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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M으로 뽑은 잡지식

허균 - 학산초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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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나의 중형은 논평하기를, 국초 이래 문은 경렴당(景濂堂)을 제일로 치고, 지정(止亭)을 다음으로 치며, 시는 충암(冲庵)의 높음과 용재(容齋)의 난숙함을 모두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나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충암은 세련되지 않은 것 같고 용재는 너무 진부하니, 시 또한 경렴을 으뜸으로 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지정 남곤(南袞)의 자는 사화(士華), 의령인(宜寧人)이며 벼슬은 영의정,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기묘사화 때 간인(奸人)의 괴수이다.

가사(歌詞)를 지으려면 반드시 글자의 청탁(淸濁)과 율(律)은 고하(高下)를 분간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음률(音律)은 중국과 달라서, 가사를 짓는 이가 없다. 공용경(龔用卿)과 오희맹(吳希孟)이 왔을 때,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호)이 차운하지 않자, 세상에서는 체면을 유지했다고들 하였다. 그 후에 소퇴휴(蘇退休)가 시강(侍講)의 운에 차운한 시에,

마음이 서글픈 이 발 걷고 다시 보니 / 傷心人復卷簾看
꽃다운 풀빛 위에 눈길이 멈추네 / 目斷凄凄芳草色
라는 구절은 화공(華公)이 여러 차례 칭찬하였으니, 모두 음률에 맞아서인지, 아니면 다만 그 말씨의 아름다움을 취한 것인지?
소퇴휴의 이름은 세양(世讓), 자는 언겸(彦謙), 진주인(晉州人)이며 벼슬은 찬성(贊成)이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나의 누님이 언젠가 ‘시를 지으면 운율에 맞다’고 차칭하면서 소령(小令)짓기를 좋아하기에, 내 속으로 남을 속이는구나 하였는데, 《시여도보(詩餘圖譜)》를 보니 구절마다 옆에 동그라미와 점으로, 어떤 자는 전청(全淸)ㆍ전탁(全濁)이고 어떤 자는 반청(半淸)ㆍ반탁(半濁)이라 하여 글자마다 음을 달았기에 시험삼아 누님이 지은 시를 가지고 맞추어 보니, 어떤 것은 다섯 자 어떤 것은 세 자의 착오가 있을 뿐, 크게 서로 어긋나거나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제야 걸출ㆍ고매한 천재적인 소질로 겸손하게 힘썼기 때문에 많은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이처럼 성취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어가오(漁家傲)’ 한 편은, 모조리 음율에 맞고 다만 한 자가 맞지 않았다. 사(詞)는 다음과 같다.
뜰에는 봄바람 스산하고 / 庭院東風惻惻
담머리엔 한그루 배꽃 희어라 / 墻頭一樹梨花白
옥난간에 기대어 고향 그리나 / 斜倚玉欄思故國
갈 수는 없고 / 歸不得
하늘과 맞닿은 우거진 꽃다운 풀빛만이 / 連天芳草凄凄色
비단방장 비단창도 쓸쓸히 닫겼는데 / 羅幙綺窓隔寂寞
단장한 얼굴에 두 줄기 눈물 붉은 가슴 적시네 / 雙行粉淚霑朱臆
강북과 강남은 무성한 나무가 가리었는데 / 江北江南煙樹隔
이 그리움 어이하리 / 情何極
산 높고 물은 아득 님 소식은 없으니 / 山長水遠無消息
‘주(朱)’ 자는 마땅히 반탁(半濁) 글자를 써야 하는 자리인데 ‘주(朱)’ 자는 전탁(全濁)이다. 하긴 소장공(蘇長公) 같은 재주로도 굳이 운율에 맞추지를 않았거든 하물며 그만 못한 사람일까보냐.

나의 중형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쓸쓸한 들에 북두성 자루는 드리웠고 / 斗柄垂寒野
부서진 배 여울 모래에 놓였구나 / 灘沙閣敗船
이것을 소재(蘇齋) 상공이 몹시 칭찬하여 당인(唐人)에 못지않다고 하였다.

나의 중형의 산역에 살다[居山驛]라는 시는 이러하다.
새벽 별빛 아래 먼 길 떠나는 고각 소리 들리는데 / 長路鼓角帶晨星
터벅터벅 청주 고역정으로 향한다 / 倦向靑州古驛亭
나하동 그윽하고 산은 웅기중기 / 羅下洞深山簇簇
시중대(侍中臺)를 감도는 바다는 아득아득 / 侍中臺廻海冥冥
천년 전 부러진 창 모래에 묻혀 짧고 / 千年折戟沈沙短
십리 황무지는 비 온 뒤에 비린내 나네 / 十里平蕪過雨腥
옛일은 아득해라 물을 데 없고 / 舊事微茫問無處
두어 가락 젓대 소리 차마 어이 들을 건가 / 數聲橫笛不堪聽
삭계례(朔啓例)에 따라 그 시가 대궐에 들어가니, 주상이 보고 몇 번이나 감탄하고는 오륙구(五六句)에 이르러서는,
“작구법(作句法)이 의당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조사(詔使) 황번충(黃樊忠)이 거련관(車輦館)의 반송(蟠松)을 읊었는데, 그 맨 끝구에 한(韓) 자를 압운하니, 나의 중형이 한 선자(韓宣子)가 각궁(角弓)을 읊은 일을 인용하여 짓기를
도리어 노 나라 가수(嘉樹)처럼 / 還同魯嘉樹
북돋아 길러서 한 선자를 잊을쏜가 / 封植敢忘韓
라 하였다. 이숙헌(李叔獻) 선생이 그 당시 원접사였는데 이 시를 버리고 쓰지 않자, 고제봉(高霽峯)이 크게 한탄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홍당릉(洪唐陵)이 몰래 황공(黃公)에게 보이니, 황공이 전편을 손으로 베껴 가져오게 하고는 한동안 고개를 끄덕이었다. 중국 사람은 시의 공정을 아는 것이 이러하다.
숙헌(叔獻)의 이름은 이(珥), 호는 율곡(栗谷), 덕수인(德水人)으로 벼슬은 일상(一相)에 이르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당릉(唐陵)은 당성(唐城)의 잘못인 듯하다. 당성은 역관 홍순언(洪純彦)의 호이다.
율곡(栗谷)의 산중절구는 다음과 같다.
약 캐다 갑자기 길을 잃으니 / 采藥忽迷路
산마다 온통 가을 낙엽뿐 / 千峯秋葉裏
산승이 물 길어 오더니 / 山僧汲水歸
숲가에 피어나네 차 달이는 연기 / 林末茶煙起
성을 나서는 느꺼움[出城感懷]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아득히 사방에는 먹구름만 가득해도 / 四遠雲俱黑
중천엔 해 정히 밝구나 / 中天日正明
외론 신하의 한줌 눈물을 / 孤臣一掬淚
한양성 향하여 뿌리노라 / 灑向漢陽城

