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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M으로 뽑은 잡지식

0.1 Ver. 자유의 불꽃, 기계의 심장: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야기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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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부: 러시아 원정과 제국의 붕괴 (1812-1814)

(알랭 마르탱의 목소리)

역사는 때로 장엄한 출정 그 자체로 이미 비극의 시작을 알린다. 1812년 6월, 니만 강을 건너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로 들어선 나폴레옹의 '위대한 군대(Grande Armée)'는 그 규모와 위용만으로도 유럽 전체를 압도하는 듯했다.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독일 등 스무 개가 넘는 민족으로 구성된 60만 대군은 황제의 영광 아래 하나가 되어 동방의 거인을 굴복시키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 장엄한 진군의 이면에는 이미 파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광활한 영토, 혹독한 기후, 적의 교묘한 전술, 그리고 무엇보다 제국 자체의 오만함과 준비 부족은 이 '위대한 군대'를 역사상 가장 참혹한 비극의 제물로 만들 운명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은 이 시기, 원정에 참여했던 한 젊은 장교(그의 조카 샤를)의 편지를 통해, 승리 없는 전진 속에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군대의 모습과 병사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나는 이제 피에르 뒤퐁과 샤를, 그리고 나폴레옹의 시점을 교차하며, 니만 강 도하 이후 모스크바 입성까지, 그 길고 고통스러웠던 '승리 없는 전진'의 과정을 그려보고자 한다.


제171장: 니만 강을 건너, 승리 없는 전진

<1812년 6월 말 - 8월 초, 러시아 서부 영토 (빌나(Vilna), 비테프스크(Vitebsk) 등으로 향하는 길) / 나폴레옹의 이동 사령부 / 프랑스군 야영지>

니만 강을 건넌 순간의 흥분과 장엄함은 잠시였다. '위대한 군대'는 곧 러시아의 광활하고 낯선 대지 앞에서 현실적인 문제들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의 초기 전략은 명쾌했다. 국경 근처에서 러시아 주력군을 포착하여 단 한 번의 결정적인 전투(제2의 아우스터리츠)로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군사적 천재성과 프랑스 군대의 속도, 그리고 러시아 군대의 약점을 과신하고 있었다.

"바클라이는 어디 있나! 놈들은 감히 우리 군대와 맞서 싸울 생각도 못 하는 겁쟁이들인가!" 나폴레옹은 이동 사령부의 지도 앞에서 초조하게 소리쳤다. 그의 예상과 달리, 러시아군 총사령관 바클라이 데 톨리(Barclay de Tolly)는 정면 대결을 교묘하게 회피하며 계속해서 동쪽으로 후퇴했다. 그저 후퇴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러시아군은 물러나면서 마을과 창고를 불태우고 우물을 오염시키는 '초토화 전술(Scorched Earth)'을 사용했다. 프랑스군은 빠른 속도로 진격했지만, 그들이 점령하는 것은 텅 빈 도시와 불타버린 들판뿐이었다. 현지에서의 보급품 조달은 거의 불가능했다.

젊은 포병 장교 샤를(에티엔의 조카)은 처음 겪는 대규모 원정의 현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숙부 에티엔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신의 경험을 담담하게 적었다.

"숙부님께, 저희는 니만 강을 건너 러시아 땅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황제 폐하의 위용은 여전하시고 병사들의 사기도 높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래 보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예상과 많이 다릅니다. 러시아 군대는 마치 유령처럼 싸움을 피하며 계속 물러서고 있고, 우리가 지나가는 길에는 오직 잿더미와 텅 빈 집들만이 남아 있습니다. 식량과 사료 부족이 벌써부터 심각하게 느껴집니다. 병사들은 굶주림에 지쳐 약탈을 시작했고, 장교들의 통제도 잘 먹히지 않습니다. 게다가 날씨는 또 어찌나 변덕스러운지요! 낮에는 살인적인 더위와 먼지 속에서 행군하다가도, 밤에는 갑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져 온통 진흙탕으로 변해버립니다. 이곳 러시아 땅은… 저희에게 너무나 광활하고 적대적입니다. 부디 파리의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해주십시오."

피에르 뒤퐁과 같은 베테랑 병사들에게도 이번 원정은 이전과는 달랐다. 스페인에서의 끔찍한 경험 이후, 그는 전쟁의 낭만보다는 현실적인 생존에 더 집중했다. 그는 젊은 신병들에게 섣부른 약탈을 자제시키고, 얼마 안 되는 배급 식량을 아껴 먹으며, 밤에는 최대한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려 애썼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얘들아." 그는 자신보다 어린 동료들에게 말했다. "이번 싸움은 예전 같지 않을 거야. 진짜 적은 저 앞에 도망가는 러시아 놈들이 아니라, 우리의 텅 빈 배와 지친 다리, 그리고 저 끝없는 땅덩어리일지도 몰라."

그의 말처럼, 전투다운 전투는 거의 없었지만, 병사들은 이미 지쳐가고 있었다. 끝없는 행군, 굶주림,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불안감은 군대의 사기를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다. 많은 병사들이 낙오했고, 말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쓰러져 갔다.

나폴레옹은 빌나(Vilna, 현 빌뉴스)와 비테프스크(Vitebsk) 등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지만, 그곳에서도 그를 기다리는 것은 환영 인파가 아니라 적대적인 시선과 텅 빈 창고뿐이었다. 그는 알렉산드르 1세가 곧 강화를 요청해 올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러시아 황제는 묵묵부답이었다. 나폴레옹은 점차 초조해졌다. 그의 단기 결전 전략은 완전히 실패하고 있었고, 전쟁은 그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장기 소모전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대체 왜 싸우려 하지 않는 거지? 바클라이는 겁쟁이인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가?" 나폴레옹은 참모총장 베르티에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폐하, 러시아 영토는 너무나 광대합니다. 그들은 시간을 벌면서 우리 군대가 스스로 지쳐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보급선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잠시 진격을 멈추고 겨울을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베르티에가 조심스럽게 건의했지만, 나폴레옹은 듣지 않았다.

"겨울? 겨울이 오기 전에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계속 진격하라! 스몰렌스크에서 놈들을 따라잡아 결판을 내겠다!"

나폴레옹은 여전히 결정적인 전투를 통한 승리를 갈망했지만, 현실은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러시아군은 스몰렌스크(Smolensk)에서도 격렬하게 저항한 뒤 다시 도시를 불태우고 후퇴했다(8월 중순). 프랑스군은 또다시 잿더미가 된 도시를 점령했을 뿐이었다. 승리는 있었지만, 그 승리는 아무런 실속도 없는 공허한 것이었다. '위대한 군대'는 계속해서 동쪽으로 나아갔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고, 길의 끝에는 예측할 수 없는 더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니만 강을 건널 때의 장엄했던 함성은 이제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 위에서 희미한 메아리가 되어 사라져가고 있었다.

