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제6부: 혁명의 제도화와 분열의 씨앗 (1790 하반기 - 1791 여름)
(알랭 마르탱의 목소리)
1790년 여름, 프랑스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다. 연맹 축제는 혁명으로 갈라졌던 민심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용광로처럼 보였다. 파리 마르스 광장에 울려 퍼진 선서와 함성은 새로운 프랑스의 탄생과 국민적 화합을 전 세계에 과시하는 듯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에도 이날의 벅찬 감격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역사의 강물은 결코 잔잔하게만 흐르지 않는 법. 축제의 열기가 식기도 전에, 혁명 정부는 프랑스 사회의 가장 깊은 뿌리 중 하나인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과감한 시도에 나선다. ‘성직자 시민 헌장’. 이는 혁명의 원칙을 관철하려는 노력이었지만, 동시에 프랑스를 다시 한번 깊은 분열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혁명은 이제 제도화를 통해 안정을 찾아가는 듯 보였지만, 그 과정 자체가 또 다른 균열을 낳고 있었다.
제51장: 연맹 축제, 하나 된 프랑스? (1790년 7월 14일)
1790년 7월 14일, 파리는 온통 삼색기의 물결로 뒤덮였다. 바스티유 함락 1주년을 기념하는 '연맹 축제(Fête de la Fédération)'가 열리는 날이었다. 지난 몇 주간 파리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마르스 광장에 모여 거대한 축제 공간을 건설했다. 신분과 계급을 넘어, 귀족 부인과 노동자가 함께 흙을 나르고, 학생과 상인이 함께 땅을 다지는 모습은 혁명이 가져온 새로운 '형제애(Fraternité)'를 상징하는 듯했다. 에티엔 드샹 역시 며칠간 이 역사적인 건설 작업에 참여하며 벅찬 감동을 느꼈다. 땀 흘리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는 책 속에서만 읽었던 '일반의지'가 실현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축제 당일, 새벽부터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지만, 사람들의 열기를 막지는 못했다. 프랑스 전역 83개 데파르트망에서 선발된 국민 방위대 대표단과 시민 대표단이 각 지역의 깃발을 앞세우고 질서정연하게 마르스 광장으로 행진했다. 광장은 이미 수십만 명의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빗속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애국가를 부르고 혁명 구호를 외쳤다. 광장 중앙에는 '조국의 제단(Autel de la patrie)'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국민 제헌 의회 의원들과 정부 관료, 그리고 외국 사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에티엔은 아버지 기욤과 함께 의원석 한쪽에 자리 잡았다. 그는 비에 젖은 채 환호하는 군중들을 바라보며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다. “보십시오, 아버지! 이것이 바로 하나 된 프랑스의 모습입니다! 왕과 국민이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이 순간을!”
기욤은 아들의 흥분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신중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 감격적인 순간이구나. 하지만 에티엔, 저 군중의 함성 속에 얼마나 많은 다른 생각들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진정한 화합은 선언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야.”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제단 위에서 진행된 엄숙한 선서식이었다. 백마를 탄 국민 방위대 총사령관 라파예트가 제단으로 올라가 검을 뽑아 들고 우렁찬 목소리로 선서했다. “우리 프랑스 국민 방위대는 국민과 법률과 국왕에게 영원히 충성할 것을 맹세하며, 의회가 제정하고 국왕께서 승인하신 헌법을 온 힘을 다해 수호할 것을 맹세합니다!”
수십만 군중이 일제히 오른손을 들고 “맹세합니다!(Nous le jurons!)”라고 외쳤다. 그 함성은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했다.
이어 루이 16세가 왕비와 왕세자를 데리고 제단에 올랐다. 그는 비에 젖은 군중 앞에서는 다소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미리 준비된 선서문을 읽어 내려갔다. “나, 프랑스인의 왕 루이는, 국가와 국민 의회가 제정한 헌법을 수호하고, 왕국 법률의 집행을 보장할 것을 맹세하노라.” 그의 목소리는 다소 힘이 없었지만, 군중은 “국왕 만세!(Vive le Roi!)”를 외치며 화답했다.
마지막으로, 성직자 시민 헌장 제정에 앞장섰던 오툉 주교 탈레랑이 삼색기로 장식된 제단 위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불과 몇 달 전 교회 재산 국유화를 주도했던 그가 이제는 혁명과 국가의 축복을 기원하는 종교 의례를 이끌고 있었다.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100문의 대포가 예포를 발사했고, 군악대는 장엄한 음악을 연주했으며, 모든 참석자들이 함께 ‘테 데움(Te Deum, 감사 찬가)’을 불렀다. 축제는 국민적 화합과 단결이라는 감격적인 분위기 속에서 절정에 달했다.
소피 라비뉴는 마담 뒤부아와 함께 인파 속에서 이 거대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빗속에서도 화려하게 펼쳐지는 행사와 사람들의 열광적인 모습은 분명 놀라웠지만, 그녀는 여전히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을까? 저 맹세들이 과연 내일 아침 우리의 굶주린 배를 채워줄 수 있을까?’ 그녀는 씁쓸함을 삼키며, 옆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마담 뒤부아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주었다.
한편, 광장 한쪽 구석에서 장 발레는 코르들리에 클럽 동료들과 함께 군중 속을 헤집고 다니며 몰래 팸플릿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냉담하고 비판적이었다. “흥, 저 위선적인 연극을 보게나! 왕과 귀족, 부르주아들이 한통속이 되어 혁명을 끝내려는 속셈이야. 라파예트는 미국의 영웅 행세를 하지만 결국 귀족이고, 탈레랑 저 주교는 교회를 팔아먹은 배신자지! 민중의 진정한 해방은 아직 멀었어. 속아서는 안 돼!”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연맹 축제는 분명 프랑스 혁명사에서 중요한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그것은 낡은 신분 질서를 넘어 '국민'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 된 공동체의 탄생을 축하하고, 입헌 군주제라는 새로운 정치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겉모습 뒤에는 해결되지 않은 심각한 갈등들이 잠복해 있었다. 왕과 혁명 세력 사이의 근본적인 불신, 성직자 문제로 인한 종교적 분열, 그리고 부르주아지와 민중 사이의 사회경제적 간극은 축제의 함성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나 된 프랑스'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어쩌면 영원히 실현되기 어려운 환상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축제의 불꽃이 사그라들자마자, 프랑스는 다시 한번 분열의 그림자와 마주해야 했다.
