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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M으로 뽑은 잡지식

0.1 Ver.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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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부: 제1공화국 수립과 혁명의 광풍 (1792년 가을 - 1793년 여름)

제71장: 8월 10일 새벽, 라 마르세예즈와 봉기의 시작

1950년 파리. 낡은 가죽 표지의 일기장 위로 희미한 등잔 불빛이 떨렸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 드샹의 필체는 유독 1792년 8월의 기록에서 더 가늘고 날카로워졌다. 마치 그날 밤, 파리의 공기를 가득 메웠던 긴장과 열기가 그의 펜 끝으로 고스란히 전달된 듯했다. 역사가 지망생인 나, 알랭 마르탱은 그의 기록을 통해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천 년 왕정의 마지막 숨결이 끊어지고, 혁명이 걷잡을 수 없는 격류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바로 그 밤으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오만한 선언은 역효과를 낳았다. 파리 시민들의 불안감은 공포로, 공포는 다시 불타는 분노로 바뀌었다. 왕이 외국의 적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은 이제 확신이 되었다. 튈르리 궁에 갇힌 왕족은 더 이상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조국을 팔아넘기려는 반역자로 인식되었다. 에티엔의 기록은 당시 파리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었다.

"파리는 잠들지 못하는 도시가 되었다. 거리마다 삼색기가 펄럭이고, 혁명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그러나 그 활기찬 모습 이면에는 깊은 불안과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내부의 적'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듯하다. 신문들은 연일 왕의 배신을 규탄하고, 카페에서는 공공연히 왕정 타도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밤이 되면 각 구(Section)의 대표들이 시청에 모여 비밀스러운 회합을 갖는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무언가 거대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 아니, 폭풍 직전의 숨 막히는 열기다."

1792년 8월 9일 밤. 에티엔의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파리의 모든 교회 종들이 약속이나 한 듯 밤의 정적을 깨뜨리며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토크생(tocsin), 봉기의 시작을 알리는 경종 소리였다. 뒤이어 북소리가 파리 동부 노동자 구역을 중심으로 울려 퍼졌다. 잠들었던 파리가 깨어나고 있었다.

생탄투안 구역의 좁은 골목길. 장 발레는 녹슨 소총을 어깨에 메고 붉은 프리지아 모자를 고쳐 썼다. 그의 눈은 지난 몇 달간의 분노와 기다림으로 핏발이 서 있었다. 인쇄소 동료이자 충실한 후배인 앙투안 루셀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형님! 드디어 시작되었습니다! 생마르셀 구역에서도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있다, 앙투안." 장 발레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오늘 밤, 우리는 역사를 새로 쓴다. 저 튈르리 궁의 늙은 여우와 오스트리아 암캐를 끌어내 인민의 심판대에 세울 것이다!"

그들의 주변으로 상퀼로트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손에는 창, 칼, 도끼, 심지어 부엌칼까지 들려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지난 몇 년간 쌓여온 굶주림과 억압, 그리고 배신감에 대한 분노가 역력했다. 그들은 더 이상 의회의 정치꾼들이나 부르주아 장군들을 믿지 않았다. 오직 자신들의 힘으로, 직접 행동으로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때, 거리 저편에서 우렁찬 군가 소리가 들려왔다. 남부 마르세유에서 온 의용군들이었다. 그들은 혁명 수호를 위해 먼 길을 행군해 온 용맹한 전사들이었다. 그들의 행진은 파리 시민들에게 엄청난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 '라인 군대의 군가'는 이미 파리의 혁명가들 사이에서 애국심과 투쟁 의지를 불태우는 성가(聖歌)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나가자, 조국의 아들딸들아! 영광의 날은 왔도다!

우리 앞에 압제의 피 묻은 깃발이 펄럭인다! (비스!)

들리는가, 저 들판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저 잔인한 병사들의 함성이다!

그들이 다가와 우리의 아내와 자식들의 목을 치려 한다!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

그대들의 대오를 갖추어라!

전진! 전진!

적들의 더러운 피가 우리의 밭고랑을 적시도록!"

