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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M으로 뽑은 잡지식

0.1 Ver.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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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부: 왕정 복고와 반동의 시대 (1815-1830)

(알랭 마르탱의 목소리)

워털루의 포성이 멎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인이 대서양 외딴 섬으로 사라진 뒤, 유럽은 마치 긴 열병을 앓고 난 환자처럼 깊은 피로감 속에서 안정을 갈망했다. 빈 회의에서 승전국들이 재단한 새로운 질서는 '정통성'과 '세력 균형'이라는 이름 아래, 프랑스 혁명 이전의 시대로 시계를 되돌리려는 시도였다. 혁명의 불길은 꺼진 듯 보였고, 왕관을 쓴 옛 군주들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으며, 메테르니히의 보수적인 외교술은 유럽 대륙을 촘촘한 감시망 아래 묶어두려 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 시기를 "자유의 숨결이 질식하고, 과거의 유령들이 대낮을 활보하는 시대"라고 묘사하며 깊은 회의와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혁명이 남긴 불씨는 결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억압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열망은 지하에서 조용히 타오르며 새로운 분출구를 찾고 있었고,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은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강력한 신화가 되어 다음 세대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20부는 이 불안정한 평화, 즉 보수 반동의 시대가 어떻게 공고화되고 또 내부로부터 균열을 일으키는지, 그리고 마침내 1830년 또 다른 혁명의 물결로 이어지는 과정을 추적한다.


제191장: 세인트헬레나의 유배객, 나폴레옹 신화의 완성

<1815년 가을 - 1821년 5월, 대서양 남쪽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 / 롱우드 하우스 / 다니엘 르페브르의 소년 시절 파리(회상/상상)>

(알랭 마르탱) 영웅은 전장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유배지의 고독과 죽음의 문턱에서, 그의 신화는 더욱 강력하게 완성되기도 한다. 워털루에서의 최종 패배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더 이상 프랑스 황제가 아니었다. 그는 영국 군함 벨레로폰(Bellerophon) 호에 스스로 몸을 맡겼지만, 영국 망명을 허락받지 못한 채 대서양 한가운데 떠 있는 화산섬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의 포로가 되었다. 한때 유럽 전체를 호령했던 그에게 주어진 것은 낡고 습기 찬 롱우드 하우스(Longwood House)와 영국 총독 허드슨 로(Hudson Lowe) 경의 끊임없는 감시, 그리고 지독한 고독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절망적인 유배 생활 속에서, 나폴레옹은 마지막 전투를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과 업적을 기록하고 미화하여 후세에 남기려는, '기억과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그는 어쩌면 워털루에서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두었는지도 모른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에는 나폴레옹 신화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내용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젊은 세대(아마도 다니엘 르페브르를 포함한)가 그 신화에 매료되는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다.

<세인트헬레나 섬, 롱우드 하우스>

세인트헬레나는 척박하고 고립된 섬이었다. 거친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왔고, 안개가 자주 끼었으며, 습기는 낡은 목조 건물인 롱우드 하우스의 벽과 가구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나폴레옹은 이곳에서 소수의 충성스러운 측근들 – 라스 카즈(Las Cases) 백작, 베르트랑(Bertrand) 장군, 몽톨롱(Montholon) 장군, 구르고(Gourgaud) 장군 등 – 과 함께 유배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고,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초라한 현실 사이의 간극은 그를 깊은 우울과 분노에 빠뜨렸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란 말인가! 한때 유럽을 발아래 두었던 내가, 이 축축하고 바람 부는 감옥에서 쥐새끼처럼 갇혀 지내야 하다니!" 나폴레옹은 종종 측근들 앞에서 울분을 토했다. 그의 가장 큰 불만 대상은 영국 정부가 파견한 섬 총독 허드슨 로 경이었다. 로는 군인 기질의 융통성 없고 의심 많은 인물로, 나폴레옹의 탈출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그의 생활을 사사건건 감시하고 제약을 가했다. 방문객 접견은 엄격히 통제되었고, 편지 왕래는 검열되었으며, 산책 범위마저 제한되었다. 나폴레옹은 이를 의도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였고, 로 총독과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두 사람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은 나폴레옹의 유배 생활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저 자는 교도관일 뿐, 군인이 아니야! 영국 정부는 나를 모욕함으로써 자신들의 치졸함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절망 속에서도 무너지지만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무기가 '기록'임을 깨달았다. 그는 라스 카즈 백작 등에게 자신의 과거를 구술하며 회고록 집필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자신의 삶, 특히 군사적 업적과 정치적 결정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미화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혼란을 수습하고 그 성과를 계승했으며, 유럽에 법과 질서를 가져다주려 했으나 영국과 옛 군주들의 이기심 때문에 좌절한 비운의 영웅으로 자신을 그렸다. 그는 자신의 야심을 프랑스의 영광과 동일시했고, 자신의 패배를 운명의 장난이나 부하들의 배신 탓으로 돌렸다.

"나는 혁명의 아들이었다. 나는 프랑스 국민의 의지에 따라 권력을 잡았고, 오직 프랑스의 영광과 유럽의 평화를 위해 싸웠을 뿐이다. 역사는 나의 진정한 의도를 알아줄 것이다."

라스 카즈의 『세인트헬레나 회상록(Mémorial de Sainte-Hélène)』을 비롯한 측근들의 기록은 나폴레옹 사후 유럽 전역에 출판되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들은 나폴레옹을 독재자가 아닌, 압제에 맞서 싸우다 외딴 섬에 갇힌 '순교자', 마치 바위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비극적 영웅으로 묘사했다. 그의 몰락은 그의 인간적인 매력과 불굴의 의지를 더욱 부각시켰고, 현실 정치의 혼란과 복고 왕정의 무능함에 실망한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파리, 다니엘 르페브르의 소년 시절(상상)>

소년 다니엘 르페브르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몰래 『세인트헬레나 회상록』을 읽으며 가슴 뛰는 흥분을 느꼈다. 그는 나폴레옹 시대의 영광과 몰락 이야기를 어른들로부터 어렴풋이 들어왔지만, 이 책은 황제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듯한 생생함을 선사했다. 그는 황제의 군사적 천재성에 감탄했고, 그의 비극적인 최후에 눈물을 흘렸으며, 그를 배신하고 억압한 세력들에 분노했다. 그는 노년의 에티엔 드샹을 만났을 때, 이 책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털어놓았다.

"선생님, 나폴레옹 황제는 정말 위대한 영웅이 아니었을까요? 비록 그가 패배했지만, 그의 이야기는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에티엔은 소년의 순수한 열정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다니엘, 그 책은 역사의 기록인 동시에 교묘하게 만들어진 신화란다. 나폴레옹은 분명 비범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영광 뒤에는 수많은 희생과 독재의 그림자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영웅을 숭배하기 전에, 그가 남긴 진정한 유산을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단다. 그것이 바로 역사를 배우는 이유이지." 에티엔의 말은 소년 다니엘에게는 아직 어렵게 느껴졌지만, 그의 마음속에 역사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의 씨앗을 뿌려주었다.

1821년 5월 5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위암(혹은 비소 중독설)으로 세인트헬레나에서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육체는 섬에 묻혔지만, 그의 신화는 이제 막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신화는 19세기 프랑스 정치(특히 조카 루이 나폴레옹의 집권)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웅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권력에 대한 복잡한 질문을 던지며 오랫동안 살아남게 된다. 세인트헬레나의 유배객은 죽음을 통해 역설적으로 불멸의 신화를 완성한 셈이었다.

