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제4부: 새로운 질서의 구축과 균열 (1789 가을 - 1791 여름)
(알랭 마르탱의 목소리)
바스티유의 함락과 7월 14일의 영광은 혁명의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시작에 불과했다. 무너진 압제의 상징 위에서, 프랑스는 이제 어떤 새로운 질서를 세울 것인가라는 거대한 질문과 마주해야 했다. 파리의 함성은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가,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농촌을 뒤흔들었다. '대공포'라는 이름의 거대한 파도는 낡은 봉건 질서의 잔재를 불태웠고, 이는 베르사유의 국민 제헌 의회가 봉건적 특권 폐지라는 역사적인 결단을 내리도록 강제했다. 그리고 곧이어 선포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혁명의 이상을 인류 보편의 언어로 새겨 넣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 격동의 순간들을 감격과 흥분 속에서 기록했지만, 그의 예리한 시선은 이미 그 찬란한 선언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 즉 배제된 목소리들과 미완의 약속들을 포착하고 있었다. 새로운 질서의 청사진은 그려졌지만, 그 설계도 안에는 이미 다음 단계의 갈등과 분열의 씨앗이 움트고 있었다.
제31장: 시골의 밤, 대공포의 그림자
(1789년 7월 하순 - 8월 초)
파리의 혁명 소식은 전령의 말발굽 소리와 함께, 혹은 장터에서 돌아온 이웃의 과장된 입소문을 타고 프랑스 전역의 농촌 마을로 퍼져나갔다. 왕의 요새 감옥이 무너졌다는 이야기, 파리 시민들이 스스로 무장하고 도시를 장악했다는 소식은 오랫동안 영주와 세금 징수원의 억압 아래 신음하던 농민들에게는 믿기 힘든 해방의 서곡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 해방감 속에는 동시에 깊은 불안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왕이 힘을 잃었다면, 이제 누가 우리를 지켜준단 말인가?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복수하기 위해 군대나 산적떼를 보낼지도 모른다.'
이러한 막연한 불안감은 1789년 여름, 프랑스 농촌 지역을 휩쓴 '대공포(Grande Peur)'라는 기묘하고 강력한 집단 현상으로 폭발했다. 노르망디의 어느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농부 프랑수아 모렐 역시 이 거대한 공포의 파도에 휩쓸렸다. 그는 평생 땅만 알고 살아온 우직하고 신앙심 깊은 농민이었다. 그는 파리의 소요 소식을 반신반의하며 들었지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혁명의 이상보다는 당장의 생계에 대한 걱정과 변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가물었고, 흉작의 그림자는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이웃 마을에서 황급히 달려온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큰일났소! 산적떼가 몰려오고 있소! 그들이 우리 마을을 불태우고 곡식을 빼앗으려 한답니다! 귀족들이 고용한 놈들이 틀림없소!”
그의 외침은 순식간에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 “산적떼라니!” “귀족들의 음모다!” “어서 무기를 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술렁였다. 실제로 산적떼가 나타났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흉흉한 시기 누적된 불안감과 불신은 근거 없는 소문을 걷잡을 수 없는 공포로 키워냈다.
프랑수아 모렐은 낡은 사냥총을 꺼내 들고 마을 광장으로 달려갔다. 이미 수십 명의 농민들이 쇠스랑, 낫, 도끼 등 온갖 농기구를 손에 들고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함께,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분노가 뒤섞여 이글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교회 종탑으로 달려가 경보를 울렸고, 종소리는 밤의 정적을 깨고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모두 정신 차리시오!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소!” 모렐이 목청을 높였다. 그는 평소 마을 사람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이끌게 되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교회로 피신시키시오! 남자들은 나와 함께 마을 입구를 지킵시다! 급조된 바리케이드라도 쌓아야 하오!”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낡은 수레와 통나무, 돌덩이들로 마을 입구를 막았고, 횃불을 밝혀 밤새도록 경계를 섰다. 바람 소리 하나, 멀리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에도 모두들 긴장하며 무기를 움켜쥐었다. 며칠 밤낮을 그렇게 공포와 긴장 속에서 보냈다.
시골 본당의 클레망 신부는 이러한 집단적인 공포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다. 그는 미사를 집전하며 신자들에게 침착함과 이성을 호소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공포에 휩싸인 군중의 함성 속에서 힘을 잃었다.
“형제자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헛된 소문에 동요하지 말고, 이성을 되찾아 서로를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낳을 뿐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신부의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당장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부는 신부마저 귀족 편이라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며칠이 지나도 산적떼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공포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공포는 점차 명확한 대상, 즉 자신들을 오랫동안 억압해 온 지역 영주를 향한 분노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산적떼가 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직접 영주에게 가서 따져야 하는 것 아니오?” 누군가 목소리를 높였다.
“맞소! 우리를 괴롭히던 봉건 문서들을 다 불태워 버립시다!”
“영주의 성에 쌓아둔 곡식과 와인도 우리 것이오!”
프랑수아 모렐 역시 마음속에서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부당한 착취와 억압의 기억.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굳게 결심했다. ‘공포에 떨며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행동해야 한다!’
대공포는 그렇게, 막연한 공포와 불안감에서 시작되어 농민들의 누적된 불만을 폭발시키고, 마침내 낡은 봉건 질서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1789년 여름, 프랑스 농촌의 밤은 더 이상 고요하지 않았다. 공포와 분노, 그리고 해방에 대한 열망이 뒤섞인 채, 역사의 새로운 장을 향해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제32장: 불타는 성, 봉건 문서의 재
(대공포 기간 중, 1789년 8월 초)
대공포의 그림자는 프랑스 농촌을 휩쓸며 단순한 공포를 넘어 격렬한 행동으로 이어졌다. ‘산적떼’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제 농민들의 분노는 명확한 목표를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을 억압하고 착취해 온 봉건적 질서의 상징, 영주의 성(Château)과 수도원이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농민들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무장하고, 자신들의 삶을 옥죄어 왔던 봉건적 속박을 끊어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랑수아 모렐도 그 흐름의 선두에 있었다. 그는 같은 마을 농민 수십 명과 함께 횃불과 농기구를 들고 지역 영주의 성으로 향했다. 그의 가슴 속에는 두려움보다는 해방에 대한 뜨거운 열망과 정의를 실현한다는 비장한 각오가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밤새 행군하여 동틀 녘, 그들은 마침내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영주의 성 앞에 도착했다. 성벽은 높고 단단해 보였지만, 그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문을 열어라! 영주는 나와서 우리의 요구에 답하라!” 모렐이 성문을 향해 소리쳤다.
