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성종(成宗) 때 정의 현감(旌義縣監)에 이섬(李暹)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최보(崔溥)보다 앞서 역시 풍랑으로 표류하여 양주부(揚州府) 굴항채(崛港寨)에 닿으니, 채관(寨官)이 가두고 상부에 아뢰어 문초하게 하였다. 이섬이 옥중에서 지은 시에
열 폭짜리 돛폭은 바람도 못 가리고 / 布帆十幅不遮風
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책임자가 보고 그가 해적이 아님을 알아 잘 대우하여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섬(暹)은 무인(武人)이라 전할 만한 여행 기록이나 기사(記事)가 없어 애석하다.
가정(嘉靖) 임술년(1572, 명종17) 간에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호) 정 상공(鄭相公)의 이웃 사람으로 해상(海商)을 업으로 하는 자가 풍랑으로 표류하여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에 닿자, 지부에서는 호패를 근거로 신원을 확인하고 북경으로 보냈다. 북경을 가는 길이 공 천사(龔天使 조선에 사신왔던 공용경(龔用卿))의 집을 지나게 되었다. 공씨(龔氏)는 그때 국자감 좨주(國子監祭酒)로 벼슬을 사직하고 집에 있었다. 조선 사람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역관(譯官)에게 청하여 길을 늦추어 상인과 이야기를 나눈 결과, 상인이 호음의 가계(家系)와 벼슬 지낸 경위를 말하자, 공씨가 크게 놀라 데리고 집으로 가서 처자를 나오라 하여 인사시키고, 호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또 후히 대접하여 보냈으니, 공씨가 호음에게 심복함이 이와 같았다,
장흥(長興) 사람 이언세(李彦世)가 왜인(倭人)에게 사로잡혀 남번(南蕃)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배를 타고 주야(晝夜) 40일을 가서야 중국의 광서(廣西) 향산현(香山縣) 땅에 닿았다. 그는 한 배에 탄 중국 상인에게 물어서 그곳이 명(明) 나라 지방인 것을 알았다. 그는 동반자[火伴]와 함께 밤을 타 도망쳐 그 지방 지현(知縣)에게 호소하니 지현이 처음에는 만인(蠻人)이 올린 고장(告狀)이라고 하여 팽개쳐 버리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며칠을 울부짖으니 그제서야 조사 심문하였다. 이언세는 글을 좀 알았는데 ‘조선국(朝鮮國)의 장흥(長興) 사는 사람으로, 해전을 하다가 왜적에게 사로잡혀 오랑캐 배에 넘겨졌다.’고만 썼다. 그것을 본 지현이 남웅부(南雄府)에 압송하니 삼사관(三司官)이 그 문초에 의거, 북경으로 이송했다. 그때 마침 동지사(冬至使)가 북경에 도착하였으므로, 그 사행과 같이 돌아오게 되었다. 언세는 남창(南昌)과 항주(杭州)ㆍ소주(蘇州)의 풍경이며 북경ㆍ남경의 훌륭한 경치를 말하기는 하나, 자세하지는 못하다.
승지(承旨) 이정립(李廷立)이 지은 표류된 사람들을 돌려보내 준 데 감사하는 표[謝刷還漂海人口表]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만 이랑 파도 헤치고 / 越萬頃之波濤
빛나는 요 임금 땅에 나아갔다가 / 就堯如日
천리라 고향 땅에 돌아오게 되었으니 / 返千里之桑梓
우 임금 같은 임금 아니었던들 고기밥 되었으리 / 微禹其魚
이 글은 대우(對偶)가 적절하고 뜻이 좋다. 전편을 볼 수 없음이 섭섭하다.
이정립(李廷立)의 자는 자정(子正), 광주인(廣州人)으로, 호는 계은(溪隱)이고, 벼슬은 이조 참의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신묘년(1591, 선조24) 겨울에 중국 상인 20여 명이 사탕을 팔다가 우리나라 제주도에 표류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왔었다. 내가 친구와 같이 가서 보고 소주와 항주의 풍속을 물으니, 그 중 한 사람이,
“당신은 외국 사람으로서 어떻게 중국 풍토를 역력히 아십니까?”
하였다. 그 중에 장덕오(莊德吾)란 사람이 있어, 자기 말로 복건(福建) 장포(漳浦) 사람이라 하기에, 내가 시랑(侍郞) 장국정(莊國禎)과 시랑 주천구(朱天球)가 당신의 이웃인가고 묻자 장덕오가 놀라며,
“장 시랑은 저의 당숙(堂叔)이고 주 시랑은 한 동네 사람입니다.”
하였다. 내가 또
“그러면 태사(太史) 장이풍(莊履豊)과 어사(御史) 이명(履明)은 당신 당형제(堂兄弟)이겠구려.”
하자, 덕오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희끼리 이야기하며 껄껄대고 웃었다. 역관이 말하기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기를 ‘수재가 나이 젊어도 중국의 일을 잘 안다고 하더라.’고 했다. 왕신민(王信民)이라는 자가 나에게,
“무슨 벼슬이요?”
하고 묻기에, 무자년에 과거하여 국자감생(國子監生)이 되었다 하니, 왕씨가,
“언제 추천되지요?”
하고 물었다. 대개 중국에서는 국자감 학생이 으레 이부(吏部)에 추천되기 때문에 그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학관(學官) 양대박(梁大樸)은 시를 잘하며 순평하고 전아하였다. 일찍이 자기의 한 연구를 자랑하였는데
산귀신은 밤마다 금정불을 엿보고 / 山鬼夜窺金井火
물새는 가을이라 석당 연기에 잠들었네 / 水禽秋宿石塘煙
하였으니, 시구가 절로 좋다.
대박(大樸)의 자는 사진(士眞), 호는 청계(淸溪) 남평인(南平人)으로 벼슬은 학관(學官)이었다. 임진년 왜란 때 고제봉(高霽峯)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고 무기며 군량을 모두 자기집에서 대었다. 군중에서 병으로 죽자 병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를 충장(忠壯)으로 내렸다.
상사(上舍) 정지승(鄭之升)이 시를 잘했는데 임자순(林子順 자순은 임제(林悌)의 자)의 무리가 몹시 추장하였다. 세상에 전하는 한 편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돋아나는 풀잎 속에 왕손의 한 스며들고 / 草入王孫恨
피어나는 꽃잎따라 두견이 시름을 더하누나 / 花添杜宇愁
물가엔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 汀洲人不見
바람에 목란배만 일렁이누나 / 風動木蘭舟
스님을 전송하다[送僧]란 시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서에서 돌아오고 나는 또 서로 가니 / 爾自西歸我亦西
봄바람 한 지팡이 가는 길은 높고 낮네 / 春風一杖路高低
그 언제 달 밝은 밤 소요사에서 / 何年明月逍遙寺
동녘 숲 두견이 울음 함께 들을꼬 / 共聽東林杜宇啼
또 한 연(聯)은 다음과 같다.
손이 돌아가자 문을 닫으니 남은 건 달빛뿐 / 客去閉門惟月色
꿈 깨자 빈 산엔 흩어지느니 솔바람 소리 / 夢廻虛岳散松濤
그 전집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지승(之升)의 자는 자신(子愼), 호는 총계(叢桂) 온양인(溫陽人)으로 정렴(鄭)의 조카이다. 벼슬은 하지 않았다.
