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부: 워털루와 빈 체제의 완성 (1814-1815)
(알랭 마르탱의 목소리)
라이프치히에서의 패배는 결정적이었다. '민족들의 전투' 이후, 나폴레옹 제국은 거대한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퇴각로는 끊어졌고, 동맹국들은 등을 돌렸으며, 마침내 연합군의 군홧발이 프랑스 본토를 짓밟았다. 황제는 마지막까지 저항했지만, 파리는 함락되었고, 그는 충성했던 원수들의 압력 앞에 무릎 꿇고 퇴위를 강요당했다. 1814년 봄, 한때 유럽을 호령했던 영웅은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의 군주라는 초라한 이름표를 단 채 유배길에 올랐다. 유럽은 마침내 25년간의 혁명과 전쟁의 광풍에서 벗어나 평화를 되찾는 듯 보였다. 빈에서는 승전국 대표들이 모여 혁명 이전의 질서를 복원하고 새로운 유럽 지도를 그리기 위한 화려한 외교 무도회를 시작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렇게 쉽게 멈추지 않았다. 엘바 섬의 유배객은 아직 마지막 불꽃을 태울 준비를 하고 있었고, 빈에서의 춤은 나폴레옹의 그림자 아래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이 시기, 제국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짧은 평화의 불안정성, 그리고 역사의 무대 뒤편에서 작동하는 강대국들의 냉혹한 이해관계와 민족들의 억눌린 열망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19부는 제국의 마지막 숨결과 새로운 시대의 질서가 탄생하는 격동의 순간들을 따라간다.
제181장: 엘스터 강의 비극, 끊어진 퇴각로
<1813년 10월 19일, 독일 라이프치히 시내 / 엘스터 강 다리 앞 / 강변>
(알랭 마르탱) 패배는 종종 죽음보다 더 잔혹한 혼돈을 동반한다. 라이프치히 '민족들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프랑스군의 퇴각은 질서정연한 후퇴가 아니었다. 그것은 압도적인 적에게 쫓기는 패잔병들의 필사적인 도주였고, 그 도주로는 라이프치히 시내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향하는 엘스터(Elster) 강 위의 단 하나의 다리뿐이었다. 수만 명의 병사와 말, 포차들이 좁은 다리로 몰려들면서 아비규환이 벌어졌고, 설상가상으로 공병의 치명적인 실수는 이 퇴각로마저 끊어버리며 수많은 생명을 강물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프랑스 척탄병 피에르 뒤퐁의 시점을 통해, 이 끔찍했던 엘스터 강의 비극, 패배의 대가를 고스란히 치러야 했던 병사들의 절망을 그려보고자 한다.
라이프치히 시내는 아수라장이었다. 포성이 멎자 승리한 연합군의 함성이 멀리서 들려왔고, 패배한 프랑스군은 공포에 질려 서쪽 엘스터 강 다리를 향해 몰려들었다. 피에르 뒤퐁은 부서진 포병 부대 동료 몇몇과 함께 인파에 휩쓸려 다리 쪽으로 떠밀려가고 있었다. 그의 어깨는 탈골된 듯 욱신거렸고, 얼굴은 화약 연기와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오직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비켜! 길을 비켜라!"
"젠장, 밀지 마!"
"다리가 무너지겠다!"
좁은 시가지 골목과 다리로 향하는 길은 퇴각하는 병사들, 부상병을 실은 수레, 버려진 대포와 탄약 상자, 그리고 겁에 질린 피난민들로 완전히 마비 상태였다. 사람들은 서로 밀치고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려 했고, 여기저기서 비명과 욕설이 터져 나왔다. 하늘에서는 아직도 연합군의 포탄이 간헐적으로 날아와 떨어지며 공포를 더했다.
엘스터 강 다리 앞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단 하나뿐인 좁은 돌다리 위로 수만 명의 인파가 한꺼번에 몰려들자, 다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웠다. 강물은 이미 사람과 말, 부서진 마차 조각들로 뒤덮여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다리 입구에서는 후위 부대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 줄로 서시오! 질서를 지키시오!" 장교가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공포에 질린 군중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피에르는 다리 입구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광경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저 아비규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과연 살아남는 길일까? 그러나 뒤에서는 이미 연합군 선두 부대의 함성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인파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조각배처럼 사람들에게 떠밀려 간신히 다리 위로 올라섰다. 발밑에서는 쓰러진 부상병들의 신음 소리가 들렸고, 옆에서는 강물로 떨어지는 병사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다리 난간은 부서져 있었고, 강물 위에는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피에르가 다리 중간쯤 이르렀을 때,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다리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다리를 지키던 프랑스 공병 부대 하사가 연합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너무 성급하게 다리 폭파 명령을 내렸거나, 혹은 도화선에 잘못 불을 붙인 것이었다. 다리가 끊어지자 아직 강 동쪽에 남아 있던 수만 명의 프랑스군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다리가… 다리가 끊어졌다!"
"우린 이제 끝장이야!"
절망적인 외침이 강 양쪽에서 터져 나왔다. 강 동쪽에 갇힌 병사들은 연합군의 포로가 되거나 강물에 뛰어들어 필사적으로 헤엄치려 했지만, 대부분 거센 물살과 추위 속에서 익사하거나 연합군의 총탄에 맞아 죽어갔다. 피에르는 간신히 강 서쪽 기슭에 도착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끊어진 다리와 아비규환 속에서 죽어가는 동료들의 모습은 그의 뇌리에 끔찍한 낙인처럼 새겨졌다.
다리 폭파 실수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격노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후위를 맡았던 폴란드 출신 포니아토프스키(Poniatowski) 원수는 마지막까지 부하들과 함께 저항하다 퇴로가 막히자 말을 탄 채 엘스터 강으로 뛰어들었으나 결국 익사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그의 죽음은 나폴레옹에게 충성했던 동맹군의 운명을 상징하는 듯했다.
엘스터 강의 비극으로 프랑스군은 또다시 수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이것은 단순한 군사적 손실을 넘어, 병사들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리고 나폴레옹 군대의 와해를 가속화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피에르 뒤퐁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는, 동료들을 버리고 왔다는 깊은 죄책감과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극도의 환멸감 속에서, 이제 조국 프랑스를 향한 기나긴 후퇴 길에 다시 올라야 했다. 그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그의 영혼은 이미 라이프치히의 피와 엘스터 강의 절규 속에 잠겨 있었다.
(약 16,000자) - 퇴각로 혼란 묘사, 후위 부대 전투, 다리 폭파 순간 긴장감, 피에르 심리 변화 심화, 포니아토프스키 최후 등 구체화 필요
제182장: 라인 강을 넘어, 프랑스 본토 침공
(알랭 마르탱) 국경은 단순한 지리적 선이 아니라, 국가의 존엄성과 국민의 자부심이 걸린 상징적인 공간이다. 1813년 겨울, 라이프치히에서의 참패 이후 나폴레옹 제국의 국경선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한때 유럽 대륙을 호령했던 프랑스 군대는 이제 자국의 영토를 지키기에도 급급한 신세가 되었다.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웨덴, 영국 등 유럽 열강들이 결성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의 거대한 군대가 마침내 라인 강을 넘어 프랑스 본토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1792년 혁명 전쟁 초기 이후 처음 겪는 국가적 위기이자 굴욕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에는 이 시기 프랑스 사회의 불안과 동요, 그리고 나폴레옹의 마지막 투혼에 대한 복잡한 시선이 담겨 있다. 나는 황제의 고독한 분투와 함께, 침략의 공포 앞에 선 프랑스 민중들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1813년 겨울 - 1814년 초, 프랑스 동부 국경 지역 / 파리 튈르리 궁 / 에티엔 드샹의 서재>
라인 강은 얼어붙어 있었다. 강 건너편 독일 땅에는 프로이센의 블뤼허(Blücher) 원수가 이끄는 군대와 오스트리아의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 공작이 지휘하는 군대가 집결해 호시탐탐 프랑스 국경을 넘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패배 이후 간신히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그의 손에 남은 병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베테랑 병사들은 대부분 러시아와 독일 땅에 뼈를 묻었고, 이제 그의 군대는 경험 없는 어린 신병들과 부상에서 겨우 회복한 노병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폐하, 연합군의 병력은 최소 50만 명에 달합니다. 우리 군대는 10만 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정면 대결은 피하셔야 합니다." 참모총장 베르티에가 침통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나폴레옹은 지도 위에 펼쳐진 프랑스 동부 지형을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분노, 그리고 초조함이 뒤섞여 있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저들이 파리까지 오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 한다! 프랑스 국민들의 애국심을 다시 한번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는 파리로 돌아와 황후 마리 루이즈를 섭정으로 임명하고, 다시 한번 군대 소집과 재정 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들은 이미 오랜 전쟁에 지쳐 있었다. 나폴레옹의 영광을 위해 아들과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는 것에 대한 염증과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징병 기피 현상은 더욱 심해졌고, 국채 발행도 예전처럼 순조롭지 않았다.
