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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M으로 뽑은 잡지식

0.1 Ver.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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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부: 나폴레옹의 시대 I - 영웅의 부상 (1796 - 1799)

제111장: 굶주린 군대 앞에 선 젊은 장군

1950년 파리. 에티엔 드샹의 서재, 그 낡은 책상 위에는 이탈리아 원정에 관한 빛바랜 문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군사 보고서, 당시 신문 스크랩, 그리고 아마도 증조할아버지가 훗날 수집했을 병사들의 증언까지. 나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 1796년 봄, 프랑스 남부 니스 해안의 황량한 풍경 속으로 들어선다. 총재정부의 혼란 속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의 이름 앞에는 아직 '황제'라는 수식어가 붙기 전이었지만, 그의 야망은 이미 이탈리아의 굶주린 군대 앞에서 용암처럼 들끓고 있었다.

"1796년 3월 27일, 니스. 이곳의 공기는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탈리아 방면군은 이름만 군대일 뿐, 사실상 오합지졸에 가깝다. 병사들은 헐벗고 굶주렸으며, 급료는 몇 달째 체불되었다. 탈영이 속출하고, 남은 이들의 눈빛에는 패배감과 냉소만이 가득하다. 이런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연합군과 싸우라고? 총재정부는 제정신인가? 새로 부임한 보나파르트 장군이라는 자는 스물일곱 살의 젊은이. 파리 사교계의 인맥과 방데미에르 포도탄 덕분에 벼락출세한 인물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마세나, 오주로 같은 백전노장들이 과연 저 애송이의 명령에 순순히 따를까? 회의적이다. 프랑스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다."

에티엔의 기록은 당시 이탈리아 원정군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총재정부는 유능한 장군들을 견제하기 위해, 혹은 당시 파리에서 급부상하던 나폴레옹을 골치 아픈 전선으로 밀어내기 위해 그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는 설이 유력했다. 그의 임명 배경에는 아내 조제핀 드 보아르네(Joséphine de Beauharnais)의 연인이자 총재정부의 실력자였던 바라스(Barras)의 영향력도 작용했다. 여러모로 불안정한 출발이었다.

<니스,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부 앞>

나폴레옹은 말을 타고 사령부 앞에 도착했다. 그는 키가 작고 말랐지만, 그의 눈빛은 마치 회색 강철처럼 날카롭고 강렬했다. 그의 얼굴에는 지중해 코르시카 섬의 거친 태양과 야심이 함께 새겨져 있었다. 낡고 해진 군복을 입고 굶주림에 지쳐 멍하니 서 있는 병사들을 둘러보는 그의 표정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어 보였다.

사령부 막사 안에서는 마세나(André Masséna), 오주로(Pierre Augereau) 등 산전수전 다 겪은 장군들이 노골적인 불신과 경멸의 눈빛으로 젊은 사령관을 맞이했다.

"파리에서 온 '방데미에르 장군'께서 행차하셨군." 오주로가 비아냥거리듯 중얼거렸다. "저런 애송이가 우리를 지휘하겠다고?"

나폴레옹은 그들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지도를 펼치고 짧고 간결하게 자신의 작전 구상을 설명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자신감과 권위가 담겨 있었다. 장군들은 여전히 반신반의했지만, 그의 명료하고 대담한 전략 앞에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며칠 후, 나폴레옹은 전군을 소집했다. 굶주림과 질병으로 초췌해진 수만 명의 병사들이 희망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폴레옹은 단상 위로 올라섰다. 잠시 병사들을 둘러본 그의 입에서 마침내 역사적인 연설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낮고 차분했지만, 점차 열정을 더해가며 병사들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병사들이여! 그대들은 굶주리고 헐벗었다! 정부는 그대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빚만 지고 있다! 그대들의 인내와 용기는 경탄스럽지만, 그것은 그대들에게 어떠한 영광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병사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그들의 고통을 정확히 짚어내는 젊은 장군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그대들을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평원으로 이끌려 한다! 위대한 도시들과 광대한 영토가 그곳에 있다! 그곳에서 그대들은 명예와 영광, 그리고 부(富)를 얻게 될 것이다!"

부(富)! 그 단어는 굶주린 병사들의 귀에 강렬하게 꽂혔다. 술렁임은 점차 기대와 흥분으로 바뀌었다.

"이탈리아 방면군 병사들이여! 그대들에게 용기가 부족한가? 아니면 인내심이 부족한가? 아니다! 이제 나를 따르라! 나는 그대들과 함께 승리할 것이다!"

나폴레옹의 외침이 끝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곧이어 병사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시작된 박수 소리가 점차 커져 마침내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바뀌었다. "보나파르트 장군 만세!"

피에르 뒤퐁은 자신도 모르게 함께 소리치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절망 속에서 탈영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젊은 장군의 말에는 이상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미래를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의 약속은 굶주린 배를 채워주고 남루한 군복을 바꿔줄 실질적인 희망처럼 느껴졌다. '그래, 저 사람이라면… 어쩌면 정말 우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을지도 몰라.'

나폴레옹은 병사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지켜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빵, 명예, 그리고 전리품. 그는 이 굶주린 늑대들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유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첫 번째 과제는 성공적이었다. 군대는 이제 그의 손안에 있었다. 그는 곧이어 엄격한 군율을 강조하며 약탈 행위를 금지시켰지만(이는 민심 수습과 효율적인 수탈을 위한 계산된 조치였다), 동시에 보급 문제 해결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며 병사들의 신뢰를 얻어 나갔다.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밀라노. 상인 마르코 롯시는 프랑스에서 온 젊은 장군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코르시카 출신의 애송이라던데, 과연 오스트리아 놈들을 몰아낼 수 있을까?' 그는 반신반의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었다. 이탈리아가 분열과 외세 지배에서 벗어나 통일되고 자유로운 나라가 될 수만 있다면.