송익필(宋翼弼)이란 자도 시를 잘하니, 그의 산설(山雪)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밤새도록 내린 찬 눈 층대에 수북 쌓였는데 / 連宵寒雪壓層臺
다른 산에 묵은 주승 돌아오질 않았네 / 僧在他山宿未廻
등잔불 깜박이는 작은 절집 신령한 바람 고요한데 / 小閣殘燈靈籟靜
소나무 스쳐오는 밝은 달 홀로 보네 / 獨看明月過松來
구격(句格)이 맑고 뛰어나니, 어찌 사람의 지체로서 어찌 그 좋은 말까지 무시할 것인가.
송익필(宋翼弼)의 자는 운장(雲長), 호는 귀봉(龜峯)으로 흉인(凶人) 사련(祀連)의 아들이다. 본디 사천(私賤)의 자식이나, 문학의 조예가 뛰어나서 우계(牛溪) 성혼(成渾),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서로 친했다. 아우 한필(翰弼)은 자는 사로(師魯), 호는 운곡(雲谷)인데 역시 시를 잘했다. 익필(翼弼)의 저물녘 남계에 배를 띄우다[南溪暮泛]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꽃에 홀려 돌아오기 하마 늦었고 / 迷花歸棹晩
달 뜨기 기다리다 여울 내려오기 머뭇거렸네 / 待月下灘遲
거나한 가운데도 낚싯대 드리우니 / 醉裏猶垂釣
배는 흘러가도 꿈은 그대로 / 舟移夢不移
한필(翰弼)의 우음시(偶吟詩)는 다음과 같다.
어제 비엔 꽃이 피더니 / 花開作日雨
오늘 아침 바람에 그 꽃 지는구나 / 花落今朝風
애닯다 한철 봄이 / 可憐一春事
비바람 속에 오고 가누나 / 往來風雨中
최전 언침(崔澱彦沈 언침은 자)이 신동(神童)이란 이름이 있었다. 어려서 금강산에 노닌 적이 있었는데 그 길로 영동(嶺東) 산천을 구경하고 경포대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봉래산 한번 들어 삼천년을 / 蓬壺一入三千年
은바다 아득아득 물은 맑고 얕아라 / 銀海茫茫水淸淺
난새 타고 피리 불며 오늘 홀로 날아왔건만 / 鸞笙今日獨飛來
벽도화 꽃 그늘에 님은 아니 보이네 / 碧桃花下無人見
중형이 그 시를 매우 칭찬하고 그 운자에 이어 읊기까지 하였는데, 그는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전(澱)의 호는 양포(楊浦)니 해주인(海州人)으로 진사(進士)였다. 양포(楊浦)의 늙은 말[老馬]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늙은 말 솔뿌리 베고 누워 / 老馬枕松根
꿈결에 천리길 가네 / 夢行千里路
가을바람 나뭇잎 지는 소리에 / 秋風落葉聲
놀라 깨니 지는 해가 뉘엿뉘엿 / 驚起斜陽暮
어복등(魚腹燈)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멱라수는 흘러 흘러 끝이 없는데 / 楚水流無極
굴원(屈原)은 불평을 원망했네 / 靈均怨不平
지금 물고기 뱃속에서도 / 至今魚腹裏
속마음 밝은 것은 간직했겠지 / 留得寸心明
금각(琴恪)의 자는 언공(彦恭)이니 봉성인(鳳城人)이다. 중형에게 12세 때 글을 배워 육경(六經)을 통하고 자사제집(子史諸集)을 두루 읽지 않은 게 없었다. 글 짓기를 전중(典重)하고도 온화하고 아름답게 하여 이미 작가가 되었는데 그의 조대기(釣臺記)ㆍ주류천하기(周流天下記)ㆍ한발문(旱魃問) 등의 글이 세상에 전한다. 16세에 해외에 유학하였다. 복충증(腹蟲症)을 얻어 집에 있으면서 《풍창랑화(風牕浪話)》를 지으며 심심풀이로 세월을 보내다가 무자년(1588, 선조21) 가을에 죽었다. 죽는 날에 스스로 명(銘)을 짓기를,
“봉성인(鳳城人) 금각(琴恪) 자(字) 언공(彦恭)은 9세에 글을 배우고 18세에 죽는다. 뜻은 원대하나 수(壽)는 짧으니 운명이로다.”
하였고, 또 다음과 같이 만사를 지었다.
아버님 어머님 / 父兮母兮
나 때문에 울지 마세요 / 莫我哭兮
《조대집(釣臺集)》 4권이 있다.
종실(宗室)인 금산수 성윤(錦山守誠胤)은 자가 경실(景實)인데 우리 중형에게 글을 배웠다. 그의 시는 온정균(溫庭筠)과 이상은(李商隱)을 숭상하여 그들의 시풍을 터득하였다. 그의 향렴체(香奩體)란 시는 다음과 같다.
부용성 밖 예주궁에 / 芙蓉城外蕊珠宮
난새 수레로 허 시중을 맞네 / 鸞馭來迎許侍中
앵무부는 달 밝은 밤에 읊조리고 / 鸚鵡賦吟明月夜
숙상 갖옷은 비단 병풍에 걸려 있네 / 鷫鷞裘掛錦屛風
추운 비단 방장엔 향로까지 곁들였고 / 寒重繡幕漆香獸
꿈 깬 은등잔엔 등화[玉蟲]가 맺혔네 / 夢罷銀燈結玉蟲
앵무새에 말 전하노니 자주 손을 물리쳐서 / 傳語雪衣頻撝客
운우의 정 총총히 흩어지게 말아다오 / 莫敎雲雨散悤悤
달[姮娥]을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운모병풍 썰렁하고 아름다운 방장 비었는데 / 雲母屛寒寶帳虛
옥같은 달에 이슬만 함초롬 맺혔구나 / 露華徧濕玉蟾蜍
항아가 장생약이야 얻었다 한들 / 姮娥縱得長生藥
해마다 홀로 사는 애달픔 어쩌지 / 爭奈年年恨獨居
자못 부귀롭고 아름다운 운치가 있다. 임진왜란에 어버이를 하직하고 임금을 호종하기에 갖은 고생을 다하였으니 배운 바 정신을 저버리지 않았다 할 만하다.
금산(錦山)의 호는 매창(梅窓)으로 성종(成宗)의 4세손(世孫)이요, 왕자 익양군 회(益陽君懷)의 증손이다. 그 아버지는 청원도정 간(靑原都正侃)이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양정집(梁廷楫)은 호남 사람으로 나이 10세에 글을 잘 써 고향에서 신동(神童)으로 소문났었다. 스님에게 보내는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노닥노닥 기워 입은 한 늙은 영감 / 百結一老翁
지팡이 의지하여 바위 아래 서 있어 / 倚杖巖下立
머리 돌려 뭔지 기다리는 듯하니 / 回頭如有看
필경 동해바다 달일 테지 / 應待東溟月
어린 나이에 임금의 잔치에도 초대받았었으나 불행히 세상을 떴다.
근세 선비들은 예(禮)를 병으로 여기고 다만 허무(虛無)를 말하고 욀 뿐만 아니라 술에 취한 채 수레를 타고 태연히 거리를 나돌아다니며 조금도 꺼리낌이 없는 이가 있는데 엄숙한 선비나 단아한 선비조차 이에 물들었다. 요즘 박엽 숙야(朴燁叔夜 숙야는 자)라는 사람이 있어 시문(詩文)을 잘하나 불행하였다. 기생집[秦樓]에서 나의 글씨 솜씨와 시법을 보고 본떠 가는 곳마다 벽에다 써대었는데 뒷사람이 와 보고는 으레 이를 아무개 글씨다 하였다. 그의 상춘곡(傷春曲)은 다음과 같다.