1814년 새해가 밝자마자, 연합군은 마침내 라인 강을 넘어 프랑스 본토 침공을 개시했다. 여러 갈래로 나뉘어 파리를 향해 진격해 오는 연합군의 기세는 거침없었다. 프랑스 동부 국경 지역 마을들은 다시 한번 전쟁의 참화에 휩싸였다. 피난민 행렬이 길게 이어졌고, 주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에티엔 드샹은 시골 저택에서 프랑스가 침략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며 착잡한 심경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나폴레옹의 독재와 제국주의적 야욕을 비판해왔지만, 조국이 외세에 짓밟히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프랑스 국민으로서의 애국심과 함께, 이 모든 비극의 근본 원인이 된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에 대한 깊은 성찰이 교차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혁명의 이름으로 시작된 전쟁이 이제 혁명의 땅을 불태우고 있다. 이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황제인가, 프랑스인가, 아니면 그저 권력욕에 눈먼 자들의 광기인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나폴레옹은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그는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직접 전선에 나서, 특유의 번뜩이는 군사적 천재성을 발휘하며 연합군을 상대로 놀라운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특히 1814년 2월, 그는 불과 엿새 동안 샹포베르(Champaubert), 몽미라일(Montmirail), 샤토티에리(Château-Thierry), 보샹(Vauchamps) 등에서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을 연파하며 연합군을 잠시 혼란에 빠뜨렸다('6일 전역(Six Days' Campaign)'). 이는 그의 군사적 역량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마지막 투혼이었지만,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연합군은 압도적인 병력 우위를 바탕으로 손실을 만회하며 꾸준히 파리를 향해 압박해왔다.
파리에서는 마리 루이즈 황후가 어린 아들 로마 왕과 함께 불안 속에서 섭정을 맡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런 실권도, 정치적 영향력도 없었다. 정부 각료들은 우왕좌왕했고, 탈레랑과 같은 노회한 정치인들은 이미 나폴레옹 이후의 시대를 준비하며 연합군 측과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었다.
프랑스 국민들의 여론도 점차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전쟁 피로감과 함께 평화에 대한 갈망이 커져갔고, 일부에서는 차라리 부르봉 왕정 복고를 통해 안정을 되찾는 것이 낫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혁명으로 시작된 민족적 에너지는 이제 거의 소진되어 가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마지막까지 항전 의지를 불태우려 했지만, 그의 등 뒤에서는 이미 제국의 붕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연합군은 파리를 향한 마지막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고, 프랑스 내부에서는 배신과 타협의 움직임이 노골화되고 있었다. 라인 강을 넘은 연합군의 진격은 단순한 군사적 침공을 넘어, 나폴레옹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유럽 질서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의 발걸음이었다.
(약 17,000자) - 연합군 침공 경로/전략, 6일 전역 상세 묘사, 프랑스 민심 변화, 파리 정치 상황, 에티엔 성찰 등 보강 필요
제183장: 파리 함락, 연합군의 개선
(알랭 마르탱) 수도의 함락은 국가의 패배를 상징하는 가장 극적인 순간이다. 1814년 3월, 나폴레옹이 동부 전선에서 연합군의 후방을 교란하려 애쓰는 사이, 슈바르첸베르크와 블뤼허가 이끄는 연합군 주력 부대는 마침내 프랑스의 심장부, 파리 성벽 앞에 당도했다. 한때 유럽 전체를 떨게 했던 제국의 수도는 이제 포위된 채 운명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파리 시민들의 반응은 복잡했다. 애국적인 저항 의지와 함께, 오랜 전쟁에 대한 피로감과 함락 이후 벌어질 약탈과 혼란에 대한 공포가 교차했다. 결국 파리 방어를 책임진 마르몽 원수의 항복 결정과 함께, 러시아 황제와 프로이센 국왕이 이끄는 연합군은 개선 장군처럼 파리 시내로 입성했다. 나는 당시 파리에 남아 있었을지도 모르는 소피 라비뉴와 마담 뒤부아의 시선, 그리고 파리 함락 소식을 접한 에티엔 드샹의 착잡한 심정을 통해, 이 역사적인 순간의 다층적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1814년 3월 말, 파리 외곽 / 파리 시내 / 베르사유(탈레랑 저택) / 에티엔 드샹의 시골 저택>
파리 시민들은 불안 속에서 숨죽인 채 연합군의 접근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문들은 여전히 황제의 승리를 선전했지만, 거리에는 패전과 수도 포위 임박에 대한 흉흉한 소문들이 떠돌았다. 일부 애국적인 시민들과 국민 방위대는 바리케이드를 쌓고 저항을 준비했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전쟁의 참화가 자신들의 집 문 앞까지 닥쳐왔다는 사실에 공포와 무력감을 느꼈다.
소피 라비뉴는 이제 중년의 여인이 되어 파리 한쪽 구석에서 작은 바느질 가게를 운영하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혁명 초기 베르사유 행진에 참여했던 기억, 공포정치 시절의 공포, 그리고 나폴레옹 시대의 짧은 안정과 계속되는 전쟁 징병의 불안감을 모두 겪어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치 구호나 영웅 신화에 열광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루하루의 생존과 평화였다.
"또 전쟁이라니… 이제는 파리까지 쳐들어온다니…" 그녀는 옆 가게의 마담 뒤부아(여전히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면)에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황제 폐하는 대체 어디 계신 건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마담 뒤부아는 특유의 냉소적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쎄, 황제 나으리께서는 지금쯤 어디선가 또 다른 전쟁놀이에 빠져 계시겠지. 결국 피를 흘리는 건 우리 민중들뿐이야. 차라리 연합군이 들어와서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주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그녀의 말에는 깊은 피로감과 체념이 묻어 있었다.
한편, 파리 방어 사령관으로 임명된 마르몽(Marmont) 원수는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했다. 그에게 남은 병력은 소수의 정규군과 훈련 부족의 국민 방위대뿐이었고, 연합군의 병력은 압도적이었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바쳤지만, 파리를 파괴적인 시가전의 희생양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에 고뇌했다.
바로 이때, 노회한 정치인 탈레랑(Talleyrand)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나폴레옹의 몰락을 예감하고, 연합국 측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전후 프랑스의 안정을 위한 협상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는 마르몽에게 접근하여, 파리를 무력으로 방어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오히려 더 큰 파괴를 초래할 뿐이라고 설득했다.
"원수, 파리는 프랑스의 심장이자 문명의 보석이오. 무모한 저항은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시민들을 불행에 빠뜨릴 뿐이오. 현명한 결단을 내리시오. 역사는 당신의 용기를 기억할 것이오." 탈레랑의 말은 달콤했지만 냉혹한 현실 인식을 담고 있었다.
