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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M으로 뽑은 잡지식

정사 삼국지 위서 2권 문제기 - 문제 비(文帝 丕)220년 1월 ~ 226년 5월 (후한 건안(建安) 25년 ~ 황초(黃初) 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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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魏書) 제2권

1. 문제기(文帝紀)

문황제(文皇帝)는 이름이 비(丕)요, 자는 자환(子桓)이며, 무제(조조)의 태자이다. 중평 4년 겨울, 초(譙)에서 태어났다.

『위서』에 이르기를, 황제가 태어날 때 푸른 구름 기운이 수레 덮개처럼 둥글게 그 위에 종일토록 머물렀는데, 기운을 살피는 자들이 이를 두고 “지극히 귀한 증거이며 신하가 될 기운이 아니다”라고 했다. 여덟 살에 문장에 능했고, 뛰어난 재주가 있어 고금의 경전과 제자백가의 서적을 널리 꿰뚫었다. 기사(말 타기와 활쏘기)와 검술을 좋아했다. 무재(茂才)로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헌제기기주』에 이르기를, 건안 15년(210년)에 사도 조온에게 벽소(부름)를 받았다. 태조가 “조온이 내 자제들을 벽소함은 선거(인재 선발)를 실질적으로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상주했다. 시중 겸 수광록훈 치려를 시켜 절을 가지고 조서를 받들어 조온을 관직에서 면직하게 했다. 건안 16년(211년), 오관중랑장이 되어 승상을 부관했다. 22년(217년), 위 태자로 세워졌다.

『위략』에 이르기를, 태조가 제때 태자를 세우지 않자 태자가 스스로 의심했다. 이때 고원여라는 자가 관상을 잘 보았기에 불러 물으니 대답하길 “그 귀함이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수명은 얼마나 되겠는가?”라고 묻자 원여가 “그 수명은 40세에 작은 고비가 있을 것이나, 그것만 넘기면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태자로 세워졌고, 40세에 이르러 훙서(사망)했다.

태조가 붕어하자 지위를 이어받아 승상, 위왕이 되었다. 원홍의 『한기』에 실린 한 황제의 조서이다.
“위 태자 비여, 옛날 황천께서 나의 현명한 부친에게 우리 황실을 보좌하게 하니, 마침내 흉악한 무리를 물리치고 9주를 평정하여 훌륭한 공과 업적이 우주에 빛났소. 짐이 이를 의지해 20여 년간 정무를 보지 않고 지냈는데, 하늘이 한 노인을 남겨두어 나 한 사람을 보전하게 하지 않고 일찍이 신을 잠들게 하니 애도하는 마음이 간절하오. 비(丕)는 대대로 밝은 덕을 펴왔으니 마땅히 문무를 겸비하여 앞선 전통을 이어 빛내시오. 지금 사자에게 절을 주어 어사대부 화흠을 시켜 책조를 받들어 비에게 승상 인수, 위왕 옥새와 인끈을 수여하고 기주목을 겸하게 하노라. 지금 밖에는 남은 적들이 있고 먼 오랑캐들은 아직 복종하지 않으며, 깃발과 북소리가 여전히 변방에 있고 무기가 칼집에 들어가지 못했으니, 이는 곧 큰 공을 떨치고 이름을 남길 때요. 어찌 상례의 예만 닦으며 옛 성인의 뜻만 다할 수 있겠소? 경은 공경히 짐의 명에 복종하고, 근심을 억누르고, 곁에서 그 전통을 받들어, 때맞춰 여러 공을 밝혀 나의 뜻에 부합하시오. 아아, 어찌 힘쓰지 않겠소!”

왕후를 높여 왕태후라 하였다. 건안 25년을 연강 원년으로 고쳤다.

5
원년 2월, 『위서』에 실린 경술령이다. “관문과 나루는 상인들의 통로이고, 연못과 동산은 재앙과 흉년을 대비하는 곳이다. 금지를 설정하고 세금을 무겁게 하는 것은 백성을 편하게 하는 방도가 아니다. 못과 정원의 금지를 없애고 관문과 나루의 세금을 가볍게 하여 모두 10분의 1 세제로 복귀시키라.”

신해일, 제후왕, 장상 이하 대장들에게 곡식 1만 섬, 비단 1천 필을 하사하고, 금과 은은 각기 차등을 두었다. 사자를 보내 군국을 순행하게 하고, 이치에 어긋나게 쥐어짜고 포학하게 구는 자가 있으면 그 죄를 고발하게 했다.

임술일, 대중대부 가후를 태위로, 어사대부 화흠을 상국으로, 대리 왕랑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산기상시와 시랑 각 4인을 두었으며, 환관으로서 관직에 있는 자는 여러 서령의 정원을 넘지 못하게 했다. 금책을 만들어 조령을 기록하고 석실에 보관하게 했다.

6
처음 한나라 희평 5년에 황룡이 초(譙)에 나타나자, 광록대부 교현이 태사령 단양에게 물었다. “이는 무슨 상서로움인가?” 단양이 “그 나라에 뒤에 왕이 일어날 징조인데, 50년이 지나지 않아 또 나타날 것입니다. 하늘의 일은 항상 상(상징)이 있으니 이것이 그 응답입니다”라고 했다. 내황의 은등이 조용히 이를 기록했다. 45년이 지나 황룡이 초에 나타나자 은등이 이를 듣고 “단양의 말이 그 응험함이 이것인가!”라고 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왕이 은등을 불러 만나보고 말했다. “옛날 성풍이 초구의 점괘를 듣고 계우를 공경히 섬겼고, 등신은 소공의 말을 믿고 스스로 광무제를 받아들였소. 은등은 늙은 몸으로 점술을 굳게 믿고 천도를 기록했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겠소!” 곡식 200섬을 하사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7
기묘일, 전장군 하후돈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예맥, 부여 단우, 언기, 우전왕이 모두 각기 사자를 보내 예물을 바쳤다.

『위서』에 이르기를, 병술일, 사관에게 명하여 중, 려, 희, 화의 직책을 닦아 하늘을 공경하고 일월성신의 운행을 관측하여 하늘의 때를 받들게 했다. (신 송지가 생각건대, 『위서』에 이런 말이 있으나 그 직책은 들은 바 없다.)

정해일 명령을 내렸다. “옛날 훌륭한 신하인 모수(毛玠), 봉상 왕수, 양무, 낭중령 원환, 소부 사환, 만잠, 중위 서혁, 국연 등은 모두 충직하게 조정에 있었고 인의를 실천했는데,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고 자손들은 몰락했으니 측은하게 여겨지오. 모두 아들들을 낭중으로 임명하라.”

8
여름 4월 정사일, 요안현에서 흰 꿩이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요안에 밭 조세를 하사하고, 발해군 100가구에 소와 술을 하사하고, 크게 3일간 잔치를 베풀었다. 태상에게 태뢰로 종묘를 제사 지내게 했다.

경오일, 대장군 하후돈이 훙서(사망)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왕이 소복을 입고 업의 동쪽 성문에 나아가 애도했다. 손성이 말하길, “예에 따르면 천자가 동성을 종묘 문 밖에서 곡하는 법이다. 성문에서 곡함은 그 장소를 잃은 것이다.”

9
5월 무인일, 천자가 왕에게 명하여 황조 태위(조숭)를 태왕으로, 부인 정씨를 태왕후로 추존하고, 왕자 조예를 무덕후에 봉했다.

『위략』에 이르기를, 시중 정칭을 무덕후의 스승으로 삼고 명령을 내렸다. “용연, 태아는 곤오의 쇠에서 나오고, 화씨의 벽은 정리의 밭에서 나왔소. 숫돌로 갈고 다른 산의 돌로 다듬었기에 연성(많은 성)의 값을 얻고 세상의 보물이 된 것이오. 학문 또한 사람을 가는 숫돌이오. 독학하는 대유(큰 선비)를 불러 경학으로 후(조예)를 돕게 했으니 마땅히 아침저녁으로 들어가 시중들며 그 뜻을 밝게 비추시오.”

이달, 풍익의 산적 정감, 왕조가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여 모두 열후에 봉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처음 정감, 왕조 및 노수호가 그 속해 있는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자 왕이 항복 문서를 보고 조정에 보여주며 말했다. “앞서 나에게 선비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리려 했는데, 내가 따르지 않자 항복했소. 또 나에게 이번 가을에 노수호를 정벌하게 하려 했는데, 내가 듣지 않자 지금 또 항복했소. 옛날 위무후는 한 번의 계책으로 적중하여 스스로 득의한 기색을 보여 이괴에게 비웃음을 샀소. 내가 지금 이것을 말하는 것은 스스로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군사를 움직이는 것보다 공이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오.”

10
주천의 황화, 장액의 장진 등이 각기 태수를 붙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금성 태수 소칙이 토벌하여 참수했고, 황화가 항복했다. (황화는 나중에 연주 자사가 되었다. 왕릉전 참조.)