제52장: 성직자 시민 헌장, 양심의 가책과 분열
(1790년 7월 12일 제정 이후 선서 강요 과정)
연맹 축제가 열리기 불과 이틀 전인 1790년 7월 12일, 국민 제헌 의회는 프랑스 사회에 깊은 파문을 일으킬 법령을 통과시켰다. 바로 '성직자 시민 헌장(Constitution civile du clergé)'이었다. 교회 재산을 국유화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혁명 정부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조직 자체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고 혁명의 원칙에 따라 재편하려 했다. 이는 수백 년간 이어져 온 프랑스 교회의 전통과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급진적인 조치였고, 결과적으로 프랑스 사회를 돌이킬 수 없는 분열로 몰고 갔다.
헌장의 주요 내용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첫째, 프랑스 전역의 교구를 기존의 135개에서 새로 만들어진 83개 데파르트망에 맞춰 83개로 대폭 축소하고, 주교좌 역시 이에 맞게 통폐합했다. 둘째, 주교와 본당 신부를 포함한 모든 성직자를 교황이나 상급 성직자가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지역의 모든 '능동 시민'(가톨릭 신자 여부 불문)들이 선거를 통해 직접 선출하도록 규정했다. 이는 교회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세속 권력이 성직자 임명에 개입하는 전례 없는 조치였다. 셋째, 모든 성직자는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는 공무원 신분이 되었으며, 로마 교황에게 보고하거나 충성 서약을 하는 것을 금지했다. 대신, 모든 성직자는 국민, 법률, 국왕, 그리고 의회가 제정한 헌법(성직자 시민 헌장 포함)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넷째, 사회적으로 '쓸모없다'고 판단된 관상 수도회 등을 해산하고 수도 서원을 금지하여 수도원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 헌장을 주도한 의회 내 다수파(주로 법률가 출신의 계몽주의자들)는 국가의 주권을 교회 위에 두는 것이 당연하며, 교회를 국가 행정 체계에 통합시키는 것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일부에서는 프랑스 교회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독립적인 전통을 가져야 한다는 '갈리아주의(Gallicanism)' 사상이 이러한 조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헌장은 프랑스 가톨릭교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독실한 신자들과 대다수 성직자들은 교황의 영적인 수위권을 부정하고, 세속 권력이 교회의 조직과 성직자 임명에 개입하는 것을 신앙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자 모독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국가에 대한 충성 선서 강요는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충성 의무와 충돌하는 양심의 문제를 야기했다.
에티엔의 어머니 마리 드샹은 헌장 소식을 듣고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법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성직자를 시장 상인 뽑듯이 선거로 뽑는다고?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종들을 저 불경한 자들이… 이제 프랑스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녀는 매일 성당을 찾아 눈물로 기도하며 혁명 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과 반감을 키워갔다. 그녀는 아들 에티엔에게도 혁명 활동에서 손을 떼라고 간절히 호소했지만, 에티엔은 어머니의 신앙적 고통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혁명의 대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모자 사이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시골 본당의 클레망 신부 역시 깊은 고뇌에 휩싸였다. 그는 처음에는 혁명의 개혁 정신에 공감했지만, 성직자 시민 헌장은 그의 양심을 정면으로 겨누는 칼날과 같았다. 그는 밤새도록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번민했다. ‘선서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국가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인가, 아니면 하느님과 교회의 법에 따르는 것이 사제의 의무인가? 선서한다면 나는 동료 성직자들과 신자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힐 것이고, 평생 양심의 가책 속에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거부한다면, 나는 사제직을 잃고 이 가난하고 힘없는 신자들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오, 주여,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 그의 기도는 응답 없는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1790년 11월, 국민 제헌 의회는 선서를 거부하는 성직자들에 대한 인내심을 잃고, 모든 성직자에게 8일 이내에 헌장에 대한 충성 선서를 하도록 강제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거부 시에는 성직 박탈, 연금 중단, 심지어 추방까지 당할 수 있었다. 프랑스 교회는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섰다.
결과는 참담한 분열이었다. 전체 주교 160명 중 단 7명만이 선서했고, 하급 성직자 중에서는 약 절반 정도만이 선서에 응했다. 프랑스 교회는 혁명 정부를 지지하는 '선서파(Constitutional)' 교회와 교황에게 충성하며 혁명 정부에 저항하는 '선서 거부파(Refractory)' 교회로 완전히 양분되었다. 선서 거부파 성직자들은 즉시 공직에서 추방되었고, 많은 이들이 박해를 피해 비밀리에 활동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많은 독실한 신자들로부터 진정한 사제로 존경받으며 강력한 반혁명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다. 특히 방데를 비롯한 서부 농촌 지역과 남부 일부 지역에서는 선서 거부파 성직자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압도적이었고, 이는 이후 대규모 반혁명 봉기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반면, 클레망 신부처럼 고뇌 끝에 선서를 선택한 성직자들은 혁명 정부로부터는 인정을 받았지만, 동료들과 신자들 사이에서는 ‘배신자’, ‘가짜 신부’로 불리며 심한 고립감과 양심의 가책에 시달려야 했다. 수녀원의 테레즈 수녀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 많은 수녀들이 서원을 포기하고 세속으로 돌아가라는 압력을 받았고, 수녀원은 폐쇄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할 위기에 놓였다. 그녀는 자신의 평생의 믿음과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혼란 속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1791년 봄, 교황 비오 6세가 마침내 성직자 시민 헌장을 공식적으로 비난하고 파문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프랑스 내 종교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제 종교 문제는 단순히 신앙의 영역을 넘어, 혁명에 대한 찬반을 가르는 가장 첨예하고 감정적인 정치적 분열선이 되었다. 혁명 정부는 사회 통합을 위해 교회를 개혁하려 했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더 깊은 분열과 증오,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갈등의 씨앗을 뿌린 셈이었다. 연맹 축제가 보여주었던 ‘하나 된 프랑스’의 모습은 이미 산산조각 나 있었다.
제53장: 사법 제도의 근대화, 법 앞의 평등을 향하여
(1790-1791년)
국민 제헌 의회의 개혁 열정은 프랑스 사회의 가장 낡고 불합리한 기둥 중 하나였던 사법 시스템에도 미쳤다. 구체제 하에서 ‘정의’는 신분과 지역에 따라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귀족과 성직자는 평민과 다른 재판소에서 재판받았고, 북부의 관습법과 남부의 로마법 전통이 혼재했으며, 수백 개의 지역 관습법과 영주 재판권이 존재하여 법 적용의 통일성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판사직은 종종 세습되거나 돈으로 사고파는 대상이었고(관직 매매, vénalité des offices), 재판 과정은 비밀스럽고 자의적이었으며, 고문은 합법적인 증거 수집 수단으로 공공연히 사용되었다. ‘법 앞의 평등’이라는 계몽사상의 이상은 이러한 현실 앞에서 공허한 구호에 불과했다.