결국 마르몽은 1814년 3월 30일, 연합군과 항복 협상을 시작했고, 다음 날 새벽 프랑스 군대는 파리에서 철수했다. 3월 31일 정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이끄는 연합군 부대가 개선문도 없는(당시 미완성) 샹젤리제 거리를 통해 파리 시내로 입성했다.
파리 시민들의 반응은 복잡했다. 일부 왕당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백색기를 흔들었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창문 뒤에 숨거나 거리 양옆에 조용히 늘어서서 점령군의 행렬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표정에는 전쟁 종식에 대한 안도감, 패배에 대한 굴욕감, 그리고 낯선 외국 군대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소피는 가게 문틈으로 코사크 기병들의 이국적인 모습과 프로이센 군인들의 딱딱한 표정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탈레랑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원로원을 설득하여 나폴레옹의 폐위를 선언하게 하고, 임시 정부를 구성하여 연합국과의 협상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의 목표는 프랑스의 혼란을 최소화하고, 가능한 한 온건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으며, 부르봉 왕정 복고를 통해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시골 저택에서 파리 함락 소식을 전해 들은 에티엔 드샹은 깊은 슬픔과 착잡함에 잠겼다. 그는 나폴레옹의 제국이 무너진 것에 대해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지만, 조국의 수도가 외국 군대에 점령당했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그는 혁명의 여정이 결국 외세의 개입과 왕정 복고라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며 역사의 아이러니를 통감했다. "자유를 외쳤던 파리가 이제 점령군의 발아래 놓였구나. 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폐허와 굴욕, 그리고 또 다른 시작점에 불과한 것인가?" 그의 기록에는 깊은 회한과 함께, 다가올 복고 왕정 시대에 대한 불안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파리의 함락은 나폴레옹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동시에, 프랑스 혁명의 유산을 둘러싼 또 다른 갈등과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약 18,000자) - 파리 시민 반응 다양화, 소피/마담 뒤부아 시점 강화, 마르몽 고뇌 상세화, 탈레랑 역할 부각, 에티엔 성찰 구체화 등 필요
제184장: 퐁텐블로의 퇴위, 엘바 섬 유배
(알랭 마르탱) 모든 권력에는 끝이 있다. 아무리 강력한 영웅이라도 역사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는 언젠가 무릎을 꿇게 마련이다. 1814년 4월, 파리 함락 소식은 퐁텐블로(Fontainebleau) 궁에 머물고 있던 나폴레옹에게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파리 탈환을 꿈꿨지만,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충성을 바쳤던 원수들의 차가운 배신과 연합국의 냉혹한 요구뿐이었다. 한때 유럽 전체를 뒤흔들었던 황제는 이제 자신의 퇴위를 받아들이고,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로 떠나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이 시기 나폴레옹의 인간적인 고뇌와 함께,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와 정치적 계산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몰락하는 영웅의 마지막 모습과 그를 둘러싼 배신과 충성의 드라마를 그려보고자 한다.
<1814년 4월, 프랑스 퐁텐블로 궁 / 황제의 집무실 / 궁정 안뜰>
파리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퐁텐블로 궁에 전해졌을 때, 나폴레옹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격노했다. "마르몽이 항복했다고? 감히 내 허락도 없이! 그는 배신자다! 당장 파리로 진격하여 저놈들을 쓸어버리겠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건재하며, 군대를 이끌고 파리를 탈환하여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남은 병력을 모아 파리 진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의 원수들은 더 이상 황제의 명령에 따를 생각이 없었다. 네(Ney), 맥도널드(Macdonald), 르페브르(Lefebvre), 우디노(Oudinot) 등 나폴레옹과 함께 수많은 전쟁터를 누볐던 노련한 원수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한 희생만 초래할 뿐이며,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서는 황제가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함께 황제의 집무실로 찾아가 침통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퇴위를 권고했다.
"폐하, 더 이상 희망은 없습니다." 네 원수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군대는 지쳤고, 파리는 적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서는 폐하께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부디… 퇴위해주십시오."
나폴레옹은 충격과 분노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네 원수! 감히 내 앞에서 퇴위를 말하는가! 그대들은 나와 함께 싸워 영광을 얻지 않았는가! 아직 싸울 수 있다! 나와 함께 파리로 가자!"
"불가능합니다, 폐하." 맥도널드 원수가 말을 이었다. "병사들은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습니다. 파리로 진격하라는 명령은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계속 고집하신다면, 프랑스는 내전 상태에 빠질 것입니다."
원수들의 단호한 태도 앞에서 나폴레옹은 깊은 절망감과 함께 배신감을 느꼈다. 한때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던 부하들이 이제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몇 시간 동안 방 안을 서성이며 고뇌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분노, 굴욕감, 그리고 어쩌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체념이 교차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외교 협상을 통해 아들 로마 왕에게 제위를 양위하는 조건으로 퇴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콜랭쿠르(Caulaincourt) 공작을 연합국 측과의 협상 대표로 파견했다. 그러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를 제외한 다른 연합국 군주들은 보나파르트 왕조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탈레랑 역시 부르봉 왕정 복고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결국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던 나폴레옹의 마지막 희망마저 좌절되었다.
연합국은 나폴레옹에게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Elba)의 군주 지위를 보장하고 막대한 연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퇴위를 요구했다(퐁텐블로 조약, 1814.4.11).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은 나폴레옹은 4월 13일, 마침내 퇴위 문서에 최종 서명했다. 한 시대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아내 마리 루이즈와 어린 아들 로마 왕에게 함께 엘바로 가자고 요청했지만, 오스트리아 황실의 반대와 마리 루이즈 자신의 의지로 인해 거절당했다. 그는 이제 가족과도 헤어져 홀로 유배길에 올라야 했다.
4월 20일, 나폴레옹은 엘바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퐁텐블로 궁정 안뜰에 도열한 그의 충직한 근위대(Vieille Garde, Old Guard) 병사들 앞에 섰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감회가 서려 있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작별 연설을 시작했다.
"나의 오랜 동지들, 나의 용맹한 근위대 병사들이여! 지난 20년간 나는 그대들과 함께 영광의 길을 걸어왔소. 그대들의 용기와 충성심에 깊이 감사하며,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이제 나는 떠나지만, 프랑스의 명예와 영광은 영원할 것이오. 부디 행복하시오! 안녕히!"
연설을 마친 그는 근위대의 군기에 입을 맞추었고,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생 눈물을 보이지 않기로 유명했던 황제의 눈물 앞에, 산전수전 다 겪은 노병들 역시 흐느낌을 참지 못했다.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비장하고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나폴레옹은 연합국 대표들의 호위 아래 엘바 섬을 향해 출발했다. 그가 지나가는 길에서 일부 프랑스 민중들은 여전히 "황제 폐하 만세!"를 외쳤지만, 또 다른 일부는 "독재자 타도!"를 외치거나 돌을 던지기도 했다. 그의 시대는 끝났지만, 그가 남긴 유산과 신화는 여전히 프랑스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었다. 엘바 섬에서의 유배 생활은 나폴레옹에게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숨 고르기의 시간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유럽은 마침내 악몽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를 모색할 기회를 얻은 것처럼 보였다.
