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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M으로 뽑은 잡지식

정사 삼국지 위서 1권 무제기 - 무제 조(武帝 操)190년 1월 ~ 220년 1월 (후한 초평(初平) 원년 ~ 후한 건안(建安) 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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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魏書) 제1권

1. 무제기(武帝紀)

태조 무황제(武皇帝)는 패국 초(譙) 사람이다. 성은 조(曹)요, 이름은 조(操)이며 자는 맹덕(孟德)이다. 한나라 상국 조참(曹參)의 후손이다.

태조의 다른 이름은 길리(吉利)였고, 어릴 적 이름은 아만(阿瞞)이었다.

『위서』에 이르기를, 그의 선조는 황제(黃帝)로부터 나왔다. 고양씨(전욱) 시대에 육종의 아들 안(安)이 있었는데, 이가 곧 조(曹) 성을 받았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선대의 후손들을 보존할 때 조협(曹俠)을 주(邾) 땅에 봉했다. 춘추 시대에는 맹회(제후들의 회합)에 참여하였으나, 전국 시대에 이르러 초나라에 멸망당했다. 그 자손들은 흩어져 살았는데, 어떤 이들은 패(沛) 땅에 자리를 잡았다. 한나라 고조가 일어날 때 조참이 공을 세워 평양후에 봉해졌고, 대대로 작위를 이어받았다.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하여 지금까지 그 적통이 용성(容城)에 봉해져 있다.

환제 시절, 조등(曹騰)은 중상시 대장추를 지냈으며 비정후에 봉해졌다.

『속한서』에 이르기를, 조등의 아버지 조절(曹節)은 자가 원위(元偉)이며 평소 인자하고 후덕하다고 칭송받았다. 이웃 사람이 돼지를 잃어버렸는데 조절의 돼지와 비슷하자 문 앞에 와서 자기 돼지라고 주장했다. 조절은 그와 다투지 않았다. 나중에 잃어버렸던 돼지가 제 집으로 돌아오자, 돼지 주인은 크게 부끄러워하며 돼지를 데리고 와 조절에게 사죄했다. 조절은 웃으며 이를 받아주었다. 이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그를 귀하게 여겨 칭찬했다. 조절에게는 장남 백흥, 차남 중흥, 삼남 숙흥이 있었다. 조등은 자가 계흥(季興)이며, 젊어서 황문의 종관(從官)이 되었다. 영녕 원년, 등 태후가 황문령에게 젊고 신중한 중황문 종관을 뽑아 황태자의 서책(書冊)을 돌보게 하라고 조서를 내리자 조등이 선발되었다. 태자는 특히 조등을 친애하여 음식과 상을 내림이 다른 이들과 달랐다. 순제가 즉위하자 소황문이 되었고, 중상시 대장추까지 승진했다. 궁궐 깊은 곳에서 30여 년간 네 명의 황제를 섬겼으나 한 번도 과오가 없었다. 현명하고 재능 있는 인재를 추천하기를 좋아했으나, 끝내 누구도 해치지 않았다. 그가 천거한 이들로는 진류의 우방, 변소, 남양의 연고, 장온, 홍농의 장환, 영천의 당계전 등이 있는데, 모두 공경(公卿)의 자리에 올랐으나 조등은 자신의 공을 뽐내지 않았다.

촉군 태수가 계리(計吏)를 통해 조등에게 정중히 예를 표했는데, 익주 자사 종고(种暠)가 함곡관에서 그 편지를 수색해 찾아내어 태수에게 올리고, 아울러 조등이 내신(환관)으로서 외관과 교류하여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며 면직과 처벌을 청했다. 황제가 말하길 “편지는 밖에서 온 것이고 조등이 먼저 글을 내보낸 것이 아니니 조등의 죄가 아니다”라 하고는 종고의 상소를 묵살했다. 조등은 이를 개의치 않고 늘 종고를 칭찬하며 그가 윗사람을 섬기는 절도를 갖추었다고 여겼다. 종고가 나중에 사도가 되었을 때 사람들에게 “오늘 내가 공(公)의 자리에 있는 것은 조 상시(조등)의 은혜 덕분이다”라고 말했다. 조등의 일처리가 모두 이와 같았다.

환제가 즉위하자 조등이 선제(전임 황제)의 구신(舊臣)으로서 충효가 뚜렷하다 하여 비정후에 봉하고 특진의 직위를 더했다. 태화 3년, 조등을 추존하여 고황제(高皇帝)라 하였다. 양자 조숭(曹嵩)이 뒤를 이어 태위까지 올랐으나,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그 본말을 확인할 수 없다.

『속한서』에 이르기를, 조숭은 자가 거고(巨高)이다. 성품이 돈독하고 신중하며 어디에서든 충효를 다했다. 사예교위를 지냈고, 영제 때 발탁되어 대사농, 대홍려를 거쳐 최열의 뒤를 이어 태위가 되었다. 황초 원년, 조숭을 추존하여 태황제(太皇帝)라 하였다.

오나라 사람이 쓴 『조만전』과 곽반의 『세어』에서는 모두 “조숭은 하후씨(夏侯氏)의 아들이며, 하후돈의 숙부이다. 태조(조조)는 하후돈과는 종형제간이다. 조숭이 태조를 낳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5
태조는 어려서부터 기지가 있고 권모술수가 있었으나, 협객처럼 방탕하게 지내며 정해진 생업을 닦지 않아 세상 사람들은 그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조만전』에 이르기를, 태조는 젊어서 매를 날리고 사냥개를 부리며 방탕하게 지내는 것을 무도로 삼았기에, 숙부가 여러 번 조숭에게 이를 일러바쳤다. 태조가 이를 걱정하여 나중에 길에서 숙부를 만나자 거짓으로 입을 비뚤어지게 하고 몸을 떨었다. 숙부가 놀라 이유를 묻자 태조가 “갑자기 악풍(중풍)에 걸렸습니다”라고 답했다. 숙부가 조숭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조숭은 놀라 태조를 불렀는데, 태조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조숭이 “숙부께서 네가 중풍에 걸렸다고 하던데, 이제 나았느냐?”라고 물으니 태조가 “처음부터 중풍에 걸린 적이 없습니다. 다만 숙부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기에 숙부님께서 저를 속인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조숭은 그제야 숙부를 의심하게 되었고, 이후 숙부가 무슨 말을 해도 조숭은 결코 믿지 않았으며, 태조는 이로부터 더욱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오직 양국의 교현과 남양의 하옹만이 조조를 남다르게 보았다. 교현이 태조에게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인데, 세상을 구제할 영웅이 없으면 안 될 것이오. 천하를 평안하게 할 사람은 아마도 그대일 것이오!”라고 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태위 교현은 세상에서 사람 보는 눈이 높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태조를 보고 남다르게 여겨 “내가 천하의 명사들을 많이 보았으나 그대만 한 자는 없었소! 그대는 스스로를 잘 지켜나가시오. 나는 이제 늙었으니 나의 처자식을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구려”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조조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속한서』에 이르기를, 교현은 자가 공조(公祖)이며, 엄격하고 명석하며 재략이 있어 사람을 보는 데 뛰어났다.

『장판한기』에 이르기를, 교현은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강직하고 결단력 있다는 칭송을 받았다. 겸손하고 검소하며 선비를 낮추어 대우하지 않았고, 왕의 작위나 사적인 친분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광화 연간에 태위가 되었다가 오래 앓아 파직당하고 태중대부로 임명되었다. 그가 죽었을 때 집안이 가난하여 산업이 없었으며 관을 안치할 곳조차 없었다. 당대 사람들은 그를 명신이라 불렀다.

『세어』에 이르기를, 교현이 태조에게 “그대는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허자장과 사귀어 보시오”라고 했다. 태조가 자장을 찾아가니 자장이 그를 받아주었고, 이로 인해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손성의 『이동잡어』에 이르기를, 태조는 일찍이 중상시 장양의 방에 몰래 들어갔다가 장양에게 들키자 뜰에서 수극(手戟, 짧은 창)을 휘두르며 담장을 넘어 도망쳤다. 그의 재능과 무용은 남보다 뛰어났기에 아무도 그를 해치지 못했다.

조조는 여러 서적을 두루 읽고 특히 병법을 좋아했다. 여러 집안의 병법을 초록하여 『접요(接要)』라 이름 지었고, 다시 『손자병법』 13편에 주석을 달았는데, 모두 세상에 전해진다.

일찍이 허자장에게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었는데 자장이 답하지 않았다. 끈질기게 묻자 자장이 “그대는 태평한 세상에는 능한 신하가 될 것이나, 어지러운 세상에는 간사한 영웅(간웅)이 될 것이오”라고 했다. 태조는 크게 웃었다.

나이 스무 살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관이 되었고, 낙양 북부위로 임명되었으며, 나중에 돈구현 현령으로 승진했다.

『조만전』에 이르기를, 태조가 처음 위(尉, 관청)에 들어갔을 때 네 문을 보수하였다. 오색 몽둥이를 만들어 문 좌우에 십여 개씩 걸어두고, 금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때려죽였다. 몇 달 후, 영제가 총애하는 소황문 건석의 숙부가 야간통행 금지를 어기자 곧바로 죽여버렸다. 경사(낙양)의 기강이 잡히고 감히 범하는 자가 없었다. 환관들은 모두 그를 미워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고, 그를 추천하여 돈구현 현령으로 보냈다.

이후 의랑(議郎)으로 징발되었다.

『위서』에 이르기를, 태조는 종매부(고종사촌 매부)인 영강후 송기가 주살되자 그 연좌제로 면직되었다. 나중에 고학(古學)을 밝히는 능력이 있다 하여 다시 의랑으로 징발되었다.

그보다 앞서 대장군 두무와 태부 진번이 환관을 제거하려다 오히려 그들에게 해를 입었다. 태조가 상소를 올려 두무 등이 정직했음에도 함정에 빠졌으며, 간사한 자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선량한 인재들이 막혀 있다고 진언했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했으나 영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조서가 삼부(삼공의 관청)에 내려져 주·현의 정치에 성과가 없거나 백성들의 요언(헛소문)이 도는 경우 그 책임자를 면직하라고 명령했다. 삼공은 기울고 간사하여 세상의 흐름에 영합하며 쓰였고, 뇌물이 횡행했다. 강한 자들은 원망을 사도 탄핵되지 않았고, 약한 자들은 도리를 지키려다 오히려 함정에 빠져 비방당하는 일이 많았다. 태조는 이를 미워했다. 그해 재이(천재지변)가 일어나자 정치의 득실을 물었는데, 태조는 이 기회를 빌려 다시 간절히 간언하며 삼공이 올리는 탄핵이 오로지 귀척(황실의 친척)들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상소가 올라가자 천자가 깨달음을 얻어 이를 삼부(삼공)에게 보여 꾸짖었고, 요언으로 징발되었던 이들은 모두 의랑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정교(정치와 교화)가 날로 어지러워지고 호악(호걸과 악당)들이 더욱 날뛰며 많은 이들을 파멸시켰다. 태조는 정치를 바로잡을 수 없음을 알고는 다시는 의견을 올리지 않았다.

6
광화 연간 말엽, 황건적이 일어났다. 태조는 기도위로 임명되어 영천의 적들을 토벌했다. 이후 제남상으로 승진했는데, 제남국에는 10여 개의 현이 있었고 장리(지방 관리)들은 대부분 귀척들에게 아부하며 뇌물과 부정이 가득했다. 태조는 그중 8명을 탄핵하여 파면했다. 음사(부정한 제사)를 금지하니 간사한 무리들이 도망쳤고 군 경계가 숙연해졌다.

『위서』에 이르기를, 장리들이 탐욕스럽게 뇌물을 받고 세력가들에게 의지하여 이전의 상들조차 탄핵하지 못했으나, 태조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는 모두 스스로 파면되었고, 크고 작은 자들이 공포에 질려 간사한 무리들이 다른 군으로 도망쳤다. 정교가 크게 행해지니 한 군이 맑고 평안해졌다. 처음 성양 경왕 유장이 한나라에 공이 있어 그 나라에 사당을 세웠는데, 청주의 여러 군들이 이를 본떠 제남에 유독 성하여 600여 개의 사당이 있었다. 상인들이 간혹 2천 석 관원의 수레와 복장을 빌려 타고 호위병을 거느리고 다니며 음악을 연주하는 등 사치가 날로 심해졌고, 백성들은 이로 인해 가난해졌으나 역대 장리들은 감히 금지하지 못했다. 태조가 부임하여 사당을 모두 허물고 관리와 백성들이 제사 지내는 것을 엄격히 금했다. 이후 정권을 잡자 간사한 귀신을 섬기는 일을 없애니, 세상의 음사가 이로부터 완전히 사라졌다.

오래지 않아 징발되어 동군 태수로 돌아왔으나 부임하지 않고 병을 칭탁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위서』에 이르기를, 이때 권신들이 조정을 전횡하고 귀척들이 횡포를 부렸다. 태조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며 용납받을 수 없었다. 여러 번 간하다가 화를 입을까 두려워 숙위(궁궐 호위)를 청했다. 의랑에 임명되었으나 항상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가 성 밖에 집을 짓고 봄·여름에는 경전을 읽고 가을·겨울에는 사냥하며 스스로 즐겼다.

7
얼마 지나지 않아 기주 자사 왕분, 남양의 허유, 패국의 주정 등이 호걸들과 결탁하여 영제를 폐하고 합비후를 세우려 했다. 이 사실을 태조에게 알렸으나 태조는 이를 거절했다. 왕분 등은 결국 패망했다.

사마표의 『구주춘추』에 이르기를, 이때 진번의 아들 진일이 방술사 양해와 함께 왕분의 자리에 모였다. 양해가 “천문이 환관에게 불리하니 황문과 상시 같은 귀족들은 멸망할 것이오”라고 하니 진일이 기뻐했다. 왕분이 “만약 그렇다면 내가 앞장서서 제거하겠소”라고 했고, 이로써 허유 등과 모의했다. 영제가 하간의 옛 집을 북쪽으로 순행하려 하자 왕분 등은 이를 틈타 변란을 일으키려 했다. 상소를 올려 흑산적이 군현을 공격하고 약탈하니 군대를 일으키게 해달라고 청했다. 마침 북쪽에 붉은 기운이 하늘을 가로질러 나타나자 태사가 “음모가 있을 것이니 북쪽으로 행차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올렸고, 황제는 행차를 중지했다. 왕분에게 군대를 해산하라는 조서가 내려지자 왕분은 두려워 자살했다.

『위서』에 실린 태조가 왕분을 거절하며 한 말은 다음과 같다. “무릇 폐립(황제를 갈아치우는 일)은 천하에서 가장 상서롭지 못한 일이오. 옛사람 중에 형세를 저울질하고 경중을 따져 결행한 자로는 이윤과 곽광이 있소. 이윤은 지극한 충성심을 품고 재상의 지위를 차지하여 관직의 윗자리에 있었으니, 나아가고 물러나거나 폐하고 세우는 것이 그 계산대로 이루어졌소. 곽광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맡기는 책임을 받아 종친의 지위를 빌리고, 안으로는 태후의 중책을 이용하고 밖으로는 여러 신료들의 동의를 얻었소. 창읍왕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귀족들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조정에 직언하는 신하가 없었으며, 의논이 측근에서 나왔으니 그 계책이 수레바퀴를 돌리듯 쉬웠고 일이 이루어짐이 썩은 나무를 꺾듯 했소. 지금 그대들은 과거의 일이 쉬웠던 것만 보고 당금의 어려움을 보지 못하고 있소. 그대들이 스스로 헤아려 보건대, 무리를 모으고 당을 결성함이 칠국의 난보다 나은가? 합비후의 귀함이 오왕, 초왕보다 나은가? 그럼에도 비상한 일을 도모하여 반드시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이 또한 위험하지 않은가!”

8
금성의 변장과 한수가 자사와 군수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니 무리가 10여만 명에 달하여 천하가 소란스러웠다. 태조는 전군교위로 징발되었다.

마침 영제가 붕어하고 태자가 즉위하여 태후가 섭정했다. 대장군 하진과 원소가 환관을 주살하려 했으나 태후가 듣지 않았다. 하진이 동탁을 불러 태후를 위협하려 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태조가 듣고 이를 비웃으며 말했다. “환관은 고금에 늘 있어 왔으나, 군주가 권력과 총애를 빌려주지 말아야 할 것인데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소. 이미 죄를 다스리려 한다면 원흉 하나만 처단하면 될 터인데, 어찌 굳이 번거롭게 외지의 장수들을 부른단 말인가! 모두 주살하려 한다면 일이 반드시 새어 나갈 것이니, 나는 그들의 패망을 보게 될 것이오.”

동탁이 도착하기 전에 하진은 살해되었다. 동탁이 도착하여 황제를 폐위하여 홍농왕으로 삼고 헌제를 세우니 경도는 대란에 빠졌다. 동탁이 태조를 효기교위로 천거하여 함께 일을 도모하려 했다. 태조는 성명을 바꾸고 샛길로 동쪽으로 돌아왔다.

『위서』에 이르기를, 태조는 동탁이 결국 패망할 것을 알았기에 그 직책을 받지 않고 고향으로 도망쳐 돌아갔다. 기병 몇 명을 데리고 옛 친구인 성고의 여백사 집을 지나가게 되었다. 여백사는 없었고 그의 아들이 빈객들과 함께 태조를 협박하여 말과 물건을 빼앗으려 하자 태조는 칼을 휘둘러 그들 수 명을 죽였다.

『세어』에 이르기를, 태조가 여백사 집을 지나갔는데, 여백사는 외출 중이었고 다섯 아들이 모두 집에 있어 주인의 예를 갖추었다. 태조는 자신이 동탁의 명을 거역한 처지라 그들이 자신을 해칠까 의심하여 밤중에 칼로 8명을 죽이고 떠났다.

손성의 『잡기』에 이르기를, 태조가 그들이 식기를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생각하여 밤중에 모두 죽였다. 그러고는 슬퍼하며 “내 사람이 나를 저버릴지언정, 내가 사람을 저버리지 않겠다!”라고 말하고 떠났다.

관문을 나와 중모현을 지나다 정장(마을 관리)에게 의심을 받아 현에 체포되었다. 현의 사람들 중에 태조를 알아보는 이가 있어 그를 위해 사정하여 풀려났다.

『세어』에 이르기를, 중모현에서 그가 도망자라고 의심하여 현에 구금했다. 당시 현의 연(벼슬아치)들도 이미 동탁의 수배령을 받은 상태였다. 오직 공조(벼슬아치)만이 태조임을 알았는데, 세상이 어지러우니 천하의 영웅준걸을 가두어서는 안 된다고 현령에게 말하여 풀려나게 했다.

동탁이 결국 태후와 홍농왕을 죽였다. 태조는 진류에 이르러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아 동탁을 토벌하려 했다. 12월, 기오(己吾)에서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세어』에 이르기를, 진류의 효렴 위자가 가산을 털어 태조를 지원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했으며, 무리가 5천 명이었다. 이때가 중평 6년이었다.

9
초평 원년 봄 정월, 후장군 원술, 기주목 한복,

『영웅기』에 이르기를, 한복은 자가 문절이며 영천 사람이다. 어사중승을 지내다가 동탁에 의해 기주목으로 천거되었다. 당시 기주는 인구가 번성하고 병량도 충분했다. 원소가 발해에 있을 때 한복은 그가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 여러 종사를 보내 감시하며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동군 태수 교모가 꾀를 내어 경도(낙양)의 삼공 명의로 주와 군에 격문을 위조해 동탁의 죄악을 폭로하며 “위협을 받아 스스로 구할 수 없으니 의병을 기대하며 국가의 난국을 풀어달라”고 했다. 한복이 이 격문을 받고 종사들을 불러 “이제 원씨를 도와야 하겠소, 아니면 동탁을 도와야 하겠소?”라고 물었다. 치중종사 유자혜가 “지금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원씨나 동탁을 논합니까!”라고 했다. 한복은 자신이 옹졸한 말을 했음을 알고 부끄러워했다. 자혜가 다시 말하길 “군대는 흉한 일이니 앞장서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다른 주의 동향을 살펴 움직이는 자가 있으면 그때 합류하십시오. 기주가 다른 주보다 약하지 않으니, 남의 공이 기주보다 나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한복이 이를 옳게 여겼다. 한복은 원소에게 서신을 보내 동탁의 죄악을 말하며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허락했다.

예주 자사 공주,

『영웅기』에 이르기를, 공주는 자가 공서이며 진류 사람이다. 『장판한기』에 정태가 동탁에게 말하기를 “공공서는 청담과 고론에 능하여 마른 것을 불어 다시 살려낼 정도요”라고 했다.

연주 자사 유대(유요의 형), 하내 태수 왕광,

『영웅기』에 이르기를, 왕광은 자가 공절이며 태산 사람이다.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협객으로 알려졌다. 대장군 하진의 부름을 받고 하진의 부절을 가지고 서주에서 강노 500명을 징발해 경도로 갔다. 하진이 패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하내 태수가 되었다.

『사승후한서』에 이르기를, 왕광은 젊어서 채옹과 사이가 좋았다. 그해 동탁군에게 패하여 태산으로 달아나 용맹한 이들 수천 명을 모아 장막과 합류하려 했다. 왕광은 먼저 집금오 호모반을 죽였다. 호모반의 친족들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태조와 힘을 합쳐 왕광을 죽였다.

발해 태수 원소, 진류 태수 장막, 동군 태수 교모,

『영웅기』에 이르기를, 교모는 자가 원위이며 교현의 일족이다. 먼저 연주 자사를 지냈으며 위엄과 은혜가 있었다.

산양 태수 원유, 원유는 자가 백업이며 원소의 종형이다. 장안령을 지냈다. 하간의 장초가 일찍이 원유를 태위 주준에게 추천하며 “관세(세상을 덮을 만한)의 미덕과 시대를 감당할 그릇이 있습니다. 그 충성스럽고 신용 있으며 밝고 곧음은 하늘이 내린 것입니다. 고전들을 포괄하고 백가들을 꿰뚫고 있으며,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짓고 물건을 보고도 이름을 알 수 있으니, 오늘날 그와 견줄 자가 없습니다”라고 칭찬했다. (내용은 장초집에 있다.)

『영웅기』에 이르기를, 원소가 나중에 원유를 양주 자사로 썼으나 원술에게 패했다. 태조는 “나이가 들어서도 부지런히 학문을 닦는 자는 오직 나와 원 백업뿐이다”라고 했다. (말은 문제의 전론에 있다.)

제북상 포신,

(포신의 일은 자훈전에 있다.)

동시에 군사를 일으켰는데 무리가 각기 수만 명이었고, 원소를 맹주로 추대했다. 태조는 분무장군을 대행했다.

10
2월, 동탁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황제를 장안으로 옮겼다. 동탁은 낙양에 머물다 궁궐을 불태웠다. 이때 원소는 하내에, 장막·유대·교모·원유는 산조에, 원술은 남양에, 공주는 영천에, 한복은 업에 주둔했다. 동탁의 군사가 강하여 원소 등은 감히 먼저 나아가지 못했다. 태조가 말했다.
“의병을 일으켜 폭도를 처단하려 하는데, 대군이 이미 모였거늘 제군들은 무엇을 망설이는가? 만약 동탁이 산동에서 군사가 일어난 것을 듣고 왕실의 권위를 빌려 2주(주나라의 도읍이었던 호경과 낙읍)의 험함을 차지한 뒤 동쪽을 향해 천하를 내려다본다면, 비록 무도한 짓을 하더라도 여전히 근심거리가 될 것이오. 지금은 궁궐을 불태우고 황제를 납치했으니 해내(천하)가 진동하여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모르고 있소. 이때가 바로 하늘이 동탁을 망하게 할 기회요. 한 번의 싸움으로 천하를 정할 수 있으니 놓쳐서는 안 되오!”

태조는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해 성고를 차지하려 했다. 장막이 장수 위자를 보내 태조를 따르게 했다. 형양 변수에 도착했을 때 동탁의 장수 서영을 만났으나, 싸움에서 불리하여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태조는 날아오는 화살에 맞았고 타고 있던 말도 부상을 입었다. 종제(사촌 동생) 조홍이 자신의 말을 태조에게 주어 밤에 탈출할 수 있었다. 서영은 태조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하루 종일 힘껏 싸우다가 산조를 쉽게 공격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군사를 돌렸다.