국민 제헌 의회는 이러한 전근대적인 사법 질서를 일소하고, 이성과 합리성, 그리고 인권 선언의 원칙에 기반한 통일되고 공정한 사법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790년 8월 16일, 의회는 사법 조직에 관한 포괄적인 개혁 법령을 통과시켰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사법 시스템의 완전한 재편이었다. 수백 년 동안 왕권과 갈등하며 특권층의 보루 역할을 해왔던 고등법원(Parlements)과 모든 종류의 특별 재판소, 영주 재판권이 전면 폐지되었다. 대신, 전국적으로 통일된 새로운 법원 체계가 도입되었다. 가장 기초 단위에는 각 캉통(Canton)마다 ‘치안 판사(Juge de paix)’가 설치되어, 주로 민사상 소액 분쟁 조정과 경범죄 처리를 담당하며 시민들에게 보다 가깝고 신속한 사법 서비스를 제공하려 했다. 각 구(District)에는 ‘지방 법원(Tribunal de district)’이 설치되어 주요 민사 및 형사 사건의 1심 재판을 담당했다. 지방 법원의 판결에 대한 항소는 인접한 다른 지방 법원에서 처리하도록 했다. 그리고 사법 시스템의 정점에는 파리에 '파기원(Tribunal de cassation)'이 설치되어, 법률 해석의 통일성을 확보하고 하급 법원의 판결이 법률을 위반했을 경우 이를 파기하는 역할을 맡았다.
판사 임명 방식 역시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구체제의 관직 매매와 세습 관행을 철폐하고, 모든 판사를 일정 기간(치안 판사 2년, 지방 법원 판사 6년) 임기로 해당 지역의 ‘능동 시민’들이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하도록 했다. 이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급진적인 시도였다. 또한 변호사 역시 길드와 같은 폐쇄적인 조직에서 벗어나, 법학 학위와 실무 경험 등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등록하고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재판 절차에서도 인권 보장을 위한 중요한 개혁들이 이루어졌다. 1789년 10월 이미 예비 심문 과정에서의 고문 사용이 폐지되었고, 1790년 법령을 통해 고문은 모든 사법 절차에서 완전히 금지되었다. 형사 재판에서는 영국 제도를 모델로 한 배심원 제도가 도입되었다. 기소 배심(Jury d'accusation)이 기소 여부를 결정하고, 재판 배심(Jury de jugement) 12명이 유죄 또는 무죄 여부를 판단하도록 했다. 재판은 원칙적으로 공개되어 누구나 방청할 수 있었고, 모든 피고인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보장받았다. '법 없이는 범죄 없고 형벌 없다', '모든 시민은 유죄 판결 전까지 무죄로 추정된다'는 근대 형법의 대원칙 역시 법률로 명확히 규정되었다.
아버지 기욤 드샹은 이러한 사법 개혁 소식을 변호사로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에티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문명의 진보다. 마침내 프랑스에도 법치주의의 새벽이 밝아오는구나. 고문이 폐지되고, 배심원 제도가 도입되어 시민들이 사법 과정에 참여하게 된 것은 실로 위대한 발전이다. 법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재판받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셈이야.”
그러나 그는 경험 많은 법률가로서 현실적인 우려도 덧붙였다. “하지만 판사를 선거로 뽑는다는 것은 여전히 걱정스럽다. 판결은 인기에 영합해서는 안 되며, 오직 법과 양심에 따라야 한다. 선출된 판사들이 과연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또한,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해 경험 있는 판사들이 부족하고, 새로운 제도가 정착되기까지 재판의 질 저하나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 배심원 제도 역시 시민들의 법률 지식이나 판단 능력이 충분히 성숙되지 않으면 오히려 오류를 낳을 수도 있고…”
에티엔은 아버지의 지적에 일부 동의하면서도, 새로운 제도에 대한 기대감을 더 크게 가졌다. 그는 가끔 새로 문을 연 파리 지방 법원의 재판을 방청했다. 이전 고등법원의 권위적이고 비밀스러운 분위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재판은 공개되었고, 변호사들은 피고인을 위해 열정적으로 변론했으며, 시민 배심원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증언을 듣고 토론했다. 비록 운영상 미숙함이나 서툰 점들이 눈에 띄었지만, 적어도 과거처럼 신분이나 재산에 따라 다른 판결이 내려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했다.
“물론 아직 보완해야 할 점들이 많을 것입니다, 아버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원칙이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이제 정의는 더 이상 소수의 특권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을 위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린 것입니다.” 에티엔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사법 제도의 근대화는 프랑스 혁명이 이룬 가장 중요하고 지속적인 성과 중 하나였다. 비록 이후 혁명의 급진화 과정(특히 공포정치 시기)에서 혁명 재판소와 같이 이러한 원칙들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비극적인 역사가 있었지만, 1790-91년에 마련된 근대적 사법 시스템의 기본 골격은 이후 나폴레옹 법전 편찬과 함께 프랑스 법치주의 발전의 확고한 토대가 되었다. 낡은 사법 질서의 폐허 위에서, 법 앞의 평등이라는 새로운 정의의 이상이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54장: 경제적 자유와 노동의 족쇄: 길드 폐지와 르 샤플리에 법
(1791년 3월, 6월)
국민 제헌 의회의 개혁 칼날은 정치와 사법 영역을 넘어 경제 분야로 향했다. 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 계급은 오랫동안 구체제의 봉건적 잔재와 중상주의적 규제가 자신들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가로막는다고 여겨왔다. 그들은 애덤 스미스가 설파한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 즉 개인의 자유로운 이익 추구가 사회 전체의 부를 증진시킨다는 자유주의 경제 사상에 깊이 공감했다. 이러한 이념적 배경 아래, 의회는 경제 활동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는 일련의 조치들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 ‘자유’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았고, 특히 새롭게 형성되는 노동자 계급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족쇄가 될 수 있었다.
1791년 3월 2일, 의회는 '알라르드 법(Loi d'Allarde)'을 통과시켜 중세 이래 도시 상공업을 지배해 온 길드(Corporation) 체제를 전면적으로 폐지했다. 길드는 특정 직업의 장인들이 모여 가입 조건, 생산 방식, 품질 기준, 가격 등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외부인의 진입을 막는 배타적인 조직이었다. 이는 숙련 기술을 보호하고 품질을 유지하는 순기능도 있었지만, 동시에 기술 혁신을 저해하고 경쟁을 제한하며 직업 선택의 자유를 막는 폐쇄적인 시스템이기도 했다. 알라르드 법은 이러한 길드의 독점적 특권을 철폐하고, “어떤 종류의 상업이든 또는 어떤 종류의 직업, 기술, 수공업이든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제 누구나 자격증(Patente)만 취득하면 원하는 사업을 자유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소식에 파리의 많은 부르주아 상공인들과 혁신적인 기업가들은 환호했다. “드디어 낡은 규제가 사라졌다! 이제 우리의 능력과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어! 경쟁을 통해 더 싸고 좋은 물건을 만들어 프랑스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 젊은 직물 상인이 기대에 부풀어 말했다.