성안은 조용했다. 영주는 이미 파리의 소요 소식을 듣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 지 오래였다. 성을 지키는 것은 소수의 관리인과 하인들뿐이었다. 그들은 성벽 위에서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영주가 없다면 우리가 직접 들어가서 찾아야 한다! 성문을 부숴라!” 누군가 외쳤고, 농민들은 통나무를 가져와 육중한 성문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낡은 성문은 거센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부서져 내렸다.
“와아!” 함성과 함께 농민들은 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문을 부수고, 화려한 가구와 장식품들을 집어 던지고 깨뜨렸다. 일부는 영주의 서재로 달려가 먼지 쌓인 오래된 문서들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테리에(Terrier)’라고 불리는 봉건 문서들이었다. 그 안에는 농민들이 영주에게 바쳐야 할 각종 공납과 부역의 의무가 깨알 같은 글씨로 기록되어 있었다. 수백 년 동안 농민들을 억압해 온 굴레의 증거였다.
“이것들을 모두 불태워 버리자! 우리의 고통을 끝장내자!” 프랑수아 모렐은 봉건 문서를 높이 쳐들고 외쳤다. 농민들은 환호하며 문서들을 마당 한가운데로 끌어내 쌓았다. 누군가 횃불을 가져와 불을 붙이자, 마른 양피지들은 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와 함께 수백 년 묵은 억압의 기록들이 재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농민들은 마치 자신들의 몸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끊어지는 듯한 강렬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이제 우리는 자유다! 더 이상 영주의 노예가 아니다!” 모렐은 벅찬 감정에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바로 그가, 그의 아버지가,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가 꿈꿔왔던 순간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해방의 열기는 곧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일부 농민들은 영주의 창고를 습격하여 밀가루와 같은 식량을 약탈했고, 다른 이들은 지하 저장고로 달려가 고급 와인 통을 굴려내어 마시고 취했다. 오랫동안 굶주리고 억눌렸던 욕망이 통제되지 않는 형태로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관리인이나 하인들은 겁에 질려 숨거나 도망쳤지만, 일부는 붙잡혀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프랑수아 모렐은 이러한 과도한 폭력과 약탈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이것이 우리가 원했던 것인가? 우리는 불의에 저항하는 것이지, 저들처럼 똑같이 야만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미 술과 해방감에 취한 군중 속에서 힘을 잃었다. 그는 이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러한 반봉건 봉기는 프랑스 전역의 수많은 성과 수도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봉건 문서들이 불타고, 성벽이 무너지고, 영주의 상징물들이 파괴되었다. 이는 단순히 재산 피해를 넘어, 구체제의 사회적·법적 기반 자체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혁명적인 행동이었다. 농민들은 더 이상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낡은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비록 그 과정에서 폭력과 무질서가 동반되었지만, 이 농민 봉기는 베르사유의 국민 제헌 의회가 더 이상 봉건제 문제를 외면할 수 없도록 만드는 강력한 압력이 되었다. 프랑스 시골 들판에서 타오른 불길은 이제 베르사유 궁전의 회의장까지 그 열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제33장: 8월 4일 밤의 열광, 특권은 폐지되었다!
(1789년 8월 4일 밤 ~ 5일 새벽)
1789년 8월 초, 프랑스 전역에서 타오르는 농민 봉기와 '대공포' 소식은 베르사유의 국민 제헌 의회에 큰 충격과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의회 내에서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한 시급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만약 의회가 농민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강경 진압으로 나선다면, 혁명은 걷잡을 수 없는 내전 상태로 빠져들 위험이 있었다. 반대로, 농민들의 폭력적인 행동을 묵인한다면 사유 재산권이라는 혁명의 또 다른 핵심 원칙이 훼손될 수 있었다. 의회는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이러한 긴장감 속에서 8월 4일 저녁, 국민 제헌 의회 회의가 소집되었다. 분위기는 무겁고 침울했다. 의원들은 농민 봉기에 대한 보고를 들으며 깊은 우려를 표했다. 바로 그때, 젊은 귀족 대표인 노아이유 자작이 연단에 올랐다. 그는 미국 독립 전쟁 참전 경험이 있는 자유주의 성향의 귀족이었다. 그는 떨리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예상치 못한 제안을 던졌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지금 프랑스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농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행한 사건들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이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특권 신분이 먼저 양보하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저의 모든 봉건적 권리와 특권을 포기할 것을 제안합니다! 농민들을 억압해 온 부역과 인신 예속, 그리고 불평등한 조세 특권을 폐지합시다! 이것만이 왕국에 평화를 가져오고 국민적 화합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노아이유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회의장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곧이어 엄청난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용기 있는 발언은 회의장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다. 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최고 명문 귀족 가문 중 하나인 데기용 공작이 연단에 올라 노아이유의 제안을 강력히 지지했다. 그는 귀족들이 누려온 특권이 더 이상 시대에 맞지 않음을 인정하며, 자신 역시 모든 특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두 명망 있는 젊은 귀족의 자기희생적인 선언은 회의장에 전염성이 강한 열광의 불길을 지폈다. 이후 회의는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연단에 올라 자신들이 가진 특권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이어가는 감격적인 장면으로 변모했다.
“우리 성직자들도 더 이상 십일조를 받지 않겠습니다! 교회의 재산은 마땅히 국민 전체를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한 주교가 외쳤다.
“영주 재판권을 폐지합시다! 모든 시민은 동등하게 국가의 법에 따라 재판받아야 합니다!” 법복 귀족 출신 의원이 선언했다.
“사냥 독점권과 비둘기 사육권도 폐지합시다! 더 이상 농민들의 농작물을 짓밟는 특권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지방 귀족 대표가 목소리를 높였다.
“관직 매매 제도를 철폐하고 능력에 따라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부르주아 대표가 주장했다.
“모든 종류의 면세 특권은 완전히 폐지되어야 합니다! 모든 프랑스인은 국가 재정에 동등하게 기여해야 합니다!”
“브르타뉴, 프로방스 등 특정 지방이나 도시가 누려왔던 특권 역시 폐지되어야 합니다! 프랑스는 하나이며, 모든 지역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져야 합니다!”
