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제7부: 입헌군주제의 실패와 공화국으로 (1791년 여름 - 1792년 가을)
제61장: 바렌 이후, 공화주의의 함성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 드샹의 빛바랜 일기장을 넘기며 나는 1791년 여름의 뜨거운 공기를 느낀다. 바렌(Varennes)으로의 실패한 도주, 그것은 단순한 왕가의 일탈이 아니었다. 프랑스 전체를 뒤흔든, 아니 혁명의 경로 자체를 바꿔버린 거대한 지각 변동이었다. 천 년을 이어온 왕정에 대한 신뢰는 하룻밤 사이에 산산조각 났고, 그 폐허 위에서 '공화국(République)'이라는 낯설지만 강렬한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증조할아버지의 기록은 바로 그 전환의 순간, 파리가 공화주의의 함성으로 들끓기 시작하던 때의 혼란과 열정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1791년 6월 25일. 왕이 돌아왔다. 아니, 끌려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튈르리 궁으로 향하는 길가에 늘어선 시민들의 얼굴에는 더 이상 경외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 차가운 침묵, 혹은 노골적인 적대감. 그들의 시선은 마치 배신자를 향한 준엄한 심판과도 같았다. 마차 안, 창백하게 질린 왕과 왕비의 얼굴에서 나는 깊은 절망과 함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체념을 읽었다. 그 순간, 내 안에서도 무언가가 결정적으로 부서져 내렸다. 입헌군주제라는 불안한 타협은 환상이었을 뿐이다. 프랑스는 이제 왕 없는 시대를 맞이해야 한다. 공화국, 오직 공화국만이 혁명의 완성이자 조국의 유일한 길이다."
에티엔의 단호한 문장에서 나는 그의 내면에서 일어난 격렬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왕정에 대한 마지막 미련마저 버린 청년 지식인의 결의. 그리고 그 결의는 에티엔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파리 전체가 들끓고 있었다.
<1791년 6월 말, 파리 코르들리에 클럽 회합 장소>
"시민들이여!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소! 우리의 왕은 스스로 왕관을 버리고 도망쳤소! 그는 프랑스의 적들과 내통하여 우리 혁명을 짓밟으려 했소!"
코르들리에 수도원의 낡은 강당은 수백 명의 상퀼로트(Sans-culottes)와 급진적인 부르주아 시민들이 내뿜는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연단에 선 조르주 당통(Georges Danton)의 우렁찬 목소리가 벽을 울렸다. 그의 사자 같은 포효는 군중의 분노를 더욱 거세게 부채질했다.
"국민 의회는 저 배신자를 비호하려 하고 있소! 왕이 납치되었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우리는 저들의 기만에 속지 않을 것이오! 프랑스에는 이제 왕이 필요 없소! 오직 인민의 의지에 의한 공화국만이 우리의 살 길이오!"
"공화국 만세! 왕정을 폐지하라!"
군중 속에서 장 발레(Jean Vallet)는 주먹을 불끈 쥐고 함성을 질렀다. 그의 옆에는 젊은 인쇄공 앙투안 루셀(Antoine Roussel)이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장 발레는 며칠 밤낮을 인쇄소에서 살다시피 하며 공화정을 요구하는 팸플릿과 벽보를 찍어냈다. 마라(Marat)의 신문 『인민의 벗(L'Ami du peuple)』은 연일 왕의 반역을 규탄하고 즉각적인 처단을 요구하는 격렬한 논조를 쏟아냈고, 장 발레는 그 잉크 냄새 속에서 혁명의 피 냄새를 맡는 듯했다.
"들었나, 앙투안? 이제 곧 때가 올 걸세. 저 부르주아 의원 나부랭이들이 머뭇거린다면, 우리 인민이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어." 장 발레는 루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의 눈빛은 광기에 가까운 열정으로 번뜩였다.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제 저 배신자 루이 카페(Louis Capet, 왕의 성씨)와 오스트리아 암캐(마리 앙투아네트를 지칭)를 단두대로 보내야 합니다!" 루셀은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얼굴로 잔인한 말을 쏟아냈다. 혁명의 열기는 순진한 영혼마저 빠르게 잠식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생토노레 거리에 있는 자코뱅 클럽(Club des Jacobins)의 분위기는 코르들리에 클럽과는 사뭇 달랐다. 좀 더 질서정연했지만, 내부의 긴장감은 훨씬 더 팽팽했다. 바렌 도주 사건 이후, 클럽 내에서도 공화주의 요구가 급격히 힘을 얻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아라스 출신의 변호사,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가 있었다. 그는 아직 대중적인 인기는 당통이나 마라에 미치지 못했지만, 특유의 논리정연함과 확고한 원칙, 그리고 청렴한 이미지로 클럽 내 좌파 세력의 구심점이 되고 있었다.
"…왕의 도주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명백한 반역 행위입니다. 그는 인민의 신뢰를 저버렸고, 헌법 정신을 짓밟았습니다. 입헌군주제는 이제 허울뿐인 이름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국민 주권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공화국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그 길은 신중하고 질서 있게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급한 폭력은 오히려 반혁명 세력에게 빌미를 줄 수 있습니다."
로베스피에르의 차분하지만 단호한 연설에 에티엔은 깊이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냉철함 속에 숨겨진 비타협적인 면모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에티엔은 최근 자코뱅 클럽 활동에 더욱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클럽 도서관에서 혁명 이론 서적들을 탐독하고, 동료 회원들과 밤늦도록 토론하며 자신의 공화주의 신념을 다졌다. 그는 이제 아버지 기욤의 온건한 개혁론이나 친구 뤽 모로의 현실적인 타협론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에티엔, 자네 요즘 너무 위험한 생각에 빠져드는 것 같네." 얼마 전 카페에서 만난 뤽 모로가 걱정스럽게 말했었다. 뤽은 바렌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입헌군주제의 틀 안에서 안정을 찾아야 한다고 믿는 듯했다. 그는 최근 라파예트(Lafayette)나 바이이(Bailly) 같은 온건파들이 새롭게 결성한 푀양 클럽(Club des Feuillants)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위험한 생각이라니, 뤽? 진실을 직시하는 것이 위험한가? 왕은 우리를 배신했네. 이제 그에게 기댈 환상은 버려야 해." 에티엔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오랜 친구와의 사이에 깊은 골이 패는 것을 느꼈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꺾을 수 없었다.
