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부: 덕과 공포의 시대, 그리고 로베스피에르의 몰락 (1794)
제91장: 탈기독교화의 광풍과 로베스피에르의 제동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1793년 가을부터 불어닥친 '탈기독교화(Déchristianisation)' 운동의 광풍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혁명의 이름으로 수백 년 된 신앙과 전통이 뿌리 뽑히는 모습 앞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증조모 마리의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에티엔 자신도 이성과 합리를 중시했지만, 종교 자체를 야만적으로 파괴하는 행위에는 깊은 거부감을 느꼈던 듯하다. 역설적이게도 이 광풍에 제동을 건 것은 공포 정치의 상징 로베스피에르였다. 그의 개입은 당시 혁명 세력 내부의 복잡한 이념 갈등과 정치적 계산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면이다.
<1793년 가을 - 1794년 봄, 파리 교회 / 거리 / 자코뱅 클럽>
공포 정치가 심화되면서, 혁명의 칼날은 이제 종교를 향했다. 파리 코뮌과 코르들리에 클럽의 가장 급진적인 세력, 특히 자크 르네 에베르(Jacques René Hébert)와 피에르 가스파르 쇼메트(Pierre Gaspard Chaumette) 등은 가톨릭 교회를 구체제의 잔재이자 반혁명의 온상으로 규정하고, 프랑스 사회에서 기독교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려는 '탈기독교화' 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했다.
파리의 교회들은 더 이상 신성한 공간이 아니었다. 많은 성당들이 문을 닫거나 '이성의 신전(Temple de la Raison)'으로 개조되었다. 성모 마리아 상 대신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졌고, 성화와 성물들은 파괴되거나 모독당했다. 거리 이름에서 '성인(Saint)' 명칭이 삭제되었고, 기독교식 달력 대신 십진법에 기반한 '공화력(Calendrier républicain)' 사용이 강제되었다. 일요일 예배는 금지되었고, 대신 공화력의 '데카디(Décadi, 10일 휴일)'를 기념하는 세속적인 축제가 장려되었다.
성직자들에 대한 박해도 극심해졌다. 선서 거부파 신부들은 물론이고, 선서파 신부들까지도 결혼하거나 성직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았다. 이를 거부하는 성직자들은 체포되어 투옥되거나 처형당했다. 클레망 신부와 같은 이들은 더욱 깊은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고, 신앙을 지키려는 신자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에티엔의 어머니 마리 드샹은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깊은 슬픔과 분노에 잠겼다. 그녀는 더 이상 예전처럼 성당에 나가 기도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방에 작은 제단을 만들어 놓고, 숨죽여 기도하며 이 끔찍한 시대가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머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이것은 일시적인 혼란일 뿐입니다. 혁명은 결국 이성과 정의를 되찾을 것입니다." 에티엔은 어머니를 위로하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보다 불안감이 더 많이 묻어났다.
"이성이라고? 저것이 이성이란 말이냐, 에티엔? 성당을 부수고 신부님들을 욕보이는 것이 너희가 말하는 이성이란 말이더냐! 이것은 신성 모독이고 광기일 뿐이다!" 마리는 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에티엔은 차마 어머니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장 발레와 같은 급진파 상퀼로트들은 탈기독교화 운동에 열광적으로 참여했다. 그들은 교회를 '미신과 기만의 소굴'로 여기며, 성상을 부수고 성직자들을 조롱하는 것을 혁명적 행위로 간주했다.
"보라, 앙투안! 저 헛된 우상들이 무너지는 것을! 이제 프랑스는 미신에서 벗어나 이성의 빛 아래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장 발레는 노트르담 대성당이 '이성의 신전'으로 바뀌는 것을 보며 흥분해서 외쳤다.
1793년 11월 10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는 '이성 숭배 축제(Fête de la Raison)'가 열렸다. 오페라 여배우가 '이성의 여신'으로 분장하여 제단 위에 앉았고, 혁명가들이 그녀를 숭배하는 기묘하고도 불경스러운 의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격한 탈기독교화 운동은 프랑스 사회, 특히 가톨릭 신앙이 깊이 뿌리내린 농촌 지역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방데 반란을 더욱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공화국에 대한 민심 이반을 초래할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공안위원회의 실권자 로베스피에르는 이러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루소의 영향을 받아 이신론(Deism)에 가까웠지만, 무신론(Atheism)에는 반대했다. 그는 무신론이 부도덕하고 사회 질서를 파괴하며, 특히 민중의 도덕적 기반을 약화시켜 혁명을 위태롭게 한다고 믿었다. 또한, 에베르파가 탈기독교화 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을 경계했다.
1793년 말부터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 클럽 연설 등을 통해 탈기독교화 운동의 과격성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무신론은 귀족적이다! 신의 존재를 믿고 영혼의 불멸을 바라는 생각은 민중에게 위안을 주는 사상이다! 우리는 미신과 싸워야 하지만, 신앙 자체를 박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다시 한번 천명하고, 에베르파의 극단적인 행동에 제동을 걸었다. 그의 개입은 탈기독교화 운동의 기세를 한풀 꺾는 효과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혁명 세력 내부의 복잡한 이념 갈등과 권력 투쟁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로베스피에르는 이제 왼쪽의 에베르파와 오른쪽의 당통파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자신만의 '덕의 공화국'을 향한 위험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제92장: 에베르파 숙청, 혁명은 왼쪽을 치다
알랭 마르탱의 기록: 혁명은 종종 자신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을 먼저 삼키는 비정함을 보인다. 1794년 봄, 로베스피에르와 공안위원회가 에베르파(Hébertists)를 숙청한 사건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에베르파는 상퀼로트 민중 운동의 가장 급진적인 목소리를 대변했지만, 그들의 과격함과 통제 불가능성은 결국 로베스피에르에게 제거의 명분을 제공했다. 이 사건은 공포정치의 칼날이 이제 혁명 세력 내부를 향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혁명 정부와 민중 운동 사이의 불안정한 동맹 관계가 파탄 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이 숙청 과정을 비교적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행간에는 혁명의 자기 파괴에 대한 깊은 우려가 담겨 있다.
