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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M으로 뽑은 잡지식

0.1 Ver.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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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부: 제국의 균열과 몰락의 시작 (1808-1812)

(알랭 마르탱의 목소리)

역사의 아이러니는 종종 승리의 절정에서 패배의 씨앗을 뿌린다. 180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제국은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유럽 대륙 대부분이 그의 발아래 놓였고, 옛 왕조들은 그의 형제들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해, 이베리아 반도의 타는 듯한 태양 아래서 시작된 '작은 전쟁', 즉 게릴라전은 제국의 아킬레스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페인 민중의 끈질긴 저항은 나폴레옹의 '위대한 군대'를 끝없는 수렁 속으로 끌어들였고, 이는 제국의 막대한 출혈을 강요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 시기 나폴레옹의 오만함이 불러온 균열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그는 "황제는 스페인 민중의 영혼을 과소평가했고, 그 대가는 제국의 심장을 갉아먹는 상처가 될 것"이라고 기록했다. 여기에 더해, 잠시 굴복했던 오스트리아의 재도전, 후계자를 위한 조제핀과의 비정한 이별, 그리고 굴욕 속에서 조용히 힘을 키우는 프로이센의 개혁까지. 제국의 화려한 외피 속에서는 이미 몰락의 징후들이 뚜렷해지고 있었다. 나는 이제 이 균열이 어떻게 벌어지고 깊어졌는지, 에티엔의 기록과 다른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추적해보고자 한다.


제161장: 영국의 개입, 웰링턴의 등장

(알랭 마르탱) 바다는 늘 육지의 정복자들에게 마지막 장벽이었다. 트라팔가르 해전(1805) 이후,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 침공의 꿈을 접어야 했지만, 대륙 봉쇄령을 통해 영국의 숨통을 조이려 했다. 그러나 바다를 지배하는 영국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1808)은 영국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프랑스의 주력이 이베리아 반도의 수렁에 빠진 틈을 타, 영국은 포르투갈을 교두보 삼아 유럽 대륙에 발을 들여놓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 원정군을 이끌 인물로, 인도에서의 경험과 비미에이루 전투(1808)에서의 승리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 훗날 워털루의 영웅이 될 웰링턴 공작이 선택되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영국의 개입을 '제국의 옆구리에 꽂힌 비수'라고 표현했다. 나는 영국 해군 장교 찰스 킹슬리(가상 인물)의 시선을 통해, 대륙에 상륙한 영국군의 모습과 '철의 공작' 웰링턴의 등장을 그려보고자 한다.

<1809년 봄, 포르투갈 리스본 항구 / 토레스 베드라스 인근 영국군 진지>

리스본 항구는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붉은 군복을 입은 영국 병사들을 가득 실은 수송선들이 속속 도착했고, 부두에는 군수품과 대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프랑스 주노 원수의 침략으로 고통받았던 포르투갈 민중들은 영국군을 해방군처럼 환영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은 유럽 전역에 공포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찰스 킹슬리 소령은 상륙하는 병사들을 지휘하며 낯선 땅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는 오랫동안 바다 위에서 프랑스 함대와 싸워왔지만, 이렇게 대규모로 유럽 본토에 발을 들인 것은 처음이었다.

"드디어 육지에서도 프랑스 놈들과 제대로 붙어보게 되었군." 킹슬리는 옆에 선 부관에게 말했다. "바다에서는 우리가 제왕이지만, 육지에서는 나폴레옹의 군대가 두려운 상대임은 분명하네. 이번 원정은 쉽지 않을 거야."

"하지만 사령관이 웰즐리 경이시니 믿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부관이 대답했다. "인도에서의 전공도 대단했고, 작년 비미에이루에서도 프랑스 놈들을 혼쭐내주지 않았습니까."

킹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 웰즐리 경은 귀족 출신이었지만, 허례허식보다는 실용적인 군사 능력을 중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과묵하고 냉철하며, 부하들에게는 엄격한 규율을 요구했지만 불필요한 희생은 강요하지 않는다는 평판을 얻고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영국 신사이면서도, 동시에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진 지휘관이었다.

웰즐리 경은 리스본 북쪽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치밀한 방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군의 대규모 공세를 정면으로 막아내기보다는,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의 보급선을 교란하며 장기적인 소모전을 유도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 핵심은 리스본으로 통하는 길목에 세워진 '토레스 베드라스(Torres Vedras) 방어선'이었다. 수십 킬로미터에 걸쳐 요새, 보루, 포대, 장애물 등을 겹겹이 설치한 이 거대한 방어선은 영국 공병대의 기술과 수만 명의 포르투갈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비밀리에 건설되고 있었다.

"킹슬리 소령, 이 방어선은 단순히 적의 진격을 막는 것이 아니네. 적을 지치게 하고, 굶주리게 만들며, 스스로 물러나게 만드는 덫이 될 걸세." 웰즐리 경은 방어선을 시찰하며 킹슬리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강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나폴레옹은 번개 같은 기동전의 명수지만, 우리는 인내심과 규율로 그를 상대할 걸세. 시간은 우리의 편이 될 걸세."

킹슬리는 웰즐리의 전략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방어에만 치중하다가는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저항군과의 협력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사령관 각하, 스페인 게릴라 지도자들은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너무 소극적이라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네, 소령." 웰즐리가 대답했다. "그들의 용기는 존경하지만, 감정에 휘둘려 무모한 전투를 벌일 수는 없네. 게릴라들과의 협력은 중요하지만, 주도권은 우리가 쥐고 있어야 하네. 우리의 목표는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전쟁 전체에서 승리하는 것일세. 그러기 위해서는 신중함과 인내가 필요하네."

웰즐리는 스페인 게릴라들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면서도, 그들의 독자적인 행동을 완전히 통제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게릴라들이 프랑스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다. 동시에 그는 영국군 자체의 규율과 훈련 강화에 힘썼다. 병사들의 복지와 보급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프랑스군은 약탈로 먹고 살지만, 우리는 신사답게 싸워야 하네. 우리 군대의 명예는 전투 능력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하게." 그는 부하 장교들에게 항상 강조했다.

킹슬리는 엄격하지만 공정한 웰즐리의 지휘 방식에 점차 신뢰를 보내게 되었다. 비록 화려한 돌격이나 극적인 승리는 없었지만, 영국군은 웰즐리의 지휘 아래 점차 강력하고 규율 잡힌 군대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가올 프랑스군의 대공세를 막아낼 준비를 착실히 해나가고 있었다.

영국의 본격적인 개입과 웰링턴이라는 새로운 적수의 등장은 나폴레옹에게는 예상치 못한 골칫거리였다. 그는 여전히 스페인 게릴라를 '오합지졸 도적떼' 정도로 얕보고 있었지만,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 정규군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대였다. 이베리아 반도는 이제 단순히 스페인 민중의 저항 무대가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이라는 두 제국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새로운 전장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지루하고 피비린내 나는 소모전은 결국 나폴레옹 제국의 몰락을 재촉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었다.

(약 15,000자) - 토레스 베드라스 방어선 건설 과정, 영국군과 현지 주민 관계, 웰링턴의 구체적 전략 논의, 찰스 킹슬리의 개인적 경험/심리 묘사 등 추가 필요


제162장: '스페인 궤양', 제국의 출혈

(알랭 마르탱) 역사는 때때로 작은 상처가 거대한 몸을 쓰러뜨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나폴레옹 제국에게 스페인은 바로 그런 존재였다. 처음에는 쉽게 정복할 수 있는 먹잇감처럼 보였던 이베리아 반도는, 민중들의 예기치 못한 저항과 게릴라 전쟁의 확산, 그리고 영국의 끈질긴 개입으로 인해 결코 아물지 않는 ‘스페인 궤양(Ulcère espagnol)’이 되어 제국의 생명력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황제는 수십만 명의 정예 병력과 막대한 물자를 이 수렁 속으로 쏟아부었지만, 승리는 요원했고 출혈은 계속되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황제는 스페인에서 사람들의 몸뿐 아니라 영혼과 싸우고 있다. 그리고 영혼과의 싸움에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고 기록했다. 파리에서 전황 보고를 받으며 초조해하는 나폴레옹의 모습과, 스페인의 참혹한 현실 속에서 절망해가는 병사 피에르 뒤퐁, 그리고 끈질기게 저항하는 게릴라 미겔의 시점을 통해, 나는 이 끝나지 않는 전쟁의 실체와 그것이 제국에 미친 파괴적인 영향을 그려보고자 한다.

<1809-1811년, 스페인 전선 (사라고사, 산악 지대) / 파리 튈르리 궁 나폴레옹 집무실>

"빌어먹을 스페인 놈들! 대체 언제까지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 건가!" 나폴레옹은 스페인 주둔군 사령관으로부터 온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동댕이치며 격노했다. 보고서에는 프랑스군의 계속되는 손실과 게릴라 활동의 심각성,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 저하에 대한 우울한 내용만이 가득했다. 그는 1808년 말 직접 스페인으로 가서 마드리드를 재점령하고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벌였지만, 그가 프랑스로 돌아오자마자 저항은 다시 거세졌다.