파리의 거리는 연일 공화정을 요구하는 시위와 집회로 들끓었다. 장 발레와 상퀼로트들은 더욱 과격한 구호를 외쳤고, 혁명 광장에서는 왕의 초상화가 불태워졌다. 에티엔은 이러한 민중의 분노 속에서 혁명의 강력한 에너지를 느꼈지만, 동시에 그 안에 내재된 파괴적인 폭력성에 대한 우려를 떨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공화국. 그 이름은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가. 그러나 그곳으로 가는 길은 왜 이리도 혼란스럽고 불안한가? 민중의 함성은 혁명의 심장 소리지만, 때로는 이성을 마비시키는 광기의 외침처럼 들린다. 우리는 과연 피 흘리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인가?"
증조할아버지의 고뇌는 백 년 하고도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듯했다. 혁명의 이상과 현실, 열정과 광기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1791년 여름, 파리는 공화주의의 함성으로 가득 찼지만, 그 함성 속에는 이미 미래의 비극을 예고하는 불협화음이 뒤섞여 있었다.
제62장: 마르스 광장의 피, 갈라진 혁명
알랭 마르탱의 노트: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 중 1791년 7월 17일, 마르스 광장 사건에 대한 부분은 유독 얼룩이 많고 글씨가 떨린다. 그날의 충격과 공포, 그리고 깊은 환멸이 백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내게까지 전달되는 듯하다. 역사가로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그의 떨리는 필체 앞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를 수밖에 없다. '마르스 광장 학살'은 프랑스 혁명의 순수한 이상이 처음으로 국가 폭력 앞에서 무참히 짓밟힌 사건이자, 혁명 세력 내부의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을 예고한 비극적인 분수령이었다.
<1791년 7월 17일, 파리 마르스 광장>
그날 마르스 광장은 마치 거대한 축제 현장 같았다. 며칠 전, 국민 제헌 의회가 바렌 도주에도 불구하고 루이 16세의 왕위를 유지하기로 결정하자, 파리 민중의 분노는 들끓었다. 특히 코르들리에 클럽은 왕의 폐위와 공화정 수립을 요구하는 청원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고, 그 서명을 받기 위해 마르스 광장의 '조국의 제단(Autel de la Patrie)' 앞에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에티엔은 복잡한 심경으로 군중 속에 섞여 있었다. 그는 공화주의를 확신했지만, 코르들리에 클럽의 급진적인 방식과 민중 동원의 잠재적 위험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왕의 명백한 배신 행위를 묵인하고 넘어가는 의회의 결정에 깊은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법치'를 존중해야 하지만, 정의가 외면당하는 현실 앞에서 그의 신념은 흔들리고 있었다.
"보시오, 드샹 군. 저 뜨거운 열기를! 이것이 바로 프랑스 인민의 진정한 목소리요!" 누군가 에티엔의 어깨를 쳤다. 돌아보니 자코뱅 클럽에서 몇 번 마주쳤던 동료 회원 하나가 상기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청원서 용지를 흔들어 보였다. "오늘, 우리는 역사를 새로 쓸 것이오. 왕 없는 공화국, 진정한 자유의 시대를 우리 손으로 열어야 하오!"
에티엔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군중의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광장 한편에서는 벌써부터 과격한 구호가 터져 나왔고, 일부는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아침에는 제단 아래 숨어 있던 두 명의 남자가 스파이로 오인받아 군중에게 린치당해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까지 벌어졌다. 이 소식은 파리 시청에 즉각 보고되었고, 온건파가 장악한 시 정부와 국민 방위대에게는 개입의 빌미를 제공했다.
한편, 장 발레는 조국의 제단 근처에서 앙투안 루셀을 비롯한 코르들리에 클럽 동지들과 함께 청원 서명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는 아침의 린치 사건 소식을 들었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반혁명의 첩자 놈들이었겠지. 인민의 분노는 정당하다!" 그는 오히려 군중을 향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시민들이여! 더 이상 망설이지 마시오! 왕을 폐위하고 공화국을 세우자는 우리의 요구를 저 교활한 의회 놈들에게 똑똑히 보여줍시다! 오늘, 이 마르스 광장에서 인민의 힘을 보여줍시다!"
오후가 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파리 시장 바이이(Bailly)와 국민 방위대 총사령관 라파예트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마르스 광장에 나타난 것이다. 붉은 깃발(계엄령 선포의 상징)이 펄럭였고, 수천 명의 국민 방위대 병사들이 총검을 번뜩이며 광장을 포위했다.
"해산하라! 불법 집회를 즉각 중단하고 해산하라!" 바이이 시장이 마차 위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군중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야유와 고함이 터져 나왔다. "배신자!" "왕의 앞잡이!" 일부 시민들은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광장을 감쌌다. 에티엔은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설마… 설마 시민에게 총을 쏘지는 않겠지?'
"발포 준비!" 라파예트의 냉정한 명령이 떨어졌다. 병사들의 얼굴에도 당혹감과 두려움이 스쳤지만, 그들은 기계적으로 총을 들어 올렸다.
"안 돼!" 에티엔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장 발레는 눈을 부릅뜨고 분노에 찬 구호를 외쳤다. "쏘아라, 이 겁쟁이들아! 인민의 피로 너희의 죄악을 씻을 수는 없을 것이다!"
탕! 탕! 타타타탕!
첫 발포 소리와 함께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사람들의 비명, 고함, 울부짖음이 뒤섞였다. 총알은 비처럼 쏟아졌고, 평화롭게 청원을 하던 시민들이 힘없이 쓰러져 갔다. 에티엔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바로 옆에 서 있던 젊은 학생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혁명의 이름으로, 자유의 이름으로, 바로 어제까지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
장 발레는 땅바닥에 엎드려 간신히 총알을 피했다. 그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그는 자신에게 총을 쏘는 국민 방위대 병사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부르주아 놈들! 라파예트! 바이이! 너희는 반드시 피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혼란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의 가슴 속에는 혁명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함께, 온건파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만이 남았다. 폭력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더욱 굳어졌다.
학살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수십 명(혹은 그 이상)의 시민들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마르스 광장은 피로 얼룩졌고, 조국의 제단은 비명과 신음으로 더럽혀졌다. 에티엔은 넋 나간 사람처럼 피투성이가 된 광장을 걸었다. 그의 가슴 속에서는 혁명의 숭고한 이상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오늘은 혁명이 죽은 날이다. 아니, 어쩌면 혁명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죽음의 씨앗을 품고 있었는지 모른다. 자유의 이름으로 자행된 이 끔찍한 학살 앞에서, 나는 무엇을 믿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조국의 제단은 피로 물들었고, 내 영혼은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마르스 광장의 피는 혁명 세력의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을 가져왔다. 온건파와 급진파는 서로를 불신하고 증오하게 되었고, 타협의 여지는 사라졌다. 혁명은 이제 폭력과 공포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더욱 격렬하고 예측 불가능한 경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제63장: 필니츠 선언과 망명 귀족, 외부의 위협
알랭 마르탱의 성찰: 바렌 도주 사건은 프랑스 내부뿐 아니라 유럽 전체를 뒤흔들었다. 혁명의 급진화와 왕권의 추락은 다른 유럽 군주들에게 자신들의 안위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에는 파리에서 감지되던 이러한 외부 압력에 대한 불안감이 곳곳에 묻어난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인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발표한 필니츠 선언은, 비록 실제 개입 의지는 약했을지라도, 프랑스 혁명가들에게는 외세의 간섭과 반혁명 전쟁의 공포를 현실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국경 너머 코블렌츠 등에 집결한 망명 귀족들의 움직임은 혁명 프랑스의 '내부의 적'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 강화시켰다.