파리 근교에 은둔하고 있던 에티엔은 이탈리아 전선의 새로운 사령관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었다. '보나파르트… 방데미에르 때 포도탄으로 시민들을 학살했던 그 장군 아닌가. 혁명의 수호자인가, 아니면 또 다른 야심가인가?'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이 젊은 장군의 행보를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1796년 봄, 니스 해안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절망에 빠져 있던 군대는 젊은 장군의 카리스마 아래 다시 생기를 되찾았고, 병사들은 그의 약속을 믿고 알프스를 향해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신화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제112장: 알프스를 넘어, 분할 격파의 시작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서재에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군사 지도들이 여러 장 보관되어 있었다. 그중 1796년 이탈리아 북서부 지도는 유독 빼곡한 메모와 화살표 표시로 가득 차 있었다. 에티엔은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에 경탄하면서도, 그 이면에 숨겨진 냉혹한 계산과 병사들의 희생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던 것 같다. 특히 그가 처음으로 선보인 '중앙 위치 확보'와 '분할 격파' 전술은 이후 나폴레옹 군사 전략의 핵심이 되었다. 나는 그의 메모와 피에르 뒤퐁 같은 가상 병사의 시점을 통해, 알프스 산맥을 넘는 고된 행군과 연이은 전투 속에서 나폴레옹이 어떻게 적을 제압하고 군대의 충성을 확보해 나갔는지 추적해 본다.

<1796년 4월 초, 알프스 산맥 남쪽 기슭 / 피에몬테 진입로>

"전진! 멈추지 마라! 뒤처지는 자는 버리고 간다!"

하사관의 거친 외침 속에서 피에르 뒤퐁은 숨을 헐떡이며 눈 덮인 산길을 올랐다. 등에는 무거운 배낭과 소총이 얹혀 있었고, 발은 이미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며칠 동안 계속된 강행군이었다. 굶주림은 여전했지만, 니스에서 출발할 때와는 달리 병사들의 눈빛에는 독기와 함께 희미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보나파르트 장군은 약속했다. 알프스 너머에는 풍요로운 땅과 승리가 기다리고 있다고.

나폴레옹은 사령부 막사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휘하 장군들과 마지막 작전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의 전략은 대담하고 명료했다.

"오스트리아군과 사르데냐군은 서로 협조가 원활하지 않다. 우리는 저 두 군대 사이의 연결 고리, 바로 이곳 아펜니노 산맥 기슭을 돌파한다. 그리고 각개 격파한다. 마세나 장군은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견제하고, 오주로 장군은 사르데냐군을 향해 돌진한다. 라아르프 장군은 중앙에서 적의 연결을 끊는다. 속도가 생명이다! 적이 정신 차리기 전에 승부를 결정지어야 한다!"

마세나와 오주로는 여전히 젊은 사령관의 계획에 반신반의했지만, 그의 확신에 찬 태도와 명료한 지시에 압도당했다. 그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4월 10일, 프랑스 군은 마침내 알프스의 험준한 고개를 넘어 이탈리아 피에몬테 평원으로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등장은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연합군에게는 완전한 기습이었다. 나폴레옹은 지체 없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몬테노테(Montenotte) / 밀레시모(Millesimo) 전투 현장>

4월 12일 몬테노테. 프랑스 군은 오스트리아군의 일부를 기습하여 격파했다. 나폴레옹의 첫 승리였다. 그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즉시 군대를 이동시켜 다음 목표를 향했다.

"쉬지 마라! 계속 전진한다! 적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마라!" 나폴레옹은 직접 말을 몰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피에르 뒤퐁은 전투와 행군을 반복하며 정신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피로와 굶주림 속에서도 승리의 소식은 그에게 알 수 없는 힘을 주었다. 그는 처음으로 적군을 향해 총을 쏘았고, 옆에서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두려웠지만, 동시에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기묘한 흥분감이 밀려왔다.

4월 13-14일, 밀레시모와 데고(Dego)에서 프랑스 군은 다시 한번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연합군을 격파했다. 특히 오주로 장군이 이끄는 부대는 사르데냐 군대를 맹렬하게 추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오주로는 처음에는 나폴레옹을 얕보았지만, 연이은 승리와 그의 뛰어난 지휘력 앞에서 점차 경외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사르데냐 군대가 전의를 상실했다고 판단하고, 그들을 집중 공격하여 동맹에서 이탈시키기로 결정했다. 4월 21일, 몬도비(Mondovì) 전투에서 사르데냐 군대는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케라스코(Cherasco) 협상 장소>

결국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 국왕은 항복을 결심하고 나폴레옹에게 휴전을 요청했다. 케라스코에서 열린 휴전 협상에서, 나폴레옹은 패배한 사르데냐 대표단 앞에서 승리자의 위엄을 과시했다.

"귀국은 이제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프랑스 공화국과 평화 조약을 맺어야 할 것이오. 또한, 프랑스 군대가 알프스를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도록 주요 요새들을 우리에게 넘겨주시오. 이것이 나의 조건이오." 나폴레옹의 목소리는 젊었지만 강철 같은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사르데냐 대표단은 굴욕감을 느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4월 28일, 케라스코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사르데냐 왕국은 전쟁에서 이탈했고, 프랑스 군은 알프스 통행로를 확보했으며, 오스트리아는 이제 홀로 프랑스군과 맞서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굶주리고 헐벗었던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강력한 적군을 연파하고 한 나라를 굴복시킨 나폴레옹의 군사적 성공은 프랑스 전체를 놀라게 했다. 파리의 총재정부는 그의 성공에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높아지는 인기와 독자적인 행동에 대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에티엔은 파리에서 이탈리아 전선의 승전보를 접하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프랑스의 승리는 분명 기쁜 일이었지만, 그는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이 가진 위험한 야심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젊은 장군은 과연 공화국의 충성스러운 칼이 될 것인가, 아니면 공화국 자체를 삼키려는 야심가가 될 것인가?'

병사 피에르 뒤퐁은 동료들과 함께 승리를 자축하며 오랜만에 배불리 먹고 마셨다. 그는 이제 보나파르트 장군이 자신들을 정말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장군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자라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병사들의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았다. 이제 그는 이탈리아 북부의 심장부, 밀라노를 향해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113장: 로디 다리, 불멸의 신화 탄생

1950년 파리. 책상 위에 놓인 낡은 동판화 한 장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탈리아 로디(Lodi) 다리 위에서 군기를 들고 병사들을 독려하는 젊은 나폴레옹의 모습.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 그림 옆에 짧게 메모를 남겼다. "신화가 만들어지는 순간. 그러나 영광 뒤에는 언제나 피가 흐른다." 로디 다리 전투(1796년 5월 10일)는 나폴레옹 개인에게나 그의 군대에게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나폴레옹을 초인적인 영웅으로 만들고, 그 자신에게도 운명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영광의 이면에는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이 있었다. 나는 에티엔의 기록과 당시 전투 참가자들의 증언을 통해, 로디 다리의 포화 속으로 들어가 그 신화 탄생의 순간을 재구성해 본다.