장 발레는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의 심장은 뜨겁게 고동쳤다. 수천, 수만 명의 무장한 시민들과 의용군들이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며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이루어 튈르리 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횃불이 밤거리를 밝혔고, '라 마르세예즈'의 선율은 혁명의 전주곡처럼 파리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다락방 창문 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소피는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그녀는 동생 피에르의 눈을 가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피에르. 그냥… 축제 같은 거야." 그녀는 거짓말을 했지만, 심장은 불안하게 뛰었다. 그녀는 저 거대한 분노의 물결이 어디로 흘러갈지, 그리고 그것이 자신과 같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어떤 운명을 가져다줄지 두려웠다.

에티엔은 자신의 방에서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과 노랫소리를 들으며 밤을 지새웠다. 그는 펜을 잡았지만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왕정은 타도되어야 한다. 공화국은 수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폭력의 에너지는 과연 새로운 시대를 건설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말 것인가? 그는 창밖으로 밝아오는 핏빛 여명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1792년 8월 10일의 새벽은 그렇게 밝아오고 있었다. 혁명의 두 번째 막이 오르려 하고 있었다.

제72장: 튈르리 궁의 전투와 학살, 왕권의 종말

1950년 파리. 에티엔 드샹의 일기장은 1792년 8월 10일의 참상을 건조하면서도 섬세한 필치로 기록하고 있었다. 그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근처 건물에서 벌어진 사건의 전말을 똑똑히 목격하고 기록했다. 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된 무자비한 폭력과 학살 앞에서, 법과 이성을 신봉했던 젊은 지식인이 겪었을 충격과 고뇌가 행간마다 배어 나왔다. 역사는 때로 가장 숭고한 이상을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배반한다. 그날 튈르리 궁에서 벌어진 일은 바로 그러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792년 8월 10일 오전, 파리 튈르리 궁>

새벽녘, 튈르리 궁은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봉기 군중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궁궐 담장 너머로는 수만 개의 창과 총구가 번뜩였고, "왕정을 타도하라!"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궁 안의 분위기는 극도의 공포와 혼란 그 자체였다.

루이 16세는 창백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존심 때문에 결사항전을 주장했지만, 왕의 측근들과 온건파 의원들은 왕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 즉시 궁을 떠나 입법 의회로 피신할 것을 간청했다. 결국 왕은 결단을 내렸다.

"짐은… 짐은 프랑스 국민의 피를 흘리게 하고 싶지 않소. 의회로 갑시다." 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고 힘이 없었다.

왕과 왕비, 두 자녀, 그리고 왕의 여동생 엘리자베트 등 왕족 일행은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황급히 궁을 빠져나와 정원을 가로질러 입법 의회 회의장으로 향했다. 그들의 뒷모습은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천 년 역사의 프랑스 왕권이 그 순간,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왕이 떠난 튈르리 궁에는 약 950명의 스위스 용병들과 일부 국민 방위대가 남아 필사적인 방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스위스 용병들은 오랜 전통에 따라 프랑스 왕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정예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맡은 바 임무를 다하기 위해 결연한 표정으로 각자 자리를 지켰다. 붉은 제복과 곰 가죽 모자는 다가올 비극 앞에서 더욱 선명해 보였다.

오전 9시경, 봉기 코뮌 대표단이 궁 안으로 들어와 마지막 협상을 시도했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투항을 거부했다. 잠시 후, 궁궐 광장 쪽에서 총성이 울렸다. 누가 먼저 발포했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지만, 그것은 피비린내 나는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공격! 문을 부수고 안으로 진격하라!" 장 발레는 봉기 군중 선두에서 소리치며 돌격했다. 마르세유 의용군과 상퀼로트들이 함성을 지르며 뒤따랐다.

궁궐 문과 창문에서 스위스 용병들의 일제 사격이 쏟아졌다. 좁은 입구를 통해 몰려들던 혁명군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용병들의 정확하고 침착한 사격은 혁명군의 초기 공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광장은 순식간에 시체와 부상자들로 뒤덮였다.