선언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귀족, 성직자, 제3신분 대표 할 것 없이 모두가 경쟁적으로 자신들이 가진 크고 작은 특권들을 ‘조국의 제단’ 위에 바쳤다. 회의장은 눈물과 환호, 박수갈채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마치 새로운 형제애로 하나가 된 듯한 감격에 젖어들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날 밤을 ‘기적의 밤’이라고 불렀다.
에티엔 드샹은 방청석에서 이 역사적인 광경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그의 펜은 쉴 새 없이 움직였고, 노트에는 감격과 흥분으로 가득 찬 문장들이 채워졌다. ‘믿을 수 없는 밤이다! 수백 년 동안 프랑스를 옭아매었던 봉건제의 낡은 쇠사슬이 단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이다! 이성과 박애의 정신이 마침내 승리하는 순간이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새로운 프랑스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다는 벅찬 감동에 휩싸였다.
회의장 한쪽에 앉아 있던 아버지 기욤 드샹 역시 깊은 감회에 젖어 있었지만, 그의 표정에는 여전히 신중함이 남아 있었다. 그는 이 밤의 열광적인 분위기가 가져올 긍정적인 효과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이것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이행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특권 폐지 선언은 위대하다. 하지만 과연 저 모든 약속들이 구체적인 법률로 뒷받침될 수 있을까? 특히 토지 소유와 관련된 복잡한 권리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감정적인 열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냉철한 이성과 치밀한 법률 작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8월 5일 새벽녘, 마침내 의회는 밤새 이루어진 선언들을 바탕으로 ‘봉건제를 완전히 파괴한다’는 원칙을 담은 법령 초안을 통과시켰다. 세부적인 내용은 추후 논의하기로 했지만, 프랑스 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던 봉건적 특권 체제는 이날 밤의 열광적인 선언과 함께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했다. 8월 4일 밤의 사건은 프랑스 혁명의 가장 극적이고 중요한 순간 중 하나였다. 비록 이후의 실행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과 타협이 따랐지만, 이날 밤의 결단은 구체제와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새로운 사회를 향한 프랑스의 의지를 전 세계에 보여준 역사적인 이정표였다.
제34장: 인간과 시민의 권리, 새로운 시대의 약속
(1789년 8월)
8월 4일 밤, 봉건적 특권이라는 낡은 건물의 기둥을 무너뜨린 국민 제헌 의회는 이제 그 폐허 위에 세워질 새로운 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해야 했다. 그 청사진의 핵심은 바로 모든 시민의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를 명확히 규정하는 것이었다. 혁명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헌법 제정에 앞서,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를 선언함으로써 혁명의 이념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미래 사회의 기본 원칙을 천명하고자 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789년 8월 26일에 채택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이었다.
선언문 기초 작업은 혁명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8월 한 달 동안 의회 내 여러 위원회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는 미라보, 시에예스, 라파예트, 무니에 등 다양한 성향의 지도자들이 참여하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로크, 몽테스키외, 루소 등 계몽사상가들의 이론과 함께, 바다 건너 미국의 독립 선언 및 각 주의 권리 장전들이 중요한 영감과 참조점을 제공했다. 특히 라파예트는 제퍼슨과 긴밀히 상의하며 초안 작성에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초안들이 제출되고 논의된 끝에, 마침내 전문(前文)과 17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선언문이 완성되었다.
에티엔 드샹은 선언문 초안이 의회에서 논의될 때부터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과정을 지켜보았고, 마침내 최종 선언문이 인쇄되어 배포되자 떨리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탐독했다. 그의 눈앞에는 새로운 시대의 약속이 펼쳐지고 있었다.
“제1조.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평등하게 태어나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 사회적 차별은 오직 공공의 유용성에 근거할 때만 있을 수 있다.”
에티엔은 이 첫 문장에서부터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천부인권! 이것이야말로 구체제의 신분 질서를 완전히 부정하는 혁명의 핵심 원리다!’
“제2조.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소멸할 수 없는 권리들을 보전함에 있다. 이 권리들은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압제에 대한 저항이다.”
‘자유, 재산, 안전, 저항권! 로크가 말한 바로 그 자연권이 아닌가! 이제 국가는 이 권리들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제3조.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떠한 단체나 개인도 국민으로부터 명시적으로 유래하지 않은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
‘국민 주권! 루소의 외침이 마침내 법의 언어로 새겨졌다! 왕도, 귀족도, 성직자도 아닌 오직 국민만이 주권자다!’
에티엔은 선언문의 각 조항을 읽어 내려가며 그 안에 담긴 혁명적 의미와 철학적 깊이에 감탄했다. 법 앞의 평등(제6조), 죄형 법정주의와 무죄 추정(제7, 8, 9조), 사상·양심·종교의 자유(제10조), 언론·출판의 자유(제11조), 사유 재산의 불가침성(제17조), 조세 평등(제13, 14조), 권력 분립의 필요성(제16조) 등 근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핵심 원리들이 명료하고 장엄한 문장으로 선포되고 있었다.
“뤽, 이것 좀 보게! 이 선언문이야말로 우리가 꿈꿔왔던 모든 것이 담겨 있지 않은가!” 에티엔은 카페에서 만난 뤽 모로에게 흥분해서 말했다. “이것은 단지 프랑스만을 위한 선언이 아닐세. 이것은 전 인류를 위한 자유의 헌장이야!”
뤽 모로는 에티엔의 열정에 동의하면서도, 여전히 현실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물론 위대한 선언임에는 틀림없네, 에티엔. 하지만 이 아름다운 원칙들이 과연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모든 시민은 법률 제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제6조)고 했는데, 과연 글도 읽지 못하는 농민이나 파리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실제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재산권은 신성불가침하다’(제17조)고 했는데, 이것이 결국 부르주아지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조항이 되지는 않을까?”
에티엔은 뤽의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 역시 선언문의 이상과 현실 적용 사이의 간극에 대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애써 그 불안감을 떨쳐내려 했다. “물론 어려움이 있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원칙을 세웠다는 것이네. 이 선언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등대와 같아. 앞으로 우리는 이 원칙들을 현실 속에서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걸세.”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발표되자마자 프랑스 전역과 유럽 전체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읽혔고, 전 세계의 자유와 인권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선언문의 문구들은 혁명 축제의 현수막에 새겨졌고, 노래 가사가 되었으며, 정치 팸플릿의 핵심 논거로 인용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법률 문서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강력한 이념적 선언이자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에티엔은 이 선언이 가져올 밝은 미래를 굳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간과했던 것은, 선언문의 아름다운 언어 뒤에 숨겨진 모순과 한계들이 곧 혁명의 경로를 더욱 복잡하고 격렬하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제35장: 선언의 한계, 배제된 목소리들
(1789년 가을 이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선포한 자유와 평등의 보편적 이상은 찬란했지만, 그 빛은 프랑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동등하게 비추지 못했다. 선언문의 언어는 의도적으로 성 중립적인 것처럼 보였지만(‘인간(homme)’이라는 단어는 ‘남성’과 ‘인간’ 모두를 의미할 수 있었다), 실제로는 혁명을 주도한 남성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관점과 이해관계가 깊이 반영되어 있었고, 이는 곧 선언의 한계와 내재적 모순으로 드러났다.