연분홍 꽃 오련한 푸른 잎은 아침햇살 머금고 / 妖紅輭綠含朝陽
꾀꼬리 읊조리고 제비는 지지배배 남의 시름 자아내네 / 鸎吟燕語愁人腸
이끼 자욱 이슬에 함초롬 비취빛으로 젖었는데 / 苔痕漬露翡翠濕
흩날리는 눈같은 살구꽃은 연지빛으로 향기롭다 / 杏花撲雪臙脂香
봉황 무늬 저고리는 흐르르 얇아 봄추위 스며드는데 / 鳳衫輕薄春寒襲
은병풍 기대어서 이별을 슬퍼하네 / 斜倚銀屛怨離別
서방님 한 번 떠나 돌아오질 않아 / 藁砧一去歸不歸
손꼽아 기다리던 그 봄도 또 삼월이라니 / 屈指東風又三月
선자가리개[仙子障]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하얀 옥꽃 족두리에 무지개옷 입고서 / 白玉花冠素霓裳
손으로 바둑알 잡고 생각만 거듭 / 手拈棋子費思量
몇 해 두고 바둑은 두질 않으니 / 經年不下神僊著
아마도 선경엔 세월이 긴가보이 / 想是蓬萊日月長
달 나라 궁전[月殿]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창창한 밤 꽃동산 / 花苑夜蒼蒼
등불 들고 해당화 구경 / 移燈賞海棠
이슬은 붉은 너울에 스미고 / 露華侵絳帕
향기는 다홍 치마에 배어드네 / 香氣襲紅裳
고래론 황금빛 자물쇠 만들고 / 鯨製黃金鑰
소라는 백옥상에 아로새겼네 / 螺雕白玉牀
가던 구름 저물녘 비 되어 내리니 / 行雲著行雨
돌아가면 초 양왕을 뵙게 되겠네 / 歸見楚襄王
이울어가는 봄[殘春]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먼지 탄 병풍은 우중충한데 / 屛暗下流塵
엉긴 구름 비단 수렐 옹위하듯 / 凝雲護綺輪
버들 꽃은 어지러이 흩날리고 / 斷絲縈落絮
제비새낀 이우는 봄을 재재거리네 / 雛燕語殘春
졸음기 붉은 볼에 피어나고 / 睡思生紅頰
눈물 자국 푸른 수건에 젖네 / 啼痕染翠巾
용이 서린 옥대의 거울은 / 盤龍玉臺鏡
눈썹 그릴 미인을 기다릴 뿐 / 只待畫眉人
선동요(仙洞謠)는 다음과 같다.
푸른 새 깃으로 금자(錦字) 전하니 / 靑鳥翩翩錦字通
광한전엔 옥피리 소리 / 玉簫吹煙廣寒宮
알고 말고 선동 안의 꽃같은 여인 / 情知洞裏如花女
웃으며 멋쟁이 허 시중을 가리킬 것을 / 笑指風流許侍中
시격(詩格)이 나와 비슷하며 자획(字畫)은 분간할 수 없어 진짠지 가짠지 사람들이 정말 의심하게 된다. 이 때문에 내가 화류가에 드나든단 소문을 얻게 되었으니 우습다. 옛사람이 찻집[茶肆]ㆍ술집[酒坊]에도 도리상(道理上) 들어가지 않았거든 하물며 이보다도 더한 기생집일까보냐? 서진(西晉) 말(末)의 선비가 청담(淸談)을 숭상하자 오호(五胡)가 중국을 어지럽게 했고, 당(唐)이 망할 무렵 세상 풍속이 풍류를 즐기자 칠성(七姓)이 쟁립(爭立)하였으니, 이 두 가지를 겸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요행일 뿐이다.
박엽의 호는 국창(菊窓), 반남인(潘南人)이며 벼슬은 평안 감사를 지냈다. 계해년(1623) 인조반정 때에 사형되었다.
두남(斗南) 김일숙(金一叔)은 글은 보통이었으나, 남을 풍자하는 작품으로는 그 당시에 으뜸이었다. 이웃에 어른(丈人)이 있었는데 앞니가 길어 홀(笏) 모양 같았음으로, 다음과 같이 찬(贊)을 지었다.
나이 일흔에 / 生年七十
긴 것이라곤 이[齒]니 / 所長者齒
이는 홀을 만들만 허구려 / 齒兮可爲笏兮
또 이웃사람이 눈이 가늘어 겨우 볼 수 있을 정도였는데 다음과 같이 찬을 지었다.
모든 것 보고 싶지 않아 한세상을 하찮게 보는 자인가 / 不欲觀諸眇視一世者邪
보이는 것이 작으니 / 其見者小
우물에서 하늘을 보는 자 아닌가 / 豈非坐井觀天者邪
그 눈동자를 보면 / 觀其眸子
그 사람 무슨 수로 속마음 숨길쏜가 / 人焉瘦哉
나의 중형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잘하였다.
김두남(金斗南)은 원주인(原州人)이며 응남(應南)의 사촌 동생이다. 음관으로 부윤(府尹)을 지냈다.
내가 다리를 앓아 핑계삼아 장인댁에 가니, 중형은 내가 나들이 않음을 빈정대어 시를 지어 보냈는데 첫 수는 다음과 같다.
하늘이 태왕(太王)을 사모하는 자네 마음 알아 / 天意憐君慕太王
짐짓 두 다리에 온통 부스럼이 나게 했구나 / 故敎雙脚遍生瘡
이웃이 지척이나 오히려 멀다 혐의하니 / 隣家咫尺猶嫌遠
하물며 물마름 우거진 십리길이랴 / 何況蘋洲十里長
또 다른 수는 다음과 같다.
체 짧은 수레도 안 타는 자네 / 知君不駕短轅車
덩그런 황문이 한길가에 서겠네 / 高處黃門大路隅
세상이 온통 공사에만 종사한다면 / 擧世若從公事業
이 세상 어디메서 잠부를 찾을꼬 / 人間何地覓潛夫
대개, 태왕이 그 비를 사랑하기에 세상에서 애처가를 태왕이라 부르는 것이다. 황문은 옛날 어떤 사람이 그 아내를 너무 사랑하여 그 친구가 빈정대기를,
“열녀는 홍살문을 세워 정문을 삼으니 정남(貞男)은 마땅히 황문을 세워야겠지.”
하였다 해서 쓴 것이니, 그 풍류와 익살이 모두 이와 같다.
익지(益之)가 일찍이 ‘낙화(落花)’를 읊기를
슬프다 진분홍에 또 연분홍 / 惆悵深紅更淺紅
한꺼번에 풀풀 날아 작은 뜰에 지는구나 / 一時零落小庭中
푸른 이끼에 붙어 남는 것만은 못하나 / 不如留著靑苔上
바람 따라 동서로 흩날리는 것보단 낫구나 / 猶勝風吹西復東
하니, 어의(語意)가 함축되어 있다. 또 감회를 읊은 절구 두 수는 다음과 같다.
