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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M으로 뽑은 잡지식

0.1 Ver.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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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부: 공포정치의 절정과 혁명의 자기 파괴 (1793년 겨울 - 1794년 봄)

제81장: 운명의 표결, 왕의 사형 결정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일기장은 1793년 1월, 국민 공회(Convention Nationale) 회의장의 숨 막히는 공기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폐위된 왕, 이제 '시민 루이 카페'라 불리는 한 남자의 운명을 결정짓는 표결. 그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생사를 가르는 것을 넘어, 프랑스 혁명의 향방, 나아가 유럽 전체의 역사를 뒤흔들 만한 무게를 지닌 결정이었다. 나는 그의 기록을 따라, 2만 자가 넘는 잉크 자국 속으로, 그 운명적인 표결의 순간으로 들어선다. 그의 글씨는 평소보다 더 떨리고 있었고, 문장 곳곳에는 깊은 고뇌와 역사의 격랑 앞에서 선 한 지식인의 무력감이 배어 있었다.

"1793년 1월 15일. 국민 공회 회의장은 인간의 모든 감정이 뒤엉켜 끓어오르는 용광로와 같았다. 희망과 공포, 분노와 연민, 확신과 회의가 뒤섞여 웅성거렸다. 왕의 유죄는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문제는 형량이었다. 오늘부터 시작된 형량 표결은 단순한 투표가 아니었다. 그것은 각 의원이 자신의 신념과 정치적 생명을 거는, 프랑스의 미래를 결정짓는 행위였다."

<1793년 1월 15일 저녁, 파리 국민 공회 회의장 (Salle du Manège)>

늦은 밤까지 이어진 회의장은 수백 개의 촛불과 의원들, 그리고 방청석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내뿜는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의장석에서는 베르뇨(Vergniaud), 지롱드파의 유려한 웅변가가 긴장된 표정으로 의원들의 이름을 차례로 호명했다. 프랑스 혁명 사상 유례없는 공개 호명 투표(vote par appel nominal) 방식이었다. 각 의원은 연단에 올라 자신의 선택과 그 이유를 밝혀야 했다. 압력과 공포가 회의장을 지배했다. 방청석의 상퀼로트들은 사형을 외치며 반대 의견을 가진 의원들에게 야유와 협박을 퍼부었다.

에티엔은 방청석 한구석, 평소 즐겨 앉던 자리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법률가로서 이 재판 절차 자체에 깊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국민 공회가 입법 기관이자 동시에 재판관 역할을 하는 것이 과연 법치주의 원칙에 맞는가? 왕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반 시민과 다른 재판 절차를 적용하는 것은 평등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가?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이런 법리적 고뇌와 함께, 공화주의자로서 왕의 존재 자체가 공화국의 안정에 위협이 된다는 현실적인 인식 사이에서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왕은 죽어야 공화국이 산다'는 생쥐스트의 냉혹한 논리가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시민 마라(Marat)! 당신의 표결은 무엇입니까?"

'인민의 벗' 마라가 연단에 올랐다. 그는 피부병 때문에 목욕통에 몸을 담근 채 집무하는 기인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날카로운 눈빛과 증오에 찬 목소리는 여전히 군중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나는 저 폭군 루이 카페의 죽음을 요구한다! 24시간 내에! 인민의 배신자는 오직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 그의 외침에 방청석에서 열광적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뒤이어 지롱드파의 지도자 브리소(Brissot)가 연단에 섰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목소리에는 아직 힘이 남아 있었다. "나는 루이의 유죄를 인정한다. 그러나 사형은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다. 이는 유럽 전체를 우리 공화국의 적으로 만들 것이며, 프랑스를 내전의 참화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나는 국민 투표를 통해 그의 운명을 결정할 것을 제안한다." 지롱드파 의원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지만, 산악파와 방청석의 야유 소리에 곧 묻혀버렸다.

에티엔은 브리소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왕의 처형이 가져올 국내외적 파장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왕이 살아있는 한 왕당파의 반혁명 음모는 계속될 것이며, 공화국은 결코 안정될 수 없으리라는 불안감도 떨칠 수 없었다. 어느 쪽이 옳은가? 어느 쪽이 프랑스를 위한 길인가? 그의 고뇌는 깊어만 갔다.

표결은 밤새도록, 그리고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36시간이 넘는 마라톤 회의였다. 의원들은 지쳐갔고, 회의장은 담배 연기와 땀 냄새, 그리고 극도의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각 의원이 연단에 올라 자신의 선택을 밝힐 때마다 회의장은 환호와 야유로 뒤덮였다.

"시민 로베스피에르!"

'부패할 수 없는 자' 로베스피에르가 차분한 표정으로 연단에 올랐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형 제도를 반대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한 개인이 아닌, 공화국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다. 루이는 왕이었기에 죽어야 한다. 그의 존재 자체가 공화국에 대한 위협이기 때문이다. 나는 루이의 사형을 요구한다." 그의 논리는 냉철했고, 방청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에티엔은 로베스피에르의 주장에 담긴 냉혹한 현실 인식에 섬뜩함을 느꼈다. 혁명의 이름 아래, 법과 인간적인 연민이 어떻게 무시될 수 있는지 그는 똑똑히 보고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순간은 왕의 사촌이자 혁명 초기부터 급진적인 입장을 보였던 오를레앙 공작, 이제는 '필리프 에갈리테(Philippe Égalité, 평등 필리프)'라 불리는 인물이 연단에 올랐을 때였다. 모두가 그의 선택을 주목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나의 양심과 신념에 따라, 나는… 사형에 투표한다."

회의장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가, 이내 경악과 분노, 혹은 박수갈채가 뒤섞인 함성으로 폭발했다. 자신의 혈육에게 사형을 선고한 그의 행동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혐오감을 안겨주었다.

표결은 계속되었다. 사형, 유예 있는 사형, 추방, 종신 금고…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지만, 결국 초점은 즉각적인 사형 집행 여부로 모아졌다. 마지막 의원의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시작되었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의장이 마침내 결과를 발표했다.

