에 맞춰 왕족들은 미리 정해진 비밀 통로와 출구를 통해 한 명씩 궁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가정교사 마담 투르젤이 먼저 아이들(왕세자와 공주)을 데리고 나섰고, 왕의 동생 엘리자베트 공주, 그리고 하인으로 변장한 루이 16세가 뒤따랐다. 마지막으로 러시아 남작 부인 코르프 남작 부인으로 위장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녀를 향한 충성심으로 마부 역할을 자처한 악셀 폰 페르센 백작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궁을 나섰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들은 파리 시내의 약속된 장소에서 만나, 페르센이 준비한 평범해 보이는 마차를 타고 파리 북동쪽 생마르탱 관문을 향해 달렸다. 관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그들을 통과시켜 주었다. 파리 시내를 완전히 벗어난 후, 그들은 본디(Bondy)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거대하고 안락한 베를린 마차로 옮겨 탔다. 여섯 필의 건장한 말이 끄는 이 특수 제작 마차는 장거리 여행을 위한 것이었지만, 너무 크고 눈에 띄는 것이 문제였다.
이곳에서 페르센 백작은 눈물을 머금고 왕족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임무를 완수하고 싶었지만, 외국인인 자신이 계속 동행하는 것은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마마. 몽메디에서 다시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손에 짧게 입을 맞추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마차는 미리 고용된 새로운 마부들이 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계획은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출발 자체가 예정보다 2시간이나 늦어졌고, 베를린 마차는 예상보다 훨씬 느렸다. 설상가상으로 마차의 일부 부품이 고장 나 수리하는 데 또 시간이 지체되었다. 왕족들은 마차 안에서 초조함과 불안감에 시달렸다.
“왜 이렇게 늦는 게요? 이러다 날이 새겠소.” 루이 16세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괜찮을 거예요, 폐하. 조금 늦더라도 부이예 장군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남편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도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접선 부대와의 엇갈림이었다. 탈출 경로 상의 주요 지점에는 부이예 후작이 보낸 용기병 부대들이 왕족을 호위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차가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늦게 도착하면서, 기다리다 지친 부대들은 왕족이 이미 지나갔거나 계획이 변경된 것으로 오인하고 철수해 버리는 사태가 반복되었다. 샬롱(Châlons-sur-Marne)에서도, 퐁 드 솜므 베슬(Pont-de-Somme-Vesle)에서도, 약속된 장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럴 수가! 쇼아죌 공작의 부대가 보이지 않는군!” 루이 16세는 창밖을 보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군대의 호위 없이는 남은 여정이 너무나 위험했다.
설상가상으로, 루이 16세 자신도 부주의한 행동으로 신분을 노출시킬 위험을 자초했다. 그는 마차가 잠시 멈춘 사이, 답답하다는 이유로 마차 밖으로 나와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의 독특한 외모와 말투는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옆에서 남편의 행동을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 6월 21일 낮이 되었고, 마차는 여전히 더디게 국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왕족들의 얼굴에는 초기 탈출의 흥분감 대신 피로와 불안, 그리고 불길한 예감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계획은 어긋나고 있었고,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운명의 바퀴는 이제 그들을 바렌이라는 작은 마을로 이끌고 있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유의 환희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좌절과 굴욕의 순간이었다.
제47장: 드루에의 눈, 왕을 알아보다
(1791년 6월 21일 저녁)
1791년 6월 21일 저녁 무렵, 파리를 탈출한 지 꼬박 하루가 지난 루이 16세 일행의 육중한 베를린 마차는 프랑스 동북부 로렌 지방의 작은 마을 생트므누(Sainte-Menehould)를 통과하고 있었다. 말들을 교체하기 위해 잠시 역참에 들렀을 때, 마차 창밖으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이 마을의 우체국장이자 전직 용기병이었던 장 바티스트 드루에였다.
드루에는 최근 파리에서 왕족이 탈출했다는 소문을 어렴풋이 듣고 있었다. 그는 호기심에 마차 안을 유심히 살폈다. 하인 복장을 한 남자의 옆모습이 어딘가 낯익었다. 잠시 후, 그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아시냐 지폐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지폐에는 루이 16세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다. 드루에는 지폐 속 왕의 옆모습과 마차 안 남자의 옆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매부리코, 살짝 튀어나온 턱… 틀림없었다!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저 사람이 바로 국왕 폐하란 말인가?’