스페인 제2의 도시 사라고사(Zaragoza)는 스페인 민중 저항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1808년 여름 첫 번째 포위 공격을 격퇴했던 사라고사는, 1808년 말부터 다시 시작된 프랑스군의 두 번째 포위 공격에 맞서 무려 두 달 넘게 처절한 항전을 벌였다. 팔라폭스(Palafox) 장군의 지휘 아래, 군인뿐 아니라 남녀노소 시민 모두가 참여하여 도시 곳곳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프랑스군은 막대한 포병 화력을 동원하여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지만, 사라고사 시민들은 집집마다, 거리마다 저항을 계속했다. 결국 굶주림과 질병으로 인해 1809년 2월 항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의 시민과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프랑스군 역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사라고사의 영웅적인 저항은 스페인 전역에 저항 의지를 더욱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라고사와 같은 정규적인 공성전 외에도, 스페인 전역은 게릴라들의 활동 무대였다. 미겔과 그의 파르티다는 오늘도 프랑스군 보급로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소총 몇 자루에 의존하지 않았다. 영국군이 비밀리에 공급해 준 신형 라이플과 탄약으로 무장했고, 전직 군인 출신 지도자의 합류로 조직력도 강화되었다. 그들은 단순히 치고 빠지는 기습 공격뿐 아니라, 프랑스군 통신망을 파괴하고, 협력자로 의심되는 스페인 관리를 암살하며, 심지어 소규모 프랑스군 주둔지를 야간에 습격하기도 했다.

"오늘 밤, 저 고개 너머 프랑스군 막사를 친다. 놈들이 잠든 틈을 노려 불을 지르고 최대한 혼란을 일으킨 뒤 빠져나온다. 무기는 최대한 많이 노획한다. 알겠나?" 미겔은 능숙하게 작전을 지시했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복수심만이 아닌, 숙련된 전사의 냉철함과 지도자의 책임감이 서려 있었다.

프랑스 군인 피에르 뒤퐁에게 스페인은 악몽 그 자체였다. 그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순찰, 매복, 그리고 소규모 전투 속에서 매일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했다. 동료들이 하나둘씩 옆에서 사라져 갔다. 전투에서 죽거나, 부상당하거나, 혹은 게릴라에게 포로로 잡혀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음식과 물은 늘 부족했고, 이질과 열병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지만, 차마 이곳의 실상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저 무사하며 곧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거짓 희망만을 적어 보낼 뿐이었다.

"이 전쟁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야." 피에르는 밤에 모닥불 옆에서 동료에게 속삭였다. "우리가 아무리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여도, 저항은 결코 끝나지 않을 거야. 오히려 우리에 대한 증오심만 더 키울 뿐이지. 황제 폐하께서는 대체 왜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계속하시는 걸까?"

동료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 역시 전쟁의 무의미함과 제국의 오만함에 지쳐가고 있었다. 황제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은 점차 희미해지고, 오직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절박한 심정만이 남아 있었다.

파리의 나폴레옹은 스페인 문제에 대한 보고를 받을 때마다 좌절과 분노를 느꼈다. 그는 수십만 명의 병력을 스페인에 투입했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스페인 궤양'은 제국의 정예 병력을 끊임없이 소모시켰고, 막대한 전비를 탕진하게 만들었다. 이는 다른 전선, 특히 오스트리아와의 전쟁(1809)이나 이후 러시아 원정 준비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는 형 조제프의 무능함을 탓하기도 하고, 장군들의 불화와 태만을 질책하기도 했지만, 문제의 근본 원인이 자신의 오만한 침략과 스페인 민중의 저항 의지를 과소평가한 데 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스페인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다. 프랑스 군대의 위력 앞에 감히 저항할 자는 없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여전히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그의内心에는 어두운 불안감이 싹트고 있었다. 그는 스페인이라는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는 제국 전체의 균열을 심화시키는 명백한 징후였다. 에티엔은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며, 제국의 과도한 팽창이 결국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자신의 예상이 현실화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스페인의 피는 나폴레옹 제국의 영광스러운 외투 아래로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약 17,000자) - 사라고사 공방전 상세 묘사, 게릴라 활동의 다양한 측면, 프랑스군 내부 갈등, 나폴레옹의 오판 분석 등 추가 필요


제163장: 오스트리아의 재도전, 바그람 전투

(알랭 마르탱) 영원한 제국은 없다.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과 프랑스 군대의 위력도 시간 앞에서는, 그리고 끊임없는 저항 앞에서는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809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아우스터리츠(1805)의 치욕적인 패배를 설욕하고 나폴레옹의 패권에 다시 한번 도전장을 내밀었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이라는 수렁에 발목이 잡혀 있는 틈을 노린 것이었다. 이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은 나폴레옹에게 생애 첫 주요 전투 패배라는 쓴맛을 안겨주었고, 비록 최종적으로는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치른 엄청난 희생은 제국의 군사력이 더 이상 무적이 아님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바그람 전투를 "피로 얼룩진 승리, 제국의 마지막 불꽃놀이"라고 평했다. 나는 이 격렬했던 전쟁의 과정을, 특히 아스페른-에슬링에서의 패배와 바그람에서의 힘겨운 승리를 통해 제국의 균열이 어떻게 가시화되었는지를 그려보고자 한다.

<1809년 봄-여름, 오스트리아 빈 근교 도나우 강변 / 아스페른-에슬링 전장 / 바그람 평원>

1809년 봄,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재정 지원을 약속받고, 프로이센의 소극적인 지지 하에 프랑스에 대한 복수전을 결심했다. 카를 대공(Archduke Charles)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군대는 군제 개혁을 통해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져 있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에서 급히 돌아와 바이에른 등 독일 동맹군과 함께 오스트리아 군을 상대해야 했다. 초기 전투에서는 나폴레옹이 승리하며 빈을 다시 점령했지만(5월), 카를 대공은 군 주력을 보존한 채 도나우 강 북쪽으로 후퇴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나폴레옹은 도나우 강을 건너 오스트리아 주력군을 격파하기 위해 조급하게 도하 작전을 시도했다. 5월 21-22일, 프랑스 군대는 빈 근교 로바우(Lobau) 섬을 거쳐 도나우 강 북쪽 강변의 아스페른(Aspern)과 에슬링(Essling) 마을 근처에 부교를 놓고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물이 불어나 부교가 끊어지고, 병력과 포병 일부만 건너간 상태에서 카를 대공의 오스트리아 군이 총공세를 퍼부었다. 좁은 교두보에 고립된 프랑스 군대는 격렬한 전투 속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나폴레옹이 가장 아끼던 원수 중 한 명인 장 란(Jean Lannes)이 포탄에 맞아 두 다리를 잃고 며칠 후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안 돼! 란! 나의 가장 용감한 친구가…!" 나폴레옹은 치명상을 입은 란을 부둥켜안고 비통하게 외쳤다. 그의 눈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눈물이 고였다. 란의 죽음은 나폴레옹에게 큰 충격이었고, 동시에 전투의 패배를 예감하게 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생애 처음으로 주요 전투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로바우 섬으로 군대를 철수시켜야 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는 나폴레옹 불패 신화에 처음으로 금이 간 사건이었고, 유럽 전역에 그의 군대가 더 이상 무적이 아님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패배의 원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다음 전투를 위한 치밀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로바우 섬을 거대한 요새로 만들고, 훨씬 더 튼튼하고 많은 부교를 건설했으며, 병력과 포병을 대규모로 증강시켰다. 그는 복수를 다짐했다.

약 6주 후인 7월 4일 밤, 나폴레옹은 폭풍우를 틈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도나우 강 도하에 성공했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 군이 예상치 못한 지점이었다. 7월 5-6일, 바그람(Wagram) 평원에서 유럽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전투 중 하나가 벌어졌다. 양측 합쳐 30만 명이 넘는 병력과 천 문 이상의 대포가 동원되어 이틀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피에르 뒤퐁은 이번에도 전투의 한복판에 있었다. 아스페른-에슬링에서의 패배 이후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져 있었지만,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전투에 다시 한번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바그람 평원은 아우스터리츠와는 달랐다. 오스트리아 군의 저항은 완강했고, 그들의 포격은 정확하고 강력했다. 피에르는 옆에서 동료들이 포탄에 맞아 형체도 없이 사라지거나, 총검에 찔려 쓰러지는 끔찍한 광경을 끊임없이 목격해야 했다.

"맙소사… 여기가 지옥이구나." 그는 포탄이 터지는 소리와 비명 소리 속에서 간신히 몸을 숨기며 중얼거렸다.

전투는 극도의 혼란 속에서 진행되었다. 나폴레옹은 중앙 돌파를 시도했고, 다부(Davout) 원수는 우익에서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압박했으며, 마세나(Masséna) 원수는 좌익에서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직접 전선을 누비며 병사들을 독려하고 작전을 지휘했지만, 전투는 쉽사리 결판나지 않았다. 양측 모두 엄청난 사상자를 냈고, 전장은 시체와 부상병들로 뒤덮였다.

결국 둘째 날 오후, 나폴레옹이 예비대로 남겨두었던 맥도널드(Macdonald) 장군의 보병 군단이 오스트리아군 중앙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면서 전세는 프랑스 쪽으로 기울었다. 카를 대공은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질서 있는 후퇴를 명령했다. 바그람 전투는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 대가는 엄청났다. 양측 사상자는 7만 명에 달했고, 프랑스군 역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는 더 이상 나폴레옹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라, 피로 얼룩진 힘겨운 승리였음을 보여주었다.

