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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M으로 뽑은 잡지식

0.1 Ver.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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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부: 통령 나폴레옹 시대 (1799-1804)

제131장: 공화력 8년 헌법, 권위주의 공화국

1950년 파리. 브뤼메르 쿠데타 이후 프랑스의 운명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권력의 진공상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수 싸움, 즉 새로운 헌법 제정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시에예스는 자신의 정교한 이론으로 공화국을 설계하려 했지만, 결국 나폴레옹의 냉철한 현실 감각과 권력 의지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공화력 8년 헌법. 그것은 공화국의 외피를 썼지만, 실질적으로는 제1통령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하는 권위주의 체제의 서막이었다.

<1799년 11월 말 - 12월, 파리 뤽상부르 궁 또는 튈르리 궁>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무너뜨린 세 명의 임시 통령, 나폴레옹, 시에예스, 로제 뒤코는 뤽상부르 궁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헌법 제정 작업에 착수했다. 표면적으로는 세 사람이 동등한 위치였지만, 군대를 장악하고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나폴레옹의 영향력은 이미 압도적이었다.

시에예스는 오랫동안 구상해 온 자신의 헌법 초안을 의기양양하게 내놓았다. 그것은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 선거권을 인정하되, 선거인단이 단계적으로 '명사(Notable)' 명부를 작성하고, 이 명부 중에서 '호민원(Tribunat)'이 법안을 토론하고 '입법원(Corps législatif)'이 침묵 속에서 표결하며, '원로원(Sénat conservateur)'이 헌법 수호 및 고위직 임명 역할을 맡는다는 구상이었다. 행정권은 두 명의 통령에게 부여되는데, 한 명은 내정을, 다른 한 명은 외정을 담당하며, 이들을 견제하고 조정하는 최고 책임자로 '대선거인(Grand Électeur)'이라는 종신직 명예직을 두자는 것이었다. 시에예스는 자신이 바로 이 '대선거인'이 되어 막후에서 실권을 행사하려 했던 것이다.

"보나파르트 장군, 보시오. 이 헌법이야말로 프랑스에 안정과 질서를 가져다 줄 완벽한 체계요. 인민의 주권은 인정하되, 과도한 민주주의의 폐단을 막고 유능한 엘리트들이 국가를 이끌 수 있도록 설계되었소." 시에예스는 자신의 복잡한 도식을 펼쳐 보이며 설명했다.

나폴레옹은 시에예스의 설명을 잠자코 들었다.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속으로는 비웃고 있었다. '늙은 여우 같으니. 결국 자기가 왕 노릇을 하겠다는 속셈 아닌가.' 그는 시에예스의 이론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의 권력 장악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다.

"훌륭한 구상이십니다, 시에예스 시민." 나폴레옹은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 복잡한 체계가 과연 지금의 위기 상황에서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프랑스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강력하고 단일한 지도력입니다. 행정권은 분할되어서는 안 되며, 신속하고 결단력 있게 행사되어야 합니다."

나폴레옹은 국참사원(Conseil d'État, 법안 기초 및 행정 자문 기구)의 회의를 주재하며 헌법 초안 수정 작업에 직접 개입했다. 그는 시에예스의 복잡한 견제 장치들을 하나씩 무력화시키고, 권력을 제1통령에게 집중시키는 방향으로 조항들을 바꾸어 나갔다.

"제1통령은 정부의 모든 권한을 행사하며, 법률을 발의하고, 각료와 모든 고위 관리를 임명한다. 다른 두 통령은 자문 역할에 그친다."

"호민원은 법안을 토론할 뿐, 표결권은 없다. 입법원은 토론 없이 침묵 속에서 표결만 한다."

"원로원은 제1통령이 제안하는 명단 중에서 의원을 선출한다."

나폴레옹의 수정안은 사실상 제1통령의 독재를 합법화하는 내용이었다. 시에예스는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나폴레옹의 군사적 배경과 대중적 인기를 등에 업은 카리스마 앞에서 그의 저항은 무력했다. 다른 두 통령 후보로 거론되던 법률가 캄바세레스(Jean-Jacques-Régis de Cambacérès)와 르브룅(Charles-François Lebrun)은 나폴레옹의 실용주의 노선을 지지하며 그의 편에 섰다.

"이것은… 이것은 내가 원했던 공화국이 아니오! 이것은 위장된 군주정일 뿐이오!" 시에예스는 분노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정치적 패배를 인정하고, 원로원 의장이라는 명예직을 받아들이며 실권 없는 자리로 물러나야 했다. 혁명의 '머리'는 '검'에게 굴복한 것이다.

1799년 12월 13일, 나폴레옹의 의도대로 수정된 공화력 8년 헌법이 최종 공포되었다. 이 헌법은 공화국이라는 이름은 유지했지만, 그 내용은 프랑스 혁명이 추구했던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권력은 제1통령 나폴레옹에게 집중되었고, 의회는 무력화되었으며, 선거권은 형식적인 것으로 전락했다.

에티엔 드샹은 시골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 깊은 탄식과 함께 기록했다. "새로운 헌법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공화국의 헌법이 아니라, 한 사람의 야심을 위한 법률일 뿐이다. 혁명은 진정 끝났는가? 아니면 이제 막 새로운 형태의 독재가 시작된 것인가? 프랑스의 미래가 암담하다."

프랑스는 이제 나폴레옹이라는 강력한 지도자의 통치 아래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질서와 안정을 갈망하는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그는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프랑스 사회를 재건하고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해 나갈 터였다.

제132장: 국민투표, 민주주의의 허울

1950년 파리. 민주주의의 핵심은 주권자인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과 참여에 있다. 그러나 역사는 종종 민주주의의 형식이 어떻게 그 실질적인 내용을 배반하고 독재 권력의 정당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공화력 8년 헌법을 국민투표(Plébiscite)에 부쳐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낸 과정은 바로 그러한 '보나파르티즘(Bonapartism)' 정치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당시 국민투표가 얼마나 기만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프랑스 국민들의 진정한 의사를 반영하지 못했는지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1800년 1-2월, 프랑스 전역>

"프랑스 국민들이여! 새로운 헌법은 혁명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질서와 안정을 가져올 것입니다! 10년간 프랑스를 이끌 제1통령 보나파르트 장군에게 힘을 실어주십시오! 그는 이탈리아와 이집트에서 프랑스의 영광을 드높였듯이, 이제 프랑스 자체를 위대하게 만들 것입니다!"

