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부: 나폴레옹 제국의 정점과 그늘 (1807-1811)
(알랭 마르탱의 목소리)
빛이 강렬할수록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는 법이다. 1807년 여름, 니만 강 위의 뗏목에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과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만났을 때, 나폴레옹의 권력은 마치 유럽 대륙 전체를 비추는 정오의 태양처럼 느껴졌다. 프로이센은 먼지 속에 무릎 꿇었고, 오스트리아는 숨죽였으며, 러시아마저 그의 동맹을 자처하며 고개를 숙였다. 프랑스 전역은 끝없는 승전보에 열광했고, 황제는 로마 황제의 후예이자 샤를마뉴의 계승자로서 유럽 문명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듯 보였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이 시기, 겉으로 드러난 제국의 압도적인 위용과 영광을 냉정하게 포착하면서도, 그 이면에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균열의 징후들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틸지트의 화려한 만남은 진정한 평화의 서막이 아니었다. 그것은 힘의 논리에 의한 불안정한 봉합이었고, 패자의 굴욕 속에 잉태된 복수의 씨앗이었으며, 무엇보다 유럽 경제 전체를 질식시키는 '대륙 체제'라는 거대한 모순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제국의 심장부, 프랑스 민중들의 삶은 황제의 영광과는 얼마나 동떨어져 있었던가. 제국의 정점이라 불리던 그 순간에, 이미 몰락의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제151장: 틸지트의 뗏목, 두 황제의 만남
(알랭 마르탱) 1950년 파리, 센 강변의 낡은 아파트. 창밖으로 보이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첨탑은 폭격의 상흔을 간직한 채 묵묵히 서 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 드샹이 남긴 수많은 기록 더미 속에서, 나는 유독 빛바랜 판화 한 장에 오랫동안 시선을 고정했다. 니만 강, 두 척의 작은 배에서 내려 화려하게 장식된 뗏목 위로 향하는 두 명의 황제. 한쪽은 작지만 다부진 체구에 강렬한 눈빛을 한 나폴레옹, 다른 한쪽은 훤칠하고 위엄있는 모습의 젊은 차르 알렉산드르 1세. 1807년 6월 25일, 틸지트에서의 첫 만남을 그린 이 그림은 당시 유럽을 뒤흔든 충격과 기대를 동시에 담고 있다. 아우스터리츠와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의 연이은 참패 이후, 유럽 대륙의 마지막 보루처럼 여겨졌던 러시아마저 프랑스의 군사력 앞에 무릎을 꿇은 순간이었다. 에티엔은 이 사건을 접하며 “두 명의 거인이 세상을 나누기로 작정한 듯 보이지만, 한 명은 승리의 오만에 취해 있고 다른 한 명은 굴욕 속에서 칼날을 갈고 있을 뿐이다. 이 불안정한 악수 뒤에는 또 다른 피바람이 예고되어 있다”고 그의 일기에 적었다. 그의 통찰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틸지트의 화려한 뗏목은 나폴레옹 제국의 외형적인 정점을 보여주는 무대였지만, 동시에 그 몰락을 향한 내리막길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1807년 6월 25일, 동프로이센 틸지트(Tilsit) 근처 니만 강>
차가운 강바람이 불어오는 니만 강 위,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이 점령한 양쪽 강기슭 사이에는 마치 연극 무대처럼 화려하게 장식된 뗏목이 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강물처럼 흘렀다. 유럽의 운명을 결정지을 두 거인의 만남을 위해, 강 양쪽에는 양국의 정예 근위병들이 칼날처럼 도열해 있었고, 수많은 장교들과 외교관들이 숨죽인 채 역사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탄 보트가 뗏목에 도착했다. 그는 낡은 녹색 샤쇠르 연대 군복에 검소한 모자를 썼지만, 그의 존재감은 주변의 모든 것을 압도했다. 아우스터리츠와 예나에서의 승리로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그의 눈빛은 유럽 전체를 자신의 발아래 두려는 확고한 의지로 불타고 있었다. 그는 짧지만 단호한 발걸음으로 뗏목 위에 올라, 강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러시아 황제의 배를 응시했다.
잠시 후, 알렉산드르 1세가 뗏목에 발을 디뎠다. 그는 나폴레옹보다 훨씬 키가 크고 잘생긴 젊은 군주였지만, 아일라우와 프리틀란트에서의 패배는 그의 얼굴에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는 애써 위엄을 유지하려 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감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두 황제는 뗏목 중앙에서 마주 섰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황제 폐하," 알렉산드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프랑스어는 유창했다. "나는 당신만큼이나 영국을 증오합니다."
나폴레옹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알렉산드르의 의중을 간파했다. 이것은 항복 선언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을 시작하려는 제스처였다.
"그렇다면, 폐하, 이미 우리의 강화는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그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우위를 확보하는 데 능숙했다.
두 황제는 뗏목 위에 마련된 호화로운 천막 안으로 들어가 단독 회담을 시작했다. 에티엔의 기록에 따르면, 이 회담은 거의 세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고 한다. 천막 밖에서는 아무도 그 내용을 알 수 없었지만,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유럽의 미래가 결정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의 젊은 야심과 이상주의를 자극하며, 영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설정하고, 프랑스와 러시아가 유럽 대륙을 양분하여 지배하는 ‘형제 제국’의 비전을 제시했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러시아의 패배를 상기시키며 암묵적인 압력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 후, 만남의 장소는 틸지트 시내로 옮겨졌다. 이번에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도 참석했지만, 그의 존재는 거의 유령과 같았다. 나폴레옹은 노골적으로 그를 무시했고, 심지어 공개적인 모욕을 주기도 했다. 프로이센 국왕은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의 참패 이후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서, 오직 나폴레옹의 자비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프로이센은 오만함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영광은 이제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국왕 앞에서 냉정하게 말했다.
보다 못한 루이제 왕비가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녀는 아름다움과 지성, 그리고 용기로 유명했다. 그녀는 나폴레옹을 개인적으로 만나 프로이센에 대한 관용을 호소했다. 그녀의 눈물 어린 간청은 감정에 메마른 나폴레옹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지만, 그의 정치적 결정을 바꾸지는 못했다.
"왕비, 당신의 용기와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하오. 하지만 나는 감정에 휘둘려 국가의 이익을 저버릴 수는 없소. 당신은 뛰어난 여성이지만, 정치의 냉혹함을 아직 모르시는구려." 나폴레옹은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결국 7월 7일에는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7월 9일에는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에 각각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공식적인 동맹을 맺고 영국에 대항하기로 합의했다. 러시아는 대륙 봉쇄령에 참여하고, 발칸 반도와 오스만 제국 문제에서 프랑스와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대신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핀란드 병합을 묵인해주었다.
프로이센에게 주어진 조건은 참혹했다. 엘베 강 서쪽 영토는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이 다스리는 베스트팔렌 왕국에 할양되었고, 폴란드 분할로 얻었던 영토는 프랑스의 위성 국가인 바르샤바 공국으로 넘어갔다. 군대는 4만 2천 명으로 축소되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받았으며, 프랑스 군대의 주둔까지 허용해야 했다. 한때 유럽의 강대국이었던 프로이센은 완전히 몰락하여 반신불수의 상태가 되었다.
틸지트 조약은 나폴레옹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지만, 에티엔의 지적처럼 불안정한 평화였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의 힘 앞에서는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굴욕을 당한 프로이센은 절치부심하며 개혁을 통해 힘을 키울 기회를 노리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자신은 대륙 전체를 자신의 발아래 두었다는 오만함 속에서, 더 큰 야심과 더 위험한 도박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었다. 니만 강 위의 화려한 뗏목은 결국 거대한 제국이 침몰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이었던 셈이다. 나는 낡은 판화를 내려놓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에티엔의 시선은 이제 나폴레옹의 야심이 유럽 경제 전체를 옥죄기 시작하는 '대륙 체제'로 향하고 있었다.