<1791년 8월, 작센 필니츠>
작센의 아름다운 여름 궁전, 필니츠 성에서는 화려한 가면 뒤에 날카로운 정치적 계산이 오가고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작센 선제후의 초청으로 회동하여 당면한 유럽 현안들을 논의하고 있었다. 폴란드 문제 등 여러 쟁점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의제는 단연 프랑스 혁명이었다. 특히 최근 벌어진 루이 16세의 바렌 도주 실패 사건은 두 군주 모두에게 큰 충격과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회의장 한쪽에는 프랑스에서 망명한 아르투아 백작(루이 16세의 동생)을 비롯한 망명 귀족 대표들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두 군주에게 강력한 군사 개입을 통해 프랑스 왕정을 복고시켜 달라고 끊임없이 간청했다.
"폐하들! 더 이상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프랑스의 왕권은 폭도들의 손에 유린당하고 있으며, 이는 유럽 전체 군주들의 권위에 대한 모욕이자 위협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저 역겨운 혁명의 불길을 꺼뜨릴 절호의 기회입니다!" 아르투아 백작이 열변을 토했다. 그의 뒤에는 앙투아네트 드 발루아의 오빠, 필리프 드 발루아도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코블렌츠에 집결한 망명군에 합류하여 조국으로 돌아가 혁명가들에게 복수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레오폴트 2세는 신중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급진화는 우려했지만, 성급한 군사 개입이 오히려 예측 불가능한 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음을 경계했다. 프로이센 국왕 역시 오스트리아와의 경쟁 관계 속에서 섣불리 행동하기를 꺼렸다. 며칠간의 논의 끝에, 그들은 망명 귀족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면서도 실제적인 군사 행동 약속은 피하는 교묘한 외교적 수사를 담은 공동 선언문을 발표하기로 합의했다.
1791년 8월 27일 발표된 '필니츠 선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황제와 프로이센 국왕은 프랑스 국왕 폐하가 처한 현 상황을 유럽 모든 군주의 공동 관심사로 간주한다... 그들이 희망하는 목표(프랑스 왕권 회복)를 위해 필요한 군대를 동원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만약 다른 열강들도 동의한다면 즉시 행동에 나설 것이다."
이 선언은 '만약 다른 열강들도 동의한다면'이라는 조건을 달아 실제적인 구속력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 사태에 직접 개입할 의사가 없었기에, 이 조건은 사실상 군사 행동을 유보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프랑스 파리에서는 이 선언이 액면 그대로, 즉 유럽 군주들의 침략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1791년 가을, 파리 입법 의회 / 자코뱅 클럽>
필니츠 선언문이 파리에 도착하자, 입법 의회는 발칵 뒤집혔다. 특히 지롱드파는 이를 외세의 노골적인 간섭이자 혁명에 대한 선전포고로 규정하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브리소는 연단에 올라 목소리를 높였다.
"시민 대표 여러분! 유럽의 폭군들이 감히 우리 프랑스 혁명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그들은 망명한 반역자들과 손잡고 우리의 자유를 짓밟고 왕정의 족쇄를 다시 채우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습니다! 압제자에 맞서 싸우는 것만이 우리의 존엄과 혁명을 지키는 길입니다!"
지롱드파의 선동적인 연설은 의회 내 애국주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망명 귀족들에 대한 처벌 요구와 함께,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제공격 주장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에티엔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자코뱅 클럽에서 로베스피에르가 전쟁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연설을 들으며 그의 신중론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조국의 위기' 앞에서 들끓는 애국심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한편, 국경 너머 코블렌츠에서는 망명 귀족들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필리프 드 발루아는 부족한 자금과 무기 속에서도 동료 귀족들과 함께 군사 훈련에 열중했다. 그는 여동생 앙투아네트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희망적인 소식을 전했다. "사랑하는 동생아,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유럽의 군주들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곧 저 파리의 폭도들을 쓸어버리고 우리의 명예를 되찾을 날이 올 것이다."
앙투아네트는 튈르리 궁의 감시 속에서 오빠의 편지를 몰래 읽으며 희미한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혁명의 물결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세고 깊어 보였다.
필니츠 선언과 망명 귀족들의 움직임은 결국 프랑스 혁명을 더욱 급진적인 방향으로 밀어 넣는 중요한 외부 요인이 되었다. 외세의 위협은 프랑스 내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자극했고, 이는 곧 혁명 전쟁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로 이어지게 된다. 유럽의 군주들은 혁명의 불길을 끄려 했지만, 그들의 서투른 개입은 오히려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낳고 있었다.
제64장: 입법 의회 개원, 새로운 얼굴, 불안한 출발
알랭 마르탱의 메모: 1791년 10월 1일, 프랑스 혁명의 두 번째 의회인 입법 의회(Assemblée législative)가 문을 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이 새로운 의회에 대한 기대와 함께 깊은 우려를 동시에 보여준다. 제헌 의회 의원들의 재선을 금지한 규정 때문에, 입법 의회는 대부분 젊고 정치 경험이 부족한 인물들로 채워졌다. 이들은 혁명의 세례를 받았지만, 동시에 혁명의 복잡한 현실과 타협보다는 이상과 원칙에 더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다. 에티엔은 방청석에서 이 새로운 '혁명의 2세대'들을 불안하게 지켜보며, 그들이 산적한 난제들을 해결하고 불안정한 입헌군주제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내비치고 있다.