(약 16,000자) - 러시아군 전술(스키타이 방식 유비), 각 지역 점령 후 상황, 나폴레옹 심리 변화, 샤를/피에르 등 병사들 경험 구체화 필요


제172장: 광활한 대지, 굶주림과 질병

(알랭 마르탱) 전쟁의 가장 무서운 적은 때로 총칼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1812년 여름,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를 행군하던 나폴레옹의 '위대한 군대'는 전투보다 더 끔찍한 적들과 싸워야 했다. 바로 굶주림과 질병이었다. 길어진 보급선과 러시아군의 초토화 전술은 군대를 만성적인 식량 부족 상태로 몰아넣었고, 비위생적인 환경과 오염된 물은 전염병이라는 또 다른 재앙을 불러왔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에는 당시 야전 병원에서 근무했을지도 모르는 조카 샤를의 편지 일부가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은 차마 눈 뜨고 읽기 어려울 정도이다. 나는 베테랑 병사 피에르 뒤퐁의 처절한 생존 투쟁과 샤를의 비통한 기록을 통해, '위대한 군대'가 전투 한번 제대로 치르기 전에 어떻게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는지를 그려보고자 한다.

<1812년 여름, 러시아 내륙 행군로 / 야영지 / 야전 병원 / 스몰렌스크 근교>

스몰렌스크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지옥 그 자체였다. 찌는 듯한 더위와 먼지 속에서 병사들은 끝없이 걸었다. 그러나 그들을 더 괴롭힌 것은 배고픔이었다. 배급되는 건빵은 돌덩이처럼 딱딱했고, 그나마 양도 턱없이 부족했다. 고기는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다. 병사들은 길가에서 썩은 감자를 주워 먹거나, 밀밭에 뛰어들어 덜 익은 이삭을 뜯어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피에르 뒤퐁은 오랜 군대 경험으로 배고픔에는 이골이 나 있었지만, 이번처럼 지독한 굶주림은 처음이었다. 그는 밤이 되면 동료 몇몇과 몰래 야영지를 벗어나 주변 농가를 뒤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농가는 이미 텅 비어 있거나 불타버린 뒤였다. 간혹 숨겨둔 감자나 닭 한 마리라도 발견하면 큰 행운이었다. 그러나 이런 약탈 행위는 군 기강을 더욱 해이하게 만들었고, 때로는 매복한 코사크 기병이나 분노한 농민들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젠장, 이러다 굶어 죽겠다! 황제 폐하는 대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시는 건가?" 한 병사가 절망적으로 외쳤다. 그의 말은 많은 병사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굶주림보다 더 무서운 것은 질병이었다. 오염된 강물을 마시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야영하면서, 이질(Dysentery)과 장티푸스(Typhus fever)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병사들은 고열과 설사, 구토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다. 군마들 역시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과로에 시달리다 대량으로 죽어나갔다. 죽은 말의 고기는 병사들의 귀한 식량이 되었지만, 이 또한 새로운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젊은 장교 샤를은 자신이 담당하던 포병 부대의 참혹한 상황을 삼촌 에티엔에게 편지로 전했다.

"숙부님, 이곳의 상황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전투에서 죽는 병사보다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병사가 훨씬 더 많습니다. 매일 아침, 수십 구의 시신이 길가에 버려지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뼈만 앙상하게 남아 유령처럼 걷고 있습니다. 야전 병원은 부상병과 환자들로 가득 차 있지만, 약품도, 의무관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매일같이 깨닫고 있습니다. 혁명의 이상은 이곳, 러시아의 진흙탕 속에서 완전히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

샤를의 묘사처럼, 야전 병원의 상황은 처참했다. 마취제도, 소독약도 없이 수술이 이루어졌고, 상처는 쉽게 감염되어 괴저로 번졌다. 의무관들은 잠잘 시간도 없이 몰려드는 환자들을 돌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병원 주변에는 죽어가는 병사들의 신음 소리와 악취가 진동했다. 에티엔 드샹이 만약 이곳에 있었다면, 그는 혁명 초기의 이상주의적 열정이 완전히 짓밟히는 광경 앞에서 깊은 절망과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즉 이 끔찍한 현실을 기록하는 것에 매달렸을지도 모른다.

군 기강 해이는 극에 달했다. 장교들의 명령은 더 이상 제대로 서지 않았고, 병사들은 약탈과 탈영을 일삼았다. 특히 바이에른, 이탈리아, 프로이센 등 동맹국 병사들의 불만은 극심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프랑스 황제를 위해 이 낯선 땅에서 죽어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나폴레옹의 총알받이일 뿐이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한 독일 병사가 술에 취해 울부짖었다.

마침내 8월 중순, 프랑스군은 스몰렌스크에 도착했다. 병사들은 이곳이 중요한 병참 기지이므로 충분한 식량과 휴식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또다시 불타버린 도시와 텅 빈 창고, 그리고 치열한 전투의 흔적뿐이었다. 러시아군은 스몰렌스크에서도 격렬하게 저항한 뒤 도시를 파괴하고 후퇴했던 것이다. 병사들의 마지막 희망마저 꺾이는 순간이었다.

나폴레옹은 스몰렌스크의 폐허 속에서 더욱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의 군대는 전투 한번 제대로 치르기도 전에 이미 절반 가까이 줄어들어 있었다. 보급 상황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겨울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서 진격을 멈추고 겨울을 나야 할까? 아니면 계속해서 모스크바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 그의 참모들은 신중론을 제기했지만, 나폴레옹은 모스크바 점령만이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그는 다시 한번 도박을 결심했다. 모스크바를 향한 진격을 계속하기로.

피에르 뒤퐁은 스몰렌스크에서 잠시 숨을 돌렸지만, 그의 마음은 조금도 편치 않았다. 그는 앞으로 다가올 전투와 혹독한 겨울, 그리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다시 한번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위대한 군대'는 이제 그 이름과는 달리,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절망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행군은 영광을 향한 진군이 아니라, 이미 예정된 비극을 향한 죽음의 행렬이었다.

(약 19,000자) - 질병 묘사 구체화, 야전 병원 상황 상세화, 샤를/에티엔 역할 비중 조절, 스몰렌스크 전투 후 상황 등 보강 필요


제173장: 보로디노의 혈투, 피로 얻은 길

(알랭 마르탱) 1950년 파리. 나는 에티엔의 서재에서 찾아낸 빛바랜 러시아 원정 지도를 펼쳐본다. 모스크바로 향하는 길목, 보로디노(Borodino)라는 작은 마을 이름 옆에는 붉은 잉크로 여러 겹의 십자 표시가 되어 있고, 그 옆에는 증조할아버지의 떨리는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1812년 9월 7일.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살육의 날. 승자는 없었다. 오직 죽음만이 승리했을 뿐." 보로디노 전투. 나폴레옹 자신도 "내가 치른 전투 중 가장 끔찍했다"고 회고했던 이날의 혈투는, 러시아 원정에서 벌어진 유일하고도 가장 거대한 규모의 정규 회전이었다. 러시아군은 조국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고, 프랑스군은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처절하게 돌격했다. 양측 합쳐 7만 명 이상이 단 하루 만에 쓰러져 간 이 전투는, 나폴레옹에게는 전술적인 승리였을지 몰라도 전략적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 오직 피로 얼룩진 공허한 전진일 뿐이었다. 나는 베테랑 척탄병 피에르 뒤퐁의 시점에서 이 지옥 같은 전투의 현장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1812년 9월 7일, 모스크바 서쪽 약 110km 보로디노 마을 근처 평원 / '라 그랑드 르두트' 주변>

오랜 후퇴 끝에, 러시아군 총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Mikhail Kutuzov) 노장은 마침내 결전을 결심했다. 그는 모스크바로 향하는 길목인 보로디노 근처의 완만한 구릉 지대에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그의 목표는 프랑스군의 예봉을 꺾고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하여, 설령 패배하더라도 프랑스군이 모스크바를 점령해도 아무런 실익을 얻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러시아 병사들은 '성스러운 도시 모스크바를 지키기 위해', '정교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싸운다는 종교적, 애국적 열정으로 충만해 있었다. 전투 전날 밤, 병사들은 이콘(Icon, 성화상) 앞에서 기도하고 서로의 죄를 고백하며 결의를 다졌다.