가장 먼저 제기된 문제는 여성의 권리였다. 선언문 어디에도 여성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은 없었다. 혁명 초기, 여성들은 빵을 요구하는 시위(베르사유 행진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정치 클럽(Sociétés fraternelles des deux sexes 등)을 조직하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민 제헌 의회의 남성 의원들 대부분은 여전히 루소의 영향 아래 여성을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 속한 존재로 간주했고,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시민권(특히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정면으로 도전한 인물이 바로 극작가이자 활동가였던 올랭프 드 구즈였다. 그녀는 1791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패러디하여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a femme et de la citoyenne)'을 발표했다. 그녀는 선언문 제1조를 “여성은 자유롭게 태어나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고쳐 쓰고, 여성의 참정권, 공직 참여권, 재산권, 이혼의 자유 등을 포함한 17개 조항을 통해 완전한 남녀 평등을 요구했다. 그녀의 선언은 당시로서는 너무나 급진적이었기에 큰 반향을 얻지 못했고, 오히려 비웃음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올랭프 드 구즈는 이후 공포정치 시기 왕정 옹호 및 연방주의 연루 혐의로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에티엔 드샹 역시 처음에는 여성의 정치적 권리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계몽사상의 세례를 받았지만, 당시 사회의 뿌리 깊은 성 역할 고정관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파리의 여성 클럽 활동 소식을 접하고, 올랭프 드 구즈의 선언문을 (비록 비판적으로라도) 읽게 되면서 점차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선언했지만, 과연 여성은 그 ‘인간’에 포함되는가? 여성들이 혁명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은데, 왜 그들의 목소리는 배제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선언의 정신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에티엔은 일기장에 이러한 고민을 적었다. 뤽 모로는 그의 고민에 대해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에티엔, 여성 참정권이라니? 너무 앞서나가는군. 여성은 가정에서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사회 질서를 위해 더 중요하네. 정치 같은 골치 아픈 일은 우리 남자들에게 맡겨두라고.” 뤽의 말은 당시 많은 남성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식민지 노예 문제 역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었다. 선언 제1조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난다”고 명시했지만, 프랑스는 여전히 카리브해 식민지(생도맹그(Saint-Domingue, 현 아이티) 등)에서 수십만 명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동원한 플랜테이션 농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고 있었다. 노예제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혁명의 이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명백한 모순이었지만, 국민 제헌 의회는 이 문제를 애써 외면했다. 식민지 플랜테이션 소유주와 상인들(대부분 부르주아지)의 강력한 로비 때문이었다. 그들은 노예제가 폐지되면 프랑스 경제가 파탄 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의회를 압박했다. ‘아미 데 누아르(Amis des Noirs, 흑인의 친구들)’와 같이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소수의 목소리도 있었지만(여기에는 브리소, 콩도르세 등 일부 혁명 지도자들도 포함), 주류 세력의 저항에 부딪혀 힘을 얻지 못했다.
에티엔은 아이티에서 온 자유 흑인이나 물라토(혼혈) 대표(가상 인물)가 파리에서 노예들의 권리를 호소하는 팸플릿을 배포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된다. 그는 그 팸플릿을 읽으며 깊은 충격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우리가 프랑스에서 왕과 귀족의 압제에 맞서 싸우는 동안, 바다 건너 식민지에서는 우리 프랑스인들이 수십만 명의 인간을 노예로 부리고 착취하고 있다니… 우리의 자유는 과연 누구의 희생 위에 세워지고 있는 것인가?’ 그는 프랑스 혁명이 지닌 보편적 이상과 제국주의적 현실 사이의 모순을 고통스럽게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 복선은 이후 아이티 혁명(제11부)과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시민(citoyen)'의 개념과 재산 자격 문제 역시 선언의 한계를 드러냈다. 선언 자체는 모든 시민의 평등한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후 1791년 헌법 제정 과정에서 투표권은 일정액 이상의 세금을 납부하는 '능동 시민'에게만 주어졌다. 이는 재산이 없는 대다수 남성들, 즉 소피 라비뉴와 같은 파리 민중이나 농촌의 빈농들을 정치 과정에서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부르주아 혁명가들은 재산 소유를 정치적 능력과 책임감의 기준으로 삼았지만, 이는 결국 자신들의 계급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이기도 했다. 소피에게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여전히 빵 한 조각보다 못한, 멀고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녀가 체감하는 현실은 선언문의 아름다운 약속과는 너무나 달랐다.
이처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근대 인권 사상의 위대한 출발점이었지만, 동시에 그것을 탄생시킨 시대와 사회의 한계를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여성, 노예, 무산자 등 사회의 다수 구성원들은 그 보편적인 권리의 이름 아래 여전히 배제되고 차별받았다. 이러한 내재적 모순과 배제된 목소리들은 이후 혁명의 전개 과정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야기하고 새로운 투쟁의 불씨가 될 것이었다. 에티엔 드샹은 혁명의 이상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면서도, 그 이상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불완전하고 위선적일 수 있는지 깨달으며 더욱 깊은 성찰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제4부: 새로운 질서의 구축과 균열 (1789 가을 - 1791 여름)
(알랭 마르탱의 목소리)
1789년의 여름은 뜨거웠다. 파리의 함성은 전국으로 퍼져나가 농촌의 잠든 분노를 깨웠고, '대공포'는 수백 년 묵은 봉건제의 성벽을 불태웠다. 이에 놀란 국민 제헌 의회는 8월 4일 밤의 열광 속에서 봉건적 특권 폐지를 선언했고, 이어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통해 자유와 평등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원칙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 속에는 당시의 감격과 흥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그 찬란한 선언이 드리운 그림자, 즉 그 보편적 약속에서 소외된 이들의 존재와 혁명의 내재적 모순 또한 놓치지 않았다. 이제 혁명은 파괴를 넘어 건설의 단계로 나아가야 했다. 새로운 프랑스를 만들기 위한 제도 개혁의 시도들. 하지만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또 다른 갈등과 분열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특히 혁명 정부의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과감한 조치, 즉 교회 재산의 국유화는 프랑스 사회를 깊이 뒤흔들 또 다른 폭풍의 시작이었다.