(약 12,000자) - 추가 묘사 및 대화 필요
제152장: 대륙 체제, 유럽 경제의 재편
(알랭 마르탱) 1950년 파리. 폐허 속에서 마셜 플랜의 원조 물품이 들어오고 유럽 경제 공동체의 싹이 트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생각한다. 나폴레옹 역시 150년 전, 자신만의 방식으로 유럽 경제를 통합하려 했다. 바로 '대륙 체제', 즉 대륙 봉쇄령을 통해 영국을 고립시키고 유럽 경제를 프랑스 중심으로 재편하려 했던 거대한 기획이었다. 그의 야심은 컸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 정책의 경제적 허구성과 정치적 위험성을 날카롭게 비판했고, 그의 기록 속에는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롯시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고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나폴레옹은 군사력으로 유럽 지도를 바꿀 수 있었지만, 복잡하게 얽힌 경제의 혈맥까지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할 수는 없었다.
<1806년 이후, 파리 정부 청사 / 유럽 주요 항구 도시 / 밀라노 마르코 롯시 상점>
1806년 11월 21일, 예나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궤멸시킨 나폴레옹은 점령한 베를린에서 소위 '베를린 칙령'을 발표했다. 이는 영국과의 모든 교역 및 통신을 금지하고, 영국 또는 그 식민지 상품을 실은 모든 선박의 유럽 대륙 항구 접근을 막으며, 대륙 내 영국인을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목표는 명확했다. '상인의 나라' 영국의 경제적 기반을 파괴하여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고, 동시에 영국 상품이 사라진 유럽 시장을 프랑스 산업이 독점하여 프랑스 중심의 자급자족적인 경제 블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러시아와 프로이센까지 이 봉쇄령에 참여하게 되면서, 포르투갈과 스웨덴 등 일부를 제외한 유럽 대륙 대부분이 이 '대륙 체제(Système Continental)' 안에 묶이게 되었다.
파리의 경제 관료들은 나폴레옹의 구상에 발맞춰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했다.
"황제 폐하, 이제 영국의 공장들은 문을 닫고 실업자들이 거리를 메우게 될 것입니다! 반면, 우리의 리옹 견직물, 루앙 면직물, 보르도 와인은 유럽 전역으로 팔려나가 프랑스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유럽 대륙은 프랑스의 지도 아래 새로운 경제적 번영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재무 장관 몰리앙(Mollien)은 황제의 비위를 맞추며 보고했다.
실제로 봉쇄령 초기에는 일부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듯 보였다. 경쟁자인 영국 상품이 사라지면서 프랑스의 면직물, 견직물, 설탕(사탕무 재배 장려) 등 일부 산업이 일시적으로 활기를 띠기도 했다. 정부는 적극적인 보호 관세 정책과 보조금 지급을 통해 국내 산업 육성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효과는 제한적이었고, 곧 심각한 부작용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럽 경제는 이미 국경을 넘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영국은 단순히 공산품 수출국이 아니라, 유럽 대륙에 필수적인 식민지 상품(설탕, 커피, 차, 향신료, 그리고 무엇보다 섬유 산업의 핵심 원료인 면화)을 공급하고, 동시에 대륙의 농산물과 원자재를 구매하는 중요한 시장이었다. 영국과의 교역이 막히자 유럽 대륙 전체는 만성적인 물자 부족과 물가 폭등에 시달렸다.
북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직물과 향신료를 거래하던 상인 마르코 롯시는 직격탄을 맞았다. 그의 주력 상품이었던 영국 맨체스터산 고급 면직물과 동인도 회사에서 들여온 인도산 향신료의 수입 루트가 완전히 막혔다. 그는 창고에 쌓여가는 프랑스산 저품질 직물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것 보게, 파올로. 예전 영국제만큼 부드럽지도 않고 색깔도 금방 바래는데 가격은 두 배나 비싸니, 누가 사려고 하겠나? 게다가 설탕이랑 커피 값은 또 왜 이리 뛰는지… 시민들은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인데, 저 프랑스 관리들은 세금만 더 뜯어갈 궁리만 하고 있으니…" 마르코는 오랜 친구이자 동업자인 파올로에게 하소연했다.
"우리만 힘든 게 아닐세, 마르코. 제노바 항구는 텅 비었고, 함부르크 상인들도 죽을 맛이라고 하더군. 러시아 쪽에서도 영국과의 무역이 막혀 목재와 곡물 수출길이 끊겼다고 난리라지." 파올로 역시 침울한 표정으로 답했다.
나폴레옹은 봉쇄령을 강화하기 위해 유럽 전역에 프랑스 세관 관리들을 파견하고 엄격한 단속을 명령했지만, 광대한 해안선을 가진 유럽 대륙에서 밀수를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봉쇄령은 밀수업자들에게는 새로운 '사업' 기회를 제공했고, 세관 관리들의 부패를 조장했다. 높은 이윤을 노린 상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영국 상품을 몰래 들여와 암시장에서 거래했다. 봉쇄령은 공식적인 무역을 마비시켰지만, 비공식적인 지하 경제를 번성시키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에티엔 드샹은 라인란트에서의 경험과 프랑스 국내 상황을 지켜보며, 대륙 봉쇄령이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니라 나폴레옹 제국의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의 기록에 이렇게 덧붙였다.
"황제의 '대륙 체제'는 그의 야심만큼이나 거대하지만, 동시에 모래 위에 세운 성과 같다. 그것은 유럽 각국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오직 프랑스의 이익만을 강요하는 제국주의적 발상이다. 자유로운 교역을 통해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경제의 자연스러운 원리이거늘, 그는 인위적인 장벽으로 유럽 전체를 질식시키려 하고 있다. 이는 결국 영국의 경제력을 꺾기보다는, 오히려 대륙 민중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프랑스에 대한 반감을 키워 제국 자체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사람들은 설탕과 커피 없이 살 수는 있어도, 자유와 존엄성 없이는 결국 저항하게 마련이다."
에티엔의 통찰처럼, 대륙 봉쇄령은 나폴레옹 제국의 정점에서 이미 그 몰락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 영국을 굴복시키려는 야심 찬 시도는 유럽 경제 전체에 고통을 안겨주었고, 각 민족의 저항 의식을 자극했으며, 결국 러시아 원정이라는 파국적인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경제를 정치와 군사의 논리로 재단하려 했던 나폴레옹의 시도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약 14,000자) - 마르코 롯시의 경험, 다른 도시 상황 묘사, 에티엔의 분석 등 추가 필요
제153장: 봉쇄의 역효과, 밀수와 영국의 반격
(알랭 마르탱) 역사 교과서 속 대륙 봉쇄령은 종종 나폴레옹의 야심 찬 계획 정도로만 언급되지만, 그 실상은 훨씬 복잡하고 역동적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유럽 대륙의 항구를 닫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봉쇄하려는 자와 뚫으려는 자 사이의 끊임없는 숨바꼭질이자, 바다를 지배하는 영국과 육지를 지배하는 프랑스 간의 치열한 경제 전쟁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이 예측했듯이, 인간의 이윤 추구 본능과 바다의 광활함은 나폴레옹의 봉쇄망에 무수한 구멍을 만들었다. 그리고 영국은 강력한 해군력과 유연한 경제 구조를 바탕으로 효과적으로 반격하며 봉쇄의 충격을 최소화했다. 맨체스터의 노동자 토마스 애쉬워스의 삶의 어려움과, 바다 위에서 제국의 의지를 관철하려 했던 찰스 킹슬리(가상 인물)와 같은 영국 해군 장교의 시점을 통해, 나는 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단면들을 그려보고자 한다.