나폴레옹 정부는 새로운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대대적인 선전 활동에 나섰다. 거리 곳곳에는 헌법의 장점을 홍보하고 나폴레옹의 영웅적인 이미지를 부각하는 포스터가 나붙었다. 관영 신문들은 연일 헌법 찬성을 독려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정부 관리들은 지방을 순회하며 '질서', '안정', '영광'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투표 방식은 이전 혁명기의 선거와는 사뭇 달랐다. 비밀 투표는 보장되지 않았고, 유권자들은 관리가 지켜보는 앞에서 공개된 명부에 찬성 또는 반대 의사를 직접 기재하고 서명해야 했다. 이러한 방식은 유권자들에게 심리적인 압력을 가하기에 충분했다. 반대 의사를 밝히는 것은 곧 '혁명의 적', '반역자'로 낙인찍힐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자, 시민. 이쪽에 찬성 서명을 하시오. 제1통령 각하와 새로운 프랑스를 위한 일이오." 투표소의 관리가 유권자들에게 노골적으로 찬성을 유도했다.

많은 시민들은 정치에 대한 환멸과 피로감 속에서 투표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소피 라비뉴 같은 평범한 민중들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거나, 참여하더라도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 마지못해 찬성란에 서명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헌법 조항 하나하나가 아니라, 나폴레옹이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정말로 빵값을 안정시키고 전쟁을 끝내줄 수 있을지 여부였다.

"투표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마담. 그냥 시키는 대로 이름이나 적고 오는 거죠." 소피는 투표소를 다녀와 마담 뒤부아에게 무덤덤하게 말했다.

반면, 에티엔 드샹은 이 기만적인 국민투표를 혐오했다. 그는 투표 자체를 거부했다.

"이것은 국민 주권의 실현이 아니라 모독이다. 공개된 장부 앞에서 어떻게 자유로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고, 이 투표는 단지 독재 권력에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씌우려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그는 자신의 서재에서 분노에 찬 글을 썼지만, 발표할 수는 없었다. 언론은 이미 통제되고 있었고, 반대 목소리는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예상대로, 1800년 2월 발표된 국민투표 결과는 나폴레옹 정부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약 301만 명이 찬성했고, 반대는 불과 1,562명에 그쳤다. 기권자도 많았지만(약 400만 명 추산), 정부는 이를 국민 대다수의 암묵적인 동의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 결과 뒤에는 경찰 책임자 푸셰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푸셰는 각 지역 도지사들에게 찬성률을 최대한 높이라는 지시를 내렸고, 투표 결과를 집계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조작이 이루어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실제 찬성표는 공식 발표보다 훨씬 적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폴레옹은 이 압도적인 국민투표 결과를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강력한 무기로 활용했다. 그는 자신이 단순히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인이 아니라, 프랑스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는 합법적인 지도자임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이후 그는 종신 통령 취임(1802), 제정 수립(1804) 등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단계마다 국민투표라는 형식을 동원하여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이처럼 나폴레옹 시대에 반복된 국민투표는, 프랑스 혁명이 낳은 '인민 주권'의 원리가 어떻게 권위주의적 통치와 결합되어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외피를 썼지만, 실제로는 대중의 지지를 동원하고 반대 의견을 억압하며 독재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형식과 실질 사이의 괴리. 이 문제는 이후 현대 민주주의 역사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중요한 딜레마로 남게 된다.

제133장: 좌우의 적을 제압하다

1950년 파리. 권력을 장악한 자는 필연적으로 내외부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브뤼메르 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통령정부는 오른쪽으로는 여전히 왕정 복고를 꿈꾸는 왕당파의 위협을, 왼쪽으로는 혁명의 급진적 이상을 포기하지 않은 자코뱅 잔당들의 반발을 동시에 안고 있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나폴레옹이 어떻게 이 양쪽의 적들을 교묘하게 제압하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해나갔는지, 그 과정에서 보여준 냉혹한 정치적 수완과 공안 통치의 강화를 주목하고 있다. 특히 1800년 12월의 '지옥의 마차' 사건은 그가 정치적 위기를 어떻게 역이용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1800년, 프랑스 파리 / 서부 방데 지역>

통령정부 수립 이후, 나폴레옹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는 프랑스 서부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왕당파 반란, 즉 슈아누리(Chouannerie)와 방데 반란을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무력 진압과 함께 회유책을 병행했다. 반란 지도자들에게는 사면을 제안하고 협상을 시도하는 한편, 반란에 가담한 농민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를 약속하며(정교 협약 추진 배경) 민심을 달랬다. 이러한 노력 끝에 1800년 초, 대부분의 반란 지도자들이 항복하거나 체포되면서 서부 지역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러나 파리를 중심으로 한 왕당파의 반(反)나폴레옹 음모는 계속되었다. 특히 조르주 카두달(Georges Cadoudal)과 같은 강경 왕당파 지도자들은 영국의 지원을 받으며 나폴레옹 암살 및 부르봉 왕정 복고를 위한 비밀 공작을 꾸미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푸셰가 이끄는 비밀경찰 조직을 총동원하여 이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한편, 혁명의 급진적 흐름을 계승하는 자코뱅 잔당들 역시 나폴레옹의 권위주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나폴레옹이 혁명을 배신하고 독재자의 길을 걷고 있다고 비판하며, 공화주의 원칙을 수호하기 위한 저항을 모색하고 있었다. 일부는 바뵈프의 평등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비밀 결사를 조직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이 양쪽의 위협을 모두 심각하게 받아들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코뱅 세력을 더 위험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전히 파리 민중들 사이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코뱅 잔당을 완전히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기회는 1800년 12월 24일 저녁,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찾아왔다. 나폴레옹이 오페라 관람을 위해 마차를 타고 파리 생니케즈(Saint-Nicaise) 거리를 지나던 순간, 길가에 세워진 마차에 실려 있던 거대한 폭탄('지옥의 마차(Machine infernale)')이 폭발했다. 나폴레옹의 마차는 간발의 차이로 폭발 지점을 지나쳐 무사했지만, 수많은 행인들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는 끔찍한 참사가 벌어졌다.

<파리 튈르리 궁>

나폴레옹은 분노했지만, 동시에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절호의 기회임을 직감했다. 그는 즉시 국참사원 회의를 소집했다.

"이것은 명백한 자코뱅 테러리스트들의 소행이다! 그들은 혁명의 혼란을 다시 불러일으키려 하고 있다! 더 이상 관용은 없다! 공화국의 안정을 위해 저들을 뿌리 뽑아야 한다!" 나폴레옹은 의도적으로 자코뱅 세력을 범인으로 지목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 책임자 푸셰는 실제 범인이 카두달을 비롯한 왕당파라는 심증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폴레옹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의 주장에 동조했다. 그는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하여 평소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자코뱅 잔당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웠다.