제36장: 교회 재산 국유화, 신성함에 도전하다
(1789년 10-11월)
1789년 가을, 혁명의 열기 속에서도 프랑스 국가 재정의 위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봉건 특권 폐지와 인권 선언 같은 위대한 선언들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텅 빈 국고를 채워주지는 못했다. 국민 제헌 의회는 국가 부도라는 파국을 막고 혁명 정부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여러 논의 끝에, 마침내 가장 논쟁적이고 과감한 해결책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바로 프랑스 가톨릭 교회가 보유한 막대한 재산과 토지를 국유화하는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 교회는 단순히 종교 기관이 아니라, 엄청난 부와 특권을 가진 거대한 지주이자 권력 집단이었다. 프랑스 전체 토지의 약 10%를 소유하고 있었고, 십일조 수입과 각종 기부금, 그리고 면세 특권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주교와 대수도원장 등 고위 성직자들은 대부분 귀족 가문 출신으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렸지만, 시골 본당의 하급 성직자들은 제3신분 출신이 많았고 비교적 청빈한 생활을 하며 민중과 가까이 지냈다. 이러한 교회의 막대한 부는 오래전부터 계몽사상가들과 제3신분의 비판 대상이었고, 이제 재정 위기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맞물려 국유화라는 급진적인 조치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1789년 10월, 이 민감한 문제가 국민 제헌 의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회의장은 찬반 양론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교회의 재산은 본질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공공의 선(善)을 위해 신자들이 맡긴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 재산을 국가 전체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한 좌파 성향의 의원이 열변을 토했다.
“또한, 성직자의 본분은 영적인 가르침에 있지, 막대한 토지를 관리하고 부를 축적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국가가 성직자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교회 재산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개혁입니다!” 다른 의원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보수적인 성직자 대표들과 일부 귀족 대표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교회의 재산은 신성불가침합니다! 감히 인간의 손으로 하느님의 것을 빼앗으려 하십니까? 이것은 신성 모독이자 혁명의 파멸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한 주교가 분노에 차 외쳤다.
“이것은 명백한 사유 재산권 침해입니다! 오늘 교회의 재산을 빼앗는다면, 내일은 귀족과 부르주아의 재산을 빼앗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사회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천만한 발상입니다!” 보수 귀족 의원이 경고했다.
에티엔 드샹은 방청석에서 이 논쟁을 지켜보며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이성적으로는 국가 재정 위기 해결과 교회 개혁이라는 명분에 공감했지만,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 마리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또한, 사유 재산권의 신성함을 강조했던 인권 선언의 정신과 교회 재산 국유화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지에 대한 법률가로서의 고민도 깊었다.
이 첨예한 대립 속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이 국유화 찬성론의 선봉에 나섰다. 바로 오툉(Autun) 교구의 주교이자 귀족 출신인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즉 탈레랑이었다. 그는 뛰어난 지성과 냉철한 현실 감각, 그리고 절묘한 처세술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종교적인 신념보다는 정치적인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국유화의 불가피성과 정당성을 설득력 있게 역설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탈레랑은 차분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우리는 지금 감상적인 논쟁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국가는 파산 직전이고, 혁명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습니다. 교회의 재산은 물론 신성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 재산의 소유권은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있습니까? 개별 성직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국민 전체의 신앙 공동체에 속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국민의 대표인 이 의회는 국가의 필요에 따라 그 재산의 용도를 결정할 권리가 있습니다. 국가는 성직자들의 적절한 생계를 보장하고 종교 의식 거행을 지원할 것입니다. 교회 재산 국유화는 결코 신앙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세속적인 부의 굴레에서 벗어나 본연의 영적인 사명에 더욱 충실할 수 있도록 돕는 길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이는 국가 재정을 회복하고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한 불가피하고도 정의로운 조치입니다.”
탈레랑의 연설은 회의장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현실적이면서도 교묘한 논리는 많은 중도파 의원들을 설득했다. 혁명의 거물 미라보 역시 강력하게 국유화를 지지하고 나섰다. 마침내 1789년 11월 2일, 격렬한 토론 끝에 ‘교회 재산은 국가의 처분에 맡긴다’는 법령이 가결되었다.
이 결정은 프랑스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혁명 정부는 당장의 재정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막대한 재원을 확보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가톨릭 교회와의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마리 드샹과 같은 수많은 독실한 신자들은 이 조치를 신성 모독이자 혁명 정부의 폭거로 받아들이며 깊은 충격과 불안감에 휩싸였다. “어떻게… 어떻게 감히 하느님의 재산에 손을 댈 수 있단 말인가… 프랑스는 이제 벌을 받을 것이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반면, 아버지 기욤 드샹은 좀 더 현실적인 입장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을지도 모르네. 교회의 과도한 부와 특권은 분명 문제가 있었고, 국가 재정 위기는 심각했으니까. 다만, 이 조치가 가져올 사회적 분열과 갈등이 걱정될 뿐이네.” 그는 에티엔에게 말했다.
에티엔은 아버지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복잡했다. 혁명의 대의를 위해서는 필요한 조치였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가져올 종교적 갈등과 사회적 분열의 씨앗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교회 재산 국유화는 혁명의 급진화 과정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었고, 이는 곧 프랑스 교회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려는 ‘성직자 시민 헌장’ 제정이라는 더 큰 논란으로 이어질 참이었다. 프랑스는 재정 위기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지만, 동시에 더 깊은 분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제37장: 아시냐 발행, 종이 위의 희망과 불안
(1789년 12월 이후)
교회 재산을 국유화하기로 결정했지만, 당장 발등의 불인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막대한 부동산을 현금으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러나 전쟁과 혁명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방대한 규모의 교회 토지(‘국유지(Biens nationaux)’)를 단기간에 제값을 받고 매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국민 제헌 의회의 재정 위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 끝에 새로운 형태의 금융 수단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아시냐(Assignat)'라고 불리는 지폐였다.