근처 건물 창가에서 망원경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에티엔은 손을 떨었다. '아, 맙소사… 이 무슨 끔찍한 살육인가!' 그는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참상 앞에서 신음했다. 혁명의 대의가 아무리 숭고하다 한들, 이렇게 많은 피를 흘려야만 하는가? 그의 이상주의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무참히 깨져나가고 있었다.

전투는 몇 시간 동안 격렬하게 계속되었다. 혁명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용병들의 용맹한 저항에 막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점차 혁명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마르세유 의용군이 가져온 대포가 마침내 궁궐 문을 박살 냈고, 시민 편에 가담한 국민 방위대 병사들이 합류하면서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궁궐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혁명군과 스위스 용병들 사이에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총검과 칼, 몽둥이가 난무했고, 비명과 신음 소리가 궁궐 복도를 가득 메웠다. 마침내 스위스 용병들의 저항선은 무너졌다. 일부는 항복했고, 일부는 흩어져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하고 동료들의 죽음에 격분한 혁명 군중에게 자비란 없었다. 그들은 항복한 용병들을 그 자리에서 찔러 죽였고, 부상당한 병사들을 창문 밖으로 내던졌으며, 도망치는 이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살해했다. 장 발레는 이 학살의 현장 한가운데 있었다. 그의 얼굴은 피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눈빛은 승리의 광기로 번뜩였다. 그는 쓰러진 스위스 용병의 시체를 발로 짓밟으며 외쳤다. "압제자의 개들에게 죽음을! 혁명 만세!"

학살이 끝나자, 군중은 궁궐 내부로 몰려들어가 약탈을 시작했다. 화려한 가구와 집기들이 파괴되었고, 왕과 왕비의 개인적인 물품들마저 찢기고 부서졌다. 어떤 이들은 왕의 와인 저장고를 열어 술을 퍼마시며 광란의 축제를 벌였다.

<입법 의회 회의장>

이 모든 혼란과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입법 의회는 마침내 결단을 내려야 했다. 왕족들은 속기사석 뒤 작은 공간에 숨어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의원들은 군중의 압력과 눈앞의 현실 앞에서 더 이상 입헌군주제를 유지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결국 그들은 왕권의 정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왕족을 탕플 탑에 유폐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남성 보통 선거에 의한 새로운 헌법 제정 기구, '국민 공회'를 소집하기로 결의했다.

1792년 8월 10일, 피로 얼룩진 튈르리 궁의 함락은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절대 왕정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된 잔혹한 폭력과 학살은 공화국으로 나아가는 길 위에 짙은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에티엔은 텅 빈 일기장 위에 단 한 문장만을 적었다. "오늘은 이성이 피를 흘린 날이다."

제73장: 9월, 공포와 광기의 시작

1950년 파리. 창밖으로는 전후 복구의 망치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지만, 내 마음은 1792년 9월의 파리가 내뿜던 음산하고 광적인 공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8월 10일 봉기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파리는 또 다른 형태의 공포에 휩싸였다.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내부의 배신자에 대한 의심이 결합되면서, 억눌렸던 민중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는 집단 광기로 변질되어 갔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당시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학살 직전의 병적인 분위기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1792년 8월 말, 파리>

8월 10일 봉기는 분명 혁명의 승리였지만, 그 승리는 불안정한 것이었다. 왕은 폐위되었지만 살아있었고, 입법 의회는 사실상 권위를 잃었으며, 새로 선출될 국민 공회는 아직 구성되지 않았다. 실질적인 권력은 봉기를 주도했던 파리 코뮌과 당통이 이끄는 임시 행정부가 나누어 갖고 있었지만, 그들의 통치력은 불안정했다. 이러한 권력 공백 상태에서 가장 큰 위협은 다시 한번 국경 너머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롱위가 함락되었다!", "적군이 베르됭을 포위했다!", "파리가 다음 목표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진격 소식은 파리 시민들을 극도의 공포 상태로 몰아넣었다. 특히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파리 시민들을 학살하겠다고 협박했던 선언은 사람들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만약 파리가 함락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이러한 외부 위협에 대한 공포는 내부의 적에 대한 의심과 증오로 쉽게 전이되었다. "우리가 전선에 나가 싸우는 동안, 감옥에 갇힌 반역자들이 뒤에서 우리 가족들을 공격할 것이다!", "귀족들과 신부들이 프로이센 놈들과 짜고 폭동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 와 같은 유언비어가 마치 전염병처럼 파리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감옥에 수감된 왕당파 귀족, 선서 거부파 성직자, 그리고 8월 10일 전투에서 살아남은 스위스 용병들은 공공의 적으로 지목되었다.