<1807년 이후, 영국 런던 의회 / 맨체스터 토마스 애쉬워스 집 / 북해 헬골란트 섬 / 유럽 해안>
나폴레옹의 베를린 칙령(1806)과 밀라노 칙령(1807, 중립국 선박까지 통제 강화)에 대한 영국의 대응은 신속하고 단호했다. 영국 정부는 일련의 '추밀원령(Orders in Council)'을 발표하여 프랑스 및 그 동맹국 항구를 봉쇄하고, 이들 지역과 교역하는 모든 중립국 선박은 먼저 영국 항구에 기항하여 검사를 받고 관세를 납부하도록 요구했다. 이는 프랑스의 봉쇄령에 대한 맞대응이자, 전 세계 해상 무역을 영국의 통제 하에 두려는 강력한 조치였다. 당시 '바다의 여왕'이었던 영국의 해군력은 이러한 정책을 뒷받침할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찰스 킹슬리 함장이 지휘하는 프리깃함 HMS 벨레로폰 (Bellerophon, 훗날 나폴레옹이 항복한 바로 그 배)은 북해의 거친 파도를 가르며 프랑스로 향하는 상선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의 임무는 명확했다. 나폴레옹의 봉쇄망을 뚫고 영국 상품을 실어 나르는 밀수선을 보호하거나 눈감아주고, 동시에 프랑스나 그 동맹국으로 향하는 중립국 선박을 나포하여 영국의 추밀원령을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전방에 돛대 발견! 미국 상선으로 보입니다!" 망루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접근하라! 정선 신호를 보내고 검색 준비!" 킹슬리는 명령했다. 미국 상선은 영국 항구 기항 증명서가 없다는 이유로 나포되어 가장 가까운 영국 항구로 끌려갔다. 이러한 조치는 미국 등 중립국들의 격렬한 항의를 불러일으켰고, 훗날 미영 전쟁(1812)의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킹슬리는 때때로 북해의 작은 섬 헬골란트 근처를 순찰하기도 했다. 바위투성이의 이 작은 섬은 당시 유럽 최대의 밀수 기지였다. 밤이 되면 수백 척의 작은 배들이 헬골란트에 정박한 영국 상선들로부터 설탕, 커피, 면직물, 심지어 프랑스 군복에 필요한 염료까지 넘겨받아 안개나 어둠을 틈타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해안으로 숨어들었다. 킹슬리는 밀수 활동을 알면서도 못 본 척해야 할 때가 많았다. 그것이 영국의 경제를 유지하고 나폴레옹의 봉쇄령을 무력화시키는 중요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영국 본토 맨체스터의 노동자 토마스 애쉬워스는 봉쇄령의 여파를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유럽 대륙으로의 면직물 수출이 감소하면서 조셉 밀러의 공장에서는 작업 시간이 줄거나 임금이 깎이는 일이 잦아졌다.
"젠장, 또 임금이 줄었어! 이놈의 전쟁은 언제 끝나는 건지… 나폴레옹 탓인지, 우리 정부 탓인지, 아니면 밀러 영감 탓인지 모르겠군." 윌 존슨이 술집에서 맥주잔을 탁 내려놓으며 투덜거렸다.
토마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내 메리와 어린 딸 에밀리가 굶주릴까 봐 걱정이 태산 같았다. 봉쇄령으로 인해 설탕이나 커피 같은 기호품 가격이 오르는 것은 그나마 견딜 만했지만, 일자리가 불안정해지는 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주변에서는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나앉거나 구빈원으로 가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나? 수출이 줄었다는데, 공장에서 쓰는 미국산 면화는 계속 들어오는 것 같단 말이야. 어디서 오는 걸까?" 토마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쉿! 그건 다 밀수품이야, 토마스. 바다 건너는 놈들이 목숨 걸고 실어 나르는 거지. 덕분에 우리 목숨 줄은 간신히 붙어 있는 거지만, 그놈들 배만 불려주는 꼴이지." 윌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실제로 영국의 경제는 대륙 봉쇄령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잘 버텨냈다. 해상력을 바탕으로 라틴 아메리카, 북미, 아시아 등 새로운 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했고, 산업 혁명으로 인한 기술 혁신은 생산성 향상을 지속시켰다. 밀수 역시 영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오히려 봉쇄령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은 유럽 대륙 국가들에게 훨씬 더 심각했다. 영국산 공산품과 식민지 상품 부족은 물가 폭등과 민생고를 야기했고, 프랑스의 경제적 종속 강요는 각국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특히 러시아의 경제는 영국과의 전통적인 무역(곡물, 목재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에 봉쇄령으로 인한 타격이 막심했다. 이는 결국 알렉산드르 1세가 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의 무역을 재개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고, 나폴레옹의 파멸적인 러시아 원정을 촉발하게 된다.
아서 핀리는 런던에서 발표된 보고서를 통해 대륙 봉쇄령이 영국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실업, 임금 하락)과 함께, 밀수 과정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부패, 그리고 유럽 민중들이 겪는 더 큰 고통에 대해 기록하며 전쟁의 비인간성과 경제 정책의 파급 효과를 분석했다.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봉쇄령 하에서 영국 기술 자립의 필요성을 느끼며 대체 연료나 재료 개발 연구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은 영국의 반격과 밀수라는 '보이지 않는 손' 앞에서 그 효과가 크게 반감되었다. 해상력을 장악한 영국은 유연하게 대처하며 위기를 극복해 나갔고, 오히려 봉쇄령은 나폴레옹 제국 내부의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만을 심화시켜 스스로를 옭아매는 덫이 되었다. 바다 위의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이미 패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약 15,000자) - 영국 해군 활동, 밀수 경로 및 방법, 영국/대륙 경제 지표 변화 등 추가 묘사 필요
제154장: 위성 왕국의 왕들, 형제들의 고충
(알랭 마르탱) 권력은 종종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마저 뒤틀어 놓는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정복하면서 로마 황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혹은 후대의 독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혈연을 이용했다. 그는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마치 장기판의 말처럼 유럽 각국의 왕좌에 앉혔다. 조제프는 나폴리 왕을 거쳐 스페인 왕으로, 루이는 네덜란드 왕으로, 제롬은 독일 베스트팔렌 왕으로, 여동생 엘리자는 토스카나 대공비로, 카롤린은 야심만만한 원수 뮈라와 결혼하여 나폴리 왕비가 되었다. 이는 프랑스 제국의 지배력을 유럽 전역에 효과적으로 투사하고, 보나파르트 왕조의 영광을 드높이려는 계산된 전략이었다. 그러나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과 여러 회고록들을 살펴보면, 이 '벼락 왕조'의 통치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황제의 형제라는 이름은 그들에게 영광의 후광인 동시에 무거운 족쇄였고, 그들의 왕좌는 화려했지만 늘 위태로웠다. 특히 민족 감정이 격렬하게 분출되던 스페인에서 왕 노릇을 해야 했던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고뇌는 제국의 그림자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808년 이후, 스페인 마드리드 왕궁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왕궁 / 베스트팔렌 카셀 궁정>
"스페인 국왕 폐하 만세!"
마드리드 왕궁 발코니에 선 조제프 보나파르트는 자신을 향해 마지못해 외치는 신하들의 환호 소리를 들으며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명목상 스페인과 인디스(아메리카 식민지)의 왕이었지만, 이 땅에서 자신을 진정한 왕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스페인 귀족들은 그의 프랑스식 교양과 온화한 성품을 경멸했고, 성직자들은 '무신론자 프랑스인'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으며, 민중들은 그를 '페페 보테야(술병 조)'라고 조롱하며 끊임없이 저항했다. 그는 마드리드 왕궁에 갇힌 포로나 마찬가지였다.
조제프는 본래 폭력보다는 개혁과 타협을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스페인에 프랑스 혁명의 긍정적인 유산, 즉 근대적인 헌법(바욘 헌법), 합리적인 행정 시스템, 봉건제 폐지, 종교 재판소 철폐 등을 도입하여 스페인 사회를 개혁하고 민심을 얻고자 했다.
"존경하는 스페인 귀족, 성직자, 그리고 시민 대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낡은 억압이 아닌 새로운 자유와 번영을 가져다주기 위해 왔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바탕으로, 우리는 스페인을 위대한 국가로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조제프는 즉위 초 여러 차례 연설을 통해 자신의 개혁 의지를 피력했다.
그러나 그의 진심은 뿌리 깊은 민족적 반감과 전쟁의 현실 앞에서 무력했다. 스페인 민중에게 프랑스식 개혁은 외세의 강요일 뿐이었고, 프랑스 군대의 잔혹한 점령 통치는 개혁의 정당성을 완전히 훼손시켰다. 조제프는 수도 마드리드와 일부 주요 도시만을 겨우 통제할 수 있었고, 나머지 광대한 지역은 사실상 게릴라들의 수중에 있었다.