<1794년 2-3월, 파리 코뮌 / 공안위원회 / 혁명 재판소>
1794년 겨울, 파리의 경제 상황은 여전히 심각했다. 최고가격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식량 부족은 계속되었다. 파리 코뮌과 코르들리에 클럽을 장악한 에베르파는 이러한 민중의 불만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공안위원회를 압박하려 했다. 에베르는 자신의 신문 『페르 뒤셴』을 통해 연일 공안위원회의 미온적인 태도를 비난하고, 투기꾼과 부자들에 대한 더욱 철저한 숙청과 재산 몰수, 그리고 '새로운 혁명적 봉기'를 선동했다.
"인민들이여, 언제까지 굶주리고 속을 것인가! 공안위원회의 배신자들은 부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혁명을 망치고 있다! 다시 한번 봉기하여 저들을 몰아내고 진정한 평등을 쟁취하자!"
장 발레는 에베르의 선동에 잠시 흔들렸다. 그는 여전히 로베스피에르를 존경했지만, 공안위원회가 상퀼로트의 요구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앙투안 루셀과 함께 코르들리에 클럽 회합에 참석하여 에베르파의 열변을 들었다.
"형님, 에베르 시민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뭔가 행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루셀이 흥분해서 말했다.
장 발레는 복잡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그는 에베르의 과격함이 마음에 걸렸지만, 민중의 고통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와 공안위원회는 에베르파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에베르파가 무책임한 선동으로 민중 봉기를 부추겨 공화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심지어 외국의 스파이들과 결탁하여 반혁명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로베스피에르는 에베르파의 무신론적 탈기독교화 운동이 혁명의 도덕적 기반을 훼손한다고 혐오했다.
공안위원회의 실질적인 이론가이자 로베스피에르의 오른팔인 생쥐스트는 에베르파 숙청의 논리를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는 국민 공회 연설에서 에베르파를 '외국 파벌(Faction de l'étranger)'과 '혁명을 과격하게 몰고 가려다 실패하게 만드는 자들'로 규정하며 맹렬하게 비난했다.
3월 중순, 공안위원회는 전격적으로 에베르, 쇼메트, 롱생(Ronsin, 혁명군 사령관) 등 에베르파 핵심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그들은 반혁명 음모, 부패, 도덕적 타락 등의 혐의로 혁명 재판소에 기소되었다.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변론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3월 24일, 에베르와 그의 주요 동료 17명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에베르파의 숙청은 파리 상퀼로트 운동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가장 급진적인 목소리를 내던 지도자들이 제거되면서 파리 코뮌과 각 구의 민중 협회는 위축되었고, 혁명 정부에 대한 민중의 자발적인 압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장 발레는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그는 에베르의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반역자'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믿음과 공포 정치의 위압감 속에서 그는 결국 침묵을 선택하거나, 혹은 살아남기 위해 로베스피에르 노선으로 완전히 돌아서며 에베르파를 비난하는 대열에 합류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합리화를 통해 양심의 가책을 억눌렀다.
에티엔은 에베르파의 숙청 소식을 들으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에베르파의 과격함과 탈기독교화 운동을 혐오했지만, 혁명이 이제 자신의 가장 열렬했던 지지자들마저 적으로 규정하고 제거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깊은 우려를 표했다.
"혁명은 이제 왼쪽 날개를 꺾었다. 다음 차례는 오른쪽일까? 로베스피에르의 칼날은 어디까지 향할 것인가? 공포는 점점 더 짙어지고, 혁명의 길은 더욱 좁아지고 있다."
혁명의 엔진이었던 민중 운동은 이제 혁명 정부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혁명은 스스로의 동력을 잠식하며, 외로운 정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제93장: 당통파 숙청, 혁명 영웅도 쓰러지다
1950년 파리. 에티엔의 일기장을 읽는 내 손가락이 멈칫했다. 1794년 4월, 당통과 데물랭의 처형. 그것은 단순한 정치적 숙청을 넘어, 프랑스 혁명 자체의 비극성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혁명의 포효하는 사자 같았던 당통, 재치 넘치는 필치로 혁명의 초기 열기를 이끌었던 데물랭. 그들마저 '반혁명'의 이름으로 단두대에서 사라져야 했던 현실 앞에서, 증조할아버지가 느꼈을 환멸과 절망은 얼마나 깊었을까. 그의 기록에는 당시의 충격과 함께, 로베스피에르라는 인물에 대한 공포와 인간적인 고뇌가 뒤섞여 있다.
<1794년 3월 말 - 4월 초, 파리 공안위원회 / 혁명 재판소 / 뤽상부르 감옥>
에베르파라는 '왼쪽의 위협'을 제거한 로베스피에르와 공안위원회는 이제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들의 다음 목표는 조르주 당통과 그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카미유 데물랭을 중심으로 한 '관용파(Indulgents)'였다.
당통은 8월 10일 봉기와 공화국 수립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한때 공안위원회의 초기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점차 혁명의 과격화와 공포 정치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전쟁 상황이 호전되면서 공포 정치 완화와 국민적 화해를 주장했다. 그는 로베스피에르의 엄격하고 금욕적인 도덕주의와 달리, 현실적이고 타협적이며 다소 방탕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데물랭은 자신의 신문 『르 비외 코르들리에(Le Vieux Cordelier)』를 통해 공포 정치의 과도함을 비판하고 관용을 호소하며 로베스피에르를 간접적으로 공격했다.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측근 생쥐스트에게 당통파의 주장은 혁명의 기강을 해이하게 하고 반혁명 세력에게 기회를 주는 위험한 행동으로 비춰졌다. 특히 당통 주변 인물들의 부패 혐의(동인도 회사 청산 관련)는 그들에게 좋은 공격 빌미를 제공했다. 로베스피에르는 한때 동지였던 당통과 데물랭을 제거하기로 냉혹한 결정을 내렸다.