11
태조가 산조에 도착하니 여러 군대의 군사가 10여만 명이었으나 날마다 술을 마시며 잔치를 열 뿐 진격할 생각은 없었다. 태조가 그들을 꾸짖으며 계책을 말했다.
“제군들은 나의 계책을 들으시오. 발해의 군사로 하내의 무리를 이끌고 맹진에 임하게 하고, 산조의 장수들은 성고를 지키며 오창을 차지하고, 번원과 태곡의 길을 막아 요충지를 완전히 제압해야 하오. 원 장군(원술)으로 하여금 남양의 군대를 이끌고 단과 석에 주둔하게 하여 무관으로 진입함으로써 삼보(장안 주변)를 진동시켜야 하오. 모두 보루를 높이 쌓고 깊은 도랑을 파서 적과 맞서 싸우지 말고, 의병을 많이 세워 천하에 형세를 보여준다면, 순리로 역을 처단하여 곧 평정할 수 있을 것이오. 지금 군사는 의로움으로 움직이는 것인데, 의심하며 나아가지 않는다면 천하의 기대를 잃을 것이니, 나는 제군들을 위해 부끄러울 뿐이오!”

장막 등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12
태조는 군사가 적어 하후돈 등과 함께 양주로 가서 병사를 모집했다. 자사 진온과 단양 태수 주흔이 군사 4천여 명을 주었다. 돌아와 용항에 도착하니 사졸들이 많이 반란을 일으켰다.

『위서』에 이르기를, 병사들이 반란을 모의하여 밤중에 태조의 장막을 불태웠다. 태조가 직접 칼을 휘둘러 수십 명을 죽이니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 진영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자는 500여 명뿐이었다. 질과 건평에 이르러 다시 병사를 모아 1천여 명을 얻어 하내에 주둔했다.

13
유대와 교모가 서로 사이가 나빠져 유대가 교모를 죽이고, 왕굉으로 동군 태수를 삼았다.

14
원소와 한복이 유주목 유우를 황제로 세우려 하자 태조가 거절했다.

『위서』에 실린 태조가 원소에게 답한 말이다. “동탁의 죄는 온 천하에 드러났으니, 우리는 대군을 합쳐 의병을 일으켰고 원근에서 호응하지 않는 이가 없는 것은 의로움으로 움직였기 때문이오. 지금 어린 군주가 유약하여 간신에게 제어당하고 있으나 아직 창읍왕(한나라 멸망의 전조가 된 폐위된 황제)과 같은 망국의 조짐은 없소. 그런데 일시에 바꾼다면 천하가 누구를 편안하게 여기겠소? 제군들은 북면(황제에게 충성)하시오, 나는 서쪽으로 향하겠소.”

원소가 일찍이 옥새 하나를 얻어 태조가 앉은 자리에서 팔꿈치를 가리키자, 태조는 이를 보고 웃으며 싫어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태조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대의 말을 듣지 않겠소.”

원소가 다시 사람을 보내 태조를 설득했다. “지금 원공은 세력이 성하고 군사가 강하며, 두 아들도 장성했소. 천하의 영웅들 중에 이보다 뛰어난 자가 누가 있겠소?” 태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원소를 더욱 옳지 않게 여겨 주멸할 계책을 세웠다.

15
2년 봄, 원소와 한복이 결국 유우를 황제로 세우려 했으나 유우는 끝내 감당하지 못했다.

16
여름 4월, 동탁이 장안으로 돌아갔다.

17
가을 7월, 원소가 한복을 위협하여 기주를 빼앗았다.

18
흑산적 우독, 백요, 수고 등이 10여만 명의 무리로 위군과 동군을 약탈했다. 왕굉이 막지 못하자 태조가 군사를 이끌고 동군으로 들어가 복양에서 백요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원소는 이 공으로 태조를 동군 태수로 천거하고 동무양을 다스리게 했다.

19
3년 봄, 태조가 돈구에 주둔하자 우독 등이 동무양을 공격했다. 태조는 곧바로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들어가 산을 넘어 우독 등의 본거지를 공격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여러 장수들이 모두 “돌아가 스스로를 구해야 합니다”라고 했으나, 태조는 말했다. “손빈은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위나라를 공격했고, 경엄은 서안을 내버려 두고 임치를 공격하려 했소. 만약 적이 우리가 서쪽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간다면 무양은 저절로 풀릴 것이오.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들의 본거지를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니, 적이 무양을 함락시키지 못하는 것은 확실하오.” 결국 그대로 행했다. 우독은 그 소식을 듣고 무양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태조는 수고를 요격했고, 또 내황에서 흉노 어부라를 공격하여 모두 크게 격파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어부라는 남단우의 아들이다. 중평 연간에 흉노 군사를 징발하자 어부라가 군사를 이끌고 한나라를 도왔다.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남단우를 죽이자 어부라는 그 무리를 이끌고 중국에 머물렀다. 천하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 서하의 백파적과 합세하여 태원과 하내를 파괴하고 여러 군을 약탈하며 도적이 되었다.

20
여름 4월, 사도 왕윤이 여포와 함께 동탁을 죽였다. 동탁의 장수 이각, 곽사 등이 왕윤을 죽이고 여포를 공격했다. 여포가 패하여 동쪽으로 무관을 빠져나갔다. 이각 등이 조정을 전횡했다.

21
청주의 황건적 무리 100만 명이 연주로 들어와 임성상 정수를 죽이고 동평으로 방향을 돌렸다. 유대가 공격하려 하자 포신이 간했다. “지금 적의 무리가 100만 명인데 백성들은 모두 떨고 있고 사졸들은 싸울 의지가 없으니 맞설 수 없습니다. 저 적들의 무리를 보니 떼를 지어 다니며 군에 치중(보급품)도 없고 오직 약탈을 자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군사의 힘을 길러 우선 굳게 지키는 것이 낫습니다. 적들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공격하려 해도 공격할 수 없으니 그 기세는 반드시 흩어질 것입니다. 그때 정예병을 골라 요충지를 차지하고 공격하면 깰 수 있습니다.”

유대가 따르지 않고 싸우다가 과연 죽임을 당했다.

『세어』에 이르기를, 유대가 죽자 진궁이 태조에게 말했다. “연주는 지금 주인이 없고 왕명은 끊겼습니다. 제가 주를 설득할 테니 명부(조조)께서 속히 가셔서 목(주지사)이 되십시오. 이를 발판으로 천하를 거둘 수 있으니 이는 패왕의 사업입니다.” 진궁이 별가와 치중에게 말했다. “지금 천하는 분열되었고 주에는 주인이 없소. 조 동군은 세상을 다스릴 재능을 갖춘 분이니 그를 맞아 주목으로 삼으면 반드시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이오.” 포신 등도 그렇게 여겼다. 포신은 곧 주 관리 만잠 등과 함께 동군으로 가서 태조를 맞이하여 연주목으로 삼았다. 결국 군사를 진격시켜 수장 동쪽에서 황건적을 공격했다. 포신은 힘껏 싸우다 전사했으나 가까스로 적을 깨뜨렸다.

『위서』에 이르기를, 태조는 보병과 기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전장을 살피러 갔다가 갑자기 적의 진영과 맞닥뜨렸다. 싸움이 불리하여 죽은 자가 수백 명이었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적은 계속해서 진격해 왔다. 황건적은 오랫동안 도적질을 해왔고 여러 번 승리를 거두어 병사들이 모두 정예하고 사나웠다. 태조는 본래 군사가 적었고 새 병사들은 훈련되지 않아 군 전체가 모두 두려워했다. 태조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직접 장병들을 순찰하며 상벌을 분명히 하니 무리가 다시 분발했다. 틈을 타 공격하자 적은 조금씩 꺾이고 물러났다. 적은 태조에게 격문을 보냈다. “예전 제남에 있을 때 신당을 허물었는데 그 도리가 중황태일과 같아 도를 아는 듯하더니, 지금은 더욱 미혹하오. 한나라의 운은 이미 다했으니 황가(황건적)가 마땅히 서야 하오. 하늘의 큰 운수니 그대의 재력으로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태조는 격문을 보고 꾸짖고 죄를 다스리며 여러 번 항복할 길을 보여주었다. 결국 기묘한 복병을 설치하고 밤낮으로 싸우니 싸울 때마다 사로잡았고, 적은 결국 달아났다. 포신의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하자 무리가 나무로 포신의 형상을 깎아 제사 지내며 곡했다. 황건적을 추격하여 제북에 이르니 항복을 구했다. 겨울, 항복한 졸개 30여만 명과 남녀 100여만 구를 받아들였고, 그중 정예병을 골라 청주병(靑州兵)이라 불렀다.

22
원술과 원소 사이에 틈이 생기자, 원술이 공손찬에게 구원을 구했다. 공손찬이 유비에게 고당에 주둔하게 하고, 단경에게 평원에, 도겸에게 발간에 주둔하게 하여 원소를 압박했다. 태조가 원소와 합세하여 공격하니 모두 깨뜨렸다.

23
4년 봄, 군사를 연성에 주둔시켰다. 형주목 유표가 원술의 보급로를 끊자, 원술은 군사를 이끌고 진류로 들어가 봉구에 주둔했고, 흑산적과 어부라 등이 그를 도왔다. 원술이 장수 유상에게 광정을 지키게 했다. 태조가 유상을 공격하자 원술이 구원하러 왔으나, 싸워서 크게 깨뜨렸다. 원술이 봉구로 물러나 보전하자 곧 포위했는데, 포위망이 좁혀지기 전에 원술이 양읍으로 달아났다. 태조가 태수로 추격하여 도랑물을 터뜨려 성을 침수시켰다. 원술이 영릉으로 달아나자 또 추격했고, 원술은 구강으로 달아났다. 여름, 태조가 군사를 정도로 돌렸다.

24
하비의 궐선이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스스로 천자라 칭했다. 서주목 도겸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태산의 화, 비를 취하고 임성을 약탈했다. 가을, 태조가 도겸을 정벌하여 10여 성을 함락시키니, 도겸은 성을 지키며 감히 나오지 못했다.

25
이해, 손책이 원술의 명을 받아 강을 건넜고, 몇 년 사이에 강동을 차지했다.

26
흥평 원년 봄, 태조가 서주에서 돌아왔다. 처음 태조의 아버지 조숭이 관직을 떠나 초로 돌아왔는데, 동탁의 난을 피해 낭야로 갔다가 도겸에게 해를 당했다. 그래서 태조가 원수를 갚고 동쪽을 정벌하려 했다.

『세어』에 이르기를, 조숭이 태산 화현에 있었다. 태조가 태산 태수 응소에게 명하여 가족을 연주로 보내게 했는데, 응소의 군사가 도착하기 전에 도겸이 몰래 기병 수천 명을 보내 덮쳤다. 조숭의 집안 사람들은 응소가 마중 온 줄 알고 대비하지 않았다. 도겸의 군사가 들이닥쳐 문 안에서 태조의 동생 조덕을 죽였다. 조숭은 두려워 뒷담을 뚫고 먼저 첩을 밖으로 내보냈는데, 첩이 뚱뚱하여 제때 나가지 못했다. 조숭은 측간으로 도망쳤다가 첩과 함께 모두 해를 입었고, 문안의 식구들이 모두 죽었다. 응소는 두려워 관직을 버리고 원소에게로 달아났다. 나중에 태조가 기주를 평정했을 때 응소는 이미 죽어 있었다.

위요의 『오서』에 이르기를, 태조가 조숭을 맞이하러 갔는데 치중(짐수레)이 100여 대였다. 도겸이 도위 장개를 보내 기병 200명으로 호위하게 했는데, 장개가 태산의 화현과 비현 사이에서 조숭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회남으로 달아났다. 태조는 도겸에게 그 죄를 물어 정벌한 것이다. 여름, 순욱과 정욱에게 연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도겸을 정벌하여 5성을 함락시켰으며, 땅을 약탈하여 동해까지 이르렀다. 돌아오는 길에 담현을 지나는데 도겸의 장수 조표와 유비가 담 동쪽에 주둔하여 태조를 요격했다. 태조가 격파하고 상분을 함락시켰으며, 지나가는 곳마다 잔혹하게 살육했다.

손성이 말하길 “죄를 벌하고 백성을 위로하는 것은 예로부터의 올바른 궤도이다. 도겸의 죄를 묻는 것이 이유가 있더라도 그 속해 있던 부대까지 잔혹하게 처리한 것은 잘못이다”라고 했다.

27
마침 장막과 진궁이 반란을 일으켜 여포를 맞이하니 군현이 모두 호응했다. 순욱과 정욱이 연성을 보전하고 범현, 동아현이 굳게 지키니 태조가 곧바로 군사를 돌렸다. 여포가 도착하여 연성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하자 서쪽 복양에 주둔했다. 태조가 말했다. “여포는 일시에 한 주를 얻었으나 동평을 차지하지 못하고 항부, 태산의 길을 끊어 험한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복양에 주둔했으니, 내가 보기에 그는 능력이 없다.” 곧바로 군사를 진격시켜 공격했다. 여포가 군사를 내어 싸우며 먼저 기병으로 청주병을 공격했다. 청주병이 달아나 태조의 진형이 어지러워졌고, 들이받는 불길 속에서 말에서 떨어져 왼쪽 손바닥을 데었다. 사마 누이가 태조를 부축해 말에 태우고 결국 물러났다.

원위의 『헌제춘추』에 이르기를, 태조가 복양을 포위하자 복양의 대성(큰 성씨) 전씨가 반간(내응)이 되어 태조가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동문을 불태워 반란의 뜻이 없음을 보였다. 싸움이 벌어지자 군사가 패했다. 여포의 기병이 태조를 잡았으나 그가 태조인 줄 모르고 “조조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었다. 태조가 “누런 말을 타고 달아나는 자가 바로 조조다”라고 했다. 여포의 기병이 태조를 놓아주고 누런 말을 탄 자를 뒤쫓았다. 문 앞의 불길이 여전히 거세자 태조가 불길을 뚫고 나왔다. 진영에 도착하지 못하고 멈추었는데,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만나지 못해 모두 두려워했다. 태조가 스스로 힘을 내어 군사를 위로하고 군중에 명하여 공격 기구를 재촉하게 한 뒤 나아가 다시 공격하여, 여포와 백여 일 동안 서로 대치했다. 메뚜기가 일어나 백성들이 크게 굶주렸고 여포의 식량도 다하자 각자 군사를 물렸다.

28
가을 9월, 태조가 연성으로 돌아왔다. 여포가 승씨에 도착했다가 그 현 사람 이진에게 패하고 동쪽 산양에 주둔했다. 이때 원소가 사람을 보내 태조에게 화친을 권했다. 태조는 막 연주를 잃고 군량도 다하여 화친하려 했다. 정욱이 태조를 말리니 태조가 따랐다. 겨울 10월, 태조가 동아에 이르렀다.

29
이해, 곡식 한 섬의 값이 50여만 전이었고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으므로 새로 모집한 관리와 병사들을 해산했다. 도겸이 죽고 유비가 그 뒤를 이었다.

30
2년 봄, 정도를 기습했다. 제음 태수 오자가 남성을 보전하고 있어 함락하지 못했다. 마침 여포가 도착하자 또 공격하여 깨뜨렸다. 여름, 여포의 장수 설란, 이봉이 거야에 주둔하자 태조가 공격했다. 여포가 설란을 구원하려 했으나 설란이 패하고 여포가 달아나 결국 설란 등을 참수했다. 여포가 다시 동민에서 진궁과 함께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 싸웠다. 이때 태조의 병사가 적어 복병을 설치하고 기묘한 군사를 내어 공격하니 크게 깨뜨렸다.

『위서』에 이르기를, 이때 병사들이 모두 나가 보리를 베고 있어 남아 있는 군사가 1천 명도 되지 않았고 진영도 굳건하지 않았다. 태조는 부인들에게 성벽(陴)을 지키게 하고 모든 병력을 내어 맞서게 했다. 진영 서쪽에 큰 둑이 있었고 그 남쪽은 나무가 우거져 어두웠다. 여포는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서로 말하길 “조조는 술수가 많으니 복병 속으로 들어가지 마라”고 하고는 군사를 물려 남쪽 10여 리에 주둔했다. 다음 날 다시 오자 태조는 병사를 둑 뒤에 숨기고 절반의 병사만 둑 밖으로 내보냈다. 여포가 더욱 진격해 오자 곧 가벼운 무장병을 보내 도전하게 했다. 교전이 벌어지자 복병이 모두 둑 위로 올라섰고 보병과 기병이 함께 진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그 용차(임금의 수레)를 획득하고 진영까지 추격하고 돌아왔다. 여포가 밤에 달아나자 태조가 다시 공격하여 정도를 함락시키고 군사를 나누어 여러 현을 평정했다. 여포는 동쪽으로 유비에게 달아났고, 장막은 여포를 따라 자신의 동생 장초에게 가족을 맡기고 옹구를 지키게 했다. 가을 8월, 옹구를 포위했다. 겨울 10월, 천자가 태조를 연주목으로 삼았다. 12월, 옹구가 함락되고 장초는 자살했다. 장막의 삼족을 멸했다. 장막은 원술에게 구원을 요청하러 갔다가 그 무리에게 죽임을 당했다. 연주가 평정되자 동쪽으로 진 땅을 약탈했다.

31
이해, 장안에 대란이 일어나 천자가 동쪽으로 옮겨갔다. 조양에서 패하고 강을 건너 안읍에 머물렀다.

32
건안 원년 봄 정월, 태조가 군사를 이끌고 무평에 이르니 원술이 임명한 진상 원사가 항복했다.

33
태조가 천자를 맞이하려 했으나 여러 장수가 의심했다. 순욱과 정욱이 권하니 곧바로 조홍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마중 나가게 했다. 위장군 동승과 원술의 장수 창노가 험한 곳을 막아서서 조홍이 나아가지 못했다.

34
여남, 영천의 황건적 하의, 유벽, 황소, 하만 등의 무리가 각기 수만 명이었는데, 처음에는 원술에게 호응하다가 나중에 손견에게 붙었다. 2월, 태조가 군사를 진격시켜 토벌하고 유벽, 황소 등을 참수하니, 하의와 그 무리가 모두 항복했다. 천자가 태조를 건덕장군으로 삼았다. 여름 6월, 진동장군으로 승진시키고 비정후에 봉했다. 가을 7월, 양봉, 한섬이 천자를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헌제춘추』에 이르기를, 천자가 처음 낙양에 도착하여 성 서쪽의 옛 중상시 조충의 집에 머물렀다. 장양을 시켜 궁궐을 수리하게 하고 궁전 이름을 양안전이라 했다. 8월, 황제가 비로소 거처를 옮겼다. 양봉은 따로 양에 주둔했다. 태조가 곧바로 낙양에 이르러 경도를 호위하니 한섬이 도망쳤다. 천자가 태조에게 절월(왕의 대행임을 나타내는 상징)을 빌려주고 상서사(국정을 총괄하는 직무)를 겸하게 했다.

『헌제기』에 이르기를, 또 사예교위를 겸하게 했다. 낙양이 파괴되자 동소 등이 태조에게 허도로 천도할 것을 권했다. 9월, 수레가 번원을 나와 동쪽으로 향했다. 태조를 대장군으로 삼고 무평후에 봉했다. 천자가 서쪽으로 옮겨간 이후 조정은 날로 어지러웠으나 이때 비로소 종묘와 사직의 제도가 세워졌다.

『장판한기』에 이르기를, 처음 천자가 조양에서 패했을 때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려 했다. 시중 태사령 왕립이 말하길 “지난봄 태백(금성)이 진성(토성)을 우두성에서 범했고 천진을 지났으며, 형혹(화성)이 또 역행하여 북하를 지키고 있으니 범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이로 인해 천자가 결국 북쪽으로 강을 건너지 않고 지관을 통해 동쪽으로 나왔다. 왕립이 또 종정 유애에게 말하길 “앞서 태백이 천관을 지키며 형혹과 만났는데, 금성과 화성이 교차함은 혁명(왕조 교체)의 상징입니다. 한나라의 운은 다했으니 진(晉), 위(魏)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립이 나중에 황제에게 여러 번 말하길 “천명은 떠나고 머무는 곳이 있으며 오행은 항상 성하지 않습니다. 불을 대신하는 것은 흙이니 한나라를 잇는 것은 위나라일 것이며, 천하를 편안하게 할 사람은 조씨 성이니 오직 조씨에게 위임하십시오”라고 했다. 공(조조)이 이를 듣고 사람을 시켜 왕립에게 말하길 “공이 조정에 충성함은 알지만 천도는 심오하고 머니 부디 그 말을 많이 하지 마시오”라고 했다.

35
천자가 동쪽으로 올 때 양봉이 양에서 가로막으려 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겨울 10월, 공이 양봉을 정벌하여 양봉이 남쪽으로 원술에게 달아나자 그가 주둔하던 양의 진영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로써 원소를 태위로 삼았으나, 원소는 자신의 서열이 공(조조)보다 아래인 것을 부끄러워하여 받으려 하지 않았다. 공이 굳게 사양하고 대장군 직을 원소에게 양보했다. 천자가 공을 사공으로 삼고 차기장군(군대를 이끄는 장군)을 겸하게 했다. 이해에 조지, 한호 등의 건의를 사용하여 비로소 둔전을 일으켰다.

『위서』에 이르기를, 황란을 겪으며 양곡이 부족했다. 여러 군대가 함께 일어났으나 한 해의 계획도 없었고, 굶주리면 약탈하고 배부르면 버려두니, 와해되고 흩어져 적을 만나기도 전에 스스로 무너진 경우가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원소가 하북에 있을 때 군사들은 뽕나무 열매를 먹고 버텼고, 원술은 강과 회수 지역에서 부들(蒲蕒)을 먹었다. 백성들은 서로 잡아먹었고 주와 고을은 황폐했다. 공이 말하길 “나라를 다스리는 기술은 군사를 강하게 하고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데 있다. 진나라 사람들은 농사를 급히 하여 천하를 겸병했고, 효무제(한 무제)는 둔전으로 서역을 평정했으니, 이는 선대의 좋은 모범이다”라고 했다. 이해에 백성을 모집하여 허도 아래에서 둔전하게 하니 곡식 100만 섬을 얻었다. 이로 인해 주와 군에서 예외 없이 전관(농사 담당 관리)을 두어 곳곳에 곡식을 쌓았다. 사방을 정벌할 때 군량을 운반하는 수고가 없었으니, 결국 여러 적들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했다.

36
여포가 유비를 습격하여 하비를 취했다. 유비가 와서 의탁하자 정욱이 공에게 말했다. “유비를 관찰하니 웅재가 있고 대중의 마음을 깊이 얻었으니, 끝내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일찍 도모함만 못합니다.” 공이 말했다. “지금은 영웅을 거두어야 할 때이다. 한 사람을 죽여 천하의 인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37
장제가 관중에서 남양으로 달아났다. 장제가 죽자 조카 장수가 그 무리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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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봄 정월, 공이 완에 도착했다. 장수가 항복했으나 곧 후회하고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공이 싸웠으나 군사가 패했고,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맏아들 조앙과 조카 조안민이 해를 당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공이 탔던 말 이름은 절영인데, 날아오는 화살을 맞아 뺨과 다리를 다쳤고 공의 오른쪽 팔도 맞았다.

『세어』에 이르기를, 조앙은 말을 탈 수 없게 되자 자신의 말을 공에게 주어 공은 탈출할 수 있었으나 조앙은 해를 당했다. 공이 곧 군사를 이끌고 무음으로 돌아왔고, 장수가 기병을 이끌고 노략질하자 공이 격파했다. 장수가 양으로 달아나 유표와 합세했다. 공이 여러 장수에게 말했다. “내가 장수를 항복시켰을 때 즉시 인질을 잡지 않아 이 지경이 되었다. 나는 왜 패했는지 안다. 제군들은 지켜보라, 지금 이후로는 다시 패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허도로 돌아왔다.