오스트리아는 결국 다시 한번 굴복하여 쇤브룬 조약(Treaty of Schönbrunn, 1809.10)을 체결하고, 또다시 영토를 할양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군사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이 전쟁은 제국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의 군대는 더 이상 무적이 아니었고, 막대한 인명 손실은 제국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에티엔은 바그람 전투 소식을 들으며, 제국의 영광이 정점에 달했지만 동시에 그 몰락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황제는 또다시 승리했지만, 그 승리는 너무 많은 피를 요구했다. 제국은 마치 스스로를 태우며 빛나는 촛불과 같다. 그 불꽃이 꺼질 날도 머지않았다." 그의 기록에는 불안한 예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약 19,000자) - 아스페른-에슬링/바그람 전투 상세 묘사, 란 원수 죽음 장면, 병사/지휘관 심리, 에티엔 성찰 등 추가 필요


제164장: 조제핀과의 이혼, 새로운 황후

(알랭 마르탱) 권력의 정점에 선 자는 종종 자신의 인간적인 감정마저 제국의 논리에 종속시켜야 하는 비정함에 직면한다. 나폴레옹에게 후계자 문제는 단순한 가족 문제가 아니라, 그가 세운 제국과 보나파르트 왕조의 영속성을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 그의 성공 가도에 동반자이자 행운의 여신처럼 여겨졌던 조제핀 드 보아르네(Joséphine de Beauharnais)는 황후가 되었지만, 그에게 제국의 후계자를 안겨주지 못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왕조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유럽의 전통적인 왕가들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조제핀과의 이혼과 새로운 정략결혼이라는 냉혹한 결단을 내린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 사건을 나폴레옹이 혁명의 이상을 완전히 버리고 구체제의 군주들과 같은 길을 걷기 시작한 상징적인 전환점으로 보았다. 나는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개인적인 고뇌, 그리고 이 결정이 가져온 정치적 파장을 중심으로 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1809년 가을-겨울, 파리 튈르리 궁 / 퐁텐블로 궁>

바그람 전투에서 힘겨운 승리를 거두고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의 마음은 무거웠다.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제국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힌 것은 후계자 문제였다. 그는 이미 40세였고, 황후 조제핀은 그보다 여섯 살 연상으로 더 이상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다. 그의 형제들은 무능하거나 야심만만했고, 그가 세운 왕조를 안정적으로 계승할 만한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제국을 영속시키기 위해서는 그의 피를 이은 적법한 후계자가 반드시 필요했다.

오랜 고뇌 끝에 나폴레옹은 결단을 내렸다. 그는 조제핀을 깊이 사랑했지만,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는 그녀와 헤어져야 했다. 1809년 11월 말, 퐁텐블로 궁에서 그는 조제핀에게 이혼 결심을 통보했다.

"조제핀, 내 사랑… 당신도 알다시피, 나에게는 프랑스를 위한 의무가 있소. 이 제국을 이끌어갈 후계자가 필요하오. 하지만 신은 우리에게 아이를 허락하지 않았소. 그래서… 나는 당신과 헤어져야만 하오. 프랑스의 운명이 나에게 이 희생을 요구하고 있소." 나폴레옹의 목소리는 떨렸고,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는 진심으로 괴로워했다.

조제핀은 이미 예감하고 있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이혼 통보를 듣자 실신할 듯 비틀거렸다. 그녀는 나폴레옹의 성공을 곁에서 지켜보며 황후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늘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황후로서 그녀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폐하… 어찌 저에게 이리 잔인하실 수 있습니까? 제가 폐하께 무슨 잘못을 했단 말입니까? 폐하의 성공을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쳤는데… 이제 와서 저를 버리시겠다니요…" 조제핀은 흐느끼며 말했다. 그녀의 슬픔은 깊고 진실했다. 그녀는 나폴레옹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황후로서의 지위 이상으로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며칠간의 눈물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결심은 확고했다. 12월 15일, 튈르리 궁에서 공식적인 이혼 절차가 진행되었다. 나폴레옹과 조제핀은 서로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표하며 이혼 문서에 서명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이 어려 있었다. 나폴레옹은 조제핀에게 막대한 연금과 말메종(Malmaison) 성 등 거처를 제공하며 그녀의 지위를 최대한 보장해주려 애썼지만, 그것이 그녀의 상처를 달래줄 수는 없었다.

이혼이 결정되자마자, 나폴레옹은 새로운 황후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표는 유럽의 유서 깊은 왕가와의 결혼을 통해 자신의 '벼락 황제'로서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동시에 강력한 동맹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여동생 안나 파블로브나(Anna Pavlovna)에게 청혼했지만, 러시아 황실은 종교 문제와 나폴레옹 가문의 비천한(?) 출신을 이유로 모욕적으로 거절했다.

이에 분노한 나폴레옹은 방향을 틀어, 놀랍게도 얼마 전까지 적국이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녀 마리 루이즈(Marie Louise)에게 청혼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에서 가장 유서 깊고 명망 높은 왕가였고, 마리 루이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와 수상 메테르니히는 이 제안에 경악했지만, 나폴레옹의 힘과 프랑스와의 동맹 필요성을 고려하여 결국 굴욕적으로 수락했다. 마리 루이즈 자신은 나폴레옹을 '악마'라고 생각하며 두려워했지만, 국가의 이익을 위해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1810년 봄, 나폴레옹과 마리 루이즈의 화려한 결혼식이 파리에서 거행되었다. 나폴레옹은 이 결혼을 통해 자신이 유럽의 정통 군주들과 동등한 반열에 올랐음을 과시하고,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통해 유럽 지배를 공고히 하려 했다. 이듬해인 1811년 3월, 마리 루이즈는 마침내 나폴레옹이 그토록 염원하던 아들을 낳았다.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로마 왕(Roi de Rome)'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받았고, 프랑스 전역에서는 후계자 탄생을 축하하는 축포가 울려 퍼졌다. 나폴레옹은 왕조 창건의 꿈을 이루고 제국의 미래가 보장되었다고 생각하며 기뻐했다.

그러나 에티엔 드샹은 이러한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나폴레옹의 이혼과 재혼을 혁명 정신에 대한 완전한 배반이자, 구체제 군주들과 다를 바 없는 왕조적 야심의 노골적인 표출이라고 비판했다.

"황제는 이제 혁명의 아들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위가 되었다. 그는 자유와 평등의 원칙을 버리고, 낡은 왕조들과의 혈연을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려 하는구나. 후계자를 얻었으니 제국이 영원할 것이라 믿겠지만, 민심을 잃고 혁명의 대의를 저버린 권력은 결코 오래갈 수 없다. 그의 제국은 이제 안으로부터 썩어가기 시작했다."

앙투아네트 드 발루아 역시 이 소식을 복잡한 심경으로 접했다. 한때 자신들의 가문을 몰락시킨 코르시카 출신 장군이 이제 합스부르크 황녀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그녀는 나폴레옹을 여전히 증오했지만, 동시에 그의 등장이 부르봉 왕가의 복귀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버렸다는 현실을 체념하며 받아들여야 했다. 어쩌면 이 새로운 제국 귀족 사회에서 자신도 살아남을 길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은 아들 탄생으로 왕조의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선택은 많은 이들에게 실망과 환멸을 안겨주었다. 조제핀과의 이별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한 의문을 남겼고, 합스부르크와의 결합은 혁명의 대의를 저버렸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했다. 제국의 정점에서 이루어진 이 화려한 결혼은 역설적으로 제국의 내적 기반이 약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이기도 했다.

(약 20,000자) - 조제핀 심리 묘사, 나폴레옹 가족 반응, 마리 루이즈 적응 과정, 에티엔/앙투아네트 등 반응 구체화 필요


제165장: 프로이센 개혁, 조용한 힘의 축적

(알랭 마르탱) 1950년 파리. 폐허 속에서 프랑스는 다시 일어서고 있지만, 과거 두 차례나 우리를 굴복시켰던 독일의 저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그 답의 실마리를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의 참담한 패배 이후 프로이센에서 시작된 '조용한 혁명'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폴레옹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영토의 절반을 잃은 프로이센은 절망 속에서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패배의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국가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미래의 부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슈타인, 하르덴베르크, 샤른호르스트, 훔볼트… 이들 개혁가들의 이름은 프랑스 혁명가들처럼 화려하게 빛나지는 않지만, 그들이 추진했던 조용하고 체계적인 개혁은 프로이센, 나아가 독일 전체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축적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에도 나폴레옹 제국에 대한 프로이센의 '조용한 저항'에 대한 경계심이 나타난다. 나는 당시 베를린 대학 학생이었을 카를 폰 슈타인(가상 인물)의 시선을 통해, 이 굴욕 속 개혁의 현장을 그려보고자 한다.

<1807년 이후, 프로이센 베를린 / 쾨니히스베르크(동프로이센 임시 수도) / 대학 강의실 / 비밀 결사 모임>

예나에서의 패배(1806)와 틸지트 조약(1807)의 굴욕은 프로이센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한때 프리드리히 대왕의 영광을 자랑했던 프로이센 군대는 단 한 번의 전투로 와해되었고, 국토는 분단되었으며, 수도 베를린에는 프랑스 군대가 주둔했다.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체념했지만, 일부 개혁적인 관료와 지식인, 군인들은 이 위기를 국가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민족 정신을 일깨울 기회로 삼고자 했다.

이러한 개혁 운동의 중심에는 슈타인 남작(Baron vom Stein)과 하르덴베르크 후작(Prince von Hardenberg)이라는 두 명의 뛰어난 정치가가 있었다. 슈타인은 나폴레옹의 압력으로 잠시 물러나기도 했지만, 그의 개혁 정신은 하르덴베르크에게 계승되었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의 긍정적인 측면, 즉 봉건제 폐지, 시민적 자유 확대, 효율적인 행정 시스템 등을 수용하되, 혁명의 과격함과 혼란은 피하면서 프로이센의 전통과 강점을 살리는 방식으로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했다.

가장 먼저 착수된 것은 농노제 개혁이었다. 1807년 10월 칙령은 농민의 인신 예속을 폐지하고 직업 선택 및 토지 소유의 자유를 원칙적으로 인정했다. 이는 농촌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 토지 분배 문제는 여전히 복잡하게 남아 있어 지주들의 영향력은 상당 부분 유지되었다. 행정 개혁도 단행되어 중앙 정부 조직이 정비되고, 도시 자치권이 확대되어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려 했다.