<1796년 5월 10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로디 마을 근처 아다(Adda) 강>

사르데냐 왕국을 굴복시킨 나폴레옹의 다음 목표는 오스트리아군을 이탈리아 북부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군 주력 부대는 동쪽으로 후퇴하며 아다 강을 건너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다. 나폴레옹은 그들을 맹렬히 추격했다. 로디 마을 근처, 아다 강을 가로지르는 좁고 긴 나무다리 위에서 오스트리아 후위 부대(약 1만 명)가 강력한 포병 지원 아래 필사적인 저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프랑스군의 도하를 최대한 지연시켜 주력 부대가 안전하게 후퇴할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프랑스군 선봉대가 다리에 접근하자, 오스트리아군의 집중 포화가 쏟아졌다. 나무다리는 폭이 좁고 엄폐물도 거의 없어 정면 돌파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 보였다.

"장군님, 무리입니다! 강 상류나 하류로 우회하여 도하 지점을 찾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세나 장군이 나폴레옹에게 진언했다. 다른 장군들도 동의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지도를 빠르게 훑어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정면으로 돌파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우리 군의 사기를 하늘 높이 끌어올릴 압도적인 용기다! 오늘, 우리는 저 다리를 건너 역사를 새로 쓸 것이다!"

그의 결정은 무모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는 이 전투를 통해 병사들에게 자신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지도자라는 믿음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것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 이상의 정치적 효과를 가져올 터였다.

나폴레옹은 직접 척탄병(Grenadiers) 정예 부대 선두에 섰다. 그는 부관이 들고 있던 삼색 군기를 빼앗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눈빛은 불타는 듯했고, 목소리는 전장을 압도했다.

"병사들이여! 나와 함께 저 다리를 건너자! 공화국을 위하여!"

나폴레옹이 직접 깃발을 들고 다리를 향해 달려나가자, 병사들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내 열광적인 함성과 함께 그를 뒤따랐다. "황… 아니, 장군님 만세!" 누군가 외쳤다.

오스트리아군의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프랑스 척탄병들은 쓰러지는 동료들을 넘어 필사적으로 다리 위를 달렸다. 다리 위는 순식간에 시체와 부상자들로 뒤덮였고, 강물은 붉게 물들었다. 피에르 뒤퐁은 공포에 질려 잠시 멈칫했지만, 앞에서 깃발을 흔들며 독려하는 나폴레옹의 모습과 동료들의 함성에 용기를 얻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장군님이 저렇게 앞장서시는데, 우리가 물러설 수는 없다!'

격렬한 백병전 끝에 마침내 프랑스군은 다리 건너편 오스트리아군 진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오스트리아 후위 부대는 큰 피해를 입고 혼란 속에서 후퇴했다. 프랑스군은 승리했지만, 그 대가 또한 컸다. 수백 명의 용감한 병사들이 짧은 다리 위에서 목숨을 잃었다.

전투가 끝난 후, 병사들은 흙먼지와 피로 범벅이 된 나폴레옹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눈에는 경외심과 함께 깊은 유대감이 어려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젊은 사령관을 '애송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나폴레옹에게 새로운 별명을 붙여주었다. 바로 '꼬마 하사(Le Petit Caporal)'! 이는 그가 병사들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싸웠다는 최고의 찬사이자, 그를 자신들과 같은 '동지'로 받아들인다는 친근감의 표현이었다.

나폴레옹 역시 이 전투를 통해 큰 변화를 겪었다. 그는 자신의 용기와 결단력이 병사들에게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확인했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평범한 인간을 넘어서는 특별한 운명을 타고났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훗날 세인트헬레나에서 이때를 회상하며 "로디 다리 전투 이후 비로소 나 자신이 비범한 인물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로디 다리는 나폴레옹 신화가 탄생하는 제단이자, 그가 스스로를 황제의 운명으로 이끌어갈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된 장소가 되었다.

파리로 전해진 로디 전투 소식은 나폴레옹을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다. 신문들은 그의 용맹함을 대서특필했고, 그의 초상화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에티엔은 이 소식을 접하며 더욱 깊은 우려에 빠졌다.

"로디의 영웅이라… 프랑스 국민들은 벌써 새로운 카이사르를 맞이할 준비가 된 것인가? 공화국은 이제 저 젊은 장군의 야심 앞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영광 뒤에 숨겨진 독재의 그림자가 두렵다." 그의 일기에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역사가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로디 다리 위의 피는 마르지 않았지만, 그 위에는 이미 불멸의 영웅 신화가 세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화는 앞으로 프랑스와 유럽 전체의 운명을 뒤흔들게 될 터였다.

제114장: 밀라노 입성, 해방자인가 정복자인가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 속에서, 나는 1796년 5월 나폴레옹의 밀라노 입성 장면을 따라가 본다. 오스트리아의 오랜 지배에서 벗어난 밀라노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 자유, 평등, 박애를 약속하는 젊은 프랑스 장군의 연설. 이탈리아 통일과 독립을 꿈꾸는 지식인들의 부푼 기대. 마치 프랑스 혁명의 이상이 국경을 넘어 전파되는 감격적인 순간처럼 보인다. 하지만 에티엔의 날카로운 시선은 그 화려한 장면 이면에 숨겨진 미묘한 균열과 불안의 조짐들을 놓치지 않는다. 해방의 약속 뒤에 숨겨진 정복자의 야심, 혁명 이념의 수출이라는 명분과 프랑스 국가 이익 사이의 긴장. 나는 북부 이탈리아 출신 상인 마르코 롯시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당시 이탈리아인들이 느꼈을 희망과 환멸의 교차점을 그려보고자 한다.

<1796년 5월 15일, 이탈리아 밀라노>

밀라노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며칠 전 로디 다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마침내 밀라노에 입성하는 날이었다. 거리에는 삼색기가 휘날렸고, 시민들은 창문마다 꽃과 양탄자를 내걸고 프랑스 군대를 환영했다. 오랫동안 합스부르크 제국의 압제에 시달려왔던 밀라노 사람들에게, 프랑스 군대는 압제자를 몰아내고 자유를 가져다 줄 해방군으로 여겨졌다.