프랑스군 진영 역시 비장한 분위기였다. 오랜 행군과 굶주림, 질병으로 지쳐 있었지만, 병사들은 마침내 적과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황제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하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 모스크바는 지척이었고,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끝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나폴레옹은 전투 전날 밤, 아들 로마 왕의 초상화를 받아보고 잠시 감상에 젖기도 했지만, 이내 냉철한 지휘관으로 돌아와 다음 날 전투 계획을 최종 점검했다. 그는 러시아군의 중앙 방어선을 강력한 포병 화력 지원 아래 정면 돌파하여 전열을 양단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9월 7일 새벽, 수백 문의 대포가 불을 뿜으며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포연이 자욱하게 전장을 뒤덮었고, 땅은 포탄의 충격으로 끊임없이 흔들렸다. 피에르 뒤퐁은 동료 척탄병들과 함께 돌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지만, 오랜 경험은 그에게 두려움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게 했다.

"제군들! 황제 폐하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라! 전진!" 연대장의 외침과 함께 북소리가 울려 퍼졌고, 피에르는 총검을 꽂은 머스킷 소총을 움켜쥐고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그들이 목표로 한 곳은 러시아군 방어선의 핵심 거점 중 하나인 '라 그랑드 르두트(Raevsky Redoubt)', 즉 라예프스키 보루였다. 보루 주변에는 이미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프랑스 보병과 기병들은 빗발치는 포탄과 총알 세례 속에서 쓰러져 가면서도 끊임없이 보루를 향해 돌격했다. 피에르는 옆에서 달리던 동료가 포탄 파편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보루 안팎에서는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총검과 개머리판, 심지어 주먹과 이빨까지 동원된 야만적인 살육전이었다. 피에르는 정신없이 총을 쏘고 총검을 휘둘렀다. 그는 자신이 몇 명을 죽였는지,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본능과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수차례의 공격과 반격 끝에 마침내 프랑스군이 보루를 점령했지만, 그곳은 이미 시체 더미로 뒤덮인 지옥과 같은 모습이었다.

다른 전선에서도 비슷한 양상의 격렬한 전투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다부, 네, 뮈라 등 프랑스 원수들은 용감하게 병사들을 독려하며 공격을 이끌었지만, 쿠투조프가 구축한 러시아군의 방어선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러시아 병사들은 놀라운 용기와 인내심으로 끝까지 저항했다. 나폴레옹은 전투 내내 중앙에 위치하여 전황을 지켜보았지만, 예전과 같은 번뜩이는 임기응변이나 과감한 결단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예비대로 남겨둔 최정예 제국 근위대의 투입을 끝까지 망설였다.

해가 질 무렵, 포성은 점차 잦아들었다. 전장은 양측 군대의 시신과 부상병들로 가득 차 있었다.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전장을 확보했지만, 러시아 주력군을 섬멸하는 데는 실패했다. 쿠투조프는 질서 있게 군대를 후퇴시켜 모스크바를 향했다. 프랑스군은 승리했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컸다. 양측 사상자는 7만 명이 넘었고, 프랑스군 역시 3만 명 이상의 병력과 수많은 장군들을 잃었다.

피에르 뒤퐁은 살아남았지만, 온몸은 피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정신은 극도의 피로와 충격으로 멍한 상태였다. 그는 전투가 끝난 후, 달빛 아래 끝없이 펼쳐진 시체 더미를 바라보며 인간의 광기와 전쟁의 허무함을 절감했다. 그의 옆에서는 부상당한 동료들의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승리를 선언했지만,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막사에서 전투 결과를 보고받으며 깊은 시름에 잠겼다. "내가 치른 전투 중 가장 끔찍했다… 프랑스인들은 승리할 자격이 있었지만, 러시아인들은 패배하지 않을 자격을 얻었다." 그는 승리의 대가가 너무 크다는 것을, 그리고 이 전쟁이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보로디노 전투는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열었지만, 그 길은 수만 명의 병사들의 피로 얼룩져 있었다. 프랑스군은 승리했지만 결정적인 승리는 아니었고, 러시아군은 패배했지만 와해되지 않았다. 이제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는 텅 빈 영광을 향해, 그리고 다가올 더 큰 비극을 향해 모스크바로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약 20,000자) - 전투 준비 과정, 양측 지휘관 심리 묘사, 각 부대별 전투 상황, 포병/기병 역할, 전투 후 참상 묘사 등 상세화 필요


제174장: 불타는 모스크바, 텅 빈 정복

(알랭 마르탱) 정복의 목표는 단순히 적의 수도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의 항복을 받아내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데 있다. 1812년 9월, 나폴레옹은 마침내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그는 보로디노에서의 막대한 희생 끝에 얻은 이 '성스러운 도시'의 점령이 알렉산드르 1세의 항복을 받아내고 전쟁을 종결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항복 사절단이 아니라, 텅 비어가는 도시와 하늘을 뒤덮는 붉은 화염이었다. 모스크바 대화재는 러시아인들의 결사항전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나폴레옹의 계산을 완전히 빗나가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조카 샤를은 이 불타는 도시 속에서 프랑스 제국의 허망한 영광과 다가올 파멸의 전조를 목격했다. 나는 그의 시선과 함께, 텅 빈 정복의 현장을 그려보고자 한다.

<1812년 9월 14일 이후, 러시아 모스크바 / 크렘린 궁 / 불타는 시가지>

보로디노 전투 이후 일주일 만인 9월 14일, 나폴레옹의 '위대한 군대' 선두 부대가 마침내 모스크바 성벽 앞에 도달했다. 병사들은 지치고 굶주렸지만, 전설적인 도시 모스크바를 눈앞에 두자 잠시나마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은 이곳에서 풍부한 식량과 따뜻한 숙소,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의 끝을 기대했다. 나폴레옹 역시 포클론나야 언덕(Poklonnaya Hill) 위에서 황금빛 양파 돔 지붕들이 빛나는 모스크바를 내려다보며 감회에 젖었다. 그는 도시 대표단이 항복의 열쇠를 들고 나올 것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도시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정찰대가 조심스럽게 시내로 들어갔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텅 빈 거리와 굳게 닫힌 집들뿐이었다. 모스크바 총독 로스톱친(Rostopchin) 백작은 시민 대부분을 피난시키고 도시를 비워둔 채 떠났던 것이다. 심지어 소방 장비까지 모두 가지고 가버렸다.

"항복 사절단은 어디 있나? 귀족들은? 성직자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폴레옹은 당혹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텅 빈 도시를 점령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9월 14일 밤, 나폴레옹은 크렘린 궁에 입성했다. 차르들이 머물렀던 장엄한 궁전은 텅 비어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는 알렉산드르 1세에게 강화 협상을 제안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아무런 답신도 오지 않았다. 바로 그날 밤부터, 도시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불씨였지만, 건조한 날씨와 강한 바람을 타고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로스톱친 백작이 떠나기 전, 도시 곳곳에 불을 지르도록 비밀리에 명령했다는 설이 유력했다. 혹은 프랑스 군인들의 부주의한 약탈 행위가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모스크바는 거대한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기 시작했다.