군제 개혁은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와 그나이제나우(August von Gneisenau) 같은 개혁파 장군들이 주도했다. 그들은 예나 패배의 원인이 낡은 용병제 군대와 귀족 중심의 장교단에 있다고 보고, 프랑스의 국민군 모델을 참고하여 군대를 근대화하려 했다. 비록 나폴레옹의 감시 때문에 완전한 징병제를 도입할 수는 없었지만, '크륌퍼 시스템(Krümpersystem)'이라는 편법을 통해 단기 복무 후 예비군으로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실질적인 예비 병력을 양성했다. 또한 장교 선발 기준에서 혈통보다는 능력과 교육을 중시하고, 참모본부(Generalstab) 기능을 강화하여 군사 작전 능력을 향상시켰다.

교육 개혁은 빌헬름 폰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가 주도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기의 기술 교육 중심 경향과는 달리, 고대 그리스의 이상을 모델로 삼아 개인의 전인적인 교양 함양(Bildung)과 학문 연구의 자유를 강조하는 인문주의적 교육 개혁을 추진했다. 그의 구상 아래 1810년 베를린 대학(현 훔볼트 대학)이 설립되었고, 이는 연구와 교육을 결합한 근대 대학 모델의 효시가 되었다. 이러한 교육 개혁은 장기적으로 독일의 학문 수준을 높이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베를린 대학 학생이었던 카를 폰 슈타인(가상 인물)은 이러한 개혁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예나 전투의 패배와 나폴레옹의 베를린 입성이라는 굴욕적인 장면을 직접 목격했고, 마음속에는 프랑스에 대한 복수심과 함께 독일 민족의 부흥에 대한 열망이 불타고 있었다. 그는 훔볼트가 설립한 새로운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며 민족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그는 피히테(Fichte)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 강연 녹취록을 탐독하며 뜨거운 감동을 느꼈고, 친구들과 함께 비밀리에 부르셴샤프트(Burschenschaft) 모임에 참여하여 독일 통일과 자유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우리는 더 이상 분열되고 무력한 독일인이 되어서는 안 되네!" 카를은 친구들에게 열변을 토했다. "우리는 프로이센의 개혁을 지지하고 힘을 키워야 하네. 그리고 언젠가 저 프랑스 압제자들을 몰아내고, 위대한 통일 독일을 건설해야 하네! 이것이 우리 세대의 사명일세!"

그의 친구들도 뜨거운 애국심으로 화답했다. 그들은 낡은 독일 군주들의 무능함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프랑스 혁명의 과격한 폭력성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가졌다. 그들이 꿈꾸는 것은 자유롭지만 질서 있고, 강력하지만 도덕적인 통일 독일이었다.

물론 프로이센 개혁은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개혁은 여전히 국왕과 보수적인 융커 귀족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민주적인 참여는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감시와 압력이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프로이센은 조용히 내실을 다지며 힘을 축적하고 있었다. 행정, 군사, 교육 등 다방면에 걸친 이 체계적인 개혁은 1813년 해방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나아가 19세기 후반 독일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다.

에티엔 드샹은 망명 중인 독일 지식인들과의 서신 교환이나 보고 등을 통해 프로이센의 변화를 예의주시했다. 그는 프로이센 개혁의 합리성과 효율성에 감탄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강력한 민족주의적 에너지와 군국주의적 잠재력에 대해서는 깊은 우려를 표했다. "프로이센은 프랑스 혁명의 교훈을 배우고 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닌 힘을 위한 교훈이다. 저 조용한 개혁의 불길이 언젠가 유럽 전체를 태울 거대한 불길로 번지지 않을까 두렵다." 그의 예언은 안타깝게도 훗날 역사를 통해 일부 증명될 것이었다. 프로이센의 조용한 개혁은 나폴레옹 제국의 균열을 파고드는 또 다른 힘이었고, 미래 유럽의 역사를 만들어갈 새로운 동력이었다.

(약 19,000자) - 각 개혁 내용 상세화, 개혁파 인물 묘사, 카를 폰 슈타인 활동/심리 구체화, 프랑스 감시/압력 등 추가 필요


 

 

 

 

 

 

 

 

 

 

 

 

 

 

 

 

 

 

 


제166장: 피히테의 외침, 독일 민족주의 심화

(알랭 마르탱) 1950년 파리. 나는 소르본 대학 도서관의 깊숙한 서가에서, 1808년 베를린에서 출간된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Reden an die deutsche Nation)』 초판본을 찾아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이 남긴 메모가 곳곳에 남아 있는 이 책은, 단순한 철학 강연집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폴레옹의 군홧발 아래 짓밟힌 독일 민족의 영혼을 일깨우고, 굴욕 속에서 새로운 희망과 정체성을 찾으려 했던 처절한 외침이었다. 피히테의 열정적인 목소리는 단순한 지적 담론을 넘어, 카를 폰 슈타인(가상 인물)과 같은 당시 독일 젊은이들의 가슴에 민족주의라는 강력한 불씨를 지폈다. 그리고 그 불씨는 훗날 독일 통일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20세기의 비극을 잉태하는 위험한 가능성 또한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카를의 시선을 통해, 프랑스 점령하 베를린의 숨 막히는 공기 속에서 피히테의 강연이 어떻게 울려 퍼지고 독일 민족주의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는지 그려보고자 한다.

<1807년 겨울 - 1808년 봄, 프랑스 점령 하 베를린 / 베를린 대학 강당(아카데미 건물) / 부르셴샤프트 비밀 모임>

1807년 겨울, 베를린은 굴욕적인 침묵에 잠겨 있었다.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의 참패 이후 도시는 프랑스 군대에 점령되었고, 프로이센 국왕과 정부는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로 피신한 상태였다. 거리에는 오만한 프랑스 군인들이 활보했고, 시민들의 얼굴에는 절망과 무력감이 가득했다. 베를린 대학 학생이었던 카를 폰 슈타인은 이 암울한 현실 앞에서 깊은 분노와 함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의 영광과 현재의 치욕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게 했다.

바로 그때, 철학자 피히테가 점령된 베를린 한복판에서 공개 강연을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장소는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거리의 과학 아카데미 건물 강당. 프랑스 점령 당국의 삼엄한 감시 아래 이루어지는 이 강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저항 행위였다. 피히테는 칸트 철학의 계승자이자 독일 관념론의 주요 인물이었지만, 이제 그는 철학자의 강단을 넘어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카를은 떨리는 마음으로 강연장을 찾았다. 강당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학생, 지식인, 시민들로 가득 차 있었고,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창백하지만 결연한 표정의 피히테가 연단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차분했지만, 점차 열정을 더해가며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독일 국민 여러분!" 피히테의 목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우리는 지금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외세의 발아래 짓밟혔고, 우리의 정신은 무력감과 자기 비하에 빠져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 우리의 분열, 우리의 이기심,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고유의 정신과 언어, 문화에 대한 자각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프랑스 혁명과 계몽주의의 보편적 이상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독일 민족의 고유한 특성을 무시하고 프랑스 중심적인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독일 민족이야말로 루터의 종교 개혁과 칸트의 철학을 통해 인류 정신의 진정한 발전을 이끌어 온 핵심적인 민족이며, 순수하고 근원적인 언어(독일어) 속에 그 위대한 정신이 담겨 있다고 역설했다.

"프랑스인들은 라틴어라는 죽은 언어 위에 세워진 피상적인 문화를 자랑하지만, 우리는 살아 숨 쉬는 우리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언어야말로 우리 민족 정신의 보고(寶庫)이며,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피히테는 패배의 원인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고, 교육을 통한 민족 정신의 혁신과 도덕적 각성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그는 특히 젊은 세대에게 독일 민족의 역사적 사명을 일깨우며, 개인적인 안락을 넘어 민족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것을 호소했다.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의 어깨에 독일 민족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낡은 시대의 이기심과 무력감을 벗어던지고, 독일 정신으로 무장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십시오! 교육을 통해 우리 자신을 단련하고, 우리 민족의 고유한 가치를 되살려, 언젠가 다시 한번 위대한 독일을 건설합시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가 우리에게 부여한 신성한 의무입니다!"

강연은 매주 일요일 오후에 계속되었고, 회를 거듭할수록 청중은 늘어났고 열기는 뜨거워졌다. 프랑스 점령 당국은 강연 내용을 예의주시했지만, 직접적인 탄압은 망설였다. 피히테의 강연은 표면적으로는 철학적이고 교육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었지만, 그 행간에는 프랑스 지배에 대한 강렬한 저항 정신과 독일 민족주의적 자부심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를 폰 슈타인에게 피히테의 강연은 단순한 지적 자극을 넘어,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계시와 같았다. 그는 강연 내용을 하나하나 필사하고, 친구들과 밤새도록 토론하며 독일 민족의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는 더 이상 무력감에 빠져 있지 않았다. 그는 훔볼트가 세운 대학에서 독일 역사와 문학을 더욱 깊이 파고들었고, 게르만 신화와 민담 속에서 민족 정신의 원형을 찾으려 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비밀리에 부르셴샤프트(Burschenschaft) 모임을 조직했다. 그들은 낡은 지방주의를 타파하고 '하나의 독일'을 건설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고, 프랑스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일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킬 것을 다짐했다. 그들은 체력을 단련하고 검술을 연마하며 미래의 '해방 전쟁'을 준비했다. 모임에서는 아른트(Ernst Moritz Arndt)나 쾨르너(Theodor Körner)와 같은 낭만주의 시인들의 애국적인 시가 낭송되었고, '독일인의 조국은 무엇인가(Was ist des Deutschen Vaterland?)'와 같은 노래가 낮은 목소리로 불려졌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더 이상 잠들어 있을 수 없다!" 카를은 비밀 모임에서 외쳤다. 그의 눈빛은 피히테의 강연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의 조국은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수백 년간 분열되어 외세의 농락을 받아왔다. 이제 우리는 이 굴욕의 역사를 끝내야 한다! 프로이센의 개혁은 시작일 뿐이다. 우리 젊은 세대가 독일 정신으로 하나 되어, 압제자를 몰아내고 자유롭고 강력한 통일 독일을 건설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민족주의적 열정 속에는 위험한 씨앗도 함께 자라고 있었다. 독일 민족의 우수성에 대한 강조는 때때로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성이나 우월 의식으로 이어질 수 있었고,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은 맹목적인 복수심으로 변질될 위험도 있었다. 자유주의적 가치와 민족주의적 목표 사이의 긴장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 시기 독일 젊은이들에게 민족주의는 무엇보다도 외세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는 해방적 열망의 표현이었다.