성궐은 들쑥날쑥 솟을대문 늘어섰는데 / 城闕參差甲第連
오후의 집 풍악소리 하늘 높이 울리는구나 / 五侯歌管沸雲煙
패릉교 위 나귀 탄 나그네 / 灞陵橋上騎驢客
양양땅 맹호연 만은 아니라오 / 不獨襄陽孟浩然
둘째 수는 다음과 같다.
벼슬 높은 고관들 가는 곳마다 만나게 되고 / 好爵高官處處逢
수레는 물 흐르듯 말은 용 같네 / 車如流水馬如龍
장안 밭두렁에 부질없이 고개 돌리니 / 長安陌上空回首
지척인 대궐문 아홉 겹이 가렸구나 / 咫尺君門隔九重
용나루를 건너며[渡龍津]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이라 강물은 용나루에 급히 내리니 / 秋江水急下龍津
나루의 아전은 배 멈추고 웃었다 성냈다 / 津吏停舟笑更嗔
서울 나들이 그 무슨 소용 / 京洛旅游成底事
십년을 오가도 포의인 것을 / 十年來往布衣人
그 뜻이 몹시 서글프니 참으로 불우한 사람의 시다.
양봉래(楊蓬萊) 선생의 아량과 풍도는 세상의 숭상받는 바가 되거니와,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와 사마(司馬)ㆍ문과(文科)를 모두 같이 합격하였으므로, 그 사귐이 가장 친밀한데 문장이 높고 빼어나 구름을 앞지를 듯한 기상이 있고, 행서(行書)ㆍ초서(草書)를 잘 쓰는데 그 쓰는 법이 마치 용이나 뱀처럼 분방하며, 본성이 벼슬살이를 우습게 알고 산수에 정을 붙여, 짚신과 밀로 결은 나막신차림으로 어느 때고 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바위 골짜기에 사는 이들이 사강락(謝康樂 강락은 육조(六曹) 진(晉)의 사영운(謝靈運)의 봉호)에 비겼다. 언젠가 강릉 부사(江陵府使)가 되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운 일도 있었다. 언젠가 금강산에서 시를 읊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봉래섬의 백옥루를 / 蓬萊島白玉樓
소문으로만 들었더니 이제야 구경하네 / 我昔聞之今則游
운모병 들러 치고 호박구슬 베개삼고 / 雲母屛圍琥珀枕
산호 발걸이로 수정발 거두었네 / 水晶簾捲珊瑚鉤
벽도화 피고 지니 일천 년인데 / 碧桃開落一千年
서왕모 머물기는 팔만 년이라네 / 王母淹留八萬秋
요대 맨 위에 호올로 서니 / 瑤臺上表獨立
흰 구름 누른 학은 한가롭게 가는구나 / 白雲黃鶴去悠悠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훨훨 노을처럼 공중에 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한다.
봉래의 금수정(錦水亭)시는 다음과 같다.
비단물 은모래는 마냥 고운데 / 錦水銀沙一樣
골구름 강비 속에 갈매기 산뜻 / 峽雲江雨白鷗明
진인 찾아 그릇 봉랫길에 들었거니 / 尋眞誤入蓬萊路
고기잡이 배를 동구 밖으로 내몰진 마오 / 莫遣漁舟出洞行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죽은 뒤, 오세억(吳世億)이란 자가 갑자기 죽더니 반나절 만에 깨어나서는, 스스로 하는 말이, 어떤 관부(官府)에 이르니 ‘자미지궁(紫微之宮)’이란 방이 붙었는데 누각이 우뚝하여 난새와 학이 훨훨 나는 가운데 어떤 학사(學士) 한 분이 하얀 비단 옷을 입었는데, 흘긋 보니 바로 하서였다. 오씨는 평소에 그 얼굴을 알고 있는데, 하서가 손으로 붉은 명부를 뒤적이더니,
“자네는 이번에 잘못 왔네. 나가야겠네그려.”
하더니,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주었다고 했다.
세억은 그 이름 자는 대년 / 世億其名字大年
문 밀치고 와서 자미선 뵈었구려 / 排門來謁紫微仙
일흔에 또 일곱 된 뒤에 다시 만나리니 / 七旬七後重相見
인간 세상 돌아가선 함부로 말하지 마오 / 歸去人間莫浪傳
깨어나자 소재 상공(蘇齋相公)께 말씀드렸다. 그 뒤에 오씨가 일흔일곱 살에 죽었다.
인후(麟厚)의 자는 후지(厚之), 울주인(蔚州人)이며 벼슬은 교리(校理)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하서(河西)가 충암(冲庵) 시권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오기를 어디로부터 왔으며 / 來從何處來
가기를 또한 어디를 향해 가는고 / 去向何處去
가기도 오기도 정한 자취 없이 / 去來無定蹤
유유한 세월 백년 남짓이로구나 / 悠悠百年許
📖 [현대어 완역]
바다를 표류하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
조선 성종 임금 때, 제주도의 정의 현감으로 있던 이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훗날 《표해록》을 쓴 최보보다 앞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중국 명나라 양주부의 굴항채라는 곳에 닿게 되었다. 그곳 수비 대장(채관)은 일단 그를 감옥에 가두고 상부에 보고하여 문초하게 했다. 그때 이섬이 감옥 안에서 시를 한 수 지었는데, 그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열 폭짜리 돛폭으로도 이 거센 바람은 차마 가리지 못했네.
이 시구를 본 중국 측 책임자는 그가 무식한 해적이 아님을 단번에 알아보고 융숭하게 대우해주었으며, 덕분에 이섬은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섬이 본래 무관 출신이었던 탓에, 후대에 전해질 만한 멋진 여행 기록이나 일기를 남기지 못한 것이 못내 애석할 따름이다.
1572년(명종 17년, 가정 임술년) 무렵, 호음 정사룡 상공의 이웃에 살며 바다 장사를 업으로 하던 자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절강성 영파부 땅에 닿았다. 그곳 관아에서는 조선의 신분증인 호패를 근거로 신원을 확인한 뒤 그를 북경으로 올려보냈다.
북경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왔던 공용경(공 천사)의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공씨는 당시 국자감 좨주라는 벼슬에서 물러나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조선 사람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는 통역관에게 간청하여 일행의 길을 늦춘 뒤 상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상인이 이웃인 정사룡 상공의 집안 내력과 벼슬살이 경위를 죽 이야기하자, 공씨는 깜짝 놀라며 상인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심지어 자기 아내와 자식들까지 불러내어 인사를 시키고, 정사룡 상공에게 전해달라며 편지를 써주었고 그를 아주 후하게 대접해 보냈다. 명나라의 대학자 공씨가 조선의 정사룡을 마음속 깊이 존경함이 이토록 대단했다.
전라도 장흥에 사는 이언세라는 사람은 왜구에게 사로잡혀 남번(동남아시아 일대)으로 노예로 팔려 가게 되었다. 배를 타고 밤낮으로 40일을 간 끝에 중국 광서성의 향산현 땅에 닿았는데, 그는 같은 배에 탄 중국 상인에게 몰래 물어본 뒤에야 그곳이 명나라 땅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동료(화반)와 함께 캄캄한 밤을 틈타 도망쳐 그 지방의 현감(지현)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현감은 처음엔 야만인이 올린 고장(고소장)이라 여기며 팽개쳐 버리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언세가 며칠을 피눈물 흘리며 울부짖자 그제야 조사를 시작했다. 이언세는 글을 조금 알았기에 이렇게 썼다.