<1791년 10월 1일, 파리 입법 의회 회의장 (Salle du Manège)>
파리 튈르리 궁 옆에 위치한 옛 승마 학교 건물, 살 뒤 마네주(Salle du Manège)는 새로운 의원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국민 제헌 의회가 역사적인 임무를 마치고 해산한 다음 날, 1791년 헌법에 따라 선출된 입법 의회의 첫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대부분 30대 미만의 젊은 변호사, 언론인, 지방 유지들로 구성된 745명의 의원들은 혁명의 완수라는 역사적 사명감과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방청석 한편에 자리 잡은 에티엔은 복잡한 표정으로 의원석을 둘러보았다. 미라보, 시에예스, 바르나브, 라메트 형제 등 제헌 의회를 이끌었던 거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기부정 조항(self-denying ordinance)'이라 불리는 재선 금지 규정 때문이었다. 대신 눈에 띄는 것은 비교적 낯선 얼굴들이었다. 그는 자코뱅 클럽 활동을 통해 알게 된 몇몇 인물들을 찾아보았다.
'저기 연단 근처에 앉은 이가 지롱드 출신의 브리소(Brissot)로군. 달변가이지만 너무 성급하고 이상주의적인 면이 있어.' 에티엔은 속으로 생각했다. 브리소 주변으로는 베르뇨(Vergniaud), 장소네(Gensonné) 등 지롱드 데파르트망 출신 의원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곧 '지롱드파'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의회 내 좌파 세력의 핵심이 될 터였다. 그들은 대부분 공화주의적 성향을 숨기지 않았고, 특히 혁명 전쟁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반대편에는 좀 더 나이가 많고 신중해 보이는 의원들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푀양 클럽에 속한 이들로, 라파예트와 바이이의 노선을 따라 1791년 헌법을 수호하고 입헌군주제를 안정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에티엔은 한때 친구였던 뤽 모로가 저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저 뒤쪽에 앉은 소수의 무리가 바로 자코뱅파로군. 로베스피에르 자신은 의원이 아니지만, 그의 영향력은 클럽을 통해 이곳까지 미치고 있겠지.' 에티엔은 훗날 '산악파'의 핵심이 될 인물들을 눈여겨보았다.
의회 개원 초기, 의원들은 왕에 대한 의례 문제와 같은 사소한(?) 문제로 시간을 허비하며 파벌 간 신경전을 벌였다. 헌법에 따라 제한된 권한을 가지게 된 루이 16세는 의회에 참석하여 헌법 수호를 다시 한번 다짐했지만, 그의 표정에는 여전히 불만과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왕과 의회 사이의 불안정한 동거는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듯했다.
에티엔은 방청석을 둘러보았다. 예전 제헌 의회 때보다 방청객들의 열기는 더 뜨거워 보였지만, 동시에 어딘가 모르게 더 불안하고 조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망명 귀족 문제, 선서 거부파 성직자 문제, 계속되는 경제난, 그리고 무엇보다 외부의 전쟁 위협. 이 젊은 의회가 과연 이 모든 난제들을 해결하고 혁명을 안정시킬 수 있을까? 에티엔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수첩을 꺼내 들었다.
"새로운 시대의 막이 올랐다. 그러나 무대는 여전히 어둡고, 배우들은 서툴며, 극본은 혼란스럽다. 과연 이 연극은 희극으로 끝날 것인가, 비극으로 치달을 것인가? 나는 다만 충실한 기록자가 될 뿐이다."
입법 의회의 불안한 출발은 프랑스 혁명이 안정적인 제도화보다는 또 다른 격변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예고하는 듯했다.
제65장: 망명자와 성직자, 혁명의 적들?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꼼꼼한 기록은 1791년 가을, 새로 출범한 입법 의회가 마주한 폭발적인 난제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마치 폭풍우 속에서 위태롭게 항해를 시작한 배처럼, 프랑스는 입헌군주제라는 불안정한 틀 안에서 혁명의 두 가지 거대한 암초, 즉 망명 귀족(émigrés)과 선서 거부파 성직자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히고 있었다. 이 두 문제는 단순한 정치적, 종교적 갈등을 넘어, 혁명의 정당성과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뇌관과도 같았다. 알랭 마르탱으로서 나는 이 시기의 기록을 읽으며, 혁명이 어떻게 스스로 적을 규정하고 분열을 심화시켜 나갔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양심과 신념이 어떻게 시험대에 올랐는지 깊이 성찰하게 된다.
<1791년 10-11월, 파리 입법 의회 회의장>
새롭게 문을 연 입법 의회 회의장은 젊은 의원들의 열기로 가득했지만, 그 열기만큼이나 불안감도 짙게 깔려 있었다. 제헌 의회가 남긴 숙제들은 산더미 같았고, 그중에서도 가장 시급하고 위험한 문제는 국경 너머와 프랑스 내부에 도사린 '반혁명의 세력'들이었다.
"시민 대표 여러분! 지금 이 순간에도 코블렌츠와 보름스에서는 반역자들이 외세와 결탁하여 우리 조국을 향해 칼을 갈고 있습니다! 왕의 형제들이라는 자들이 유럽의 군주들을 충동질하며 신성한 혁명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들을 방치할 것입니까?"
지롱드파의 젊은 변호사, 피에르 베르뇨(Pierre Vergniaud)의 열정적인 목소리가 회의장을 울렸다. 그의 연설은 많은 의원들의 박수를 받았다. 특히 지롱드파는 혁명 전쟁을 통해 국내외의 적들을 일소하고 혁명의 열기를 유럽 전역으로 확산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굳히고 있었고, 망명 귀족 문제는 그들에게 좋은 공격 목표였다.
치열한 논쟁 끝에, 1791년 10월 31일, 입법 의회는 망명 귀족들에 대한 첫 번째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 법령은 왕의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미래의 루이 18세)에게 2개월 내 귀국을 명령했고, 불응 시 왕위 계승권을 박탈한다고 규정했다. 이어 11월 9일에는 모든 망명 귀족들에게 1792년 1월 1일까지 귀국하지 않으면 '반역 음모' 혐의로 간주하고 재산을 몰수하며, 경우에 따라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훨씬 더 강경한 법령을 제정했다.
이 소식은 코블렌츠의 망명 귀족 진영에 분노와 함께 약간의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필리프 드 발루아는 동료들과 함께 훈련장에서 땀을 흘리며 저주를 퍼부었다.
"파리의 하찮은 것들이 감히 우리에게 명령을 해? 돌아가면 목이 달아날 판인데! 하지만 저놈들도 두려운 모양이군. 우리의 힘이 커지는 것을!"
옆에 있던 나이 든 망명 귀족이 씁쓸하게 말했다. "두려워하는 것은 맞겠지. 하지만 저 법령 때문에 남은 재산마저 빼앗길까 봐 망설이는 이들도 생겨날 걸세. 우리의 대의는 흔들려서는 안 되네." 필리프는 불안감을 떨치려 애썼지만, 망명 생활의 고단함과 불확실한 미래는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의회의 칼날은 이제 국내의 선서 거부파 성직자들에게로 향했다. 성직자 시민 헌장에 대한 교황 비오 6세의 공식적인 비난(1791년 3-4월) 이후, 선서를 거부한 성직자들은 많은 지역에서 반혁명 선동의 중심지로 간주되고 있었다. 특히 독실한 신자들이 많은 농촌 지역에서는 선서 거부파 신부들이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이들을 따르는 신자들과 선서파 성직자 및 혁명 지지자들 사이의 갈등이 폭력 사태로 번지기도 했다.