그의 의심은 마차 안의 다른 여인의 모습에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러시아 남작 부인 행세를 하고 있었지만, 오만한 표정과 특유의 합스부르크 가문 얼굴 윤곽은 영락없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였다! 드루에는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엄청난 비밀을 목격했음을 직감했다. 왕이 외국으로 도망치려 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반역 행위였다. 그는 조국 프랑스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차가 다시 덜컹거리며 출발하자, 드루에는 재빨리 자신의 말을 준비했다. 그는 마차가 향하는 다음 목적지인 바렌(Varennes-en-Argonne) 마을로 먼저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리고 그들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어둠 속을 가로질러 지름길을 따라 미친 듯이 말을 달렸다.
한편, 왕 일행의 마차는 마지막 남은 희망을 안고 바렌을 향해 느릿느릿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바렌 외곽의 특정 지점에서 부이예 후작이 보낸 마지막 접선 부대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둠과 피로 속에서, 그리고 부정확한 정보 때문에 그들은 약속된 장소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바렌 마을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말을 교체하기로 한 역참조차 찾을 수 없어 마차는 마을의 좁은 길에서 멈춰 섰다.
“대체 어떻게 된 게요? 약속된 장소가 여기가 아니지 않소?” 루이 16세가 초조하게 마부에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저도 이 근방 지리는 처음이라…” 마부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왕 일행이 우왕좌왕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드루에는 이미 바렌 마을에 도착하여 지역 유지이자 식료품 가게 주인이었던 소스(Sauce) 이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소스 씨! 파리에서 도망친 국왕 일행이 곧 이리로 올 거요! 어서 막아야 하오!”
소스 이장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드루에의 확신에 찬 모습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즉시 행동에 나섰다. 그는 지역 국민 방위대원들과 마을 주민들을 급히 소집했다. 그들은 낡은 수레와 통나무 등으로 에르 강(Aire River)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재빨리 봉쇄했다. 마침내 왕의 베를린 마차가 다리 앞 봉쇄선에 막혀 멈춰 섰다.
“무슨 일이오? 길을 비키시오!” 마차 안에서 누군가 위압적으로 소리쳤다.
드루에와 소스 이장이 국민 방위대원들과 함께 마차로 다가갔다. 횃불 빛이 마차 안을 비추었다.
“당신들의 신분을 밝히시오! 여권이 있소?” 소스 이장이 단호하게 물었다.
마차 안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애써 침착하게 러시아 남작 부인 행세를 하며 가짜 여권을 내밀었다. 하지만 드루에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이분은 남작 부인이 아니오! 그리고 저분은 하인이 아니라,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 폐하시다!” 드루에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뭐라고? 국왕 폐하?” 주변에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과 국민 방위대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루이 16세는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래… 내가 국왕이다.”
그 순간, 왕의 탈출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한 평범한 우체국장의 예리한 눈썰미와 용기 있는 행동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바렌의 작은 마을에서, 프랑스 국왕은 혁명을 등지고 도망치려던 ‘반역자’로서 초라하게 발각되고 말았다.
제48장: 굴욕의 귀환, 민심은 싸늘했다
(1791년 6월 22-25일)
바렌에서의 체포 소식은 전신이 없던 시대였음에도 놀라운 속도로 파리에 전달되었다. 국민 제헌 의회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국왕이 조국을 등지고 외세와 손잡으려 했다는 사실은 용서받을 수 없는 배신 행위였다. 의회는 즉시 루이 16세의 모든 권한을 정지시키고, 그를 파리로 안전하게(?) 압송하기 위해 세 명의 의원(페티옹, 바르나브, 라투르-모부르)을 바렌으로 급파했다.