가장 큰 고통은 동생인 황제 나폴레옹과의 관계였다. 나폴레옹은 조제프를 독립적인 군주로 존중하기보다는, 제국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대리인으로만 여겼다. 그는 스페인으로부터 막대한 자원과 병력을 끊임없이 요구했고, 조제프의 유화적인 통치 방식을 질책하며 더욱 강력한 군사적 탄압을 명령했다.
"형은 너무 약해 빠졌어! 스페인 놈들은 채찍으로 다스려야 말을 듣는다. 반란군을 모조리 소탕하고, 내 명령을 즉각 이행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직접 가서 처리하겠다!" 나폴레옹의 편지는 조제프를 절망에 빠뜨렸다.
조제프는 스페인 주둔 프랑스 장군들에 대한 통제권도 거의 없었다. 술트, 네, 마세나와 같은 원수들은 조제프 왕의 명령보다는 파리의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며 독자적으로 행동했고, 종종 서로 경쟁하며 스페인 통치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조제프는 프랑스 군대의 약탈과 만행을 막으려 했지만 번번이 좌절했다.
"나는 왕인가, 아니면 그저 프랑스 총독인가?" 조제프는 밤마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그는 스페인 국민들의 고통에 연민을 느꼈지만,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는 프랑스인이었지만, 프랑스 군대 내에서도 이방인이었다. 그는 왕관을 썼지만, 진정한 권력은 없었다. 그의 스페인 통치는 고독하고 비참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네덜란드 왕이었던 루이 보나파르트 역시 비슷한 딜레마에 빠졌다. 그는 진심으로 네덜란드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 노력했고, 특히 경제적 피해가 막심했던 대륙 봉쇄령을 느슨하게 적용하려 시도했다. 이는 네덜란드 국민들의 환심을 샀지만, 나폴레옹의 격노를 유발했다.
"네덜란드 왕은 프랑스 황제의 신하임을 잊었는가! 나의 명령을 어기고 영국 놈들과 거래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나폴레옹은 루이를 소환하여 호되게 질책했고, 결국 1810년 네덜란드를 프랑스 제국에 직접 병합시키고 루이를 왕위에서 물러나게 했다. 루이는 망명길에 오르며 "나는 네덜란드인들에게는 너무 프랑스적이었고, 프랑스인들에게는 너무 네덜란드적이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가장 어렸던 제롬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이 독일 중서부 영토들을 모아 만들어준 베스트팔렌 왕국의 왕이 되었다. 그는 형의 지시에 따라 나폴레옹 법전을 도입하고 봉건제를 폐지하는 등 일부 개혁 조치를 시행했지만, 동시에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 그리고 과도한 세금 징수로 인해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그의 왕국은 '웃음거리 왕국(Königreich Witzig)'이라는 조롱을 받으며 제국의 불안정한 기반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가족 왕조' 시스템은 그가 의도했던 제국의 효율적인 통제와 안정에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각 지역의 민족 감정을 자극하고 저항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황제의 형제라는 후광은 그들에게 실질적인 권위를 부여해주지 못했고, 나폴레옹의 끊임없는 간섭과 요구는 그들을 고뇌와 좌절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 '벼락 왕조'의 불안정성은 결국 제국 전체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징표였으며, 나폴레옹 몰락의 한 원인이 되었다.
(약 16,000자) - 각 형제 왕국의 구체적 통치 사례, 현지 반응, 나폴레옹과의 관계 추가 묘사 필요
제155장: 법전의 전파, 개혁인가 강요인가
(알랭 마르탱) 나폴레옹 법전은 부인할 수 없는 근대 법체계의 기념비적 성과이다. 법 앞의 평등, 사유 재산권 보장, 계약의 자유 등 프랑스 혁명이 이룬 사회경제적 성과를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담아낸 이 법전은 이후 전 세계 수많은 국가의 민법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라인란트 파견 경험 기록은 이 법전이 단순히 '선진적인' 법률 시스템으로서 자발적으로 수용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나폴레옹 군대의 힘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법전의 '전파' 과정은 종종 피정복민들에게는 프랑스 중심주의적 가치와 제도를 강요하는 제국주의적 통치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예상치 못한 문화적 충돌과 민족적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개혁의 이름으로 행해진 강요는 때로는 저항의 씨앗을 뿌리기도 하는 법이다.
<1800년대 후반, 독일 라인란트 지역 도시 (쾰른, 마인츠 등) / 에티엔 드샹의 집무실>
1807년, 통령 정부(곧 제국 정부)의 일원으로서 에티엔 드샹은 새로운 프랑스 영토가 된 라인란트 지역의 행정 및 사법 시스템 개편 작업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내심 복잡한 심경이었지만(나폴레옹의 독재화 경향에 대한 우려), 나폴레옹 법전을 통해 이 지역의 낡고 복잡한 봉건적 법체계를 일소하고 합리적인 근대 질서를 수립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는 법전의 내용을 번역하고 해설하는 작업에 착수했고, 현지 법률가, 교수, 관리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개최했다.
"친애하는 독일 시민 여러분, 그리고 존경하는 법률가 동료 여러분! 이 나폴레옹 법전은 프랑스 혁명이 인류에게 선사한 가장 위대한 선물 중 하나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신분이나 종교에 따른 차별 없이 법 앞에서 동등한 권리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봉건 영주의 자의적인 재판과 불합리한 부담은 사라지고, 여러분의 재산권은 신성하게 보호될 것입니다. 계약의 자유는 경제 활동을 촉진하여 이 지역에 새로운 번영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이 법전은 이성과 정의의 빛 아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열쇠입니다!" 에티엔은 진심으로 법전의 장점을 설명하며 현지 엘리트들의 협력을 구하고자 했다.
초기에는 긍정적인 반응도 있었다. 특히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은 일부 지식인들과 상인 계층은 프랑스 혁명의 개혁 정신과 법전의 합리성을 높이 평가했다.
"드디어 우리 라인란트에도 새로운 시대가 오는군요! 낡은 관습과 특권에 얽매이지 않는 통일된 법 아래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기를 오랫동안 기다려왔습니다." 쾰른의 한 젊은 상인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법전 시행이 본격화되면서 점차 문제점과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첫째, 언어 장벽과 문화적 이질감이 컸다. 모든 법률 문서와 재판 절차가 프랑스어로 진행되면서 대다수 독일 주민들은 소외감을 느꼈고, 프랑스식 법률 용어와 개념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도대체 저 프랑스 관리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재판을 받으러 가도 온통 프랑스 말뿐이니, 내 권리를 제대로 주장할 수나 있겠는가?" 한 농민이 불만을 터뜨렸다.
둘째, 나폴레옹 법전이 프랑스의 역사적 경험과 사회 구조를 반영하고 있어 독일의 전통적인 법 감정이나 관습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상속법에서 프랑스식 균등 상속 원칙은 독일의 장자 상속 관행과 배치되었고, 개인의 절대적인 재산권을 강조하는 조항은 공동체적 토지 이용 전통을 중시하던 농촌 사회에서 혼란을 야기했다.
"수백 년 동안 우리 마을 공동체가 함께 사용해 온 숲과 목초지를 이제 와서 개인 소유로 나누고 울타리를 치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프랑스 법은 개인의 욕심만 채워줄 뿐, 우리 공동체의 오랜 지혜와 유대를 파괴하고 있네." 한 마을의 원로가 개탄했다.
셋째, 종교 문제가 여전히 민감한 갈등 요인이었다. 나폴레옹 법전은 국가의 세속성을 강조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지만, 동시에 민사적인 결혼과 이혼 제도를 도입하여 교회의 전통적인 권한을 축소시켰다. 이는 특히 가톨릭 신앙이 강했던 라인란트 지역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혼은 신성한 성사(Sacrament)인데, 어찌 국가 관리가 감히 이를 주관하고 마음대로 이혼을 허락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신성 모독이며, 가정을 파괴하는 악법이다!" 지역 주교는 강론을 통해 나폴레옹 법전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에티엔은 이러한 반발에 직면하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법전의 합리성과 진보성을 확신했지만, 그것이 현지 사람들에게 '강요'로 받아들여지고 오히려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보고서에 현지 상황을 솔직하게 기술하며 중앙 정부에 유연한 적용과 현지 문화 존중의 필요성을 건의했지만, 파리의 반응은 냉담했다. 나폴레옹 제국에게 법전의 전파는 단순한 법률 개혁이 아니라, 프랑스 중심의 질서를 확립하고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해방자가 아니라 새로운 정복자로 비춰지고 있는 것인가? 혁명의 이상은 제국의 깃발 아래 질식하고 있는 것인가?" 에티엔은 라인 강변을 거닐며 착잡한 심정을 일기에 담았다.