"프랑스의 심장을 갉아먹는 독버섯 같은 존재들이 바로 저 완고한 신부들입니다! 그들은 종교의 탈을 쓰고 민중을 선동하여 조국을 내란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관용은 없습니다! 모든 성직자들은 즉시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서약해야 합니다!"
이냐르(Maximin Isnard)와 같은 지롱드파 의원들은 종교 문제에서도 강경한 입장을 쏟아냈다. 마침내 11월 29일, 입법 의회는 모든 성직자들에게 8일 이내에 시민 선서를 하도록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는 성직자는 연금을 박탈하고 '용의자'로 간주하여 추방하거나 감금할 수 있다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프랑스 시골, 클레망 신부의 고뇌>
클레망 신부에게 이 법령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미 선서를 거부하고 숨어 지내는 처지였다. 그는 밤에 몰래 찾아온 신자에게서 파리의 소식을 전해 듣고 깊은 고뇌에 잠겼다.
"신부님,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잡히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갈 겁니다. 더 깊은 곳으로 숨으셔야 합니다." 신자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클레망 신부는 창백한 얼굴로 십자가를 움켜쥐었다. '주님, 당신의 어린 양들을 버리시나이까? 나의 신앙과 양심은 국가의 명령보다 위에 있나이다. 그러나 이 연약한 육신으로 저들의 박해를 견뎌낼 수 있을지…'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을 숨겨주고 따르는 신자들이 겪게 될 위험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그의 눈앞에는 테레즈 수녀처럼 삶의 터전을 잃고 불안에 떠는 다른 성직자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종교 박해는 프랑스 사회의 가장 깊은 상처를 후벼 파고 있었다.
<1791년 12월, 파리 튈르리 궁>
두 개의 강경 법령은 이제 국왕 루이 16세의 책상 위에 놓였다. 헌법에 따라 그는 이 법안들에 대해 거부권(veto)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의 결정은 프랑스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것이었다.
"폐하, 제발 현명하게 판단하십시오! 이 법령들을 승인하신다면 수많은 충성스러운 신민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 됩니다. 폐하의 신앙과 양심에 따라 거부권을 행사하셔야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간절하게 호소했다. 그녀에게 이 법령들은 혁명 세력의 오만함과 신성 모독의 극치였다.
온건파 고문들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폐하, 물론 어려운 결정이십니다. 허나 지금은 의회와의 정면충돌을 피해야 할 때입니다. 거부권을 행사하시면 폐하께서 망명 귀족과 선서 거부파 성직자들, 즉 반혁명 세력과 한패라는 의혹을 더욱 굳히게 될 것입니다. 이는 폐하와 왕가의 안위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 뿐입니다."
루이 16세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성직자들에게 선서를 강요하는 법은 양심상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한, 망명 귀족 중에는 자신의 형제들과 친척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문들의 말처럼, 거부권 행사가 가져올 정치적 파장 또한 두려웠다. 그는 우유부단하게 며칠을 보냈다.
마침내 12월 중순, 루이 16세는 성직자 관련 법령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망명 귀족 관련 법령에 대해서는 결정을 유보하는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이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혁명 세력은 왕이 노골적으로 반혁명의 편을 들었다고 격분했고, 온건파마저 왕에 대한 기대를 접기 시작했다. 왕의 거부권 행사는 왕과 의회의 협력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고, 입헌군주제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제 프랑스는 걷잡을 수 없는 급진화와 내부 분열, 그리고 외부와의 전쟁이라는 파멸적인 삼중주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제66장: 전쟁이냐 평화냐, 운명의 갈림길
알랭 마르탱의 분석: 1791년 말부터 1792년 봄까지 프랑스 정계를 뜨겁게 달군 것은 전쟁이냐 평화냐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당시 파리의 분위기를 마치 화산 폭발 직전의 고요함과 불안함으로 묘사하고 있다. 단순한 외교적 갈등을 넘어, 전쟁 문제는 혁명의 방향, 국내 정치 권력 투쟁, 그리고 프랑스의 미래 운명과 직결된 복잡한 함수였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 지롱드파의 대표 주자 브리소와 자코뱅 클럽의 떠오르는 별 로베스피에르가 있었다. 두 사람의 불꽃 튀는 연설 대결은 혁명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이정표였다.
<1791년 12월 - 1792년 3월, 파리 입법 의회 / 자코뱅 클럽>
입법 의회와 자코뱅 클럽은 연일 전쟁 문제를 둘러싼 열띤 토론으로 들끓었다. 왕의 거부권 행사로 국내 정치 개혁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망명 귀족과 선서 거부파 성직자 문제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외부로 향했다. 특히 지롱드파는 전쟁을 현재의 난국을 타개할 유일한 돌파구로 여겼다.
자크 피에르 브리소(Jacques Pierre Brissot)는 특유의 열정적인 목소리로 의원들과 클럽 회원들을 선동했다. "시민 여러분! 저 라인 강 너머 코블렌츠의 반역자 소굴을 보십시오! 유럽의 폭군들이 저들과 손잡고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우리는 압제받는 유럽 민족들에게 자유의 빛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것은 정복 전쟁이 아니라, 인류 해방을 위한 성전(聖戰)이 될 것입니다!"
그의 연설은 큰 호응을 얻었다. '혁명 수출'이라는 매력적인 구호는 프랑스 국민들의 자부심과 애국심을 자극했다. 또한, 지롱드파는 전쟁을 통해 왕의 진정한 의도를 시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왕이 전쟁 수행에 소극적이거나 외국의 적들과 내통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할 절호의 명분이 될 터였다. 게다가 전쟁 영웅주의는 국내의 경제난과 정치적 불안정에 대한 민중의 불만을 잠재우는 데 효과적일 수 있었다.
에티엔은 브리소의 연설을 들으며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혁명의 이상을 유럽 전역에 전파한다는 생각은 분명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프랑스 군대는 과연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전쟁이 가져올 예측 불가능한 혼란과 희생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일까?
이러한 에티엔의 고민은 자코뱅 클럽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을 들으며 더욱 깊어졌다. 로베스피에르는 전쟁 열기에 휩쓸린 클럽 분위기 속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논리적으로 전쟁 반대론을 펼쳤다.