(약 19,000자) - 롱우드 생활 상세 묘사, 허드슨 로와의 갈등 구체적 사례, 회고록 구술 장면, 측근들 심리, 나폴레옹의 죽음 장면, 신화 확산 과정 등 보강 필요


제192장: 메테르니히 체제, 유럽의 감시자

(알랭 마르탱) 나폴레옹이라는 거대한 태풍이 지나간 뒤, 유럽 대륙에는 깊은 상처와 함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남았다. 빈 회의를 주도했던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는 이러한 두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이용했던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가져온 혼란을 '전염병'에 비유하며, 다시는 그러한 '광기'가 유럽을 휩쓸지 못하도록 철저한 방역 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메테르니히 체제(Metternich System)', 또는 '빈 체제(Vienna System)'라 불리는 보수 반동적인 국제 질서였다. 이 체제는 정통 군주들의 연대, 강대국 간의 협력, 그리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철저한 탄압을 통해 약 30여 년간 유럽의 평화(혹은 억압된 안정)를 유지하려 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 체제를 "화려하지만 숨 막히는 수정궁"에 비유하며, 그 안에서 질식해가는 자유의 숨결을 안타까워했다. 나는 메테르니히의 시점에서 이 보수적인 국제 질서가 어떻게 작동하고 유지되었는지, 그리고 그 한계는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815년 이후, 오스트리아 빈 호프부르크 궁/외무성 / 유럽 주요 도시(파리, 베를린,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 국제 회의장(엑스라샤펠, 트로파우 등)>

"질서, 그것이 문명의 기초이자 평화의 담보입니다." 메테르니히 후작은 빈 외무성의 집무실에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에게 보고하며 자신의 정치 철학을 피력했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라는 미명 아래 무질서와 폭력을 초래했고, 나폴레옹은 그 혼란을 이용하여 유럽 전체를 전쟁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우리는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유럽은 강력한 군주들의 연대와 현명한 외교를 통해 안정을 유지해야 합니다."

메테르니히의 구상은 크게 두 가지 축으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제창한 '신성 동맹(Holy Alliance)'이었다. 이는 기독교적 원칙에 입각하여 군주들 간의 형제애와 상호 지원을 약속하는 다소 모호하고 이상주의적인 선언이었지만, 메테르니히는 이를 군주 간의 연대를 강화하고 혁명 사상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활용했다. (영국과 교황청은 참여하지 않았다.)

둘째는 보다 현실적인 '4국 동맹(Quadruple Alliance)'이었다. 이는 빈 회의를 주도했던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4대 강국이 프랑스의 재침략을 방지하고 빈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결성한 군사·정치 동맹이었다. 이후 프랑스(복고 왕정)가 가입하면서 '5국 동맹(Quintuple Alliance)'으로 확대되었고, 이들 강대국은 정기적으로 국제 회의(소위 '회의 체제(Congress System)')를 개최하여 유럽의 현안을 논의하고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합의했다. 엑스라샤펠(Aachen, 1818), 트로파우(Troppau, 1820), 라이바흐(Laibach, 현 류블랴나, 1821), 베로나(Verona, 1822) 등에서 열린 일련의 회의들은 메테르니히가 구상한 '유럽 협조 체제(Concert of Europe)'의 작동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협조 체제의 주된 목적은 평화 유지보다는 '현상 유지(Status Quo)', 즉 빈 체제의 보수적인 질서를 유지하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하는 데 있었다. 특히 1820년대 초 이탈리아(나폴리, 피에몬테)와 스페인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발발하자, 메테르니히는 이를 유럽 전체의 안정을 위협하는 '전염병'으로 간주하고 강력한 개입을 주장했다. 트로파우와 라이바흐 회의에서는 '혁명이 발생한 국가는 유럽 협조 체제에서 제외되며, 다른 회원국은 질서 회복을 위해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트로파우 의정서(Troppau Protocol)'가 채택되었다. 이는 명백한 내정 간섭 원칙이자, 혁명 운동에 대한 공동 탄압을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이 원칙에 따라 오스트리아 군대는 이탈리아 혁명을 진압했고, 프랑스 군대는 스페인 혁명을 진압했다. (영국은 이러한 간섭주의에 반대하며 점차 회의 체제에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메테르니히 체제의 안정은 각국 정부의 강력한 내부 통제와 감시 시스템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는 광범위한 비밀경찰망이 작동하여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 학생 운동가들을 감시하고 탄압했다. 언론과 출판물에 대한 검열은 강화되었고, 대학은 엄격한 통제 아래 놓였다. 메테르니히는 독일 연방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각국 정부가 유사한 탄압 정책을 시행하도록 유도했다(카를스바트 결의 등). 프랑스 복고 왕정,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 치하에서도 비슷한 양상의 보수 반동 정치가 이루어졌다. 유럽은 마치 거대한 감옥처럼, 자유로운 사상과 변화의 움직임이 억압당하는 '반동의 시대(Age of Reaction)'로 접어들었다.

"메테르니히 각하, 이탈리아 카르보나리의 활동이 다시 감지되고 있습니다. 독일 대학가에서도 부르셴샤프트 잔당들이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비밀경찰 책임자가 빈 외무성 집무실에서 메테르니히에게 보고했다.

메테르니히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싹을 잘라야 하네. 혁명의 불씨는 아주 작은 곳에서도 다시 타오를 수 있네. 감시를 강화하고, 주동자들을 철저히 색출하여 본보기를 보이게. 유럽의 안정을 위해서는 한 치의 방심도 용납될 수 없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그의 눈빛에는 보수적인 질서를 수호하려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메테르니히 체제는 약 30여 년간 유럽에서 대규모 전쟁을 방지하고 일시적인 안정을 가져오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아닌, 억압을 통한 미봉책에 불과했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시대의 거대한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으려 했던 시도는 결국 실패할 운명이었다. 그의 체제 아래에서 억눌렸던 힘들은 더욱 강력한 형태로 응축되어, 마침내 1830년과 1848년 혁명으로 폭발하게 된다. 메테르니히는 '유럽의 마부'를 자처하며 질서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추거나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가 세운 반동의 제방은 결국 시대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무너져 내릴 운명이었다.

(약 17,000자) - 신성 동맹/4국 동맹 차이 명확화, 각 국제 회의 내용/결과 상세화, 비밀경찰/검열 시스템 작동 방식, 메테르니히 외교 철학/심리 묘사 등 추가 필요


제193장: 프랑스 복고 왕정, 루이 18세와 울트라

(알랭 마르탱) 왕관은 다시 돌아왔지만, 왕좌는 예전 같지 않았다. 1814년(그리고 백일천하 이후 1815년),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연합군의 보호 아래 파리로 돌아왔을 때, 프랑스는 지난 25년간의 혁명과 제국 시대를 거치며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 있었다. 루이 18세 자신도 혁명 전의 절대 왕정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를 따라 망명지에서 돌아온 극단적인 왕당파 귀족들, 소위 '울트라(Ultras)'들은 혁명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구체제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열망에 불타고 있었다. 이 타협과 반동 사이의 위태로운 줄타기 속에서 복고 왕정(Restoration Bourbon, 1814/15-1830)은 시작부터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 있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복고 왕정을 "과거의 유령과 현재의 현실이 불편하게 동거하는 시대"라고 묘사했다. 나는 앙투아네트 드 발루아(가상 인물)와 같은 귀환 망명 귀족의 시선과 함께, 이 시기 프랑스 정치의 복잡한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1815년 이후, 프랑스 파리 튈르리 궁 / 생제르맹 지구 귀족 살롱 / 의회(대의원) / 남부 프랑스>

마침내 파리로 돌아온 앙투아네트 드 발루아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혁명의 광풍 속에서 가족을 잃고(오빠 필리프는 망명 중 전투에서 사망했고, 부모님은 공포정치 하에서 처형당했다), 재산을 몰수당한 채 신분을 숨기고 비참한 은둔 생활을 했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제 부르봉 왕가가 복위했고, 그녀와 같은 '충성스러운' 귀족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옛 동료였던 한 울트라 왕당파 후작의 도움으로 파리 생제르맹 지구에 작은 거처를 마련하고 사교계 복귀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녀가 마주한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루이 18세는 (혁명 전 루이 16세의 동생, 프로방스 백작) 망명 생활 동안 많은 것을 배웠고, 프랑스를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혁명의 일부 성과를 인정하고 타협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가 1814년에 반포한 '헌장(Charte constitutionnelle)'은 입헌 군주제, 양원제 의회, 법 앞의 평등, 사유 재산권 보장(혁명 시기 토지 매각 인정 포함) 등 혁명의 유산을 상당 부분 담고 있었다. 이는 앙투아네트와 같은 울트라들에게는 불만스러운 조치였다.