"프랑스 만세! 보나파르트 장군 만세! 자유 만세!" 시민들의 함성이 밀라노 대성당 앞 광장을 가득 메웠다.

상인 마르코 롯시는 군중 속에서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이탈리아가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로 통일된 독립 국가가 되기를 꿈꿔왔다. 프랑스 혁명 소식은 그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이제 그 혁명의 군대가 자신의 고향 밀라노를 해방시킨 것이다.

"드디어… 드디어 우리에게도 기회가 왔어!" 마르코는 옆에 있던 친구이자 같은 생각을 가진 지식인 파올로에게 속삭였다. "보나파르트 장군은 분명 우리 이탈리아의 통일과 자유를 도와줄 거야. 그는 혁명의 아들이 아닌가!"

파올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는 폭군들을 몰아내고 민족 자결의 시대를 열 것이라고 약속했네. 우리는 그와 협력하여 롬바르디아에 새로운 공화국을 세워야 하네." 그들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이탈리아의 통일과 공화정 수립을 꿈꾸는 '자코뱅주의자(Giacobini)'들이었다.

나폴레옹은 백마를 타고 위풍당당하게 밀라노 시내로 들어섰다. 그는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에 미소로 화답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의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많은 이탈리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시청 발코니에 서서 열정적인 연설을 했다.

"밀라노 시민들이여! 프랑스 군대는 여러분을 압제자의 족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왔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자유와 평등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되어, 영광스러운 이탈리아의 역사를 새로 쓸 것입니다! 프랑스 공화국은 여러분의 영원한 친구이자 동맹이 될 것입니다!"

그의 연설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마르코 롯시는 나폴레옹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감격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저 젊은 영웅이야말로 이탈리아의 구원자다!'

나폴레옹은 며칠간 밀라노에 머물며 시민들을 위한 축제를 열고, 오스트리아 통치 기구를 해체했으며, 마르코 롯시와 파올로 같은 이탈리아 자코뱅 지도자들을 만나 새로운 공화국(훗날 치살피나 공화국(Repubblica Cisalpina)으로 불리게 될) 수립에 대한 구상을 논의했다. 그는 자유주의적인 개혁 조치들을 약속하며 이탈리아인들의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그러나 해방의 축제 분위기 속에서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프랑스 군인들은 '해방군'이라기보다는 '점령군'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리에서 오만한 태도를 보였고, 식량과 물자를 거리낌 없이 징발했으며, 일부는 약탈 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피에르 뒤퐁은 오랜 굶주림 끝에 얻은 풍족함 속에서 잠시 해이해진 군기를 느꼈다. 그는 동료들이 이탈리아 여성들에게 무례하게 굴거나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는 모습을 보며 불편함을 느꼈지만, 감히 제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르코 롯시 역시 프랑스 군대의 이러한 모습에 처음에는 실망감을 느꼈다. '전쟁 중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아니면 저것이 그들의 본모습인가?' 그는 불안감을 애써 누르며 나폴레옹 장군이 약속한 개혁과 이탈리아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머릿속 계산은 훨씬 복잡했다. 그는 혁명 이념의 전파자 역할을 자처했지만, 동시에 프랑스의 국가 이익(재정 확보, 전략적 요충지 확보, 정치적 영향력 확대)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그에게 혁명 이상 실현의 장인 동시에, 정복과 수탈의 대상이기도 했다. '해방자'와 '정복자'라는 두 개의 얼굴. 나폴레옹은 능숙하게 이 두 얼굴을 번갈아 사용하며 이탈리아를 자신의 야망을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밀라노 시민들의 환호성 뒤에는 프랑스의 지배라는 또 다른 멍에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제115장: 예술품 약탈과 경제적 수탈

1950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화려한 전시실을 거닐 때면, 나는 저 위대한 예술품들 뒤에 숨겨진 약탈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나폴레옹 시대에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수많은 걸작들은 프랑스 문화의 영광을 상징하는 동시에, 제국주의적 문화재 강탈이라는 어두운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에는 당시 프랑스 정부와 군대가 자행한 체계적인 예술품 약탈과 경제적 수탈에 대한 분노와 비판이 담겨 있다. 나는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롯시의 시점에서, 문화유산을 빼앗기는 민족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해방자로 믿었던 존재에 대한 깊은 환멸을 그려보고자 한다.

<1796년 여름-가을, 이탈리아 밀라노 / 파르마 / 볼로냐 / 로마 등>

나폴레옹 군대가 북부 이탈리아를 석권하면서, '해방'의 달콤한 약속은 점차 '수탈'이라는 씁쓸한 현실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 비용을 현지에서 조달하고, 동시에 고갈된 프랑스 정부의 재정을 채우기 위해 점령한 각 도시와 국가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공물을 요구했다. 그의 요구는 가혹하고 집요했다.

밀라노의 임시 정부는 프랑스 군 주둔 비용 명목으로 엄청난 액수의 돈을 지불해야 했고,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은 강제로 '대출'을 제공해야 했다. 마르코 롯시 역시 가문의 재산을 상당 부분 헌납해야 했다. 그는 처음에는 조국의 해방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고 생각했지만, 프랑스 관리들의 탐욕스러운 요구는 끝이 없었다.

"또 돈을 내라고? 우리 금고는 이제 바닥났소! 프랑스 군대는 해방군인가, 아니면 약탈자인가!" 마르코는 프랑스 군정 관리 앞에서 분통을 터뜨렸지만, 돌아온 것은 냉담한 답변뿐이었다. "공화국을 위한 기부라고 생각하시오, 롯시 시민. 불만이 있다면 혁명의 적으로 간주될 수도 있소."

경제적 수탈보다 더 이탈리아인들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은 바로 체계적인 예술품 약탈이었다. 나폴레옹은 파리를 세계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야심 아래, 이탈리아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프랑스로 옮겨갈 계획을 세웠다. 그는 저명한 예술 전문가들(도미니크 비방 드농(Dominique Vivant Denon) 등)을 대동하고, 마치 정복자가 전리품을 챙기듯 이탈리아 전역의 궁전, 미술관, 교회를 뒤지며 걸작들을 '선별'했다.