근세 어떤 선비가 지리산(智異山)에 유람갔는데, 한 외진 숲에 이르니, 폭포는 이리저리 흐르고 푸른 대 우거진 가운데 한 띳집이 있는데,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섰다가, 선비를 보고는 몹시 반기며 손을 맞아 솔 아래 앉혀 놓고 막걸리에 나물국으로 대접하고는 말하기를,
“이 늙은 것이 평소에 머리 빗기를 좋아하여 하루에 꼭 천 번은 빗어내린다오.”
하면서 쪽지를 내어 놓는데, 그 속에 든 것이 바로 머리를 빗는다는 소두시(梳頭詩)였다.
얼레빗으로 솰솰 가려 낸 다음 참빗으로 훑되 / 木梳梳了竹梳梳
천 번이나 훑어내니 이는 벌써 없어졌네 / 梳却千廻蝨已除
어떻게 하면 만 길 되는 큰 빗 구하여 / 安得大梳長萬丈
백성의 이 모조리 훑어 없앨꼬 / 盡梳黔首蝨無餘
선비가 자신도 모르게 뜰 아래 내려가 절하고 그 이름을 물으니 숨기고 알려 주지 않았다. 이튿날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는 두세 사람이 같이 다시 찾아가보니 집은 그대로 있었으나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성혼 호원(成渾浩原 호원은 자) 선생이 청양군(靑陽君)을 애도한 시에,
속세에 벼슬살이 진정 뉘가 참인고 / 宦遊浮世定誰眞
역려에서 만나니 바로 친구일레 / 逆旅相逢卽故人
오늘의 이별 자리 한 가락 노래로 / 今日祖筵歌一曲
고향 봄동산에 가서 누울 그대 전송하네 / 送君歸臥舊山春
하였으니, 이른바 길게 읊는 가락의 서글픔이 통곡보다 더하다는 게 바로 이것이 아닌가?
선생의 호는 우계(牛溪)이고 창녕인(昌寧人)이다. 벼슬은 참찬(參贊)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庵)이며, 청송인(靑松人)으로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차천로 복원(車天輅復元 복원은 자)의 글은 당시 사람들이 웅문(雄文)이라 일컬었다. 글(文)이란 기(氣)로써 주를 삼아야 하건만 복원(復元)은 하찮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았고, 사륙문(四六文)은 전아(典雅)해야 하는데도 복원의 사륙문은 순정치 못하고 거칠다. 시는 그보다 더 못하다. 그의 일본기행고(日本紀行稿)가 매우 많아 천여 수나 되지만, 읊을 만한 글귀는 하나도 없다. 다만 명천(明川)으로 귀양 갈 때 지은
하늘가에 성난 소린 발해의 파도 / 天外怒聲聞渤海
눈속에 시름겹긴 음산의 빛이로다 / 雪中愁色見陰山
라는 구절은 정말 웅혼(雄渾)하다. 그러나 전편이 다 그렇지는 못하다. 만약 복원이 조금만 사리를 추구하여 많이 짓거나 빨리 짓는 데 치우치지만 않았다면, 고인의 경지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천로(天輅)의 호는 오산(五山)이며, 연안인(延安人)으로 벼슬은 봉정(奉正)이다.

복원(復元)이 이필이 형산에 돌아가기를 비는 표[李泌乞還衡山表]를 지었는데,
객성이 임금자릴 여러번 침범하고 / 屢犯客星於帝坐
늘 경월이 천혼을 두드렸네 / 常叩卿月於天閽
라는 구절이 있어 세상에서 적절하다고 일컬었다. 우리 중형이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가는 윤칠계(尹漆溪)를 보내는 시의 항련(項聯)에 역시
경월이 잠시 대궐을 하직하자 / 卿月暫辭天北極
복성이 먼저 낙동강을 비추누나 / 福星先照洛東江
라는 구절이 있으니, 차천로의 표에 비하면 나은 것 같다.
칠계(漆溪)의 이름은 탁연(卓然),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이며 칠원인(漆原人)으로 벼슬은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한익지(韓益之)가 어떤 일로 파직되어 농사를 짓기로 하고 온 식구가 원주로 내려갔다. 배가 종실(宗室) 순치수(順致守)의 별장에 닿았는데, 수(守)는 마침 활을 쏘고 약을 캐던 터라 사람을 달려 보내어 누구냐고 물어왔다. 익지(益之)는 대답을 하지 않고 절구 한 수로 대구하기를
공자의 풍류가 무리에 뛰어나니 / 公子風流自不群
봄이 오자 살구꽃 마을에 낚시질하네 / 春來漁釣杏花村
쪽배 탄 나그네가 정겹게 문안드리니 / 扁舟過客勤相問
이 사람은 금양의 옛 원이라오 / 我是衿陽舊使君
라 하자 수가 배를 타고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그때 한익지는 금천 군수로 있다가 파면되어 가는 중이고, 순치(順致)는 금천에 은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익지(益之)의 이름은 준겸(浚謙), 호는 유천(柳川)이다. 청주인(淸州人)으로 벼슬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며, 인조의 장인이다.

이익지(李益之)가 최가운(崔嘉運)을 따라 영광(靈光)에 노닐 적에, 사랑하는 기생이 있어 자금(紫錦)을 사주려는데, 그 비단 살 돈을 마련할 수 없어, 익지가 시로써 다음과 같이 빌었다.
장사아치 강남 저자에서 비단을 파니 / 商胡賣錦江南市
아침 해가 비치자 자주빛 안개가 피어나는구나 / 朝日照之生紫煙
미인은 그걸 사서 치마며 허리띠를 만들려는데 / 美人欲取爲裙帶
주머니 더듬어야 돈은 없구려 / 手探囊中無直錢
가운(嘉運)이 말하기를,
“손곡(蓀谷)의 시는 한 자가 천금이니 감히 비용을 아끼랴.”
하고는 한 자에 각각 세 필씩 쳐서 그 요구에 응해 주었으니, 그 재주를 아낌이 이와 같았다.

동파(東坡)의 시에
슬프다 사하 물가 십리의 봄 / 惆悵沙河十里春
한 차례 꽃 이울자 다음 꽃 새로워라 / 一番花老一番新
비낀 저녁 놀에 작은 누각 예 같건만 / 小樓依舊斜陽裏
그 당시 춤추던 이 어디 갔는지 / 不見當時垂手人
라는 것이 있는데, 손곡(蓀谷)이 죽은 아내를 슬퍼한 시에도 또한 동파의 말을 답습했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깁 방장엔 향내 가시고 거울엔 먼지 / 羅幃香盡鏡生塵
닫힌 문엔 복사꽃만 쓸쓸한 봄날 / 門掩桃花寂寞春
작은 누각엔 옛날처럼 달은 밝은데 / 依舊小樓明月在
발 걷고 달 즐길 이 그 누구런가 / 不知誰是捲簾人
이 시는 무르녹게 곱고 정겨워 전사람의 말을 쓴 줄도 모를 정도다. 익지(益之)가 기생을 너무 좋아한 것으로 남에게 비방을 받으면서도 정에 끌린 것이 이러하단 말인가.