"폐하께서 어찌 저 혁명의 잔재들을 인정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그녀가 방문한 후작 부인의 살롱에서 한 늙은 망명 귀족이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잃어버린 토지와 특권을 되찾고, 저 불경한 삼색기 대신 신성한 백색기를 다시 휘날려야 합니다! 혁명에 부역했던 자들을 모두 처단하고 구체제의 영광을 되살려야 합니다!" 살롱 안은 울트라들의 불만과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울트라들의 열망은 1815년 여름 남부 프랑스에서 '백색 테러(Terreur blanche)'라는 폭력적인 형태로 분출되었다. 왕당파 무리들이 혁명 지지자나 나폴레옹파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재판 없이 학살하고 약탈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루이 18세 정부는 이를 공식적으로 규탄했지만, 초기에는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1815년 가을에 실시된 첫 선거에서는 이러한 반동적 분위기 속에서 울트라 왕당파가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한, 소위 '찾을 수 없는 의회(Chambre introuvable)'가 구성되었다. 이 의회는 망명 귀족 재산 반환, 교회 권한 강화, 선거권 축소 등 극단적인 반동 입법을 추진하려 했고, 오히려 루이 18세의 타협적인 통치에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 루이 18세는 1816년 이 의회를 해산하고 다시 선거를 실시하여 온건 왕당파와 자유주의자들이 다소 힘을 얻도록 조절해야 했다.

앙투아네트는 울트라들의 주장에 동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프랑스 사회가 너무나 많이 변해버렸다는 현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녀는 몰수된 가문의 재산을 일부 되찾으려 했지만 법적인 절차는 복잡했고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녀가 다시 찾은 파리 사교계에는 혁명이나 나폴레옹 시대에 부를 축적한 신흥 부르주아들이나 제국 귀족들이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경멸했지만, 동시에 그들의 활력과 현실 적응력 앞에서 자신과 같은 구 귀족들의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다.

어느 날, 그녀는 한 살롱에서 우연히 뤽 모로를 다시 만났다. 에티엔의 친구였던 그는 이제 나폴레옹 밑에서 고위 관료를 지냈고, 복고 왕정 하에서도 교묘하게 처신하여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발루아 양, 오랜만이오. 파리로 돌아오신 것을 환영하오." 뤽은 예의 바르지만 어딘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모로 씨… 당신은 여전히 변함없으시군요." 앙투아네트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그의 기회주의적인 모습에 혐오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그가 살아남은 방식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세상은 변하는 법이지요, 마드무아젤. 과거에 얽매여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뤽의 말은 현실적이었지만, 앙투아네트에게는 더욱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복고 왕정 시기 프랑스 사회는 이처럼 과거의 유령(울트라)과 현재의 현실(혁명의 유산, 신흥 세력)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하고 갈등했다. 루이 18세는 이 사이에서 위태로운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언론과 출판에 대한 규제는 강화되었고, 정치적 자유는 제한되었다. 1820년, 왕위 계승자인 베리(Berry) 공작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정국은 다시 급격히 보수화되었고, 울트라 세력이 다시 힘을 얻었다. 1824년 루이 18세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이자 울트라의 수장이었던 아르투아 백작이 샤를 10세로 즉위하면서, 프랑스는 노골적인 반동 정치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는 결국 1830년 7월 혁명이라는 또 다른 폭발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복고 왕정은 과거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미 혁명의 강물은 너무 멀리 흘러가 버린 뒤였다.

(약 19,000자) - 루이 18세/샤를 10세 캐릭터 심화, 울트라/자유주의 세력 인물/활동 구체화, 백색 테러/찾을 수 없는 의회 등 사건 상세 묘사, 앙투아네트 심리 변화/사회 적응 과정 등 보강 필요


제194장: 숨 막힌 독일, 카를스바트 결의

(알랭 마르탱) 해방의 기쁨은 짧았고, 억압의 겨울은 길었다. 나폴레옹을 몰아낸 해방 전쟁(1813-1814)은 독일 전역에 민족적 자부심과 함께 자유주의적 통일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부르셴샤프트(Burschenschaft) 운동은 '명예, 자유, 조국(Ehre, Freiheit, Vaterland)'을 외치며 낡은 지방주의와 군주들의 전제 정치를 비판하고 통일된 자유 독일을 꿈꾸었다. 그러나 이러한 젊은 열정은 빈 체제를 설계한 메테르니히와 독일 군주들에게는 체제를 위협하는 '위험한 불장난'으로 보였다. 1819년 카를스바트(Karlsbad)에서 내려진 반동적인 결의는 독일의 짧았던 자유의 봄을 끝내고, 숨 막히는 감시와 탄압의 시대를 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에는 망명한 독일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접했을 이 시기 독일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 나는 해방 전쟁의 영웅에서 이제는 '위험분자'로 낙인찍힐 위기에 처한 청년 카를 폰 슈타인(가상 인물)의 시점에서, 이 억압의 시대를 그려보고자 한다.

<1815-1819년, 독일 대학 도시(예나, 베를린 등) / 바르트부르크 성 / 카를스바트 / 카를 폰 슈타인의 방>

해방 전쟁이 끝나고 카를 폰 슈타인은 예나 대학으로 돌아왔다. 그는 전쟁 영웅으로 친구들과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마음 한구석은 빈 회의의 결과에 대한 실망감으로 차 있었다. 독일 연방은 이름뿐인 연합체였고, 각국의 군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절대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프랑스의 압제는 사라졌지만, 진정한 자유와 통일은 아직 요원해 보였다.

그러나 카를과 그의 동지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학 내에서 부르셴샤프트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했다. 부르셴샤프트는 단순히 학생들의 사교 모임이 아니라, 독일 민족의 통일과 자유주의적 개혁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인 성격의 단체였다. 그들은 금지된 프랑스 혁명 사상 서적과 함께, 피히테, 아른트, 얀(Friedrich Ludwig Jahn, 체조 운동 창시자) 등 민족주의 사상가들의 글을 탐독하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들은 낡은 귀족 중심의 학생 조합(Landsmannschaften)에 반대하며 모든 독일 학생들의 단결을 외쳤고, 검소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강조하며 개인보다는 민족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정신을 함양하려 했다.

1817년 10월, 종교 개혁 300주년과 라이프치히 전투 승리 4주년을 기념하여 전국 각지 부르셴샤프트 대표 약 500명이 튀링겐의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모였다. 이곳은 마르틴 루터가 성서를 번역했던 역사적인 장소였다. 카를도 이 축제에 참여했다. 축제는 애국적인 연설과 노래, 체조 시범 등으로 뜨거운 열기 속에 진행되었다. 그러나 일부 급진적인 학생들이 반동적인 서적들과 구체제의 상징물들(가발, 코르셋, 프로이센 군모 등)을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벌이면서, 축제는 군주들과 메테르니히에게 심각한 우려와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저 젊은이들의 광기를 보시오! 저들은 루터의 이름으로 혁명을 꿈꾸고 있소!" 메테르니히는 빈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분노했다. 그는 독일 대학들을 '혁명 사상의 온상'으로 규정하고 탄압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기회는 1819년 3월에 찾아왔다. 예나 대학의 부르셴샤프트 회원이자 신학도였던 카를 루트비히 잔트(Karl Ludwig Sand)가 러시아 차르의 스파이이자 반동적인 극작가로 알려진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August von Kotzebue)를 만하임에서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잔트는 코체부를 민족의 배신자로 규정하고 자신의 행동을 애국적인 행위로 정당화했지만, 이 사건은 메테르니히와 독일 군주들에게 자유주의/민족주의 운동 전체를 탄압할 완벽한 명분을 제공해주었다.

1819년 8월, 메테르니히의 주도 아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및 주요 독일 연방 국가 대표들이 보헤미아의 온천 휴양지 카를스바트(Karlsbad)에 비밀리에 모였다. 그들은 불과 몇 주 만에 일련의 강력한 탄압 법령, 즉 '카를스바트 결의(Karlsbader Beschlüsse)'를 채택했다. 이 결의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모든 대학에 정부 감시관을 파견하고 '위험한' 사상을 가르치는 교수를 해고하며, 학생 조직(특히 부르셴샤프트)을 금지한다. 둘째, 모든 출판물(20페이지 미만)에 대한 사전 검열을 강화하고, 자유주의/민족주의적인 신문과 잡지를 탄압한다. 셋째, 각국 정부의 탄압 정책을 감시하고 조정하기 위한 중앙 조사 위원회를 마인츠에 설치한다.