나폴레옹 법전은 분명 유럽의 법률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 전파 과정에서 나타난 문화적 충돌과 강압성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과 제국주의적 현실 사이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주었으며, 역설적으로 피지배 민족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이후 반(反)프랑스 감정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법과 제도의 이식은 결코 가치 중립적인 과정이 아니며, 그것이 뿌리내릴 토양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큰 저항과 갈등을 낳을 수 있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었다. 에티엔은 이 교훈을 가슴 깊이 새기며, 자신의 역할에 대한 회의감 속에서 라인란트에서의 임기를 마무리했다.
(약 17,000자) - 현지 법률가/관리/시민과의 구체적인 대화, 법 적용 사례, 문화 충돌 양상 등 추가 필요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알랭 마르탱의 목소리)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는 법이다. 1807년 틸지트에서의 영광 이후, 나폴레옹 제국은 그 판도를 최대로 넓히며 외견상 절정기를 구가하는 듯 보였다. 프랑스 황제의 독수리 문장은 피레네 산맥에서 니만 강까지, 북해 연안에서 아드리아 해까지 유럽 대륙을 뒤덮었다. 법전은 전파되었고, 옛 제국들은 해체되었으며, 황제의 형제들이 새로운 왕관을 썼다. 그러나 바로 그 정점에서, 제국의 내부는 서서히 곪아가고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시작된 민족적 저항의 불길은 꺼지지 않는 '궤양'이 되어 제국의 힘을 갉아먹었고, 오스트리아는 굴욕 속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대륙 봉쇄령이라는 경제적 족쇄는 유럽 민중의 숨통을 조였고, 러시아와의 불안정한 동맹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았다. 심지어 황제 자신마저 후계자를 얻기 위해 조제핀과 이혼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와 정략결혼을 감행하며, 혁명의 아들이 아닌 옛 군주들의 길을 따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이 시기를 '위태로운 영광의 시대'로 규정한다. 그는 제국의 광대한 영토 확장 이면에 숨겨진 내부 모순의 심화, 그리고 필연적으로 다가올 파국, 즉 무모한 러시아 원정의 전조들을 불안한 시선으로 포착하고 있었다.
제156장: 예술품 약탈, 루브르의 영광 이면
(알랭 마르탱) 정복은 영토와 사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종종 패배한 자들의 영혼과 기억, 그들의 문화적 자부심까지 탐낸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이탈리아를 휩쓸었을 때, 총칼만큼이나 날카롭게 움직였던 것은 예술품을 식별하고 목록을 작성하며 파리로 보낼 준비를 하던 전문가들의 눈과 손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내세웠던 ‘문명’과 ‘이성’의 이름 아래, 인류 최고의 예술적 유산들이 전리품처럼 취급되어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했다. 파리는 세계 예술의 수도가 되었지만, 그 영광은 약탈당한 이들의 눈물과 분노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밀라노의 상인이자 지식인이었던 마르코 롯시(가상 인물)의 분노 어린 기록은, 단순한 재산 손실을 넘어 문화적 정체성을 강탈당한 피정복민의 상처를 생생히 증언한다. 그리고 그 약탈에 동원되었던 평범한 병사 피에르 뒤퐁의 혼란스러운 시선은, 제국주의적 폭력 앞에서 혁명의 이상이 어떻게 퇴색해 가는지를 보여준다.
<나폴레옹 점령기, 이탈리아 로마 / 피렌체 / 베네치아 / 파리 루브르 박물관(상상)>
나폴레옹 군대의 이탈리아 점령은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실상은 곧 가혹한 수탈로 변질되었다. 나폴레옹은 점령한 도시와 공국들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군수품 공출을 강요했다. 재정이 바닥난 프랑스 정부와 끊임없이 전쟁 비용을 필요로 하는 군대를 위해, 이탈리아의 부는 체계적으로 착취당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탐욕은 돈과 물자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의 영광을 간직한 이탈리아의 예술품이야말로 프랑스 제국의 위대함을 장식할 최고의 전리품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동원된 인물은 박식한 예술 애호가이자 외교관이었던 도미니크 비방 드농(Dominique Vivant Denon)이었다. 나폴레옹은 그를 루브르 박물관(당시 나폴레옹 박물관으로 개칭) 관장으로 임명하고, 이탈리아 원정대에 동행시켜 최고의 예술품들을 ‘선별’하여 파리로 옮기는 임무를 맡겼다. 드농과 그의 전문가 팀은 마치 보물 사냥꾼처럼 이탈리아 전역을 누볐다. 그들은 교황령과의 톨렌티노 조약(1797)을 통해 바티칸 박물관의 귀중한 고대 조각상들(라오콘 군상, 벨베데레의 아폴론 등)과 라파엘로의 걸작들을 합법적인(?) 형태로 넘겨받았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파르마, 모데나, 베네치아 등에서도 수많은 회화, 조각, 고문서들이 프랑스 군대의 보호 아래 파리로 향하는 상자에 실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벽화는 옮길 수 없었지만, 그의 귀중한 스케치와 노트들은 예외가 아니었다.
밀라노의 상인 마르코 롯시는 젊은 시절부터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에 소장된 레오나르도의 『코덱스 아틀란티쿠스』를 보며 인간 지성의 위대함에 경탄하곤 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프랑스 군인들이 삼엄한 경비 속에 그 거대한 스케치북을 특별 제작된 상자에 담아 마차에 싣는 광경을 목격했다. 주변에는 무력하게 지켜보는 도서관 사서들과 분노에 찬 시민들 몇몇이 있을 뿐이었다.
"저… 저것은 우리 밀라노의 보물인데! 감히 저걸 가져가다니!" 마르코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항의하려 했지만, 총검을 든 프랑스 병사들의 위협적인 눈빛 앞에서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프랑스 장교는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고르듯 태연하게 목록을 확인하며 작업을 지시하고 있었다.
"파올로,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프랑스군을 환영했던가?" 마르코는 밤늦게 동료 상인 파올로의 가게를 찾아가 격정을 토로했다. "오스트리아 놈들을 몰아낸 자리에 더 탐욕스럽고 오만한 프랑스 놈들이 들어앉았네! 그들은 우리의 돈과 곡식뿐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남긴 위대한 영혼의 결정체마저 빼앗아가고 있네. 저 루브르라는 곳은 약탈품으로 가득 찬 도둑들의 소굴이 될 걸세!"
파올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힘없는 자의 설움이지 뭔가. 황제가 직접 명령한 일이라는데,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나. 들리는 소문으로는 로마에서도, 피렌체에서도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들이 마차에 실려 알프스를 넘고 있다더군. 프랑스 놈들은 혁명으로 자신들의 왕과 귀족 유산을 파괴하더니, 이제 남의 나라 유산을 훔쳐 자신들의 박물관을 채우려 하는군."
"우리가 침묵해서는 안 되네!" 마르코는 결연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저들을 막을 힘은 없지만, 무엇이 약탈되었는지 똑똑히 기록해 두어야 하네.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우리 손으로 되찾아 와야 하네! 이것은 단순한 예술품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이탈리아 민족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일세!" 마르코는 그날 밤부터 비밀리에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함께 프랑스군이 약탈해가는 예술품 목록을 작성하고, 그 과정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 프랑스에 대한 증오와 함께, 분열된 이탈리아를 하나로 묶어 외세에 맞서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열망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한편, 피에르 뒤퐁과 같은 프랑스 병사들은 이 거대한 '문화 이송 작전'에 복잡한 심경으로 동원되었다. 그들은 무거운 조각상을 옮기거나 그림 상자를 마차에 싣는 고된 작업에 투입되었다.
"이 돌덩이가 대체 뭐길래 이렇게 귀하게 모시는 건지 모르겠군." 피에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동료에게 투덜거렸다.