(약 19,000자) - 나폴레옹 심리 묘사(분노, 좌절, 체념), 원수들과의 대립 장면, 콜랭쿠르 협상 과정, 근위대 작별 장면 감정선 등 보강 필요
제185장: 빈에서의 춤, 유럽 지도 다시 그리기
(알랭 마르탱) 1950년 파리. 나는 얼마 전 파리에서 열렸던 전후 유럽 부흥을 위한 국제 회의를 떠올린다. 폐허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는 열망과 함께, 강대국들의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가 느껴졌었다. 1814년 가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렸던 회의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폴레옹이라는 거대한 폭풍이 지나간 뒤, 유럽의 군주들과 외교관들은 빈에 모여 지난 25년간의 혁명과 전쟁으로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유럽의 지도를 새로 그리고, 다시는 프랑스 혁명과 같은 '재앙'이 반복되지 않도록 보수적인 질서를 재건하려 했다. 그들은 화려한 무도회와 연회를 끊임없이 열며 사교 활동에 열중했지만, 그 이면에서는 각국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치열한 외교적 암투와 흥정이 벌어지고 있었다. 벨기에의 외교관이었던 리뉴 공(Prince de Ligne)이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Le congrès danse beaucoup, mais il ne marche pas)"라고 풍자했듯이, 빈 회의는 화려함과 정치적 계산, 그리고 복잡한 이해관계가 뒤섞인 근대 외교사의 중요한 한 장면이었다. 나는 오스트리아의 노련한 외교관 메테르니히(Metternich)와 패전국 프랑스를 대표하여 기적적인 외교력을 발휘한 탈레랑의 시점을 교차하며, 이 '춤추는 회의'의 막후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1814년 9월 이후, 오스트리아 빈 / 호프부르크 궁 / 쇤브룬 궁 / 각국 대사관 / 무도회장>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빈은 유럽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화려한 외교 무대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초청으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를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등 크고 작은 유럽 국가들의 군주, 수상, 외교관, 그리고 수많은 수행원들이 빈으로 몰려들었다. 도시는 전례 없는 활기와 사치스러운 분위기로 가득 찼다. 낮에는 공식적인 회의와 소위원회 활동이 이어졌지만, 밤이 되면 호프부르크 궁과 쇤브룬 궁, 그리고 각국 대사관에서는 화려한 무도회, 오페라 공연, 연회, 사냥 등 사교 행사가 끊이지 않았다. 이는 전쟁의 상처를 잊고 평화의 도래를 축하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동시에 각국 대표들이 비공식적인 만남과 대화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의 의중을 떠보며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중요한 장이기도 했다.
이 거대한 외교 무대의 실질적인 연출가는 오스트리아의 외무장관이자 수상이 될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였다. 그는 귀족 출신의 노련하고 보수적인 외교관으로, 프랑스 혁명이 초래한 혼란과 폭력에 깊은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명확했다. 혁명 이전의 '정통(Legitimate)' 군주들을 복위시키고, 유럽 각국의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을 회복하여 프랑스와 같은 특정 강대국의 패권을 막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와 같은 '위험한' 사상의 확산을 억제함으로써 유럽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이익(특히 독일 연방과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 유지)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면서도, 유럽 전체의 안정을 위한 보수적인 국제 질서 구축을 주도해 나갔다. 그는 뛰어난 사교술과 치밀한 외교 전략으로 회의를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가려 했다.
"우리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메테르니히는 동료 외교관들과의 비밀 회담에서 강조했다. "혁명의 광풍은 유럽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강력한 군주들의 연대와 국가 간의 힘의 균형을 통해 안정을 되찾아야 합니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이름의 파괴적인 이념들은 철저히 억눌러야 합니다. 이것만이 유럽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했다.
한편, 패전국 프랑스를 대표하여 빈 회의에 참석한 탈레랑(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의 등장은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과 경계심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그는 혁명 초기부터 나폴레옹 시대, 그리고 이제 복고 왕정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신하며 살아남은 '배신의 달인'이었지만, 동시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뛰어난 외교적 수완가였다. 그는 프랑스가 더 이상 혁명적인 위협 국가가 아니라, 정통 군주(루이 18세)가 복위한 유럽 질서의 일원임을 강조하며, 프랑스의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고 국제 사회에서의 고립을 탈피하려 노력했다. 그는 승전 4대 강국(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사이의 이해관계 대립(특히 폴란드-작센 문제)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프랑스의 발언권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는 더 이상 정복을 원하지 않습니다. 프랑스는 오직 유럽의 안정과 정통성의 원칙이 존중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탈레랑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빈틈없는 논리로 다른 대표들을 설득했다. 그의 노련한 외교술 덕분에 프랑스는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빈 회의의 주요 행위자 중 하나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회의는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폴란드 왕국의 부활(자신이 통치하는)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프로이센은 그 대가로 작센 왕국 병합을 요구했다. 이는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한때 연합국 간의 전쟁 위기까지 고조되기도 했다. 화려한 무도회 뒤편에서는 각국의 영토와 이권을 둘러싼 치열한 밀고 당기기가 계속되었다.
에티엔 드샹은 빈에서 벌어지는 이 거대한 외교 게임을 멀리서 지켜보며, 혁명의 이상이 어떻게 현실 정치의 논리 앞에서 무력해지는지를 다시 한번 통감했다. "빈에서는 왈츠 소리가 요란하지만, 그 선율 뒤에는 민족들의 신음 소리가 숨겨져 있다. 그들은 혁명을 잠재우고 과거의 질서를 되살리려 하지만, 한번 터져 나온 자유와 민족의 열망을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억누를 수 있을까? 빈의 춤은 어쩌면 또 다른 혁명을 향한 전주곡일지도 모른다."
빈 회의는 결국 정통성 회복과 세력 균형이라는 보수적인 원칙 아래 유럽의 지도를 새로 그리는 데 성공했지만, 동시에 민족 자결과 자유주의라는 시대의 요구를 외면함으로써 미래의 갈등 요인을 남겨두었다. '춤추는 회의'는 나폴레옹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화려한 피날레였지만, 동시에 19세기 유럽을 뒤흔들 새로운 갈등의 서막을 알리는 무대이기도 했다.
(약 20,000자) - 빈 회의 분위기 상세 묘사(무도회, 연회, 사교계), 메테르니히/탈레랑 등 주요 인물 심리/전략, 폴란드-작센 문제 등 구체적 외교 갈등, 에티엔의 분석 등 추가 필요
제186장: 정통성과 세력 균형, 새로운 질서 구축
<1814년 가을 - 1815년 초, 오스트리아 빈 / 호프부르크 궁, 외무성 회의실 / 메테르니히의 집무실>
(알랭 마르탱) 1950년 파리. 전후 질서를 논하는 국제 회의들을 지켜보며 나는 종종 1814년 빈 회의를 떠올린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대국들은 평화와 안정을 이야기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냉혹한 계산이 깔려 있다. 빈 회의를 주도했던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두 가지 원칙, 즉 '정통성(Legitimacy)'과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을 통해 유럽의 시계를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되돌리려 했다. 그의 목표는 혁명의 '전염병'을 막고, 유럽을 군주들의 안정적인 협력 체제 아래 두는 것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메테르니히를 "낡은 질서의 유능한 관리인이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자"라고 평가했다. 빈의 화려한 무도회 뒤편, 밀실에서 이루어졌을 그들의 논의와 결정 과정을 상상하며, 나는 메테르니히의 시선으로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는 현장을 재구성해본다.
빈의 호프부르크 궁은 유럽 각국에서 온 왕족, 귀족, 외교관들로 북적였다. 밤마다 화려한 왈츠 선율이 울려 퍼지고 샴페인 잔이 부딪쳤지만, 메테르니히에게는 여유를 즐길 틈이 없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이익을 지키고, 동시에 유럽 전체를 뒤덮은 혁명의 불길을 잠재워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영국 대표 캐슬레이(Castlereagh) 경, 프로이센 대표 하르덴베르크(Hardenberg) 후작, 그리고 패전국 프랑스를 대표하여 놀라운 외교력을 발휘하고 있는 탈레랑(Talleyrand)과 끊임없이 만나며 복잡한 외교 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상대는 러시아의 젊은 황제 알렉산드르 1세였다. 그는 때로는 신비주의적인 구원자를 자처하며 자유주의적인 제스처를 취하다가도, 때로는 냉혹한 현실 정치인의 모습을 보이며 폴란드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혁명 이전의 신성한 질서 회복입니다." 메테르니히는 주요 강대국 대표들과의 회의에서 자신의 원칙을 강조했다. "프랑스 혁명은 정통 군주들의 신성한 권리를 부정하고 유럽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우리는 각국의 정통 군주들을 복위시키고, 그들의 권위를 존중하는 질서를 재건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통성'의 원칙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라 프랑스, 스페인, 나폴리 등지에서는 부르봉 왕가가 복위했고, 교황령도 회복되었다. 이는 국민 주권이라는 혁명 이념에 대한 명백한 반동이었다.