카를스바트 결의는 독일 연방 의회에서 신속하게 승인되었고, 독일 전역에서 즉시 시행되었다. 이는 독일의 지성계와 청년 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었다. 수많은 교수들이 강단을 떠나야 했고, 학생들은 감시와 처벌의 공포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했다. 신문과 서적은 엄격한 검열 아래 놓였고,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의 목소리는 질식당했다.

카를 폰 슈타인은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 그가 꿈꾸었던 자유롭고 통일된 독일은 이제 불가능한 환상처럼 보였다. 부르셴샤프트는 해체되었고,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 중 일부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카를 자신도 비밀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그는 더 이상 대학에 남아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우리의 봄은 너무나 짧았구나… 이제 기나긴 겨울이 다시 찾아왔다." 카를은 자신의 방에서 흑-적-금 깃발을 불태우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 불씨까지 꺼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잠시 숨을 죽일 뿐,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스위스나 프랑스로 망명하여 새로운 저항의 길을 모색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망명길은 길고 고독하겠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언젠가 다시 타오를 독일 민족 해방의 불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카를스바트 결의는 메테르니히 체제의 억압적인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단기적으로는 독일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억누르는 데 성공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저항 의지를 더욱 강화시키고, 독일 사회 내부에 깊은 불만과 갈등의 골을 남기는 결과를 낳았다. 숨 막히는 반동의 시대 속에서, 독일은 조용히 다음 변혁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 20,000자) - 부르셴샤프트 활동/이념 상세화, 바르트부르크 축제 분위기, 코체부 암살 배경/파장, 카를스바트 결의 구체적 내용 및 집행 과정, 카를의 좌절/고뇌/결단 심화 등 추가 필요


제195장: 분열된 이탈리아, 카르보나리의 저항

(알랭 마르탱) "이탈리아는 단지 지리적인 표현일 뿐이다." 빈 회의를 주재했던 메테르니히의 이 냉소적인 말은 1815년 이후 이탈리아 반도의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나폴레옹 시대 잠시나마 통일의 가능성을 맛보았던 이탈리아는 다시 여러 개의 왕국과 공국으로 분열되었고, 북부의 부유한 롬바르디아-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직접 지배 아래 놓였으며, 중부와 남부의 군주들 역시 오스트리아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신음했다. 교황의 세속 권력 또한 부활하여 중부 이탈리아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과 외세 지배의 현실 속에서도, 이탈리아 민족의 통일과 독립을 향한 열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 열망은 오스트리아와 각국 군주들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 '카르보나리(Carbonari, 숯쟁이)'라는 이름의 비밀 결사 조직을 통해 은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에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망명 프랑스인들의 편지가 일부 포함되어 있다. 나는 그 기록들과 함께, 카르보나리 단원으로 활동했던 밀라노 상인 마르코 롯시(가상 인물)의 시점을 통해, 억압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저항을 준비했던 이탈리아 민족주의 운동의 초기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1815-1821년,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 남부 나폴리 / 피에몬테 토리노 / 카르보나리 비밀 회합 장소 / 오스트리아 감옥(Spielberg)>

밀라노의 상인 마르코 롯시는 예전의 활기를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가 다시 시작되면서 도시는 무거운 침묵과 감시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오스트리아 군인들이 거리를 순찰했고, 비밀경찰들은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감시했다. 그가 한때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에게 걸었던 기대는 환멸과 배신감으로 바뀌었고, 이제 그의 가슴속에는 오직 오스트리아 압제자들에 대한 증오와 이탈리아 민족의 통일에 대한 열망만이 남아 있었다.

마르코는 오래전부터 활동해 온 비밀 결사 '카르보나리'의 밀라노 지부 책임자 중 한 명이었다. 카르보나리는 원래 나폴레옹 시대 말기에 프랑스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결성되었으나, 왕정 복고 이후에는 오스트리아와 각 지역의 전제 군주 타도, 그리고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주로 입헌 군주제 형태)을 목표로 활동하는 전국적인 비밀 네트워크로 성장해 있었다. 그들은 복잡한 위계질서와 비밀 의식(숯을 만드는 과정 비유)을 통해 조직을 유지했고, 주로 중산층 지식인, 군 장교, 학생, 일부 자유주의 귀족들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네. 우리의 조국 이탈리아는 지금 오스트리아의 발아래 신음하고 있으며, 여러 군주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 있네. 우리는 이 굴욕적인 현실을 타파하고, 로마 시대의 영광을 되살려 통일된 이탈리아를 건설해야 하네!" 마르코는 어두운 지하실에서 열린 카르보나리 비밀 회합에서 낮은 목소리로 열변을 토했다. 촛불 아래 모인 단원들의 눈빛은 결연한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비밀 정보를 교환하며, 다음 봉기를 위한 준비를 조심스럽게 해나가고 있었다.

1820년 여름, 기회가 찾아왔다. 스페인에서 리에고 대령이 일으킨 자유주의 혁명 성공 소식이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왕국에 전해지자, 구글리엘모 페페(Guglielmo Pepe) 장군이 이끄는 일부 군 장교들과 카르보나리 단원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는 예상외로 빠르게 성공하여,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는 겁을 먹고 스페인 1812년 헌법과 유사한 자유주의 헌법을 승인하고 의회 소집을 약속해야 했다.

나폴리 혁명 소식은 이탈리아 전역의 자유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을 흥분시켰다. 마르코 롯시는 밀라노에서 동지들과 함께 축배를 들었다. "보라! 마침내 이탈리아에도 자유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다! 이제 곧 우리 북부에서도 봉기의 깃발을 올려 오스트리아 놈들을 몰아내야 하네!"

이듬해인 1821년 3월, 나폴리 혁명에 고무된 피에몬테 왕국에서도 산토레 디 산타로사(Santorre di Santarosa) 등이 이끄는 자유주의 장교들과 카르보나리 단원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에게 헌법 제정과 대(對)오스트리아 전쟁을 요구했다. 국왕이 퇴위하고 그의 동생 카를로 펠리체(Carlo Felice)가 섭정이 되었으나, 그는 오스트리아의 개입을 요청하며 반동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자유주의자들의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유럽의 '소방수'를 자처한 메테르니히는 이탈리아에서의 혁명 성공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트로파우(1820)와 라이바흐(1821)에서 열린 열강 회의에서 '간섭주의' 원칙을 관철시켰고, 오스트리아 군대가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승인받았다.

1821년 봄, 오스트리아 군대는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나폴리 왕국과 피에몬테 왕국을 침공하여 자유주의 혁명을 무참히 진압했다. 혁명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투옥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망명해야 했다. 마르코 롯시 역시 오스트리아 경찰의 수배 명단에 올랐고, 동지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스위스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그는 망명지에서 젊은 제노바 출신 변호사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가 새로운 방식의 민족 운동, 즉 '젊은 이탈리아(Giovine Italia)'를 구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당국은 혁명 가담자들을 철저히 색출하여 탄압했다. 많은 카르보나리 단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체포되어 오스트리아 제국 내 악명 높은 슈필베르크(Spielberg) 요새 감옥 등에 투옥되어 혹독한 고통을 겪었다. 그들의 희생과 고통은 실비오 펠리코(Silvio Pellico)의 『나의 감옥(Le mie prigioni)』과 같은 기록을 통해 알려지면서, 오히려 이탈리아 민중들의 반(反)오스트리아 감정과 통일 의지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820-21년의 혁명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탈리아 통일 운동(리소르지멘토)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처음으로 이탈리아 전역에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깃발 아래 광범위한 저항이 일어났음을 보여주었고, 외세의 간섭과 내부의 분열이라는 통일의 과제를 명확히 드러냈다. 카르보나리의 비밀스러운 저항은 실패했지만, 그들이 뿌린 씨앗은 마치니와 가리발디, 그리고 카부르로 이어지는 다음 세대 지도자들에 의해 마침내 통일이라는 결실을 맺게 될 것이었다. 마르코 롯시는 망명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언젠가 다시 이탈리아 땅에서 자유와 통일의 깃발을 휘날릴 날을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약 20,000자) - 카르보나리 조직/의식 상세화, 나폴리/피에몬테 혁명 과정 구체화, 오스트리아 진압/탄압 모습, 슈필베르크 감옥 생활, 마르코 롯시 망명 생활 및 마치니와의 연결 등 보강 필요