젊은 장교 샤를은 크렘린 궁의 창문을 통해 불타는 도시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밤하늘은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었고, 검은 연기 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귀를 찢는 듯한 불길 소리와 무너지는 건물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매캐한 연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세상에…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정복의 결과란 말인가?" 그는 옆에 있던 동료 장교에게 힘없이 말했다. "우리는 도시를 점령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무덤 위에 서 있는 것 같네."

불길은 며칠 밤낮으로 계속되어 모스크바 시가지의 4분의 3 이상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수만 채의 집과 건물, 교회, 그리고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식량과 물자들이 모두 타버렸다. 프랑스 군인들은 불길을 피해 도시 외곽으로 피신해야 했고, 약탈할 물건조차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건물들에는 병사들이 무질서하게 몰려들어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고, 군 기강은 땅에 떨어졌다.

피에르 뒤퐁은 불타는 도시 속에서 살아남은 작은 술집을 찾아 동료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독한 보드카가 그의 타는 목마름과 절망감을 잠시 잊게 해주었다.

"모스크바! 위대한 도시 모스크바! 하하! 결국 잿더미만 남았군!" 한 병사가 술에 취해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가! 황제 폐하는 우리를 이곳에 버려두고 잊어버린 건 아닐까?"

피에르는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전쟁에서 살아남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나폴레옹은 크렘린 궁에서 불타는 도시를 지켜보며 초조하게 알렉산드르의 답신을 기다렸다. 그러나 차르는 여전히 침묵했다. 그는 모스크바가 불타더라도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시간을 끌며 프랑스 군대가 스스로 지쳐 쓰러지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한 달 넘게 모스크바에 머물렀지만,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식량은 바닥나고 있었고, 병사들은 지쳐갔으며, 첫눈 소식과 함께 겨울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10월 중순, 나폴레옹은 더 이상 모스크바에 머무르는 것이 무의미하며, 오히려 재앙을 초래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철수를 결정했다. 아직 파괴되지 않은 남쪽 길을 통해 퇴각하여 겨울 숙영지를 마련하려는 계획이었다.

10월 19일,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는 불타버린 도시 모스크바를 뒤로하고 서쪽을 향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앞날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스크바 점령은 나폴레옹에게 텅 빈 영광과 함께 돌이킬 수 없는 전략적 실패를 안겨주었다. 그들이 떠나는 폐허 위로는 곧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이 찾아올 것이었고, 그것은 '위대한 군대'에게 최후의 심판을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약 19,000자) - 모스크바 화재 원인 논쟁, 로스톱친 역할, 프랑스군 약탈 실상, 나폴레옹의 심리 변화(기대→실망→분노→초조→결단), 에티엔/샤를의 기록/성찰 내용 추가 필요


제175장: 겨울 장군의 역습, 퇴각의 시작

(알랭 마르탱) 역사에는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존재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천재적인 군사 전략과 병사들의 용기로 유럽 대륙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와 혹독한 자연 앞에서는 무력했다. 1812년 10월 19일, 불타버린 모스크바를 떠나 퇴각을 시작한 나폴레옹의 군대는 곧이어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재앙 중 하나와 마주하게 된다. 바로 '겨울 장군(General Winter)'의 역습이었다. 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러시아의 혹한은 이미 굶주림과 질병으로 지쳐 있던 '위대한 군대'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조카 샤를은 이 퇴각 과정 초기에 동상으로 다리를 잃고 간신히 후송되었다고 한다. 그의 편지에는 얼어붙은 땅 위에서 벌어진 생지옥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그 기록과 베테랑 병사 피에르 뒤퐁의 시점을 통해, 절망적인 퇴각의 시작과 겨울 장군의 무서운 위력을 그려보고자 한다.

<1812년 10월 말 - 11월 초, 모스크바 서쪽 퇴각로 / 말로야로슬라베츠(Maloyaroslavets) 근처>

모스크바를 떠나는 프랑스 군대의 행렬은 더 이상 위풍당당한 정복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치고 굶주린 패잔병들의 끝없는 행렬에 가까웠다. 병사들은 모스크바에서 약탈한 온갖 잡동사니(보석, 모피, 식기 등)를 잔뜩 짊어지고 있었지만, 정작 생존에 필요한 식량과 방한 장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폴레옹은 아직 파괴되지 않은 남쪽 경로를 통해 스몰렌스크까지 후퇴하여 겨울을 나려 했지만, 쿠투조프가 이끄는 러시아 군대가 말로야로슬라베츠에서 이 길을 가로막았다.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은 간신히 마을을 점령했지만, 더 이상 남쪽으로 진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결국 자신들이 왔던 길, 즉 이미 초토화된 북쪽 경로를 따라 스몰렌스크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치명적인 결정이었다.

11월 초가 되자, 날씨가 급격하게 추워지기 시작했다. 기온은 영하로 떨어졌고,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여름 군복 차림 그대로였고, 제대로 된 방한 장비는 거의 없었다. 밤이 되면 수많은 병사들이 추위 속에서 잠들었다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피에르 뒤퐁은 낡은 담요 한 장에 의지해 밤을 지새웠다. 그는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끊임없이 몸을 떨어야 했다. 옆에서 자던 동료 병사는 아침에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피에르는 이제 죽음이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오히려 무감각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죽은 동료의 낡은 외투를 벗겨 껴입었다. 생존 앞에서는 동료애도 사치였다.

낮에는 눈보라를 헤치며 미끄러운 얼음길을 걸어야 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동상에 걸려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검게 변해갔고, 저체온증으로 쓰러져 갔다. 낙오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누구도 쓰러진 동료를 부축할 여력이 없었다.

젊은 장교 샤를은 자신의 포병 부대가 형체도 없이 사라져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말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거의 다 죽었고, 무거운 대포는 눈밭 속에 버려졌다. 병사들은 상관의 명령도 듣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약탈하거나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다. 샤를 자신도 심한 동상으로 발을 절뚝거렸고, 더 이상 행군을 계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다행히 후송 마차에 실려 후방으로 보내졌지만, 그의 눈에는 얼어붙은 땅 위에 버려진 채 죽어가는 동료들의 모습이 마지막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그는 에티엔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이렇게 썼다.

"숙부님, 저는 살아남았지만, 제 영혼은 이곳 눈밭에 묻혔습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신의 저주입니다. 황제는 겨울 장군에게 패배했습니다…"

나폴레옹 역시 퇴각 행렬 속에서 이 끔찍한 현실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말에서 내려 병사들과 함께 걷거나, 위엄을 잃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와 수심이 가득했다. 그는 여전히 병사들 앞에서는 자신감을 보였지만, 측근들과 있을 때는 절망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런 추위는 예상하지 못했다… 겨울 장군이 나의 가장 강력한 적이 될 줄이야!" 그는 콜랭쿠르에게 털어놓았다. "우리는 너무 깊이 들어왔고,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러시아 군대와 코사크 기병들은 지쳐 쓰러져 가는 프랑스 군대의 후미를 끊임없이 공격하며 피해를 가중시켰다. 그러나 프랑스 군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총칼이 아니라, 살을 에는 추위와 뼈에 사무치는 굶주림이었다. 병사들은 더 이상 군인이 아니라, 생존 본능만이 남은 비참한 존재들이었다. 길가에는 얼어붙은 시체들이 눈더미처럼 쌓여갔고, 그 위로는 검은 까마귀 떼만이 맴돌았다.