11
6월 신해일, 동쪽 교외에서 치병(군사 훈련)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공경들이 의식을 행할 때 왕이 화개(수레 덮개)를 타고 금고(북)의 절도를 살폈다.

경오일, 마침내 남쪽을 정벌했다.

『위략』에 이르기를, 왕이 출정하려 할 때 신평의 곽성이 글을 올려 간했다. “신이 들으니 문왕과 주왕의 일은, 이때 천하가 주머니를 묶은 듯 허물이 없었고 모든 군자들이 간언을 쓰려 하지 않았다고 했소. 지금 대왕께서는 건곤(하늘과 땅)을 본받고 총명을 넓게 열어 현인과 어리석은 자가 각기 규범을 세우게 하셨소. 생각건대 선왕의 공은 견줄 바가 없는데 지금 말할 수 있는 무리들은 덕이라 칭하지 않소. 그래서 성인이 ‘백성의 환심을 얻으라’고 하셨소. 병서에 ‘싸움은 위험한 일이다’라고 했으니, 그래서 6국은 힘껏 싸우다 강한 진나라가 그 폐단을 이었고, 빈왕은 다투지 않아 주나라의 도가 흥했소.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대왕께서 잠시 본조를 맡기고 암컷(지키는 입장)을 지키며 위엄을 억누르고 호랑이처럼 엎드려 있다면 공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그런데 지금 기틀을 닦자마자 곧바로 군사를 일으키니, 병사는 흉한 그릇이라 반드시 흉한 어지러움이 있을 것이오. 어지러우면 난을 생각하고 난은 뜻밖의 곳에서 나오오. 신은 이것을 위험하다고 하니, 알을 쌓아놓은 것보다 위험하오. 옛날 하나라 계가 신의 3년을 숨었고, 역에 ‘멀지 않아 돌아온다’가 있고, 논어에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가 있소. 진실로 대왕께서 옛을 헤아리고 지금을 살피며 깊이 계책을 세우고 멀리 생각하여 3사(공경) 대부들과 그 길고 짧음을 계산하시길 바라오. 신은 선왕의 만남을 입고 또 처음 정치를 고치며 다시 중임을 받았으니, 비록 용의 비늘을 건드리는 말을 하는 것을 알지만(위험을 알지만), 아첨은 복을 가까이하게 하니, 삼가 읽은 바를 느끼어 위태로운데도 받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소.”

상주가 통과되자 황제가 노하여 자간(간첩 감시)을 보내 고찰하게 하고 결국 그를 죽였다. 얼마 뒤 후회했으나 이미 늦었다.

12
가을 7월 경진일, 명령을 내렸다. “헌원(황제)에게는 명대의 의논이 있었고 방훈(요 임금)에게는 구실의 질문이 있었으니, 모두 아래로 널리 묻기 위함이었소. 관자가 말하길 ‘황제가 명대의 의논을 세운 것은 위로는 군대를 살피기 위함이고, 요 임금에게 구실의 질문이 있는 것은 아래로는 백성의 소리를 듣기 위함이오. 순 임금에게는 선을 알리는 깃발이 있어 주인이 가려지지 않았고, 우 임금은 조정에 건고(북)를 세워 소송을 대비했고, 탕 임금에게는 총가(큰 거리)의 뜰이 있어 백성의 잘못을 보았고, 무왕에게는 영대의 동산이 있어 현자가 나아갔으니’ 이는 고대의 성제명왕이 가지고 잃지 않았던 것이고 얻어서 잊지 않았던 것이오. 백관과 유사는 각기 그 직무를 다하여 규간(간언)하고, 장수들은 군법을 진술하고, 조정의 선비들은 제도를 밝히고, 목수는 정사를 진술하고, 신사들은 6예를 시험하면 내가 겸하여 살펴볼 것이오.”

13
손권이 사자를 보내 예물을 바쳤다. 촉나라 장수 맹달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다. 무도 저왕 양복이 종인(부족)을 이끌고 내부(귀의)하여 한양군에 거주했다.

『위략』에 실린 왕이 직접 쓴 명령이다. “내가 앞서 사자를 보내 나라의 위엄과 신령을 선포했는데 맹달이 즉시 왔다. 내가 생각건대 춘추에서 의부를 칭찬했으니 즉시 맹달을 봉하고 임명하여 돌아가 신성 태수를 맡게 하라. 근래에 또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이를 이끌고 왕화(왕의 교화)를 향하는 자들이 있소. 내가 들으니 숙사의 백성들은 스스로 그 군주를 묶어 신농에게 귀의했고, 빈나라의 무리는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풍, 호로 들어갔으니 이것이 어찌 핍박하여 이르게 한 것이겠소? 풍화가 그 마음을 움직이고 인의가 그 속마음을 감동시켜 환심이 안에서 우러나와 그렇게 된 것이오. 이로써 미루어 보면 서남쪽 만 리까지 밖이 없을 것이니 손권, 유비가 누구와 함께 죽음을 지키겠소?”

14
갑오일, 군사가 초(譙)에 머물렀는데 읍의 동쪽에서 6군 및 초의 노인과 백성들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위서』에 이르기를, 기악과 백희(잡기)를 베풀고 명령을 내렸다. “선왕은 모두 그 삶을 즐겁게 하고 예는 근본을 잊지 않았소. 초는 패왕의 나라요, 진인(참된 사람)이 본래 나온 곳이니 초의 조세를 2년간 면제해주시오.” 3로(삼로)와 관리, 백성들이 장수(축배)를 하니 날이 저물고 나서야 파했다.

병신일, 친히 초陵(조숭의 무덤)을 제사 지냈다.

손성이 말하길, “옛날 선왕이 효로써 천하를 다스릴 때는 안으로는 천성을 절제하고 밖으로는 사해에 베풀었으며, 살아있을 때는 그 공경을 다하고 죽어서는 그 슬픔을 다했소. 량암(상복)을 그리워하며 정사를冢宰(재상)에게 맡겼으니, 그래서 ‘3년의 상은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통한다’라고 했소. 무릇 그러하기에 삼지(중요한 제사)의 의리는 두터워지고 신하와 자식의 은혜는 돈독해졌으며 옹희(평화로운 세상)의 교화는 융성해지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견고해졌으니, 성인이 하늘과 땅을 통하고 인륜을 두터이 하며 지극한 가르침을 드러내고 풍속을 두텁게 한 까닭이오. 이것이 만세에 바뀌지 않는 법전이자 백 왕들이 복응(가슴에 새김)하는 제도요. 이 때문에 상례에 소관(흰 갓)을 쓰는 것을 鄶(괴)나라 사람이 서민을 보았다고 비난했고, 재여가 1년으로 상복을 줄이자 공자가 어질지 못하다고 탄식했고, 자퇴가 슬픔을 잊자 군자가 나라의 화를 즐긴다고 여겼고, 노후가 옷을 바꾸자 춘추가 그 끝이 좋지 못함을 알았으니, 어찌 지통(지극한 아픔)의 성심을 떨어뜨리고 애락의 큰 절개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겠소? 그러므로 비록 3계(주나라 말기)의 끝이나 7웅의 폐단에도 아직 10일이나 1개월 사이에 쇠참(상복)을 폐하거나 반곡(곡을 마치고 돌아옴)하는 날에 삼과 지팡이를 놓는 자는 없었소. 한나라 문제에 이르러 옛 제도를 변개하니 인도의 기강이 하루아침에 폐해졌고, 쇠참(상복)은 지존에게서 빼앗겼으며 사해는 그 억밀(애도)을 흩어버렸으니, 의감이 군후(제후)들에게 결여되었고 대화(큰 교화)가 군친(임금과 부모)에게서 떨어졌소. 비록 마음으로 격약(검소함)을 두고 생각은 경륜(정치)에 있었으나, 덕을 세우고 이름을 남기며 교화를 높이고 풍속을 바꿈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그해의 도가 엷어지고 백대의 풍속이 무너졌소. 하물며 무왕이 주(임금의 위패)를 싣고 목야에서 진을 치지 않았고, 진 양공이 묵참(검은 상복)을 입고 세 장수를 포로로 잡았으니, 임무를 다하고 공을 이루고 그 해를 복(옷)하였소. 위왕이 이미 한나라 제도를 따르고 그 큰 예절을 바꾸고 가장 무거운 슬픔에 처해서도 연회와 음악을 베풀었으니, 貽厥(유업)의 시작에 처해서도 왕화의 기틀을 무너뜨렸소. 선위(황제에게 왕위를 줌)를 받는 데 이르러, 두 딸을 현저히 받아들이고 그 지극한 슬픔을 잊고 선성(옛 성인)의 법전을 속였으니 하늘의 마음이 상했소. 장차 무엇으로 끝을 보겠는가! 이로써 왕의 수명이 멀지 않고 복을 점치는 기한이 촉박함을 알 수 있소.”