"시민 동지들, 전쟁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의 군대는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장교들은 여전히 구체제의 인물들이며, 병사들은 훈련 부족과 보급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필패의 길로 들어서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목소리를 조금 높여 말을 이었다. "더욱 위험한 것은 전쟁 그 자체입니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군대의 힘을 강화시키고, 이는 군사 독재로 이어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로마 공화정이 어떻게 몰락했는지 기억하십시오! 또한, 전쟁은 국내 문제 해결을 위한 관심을 외부로 돌리려는 기만적인 술책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적은 국경 너머의 군주들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반혁명 세력과 부패입니다! 먼저 집안을 청소하고 혁명의 기초를 튼튼히 다지는 것이 순서입니다. '무장한 선교사'를 반기는 민족은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유럽의 자유를 원한다면, 우리의 모범을 통해 보여주어야 합니다!"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은 청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당시 파리를 휩쓸던 애국주의와 전쟁 열기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로베스피에르의 주장을 너무 소극적이거나 심지어 비겁하다고 여기기도 했다. 에티엔 역시 로베스피에르의 논리적인 분석력과 통찰력에 감탄했지만,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외침 앞에서 그의 주장이 너무 이상론적으로 들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로베스피에르 선생의 말씀은 옳네. 이론적으로는 말이지." 뤽 모로가 에티엔에게 말했다. 뤽은 이미 지롱드파와 교류하며 전쟁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네, 에티엔. 지금 프랑스는 위기에 처해있고, 국민들은 행동을 원하고 있네. 전쟁은 위험하지만,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법이지. 그리고 전쟁은 진정한 애국자와 반역자를 가려내는 시금석이 될 걸세. 자네도 언제까지 책상머리에 앉아 고민만 할 텐가?"
에티엔은 뤽의 말을 반박했지만, 그의 마음은 복잡하게 흔들렸다. 혁명의 이상과 현실, 평화의 가치와 조국 수호의 의무 사이에서 그는 길을 잃은 듯했다.
파리의 분위기는 점점 더 전쟁 쪽으로 기울어갔다. 신문들은 연일 오스트리아와 망명 귀족들의 위협을 부각하며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기사를 쏟아냈고, 거리에서는 전쟁을 촉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국왕 루이 16세와 궁정 세력은 겉으로는 평화를 말했지만, 속으로는 전쟁 패배를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위험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지롱드파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의회 내에서 전쟁 찬성 여론을 주도해 나갔다.
1792년 봄, 프랑스는 운명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전쟁이냐, 평화냐. 이 결정은 단순히 외교 정책의 선택이 아니라, 혁명의 미래, 나아가 유럽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역사적인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추는 점점 전쟁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에티엔은 불안한 마음으로 다가올 미래를 예감하며, 로베스피에르의 마지막 경고를 떠올렸다. '전쟁은 혁명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 그의 예언은 과연 현실이 될 것인가?
제67장: 붉은 모자와 혁명의 노래, 상퀼로트의 부상
알랭 마르탱의 노트: 프랑스 혁명사에서 '상퀼로트(Sans-culottes)'의 역할은 지대하다. 그들은 단순한 도시 빈민이나 폭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의 가장 급진적인 시기에 정치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때로는 혁명의 방향 자체를 결정짓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퀼로트(culotte, 귀족들이 입던 반바지)를 입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경멸적인 호칭에서 유래한 이 이름은 오히려 그들의 자부심과 정체성의 상징이 되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에는 상퀼로트에 대한 복잡한 시선이 담겨 있다. 그는 그들의 순수한 열정과 평등에 대한 갈망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과격함과 폭력성, 그리고 쉽게 선동되는 모습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기, 특히 1791년 말부터 1792년에 걸쳐 상퀼로트가 혁명의 중요한 주체로 부상하는 과정은 혁명의 동력이 어떻게 아래로부터 변화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장면이다.
<1791년 말 - 1792년, 파리 생탄투안 구역 / 코르들리에 클럽 / 거리>
파리의 동부 구역, 특히 생탄투안(Saint-Antoine)과 생마르셀(Saint-Marcel)은 상퀼로트 운동의 심장부였다. 이곳의 좁고 미로 같은 골목길에는 가구 장인, 금속 공예가, 인쇄공, 잡화상, 날품팔이 노동자 등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그들은 구체제 하에서 오랫동안 억압받고 소외되었으며,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배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피 라비뉴는 매일 거리에서 변화하는 분위기를 피부로 느꼈다. 이전에는 그저 굶주림과 고된 노동에 대한 한탄이 주를 이루었다면, 이제 사람들의 대화에는 정치적인 구호와 분노가 더 자주 섞여 나왔다.
"글쎄, 마담 뒤부아. 의회 나리들은 자기들 배만 불릴 생각이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니까요!" 이웃 정육점 주인이 핏기 어린 앞치마를 두른 채 목소리를 높였다. "최고가격제를 실시해서 빵값이든 고기값이든 잡아야지, 이대로는 살 수가 없어요!"
마담 뒤부아는 깊은 주름이 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렇고말고. 말로는 자유니 평등이니 하지만, 여전히 가진 놈들만 잘사는 세상이야. 혁명이 뭘 바꿨는지 원."
소피는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녀 역시 정치인들의 약속에 대한 불신이 깊었지만, 동시에 거리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와 변화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사람들의 옷차림과 말투의 변화였다. 귀족들이 입던 퀼로트 대신 긴 바지(pantalon)를 입고, 짧은 상의인 카르마뇰(carmagnole) 조끼를 걸치고, 혁명의 상징인 붉은 프리지아 모자(bonnet rouge)를 쓴 남자들이 부쩍 늘었다. 서로를 부를 때도 '무슈(Monsieur)'나 '마담(Madame)' 대신 평등을 의미하는 '시민(Citoyen/Citoyenne)'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이러한 상퀼로트 문화의 확산과 함께, 그들의 정치적 목소리도 점차 조직화되고 있었다. 각 구(Section)의 자치 회의와 민중 협회(Sociétés populaires)는 상퀼로트들이 모여 토론하고 정치적 요구를 결집하는 중요한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코르들리에 클럽과 마라, 에베르(Hébert) 같은 급진적인 언론인/선동가들이 있었다.
코르들리에 클럽 회합은 언제나 열광과 흥분으로 가득 찼다. 장 발레는 이제 클럽의 주요 연설가 중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의 거칠지만 힘 있는 목소리는 상퀼로트들의 심금을 울렸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더 이상 저 부르주아 의회와 배신자 왕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 없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투표권 따위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직접 악을 처단하고 정의를 세우는 것이오!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 있어야 하오! 이것이 진정한 공화국이오!"