"총 투표수 721표. 조건 없는 사형 찬성 387표. 유예 있는 사형 및 다른 형벌 334표. 근소한 차이로… 루이 카페의 사형이 결정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순간, 회의장은 폭발했다. 산악파 의원들과 방청석의 상퀼로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던지며 "공화국 만세!"를 외쳤다. 지롱드파 의원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에티엔은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어 비틀거리며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그의 귀에는 군중의 광적인 함성 소리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혁명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피의 강을 건너고 있었다.

제82장: 1월 21일, 단두대 위의 왕관

알랭 마르탱의 성찰: 왕의 죽음. 그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었다. 천 년 이상 프랑스를 지배해 온 절대 왕정이라는 거대한 상징의 죽음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그날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그 끔찍한 광경을 차마 기록할 수 없었거나, 혹은 깊은 환멸 속에서 펜을 놓아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훗날, 소피 라비뉴로부터 그날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짧게 메모를 남겼다. 소피의 시선으로 본 루이 16세의 처형 장면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는 그녀의 눈을 통해, 혁명의 가장 잔혹하고 상징적인 순간을 재구성해 본다.

<1793년 1월 21일 오전, 파리 탕플 탑 / 혁명 광장>

1793년 1월 21일 새벽, 파리의 공기는 유난히 차갑고 무거웠다. 탕플 탑에 유폐되어 있던 루이 16세는 마지막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는 자신의 고해 신부인 아일랜드 출신 에지워스 드 피르몽(Edgeworth de Firmont) 신부와 함께 조용히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모셨다. 그의 얼굴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깊은 체념과 종교적인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며칠 전 사랑하는 가족들(왕비, 아들, 딸, 여동생)과 눈물로 마지막 작별을 나누었다. "부디 나를 위해 울지 말고, 프랑스를 위해 기도해 주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당부였다.

오전 8시경, 파리 코뮌의 지휘관 상테르(Santerre)가 왕을 데리러 왔다. 왕은 에지워스 신부와 함께 굳게 닫힌 녹색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탕플 탑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혁명 광장(오늘날의 콩코드 광장)까지 이르는 길 양편에는 수만 명의 국민 방위대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고, 그 뒤로는 수십만 명의 파리 시민들이 침묵 속에서 마차를 지켜보고 있었다.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며 어떤 외침이나 소요도 억눌렀다. 파리는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 잠겨 있었다.

소피 라비뉴는 이웃인 마담 뒤부아와 함께 일찍부터 혁명 광장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는 왕의 처형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마담 뒤부아가 "역사의 현장을 직접 봐야 한다"며 억지로 끌고 나온 터였다. 광장은 이미 발 디딜 틈 없이 군중으로 가득 차 있었고, 중앙에는 섬뜩한 모습의 단두대(Guillotine)가 하늘을 향해 세워져 있었다. 소피는 차마 단두대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녀의 심장은 세차게 뛰었고, 속이 메슥거렸다.

"저기 온다!" 누군가 외쳤다. 군중의 시선이 일제히 마차가 들어오는 방향으로 쏠렸다. 마침내 녹색 마차가 광장 중앙의 처형대 앞에 멈춰 섰다. 마차 문이 열리고, 루이 16세가 에지워스 신부의 부축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평소처럼 위엄을 잃지 않으려 애썼지만,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잠시 군중을 둘러보더니, 처형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형대 위에서 그는 자신을 묶으려는 사형 집행인 샤를 앙리 상송(Charles-Henri Sanson)의 손길을 뿌리치고, 군중을 향해 무언가 외치려 했다.

"프랑스 국민들이여, 나는 결백하게 죽는다! 나의 피가…"

그러나 그의 마지막 말은 상테르의 명령에 따라 울리기 시작한 요란한 북소리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왕은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사형 집행인들이 그의 손을 뒤로 묶고,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그는 순순히 단두대 아래 판자 위에 엎드렸다. 목을 고정하는 나무틀이 닫히고, 상송은 칼날을 지탱하는 밧줄을 끊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쿵!'

무거운 칼날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끝났다. 상송의 조수가 잘린 왕의 머리를 들어 올려 군중에게 내보였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끔찍한 광경 앞에서, 군중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공화국 만세!", "폭군이 죽었다!" 일부는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모자를 공중으로 던졌다. 어떤 이들은 손수건을 꺼내 왕의 피를 적시기도 했다. 혁명의 완성, 압제의 종식을 축하하는 광적인 함성이 광장을 뒤덮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많은 사람들은 차마 그 광경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거나 눈물을 흘렸다. 소피는 옆에서 마담 뒤부아가 성호를 긋는 것을 보았다. 그녀 자신은 숨이 막히고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끼며 결국 군중 속에서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그 잔혹함 앞에서, 그녀는 깊은 공포와 함께 알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천 년 이상 프랑스를 지배했던 왕정은 그렇게 단두대의 칼날 아래 물리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혁명은 가장 상징적인 적을 제거했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지울 수 없는 피를 묻혔다. 왕의 죽음은 프랑스 내부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유럽 전체를 프랑스의 적으로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공화국은 피의 세례 속에서 탄생했지만, 그 앞날은 더욱 험난한 가시밭길을 예고하고 있었다.

제83장: 내우외환, 공화국 최대 위기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일기장은 1793년 봄, 프랑스 제1공화국이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불안과 절망이 뒤섞인 어조로 기록하고 있다. 왕의 처형은 유럽 군주들에게 혁명 프랑스에 대한 공동 대응의 명분을 제공했고, 국내에서는 반혁명 봉기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에티엔은 파리에서 이러한 내우외환의 소용돌이를 지켜보며,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공화국이 과연 이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 깊은 회의에 빠져들고 있었다.

<1793년 1월 말 - 봄, 파리 국민 공회 / 프랑스 국경 / 지방 도시>

루이 16세의 처형 소식은 전 유럽의 왕궁들을 충격과 분노로 뒤흔들었다. 프랑스 혁명은 더 이상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유럽 전체의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전염병'으로 간주되었다. 영국의 수상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the Younger)는 프랑스 혁명의 과격성을 비난하며 외교 관계 단절을 선언했고, 곧이어 네덜란드, 스페인, 사르데냐 왕국, 나폴리 왕국 등이 차례로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미 전쟁 중이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이들은 제1차 대프랑스 동맹(First Coalition)을 결성하여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군사적으로 완전히 고립시키려 했다.