파르마에서는 코레조의 그림들이, 모데나에서는 에스테 가문의 소장품들이, 볼로냐에서는 라파엘로의 '성 체칠리아'와 구이도 레니의 작품들이 프랑스로 향하는 마차에 실렸다. 로마에서는 교황청과의 평화 조약(톨렌티노 조약, 1797) 조건으로 바티칸 미술관의 최고 걸작들, 라오콘 군상, 벨베데레의 아폴론과 같은 고대 조각품들이 대거 약탈되었다. 심지어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의 유명한 청동 말 조각상까지 파리로 옮겨졌다.

마르코 롯시는 밀라노의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귀중한 코덱스(Codex Atlanticus)가 프랑스 관리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안 돼! 저것은 우리 밀라노의 보물, 아니 이탈리아 전체의 영혼이란 말이다!" 그가 소리쳤지만, 프랑스 군인들의 총검 앞에서 그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다. '언젠가, 반드시 저 약탈자들에게 복수하고 우리의 것을 되찾으리라.' 그의 마음속에서 나폴레옹과 프랑스 혁명에 대한 환상은 완전히 깨져버렸고, 대신 이탈리아 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저항 의식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비밀리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모아 프랑스 지배에 저항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훗날 카르보나리 운동으로 이어지는 작은 불씨였다.

한편, 프랑스 병사 피에르 뒤퐁은 이러한 약탈 행렬을 복잡한 심경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상관의 명령에 따라 예술품 포장과 운반을 돕기도 했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 어린 눈빛 앞에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리는 해방군이라고 배웠는데, 왜 저 사람들의 소중한 것을 빼앗아야 하는 걸까? 이것이 정말 공화국이 말하는 자유와 평등인가?' 그는 혼란스러웠지만, 군대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감히 의문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그저 묵묵히 명령을 따를 뿐이었다.

파리에서는 이탈리아에서 온 전리품들이 루브르 박물관(당시 중앙 예술 박물관)을 가득 채웠고, 시민들은 프랑스의 위대함을 찬양했다. 그러나 그 영광의 이면에는 짓밟힌 민족의 눈물과 약탈당한 문화의 신음 소리가 숨겨져 있었다. 에티엔은 파리에서 이러한 소식들을 접하며 프랑스 혁명이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통감했다. 그는 나폴레옹과 총재정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저 약탈과 수탈은 프랑스의 명예를 더럽히는 행위이다! 우리는 자유의 전파자가 아니라 탐욕스러운 정복자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이것은 혁명 정신에 대한 명백한 배반이다!" 그의 외침은 아직 미약했지만, 점차 커져갈 비판의 시작이었다.

이탈리아에서의 예술품 약탈과 경제적 수탈은 나폴레옹과 프랑스 혁명이 지닌 양면성, 즉 해방과 압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는 이탈리아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장기적인 저항 운동의 씨앗을 뿌리는 동시에, 혁명 프랑스 내부에서도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12부: 나폴레옹의 시대 I - 영웅의 부상 (1796 - 1799)

제116장: 아르콜레의 깃발, 리볼리의 승리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서재에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을 다룬 수많은 그림과 판화들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내 시선을 끄는 것은 아르콜레(Arcole) 다리 위에서 군기를 들고 돌격하는 젊은 나폴레옹의 모습이었다. 에티엔은 그 그림 옆에 "신화는 영웅을 만들고, 영웅은 다시 신화를 만든다. 그러나 그 발밑에는 언제나 병사들의 피가 흐른다."라고 적어 놓았다. 로디 다리에 이어 아르콜레 다리에서의 영웅적인 행동(비록 그 진위나 과장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은 나폴레옹을 단순한 유능한 장군을 넘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초인적인 영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연이어 벌어진 리볼리(Rivoli) 전투의 결정적인 승리는 그의 군사적 천재성을 다시 한번 입증하며, 이탈리아 북부에서의 프랑스 지배를 확고히 하는 결정타가 되었다.

<1796년 11월, 이탈리아 베네토 지방 아르콜레 다리 근처>

캄포포르미오 조약 이전, 오스트리아는 빼앗긴 이탈리아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인 반격을 시도했다. 노련한 알빈치(Alvinczy) 장군이 이끄는 새로운 오스트리아 군대가 티롤 알프스를 넘어 베네토 평원으로 진격해 왔고,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은 다시 한번 위기에 직면했다. 병력은 분산되어 있었고, 보급은 여전히 불안정했으며, 병사들은 계속된 전투와 질병으로 지쳐 있었다.

1796년 11월 15일부터 17일까지, 아르콜레 마을 근처 알포네(Alpone) 강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를 놓고 양측 군대는 사흘간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좁은 제방 길과 늪지대로 둘러싸인 다리는 오스트리아군의 강력한 방어 진지 역할을 했다. 프랑스군은 몇 차례 돌격을 감행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의 맹렬한 포격과 사격에 막혀 번번이 실패하고 막대한 사상자만 냈다. 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고, 패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바로 그때, 나폴레옹은 다시 한번 극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 로디 다리에서처럼, 그는 직접 군기를 빼앗아 들고 병사들 앞에 섰다.

"병사들이여! 그대들은 로디의 영웅들이 아니었던가! 저 다리 너머에 승리가 기다리고 있다! 나를 따르라!"

그는 빗발치는 총탄을 무릅쓰고 다리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의 용맹한 모습에 병사들은 다시 한번 용기를 얻어 함성을 지르며 뒤따랐지만,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은 너무나 완강했다. 나폴레옹 자신도 말에서 떨어져 늪에 빠질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결국 정면 돌파는 실패했지만, 나폴레옹의 솔선수범은 병사들의 사기를 다시 끌어올렸고, 마세나와 오주로 등 휘하 장군들의 활약과 측면 공격이 성공하면서 프랑스군은 마침내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하고 아르콜레를 점령할 수 있었다. 비록 이 전투의 영웅적인 깃발 돌격 장면은 나폴레옹의 선전술에 의해 과장되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그의 위기 극복 능력과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만은 분명했다.