"옳소! 발레 시민 말이 맞소!" 앙투안 루셀을 비롯한 젊은 상퀼로트들이 열광적으로 외쳤다. 그들은 장 발레를 영웅처럼 따랐다.
상퀼로트들은 구체적인 요구들을 내걸었다. 투기꾼과 매점매석 상인들에 대한 처벌, 생필품 가격 통제(최고가격제), 부자들에 대한 누진세 부과, 그리고 무엇보다 '반혁명 용의자'들에 대한 철저한 숙청.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시위, 청원, 그리고 때로는 무력시위도 불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파리 시장이 된 페티옹(Pétion)은 지롱드파에 가까웠지만, 상퀼로트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에티엔은 이러한 상퀼로트 운동의 부상을 복잡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민중의 정치적 각성과 참여 확대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그들의 직접 민주주의 요구와 폭력 숭배 경향에는 깊은 우려를 표했다. 그는 자코뱅 클럽에서 만난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물론 민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네. 하지만 법과 제도를 무시하고 거리의 함성만으로 정치가 결정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폭정이 될 수 있네. 우리는 이성과 법치 위에서 공화국을 세워야 하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점차 커지는 상퀼로트의 함성 속에서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혁명의 위기가 심화될수록, 파리의 거리를 장악한 상퀼로트들의 힘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 혁명의 단순한 지지자가 아니라, 혁명의 방향을 결정짓는 강력한 주체로 부상하고 있었다. 붉은 모자와 혁명의 노래 '라 마르세예즈'는 곧 다가올 더 격렬하고 피비린내 나는 혁명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제68장: 1792년 4월 20일, 루비콘 강을 건너다
알랭 마르탱의 노트: 역사에서 전쟁의 시작은 종종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 '루비콘 강을 건너는' 순간과 같다. 1792년 4월 20일,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한 결정은 바로 그러한 순간이었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결정을 넘어, 프랑스 혁명 자체의 성격과 경로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유럽 전체를 20년 이상 지속될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사건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전쟁 선포 당시 파리의 열광적인 분위기와 함께, 그 결정 이면에 숨겨진 복잡한 정치적 계산과 불안감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1792년 4월, 파리 입법 의회 / 튈르리 궁>
전쟁이냐 평화냐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 끝에, 프랑스는 마침내 전쟁의 길을 선택했다. 자코뱅 클럽에서 고립된 로베스피에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롱드파가 주도하는 전쟁 찬성론이 의회와 여론을 압도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루이 16세가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전쟁 찬성파와 손을 잡은 것이었다. 그는 내심 프랑스의 패배를 바랐을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애국적인 군주로서의 역할을 연기하며 전쟁을 통해 자신의 인기를 회복하고 혁명의 과격화를 막을 수 있다고 계산했을 수도 있다.
1792년 3월, 루이 16세는 브리소 등 지롱드파 인물들이 대거 포함된 새로운 내각을 임명했다. 외무부 장관이 된 샤를 뒤무리에(Charles Dumouriez) 장군은 오스트리아에 대해 프랑스 망명 귀족들의 해산과 필니츠 선언 철회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예상대로 오스트리아는 이를 거부했다.
4월 20일, 루이 16세는 직접 입법 의회에 출석하여 오스트리아(공식적으로는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 자격)에 대한 전쟁 선포를 제안했다. 그의 목소리는 다소 긴장되어 있었지만, 표정에는 묘한 기대감마저 서려 있는 듯했다.
"의원 여러분, 짐은 프랑스의 명예와 안보를 위해, 그리고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는 오스트리아의 도발에 맞서, 부득이하게 전쟁을 제안하게 되었소. 짐은 우리 군대의 용기와 프랑스 국민의 애국심을 믿소."
왕의 제안에 이어, 지롱드파 의원들의 열정적인 전쟁 지지 연설이 이어졌다.
"이것은 왕들의 전쟁이 아니라 민족들의 전쟁입니다! 우리는 유럽의 모든 압제받는 민족들에게 자유의 횃불을 전달해야 합니다! 프랑스의 군대는 해방의 군대가 될 것입니다!"
회의장은 애국적인 열광으로 뒤덮였다. 로베스피에르의 경고나 일부 온건파의 우려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전쟁 선포 동의안은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되었다. 의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삼색 모자를 흔들며 "조국 만세!", "자유 만세!"를 외쳤다.
방청석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에티엔은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전쟁의 위험성을 깊이 우려했지만, 동시에 조국 프랑스가 외세의 위협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복잡한 애국심을 느꼈다. 그는 옆자리의 동료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결국 주사위는 던져졌군. 이제 우리는 루비콘 강을 건넜네. 이 전쟁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갈지… 신만이 아시겠지."
전쟁 선포 소식은 파리 시민들에게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거리에는 군대가 행진하고, 군가('라 마르세예즈'가 더욱 힘차게 불렸다)가 울려 퍼졌다. 많은 젊은이들이 의용군에 지원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러나 소피 라비뉴와 같은 민중들은 전쟁이 가져올 굶주림과 희생을 직감하며 불안감에 휩싸였다. 마담 뒤부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전쟁이라니… 높은 양반들은 자기들끼리 싸움 붙여놓고, 피 흘리는 건 결국 우리 같은 백성들이지."
프랑스의 선전포고에 프로이센은 즉각 오스트리아와의 동맹 조약에 따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제 프랑스는 유럽의 주요 군사 강국들과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혁명은 새로운 국면, 즉 생존을 위한 총력전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 전쟁이 20년 이상 지속될 기나긴 나폴레옹 전쟁의 서막이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제69장: 연이은 패배, 흔들리는 전선
알랭 마르탱의 회고: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전쟁 선포 직후의 기록에서 애국심과 함께 깊은 불안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안타깝게도 곧 현실이 되었다. 전쟁 초기의 프랑스 군대는 혁명의 열정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다. 훈련 부족, 장비 노후, 지휘관 불신, 그리고 무엇보다 구체제 군대와 혁명 의용군 사이의 이질감. 뤽 모로와 같은 인물들이 전쟁터에서 겪었을 혼란과 절망은 당시 프랑스 군 전체의 상황을 축약해서 보여주는 듯하다.
<1792년 4월 말 - 여름, 프랑스 북부 국경 지대>
"전진! 공화국을 위하여! 폭군들을 타도하자!"