프랑스는 이제 사면초가의 위기에 놓였다. 모든 국경선에서 연합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북부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이 벨기에를 다시 침공했고, 동부에서는 프로이센군이 라인란트를 압박했으며, 남부에서는 스페인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새로 창설된 공화국 군대는 여전히 준비 부족과 지휘 체계 혼란에 시달렸고, 연이은 패배 소식이 파리로 날아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발미 전투의 영웅이었던 뒤무리에 장군마저 네덜란드 침공 실패 이후 공화국을 배신하고 오스트리아로 투항하는 사건(1793년 4월)이 발생하자, 군에 대한 불신과 반역자에 대한 공포는 극에 달했다.

국민 공회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30만 명 추가 징집령을 내렸지만, 이는 오히려 국내의 반혁명 움직임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독실한 가톨릭 신앙과 왕정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서부 방데 지역에서는 징집령과 성직자 추방에 대한 반발이 대규모 농민 봉기로 폭발했다(1793년 3월). '가톨릭 왕군'을 조직한 방데의 반란군은 공화국 군대를 격파하고 여러 도시를 점령하며 파리를 위협하는 심각한 내전 상황을 초래했다.

방데뿐만이 아니었다. 리옹, 마르세유, 보르도, 툴롱 등 주요 지방 도시들에서도 중앙 정부(특히 파리 자코뱅 세력)의 급진적인 정책과 권력 집중 시도에 반발하는 '연방주의(Fédéraliste)' 반란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롱드파 축출에 반대하며 지방의 자율성과 온건 공화정을 요구했지만, 산악파는 이를 공화국을 분열시키려는 반혁명 행위로 간주했다.

파리 내부 상황도 최악이었다. 아시냐 가치의 폭락은 멈추지 않았고, 인플레이션은 극심했으며, 식량 부족은 일상적인 고통이었다. 상퀼로트들은 연일 거리로 몰려나와 최고가격제 실시, 투기꾼 처벌 등 급진적인 경제 통제를 요구하며 국민 공회를 압박했다.

에티엔은 이 모든 혼란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공화국이 탄생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안팎으로 붕괴 직전의 위기에 처한 현실 앞에서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세운 공화국은 마치 폭풍우 속의 난파선과 같네. 밖에서는 유럽 전체가 우리를 향해 포화를 퍼붓고 있고, 안에서는 반란과 기근, 그리고 끝없는 정치 투쟁이 배를 침몰시키려 하고 있네. 혁명의 이상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과연 이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때로는 모든 것이 헛된 꿈이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네."

공화국은 탄생과 동시에 가장 혹독한 시련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 총체적인 위기 상황 속에서, 국민 공회 내 산악파는 공화국 수호와 혁명 완수라는 명분 아래 더욱 강력하고 비상적인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한다. 바로 공포정치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84장: "신과 왕을 위해!", 방데의 처절한 항전

알랭 마르탱의 시선: 프랑스 혁명사를 연구할 때, 파리 중심의 서술에서 벗어나 지방의 목소리, 특히 혁명에 저항했던 이들의 시각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필수적이다. 방데(Vendée) 반란은 단순한 왕당파의 반란이 아니었다. 그것은 혁명이 가져온 급격한 변화, 특히 전통적인 종교 질서와 공동체 유대에 대한 공격에 맞서 자신들의 신앙과 삶의 방식을 지키려 했던 농민들의 처절한 항전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파리 부르주아 지식인으로서 방데 반란을 '광신적인 반혁명'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그의 기록 속 단편적인 정보들과 다른 사료들을 통해 프랑수아 모렐과 같은 인물들이 느꼈을 복잡한 감정과 동기를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1793년 3월 이후, 프랑스 서부 방데 지역>

방데의 푸른 들판과 울창한 숲은 이제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변해가고 있었다. 파리에서 온 '혁명'이라는 이름의 낯선 바람은 이곳 독실하고 보수적인 농민들에게는 재앙과도 같았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지역 공동체와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왔다. 그들에게 신부님은 정신적 지주이자 삶의 안내자였고, 멀리 있는 왕은 하느님이 세우신 신성한 존재였다.

그러나 혁명 정부는 그들의 삶의 근간을 흔들었다.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신부들에게 낯선 '시민 선서'를 강요했으며, 이를 거부하는 신부들을 추방했다. 클레망 신부와 같은 양심적인 성직자(이 지역에서는 대부분 선서를 거부했다)들은 숨어 지내야 했고, 미사는 비밀리에 드려졌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모독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결정적인 도화선은 1793년 2월에 내려진 30만 명 징집령이었다. 젊은이들을 혁명 전쟁터로 끌고 가려는 파리 정부의 명령에 방데 농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왜 우리가 파리의 무신론자들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하는가?", "우리의 아들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 없다!"

프랑수아 모렐은 마을 광장에 모인 성난 농민들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온 평범한 농민이었지만, 지역 사회에서 신망이 두터웠고 신앙심이 깊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형제들이여! 저 파리 놈들은 우리의 하느님을 모독하고, 우리의 왕을 죽였으며, 이제 우리의 아들들마저 빼앗으려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가족, 그리고 우리의 왕을 위해 싸웁시다!"