 

 

 

 

 

 

 

 

 

 

 

 

 

 

 

 


제196장: 러시아의 얼음 감옥, 데카브리스트의 꿈

<1825년 12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원로원 광장 / 니콜라이 1세의 겨울 궁전 / 시베리아 유형지 / 모스크바 헤르첸의 집(소년 시절)>

(알랭 마르탱) 프랑스 혁명의 메아리는 알프스 산맥을 넘고 라인 강을 건너, 마침내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까지 가닿았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여 '문명화된' 유럽을 직접 경험했던 러시아의 젊은 귀족 장교들은 조국의 후진적인 전제 정치와 야만적인 농노제의 현실에 깊은 문제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프랑스 계몽사상과 혁명의 이상, 즉 입헌 군주제, 법치주의, 시민적 자유, 그리고 인간 해방의 꿈을 러시아 땅에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차가운 러시아 겨울, 얼어붙은 원로원 광장에서 너무나 허무하게, 그리고 잔인하게 짓밟혔다. 1825년 12월의 데카브리스트(Dekabrist, 12월 당원) 봉기는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혁명 시도였지만, 동시에 차르 전제 정치의 견고함과 개혁의 어려움을 극명하게 보여준 비극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 사건을 "얼음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 그러나 피기도 전에 꺾여버린 비운의 혁명"이라 불렀다. 나는 소년 알렉산드르 헤르첸이 느꼈을 충격과 함께, 이 짧지만 강렬했던 혁명의 꿈과 좌절을 그려보고자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1820년대 초반, 귀족 청년 장교들의 비밀 결사 모임>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치고 파리까지 입성했던 영광의 기억과 함께, 젊은 러시아 귀족 장교들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고민이 싹트고 있었다. 그들은 서유럽에서 경험한 자유로운 분위기와 합리적인 제도들을 러시아의 현실과 비교하며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

"우리는 유럽의 해방자라고 불렸지만, 정작 우리 조국 러시아는 여전히 차르의 전제 정치와 몽매한 농노제 아래 신음하고 있지 않은가!" 파벨 페스텔(Pavel Pestel), 콘드라티 릴레예프(Kondraty Ryleyev), 세르게이 무라비요프-아포스톨(Sergey Muravyov-Apostol) 등 젊고 이상주의적인 장교들은 비밀리에 모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들은 '구제 동맹(Союз спасения)', '복지 동맹(Союз благоденствия)' 등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러시아의 미래를 위한 개혁 방안을 모색했다.

그들의 목표는 다양했다. 페스텔과 같은 급진파는 차르 전제정을 타도하고 공화국을 수립하며 농노제를 즉각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남방 결사(Южное общество)'). 반면, 니키타 무라비요프(Nikita Muravyov) 등 온건파는 영국식 입헌 군주제 도입과 점진적인 농노제 폐지를 선호했다('북방 결사(Северное общество)'). 비록 구체적인 방법론에서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러시아를 개혁하고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대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공통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러시아를 깨우는 선구자라고 믿었다.

<1825년 11-12월, 타간로크 / 상트페테르부르크>

기회는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1825년 11월,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던 알렉산드르 1세가 남부 타간로크에서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잠시 권력 공백 상태가 발생했다. 원래대로라면 둘째 동생 콘스탄틴(Constantine) 대공이 계승해야 했지만, 그는 이미 오래전에 비밀리에 계승권을 포기한 상태였다. 결국 셋째 동생 니콜라이(Nicholas) 대공이 새로운 차르로 즉위하게 되었다. 니콜라이는 형과 달리 완고하고 보수적인 군인 기질의 인물이었다.

데카브리스트들은 이 계승 혼란을 혁명의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그들은 니콜라이의 즉위를 반대하고 '콘스탄틴과 헌법(Константин и Конституция)!'이라는 (다소 모호한) 구호를 내걸고 봉기를 계획했다. 그들은 군대 내 동조 세력을 규합하여 원로원 의원들에게 니콜라이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새로운 헌법 제정을 요구하려 했다.

<1825년 12월 14일(러시아력 12월 26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원로원 광장>

운명의 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원로원 광장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데카브리스트 장교들이 이끄는 약 3,000명의 병사들이 광장에 도열했다. 그들은 새로운 차르 니콜라이 1세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하고 헌법 제정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봉기는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계획은 치밀하지 못했고, 지도부는 우왕좌왕했으며, 기대했던 다른 부대들의 합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자신들이 왜 광장에 나와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콘스탄틴 황제를 위해!' 싸우는 줄로만 알았다.

광장 주변에는 니콜라이 1세에게 충성하는 압도적인 병력의 정부군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니콜라이 1세는 처음에는 대화를 통해 사태를 해결하려 했지만, 반란군이 완강히 버티자 결국 무력 진압을 명령했다.

"반역자들에게 자비는 없다! 포병은 발포하라!"

정부군의 대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광장에 밀집해 있던 반란군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다. 눈 덮인 광장은 순식간에 피와 시체로 뒤덮였다. 봉기는 단 몇 시간 만에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살아남은 데카브리스트 지도자들과 가담자들은 체포되었다.

모스크바의 부유한 귀족 저택에서 살던 열세 살 소년 알렉산드르 헤르첸(Alexander Herzen)은 이 충격적인 소식을 아버지와 손님들의 대화를 통해 들었다. 그는 데카브리스트들의 이름과 그들의 이상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젊고 용감한 귀족 장교들이 자유를 위해 싸우다 처참하게 죽어갔다는 사실은 어린 헤르첸의 마음에 깊은 슬픔과 함께 강렬한 불꽃을 지폈다. 그는 그날 밤, 친구 오가료프(Ogarev)와 함께 언젠가 데카브리스트들의 복수를 하고 러시아를 해방시키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러시아 혁명 사상의 중요한 선구자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82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 시베리아>

체포된 데카브리스트들에 대한 재판은 가혹했다. 특별 법정에서 5명의 핵심 지도자(페스텔, 릴레예프, 무라비요프-아포스톨 등)는 교수형(오랜만에 부활된)에 처해졌고, 120여 명의 다른 가담자들은 시베리아 유형이라는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시베리아의 얼어붙은 땅은 이제 그들에게 '살아있는 감옥'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비록 봉기는 실패했지만, 그들의 꿈과 이상은 러시아 지식인 사회(인텔리겐치아)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이후 푸쉬킨, 레르몬토프 등 문학 작품과 헤르첸, 바쿠닌 등으로 이어지는 혁명 사상의 중요한 뿌리가 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 봉기를 진압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지만, 동시에 그는 자유주의 사상의 위험성을 절감하고 더욱 강력한 전제 정치와 검열, 비밀경찰(제3부) 통치를 강화하는 길로 나아갔다. 러시아는 다시 한번 두꺼운 얼음 속에 갇힌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얼음 밑에서는 데카브리스트들이 뿌린 자유의 씨앗이 조용히 다음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 20,000자) - 데카브리스트 비밀 결사 활동/이념 상세화, 알렉산드르 1세/콘스탄틴/니콜라이 관계 및 성격 묘사, 봉기 당일 상황(병사/시민 반응 포함) 구체화, 재판/처형/유형 장면, 헤르첸의 각성 과정 심화 등 추가 필요


제197장: 스페인의 퇴보, 리에고 혁명의 좌절

(알랭 마르탱) 역사의 진보는 종종 두 걸음 나아가면 한 걸음 물러서는, 때로는 그 이상 후퇴하기도 하는 힘겨운 과정이다. 1820년대 초 스페인의 역사는 이러한 퇴보의 전형을 보여준다. 나폴레옹 전쟁의 폐허 속에서 어렵게 싹텄던 자유주의의 희망은 복위한 부르봉 왕가의 완고한 반동 정치와, 유럽의 '질서'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이루어진 외세의 군사적 개입 앞에서 무참히 짓밟혔다. 라파엘 델 리에고(Rafael del Riego) 대령의 용감한 봉기로 시작된 '자유주의 3년(Trienio Liberal)'은 결국 빈 체제의 수호자를 자처한 프랑스 군대의 침공으로 막을 내렸고, 스페인은 다시 암울한 절대 왕정 시대로 회귀하고 말았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 사건을 "메테르니히 체제의 국제적 간섭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기록하며, 한 민족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 강대국들의 정치적 계산에 의해 좌우되는 현실을 개탄했다. 나는 이 짧지만 격렬했던 스페인 자유주의 혁명의 발발과 좌절 과정을 통해, 반동 시대 유럽의 정치적 현실을 그려보고자 한다.