당 나라 장우(張祐)와 최애(崔涯)가 창루(娼樓)에 제시(題詩)를 해 주었는데, 만약 칭찬을 하면, 네 말[馬]이 끄는 수레가 그 문을 메우고, 그 시가 기생을 헐뜯으면 손님도 끊겼다. 신차소(申次韶) 선생이 상림춘(上林春)이라는 기생에게 준 시에
제오교 머리에 내 낀 버들 비꼈고 / 第五橋頭煙柳斜
밤들자 바람 자고 날씨도 해맑아라 / 晩來風日轉淸和
노르스름한 열두 난간에 아가씨 옥과 같으니 / 緗簾十二人如玉
대궐 안 시인들도 말 가는 대로 찾아드네 / 靑瑣詞臣信馬過
라 하니, 기생의 명성은 이로 인해 십배나 올랐다. 이익지(李益之)가 옥하선(玉河仙)이란 기생을 비웃기를
빗자루 같은 머리털 그나마 센데다가 / 頭如刷箒色如銀
암말 않고 앉은 꼴 귀신 같구나 / 黙坐無言似鬼神
몸에 걸친 비단옷도 얻어 입은 듯 / 遍身綺羅疑借著
고작해야 곽충륜에게나 시집가겠군 / 只宜終嫁郭忠輪
이라 하였다. 충륜(忠輪)은 장님인데 돈은 있었다. 이 기생은 유명했었으나 익지(益之)의 시가 나오자 문득 그 집이 쓸쓸해졌다. 똑같이 이름난 기생이로되, 한 시로 그 값을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있었으니, 어찌 다만 기생뿐이겠는가? 대개 선비도 이와 같았다.
차소(次韶)의 이름은 종호(從護), 호는 삼괴(三魁)로 고령인(高靈人)이다. 벼슬은 예조 참판에 이르렀는데, 연경에 사신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송도에서 죽었다.
삼괴(三魁)의 상춘(傷春) 절구에
한 사발 차 마시자 졸음 막 깨니 / 茶甌飮罷睡初醒
이웃에서 들려오는 붉은 옥피리 소리 / 隔屋聞吹紫玉笙
제비도 오잖고 꾀꼬리도 날아갔는데 / 燕子不來鸎又去
뜰에 가득 붉은 꽃잎만 지네 소리도 없이 / 滿庭紅花落無聲
라는 시가 있다.

임자순(林子順)은 스스로 소치(笑癡)라 호하였다. 우리 중형이 언젠가 기생들의 고사를 모아 글을 지었는데, 화치(和癡)의 고사를 따서 이십사령(二十四令)을 지었다. 자순(子順)이 칠언시로 제하기를
추리고 가린 명기 스물넷인데 / 揀得名花二十四
소치의 차지는 하나도 없네 / 笑癡之物一無之
인간 만사 다 거짓이라고 / 人間萬事皆虛僞
곳곳마다 풍류랑은 소치라 말들 하네 / 處處風流說笑癡
라 하였는데, 그의 글은 흔히 볼 수가 없다. 이른바 《수성지(愁城志)》라는 것은 문자가 생긴 이래로 특별한 글이니, 천지간에 절로 이런 문자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익지(益之)의 시를 세상 사람들은 기생에 대한 실수 때문에 트집을 잡지만, 그의 동산역시(洞山驛詩)에
이웃집 어린 며느린 저녁거리도 없어 / 隣家少婦無夜食
비맞으며 보리 베어 풀섶길로 돌아오네 / 雨中刈麥草間歸
축축한 생솔가지 불도 안 붙는데 / 靑薪帶湿煙不起
문 들어서자 어린 것들 옷 잡고 칭얼대네 / 入門兒女啼牽衣
라 하였으니, 시골 살림의 식량 딸리는 보릿고개 실정을 직접 보는 듯하다. 그의 이삭줍기노래[拾穗謠]에는
논에서 이삭 줍는 어린이 하는 말 / 田間拾穗村童語
온 종일 이리저리 주워야 소쿠리도 안 차요 / 盡日東西不滿筐
올해는 벼 베는 이 솜씨 하 좋아 / 今歲刈禾人亦巧
한톨이라도 흘릴세라 관창에 다 바쳤대요 / 盡收遺穗上官倉
라 하였으니, 흉년에 시골 사람의 말을 마치 친히 듣는 듯하다. 영남도중(嶺南道中)이란 시에서는
영감은 솥 지고 숲길로 가버렸는데 / 老翁負鼎林間去
할멈은 어린 것을 데리고 따라가질 못하네 / 老婦携兒不得隨
사람 만나 떠돌아다니는 괴로움 넋두리하되 / 逢人却說移家苦
종군하기 육년이라 부자도 이별이라오 / 六載從軍父子離
라 하였으니, 부역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살 수 없어 유리 신고하는 모습이 한편에 갖추 실려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이 시를 보고 가슴 아파하며 놀라 깨달아, 고달프고 병든 자를 어진 정치로 잘 살게 한다면, 그 교화에 도움됨이 어찌 적다 할 것인가. 문장을 지음이 세상 교화와 관계가 없다면 한갓 짓는데 그칠 뿐일 것이니, 이러한 작품이 어찌 소경의 시 외는 소리나 솜씨 있는 간언보다 낫지 않겠는가.

이망헌(李忘軒 망헌은 이주(李冑)의 호)이 진도(珍島)로 귀양 갈 때, 이낭옹(李浪翁 낭옹은 이원(李黿)의 자)을 작별하는 시에
바닷가 정자에 가을밤도 짧은데 / 海亭秋夜短
이번 작별에 새삼 무슨 말 할꼬 / 一別復何言
궂은비는 깊은 바닷속까지 연하였고 / 怪雨連鯨窟
험상궂은 구름은 변방에까지 이었네 / 頑雲接鬼門
흰 구레나룻에 파리한 안색 / 素絲衰鬢色
두려운 눈물 자국 적삼에 그득 / 危涕滿痕衫
이소경(離騷經)의 말을 가지고 / 更把離騷語
그대와 꼼꼼히 따질 날 그 언제런가 / 憑君欲細論
라 하였다. 그가 제주도로 이배(移配)될 제, 배가 막 뜨려는데 친동생이 뒤쫓아 왔다. 떠나면서 시 한 수를 읊어 작별하기를
찌걱거리는 노 굳이 멈추고 한평생을 서러워하니 / 强停鳴櫓痛平生
백일은 밝게밝게 우리 형제를 비추네 / 白日昭昭照弟兄
정위새 와서 바다를 메우기만 한다면 / 若敎精衛能塡海
한 덩이 탐라도를 걸어서도 가련만 / 一塊耽羅可步行
하였으니 천년 뒤에도 읽는 이의 애를 끊어지게 하리라. 김경림 명원(金慶林命元 경림은 봉호)이 우리 형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낭옹(浪翁)의 이름은 원(黿), 호는 재사당(再思堂)이며, 경주인(慶州人)이다. 벼슬은 예조 정랑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장류(杖流)되었고, 갑자년에 원통하게 죽었다. 망헌(忘軒)의 아우의 이름은 여(膂), 자는 홍재(弘哉)이고 벼슬은 수찬(修撰)에 이르렀다. 명원(命元)의 자는 응순(應順), 호는 주은(酒隱)이고 경주인이다.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우리 형의 이름은 성(筬), 자는 공언(功彦)인데 벼슬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호는 악록(岳麓)이다.
망헌(忘軒)의 만성시(漫成詩)에
나이 드니 풍상은 두렵기만 하고 짓궂은 병은 더욱 떠날 줄 모르는데 / 老怯風霜病益頑
외로운 처마 아침해에 포단에 앉았네 / 一簷朝旭坐蒲團
이웃 중이 가버린 뒤 사립 다시 닫았는데 / 隣僧去後門還掩
산구름만 돌난간을 스쳐 지날 뿐 / 只有山雲過石欄
이라는 것이 있다. 중에게 준[寄僧] 시는 또 다음과 같다.
종소리는 달을 두드려 가을 구름에 지고 / 鍾聲敲月落秋雲
산비는 주룩주룩 그대는 안 보이네 / 山雨翛翛不見君
염정은 닫히고 불길만 보이는데 / 鹽井閉門唯有火
개울 너머 인기척 밤깊도록 두런두런 / 隔溪人語夜深聞