"하지만 정통성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메테르니히는 말을 이었다. "프랑스와 같은 특정 강대국이 다시 유럽 전체를 위협하는 상황을 막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력 균형'이 필수적입니다. 어느 한 국가도 압도적인 힘을 갖지 못하도록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세력 균형 원칙 아래 유럽의 지도는 철저하게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재단되었다. 프랑스는 혁명 이전의 국경으로 축소되었고, 다시 팽창하지 못하도록 주변 국가들을 강화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네덜란드에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벨기에)가 합병되어 네덜란드 연합 왕국이 탄생했고, 프로이센은 라인란트와 작센 북부를 얻어 서쪽과 동쪽에서 프랑스를 견제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북부 이탈리아(롬바르디아, 베네치아)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았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제노바를 합병하여 프랑스 남동부 국경의 완충 역할을 맡게 되었다. 영국은 해상 패권을 유지하며 몰타, 실론(스리랑카), 케이프 식민지 등 해외 거점을 확보하는 데 만족했다.
가장 큰 논쟁거리는 폴란드와 작센 문제였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자신이 해방시킨 폴란드의 대부분을 자신의 입헌 왕국으로 만들려 했고, 프로이센은 그 대가로 작센 왕국 전체를 병합하려 했다. 이는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심지어 프랑스의 탈레랑까지 가세하여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과도한 팽창을 견제했다. 한때 4대 승전국 간의 동맹이 깨지고 새로운 전쟁이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감돌았다.
"차르 폐하의 이상주의는 존경하지만, 폴란드 전체를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두는 것은 유럽의 균형을 심각하게 위협할 것입니다." 메테르니히는 알렉산드르를 설득하려 애썼다.
"프랑스는 패전국이지만, 유럽 질서의 안정을 위해서는 완전히 무시될 수 없습니다. 프랑스의 정통 정부를 존중하고, 과도한 팽창을 견제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이익에 부합합니다." 탈레랑은 교묘한 논리로 프랑스의 입지를 강화했다.
결국 오랜 협상과 타협 끝에 폴란드는 다시 분할되어 대부분 러시아 황제가 통치하는 입헌 왕국(소위 '회의 폴란드(Congress Poland)')이 되었고, 프로이센은 작센 영토 일부와 라인란트를 얻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독일 문제는 39개의 국가로 구성된 느슨한 '독일 연방(Deutscher Bund)'을 창설하고 오스트리아가 의장국을 맡는 것으로 봉합되었다. 이는 독일 민족의 통일 열망을 완전히 외면한 조치였다.
1815년 6월 9일, 워털루 전투 직전에 빈 회의 최종 의정서가 채택되었다. 빈 체제는 이후 약 30-40년간 유럽의 국제 질서를 규정하는 틀이 되었다. 메테르니히는 자신의 외교적 승리에 만족했을지 모른다. 그는 혁명의 혼란을 잠재우고 보수적인 안정을 회복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체제는 아래로부터 끓어오르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거대한 흐름을 인위적으로 억누르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빈 체제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들은 낡은 지도를 다시 펼쳐놓고 과거의 영광을 꿈꾸지만, 이미 세상은 변했다. 혁명이 뿌린 씨앗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렸고, 언젠가 다시 싹을 틔워 저 낡은 질서의 벽을 허물 것이다." 빈 회의가 구축한 보수적 질서는 결국 미래의 더 큰 혁명과 갈등을 예고하는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약 18,000자) - 빈 회의 주요 쟁점 상세화, 각국 대표 외교 스타일 비교, 탈레랑 역할 심층 분석, 사교 행사 장면 통한 분위기 묘사 등 추가 필요
제187장: 민족들의 좌절, 억압된 열망
(알랭 마르탱) 빈 회의의 화려한 무도회 뒤편에는 수많은 민족들의 눈물과 좌절이 있었다. 나폴레옹의 지배로부터 해방될 것을 기대했던 독일인들, 오스트리아의 압제에서 벗어나 통일 국가를 꿈꿨던 이탈리아인들, 그리고 독립을 갈망했던 폴란드인들에게 빈 회의의 결정은 냉혹한 배신과 같았다. '정통성'과 '세력 균형'이라는 강대국들의 논리 앞에서, '민족 자결'이라는 프랑스 혁명의 또 다른 중요한 유산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빈 체제는 유럽에 일시적인 안정을 가져왔을지 모르지만, 동시에 수많은 민족들에게는 '민족들의 감옥'과 같은 억압적인 질서였다. 그러나 억압은 저항을 낳는 법. 빈 회의의 결과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독일의 부르셴샤프트, 이탈리아의 카르보나리, 폴란드의 비밀 결사 등 민족주의 운동을 더욱 지하화시키고 급진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에도 이 시기 유럽 각지에서 움트기 시작한 저항의 불씨들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나는 빈 체제 하에서 좌절을 겪는 카를 폰 슈타인(독일)과 마르코 롯시(이탈리아)의 시점을 통해, 억압된 민족주의적 열망이 어떻게 살아남아 미래의 변화를 준비하고 있었는지 그려보고자 한다.
<1815년 이후, 독일 대학 도시(예나 등) / 이탈리아 북부 도시(밀라노 등) / 폴란드 바르샤바 / 오스트리아 제국 내 소수 민족 거주 지역 / 에티엔 드샹의 서재>
독일의 젊은 민족주의자 카를 폰 슈타인에게 빈 회의의 결과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는 해방 전쟁에 의용군으로 참전하여 프랑스 압제자들을 몰아내는 데 피를 흘렸고, 마침내 자유롭고 통일된 독일 조국이 건설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현실은 오스트리아의 입김 아래 39개의 군주국으로 나뉜 느슨한 '독일 연방(Deutscher Bund)'일 뿐이었다. 각 군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영토에서 절대주의적인 통치를 유지하려 했고, 자유주의와 통일에 대한 논의는 '위험한 사상'으로 간주되어 탄압받기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가 피 흘려 얻은 결과란 말인가!" 카를은 예나 대학의 친구들과 비밀리에 모인 자리에서 분노를 터뜨렸다. "메테르니히와 저 늙은 군주들은 여전히 우리 독일 민족을 분열시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 하고 있다! 프랑스 폭군을 몰아내니 오스트리아 폭군이 그 자리를 대신하려 하는구나! 우리는 속았다!"
그의 친구들 역시 깊은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대학 내에서 다시 부르셴샤프트(Burschenschaft) 활동을 재개하며, 흑-적-금 삼색기 아래 자유와 통일을 향한 열망을 다졌다. 그들은 금지된 서적들을 몰래 읽고 토론했으며, 정부의 감시를 피해 체력 단련과 함께 저항을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앞길은 험난해 보였다. 이미 많은 자유주의 교수들이 해고당했고, 학생 운동에 대한 탄압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카를은 때로는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지만, 독일 민족의 통일이라는 꿈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언젠가, 반드시 우리의 힘으로 진정한 통일 독일을 이루고 말 것이다."
이탈리아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며 잠시나마 통일의 가능성을 엿보았던 마르코 롯시에게, 빈 회의의 결과는 끔찍한 후퇴였다. 이탈리아는 다시 여러 개의 왕국과 공국으로 분열되었고, 북부의 롬바르디아-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직접 병합되었으며, 중부와 남부의 군주들 역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 교황의 세속 권력도 복원되었다. '이탈리아는 단지 지리적 표현일 뿐'이라는 메테르니히의 조롱 섞인 말이 현실이 된 것이다.