급진 언론들은 이러한 공포와 증오심을 더욱 부추겼다. 장 폴 마라는 그의 신문 『인민의 벗』에서 연일 피비린내 나는 언어로 '반역자'들에 대한 즉각적이고 무자비한 처단을 요구했다. "기다릴 시간이 없다! 인민의 손으로 직접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감옥으로 가서 저 악당들을 모두 쓸어버려라!"

거리의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상퀼로트들은 무기를 들고 삼삼오오 모여 과격한 구호를 외쳤고, 감옥 주변에는 불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소피 라비뉴는 시장에 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흉흉한 대화에 몸서리를 쳤다. 빵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굶주림과 함께 불안과 증오가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어린 동생 피에르를 돌보며 최대한 집 안에만 머물렀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소피야." 마담 뒤부아는 창밖을 내다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눈에는 핏발만 서 있어. 이러다 정말 큰일 나지 싶다."

에티엔은 이러한 파리의 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깊은 무력감과 혐오감을 느꼈다. 그는 자코뱅 클럽에서조차 '인민의 정의'라는 이름 아래 폭력을 정당화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보며 절망했다. 그는 방에 틀어박혀 책 속에 파묻히려 했지만, 거리의 함성과 불안감은 그의 마음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그는 친구 뤽 모로(만약 아직 파리에 있다면)에게 편지를 썼다.

"뤽, 지금 파리는 이성을 잃었네. 공포가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증오가 그들의 심장을 지배하고 있네. 혁명이 이토록 추악한 얼굴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네. 나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당시 임시 행정부의 수장이자 법무 장관이었던 당통의 태도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그는 학살을 직접 지시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막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8월 28일 의회 연설에서 "조국의 적들을 두렵게 하기 위해, 우리는 대담함, 대담함, 그리고 또 대담함이 필요합니다!"라고 외쳐, 결과적으로 민중의 과격한 행동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는다. 봉기 코뮌의 지도자들 역시 이러한 민중의 분노를 방치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하며, 학살의 비극을 막지 못했다.

파리를 뒤덮은 공포와 광기는 이제 임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내부의 적'에 대한 집단적인 망상은 현실적인 위협과 뒤섞여 폭발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다. 1792년 9월 2일, 몇몇 선서 거부파 성직자들이 호송 도중 군중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억눌렸던 광기는 마침내 터져 나왔다. 지옥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제74장: 감옥 습격, '인민의 정의'인가 학살인가

알랭 마르탱의 노트: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9월 학살에 대해 "인간 정신의 가장 어두운 심연을 목격한 사건"이라고 기록했다. 그가 직접 본 것은 아니었지만, 파리 전역을 휩쓴 공포와 잔혹 행위에 대한 소식들은 그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음이 분명하다. 며칠 동안 이어진 이 집단 학살은 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된 가장 끔찍한 범죄 중 하나로, 혁명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무엇이 '인민의 정의'이고, 무엇이 광기 어린 학살인가? 장 발레와 같은 인물은 이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정당화했을까? 역사가로서 나는 이 끔찍한 사건을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희생된 수많은 개인들의 고통과 공포를 외면할 수 없다.

<1792년 9월 2-6일, 파리 감옥들 (아베이, 카르멜, 라 포르스 등)>

1792년 9월 2일 오후, 파리의 감옥 문들이 무너져 내렸다. 도끼와 쇠망치로 문을 부순 무장한 상퀼로트 군중이 함성을 지르며 감옥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눈빛은 광기와 복수심으로 이글거렸고, 손에는 칼, 몽둥이, 창 등 온갖 종류의 무기가 들려 있었다.