"제1통령 각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 정보망에 따르면, 이 테러는 자코뱅 과격파들의 소행이 분명합니다. 즉시 관련자들을 색출하여 엄단해야 합니다." 푸셰는 태연하게 거짓 보고를 올렸다.

나폴레옹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대대적인 자코뱅 탄압에 나섰다. 130여 명의 자코뱅 지도자 및 활동가들이 증거도 없이 체포되어 재판 없이 프랑스령 기아나나 세이셸 등 해외 식민지로 추방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유형지에서 병이나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에티엔은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지만, 공포 분위기 속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었다. 그는 비밀 기록에 남겼다. "나폴레옹은 테러를 이용하여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이것은 로베스피에르의 방식과 무엇이 다른가? 혁명은 또다시 그 자식들을 삼키고 있다."

이후 '지옥의 마차' 사건의 진범이 왕당파임이 밝혀졌지만, 나폴레옹은 이미 자코뱅 세력을 성공적으로 제거한 뒤였다. 그는 왕당파에 대해서도 일부 주모자를 처형하는 등 단호한 조치를 취했지만, 자코뱅 탄압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그가 당시 왕당파보다는 좌파 급진 세력을 더 큰 위협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지옥의 마차' 사건과 그 이후의 정치적 탄압을 통해, 나폴레옹은 좌우의 반대 세력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자신이 혼란과 테러로부터 질서를 회복시키는 유일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공포와 안정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그의 통치술은 프랑스를 점차 제정(帝政)으로 이끌어갈 강력한 엔진이 되고 있었다.

제134장: 행정 개혁, 도지사의 힘

1950년 파리. 프랑스 현대 국가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강력한 중앙 집권적 행정 체제이다. 그리고 그 초석을 놓은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프랑스 혁명은 초기에는 과도한 지방 분권을 추구했지만, 이는 행정의 비효율과 혼란을 야기했다. 통령 정부 수립 후 나폴레옹은 혁명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중앙 정부의 권한을 지방까지 강력하게 관철시킬 수 있는 새로운 행정 시스템 구축에 착수했다. 그 핵심이 바로 도지사(Préfet) 제도의 도입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이 개혁의 효율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혁명이 추구했던 지방 자치와 민주주의 원칙의 후퇴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다.

<1800년 2월 이후, 파리 정부 청사 / 프랑스 지방 데파르트망>

"프랑스는 하나다! 혁명은 우리에게 통일된 국가를 주었지만, 행정은 여전히 분열되어 있고 비효율적이다. 각 지방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진정한 국가 통합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파리의 강력한 의지가 프랑스 구석구석까지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제1통령 나폴레옹은 국참사원 회의에서 새로운 행정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옆에는 충실한 제2통령 캄바세레스와 내무 장관 샤프탈(Jean-Antoine Chaptal) 등이 앉아 그의 구상을 뒷받침했다. 혁명기에 도입된 데파르트망(Département) 제도는 유지하되, 각 데파르트망의 행정 책임자를 선출직이 아닌 중앙 정부 임명직으로 바꾸는 것이 개혁의 핵심이었다.

1800년 2월 17일(공화력 8년 플뤼비오즈 28일), '데파르트망 행정 조직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었다. 이 법에 따라 각 데파르트망에는 제1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도지사(Préfet)'가 파견되었다. 도지사는 해당 데파르트망에서 중앙 정부를 대표하는 최고 행정 책임자로서, 법률 집행, 치안 유지, 조세 징수, 징병 관리, 교육 감독, 공공사업 추진 등 거의 모든 행정 영역에 걸쳐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도지사는 오직 제1통령(즉, 나폴레옹)에게만 책임을 졌으며, 임기는 보장되지 않아 언제든 해임될 수 있었다. 이는 도지사가 중앙 정부의 의지를 지방에 강력하게 관철시키는 효과적인 수단임을 의미했다.

도지사 아래에는 각 아롱디스망(Arrondissement, 데파르트망 하위 행정 구역)을 책임지는 '부지사(Sous-préfet)'가 임명되었고, 각 코뮌(Commune, 기초 자치 단체)의 '시장(Maire)' 역시 선출직에서 임명직(인구 5천 이상은 제1통령, 그 미만은 도지사 임명)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프랑스 행정 시스템은 파리 중앙 정부-도지사-부지사-시장으로 이어지는 명확하고 위계적인 중앙 집권 체제로 재편되었다.

새롭게 임명된 도지사들은 대부분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인물들로 채워졌다. 그들은 혁명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된 법률과 행정 절차를 시행하며 지방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도로와 교량이 건설되고, 학교가 세워졌으며, 조세 징수는 이전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효율성의 이면에는 혁명이 추구했던 지방 자치와 민주주의 원칙의 심각한 후퇴가 있었다. 혁명 초기, 시민들은 직접 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지방 대표와 행정 책임자를 선출하는 권리를 쟁취했었다. 그러나 이제 지방 행정은 파리에서 파견된 임명직 관료들에 의해 좌우되게 되었다. 지방의 고유한 특성이나 주민들의 의사는 무시되기 일쑤였고, 중앙 정부의 정책은 일방적으로 강요되었다.

에티엔 드샹은 시골에 머물면서 이러한 변화를 직접 목격했다. 그는 새로 부임한 도지사가 지역 유지들과 충돌하거나, 혹은 중앙 정부의 지시에 따라 무리한 세금 징수나 징병을 강행하는 모습을 보며 우려를 금치 못했다.

"행정의 효율성이 높아진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혁명기의 혼란에 비하면 분명 나아진 점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과연 진정한 진보인가? 시민들의 자율적인 참여와 지방의 고유한 목소리가 질식되고, 모든 것이 파리의 의지에 따라 획일적으로 통제되는 사회. 이것이 우리가 혁명을 통해 얻으려 했던 결과는 아닐 것이다. 효율적인 통치는 때로 자유의 무덤이 될 수도 있다." 그의 기록에는 강력한 국가 권력에 대한 경계심과 함께, 혁명의 이상이 관료주의적 질서 속에서 질식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담겨 있었다.

나폴레옹이 구축한 중앙 집권적 도지사 제도는 이후 프랑스 행정 시스템의 근간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근대 국가의 효율적인 통치 기반을 마련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프랑스 사회의 고질적인 중앙 집권주의와 관료주의 문화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혁명의 유산은 이처럼 종종 양날의 검과 같은 모습으로 역사 속에 남겨졌다.