그러나 생탄투안 구역의 숙련된 가구 장인 마티유 뒤부아는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길드가 없어지면… 우리 같은 작은 공방들은 어떻게 살아남으란 말인가? 큰 공장에서 값싼 가구를 마구 찍어낼 텐데… 기술이고 뭐고 가격만 싼 물건들이 판치게 될 거야. 길드는 우리 기술의 가치를 지켜주고 서로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는데…” 그는 어머니 마담 뒤부아에게 자신의 불안감을 토로했다. 길드 폐지는 분명 경제적 자유를 확대했지만, 동시에 오랫동안 숙련 기술과 공동체적 유대에 의존해왔던 전통적인 장인들에게는 생존의 위협이자 불안정한 경쟁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자유주의 원칙은 불과 석 달 뒤, 노동자들의 권리를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법률로 이어졌다. 1791년 봄, 파리에서는 일부 직종(목수, 인쇄공 등)의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과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연합하여 파업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는 새로운 경제 질서 속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초기 집단 행동이었다. 그러나 고용주들과 의회 내 부르주아 대표들은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1791년 6월 14일, 변호사 출신의 의원 이자크 르네 기 르 샤플리에가 제안한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르 샤플리에 법(Loi Le Chapelier)'으로 알려진 이 법은 알라르드 법이 선언한 '개인의 자유' 원칙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노동자들이 동일 직업 내에서 공동의 이익을 위해 단결하거나 결사체를 만드는 행위, 임금 등 노동 조건을 공동으로 결정하려는 시도, 그리고 파업하는 행위를 일체 금지시켰다. 르 샤플리에는 이러한 노동자들의 집단 행동이 개인의 자유로운 계약을 방해하고, 구체제의 길드와 같은 '중간 집단(corps intermédiaires)'을 부활시켜 국가의 '일반의지'를 저해한다고 주장했다.
에티엔 드샹은 이 법안에 대해 자코뱅 클럽 모임에서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것은 명백한 위선이며 불의입니다! 알라르드 법으로 고용주들에게는 무한한 자유를 주면서, 왜 노동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단결할 자유마저 빼앗으려 합니까? 이것은 평등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혁명은 특정 계급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소수에 불과했다. 의회 다수는 르 샤플리에 법을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시켰다. 부르주아 의원들은 노동자들의 단결을 사회 질서를 위협하고 경제 발전을 저해하는 위험한 행위로 간주했고, 국가가 이를 통제해야 한다고 믿었다.
인쇄공 장 발레는 르 샤플리에 법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그는 코르들리에 클럽 동료들에게 외쳤다. “결국 이렇게 나오는군! 부르주아 놈들은 혁명의 과실만 따먹고, 우리 노동자들은 영원히 노예처럼 부려먹겠다는 속셈이야! 단결할 권리마저 빼앗다니! 이것은 전쟁 선포나 다름없다! 우리는 이 법에 결코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배신감과 함께 더욱 거센 투쟁 의지가 담겨 있었다.
르 샤플리에 법은 프랑스 노동 운동 역사에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법은 1864년 파업권이 일부 인정되고 1884년 노동조합 결성이 합법화될 때까지 거의 한 세기 동안 노동자들의 단결권과 단체 행동권을 억압하는 강력한 법적 무기로 사용되었다. 혁명이 선포한 '경제적 자유'는 이처럼 생산 수단을 소유한 부르주아에게는 날개를 달아주었지만,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스스로를 보호할 최소한의 무기마저 빼앗는 결과를 낳았다. 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자본과 노동 사이의 깊은 골은 더욱 벌어지고 있었고, 미래의 격렬한 계급 투쟁의 씨앗은 이미 뿌려지고 있었다.
제55장: 클럽 정치의 시대, 혁명의 엔진 혹은 분열의 온상
(1791년)
1791년, 프랑스 혁명은 입헌 군주제라는 새로운 정치적 틀을 갖추었지만, 실제 정치의 열기와 방향은 공식적인 의회 기구보다는 파리의 활발한 정치 클럽들에서 결정되고 있었다. 혁명 초기부터 생겨난 이 클럽들은 이제 단순한 토론 모임을 넘어, 강력한 여론 형성 능력과 조직력을 갖춘 실질적인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혁명의 불길을 지피는 엔진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격렬한 파벌 투쟁과 이념 대립을 통해 혁명을 분열시키는 온상이 되기도 했다.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클럽은 단연 '자코뱅 클럽(Club des Jacobins)'이었다. 원래 '헌법의 벗 협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주로 제헌 의회 의원들이 중심이 되었던 이 클럽은, 파리 생토노레 거리의 옛 자코뱅 수도원을 회합 장소로 사용하면서 이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초기에는 미라보, 라파예트, 시에예스 등 온건파 지도자들이 주도했지만, 혁명이 진행되면서 점차 입장이 갈라졌다. 특히 1791년 여름, 바렌 도주 사건과 마르스 광장 학살은 자코뱅 클럽 내부의 분열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왕을 옹호하고 입헌 군주제를 유지하려 했던 라파예트, 바이이, 바르나브 등 온건파 지도자들은 클럽을 탈퇴하여 별도로 '푀양 클럽(Club des Feuillants)'을 결성했다.
푀양 클럽은 주로 부유한 부르주아지, 자유주의 귀족, 그리고 입헌 군주제를 지지하는 지식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혁명의 과격화를 막고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에티엔 드샹의 옛 친구 뤽 모로 역시 이 클럽에 가담했다. 그는 에티엔에게 편지를 보내 자코뱅 클럽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려 했다.
‘에티엔, 자네는 아직도 로베스피에르 같은 급진파들의 달콤한 말에 속고 있는가? 그들이 말하는 ‘인민’이란 결국 파리의 성난 군중일 뿐이야. 그들의 손에 프랑스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네. 우리는 헌법과 법률에 기반한 안정적인 입헌 군주제를 지켜야 하네. 이것만이 프랑스를 혼란에서 구할 수 있는 길이야. 자네도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라네.’