<1814년 이후, 스페인 마드리드 / 카디스 / 유럽 주요 수도(빈, 파리, 베로나 등)>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페르난도 7세(Ferdinand VII)가 스페인 왕좌로 돌아왔을 때,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그가 1812년 카디스(Cádiz) 코르테스(의회)에서 제정된 진보적인 자유주의 헌법을 존중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헌법은 국민 주권, 입헌 군주제, 보통 선거권(남성), 언론 자유 등을 규정하며 당시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헌법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페르난도 7세 역시 망명 시절에는 이 헌법에 대한 충성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을 되찾자마자 그는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귀족, 성직자 등 보수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고 1814년 5월, 1812년 헌법을 폐기하고 모든 자유주의적 개혁 조치를 무효화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절대 왕정 시대로의 완전한 복귀를 선언했으며,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해야 했고, 스페인 사회는 다시 한번 정치적 암흑기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반동 정치에 대한 불만은 특히 군대 내 젊은 장교들 사이에서 높았다. 그들 중 다수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 게릴라 활동이나 정규군 복무를 통해 자유주의 사상에 눈을 떴고, 왕의 무능과 전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카르보나리와 유사한 비밀 결사를 조직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820년 1월 1일,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라파엘 델 리에고 이 누녜스(Rafael del Riego y Nuñez) 대령은 남미 독립 운동 진압을 위해 카디스 항구에 집결해 있던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1812년 헌법의 부활과 의회 소집을 요구하며 안달루시아 지방을 행진했다. 처음에는 그의 봉기가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지만, 그의 용감한 행동은 스페인 전역의 자유주의자들과 불만 세력을 자극했다. 갈리시아, 아라곤, 카탈루냐 등 여러 지역에서 동조 봉기가 잇따랐고, 마드리드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궁지에 몰린 페르난도 7세는 결국 1820년 3월, 마지못해 1812년 헌법을 다시 수용하고 자유주의 정부 구성을 약속해야 했다. 스페인에는 다시 한번 자유주의의 시대가 열리는 듯 보였다('자유주의 3년(Trienio Liberal)', 1820-1823). 의회가 소집되었고, 언론 자유가 회복되었으며, 교회 재산 일부가 매각되는 등 개혁 조치들이 추진되었다. 리에고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 자유주의 정부는 처음부터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국왕 페르난도 7세는 겉으로는 헌법을 존중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절대 왕정 복귀를 위한 음모를 꾸미며 유럽 열강들에게 비밀리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자유주의 진영 내부에서도 온건파와 급진파 사이의 분열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가톨릭 교회와 보수 귀족 세력은 여전히 강력한 반(反)혁명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유럽 열강들의 개입이었다. 메테르니히는 스페인 혁명이 이탈리아를 거쳐 유럽 전체로 확산될 것을 극도로 우려했다. 그는 트로파우와 라이바흐 회의에서 확립된 '간섭주의' 원칙에 따라 스페인 혁명을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22년 베로나(Verona) 회의에서 신성 동맹(및 프랑스)은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에 개입하여 페르난도 7세의 절대 왕권을 회복시키는 것을 승인했다. (영국은 이 결정에 반대하며 회의 체제에서 사실상 탈퇴했다.)

1823년 4월, 프랑스 국왕 루이 18세(샤를 10세 즉위 전)는 '성 루이의 10만 아들(Cent Mille Fils de Saint Louis)'이라 불리는 대규모 군대를 스페인으로 파견했다. 프랑스 군대는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스페인 영토를 진격하여 마드리드를 점령했다. 자유주의 정부와 의회는 카디스로 피신하여 저항을 계속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리에고는 군대를 이끌고 저항했으나 결국 체포되었다.

11월, 페르난도 7세는 프랑스 군대의 보호 아래 마드리드로 돌아와 절대 왕권을 완전히 회복했다. 그는 즉시 1812년 헌법을 다시 폐기하고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잔혹한 보복과 탄압을 시작했다. 리에고는 반역죄로 마드리드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의 시신은 능지처참되었다. 그의 죽음은 스페인 자유주의의 비극적인 좌절을 상징했다.

스페인에서의 혁명 실패는 유럽 전역의 자유주의 및 민족주의 운동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것은 빈 체제의 보수 반동 세력이 여전히 강력하며, 자신들의 질서를 위협하는 어떤 변화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외세의 군사적 개입은 한 국가 내부의 개혁과 혁명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망명 중이던 에티엔 드샹은 이 소식을 접하며 깊은 절망감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 "프랑스가 한때 혁명의 이름으로 유럽을 침략하더니, 이제는 반혁명의 이름으로 다른 나라의 자유를 짓밟는구나! 이것이 빈 체제가 말하는 '질서'와 '평화'인가? 이것은 군주들의 탐욕과 민중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는 위선적인 동맹일 뿐이다! 스페인의 비극은 언젠가 유럽 전체의 비극으로 이어질 것이다."

스페인은 다시 길고 어두운 반동의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리에고와 자유주의자들이 뿌린 씨앗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의 꿈과 저항은 이후 스페인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을 이어가는 동력이 될 것이었다.

(약 18,000자) - 스페인 정치 상황 상세화, 리에고 봉기 과정, 자유주의 3년 개혁 내용, 베로나 회의 외교전, 프랑스군 침공 및 진압 과정, 리에고 최후 장면, 에티엔 성찰 등 보강 필요


제198장: 영국의 보수화, 피털루의 상처

(알랭 마르탱) 유럽 대륙이 혁명과 반동의 격랑에 휩싸여 있을 때, 해협 건너 영국은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점진적인 개혁과 의회 정치를 통해 프랑스와 같은 급격한 혁명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 당시 영국 지배층의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그 안정의 이면에는 산업 혁명이 낳은 극심한 사회 문제와 민중의 불만, 그리고 이를 억누르려는 국가의 냉혹한 폭력이 존재했다. 1819년 맨체스터 세인트 피터 광장에서 벌어진 '피털루 학살(Peterloo Massacre)'은 이러한 영국의 감춰진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평화적인 개혁 요구 집회에 대한 군대의 무자비한 발포는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에도 피털루 사건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그는 이를 "영국식 자유의 허울을 벗겨낸 부끄러운 사건"이라고 평했다. 나는 노년의 사회 개혁가 아서 핀리(가상 인물)와 노동자 토마스 애쉬워스의 시점을 통해, 이 피로 얼룩진 역사의 현장을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1819년 여름, 영국 맨체스터 / 노동자 거주 구역 / 세인트 피터 광장 / 아서 핀리의 진료소>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는 영국에게 영광을 안겨주었지만, 평화는 곧바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수십만 명의 군인들이 제대하면서 실업이 급증했고, 전쟁 특수가 사라지면서 공장 가동률은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1815년 제정된 '곡물법(Corn Laws)'은 지주들의 이익을 위해 곡물 수입을 제한하여 빵값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시켰고, 이는 노동자들과 도시 빈민들의 생계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사회적 불만은 고조되었고, 의회 개혁(부패 선거구 폐지, 산업 도시 대표 선출)과 선거권 확대(특히 노동자 계급)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헨리 헌트(Henry Hunt)와 같은 급진파 연설가들은 대규모 군중 집회를 통해 개혁을 요구하며 인기를 얻고 있었다.

1819년 8월 16일, 맨체스터의 세인트 피터 광장(St. Peter's Field)에는 의회 개혁을 요구하는 대규모 평화 집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주최 측은 최대 10만 명의 인파를 예상했고, 맨체스터뿐 아니라 주변 랭커셔 지역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아침 일찍부터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자유', '선거권', '개혁' 등의 구호가 적힌 현수막과 깃발을 들고 행진했다. 아이들과 여성들도 많이 참여하여 평화적인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려 했다. 토마스 애쉬워스도 아내 메리, 그리고 이제 제법 자란 딸 에밀리와 함께 이 집회에 참여했다. 그는 여전히 고된 공장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차티즘 운동의 전조가 된 이 개혁 요구 집회에서 작은 희망을 찾고 싶었다.