피에르 뒤퐁은 이 전투에서 옆에서 싸우던 동료를 잃었다. 그는 늪지대의 차가운 물 속에서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동시에 나폴레옹 장군의 초인적인 용기에 감탄했다. '저분은 정말 인간이 아닌 것 같다. 마치 전쟁의 신이 우리와 함께 싸우는 듯하다.' 그의 마음속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경외심은 더욱 깊어졌다.

<1797년 1월, 리볼리 고원>

오스트리아군은 최후의 반격을 시도했다. 알빈치 장군은 다시 한번 대군을 이끌고 만토바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남하했다. 나폴레옹은 이 정보를 입수하고, 리볼리 고원이라는 전략적 요충지에서 적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1월 14일, 리볼리 전투가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군은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여러 방향에서 프랑스군을 포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뛰어난 전술적 안목으로 적의 의도를 간파하고, 병력을 신속하게 집중시키며 각개 격파에 나섰다. 그는 마치 체스판의 말을 움직이듯 보병, 기병, 포병을 유기적으로 지휘하며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역습을 감행했다. 특히 주베르(Joubert) 장군의 활약과 뮈라(Murat) 기병대의 결정적인 돌격은 전세를 프랑스 측으로 완전히 기울게 만들었다. 오스트리아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완전히 궤멸되었다.

리볼리 전투의 승리는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전투였다. 그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뛰어난 전술적 임기응변과 지휘력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북부 재탈환 시도는 완전히 좌절되었고, 얼마 뒤 만토바 요새마저 함락되었다. 이제 오스트리아에게 남은 선택은 강화 조약을 맺는 것뿐이었다.

아르콜레와 리볼리에서의 연이은 승리는 나폴레옹의 명성을 유럽 전역에 떨치게 했다. 그는 이제 단순한 장군이 아니라,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불세출의 영웅으로 여겨졌다. 그의 군대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전투력과 사기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 영광의 이면에는 수많은 병사들의 피와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에티엔의 지적처럼, 신화는 언제나 피를 먹고 자라는 법이다.

제117장: 캄포포르미오 조약, 외교 무대의 승자

1950년 파리. 에티엔의 서재에는 낡은 유럽 지도 한 장이 걸려 있었다. 그 위에는 캄포포르미오 조약(Traité de Campo-Formio)으로 인해 변경된 국경선이 붉은 잉크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 조약은 나폴레옹이 단순히 뛰어난 군사적 천재일 뿐만 아니라, 냉철하고 능숙한 외교가이자 정치가임을 보여준 첫 번째 중요한 사례였다. 그는 파리 총재정부의 훈령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판단과 야심에 따라 독자적으로 협상을 주도했고, 그 결과 프랑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하늘 높이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 조약은 동시에 천 년 역사의 베네치아 공화국을 희생양으로 삼는 냉혹한 현실 정치(Realpolitik)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1797년 여름-가을, 이탈리아 북동부 우디네 근처 / 캄포포르미오>

리볼리 전투 패배와 만토바 함락 이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마침내 프랑스에 강화를 요청했고, 나폴레옹은 이를 받아들여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은 몇 달 동안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 파리의 총재정부는 오스트리아를 최대한 압박하여 라인 강 좌안 전체를 프랑스 영토로 확보하고, 이탈리아에서는 공화주의 원칙에 충실한 위성 공화국들을 세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당장의 실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오스트리아와의 신속한 강화 조약 체결을 통해 자신의 군사적 성과를 정치적 자산으로 확고히 하려 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협상 대표 코벤츨(Cobenzl) 백작을 상대로 특유의 카리스마와 함께 외교적 압박과 회유를 번갈아 사용하며 협상을 주도했다. 그는 때로는 격렬하게 분노를 표출하며 찻잔을 던지는 연극을 하기도 했고, 때로는 부드러운 말투로 오스트리아의 체면을 세워주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백작,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있겠소?" 나폴레옹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코벤츨을 쏘아보며 말했다. "프랑스 군대는 당장이라도 빈으로 진격할 준비가 되어 있소. 오스트리아가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을 내가 제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오."

나폴레옹이 제시한 조건은 오스트리아에게는 굴욕적이었지만, 동시에 예상보다는 관대한 측면도 있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벨기에(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롬바르디아를 획득하고, 라인 강 좌안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를 인정받는 대신, 오스트리아에게는 베네치아 공화국 본토와 이스트리아, 달마티아 등 베네치아의 옛 영토 대부분을 넘겨주기로 한 것이다.

이는 베네치아 공화국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베네치아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독립 공화국이었지만, 나폴레옹은 이미 군대를 보내 베네치아를 점령하고 민주 정부를 수립시킨 뒤였다. 이제 그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베네치아를 오스트리아와의 거래 대상으로 삼아버린 것이다. 베네치아 대표들은 절망적으로 항의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천 년 공화국 베네치아는 그렇게 강대국들의 흥정 속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마르코 롯시는 이 소식을 듣고 치를 떨었다. '이것이 프랑스 혁명이 말하는 민족 자결이란 말인가! 약소국의 운명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함부로 재단하는 저 오만함! 나폴레옹은 해방자가 아니라 탐욕스러운 정복자일 뿐이다!' 그는 이탈리아가 진정한 독립과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외세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을 키워야 함을 절감했다. 그의 비밀 결사 활동은 더욱 은밀하고 치밀해졌다.

1797년 10월 17일, 마침내 캄포포르미오 근처 파사리아노(Passariano) 별장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간의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은 사실상 와해되었고, 프랑스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압도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서 치살피나 공화국(롬바르디아 등), 리구리아 공화국(제노바) 등 프랑스의 위성 국가들을 세우고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파리의 총재정부는 나폴레옹이 자신들의 지시를 어기고 독자적으로 조약을 체결한 것에 불만을 품었지만, 그의 엄청난 군사적 성공과 국민적 인기를 고려할 때 어쩔 수 없이 이를 승인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이제 단순한 군사 영웅을 넘어, 프랑스 정치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는 강력한 실력자로 부상했다. 캄포포르미오 조약은 그의 군사적 승리를 외교적, 정치적 승리로 완성시킨 중요한 이정표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강대국의 힘의 논리와 약소국의 비극이라는 냉혹한 국제 현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제118장: 총재정부의 견제와 영웅의 귀환

1950년 파리. 에티엔 드샹의 기록은 1797년 겨울, 이탈리아에서의 눈부신 승리를 안고 파리로 개선한 나폴레옹을 향한 파리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와 함께, 그 이면에 감도는 총재정부의 불안과 견제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너무 커져 버린 영웅. 총재정부는 그의 인기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동시에 자신들의 취약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의 군사력에 의존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긴장 관계 속에서, 나폴레옹은 또 다른 야심 찬 계획, 즉 이집트 원정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 한다.