8월, 석읍현에서 봉황이 모였다고 보고했다.

15
겨울 11월 계묘일, 명령을 내렸다. “상란(전쟁)이 있은 뒤 병사와 장비가 아직 멈추지 않았는데, 천하 사람들이 서로 잔혹하게 살상했소. 지금 해내(천하)가 비로소 정해졌는데 감히 사적으로 원수를 갚는 자가 있으면 모두 족살(멸족)하시오.”

완에 남순대를 쌓았다. 3월 병신일, 완에서 돌아와 낙양궁에 이르렀다. 계묘일, 달이 심(별자리) 중앙의 큰 별을 범했다.

『위서』에 실린 병오 조서이다. “손권이 백성과 물건을 잔혹하게 해치니, 짐은 적을 길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맹장에게 명해 세 길로 함께 정벌했소. 지금 정동의 여러 군사가 권의 당여인 여범 등과 수전(물 위에서의 싸움)을 벌여 4만 명을 참수하고 배 1만 척을 획득했소. 대사마가 유수를 지키는데 그 사로잡은 것 또한 만 단위요. 중군, 정남이 강릉을 포위 공격하고 좌장군 장합 등이 배를 이끌고 곧바로 건너 남쪽 물가를 공격하여 적들이 물에 뛰어들어 익사한 자가 수천 명이고, 또 땅굴을 파서 성을 공격하니 성 안팎으로 참새와 쥐조차 드나들 수 없었으니 이는 도마 위의 고기일 뿐이오! 그런데 적들 중에 역기(전염병)와 질병이 강을 끼고 널려 있으니 서로 전염될까 두려우오. 옛날 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할 때 맹진에서 군사를 돌렸고, 한 고조가 외효를 정벌할 때 고평으로 군사를 돌렸으니 모두 하늘의 때를 알고 적의 정황을 헤아렸기 때문이오. 더구나 성탕은 세 면의 그물을 풀었으니 천하가 인을 귀의했소. 지금 강릉의 포위를 풀어 죽은 禽(짐승 같은 적)을 완화해주오. 또 역사를 쉬게 하고 요수(부역)를 덜고 사민을 축양하여 모두 안식하게 하시오.”

정미일, 대사마 조인이 훙서(사망)했다. 이달에 큰 역병이 돌았다.

16
여름 5월, 영지池(못)에 펠리컨(鵜鶘) 새가 모여들자 조서를 내렸다. “이는 시인이 말한 오택(더러운 못)이오. 조나라 시에 ‘공공이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함을 찌르다(비판하다)’라고 했으니, 지금 어찌 현명하고 지혜로운 선비가 낮은 자리에 있는 경우가 있겠소? 그렇지 않다면 이 새가 어찌하여 이르는가? 널리 천하의 준덕(준걸과 덕이 있는 자), 무재, 독행군자를 천거하여 조인의 비판에 답하시오.”

『위서』에 이르기를, 신유일, 유사가 두 사당을 만들 것을 주청했다. 태황제(조등) 사당을 세워 대장추 특진후와 함께 합제(함께 제사)하고, 친함이 다하면 차례로 훼(제사를 그만둠)하며, 따로 무황제(조조) 사당을 세워 사시(사철)로 향사하고 위 태조로 삼아 만세토록 훼하지 않게 했다.

17
6월 갑술일, 동쪽 교외에서 치병(군사 훈련)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공경들이 의식을 행할 때 왕이 화개(수레 덮개)를 타고 금고(북)의 절도를 살폈다.

경오일, 마침내 남쪽을 정벌했다.

『위략』에 이르기를, 왕이 출정하려 할 때 신평의 곽성이 글을 올려 간했다. “신이 들으니 문왕과 주왕의 일은, 이때 천하가 주머니를 묶은 듯 허물이 없었고 모든 군자들이 간언을 쓰려 하지 않았다고 했소. 지금 대왕께서는 건곤(하늘과 땅)을 본받고 총명을 넓게 열어 현인과 어리석은 자가 각기 규범을 세우게 하셨소. 생각건대 선왕의 공은 견줄 바가 없는데 지금 말할 수 있는 무리들은 덕이라 칭하지 않소. 그래서 성인이 ‘백성의 환심을 얻으라’고 하셨소. 병서에 ‘싸움은 위험한 일이다’라고 했으니, 그래서 6국은 힘껏 싸우다 강한 진나라가 그 폐단을 이었고, 빈왕은 다투지 않아 주나라의 도가 흥했소.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대왕께서 잠시 본조를 맡기고 암컷(지키는 입장)을 지키며 위엄을 억누르고 호랑이처럼 엎드려 있다면 공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그런데 지금 기틀을 닦자마자 곧바로 군사를 일으키니, 병사는 흉한 그릇이라 반드시 흉한 어지러움이 있을 것이오. 어지러우면 난을 생각하고 난은 뜻밖의 곳에서 나오오. 신은 이것을 위험하다고 하니, 알을 쌓아놓은 것보다 위험하오. 옛날 하나라 계가 신의 3년을 숨었고, 역에 ‘멀지 않아 돌아온다’가 있고, 논어에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가 있소. 진실로 대왕께서 옛을 헤아리고 지금을 살피며 깊이 계책을 세우고 멀리 생각하여 3사(공경) 대부들과 그 길고 짧음을 계산하시길 바라오. 신은 선왕의 만남을 입고 또 처음 정치를 고치며 다시 중임을 받았으니, 비록 용의 비늘을 건드리는 말을 하는 것을 알지만(위험을 알지만), 아첨은 복을 가까이하게 하니, 삼가 읽은 바를 느끼어 위태로운데도 받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소.”

상주가 통과되자 황제가 노하여 자간(간첩 감시)을 보내 고찰하게 하고 결국 그를 죽였다. 얼마 뒤 후회했으나 이미 늦었다.

18
이해, 장수교위 대릉이 자주 사냥을 나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간하자 제(황제)가 크게 노했으나, 대릉의 사형을 한 등급 감했다.

19
2년 봄 정월, 교사(교외의 제사)로 천지, 명당에 제사 지냈다. 갑술일, 원릉(황제의 무덤)까지 사냥을 나갔고 사자를 보내 태뢰로 한나라 세조(광무제)를 제사 지냈다. 을해일, 동쪽 교외에서 조일(해를 맞이하는 제사)을 했다.

(신 송지가 생각건대, 예에 천자는 춘분에 조일하고 추분에 석월을 한다고 했는데, 이 해 정월의 교사(제사)를 찾아보니 달은 있는데 날이 없고, 을해일 조일에는 날은 있는데 달이 없으니 대개 글이 탈락된 것이다. 명제의 조일, 석월을 살펴보면 모두 예문에 따랐으므로 이 기사가 잘못된 것임을 안다.)

처음 군국(지방)에 인구가 10만 명을 채우면 한 해에 효렴 1명을 천거하게 했고, 빼어난 인재가 있으면 호구에 구애받지 않게 했다. 신사일, 3공의 호읍을 나누어 자제 각 1인을 열후로 봉했다. 임오일, 영천군의 1년 밭 조세를 면제해주었다.

『위서』에 실린 조서이다. “영천은 선제(조조)가 군사를 일으켜 정벌을 시작한 곳이오. 관도의 전투에서 사방이 와해되고 원근에서顾望(눈치를 봄)했는데, 이 군(영천군)은 의리를 지켰고 정장(젊은 장정)들은 창을 메었으며 노약자들은 식량을 짊어졌소. 옛날 한 고조가 진중(관중)을 국본으로 삼았고 광무제는 하내를 왕기(왕의 기반)로 삼았는데, 지금 짐이 다시 여기서 단에 올라 선위를 받았으니 하늘이 이 군을 도와 대위를 완성하게 했소.”

허현을 허창현으로 고쳤다. 위군의 동부를 양평군으로, 서부를 광평군으로 삼았다.

『위략』에 이르기를, 장안, 초, 허창, 업, 낙양을 5도로 고쳤다. 돌 비석을 세웠는데, 서쪽 경계는 의양, 북쪽은 태항을 따르고, 동북쪽 경계는 양평, 남쪽은 노양을 따르고, 동쪽 경계는 담현으로 하여 중도의 땅으로 삼았다. 천하 백성들이 안쪽으로 옮겨 살게 하고 5년간 복(세금 면제)을 주었으며 뒤에 또 그 복을 늘려주었다.