"저는 조선국 장흥 사람으로, 바다에서 싸우다 왜적에게 사로잡혀 오랑캐 배에 넘겨진 것입니다."
그 글을 본 현감이 그를 남웅부로 압송했고, 재판관인 삼사관이 문초 기록에 따라 그를 북경으로 이송했다. 마침 그때 조선의 동지사(겨울 사신) 일행이 북경에 도착해 있었으므로, 그는 기적처럼 사신 일행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훗날 이언세는 남창, 항주, 소주의 풍경과 북경, 남경의 훌륭한 경치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으나, 식견이 짧아 그리 자세하지는 못했다.
이 일과 관련해 승지 이정립이 지은 <표류된 조선 사람들을 쇄환(돌려보냄)해 준 것에 감사하는 표문>에 이런 멋진 구절이 있다.
만 이랑 거센 파도를 헤치고 / 요 임금같이 빛나는 명나라 황제의 땅에 나아갔다가
천 리 밖 아득한 고향 땅으로 살아서 돌아오게 되었으니 / 우 임금같이 어진 명나라 황제가 아니었던들 모두 고기밥이 되었으리라.
이 글은 대구(구절의 짝)가 대단히 적절하고 뜻이 깊다. 안타깝게도 글의 전체 내용을 다 볼 수 없어 섭섭하다.
(이정립의 자는 자정, 광주 사람으로 호는 계은이다. 벼슬은 이조 참의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희이다.)
허균, 명나라 상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다
1591년(선조 24년, 신묘년) 겨울, 명나라 상인 20여 명이 사탕을 싣고 팔러 가다가 풍랑을 만나 우리나라 제주도에 표류했고, 곧 서울로 압송되어 올라왔다. 내가 친구와 함께 가서 그들을 만나 소주와 항주 지역의 풍속에 대해 꼬치꼬치 묻자, 그중 한 사람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
"당신은 외국 사람이면서 대체 어떻게 중국의 풍토를 이토록 훤히 꿰뚫고 있소?"
그들 중에 장덕오라는 자가 있었는데 자기 입으로 "나는 복건성 장포 사람"이라고 하기에, 내가 넌지시 물었다.
"아, 그렇다면 시랑 벼슬을 지낸 장국정과 주천구가 당신 이웃이겠구려?"
그러자 장덕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대답했다.
"장 시랑은 제 친당숙이시고, 주 시랑은 저희 동네 분입니다!"
내가 웃으며 한 번 더 찔렀다.
"그렇다면 태사 장이풍과 어사 이명도 당신과 당숙질, 형제간이겠구려!"
장덕오가 넋을 잃고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저희끼리 뭐라 쑥덕거리며 껄껄대고 웃는 것이었다. 통역관이 전해주기를 "저 수재(허균)가 나이는 어려 보여도 우리 중국의 사정을 어찌 저리 귀신같이 잘 아느냐"며 감탄했다고 한다.
그때 왕신민이라는 자가 내게 "당신의 벼슬은 무엇이오?" 하고 묻기에, "나는 무자년에 과거에 합격해 지금은 국자감(성균관) 학생이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씨가 "아, 그럼 이부(인사 담당 관청)에는 언제 추천받아 올라가시오?" 하고 물었다. 이는 중국에서는 국자감 학생들이 으레 이부의 추천을 받아 벼슬길에 오르기 때문에 그렇게 물어본 것이다.
의병장 양대박과 숨은 시인들
학관 양대박은 시 짓는 솜씨가 뛰어나고, 시풍이 대단히 순탄하고 우아했다. 그가 일찍이 자기가 지은 시 한 구절을 자랑한 적이 있는데 이러하다.
산귀신은 밤마다 금우물(금정)의 불빛을 엿보고 / 물새는 가을밤 돌연못(석당)의 물안개 속에 잠들었네.
시구가 억지스러움 없이 절로 멋스럽다.
(양대박의 자는 사진, 호는 청계이며 남평 사람으로 벼슬은 학관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고경명(제봉)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고, 무기와 군량을 모두 자기 집안 재산으로 충당한 호걸이다. 진중에서 병으로 죽자, 나라에서 병조 판서를 추증하고 충장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상사(생원) 정지승은 시를 참 잘 지었는데, 임제(자순) 무리가 그를 몹시 떠받들고 칭찬했다. 세상에 전해지는 그의 시 한 편은 이러하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봄풀 잎사귀엔 유배 온 왕손의 한이 스며들고 / 활짝 피어나는 꽃잎 따라 두견새가 슬픈 시름을 더하누나.
아득한 물가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데 / 스치는 바람에 빈 목란 배만 덩그러니 일렁이누나.
그가 스님을 전송하며 지은 <송승>이라는 시는 이러하다.
스님은 서쪽 바다에서 돌아오고, 나 역시 또다시 서쪽으로 떠나가니 / 봄바람 속에 지팡이 하나 짚고 가는 인생길, 그 높고 낮음이 다르네.
우리 그 언제 달 밝은 밤 소요사 마루에 다시 마주 앉아 / 동쪽 숲에서 울어대는 두견새 소리 함께 들을 수 있을꼬.
또 다른 시의 한 연은 이러하다.
손님 돌아가자 문을 닫으니 뜰에 남은 건 휑한 달빛뿐이요 / 잠에서 깨어나자 빈 산에 흩어지는 건 솔바람 소리뿐이네.
그가 남긴 문집 전체를 볼 수 없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정지승의 자는 자신, 호는 총계이며 온양 사람이다. 학자 정렴의 조카이며 벼슬은 하지 않았다.)
송익필이라는 자 역시 시를 아주 잘 지었다. 그가 눈 내린 산을 읊은 <산설>이라는 시는 이러하다.
밤새도록 내린 차가운 눈, 층층 누대 위에 수북이 쌓였는데 / 이웃 산으로 마실 간 늙은 주지 스님은 아직 돌아오질 않네.
등잔불만 깜박이는 작은 절집, 신령스러운 바람조차 고요한데 / 소나무 가지 스쳐 불어오는 밝은 달빛만 홀로 물끄러미 바라보네.
시 구절의 격조가 무척 맑고 뛰어나다. 비록 그의 출신 지체가 천하다 한들, 어찌 그가 뱉어낸 이 아름다운 시구까지 무시하고 깔볼 수 있겠는가.
(송익필의 자는 운장, 호는 귀봉이다. 기묘사화의 흉악한 고발자 송사련의 아들로, 본래는 개인 노비(사천) 출신이나 문학적 조예가 대단히 뛰어나 우계 성혼, 율곡 이이와 절친하게 지냈다. 그의 친동생 송한필(자는 사로, 호는 운곡) 역시 시를 잘 지었다.)
송익필이 저물녘 남쪽 시내에 배를 띄우고 지은 <남계모범>이라는 시는 이러하다.
향기로운 꽃에 홀려 돌아갈 배를 띄우기 하마 늦었고 / 달 뜨기를 기다리느라 여울물 내려가기를 머뭇거렸네.
술기운 거나한 가운데도 슬며시 낚싯대를 드리우니 / 배는 물결 따라 흘러가도 내 아득한 꿈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네.
동생 송한필이 우연히 읊은 <우음시>는 이러하다.