『세어』에 이르기를, 옛 제도에 삼공이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알현할 때는 모두 극(창)을 교차하여 목에 대고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처음 공이 장수를 토벌하러 갈 때 천자를 알현했는데, 이때 비로소 이 제도를 회복했다. 공은 이때부터 다시는 조정에 나아가 알현하지 않았다.

39
원술이 회남에서 황제를 칭하려 하여 사람을 보내 여포에게 알렸다. 여포가 그 사자를 잡아서 그 서신을 올렸다. 원술이 노하여 여포를 공격했으나 여포에게 패했다. 가을 9월, 원술이 진을 침범하자 공이 동쪽으로 정벌했다. 원술이 공이 직접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버리고 달아났으며, 그 장수 교유, 이풍, 양강, 악취를 남겨두었다. 공이 도착하여 유상 등을 공격해 깨뜨리고 모두 참수했다. 원술이 회수를 건너 달아났다. 공이 허도로 돌아왔다.

40
공이 무음에서 돌아오자 남양, 장릉의 여러 현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장수에게 붙었다. 공이 조홍을 보내 공격했으나 불리하여 엽으로 돌아와 주둔했는데, 장수와 유표에게 자주 침범당했다. 겨울 11월, 공이 남쪽을 정벌하여 완에 이르렀다.

『위서』에 이르기를, 유수(강) 가에 임하여 죽은 장병들을 제사 지내며 흑흑 흐느끼니 무리가 모두 감동하여 통곡했다. 유표의 장수 등제가 호양을 차지하자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등제를 생포하니 호양이 항복했다. 무음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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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봄 정월, 공이 허도로 돌아왔고 처음으로 군사제주(군사 자문 직책)를 두었다. 3월, 공이 장수를 양에서 포위했다. 여름 5월, 유표가 군사를 보내 장수를 구원하여 군사의 뒤를 끊으려 했다.

『헌제춘추』에 이르기를, 원소의 배반한 병사가 공에게 와서 말했다. “전풍이 원소에게 일찍이 허도를 습격하여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했다면 사해를 손가락질하듯 평정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공이 곧 장수의 포위를 풀었다. 공이 이끌고 돌아가려 하자 장수의 병사가 쫓아왔고 공의 군사는 나아가지 못하고 진영을 이어 서서히 나아갔다. 공이 순욱에게 편지를 보냈다. “적이 나를 쫓아오는데 비록 하루에 몇 리밖에 가지 못하지만 나는 계산이 서 있다. 안중에 도착하면 반드시 장수를 깨뜨릴 것이다.” 안중에 도착하자 장수와 유표의 병사가 험한 곳을 합쳐 지켰고 공의 군사는 앞뒤로 적을 받았다. 공이 밤에 험한 곳을 뚫어 땅굴을 만들고 치중(보급품)을 모두 지나가게 한 뒤 기묘한 병사를 배치했다. 날이 밝자 적들은 공이 달아난 줄 알고 전군이 쫓아왔다. 곧 기묘한 병사들인 보병과 기병을 양쪽에서 협공하니 크게 깨뜨렸다. 가을 7월, 공이 허도로 돌아왔다. 순욱이 공에게 물었다. “전에 적이 반드시 깨질 것이라고 계책을 세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공이 답했다. “적들이 나의 돌아가는 군사를 막아서며 우리와 죽을 곳에서 싸웠기 때문에 나는 승리를 확신했소.”

42
여포가 다시 원술의 사주를 받아 고순을 시켜 유비를 공격하게 했다. 공이 하후돈을 보내 구원하게 했으나 불리했고, 유비는 고순에게 패했다. 9월, 공이 동쪽으로 여포를 정벌했다. 겨울 10월, 팽성을 도륙하고 그 재상 후해를 사로잡았다. 하비에 이르자 여포가 직접 기병을 이끌고 역공했으나 크게 깨뜨리고 그 용맹한 장수 성렴을 사로잡았다. 성 아래까지 추격하자 여포가 두려워 항복하려 했다. 진궁 등이 그 계책을 막고 원술에게 구원을 구하게 했다. 여포가 밖으로 나와 싸우려 했으나 또 패하여 돌아와 굳게 지켰고, 공격했으나 함락되지 않았다. 이때 공이 여러 번 싸워 사졸들이 지쳤고 돌아가려 했으나 순유, 곽가의 계책을 사용하여 사수와 기수를 터뜨려 성을 침수시켰다. 달여가 지나자 여포의 장수 송헌, 위속 등이 진궁을 붙잡아 성을 통째로 바치고 항복했다. 여포와 진궁을 생포하여 모두 죽였다. 태산의 장패, 손관, 오돈, 윤례, 창희가 각기 무리를 모았다. 여포가 유비를 깰 때 장패 등은 모두 여포를 따랐다. 여포가 패하자 장패 등을 사로잡았는데, 공이 후하게 대접하고 청주, 서주 2주를 떼어 바닷가에 붙여 맡겼으며, 낭야, 동해, 북해를 나누어 성양, 이성, 창려군으로 만들었다.

43
처음 공이 연주목이 되었을 때 동평의 필심을 별가로 삼았다. 장막이 반란을 일으킬 때 장막이 필심의 어머니와 동생, 처자를 인질로 잡았다. 공이 필심을 보내며 말했다. “그대의 노모가 저곳에 있으니 갈 수 있겠소.” 필심은 머리를 조아리며 두 마음이 없다고 했고 공이 그를 가상히 여겨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밖으로 나오자 결국 도망쳐 돌아갔다. 여포가 패하자 필심이 붙잡혔고 무리들은 필심이 두려워했으나 공이 말했다. “자기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가 어찌 군주에게 충성하지 않겠는가! 내가 구하던 사람이다.” 그리고는 노상으로 삼았다.

『위서』에 이르기를, 원소는 평소 고 태위 양표, 대장추 양소, 소부 공융과 사이가 나빠 공에게 다른 죄를 씌워 죽이게 하려 했다. 공이 말했다. “지금 천하가 토붕와해되고 영웅들이 함께 일어나 보상(輔相)과 군장(君長)들이 사람마다 꺼림칙하게 여기며 각자 스스로를 위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지금은 위아래가 서로 의심할 때요. 혐의 없는 사람을 대할 때도 오히려 믿지 못할까 두려운데, 만약 제거할 자가 있다면 누가 스스로 위태롭지 않겠소? 더구나 포의(평민)에서 일어나 먼지 구덩이 속에 있으면서 평범한 자들에게 짓밟히는 원한을 감당할 수 있겠소! 고조는 옹치의 원한을 사면하여 무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는데 어찌 잊겠소?” 원소는 공이 겉으로는 공의를 핑계 대고 속으로는 이질감을 보인다고 여겨 깊은 원망을 품었다. 신 송지가 생각건대, 양표 또한 일찍이 위무(조조)에게 곤경을 당해 죽을 뻔했고, 공융은 끝내 주살을 면치 못했으니 어찌 그 말을 앞세우고 나중에 따랐다고 하겠는가!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임이 참으로 옳다.

44
4년 봄 2월, 공이 창읍으로 돌아왔다. 장양의 장수 양추가 장양을 죽였고, 수고가 다시 양추를 죽여 그 무리를 원소에게 바치고 사견에 주둔했다. 여름 4월, 군사를 진격시켜 황하에 임하고 사환, 조인을 보내 강을 건너 공격하게 했다. 수고는 옛 장사 설홍, 하내 태수 무상에게 지키게 하고 자신은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원소에게 가서 구원을 청하다가 사환, 조인과 견성에서 마주쳤다. 교전 끝에 크게 깨뜨리고 수고를 참수했다. 공이 곧 황하를 건너 사견을 포위했다. 설홍, 무상이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여 열후에 봉하고 군사를 오창으로 돌렸다. 위종을 하내 태수로 삼아 하북의 일을 맡겼다.

45
처음 공이 위종을 효렴으로 천거했다. 연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공이 “오직 위종만은 고립된 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나중에 위종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자 공이 노하여 “위종이 남쪽으로 월나라나 북쪽으로 오랑캐로 도망치지 않는다면 반드시 너를 놓아두지 않겠다!”라고 했다. 사견을 함락시킨 후 위종을 생포하자 공이 “오직 그 재능 때문이지!”라고 하며 포박을 풀고 그를 썼다.

46
이때 원소가 공손찬을 병합하고 4주의 땅을 겸하여 무리가 10여만 명이었고, 군사를 진격시켜 허도를 공격하려 했다. 여러 장수가 대적할 수 없다고 했으나 공이 말했다. “나는 원소의 사람됨을 아오. 뜻은 크지만 지혜는 작고, 겉으로는 엄하나 겁이 많으며, 시기하고 질투하여 위엄이 적소. 병사는 많으나 지휘가 불분명하고, 장수는 교만한데 정령이 하나로 모이지 않으니, 땅이 비록 넓고 식량이 비록 풍족해도 나를 봉양하기에 딱 좋을 뿐이오.” 가을 8월, 공이 군사를 진격시켜 여양에 주둔하고 장패 등을 청주로 보내 제, 북해, 동안을 깨뜨리고 우금을 남겨 황하 위에 주둔하게 했다. 9월, 공이 허도로 돌아오고 군사를 나누어 관도를 지키게 했다. 겨울 11월, 장수가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여 열후에 봉했다. 12월, 공이 관도에 주둔했다.

47
원술이 진에서 패한 후 점차 곤궁해지자, 원담이 청주에서 사람을 보내 맞이하려 했다. 원술이 하비를 거쳐 북쪽으로 가려 하자 공이 유비, 주령을 보내 막게 했다. 마침 원술이 병으로 죽었다. 정욱, 곽가가 공이 유비를 보낸 소식을 듣고 공에게 말했다. “유비는 풀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공이 후회했으나 쫓아갔을 때는 이미 늦었다. 유비가 아직 동쪽으로 가지 않았을 때 몰래 동승 등과 함께 반란을 모의했다가 하비에 도착하자 서주 자사 차주를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패에 주둔했다. 유대, 왕충을 보내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헌제춘추』에 이르기를, 유비가 유대 등에게 말했다. “너희들을 100명이나 보낸다 해도 나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조공이 직접 온다면 모를까!”

『위무고사』에 이르기를, 유대(공산)는 패국 사람이다. 사공 장사로서 정벌을 따라 공을 세워 열후에 봉해졌다.

『위략』에 이르기를, 왕충은 부풍 사람으로 젊어서 정장이었다. 삼보가 어지러워지자 왕충은 굶주려 사람을 잡아먹었고, 무리를 따라 남쪽으로 무관으로 향했다. 루자백이 형주에 있으면서 북쪽에서 오는 손님을 맞이하려 했는데 왕충은 가고 싶지 않았고, 곧 무리를 이끌고 거슬러 공격하여 그들의 무기를 빼앗고 무리 1천여 명을 모아 공에게 귀의했다. 왕충을 중랑장으로 삼고 정벌을 따라다니게 했다. 오관장(조비)이 왕충이 일찍이 사람을 잡아먹은 것을 알고는, 나중에 황제를 모시고 나갈 때 배(광대)를 시켜 무덤 사이의 해골을 가져와 왕충의 말 안장에 매달게 하여 웃음거리로 삼았다.

48
여강 태수 유훈이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여 열후에 봉했다.

49
5년 봄 정월, 동승 등의 모의가 탄로 나 모두 주살되었다. 공이 직접 동쪽으로 유비를 정벌하려 하자 여러 장수가 모두 말했다. “공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원소입니다. 지금 원소가 바야흐로 오고 있는데 동쪽으로 가서 버린다면 원소가 뒤를 노릴 터인데 어찌합니까?” 공이 말했다. “유비는 인걸(사람 중의 영웅)이니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오.”

손성의 『위씨춘추』에 이르기를, 여러 장수에게 답하길 “유비는 인걸이니 장차 과인에게 근심을 낳을 것이다”라고 했다. 신 송지가 생각건대, 역사서에 기록된 말들은 이미 윤색된 것이 많아 앞서 기록된 내용 중에는 사실이 아닌 것이 있다. 후대의 작가들이 또 자기 생각을 더해 고쳤으니, 사실을 잃음이 이 또한 멀지 않겠는가! 무릇 손성이 책을 지으며 왼쪽(좌씨춘추)의 글을 많이 사용하여 옛 글을 바꿨는데, 이와 같은 것이 하나둘이 아니다. 아아, 후대의 학자들이 무엇을 믿겠는가! 더구나 위무(조조)는 바야흐로 천하를 위해 뜻을 떨치려는데 부차의 분사(자신이 죽을 것을 분하게 여김)와 같은 말을 썼으니 더욱 부류가 맞지 않다. 원소가 비록 큰 뜻이 있으나 일을 보는 것이 느리니 반드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곽가 또한 공에게 권하여 결국 동쪽으로 유비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그 장수 하후박을 생포했다. 유비가 원소에게로 달아나고 그 처자를 획득했다. 유비의 장수 관우가 하비에 주둔하자 다시 진격하여 공격하니 관우가 항복했다. 창희가 배반하여 유비에게 붙자 또 공격하여 깨뜨렸다. 공이 관도로 돌아왔으나 원소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50
2월, 원소가 곽도, 순우경, 안량을 보내 동군 태수 유연을 백마에서 공격하게 했고, 원소는 군사를 이끌고 여양에 이르러 강을 건너려 했다. 여름 4월, 공이 북쪽으로 유연을 구원했다. 순유가 공에게 설득했다. “지금 병사가 적어 대적할 수 없으니 그 세력을 나누게 해야 합니다. 공께서 연진에 도착하여 마치 군사를 건너 그 뒤를 향하는 것처럼 하면 원소가 반드시 서쪽에서 대응할 것이오. 그런 뒤에 가벼운 병사로 백마를 습격하면 그 방비하지 않은 틈을 타 안량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공이 따랐다. 원소가 병사가 건넌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군사를 나누어 서쪽에서 대응하게 했다. 공이 곧 군사를 겸행(빠른 행군)시켜 백마로 향했는데, 10여 리도 못 가서 안량이 크게 놀라 역전하려 했다. 장료, 관우를 시켜 앞서 올라가 공격하여 깨뜨리고 안량을 참수했다. 곧 백마의 포위를 풀고 그 백성들을 옮기며 강을 따라 서쪽으로 갔다. 원소가 이에 강을 건너 공의 군사를 추격하여 연진 남쪽에 이르렀다. 공이 병사를 정돈하여 남쪽 언덕 아래에 진영을 치고, 등루(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게 하니 “기병 5, 6백 명인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얼마 후 다시 “기병이 조금 많아지고 보병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라고 했다. 공이 “다시 보고하지 마라”라고 하고는 기병들에게 안장을 풀고 말을 놓아먹이게 했다. 이때 백마의 치중(보급 수레)이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여러 장수가 적의 기병이 많으니 진영으로 돌아가 지키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순유가 “이것은 적을 미끼로 삼는 것인데 어찌 떠나려 하십니까!”라고 했다. 원소의 기병 장수 문추가 유비와 함께 기병 5, 6천 명을 이끌고 앞뒤로 도착했다. 여러 장수가 다시 “말에 올라야 합니다”라고 했다. 공이 “아직이다”라고 했다. 얼마 후 기병이 조금 많아지고, 어떤 이들은 치중을 향해 달려갔다. 공이 “이제 되었다”라고 하고는 모두 말에 올랐다. 이때 기병이 600명이 차지 않았으나 곧 군사를 풀어 공격하여 크게 깨뜨리고 문추와 안량을 참수했다. 문추와 안량은 모두 원소의 명장들이었는데, 두 번의 싸움에 모두 사로잡히니 원소의 군사가 크게 진동했다. 공이 군사를 관도로 돌렸다. 원소는 양무를 보전하며 나아갔다. 관우가 달아나 유비에게 돌아갔다.

51
8월, 원소가 진영을 조금씩 앞으로 옮겨 모래 언덕에 의지해 진을 쳤는데 동서로 수십 리에 달했다. 공 또한 진영을 나누어 서로 대치했으나 합전하여 불리했다.

습착치의 『한진춘추』에 이르기를, 허유가 원소에게 설득했다. “공께서는 조조와 서로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급히 여러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곧장 다른 길을 통해 천자를 맞이하면 일은 즉시 이루어질 것이오.” 원소가 따르지 않으며 “나는 마땅히 먼저 포위하여 취할 것이오”라고 했다. 허유가 노했다.

이때 공의 병사는 1만 명이 되지 않았고 부상자가 10의 2, 3은 되었다. 신 송지가 생각건대, 위무가 처음 군사를 일으켰을 때 이미 5천 명의 무리가 있었고, 그 이후 백 번 싸워 백 번 이겼으니 패한 것이 10의 2, 3뿐이라는 말이다. 다만 황건적을 한 번 깨뜨려 항복한 졸개 30여만 명을 받았고, 나머지는 겸병한 것이니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비록 전투에서 손실이 있었으나 어찌 이토록 적겠는가! 무릇 진영을 맺고 서로 지키는 것은 적과 맞서 결전하는 것과는 다르다. 본기에서 “원소의 무리는 10여만 명이고 진영은 동서 수십 리였다”라고 했다. 위 태조(조조)가 비록 기변(기이한 변칙)이 무방하고 세상에 드문 인물이라 해도, 어찌 수천 명의 병사로 시간을 넘기며 서로 대항할 수 있었겠는가? 이치로 말하자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원소가 수십 리의 진영을 쳤고 공이 진영을 나누어 대치할 수 있었으니, 이는 병사가 매우 적지 않았음이 첫 번째다. 원소에게 만약 10배의 무리가 있었다면 이치상 마땅히 전력을 다해 포위하여 밖으로 드나들지 못하게 했을 텐데, 공이 서황 등을 시켜 그 운송 수레를 공격하게 하고, 공이 또 직접 나가 순우경 등을 공격하며 깃발을 휘날리며 왔다 갔다 하여 전혀 막힘이 없었으니, 원소의 힘으로는 제압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고, 병사가 매우 적지 않았음이 두 번째다. 여러 서적들이 모두 공이 원소의 무리 8만 명을 구덩이에 묻었다고 하거나 혹은 7만 명이라고 했다. 무릇 8만 명이 달아나 흩어지는데 8천 명의 병사가 묶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원소의 대군이 모두 공손히 죽임을 당하러 들어갔으니 무슨 힘으로 제압할 수 있겠는가? 이는 병사가 매우 적지 않았음이 세 번째다. 장차 기록하는 자가 적은 것으로 기이함을 보이려 한 것이지 실록이 아니다. 종요전을 살펴보건대 “공이 원소와 서로 대치할 때 종요가 사예로서 말 2천여 필을 보내 군사에 보태주었다”라고 했다. 본기와 세어가 모두 공의 이때 기병이 600여 필이라고 했는데 종요의 말은 어디에 있었는가?

원소가 다시 관도에 임하여 토산과 땅굴을 일으켰다. 공 또한 안에서 이를 만들어 서로 대응했다. 원소가 진영 안으로 화살을 쏘니 비 오듯 쏟아졌고,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방패를 써야 했으며 무리들은 크게 두려워했다. 이때 공은 군량이 적어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허도로 돌아갈 것을 의논했다. 순욱이 생각하길 “원소가 모든 무리를 모아 관도에 있는데 공과 승패를 결정지으려 하는 것입니다. 공께서 지극히 약한 것으로 지극히 강한 것을 당하고 있으니 만약 제압하지 못하면 반드시 그들에게 당할 것이니, 이는 천하의 큰 기틀입니다. 더구나 원소는 포의(평민)의 영웅일 뿐 사람을 모을 줄은 알지만 쓸 줄은 모릅니다. 공의 신무함과 명철함으로 대순(큰 순리)을 보좌하니 어디를 향한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공이 따랐다.

52
손책이 공과 원소가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허도를 습격하려 했으나, 미처 출발하지 못하고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53
여남의 항복한 도적 유벽 등이 배반하여 원소에게 호응하고 허도 아래를 약탈했다. 원소가 유비를 보내 유벽을 돕게 했고, 공이 조인을 보내 깨뜨렸다. 유비가 달아났고, 곧바로 유벽의 진영을 파괴했다.

54
원소가 곡식을 실은 수레 수천 대를 가져오자 공이 순유의 계책을 사용하여 서황, 사환을 보내 요격하게 하여 크게 깨뜨리고 그 수레를 모두 불태웠다. 공과 원소가 서로 대치한 지 여러 달이 지났고 싸움에서 장수를 베기도 했으나, 무리가 적고 군량이 다하여 사졸들이 피로했다. 공이 운송하는 자에게 말했다. “15일 안에 그대를 위해 원소를 깨뜨릴 테니 더는 그대를 수고롭게 하지 않겠다.”

겨울 10월, 원소가 수레에 곡식을 싣고 순우경 등 5명에게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운송하게 하여 원소의 진영 북쪽 40리에 주둔시켰다. 원소의 모신 허유가 재물을 탐내었는데 원소가 채워주지 못하자, 공에게 달려와 순우경 등을 공격할 것을 유세했다. 좌우가 의심했으나 순유, 가후가 공에게 권했다. 공이 곧 조홍을 남겨 지키게 하고, 직접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밤에 가니 날이 밝을 때 도착했다. 순우경 등이 공의 병사가 적은 것을 보고 진영 문밖으로 나왔다. 공이 급히 공격하자 순우경이 진영으로 물러나 지켰고, 곧바로 공격했다. 원소가 기병을 보내 순우경을 구원하게 했다. 좌우에서 “적의 기병이 점점 가까워오니 군사를 나누어 막기를 청합니다”라고 했다. 공이 노하며 “적이 뒤에 있는데, 그러면 보고하라!”라고 했다. 사졸들이 모두 죽기를 무릅쓰고 싸워 순우경 등을 크게 깨뜨리고 모두 참수했다.

『조만전』에 이르기를, 공이 허유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맨발로 나가 맞이하며 손바닥을 치고 웃으며 말했다. “자경(허유)이 멀리서 왔으니 내 일이 이루어졌소!”

방 안으로 들어가 앉자 허유가 공에게 말했다. “원씨의 군사가 성대하니 무엇으로 맞서겠소? 지금 군량이 얼마나 남았소?” 공이 “아직 1년은 버틸 수 있소”라고 했다. 허유가 “그럴 리가, 다시 말하시오”라고 했다. 다시 “반년은 버틸 수 있소”라고 했다. 허유가 “족하(당신)는 원씨를 깨뜨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오, 어찌 진실을 말하지 않소!”라고 했다. 공이 “방금은 농담이었소. 사실은 1달이면 끝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했다. 허유가 “공께서는 고립된 군사로 홀로 지키고 있어 밖으로 구원도 없는데 곡식마저 다했으니, 이는 위급한 날이오. 지금 원씨의 치중이 1만여 수레나 되어 고시, 오소에 있는데 군영에 엄한 방비가 없소. 지금 가벼운 병사로 습격하여 뜻밖의 때에 도착하여 그 쌓아둔 것을 불태우면 3일 안에 원씨는 스스로 패할 것이오”라고 했다. 공이 크게 기뻐하여 정예 보병과 기병을 뽑아 모두 원소 군의 깃발을 사용하게 하고, 입에 재갈을 물리고 말의 입을 묶어 밤에 샛길로 나갔다. 사람들에게 “원공(원소)이 조조가 후군을 약탈할까 두려워 군사를 보내 방비를 더하게 했다”라고 말하니, 듣는 자들이 사실이라 믿고 모두 태연했다. 도착하자마자 진영을 포위하고 크게 불을 지르니 진영 안이 놀라고 혼란스러웠다. 크게 깨뜨리고 그 곡식과 보물을 모두 불태웠으며, 독장 수원진, 기독 한거자, 여위황, 조예 등의 머리를 참수했다. 장군 순우중간의 코를 베었는데 죽지 않아 사졸 1천여 명을 죽여 모두 코를 가져왔고, 소와 말의 입술과 혀를 베어 원소의 군사들에게 보여주었다. 장수와 사졸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이때 밤에 순우중간을 사로잡아 지휘부 아래로 데려오자 공이 “어찌 이리되었느냐?”라고 물었다. 순우중간이 “승부는 하늘에 달린 것인데 어찌 물으십니까!”라고 했다. 공이 죽이지 않으려 했다. 허유가 “내일 아침이면 거울에 비칠 텐데(스스로 알 텐데), 이 사람은 남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원한을 가질 것입니다)”라고 하여 결국 죽였다. 원소가 처음 공이 순우경을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맏아들 담에게 말했다. “그들이 순우경 등을 공격하면 나는 그들의 진영을 함락시킬 것이니, 그들은 돌아갈 곳이 없을 것이다!” 곧바로 장합, 고람을 시켜 조홍을 공격하게 했다. 장합 등이 순우경이 깨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와서 항복했다. 원소의 무리가 크게 흩어졌고, 원소와 원담은 군사를 버리고 달아나 강을 건넜다. 추격했으나 미치지 못했고, 그 치중과 도서, 보물을 모두 거두었으며 그 무리들을 사로잡았다.