"글쎄, 장교 나리들 말로는 엄청나게 비싼 보물이라던데. 황제 폐하께서 파리 시민들에게 보여주려고 가져가시는 거라고 하더군. 우리 덕분에 파리 구경하게 될 모양이야." 동료가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나 피에르는 웃을 수 없었다. 그는 며칠 전, 한 작은 교회의 제단화를 떼어가는 프랑스 군인들을 말없이 눈물 흘리며 바라보던 늙은 신부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었지만, 때때로 자신이 하는 일이 정당한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파리에서는 이탈리아에서 온 전리품들이 속속 도착했고, 루브르 박물관은 고대와 르네상스 걸작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시민들은 개선 장군의 귀환을 환영하듯 예술품의 도착을 축하했고, 프랑스의 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은둔 생활을 하던 에티엔 드샹은 루브르 재개관 소식을 듣고 착잡한 심정으로 박물관을 찾았다. 그는 벨베데레의 아폴론 조각상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는 그 완벽한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그것이 원래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정복자의 전리품으로서 이곳에 서 있다는 사실에 깊은 씁쓸함을 느꼈다.
"혁명은 만인의 자유와 권리를 선언했지만, 제국은 다른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짓밟는구나. 루브르의 영광은 과연 누구의 눈물 위에 세워진 것인가?" 그는 자신의 일기에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나폴레옹의 군사적 승리는 프랑스에 물질적, 문화적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그 과정에서 자행된 약탈과 폭력은 혁명의 이상을 퇴색시키고, 민족 간의 깊은 상처와 불신을 남기는 결과를 낳았다. 루브르의 화려한 전시실은 제국의 영광인 동시에 그 어두운 이면을 증언하는 역사의 현장이 되고 있었다.
(약 16,000자) - 예술품 약탈 과정의 구체적 에피소드, 드농 등 인물 묘사, 이탈리아 지식인/예술가 반응, 에티엔의 비판 심화 등 추가 필요
제157장: 교황과의 갈등, 황제와 사제
(알랭 마르탱) 권력은 취하게 하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취하게 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스스로 황제의 관을 쓴 그는 유럽 대륙을 자신의 발아래 두려 했고, 그 과정에서 지상의 군주들뿐 아니라 하늘의 대리자, 즉 로마 교황과의 충돌마저 불사했다. 1801년 정교 협약은 불안정한 타협이었을 뿐, 나폴레옹의 궁극적인 목표는 교회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고 자신의 제국 건설에 복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황 비오 7세는 세속 권력 앞에서도 영적 권위의 존엄성을 지키려 했고, 이는 결국 두 거대한 권력의 정면충돌이라는 파국을 불렀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어머니, 독실한 신자였던 증조할머니 마리의 기록에는 이 시기 프랑스 가톨릭 신자들이 겪었던 충격과 고뇌가 절절히 담겨 있다. 황제와 교황의 갈등은 단순한 정치적 대립을 넘어, 신앙과 양심, 국가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건이었다.
<1804년 이후, 파리 / 로마 / 퐁텐블로 궁 / 프랑스 시골 클레망 신부의 교구>
1804년 12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열린 나폴레옹의 대관식은 겉으로는 화려했지만, 이미 황제와 교황 사이에는 불편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교황 비오 7세를 파리로 '초청'하여 자신의 즉위에 종교적 권위를 더하려 했지만, 정작 대관식에서는 교황의 손에서 직접 왕관을 받아 자신의 머리에 씀으로써 교황의 권위 위에 자신의 권력이 있음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비오 7세는 이 모욕적인 장면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
대관식 이후 나폴레옹의 요구는 더욱 노골화되었다. 그는 교황에게 자신의 형 조제프를 나폴리 왕으로 인정하고, 이탈리아 내 교회령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하며, 무엇보다 영국에 대항하는 대륙 봉쇄령에 교황령도 동참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교황 성하, 당신은 프랑스 제국의 보호 아래 있음을 잊지 마시오. 짐의 적은 곧 당신의 적이 되어야 하며, 영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해야 할 것이오. 이것은 명령이오!" 나폴레옹의 편지는 점점 더 위협적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비오 7세는 세속적인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교황의 영적 수장으로서의 역할과 중립적 지위를 강조하며 나폴레옹의 요구를 거부했다.
"황제 폐하, 짐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로서 평화를 위해 기도할 뿐, 특정 국가 간의 전쟁에 교회를 끌어들일 수는 없소이다. 영국의 신자들 역시 짐의 양 떼이며, 그들과의 영적인 교류를 끊을 수는 없소. 또한, 교황령의 독립성은 교회의 자유를 위해 필수적이오." 교황의 답변은 정중했지만 단호했다.
교황의 저항에 나폴레옹은 분노했다. 그는 1808년 프랑스 군대를 로마로 진격시켜 사실상 교황령을 점령했고, 교황을 바티칸 궁에 연금시켰다. 교황은 이에 굴하지 않고 나폴레옹의 행동을 비난하는 교서를 발표하며 저항을 계속했다.
"황제는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소. 교회의 재산을 강탈하고 주교 임명에 간섭하며, 이제는 교황의 자유마저 빼앗으려 하는구려. 회개하지 않는다면,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그대를 파문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마리 드샹은 충격과 슬픔에 잠겼다. 그녀는 매일같이 성당을 찾아 교황의 안전과 교회의 평화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다. 그녀는 혁명 이후 확산되는 반종교적인 분위기와 아들 에티엔의 회의적인 태도에 늘 마음 아파했는데, 이제 황제마저 교황을 박해하는 상황에 이르자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오, 주님! 어찌하여 프랑스에 이런 시련을 내리시나이까? 혁명의 광풍이 지나가고 겨우 안정을 찾는가 싶더니, 이제는 황제가 교회의 목자를 핍박하는군요. 부디 교황 성하를 보호해주시고, 우리 프랑스가 다시 신앙의 길로 돌아오게 하소서." 그녀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졌다.
시골 본당의 클레망 신부 역시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는 정교 협약 이후 조심스럽게 사목 활동을 재개했지만, 황제와 교황의 갈등은 그의 양심을 다시 흔들었다. 그는 국가에 충성 서약을 했지만, 교황에 대한 순명 의무 역시 저버릴 수 없었다. 그는 미사 강론에서 직접적으로 황제를 비판하지는 못했지만,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독립성을 강조하며 은유적으로 나폴레옹의 행동을 비판했다. 그는 비밀리에 선서 거부파 동료 성직자들과 연락하며 교황에게 지지를 보내고, 신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우리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려 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법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시련 속에서 더욱 빛나는 법입니다."
1809년, 나폴레옹은 마침내 교황령을 프랑스 제국에 완전히 병합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교황이 나폴레옹을 (이름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명백히) 파문하는 교서를 발표하자, 나폴레옹의 인내심은 바닥났다. 그는 즉각 교황 체포를 명령했고, 7월 6일 새벽 프랑스 군인들이 바티칸 궁을 습격하여 비오 7세를 체포했다. 교황은 마치 죄수처럼 프랑스로 압송되어 퐁텐블로 궁에 유폐되었다.
이 사건은 전 유럽 가톨릭 신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을 극도로 고조시켰다. 특히 독실한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에서는 교황에 대한 박해가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지를 더욱 불태우는 기폭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군사력으로 교황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지만, 오히려 그의 영적 권위와 순교자적 이미지만 강화시켜 주었을 뿐이었다.
에티엔 드샹은 교황 체포 소식을 듣고 나폴레옹 정권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비판이 옳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는 나폴레옹이 혁명의 이상을 완전히 배반하고, 중세 시대 황제들처럼 교황과 권력 다툼을 벌이는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통탄했다.
"황제는 스스로 혁명의 아들이라 칭했지만, 그의 행동은 루이 14세의 절대 권력, 아니 그보다 더한 폭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프랑스 국민의 자유뿐 아니라, 이제 유럽 전체의 양심과 신앙마저 짓밟으려 하는구나. 그의 제국은 모래 위에 세워진 거대한 바벨탑처럼 언젠가 무너져 내릴 것이다."