"아버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니 정말 대단해요! 우리의 목소리가 의회까지 들릴까요?" 어린 에밀리가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다, 에밀리. 하지만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겠지." 토마스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의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광장 주변에는 이미 지방 행정관들과 치안판사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모여 있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지역 의용 기병대(Yeomanry Cavalry)와 정규군(제15 후사르 연대)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행정관들은 이 대규모 집회가 폭동으로 번질 것을 극도로 우려했고, 집회를 강제로 해산시킬 명분을 찾고 있었다.

오후 1시 30분경, 마침내 연설가 헨리 헌트가 연단에 모습을 드러내자 군중들은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그가 연설을 시작하기도 전에, 행정관들은 헌트 체포를 명령했다. 체포조가 군중을 헤치고 연단으로 향하자 혼란이 발생했고, 행정관들은 즉시 기병대 투입을 명령했다. 술에 취해 있거나 흥분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진 의용 기병대가 먼저 칼을 빼 들고 성난 군중 속으로 돌진했다. 평화롭게 모여 있던 비무장 시민들은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

"기병대다! 도망쳐!"

"사람 살려!"

광장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기병들은 무차별적으로 칼을 휘둘렀고, 사람들은 서로 밟고 밟히며 도망치려 했다. 뒤이어 투입된 정규군 후사르 연대까지 가세하여 군중을 해산시켰다. 토마스는 비명을 지르는 아내와 딸을 필사적으로 감싸 안고 인파에 휩쓸려 광장을 빠져나오려 애썼다. 그의 눈앞에서 칼에 베이거나 말발굽에 짓밟혀 쓰러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지나갔다. 그는 간신히 가족들을 데리고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그의 온몸은 떨리고 있었고, 에밀리는 공포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불과 10여 분 만에 벌어진 이 참극으로, 최소 15명 이상이 사망하고 600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다. 희생자 중에는 여성과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워털루 전투의 영광에 빗대어 '피털루(Peterloo)' 학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맨체스터 시내에서 빈민들을 위한 작은 진료소를 운영하고 있던 노년의 의사 아서 핀리는 끔찍한 소식을 듣고 즉시 광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밀려드는 부상자들을 치료하며 참혹한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칼에 베인 상처, 골절, 심각한 타박상… 그는 분노와 슬픔 속에서 부상자들의 증언을 꼼꼼히 기록했다.

"이것은 학살이다! 비무장 시민들을 향한 국가의 야만적인 폭력이다! 정부는 이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한다!" 핀리는 밤늦게 자신의 서재로 돌아와 피 묻은 손으로 기록을 이어갔다. 그는 이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강력하게 주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와 보수 언론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들은 피털루 사건을 '불법 집회에 대한 정당한 진압'으로 규정하고, 오히려 민중의 불온한 움직임을 막기 위해 더욱 강력한 탄압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해 말, 영국 의회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대폭 제한하는 6개의 법령('Six Acts')을 통과시켰다. 영국의 보수 반동 체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개혁을 향한 길은 더욱 험난해졌다.

피털루 학살은 영국 노동 운동과 사회 개혁 운동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각성을 촉진하고 장기적인 투쟁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토마스 애쉬워스는 그날의 공포를 평생 잊지 못했고, 딸 에밀리의 마음속에도 국가 폭력과 사회 불의에 대한 강렬한 문제의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영국의 안정이라는 신화 이면에는 피털루의 눈물과 분노가 흐르고 있었다.

(약 19,000자) - 집회 전 분위기, 헨리 헌트 역할, 행정관/기병대 입장, 피털루 학살 장면 상세화, 아서 핀리 활동/기록, 토마스/에밀리 심리 변화, 식스 액츠 내용 등 보강 필요


제199장: 억압 속의 사상, 에티엔과 다니엘

(알랭 마르탱) 시대가 암울할수록 사상의 등불은 더욱 간절해지는 법이다. 1820년대 프랑스는 복고 왕정의 반동 정치 아래 숨 막히는 침묵이 강요되던 시기였다. 언론과 출판은 검열되었고,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은 위험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혁명의 기억과 계몽주의의 유산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낡은 서적 속에서, 은밀한 독서 모임에서, 그리고 세대를 잇는 지적인 교감 속에서 조용히 살아 숨 쉬며 다음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 드샹은 바로 이 시기,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시골에 은둔하며 과거를 성찰하고 기록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고독한 서재에, 미래의 증언자가 될 한 젊은이가 찾아온다. 바로 나의 또 다른 조상일지도 모르는, 청년 다니엘 르페브르였다. 이 두 세대의 만남은 단순한 개인적인 인연을 넘어, 억압 속에서도 자유와 진실을 향한 열망이 어떻게 계승되고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1820년대 중반, 프랑스 파리 근교 에티엔 드샹의 시골 저택 서재 / 파리 다니엘 르페브르의 거처 또는 카페>

파리의 소음과 정치적 격변을 피해 에티엔 드샹이 정착한 시골 저택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는 이제 육십 고개를 바라보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혁명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어낸 깊은 고뇌와 성찰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고, 젊은 시절의 불같은 열정은 차분한 관조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에서 보냈다. 창밖으로는 평화로운 프랑스 농촌 풍경이 펼쳐졌지만, 그의 책상 위에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에 대한 방대한 기록들과 저술 원고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마치 역사가가 된 듯,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목격했던 사건들의 의미를 되새기고, 혁명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 자유와 질서의 관계, 그리고 역사의 교훈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글을 써 내려갔다.

"혁명은 위대한 약속이었지만, 동시에 끔찍한 배신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적었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 박애를 외쳤지만, 결국 공포와 독재, 그리고 끝없는 전쟁을 겪어야 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이상이 너무 높았던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본성이 악해서였을까? 아니, 어쩌면 혁명 그 자체가 내부에 파괴의 씨앗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의 성찰은 깊고 때로는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기록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만이 자신이 겪었던 시대의 의미를 찾고 미래 세대에게 무언가를 남겨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오후, 하인이 젊은 손님이 찾아왔다고 알렸다. 파리에서 온 다니엘 르페브르라는 이름의 청년이었다. 에티엔은 잠시 망설였지만, 손님을 서재로 안내하라고 했다. 서재 문을 열고 들어선 청년은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였고, 다소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눈빛은 총명하고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에티엔의 오랜 친구이자 혁명 동지였던 (지금은 고인이 된) 한 변호사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를 통해 에티엔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고, 숨 막히는 복고 왕정 시대에 진정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사상을 배우고 싶어 용기를 내어 찾아왔다고 했다.

"선생님, 이렇게 외람되게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다니엘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버님께 선생님의 학식과 용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디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지금 프랑스는… 너무나 답답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에티엔은 젊은이의 진지한 눈빛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다니엘에게 자리를 권하고, 과거 혁명 시절의 이야기부터 조심스럽게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혁명의 열기와 이상,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목격했던 민중의 힘과 광기, 지도자들의 야심과 배신, 공포정치의 참혹함, 그리고 나폴레옹 시대의 영광과 오욕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영웅을 미화하거나 특정 이념을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니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자유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젊은이?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질서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혁명은 과연 진보를 위한 유일한 길일까?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다니엘은 에티엔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책이나 신문에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역사의 생생한 숨결과 복잡한 이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에티엔의 깊은 성찰과 비판적인 시각에 감탄하면서도, 여전히 젊은이다운 이상주의적인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선생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유와 공화국에 대한 꿈을 포기해야 합니까? 이 억압적인 시대를 그저 참고 견뎌야만 하는 겁니까?"

에티엔은 다니엘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말했다. "포기하라는 뜻이 아닐세. 오히려 그 반대야.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만이 우리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진정한 진보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일세. 꿈을 꾸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꿈을 현실 속에서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냉철하게 고민해야 하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로운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일세."

에티엔은 다니엘에게 자신이 아끼던 책 몇 권(몽테스키외, 루소, 칸트 등, 그리고 조심스럽게 혁명기 기록 일부)을 빌려주며, 계속해서 공부하고 사색하며 시대의 진실을 탐구하는 언론인이나 역사가가 되기를 격려했다.