『헌제기기주』에 이르기를, 공이 상언했다. “대장군 업후 원소가 전 기주목 한복과 함께 옛 대사마 유우를 세우려 했고, 금으로 인장을 새겨 전 임장 필유를 유우에게 보내며 그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권하는 글을 지었습니다. 또 원소가 신에게 보낸 글에 ‘가히 연성에 도읍하여 세울 바가 있을 것이오’라고 했고, 함부로 금은 인장을 주조하여 효렴과 계리들이 모두 원소에게 갔습니다. 종제인 제음 태수 서가 원소에게 글을 보내길 ‘지금 해내(천하)가 상패(망함)하니 하늘의 뜻은 실로 우리 가문에 있습니다. 신령스러운 응답에 징조가 있으니 마땅히 형님에게 있을 것입니다. 남형(원술)의 신하들이 즉위를 하게 하려 하나 남형은 말하길, 나이로는 북형(원소)이 위이고 지위로는 북형이 중하다고 합니다. 곧 인장을 보내려 했으나 마침 조조가 길을 끊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원소의 종족은 대대로 나라의 큰 은혜를 입었으나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남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곧 군사를 정돈하여 관도에서 싸워, 성스러운 조정의 위엄을 빌려 원소의 대장 순우경 등 8명의 머리를 참수했고, 결국 크게 깨뜨려 흩어지게 했습니다. 원소는 아들 담과 함께 가벼운 몸으로 달아났습니다. 무릇 7만여 급을 참수했고, 치중과 재물은 억대였습니다.”

공이 원소의 서신 중에서 허도와 군중 사람들의 서신을 얻어 모두 불태웠다.

『위씨춘추』에 이르기를, 공이 “원소가 강성할 때도 고립된 나는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여러 사람들이랴!”라고 했다. 기주의 여러 군현은 대부분 성읍을 들어 항복했다.

55
처음 환제 시절에 황성(누런 별)이 초나라와 송나라의 분계에 나타났다. 요동의 은규는 천문에 능했는데, “뒤로 50년이 지나면 진인(참된 사람)이 양 땅과 패 땅 사이에서 일어날 것인데, 그 기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때 이르러 50년이 되었고, 공이 원소를 깨뜨리니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게 되었다.

56
6년 여름 4월, 강 위에서 군사를 떨치고 원소의 창정 군영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원소가 돌아가 다시 흩어진 졸개들을 모으고 반란을 일으킨 여러 군현을 평정했다. 9월, 공이 허도로 돌아왔다. 원소가 아직 깨지기 전, 유비에게 여남을 약탈하게 하고 여남의 도적 공도 등이 이에 호응했다. 채양을 보내 공도를 공격했으나 불리하여 공도에게 패했다. 공이 남쪽으로 유비를 정벌했다. 유비가 공이 직접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쳐 유표에게 달아났고 공도 등은 모두 흩어졌다.

57
7년 봄 정월, 공이 초에 주둔하며 명령을 내렸다. “내가 의병을 일으킨 것은 천하를 위해 폭도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옛 땅의 인민들이 죽고 흩어져 거의 다 사라졌으니 나라 안에서 종일 걸어 다녀도 아는 이가 보이지 않아 내 마음이 슬프고 상한다. 의병을 일으킨 이래 장병 중에 뒤를 이을 이가 없는 자가 있으면 그 친척을 찾아 뒤를 잇게 하고 상전(좋은 밭)을 주며, 관에서 쟁기질할 소를 주고 학사를 두어 가르치겠다. 살아남은 이들을 위해 사당을 세워 그 선조를 제사 지내게 하니, 죽어서 영혼이 있다면 내가 100년 뒤에 무슨 한이 남겠는가!”

결국 준의에 이르러 수양의 운하를 다스리고 사자를 보내 태뢰(소, 양, 돼지의 제물)로 교현을 제사 지냈다. 포상령에 실린 공의 제사문은 다음과 같다. “고 태위 교공은 밝은 덕을 널리 펴고 두루 사랑하며 너그러이 포용하셨소. 나라는 명훈을 생각하고 선비들은 훌륭한 계책을 그리워하오. 영혼은 그윽하여 몸은 사라졌으니, 아득하여 그립구려! 내가 어린 시절, 곁에서 모시며 특별히 미련하고 비루한 모습으로 큰 군자에게 받아들여졌소. 영예를 더하고 관망을 넓힌 것은 모두 그대의 장려와 도움 덕분이었으니, 마치 공자가 안연을 칭찬하고 이생이 가복을 두터이 탄식함과 같소.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으니, 이를 품고 잊지 못하오. 또 곁에서 약속한 말을 떠올리오. ‘죽은 뒤에 길을 지나는 일이 있거든 투주(한 말 술)와 지계(한 마리 닭)로 제사 지내주지 않고, 수레가 세 걸음 지나치거든 배가 아픈 것을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비록 당시의 농담 섞인 말일지라도 지극한 친밀함이 없었다면 어찌 이런 말을 했겠소? 영혼이 노하여 내게 질병을 내린다는 뜻이 아니라, 옛것을 그리워하며 돌아보니 슬픔이 사무치오. 명을 받들어 동쪽을 정벌하며 고향에 주둔하니 북쪽을 바라보며 그 귀한 땅과 능묘를 생각하오. 짧은 제물을 차렸으니 공께서는 흠향하시길!”

군사를 관도로 진격시켰다.

58
원소는 군사가 패한 뒤 병이 들어 피를 토하다가 여름 5월에 죽었다. 작은아들 원상이 뒤를 이었고, 원담은 스스로 거기장군이라 칭하고 여양에 주둔했다. 가을 9월, 공이 정벌하여 연이어 싸웠다. 원담, 원상이 여러 번 패하여 물러나 굳게 지켰다.

59
8년 봄 3월, 그 외성을 공격하니 비로소 나와 싸웠고, 공격하여 크게 깨뜨리니 원담, 원상이 밤중에 달아났다. 여름 4월, 군사를 업으로 진격시켰다. 5월 허도로 돌아오고 가신을 남겨 여양을 지키게 했다.

60
기유일, 명령을 내렸다. “사마법에 ‘장군은 죽음으로 지킨다(장군사수, 將軍死綏)’라고 했소. 앞으로는 한 치도 물러나지 않는 것이오. 그래서 조괄의 어머니가 조괄의 죄를 함께 묻지 말라고 청했던 것이오. 이는 옛 장수들은 밖에서 군사가 패하면 집안까지 죄를 받았음을 뜻하오. 스스로 장수를 임명하고 정벌을 나갈 때 공만 상주고 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국전(나라의 법)이 아니오. 제장들이 출정할 때 군사를 패하게 하면 죄를 물을 것이고, 이익을 잃으면 관직과 작위를 면할 것이오.”

『위서』에 실린 경신령이다. “의논하는 자들은 군리(군대의 관리)들이 기능은 있으나 덕행이 부족하여 군국의 선발에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니, 소위 ‘길을 함께할 수는 있으나 권도(임기응변)를 함께할 수는 없다’는 것이오. 관중이 말하길 ‘현자에게 능력에 따라 먹게 하면 윗사람이 존중받고, 투사(싸우는 선비)에게 공에 따라 먹게 하면 사졸들이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 이 두 가지를 나라에 세우면 천하가 다스려진다’라고 했소. 무능한 자와 싸우지 않는 자가 나란히 녹봉과 상을 받으면서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소. 그러므로 현명한 군주는 공 없는 신하에게 관직을 주지 않고, 싸우지 않는 선비에게 상을 주지 않소. 다스려질 때는 덕행을 숭상하고 일이 있을 때는 기능을 상으로 논하니, 논하는 자들의 말은 마치 관으로 호랑이를 엿보는 것과 같구려!”

61
가을 7월, 명령을 내렸다. “상란(전쟁)이 있은 지 15년이 지났는데, 뒤에 태어난 자들은 인의와 예양의 풍속을 보지 못했으니 내 매우 슬프게 여기오. 각 군국으로 하여금 문학을 닦게 하고, 현에 500호가 차면 학교를 세워 그 향리의 준조(준걸)를 뽑아 가르치게 하니, 선왕의 도가 폐해지지 않고 천하에 이로움이 있기를 바라오.”

62
8월, 공이 유표를 정벌하여 서평에 주둔했다. 공이 업을 떠나 남쪽으로 갈 때 원담, 원상이 기주를 다투었는데 원담이 원상에게 패하여 평원을 지키며 지켰다. 원상이 급히 공격하자 원담이 신비를 보내 항복을 구하고 구원을 청했다. 여러 장수가 모두 의심했으나 순유가 공에게 허락할 것을 권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공이 말했다. “내가 여포를 공격할 때 유표는 적이 되지 않았고, 관도에서 싸울 때도 원소를 구하지 않았으니, 스스로 지키기에 급급한 도적일 뿐이다. 나중에 도모할 일이다. 원담과 원상은 교활하니 그 난리를 틈타야 하오. 원담이 속임수를 쓴다 해도 끝내 스스로 손을 묶지는 않을 것이고, 내가 원상을 깨뜨려 그 땅을 모두 거두면 이익이 저절로 많아질 것이오.” 마침내 허락했다. 공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여양에 이르러 아들 조정(曹整)을 원담과 혼인시켰다.

신 송지가 생각건대, 원소가 죽은 지 여기까지 5개월 남짓 지났다. 원담은 비록 그 백부의 후사가 되었으나 원소를 위해 3년 복을 입지 않았는데, 2년이 채 안 되어 길례를 행했으니 패륜이다. 위무가 혹 권도(임기응변)로 그와 약속했을지도 모르나, 지금 혼인을 한다고 했으니 반드시 이 해에 예식을 올린 것은 아닐 것이다.

원상이 공이 북쪽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곧 평원을 풀어 업으로 돌아갔다. 동평의 여광, 여상이 원상을 배반하고 양평에 주둔하며 그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니 열후에 봉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원담의 포위가 풀리자 몰래 장군 인수를 여광에게 빌려주었다. 여광이 인수를 받고 이를 보냈는데, 공이 말했다. “나는 원담이 작은 꾀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나로 하여금 원상을 공격하게 하여 그 틈을 타 백성을 약탈하고 무리를 모아, 원상이 깨진 뒤에 스스로 강해져 나를 틈타려 하는 것이오. 원상이 깨지면 내 군세가 성대할 터인데 무슨 틈을 타겠소?”

63
9년 봄 정월, 황하를 건너 기수를 막아 백구로 흘려보내 군량 길을 텄다. 2월, 원상이 다시 원담을 공격하자 소유, 심배를 남겨 업을 지키게 했다. 공이 군사를 진격시켜 환수에 이르자 소유가 항복했다. 도착하여 업을 공격하고 토산과 땅굴을 만들었다. 무안장 윤해가 모성에 주둔하며 상당으로 가는 군량 길을 통하게 했다. 여름 4월, 조홍을 남겨 업을 공격하게 하고, 공이 직접 윤해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돌아왔다. 원상의 장수 저곡이 한단을 지켰다. (저(沮)는 저(菹)라 발음하며, 하삭 지역에 지금도 이 성씨가 있다.) 저곡은 저수의 아들이다. 또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역양령 한범, 섭장 양기가 성을 들어 항복하니 관내후 작위를 주었다.

5월, 토산과 땅굴을 허물고 포위망을 쌓아 장수를 터뜨려 성을 침수시키니 성 안의 아사자가 절반이 넘었다. 가을 7월, 원상이 업을 구원하러 돌아왔다. 여러 장수가 “이들은 돌아오는 군사들이니 스스로를 위해 죽기로 싸울 것이니 피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공이 “원상이 큰길로 오면 피해야겠지만, 만약 서산을 따라온다면 스스로 사로잡힐 뿐이오”라고 했다. 원상이 과연 서산을 따라와 부수에 이르러 진영을 쳤다.

『조만전』에 이르기를, 정탐꾼 여러 부대를 보내 앞뒤로 살피게 하니 모두 “정녕 서쪽 길을 따라와 이미 한단에 있다”라고 했다. 공이 크게 기뻐하며 여러 장수를 모아 말했다. “내가 이미 기주를 얻었는데 제군들은 알겠는가?” 모두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공이 “제군들은 머지않아 보게 될 것이오”라고 했다. 밤에 군사를 보내 포위망을 범하게 했고, 공이 역공하여 깨뜨리고 달아나게 한 뒤 그 진영을 포위했다. 포위망이 좁혀지기 전에 원상이 두려워했다. 옛 예주 자사 음규와 진림이 항복을 구했으나 공이 허락하지 않고 포위를 더욱 급하게 했다. 원상이 밤중에 달아나 기산을 보전하자 추격하여 공격했다. 그 장수 마연, 장의 등이 진 앞에서 항복했고 무리가 크게 흩어졌다. 원상이 중산으로 달아났다. 그 치중을 모두 획득하고 원상의 인수와 절월을 얻어 원상의 항복한 자들을 시켜 그 가족들에게 보여주니 성 안이 무너져 내렸다. 8월, 심배의 형의 아들 심영이 밤중에 지키던 성 동문을 열어 군사를 들였다. 심배가 역전했으나 패하고 생포되어 참수당하니 업이 평정되었다. 공이 원소의 묘를 제사 지내며 곡하고 눈물을 흘렸다. 원소의 아내를 위로하고 그 가족의 보물을 돌려주었으며, 헝겊과 솜을 하사하고 식량을 주었다.

손성이 말하길 “옛날 선왕이 처벌하고 상을 준 것은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장하며 영원히 경계로 삼으려 함이었다. 원소는 세상이 어려움을 틈타 결국 반역을 꾀했고, 위로는 황제의 자리를 논하고 아래로는 국기를 범했다. 사당을 허물고 집을 더럽히는 것은 옛 제도이다. 그런데도 반역 신하의 무덤에 애도를 다하고 탐욕스러운 자의 집에 은혜를 더했으니, 정치를 하는 도리가 여기서 어긋났다. 친구에게 원망을 숨기는 것은 앞선 철학자들이 부끄러워하던 바요, 옛 관소에서 수레를 멈추는 데도 빈 눈물을 흘릴 의리는 없다. 진실로 도리가 어긋나고 관계가 끊어졌거늘 어찌 곡을 한단 말인가! 옛날 한 고조가 항씨에게서 잃은 것을 위무(조조)가 이 일에서 잘못 따랐으니, 어찌 백 가지 고려 중의 한 가지 실수가 아니겠는가!”

64
처음 원소와 공이 함께 군사를 일으켰을 때 원소가 공에게 물었다. “만약 일이 잘되지 않으면 방면(지역) 중 어디를 거점으로 삼을 수 있겠소?” 공이 “족하(당신)의 뜻은 어떠하오?”라고 물었다. 원소가 “나는 남쪽으로 황하를 의지하고 북쪽으로 연나라, 대나라를 막으며 융적의 무리를 겸하여 남쪽을 향해 천하를 다툰다면 거의 이루지 않겠소?”라고 하니, 공이 “나는 천하의 지혜와 힘을 빌려 도리로써 어지러우니 안 될 것이 없소”라고 했다.

『부자』에 이르기를, 태조가 또 말했다. “탕, 무왕이 왕이 된 것이 어찌 위와 같겠는가? 만약 험함과 견고함을 밑천으로 삼는다면 시기에 응해 변화할 수 없을 것이오.”

65
9월, 명령을 내렸다. “하북이 원씨의 난을 겪었으니 올해의 조부(세금)를 징수하지 마라!” 호강(지방 세력가)들이 겸병하는 법을 무겁게 하니 백성들이 기뻐했다.

『위서』에 실린 공의 명령이다. “나라와 집을 가진 자는 적음을 걱정하지 말고 고르지 않음을 걱정하며, 가난함을 걱정하지 말고 편안하지 않음을 걱정해야 하오. 원씨의 정치는 호강들이 멋대로 하게 하여 친척들이 겸병하게 했소. 하민(백성)은 가난하고 약한데 대신 조부를 내야 했고, 집안 재산을 팔아도 명령을 감당하지 못했소. 심배의 종족은 심지어 죄인을 숨겨주고 도망자의 주인이 되었소. 백성들이 친근해지고 병사가 강성해지기를 바란들 어찌 얻을 수 있겠소! 이제 밭 조부를 1묘당 4승(되)만 거두고, 한 가구당 비단 2필과 솜 2근만 내게 하고, 그 외에는 함부로 징발하지 마라. 군국의 수상(태수와 상)들은 명확히 검사하고, 세력가들이 숨기는 바가 없게 하여 약한 백성들이 세금을 겸해서 내는 일이 없게 하라.”

천자가 공을 기주목으로 삼자 공이 연주를 돌려주었다.

66
공이 업을 포위할 때 원담이 감릉, 안평, 발해, 하간을 약탈했다. 원상이 패하자 중산으로 돌아갔다. 원담이 공격하자 원상이 고안으로 달아났고 결국 그 무리를 병합했다. 공이 원담에게 글을 보내 약속을 어긴 것을 꾸짖고 혼인을 절연하며 딸을 돌려보낸 뒤 군사를 진격시켰다. 원담이 두려워 평원을 빼앗기고 남피로 달아나 보전했다. 12월, 공이 평원에 들어가 여러 현을 평정했다.

67
10년 봄 정월, 원담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원담을 참수했으며, 그 처자를 주살하니 기주가 평정되었다.

『위서』에 이르기를, 공이 원담을 공격할 때 아침부터 낮까지 결판이 나지 않았다. 공이 직접 북을 치니 사졸들이 모두 분발하여 때맞춰 깨뜨리고 함락시켰다. 명령을 내렸다. “원씨와 함께 악을 행한 자들도 다시 시작할 것이다.” 백성들로 하여금 사적인 원수를 갚지 못하게 하고, 후한 장례를 금지하여 모두 법대로 통일했다. 이달, 원희의 대장 초촉, 장남 등이 반란을 일으켜 원희, 원상을 공격하니 원희와 원상이 삼군(중산, 거록, 청하)의 오환으로 달아났다. 초촉 등이 그 현을 들어 항복하니 열후에 봉했다. 처음 원담을 토벌할 때 백성들이 얼음을 망치로 깨뜨렸는데, 신 송지가 생각건대 원담을 토벌할 때 강물의 물길이 얼어 백성들을 시켜 얼음을 깨뜨려 배를 통하게 했는데, 백성들이 부역을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항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후 달아난 백성들이 문앞에 와서 스스로 머리를 조아리니 공이 말했다. “너희를 들여보내면 명령을 어기는 것이고, 너희를 죽이면 우두머리를 주살하는 것이니, 돌아가 깊이 숨어 있고 관리에게 잡히지 마라.”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떠났는데 나중에 결국 붙잡혔다.

68
여름 4월, 흑산적 장연이 그 무리 10여만 명을 거느리고 항복하여 열후에 봉해졌다. 고안의 조독, 호노 등이 유주 자사와 탁군 태수를 죽였다. 삼군 오환이 선우보를 광평에서 공격했다.

『속한서 군국지』에 이르기를, 광평은 현 이름이며 어양군에 속한다. 가을 8월, 공이 정벌하여 조독 등을 참수했고, 곧 노하를 건너 광평을 구원하니 오환이 달아나 변방 밖으로 나갔다.

69
9월, 명령을 내렸다. “아당비주(끼리끼리 붕당을 지음)는 예부터 성인들이 미워하던 바요. 듣건대 기주의 풍속이 부자지간에도 부대가 다르고 서로 헐뜯고 칭찬한다고 하오. 옛날 직불의에게는 형이 없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형수를 훔쳤다고 했고, 제오어어는 고아를 세 번 아내로 맞아 부인을 때리는 옹(장인)이라 불렀소. 왕봉이 권세를 잡자 곡영이 신백에 비유했고, 왕상이 충성스러운 의논을 하자 장광이 사도라 불렀소. 이는 모두 흰 것을 검은 것으로 만들고 하늘을 속이고 군주를 기만하는 것이오. 내가 풍속을 정리하려 하는데 이 네 가지를 없애지 않으면 내가 부끄럽게 여길 것이오.” 겨울 10월, 공이 업으로 돌아왔다.

70
처음 원소가 조카 고간을 병주목으로 삼았는데, 공이 업을 함락시키자 고간이 항복하여 자사로 삼았다. 고간이 공이 오환을 토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주를 배반하여 상당 태수를 붙잡고 군사를 일으켜 호관구를 지켰다. 악진, 이전을 보내 공격하니 고간이 돌아와 호관성을 지켰다. 11년 봄 정월, 공이 고간을 정벌했다. 고간이 소식을 듣고 별장을 남겨 성을 지키게 하고 흉노로 달아나 단우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단우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이 호관을 3개월간 포위하여 함락시켰다. 고간은 결국 형주로 달아났는데 상락 도위 왕염이 붙잡아 참수했다.

71
가을 8월, 공이 동쪽으로 해적 관승을 정벌하여 순우에 이르렀고, 악진, 이전을 보내 격파하니 관승이 바다 섬으로 달아났다. 동해의 양분, 담, 척을 나누어 낭야에 더하고 창려군을 없앴다.

『위서』에 실린 10월 을해령이다. “다스리는 세상에서 대중을 거느리고 보필을 세우는 것은 면종(겉으로만 따름)을 경계해야 하오. 시경에 ‘나의 계책을 듣고 쓰면 큰 후회가 없을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는 진실로 군신 간에 간절히 구하는 것이오. 내가 중책을 맡아 늘 중도를 잃을까 두려운데, 근래에 좋은 계책이 들리지 않으니 어찌 내가 열어 보이고 힘쓰지 않은 허물이 아니겠소? 지금부터 이후로 여러 연속, 치중, 별가들은 매달 초하루마다 각기 그 실책을 말하시오. 내가 살펴볼 것이오.”

72
삼군 오환이 천하의 난리를 틈타 유주를 깨뜨리고 한나라 백성 10여만 가구를 약탈했다. 원소가 그 추장들을 모두 단우로 세우고 가족의 자식들을 자기 딸이라 하여 아내로 삼게 했다. 요서 단우 답돈이 유독 강성했는데 원소의 후대를 받았기에 원상 형제가 그에게 귀의했고, 자주 변방을 넘어와 해를 끼쳤다. 공이 이를 정벌하려 하여 수로를 파고 호타수에서 합수까지 들어가 평로거라 이름 지었으며, 또 구하구에서 노하로 들어가 천주거라 이름 지어 바다와 통하게 했다.

73
12년 봄 2월, 공이 순우에서 업으로 돌아왔다. 정유일, 명령을 내렸다. “내가 의병을 일으켜 폭도를 처단한 지 이제 19년이 되었소. 정벌하면 반드시 이겼으니 어찌 내 공이겠소? 이는 현명한 사대부들의 힘이오. 천하가 아직 모두 평정되지 않았으나 나는 마땅히 현명한 사대부들과 함께 평정할 것이오. 그런데 나만 홀로 그 수고를 누린다면 내 어찌 편안하겠소! 속히 공을 정하고 작위를 봉하시오.” 결국 공신 20여 명을 크게 봉하여 모두 열후로 삼았고, 나머지는 각기 차례대로 봉했으며, 전사한 이들의 고아들에게도 경중을 달리하여 차등 있게 했다.