나폴레옹은 이후에도 유폐된 교황에게 새로운 정교 협약(퐁텐블로 정교 협약, 1813) 서명을 강요했지만, 이는 곧 교황에 의해 철회되었고, 결국 나폴레옹 몰락 이후 비오 7세는 로마로 귀환하여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게 된다. 황제와 교황의 대결은, 단기적으로는 황제의 물리적 힘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장기적으로는 교황의 영적 권위와 도덕적 정당성이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세속 권력은 총칼로 신앙과 양심까지 지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약 18,000자) - 교황 유폐 생활 묘사, 가톨릭 신자들의 반응, 클레망 신부의 구체적 활동 등 추가 필요
제158장: 반도의 수렁, 스페인의 저항 시작
(알랭 마르탱)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도, 그의 치밀한 정치적 계산도, 예상치 못한 민중의 저항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때가 있었다. 그의 가장 큰 오판 중 하나는 바로 이베리아 반도, 특히 스페인이었다. 그는 스페인을 손쉽게 장악하고 자신의 제국 시스템에 편입시킬 수 있다고 믿었지만, 스페인 민중의 뿌리 깊은 자존심과 독실한 가톨릭 신앙, 그리고 프랑스 침략자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을 간과했다. 1808년 마드리드에서 터져 나온 '도스 데 마요(Dos de Mayo)' 봉기는 이후 6년간 프랑스 제국의 발목을 잡는 기나긴 '반도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 스페인에서의 전쟁을 '제국의 치유 불가능한 상처'라고 불렀다. 나는 프랑스군이 저지른 잔혹 행위를 고발한 고야의 그림들을 떠올리며, 조제프 보나파르트와 마드리드 시민들의 시점을 교차하여 그 비극의 시작을 그려보고자 한다.
<1808년 5월, 스페인 마드리드 / 프랑스 바욘>
사건의 발단은 나폴레옹의 교활한 계략이었다. 그는 1807년 말 포르투갈 침공을 빌미로 프랑스 군대를 스페인 영토에 진주시켰다. 그리고 1808년 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들 페르난도 7세 사이의 왕위 계승 분쟁을 이용하여 두 사람을 프랑스 남부 바욘으로 유인했다. 그곳에서 나폴레옹은 부자(父子) 모두에게 왕위 포기를 강요하고,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새로운 스페인 국왕으로 임명하는 '바욘의 강탈극(Abdication of Bayonne)'을 연출했다. 이는 명백한 주권 침해이자 스페인 민족에 대한 모욕이었다.
마드리드 시민들은 불안과 분노 속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프랑스 군대는 이미 도시 곳곳에 주둔하며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고, 특히 요아힘 뮈라(Joachim Murat) 장군이 이끄는 기병대의 오만한 행동은 시민들의 반감을 사고 있었다. 5월 2일 아침, 뮈라가 마드리드 왕궁에 남아있던 마지막 스페인 왕족들(카를로스 4세의 막내아들과 딸)마저 프랑스로 보내려 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억눌렸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
"우리 왕족을 내줄 수 없다!", "프랑스 놈들을 몰아내자!"
왕궁 앞에 모여든 수백 명의 시민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수의 저항이었지만, 프랑스 군대가 발포하며 진압에 나서자 순식간에 시위는 도시 전체로 번져나갔다.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서는 시민들이 프랑스 맘루크 기병대를 포위하고 공격하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시민들은 칼, 몽둥이, 심지어 부엌칼이나 돌멩이까지 동원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잘 훈련되고 중무장한 프랑스 기병대의 상대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뮈라는 무자비한 진압을 명령했고, 기병대는 칼을 휘두르며 군중 속으로 돌진했다. 거리는 순식간에 비명과 피로 물들었다.
같은 시각, 갓 스페인 국왕 '호세 1세'로 임명된 조제프 보나파르트는 바욘에서 마드리드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뮈라 장군이 이를 강력하게 진압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시작부터 피를 부르는구나… 이것이 과연 내가 원했던 통치 방식인가?"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왕관의 무게가 예상보다 훨씬 더 무겁고 잔혹할 것임을 직감했다. 그는 스페인 국민들에게 개혁과 번영을 약속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프랑스 군대의 총검에 의지해야 하는 불안정한 점령자 신세였다.
마드리드에서의 봉기는 몇 시간 만에 진압되었지만, 프랑스군의 보복은 이제 시작이었다. 5월 2일 밤부터 3일 새벽까지, 프랑스 군인들은 시내 곳곳을 돌며 봉기에 가담했거나 의심되는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했다. 체포된 사람들은 재판 절차도 없이 프린시페 피오 언덕 등 시 외곽으로 끌려가 집단으로 총살당했다. 밤의 어둠 속, 랜턴 불빛 아래 공포에 질린 채 무릎 꿇린 시민들과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눈 프랑스 군인들의 모습은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듯했다. (고야는 이 장면을 <1808년 5월 3일의 총살>에서 강렬한 빛과 어둠의 대비, 그리고 희생자들의 절규하는 듯한 표정을 통해 불멸의 이미지로 각인시켰다.)
이틀간의 사건으로 마드리드에서는 수백 명, 어쩌면 천 명 이상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도스 데 마요' 봉기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스페인 전역에 프랑스 침략자에 대한 불타는 증오와 저항 의지를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각 지역에서는 '훈타(Junta)'라고 불리는 저항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민중들은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이제 스페인은 나폴레옹 제국의 발목을 잡는 거대한 수렁, 즉 '반도 전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조제프 보나파르트는 마드리드에 도착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텅 빈 궁전과 싸늘한 시선, 그리고 끊이지 않는 저항의 소식뿐이었다. 그는 형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폐하, 스페인은 폐하의 생각처럼 쉽게 정복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곳에는 폐하의 군대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왕이 아니라, 증오받는 이방인일 뿐입니다." 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스페인에서의 전쟁은 나폴레옹에게 결코 끝나지 않는 악몽이 될 것이었다.
(약 17,000자) - 마드리드 봉기 시민들의 구체적 모습, 조제프/나폴레옹 심리 묘사, 고야 그림과의 연결 등 추가 필요
제159장: 게릴라 전쟁,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
(알랭 마르탱) 전쟁의 양상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한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정규군 간의 회전을 통해 유럽 대륙을 석권했지만, 스페인의 거칠고 광활한 땅에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전쟁, 즉 '게릴라(Guerrilla, 작은 전쟁)'라는 이름의 비정규전에 직면해야 했다. 보이지 않는 적, 예측 불가능한 공격, 그리고 민중 전체가 저항의 네트워크를 이루는 이 새로운 전쟁 방식은 프랑스 정예군에게 극심한 공포와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게릴라 전쟁을 “제국의 갑옷 틈새를 파고드는 독충과 같다”고 표현했다. 나는 당시 스페인 산악 지대를 누볐을 가상의 게릴라 ‘미겔’과, 그들에게 쫓기던 프랑스 병사 ‘피에르 뒤퐁’의 시점을 통해, 이 처절하고 잔혹했던 비정규전의 실상을 그려보고자 한다.