제135장: 프랑스 은행 설립, 재정 안정의 초석

1950년 파리. 전후 프랑스 경제 재건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안정적인 금융 시스템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을 보면, 프랑스 혁명기 아시냐 지폐의 실패와 총재정부 시기 재정 파탄의 경험은 국가 경제에서 안정적인 통화와 신용 시스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다. 나폴레옹이 통령 정부 수립 직후 가장 먼저 추진했던 개혁 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 은행(Banque de France)'의 설립이었다. 이는 단순히 경제 문제 해결을 넘어, 새로운 정권의 안정성과 신뢰도를 높이고 국가 권력을 강화하려는 나폴레옹의 치밀한 계산이 깔린 조치였다.

<1800년 1월 이후, 파리 재무부 / 은행가 사무실 / 초기 프랑스 은행>

프랑스 혁명은 재정 파탄에서 시작되었고, 혁명 기간 내내 재정 문제는 정부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이었다. 특히 무분별하게 남발된 아시냐 지폐는 가치가 폭락하여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했고, 경제 활동을 마비시켰으며, 민중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총재정부 시기에는 국가 재정이 사실상 파산 상태에 이르러, 군대 급료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못할 정도였다.

제1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이러한 재정적 혼란을 수습하고 경제를 안정시키는 것이 정권 안정의 최우선 과제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재정 개혁에 착수했다. 그 핵심 조치 중 하나가 바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통화와 신용을 관리할 중앙은행 설립 구상이었다.

1800년 1월, 나폴레옹은 페르고(Jean-Frédéric Perregaux), 레카미에(Jacques-Rose Récamier) 등 파리의 유력 은행가들과 협력하여 '프랑스 은행(Banque de France)'을 설립했다. 초기에는 정부가 일부 지분을 참여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민간 주주들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주식 회사 형태였다. 프랑스 은행의 주요 임무는 정부에 대한 대출 제공, 국채 관리, 그리고 상업 어음 할인 등을 통해 민간 기업에 대한 신용 공급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에는 안정적인 통화와 신용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나폴레옹은 은행 설립을 주도하며 강조했다. "프랑스 은행은 정부 재정을 돕는 동시에, 상공업 발전을 지원하여 국가 경제 전체를 부흥시키는 엔진 역할을 할 것입니다."

프랑스 은행 설립과 함께, 나폴레옹 정부는 통화 제도를 안정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아시냐 지폐를 폐지하고, 금과 은에 기반한 새로운 금속 화폐, 즉 '프랑 제르미날(Franc Germinal)'(1803년 공식 도입)을 발행하여 통화 가치를 안정시키려 했다. 프랑스 은행은 점차 지폐 발행권을 독점하게 되면서(1803년 파리 독점, 1848년 전국 독점), 사실상의 중앙은행으로서의 역할을 강화해 나갔다.

동시에 조세 제도 개혁도 추진되었다. 혁명기에 도입된 직접세(토지세, 동산세, 영업세 등) 징수 시스템을 효율화하고, 전국적인 토지 대장(Cadastre) 정비 사업을 시작하여 공평하고 안정적인 세수 확보 기반을 마련하려 했다. 또한, 소금, 담배, 주류 등에 대한 간접세를 다시 도입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했다.

이러한 일련의 재정 및 금융 개혁 조치들은 점차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통화 가치가 안정되고 신용 시스템이 재건되면서 경제 활동은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은행 대출을 통해 투자를 늘릴 수 있었고, 정부는 안정적인 재정 수입을 바탕으로 국가 운영 및 전쟁 수행 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소피 라비뉴는 이러한 변화를 피부로 느꼈다. "요즘은 빵값이 예전처럼 미친 듯이 오르지는 않는 것 같아요, 마담. 아시냐 때는 정말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는데." 그녀가 마담 뒤부아에게 말했다. 물론 그녀의 삶은 여전히 고단했지만, 최소한 극심한 인플레이션의 공포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에티엔 드샹은 나폴레옹의 재정 개혁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프랑스 은행 설립 과정에서 소수의 파리 은행가들에게 특혜가 주어졌다는 점, 그리고 간접세 부활이 민중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점 등을 비판적으로 지적했다. 그는 또한 프랑스 은행이 장기적으로 정부의 전쟁 비용 조달 창구로 전락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재정 안정은 분명 중요한 성과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소수 자본가의 이익이 우선시되고 민중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 또한, 강력한 중앙은행이 정부, 특히 전쟁을 추구하는 정부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때 어떤 결과를 낳을지…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프랑스 은행 설립과 재정 개혁은 나폴레옹 통치 하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제도적 정비 작업이었다. 이는 프랑스 자본주의 발전의 초석을 놓았고, 국가의 통치 역량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특정 엘리트 집단(금융 자본가, 국가 관료)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국가 권력의 비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씨앗을 품고 있기도 했다. 이중 혁명의 유산은 경제 영역에서도 이처럼 복합적인 명암을 드리우고 있었다.

(제135장 끝)

 

 

 

 

 

 

 

 

 

 

 

 

 

 

 

 

 

 

 

 

 

 

 

 


제14부: 통령 나폴레옹 시대 (1799-1804)

제136장: 종교와의 화해, 정교 협약의 명암

1950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쏟아지는 빛줄기를 바라보며, 나는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 속 또 다른 역사의 페이지를 넘긴다. 프랑스 혁명은 가톨릭 교회와 뿌리 깊은 갈등을 겪으며 사회를 극심하게 분열시켰다. 성직자 시민 헌장, 탈기독교화 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와 반감을 남겼다. 이 혼란을 수습하고 사회 통합을 이루기 위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선택한 카드는 바로 교황청과의 화해, 즉 1801년의 정교 협약(Concordat)이었다. 에티엔은 이 협약을 나폴레옹 특유의 정치적 실용주의와 권력 강화 술책의 산물로 보며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했지만, 동시에 독실한 신자였던 증조모 마리에게는 한 줄기 구원의 빛이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 협약은 과연 진정한 화해였을까, 아니면 국가가 종교 위에 군림하는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었을까?

<1800-1801년, 파리 / 로마>

제1통령 나폴레옹은 프랑스 사회에서 가톨릭 신앙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회의론자였지만, 종교가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했다. 특히 혁명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과 왕당파 세력을 회유하고, 방데와 같은 지역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교회와의 관계 정상화가 필수적이었다.

"프랑스 국민 대다수는 가톨릭 신자다. 그들의 신앙심을 무시하고서는 진정한 국민 통합을 이룰 수 없다. 국가는 종교를 통제해야 하지만, 파괴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정부의 가장 강력한 동맹이 될 수도 있다." 나폴레옹은 측근들에게 자신의 현실적인 계산을 설명했다.