『위서』에 실린 공의 명령이다. “옛날 조사, 두영이 장수가 되었을 때 하사받은 천금을 일조에 흩뿌렸기에 큰 공을 이루고 대대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소. 내가 그 글을 읽을 때마다 그 사람됨을 흠모하지 않은 적이 없었소. 제 장수 사대부들과 함께 군사 일을 함께하니, 다행히 현명한 이들이 계책을 아끼지 않고 여러 선비들이 힘을 다해주었기에 험난함을 평정하고 내가 큰 상을 훔쳐 호읍 3만 가구를 받게 되었소. 두영이 금을 흩뿌린 의를 추억하며, 지금 받은 조세를 제 장수와 연속, 그리고 진, 채 땅의 옛 수자리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무리의 노고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홀로 큰 은혜를 누리지 않으려 하오. 마땅히 전사한 이들의 고아들에게 조곡이 미치게 하시오. 만약 해가 풍성하고 쓰임이 족하여 조세가 모두 들어오면 장차 크게 무리들과 함께 누릴 것이오.”

74
북쪽으로 삼군 오환을 정벌하려 하자 여러 장수가 모두 말했다. “원상은 망한 도적일 뿐이고, 오랑캐는 탐욕스러워 친함이 없으니 어찌 원상을 위해 쓰이겠습니까? 지금 깊이 들어가 정벌하면 유비가 반드시 유표를 설득하여 허도를 습격할 것입니다. 만에 하나 변고가 생기면 일은 후회할 수 없습니다.” 오직 곽가만이 유표가 반드시 유비를 쓸 수 없다고 계책을 세워 공에게 가기를 권했다. 여름 5월, 무종에 이르렀다. 가을 7월, 큰물이 나 해변 길이 통하지 않게 되자 전주가 향도(길잡이)가 되기를 청하여 공이 따랐다. 군사를 이끌고 노룡새를 나갔으나 변방 밖의 길은 완전히 끊겨 있었으므로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우기를 500여 리 하여 백단을 지나 평강을 거치고 선비의 정(뜰)을 밟으며 동쪽으로 유성을 가리켰다. 도착하기 200리 전에서 오랑캐가 비로소 알았다. 원상, 원희가 답돈, 요서 단우 누반, 우북평 단우 능신저 등과 함께 수만 기를 이끌고 군사에 맞섰다. 8월, 백랑산에 오르니 갑자기 오랑캐와 마주쳤는데 무리가 매우 성대했다. 공의 치중(수레)이 뒤에 있고 갑옷을 입은 자가 적어 좌우가 모두 두려워했다. 공이 높은 곳에 올라 오랑캐의 진형이 정돈되지 않은 것을 보고 곧 군사를 풀어 공격하게 했고, 장료를 선봉으로 삼았다. 오랑캐의 무리가 크게 무너졌고 답돈 및 명왕 이하를 참수했으며, 호인과 한인 항복자가 20여만 구였다. 요동 단우 속복환 및 요서, 북평의 여러 호족들이 그 종인들을 버리고 원상, 원희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나니 무리가 아직 수천 기였다. 처음 요동 태수 공손강이 멀리 있음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다. 공이 오환을 깨뜨리자 혹자는 공에게 계속 정벌하여 원상 형제를 사로잡으라고 했다. 공이 말했다. “내가 장차 공손강을 시켜 원상, 원희의 머리를 베어 보내게 할 것이니 병사를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소.” 9월, 공이 군사를 이끌고 유성에서 돌아왔다.

『조만전』에 이르기를, 이때 춥고 가물어 200리 안에 다시는 물이 없었고 군대마저 식량이 부족하여 말 수천 마리를 죽여 식량으로 삼았고, 땅을 30여 장 파고 나서야 물을 얻었다. 돌아온 뒤, 이익을 따져 앞서 간언했던 자를 물었는데 무리가 모두 그 이유를 몰라 사람마다 두려워했다. 공이 모두 후하게 상을 주며 말했다. “내가 앞서 행함에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랐으니, 비록 얻었으나 하늘이 도운 것이지 결코 항상 그렇게 해서는 안 되오. 제군들의 간언은 만전을 기하는 계책이었으니, 이 때문에 상을 주는 것이오. 나중에 간언하기 어려워하지 마시오.”

공손강이 곧 원상, 원희 및 속복환 등을 참수하여 그 머리를 전해왔다. 여러 장수가 물었다. “공께서 돌아오시자 공손강이 원상, 원희를 참수하여 보냈는데 무엇 때문입니까?” 공이 말했다. “그들은 평소 원상 등을 두려워했소. 내가 급히 몰아붙이면 힘을 합칠 것이나, 느슨하게 하면 스스로 서로 도모할 것이니 그 형세가 그러했소.”

11월, 역수에 이르자 대군 오환 행단우 부부로, 상군 오환 행단우 나루가 그 명왕들을 이끌고 와 축하했다.

75
13년 봄 정월, 공이 업으로 돌아와 현무지를 만들어 주사(수군)를 훈련했다.

한나라가 삼공 관직을 폐지하고 승상, 어사대부를 두었다. 여름 6월, 공을 승상으로 삼았다.

『헌제기기주』에 이르기를, 태상 서흡을 시켜 즉시 인수를 수여하게 했다. 어사대부는 중승을 거느리지 않고 장사 1명을 두었다.

『선현행장』에 이르기를, 서흡은 자가 맹평이며 광령 사람이다. 젊어서 청렴하고 맑았으며 조정에 서면 정색했다. 임성, 여남, 동해 세 군을 거쳤는데 가는 곳마다 교화가 행해졌다. 징발되어 돌아오다가 원술에게 겁박당했다. 원술이 참람하게 황제를 칭하며 그에게 상공의 지위를 주려 했으나 서흡은 끝내 굴하지 않았다. 원술이 죽은 뒤 서흡이 원술의 옥새를 얻어 한나라 조정에 바쳤고, 위위와 태상을 지냈다. 공이 승상이 되자 그 지위를 서흡에게 양보하려 했다.

76
가을 7월, 공이 남쪽으로 유표를 정벌했다. 8월, 유표가 죽고 아들 유종이 뒤를 이어 양양에 주둔했고 유비는 번에 주둔했다. 9월, 공이 신야에 이르자 유종이 곧 항복했고 유비는 하구로 달아났다. 공이 군사를 강릉으로 진격시켜 형주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려 새롭게 시작하게 했다. 곧 형주에 복종한 공을 논하여 15명을 후(侯)에 봉했고, 유표의 대장 문빙을 강하 태수로 삼아 본병을 통솔하게 했으며, 형주의 명사 한숭, 등의 등을 발탁해 썼다.

『위항사체서세서』에 이르기를, 상곡의 왕차중이 예서에 능하여 비로소 해서법을 만들었다. 영제에 이르러 글쓰기를 좋아하여 세상에 능한 자가 많았는데, 사의관이 가장 뛰어났다. 매우 자신의 능력을 뽐내어 글을 쓸 때마다 판을 깎아 불태웠다. 양곡이 더 많은 판을 준비하고 그에게 술을 먹여 취하기를 기다렸다가 몰래 그 판을 훔쳤고, 양곡은 결국 글을 잘 써서 선부상서에 이르렀다. 이때 공이 낙양령을 하려 하자 양곡이 그를 북부위로 삼았다. 양곡은 나중에 유표에게 의지했다. 형주가 평정되자 공이 양곡을 널리 구했는데, 양곡이 두려워 스스로를 결박하고 문앞에 이르렀다. 군 가사마로 임명하고 비서에 있게 하며 부지런히 글을 써서 보답하게 했다. 공이 일찍이 장막 안에 걸어두거나 벽에 못 박아 두고 감상하며 사의관보다 낫다고 했다. 양곡은 자가 맹황이며 안정 사람이다. 위나라 궁전의 현판은 모두 양곡의 글씨다.

『황보밀일사전』에 이르기를, 여남의 왕준은 자가 자문이며 젊어서 범방, 허장에게 알려졌고 남양의 잠호와 사이가 좋았다. 공이 포의(평민)였을 때 특별히 왕준을 사랑했고, 왕준 또한 공에게 세상을 다스릴 도구가 있다고 칭찬했다. 원소가 동생 원술과 어머니를 잃고 여남으로 돌아와 장사 지낼 때 왕준과 공이 만났는데, 모인 사람이 3만 명이었다. 공이 밖에서 은밀히 왕준에게 말했다.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인데, 난리를 일으킬 우두머리는 반드시 이 두 사람일 것이오. 천하를 구제하고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려면 먼저 이 두 자식을 죽이지 않고는 난리가 지금 일어날 것이오.” 왕준이 “경의 말대로 천하를 구제할 자가 경을 버리고 다시 누구이겠소?”라고 하고는 마주 보며 웃었다. 왕준은 밖으로는 조용하고 안으로는 밝은 사람으로 주·군과 삼부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공거(황제의 부름)로 징발되었으나 가지 않았고, 피난하여 무릉에 거주했는데 왕준에게 귀의한 자가 100여 가구였다. 황제가 허도로 도읍하자 다시 상서로 징발되었으나 가지 않았다. 유표가 원소가 강성함을 보고 몰래 원소와 통하려 하자 왕준이 유표에게 말했다. “조공은 천하의 영웅이니 반드시 패도를 일으켜 환공, 문공의 공을 이을 자요. 지금 가까운 이를 버리고 먼 이를 따르려 하니, 만약 아침저녁으로 급한 일이 생기면 막북(먼 북쪽)의 구원을 멀리서 바라볼 것이니 어찌 어렵지 않겠소!” 유표가 따르지 않았다. 왕준은 나이 64세에 무릉에서 천수를 다하고 죽었는데, 공이 듣고 애통해했다. 형주를 평정하자 직접 강가에서 영접하여 장례를 치르고 강릉에 개장해 주었으니, 유표가 선현이었기 때문이다.

익주목 유장이 비로소 정역(징병)에 응하여 군사를 보내 군에 보태주었다. 12월, 손권이 유비를 위해 합비를 공격했다. 공이 강릉에서 유비를 정벌하러 가다가 파구에 이르러 장희를 보내 합비를 구원하게 했다. 손권이 장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아났다. 공이 적벽에 이르러 유비와 싸웠으나 불리했다. 이때 큰 역병이 돌아 관리와 사졸들이 많이 죽었으므로 결국 군사를 돌렸다. 유비가 결국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했다.

『산양공재기』에 이르기를, 공의 배가 유비에게 불탔고 군사를 이끌고 화용도로 걸어서 돌아왔는데 진흙탕을 만나 길이 통하지 않았고 하늘에 또 큰바람이 불어, 쇠약한 병사들을 시켜 풀을 짊어지고 메우게 하니 기병들이 비로소 지날 수 있었다. 쇠약한 병사들은 사람과 말에게 밟혀 진흙 속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군사가 빠져나오자 공이 크게 기뻐했는데, 여러 장수가 이유를 묻자 공이 말했다. “유비는 나의 짝이다. 다만 계책을 얻음이 조금 늦었을 뿐이다. 만약 일찍 불을 질렀다면 우리는 모두 죽었을 것이다.” 유비도 곧 불을 질렀으나 미치지 못했다.

손성의 『이동평』에 이르기를, 『오지』를 살펴보건대 유비가 먼저 공의 군사를 깨뜨린 뒤에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다고 했는데, 이 기록에는 손권이 먼저 합비를 공격한 뒤 적벽의 일이 있었다고 했다. 둘이 서로 다르니 『오지』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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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봄 3월, 군사가 초에 이르러 가벼운 배를 만들고 수군을 다스렸다. 가을 7월, 와수에서 회수로 들어가 비수를 나와 합비에 주둔했다. 신미일, 명령을 내렸다. “근래에 군사가 자주 정벌을 나가 혹 역기(전염병)를 만나 관리와 사졸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집안은 원망하며 백성들은 흩어졌으니, 어진 자가 어찌 즐기겠소? 부득이한 일이오. 죽은 자의 집안에 기반이 없어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들은 관에서 양식을 끊지 말고 장리들이 돌보고 어루만져 내 뜻에 맞게 하라.” 양주의 군현 장리를 두고 작파에 둔전했다. 12월, 군사가 초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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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봄, 명령을 내렸다. “예부터 천명을 받은 군주나 중흥한 군주가 어찌 어진 이와 함께 천하를 다스리지 않았겠소! 그들이 어진 이를 얻음은 거리나 골목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어찌 우연히 만났겠소? 윗사람이 구하지 않았을 뿐이오. 지금 천하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 이는 특별히 어진 이를 구하는 급한 시기요. ‘맹공작은 조나라, 위나라의 노인으로는 훌륭하나 등나라, 설나라의 대부로는 적합하지 않다’라고 했소. 만약 반드시 깨끗한 선비라야 쓸 수 있다면 제 환공이 어찌 패업을 이루었겠소! 지금 천하에 홑옷을 입고 옥을 품은 채 위수 가에서 낚시하는 자가 있지 않겠소? 또 형수를 훔치고 금을 받았으나 아직 무지(진평)를 만나지 못한 자가 있지 않겠소? 너희들은 나를 도와 좁은 길에 있는 인재들을 높이 들어 올리시오. 오직 재능만을 들어 쓴다면 나는 그들을 얻어 쓸 것이오.”

겨울, 동작대를 만들었다.

『위무고사』에 실린 공의 12월 기해령이다. “나는 처음 효렴으로 천거되었을 때 나이가 어렸고 스스로 바위나 굴에 사는 유명한 선비가 아니라고 여겨, 세상 사람들이 범상하고 어리석게 볼까 두려워 군수가 되어 좋은 정치를 펼쳐 명예를 세우고 세상 선비들이 밝히 알게 하려 했소. 그래서 제남에 있을 때 처음 잔악한 것을 제거하고 마음을 평정하여 관리들을 선발했는데 여러 상시들과 어긋났소. 세력가들에게 미움을 사 집안에 화가 미칠까 두려워 병을 핑계로 돌아왔소. 관직을 떠난 뒤 나이는 아직 어렸고 같은 해에 태어난 이들을 돌아보니 50세인 이도 노인이라 불리지 않았소. 마음속으로 헤아리길 앞으로 20년 뒤 천하가 맑아지면 그때 같은 나이에 처음 거두어진 자들과 같을 것이라 생각했소. 그래서 사시(사철)에 고향으로 돌아가 초 동쪽 50리에 정사를 짓고 가을과 여름에는 글을 읽고 겨울과 봄에는 사냥하며 낮은 땅을 구해 진흙과 물로 스스로를 숨기고 손님들이 오는 것을 끊으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소. 나중에 도위로 징발되고 전군교위로 승진하자 뜻이 바뀌어 국가를 위해 도적을 토벌하고 공을 세우고 싶어졌소. 봉후가 되어 정서장군이 되기를 바라고, 그다음 묘도에 ‘한나라 고 정서장군 조후의 묘’라고 적기를 바랐으니 이것이 나의 뜻이었소. 그런데 동탁의 난을 만나 의병을 일으켰소. 이때 군사를 합치면 많이 얻을 수 있었으나 늘 스스로 줄이고 많이 얻으려 하지 않았소. 까닭은 병사가 많으면 뜻이 성해져 강적과 다투다가 혹 화의 시작이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오. 그래서 변수의 싸움에는 수천 명이었고 나중에 연주로 돌아와 다시 모집해도 3천 명을 넘지 않았으니, 이것이 나의 본래 뜻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오. 나중에 연주를 거느리고 항복한 황건적 30만 명을 깨뜨렸소. 또 원술이 구강에서 참람하게 황제를 칭하고 아래 사람들은 모두 신이라 칭하며 문을 건호문이라 하고 옷은 천자의 제도로 하였으며 두 부인이 앞다투어 황후가 되려 했소. 뜻과 계산이 이미 정해졌고 누군가 원술에게 황제 자리에 올라 천하에 포고하라고 권하자 ‘조공(조조)이 아직 살아있으니 안 된다’라고 답했소. 나중에 내가 그 사장(장수)들을 사로잡고 무리를 얻자 결국 원술이 곤궁해지고 해이해져 병으로 죽었소. 하북을 차지한 원소가 군세가 강성했을 때 나는 스스로 형세를 헤아려 실로 대적할 수 없었으나, 다만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로 의로써 몸을 멸하여 후세에 남기기로 계산했소. 다행히 원소를 깨뜨리고 두 아들의 목을 베었소. 또 유표는 스스로 종실이라 여기며 간사한 마음을 품고 앞뒤로 물러나며 세상을 관망하며 주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내가 다시 평정했고, 마침내 천하를 평정했소. 몸은 재상이 되어 인신(신하)의 귀함이 이미 극에 달했고 뜻과 바람이 이미 지나쳤소. 지금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겨 사람들이 다 말하게 하려는 것이니 숨길 것이 없소. 가령 나라에 내가 없었다면 몇 사람이 황제를 칭하고 몇 사람이 왕을 칭했을지 알 수 없소. 혹 사람들은 내가 강성하고 또 천명(하늘의 뜻)에 관한 일을 믿지 않는 성격이라 사적인 마음으로 비평하며 불손한 뜻이 있다고 망령되이 추측할까 두려워 매번 근심이 되었소. 제 환공, 진 문공이 오늘날까지 칭송받는 이유는 군세가 광대했음에도 주나라 왕실을 받들었기 때문이오. 논어에 ‘천하를 삼등분하여 그 둘을 가지고도 은나라를 섬겼으니 주나라의 덕은 지극한 덕이라 할 만하다’라고 했으니,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섬기는 것이오. 옛날 악의가 조나라로 달아났을 때 조나라 왕이 그와 연나라를 도모하려 하자 악의가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답하길 ‘신이 소왕을 섬긴 것은 대왕을 섬기는 것과 같았습니다. 신이 만약 죄를 지어 타국에 버려지더라도 죽을 때까지일 뿐이며 연나라의 후사(후계자)를 해치는 짓은 차마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소. 호해(진시황의 아들)가 몽염을 죽일 때 몽염이 ‘내 선조로부터 자손에 이르기까지 진나라에 쌓은 믿음이 3대입니다. 지금 내가 군사 30여만 명을 거느리고 있으니 그 세력으로 충분히 배반할 수 있지만, 스스로 죽음을 알고도 의를 지키는 것은 선조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여 선왕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소. 나는 매번 이 두 사람의 글을 읽을 때마다 창연히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소. 나의 조부로부터 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친중(친하고 중요한)의 임무를 맡았으니 믿음을 받은 자라 할 수 있소. 자환(조비) 형제에게 이르러서는 3대보다 더했소. 나는 다만 제군들에게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항상 처첩들에게 말하여 모두 이 뜻을 깊이 알게 했소. 내가 그들에게 이르길 ‘내가 만년(죽은 뒤)이 지나면 너희들은 모두 출가할 것인데, 나의 마음을 전하여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게 하라’라고 했소. 나의 이 말은 간격(마음속)의 요체요. 그래서 근근하고 간절하게 심복을 진술하는 것은 주공에게 스스로를 밝히는 금등의 글이 있었으나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내가 지금 바로 거느린 병사들을 내던지고 집사(한나라 조정)에게 돌아가 무평후의 나라(영지)로 돌아가는 것은 실로 불가하오. 어째서인가? 진실로 병사를 떠나면 남에게 화를 당할까 두려워서요. 자손을 위해 계산한 것이고, 또 내가 패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지니, 허명을 흠모하다가 실질적인 화를 당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하게 하는 일이오. 전 조정에서 세 아들을 은혜로 후(侯)에 봉할 때 굳게 사양하여 받지 않았으나, 지금 다시 받으려는 것은 다시 영예를 누리려 함이 아니라 외부의 지원을 삼아 만전의 계산을 하려는 것이오. 나는 개자추가 진나라의 봉토를 피하고 신서가 초나라의 상을 달아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책을 놓지 않고 탄식하며 스스로 반성한 적이 없소. 나라의 위엄을 받들어 월(도끼)을 가지고 정벌하며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이기고 작은 곳에서 큰 것을 사로잡았으니, 뜻이 도모하는 바는 움직여 어긋나는 일이 없고, 마음이 생각하는 바는 어디를 향한들 이루지 못한 것이 없어 마침내 천하를 탕평하고 주명의 뜻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하늘이 한나라 왕실을 도운 것이지 사람의 힘이 아니오. 그러나 4현을 겸하여 봉하고 3만 가구를 먹으니 무슨 덕으로 감당하겠소! 강호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자리를 양보할 수 없소. 읍토에 이르러서는 사양할 수 있소. 지금 양하, 저, 고 3현의 2만 가구를 위로 올리고 다만 무평의 1만 가구만 먹으며, 우선 비방을 나누어 내 죄를 조금 줄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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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봄 정월,

『위서』에 이르기를, 경진일, 천자가 답하길 “5천 가구를 줄이고 양보한 3현의 1만 5천 가구를 나누어 세 아들을 봉하노라. 식은 평원후, 거는 범양후, 표는 요양후로 봉하고 식읍을 각기 5천 가구씩 하라.” 천자가 공의 세자 비(조비)를 오관중랑장으로 삼고 관속을 두어 승상의 부관으로 삼았다. 태원의 상요 등이 대릉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하후연, 서황을 보내 공격하여 깨뜨렸다. 장로가 한중을 차지하자 3월에 종요를 보내 토벌했다. 공이 연 등을 시켜 하동으로 나가 종요와 합류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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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관중의 여러 장수가 종요가 스스로 습격하려 한다고 의심하여 마초가 마침내 한수, 양추, 이감, 성의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조인을 보내 토벌했다. 초 등이 동관에 주둔하자 공이 제장에게 명했다. “관서의 병사는 정예하니 굳게 지키며 싸우지 마라.”

가을 7월, 공이 서쪽으로 정벌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관서의 병사는 강하고 긴 창을 익혔으니 정예 전봉을 뽑지 않으면 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공이 제장에게 말했다. “싸움은 나에게 달려 있지 적에게 달려 있지 않소. 적들이 비록 긴 창을 익혔으나 찌르지 못하게 할 것이니 제군들은 지켜보시오.” 초 등과 관을 사이에 두고 군사를 배치했다. 공이 급히 대치하면서도 몰래 서황, 주령 등을 시켜 밤에 포판진을 건너 강 서쪽에 진영을 치게 했다. 공이 직접 동관에서 북쪽으로 건넜는데 미처 건너기도 전에 초가 배로 달려와 급히 싸웠다. 교위 정비가 소와 말을 풀어 적을 유인하니 적들이 어지러이 소와 말을 취했고, 공이 마침내 건널 수 있었다.

『조만전』에 이르기를, 공이 강을 건너려 할 때 앞 부대가 막 건너려 하자 초 등이 갑자기 들이닥쳤으나 공은 여전히 호상(의자)에 앉아 일어나지 않았다. 장합 등이 일이 급함을 보고 함께 공을 이끌고 배에 태웠다. 강물이 급하여 북쪽으로 4, 5리 떠내려갔고 초 등의 기병이 추격하며 쏘아대니 화살이 비 오듯 했다. 여러 장수가 군사가 패했음을 보고 공의 소재를 몰라 모두 황당하고 두려워했으나, 마침내 만나자 슬프고 기뻐하며 혹 눈물을 흘렸다. 공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소적(작은 도적)에게 곤경을 당할 뻔했구나!” 강을 따라 용도(담장 있는 길)를 만들어 남쪽으로 갔다. 적이 물러나 위구(위수 입구)를 막자 공이 곧 의병(거짓 병사)을 많이 설치하고, 몰래 배로 병사를 실어 위수로 들어가 부교를 만들었고 밤에 병사를 나누어 위수 남쪽에 진영을 맺었다. 적이 밤에 진영을 공격하자 복병을 보내 깨뜨렸다. 초 등이 위수 남쪽에 주둔하며 편지를 보내 강 서쪽을 떼어 화친을 구했으나 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9월, 군사를 진격시켜 위수를 건넜다.

『조만전』에 이르기를, 이때 공의 군사가 위수를 건널 때마다 초의 기병이 충돌하여 진영을 세울 수 없었고 땅 또한 모래가 많아 보루를 쌓을 수 없었다. 루자백이 공에게 말했다. “오늘 날이 차가우니 모래를 일으켜 성을 쌓고 물을 부으면 하룻밤 만에 이룰 수 있습니다.” 공이 따랐고, 곧 겹주머니(縑囊)를 많이 만들어 물을 운반하여 밤에 병사를 건너 성을 쌓으니 날이 밝자 성이 섰고, 이로 말미암아 공의 군사가 모두 위수를 건널 수 있었다. 혹자가 9월에는 물이 얼지 않았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신 송지가 『위서』를 살펴보건대, 공의 군사가 8월에 동관에 이르러 윤달에 강을 건넜으니 그해 윤 8월이어서 이때 큰 추위가 닥칠 수 있었다!