에티엔은 뤽의 편지를 읽으며 씁쓸함을 느꼈다. 한때 혁명의 이상을 함께 나누었던 친구가 이제는 너무나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에티엔은 푀양파의 질서 유지 논리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대변하는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와 민중의 고통에 대한 외면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뤽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푀양파가 떨어져 나간 자코뱅 클럽은 자연스럽게 급진적인 공화주의자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아라스 출신의 변호사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가 뛰어난 논리력, 확고한 원칙, 그리고 청렴한 이미지로 클럽 내에서 점차 강력한 지도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는 루소의 사상에 깊이 심취하여, 인민 주권과 평등의 원칙을 철저히 구현하는 '덕의 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한 선거권, 노예제 등 1791년 헌법의 타협적인 측면을 날카롭게 비판했고, 왕의 배신 행위(바렌 도주) 이후에는 공화정 수립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에티엔은 자코뱅 클럽의 정기 모임에 참석하여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을 경청했다. 그의 엄격하고 냉철한 논리는 설득력이 있었지만, 동시에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이상 실현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을 듯한 단호함에서는 섬뜩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는 혁명의 순수한 불꽃인가, 아니면 위험한 광신자인가?’ 에티엔은 로베스피에르라는 인물에 대해 깊은 호기심과 함께 경계심을 품었다.
한편, 자코뱅 클럽보다 더 급진적이고 민중적인 성격을 띤 클럽은 '코르들리에 클럽(Club des Cordeliers)'이었다. 옛 프란체스코회(코르들리에 수도회) 건물을 사용한 이 클럽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 협회'를 표방하며, 가입 조건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 상퀼로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곳의 분위기는 자코뱅 클럽의 진지함과는 달리 훨씬 더 자유롭고 격정적이었으며, 때로는 소란스러웠다. 조르주 당통의 호탕하고 힘 있는 웅변, 장 폴 마라의 신랄하고 선동적인 비판, 카미유 데물랭의 재치 있는 풍자가 군중을 사로잡았다. 코르들리에 클럽은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가장 먼저 강력하게 요구했으며, 직접 민주주의(국민 투표, 대표 소환 등)와 경제적 평등(부의 재분배)과 같은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다.
인쇄공 장 발레는 코르들리에 클럽의 열렬한 활동가였다. 그는 마르스 광장 학살 이후 푀양파와 온건 부르주아지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 불태웠고, 오직 민중의 직접적인 힘만이 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클럽 모임에서 목소리를 높여 즉각적인 왕정 타도와 공화정 수립을 외쳤고, 상퀼로트 동료들을 조직하여 거리 시위와 청원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마라의 신문 '인민의 벗'을 열심히 읽고 배포하며, '인민의 적'들에 대한 무자비한 처단을 주장했다. 그에게 자코뱅 클럽의 일부 지식인들은 여전히 말만 앞세우는 나약한 존재로 비춰졌고, 오직 코르들리에 클럽만이 진정한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이 세 주요 클럽 외에도 파리에는 수많은 소규모 클럽과 협회들이 활동하며 각자의 목소리를 냈다. 여성들 역시 '혁명적 공화주의 여성 시민 클럽' 등을 조직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려 했지만, 남성 중심의 혁명 세력에 의해 곧 활동이 금지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각 지역 구(Section) 단위의 민중 협회들은 상퀼로트들의 정치 참여 통로이자 혁명적 동원의 기반이 되었다. 신문과 팸플릿은 이러한 클럽들의 주장을 전파하고 논쟁을 확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클럽 정치는 분명 혁명 프랑스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현상이었다. 그것은 이전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광범위한 정치 참여와 토론 문화를 가능하게 했고, 혁명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동시에 클럽 정치는 파벌 간의 극단적인 대립과 불신을 심화시키고, 감정적인 선동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1791년, 자코뱅, 코르들리에, 푀양이라는 세 개의 큰 흐름으로 나뉜 클럽 정치는 프랑스를 더욱 깊은 분열과 갈등으로 이끌고 있었고, 이는 곧 다가올 입헌 군주제의 파탄과 공화정 수립, 그리고 공포정치라는 비극적인 역사의 무대가 될 것이었다.
제56장: 1791년 헌법 제정, 입헌 군주제의 불안한 출범
(1791년 9월)
1791년 9월 3일, 2년여의 산고 끝에 국민 제헌 의회는 마침내 프랑스 최초의 성문 헌법을 제정하고 승인했다. 이 헌법은 프랑스 혁명의 초기 성과를 집대성하고, 절대 왕정을 무너뜨린 자리에 입헌 군주제라는 새로운 정치 체제를 세우려는 시도였다. 그것은 계몽사상의 이상과 혁명적 열정, 그리고 복잡한 현실 정치 세력 간의 타협이 뒤섞인 결과물이었다.
헌법 전문(前文)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모든 시민의 자연권과 법 앞의 평등을 천명했다. 이는 구체제와의 완전한 단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헌법의 본문은 국가의 기본 구조를 규정했다. 핵심은 국민 주권과 권력 분립이었다.
주권은 더 이상 왕에게 속하지 않고, 오직 '국민(Nation)'에게 속한다고 명시되었다(제3편 제1조). 국민은 직접 주권을 행사하는 대신, 선출된 대표자들(입법 의회)과 세습 군주(국왕)를 통해 주권을 행사하도록 규정되었다.
입법권은 단원제 '입법 의회(Assemblée législative)'에 부여되었다. 745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입법 의회는 2년 임기로 선출되며, 법률 제정권, 예산 심의 및 승인권, 선전 포고 및 강화 조약 비준권 등 강력한 권한을 가졌다.
행정권은 '프랑스인의 왕(Roi des Français)'에게 속했다. 왕은 신성불가침한 존재였지만, 그의 권력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그는 법률을 집행하고, 각료를 임명하며, 군대를 통솔하는 권한을 가졌지만, 의회가 제정한 법률에 대해 영구적인 거부권이 아닌, 최대 4년간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정지 거부권(Veto suspensif)'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왕의 모든 행위는 해당 각료의 부서(副署)를 필요로 했다.
사법권은 선출된 판사들로 구성된 독립된 법원에 속하며, 왕이나 의회의 간섭으로부터 독립성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이 헌법은 동시에 심각한 한계와 모순을 안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역시 '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으로 시민을 구분하여 선거권을 제한한 것이었다. 약 3일치 임금에 해당하는 직접세를 납부하는 25세 이상 남성만이 능동 시민으로서 투표권을 가졌고, 이들 중에서 더 많은 세금을 내는 소수만이 선거인이나 의회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이 기준에 따라 프랑스 성인 남성 중 약 300만 명과 모든 여성은 정치 참여에서 배제되었다. 이는 '모든 시민은 법률 제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던 인권 선언의 정신과 명백히 모순되는 것이었다.