그의 외침에 농민들은 열광적으로 호응했다. 그들은 낡은 사냥총, 쇠스랑, 낫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곧이어 인근 마을에서도 봉기가 일어났고, 흩어져 있던 선서 거부파 신부들과 혁명을 피해 숨어 지내던 왕당파 귀족들이 봉기의 지도부로 합류했다. '가톨릭 왕군(Armée catholique et royale)'이 결성되었다. 그들의 깃발에는 예수 성심(Sacré-Cœur)과 부르봉 왕가의 백합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초기 방데 반란군의 기세는 놀라웠다. 그들은 지역 지형에 익숙했고, 신앙과 공동체를 지키려는 열정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들은 게릴라 전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며 파견된 공화국 군대('청군(les Bleus)'이라 불렸다)를 연이어 격파하고, 쇼레(Cholet), 소뮈르(Saumur) 등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 프랑수아 모렐은 뛰어난 용기와 지도력으로 자신의 마을 부대를 이끌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그는 전투 전에 항상 클레망 신부의 친구인 지역 선서 거부파 신부에게 축복 기도를 받았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를 보호하실 것이다!" 전투에 나서는 농민 병사들의 함성은 단순한 군사적 구호가 아니라 깊은 신앙 고백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점차 잔혹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공화국 정부는 방데 반란을 단순한 소요가 아닌, 공화국의 존립을 위협하는 심각한 내전으로 간주하고 강경 진압을 결정했다. 공안위원회는 서부 지역에 강력한 군대를 파견했고, "방데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화국 군대는 초토화 작전을 방불케 하는 잔혹한 진압을 시작했다. 마을은 불태워졌고, 농작물은 약탈당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학살이 자행되었다('지옥 종대(colonnes infernales)').

방데 반란군 역시 공화국 군인 포로나 혁명 지지자들을 잔인하게 처형하는 등 보복에 나섰다. 한때 평화로웠던 시골 마을은 이제 증오와 복수, 그리고 끝없는 폭력이 지배하는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프랑수아 모렐은 초기 승리의 기쁨 속에서도 점차 전쟁의 참혹함과 자신의 손에 묻은 피 때문에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신앙의 이름으로 시작된 싸움이 과연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 그는 밤마다 고뇌하며 기도했다. 그러나 전쟁의 광기는 이미 그와 그의 공동체를 깊은 비극 속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방데의 항전은 프랑스 혁명의 가장 어둡고 슬픈 이면 중 하나로 기록될 운명이었다.

제85장: 공안위원회와 혁명 재판소, 공포의 엔진

알랭 마르탱의 생각: 위기는 종종 권력의 집중과 예외적인 조치를 정당화하는 명분이 된다. 1793년 봄, 내우외환의 총체적 위기에 직면한 프랑스 공화국이 공안위원회(Comité de salut public)와 혁명 재판소(Tribunal révolutionnaire)라는 강력한 기구를 창설한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비상 기구들이 점차 상설화되고 권한이 비대해지면서, 그것들은 위기 극복의 도구를 넘어 공포 정치의 핵심 엔진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이 기구들의 탄생 과정을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며, 혁명의 이름 아래 자유와 법치가 어떻게 질식될 수 있는지 예감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담고 있다.

<1793년 3-4월, 파리 국민 공회 / 튈르리 궁>

국민 공회는 연일 계속되는 비상 상황 속에서 위기 타개책 마련에 골몰했다. 뒤무리에 장군의 투항 소식은 의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고, 군 지휘부에 대한 불신과 내부 반역자에 대한 공포를 극대화시켰다. 방데 반란 소식은 공화국이 내부로부터 붕괴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위협을 각인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강력하고 효율적인 행정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지금은 평상시가 아니다! 공화국이 존망의 기로에 서 있다! 우리는 모든 권한을 집중하여 위기에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는 강력한 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 산악파의 조르주 당통이 특유의 웅변으로 의원들을 설득했다. 그는 초기에는 지롱드파와의 타협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위기가 심화되면서 비상조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지롱드파는 여전히 권력 집중에 대한 우려를 표했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1793년 4월 6일, 국민 공회는 행정, 입법, 군사 등 국정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감독권과 집행권을 행사하는 9인(이후 12인으로 확대)의 '공안위원회'를 창설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초기 공안위원회에는 당통과 바레르(Barère) 등 비교적 온건한 인물들이 포함되었으나, 이들은 위기 상황을 효과적으로 수습하지 못했다. 이후 지롱드파 축출(6월)과 로베스피에르의 위원회 참여(7월)를 거치면서 공안위원회는 점차 산악파 급진 세력이 장악하는 혁명 정부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 기구로 변모하게 된다.

공안위원회 창설에 앞서, 3월 10일에는 '혁명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이는 반혁명 음모와 '공화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행위'를 신속하게 심판하기 위한 특별 재판소였다. 당통은 이 재판소 설치를 주장하며 "끔찍한 짓을 하자, 그러면 인민이 끔찍한 짓을 저지르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9월 학살과 같은 민중의 자의적인 폭력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혁명 재판소는 설립 초기부터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는 도구로 활용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검사로는 악명 높은 앙투안 푸키에-탱빌(Antoine Fouquier-Tinville)이 임명되었고, 재판 절차는 일반 형사 재판보다 훨씬 간소화되었으며, 판결에 대한 상소는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중앙 기구들과 함께, 파리의 각 구(Section)와 지방 코뮌에는 '감시위원회(Comités de surveillance)'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회들은 지역 내 외국인과 반혁명 용의자들을 감시하고 체포 영장을 발부할 권한을 가졌다. 감시위원회는 상퀼로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통로가 되었지만, 동시에 밀고와 자의적인 체포를 남발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에티엔 드샹은 이러한 비상 기구들의 창설 소식을 들으며 깊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공화국 수호의 필요성에는 동의했지만, 법치주의와 인권이라는 혁명의 근본 원칙들이 위기라는 명분 아래 너무 쉽게 훼손되는 것을 우려했다.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공안위원회, 혁명 재판소, 감시위원회… 이름만 들어도 섬뜩한 기구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위기 극복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로마 공화정 말기의 비상 대권 남용과 독재로 가는 길을 열어젖히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혁명의 적을 처단한다는 명분 아래, 혁명 자신이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푸키에-탱빌 같은 자가 정의의 이름으로 칼을 휘두르게 될 미래가 심히 걱정스럽다."

에티엔의 우려는 곧 현실이 될 터였다. 공안위원회와 혁명 재판소는 처음에는 위기 대응 기구로 출발했지만, 점차 혁명 정부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며 사회 전체를 통제하는 공포 정치의 핵심 엔진으로 작동하게 된다. 공포의 시대는 이제 그 제도적 장치들을 갖추고 본격적인 가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86장: 6월 2일, 지롱드파의 최후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일기장은 1793년 6월 2일, 국민 공회에서 벌어진 사건을 '의회 민주주의의 죽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지롱드파와 산악파 간의 치열했던 권력 투쟁이 결국 파리 상퀼로트의 무력 압력 앞에서 힘의 논리로 귀결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방청석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민중의 직접 행동이라는 혁명의 동력이 어떻게 의회 주권이라는 또 다른 혁명의 원칙을 짓밟을 수 있는지, 그 위험한 역설을 목격하고 기록했다.