초 등이 여러 번 도전했으나 또 허락하지 않았다. 굳이 땅을 떼어달라며 인질을 보내기를 구하니 공이 가후의 계책을 써서 거짓으로 허락했다. 한수가 공과 만나기를 청했다. 공이 한수의 아버지와 같은 나이의 효렴이었고, 또 한수와 동시대의 벗이었기에 교마(말을 나란히 함)하고 옮겨 말했으나 군사 일은 언급하지 않고 다만 경도의 옛 친구들만 이야기하며 손뼉 치며 크게 웃었다. 교전이 끝난 뒤 초 등이 한수에게 물었다. “공이 무슨 말을 하던가?” 한수가 “아무 말도 없었소”라고 했다. 초 등이 이를 의심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공이 다음 날 다시 한수 등과 만나 이야기했다. 제장들이 “공께서 오랑캐와 만나 말씀하시는데 가벼이 행동해서는 안 되니 나무로 행마(말 모양의 방어물)를 만들어 막아두십시오”라고 했고 공이 이를 옳게 여겼다. 적의 장수들이 공을 보자 모두 말 위에서 절했고, 진과 호의 구경꾼들이 앞뒤로 겹겹이 쌓이자 공이 웃으며 적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조조를 보고 싶은가? 사람과 같을 뿐이니 눈이 넷이거나 입이 둘이 아니고 다만 지혜가 많을 뿐이오!” 진과 호가 앞뒤로 크게 보았다. 또 철기 5천 명을 10중진으로 늘어세우니 정광이 해를 빛내었고 적들이 더욱 두려워했다. 다른 날 공이 다시 한수에게 글을 보냈는데 여러 곳을 고쳐 마치 한수가 수정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초 등이 더욱 한수를 의심했다. 공이 곧 날을 정해 싸우기로 하고, 먼저 가벼운 병사로 도전하게 하여 싸운 지 오래되자 곧 호기(정예 기병)를 풀어 협공하니 크게 깨뜨리고 성의, 이감 등을 참수했다. 한수, 초 등이 양주로 달아났고 양추가 안정으로 달아나 관중이 평정되었다. 여러 장수가 공에게 물었다. “처음 적이 동관을 지킬 때 위북의 길이 끊겼는데 하동을 통해 풍익을 공격하지 않고 도리어 동관을 지키며 날을 끌다가 북쪽으로 건넌 이유는 무엇입니까?” 공이 말했다. “적이 동관을 지킬 때 만약 내가 하동으로 들어갔다면 적이 반드시 여러 나루를 지켰을 것이니 서하를 건널 수 없었을 것이오. 그래서 나는 병사를 성대히 하여 동관을 향하게 했소. 적들이 무리를 합쳐 남쪽을 지키니 서하의 방비가 비게 되어 두 장수가 서하를 쉽게 취할 수 있었던 것이오. 그런 뒤에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건너니 적들이 나와 서하를 다툴 수 없었던 것은 두 장수의 군사가 있었기 때문이오. 수레를 잇고 담장을 세워 용도를 만들어 남쪽으로 가니, 신 송지가 생각건대 한 고조 2년에 초나라와 형양의 경, 소 사이에서 싸울 때 용도를 만들어 강에 잇대어 오창의 粟(곡식)을 취했다. 응소가 말하길 ‘적이 치중을 약탈할까 두려워 담장과 벽을 쌓아 거리와 골목처럼 만들었다’라고 했다. 지금 위무는 담장을 쌓지 않고 다만 수레를 잇고 담장을 세워 양면을 막았을 뿐이다. 이미 이길 수 없게 만들었고 또 약함을 보여주었다. 위수를 건너 견고한 보루를 만드니 오랑캐가 이르러도 나오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을 교만하게 하려는 것이오. 그래서 적들이 진영을 세우지 않고 땅을 떼어달라고 구했던 것이오. 나는 순순히 허락했으니 그들의 뜻을 따라 그들이 안심하고 방비하지 않게 한 뒤, 그 병력을 축적했다가 한 번에 공격한 것이오. 소위 질뢰(빠른 천둥)가 귀를 가릴 틈이 없다는 것이니 병사의 변화는 결코 한 가지 도리가 아니오.”

처음 적의 부대가 올 때마다 공은 항상 기쁜 기색이 있었다. 적을 깨뜨린 뒤 여러 장수가 그 이유를 묻자 공이 답했다. “관중은 멀고 넓으니 만약 적들이 각기 험난한 곳에 의지하여 지키면 정벌하는 데 1, 2년 안에는 평정할 수 없을 것이오. 지금 모두 와서 모였으니 그 무리는 비록 많으나 서로 귀순하지 않고 군대에 적절한 주인이 없으니 한 번에 멸할 수 있어 공이 조금 쉬우니 나는 이 때문에 기뻤던 것이오.”

81
겨울 10월, 군사를 장안에서 북쪽으로 정벌하여 양추를 안정에서 포위했다. 양추가 항복하자 그 작위를 회복시켜 남겨두고 백성들을 돌보게 했다.

『위략』에 이르기를, 양추는 황초 연간에 토구장군으로 옮겨 위 특진에 올랐고 임경후에 봉해져 천수를 다했다. 12월, 안정에서 돌아오고 하후연을 남겨 장안에 주둔하게 했다.

82
17년 봄 정월, 공이 업으로 돌아왔다. 천자가 공에게 찬배불명(이름을 부르지 않음), 입조불추(조정에서 뛰지 않음), 검이상전(칼과 신발을 신고 전각에 오름)의 예우를 내렸는데 소하의 고사와 같다. 마초의 나머지 무리 양흥 등이 남전에 주둔하자 하후연을 보내 평정하게 했다. 하내의 탕음, 조가, 임려와 동군의 위국, 돈구, 동무양, 발간, 거록의 혜도, 곡주, 남화, 광평의 임성, 조나라의 양국, 한단, 역양을 떼어 위군을 더했다.

83
겨울 10월, 공이 손권을 정벌했다.

84
18년 봄 정월, 군사를 유수구로 진격시켜 손권의 강 서쪽 진영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손권의 도독 공손양을 사로잡고 군사를 돌렸다. 조서로 14주를 합쳐 다시 9주로 만들었다. 여름 4월, 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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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병신일, 천자가 어사대부 치려를 시켜 절(황제의 권위)을 가지고 공에게 책명을 내려 위공(魏公)으로 삼았다.

『속한서』에 이르기를, 치려는 자가 홍예이며 산양 고평 사람이다. 젊어서 정현에게 수학했고 건안 초에 시중이 되었다. 우부의 『강표전』에 이르기를, 헌제가 일찍이 치려와 소부 공융을 특별히 만나 공융에게 물었다. “홍예는 어떤 점이 뛰어나고 긴가?” 공융이 “길을 함께할 수는 있으나 권도(임기응변)를 함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다. 치려가 홀(판)을 들고 “공융은 옛날 북해를 다스릴 때 정치가 흩어지고 백성들이 흘러갔으니 그 권도는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라고 했다. 결국 공융과 서로 장단점을 논하며 사이가 나빠졌다. 공이 글을 보내 화해시켰다. 치려는 광록훈에서 대부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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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말하길, “짐은 덕이 부족하여 젊어서 민흉(민망하고 흉한 일)을 겪고 서쪽 땅으로 넘어가 당, 위로 옮겼소. 이때는 마치 깃발이 매달린 듯 위태로웠고 종묘는 제사를 지내지 못했으며 사직은 자리를 잃었소. 흉악한 무리들이 기회를 엿보며 제하(중국)를 분열시켰고, 온 땅의 백성들을 짐이 얻지 못했으니 우리 고조의 명운이 땅에 떨어지려 했소. 짐이 아침 일찍 일어나 졸고(잠깐 자고) 마음을 진동하며 ‘조상과 아버지를 생각하고, 고굉과 선정(선신)을 생각건대, 누가 나를 근심할 것인가’라고 했소. 곧 하늘의 마음을 인도하여 승상을 낳아 우리 황실을 보우하고 험난함 속에서 널리 구제했으니 짐이 실로 의지하는 바요. 지금 경에게 전례(작위)를 주려 하니 공경히 짐의 명을 들으시오.”

87
“옛날 동탁이 처음 국난을 일으켰을 때 제후들이 지위를 버리고 왕실을 도모했소. 경은 곧 섭정으로 나아가 앞장서서 군대를 일으켰으니 이는 경의 본조에 대한 충성이오. 뒤에 황건적이 천상을 어기고 우리 3주를 침범하여 평민에게까지 미치자 경은 또 그들을 제거하여 동하를 편안하게 했으니, 이는 또 경의 공이오. 한섬, 양봉이 위엄을 멋대로 부리자 경은 토벌에 나서 그 난을 제거했고, 결국 허도로 천도하여 우리 경기를 만들고 관직과 종묘를 세워 옛 물건을 잃지 않게 했으니 천지와 귀신이 비로소 안정을 얻었소. 이는 또 경의 공이오. 원술이 참람하게 반역하여 회남에서 방자했으나 경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드러난 계책을 썼고, 기양의 싸움에서 교유가 머리를 내놓았으며, 위엄이 남쪽으로 나아가 원술이 무너졌으니 이는 또 경의 공이오. 군사를 돌려 동쪽으로 정벌하여 여포를 죽였고, 수레를 돌리려 할 때 장양이 죽었으며 수고가 죄에 복종했고 장수가 항복했으니 이는 또 경의 공이오. 원소가 천상을 어지럽히고 사직을 위태롭게 하여 그 무리를 믿고 병사를 일으켜 내부를 모욕했소. 이때 왕의 군사는 적고 천하는 마음이 차가워 굳은 뜻이 없었으나, 경은 절개를 지키며 정기가 백일(태양)을 꿰뚫었소. 무용을 떨치고 신묘한 계책을 운용하여 관도에 이르러 추한 무리들을 크게 섬멸했으니, 우리 국가가 위태로움에서 구해진 것은 이 또한 경의 공이오. 홍하(황하)를 건너 4주를 평정했고 원담, 고간이 모두 머리를 내놓았으며, 해적들이 달아나 흩어지고 흑산적이 궤도를 따랐으니 이는 또 경의 공이오. 오환 세 종족이 대대로 난을 숭상했고 원상이 이에 힘입어 북쪽 변방을 위협했으나, 묶은 말과 매달린 수레로 한 번 정벌하여 멸했으니 이는 또 경의 공이오. 유표가 배반하여 공물을 바치지 않았으나 왕의 군사가 길을 내자 위엄이 먼저 사라졌고, 백 개의 성과 여덟 개의 군이 팔을 교차하며 무릎을 꿇었으니 이는 또 경의 공이오. 마초, 성의가 같은 악으로 합세하여 하와 동관에 웅거하며 욕심을 부리려 했으나 위남에서 그들을 진멸하고 벤 귀가 1만여 개에 이르렀고, 결국 변경을 평정하고 오랑캐를 무마했으니 이는 또 경의 공이오. 선비, 정령이 통역을 거듭하여 왔고 백옥(변방)에서 관리들을 청하여 직분을 따랐으니 이는 또 경의 공이오. 경은 천하를 평정한 공이 있고 밝은 덕을 더했으며 해내에 순서를 정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펼쳤소. 널리 근면한 가르침을 베풀고 형옥을 신중히 살피니 관리들에게는 가혹한 정치가 없고 백성들은 품은 악한 마음이 없소. 제족을 높이고 대가 끊긴 세대를 이어 옛 덕과 앞선 공로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소. 비록 이윤이 황천에 이르고 주공이 사해에 빛났으나, 경을 비할 바는 못 되오.”

88
“짐이 듣건대 선왕은 명덕을 함께 세워 토지를 주어 나누고 백성을 나누며 그 은총을 높이고 예물을 갖추었으니, 이는 왕실을 번위(울타리)하고 세대를 좌우하려는 것이오. 주나라 성왕 시절 관채가 편안하지 않자 난을 징계하고 공을 생각하여 소강공을 시켜 제 태공에게 신발을 하사하게 하여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강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목릉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무제에 이르게 했소. 5후 9백이 실로 그들을 정벌할 수 있었고 대대로 태사를 이어 동해를 표상했소. 원(이에) 양왕에 이르러 초나라 사람이 왕의 직분을 다하지 않자 또 진 문공을 명하여 후백으로 삼고, 이로, 호분, 부월, 거창, 궁시를 하사하고 남양을 크게 열어 대대로 맹주가 되게 했소. 그래서 주나라 왕실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그 두 나라에 의지했기 때문이오. 지금 경은 지극히 밝은 덕으로 짐의 몸을 밝게 보전하고 천명에 답하며 널리 큰 위엄을 떨쳤소. 9역(천하)이 아니 순종하는 이가 없소. 공은 이윤, 주공보다 높으나 상은 제, 진보다 낮으니 짐이 심히 부끄럽소. 짐은 미미한 몸으로 조민(백성) 위에 맡겨졌으니 그 어려움을 영원히 생각함이 깊은 연못이나 살얼음을 밟는 것 같소. 경이 구해주지 않으면 짐은 감당할 수 없소. 지금 기주의 하동, 하내, 위군, 조국, 중산, 상산, 거록, 안평, 감릉, 평원 10군을 주어 경을 위공에 봉하노라. 경에게 검은 흙을 하사하고 백모(흰 띠풀)로 묶어주니, 거북점을 쳐서 종묘와 사직을 세우시오. 옛날 주나라 왕실에 필공, 모공이 들어와 경좌(높은 벼슬)가 되었고, 주공, 소공이 스승과 보호자로 나가 이백(우두머리)이 되었으니, 외직과 내직의 임무를 경이 실로 마땅히 감당해야 하오. 승상으로서 기주목을 겸함은 예전과 같소. 또 경에게 구석(아홉 가지 하사품)을 더하니 공경히 짐의 명을 들으시오.”

89
“경은 예와 법을 꿰뚫어 백성들의 궤도와 의례가 되었고, 백성들이 직업을 편안히 하고 옮기려는 뜻이 없게 했소. 이에 경에게 대로(큰 수레), 융로(군용 수레) 각 1대와 검은 소 4마리를 하사하오. 경은 분수를 권하고 근본에 힘써 농부들이 부지런히 일하게 했고, 곡식과 비단이 쌓이고 큰 대업이 흥하게 했으니 이에 경에게 곤면(예복)을 하사하고 붉은 신을 부속하오. 경은 겸양을 숭상하고 백성들을 흥하게 하며 장유에 예가 있고 상하가 모두 화합하게 했으니 이에 경에게 헌현(악기)의 음악과 육일(무용)의 춤을 하사하오. 경은 바람과 교화를 널리 펴고 사방으로 발하게 하여 먼 곳의 사람들이 얼굴을 고치고(교화되고) 화하(중국)가 충실해졌으니 이에 경에게 주호(붉은 문)를 하사하여 거처하게 하오. 경은 밝은 지혜를 갈고 닦아 황제가 어려워하는 바를 생각하고 인재를 등용하며 여러 선을 반드시 들게 했으니 이에 경에게 납폐(계단)를 하사하여 오르게 하오. 경은 나라의 저울을 잡아 바른 색으로 가운데에 서서 섬호(작은 악)라도 억압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에 경에게 호분(군사) 300명을 하사하오. 경은 하늘의 형벌을 바로잡고 그 죄 있는 자들을 밝히니, 범관(관문을 범함)하고 간기(기강을 어지럽힘)하여 주살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에 경에게 부월(도끼) 각 1개를 하사하오. 경은 용처럼 솟구치고 범처럼 보며 사방을 멀리 살피고 역절(반역의 마디)을 토벌하여 사해를 굴복시키니 이에 경에게 통궁 1개, 통시 100개, 려궁 10개, 려시 1,000개를 하사하오. 경은 온공(온화하고 공손함)을 근본으로 하고 효우(효도와 우애)를 덕으로 하며 명윤(밝고 믿음)과 독성(독실하고 진실함)으로 짐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으니 이에 경에게 거창(제사 술) 1단과 규찬(술잔)을 부속하오. 위나라는 승상 이하 여러 관료들을 두되 모두 한나라 초 제후왕의 제도를 따르시오. 나아가 공경히 하시오, 짐의 명에 복종하시오! 그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고 때맞춰 여러 공을 밝혀, 그 현저한 덕을 끝까지 완수하고 우리 고조의 휴명(아름다운 명)을 높이 드러내시오!”

이는 후한 상서좌승 반욱이 지은 글이다.

(반욱은 자가 원무이며 진류 중모 사람이다.)

『위서』에 실린 공의 명령이다. “무릇 구석을 받고 넓게 토지를 개척하는 것은 주공이 그런 인물이었소. 한나라의 이성(다른 성씨) 8왕들은 고조와 함께 포의(평민)에서 일어나 왕업을 세웠으니 그 공이 지극히 컸소. 내가 어찌 그들과 비할 수 있겠소?”

앞뒤로 세 번 사양했다. 이에 중군사 왕릉, 사정후 순유, 전군사 동무정후 종요, 좌군사 양무, 우군사 모개, 평로장군 화향후 유훈, 건무장군 청원정후 유약, 복파장군 고안후 하후돈, 양무장군 도정후 왕충, 분위장군 낙향후 유전, 건충장군 창향정후 선우보, 분무장군 안국정후 정욱, 태중대부 도정후 가후, 군사제주 천추정후 동소, 도정후 설홍, 남향정후 동몽, 관내후 왕찬, 부손, 제주 왕선, 원환, 왕랑, 장승, 임번, 두습, 중호군 국명정후 조홍, 중령군 만세정후 한호, 행효기장군 안평정후 조인, 영호군장군 왕도, 장사 만잠, 사환, 원패 등이 권진(나아가기를 권함)했다.

“옛날 삼대에 신하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중흥을 받아 보좌를 봉하고 작위를 준 것은 모두 공을 기리고 덕을 상주어 나라의 울타리로 삼기 위함이었소. 지난번 천하가 붕괴되고 흉악한 자들이 일어날 때 뒤집히고 횡포를 부리는 위험은 차마 말할 수 없었소. 명공(조조)께서 몸을 던져 목숨을 걸고 그 난국을 평정하고 두 원씨의 찬탈하는 역적을 주살했으며 황건적의 난리를 멸하고 우두머리 역적을 섬멸하고 황폐함을 깎아내었으니, 서리와 이슬을 맞으며 20여 년을 지냈는데 서계(글)가 생긴 이래 이보다 큰 공은 없었소. 옛날 주공이 문왕, 무왕의 자취를 이어 이미 이루어진 업을 받았고, 베개를 높이 베고 붓을 잡으며 여러 제후들을 굽어보았으니 상, 엄의 수고도 2년을 넘지 않았소. 여망(강태공)은 천하를 3분하여 2를 가진 형세로 800 제후의 세력을 차지하고 잠시 모월(깃발과 도끼)을 잡고 한때 지휘했으나, 모두 크게 토지를 열어 주와 나라를 겸했소. 주공의 여덟 아들도 모두 후백이 되었고, 흰 수소와 붉은 수소를 제사 지내고 전책과 물건을 갖추어 왕실을 본떴으니 영광과 은총이 이토록 홍대했소. 한나라가 흥할 때 보좌한 신하 장이, 오예는 그 공이 지극히 보잘것없었으나 연이어 성을 열고 땅을 넓히며 남면하여 고를 칭했소. 이는 모두 명군과 달주가 위에서 행한 것이고 현신과 성재가 아래에서 받은 것이니, 삼대의 영전이자 한나라의 밝은 제도였소. 지금 노고를 비교하면 주나라, 여망보다 편안하고, 공을 계산하면 장이, 오예보다 미미하고, 제도를 논하면 제나라, 노나라보다 무겁고, 땅을 말하면 장사보다 많소. 그러니 위나라의 봉작과 구석의 영광은 옛 상에 비추어 보면 마치 옥을 품고 홑옷을 입은 것과 같소. 또 열후 제장들도 다행히 용을 타고 기린을 올라 작은 공을 훔쳐 자줏빛을 허리에 차고 누런 빛을 품은 것이 백에 달하는데, 명공께서 홀로 위에서 상을 사양하면 그 아래 사람들은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오. 위로는 성스러운 조정의 환심을 어기고 아래로는 관대(벼슬아치)들의 지극한 기대를 잃으며, 보필의 큰 업을 잊고 필부의 작은 행동을 믿는 것이니 유(순유) 등이 심히 두려워하는 바요.”

이에 공이 밖으로 표를 올려 다만 위군만을 받겠다고 했다. 순유 등이 다시 말했다. “엎드려 보니 위나라의 처음 봉작은 성스러운 조정에서 생각을 발하고 여러 신료들과 계책을 모은 뒤에 책명한 것이오. 그런데 명공께서 오래도록 위(조정)의 뜻을 어기고 큰 예를 행하지 않으셨소. 지금 이미 경건하게 조명을 받들었으니 무리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텐데, 또 많이 사양하고 적게 당하며 9를 받지 않고 1만 받으려 하니 이는 한나라의 상이 행해지지 않고 유 등의 청이 허락되지 않은 것과 같소. 옛날 제, 노의 봉작은 동해를 차지하여 강역과 세금이 400만 가였고 기틀이 융성하고 업이 넓어 공을 세우기 쉬웠으니, 날개를 펴 보좌하는 훈공을 이루고 일광의 업적을 세울 수 있었소. 지금 위나라는 비록 10군의 이름이 있으나 곡부보다 줄었으니 호수를 계산하면 절반도 안 되니 왕실을 울타리하고 담장을 세우기에 아직 부족하오. 더구나 성상께서 망한 진나라의 보좌가 없던 화를 살피고 지난날의 진탕(어지러움)의 어려움을 징계하여 충현을 세우려 하니, 명공께서는 공손히 황제의 명을 받들어 어기지 마시오.”

공이 마침내 명을 받았다.

『위략』에 실린 공이 올린 사은표이다. “신은 선제의 후은을 입어 낭서(관직)에 올랐고, 성품이 피곤하고 게을러 뜻과 바람이 이미 족하니 감히 높은 지위를 바라거나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았소. 동탁이 난을 일으킬 때 의로움이 죽음의 난국에 당했기에 감히 몸을 던져 목숨을 걸고 칼날을 뚫고 무리를 거느렸으며, 마침내 천 년의 운을 만나 눈앞에서 부역했소. 두 원씨가 불타오르며 침범하던 때 폐하와 신은 차가운 마음으로 같은 근심을 했고 경도를 돌아보며 맹적(강한 적)을 마주했으니 늘 군신이 모두 호구(범의 입)에 빠질까 두려워했고, 스스로 목숨을 온전히 할 줄 몰랐소. 조종의 영험한 도움에 힘입어 추한 무리들을 멸했고, 미천한 신이 그 사이에 이름을 훔칠 수 있었소. 폐하께서 은혜를 더하여 상상의 지위를 주시고 봉작과 총록을 풍대하고 홍후하게 하시니 평생의 소원이 실로 바라던 바가 아니오. 입과 마음으로 계산해 보건대 다행히 죄를 지을 처지이고 열후를 유지하며 자손에게 남겨주어 성스러운 세상에 의탁하여 영원히 근심할 책임이 없기를 바랐소. 폐하께서 성대한 뜻을 발하여 나라를 열고 구석을 갖추어 우신에게 하사하실 줄은 몰랐으니, 땅은 제, 노에 비할 만하고 예는 번왕과 같으니 신의 공 없음으로 감당할 바가 아니오. 정을 올렸으나 듣지 않으시고 엄한 조서가 절절하니 실로 신의 마음이 부복하여 핍박을 느끼오. 스스로 반성해 보건대 대신의 자리에 나열되어 왕실의 명을 제어하니 몸이 제 것이 아니니 어찌 감히 사사로이 뜻을 이루겠소? 곧 퇴임하여 초복(처음의 옷)을 입고 싶소. 지금 강토를 받들어藩翰(울타리)의 수를 갖추니 감히 멀리 기약하여 후세를 염려함이 아니오. 부자가 서로 맹세하여 종신토록 몸을 잿가루로 만들고 목숨을 다하여 두터운 은혜에 보답하겠소. 천위(황제의 위엄)가 얼굴에 있으니 두려움에 조서를 받드오.”