<1797년 12월, 프랑스 파리 뤽상부르 궁 / 파리 거리 / 나폴레옹 저택>

"보나파르트 만세! 이탈리아의 영웅 만세!"

나폴레옹이 파리에 도착하자, 거리는 그를 환영하는 인파로 가득 찼다. 시민들은 마치 개선 장군을 맞이하듯 열광적으로 환호했고, 그의 이름은 연일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는 단숨에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 되었다.

총재정부가 있는 뤽상부르 궁에서의 공식 환영 행사는 화려했지만, 분위기는 미묘했다. 총재 바라스는 겉으로는 나폴레옹의 공적을 높이 치하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경계심과 불안감이 역력했다. 다른 총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나폴레옹의 인기가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보나파르트 장군, 그대의 혁혁한 공로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 이제 그대의 능력을 영국과의 싸움에 쏟아부을 때요. 우리는 그대를 영국 침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자 하오." 바라스를 비롯한 총재들은 그를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위험한 임무에 보내려 했다.

나폴레옹은 속으로 그들의 의도를 간파했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총재님들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영국 침공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작전입니다. 영국 해군의 벽은 너무나 높습니다." 그는 해협을 건너 영국 본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대신 그는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야심 찬 계획을 제시했다.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생명줄인 인도로 가는 길목을 차단해야 합니다. 제가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점령하여 동방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겠습니다. 이는 프랑스에게 새로운 영광과 부를 안겨줄 것입니다."

총재들은 나폴레옹의 제안에 솔깃했다. 이집트 원정은 위험 부담이 컸지만, 성공한다면 프랑스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위험한 야심가 나폴레옹을 파리 정치 무대에서 멀리 떼어놓을 수 있다는 매력이 있었다. 그들은 결국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계획을 승인했다.

에티엔 드샹은 이러한 정치적 움직임을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그는 나폴레옹의 인기가 혁명의 원칙보다는 군사적 영광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는 익명의 팸플릿을 통해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다.

"시민들이여, 경계하라! 로마 공화정은 카이사르라는 군사 영웅의 손에 무너졌다. 지금 프랑스에도 새로운 카이사르가 등장하려 하고 있다. 그의 화려한 승리에 현혹되지 마라! 그의 야심은 공화국의 자유를 위협할 수 있다! 우리는 영웅이 아니라 법과 제도를 신뢰해야 한다!" 그의 목소리는 아직 미약했지만, 나폴레옹의 부상에 대한 지식인 사회의 잠재적 불안감을 대변하고 있었다.

한편, 나폴레옹은 파리 사교계의 중심인 아내 조제핀과 함께 화려한 생활을 즐기면서도, 이집트 원정을 위한 준비를 착실히 진행했다. 그는 단순히 군대뿐만 아니라, 수많은 과학자, 기술자, 예술가들을 원정대에 포함시켜 이집트 문명 연구라는 문화적 목표를 내세우기도 했다. 이는 그의 원정이 단순한 군사 정복이 아니라 문명사적 의미를 지닌다는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계산된 행동이었다.

1798년 봄, 나폴레옹은 '동방 원정군'을 이끌고 툴롱 항구를 떠나 이집트로 향했다. 파리의 정치인들은 그가 떠나는 것을 안도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풀어준 호랑이가 얼마나 더 강력해져서 돌아올지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이제 유럽을 넘어 동방에서 새로운 영광과 야망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119장: 이집트 원정, 피라미드 앞의 영광?

1950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이집트관에 전시된 수많은 유물들, 특히 로제타석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 남긴 문화적 유산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그의 기록에서 이 원정의 군사적, 정치적 의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총재정부의 견제를 피해 동방에서 새로운 영광을 찾으려 했던 나폴레옹의 야심 찬 도박은 결국 군사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그가 없는 동안 프랑스를 더 큰 위기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이집트 원정은 나폴레옹 개인의 야망과 프랑스 제국주의 팽창 욕구가 결합된 모험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들과 현지 민중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1798년 5-7월, 지중해 /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 카이로 근처>

1798년 5월, 거대한 프랑스 함대가 툴롱 항구를 출발했다. 약 4만 명의 병사와 1만 명의 선원, 그리고 160여 명의 과학자, 예술가, 기술자들을 태운 이 함대의 목표는 비밀에 부쳐져 있었지만, 그 최종 목적지는 이집트였다. 나폴레옹은 지중해를 건너는 동안 몰타 섬을 점령하여 전략적 거점을 확보했다. 그의 함대는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의 추격을 교묘하게 따돌리며 7월 1일, 마침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근처 해안에 상륙했다.

이집트는 당시 명목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속주였지만, 실제로는 맘루크(Mamluk) 기병 군벌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민중들에게 자신들이 오스만 술탄의 권위를 회복하고 맘루크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왔다고 선전했다. 그는 이슬람교와 현지 문화를 존중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민심을 얻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프랑스 군대는 곧바로 카이로를 향해 사막 행군을 시작해야 했다. 병사들은 살인적인 더위와 갈증, 그리고 낯선 질병과 싸워야 했다. 보급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피에르 뒤퐁은 이 지옥 같은 행군 속에서 이탈리아 원정 때의 영광은 온데간데없음을 느꼈다.

"젠장, 여기가 약속의 땅이란 말인가?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실 수 없는 이 찜통 사막이?" 동료 병사가 투덜거렸다.

"조용히 해! 보나파르트 장군님께서 곧 우리를 카이로의 부귀영화로 이끌어 주실 걸세!" 다른 병사가 반박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도 확신은 없어 보였다.