1789년 12월, 의회는 국유지를 담보로 하는 일종의 국채인 아시냐를 처음 발행했다. 초기 아시냐는 비교적 높은 이자(5%)를 지급하고, 국유지 구매 시 액면가 그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 투자자들의 구매를 유도하려는 목적이었다. 정부는 국유지가 매각되면 그 대금으로 아시냐를 회수하여 소각함으로써 통화량을 조절할 계획이었다. 에티엔 드샹은 이 새로운 제도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교회 재산을 담보로 한 지폐라… 기발한 발상이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정부 재정 문제도 해결하고, 국유지 매각을 통해 토지 소유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분산시키는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아시냐가 혁명의 재정적 난관을 극복하고 사회 개혁을 촉진하는 수단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아버지 기욤 드샹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역사, 특히 존 로(John Law)가 섭정 시대(18세기 초)에 시도했다가 처참하게 실패한 미시시피 회사 주식 및 지폐 발행 사건을 떠올리며 깊은 우려를 표했다.
“에티엔, 종이돈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정부가 재정 압박 때문에 약속을 어기고 무분별하게 찍어내기 시작하면, 그 가치는 순식간에 폭락하고 끔찍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수 있다. 존 로의 시스템 붕괴가 프랑스 경제에 얼마나 큰 혼란을 가져왔는지 잊었느냐? 국유지라는 담보가 있다고 하지만, 그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고 안정적으로 매각될 수 있을지 누가 보장한단 말인가?” 기욤은 아들에게 경고했다.
기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시냐 발행은 확대되었다. 1790년 4월, 의회는 아시냐를 법정 통화, 즉 실제 화폐로 사용하도록 결정하고 이자 지급을 중단했다. 발행 규모도 급격히 늘어났다. 정부는 당장의 재정 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그리고 국유지 구매를 촉진하기 위해 계속해서 아시냐를 찍어냈다.
파리 시내에서는 아시냐가 점차 유통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새로운 화폐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국유지를 싼값에 살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아시냐를 환영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소피 라비뉴도 시장에서 아시냐로 물건값을 치르는 사람들을 보았다.
“마담, 저 종이 조각으로도 빵을 살 수 있나 봐요. 신기하네요.” 소피가 마담 뒤부아에게 말했다.
“글쎄다. 아직은 액면가대로 받아주는 것 같지만… 저게 정말 돈값을 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왠지 불안하구나.” 마담 뒤부아는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녀의 불안처럼, 아시냐의 문제점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부의 남발로 발행량이 급증하면서 그 가치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금속 화폐(금화, 은화)를 숨기고 아시냐를 먼저 사용하려 했고, 이는 실질적인 화폐 가치 하락을 더욱 부추겼다(그레셤의 법칙). 또한, 국유지 매각 과정에서 부유한 부르주아지와 투기꾼들이 헐값에 토지를 사들이는 경우가 많아, 토지 소유 민주화라는 초기 목표는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장 발레는 인쇄소에서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아시냐 지폐를 보며 혀를 찼다.
“저 종이 조각들이 결국 누구 배만 불릴 것 같은가, 앙투안? 혁명으로 돈방석에 앉은 저 부르주아 놈들이지! 우리 민중은 여전히 굶주리는데 말이야!” 그는 아시냐 발행이 결국 부자들의 투기 수단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아시냐 발행은 단기적으로는 혁명 정부의 재정 숨통을 틔워주고 국유지 매각을 촉진하는 효과를 거두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통제 불가능한 인플레이션과 경제 혼란을 야기하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종이 위에 인쇄된 희망은 점점 불안의 그림자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혁명 프랑스는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위험한 길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었다.
제38장: 행정 구역 개편, '데파르트망'의 탄생
(1789년 말 - 1790년 1월)
프랑스 혁명은 정치 체제뿐만 아니라 국가의 기본적인 행정 구조까지 뿌리부터 바꾸려는 야심 찬 시도였다. 구체제 하의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다양한 크기와 특권을 가진 프로뱅스(Province), 제네랄리테(Généralité), 바이아주(Bailliage)/세네쇼세(Sénéchaussée) 등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행정 구역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각 지역은 고유한 법률, 관습, 도량형, 심지어 세금 제도까지 가지고 있어 국가 전체의 통일성을 저해하고 지역 간 불평등을 야기했다. 국민 제헌 의회의 혁명가들은 이러한 낡은 틀을 깨고, 이성과 합리성에 기반한 통일되고 효율적인 행정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다.
행정 구역 개편 논의는 1789년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의회 내에서는 다양한 개편 방안이 제시되었고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일부에서는 역사적 전통과 지역 정체성을 존중하여 기존 프로뱅스를 유지하면서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미라보와 같은 인물은 너무 급격하고 인위적인 개편이 오히려 혼란과 반발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의 역사는 지울 수 없는 흔적입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프로뱅스의 경계를 하루아침에 없애는 것은 프랑스의 뿌리를 뽑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존중하면서 점진적으로 개혁해야 합니다.” 한 온건파 의원이 주장했다.
그러나 시에예스와 투레(Thouret)를 비롯한 다수파는 구체제의 불합리한 유산을 완전히 청산하고, 합리적인 원칙에 따라 프랑스를 새롭게 구획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들은 역사적 경계 대신 지리적 크기와 인구 수를 기준으로 프랑스 전체를 비슷한 규모의 행정 단위로 나누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는 중앙 정부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고, 전국적으로 통일된 법률과 행정 시스템을 적용하며, 지역 간 특권을 철폐하여 국가적 통일성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낡은 프로뱅스는 봉건적 특권과 불평등의 온상이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잔재를 과감히 청산하고, 이성과 합리성에 기반한 새로운 프랑스를 설계해야 합니다! 모든 프랑스 시민은 동등하며, 모든 지역은 하나의 법 아래 통합되어야 합니다!” 시에예스가 힘주어 말했다.
에티엔 드샹은 이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는 합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개혁 방향에는 공감했지만, 동시에 역사적 전통과 지역 문화가 지닌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우려를 느꼈다. 그는 아버지 기욤과 이에 대해 토론했다.
“아버지 생각은 어떠십니까? 시에예스의 주장은 논리적이지만, 너무 급진적이지 않습니까? 각 지역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구획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요?”
“물론 우려되는 점이 있지.” 기욤이 답했다. “하지만 구체제의 행정 구역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불공평했는지 생각해 보아라. 국가를 근대화하고 통일된 법 체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과감한 개편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제도가 얼마나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느냐겠지.”