3월 30일 밤, 당통, 데물랭, 그리고 그들의 측근들이 전격적으로 체포되었다. 혐의는 부패, 외세와의 결탁, 반혁명 음모 등이었다. 소식을 들은 파리는 충격에 빠졌다. 혁명의 거물이었던 당통마저 체포되었다는 사실은 공포 정치의 칼날이 이제 누구에게나 향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에티엔은 절망했다. 그는 데물랭과 학창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고, 당통의 넘치는 활력과 대중적 카리스마를 한때 동경하기도 했다. 비록 그들의 정치 노선에는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들이 반역자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맙소사… 당통과 데물랭마저… 로베스피에르는 정녕 미쳐버린 것인가? 아니면 저 냉혹한 권력욕이 그의 영혼을 완전히 삼켜버린 것인가? 혁명은 이제 괴물이 되어 자신의 자식들을 잡아먹고 있다." 에티엔은 자신의 서재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탄식했다. 그는 로베스피에르 독재에 대한 공포를 느꼈고, 프랑스를 떠나 망명할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기록하는 것조차 두려운 시대였다.
혁명 재판소에서 당통은 특유의 사자 같은 웅변으로 자신을 변호하려 했다. "나 당통이 반역자라고? 내 이름은 프랑스 혁명의 역사와 함께 새겨져 있다! 나를 기소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반역자다!" 그의 목소리는 법정을 뒤흔들었지만, 재판은 이미 짜여진 각본대로 흘러갔다. 공안위원회는 당통의 변론이 재판을 방해한다고 주장하며 그의 발언을 중단시켰고, 변론 기회는 박탈되었다.
데물랭은 재판 과정에서 절망과 분노 속에서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는 한때 친구였던 로베스피에르를 향해 울부짖었다. 그의 젊은 아내 뤼실(Lucile)은 남편을 구하기 위해 탄원서를 제출하고 사람들에게 호소했지만, 오히려 반혁명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함께 체포되어 얼마 뒤 단두대에 오르게 된다.
4월 5일, 당통과 데물랭을 포함한 당통파 핵심 인물들은 유죄 판결을 받고 혁명 광장의 단두대로 향했다. 당통은 처형장으로 가는 수레 위에서도 여전히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로베스피에르의 집 앞을 지나며 "로베스피에르, 다음은 네 차례다!"라고 외쳤고, 단두대 앞에서는 사형 집행인 상송에게 "내 머리를 민중에게 잘 보여주게. 이런 머리는 흔치 않으니까!"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혁명 영웅들의 처형은 프랑스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공포 정치의 위력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로베스피에르는 이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혁명의 가장 중요한 동지들을 자신의 손으로 제거함으로써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더욱 고립시키는 길을 택했다. 그의 권력은 절정에 달했지만, 그 기반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에티엔은 이제 혁명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깊은 환멸과 함께, 언제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공포만이 남아 있었다.
제94장: 최고 존재 숭배, 새로운 종교의 시도
알랭 마르탱의 기록: 공포 정치의 정점에서 로베스피에르가 추진했던 '최고 존재 숭배(Culte de l'Être suprême)'는 프랑스 혁명사에서 가장 기묘하고도 논쟁적인 시도 중 하나이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를 "독재자의 망상적인 자기 신격화 시도"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복잡한 맥락이 얽혀 있다. 이는 에베르파의 과격한 무신론적 탈기독교화 운동에 대한 반작용이자, 루소의 이신론(Deism) 사상에 기반하여 공화국의 새로운 도덕적·종교적 토대를 마련하려는 로베스피에르 나름의 진지한 시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방식과 시기는 그의 정치적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1794년 5월, 파리 국민 공회 / 자코뱅 클럽>
에베르파와 당통파를 차례로 제거하고 권력의 정점에 선 로베스피에르는 이제 자신이 꿈꾸는 '덕의 공화국' 건설을 위한 마지막 단계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혁명이 단순히 정치 체제를 바꾸는 것을 넘어, 프랑스 국민 전체의 도덕적 재탄생을 이끌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도덕적 기반의 핵심에는 종교적 신념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에베르파가 주도했던 과격하고 무신론적인 탈기독교화 운동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프랑스 민중의 깊은 종교적 감성을 무시하고 사회를 분열시킬 뿐이라고 판단했다. 대신 그는 자신이 젊은 시절부터 깊이 심취했던 장 자크 루소의 사상, 특히 자연적이고 이성적인 종교관인 이신론에서 해답을 찾았다.
1794년 5월 7일(공화력 2년 플로레알 18일), 로베스피에르는 국민 공회에서 장시간의 연설을 통해 '최고 존재 숭배' 법령 제정을 제안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무신론이 귀족적이고 부도덕하며 사회 질서를 파괴한다고 맹렬히 비판하는 한편, '최고 존재(l'Être suprême)'의 존재와 '영혼 불멸(Immortalité de l'âme)'을 인정하는 것이 공화국 시민의 덕성을 함양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공화국은 덕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덕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주를 창조하고 질서를 부여한 최고 존재에 대한 인식과, 사후 세계에서의 정의로운 보상, 즉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약자에게는 위안을 주고, 악인에게는 두려움을 주며, 모든 시민을 공화국의 신성한 의무로 결속시키는 힘입니다!"
그는 '최고 존재 숭배'가 특정한 교리나 의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공유할 수 있는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종교 감정이라고 주장했다. 법령은 최고 존재와 영혼 불멸을 인정하고, 공화국의 덕(정의, 평등, 자유, 애국심 등)을 숭배하며, 이를 기념하기 위한 전국적인 축제를 정기적으로 개최할 것을 규정했다.