20
조서를 내렸다. “옛날 공자(중니)는 대성(큰 성인)의 재능을 밑천으로 삼고 제왕의 그릇을 품었으나, 쇠퇴한 주나라 말기에 천명을 받은 운이 없었소. 노나라, 위나라 조정에 있으면서 주, 사(강가) 위에서 교화했는데, 처량하게도 황망하게도 스스로를 굽혀 도를 보존하려 했고 몸을 낮추어 세상을 구하려 했소. 이때 왕공들은 끝내 그를 쓰지 못했으니, 곧 물러나 5대의 예를 고찰하고 소왕(왕의 이름만 있는 성인)의 일을 닦았으며, 노나라 역사를 따라 춘추를 제정하고 태사(악사)에게 나아가 아, 송을 바로잡았소. 천 년 뒤의 무리들이 문장을 숭상하여 서술하지 않는 자가 없게 했고, 그 성인됨을 우러러 계책을 이루게 했으니, 아! 가히 세상을 명할 대성(큰 성인)이자 억만 년의 사표(스승의 본보기)라 할 만하오.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백세(100년)의 제도가 무너졌는데 옛 거처하던 사당은 무너져도 수리하지 않았고, 포성(공자의 후손)의 뒤는 끊겨 잇는 자가 없었소. 궐리(공자의 고향)에는 강의하고 읊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사시(사철)에 증상(제사)의 자리를 보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예절을 숭상하고 공에 보답하며 성덕을 백세에 반드시 제사 지내야 한다는 것인가! 이에 의랑 공선을 종성후로 봉하여 읍 100가구를 주고 공자의 제사를 받들게 하라.”

노군에 옛 사당을 수리하고 100가구의 이졸(관리와 병사)을 두어 지키게 했으며, 또 그 바깥에 집을 넓게 지어 배우는 자들이 거처하게 했다.

21
3월, 요동 태수 공손공을 차기장군으로 더했다. 처음으로 5수전을 복구했다. 여름 4월, 차기장군 조인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5월, 정감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조인을 보내 공격하여 참수했다. 6월 경자일, 처음으로 5악과 4독(강)을 제사 지내고 여러 제사를 모두 차례대로 벌였다.

『위서』에 이르기를, 갑진일, 경사(수도)의 종묘가 아직 완성되지 않아, 제(황제)가 친히 건시전에서 무황제(조조)를 제사 지내고 몸소 음식을 올리니 집안사람의 예와 같았다.

정묘일, 부인 견씨가 훙서(사망)했다. 무진일晦(그믐), 일식(해식)이 있었다. 유사가 태위를 면직할 것을 주청하자 조서를 내렸다. “재이(재앙과 이상한 징조)가 일어남은 머리(황제)를 꾸짖기 위함인데, 과오를 고굉(신하)에게 돌리니 어찌 우, 탕이 자기 죄를 아는 의리이겠소? 백관들은 각기 그 직무를 경건히 하고, 뒤에 천지의 眚(재앙)이 있으면 다시는 3공을 탄핵하지 마시오.”

22
가을 8월, 손권이 사자를 보내 글을 올리고, 아울러 우금 등을 돌려보냈다. 정사일, 태상 형정을 시켜 절을 받들고 손권에게 대장군을 주어 오왕으로 봉하고 구석을 더했다. 겨울 10월, 양표를 광록대부로 삼았다.

『위서』에 이르기를, 기해일, 공경들이 삭단(초하루 아침)에 조회할 때 옛 한나라 태위 양표를 함께 불러들여 객의 예로 대접하고 조서를 내렸다. “옛날 선왕이 기장(지팡이와 의자)을 하사하는 제도를 만든 것은 황고(나이 많은 노인)를 빈례(손님 예우)하고 원로를 높이고 숭상하기 위함이오. 옛날 공광, 탁무는 모두 숙덕(맑은 덕)과 고년(높은 나이)으로 이嘉錫(아름다운 하사품)을 받았소. 공은 옛 한나라의 재신이고,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명절을 떨쳤소. 나이 70이 넘어 행동이 법도를 넘지 않으니 노성인(경험 많은 어른)이라 할 수 있소. 마땅히 총애를 달리하여 옛 덕을 밝혀야 하오. 공에게 연년장(지팡이)과 풍기(의자)를 하사하고, 알현을 청하는 날에는 지팡이를 짚고 들어오게 하고, 또 녹피관을 쓰게 하시오.”

양표가 사양했으나 듣지 않고 결국 베단(천)으로 만든 단의와 피변(가죽 모자)을 쓰고 알현했다.

『속한서』에 이르기를, 양표가 한나라의 운이 곧 다할 것을 보고 대대로 삼공을 지냈음을 생각하여 위나라의 신하 됨을 부끄러워하고 결국 발이 굳어 걷지 못한다고 칭하고 다시는 가지 않았다. 10여 년이 지났을 때 제(조조의 아들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태위로 삼으려 하여 근신에게 선지를 전하게 했다. 양표가 사양하며 “일찍이 한나라 조정에서 삼공을 지냈는데 세상이 어지러워 치수의 이익도 세우지 못했소. 만약 다시 위나라 신하가 된다면 나라의 선택에 있어서도 영예롭지 않을 것이오”라고 했다. 제(조비)가 그 뜻을 빼앗지 못했다. 황초 4년, 조서를 내려 광록대부로 삼았는데 품계는 중2천석이었고 조회 때의 지위는 3공의 다음이었으니 공광의 고사를 따랐다. 양표가 글을 올려 굳게 사양했으나 제(조비)가 듣지 않았고, 또 문 밖에 행마를 설치하고 관리와 병사를 두어 우대하고 높였다. 84세에 6년에 훙서했다. (아들 수의 일은 진사왕 전 참조.)

곡식이 귀해지자 5수전을 폐지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11월 신미일, 진서장군 조진이 여러 장수와 주군의 병사를 명해 반란을 일으킨 호족 치원다, 노수, 봉상 등을 토벌하여 5만여 급을 참수했고, 생구(포로) 10만 명, 양 111만 마리, 소 8만 마리를 획득하니 하서가 평정되었다. 제(조비)가 처음 호족이 물을 터뜨려 현미를 침수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좌우의 여러 장수에게 말했다. “옛날 외효가 약양을 침수시켰으나 광무제가 그 피폐하고 쇠약함을 틈타 군사를 진격시켜 멸했소. 지금 호족이 물을 터뜨려 현미를 침수시킨 일이 그 일과 똑같으니 호족을 깨뜨릴 일이 이제 멀지 않았소.” 10일 뒤 호족을 깨뜨렸다는 고격(알리는 글)이 도착하자 상(조비)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장막 안에서 이를 계산했고 여러 장수가 만 리 밖에서 힘껏 공격했으니 그 호응함이 마치 부절을 맞춘 것 같소. 앞뒤로 싸워 이기고 오랑캐를 포획함에 이처럼 큰 적이 없었소.”

기묘일, 대장군 조인을 대사마로 삼았다. 12월, 동쪽을 순행했다. 이해에 능운대를 쌓았다.

23
3년 봄 정월 병인삭, 일식(해식)이 있었다. 경오일, 허창궁으로 행차했다. 조서를 내렸다. “오늘날의 계고(정치 성적 평가)는 고대의 공사(인재 천거)와 같은 것이오. 10가구의 마을에도 반드시 충신이 있는데 만약 나이를 제한한 뒤에 인재를 취한다면 이는 여상, 주진이 전세에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오. 각 군국으로 하여금 선발함에 있어 노소에 구애받지 마시오. 유교의 경술에 통달하거나 문법(법률)에 능통한 자가 오면 모두 시험하여 쓰시오. 유사가 옛것을 따지되 실질적으로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탄핵하시오.”

『위서』에 이르기를, 계해일, 손권이 상서하여 말했다. “유비의 지당(무리) 4만 명과 말 2~3천 마리가 자귀에서 나왔으니, 청컨대 가서 扫扑(쓸어버림)하여 승리함을 효험으로 삼겠습니다.” 제(조비)가 답했다. “옛날 외효의 폐단이 荀(순)읍에서 화를 일으켰고 자양(공손술)이 사로잡힘이 한관(관문)에서 변이 시작되었으니, 장군은 그 위무(위엄과 무용)를 높이 들어 기묘한 공을 밟기를 힘써 내 뜻에 맞게 하시오.”

24
2월, 선선, 구자, 우전왕이 각기 사자를 보내 예물을 바쳤다. 조서를 내렸다. “서융이 곧 서술(차례)되었으니 저, 강이 와서 왕(조현)함은 시, 서에서 아름답게 여겼소. 근래에 서역의 외이들이 모두 叩塞(관문에 머리를 조아림)하여 내부(귀의)했소.” (응소의 한서 주석에 “款은 두드림(귀의)이다”라고 했다. 모두 관문을 두드려 복종해 온 것이다.) “사자를 보내 위로하시오.” 이후 서역이 마침내 통하게 되어 무기교위를 두었다.

25
3월 을축일, 제공 조예를 평원왕으로 세우고, 제 동생 언릉공 조창 등 11명을 모두 왕으로 삼았다. 처음 왕의 서자(왕의 아들이지만 적자가 아닌 자)는 향공으로 봉하고, 사왕(뒤를 이은 왕)의 서자는 정후로, 공의 서자는 정백으로 봉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갑술일, 황자 조림을 하동왕으로 세웠다. 갑오일, 양읍으로 행차했다. 여름 4월 무신일, 견성후 조식을 견성왕으로 세웠다. 계해일, 행차하여 허창궁으로 돌아왔다. 5월, 형주, 양주, 강표(장강 이남)의 8군을 합쳐 형주로 삼았는데 손권이 목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주의 강 북쪽 여러 군을 영주로 삼았다.