그날 이후, 다니엘은 여러 차례 에티엔을 찾아와 가르침을 구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세대를 뛰어넘는 깊은 지적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다니엘은 파리로 돌아와 친구들과 함께 비밀 독서 모임을 만들고, 금지된 자유주의/공화주의 서적들을 몰래 읽고 토론하며 자신들의 생각을 키워나갔다. 그는 에티엔과의 만남을 통해 얻은 역사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언젠가 자신의 글을 통해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 진실을 알리는 역할을 하리라 다짐했다.

에티엔 역시 다니엘과의 만남을 통해 젊은 시절의 열정을 떠올리며 작은 위안과 희망을 얻었다. 비록 자신은 이제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물러났지만, 자유와 이성을 향한 열망은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억압의 시대 속에서도 사상의 등불은 결코 꺼지지 않고, 세대를 이어 조용히 전달되고 있었다. 이들의 만남은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 유산이 어떻게 살아남아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약 20,000자) - 에티엔의 은둔 생활/저술 내용 상세화, 다니엘의 배경/성격 구체화, 두 사람의 대화(혁명 평가, 시대 진단, 미래 전망 등) 심화, 비밀 독서 모임 모습 추가 등 필요


제200장: 그리스 독립 전쟁, 빈 체제의 첫 균열

(알랭 마르탱) 역사는 종종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변화의 물꼬를 튼다. 1821년, 메테르니히의 빈 체제가 유럽을 굳건히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던 시기, 발칸 반도의 작은 나라 그리스에서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오랜 지배에 맞선 독립 전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이 전쟁은 단순히 한 민족의 해방 투쟁을 넘어, 프랑스 혁명이 확산시킨 민족주의와 낭만주의적 이상, 그리고 유럽 열강들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국제적인 사건으로 발전했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Lord Byron)을 비롯한 수많은 유럽 젊은이들이 '필헬레네스(Philhellenes, 그리스를 사랑하는 사람들)'를 자처하며 의용군으로 참전했고, 처음에는 현상 유지를 원했던 열강들마저 결국 그리스 독립을 지지하며 개입하게 되었다. 그리스의 독립(1830년 승인)은 빈 체제의 '정통성'과 '불간섭' 원칙에 가해진 첫 번째 심각한 균열이었으며, 다른 억압받는 민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나는 당시 파리에서 언론인으로서 막 활동을 시작했을 다니엘 르페브르의 시점을 통해, 이 낭만과 비극, 그리고 국제 정치가 뒤얽힌 그리스 독립 전쟁의 과정을 그려보고자 한다.

<1821년 이후, 그리스 모레아(펠로폰네소스) 반도 / 히오스 섬 / 영국 런던 / 프랑스 파리 / 나바리노 해상>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수백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그리스 민족의 독립 의지는 19세기 초 프랑스 혁명의 영향과 낭만주의 사조의 확산 속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필리키 에테리아(Filiki Eteria, 우호 협회)'와 같은 비밀 결사 조직들이 결성되어 독립을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마침내 1821년 3월, 러시아 군 장교 출신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Alexandros Ypsilantis)가 몰다비아에서 봉기를 일으키며 독립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비록 그의 봉기는 실패했지만). 곧이어 그리스 본토, 특히 펠로폰네소스 반도(모레아)에서 클레프테스(Klephtes, 산악 도적/독립 투사) 출신의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Theodoros Kolokotronis) 등이 이끄는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 오스만 군대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파리의 젊은 언론인 다니엘 르페브르는 그리스에서 전해져 오는 소식들에 열광했다. 그는 고대 그리스 문명에 대한 깊은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스인들의 독립 투쟁을 프랑스 혁명의 이상, 즉 자유와 민족 자결권을 위한 성스러운 싸움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일하는 신문에 그리스의 영웅적인 투쟁을 알리고 유럽인들의 지지를 호소하는 열정적인 기사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보라! 고대 영웅들의 후예들이 압제의 사슬을 끊고 자유를 위해 일어섰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땅, 민주주의의 발상지에서 다시 한번 자유의 횃불이 타오르고 있다! 문명 세계의 모든 자유 시민들이여, 그리스 형제들의 성스러운 투쟁에 연대하자!"

다니엘의 기사처럼, 유럽 전역에서는 '필헬레니즘(Philhellenism)' 열풍이 불었다. 낭만주의 시대의 지식인, 예술가, 학생들은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한 향수와 오스만 제국(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적 적개심, 그리고 자유를 위한 투쟁에 대한 낭만적인 동경심으로 그리스 독립 운동을 열렬히 지지했다. 영국의 위대한 시인 바이런 경은 직접 의용군을 조직하여 그리스로 건너가 싸우다 메솔롱기(Missolonghi)에서 병사했고(1824), 그의 죽음은 필헬레니즘 운동을 더욱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화가 들라크루아는 오스만 군대에 의한 히오스 섬 학살(1822)의 참상을 그린 <히오스 섬의 학살>을 발표하여 유럽인들의 공분을 샀다. 수많은 유럽 젊은이들이 직접 그리스로 건너가 의용군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유럽 열강 정부들의 초기 반응은 냉담했다. 특히 빈 체제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메테르니히는 그리스 독립 운동을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혁명적' 움직임으로 간주하고 오스만 제국의 정통성을 지지하며 개입에 반대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초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약화가 가져올 동방 문제의 복잡성을 우려하여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변했다. 오스만 제국의 잔혹한 탄압(특히 이집트 군대의 개입 이후)에 대한 유럽 내 여론이 악화되었고, 각국의 전략적 이해관계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정교회 보호와 남하 정책의 일환으로 그리스 독립 지원에 점차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영국은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는 국내 여론 및 중동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개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마침내 1827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은 그리스 문제 해결을 위해 공동으로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10월, 3국 연합 함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남쪽 나바리노(Navarino) 만에서 오스만-이집트 연합 함대와 충돌했다. 에드워드 코드링턴 제독이 이끄는 연합 함대는 이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오스만 제국의 해상력을 괴멸시켰다. 나바리노 해전은 그리스 독립 전쟁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1828-29)에서 승리하여 아드리아노플 조약(1829)을 통해 그리스의 자치를 인정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1830년 런던 의정서(London Protocol)를 통해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은 그리스를 완전한 독립 왕국으로 승인했다.

그리스의 독립은 빈 체제의 근본 원칙이었던 정통성과 불간섭주의가 처음으로 깨진 중요한 사건이었다. 비록 독립 이후 그리스는 열강들의 영향력 아래 놓이고 내부적인 정치 혼란을 겪게 되지만,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열망이 결국 보수적인 국제 질서에 균열을 낼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성공 사례였다.

다니엘 르페브르는 그리스 독립 소식에 감격하며, 이를 자유와 민족 자결을 향한 인류의 위대한 진보라고 찬양하는 기사를 썼다. 그는 이 사건이 이탈리아, 독일, 폴란드 등 다른 억압받는 민족들에게도 희망의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스는 다시 한번 유럽 문명의 등불이 되었다! 그들의 승리는 빈의 군주들이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자유와 민족의 정신은 결코 소멸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이제 곧 유럽 전역에서 새로운 해방의 물결이 일어날 것이다!"

노년의 에티엔 드샹은 다니엘의 열정에 동감하면서도, 좀 더 신중한 시각을 유지했다. "그리스의 독립은 분명 축하할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잊어서는 안 되네. 진정한 독립은 외세의 간섭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법이지. 그리고 독립 이후 그리스가 마주하게 될 과제들(왕정 수립, 내부 통합 등) 또한 만만치 않을 걸세." 그는 역사가 단순히 이상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힘과 이해관계의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전개됨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그리스 독립 전쟁은 19세기 유럽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것은 빈 체제의 균열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다가올 1830년 혁명의 전주곡이었으며, 민족주의가 시대를 관통하는 거스를 수 없는 힘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약 20,000자) - 필리키 에테리아 활동, 그리스 내부 지도자 갈등, 히오스 학살 상세화, 바이런 참전/죽음, 나바리노 해전 묘사, 다니엘/에티엔 반응 구체화 등 추가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