한 경홍 호(韓景洪濩)는 글씨를 잘 쓸뿐더러 시도 잘 지었다. 그러므로 한경당(韓敬堂 경당은 한세능(韓世能)의 호)ㆍ등북해(滕北海 북해는 등계달(滕季達)의 호)ㆍ황규양(黃葵陽 규양은 황홍헌(黃洪憲)의 호)이 모두 그를 시인으로 대접했다. 임궁아집시(琳宮雅集詩)를 경홍(景洪)에게도 운을 화작하게 하였으니, 중국인이 그를 중히 여기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언젠가 《봉주집(鳳洲集)》을 보니, 한 태사(韓太史)의 《동행록(東行錄)》에 발문을 지은 것이 있는데, 거기에서 한석봉(韓石峯)의 글씨를 칭찬하되 액자(額字)는 양속(羊續)보다 나아서 성난 사자가 돌을 후벼대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였고 해서(楷書)는 왕헌지(王獻之)와 비슷하고 초서(草書)는 바로 회소(懷素)와 같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경홍을 잘 알아주었다고 하겠다.
다른 책을 상고하면 호(濩)의 자는 경호(景浩)인데, 여기서 경홍(景洪)이라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혹은 자가 둘인지?
근세에 이현욱(李顯郁)이라는 이가 있어 시마(詩魔)에 걸렸는데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호) 상공(相公)은 그런 줄도 모르고 굉장히 칭찬을 하였다. 이익지(李益之)가 어느 날 상공을 뵈러 가니 상공은 현욱(顯郁)의 시를 보여주며 그에게 고하(高下)를 품평케 하였다. 그러자 이익지는
봄이 오는 걸음걸인 느릴 것도 없고 서두는 것도 아닌데 / 步復無徐亦不忙
봄빛은 동서남북으로 고루 비치네 / 東西南北遍春光
라는 구절을 들어,
“이것은 정말 문장가의 말투입니다. 우리나라 서ㆍ이(徐李) 같은 분도 일찍이 이런 말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나이도 어리니 필경 시마(詩魔)가 붙은 것입니다.”
하였지만, 상공은 그렇게 여기질 않았으나 얼마 있다가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그가 허영주(許郢州)에게 차운한 시에
봄 산길 외져 돌아가는 나무꾼에게 물으니 / 春山路僻問歸樵
손가락으로 앞산 돌길을 가리키네 / 爲指前峯石逕遙
중도 백운도 어두운 골짜기로 돌아간 뒤 / 僧與白雲還暝壑
달은 푸른 바다 찬 밀물을 따라 오르네 / 月隨滄海上寒潮
세상살이 늙을수록 도무지 믿을 수 없는데 / 世情老去渾無賴
유흥만은 요즘에도 삭을 줄 모르누나 / 遊興年來獨未銷
둘러보니 외로운 배 벌써 자취 아득한데 / 回首孤航又陳迹
물 건너 드문 종소리만 한밤에 은은해라 / 疏鐘隔渚夜迢迢
라 하였고, 이익지에게 차운한 시는 다음과 같다.
바람에 휘몰려 놀란 기러긴 편편한 모래밭에 내려앉고 / 風驅驚雁落平沙
물맵시 산빛엔 어스름 빛 자욱해라 / 水態山光薄暮多
용면(龍眠)시켜 이 경치 그림폭에 옮기려 하는데 / 欲使龍眠移畫裏
고깃배의 젓대소린 이를 어쩐다지 / 其如漁艇笛聲何
말들이 모두 속기가 없고 격이 또한 노숙하다. 시마(詩魔)가 떠난 뒤로는 일자무식이 되어 마치 추매(椎埋)처럼 되어버렸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자는 여수(汝受)이고 한산인(韓山人)인데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다.

📖 [현대어 완역]

조선 초기 문장의 대가들에 대한 평가
나의 둘째 형님(하곡 허봉)은 조선 건국 이래의 문장을 논평하시며, "산문은 경렴당(고려 말의 대학자 이색)을 최고로 치고 지정(남곤)을 그다음으로 친다. 반면, 시는 충암(김정)의 높은 격조와 용재(이행)의 무르익은 솜씨를 도무지 따라갈 자가 없다"고 평가하셨다.
하지만 나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약간 다르다. 충암 김정의 시는 어딘가 세련되지 못한 구석이 있고, 용재 이행의 시는 너무 진부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시에 있어서도 산문처럼 경렴당 이색을 으뜸으로 치는 것이 옳을 듯싶다.
(참고로 지정 남곤은 자가 사화이며 의령 사람이다.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인데, 역사적으로는 조광조 일파를 죽인 기묘사화 때 간신들의 우두머리였다.)

허난설헌의 놀라운 천재성
중국의 시 양식인 가사(歌詞, 노랫말이 되는 시)를 지으려면 반드시 글자 발음의 맑고 탁함(청탁)을 따지고, 음률의 높고 낮음(고하)을 엄격히 분간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음률은 중국과 달라서 이 규칙에 맞춰 가사를 제대로 짓는 이가 거의 없다. 일찍이 명나라 사신 공용경과 오희맹이 조선에 왔을 때, 호음 정사룡 공이 그들의 가사에 차운(운자를 빌려 시를 지음)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함부로 나섰다가 망신당하느니 잠자코 체면을 잘 유지했다"고들 수군거렸다.
그 후에 소세양(소퇴휴)이 명나라 시강의 운에 맞추어 지은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마음 서글픈 사람, 발 걷어 올리고 다시 바라보니 / 아득한 저 슬프고도 꽃다운 풀빛 위에 눈길이 멈추네.

이 구절을 두고 중국 사신 화공이 여러 차례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는데, 과연 그가 중국의 엄격한 음률에 딱 맞아서 칭찬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말씨가 아름다워서 취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소세양의 이름은 세양, 자는 언겸, 호는 퇴휴이며 진주 사람이다. 찬성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이다.)

그런데 나의 누님(허난설헌)은 평소 "내가 시를 지으면 저절로 운율에 딱딱 들어맞는다"고 자신하며 소령(小令, 짧은 가사) 짓기를 즐겼다. 솔직히 나는 속으로 '누님이 남들을 속이시는구나' 하고 반신반의했다.
그러다 훗날 중국의 가사 작법서인 《시여도보》를 구해 보게 되었다. 그 책에는 구절마다 옆에 동그라미와 점을 찍어, 어떤 글자는 완전히 맑은소리(전청)나 완전히 탁한소리(전탁)로 내야 하고, 어떤 글자는 반쯤 맑은소리(반청)나 반쯤 탁한소리(반탁)로 내야 한다는 발음 기호가 세세히 달려 있었다.
나는 시험 삼아 누님이 지으신 가사를 그 책의 규칙에 맞춰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긴 시에서 겨우 세 글자에서 다섯 글자 정도의 착오가 있을 뿐, 까다로운 중국의 음률 규칙과 크게 어긋나거나 잘못된 곳이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제야 우리 누님이 얼마나 고매하고 걸출한 천재적 소질을 지녔는지, 따로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이 엄청난 경지를 이뤄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특히 누님이 지은 <어가오(漁家傲)>라는 작품은 모조리 음률에 완벽히 들어맞고, 단 한 글자만 규격에 맞지 않았을 정도다. 그 가사는 이러하다.