로베스피에르의 제안은 국민 공회에서 큰 반대 없이 통과되었다. 당시 그의 권위는 절대적이었고, 감히 그의 제안에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 의원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많은 의원들이 그의 의도를 의심하거나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과거 탈기독교화 운동에 참여했던 급진파 의원들이나,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 있던 의원들 모두에게 이 새로운 '국가 종교'는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의 구상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화가이자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자크 루이 다비드에게 '최고 존재 숭배 축제'의 연출을 맡겼다. 다비드는 고대 로마의 의례와 상징을 차용하여 장엄하고 화려한 축제를 기획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6월 8일(프레리알 20일) 파리에서 열릴 대규모 행사로, 로베스피에르 자신이 마치 대사제처럼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었다.
에티엔은 최고 존재 숭배 법령 소식을 듣고 깊은 회의감에 빠졌다. 그는 무신론에는 반대했지만, 국가가 특정 종교(설령 그것이 이신론이라 할지라도)를 강요하고 의례를 주관하는 것은 정교 분리 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로베스피에르 개인의 권력을 신격화하려는 위험한 시도라고 보았다.
"이제 그는 스스로를 혁명의 대사제, 아니 거의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모양이다. 루소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하려는 것인가? 덕과 공포에 이어 이제 종교마저 그의 통치 도구가 되는구나. 이것은 공화국이 아니라 신정 정치로 가는 길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진심으로 '덕의 공화국'을 위한 도덕적 재무장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방식은 시대착오적이고 독선적이었으며, 오히려 그의 정치적 고립을 심화시키고 반대파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최고 존재 숭배는 로베스피에르 권력의 정점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 몰락의 시작을 알리는 불길한 전조이기도 했다.
제95장: 프레리알 20일, 화려한 축제, 불안한 영광
1950년 파리. 나는 1794년 6월 8일, 파리에서 열렸던 '최고 존재 숭배 축제'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본다. 화가 다비드가 연출한 이 거대한 스펙터클은 로베스피에르 권력의 절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안에 내재된 불안정성과 아이러니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그날 축제 현장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기록에는 화려한 장관에 대한 묘사와 함께, 그 이면에 감도는 냉담함과 불안감, 그리고 로베스피에르의 '연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 있다. 이 축제는 과연 국민 통합의 장이었을까, 아니면 독재자의 자기 과시 무대였을까?
<1794년 6월 8일(공화력 2년 프레리알 20일), 파리 튈르리 정원 / 마르스 광장>
그날 파리는 화창했다. 프레리알 20일, 최고 존재를 기리는 대축제의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파리 시민들은 저마다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건물들은 삼색기와 꽃, 푸른 나뭇가지로 장식되었고, 곳곳에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축제의 중심 무대는 튈르리 정원이었다. 정원 중앙에는 화가 다비드가 설계한 거대한 인공 산이 세워졌고, 그 위에는 자유의 나무와 상징적인 조각상들이 배치되었다.
오전, 국민 공회 의원들이 튈르리 정원에 집결했다. 그들의 손에는 꽃과 과일, 곡식 이삭 등이 들려 있었다. 잠시 후, 로베스피에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날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하늘색 연미복을 입고 손에는 삼색 깃털 장식의 모자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의 냉철함 대신 엄숙하고 경건한 표정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는 이날 국민 공회 의장 자격으로 축제를 주재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인공 산 정상에 올라 최고 존재와 영혼 불멸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장엄한 연설을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 위로 울려 퍼졌다.
"프랑스 국민들이여! 오늘 우리는 최고 존재에게 경배하고 자연에 감사하며, 공화국의 덕을 찬양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최고 존재는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자 인간 이성의 근원이며, 덕과 정의의 수호자입니다! 그의 가호 아래,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하며 형제애로 가득 찬 덕의 공화국을 건설할 것입니다!"
연설이 끝나자, 그는 횃불을 받아 '무신론'과 '이기심'을 상징하는 거대한 허수아비들을 불태웠다. 불길 속에서 지혜의 여신상이 솟아오르는 퍼포먼스가 연출되었다. 군중 속에서는 "공화국 만세!", "로베스피에르 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에티엔은 이 모든 광경을 냉담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로베스피에르의 연설과 행동에서 진정한 신앙심보다는 정치적인 계산과 자기 과시욕을 느꼈다. 특히 로베스피에르가 마치 자신이 대사제인 양 축제를 주도하는 모습은 그의 눈에 오만하고 위험해 보였다.
"저 연극은 너무나 인위적이고 공허하다. 최고 존재를 들먹이며 자신의 권력을 신격화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인다. 동료 의원들의 표정에도 경외심보다는 냉담함과 조소가 어려 있지 않은가." 에티엔은 수첩에 빠르게 메모했다.
실제로 축제에 참여한 많은 공회 의원들은 로베스피에르의 독단적인 모습에 불쾌감을 느꼈다. 그들은 뒤에서 "저 독재자가 이제 스스로 교황 노릇까지 하려 한다", "최고 존재는 몰라도,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숭배는 역겹다"고 수군거렸다. 심지어 로베스피에르를 향해 "단두대로 가는 길이 멀지 않았다"고 외치는 소리까지 들렸다.
축제 행렬은 튈르리 정원에서 마르스 광장까지 이어졌다. 마르스 광장에는 또 다른 거대한 인공 산과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져 있었고, 그곳에서 다시 한번 연설과 합창, 공화국에 대한 맹세 의식이 거행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축제는 장엄하고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고, 많은 시민들은 오랜 공포와 불안 속에서 잠시나마 해방감과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는 듯했다.