'위대한 군대'의 퇴각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앞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스몰렌스크의 실망, 베레지나 강의 비극, 그리고 군대의 완전한 와해라는 더 끔찍한 운명이었다. 겨울 장군은 나폴레옹의 오만한 도전에 대해 냉혹한 복수를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약 19,000자) -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 러시아군/코사크 추격, 나폴레옹 심리 묘사 심화, 샤를/피에르 경험 구체화 등 추가 필요

 

 

 

 

 

 

 

 

 

 

 

 

 

 

 

 

제176장: 죽음의 행군, 얼어붙은 눈물

<1812년 11월, 러시아 퇴각로 / 스몰렌스크 주변 / 프랑스군 야영지 / 에티엔 드샹의 기록(상상 또는 간접 인용)>

(알랭 마르탱)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1812년 11월, 러시아의 눈 덮인 벌판을 헤치며 서쪽으로 향하던 나폴레옹 군대의 퇴각로는 그 질문에 대한 가장 끔찍한 답을 보여주는 듯했다. '겨울 장군'의 본격적인 공세 앞에서 '위대한 군대'는 문자 그대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굶주림은 극에 달했고, 추위는 뼈를 파고들었으며, 질병은 살아남은 자들의 마지막 남은 기력마저 앗아갔다. 이것은 더 이상 군대의 행군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유령들의 행렬, 인간 존엄성이 완전히 짓밟히는 생지옥의 현장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의 기록 속에는 이 시기 참상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없지만, 그는 분명 파리에서 들려오는 소문과 살아 돌아온 병사들의 증언을 통해 그 비극의 깊이를 통감했을 것이다. 나는 베테랑 병사 피에르 뒤퐁의 시선을 통해, 인간이 어디까지 비참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극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으려는 본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그려보고자 한다.

<러시아 퇴각로, 스몰렌스크를 향하여>

눈보라는 며칠 밤낮으로 멈추지 않고 몰아쳤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 피에르 뒤퐁은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은 이미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고, 누더기가 된 군화 속에서 동상으로 검게 변해가고 있을 터였다. 옆에서 걷던 동료가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졌다. 피에르는 잠시 멈춰 섰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쓰러진 동료를 부축할 힘도,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낙오는 곧 죽음이었다. 길가에는 이미 수많은 동료들의 얼어붙은 시신들이 눈 속에 반쯤 묻힌 채 널려 있었다. 마치 끔찍한 이정표처럼.

굶주림은 이제 고통을 넘어 광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배급은 완전히 끊겼고, 병사들은 닥치는 대로 먹을 것을 찾아 헤맸다. 죽은 군마의 시체는 발견되자마자 달려드는 병사들에 의해 순식간에 해체되었다. 얼어붙은 말고기를 날로 씹어 먹으며 피에르는 이것이 자신이 아는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는 더 끔찍한 소문들이 떠돌았다. 죽은 동료의 인육을 먹었다는 이야기, 심지어 살아있는 부상병을… 피에르는 애써 그 소문들을 외면하려 했지만, 굶주림이 극에 달했을 때 자신 안에도 그런 끔찍한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안 돼, 나는 아직 인간이다!’ 그는 속으로 절규했다.

질병 역시 죽음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이질과 장티푸스는 멈추지 않았고, 동상과 저체온증은 수많은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에티엔 드샹이 만약 이곳 야전 병원에 있었다면(혹은 그의 조카 샤를이 후송되기 전 마지막으로 목격했다면), 그는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약품은 바닥났고, 의무관들도 지쳐 쓰러지거나 병에 걸렸다. 부상병들은 치료는커녕 기본적인 위생 관리조차 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에티엔의 기록에는 아마도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이곳은 병원이 아니라 죽음을 기다리는 대기실이다. 의술은 무력하고, 신의 자비마저 얼어붙은 듯하다. 혁명의 이름으로 시작된 이 원정은 결국 인간을 어디까지 타락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끔찍한 실험장이 되고 말았다.”

군대의 규율은 완전히 사라졌다. 장교들은 더 이상 병사들을 통제하지 못했고, 병사들 역시 상관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오직 생존 본능만이 지배하는 무법 상태였다.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얼마 남지 않은 식량이나 옷가지를 빼앗았고, 병사들은 서로를 불신하며 경계했다. 피에르는 한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던 전우들이 짐승처럼 변해가는 모습에 깊은 슬픔과 혐오감을 느꼈다. 그는 낡은 배낭 속에 간직하고 있던 아내의 작은 초상화를 꺼내 보았다. 그 온화한 미소가 지금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보여 그의 눈가에는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얼어붙은 눈물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스몰렌스크에 도착했다. 많은 병사들이 이곳에 도착하면 식량과 보급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파괴된 도시와 텅 빈 창고, 그리고 실망감뿐이었다. 후퇴하는 러시아군이 이곳마저 철저히 파괴하고 떠났던 것이다. 병사들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군대의 형태마저 와해되기 시작했다. 일부 병사들은 더 이상 행군을 포기하고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고, 또 다른 일부는 탈영하여 제 살길을 찾아 흩어졌다.

피에르는 스몰렌스크의 폐허 속에서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절망감 속에서 거의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같은 중대 소속의 늙은 하사관이었다.

"정신 차리게, 뒤퐁! 여기서 죽을 셈인가? 아직 갈 길이 멀어. 황제 폐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걸세!"

피에르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황제 폐하…? 그분은 이미 우리를 잊으셨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아닐세! 황제 폐하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걸세! 어서 일어나게!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일 뿐이야!" 하사관은 피에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피에르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다시 일어섰다.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 고향에 대한 그리움? 아니면 그저 살아남고 싶다는 본능? 그는 비틀거리며 다시 서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는 여전히 끝없는 눈밭과 죽음의 그림자가 펼쳐져 있었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얼어붙은 눈물이 지나간 자리에는 희미한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이 죽음의 행군이 남긴 수많은 비극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약 19,000자) - 스몰렌스크 상황 상세화, 병사들 간 다양한 반응(약탈, 이기심, 동료애 등), 에티엔/샤를 기록 연계, 피에르 심리 변화 깊이 있게 묘사 등 추가 필요


제177장: 베레지나 강의 비극, 군대의 와해

(알랭 마르탱) 절망적인 퇴각 행렬의 끝에는 더욱 끔찍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1812년 11월 말, 벨라루스의 베레지나(Berezina) 강. 이곳은 나폴레옹의 '위대한 군대'에게 최후의 심판 장소이자, 제국의 몰락을 상징하는 비극의 무대가 되었다. 러시아 군대의 포위망이 좁혀오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프랑스 군대는 얼어붙은 강을 건너기 위한 필사적인 사투를 벌여야 했다. 공병들의 영웅적인 희생과 나폴레옹의 기만 작전에도 불구하고, 베레지나 강 도하 과정은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적의 공격 속에서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 사건을 "제국의 관 뚜껑에 마지막 못을 박은 비극"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병사 피에르 뒤퐁의 시점을 통해, 이 끔찍했던 베레지나 강의 비극과 '위대한 군대'가 완전히 와해되는 과정을 그려보고자 한다.