26
윤달, 손권이 이릉에서 유비를 깨뜨렸다. 처음 제(조비)가 유비의 병사가 동쪽으로 내려와 손권과 교전하며 진영을 700여 리에 걸쳐 연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신에게 말했다. “유비는 병법을 알지 못하니 어찌 700리 진영으로 적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원습(언덕과 늪)과 험조를 감싸고 군사를 만드는 자는 적에게 사로잡힌다’고 했으니, 이는 병사의 금기이다. 손권의 상사(보고)가 곧 도착할 것이다.” 7일 뒤 유비를 깨뜨렸다는 글이 도착했다.

27
가을 7월, 기주에 큰 메뚜기떼가 나타나 백성들이 굶주리자 상서 두기를 시켜 절을 가지고 창고를 열어 구제하게 했다.

8월, 촉나라 대장 황권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황권 및 영남군 태수 사합 등 318명이 형주 자사에게 나아가 가인(빌려준) 인수, 계극, 당휘, 아문, 고차를 바쳤다. 황권 등이 행재소(황제가 머무는 곳)에 이르자 제(조비)가 술을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게 했으며 승광전에서 인견했다. 황권, 사합 등이 사람마다 앞으로 나아가 스스로 진술하니 제(조비)가 장병의 성패와 거취의 구분을 논해주니 제장들 중에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황권에게 금비단, 차마, 의구, 유장(휘장), 처첩을 하사했고, 아래로 편비(장군)까지 모두 차등이 있었다. 황권을 시중 진남장군으로 임명하고 열후에 봉했으며, 즉시 불러 참승(황제의 수레에 함께 탐)하게 했다. 사합 등 42명을 모두 열후에 봉하고, 장군, 낭장 100여 명을 임명했다.

28
9월 갑오일, 조서를 내렸다. “부인이 정사에 참여함은 난의 근본이다. 지금 이후로 군신들은 태후에게 정사를 주청하지 말고, 후족(황후의 친족)의 집안은 보정(섭정)의 임무를 맡지 말며, 또 함부로 모토(봉토)의 작위를 받지 말라. 이 조서를 후세에 전하여 만약 어기는 자가 있으면 천하가 함께 주살할 것이다.”

손손이 말하길, “무릇 나라를 경영하고 정치를 하는 것은 반드시 준철(준걸)의 보좌에 의지해야 하고, 현달하고 영덕이 있는 자가 반드시 참란(정사에 참여)의 임무에 거해야 하므로 비록 주나라 왕실이 성했으나 부인이 참여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곤도(땅의 도)가 하늘을 잇고 남면(제왕의 자리)에 둘이 없으며, 3종(여자의 도리)의 예가 가장 순조롭다고 일컬어지지만, 호령이 천자로부터 나오고 정사를 전문적으로 행함은 옛 의리가 아니다. 옛날 신, 려가 실로 주나라를 보좌했다. 진실로 천하를 마음으로 삼고 오직 덕을 의지한다면, 친하고 먼 사람의 수여는 지극히 공평하게 하나인데, 어찌 후족에 이르러 반드시 배척하고 멀리해야 한단 말인가! 두 한나라의 계세(말기)에 왕도가 능치(쇠퇴)했으므로 외척이 총애를 믿게 하여 난의 계단이 되었다. 여기에서 도가 혼미하고 잃었으니 운조가 옮겨가려 할 때, 비록 왕, 려의 난이 없었더라도 어찌 전, 조의 화가 없었겠는가! 후세 사람들이 이를 보고 깊이 산독(괴로움과 독)의 경계를 품었소. 위 문제(조비)에 이르러 결국 이런 일반적인 조서를 발했으니, 식견이 밝은 언사라고 할 수 있으나 제왕의 홍대(큰)한 의논은 아니다.”

경자일, 곽씨를 황후로 세웠다. 천하의 남자에게 작위 1급을 하사하고, 환과고독(외로운 자) 및 독농(병든 자)으로 스스로 살 수 없는 자에게 곡식을 하사했다.

29
겨울 10월 갑자일, 수양산 동쪽을 수릉(무덤)으로 표하고 종제(마지막 명령)를 지었다. “예에 국군(임금)이 즉위하면 비(관)를 만든다.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신 송지가 생각건대, 예에 천자, 제후의 관은 각기 중수(겹수)가 있는데, 몸에 닿는 관을 비라고 한다.)

옛날 요 임금은 곡림에 장사 지내고 통수(나무를 심음)했고, 우 임금은 회계에 장사 지내고 밭의 둑을 바꾸지 않았다.

(여씨춘추에 이르기를, 요 임금은 곡림에 장사 지내고 통수했고, 순 임금은 기에 장사 지내고 밭의 둑을 바꾸지 않았고, 우 임금은 회계에 장사 지내고 사람들의 무리를 바꾸지 않았다.)

그러므로 산림에 장사 지내면 산림과 합치하는 것이다. 봉분과 나무를 심는 제도는 상고 시대의 것이 아니니, 나는 취하지 않겠다. 수릉은 산을 근거로 삼고 봉분을 하지 말고 나무를 심지 말고, 침전(사당)을 세우지 말고 원읍(묘를 지키는 집)을 짓지 말고 신도(귀신 길)를 통하게 하지 마라. 장례라는 것은 감추는 것이니 사람이 볼 수 없게 하려는 것이다. 뼈에는 통증의 앎이 없고 무덤은 혼이 깃드는 집이 아니니, 예에 묘제(무덤 제사)가 없는 것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더럽히지 않으려는 것이다. 관곽은 뼈를 썩게 하기에 족하고, 의금(옷과 이불)은 살을 썩게 하기에 족할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丘墟(무덤)의 먹을 수 없는 땅을 경영하여 후세 사람이 그곳을 알지 못하게 하려 한다. 위탄(갈대와 숯)을 쓰지 말고 금은동철을 넣지 말고 오직 와기(흙으로 만든 그릇)로 합치하는 것이 옛 도거(흙으로 칠한 수레), 추령(짚으로 만든 인형)의 뜻이다. 관은 접합부만 칠을 세 번 하고, 반함(입에 넣는 것)에 구슬과 옥을 쓰지 말고 주유옥갑(구슬 옷과 옥갑)을 쓰지 마라. 모두 어리석은 세속이 하는 짓이다. 계손이 여번(옥)으로 염하자 공자가 등급을 따져 구했는데, 길가에 시체를 버리는 것에 비유했다. 송공(송나라 임금)이 후하게 장사 지내자 군자가 화원, 악거가 신하가 아니라고 말하며 임금을 악한 곳에 버린다고 여겼다. 한 문제의 발굴되지 않음은 패릉에 구함이 없었기 때문이고, 광무제의 도굴은 원릉에 봉樹(봉분과 나무)했기 때문이다. 패릉의 온전함은 석지의 공이고, 원릉의 도굴은 명제의 죄이다. 이는 석지는 임금을 이롭게 하여 충성했으나, 명제는 사랑하여 친족을 해친 것이다. 충신효자는 마땅히 중니(공자), 구명(좌구명), 석지의 말을 생각하고 화원, 악거, 명제의 경계를 거울삼아 임금을 안치하고 친족을 정하는 곳에 두어, 혼령이 만 년 동안 위태롭지 않게 해야 하니, 이것이 현성(성인)의 충효이다. 예부터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도굴되지 않은 무덤이 없다. 상란이 있은 뒤로 한나라의 여러 능이 도굴되지 않은 것이 없고, 심지어 옥갑과 금실을 태워 취하여 뼈마저 다 없어졌으니, 이는 분여(시신을 태우는)의 형벌이다. 어찌 심히 아프지 않겠는가! 화는 후한 장례와 봉수에서 비롯된다. ‘상, 곽(춘추시대의 도굴된 무덤)이 나에게 경계가 된다’는 말이 어찌 밝지 않은가! 그 황후 및 귀인 이하로 왕의 나라(봉지)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끝내 죽으면 모두 간 서쪽에 장사 지내라. 앞서 이미 그곳을 표해 두었다. 대개 순 임금은 창오에 장사 지냈는데 두 비는 따르지 않았고, 연릉(계찰)은 아들을 장사 지낼 때 멀리 영, 박에 두었으니, 영혼이 있다면 가지 못할 곳이 없다. 한 澗(골짜기) 사이는 멀다고 할 수 없다. 만약 지금의 조서를 어기고 망령되이 변개하여 만들거나 시술하면 나는 지하에서 시신을 주벌할 것이니, 죽어서 거듭 주벌하고 죽어서 거듭 죽을 것이다. 신자로서 죽은 임금과 아버지를 멸시하는 것은 불충하고 불효한 것이니, 죽은 자가 앎이 있다면 너희들에게 복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이 조서를 종묘에 간직하고 상서, 비서, 3부에 부본을 두라.”