피히테의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프랑스 점령 하 독일 지식인 사회와 청년들의 가슴속에 깊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당장의 정치적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독일 민족 의식을 일깨우고 미래의 통일과 저항을 위한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은 군사력으로 독일 땅을 점령했지만, 피히테의 말처럼 독일인의 정신까지 지배할 수는 없었다. 굴욕 속에서 싹튼 민족주의의 씨앗은 이제 조용히 자라나, 언젠가 거대한 나무가 되어 제국의 하늘을 뒤덮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약 19,000자) - 피히테 강연 분위기/청중 반응, 부르셴샤프트 활동 구체화, 카를의 심리 변화, 낭만주의 영향 등 추가 묘사 필요


제167장: 제국의 확장과 내부 모순 심화

(알랭 마르탱) 역사가 토인비는 제국의 운명을 '도전과 응전'의 과정으로 설명했다. 나폴레옹 제국은 1810년경 외형적으로 최대 판도에 도달하며 그 위세가 절정에 달한 듯 보였다. 프랑스 황제는 유럽 대륙의 거의 모든 국가를 직간접적으로 지배했고, 그의 법전과 행정 시스템은 새로운 질서의 표준이 되는 듯했다. 오스트리아 황녀와의 결혼과 로마 왕(아들)의 탄생은 보나파르트 왕조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통찰처럼, 바로 이 정점의 순간에 제국은 이미 내부로부터 심각한 모순과 균열에 직면하고 있었다. 끝없는 전쟁은 제국의 재정과 인적 자원을 고갈시켰고, 대륙 봉쇄령은 유럽 경제를 질식시켰으며, 피지배 민족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심지어 황제 자신마저 과도한 권력과 성공에 도취되어 현실 감각을 잃고 오만한 결정을 내리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나폴레옹의 집무실과 유럽 각지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교차하며, 제국의 화려한 외피 아래 가려진 내부 모순의 심화 과정을 그려보고자 한다.

<1810-1811년, 파리 튈르리 궁 / 스페인 전선 / 독일 함부르크 항구 / 프랑스 농촌>

파리 튈르리 궁, 나폴레옹 황제의 집무실은 여전히 분주했다. 유럽 전역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황제는 잠잘 시간도 쪼개가며 국정을 돌보았다. 그는 여전히 강철 같은 의지와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피로와 초조함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몸무게는 불어났고, 때로는 격렬한 분노를 터뜨리거나 우울감에 잠기는 모습도 보였다. 그의 제국은 지도 위에서는 광대했지만, 현실은 끊임없는 문제들로 가득 차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아직도 그 빌어먹을 게릴라 놈들을 소탕하지 못했는가!" 나폴레옹은 스페인 전황 보고서를 읽으며 소리쳤다. "수십만 대군을 보내놨는데,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당장 반란의 뿌리를 뽑아버리라고 전하라!" 그러나 그의 명령은 더 이상 예전처럼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스페인 주둔군은 지쳐 있었고, 게릴라 소탕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폐하, 독일에서의 징병 할당량을 채우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군역을 피해 도망치거나 심지어 자해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프랑스에 대한 반감도 커지고 있고요." 베스트팔렌 왕국의 관리(아마도 에티엔의 동료였을)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나폴레옹은 인상을 찌푸렸다. "독일 놈들은 배은망덕하군! 내가 그들에게 법과 질서를 가져다주었거늘! 더욱 강력하게 징병을 실시하고, 저항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라!"

대륙 봉쇄령 역시 골칫거리였다. 영국을 고립시키려던 정책은 오히려 유럽 대륙 경제에 더 큰 타격을 주고 있었다. 함부르크, 암스테르담 같은 항구 도시는 활기를 잃었고, 설탕, 커피, 면화 등 필수품 부족으로 민심이 흉흉해지고 있었다. 밀수는 더욱 기승을 부렸고, 심지어 프랑스 관리들조차 부패에 연루되어 있었다.

"봉쇄령을 더욱 철저히 감시하라! 밀수업자들은 본보기로 처형하고, 영국 상품을 거래하는 자는 재산을 몰수하라!" 나폴레옹은 명령했지만, 이미 그의 통제력은 예전 같지 않았다.

프랑스 본토 역시 전쟁의 피로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끝없는 전쟁은 젊은이들을 계속해서 징병터로 내몰았고, 농촌에서는 일손 부족이 심각해졌다. 소피 라비뉴의 남동생 피에르(만약 성장했다면) 역시 징집 대상 연령이 가까워지면서 소피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전쟁으로 인한 세금 부담도 증가하여 민중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파리에서는 여전히 황제의 영광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거리의 뒷골목에서는 전쟁에 대한 염증과 불만이 조용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또 전쟁이라니… 우리 아들들은 언제까지 저 황제를 위해 피를 흘려야 하는 건가?" 마담 뒤부아(만약 생존했다면)는 쓴소리를 내뱉었다.

에티엔 드샹은 시골 영지에 은둔하며 제국의 현실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는 나폴레옹이 이룩한 업적(법전, 행정 개혁 등)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제국이 근본적으로 혁명의 이상을 배반하고 있으며 지속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황제의 제국은 너무 넓고, 너무 많은 민족을 억압하고 있으며, 너무 많은 피를 요구하고 있다. 그의 권력은 오직 군사적 승리에 기반하고 있기에, 단 한 번의 결정적인 패배는 제국 전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그는 마치 끊임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아야만 쓰러지지 않는 곡예사 같다. 그러나 언젠가는 지치거나 헛발을 디딜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폴레옹 자신도 제국의 불안정성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오스트리아 황녀와의 결혼과 아들(로마 왕) 탄생에 집착했던 것은, 어쩌면 자신의 권력 기반이 취약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는 혈연과 왕조라는 낡은 방식으로 제국의 영속성을 보장받으려 했지만, 시대는 이미 변해 있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나폴레옹 자신의 변화였다. 연이은 성공은 그를 더욱 오만하고 독선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고, 주변의 조언이나 반대 의견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특히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강경하고 비타협적인 태도는 현실 감각이 둔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징후였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운명의 주재자라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제국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무게에 짓눌려 스스로 파멸의 길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1811년, 나폴레옹 제국은 외형적으로는 그 영광의 정점에 서 있었다. 로마 왕의 탄생은 왕조의 미래를 밝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제국의 내부에는 스페인의 출혈, 대륙 봉쇄령의 실패, 피지배 민족의 저항, 그리고 황제 자신의 오만함이라는 치명적인 모순들이 곪아가고 있었다. 이 모든 균열들은 곧 다가올 러시아 원정이라는 거대한 도박 속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오며 제국을 붕괴로 이끌게 될 것이었다. 제국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동시에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약 18,000자) - 각 지역 저항 사례 구체화, 나폴레옹 심리 변화 묘사 심화, 에티엔 분석 내용 보강 등 필요


제166장: 피히테의 외침, 독일 민족주의 심화

(알랭 마르탱) 무력이 육체를 굴복시킬 수는 있어도, 정신까지 지배할 수는 없는 법이다.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의 참패는 프로이센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안겼고, 수도 베를린은 프랑스 군대의 점령 아래 신음했다. 물리적인 힘 앞에서는 무력했지만, 바로 그 절망의 밑바닥에서 독일 민족의 정신은 새로운 각성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각성의 중심에는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가 있었다. 프랑스 군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그는 1807년 겨울부터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 강당에서 "독일 국민에게 고함(Reden an die deutsche Nation)"이라는 제목의 열정적인 강연을 이어나갔다. 그의 외침은 단순한 철학 강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잠들어 있던 독일 민족의 영혼을 뒤흔드는 우렁찬 종소리였고, 굴욕 속에서 민족적 자긍심과 저항 의지를 일깨우는 불꽃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에는 피히테 강연에 대한 언급과 함께, 프랑스 점령 당국이 그의 '위험한' 사상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나는 당시 베를린 대학 학생이었을 카를 폰 슈타인(가상 인물)의 시선을 통해, 이 역사적인 강연의 현장과 그것이 젊은 세대의 가슴에 지핀 민족주의의 불길을 그려보고자 한다.