뜰에는 봄바람 서늘하게 불어오고 / 담장 너머 한 그루 배꽃만 하얗게 피었네.
옥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고향 땅을 그리워하나 / 돌아갈 수는 없고 / 하늘과 맞닿은 무성하고 향기로운 풀빛만 서글프네.
비단 장막, 비단 창문도 쓸쓸히 닫혀 있는데 / 곱게 단장한 뺨 위로 흐르는 두 줄기 눈물, 붉은 가슴을 적시네.
강북과 강남은 아득한 물안개 낀 나무들에 가로막혔는데 / 이내 애끓는 그리움은 어찌 다할꼬.
산은 높고 물은 아득한데, 떠나간 님의 소식은 올 길이 없네.

여기서 '붉을 주(朱)' 자는 규칙상 마땅히 반탁(반쯤 탁한소리) 글자를 써야 하는 자리인데, 누님은 전탁(완전히 탁한소리) 글자를 썼을 뿐이다. 하긴, 송나라 최고의 천재 소동파조차 시를 지을 때 굳이 얽매여 운율을 다 맞추지는 않았거늘, 하물며 그만 못한 평범한 사람들이야 어찌 이 사소한 티를 탓할 수 있으랴!

허봉의 시를 극찬한 선조 임금과 중국 사신
나의 둘째 형님(허봉)이 지은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쓸쓸한 겨울 들판엔 북두칠성 손잡이가 낮게 드리웠고 / 부서진 낡은 배는 여울가 모래톱에 덩그러니 버려져 있구나.

이 구절을 보고 소재 노수신 상공이 "당나라 최고 시인들의 솜씨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형님이 지은 <산중 역참에 머물며(거산역)>라는 시는 이러하다.

새벽 별빛 아래 먼 길 재촉하는 나팔과 북소리 들려오는데 / 지친 몸 이끌고 터벅터벅 청주의 옛 역참으로 향하네.
나하동 골짜기는 그윽하고 산봉우리는 겹겹이 솟았는데 / 시중대(정자 이름)를 휘감아 도는 바다는 아득하기만 하네.
천 년 전 싸움터에 부러진 창은 모래 속에 짧게 묻혔고 / 십 리 길 펼쳐진 황무지엔 비 내린 뒤 피비린내 나는 듯하네.
아득한 옛일은 어디 물어볼 곳조차 없는데 / 서글프게 들려오는 두어 가락 젓대(피리) 소리 차마 어이 들을 건가.

당시 매월 초하루에 임금께 시를 바치는 규례(삭계례)에 따라 이 시가 대궐로 올려졌다. 선조 임금께서 이 시를 보시더니 몇 번이나 깊이 감탄하시고는, 다섯째와 여섯째 구절("천 년 전, 십 리 길")에 이르러 "시 구절을 짓는 법이란 마땅히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크게 칭찬하셨다.

명나라 사신 황번충이 조선의 거련관에 머물 때 뜰의 반송(소나무)을 읊은 시를 지었는데, 그 시의 맨 마지막 운자를 '한나라 한(韓)' 자로 썼다. 이에 나의 둘째 형님이 옛 춘추시대 진나라의 한선자가 각궁(활)을 노래했던 고사를 기막히게 인용하여 이렇게 화답시를 지어 올렸다.

도리어 노나라의 아름다운 나무(가수)처럼 / 정성껏 북돋아 길렀으니 어찌 한선자(韓)를 잊겠습니까.

그런데 당시 조선의 원접사(사신 접대관)로 있던 율곡 이이 선생이 이 시를 보고는 어찌 된 일인지 채택하지 않고 버려버렸다. 이를 본 제봉 고경명 공이 크게 한탄하며 몹시 애석해했다.
그러자 역관 홍당릉이 몰래 명나라 사신 황번충에게 이 시를 보여주었다. 시를 본 황번충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시 전체를 손수 베껴 쓰게 한 뒤, 한참 동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중국인들이 좋은 시의 가치를 공정하게 알아보는 안목이 바로 이러하다!
(율곡 이이 선생의 이름은 이, 호는 율곡, 덕수 사람으로 벼슬이 일인지상(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성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위에서 말한 홍당릉은 홍당성의 잘못된 기록인 듯하다. 당성은 명나라 사신들과 친했던 역관 홍순언의 호이다.)

참고로 율곡 이이 선생이 지은 <산중 절구>는 이러하다.

산에서 약초 캐다 갑자기 길을 잃으니 / 일천 봉우리 온통 가을 낙엽 속이네.
마실 물 길어 돌아가는 산승의 발걸음 뒤로 / 숲 저편 끝에서 몽글몽글 차 달이는 연기가 피어오르네.
율곡 선생이 <한양 성을 나서며 느낀 감회(출성감회)>를 읊은 시는 이러하다.
아득한 사방에는 먹구름만 겹겹이 가득해도 / 중천에 뜬 해는 정히 밝게 빛나누나.
외로운 신하의 애끓는 한 줌 눈물을 / 떠나가는 한양 성을 향해 흩뿌리노라.

머릿니를 빗어내는 지리산 노인
최근 어떤 선비가 지리산으로 유람을 갔다. 외진 숲 깊숙한 곳에 이르니, 폭포가 시원하게 쏟아지고 푸른 대나무가 우거진 곳에 자그마한 초가집이 한 채 있었다.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가 선비를 보고는 몹시 반가워하며 손을 이끌어 소나무 아래에 앉히고는, 막걸리와 산나물국으로 후하게 대접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 늙은이가 평소 머리 빗는 것을 몹시 좋아하여, 하루에 꼭 천 번씩은 빗어 내린다오."
노인이 종이쪽지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는 머리 빗는 것을 빗대어 세상을 풍자한 <소두시(梳頭詩)>가 적혀 있었다.

얼레빗으로 성글게 빗어내고 참빗으로 촘촘히 훑어내어 / 천 번을 빗어 넘기니 머릿니는 이미 다 사라졌네.
어찌하면 만 길이나 되는 저 거대한 빗을 구해다가 / 온 백성의 고혈을 빠는 벌레(탐관오리)들을 모조리 훑어 없앨꼬.

선비는 이 시의 깊은 뜻을 깨닫고 자기도 모르게 마당으로 내려가 큰절을 올리며 노인의 존함을 물었으나, 노인은 끝내 숨기고 알려주지 않았다. 다음 날 선비가 친구들에게 이 신기한 일을 이야기하고는 두세 사람과 함께 다시 그곳을 찾아가 보았다. 하지만 오두막은 그대로인데 노인은 이미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우계 성혼의 애도시
우계 성혼(자는 호원) 선생이 친구 청양군 심의겸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시는 이러하다.

뜬구름 같은 속세의 벼슬살이, 진정 그 누가 참되다 할꼬 / 여관방(이승)에서 잠시 만난 우리가 바로 평생의 벗이었네.
오늘 눈물로 차린 이별의 자리, 애달픈 노래 한 가락 불러 / 고향 봄 산으로 돌아가 영원히 누울 그대를 전송하네.