소피 라비뉴도 거리에 나와 축제 행렬을 구경했다. 화려한 장식과 음악 소리는 잠시나마 그녀의 고된 삶을 잊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불안했다. 최고 존재니 덕이니 하는 어려운 말들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여전히 빵과 생존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로베스피에르라는 이름이 주는 공포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프레리알 20일의 축제는 로베스피에르 권력의 정점을 보여주는 화려한 무대였지만, 동시에 그 이면에는 그의 정치적 고립과 다가올 몰락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축제의 함성은 공허했고, 화려한 영광은 불안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덕의 공화국을 꿈꿨지만, 그가 만들어낸 것은 점점 더 질식할 듯한 공포의 왕국이었다. 그리고 그 공포는 이제 그 자신을 향해 칼날을 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96장: 프레리알 22일 법, 공포는 광기가 된다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일기장에서 1794년 6월 10일, 공화력 2년 프레리알 22일의 기록은 유독 검붉은 잉크 자국처럼 느껴진다. 최고 존재 숭배 축제의 화려한 막이 내린 지 불과 이틀 만에,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공포 정치의 마지막 고삐마저 풀어버리는 악명 높은 법률을 통과시켰다. 프레리알 22일 법. 그것은 법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체계적인 살인을 정당화하고, 공포를 일상적인 광기로 몰아넣은 법률이었다. 에티엔의 글은 당시 파리를 뒤덮었던 질식할 듯한 공포와 함께, 혁명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어떻게 스스로를 집어삼키는지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1794년 6월 10일, 파리 국민 공회 회의장 / 혁명 재판소>
최고 존재 숭배 축제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국민 공회 회의장. 그러나 분위기는 축제의 그것과는 정반대로 싸늘하고 무거웠다. 로베스피에르의 충실한 동료이자 공안위원회 위원인 조르주 쿠통(Georges Couthon, 다리가 불편하여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이 새로운 법안을 제안하기 위해 연단으로 향했다. 그의 부드러운 말투와 달리, 법안의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시민 대표 여러분, 공화국의 적들은 여전히 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혁명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내기 위해 더욱 신속하고 단호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이에 공안위원회는 혁명 재판 절차를 개선하여 정의의 실현을 가속화하는 법안을 제안합니다."
그가 낭독한 '프레리알 22일 법'의 핵심 내용은 공포 그 자체였다. 이 법은 혁명 재판소에서의 예비 심문 절차를 폐지했다. 피고인에게는 국선 변호인의 조력이 금지되었고, 증인 소환 역시 제한되었다. 유죄 판결의 유일한 증거는 배심원단의 '도덕적 확신(conviction morale)'으로 충분했으며, 유죄 판결 시 선고될 수 있는 형벌은 오직 사형뿐이었다. '인민의 적(ennemi du peuple)'의 정의는 더욱 모호하고 포괄적으로 확대되어, 사실상 누구든 공안위원회의 의지에 따라 단두대로 보낼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법안 내용이 알려지자 회의장에는 잠시 술렁임이 일었다. 일부 의원들은 너무 가혹하고 자의적이라며 반대 의견을 내려 했지만,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추종자들의 서슬 퍼런 눈빛 앞에서 감히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직접 연단에 올라 법안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반혁명 음모가 공화국의 심장부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인민의 적들에게는 오직 신속하고 준엄한 처벌만이 필요합니다! 이 법은 덕의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한 방패이자 칼입니다!"
결국 법안은 거의 아무런 토론 없이 통과되었다. 이 순간, 프랑스 혁명은 법치주의라는 마지막 안전장치마저 스스로 내던져 버렸다.
<파리 혁명 재판소 / 거리>
프레리알 22일 법 시행 이후, 혁명 재판소는 그야말로 '죽음의 공장'처럼 가동되기 시작했다. 재판은 형식적인 절차로 전락했고, 하루에 수십 명씩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푸키에-탱빌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기계적으로 기소장을 읽어 내려갔고, 배심원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유죄를 선언했다.
콩시에르주리 감옥은 여전히 넘쳐났고, 이제는 언제 자신의 이름이 불릴지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가 감옥 전체를 지배했다.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했고, 작은 말 한마디조차 조심했다.
소피 라비뉴는 집 밖으로 나서는 것이 더욱 두려워졌다. 거리에는 검은 옷을 입은 감시위원회 위원들이나 비밀경찰들이 매의 눈으로 시민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웃집 마티유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고, 마담 뒤부아는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매일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소피는 자신과 피에르가 연루될까 봐 노심초사하며, 최소한의 식량을 구하는 일 외에는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파리 전체가 거대한 감옥처럼 느껴졌다.
"이젠 숨 쉬는 것조차 두렵구나." 소피는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혁명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더니,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에티엔 역시 깊은 절망 속에서 은둔 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프레리알 22일 법 소식을 듣고 더 이상 글을 쓸 수도, 희망을 가질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낡은 트렁크 깊숙한 곳에 자신의 일기장과 기록들을 숨겼다. 언젠가, 아주 먼 훗날 누군가가 이 기록을 발견하여 진실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그는 술로 밤을 지새우며 자문했다. '이 광기는 언제 끝날 것인가? 아니, 끝나기는 할 것인가?'
프레리알 22일 법은 공포 정치를 광기로 몰아넣었다. 로베스피에르는 덕의 이름으로 공포를 정당화했지만, 그 공포는 이제 혁명 자체를 질식시키고 있었다. '대공포(Grande Terreur)'라 불리는 이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로베스피에르 정권의 자기 파괴를 가속화시키는 마지막 단계가 되었다.
제97장: 플뢰뤼스 승리, 아이러니한 성공
1950년 파리. 역사의 전개는 종종 모순과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1794년 6월, 파리가 '대공포'의 광기 속에서 서로를 죽이고 있을 때, 국경 너머 벨기에 전선에서는 프랑스 혁명군이 눈부신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플뢰뤼스(Fleurus) 전투의 승리는 프랑스 혁명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었고, 공화국 군대의 힘을 과시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이 승리에 대해 짧고 냉담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군사적 성공이 파리의 공포 정치를 정당화하거나 강화하는 데 이용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승리의 함성 뒤에 가려진 역사의 아이러니를 나는 그의 기록 속에서 읽어낸다.