30
이달, 손권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영주를 복구하여 형주로 삼았다. 제(조비)가 허창에서 남쪽으로 정벌하니 여러 군대가 함께 진격했고, 손권이 강을 임하여 지켰다. 11월 신축일, 완으로 행차했다. 경신일 그믐에 일식(해식)이 있었다. 이해에 영지지를 팠다.

31
4년 봄 정월, 조서를 내렸다. “상란(전쟁)이 있은 뒤 병사와 장비가 아직 멈추지 않았는데, 천하 사람들이 서로 잔혹하게 살상했소. 지금 해내(천하)가 비로소 정해졌는데 감히 사적으로 원수를 갚는 자가 있으면 모두 족살(멸족)하시오.” 완에 남순대를 쌓았다. 3월 병신일, 완에서 돌아와 낙양궁에 이르렀다. 계묘일, 달이 심 중앙의 큰 별을 범했다.

『위서』에 실린 병오 조서이다. “손권이 백성과 물건을 잔혹하게 해치니, 짐은 적을 길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맹장에게 명해 세 길로 함께 정벌했소. 지금 정동의 여러 군사가 권의 당여인 여범 등과 수전을 벌여 4만 명을 참수하고 배 1만 척을 획득했소. 대사마가 유수를 지키는데 그 사로잡은 것 또한 만 단위요. 중군, 정남이 강릉을 포위 공격하고 좌장군 장합 등이 배를 이끌고 곧바로 건너 남쪽 물가를 공격하여 적들이 물에 뛰어들어 익사한 자가 수천 명이고, 또 땅굴을 파서 성을 공격하니 성 안팎으로 참새와 쥐조차 드나들 수 없었으니 이는 도마 위의 고기일 뿐이오! 그런데 적들 중에 역기(전염병)와 질병이 강을 끼고 널려 있으니 서로 전염될까 두려우오. 옛날 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할 때 맹진에서 군사를 돌렸고, 한 고조가 외효를 정벌할 때 고평으로 군사를 돌렸으니 모두 하늘의 때를 알고 적의 정황을 헤아렸기 때문이오. 더구나 성탕은 세 면의 그물을 풀었으니 천하가 인을 귀의했소. 지금 강릉의 포위를 풀어 죽은 짐승 같은 적을 완화해주오. 또 역사를 쉬게 하고 부역을 덜고 사민을 축양하여 모두 안식하게 하시오.”

정미일, 대사마 조인이 훙서(사망)했다. 이달에 큰 역병이 돌았다.

32
여름 5월, 영지池(못)에 펠리컨(鵜鶘) 새가 모여들자 조서를 내렸다. “이는 시인이 말한 오택(더러운 못)이오. 조나라 시에 ‘공공이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함을 찌르다’라고 했으니, 지금 어찌 현명하고 지혜로운 선비가 낮은 자리에 있는 경우가 있겠소? 그렇지 않다면 이 새가 어찌하여 이르는가? 널리 천하의 준덕(준걸과 덕이 있는 자), 무재, 독행군자를 천거하여 조인의 비판에 답하시오.”

『위서』에 이르기를, 신유일, 유사가 두 사당을 만들 것을 주청했다. 태황제(조등) 사당을 세워 대장추 특진후와 함께 합제하고, 친함이 다하면 차례로 훼하며, 따로 무황제(조조) 사당을 세워 사시로 향사하고 위 태조로 삼아 만세토록 훼하지 않게 했다.

33
6월 갑술일, 임성왕 조창이 수도에서 훙서했다. 갑신일, 태위 가후가 훙서했다. 태백(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달에 큰비가 내려 이수와 낙수가 넘쳐흘러 인민을 죽이고 가옥을 파괴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7월 을미일, 대군이 곧 나가려 하기에 태상을 시켜 특우(제물) 1마리로 교외에서 제사 지내게 했다.

(신 송지가 생각건대, 위나라의 교사(제사) 주청 중 상서 노육이 재앙을 제사 지내는 일에 의논하며 “희생과 제기를 갖추기를 전후의 군사 출동 시 교외에 고하는 예와 같이 하라”라고 했다. 그렇다면 위나라의 출사(군대 출동)는 모두 교외에 고하는 것이다.)

가을 8월 정묘일, 정위 종요를 태위로 삼았다.

『위서』에 이르기를, 유사가 한나라 종묘의 안세악을 정세악으로, 가지악을 영령악으로, 무덕악을 무송악으로, 소용악을 소업악으로, 운교무를 봉상무로, 육명무를 영응무로, 무덕무를 무송무로, 문소무를 대소무로, 5행무를 대무무로 고칠 것을 주청했다.

신미일, 형양에서 사냥했고 마침내 동쪽을 순행했다. 손권을 정벌한 공을 논하여 제장 이하 작위를 올리고 호수를 더하는 데 차등을 두었다. 9월 갑진일, 허창궁으로 행차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12월 병인일, 산양공의 부인에게 탕목읍을 하사하고 공의 딸 만을 장락군 공주로 삼아 식읍 각 500호를 주었다. 이해 겨울, 화림원에 감로(단 이슬)가 내렸다.

(신 송지가 생각건대, 화림원은 곧 지금의 화림원이다. 제왕 조방이 즉위하자 화림으로 고쳤다.)

34
5년 봄 정월, 처음으로 반란과 대역(역적질)은 서로 고발할 수 있게 하고 그 나머지는 심리하지 말라 했으며, 망령되이 서로 고발하는 자는 그 죄로 죄를 주라 했다. 3월, 허창에서 낙양궁으로 돌아왔다. 여름 4월, 태학을 세우고 5경의 과시(시험) 법을 제정했으며, 춘추 곡량 박사를 두었다. 5월, 유사가 공경들이 초하루와 보름에 조회할 때 의심스러운 일을 아뢰고 큰 정치를 결단하며 득실을 논변할 것을 주청했다. 가을 7월, 동쪽을 순행하여 허창궁에 행차했다. 8월, 수군을 만들고 친히 용주(임금의 배)를 타고 채수, 영수를 따라 회수를 떠나 수춘에 행차했다. 양주 경계의 장리, 사민 중에 5년 형벌 이하를 범한 자는 모두 면제해주었다. 9월, 마침내 광령에 이르러 청주, 서주 2주를 사면하고 여러 장수와 태수를 교체했다. 겨울 10월 을묘일,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허창궁으로 돌아왔다.

『위서』에 실린 계유 조서이다. “가까운 이를 편안하게 하지 않으면서 어찌 먼 이를 그리워하겠소? 지금 일은 많고 백성은 적은데 상하가 문법(법률 조항)으로 서로 폐단이 생기니, 백성들은 손발을 둘 곳이 없소. 옛날 태산의 울던 자(공자에게 험한 정치를 호소한 여인)는 가혹한 정치가 맹호보다 심하다고 생각했소. 나는 유자의 풍모를 갖추고 성인의 유교를 입었으니, 어찌 눈으로 그 말을 즐기고 행함은 그 경계함을 어길 수 있겠소? 의논을 넓히고 형벌을 가볍게 하여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오.”

11월 경인일, 기주가 굶주리자 사자를 보내 창름을 열어 구제하게 했다. 무신일 그믐에 일식(해식)이 있었다.

35
12월, 조서를 내렸다. “선왕이 예를 제정한 것은 조상을 효도로 모시기 위함이니, 큰 것은 교사(하늘 제사)이고 그다음은 종묘이며, 3신(해, 달, 별)과 5행, 명산과 대천은 이 족(조상)이 아니니 사전에 있지 않다. 숙세(말세)에 어지러워져 무사(무당과 사관)를 숭신하며 심지어 궁전 안과 문과 창문 사이까지 붓지 않은(제사) 곳이 없으니, 그 미혹됨이 심하도다! 지금 이후로 사전에 없는 제사와 무축(무당)의 말을 감히 베푸는 자는 모두 좌도(사악한 법)를 행한 것으로 논하여令典(법령)에 기록하라.” 이해에 천연지를 팠다.

36
6년 봄 2월, 사자를 보내 허창에서 동쪽으로 패군 끝까지 순행하며 백성들의 질고(병과 고통)를 묻고 가난한 자들은振貸(구제하고 대여)하게 했다.