마르코는 밀라노에서 다시 상업 활동을 시작했지만, 그의 마음은 오스트리아 지배에 대한 분노와 이탈리아 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과거 카르보나리(Carbonari) 활동을 했던 동지들과 다시 비밀리에 접촉하기 시작했다. 카르보나리는 나폴레옹 시대 말기에 조직된 비밀 결사로,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 그리고 자유주의 헌법 제정을 목표로 했다. 그들은 복잡한 의식과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며 오스트리아 경찰과 비밀경찰의 감시를 피해 활동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다시 한번 어둠 속에서 칼을 갈아야 하네." 마르코는 카르보나리 비밀 회합에서 말했다. "빈의 군주들은 우리 이탈리아 민족의 염원을 짓밟았지만, 우리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소. 우리는 끊임없이 저항하고 준비하여, 언젠가 저 오스트리아 독수리를 몰아내고 로마의 영광을 되살려 통일된 이탈리아를 건설해야 하오!" 그의 목소리에는 비장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봉기를 계획하고, 무기를 숨기며, 젊은 세대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조심스럽게 이어나갔다. 비록 당장은 성공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지만, 그들의 비밀스러운 활동은 이후 마치니와 가리발디로 이어지는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폴란드의 상황은 더욱 비극적이었다. 빈 회의는 폴란드를 다시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3국이 분할하는 것을 재확인했고, 그나마 '회의 폴란드'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황제 아래 형식적인 자치권이 부여되었지만, 이는 곧 러시아의 직접적인 통치와 동화 정책으로 변질되었다. 아담 차르토리스키(Adam Czartoryski)와 같은 폴란드 애국자들은 좌절 속에서 망명하거나 지하에서 독립 운동을 계속해야 했다. 그들의 투쟁은 1830년 11월 봉기와 같은 비극적인 실패로 이어지곤 했지만, 폴란드 민족의 독립 의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제국 내의 다른 소수 민족들, 즉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루마니아인 등 역시 빈 체제 하에서 자신들의 민족적 요구가 철저히 억압당하는 현실에 직면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다양한 민족들을 독일인 중심의 관료 체제 아래 묶어두려 했지만, 이는 오히려 각 민족의 정체성과 저항 의식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민족들의 감옥'이라는 제국의 모순은 19세기 내내 끊임없는 불안과 갈등의 원인이 될 것이었다.
에티엔 드샹은 빈 체제가 가져온 표면적인 평화 이면에 숨겨진 이러한 민족 문제의 심각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깨운 민족 자결의 원칙을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짓밟는 행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메테르니히는 유럽에 질서를 가져왔다고 자부하지만, 그것은 화산 위에 세워진 질서에 불과하다. 억압된 민족들의 열망은 언젠가 저 보수 반동의 둑을 무너뜨리고 다시 한번 유럽을 거대한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억압이 아닌 자유와 자결권 존중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의 예언처럼, 빈 체제가 구축한 보수적인 질서는 19세기 내내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1830년과 1848년의 혁명들은 그 도전이 표면으로 분출된 결과였으며, 비록 많은 경우 실패로 끝났지만, 결국 빈 체제를 무너뜨리고 유럽의 지도를 다시 한번 바꾸는 동력이 되었다. 민족들의 좌절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던 것이다.
(약 19,000자) - 각 지역 민족 운동 구체적 사례, 카를/마르코 활동 및 심리 묘사 심화, 폴란드/오스트리아 제국 내 상황 묘사, 에티엔 비판 내용 등 보강 필요
제188장: 엘바 섬 탈출, 황제의 귀환
(알랭 마르탱) 역사는 때로 믿을 수 없는 반전을 연출한다. 1814년 봄, 몰락하여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로 유배되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유럽은 그가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815년 2월 말, 그는 감시를 뚫고 극적으로 엘바 섬을 탈출하여 프랑스 남부 해안에 상륙했다. 그리고 마치 마법처럼, 그를 막기 위해 파견된 군대와 민중들은 그의 카리스마 앞에 다시 한번 무릎 꿇고 열광적으로 그를 맞이했다. 그의 파리 복귀는 유럽 전체를 다시 한번 충격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고, 그의 마지막 도박, 즉 '백일천하(Cent-Jours)'의 서막을 알렸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 사건을 "죽은 줄 알았던 불사조가 잿더미 속에서 다시 날갯짓을 시작한 순간"이라고 표현하며 경악과 함께 깊은 우려를 표했다. 나는 나폴레옹의 시점에서 그의 대담한 결단과 극적인 귀환 과정을, 그리고 그 소식을 접한 베테랑 병사 피에르 뒤퐁의 복잡한 심정을 그려보고자 한다.
<1815년 2월 말 - 3월, 엘바 섬 포르토페라이오 / 프랑스 남부 주앙 만 / 그르노블로 향하는 길 '나폴레옹 루트' / 파리>
엘바 섬에서의 생활은 나폴레옹에게 견딜 수 없는 굴욕이었다. 그는 명목상으로는 엘바의 군주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영국 군함의 감시 아래 놓인 유배객 신세였다. 그의 작은 왕국은 너무나 비좁았고, 그의 야심은 여전히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는 매일 프랑스 본토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복위한 루이 18세와 부르봉 왕정은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망명에서 돌아온 귀족들은 오만하게 굴었고, 혁명으로 얻었던 토지를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농민들의 불안감은 커져갔다. 무엇보다도, 나폴레옹과 함께 싸웠던 수많은 군인들이 새로운 정권 아래서 푸대접받고 해고당하며 불만을 품고 있었다. 연합국들은 빈 회의에서 서로의 이익을 놓고 다투며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아직 기회는 있다… 프랑스는 나를 원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직감했다.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운명의 별'을 시험해보기로 결심했다. 그의 계획은 대담했다. 소수의 충성파 병사들과 함께 엘바 섬을 탈출하여 프랑스 남부에 상륙한 뒤, 민중과 군대의 지지를 얻어 파리까지 진격하여 황제의 자리를 되찾는 것이었다. 실패하면 죽음뿐인,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건 도박이었다.
1815년 2월 26일 밤, 나폴레옹은 영국 감시선의 눈을 피해 7척의 작은 배에 약 1,000명의 근위대 병사들을 태우고 엘바 섬을 비밀리에 빠져나왔다. 사흘간의 아슬아슬한 항해 끝에, 3월 1일 프랑스 남부 칸 근처의 주앙 만(Golfe-Juan)에 무사히 상륙했다. 그는 상륙하자마자 병사들 앞에서 외쳤다.
"병사들이여! 독수리가 종탑에서 종탑으로 날아 마침내 노트르담 성당까지 도달할 것이다! 나와 함께 파리로 가자!"
그의 귀환 소식은 전보를 통해 순식간에 프랑스 전역과 빈 회의에 알려졌다. 루이 18세와 유럽 군주들은 경악했다. 루이 18세는 즉시 나폴레옹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진격은 예상외로 순조로웠다. 그는 왕당파 세력이 강한 프로방스 해안 대신, 알프스 산맥을 넘는 험준하지만 민중의 지지를 얻기 쉬운 경로(훗날 '나폴레옹 루트(Route Napoléon)')를 택했다. 그가 지나가는 마을마다 주민들은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이내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며 그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3월 7일, 그르노블(Grenoble) 근처 라프레(Laffrey)에서 벌어졌다. 나폴레옹을 막기 위해 파견된 제5 보병 연대가 길을 가로막고 총구를 겨누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나폴레옹은 말에서 내려 병사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이며 외쳤다.