에티엔 드샹은 완성된 헌법 조문을 읽으며 만감이 교차했다. “혁명의 위대한 원칙들이 마침내 법의 형태로 새겨졌구나! 법 앞의 평등, 국민 주권, 권력 분립… 이것은 분명 거대한 진보다.” 그는 감격했지만, 동시에 실망감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왜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지 못했는가? 재산의 많고 적음이 시민의 자격을 결정해서야 되겠는가? 이것은 평등 원칙에 대한 배신이다. 그리고 왕에게 거부권을 준 것은… 바렌 사건 이후에도 왕을 신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너무나 위험한 타협이다.”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헌법의 성과와 함께 그 한계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을 남겼다.
아버지 기욤 드샹은 아들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입장이었다. “에티엔, 완벽한 헌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현재 프랑스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타협점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 헌법의 틀 안에서 안정을 찾고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물론 왕이 진심으로 헌법을 존중할지는 나도 의문이다만… 그래도 일단은 이 체제를 유지하며 지켜보는 수밖에.”
1791년 9월 14일, 루이 16세는 국민 제헌 의회에 출석하여 새로운 헌법에 대한 충성을 서약했다. 그의 표정은 어두웠고 목소리에는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의원들은 형식적인 박수를 보냈다. 이로써 입헌 군주제는 법적인 절차를 완료했다. 9월 30일, 2년여 동안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국민 제헌 의회는 역사적인 임무를 마치고 해산되었다.
이제 프랑스는 새로운 헌법과 새롭게 선출될 입법 의회와 함께 입헌 군주제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혁명의 성과를 제도화하려는 노력은 결실을 맺었지만, 그 제도 자체가 내포한 불안정성과 모순, 그리고 무엇보다 국왕의 진심에 대한 깊은 불신은 새로운 체제의 앞날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혁명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새로운 갈등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제57장: 왕의 이중 생활, 탈출 계획 구체화
(1790년 말 - 1791년 봄)
파리 튈르리 궁의 화려한 외관과 달리, 그 안에서의 왕족의 삶은 점점 더 질식할 듯한 감시와 굴욕감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루이 16세는 본래 우유부단하고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혁명이 자신의 신성한 권위를 훼손하고 특히 종교적 신념까지 건드리자(성직자 시민 헌장), 점차 완고한 저항 의지를 굳혀갔다. 그는 겉으로는 국민 제헌 의회의 결정들을 마지못해 승인하는 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혁명을 저주하고 예전의 권위를 되찾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왕의 소극적인 저항을 행동으로 부추긴 것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주로서 자부심이 강했던 그녀는 혁명 세력과 파리 민중에 대한 깊은 적개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튈르리 궁에서의 생활을 '끔찍한 감옥살이'라고 여겼고, 어떻게든 이곳을 탈출하여 오빠인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2세의 도움을 받아 왕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남편을 끊임없이 설득했다. 그녀는 비밀리에 오스트리아 대사 등과 접촉하며 외부의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폐하, 언제까지 저 폭도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실 겁니까?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셔야지요! 지금 당장 이곳을 벗어나 국경 근처로 가서 충성스러운 군대와 합류해야 합니다. 그러면 유럽의 모든 군주들이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의 우유부단함에 답답함을 느끼며 다그쳤다.
루이 16세는 탈출의 위험성을 두려워했지만, 결국 아내의 간청과 자신의 종교적 양심(선서 거부파 성직자에게 미사를 받기 원했음) 때문에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 이 위험천만한 계획의 실행을 맡은 인물이 바로 스웨덴 귀족 악셀 폰 페르센 백작이었다. 그는 젊고 잘생겼으며, 왕비에 대한 깊은 연정과 충성심으로 헌신적인 조력자 역할을 자처했다.
페르센은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게 탈출 계획을 준비했다. 그는 먼저 왕족 일행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러시아의 코르프 남작 부인 일행 행세를 하기로 하고, 가짜 여권과 수수한 여행용 의복을 준비했다. 루이 16세는 남작 부인의 하인 '뒤랑'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가정교사 '마담 로셰'로, 왕세자와 공주는 그녀의 자녀들로 변장할 예정이었다. 왕의 동생 엘리자베트 공주와 아이들의 가정교사 마담 투르젤도 동행하기로 했다.
페르센은 또한 장거리 여행의 안락함과 안전을 위해 특별히 크고 튼튼한 마차, '베를린(Berline)'을 주문 제작했다. 여러 필의 말이 끌어야 하는 이 육중한 마차는 비록 속도는 느렸지만, 왕족의 체면과 편의를 고려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 선택은 훗날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도주 경로는 파리에서 동북쪽 국경을 향해 샬롱, 생트므누, 바렌을 거쳐 몽메디 요새에 이르는 길로 정해졌다. 각 역참에서 말을 교체할 계획과 예상 소요 시간이 계산되었고, 국경 근처의 주요 지점에서는 왕당파 장군 부이예 후작이 지휘하는 충성스러운 용기병 부대가 마차를 호위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페르센은 마부로 변장하여 파리 시내를 벗어나는 가장 위험한 구간을 직접 안내하고, 본디에서 왕족을 베를린 마차에 태운 뒤 헤어지기로 했다.
튈르리 궁 안에서는 극도의 비밀 속에서 준비가 진행되었다. 왕족들은 밤마다 모여 계획을 속삭였고, 충성스러운 소수의 시종들이 비밀 통로를 확보하고 감시를 따돌릴 방법을 모색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에 있는 오빠에게 보내는 편지에 희망과 불안을 담아 적었다. ‘우리는 곧 이 끔찍한 곳을 떠날 것입니다. 부디 폐하의 군대가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해주십시오. 우리의 운명은 이제 폐하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계획에는 처음부터 불안 요소가 많았다. 참여하는 인원이 너무 많았고,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비밀이 새어 나갈 위험이 커졌다. 거대하고 눈에 띄는 베를린 마차 선택은 신속한 이동에 불리했다. 또한, 군대와의 접선 계획은 복잡하고 정확한 시간 엄수가 중요했지만, 당시의 통신 수단으로는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루이 16세 자신의 결단력 부족과 망설임이 계획 실행에 가장 큰 변수가 될 수 있었다.