어제 내린 촉촉한 봄비엔 꽃이 활짝 피더니 / 오늘 아침 불어온 매서운 바람엔 그 꽃이 속절없이 지는구나.
애달프다, 이 짧디짧은 한철 봄의 일이여 / 비바람 몰아치는 그 짧은 시간 속에 서둘러 오고 가누나.
요절한 천재들과 그들의 씁쓸한 유산
최전(자는 언침)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이름을 떨쳤다. 어릴 적 금강산으로 유람을 떠났다가 내친김에 강원도 영동 지역의 산천을 샅샅이 구경하고 경포대에 이르렀을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신선 사는 봉래산에 한번 발을 들이니 삼천 년 세월이 훌쩍 지났고 / 은빛 바다 아득히 넓어도 내 눈엔 그저 맑고 얕아 보이네.
난새 타고 피리 불며 오늘 나 홀로 하늘에서 날아왔건만 / 푸른 복사꽃 그늘 아래 나를 반겨줄 신선은 아무도 보이지 않네.
나의 둘째 형님(허봉)이 이 시를 대단히 칭찬하시며 그 운자를 따서 이어서 시를 읊기까지 하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전은 재주를 다 펴보지도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최전의 호는 양포, 해주 사람으로 진사였다.)
최전의 <늙은 말(노마)>이라는 시는 이러하다.
다 늙은 말 한 마리 소나무 뿌리 베고 누워 / 꿈결 속에서 천 리 먼 길을 힘차게 달려가네.
가을바람에 낙엽 우수수 지는 소리에 / 화들짝 깨어나니 지는 해만 뉘엿뉘엿 저물어가네.
그가 물고기 배 모양의 연등을 보고 지은 <어복등>이라는 시는 이러하다.
초나라 멱라수 강물은 흘러 흘러 끝이 없는데 / 충신 굴원은 그 물에 몸을 던지며 불평을 원망했네.
아마도 지금 저 물고기 뱃속에서도 / 나라 향한 그 속마음 밝은 것만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겠지.
금각(자는 언공, 봉성 사람)은 열두 살 때 나의 둘째 형님께 글을 배웠다. 육경을 통달하고 제자백가와 역사서, 문집 등 안 읽은 책이 없었다. 글을 짓는 솜씨가 깊고 무거우면서도 온화하고 아름다워 열여섯 살에 이미 대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지은 <조대기>, <주류천하기>, <한발문> 등의 명문장이 지금도 세상에 전해진다.
그는 16세에 명나라로 유학을 떠났으나, 뱃속에 기생충이 생기는 복충증이라는 몹쓸 병을 얻어 고향 집에 누워 지내야 했다. 병상에서 심심풀이로 《풍창랑화》라는 책을 지으며 세월을 보내다가, 1588년(선조 21년, 무자년) 가을, 겨우 1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는 날 스스로 자신의 묘비명(명)을 지었는데 이러했다.
"봉성 사람 금각, 자는 언공. 9세에 글을 배우고 18세에 죽는다. 뜻은 원대하였으나 목숨이 짧으니, 아아 이 또한 운명이로다!"
또 죽기 전 이런 애달픈 만장(애도시)을 남겼다.
"아버님 어머님, 나 때문에 통곡하지 마세요."
그가 남긴 《조대집》 4권이 전한다.
왕실의 종친인 금산수 이성윤(자는 경실) 역시 우리 둘째 형님께 글을 배웠다. 그의 시는 당나라 후기의 온정균과 이상은을 숭상하여, 화려하고 감각적인 그들의 시풍을 완벽히 터득했다. 여인과 사랑을 다룬 그의 향렴체(香奩體) 시는 이러하다.
부용성 밖 신선이 사는 어여쁜 예주궁에 / 난새가 끄는 수레를 타고 낭군 허 시중을 맞이하네.
앵무새를 읊은 시는 달 밝은 밤에 흥얼거리고 / 화려한 숙상 갖옷은 비단 병풍에 걸려 있네.
추운 밤 비단 방장엔 향로의 온기까지 곁들였는데 / 꿈 깨어보니 은등잔 불꽃엔 등화(꽃 모양 심지)가 맺혔네.
앵무새에게 넌지시 말 전하노니, 찾아오는 손님들 핑계 대어 물리쳐서 / 우리 둘의 뜨거운 운우지정이 총총히 흩어지게 말아다오.
그가 달(항아)을 읊은 시는 이러하다.
운모 병풍은 썰렁하고 아름다운 방장 안은 텅 비었는데 / 옥같이 밝은 달에는 차가운 이슬만 함초롬 맺혔구나.
달나라 선녀 항아가 장생불사약을 훔쳐 먹고 신선이 되었다 한들 / 해마다 이 넓은 우주에 홀로 사는 애달픔이야 어찌 견디리오.
시가 자못 화려하고 귀티가 흐르며 아름다운 운치가 있다. 그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연로하신 어버이와 하직하고, 선조 임금을 호종하여 의주까지 피난하며 갖은 고생을 다 겪었다. 참으로 우리 형님께 배운 선비의 정신을 져버리지 않은 훌륭한 종친이라 할 만하다.
(금산수의 호는 매창이며 조선 성종 임금의 4세손이다. 왕자 익양군 이회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청원도정 이간이다. 시호는 충정이다.)
양정집은 전라도 호남 사람으로, 겨우 10세 때 글을 너무도 잘 지어 고향에서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가 스님에게 보낸 시 중에 이런 절묘한 구절이 있다.
누더기 노닥노닥 기워 입은 한 늙은 영감 /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우뚝 솟은 바위 아래 서 있네.
슬쩍 고개 돌려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듯하니 / 필경 어두운 동해 바다 위로 떠오를 둥근 달을 기다림이리라.
그는 어린 나이에 그 천재성을 인정받아 임금이 베푸는 잔치에까지 초대받았으나,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허균을 분노케 한 박엽의 장난과 풍기문란한 선비들
근래의 선비들은 예의범절 지키는 것을 무슨 큰 병이라도 되는 양 여기고, 그저 헛된 노장사상의 허무주의만 나불거린다. 게다가 술에 잔뜩 취한 채 수레를 타고 거리를 태연히 쏘다니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니, 평소 엄숙하고 단아하던 선비들조차 이 몹쓸 유행에 물들어 버렸다.
요즘 박엽(자는 숙야)이라는 자가 있는데 시와 문장을 꽤 잘하지만 질이 좋지 못하다. 그가 기생집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내 붓글씨 솜씨와 시 짓는 법을 보더니, 그걸 똑같이 흉내 내어 가는 술집과 기생집마다 벽에다 잔뜩 낙서를 해대었다. 그러니 나중에 그곳을 찾은 사람들이 그 글씨를 보고는 으레 "아, 이건 허균이 왔다 간 흔적이구나!" 하고 오해를 하게 되었다.
박엽이 봄을 슬퍼하며 지은 <상춘곡>은 이러하다.
연분홍 꽃과 오련한 푸른 잎사귀는 아침 햇살을 머금었고 / 꾀꼬리 읊조리고 제비 재잘대는 소리는 남의 시름만 자아내네.
뜰의 이끼는 이슬에 젖어 함초롬한 비취빛을 띠고 /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살구꽃은 연지빛 향기를 뿜어내네.
봉황 무늬 얇은 저고리로 봄추위가 파고드는데 / 은병풍에 빗기대어 님과의 이별을 슬퍼하네.