"병사들이여! 나를 알아보겠는가? 그대들 중 누구라도 그대들의 황제를 쏘고 싶다면, 지금 쏘아라! 내가 여기 있다!"
그의 대담함과 카리스마 앞에 병사들은 얼어붙었다. 잠시의 침묵 끝에, 한 병사가 "황제 폐하 만세!"를 외쳤고, 이내 모든 병사들이 모자를 벗어 던지고 함성을 지르며 나폴레옹에게 달려왔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황제의 손과 옷자락에 입을 맞추었다. 저항은 없었다. 그르노블은 무혈 입성했고, 이후 리옹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나폴레옹을 막기 위해 파견된 군대는 오히려 그의 군대에 합류하여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미셸 네(Michel Ney) 원수마저 루이 18세에게 "나폴레옹을 쇠사슬에 묶어 데려오겠다"고 장담하고 떠났지만, 막상 옛 주군을 만나자 다시 그의 편으로 돌아섰다.
고향에서 상이군인으로 힘겹게 살아가던 피에르 뒤퐁은 나폴레옹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는 러시아와 라이프치히에서의 끔찍한 경험 이후 전쟁과 황제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라는 이름이 주는 마법과 같은 힘, 그리고 옛 전우들이 다시 깃발 아래 모여든다는 소식은 그의 가슴을 다시 뛰게 했다.
"황제 폐하께서 돌아오셨다니… 정말인가?"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나도 가야지! 프랑스를 위해, 황제를 위해 다시 한번 총을 들어야지!" 그는 낡은 군복을 꺼내 입고 절뚝거리는 다리로 파리를 향해 출발했다. 그에게는 다시 한번 영광을 되찾을 기회가 온 것처럼 느껴졌다.
3월 19일 밤, 루이 18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깨닫고 파리를 떠나 벨기에로 도주했다. 다음 날 저녁, 나폴레옹은 수많은 군중의 열광적인 환호 속에 튈르리 궁에 재입성했다. 불과 20일 만에, 단 한 발의 총성도 없이, 그는 다시 프랑스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의 귀환은 기적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동시에 프랑스와 유럽 전체를 또 다른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 서곡이기도 했다. 엘바 섬을 탈출한 독수리는 다시 한번 하늘 높이 날아올랐지만, 그의 날갯짓은 이미 예전 같지 않았고, 사냥꾼들은 이미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약 19,000자) - 엘바 섬 생활 묘사, 탈출 계획/과정 긴장감, 프랑스 국내 상황 상세화, 그르노블 장면 극적 구성, 피에르 등 병사 심리 묘사 등 추가 필요
제189장: 백일천하, 마지막 전쟁 준비
(알랭 마르탱) 권좌에 복귀한 나폴레옹의 '백일천하(Cent-Jours)'는 영광의 재현이 아닌,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위한 짧고 불안한 시간이었다. 프랑스 민중과 군대의 열광적인 지지 속에 파리로 돌아왔지만, 그는 이전과는 다른 현실에 직면해야 했다. 프랑스 내부는 여전히 분열되어 있었고, 유럽 열강들은 그의 복귀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한편으로는 국내의 자유주의 세력을 달래고 정권을 안정시켜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피할 수 없는 유럽 연합군과의 마지막 결전을 준비해야 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 시기를 "벼랑 끝에 선 황제의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표현하며, 그의 정치적 술수와 군사적 준비 과정을 냉철하게 기록했다. 나는 나폴레옹의 불안한 통치와 함께, 빈에서 그의 복귀 소식을 접한 유럽 열강들의 단호한 대응, 그리고 워털루를 향해 다가가는 운명의 발걸음을 그려보고자 한다.
<1815년 3월 - 6월 초, 파리 튈르리 궁 / 빈 회의장 / 벨기에 국경 지역 프랑스군 진영>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더 이상 혁명의 열기를 등에 업은 제1통령이나 유럽을 제패한 황제가 아니었다. 그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약속해야 했고, 동시에 자유주의적인 요구에도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는 과거의 측근이었으나 이제 자유주의 사상가로 명망이 높던 벤자맹 콩스탕(Benjamin Constant)을 불러들여 새로운 헌법 초안(‘제국의 헌법에 대한 부가법(Acte additionnel aux constitutions de l'Empire)’) 작성을 의뢰했다. 이 헌법은 양원제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언론 자유를 확대하는 등 이전 제국 헌법보다 훨씬 자유주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여전히 황제의 강력한 권한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이를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시켰지만, 많은 자유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은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황제는 여전히 늑대지만, 양의 탈을 쓰려 하는군." 에티엔은 자신의 일기에 썼다. "그가 진정으로 자유를 원한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시간을 벌고 민심을 달래기 위한 정치적 연극일 뿐이다."
국내 정치의 불안정 속에서 나폴레옹의 최우선 과제는 군대를 재건하고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는 엘바 섬에서 함께 탈출한 근위대 병사들을 핵심으로, 과거 '위대한 군대'에서 복무했던 베테랑 병사들(피에르 뒤퐁과 같은)을 다시 소집했다. 수만 명의 병사들이 황제의 부름에 응했지만, 러시아와 독일에서의 참패로 인한 손실은 너무나 컸다. 숙련된 장교와 기병, 포병 전력은 턱없이 부족했고, 보급과 장비 역시 열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불과 두 달여 만에 약 12만 명 규모의 군대를 재편성하는 놀라운 조직력을 보여주었다.
한편, 빈 회의에 모여 있던 유럽 열강들은 나폴레옹의 파리 복귀 소식에 경악했지만,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응했다. 메테르니히, 캐슬레이, 알렉산드르 1세, 하르덴베르크 등은 즉각 회담을 갖고 나폴레옹을 '유럽 평화의 파괴자'이자 '인류의 적'으로 규정하는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나폴레옹 개인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제7차 대프랑스 동맹(Seventh Coalition)을 결성하여 그를 타도하기 위해 다시 한번 힘을 합치기로 결의했다.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은 각각 수십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보나파르트는 더 이상 프랑스의 황제가 아니다. 그는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는 범죄자일 뿐이다. 우리는 그를 완전히 제거하고 유럽에 항구적인 안정을 가져올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메테르니히는 빈 회의에서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나폴레옹은 외교를 통해 연합국 진영을 분열시키려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특히 장인이었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오스트리아는 단호하게 동맹에 참여했다. 그는 이제 유럽 전체를 상대로 홀로 싸워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 그는 시간이 자신의 편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연합군 대군이 프랑스 국경에 완전히 집결하기 전에, 먼저 분산되어 있는 적 부대를 각개 격파하는 것만이 유일한 승리의 길이었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벨기에에 주둔하고 있는 웰링턴의 영국-네덜란드-독일 연합군과 블뤼허의 프로이센 군이었다. 그는 이 두 군대가 합류하기 전에 먼저 격파하여 연합군의 예봉을 꺾고, 이를 통해 다른 동맹국들의 전의를 상실시키거나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 했다. 그는 재건된 북부군(Armée du Nord) 주력을 이끌고 6월 초 비밀리에 벨기에 국경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피에르 뒤퐁은 다시 한번 전장으로 향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황제의 부름에 응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예전과 같은 열광적인 충성심보다는 깊은 피로감과 함께, 이번이 정말 마지막 싸움이 되기를 바라는 절박한 심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곁에서 행군하는 젊은 병사들의 불안한 눈빛 속에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이번에는 꼭 살아 돌아가자, 친구." 그가 옆의 젊은 병사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전쟁은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야. 그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
파리에서는 에티엔 드샹이 황제의 마지막 도박 소식을 들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또다시 전쟁이구나. 황제의 야심은 프랑스를 또다시 피로 물들일 것이다. 이번에는 부디 이것이 마지막이기를…"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는 이제 벨기에의 작은 마을 워털루 근처 들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유럽의 운명을 건 마지막 대결전이 벌어질 것이고, 한 시대는 마침내 그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었다.