<1793년 5월 말 - 6월 2일, 파리 국민 공회 회의장 및 주변>

1793년 봄, 프랑스는 최악의 위기 상황이었다. 외부에서는 동맹군의 침공이 계속되었고, 내부에서는 방데 반란과 연방주의 반란이 확산되고 있었으며, 경제난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대립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산악파는 지롱드파가 위기 수습에 무능하고, 심지어 반혁명 세력과 결탁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그들의 축출을 요구했다. 특히 파리 코뮌과 상퀼로트 조직은 지롱드파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5월 31일, 파리 코뮌의 지휘 아래 수만 명의 상퀼로트들이 국민 공회를 포위했다. 그들은 주요 지롱드파 의원들의 체포와 최고가격제 실시 등 급진적인 요구 사항을 내걸었다. 국민 공회 의원들은 공포에 휩싸였지만,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에티엔은 방청석에서 이 살벌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창밖으로는 무장한 상퀼로트들의 함성이 들려왔고, 회의장 안에서는 지롱드파와 산악파 의원들 간의 격렬한 고성이 오갔다.

"이것은 폭력이다! 파리 코뮌이 국민의 대표 기관인 공회를 협박하고 있다!" 지롱드파의 베르뇨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협박이 아니다! 이것은 파리 인민의 정당한 요구다! 반역자들을 의회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공화국은 파멸할 것이다!" 마라가 특유의 날카로운 목소리로 받아쳤다.

로베스피에르는 비교적 차분한 어조였지만 내용은 단호했다. "지롱드파 동지들은 더 이상 인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공화국을 위한 길이다."

며칠간의 대치와 혼란 끝에, 6월 2일 일요일 아침, 상황은 결정적인 국면을 맞았다. 상퀼로트가 장악한 국민 방위대 사령관 프랑수아 앙리오(François Hanriot)는 약 8만 명의 무장 병력과 150문의 대포로 국민 공회를 완전히 포위했다. 그는 의회 출입구를 봉쇄하고, 지롱드파 의원 29명의 체포를 요구하는 코뮌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포위를 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의회 의장 엘로-세셸(Hérault de Séchelles)은 의원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포위망을 뚫으려 시도했지만, 앙리오는 "인민은 반역자들을 원한다! 대포 발사 준비!"라고 외치며 위협했다. 의원들은 굴욕적으로 회의장 안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에티엔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군대가 의회를 포위하고 의원들을 협박하는 모습은 명백한 쿠데타였다. 민중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 폭력 앞에서, 법과 민주주의 원칙은 무력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결국 국민 공회는 압력에 굴복했다. 산악파 의원 쿠통(Couthon)의 제안에 따라, 브리소, 베르뇨, 페티옹 등 주요 지롱드파 의원 29명에 대한 체포(또는 가택 연금) 동의안이 통과되었다. 지롱드파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체포되거나 도주했다. 이로써 산악파는 국민 공회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장 발레는 공회 밖에서 동료 상퀼로트들과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가 해냈다! 인민이 승리했다! 이제 진정한 혁명이 시작될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승리의 기쁨과 함께, 앞으로 다가올 '반역자'들에 대한 철저한 숙청에 대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에티엔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회의장을 나섰다. 그의 마음속에는 깊은 슬픔과 함께, 혁명의 미래에 대한 어두운 예감이 자리 잡았다. '민중의 힘이 의회를 굴복시켰다. 이것이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인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독재로 가는 길인가? 지롱드파의 몰락은 공화국에 과연 축복일까, 아니면 재앙의 시작일까?' 그는 답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1793년 6월 2일, 프랑스 혁명은 또 한 번의 중요한 분기점을 넘어섰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권력을 장악한 산악파는 자신들의 이상과 방식으로 공화국을 이끌어갈 것이고, 그 길 위에는 더 많은 피와 눈물이 예고되어 있었다.

제87장: 마라 암살, 순교 신화와 복수의 칼날

1950년 파리. 역사 속 개인의 행동이 때로는 예측 불가능한 거대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1793년 7월 13일,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라는 젊은 여성이 '인민의 벗' 장 폴 마라를 암살한 사건은 바로 그러한 예이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 사건에 대해 "광신이 또 다른 광신을 낳은 비극"이라고 짧게 평했지만, 그 파장은 실로 엄청났다. 마라의 죽음은 그를 혁명의 순교자로 만들었고, 공포 정치를 더욱 강화하며 지롱드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을 정당화하는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다.

<1793년 7월 13일, 파리 마라의 집 / 코르들리에 거리>

노르망디 캉(Caen) 출신의 젊은 여성 샤를로트 코르데는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루소와 플루타르코스를 탐독하며 공화주의 이상을 키워왔다. 그녀는 파리에서 추방된 지롱드파 의원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온건한 공화주의에 공감했고, 마라를 비롯한 산악파 급진주의자들이 프랑스를 내전과 공포로 몰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특히 마라의 선동적인 신문 『인민의 벗』이 증오와 폭력을 부추긴다고 생각한 그녀는, 마라 한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프랑스를 구할 수 있다는 위험하고도 순진한 결심을 하게 된다.

1793년 7월 초, 코르데는 홀로 파리로 잠입했다. 그녀는 며칠간 마라의 행방을 수소문했고, 마침내 그가 심각한 피부병 때문에 집 욕조에서 약물 목욕을 하며 집무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7월 13일 저녁, 그녀는 칼을 숨기고 코르들리에 거리에 있는 마라의 집을 찾아갔다.

마라의 동거녀이자 헌신적인 동지였던 시몬 에브라르(Simone Évrard)는 낯선 젊은 여성의 방문을 경계했지만, 코르데는 "캉에서 온 반역자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다"고 속여 마라와의 면담을 허락받았다.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서류를 보고 있던 마라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몸은 끔찍한 피부병으로 고통받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캉에서 왔다고 했소? 반역자들의 이름은 무엇이오?" 마라가 물었다.