<1807년 12월 - 1808년 3월, 프랑스 점령 하 베를린 / 과학 아카데미 강당 / 카를 폰 슈타인의 하숙방 / 부르셴샤프트 비밀 모임>

겨울의 찬바람이 훔볼트 대학(당시 베를린 대학) 교정을 스산하게 휘감았다. 카를 폰 슈타인은 두꺼운 외투 깃을 여미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마음은 착잡했다. 강의실 창밖으로는 위풍당당하게 순찰하는 프랑스 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굴욕적인 현실이었다. 그는 법학 강의에 집중하려 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조국의 패배와 민족의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왜 졌는가?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그러던 중, 카를은 친구로부터 피히테 교수의 공개 강연 소식을 들었다. 프랑스 점령 당국의 허가를 받아 진행되는 강연이었지만, 그 주제가 '독일 국민'이라는 사실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 호기심과 함께 일말의 기대감을 안고 카를은 강연이 열리는 과학 아카데미 건물로 향했다. 강당은 이미 학생, 교수, 관리, 심지어 평범한 시민들까지 다양한 청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감과 함께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뜨거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강당 뒤편에는 프랑스 군 장교 몇몇이 팔짱을 낀 채 매서운 눈초리로 감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창백하지만 날카로운 눈빛의 피히테가 연단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낮고 차분했지만, 점차 힘을 얻어가며 강당 전체를 휘감았다. 그의 강연은 단순한 철학 강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독일 민족의 영혼을 향한 절절한 호소이자,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열정적인 외침이었다.

"독일 국민 여러분! 이 강연은 오직 독일인을 위한 것입니다. 독일인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움과 후회의 동의어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감히 '독일 국민'을 이야기하는 저의 용기를 나무라지 마십시오!" 그의 서두는 청중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피히테는 독일 민족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과 역사적 사명을 역설했다. 그는 라틴어에 기반한 다른 서유럽 민족들과 달리, 독일 민족은 고대 게르만족의 순수한 언어와 정신을 계승해 온 '근원 민족(Urvolk)'이라고 주장했다. 이 살아있는 언어야말로 독일 민족의 심오한 철학과 문학, 그리고 도덕적 깊이를 담고 있는 보고이며, 이것이 바로 독일 민족이 가진 가장 위대한 힘이라고 강조했다.

"우리의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며, 우리의 역사이며, 우리의 미래입니다! 이 언어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스스로를 구원하고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 내세운 보편적 자유의 이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개별 민족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무시하는 획일적인 형태로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그는 진정한 자유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족 스스로의 내적인 힘과 도덕적 각성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그 각성의 핵심은 바로 '교육'에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조국을 구원할 길은 오직 교육뿐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교육을 통해 모든 독일 국민을, 특히 젊은 세대를 이기심과 무력감에서 벗어나 민족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도덕적인 인간으로 길러내야 합니다. 교육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혁신하고, 민족의 힘을 결집시키며, 미래의 영광을 준비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피히테의 목소리는 때로는 격정적으로 타올랐고, 때로는 비통함에 잠겼다. 그의 강연은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굴욕적인 현실 속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우고 미래를 향한 희망을 불어넣으려는 절박한 시도였다. 카를은 숨죽인 채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가슴은 뜨거운 감동과 함께 새로운 결의로 차오르고 있었다. 강연이 끝나자, 청중들은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가, 이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프랑스 감시병들의 눈초리가 느껴졌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순간, 강당 안의 모든 독일인들은 하나의 정신으로 연결된 듯 보였다.

강연이 끝난 후, 카를은 하숙방으로 돌아와 밤새도록 피히테의 강연 내용을 곱씹었다. 그는 더 이상 패배감에 젖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독일인이라는 사실에 새로운 자부심을 느꼈고, 조국의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더욱 열정적으로 부르셴샤프트 활동에 참여했다. 그들은 피히테의 강연 내용을 함께 읽고 토론했으며, 아른트의 시와 쾨르너의 노래를 부르며 애국심을 고취했다. 그림 형제가 수집한 독일 민담을 읽으며 민족의 뿌리를 되새겼고,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그림 속 독일 자연 풍경에서 숭고한 민족정신을 발견하려 했다. 그들은 밤늦게까지 체력을 단련하고 검술을 연마하며, 언젠가 다가올 '해방 전쟁'의 날을 꿈꾸었다.

"우리는 피히테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 교육을 통해 우리 자신을 단련하고 독일 정신을 바로 세워야 하네." 카를이 비밀 모임에서 말했다. "동시에 우리는 힘을 길러야 하네. 언젠가 저 오만한 프랑스 독수리의 날개를 꺾고, 분열된 조국을 하나로 통일하여 위대한 독일 제국을 건설해야 하네!"

물론 이러한 열정 속에는 위험한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었다. 독일 민족의 우수성에 대한 강조는 점차 다른 민족, 특히 유대인이나 슬라브족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로 이어질 수 있었고,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은 합리적인 판단을 흐리게 할 수도 있었다. 자유주의적 가치와 민족주의적 목표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그러나 1808년 겨울의 베를린에서, 피히테의 외침은 절망에 빠진 독일인들에게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것은 단순한 복수심을 넘어, 문화적 자긍심과 도덕적 각성을 통해 민족을 재건하려는 고귀한 이상을 담고 있었다. 비록 그 이상이 훗날 어떻게 변질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지만, 그 순간 피히테의 목소리는 잠자던 독일 민족주의의 거인을 깨우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카를 폰 슈타인과 그의 세대는 이제 그 거인의 발걸음을 따라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약 20,000자) - 강연 내용 구체화, 청중 반응 다양화, 부르셴샤프트 활동 상세 묘사, 카를의 심리 변화, 낭만주의와의 연결 등 추가 필요


제167장: 제국의 확장과 내부 모순 심화

(알랭 마르탱) 1810년, 나폴레옹 제국은 그 영토적 범위에서 정점에 달했다. 프랑스 본토는 라인 강 좌안, 벨기에, 네덜란드, 북해 연안, 이탈리아 북서부 등을 직접 병합하여 크게 확장되었다. 그 주변에는 그의 형제나 측근들이 다스리는 위성 왕국들(스페인, 이탈리아 왕국, 나폴리 왕국, 베스트팔렌 왕국, 바르샤바 공국 등)과 라인 동맹과 같은 종속적인 동맹국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때 그의 적수였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굴복했고, 러시아마저 그의 동맹국이었다. 유럽 대륙은 사실상 프랑스 황제의 지배 아래 놓인 것처럼 보였다. 1811년,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의 사이에서 아들(로마 왕)까지 태어나면서 보나파르트 왕조의 영속성마저 보장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외형 아래, 제국은 이미 심각한 내부 모순과 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 시기를 "겉은 금으로 칠했지만 속은 썩어가고 있는 거대한 상자"에 비유했다. 끝없는 전쟁, 경제적 압박, 민족적 저항, 그리고 황제 자신의 변화는 제국의 기반을 서서히 침식하고 있었다.

<1810-1811년, 파리 튈르리 궁 / 유럽 각지 제국 영토 / 에티엔 드샹의 시골 저택>

파리 튈르리 궁의 황제 집무실. 나폴레옹은 거대한 유럽 지도 앞에 서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도 위에는 프랑스 제국과 그 영향력이 미치는 광대한 영역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알렉산더 대왕이나 카이사르, 샤를마뉴를 능가하는 위업을 달성했다고 자부했다. 그는 유럽에 통일된 법(나폴레옹 법전), 합리적인 행정 시스템, 그리고 프랑스 문명의 빛을 가져다주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책상 위에는 유럽 각지에서 올라오는 불안한 보고서들이 쌓여 있었다. 스페인에서의 전쟁은 여전히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매달 수천 명의 프랑스 병사들이 보이지 않는 게릴라들에게 희생되고 있었다. 대륙 봉쇄령은 영국 경제에 타격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유럽 대륙의 경제를 마비시키고 있었고, 밀수는 더욱 기승을 부렸으며, 러시아를 포함한 동맹국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독일에서는 비밀 결사 활동과 민족주의적 저항 움직임이 끊이지 않았고, 이탈리아에서도 카르보나리 같은 비밀 조직들이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폐하, 제국 전역에서 징병에 대한 저항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내무장관이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특히 프랑스 본토 농촌 지역에서는 젊은이들이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도망치거나 자해하는 사례까지 보고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민심이 점차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미간을 찌푸렸다. "프랑스 국민들은 영광을 위해 작은 희생도 감수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는 더 많은 병사가 필요하다! 징병을 더욱 강력하게 실시하고, 탈영병과 저항 세력은 엄벌에 처하라!"

그의 명령은 여전히 단호했지만, 그의 통치 방식은 점차 현실과 유리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군사적 능력과 의지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연이은 성공은 그를 오만하게 만들었고, 반대 의견이나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한 보고를 귀담아듣지 않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의 주변에는 아첨꾼들과 예스맨들만이 남아 있었고, 콜랭쿠르와 같은 충직하고 현실적인 조언자들은 점차 멀어져 갔다. 그는 제국의 정점에 서 있었지만, 동시에 가장 고독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건강도 예전 같지 않았다.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 그리고 불규칙한 생활로 인해 그는 종종 피로와 신경과민 증세를 보였고, 그의 판단력도 점차 흐려지는 듯했다.

<에티엔 드샹의 시골 저택 서재>

에티엔 드샹은 파리의 정치적 혼란과 나폴레옹의 독재를 피해 시골에 은둔하며, 제국의 현실을 깊이 성찰하고 있었다. 그는 망명 중인 친구들이나 유럽 각지의 지식인들과 비밀리에 서신을 교환하며 정보를 얻었고, 금지된 비판적인 출판물들을 탐독했다. 그의 일기에는 나폴레옹 제국의 내부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담겨 있었다.

"황제의 제국은 모순 위에 세워져 있다. 그는 혁명의 아들이라 자처하면서 왕조를 세우고 귀족제를 부활시켰다. 그는 민족 해방을 외치면서 다른 민족들을 억압하고 착취한다. 그는 법과 질서를 세웠다고 자랑하지만, 그의 통치는 자의적인 폭력과 비밀경찰의 감시에 의존하고 있다. 그는 유럽의 평화를 가져왔다고 말하지만, 그의 제국은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이 거대한 제국은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모순 때문에 먼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에티엔은 특히 대륙 봉쇄령의 폐해를 심각하게 우려했다. "경제는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아서, 억지로 흐름을 막으면 결국 괴사하게 마련이다. 봉쇄령은 유럽 전체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으며, 이는 결국 프랑스에 대한 증오로 돌아올 것이다. 황제는 영국을 굶겨 죽이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제국을 질식시키고 있다."