아베이 감옥 안뜰에서는 급조된 '인민 재판소'가 열렸다. 낡은 테이블에 앉은 몇몇 시민들이 자신들을 재판관이라 칭했고, 겁에 질린 간수가 가져온 수감자 명부를 훑어보았다. 수감자들은 차례로 끌려 나와 몇 분간 형식적인 심문을 받았다.

"이름은?", "직업은?", "왜 여기에 갇혔지?", "8월 10일에 어디 있었나?"

대부분의 경우, 변명의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심문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판결은 신속하고 잔인했다. 재판관이 "석방!"이라고 외치면 그것은 감옥 문밖에서 기다리는 '처형 집행인(égorgeurs)'들에게 넘겨진다는 의미였다. 문밖으로 끌려 나간 수감자들은 골목길이나 안뜰에서 군중에게 둘러싸여 무참히 살해되었다. 칼과 창에 찔리고,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카르멜 수도원에 감금되어 있던 150여 명의 선서 거부파 성직자들은 가장 먼저 학살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마지막 기도를 올렸지만, 광포한 군중은 수도원 정원으로 그들을 끌어내어 잔인하게 살해했다. 신앙의 이름으로 순교를 택한 그들의 피가 수도원 뜰을 붉게 물들였다.

라 포르스 감옥에서는 왕비의 절친한 친구였던 랑발 공작 부인이 군중에게 끌려 나와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군중은 그녀의 시신을 능욕하고, 그 머리를 잘라 창끝에 꽂아 탕플 탑 아래까지 행진하며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보여주려 했다. 혁명의 광기는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짓밟는 야만성으로 치달았다.

장 발레는 이 광란의 현장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혁명 위원회의 완장을 차고 군중을 지휘하거나, 혹은 직접 '인민의 심판'에 참여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죄책감보다는, '반역자'들을 처단하는 정의로운 행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확신과 광신적인 열정만이 가득했을 것이다. 옆에서 망설이는 앙투안 루셀에게 그는 이렇게 외쳤을지도 모른다.

"뭘 망설이나, 동지! 저들은 인민의 피를 빨아먹던 흡혈귀들이야! 혁명을 위해서는 저 쓰레기들을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이것은 정의의 실현이다!"

학살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고, 파리의 여러 감옥으로 확산되었다. 희생자는 1,100명에서 1,4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중에는 귀족이나 성직자 외에도 많은 일반 형사범과 부랑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반혁명 용의자'라는 낙인 하나면 충분했다.

에티엔 드샹은 집 안에 갇혀 공포에 떨며 간간이 들려오는 끔찍한 소식들에 귀를 기울였다. 거리에는 시체를 실어 나르는 수레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비명과 총성이 밤낮으로 이어졌다. 그는 자신이 믿었던 혁명이 이런 괴물 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린 현실 앞에서 깊은 절망감과 환멸을 느꼈다. 그는 일기장에 갈겨쓰듯 적었다.

"지옥. 파리는 지옥이 되었다. 자유와 이성을 외치던 도시가 피의 광기로 미쳐 날뛰고 있다. 인간이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신이시여, 우리를 버리셨나이까? 아니, 어쩌면 신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 야만의 시대에 나는 무엇을 기록해야 하는가? 침묵만이 유일한 미덕인가?"

정부와 파리 코뮌의 지도자들은 이 걷잡을 수 없는 폭력을 막으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민중의 분노를 이용하여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려 했거나, 혹은 단순히 그 광기를 통제할 힘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침묵과 방관 속에서, 9월 학살은 프랑스 혁명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피의 얼룩을 남겼다.

제75장: 발미의 포성, 공화국의 기적

1950년 파리. 9월 학살의 참혹한 기록 다음 페이지에 나타난 '발미(Valmy)'라는 지명은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비추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절망과 공포가 파리를 뒤덮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 프랑스 동북부의 작은 마을에서 들려온 승전보는 프랑스 혁명의 운명을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발미 전투를 단순한 군사적 승리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공화국에 새로운 생명과 희망을 불어넣은 '기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는 그의 글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감격과 안도감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본다.