파리로 돌아오는 길은 왕족에게는 굴욕과 공포의 여정이었다. 그들이 탄 베를린 마차는 이제 더 이상 도주용 마차가 아닌, 죄인을 호송하는 감옥과 같았다. 마차는 일부러 천천히 이동했고, 길 양옆에는 수많은 프랑스 국민들이 왕족의 초라한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동정심보다는 싸늘한 침묵과 경멸, 때로는 노골적인 적대감이 서려 있었다. 파리 코뮌은 미리 "왕을 본 자는 누구든 박수를 치면 매질을 당할 것이고, 왕을 모욕하면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다"라는 경고문을 파리 시내 곳곳에 붙여 놓았다. 이 기묘한 명령은 왕에 대한 존경심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그리고 민심이 얼마나 흉흉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마차 안의 분위기는 무겁고 침울했다. 루이 16세는 대부분 침묵을 지켰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만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지만 창백한 얼굴과 떨리는 손은 그녀의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왕세자와 공주는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함께 마차에 탄 파견 의원들과의 대화는 어색하고 불편했다. 특히 급진적인 성향의 페티옹은 왕족에게 일부러 무례하게 굴거나 그들의 불안감을 즐기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왕족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지옥 같은 사흘 밤낮을 보내야 했다.
에티엔 드샹은 왕족 일행이 파리로 압송되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착잡한 마음으로 거리로 나섰다. 그는 한때 입헌 군주제에 희망을 걸었지만, 바렌 도주 사건은 그 희망을 산산조각 냈다. 왕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이제 공화주의야말로 프랑스가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샹젤리제 거리에 도착했을 때, 왕족을 태운 마차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놀랍도록 조용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자를 벗지도, 박수를 치지도, 야유를 보내지도 않고 그저 싸늘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마차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침묵은 어떤 함성보다도 더 무겁고 무서운 단죄처럼 느껴졌다. 에티엔은 마차 창문 너머로 언뜻 보이는 루이 16세의 초라하고 지친 모습을 보며, 한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실감했다.
소피 라비뉴 역시 일터로 가던 길에 이 기묘한 행렬을 목격했다. 그녀는 마담 뒤부아로부터 왕이 도망치다 잡혀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잘 믿기지 않았다. 하늘 같은 존재로만 여겼던 왕이 그런 비겁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제 저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끌려오고 있다는 현실은 그녀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녀는 왕족에 대한 막연한 경외심이 사라지고, 대신 그들도 자신들과 똑같은, 혹은 더 못한 인간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군중의 싸늘한 침묵 속에서, 소피는 더 이상 왕이나 귀족에게 기댈 것이 아니라, 민중 스스로 힘을 합쳐 세상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되었다.
1791년 6월 25일, 왕족 일행은 마침내 파리에 도착하여 튈르리 궁에 다시 갇혔다. 그러나 이제 튈르리 궁은 더 이상 왕궁이 아니라, 삼엄한 감시 아래 놓인 감옥과 다름없었다. 바렌 도주 사건은 프랑스 혁명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이 사건은 왕정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완전히 파괴하고, 공화주의 운동을 급격히 성장시켰다. 입헌 군주제는 공식적으로 선포되기도 전에 이미 그 기반을 상실했다. 프랑스는 이제 왕 없는 공화국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마르스 광장의 피로 얼룩질 운명이었고, 혁명은 더욱 격렬하고 예측 불가능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참이었다.
제49장: 마르스 광장의 피, 갈라진 혁명
(1791년 7월 17일)
바렌 도주 사건 이후, 파리의 정치적 분위기는 공화정 수립 요구로 들끓었다. 특히 코르들리에 클럽과 같은 급진 클럽들은 루이 16세의 즉각적인 폐위와 재판을 요구하며 연일 시위를 벌이고 선동적인 팸플릿을 배포했다. 장 발레는 이 운동의 선봉에 서서, 상퀼로트들을 조직하고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배신자 왕을 처단하라! 공화국을 세우자!” 그의 외침은 굶주림과 정치적 배신감에 분노한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국민 제헌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온건파(대부분 푀양 클럽 소속)는 여전히 입헌 군주제를 유지하려 했다. 그들은 왕이 폐위될 경우 프랑스가 내전과 외국의 간섭이라는 더 큰 혼란에 빠질 것을 두려워했고, 급진적인 공화주의 운동이 사회 질서를 위협한다고 판단했다. 결국 의회는 왕이 반혁명 세력에게 '납치'되었던 것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내세우며, 왕의 책임을 묻지 않고 그의 권한을 잠시 정지시키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짓기로 결정했다(7월 15일).