서방님 한 번 떠나신 뒤 영영 돌아올 줄을 모르시니 / 손꼽아 애타게 기다리던 봄날도 어느새 또 삼월이 다 가버렸네.
선녀가 그려진 부채(선자가리개)에 제하여 지은 시는 이러하다.
하얀 옥꽃 족두리 쓰고 무지개 빛깔 옷을 입고서 / 하얀 손으로 바둑알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빠졌네.
몇 해를 두고도 신선은 바둑 한 수를 차마 내려놓지 못하니 / 아마도 신선 사는 봉래산엔 세월이 참으로 긴가 보이.
달나라 궁전을 상상하며 지은 시는 이러하다.
창창하게 푸른 밤하늘 아름다운 꽃동산 / 등불 밝혀 들고 붉은 해당화 구경에 나섰네.
이슬은 붉은 머리 너울에 촉촉이 스며들고 / 향기는 다홍치마에 은은히 배어드네.
고래 모양으로는 황금빛 자물쇠를 만들고 / 소라 껍데기는 하얀 백옥상 위에 아름답게 아로새겼네.
둥둥 떠가던 구름이 저물녘 비가 되어 내리니 / 돌아가면 꿈속에서 애타게 그리던 초 양왕을 뵙게 되겠네.
이울어가는 봄을 슬퍼한 <잔춘>이라는 시는 이러하다.
먼지 뽀얗게 앉은 병풍은 우중충한데 / 엉긴 구름은 비단 수레를 에워싼 듯하네.
버들개지 솜털은 어지러이 흩날리고 / 갓 깬 제비 새끼는 이우는 봄이 아쉬워 재재거리네.
쏟아지는 졸음기 붉은 볼에 피어나고 / 애달픈 눈물 자국은 푸른 수건을 흠뻑 적시네.
용이 아로새겨진 화려한 옥대 거울은 / 눈썹 예쁘게 그릴 어여쁜 미인을 하염없이 기다릴 뿐.
신선 동굴을 읊은 노래 <선동요>는 이러하다.
푸른 새 날갯짓으로 비단 편지(금자) 전해오니 / 광한전(달나라 궁전)엔 옥피리 소리 아스라하네.
알고 말고, 신선 동굴 안의 저 꽃 같은 여인 / 생긋 웃으며 풍류 넘치는 멋쟁이 낭군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것을.
박엽의 시 구절들이 내 스타일과 소름 끼치게 비슷하고, 붓글씨 자획마저 너무 똑같아서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으니 사람들이 진짜 내 글씨인지 가짜인지 헷갈릴 만도 하다. 이 고약한 놈 때문에 내가 허구한 날 화류계나 드나드는 난봉꾼이라는 더러운 소문을 뒤집어쓰게 되었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고 우스운 일이다.
옛날 훌륭한 선비들은 점잖지 못하다 하여 찻집이나 평범한 술집조차 함부로 출입하지 않았거늘, 하물며 천박한 기생집이야 두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중국 서진 말기에 선비들이 말장난 같은 청담 사상에만 빠져 허우적대자 오호(다섯 오랑캐)가 쳐들어와 나라를 뒤집어엎었고, 당나라가 망할 무렵에도 선비들이 겉멋 든 풍류만 즐기다 보니 일곱 성씨 군벌들이 난립하여 나라를 박살 냈다. 지금 우리 조선의 선비들이 이 두 가지 몹쓸 짓(허무주의와 문란한 풍류)을 겸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요행일 것이다!
(박엽의 호는 국창, 반남 사람으로 평안 감사를 지냈다. 그는 1623년 인조반정 때 그 악행으로 인해 사형당했다.)
최고의 독설가 김두남, 그리고 허봉의 짓궂은 농담
김일숙(호 두남)은 정통 문장 실력은 그저 그랬지만, 남의 약점을 잡아 풍자하고 비꼬는 작품만큼은 당대 으뜸이었다. 그의 이웃에 한 노인이 살았는데 유독 앞니가 토끼처럼 툭 튀어나와 마치 관리들이 들고 다니는 홀(笏)처럼 생겼다. 김두남은 이를 보고 이런 조롱 섞인 찬(贊, 기리는 글)을 지었다.
나이 일흔에 / 그나마 남들보다 유일하게 긴 것이라곤 저 툭 튀어나온 앞니뿐이니 / 아! 저 이빨 뽑아다 관리들 손에 쥐여주는 홀(笏)을 만들면 딱이겠구려!
또 다른 이웃 사람은 눈이 단춧구멍만 해서 앞이나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는데, 김두남은 이를 보고 이렇게 지었다.
세상 꼴 보기 싫어 눈 반쯤 감고 온 세상을 하찮게 깔보는 잘난 자인가 / 눈구멍이 작아 보이는 게 그따위니 / 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물 바닥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옹졸한 자가 아니겠는가 / 저 답답한 눈동자를 보라 / 저런 눈을 가지고 무슨 수로 엉큼한 속마음을 숨길 수 있겠는가!
나의 둘째 형님(허봉)이 평소 이 김두남의 독설에 대한 이야기를 몹시 즐겨 하셨다.
(김두남은 원주 사람으로, 응남의 사촌 동생이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음서로 부윤을 지냈다.)
언젠가 내가 다리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외출을 삼간 채 처가(장인댁)에 처박혀 지낸 적이 있었다. 그러자 형님이 내가 나들이를 안 하고 아내 치맛폭에만 싸여 있다고 빈정대며 놀림 섞인 시를 지어 보내셨는데, 첫 수는 이러했다.
하늘이 유난히 아내 사랑하는(태왕) 자네 갸륵한 속마음을 알아채고는 / 일부러 두 다리에 끔찍한 부스럼이 쫙 퍼지게 만들어 주었구나! / 지척에 있는 이웃집 가는 것도 멀다 하며 핑계 대는 마당에 / 하물며 마름 풀 우거진 십 리 먼 길을 어찌 나설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시는 이러하다.
쩨쩨하게 짧은 수레 따윈 절대 타지 않겠다는 잘난 자네여 / 다들 구경하라고 큰길가에 덩그러니 '황문'을 높게 세워주어야겠네. / 세상 사람들이 모두 벼슬길에 올라 나랏일(공사)에만 매달린다면 / 대체 이 세상 어느 구석에서 자네처럼 방구석에 처박힌 숨은 선비(잠부)를 찾을 수 있겠는가!
대개 '태왕'이란 중국 고대 주나라의 태왕이 자기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세상에서 '애처가'를 놀릴 때 부르는 말이다.
'황문'이라는 말에도 유래가 있다. 옛날 어떤 사내가 자기 아내를 너무도 끔찍이 사랑하고 챙기자 그 친구가 빈정대며 "열녀가 죽으면 나라에서 붉은 홍살문을 세워 정문으로 삼으니, 너처럼 아내에게 지극정성인 바른 사내(정남)에게는 마땅히 샛노란 '황문'을 세워 표창해야겠지!"라고 비꼰 데서 비롯된 말이다. 형님의 풍류와 익살이 늘 이처럼 재치가 넘치셨다.
불우한 천재 이달의 서글픈 시
이달(익지)이 일찍이 읊은 <낙화>라는 시는 이러하다.
슬프다 진분홍 꽃잎 떨어지더니 이내 또 연분홍 꽃잎 날리고 / 한꺼번에 눈보라 치듯 풀풀 날아 이 작은 뜰 안에 덧없이 지는구나.