젊은 장교 뤽 모로는 칼을 빼 들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는 지롱드파와의 연줄 덕분에 비교적 빠르게 장교로 임관하여 북부 군에 배속되었다. 그는 전쟁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출세의 기회를 잡으리라 기대했다. 그의 부대에는 혁명적 열정에 불타는 의용군들과 함께, 구체제 시절부터 복무해 온 늙고 지친 직업 군인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벨기에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향한 첫 진격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보급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병사들은 굶주림과 행군의 피로에 지쳐 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의 첫 포격이 시작되자, 훈련 부족한 의용군들은 순식간에 공황 상태에 빠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멈춰라, 이 겁쟁이들아! 대열을 유지하라!" 뤽은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일부 병사들은 장교들이 자신들을 배신하고 적에게 팔아넘기려 한다고 소리치며 총구를 돌리려 하기까지 했다. 가까스로 후퇴하여 목숨은 건졌지만, 뤽은 깊은 절망감과 함께 자신의 부하들에 대한 불신감을 느껴야 했다.
다른 전선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경험 많은 로샹보(Rochambeau) 장군이나 라파예트 장군은 군대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실망하여 사임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귀족 출신 장교들 중 상당수는 아예 국경을 넘어 망명해 버렸다. 지휘 체계는 마비되었고, 군 기강은 땅에 떨어졌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연합군은 이러한 프랑스 군의 약점을 놓치지 않았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 정예군은 프랑스 국경을 넘어 롱위(Longwy)와 베르됭(Verdun) 요새를 차례로 함락시키며 파리를 향해 거침없이 진격해 왔다. 프랑스 북부 전선은 완전히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후방 부대에서 행정 장교(혹은 유사 역할)로 복무하고 있던 뒤부아 대위는 참담한 심정으로 패전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는 구체제 군대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혁명이 오히려 군대를 더 약화시킨 현실 앞에서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혁명은 군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동가만 만드는 것인가? 이대로라면 프랑스는 끝장이다.'
한편, 의용군으로 갓 입대한 피에르 뒤퐁(혹은 유사 인물)은 첫 전투의 참상을 목격하고 큰 충격에 빠졌다. 혁명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고 다짐했지만, 눈앞에서 동료들이 맥없이 쓰러져 가고, 굶주림과 공포 속에서 도망치는 병사들의 모습은 그가 상상했던 영웅적인 전쟁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는 고향에 남겨둔 가족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삼켰다.
연이은 패전 소식은 파리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신문들은 패배의 책임을 군 지휘관들의 무능과 반역 탓으로 돌렸고, 왕과 왕비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혁명 정부와 군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면서, 파리의 분위기는 점점 더 위험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전쟁은 시작부터 프랑스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었다.
제70장: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 비상 선포
알랭 마르탱의 생각: 위기는 때때로 잠재된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된다. 1792년 여름, 프랑스는 군사적 패배와 내부 분열이라는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지만, 바로 그 위기 속에서 혁명은 새로운 동력을 얻고 더욱 급진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La patrie est en danger!)"는 선언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프랑스 국민 전체에게 혁명 수호를 위한 총력 동원을 요구하는 비상벨이었고, 동시에 왕정을 향한 마지막 인내심이 바닥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당시 파리의 불안과 흥분, 애국적 열정과 공포가 뒤섞인 복잡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1792년 7월, 파리 입법 의회 / 거리>
"프랑스가 위험하다! 우리의 국경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폭군들에게 유린당하고 있다! 베르됭이 함락 직전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파리가 저들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다!"
입법 의회 회의장은 연일 계속되는 패전 소식과 임박한 위협에 대한 불안감으로 술렁였다. 지롱드파 의원들은 패전의 책임을 왕과 군부 내 반역자들에게 돌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코뱅파는 더욱 강력한 혁명적 조치를 요구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7월 11일, 입법 의회는 마침내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다.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엄숙한 선언과 함께, 프랑스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모든 시민들에게 조국 수호를 위해 궐기할 것을 호소한 것이다.
파리 시내 곳곳에는 비상 선언문이 나붙었다.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관리들이 말을 타고 다니며 시민들에게 선언문을 낭독했다. 교회 종탑에서는 경종이 끊임없이 울렸다.
"모든 시민은 무기를 들고 조국을 지킬 준비를 하라! 전국 각지의 용감한 시민들이여, 파리로 와서 혁명을 수호하라!"
이 선언은 파리 시민들에게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불안감과 공포는 극에 달했지만, 동시에 위기에 맞서 싸우려는 애국적인 열정도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거리에는 삼색기가 넘실거렸고, 시민들은 혁명 노래 '라 마르세예즈'를 목청껏 불렀다. 젊은이들은 의용군에 지원하기 위해 구청 앞에 길게 줄을 섰다.
에티엔은 거리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며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다. 비록 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지만, 조국의 위기 앞에서 하나 되어 떨쳐 일어나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그는 혁명의 진정한 힘을 발견했다. 그는 잠시 자신의 지식인적인 고뇌를 접어두고, 혁명 수호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원하여 국민 방위대 훈련에 참여하거나, 혹은 펜을 통해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글을 쓸 수도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다시 한번 혁명에 대한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피 라비뉴에게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선언은 또 다른 공포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빵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이제 전쟁으로 인해 사랑하는 남동생 피에르마저 징집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거리의 애국적인 함성 속에서 그녀는 더욱 절박하게 생존을 걱정해야 했다.
"전쟁이라니, 굶어 죽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 총알받이까지 되라는 건가." 소피는 쓴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녀에게 '조국'이나 '혁명' 같은 거창한 구호는 여전히 멀고 공허하게만 들렸다.
한편, 급진파 지도자들은 이 위기를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할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당통은 코르들리에 클럽과 파리 코뮌을 오가며 특유의 웅변으로 민중을 선동하고 왕정 타도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했다.
"이제 더 이상 배신자 왕을 용납할 수 없다! 조국의 위기는 바로 저 튈르리 궁 안에 도사리고 있는 반역자들 때문이다! 시민들이여, 일어나 저들을 몰아내고 진정한 공화국을 세우자!"
전국 각지에서 의용군들이 속속 파리로 집결했다. 특히 남부 마르세유에서 온 의용군들은 용맹함과 함께 그들이 부르는 열정적인 노래로 유명세를 탔다. 그 노래는 곧 파리 전체로 퍼져나가 혁명의 상징가가 되었다.
"나가자, 조국의 아들딸들아! 영광의 날은 왔도다! 우리 앞에 압제의 피 묻은 깃발이 펄럭인다!"
'라 마르세예즈'의 힘찬 선율은 파리의 공기를 뜨겁게 달궜다. 조국의 위기 선언은 프랑스를 하나로 묶는 동시에, 왕정을 향한 마지막 인내심을 끊어버리는 방아쇠가 되었다. 혁명은 이제 겉잡을 수 없는 급류를 타고 왕정 타도라는 목표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1792년 8월, 또 다른 피의 역사가 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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