(약 19,000자) - 백일천하 시기 국내 정치 상황(자유주의자와의 관계 등), 군대 재건 과정 상세화, 빈 회의 반응, 양측 전쟁 준비 비교, 에티엔/피에르 심리 묘사 등 추가 필요
제190장: 워털루 들판의 비, 제국의 종언
(알랭 마르탱) 역사의 모든 길은 종종 하나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수렴된다. 1815년 6월 18일, 벨기에 브뤼셀 남쪽의 작은 마을 워털루(Waterloo) 근처 몽생장(Mont-Saint-Jean) 언덕은 바로 그런 운명의 장소였다. 그곳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마지막 군대와, 그를 막기 위해 뭉친 웰링턴과 블뤼허의 연합군이 유럽의 패권을 놓고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전날 밤 내린 폭우로 질퍽해진 들판 위에서 펼쳐진 이날의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처절했고, 그 결과는 나폴레옹 제국의 완전한 종말과 새로운 유럽 질서의 확립을 가져왔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 전투를 "영웅의 마지막 숨결이 꺼져가고,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 밝아오는 순간"이라고 기록했다. 나는 프랑스 척탄병 피에르 뒤퐁, 영국 해군 장교 찰스 킹슬리(해전 지원 또는 소식 전달), 그리고 지휘관 나폴레옹과 웰링턴의 시점을 교차하며, 이 역사적인 전투의 과정을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1815년 6월 18일, 벨기에 워털루 근처 몽생장 전장 / 영국 해협 / 런던>
전날 밤부터 쏟아진 폭우는 6월 18일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멎었다. 그러나 워털루 근처 들판은 온통 진흙탕으로 변해 있었다. 나폴레옹은 포병 화력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땅이 마르기를 기다려야 했고, 이는 전투 개시 시간을 오전 11시 30분경으로 늦추는 결과를 낳았다. 이 몇 시간의 지연은 결과적으로 전투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의 목표는 웰링턴 군대를 먼저 격파한 뒤, 동쪽에서 접근해오는 블뤼허의 프로이센 군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웰링턴 공작은 몽생장 언덕 남쪽 경사면에 그의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병사들을 교묘하게 배치했다. 그는 정면 공격을 예상하고, 언덕 뒤편에 주력 부대를 숨겨 포격 피해를 최소화했으며, 전방의 주요 농가 건물인 우구몽(Hougoumont)과 라 에 생트(La Haye Sainte)를 강력한 방어 거점으로 삼았다. 그는 나폴레옹의 공격을 최대한 막아내면서 블뤼허의 프로이센 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 목표였다. 그의 얼굴은 늘 그렇듯 차분하고 냉정했지만, 그의 내면은 다가올 격전에 대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침내 프랑스군의 대규모 포격과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 첫 공격은 전장 서쪽의 우구몽 농가를 향했다.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이 지휘하는 부대가 농가를 공격했지만, 영국 근위대의 필사적인 방어에 막혀 격렬한 공방전만 벌어질 뿐이었다.
오후 1시 30분경, 나폴레옹은 주력 부대인 데를롱(D'Erlon) 장군의 보병 군단을 웰링턴 군대의 중앙을 향해 투입했다. 프랑스 보병들은 웅장한 대열을 이루어 언덕을 향해 진격했다. 피에르 뒤퐁은 이 거대한 돌격 대열의 일부였다. 그는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며 진흙탕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빗발치는 영국군의 포탄과 머스킷 총알 속에서 수많은 동료들이 쓰러져 갔지만, 그들은 마침내 언덕 위에 도달하여 영국군 전열 일부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때, 웰링턴이 숨겨두었던 영국 중기병대(Uxbridge 지휘)가 프랑스 보병 대열의 측면을 덮쳤다. 프랑스 보병들은 기병 공격에 취약한 대열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피에르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거대한 말들과 번쩍이는 칼날 앞에서 그의 부대는 순식간에 와해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후방으로 물러나야 했다.
오후 중반, 미셸 네(Michel Ney) 원수는 영국군 중앙이 흔들린다고 오판하고, 예비대로 남겨두었던 프랑스 중기병대(퀴라시에(Cuirassier) 등) 전체를 투입하여 대규모 돌격을 감행했다. 수천 기의 프랑스 기병들이 번쩍이는 흉갑과 투구를 쓰고 함성을 지르며 영국군 보병 방진(Square)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은 장관이었지만, 동시에 무모한 공격이었다. 영국 보병들은 침착하게 방진을 형성하고 총검과 머스킷 사격으로 프랑스 기병대의 돌격을 막아냈다. 수차례에 걸친 처절한 기병 돌격은 영국군 방진을 깨뜨리지 못한 채 막대한 손실만을 남기고 실패로 돌아갔다. 네 원수의 성급함과 나폴레옹의 지휘 부재가 빚은 비극이었다.
한편, 영국 해협에서는 찰스 킹슬리 함장의 군함이 혹시 모를 프랑스 해군의 움직임을 감시하며 워털루 전황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넬슨 제독과 함께 싸웠던 경험을 떠올리며, 육지에서 벌어지는 이 운명의 전투에서 웰링턴 공작이 반드시 승리하기를 기도했다.
해가 기울 무렵, 마침내 전장 동쪽에서 블뤼허 원수가 이끄는 프로이센 군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틀 전 리그니(Ligny)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패배했지만, 끈질기게 추격을 피해 전열을 재정비하여 약속대로 웰링턴을 지원하러 온 것이었다. 프로이센군의 등장은 프랑스군 우익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고, 나폴레옹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이제 나폴레옹에게 남은 마지막 카드는 그의 불패 신화를 상징하는 제국 근위대(Imperial Guard)뿐이었다. 오후 7시경, 그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근위대 정예 부대에게 웰링턴 군대 중앙을 향한 최후의 돌격을 명령했다. 곰 가죽 모자를 쓴 근위대 병사들은 황제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용맹하게 언덕을 향해 진격했다. 피에르 뒤퐁은 후방에서 이 장엄하고 비장한 광경을 지켜보며 마지막 기적을 바랐다.
그러나 웰링턴은 이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군 근위대와 포병 화력을 집중시켜 프랑스 근위대의 돌격을 막아냈다. 치열한 전투 끝에,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던 제국 근위대가 마침내 대열이 흐트러지며 후퇴하기 시작했다.
"근위대가 후퇴한다!(La Garde recule!)"
이 외침은 프랑스군 전체에 치명적인 충격과 공황을 불러왔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음을 직감한 프랑스 군대는 전선 전체에서 완전히 붕괴하여 무질서하게 도주하기 시작했다.
웰링턴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군에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은 도망치는 프랑스군을 맹렬하게 추격했다. 피에르 뒤퐁은 다시 한번 패주의 굴욕과 공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야 했다. 나폴레옹 자신도 근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간신히 전장을 빠져나왔다.
워털루 들판은 달빛 아래 수만 구의 시신과 부상병들의 신음 소리로 가득 찼다. 한때 유럽을 호령했던 위대한 군대는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런던에서는 워털루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성을 질렀다. 찰스 킹슬리는 함선 위에서 축포 소리를 들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마침내 길고 길었던 전쟁이 끝났고, 영국의 바다는 안전해졌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전쟁의 참혹함과 수많은 희생을 떠올리며 무거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 시대의 완전한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unleashing했던 거대한 에너지는 마침내 소진되었고, 유럽은 다시 한번 새로운 질서 속으로 편입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워털루 들판에 내렸던 비는 단순히 전투를 지연시킨 것이 아니라, 제국의 몰락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역사의 눈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약 21,000자) - 전투 각 단계(우구몽, 라 에 생트, 기병 돌격, 근위대 공격 등) 상세 묘사, 각국 병사 시점, 지휘관 심리/전술, 전투 후 참상 등 추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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