결국 의회는 시에예스 등이 주도한 합리적 재편 방안을 채택했다. 오랜 논의와 지도 제작 작업을 거쳐, 1790년 1월 15일, 프랑스 전역을 83개의 '데파르트망(Département)'으로 나누는 법령이 최종 통과되었다. 각 데파르트망의 명칭은 주로 그 지역을 흐르는 강이나 산맥 등 자연 지형에서 따왔으며, 크기와 인구가 비교적 균등하게 배분되도록 노력했다. 데파르트망 아래에는 아롱디스망(Arrondissement), 캉통(Canton), 그리고 가장 기초적인 자치 단위인 코뮌(Commune)을 두어 체계적인 행정 위계를 갖추었다. 각 데파르트망에는 중앙 정부가 임명하는 도지사(Préfet, 나폴레옹 시대에 이 명칭으로 확립)의 전신격인 행정관이 파견되어 중앙 정부의 정책을 집행하고 지방 행정을 감독하게 되었다.
이 행정 구역 개편은 프랑스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구체제의 복잡하고 불평등한 지방 제도를 일소하고, 합리적이고 통일적인 국가 행정 시스템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중앙 집권화를 강화하고 국가적 통일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이후 프랑스 행정 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지방의 고유한 전통과 자율성을 약화시키고 프랑스를 획일적인 행정 단위로 재편했다는 비판도 받게 된다. 혁명은 이처럼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려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성찰도 필요했다. 에티엔은 프랑스 지도를 펼쳐놓고 새롭게 그어진 데파르트망 경계선들을 바라보며, 이 합리적인 질서가 과연 프랑스인들의 삶에 어떤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제39장: 연맹 축제, 하나 된 프랑스의 환상
(1790년 7월 14일)
1790년 7월 14일, 파리는 다시 한번 혁명의 열기로 들끓었다. 바스티유 함락 1주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헌법 제정을 축하하며, 프랑스 국민 전체의 화합과 단결을 과시하기 위한 거국적인 행사인 '연맹 축제(Fête de la Fédération)'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날의 축제는 단순한 기념행사를 넘어, 혁명이 만들어낸 새로운 프랑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국민적 에너지를 하나로 모으려는 의도에서 기획되었다.
축제의 주 무대는 파리 서쪽의 넓은 평원인 마르스 광장(Champ-de-Mars)이었다. 수십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과 중앙에 '조국의 제단(Autel de la patrie)'을 세우는 대규모 토목 공사가 필요했지만, 재정이 부족한 정부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호소했다. 놀랍게도, 파리 시민들은 남녀노소,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열정적으로 이 작업에 동참했다. 귀족 부인과 상점 점원이 함께 흙을 나르고, 성직자와 노동자가 함께 땅을 다지는 모습은 혁명이 가져온 새로운 형제애와 연대 의식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에티엔 드샹 역시 며칠 동안 마르스 광장에 나가 다른 시민들과 함께 땀 흘리며 일했다. 그는 계급의 벽이 허물어지고 모두가 하나의 ‘국민’으로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축제 당일, 이른 아침부터 폭우가 쏟아졌지만, 사람들의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다. 프랑스 전역 83개 데파르트망에서 선발된 국민 방위대 대표단과 시민 대표단이 형형색색의 깃발과 플래카드를 들고 파리 시내를 행진하여 마르스 광장으로 집결했다. 광장은 이미 수십만 명의 파리 시민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삼색기가 곳곳에서 휘날렸고, 애국적인 노래와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중앙 제단에서 거행된 엄숙한 의식이었다. 국민 방위대 총사령관 라파예트 후작이 말을 타고 제단으로 올라가, 오른손을 들고 전국 국민 방위대를 대표하여 선서했다. "우리는 국민과 법률과 국왕에게 영원히 충성할 것을 맹세하며, 의회가 제정하고 국왕께서 승인하신 헌법을 온 힘을 다해 수호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의 선서에 수십만 군중은 "맹세합니다!"라고 외치며 화답했다.
이어 루이 16세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및 왕세자와 함께 제단에 올랐다. 왕은 다소 굳은 표정이었지만, 군중의 함성 속에 헌법을 수호하고 법률을 집행할 것을 선서했다. 왕비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군중에게 손을 흔들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불안감이 감돌았다.
마지막으로, 오툉 주교 탈레랑이 삼색기 장식으로 꾸며진 제단 위에서 수백 명의 성직자들과 함께 장엄한 미사를 집전했다. 미사 중에는 대포가 예포를 발사하고 군악대가 연주를 했으며, 모든 참석자들이 함께 국가에 대한 충성과 형제애를 다짐하는 합창을 불렀다. 축제는 겉보기에는 프랑스 국민 전체가 혁명의 성과 아래 하나로 뭉쳐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감격적인 화합의 장처럼 보였다.
에티엔은 이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며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다. ‘보라! 프랑스는 하나가 되었다! 왕과 국민, 귀족과 평민, 성직자와 시민이 모두 함께 새로운 프랑스를 위해 맹세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의 위대한 승리다!’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주변 사람들과 함께 "프랑스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에티엔처럼 감격에 젖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피 라비뉴는 마담 뒤부아와 함께 광장 한쪽 구석에서 이 거대한 행사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는 수많은 인파와 화려한 깃발, 그리고 울려 퍼지는 음악과 함성에 압도당했지만, 여전히 이 모든 것이 자신과는 동떨어진 그들만의 잔치처럼 느껴졌다. “마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맹세하면… 정말 세상이 바뀔까요? 내일 아침에도 우리는 여전히 배고프지 않을까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회의감이 묻어났다.
장 발레 역시 축제 현장에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냉담했다. 그는 코르들리에 클럽 동료들과 함께 군중 속에서 팸플릿을 나눠주며 속삭였다. “이건 다 쇼야! 라파예트와 저 부르주아 의원 놈들이 왕과 손잡고 혁명을 끝내려는 속셈이지! 저 가증스러운 미사를 보라고!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진짜 혁명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그는 연맹 축제의 화합 분위기를 부르주아들의 기만으로 간주하고, 더욱 급진적인 투쟁을 다짐했다.