1791년 봄, 파리의 정치적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튈르리 궁 안에서는 왕족의 운명을 건 비밀스러운 탈출 계획이 차근차근 구체화되고 있었다. 왕의 이중생활은 이제 극적인 정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성공한다면 왕권 복고와 혁명의 좌절을 의미할 것이고, 실패한다면 왕정의 완전한 종말을 고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제58장: 바렌의 밤, 엇갈린 운명과 지연된 시간
(1791년 6월 20일 밤 - 21일 낮)
1791년 6월 20일 밤 10시경, 마침내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튈르리 궁은 삼엄한 경비 속에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 정적 속에서, 왕족 일행은 약속된 계획에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시병들의 눈을 피해, 그들은 각기 다른 시간에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궁을 빠져나왔다. 가장 먼저 아이들의 가정교사 마담 투르젤이 왕세자와 공주를 데리고 나왔고, 뒤이어 왕의 동생 엘리자베트 공주가 시녀로 변장하여 뒤따랐다. 평범한 하인 복장의 루이 16세 역시 경비병의 눈을 피해 무사히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가장 긴장되는 순간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탈출이었다. 그녀는 러시아 남작 부인으로 위장했지만,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 악셀 폰 페르센 백작이 충실한 마부로 변장하여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의 손을 잡아 마차에 태웠다. 마차는 조심스럽게 튈르리 궁 주변을 빠져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초기 탈출은 성공적이었다.
파리 북동쪽 생마르탱 관문을 통과할 때, 그들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지만, 다행히 경비병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통과시켜 주었다. 마침내 파리 시 외곽 본디에 도착한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곳에는 페르센이 미리 준비해 둔, 여섯 필의 말이 끄는 크고 튼튼한 베를린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왕족 일행은 서둘러 마차를 갈아탔다.
이곳에서 페르센은 왕족과 애틋한 작별을 고해야 했다. 그는 왕비의 손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부디 행운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마마. 몽메디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페르센은 마차의 안전을 위해 미리 고용된 마부들에게 신신당부하고 어둠 속으로 말을 달렸다.
그러나 이때부터 계획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예정된 출발 시간보다 이미 2시간이나 늦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베를린 마차의 마구 일부가 고장 나 수리하는 데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다. 거대한 마차는 생각보다 훨씬 느렸고,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덜컹거리며 나아갔다. 마차 안의 왕족들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 이렇게 마차가 느린 게요? 이러다 날이 새겠네!” 루이 16세가 신경질적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조금만 참으세요, 폐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남편을 달랬지만, 그녀 역시 불안했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군대와의 접선 실패였다. 첫 번째 접선 지점인 퐁 드 솜므 베슬에는 쇼아죌 공작이 이끄는 용기병 부대가 기다리고 있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차가 약속 시간보다 몇 시간이나 늦게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다리다 지친 쇼아죌 공작은 왕족이 이미 다른 길로 갔거나 계획이 취소된 것으로 판단하고 부대를 철수시킨 후였다.
두 번째, 세 번째 접선 지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약속된 시간에 마차가 나타나지 않자, 대기하던 부대들은 혼란 속에서 뿔뿔이 흩어지거나 철수했다. 마차 안의 왕족들은 점점 더 불안감과 고립감에 휩싸였다. 군대의 호위 없이는 남은 여정이 너무나 위험했다.
설상가상으로, 루이 16세는 변장한 신분을 잊은 듯 부주의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마차가 잠시 멈춘 사이 답답하다며 마차 밖으로 나와 신선한 공기를 쐬거나, 역참 관리인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다. 그의 비대한 몸집과 독특한 매부리코는 하인 복장과는 어울리지 않았고, 그의 말투에는 여전히 왕족 특유의 위엄이 남아 있어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 충분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의 행동을 제지하려 했지만, 그는 “괜찮을 것이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거요.”라며 안일하게 대처했다.
시간은 계속 흘러 6월 21일 낮이 되었고, 마차는 여전히 더디게 국경을 향하고 있었다. 초기 탈출의 성공으로 인한 안도감은 사라지고, 피로와 불안, 그리고 불길한 예감이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계획은 곳곳에서 어긋나고 있었고, 시간은 점점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한 남자가, 이미 그들보다 앞서 바렌이라는 작은 마을을 향해 필사적으로 말을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제59장: 드루에의 눈, 역사를 바꾼 우연
(1791년 6월 21일 저녁)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한 1791년 6월 21일 저녁, 루이 16세 일행을 태운 베를린 마차는 마침내 생트므누 마을의 역참에 도착했다. 말을 교체하고 잠시 숨을 돌리는 동안, 하인 복장을 한 루이 16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또다시 마차 밖으로 나와 서성거렸다. 바로 그때, 역참 근처에 있던 우체국장 장 바티스트 드루에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드루에는 얼마 전 파리에서 왕족이 탈출했다는 소문을 들었고, 오늘따라 유난히 호화롭고 수상해 보이는 이 마차 행렬에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하인 복장의 남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 그는 무심코 주머니에 있던 아시냐 지폐를 꺼내 들었다. 지폐에 새겨진 루이 16세의 옆모습과 마차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옆모습이 놀랍도록 일치했다! 드루에는 숨을 삼켰다. 그의 시선은 곧이어 마차 안에 앉아 있는 여인에게로 향했다. 러시아 남작 부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기품 있고 오만한 표정.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틀림없었다!
‘세상에… 국왕 폐하께서 정말로 도망치시는구나!’ 드루에는 전직 용기병다운 빠른 판단력과 결단력을 발휘했다. 그는 이 사실을 즉시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이 국경을 넘기 전에 막아야 했다. 마차가 다시 출발 준비를 하는 것을 본 드루에는 조용히 자신의 마구간으로 달려가 가장 빠른 말을 꺼냈다. 그는 마차가 향할 다음 목적지인 바렌 마을을 향해 지름길인 아르곤 숲을 가로질러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밤의 숲길은 험하고 위험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조국을 구해야 한다는 뜨거운 사명감이 불타고 있었다.
한편, 왕 일행의 마차는 마지막 남은 희망을 안고 바렌 마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바렌 마을 입구에서 부이예 후작의 아들이 이끄는 후사르 기병 연대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마침내 바렌 외곽에 도착했을 때, 약속된 장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간 지연과 정보 전달의 오류로 인해 접선 부대는 이미 철수한 뒤였다. 게다가 말을 교체하기로 한 역참조차 찾을 수 없었다. 당황한 마부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바렌 마을의 좁고 구불구불한 길 안쪽까지 마차를 몰고 들어갔다.