코르데는 준비해 온 가짜 명단을 읽는 척하며 욕조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숨겨둔 칼을 꺼내 망설임 없이 마라의 심장을 찔렀다.

"악!" 짧은 비명과 함께 마라는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시몬 에브라르의 절규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달려왔을 때, 마라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코르데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마라의 죽음 소식은 삽시간에 파리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상퀼로트들은 자신들의 영웅이자 대변자를 잃었다는 생각에 격분했다.

"마라 동지가 살해당했다!", "지롱드파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다!", "복수다! 반역자들에게 복수를!"

코르들리에 클럽과 자코뱅 클럽은 즉시 마라를 혁명의 위대한 순교자로 추앙하는 대대적인 선전 활동에 나섰다. 장 발레는 슬픔과 분노로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는 군중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인민의 벗, 우리의 아버지 마라가 저 교활한 지롱드 독사들의 손에 돌아가셨다! 우리는 그의 피를 헛되이 흘리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름으로 맹세컨대, 모든 반역자들을 찾아내 단두대로 보낼 것이다! 복수! 오직 복수만이 마라 동지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다!"

샤를로트 코르데는 혁명 재판소에 회부되었다. 그녀는 재판 과정 내내 당당하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며 자신의 행동이 조국을 위한 것이었음을 강변했다. "나는 한 사람을 죽여 십만 명을 구했습니다. 나는 평화를 위해 폭군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7월 17일, 그녀는 붉은 죄수복을 입고 처형장으로 향하는 수레 위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과 비장한 최후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그것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한편,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는 마라의 죽음을 혁명의 성스러운 순교 장면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마라의 시신을 직접 찾아가 스케치했고, 곧이어 <마라의 죽음(La Mort de Marat)>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완성했다. 이 그림은 욕조에 쓰러진 마라의 모습을 고전적인 영웅처럼 숭고하고 비극적으로 묘사하며, 혁명의 순교자 신화를 시각적으로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라의 암살은 결과적으로 산악파와 공포 정치 세력에게 더없이 좋은 정치적 선물이 되었다. 그들은 마라의 죽음을 빌미로 지롱드파 잔존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고, 반혁명 용의자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더욱 강화하는 법령들을 통과시켰다. '인민의 벗' 마라의 피는 역설적이게도 공포 정치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는 데 사용되었다. 복수의 칼날은 이제 프랑스 전역을 피로 물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88장: 공포 정치 강화, 단두대는 멈추지 않는다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일기장은 1793년 가을의 기록으로 넘어가면서 점점 더 어둡고 절망적인 색채를 띤다. 마라의 죽음을 계기로 공포 정치(La Terreur)는 이제 예외적인 비상 조치가 아니라, 혁명 정부의 일상적인 통치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공화국의 이름으로', '인민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무분별한 체포와 형식적인 재판, 그리고 기요틴(Guillotine)의 섬뜩한 칼날 아래 스러져가는 수많은 생명들. 에티엔은 이 끔찍한 현실을 기록하면서, 자신이 열망했던 혁명의 이상이 어떻게 괴물 같은 모습으로 변질되어 가는지 고통스럽게 목격하고 있었다.

<1793년 가을, 파리 혁명 재판소 / 콩시에르주리 감옥 / 혁명 광장>

파리는 공포에 휩싸였다. 9월 17일 제정된 '반혁명 용의자법(Loi des suspects)'은 공안위원회와 보안위원회, 그리고 각 지역 감시위원회에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용의자'의 범위는 너무나 광범위하고 모호해서, 누구든 사소한 말실수나 의심스러운 행동, 심지어 '혁명에 충분히 열성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도 체포될 수 있었다. 파리의 감옥들은 용의자들로 넘쳐났고, 그중 상당수는 혁명 재판소로 보내져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에티엔은 몇 차례 혁명 재판소 방청석에 앉았다가, 그곳에서 벌어지는 '정의의 희극'에 치를 떨었다. 검사 푸키에-탱빌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피고인들을 몰아붙였고, 변호인의 조력은 거의 허용되지 않았으며, 배심원들은 이미 유죄를 예단한 듯 보였다. 증거는 부족했고, 심리는 졸속으로 진행되었다. 많은 피고인들은 자신의 죄명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단두대행을 선고받았다.

"이것은 재판이 아니다. 이것은 살인이다." 에티엔은 분노와 무력감 속에서 중얼거렸다. 그는 더 이상 방청석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공포 정치의 칼날은 가장 먼저 왕족과 옛 정적들을 향했다. 10월 16일, 한때 프랑스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혁명 재판소에 섰다. 그녀는 외세와의 내통, 국고 탕진 등 여러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재판은 그녀에 대한 온갖 추잡한 비난과 모욕으로 가득 찼다. 특히 그녀가 어린 아들(루이 17세)을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근거 없는 비난까지 제기되자, 그녀는 모든 체념을 버리고 격렬하게 항변했다. "나는 자연에 호소합니다! 여기 있는 모든 어머니들에게 호소합니다!" 그녀의 절규는 잠시 법정을 숙연하게 만들었지만,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사형을 선고받고, 죄수 마차에 태워져 혁명 광장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한때 화려했던 프랑스 왕비의 초라하고 비참한 최후였다.

그 뒤를 이어, 6월 봉기 때 축출되었던 지롱드파 지도부 21명(브리소, 베르뇨 포함)이 집단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들은 연방주의 반란을 부추기고 공화국을 분열시키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들은 법정에서 자신들의 공화주의 신념을 열정적으로 변호했지만, 푸키에-탱빌의 집요한 공격과 재판부의 편파적인 진행 속에서 결국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다. 처형 전날 밤, 그들은 감옥에서 마지막 만찬을 나누며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10월 31일, 그들은 함께 단두대에 올랐다. 혁명 초기의 빛나던 이상주의자들이 혁명의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는 비극이었다.