그는 또한 나폴레옹 개인의 변화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권력은 인간을 타락시킨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다. 한때 공화국의 제1통령으로서 보여주었던 그의 명석함과 현실 감각은 이제 황제의 오만함과 과대망상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그는 더 이상 주변의 충고를 듣지 않으며, 자신의 운명을 맹신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징후이다."

에티엔의 분석처럼, 1811년경 나폴레옹 제국은 그 내부적인 취약성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었다. 스페인에서의 끝없는 출혈, 대륙 봉쇄령의 경제적 실패, 피지배 민족들의 저항 심화, 프랑스 내부의 전쟁 피로감, 그리고 황제 자신의 오만함과 현실 인식 부족. 이 모든 요인들은 제국의 기반을 서서히 침식하고 있었고, 거대한 위기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불길한 전조였다. 그리고 그 위기는 바로 동쪽, 광활한 러시아 대지에서 시작될 운명이었다. 나폴레옹은 제국의 정점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파멸을 향한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약 19,000자) - 각 지역 상황 묘사(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본토 민심 등), 나폴레옹 심리 변화 구체화, 에티엔의 성찰 내용 심화 등 필요


제168장: 러시아와의 균열, 봉쇄령의 덫

(알랭 마르탱) 동맹은 영원하지 않다. 특히 힘의 논리와 각자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국제 관계에서 동맹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유리 조각과 같다. 1807년 틸지트에서 맺어진 프랑스와 러시아의 동맹은 처음부터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 있었다.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1세, 두 황제는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면서도 깊은 불신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불안정한 동맹을 결정적으로 파탄으로 몰고 간 것은 바로 나폴레옹의 야심 찬 경제 정책, 즉 대륙 봉쇄령이었다. 영국과의 교역 단절은 러시아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고, 이는 결국 알렉산드르 1세로 하여금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경제적 이해관계는 종종 이념이나 개인적인 호감보다 더 강력한 외교적 동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나는 이 시기 파리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오갔던 외교 문서들과 보고서들을 바탕으로, 두 제국의 균열이 어떻게 심화되고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파국, 즉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추적하고자 한다.

<1810-1812년 초, 파리 튈르리 궁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 / 프랑스/러시아 외교 공관>

틸지트 조약 이후 몇 년간, 프랑스와 러시아의 동맹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유지되는 듯 보였다. 두 황제는 서로에게 친밀한 서신을 보내고 외교 사절을 교환했으며, 에르푸르트 회담(1808) 등에서 만나 협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이미 균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가장 큰 갈등 요인은 대륙 봉쇄령이었다. 러시아는 틸지트 조약에 따라 마지못해 봉쇄령에 참여했지만, 이는 영국에 곡물, 목재, 조선 기자재 등을 수출하고 영국산 공산품을 수입하던 러시아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루블화 가치는 폭락했고, 귀족 지주들과 상인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알렉산드르 1세는 국내의 압력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점차 봉쇄령 이행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중립국 선박을 통한 영국과의 비밀 교역을 사실상 묵인했고, 1810년 말에는 자국 항구에서 중립국 선박의 입항을 허용하는 칙령을 발표하여 봉쇄령에 구멍을 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나폴레옹은 격분했다. 그에게 대륙 봉쇄령은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한 제국의 핵심 전략이었고, 러시아의 이탈은 용납할 수 없는 배신 행위였다.

"차르가 감히 짐과의 약속을 어기고 영국 놈들과 내통하려 하는군! 러시아는 아직 짐의 힘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나폴레옹은 파리 주재 러시아 대사 쿠라킨(Kurakin) 공작을 불러 강하게 항의하고 위협했다.

폴란드 문제 역시 양국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이었다. 나폴레옹이 틸지트 조약으로 창설한 바르샤바 공국은 러시아에게는 자국의 서쪽 국경을 위협하는 존재이자, 폴란드 독립 운동을 자극하는 불씨로 여겨졌다. 나폴레옹이 1809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이후 바르샤바 공국 영토를 확장시키자 러시아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에게 폴란드 왕국 부활을 절대 지지하지 않겠다는 명확한 약속을 요구했지만, 나폴레옹은 폴란드 귀족들의 지지를 의식하여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다.

발칸 반도와 오스만 제국 문제에서도 양국의 이해관계는 충돌했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부동항 확보를 위해 남하 정책을 추구하며 오스만 제국 영토에 대한 야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폴레옹은 오스만 제국을 유지시켜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려 했다. 틸지트 비밀 협정에서 논의되었던 오스만 제국 분할 문제는 구체적인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양측의 불신만 키웠다.

개인적인 감정도 균열을 심화시키는 데 한몫했다. 나폴레옹이 조제핀과 이혼하고 새로운 황후를 찾을 때, 러시아 황실이 알렉산드르의 여동생과의 결혼을 사실상 거절한 것은 나폴레옹에게 큰 모욕감을 안겨주었다. 그가 대신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한 것은 러시아에 대한 외교적 불쾌감을 표시하는 동시에, 오스트리아와의 관계 강화를 통해 러시아를 압박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알렉산드르 1세 역시 나폴레옹의 오만함과 예측 불가능한 행동에 점차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그의 '유럽 지배자' 행세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때 나폴레옹의 카리스마에 매료되었지만, 이제는 그를 유럽 평화를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주 프랑스 러시아 대사였던 콜랭쿠르(Armand de Caulaincourt, 당시 나폴레옹의 측근으로 활동)는 이러한 양국 관계 악화를 깊이 우려하며 나폴레옹에게 신중한 외교를 간언했다.

"폐하, 러시아와의 전쟁은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러시아 영토는 광대하고 겨울은 혹독합니다. 차르는 결코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외교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책을 찾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콜랭쿠르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군사력과 운명을 맹신했고, 러시아의 저항을 굴복시키지 않고서는 자신의 유럽 지배 체제가 완성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러시아가 영국과의 교역을 재개하는 것을 막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군사적 행동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1811년 말부터 양국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침공을 위한 대규모 군대 동원을 시작했고, 알렉산드르 1세 역시 프랑스의 침공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마지막 외교적 노력들이 오갔지만, 양측의 불신은 너무 깊었고 입장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대륙 봉쇄령이라는 경제적 덫은 결국 프랑스와 러시아를 전쟁이라는 파국적인 충돌로 이끌고 있었다. 에티엔 드샹은 이 시기 유럽 외교 문서를 분석하며, “두 마리의 거대한 곰이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다. 한쪽은 오만함에 눈이 멀었고, 다른 한쪽은 굴욕 속에서 분노를 키웠다. 결국 둘 중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싸움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유럽 전체가 그 싸움의 제물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적인 기록을 남겼다.

(약 18,000자) - 양국 외교관 활동 상세화, 러시아 귀족/상인 반응, 콜랭쿠르 노력/좌절 등 구체화 필요


제169장: 1812년, 운명의 원정 결심

(알랭 마르탱)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들은 종종 한 개인의 의지와 오판 속에서 이루어진다. 1812년 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자신의 운명을 건 가장 거대하고 위험한 도박, 즉 러시아 원정을 최종적으로 결심했다. 그의 측근 참모들과 경험 많은 외교관들은 러시아 영토의 광대함, 혹독한 기후, 그리고 보급의 어려움을 들어 극구 만류했지만, 황제는 듣지 않았다. 연이은 군사적 성공과 유럽 대륙 제패는 그의 자신감을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만들었고, 그는 자신의 군사적 천재성과 '운명의 별'이 이번에도 승리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맹신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 결정을 "오만함이 이성을 삼켜버린 순간, 영웅이 스스로 파멸의 길을 선택한 비극"이라고 기록했다. 나는 나폴레옹의 심리 상태와 주변의 반대 목소리, 그리고 제국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는 거대한 전쟁 준비 과정을 통해, 이 운명적인 결정이 내려지던 순간의 분위기를 재현하고자 한다.

<1811년 - 1812년 봄, 파리 튈르리 궁 / 군 사령부 회의실 / 에티엔 드샹의 서재>

1811년 내내 나폴레옹의 마음은 러시아를 향해 있었다. 알렉산드르 1세가 대륙 봉쇄령을 공공연히 무시하고 영국과의 교역을 재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나폴레옹은 이를 자신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유럽 지배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그는 러시아를 군사적으로 굴복시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 영국을 완전히 고립시키겠다고 결심했다.

"차르는 어린 아이처럼 변덕스럽고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리는군! 감히 짐의 명령을 거역하다니! 본때를 보여주어야겠다. 러시아 곰에게 프랑스 독수리의 발톱 맛을 톡톡히 보여주리라!" 나폴레옹은 측근들 앞에서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의 가장 경험 많고 충직한 조언자였던 콜랭쿠르(전 주 러시아 대사)는 이 결정의 위험성을 직감하고 용기를 내어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폐하,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러시아는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광대하고 험난한 땅입니다. 그들의 군대는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겨울의 추위는 우리 군대에게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보급선을 유지하는 것 역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 원정은 너무나 위험한 도박입니다!" 콜랭쿠르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직접 겪었던 러시아의 현실과 알렉산드르의 숨겨진 저력을 알고 있었다.