옛말에 "길게 읊는 가락의 서글픔이 소리 내어 통곡하는 것보다 훨씬 더 슬프다"고 했는데, 바로 이 시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성혼 선생의 호는 우계, 창녕 사람이다. 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문간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청양군 심의겸은 자가 방숙, 호는 손암이며 청송 사람으로 대사헌을 지냈다.)

글의 겉치레만 좇은 차천로에 대한 비판
오산 차천로(자는 복원)의 글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기세가 대단한 '웅문(雄文)'이라며 떠받들었다. 하지만 훌륭한 문장이란 모름지기 내면의 '기운(氣)'을 뼈대로 삼아야 하거늘, 차천로는 그저 남의 하찮은 글귀 부스러기나 주워 모아 겉치레만 꾸몄다. 사륙변려문(넉 자, 여섯 자로 짝을 맞춘 문체)은 마땅히 우아하고 법도가 있어야 함에도, 그의 글은 전혀 순정하지 못하고 거칠기 짝이 없다.
시는 그보다 훨씬 더 형편없다. 그가 지은 <일본기행고>를 보면 시가 무려 천여 수나 되지만, 입에 올려 읊을 만한 제대로 된 구절은 단 하나도 없다. 다만 그가 명천으로 귀양을 갈 때 지은 다음 구절만큼은 예외다.

하늘 저 밖에서 들려오는 성난 소리는 발해의 파도 소리요 / 눈 속에서 시름겹게 보이는 것은 음산의 차가운 빛이로다.

이 구절만큼은 정말 스케일이 크고 웅혼(雄渾)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시 전체가 다 이렇지는 못하다. 만약 차천로가 사물의 이치를 조금만 더 깊이 파고들고, '많이 짓고 빨리 짓는' 얄팍한 속도전에만 치우치지 않았더라면 옛 대가들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차천로의 호는 오산, 연안 사람이며 벼슬은 봉정에 그쳤다.)

언젠가 차천로가 당나라 충신 이필이 형산으로 돌아가기를 간청하는 글인 <이필걸환형산표>를 지었는데, 그 안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낯선 별(객성)이 임금의 자리를 여러 번 침범하고 / 늘 달 같은 충신(경월)이 하늘 문을 애타게 두드렸네.
세상 사람들은 이 구절이 대단히 적절하고 멋지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우리 둘째 형님(허봉)이, 상주 목사로 부임하는 윤탁연(호는 칠계)을 전송하며 지은 시의 한 구절을 보라.
달 같은 충신(경월)이 잠시 대궐을 하직하고 떠나자 / 복을 내리는 별이 먼저 낙동강을 환히 비추누나.
어떤가? 내 눈에는 이 구절이 차천로의 그 잘난 표문보다 훨씬 더 낫게 여겨진다.
(윤탁연의 이름은 탁연, 자는 상중, 호는 중호 내지 칠계이며 칠원 사람이다. 형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헌민이다.)

재치로 신분을 밝힌 한준겸
한준겸(자는 익지)이 어떤 일로 금천 군수 자리에서 파직되었다. 그는 농사나 짓고 살 요량으로 온 식구를 이끌고 원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배가 종실(왕족)인 순치수(금천에 은거하던 왕족)의 별장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에서 활을 쏘고 약초를 캐던 순치수가 사람을 달려 보내 "저 배에 탄 자가 대체 뉘시오?" 하고 물어왔다.
한준겸은 구구절절 대답하는 대신 절구 한 수를 지어 이렇게 대구(對句)를 보냈다.

왕실 공자님의 풍류가 무리 중에 참으로 뛰어나시니 / 봄이 오자 살구꽃 피는 이 아름다운 마을에서 낚시를 즐기시는구려.
쪽배 탄 이 쓸쓸한 나그네에게 정겹게 안부를 물어주시니 / 이 사람은 다름 아닌 옛 금천(금양)의 군수라오.

그 시를 본 순치수가 크게 반가워하며 배를 띄워 다급히 뒤쫓아왔으나, 한준겸의 배는 이미 멀리 떠난 뒤라 미처 따라잡지 못했다.
(한준겸의 이름은 준겸, 호는 유천이며 청주 사람이다. 훗날 영돈녕부사까지 올랐으며 인조의 장인이다. 시호는 문익이다.)

시 한 구절이 천금과 같으니
내 스승 이달(손곡, 익지)이 친구 최경창(고죽, 가운)을 따라 전라도 영광으로 놀러 갔을 때의 일이다. 이달에게 몹시 사랑하는 기생이 하나 생겼는데, 그녀에게 예쁜 자줏빛 비단을 사주고 싶어도 주머니에 돈 한 푼이 없었다. 그래서 이달은 최경창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내며 돈을 빌려달라고 졸랐다.

오랑캐 상인들이 강남 저잣거리에서 고운 비단을 파니 / 아침 해가 비치자 자줏빛 안개가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구나.
어여쁜 미인이 저걸 사서 예쁜 치마와 허리띠를 지어 입으려는데 /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땡전 한 푼 없구려.

이 시를 받아 든 최경창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손곡의 시는 한 글자가 천금의 가치가 있거늘, 내 어찌 감히 그 비용을 아끼겠는가!"
그러고는 시의 한 글자당 비단 세 필씩을 쳐서 그가 요구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비단을 흔쾌히 사주었다. 옛 선비들이 친구의 문학적 재주를 아끼고 사랑함이 이처럼 호탕했다.

기생을 향한 애정, 그 이면의 문학성
송나라 소동파의 시에 이런 명구절이 있다.

슬프구나, 모래강 물가 십 리에 펼쳐진 봄날이여 / 한 차례 꽃이 시들어 떨어지면 또 한 차례 새 꽃이 피어나는구나.
비낀 저녁노을 속에 작은 누각은 옛날 그대로 서 있건만 / 그 옛날 소매 늘어뜨리며 예쁘게 춤추던 그 사람은 보이지 않네.
그런데 내 스승 이달(손곡)이 일찍 죽은 아내를 슬퍼하며 지은 시를 보면, 소동파의 이 구절을 절묘하게 답습하고 있다.

얇은 비단 방장엔 향내 이미 가시고 거울엔 뽀얗게 먼지 앉았는데 / 굳게 닫힌 방문 밖엔 복사꽃만 피어나는 쓸쓸한 봄날이네.
작은 누각엔 옛날처럼 둥근 달만 환히 밝게 떠 있는데 / 발 걷어 올리고 저 달빛 즐길 어여쁜 사람, 대체 그 누구런가.

이 시는 감정이 너무나 무르녹게 곱고 뼈저리게 정겨워서, 읽다 보면 옛사람(소동파)의 시구를 빌려 쓴 줄조차 모를 지경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달이 기생을 너무 좋아하고 여색을 탐한다고 비방하지만, 그의 사랑이란 이토록 애절하고 깊은 정에 이끌린 문학적 감수성이 아니겠는가.

당나라 시대 시인 장우와 최애가 기생집 누각에 시를 지어주면, 그 시에서 기생을 칭찬할 경우 네 마리 말이 끄는 화려한 수레들이 앞다투어 그 기생집 문전을 메웠고, 반대로 기생을 헐뜯으면 당장 손님이 뚝 끊겼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신종호(삼괴, 차소) 선생이 '상림춘'이라는 기생에게 이런 시를 지어준 적이 있다.