<1794년 6월 26일, 벨기에 플뢰뤼스 전장>
플뢰뤼스 평원 위에는 화약 냄새와 함께 승리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장 바티스트 주르당(Jean-Baptiste Jourdan)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혁명군은 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 끝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793년 총동원령 이후 라자르 카르노의 주도 아래 재편성되고 훈련된 혁명군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높았고, 지휘관들은 혁명 정부의 강력한 지원 아래 과감한 전술을 구사했다. 특히 이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이 정찰용 수소 열기구 '앙트르프르낭(l'Entreprenant)'을 띄워 적진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아군 포병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등, 역사상 최초로 항공 기술을 군사적으로 활용하는 혁신적인 시도도 이루어졌다.
"공화국 만세! 전진하라! 적들을 쓸어버려라!"
피에르 뒤퐁은 동료 병사들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어리숙한 신병이 아니었다. 수많은 전투를 거치며 그는 강인한 베테랑 병사가 되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전쟁의 참혹함을 혐오했지만, 조국 프랑스를 지키고 혁명의 적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신념은 확고했다. 그는 동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총검을 휘두르며 용감하게 싸웠고, 마침내 적군이 후퇴하는 모습을 보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플뢰뤼스 전투의 승리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이 승리로 프랑스는 벨기에 지역을 다시 장악하게 되었고, 네덜란드까지 위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프랑스 국경에 대한 외적의 직접적인 위협은 크게 감소했다. 공화국은 스스로를 지켜낼 힘이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한 것이다.
<파리, 공안위원회 회의실>
플뢰뤼스 승전보는 파리의 공안위원회에도 전달되었다. 그러나 이 소식은 공포 정치를 완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정책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내부의 적들을 더욱 철저히 숙청할 명분을 제공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보시오, 동지들! 우리의 강력한 조치가 헛되지 않았음이 증명되었소! 공화국 군대는 외적을 격파하고 승리했소!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내부에 숨어있는 반역자들을 완전히 뿌리 뽑는 일이오! 조국의 위협이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덕의 공화국을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 정화 작업을 단행할 때요!" 로베스피에르는 승전보를 들고 동료 위원들에게 열변을 토했다. 그의 눈빛에는 승리의 기쁨보다는 오히려 내부 숙청에 대한 냉혹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생쥐스트 역시 동의했다. "외부의 승리는 내부의 정화 없이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조금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플뢰뤼스의 군사적 승리는 파리의 정치적 광기를 잠재우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은 '대공포'를 더욱 심화시키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초래했다. 전선에서의 승리가 국내에서의 공포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면서, 혁명은 더욱 위험한 자기 파괴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에티엔은 플뢰뤼스 승리 소식을 들었지만, 기쁨보다는 착잡함을 느꼈다. 그는 일기장에 짧게 썼다. "승리의 함성이 단두대의 칼날 소리를 덮을 수는 없다. 이 아이러니한 성공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제98장: 테르미도르 전야, 반격의 칼날을 갈다
알랭 마르탱의 노트: 어떤 독재 권력도 영원할 수는 없다. 공포가 극에 달하면, 그 공포는 결국 권력자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오기 마련이다. 1794년 7월, '대공포'의 질식할 듯한 분위기 속에서 로베스피에르의 권력은 정점에 달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그의 몰락을 예고하는 비밀스러운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당시 파리의 살벌한 분위기와 함께, 공포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혹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움직이는 다양한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와 음모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테르미도르 반동은 단순히 로베스피에르 한 사람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다양한 동기와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들의 불안정한 연합의 결과였다.
<1794년 7월 중하순(테르미도르 초), 파리 의회 복도 / 비밀 회합 장소>
프레리알 22일 법 이후, 파리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매일 수십 명씩 단두대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이름이 공표되었고, 국민 공회 의원들조차 언제 자신의 이름이 불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었다. 로베스피에르의 말 한마디는 곧 법이었고, 그의 시선은 죽음을 예고하는 전조와 같았다. 그는 최고 존재 숭배 축제 이후 대중 앞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고, 이는 오히려 그의 의도에 대한 불확실성과 공포를 더욱 증폭시켰다.
공안위원회와 보안위원회 내부에서도 균열이 깊어지고 있었다. 콜로 데르부아, 비요-바렌과 같은 공안위원회 내 경쟁자들은 로베스피에르의 독주와 '덕의 공화국'이라는 그의 이상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보안위원회 위원들은 자신들의 권한이 공안위원회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다고 불만을 품었다. 특히 로베스피에르가 자신만의 비밀경찰 조직을 운영하며 독자적으로 숙청 대상을 물색하고 있다는 소문은 이들의 불안감을 극대화시켰다.
여기에 더해, 지방 파견 임무 수행 중 과도한 폭력 행사나 부패 혐의로 공안위원회의 조사를 받고 있던 탈리앵(Jean-Lambert Tallien)과 푸셰(Joseph Fouché) 같은 의원들은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로베스피에르를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푸셰는 특유의 교활함으로 물밑에서 반(反)로베스피에르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모두 저 '부패할 수 없는 자'의 제물이 될 걸세." 푸셰가 비밀리에 만난 탈리앵에게 속삭였다. "그가 다음 숙청 명단을 발표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손을 써야 하네." 탈리앵은 자신의 연인 테레사 카바뤼스(Thérésa Cabarrus)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격분하여 푸셰의 제안에 적극 동조했다.