<1808년 이후, 스페인 산악 지대 / 프랑스군 순찰로 / 농촌 마을>
프랑스 군대가 주요 도시와 교통로를 장악했지만, 스페인의 광활한 시골과 험준한 산악 지대는 여전히 저항의 불길이 타오르는 해방구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는 정규군이 아닌, '파르티다스(Partidas)'라 불리는 다양한 게릴라 부대들이 프랑스 점령군을 상대로 끈질긴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안달루시아 산맥 깊숙한 곳에서 활동하는 미겔의 파르티다는 스무 명 남짓한 소규모 부대였다. 대부분 미겔처럼 프랑스 군에게 가족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빼앗긴 젊은 농민이나 양치기들이었다. 그들의 무기는 프랑스 군에게서 빼앗은 낡은 소총 몇 자루와 칼, 도끼, 심지어는 농기구에 불과했지만, 그들에게는 지형에 대한 완벽한 지식과 프랑스군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 그리고 지역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오늘 밤, 프랑스 놈들의 보급 마차가 저 고갯길을 지날 것이다." 미겔이 동료들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낮 동안 마을에 내려가 협력자인 신부로부터 얻은 정보를 전달했다. "길 양쪽 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마차가 계곡 가운데 들어서면 일제히 공격한다. 말들을 먼저 쏘고, 호위병들을 처리한 뒤, 마차의 물건은 필요한 만큼만 챙기고 나머지는 불태워 버린다. 알겠나?" 동료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빛에는 복수심과 함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밤이 되자, 미겔의 파르티다는 약속된 지점에 매복했다. 달빛조차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숨죽인 채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 고통스러웠다. 마침내 멀리서 덜컹거리는 마차 소리와 프랑스 군인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마차가 계곡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미겔의 신호와 함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프랑스 호위병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몇몇이 저항했지만,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총알과 바위 뒤에서 뛰쳐나온 게릴라들의 칼날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짧고 격렬한 전투가 끝나고, 게릴라들은 마차에서 밀가루, 포도주, 탄약 등 필요한 물품들을 챙긴 뒤 불을 질렀다. 활활 타오르는 마차를 뒤로하고 그들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게릴라들의 공격은 프랑스 군에게는 일상적인 공포였다. 피에르 뒤퐁이 속한 소대는 순찰 임무를 마치고 주둔지로 복귀하던 중이었다. 길 양쪽은 험준한 산악 지대였다. 병사들은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주변을 경계하며 걸었다.
"젠장, 이곳은 꼭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군." 피에르의 옆에서 걷던 동료가 중얼거렸다.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니, 등골이 오싹해."
바로 그 순간, 길가 숲 속에서 총성이 울렸다. 맨 앞에 서 있던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매복이다! 엄폐하라!" 소대장이 소리쳤다. 병사들은 황급히 바위 뒤나 길가 도랑으로 몸을 숨겼다. 어디서 총알이 날아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마구 총을 쏘아댔지만, 소용없었다. 잠시 후 총성은 멎었고, 숲 속에서는 그들을 조롱하는 듯한 외침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 확인해보니 두 명의 동료가 죽어 있었다.
프랑스 군은 게릴라들을 '산적' 또는 '광신도'라고 불렀지만, 그들의 끈질기고 효과적인 저항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게릴라들은 정규 전투를 피하고, 프랑스 군의 약점(보급선, 소규모 부대)만을 노렸다. 그들은 지역 주민들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군은 누가 민간인이고 누가 게릴라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프랑스 군 지휘부는 게릴라 소탕을 위해 점점 더 잔혹한 방법을 동원했다. 그들은 게릴라 활동 의심 지역 주민들을 연대 책임으로 몰아 처형하거나 마을 전체를 불태웠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민심을 더욱 악화시키고 게릴라 저항을 부채질할 뿐이었다. 스페인에서의 전쟁은 명예로운 전투가 아니라, 보복과 학살이 난무하는 추악한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미겔은 오늘도 동료들과 함께 프랑스 군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매복 장소를 물색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인 프랑스 군인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지만, 이제 그의 싸움은 개인적인 복수를 넘어 조국 스페인의 자유와 신앙을 지키기 위한 성전(聖戰)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두려웠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그의 손에 들린 낡은 총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억압에 맞서는 스페인 민중의 불타는 저항 정신 그 자체였다. 보이지 않는 적과의 이 끈질긴 싸움은 나폴레옹 제국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고, 제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비극적인 전주곡이었다.
(약 18,000자) - 게릴라 조직/전술, 지역 주민 협력, 프랑스군 심리/전술 변화 등 상세 묘사 필요
제160장: 프랑스군의 잔혹 행위, 피에르의 환멸
(알랭 마르탱) 고야의 <전쟁의 재앙(Los Desastres de la Guerra)> 연작 판화는 스페인 반도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가장 강력하고 잊을 수 없는 증언이다. 총살, 교수형, 강간, 기아, 시체 훼손…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잔혹 행위가 그 안에 담겨 있다. 이 끔찍한 폭력의 주체는 종종 '해방자'를 자처하며 스페인 땅을 밟았던 프랑스 군대였다. 게릴라 저항에 대한 공포와 분노, 그리고 제국의 오만함은 한때 혁명의 이상을 품었던 군인들마저 야만적인 폭력의 가해자로 만들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이 입수했던 병사들의 편지에는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함께,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죄책감과 환멸이 희미하게 묻어 나온다. 나는 피에르 뒤퐁의 시점을 빌려, 전쟁이 어떻게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고 혁명의 대의를 배반하는지 그려내고자 한다.
<반도 전쟁 기간 중, 스페인 점령 지역 마을 / 프랑스군 야영지 / 피에르의 악몽>
스페인에서의 복무가 길어질수록, 피에르 뒤퐁의 마음속에는 공포와 함께 깊은 환멸감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프랑스 군대의 진격에서 영광이나 해방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매일 목격하는 것은 오직 죽음과 파괴, 그리고 인간성의 상실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게릴라들의 공격에 대한 프랑스 군의 대응은 점점 더 잔혹해졌다. ‘본보기를 보인다’는 명분 아래,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보복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피에르는 상관의 명령에 따라 게릴라 협력 혐의를 받는 마을을 습격하고 불태우는 작전에 여러 번 참여해야 했다.
어느 날, 그들이 도착한 작은 산골 마을은 이미 다른 부대에 의해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집들은 불타고 있었고, 광장에는 처형당한 남자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여자들은 겁에 질려 숨어 있었고, 아이들은 굶주림과 공포 속에서 울고 있었다. 피에르는 차마 그 광경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이것이 정녕 문명화된 프랑스 군대가 할 짓이란 말인가?
"이건 전쟁이 아니야, 학살이야." 피에르 옆에 있던 젊은 신병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닥쳐, 신병! 명령은 명령이다! 저놈들은 모두 게릴라 한패거리야!" 소대장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도 불안감이 섞여 있는 듯했다.
약탈과 폭력은 일상이 되었다. 굶주린 병사들은 농가의 식량과 가축을 빼앗았고, 일부는 술에 취해 민간인을 구타하거나 부녀자를 겁탈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피에르는 그런 동료들을 경멸했지만, 감히 나서서 막을 용기는 없었다. 그 역시 이 지옥 같은 전쟁 속에서 점차 무감각해져 가는 자신을 발견하며 두려움을 느꼈다. 밤이 되면 그는 악몽에 시달렸다. 불타는 마을, 절규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총구를 겨누었던 노인의 공허한 눈빛이 그를 괴롭혔다.
"에티엔 씨… 당신이 말했던 자유와 평등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우리가 이곳에서 싸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저는 더 이상 모르겠습니다." 그는 밤에 몰래 쓴 편지(결코 부치지 못할)에 자신의 고통과 혼란을 쏟아냈다. 그는 한때 나폴레옹 황제를 영웅으로 숭배했지만, 이제 황제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 잔혹한 전쟁에 깊은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황제의 영광은 수많은 스페인 사람들의 피와 프랑스 병사들의 망가진 영혼 위에 세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야의 판화들은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고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이 더 나쁘다(Esto es peor)>에서는 몸통이 잘려 나무에 꿰어진 시신을, <이것을 위해 당신들은 태어났다(Para eso habeis nacido)>에서는 쌓여있는 시체 더미 위로 걸어가는 인물을, <자비심 없는 전쟁(Cruel lástima!)>에서는 프랑스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여성을 묘사한다. 고야의 시선은 프랑스 군의 만행뿐 아니라, 전쟁이 인간에게 가하는 보편적인 폭력과 고통, 그리고 인간성 자체의 파괴를 고발하고 있다.
피에르는 어느 날 우연히 스페인 신부가 숨겨 가지고 있던 고야의 판화(가상 설정) 몇 점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 끔찍하고 적나라한 묘사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자신이 매일 목격하고 있는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조국 프랑스가, 그리고 자신이 속한 군대가 저지르고 있는 죄악의 무게를 절감했다.
"우리는 해방자가 아니라, 악마가 되어가고 있구나…" 피에르의 환멸은 극에 달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시는 총을 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의 영혼에 새겨진 전쟁의 상처는 평생 그를 괴롭힐 것이었다. 스페인에서의 잔혹 행위는 나폴레옹 제국의 도덕적 파산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으며, 혁명의 이상이 제국주의 침략 전쟁 속에서 어떻게 배반당하고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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