<1812년 11월 26-29일, 벨라루스 베레지나 강변 / 스투디안카(Studianka) 근처 임시 다리>

서쪽으로 향하는 퇴각로는 이제 러시아 군대에 의해 거의 차단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남쪽에서는 치차고프(Chichagov) 제독의 군대가, 북쪽에서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장군의 군대가 협공해 오고 있었고, 후방에서는 쿠투조프의 주력 부대가 추격해오고 있었다. 프랑스 군대는 베레지나 강이라는 자연 장애물 앞에서 완전히 포위될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 병력은 전투, 굶주림, 질병, 추위로 인해 이제 수만 명 수준으로 급감해 있었고, 그마저도 대부분 전투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 위기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마지막 남은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치차고프를 속이기 위해 강 하류에서 도하 작전을 준비하는 척 위장했고, 동시에 북쪽 스투디안카 근처의 얕은 여울에 비밀리에 두 개의 임시 목조 다리를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에블레(Eblé)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공병대는 영하의 날씨 속에서 얼음이 떠다니는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어 밤낮없이 다리 건설 작업에 매달렸다. 수많은 공병들이 추위와 과로, 그리고 러시아군의 산발적인 포격 속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그들의 영웅적인 희생 덕분에 11월 26일, 마침내 두 개의 다리가 완성되었다.

피에르 뒤퐁은 지친 몸을 이끌고 베레지나 강변에 도착했다. 강둑에는 이미 수만 명의 병사들과 민간인(군대를 따라온 상인, 여성, 아이들)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임시 다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서둘러! 다리를 건너야 해! 러시아 놈들이 쫓아온다!" 여기저기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병사들은 서로 먼저 다리를 건너기 위해 밀치고 싸우며 아비규환을 벌였다. 다리 위는 사람과 말, 마차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에게 짓밟혔고, 중심을 잃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얼음장 같은 강물 속으로 떨어져 갔다. 강물은 순식간에 시체와 부서진 마차 조각들로 뒤덮였다.

피에르는 이 끔찍한 광경 앞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그를 다그쳤다. 그는 인파를 헤치고 간신히 다리 입구까지 다가갔다. 바로 그때, 강 건너편에서 러시아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포탄이 다리 위와 주변에 떨어지면서 병사들은 더욱 공황 상태에 빠졌다. 피에르는 포탄 파편을 피해 바닥에 엎드렸다가, 다시 일어나 미친 듯이 다리 위를 달렸다. 그는 주변에서 터지는 비명 소리와 포탄 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오직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강 건너편 땅을 밟았을 때, 그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그러나 강을 건너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비극적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 군대의 포위망은 점점 더 좁혀왔고, 다리를 지키던 네(Ney) 원수의 후위 부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나폴레옹은 더 이상의 희생을 막고 주력 부대의 탈출 시간을 벌기 위해, 11월 29일 아침 다리를 폭파하라는 비정한 명령을 내렸다. 아직 다리를 건너지 못한 수천 명의 병사들과 민간인들은 절규하며 강물에 뛰어들거나 러시아 군의 포로가 되었다. 베레지나 강은 문자 그대로 죽음의 강이 되었다.

네 원수는 마지막까지 남아 후위를 지휘하며 경이로운 용맹을 보여주었다. 그는 부하들을 독려하며 러시아군의 추격을 필사적으로 막아냈고, 마지막으로 강을 건넌 뒤 다리가 불타는 것을 확인했다. 그의 영웅적인 분투 덕분에 나폴레옹과 남은 군대의 핵심 병력은 간신히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베레지나 강에서의 참사는 '위대한 군대'가 조직적인 군대로서 완전히 와해되었음을 의미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서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황제의 군대가 아니라, 각자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비참한 난민 무리에 불과했다.

피에르 뒤퐁은 강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는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 동료들을 버리고 왔다는 죄책감과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깊은 절망감을 더 크게 느꼈다. 그의 눈에서는 다시 한번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혹한의 추위 속에서 그것은 곧바로 얼어붙어 버렸다. 베레지나 강의 비극은 나폴레옹 제국의 몰락을 알리는 장송곡과 같았다.

(약 19,000자) - 러시아군 추격 및 포위 과정, 공병대 다리 건설 상세화, 다리 위 아비규환 장면, 네 원수 역할, 나폴레옹의 심리/결단 등 추가 필요


제178장: 황제의 탈출, 신화의 종말

(알랭 마르탱) 지도자는 위기의 순간에 그 진면목을 드러낸다. 베레지나 강에서의 참사 이후, '위대한 군대'는 사실상 소멸했다. 남은 병사들은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러시아군의 추격 속에서 절망적인 퇴각을 계속할 뿐이었다. 바로 이 순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자신의 군대를 버리고, 소수의 측근만을 데리고 비밀리에 파리로 귀환하기로 한 것이다. 그의 결정은 정치적으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파리에서의 정권 안정을 도모하고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황제의 존재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는 자신의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친 '탈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 사건은 나폴레옹의 불패 신화에 결정적인 종지부를 찍고, 그의 리더십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제국 몰락을 가속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나는 황제의 비밀스러운 탈출 과정과, 그 소식을 접한 남은 병사들의 반응, 그리고 유럽 전체에 미친 파장을 중심으로 이 '신화의 종말'을 그려보고자 한다.

<1812년 12월 초, 벨라루스 스마르혼(Smorgonie) 근처 / 파리로 향하는 썰매 길 / 남겨진 프랑스군 진영>

베레지나 강을 건넌 이후에도 퇴각은 계속되었다. 추위는 더욱 극심해졌고, 살아남은 병사들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나폴레옹은 더 이상 이 군대를 이끌고 의미 있는 저항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파리에서는 그의 사망설이 퍼지고 말레(Malet) 장군이 쿠데타를 시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비록 실패했지만). 제국의 심장부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러시아 땅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1812년 12월 5일, 스마르혼 근처에서 나폴레옹은 남은 군대의 지휘권을 매제인 뮈라(Murat, 나폴리 왕)에게 넘기고, 콜랭쿠르 등 극소수의 측근과 함께 파리로 향하는 비밀 탈출 길에 올랐다. 그는 병사들에게는 아무런 공식적인 발표도 하지 않았다. 그의 출발은 극도의 비밀 속에서 이루어졌다.