이들은 침묵하고 있던 평원파(중도파) 의원들을 설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평원파 의원들은 공포 정치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로베스피에르의 권위에 눌려 감히 반대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의 독재가 강화되고 숙청의 칼날이 자신들에게도 향할 수 있다는 공포가 커지면서, 그들 역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1794년 7월 26일(테르미도르 8일), 로베스피에르가 오랜 침묵을 깨고 국민 공회에 나타나 행한 연설이었다. 그는 이 연설에서 구체적인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공화국 내부에 여전히 '반역자'와 '음모꾼'들이 존재하며, 이들에 대한 마지막 정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는 사실상 새로운 대규모 숙청을 예고하는 선언과 다름없었다. 연설을 들은 의원들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누가 다음 희생자가 될 것인가?
그날 밤, 파리 곳곳에서 반로베스피에르파 의원들의 비밀 회합이 열렸다. 푸셰, 탈리앵, 비요-바렌, 콜로 데르부아 등 다양한 배경과 동기를 가진 인물들이 로베스피에르 타도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하나로 뭉쳤다. 그들은 다음 날(테르미도르 9일) 공회 회의장에서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가 발언할 기회를 막고, 그들을 탄핵하여 체포하기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에티엔은 당시 파리에 떠돌던 심상치 않은 소문들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는 로베스피에르의 독재에 환멸을 느꼈지만, 또 다른 쿠데타가 가져올 혼란과 폭력 또한 두려웠다. 그는 자신의 은신처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우며 기록했다.
"파리의 공기는 살얼음판 같다. 로베스피에르의 마지막 연설은 공포의 극치였다. 이제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독재에 대한 반발도 극에 달한 듯하다. 의회 복도에서는 의원들이 비밀스럽게 모여 수군거리고, 그들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함께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내일, 국민 공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 프랑스는 또다시 피바람 속으로 빠져들 것인가?"
테르미도르 9일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로베스피에르의 '덕과 공포의 시대'는 이제 그 마지막 장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반격의 칼날은 이미 날카롭게 갈려 있었다.
제99장: 테르미도르 9일, "독재자를 타도하라!"
1950년 파리.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 프랑스 혁명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이날의 사건을,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국민 공회 방청석에서 직접 목격했다. 그의 기록은 당시 회의장의 혼란과 격정, 그리고 한때 혁명의 절대 권력자였던 로베스피에르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숨 막힐 듯 생생하게 전달한다. 나는 그의 눈을 통해, 역사의 흐름이 단 몇 시간 만에 극적으로 뒤바뀌는 순간의 무게와 의미를 되새겨 본다.
<1794년 7월 27일(공화력 2년 테르미도르 9일), 파리 국민 공회 회의장>
그날 국민 공회 회의장은 아침부터 예사롭지 않은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날 로베스피에르의 위협적인 연설 이후, 의원들은 밤새 비밀 회합을 갖고 반격을 준비했다. 로베스피에르의 최측근이자 '죽음의 천사'로 불리던 젊은 생쥐스트가 먼저 연단에 올라 어제 로베스피에르가 제기했던 '음모'에 대해 보고하려 했다. 그의 손에는 새로운 숙청 명단이 들려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생쥐스트가 입을 열려는 순간, 장 랑베르 탈리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어제 고립되었던 한 사람이 오늘 다시 연설하려 합니다! 나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습니다! 베일이 찢어질 때까지!" 그의 외침은 반격의 신호탄이었다.
곧이어 공안위원회 위원인 비요-바렌이 연단으로 뛰어 올라가 생쥐스트를 밀치고 로베스피에르를 맹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어제 자코뱅 클럽에서의 연설은 공안위원회를 모욕하고 국민 공회를 마비시키려는 음모였습니다! 그는 독재자가 되려 합니다!"
회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로베스피에르파 의원들이 항의하려 했지만, 탈리앵파와 공모한 의원들의 고함 소리에 묻혀버렸다. 탈리앵은 다시 한번 연단 근처로 다가가 품 속에서 단검을 꺼내 보이는 시늉까지 하며 외쳤다. "나는 저 새로운 크롬웰(영국 독재자)을 타도하기 위해 이 단검으로 무장했습니다! 만약 공회가 독재자를 고발할 용기가 없다면, 내가 직접 저 자를 찌르겠습니다!"
"독재자를 타도하라! 독재자를 타도하라!" 의원석과 방청석 곳곳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에티엔은 방청석에서 이 믿기지 않는 광경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로베스피에르의 이름 앞에서 숨죽여야 했던 의원들이 이제 그를 향해 공개적으로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공포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연단으로 다가가 발언 기회를 얻으려 했지만, 이날 의장을 맡고 있던 콜로 데르부아(공안위원회 동료였지만 반대파로 돌아섰다)는 계속해서 종을 울리며 그의 발언을 막았다.
"의장! 암살자들에게 발언권을 주려는 겁니까?" 로베스피에르가 절박하게 외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독재자를 타도하라!"는 의원들의 함성에 묻혀버렸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분노와 당혹감 속에서 목이 쉰 그를 향해 한 의원이 "당통의 피가 네놈의 목을 막는구나!"라고 외쳤다고 한다.
마침내 무명의 한 의원이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체포 동의안을 발의했다. 잠시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곧이어 "찬성! 찬성!" 하는 외침이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그의 동생 오귀스탱, 생쥐스트, 쿠통, 그리고 르바가 함께 체포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체포 동의안은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되었다.
한때 프랑스 혁명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던 로베스피에르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의회 경비병들에게 끌려 나갔다. 그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깊은 절망감이 서려 있었다. 생쥐스트는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고, 쿠통은 휠체어 위에서 조용히 운명의 순간을 받아들였다.
에티엔은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안도감과 함께 알 수 없는 허무함,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혼란에 대한 불안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는 수첩에 떨리는 글씨로 적었다.
"테르미도르 9일. 독재자는 쓰러졌다. 공포는 물러가는가? 그러나 그의 몰락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혼란스럽다. 과연 이 반동이 프랑스를 어디로 이끌고 갈 것인가?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더 깊은 혼돈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국민 공회에서의 극적인 드라마는 로베스피에르 시대의 종말을 알렸지만, 그것은 동시에 프랑스 혁명이 또 다른 예측 불가능한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했다.