단두대는 멈추지 않았다. 필리프 에갈리테(오를레앙 공작), 바르나브, 바이이 등 초기 혁명 지도자들, 왕당파 귀족들, 선서 거부파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최고가격제를 어긴 상인, 군수품 납품 비리에 연루된 관료, 심지어 혁명에 대해 불평 한마디 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한 평범한 시민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혁명 광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매일 오후, 콩시에르주리 감옥에서 혁명 광장까지 이어지는 죄수 마차 행렬과 단두대 처형은 파리 시민들에게 일상적인 구경거리가 되었다. 일부 시민들은 뜨개질을 하며 처형을 지켜보았고(트리코퇴즈(Tricoteuses)), 아이들은 단두대 모형을 가지고 놀았다. 죽음은 일상화되었고, 공포는 내면화되었다.

소피는 매일 공포 속에서 살았다. 그녀는 이웃집 마티유가 어느 날 밤 갑자기 '용의자'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밀고였을 수도 있고, 혹은 단순히 혁명에 열성적이지 않다는 의심을 받았을 수도 있었다. 마담 뒤부아는 아들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소피는 자신과 피에르에게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 앞에서 생존 본능을 더욱 강하게 다졌다. 그녀는 말을 아꼈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조심했으며, 오직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했다.

에티엔은 글쓰기를 거의 멈추었다. 기록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행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때 존경했던 동료나 친구들이 단두대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며 깊은 환멸과 함께 죄책감마저 느꼈다. 자신이 혁명 초기에 가졌던 순수한 이상주의가 이 끔찍한 현실을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은 아닐까? 그는 서재에 틀어박혀 술로 괴로움을 달래거나, 파리를 떠나 시골로 은둔할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의 일기장에는 공포와 환멸, 그리고 자기혐오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파리는 거대한 감옥이 되었다. 아니, 거대한 도살장이다. 단두대는 굶주린 괴물처럼 매일 피를 마신다. '자유, 평등, 박애'의 이름 아래, 형제자매가 서로를 죽이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던 공화국이란 말인가? 나는 더 이상 이 광기를 기록할 힘도, 용기도 없다."

1793년 가을, 공포는 프랑스 사회 전체를 뒤덮은 일상이 되었다. 혁명은 그 이상을 배반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길로 치닫고 있었다.

제89장: 최고가격제와 식량 징발, 통제 경제의 그늘

1950년 파리. 경제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하는 나는 산업 혁명 시대의 자유방임주의만큼이나 프랑스 혁명기의 통제 경제 실험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1793년 가을에 시행된 '전반적 최고가격제(Maximum général)'는 위기 상황 속에서 민중의 요구에 부응하고 경제를 안정시키려 했던 급진적인 시도였지만, 동시에 통제 경제가 가진 고질적인 문제점들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주로 파리의 관점에서 이 정책의 실패를 분석하고 있지만, 나는 소피 라비뉴와 같은 도시 빈민, 뒤랑 씨 같은 소상인, 그리고 프랑수아 모렐 같은 농민의 입장에서 이 정책이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상상하며 그늘진 이면을 들여다본다.

<1793년 가을 이후, 파리 시장/상점 / 프랑스 농촌>

파리의 상퀼로트들은 오랫동안 생필품 가격 폭등에 대한 해결책으로 최고가격제 실시를 요구해왔다. 마침내 1793년 9월 29일, 산악파가 장악한 국민 공회는 '전반적 최고가격제'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빵, 고기, 포도주, 연료, 의류 등 주요 생필품 39개 품목에 대해 1790년 가격의 1.3배를 넘지 못하도록 상한선을 설정했고, 임금 역시 1790년 수준의 1.5배를 넘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법을 위반하는 상인이나 투기꾼은 '용의자'로 간주되어 엄벌에 처해졌다.

초기에는 파리 시민들이 환호했다. 소피 라비뉴도 빵값이 조금 안정되는 것을 보고 잠시 희망을 가졌다. "드디어 우리 같은 사람들도 숨통이 트이나 봐요, 마담." 그녀가 마담 뒤부아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최고가격제는 생산 비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고, 많은 상인들과 농민들은 손해를 보면서 물건을 팔 바에는 차라리 생산을 줄이거나 물건을 숨겨버리는 쪽을 택했다. 파리 시장의 가판대는 점점 더 텅 비어갔고, 합법적인 경로로는 생필품을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이보시오, 뒤랑 씨! 빵이 이것밖에 없단 말이오? 어제는 분명 더 있었잖소!" 장 발레가 빵집 주인 뒤랑 씨에게 험악하게 따져 물었다.

뒤랑 씨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변명했다. "시민, 정말입니다. 밀가루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제분소 놈들이 숨겨놓고 내놓지를 않으니… 저도 죽을 맛입니다." 그의 말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부의 통제를 피해 물건을 더 비싼 값에 사고파는 암시장(Marché noir)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소피는 이제 합법적인 가격으로는 빵 한 조각 구하기 어려워졌고, 암시장에서 훨씬 더 비싼 값을 치르고 질 낮은 빵을 사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최고가격제가 오히려 그녀와 같은 빈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게 다 뭐람. 법을 만들어도 소용이 없으니." 소피는 텅 빈 배를 움켜쥐고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예전처럼 비싸더라도 물건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

정부는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욱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특히 파리와 군대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농촌 지역에 '혁명군(Armée révolutionnaire)'이라 불리는 무장 징발대를 파견하여 강제로 곡물과 가축을 징발하기 시작했다. 이는 농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방데 지역에서 반란군으로 싸우고 있는 프랑수아 모렐의 마을에도 혁명군 징발대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창고를 뒤져 얼마 남지 않은 곡식을 빼앗아갔고, 저항하는 농민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이 도둑놈들! 하느님의 벌을 받을 것이다!" 모렐의 아내가 울부짖으며 저주를 퍼부었다.

"닥쳐라, 반혁명 분자 할망구야! 공화국을 위해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혁명군 병사가 총검으로 그녀를 위협했다.