"콜랭쿠르, 내가 파리에 빨리 도착해야만 하네. 프랑스를 안정시키고, 새로운 군대를 일으켜야만 해. 여기서 병사들과 함께 죽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네. 제국이 먼저 살아야 하지 않겠나?" 나폴레옹은 콜랭쿠르와 함께 탄 좁은 썰매 안에서 자신의 결정을 합리화하려 애썼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제국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어쩌면 병사들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자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썰매는 밤낮없이 눈 덮인 길을 달렸다. 그들은 신분을 숨기기 위해 변장했고, 여러 차례 코사크 기병이나 적대적인 주민들에게 발각될 뻔한 위기를 넘겨야 했다. 한때 유럽을 호령했던 황제는 이제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발각의 공포 속에서 도망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 고되고 굴욕적인 여정 속에서 나폴레옹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에티엔은 그의 기록에서 상상력을 발휘한다. "아마도 그는 텅 빈 러시아 설원을 바라보며, 자신의 '운명의 별'이 마침내 빛을 잃어가고 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성공에 대한 오만함과 함께, 실패에 대한 깊은 두려움, 그리고 자신을 따르다 죽어간 수많은 병사들에 대한 일말의 부채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한편, 황제가 떠났다는 소문은 남겨진 군대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믿지 않으려 했던 병사들은 곧 뮈라와 다른 원수들의 모습을 통해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그들의 반응은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완전한 절망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우리를 버리고 가셨다고?" 피에르 뒤퐁은 동료 병사의 말을 듣고 망연자실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황제가 자신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황제에 대한 믿음은 그들이 이 지옥 같은 퇴각을 견뎌내는 마지막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버팀목마저 사라져 버렸다.

"배신자! 그는 우리를 사지로 몰아넣고 혼자 도망쳤다!"

"이제 우린 다 죽었어… 희망은 없어…"

병사들의 절규와 탄식이 눈보라 속으로 흩어졌다. 그나마 유지되던 최소한의 규율마저 완전히 무너졌고, 군대는 그야말로 오합지졸로 변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많은 병사들이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길가에 쓰러져 죽어갔고, 나머지는 러시아 군이나 코사크 기병의 포로가 되었다.

12월 중순, 나폴레옹은 마침내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지치고 초췌했지만, 여전히 황제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원로원과 각료들 앞에서 러시아 원정의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오직 '겨울 장군' 때문이었으며 자신의 군사적 능력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강변했다. 그는 즉시 새로운 군대 징집과 제국 재건을 위한 강력한 조치들을 발표하며 건재함을 과시하려 했다.

"프랑스는 잠시 좌절했을 뿐,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짐은 곧 새로운 군대를 이끌고 다시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유럽 전체에 퍼진 나폴레옹의 참패 소식과 그의 '탈출'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그의 군사적 불패 신화는 완전히 깨졌고, 그의 리더십에 대한 의문과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굴복했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다시 용기를 얻어 반 나폴레옹 연합에 가담할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고, 영국은 대륙에서의 승리를 확신하며 지원을 강화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유럽의 해방자'를 자처하며 군대를 서쪽으로 진격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파리에서 정권을 안정시키고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가 잃어버린 것은 단순한 군대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신화였고, 유럽 전체를 압도했던 그의 권위였다. 황제의 탈출은 나폴레옹 제국 몰락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유럽은 이제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약 18,000자) - 나폴레옹 탈출 과정 긴장감, 썰매 위 심리 묘사, 남겨진 군대 반응 다양화, 유럽 각국 반응, 에티엔 성찰 등 보강 필요


제179장: 해방 전쟁의 불길, 유럽의 총반격

(알랭 마르탱) 불씨는 때를 기다린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라는 거대한 재앙은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유럽 민족들의 저항 의지에 불을 지폈다. 특히 예나 전투의 굴욕 이후 절치부심하며 개혁을 통해 힘을 키워온 프로이센에게는 마침내 복수의 기회가 찾아왔다. 프로이센 군 지휘관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시작된 '해방 전쟁(Befreiungskriege)'의 불길은 독일 전역으로 빠르게 번져나갔고, 러시아, 스웨덴, 영국, 그리고 마침내 오스트리아까지 가세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제 나폴레옹은 프랑스 혼자서 유럽 전체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증조할아버지 에티엔은 이 시기를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뭉친 거대한 파도가 제국의 방파제를 무너뜨리기 시작한 순간"이라고 묘사했다. 나는 망명지에서 돌아와 해방 전쟁에 뛰어든 카를 폰 슈타인(가상 인물)의 뜨거운 열정과 함께, 유럽 전체가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고 총반격을 개시하는 과정을 그려보고자 한다.

<1812년 말 - 1813년 봄, 동프로이센 / 베를린 / 독일 북부 / 러시아/스웨덴/영국/오스트리아 외교 무대>

나폴레옹이 버리고 간 '위대한 군대'의 잔해는 처참했다. 수십만 대군 중 니만 강을 다시 건너 동프로이센 땅으로 살아 돌아온 병사는 불과 몇만 명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대부분 유령 같은 모습이었다. 이 끔찍한 광경은 프로이센 군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동프로이센에 주둔 중이던 프로이센 군단 사령관 요르크 폰 바르텐부르크(Yorck von Wartenburg) 장군은 더 이상 나폴레옹을 위해 싸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국왕의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 러시아군과 타우로겐 협정(Convention of Tauroggen, 1812.12.30)을 맺고 중립을 선언했다. 이는 사실상 프로이센의 반 나폴레옹 노선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처음에는 요르크의 행동에 당황하며 나폴레옹의 보복을 두려워했지만,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강력한 설득과 국내의 뜨거운 애국적 여론에 힘입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1813년 2월,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칼리슈(Kalisch) 동맹 조약을 맺고, 3월 16일 프랑스에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국왕은 "나의 국민들에게(An Mein Volk)"라는 격정적인 호소문을 발표하며 모든 독일인들의 '해방 전쟁' 참여를 촉구했다.

이 소식은 망명지(스위스 또는 러시아)에 있던 카를 폰 슈타인에게 감격적인 낭보였다. 그는 오랫동안 이 날을 기다려왔다. 그는 즉시 프로이센으로 돌아와 해방 전쟁에 투신했다. 그는 대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뤼초프(Lützow) 남작이 이끄는 의용군(Lützowsches Freikorps, 검은 군복에 붉은 견장과 황금 단추 - 훗날 독일 국기 색깔의 기원)에 자원 입대했다. 뤼초프 의용군에는 시인 테오도르 쾨르너(Theodor Körner)를 비롯한 수많은 애국적인 청년 지식인과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군사적 능력은 미미했을지 몰라도, 독일 해방과 통일을 향한 열정은 하늘을 찔렀다.

"형제들이여, 드디어 때가 왔다!" 카를은 훈련장에서 동료 의용군들에게 외쳤다. "우리는 더 이상 책상 앞에서만 독일을 논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피와 땀으로 조국을 해방시키고, 분열된 독일을 하나로 통일할 것이다! 자유와 조국을 위하여!" 그의 목소리는 벅찬 감격으로 떨리고 있었다.

독일 전역이 민족주의적 열정으로 들끓었다. 여성들은 전쟁 기금을 모으고 부상병을 간호했으며, 노인들마저 의용군에 참여하려 했다. 프랑스 지배에 대한 반감과 통일 독일에 대한 열망이 하나로 뭉쳐 거대한 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자신을 '유럽의 해방자'로 여기며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계속 진격했다. 스웨덴 역시 나폴레옹의 옛 원수였던 베르나도트(Bernadotte, 스웨덴 왕세자)의 지휘 아래 동맹에 가담했다. 영국은 막대한 재정 지원과 함께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며 나폴레옹을 양면에서 압박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스트리아의 결정이었다. 메테르니히는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나폴레옹과 연합국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했지만,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의 요구(영토 반환 등)를 거부하자 결국 1813년 8월, 오스트리아마저 제6차 대프랑스 동맹(Sixth Coalition)에 가담하여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이제 나폴레옹은 프랑스 혼자서 유럽 대륙 전체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

에티엔 드샹은 프랑스 국내에서 이러한 국제 정세의 급변을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그는 나폴레옹의 몰락을 예감했지만, 동시에 연합군의 침공과 또 다른 전쟁의 참화를 우려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 낳은 민족주의라는 힘이 이제 부메랑이 되어 프랑스를 겨누고 있음을 통감했다.