『위략』에 실린 조서이다. “옛날 헌원(황제)은 사면의 호(직책)를 세웠고, 주 무왕은 ‘나에게 난신(어지러운 세상에 다스리는 신하) 10명이 있다’고 칭했으니, 이는 선성(옛 성인)이 나라를 체득하고 백성을 군림하며 천공(하늘의 일)을 이루는 방법으로, 현명한 자를 많이 두는 것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오. 지금 안으로는 공경들이 경사를 진압하고 밖으로는 목백(지방관)들을 세워 사방을 감시하게 했으나, 원융(군대)이 출정할 때는 군중에 마땅히 주석(기둥과 돌) 같은 현명한 장수가 있어야 하고 치중이 있는 곳에는 또 진수(지키는)할 중신이 있어야 하오. 그래야 차가(황제의 수레)가 천하를 두루 다녀도 내외의 걱정이 없을 것이오. 내가 지금 정벌하려 하니 오랫동안 지키려 하오. 상서령 영향후 진군을 진군대장군으로, 상서복야 서향후 사마의를 무군대장군으로 삼으시오. 만약 내가 강가에 임하여 제장들에게 방략을 수여하면, 무군대장군(사마의)은 허창에 머물며 후방의 여러 군사를 감독하고 뒤의 태문서(관청 문서) 일을 기록하고, 진군대장군(진군)은 차가를 따라 대중군을 감독하며 행상서사(상서의 일을 행함)를 기록하시오. 모두 가절(절을 빌림), 고취(악기)를 하고 중군 병기 600명을 주시오. 내가 강에서 몇 리 떨어져 궁실을 짓고 그 사이를 오가며 적을 공격할 형세가 보이면 곧 기이한 병사를 내어 공격할 것이오. 만약 아직 안 된다면 육군(전군)을 펼쳐 유렵(사냥)하며 군사들에게 향사(잔치)를 베풀 것이오.”

3월, 소릉에 행차하여 토로거(수로)를 통하게 했다. 을사일, 허창궁으로 돌아왔다. 병주 자사 양습이 선비의 가비능을 토벌하여 크게 깨뜨렸다. 신미일, 왕이 주사(수군)를 훈련하러 동쪽을 정벌했다. 5월 무신일, 초에 행차했다. 임술일, 형혹(화성)이 태미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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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이성군의 군사 채방 등이 군을 배반하고 태수 서질을 죽였다. 둔기교위 임복, 보병교위 단소와 청주 자사를 보내 평정했다. 그 협략(위협당해 약탈당함)당하거나 망명한 자들은 모두 그 죄를 사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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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7월, 황자 조감을 동무양왕으로 세웠다. 8월, 왕이 마침내 주사(수군)를 이끌고 초에서 와수를 따라 회수로 들어가 육로로 서(徐)에 행차했다. 9월, 동순대(동쪽 순행대)를 쌓았다. 겨울 10월, 광릉의 옛 성에 행차하여 강에 임하여 병사를 관람했는데 군졸이 10여만 명이었고 깃발이 수백 리에 뻗쳤다.

『위서』에 실린 왕이 말 위에서 지은 시이다. “병사를 관람하며 강물에 임하니, 물 흐름은 어찌 이리도汤湯(탕탕)한가! 창과 방패가 산림을 이루고, 검은 갑옷은 햇빛을 받아 빛나네. 맹장들은 포악한 노여움을 품고, 담기는 정횡(가로세로)하네. 누가 강물이 넓다 하는가, 갈대 하나로 건널 수 있네. 싸우지 않고 적들을 굴복시키고, 병기를 거두어 현량하다 칭송받네. 고공(고공 단보)이 기읍에 머물며, 실로 은나라 상을 멸하기 시작했네. 맹헌이 호牢(호뢰)를 경영하니, 정나라 사람들이 두려워稽顙(조아림)했네. 충국(조충국)은 농경을 힘쓰니, 선령(강족)이 스스로 멸망했네. 사수 사이에서 농사를 일으키고, 집을 지어 서방에 도읍했네. 의에 맞춰 권략을 운용하니, 6군이 모두 기뻐 편안하네. 어찌 동산 시(시경의 시)처럼, 유유히 걱정과 슬픔이 많으랴.”

이해에 큰 추위가 닥쳐 물길이 얼어 배가 강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자 결국 군사를 돌렸다. 11월, 동무양왕 조감이 훙서했다. 12월, 초에서 돌아와 양을 지나며 사자를 보내 태뢰로 옛 한나라 태위 교현을 제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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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봄 정월, 허창에 행차하려 하자 허창성 남문이 까닭 없이 무너져 제(조비)가 마음으로 이를 악하게 여겨 결국 들어가지 않았다. 임자일, 낙양궁으로 돌아왔다. 3월, 구화대를 쌓았다. 여름 5월 병진일, 제(조비)가 병이 위독해져 중군대장군 조진, 진군대장군 진군, 정동대장군 조휴, 무군대장군 사마선왕(사마의)을 불러 함께 유조(유언)를 받아 후사(새 황제)를 보좌하게 했다. 후궁의 숙원, 소의 이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정사일, 제(조비)가 가복전에서 붕어했으니 나이 40세였다.

『위서』에 이르기를, 숭화전에서 빈소했다. 6월 무인일, 수양릉에 장사 지냈다. 빈소에서 장례까지 모두 종제(마지막 명령)를 따랐다.

『위씨춘추』에 이르기를, 명제(조예)가 장례를 치르려 할 때 조진, 진군, 왕랑 등이 여름의 더위를 이유로 굳게 간하여 결국 멈췄다.

손성이 평하길, “장례는 효자의 지극한 슬픔이며 인륜의 도리에서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천자는 7개월 만에 장사 지내고 동궤(수레)가 모두 이른다. 의로운 정으로 느낀 감정으로도 임종의 슬픔을 다하거늘, 하물며 천성이 안에서 발하고 예의를 두터이 하는 자가 무겁게 여기는 것임에랴! 위씨의 덕은 대대로 기반을 닦지 못했소. 옛날 화원이 후하게 장사 지내자 군자가 임금을 악한 곳에 버린다고 여겼는데, 군들의 간언은 버림보다 심했소!”

제(조비)의 동생 견성후 조식(조식)이 誄(제문)을 지었다.

(내용 생략: 슬픔과 애도, 조비의 업적을 기리고 천명을 받아 통치했음을 칭송하는 긴 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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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조비)는 문학을 좋아하여 저술을 힘썼고, 스스로 기록한 것이 거의 100편에 달했다. 또 유학자들을 시켜 경전을 편집하고 분류하게 하니 모두 1천여 편이었는데, 이름을 『황람』이라 했다.

『위서』에 이르기를, 제(조비)가 동궁에 있을 때 역려(전염병)가 크게 일어나 당시 사람들이 많이 죽자 제가 깊이 탄식하며 평소 존경하던 대리 왕랑에게 편지를 보냈다. “삶은 7척의 형체가 있고 죽으면 한 관의 흙이 되니, 오직 덕을 세우고 이름을 날려야 썩지 않을 수 있고, 그다음은 글을 쓰는 것만 한 것이 없소. 역려가 자주 일어나 선비들이 죽어가니 내가 홀로 어떤 사람이라 목숨을 온전히 할 수 있겠소?”

그래서 저술한 『전론』, 시, 부가 100여 편이었고, 여러 유학자들을 숙성문 안에 모아 대의를 강론하게 하니 간간(씩씩함)하여 지치지 않았다. 항상 한나라 문제(한 문제)가 군주가 되어 관인하고 현묵하며 덕으로 백성을 교화하려 함을 아름답게 여겨 성인의 풍모가 있다고 했다. 당시 문학 유학자들은 혹 “효문(한 문제)이 비록 현명하나 총명하고 국체를 통달함은 가의만 못하다”라고 했다. 제(조비)가 이로 인해 『태종론』을 지었다. “옛날 유묘가 복종하지 않자 순 임금은 간척(방패와 도끼)으로 춤을 추었고, 위타가 제를 칭하자 효문은 은덕으로 어루만졌고, 오왕이 조회하지 않자 기장(지팡이와 의자)을 주어 그 뜻을 달랬으며 천하가 의지하여 편안했소. 곧 3장의 교훈과 개제(온화함)의 교화를 넓혀 예전의 누식(숨 쉴 틈 없는)하던 백성들이 크게 걷고 높이 말하며(자유롭게 지내고), 위태롭고 두려운 마음이 없게 하려 했소. 가의의 재주가 민첩하여 국정을 계획함은 특별히 현신(어진 신하)의 그릇이자 관, 안(관중, 안영)의 자질이었으나, 어찌 효문 대인의 도량만 하겠소?”

3년 중에 손권이 복종하지 않자 다시 『태종론』을 천하에 반포하여 정벌을 원하지 않음을 밝게 보여주었다. 다른 날 또 조용히 말했다. “내가 한나라 문제에게 취하지 않는 점이 세 가지가 있소. 박소를 죽인 것, 등통을 총애한 것, 신부인의 옷이 땅을 끌지 않게 하고 상서 주머니를 모아 장막을 만든 것이오. 이는 한나라 문제가 검소하나 법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오. 외척과 후족의 집안은 다만 은혜로 양육해야지 권력을 빌려주어서는 안 되는데, 이미 죄를 범했으니 어쩔 수 없이 해를 끼쳐야 했소.” 그 중도를 지키고 제왕의 의표(본보기)가 되려 함이 이와 같았다.