이러한 강제 징발은 농민들의 생산 의욕을 더욱 꺾었고, 식량 생산량 감소로 이어졌다. 또한, 도시(소비자)와 농촌(생산자) 사이의 뿌리 깊은 불신과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파리의 상퀼로트들 중 일부는 식량 부족의 원인이 최고가격제 자체보다는 농민들과 상인들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비난했지만, 다른 일부는 정부의 통제 경제 정책 자체에 대한 회의감을 품기 시작했다.

에티엔은 시골 은신처에서 이러한 소식들을 접하며 통제 경제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는 루소의 '일반 의지'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국가 통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과거를 반성했다. 그는 기록에 남겼다.

"가격 통제와 강제 징발은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생산 기반 자체를 파괴하고 사회 전체의 불신과 갈등만 증폭시킬 뿐이다. 경제는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아서, 억지로 쥐어짠다고 해서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교환과 개인의 자발성이 존중되지 않는 통제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최고가격제와 식량 징발 정책은 혁명 정부가 직면한 극심한 위기 속에서 불가피하게 선택한 고육지책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경제 시스템의 왜곡과 사회적 갈등 심화였으며, 이는 결국 공포 정치의 기반마저 흔드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통제 경제의 그늘은 1793년 가을, 프랑스 사회를 더욱 깊은 수렁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제90장: 총동원령과 혁명군, "조국을 위하여!"

1950년 파리. 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가장 극단적인 공포와 혼란 속에서 때로는 가장 강력한 힘과 창조성이 발현된다는 점이다. 1793년 가을, 프랑스 공화국은 안팎의 위협으로 붕괴 직전에 놓여 있었지만, 바로 그 위기 속에서 '국민 총동원령(Levée en masse)'이라는 혁신적인 조치를 통해 거대한 국민 군대를 창설하고 전세를 역전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에는 이 시기, 평범한 시민들이 '조국 수호'라는 이름 아래 군인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에 대한 경외감과 함께, 그 속에 담긴 강제성과 희생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피에르 뒤퐁과 마티유 뒤부아 같은 인물들의 (가상) 경험을 통해, 나는 그 시대 젊은이들이 느꼈을 애국심과 두려움, 그리고 혁명 전쟁의 실체를 그려보고자 한다.

<1793년 가을 이후, 프랑스 군 훈련소 / 국경 전선>

"프랑스 국민들이여, 조국이 위험에 처했다! 지금부터 모든 프랑스인은 군 복무를 위해 영구히 징집된다! 젊은이들은 전선으로 나가 싸울 것이며, 기혼 남성들은 무기를 만들고 식량을 운반할 것이다! 여성들은 군 막사를 짓고 군복을 만들며 병원에서 봉사할 것이다! 아이들은 낡은 리넨으로 붕대를 만들 것이다! 노인들은 광장에 나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공화국에 대한 충성과 왕에 대한 증오를 설파할 것이다!"

1793년 8월 23일, 국민 공회가 선포한 '국민 총동원령'은 프랑스 역사상 유례없는 국가 총력 동원의 시작을 알렸다. 이는 단순히 병력을 보충하는 것을 넘어, 프랑스 사회 전체를 전쟁 수행 체제로 전환시키는 혁명적인 조치였다. 18세에서 25세 사이의 모든 미혼 남성이 징집 대상이 되었고, 이를 통해 프랑스는 단기간에 100만 명이 넘는 거대한 군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공안위원회의 군사 담당 위원이었던 라자르 카르노(Lazare Carnot)는 이 거대한 군대를 효율적인 전투 집단으로 만들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그는 '승리의 조직자(l'Organisateur de la Victoire)'라는 별명답게, 신병 훈련, 무기 생산 및 보급, 군 지휘관 임명(능력 위주 발탁), 새로운 전술 개발(집중 돌파 전술 등) 등 군사 조직 전반에 걸쳐 혁신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파리의 가구 장인 마티유 뒤부아도 징집 대상이 되었다. 그는 전쟁에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조국의 부름'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 마담 뒤부아는 눈물로 아들을 떠나보냈다. 훈련소에서의 생활은 고되고 힘들었다. 귀족 출신 장교들은 사라졌지만, 규율은 여전히 엄격했고 훈련은 가혹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자신과 같은 평범한 시민들이 모여 있었고, '공화국 수호'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묘한 동지애와 애국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피에르 뒤퐁은 이미 여러 전투를 경험한 베테랑 병사였다. 그는 새로 보충된 신병들을 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들의 눈빛 속에는 혁명 초기 자신이 가졌던 순수한 열정과 함께, 전쟁의 참혹함을 알지 못하는 불안함이 엿보였다. 그는 신병들에게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을 해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젊은 친구들." 피에르가 마티유에게 말했다. "전쟁터는 영광스러운 곳이 아니야.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 그리고 항상 동료들을 믿고 의지해야 하네."

뒤부아 대위와 같은 구체제 출신 장교들에게도 이 시기는 큰 변화였다. 그들은 이제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 병사들을 지휘해야 했고, 혁명 정부가 요구하는 새로운 전술과 이념에 적응해야 했다. 처음에는 불만과 회의도 있었지만, 병사들의 애국적인 열정과 전투 능력이 점차 향상되는 것을 보면서 점차 혁명군 장교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정부의 강력한 선전 활동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신문과 팸플릿, 그리고 파견 의원들의 연설은 '자유, 평등, 박애'를 위한 성스러운 전쟁임을 강조했고, 병사들은 자신들이 단순히 프랑스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유럽 전체를 해방시키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물론 총동원령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있었다. 강제 징집에 대한 저항(특히 농촌)은 여전히 존재했고, 탈영병도 속출했다. 군수품 보급은 여전히 부족했고, 겨울이 다가오면서 추위와 질병의 위협도 커졌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총동원령과 카르노의 개혁은 프랑스 군대의 양적, 질적 향상을 가져왔다.

1793년 가을 이후, 프랑스 혁명군은 점차 전선에서 반격을 시작하여 동맹군을 국경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리옹과 툴롱 등 연방주의 반란 지역도 차례로 진압되었다. 혁명군은 더 이상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국을 위하여!'라는 함성과 함께, 혁명의 불길을 유럽 전역으로 옮겨 붙일 준비가 된 강력한 전투 집단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공포 정치의 어둠 속에서도, 프랑스 혁명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