참모총장 베르티에(Berthier)를 비롯한 다른 장군들 역시 내심으로는 원정의 어려움을 우려했지만, 황제의 분노를 살까 두려워 감히 강하게 반대하지 못했다. 오직 콜랭쿠르만이 황제의 오판을 막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결심은 확고했다.

"콜랭쿠르, 그대의 충성심은 알지만 너무 소심하군!" 나폴레옹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짐의 군대는 유럽 최강이다! 러시아 군대는 보로디노에서 이미 겪어보지 않았는가? 짐이 직접 가면 차르는 겁을 먹고 항복할 것이다. 모스크바만 점령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은 끝날 것이니 걱정할 것 없네. 나의 운명은 언제나 승리를 향해 있다!"

나폴레옹은 과거의 성공 경험에 취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군사적 천재성과 '위대한 군대'의 힘을 과신했고, 러시아의 지리적, 기후적 특성과 러시아 민중의 저항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는 이번에도 단기 결전을 통해 빠른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낙관했다. 그의 계획은 국경 근처에서 러시아 주력군을 유인하여 섬멸하고, 모스크바를 점령한 뒤 알렉산드르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 몇 주 안에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무모한 결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제국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본토는 물론, 이탈리아, 독일(라인 동맹,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 동맹국과 위성 국가들로부터 병력을 징발했다.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의 다국적 군대, 약 60만 명 이상이 동쪽 국경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말과 수송 마차, 대포, 그리고 막대한 양의 군수품을 준비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엄청난 도전이었다. 병참 준비는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광활한 러시아 영토에서 이 거대한 군대를 먹이고 입힐 물자를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인 계획은 부족했다.

마리 루이즈 황후는 남편의 원정 계획에 대해 깊은 불안감을 느꼈지만, 감히 반대 의견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무사 귀환을 기도할 뿐이었다. 조제핀 역시 말메종 성에서 나폴레옹의 무모한 결정을 전해 듣고 그의 운명을 걱정했다.

에티엔 드샹은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 있었지만, 들려오는 소식들을 통해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계획을 알게 되었다. 그는 즉각 이것이 제국의 몰락을 초래할 파국적인 결정임을 직감했다.

"황제는 마침내 이성을 잃었는가? 그는 마치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과 같다.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와 혹독한 겨울은 그 어떤 군대도 삼켜버릴 수 있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려 하지만, 이번에는 운명의 여신이 그의 편을 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영광을 향한 원정이 아니라, 죽음을 향한 행군이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이러한 우려와 비판을 담담하게 기록했다. 그는 또한 전쟁에 또다시 끌려가게 될 프랑스 청년들의 운명을 안타까워했다.

1812년 봄, 나폴레옹은 자신의 결정에 대한 모든 의심과 반대를 뿌리치고, '위대한 군대'를 이끌고 동쪽 국경으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지만, 그 이면에는 어쩌면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불안감이 숨겨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럽 전체가 숨죽인 채, 역사상 가장 거대한 원정의 시작과 그 운명을 지켜보고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운명을 건 마지막 도박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약 19,000자) - 나폴레옹 심리 묘사(과신, 불안), 측근 만류와 나폴레옹 반박 구체화, 병참 준비 과정의 어려움, 에티엔의 우려 심화 등 추가 필요


제170장: 위대한 군대, 동방으로의 출정

(알랭 마르탱) 1812년 봄, 유럽은 전례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명령 아래, 수십만 명의 대군이 마치 거대한 강물처럼 동쪽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프랑스 병사들뿐 아니라, 이탈리아, 폴란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작센, 베스트팔렌 등 스무 개가 넘는 국적의 군인들이 황제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위대한 군대(Grande Armée)'! 그 이름처럼 압도적인 규모와 화려한 군장(軍裝)은 나폴레옹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용광로 속에는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상이한 동기와 충성심, 그리고 희망과 불안감이 뒤섞여 있었다. 폴란드인들은 조국의 부활을 꿈꿨고, 독일인들은 마지못해 끌려왔으며, 프랑스 병사들은 또 다른 영광을 기대하면서도 전쟁의 피로감에 지쳐 있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건강상의 이유(혹은 정치적 판단)로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조카(가상 설정)가 젊은 장교로 원정에 참여하면서 그 비극을 간접적으로 기록하게 된다. 나는 이 젊은 장교와 베테랑 병사 피에르 뒤퐁의 시선을 통해, '위대한 군대'의 출정 모습과 그 속에 감춰진 불안의 그림자를 그려보고자 한다.

<1812년 봄 - 6월, 동유럽 평원 / 폴란드 바르샤바 / 니만 강변>

유럽 동부의 넓은 평원은 끝없이 이어진 군대의 행렬로 뒤덮였다. 프랑스 제국 근위대의 화려한 군복, 이탈리아 왕국군의 녹색 제복, 폴란드 울란(Ulan, 창기병)의 각진 모자, 바이에른 병사들의 푸른 군복,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지원군의 낯선 깃발들… 마치 유럽의 모든 민족이 나폴레옹의 발아래 모여든 듯한 장관이었다. 병력은 60만 명을 훌쩍 넘었고, 말은 수십만 마리, 대포는 천 문이 넘었다. 역사상 이토록 거대한 군대가 단일한 지휘 아래 움직인 적은 없었다.

피에르 뒤퐁은 늙은 척탄병으로서 이 거대한 행렬의 일부가 되어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는 이미 수많은 전쟁터를 누볐고, 황제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스페인에서의 악몽과 같은 경험이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는 이번 원정이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는 것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군대야, 그렇지 않나?" 옆에서 걷던 젊은 신병이 감탄하며 말했다. 그는 아직 전쟁의 참혹함을 모르는 듯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그렇지." 피에르는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군대의 크기가 승리를 보장하는 건 아니야. 중요한 건 병사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그리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지." 그는 속으로 '그리고 얼마나 굶주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라고 덧붙였다. 이미 행군 초기부터 보급 문제는 심각한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빵은 딱딱했고, 고기는 구경하기 힘들었다. 병사들은 가는 길에 농가를 약탈하기 시작했고, 군 기강은 벌써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폴란드 바르샤바에 도착했을 때, 군대는 잠시 휴식을 취하며 재정비했다. 폴란드인들은 나폴레옹을 자신들을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영웅으로 여기며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바르샤바 공국의 폴란드 귀족들은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독립 폴란드 왕국의 부활을 간청했다. 나폴레옹은 그들의 기대를 부추기며 폴란드 군대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폴란드 병사들은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이번 전쟁은 조국 해방 전쟁이었다.

에티엔 드샹의 조카, 젊은 포병 장교 샤를(가상 인물)은 이 모든 광경을 흥분과 함께 약간의 불안감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삼촌 에티엔처럼 법학을 공부했지만, 나폴레옹 황제의 영광과 군인의 명예에 대한 동경으로 군에 입대했다. 그는 이 위대한 원정에 참여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동시에 다국적 군대의 이질적인 모습과 병사들의 사기 저하, 그리고 러시아라는 미지의 적에 대한 두려움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삼촌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적었다.

"숙부님, 저희는 지금 니만 강을 향해 진군하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의 위용 앞에 유럽 전체가 떨고 있는 듯합니다. 이 위대한 군대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병사들은 지쳐 보이고, 보급은 원활하지 않습니다. 러시아는 너무나 광활하고, 저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낍니다. 부디 저희의 승리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마침내 1812년 6월 23일 밤, '위대한 군대'는 니만 강 서쪽 강둑에 집결했다. 강 건너편은 어둠에 잠긴 러시아 영토였다. 나폴레옹은 강가 언덕 위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자신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은 제국의 위용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운명의 순간을 앞둔 비장한 각오로 가득 찼다. 그는 병사들에게 마지막 연설을 했다.

"병사들이여! 제2차 폴란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는 러시아 원정을 이렇게 불렀다) 틸지트에서의 평화는 러시아의 배신으로 끝났다. 그들은 우리의 동맹을 거부하고 프랑스의 영향력이 서쪽으로 밀려나기를 원한다. 운명은 그들을 이끌고 있다. 그들의 운명은 완수되어야 한다! 그들이 우리를 나약하게 여기는가? 우리는 더 이상 아우스터리츠의 병사들이 아닌가? 러시아는 우리를 유럽의 변방으로 몰아넣으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오만한 계획을 분쇄하고, 유럽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니만 강을 건너, 저 야만적인 제국의 심장부로 진격하라!"

황제의 연설에 병사들은 "황제 폐하 만세!(Vive l'Empereur!)"를 외치며 화답했지만, 그 함성 속에는 이전 전투 때와는 다른 불안과 피로의 기색이 섞여 있었다.

6월 24일 새벽, 공병대가 놓은 세 개의 다리 위로 '위대한 군대'의 선두 부대가 니만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수십만 명의 병사와 말, 대포가 끝없이 강을 건너는 모습은 장엄했지만, 동시에 불길한 예감을 안겨주었다. 그날 밤, 하늘에서는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쳤고, 천둥 번개가 밤새도록 어둠을 갈랐다. 마치 자연조차 이 무모한 원정의 비극적인 미래를 경고하는 듯했다. 피에르 뒤퐁은 비에 젖은 채 밤하늘을 바라보며 성호를 그었다. 샤를은 천막 안에서 잠 못 이루고 뒤척였다. 그들은 이제 막 역사의 거대한 비극 속으로 첫 발을 내딛고 있었다. 황제의 '위대한 군대'는 영광을 향해 진군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거대한 무덤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약 20,000자) - 다국적 군대 병사들(독일, 이탈리아 등)의 시점 추가, 행군 과정 및 보급 문제 상세화, 폴란드 상황 묘사, 나폴레옹 연설 전문/심리 묘사, 니만 강 도하 장면 시각/청각 묘사 등 추가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