1800년, 나폴레옹은 로마 교황청에 특사를 파견하여 새로운 교황 비오 7세(Pius VII)와의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은 처음부터 험난했다. 교황청은 혁명 정부가 몰수한 교회 재산 반환, 성직자 시민 헌장 철폐, 그리고 가톨릭의 프랑스 국교 지위 회복 등을 요구했다. 반면 나폴레옹은 혁명의 기본 원칙(정교 분리, 종교의 자유, 국유화된 교회 재산 소유권 인정)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으며, 오히려 주교 임명권 등 교회를 국가 통제 하에 두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지기도 했지만, 나폴레옹은 군사적 성공(마렝고 전투 승리)을 바탕으로 교황청을 압박하는 동시에, 외교적 수완(탈레랑, 그리고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협상에 참여)을 발휘하여 타협점을 찾아나갔다.

마침내 1801년 7월 15일 밤, 파리에서 역사적인 정교 협약(Concordat)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프랑스 정부는 가톨릭을 프랑스 '대다수 시민의 종교'로 인정한다 (국교는 아님).
  • 프랑스 내에서 가톨릭 예배의 자유를 보장한다.
  • 주교 임명은 제1통령이 후보자를 지명하면 교황이 서임하는 방식으로 타협한다.
  • 성직자(주교, 사제)는 국가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해야 하며, 국가는 이들에게 급여를 지급한다.
  • 교황청은 혁명 기간 중 몰수된 교회 재산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현재 소유자(국가 또는 개인 구매자)의 권리를 인정한다.
  • 성직자 시민 헌장은 사실상 폐지된다.

이 협약은 양측 모두에게 일정 부분 만족과 불만을 안겨주는 타협의 산물이었다. 교황청은 프랑스에서 가톨릭 신앙의 지위를 회복하고 국가와의 관계를 정상화했지만, 교회 재산과 과거의 특권을 상당 부분 포기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종교 갈등을 봉합하여 사회 안정을 도모하고 가톨릭 세력을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끌어들이는 정치적 이득을 얻었지만, 동시에 국가가 성직자 급여를 부담하게 되었다.

협약 체결 소식은 프랑스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마리 드샹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성당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남편 기욤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세요, 여보! 하느님께서 프랑스를 버리지 않으셨어요! 이제 다시 평화롭게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어요!" 기욤 역시 사회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국가가 성직자 임명과 급여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했다.

시골에 숨어 지내던 클레망 신부와 테레즈 수녀도 협약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박해가 끝나고 다시 자유롭게 신앙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한편으로는 교황청이 혁명 정부와 타협한 것에 대한 씁쓸함과 함께, 국가에 충성 서약을 해야 한다는 새로운 의무 앞에서 또 다른 양심의 고민을 시작해야 했다.

에티엔은 정교 협약을 나폴레옹의 교활한 정치적 술수로 간주하며 비판했다. "결국 종교마저 그의 통치 도구로 전락하는구나. 그는 신앙 자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면서, 단지 사회를 통제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교회를 이용하려 할 뿐이다. 게다가 '조직 조례(Articles organiques)'라는 것을 슬그머니 추가하여 교황의 권한을 더욱 제약하고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화해가 아니라, 교회의 굴복일 뿐이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정교 협약 비준 과정에서 교황청과 상의 없이 '조직 조례'를 일방적으로 추가하여, 교황 칙서 발표나 종교 회의 소집 등에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하는 등 교회를 더욱 엄격한 국가 통제 하에 두려 했다. 이는 이후 나폴레옹과 교황청 사이에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정교 협약은 프랑스 혁명기의 극심했던 종교 갈등을 봉합하고 사회 통합에 기여한 중요한 정치적 성과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혁명의 세속주의 원칙을 일부 후퇴시키고, 교회를 국가 권력 아래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정교 관계라는 민감한 문제 앞에서 나폴레옹은 다시 한번 자신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함께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그 명암은 이후 프랑스 역사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제137장: 알프스를 넘어, 마렝고의 영광

1950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그림은 나폴레옹 신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품이다. 백마를 타고 험준한 알프스 고개를 넘는 젊은 영웅의 모습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러나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그 화려한 이미지 뒤에 숨겨진 냉혹한 현실, 즉 제2차 이탈리아 원정의 실제 어려움과 마렝고(Marengo) 전투에서의 아슬아슬했던 승리,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병사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선전과 신화 만들기를 통해 정치적 자산으로 전환되는지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1800년 봄, 알프스 산맥 생베르나르 고개 / 이탈리아 북부 마렝고 평원>

통령 정부 수립 이후에도 프랑스는 여전히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특히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과거의 영토를 상당 부분 회복한 상태였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확고히 하고 프랑스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다시 한번 대담한 군사적 도박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제2차 이탈리아 원정이었다.

그는 적의 허를 찌르기 위해, 한니발의 고사를 모방하여 험준한 알프스 산맥의 생베르나르(Saint-Bernard) 고개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한다는 놀라운 계획을 세웠다. 1800년 5월, 약 4만 명의 프랑스 군대는 눈 덮인 가파른 산길을 넘는 고된 행군을 시작했다. 대포는 분해해서 운반해야 했고, 병사들은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눈사태의 위험과 싸워야 했다.

피에르 뒤퐁은 이 지옥 같은 행군 대열 속에 있었다. 그는 러시아 원정 때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며 몸서리쳤지만, 동시에 나폴레옹 장군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었다. 나폴레옹은 실제로 병사들과 함께 고개를 넘으며 그들을 격려했고, 그의 강인한 의지는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병사들이여! 알프스 너머에 승리와 영광이 기다린다!"

마침내 알프스를 넘은 프랑스 군은 오스트리아군의 배후를 기습적으로 공격하며 밀라노를 다시 점령했다.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멜라스(Michael von Melas)는 당황했지만, 병력을 재정비하여 마렝고 평원에서 프랑스군과 결전을 벌이기로 했다.

1800년 6월 14일, 마렝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초기 전세는 프랑스군에게 매우 불리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맹렬하게 공격해 왔고, 프랑스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실수를 인정하고 후퇴까지 고려해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다.

"각하,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병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측근 장군들이 초조하게 보고했다. 나폴레옹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역력했다.

바로 그 절체절명의 순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나폴레옹이 다른 지역으로 파견했던 루이 드제(Louis Desaix) 장군이 전투 소식을 듣고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전장에 극적으로 도착한 것이다. 드제는 전황을 파악하고 나폴레옹에게 즉시 반격을 건의했다.