<1792년 9월 20일, 프랑스 동북부 발미 근처 풍차 언덕>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1792년 9월 20일 새벽, 발미 근처 언덕 위에는 프랑스 혁명군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며칠 전 베르됭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파리를 공포로 몰아넣었고,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강력한 프로이센군은 파리를 향해 거침없이 진격하고 있었다. 샤를 뒤무리에 장군과 프랑수아 켈레르만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이곳, 풍차 언덕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적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뒤부아 대위는 부하 병사들의 진열을 점검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병사들의 얼굴에는 불안과 피로가 역력했다. 대부분은 훈련 부족한 의용군이거나 징집된 지 얼마 안 된 신병들이었다. 반면, 언덕 아래 펼쳐진 프로이센군은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부터 유럽 최강으로 명성을 떨친 정예 부대였다.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의 차이. 승산은 없어 보였다.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르겠군.' 뒤부아 대위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옆에 서 있던 젊은 의용군 피에르 뒤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낡은 소총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오전,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프로이센군의 본격적인 포격이 시작되었다. 육중한 대포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고, 포탄이 프랑스군 진지 주변에 작렬하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프랑스군 포병대도 즉각 응사를 시작했다. 귀족 장교들이 대거 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보발(Gribeauval) 시스템으로 개량된 프랑스 포병대의 성능은 예상외로 뛰어났고, 포병들의 숙련된 솜씨와 혁명적 사기는 프로이센군을 놀라게 했다.

"쏴라! 공화국을 위하여! 저 폭군들에게 우리의 맛을 보여줘라!" 포병 장교의 외침과 함께 포탄이 쉴 새 없이 발사되었다.

치열한 포격전은 몇 시간 동안 이어졌다. 프로이센 보병대는 공격 명령을 기다렸지만, 프랑스군의 예상 밖의 격렬한 저항과 굳건한 방어 태세 앞에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군의 사기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바로 그때, 프랑스군 진영 한가운데서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노장 켈레르만 장군이 자신의 모자에 삼색 코케이드를 꽂고 칼을 번쩍 치켜들며 말 위에서 외쳤다.

"국민 만세!(Vive la Nation!)"

그의 목소리는 포성을 뚫고 병사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순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수만 명의 프랑스 병사들이 일제히 자신의 모자를 흔들고 총검을 치켜들며 함성을 질렀다.

"국민 만세! 공화국 만세!"

그 함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고, 그 속에는 조국을 지키겠다는 불굴의 의지와 혁명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훈련이나 장비의 열세를 뛰어넘는 강력한 힘, 바로 혁명 프랑스의 '정신'이었다.

프로이센군은 이 예상치 못한 혁명적 사기에 압도되었다. 그들은 전투 의지를 상실한 듯 보였고,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결국 무의미한 희생을 피하기 위해 총공격을 포기하고 군대를 후퇴시키기로 결정했다.

프랑스군 진영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믿을 수 없는 승리를 거둔 것이다. 피에르 뒤퐁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동료들과 얼싸안았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가슴 벅찬 감격과 자부심이 그 자리를 채웠다. 뒤부아 대위 역시 굳은 표정을 풀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직 희망은 있다. 우리 프랑스는 쓰러지지 않는다.'

이 전투를 프로이센군 진영에서 참관하고 있던 괴테는 훗날 이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오늘 이곳에서, 그리고 이날부터 세계 역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며칠 뒤, 에티엔 드샹은 파리에서 발미 전투 승리 소식을 들었다. 9월 학살의 참혹함 속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던 그에게, 이 소식은 꺼져가던 혁명의 불씨를 되살리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는 일기장에 희망을 담아 적었다.

"발미! 절망의 늪에서 피어난 기적 같은 승리! 비록 혁명의 길은 여전히 피로 얼룩져 있지만, 오늘 우리는 공화국을 지켜낼 힘과 용기가 우리 안에 있음을 확인했다. 프랑스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공화국 만세!"

발미에서의 포성은 단순히 전투의 승리를 알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공화국의 탄생을 예고하고, 혁명의 역사가 계속될 것임을 알리는 우렁찬 함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