마차는 에르 강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앞에서 멈춰 섰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왕족들은 마차 안에서 점점 더 초조해졌다. “대체 어떻게 된 게요? 길을 잃은 게요?” 루이 16세가 불안하게 소리쳤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든 사람들이 나타나 마차를 둘러쌌다. 그들은 드루에의 연락을 받고 급히 모인 바렌 마을의 국민 방위대원들과 주민들이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식료품 가게 주인이자 마을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던 소스(Sauce) 이장이 서 있었다. 그는 드루에와 함께 말을 타고 달려와 미리 다리를 봉쇄해 놓았던 것이다.
“멈추시오! 당신들은 누구시오?” 소스 이장이 마차를 향해 외쳤다.
마차 안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코르프 남작 부인 일행이오. 서둘러 가야 하니 길을 비키시오!”
“여권이 있소? 신분을 증명하시오!” 드루에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가짜 여권을 내밀었다. 그러나 소스 이장은 여권을 유심히 살펴본 뒤 고개를 저었다. “이 여권은 이상하오. 당신들의 신분이 의심스럽소. 잠시 내려서 우리 집으로 갑시다. 날이 밝으면 신원을 확인하고 보내드리겠소.”
왕족들은 저항하려 했지만, 이미 마차는 성난 마을 사람들과 무장한 국민 방위대원들에게 포위된 상태였다. 드루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차 문을 열어젖히며 외쳤다.
“모두 보시오! 이분은 러시아 남작 부인이 아니오! 이분은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요! 그리고 저 하인 복장을 한 분은 바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 폐하시다!”
그의 외침에 주변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가, 이내 엄청난 술렁임과 함성으로 바뀌었다. “국왕 폐하라고?” “왕이 도망치다 잡혔다!” “반역자다!”
루이 16세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그는 지친 표정으로 마차에서 내리며 힘없이 말했다. “그래… 내가 국왕이다. 나는 파리를 떠나 몽메디로 가려 했을 뿐이다.”
그 순간, 바렌의 밤하늘 아래서 프랑스 군주제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왕은 더 이상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조국을 등지고 도망치려다 붙잡힌 초라한 죄인이었다. 한 평범한 우체국장의 예리한 눈과 용기 있는 행동이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제60장: 굴욕의 귀환, 입헌 군주제의 종언 예고
(1791년 6월 22-25일)
바렌에서의 국왕 체포 소식은 마치 전광석화처럼 파리로 전해졌고, 국민 제헌 의회와 파리 시민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국왕이 단순히 파리를 떠나려 한 것이 아니라, 국경 너머의 외국 군대와 합류하여 반혁명을 도모하려 했다는 사실은 명백한 배신 행위였다. 의회는 즉시 긴급 회의를 소집하여 루이 16세의 모든 권한을 정지시키고, 그를 파리로 압송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세 명의 의원 – 급진파 페티옹(Pétion), 온건파 바르나브(Barnave), 그리고 라투르-모부르(Latour-Maubourg) – 이 왕족을 ‘호위’(사실상 감시)하기 위해 바렌으로 파견되었다.
파리로 돌아오는 길은 왕족에게는 끔찍한 굴욕의 여정이었다. 그들이 탄 육중한 베를린 마차는 이제 더 이상 호화로운 여행 마차가 아닌, 움직이는 감옥이었다. 의회의 명령에 따라 마차는 일부러 가장 먼 길을 택해 천천히 이동했고, 그들이 지나가는 모든 마을과 도시에서는 분노하거나 혹은 싸늘한 호기심에 찬 군중들이 몰려나와 왕족의 초라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파리 코뮌은 사전에 "왕을 보고 박수 치는 자는 매질을, 왕을 모욕하는 자는 교수형에 처한다"는 기묘한 경고문을 파리 시내 곳곳에 붙였다. 이 명령은 왕에 대한 존경심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그리고 동시에 민중의 폭발적인 분노를 억제하려는 당국의 불안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결과, 왕족 일행이 지나가는 길에는 박수도 야유도 없는, 오직 무겁고 싸늘한 침묵만이 흘렀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었지만,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모자를 벗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마차를 응시했다. 그 침묵은 어떤 함성보다 더 강력한 비난과 단죄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마차 안의 분위기는 숨 막힐 듯 무거웠다. 루이 16세는 창밖을 내다보지도 못한 채 깊은 무력감과 체념에 빠져 있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여전히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창백한 얼굴과 꽉 다문 입술은 그녀의 굴욕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어린 왕세자와 공주는 겁에 질려 어머니의 품에 파고들었다. 함께 마차에 탄 파견 의원들과의 관계는 어색하고 긴장되었다. 특히 페티옹은 일부러 왕족 앞에서 무례하게 굴거나 혁명의 당위성을 설파하며 그들을 모욕했고, 온건파였던 바르나브는 오히려 왕비의 위엄과 불행에 연민을 느끼며 그녀와 대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에티엔 드샹은 왕족 일행이 파리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샹젤리제 거리로 나갔다. 그는 군중 속에 섞여 천천히 다가오는 마차를 지켜보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더 이상 왕에 대한 연민이나 입헌 군주제에 대한 미련은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배신감과 함께, 공화국이야말로 프랑스가 가야 할 길이라는 확신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차가 지나갈 때, 그는 창문 너머로 루이 16세의 텅 빈 눈빛과 마주쳤다. 한때 프랑스 전체의 정점이자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던 왕의 초라한 모습에서, 에티엔은 한 시대가 끝나고 있음을 명확히 느꼈다.
소피 라비뉴 역시 시장에 다녀오는 길에 이 기이한 행렬을 목격했다. 그녀는 마담 뒤부아로부터 왕이 도망치다 잡혀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믿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눈으로, 침묵하는 군중 속에서 굴욕적으로 돌아오는 왕족의 모습을 직접 보게 되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에게 왕은 하늘처럼 멀고 높은 존재였지만, 저 마차 안의 사람들은 두려움과 굴욕에 떠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왕이나 귀족이 자신들의 삶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의 고통의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늘한 침묵 속에서, 소피는 이제 민중 스스로가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1791년 6월 25일, 왕족 일행은 마침내 파리에 도착하여 튈르리 궁에 다시 갇혔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삼엄한 감시와 불확실한 미래뿐이었다. 바렌 도주 사건은 프랑스 혁명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밀어붙였다. 이 사건은 왕정에 대한 마지막 남은 신뢰마저 파괴했고, 공화주의 운동에 결정적인 동력을 제공했다. 1791년 헌법에 기반한 입헌 군주제는 공식적으로 출범하기도 전에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남은 질문은 단 하나였다. 왕 없는 프랑스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그 대답을 찾아가는 길은 마르스 광장의 피와 혁명 전쟁의 포화, 그리고 결국 공포정치라는 더 깊은 혼돈 속으로 이어질 운명이었다. 입헌 군주제의 종언은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
(제6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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