"각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반격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드제의 건의를 받아들여 마지막 예비 병력까지 투입하여 총반격을 명령했다. 프랑스군은 새로운 용기를 얻어 맹렬하게 돌격했고, 승리를 예감하고 방심했던 오스트리아군은 허를 찔려 혼란에 빠졌다.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은 마침내 전세를 뒤집고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프랑스군은 큰 슬픔에 잠겨야 했다.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던 영웅 드제 장군이 반격 과정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그의 죽음을 깊이 애통해하며 "이 얼마나 완벽한 승리인가! 만약 오늘 밤 드제의 시신 옆에서 잠들 수만 있다면!"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마렝고 전투의 승리는 나폴레옹에게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결정적인 승리였다. 이 승리로 프랑스는 이탈리아 북부의 지배권을 다시 확보하게 되었고,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승리는 나폴레옹의 '불패 신화'를 다시 한번 입증하며, 프랑스 내에서 그의 정치적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제 단순한 군사 영웅을 넘어,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국가의 구원자'로 칭송받게 되었다.

훗날 화가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주문을 받아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라는 유명한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실제 나폴레옹이 노새를 타고 힘겹게 고개를 넘었던 사실과는 달리, 백마를 타고 위풍당당하게 알프스를 지휘하는 영웅적인 모습으로 그를 묘사했다. 이는 마렝고 전투의 승리와 함께, 나폴레옹 신화를 시각적으로 완성하고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에티엔은 마렝고 전투 승리 소식과 함께 파리에서 다시 한번 나폴레옹 열풍이 부는 것을 보며, 그의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소비되는지를 냉철하게 분석했다. "승리는 사실이지만, 그 과정의 어려움과 희생은 감추어지고 영웅의 모습만이 부각되고 있다. 대중은 진실보다는 신화를 원하는 것인가? 저 영웅 숭배가 결국 프랑스를 어디로 이끌고 갈지 진정 두렵다."

마렝고의 영광은 통령 나폴레옹의 시대를 열고, 제정으로 나아가는 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나 그 영광 뒤에는 드제 장군의 죽음과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 그리고 신화 뒤에 가려진 냉혹한 정치적 계산이 숨겨져 있었다.

제138장: 아미앵 조약, 짧은 평화의 시대

1950년 파리. 전쟁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 않은 파리의 거리를 걸으며, 나는 20세기 초 두 차례의 끔찍한 전쟁을 겪었던 유럽인들이 얼마나 간절히 평화를 갈망했을지 생각해 본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 속 1802년, 아미앵 조약(Treaty of Amiens) 체결 소식은 당시 프랑스인들에게 단순한 종전 이상의 의미, 즉 10년간의 혁명과 전쟁으로 지친 사회에 찾아온 소중한 휴식과 안정에 대한 기대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이 평화를 자신의 최대 치적으로 선전하며 종신 통령으로 나아가는 발판으로 삼았다. 그러나 에티엔은 이 평화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잠정적인 것인지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그의 기록은 평화에 대한 환호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근본적인 불신과 경쟁 관계를 지적하며, 이 짧은 평화가 더 큰 전쟁의 서곡일 뿐임을 암시하고 있다.

<1801-1802년, 파리 / 뤼네빌 / 아미앵>

마렝고 전투에서의 승리는 나폴레옹에게 유럽 대륙에서의 주도권을 안겨주었다. 오스트리아는 1801년 2월 뤼네빌 조약(Treaty of Lunéville)을 통해 캄포포르미오 조약 내용을 재확인하고, 프랑스의 라인 강 좌안 영유권 및 이탈리아 위성 공화국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했다. 이로써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은 사실상 와해되었고, 프랑스의 유일한 강적은 이제 바다 건너 영국만이 남게 되었다.

영국 역시 오랜 전쟁에 지쳐 있었다. 해상에서는 프랑스를 압도했지만, 대륙 봉쇄 시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팽창을 막지 못했고, 전쟁 비용 부담은 갈수록 커져갔다. 피트 내각이 물러나고 애딩턴(Addington) 내각이 들어서면서, 영국 내에서도 프랑스와의 강화 협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나폴레옹 역시 당분간의 평화가 필요했다. 그는 정교 협약, 행정 개혁, 법전 편찬 등 국내 개혁을 마무리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할 시간이 필요했고, 또한 장기적으로 영국과의 재대결을 위한 해군력 증강 등 군사적 준비도 해야 했다.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1801년 말부터 프랑스 아미앵에서 영국과의 강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협상은 쉽지 않았다. 양측은 해외 식민지 반환, 몰타 섬 귀속 문제, 네덜란드 및 이탈리아 문제 등 여러 쟁점을 놓고 팽팽하게 맞섰다. 프랑스 측 대표는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와 외무장관 탈레랑이었고, 영국 측 대표는 콘월리스(Cornwallis) 경이었다.

<파리, 에티엔의 서재>

에티엔은 아미앵에서의 협상 과정을 면밀히 주시하며 기록했다. 그는 평화를 갈망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근본적인 경쟁 관계와 불신이 쉽게 해소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영국은 프랑스의 대륙 패권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프랑스는 영국의 해상 패권에 계속 도전할 것이다. 이번 평화는 양측 모두에게 숨 고르기를 위한 시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폴레옹은 이 평화를 이용하여 국내에서 자신의 독재를 강화하고, 다음 전쟁을 준비할 것이다. 과연 진정한 평화의 시대가 올 수 있을까?"

마침내 1802년 3월 25일, 아미앵 조약이 체결되었다. 영국은 프랑스 공화국을 공식 인정하고, 전쟁 중 점령했던 대부분의 프랑스 및 동맹국(네덜란드, 스페인) 식민지를 반환하기로 했다(트리니다드, 실론 제외). 프랑스는 나폴리 왕국과 교황령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이집트 영유권을 포기하기로 했다. 몰타 섬은 영국군이 철수하여 성 요한 기사단에게 반환하기로 합의했지만, 이 조항은 이후 분쟁의 불씨가 된다.

조약 체결 소식은 프랑스와 영국 양국 모두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파리와 런던 거리에서는 평화를 축하하는 축제가 열렸고, 사람들은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안도하며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었다. 오랜만에 영국과 프랑스 간의 교류가 재개되었고, 많은 영국인들이 파리를 방문했다.

소피 라비뉴도 파리 거리의 활기찬 분위기를 느꼈다. 전쟁이 끝나면서 물가가 안정되고 장사도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다. "이제 정말 살 만한 세상이 오려나 봐요." 그녀는 희망을 가졌다.