제오교 다리 머리에 안개 낀 수양버들 비스듬히 늘어졌고 / 밤 되니 바람 잦아들고 날씨도 해맑아라.
노르스름한 열두 난간에 앉은 아가씨, 그 자태 옥과 같이 어여쁘니 / 대궐 안 콧대 높은 시인들도 말 가는 대로 앞다투어 찾아드네.

이 시 한 수 덕분에 상림춘의 명성은 순식간에 열 배나 치솟았다.
반면, 이달이 '옥하선'이라는 기생의 오만함을 비웃으며 이런 시를 지었다.

빗자루 같은 거친 머리털에 얼굴색은 늙은 은빛인데 / 아무 말 없이 뻣뻣하게 앉은 꼴이 꼭 처녀 귀신 같구나.
몸에 걸친 비단옷도 뉘한테 빌려 입은 듯 어색하니 / 그저 돈이나 쥔 장님 곽충륜에게 시집가는 게 딱 어울리겠군.

곽충륜은 앞 못 보는 장님이었으나 돈은 많은 자였다. 원래 옥하선은 꽤 유명한 기생이었으나 이달의 이 조롱 섞인 시가 세상에 퍼지자, 문득 그 기생집은 파리만 날리며 쓸쓸해지고 말았다. 똑같이 이름난 기생이라도 시인들의 시 한 수로 그 몸값을 하늘로 올릴 수도 있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할 수도 있었다. 어찌 이것이 기생의 운명뿐이겠는가? 당대 문인들의 명성 또한 이처럼 시 한 수에 좌우되곤 했다.
(신종호의 자는 차소, 호는 삼괴로 고령 사람이다. 예조 참판에 올랐으나 중국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오다 송도에서 병사했다. 그가 봄을 슬퍼하며 지은 <상춘> 절구를 보면 "한 사발 차 마시고 졸음 막 깨어나니 /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붉은 옥피리 소리. / 제비는 아직 오지 않고 꾀꼬리마저 날아갔는데 / 뜰에 가득 붉은 꽃잎만 소리 없이 지누나"라는 훌륭한 시가 있다.)

백호 임제(자는 자순)는 스스로를 가리켜 '소치(笑癡, 웃는 바보)'라 불렀다. 언젠가 우리 둘째 형님(허봉)이 유명 기생들의 고사를 모아 글을 짓고, '화치(和癡)'라는 고사를 따서 스물네 곡의 아름다운 노래(이십사령)를 지은 적이 있다. 그러자 임제가 칠언시로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추리고 가려 뽑은 천하의 명기 스물넷이라지만 / 이 웃는 바보(소치)가 차지할 몫은 단 하나도 없구려!
인간 세상 만사가 어차피 다 부질없는 헛것이거늘 / 곳곳의 잘난 풍류객들은 도리어 나를 바보라 비웃네.

임제의 글은 평소 흔히 볼 수가 없는데, 그가 지은 《수성지(愁城志, 근심의 성에 대한 기록)》라는 작품만큼은 문자가 생겨난 이래로 가장 독창적이고 특별한 명작이다. 천지간에 결코 이런 위대한 문자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은 진정한 문학
세상의 꽉 막힌 자들은 이달(익지)의 시를 두고 그가 기생들과 어울린 작은 실수들만 꼬투리 잡아 깎아내리곤 한다. 하지만 그의 <동산역 시>를 한번 보라.

이웃집 젊은 아낙은 당장 오늘 저녁 먹거리조차 없어서 / 비 맞으며 덜 익은 보리 베어 풀섶 길로 돌아오네.
물기 머금은 젖은 생솔가지는 연기만 날 뿐 불길도 안 붙는데 / 문턱 들어서자 굶주린 어린것들 어미 옷자락 쥐고 칭얼대네.

어떤가? 식량이 뚝 떨어져 피눈물 나는 시골 보릿고개의 비참한 실정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지 않는가?
또 그가 지은 <이삭 줍는 노래(습수요)>는 이러하다.

빈 논에서 이삭 줍는 촌아이의 서글픈 넋두리 / "온종일 이리저리 흙바닥 뒤져도 소쿠리 반도 못 채웠어요."
"올해는 관리들 보리 베는 솜씨가 어찌나 기막힌지 / 백성들 주울 한 톨마저 남길세라 관청 창고로 싹싹 긁어갔다오!"

참혹한 흉년에 탐관오리들에게 수탈당하는 시골 백성들의 원망을 곁에서 직접 듣는 듯하지 않은가.
<영남 도중>이라는 시는 또 어떠한가.

늙은 영감은 무거운 솥단지 짊어지고 숲속 길로 떠나갔는데 / 늙은 할멈은 어린 손주 데리고 차마 걸음 못 맞추고 뒤처지네.
길 가다 사람 만나면 집 떠나 떠도는 괴로움 넋두리하네 / "늙은 아비 부역 끌려간 지 벌써 육 년째라 우리 부자 이생에 생이별이라오."

무거운 부역에 허덕이다 끝내 살 곳을 잃고 떠도는 백성들의 끔찍한 참상이 이 짧은 시 한 편에 다 담겨 있다.
만약 백성을 다스리는 위정자들이 이 시들을 읽고 가슴 깊이 아파하며 깨달음을 얻어, 고달프고 병든 자들을 위한 어진 정치를 편다면 그 교화의 공로가 어찌 작다 하겠는가! 문장을 짓는 일이 세상을 올바르게 이끄는 데 쓰이지 않는다면 그저 헛된 글장난에 불과할 뿐이다. 백성의 고통을 대변하는 이달의 이 작품들이야말로, 아무 뜻 없이 옛 시나 달달 외는 장님 같은 선비들이나, 솜씨만 번지르르하게 꾸며댄 간언 따위보다 천 배, 만 배 낫지 않겠는가!

귀양지에서 나눈 형제의 애끓는 이별
이주(호 망헌) 공이 진도로 귀양을 갈 때, 친동생 이원(호 낭옹)과 작별하며 지은 시는 이러하다.

바닷가 정자에 머무는 이 가을밤은 짧기만 한데 / 이번 작별에 새삼 무슨 긴말을 더 나누리오.
궂은비는 고래 사는 깊은 바닷속까지 먹구름을 이었고 / 험상궂은 구름은 귀신 우는 변방 끝까지 닿아있네.
하얗게 세어버린 구레나룻에 파리해진 이내 안색 / 두려움과 한스러움에 흘린 눈물, 적삼을 흥건히 적시네.
굴원의 애달픈 이소경 구절을 다시 부여잡고 / 내 아우 그대와 마주 앉아 꼼꼼히 이치를 따져볼 날, 대체 그 언제런가.

훗날 이주 공이 진도에서 더 먼 제주도로 이배(배소 이동)될 때였다. 배가 막 바다로 떠나려는데, 동생이 피눈물을 흘리며 뱃머리까지 뒤쫓아 왔다. 그때 형 이주가 먼 길을 떠나며 아우에게 읊어준 이별시는 이러하다.