"우리가 유럽에 뿌린 자유와 민족의 씨앗이 이제 우리를 향한 총칼이 되어 돌아왔구나. 혁명은 과연 무엇을 남겼는가? 끊임없는 전쟁과 증오뿐인가?" 그의 기록에는 깊은 회의감이 담겨 있었다.

1813년 봄, 나폴레옹은 놀라운 속도로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여 뤼첸(Lützen)과 바우첸(Bautzen) 전투에서 연합군에게 승리를 거두며 건재함을 과시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대부분 경험 없는 신병들이었고, 기병과 포병 전력은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연합군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전열을 재정비하며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유럽 전역에서 모여든 수십만 대군이 독일 중부의 라이프치히를 향해 집결하고 있었다.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전투, '민족들의 전투'가 임박해오고 있었다. 카를 폰 슈타인과 피에르 뒤퐁은 이제 운명의 땅 라이프치히에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게 될 운명이었다.

(약 19,000자) - 요르크 결정 배경, 프로이센 국왕 심리, 카를 의용군 활동 상세화, 오스트리아 참전 결정 과정, 에티엔 성찰 등 추가 필요


제180장: 라이프치히 '민족들의 전투', 결정적 패배

(알랭 마르탱) 역사는 때로 모든 것을 건 거대한 충돌을 통해 시대의 흐름을 결정짓는다. 1813년 10월, 독일 작센 지방의 라이프치히(Leipzig) 평원에서 벌어진 나흘간의 전투는 바로 그러한 순간이었다.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웨덴 등 유럽의 거의 모든 민족이 참여하여 '민족들의 전투(Völkerschlacht)'라는 이름이 붙은 이 거대한 회전은 나폴레옹 전쟁 전체의 향방을 결정짓는 분수령이었다. 나폴레옹은 마지막 남은 군사적 천재성과 병사들의 용맹함에 기대를 걸었지만, 압도적인 수적 열세와 동맹군의 배신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어야 했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 제국의 실질적인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으며, 독일 민족에게는 해방의 감격을, 프랑스 병사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패배의 절망을 안겨주었다. 나는 프로이센 의용군 병사 카를 폰 슈타인과 프랑스 척탄병 피에르 뒤퐁, 그리고 전투를 지휘하는 나폴레옹의 시점을 교차하며, 이 역사적인 대결전의 치열함과 비극성을 그려보고자 한다.

<1813년 10월 16-19일, 독일 작센 라이프치히 근교 평원 및 시내>

1813년 여름의 짧은 휴전은 결렬되었고, 오스트리아마저 동맹에 가담하면서 나폴레옹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렸다.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 오스트리아)가 총지휘하는 연합군은 압도적인 병력(약 36만 명)을 동원하여 라이프치히 근처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약 19만 명)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중앙 위치를 이용하여 연합군을 각개 격파하려 시도했다.

10월 16일, 전투의 막이 올랐다. 라이프치히 남쪽 평원에서 양측 군대는 격렬한 포격전과 함께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카를 폰 슈타인이 속한 뤼초프 의용군은 블뤼허(Blücher) 원수가 이끄는 프로이센 군의 일부로서 북쪽 전선에서 프랑스군과 맞섰다. 카를은 몇 달간의 훈련을 받았지만, 실제 전투는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다. 포탄이 빗발치듯 쏟아졌고, 옆에서 함께 싸우던 친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갔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을 애써 누르고 "조국 독일을 위하여!(Für das Vaterland!)"를 외치며 총을 쏘았다. 그의 가슴속에는 독일 민족 해방이라는 뜨거운 열망이 불타고 있었다.

한편, 남쪽 전선의 프랑스 척탄병 피에르 뒤퐁은 지옥 같은 전투를 다시 한번 겪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에서의 참혹한 경험 이후 다시 징집되어 이곳까지 끌려왔다. 그의 주변에는 대부분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어린 신병들이었다. 그들은 연합군의 압도적인 포격과 끊임없는 공격 앞에서 공포에 떨며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다.

"버텨라! 황제 폐하를 위해 물러서지 마라!" 피에르는 어린 병사들을 독려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절망감이 묻어 나왔다. 그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보급은 형편없었고, 탄약마저 부족했다. 병사들은 굶주리고 지쳐 있었다.

나폴레옹은 중앙 지휘소에서 초조하게 전황을 지켜보며 필사적으로 전세를 만회하려 했다. 그는 여전히 번뜩이는 전술적 지휘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압도적인 병력 차이와 연합군의 끈질긴 공격 앞에서 그의 천재성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믿었던 원수들의 실수와 부진에 분노를 터뜨리기도 했다.

전투는 나흘 동안 이어졌다. 라이프치히 주변의 마을들은 잿더미로 변했고, 평원은 양측 군대의 시신으로 뒤덮였다. 10월 18일,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나폴레옹 군대에 속해 있던 작센(Sachsen) 군대가 전투 중에 갑자기 연합군 편으로 돌아서서 프랑스군에게 총부리를 겨눈 것이다. 동맹군의 배신은 프랑스군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고, 전선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작센 놈들이 배신했다! 우리는 포위됐다!" 절망적인 외침이 프랑스군 진영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카를 폰 슈타인은 작센 군의 합류 소식에 환호성을 질렀다. "보라! 독일 민족이 하나 되어 폭군 나폴레옹에게 맞서고 있다! 우리의 승리가 눈앞에 있다!" 그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돌격했다.

나폴레옹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마침내 10월 19일 새벽, 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퇴각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 이루어졌다. 라이프치히 시내를 통과하여 서쪽으로 향하는 유일한 퇴각로인 엘스터(Elster) 강 다리는 몰려드는 패잔병들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곧이어 비극적인 다리 폭파 사건(다음 장에서 상세히 다룸)으로 이어지며 프랑스군의 피해를 더욱 키우게 된다.

피에르 뒤퐁은 아비규환 속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져 퇴각 행렬에 합류했다. 그는 흙먼지와 피로 뒤범벅이 된 채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의 눈에는 아무런 희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황제는 또다시 패배했고, 수많은 동료들이 헛되이 죽어갔다. 그는 이제 오직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만을 생각했다.

라이프치히 '민족들의 전투'는 나폴레옹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 전투로 프랑스군은 10만 명 이상의 사상자 및 포로를 냈고, 독일 내에서의 지배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연합군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프랑스 본토를 향해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를 폰 슈타인과 독일 민족에게는 해방의 감격과 통일의 희망이 보이는 순간이었지만, 피에르 뒤퐁과 프랑스에게는 제국의 몰락과 끝없는 비극의 시작일 뿐이었다. 나폴레옹의 시대는 이제 저물어가고 있었다.

(약 20,000자) - 각 전선 전투 상황, 지휘관들의 역할, 카를/피에르의 구체적인 전투 경험 및 심리 묘사, 작센군 배신 장면, 나폴레옹의 패배 인정 과정 등 추가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