영국 맨체스터에서도 잠시나마 경제가 활기를 띠었다. 대륙과의 무역이 재개되면서 토마스 애쉬워스가 일하는 공장도 가동률이 높아졌다.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프랑스의 과학 기술 동향에 대한 정보를 접할 기회를 얻었고, 아서 핀리는 평화 속에서 사회 개혁 논의가 활발해지기를 기대했다.

나폴레옹에게 아미앵 조약은 최고의 정치적 선물이 되었다. 그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10년 만에 영광스러운 평화를 가져다준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받았다.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802년 8월, 국민투표를 통해 압도적인 지지로 종신 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공화정의 외피는 유지되었지만, 사실상 그는 프랑스의 종신 독재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아미앵의 평화는 애초부터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 있었다. 양국의 근본적인 이해관계 충돌과 불신은 해소되지 않았고, 조약의 모호한 조항들은 끊임없이 분쟁을 야기했다. 특히 몰타 섬 문제와 나폴레옹의 지속적인 팽창 정책(스위스, 이탈리아 개입)은 양국 관계를 다시 악화시켰다. 에티엔의 예감처럼, 아미앵의 평화는 불과 1년 남짓 지속된 짧은 휴전이었을 뿐, 더 거대하고 파괴적인 전쟁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놓인 불안한 숨 고르기에 지나지 않았다. 짧았던 평화의 시대는 곧 끝나고, 유럽은 다시 한번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풍 속으로 휘말리게 될 운명이었다.

제139장: 교육 개혁, 제국의 엘리트 양성

1950년 파리. 오늘날 프랑스 교육 시스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엘리트 고등 교육 기관 '그랑제콜(Grandes Écoles)'과 중등 교육 기관 '리세(Lycée)'의 뿌리는 나폴레옹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나폴레옹의 교육 개혁이 단순히 지식 전달을 넘어, 국가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유능한 엘리트를 양성하여 제국의 통치 기반을 강화하려는 명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혁명기의 자유롭고 다양한 교육 실험들은 폐기되었고, 그 자리를 국가가 통제하는 중앙 집권적이고 표준화된, 그리고 군대식 규율을 강조하는 새로운 교육 시스템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프랑스 사회의 엘리트주의 문화를 강화하는 동시에, 교육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억압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802년 이후, 파리 정부 청사 / 새로 설립된 리세>

통령 나폴레옹은 국가 재건과 통치 시스템 정비의 일환으로 교육 개혁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프랑스 혁명기에는 콩도르세 등을 중심으로 보편적이고 민주적인 공교육 시스템에 대한 이상적인 구상들이 제시되었지만, 정치적 혼란과 재정 부족으로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혁명기의 이상보다는, 국가에 필요한 인재, 즉 충성스럽고 유능한 행정 관료, 군 장교, 기술자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엘리트 교육 시스템 구축에 더 중점을 두었다.

"공화국(이제 곧 제국이 될)의 미래는 교육에 달려 있다. 우리는 국가에 봉사할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발굴하고, 그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하여 제국의 기둥으로 키워내야 한다. 교육은 국가의 통제 아래 통일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나폴레옹은 교육 개혁을 담당한 푸르크루아(Antoine François de Fourcroy) 등에게 자신의 구상을 명확히 전달했다.

1802년 5월 1일, 나폴레옹 정부는 새로운 교육법을 공포했다. 이 법은 초등 교육은 지방 자치 단체나 개인에게 맡겨두는 대신, 중등 교육과 고등 교육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전국적인 규모의 국립 중등 학교, 즉 '리세(Lycée)'의 설립이었다. 리세는 주로 부르주아 및 전문직 계층 자제들을 대상으로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쳐 학생을 모집했으며, 졸업 후 고등 교육 기관 진학이나 공직/군 장교 임용에 유리한 발판을 제공했다.

리세의 교육 과정은 고전(라틴어, 수사학), 프랑스어, 역사, 지리, 그리고 수학과 과학에 중점을 두어 표준화되었다. 교과 내용뿐만 아니라 학교 운영 방식도 중앙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학생들은 군대식 제복을 입고 기숙사 생활을 하며 엄격한 규율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교사 역시 국가의 감독 아래 정해진 교육 과정을 충실히 가르쳐야 했다. 이는 학생들에게 지식 전달과 함께,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복종심, 그리고 엘리트 의식을 심어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에티엔 드샹은 이러한 새로운 교육 시스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기록에 이렇게 남겼다.

"리세라는 이름의 새로운 학교들이 문을 열고 있다. 겉으로는 국가 인재 양성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젊은이들의 정신을 국가가 원하는 틀 안에 가두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획일적인 교육 과정과 군대식 규율 속에서 과연 자유로운 사상과 비판적인 지성이 자라날 수 있을까? 이것은 공화국의 시민을 키우는 교육이 아니라, 제국에 봉사할 부속품을 만드는 교육이다."

나폴레옹의 교육 개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의 모든 고등 교육 기관을 통합 관리하는 중앙 기구로서 '제국 대학(Université impériale)' 설립을 구상했고, 이는 1806년 법령으로 구체화되어 1808년 공식 출범했다. 제국 대학은 특정 지역의 대학이 아니라, 프랑스 전체의 공교육 시스템(초등 교육 제외)을 관장하는 거대한 국가 교육 행정 조직이었다. 이는 교육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교육 내용의 표준화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동시에, 과학 기술 분야 엘리트 양성을 위한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와 같은 기존의 그랑제콜들은 나폴레옹 정권 하에서 더욱 중요성이 커지고 군사 기술 교육과의 연계가 강화되었다.

나폴레옹의 교육 개혁은 분명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 교육 시스템을 통일하고 표준화하여 근대적인 교육 체제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능력 있는 인재들에게 (적어도 남성 부르주아 자제들에게는) 사회적 상승 이동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동시에 교육에 대한 국가 통제를 극도로 강화하고 교육 과정을 획일화함으로써, 교육의 자율성과 다양성, 그리고 비판적 사고 능력을 저해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제국의 영광을 뒷받침할 엘리트를 양성하려 했던 나폴레옹의 교육 시스템은 이후 프랑스 사회에 깊은 엘리트주의 문화를 남기며 오늘날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제140장: 법과 질서, 나폴레옹 법전 편찬 완료

1950년 파리.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서재 한쪽 벽면에는 낡고 두꺼운 법전 한 권이 꽂혀 있었다. 바로 1804년에 공포된 프랑스 민법전, 즉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éon)'의 초판본이었다. 에티엔은 이 법전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혁명의 혼란 속에서 흩어져 있던 법률들을 집대성하여 통일되고 명료한 근대적 법체계를 완성한 위대한 업적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하고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등 혁명의 평등 이념을 후퇴시킨 보수적인 측면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나폴레옹 법전은 이중 혁명의 복합적인 유산을 법률이라는 형태로 압축하여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상징물 중 하나이다.