연맹 축제는 표면적으로는 국민적 통합과 혁명의 성공을 과시하는 화려한 성공작처럼 보였다. 축제를 통해 혁명 정부는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입헌 군주제의 정당성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스펙터클 이면에는 해결되지 않은 갈등과 불안 요소들이 잠복해 있었다. 루이 16세의 선서는 진심이었을까? 성직자 시민 헌장 문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부르주아지와 민중 사이의 간극은 좁혀질 수 있을까? 연맹 축제가 보여준 '하나 된 프랑스'는 사실 위태로운 환상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축제의 열기가 식기도 전에, 프랑스는 다시 한번 깊은 분열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40장: 성직자 시민 헌장, 갈등의 씨앗 뿌려지다
(1790년 7월 12일 제정 및 이후 선서 강요 과정)
1790년 7월, 연맹 축제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국민 제헌 의회는 프랑스 사회를 뿌리부터 뒤흔들 또 하나의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바로 7월 12일 제정된 '성직자 시민 헌장(Constitution civile du clergé)'이었다. 교회 재산 국유화 이후, 혁명 정부는 이제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조직 자체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고 혁명의 원칙에 맞게 재편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깊고 격렬한 종교적·정치적 분열을 야기하며, 혁명의 경로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성직자 시민 헌장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기존의 복잡한 교구 체계를 폐지하고, 새로 만들어진 83개 데파르트망에 맞춰 교구 수를 83개로 축소했다. 둘째, 주교와 본당 신부를 포함한 모든 성직자를 해당 지역 주민(가톨릭 신자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능동 시민')들이 선거를 통해 직접 선출하도록 규정했다. 이는 교황이나 기존 교회 계층의 임명권을 부정하는 혁명적인 조치였다. 셋째, 모든 성직자는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는 공무원 신분이 되며, 로마 교황청에 대한 충성 서약을 금지하고 대신 국가와 헌법에 대한 충성을 서약해야 했다. 넷째, 수도회 중 일부(사회적으로 '유용하지 않다'고 판단된 관상 수도회 등)를 해산하고 수도 서원을 금지했다.
이 헌장은 프랑스 교회를 로마 교황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사실상 국가 교회(Gallican Church 전통의 극단적 형태)로 만들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의회 내 다수를 차지했던 계몽주의 성향의 의원들(특히 법률가들)은 교회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고, 얀센주의나 갈리아주의 전통에 익숙한 일부 성직자들도 이에 동조했다. 그들은 교황의 권위보다는 국가의 주권과 의회의 결정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 헌장은 프랑스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과 로마 교황과의 영적 유대를 중시하는 많은 성직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교황의 승인 없이 교회의 조직과 교리를 국가가 일방적으로 변경하고, 성직자를 시민들이 선출하며, 국가에 대한 충성 서약을 강요하는 것은 신앙의 근본 원칙을 훼손하는 신성 모독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에티엔 드샹의 어머니 마리 드샹은 헌장 소식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럴 수가! 감히 교회의 일을 저들이 마음대로 결정하다니! 성직자를 투표로 뽑는다고? 하느님의 종을 인간의 손으로 뽑는다는 말이냐?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도전이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매일같이 성당을 찾아 기도했지만, 성당 분위기 역시 뒤숭숭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클레망 신부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는 선서파 성직자로서 처음에는 혁명의 일부 개혁 요구에 공감했지만, 성직자 시민 헌장은 그의 양심을 심각하게 뒤흔들었다. ‘국가에 충성하는 것은 시민으로서 당연한 의무이다. 하지만 교황 성하의 영적인 권위를 부정하고, 신앙의 문제를 국가가 결정하도록 따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만약 내가 선서한다면, 나는 하느님과 교회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선서를 거부한다면… 나는 반역자로 몰려 사제직을 박탈당하고 신자들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밤늦도록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번민했지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1790년 11월, 국민 제헌 의회는 모든 성직자에게 헌장에 대한 충성 선서를 법적으로 의무화하고, 이를 거부하는 성직자는 직위를 박탈하고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프랑스 교회는 이제 ‘선서파(jureur, 헌법 준수파)’와 ‘선서 거부파(réfractaire, 반항파)’로 명백하게 갈라지게 되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주교들 중에서는 극소수(탈레랑 포함 7명)만이 선서했고, 하급 성직자들 중에서도 절반 정도만이 선서에 응했다. 특히 독실한 신앙심이 강했던 서부(방데 등)와 남부 지역에서는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선서를 거부했다.
선서를 거부한 성직자들은 즉시 공직에서 추방되었고, 많은 이들이 박해를 피해 숨거나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들 ‘선서 거부파’ 성직자들은 오히려 많은 신자들(특히 농민들과 여성들)로부터 진정한 신앙의 수호자로 여겨지며 비밀리에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숲 속이나 헛간에서 비밀 미사를 집전하며 신앙 공동체를 유지하려 했고, 혁명 정부에 대한 저항의 구심점이 되어갔다. 프랑수아 모렐과 같은 방데 농민들은 자신들이 존경하던 신부가 쫓겨나고, 파리에서 온 ‘가짜’ 선서파 신부가 대신 미사를 집전하는 것에 대해 깊은 분노를 느꼈다.
반대로, 선서에 응한 클레망 신부와 같은 성직자들은 혁명 정부로부터는 합법적인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많은 동료 성직자들과 독실한 신자들로부터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고립되고 비난받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국가와 신앙 사이에서 끊임없이 양심의 가책에 시달렸다. 수녀원의 테레즈 수녀 역시 비슷한 고민에 빠졌다. 수녀 서원을 포기하고 세속으로 돌아가라는 압력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신앙과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며 괴로워했다.
1791년 봄, 마침내 교황 비오 6세가 성직자 시민 헌장을 공식적으로 비난하고 파문 위협을 가하면서, 프랑스 교회와 사회의 분열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종교 문제는 단순한 신앙의 문제를 넘어, 혁명에 대한 찬반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루이 16세가 바렌 도주를 결심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성직자 시민 헌장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에티엔은 이러한 종교적 갈등 심화를 우려 깊게 지켜보았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이신론에 가까웠지만, 종교적 신념이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혁명 정부의 성급하고 강압적인 조치가 오히려 불필요한 반발과 분열을 초래하여 혁명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성직자 시민 헌장은 혁명 프랑스에 깊고 오래가는 상처를 남겼다. 그것은 사회를 둘로 나누었고, 반혁명 세력에게 강력한 동력을 제공했으며, 이후 공포정치의 비극을 예고하는 불길한 씨앗이 되었다. 1790년 여름, 연맹 축제가 보여주었던 덧없는 화합의 환상은 그렇게 깨져나가고 있었다.
(제4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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