찌걱거리는 뱃노를 억지로 멈춰 세우고 한평생의 이별을 서러워하니 / 저 하늘의 밝은 해는 소소히 우리 형제의 억울함을 비추누나.
전설 속 정위새를 불러내어 이 아득한 바다를 흙으로 다 메울 수만 있다면 / 저 한 덩이 외로운 탐라도(제주)까지 걸어서라도 오가며 널 보련만!

이 시는 천년 뒤에 읽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애간장이 다 끊어지게 만들 만큼 비통하다. (이 이야기는 김명원 공이 나의 맏형 허성에게 직접 들려준 것이다.)
(동생 이원의 자는 낭옹, 호는 재사당, 경주 사람이다. 예조 정랑을 지냈으나 무오사화 때 장을 맞고 귀양 갔으며 갑자사화 때 원통하게 죽었다. 형 이주의 또 다른 동생 이름은 이여, 자는 홍재이며 수찬을 지냈다. 김명원의 자는 응순, 호는 주은 내지 경림, 경주 사람으로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충익이다. 우리 맏형 허성의 자는 공언, 호는 악록이며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참고로 이주(망헌) 공이 지은 <만성시(마음 내키는 대로 지은 시)>는 이러하다.

나이 드니 거센 풍상 두렵기만 하고 짓궂은 병마는 떠날 줄 모르는데 / 아침 해 비치는 외로운 처마 밑 포단(방석)에 홀로 앉았네.
이웃 스님 놀러 왔다 돌아간 뒤 다시 굳게 사립문 닫아거니 / 깊은 산 구름만 차가운 돌난간을 스쳐 묵묵히 지나갈 뿐이네.
스님에게 부쳐준 <기승>이라는 시는 이러하다.
산사 종소리는 허공의 달을 두드려 가을 구름 속으로 흩어지고 / 산비는 주룩주룩 쏟아지는데 그대는 보이지 않네.
소금 굽는 마을 우물문은 닫히고 붉은 불길만 일렁이는데 / 개울 너머 두런두런 인기척 소리 밤깊도록 들려오네.

명나라까지 떨친 한석봉의 천재성
한호(경홍, 자는 경호이며 호는 한석봉)는 붓글씨를 신들린 듯 잘 썼을 뿐만 아니라, 시 짓는 솜씨 또한 대단히 뛰어났다. 그래서 한세능(한경당), 등계달(등북해), 황홍헌(황규양) 같은 콧대 높은 명나라의 대문장가 사신들조차 모두 그를 진정한 시인으로 깍듯이 대접했다. 중국 사신들이 <임궁아집시>라는 시집을 엮을 때 한호에게도 똑같이 운자를 맞추어 시를 짓게(화작) 했을 정도니, 중국인들이 그의 재주를 얼마나 무겁게 여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언젠가 명나라 왕세정의 문집인 《봉주집》을 읽어보니, 한태사가 지은 《동행록》에 발문(추천사)을 쓴 것이 있었다. 거기서 왕세정은 한호(한석봉)의 글씨를 극찬하며 이렇게 썼다.
"그의 액자(큰 현판 글씨)는 한나라 명필 양속보다 뛰어나 흡사 성난 사자가 발톱으로 바위를 후벼 파는 듯 맹렬하고, 해서(반듯한 글씨)는 왕희지의 아들 왕헌지의 경지에 닿아 있으며, 초서(흘림체)는 곧바로 당나라 초서의 달인 회소와 맞먹는다!"
이 평가야말로 한호라는 천재의 가치를 진정으로 알아준 최고의 찬사라 하겠다.
(참고로 다른 기록을 보면 한호의 자가 '경호'로 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서는 '경홍'이라 불렀으니 어느 것이 정확한지 모르겠다. 어쩌면 자를 두 개 썼던 것일지도 모른다.)

시마(詩魔)에 씌었던 사나이, 이현욱
최근 이현욱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시마(詩魔, 시를 짓게 만드는 귀신)'에 단단히 씌어 미친 듯이 시를 쏟아낸 적이 있었다. 당시 영의정 이산해(호는 아계) 상공은 그가 귀신에 씌인 줄도 모르고 그의 시를 엄청나게 칭찬하고 다녔다.
어느 날, 내 스승 이달(익지)이 이산해 상공을 뵈러 갔다. 상공은 자랑스럽게 이현욱의 시를 꺼내 보여주며 이달에게 그 수준을 평가해 보라고 했다. 이달이 시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다음 구절을 짚어내었다.

봄이 오는 걸음걸인 느리지도 서두르지도 않는데 / 화사한 봄빛은 동서남북 온 세상에 고루 비추누나.

이달이 단호하게 말했다.
"상공, 이 시는 진짜 범상치 않은 대문장가의 말투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문장가라 불리는 서거정이나 이행 같은 대가들도 일찍이 이런 기가 막힌 표현은 쓰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현욱은 나이도 어린 애송이 아닙니까? 장담하건대, 이건 필경 그의 재주가 아니라 '시 귀신(시마)'이 들러붙어서 쓴 것입니다!"
상공은 이달의 말을 믿지 않고 코웃음 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달의 말이 무섭도록 사실로 드러났다. 당시 시마에 씌었던 이현욱이 허영주에게 차운하여 지은 시는 이토록 훌륭했다.

봄 산길 워낙 외져 돌아가는 나무꾼에게 길을 물으니 / 손가락 들어 앞산의 아득한 돌길을 가리키네.
스님도 흰 구름도 모두 어두운 골짜기로 깃들어 돌아간 뒤 / 밝은 달빛만 푸른 바다의 차가운 밀물 따라 차오르네.
팍팍한 세상살이 늙어갈수록 도무지 기댈 곳 하나 없는데 / 천지 분간 못하는 유람할 흥취만은 요즘에도 식을 줄 모르누나.
고개 돌려보니 타고 온 외로운 배는 벌써 자취도 아득한데 / 물 건너 드문드문 들려오는 산사 종소리만 한밤에 은은해라.

그가 이달에게 차운하여 지은 시도 이러했다.

매서운 바람에 휘몰려 놀란 기러기 떼, 편평한 모래밭에 다급히 내려앉고 / 잔잔한 물결 맵시와 푸른 산빛 위로 서늘한 어스름 짙어오네.
당나라 최고 화가 이공린(용면)을 깨워 이 절경을 그림폭에 담게 하고 싶건만 / 저기 떠가는 고깃배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젓대 소리는 또 어찌 그려낼 수 있을꼬.

이 시어들은 하나같이 유치한 속기가 전혀 없고, 그 시격 또한 대단히 노숙하다.
그런데 소름 돋게도, 얼마 뒤 그 '시마(귀신)'가 이현욱의 몸에서 홀연히 빠져나가자, 그는 하루아침에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 되어버렸다. 마치 뒷골목에서 주먹질이나 하는 거칠고 무식한 왈패(추매)처럼 변해버렸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산해의 자는 여수, 호는 아계이며 한산 사람이다. 영의정에 올랐다.)


💡 [핵심 해설]
허균은 이 글에서 엄격한 규칙 없이도 중국의 음률을 완벽히 소화해 낸 누이 허난설헌의 천재성을 자랑하는 한편, 겉멋만 부린 주류 문단(차천로 등)을 통렬히 비판합니다. 특히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던 스승 이달의 시 속에 담긴 민중에 대한 깊은 연민을 조명하며, "문학의 진짜 존재 이유는 백성의 고통을 대변하여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는 혁명적인 문학관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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