90
가을 7월, 비로소 위나라의 사직과 종묘를 세웠다. 천자가 공의 세 딸을 귀인으로 맞이했고, 어린 자는 나라(위나라)에서 나이를 기다리게 했다.

『헌제기기주』에 이르기를, 사자에게 절을 주고 행태상 대사농 안양정후 왕읍을 시켜 벽, 백, 현훈, 비단 5만 필을 업으로 가져가 납빙(혼례)하게 했고, 개자(중매인) 5명은 모두 의랑으로 대부의 일을 행하게 했고, 부개 1명을 두었다.

9월, 금호대를 만들고 수로를 파서 장수를 백구로 끌어들여 황하와 통하게 했다. 겨울 10월, 위군을 나누어 동부와 서부로 만들고 도위를 두었다. 11월, 처음 상서, 시중, 6경을 두었다.

『위씨춘추』에 이르기를, 순유를 상서령으로, 양무를 복야로 삼고, 모개, 최염, 상림, 서혁, 하규를 상서로, 왕찬, 두습, 위기, 화합을 시중으로 삼았다.

91
마초가 한양에 있으면서 다시 강, 호를 틈타 해를 끼치니 저왕 천만이 반란을 일으켜 마초에게 응하며 흥국에 주둔했다. 하후연을 보내 토벌하게 했다.

92
19년 봄 정월, 비로소 적전을 갈았다. 남안의 조구, 한양의 윤봉 등이 마초를 토벌하고 그 처자를 죽이니 마초가 한중으로 달아났다. 한수가 금성으로 옮겨 저왕 천만의 부대로 들어가 강, 호 1만여 기를 거느리고 하후연과 싸웠으나 크게 깨뜨리니 서평으로 달아났다. 하후연이 제장들과 함께 흥국을 공격하여 도륙했다. 안동, 영양군을 없앴다.

93
안정 태수 관구흥이 관직으로 향하려 하자 공이 경계했다. “강, 호가 중국과 통하려 하면 스스로 사람을 보내 올 것이니 삼가 사람을 보내지 마라. 좋은 사람은 얻기 어렵고, 반드시 강, 호가 망령되이 무언가를 청하도록 가르쳐 스스로 이익을 취하려 할 것이오. 따르지 않으면 이속(다른 풍속)의 뜻을 잃는 것이고, 따르면 무익한 일이오.” 흥이 도착하여 교위 범릉을 강중에 보냈는데, 범릉이 과연 강들을 가르쳐 스스로 속국 도위가 되게 청하게 했다. 공이 말했다. “내가 미리 이럴 줄 알았는데 성인이어서가 아니라 일을 겪은 것이 많을 뿐이오.”

『헌제기기주』에 이르기를, 행태상사 대사농 안양정후 왕읍과 종정 유애에게 모두 절을 주었고, 개자 5명은 속백, 사마를 짊어지고 급사황문시랑, 액정승, 중상시 2명과 함께 두 귀인을 위공국에서 맞이했다. 2월 계해일, 또 위공 종묘에서 두 귀인에게 인수를 수여했다. 갑자일, 위공궁 연추문에 이르러 귀인을 맞이하여 수레에 태웠다. 위나라가 낭중령, 소부, 박사, 어부 승황구령, 승상 연속을 시켜 귀인을 호송했다. 계유일, 두 귀인이 위창에 이르자 시중 단을 시켜 호분(군사)을 거느리고 앞뒤로 잇달아 맞이하게 했다. 을해일, 두 귀인이 궁에 들어가자 어사대부, 중2천석, 대부, 의랑이 전중에 모였고 위나라의 2경 및 시중, 중랑 2명이 한나라의 공경들과 함께 전에 올라 연회를 베풀었다.

94
3월, 천자가 위공의 지위를 제후왕보다 높이고 금으로 된 옥새, 적불(붉은 띠), 원유관을 하사했다.

『헌제기기주』에 이르기를, 좌중랑장 양선, 정후 배무를 시켜 절과 인을 가지고 수여했다.

95
가을 7월, 공이 손권을 정벌했다.

『구주춘추』에 이르기를, 참군 부간이 간했다. “천하를 다스리는 큰 도구는 둘이니 문과 무요. 무를 쓰면 위엄이 앞서고 문을 쓰면 덕이 앞서는데, 위와 덕이 서로 보완해야 왕도가 갖춰지오. 지난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상하의 질서가 없었는데 명공께서 무를 써서 물리치니 10중에 9를 평정했소. 지금 왕의 명령을 받지 않는 자는 오나라와 촉나라인데, 오나라는 장강의 험함이 있고 촉나라는 숭산의 가로막힘이 있어 위엄으로 굴복하기 어렵고 덕으로 회유하기 쉬우오.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잠시 갑옷을 덮고 병사를 쉬게 하며 군사를 기르고 백성을 양육하고, 땅을 나누어 봉작을 정하고 공을 논하여 상을 주십시오. 이와 같이 하면 내외의 마음이 굳어지고 공 있는 자가 권장되어 천하가 제도를 알게 될 것이오. 그런 뒤에 점차 학교를 일으켜 선한 성품을 인도하고 의절을 길러야 하오. 공의 신무함이 사해를 진동시키니 만약 문을 닦아 보완한다면 온 천하가 따르지 않을 리가 없소. 지금 10만 군사를 일으켜 장강가에 멈추게 하면 적들이 험한 곳에 숨어드니 사마(장병과 말)들이 재능을 펼칠 수 없고 기이한 변화를 쓸 권세를 잃게 되어, 큰 위엄이 꺾이고 적의 마음을 굴복시킬 수 없을 것이오. 오직 명공께서는 순 임금이 간척(방패와 도끼)을 휘두른 의를 생각하시어, 위엄을 온전히 하고 덕을 길러 도리로써 승리하십시오.” 공이 따르지 않고 군사를 진격시켰으나 결국 공이 없었다. (부간은 자가 언재이며 북지 사람이고 결국 승상창조속을 지냈다. 아들 현이 있다.)

96
처음 농서의 송건이 스스로 하수평한왕이라 칭하고 복한에 무리를 모아 연호를 고치고 백관을 두기를 30여 년 했다. 하후연을 보내 흥국에서 토벌하게 했다. 겨울 10월, 복한을 도륙하고 송건을 참수하니 양주가 평정되었다.

97
공이 합비에서 돌아왔다.

98
11월, 한나라 황후 복씨가 옛날 아버지 전 기기교위 복완에게 보낸 글이 문제가 되었는데, 황제가 동승이 주살된 것을 공에게 원망한다는 내용이었고 말이 매우 추악했다. 일이 드러나자 황후가 폐위되어 죽었고 형제들이 모두 법에 따라 처형당했다.

『조만전』에 이르기를, 공이 화흠을 시켜 군사를 이끌고 궁에 들어가 황후를 잡게 하니 황후가 문을 닫고 벽 속에 숨었다. 화흠이 문을 부수고 벽을 열어 황후를 끌고 나왔다. 황제가 그때 어사대부 치려와 앉아 있었는데, 황후가 머리를 풀고 맨발로 지나가며 황제의 손을 잡고 “나를 다시 살릴 수 없습니까?”라고 했다. 황제가 “나도 나의 명줄이 언제까지인지 알지 못하오”라고 했다. 황제가 치려에게 “치공(치려), 천하에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 결국 황후를 죽였고 복완 및 종족 중에 죽은 자가 수백 명이었다.

99
12월, 공이 맹진에 이르렀다. 천자가 공에게 모두(깃발 장식)를 두게 하고 궁전에 종서를 설치하게 했다. 을미일, 명령을 내렸다. “행실이 있는 선비가 반드시 진취적인 것은 아니고, 진취적인 선비가 반드시 행실이 있는 것은 아니오. 진평이 어찌 독실한 행실이 있겠으며 소진이 어찌 신의를 지켰겠소? 그러나 진평은 한나라 업을 정했고 소진은 약한 연나라를 구했소. 이 말로 미루어 보건대 선비에게 편단(치우친 단점)이 있다고 어찌 버리겠소! 유사는 이 뜻을 밝게 생각하여 선비가 버려짐이 없고 관직에 폐단이 없게 하시오.”

또 말했다. “형벌은 백성의 목숨인데 군중에서 형벌을 다스리는 자들이 혹 사람이 아니어서 삼군의 생사 문제를 맡기니 내가 심히 두렵소. 법리(법의 이치)에 밝고 통달한 자를 뽑아 형벌을 맡기시오.” 이에 이조연속을 두었다.

100
20년 봄 정월, 천자가 공의 둘째 딸을 황후로 세웠다. 운중, 정양, 오원, 삭방군을 줄이고 군마다 1현을 두어 백성들을 다스리게 했으며 모두 합쳐 신흥군으로 만들었다.

101
3월, 공이 서쪽으로 장로를 정벌하여 진창에 이르렀다. 무도에서 저나라로 들어가려 했는데 저 사람들이 길을 막자 먼저 장합, 주령 등을 보내 공격하여 깨뜨렸다. 여름 4월, 공이 진창에서 나와 산관을 통해 하지에 이르렀다. 저왕 두무의 무리 1만여 명이 험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자 5월, 공이 공격하여 도륙했다. 서평, 금성의 제장 국연, 장석 등이 함께 한수의 목을 베어 보냈다.

『전략』에 이르기를, 한수는 자가 문약이며 처음 같은 군의 변장과 함께 서주에서 유명했다. 변장이 독군종사였고 한수는 계책을 받들어 경도로 갔다. 하진이 평소 그 이름을 듣고 특별히 만나게 했는데, 한수가 하진에게 여러 환관을 주살할 것을 설득했으나 하진이 따르지 않자 돌아가기를 구했다. 마침 양주의 송양, 북궁옥 등이 반란을 일으켜 장, 수를 우두머리로 세웠다. 장이 병으로 죽자 한수는 양 등에게 겁박당하여 부득이하게 병사를 막고 난을 일으켜 32년을 쌓았는데, 이때 이르러 죽으니 나이 70여 세였다.

유애의 『영제기』에 이르기를, 장은 다른 이름이 원(元)이다.

가을 7월, 공이 양평에 이르렀다. 장로가 동생 장위와 장수 양앙 등을 시켜 양평관을 지키게 했고, 산을 가로질러 10여 리에 성을 쌓았는데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군사를 돌렸다. 적들이 대군이 물러난 것을 보고 방비가 느슨해졌다. 공이 곧 몰래 해진, 고조 등을 시켜 밤에 험한 곳을 습격하여 크게 깨뜨리고 그 장수 양임을 참수했다. 나아가 장위를 공격하니 장위 등이 밤에 도망쳤고, 장로가 궤멸하여 파중으로 달아났다. 공의 군사가 남정에 들어가 장로의 부고와 보물을 모두 얻었다.

『위서』에 이르기를, 군사가 무도산에서 1천 리를 가며 오르내리는 험난함을 겪어 군인들이 고단했으나, 공이 크게 잔치를 베푸니 모두 그 수고를 잊었다. 파, 한이 모두 항복했다. 한녕군을 다시 한중이라 했다. 한중의 안양, 서성을 나누어 서성군을 두고 태수를 두었으며, 석, 상용군을 나누어 도위를 두었다.

102
8월, 손권이 합비를 포위하자 장료, 이전이 공격하여 깨뜨렸다.

103
9월, 파나라 7성 이왕 박호, 종읍후 두호가 파이, 종민을 이끌고 귀의했다.

손성이 말하길, 박은 ‘부’로 읽고 호는 ‘호’로 읽는다.

이어서 파군을 나누어 박호를 파동 태수로, 두호를 파서 태수로 삼고 모두 열후에 봉했다. 천자가 공에게 승제(황제의 대행)하여 제후의 수상(태수와 상)을 봉하고 임명하게 했다.

공연의 『한위춘추』에 이르기를, 천자가 공에게 밖에서 맡겨진 일을 다스리게 했으며, 임기응변의 상은 빠르고 신속해야 하므로 공에게 승제하여 제후의 수상을 봉하고 임명하게 했다. 조서에 “무릇 군대의 큰일은 상벌에 있는데,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함은 시간을 넘겨서는 안 되므로 사마법에 ‘상은 하루를 넘기지 않는다’라고 했으니 백성들이 선행의 이익을 빨리 보게 하려는 것이오. 옛날 중흥할 때 등우가 관에 들어오자 승제하여 군제주 이문을 하동 태수로 삼았고, 내흡이 또 승제하여 고준을 통로장군으로 삼았으니 그 본전을 살펴보면 모두 먼저 청한 것이 아니며, 임기응변하여 도장을 새긴 것이오. 이는 세조(광무제)가 신명하고 권도를 통달하여 손익을 따진 것이니, 대개 빠르게 위엄과 회유를 보여 큰 공을 드러내려는 것이오. 그 춘추의 의리에 대부들이 국경을 나가면 전문(특별한 명령)의 일이 있는 법이니, 오직 사직을 이롭게 하고 국가를 편안하게 하면 그만인 것이오. 하물며 경은 이백(우두머리)의 임무를 잡고 9유(천하)의 사윤(스승)이 되어 실로 이, 하를 정벌하는데, 군사가 변방 밖에 나가 있는데 얻고 잃음이 순식간에 달려 있소. 상을 기다리며 조서를 기다리다 업무를 지체함은 진실로 짐이 꾀하는 바가 아니오. 지금 이후로는 임기응변하여 진선(뽑는 것)할 때 총호(높은 칭호)를 더해야 할 자는 곧바로 인장을 새겨 가수(임시 수여)하고, 모두 충의를 다해 서로 장려하게 하시오. 의심하지 마시오.”

104
겨울 10월, 비로소 명호후에서 5대부까지 두었으니 구열후, 관내후와 합쳐 모두 6등급이며 군공을 상주기 위함이다.

『위서』에 이르기를, 명호후 작위 18급, 관중후 작위 17급을 두었으니 모두 금인자수(금도장과 보라색 끈)이다. 또 관내외후 16급은 동인귀뉴묵수(구리 도장과 거북이 꼭지, 검은 끈)이며, 5대부 15급은 동인환뉴(구리 도장과 고리 꼭지)이며 역시 묵수이고 모두 조세를 먹지 않으니, 구열후, 관내후와 합쳐 모두 6등급이다. 신 송지가 생각건대 오늘날의 허봉(실권 없는 봉작)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105
11월, 장로가 파중에서 그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다. 장로와 다섯 아들을 모두 열후에 봉했다. 유비가 유장을 습격하여 익주를 취하고 마침내 파중을 차지하자 장합을 보내 공격했다.

106
12월, 공이 남정에서 돌아오고 하후연을 남겨 한중을 지키게 했다. 이 정벌 길에 시중 왕찬이 5언시를 지어 그 일을 아름답게 읊었다. “군대를 따름에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으니, 다만 누구를 따르는지 물어보라. 따르는 이 신령하고 무용하니 어찌 오래도록 군사를 수고롭게 하겠는가? 상공(조조)이 관우(관동)를 정벌하니, 혁혁한 노여움이 천하의 위엄을 떨쳤네. 한 번 일으켜 훈로(북쪽 오랑캐)를 멸하고, 다시 일으켜 강이(서쪽 오랑캐)를 복종시켰네. 서쪽 변방의 도적을 다스리니, 갑자기 물건을 줍는 듯하네. 상을 베풀고 산과 바다를 넘으니, 술과 고기가 강가를 넘치네. 군중에 배불리 먹으니 사람과 말이 모두 살이 찌네. 도보와 수레를 겸해 돌아오니, 빈손으로 나갔다가 남는 재물이 있네. 땅을 3천 리 넓히니, 오고 감이 나는 듯 빠르네. 노래하고 춤추며 업성에 들어가니, 바라는 바 어긋남이 없네.”

107
21년 봄 2월, 공이 업으로 돌아왔다.

『위서』에 이르기를, 신미일, 유사가 태뢰(제물)를 올렸고 사당에 공을 기록했다. 갑오일 처음 봄 제사를 지냈는데 명령을 내렸다. “의논하는 자들은 사당에 오를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고 하오. 나는 석명(구석)을 받았으니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 전각에 올랐소. 지금 사당에서 일을 보는데 신발을 벗는다면 이는 선공을 높이고 왕명을 바꾸는 것이며, 조상을 공경하고 군주를 낮추는 것이니, 그래서 나는 감히 신발을 벗고 전각에 오르지 못하겠소. 또 제사를 지내며 씻으러 갈 때 손으로 물을 흉내만 내고 씻지 않았소. 무릇 씻는 것은 정결함을 공경하는 것인데, 흉내만 내고 씻지 않는 예는 들어본 적이 없소. 더구나 ‘신을 제사 지낼 때는 신이 있는 것처럼 하라’고 했으니, 그래서 나는 직접 물을 받아 씻겠소. 또 강신(신을 내림) 예가 끝나고 계단을 내려와 장막에서 서서 음악이 끝나기를 기다렸는데, 마치 허물이 없는 듯했으나 열조(선조)께서 제사를 늦추시어 속히 끝내지 않으셨소. 그래서 나는 앉아서 음악이 마쳐 신을 보낼 때까지 기다리다 일어섰소.胙(제사 고기)를 받아 신을 납시는 것을 시중에게 주었는데 이는 공경이 끝까지 정성스럽지 못한 것이오. 옛사람들은 직접 제사 일을 잡았으니, 그래서 나는 친히 신에게 바치고 끝까지 안고 돌아오겠소. 공자께서 ‘비록 무리와 어긋나도 나는 아래를 따르겠다’라고 했으니 참으로 옳은 말이오.”

3월 임인일, 공이 친히 적전을 갈았다.

『위서』에 이르기를, 유사가 주청했다. “사철에 농한기를 틈타 강무(군사 훈련)를 합니다. 한나라는 진나라 제도를 이어받아 세 때(춘, 하, 동)는 강무하지 않고, 오직 10월에 도시(군사 점검)하여 차마를 살피고 장수 남문에 행차하여 5영의 군사를 모아 8진의 진퇴를 익히니 이름을 승지라 합니다. 지금 금혁(전쟁)이 아직 멈추지 않았고 사민들이 평소 익숙하니, 지금 이후로는 사철 강무를 하지 말고 다만 입추에 길일을 택해 차마를 크게 조회(점검)하며 이름을 치병이라 하니 위로는 예의 이름에 합당하고 아래로는 한나라 제도를 잇는 것입니다.” 주청이 허락되었다.

여름 5월, 천자가 공의 작위를 진급시켜 위왕(魏王)으로 삼았다.

『헌제전』에 실린 조서이다. “예부터 제왕은 비록 호칭과 상이 변하고 작위 등급이 다르다 해도, 원훈을 높이고 공덕을 세워 성씨를 빛내고 자손에게 이어주어, 서성과 친척이 다를 것이 없었소. 옛날 우리 성조께서 천명을 받아 창업하고 기틀을 세워 우리 구하(중국)를 만들었소. 고금의 제도를 거울삼아 작위 등급의 차이를 통하고, 산천을 봉하여 번병을 세우고, 이성과 친척을 나란히 땅을 열어 국을 차지하고 왕이 되게 했으니 이는 천명을 보전하고 만대에 굳건히 하려는 것이오. 대대로 태평하여 신하와 군주 사이에 일이 없었소. 세조가 중흥했으나 시대마다 난이 있었고, 그래서 수백 년 동안 이성 제후왕의 자리가 없었소. 짐은 덕이 부족하나 홍업을 이어받아 온 땅이 분붕(붕괴)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독을 내뿜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며 힘들고 비약(가난)했소. 이때 오직 난에 빠져 선제의 성스러운 덕을 욕되게 할까 두려웠소. 황천의 영험함에 힘입어 경(조조)이 의를 잡고 몸을 일으켜 신무(신묘한 위엄)를 진동시키며 험난함 속에서 짐을 방어하여 종묘를 보전했으니, 화하의 남은 백성과 기운을 머금은 무리들이 몽은(은혜를 입음)하지 않음이 없었소. 경의 근면함은 직, 우보다 지나치고 충성심은 이, 주와 같으나 겸양으로 가리고 공손함으로 지켰소. 그래서 지난번 처음 위나라를 열고 경에게 토우를 하사했을 때 경이 명을 어길까 두려워 굳이 사양할 것을 염려하여, 잠시 뜻을 품고 의지를 굽혀 경을 상공에 봉했으니 고귀한 뜻을 공경히 따르려 했기 때문이었고 공적이 쌓이기를 기다렸기 때문이었소. 한수, 송건이 남쪽으로 파, 촉과 결탁하여 여러 역적이 합종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 했소. 경이 다시 장수를 명하여 용처럼 솟구치고 범처럼 떨쳐 그 우두머리를 베고 그 굴혈을 도륙했소. 양평의 싸움에 이르러 직접 갑주를 입고 깊은 험로에 들어가 芟夷(풀을 베듯)하여 흉악한 무리를 멸했고, 서쪽 변방을 탕정(평정)하여 깃발을 만 리에 드리웠고 성교(위엄과 가르침)를 멀리 떨쳐 우리 구우를 편안하게 했소. 당, 우의 성함에 삼후가 공을 세웠고 문, 무의 흥함에 단, 석이 보좌가 되었고, 이조(고조, 광무제)가 업을 이루는데 영웅들이 보좌했소. 무릇 성철한 군주로서 일을 자기 책임으로 여겼는데도 오히려士에게 반서(작위)를 하사하여 공신에게 보답했으니, 어찌 짐처럼 덕이 부족하고 경에게 의지하여 구제받는데 상전이 풍성하지 않겠소. 지금 경의 작위를 진급시켜 위왕으로 삼고, 사자를 보내 절행어사대부 종정 유애가 책새(책문과 옥새)를 받들어 현토의 사당에 제사 지내고 백모로 묶어 금호부 제1에서 제5, 죽사부 제1에서 제10을 하사하노라. 경은 왕위를 바로잡고 승상으로서 기주목을 겸함은 예전과 같소. 위공의 인수부책을 올리라. 경의 명에 복복하고 그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고 여러 공적을 이루어 우리 조종의 휴명을 높이 드러내시오.”

위왕이 상서하여 세 번 사양했으나 조서에 세 번 답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또 손조(직접 쓴 조서)에 “대성은 공덕으로 높고 아름답게 여기고 충화로 전훈을 삼으니, 창업하여 이름을 남겨 백세가 사모하게 하고, 도를 행하고 의를 세워 힘써 행함이 본받게 하니 훈열이 무궁하고 휴광(아름다운 빛)이 무성하오. 직, 계는 원수의 총명을 지녔고 주, 소는 문, 무의 지혜를 빌렸으니 여러 관직을 경영하고 앙탄부사(우러러 탄식하고 굽어 생각함)했으나 그 짝이 어찌 경만 하겠소? 짐이 옛사람의 공을 생각하여 미화함이 저와 같고 경의 충근한 공적을 생각하니 그 무성함이 이와 같소. 그래서 매번 루부(새긴 부절)와 석서(쪼갠 증서)를 하사하고 예와 명책을 진열하려 할 때마다 오매(자나 깨나) 개연하여 스스로 문을 지키는 덕 없음을 잊었소. 지금 경이 거듭 짐의 명을 어기고 굳이 사양함이 간절하니 짐의 마음을 칭할 바가 아니고 후세의 가르침이 아니오. 뜻을 억누르고 절제하여 다시는 굳이 사양하지 마시오.”

『사체서세서』에 이르기를, 양곡이 공을 북부위로 삼았다.

『조만전』에 이르기를, 상서우승 사마건공이 추천했다. 공이 왕이 되자 건공을 불러 업으로 오게 하여 함께 즐겁게 술을 마시며 건공에게 말했다. “고(나)는 오늘 다시 위(위정자)를 할 수 있겠소?” 건공이 “옛날 대왕을 추천할 때는 적당히 위를 할 만했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크게 웃었다.

(건공은 이름이 방이며 사마선왕의 아버지이다. 신 송지가 사마표의 서전을 살펴보건대 건공은 우승이 되지 않았으니 의심스럽다. 그러나 왕은의 『진서』에 조왕이 참람하게 왕위를 찬탈하고 조상을 높여 황제로 삼으려 할 때 박사 마평이 의논하길 경조부군(사마방)이 옛날 위무제를 북부위로 추천하여 도적이 경계를 범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이렇다면 증거가 있는 것이다.)