마침내 7월 21일, 카이로 근처 기자(Giza)의 피라미드가 보이는 평원에서 프랑스 군은 맘루크 군대와 마주쳤다. 맘루크 기병대는 용맹했지만, 무기와 전술 면에서 프랑스군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보병 방진(方陣)을 활용하여 맘루크 기병대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고, 프랑스군의 우월한 화력 앞에 맘루크 군대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전투 직전, 나폴레옹은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전해진다. "병사들이여! 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4천 년의 역사가 그대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말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피라미드 전투의 승리로 프랑스 군은 카이로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통치를 위한 행정 기구를 설치하고, 현지 유력자들과의 협력을 모색했다. 동시에, 원정대에 동행한 학자들은 본격적인 이집트 문명 연구에 착수했다. 그들은 고대 유적을 조사하고, 동식물을 채집했으며, 측량과 지도 제작을 진행했다. 이들의 활동은 이후 '이집트학(Egyptology)'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 탄생의 기초가 되었고, 특히 로제타석(Rosetta Stone)의 발견은 고대 이집트 상형 문자 해독의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집트 점령은 처음부터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 있었다. 이집트 민중들은 프랑스 군대를 해방군이 아닌 새로운 점령군으로 여겼고, 곳곳에서 저항과 반란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프랑스군의 과도한 세금 징수와 이슬람 문화에 대한 몰이해는 반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설상가상으로, 나폴레옹에게는 더 큰 재앙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육지에서 승리를 거두는 동안, 지중해의 제해권은 여전히 영국의 손아귀에 있었던 것이다.

제120장: 아부키르 만의 재앙, 고립된 영웅

1950년 파리.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흔히 피라미드 전투의 영광과 로제타석 발견이라는 문화적 성과로 기억되지만, 군사 전략적으로는 아부키르 만 해전(나일 해전)에서의 참패로 인해 실패로 귀결될 운명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집트 원정 소식을 파리에서 접하며, 나폴레옹의 무모한 야심과 프랑스가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기록 속에는 넬슨 제독의 이름이 경외와 함께 등장한다. 바다의 지배권을 잃는다는 것이 대륙의 영웅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나는 그의 기록을 통해 되짚어 본다.

<1798년 8월 1-2일, 이집트 아부키르 만 해상 / 카이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육군 주력 부대가 카이로를 점령하고 이집트 내륙으로 진격하는 동안, 프랑수아-폴 브뤼에스(François-Paul Brueys d'Aigalliers)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는 알렉산드리아 동쪽 아부키르 만에 정박해 있었다. 나폴레옹은 함대에 좀 더 안전한 항구를 찾으라고 지시했지만, 브뤼에스 제독은 만 안쪽에 일렬로 함대를 배치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이는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한편, 지중해에서 프랑스 함대를 놓치고 끈질기게 추격해 온 호레이쇼 넬슨 제독의 영국 함대는 마침내 아부키르 만에 정박한 프랑스 함대를 발견했다. 넬슨은 망설이지 않고 즉시 공격을 명령했다. 8월 1일 저녁,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대의 허를 찌르며 만 안쪽과 바깥쪽 양면에서 협공을 가하는 대담한 전술을 구사했다.

프랑스 함대는 야간 기습 공격에 완전히 허를 찔렸다. 함선들은 좁은 만 안에서 제대로 기동할 수도 없었고, 육지 쪽 포문은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영국 함대의 정확하고 맹렬한 포격 앞에 프랑스 함선들은 속수무책으로 파괴되었다. 브뤼에스 제독의 기함인 거대한 전함 '오리앙(L'Orient)'호는 격렬한 전투 끝에 화약고가 폭발하며 밤하늘을 대낮처럼 밝히고 산산조각 나 침몰했다. 브뤼에스 제독 자신도 이 폭발 직전 전사했다.

전투는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졌고, 결과는 프랑스 함대의 참담한 궤멸이었다. 13척의 주력 전함 중 11척이 나포되거나 파괴되었고, 수천 명의 프랑스 해군 병사들이 사망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영국 측 피해는 경미했다. '나일 해전(Battle of the Nile)'으로 알려진 이 전투는 넬슨 제독의 명성을 다시 한번 드높였고, 트라팔가르 해전과 함께 영국 해상 패권의 상징적인 승리로 기록되었다.

<카이로, 프랑스군 사령부>

아부키르 만 해전의 패배 소식은 카이로에 있던 나폴레옹에게 청천벽력과 같았다. 그는 격노했고, 동시에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 함대의 전멸은 단순히 군사적 패배를 넘어, 이집트 원정군 전체가 본국과의 연결이 끊긴 채 완전히 고립되었음을 의미했다. 이제 병력과 물자 보충은 불가능해졌고, 이집트에서의 장기적인 통치 계획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브뤼에스, 이 멍청한 놈! 내 명령을 따랐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나폴레옹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소리쳤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특유의 강인한 의지로 이집트 통치를 유지하고 활로를 모색하려 했다. 그는 이슬람 율법학자들과의 관계 개선, 조세 제도 개혁, 행정 시스템 정비 등을 시도했고, 심지어 오스만 제국의 반격을 막기 위해 시리아 원정까지 감행했다.

그러나 시리아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아크레(Acre) 요새 공략 실패와 전염병(페스트) 창궐로 막대한 손실만 입은 채 퇴각해야 했다. 이집트 내부에서도 카이로 반란(1798년 10월) 등 프랑스 지배에 대한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1799년 초, 프랑스 본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최악이었다. 나폴레옹이 없는 틈을 타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공세를 재개했고, 프랑스 군은 이탈리아 등지에서 연패하며 나폴레옹이 이룩했던 성과들을 대부분 상실했다는 것이었다. 총재정부는 무능과 부패로 국민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고, 프랑스는 다시 한번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나폴레옹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집트에서의 성공 가능성은 희박해졌고, 프랑스 본국은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할 기회가 바로 지금 파리에 있다고 판단했다.

1799년 8월, 나폴레옹은 이집트 주둔군 지휘권을 클레베르(Kléber) 장군에게 비밀리에 넘기고, 소수의 측근들과 함께 작은 프리깃함 두 척에 몸을 실었다. 그의 목표는 영국 함대의 봉쇄망을 뚫고 프랑스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고립된 영웅의 위험천만한 탈출이 시작된 것이다. 그의 부재 속에서 이집트에 남겨진 프랑스 군대는 결국 1801년 영국-오스만 연합군에게 항복하게 된다. 이집트 원정은 군사적으로는 명백한 실패였지만, 나폴레옹은 이 실패마저도 자신의 정치적 부활을 위한 발판으로 삼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이미 파리의 권력 중심부를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