<1801-1804년, 파리 국참사원(Conseil d'État) 회의실>

통령 정부 수립 이후, 나폴레옹은 프랑스 사회의 법적 기반을 통일하고 안정시키기 위한 민법전 편찬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혁명 이전 프랑스는 북부의 관습법(Coutume)과 남부의 로마법 성문법 전통이 혼재했고, 각 지역과 신분별로 다른 법률이 적용되어 극도로 복잡하고 불공평했다. 혁명기 동안 여러 차례 통일 민법전 편찬 시도가 있었지만, 정치적 혼란 속에서 결실을 맺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1800년, 트롱셰(Tronchet), 포르탈리스(Portalis), 비고 드 프레아므뇌(Bigot de Préameneu), 말빌(Maleville) 등 당대 최고의 법률가들로 구성된 4인의 기초 위원회를 임명하여 법전 초안 작성을 지시했다. 이들은 불과 4개월 만에 초안을 완성했고, 이후 법안은 파기원(Tribunal de Cassation)과 각 지방 항소 법원의 검토를 거쳐, 최종적으로 국참사원(Conseil d'État)에서 조문 하나하나에 대한 치열한 토론과 심의를 거쳐 완성되었다.

놀라운 점은 나폴레옹 자신이 이 국참사원 회의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총 102번의 회의 중 57번 이상 직접 회의를 주재하며 법률가들의 전문적인 논의에 깊숙이 개입했다. 물론 그는 법률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특유의 명석한 두뇌와 현실 감각, 그리고 강력한 의지력으로 토론을 이끌고 자신의 견해를 관철시켰다. 그는 복잡하고 추상적인 법 이론보다는 명료하고 실용적이며 상식에 부합하는 해결책을 선호했다.

"법은 명확하고 간결해야 합니다. 모든 시민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철학자들의 공허한 논쟁이 아니라, 현실 생활에 필요한 질서를 제공해야 합니다." 나폴레옹은 종종 법률가들의 현학적인 논쟁을 중단시키고 핵심을 짚었다고 한다.

편찬 과정에서는 다양한 법 전통과 혁명의 성과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로마법의 합리적인 체계, 프랑스 북부의 관습법 전통, 그리고 왕령과 혁명기의 입법들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었다. 핵심 원칙은 프랑스 혁명이 이룩한 사회적 성과들을 법적으로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 법 앞의 평등: 제1조는 "모든 프랑스인은 시민권을 향유한다"고 선언하며 신분제를 완전히 폐지하고 법 앞에 모든 시민이 평등함을 명시했다.
  • 개인의 자유: 신체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등 개인의 기본적인 자유가 보장되었다.
  • 국가의 세속성: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었고, 출생, 사망, 결혼 등 시민의 신분 등록은 국가가 관리하게 되었다(시민 등록 제도).
  • 사유 재산권의 절대성: 재산권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방식(de la manière la plus absolue)"으로 향유할 수 있는 신성하고 불가침한 권리로 규정되었다. 이는 토지 소유 부르주아지와 농민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계약의 자유: 개인 간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계약은 법적인 구속력을 가지며, 국가는 원칙적으로 이에 개입하지 않음을 명시했다.

이러한 조항들은 봉건적 질서를 완전히 해체하고,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법적 토대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동시에 나폴레옹 법전은 혁명기의 급진적인 평등 이념으로부터 후퇴하여 사회 질서와 안정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측면 또한 강하게 드러냈다. 특히 가족법 분야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 가부장적 권위 강화: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으며, 남편의 허가 없이는 법률 행위(소송 제기, 재산 처분 등)를 할 수 없도록 규정되었다. 남편은 자녀에 대한 강력한 친권을 행사했다.
  • 여성의 법적 지위 약화: 기혼 여성은 사실상 미성년자와 유사한 법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이혼 조건은 남편에게 훨씬 유리하게 규정되었다.
  • 혼외 자녀 차별: 사생아의 상속권 등 법적 권리가 크게 제한되었다.

이러한 조항들은 당시 로마법과 관습법에 남아있던 가부장적 전통을 반영한 것이자, 혁명기의 급격한 사회 변화 이후 '가족 질서'를 회복하고 강화하려는 나폴레옹 정권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여성의 권리 측면에서는 명백한 후퇴였다.

또한, 노동 관련 규정에서는 르 샤플리에 법의 정신을 계승하여 노동자의 단결권이나 파업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고용주와 노동자 간 분쟁 시 고용주의 진술을 우선적으로 신뢰하도록 규정하는 등 자본가에게 유리한 측면을 보였다.

1804년 3월 21일, 36개의 개별 법률로 구성된 2,281개 조항의 프랑스 민법전, 즉 '나폴레옹 법전'이 마침내 최종 공포되었다.

시골에 있던 에티엔은 어렵게 법전 사본을 구해 탐독했다. 그는 법전의 명료함, 체계성, 그리고 혁명의 핵심 원칙들을 담아낸 점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표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위대한 업적이다. 수백 년간 프랑스를 혼란에 빠뜨렸던 잡다하고 모순적인 법률들을 폐기하고, 이성과 평등의 원칙 위에 세워진 통일된 법체계를 마침내 완성했다. 이 법전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체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법전의 한계, 특히 여성과 노동자의 권리를 제약하고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한 점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 법전은 동시에 혁명의 후퇴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평등의 원칙은 남성 유산자에게만 온전히 적용될 뿐, 여성과 노동자는 여전히 종속적인 지위에 머물러 있다. 재산권은 신성시되었지만, 인간의 존엄성은 때로 그 그늘에 가려졌다. 나폴레옹은 질서와 안정을 위해 혁명의 이상 일부를 희생시킨 것이다."

나폴레옹 법전은 이처럼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안고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성과를 법적으로 공고히 다진 근대 시민법의 기념비적인 성과였지만, 동시에 혁명이 제기했던 더 급진적인 평등의 요구와는 거리를 두는 타협의 산물이기도 했다. 이 법전은 이후 나폴레옹 제국의 확산과 함께 유럽 대륙 전반으로 퍼져나가 각국 법체계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근대 세계의 법적 질서를 형성하는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법과 질서의 이름 아래, 나폴레옹은 이제 제국을 향한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14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