대군 오환 행단우 부부로와 그 제후왕들이 와서 조회했다. 천자가 왕의 딸을 공주로 삼고 탕목읍을 주었다. 가을 7월, 흉노 남단우 호주천이 그 명왕들을 이끌고 와 조회하니 객의 예로 대접하고 마침내 위나라에 머물게 하여 우현왕 거비를 시켜 그 나라를 감시하게 했다. 8월, 대리 종요를 상국으로 삼았다.

『위서』에 이르기를, 비로소 봉상과 종정 관직을 두었다.

108
겨울 10월, 치병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왕이 친히 금고(북)를 잡고 진퇴를 명령했다. 손권을 정벌하여 11월에 초에 이르렀다.

109
22년 봄 정월, 왕이 군사를 거주에 주둔시켰다. 2월, 군사를 진격시켜 강 서쪽 학계에 주둔했다. 손권이 유수구에 성을 쌓고 지키자 곧바로 공격하니 손권이 물러나 달아났다. 3월, 왕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고 하후돈, 조인, 장료 등을 남겨 거주에 주둔하게 했다.

110
여름 4월, 천자가 왕에게 천자의 정기(깃발)를 설치하게 하고 출입할 때 경필(길을 비키게 함)을 칭하게 했다. 5월, 반궁(학교)을 만들었다. 6월, 군사 화흠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위서』에 이르기를, 처음 위위 관직을 두었다.

가을 8월, 명령을 내렸다. “옛날 이지(이윤), 부열은 천한 사람에게서 나왔고 관중은 환공의 적이었으나 모두 그들을 써서 흥했소. 소하, 조참은 현리(작은 관리)였고 한신, 평은 오욕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웃음을 받는 수치를 당했으나 끝내 왕업을 이루고 이름을 천 년에 남겼소. 오기는 탐욕스러운 장수였으나 아내를 죽여 신임을 얻었고 금을 흩뿌려 관직을 구했으며 어머니가 죽어도 돌아가지 않았으나, 위나라에 있을 때는 진나라 사람들이 감히 동쪽을 향하지 못했고 초나라에 있을 때는 삼진이 감히 남쪽을 도모하지 못했소. 지금 천하에 지덕을 가진 자가 민간에 놓여 있고, 과용(과감하고 용맹)하여 죽음을 돌아보지 않고 적을 힘껏 싸우는 자가 있지 않겠소? 문속(글에 익숙한)의 관리나 뛰어난 재능과 다른 기질을 가진 자는 혹 장수나 수령을 감당할 수 있소. 오욕의 이름을 짊어지거나 비웃음을 받는 행실이 있거나, 혹 불인하거나 불효하더라도 나라를 다스리고 병사를 쓰는 기술이 있다면, 각기 아는 바를 추천하여 유락(빠뜨림)이 없게 하시오.”

겨울 10월, 천자가 왕에게 12류(장식)의 면류관을 하사하고 금근거(황금 수레)를 타고 여섯 마리 말을 몰게 했으며, 5시 부차(보조 수레)를 설치하게 했고 오관중랑장 비(조비)를 위태자로 삼았다.

111
유비가 장비, 마초, 오란 등을 보내 하변에 주둔하게 했다. 조홍을 보내 막게 했다.

112
23년 봄 정월, 한 태의령 길본과 소부 경기가 직실 위황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허도를 공격하고 승상 장사 왕필의 진영을 불태웠다.

『위무고사』에 실린 명령이다. “영장사 왕필은 내가 형극(어려운 시절)을 헤쳐 나갈 때의 관리요. 충직하고 일을 부지런히 하니 마음이 쇠와 돌 같아서 나라의 좋은 관리요. 잘못되어 오래도록 불러들이지 못했으니 기린을 버리고 타지 못함과 같으니, 어찌 황망히 다시 구하겠소? 그래서 불러들이라 가르쳤고, 마땅한 자리에 임명했으니 곧 영장사로서 일을 통솔하게 하시오.”

왕필이 영천 전농중랑장 엄광과 함께 토벌하여 참수했다.

『삼보결록주』에 이르기를, 이때 경조 김의(자 덕의)가 대대로 한나라 신하였고 일제(김일제)가 망하라를 토벌하여 충성이 뚜렷하고 명절이 대대로 이어졌다고 여겼다. 한나라 운이 옮겨가는 것을 보고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크게 분개했고, 곧 경기, 위황, 길본, 길본의 아들 막, 막의 동생 목 등과 결모했다. 경기는 자가 계행이고 젊어서 미명이 있었으며 승상의 연(벼슬아치)이 되었는데 왕이 심히 공경하고 특별히 여겨 시중으로 옮기고 소부를 지키게 했다. 막은 자가 문연이고 목은 자가 사연이다. 김의가慷慨(씩씩하고 의기 있음)하여 일제의 풍모가 있고 또 왕필과 사이가 좋았는데, 왕필을 죽여 천자를 끼고 위나라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유비를 구원하려 했다. 이때 관우가 강성했고 왕은 업에 있었는데, 왕필을 남겨 군사를 거느리고 허도 안의 일을 감독하게 했다. 문연 등이 잡인과 가동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밤중에 문을 불태우고 왕필을 공격했다. 김의가 사람을 시켜 내응하게 하여 왕필의 어깨를 쐈다. 왕필은 공격자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평소 김의와 사이가 좋았기에 김의에게 달려가 밤에 ‘덕의’를 불렀다. 김의의 집은 왕필인 줄 모르고 문연 등인 줄 알고 잘못 응답했다. “왕 장사가 이미 죽었소? 경들의 일이 이루어졌구려!” 왕필이 곧 다른 길로 달아났다. 일설에는 왕필이 김의에게 투항하려 하자 그 장하독(측근 장교)이 “오늘 일이 결국 누구의 문으로 들어가는지 아는가!”라고 하여 왕필을 부축해 남성으로 달아났다. 날이 밝자 왕필은 살아 있었고 문연 등의 무리는 흩어졌으므로 패했다. 10여 일 뒤 왕필이 결국 상처로 죽었다.

『헌제춘추』에 이르기를, 경기, 위황 등을 잡아 참수하려 하자 경기가 위왕의 이름을 부르며 “내가 스스로 뜻을 펼치지 못하고 결국 군아(어리석은 무리)들에게 오도된 것이 한스럽구나!”라고 했다. 위황은 머리를 조아리고 뺨을 치며 죽을 때까지 그랬다.

『산양공재기』에 이르기를, 왕이 왕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한나라 백관을 업으로 불러, 불을 끄러 간 자는 왼쪽으로, 불을 끄러 가지 않은 자는 오른쪽으로 서게 했다. 사람들은 불을 끄러 간 자는 반드시 죄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모두 왼쪽으로 붙었다. 왕은 “불을 끄러 가지 않은 자는 난을 돕지 않은 것이고, 불을 끄러 간 자는 실로 적이다”라고 하고 모두 죽였다.

113
조홍이 오란을 깨뜨리고 그 장수 임규 등을 참수했다. 3월, 장비, 마초가 한중으로 달아났다. 음평의 저나라 강단이 오란을 참수하고 그 머리를 전해왔다.

114
夏 4월, 대군, 상곡의 오환 무신저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언릉후 조창을 보내 공격하여 깨뜨렸다.

『위서』에 실린 왕의 명령이다. “지난겨울 하늘에서 역려(전염병)가 내려 백성들이 시들고 상했소. 군사를 밖으로 일으켜 밭을 일구는 것이 줄었으니 내가 심히 걱정하오. 관리와 백성 남녀에게 명하오. 여자 70세 이상으로 남편과 자식이 없는 자, 12세 이하로 부모 형제가 없는 자,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거나 손으로 일을 할 수 없거나 발로 걸을 수 없는데 처자부형의 산업(재산)이 없는 자는 평생 양식을 대주시오. 어린이는 12세까지 그치고 가난하여 스스로 지탱할 수 없는 자는 입수대로 대여해주시오. 노모하여 양육을 기다려야 하는 자는 90세 이상이면 부역하지 않게 하고 집안의 한 사람을 돌보게 하시오.”

115
6월, 명령을 내렸다. “옛날 장례는 반드시 척박한 땅에 머물렀소. 서문표 사당 서쪽 언덕 위에 수릉(무덤)을 계획하되, 높은 곳을 근거로 삼고 봉분을 하지 말고 나무를 심지 마시오. 『주례』 총인(무덤 담당)이 공묘의 땅을 관장하는데, 무릇 제후는 왼쪽과 오른쪽에 거하고 앞쪽은 경대부가 뒤쪽에 거하니 한나라 제도 역시 이를 배릉이라 했소. 공경대신이나 공 있는 열후 장수는 수릉에 배장(함께 묻힘)하게 하고, 그 조역(무덤 구역)을 넓게 하여 충분히 서로 용납하게 하시오.”

116
가을 7월, 치병하고 곧 서쪽으로 유비를 정벌하여 9월에 장안에 이르렀다.

117
겨울 10월, 완의 수장 후음 등이 반란을 일으켜 남양 태수를 붙잡고 관리와 백성을 약탈하며 완을 보전했다. 처음 조인이 관우를 토벌하러 번성에 주둔했는데, 이때 조인에게 완을 포위하게 했다.

118
24년 봄 정월, 조인이 완을 도륙하고 후음을 참수했다.

『조만전』에 이르기를, 이때 남양 일대는 요역에 고통받고 있었다. 후음이 곧 태수 동리포를 붙잡고 관리, 백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관우와 연합했다. 남양 공조 종자경이 가 왕께 유세했다. “족하가 민심을 따라 대사를 일으켰으니 원근에서 풍문을 들을 것이오. 그러나 군장을 붙잡는 것은 거스르는 일이고 이로울 것이 없으니 어찌 보내지 않겠소? 내가 그대와 함께 힘을 합쳐 조공의 군사가 오기 전에 관우의 병사도 이를 것이오.” 후음이 따랐고 즉시 태수를 놓아주었다. 자경이 밤중에 성을 넘어 도망쳐 결국 태수와 함께 남은 백성을 모아 후음을 포위했는데 마침 조인의 군사가 도착하여 함께 멸했다.

119
하후연이 양평에서 유비와 싸우다 유비에게 죽임을 당했다. 3월, 왕이 장안에서 사곡을 나와 군사를 요충지에 배치하여 한중을 임하였고 곧 양평에 이르렀다. 유비가 험한 곳을 의지하여 지켰다.

『구주춘추』에 이르기를, 이때 왕이 돌아가려 하여 명령을 내리길 “계륵(닭갈비)”이라고 했다. 관속들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주부 양수가 곧 행장을 꾸리니 사람들이 놀라 물었다. “어찌 아는가?” 양수가 “무릇 계륵은 버리기는 아깝지만 먹을 것은 없으니, 한중에 비유하면 왕께서 돌아가려 하시는 줄 알 수 있소”라고 했다.

120
여름 5월,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121
가을 7월, 부인 변씨를 왕후로 삼았다. 우금을 보내 조인을 도와 관우를 공격하게 했다. 8월, 한수가 넘쳐 금의 군사를 침수시켰고 군사가 잠기자 관우가 우금을 사로잡고 곧바로 조인을 포위했다. 서황을 보내 구원하게 했다.

122
9월, 상국 종요가 서조연 위풍의 반란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세어』에 이르기를, 위풍은 자가 자경이며 패인(패 사람)이다. 무리를 미혹하는 재주가 있어 업도를 기울어지게 하니 종요가 이로 인해 불러들였다. 대군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위풍이 몰래 무리를 결탁하고 또 장락위위 진의와 함께 업을 습격하기를 꾀했다. 기한이 되지 않았는데 진의가 두려워 태자에게 고했고, 위풍을 주살했는데 연루되어 죽은 자가 수십 명이었다. 왕창의 『가계』에는 “제음 위풍”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패인이라 했으니 자세하지 않다.

123
겨울 10월, 군사가 낙양으로 돌아왔다.

『조만전』에 이르기를, 왕이 다시 북부위 관청을 수리하게 했는데 이전보다 지나치게 좋게 했다. 손권이 사자를 보내 상서하여 관우를 토벌하여 스스로 효도하겠다고 했다. 왕이 낙양에서 남쪽으로 관우를 정벌하러 갔는데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서황이 관우를 공격하여 깨뜨렸고, 관우가 달아나자 조인의 포위가 풀렸다. 왕의 군사는 마피에 있었다.

『위략』에 이르기를, 손권이 상서하여 신이라 칭하고 천명을 설득했다. 왕이 손권의 글을 밖으로 보이며 “이 아이가 나를 화로 위에 앉히려는구나!”라고 했다. 시중 진군, 상서 환계가 아뢰길 “한나라는 안제 이래로 정치가 공실(황실)을 떠났고 국통이 여러 번 끊겼으니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직 이름과 명호만 있을 뿐, 한 뼘의 땅과 한 명의 백성도 한나라의 소유가 아니니 기운이 이미 다했고 역수가 이미 끝났으니 지금의 일이 아니오. 그래서 환제, 영제 시절에 도위(예언)를 밝히는 자들이 모두 ‘한나라의 기운이 다했고 황가(위나라)가 흥할 것이다’라고 했소. 전하께서는 기회에 응하여 천하 10분 중 9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나라를 섬기고 있으니 온 생명들이 주시하고 원근에서 원망과 탄식하니, 그래서 손권이 멀리서 신이라 칭하는 것이오. 이는 천인의 응답이며 기운이 다르고 소리가 같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우, 하(순, 우)는 겸양하는 말이 없었고 은, 주(탕, 무)는 주살과 방축을 아끼지 않았으니, 하늘을 두려워하고 운명을 알면 더불어 사양할 바가 아니오.”

『위씨춘추』에 이르기를, 하후돈이 왕에게 말했다. “천하가 모두 한나라의 운이 다하고 이대가 바야흐로 일어날 것을 아오. 예부터 민해(백성의 해)를 제거하여 백성들이 귀의하면 곧 민주(백성의 주인)요. 지금 전하께서 군사를 일으킨 지 30여 년, 공덕이 여서(백성)에게 드러나 천하가 의지하고 귀의하니, 천명과 순민(백성의 뜻)에 응하는데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소!” 왕이 “‘정사에 펴지면 이것 또한 정사를 하는 것이다’. 만약 천명이 나에게 있다면 나는 주나라 문왕이 될 것이오.”

『조만전』과 『세어』에서는 모두 환계가 왕에게 정위(왕의 자리)를 권했고, 하후돈은 마땅히 먼저 촉나라를 멸해야 하고 촉이 망하면 오나라가 복종할 것이니, 양방이 이미 정해지면 그런 뒤에 순, 우의 궤도를 따르라고 했고 왕이 이를 따랐다고 했다.

왕이 훙서(사망)하자 하후돈이 이전의 말을 추한(뒤늦게 한탄)하며 병이 들어 죽었다.

손성이 평하길 “하후돈은 한나라 관리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위나라 인장을 받으려 했고, 환계는 하후돈과 나란히 서서 의롭고 곧은 절개가 있었소. 전기를 살펴보면 『세어』는 망령된 기록이다.”

124
25년 봄 정월, 낙양에 이르렀다. 손권이 관우를 공격하여 참수하고 그 머리를 보내왔다.

125
경자일, 왕이 낙양에서 붕어했으니 나이 66세였다.

『세어』에 이르기를, 태조가 한중에서 낙양에 이르러 건시전을 일으켰는데 탁룡사의 나무를 베니 피가 나왔다.

『조만전』에 이르기를, 왕이 일꾼 소월을 시켜 아름다운 배나무를 옮기게 했는데 뿌리가 다치자 모두 피가 났다. 소월이 상황을 알리자 왕이 직접 보고 이를 악하게 여겨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돌아와 결국 병이 났다. 유령(유언)에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옛 제도를 따를 수 없다. 장례가 끝나면 모두 상복을 벗어라. 군사를 거느리고 둔수(방어)하는 자들은 모두 둔부를 떠나지 마라. 유사는 각기 그 직무를 다하라. 시신은 평소 입던 옷으로 염하고 금은보물을 넣지 마라.”

시호는 무왕(武王)이다. 2월 정묘일, 고릉에 장사 지냈다.

126
『위서』에 이르기를, 태조가 직접 해내를 다스리고 여러 악한 무리를 깎아내렸다. 군사를 행하고 병법을 사용하는 것은 대개 손자, 오자의 법에 의지했으나 일을 겪으며 기묘함을 베풀고, 적을 속여 승리하며 변화함이 신과 같았다. 직접 쓴 병서 10만여 마디가 있고, 여러 장수가 정벌할 때 모두 새 책에 따라 종사했다. 일에 임하면 또 손수 절도(법도)를 썼는데 명령을 따르는 자는 이기고 가르침을 어기는 자는 패했다. 오랑캐와 진을 대할 때는 뜻이 편안하고 한가하여 싸우려 하지 않는 듯했으나, 기회를 결단하여 승기를 잡을 때는 기세가 넘쳤으므로 매번 싸우면 반드시 이겼고 군대에 요행으로 이긴 적이 없었다. 사람을 알고 잘 살폈으며 위엄으로 속이기 어려웠고, 우금, 악진을 군진 사이에서 발탁했고 장료, 서황을 달아난 포로 안에서 취했으니 모두 나라를 돕고 공을 세워 이름난 장수가 되었다. 그 나머지는 미천한 곳에서 발탁되어 목수가 된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로써 큰 업을 창조하고 문무를 함께 베풀었으며, 군사를 거느린 지 30여 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낮에는 병법을 강론하고 밤에는 경전을 생각했으며, 높은 곳에 오르면 반드시 시를 짓고 새 시를 지어 관현(악기)에 맞추니 모두 악장이 되었다. 재능과 힘이 남보다 뛰어나 손으로 나는 새를 쏘고 몸소 맹수를 사로잡았는데, 일찍이 남피에서 하루에 꿩을 쏴 63마리를 잡았다. 궁전을 짓고 기계를 수리함에 법칙이 없는 것이 없었고 모두 그 뜻을 다했다. 성품이 검소하고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아 후궁의 옷은 비단이 아니었고 시어(시녀)의 신발은 두 가지 색이 아니었으며, 휘장과 병풍은 헐면 보수했고 요는 따뜻하게 취했을 뿐 가장자리를 꾸미지 않았다. 성과 읍을 공격하여 아름다운 물건을 얻으면 모두 공 있는 자에게 주었고, 훈로가 마땅히 상을 받아야 하면 천금도 아끼지 않았으나, 공이 없는데 칭송을 바라면 한 털끝도 주지 않았고, 사방에서 바치는 어물은 무리들과 함께 나누었다. 늘 장례 제도의 襲(수의) 숫자가 번거롭고 무익한데도 세속이 이를 지나치게 따르는 것을 보고, 미리 옷을 죽은 뒤의 옷으로 삼되 네 궤짝에 그치게 했다.

127
『부자』에 이르기를, 태조가 혼인의 사치와 참람함을 미워하여 공녀가 시집갈 때는 모두 조장(검은 휘장)을 쓰고 따르는 여종이 10명을 넘지 않게 했다.

128
장화의 『박물지』에 이르기를, 한나라 시대에 안평의 최원, 최원의 아들 실, 홍농의 장지, 장지의 동생 창이 모두 초서에 능했는데 태조가 그 다음이었다. 환담, 채옹은 음악에 능했고, 풍익의 산자도, 왕구진, 곽개 등이 바둑에 능했는데 태조는 모두 그들과 능력을 나란히 했다. 또 양성법을 좋아하고 방약(의술)도 이해하여 방술의 선비들을 불러들이니 여강의 좌자, 초군의 화타, 감릉의 감시, 양성의 극검이 모두 오지 않은 이가 없었고, 또 야갈을 1척까지 먹는 연습을 하였으며 또한 짐주(독주)도 조금씩 마실 수 있었다.

129
『부자』에 이르기를, 한나라 말기 왕공들은 왕복(왕의 의복)을 버리고 폭건(두건)을 우아하게 여겼으므로 원소, 최표의 무리는 비록 장수라 해도 모두 겸건(비단 두건)을 썼다. 위 태조는 천하가 흉작으로 재물이 부족했으므로 옛 피변(가죽 모자)을 모방하고 겸백을 재단하여 차(모자)를 만들었으며, 간이하고 때에 따르는 의에 합당하게 했고 색깔로 귀천을 구별하게 했으니, 지금 시행하는 것은 군용이라 할 수 있고 국용은 아니다.

130
『조만전』에 이르기를, 태조는 사람됨이 경박하고 위중함이 없었으며 음악을 좋아하여 창우(광대)를 곁에 두고 아침부터 밤까지 즐겼다. 경초(가벼운 비단)를 입고 몸소 작은 패낭(주머니)을 차고 손수건과 세밀한 물건을 담았으며 때로는 차모(모자)를 쓰고 손님을 만났다. 매번 사람과 담론하며 희롱하고 읊조릴 때는 숨김이 없었고, 기뻐서 크게 웃을 때는 머리를 술잔과 책상 안으로 파묻기도 하여, 음식과 반찬이 모두 수건과 두건에 묻었으니 그 경박함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법을 지키기는 엄하고 가혹하여 제장 중에 계획이 자신보다 뛰어난 자가 있으면 곧바로 법으로 주살했고, 옛 친구나 오래된 원한도 남김이 없었다. 그 형살하는 자들을 대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아파했으나 끝내 살려주지 않았다. 처음 원충이 패상이 되었을 때 일찍이 법으로 태조를 다스리려 했고, 패국의 환소 또한 그를 가볍게 여겼다. 나중에 연주에 있을 때 진류의 변양이 언론으로 태조를 침범하자 태조가 변양을 죽이고 그 집안을 멸했다. 원충, 환소는 모두 교주로 피난 갔는데, 태조가 사자를 보내 태수 사섭에게 그들을 모두 멸하게 했다. 환소가 스스로 나타나 뜰에서 절하며 사죄하자 태조가 “꿇어앉으면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결국 죽였다. 일찍이 군사를 내어 보리밭을 지나갈 때 “사졸들은 보리를 밟지 말고 어기는 자는 죽인다”라는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보리를 피하여 서로 부축했는데, 태조의 말이 놀라 보리밭으로 뛰어들자 주부에게 죄를 논하게 했다. 주부가 『춘추』의 의리에 따라 벌은 존귀한 자에게 가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자, 태조가 “법을 만들고 스스로 어기면 무엇으로 군사를 거느리겠는가? 그러나 나는 군사를 거느리는 수장이니 스스로 죽일 수는 없다”라고 하고는 곧 칼을 들어 머리카락을 잘라 땅에 놓았다. 또 총애하는 기첩이 평소 낮잠을 잘 때 늘 베고 누웠는데, “잠시 뒤에 나를 깨워라”라고 했다. 기첩이 태조가 편히 자는 것을 보고 즉시 깨우지 못했는데 스스로 깨고는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평소 도적을 토벌할 때 군량(린곡)이 부족하여 사적으로 주자에게 “어찌하면 좋은가?”라고 물었다. 주자가 “작은 되(소곡)로 채우면 됩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좋다”라고 했다. 나중에 군중에서 태조가 무리를 속였다고 말하자 태조가 주자에게 말했다. “특별히 그대의 죽음을 빌려 무리들을 만족시켜야겠소. 그렇지 않으면 일이 풀리지 않소.” 곧 참수하고 그 머리를 매달아 “작은 되를 행하고 관곡을 훔쳤으니 군문에 참수한다”라고 써 붙였다. 그 혹독하고 변사(변칙)함이 모두 이런 류였다.

131
평하길, 한나라 말기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웅호들이 함께 일어났는데 원소가 4주를 호시(호랑이처럼 노려봄)하여 강성하여 대적할 자가 없었다. 태조는 운주(계책을 움직임)하고 모의를 펼쳐 우내(천하)를 채찍질하고, 신자, 상앙의 법술을 잡고 한신, 백기의 기책을 다했으며, 관직을 정하고 재능을 주어 각기 그 그릇에 맞게 하고, 정을 바로잡고 셈을 맡기며 옛 원한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결국 황기(중요한 기틀)를 총어(총괄)하고 홍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명략(밝은 계책)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억(생각건대) 가히 비상한 사람이라 할 수 있고 세상을 뛰어넘은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