제100장: 로베스피에르의 최후, 공포 시대의 종언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테르미도르 9일의 극적인 사건 이후, 로베스피에르의 마지막 저항 시도와 비참한 최후, 그리고 파리 시민들의 반응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한때 혁명의 상징이자 공포의 화신이었던 인물의 몰락은 허무하면서도, 동시에 역사의 엄중함을 보여준다. 나는 그의 기록과 다른 증언들을 통해, 공포 시대가 막을 내리던 그날 밤과 다음 날의 혼란스럽고도 결정적인 순간들을 재구성해 본다.
<1794년 7월 27일 밤 - 28일(테르미도르 9-10일), 파리 시청(Hôtel de Ville) / 혁명 광장>
국민 공회에서 체포된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동료들은 각기 다른 감옥으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에게 충성하는 파리 코뮌은 이 소식을 듣고 즉각 행동에 나섰다. 코뮌은 로베스피에르 일파를 감옥에서 석방시켜 시청으로 모이게 했고, 상퀼로트들에게 국민 공회에 맞서 봉기할 것을 호소했다. 시청 앞 그레브 광장에는 수천 명의 상퀼로트와 국민 방위대 일부가 집결했고, 한때 로베스피에르를 지지했던 국민 방위대 사령관 앙리오(Hanriot)가 이들을 지휘하려 했다. 잠시나마 로베스피에르에게 반격의 기회가 오는 듯 보였다.
그러나 상황은 로베스피에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상퀼로트들은 이전과 같은 혁명적 열정을 보이지 않았다. 에베르파 숙청 이후 그들의 조직력은 약화되었고, 로베스피에르 정권의 공포 정치와 경제 통제 정책에 대한 불만도 누적되어 있었다. 또한, 로베스피에르 자신이 봉기를 주저하며 결단력 있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시청 앞에 모였던 군중은 점차 흩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국민 공회는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응했다. 로베스피에르와 그를 지지하는 코뮌 지도자들을 '법의 보호 밖에 있는 자(hors-la-loi)'로 선언했다. 이는 재판 절차 없이 즉시 처형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가장 강력한 조치였다. 그리고 폴 바라스(Paul Barras)를 군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시청 진압 작전을 명령했다.
새벽 2시경, 바라스가 이끄는 국민 공회 충성파 군대가 시청을 기습 공격했다. 별다른 저항 없이 군대는 시청 안으로 진입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있던 방에서는 총성이 울렸다. 그가 자살을 시도했는지, 아니면 진압 과정에서 총을 맞았는지는 여전히 역사가들 사이의 논쟁거리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턱이 총탄에 의해 끔찍하게 부서졌다는 사실이다. 그의 동생 오귀스탱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중상을 입었고, 르바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생쥐스트와 쿠통 등 나머지 핵심 인물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장 발레는 이 마지막 혼란 속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마도 그는 끝까지 로베스피에르를 지지하며 시청을 방어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닫고 절망 속에서 체포되었거나, 혹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겨 도망쳤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는 이미 이전 숙청 과정에서 희생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운명은 상퀼로트 운동의 몰락과 함께 미궁 속으로 사라졌다. (작가의 선택에 따라 그의 최후를 명확히 설정할 수도 있음)
다음 날, 테르미도르 10일 오후. 피투성이가 된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 쿠통 등 22명의 로베스피에르파 핵심 인물들은 재판 절차 없이 곧바로 혁명 광장의 단두대로 끌려갔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혁명의 주역들이 이제 초라한 죄수가 되어 처형장으로 향하는 모습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광장은 전날과는 또 다른 종류의 흥분으로 가득 찼다. 로베스피에르의 처형을 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은 그를 향해 야유와 저주를 퍼부었다. "독재자에게 죽음을!", "폭군 타도!" 어제까지 그를 찬양했던 목소리들이 이제는 증오의 함성으로 변해 있었다.
소피 라비뉴는 집 창문 너머로 멀리 들려오는 군중의 함성을 들었다. 그녀는 안도감을 느꼈다. 마침내 공포의 시대가 끝났다는 생각에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불안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사라진다고 해서 빵 문제가 해결될까? 또 다른 혼란이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그녀의 삶은 여전히 불확실성 속에 놓여 있었다.
망명지(또는 은신처)에서 이 소식을 들은 앙투아네트 드 발루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복수심과 함께 일말의 희망을 느꼈을 것이다. '마침내 폭군이 쓰러졌구나. 이제 우리의 시대가 다시 올지도 몰라.'
로베스피에르는 턱 부상으로 인해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단두대의 칼날이 그의 목을 내리치는 순간, 광장을 가득 메웠던 군중 속에서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공포 정치의 상징이었던 그의 죽음은 마침내 '대공포'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신호였다.
테르미도르 반동은 프랑스 혁명의 가장 급진적인 단계를 마무리 짓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전환점이었다. 혁명은 이제 '덕'과 '공포'라는 극단적인 이상주의에서 벗어나, 보다 현실적이고 타협적인, 그리고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가 더욱 강하게 반영되는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공포정치가 남긴 깊은 상처와 분열의 기억은 프랑스 사회에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었다. 에티엔은 테르미도르 반동을 목격하며 안도감보다는 허무함과 함께,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혼란에 대한 불안감을 더 크게 느꼈다. 그의 일기장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맺고 있었다. "폭군은 죽었다. 그러나 혁명은 어디로 가는가?"
(제10부 끝)
'LLM으로 뽑은 잡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0.1 Ver.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12/50 (0) | 2025.04.18 |
---|---|
0.1 Ver.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11/50 (1) | 2025.04.18 |
0.1 Ver.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9/50 (1) | 2025.04.17 |
0.1 Ver.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8/50 (0) | 2025.04.17 |
0.1 Ver.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7/50 (0) | 2025.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