호충의 『오력』에 이르기를, 제(조비)가 평소 쓴 『전론』과 시, 부를 손권에게 보내고 또 종이에 써서 한 통을 장소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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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하길, 문제(조비)는 천성적으로 문조(문장의 아름다움)가 있어 붓을 들면 장을 이루었고, 박문강식(많이 듣고 잘 기억함)하며 재예(재주와 기예)를 겸비했다.

『전론』 제자(황제 본인)의 서문이다. “초평 원년에 동탁이 주(황제)를 죽이고 황후를 독살하며 왕실을 뒤엎었다. 이때 사해가 이미 중평의 정체에 곤궁해졌고, 아울러 동탁의 흉악함과 역적질을 미워하여 집집마다 난리를 생각하고 사람마다 스스로 위태로웠다. 산동의 목수(지방관)들은 모두 춘추의 의리에 따라 ‘위나라 사람이 주우를 복양에서 토벌했다’는 말처럼, 누구나 도적을 토벌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에 의병을 크게 일으켰고 명호(이름난 호걸), 대협(큰 협객), 부실(부자), 강족(강력한 가문)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만 리를 서로 달려왔다. 연주, 예주의 군대가 형양에서 싸웠고 하내의 갑옷 입은 군사가 맹진에서 진을 쳤다. 동탁은 결국 대가를 옮겨 장안에 서도(서쪽 도읍)했다. 그런데 산동의 큰 자는 군국을 잇고, 중간은 성읍을 보전하며, 작은 자는 전맥(밭 사이)에 모여 서로 삼키고 멸망시켰다. 마침 황건적이 해, 대(동쪽과 북쪽)에서 성하여 산구(산 도적)가 병, 기(북쪽)에서 폭주하며 승세를 타서 공격해오니 회오리바람처럼 남쪽으로 휩쓸었고, 향읍은 연기를 바라보며 달아났고 성곽은 먼지를 보고 무너졌으며, 백성들은 죽어 뼈가 망초처럼 널렸다. 내가 이때 나이 5세였는데, 위(세상)가 바야흐로 어지러워 위(조조)께서 나에게 사격(활쏘기)을 가르쳤고, 6세에 사격을 알았으며, 또 말을 가르쳐 8세에 능히 기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많은 사고가 있어 정벌을 나갈 때마다 내가 늘 따랐다. 건안 초, 위께서 형주를 남쪽으로 정벌하여 완에 이르렀는데 장수가 항복했다. 열흘 만에 반란을 일으켜 망형(죽은 형) 효렴 자수와 종형 안민이 해를 당했다. 이때 내가 10세였는데 말을 타고 탈출했다. 무릇 문무의 도는 각기 때에 따라 쓰이는 것인데, 중평의 끝에 나서 군려(군대 생활) 사이에 자랐으니, 이 때문에 어려서 궁마(활과 말)를 좋아했고 지금까지 쇠하지 않았다. 새를 쫓으면 문득 10리를 가고, 달려 쏘기를 늘 100보를 하니, 날이 많아도 몸이 튼튼하고 마음은 늘 싫증 나지 않았다. 건안 10년, 비로소 기주를 평정하니 예, 맥이 좋은 활을 바치고 연, 대가 명마를 바쳤다. 때가 늦은 봄이라 구망(신)이 절기를 맡아 온풍이 사물을 펼치니, 활은 마르고 손은 부드러우며 풀은 얕고 짐승은 살이 쪘다. 종형 자단(조진)과 함께 업 서쪽에서 사냥했는데, 종일 손으로 獐(노루), 鹿(사슴) 9마리와 꿩, 토끼 30마리를 잡았다. 뒤에 군사를 남쪽으로 정벌하여 내려가 내려(지명)에 이르렀는데, 상서령 순욱이 사신을 받들어 군사를 위로하다가 내가談論(담론)하는 끝을 보고 순욱이 말했다. ‘듣건대 군께서 좌우 사격(활쏘기)을 잘하신다는데 이는 실로 난능(하기 어렵다)입니다.’ 내가 말했다. ‘집사(순욱)께서는 아직 항발(목 뒤로 쏘는 것), 구종(입으로 물고 쏘는 것), 복마제(말발굽을 굽히고 쏘는 것)를 보지 못했소.’ 순욱이 웃으며 ‘그 정도로!’라고 했다. 내가 ‘과녁에는 일정한 길과 정해진 곳이 있으니 비록 매번 적중해도 지극히 묘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평원을 달리고 풍초(우거진 풀)로 들어가 교활한 짐승을 요격하고 가벼운 새를 截(가로채)어 쏘아, 활을 헛되이 당기지 않고 맞히는 족족 꿰뚫는다면 이것이 묘한 것입니다.’ 그때 군사주張京(장경)이 앉아 있다가 순욱을 돌아보며 손뼉을 치고 ‘좋소’라고 했다. 내가 또 검술을 배웠는데 사법(검술)을 열람한 것이 많았고 사방의 법이 각기 달랐는데, 오직 경사가 훌륭했다. 환, 영제 시절에 호분 왕월이 이 술에 능하여 경사에서 칭송받았다. 하남 사아가 말하길 옛날 왕월과 놀면서 그 법을 모두 얻었다 하여, 내가 사아를 따라 그 법을 정숙하게 배웠다. 일찍이 평로장군 유훈, 분위장군 등전 등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평소 등전이 팔의 힘이 좋고 5병(5가지 무기)에 밝으며 또 빈손으로 백인(칼날)에 들어갈 수 있다고 들었다. 내가 등전과 검을 논한 지 오래되었는데, ‘장군의 법은 틀렸소. 내가 평소 좋아했기에 또 좋은 술을 얻었소’라고 하고는 그와 대련하기를 청했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마침芋蔗(사탕수수)를 먹다가 그것을 지팡이로 삼아 전각 아래에서 몇 번 교전하니 세 번 그의 팔을 맞췄고, 좌우가 크게 웃었다. 등전이 뜻이 평안하지 않아 다시 하기를 청했다. 내가 ‘내 법은 급속하여 얼굴을 맞히기 어려우니 팔을 맞혔을 뿐이오’라고 했다. 등전이 ‘한 번 더 대련하기를 원하오’라고 하여, 내가 그가 突(돌진)하여 교중(팔꿈치 사이)을 취하려 함을 알고, 거짓으로 깊이 진격하니 등전이 과연 따라왔고, 내가 다리를 굽혀 截(베어) 그 이마를 맞히니 앉아 있던 자들이 놀라 쳐다보았다. 내가 돌아와 앉으며 웃으며 말했다. ‘옛날 양경이 순우의에게 옛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비술을 전했듯이, 지금 나도 등 장군이 옛 기예를 버리고 더 요긴한 도를 받기를 원하오.’ 한자리에 있던 자들이 모두 즐거워했다. 무릇 일은 스스로 자신의 장점을 말해서는 안 되는데, 내가 어려서 지복(쌍극)을 들 줄 알아 스스로 대적할 자가 없다고 했소. 속명으로 쌍극을 좌철실이라 하고, 상순(방패)을 폐목호라 했소. 뒤에 진국의 원민을 따라 단공복(단극으로 쌍극을 공격)을 배워 매번 신과 같았으니, 상대가 어디서 나올지 몰랐소. 먼저 말하길 ‘만약 좁은 길에서 민을 만나면 곧바로 결판을 낼 뿐이오!’라고 했다. 내가 다른 희롱하는 일에는 좋아하는 것이 적었고, 오직 탄기(바둑과 비슷한 놀이)는 거의 그 교묘함을 다하여 젊어서 이를 위해 부를 지었다. 옛날 경사의 선공(장인)으로 마합향후, 동방안세, 장공자가 있었는데 늘 그 몇 자(사람)들과 대결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했소. 위(조조)께서 평소 시서와 문적을 좋아하여 비록 군려(군대)에 있어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고, 매번 정성(안부를 물음)하고 종용(조용히)할 때마다 ‘사람이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면 생각이 전일하고, 크면 잊기 쉬우며, 장대하여 부지런히 학문을 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나와 원 백업뿐이다’라고 하셨소. 내가 이 때문에 어려서 시, 논을 외웠고, 자라서 4부, 사, 한, 제자백가, 백가의 말을 두루 갖추어 보지 않은 것이 없소.”

『박물지』에 이르기를, 제(조비)는 탄기에 능했고, 손수건 모서리를 사용할 수 있었다. 때에 한 서생이 있었는데 또 머리를 낮추어 그가 쓴 갈건(칡 두건) 모서리로 탄기를 튕길 수 있었다. 만약 여기에 광대한 도량을 더하고 공평한 성실함으로 힘쓰며 뜻을 펴고 도를 품고 덕의 마음을 넓게 한다면, 옛날의 현명한 군주가 어찌 멀리 있겠소!