이 결정은 급진파와 파리 민중들의 격렬한 분노를 샀다. 코르들리에 클럽은 의회의 결정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왕의 폐위와 공화정 수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청원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1791년 7월 17일 일요일, 파리 시민 수만 명이 마르스 광장의 '조국의 제단(Autel de la patrie)' 앞에 모여 청원서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집회는 초기에는 비교적 평화롭고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가족 단위로 나온 시민들도 많았고, 축제 같은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에티엔 드샹도 복잡한 마음으로 이 집회에 참여했다. 그는 공화주의를 지지했지만, 동시에 코르들리에 클럽의 과격한 선동과 민중 운동의 잠재적 폭력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우려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아침, 광장 근처에서 두 명의 부랑자가 여성들을 훔쳐보려다 발각되어 군중에게 린치를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집회 반대 세력에게 폭력 진압의 빌미를 제공했다. 파리 시장 바이이와 국민 방위대 사령관 라파예트는 이 사건을 빌미로 집회가 불법적이며 사회 질서를 위협한다고 판단하고, 계엄령을 상징하는 붉은 깃발을 내걸고 국민 방위대의 출동을 명령했다.
오후 늦게, 라파예트가 이끄는 수천 명의 국민 방위대 병사들이 총검을 장착한 채 마르스 광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비무장 상태의 평화로운 군중을 향해 해산을 명령했다. 군중은 야유를 보내며 물러서기를 거부했다. “우리는 국민이다! 우리의 요구를 들어라!” 장 발레를 비롯한 일부 급진파 활동가들은 더욱 목소리를 높여 군중을 선동했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 바이이는 마침내 발포를 명령했다. "발포하라!(Feu!)" 국민 방위대의 총구가 불을 뿜었고, 총탄은 비명 소리와 함께 평화로운 군중 속으로 무자비하게 쏟아졌다.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흩어졌고, 쓰러진 사람들의 신음 소리와 울부짖음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정확한 사상자 수는 알 수 없지만, 최소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에티엔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학살극에 할 말을 잃었다. 불과 2년 전, 자유를 위해 함께 싸웠던 국민 방위대가 이제 비무장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이것이 혁명이 약속한 자유와 인권이란 말인가? 그의 마음속에서 혁명에 대한 마지막 남은 순수한 믿음마저 산산조각 나는 듯했다. 그는 피 묻은 광장을 황급히 빠져나오며 깊은 환멸과 절망감에 휩싸였다.
장 발레는 분노로 온몸을 떨었다. 그는 간신히 현장을 빠져나왔지만, 그의 눈에는 죽어간 동지들의 모습과 배신자 라파예트, 바이이에 대한 증오가 가득했다. “부르주아 놈들! 결국 너희들의 본색을 드러냈구나! 말로는 자유와 평등을 외치면서, 민중의 정당한 요구는 총칼로 짓밟는 위선자들! 좋다, 이제 더 이상 타협은 없다! 오직 피의 복수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더욱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혁명을 다짐했다.
'마르스 광장 학살'은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이 사건은 1789년 혁명을 함께 이끌었던 온건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푀양파)과 급진 공화주의 민중 세력(코르들리에, 자코뱅 좌파)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의미했다. 온건파는 질서 유지를 위해 국가 폭력을 사용했고, 급진파는 이에 대한 복수와 더 강력한 혁명을 다짐했다. 혁명은 이제 화합이 아닌 분열과 투쟁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마르스 광장에 뿌려진 피는 앞으로 다가올 공포정치의 비극적인 전조와 같았다.
제50장: 입법 의회 개원, 새로운 갈등의 시작
(1791년 10월 1일)
1791년 9월 말, 2년여의 대장정을 마친 국민 제헌 의회가 해산하고, 프랑스는 새로운 헌법에 따라 선출된 '입법 의회(Assemblée législative)'와 함께 입헌 군주제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0월 1일, 파리의 튈르리 궁 옆 마네주(Manège, 옛 승마 학교 건물)에 마련된 회의장에서 마침내 입법 의회가 첫 회의를 열었다.