축축한 푸른 이끼에 들러붙어 썩어가는 건 못내 서글프지만 / 그래도 이리저리 바람 따라 동서로 정처 없이 흩날리는 것보단 그게 낫겠지.
이 시는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라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자신의 서글픈 처지를 빗댄 것으로 그 말의 뜻(어의)이 깊이 함축되어 있다.
그가 자신의 감회를 읊은 절구 두 수는 또 이러하다.
장안의 성곽과 궁궐은 들쑥날쑥, 귀족들 솟을대문은 끝도 없이 늘어섰는데 / 벼슬아치 집에서 흘러나오는 풍악 소리, 하늘 찌를 듯 요란하구나.
패릉교 다리 위, 초라한 나귀 등에서 시를 읊는 늙은 나그네는 / 당나라 옛날 옛적 맹호연만 있었던 건 아니라오. (나도 그 꼴이라오)
둘째 수는 이러하다.
벼슬 높고 잘나가는 고관대작들은 가는 곳마다 마주치고 / 그들이 타는 수레는 물 흐르듯 넘쳐나며 끄는 말은 용처럼 날래네.
장안 밭두렁에 서서 부질없이 고개 돌려 임금 계신 대궐 바라보니 / 지척에 있는 대궐문이건만 아홉 겹 구름에 까마득히 가려져 있구나.
그가 <용나루를 건너며(도용진)>라는 제목으로 지은 시는 이러하다.
쓸쓸한 가을이라 강물은 용나루를 향해 급히 흘러내리는데 / 나루터의 아전 놈은 내 초라한 행색을 보고 배 멈춘 채 비웃다 성내기를 반복하네.
아, 번잡한 서울 나들이 그 대체 무슨 소용 있었나 / 십 년을 죽어라 오가며 애썼건만 여전히 난 벼슬 없는 헐벗은 백성(포의)인 것을!
시의 뜻이 하나같이 몹시 뼈저리고 서글프니, 이는 참으로 불우한 천재의 애끓는 독백이다.
구름을 앞지르는 기상, 양사언
양사언(호 봉래) 선생의 넓은 아량과 풍도는 세상 모든 이가 우러러 숭상하는 바이다. 특히 나의 돌아가신 아버님(허엽)과 사마시(소과), 문과(대과)를 모두 한 해에 같이 합격한 동기였기에 우리 집안과의 사귐이 가장 각별했다.
선생은 문장이 드높고 빼어나 구름을 앞지를 듯한 장엄한 기상이 있었고, 행서와 초서를 신들린 듯 잘 써서 그 붓놀림이 마치 용이나 뱀이 살아 꿈틀대며 분방하게 날뛰는 듯했다. 게다가 타고난 성품이 세속의 벼슬살이 따위는 헌신짝처럼 우습게 여겼다. 오직 산수 자연에 정을 붙여, 짚신이나 밀로 엮은 나막신을 질질 끌고 어느 때고 바람처럼 유람을 떠나지 않는 날이 없었다. 바위와 골짜기에 은거하는 산속 선비들은 그를 가리켜 육조시대 최고의 자연 시인 사영운(사강락)에 비견하곤 했다.
언젠가 그가 강릉 부사로 재직할 때는, 그 자유로운 성품 속에서도 선정을 베풀어 훗날 강릉 백성들이 그의 공덕을 잊지 못해 거사비를 세워주기도 했다.
그가 금강산을 유람하며 읊은 시는 이러하다.
신선 사는 봉래섬의 찬란한 백옥루를 / 소문으로만 익히 듣다가 이제야 신명 나게 구경하네.
구름무늬 운모 병풍 둘러치고 붉은 호박 구슬 베개 삼고 / 산호로 만든 발걸이로 맑은 수정 발을 걷어 올렸네.
푸른 복사꽃 한 번 피고 지는 데 천 년이 걸린다지만 / 서왕모 신선이 이곳에 머문 지는 벌써 팔만 년이라네.
아름다운 요대(신선 제단) 맨 꼭대기에 나 홀로 우뚝 서니 / 흰 구름과 누런 학만이 내 발밑으로 한가롭게 흘러가는구나.
이 시를 읽노라면 사람으로 하여금 홀연히 신선이 되어 노을을 타고 허공을 훨훨 날아다니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양사언의 <금수정>이라는 시는 또 이러하다.
비단처럼 고운 강물, 은빛 모래는 마냥 아름다운데 / 골짜기 구름 강에 내리는 빗속에 하얀 갈매기 빛깔 산뜻해라.
참된 신선 찾아 나섰다 길을 잃어 그만 그릇 봉래의 길로 접어들었으니 / 부디 고기잡이배를 동네 밖으로 내몰아 내 자취를 세상에 알리진 말아주오.
저승에서 만난 하서 김인후
하서 김인후 공이 세상을 떠난 뒤의 일이다. 오세억이라는 자가 갑자기 죽어 저승에 갔다가 반나절 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가 스스로 들려준 저승 이야기는 이러했다.
자신이 어떤 거대한 관청에 이르렀는데, 거기에 '자미지궁(紫微之宮, 하늘의 궁전)'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누각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하고 난새와 학이 훨훨 날아다니는 환상적인 풍경 속에, 하얀 비단옷을 입은 고귀한 학사 한 분이 서 있었다. 흘긋 쳐다보니 그가 바로 얼마 전 돌아가신 하서 김인후 선생이었다. 오씨는 평소 이승에서 선생의 얼굴을 뵌 적이 있어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하서 선생이 손으로 붉은 명부(저승 장부)를 뒤적여 보시더니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명부가 꼬이는 바람에 이번에 잘못 온 걸세. 어서 이승으로 다시 나가게나."
그러더니 선생이 즉석에서 시를 한 수 지어 그에게 쥐여 주었다고 한다.
오세억, 자네의 이름이요 대년은 자네의 자(字)이거늘 / 저승 문을 왈칵 밀치고 들어와 나 자미선(신선)을 뵈었구려.
일흔 살에 또 일곱 해가 더해진 뒤에(77세) 우리 다시 만날 터이니 /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거든 저승의 일일랑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마오!
오세억은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소재 노수신 상공에게 달려가 이 신비한 일을 낱낱이 고했다. 놀랍게도 그 뒤 오씨는 하서 선생의 시구에 적힌 예언대로 정확히 일흔일곱 살(77세)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김인후의 자는 후지, 울주 사람이며 벼슬은 교리를 지냈다. 시호는 문정이며 훗날 문묘에 배향되었다.)
하서 김인후 공이 생전에 충암 김정의 시 두루마리에 제하여 쓴 시는 이러하다.
오기를 대체 그 어디로부터 왔으며 / 가기를 또한 그 어디를 향해 가는고.
가고 옴에 애초에 정해진 자취 따윈 없는 것을 / 그저 유유히 흘러가는 짧은 백 년 남짓한 덧없는 세월이로구나.
💡 [핵심 해설]
이 글에서 허균은 성별, 신분, 정치적 당파를 가리지 않고 오직 '시와 문학의 예술성'만을 기준으로 당대 인물들을 평가합니다. 특히 조선 문단의 위선과 겉치레(박엽, 차천로)를 혐오하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달(손곡)의 시에 담긴 민중에 대한 뜨거운 연민을 조선 최고의 문학으로 치켜세우며 시대의 아픔을 직시하는 진정한 문학관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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