새로운 의회는 이전 제헌 의회와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제헌 의회 의원들의 재선을 금지하는 규정 때문에, 745명의 입법 의회 의원들 대부분은 정치 경험이 부족한 젊은 인물들이었다. 평균 연령은 30세 미만이었고, 변호사, 언론인 등 부르주아 지식인 출신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혁명의 원로들이 사라진 자리를 젊은 야심가들이 채운 것이다.
에티엔 드샹은 방청석에 앉아 새로운 의원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다. 젊은 피가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도 있겠지만, 경험 부족과 정치적 미숙함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특히 마르스 광장 학살 이후 깊어진 혁명 세력 내부의 분열이 이 새로운 의회에서 어떻게 표출될지 걱정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의회는 개원 초기부터 파벌 간의 대립 양상을 뚜렷하게 보였다. 의석 배치에 따라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었다.
우파: 약 260석을 차지한 '푀양파(Feuillants)'는 입헌 군주제를 확고히 지키려는 온건 보수파였다. 라파예트, 바이이 등 제헌 의회 시절 온건파 지도자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주로 부유한 부르주아지와 자유주의 귀족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의 혁명적 변화를 원하지 않았고, 질서와 안정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다. 에티엔의 옛 친구 뤽 모로 역시 이들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며 의회 내에서 활동을 시작할 가능성이 있었다.
좌파: 약 136석을 차지한 의원들은 대부분 '자코뱅 클럽' 소속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노선 차이가 있었다. 이들 중 다수를 형성한 것은 '지롱드파(Girondins)'로 불리는 온건 공화파였다. 브리소, 베르뇨, 콩도르세 등 웅변가와 지식인들이 주축이었으며, 지방(특히 지롱드 데파르트망) 출신 의원들이 많았다. 그들은 입헌 군주제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점차 공화정 수립을 지향했으며, 특히 대외적으로 혁명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전쟁을 강력하게 주장하게 된다.
극좌파: 자코뱅 클럽 내에서도 로베스피에르, 쿠통 등 소수의 급진 공화파 의원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파리의 상퀼로트 민중과 코르들리에 클럽과 연계하여 보다 철저한 평등주의와 직접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비록 의회 내에서는 소수였지만, 클럽 활동과 여론 동원을 통해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도파(또는 무소속): 나머지 약 350석의 의원들은 뚜렷한 당파 소속 없이 상황에 따라 입장을 정하는 중도파 또는 무소속이었다. 이들은 '평원파(La Plaine)' 또는 '늪(Le Marais)'이라고 불리며, 의회 내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게 된다.
개원 초기, 의회는 왕에 대한 의례 방식이나 의원 좌석 배치 같은 사소한 문제들을 둘러싸고도 격렬한 논쟁을 벌이며 파벌 간의 대립을 노출했다. 이는 앞으로 입법 의회가 마주하게 될 험난한 여정을 예고하는 듯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의회가 해결해야 할 산적한 난제들이었다. 바렌 도주 사건 이후 왕과 의회 사이의 불신은 극에 달해 있었고, 입헌 군주제는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워 보였다. 성직자 시민 헌장으로 인한 종교적 갈등은 여전히 프랑스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었고, 아시냐 가치 하락과 경제난은 민중의 불만을 키우고 있었다. 국경 너머에서는 망명 귀족들이 반혁명 군대를 조직하고 있었고, 유럽 열강들은 혁명 프랑스를 위협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에티엔은 불안한 마음으로 새로운 의회의 시작을 지켜보았다. 과연 이 젊고 경험 없는 의회가 혁명의 성과를 지키면서도 프랑스를 안정과 번영으로 이끌 수 있을까? 아니면 내부 분열과 외부 위협 속에서 좌초하고 말 것인가? 그의 노트에는 질문만이 가득할 뿐, 답은 보이지 않았다. 1791년 가을, 입헌 군주제라는 불안한 배는 새로운 선원들과 함께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를 향해 위태로운 항해를 시작하고 있었다.
(제5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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